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라팽은 전장의 상황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좋지 않았다.
아군이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다.
그나마 유리했던 건 기병의 차이였지만, 그조차 어떤 흑기사에 의해 제지되었다.
이러다 대열의 어느 한쪽이 무너지면, 그대로 전체가 붕괴할 것이다.
하지만 라팽은 신경 쓰지 않았다.
패배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그에게는... 특별한 무기가 있으니까.
라팽은 음울한 색을 띠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원통형 도구를 어루만졌다.
대포와 똑같은 생김새.
하지만 크기는 일반 대포보다 작다. 양손으로 들고 이동할 수 있을 정도다.
라팽은 유물 대포의 겉면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기기괴괴하게 생긴 문자가 대포의 겉면에 새겨져 있었다.
라팽은 이 문자를 읽을 수 없다.
하지만 마음속 깊이 생각했다.
아름답다고.
가슴속에 강한 충동이 생긴다.
어서 이 무기를 시험해보고 싶다.
라팽은 유물 대포를 들었다.
서로 얽혀 있는 병사들을 향해, 홀린 듯이 대포를 겨누었다.
"네 아름다움을 저놈들에게도 보여봐라."
라팽이 마지막으로 대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다음 순간.
유물 대포가 하늘을 향해 녹색 불꽃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탈영병
* * *
쏘아 올려진 녹색 불꽃은 비가 되어 아래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양측의 병사들은 그 광경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대장이 뭔가 쐈는데?"
"...?"
도적들도 당황스러웠다. 이건 합의되지 않은 사항이다.
하지만 대처는 신속했다.
"방패 들어 이것들아!"
경험 풍부한 탈영병답게 곧장 하늘을 향해 방패를 들었다.
아군 측 사병들도 똑같이 따라했다.
당장 앞의 적들이 있지만, 하늘에서 날아오는 저 불꽃이 더 위험해 보였다.
다음 순간. 여유롭게 낙하한 녹색 불꽃이 중앙의 병사들을 덮쳤다.
양측의 병사들은 방패를 굳게 쥐었다. 하지만....
"어?"
방패에 불꽃이 닿았다.
그러자 마치 냄비 속 버터처럼, 방패가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방패를 먹어치운 불꽃은 곧장 그 아래 있는 사람까지 집어삼켰다.
"크아아악!"
"으, 으억."
병사들의 피부는 방패보다 더 빠르게 녹아내렸다. 단순히 뜨겁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다.
저 불꽃에는 사악한 힘이 담겨 있다.
끔찍한 고통에 병사들이 허우적거렸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사, 살려줘! 제발!"
"가만히 있어봐! 불을 꺼줄.... 어억!"
도와주려던 동료들도 불꽃에 닿자, 순식간에 불이 옮겨붙었다.
사제들이 치유 기적을 통해 치유하려 했지만 역부족.
"살...려줘."
"가까이 오지마! 가까이 오지 말라고!"
이 불이 전염성이 강하다는 걸 깨달은 사병들은 결국, 불에 붙은 동료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무기를 휘둘러야 했다.
아비규환.
사람이 불에 타고, 동료가 동료를 찌른다.
에슬델이 이 끔찍한 광경에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저 불꽃. 악마의 힘이 담겨 있다."
옆으로 다가온 데일이 덤덤히 말했다. 그 차분한 태도에 덩달아 진정한 에스델이 물었다.
"악마의 힘이라고요?"
"내가 아는 불꽃 중에, 저리 전염성이 강한 건 악마의 불꽃 말고는 없다."
"그렇다면 저 라팽이라는 사내가 쥔 대포는...."
"악마의 무기쯤 되지 않겠나."
최근 이 근방에서 악마 숭배자들이 활개 친다 들었다. 저들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이제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조금이라도 빨리 라팽을 죽이고 대포를 부수는 것.
시간이 늦어질수록,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데일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또 있었다.
가브리엘이었다.
그는 자기가 직접 키운 병사들이 녹아내리는 모습에 분개했다.
"이 역겨운 놈들이!"
몸에 마력을 끌어올린 가브리엘이 라팽을 향해 달렸다. 라팽은 적진의 정중앙에 있었다.
도적들이 다급히 가브리엘을 막아섰다. 하지만 거칠게 날뛰는 기사를 저지하기는 어려웠다.
무엇보다. 도적들 역시 방금 자신들의 대장이 일으킨 끔찍한 참상에 당황하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홀로 도적들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기사라도 무모한 행동.
지켜보던 데일도 달렸다.
라팽을 죽여야 한다는 목표가 일치한다면, 함께 행동하는 게 낫다.
데일은 가브리엘과는 반대편에서 도적들을 뚫고 들어갔다.
흑기사가 다가오자, 도적들도 정신을 차렸다.
자기 대장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든 일단 지키는 게 우선이다.
"막아라!"
도적들이 데일을 막아섰다.
일전과는 다르다.
이들은 경험 많은 군인 출신이다.
대열을 잘 유지했고, 서로 협동할 줄 알며, 개개인의 실력도 뛰어났다.
'대부분 최소 3등급 정도는 되려나? 직업은 모르겠고.'
원래라면 시간을 들여 신중히 싸우는 게 좋다.
하지만 시간은 이쪽 편이 아니다. 대포가 다음 불꽃을 뿜어낼 시간을 주어선 안 된다.
데일은 도적들 사이로 과감히 파고들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사방에서 무기가 날아와 데일을 두드렸다.
적지 않은 힘이 실려 있다. 단단한 갑옷에도 흠집이 났다.
데일은 신경 쓰지 않았다.
다른 놈은 무시하고, 가장 가까이 있던 도적에게 검을 찔러 넣었다.
"끄악!"
심장이 꿰뚫린 도적이 허우적거렸다. 데일은 검을 비틀었다.
맥 빠지는 비명과 함께 도적이 고개를 풀썩 숙였다.
데일은 그 몸속에 건틀렛을 박아 넣었다.
생기가 빨려 들어오며 찌그러졌던 갑옷이 원상태로 되돌아갔다.
반 언데드다운 우악스럽고 무식한 싸움 방법.
하지만 동시에 가장 위협적이기도 하다.
"이런 괴물 같은 새끼가...."
"성수 있는 놈 없어?!"
"나, 나.... 억!"
도적 중 하나가 가방에서 성수를 꺼내려 했다. 데일은 곧장 단검을 꺼내, 도적에게 투척했다.
카창!
단검이 도적의 손과 성수가 든 유리를 동시에 꿰뚫었다.
도적은 손을 부여잡고, 비명을 내질렀다.
다른 도적들은 그 광경을 보며 당황했다.
'우리만큼이나 전투에 이골이 난 놈이다.'
'이런 녀석이랑은 안 싸우는 게 오래 사는 길인데....'
그런 도적들을 보며 데일은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리고 도발하듯이 말했다.
"빨리 와라. 시간 없으니까."
"...."
서로 시선을 교환하던 도적들은, 이내 외마디 기합성을 내지르며 데일에게 달려들었다.
* * *
가브리엘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호쾌하게 도적들을 베어나가며 생각했다.
'공을 세워야 한다. 내가 저 도적 우두머리를 잡아야 해.'
한때 이름있던 국가에서 기사로 살아가던 가브리엘이다.
나름대로 존경도 받고, 여유롭게 살아가던 그런 평범한 기사.
하지만 그의 조국은 악마들에 의해 멸망했다. 가문도 송두리째 날아갔다.
가브리엘은 살길을 찾기 위해 이레네로 와야 했다.
도시에 처음 왔을 때. 가브리엘은 당연히 자기가 상위 구역에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자신의 실력이라면, 당연히 황실 기사단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꿈도 꾼 적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그는 여러모로 애매한 기사다.
출신이 고귀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실력이 특출나게 뛰어난 것도 아니다.
그저 운 좋게 기사 가문에 태어나, 교육을 받고 기사가 된. 그저 그런 평범한 사내였다.
상위 구역에서는 그를 쓸모 없는 사람으로 판단했다. 입장은 거부되었다. 가브리엘은 좌절했다.
하지만 절망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일단 먹고 살길을 찾아야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았다.
가장 적합한 건 용병. 기사로서 갈고 닦아온 무력은 용병으로서도 쓸모가 있을 것이다.
차분히 실적을 쌓아 동패를 단다면, 금방 상위 구역으로도 갈 수 있을 터고.
하지만 그는 기사다.
자부심이 있다. 굶을지언정 천한 용병일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가브리엘은 그렇게 이리저리 방황했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어쩌면 다른 가난한 기사들이 그랬듯. 강도 기사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가브리엘은 우연히 레베카와 만나게 되었다.
레베카는 그의 실력을 높이 평가해, 제법 큰 금액을 주고 그를 고용했다.
탐탁지는 않았다.
명예라고는 조금도 찾아보기 힘든 상인 밑에서 일한다니. 심지어 레베카는 비천한 고아 출신이 아닌가?
예전이었으면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그래도 대우가 좋았기에, 가브리엘은 그냥 참기로 했다.
레베카도 그런 가브리엘을 존중해주었고. 그럭저럭 생활이 안정되었다.
한데. 그런 그의 생활에 불청객이 들어왔다.
'이교도 놈!'
최근, 도시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는 흑기사. 데일이 이뤄낸 업적들은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곤 했다.
하지만 그는 데일의 소문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했다.
'운 좋은 놈.'
운. 그래, 운이 좋았을 뿐이다.
결투로 이긴 크리스틴이라는 놈도 실은 별거 없었고, 나머지도 다 운이 좋게 작용한 결과일 뿐.
그 자리에 가브리엘 자신이 있었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라고 믿었다.
그런 운만 좋은 놈을 레베카가 고용했다. 심지어 호의적으로 대한다.
가브리엘은 위기감을 느꼈다.
그 위기감은, 도적들의 함정에 빠져 말과 기병을 잃었을 때 더더욱 커졌다.
가브리엘은 바보가 아니다.
자기를 쳐다보는 레베카의 눈이 이전보다 싸늘하다는 것쯤은 안다.
요즘 부하들이 자기 얘기보다, 그 흑기사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것도 안다.
그래서 가브리엘은 다급하다. 이번에 공을 세워야 한다.
라팽을 베고, 실추된 명예를 다시 회복해야만 한다.
그런 집념으로 가브리엘은 도적들을 베어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라팽이 보인다.
"이 사지를 찢어 죽일 비천한 도적놈아! 나 레판토의 기사, 가브리엘이 너를 단죄하러 왔다!"
"으음?"
천둥 같은 고함에 라팽이 고개를 돌렸다.
라팽은 그때까지도 자기가 만들어낸 참상과 손에 든 대포가 자아내는 아름다움에 홀려 있었다.
기회라 여긴 가브리엘이 곧장 땅을 박찼다.
라팽은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더니, 돌연 대포를 가브리엘에게 향했다.
대포의 주둥이에서 녹빛의 화염이 일렁이기 시작한다.
'발사된다!'
가브리엘은 두 눈을 부릅떴다. 놀라운 반사 신경으로 몸을 옆으로 굴렀다.
라팽의 부하들이 있는 곳이었다.
가브리엘은 아무리 악독한 사람이라도, 부하들을 불태우기 전에 조금이라도 머뭇거릴 것이라 생각했다.
틀렸다.
라팽은 망설이지 않았다. 대포가 불꽃을 또 한번 토해냈다. 이번에는 불꽃을 한번 뱉고 끝내는 게 아닌, 연속해서 토해냈다.
주위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그 속에 가브리엘도 있었다.
"으으윽!"
녹색 불꽃이 가브리엘의 갑옷을 녹였다. 하지만 그는 기사다. 다른 이들처럼 무력하게 녹아내리지는 않았다.
끌어올린 정신력으로 그대로 라팽에게 달렸다.
"하하! 하하하!"
라팽은 그저 즐거워했다. 계속 대포의 불꽃을 가브리엘을 향해 발사했다.
가브리엘은 이를 악물고 한 걸음씩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아무리 마력으로 몸을 보호한다 해도, 한계는 있다.
몇 걸음 더 나아가던 가브리엘은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라팽과의 거리는 불과 열 걸음이었지만, 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가브리엘의 행동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냐? 한다면 그건 아니었다.
라팽이 가브리엘에게 집중하고 있던 그때. 시커먼 마검이 불바다를 반으로 갈랐다.
"!"
놀란 라팽이 당장 포구를 뒤쪽으로 돌렸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데일의 왼손의 유물 대포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 도적들을 죽여 잔뜩 모아 놓은 생기를 대가로 바쳐, 유물 장갑의 힘을 발동했다.
강력한 충격파가 발생했다.
까드득!
압력에 대포의 입구가 찌그러졌다. 뿜어져 나오려던 녹색 불꽃이 속에서 맴돌았다. 대포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대포가 폭발하며 주위에 불꽃을 뿜어댔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라팽은 불꽃을 그대로 뒤집어썼다.
"아, 안돼! 안돼!"
라팽은 비명을 질렀다. 고통에 의한 비명은 아니었다.
그는 유물 대포가 망가졌다는 데에 더 충격을 느꼈다.
"이 빌어 처먹을 개자식이!"
분노한 라팽은 자기 몸이 불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데일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근육이 녹아내려 라팽의 움직임은 몹시 굼떴다.
데일은 손도끼를 꺼냈다. 자연스럽게 휘둘렀다.
우적!
도끼날이 근육을 자르고 뼈를 끊었다. 눈을 부릅뜬 라팽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는 이내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아마도 이것으로 싸움은 끝.
'애먹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쉽게 처리했군. 기습을 먹인 게 유효했어.'
그리고 그건, 어느 한 저돌적인 기사 덕분이었다.
데일은 고개를 돌렸다.
가브리엘은 여전히 산채로 불탄 채, 바닥에 앉아 이를 악물고 있었다.
입으로는 비탄의 말을 중얼거렸다.
"내, 내가. 내가 어째서 이런 곳에서. 이건 잘 못 되었다."
데일은 검을 들고 가브리엘에게 다가갔다.
안구가 전부 타버린 가브리엘이지만, 발걸음 소리만으로도 누가 다가오는지 알아차렸다.
"...."
그는 입을 다물었다.
데일은 그런 가브리엘을 고통 없이 보내줄 생각이었다. 이 불꽃은 당장 사제들의 치유를 받는다 해도 가망이 없어 보였으니.
비록 이 못난 기사가 무고한 사람들에게 사격을 명했어도.
여러 바보 같은 짓으로 아군을 곤란하게 만들었어도.
최후에만큼은 자비를 베풀어줄 생각이었다.
데일이 검을 쥐며 말했다.
"결투다 가브리엘. 검을 들어라."
이 기사는 아마도 자기가 기사라는 점이 자랑스러울 터.
그렇기에 기사로서 죽을 수 있게 해주기로 결정했다.
그게 데일의 자비다.
하지만 그 배려가 잘 전해지지 않은 듯하다.
다 타버린 눈을 부릅뜬 가브리엘은 이를 갈며 말했다.
"이, 이교도 따위가...."
어쨌거나 그는 일어섰다. 검을 쥐고 달려들 태세를 취했다.
데일은 차분히 말했다.
"데일."
가브리엘은 결투의 예를 지키지 않았다. 자기 이름을 외치는 대신, 기습적으로 땅을 박찼다.
가브리엘은 검을 휘둘렀다. 데일은 그 궤적을 차분히 읽었다.
'평범하군.'
이런 평범함으로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하물며 눈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는 더더욱.
데일은 검로를 읽고, 정확하게 상대의 급소를 베어냈다.
가브리엘의 움직임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풀썩 쓰러졌다.
데일은 피 묻은 검을 땅에 박아 넣으며 말했다.
"유언을 말해라. 전해주겠다. 가족은 있나?"
가브리엘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거, 건방 떨지 마라. 나, 나도 너처럼 운만 좋았다면...!"
가브리엘의 마지막 말은 끝내 문장이 되지 못한 채 끊어졌다.
'운?'
데일은 가브리엘의 얼굴을 확인했다.
심하게 녹아내려 잘 읽어낼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 굉장히 억울해하는 기색은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에 하던 말은 무슨 의미지.'
모른다. 모든 사람의 생각을 이해할 수는 법이니.
다만 확실한 건 있다.
데일이 베풀어준 자비 덕에 가브리엘은 적어도 기사로서 죽었다.
그리고 이 성격 더러운 기사는 데일의 성장을 위한 양분이 되어줄 것이다.
숭배자
* * *
라팽이 쓰러지자, 저항하던 도적들은 대부분 항복했다.
다들 하나같이 생기가 없는 표정이다.
자신들의 믿고 따르던 대장이 아군과 적을 구분하지 않고 불태워버린 게 충격이었던 듯하다.
'그게 악마의 무기가 지닌 무서운 점이지.'
악마의 힘이 깃든 무기는 사용자의 이성을 흐리게 만든다.
동료나 가족도 못 알아보는 괴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데일은 죽는 그 순간까지 유물 대포를 품에 꼭 안고 있는 라팽의 주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득, 이전에 싸웠던 상대가 떠올랐다.
유물 지팡이를 사용하던 여인.
여인 역시 죽는 순간까지 사악한 힘이 깃든 지팡이에 집착하곤 했다.
그때의 일과 지금의 일이 연관이 있을까?
데일은 라팽의 몸에 건틀릿을 박아 넣어 생기를 흡수했다. 잔혼과 함께 라팽의 기억 일부가 흘러들어왔다.
기억 속에 보이는 건 곱사등이다. 흰 가면을 쓴 곱사등이.
곱사등이는 라팽이 준비한 산제물을 손수 거둬들인 뒤, 라팽에게 유물 대포를 건네주었다.
'흰가면?'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놈들은 대부분 뒤가 구린 놈들이다
심지어 산제물을 모으며 악마의 무기를 건네주는 이라면 더더욱.
'악마 숭배자인 건가?'
데일은 이 기억이 비교적 최근의 것임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라팽에게 무기를 건네준 이 악마숭배자가 이 근처에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데일이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상회 직원들은 분주히 움직이며 상황을 파악했다.
"피해 상황은 어때?"
"사망자가 19명. 그리고 심각한 부상을 입은 쪽은 23명입니다."
"마차는? 아까 불이 옮겨 붙었잖아."
"3대는 완전히 불타 버렸고, 두 대는 그래도 절반은 건졌습니다."
데일과 사제들의 활약으로 어떻게든 피해는 줄였지만, 무려 상행에 참여한 절반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
심지어 일부 마차는 불타버리기까지 했다.
어마어마한 피해다.
당연히 상행을 맡은 직원들과 레베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지금은 일단 해야 할 일이 많다.
마차를 수리하고, 시체를 모으고, 도적들과 아군이 떨어트린 장비를 수거하고, 휴식을 취하는 등등.
사람들은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원래라면 그중에서 가장 품이 많이 드는 건 바로 시체를 처리하는 일이다.
야외에서 시체를 처리하는 건 언제나 골치 아픈 문제였다.
하지만 이번엔 데일이 있었기에 얘기가 달랐다.
상회 직원들이 아군의 시체를 모두 치우자 데일은 주위에 검은 안개를 한 차례 흩뿌렸다.
안개가 주위 일대를 얕게 덮었다.
안개가 다시 걷히자, 남은 건 바짝 말라비틀어진 시체뿐이었다.
'일일이 흡수 안 해도 돼서 편하군.'
몸 안에 생기와 잔혼이 차올랐다.
그 양이 많다. 어쩌면 이번에 신전으로 돌아가면, 큰 성장을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음. 좀 그렇네."
"그래도 시체 처리가 쉬우니까 뭐."
"저분 아니었으면 우리가 죽었을 수도 있고. 괜한 소리는 하지 말자고."
아무리 적군이라도 시체에서 생기와 잔혼을 거두는 게,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던 탓이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이번 승리의 주역은 데일이다.
데일을 보고 대놓고 표정을 찡그리는 이는 없었다. 몇몇 사제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세상에!"
"신이시여."
신앙심 깊은 그들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광경이었다.
몇몇 사제는 데일에게 다가와 핀잔을 주려 했다.
눈앞에 거대한 늑대가 지나가지 않았다면, 어쩌면 귀찮은 상황이 되었을 수도 있다.
"어어!"
"꺄악!"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하티 탓에 사제들이 크게 놀랐다.
하티는 그런 사제들을 심드렁하게 쳐다본 뒤, 기품 있는 걸음걸이로 데일에게 다가왔다.
녀석은 뭉툭한 코로 데일의 허리를 쿡 찔렀다. 늘 눈을 게슴츠레 뜨는 놈이, 제법 초롱초롱하다.
"이럴 때만 친한 척이지. 마음대로 해라."
허락이 떨어지자 하티는 말라비틀어진 시체를 질겅질겅 씹었다.
그 광경에 사제들은 더더욱 경악했다.
그 시선에 하티가 불만스럽게 크릉 울었다.
밥 먹는 데 뭘 쳐다보냐는 의미였다. 사제들은 그제야 불편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데일에 대해 떠들어대는 소문에 식인 늑대의 이야기도 추가될 것이다.
작업을 마친 데일은 말라비틀어진 시체들을 한데로 옮겼다.
전염병이나 몬스터 먹이가 되는 걸 막기 위해서는, 깔끔히 태우는 게 좋다.
그렇게 홀로 옮기고 있자니 옆에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제가 돕겠습니다."
에스델이었다. 그녀는 직접 팔을 걷어붙여, 시체를 옮기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사제들은 탐탁지 않아 했다.
"네 동료들이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은데."
에스델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전에 말했잖습니까. 제가 누구랑 다니든, 그건 제 자유라고."
"괜한 미움을 살 수도 있다."
에스델이 움찔했다. 좀 찔리는 구석이 있긴 한 모양이다.
에스델이 풀 죽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괜찮습니다."
괜찮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데일은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작업에 집중했다.
아군과 도적을 막론하고, 시체를 전부 모았다. 땔감을 찾아 불을 피웠다.
불길이 시체를 감쌌다. 녹색 불꽃이 아닌, 평범한 불이다.
사제들은 기도문을 읊으며 죽은 자의 사후세계에서의 복을 빌어주었다.
용병과 상회의 직원들은 침통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없다.
목숨은 가볍고 죽음은 흔한 세상이다. 익숙해져야 한다.
일일이 슬퍼하다가는, 언제고 마음이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울어주는 사람 하나 없는 죽음이라.'
당사자로선 꽤나 쓸쓸하지 않을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지만.
'아니.'
주위를 둘러보던 데일은 에스델의 눈가에 맺힌 희미한 물기를 발견했다.
데일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오지랖 넓은 사제가 자신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니, 쓸쓸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 * *
뒤처리를 마친 일행은 계속 이동했다.
죽은 가브리엘을 대신해, 가장 고참 병사가 책임자를 임시로 맡게 되었다.
그는 막대한 임무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었는데, 문제가 생길 때마다 데일에게 다가와 의견을 구했다.
"이, 이렇게 해도 될까요?"
몇 번 정도는 조언을 해주었지만, 슬슬 귀찮아졌다. 데일은 꺼지라는 의미로 말했다.
"난 용병이다. 알아서 해."
"죄, 죄송합니다."
상단은 파이도 마을을 지나쳤다. 원래는 하루 묵고 가기로 예정되어 있던 장소.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숙박할 수 있는 곳이 못 되었다.
에스델이 건조하게 말했다.
"지도상에서 마을 하나가 또 하나 사라지겠군요."
수천 년을 이어오던 국가도 무너져내리는 데, 마을쯤이야.
상단은 마을을 지나쳐 적당한 평지에서 이동을 멈췄다.
야영 장소가 정해진 것이다.
모닥불과 솥을 앞두고, 언제나처럼 에스델과 하켄, 그리고 하티가 모여 앉았다.
무려 뛰어난 활약을 선보인 아름다운 여사제와 데일이 있는 자리다.
다른 용병 중에서 이곳에 함께하고 싶어하는 이가 몇 있었지만, 하티가 한차례 으르렁거리자 모두 겁을 집어먹고 물러났다.
하켄은 용병들이 부러워하는 시선을 한껏 즐기며 말했다.
"후우. 우리 파티가 명성을 떨치는 것도 먼 일이 아니겠습니다 이거."
"파티라니. 무슨 말입니까?"
에스델이 마른 빵을 우물거리며, 무슨 이상한 소리냐는 눈으로 물었다.
하켄이 씨익 웃었다.
"나랑 데일 경은 뭐. 이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영혼의 단짝이라 할 수 있고. 사제 양반도 아까 보니 엄청 실력이 늘었던데? 이렇게 셋이 함께 다니면, 적수가 없을 것 같지 않아?"
에스델이 빵을 내려놓으며 눈을 반개했다.
"...얹혀가려는 속내가 보이는 건 제 기분 탓입니까?"
"어허. 무슨 소리를."
하켄의 시답잖은 소리를 듣다 못한 에스델이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탈영병들이 이렇게 도적이 되다니. 전선 상황이 이상한 것 같긴 하네요."
하켄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뭐, 이해는 돼. 4군단은 사막 옆에 있으니까. 날씨는 덥고, 모래도 휘날리고, 여러모로 오래 있을 만한 곳은 아니니까."
"왜 탈영한 걸까요?"
에스델의 의문에 데일은 얼마 전, 직접 심문했었던 피셔를 떠올렸다. 그가 마지막에 내뱉었던 말을.
데일은 하켄에게 물었다.
"하켄. 악마를 본 적 있나?"
"예?"
갑작스러운 질문에 머리를 긁적인 하켄이 말했다.
"제가 전선에 있었던 건 맞지만, 비교적 안전한 곳에서 지냈거든요. 운이 좋았죠. 그래서 악마를 직접 본 적은 없습니다."
"그래?"
"하지만 악마를 봤다는 녀석들은 몇 명 봤어요. 그놈들은.... 하나같이 병신이 되어 있었어요. 머리 어딘가 망가지던가, 아예 미쳐서는 악마 편에 붙는 놈들도 있었고요."
어딘가 망가지거나, 악마의 편에 붙어버리던가.
데일은 넋이 나갔던 피셔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악마에 대한 기억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극심한 공포에 시달렸다.
"악마란 게 어지간히도 무서운 적인가 봐요. 사실, 저랑 퀼이 기회 되자마자 이레네로 돌아온 것도 그런 꼴 되기 싫어서 그랬던 거거든요."
"그렇군."
그런 두려운 적들을 수십 년간 상대해왔으니, 전선의 군인들이 변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머지않아 균형이 깨지겠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지금의 균형은 오래지 않아 무너질 것이다.
소강상태는 끝이 나고. 악마의 군대는 언제고 진군을 재개할 터.
이렇게 후방에서 날뛰는 도적 떼나 그림자 속에서 암약하는 악마 숭배자들이 그 증거다.
'아직은 시간이 필요해.'
아직 데일은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 여전히 악마를 마주치면 이길 수 없다.
성장할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의 아슬아슬한 균형은 유지되어야 한다.
그걸 위해서도 이 근방에 있다는 악마숭배자는 미리 제거해두고 싶다.
놈들은 가만히 놔둬서는 안 되기도 하지만.... 사냥했을 때 짭짤한 보상도 기대된다.
놓칠 수 없는 사냥감.
'악마 숭배자라.'
하지만 악마숭배자라고 다 비슷한 건 아니다.
그들은 자기가 섬기는 악마에 따라 다루는 힘의 종류와 크기 다르다.
이번 같은 경우에는....
'유물 대포. 흰 가면. 전염성 있는 녹색 불꽃.'
데일은 단서들을 가지고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악마에게는 각각 뚜렷한 특징이 있다.
데일은 게임을 여러 번 해본 만큼, 그 특징을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 본 악마숭배자들에 대한 특징으로 그들이 섬기는 악마를 추측하면....
의외로 정답은 금방 나왔다.
하지만 데일은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건 좀 이상한데.'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 * *
상단은 그 이후로 큰 문제 없이 이동해, 목적지인 카엘름 성에 도착했다.
이레네와 4군단 사이의 중간 지점에 해당하는 카엘름 성은 우중충한 곳이었다.
한낮에도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볕이 잘 들지 않았는데.
그래서인지 주민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느껴질 정도로 하얗다.
마치 옛이야기 속 흡혈귀들이 모여 사는 성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라 해야 할까.
심지어 성은 아주 고요했다. 성문에도 사람이 한 명도 나다니지 않았다.
그 광경에 레베카가 얼굴을 찡그렸다.
"조용하군요. 이상할 정도로."
"원래 이런 곳 아니었소?"
"그럴 리가요. 날씨가 좀 우중충해도 이렇게 고요하지는 않았어요."
상단은 성문 쪽으로 다가갔다.
병사 여럿이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들은 상단이 다가오자, 험악한 얼굴로 말했다.
"멈춰라! 신원을 밝혀라!"
레베카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외곽 구역의 상인 길드장, 레베카에요. 카엘름 백작께도 미리 말을 해놓았어요."
신원을 보증해주는 증서를 확인한 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실례했습니다!"
"고마워요. 고생이 많아요. 이제 들어가도 되죠?"
"아.... 그게."
병사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당연히 들여보내 줄 거라 생각한 레베카는 그대로 상단을 이끌고 도시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때.
누군가 도시 안에서 걸어 나오며 외쳤다.
"멈추십시오! 우리 허락 없이는 아무도 도시로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습니다!"
잘 단련된 신체에 새빨간 법복. 왼쪽 옷 소매에 새겨진 흰색 고리와 반대편에 새겨진 붉은색 고리.
레베카는 상대는 정체를 알아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교단의 이단 심문관이었다.
숭배자
* * *
이단 심문관.
빛의 신앙에 대한 광신적인 믿음을 지닌 그들은 변절자들을 잡아 죽이는 일을 숙명으로 삼는다.
과거의 변절자들이란 밤의 신도들이었다.
심문관들은 이 땅에 마지막 하나 남은 이교도까지 전부 죽이기 위해, 온 대륙을 헤집고 다니곤 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빛과 밤은 화해했다.
그리고 악마 숭배자와 하수인이라는 이름의 더더욱 끔찍하고. 더 강력한 이교도들이 등장했다.
이제 이단 심문관들은 악마와 그 추종 세력을 잡아 죽이는 걸 숙명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부분에서 절대 타협하는 법이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단 심문관을 꺼려하고 두려워하는 이유였다.
늘 건방지고 예의 없는 하켄조차 허리를 쭉 펴고 서, 시선을 땅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데일에게 다급히 말했다.
"뭐, 뭐합니까 데일 경. 이단 심문관들이랑은 눈도 마주치지 말라는 말 못 들어봤어요? 특히 데일 경은 더 위험하다고요!"
에스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켄. 호들갑 좀 그만 떠세요. 세간에 퍼진 과장된 소문과 달리, 심문관분들은 모두 좋은 분들입니다."
하켄이 미간을 좁혔다.
"그래. 같은 식구라 변호한다 이거지? 악마 숭배자로 의심되는 마을을 심문관이 모조리 불태워버린 이야기 몰라?"
"그거야말로 뜬소문입니다. 과거라면 몰라도, 지금은 명확한 증거가 없다면 아무리 심문관이라도 처결을 진행할 권한이 없습니다. 교단의 규율에도 그리 나와 있죠."
에스델의 반박에 하켄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아니 이 순진한 사람아. 세상이 규율대로 돌아가면 얼마나 좋겠냐고."
둘이 실랑이를 벌이든 말든.
데일은 이단 심문관을 빤히 쳐다보았다.
심문관은 머리를 짧게 깎은 깔끔한 인상의 중년이었는데, 시선을 끄는 건 바로 눈이다.
흰자위가 훤히 드러낸 사백안. 그와 어울리지 않게 호수처럼 맑은 눈동자.
이 두 가지가 조합되어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데일의 시선을 읽은 걸까?
심문관도 데일을 보았다.
그는 데일을 보고 어떤 표정의 변화도 짓지 않았다.
적의나 경멸도 없다.
하지만 그게 더 꺼림칙했다.
'감정을 제어하는 데에 능숙하군.'
다시 고개를 돌린 심문관은 레베카에게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이단 심문관 탈로스입니다."
"고생이 많아요. 탈로스. 레베카예요."
둘은 악수를 나누었다.
하지만 서로를 향하는 시선에 호의라고는 조금도 들어 있지 않았다.
레베카가 입을 열었다.
"이단 심문관이 이 주위에 파견되었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어요. 악마 숭배자가 있다죠?"
"그렇습니다."
"안 그래도 그 악마 숭배자에 대해 할 얘기가 있었어요. 우리가 싸운 도적 떼가 그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아서요."
"아. 그 얘기는 흥미가 가는군요. 나중에 자세히 얘기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지금은 일단 지나가도 될까요?"
레베카는 성문을 가리켰다.
하지만 탈로스는 조금이 표정 변화도 없이 단칼에 거절했다.
"안 됩니다. 현재 이 성에는 악마 숭배자가 숨어 있는 것으로 판단되어, 봉쇄 조치가 내려진 상태입니다. 나오는 것도, 들어가는 것도. 결백하다고 증명된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봉쇄 조치라니...."
레베카는 미간을 좁혔다. 작은 마을도 아니고.
이런 거대한 성을 봉쇄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꽤나 극단적인 처방.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라면, 카엘름 성의 영주가 허락하지 않았을 거다.
레베카가 물었다.
"뭔가 심각한 일이라도 있었군요. 그쵸?"
탈로스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백작의 조카 딸이 악마 숭배자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예?"
"정확히는 이틀 전. 사지가 비틀리고, 입에서 피를 토하는 모습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최근 주민들이 그런 모습으로 발견되는 경우가 몇 번 있었지만, 백작의 가족이 그렇게 된 건 처음이었죠."
"...백작께서 화가 많이 나셨겠군요."
탈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감사하게도, 악마 숭배자를 잡기 위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하아."
레베카는 골치가 아파졌다.
안 그래도 도적들과의 전투로 다들 지쳐 있다.
이제 도시에서 쉴 수 있나 했더니, 귀찮은 일이 생겨버렸다.
레베카가 마른세수를 하며 물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하면 우리를 들여보내 줄 거죠?"
"본인의 결백을 증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식으로요?"
"흠. 옛날이었으면 몇 가지 특별한 도구들을 사용하면 간단했는데 말입니다. 하하."
그 특별한 도구란 고문 도구를 의미했다. 이단 심문관은 고문의 대가이니.
아무리 과묵한 이들도 진실을 모조리 실토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탈로스는 자기가 퍽 재밌는 농담을 했다는 듯, 실없이 웃었다.
정작, 눈은 웃지 않아서 더욱 섬뜩했지만.
"하하. 하하하하. 하하."
"그만 웃으시죠."
"이런. 농담이 재미없었습니까?"
"어디 가서 농담은 하지 않는 걸 추천할게요."
"마음이 여유롭지 못한 사람들은 웃음에도 인색한 법이죠.... 하지만. 조언은 감사히 듣겠습니다."
비꼬듯이 말하는 탈로스를 찌릿 노려본 레베카가 말했다.
"제가 데려온 사람들은 모두 믿을만한 사람이에요. 제가 보증할 수 있어요."
"악마 숭배자들은 위장에 능한 법입니다. 겉으로 멀쩡해 보여도, 그 속에 어떤 걸 품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죠."
"아실 텐데요? 우리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어요."
"이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이런 말까지 안 하려고 했는데, 제가 교단에 갖다 바치는 헌금이 얼마인지는 아나요?"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과 그건 다른 문제입니다."
레베카가 다방면으로 설득해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아무래도, 탈로스는 순순히 들여보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결백을 증명하는 수밖에 없나.'
문제는 악마 숭배자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점이다.
악마가 이 대륙에 나타난 시간은 짧다.
그들을 확실하게 감지해내는 기술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단순히 직감에 의존하는 방법은 있지만.... 그것만 가지고 판단했다가는 무고한 죽음이 너무 많이 생길 것이다.
과거처럼.
레베카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말로 해서는 안 되겠네.'
설득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무력으로 뚫을 수도 없다. 그녀 역시 일단은 신도였고, 교단에 검을 들이밀 수는 없었다.
'이렇게 되면 백작을 직접 설득하는 수밖에.'
백작에게 성안으로의 진입을 허가받는 수는 그것밖에 없었다.
레베카가 말했다.
"그렇다며 일단 확실한 사람만이라도 들여보내 주세요. 일단 저는 통과죠?"
"물론입니다. 감히 평의원을 의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다음으로는.... 교단의 사제들도 들여보내 주세요."
"그것 역시 당연한 겁니다. 기적을 부리는 것 그 자체가 의심할 수 없는 증거이니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레베카는 고민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호위 병력 없이 홀로 성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단 심문관이나 성의 병사들이 있다지만 믿을 수 없다.
당장 백작의 조카딸도 살해당했다지 않는가?
그때. 레베카의 머리에 한 가지 묘안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당당히 말했다.
"마지막으로 데일 경도 같이 들어가겠어요."
"데일 경이 누구.... 아."
탈로스는 데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흰자위가 드러난 눈을 한층 더 희번덕 뜨며 말했다.
"제법 재밌는 얘기를 하시는군요. 레베카 님. 이렇게 재밌는 농담을 하시는 분이, 아까 제 농담에는 왜 안 웃으신 겁니까."
"농담 아니에요."
레베카는 데일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데일은 그리했다.
탈로스의 앞으로 걸어가, 그와 마주 섰다.
레베카가 설명했다.
"그는 밤의 여신을 섬기는 기사예요. 교단으로 치면 성기사와 다를 바 없죠. 사제님들이 들어갈 수 있다면, 데일 경도 들어갈 수 있어야 하죠."
"...그것참. 흥미로운 견해군요."
혹여나 마찰을 빚을까 따라온 에스델도 데일을 두둔했다.
"탈로스 형제님. 데일 경에 대해서는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경은 사도 하시나를 직접 처단했습니다. 그것 외에 더 명백한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에스델...."
못마땅한 기색으로 에스델을 내려다보던 탈로스는 다시 데일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명목상 빛과 밤이 화해했어도, 그 아래 패인 감정의 골까지 메워진 건 아니다.
과거에 그러했듯. 탈로스는 여전히 데일을 사냥꾼의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데일은 그 시선을 마주 노려봐 주었다.
'불만 있으면 무기 뽑던가.'
그러길 잠시. 탈로스는 콧숨을 내뿜으며 말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지금은 이런 일로 다툴 정도로 한가한 상황은 아니니."
"고마워요."
허가를 받은 레베카는 상단의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린 뒤, 사제들과 데일을 이끌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에스델의 등에 대고 탈로스가 말했다.
"에스델 자매님. 본인의 위치를 자각하시길 바랍니다. 누구랑 어울려 다녀야 할지도 신중히 생각하시고요. 애도 아니지 않습니까."
우뚝 멈춰 섰던 에스델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충고 고맙습니다. 탈로스 형제님."
일행은 탈로스를 지나쳐 성안으로 들어갔다. 경비병 하나가 그런 일행을 안내했다.
"바로 백작님께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성안은 바깥에서 보는 것보다 더 고요했다. 무려 영주의 조카딸이 죽었다.
주민들은 괜한 불똥을 뒤집어쓰지 않기 위해, 집 안으로 들어가 빗장을 걸어 잠갔다.
데일은 조용한 거리를 걸었다. 오래된 도시인 카엘름 성은 그 나름의 고풍스러운 풍경을 지니고 있었다.
주위에 지어진 건축물의 양식을 구경하던 데일은 문득. 지면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
갑작스럽게 데일이 멈춰서자 레베카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데일 경."
"이 아래에 지하 수로 같은 게 있소?"
"오래된 도시니, 그런 게 있어도 이상하진 않죠. 근데 그게 왜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데일이 고개를 내젓자, 주위를 휙 둘러본 레베카가 작게 속삭였다.
"경. 이곳에서 제가 믿을 건 경밖에 없어요. 그러니 부탁드려요."
잠깐 고민한 데일이 말했다.
"근데. 이미 성에 도착한 순간 내 의뢰는 끝난 것 아니오?"
의뢰 내용은 어디까지나 이 카에름 성까지의 호위였다.
레베카의 입꼬리가 움찔했다.
"...이런 상황에서 협상이라니. 경께는 상인의 재능이 있군요."
"그저 진실만 말했을 뿐이오."
"어려운 부탁을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냥 만약에 무슨 일이 터지면, 그때는 저를 우선해주세요. 당연히 사례는 할 거고요."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해두겠소."
돈을 더 준다면야 어려운 일도 아니다.
데일은 이 악마 숭배자들을 찾아내 잡아 죽일 생각이니 레베카를 신경 쓸 시간이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일단은 머릿속에 기억해두었다.
병사는 고요한 거리를 지나쳐 곧장 영주성으로 안내했다.
영주성은 또 다른 이단 심문관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그들은 자초지종을 전해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되도록 외출은 삼가십시오."
딱딱하게 말한 심문관이 일행을 들여보내 주었다.
성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정원이 보였다.
정원사의 솜씨가 훌륭한지, 꽃과 나무가 조화롭게 가꾸어져 있었다.
하지만 주위의 우중충하고 고요한 분위기 탓에, 오히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만 감돌았다.
정원을 순찰하는 병사들 탓에 그런 느낌은 배가 되었다.
일행은 정원을 가로질러 고풍스러운 저택으로 안내되었다. 사각형에, 한쪽 면이 뚫린 모양을 한 저택이었다.
병사에게서 일행을 인도받은 저택의 집사가 말했다.
"사제님들께는 방을 내어드리겠습니다. 레베카 님께서는 곧장 백작님을 찾아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 그리고 데일 경도요."
"나를 아시오?"
데일의 질문에 집사가 반가이 미소 지었다.
"알다마다요. 어쨌건, 따라오시죠."
영주가 있는 장소는 저택의 꼭대기 층이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기사가 데일을 보며 말했다.
"무기를 전부 놓고 가시오."
데일은 마검을 손에 쥐며 주저했다. 귀한 물건이니, 선뜻 몸에서 떼기 망설여진 것이다.
하지만 이내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나 외에는 쓸 수도 없겠지.'
순수한 불신자인 데일이 아니라면 이 마검을 다룰 수도 없으리라.
게다가 무기가 없다고 데일이 싸울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이 몸뚱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흉기나 다름없었다.
기사는 데일에게서 무기를 모두 받아들고, 그 무게에 살짝 놀랐다.
검이라거나 다른 무기들이 생각보다 무거웠던 탓이다.
'이것들을 전부 들고 싸우지는 않겠지?'
기사는 바로 표정을 되돌리고, 얼른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가시오. 백작님께서 기다리고 있소."
레베카와 데일은 영주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문을 닫으며, 집무실에 발을 디뎠다.
그러자 누군가 데일에게로 냅다 달려들었다.
데일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휘두르려다 말았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옳은 선택이었다.
만약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면.... 데일은 꼼짝없이 감옥에 가야 했으니까.
"기다리고! 기다리고 있었네! 왜 이제 왔나!"
다짜고짜 다가온 왜소한 노인이 데일의 손을 마구 흔들었다.
이 잔뜩 겁에 질린 노인은 이 성의 영주이며.... 왜인지 데일을 굉장히 반가워하고 있었다.
숭배자
* * *
카엘름 백작은 눈썹이 조금 부리부리한 걸 제외하면, 아무런 특징도 없는 왜소한 노인이었다.
그런 백작이 데일의 손을 잡고 붕붕 흔들었다.
당장이라도 손을 빼고 싶었지만, 데일은 꾹 참았다. 데일은 나이 지긋한 연장자에게 약하다.
"잘 와주었네! 잘 와주었어!"
데일이 물었다.
"...나를 아시오?"
"알다마다! 결투자 데일을 모르는 사람이 어딨겠나."
"결투자?"
데일이 의아해하자 레베카가 귀띔해주었다.
"몰랐어요? 결투 이후에 데일 경께 새로 붙은 별명 중 하나예요."
"몰랐는데.... 별명 중 하나라는 건 다른 별명도 있다는 것이오?"
"기사 살해자, 밤의 사도, 왕족의 수호자, 수상하게 잘 싸우는 언데드. 더 듣고 싶어요?"
"결투자가 그나마 낫군."
데일은 이 별명들이 탐탁지 않았다. 그리고 놀랍기도 했다.
'설마 여기까지 소문이 퍼졌을 줄이야.'
이는 데일이 잘 모르기 때문에 가진 의문이다.
이레네는 이제 제국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악마에 맞서는 인류의 상징과도 같았다.
대륙에 남아 있는 모든 도시와 국가에서 이레네를 주목한다.
이레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공주의 처벌을 두고 벌이는 두 기사 간의 결투는, 당연히 인기 있는 화젯거리다.
이곳까지 소문이 퍼진다 해서 이상할 게 없었다.
백작은 데일의 손을 놔주지 않으며 말했다.
"연약한 공주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결투에 임하다니. 나도 한때는 기사를 꿈꾸었던 몸이네. 비록 믿는 신앙은 다를지라도, 그대야말로 기사도를 따르는 진정한 기사일세!"
"...칭찬 고맙소."
"음! 기사란 약자를 지켜야 하는 법이지. 알겠나? 약자를 지켜야 한다 이 말이네!"
구태여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하는 의미는 무얼까.
데일이 시큰둥해하자, 백작은 떨리는 동공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겁에 질린 초식 동물 같은 모습이었다.
"이미 이야기는 들었을 거라 믿네. 지금 내 성에는 사악한 악마 숭배자들이 돌아다니고 있지. 그들이 내 백성을. 조카 딸을 끔찍하게 죽였네!"
"유감이오."
백작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들이 곧 나 역시 죽이러 올 걸세! 나는 확신할 수 있어. 반드시 죽이러 올 거라고! 하지만 나는 늙고, 약한 몸일세. 그러니 진정한 기사인 자네는 나를 지켜야 하지 않나. 응?"
이걸 위해서 처음부터 기사도니 뭐니 얘기를 했던 걸까.
불안 장애에 시달리는 듯한 백작의 행동에 데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 안에는 백작을 섬기는 기사가 두엇 보였고, 병사 여럿과 심지어 이단 심문관도 한 명 보였다.
사람 하나를 호위하기 위한 것 치고는 충분하다 못해 과할 정도의 병력이다.
"내가 없어도 충분할 것 같소만."
"무, 무슨 소리! 여기 있는 놈들은 다 형편없어. 이단 심문관들이란 것들도 목에 힘만 잔뜩 들어갔지, 실속이 없다고. 안 그랬다면 내 조카가 죽지도 않았겠지. 하다못해 내 앞에 숭배자 놈의 목을 가져왔거나!"
백작 본인은 데일에게만 속삭이듯이 말한다 생각했지만, 그 목소리 제법 컸다.
실내에 있는 모두가 언짢아했다.
특히, 데일보다 못한 취급을 받은 이단 심문관의 얼굴은 굴욕으로 일그러졌다.
반대로 말하면. 백작은 그런 걸 고려하지 못할 정도로 심적으로 몰려 있었다.
분위기가 미묘해지자 눈치만 살피던 레베카가 끼어들었다.
"흠흠. 아무래도 저를 잊고 계신 모양이네요."
"으음? 아. 레베카 공...."
백작은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평의원이고 뭐고, 별로 관심 없다는 태도였다.
그런 반응에 자존심이 상했지만, 레베카는 인내심을 가지고 말했다.
"상황은 전해 들었어요. 말씀드리기 송구하지만, 데일 경은 이미 제 호위를 맡고 있답니다."
"그, 그런."
"하지만 안심하세요. 이 저택에서 함께 지낼 테니, 무슨 일이 있다면 함께 대처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군...."
백작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로 레베카는 성벽 밖에서 기다리는 상단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지만, 백작은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자기 안위와 성안에 숨어 있는 악마 숭배자에게만 쏠려 있었다.
진전없는 얘기를 나눈 뒤.
데일과 레베카가 방을 빠져나왔다.
레베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태가 심각하네요."
"원래 저런 사람이오?"
"원래도 유약하긴 했죠. 그래도 나름 현명하고, 주위 말을 잘 듣는 사람이었어요. 근데 지금은.... 맛이 완전히 가버렸네요."
백작을 설득해 상단을 도시로 들여온다는 계획은 실패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
"악마 숭배자가 잡힐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까요?"
"아니면 악마 숭배자를 직접 잡는 방법도 있소."
"아뇨아뇨. 굳이 그런 위험한 일은... 잠깐. 데일 경은 그리할 생각이시군요?"
데일은 침묵으로 답했다.
레베카가 묘한 표정으로 데일을 봤다.
"대체 왜죠? 관련도 없는 공주 일에 나서는 것도 그렇고.... 역시 그런 건가요? 오지랖?"
"내게 이득이 있으니 하는 것뿐이오."
"흐음."
묘한 눈으로 데일을 보던 레베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거로 해두죠."
그 뒤로도 둘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우선 이단 심문관을 찾아 라팽과 그가 사용하던 악마의 무기에 관해 이야기했다.
탈로스는 유물 대포의 잔해를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악마의 힘이 깃든 무기가 맞군요."
"어쩌면 이곳에 숨어 있다던 악마 숭배자와도 연관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이건 저희가 조사해 보겠습니다."
"잠깐만요."
레베카가 대포만 챙겨 돌아서려는 탈로스를 붙잡았다.
"악마 숭배자에 대한 정보를 저희한테도 좀 공유해주시지요. 그래야 저희가 더 조심하거나, 악마 숭배자를 운 좋게 발견할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탈로스는 섬뜩한 시선으로 레베카와 데일을 노려보았다.
당최 무슨 의미를 담고 있을지 모르는 시선이었다.
그러고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이건 저희 일입니다. 두 분께서는 위험하게 돌아다니지 말고, 되도록 방 안에서만 지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견은 받지 않겠다는 듯.
탈로스는 그대로 떠나려 했다. 그런 탈로스의 등에 대고 데일이 물었다.
"가면."
"...?"
"그 악마 숭배자가 흰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나?"
고개를 휙 돌린 탈로스는 안 그래도 희번득한 눈을 더 부릅떴다.
그는 의심을 담아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유물 대포 옆에 흰 가면이 떨어져 있더군."
"그 가면은 지금 어딨습니까."
"불길해서 부숴버렸다."
사실은 라팽의 기억을 엿봐 얻은 정보지만, 데일은 뻔뻔하게 거짓말했다. 이 차가운 몸뚱이가 가진 무표정은 거짓말을 할 때 진가를 발휘했다.
탈로스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가지 충고해드리죠. 중요한 증거가 될 물건은 함부로 부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괜한 의심을 사고 싶지 않다면 말이죠."
위협하듯이 말했지만, 이런 거에 움츠러들 데일이 아니다.
데일이 맞받아쳤다.
"나도 하나 충고하겠다. 악마 숭배자를 찾는 데 실패했으면, 깔끔히 인정하고 협조를 구해라. 고집스럽게 굴수록 피해만 커질 거다."
이단 심문관이 이곳 카엘름 성으로 온 지도 꽤 시간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악마 숭배자의 근거지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이제는 방법을 바꿔야 한다.
데일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탈로스는 움찔했다. 그의 이마에 주름이 생겨났다.
때로는 그 어떤 욕설보다 진실을 찌르는 한마디가 더 아픈 법이다.
탈로스가 눈가를 파르르 떨며 말했다.
"마치 그쪽은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듯한 말투군요."
"찾을 거다."
의문이 아닌 확신.
그도 그럴 게, 데일은 이미 악마 숭배자가 어떤 악마를 섬기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완전히 확신하는 건 아니지만....
'어지간하면 내 예상이 맞을 거다.'
이미 능력을 아는 상대는 대처할 수 있다.
찾는 것도 훨씬 수월할 것이다.
퍼즐로 비유하면, 이미 가장자리가 채워져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해야 할까.
그런 사실을 모르는 탈로스는 데일이 허세를 부린다 생각했다.
"허. 이 일을 참 우습게 보는군요. 좋습니다. 어디 마음껏 찾아보십시오. 만약 당신이 저희보다 먼저 녀석들을 먼저 찾아낸다면, 그때는 저희가 아둔했다는 걸 인정하죠. 원한다면 고개라도 숙이겠습니다."
탈로스는 비웃듯이 입꼬리를 올리며 덧붙였다.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입니다."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눈앞에 상대는 잘 모르는 모양이다.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다는 것을.
* * *
본격적으로 성안을 돌아다니기에는 이미 시각이 늦었다.
최근 악마 숭배자가 활개 치고 난 후. 성안에는 통금령이 내려졌다.
해가 진 후 집 밖으로 나다니는 건 금지되었다.
설령 금지가 아니라 해도, 이런 분위기에서 나다닐 머저리는 없겠지만.
카엘름 백작은 성에 찾아와준 레베카와 데일, 사제들, 그리고 이단 심문관들을 위해 연회를 열었다.
정작 그 백작은 겁에 질려 참석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정말이지. 이런 상황에서도 연회라니. 귀족분들의 생각은 잘 이해가 안 갈 때가 많습니다."
에스델은 떨떠름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현악기와 피리를 연주하는 악공. 과하다 싶을 정도로 쌓여 있는 술과 음식.
그사이에서 웃고 떠드는 백작의 가신과 혈육들.
그녀가 보기에는 너무나 사치스러운 연회였다.
에스델은 이런 사치가 불편했다.
정작 다른 사제들은 이런 자리가 익숙한 듯, 술과 음식을 즐기고 있지만 말이다.
데일은 그런 에스델에게 술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는 안 마시나?"
"안 마셔요. 술은 사람의 정신을 흐리게 만드는 법이니까요."
에스델은 단호하게 말했다.
'하켄이 들었다면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 했겠군.'
지금쯤 하켄은 성 밖에서 야영하며 툴툴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 하켄이 에스델을 봤다면 한소리 했을 거다.
둘은 연회의 구석에 서서 멍하니 다른 이들을 구경했다. 둘 다 다른 사람과 흥청망청 마시며 어울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 둘에게 다가왔다. 강직하고 올곧은 인상의 청년이었다.
청년을 알아본 에스델이 반가운 얼굴을 했다.
"페일 형제님!"
"오랜만입니다 둘 다."
예전. 마리아라는 이름의 여사제의 주검을 교단에 전해주었을 때 마주쳤던 사제다.
그는 데일을 보며 꾸밈없는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건넸다.
"데일 경이 이곳에 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급하게 달려왔습니다."
"오랜만이다. 그 옷은?"
데일은 페일의 옷을 가리켰다.
새빨간 법복. 이단 심문관이라는 증거였다.
페일이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이단 심문관 수습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과분한 영광이죠."
"그렇군."
이 청년 사제는 충실히 출셋길을 걷고 있는 모양이다.
오랜만의 만남에 페일은 이러저러한 얘기를 했다.
가장 먼저 나온 말은 바로 데일의 결투에 대한 이야기였다.
"정말 놀랐습니다. 데일 경은 크리스틴 경과의 결투에서 마리아가 준 반지를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반지를 부순 것에 대해서는 유감이다."
페일은 손사래를 쳤다.
"아뇨. 책망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마리아도 옳은 일에 쓰였다고 좋아했을 겁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요."
"걸리는 부분?"
"예. 신념의 반지 안에 깃든 건 저희 교단의 영웅입니다. 원래는 그분의 마음에 든 사람에게 잠시나마 강한 힘을 내려주는 유물이죠."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크리스틴과의 싸움에서 데일은 자기에게 허용된 것보다 강한 힘을 발휘했다.
지금은 원래대로 되돌아갔지만.
페일이 잠시 말을 고르다,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데일 경은 그.... 다소 강압적인 방법으로 힘을 빼앗아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게 이상하다는 겁니다. 당연히 영웅은 저항했을 거고, 어떻게든 신성을 끌어내려 했을 겁니다."
그리고 빛의 신성은 데일에게 상극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 순간 데일 경은 말 그대로 녹아내렸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걸 몸으로 받아내, 자기 힘으로 삼았죠."
에스델이 맞장구쳤다.
"저도 계속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얘기를 하려 했는데, 당최 데일 경이 듣지를 않더군요."
페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보기에 데일 경께는 뭔가 특별한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영혼의 특별함이라 해야 할까.... 그렇기에 다른 흑기사와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특별함이라.
짐작 가는 구석은 몇 개 있었다.
데일이 흑기사로서 최초로 교단의 본당에 발을 들였을 때.
빛의 여신이 그에게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다. 아주 잠깐이지만 말이다.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지만, 이게 범상치 않은 일이라는 것 정도는 안다.
데일은 일단 밤의 여신을 따르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사도 하시나를 만났을 때도 비슷한 얘기를 들었었다.
―세상에. 이런 영혼은 본 적이 없는데. 너. 대체 뭐야. 어떻게 이런 형태로....
그렇게 중얼거린 하시나는 기쁜 얼굴을 하며, 데일을 죽여 악마에게 바친다는 얘기를 지껄였었다.
데일 자신에게 대단한 비밀이라도 숨겨져 있는 걸까?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류의 고민이다.
'그런 것치고 성수에 닿으면 몸이 녹던데. 잘 모르겠군.'
이 차가운 몸뚱이에 들어서기 전 데일은 그저 조부와 대화하는 걸 좋아하고, 애 돌보기를 잘하는 평범한 청년일 뿐이었다.
특별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페일이 던져준 새로운 의문에 데일이 고심에 빠져들던 그때였다.
연회장의 문이 열리며, 쟁반을 든 하인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흥청망청 취한 사람들은 그들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인들의 얼굴에 불길한 흰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하하! 내가 그때 그 자식 코를 납작하게.... 억!"
뚱뚱한 가신 중 하나가 그런 하인과 부딪혔다.
손에 든 와인이 쏟아지며 가신의 옷이 엉망이 되었다.
그는 곧장 걸걸한 욕설을 내뱉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눈 똑바로 안 뜨고 다녀?"
하지만 하인의 반응은 평온했다.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런. 옷이 엉망이 되었군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뭐?"
"당신에게는 붉은색이 더 잘 어울리거든요."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가신이 화를 내려던 그때.
한 줄기 바람이 가신을 훑고 지나갔다. 여름에 어울리지 않는 산뜻한 바람이었다. 가신의 기름진 머리카락이 한차례 나풀거렸다.
"어?"
다음 순간.
가신의 목에 붉은 실선이 생기더니, 머리가 뚝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피가 튀는 건 그다음이다.
피 분수가 튀며 하인이 쓴 하얀 가면이 붉게 물들었다. 가신의 옷 역시 새빨갛게 변했다.
하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거봐요. 제 말이 맞죠?"
숭배자
* * *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맞닥뜨리면 굳어버리고 만다.
연회에 참석한 이들도 그랬다.
가신의 목이 썩둑 잘려나갔지만, 순간적으로 반응하지 못했다.
그 짧은 찰나.
흰 가면을 뒤집어쓴 이들은 주문을 완성했다.
"역시 연회의 마무리에는 춤이 제격이죠! 다들 함께 춤춥시다!"
휘오오오!
연회장의 중앙에 공기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더니, 이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칼날 같은 바람이다.
데일은 에스델을 뒤로 끌어당겨 자기 몸으로 가렸다.
카각!
칼날 바람이 데일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단단한 갑옷에 깊은 상처가 패였다.
마법의 위력이 상당했다.
에스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이게 무슨. 이, 일단 감사...."
데일이 횡설수설하는 에스델에게 말했다.
"정신 차려라. 악마 숭배자들이다."
"예?"
옆에서 솜씨 좋게 방어벽을 만들어낸 페일이 으득 이를 갈았다.
"여길 직접 공격해오다니, 어지간히 만만하게 보였나 보네요."
데일은 피해 상황을 확인했다.
첫 기습은 제법 치명적이었다.
가신과 저택의 사용인들이 토막이 나, 이곳저곳에 굴러다녔다.
하지만 이단 심문관들은 나름대로 실력은 있는지, 사제들을 보호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악마 숭배자는 그 사실이 마음에 안 든 모양이다.
"쓸데없이 튼튼하기만 해서는. 바로 다음으로 갑시다!"
가면을 쓴 악마 숭배자 일곱이 일제히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데일은 곧바로 주변의 식탁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음식 접시가 가득 올려진, 원목 식탁이었다.
페일은 당황하며 물었다.
"데일 경! 그건 사람 혼자서 들 수 있는 물건이.... 들리네?"
데일은 원목 식탁을 번쩍 들어 올렸다. 접시가 바닥에 이리저리 떨어졌다.
음식이 몸에 쏟아졌지만 데일은 신경 쓰지 않았다.
무릎을 구부렸고. 용수철처럼 다시 무릎을 피며 식탁을 힘껏 던졌다.
쾅!
식탁이 모여 있던 악마 숭배자들을 덮쳤다. 아무리 악마 숭배자라도 계속 주문을 외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사방으로 산개하며, 눈을 빛냈다.
"오호라! 소문의 주인공이 여기 와 있구만!"
"듣던 대로 특이한 놈이다."
"우린 운이 좋아! 주인님께 바칠 수 있겠어!"
사방으로 퍼진 그들은 제각각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데일은 곧장 자리를 박차, 앞으로 튀어나갔다.
가장 가까운 녀석에게 달렸는데, 그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 있었다.
주문이 거의 완성되었다는 증거다.
으레 마법사들이란 주문을 완성하기 전에 기쁨을 느끼는 변태들이니.
데일은 식탁에 놓인 포크를 집어 들었다. 손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쇳덩어리였다. 데일은 감각에 의지해 손을 뻗었다.
포크가 비수처럼 날아가, 그대로 가면의 왼쪽 눈구멍으로 파고들었다.
"크악!"
악마를 따르는 놈들 특유의 보석같이 반짝이는 눈에 포크가 틀어박혔다.
당연히 준비하던 주문은 취소.
그대로 거리를 좁힌 데일은 검을 뽑아, 빠르게 내리쳤다.
퍼억!
정수리부터 틀어박힌 검은 그대로 목 아래까지 파고들었다.
아무리 악마 숭배자라도 즉사에 이를 일격이다. 데일은 악마 숭배자의 몸을 걷어차 검을 빼냈다.
데일은 곧장 시선을 돌렸다.
이단 심문관과 사제들도 제법 능숙하게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온몸에 찬란한 광휘를 두른 심문관이 묵직한 망치를 휘둘렀고, 눈 부신 빛을 뿜어내는 섬광이 숭배자들을 노렸다.
그럴 때마다 악마 숭배자들은 불꽃을 흩뿌리고, 차가운 숨결을 내뱉으며, 때로는 산성 안개를 뿜어대며 이단 심문관을 저지했다.
심문관은 몸을 감싸는 방벽으로 그 모든 마법을 맞아가며 악마 숭배자를 쫓았다.
언뜻 보면 이단 심문관의 우세다.
하지만 둘 간에는 명백한 목적의 차이가 있었단.
이단 심문관의 목표가 악마 숭배자라면, 악마 숭배자가 바라는 건 무차별적인 살육이다.
허공에 분사된 산성 안개는 미처 도망가지 못한 가신, 병사, 그리고 사용인을 덮쳤다.
"커억!"
"수, 숨이!"
산성 안개가 코로 들어가 호흡기를 녹여버리자, 버티지 못한 이들이 털썩 쓰러졌다.
심각한 부상.
하지만 이단 심문관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오로지 악마 숭배자들에게 집중했다.
탈로스가 외쳤다.
"반드시 죽여라! 놓쳐서는 아니된다!"
그들이 지닌 무기와 부리는 기적은 오로지 악마 숭배자들만을 향했다.
그러다 보니 싸움이 계속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픽픽 죽어 나갔다.
그러던 와중. 한참을 주문만 외우던 악마 숭배자 하나가 마침내 주문을 완성했다.
"헤! 됐다!"
퍽!
이단 심문관이 달려가 그런 악마 숭배자의 머리를 내리쳤다. 가면과 함께 두개골이 으스러졌다.
하지만 이미 완성된 주문은 끊어지지 않았다.
허공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녹색 불꽃. 일전에 봤던 유물 대포에서 발사된 것과 똑같은 불꽃이다.
불꽃의 파도는 아직 살아남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을 향해 굽이쳐갔다.
"비, 빛이여! 방패를!"
사제들이 급하게 기적을 부려 방벽을 세웠다. 하지만 역부족이다.
사제들은 어떻게든 버티려 했지만, 점점 힘에 부쳤다. 사악한 불꽃은 너무나 강력하다.
'신이시여. 이대로라면....'
궁지에 몰린 사제들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그들의 신을 찾았다. 여기서 밀리면 끝이다.
그런 그들의 부름에 신이 응답한 걸까? 순간. 불꽃이 잘려나갔다.
"어?"
사제는 고개를 들었다.
당연하게도, 신이 그들의 기도에 응답한 건 아니었다.
앞에 선 건 흑기사다.
데일은 보기만 해도 불길해지는 마검을 들고 그들의 앞에 섰다.
후웅!
굳게 쥔 마검을 사선으로 휘둘렀다.
녹색 불꽃이 순간적으로 잘려나갔다가, 다시 파도처럼 짓쳐 들었다.
데일은 반대 방향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또 반대 방향으로. 다시 반대로. 팔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의 속도로 반복했다.
검격으로 만들어낸 장벽. 불꽃은 그 장벽을 결코 넘을 수 없었다.
'세, 세상에.'
사제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불꽃을 베어내는 검사라니. 그들이 지금 보는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렇게 데일이 불꽃을 다 잘라내었을 때.
몇 남지 않은 악마 숭배자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가면을 써 표정을 읽을 수는 없지만, 설마 불꽃을 막아낼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그들은 눈빛만으로 빠르게 의사를 교환했고.
이내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후퇴!"
악마 숭배자 넷은 일제히 흩어졌다.
세 녀석은 연회장의 입구로.
하나는 창문으로 몸을 던졌다.
챙그랑!
악마 숭배자와 부딪힌 유리창이 산산이 조각났다.
그 귀를 긁는 소음과 함께 이단 심문관과 데일도 추격을 개시했다.
데일이 쫓은 건 창문으로 도망친 녀석이었다.
이단 심문관이 모두 입구로 달려갔기 때문인데, 이는 연회장이 3층에 있어서였다.
데일은 3층에서 떨어져도 멀쩡히 달아나는 악마 숭배자를 눈에 담은 뒤, 망설임 없이 창문으로 몸을 던졌다.
쿵!
거체가 떨어지며 자욱한 흙먼지를 일으켰다. 아름답게 가꿔진 화단은 엉망이 되었다.
낙하한 충격에 몸이 한차례 흔들린다. 상관없다.
데일은 달렸다. 악마 숭배자와의 거리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도망치던 악마 숭배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 보석 같은 눈에 기이한 빛이 일렁였다.
여유롭게 도망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만 쫓아오시죠! 진심으로 충고해 드리는 거예요!"
악마 숭배자는 달리는 속도를 올리며 외쳤다. 어딘가 장난기가 가득한 어조.
데일은 대답 대신 단검을 꺼내 던졌다.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여 단검을 피한 악마 숭배자가 양손을 착 부딪쳤다.
"저는 경고했습니다?"
그러자 데일이 디딘 땅에 복잡하고 기하학적인 마법진이 생겨났다.
'룬 마법?'
다음 순간.
불기둥이 마법진에서 피어올랐다. 멀리서도 느껴질 정도로 뜨겁고 강력한 불기둥이었다.
자기가 만들어낸 작품을 보며 악마 숭배자가 익살을 떨었다.
"그러게 남이 조언을 하면 들어야.... 어?"
불기둥을 뚫으며 데일이 걸어 나왔다. 온몸에 불이 붙고, 갑옷은 군데군데 녹았지만 치명상에 이를 피해는 아니다.
그거면 충분하다.
데일이 물었다.
"준비한 건 이게 전부인가?"
"...생각보다 튼튼하군요."
그렇게 말한 악마 숭배자가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데일의 검이 더 빨랐다.
수평으로 휘둘러진 마검이 악마 숭배자의 허리를 갈랐다.
졸지에 반 토막이 된 악마 숭배자가 땅에서 허우적거렸다. 단면에서 피와 내장이 흘렀다.
이들 역시 한때 인간이었다는 증거. 악마 숭배자의 가장 성가신 점이다.
데일은 악마 숭배자의 상반신에 고개를 들이밀며 말했다.
"알고 있는 걸 모두 말해. 네 동료들이 숨어 있는 은신처. 이곳에서 꾸미려는 계획. 전부다."
"헤. 헤헤. 정말 말할 거라 생각하고 물어본 건 아니죠?"
물론 아니다.
이 악마 숭배자라는 놈들은 하나 같이 머리가 훼까닥 돌아 있어, 어지간한 고문으로도 입을 열 수 없다.
악마 숭배자는 데일을 비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따르는 분의 이름도 모르는 머저리들. 당신들은 머지않아 파멸을 맞이할 겁니다. 그때 당신이 내뱉을 고통어린 비명을 듣지 못해 참으로 아쉽군요."
아마 그때가 되어도 데일이 비명을 지르는 일은 없지 않을까?
데일은 그렇게 대답하는 대신, 하나의 이름을 툭 던졌다.
"가니아고스."
"...예?"
반 토막이 나도 여유롭던 숭배자의 눈에 충격 어린 감정이 드러났다.
"어, 어떻게?"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지."
얼굴을 가린 흰 가면. 갖가지 변칙적인 주문을 다루는 숭배자. 마지막으로 전염성이 있는 녹색 불꽃.
그 특징들은 하나의 악마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가 네 주인을 많이 만나봤거든."
갖가지 주문을 사용하며 상대를 농락하는 가니아고스의 싸움 방식은 굉장히 까다롭다.
게임에서도 유독 애를 먹이던 악마였으니, 데일의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당황한 악마 숭배자가 화를 냈다.
"우, 우리 주인님을 많이 만나봤다니.... 거짓말하지 마라!"
"일단 네 주인이 가니아고스라는 건 인정한 건가?"
그제야 아차한 악마 숭배자가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데일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얼추 예상은 했지만.... 진짜였다니.'
데일이 악마의 정체를 짐작한 건 라팽을 처단했을 때다.
그때에도 가니아고스라는 이름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짐작할만한 증거들이 제법 많았으니.
하지만 의문점이 한 가지 있었다.
'가니아고스는 이미 죽었다.'
과거. 드워프들의 유적에서 사도 하시나와 싸울 때 데일은 물었다. 마법사인 주제에 왜 가니아고스 말고 다른 악마를 따르냐고.
하시나는 답했다. 가니아고스가 죽은 지는 이미 한참이 지났다고.
그때 데일이 얼마나 놀랐던가.
'악마를 아무나 죽일 수 있는 게 아닌데.'
어쨌거나 가니아고스는 죽었다. 하지만 지금 그 죽은 악마를 섬기는 숭배자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데일이 물었다.
"네 한심한 주인이 죽었으면 얌전히 있을 것이지. 아니면 다른 악마에게 붙거나. 뭐 하려고 난리나 피우고 있는 거지?"
데일의 질문에 악마 숭배자의 몸이 파들파들 떨렸다. 굴욕감과 분노가 전해진다.
악마 숭배자는 가래 끓는 듯한 쉰 목소리로 외쳤다.
"그분은.... 그분은! 위대하신 분이다! 너 같은 송장이 입을 놀릴 분이 아니란 말이다!"
"죽은 건 가니아고스니, 송장은 내가 아닌 그쪽이 아닌가?"
악마 숭배자는 데일의 말을 무시하며 고함을 내질렀다.
"그분은 돌아올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그때가 머지않았단 말이다!"
그렇게 외친 악마 숭배자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팔을 뻗었다. 날카로운 손톱을 데일의 투구로 향했다.
데일은 곧바로 주먹을 휘둘렀다. 더 늦게 출발했지만, 더 빨리 목표에 맞닿은 건 데일이었다.
주먹이 가면과 함께 숭배자의 머리통을 박살냈다.
숭배자의 몸이 허물어졌다.
데일은 곧장 건틀릿을 박아넣었다.
만족스러울 만치 많은 양의 생기가 차올랐다. 신체도 곧바로 회복되었다.
다만, 악마 숭배자의 기억은 너무 흐릿하고 혼란스러워, 도저히 읽을 만한 것이 못 되었다.
데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개가 가득 낀 카엘름의 밤하늘을 보았다.
안개 속에서 불길한 그믐달만이 희미한 빛을 뿜고 있다.
'돌아온다...라.'
비로소 숭배자들의 목적을 알았다.
놈들은 가니아고스를 부활시킬 생각이었다.
숭배자
* * *
데일은 바싹 말라버린 악마 숭배자의 시체를 가지고 돌아왔다.
연회장에는 사람들이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었다.
백작의 가신과 병사가 많이도 죽었다.
그들이 흘린 피로 연회장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데일이 돌아오자 에스델과 페일이 맞아주었다.
"아. 데일 경."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문제없다."
데일은 악마 숭배자의 시체를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피해는 어떤가?"
페일이 탄식을 내뱉으며 말했다.
"못해도 스무 명은 죽었습니다. 저희가 지키고 있었는데도 말이죠."
무려 이단 심문관과 사제들이 모여 있던 자리다.
아무리 예상치 못한 기습이었다 해도, 피해가 너무 컸다.
"저희가 더 잘 대처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상대를 얕보고 있던 건, 우리 쪽이었던 것 같네요."
데일은 주위 참상을 눈에 담으며 말했다.
"백작이 더욱 겁을 먹겠군."
"저택 한복판에서 이런 학살이 일어났으니까, 백작 성격에 호위 병력을 늘리겠죠. 어쩌면 이게 놈들이 노리는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백작의 공포를 자극해, 병력을 저택 안에 틀어박히게 만든다.
악마 숭배자를 쫓거나 도시를 순찰하는 병력은 더욱 줄어들 테니, 놈들은 훨씬 편하게 활개 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쯤.
다른 악마 숭배자를 쫓아 나갔던 이단 심문관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악마 숭배자의 시체를 어깨에 들쳐메고 있었는데, 가면을 벗은 악마 숭배자의 얼굴은 놀랍도록 평범했다.
눈이 보석처럼 반짝이지도 않고, 뒤틀린 부분도 없다. 어디서나 볼 법한 그런 평범한 사람이었다.
탈로스도 그 부분을 의식하는 듯했다.
"당장 하인과 그 가족들의 신원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모든 심문관은 저를 따라오세요."
"네!"
발걸음에 망설임은 없다.
연회장에서 사람이 몇이 죽었든,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단 심문관은 처단하는 역할이지, 보호하는 이들은 아니므로.
이단 심문관들이 탈로스를 따라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마지막으로 연회장을 나서려던 탈로스는 고개를 돌렸다.
"무엇합니까 페일. 어서 오지 않고."
"탈로스 님...."
페일은 주위를 둘러보고, 데일의 얼굴을 한번 쳐다본 뒤,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저는 이곳에 남아 뒤처리나 맡겠습니다."
"음?"
"어차피 저는 수습이라 별로 도움도 되지 않으니까요. 이렇게라도 손을 거들고 싶습니다."
탈로스는 감정을 읽기 힘든 눈으로 페일을 응시하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뜻대로 하십시오."
탈로스가 떠나가자, 페일이 데일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저는 데일 경을 돕겠습니다."
"뭐?"
페일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얘기 들었거든요. 데일 경이 탈로스 형제님께 악마 숭배자에 대한 정보를 알려 달라 했는데, 거절당했다는 걸요. 그 부분을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데일이 물었다.
"그래도 괜찮겠나? 들키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저는 악마 숭배자가 선량한 사람들에게 해코지하는 걸 막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단 심문관이 되었죠."
페일은 올곧은 눈으로 말했다.
"탈로스 형제님의 방식은. 음. 때로는 지나칠 때가 있죠. 지금은 데일 경을 돕는 게 악마 숭배자를 잡을 가장 빠른 방법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제 개인적으로 마리아에 대한 빚을 갚고 싶기도 하고요.... 만약 잘못된다면, 그때는 이단 심문관 같은 건 그만둬 버리죠. 뭐."
페일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정말로 그만두어도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다.
데일이야 반가운 얘기다.
안 그래도 정보가 없어 곤란해하던 차다. 게다가 성안을 돌아다니려면 길잡이는 필수다.
왜냐하면.... 데일은 지독한 길치다.
언제나 길을 이끌어주는 하티가 없는 지금, 혼자 낯선 곳으로 나섰다가는 영원히 도시를 배회할 수도 있다.
"그러면 바로 이동하지."
"예. 한시라도 빨리 놈들을 잡아야 하니까요."
"아!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제가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에스델 자매님이 도와주신다면 든든하죠."
페일과 에스델이 앞장서서 걸어갔다.
데일도 그 뒤를 따랐다. 이 둘은 악마 숭배자를 찾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데일을 불렀다.
"저, 저기!"
걸어가던 데일과 에스델은 뒤를 돌아보았다.
사제들이 데일을 보며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이레네로부터 이곳까지. 2주일에 가까운 시간을 함께했지만, 데일은 이 사제들의 이름도 몰랐다.
그들은 데일을 탐탁지 않아 했으며, 말도 섞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사제들이 데일을 불러세웠다.
데일은 말없이 턱을 까딱였다. 어서 말하라는 뜻이었다.
사제 중 대표 격인 인물이 말하기 힘들다는 듯. 몇 번 입을 뻐끔거렸다.
참다못한 데일이 말했다.
"할 얘기가 없다면 가겠다."
사제가 다급히 말했다.
"고마워요."
"뭐?"
"아까 그 불꽃에서 저희를 지켜주신 점. 고마워요. 그뿐이에요."
말을 뱉은 사제는 겨우 해냈다는 듯. 깊은 숨결을 토해냈다.
꽉 막힌 사제들이 이교도에게 감사를 표한다는 게, 분명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데일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옆에 있던 에스델이 환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자기가 감사받은 것처럼 기뻐했다.
"제가 말했잖아요. 보기보다 괜찮은 분이라고."
"보기에는 안 괜찮다는 건가?"
데일이 묻자 에스델은 입을 다물었다.
쓴웃음을 지은 사제가 데일에게 한걸음 다가왔다. 그리고 양팔을 내밀었다.
"받으세요. 감사의 의미로 선물해드리는 거예요."
"이건...?"
사제가 뿌듯한 얼굴로 내민 물건은.... 묵직한 성경이었다. 그것도 표지가 고급 가죽으로 만들어진, 고가품이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읽어보세요. 삶의 방향을 잃을 때, 분명 답을 알려줄 거예요."
데일은 상대의 순수한 미소를 봤다. 악의는 조금도 없었다.
당황한 에스델을 흘끗 살핀 뒤, 차갑게 말했다.
"그냥 돈으로 줘라."
* * *
에스델은 연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자매님께 나쁜 뜻은 없었을 거예요."
"이해한다. 너도 예전에 똑같이 행동하지 않았나?"
과거.
에스델이 식사하기 전에 식전 기도를 올리자고 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그때가 떠올라 창피한지, 에스델은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그, 그때 일은 잊어주세요."
셋은 페일이 묵는 방으로 들어갔다. 본격적으로 악마 숭배자를 찾기 전에, 우선 의견을 교환해야 했다.
페일이 입을 열었다.
"우선, 예. 정보 공유부터 하겠습니다. 최근 악마 숭배자들의 소행이랑, 저희 이단 심문관이 어디까지 알아냈는지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데일과 에스델이 고개를 끄덕이자, 페일이 천천히 설명했다.
"악마 숭배자가 나타났다는 목격 정보가 처음 나온 건 한 달 전이었습니다. 이곳 카엘름 성이 아닌, 근처의 파벤 마을이라는 곳 주민들이 모조리 실종되어 버린 사건이었죠. 그것 때문에 카엘름 백작이 교단에 수사를 부탁했고요."
백작의 부탁을 받고 이단 심문관들이 파견되었다.
그들은 카엘름 근방의 마을들을 수색하며 악마 숭배자들에 대한 흔적을 추적해나갔다.
본격적으로 사건이 터지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일주일 후부터다.
"카엘름 성의 주민이 끔찍한 모습으로 살해된 채 발견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같이 끔찍한 몰골이었고, 시체 옆에는 흰 가면이 놓여 있었죠."
"놈들이 쓰고 있던 그 가면이군."
"예. 반대로 시체가 발견되지 않고, 실종만 된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고민해본 결과.... 한 가지 이상한 점을 알아챘습니다."
이 부분에서 페일은 한번 말을 끊고 주위 반응을 살폈다. 긴장한 에스델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상한 점이 무엇입니까?"
"시체로 발견된 건 나이가 어린 아이거나 노인. 반대로 실종된 건 젊은 사람들 뿐이었습니다. 예외는 없었죠. 그래서 저희는 두 가지 가설을 세웠습니다. 하나는 놈들이 제물을 모으려 한다. 젊은 사람의 혼과 피는 제물로서의 가치가 있으니까요."
데일이 물었다.
"두 번째 가설은?"
"동료를 늘리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동료?"
"아무래도 그 흰가면. 사람을 홀리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당장 방금 우리를 습격했던 하인들도, 아마 평범한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오늘 아침까지는 말이죠."
평범한 사람도 그런 악마 숭배자로 만들어버린다면, 그건 확실히 곤란한 일이다.
'제물 수집과 동료 늘리기가 목적인가.'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서로 상충하지 않죠. 그래서 저희는 둘 다라고 보고 있습니다. 동료를 늘리면서, 겸사겸사 제물도 수집하는 거죠. 다만 놈들이 무엇을 위해 제물을 모으는지는 아직도 확정하지 못했습니다. 악마 숭배자들이 꼭 이유가 있어 사람들을 죽이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제물이 아주 많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벌써 1달째 실종된 사람들만 엄청나게 많으니까요. 어쩌면 그 이전부터 준비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요."
지난 시간 동안 이단 심문관들이 놀고만 있던 건 아닌 듯하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착실하게 정답에 다가서고 있었다.
데일이 물었다.
"놈들이 어떤 악마를 숭배하는지는 특정해냈나?"
"그게 아주 곤란한 문제입니다. 다양한 마법을 구사하고, 가면을 쓰고 다니는 걸 제외하면 이렇다 할 특징이랄 게 없으니까요. 어쩌면 우리가 잘 모르는 악마를 섬기는 놈들일 수도 있습니다."
데일은 의아함을 느꼈다.
'이단 심문관들은 악마에 대해서 잘 알지 않나?'
악마의 특성에 대해 누구보다 빠삭해야 하는 게 이단 심문관일 것이다.
하지만 페일은 놈들이 숭배하는 악마가 누군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모습.
데일이 툭 말했다.
"가니아고스."
"예?"
"놈들은 가니아고스를 섬긴다."
"가니아고스라니...."
그 이름을 몇 번 중얼거리던 페일이 눈을 크게 떴다.
"아. 과거에, 영웅들이 죽였다는 그 악마를 말하는 것이군요!"
"그래. 가니아고스에 대해서 잘 모르나?"
페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영웅들께서는 가니아고스와의 사투에 대해서 발언하기를 꺼리셨으니까요. 그저 마법을 능숙하게 다뤘다는 얘기만 들어봤습니다."
게임에서 가니아고스는 각양각색의 마법을 다루며, 매우 귀찮게 싸우는 녀석이었다.
더욱 성가신 건, 놈이 부하들을 아주 많이 부린다는 것이다.
그 부하들 중에서도 특히 강력한 심복들은 하나같이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는데, 덕분에 데일은 이번 악마 숭배자들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단 심문관에게는 그런 정보가 전해지지 않았다.
'일부러 함구했다라....'
악마를 죽였다는 놈들이 악마에 관한 얘기를 일부러 밝히지 않았단다.
그렇다면 가니아고스는 자기 영역을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 놈이니, 이단 심문관들이 잘 모른다 해서 이상할 건 없다.
생각을 정리하는 데일에게 페일이 물었다.
"가니아고스를 섬긴다는 것.... 확신하십니까?"
"그래."
"으음. 그런데 이미 가니아고스는 오래전에 죽은 악마 아닙니까?"
"놈들은 그 악마를 부활시키려 하는 거다. 그래서 동료와 제물을 모으는 거라고 생각한다."
"아. 잠깐. 그러면 놈들이 제물을 많이 모으는 것도...."
"악마를 되살리는 데에는 제물이 아주 많이 필요할 테니."
죽은 악마의 부활.
예상을 뛰어넘는 심각한 얘기에 에스델과 페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페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큰일입니다. 탈로스 형제님께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안 믿을 거다. 명확한 근거는 없으니까."
잠시 머리를 굴려보던 페일이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그건 그렇군요. 오히려 터무니 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핀잔만 들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저도 선뜻 믿기 어렵네요. 정말 확실하신 거 맞습니까?"
"확실하지 않더라도,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그것도 그렇군요."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불확실한 가능성에라도 걸어보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페일도 일단 데일의 의견에 동의했다.
"어쨌거나, 저희가 직접 찾는 수밖에 없겠군요. 이단 심문관분들의 도움을 받기는 힘드니까요."
"그렇겠지."
"하지만 어떻게요? 이미 저희는 성안을 몇 차례나 뒤집었습니다. 하지만 놈들을 잡을 수 없었어요. 워낙 영악한 놈들이라 말이죠."
그 의문에 대해 데일은 명쾌한 답을 내놓았다.
"우리가 가는 게 아닌, 놈들이 찾아오게 만들면 된다."
"예?"
"미끼를 쓰는 거다. 제물로서 젊은 사람을 원하니, 미끼를 던지면 알아서 찾아오지 않겠나?"
"하지만 그 미끼를 누구로... 아!"
페일과 데일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에스델은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해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쏠린 시선에 순진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그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설마 그 미끼라는 게.... 저를 말하는 건 아니죠?"
데일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숭배자
* * *
계획 실행에 앞서 우선 할 일이 있었다.
데일은 레베카를 찾아갔다.
백작의 집무실에서 백작을 설득하던 레베카는 악마 숭배자의 습격을 운 좋게 피할 수 있었다.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레베카가 표정을 굳혔다.
"상황이 심각하긴 하네요. 백작도 가신들이 여럿 죽었다는 말에 지금은 거의 발작을 일으키고 있어요. 병사들도 모두 이곳으로 불러들였고요. 한시라도 빨리 악마 숭배자를 처리하지 않으면 백작은 신경 쇠약으로 죽어버리지 않을까요?"
"백작 옆에 단단히 붙어 있으시오. 지금은 그곳이 가장 안전하니."
"네. 데일 경도 조심하세요."
다음은 에스델을 무장시키는 일이었다. 페일은 어디선가 갑옷과 방어구를 들고 와 에스델에게 건넸다.
한참을 낑낑거리며 갑옷을 입은 에스델이 말했다.
"으음. 이거 조금 꽉 끼는데요. 무겁기도 하고요."
데일이 말했다.
"참아라. 칼에 찔려 내장을 질질 흘리며 기어 다니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말을 살벌하게 하시네요."
에스델은 원래 입던 법복 대신, 펑퍼짐하고 질긴 로브를 입었다. 그리고 로브 아래에 사슬 갑옷과 누비 갑옷을 겹겹이 껴입어야 했다.
이런 갑옷을 입는 게 불편한지 에스델은 이리저리 뒤뚱거렸다.
그러고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역시 무겁습니다 이거."
"앞으로 전투 사제로서 진로를 정할 거라면 익숙해져야 한다. 다음부터는 운동해서 근육도 좀 기르고."
"알았습니다. 운동하면 되잖습니까."
데일이 엄하게 말하자, 에스델은 시무룩한 얼굴로 툴툴거렸다.
에스델도 데일의 조언이 정론이라는 걸 알았다.
이 시대는 사제라고 안전하게만 지낼 수 있는 게 아니고, 위험한 일에 나설 때도 많았다.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심지어 가볍게나마 무기술도 배우는 게 정석이었다.
에스델의 무장을 마친 뒤.
셋은 곧장 밖으로 향했다.
페일이 말했다.
"뒷문을 압니다. 그곳으로 가면 될 겁니다."
페일은 일행을 영주성의 뒷문으로 이끌었다.
뒷문에는 병사가 잔뜩 굳은 얼굴로 지키고 서 있었지만, 페일이 입은 이단 심문관의 법복을 보고는 묻지도 않고 문을 열어 주었다.
페일은 뒷문을 통과하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백작이 성안을 순찰하던 병사들도 모두 저택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악마 숭배자가 활개 치기 좋은 환경이군요."
"예. 그러니 더더욱 저희가 나서야지요."
셋은 영주 성 밖으로 나섰다.
늦은 밤이었다.
지면에는 뿌옇게 안개가 끼어 있고, 하늘에는 어디선가 몰려온 구름이 가득 걸려 있었다.
크고 작은 저택이 늘어선 거리는 몹시 조용하다.
빗장이 걸린 저택은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정적에 휩싸였다.
나름대로 큰 도시에 속하는 카엘름 성은 지금, 유령 도시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런 분위기에 긴장했는지 에스델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제, 제가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너무 티가 나지 않을까요?"
페일이 부드럽게 답했다.
"이 악마 숭배자들은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대담하게 저택을 직접 습격할 정도니까요. 거리에 대놓고 돌아다니는 에스델을 그냥 보아 넘기지는 않을 겁니다."
"으음.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에스델이 둘과 떨어져 앞으로 걸어나갔다.
페일은 데일에게 말했다.
"장막을 칠 테니 저에게 붙어주십시오."
페일은 입안에서 자그맣게 기도문을 외웠고, 이윽고 반투명한 반구형의 장막이 페일과 데일을 감쌌다.
빛을 굴절시켜 모습을 가려주는 기적이다.
환한 대낮에 사용하면 아무래도 티가 나지만, 이렇게 안개가 낀 밤에는 제법 쓸만한 기적이었다.
페일이 말했다.
"그 마검은 뽑지 마세요. 기적이 흩어져 버릴 테니. 아, 그리고 장막에 몸이 안 닿는 게 좋을 겁니다. 공격용 기적은 아니지만.... 또 모르니까요."
"알겠다."
둘은 장막 속에 숨어 에스델을 지켜보았다.
에스델은 로브를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불안하게 거리를 서성였다.
머리까지 뒤집어쓴 로브나, 갑옷 때문에 엉거주춤한 걸음걸이나.
굉장히 수상한 모습이었다.
만약 순찰하는 병사가 있었다면 당장 잡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에스델은 그런 식으로 거리를 걸어 다녔다.
이따금 불안해질 때는, 고개를 돌려 데일과 페일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작 장막에 가려져 제대로 보지도 못하지만.
그렇게 꽤 긴 시간이 지났다.
미끼를 던졌지만, 상대는 좀처럼 물지를 않았다.
'계획을 수정해야 하나?'
슬슬 그런 생각을 할 때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늦은 밤에 아가씨 혼자서 돌아다니다니. 너무 위험하지 않나요?"
정적을 깨트린 목소리는 기이하리만치 선명하게 주위를 울렸다.
에스델이 흠칫 놀라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길거리의 한복판에 사람이 하나 서 있었다. 에스델과 똑같이 로브를 뒤집어쓴 모습.
등이 잔뜩 굽은 사내는 양손을 비벼댔다.
흐릿한 달빛이 사내의 창백하리만치 흰 손을 비추었다.
사내는 말했다.
"안 됩니다. 그렇게 조심성이 없어서야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에스델은 뒤로 주춤 물러났다.
'어느 틈에?'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던 거리다.
이 곱사등이 사내는 마치 연기처럼 그곳에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 건 페일도 마찬가지였다.
페일은 자기도 모르게 뛰어나가려 했다. 곱사등이에게서 위험한 냄새가 풍겼기 때문이다.
피, 시체, 혹은 고기 썩은 내 같기도 한 끔찍한 냄새.
데일이 그런 페일을 붙잡았다.
이건 낚시와 똑같다.
목표가 완전히 미끼를 물때까지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데일은 페일을 말리며 생각했다.
'곱사등이.'
라팽의 기억에서 보았던 놈이다. 파이도 마을의 주민들을 먼지로 만들고, 라팽에게는 유물 대포를 주었던 악마 숭배자.
그런 곱사등이 사내가 손을 비벼대며 에스델에게 접근했다.
"자. 아가씨. 함께 가시죠. 저희가 집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곱사등이가 혀를 낼름거렸다. 그 끝이 뱀의 혀처럼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에스델이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저 혼자서도...."
에스델은 문득, 사내가 내뱉은 말을 곱씹었다.
'제가, 가 아닌 저희가?'
그녀는 본능적으로 뒤를 돌았다. 그리고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흰 가면의 괴한들이 양팔을 벌린 채 달려드는 모습을 발견했다.
에스델은 재빨리 기도문을 읊었다. 다음 순간. 단단한 방벽이 에스델을 감쌌다.
갑작스러운 벽에 튕겨나간 악마 숭배자가 주춤했다.
에스델이 외쳤다.
"데일 경!"
그 순간. 데일이 장막을 찢으며 뛰쳐나왔다.
폭발적인 힘으로 땅을 박찬 데일은 그대로 마검을 크게 휘둘렀다.
목표로 하는 건 곱사등이다.
'어쩌면 저놈이 우두머리일 수도 있다.'
곱사등이는 뱀 같은 혀를 낼름거리며 감탄을 흘렸다.
"오호."
그는 오른손을 옆으로 쭉 뻗었다. 그 손이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다음 순간. 주문이 발동되고, 에스델에게 달려들던 악마 숭배자의 몸이 뒤로 쭉 밀려났다.
허공에 붕 뜬 악마 숭배자는 데일의 검을 향해 그대로 내던져졌다.
파악!
마검은 악마 숭배자를 반 토막 내버렸다. 끈적하고 뜨거운 피가 튀었다.
동료를 방패로 세운 덕에 곱사등이는 뒤로 물러날 찰나의 시간을 벌었다.
짐승처럼 손과 발을 모두 이용해 뒤로 물러난 곱사등이는 웃었다.
"하하. 당신이 그 소문의 주인공이군요. 실제로 보니... 과연 특별하군요. 그런 당신을 이렇게 중요한 때에 만날 수 있다니, 저는 참 운이 좋은 것 같습니다."
"악마 하수인 놈도 비슷한 소리를 하더군. 그리고 목이 잘렸지."
곱사등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시나 말하는 겁니까? 그녀는 반푼이라는 말에 딱 어울리는 사람이었죠. 한심한 주인을 섬기는 얼간이 마법사!"
저놈이 말하는 한심한 주인이란 하시나가 섬기던 악마를 말하는 걸까.
악마끼리도 파벌이 나뉘는 모양이었다.
데일은 으스대는 곱사등이에게 툭 던졌다.
"이미 죽어버린 놈을 섬기는 너보다는 현명한 것 같은데."
"...!"
곱사등이의 로브 아래에서 안광이 번뜩였다. 데일의 방금 그 말에 놀란 건가, 아니면 분노하는 건가.
어느 쪽이든 데일의 짐작은 확신이 되었다.
곱사등이가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당신에게는 들을 것이 조금 있겠군요. 당신을 죽여서 그 뇌를 헤집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제 주인님께 바쳐드리지요."
"할 수 있으면 해봐."
데일은 검끝을 곱사등이에게 향했다. 곱사등이의 로브 아래에서 붉은 안광이 반짝거렸다.
마찬가지로 데일의 투구의 눈구멍에서도 푸른 빛이 새어 나왔다.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구름이 마침내 달을 완전히 가렸다.
구름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데일과 곱사등이를 덮었다.
그 순간. 데일은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빠르게 팔을 움직여, 품에서 단검을 꺼내 던졌다.
"어딜!"
곱사등이의 창백한 손이 다시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빠르게 날아가던 단검이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머리를 반대로 돌리더니, 이내 데일을 향해 날아들었다.
캉!
손바닥을 휘둘러 단검을 쳐낸 데일은 그대로 성큼성큼 달려 곱사등이와 거리를 좁혔다.
곱사등이가 외쳤다.
"모여!"
그러자 어두운 골목길. 을씨년스러운 저택의 천장. 황량히 서 있던 담벼락. 그 모든 사각에서 흰 가면을 쓴 악마 숭배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곱사등이의 명에 따라 충실히 데일에게 달려들었다.
마법을 쓰는 놈이 있는가 하면, 육탄 공격을 가하는 놈도 있었다.
데일은 몰려드는 악마 숭배자를 검으로 썰어버리며 생각했다.
'에스델이랑 페일은... 괜찮아 보이는군.'
에스델과 페일은 벽을 등지고 서서 싸우고 있었다.
에스델이 휘황찬란한 빛을 내는 방벽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페일이 철퇴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악마 숭배자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방어력에 강점을 보이는 교단의 사제들인 만큼, 잘 버텨내고 있다.
데일은 마음 놓고 앞의 상대들에게 집중했다.
다양한 종류의 마법이 데일에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데일은 검을 넓게 그었다.
웬만한 마법은 마검에 닿는 것만으로도 전부 흩어져 버렸다.
그 모습을 뒤에서 구경하던 곱사등이가 중얼거렸다.
"귀찮은 검이네요. 하지만 뭐. 이제 됐습니다."
주문을 완성한 곱사등이는 양 손바닥을 바닥에 갖다 댔다.
그러자 지진이라도 난 듯, 지면이 우르릉 울리기 시작했다.
도로에 깔린 판석과 돌, 흙이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데일은 흙의 파도에 쓸려나가지 않기 위해 뒤로 훌쩍 물러났다.
산처럼 쌓인 흙더미는 이내 커다란 거인의 형상을 이루었다.
데일의 두 배는 될법한 키. 다리는 네 개. 팔은 두 개. 각진 머리. 흙과 돌로 이루어진 단단한 거인의 이름은....
"골렘."
"정답입니다."
골렘 소환 마법. 그것도 그냥 허접한 골렘이 아닌, 제법 커다란 녀석이다.
자기 작품이 만족스러운 듯. 곱사등이가 즐거워하는 웃음을 흘렸다.
"하하. 멋지네요. 가면도 씌워줄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뭐. 당신을 짓뭉개는 데에는 이것으로 충분하겠죠."
곱사등이는 골렘의 다리를 툭툭 쳤다.
"처리하세요."
"그어어어!!"
대체 어떻게 발성을 내는지 의아하지만, 골렘은 우렁찬 고함을 내지른 뒤.
네 개의 다리를 이용해 쿵쿵 달렸다.
어찌나 무거운지 녀석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이 들썩였다.
데일은 가까워져 오는 골렘을 눈에 담았다. 무겁고, 강하다. 하지만 그 탓인지 속도는 느리다.
데일은 골렘의 구조를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어떤 확신을 얻었을 때.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어?"
갑작스러운 접근에 골렘이 곧바로 주먹을 내지르려 했다.
하지만 골렘은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리다. 안타깝게도 데일은 하품을 할 수 없는 몸이지만.
데일은 주먹을 뒤로 젖혔다가, 그대로 허릿심을 이용해 골렘의 머리를 힘껏 후려쳤다.
예전. 거인과 승부했을 때의 경험을 가감 없이 녹여냈다.
콰앙!
굉음과 함께 골렘의 머리에 데일의 주먹이 박혔다. 주먹은 그대로 뻗어나가, 골렘의 뒤통수에서 튀어나왔다.
흙과 돌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어. 그어."
골렘은 알 수 없는 고함을 더 내질렀다. 팔을 허우적거리며 데일을 붙잡으려 했다.
데일은 그대로 주먹을 뺀 뒤, 다시 한번 골렘의 머리를 내리쳤다.
녀석의 머리가 산산이 부서졌다. 그러자 그 아래에 유독 마력이 뭉쳐 있는 부위가 나타났다. 골렘의 핵. 데일은 왼팔을 뻗어 골렘의 핵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유물 장갑을 발동시켰다.
콰앙! 강한 충격파가 그대로 골렘의 핵을 가루로 만들었디.
핵을 잃은 골렘은 주위를 방황하더니, 이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엎어졌다.
"...."
단단해 보이는 골렘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에스델과 페일은 말없이 데일을 쳐다보았다.
마찬가지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곱사등이는 하도 기가 찼는지, 늘 고집하던 존댓말조차 잊고 중얼거렸다.
"뭐야 이거."
의식
* * *
곱사등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일단 묻겠는데, 그곳에 골렘의 핵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안 거죠?"
데일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너희 마법사들은 창의성이 없거든. 늘 같은 자리에 핵을 숨겨두지."
"...그건 창의성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골렘의 핵을 그곳에 배치한 건 그게 가장 효율적이고 우월한...."
"그게 창의성이 없다는 거다."
데일은 칼로 자르듯, 곱사등이의 말을 끊었다. 곱사등이의 가면 속 두 눈이 불온한 빛을 품었다.
녀석이 중얼거렸다.
"그래요. 인정할게요. 제 생각보다 뛰어나군요. 무식하게 생긴거랑 달리 요령도 있고 말이죠. 그러니 더욱 탐이나요. 당신을 가져다 바치면, 주인님께서 분명 고맙다고. 대견하다고 말해주겠죠?"
"할 수 있으면 해봐."
"물론 그리 할 겁니다."
곱사등이는 그렇게 주문을 사용하고도 마력이 남는지, 곧바로 다음 주문을 준비하려 했다.
두고 볼 데일이 아니다.
데일은 막아서는 다른 악마 숭배자들을 학살하며, 거침없이 전진했다.
곱사등이는 짐승처럼 손과 발을 모두 이용하며 네발로 기었다. 그러며 말했다.
"좋은 날이에요. 안 그런가요? 그믐달에 구름도 자욱하고, 안개도 끼어있어요. 일을 벌이기에는 최고의 조건이죠."
데일은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르며 생각했다.
'말이 많은 놈이군.'
으레 다른 마법사들이 그렇듯, 자기만 아는 내용을 줄줄 늘어놓는다.
데일은 그런 쓸데없는 데에 신경 쓰는 대신, 눈앞에 달려드는 악마 숭배자를 베는 데에 모든 집중력을 발휘했다.
저 곱사등이 만큼은 아니어도, 이 악마 숭배자들이 사용하는 주문은 성가시다.
무시할 만한 게 못 되었다.
그런 데일의 분투를 아는지 모르는지. 곱사등이는 쉴새 없이 중얼거렸다.
"준비는 거의 끝난 참이었어요. 마지막 한 조각이 부족했는데, 마침 당신이 와주었으니.... 뭐랄까. 이게 운명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데일은 대답 대신 반토막 난 악마 숭배자의 몸을 힘껏 집어 던졌다.
곱사등이는 민첩하게 옆으로 굴렀다. 그러면서도 입은 쉬지 않았다.
"운명이 불렀으니, 저도 응답해야 겠지요! 취향에는 안 맞지만 도박을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대체 어디에서 꺼냈는지 모를 지팡이를 하나 꺼내들었다.
데일은 그 지팡이마저 무시할 수는 없었다. 저 생김새. 이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짐승을 조종하던 유물 지팡이.'
생김새는 비슷하나, 그 안에서 느껴지는 힘은 더욱 강력하다.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도 느껴질 정도다.
악마 숭배자를 막아서던 페일이 외쳤다.
"데일 경!"
가만둬서는 안된다는 의미의 외침이다. 데일도 동의했다. 그는 다른 악마 숭배자를 무시하며, 그대로 곱사등이에게 달렸다.
하지만 곱사등이가 더 빨랐다.
곱사등이는 지팡이를 머리 위로 들더니.... 그대로 바닥을 향해 내리쳤다.
콰작!
지팡이는 너무나 쉽게 부러졌다. 그 파편이 거리에 널브러졌다. 놀라운 건 그 다음이다.
부서진 지팡이 파편이 마치 물에 가라앉는 것처럼 지면 아래로 잠겨 들어간 것이다.
"최근 이 주위에서는 피와 죽음이 충분히 쌓여서 말이죠. 이런 것도 가능하죠."
곱사등이가 왼발을 들어 땅을 한번 밟았다.
그러자 도로 위로 알 수 없는 문자와 기하학적인 문양이 빼곡히 새겨졌다.
분위기가 변한다. 바람이 멈추고, 안개가 요동친다.
'이런.'
무언가가 일어나려 한다.
에스델을 미끼로 써서 악마 숭배자의 흔적을 쫓겠다는 계획은, 데일과 곱사등이와의 만남으로 이어졌으며, 이 만남에서 곱사등이는 어떤 운명을 보았다.
놈이 오래도록 준비하고 있던 계획이, 지금 발동하고 있었다.
우웅.
불온한 공기가 성 전체로 퍼져나갔다.
낮게 깔린 안개가 옅은 녹빛을 띄었다. 데일은 손을 휘저어 안개를 물러나게 했다.
'안개에 마력이 담겨 있어.'
안개는 특별히 산성이나 유독성을 띄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안심할 수 없다.
안개가 괜히 마력을 품고 있는 건 아닐 터이니.
의문은 머지 않아 풀렸다.
거리의 한쪽에 조형물처럼 서 있던 저택의 문이 벌컥 열린 것이다.
저택에서는 사람이 걸어 나왔다.
아이 셋과 부모. 그리고 조부모로 보이는 가족이었다.
당황한 에스델이 외쳤다.
"무슨.... 위험합니다! 당장 안으로 돌아가세요!"
하지만 일가족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저 흐릿한 눈으로, 죽은 사람처럼 비척비척 걸었다.
곱사등이가 외쳤다.
"자자. 저를 따라오세요! 위대한 분의 일부가 되실 영광을 안겨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일가족은 곱사등이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곱사등이는 경쾌한 리듬감으로 손뼉을 치며 거리를 달렸다.
손뼉 치는 소리가 울리자, 집집 마다 문이 열렸고. 안에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이 멍한 눈으로 걸어 나왔다.
다만. 모두가 홀린 건 아니었다.
"아, 아버님! 갑자기 왜 그래요! 정신 좀 차려봐요!"
중년 여성이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의 허리를 붙잡았다.
하지만 노인은 그런 여인을 매단 채, 맹목적으로 곱사등이를 향해 다가갔다.
곱사등이가 여인을 보며 감탄을 흘렸다.
"오호. 제법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군요. 좀 더 젊었다면 제물로서도 훌륭했겠지만.... 아쉽습니다."
"어?"
곱사등이는 여인의 이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대로 마법을 일으켜 여인의 목숨을 거두려 했다.
여인은 그런 곱사등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곱사등이의 손이 여인의 이마에 닿으려던 그때.
검은 안개가 곱사등이를 덮쳤다.
"칫."
시야를 잃은 곱사등이는 일단 뒤로 크게 물러났다. 그는 어디까지나 마법사지, 전사는 아니었다.
모르는 곳에서 칼이 날아오면 곤란하다.
안개가 다시 걷히자, 당황하던 여인은 더욱 놀랐다. 흑색 갑옷을 입은 기사가 어느새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어. 사, 살려...."
데일은 여인을 무시하고 곱사등이를 바라봤다. 한층 더 무기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준비한 게 이건가? 온 성의 주민들을 홀리는 것."
"물론, 이건 계획의 첫 단추일 뿐입니다. 부디 계속 지켜봐 주시지요."
그렇게 말한 곱사등이는 익살스럽게 인사한 뒤, 거리를 빠르게 내달렸다.
마법에 홀린 성의 주민들이 그 뒤를 따랐다.
데일 속으로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때. 누군가가 데일의 손을 잡았다.
아까 구해준 중년의 여인이었다.
"아, 아, 아버님을 구해주세요. 남편이 죽고, 제게는 하나 남은 가족이에요. 그러니 제발...."
데일은 간절한 여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여전히 데일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런 데일에게 부탁할 정도로 여인에게 저 사내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 터였다.
용기.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해보겠소."
설마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올지 여인은 입을 열지 못했다.
데일은 검을 들고 앞을 바라봤다.
가로막는 악마 숭배자의 수도 많이 줄었다. 대부분은 곱사등이를 따라갔기 때문이다.
페일과 에스델도 옆으로 다가왔다.
페일이 물었다.
"온 도시에서 불온한 냄새가 진동합니다. 저대로 저 악마 숭배자를 놓쳐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 바로 쫓겠다."
그렇게 말한 데일은 거침없이 달렸다. 막아서는 악마 숭배자를 분쇄한 뒤, 곱사등이를 추격했다.
추격은 어렵지 않았다.
거리로 나온 주민들이 긴 줄을 만들어 이동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움직이는 방향에 분명 곱사등이가 있을 터였다.
그렇게 달리기를 한참. 일행은 줄지어 선 사람들이 멈춰 있는 곳에 도달했다.
그 끝에는 당연히 곱사등이가 있을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사람들이 멈춘 곳은 어느 한 구멍이었다.
도로에 난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구멍. 그 구멍 속의 공간은 기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아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까맣다.
하지만 줄지어 선 주민들은 어떠한 두려움도 없이, 한 명씩 차례대로 그 구멍에 몸을 집어넣고 있었다.
구멍에 몸을 닿으면, 주민들의 모습은 어둠에 둘러싸여 사라졌다.
주위에 곱사등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잠깐! 다들 멈추십시오! 이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됩니다!"
"모두 정신 차리세요!"
페일과 에스델이 양팔을 벌려 구멍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막았다.
하지만 단단히 홀린 사람들은 마치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물고기 떼처럼. 맹목적으로 구멍 안으로 들어가려 버둥거렸다.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페일이 입술을 깨물며 구멍을 살폈다.
"언제 이런 구멍을.... 지하실? 아니면 지하수로?"
도시의 지하 구조물을 악마 숭배자가 점거한 것일까. 마치 예전 하시나처럼?
페일이 데일에게 다급히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정도로 요란하게 굴었으니, 탈로스 님과 이단 심문관 분들도 이변을 알아차렸을 겁니다. 머지 않아 이쪽으로 오겠죠. 그분들을 기다리는 게 어떻습니까."
커다란 구멍.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저 마굴에서는 지금껏 데일이 맡아온 그 무엇보다도 위험한 냄새가 풍겼다.
저런 곳에 이 셋이서 들어가는 건 분명 위험한 모험일 것이다.
침착한 페일과 달리 에스델은 불안하게 말했다.
"그러면 저희가 여기서 기다리는 동안, 주민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야...."
페일은 말을 흐렸다.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시간이 늦어질수록 희생은 커질 것이라는 게 자명했다.
둘은 이윽고 데일에게 시선을 돌렸다.
"데일 경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데일은 구멍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칠흑처럼 어둡다. 불길한 냄새가 퍼져 나온다.
위험한 적이 저 아래에 기다리고 있다는 걸, 데일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일부러 나를 유인하는 건가?'
곱사등이는 데일을 탐냈다. 데일을 죽여 제물로 바치고 싶어했다.
그랬던 주제에, 이 구멍만을 대놓고 보이는 곳에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마치 이렇게 도발하는 것 같다.
용기가 있으면, 어디 한번 들어와 보라고. 감히 데일을 조롱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나 데일은 차분히 고민했다.
'의식이 시작되었어.'
아마도 악마 가니아고스를 되살리기 위한 의식. 지금 홀린 듯이 걷는 성의 주민들은 그 의식을 위한 제물일 터.
'의식은 완성되기 전이 가장 취약하다.'
마법사의 주문과 마찬가지다.
의식은 한번 완성되고 난 후에는 돌이킬 수 없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의식이 완성되지 못하게 하는 것.
부활한 가니아고스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부활하기 전에 막는 것이 가장 좋았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함정일수도.'
어쩌면 곱사등이는 함정을 파고 데일을 끌어들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내게도 지금이 가장 승산이 높아. 그러니.'
데일은 한차례 주위를 둘러보았다. 홀린 듯이 구멍으로 들어가는 주민들을 페일과 에스델이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역시, 저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상념을 마친 데일이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안으로 들어간다. 놈을 막아야겠다."
"...."
굳은 얼굴로 데일을 보던 페일과 에스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저희도 함께하겠습니다."
"위험할 거다. 죽을 수도 있어."
"상관없습니다. 저희의 신께서는 이럴 때 도망치라고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에스델도 결의를 다지며 말했다.
"저도 발목 잡지 않을게요."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싸움이겠지만, 이번 싸움을 극복한다면 페일과 에스델은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갈 것이다.
데일 역시 마찬가지.
이제 결심을 내렸으면, 주저할 이유는 없다. 남는 건 행동하는 것 뿐.
데일은 페일과 에스델의 허리를 팔로 단단히 휘감았다.
에스델이 멍한 얼굴로 물었다.
"...데일 경?"
"바로 가겠다."
데일은 이내 둘을 들고, 구멍을 향해 뛰었다.
몸이 붕 떠오르는 부유감에 에스델이 새된 비명을 질렀고, 그러거나 말거나 데일은 구멍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윽고, 구멍 속 기묘하게 일그러진 공간에 몸이 닿았고, 셋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이변을 깨닫고 이단 심문관과 병사들이 모여든 건, 그로부터 시간이 꽤 지난 후였다.
의식
* * *
일그러진 공간은 데일 일행을 집어삼켰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일행은 주위가 낡은 돌로 이루어진 지하 시설에 있었다.
페일은 손에서 경건한 광휘를 피워내 어둠을 밝힌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하수로인가요."
낡은 돌벽과 바닥에 얕게 흐르는 오물. 카엘름 성 지하를 관통하는 지하수로로 보였다.
에스델은 심한 악취에 집게손가락으로 코를 막았다. 그리고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천장에 우리가 들어온 구멍이 없네요."
페일이 답했다.
"공간을 왜곡하는 마법일 겁니다."
"공간 왜곡 마법이요? 그건...."
"예. 난해하고 고등한 마법이죠. 마탑에서도 대마법사 외에는 다룬 적이 없었던 걸 생각하면... 우리 상대가 그만큼 만만치 않다는 걸 의미합니다."
데일도 말없이 동의했다.
들어오는 사람을 다른 공간으로 전이시켜 버리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재주가 아니다.
괜히 이단 심문관이 악마 숭배자의 근거지를 못 찾은 게 아니었다.
'같이 들어오길 잘했군.'
데일은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상정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에스델과 페일의 허리를 손으로 감아 같이 들어온 것이다.
만약 따로 들어왔다면, 각각 전혀 다른 곳으로 떨어졌을 수도 있다.
페일이 중얼거렸다.
"다른 주민들은.... 안 보이는군요. 우리만 이곳에 떨어진 걸까요?"
"제물로 쓰려면 곧장 근처로 데려와야겠지. 반대로 불청객은 되도록 멀리 떨어트려 놓고."
그래야 힘을 빼놓기 좋다.
그리고 힘 빠진 먹잇감은 사냥하기도 편하다.
"바로 가자."
"예. 그런데, 어느 방향으로 가죠?"
길은 두 가지다. 앞과 뒤.
어느 쪽이 목적지에 이를 수 있는지는 모른다.
데일은 피 냄새를 맡으려고 해 봤다. 피를 통해 적이 있는 곳을 가늠해보려 했다.
하지만 이 불결한 장소는 악취가 너무 심한 데다, 악마 숭배자 놈이 무얼 하는지 온 공간에 피 냄새가 자욱했다.
이곳에서 후각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페일과 에스델도 고심에 빠졌다.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운에 맡겨보는 수밖에 없을까요?"
"자칫 길을 잃어버린다면 너무 늦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 미로 같은 데에서 영원히 헤맬 수도 있고요."
에스델은 고심에 잠겨 중얼거렸다.
"으음. 길을 잃는다. 길을 잃는다.... 아!"
"왜 그러십니까 에스델?"
에스델이 손뼉을 짝! 치자 페일과 데일의 시선이 모였다.
에스델은 데일을 쳐다보며 말했다.
"골라 보세요 데일 경. 앞으로 가고 싶으세요 뒤로 가고 싶으세요?"
"...왜 그러지? 다수결로 정하자는 건가?"
"일단 대답해보세요."
데일은 투구를 긁적였다. 수로의 앞과 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지만 딱히 느껴지는 건 없었다.
앞이든 뒤든, 똑같이 더럽고 낡은 수로일 뿐이었다.
데일은 대답을 채근하는 에스델에게 말했다.
"나는 앞이 나을 것 같다."
"좋아요! 그럼 뒤쪽으로 가죠!"
"?"
"에스델 자매님?"
페일이 당황하자 에스델이 말했다.
"몇 번 같이 다니면서 느꼈습니다. 데일 경은 그 커다란 늑대 없이는 자주 다니는 길도 헤맬 정도의 길치라는 걸. 신기할 정도였지요."
"설마...."
"그러니 데일 경의 반대를 선택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이야기를 곱씹어보던 페일이 턱을 어루만지며 '그럴듯한데'라고 중얼거렸다.
'대체 어디가?'
그렇게 따지고 싶은 데일이었지만, 사실. 지금은 앞이든 뒤든 선택을 내려야 하는 때다.
터무니없는 근거라도 방향이 정해졌으면, 따르는 게 옳다.
"그럼 바로 출발하죠."
"잠깐. 그전에."
둘을 불러세운 데일은 품에서 헝겊을 꺼냈다.
그리고 에스델의 입가에 직접 헝겊을 감아 주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이곳 공기는 몸에 안 좋다. 페일 너도 코와 입에 두건을 감아라."
"예? 아, 예."
"...제가 직접할 수 있습니다."
에스델은 툴툴거렸지만, 데일은 꿋꿋이 헝겊을 감아주었다.
페일도 그 모습에 빙그레 웃으며 입가에 손수건을 둘렀다.
데일이 묶는 걸 마치자, 에스델이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손수건.... 왠지 쇠비린내가 나네요.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지만, 데일 경이 늘 무기를 닦을 때 쓰던 그 헝겊은 아니죠?"
그 헝겊이 맞다.
투구를 긁적이며 잠시 대답을 않던 데일이 고개를 휙 돌리며 말했다.
"이제부터 말은 꼭 필요할 때만 해라. 어디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잠깐. 저는 아직 대답을 못 들었습니다."
"조용히."
데일은 에스델이 말을 끊으며 성큼 앞장섰다.
그 뒤를 석연치 않은 표정의 에스델이 따랐고, 맨 뒤에서 페일이 걸음을 옮겼다.
일행은 한동안 입을 다물고 이동했다. 주위는 고요했다.
오물을 밟으며 찰박이는 소리와 이따금 천장에 맺힌 물방울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는 들렸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악마 숭배자들이 있다면 그 소리가 나야 하는데.'
둘 중 하나였다.
지하수로에 소리를 퍼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마법이 걸려 있거나, 아니면 이 지하수로 자체가 아주아주 넓거나.
그렇게 이동하길 잠시.
일행은 세 갈래 길을 마주쳤다.
두 통로가 십자 모양으로 교차하는 길목이었다.
페일이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에스델이 데일을 쳐다봤다.
"데일 경은 어느 방향이 맞을 것 같으신가요."
"왼쪽."
"그다음으로는요?"
"오른쪽."
"그러면 그 두 개를 뺀 앞으로 쭉 걷죠."
"...."
이번에도 이견은 없었다.
셋은 일직선으로 계속 걸었다.
'만약 길을 잘못 들었으면 어떡하지?'
문득 데일의 머리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두려울 게 없는 그라도,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황은 있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 이레네로 오지 못해 1년간 헤맸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이런 지하를 몇 년이고 헤매는 건 사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데일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한참을 걸어가던 일행은 자리에 멈춰 섰다. 무언가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음이 들렸다. 그 소음은 이쪽으로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저 앞의 어둠에 잠긴 통로를 가늠해보던 데일이 말했다.
"온다."
* * *
지하수로에 있는 커다란 공동. 그 가운데에서 곱사등이는 만족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흐음. 괜찮군요. 의식을 앞당기길 잘했어요."
지하 공동에는 흐리멍덩한 눈의 주민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앉아 있었다.
흰 가면을 쓴 악마 숭배자들이 그런 주민들을 삼엄히 감시했다.
"이제 그 흑기사만 오면, 준비는 완벽합니다. 드디어 우리의 주인을...."
가슴이 벅차오르는지. 곱사등이는 눈가를 훔쳤다. 물론, 진짜로 눈물이 맺혀 있지는 않았다.
그런 곱사등이에게 가면을 쓴 숭배자 하나가 다가왔다.
그리고 귀에다 상황을 속삭였다.
곱사등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역시 도망치지 않고 이곳으로 들어와 줄 줄은 알았습니다."
기껍게 말한 곱사등이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머지는 거슬리는군요. 딱히 필요도 없는데 말이죠. 그러니...."
곱사등이의 눈이 한차례 명멸했다.
"선물을 보내세요. 흑기사는 괜찮겠지만, 나머지 둘은 절대 살아남을 수 없을 겁니다."
말을 마친 곱사등이는 손을 휘저었다.
고개를 끄덕인 숭배자는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빠르게 사라졌다.
그에게서 신경을 끈 곱사등이는 다시 의식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산 제물을 되어 의식을 위해 사용될 것이다.
그리고, 죽었던 악마가 다시 지상에 강림하리라.
* * *
"기척이 들린다. 그것도 아주 많이."
"예. 그렇다는 말은...."
"옳은 길로 왔다는 거죠."
이쪽을 향해 무언가가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이는 일행이 목적지에 옳게 왔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습격하지도 않았을 테니.
'설마 에스델의 방법이 성공하다니.'
운이 좋았던 걸까?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일단 성공은 성공이다.
데일은 검을 쥐며 말했다.
"숫자가 많다. 조심해라."
"예."
이윽고 다가오는 적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에스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쥐?"
몰려오는 건 쥐 떼였다.
그것도 그냥 쥐가 아닌, 사람의 허벅지 정도까지 오는 덩치를 가진 괴물 같은 쥐였다.
눈은 새빨갛게 빛나고, 이빨은 뾰족한 괴물. 그런 괴물의 숫자가 많았다. 아주아주 많았다.
쥐 떼는 수로의 앞과 뒤, 그리고 바닥과 천장과 벽을 빼곡히 채우며 이쪽을 향해 몰려들었다.
에스델이 중얼거렸다.
"차라리 악마 숭배자가 낫겠는데요."
"산 채로 뜯어먹히고 싶지 않으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싸워라."
"잠...."
데일은 곧장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의 싸움 방식 특성상, 다른 이들과 근처에 붙어 있으면 오히려 번거로웠다.
마검을 수직으로 들어 올린 데일은 그대로 아래를 향해 힘껏 내리쳤다.
쿵!
"찌익!"
한 번의 검격으로 십여 마리의 쥐가 토막 났다. 하지만 쥐 떼에게는 두려움이 없다.
동료가 분쇄되든 말든, 데일에게 맹목적으로 달려들며 이빨을 세웠다.
날카롭고 이빨이 데일의 갑옷에 부딪혀왔다. 하지만 부러지는 건 도리어 이빨 쪽이다.
짐승의 이빨은 갑옷을 뚫어내기에 충분히 날카롭지 못했다.
아무리 평범한 쥐가 아니라 하나, 쥐는 쥐였다.
문제는 그 숫자다.
오래된 지하수로에서 대를 이어 번식을 거듭한 쥐 떼는 그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데일은 베고, 베고, 또 베었다. 하지만 쥐 떼는 도무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데일은 괜찮다. 심장이 뛰지 않는 차가운 몸은 무한한 체력을 지녔다.
쥐 떼를 토막 내며 생기를 흡수하고, 그걸 원동력으로 쥐 떼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싸울 수도 있다.
아무리 그 수가 많다 하지만, 무한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에스델과 페일 쪽이다.
"당신의 종들에게 빛을 내려 주소서."
"하압!"
둘은 놀랄 만큼 잘 싸워주고 있었다.
에스델이 펼치는 방벽 속에서 페일은 신성이 서린 빛나는 철퇴를 미친 듯이 휘둘렀다.
문제는 저 둘이 데일과 달리 평범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사람은 지치기 마련이고, 신성력도 무한한 자원이 아니다.
언젠가는 쥐 떼의 파도에 쓸려나갈 터.
에스델과 페일도 그 점을 아는지 이를 악물었다.
"으으. 이럴 줄 알았다면 공격 기적을 배워둘 걸 그랬어요."
"으음."
저 둘을 저렇게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이 쥐 떼를 최대한 빨리 정리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언제나 문제는 방법이다.
아직 광역 공격 기술이 부족한 데일에게 다수를 상대하는 방법이 부족하다.
지금까지는 그냥 우직하게 하나하나 착실히 죽여나갔지만.... 이제는 변화가 필요하다.
'여럿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기술....'
데일은 머리를 굴렸다. 기억 속에서 있을지도 모를 실마리를 찾아 헤맸다.
그러다 어느 순간, 게임을 할 적의 기억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곳에서 데일은 한가지 번뜩임을 찾아냈다.
'할 수 있을까?'
직접 해본 적도 없는, 생각만 해도 어려운 기술이다.
하지만 지금은 할 수 있느냐 없느냐 고민할 때가 아니다. 이 쥐 떼를 처리하고, 저 둘을 살리려면. 해내야만 한다.
그리고 데일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무언가를 죽이 데에 천재적인 재능.
데일은 자신감을 갖기로 했다.
'간다.'
양손으로 마검의 손잡이를 굳게 부여잡고, 검을 저 앞으로 쭉 뻗었다.
갑작스럽게 데일이 자리에서 멈추자 쥐 떼도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듯, 제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뜬금 없이 찾아온 정적에 에스델과 페일도 데일을 쳐다보았다.
그다음 순간.
데일이 제자리에서 돌기 시작했다.
후웅!
처음에는 느리게. 그러다 점점 신속하게. 이윽고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데일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마검 역시 그 움직임에 맞춰 커다란 원을 그렸다. 죽음의 원. 칼날의 소용돌이. 검의 폭풍.
폭풍이 지하수로를 누비며, 쥐 떼를 문자 그대로 갈아버리기 시작했다.
의식
* * *
왼발을 오른발의 뒤로 옮겨 반 회전. 오른발을 다시 왼발의 뒤로 옮겨 또다시 절반을 회전.
익숙하지 않았던 동작은 놀랄 만큼 빠르게 숙달되었다. 데일은 마치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데일의 몸을 따라 검이 원을 그리고, 원에 닿은 쥐 떼는 그대로 핏덩이가 되었다.
데일은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효과적으로 적을 학살할 수 있는 기술을 찾아내고 만 것이다.
칼날의 폭풍이 지하수로를 휩쓸었다.
그 앞에 어떤 저항은 의미 없었다.
쥐 떼의 숫자도 별 의미는 되지 못했다.
데일이 지나간 곳에는 오로지 흉측한 쥐 사체와 널브러진 뼛조각들. 몸 어디가 잘려나가 숨을 깔딱이는 쥐밖에 남지 않았다.
"찌익...."
쥐 떼도 주춤했다.
두려움이 없는 이 괴물들의 머릿속에도 생존 본능이 잠들어 있었다.
그 본능이 저 폭풍을 보며 깨어나 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기분 탓일까?
데일이 회전하며 이동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쥐 떼는 주춤했다. 하지만 놈들에게 후퇴라는 선택지는 없다.
이내 전의를 되살린 쥐 떼는 마치 불꽃에 달려드는 벌레마냥 맹목적으로 데일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시체 더미의 일부가 되었다.
단단한 갑옷을 입었거나 가죽이 더 질겼다면. 그랬다면 이런 육탄 돌격이 데일의 전진을 더디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믿을 건 숫자밖에 없는 쥐 떼에게 남은 결과는 하나밖에 없었다.
몰살.
그렇게 한차례 폭풍이 지나갔다. 이제 지하수로에 살아 움직이는 쥐는 없었다.
적어도 이곳에는 말이다.
대를 이어 번식하고 덩치를 불리던 쥐 떼는 오늘 그 명맥이 끊기고 말았다.
카엘름 성의 주민들에게는 참으로 좋은 일이었다.
데일은 그제야 회전하는 걸 멈췄다. 검을 땅에 짚고, 고개를 돌려 자기가 만들어낸 참상을 보았다.
빼곡히 쌓인 쥐의 사체가 못해도 축구장 길이만큼 쭉 이어져 있었다.
학살이라는 말 외에는 설명할 수 없는 광경.
데일은 자기가 이룩해낸 일에 만족감을 느꼈다.
'처음치고는 나쁘지 않은데.'
게임에서나 볼법한 기술을 실전에서 구현해내다니. 묘한 뿌듯함이 가슴을 채웠다.
데일은 에스델과 페일에게 돌아가며 검은 안개를 흩뿌렸다.
안개는 쥐 사체에서 생기를 흡수해 데일에게 전해주었다.
쥐 하나하나의 생기는 보잘것없지만, 그것도 수가 많이 쌓이니 제법 많은 양이 되었다.
에스델과 페일은 그런 데일을 멍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방금 그건 대체...."
"무기를 들고 빙글빙글 돈다니. 생각해본 적도 없는 방식입니다."
에스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어지럽지는 않습니까? 멀미가 난다거나."
"별로. 아무렇지도 않다."
"으음. 그, 그건 다행이군요."
데일이 보여준 어처구니없는 무위에 페일과 에스델이 어벙하게 있던 그때였다.
우르릉.
지하수로가 한차례 진동했다. 바닥에 고인 오물이 출렁이고, 오래된 벽에서는 부스러기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진동은 이내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공기를 타고 흐르는 불길한 기운은 더욱 짙어졌다.
페일이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아무래도 시작된 모양이군요. 서둘러야겠습니다."
"그래."
일단 길을 옳게 찾아왔다는 건 확실해졌으니, 셋은 걸음 속도를 올렸다.
다행히 쥐 떼 이후로 다른 습격은 없었다.
데일은 주위에 흐르는 기분 나쁜 분위기를 감지하며 생각했다.
'점점 놈에게 가까워지고 있다.'
이제는 정말로 근처까지 다다랐다. 이제 그 곱사등이를 죽이고 놈이 벌이려는 의식을 막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던 데일은 우뚝 멈춰서야 했다.
두 가지 길이 합쳐지는 길목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마주했다.
페일이 입을 열었다.
"...탈로스 님?"
만신창이가 된 탈로스가 이단 심문관 셋을 뒤에 대동하고 서 있었다.
당황한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페일? 갑자기 사라지더니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아니, 그보다 왜 이 자와 함께 있는 겁니까. 설마, 이교도에게 협력한 건 아니겠죠?"
탈로스가 눈을 희번떡 뜨자 페일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이런 곳에서 이런 식으로 마주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가 아니다.
데일이 물었다.
"한가하게 얘기할 때가 아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아나?"
탈로스는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가, 대답했다.
"악마 숭배자 놈들이 저주받을 의식을 준비하고 있는 것 정도야 알고 있습니다."
"그냥 의식이 아니다. 가니아고스를 부활시키려 하고 있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예상을 벗어나는 이야기에 탈로스 역시 굳어버렸다.
"가니아고스는 분명.... 죽은 악마를 되살린다는 겁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군요."
"말이 된다면? 그 정도의 의식이 아니라면 성의 주민들을 모조리 산제물로 사용할 것 같나?"
"...."
탈로스는 고심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 역시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
데일의 주장이 진실에 닿아 있다는 걸. 다만, 선뜻 인정하기 힘들 뿐이었다.
대화가 끊기자, 눈치를 보던 페일이 물었다.
"탈로스 님도 이변을 눈치채고 곧바로 오신 겁니까."
탈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성으로 나오니 주민들이 모두 홀려 있고, 그 주민들을 따라가니 웬 구멍이 나오더군요. 그 안으로 들어왔더니 이런 곳이었습니다."
"다른 심문관님들은 어딨습니까?"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 수로는 공간이 왜곡된 모양이라 말이죠."
탈로스는 엄지손가락으로 뒤쪽의 심문관들을 가리켰다.
"수로를 헤매다가 몇몇 형제들과 조우하고, 쥐 떼와 싸우다 보니 이곳까지 당도했습니다."
"아. 탈로스 님도 쥐 떼와 싸우셨군요."
"도? 에스델 자매도 쥐 떼와 싸운 겁니까? 그런 것치고는 멀쩡해 보이는데요."
에스델과 페일은 어색한 표정으로 데일을 쳐다봤다.
데일 혼자서 쥐 떼를 전부 갈아버렸다는 걸 어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데일이 입을 열어 그런 분위기를 환기했다.
"한가하게 잡담할 시간은 없다. 당장 가서 부활을 막아야 한다."
"그러니까 악마의 부활은...."
탈로스의 말을 끊고 페일이 말했다.
"꼭 악마의 부활이 아니라도, 어떤 의식이든 미리 막는 게 좋습니다."
에스델도 거들었다.
"맞습니다. 지금은 협력해야 할 때입니다."
탈로스는 끄응, 하고 신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데일을 흘끔 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번만입니다."
이단 심문관이 합류하면서 일행이 7명으로 늘었다.
탈로스와 다른 이단 심문관들은 데일과 협력하는 걸 탐탁지 않아 했지만, 이런 상황에 실랑이를 벌일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었다.
일행은 지하수로를 빠르게 주파했다.
더는 쥐 떼도, 악마 숭배자도, 막아서는 적도 없었다.
"아. 저긴."
한참을 걷던 에스델이 저 앞을 가리켰다.
통로의 끝이 보였다. 통로가 끝나는 곳에 음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누구라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불길한 냄새가 풍겼다.
각자가 긴장한 얼굴로 자신의 무기를 꼬나쥐었다.
"앞장서겠다."
데일은 검을 쥔 채 신중히 걸어나갔다.
그리고 통로의 끝에 이르렀을 때, 그 안에 펼쳐진 광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여긴....'
공동이었다. 대체 지하에 어떻게 이런 공간을 만들었을지 모를 거대한 반구형의 공동.
그런 공동에는 넋을 잃은 주민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앉아 있었다.
바닥에는 피가 발목 언저리까지 고여 있었는데, 그 피의 새빨간 표면에 알 수 없는 문자가 가득 적혀 있었다.
글자는 너무 작고, 검고, 빼곡하여 마치 자그마한 벌레 떼가 모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소름 끼치는 광경.
의식에 여념이 없는지 공동의 중앙에서는 곱사등이가 무언가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를 다른 악마 숭배자들이 호위했다.
그러던 와중.
일행이 공동에 들어서자 한순간 숭배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으로 쏠렸다.
작업에 열중하던 곱사등이도 고개를 들었다.
"오호. 늦지 않게 와주셨군요. 한데 이상하군요. 여전히 뒤에 혹을 붙이고 계시다니. 분명 선물을 보내드렸을 텐데?"
데일이 물었다.
"쥐 떼를 말하는 거라면 전부 죽였다."
"으흠?"
이건 예상치 못했다는 듯. 곱사등이는 곤란함이 섞인 신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피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뭐. 상관없으려나요. 어차피 결과는 변하지 않으니. 이제 재료는 모두 모였으니, 슬슬 시작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곱사등이는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피에 새겨져 있던 문자가 동시에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멍하니 앉아 있던 주민들은 일제히 고통 어린 비명을 질렀다.
"끄. 끄아아!"
"아악!"
의식이 시작되었다. 강력한 힘이 곱사등이를 향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막아야 합니다!"
"예!"
탈로스와 이단 심문관들이 곧바로 곱사등이를 막으려 했다.
의식을 주관하는 곱사등이만 방해한다면, 의식을 막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가면을 쓴 숭배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공간의 특성상 마법을 자유롭게 사용하기는 힘들지만, 그 숫자가 만만치 않았다.
데일과 에스델, 그리고 페일도 싸움에 합류했지만, 저항이 거셌다.
계획의 막바지에 이른 만큼, 숭배자들은 목숨을 던져가며 막아냈다.
그런 주위의 혼란과는 별개로.
곱사등이는 미약하게 콧노래마저 중얼거리며 주문을 외웠다.
이 상황이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기색이었다.
문자에서 뿜어지는 빛은 점점 더 강해졌다. 주민들의 비명도 더 커졌다.
그들의 모습은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수척해져가고 있었다. 생기가 빨리고 있었다.
동시에 기분 나쁜 기운이 온 공간을 가득 메웠다. 공기가 한층 더 무거워지는 착각이 들었다.
이제 탈로스는 본능적으로 확신하고 있다.
나타나서는 안 되는 존재가 이 세상에 되살아나려 하고 있었다.
'막아야 한다.'
무슨 수를 쓰든. 그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이 의식을 막아내야 한다.
'그렇다면....'
탈로스는 가장 가능성 높은 방안을 찾아냈다. 그 섬뜩한 눈길이 향한 곳은 고통 어린 비명을 지르는 주민들이었다.
스릉.
그는 법복 아래에 감춰두었던 한 손 검을 꺼냈다.
탈로스의 검 끝은 곱사등이를 향하는 대신, 고통스러워하는 주민에게 향했다.
그 모습을 에스델이 보았다. 그녀는 당황해서 외쳤다.
"자, 잠깐. 탈로스 형제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탈로스가 차갑게 대꾸했다.
"대의를 위해 다소의 희생은 감수해야 합니다. 이들을 제물로 써 악마를 소환할 생각이라면, 그 전에 모두 죽여서 제물로서의 가치를 없애면 될 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에스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전. 하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단 심문관이 악마 숭배자로 의심되는 마을을 전부 불태워버렸다는 흉측한 이야기.
당연히 헛소문인 줄 알았다.
에스델은 교단의 형제자매들을 믿었다.
하지만 그 끔찍한 이야기가 지금 재현되려 하고 있었다.
탈로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며 말했다.
"이들 역시 악마의 제물이 되어 고통받느니, 차라리 안락한 죽음을 원할 겁니다. 보세요.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한 탈로스는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일말의 고민도 없이, 그대로 내려치려는 찰나.
턱!
누군가 그런 탈로스의 팔을 붙잡았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탈로스는 어느새 눈앞에 다가온 흑기사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데일은 아래 있는 주민을 흘끔 내려다보았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탈로스가 베려던 건 아까 중년 여성이 도와달라 부탁했던 노인이다.
데일은 덤덤히 말했다.
"약속을 했다."
"무슨 바보 같은.... 시간이 없다!"
다급하게 곱사등이를 쳐다본 탈로스가 다시 데일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도 알 텐데! 이제 이 방법 외에는 없어! 어서 이 손 놔!"
하지만 데일은 놔주지 않았다.
악마를 막기 위해 무고한 주민들을 죽인다니. 그럴 수는 없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언데드라면 몰라도, 사람은 그래서는 안 된다. 적어도 데일은 조부에게 그렇게 배워왔다.
언제나 그렇듯. 그 가르침을 따를 뿐이다. 데일은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 남아왔다.
그리고....
"이 공간에서는 제물을 죽여봤자 별 의미 없다. 이미 늦기도 했고."
"뭐라고 했습니까?"
"이미 의식이 완성되었다."
그와 동시에, 곱사등이가 손뼉을 쳤다. 그리고는 장난기 가득한 어조로 외쳤다.
"완성!"
피에 새겨진 문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더욱 거세져 온 공간을 메웠다.
불온한 기운이 곱사등이를 중심으로 휘몰아친다.
지금. 이 카엘름 성의 오래된 지하수로에서 죽은 악마가 부활하려 한다.
가니아고스
* * *
쿠구구궁.
지하 공간에 진동이 울려 퍼졌다. 바닥에 고인 피에서는 형형색색의 빛이 명멸하기를 반복했다.
이윽고 허공이 찢어졌다.
양옆으로 커튼처럼 열린 공간에서 커다랗고 미끈한 머리가 튀어나왔다.
길쭉하고 거대한 몸. 파충류 특유의 단단하고 짙은 색깔의 비늘. 다섯 개의 뱀의 머리. 어둠을 사르는 흉흉한 10개의 안광.
세상의 이치를 읽어내는 뱀. 만개의 주문을 다루는 악마.
가니아고스의 강림이었다.
곱사등이는 외쳤다.
"아아! 오셨군요! 마침내 돌아오셨군요!"
곱사등이는 눈물을 흘리며 가니아고스에게 다가갔다.
다른 악마 숭배자들도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다음 순간.
콰작!
가니아고스의 다섯 머리가 곱사등이와 숭배자들을 한입에 베어 물었다.
우득우득 씹었고. 꿀꺽 삼켜버렸다.
가니아고스의 배 한편이 부풀어 올랐다.
[으, 으윽. 여기는 어디지....]
[머리가. 머리가 아프다.]
[먹을 게 필요해.]
가니아고스의 다섯 개의 머리가 각각 두통과 허기를 호소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몸도 잘 가누지 못했다.
놈이 고통에 차 몸을 뒤틀자 주위에 앉아 있던 산제물들이 그대로 으스러졌다.
가니아고스는 본능적으로 그 산 제물들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고통 어린 포효를 내뱉었다. 부활의 후유증으로 정신이 온전치 못한 듯했다.
포효가 온 공간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 포효를 들은 것만으로도 홀린 듯이 앉아 있던 주민들이 기절해 쓰러졌다.
정신력이 약한 자들은 악마의 위압감을 버텨낼 수 없다.
"크윽. 시, 신이시여."
탈로스를 포함한 이단 심문관들도 이를 악물었다. 무언가가 머리를 짓누르는 느낌이다.
제대로 두 다리를 펴고 서 있을 수가 없다.
그들은 지상에 강림한 악마를 보고 공포에 떨었다.
공포에 질린 사람은 보통 두 가지로 나뉜다.
완전히 굳어버리거나. 이성적이지 못한 행동을 하거나.
그들은 후자였다. 이단 심문관들이 평생 쌓아온 신앙이 근거 없는 용기를 불어넣었다.
탈로스를 제외한 이단 심문관들이 일제히 땅을 박찼다.
"저 부정한 것을 지워버려야 한다!"
"신이시여 힘을! 용기를!"
"잠깐! 멈춰라!"
탈로스가 만류하려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이단 심문관들은 온몸을 짓누르는 압박감을 떨쳐내고, 용맹하게 달려들었다.
그들의 갑옷과 무기가 하얀빛을 발했다. 찬란한 빛이다.
숱한 사선을 넘어온 역전의 용사들답게 이단 심문관들의 움직임은 기민하면서도 힘이 넘쳤다.
하지만.
[으음?]
가니아고스는 고통스러워하는 와중에도 가까이 다가오는 날벌레들을 알아차렸다.
그 눈이 한번 명멸했다.
그러자 이단 심문관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강한 압력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어, 어억!"
"으윽! 이게!"
이단 심문관들이 허우적거렸다.
어떻게든 이 압박감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의미 없었다.
우득!
이단 심문관의 허리가 반대로 꺾였다. 그다음에는 다리가. 팔이. 머리가 차례대로 꺾여 마치 둥근 공처럼 찌그러졌다.
"시, 신이시여."
"죽여...."
목이 꺾여버린 이단 심문관은 그러나 여전히 숨이 붙어 있었다.
사제 특유의 질긴 생명력 탓에? 아니다. 가니아고스가 일부러 숨을 붙여놓은 것이다.
가니아고스는 하찮은 미물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즐기며, 무엇보다. 살아있는 음식을 선호한다.
이단 심문관들을 가지고 놀던 가니아고스는 그대로 아가리를 벌려,이단 심문관을 갑옷째로 삼켜버렸다.
탈로스는 그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데일이 그런 탈로스에게 다가갔다.
"이봐."
"...."
"이봐. 정신 차려라."
탈로스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데일은 손바닥을 휘둘렀다.
짝!
탈로스가 바닥을 굴렀다. 화끈한 통증에 온몸을 옭아매던 공포가 풀렸다.
"지금 무슨...!"
화를 내려는 탈로스를 무시하고, 데일은 페일과 에스델도 비슷한 방법으로 깨웠다.
물론. 탈로스보다는 훨씬 부드럽게 대했다.
데일은 정신을 차린 셋에게 빠르게 설명했다.
"척 보면 알겠지? 지금 가니아고스는 불완전한 상태다. 반쪽짜리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지."
만약 가니아고스가 온전한 상태였다면, 여기 있는 모두는 제대로 서 있지 못할 것이다.
정신력이 약한 자들은 저 악마를 보는 것만으로도 피를 뿜으며 죽었을 터.
하지만 가니아고스에게 전해지는 압박감은 생각보다 훨씬 덜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가.'
죽은 이를 부활시킨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그게 악마처럼 강력한 존재라면 더더욱.
아무리 긴 시간 계획을 준비하고, 제물을 바쳐도.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충분히 죽일 수 있다. 상대를 악마라기보다는 그냥 조금 강할 뿐인 몬스터라 생각해라. 겁먹을 필요는 없다."
사실 그것보다는 더 강한 적이다.
하지만 구태여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두려워한다고 못 이길 싸움을 이기지는 못하는 법이니.
"조금 강한 몬스터라.... 오만하군."
차갑게 지껄인 탈로스가 물었다.
"그래서. 계획은 있나? 우리는 가니아고스에 대한 정보가 적다. 좀 더 아는 게 있었다면.... 내 부하들이 근처에도 못가고 죽지는 않았을 테니."
데일이 망설임 없이 답했다.
"걱정하지 마라. 아마도 놈에 대해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은 드물 테니."
"뭐?"
그게 무슨 소리냐는 탈로스를 무시하며, 데일은 검으로 가니아고스를 가리켰다.
그리고 설명했다.
"놈은 주문이나 기적으로는 상처입히기 어렵다. 직접 무기로 베어야 한다."
뛰어난 마법사인 가니아고스는 주문에 대해 굉장히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었다.
신성으로 부리는 기적 역시 마찬가지.
거리를 좁혀 무기를 휘두르는 게 제일이었다.
"내가 놈을 상대하겠다. 그 사이에 너희들은 의식에 얽힌 주민들을 깨워서 물러나게 해야한다."
여전히 수백 명이 넘는 주민들이 홀린 듯이 앉아 있었다.
그들의 몸은 점점 핼쑥해지고 있었다. 가니아고스가 산제물의 생기로 몸을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주민들이 머지않아 죽음에 이를 것은 자명했다.
데일은 탈로스를 보며 말했다.
"죽이면 안 된다. 살아있는 채로 의식에서 벗어나게 해야 해. 안 그러면 가니아고스에게 생기가 흘러 들어갈 뿐이다."
데일은 바닥에 찰랑거리는 새빨간 피를 가리켰다. 가니아고스는 이 피를 통해 생기를 공급받고 있다.
탈로스가 아까처럼 제물을 죽이려고 해 봤자 큰 의미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 아래에서 피를 흘리면, 가니아고스에게로 생기가 흘러 들어갈 뿐이다.
설명을 들은 탈로스가 반발하려 했다.
"설령 생기가 흡수된다 해도 산제물만큼의 힘은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데일이 탈로스의 말을 끊었다.
"탈로스. 내 말을 따라라."
차갑게 내뱉는 말에 탈로스가 입을 다물었다.
데일의 말에는 항거할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탈로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흠칫했다. 한순간이나마 자신이 데일에게 압도당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옆에서 듣던 에스델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런. 데일 경 혼자서 상대하신다니.... 너무 위험합니다."
데일은 대답 대신 검을 들었다.
위험해도 해야 한다.
그리고 데일에게는 자신감이 있기도 했다.
'가니아고스.'
참으로 많이도 상대해봤던 적을 다시 한번 마주하게 되었다.
심지어 더 약해진 상태로. 겁낼 이유는 없다.
오히려 기회다. 가니아고스를 사냥하면 데일은 이전보다 더 강해질 수 있다.
데일은 더 이상의 의견은 받지 않겠다는 듯. 곧장 땅을 박찼다.
가니아고스는 여전히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지만, 점점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 그래. 기억났다. 나는 머리가 잘려 죽었어. 그 용병왕이라는 머저리.]
[대마법사라 불리던 얼간이.]
[성녀라는 이름의 갈보.]
[우둔한 기사 놈에게! 그 놈들은 아주 비겁한 수를 썼어!]
[영악한 놈들!]
거대한 몸통에서 길게 뻗어 나온 다섯 개의 머리가 각각 외쳐댔다.
죽음에 대한 억울함과 자기를 그렇게 만든 자에 대한 복수심이 불타올랐다.
그런 뜨거운 감정은 역설적으로, 혼란한 악마의 머릿속을 명료하게 해주었다.
[우리의 기특한 심복이 우리들을 되살렸군]
[하지만 의식은 완전하지 않았다. 이 몸을 유지하려면 더 많은 영혼과 피가 필요하다. 안 그러면 달이 지평선으로 사라지기 전에 우리는 다시 먼지로 되돌아갈 것이다.]
[피를 먹자! 강력하고 먹음직스러운 피!]
가니아고스의 머리가 그렇게 떠들어댈 때.
데일은 가니아고스에게 빠르게 접근했다.
그리고 가니아고스도 그런 데일을 알아차렸다. 가니아고스의 다섯 머리는 데일을 보았다.
그리고 하나 같이 놀라워했다.
[이건 대체....]
[저 놈을 잡아 먹어야 한다! 반드시!]
[운명. 운명이다.]
[한입에 삼키자!]
그들은 이게 웬 횡재냐는 듯. 하나 같이 크게 기뻐했다.
놈들의 눈이 깜빡였다. 주문 구결을 외는 일도 없이, 마법이 발동되었다.
드드득.
데일은 몸을 압박해 오는 강한 마력을 느꼈다. 데일은 압박감이 심해지기 전에 마검을 크게 휘둘렀다.
주문이 베였다. 자유로워진 데일은 한층 속도를 높였다.
이는 가니아고스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예상하지 못했기에 대처도 조금 늦었다. 데일이 땅을 박차 힘껏 뛰어올랐다.
첫째 머리의 길쭉한 목이 눈에 들어왔다. 마검을 크게 휘둘렀다.
촤아악!
마검이 녀석의 목을 베었다.
단단한 비늘 탓에 완전히 잘라내지는 못했지만, 긴 상처를 만들어냈다.
[크아악!]
비명을 지르는 첫 번째 머리. 나머지 머리들은 곧장 상황을 파악했다.
[저 검. 위험하다.]
[예사 놈이 아니군.]
[방심하면 안 된다!]
곧바로 멀쩡한 두 개의 머리의 눈이 깜빡였다.
성가시다.
악마는 주문을 영창하지 않고, 즉시 마법을 사용하기에 까다롭다.
놈이 어떤 마법을 사용할지에 대한 정보가 없으면, 대처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데일은 놈들을 잘 알았다. 어떻게 행동할지도.
'세 번째 머리는 얼음 마법. 다섯 번째 머리는 바람 계열 마법 전문.'
마력이 이동하는 흐름을 통해 마법이 어떻게 발동할지 읽은 데일은 바닥을 굴렀다.
카창!
공중에 얼음창이 수십 개가 생겨나더니, 이내 데일에게 서 있던 자리에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 다음은 바람의 칼날이다.
바람의 칼날이 데일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 수로의 벽면을 버터 자르듯 갈라버렸다.
조금만 늦었으면 갈라지는 건 데일의 머리였을 것이다.
마법을 피하자마자 다른 두 개의 머리가 데일을 향해 짓쳐 들었다.
쩍 벌린 아가리에 튀어나온 송곳니는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 송곳니에는 피부에 닿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고통을 선사하는 맹독이 맺혀 있었다.
'역시 빠르다.'
데일은 그 움직임을 신중히 읽었다.
가니아고스의 가장 까다로운 점은 저 다섯 개의 머리가 보여주는 유기적인 움직임이다.
언제나 두셋의 머리는 마법을 부리고, 나머지 머리들은 육탄 돌격을 해온다.
한 번에 다섯의 괴물을 상대하는 것과 같다. 심지어 마법을 잘 쓰는 괴물을.
그 복잡함과 현란한 공격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게 된다.
어떻게든 거리를 벌려 싸우는 걸 시도한다.
'하지만 그래선 안 돼.'
저 가니아고스를 이기려면 가까이 붙어서 싸워야 한다.
가장 위험한 방식이지만, 오로지 그 방법밖에 없다.
데일은 땅을 한 번 더 박차 도리어 가니아고스에게 더 파고들었다.
양옆에서 파고드는 두 개의 머리를 절묘하게 피해낸 뒤, 바닥을 미끄러져 가니아고스의 뒤편으로 움직였다.
쾅!
데일이 지나간 자리에 성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첫째 머리가 주문을 시전한 것이다.
데일은 그 폭발이 전해주는 충격을 도리어 이동해, 속도를 한층 높였다.
드디어 틈이 생겼다.
가니아고스의 다섯 머리의 공격을 한차례 흘려내고, 다음 공격을 하기 전까지의 작은 틈.
그리고 데일은 아무리 작은 틈이라도 절대로 놓치는 법이 없다.
콱!
데일은 가니아고스의 등에 기어코 마검을 찔러넣는 데에 성공했다.
[이놈!]
강한 풍압이 데일을 날려버렸다.
미리 마검을 몸에 기대 대비하고 있던 데일은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다시 가니아고스와의 거리가 멀어졌다. 이제 방금 전 선보였던 아슬아슬한 묘기를 반복해야 할 것이다.
가니아고스의 힘이 다할 때까지.
단 한 번만 실수해도 목숨을 잃게 되는 위험한 승부.
하지만 상관없다.
단 한 번이라도 실수하지 않는다면 데일의 승리이니까.
그리고 그런 데일의 활약을 에스델과 페일, 그리고 탈로스가 당황스럽게 바라보았다.
"대체 어떻게."
"저 거리에서 다섯 개의 머리랑 싸워내다니. 마치 저 악마랑 수백 번은 싸워본 것 같지 않습니까. 대단합니다!"
"...."
감탄하는 둘과 다르게 탈로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충격받은 눈으로 데일을 바라볼 뿐.
그는 자기가 쥔 검에 눈길을 주었다. 자신 역시 저런 움직임을 보여줄 수 있을까? 그 희번떡 뜬 눈에 처음으로 회의감과 허망함이 감돌았다.
그러던 탈로스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리고 말했다.
"구경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계속해야 합니다."
"아, 예!"
셋은 주민들에게 걸려 있는 주문을 최대한 빨리 해제한 뒤, 그들을 공동 밖으로 옮겼다.
이곳에 잡혀 온 사람만 수백 명이라 굉장히 품이 많이 드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악마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산 제물로 사용할 사람 하나가 줄어들 때마다, 악마의 힘은 약해질 것이다.
데일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만큼 이들 역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반면.
데일을 상대하는 가니아고스는 심히 당황하고 있었다.
[왜지? 왜 우리 움직임을 훤히 꿰뚫고 있는 거지?]
[우리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게 아닌가?]
[불가능해!]
그들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데일이 예사로운 적이 아니라는 것을.
그런 데일이 다시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 전의 공방을 반복하면 이길 수 있을까?
이길 수도 있다. 여전히 가니아고스는 강력했다. 승산을 따진다면 훨씬 우위에 있을 것이다.
문제는 시간이 가니아고스의 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니아고스는 현재 산제물과 의식에 의지해 이 세상에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몸이 붕괴하지 않게.
그리고 죽음으로 되돌아가지 않게 하려면 한시라도 더 빨리 많은 인간을 먹어 치워야 한다.
가니아고스는 위기감을 느꼈다.
[위험하다.]
[산 제물을 계속 빼돌리고 있다. 저놈들도 죽여야 한다.]
[지체할 시간이 없어.]
[그렇다면....]
다섯 개의 머리가 의견의 일치를 모였다.
그들의 눈이 동시에 흉흉한 안광을 뿜어냈다.
그간 아끼고 있던 막대한 마력이 몸에서 나왔다. 온 공동이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마력 농도가 진해졌다.
지진이라도 난 듯 공간이 우르릉 울린다.
돌 부스러기가 아래를 향해 쏟아져 내린다.
강한 압력이 온 공간을 찍어누른다. 데일은 버티지 못하고 두 무릎을 꿇었다.
'이런.'
데일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가니아고스가 숨겨온 자신의 온 힘을 개방하려 하고 있었다.
이걸 게임식으로 말하면....
'2페이즈가 시작되는군.'
가니아고스
* * *
가니아고스는 온전치 못한 상태다. 본래 힘의 일부밖에 쓰지 못하는 상태.
그런 상황에서 지금껏 아껴두던 힘을 끌어내 쓰겠다는 건, 가니아고스도 각오를 다졌다는 의미다.
쿠구구구!
강한 압력이 가니아고스의 주위에 퍼져나갔다.
데일은 사방에서 짓쳐 오는 힘에 무릎을 꿇었다.
'공간 마법.'
기이하게 왜곡된 공간은 공동에 있는 모두를 짓눌렀다.
특히 가니아고스에 가까워질수록 압력은 강해졌다. 악마 주위에 앉아 있던 산제물들은 그대로 짓뭉개져 핏물이 되었다.
가니아고스의 다섯 머리가 말했다.
[나 세상의 이치를 읽어내는 뱀, 가니아고스가 선언하느니.]
[두 발로 걷는 것들은 바닥을 기게 될 것이며.]
[너흰 다시는 지상의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다섯 개의 머리는 계속해서 주문을 외웠다.
악마가 주문 구결을 직접 읊는다는 건 그만큼 강력한 마법을 사용한다는 증거다.
다섯 마리는 마치 의식을 공유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같은 주문 구결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읊었다.
그럴수록 주위에 전해지는 압력은더욱 강해졌다.
'녀석이 공간 왜곡 마법을 사용했다.'
공간 자체를 비틀어버리는 고등하고 강력한 주문.
데일은 팔에 힘을 주어 어렵사리 마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잠시나마 몸에 전해지는 압력이 사라졌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한순간이었다. 또 다시 압력이 데일을 짓누르기 전, 데일은 뒤로 거리를 벌렸다.
가니아고스의 공간 왜곡 마법은 거리가 멀어질수록 그 효과가 약해졌다.
에스델이 급하게 신성의 장벽을 펼치며 데일에게 말했다.
"데일 경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페일이 질린 얼굴로 말했다.
"큰일입니다. 압력이 점점 거세지고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전부 짓눌러질 겁니다."
"그래."
탈로스가 물었다.
"무언가 계획이 있나?"
그리고 이어지는 정적.
갑작스럽게 찾아온 침묵은 불과 반 호흡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이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데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 마법을 뚫고, 놈을 직접 공격해야 한다."
"그러니까 저 마법을 어떻게 뚫는단 말인가!"
"...뾰족한 수는 없다. 그냥 몸으로 받아내야 한다."
아니. 사실 공략법은 있다.
강력한 악마들에게도 약점은 있기 마련이다.
가령, 가니아고스는 냉기와 불에 약하다. 불타는 유물 검이라도 있으면 좀 더 상대하기 수월할 터.
하지만 데일은 준비가 안 되어 있다. 오늘 밤 가니아고스를 마주한 건 여러모로 그의 예상을 벗어난 일이었다.
가니아고스가 완벽한 상태가 아닌 것처럼 데일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지금 가진 것만으로 부딪히는 수밖에.
다행히 데일은 혼자가 아니다.
구태여 신경 써가며 이곳까지 데려온 페일과 에스델이 있었다. 그리고 탈로스도
데일은 셋에게 말했다.
"최대한 악마에게 다가가야 한다. 나를 위해 길을 뚫어줘라. 나머지는 내가 하겠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에스델은 침을 꿀꺽 삼켰고, 페일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저 악마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데에 겁을 먹은 것이다.
탈로스는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누으로 데일을 쳐다보았다.
데일이 그런 탈로스에게 물었다.
"할 수 있겠나?"
데일의 질문에 탈로스는 대답 대신 콧숨을 내뿜었다.
"지금은 그것 외에 방법은 없겠군. 한번 해보겠다."
페일과 에스델도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움을 느낄지언정, 여기까지 와서 도망치는 이는 없었다.
데일이 말했다.
"가자. 놈이 더 성가신 마법을 사용하기 전에."
탈로스가 앞으로 나섰다.
"내가 앞장서겠다."
그리고는 기도를 읊어, 주위를 둘러싸는 신성의 장벽을 만들어냈다.
이어서 페일이 함께 기도를 읊었고, 에스델도 동참했다.
마치 가니아고스가 그러는 것처럼, 이 셋도 똑같은 기도문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외웠다.
그러자 일행을 감싼 장벽이 더욱 찬란하게 빛났다. 그 신성한 빛에 데일은 조금 괴로웠다.
하지만 버틸만했다.
셋은 기도문을 읊으며 한걸음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드득!
강한 압력이 장벽에 전해진다. 나무토막이 으스러지는 듯한 둔탁한 소음이 울렸다.
하지만 장벽은 깨지지 않았다.
일행은 계속 전진했다.
그리고 그런 셋에게 둘러싸인 데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니아고스 역시 이쪽의 접근을 알아차렸다. 온 공간에 휘몰아치던 마력이 일행에게로 집중되었다.
마력과 신성력의 격돌.
마치 북쪽의 하늘에 오로라가 펼쳐지는 것처럼, 형형색색의 색채가 공간을 수놓았다.
그 모습은 심미적 감성을 잃어버린 데일이 보기에도.... 아름다웠다.
언젠가 발튼이랑 했던 대화가 떠오른다.
신성력과 마력은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없는 힘이 아닐까. 하는 불경한 대화.
지금 이 광경을 보며 데일은 그 말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도 여기까지였다.
가니아고스에게 다가갈수록 짓눌러 오는 공간의 힘이 너무 강력했다.
가니아고스 역시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빛을 추종하는 노예들이!]
[건방지구나.]
[우리가 아무리 약해졌다 하나, 너희 같은 벌레들에게 당해줄 듯싶으냐?]
그렇게 지껄이는 말에서 데일은 두려움을 읽어냈다.
'악마가 두려움을 느낀다고?'
가니아고스는 한번 죽음을 겪었다. 죽음을 경험했기에, 다른 무엇보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악마가 두려움을 느끼다니!
두려움을 느끼는 적은 더는 두려운 적이 아니다.
데일이 일전에 허세를 섞어 말했던 말처럼, 저 눈앞의 적은 이제 조금 크고. 성가신 몬스터일 뿐이다.
데일은 마검을 꼬나쥐었다.
마침 그 시점에 일행의 전진도 눈에 띄게 느려지고 있었다.
가니아고스에게 가까워질수록 압력이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지고 있었다.
절대 깨지지 않을 것 같은 빛의 장벽에도 균열이 이고 있었다.
"으윽."
탈로스와 페일, 에스델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눈은 빨갛게 충혈되었다. 코에서 피가 한줄기 흘러내린다.
데일은 이들이 한계에 달했다는 걸 알아챘다.
그렇기에 검을 쥐고,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물러나라. 여기서부터는 내가 가겠다."
데일은 마검을 장벽에 겨누었다. 데일이 장벽을 뚫고 나가는 순간. 그때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데일이 가니아고스에게 당도해 놈을 죽이느냐.
아니면 그전에 짓눌러져 무릎 꿇느냐.
데일이 실패하며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는다.
그러고도 모자라 되살아난 악마는 안 그래도 몰락해가는 이 세상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데일은 패배하기 위해 이 어둡고 습한 지하까지 내려온 게 아니다.
데일은 마지막으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오로지 가니아고스에게 집중하며, 조금 뒤에 있을 찰나의 전투를 상상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데일이 마검으로 장막을 찢으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자 강한 압력이 데일을 짓눌렀다.
드득!
데일은 땅에 주저앉아 무릎을 꿇었다. 모든 마력이 데일에게 집중되었다.
무겁다. 마치 어깨에 거대한 바위가 올려진 것처럼 좀처럼 일어설 수가 없다.
압력은 점점 거세진다. 딛고 선 땅이 쩌적 갈라지더니 움푹 내려앉는다.
데일은 그대로 땅에 널브러지지...않았다.
천천히 무릎을 폈고. 온 압력을 이겨내며 두 다리로 꿋꿋이 섰다.
움직이지 않는 팔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아래로 내리쳤다.
화악!
가니아고스의 주문이 베였다. 온몸을 짓누르던 압력도 한순간이나마 사라졌다.
데일은 땅을 박찼다. 온 힘을 다해 가니아고스에게 쇄도했다.
[어림없다!]
다시 한번 주문이 집중되었다.
날아올랐던 데일이 곧바로 땅에 처박혔다.
쿵!
"데일 경!"
"!"
에스델과 페일이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데일은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한걸음. 또 한걸음. 착실하게 가니아고스에게 다가갔다.
당황한 가니아고스는 커다란 꼬리를 들었다. 주문으로는 멈출 수 없다는 생각에 가장 단순하지만 확실한 방법으로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높이 든 꼬리를 그대로 데일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지켜보던 에스델은 눈을 질끔 감았다.
콰앙!
이어지는 굉음. 하지만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데일은 아슬아슬하게 꼬리를 피해냈다. 왼손의 유물 장갑을 최대 출력으로 발동시켜, 그 충격파로 옆으로 구른 것이다.
당황한 가니아고스가 다시 꼬리를 거두려 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데일과 너무 거리가 가까웠다.
데일은 검을 들어 가니아고스의 꼬리 끝을 일격에 잘라버렸다.
파악!
푸른 피가 튀었다. 데일은 손을 뻗어 그 피를 흡수했다.
무려 악마의 피다. 강력한 생기가 몸을 채웠다. 다시 힘이 차오른다.
데일은 포효를 내지르며 가니아고스의 꼬리를 타고 올랐다. 파충류 특유의 우둘투둘한 비늘을 힘껏 밟았다.
그렇게 해 놈의 목까지 올라, 마검을 수평으로 크게 휘둘렀다.
촤악!
[그악!]
마검이 첫 번째 머리의 목에 반쯤 파고들었다.
데일은 두 다리로 녀석의 목에 단단히 달라붙은 뒤, 마검을 톱질하듯 아래위로 움직였다.
뼈 깎이는 소리와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퍼져다 마침내 뚝. 하고 목이 떨어졌다.
기어코 목을 잘라내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데일은 안다.
시간이 지나면 저 머리는 다시 재생할 것이다. 제한 시간 내에 나머지 머리도 모두 잘라야 한다.
데일은 다음 머리를 향해 마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온 무게를 실은 힘으로 내려치려 했다.
크리스틴이 보였던 세련된 검술과는 큰 차이가 있는 무식하고 단순한 움직임.
하지만 저런 괴물을 상대하려면 무식하게 싸울 수밖에 없다.
데일은 그대로 가니아고스의 두 번째 머리를 두동강내려 했다.
그냥 두고 볼 가니아고스가 아니다. 세 번째 머리가 데일을 향해 아가리를 벌렸다.
[놈!]
맹독이 서린 송곳니가 흉갑을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가니아고스는 모를 것이다. 놈을 고정시키기 위해, 데일이 일부러 공격을 허용했다는 것을.
데일은 몸속에 독이 퍼지든 말든. 홀스터에서 도끼를 꺼내 그대로 녀석의 뒤통수에 내리쳤다.
우적!
질긴 살을 파고든 도끼가 단단한 머리뼈에 가로막혔다.
데일은 주먹을 높이 든 뒤. 박혀 있는 도끼를 힘껏 내리쳤다.
콱!
비로소 도끼날이 뼈를 뚫고 뇌를 파고들었다.
데일을 깨물었던 턱에도 힘이 빠졌다.
아가리에서 벗어난 데일이 바닥에 착지했다. 가니아고스를 올려다보았다.
몸에는 독이 퍼지고, 온몸은 너덜너덜했지만, 그 눈빛만큼은 빛나고 있었다.
가니아고스조차 당황할 정도로 흉흉한 빛이었다.
동시에 가니아고스는 알아차렸다. 눈앞의 흑기사와 육탄전으로 맞붙어서는 안 된다.
경험 많은 악마인 그들도, 이렇게 우악스러우면서도 절묘하게 싸우는 전사를 맞닥뜨려본 적은 없었다.
남은 세 개의 머리가 다급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데일은 갈고리를 꺼내 갈라진 목 부분에 단단히 고정한 뒤. 밧줄을 힘껏 잡아당겼다.
가니아고스의 눈높이로 떠오른 데일이 마검을 위로 힘껏 들어 올렸다.
동시에 가니아고스의 주문이 완성되었다. 그들은 마력으로 넓은 범위를 짓누르는 대신.
한 점에 힘을 집중하기로 했다.
그 목표는 데일의 오른팔이다. 공간이 기이하게 일그러지더니, 파각!
데일의 오른팔이 그대로 잘려나갔다.
"...."
상관없다. 데일에게는 아직 왼팔이 남았다.
데일은 검끝을 아래로 향한 뒤, 그대로 마검을 내리찍었다.
파악!
마검이 세 번째 머리의 한가운데에 깊숙이 박혀 턱을 뚫고 나왔다. 분명 치명상이다.
하지만 확인할 시간은 없었다. 검을 뽑을 시간도 없다. 데일 주위 공간이 계속해 일그러지고 있었다.
드득!
왼쪽 무릎 아래가 완전히 찌그러졌다. 제대로 걷기도 힘들다. 하지만 데일은 여전히 밧줄을 들고 있었다.
밧줄의 탄성을 이용해, 위치를 빠르게 이동시켰다. 그리고 그 속도를 이용해 네 번째 머리에 달라붙었다.
남은 한쪽 팔과 다리로 녀석의 목을 힘껏 옭아맸다.
[이거 놔!]
네 번째 머리가 미친 듯이 버둥거렸다. 천장과 바닥에 머리를 부딪히며 발광했다.
하지만 데일은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밧줄을 회수해 녀석의 목에 칭칭 휘감았다.
그 뒤.
품에 있는 무기란 무기는 모두 꺼내 녀석의 턱 아래를 미친 듯이 찔러댔다.
푸른 피가 흥건히 튀고, 가니아고스는 괴로워하다 바닥에 천천히 허물어졌다. 데일은 홀스터에 걸린 파우치를 버린 뒤.
남은 오른발만을 이용해 힘껏 뛰어올랐다.
역설적이지만. 무기를 벗어던지고 팔다리를 잃었기에 몸이 가벼워졌다. 덕분에 생각보다 더 높이 뛰어 오를 수 있었다.
가니아고스의 마지막 머리보다 더 높게.
이제 남은 건 하나다. 무기를 낙하하는 힘을 이용해 찌르기만 하면....
'이런.'
문제가 생겼다
싸우는 와중에 무기를 전부 사용하고 말았다.
미처 예상하지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 그 찰나의 시간이 가니아고스에게 틈을 벌어주었다.
녀석이 주문을 완성했다.
파앙!
또다시 공간이 일그러지면 하나 남은 오른쪽 다리가 완전히 잘려 나갔다.
데일의 몸이 차가운 피를 철철 흘리며 낙하했다. 그 아래에 가니아고스가 입을 쩍 벌렸다.
가니아고스가 두려움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인정한다 기사야. 너는 비단 영혼만 특별한 게 아니었구나. 네 강함을 인정하겠다. 그리고 너를 잊지 않으마.]
마치 다 끝났다는 말투.
승리 선언.
페일은 탄식을 흘렸고, 에스델은 눈을 질끈 감았으며, 탈로스가 고개를 숙였다.
끝났다.
모두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끝나지 않았어.'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비록 팔다리가 세 개나 날아갔지만 아직 몸은 움직인다.
포기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승리로 이르는 길을 찾아내야만 한다.
'무기가 필요해.'
데일은 다급하게 품을 뒤졌다. 그리고 무언가 둔탁한 게 걸렸다. 이 묵직한 물건은....
'성경?'
이 무슨 우연인가.
데일이 한 손으로 가까스로 집어 든 건, 이전. 사제들이 감사의 표시로 주었던 두꺼운 성경이다.
데일은 받기를 거절했지만, 사제들은 끝끝내 성경을 건네주려 했더랬다.
귀찮아진 데일은 일단 받아들였었는데....
그리고 데일의 머릿속에 섬광이 지나갔다.
성경은 종이. 그리고 종이는 불에 잘 탄다.
데일은 일전에 밤의 여신의 성경을 태워봐서 안다.
성경만큼 훌륭한 땔감은 드물다는 것을.
'그리고 가니아고스는 불에 약하다.'
데일은 주머니에 남은 부싯돌을 꺼내 성경에 올려놓았다.
이제 가니아고스의 어금니가 바로 앞에 보인다. 승부를 가를 찰나의 순간.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착각이 든다.
기회는 한 번.
데일은 잘려나간 오른 팔꿈치를 들어 올린 뒤.... 부싯돌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캉!
갑옷과 부싯돌이 부딪히며 불티가 한 차례 튀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성경에 불이 활활 타올랐다.
마치 스스로를 불태워 온 세상을 밝혔다는 빛의 여신처럼.
성경에서는 그 무엇보다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거짓말 같은 광경이다. 시도한 데일 본인도 놀랄 정도였다.
데일은 문득, 사제가 성경을 건네주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삶의 방향을 잃을 때, 분명 답을 알려줄 거예요.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 답을 알려주긴 하는군.'
데일은 불타는 성경을 가니아고스의 아가리 속에 내리찍었다.
송곳니를 이용해 그대로 데일을 씹어먹으려던 가니아고스는 갑작스러운 열기에 놀라 입을 크게 벌렸다.
데일은 가니아고스의 입안으로 착지했다.
놈의 입은 어둡고 끈적했다. 그 어둠 속에서 성경의 불빛이 활활 불타올랐다.
데일은 가니아고스가 아가리를 닫기 전에 팔을 활짝 벌렸다. 녀석의 윗 입을 껴안듯이 단단히 잡았다.
가니아고스는 데일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데일이 서서히 힘을 주며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니아고스의 위턱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의도를 알아차린 가니아고스는 당황했다. 설마 했던 심정이 적중했다.
내버려 둬선 안 된다. 어떻게든 데일을 떨쳐내야 한다.
하지만 악마의 피를 흡수한 데일의 몸속에는 강한 힘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데일은 한번 잡은 위턱을 결코 놓아주지 않았다.
당황한 가니아고스가 무언가 말하려던 그때.
[잠...!]
빠드득.
가까스로 버티던 비늘과 뼈에서 나서는 안 될 소리가 울렸다.
데일은 마지막 박차를 가했다. 온 힘을 끌어모았다. 팔에 힘을 집중했다.
그리고 마침내.
드드득!
위턱이 비틀어졌다. 데일은 턱을 비튼 상태에서 뒤로 세게 잡아당겼다.
그러자 가니아고스의 위턱이 찢어졌다. 두꺼운 뼈가 뽑혀 나왔다.
쿵!
데일은 가니아고스의 위턱을 그대로 바닥에 던져버렸다.
산채로 아가리가 찢긴 가니아고스의 몸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데일은 비처럼 쏟아지는 가니아고스의 피를 얼굴에 맞으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포효를 내질렀다.
그리고 그런 데일을 수많은 시선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 * *
리델은 카엘름 성에서 평생을 살아온 노인이다.
이 나이 지긋한 노인은 솜씨 좋은 무두장이였는데, 가죽 무두질에서는 이 성에서 비할 바가 없다는 평가를 듣는 사람이었다.
또, 리델은 신심이 깊기로도 유명했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교단에 찾아가 예배를 드렸다.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고, 착한 며느리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자가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아들과 손자는 불우한 사고로 죽고 말았다.
그때 그가 얼마나 상심했던지.
지금도 리델은 술이 없으면 잠을 못 이루었다.
하지만 그는 신앙심을 잃지 않았다.
이 불행은 자기한테 주어진 시련이며, 그나마 자신에게 남아준 착한 며느리는 신께서 보내주신 소중한 선물이라 여겼다.
오늘도 그는 신께 감사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는 며느리에게 잘 자라고 말한 뒤, 깊은 잠에 들었다.
한데 눈을 뜨고 보니 웬 지하 공동 안이었다.
눈을 희번떡 뜬 사제와 어여쁜 여사제가 뭐라고 설명했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꿈을 꾸는 건가?'
아니. 꿈은 아니었다. 리델은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홀린 듯이 이곳으로 걸어오던 자신을. 그런 자신을 어떻게든 붙잡으려던 며느리를. 그런 며느리를 죽이려 한 괴한과 그 괴한을 막아선 흑기사까지.
리델은 고개를 돌렸다.
굉음이 들려오는 곳에는 보기만 해도 끔찍한, 뱀같이 생긴 괴물이 발광하고 있었다.
무지렁이인 리델이지만 저 괴물이 예사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괴물을 한 기사가 용감히 맞서고 있었다.
아까 며느리를 지켜준 흑기사다.
그리고 흑기사는 분명....
'이교를 따르는 기사일 터인데.'
흑기사는 괴물과 우악스럽게 싸웠다. 저 괴물을 이기기는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났다.
손에 불타는 무언가를 든 흑기사가 괴물의 입속에 파고들더니, 기어코 그 끔찍한 괴물의 아가리를 산채로 찢어버리는 데에 성공했다.
리델은 전율했다.
'신이시여. 맙소다. 신이시여! 저런 대단한 기사가 우리를 지켜주시다니! 이게 당신의 뜻은.... 아니겠지요. 그는 이교의 기사이니.'
리델은 살아생전 처음으로 신앙적 흔들림을 느꼈다.
그리고 이 순간이, 밤의 여신을 따르는 신도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는 전환점이었다.
되돌아오다
* * *
데일은 전투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발아래에는 죽은 가니아고스의 시체가 꿈틀거렸다. 녀석의 몸이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죽음에서 부활한 가니아고스의 신체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붕괴하는 것이다.
데일은 그런 가니아고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투구를 벗었다.
색이 바랜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급하게 다가온 에스델이 물었다.
"괜찮으십니... 지금 뭐하시나요?"
데일은 가니아고스의 몸에 머리를 가까이 하며 말했다.
"가니아고스의 피는 맹독이다. 피부에 닿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고통을 준다."
"...그런데 왜?"
"동시에 가니아고스의 피는 마력이 듬뿍 담긴 영약이나 다름없다."
그렇다. 가니아고스의 피는 마법사들이라면 환장할 보물이나 다름없다.
이런 걸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다.
에스델이 미간을 좁혔다.
"잠깐. 맹독이라면서요."
"나는 괜찮다."
"괜찮다니 그게 무슨...."
"나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데일에게 가이아고스의 피는 부담 없는 영약에 불과했다.
비록 속이 조금 녹아내리겠지만, 데일의 신체라면 금방 나을 것이다.
'직접 마시는 게 낫겠지.'
건틀릿을 박아 넣어 피를 흡수하는 수도 있었다. 하지만 데일은 혹시나 몰라 입가를 대 가이아고스의 피를 마셨다.
꿀꺽.
가니아고스의 피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끔찍한 냄새가 퍼져나 왔다.
데일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미각을 잃은 데에 감사했다.
악마의 피는 냄새만큼이나 끔찍한 맛을 지녔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생으로 피를 마시는 데일을 보며 에스델은 헛구역질했다.
옆에 다가온 탈로스도 살벌한 눈으로 말했다.
"악마의 피를 마시는 기사라니. 대륙에 있는 모든 이단 심문관에게 쫓겨도 할 말 없다는 걸 알고 있나?"
입가를 새빨갛게 물들인 데일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막을 건가?"
탈로스는 그런 데일을 쳐다보다, 죽은 가니아고스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꽉쥔 손에는 땀이 흥건하게 베어나왔다.
탈로스는 알았다.
'이 자가 아니었다면 이길 수 없었다.'
탈로스는 데일이 어떻게 싸우는지를 보았다. 자기 몸을 신경 쓰지 않고, 끝끝내 가니아고스의 아가리를 찢어버리는 광경을.
그 누구라도 그런 모습을 본다면... 압도당하고 말 것이다.
숱한 사선을 넘나든 이단 심문관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탈로스는 싫어도 인정 해야했다.
데일이 없었다면 더 큰 재앙이 벌어졌을 것이라는 걸.
탈로스는 눈을 감았다.
"악마의 피와 살점은 대지를 오염시킨다는 기록이 있다. 이대로 놔두면 이 지하 수로에는 또 다른 괴물이 생겨나겠지. 그걸 막기 위한 조치라고 생각하겠다."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탈로스가 나름의 융통성을 발휘해줬다.
사실, 막았어도 상관없다.
데일은 탈로스를 때려눕히는 한이 있더라도 가니아고스의 피를 취했을 거다.
사투 끝에 가니아고스를 처치한 건 데일이었고, 승자는 패자의 모든 걸 취할 권리가 있다.
피를 될 수 있는 한 빨아들인 데일은 몸 안에 느껴지는 짙은 마력을 느꼈다.
다행히 가니아고스의 피는 예상했던 결과를 주었다.
기존의 마력보다 최소 두 배는 많은 마력이 몸에 맴돌았다.
물론. 당장 데일이 마력을 쓸 수 있는 기술은 검은 안개뿐이다.
하지만 데일은 진한 만족감을 느꼈다.
'이번에 반드시 등급이 오를 거다.'
본래 힘에 절반조차 미치지 않았다 해도, 악마는 악마다. 그 생기를 취했으니 등급이 오를 건 정해진 것과 다름없다.
'4등급에서는 제법 괜찮은 기술을 배울 수 있지.'
4등급은 5등급을 달성해 특성화를 들어는 가기 직전 단계로, 흑기사의 공용 기술을 배울 수 있다.
흑기사의 공용 기술은 하나 같이 준수한 성능을 지녔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성능이 좋은 만큼, 기술을 사용하는 데에 드는 마력의 양도 많았다.
자칫 잘못하면 기껏 기술을 배워놓고 활용하지도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 가니아고스의 피를 마셔 마력이 늘었으니, 그 걱정은 한시름 놓았다.
피 빠는 걸 마친 데일은 에스델에게 부탁했다.
"내 팔 좀 가져와 줬으면 좋겠군."
"예? 아, 예."
"기왕이면 다리도."
"...예."
에스델이 분주하게 주위를 뒤져 찌그러진 팔과 잘려 나간 다리 따위를 가져다주었다.
데일이 덤덤히 감사를 표했다.
"고맙다."
"이 정도로는 고맙기는요.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합니다."
"그래. 이제 가봐도 된다."
에스델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
"몸이 낫는 걸 보고 가겠습니다."
"나는 괜찮다."
"보고 가겠습니다."
데일은 의아해했다. 에스델이 왜 고집을 부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깨를 으쓱인 데일은 하나 남은 팔을 가니아고스의 시체에 찔러넣었다.
강한 생기와 잔혼이 몸에 홍수처럼 흘러들어왔다.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생기를 흡수하며 찌그러졌던 갑옷이 말끔해지고, 잘린 팔도 달라붙었다.
하지만 생기를 중간 정도 흡수했을 때, 데일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데일은 본능적으로 가니아고스에게서 건틀릿을 빼고 물끄러미 자기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에스델이 물었다.
"왜 그러시나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본능이 외쳤다. 여기서 더 흡수해서는 안 된다는 걸.
어떤 본능인지는 모르겠다. 데일의 내면에 있는 언데드로서의 본능인지 아니면 인간으로서의 본능인지.
어쨌든 데일은 멈췄다. 데일은 욕심을 절제할 줄 아는 사내였다.
'기분 탓은... 아닌 것 같은데.'
데일의 몸이 멀쩡해지자, 에스델은 데일의 갑옷 이곳저곳을 유심히 살폈다.
혹시나 흠집이라도 있나, 눈을 날카롭게 뜨고 집중했다.
너무 진지해서 선뜻 건드리기도 어려웠다.
그러고는 멀쩡한 걸 확인하고는 안심한 듯.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 이제 다 나으셨네요. 그럼 전 이만 주민분들을 도와드리러 갈게요."
"그러니까 괜찮다니까."
에스델은 이제 막 깨어나기 시작하는 주민들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저럴 거면 굳이 왜 낫는 걸 확인하고 가는 건지. 데일의 몸은 사람의 그것처럼 나약하지도 않은데 말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데일은 남은 가니아고스의 시체를 살폈다.
그중에서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가니아고스의 송곳니에 맺힌 짙푸른 맹독.
이 맹독은 가니아고스의 피와 같이 닿는 상대에게 끔찍한 고통을 주는데, 어디서도 쉽게 구하기 힘든 귀한 물건이다.
저런 귀한 걸 그냥 버릴 수는 없었다.
'병이 필요해.'
다행히 페일이 성수가 든 유리병을 가지고 있었다.
데일은 유리병 안에 든 성수를 버린 뒤, 그 안에 가니아고스의 맹독을 한 방울씩 담았다.
데일이 작업을 모두 마쳤을 때쯤.
에스델과 페일은 사람들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 성공했다.
공동의 모두가 데일을 보고 있었다.
호기심. 경계. 두려움. 그리고 경의.
이들 역시 저 괴물을 누가 쓰러트렸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데일은 그런 시선들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페일에게 물었다.
"준비는 끝났나?"
"예!"
"그럼 돌아가자."
"예. 이제 지하수로는 지긋지긋하니까요."
데일을 선두로 일행이 걸음을 옮겼다. 이제 지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