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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화. 언데드 킹(2)

타로스는 제후들이 있는 언덕으로 이동을 해 왔다.

당연하게도 그의 옷에는 피 한 방울 묻지 않았다.

땀조차 맺혀 있지 않았지만, 호위 기사 레베카는 수건을 내밀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폐하."

"싱거운 놈이었다."

"허허허, 드래곤이나 지옥 대군주에 비한다면 그렇겠지요."

"경들이라면 능히 상대할 수 있었을 것이나 역시 포위를 돌파하기는 쉽지 않았겠지."

"정진하겠사옵니다."

"...."

언데드 킹을 처리한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타로스.

그 때문에 공국 사람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랭턴 공작이 방금 전투에 관해 흥미를 가지고 물었다.

"폐하, 신이 가만히 고찰을 해 보니 고대의 검술을 견식하신 것으로 보였는데 맞사옵니까?"

"그렇다."

"오오! 고대의 검술은 어땠사옵니까? 현 제국의 검술과 비교한다면 말이옵니다."

"공간을 이용하는 검술이나 경들이 이해하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을 것이다."

"고, 공간을 이용한다는 말씀입니까?"

"경의 경지가 다음으로 넘어간다면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르지."

"반드시 현재의 경지를 뛰어넘겠사옵니다!"

"그 이후 짐을 찾아오라."

"존명!"

랭턴 공작은 그랜드 마스터다.

그랜드 마스터의 끝자락이었으며 후작급의 제후들은 그랜드 마스터 초입이나 중입에 머물고 있었다.

그걸 뛰어넘는다?

가능할지 의문이다.

공국 사람들의 놀람은 여전히 이어졌다.

타로스가 고대의 검술을 분해하고 사용할 수 있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쿠구구구궁!

잠시 후, 주인을 잃고 우왕좌왕하던 언데드들의 머리 위로 파이어 레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내리는 불의 비.

위력은 그다지 크지 않았으나 도시 전체를 태워 버릴 정도의 마법이었다.

화르르르륵!

"꾸에에엑!"

"끼에에엑!"

도시를 탈출하는 언데드들은 기병들이 달려가 목을 베어 버렸다.

그래도 빠져나가는 놈들은 도시를 포위하고 있던 보병들이 창으로 처리했다.

괜히 검을 썼다가 피가 눈에 튀면 감염될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창을 사용하는 것이다.

감염이 된다고 해도 소수였고, 신관이 빠르게 치료하면 전염이 되지는 않았기에 사상자는 전무한 실정이었다.

이것으로 토벌은 종료되었다.

완전히 폐허가 된 도시.

타로스는 울라카 본성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오후 내내 전 병력이 동원되어 불타 죽은 언데드를 묻었다.

작업이 모두 끝나고 나자 저녁이었다.

타로스는 도시 근처에 숙영지를 설치하고 하루 묵고자 했다.

막사가 설치되고 곳곳에 모닥불이 피워진다.

보급은 넉넉했기에 밥을 짓고 끼니를 해결한다.

나름대로 제후들은 건조한 고기들을 내어 놓았고, 모닥불에 고기를 구우면서 둘러앉았다.

황제인 타로스 주변으로 30인의 제후들과 대공, 그리고 대공의 신하들이 옹기종이 앉자 매우 비좁아 보였다.

황실 기사들은 열심히 구워진 고기를 날랐으며, 타로스는 대충 끼니를 해결하며 다음 일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전쟁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또 있다."

"그게 무엇입니까?"

제후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작년에 타로스는 제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위험 요소들을 처리하였다.

만약 그런 위험 요소들을 제거하지 않았다면 절대 이번 원정은 성공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제후들도 궁금한 것이다.

그들 역시 전쟁 와중에 후방에서 소요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고대 악마의 봉인이 풀릴 때가 되었다."

"...!"

별일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제후들은 깜짝 놀랐다.

그건 대공과 그 신하들도 마찬가지였다.

"고, 고대의 악마라고 하셨습니까?"

특히나 델리안 대공의 놀람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마치 델리안에 고대 악마의 봉인지가 있다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래, 해결을 하지 않으면 마계의 문이 열리며 골치 아픈 일이 발생하고 말겠지."

"허어."

"도대체 그게 무슨...?"

사실 타로스도 고대 악마 벨가루스가 언제 마계의 문을 열어 버리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게임 내에서는 델리안이 아닌 제국 동부에서부터 사태가 시작됐었다.

결국 이 역시 황제인 타로스가 정리를 해 버리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런 사태가 터지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타로스가 이 문제를 인식한 것은 푸아온의 나침반 때문이었다.

동쪽을 향해 갈수록 푸아온의 나침반은 마기로 물들었는데, 이쯤 되자 타로스는 확신하게 되었다.

잘못하면 다음 이벤트가 터질 수도 있음을 말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여행이었지만 반드시 이번 일은 처리하고 가야 한다.

"짐이 제위를 물려받기 전의 일이다."

"...."

사람들은 입을 다물며 경청하였다.

황제가 제위에 오르기 전의 행적은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나마 이리저리 여행을 다니며 이야기를 푼 것이 소문으로 번지고 있을 뿐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타로스의 과거를 듣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역사적인 기록이었다.

물론 타로스야 자신이 설정한 세계관을 읊는 것이기에 어려울 것이 없었다.

"대략 300년 전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의 짐은 마스터에서 그랜드 마스터의 초입 정도의 실력이었을 것이다. 대륙을 주유하며 실력을 다지고 있을 즈음에 마계의 문이 열릴 수 있다는 신관의 말을 들었다."

"허어."

"마계의 문이라니."

"현 델리안 공국의 동쪽, 울라카를 넘어서면 울창한 대수림이 나오지. 마계의 문은 그곳에서 열리려 하고 있었다. 고대의 악마가 깨어나 수많은 사람들을 제물로 잡아들이고 피를 뿌렸고 몇 차례나 공국에서 군대를 보냈으나 오히려 제물이 되고 말았다. 짐은 선황 폐하의 명령을 받아 그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

공식적으로 기록된 내용이 아니었다.

마계의 문이 열릴 뻔했다는 기록은 남겨져서 좋을 게 없었으며, 이 일은 그 당시 세대들이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었다.

"짐이 제국군을 이끌고 도착하였을 때에는 참혹했지. 이미 수많은 마물들이 튀어나와 있었으며 마계의 틈은 벌어져 있었다."

"그, 그런 일이."

"당시 제국군 3군단이 대부분 죽고 1개 기사단이 희생되었지. 짐은 고대의 악마와 칠 주야를 싸웠고 어쩔 수 없이 제국의 신기였던 아이비오르를 사용해 봉인했다."

"마계의 문은 닫혔사옵니까?"

"마계의 문이 열리는 자체가 고대의 악마를 매개체로 하였기에 당연히 닫혔지. 그러나 역시 그건 미봉책에 불과하였던 바."

"서, 설마."

"세월이 꽤 흘렀고 대지가 마기에 오염되고 있을 것이다. 대지가 오염되면 당연히 마수들이 들끓게 되고 시간이 흐르면 제국의 후방이 위험해지는 바,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지금은... 잡을 수 있사옵니까?"

"간단한 일이지."

제후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급작스럽게 여기서 전투에 동원되면 죽거나 다칠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로스가 함께한다면?

그건 토벌이 아니라 유람이 된다.

"마수들이 있기야 하겠지만 꽤 흥미로운 여정이 될 것이다. 참고로 고대 악마가 머물렀던 던전을 통째로 봉인했고, 그 던전은 도저히 연대를 측정할 수 없다."

"...!"

"즉, 그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짐조차 모른다는 거지. 짐의 목적은 후방을 안정케 하고 제국의 신기인 아이비오르를 회수하는 것이다. 나머지는 균등하게 분배할 것이다."

"오오!"

"그 안에 비싼 물건들이 있을 수도 있고, 아무것도 없을 수 있다."

"당연히 폐하의 여정에 참여할 것이옵니다!"

"함께하고 싶사옵니다!"

타로스는 속으로 웃었다.

제국 귀족들은 욕망에 충실하다.

타로스가 알기로 그곳은 고대 제국의 유적지로 아마 상당량의 금이 쌓여 있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마법적 사료가 더 많을 것이니, 제후들보다는 마법사들이 더 많은 이익을 볼 것으로 보였다.

다음 날 아침.

타로스는 대수림을 향해 나아가기로 했다.

병력은 2천으로 축소되었고 한 개 기사단이 동원됐다. 제후들은 여정을 함께하겠다고 말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고대 제국의 유적지라는 것에 군침이 돌기도 했다.

타로스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제국의 강자들인 제후들이 함께한다면 유사시에는 큰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행 자체가 편해지기도 할 것이다.

'신기 아이비오르를 벌써 얻게 되는군.'

언뜻 보면 검 이름 같았지만, 갑옷이다.

드래곤 비늘로 만들어진 용린갑이었으며, 거기에 고대 마법사들이 수많은 마법 처리를 하여 제국의 유물로 지정됐었다.

타로스가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곳 세계관에서는 정말로 있었던 일이니까.

두두두!

아침 식사를 마치고 대수림으로 들어갈 병력을 추리고 있을 때, 제국에서 전령이 도착했다.

"황제 폐하를 뵙사옵니다!"

전령의 옷차림은 남루했다.

소식을 받는 즉시 지금까지 달려온 것이 확실했다.

"무슨 일이냐."

타로스 대신 랭턴 공작이 물었다.

일상적인 일.

지금이야 타로스가 직접 움직이지만 여전히 권태로움은 남아 있도록 행동했고, 이런 공무는 대제후들이 들어도 된다.

"그람 왕국에서 입조를 청한다고 국서가 내려왔사옵니다!"

"그람 왕국에서?"

웅성웅성.

생각지도 않았던 호재다.

그람 왕국은 총 인구 300만, 병력 15만을 보유하고 있는 중형 왕국이다.

그런 왕국에서 입조를 청했다는 것은 제후국을 넘어 공국이 되겠다는 뜻을 피력한 것이었다.

제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던 그람 왕국으로서는 꽤 부담이었을 것이다. 다음 타깃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공국이라. 분명히 왕국 일부가 축소될 수도 있을 텐데."

"국서에는 영토 일부를 포기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사옵니다."

"폐하, 여기 국서이옵니다."

타로스는 담담하게 국서를 받았다.

마법 통신으로 알릴 수도 있었지만 그만큼이나 기밀을 요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감청이 된다면 주변국에 좋을 것이 없었다.

만약 입조를 청했다가 거절되면?

여러 문제들이 발생할 것이 빤하였기에 국서가 황제에게 직접 전달된 것이다.

국서의 내용은 별것 없었다.

여러 미사여구를 포함하고 있었지만 결국 어떻게 해서든 제국에 입조하여 전쟁을 피해 가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영토 일부를 포기할 정도였으니, 제국의 위명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하였다.

모두의 시선이 타로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입조를 받아들일 것인가, 그람 왕국조차 정벌의 대상이 될 것인가.

"직접 와서 죄를 청하라 통신을 보내라."

"괜찮겠사옵니까?"

"그들은 과거 제국의 제후국이었고 무단으로 품을 벗어나 영토를 확장했다. 무단 확장한 영토를 반환하고 그동안의 죄를 청한다면 받아 줄 것이나, 그리하지 않는다면 쓸어버리겠다."

타로스는 통신이 유출될 우려도 있었으나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내용이 유출되는 것이야 놈들 사정이었고, 거절하면 제국의 입장에서는 토벌을 하면 그뿐이었으니까.

#제86화. 그람 왕국의 입조(1)

그람 왕국.

구 그람 공국에서 출발하였으며, 약 100년 전에 제국에서 분리되어 국토를 확장하였다.

그람 왕국이 제국의 품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황제의 태업 때문이다.

불멸왕 타로스의 은거.

이는 제국과 그 주변 왕국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황제가 각성한 듯이 국정을 돌보기 시작하고 제국 후방의 위협들을 직접 처리하더니 친정을 선포하고 율리우스 왕국을 몇 개월 만에 집어삼켜 버렸다.

이는 단순한 영토 싸움이 아닌 점령전이었으며, 제국군 50만이 동원된 대역사였다.

황제가 움직이기 시작하니 도저히 율리우스 왕국은 버틸 수가 없었다.

이미 황제는 내년 추수 이후 다시 원정을 시작할 것이라고 선포하였으나, 그 대상이 어디가 될지는 밝히지 않고 있었다.

제국 주변국은 황제의 행보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으며 그 대상이 어디가 될지 알아내기 위해 정보부를 풀가동하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황제의 의중을 짐작할 수 없었다.

제국의 제후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일을 타국의 왕들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고 두려움은 전염병처럼 번져 가고 있었다.

그람 왕국은 제 발이 저리고 있었다.

율리우스 왕국이 병탄되었으니, 제국에서 동원할 수 있는 군대는 규모가 더욱 확장될 것이다.

특히나 다음 원정은 제국 중앙군이 30만이나 투입된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와중이었다.

제후들도 첫 원정 성공에 기세를 올려 더 많은 병력을 뽑아 낼 것이고, 이번에는 총 병력 60만, 많으면 70만까지 동원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걸 막을 수 있는 왕국이 있을까?

그람 왕국은 구 공국이다.

황제가 그 사실을 걸고넘어지면 꼼짝 없이 전면전을 벌여야 했는데, 도저히 그람 왕국이 막을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주변국과 연합을 하면?

괘씸죄가 적용되어 처참하게 죽고도 남을 것이다.

이 때문에 그람 왕국 내에서는 연일 회의가 열렸고, 결국에는 제국으로 돌아가는 결론을 내렸다.

반대가 없지는 않았다.

"굳이 제국에 입조할 필요가 있겠사옵니까? 제국은 주변국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대륙을 일통할 것이라 선언한 만큼 연합이 형성될 것이옵니다. 차라리 제국에 대항을 하심이 어떻습니까?"

"후작은 대체 생각이 있나, 없나? 우리가 영토를 확장하고 제국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황제의 태업 때문이었네. 지금 상황에서 제국에 대항을 하자고? 그 순간 100만 대군이 몰려올 것이야."

사실 100만 대군은 조금 과장이 있었다.

말이 100만 대군이지 보급을 하는 과정에서 제국의 재정도 휘청거릴 것이다.

원정에 실패하기라도 하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었기에 그만한 병력을 한꺼번에 동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제국이 작정하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제국에서 보낸 통신에 의하면...."

"통신?"

"예, 통신이 왔사옵니다. 입조를 하실 거라면 폐하께서 직접 오시라고...."

"...!"

놀라운 결단이었다.

제국은 누군가가 감청할 수도 있는 마법 통신을 보냈고, 직접 와서 죄를 청하라고 명령했다.

거부한다면?

그때에는 다음 제물이 될 것이 확실했다.

"거절하시옵소서."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죄를 청하고 숙여야 하옵니다. 황제의 눈 밖에 난다면 모두 능지형입니다."

"아니, 공작은 누구의 신하요!"

"폐하의 뜻이 입조에 있고, 그 누구도 제국을 막을 수가 없네!"

웅성웅성.

갑론을박.

귀족들은 각자 파벌을 가르고 싸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이미 국왕은 입조하기로 확고하게 결정한 상태였다.

지금에 이르러 직접 가서 죄를 청하는 것이 뭐 어려운 일일까.

목숨을 건질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었다.

"마침 황제께서 대수림에 들어가신다고 하니 지금 출발하면 대수림 입구에서 뵐 수 있을 것이다."

"폐하, 하오나."

"이미 결정을 내렸다. 반대하는 자들은 망명하라. 내전을 일으켜도 좋다. 제국에서 가만히 있을지는 의문이다만."

"...."

국왕의 말에 반대하던 신하들도 입을 다물었다.

국왕과의 전쟁은 승리의 가능성이라도 있지 진노한 황제가 직접 군을 몰고 온다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

여행 일주일째.

타로스를 비롯한 제후들은 정말로 여행하는 심정으로 뒤따르고 있었다.

이제 영지로 돌아가면 결코 시간이 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수림 입구.

일단의 무리들이 대수림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깃발을 보니 그람 국왕의 것이었다.

두두두두!

그들은 타로스의 군대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그 무리는 대략 1천.

국왕을 호위하는 군대로는 부족한 감이 있었으나 입조를 청하기 위함이라면 충분한 숫자였다.

게다가 대수림과 그람 왕국은 인접해 있었다.

여차하면 왕국으로 돌아가도 되었고, 가까운 곳에는 왕국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람 국왕은 30미터 정도 앞에서 내린 후 달려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를 뵙고 죄를 청하옵니다!"

"...."

타로스는 무심하게 그람 국왕을 바라봤다.

황제가 말이 없자 그람 국왕은 더욱 큰 목소리로 외쳤다.

"신은 선대의 죄업을 그대로 짊어졌사옵니다. 선왕들의 죄는 소신의 죄이기도 하나이다. 지난 과오를 용서하고 폐하와 제국에 충성하며 공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그저 자비를 바랄 뿐이옵니다."

모두가 타로스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과연 황제는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제 발로 걸어왔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지.'

이미 그들의 입조를 받아 주기로 내심 결정한 상태였다.

전쟁을 하지 않고 영토를 확장하며 그만한 중형 왕국을 꿀꺽 삼킬 수 있다면 그보다 남는 장사가 어디에 있을까.

또한 죄를 청했는데도 받아 주지 않고 점령한다면 그 이후에도 반란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타로스는 앞으로 일어날 일까지 모두 예상하고 한마디를 내뱉었다.

"용서한다."

"...!"

그저 한마디였으나 천금과 같이 묵직했다.

군주는 허언을 하지 않는 법.

특히나 황제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게 그릇된다고 해도 지켜져야 하는 것이 제국의 법이다.

"황공, 또 황공하옵니다! 지금껏 불법으로 얻은 땅은...."

"그런 자잘한 일이야 재상과 이야기하도록 해라."

"예!"

"그람 대공, 검은 좀 쓰나?"

"검...이라고 하셨사옵니까?"

"그렇다."

타로스는 대수림으로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그람 대공은 주변을 둘러본다. 하나같이 쟁쟁한 인사들.

모두가 제후였으며 마스터급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제국이 팽창하기 시작하고 있었으니 제후들은 곧 한 명, 한 명이 공국의 공왕 정도의 영토와 병력을 보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들과 친분을 다져서 나쁠 건 없다.

"어느 정도는 사용할 수 있사옵니다. 다행히 폐하께서 오래전, 전수를 해 주셨던 검술을 익히고 있는지라."

"그럼 함께하지."

"영광이옵니다!"

일행에 그람 대공이 추가되었다.

대륙 동부의 대수림.

이 세상에는 마경으로 불리는 절대 금역들이 존재하였는데 남부의 대사막, 동부의 죽음의 늪, 북방의 혹한의 대지다.

죽음의 늪 대수림 안쪽에 존재하고 있었고, 이곳 자체가 금역으로 통했다.

그런 금역에 들어서고 있었으나 제후들은 천천히 유람을 나온 사람들처럼 걸었다.

이제 각 영지로 돌아가면 내년의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진군은 추수 이후가 될 테지만 올해부터 준비해야만 원활하게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제후들의 걸음은 느렸고 그건 타로스도 마찬가지였다.

태업을 일삼던 시절에도 제국은 잘만 굴러갔다.

비록 이번에는 영토가 대거 늘어나면서 재상부는 물론이고 궁정 귀족들이 죽어 나가겠지만 정 힘들면 아카데미 생도들이라도 들여 업무를 보조하게 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번에 재상 로터스 후작이 대거 관료들을 추가로 등용하자는 안건을 제출했고, 타로스가 승인하면서 관료들도 늘어날 예정이었다.

'괜히 일찍 돌아가 업무를 볼 필요는 없지.'

타로스의 지상 목표는 생존이었다.

이제는 여러 신화들과 유물을 취하였으니 어디서 암살을 당해 죽을 가능성은 현저하게 줄었고 이런 편안한 여정도 가능하게 되었다.

생존 이후에는?

그때부터는 천천히 인생을 즐기며 살아갈 것이다.

타로스의 곁은 기사들이 있었지만 그들 역시 진정으로 황제를 지키기 위하여 호위하는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황제가 직접 나서기 전에 위협을 차단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지금처럼 제후들이 모조리 쫓아와서 황제를 호위하듯이 걷고 있었으니, 어떤 위험이 온다고 해도 돌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 여정에 막 편입한 그람 대공은 타로스에게 대륙 정세에 대해 이야기했다.

"폐하, 소신이 한 가지 걱정되는 부분이 있사옵니다."

"무엇이냐."

"최근 폐하께서 대륙 일통을 선언하시면서 주변국에서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사옵니다."

"그럴 테지."

타로스나 제후들은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전 대륙이 합심하여 쳐들어온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고는 제국이 모조리 격파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제국의 전력은 다른 국가들에 비하여 100% 이상 높게 잡아 주어야 한다.

제국 군인들의 지상 목표가 제후가 되는 것인 만큼이나 개인적인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체력도 강하여 단체 진법 훈련도 곧장 쫓아왔다.

제국이 걱정할 이유는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대공의 말은 조금 신경 쓰였다.

"몇몇 국가들이 연합을 하고 있사옵니다."

"몇몇 국가들?"

"하하하! 폐하, 주변 국왕들이 잔뜩 겁을 먹은 모양입니다."

"그러게 말이옵니다. 제까짓 것들이 연합한다고 제국의 진공을 막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입니다."

제후들은 그딴 적들이야 단숨에 격파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의견을 개진한 그람 대공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웃어넘길 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3개국이 연합하였고 여기서 몇 개국이 더해지면 50만 대군이 넘어갈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경은 무엇이 걱정이더냐."

"제국에서도 사활을 걸어야 한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사활이라. 경은 제국을 너무 저평가하고 있군. 어디 내전이라도 치르는 상태에서 침공을 당한다면 모르겠으나 현 제국은 안정되어 가고 있지. 영토 확장에 열을 올려도 부족한데, 굳이 반역을 행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그렇사옵니까?"

타로스가 대놓고 반역을 입에 올리는 바람에 분위기가 잠깐 경직되었지만, 실제로 내전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장담에 다시 훈훈해졌다.

"걱정할 것 없다. 저들이 알아서 제국을 침공해 준다?"

타로스는 무표정하지만 입꼬리를 약간 올렸다.

"그래 주면 고마울 따름이지."

#제87화. 그람 왕국의 입조(2)

점심 무렵.

타로스는 곧 자리를 잡고 식사하려 했지만 문제가 좀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대수림의 마수들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전방에 다이어 울프 무리입니다!"

"막내들아! 출격해라!"

"네!"

"쳇! 맨날 나만 시켜."

"닥치고 따라와! 폐하께서 계시는 자리에 웬 투정이냐!"

"나, 언제까지 막내?"

"네놈 실력으로는 몇 년은 걸리겠지?"

다이어 울프 수십 마리의 규모였다.

레벨로 치면 70대 중반의 몬스터들로, 만약 다른 왕국의 영지에서 이만한 규모의 마수들이 나타났다면 비상이 걸리겠지만, 이 자리에는 제후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자작급의 레벨이 90대 초반.

준남작인 바바의 레벨이 88이다. 다이어 울프 따위는 가볍게 찢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곧바로 바바와 그란달 남작이 티격태격하며 튀어 나갔다.

마치 다이어 울프를 동네 똥강아지 취급을 하는 모습에 그람 대공은 다소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 아니. 아무리 제후들이라고는 해도 지원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요?"

"아니, 대공 각하. 어째서 제후들을 무시하십니까?"

"무시하다니?"

"사실 바바 준남작 혼자로도 충분합니다. 빨리 처리하고 식사를 해야 하기에 그란달 남작까지 보낸 것이지요."

"그, 그런가?"

쿠아아앙!

그리고 들리는 소음.

라이너스 후작의 말이 맞았다.

바바 준남작과 그란달 남작은 각자 그레이트 액스와 대검을 휘두르며 다이어 울프를 때려잡고 있었다.

공격을 막을 생각도 하지 않고 통째로 베어 버린다.

마치 두부 자르듯 다이어 울프들이 잘려 나가고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최대한 피를 뒤집어쓰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나름 무예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했던 그람 대공은 그 모습을 보며 경악했다.

'뭔 제후의 말석이라는 작자들의 무력이 저렇게?'

제국에는 기사들 중에서도 마스터급이 꽤 있었다.

그런 기사들조차 제후들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기에, 일개 다이어 울프 따위가 힘을 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처리하는데 걸린 시간은 단 3분.

막내 제후들은 의기양양하게 돌아왔지만, 란투스 자작이 혀를 찼다.

"멀리 가져다 버리고 와라! 식사해야 할 것 아니냐."

"예, 예. 그럽지요."

"으으! 괜히 쫓아왔어!"

제후들이 그 일을 기사들에게 지시하자, 기자들은 재빠르게 움직여 사체들을 처리하였다.

대수림은 공터 따위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그랑카인 후작."

"예, 폐하!"

"우리가 잠시 머물 수 있는 공터를 마련해라."

"존명!"

그랑카인 후작은 바로 마법을 캐스팅하더니 순식간에 윈드커터가 다발적으로 실행되며 나무 밑동까지 깔끔하게 잘라 버렸다.

서걱! 서걱!

사방 수백 미터가 벌목되었고, 그렇게 잘려 나간 나무들은 역중력 마법을 사용하여 어디론가 이동하였다.

그 광경을 본 그람 대공은 식은땀을 흘렸다.

'대마법사를 이런 잡일에 동원하다니. 과연 황제의 행차인가.'

그야말로 고품격 서비스였다.

어디서도 이런 서비스는 제공받지 못할 것이다.

전 대륙을 통틀어 대마도사에게 이런 일을 맡길 사람은 황제가 유일할 터였다.

"마법사들은 트랩을 설치하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사냥해서 먹을 것을 마련해라."

"사냥을 합니까?"

"이런 모험을 나섰다면 낭만을 즐겨야 하지 않겠느냐."

황제가 직접 나서고 있었다.

제후들은 눈을 반짝이며 그의 뒤를 따랐다.

대수림에는 마수들뿐만이 아니라 산짐승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았기에 저들의 세상이었고, 커다란 멧돼지나 사슴들이 수없이 많이 돌아다녔다.

타로스가 직접 사냥을 하자 제후들도 한 명의 모험가나 용병들이 되어 사냥했고,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보니 병사들도 각자 조를 이루어 사냥했고, 한 시간도 되지 않아 고기 파티를 벌일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타로스가 직접 나무를 베어 모닥불을 피우자 제후들은 땔감을 주워야만 했다.

"그랑카인."

"예!"

화르르륵!

여기에 대마도사가 불을 피운다.

그람 대공과 휘하 기사들, 델리안 대공까지 이 모습은 굉장히 생경하게 비춰졌다.

황제쯤 되니 마스터들이 잡일을 하고, 대마도사가 캠핑 보조를 하는 격이었다. 그래도 고기의 도축은 병사들이 했다.

깔끔한 솜씨로 도축되고 향신료와 소금까지 뿌린 후에 포도주를 곁들여 식사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은 계급 순으로 많이 먹는다는 점이었다.

그나마 타로스가 제후들 사이에서는 가장 적게 먹었다.

일국의 왕이었던 그람 대공은 고기를 굽는 신세였으나 이것도 하다 보니 꽤 재밌는 일이었다.

왕이었던 자가 언제 이런 잡일을 해 봤을까.

그래도 그람 대공은 궁금했다.

"폐하, 어찌하여 그 귀한 옥체를 직접 움직이시는 것이옵니까?"

"궁금한가?"

"이해가 잘 되지 않사옵니다."

타로스는 장작불 하나를 집어넣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이야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이나, 이전에는 황제의 자리를 논할 만큼도 안 될 정도의 기사였다. 선황의 자리를 계승할 수 있게 된 것은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추기 전이었지."

"아아."

그제야 그람 대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집중되는 제후들의 시선.

언제나 타로스의 과거는 관심사였다.

도대체 타로스는 어떻게 불멸의 황제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는가. 그리고 당시의 공작을 어찌 꺾고 황제가 되었는가.

제국은 황가가 수시로 바뀌는 것도 드물지 않았다. 기조 자체가 제국에서 가장 강한 자가 황제가 되는 것이었으므로.

"그 전에는 대륙 전역을 돌아다니며 실력을 쌓았다. 나름대로 재능은 있었는지 A급 용병과 모험가로 시작할 수 있었지. 처음 용병패와 모험가 패를 딴 이후에는 용병왕 그라미스의 휘하로 들어갔다. 들어 봤나?"

"전설의 용병왕 그라미스 말씀이옵니까?"

"그렇다. 300년 전 인물이지."

타로스의 나이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많았다.

400살이다, 300살이다 등등.

그저 그러려니 하고 들을 뿐.

제후들이 보기에 타로스야말로 살아 있는 역사책이 아니던가.

"그라미스 용병단은 막내가 A급 용병패를 가지고 시작하며 짐 역시 막내 생활을 피해 갈 수 없었지. 가장 먼저 했었던 일이 무엇인지 짐작하겠나?"

"사냥과 장작 패기, 불 피우기, 요리 등 아닙니까?"

"바로 보았다."

왕가의 핏줄을 타고난 것만으로 왕위가 결정되는 타국과는 전혀 다른 체계였다.

제후들은 타로스가 밑바닥부터 용병 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저 설정일 뿐이지만.'

타로스가 직접 설정한 과거이기에 실감 나게 말할 수 있었다.

막내 생활의 어려움을 이야기하였고 그 당시에는 고참 용병들의 무구 손질이나 청소 등을 도맡아 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이야기를 듣고 난 그람 대공은 탄성을 내뱉었다.

"정말 상상이 되지 않사옵니다. 폐하께서 그런 삶을 거쳐 오셨다는 것이."

"다 마찬가지지. 짐 역시 선황의 재능과 검술을 이어받아 좀 더 수월하게 수련과 경험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이지. 제후들도 처음에는 밑바닥부터 시작하였을 것이다. 제국은 장남이라고 하여 가문을 이어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단한 시스템이라고 생각하옵니다. 실제로 그런 문화가 정착되기까지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심지어 그란달 남작은 병사부터 시작했다."

기사들이 쫑긋 귀를 세웠다.

그란달이 제후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다지만, 그야말로 입지전적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치열한 경쟁 사회인 제국에서 병사로 시작하여 제후까지 올라온 그란달은 존경을 받아 마땅했다.

"그란달 남작, 경이 부사관으로 시작했던가?"

"헤헤, 공부에는 영 재능이 없어 일반 병사로 입대하여 시작했사옵니다."

"그런가."

"폐하의 고생에 비한다면 고생도 아니죠."

그람 대공은 제국의 제후들이 굉장히 대단한 인간들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그러한 제국의 시스템이야말로 현 제국을 지탱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이렇게 직접 몸을 움직이니 예전 생각이 나는구나. 어떻게 보면 제국의 황제로 살아가는 지금보다 더 즐거웠던 것 같구나."

"종종 여행을 다니면 되지 않겠사옵니까?"

"시간이 난다면 말이지."

타로스는 점심을 모두 먹고 난 후, 다시 진군을 지시하였다.

죽음의 늪.

전 대륙에서 금역으로 지정될 만큼이나 기후가 최악인 곳이었다.

그나마 선선했던 기후가 햇볕 때문에 급변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의 더위와 함께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저 멀리 펼쳐져 있는 끝없는 늪이 보였으며, 온갖 독충들이 우글거렸다.

제후들은 이 날씨와 냄새에 상당히 곤욕스러워했지만, 유일하게 바바와 그란달만이 익숙한 듯이 초연했다.

그들은 대사막에 영지를 두고 살고 있다.

심심치 않게 대사막으로 나가 토벌을 했으며 아예 사막의 기후에 익숙했다.

물론 그런 그들조차 습한 기후는 처음인 듯했다.

"이 정도로 덥고 습하다니. 대사막보다 환경이 좋지 않사옵니다."

"짐도 그리 생각한다."

"폐하께서는 과거에 이곳에 와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아주 오래전, 고대의 악마를 봉인하기 위하여 이곳으로 중앙군을 몰고 진군해 왔다. 그때 많은 병력이 상했었지."

온갖 해충은 그렇다고 치고 저 늪 안에 무슨 몬스터가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나무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니 마기에 찌든 타락한 엔트들이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곤욕스럽기는 타로스도 마찬가지였지만, 대안이 없는 건 아니다.

괜히 대마도사들과 마법사단을 이끌고 온 것이 아니다.

"마법사들은 길을 만들고 궁정 후작들은 보호막을 쳐라. 그리고 내부를 정화하라."

"존명!"

쿠구구구!

타로스의 명령이 떨어지자 대지가 말라붙으며 평지가 되었다.

해충들이 들어올 수 없도록 보호막과 썩은 냄새를 정화하는 마법까지 펼쳐지자 이곳은 더 이상 죽음의 늪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날씨도 마찬가지였다.

기후 조작 마법까지 더해지자 오히려 대수림을 거쳐 온 것보다 쾌적해졌다.

"이, 이런 일이 가능하다니."

두 대공들과 휘하의 기사들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세상에 그 누가 있어 죽음의 늪을 이런 식으로 정화할 수 있단 말인가.

오직 황제가 직접 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법사들을 동원하지 못했다면 나도 올 생각을 안 했지.'

신기이고 나말이고 그냥 두었을 것이다.

마법사의 도움 없이 죽음의 늪을 횡단한다?

그야말로 신종 자살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놀란 것은 타로스도 마찬가지였다.

제국의 마법사들이라고 해서 공격 마법에만 조예가 있는 줄 알았는데 여러 가지 보조 마법에도 실력이 상당하였던 것이다.

타로스가 먼저 한 발을 내딛었다.

흙까지 정화가 되어 있어 숲길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타로스는 담담하게 일행을 이끌었다.

"출발하지."

평소라면 이곳에 올 생각조차 하지 못했겠지만, 타로스는 최악의 환경을 무력화시키고 쾌적하게 여행을 즐겼다.

#제88화. 고대의 악마(1)

"케륵! 케르르륵!"

푸하하학!

사방에서 녹색의 체액이 튄다.

죽음의 늪 중심으로 들어가자 리자드맨이 끝도 없이 튀어나왔다.

레벨 50대 후반에 불과하였고 병사들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으나, 그 숫자가 만만치 않고 끈질기기가 이를 데 없어 3교대로 끊임없이 전투를 벌여야 했다.

"변이 리자드맨입니다!"

"기사단 출격."

기사들도 쉬지 않았다.

레벨 70대의 변이 몬스터들은 기사들이 처리하였으며, 레벨 80대의 보스급 몬스터들은 제후들이 직접 나서서 처리했다.

그리고 가끔씩 레벨 90대 초반에 이르는 보스가 출현하였는데, 이는 타로스가 나서서 처리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간만에 레벨이 올랐다.

보스의 개체도 많아 죽음의 늪에 들어온 이후 타로스의 레벨이 2개나 올랐다.

"폐하! 리자드맨 킹이 떼로 뭉쳐 있나이다!"

팟!

보고가 들어오기 무섭게 타로스는 빛과 같이 나아가 파워드 킬을 뿌렸다.

순식간에 리자드맨 킹 무리가 휩쓸려 나간다.

여기까지 들어온 이상 타로스도 무덤덤하게 여행이나 즐기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과연 악명이 높은 마경이다.

신관들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크게 다친 사람은 나오지 않고 있었지만 독에 중독된 병사들이 꽤 되었다. 그 탓에 사방으로 신성한 힘이 흐르고 있는 중이었다.

마법사들도 나름대로 지원을 했다.

콰과과과광!

화염구에 의해 뭉쳐 있는 개체들을 흩트리면 병사들이 처리하는 개념.

이만하면 전쟁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제국의 군인들은 오히려 즐겁다는 듯이 검을 휘둘렀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경험치가 흡수되면서 강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광적인 모습을 보며 델리안과 그람 공국의 사람들은 몸을 떨어야 했다.

"제국 군인들은 기본적으로 싸움에 미친 사람들이라고 하더니."

"이런 광적인 전투는 난생처음이오."

"공감입니다."

두 대공들은 간헐적으로 들어오는 몬스터들을 베어 넘기며 혀를 내둘렀다.

스파르타는 한 수 접어주어야 할 정도로 전투에 혈안이었다.

이 중 독보적인 존재는 역시 황제였다.

명불허전.

대륙 최강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 주듯 모든 보스 몬스터들이 갈려 나갔다. 검에 닿기도 전에 모두 쓸려 나가는 광경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다. 무려 일주일 이상 이런 식으로 전투가 이어져 왔지만 제국 군인들은 딱히 지친 기색이 아니었다.

다만, 공국 사람들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아도 지쳐 가고 있었다.

저녁이 되어 식사를 하는 시간.

이제 야생 동물들도 사라지고 마수나 몬스터가 주를 이루었으므로 사냥은 할 수 없었고, 그 탓에 육포와 스프로 허기를 달래야 했다.

"오늘도 대단한 하루였사옵니다."

그람 대공의 평가였다.

어마어마한 양의 육포를 소모하고 있던 바바 준남작이 그람 대공을 보며 비웃었다.

"공국의 병사들, 허접하다."

"...!"

"우리는 죽어라고 일하는데, 병사들은 짐이나 들고."

"아니, 그것은!"

"됐다. 그만해라."

"황공하옵니다, 폐하."

"황공, 폐하."

바바의 말에 공국 사람들은 속이 뒤틀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제국 군인들이 전투를 하는 동안 공국 병사들은 도저히 전투에 참여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구운 육포를 내미는 레베카의 표정은 황망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폐하께 고작 이런 육포 쪼가리를 내밀어야 한다니. 손이 부끄럽나이다."

"마경에 들어와 이 정도 식사면 훌륭하지. 예전에는 벌레를 잡아먹으며 전진해야 했다."

"그, 그렇사옵니까?"

"보급 부대가 몬스터의 습격을 받아 궤멸되면서 참으로 암담한 상황이었지. 살려면 별수 없는 일 아닌가. 그나마 뒤져 보면 독에 물들지 않는 벌레들도 꽤 있지."

사람들은 황제의 과거사를 들으면 들을수록 쉽게 살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긴, 모험과 수련을 병행하며 살았던 삶이 평범할 리가 없었다.

지금이야 제국을 굽어보는 지배자의 위치에 있었으나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타로스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본다.

빼곡하게 자리한 별들.

제법 힘들게 진격하고 있었으나 제국에서는 이런 아름다운 별을 볼 수가 없었다.

"그나마 저녁에는 독이 물러가는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지."

"참으로 그러하옵니다."

"마법사들의 노고가 많다."

"클클, 아니옵니다. 저희 마법사들도 고생이라는 것을 좀 해야지요. 매일 연구실에 틀어박혀 연구만 하면 무슨 사는 낙이 있겠사옵니까?"

"내일이면 고대 사원에 도착한다. 고대 악마 놈이 죽으면 돌아가는 길은 좀 순탄할 것이다."

제국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공국인들은 황제가 고대의 악마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게 아닌지 걱정스러워했다.

대륙 최악의 금역이자 마경으로 불리는 죽음의 늪 중심부.

지난 수백 년 동안 여기까지 발을 들인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마경을 굳이 토벌하여 영토를 확장할 이유가 없었다.

생명이 잉태하기 힘든 환경에 독충이 우글거려 개척은 생각조차 못하는 이곳에 군대를 보낼 바보 같은 군주는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과거 제국에서 여기까지 군대를 보냈던 것은 고대의 악마를 봉인하기 위함이었다.

늪 한가운데에 사원이 있는 모습은 굉장히 이질적이다.

게다가 사원 부근에는 대리석이 정갈하게 깔려 있었고, 늪지대도 끝나 오히려 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어마어마한 마기가 흘러나오는 것이 문제였으나, 이곳에는 개미 새끼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으며 마법사들과 사제들이 정화 마법을 펼치자 이만큼 쾌적할 수가 없었다.

병사들은 오랜만에 보는 정갈한 땅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아무리 마법사들이 땅을 다졌다고 하지만, 스멀스멀 땅에서 올라오는 냄새는 여간 고역이 아니었던 탓이다.

"정말로 사원이 있다니."

공국의 대공들은 이 비현실적인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사원은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마기는 일반인이라면 질식해서 죽을 정도였고, 병사들도 마법사들의 도움이 아니라면 영향을 받았을 정도로 강렬했다.

거액을 주고 고용한 사제들이 사원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여간 불길한 것이 아니군요. 만악의 근원이라고 칭해도 부족함이 없겠습니다."

대사제 보겔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사제들은 악의 근원을 목도하고 큰 결심을 했다.

"저희들도 함께 들어가겠습니다."

"목숨을 보장할 수는 없다."

"이만한 악의 근원을 마주하고 도망간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순교를 결심하는 사제들.

신이 실재하는 세상이었기에 그 믿음은 매우 단단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여기까지 온 사제들이었으나, 지금은 모두가 순교하겠다고 이야기했다.

타로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거창하게 순교를 운운할 필요 없다. 저 안에 들어가면 정화에 힘을 쏟도록. 나머지는 짐이 처리한다."

"그렇다면 자그마한 도움이라도 드리겠습니다."

"제후들은 어쩔 것인가. 이곳에서 기다려도 된다."

"아니옵니다! 폐하께서 역사를 이룩하심을 어찌 외면한다는 말이옵니까?"

"뜻대로 해라. 허나 고대의 악마와 전투는 불허한다."

"존명!"

고대의 악마.

타로스가 알기로 그놈은 레벨 100을 넘겼다.

즉, 지금의 전력으로 부딪치면 답이 없다는 뜻이었다.

오죽하면 과거 타로스가 고대의 악마를 신기로 봉인할 생각을 하였을까.

이곳에서 잠시 식사를 하고 한 시간 정도 휴식을 취한 후에 고대 사원으로 진입하였다.

밖에서 보기에는 그다지 크지 않았으나, 내부에는 공간 확장 마법이 걸려 있어 내부가 대략 3천 평은 되어 보였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대리석 바닥이 이어졌고, 그 중심에는 제단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제단에 꽂혀 있는 순백의 검.

물론 신기 아이비오르는 원래 갑옷이다. 그저 금속을 변형할 수 있는 마법이 걸려 있어 자유자재로 원하는 형태를 추구할 수 있을 뿐이었다.

검의 형태여야 바닥에 꽂아 오랜 세월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검의 형태를 하고 있을 뿐이지, 저건 갑옷이었다.

타로스가 원했던 신기 아이템.

유물을 넘어선 신기급이라고 불렸으며, 게임 내에서 몇 개 존재하지도 않는 고효율의 아이템이었다.

이걸 얻기 위해 죽을 고생을 한 것이다.

검 한 자루가 막대한 마기를 억누르고 있었다.

봉인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마기가 번져 죽음의 늪 전체에 영향을 미칠 정도라면 대체 고대의 악마는 어느 정도의 마기를 품고 있을 것인가.

저벅저벅.

타로스가 제단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제후들은 마른침을 삼킨다.

"심장이 다 떨리기는 오랜만이로군."

"그러게 말입니다. 제후의 자리에 오른 이후 두려움을 느낀 것은 폐하 이후 처음입니다."

"뭔가 어마어마한 것이 튀어나올 것 같은데."

제후들은 분위기에 압도되어 긴장하고 있었다.

여기에 사제들이 양념을 추가했다.

"고대의 악마 벨가루스.... 마왕으로 군림하였던 기록이 있지요."

"...!"

"현 마왕에게 그 자리를 내어 주고 지상계에 강림했던 이유는 마계의 문을 열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성서에 기록이 된 내용이지만 짧게 언급되었고, 그 뒤의 내용은 삭제가 되어 더 이상 정보는 얻을 수 없었지만."

사제들마저 식은땀을 흘렸다.

한때 마왕이었던 자.

제후들은 더욱 가슴을 졸였다.

마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것도 아니고 마계의 문을 열기 위해 그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마계의 모든 직위를 포기한 것은 인과율 때문이었다고.

그런 괴물을 오늘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타로스는 제단 끝에 올라왔다.

여전히 무심한 표정이었으나 내심은 심장이 뛰고 있었다.

'까딱 잘못하면 사망이다. 최대한 빠르게 처리해야겠지.'

타로스 역시 위험성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기 아이비오르의 유혹이 너무 강렬했다.

지금 그에게는 마땅한 갑옷이 없는 상태였다.

여러 유물들을 취해 강해졌다고 해도 방어력이 형편없다면 끔살을 당할 수도 있다.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제대로 된 방어구는 필요했다.

꽈드득!

신기를 손에 쥔다.

타로스가 봉인했다는 설정이었기에 오직 본인만 봉인을 풀 수 있었다. 하지만 크게 힘든 건 아니었다.

그그그극!

천천히 신기가 뽑혀 나온다.

그와 동시에 막대한 마기가 분출되기 시작했다.

"크윽!"

"큭!"

"전력으로 정화를 하라!"

"예!"

제후은 마나로 몸을 두르고 마법사들과 사제들은 신성과 마력으로 막을 치며 정화를 시작했다.

하지만 정화는 사원 전체로 퍼지지 않았다.

고작해야 자신들의 주변으로 퍼지는 마기만 막아 낼 뿐이었다.

타로스 역시 앱솔루트 배리어를 쳤다.

쿠구구구구!

사원 전체가 흔들리며 봉인이 풀렸다.

활활 타오르는 붉은 불꽃 속에서 키가 3미터가 넘어가는 장신의 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통 화염으로 몸을 두르고 있었으며, 거대한 세 개의 뿔과 가시로 뒤덮인 팔을 가진 전대 마왕.

벨가루스는 타로스를 보자마자 낮은 울음을 토했다.

-오랜 세월 네놈을 기다리고 있었노라.

"간만이구나, 벨가루스. 네놈의 목숨을 거두기 위해 왔다."

#제89화. 고대의 악마(2)

쿠구구구구!

대지가 떨리고 사원 전체가 흔들렸다.

대륙의 강자들이라고 불리는 제후들조차 도저히 적응하지 못할 정도의 위압감.

황제를 제외한 제후들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는 랭턴 공작조차 벨가루스의 실물을 보며 몸을 떨었다.

"전 마왕이라더니, 위압감이 장난 아니로군."

"그러게 말입니다. 과연 폐하께서 상대할 수 있을지."

"상대?"

제후들의 눈동자가 그람 대공에게 돌아갔다.

그람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제후들을 바라봤다. 도대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 제가 무슨 말을 잘못했습니까?"

"대공, 그것 참 폐하께 실례가 되는 말입니다. 상대가 되지 않고 말고는 고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상대는 전 마왕이라지 않습니까? 침공을 위하여 옥좌를 포기한."

"이 세상의 그 누구도 폐하의 상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게 설사 마신이라고 하여도!"

드드드드!

막대하게 방출되는 마기의 일렁거림이 제후들의 얼굴을 스치자 그것은 광기와 같이 비추어졌다.

이 인간들은 정말로 황제가 이 세상의 절대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사제들이 신을 믿는 것보다 더한 믿음이었다.

제국은 무학을 숭상한다.

신을 믿는 사람보다 기사도를 더 숭상하였으며, 그런 기조는 건국 초부터 쭉 이어져 왔다. 그런 기조가 지금의 제국을 만들었다.

제국 내에서야 여러 다툼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기사도로 뭉친 군단은 그 어떤 군대도 격파해 왔었다.

미친 인간들처럼 보였으나 이것이 제국에서는 일반적인 논리다.

황제이기에 그 어떤 적도 격파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애초에 제후들이 여기까지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람 대공은 황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하였군요."

그제야 제후들은 그에게서 눈을 떼고 제단을 올려다봤다.

고대의 악마가 출현하였고 놈은 황제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흐흐흐, 그 오만함은 여전하구나. 이제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권태감에 찌들어 있어. 도대체 무엇이 네놈을 여기까지 이끌었느냐.

"영구적인 평화를 이룩하기 위함이다."

-크하하하! 네놈이 영구적인 평화를 이룩해? 새로운 취미로 합법적인 살인을 하기 위함이 아니고?

"짐은 황제다. 굳이 합법적으로 살인을 할 이유가 있겠느냐."

-여하튼. 죽을 자리를 찾아왔다 그 말이렷다.

콰아아앙!

콰드드드득!

거센 공격이 시작되었다.

일격이 먹혀 들어간 것을 제후들은 보았다.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공격이었으나 막혀 버렸다.

일순 벨가루스의 눈에 당혹감이 어렸다.

재차 공격에 들어갔다.

파스스슷!

마기와 화염의 채찍이 쉴 새 없이 휘둘러진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사원 자체가 무너지지는 않는다는 것.

어마어마한 속도와 파괴력을 가진 채찍들이었으며 틈도 없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람과 델리안 대공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손도 부들부들 떨렸다.

저런 놈이 이곳으로 쇄도한다면 모두가 죽은 목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후들은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위력적인 공격이로다. 지금까지 폐하께서 상대해 오셨던 그 어떤 적보다 강하다."

"드, 드래곤보다 말입니까?"

"제가 느끼기에는 그렇습니다."

랭턴의 말에 제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은 감히 보조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강맹한 공격이었다.

사정권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권태로운 표정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한차례 공격이 멈추었다.

고대의 악마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이놈.... 도대체 무슨 기술을 얻은 것이냐!?

"그건 알 필요 없다. 중요한 것은 네놈이 죽는다는 거지."

쿠구구구구!

타로스는 내심 식은땀을 흘렸었다.

조금이라도 뚫고 들어갈 틈이라도 있어야 어떻게든 파워드 킬을 상대할 텐데, 도저히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력이 소진되면 타로스는 허무하게 죽을 것이다.

고맙게도 벨가루스는 공격을 멈추며 입을 털었고, 그 즉시 타로스의 마력이 놈에게 닿았다.

거리가 10미터가 넘었기에 이 상태로 파워드 킬을 사용하면 닿지 않을 것이고 반드시 마력이 닿아야 했다.

'끝났다.'

마력이 닿았기에 의지에 따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마력을 심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번에는 조금 위험할 수도 있었어.'

겉으로는 시종일관 여유로움을 보였고 이제는 마음에서도 평화를 찾는다.

-네놈이 어떤 힘을 얻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만으로는 나, 고대의 마왕을 넘을 수 없을 것이다!

쩌저저적!

또다시 휘몰아치는 채찍.

이번에는 타로스의 주변이 완전히 불길로 타오른다.

마력에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타로스는 놈이 무슨 기술을 사용하는지 꿰뚫어 보려 노력하였다.

'공간의 휘어짐을 극도로 늘리면 검강이 마치 채찍같이 휘둘러지지.'

사원이 어떤 힘으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면 이미 건물 전체가 주저앉고 남았을 것이다.

놈의 레벨은 100이 넘어간다.

전투에서 승리를 하고 나면 몇 개의 레벨이 오를까?

점점 벨가루스의 힘이 약화되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전력을 다하고 있었으나 앱솔루트 배리어를 뚫을 수는 없었던 거다.

그리고 잠시 보이는 틈.

"이만 죽어라."

콰과과과광!

쩌저저정!

벨가루스의 몸에서 화려한 원소 폭발이 일어나며 몸이 갈라지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마왕은 마왕인가.

이 순간에도 한마디를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끄아아악! 이것이 끝이라 생각하지 말라! 마계의 문이 열리는 날, 인간은 멸망할 것이니!

동시에.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놀라운 일이다.

실질적인 레벨이 100을 넘기는 괴물이라 그 말인가?

벨가루스는 어마어마한 양의 경험치를 남기고 사라졌다.

저벅저벅.

타로스는 천천히 계단을 밟고 내려왔다.

제후들 사이에서는 어마어마한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드래곤을 죽였을 때보다 더한 흥분.

제후들은 물론이고 대공들도 무릎을 꿇었다.

"승리를 감축 드리옵니다!"

"감축 드리옵니다!"

이어서 사제들까지.

"역시 성자로 이름이 높으신 폐하이십니다. 설마하니 고대의 마왕을 죽여 없애실 줄은...."

이미 지옥의 대군주를 죽여 없애면서 타로스의 이름은 교단 내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비록 본인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각 교단에서 타로스를 성인으로 추대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였다.

가이아 교단이 첫 번째로 승인하고 전장에 참전을 하였고 말이다.

이번에는 고대의 마왕을 죽이고 마계의 문을 완전히 없애 버렸으니, 그 업적은 종교사에 길이 남을 만했다.

"별일 아니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성전이었어요!"

"교단에 이 사실을 알리겠습니다."

흥분하는 것은 제후들뿐만이 아니었다.

사제들 역시 이 위대한 발자취를 함께하며 몸을 떨었다.

***

마기가 사라지자 조금씩 사원 주변이 정화되는 것처럼 보였다.

늪의 독기는 여전하였으나 마기가 사라지면서 마수들이 짐승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고, 오염된 나무들도 제자리를 찾고 있었다.

이대로 오랜 세월이 흐르면 나무들이 독을 정화하면서 점점 제 모습을 찾아갈 것이다.

마기가 사라지니 숨 쉬기도 편안해졌다.

황제와 제후들, 사제들은 잠시 사원을 나와 휴식을 취했다.

단지 황제가 싸우는 모습을 보기만 하였음에도 기력이 다 빠지는 느낌이었다. 물론 사제들은 마기를 정화하며 신성력을 소모하기는 하였지만.

"오늘 진정한 성자의 출현을 목도하였다."

"...."

자애의 사제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자애의 교단에서도 황제를 성자로 이름을 올려야 할지, 말지에 대해 말들이 많았다.

이미 어마어마한 권력을 쥐고 있는 황제였는데, 굳이 성자라고 추앙하여 전쟁의 명분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가?

영구적인 평화를 이룩하여 전쟁 자체를 없애 버리겠다는 대의는 있었으나 그동안 죽어 나갈 사람도 생각해야 했다.

그러나 오늘, 사제들은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다.

"대륙에 평화를 이룩하겠다는 대의는 진짜였다. 의심할 여지가 없어."

"교단에 통신을 보낼까요?"

"오늘 있었던 일을 그대로 보내도록 해라. 황제는 만악의 근원을 없애 버릴 위대한 성자라고."

"그리하겠습니다."

사제들은 휴식을 취하고 있는 황제를 바라보며 절로 고개를 숙였다.

지금껏 보이고 있는 황제의 행보는 정말로 대륙을 정화하는 듯한 움직임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율리우스 왕국을 멸망시켜 흡수하였으나, 그 자체도 영구적인 평화를 목적으로 하였다면 이해가 되는 일이었다.

전쟁은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앞으로도 그런 식으로 승리해 나간다면 수십 년이 지나지 않아 제국에 모든 국가들이 복속할 것이다.

대사제 보겔은 교단이 취할 입장을 훤하게 짐작했다.

"허허, 어쩌면 다음 전쟁에는 자애의 교단이 참전하게 될지도 모르겠군."

타로스의 활약은 기사들이나 병사들에게도 전해졌다.

특히나 상대가 고대의 마왕이었다는 것에 놀람을 감추지 못하였다.

제후들이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고 사제들까지 같은 말을 하니, 이번 여정이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성전에 가까웠음을 인지하게 된 것이다.

곳곳에 막사가 쳐졌다.

사원으로는 몬스터나 마수들이 침범하지 않았기에 최소한 이틀 정도는 쉬어 가기로 했다.

잠시 전투의 피로를 회복하는 동안 타로스는 제국의 신기급 아이템을 확인했다.

신기 아이비오르

등급: 신기

착용 조건: 마력 100/레벨 제한 60

내구도: 무제한

물리 방어력 +100

마법 방어력 +100

모든 스탯 20%

실드 상시 발동

금속 변형

천신 아이비오르가 제작한 갑옷.

강력한 신성력이 휘감고 있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의 옵션이었다.

유물조차 하나를 모으기가 힘들었는데, 신기급 아이템은 대륙에 몇 점 있지도 않았다.

제국 주변에는 이제 존재하지 않으며 정벌을 시작하면서도 운이 좋아야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레벨 조건에는 간신히 맞았고, 마력 조건은 여유가 있을 정도였다.

이래저래 이번 여정은 큰 이익이었다.

방어력이 대폭 올라가고 실드가 상시 발동되니, 웬만한 마법이나 공격은 그냥 튕겨 낼 것이다.

실험을 해 봐야 알겠지만 최소 5서클의 마법에 검기까지는 그냥 튕겨 내지 않을까 싶었다.

'왜 신기가 밸런스 붕괴 아이템이라고 불렸는지 알겠다.'

사실 신기 아이템을 정말로 서비스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는 회사 내에도 의견이 분분했었다.

베타 버전에서는 우선 등장을 시키지만 정식 버전에서는 삭제가 되었을 수도 있다.

아이비오르를 갑옷으로 변형하여 입자 순백으로 빛남과 동시에 신성력이 흘렀다.

밖으로 나오자 제후들조차 눈이 돌아갈 정도.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을 때, 타로스는 최대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던전을 탐사한다."

#제90화. 귀환(1)

던전 탐사.

대륙 곳곳에는 고대 마도 제국이 남긴 던전들이 있다.

찾기 쉬운 던전들은 대부분 탐사가 이루어졌고, 남은 던전들은 금역이나 마경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이곳 사원 던전도 마찬가지였다.

사원 제단으로 이어지는 던전은 아마 수천 년 동안 탐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리라고 보았다.

제후들이 기대감을 갖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고대의 악마, 혹은 고대의 마왕이라고 불리는 어마어마한 악마와 전투를 벌이는 바람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애초에 제후들이 타로스를 쫓아온 이유가 바로 이 던전에서 발생할 수익 때문이었다.

"저희들이 과연 탐사를 할 자격이 있을지 모르겠사옵니다."

"어찌하여 그리 생각하느냐."

"고대의 마왕을 해치우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여기까지 오느라 함께 고생하였으니 과실을 나누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폐하...."

제후들은 감동 어린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만사를 귀찮아하던 황제였기에 어심을 짐작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어떤 사건이 발생하며 황제가 해결해 나가는 모습을 보자 타로스라는 사람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황제가 태업을 일삼았던 것은 악마가 말했듯 세월의 무게 때문이었다.

고작해야 수명이 50년에 지나지 않는 이 시대에 수백 년을 살아왔다는 것은 정신이 마모되고도 남을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권태로워했지만, 그래도 움직이기 시작하자 황제는 제국과 인류를 위하여 움직인다는 대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걸 제후들도 깨닫고 있는 것이다.

귀족파나 중립 파벌에서도 황제를 내심 지지하는 사람들이 생길 정도였다.

태업에 가려져 있던 인간성.

황제는 언제나 공평하게 판단을 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물론 자신과 관련된 일이라면 최대한 공로를 다른 사람들에게 돌리려 노력하였으니 그걸 모를 리가 없다.

내심이야 어쨌든, 타로스는 늘 그러하듯 느리게 움직였다.

표정만으로는 그 내심을 전혀 짐작할 수 없었기에 더욱 긴장이 어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제단의 지하를 지나쳐 내부로 들어오자 마법사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이런! 고대어입니다! 어쩌면 마도 제국 이전의 던전일지도 모르겠사옵니다."

"...!"

그랑카인 후작의 말에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미 마도 제국은 수천 년 전에 멸망하지 않았던가.

그보다 더 오래된 던전이라면 연대를 측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곳에는 대륙의 현자 둘이 모두 함께하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탐독하였다는 현자들이 연대를 알 수 없다면, 그건 마도 제국 이전, 즉 신들이 전쟁을 벌이던 암흑기에 형성되었던 던전이라는 의미였다.

'꽤 안목이 높은데.'

오직 던전을 디자인하였던 타로스만이 정확하게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신마대전 시절에 형성된 던전이 맞았다.

신들이 대륙을 활보하던 시기.

그에 대한 역사적인 벽화들이 가득하다.

던전 깊숙이 들어오자 긴 회랑이 펼쳐져 있었으며, 그곳에는 신마대전 당시의 벽화가 꽤 많았다.

"이럴 수가! 신마대전은 그저 전설로만 들었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이곳에 그 증거가 있사옵니다!"

"역사적인 가치가 높군."

"역사학자들이 본다면 눈이 뒤집힐 만한 광경이옵니다."

놀라기는 제후들도 마찬가지였으나 그들의 관심은 던전에 존재하고 있는 보물에 쏠려 있었다.

과연 이만한 고대 던전에는 어떤 보물들이 잠들어 있을까.

'아마도 매직에서 레어급 아이템 정도겠지. 하지만 요구 레벨이 90 이상이라 내가 착용할 수는 없을 거야.'

애초에 타로스의 목적은 이루었다.

신기 아이비오르를 얻은 것만 해도 그 가치를 측정할 수 없을 지경이다.

기껏해야 금은보화들이었는데 그 정도야 제후들이 알아서 분배할 것이다.

회랑을 지나 지하 공동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안에는 연대를 측정할 수 없는 서적들과 마법 도구들, 그리고 몇몇 궤짝들이 존재했다.

마법사들은 열광했고 제후들은 궤짝에 관심을 가졌다.

랭턴 공작이 단숨에 궤짝들을 잘라 냈다.

끼이이익!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상당한 소음과 함께 궤짝들이 개봉됐다.

"오오!"

"고대 주화들과 보석들이옵니다!"

"주화는 금인가?"

"예! 허나 신마대전 당시 인간들이 사용하던 주화이니, 역사적인 가치가 상당하옵니다. 이 정도면 유물이며 수집가들 사이에서 상당한 가격에 판매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보석들도 다소 있사옵니다!"

"이, 이건 마도구?"

한쪽에는 역시 무구들이 진열되어 있기도 했다.

총 50여 개나 되었는데, 제후들이 모두 하나씩 나누어 갖고 기사들에게도 나누어 줄 정도는 되어 보인다.

타로스는 쭉 무구들을 살폈으나 역시 쓸 만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진실의 눈을 사용하면서 하나하나 감정을 해 나간다.

외양은 그럴싸했고 그럭저럭 가볍고 튼튼하여 사용하는데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옵션들이 다소 아쉽다.

이미 신기를 이곳에 두었다는 것만 해도 더 대단한 아이템이 등장하기는 힘들었다.

그래도 혹시나 모르니 쭉 아이템을 훑어보다가 타로스는 꽤 쓸 만한 반지를 하나 발견했다.

유랑 신의 반지

등급: 레어

착용 조건: 민첩 100/레벨 제한 60

내구도: 무제한

민첩 +20

10초 동안 50% 가속 이동

쿨타임: 30분

유랑의 신 람테로스가 제작하였으나 실패한 반지.

신의 숨결이 느껴진다.

녹색으로 빛나고 있는 반지에서는 은은한 신성력도 느껴졌다.

신이 제작을 하려다 실패하였다는 설정이었으나 이만하면 언젠가는 쓸모가 있지 않을까?

게다가 민첩이 약간 붙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제후들은 이런저런 무구들에 관심을 보였는데,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라 모두 황실에 귀속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폐하, 신들은 약간의 금화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되옵니다. 모두 폐하께서 취하시옵소서!"

"취하시옵소서!"

"...."

'쩨쩨하게 그럴 수야 있나.'

황제 체면에 별것도 아닌 아이템을 가지고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었다.

타로스는 천천히 무구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 유랑 신의 반지를 집어 들었다.

손가락에 끼자 크기에 맞게 줄어들었다.

"나머지는 제후들과 기사들이 분배하고, 금화와 보석들은 균등하게 나눈다. 금화 하나라도 병사들에게 돌아가도록 조치하고, 제후들은 어느 정도의 보상을 기사와 병사들에게 하도록 하라. 유물을 얻었으니 그만한 가치는 있을 것이다."

"폐, 폐하!"

"하오나!"

"명이다."

"존명!"

이번에는 마법사들이 타로스를 바라봤다.

그들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언제나 황제는 관대하였고, 특히나 마법 자료에 대해서는 예외가 없었다.

"황실 마법사들이 사용하도록 한다. 단, 서적들은 필사한 후 원본을 황궁 무고에 보관한다."

"예!"

***

죽음의 늪을 빠져나오는 내내 모든 사람들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타로스는 기사들이나 병사들에게도 고대 주화를 챙겨 주는 등 관대한 모습을 보였다.

자신의 몫으로는 고작 반지 하나를 챙겼을 뿐이다.

물론 일정 부분의 고대 주화를 가져오기는 했지만, 모두 매각하여 내년 전쟁 비용에 보태라고 명령했다.

고생을 한 만큼 보상이 돌아가자 모두가 만족해했다.

특히나 두 대공들은 보상을 받아도 될지 상당히 고심했다.

결국 타로스의 명령으로 고대 주화들과 유물 한 점씩을 챙겼고 감격에 겨워했다.

죽음의 늪과 대수림을 관통할 때에는 시간이 다소 걸렸지만 마기가 사라지고 마수들이 사라지자 횡단하기가 굉장히 수월해졌다.

마침내 원정대는 대수림 입구까지 도착했다.

다만, 여기서 다시 움직이기에는 무리가 있었기에 이른 저녁부터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이제 내일이면 이 자리에서 헤어지게 될 것이다.

기사들은 대수림에서 사냥하여 고기를 마련하였고, 간만에 포식을 했다.

배가 든든하게 채워지고 보급대에서 가져온 와인을 마신 타로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닥! 타닥!

모닥불이 타들어 가며 소리를 낸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공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타로스에게 모였다.

"경들과 함께하여 즐거웠다."

"소신들도 마찬가지이옵니다!"

"상당히 아쉽습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 아니겠느냐. 이제 각자 영지로 돌아가 황명을 대기하도록 하라. 또한 내년 추수가 끝나면 바로 진군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

"황명을 받드옵니다!"

"마시자. 지금까지 고생했다."

그걸로 끝이었지만, 타로스의 입장에서 이만하면 상당히 말을 많이 한 편이라고 볼 수 있었다.

제후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특히나 상당한 아쉬움을 토로하였는데, 여행을 하다 보니 중독되는 맛이 있어서다.

"왜 모험가들이 모험에 빠져 사는지 알겠습니다."

"허허허, 나는 용병들의 마음을 이해했지."

"이런 자유로운 삶이라니."

"그래도 모험은 언제든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니겠소?"

타로스는 제후들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본의 아니게 제후들은 모험을 동경하게 되었다.

영지에 매인 것보다는 자유와 모험을 향해 떠나는 것이 더 보람찬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번 여행은 제후들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 틀림없었다.

다음 날 오전.

여느 때와 달리 10시까지 기상하지 않았다.

다들 여정에 고생하였으니 안전 구역에서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마법사들이 트랩을 깔고 경비를 했다고 해도 지옥의 마경이라 불리는 곳에서 긴장을 풀고 잘 수는 없었다.

타로스 역시 늦게까지 자고 일어났다.

이 자리에서 철군 준비를 했다.

2천의 병사들과 기사단 기사들, 제후들까지 도열을 한 후에 각을 맞춰 섰다.

그 덕분에 공국의 대공들이나 공국 사람들도 각을 맞춰 도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가운데 타로스는 느릿느릿하게 움직여 바위 위로 올라왔다.

"이번 여정은 이것으로 끝이다. 허나 내년 전쟁이 끝나고 나면 다시 한번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그때 짐과 함께 여행을 하고 싶은 제후가 있다면 지원을 해도 좋다."

"오오!"

제후들의 눈이 반짝였다.

이미 여행에 중독된 그들이었다.

무엇보다, 타로스는 수백 년을 살아왔고 대륙 곳곳에 숨겨진 던전들을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황제와 함께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보상과 재미를 보장한다는 걸 알았기에 제후들은 열광했다.

"반드시 참여하겠사옵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이 자리에서 지원하겠나이다!"

"그리하라."

타로스는 간단하게 수락했다.

다들 말은 안 했지만,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했다.

전쟁에 이어 여행까지 함께하면서 전우애가 쌓인 탓이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하였던가.

서로 만나면 치고받고 싸우기 바빴던 각 파벌들은 이번 기회로 좀 더 친해지기도 했다.

"귀환한다."

타로스는 그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렸다.

따로 헤어져 각자의 영지로 향한다.

물론 타로스와 같은 경우에는 제도로 향해야 했다.

"내년에도 공짜 인력들을 부릴 수 있겠는데."

제후들이 지원하는 여행은 언제라도 환영이었다.

#제91화. 귀환(2)

대수림에서 제국의 제도까지 무려 한 달의 여정이었다.

말을 타고 빠르게 내려왔다면 시간이 꽤 단축되었겠지만, 타로스는 그러지 않았다.

제도로 빨리 돌아와 봤자 국무 회의에 바로 들어가고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했으므로 여행이나 하면서 천천히 되돌아왔다.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마법사들로부터 서류를 받아 처리하였으며, 기밀을 요하는 경우에는 파발을 띄웠다.

최대한 꼼수(?)를 부리며 내려왔지만 결국에는 제도에 도착했다.

좋은 시절은 다 갔다는 뜻이다.

"폐하, 제도에 도착했사옵니다."

"그런가."

브론티아 성채 앞.

황궁도 아니고 수도 앞에 어마어마한 인파가 모여 있었다.

제국의 군인들은 물론이고 궁정 귀족들과 황후 나타샤까지 타로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이 꽤 많은데."

"그만한 위업을 달성하였기 때문이 아니겠사옵니까."

로빈슨 단장의 얼굴에는 절대적인 신뢰가 묻어났다.

이제 이런 신뢰는 기사들만 갖는 것이 아니었다.

제국의 군인들은 모두 타로스에게 큰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여러 가지 일들을 거치면서 충성도 자체가 올라간 것이다.

'이만하면 반란의 우려는 없나.'

제후들의 반응만 보아도 반란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들 다음 여행을 기약하는 모습이었으며, 어떻게든 이어지는 전쟁에서 공을 세울 생각으로 가득했다.

제후들은 돌아가는 즉시 전쟁을 준비한다고 했다.

병력을 증강하고 타국 상단을 통하여 물자를 수입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낼 것이라고.

예전 같았으면 궁정 귀족들의 반란을 우려했겠지만, 이제 제국 중앙군은 약 60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율리우스 왕국과 전쟁 직후 50만까지 늘어났고, 그 이후에 각지에서 10만을 더 모병하였다.

황실 직할령이 늘어난 만큼이나 여력이 생겼고, 전리품을 처분하면서 재정적으로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

물론, 여전히 제국의 재정 적자는 1800%를 기록하고 있었으나 다음 전쟁만 끝나면 1000% 이하로 떨어질 것으로 봤다.

"폐하!"

황후 나타샤가 꽃다발을 들고 달려와, 바로 타로스에게 안겼다.

"와아아아!"

환호하는 사람들.

처음 타로스가 이 땅에 떨어졌을 때와는 분위기가 대조적이다.

그 당시에는 그저 공포로 군림하고 있었으나 이제 백성들이 진심으로 따르고 있었기에 나타난 결과다.

나타샤는 만인이 보는 앞에서 애정을 과시했다.

이어지는 키스.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황후도 기다리느라 고생 많았소."

"오늘 밤에는 기대하셔도 좋아요."

"기, 기대하지."

괜스레 땀이 흐른다.

이제 타로스도 체력적으로 굉장히 많은 발전을 이루었지만, 아이템을 모조리 해제하고 나면 황후를 쫓아가지는 못한다.

밤일을 하면서 아이템을 착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힘든 나날이 예상된다.

'보약이라도 지어 먹어야지 안 되겠군.'

여기서 후궁을 들인다?

바로 미라로 발견될 것이다.

고대 병영 국가 스파르타가 형님이라 부르고도 남을 만한 제국에서 후궁이라 해서 정상적인 여자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타로스는 여러 궁정 귀족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가장 먼저 로터스 후작.

타로스가 없는 동안 전후 처리를 모두 재상이 처리하였다.

눈 밑이 퀭한 것이 그동안 얼마나 고생을 하였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고생했다."

"아니옵니다. 제국의 위협을 없애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신 폐하에 비하겠사옵니까."

"여전히 관료 부족으로 고생하고 있나."

"제국의 영토가 50%나 확장되었사옵니다. 그중 60%가 황실 직할령으로 편입이 된 바, 심각한 인력 부족을 겪고 있나이다."

로터스 후작의 말에 의하면 인력을 충원하기는 했는데 여전히 부족하여 기존 관료들의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그 문제는 국무 회의에서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지."

"그래 주신다면 황공하기 이를 데 없겠나이다."

그 이후 이어지는 화려한 개선.

제국의 사정이 나아지기는 한 모양인지 곳곳에서 오색의 꽃들이 떨어져 내렸고, 백성들의 얼굴에도 윤기가 돌았다.

이게 다 식량난이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율리우스 왕국을 털어 식량난을 타파하겠다는 타로스의 생각은 주효했다.

어전.

타로스는 오자마자 국무 회의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여행 내내 원격으로 서류를 결재하고 일을 하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로터스 후작은 가장 시급한 문제부터 이야기했다.

"폐하, 각국의 사신들이 폐하께 알현만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각국 사신이라."

"다음 제국의 칼날이 어디로 향할지 두려움에 떠는 모습이었사옵니다."

"그럴 테지."

"그들은 어떻게 처리를 할까요?"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했다. 다들 똥줄이 타고 있는 것이다.

제국에서 군대를 동원하면 웬만한 힘으로는 막을 재간이 없었다.

이미 대륙 일통을 선언하지 않았던가.

타로스는 간단하게 하교했다.

"제후국으로 입조한다면 제국의 칼날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전해라. 제국에 입조하여 공왕의 작위를 받겠다는 왕국의 사신들만 들여라."

"그리된다면 거대한 연합이 형성될 가능성이 높사옵니다."

"언젠가는 모두 처리해야 할 일이다."

"그리 전하겠사옵니다."

아마 사신들은 대부분 돌아가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사신에 대한 문제가 처리되자 바로 세율에 대한 문제가 튀어나왔다.

"폐하, 현 제국의 세율은 전시에 적합하지 못하옵니다."

"어째서인가."

"세율 40%만으로 전시 행정부를 꾸려 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옵니다. 이에 전시 특별세를 징수해야 한다고 사료되옵니다."

"불허한다."

"그렇다면."

"이미 제국은행에 상당한 자금이 모이고 있다고 들었다."

"그렇사옵니다."

"베이너스 백작."

"하교하소서."

"은행에 전시 투자 상품을 만들어라."

"예?"

천재 행정가이자 산술에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베이너스 백작조차 투자 상품이라는 타로스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투자 상품이시라면...."

"은행 이자보다 더 높은 이율의 투자 상품을 만들라는 뜻이다. 은행 이자가 3% 아니더냐. 투자자들에게 10%의 이율을 약속하고 상품을 만들어 판매하라. 전쟁이 끝나는 즉시 투자금의 10%를 이자로 돌려주는 조건이다."

"허어! 그 말씀은."

"전쟁 이후에는 이익이 발생한다. 10%의 이자를 지급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허허,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투자 상품을 만들면 굳이 빚을 늘릴 필요도 없고, 비싼 이율을 지불하고 상단의 돈을 사용할 필요도 없지. 제국은 세계 최대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그 힘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폐하의 혜안에 탄복하였사옵니다."

이것으로 돈 문제는 해결이다.

은행 독점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이익은 상상을 초월한다.

무려 금융을 지배하는 것이다.

타로스는 금력까지 손에 쥐게 되었으므로 웬만해서는 권력이 흔들릴 일이 없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기도 했다.

그 밖에 무역에 대한 문제나 해외에서 전쟁 물자를 구입하는 문제, 자잘한 건설이나 기반 시설 확충 등에 대한 문제들이 끊임없이 논의되었다.

회의는 저녁까지 이어졌고 이제 마지막 안건이다.

로터스 후작은 이 순간만 기다려 왔다는 듯, 우렁차게 외쳤다.

"폐하! 현 제국은 그 유례가 없을 만큼의 국력을 뽐내고 있사옵니다. 주변국은 제국의 칼날이 향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으며, 제국의 규모는 최대로 확장 중에 있습니다. 허나 제국이 덩치를 불려 갈수록 인내 부족의 문제가 심화되고 있사옵니다. 특히나 황실 직할령이 늘어나고 있어 다음 전쟁까지 가게 되면 지금의 행정력으로는 도저히 감당을 할 수 없나이다."

"그렇겠지."

"해서, 최대한 인원을 확충하고 있으나 한계가 있사옵니다. 이를 어찌 해결해야겠사옵니까?"

"제국 전역에서 인재를 모아야겠지. 관료 선발을 위한 시험을 신설하고 인재를 뽑아 올려라."

"시험...이라고 하셨사옵니까?"

"제국은 평민에서 귀족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은 국가다. 능력만 있다면 평민이 황제가 되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느냐."

"화, 황망한 말씀이시옵니다."

"비록 병사들에 한한 일이지만 행정 능력이 뛰어난 자들을 쓰고, 업무 평가에 따라 궁정 귀족이 될 수 있는 길을 연다면 꽤 많은 자들이 지원할 것이다."

"그런 방법이...."

타국이었다면 어마어마한 반발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실 직할령이나 궁정 귀족을 임명하는 것은 황제의 고유 권한이었다.

제후들이야 제국의 시스템이 선발한다고 해도 황실에서 운영하는 땅은 분명 황실이 모든 것을 통제하였다.

황제의 힘이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었고, 황실 직할령도 어마어마하게 늘어나고 있었으니 이는 좋은 대안이다.

물론 그래도 부족하기는 할 것이다.

"그보다, 전에 짐이 지시한 일은 어찌 되었느냐."

"어떤...?"

"아카데미 3년 차 이상 생도들 중에서 뛰어난 자들을 선발하여 관료로 등용시키는 문제 말이다."

"으음, 학장이 보류를 하고 있사옵니다."

"보류를 해? 어찌하여?"

"겨우 몇 년 수학한 것만으로 관료로 등용이 되면 폐하께 누가 될 수 있다고 하여."

"명령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더냐."

"어디까지나 권고였사옵니다."

"그런가. 학장에게 연락해라. 내일 짐이 직접 아카데미를 찾아가겠노라고."

"...!"

궁정 귀족들은 깜짝 놀랐다.

생도들을 뽑기 위하여 직접 움직인다는 것도 그랬지만, 황제가 이만한 일로 아카데미를 찾는다는 것은 예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

제국 아카데미.

예로부터 제국 아카데미에서는 인재를 배출하는 기관으로 유명했다.

문과와 무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문과에서는 행정 관료들을, 무과에서는 제국 사관학교로 진학을 지원했다.

제국 사관학교에 입학하면 군인으로서 입대하며 지휘관으로 시작한다.

군대에서는 수련을 지원하며 코스를 잘 밟아 가면 엘리트라 할 수 있는 기사로 진급하여 제후의 자리에 도전하게 되는 시스템이다.

물론 제국의 제후는 단 30인에 불과하였으며, 경쟁이 치열하여 재능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기사는커녕 만년 병사로 복무하는 경우도 꽤 있었다.

황제는 문과의 행정관을 뽑기 위하여 아카데미를 방문하는 것이었으나 관심은 무과에서 폭발적이었다.

"폐하께서 오신다고?"

"그렇다니까. 잘 하면 뭔가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몰라!"

"황제 폐하의 가르침이라니!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 아니겠어?"

아카데미 전체가 끓어오르는 것은 물론이고 기사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아카데미로 발길을 돌렸다.

"마계의 마왕조차 처치하고 성인으로 추앙된 폐하께서 약간의 가르침이라도 내리신다면 그것이야말로 천우신조의 기회. 우리도 아카데미로 간다!"

기사들도 아카데미로 향하였고, 그건 제국 중앙군 지휘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강의는 무조건 들어야 해!"

혹시나 하는 기대가 와전되어 황제가 가르침을 내린다는 식으로 소문이 부풀려지기 시작했다.

#제92화. 제국 아카데미(1)

평일 오전.

타로스는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제국 아카데미를 찾았다.

현 제국에서 관료의 부족은 계속해서 지적되고 있었고, 시험으로 인재를 선별하는 과정도 쉽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제국은 태생적으로 병영 국가다.

강함 자체를 숭상하며 기사도가 제국의 근간을 이룰 정도였다.

그 덕분에 문관들은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제후들은 모두 기사 출신이거나 드물게 마법사들이 탄생하는 편이었다.

시험을 친다고 해도 재야의 인재가 크게 모일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고, 결국 대안은 아카데미 생도들을 뽑아 올리는 것이었다.

전문적으로 행정학 교육을 수료한 자들이라면 3년 차 생도들부터 투입해도 무리가 없다고 보았다.

예전에 비해 가마는 더욱 화려하고 거대해졌다.

그만큼 국력이 신장되었기에 황제의 어가 역시 기존과는 달라져야 한다는 궁정 귀족들의 뜻을 받아들인 결과다.

아카데미 부근으로 사람들이 폭증하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께서 오신다!"

"와아아아!"

환호하는 사람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기사들도 있었고 병사들도 있었다.

문득 타로스는 궁금해졌다.

"로빈슨 단장."

"예, 폐하!"

"아카데미에 군인들이 왜 이렇게 모여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라."

"존명!"

명령을 내려놓고 타로스는 비스듬하게 몸을 뉘었다.

타로스의 이런 모습에 백성들은 익숙했고, 편안하게 이동한다고 태클을 거는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그저 태업을 깨고 돌아다니는 것만 해도 귀족들은 감지덕지라고 여겼으니까.

아카데미 내로 들어가는 내내 사람들이 모여 있어 이동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로빈슨 단장이 바로 원인을 알아왔다.

"폐하께서 아카데미를 방문하셨기 때문이옵니다."

"짐의 방문이 무슨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냐."

"아카데미라는 곳은 배움의 장이 형성되는 곳 아니겠사옵니까. 폐하께서 행차하시는 것이 약간의 가르침을 내려 주시는 것이라는 기대감을 형성하였사옵니다."

"...."

타로스가 아카데미를 방문한다는 소문이 번지자 그러한 기대감이 형성되었고, 소문이 와전되는 바람에 황제가 가르침을 내린다고 부풀려졌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강함을 숭상하는 제국의 기조를 생각하면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가르침?'

그게 말이 되나?

타로스의 레벨이 60을 갓 넘었다.

이는 제국 병사와 비슷한 수준이었기에 누굴 가르치고 말고 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 들었으니 타로스가 이대로 환궁하면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닐 터였다.

'곤란하게 됐는데.'

타로스는 몸을 축 늘어뜨리고 권태감에 찌든 얼굴로 이동하고 있었지만 내심으로는 심장이 옥죄여 들었다.

어설픈 강의를 열었다가는 단번에 밑천이 드러나고 말 테니까.

아카데미 본관 앞.

제국 아카데미 학장 하칸 궁정 백작을 비롯하여, 교수들이 무릎을 꿇고 타로스를 맞이했다.

"만국의 지배자이신 황제 폐하를 뵙사옵니다!"

"황제 폐하 만세!"

자동적으로 아카데미 학생들도 무릎을 꿇고 만세를 외쳤다.

"일어나라."

"황공하옵니다."

"하칸 백작, 고생이 많구나. 제후의 자리를 포기하고 후학 양성에 힘을 쓰는 경의 노고를 치하한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옵니다."

외팔의 검사 하칸.

한 세대 전의 인물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나름 유명한 기사였다.

병사로 입대하여 승승장구하였으며, 한때에는 제후의 자리까지 올라갔었다.

그러나 하칸은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후학 양성에 힘을 썼고, 타로스가 직접 그를 궁정 백작으로 임명했다.

"모두 일어나라."

웅성웅성.

수많은 시선들이 모이면서 얼굴이 따끔거릴 지경이다.

타로스는 하칸과 나란히 걸었다.

지나가는 길마다 생도들이 모여들며 인산인해를 이뤘다.

"폐하께서 대업을 이루셨다는 보고는 받았사옵니다. 제국의 위협을 없애시고 율리우스 왕국을 단숨에 정벌하시니 그 위업이 하늘에 닿았나이다."

"백작, 늙더니 아부가 늘었구나."

"아부라니요? 그 누구도 그리 생각하지 않사옵니다. 마왕을 격파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전율이 일 지경이었지요. 이번에 자애의 교단에서도 폐하를 살아 있는 성인으로 추앙하였다는 말을 들었사옵니다. 역사를 함께하였던 사제들의 증언으로 말이옵니다!"

더욱 주변이 술렁거린다.

타로스가 고대의 마왕을 격파했다는 소식은 좀처럼 믿기가 어려운 감이 있었는데 그걸 사제들이 공증하였기에 신빙성이 더해졌다.

그 밖에도 남부 대사막, 금역들을 종행무진하며 제국의 위협을 없앴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 있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을 뿐이지."

"허허허, 신 또한 마찬가지이옵니다."

타로스는 피식 웃고 말았다.

"학장이 직접 강의도 하느냐. 말재간이 상당히 좋아졌구나."

"세월의 흐름이 이렇게 만들었지 않겠사옵니까."

하칸 학장은 제법 유쾌한 사람이었다.

제국 아카데미 학장실.

타로스는 상석에 앉아 편안하게 차를 마셨다.

학장실 입구는 제국 기사들이 철통같이 경비하고 있었고 학장실 내부에는 세실리아와 레베카가 호위를 했다.

그녀들은 병풍처럼 타로스의 뒤에 서 있었다.

달칵.

타로스는 마시던 차를 내려놓는다.

"학장, 짐이 온 이유를 짐작하는가."

"물론이옵니다."

"생도들을 끌어가는 것을 왜 보류하였나."

"그들이 제국을 이끌어 나갈 인재가 아니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옵니다."

"판단은 짐이 한다."

"...!"

하칸의 손이 떨렸다.

여기서 반대를 한다면 바로 목이 날아간다.

하칸도 알고 있었다. 경고는 한 번뿐이며 이마저도 타로스가 굉장한 자비를 베풀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일전에는 권고를 하였으나 이번에는 명령이다."

"그러시다면... 소신은 명에 따를 뿐이옵니다."

"생도들이 인재가 아니라는 것은 백작의 판단인가, 교수들의 판단인가?"

"아직 교육 과정이 끝나지 않았사옵니다. 졸업을 앞둔 생도들이라면 모르겠지만, 3년 차부터 쓴다는 것이."

"어차피 교육과 실무는 다르다. 아카데미에서 뛰어난 생도가 좀 더 좋은 관료가 될 가능성이 높은 건 사실이지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그렇사옵니까."

"우선 실습의 개념으로 3년 차 이상 모든 생도들을 투입한다."

"실습이시라면?"

"직접 일을 시켜보고 쓸 만하면 뽑고, 쓸 만하지 않으면 돌려보낼 것이다. 짐 역시 막무가내로 그들을 잡아간다는 것이 아니니라."

쿵!

하칸 백작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의 큰 뜻을 오해하였사옵니다. 죄를 청하옵니다."

"일어나라. 유능한 학장을 잃고 싶지 않으니."

"폐하...."

"이 이야기를 하려고 행차하였노라."

"이제... 돌아가십니까?"

"남아 있을 이유가 있나."

"폐하! 신, 하칸! 목숨을 걸고 청하옵니다!"

그는 다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타로스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대충 하칸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을 했기 때문이다.

"뭔가."

"바라옵건대 아카데미 생도들에게 폐하께서 작은 가르침이라도 내려 주신다면 영광이겠나이다."

"음."

올 것이 왔다.

예전의 타로스였다면 바로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타로스는 인기 관리에도 힘을 쓰고 있었다.

여기서 단칼에 거절을 해 버리면 여러 가지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라도 괜찮다면 가르침을 내려 주겠다."

***

황제의 방문 목적은 생도들의 실습 때문이라고 했다.

최근 들어 제국은 워낙 방대한 영토를 습득하였고, 이 때문에 관리 인력이 현저하게 부족한 판국이라고.

중앙 관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만한 영토를 얻었다면 지방관으로 파견되는 관료들 이외에도 상당한 인력이 충원되어야 한다.

하지만 급작스럽게 그만한 관료들을 등용시키기는 어려웠고, 무를 숭상하는 제국의 기조에서 대량의 문관들이 배출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생도들에게 실습의 기회를 부여하고, 현 관료들을 보조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황제가 가르침을 내린다는 소문이 돌았고 학장이 직접 청하여 강의가 잡혔다.

무려 황제의 강의.

역사상 최강이라고 불리며 불멸하는 존재이자 만악의 근원을 없애 버린 군주.

그런 강자의 강의는 어떨까.

그 때문에 이미 아카데미 강당은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북적거렸으며, 생도들은 물론이고 현직 기사들과 지휘관들까지 모이며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현직 기사들까지 기대한다는 것은 그만큼 강의의 수준도 높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생도들이 갖는 기대는 상상을 초월했다.

"폐하와 마주할 수 있는 날이 오다니. 이건 꿈일 거야."

"너어... 정말 할 거니?"

"응, 고대하던 일이었으니까."

아카데미에서 배출한 최고의 천재, 세리아는 눈을 빛냈다.

그녀는 날마다 황제를 만나면 가르침을 청할 것이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이런 사실들은 교수들까지 모두 알고 있을 정도.

오죽하면 교수들이 찾아와 부탁까지 했다.

"세리아, 오늘 폐하께서 오셨다. 제발 가만히 있어 주면 안 되겠니?"

"네, 그럴게요."

"약속하는 거다? 잘못하면 우리 모두 목이 날아갈 수 있어. 폐하께서 애민을 하신다는 사실이야 잘 알려졌지만 그래도 절대자이시다. 그분의 심기를 거스르게 해서는 절대 안 돼. 이미 학장께서 부탁하여 강의를 연 것만 해도 위태로운 상황이거든."

"물론이에요."

교수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친구들이 물었다.

"정말로 가만히 있으려고?"

"당연히 아니지. 여기서 폐하께 대련을 청한다고 말해 봐. 어떻게 되겠어?"

"끌려가겠지?"

"그래서 거짓말을 한 거야."

그녀의 급우들은 뜨악한 표정이었지만 정작 세리아는 의기양양했다.

아카데미 대기실.

타로스는 남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강당 안은 사람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도저히 학장의 말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저들은 제국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인재들이다.

여기서 황제가 발을 빼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좋게 작용할 리가 없었다.

포비아 제국에서 황제는 절대 권좌를 추구하지만 정치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학장이 대기실로 들어왔다.

"폐하, 강연 준비가 끝났사옵니다."

"나가지."

타로스는 마음을 다잡았다.

속마음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무심하고 권태로움에 절어 있는 연기를 한다.

이제는 그런 연기가 자연스러울 정도.

학장이 직접 외쳤다.

"만국의 지배자,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황제 폐하께 경의를!"

"황제 폐하께 영광을!"

기대감 가득한 모습들.

천재들이 즐비한 이 자리에서 어설픈 강의를 보였다가는 밑천이 드러나 어마어마한 사태로 번질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타로스는 시공검결의 기초를 풀어 설명하기로 했다.

시공검결이란 공간을 지배하는 기술.

강의를 듣는다고 해서 시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타로스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공간 장악에 대해 강연하겠다."

#제93화. 제국 아카데미(2)

공간 장악.

육체와 마나를 수련하는 기사들에게 있어 공간 장악이라는 말은 굉장히 생소하게 들릴 것이다.

물론 기사 출신의 교수들은 공간을 장악하는 것이 승부의 열쇠라는 말을 하고는 했지만, 그게 타로스의 입에서 흘러나오니 검술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타로스는 말을 이어 갔다.

"기본적인 강연은 교수들이 할 것이다. 재능과 노력은 당연히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바, 일단 넘기기로 한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

최소한 무학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면 재능과 노력은 기본적으로 깔려 있어야 한다.

아카데미에 입학했다는 자체가 어마어마한 재능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제국 아카데미는 평민과 귀족을 가리지 않는다.

이미 평민 출신의 제후들이 수두룩하다.

제국 내에서 가리고 가린 인재들이 입학을 하였으니, 기본적인 강연은 그냥 넘기겠다는 의미였다.

"많은 기사들이 공간의 개념에 대해 헷갈려 한다. 사각지대 혹은 공간을 점한다는 것은 기본적인 강의인 바, 짐은 오늘 시간과 공간, 마나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오랜 세월 검을 수련하며 짐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

기대감이 증폭된다.

황제의 깨달음.

도대체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다들 침음을 삼키는 중이었다.

"마나를 가속하면 공간은 휘어진다."

"...!"

웅성웅성.

장내가 술렁거렸다.

공간이 휘어진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마나는 직진성을 가지고 있으나 어느 임계점에 이르면 휘어지는 성질이 있다. 이는 마법과도 무관하지 않다."

"마나가 휘어진다니...."

"그렇다면 검기나 검강이 휘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게 가능한가?"

척.

타로스는 손을 들었다.

그제야 소란이 잠잠해졌다.

궁금한 점이야 많겠지만 아직 황제의 강의는 끝나지 않았다. 이제 운을 떼었을 뿐이다.

"마나가 가속되면 공간이 휘어진다고 가정하자. 이는 곧 시연을 보일 것이니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

강연을 하는 사람은 일개 용병이 아닌 역사상 최강의 군주로 평가되는 타로스 황제였다.

황제가 헛소리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시간과 공간에 대해 생각해 보자. 많은 이들이 시간과 공간을 분리하여 생각한다. 허나 시간이 있기에 공간이 존재하는 것이며, 공간을 지배한다는 것은 시간을 지배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를 합쳐 시공간이라 부른다. 마나는 시공간에서 휘어지는 성질이 있으며, 이는 속도에 비례하는 성질을 보인다. 그러나 시공간에 대한 모든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마나는 속도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허어."

"그, 그런 일이 가능할까?"

시공간에 대한 이해.

타로스는 검을 꺼내 고대의 마왕이 사용했던 검술을 펼쳤다.

벨가루스와 싸울 때에는 도대체 어떻게 사용이 된 검술인지 몰랐지만, 시공검결에 대입을 하고 나니 어떻게 펼쳐야 할지 깨닫게 되었다.

타로스는 가볍게 시공검결의 응용을 펼쳤고, 정말로 검이 채찍처럼 휘어졌다.

빠르게 검을 내지르는 것도 아니었다. 느릿느릿하게 펼쳐지는 검이 휘어지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다들 경악한 채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황제의 강의가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고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시공간이 휘어진다는 것.

이 시대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이해 불가의 영역이었다.

"이는 시공간에 대한 깨달음이 극의에 이르러야 시전할 수 있는 검술이나, 마나가 직진성을 가지지 않았다는 점을 고찰하고 쾌검을 구사할 수 있는 검객이라면 어느 정도는 공간을 제어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오직 이는 노력의 영역이다."

열망이 피어올랐다.

극의에 이른 깨달음.

마나가 휘어지는 성질을 가졌고 그것을 검술에 적용할 수 있다면 검술 자체가 진보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타로스는 그 밖에 시공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

스슷!

팟!

"헉!"

"도대체 무슨!?"

물론 이것은 스모크를 시연한 것이었다.

전장에서야 타로스가 공간을 뛰어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아카데미에서 펼쳐지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나의 흐름에 몸을 실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극의에 이르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이러한 움직임도 가능하다. 물론 누구나 시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평생토록 시전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다만, 마나가 직진하지 않는다는 성질을 고찰하고 연성을 위해 노력한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타로스의 강연은 대략 30분 동안 이어졌다.

그 시간 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고 그저 필기하기에 바빴다.

심지어는 교수들과 학장 역시도 필기를 하는 지경이었으니, 그 모습을 본 생도들은 타로스의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필기하는 열정을 보였다.

"...시공간의 틈을 비트는 것은 그만큼이나 지난하고 어려운 일이다. 허나 이 역시 극의에 오른다면 그대들은 전혀 새로운 경지에 입문할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자세하게 풀이하지 않는 것은 유출의 우려 때문이다. 이러한 기술들은 충성심과 신분이 완전하게 검증된 제후들이나 기사들에게나 전수할 수 있다. 이 자리에서 모든 강연을 마치지 못함을 이해하기 바란다. 만약 그 이상의 강연을 원한다면 높은 자리까지 올라오라. 짐이 친히 가르침을 내릴 것이다."

짝짝짝짝!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타로스의 강의는 대단히 파격적이었고 생도들에게도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만했다.

하지만 그 이상 깊게 들어가는 것은 피했다.

잘못하면 밑천이 바닥날 우려도 있었지만 기술이 유출될 우려도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이다.

번쩍!

그때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타로스는 질문을 받지 않으려 했다.

기본적인 이론에 대해서는 타로스보다 생도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괜히 깊게 관여했다가 망신을 당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꽤나 도전적인 눈빛을 한 여성 생도였다.

매우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런 것이 아카데미 입학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

그녀 역시 다른 인재들과 마찬가지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바로 여성 생도들은 교수들에게 제지되었다.

"네 녀석! 분명히 사고 치지 말라고 했을 텐데!"

"폐하! 한 수 가르침을 청해요!"

"...!"

웅성웅성.

아카데미 창립 이후 초유의 사태였다.

교수들은 물론이고 학장까지 무릎을 꿇었다.

쿵!

"폐하! 저 생도는 매일 폐하와 대련하는 것이 꿈이라는 말을 달고 다녔사옵니다. 그저 허무맹랑한 꿈이 발현된 것이니 부디 용서를 바라옵니다."

"그게 어찌 죄라는 말인가. 받아들이고 말고는 짐이 판단할 일이다."

타로스는 생도를 향해 손짓했다.

교수들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그녀는 재빠르게 타로스의 앞으로 나와 부복했다.

"황제 폐하 만세!"

"고개를 들어라."

금발벽안의 아름다운 외모로, 생도들에게 인기가 꽤 있을 것 같았다.

물론 타로스야 주변에 워낙 미인들이 많았고, 황후 나타샤는 제국 제일의 미녀라고 불릴 만큼이었으니 어떤 감흥이 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흥미로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름이 무엇이냐."

"네! 세리아라고 하옵니다!"

"짐과의 대련을 원하였다고."

"평생 꿈이었나이다!"

"무장을 갖추고 오거라. 30분 후에 짐이 가르침을 내리겠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

강당 대기실.

타로스는 최대한 가볍게 무장을 했다.

투구나 겉으로 보이는 아이템은 없었지만, 액세서리들을 모두 착용하고 신기 아이비오르는 금속 변형을 일으켜 반지의 형태로 만들어 꼈다.

생도를 상대하는데 황제 체면에 갑옷까지 입을 수는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 타로스는 굉장히 태연해 보였다.

학장 하칸 백작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타로스와 마주하고 있었다.

"불충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게 어째서 불충인가."

"평소 세리아 생도의 행실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나이다. 미리부터 제지했어야 했는데...."

"괜찮다. 오히려 짐은 그 용기를 대단히 높게 평가하였다."

"그, 그렇사옵니까?"

"그 누가 짐에게 그러한 제안을 하겠는가. 황후 정도나 가르침을 내려 달라고 청하지."

타로스는 그저 차를 음미할 뿐이었다.

다만 내심은 그게 아니었다.

'개망신을 당하지 않으려면 신경 쓰는 편이 좋겠는데.'

30분이 흐른 후, 강당에는 긴장감마저 흐르고 있었다.

물론 기사들은 겨우 4년 차 생도가 크게 활약할 거라고 보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서 뭔가를 얻어 가기 위하여 눈에 불을 켰다.

한편, 도전자로 나선 세리아는 생도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중이었다.

"황제 폐하께 정말로 도전하다니. 잘못하면 목이 잘릴 수도 있었어."

"폐하께서는 백성을 사랑하신다고 하는데, 겨우 이런 일로 목이 잘리겠어?"

"진짜 간이 배 밖으로 나왔네."

"이번에 잘 보이면 황실 기사단의 종자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아카데미 생도가 졸업을 하면 바로 기사단 입단 시험을 본다.

여기서 통과가 되면 종자로 활동하게 되는 것이고, 추후 실력에 따라 기사로 서품을 받을 수 있다.

불합격을 하게 되면 사관학교로 진학하기도 하였으며 좀 더 수련을 쌓아 기사에 도전할 수도 있었다.

그녀는 내년이면 졸업이다.

바로 황실 기사단 입단 시험을 볼 생각이었으며, 아카데미 내에서도 불세출의 천재로 불리는 만큼 반드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후,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리아는 완전히 무장을 하고 있었지만 황제는 달랑 검 한 자루만 들고 있었다.

하긴, 고작 생도를 상대로 황제가 무장을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강당 한편이 비워졌다.

황제는 여전히 무심하고 권태로운 표정이었는데, 도저히 그 속을 짐작할 수도 없었다.

"생도는 앞으로 나오라."

척!

세리아는 절도 있게 나와 부복했다.

"일어나라."

"존명!"

"짐과 대련을 통하여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

"어떻게든 폐하께 실력을 드러내 내년 기사단 입단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

모두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에게 검을 배우겠다는 것도 아니고,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였다니.

그러나 황제의 표정에는 그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만한 실력이 된다면 도전 못 할 것도 없다."

"황공하옵니다!"

"전력을 다해 공격하라."

"네!"

세리아는 빠르게 이동하여 검을 찔러 넣었다.

황제가 다칠 수 있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그건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왕까지 쳐 죽여 없앤 황제가 고작 생도의 칼에 상처를 입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천재로 불리는 세리아.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기 시작했고, 황제는 가볍게 움직이며 그녀의 검을 모조리 피해 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세리아의 검 끝에 황제의 검이 닿으며 그녀는 저 멀리 튕겨져 나갔다.

#제94화. 제국 아카데미(3)

모두가 경악하는 순간이었다.

세리아의 검을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초감각과 초공간 이동을 일부 동원하기만 해도 모두 피할 수 있었으니까.

다만 검 끝을 찔러 내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여기서 쓰기에는 아까운 기술이었지만, 시공검결을 응용하여 그녀의 검 끝을 찔러 냈고 그 순간 세리아는 저 멀리 날아가 처박혔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졌다.

"지금, 폐하께서 검 끝을 찌르신 건가?"

"그, 그렇지?"

"그게 가능한가?"

"역사상 최강의 검술을 지니신 분인데, 그게 불가능할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웅성웅성.

세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떨었다.

그 충격이 말도 못했기 때문이다.

"폐하! 방금 그것은...!?"

"공간을 장악하는 기술을 일부 응용했다."

"아아!"

세리아는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듯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그녀는 벌떡 일어나 바람처럼 움직였다.

'설마 바람의 기사 세리아?'

후웅!

초감각을 이용하여 그녀의 움직임을 느리게 보았다.

아직 생도라서 그런지 움직임에 허점이 많았다.

세리아 LV. 70

아카데미 4년 차 생도.

레벨은 70에 이른다.

이 정도면 백인장을 뛰어넘어 수습 기사가 되기에 충분한 실력이었다.

타로스의 기억이 맞는다면 그녀는 천재 기사로 소문이 나고, 5년 안에 제후로 성장한다.

이 천재적인 검술.

수많은 강자들과 싸워 오지 않았다면 그녀의 검술이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파악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타로스는 가볍게 그녀의 다리를 걸었다.

쿠당탕!

그녀는 몇 바퀴나 굴러 더 멀리 나가떨어졌다.

"가까이 오라."

타로스는 팔을 뻗어 레베카에게 검을 건네주었다.

그녀의 얼굴이나 팔에 멍이 들었고 팔목을 부러져 덜렁거렸다.

신관들이 치료를 해 주었고 그녀는 타로스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이름이 세리아라고 하였느냐."

"네! 미천한 생도의 이름을 기억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가히 천재적인 검술의 운용이었다. 이미 수습 기사의 실력은 갖추고 있음이야."

"...!"

눈을 빛내는 세리아.

그러나 타로스의 질타도 함께 섞여 이어졌다.

"허나 네 검술은 기본이 잘못되어 있으며, 이것을 천재의 만용이라 부른다."

"그, 그 말씀은...."

"검술을 운용하는데 움직임이 꽤 불편할 것이다. 이는 네가 검술의 기초를 등한시하였다는 증거. 짐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천재들을 보아왔다. 그들 상당수는 스스로의 만용으로 무너졌고 묵직하게 기초부터 쌓아 올린 자들은 제후가 되었지."

"아아!"

"기초부터 다시 쌓아라. 교정까지 몇 개월은 걸릴 것이라 본다."

쿵!

세리아는 그대로 머리를 박았다.

타로스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녀의 단점이 훤하게 보였으니까.

"노력하도록 해라."

아카데미에서의 일정은 끝났다.

타로스는 어가에 올랐으며 마법사들이 마력을 주입하자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갔다.

황제의 어가가 사라진 자리.

세리아는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그녀의 보법을 지적하였다면 반항심에 불타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황제다.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의 강자였으며, 검 한 자루로 제국을 평정하고 황제의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드래곤이나 마왕 등 인간은 절대적으로 상대가 불가능한 괴물들을 처리해 왔다.

또한 검술에 대한 이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 황제였기에 세리아는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그래, 내가 너무 오만했던 거야."

그녀는 또래의 누구도 쫓아올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이만하면 반드시 황실 기사가 될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막상 황제에게 평가를 받아 보니 그렇지 않았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으나 너무 자신의 재능을 과신한 나머지 기초를 간과하였다고.

아무리 황제였다지만 가볍게 다리가 걸려 손목이 부러진 것을 보면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녀의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괜찮아?"

"다친 곳은?"

"나는 괜찮아."

그녀는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카데미 강당은 언제 그렇게 사람들로 차 있었냐는 듯이 텅텅 비었다.

세리아는 황제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다.

"반드시 입단을 하고 말 테야."

황실 기사단의 일원이 되면 황제와 매일 대면할 수 있다.

그녀는 새로운 꿈을 꾸었다.

***

잠시 외유를 나갔다가 왔으나 황제는 그리 편하게 쉴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중앙 집권의 말은 그만큼 절대자의 업무가 과중한다는 말이나 진배없었다.

물론 타로스와 같은 경우에는 많은 업무를 재상부에 전가하고 군권만 확실하게 틀어쥐고 있었다.

제국에서는 군권만 틀어쥐고 있어도 권력이 피탈당하는 경우는 없었으니까.

그래도 국무 회의에는 참여를 해야 한다.

하루에 몇 시간 정도에 불과하였지만, 이마저도 굉장히 귀찮은 일이었다.

'타로스에 빙의해서 살아가다 보니 성격도 비슷해져 가나.'

매일 권태로움을 연기하다 보니 정말로 권태로운 감정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타로스의 육체가 휴식을 원하는 걸까?

한숨을 내쉰 그는 어좌에 자리하였다.

"폐하! 여러 가지 보고가 있사옵니다만."

"재상부에서 처리하고 중요한 안건만 올려라."

"허험, 그러하시다면 가장 중요한 안건인 생도들부터 논하였으면 하옵니다."

"그러지."

관료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다들 죽을 맛이었다. 도대체 사람이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혹사를 당하고 있었으니 모두 꼴이 말이 아니다.

이런 와중에 기쁜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새로운 업무의 노예들을 황제가 직접 수급을 해 왔다.

기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생도들의 활용은 어느 선까지 허용하나이까?"

"실무에 바로 투입하도록 해라."

"저, 정말입니까!?"

"안 될 이유 있나. 행정 업무의 상당 부분은 문서 노동에 가깝다. 글만 읽을 수 있으면 바로 투입해도 문제가 되지 않지. 그중에서 특별히 뛰어난 자들은 단순 업무가 아닌 일반 행정 업무로, 더 두각을 보이는 천재가 있다면 바로 등용하여 써도 좋다."

"오오오!"

제신들의 얼굴이 더욱 반짝였다.

대규모로 인원이 투입되면 그들도 정시 퇴근을 할 수 있다.

요즘에는 황궁에서 불철주야 일하기 바빴고, 아예 잠을 황궁에서 자는 경우도 많았다. 관료들을 위해 숙식을 제공할 지경이었으니 그들의 업무량은 말도 못했다.

하지만 이런 때에 수습 관료들이 대거 들어온다면?

합법적으로 굴릴 수 있는 문서의 노예들을 얻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참고로 무과의 생도들도 올 것이다. 기사단에서 그들을 한 번 가르쳐 보고 잡무를 시켜라."

"예!"

그 이후로 국무 회의가 이어졌지만 관료들의 표정이 매우 밝았다.

도대체 새로운 영토들의 토지 대장을 어떻게 작성하며, 인구 조사에 대한 문서들을 어떻게 정리할지 막막하였는데 대안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날 밤.

타로스는 저녁까지 정무를 돌보고 간신히 쉴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오늘 복잡한 일들을 처리하였으니 내일부터는 오전에만 정무를 보고 오후에는 편하게 쉴 수 있을 것이다.

타로스의 방으로 찾아온 황후.

안 그래도 피로했지만 차마 그녀를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나타샤는 헌신적이었고, 나름 부대끼며 살다 보니 정도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와인을 채워 타로스에게 주었다.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

"황후도 고생 많았소."

"저야 매일 수련을 하는 일밖에는 하는 일이 없어요."

"그러한가."

이 나라는 황후조차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웬만한 기사를 찜 쪄 먹을 정도의 레벨이기도 했고 예전에 비해 레벨이 더 올랐다.

"오늘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하셨다고 들었어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 학장이 그리도 청하고 모든 생도들이 원했기에 사기 진작 차원에서 강의를 한 것뿐."

"와, 그래도 많이 바뀌셨어요. 예전 같았으면 귀찮아서 가지 않으셨을 텐데."

"스스로의 약속은 지켜야지. 언제까지 은거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고, 기왕 움직이기로 하였으니 귀찮아도 별수 있겠나."

스르륵.

슬립 한 장만 걸친 황후가 접근했다.

타로스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물러났다.

그녀가 타로스의 몸을 휘감았다.

"저도 강의에 참여할 수 있나요?"

"앞으로 예정은 없으나 황후라면 개인 교습을 해 주어야겠지."

"어머, 정말 기대돼요."

타로스는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

오늘 밤도 평범하게 넘어갈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황제의 삶이 꽤 괴로운데.'

***

황제가 아카데미를 다녀간 후, 일주일이 지났다.

금년부터 아카데미에는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였는데, 황제의 명령으로 3년 차 이상의 생도부터는 모두 수습 관료로 등용한 후 실무 교육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무과의 생도들도 마찬가지였다.

중앙 기사단의 숙소에서 머물며 종자로서 교육을 받고 잡다한 업무를 경험하기로 되어 있었다.

당연히 생도들은 환호했다.

애초에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문과에서는 행정 관료가 되기 위해서였고, 무과에서는 기사가 되기 위해서였다.

졸업을 하기도 전에 실습을 하게 해 준다고 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특히 생도들은 제국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황제가 움직이기 전에도 제국은 대륙의 중심이라는 사상이 깔려 있었으나, 황제가 태업을 접고 움직이자 중앙군은 60만까지 불어났고, 6개 기사단을 완충하였으며 영토도 어마어마할 정도로 팽창했다.

황제가 대륙 일통을 선언한 만큼 국토는 팽창될 것이니 이제 궁정 귀족이라고 해도 무시 못 할 힘을 갖게 될 것이다.

궁정 귀족이 되면 황실 직할령을 다스리는 행정 관료가 될 수도 있었다.

그 때문인지 황궁으로 들어서는 생도들의 표정에는 기대감이 가득하였다.

문과 생도들은 재상부 앞에 집결했다.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들에 생도들은 압도되었는데 그들의 앞으로 몇몇 관료들이 어기적어기적 지나갔다.

"뭐, 뭐야? 방금 언데드가 지나갔나?"

"관료들 같은데?"

"얼굴들이 왜 저래?"

한마디로 썩어 문드러지기 직전의 얼굴들이었다.

눈 밑은 검게 변색되어 있었고 언제 잠을 잔 것인지 피로감이 몸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다.

한 생도가 말했다.

"요즘 제국의 영토가 늘어나서 그래. 무려 50%나 확장했으니 제정신일 리가 없지."

"그래서 우리도 보조를 하는 차원에서 온 건가?"

"그렇다고 봐야지?"

결코 나쁜 일은 아니다.

관료들이 부족하다는 것은 그들이 모두 등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행정 관료도 귀족이 될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진 제국이었으니 그들은 마음을 다잡았다.

잠시 후, 한 노인이 관료들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왔다.

"아니, 저분은 재상 각하이신데!?"

"최근 과로가 심하셨나? 10년은 늙어 보이시는데...."

생도들의 얼굴에 잠시 동안 불안감이 스쳐 갔다.

행정 관료라는 자들이 하나같이 과로에 치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재상 로터스 후작은 다 죽어 가는 얼굴과는 다르게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지옥에 들어온 것을 환영한다, 애송이들아."

#제95화. 변화하는 경제

제국 재상부.

얼마 전 재상부에 배치된 아카데미 생도들은 기세 좋게 업무에 들어갔다.

제국 아카데미에서는 정신 교육의 일환으로 애국심을 주입하는 과정이 있었다.

제국에 충성을 해야 하는 이유, 관료가 되어 업무를 보게 됨으로 인하여 통치가 된다는 이념 등.

아직 애송이의 티를 벗지 못한 문과 생도들은 기세 좋게 일을 시작하였으나 업무의 강도가 상상 이상이었다.

단순 업무인 서류 정리부터 시작하여 각종 통계와 명령의 전달 체계에 이르기까지.

문서 정리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고, 거기서 뛰어난 자들을 선별하여 진급을 시켰는데, 악명이 자자한 토지 정리와 인구 정리였다.

문과 4년 차 생도 아드리안은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인구와 토지들을 정리하며 비명을 질러야 했다.

처음에는 사명감도 있었다.

제국의 영토가 50%나 늘어났기에 말 그대로 최강국으로 불리게 되었다.

주변국에서 연합을 형성하여 쳐들어오지 않는 이상, 절대 넘볼 수 없는 강국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 쫓아오는 업무의 양이 상상을 초월했다.

또한 로터스 후작은 지금까지 미루어 왔었던 일도 추진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그건 바로 제국 내 총인구 조사와 토지 조사였다.

늘어난 영토뿐만이 아니라 제국 내의 토지와 인구도 조사한다.

제국의 인구가 무려 1억이 넘어간다.

제후들도 정신없이 황제의 명령에 따라 토지와 인구를 조사하는데 심력을 기울이고 있었으나 역시 마지막에는 중앙에서 통제해야 한다.

이 때문에 쉴 틈이 없었다.

"도대체... 내가 왜 여기서 이만한 업무를 하고 있어야 하는 거지?"

"그만큼 선배가 유능하다는 뜻입니다."

"유능? 이건 거의 노예나 다름없는데."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이번에나 이렇게 바쁜 것이지 추후 제국이 안정되면...."

"영토와 인구가 더 늘어날 텐데?"

"허험, 그때에는 흡수된 관료들이 있겠죠."

"과연 그럴지 모르겠는데."

거의 형벌이나 다름없는 노동의 강도였다.

이 때문에 업무에 지원한 생도들은 제국 중앙이 아니라 지방으로 내려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물론 생도들이 얼마나 편리함을 안겨다 주는지 알았기에 결코 이들을 놓아줄 재상이 아니었다.

제국은행.

제국에 금융이 안착이 된 이후, 경제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고리대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던 상인들은 돈을 빌려 사업을 일으키는 것을 매우 꺼렸는데 제국은행이 생기고 이율이 5% 정도로 고정되면서 기존의 능력보다 더 크게 사업을 확장하였다.

뿐만 아니다. 서민들 사이에서도 돈을 빌려 집을 사거나 농지를 구매하기도 하였으며, 대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정기 예금을 하며 안전하게 자산을 보관했다.

자금이 도는 선순환 체계.

이는 경제의 혁명이나 다름없었다.

제국은행 은행장 베이너스 백작은 이번에 황제가 명령한 전시 투자 상품의 판매량이 어느 정도 되는지 조사하기 위하여 직접 은행의 창구를 찾았다.

"그러니까... 나라에서 판매하는 상품이랍굽쇼?"

"네, 맞습니다, 고객님. 제국에서 한시적으로 판매하는 상품이고, 연이율 10%를 보장하고 있답니다."

"그렇다면 투자해야지! 당장 계좌를 개설하겠소!"

"저도 투자하렵니다!"

"암, 나라를 위한 일인데."

여기저기서 투자 열풍이 불었다.

물론 이 투자 상품에는 함정이 존재하기는 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제국이 전쟁에서 패하게 된다면 투자금을 날리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제국이 패할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제국이 어떤 곳인가.

전쟁의 최고 전문가들이 모인 집단이었다. 그러니 제국이 패할 일은 없다.

무엇보다, 수백 년이나 전쟁을 경험한 황제가 총사령관이었고, 제후들도 매일 전쟁을 연구하는 괴물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이끄는 군대가 패할까?

어디서 100만 대군이 쳐들어오지 않고서야 충분히 격파할 수 있다.

이런 믿음 때문에 전시 상품은 빠르게 재고가 소진되고 있었다.

"은행장님, 오늘 준비한 상품이 모두 판매되었다는 소식입니다."

"벌써 말인가?"

"제국 백성들의 애국심이 상당한 모양입니다."

"허어, 나는 이런 상품으로 전비를 충당할 수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랐네."

"폐하의 혜안이 아니겠습니까?"

"그래, 모든 것은 폐하의 혜안 덕분이지."

베이너스 백작은 제국으로 귀화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는 온갖 신개념을 제시하였고 모든 사업들을 성공시키고 있었다.

은행의 개념을 들었을 때에도 그랬다.

은행이 미치고 있는 긍정적인 경제의 여파들.

이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이만하면 폐하께 보고할 수 있을 것 같군. 곧 국무 회의에 들어갈 것이니 돌아가세."

"예, 각하."

***

오전, 국무 회의.

타로스는 여전히 오전에는 업무를 수행했다.

일각에서는 타로스가 오후에도 정무를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도 하였지만, 궁정 귀족들은 그렇게 의견을 개진하는 귀족들의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경은 생각이 있나 없나? 그러다 폐하께서 다시 손을 놓아 버리시면 어찌 감당하겠나!]

[설마 그렇게까지 되겠습니까? 내년에는 전쟁까지 예정되어 있는데....]

[그러니 더 큰일이지. 이런 와중에 폐하께서 은거하시면?]

그렇게 의견을 개진하는 귀족들은 묵살되었다.

지금만 해도 감지덕지다.

재상 로터스 후작은 다음과 같은 말도 덧붙였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로 착각하고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된다. 폐하께서 국정을 운영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일이야.]

귀족들은 한동안 황제가 다시 태업에 들어가는 악몽을 꾸었다고 한다.

지금 타로스가 국정에서 손을 놓아 버리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질 테니까.

정말 나라가 망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 덕분인지 궁정 귀족들은 업무에 대한 문제로 절대 타로스를 압박하지 않았다.

이는 참으로 긍정적인 효과(?)였다.

"그래, 전시에 필요한 자금이 거의 확충되었다고?"

"그렇사옵니다, 폐하. 더 이상은 상품이 없어서 팔지 못할 지경이옵니다."

"그사이에 완판 되었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재상."

웅성웅성.

재상부 귀족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또다시 제국의 빚을 늘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는데,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전쟁에 투자를 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터스 후작은 이 놀라운 기적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실로 놀라운 애국심이옵니다, 폐하. 전쟁에 투자를 한다는 개념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지도 않다. 제후들이 자금을 출자하여 전쟁을 하는 것도 일종의 투자가 아니겠느냐."

"그렇기는 하옵니다."

"또한 제국이 무패를 기록하고 있으니, 당연히 이번 전쟁에도 승리하리라 생각하는 것이겠지."

궁정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타로스가 직접 나서는 이상, 결코 전쟁은 패하지 않는다.

"토지와 인구 조사는 어찌 되어 가고 있나?"

"절반 정도 완료되었사옵니다."

"기대되는 효과는?"

"신 등은 진실로 그 효과에 대해 의문을 가졌습니다만, 기대 이상의 효과를 보았사옵니다. 제국의 인구 중에서 누락된 부분이 꽤 있었으며, 이는 총인구의 20~30%에 달하는 것으로 그만큼의 세금 증대 효과가 기대되옵니다."

"그런가."

"그저 폐하의 혜안에 감탄했을 뿐이옵니다."

타로스는 내심 웃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인구 조사와 토지 정리 사업에 다소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백성들이 알아서 신고할 것이라 여겼고, 그에 대한 국법도 엄히 적용을 하였기에 이런 결과가 나올 줄 몰랐던 것이다.

그에 따라 세수가 증대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제국 정도의 덩치를 가진 국가는 인구를 조사하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비용과 인력이 소모된다.

다들 밤잠을 줄였을 정도였으니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효과는 확실하다.

세수가 20~30%나 증대된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증가폭이었다.

재상은 그에 따른 문제도 제기했다.

"결과가 이렇게 나왔다는 것은, 그 전에는 일부러 세금 신고를 누락하고 호적에서 제외하였다는 것이오니, 그들에 대한 처벌은 어찌해야겠는지요?"

"올해 총수익의 30%를 벌금으로 내도록 한다. 부족한 부분은 대출을 해 주고 제국 전역에 호패를 만들어 뿌리도록 하라."

"그리하겠사옵니다."

그 밖에도 타로스는 몇 가지 제도들을 손보았다.

공식 휴일이 없었기에 일주일에 하루를 휴일로 선포하고 쉬게 하였으며, 여러 가지 문화 시설들도 확충하기로 했다.

다만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는 갈 길이 험했다.

"그러자면 막대한 비용이 소모될 것으로 보이옵니다."

"대비책이 있지. 베이너스 백작."

"예, 폐하."

"제국 화폐를 기축 통화로 만드는 건은 어찌 되어 가고 있나?"

"우선, 화폐 자체를 제국에서 보증하였기에 공신력이 증가하고 있으며 국제 상단에서도 제국 화폐를 우선적으로 사용하고 있사옵니다. 그에 따라 더 많은 화폐가 요구되고 있으며 화폐국에서 조금씩 물량을 조절하고 있는 중이옵니다."

"그에 따른 수익도 발생할 터."

"명령에 따라 여러 시설들을 확충하는데 사용되고 있사옵니다."

"기축... 통화?"

"아무래도 경들은 짐이 지은 경제학 개론을 공부하는 편이 좋겠다."

"책을 쓰셨사옵니까!?"

"어려운 일은 아니지."

타로스가 현대의 지식을 접목하여 현실에 맞게 개정한 책이다.

경제학 개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으며, 이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논리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을 정도로 큰 파급력을 가지고 있다.

타로스가 손짓하자 관료들이 제신들에게 책을 한 권씩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얼떨떨한 얼굴로 책을 받아 들었다.

"공부해라. 제국이 발전할 수 있는 길이다."

"삼가 폐하의 명을 받드옵니다!"

평화로운 나날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오전에는 국무 회의나 서류 작업, 오후에는 편안하게 쉬거나 취미 활동을 즐긴다.

매일 달려드는 황후 때문에 밤이 조금 무섭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이제 타로스의 체력으로도 감당이 되었다.

가끔 기사들과 대련을 벌였고 아카데미 생도들을 대상으로 강론을 하기도 했다.

문관들에게는 경제학 강론을, 무과 생도들에게는 검술 강론을 가끔 폈다.

슬슬 추수기에 가까워지고 있었기에 세수가 확보되는 즉시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돌입할 것이다.

평화의 시간도 봄이 되면 사라질 것이고, 바로 출정해야 한다.

물론 그 전까지는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면 된다.

여름이 지나 초가을.

오전에 국정을 돌보고 있던 타로스에게 급보가 도착하였다.

정보부 수장 레인 자작의 얼굴이 꽤나 상기되어 있다.

"폐하! 주변 5국이 반제국 연합을 형성하였사옵니다!"

타로스는 펜을 내려놓고 무심하게 레인 자작을 바라봤다.

"그런가."

"설마 5개국이 연합을 할 줄은.... 신의 실책이옵니다. 어찌 반응을 해야 할지 하교가 필요한 상태이옵니다."

입술을 짓씹는 레인 자작.

하지만 타로스는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봤다.

"반제국 연합에 선전 포고를 한다."

#제96화. 폭풍 전야(1)

반제국 연합.

최근 제국은 율리우스 왕국을 정벌하면서 대륙 일통을 선언했다.

만약 이런 선포를 제국이 아닌 다른 국가에서 했다면 단순한 포부로 치부하였을 것이다.

대륙 정벌이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진정으로 실행을 할 수 있는 국가는 제국이 유일했다.

특히나 대륙 중부의 강국을 단 몇 개월 만에 쓸어버리고, 다음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제국의 움직임을 보면 주변국에서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반제국 연합 초기에는 론 왕국을 비롯하여 라진, 카롯까지 3개국에 그쳤으나 최근 들어 필리언 왕국과 루안 공국이 참여하였다.

이 중 필리언 왕국은 150년 전 제국에서 분리된 국가였고, 루안 공국은 불과 10년 전에 독립을 주장하였으나 제국에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 두 왕국이 반제국 연합에 가입한 건 필연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대륙의 모든 국가들은 양강 구도를 보며 숨을 죽였다.

이번 전쟁의 결과에 따라 제국이 몰락을 하든, 진정으로 대륙을 일통할 힘을 얻든 갈릴 것이기 때문이다.

반제국 연합 맹주국 론 왕국의 수도 안타.

해가 바뀌었고 파종이 시작될 즈음 반제국 연합 회의가 주제되었다.

"맹주! 제국이 선전 포고를 감행했고, 반제국 연합 가입을 추진하고 있던 왕국들이 입을 다물었소!"

"...."

"그렇습니다. 이대로라면 바로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아직 우리는 제국을 압도할 만큼의 병력이 없지 않습니까?"

"이대로라면 필패입니다."

쾅!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론 국왕이 회의실 테이블을 내려쳤다.

"패배주의적인 발언은 그만두시오!"

"하지만 상황이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5개국에서 병력을 모으면 50만이 넘소! 역사상 이 정도의 군세가 모인 적이 있소?"

"제국 중앙군이 이미 60만이라지 않습니까?"

"그 넓은 덩치를 유지하려면 최소한 수십만은 필요할 터. 원정에 나설 수 있는 군대는 40~50만에 불과하오."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일개 농부의 실력이 우리 정예병에 필적하다는 제국에?"

"그걸 믿소?"

"기록에 의하면...."

"그거야 황제가 태업에 들어가기 전 이야기지."

론 국왕은 확신하고 있었다.

예전의 제국이라면 분명히 국가 전체가 병영을 이룬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황제가 태업에 들어가자 제국군은 나태해졌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그렇듯 타국의 전력은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있었고, 론 왕국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율리우스 왕국과의 전쟁은 제국이 강해서가 아니라 율리우스 왕국이 약해서요. 무슨 농민들로 전쟁을 할까."

"으음, 그러나 황제나 제후들의 힘은."

"그마저도 과대평가 됐지. 드래곤을 죽이고 마왕을 잠재워? 그게 일개 인간으로 가능한 일이오?"

"그럼 자애의 교단과 가이아 교단은 바보라서 황제를 성인으로 추대하였겠습니까?"

"모르지. 그 이단 놈들이 돈을 받고 황제를 성인으로 추대하였는지도."

"...."

몇몇 국왕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론 왕국이야 유일신 테이아를 믿지만 대부분 왕국들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이 좀 과격하였으나 정치 공작이 있었다는데 내 손목을 걸지."

"후우, 그래서 대안은 있습니까?"

"최대한 병력을 만들어야 하오. 최소 60만을 배치하고 버텨야지. 제아무리 제국이라고 해도 단기간에 전쟁을 끝내지 못하면 힘드오. 채무가 무려 1800%라고 하니까. 이만하면 웬만한 국가들은 무너지고도 남았지."

제국이 전쟁을 길게 끌지 못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웬만한 국가들은 1000%의 채무도 버티지 못한다. 아니, 채무가 500% 수준만 되어도 무너지기 직전일 것이다.

제국이 이만큼 버티는 것은 그들이 병영 국가이기 때문이다.

무를 숭상하는 이상한 국가였기에 경제에 둔감한 경향이 있었다.

회의에서 내려진 결론.

"우선 30만을 먼저 국경에 배치하고 군사 훈련을 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5개 왕국이고, 제국은 하나. 자금력 때문이라도 제국은 감당할 수 없을 거요."

***

요동치는 정세.

율리우스 왕국이 정벌되고 1년이 채 되지 않아 다시 전운이 감돌았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내년이나 되어야 제국이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아직 율리우스 왕국은 영토가 흡수되고 있는 중이었다.

문화적인 갈등도 일부 있었고, 종종 반란의 조짐이 보이기도 했다.

다만, 제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고, 첩보력도 상상을 초월하였기에 조기에 반란을 색출하여 3족을 멸해 버리는 강경책을 썼다.

이런 와중에 바로 전쟁이 벌어지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경계의 단계.

많은 전문가들이 현 정세를 그렇게 평가했다.

국무 회의에서 타로스는 연합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보고받았다.

"30만이 배치되고 있다고 했나."

"그렇사옵니다. 기습을 염려한 처사로 보이옵니다."

"그렇겠지."

기습은 제국의 특기다.

율리우스 왕국 병탄 전쟁에서도 기습으로 상당한 이익을 보아왔다.

이번에도 기습을 강행하지 않을까 싶어 적들은 무리하여 국경에 병력을 배치하고 있는 중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다른 국가에서는 관망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수 정보국 제이나가 주변국 정보를 취합해 주었다.

"근거는?"

"중립을 선언하고 있는 국가들이 늘어나고 있고, 여차하면 제국에 입조하겠다는 움직임도 보입니다."

"그런가. 그람 공국과 델리안 공국에서는 병력을 얼마나 낸다고 하나."

"그람 왕국에서 5만, 델리안에서 5만 수준입니다."

"그래도 꽤 무리를 했는데."

"보급 병력으로 사용한다면 무리가 없을 줄로 아옵니다."

전쟁은 단순히 전투병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50만 대군이 동원된다면 그중 15만 정도는 보급을 비롯한 지원 부대로 남겨야 한다. 일종의 예비대 역할도 한다.

10만이라면 보급 부대나 예비대로 좀 부족하였지만, 어차피 전쟁을 길게 끌 생각은 없었기에 그 정도로도 충분해 보인다.

"소국들의 입조는?"

"3개국에서 의사를 타진하였사옵니다."

타로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기에도 대륙의 정세는 심하게 요동치고 있는 중이었다.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내내 긴장이 어리고 있을 정도다.

물론 타로스는 여전히 무심하고 권태로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영토가 대량으로 늘어나겠군. 5개국이라니. 언제 대륙을 일통하나 고민이었는데 알아서 땅을 바치겠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허허허, 그러하옵니다."

"폐하께서 하실 일이 줄었사옵니다."

궁정 귀족들은 이번 전쟁도 전혀 패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여유가 넘쳐흐르는 것이다.

심지어 황제인 타로스는 이마저도 귀찮은 작업이라는 티를 내고 있었다.

타국에서 제국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것은 여유를 가질 수 있는 한 이유였다.

"이번 전쟁도 속전속결로 끝낸다. 전시 행정부는 기존 그대로 유지하고 내달 초, 제후들을 황궁으로 소환하도록 하라."

"황명을 받드옵니다!"

타로스는 리카드로 후작을 불러들였다.

율리우스 왕국과의 전쟁에서도 리카드로 후작은 참모장으로 활약했다.

이번에도 그는 참모장으로 임명되었으나 그 권한은 막강했다.

제국 중앙군이 60만에 이르렀고, 영토를 어마어마하게 확장되었다. 그러다 보니 궁정 귀족들의 권력 역시 말도 못하게 높아지고 있는 중이었다.

"찾으셨사옵니까, 폐하."

타로스는 의자에 비스듬하게 앉아 있었다.

하도 권태로운 황제를 연기하다 보니 정말로 만사가 귀찮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도를 펴라."

"예!"

타로스가 손을 까딱이자 레베카가 대륙 전도를 폈다.

한눈에 보아도 제국의 영토가 꽤 팽창하기는 했다.

이제 제국의 강역은 전 대륙의 25%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대략 대륙의 40%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니, 제국이 대륙 전체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도 될 정도였다.

리카드로 후작은 감회가 새롭다는 표정이었다.

"이번 전쟁으로 영토가 어마어마하게 확장되었사옵니다."

"아직 멀었다."

"물론...이옵니다."

무심하게 말하는 타로스.

리카드로 후작은 쓴웃음을 지을 뿐이다.

대륙을 일통하겠다는 황제의 선언이 도저히 허풍으로 들리지 않았던 탓이다.

'폐하께서는 진심이시다.'

한편으로는 이해도 됐다.

수명이 1만 년 가깝게 남은 황제였기에 앞으로 이런저런 문제에 신경 쓰지 않으려면 가능한 한 빨리 대륙을 삼켜 버리는 것이 나았다.

"후작, 이번 전쟁을 빠르게 끝내려면 정공법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렇기는 하옵니다."

"해서, 정면으로 50만을 동원하고, 따로 20만의 병력을 운용하려 한다."

"...!"

리카드로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번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한계는 50만 정도라고 내심 여기고 있었다. 이는 보급의 한계 때문이었다.

아무리 병력이 많아도 함부로 대군을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는 경제에 극심한 타격이 오기 때문이다.

경제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관료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 그리하신다면 상당한 타격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괜찮다. 감당할 수 있을 것이야. 제국 황실만 채무를 짊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제후들에게도 타격이 있을 것이옵니다."

"예전 같았으면 시행하지 못하였을 작전이다. 허나 우리에게는 바바 준남작이 있다."

"치고 빠지는 유격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바로 보았다. 전원 기병으로 이루어진 20만 병력이라면 충분히 위협적이지. 그 칼날이 자신들의 왕국으로 겨누어지면 과연 멀쩡한 정신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까?"

"신묘한 수이기는 합니다만, 이 역시 보급의 문제가 있사옵니다."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바바 준남작에게 대안이 있기 때문이지."

리카드로 후작은 고개를 숙였다.

궁금한 점이야 많았지만, 황제의 의견에 반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황제가 결심하였다면 관료들은 수행을 하는 존재였다.

곧 타로스의 부름을 받고 바바 준남작이 도착했다.

"황제, 뵙는다!"

"바바 준남작, 요즘 몸이 근질근질하지 않던가."

"맞다! 전쟁, 언제 시작합니까?"

호루루 부족은 타고난 전투 민족이었다.

전투라면 환장하는 제국인들보다 더욱 호전적이었고, 기병의 운용은 제국의 군사 전문가들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이번 추수 전이다."

"오오! 좋아!"

가만히 있다가 깜짝 놀라는 리카드로 후작.

전쟁의 시기가 적들의 허를 찌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바, 네가 설명해 주거라. 20만 기병이 적진을 휩쓸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거야 기본적으로 개인당 말 3필과 식량이다!"

"식량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지?"

"보르츠? 고기를 말려서 가루로 만들면 아주 훌륭한 식량이 됩니다! 최소한 1년은 전투를 수행할 만큼?"

"...!"

리카드로는 꽤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육포 수준이 아니라 더욱 수분을 빼서 가루로 만들어 지니고 다니면 어마어마한 기동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97화. 폭풍 전야(2)

보르츠(Borcha).

호루루 부족이 보르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타로스가 그들을 디자인할 때 몽골군을 모티브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전술뿐만이 아니라 생활 양식, 전투 식량, 진영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을 참고했었다.

보르츠는 여러 고기를 결대로 잘라 건조한 후 분말로 가공한다.

분말을 현지에서 조달하는 야채와 향신료, 소금 등을 넣고 끓이면 훌륭한 한 끼 스프가 된다.

어떻게 가공하느냐가 관건이기는 하지만, 상품의 보르츠는 상당히 맛도 좋았고 열량도 높아 장거리 이동을 위한 식량으로 사용됐다.

보르츠를 섭취하며 진격하게 되면 보급은 최소화되거나 거의 필요가 없는 수준이었고, 어마어마한 속도로 진격이 가능하였기에 적들이 대비하기도 전에 공격을 개시할 수 있었다.

몽골 제국이 그러했듯 20만 기병이라면 어마어마한 전투력을 가진 병력이 될 것이다.

바바는 보르츠의 강점에 대해 설명했다.

"보르츠는 곡식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어. 거기에 야채를 넣고 끓이면 아주 기가 막혀. 후작은 안 먹어 봤지?"

"음.... 그렇기는 하네만."

"아주 훌륭해! 오늘 보르츠 스프 같이 먹을까?"

리카드로 후작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의 참모장이라면 앞으로 제국군 기병이 무엇을 먹으면서 진군하게 될지 정도는 알아야 한다.

"참모장, 제국 상단에 명하여 식량과 육포를 대량으로 수입하라 일러라."

"아직 식량은 부족하지 않사옵니다. 몇 개월은 전쟁을 수행할 수 있나이다."

"눈가림이다."

"허허, 그렇군요."

이미 전쟁은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직접 창칼을 들고 피를 흘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상대국의 경제력에 구멍을 내는 것도 전쟁의 일종이었다.

***

제국이 식량을 수입하기 시작하자 연합 측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제국이 식량을 수입하기 시작하였다고?"

"그렇사옵니다, 폐하. 아무래도 얼마 전까지 전쟁을 치러 왔기에 추수되는 식량만으로는 군량을 확충하기 힘들어서일 것이옵니다."

참모장 비탄 공작이 론에게 보고를 해 왔다.

연합국의 수장이 되었다는 것은 전쟁을 전체적으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론 왕국에서는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정보원을 제국으로 풀었고, 그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예의 주시하였다.

제국의 식량 사정이 좋지 않다는 방증이었으므로 여기에 초를 칠 수 있다면 적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다.

"수입을 방해할 수는 없나?"

"그들은 국제 상단을 이용하옵니다. 국제 상단을 타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옵니다."

국제 상단을 타격한다?

모든 군상들이 연합에 등을 돌릴 것이다.

국제 상단의 도움 없이 전쟁을 치른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이용한다.

"우리도 수입한다."

"예!? 경제적으로 타격이 막심할 것이옵니다. 이미 곡물 가격이 치솟고 있는 상황이옵니다."

"우리는 5개국이 타격을 나누어지고, 제국은 혼자서 타격을 짊어진다. 무엇보다 제국의 채무가 극심한 상태이니, 지체 없이 실행하라."

"폐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론은 이런 결정을 연합국 수장들에게도 통보하였다.

다행히 연합국 수장들은 론의 계책에 동의했다.

전쟁 시작 전에 경제 공격을 시도한다면 제국 내에서 분열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제국 상단.

황제에게 직접 등용이 된 뒤, 지금까지 상단에서 여러 업무를 맡으며 아몬 베이커스는 부단주의 직위까지 상승했다.

황제가 장담했던 대로 제국은 빠르게 성장하였고, 제국 상단의 규모도 어마어마하게 확장됐다.

최근 들어 제국은 대규모 식량을 수입했다.

이 덕분에 국제 식량 가격은 하늘을 뚫고 승천할 기세가 됐다.

아몬 부단주는 아직까지 황제의 생각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굳이 지금 상황에서 식량을 수입할 필요가 있었을까?"

"뭔가 노림수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기는 할 텐데."

황제는 오랜 세월을 살아왔고, 당연히 경제학이나 상단의 운용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 증거로 은행이 얼마나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던가.

평생 상계에 몸담았던 아몬조차 무릎을 쳤을 정도다.

제국 상단은 국제 상단과 중개 거래를 했다. 제국 상단이 직접 움직인다면 전쟁이 선포된 반제국 연합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일정액의 수수료를 지불하기는 했으나 수입은 제대로 진행됐고, 창고마다 식량이 가득 쌓이고 그것도 모자라 창고를 증축해야만 했다.

투자된 비용은 수억 골드에 달한다.

제국 1년 예산 정도가 모조리 투자되니, 국제 곡물 가격이 요동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연합이 끼어들었다.

"문제는 적들도 식량을 수입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가격이 더 오르겠군."

부관의 말에 아몬은 눈살을 찌푸렸다.

다음 차 식량을 수입해야 할지 말지 기로에 서 있는 중이다.

이번에 식량을 수입한다면 손해가 막심할 것이다.

그가 고민하고 있을 때, 근위 기사가 명령서를 가져왔다.

"부단주 되십니까?"

"그렇습니다만?"

"폐하의 명령서입니다."

근위 기사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사라졌다.

촤악!

아몬은 명령서를 펴 들었다.

지금까지 매입하였던 잉여 식량을 모두 되팔 것.

동시에 육포를 수입하여 보급대로 넘길 것.

"...!"

아몬의 몸이 흔들렸다.

실로 엄청난 이익을 남길 수 있는 장사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익은 바로 연합에 극심한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제국의 급속한 움직임에 연합은 꽤나 당혹해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억 골드를 들여 식량을 수입하던 제국이 돌연 판매를 시작한 것이다.

연합의 수장인 론 국왕은 회원국 국왕들에게 거센 질타를 받고 있었다.

-아니, 분명히 제국에 타격을 줄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이로 인하여 우리 연합도 극심한 타격을 받았습니다. 괜히 자금을 들여 식량을 사들인 격이 아니겠습니까?

"실책을 인정하리다."

론은 이를 악물었다.

제국의 악랄함에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이번 식량 매수로 인하여 연합은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제국은 어마어마한 이익을 챙겼다.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경제에 구멍이 생겼으니 이미 지고 들어가는 것이 다름없었다.

전쟁이 시작되면 진군하여 제국의 영토를 잘라 먹어야 한다. 그리하지 않는다면 이번의 손해를 만회할 수가 없었다.

"제국의 영토를 병합하기만 한다면!"

-그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잘 알지 않소?

-맞습니다. 어찌 제국의 영토를 병합한다는 말입니까?

쾅!

론은 테이블을 내려치자, 통신구들이 흔들렸다.

잠시 치직, 회원국 국왕들의 얼굴이 흔들렸다.

이것은 회원국들을 향한 분노가 아닌 제국을 향한 분노였다.

"연합에 막대한 타격을 안겨 주었으니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오!"

-한 번 믿어 보리다.

-다시는 이런 수작에 넘어가서는 안 될 것이오.

숫제 협박에 가까웠으나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번 작전을 승인한 것이 론이었으니, 그 책임도 론이 지는 것이 맞았다.

통신을 마치자 참모장에게 보고가 올라왔다.

"제국의 세작들에게서 들어온 소식입니다!"

"제길! 이번에는 무슨 수작을 부린다더냐?"

"이번에는 가축이나 육포를 수입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찌할까요?"

제국의 대대적인 수입으로 육류의 가격이 하늘을 뚫고 있다고 한다.

정확하게 식량을 수입할 때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여기에 손을 댄다면?

또다시 제국에 놀아나는 꼴이 된다.

"무시하라."

"하오나 분명히 식량을 확충하는 움직임으로...."

"놈들은 이미 50만 대군이 1년 이상 먹을 수 있는 식량을 확보했다."

"문제는 그들이 식량을 되팔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더욱 무시를 해야 한다."

론은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제국이 식량을 되파는 바람에 식량 가격이 다시 하락하고 있었다.

놈들은 광활한 영토와 인구를 바탕으로 국제 식량 가격을 놓고 장난질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연합은 이에 무대응으로 일관하기로 했다.

***

5월 초.

지난 몇 개월은 격동의 시기였다.

제국이 식량을 수입하고 가격이 폭등하자 연합에서 바로 식량을 수입하여 국제 식량 가격을 올려놓았고, 그 덕분에 제국은 식량을 되팔아 큰 이익을 볼 수 있었다.

그 결과 주변국이 피해를 보게 되었으나, 제국의 입장에서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었다.

제국에 입조하지 않는 왕국들은 죄다 적으로 규정하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일.

이렇게 벌어들인 돈으로는 육포와 가축을 수입하는데 사용하였고, 다시 식량 가격이 내려가자 여유 자금을 운용하여 식량을 매집했다.

결국 제국은 막대한 이익을 보며 주변국을 패배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늘은 제후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기에 제후들이 어전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최근에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참으로 신묘한 계책이었사옵니다. 상계를 쥐고 흔드는 것만으로도 적들에게 타격을 주시다니요? 신 등은 폐하의 신묘한 계책에 감탄하였나이다."

"맞습니다. 그 악랄한 놈들의 뒤통수를 역으로 쳤으니, 이 얼마나 통쾌한지 모릅니다."

"자주 쓸 수는 없는 수법이다. 이로 인하여 다소 군비를 줄일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제국은 막대한 수익을 냈고, 그로 인하여 전쟁 비용을 다소 줄였으나 타로스는 무심한 얼굴로 제후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미 타로스의 반응에는 익숙해진 사람들이었다.

'하긴, 폐하께서는 드래곤이나 마왕을 처치하고 나서도 별다른 반응이 없으셨다. 그저 일어날 일이 일어났을 뿐이라고 여기신 거지.'

'적국들에 경제적인 타격을 입혔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전초전에 불과하다. 율리우스 왕국을 병탄하고 난 직후에도 별 반응이 없으셨으니.'

이 때문에 제후들도 무덤덤하게 되었다.

대륙을 일통하고 나서도 황제는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듯한 담담함.

황제가 이루어 나가고 있는 업적들이 워낙에 대단했기에 다른 일들은 사소한 일들로 치부될 지경이었다.

"식량 가격이 내려갔으니 다시 식량을 수입한다. 다만, 이번에는 어느 정도의 비축분만 수입하라."

"명에 따르옵니다!"

"짐이 경들을 부른 이유는 그런 사소한(?) 일 때문이 아니다."

"허험."

제후들은 헛기침을 했다.

도대체 이게 사소한 일이면 뭐가 큰일이라는 말일까.

전쟁은 추수 이후로 예정되어 있었고, 제국이 어느 정도 준비가 되느냐에 따라 내년으로 미루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번 회의는 전쟁 물자 관련이라고 내심 생각했던 제후들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랭턴 공작이 총대를 메고 물었다.

"신 등이 아둔하여 폐하의 뜻을 짐작하기 힘드나이다. 저희들이 이 자리에 온 것은 어떤 이유이옵니까?"

"전쟁을 당긴다."

"...!"

"아군마저 올해 말이나 내년에 전쟁이 터질 것이라 예상하고 있으니, 적들은 당연히 그에 맞춰 전략을 수립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적의 허를 찌를 것이다."

#제98화. 충성 맹세(1)

꽤나 큰 충격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타로스는 이번 상행으로 본 이익을 모조리 재투자하면서 전쟁 물자를 끌어모았다.

이로 인하여 상당한 이익이 발생하였으니, 적의 허를 찌르는데 이용할 생각이었다.

제후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군마저 황제의 의도에 휘둘렸다.

당연히 전쟁은 추수 이후가 될 것이라고 여겼는데, 갑자기 전쟁이 시작되면 당연히 적의 허를 찌를 수 있다.

타로스는 담담하게 이런 결정을 하게 된 이유를 밝혔다.

"우리가 율리우스 왕국을 정벌하여 국난을 넘겼듯, 이번에도 그들의 물자를 이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게 가능한 일이옵니까? 이번 전쟁은 양상이 조금 다른 줄로 아옵니다."

"특수 부대와 국제 상단을 이용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 말씀은...?"

"바바 준남작이 기병 20만을 운용한다. 다들 잘 알겠지. 바바 준남작이 어느 정도의 기병 운용력을 가지고 있는지."

제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바바 준남작은 제후들 가운데 말석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기병의 운용에 대해서는 세계 제일을 다투었다.

랭턴 공작이나 라이너스 후작도 바바의 기병 운용에는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이는 지난 전쟁에서 증명되었다.

타로스는 대전략에 대해 설명했다.

"이번 전쟁에서 50만을 동원하고 별동대로 20만을 동원할 것이다. 별동대 20만은 가벼운 식량만 휴대하여 적 후방을 타격하며, 그렇게 털어 낸 식량은 국제 상단에 판매하고 다시 제국에서 구매하는 형식을 취한다."

"허어!"

"기가 막힌 전략이옵니다!"

국제 상단을 타격할 수는 있지만, 전쟁 이후 큰 문제가 된다.

왕국의 모든 무역은 막히고, 경제가 완전히 고사되어 국가 부도 사태에 이를 것이 뻔했다.

또한 다음에 전쟁이 터지기라도 한다면 모든 국제 상단들이 등을 돌릴 것이므로 이는 굉장히 신묘한 수였다.

바바에게는 20만 기병을 내어 주고 기병 한 명당, 전마 세 필을 지급한다. 충분히 유격 전술을 펼치며 적의 보급에 타격을 줄 수 있다.

"적의 보급이 끊기면 군대는 알아서 자멸하거나 전투력이 극도로 저하된다."

"최소한의 전투로 적들을 끝장낼 수 있는 계책이옵니다."

"신 등은 감탄하였나이다!"

다들 타로스의 수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 정도면 적을 농락하는 수준이었다.

제국이 병영 국가이기에 가능한 전략이기도 했다.

제국의 병사들은 전마만 있으면 언제라도 기병으로 운용할 수 있었다.

파르티안 샷을 기본으로 구사하는 군대.

제후들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황제의 뛰어난 전략과 제국의 뛰어난 병사들을 극도로 활용하게 되었으니 패배할 수가 없었다.

"허나 개전과 동시에 적들의 사기를 저하시킬 필요가 있다. 30만을 우선 올려 보내고 군사 훈련을 한다. 그리고 보름 정도가 흐른 후에 짐이 직접 국경으로 올라가 적진을 타격, 막대한 피해를 준다."

"허어! 그 이후에 바바 준남작이 적 후방을 타격한다면."

"올해 안에 전쟁이 끝날 수도 있다."

제후들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작전대로만 실행이 된다면 적들은 이리저리 제국에 휘둘리다가 멸망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

제국 수도 브론티아 가젤 후작의 저택.

오늘, 제후 회의에서 제후들은 황제의 전략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개전의 시기를 앞당겨 적을 후려치는 것이 첫 번째 전략이었으며, 빠른 기동성을 가진 기병을 이용하여 적 후방 보급 기지를 타격하는 것이 두 번째 전략이다.

또한 그렇게 털어 낸 보급품을 국제 상단에 매각하고, 다시 제국이 사들이는 것이 세 번째 전략이다.

이로 인하여 제국은 일정액의 수수료만 지불하고 적들의 물자를 들여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그것도 모자라 황제는 또다시 개전 직후 선봉에서 적들을 직접 상대한다고 말했다.

이번 전쟁도 빠르게 종료될 것이 뻔했다.

"실로 무서운 책략입니다."

귀족파 참모인 란데일 백작이 국정 회의를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가젤 후작도 마찬가지였다.

황제가 아군이라 다행이지 저런 괴물을 적으로 만나게 된다면 도저히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건 모든 귀족파 귀족들이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황제와 부딪치지 않은 것이 천운이라고 여긴 것이다.

"참모장, 우리가 황제의 전력을 뛰어넘을 수 있는 날이 오겠나?"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황제는 불멸합니다. 우리 세대는 물론이고 대대손손 불가능할 것입니다."

"...."

참모장이 열세를 인정했다.

황제가 중앙군과 기사단을 재건한 순간 반역은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저 괴물과 같은 황제와 60만 대군을 어찌 막는다는 말인가.

게다가 이건 황제의 전력만 평가한 것이었고, 황제파 제후들이 지닌 병력까지 합산하면 100만을 뛰어넘었다.

역사상 유례없는 황권이 구축되어 가는 중이었다.

"차라리 공신을 노리는 편이 낫겠습니다."

"공신을 노린다?"

"빠르게 충성을 바치고 통일 제국의 공신이 된다면 웬만한 공국 정도의 영토를 다스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영광은 대대손손 이어지지 않겠습니까."

"으음."

"그건."

부정할 수가 없었다.

황제에게 칼을 들이대려 했으면 진즉에 했어야 한다.

태업을 일삼을 때 바로 들이쳤다면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황제에게 나오는 전략마다 제후들의 상식을 뒤집어엎고 있었다.

도대체 경제와 전술을 연관시킨다는 발상을 누가 할 수 있었을까.

오늘 회의에서 보니 리카드로 후작 역시 놀란 얼굴이었다.

란데일 백작이 눈을 빛냈다.

"황제께 충성을 하려 한다면 전쟁 전이어야 합니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절대 황권이 구축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지요."

***

며칠 후, 2차 제후 회의를 앞둔 어느 날.

타로스는 오전에 국정을 마치고 한가로운 점심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최근 조성되기 시작한 황제의 정원.

시간이 날 때마다 타로스는 직접 분재 가위를 들고 정원을 가꾸었다.

물론 대부분은 황궁의 정원사들이 나섰지만, 이런 식으로 정권을 꾸미는 것도 나름 보람차다.

정원 한가운데에 지어진 정자.

한 시간 정도 일하고 정자에 설치되어 있는 푹신한 의자에 비스듬하게 누워 황후의 다리를 베고 있었다.

딱히 이런 상황은 타로스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고, 잠시 쉬기 위해 의자에 누웠는데 황후가 찾아와 타로스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 위에 얹혔다.

그 이후에 씨 없는 포도 알을 따서 타로스의 입에 넣어 주고 있었으니 이만한 천국이 없었다.

나타샤가 밤에 불같아서 그렇지 조강지처로는 전혀 손색이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폐하께서 검을 드시니 제국은 평안하고, 빠르게 국토는 팽창하고 있어요. 저는 문득 동경을 하게 되었답니다."

"동경?"

"폐하와 함께 대륙을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는 꿈이요."

"황후가 직접 검을 든다면 황궁과 수많은 영토는 누가 돌본다는 말이오?"

"그건 궁정 귀족들에게 맡겨도 되지 않을까요?"

나타샤의 레벨은 80대.

전쟁에 나서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레벨이었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레벨이 70대였다면, 상당히 레벨 업을 하였으니 타로스가 없을 때 수련을 얼마나 열심히 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황후의 실력이 제후에 근접하게 된다면 수락하지."

"정말인가요!?"

"군주의 말에 허언은 없는 법."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노력할게요!"

이게 아내와 할 말인가 싶었지만, 제국 전체가 무를 숭상하는 기조를 가지고 있었고 역대 황후들 중에서도 전쟁에 참전하였던 전례가 많았다.

강함을 숭상하는 제국 황실이 황후라고 멀쩡한 여자를 뽑았을까.

당연히 강력한 무력을 가진 황후들이 황제와 옆자리에 있었다.

제국에서 황후가 될 정도면 기사급 이상의 무력을 보유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타로스가 나타샤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로빈슨 단장이 다소 황망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폐하, 가젤 후작이 뵙기를 청하나이다."

"지금 쉬는 것 안 보이나."

"중대한 결심을 하고 찾아왔다고 하나이다."

"곧 제후 회의 아니더냐."

"아무래도 폐하께 긴밀히 드릴 말이 있는 모양입니다."

"불러라."

타로스는 여전히 황후의 다리를 베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꼴이야 하루 이틀도 아니었고, 절대 황권을 이룩해 나가고 있는 황제에게 트집을 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타로스와 함께하고 있는 여자가 다름 아닌 황후가 아니던가.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를 뵙사옵니다!"

"지금 쉬고 있는 중이다. 할 말이 무엇인가."

쿵!

가젤 후작은 정자가 깨질 정도로 머리를 박았다.

그 역시 제후의 일인으로 그랜드 마스터급의 실력을 가졌다.

쩌저정!

정자 바닥 대리석이 갈라지며 그의 머리에 피가 흘렀다.

쿵! 쿵!

총 세 번.

타로스는 대체 저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눈살을 찌푸렸다.

"전쟁을 앞두고 있는 중이다. 저의가 무엇인가."

"폐하! 신이 불민하여 사사롭게 당파를 만들어 심기를 어지럽혔나이다! 이는 죽어 마땅한 중죄! 부디 이 죄인을 용서치 마시옵소서."

"...!"

황후는 물론이고 호위 기사들, 시녀들까지 깜짝 놀랐다.

황제만 있는 자리가 아니라 이렇게 공개된 장소에서 이런 식으로 죄를 청한다는 것은 일부러 소문이 나길 바란다는 뜻이었다.

타로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게 무슨 죄란 말이더냐."

"제국의 모든 강역은 폐하의 것. 저희 당파는 귀족파라는 이름으로 당파를 만들어 폐하께 반발하였으니 그 죄가 죽어 마땅하나이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저를 비롯한 당파의 모든 제후들은 폐하께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기로 결심하였나이다. 폐하께서 받아 주신다면 만인이 보는 앞에서 충성의 서약을 하겠나이다."

사실 타로스도 내심 놀랐다.

그저 황제의 원래 성격이 무덤덤하였기에 그걸 연기하고 있을 뿐.

타로스는 절대 황권을 이룩해 나가고 있었고, 이번 전쟁이 끝나면 완전히 지배력이 굳어질 것이다.

그걸 가젤 후작도 모르지는 않았다.

황제와의 대립 구도가 굳어지기 전에, 그리고 절대 황권이 완벽하게 구축되기 전에 충성을 맹세해야만 한다.

그리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숙청의 대상이 될 것이 뻔했다.

이는 타로스도 바라지 않는 일.

능력 있는 제후들을 쳐 내 봤자 제국의 손해였다.

"그건 경의 착각이다."

"예!?"

"짐은 한 번도 경들을 다른 당파의 파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경들이 착각을 했던 모양이군."

"폐, 폐하!"

"원하는 대로 하라."

"황공하옵니다! 목숨을 바쳐 충성하겠나이다!"

타로스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덤덤한 표정의 황제와는 다르게 황후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경악한 채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제99화. 충성 맹세(2)

올해 2차 제후 회의.

보통 몇 년에 한 번씩 제후 회의가 열리나, 지금은 워낙 특수한 경우였다.

율리우스 병탄에 이은 또 다른 전쟁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제후들은 각자의 영지에서 준비를 하면서도 제국 황실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제 제후들의 입장에서도 궁정 귀족들의 권력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기에 이런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

출병 일을 확정 짓는 회의가 열린다.

제후들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었고 기밀은 유지된다.

아직 황제가 도착하지 않은 어전.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전쟁에 대한 이야기로 한창 시끄러워야 정상이겠지만, 이보다 더 큰 이슈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귀족파의 충성.

제후들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더 큰 이슈였다.

전쟁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황제가 직접 나서는 전쟁이었기에 패배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젤 후작 휘하 귀족들의 충성 맹세는 굉장히 큰 문제였다.

제국은 외부의 침략보다는 내부의 분열로 망할 가능성이 더 큰 국가였다.

워낙 제후들이 가진 힘이 강력하였고, 비정상적인 병영 국가였기에 반란이 한 번 터지면 어마어마한 소모전이 일어난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제국이 얻게 될 이익은 굉장히 컸다.

"정말 놀라운 일이군. 그 옹고집 같은 가젤 후작이 폐하께 충성을 맹세한다니."

"저는 처음에 헛소리인 줄 알았습니다. 허나 워낙에 보는 눈이 많았고 심지어는 황후마마께서 계시는 자리였다고 합니다."

"공개적으로 충성을 맹세한다는 의사를 보였다는 거로군."

"그렇지요."

"하긴, 달리 생각하면 놀라운 일도 아닐세."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폐하께 대적하면 무슨 꼴을 당하겠나? 내전이 벌어진다고 치면, 폐하께서 그 머리를 치지 못하겠나?"

"하하하! 그건 그렇습니다."

반란이 일어나도 제국의 영웅이자 성군으로 위명이 자자한 황제에게 직접 칼을 들 기사나 병사가 있을지 의문이다.

무엇보다.

황제가 직접 나서면 반역의 수괴는 반드시 죽는다.

황제라고 하여 수십만 대군을 한 방에 쓸어버릴 수는 없지만, 단일 전투에서는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

분명히 기쁜 일이었지만, 여기저기서 안 좋은 소리도 들린다.

"세력의 열세를 인정한 것이겠습니다."

라무스 백작은 여전히 귀족파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다.

절대 황권이 구축되기 직전이었으니 숙청이 시작되기 전에 고개를 숙이는 것이라고 여겼다.

물론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황제파 수장인 랭턴 공작은 불만 어린 귀족들의 목소리를 잠재우려 노력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은 제후일세. 작금의 제국은 제후들의 힘이 막강한 수준이지. 그들이 모이면 대륙 일통은 어렵지 않아. 오히려 그만한 전력이 사라지면 그게 더 문제이지."

"그런 긍정적인 면도 있지요."

"가젤 후작께서 드십니다!"

시종장의 외침에 제후들의 눈동자가 입구로 집중되었다.

대전의 문이 열리자 가젤 후작을 필두로 귀족파 제후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매우 결연했다.

가젤 후작은 정확히 랭턴 공작 앞에 섰다.

"각하를 뵙습니다."

"어서 오게."

"소문은 들으셨을 겁니다."

"들었지. 꽤 놀라기도 했네. 어찌 그런 생각을 다 하였는가."

"이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 아니겠습니까."

"사람 참 솔직하군."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가시처럼 걸리시겠지만."

"그런 말 말게. 나 역시 중립 귀족이었네. 지금이야 이렇게 모두를 이끌고 있지만."

가젤 후작을 비롯한 귀족들이 허리를 숙였다.

훈훈하면서도 굉장히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치고받고 싸우던 사이가 아니던가. 영지전 직전까지 갔던 적도 많았다.

그런 사람들이 화해를 하고 잘 지내려 하니 이질적인 것이 당연했다.

그들은 황제가 등청하기 전에 대전 한가운데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절로 엄숙한 광경이 펼쳐졌다.

모든 제후들이 황제를 중심으로 모였으니, 제국이 동원할 수 있는 진정한 힘은 100만이 넘어갈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고, 시종장의 목소리에는 더욱 힘이 들어갔다.

"만국의 진실한 지배자,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황제 폐하 만세!"

랭턴 휘하 귀족들도 무릎을 꿇고 부복했다.

그러나 가젤 휘하의 귀족들은 좀 달랐다.

쿵!

쿠구구궁!

대전 바닥이 깨질 정도로 머리를 찧었고, 그들의 이마에는 모두 피가 흘렀다.

이마에 피가 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사전에 협의라도 한 것처럼 격렬한 움직임이었다.

황제는 옥좌에 앉아 무심한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봤다.

"경들은 왜 그러고 있는가."

"폐하! 신 등이 지금껏 잘못된 길을 걸었으나, 이제야 폐하께 진실한 마음으로 충성을 맹세하려 하니 받아 주시기 바라옵니다!"

"충성을 받아 주시옵소서!"

황제는 언제나 그랬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받아들인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들에 이어 랭턴 휘하 귀족들도 충성을 다시 맹세한다.

제후들을 제외하고 이 자리에는 시종장 한 명만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이 광경을 바라보며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제국이 건국된 이후로 최대의 사건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