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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 *

탐색의 시작은 산뜻했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정확히는 인내심이 없는 두 마리 드래곤이 문제였다.

[로이… 이거 언제까지 해야 해?]

[진짜 어떻게 된 게 나무밖에 없냐?]

[이렇게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찾아야 해? 그냥 날아올라서 찾으면 안 돼?]

[멍청한 칸. 나무가 이렇게 울창한데 하늘에서 석상이 보이겠냐? 로이, 여기 엘프 없어? 그냥 걔들한테 물어보자!]

[나보다 카니 네가 더 멍청한 거 같은데? 엘프가 어디 사는 줄 알고? 석상 찾는 것보다 엘프 찾는 게 더 어렵겠다! 똥멍청아!]

[왜 엘프 찾는 게 더 어려워? 그냥 소리치면 나오는 건데!]

쉼 없이 투덜거림이 흘러나오는 통신석.

이에 로이스의 한숨을 쉰 로이스가 통신석에 대고 으르렁거렸다.

"칸, 카니 말처럼 나무가 우거져서 위에서는 석상이 안 보여. 그러니까 그냥 찾아."

[거봐! 멍청한 칸!]

"그리고 카니, 이 숲에 엘프 없어."

[하, 하지만… 아까 핀의 말로는 나무꾼들이 엘프를 봤다며?]

"그건 그냥 그들이 믿고 싶은 걸 봤다고 착각한 거고. 애초에 엘프가 있었다면 나무꾼들이 자기들의 숲을 훼손하는 걸 그냥 보고 있었겠냐? 대갈통에 화살부터 박았겠지."

[윽....]

[거봐! 멍청한 카니!]

"둘 다 시끄러. 조용히 찾기나 해."

[네....]

[넵....]

이제야 겨우 조용해진 통신석에 로이스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해 보였다.

이에 핀이 키득거렸다.

"쌍둥이님들은 여전하네요."

"너무 여전해서 문제지. 이 자식들은 어떻게 된 게 발전이 없냐. 발전이."

로이스는 혀를 내두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넓긴 넓네.'

숲의 중앙이라는 단서로 어느 정도 탐색 범위를 줄일 수 있었지만, 애초에 숨이 워낙 넓었기에 그마저도 엄청난 넓이를 자랑했다.

'쉽게 찾기는 힘들지도....'

로이스는 어느 정도 마음을 내려놓았다.

며칠 정도 숲을 헤맬 것이라고 미리 단정 지은 것이다.

그때였다.

[로이, 로이!]

조용히 하고 찾으라고 말한 지 몇 초나 지났다고 다시 통신을 걸어온 칸.

너무도 활기찬 목소리에 로이스가 한숨을 쉬며 다시 칸을 진정시키려 했다.

곧이어 들려온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로이! 여기 석상 있어!]

"…뭐?!"

로이스가 화들짝 놀라 통신석을 부여잡았다.

그가 다급하게 물었다.

"정말?!"

[거짓말! 내가 먼저 찾으려고 했는데!]

"카니, 쉿!"

[힝....]

"칸! 진짜 있어?"

[엉. 있어. 근데… 이게 네가 찾는 게 아닌 거 같은데?]

"그게 무슨 말이야?"

[이거 안 부서졌는데?]

[봐봐! 거짓말이라니까!]

칸의 말에 로이스의 표정이 변했다.

'부서지지 않았다라....'

분명 원작에 등장한 석상은 상반신이 날아간 형태였다.

'아니, 어쩌면 같은 것일지도 몰라. 원작에서 석상이 등장한 것은 후반부였으니까. 그렇다면....'

로이스가 고민하는 사이 다시금 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로이.]

"왜?"

[어… 음… 이거 뭔가 이상한데?]

"뭐가?"

[일단 와 봐! 와서 보면 알아.]

"알았어. 거기 어디야?"

[…그러게? 여기가 어디지?]

"됐다. 내가 알아서 찾아갈 테니까 넌 그냥 거기 있어. 카니도 칸이 있는 곳으로 와."

[알았어!]

[응!]

짧게 통신을 마친 로이스는 기감을 펼쳤다.

순식간에 빠르게 뻗어 나간 그의 기감 안에 걸려든 칸의 기운.

'멀지는 않네.'

로이스는 칸의 기운을 쫓아 달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이스의 시야에 칸과 카니의 모습이 들어왔다.

로이스보다 카니가 먼저 도착한 듯싶었다.

그리고 쌍둥이가 서 있는 주변 광경이 자연스럽게 로이스의 눈에 담겼다.

그와 함께 로이스의 걸음이 멈췄다.

"…어?!"

로이스는 눈을 끔뻑거렸다.

숲에 자리한 작은 공터와 나무 사이로 내려오는 한 줄기 빛.

그리고 밝은 빛 줄기 아래 놓인 2m 크기의 새하얀 석상.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석상은 깨끗했다.

이끼 하나 끼지 않아, 방금 조각한 듯 보일 정도.

그러한 사실이 놀랍기는 했지만, 로이스가 발걸음을 멈춘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저벅저벅-.

홀린 듯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로이스.

그의 걸음이 석상의 코앞에서 완전히 멈췄다.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여인의 조각상.

그 하단에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발레나 님을 기억하며.]

이를 살핀 그가 고개를 살짝 위로 올렸다.

먼 옛날, 엘프들을 이끌었던 위대한 법사 발레나.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로이스의 입에서 중얼거림이 튀어나왔다.

"…어무니?"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한 어머니의 모습에 로이스가 두 눈을 끔뻑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로이스의 옆으로 쪼르르 다가온 쌍둥이.

"그치? 로이네 아줌마지?"

"아줌마가 왜 여기 있어?"

"로이스님? 이분… 발렌티나 님 맞으시죠?!"

연이은 쌍둥이와 핀의 질문에 로이스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엄마가 왜 여깄지?"

뚱하니 발레나의 석상을 올려다보던 로이스는 돌연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핫! 이건 뭐...."

발레나. 발렌티나.

너무도 유사한 이름.

대놓고 정답을 알려 주고 있지 않은가.

'엄마가 발레나였던 거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드래곤이 유희를 즐기는 게 잘못된 일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어머니가 발레나였다는 사실이 확실해지면 확실해질수록 로이스의 얼굴은 굳어져 갔다.

'잠깐… 그럼 설마...?'

완전히 딱딱하게 굳은 로이스의 얼굴.

그는 심각한 눈빛으로 석상의 밑을 내려다보았다.

무언가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러다가 그가 석상을 밀었다.

드르륵-.

그와 함께 드러나는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

이를 보며 로이스가 중얼거렸다.

"…확인해 보면 알겠지."

굳은 얼굴을 풀지 않은 로이스가 지하로 몸을 날렸다.

"같이 가!"

"우리도 데려가!"

로이스의 뒤를 쌍둥이가 빠르게 쫓았다.

161화. 새로운 목표 (5)

오랜 시간 아무도 찾지 않은, 늘 적막만 감돌던 지하 세계에 말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이, 여기 어디야?"

"여기 레어지? 그렇지?"

로이스의 옆에 붙어 재잘재잘 떠들어 대는 쌍둥이.

녀석들의 목소리가 지하 공간에 메아리쳤다.

로이스가 그들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레어였지. 지금은 비어 있는...."

로이스는 자신이 말하고 흠칫 놀라 움찔거렸다.

'여기가 비어 있는 레어가 맞는 걸까?'

자신이 알고 있는 원작의 내용과 너무도 많은 것이 달랐다.

애초에 부서진 석상이 존재할 자리에 완전한 형태의 석상이, 그것도 어머니의 조각상이 있을 거라고 예상이나 했겠는가.

이제 로이스도 원작의 내용이 어디까지 맞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런 로이스의 복잡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쌍둥이는 여전히 긴장감 없이 로이스의 주변을 빙빙 돌았다.

"누구 레어였는데?"

"원래 주인은 어떻게 됐는데?"

"로이는 여기 어떻게 알았어?"

쉼 없이 쏟아지는 질문.

귀가 따가울 정도의 질문 공세에 로이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오. 진짜!'

성장한 쌍둥이는 어릴 때와는 달리 제법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로 인해 이래저래 손이 덜 가기는 했지만, 부작용이 생겼다.

바로 궁금한 게 있으면 바로바로 질문을 한다는 것.

물론 그 질문의 대상은 당연히 로이스였다.

쏟아지는 질문에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자 로이스가 결국 녀석들을 쥐어박았다.

딱- 딱-.

"악!"

"아오! 왜 때려!"

"좀! 나한테 물어보기 전에 너희가 생각이란 걸 해 봐라!"

"응...."

"네...."

사이좋게 이마를 얻어맞고 볼을 내미는 쌍둥이들.

그렇지만 로이스에게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다.

덩치는 쌍둥이가 더 컸지만, 확실히 그들보다 로이스가 우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대목이었다.

그렇게 쌍둥이를 진정시킨 로이스는 발길을 재촉했다.

혹여 비어 있는 레어가 아니면 어떻게 하나 싶었지만, 그것은 기우에 그쳤다.

"진짜 아무것도 없네?"

카니의 말처럼 로이스 일행이 가는 길은 한적해도 너무 한적했다.

아무런 위험도 없이 말이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밝은 빛이 앞에 나타나는 순간, 로이스 일행의 발걸음이 멈췄다.

"와...."

"예쁘다...."

"우와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쌍둥이와 핀이 감탄했다.

"이걸 어떻게 만든 거지?"

"그러니까."

분명 그들은 비탈진 경사를 따라 지하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의 앞에 나타난 것은 숲이었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밝은 햇살과 졸졸졸- 흐르는 냇물.

넓은 공간에 흐드러지게 만개한 하얀 꽃의 향연.

꽃밭의 군데군데 자리한 투명한 수정까지.

과연 이곳이 지하가 맞는가 싶을 정도의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풍경을 바라보는 로이스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다.

그는 꽃밭의 중앙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없어....'

분명, 이 꽃밭은 원작에서도 나온 장소였다.

그러나 원작과 다른 점은 꽃밭의 중앙에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거였다.

'없어! 드래곤의 사체가!'

드래곤은 수명이 다하면 스스로 육체를 마나로 환원시킨다.

그것이 드래곤만의 장례식이었다.

그로 인해 드래곤의 사체는 쉽게 구경할 수 없었지만, 미처 장례를 치르지 못한 드래곤의 사체는 그 모습을 유지한 채 그대로 남게 되는 것이다.

원작에서는 그런 시체가 바로 이 꽃밭에 존재했었고, 그 곁에 안식을 찾지 못한 드래곤의 영혼도 같이 있었다.

한데, 현실의 꽃밭은 너무도 깨끗했다.

그 소리는 다시 말해....

'참룡검이 흡수할 영혼도 남지 않았다는 소리지.'

원작의 후반부에 이르러 밝혀진 참룡검에 관한 진실.

그것은 참룡검의 특수 능력이었다.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를 이 정체불명의 검은 영혼을 동력원으로 삼는다.

흡수한 영혼의 격이 높으면 높을수록 강대한 힘을 발휘했고, 원작에서 봉인이 풀린 참룡검은 이 꽃밭에서 안식을 찾지 못한 드래곤의 영혼을 흡수한다.

그렇게 드래곤의 영혼을 흡수한 검은 광룡의 목을 베어 내며 '참룡검'이 되었다.

로이스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드래곤의 영혼을 흡수해 또 다른 드래곤을 죽이는 검이라....'

더군다나 죽어서도 안식을 찾지 못한 드래곤의 영혼이 동족을 해치는 데 쓰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영 별로였다.

때문에 로이스는 먼 훗날 착취당했을지 모를 드래곤의 영혼을 자유롭게 해방해 주고자 발레나의 숲을 찾은 것이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모든 일이 손쉽게 해결됐다.

아니, 해결됐다기보다는 그냥 문제 자체가 발생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계속해서 묘한 불쾌감이 로이스의 신경을 툭툭 건드렸다.

고민하던 로이스가 꽃밭을 구경 중인 쌍둥이에게 물었다.

"칸, 카니."

"왜?"

"응?"

"여기가 드래곤 레어고, 그 입구를 지키는 석상이 우리 엄마랑 똑같아. 이게 무슨 의미일까?"

"그야 당연히 여기가 로이네 아줌마의 레어라는 거?"

"그런 거지!"

"…그렇지? 너희도 그렇게 생각하지?"

고개를 끄덕이는 쌍둥이를 보며 로이스가 고민에 잠겼다.

'저 단순한 쌍둥이도 그렇게 생각할 정도면....'

주어진 정황이 이 빈 레어가 발렌티나의 레어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 고민해서 뭐 하냐. 당사자한테 물어보는 게 제일 빠르지."

살짝 한숨을 쉰 그가 통신석을 꺼내 들었다.

속성력이 주입되자 신호가 가고, 곧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들!]

[아들?]

동시에 들려온 제네로커와 발렌티나의 목소리에 로이스가 빠르게 요점만 집어 질문을 던졌다.

"엄마, 궁금한 게 있어요. 1,500여 년 전에 활동했던 발레나라는 법사가 엄마였어요?"

[발레나?]

"왜, 봄 대륙 북단에 발레나의 숲이라고 있잖아요."

[아, 거기? 맞아! 그거 엄마야!]

"여기 숲 중앙에 있는 레어… 여기도 엄마 거였어요?"

[어머? 아들 거기 있니? 후후, 거기 예쁘지? 그 레어, 엄마가 네 아빠 만나기 전에 살던 곳이었단다.]

"혹시 여기 알고 있는 다른 드래곤 있어요?"

[없을걸? 당신은 알았어?]

[아니, 나도 방금 처음 들었는데? 당신이 발레나였어?]

[그걸 왜 몰라? 당시 내가 얼마나 유명했는데!]

[아마 비슷한 시기에 난 가을 대륙에서 귀족 가문 만들기 하고 있었을걸? 그런데 그때 당신 왜 그런 거였는데?]

[뭐였더라… 아! 꽃밭 가꿔 줄 애를 구하려고 나갔다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더라고. 난 그냥 엘프 한둘만 구해서 데려올 생각이었는데 나중에 보니 200명이나 데려왔더라.]

[하여간 당신도… 그래서 그 엘프 아이들은?]

[이곳으로 이사 올 때 나 따라오겠다고 해서 다 같이 녹치 산맥으로 왔지.]

어느덧 로이스는 뒷전이고 자신들의 과거 이야기 삼매경에 빠진 제네로커와 발렌티나.

그들 덕분에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된 로이스는 자신의 신경을 툭툭 건드리던 불쾌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설마설마했는데....'

2차 수면기에서 깨어난 로이스는 한때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원작의 광룡은 왜 제네로커뿐일까?

발렌티나의 성격이라면 그녀도 충분히 광룡이 돼야 했을 텐데?

대체 원작에서 로이스의 어머니는 어떻게 됐을까?

그런 의문점에 2차 수면기 때 로이스가 겪은 사건이 섞여들었다.

금지로 들어온 인간에 의문을 품고 감시한 발렌티나.

그런 그녀의 옆을 지킨 제네로커.

자신이 외부의 침입에 대비해 설치한 함정에 걸려 죽어 간 인간.

거기서 로이스는 모든 조건을 반대로 가정해 봤다.

금지로 들어온 인간.

하지만 방심을 하고 그대로 자리를 떠난 발렌티나.

은화성에서 돌아오지 않은 제네로커.

아무런 대비 없이 무방비하게 잠이 든 로이스를 해친 인간.

그런 식으로 원작에서의 로이스는 죽었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됐다면....

자신의 방심으로 인해 자식이 죽어 간 상황에서 어머니가 멀쩡했을까?

'끔찍이 아들을 사랑했던 아버지는 모든 잘못의 원흉을 인간으로 생각해 광룡이 되었고, 아들이 죽은 게 자신 때문이라고 여겼을 어머니는....'

아마 죄책감에 잡아먹혔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원작 속, 저 꽃밭에서 쓸쓸히 죽어 갔을 드래곤이리라.

아들을 잃은 고통에 발렌티나는 영혼조차 안식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을 터.

이를 떠올린 로이스의 가슴에 불쾌감이 더욱더 짙어졌다.

'아픔과 고통 속에 몸부림치던 어머니의 영혼이 결국 광룡이 된 아버지의 목줄을 끊는 칼날이 되었구나.'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설정이다.

하지만 로이스가 찾아낸 원작의 숨겨진 설정은 너무도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로이스에게는 말이다.

"로이스 님?"

"무슨 일 있어?"

"로이, 괜찮아?"

심각한 로이스의 얼굴에 일행이 걱정스럽게 다가왔다.

이에 정신을 차린 로이스가 마음을 가라앉혔다.

'진정해. 어차피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다.'

자신이 이 세상에 개입함으로써, 그리고 살아남음으로써 모든 게 변했다.

광룡이 나타날 일도 없고, 어머니가 홀로 죽어 갈 일도 없다.

그렇게 마음을 진정시키던 찰나.

무언가를 떠올린 로이스의 얼굴이 다시금 굳어졌다.

'그러고 보니… 이 작품 완결이 어떻게 됐을까?'

원작의 후반부에서 광룡을 죽인 주인공 일행.

그렇게 세상의 평화를 위협하던 존재가 사라졌지만, 작품은 끝나지 않았다.

또한, 웹툰이 완결이 나기 전, 전생의 자신은 죽었다.

미완의 작품.

이를 떠올린 순간 로이스의 뒷골이 쭈뼛 솟아올랐다.

'나는… 이 작품의 끝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작품 속에 자신이 살아가고 있다.

작품의 완결이 해피 엔딩이라면 상관이 없다.

그러나 배드 엔딩이라면?

모두가 죽는, 세상의 종말이라면?

그런 일이 일어나리란 보장은 없지만, 반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란 확신도 없었다.

원작의 결말은 정해진 게 없으니 말이다.

이를 떠올린 로이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하… 진짜 왜 이렇게 먹고살기 힘드냐."

"로이?"

"로이스 님?"

"...?"

로이스의 중얼거림에 일행이 이상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이에 로이스는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광룡이 죽었는데도 완결이 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이후에 사건이 더 벌어질 거란 거지.'

그렇게 일어난 사건으로 스토리는 해피 엔딩이든, 배드 엔딩이든, 어느 방향으로든 향했을 것이다.

때문에 로이스는 준비를 해야 했다.

언젠가 벌어질 최악의 상황을 말이다.

'유비무환이라....'

로이스는 피식거렸다.

'잘됐네. 새로운 목표가 생겼어.'

이번 여행의 목적은 레어를 둘 장소를 알아보는 것.

그리고 대륙 각지를 돌며 숨겨진 히든 피스를 찾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막연하게 미래를 알고 있으니 히든 피스를 찾자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정확한 목적성이 생겼다.

'히든 피스를 찾아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

앞으로 세상에 종말에 준하는 상황이 와도 너끈히 이겨 낼 수 있게.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히든 피스를 찾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며 강해져야 한다.

번쩍-.

새로운 목표를 찾은 로이스의 눈에 형형한 빛이 깃들었다.

로이스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도 발렌티나와 제네로커의 잡담은 계속됐다.

그러다가 발렌티나가 물었다.

[로이스, 거기 괜찮지? 그럼 우리 아들, 거길 레어로 쓸래?]

[오! 그래그래! 그거 좋다!]

물론 로이스의 답은 간단했다.

"그냥 제가 알아볼게요. 전 새집으로 들어가고 싶은걸요."

[그래… 그러렴.]

[…어쩔 수 없지.]

부모님의 시무룩한 목소리에 로이스는 피식거렸다.

이에 로이스가 통신석에 대고 말했다.

평상시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

원작의 비극을 안 오늘이기에 꺼낼 수 있는 말.

"엄마, 아빠."

[응?]

[왜, 아들?]

"…사랑해요."

그의 목소리가 통신석에 흘러 들어갔다

그렇게 한동안 통신석에선 말이 없었다.

잠시 뒤, 통신석 너머에서 난리가 났다.

[아, 아들 지금 뭐라고?]

[하, 한 번만 더 해 보렴! 엄마가 바로 녹음할게!]

[그, 그래! 한 번 더 해 보렴!]

통신석에서 느껴지는 부산스러움에 로이스는 서둘러 마무리 지었다.

"그, 그럼 전 이만. 종종 연락할게요!"

[자, 잠깐 아들!]

[로이 한 번 더 해 주고 가렴!]

후다닥- 통신석을 집어넣은 로이스.

순간 분위기에 취해 말을 내뱉기는 했지만, 끝나고 나니 창피함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으흐흐."

"후후후."

자신의 앞에서 음흉하게 미소 짓는 쌍둥이를 보고 있자니 창피함 뒤에 후회가 잇따랐다.

'아… 쟤들 없는 곳에서 할걸.'

그런 후회를 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 버린 뒤였다.

"칸, 들었어? '엄마, 아빠 사랑해요'래!"

"들었지! 으흐흐."

"우리 로이, 귀엽기도 해라!"

활짝 웃으며 로이스를 와락 껴안은 카니.

로이스가 얼굴이 시뻘게져 소리쳤다.

"왜! 뭐! 뭐, 뭐가 어때서!"

"그래, 그래. 우리 로이, 부모님이랑 떨어지니까 쓸쓸하지? 걱정 마. 이 카니 누나가 위로해 줄게! 외로우면 이 누나한테 안겨!"

"아, 꺼져!"

치근덕거리며 달라붙는 카니와 음흉한 눈빛을 보내는 칸.

그런 녀석들을 로이스가 걷어찼다.

새하얀 꽃밭에서 아웅다웅거리던 세 친구.

그런 모습을 핀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잠시 뒤, 로이스가 헥헥-거리며 말했다.

"흐헥… 그만하고 이제 가자."

"그런데 로이, 너 아까 뭐 찾을 거 있다고 하지 않았어?"

"…이미 해결했어."

"...?"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해결됐다는 말에 쌍둥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로이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럼 이제 어디로 가?"

의문을 지운 쌍둥이가 로이스에게 다시 달라붙으며 재잘거렸다.

이에 로이스가 웃으며 말했다.

"애들 잘 컸나 보러."

162화. 존버! (1)

뜨거운 여름의 태양이 떠올랐다.

짹짹-.

새의 지저귐이 방 안으로 흘러들며 활기를 부여했다.

하지만 그 안에 자리한 엘비스의 얼굴에서는 한 점의 활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찌....'

며칠은 잠을 못 잔 듯 퀭한 얼굴.

눈 밑에 자리한 검은 그늘과 혼탁한 눈빛이 엘비스의 속마음을 대변해 주었다.

'이게 어찌 된 거지?'

침대에 앉은 엘비스가 속으로 절규하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끼익- 삐걱-.

그의 작은 움직임 한 번에 낡은 나무 침대가 부서질 듯한 소리를 냈다.

이를 들은 엘비스는 방 안을 살폈다.

오래되어 때가 탄 낡은 나무 바닥.

거기에 방 안에 자리한 집기류도 하나같이 오래되어 보이는 것들뿐.

이에 엘비스의 입에서 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 말도 안 돼...."

처음 모래시계를 돌려 과거로 돌아왔을 때.

성공적으로 회귀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기뻐했다.

하지만 그런 기쁨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의 기억이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 * *

회귀한 엘비스는 낯선 천장을 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여기가 어디지?"

자신이 사용한 모래시계.

시간을 되돌리는 역천의 물건에도 한계는 있었다.

광룡의 탄생을 막을 수 있는 시점까지 시간을 되돌렸으면 좋았겠지만,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때문에 엘비스는 가능한한 최대한 과거로 시간을 되돌렸고, 그가 계산한 회귀의 시점은 아직 광룡의 공격에 가문이 휩쓸리기 전이었다.

막 광룡의 공격이 시작되고 슬슬 그 여파가 여름 대륙에 닿을 때쯤.

'광룡의 공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으니, 가문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

엘비스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쯤이면… 내가 가문에서 마나 집적 이론을 연구할 때군.'

때문에 엘비스는 자신이 눈을 뜰 장소가 가문의 어딘가가 될 거라고 여겼다.

한데, 웬걸?

막상 눈을 뜨니 낡고 거미줄이 쳐진 천장이 자신을 반기는 게 아닌가.

거기에 천장만 낡은 게 아니었다.

"무슨 냄새가?!"

땀으로 찌들어 누렇게 변해 버린 옷에서 쿰쿰한 냄새가 올라왔다.

심지어 그런 옷을 자신이 입고 있다니?

회귀 전, 가문에서 지낼 당시 자신은 이런 옷을 입어 본 기억이 없었다.

'설마… 회귀 시점이 잘못 계산된 건가?!'

지금이 광룡의 공격에 가문을 잃고 대륙을 떠돌던 시절이라면 이런 환경에 처해 있는 것도 납득이 간다.

그랬다면 그저 걸칠 수 있는 옷과 비를 피할 수 있는 지붕만 있다면 감사했을 테니 말이다.

"그럴 리가… 나의 계산은 정확했을 텐데?"

엘비스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문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끼익- 끼익-.

저벅- 저벅-.

낡은 나무판이 비틀리는 소리와 발소리.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은 엘비스의 얼굴이 날카로워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낯선 환경.

그런 상황에서 접근해 오는 의문의 발소리.

엘비스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속성력을 끌어올렸다.

동시에 그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

어린 시절 천재라 불리며 가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쌓아 올린 속성력.

비록 전성기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수준이기는 했지만, 당시 자신이 보유한 속성력의 총량은 또래 법사들에 비해서는 월등했다.

한데, 그랬던 속성력이....

'어, 없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회귀 전의 막대한 속성력에 익숙해진 탓에 자신이 착각한 것이리라 여겼지만, 한 번 두 번, 몇 번을 확인해도 육신에서 속성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어찌 된 거냐?!'

난데없는 상황에 그가 넋을 놓은 사이, 방문이 벌컥 열렸다.

그와 함께 들려온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엘비스의 정신을 일깨웠다.

"해가 중천이야! 언제까지 자빠져 있을 거야!"

방문을 열고 들어온 소년을 본 엘비스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앤드류?"

방문을 열고 나타난, 이제 막 열다섯쯤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

저 얼굴을 어찌 잊겠는가.

엘비스가 벌떡 일어나 소년에게 달려가 와락 껴안았다.

"…앤드류 맞지? 그렇지?"

광룡의 공격에 가문이 휩쓸릴 때, 무너진 천장에 깔려 유명을 달리한 자신의 남동생.

다시는 못 볼 거라 여긴 이의 등장에 엘비스는 감격스러웠다.

정작 앤드류는 난데없는 형의 포옹에 질겁했지만.

"뭐, 뭐야?! 왜 이래? 징그럽게?!"

"너...! 아 그래...."

동생이 자신을 밀어내자 엘비스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하긴… 나에게 앤드류의 죽음은 과거일지 모르나 여기서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

그렇기에 앤드류가 이리 반응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로 인해 엘비스의 혼란이 더욱더 깊어졌다.

'가만… 지금 앤드류가 살아 있다면 아직 광룡이 여름 대륙에 나타나기 전이라는 소리인데?'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은 대체 어떻게 된 거란 말인가?

혼란스러운 엘비스가 정색하며 앤드류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냐?"

"뭐가?"

"여긴 어디고? 그… 네 옷은 왜...?"

엘비스의 시선이 자신의 것처럼 허름한 앤드류의 옷에 닿았다.

"내 옷이 어때서?"

"어, 어째서 너와 내가 이런 옷을 입고 있는 거지?"

"왜 입긴? 그럼 벗고 다녀?"

"대체 왜?"

"뭐라는 거야 진짜. 형, 어디 아파?"

"아니, 난 멀쩡해! 아, 그래. 아버지! 아버지는? 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시냐?"

"아빠? 아빠야 아침 일찍 밭일 하러 나가셨지."

"바, 바, 밭일?!"

엘비스는 지금 자신이 뭘 들었는지 몰라 눈을 끔뻑였다.

그가 다급히 되물었다.

"지, 지금 밭일이라고 했냐?"

"어."

"밭일이라고? 에스테반가의 가주가 지금 밭일을 하러 나갔다고?"

그런 엘비스의 물음에 앤드류가 정색했다.

"형… 입 조심해. 아버지 앞에서 에스테반의 '에' 자라도 꺼냈다가는 그날 바로 몽둥이찜질 당할 테니까."

"그, 그게 무슨?"

당황하여 입을 끔뻑거리던 엘비스의 어깨를 앤드류가 토닥여 줬다.

"형, 진짜 어디 아프구나? 오전은 그냥 쉬고 점심쯤 나와. 아무래도 상태가 많이 안 좋네."

"...."

"아버지한테는 내가 말해 놓을게."

"...."

"그럼 쉬어."

그리 형을 다독인 동생이 방을 빠져나갔다.

엘비스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 * *

회상을 마친 엘비스는 마른세수를 했다.

"하...."

회귀한 그날,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엘비스는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모은 정보를 머릿속에 정리했다.

첫째, 회귀는 정상적으로 일어났고 자신의 시점 계산은 틀리지 않았다.

둘째, 현재 에인폴트 공화국은 존재하지 않으며, 대신 공화국의 전신이었던 프렌체 왕국이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사람들은 에인폴트란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

셋째, 에인폴트 공화국의 위원가였던 자신의 가문은 이제 '성(姓)'만 남아 있을 뿐, 귀족이 아닌 평민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아버지는 자식들이 저주받을 '에스테반'을 입에 담는 걸 극도로 싫어하고 있었다.

허울뿐인 귀족의 핏줄만 내세웠다가는 굶어 죽는다며 말이다.

며칠에 걸쳐 이와 같은 정보를 모으는 동안 엘비스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사실은 엘비스의 혼을 쏙 빼놓기 충분했다.

'말도 안 돼… 이건 꿈이야.'

그가 넋이 나가 현실을 부정하고 있을 때 방문이 열렸다.

끼익-.

낡은 경첩 소리와 함께 들어온 소년.

"뭐야? 아직도 그러고 있어?"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내는 동생을 보며 엘비스가 입을 열었다.

"앤드류...."

"왜?"

"혹시나 해서 다시 물어보는데… 정말… 정말 광룡이 나타나지 않은거냐?"

"이 인간, 아직도 그런 헛소리를 하네."

"헛소리가 아니라… 지금쯤 광룡이 봄 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들...."

"아니, 형 나이가 몇 개인데 아직도 동화 속 드래곤 타령이야! 제발 정신 차려!"

"...."

"그럴 시간에 나가서 밭이라도 한 줄 더 갈아!"

"그… 아… 하아...."

엘비스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지난 며칠간 모은 정보가 모두 이해 못 할 것들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이해 가지 않은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광룡.

지금쯤 여름 대륙 어디에서도 들을 수 있을 광룡과 봄 대륙에 관한 소문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

그러기는커녕 광룡을 언급하는 자신을 미친 사람 취급했다.

이는 동생뿐 아니라 그의 부모님, 나아가 마을의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였다.

그 누구도 광룡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세상은 평화롭다고 말했다.

엘비스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

그것도 크게 잘못됐다.

아무리 부정을 해 봐도 주변의 모든 상황이 지금의 상황이 현실이라 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엘비스는 인정할 수 없었다.

'광룡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동료들은 무엇 때문에 희생해야 했단 말이냐!'

또한, 자신은 무엇을 위해 회귀한 거고!

회귀 전 겪은 상황과 너무도 간극이 큰 현재 상황에 엘비스는 쉽사리 적응하지 못했다.

때문에 검증이 필요했다.

'그래… 내 두 눈으로 확인해 봐야겠어. 광룡도, 봄 대륙도!'

그렇게 결심을 내린 엘비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려는 듯 보이는 형을 보며 이에 앤드류가 물었다.

"어디 가게?"

"앤드류, 난 떠난다."

"엉? 뭔 소리야?"

"아무래도 확인해 봐야겠다. 정말로 광룡이 나타나지 않은 건지. 세상이 평화로운 건지."

"...."

진지한 얼굴의 형을 보며 앤드류는 말이 없었다.

대신 슬금슬금 방문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렇게 방문을 막아선 앤드류가 돌연 소리쳤다.

"엄마! 아빠! 형이 미쳤어! 가출한대!"

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방문 너머로 뻗어 나가고.

"엘비스! 또, 네놈이냐!"

"아직도 정신 못 차렸냐? 대체 이게 며칠째야!"

문밖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리에 엘비스는 암담해졌다.

그가 거미줄 쳐진 천장을 공허하게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광룡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봄 대륙으로 떠나려면 일단 집에서 벗어나는 게 먼저 일 듯싶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 * *

녹치 산맥의 어느 산자락에 있는 한적한 산골 마을.

고즈넉한 풍경을 지닌 마을의 상공에 변화가 생겨났다.

츠팟!

허공에서 불쑥 생겨난 로이스와 쌍둥이.

하늘에 둥둥 떠서 발아래 펼쳐진 마을의 풍경을 바라보며 쌍둥이가 물었다.

"로이, 저기가 네가 말한 그 마을이야?"

"생각보다 큰데?"

녀석들의 질문에 로이스도 신기하단 얼굴로 답했다.

"그러게. 예전에는 안 이랬는데 제법 규모가 커졌네."

리아의 가족이 자리 잡은 산골 마을은 못 본 사이에 제법 가구 수가 더 늘어나 있었다.

일전에 60가구 남짓이었다면 이제는 100가구 정도.

한 가구당 2명씩만 잡아도 최소 200명이 모여 사는 마을인 것이다.

아마 실제로는 그것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모여 살리라.

도무지 이런 산골에 있을 규모가 아니었다.

'원래는 오우거의 습격에 사라졌을 마을이 이렇게 커지다니.'

자신으로 인해 살아남은 마을이 이토록 번창하니 로이스도 뿌듯함이 들었다.

로이스가 흐뭇해하는 사이 카니가 그의 옆으로 붙었다.

"아무튼, 저기에 네 제자들이 있다는 거지?"

"어."

"어디야? 얼른 가자!"

"내가 내 제자들 만난다는데 네가 왜 신났냐?"

"우리 로이 제자니까!"

뭔가 이해할 수 없는 답변이었지만, 로이스는 무시했다.

대신 쌍둥이를 이끌고 리아의 집 앞에 내려섰다.

앞마당에 서서 로이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형태의 주택.

그리고 그 옆에 지어진 작은 목조 건물.

'저게 아직도 있네.'

자신이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지어 놓은 학교를 보며 로이스는 피식거렸다.

짧게 감상을 마친 로이스가 집으로 걸어갔다.

'다행히 안에 있나 보네.'

집 안에서 기척을 느낀 로이스가 조용히 문을 두들겼다.

쿵- 쿵-.

큼지막한 울림이 퍼져 나가고.

"…누구세요?"

말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163화. 존버 (2)

열린 문 너머로 여인의 얼굴이 보였다.

흐른 세월을 고스란히 담아낸 맑고 고운 얼굴.

이제는 50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여전히 어릴 적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여인을 보며 로이스는 안도했다.

'혹여 이사라도 갔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만약 그랬다면 찾느라 고생을 좀 했을 것이다.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

그녀는 여전히 이곳에 정착해 살아가고 있었다.

로이스가 리아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

경쾌한 인사에 리아는 멈칫했다.

난데없이 찾아온 2남 1녀.

리아의 시선은 그들 중 선두에서 인사를 건넨 젊은 남자에 꽂혀 떨어질 줄 몰랐다.

무언가 엄청 혼란스러워하던 리아의 두 눈이 돌연 커지고 놀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로이스… 오빠?"

오랜만에 들어본 호칭에 로이스가 미소를 보냈다.

"잘 지냈냐?"

퉁명스러운 인사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바람처럼 나타났던 그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인사를 건넸으니 말이다.

11년 전 떠났던 이의 얼굴이 성장한 로이스의 얼굴에 겹쳐지고.

그제야 보고팠던 존재의 방문에 리아가 울음을 터뜨리며 몸을 날렸다.

"오빠!"

중년의 여인이 스물도 안 돼 보이는 남자에게 오빠라고 말하며 안기는 모습은 사정을 모르는 이가 봤다면 이상하게 여겼을지 모른다.

하지만 로이스에게는 리아가 46살이 되었든 100살이 되든 여전히 어린 날의 리아일 뿐.

그가 리아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애 딸린 유부녀가 이렇게 외간 남자한테 덥석덥석 안기는 거 아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로이스의 장난스러운 잔소리에 리아는 피식 실소하고 말았다.

그녀가 로이스에게 떨어져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하여간… 변함없으시네요."

"변함없다니! 내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데!"

로이스가 투덜거리자 리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로이스를 훑어보았다.

"그렇긴 하네요. 많이 크셨네요?"

"그렇지?"

11년 전 떠난 로이스는 잘 봐 줘야 15살의 소년이었다.

한데 돌아온 그는 이제 성인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평생 로이스가 자라지 않는 소년일 것이라고 여겼던 리아로서는 놀라운 변화였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던 리아는 그제야 로이스의 뒤편에 서 있는 1남 1녀에게 시선이 갔다.

"저… 이분들은?"

"아, 얘들? 내 친구들."

"...?!"

리아의 눈에 다시금 놀람이 서렸다.

로이스와 알고 지낸 세월이 길었지만, 그가 자신의 친구라고 누군가를 데려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런!"

화들짝 놀란 리아는 그제야 자신이 손님들을 문 앞에 세워 두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문을 활짝 열었다.

"얼른 들어오세요!"

"응, 고마워!"

"실례합니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쏜살같이 들어가는 쌍둥이들.

아무리 손님이라지만, 조금은 무례한 행동일 수 있었다.

이에 로이스가 헛기침했다.

"흠흠, 쟤들은...."

"후후, 알아요. 오라버니 같은 분들이겠죠. 생각보다 나이가 많으시고?"

"그래, 맞아."

로이스가 고개를 끄덕일 때,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로이보다 한 달 먼저 태어났어!"

"따지고 보면 우리가 형, 누나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로이스의 눈꼬리가 씰룩였다.

"저것들이...."

"많이 친하신가 봐요?"

"어릴 때부터 옆집에 살던 놈들이야."

"소꿉친구시네요?"

"원수지 원수."

주먹을 부들부들 떠는 로이스를 보며 리아는 키득거렸다.

그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못다 한 얘기는 들어가서 해요."

"그러자...."

고개를 끄덕인 로이스가 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리아가 차를 가지러 간 사이 집 안을 둘러보는 로이스의 눈에 잔잔함이 깃들었다.

"여긴… 똑같네."

마치 11년 전에 시간이 멈춘 듯, 리아 가족이 살아가는 집은 로이스의 기억과 똑같았다.

다만.

"로이 일로 와!"

"여기 앉아!"

남의 집 식탁에 제집처럼 편하게 있는 쌍둥이가 있다는 게 다를 뿐.

로이스가 어슬렁어슬렁 쌍둥이의 옆에 앉자 리아가 차를 내왔다.

"드세요."

"고마워."

"잘 먹을게."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는 쌍둥이를 뒤로하고 로이스가 물었다.

"남편이랑 애들은?"

"타니아는 아마 마을 어귀에 있을 거예요. 혹시 못 보셨어요?"

"응. 못 봤는데."

"그래요? 걔는 작년부터 매일 마을 어귀에 가는 게 일인데...."

"아, 우리는 마을 입구를 통해서 온 게 아니거든."

"아아, 그러시군요."

"그런데 걔는 거기서 뭐 한대?"

로이스의 물음에 리아가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뭐 하긴요. 작년쯤 오신다고 했던 임을 기다리고 있죠. 목이 빠지게, 매일매일."

리아의 눈이 음흉해졌다.

지난 세월 이사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11년간 이사하지 못하고 이곳에 남은 것은 타니아 때문이었다.

오매불망, 언젠가는 돌아오겠다는 첫사랑을 기다리는 딸아이.

혹여, 이사를 하면 첫사랑과 길이 어긋날까 걱정 가득했던 타니아가 '이사 결사반대!'를 외친 것이다.

그런 속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이스는 태연하게 답했다.

"오, 그래? 그런 사람이 있어? 이야, 우리 타니아 다 컸네. 연애도 하고."

"...."

전혀 모르겠다는 듯한 로이스의 목소리에 리아는 체념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하여간 진짜....'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건지.

뭐가 되었든 간에 여러모로 딸아이가 불쌍해지는 리아였다.

그녀는 차를 홀짝이는 로이스를 보며 말했다.

"아무튼, 니아는 마을 어귀에서 그러고 있고, 남편과 켄드릭은 몬스터 부산물을 팔기 위해 인근 도시에 갔어요. 보름 전쯤 갔으니까… 아마 오늘이나 내일쯤 올 거예요."

"그래? 흠...."

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로이스의 시선이 문 쪽으로 살짝 돌아갔다.

리아의 집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익숙한 기운.

이에 로이스가 미소를 머금었다.

"내일이 아니고 오늘 올걸?"

"네? 그걸 어떻게...?"

그런 리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문이 벌컥 열렸다.

"여보오오! 우리 왔소!"

"엄마, 나 왔어!"

문을 열며 두 명의 사내가 들어왔다.

리아와 함께 세월을 보낸, 이제는 중년이 된 아론과 그를 뒤따르고 있는 붉은 머리의 청년.

190㎝의 신장.

옷 위로도 느껴지는 잘 단련된 몸.

허리춤에 찬 검 한 자루까지.

살짝 각이 진, 시원시원한 외모의 미남을 보며 로이스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검성 켄드릭.'

11년 만에 만난 제자의 모습은 원작에서 묘사된 검성의 모습 그대로였다.

"여보, 이번에도 아주 제대로 팔아 왔어! 이 녀석이 상인을 아주 탈탈 후려치더라니까!"

"아빠! 후려친 게 아니고 흥정입니다! 흥정!"

"어떻게 흥정을 하면 상인이 울면서 돌아가냐, 이것아!"

"그건 그 상인 놈 담이 약한 거고요."

"됐다, 인석아! 그나저나 타니아 고것은 오늘도 마을 앞에 있던데… 어?"

"왜 그러세요?"

소란스럽게 입구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부자(父子).

그들의 수다는 식탁을 차지한 손님들을 발견한 순간 자연스럽게 끊겼다.

"…여보?"

"엄마? 이분들 누구세요?"

아론과 켄드릭은 당황했다.

특히, 켄드릭은 정면에 자리한 카니를 보며 얼굴을 붉혔다.

'무, 무슨 여자가?!'

마을이 제법 커지며 사람들의 유입이 생겨났고, 또 몬스터의 부산물을 팔기 위해 자주 도시를 오갔다.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사람을 많이 만나 봤고 제법 많은 여자를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눈앞의 여인처럼 아름다운 이는 처음이었다.

윤기 나는 긴 은발과 시원함이 느껴지는 청록빛의 눈동자.

뽀얘도 너무 뽀얀 피부와 살짝 올라가 도도해 보이는 눈매까지.

도무지 인세에 있을 것 같지 않은 미모였다.

그녀의 옆에 비슷하게 생긴 미청년도 같이 앉아 있었지만, 켄드릭의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난생처음 보는 미녀뿐이었다.

그렇게 켄드릭이 넋을 놓은 사이.

슥-.

새하얀 머리가 불쑥 올라왔다.

집주인이 돌아왔어도 꿋꿋이 의자에 앉아 등만 보이던 이가 드디어 일어선 것이다.

'아! 누구야?! 비켜!'

눈부신 미녀를 가린 이를 향해 인상을 찌푸린 켄드릭.

곧 흰머리 뒤통수가 뒤돌아서며 그의 얼굴이 켄드릭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흰머리와 창백하리만치 뽀얀 피부.

긴 속눈썹에 영혼을 끌어당기는 듯한 자주색의 눈동자.

여인인 듯 남자인 듯, 중성적인 아름다움을 품은 이를 보며 켄드릭은 홀린 듯 속마음을 내뱉고 말았다.

"…사내새낀가?"

그리고.

딱-.

"칵!"

어마어마한 고통에 이마를 잡고 뒤로 넘어갔다.

촐싹거리며 바닥을 뒹굴뒹굴하는 켄드릭을 보며 로이스가 싸늘하게 말했다.

"이 새끼가 뒈질라고, 누굴 보고 새끼래?"

잔잔한 목소리가 켄드릭의 귓가에 천둥처럼 울리고.

'이, 이 목소리?!'

과거의 기억이 주르륵 흘러갔다.

물론 딱히 좋은 기억이 아니라 무수히 얻어터진 기억이었지만.

'이 익숙한 고통!'

단번에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몸은 기억했다.

그가 아니라면 누가 자신의 이마를 이토록 쉽게 후들겨 패겠는가.

살짝 상체를 일으킨 켄드릭이 말을 더듬었다.

"서, 설마?!"

"그래, 내가 네 선생 새끼다. 이놈의 새끼야!"

"서, 선생님?!"

비록 기억 속 스승의 모습과는 달랐지만, 저 말투와 눈빛이 눈앞의 존재가 로이스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켄드릭이 넋이 나간 사이 쌍둥이가 너도 나도 한마디씩 했다.

"쟤가 로이 제자야?"

"조금 많이 모자라 보이는데?"

"그런데 제자 한 명 더 있다고 안 했나?"

그런 칸의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좀 따라오지 말라고!]

[타니아! 타니아! 내 얘기 좀 들어 줘!]

[무슨 얘기? 난 할 얘기 없다니까?]

로이스 때문에 발생한 적막 속에 문밖의 소란이 적나라하게 집 안으로 흘러들었다.

그와 함께 문이 벌컥 열리며 두 사람이 나타났다.

꽃다발을 든 청년과 문고리를 잡은 여인.

켄드릭처럼 붉지만, 살짝 구부러진 긴 머리.

그리고 큰 눈망울과 녹색의 눈동자.

전체적으로 청순해 보이면서도 짙은 활기가 느껴지는 미인이었다.

하지만 그런 외모와는 달리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투는 매우 거칠었다.

"아씨! 어디까지 따라오는 건데!"

"타니아! 제발 내 마음을 받아 줘!"

"너, 집에서 이렇게 여자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는 거 아냐? 좀 가라!"

"이, 이거 받아 주면 갈게!"

청년이 꽃다발을 내밀었다.

애절한 그의 구애에도 타니아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하아...."

한숨을 내쉰 타니아가 청년에게서 꽃다발을 뺏어 들었다.

"이제 됐지? 그만 가!"

이후 그녀는 매몰차게 문을 닫으려 했다.

집 안 광경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가장 먼저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켄드릭이 시야에 잡혔다.

"뭐야? 이 멍청이는 왜 저러고 있어?"

타니아는 켄드릭에게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그렇게 켄드릭을 향했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 뒤에 서 있는 존재에게 옮겨 갔다.

그리고.

"어...?"

타니아의 눈이 차츰 커지기 시작했다.

"어어...?"

크게 흔들리는 타니아의 녹색 동공.

턱-.

손에 힘이 풀린 그녀는 청년에게서 빼앗아 왔던 꽃다발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동시에 타니아의 입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선… 생님?"

켄드릭과 달리 자신을 한 번에 알아보는 다른 제자의 부름에 로이스가 웃으며 답했다.

"오냐."

뚱한 그 목소리에 타니아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눈물을 그렁그렁 단 타니아가 로이스를 향해 달렸다.

그러면서 그녀는 오랫동안 품어 왔던, 간절한 마음을 담아 우렁차게 소리쳤다.

"로이스 오빠아아아아!"

쩌렁쩌렁 울리는 타니아의 목소리.

깃털처럼 날아 로이스의 품에 포옥- 안긴 그녀를 보며 문밖의 청년은 입을 떡하니 벌렸다.

164화. 존버! (3)

로이스의 어깨를 눈물로 적신 타니아.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고백남이 바닥에 떨어진 꽃다발을 주워 들고 유유히 사라졌다.

고백남의 쓸쓸한 뒷모습에 로이스가 혀를 찼다.

'쯧. 충격을 좀 받았겠구만.'

고백하자마자 고백 상대가 다른 남자한테 안기는 걸 봤으니, 그 충격이 어찌 작으랴.

아마 오늘로 그의 짝사랑은 끝이 났으리라.

한편, 한 남자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타니아는 여전히 로이스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래도 오랜만에 봤다고 나름 다독여 주는 로이스.

어느새 울음을 그친 타니아는 헤실헤실 웃으며 로이스의 어깨에 볼을 비볐다.

그 모습을 보고 짜증이 난 카니가 로이스의 팔을 휙 잡아 뺐다.

"...?"

지척에서 11년이나 기다려 온 행복을 빼앗긴 타니아가 화난 얼굴로 쏘아붙였다.

"누구세요?"

이에 카니가 쌍심지를 켜고 답했다.

"함부로 만지지 마! 만질 거면 우리 허락받고 만져!"

"…우리?"

무언가 이상함에 타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우리 허락'이 아니라 '내 허락'이 나와야 정상 아닌가?

그런 타니아의 의문은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해결됐다.

"그럼, 그럼. 우리 허락받고 만져야지."

팔짱을 낀 채,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칸.

지난 세월 로이스를 독차지해 왔던 쌍둥이로서는 로이스에게 치근덕거리는 타니아의 존재가 거슬렸다.

쌍둥이와 타니아.

그들의 신경전이 잠깐 이어지는 사이.

"이것들이… 내가 물건이냐?"

그 중간에 껴 있던 로이스의 눈썹이 역팔 자로 휘었다.

다년간의 경험상, 여기서 더 건드리면 로이스가 입에 게거품을 문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쌍둥이는 은근슬쩍 딴청을 피웠다.

그 모습에 타니아가 물었다.

"로이스 오빠, 이분들 누구세요?"

"내 친구들… 아니, 너 그런데 호칭 똑바로 안 해?"

"네, 선생님!"

은근슬쩍 오빠라고 불렀다가 배시시 웃으며 정정하는 타니아였다.

한바탕 소란이 일고 난 뒤, 그제야 아론이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지냈냐?"

"저야 뭐… 잘 지냈습니다."

아론이 어수룩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보고자 했던 이들이 한자리에 모이자 로이스가 말했다.

"일단 앉자.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그렇게 막 자리에 앉으려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찌릿-.

자연스럽게 로이스의 양옆을 차지한 쌍둥이.

한발 늦어 버린 탓에 로이스의 옆자리를 빼앗긴 타니아.

셋의 눈싸움이 시작됐다.

그때 눈치 없는 켄드릭이 타니아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야, 그나저나 이 마을에 아직 너한테 고백하려는 놈이 남아 있었네. 하긴, 아까 그 자식 여기 온 지 얼마 안 된 놈이지?"

그 이야기에 로이스가 흥미를 보였다.

"오? 타니아 인기 좋네? 모든 마을 청년들에게 고백받은… 뭐 그런 건가? 확실히 이런 산골 마을에 있을 법한 미모는 아니지."

"서, 선생님도 참...."

난데없는 로이스의 칭찬에 타니아의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런 동생을 징그럽다는 듯 본 켄드릭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선생님,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요."

"뭐가?"

"이 마을에서 타니아한테 고백할 놈이 남아 있지 않은 건 쟤가 어릴 때부터 하도 애들을 패고 다녀서 그런 거예요."

"...."

"한마을에서 자라면서 매일 처맞고 다닌 남자애들이 무서워서 고백을 어찌합니까? 저 녀석 실체를 모르는 외지인이야 겉껍데기에 속아서 고백하는 거… 끄악!"

주저리주저리 떠들던 켄드릭이 옆구리를 부여잡고 펄떡거렸다.

그 옆에 타니아가 제 오빠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죽는다?"

"너, 너 손가락에 속성력 담았지? 아프잖아!"

"옆구리 살을 도려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

험악한 말을 내뱉으려던 타니아가 로이스를 의식하고는 슬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기시지요. 오라버니."

"…미쳤어?"

"후후후, 조용히 해 주세요. 오라버니. 선생님 앞에서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지."

"내가 없는 말 했냐? 네가 애들 패고 다닌 거는 사실이잖아!"

"난 그저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른 것뿐이야!"

난데없이 자신이 언급되자 로이스가 눈을 끔뻑였다.

"선생님께서 그랬어! 실전만큼 좋은 수련은 없다고!"

로이스가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그런 말을 한 적이 있긴 했지.

"그래서 내가 친히 애들 실전 상대가 되어 준 거잖아!"

주억거리던 로이스의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우리 동네 애들이 얼마나 실전에 강한 애들인데! 그게 다 내 덕분이라고!"

야… 근데 그건 너한테 맞은 애들 입장도 들어 봐야 하는 거 아니냐?

로이스가 눈을 끔뻑거렸다.

"아무튼, 난 우리 선생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을 뿐이야!"

"얼씨구?"

아웅다웅하는 불꽃 남매.

그런 남매의 다툼이 일상인지 아론과 리아는 그저 허허로운 얼굴이었다.

오히려 아예 없는 자식 취급을 하고 있었다.

로이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얘들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그때 로이스의 양옆에서 들려온 목소리.

"우와… 애들이 하나같이 로이 같아."

"쟤들, 로이 제자 맞나 봐."

쌍둥이의 중얼거림에 로이스는 살짝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시끌벅적한 상황, 그때 리아가 상황 정리에 나섰다.

"너희, 선생님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이니!"

그제야 투덕거림을 멈춘 불꽃 남매가 휙 하니 시선을 돌렸다.

어색한 미소를 지은 리아가 로이스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애들이 좀 버릇없게 커서."

"아냐...."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양심의 가책이 두 배로 증폭됐다.

이를 모르는 리아가 웃으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하실 말씀 있다고 하셨잖아요?"

"아… 맞다."

불꽃 남매의 투덕거림에 잊고 있던 본론을 그제야 떠올린 로이스.

그가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난 곧 봄 대륙을 떠날 거다."

"...?"

난데없는 이야기에 모두가 의문을 표했다.

다만 그 앞에 앉은 타니아만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또, 또요? 이번에 가면 언제 오실 건데요?"

"몰라. 기약할 수 없어."

"...?!"

타니아의 얼굴이 충격으로 새하얗게 변했다.

하지만 이어진 로이스의 이야기에 낯빛이 화색으로 물들었다.

"이번에는 너희도 데려갈까 생각 중이야."

'너희'라는 물에 켄드릭이 침을 꿀꺽 삼키며 되물었다.

"너, 너희라 하심은...?"

"뭘 물어? 내가 너희라고 할 애들이 너랑 타니아 말고 더 있어?"

그 말에 불꽃 남매가 벌떡 일어섰다.

놀란 아론이 소리쳤다.

"어, 어디 가려고?"

"짐 싸려고요!"

"여행 짐! 여행 짐!"

이제 23살의 성인이 된 켄드릭.

한적한 산골의 생활은 평화로웠지만, 혈기 왕성한 그에게는 너무도 단조로운 생활이 아닐 수 없었다.

때문에 녹치 산맥을 떠돌며 몬스터를 잡고, 조금이나마 마음을 달래고자 주기적으로 도시를 오갔다.

그런 상황에서 로이스의 제안은 켄드릭이 오랫동안 바라 온 일이었다.

그리고 타니아는....

"진짜 같이 가는 거죠? 그런 거죠?!"

말해 뭐 하겠는가.

로이스가 데려간다고 하니 그곳이 어디든 상관없이 당장에 달려갈 듯 발을 동동 굴렀다.

그때 로이스가 흥분한 불꽃 남매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앉아. 내가 데려갈까 생각 중이라고 했지, 언제 데려간다고 했냐?"

로이스의 담담한 목소리에 불꽃 남매가 얼음이 되어 버렸다.

그런 녀석들을 뒤로하고 로이스가 리아&아론 부부를 바라보았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해?"

"...."

로이스의 물음에 아론과 리아는 잠시 말없이 자식들을 바라보았다.

이를 마주한 불꽃 남매의 얼굴에는 긴장이 가득했다.

'엄마 아빠, 제발!'이라는 간절함 가득한 자식들의 시선에 리아 부부가 동시에 답했다.

"저희는 좋아요."

"로이스 님이라면… 찬성합니다."

지금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에 이 문제에 대해 말을 맞춰 놓은 듯, 둘의 대답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들이라고 왜 모르겠는가.

어린 자식들의 재능이 이런 산골 마을에 묶여 있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뛰어남을....

때문에 예상할 수 있었다.

언젠가는 아이들이 자신의 품에서 벗어날 것을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로이스의 제안은 리아 부부에게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부탁하고 싶은 일이었다.

'로이스 님이 함께해 주신다면 아이들을 잘 이끌어 주겠지.'

'오빠라면 믿고 보낼 수 있을 거야.'

물론 자식들의 성격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게 선생이란 작자 때문인 걸 알았다면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겠지만....

그렇게 부모의 승낙이 떨어지자 불꽃 남매의 긴장 가득한 얼굴이 사르르 풀렸다.

그들이 로이스를 바라보았다.

마치 이젠 자신들을 데려가 줄 거냐는 듯한 눈빛 공세에 로이스가 피식거렸다.

"뭐, 너희 부모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 그럼?"

"저희 데려가 주시는 거예요?"

"아니. 고민 중이야."

"...?!"

"또 왜요!"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로이스의 농락에 불꽃 남매가 펄쩍 날뛰었다.

"왜긴. 숙제 검사 안 끝났잖아?"

"숙제 검사요?"

"내가 뭐랬냐? 갔다 와서 수련 잘했는지 검사한다고 했지."

"아! 네...."

켄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에게 들은 적이 있는 타니아도 동조했다.

"너희를 데려갈지 말지는 숙제 검사부터 하고 결정할 거다."

로이스의 물음에 불꽃 남매가 웃으며 답했다.

"얼마든지요!"

"당장 시작하시죠!"

자신 넘치는 대답에 로이스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하긴… 자신감 있을 만도 하지.'

그가 켄드릭을 훑어보았다.

탄탄한 육신 속에 자리한 속성력.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강인한 불의 기운은 그가 2티어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다.

나이 23살에 2티어의 경지.

인간들의 기준에서 이는 경악을 금치 못할 수준이었다.

'원작의 검성보다 훨씬 낫군.'

사실상 원작의 검성은 지금 시간대에 그저 산골 청년에 불과했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켄드릭을 보던 로이스의 시선이 옆으로 옮겨갔다.

그곳에 켄드릭보다 더욱 강인한 기운을 품은 타니아가 있었다.

'굉장하네.'

이제 타니아의 나이 고작 스물하나.

한데 그녀는 벌써 2티어 상급에 도달한 상태였다.

여기서 조금만 더 수련한다면 금방 최상급까지 노려볼 만했다.

어쩌면 스물다섯이 되기 전에 1티어에 도달할지도 몰랐다.

아마 봄 대륙… 아니, 4대륙의 모든 또래 중 이 남매보다 강한 이는 없을 것이다.

인간 기준에서 말이다.

'한창 콧대가 올라 있을 때긴 하지.'

그렇다면 그런 제자들의 콧대를 살포시 눌러 주는 게 스승의 역할이지 않겠는가?

눈을 빛낸 로이스가 쌍둥이에게 눈짓했다.

"칸, 카니."

"왜?"

"응?"

벌써 4번째 찻물을 들이켜고 있던 쌍둥이가 고개를 돌렸다.

"너희가 좀 도와줘."

"뭘?"

"저 녀석들 숙제 검사."

"아항!"

로이스의 이야기에 쌍둥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할까? 살살해?"

카니의 물음에 로이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적당히.... 알아서 해."

카니가 고개를 끄덕이는 찰나.

[적당히 말고....]

쌍둥이의 귀로 로이스의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철저하게 눌러 버려.]

이에 쌍둥이가 환히 웃으며 답했다.

"응!"

"쉽네!"

165화. 존버! (4)

봄 대륙, 녹치 산맥의 어느 산자락.

너른 공터가 자리한 상공에 다수의 인영이 나타났다.

바로 로이스와 함께 공간 이동을 한 일행들이었다.

"우아아악!"

"떠, 떨어진다!"

공간 이동에 익숙한 쌍둥이와 달리 허둥거리는 불꽃 남매.

그들이 높은 상공에서 떨어지는 경험을 언제 해 보았겠는가.

당황해 펄떡거리는 둘의 뒷덜미를 잡아 준 건 로이스였다.

곧 다섯의 신형이 지면에 닿았다.

탁-.

"노, 놀래라."

"학… 깜짝이야."

숙제 검사를 한다면서 뜬금없이 손을 잡으라고 했다.

그 손을 잡았더니, 난데없이 공중에서 떨어지지를 않나....

불꽃 남매에게 로이스는 여러모로 별난 스승이 아닐 수 없었다.

"아...."

타니아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로이스가 일행을 데리고 온 장소는 아무것도 없는 널찍한 평야.

타니아가 궁금증을 담아 물었다.

"여긴 왜 오신 거예요?"

"말했잖아. 숙제 검사 한다고."

"...?"

"숙제 검사를 뒷마당에서 했다가는 너희 집 날아갈 수도 있을걸?"

로이스의 이야기에 불꽃 남매가 멈칫했다.

일단 로이스가 말한 숙제 검사가 대련임을 모르지는 않았다.

켄드릭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 말씀은… 전력을 다하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럼 대충 하려고 했어?"

켄드릭의 시선이 쌍둥이에게 꽂혔다.

그들도 조금 전에 들어서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숙제 검사의 상대가 스승님의 친구라는 쌍둥이 남매임을 말이다.

"하지만...."

무언가 염려하는 듯한 켄드릭의 눈빛.

타니아도 딱히 다르지 않았다.

이에 로이스가 실소했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한편으로는 이번 숙제 검사를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겠지.'

어릴 때, 아버지인 아론과 로이스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누군가에게 패한 적이 없을 것이다.

그게 또래이든 혹은 그 이상의 연배이든.

때문에 녀석들의 마음에 자만이 깃들었을 수도 있었다.

'이번에 왕창 깨지고 나면 정신이 좀 들겠지.'

하늘 밖에 하늘이 있음을 깨닫는다면....

자신들보다 뛰어난 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불꽃 남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녀석들의 숙제 검사 상대로 자신보다는 쌍둥이가 제격이었다.

스승인 자신에게 져 봤자, '역시 스승님은 우리가 따라갈 수 없구나!'라며 안도할 테니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로이스가 이번 숙제 검사를 쌍둥이에게 맡긴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었으니.

'위계질서 한번 잡아 줘야지.'

오늘 보니 불꽃 남매의 성격도 보통이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쌍둥이의 성격이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는 점.

나중에 가서 뇌전 남매 대 불꽃 남매 간에 마찰이 생기기 전에 지금 위계질서를 한번 잡아 주는 것이 필요할 듯싶었다.

불꽃 남매와 쌍둥이를 한 번 쓱 훑은 로이스.

그가 적절히 양념을 치기 시작했다.

"켄드릭, 타니아."

"네!"

"네?"

"까불지 마. 내가 너희 수준도 파악 못 했을 거 같아?"

"...."

"만약 너희가 쌍둥이의 털끝이라도 건드린다면 소원 하나씩 들어 주마."

"소, 소원요?"

"그래, 소원. 대신 그러지 못할 시, 내 수발은 물론이고 쌍둥이 수발, 우리와 함께하는 여행에서 일어나는 모든 잡무는 너희 담당이다."

"...."

"할래? 말래?"

로이스의 도발적인 눈빛에 불꽃 남매가 흠칫했다.

그들의 본능이 경고했다.

이 도발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아직도 저 스승이란 작자를 모르는 거냐고.

하지만 젊은이의 패기와 자존심이 경고를 넘어섰다.

"좋아요!"

"하겠습니다!"

불꽃 남매가 넘어오자 로이스가 씨익 웃으며 쌍둥이를 불렀다.

"칸, 카니."

"응!"

"왜?"

싱글벙글 답하는 쌍둥이.

하지만 이어지는 로이스의 협박에 그들의 표정이 단숨에 변했다.

"단 한 대라도 맞으면 떼 놓고 간다."

자신들이 어떻게 로이스를 따라왔던가.

그런데 한 대라도 맞으면 되돌아가라고?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이번 일을 가볍게만 여기던 쌍둥이의 눈빛이 변했다.

불붙은 쌍둥이를 보며 로이스가 슬쩍 뒤로 물러섰다.

"방식은 너희가 알아서 정해."

그렇게 로이스가 뒤로 물러나자 쌍둥이 대 불꽃 남매의 대치 구도가 이뤄졌다.

그들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카니였다.

입가에 도발적인 미소를 머금고.

"어떻게 할래?"

카니의 도발에 타니아가 눈빛을 굳히고 답했다.

"2대 2로 가죠. 방식은 상대방 측이 모두 항복하거나 전투 불능이 되면 이기는 거로."

"마음대로."

"나쁘지 않네."

카니와 칸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남매 진영이 거리를 벌렸다.

긴장된 눈빛의 불꽃 남매와 여전히 여유 있어 보이는 쌍둥이.

숨 막히는 적막이 이어지고, 켄드릭이 동생에게 물었다.

"뭔가 느껴져?"

"아니… 전혀."

"둘 다?"

"응, 둘 다."

타니아의 답에 켄드릭의 낯빛이 더욱 굳어졌다.

그 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타니아의 경지가 자신보다 높음을.

한데, 그런 타니아마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었다.

'이런....'

맨 처음 쌍둥이를 봤을 때,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 소리는 두 가지 경우를 의미했다.

쌍둥이가 속성력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이거나.

혹은, 자신의 경지를 웃도는 존재이거나.

물론 전자의 경우였다면, 스승인 로이스가 저토록 자신감 있게 소원을 들어 준다고 하지 않았으리라.

다시 말해 저 쌍둥이가 자신은 물론 타니아까지 넘어서는 강자라는 소리였다.

"쉽지 않겠네."

"…응."

물론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목적은 쌍둥이에게 승리하는 게 아니라 저들을 털끝만큼이라도 건드리는 거였으니 말이다.

'그 정도라면....'

'…할 수 있다!'

지난 세월 수련을 하며 서로의 대련 상대가 되어 주었던 불꽃 남매.

그만큼 서로의 장단점, 습관 등을 잘 알고 있었고 합격술에도 능했다.

그렇기에 자신 있게 2대 2 대련을 제안한 거였다.

'선공!'

'선공이다!'

눈빛으로 의견을 맞춘 그들이 곧장 쌍둥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달려가며 켄드릭은 검을 꺼냈고, 타니아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불꽃 남매의 선공을 지켜보고 있는 로이스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호오?"

그때 로이스의 가슴 언저리에서 볼록 고개를 내민 핀이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동작이 깔끔하네요?"

단지 달리는 자세와 은연중에 위치를 잡아가는 모습만을 보고도 핀은 불꽃 남매의 합격술이 수준급임을 눈치챘다.

"일단 먼저 카니 님을 노리는 거 같은데요?"

"정확히 봤어. 핀, 많이 늘었네?"

"헤헤. 그럼요!"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핀의 안목이 어디서 나왔겠는가.

그게 다 로이스와 쌍둥이의 대련을 무수히 지켜본 결과였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이 싸움의 결말을.

핀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상대가 좋지 않네요."

"그래, 좋지 않지."

합격술을 내세워 압박하려는 불꽃 남매.

그러나 그들은 알았어야 했다.

자신들보다 개개인의 역량이 뛰어남은 물론 합격술까지 뛰어난 존재가 바로 쌍둥이임을 말이다.

'금방 끝나겠네,'

로이스가 그리 생각하는 사이 타니아의 다리와 켄드릭의 검에서 성강이 치솟았다.

화르륵-.

짙고 짙은 홍염은 극한의 열기를 머금었다.

'전력으로 간다!'

'단번에 끝낸다!'

로이스 선생님이 인정한 강자라면 자신들의 이런 공격도 얼마든지 막아 낼 것이다.

타니아의 다리가 카니의 발목을 노리고 하단을 쓸었으며, 켄드릭의 검이 카니의 상단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그때까지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있던 카니와 칸.

그렇게 불꽃 남매의 공격이 막 카니의 몸에 닿으려는 찰나.

파측-.

한 줄기 전류가 치솟고 카니의 몸이 사라졌다.

"...?!"

"어?!"

놀란 타니아와 켄드릭.

어느새 칸의 옆에 나타난 카니의 입술이 달싹였다.

"칸, 네가 남자애 맡아."

"응."

짧게 답을 나눈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며 다시 그 자리에 전류가 치솟았다.

어느새 그들의 모습은 불꽃 남매 앞에 도달해 있었다.

카니가 타니아를.

칸이 켄드릭을.

각각의 앞에 상대방이 도착한 순간 불꽃 쌍둥이는 경악했다.

'뭐...?!'

'빠, 빠르다!'

이게 단순히 빠르다는 수준으로 말할 수 있는 걸까?

쌍둥이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불꽃 남매는 보지 못했다.

곧 놀란 이들의 앞에 빛이 번쩍였고, 불꽃 남매는 반사적으로 몸을 보호했다.

그리고.

쾅-.

동시에 굉음이 울리며 불꽃 남매가 좌우로 튕겨 나갔다.

미처 균형도 잡지 못하고 허공을 날아가는 그들의 옆에 쌍둥이가 나타났다.

다시 빛이 번쩍이며 폭음이 발생하고.

쾅-.

"칵!"

"컥!"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은 불꽃 남매가 수직으로 땅에 꽂혔다.

이를 보며 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쌍둥이님들이 로이스 님을 정말 따라가고 싶었나 봐요. 전광석화에 몸통 박치기까지 쓰시다니."

"…그거,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킥킥, 맨 처음에 그렇게 부르신 게 로이스 님이셨잖아요. 쌍둥이님들도 좋아하시고."

"끙...."

핀의 말에 할 말을 잃은 로이스가 앓는 소리를 냈다.

'…이러다가 이거 저작권법 걸리는 거 아냐?'

틈만 나면 쌍둥이에게 '뇌전쌍둥몬 100만 볼트! 전광석화! 몸통 박치기!'를 외쳐 댄 로이스.

이에 쌍둥이가 기어코 그와 비슷한 기술을 만들어 온 것이 바로 저것들이었다.

뇌전이 지닌 특성인 빠름과 강함.

빠름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전광석화와 극한의 쾌를 강으로 바꾸는 몸통 박치기.

자신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기에 죄인은 입을 열 수 없었다.

대신 어물쩍 말을 돌릴 뿐.

"그나저나… 끝났네."

"애초에 싸움이 될 리가 없죠. 쌍둥이님들도 탑티어인데… 켄드릭과 타니아는 아직 한참 멀었죠."

핀의 말에 로이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세월, 쌍둥이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

그건 바로 쌍둥이가 탑티어에 올랐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쌍둥이가 탑티어에 오른 것은 로이스 때문이었다.

'그땐 몰랐지. 녀석들한테도 승부욕이란 게 있을 거란 걸.'

허구한 날 놀러 와 자신을 괴롭히는 쌍둥이를 어떻게 써먹을까 싶었던 로이스는 녀석들과 대련을 시작했다.

물론 대련은 늘 로이스의 승리였다.

한데, 매일 지기만 하니 쌍둥이도 열이 받았었나 보다.

'우씨! 로이, 나빠!'

'꼭 이길 거야!'

그날부터 쌍둥이는 로이스를 따라 수련을 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430살 무렵 탑티어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전광석화와 몸통 박치기도 바로 녀석들이 탑티어에 올라 만든 기술들이었다.

오로지 로이스를 이기겠다는 일념으로 말이다.

한편 몸통 박치기에 당해 바닥에 널브러진 타니아와 켄드릭.

그들의 몸에 잔류한 뇌전이 번뜩일 때마다 타니아는 근육이 비틀리는 고통을 느꼈다.

'아...?!'

타니아가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 세우려 해 보았지만, 전류가 꿈틀댈 때마다 고통은 극심해졌다.

그런 그녀의 귓속으로 카니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그거 알아?"

"...?!"

"53,154번. 우리와 로이스가 대련한 횟수야. 그리고...."

"...?"

난데없는 이야기에 타니아가 눈을 끔뻑였다.

곧 이어진 카니의 이야기에 타니아의 눈이 커졌다.

"53,154번. 우리가 로이스에게 진 횟수이기도 하고. 그것도 나와 칸이 동시에 덤벼서."

"...?!"

이런 괴물들을 상대로 선생님은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다고?

놀란 타니아를 보며 카니가 미소 지었다.

"너, 어디 가서 우리 로이 제자라고 말하고 다니려면 좀 더 노력해야겠다."

그 말과 함께 카니가 손을 내저으니 다시금 뇌전이 번쩍이고.

'아...!'

타니아의 의식이 끊겼다.

곧 켄드릭에게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숙제 검사가 종료되는 순간이었다.

166화. 존버! (5)

로이스의 숙제 검사가 있던 그날.

쌍둥이에게 업혀 온 켄드릭과 타니아는 저녁까지 쭉 기절해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이 되어서야 깨어난 켄드릭은 조용히 집을 빠져나왔다.

그가 향하는 곳은 어린 시절 로이스가 만들어 준 작은 학교였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혼이 나거나, 혹은 무언가 복잡한 마음이 들 때면 그곳에서 마음을 달래곤 했었다.

끼익-.

학교의 문을 열던 켄드릭은 안에 있는 선객을 보고 흠칫했다.

"…뭐야?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냐?"

학교의 구석에 무릎을 끌어안고 쭈그린 타니아.

켄드릭이 그렇듯 타니아에게도 이 작은 학교가 마음의 안식처였다.

문밖에 선 켄드릭을 보고 타니아가 작게 쏘아붙였다.

"…왔으면 조용히 문 닫고 들어 나 와."

여동생의 타박에 켄드릭이 문을 닫고 들어섰다.

그러고는 그도 타니아처럼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후 적막이 감돌았다.

창문에 비친 노을이 서서히 짧아져 갈 때쯤.

먼저 입을 연 것은 켄드릭이었다.

"…졌네."

"응."

"역시 선생님 친구분들이라 그런지 쎄긴 쎄더라."

"그러게...."

처음이었다.

스승인 로이스를 제외하고 누군가에게 이토록 압도적으로 패배한 것은.

비록 자신들이 많은 경험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알고 있었다.

현재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말이다.

마을은 물론이거니와 인근 도시에서조차 자신들과 대적할 만한 실력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때문에 조금은 자만하는 마음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그런 자만심이 오늘의 압도적인 패배에 산산이 조각났다.

그와 함께 로이스에 대한 경외감이 치솟았다.

켄드릭이 중얼거렸다.

"대체… 선생님은 어떤 분이실까? 그런 분들을 동시에 상대하면서도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다니. 이번 여행에서 돌아오면 우리도 그렇게 강해질 수 있을까?"

"오빠...."

"왜?"

"그딴 고민도 일단 선생님이 우릴 데려간다고 하실 때 해야 하는 거 아냐? 돌대가리야!"

그렇게 힘없이 타박한 타니아가 고개를 무릎 사이에 집어넣었다.

그제야 켄드릭은 여동생이 왜 여기에 와서 궁상을 떨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오늘의 패배를 곱씹기 위해 이 장소를 찾았다면, 타니아는....

'선생님이 안 데려갈까 봐 이러고 있던 거였어?'

현재 타니아에게 패배감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그저 이번 숙제 검사의 패배로 로이스가 자신을 데려가지 않으면 어쩌나… 오로지 그 걱정뿐이었다.

이에 켄드릭이 자상하게 말했다.

"야, 그걸 왜 걱정하고 있냐?"

"…뭐?"

"아직도 선생님을 몰라? 선생님은 애초부터 친구들과 우리의 격차를 알고 계셨을 거고, 이런 결과가 나올 거라는 걸 예상하셨겠지. 그러니까 우리가 진 건 그렇게 문제가 될 게 아니라니까?"

켄드릭의 위로에 타니아는 감동하기는커녕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멍청하긴… 너야말로 선생님을 몰라?"

"이게 오빠보고...!"

"너, 언제 우리 선생님이 불필요한 일 하는 거 본 적 있어?"

"…없지."

"그런데 왜 결과가 뻔한 대련을 시켰겠어?"

"음… 우리에게 무언가 큰 깨달음을 주기 위해?"

"선생님이? 우리 선생님이 그렇게 비생산적인 일을 하시겠어? '니들 깨달음은 니들이 알아서 얻어!'라고 하실 분이?"

"어… 그렇긴 하네."

여동생의 반격에 켄드릭이 눈을 끔뻑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동생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아니, 한 열 번을 생각해 봐도… 선생님의 성격상 분명 그러했을 것이다.

그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럼… 넌 왜 선생님이 그 대련을 하게 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내 예상대로라면...."

"예상대로라면?"

다음 말을 기다리며 켄드릭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게 우리의 시험 과제였을 거야."

"응?"

"선생님이 그러셨잖아, 친구분들 털끝이라도 건들면 소원을 들어 주겠다고."

"그랬지."

"바로 그게 시험이었던 거야. 아무리 어려운 시험이라고 해도 선생님은 우리가 이겨 내는 걸 보고 싶어 하셨던 게 아닐까? 하지만 우린....

"…보기 좋게 시험에서 낙제한 거겠네?"

"응… 부모님이 허락하셨다고 해도 결국 우리를 데려가는 거는 선생님이셔. 그런 선생님의 기준에 미달이라면...."

"서, 선생님 성격상 절대 안 데려가시겠구나!"

타니아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아니, 켄드릭이 알고 있는 로이스라면 분명 그리했으리라.

물론 로이스가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면....

'뭔 소리야? 그냥 실용적으로 너희 부려 먹으려고 내기한 거뿐인데?'

…라고 했을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를 단단히 오해한 켄드릭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그, 그럼 어떡하지?"

"몰라… 알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

뚱하게 쏘아붙인 타니아가 다시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를 본 켄드릭도 동생을 따라 무릎 사이에 얼굴을 집어넣었다.

"하아...."

"하아...."

작은 학교에 불꽃 남매의 한숨이 짙게 깔렸다.

그때였다.

"여기서 뭐 해?"

학교의 문이 열리며 빼꼼히 하얀 얼굴 두 개가 들어왔다.

이를 본 불꽃 남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 선생님 친구분들...?"

갑자기 이름이 생각나지 않은 켄드릭이 당황하여 허둥거렸다.

이에 쌍둥이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카니."

"난, 칸!"

"아, 네! 칸 씨… 카니… 씨?"

이름을 들었지만, 이번에는 호칭이 문제였다.

선생님의 친구분을 뭐라고 부르지?

불꽃 남매가 당황한 사이 쌍둥이가 학교로 들어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서 뭐 해? 로이가 너희 찾아오래."

"저녁 먹자고 찾아오래."

여유로운 그들의 이야기에 타니아가 기회라는 듯 물었다.

"저… 칸, 카니씨?"

"왜?"

"…선생님이 이번 여행에 저희 데려가실까요? 아무래도 안 데려가시겠죠?"

"응?"

실망감 가득한 불꽃 남매를 보며 쌍둥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둘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흐음… 글쎄?"

"안 데려가려나?"

"그, 그런...."

표정이 어두워지는 불꽃 남매를 보며 쌍둥이는 속으로 키득 거렸다.

로이스가 매번 민폐 쌍둥이, 망할 쌍둥이,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싸우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쌍둥이 등등으로 욕하지만, 사실상 로이스도 인정하는 쌍둥이의 장기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기묘한 순간 발동하는 쌍둥이의 눈치와 녀석들의 연기력.

특히 눈물 연기가 발군이라지....

지금도 그런 쌍둥이의 기묘한 촉과 눈치가 발동한 상태였다.

쌍둥이가 불안해하는 불꽃 남매에게 배시시 미소를 보냈다.

"너무 걱정 마."

"그래, 걱정 마."

"네?"

"로이가 안 데려간다고 하면 우리가 설득해 볼게."

"저, 정말요?"

"쉽지는 않겠지만… 알지? 우리 로이 성격 까칠한 거."

"알죠!"

"알고 말고요!"

불꽃 남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반응에 쌍둥이가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말했다.

"그래도 로이가 나랑 칸 이야기라면 들어는 주거든!"

"저, 정말요? 선생님이 이야기는 들어 주세요?"

"그럼! 조금은 들어 주지!"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너희도 알지?"

"그럼요!"

"아무렴요!"

불꽃 남매가 고개를 끄덕이는 속도가 두 배는 빨라졌다.

독불장군 선생님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불꽃 남매에게 쌍둥이는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니까 너희는 나만 믿고 있어! 난… 너희가 제법 마음에 들거든."

"나도 너희 마음에 들어. 우리가 힘써 볼게!"

쌍둥이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에 불꽃 남매가 희망을 발견한 듯 눈을 빛냈다.

타니아가 카니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저… 카니 씨."

"응? 왜?"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저, 저도 형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칸 형님!"

갑작스러운 호칭 변경에 쌍둥이가 눈을 끔뻑였다.

그러다가 밝게 웃으며 답했다.

"그래!"

"좋아!"

쌍둥이를 바라보는 불꽃 남매의 시선에 존경심이 가득했다.

물론 쌍둥이는 로이스에게 따로 말을 전하지는 않았다.

굳이 자신들이 말하지 않아도 로이스가 저 남매를 데려가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뭐 하냐? 따라가고 싶다며?"

"네?"

"예?"

"얼른 짐 싸. 내일 아침에 출발할 거니까. 제대로 준비 안 하면 떼 놓고 간다?"

"저, 정말요?"

"만세!"

여행에 데려간다는 로이스의 이야기에 불꽃 남매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런 로이스의 옆에서 음흉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쌍둥이.

그들을 향한 불꽃 남매의 존경 어린 눈빛이 짙어졌다.

'감사합니다! 칸 형님!'

'카니 언니 최고!'

'별거 아니지 뭐!'

'이 정도쯤이야!'

한편 쌍둥이와 불꽃 남매 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로이스가 핀을 향해 속삭였다.

"…쟤들, 언제 저렇게 친해졌냐?"

"글쎄요...?"

핀이라고 사정을 알겠는가?

영문을 모르는 둘은 묘한 눈빛을 주고받는 두 쌍의 남매를 기묘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의 침묵 끝에 로이스는 결론을 내렸다.

"비슷한 것들은 원래 금방 친해지나 보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핀도 로이스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렇게 다음 날 아침.

"다녀올게요...."

"건강히 몸조심히 다녀오렴."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여행 짐을 챙긴 켄드릭과 타니아가 부모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모든 상황이 정리되고, 로이스 일행은 법진 위에 섰다.

난생처음 법진을 본 타니아가 물었다.

"이게 뭐예요?"

"장거리 공간 이동 법진."

"와...."

그간 법진 없이도 잘만 공간 이동을 하던 로이스였다.

그런 그도 한 번에 다섯, 아니 핀까지 합치면 여섯에 달하는 인원을 공간 이동 시키는 것은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이번 공간 이동은 제법 장거리였기에 로이스는 공들여 공간 이동 법진을 그려 나갔다.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켄드릭이 물었다.

"그런데 저희 어디로 가나요?"

그 질문에 로이스가 씨익 웃었다.

"켄드릭, 너 혹시 그런 말 들어 봤냐?"

"네?"

"존버는 승리한다!"

"…그게 무슨 말인데요?"

켄드릭뿐만 아니라 타니아, 그리고 쌍둥이에 핀까지 의문을 표했다.

존버?

그들로서는 난생처음 들어 보는 말이었다.

주변 반응에 로이스가 친절히 답해 줬다.

"간단히 말해서 버티고 버티다 보면 언젠가는 유의미한 과실을 얻게 된다는 의미지."

"...?"

어디로 가냐고 물었는데 영 엉뚱한 답이 돌아왔다.

의문 가득한 주변의 시선 속에 로이스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후후후, 무려 250년을 존버했다. 이제 충분히 익었겠네.'

1㎝ 묘약을 떠올린 로이스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곧 그가 법진에 속성력을 불어넣었다.

츠츠츠-.

찬란하게 빛을 뿌리는 법진.

켄드릭과 타니아는 법진 밖에서 손을 흔드는 부모를 보며 같이 손을 흔들었다.

"갔다 올게!"

"다녀오겠습니다!"

그 순간 온 세상이 빛으로 물들고.

츠팟!

다섯의 신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갔네요."

"그러게...."

자식들이 서 있던 자리를 한동안 지키던 리아와 아론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떠나갔다.

이번 여행에서 아이들이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느끼며, 무사히 성장해 돌아오길 바라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