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새로운 목표 (2)
난데없는 로이스의 독립 선언에 제네로커와 발렌티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도, 독립?!"
"갑자기?"
인간들이 그렇듯, 드래곤도 성룡이 되면 부모에게서 독립한다.
물론 독립하는 기간에도 약간씩 차이는 있었지만, 보통 수십에서 수백 년 정도 부모와 함께하며 독립을 준비하고는 했다.
그랬기에 제네로커와 발렌티나가 당황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로이… 너 이제 막 성룡이 된 거야."
"그래, 독립은 차차 생각해 보는 게 어떻겠니?"
부모님의 간절한 눈빛 공격에도 로이스는 단호했다.
"언제요?"
언제 자신을 독립시켜 줄 거냐는 눈빛에 제네로커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한… 천 년?"
"...."
"그, 그럼 900년?"
"...."
점점 짜게 식어 가는 아들의 눈빛에 제네로커가 당황해 소리쳤다.
"오, 오백 년은 어떻니?"
"…그냥 지금 바로 짐 싸서 나갈까요?"
"...?!"
단호해도 너무 단호한 아들의 목소리에 제네로커가 세상 다 잃은 표정을 지었다.
그가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어흑… 우리 아들 뽈뽈거리며 아빠 쫓아다니던 때가 좋았지."
"뽈뽈거리며 아부지 쫓아다닌 적 없었는데...."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하던 우리 아들이 언제 이렇게 큰 건지...."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만?"
"허어… 세월이 무상하구나."
로이스의 말은 귓등으로 듣지도 않고 그저 자신의 할 말만 중얼거리는 제네로커였다.
그런 남편의 옆구리를 쥐어박아 진정시킨 발렌티나가 로이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도 눈에는 섭섭함이 가득했다.
"이렇게 빨리 독립하려는 이유가 있는 거니?"
"있죠!"
발렌티나의 물음에 로이스의 눈이 반짝였다.
"뭐니 그게?"
"제집 마련!"
"...?"
발렌티나는 물론 제네로커의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제집 마련?"
"여기도 네 집이란다."
"아니죠! 그건 다르죠!"
로이스가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여긴 어무니 아부지 집이죠! 제가 원하는 건 온전히 저만을 위한 집! 저의 안식처라고요!"
제네로커의 레어에 로이스의 방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방'이었다.
아무리 잘 포장을 해 줘도 결국 부모님의 집에 얹혀살고 있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내 집! 자가(自家)!'
과거 전생의 시절, 하루하루 먹고살기 힘들었던 그때.
로이스가 가진 꿈은 하나였다.
'나만을 위한 멋진 주택! 기왕이면 큰 집으로!'
당시에는 돈도 없고 남은 시간도 없었기에 이루지 못한 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넘쳐 나는 재력과 남아도는 시간!'
그 두 가지라면 충분히 자신만을 위한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월세도… 전세도 아닌, 자가! 나만의 레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좋은지 로이스의 눈이 과하게 반짝였다.
그런 로이스의 이야기를 들은 파무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크헐헐! 그렇지! 모름지기 성룡이 됐다 하면 자기만의 레어를 가지고 싶은 법!"
"그렇죠! 할아버지가 뭘 좀 아시네요!"
"좋은 터에 레어를 틀고 이것저것 꾸며 가는 재미가 쏠쏠하지, 암! 그렇고말고!"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주거니 받거니, 사이가 좋은 두 조손.
그때 파무스가 제네로커를 보며 피식거렸다.
"우리 손주 놈이 네 녀석이랑은 많이 다르구나."
"…제가 뭐요?"
"너는 나가기 싫다고 오백 년이나 내 집에 붙어 있었잖느냐."
"...."
"그러다가 내가 쫓아내서야 겨우 나갔다지?"
"구, 굳이 그 얘기를 지금 하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큭큭큭, 어떻게 저런 놈한테서 이런 똘똘한 놈이 나왔을꼬?"
아버지를 보는 제네로커의 얼굴에 원망이 서렸다.
"말리지는 못하실망정!"
"말리긴 뭐 하러 말리느냐. 이렇게 잘 큰 손주가 독립하겠다는데 응원을 해 줘야지! 얼마나 자립심이 투철해!"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상치 못한 든든한 지원군의 등장에 로이스가 환하게 웃었다.
결국, 분위기가 로이스의 독립 쪽으로 굳혀지는 듯싶자, 제네로커가 마지막 협상을 시도했다.
"아들."
"네."
"그, 그럼 한 백 년만 더 같이 살… 끕."
끝까지 안 보내 주려는 제네로커와 못 말린다는 듯 그의 옆구리를 꼬집은 발렌티나.
이에 로이스가 살짝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제가 오늘 당장 짐 싸서 나가겠다는 거는 아니에요."
그의 말에 발렌티나가 되물었다.
"그럼?"
"일단 저도 아무 곳에나 레어를 만들 수는 없잖아요"
"어디에 레어를 둘 생각이니? 생각해 둔 장소는 있고?"
"그건 이제 천천히 찾아보려고요. 그래서 말인데요."
"...?"
"저, 여행 좀 다녀오겠습니다."
"여행?"
"네. 레어 만들기 좋은 곳을 좀 알아보려고요. 겸사겸사 유희도 하고."
로이스의 이야기에 발렌티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렴. 다 큰 아들 막을 수도 없고. 네가 그렇게 하고 싶다는데 해야지."
마음이야 붙잡고 싶었지만, 아들이 저토록 원하는데 막을 방법이 없었다.
"허허, 그럼 결정된 거 같구나. 그럼 나는 가마. 로이스, 나중에 좋은 레어 찾거든 할애비도 초대해 주거라."
"그럼요!"
대충 상황이 마무리되자 파무스가 떠나갔다.
물론 그렇다고 모두가 이 상황을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그… 아들? 그냥 아빠 레어 근처에 레어 만들면 안 돼? 녹치 산맥이 얼마나 좋아? 물 좋고, 공기 좋고, 마나 좋고! 그러니까...."
"당신은 그만하고 따라와요...."
"여, 여보?"
어떻게 해서든 로이스를 안 떠나보내려던 제네로커가 발렌티나의 손에 잡혀 질질- 끌려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로이스의 입꼬리가 씨익 말려 올라갔다.
"흐흐. 내 집이다. 내 집!"
그렇게 2차 수면기가 끝난 다음 날.
로이스의 독립이 결정됐다.
* * *
독립 선언을 한 이후, 로이스는 바로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
대신 발렌티나와 제네로커에게 자신이 잠든 사이 벌어졌던 일에 관한 이야기를 물어봤다.
부모님께 전해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로이스는 생각에 잠겼다.
'인간 하나가 내 수면방에 들어왔다라....'
드래곤이 설치한 고등의 결계를 인간이 손쉽게 통과했다고 한다.
심지어 부모님조차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말이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로이스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 인간이었겠네.'
원작에서 로이스를 해친 인간 귀족.
그가 바로 훗날, 광룡 탄생의 계기를 제공하는 장치였으리라.
'만약 어머니가 방심한 틈을 타 그 인간이 나까지 해쳤다면… 원작과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됐겠지.'
하지만 '발렌티나의 의심', '로이스의 준비', '제네로커의 합류' 등의 전개가 끼어들며 원작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왔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거지.'
이에 로이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다가 문득 그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 어머니는 어떻게 되신 거지?'
원작에서 등장한 광룡은 제네로커뿐이었다.
발렌티나의 성격상 그녀 역시 제네로커 못지않은 광룡이 돼야 했다.
하지만 원작에서 발렌티나의 이야기는 등장한 적이 없었다.
'내가 모르는 설정이 있던 건가?'
원작의 시작 전에 관한 스토리는 등장하지 않으니 발렌티나의 이야기가 어찌 되는지 로이스가 알 길이 없었다.
"뭐, 이제는 딱히 신경 안 써도 되는 문제니까."
광룡이 등장할 일이 없는데 과거가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그러다 그의 생각이 억지력에 미쳤다.
'이제 억지력은 발생하지 않는 건가?'
로이스는 수면기 때 발생할 억지력을 걱정했었다.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축적된 억지력.
만약 억지력의 목적이 자신의 죽음이라면 2차 수면기만큼 그 목적을 달성하기 좋은 시기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억지력은 발생하지 않았다.
수면기 때 로이스를 위협한 위험이라고는 원작에서 등장했을 정해진 '순리'뿐이었다.
'포기한 건가? 포기하면 나야 좋지.'
설사 억지력이 포기하지 않았다고 쳐도 이제는 상관없었다.
자신은 온전히 성룡이 되었고, 스스로를 지켜낼 힘을 만들어 냈으니까.
아무리 억지력이 쌓였다고 해도 이제 어지간한 일로는 자신을 위협할 수 없으리라.
"대륙 몇 개를 몰살시킬 정도의 위협이 아니라면 말이...."
그렇게 중얼거리던 로이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퉷!"
돌연 바닥을 향해 침을 뱉은 로이스.
"부정 탈 뻔했네. 퉷퉷!"
꺼림칙함이 남은 듯 로이스는 연신 바닥을 향해 침을 뱉었다.
그렇게 애써 부정한 말을 털어낸 로이스는 기지개를 켰다.
"으그그, 그건 그거고. 이제 슬슬 떠날 준비를 해야겠네."
일단 이번 여행의 목적은 자신만의 레어를 틀 장소를 알아보는 거였지만, 그것 외에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가 한쪽에서 바삐 움직이는 핀을 불렀다.
"핀!"
"넵!"
"준비는 잘돼 가?"
며칠 전, 로이스가 여행을 간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핀은 주인의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챙길 게 많네요."
"…챙길 게 많은 게 아니라 그냥 싹 다 챙기고 있는 거 아냐?"
"여행을 얼마나 하실지 모르니 철저하게 준비해야죠!"
로이스는 휑하게 변한 자신의 방을 어이없게 바라보았다.
'이건 여행 가는 게 아니라 이사하는 수준이니 원....'
여행 짐을 싸는 게 아니라 이삿짐을 싸는 핀이었다.
만약 아공간이 없었다면 1톤 트럭 10대는 필요했으리라.
물론 그렇다고 로이스가 핀을 말리지는 않았다.
어차피 나중에 챙길 거 미리미리 챙겨 두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 말이다.
'이미 중요한 거는 내가 다 챙겼으니까.'
그리 생각한 로이스가 손을 내저었다.
"쉬엄쉬엄해. 힘들면 내가 도와줄게."
"무슨 말씀을요! 이건 제 일입니다! 로이스 님이 하실 일이 아니라고요!"
"그래, 알았다...."
핀이 절대 안 된다는 얼굴로 막아서자 로이스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그때 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요, 로이스 님."
"왜?"
"이번 여행에 쌍둥이님들은 안 데려가세요? 같이 가… 읍읍!"
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로이스가 녀석의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해 보이는 로이스의 얼굴.
그가 다급하게 외쳤다.
"핀, 침 뱉어 침! 부정 타!"
"네?"
"빨리!"
"아, 넵! 퉷!"
"한 번 더!"
"퉷!"
핀이 침을 뱉는 것을 보고 그제야 안심한 로이스가 핀에게 속삭였다.
"어디 가서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마."
"그, 그런가요?"
"내가 이번에도 그것들한테 시달려야겠어?"
"음… 그건 아니죠?"
핀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속을 킥킥거렸다.
'정말 솔직하지 못하시다니까.'
핀이 본 로이스는 쌍둥이를 좋아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의 오랜 친우들이니 말이다.
핀이 웃으며 물었다.
"수면기가 끝나고 나서 아직 한 번도 안 보셨잖아요? 가실 땐 가시더라도 얼굴은 한 번 보고 가시는 게...."
"너, 아직도 쌍둥이를 몰라?"
"네?"
"이대로 걔들한테 얼굴 비치면 내가 놈들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 끈덕진 것들한테?"
"…그건 그렇네요."
"얼굴 비치는 순간 끝이라고, 끝! 아무튼, 앞으로 쌍둥이의 '쌍' 자도 꺼내지 마."
로이스가 다시 한번 핀의 입을 단속했다.
하지만 핀이 이미 내뱉은 말이 부정을 탔다는 것을 그는 몰랐다.
"로이이이이이!"
"로이이이!"
방문 너머, 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로이스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이 목소리는?!"
곧 방문이 벌컥 열리고.
"로이, 나 왔어!"
"로이, 나도 왔어!"
반짝이는 은발을 본 순간 로이스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망할...."
159화. 새로운 목표 (3)
로이스의 방문을 부술 듯 박차고, 제 방 드나들듯 들어온 1남 1녀.
호리호리하고 늘씬한 몸매에 밝은 은발, 청록색의 눈동자.
닮아도 너무 닮은 두 남녀를 보는 순간 로이스의 얼굴에 불쾌함이 서렸다.
'아, 이것들… 더 컸네?!'
2차 수면기에 들어가기 전 본 쌍둥이들은 안 그래도 컸었는데 수면기를 마친 녀석들은 그때보다 더 훌쩍 자라나 있었다.
185㎝에 달하는 큰 키와 짧은 머리, 선 얇은 미청년이 된 칸.
로이스와 비슷한 키,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에 고양이상의 미녀 카니.
칸은 그렇다 쳐도 카니까지 자신과 비슷할 거라고는 생각 못 한 로이스는 우울해했다.
그런 로이스의 앞으로 쪼르르 온 쌍둥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이… 수면기 안 들어갔어?"
"왜 안 컸어? 똑같네?"
둘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로이스의 이마에 혈관이 불거졌다.
파직-.
"나도 컸거든!"
"그런데 눈높이가 똑같은데?"
칸의 웃음기 담긴 목소리에 이미 불거진 혈관이 두 배로 불거졌다.
파지직-.
"네가 멀대같이 큰 거뿐이다!"
"야, 칸! 우리 로이 놀리지 마!"
칸을 째려본 카니가 슬그머니 로이스를 껴안으며 말했다.
"우리 로이는 더 크면 별로야. 지금이 딱이라고! 로이가 너만큼 크면 내가 이렇게 보들보들한 행복을 느낄 수 없잖아?"
그러면서 카니는 로이스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매우 매우 행복해하는 얼굴로 말이다.
반면 남매의 합동 공격에 열이 뻗친 로이스.
눌린 찐빵이 된 그가 쌍심지를 켜며 버럭 소리쳤다.
"이것들이… 떨어져!"
"아, 조금만 더! 오랜만에 만났는데 나 충전 좀 하게 해 주라!"
"꺼져!"
어떻게든 달라붙으려는 카니와 악착같이 밀어내는 로이스.
기어코 걷어차인 카니를 보며 낄낄거리는 칸까지.
오랜만에 모인 삼총사의 모습에 핀은 그저 흐뭇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렇게 10여 분간의 실랑이 끝에 로이스에게서 떨어진 카니.
"진짜 못됐어."
산발이 된 그녀가 머리를 정돈하며 로이스를 노려보았다.
그런 카니에게 관심을 끈 로이스가 시큰둥하게 물었다.
"여긴 왜 왔냐?"
"왜긴! 우리 로이 보러 왔지!"
"봤으니 가지?"
"싫어."
로이스가 다시 실실거리며 다가오는 카니에게서 슬그머니 떨어졌다.
그러면서 눈을 게슴츠레 뜨고 물었다.
"그래서 진짜 왜 왔는데?"
"후후."
"흐흐. 몰라서 물어?"
쌍둥이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로이스의 좌우를 포위했다.
이에 로이스가 팔짱을 꼈다.
"어, 몰라서 묻는데?"
로이스의 답변에 쌍둥이가 상처받았다는 눈망울로 소리쳤다.
"너, 여행 간다며! 유희, 유희!"
"그것도 곧!"
"하아...."
둘의 외침에 로이스가 살짝 이마를 감싸 쥐었다.
쌍둥이가 찾아왔을 때부터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다.
'이것들이 어떻게 알았지?'
물론, 쌍둥이가 자신의 여행 소식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도 어느 정도 짐작은 갔다.
'어무니....'
로이스네와 쌍둥이네는 날아서 3분 거리였다.
두 집이 가까이 붙어 있고, 남편들이 원로직으로 은화성에 가 있는 동안 심심한 두 아내가 무얼 하겠는가.
바로 폭풍 수다였다.
'좀 조심해 달라고 했는데....'
원래 수다란 게 말하다 보면 나중에는 내가 뭘 말했는지도 모르게 되는 법이었다.
하물며 아침에 해가 떠서 다음 날 해가 뜰 때까지 수다를 나누는 두 아주머니가 자신들이 뭘 말했는지 기억하기나 할까?
아마 쌍둥이도 거기서 자신의 소식을 듣고 온 것이리라.
카니가 로이스를 보며 배신당했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뭐가?"
"여행을 가면 우리한테도 말해 줬어야지!"
"내가 왜?"
"우리도 같이 갈 거니까!"
"누구 마음대로?"
"…그럼 칸 빼고 나랑 가자."
"야, 카니!"
"왜, 뭐?"
티격태격하는 쌍둥이를 보며 로이스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싸울 거면 너희 집 가서 싸워."
그 말에 다시 쌍둥이가 의견을 합쳐 소리쳤다.
"우리도 데려가 줘!"
"맞아! 우리도 데려가 달라!"
시위하듯 주먹을 불끈 쥐고 외치는 쌍둥이를 보며 로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냉정한 눈빛으로 물었다.
"좋아. 그럼 내가 너희를 데려가야 할 이유를 3가지만 대 봐. 내가 납득할 수 있게."
그 물음에 쌍둥이가 시위를 멈추고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끔뻑였다.
그러다가 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우리, 친구잖아?"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두 번째는?"
이번에는 카니가 우물쭈물 말했다.
"음… 로이랑 가면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아서 재밌고...."
카니의 말을 칸이 이어받았다.
"…우리가 심심하지 않아서?"
로이스의 이마에 가라앉았던 혈관이 다시 튀어나왔다.
'이것들이....'
결국에 나랑 가는 게 재밌다는 소리를 다르게 말한 거뿐이잖아!
로이스가 녀석들을 노려보며 잔소리를 퍼부었다.
"야, 내가 너희를 데려갈 이유를 대라고 했지, 너희가 가고 싶은 이유를 대라고 했냐?"
로이스의 싸늘한 지적에 쌍둥이가 움찔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냉랭한 목소리.
"자, 그럼 이제부터 내가 너희를 데려가면 안 되는 이유를 딱 2가지만 말해 줄게."
"음… 안 말해 주면 안 될까?"
"구, 굳이 듣고 싶지 않은데...."
"시끄러. 조용히 하고 들어."
"넵."
"옙."
로이스의 싸늘한 눈빛에 본전도 못 건지고 입을 다문 칸과 카니.
녀석들이 로이스 앞에 얌전히 무릎 꿇었다.
곧 이어지는 로이스의 속사포 같은 목소리.
"첫째, 너희랑 가면 내가 너무 정신없고, 신경 쓰이고, 머리 아프고, 바쁘고, 혈압 오르고, 짜증 나고, 귀찮고, 매우 정신없고, 힘들다."
"저기 로이...? 첫 번째 이유에 이미 우리와 같이 가면 안 되는 이유가 대충 10개 정도 들어간 거 같은데...?"
"…정신없다는 두 번이나 말했어."
"조용히 해."
"응...."
"미안...."
로이스가 노려보자 쌍둥이가 다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리고 두 번째, 나는 너희 친구지, 보모가 아니다. 너희들 데려가면 그 뒷바라지 누가 하냐? 내가 하겠지?"
"우, 우리도 다 컸어! 이제 우리 할 일은 우리가 해! 그치 칸?"
"맞아!"
"검 휘두르는 거 말고 너희가 할 수 있는 걸 말해 봐."
"미안...."
"…조용히 하고 있을게."
"나는 이것저것 알아볼 게 있어서 유희 겸 여행을 가려는 거지 너희 보모 노릇 하면서 여행할 생각은 없다. 이의 있으신 분?"
"우우...."
"으으...."
진실로 무장한 로이스의 칼질에 쌍둥이가 좌절하듯 쓰러졌다.
이에 로이스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없으면 가 봐."
의기양양.
로이스의 얼굴에 승리의 기쁨이 가득했다.
하지만 쌍둥이가 누구던가.
세상에서 제네로커&발렌티나 부부만큼이나 로이스를 잘 알고 있는 녀석들이었다.
좌절하며 쓰러졌던 두 남매가 눈을 마주치고.
끄덕-.
한 번의 고개 끄덕임과 함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녀석들이 은은한 목소리로 물었다.
"로이… 우리, 친구지?"
"그렇지? 우리 친구지?"
쌍둥이의 질문에 로이스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변했다.
'이것들이… 왜 이러냐?'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듯싶었지만, 그래도 친구라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았다.
"친구지. 하지만 친구라고 한쪽에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는 법이야."
"물론이지!"
"우리도 로이한테 그럴 생각 없어!"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쌍둥이가 각자 허리춤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저건?'
쌍둥이가 손에 쥔 주머니.
그것은 로이스가 쌍둥이들의 생일날 만들어 준 아공간 주머니였다.
곧 그 안으로 쌍둥이가 손을 집어넣고.
쿵-.
거대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쿵-.
쌍둥이가 꺼내 든 것은 1.5m는 되어 보임 직한 보석 상자였다.
그것도 각각의 주머니에서 하나씩, 모두 2개를 말이다.
쌍둥이는 자신만만하게 보석 상자를 개봉했다.
곧 휘황찬란한 광채가 그 안에서 뿜어지고.
"...?!"
금빛 물결의 향연에 로이스의 목울대가 꿀렁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쌍둥이가 됐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리랑 같이 가면 로이가 힘든 거 알아."
"그러니까 우리도 로이 말 잘 들을게."
"우리, 친구잖아?"
"이건 우리 때문에 고생할 로이를 위한 선물이야!"
"우리… 친구지?"
번갈아 가며 들려오는 쌍둥이의 목소리에 로이스의 동공이 흔들렸다.
쌍둥이를 데려갔을 때의 고난이냐.
아니면 눈앞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친구비냐.
두 개의 선택지 사이에서 갈등하던 로이스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너희가 이렇게까지 성의를 보이는데.... 까, 까짓것 같이 가자!"
미래에 있을 고난보다는 현재의 즐거움을 선택한 로이스였다.
이에 친구비를 상납한 쌍둥이의 얼굴에도 화색이 번졌다.
* * *
친구비에 혹해 쌍둥이를 데려간다고 말한 로이스.
정신을 차리고 나서 후회해 보았지만, 이미 내뱉어진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대신 그는 쌍둥이에게 두 가지 조건을 걸었다.
그 첫 번째는 허락이었다.
"너희… 아주머니한테 이야기는 했어?"
그 물음에 움찔한 쌍둥이.
"우, 우리 엄마는 딱히 신경 안 쓸걸?"
"맞아. 아빠는 우리보고 언제 독립하냐고 맨날 물어보더라...."
자신의 집과는 정반대의 상황에 로이스가 혀를 찼다.
"쯧쯧. 그건 그거고, 아무리 성룡이 되었어도 부모님께 이야기는 해야 할 거 아냐! 얼른 집에 가서 허락 맡고 와!"
"응...."
"갔다 올게...."
로이스의 훈계에 쌍둥이가 쭈뼛쭈뼛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채 10분도 되지 않아 녀석들이 돌아왔다.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말이다.
"따라갔다 오래!"
"엄마가 미리 짐도 싸 놨어!"
"...."
로이스의 얼굴에서 어이가 사라졌다.
쌍둥이네 아줌마는 이미 이렇게 될 것을 알고 계셨던 걸까?
'설마 녀석들한테 나 여행 간다고 한 게… 아줌마 아냐?!'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아니, 미리 짐까지 싸 둔 걸 보면 이건 확실했다.
살짝 한숨을 내쉰 로이스가 두 번째 조건을 제시했다.
"이번 여행에서 얻게 되는 각종 부산물은 내가 챙긴다? 이의 있으신 분?"
이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단순히 레어 터 보기만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런 물음에 즉각적인 답이 돌아왔다.
"없어!"
"그냥 로이 다 가져!"
불합리하다고 생각되었을지도 모를 조건.
하지만 녀석들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오로지 로이스와 같이 여행을 갈 수만 있다면 충분하다는 듯 말이다.
이에 로이스는 피식거렸다.
'어릴 때 겪은 여행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었었나 보네.'
헤츨링 시절 겪은 귀가 여행은 자신뿐 아니라 쌍둥이에게도 추억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아득바득 따라가려는 걸 테지.
"우리 언제 가?"
자신에게 어깨동무하는 칸과.
"로이, 우리 언제 출발해?"
팔을 껴안으며 배시시 미소를 보내 오는 카니까지.
척하니 달라붙은 쌍둥이의 재촉에 로이스가 속으로 피식거렸다.
'뭐, 지루하지는 않겠네.'
이번 여행도 시끌벅적할 듯싶었다.
'어차피 간다고 말도 다 했고, 핀도 짐을 다 쌌고.'
그렇다면 굳이 길게 끌 필요 없었다.
"그래, 가자, 가!"
"우와!"
"출발!"
환호하는 쌍둥이.
그러다 녀석들이 의문을 담아 물었다.
"그런데 우리 어디로 가?"
그들의 물음에 로이스가 웃으며 답했다.
"제일 먼저 들러야 할 데가 있어."
"...?"
쌍둥이의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160화. 새로운 목표 (4)
봄 대륙의 북단.
녹치 산맥으로부터 4,000㎞가 넘게 떨어진 곳에 끝없이 펼쳐진 녹림이 있었다.
왕국 하나의 규모를 자랑하는 이 녹림의 이름은 '발레나의 숲'.
지금으로부터 천오백 년 전, 봄 대륙에 발레나라는 이름을 지닌 여인이 나타났다.
경지 높은 법사였던 그녀는 대륙 각지를 돌며 노예로 잡혀 있던 엘프들을 구해 봄 대륙의 북단으로 이동했다.
지금에 와서 그녀와 엘프들이 걸어간 이 길은 '숲의 해방'이라는 평화로운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당시 발레나와 엘프들의 여행은 결코 평화롭지 못했다.
오히려 혈로(血路)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무력으로 엘프들을 구해 내며 수많은 귀족들과 마찰을 빚은 발레나.
그녀에게 빼앗긴 엘프들을 되찾으려는 세력.
거기에 어부지리로 엘프를 얻기 위해 끼어든 제3세력까지.
봄 대륙을 가로지르는 발레나와 엘프들의 걸음걸음에 마르지 않는 핏물이 묻어났다.
수많은 이들이 엘프들을 노리는 와중에도 발레나는 단 한 명의 엘프도 다치지 않게 보호하며 봄 대륙 북단에 도착했다.
전해지는 바로는 당시 엘프들이 도착한 땅은 개간조차 되지 않은 척박한 토지라고 했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죽은 땅.
그런 곳에 도착한 발레나와 엘프들은 땅을 일구고 숲을 만들어 나갔다.
그러는 중에도 발레나와 엘프들을 노리는 습격은 계속됐지만, 습격자들 모두가 발레나의 손에 유명을 달리했다.
발레나가 무슨 이유에서 엘프들을 구해 내고 북쪽으로 이주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발레나의 노력 덕분에 아무도 개간하지 못해 황폐해진 땅에 나무가 자라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봄 대륙의 허파라 불릴 정도의 넓은 산림을 형성했다.
이후 발레나와 엘프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숲의 외곽에서, 숲이 나눠 주는 것으로 살아가는 나무꾼과 사냥꾼들은 말한다.
종종 엘프들을 보았다고.
때문에 나무꾼과 사냥꾼들은 발레나의 숲 깊숙이 들어가는 것을 철저히 금기시했다.
평화로운 엘프들의 생활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한데, 나무꾼들의 금지, 발레나 숲의 중심 상공에 난데없이 인영이 나타났다.
츠팟!
갑작스럽게 허공에 생겨난 3개의 그림자.
"얏호!"
"떨어지이인다!"
"아! 좀 얌전히 떨어지면 안 되냐?!"
그들의 정체는 새로운 여행을 떠난 로이스와 쌍둥이였다.
자주 공간 이동을 겪은 탓에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을 법도 한데, 쌍둥이는 여전히 공간 이동을 하면 어린애들처럼 좋아했다.
높디높은 상공에서 그대로 지면으로 떨어지는 로이스와 쌍둥이.
예전 같았으면 드래곤으로 현룡을 한다든지 호들갑을 떨었겠지만, 이제 그들에게 수백 미터 상공의 높이는 크게 문제 될 게 없었다.
탁-.
그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가볍게 지면에 착지한 일행.
그러기 무섭게 카니가 로이스에게 찰싹 붙었다.
"여기가 어디야?"
"그러게? 여기 어디야?"
칸과 카니의 물음에 로이스가 웃으며 답했다.
"발레나의 숲."
"발레나의 숲?"
"그게 뭔데?"
모르겠다는 듯한 쌍둥이의 표정에 로이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래. 너희한테 내가 뭘 기대하겠냐. 핀 설명해 줘."
"넵!"
로이스의 명령에 핀이 경례를 붙이고 '발레나의 숲'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잠시 뒤.
핀의 설명을 다 들은 쌍둥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구나."
"이런 곳이 있었구나."
"그래서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여긴 왜 온 건데?"
번갈아 가며 날아오는 쌍둥이의 질문 속에서도 로이스는 태연했다.
이제는 이런 상황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로이스의 입꼬리가 씨익 말려 올라갔다.
"여기서 꼭 찾아야 할 게 있어서 말야."
발레나의 숲은 원작에서도 후반부에 등장하는 장소였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장소이기도 했다.
'참룡검과 관련된 히든 피스가 있는 곳.'
녹을 제거함으로써 봉인이 풀린 참룡검은 그저 예리하게 날이 잘 선 검에 불과했다.
하지만 특수한 조건만 갖춘다면 신검이라 불리기 마땅한 물건으로 바뀐다.
바로 이 발레나의 숲에 녹이 제거된 참룡검을 신검으로 만든 '그것'이 있었다.
'비록 지금은 참룡검의 녹도 제거하지는 못했지만....'
참룡검과 관련된 히든 피스 중 이곳 발레나의 숲에 있는 히든 피스는 반드시 로이스가 제 손으로 '처리'해야겠다고 이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성룡이 되기 전에는 외출 금지령 때문에 나오지 못했기에 바로 성룡이 되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그게 뭔데?"
"알려줘!"
"그건 나중에 알려줄게. 일단 길부터 찾자."
"흠… 알았어."
"그러자."
쌍둥이가 수긍하자 로이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빛이 신중해졌다.
'이 숲 어딘가에 있다는 거지? 버려진 드래곤 레어가?'
로이스가 찾으려는 물건이 있는 장소.
그곳은 다름 아닌 버려진 드래곤의 레어였다.
넓은 숲에서 어떻게 드래곤의 레어를 찾나 싶었지만, 로이스에게도 단서는 있었다.
그가 쌍둥이에게 통신석을 건넸다.
"이거 쓰는 법은 알지?"
"응!"
"당연히 알지."
"좋아!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는 여기서 흩어진다. 여기 주변을 탐색하다가 부서진 석상을 보면 나한테 바로 알려줘."
"부서진 석상?"
"그런 게 있어?"
"응. 있어"
원작에서는 분명 있었다.
상체가 날아간 석상이.
그리고 그 석상의 밑으로 빈 드래곤의 레어가 존재했다.
일단 부서진 석상만 찾으면 모든 게 해결되리라.
'주인 없는 드래곤 레어니까 딱히 문제 될 것도 없고 말이지.'
그리 생각한 로이스가 힘차게 외쳤다.
"자, 출발!"
"출발!"
"가즈아!"
성룡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하는 여행이자 유희.
신난 세 마리의 드래곤이 가벼운 걸음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