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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 *

프라우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다.

데일은 두 마차의 인원을 섞었다.

앞차에는 엘레나와 프라우, 그리고 에스델이.

나머지는 전부 뒷차에 탔다.

데일이 함께하자, 마법사들이 일으키는 소란은 더는 없었다.

그들은 언제 그렇게 시끄럽게 떠들었냐는 듯. 조용히 책을 들여다보았다.

'프라우 녀석이 또 호들갑을 떨었군. 이렇게 조용한데.'

데일도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책을 읽었다.

안드레이가 빌려준, 영웅들의 행적을 담은 책이었다.

'얼굴 없는 기사. 주로 북부에서 활동했으며, 항상 투구를 깊이 눌러써 이런 별명이 붙었다. 다른 영웅들 중에서 유독 성녀랑 친했고, 교단에 들른 일도 많아, 성기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도 돌았다. 손에 든 한 자루의 룬검은 얼굴 없는 기사의 상징이 되었다.'

기사가 늘 투구를 눌러쓴 이유는 기억이 난다.

게임 속에서 질병을 다루는 악마랑 싸운 적이 있었는데, 그때 끔찍한 병에 걸려 얼굴이 흉하게 녹아내렸던 것이다.

'다른 캐릭터의 호감도를 떨어트리지 않기 위해서는 투구를 눌러써야 했지.'

영웅들이 데일이 키우던 캐릭터와 동일한 인물임을 나타내는 증거와도 같았다.

하지마 책을 읽던 데일은 한 가지 의아한 점을 깨달았다.

'왜 굳이 이름을 안 쓰는 거지?'

기사에게는 아렌이라는 이름이 있다. 근데 왜 굳이 이름을 밝히지 않고, 별명으로 불리길 원했을까.

다른 영웅들도 마찬가지다.

용병왕. 성녀. 대마법사.

솔직히 호칭으로 삼기에는 너무 거창하고 번거로운 별명들이 아닌가.

그럼에도 굳이 저런 별명들을 고집할 이유는 또 무언가.

'이름이 마음에 안 들었나?'

의문투성이.

머리가 복잡해지니, 데일은 읽던 책을 덮고 고개를 들었다.

마침 앞에 앉아 있는 한스도 책을 붙잡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으윽. 너무 어려운데. 이건 또 왜 이런 식으로?"

데일이 물었다.

"대체 뭘 하길래 그렇게 죽을상이냐."

한스는 대답 대신 책을 들어 제목을 보여주었다.

"...부유 마법 입문?"

"예. 공간 마법의 일종인데, 이거 엄청 어렵네요."

"넌 전격 계열 마법사가 아니었나?"

"뭐. 전격 계열이 나쁘지는 않은데... 솔직히 이미 쟁쟁한 실력자들이 많아서 저는 경쟁력이 없더라고요. 그리고 요즘 마법사들 사이에서 부유 마법이 유행이에요."

"유행이라고?"

"예. 황제 폐하께서 몇 년 전부터 부유 마법에 엄청 투자하고 있으시거든요. 잘하면 한자리를 해먹을 수도 있어요."

데일은 머릿속에 남은 마법 지식을 점검했다.

그중에 부유 마법에 대한 것도 있었다.

'물체를 위로 띄우거나, 날아다니는 마법이었지.'

익히는 데 상당히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 고위급 마법이었던 거로 기억한다.

'별로 그렇게 쓸모 있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

물론. 하늘을 날며 적을 공격하는 건 굉장한 이점이다.

문제는 효율성이다.

부유 마법에 시간을 들이느니, 다른 계열 마법을 빠르게 마스터해 화력을 뿜어내는 게 훨씬 가성비가 좋았다.

"대체 황제는 부유 마법으로 뭘 하려고 투자하는 거지?"

한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날아다니는 함선을 건조해서 지상을 공격하는 공중 함대를 만든다는 얘기가 있던데요? 뭐. 높으신 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저는 모르죠. 그냥 이번에 친위대 고문이라는 기회를 잡은 김에, 아예 부유 마법까지 익혀 황실과의 연결고리를 만든다! 하는 게 제 계획입니다."

한스의 거창한 포부에 안드레이가 혀를 끌끌 찼다.

"하여튼 요즘 젊은것들은 말이야. 한 가지 분야에 파고드는 끈기가 없어. 맨날 유행 따라 마법을 겉핥기로만 훑으니, 발전이 없지."

한스가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마법사가 유연함이 있어야 오래 살아남죠. 제가 연구하던 분야가 주류 학파에서 소외되었는데, 계속 그걸 붙들고 있는 건 끈기라기보다는 미련함에 가깝지 않을까요?"

"뭐 이놈아? 지금 나 들으라고 한 말이지? 이런 시건방진 놈이!"

둘은 금방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마탑의 파벌 싸움이 왜 일어나는지 알 것 같군.'

마법사들이란 특히 마법에 대해서는 자존심이 드높아서, 그 부분을 건드리면 상대가 마스터고 나이 지긋한 영감이고는 상관이 없다.

괜히 비슷한 공부를 하는 마법사들끼리 뭉치는 게 아니었다.

"하여간 쯧. 다 죽어가는 학파에 속해 있는 놈이 말은 번지르르해요."

"...그걸 아니까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거 아닙니까."

듣다 못한 데일이 말했다.

"둘 다 그쯤 하시오. 친하게 지내지는 못해도, 여정 동안 싸우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니오."

"쯧. 네가 그렇게 말하니. 내가 참아주는 수밖에."

"경이 그렇게까지 말하면 어쩔 수 없죠. 참아 볼게요."

둘은 이내 서로에게 시선을 훽 돌려버렸다.

데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기에 엘레나까지 끼면, 확실히 시끄럽긴 하겠군.'

한스가 속한 파벌은 엘레나를 사로잡기 위해 빈민가 수색을 감행한 적이 있다.

한스도 그 수색에 참여했던 전적이 있다.

엘레나가 한스를 좋게 생각하지 않는 건 당연했다.

'어쩔 수 없지.'

이러나저러나 보물고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시끄러운 마법사들이 필요하다.

그저 싸우지만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한차례 설전이 지나가자.

피곤한 기색으로 마차 벽에 등을 기댔던 안드레이가 데일을 보고는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말을 꺼냈다.

"아. 그러고보니 이걸 깜빡 잊고 있었군."

안드레이는 배낭에서 망토를 꺼내 데일에게 건네주었다.

카엘름 성에서 선물 받은 망토였다.

"네가 북부로 떠나 있을 동안 자세히 조사 해봤다."

"오. 어떤 힘이 깃들어있는지 알아내셨소?"

안드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정말 제대로 숨겨놨더군. 하지만 한 가지 알아낸 게 있다."

"무엇이오."

"이건 주인의 허락이 없으면 그 힘을 사용할 수 없는 종류의 마도구야."

주인을 알아보는 유물에 대한 이야기는 흔하다.

말하는 무기라거나 한번 손에 들면 다시는 놓을 수 없는 마검이라거나.

"힘이 봉인되어 있는데, 봉인을 풀어 힘을 사용하려면 둘 중 하나다. 주인의 허락을 받거나. 아니면 억지로 봉인을 잡아 뜯어버리거나."

"후자가 더 마음에 드는데."

안드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나도 시도해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이거. 봉인을 강제로 풀어버리면 무언가 일어나게 조치를 해놨어."

"그 무언가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오."

"글쎄. 나야 모르지. 펑! 하고 터져버리거나 사용자한테 끔찍한 저주를 걸거나. 어느 쪽이든 별로 시험해보고 싶지는 않아."

한마디로, 보안을 철저하게 걸어놓은 셈이다.

마법으로 이름 높은 바이만 왕국답다고 해야 할지.

"그러고보니 이번에 가는 곳이 바이만의 보물고가 아닌가. 어쩌면 그곳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겠어?"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소."

그때. 한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잠깐!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이 어디라고요?"

깜짝 놀란 표정.

생각해 보니 한스에게는 굳이 말을 안 해주었던가.

"바이만의 보물고다. 얌전히 잘 따라오면, 보물고에서 원하는 걸 하나 집어갈 수 있게 해주겠다."

"...!"

한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는 데일의 말이 사실인지 거듭 물어보다가, 이내 데일을 곁으로 왔다. 그리고 비장하게 말했다.

"데일 경. 평생 충성하겠습니다."

"...원래 엘레나꺼니까 깍듯하게 대하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일행은 별다른 문제 없이 이동을 계속했다.

그렇게 부지런히 이동하길 나흘째.

일행은 마침내 카드라스 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 * *

"그러니까. 지금 이 계절에 산을 올라가겠다고? 제정신이슈?"

카드라스 산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의 촌장은 말했다.

"겨울이 되면 동면에 드는 몬스터도 있지만,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놈들이 대부분이유. 춥고 굶주려서 잔뜩 포악해진 상태일 텐데, 감당할 수 있겠슈?"

"거참. 신경 꺼요."

"나는 분명 말렸슈? 나중에 원망은 말어유. 허 참. 이 계절에 몬스터 사냥이라니. 용감한 건지 원."

촌장은 용병인 하켄을 앞에 두고서도 당당히 하고 싶은 말을 다 뱉었다.

이 정도 기개가 없으면, 카드라스 산맥의 근처에서 터전을 짓고 살 수 없는 법이다.

일행은 가져온 마차를 마을에 맡겼다.

촌장은 거의 헐값에 마차를 맡아주었는데, 산맥에서 일행이 죽으면 마차는 그대로 자기 차지가 되니, 수고로움을 감수한 것이다.

마을에서 식량을 구매한 일행은 곧바로 카드라스 산으로 들어갔다.

아직 해가 질 때까지 시간이 꽤 남았으므로, 서둘러 수색할 생각이었다.

촌장은 그런 일행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에잉 쯧. 거 사람들. 들어갈지 말라고 해도 말을 안 들어 처먹어요."

"내버려둬요. 위험해지면 돌아오겠죠. 날이 추우니 어서 안으로 들어가요."

촌장은 아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집으로 들어갔다.

겨울은 농부들에게도 한가한 계절이었다.

그저 창가에 앉아, 언제 데일 일행이 돌아올지나 기다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반나절 후.

마을에 들어온 건 데일 일행이 아니었다.

"마차가 여러 대 왔는데요?"

"오늘 무슨 날인가? 이 겨울에 무슨 손님이 이렇게 많이 와."

촌장은 툴툴거리면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마차에서 내리는 성기사와 병사들을 발견했다.

"으잉. 성기사?"

성기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봐 마젤. 여기에 흔적이 이어진 거 맞나?"

"맞소. 반나절 정도 지난 것 같군. 이 근처에서 흔적을 찾고 오겠소."

"카드라스 산이라니. 쯧."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찬 성기사가 성큼성큼 촌장에게로 걸어왔다.

족히 2미터는 될법한 성기사의 덩치에 촌장은 고개를 들어올려야 했다.

"어. 성기사님들이 이런 곳에는 무슨 일이슈."

성기사가 물었다.

"오늘 이곳에 지나간 사람이 있지 않았나?"

"어. 용병들이 오긴 했는데, 그건 왜 물어보슈?"

"용병? 흑기사나, 미모가 빼어난 사제를 보지는 못했나?"

촌장은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 나는 곱슬머리 용병 한 명만 봤고, 나머지 일행의 얼굴은 못 봤슈. 그냥 마차나 맡아달라고 부탁받았는데...."

"나는 지금 신의 뜻을 대행하고 있다. 만약 허튼 소리를 한다면,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방금 한 말에 거짓은 없겠지?"

"어어. 음. 그렇슈?"

아무리 간 큰 촌장이라도 신의 이름을 들먹이자, 살짝 움츠러들었다.

그런 촌장을 사납게 내려다보던 성기사가 고개를 돌렸다.

"바로 가자. 놈들이 근처에 있는 모양이다."

"예!"

성기사가 성큼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교단의 적을 멸하러 간다."

카드라스

* * *

이레네에서 서쪽에 위치한 카드라스 산은 북서쪽의 뾰족 바위산을 거쳐 북쪽의 용뼈 산맥에도 연결되어 있다.

따지고 보면 산맥의 일부인 셈이다.

용뼈 산맥과 마찬가지로 카드라스 산에는 몬스터가 바글거린다.

하지만 그 종류에는 큰 차이가 있다.

북쪽의 용뼈 산맥에는 덩치가 거대한 몬스터들이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로서 활동한다면, 이곳의 포식자는....

"또 얼음 정령이 온다! 바로 구워버려!"

"다른 동료들을 불러오면 성가셔진다. 곧바로 처리해야 해."

정팔면체 얼음덩어리 일곱이 하늘을 부유했다.

놈들은 이내 공중에서 빙빙 돌더니, 일행을 향해 날카로운 얼음 조각들을 뱉어냈다.

"어딜!"

하켄이 방패를 앞세웠다.

최근. 데일과 함께 다니며 부쩍 실력을 키운 하켄은, 자기 체격만 한 타워 실드를 거뜬히 들고 다녔다.

투둥퉁!

단단한 타워 실드에 얼음 조각들이 튕겨나갔다.

하켄이 우쭐거렸다.

"하! 어때! 이번에 새로 산 방패다!"

"비켜요 하켄!"

주문을 완성한 엘레나가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손바닥에서 물줄기가 뿜어져 나와 얼음 정령들을 강타했다.

그대로 정령 셋이 파괴되었고, 나머지 정령들도 비척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기회를 엿보던 데일이 뛰쳐나갔다.

굳이 검을 들 필요도 없다.

데일은 주먹으로 정령을 힘껏 내리쳤다.

파각!

경쾌한 소리와 함께 얼음 정령이 분쇄되었다.

데일은 재빨리 주위를 살펴 다른 정령이 있는지를 살폈다.

'없군.'

이 정령이라는 몬스터의 가장 까다로운 점은, 언제든 동료를 불러모을 수 있다는 점이다.

신이 나서 사냥하다가는 아차 하는 사이 포위되어 몰매를 맞을 수도 있다.

게다가 정령이 싫은 점이 한 가지 더 있다.

"...아무것도 안 남기는군."

정령은 마력으로 이루어진 몬스터다. 반쯤은 에너지 상태인 셈이다.

시체를 남기지도 않고, 하급 정령은 영혼이랄 것도 없다.

즉. 사냥해봤자 남는 게 없다는 뜻.

'쓸모없기는.'

그런 데일의 무덤덤한 감상과 달리, 마법사들은 제법 흥미를 보였다.

"정령들은 늘 마법사들의 호기심을 자극해왔지. 특히 카드라스 산의 정령 생태계에 대해서는 궁금한 게 많아."

"가장 원시적인 마법을 구사하는 게 바로 정령이니까요."

"정령을 사역하는 방법만 알아낼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요. 아직까지는 하이 엘프 외에는 정령을 못 다루니...."

세 마법사는 언제 싸웠냐는 듯. 도란도란 학술적인 대화를 나눴다.

그냥 놔두면 하루종일 떠들어댈 것 같았기에, 데일이 말을 끊었다.

"엘레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고개를 끄덕인 엘레나가 입을 열었다.

"왕가의 핏줄이 카드라스에 오르면 길이 보이리라. 다섯 걸음에서 멈춰라. 마법사 셋이 함께하면 문이 열리리라. 파수꾼을 피해 수호자를 만나면 원하는 것을 거머쥐리라."

일행의 시선이 엘레나에게 집중되었다.

"아버지와 헤어지기 전, 아버지께서 제게 들려주셨던 말이에요. 보물고를 찾아가는 단서가 되어줄 것이라고."

"수수께끼 같은 건가?"

데일이 엘레나에게 물었다.

"보물고로 향하는 길이 보이나?"

왕가의 핏줄에게만 보인다는 길.

엘레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피부의 감각에 집중했다.

"확실히. 뭔가 느껴져요. 이 산 어딘가에 왕가의 마법이 서려 있어요. 너무 미약해 집중하지 않으면 알아채기도 어렵겠지만, 그 특유의 파장이 느껴져요."

안드레이가 감탄했다.

"허. 바이만 왕족의 재능이 뛰어나다는 말은 들었지만, 산 어딘가에 서려 있는 마법까지 감지해낸단 말인가? 대단하군."

"어쩌면 왕가의 일원만 느낄 수 있게 만들었을 수도 있죠."

또다시 한스와 안드레이가 끼어들어 쓸데없는 말을 첨언하자, 데일은 조금 짜증난 기색으로 째려보았다.

"조용히 좀 해주시오."

둘은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법사들은 당최 입을 쉬지 않는 족속들이었다. 괜히 마법사 3명이 모이면 창문이 깨진다는 말이 있는 게 아니었다.

데일이 다시 물었다.

"그곳이 어딘지 찾아갈 수 있겠나?"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눈을 감고 집중하면, 시간은 좀 걸려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려면...."

"업혀라."

데일은 허리를 숙여, 엘레나에게 등을 내주었다.

엘레나가 당황하며 물었다.

"어, 업히라고요?"

"눈을 감고 이동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업히는 게 효율적이다. 이런 설산을 꼬맹이가 걷기에는 위험하기도 하고."

"...꼬맹이 아니에요."

엘레나는 부루퉁한 기색을 보였다. 옆에서 듣던 프라우가 끼어들었다.

"그거라면 제가 업어드리죠! 공주님도 데일 경보다는 공주님의 충실한 기사인 제가 업어드리는 게 좋지 않습니까?"

"아뇨. 데일 경께 업힐게요."

"예?"

엘레나는 주저 없이 데일의 등에 업혔다.

데일은 엘레나를 들어 올려 목마를 태운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생각보다 더 높은 시야에 엘레나는 멍하니 있었다.

"왜 그러나?"

"아, 아뇨. 잠시 옛날 기억이 떠올라서...."

"옛날 기억?"

"아버지께서 제가 어릴 적에 이런 식으로 목마를 태워주셨었는데...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데일은 엘레나가 집중할 수 있게 단단히 고정해준 뒤. 말했다.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켜라. 그쪽으로 가겠다."

"예!"

"에스델은 만약 전투가 있으면, 엘레나에게 망설이지 말고 보호벽을 쳐주면 좋겠다."

"아, 예!"

빛의 신성을 만들어낸 보호벽은 데일을 불태워버리겠지만, 이제 그 정도는 견뎌낼 수 있다.

왜인지 엘레나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에스델이 붕붕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에스델의 안내를 따라 산을 헤매기 시작했다.

당연히 쉽지는 않았다.

발목까지 쌓인 눈은 발을 디딜 때마다 푹푹 꺼졌고.

다른 무엇보다 정령이 문제였다.

"이런 씨! 또 눈꽃 정령이야!"

하켄이 툴툴거리며 방패를 앞으로 내밀었다.

차가운 눈보라가 방패를 두드렸다.

방패가 하얗게 얼어붙고, 그 방패를 쥔 손에도 서리가 끼지만, 하켄은 어렵지 않게 버텨냈다.

"중급 정령이 둘. 하급 정령이 다섯이네요. 이번엔 제가 먼저 공격할게요."

한스가 나서서 손을 내뻗었다.

손바닥에 하얀 전류가 파직 튕기더니, 독수리의 형상으로 바뀐 번개가 정령들을 덮쳤다.

"허. 맞추기 쉽게 하려고 형상을 바꿨다 이건가? 나쁘지 않은 발상이야."

감탄한 안드레이도 마력을 일으켰다. 그러자 배낭 속에 들어 있던 종이 뭉치가 하늘을 향해 치솟더니, 하늘을 날아 도망가려던 정령들을 감싸버렸다.

정령들은 도망치지 못하고 그대로 고정되어버렸다.

그런 정령들을 날카로운 화살이 꿰뚫고 지나갔다.

"음! 내 실력도 녹슬지 않았군."

프라우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뒤, 활을 다시 등에 멨다.

그러고는 아쉬운 듯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손맛이 없는 건 아쉬운데. 정령들은 베어봤자 피가 튀지도 않고, 내장이 흘러내리지도 않으니 참 상거워. 어디 강력한 몬스터는 안 나타나나? 내 새로 산 단검, 카락이 피에 굶주렸다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라."

사실 프라우가 아쉬워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지금까지의 전투는 싱거우리만치 수월했다.

방패수인 하켄과 전투에 익숙한 한스. 보조 역할에 충실한 안드레이와 뛰어난 재능을 지닌 엘레나.

근접 전투와 원거리 지원이 모두 가능한 프라우와 강력한 기적을 부리는 에스델까지.

데일은 나설 틈조차 없었다.

'이게 파티의 안정성인가.'

완벽하게 조합이 갖춰진 파티는 어느 상황이 와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법이다.

게다가 이 파티에는 무려 마법사만 셋이다.

이렇게 호화로운 구성이 있을 수 있을까.

데일은 실로 오랜만에, 누군가한테 '업혀간다'는 감각을 느꼈다.

'내가 나설 것도 없겠군.'

그렇게 일행은 계속해서 산을 탔다.

데일이 다섯 걸음 이동할 때마다 엘레나가 새로 방향을 가리켰는데, 그 손가락은 보통 위쪽으로 향했다.

즉. 산 중턱쯤에 보물고가 숨겨져 있다는 뜻이었다.

산속 깊숙이 올라갈수록 저항은 더 거세졌다.

기껏해야 하나둘 튀어나오던 중급 정령이 무더기로 나타나는 건 기본에 가끔 재수 없으면 상급 정령을 마주칠 때도 있었다.

중급 정령 다섯 개를 연결해 놓은 것처럼 생긴 상급 정령은, 나무 사이를 조용히 배회하고 있었다.

"어우. 상급 정령은 처음인데. 번개로 저격해볼까요?"

한스가 나서려고 하자, 데일이 막아섰다.

"아니. 그냥 왔던 길로 돌아갔다가 우회하자."

"예? 왜요?"

"상급 정령은 이 영역의 우두머리 같은 놈이다. 놈이 쓰러지면, 곧바로 영역 내의 모든 정령들이 몰려들 거다."

못해도 수백 기의 정령이 일행을 포위할 것이다.

그쯤 되면 일행도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특히 마법사들은 몸이 약한 편이니, 자칫 재수 없으면 골로 가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한 데일의 설명에 일행들은 납득했다.

"그, 그렇군요. 상급 정령이 죽으면 다른 정령들을 끌어모은다는 사실은 몰랐어요."

"아무래도 정령은 알려진 게 많이 없다보니... 네가 그런 것까지 알고 있다는 게 신기하군."

안드레이의 감탄에 데일은 적당히 대답했다.

"어쩌다 알게 되었소."

게임을 하던 시절에 이미 터득했던 지식이다.

개떼처럼 달려드는 정령들에게 몇 번 시달리다 보면, 싫어도 그 기억이 남을 수밖에 없다.

"경이 없었으면 큰 곤욕을 치를 뻔했네요. 그럼 일단 내려갔다가, 우회하는 길을 찾아보죠. 제가 방향을 다시 잴게요."

엘레나의 말을 끝으로 일행은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데일이 없었다면 꽤나 곤란한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 * *

"이봐! 마젤!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바닥에 난 흔적을 살피던 마젤에게 성기사가 벌컥 화를 냈다.

누군가를 추적한다는 건 인내심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걷다가 흔적을 살피고, 또 몇 걸음 가다 흔적을 살피는 과정의 반복.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성기사는 그런 수고를 참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 추운 설산에서 계속해서 헤매는 게 짜증 날 뿐.

마젤은 속으로 짜증을 삼켰다.

'신을 따르는 기사란 자가 이리도 참을성이 없어서야.'

문득. 마젤은 자신과 함께 범죄자를 추적했던 흑기사를 떠올렸다.

'그 기사랑은 완전히 딴판이군.'

데일은 마젤의 전문성을 인정해주었고, 추적하는 과정을 전적으로 마젤에게 맡겼다.

아무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절대 재촉하는 법이 없었다.

게다가 실력도 출중하니, 함께하는 동료로서는 그보다 훌륭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마젤은 한숨을 삼켰다. 용병 일을 하다보면, 가끔 이런 고용주를 만나기도 하는 법이다.

"눈꽃 정령 때문에 놈들의 흔적이 자꾸만 눈에 덮여버리고 있소.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양해해주시오."

"끄응. 만약 놈들을 놓친다면, 네 목숨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인 마젤은 다시 흔적을 살폈다.

그렇게 천천히 움직이기를 한참. 마젤이 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나?"

마젤은 대답 대신 한쪽을 가리켰다.

상급 정령이 나무 사이를 조용히 부유하고 있었다.

"상급 눈꽃 정령이오."

"이놈의 산맥은 정말 진절머리가 나는군. 모두 나를 따라라! 신의 뜻에 따라, 몬스터를 토벌할 시간이다!"

"예!"

성기사는 하얗게 빛을 발하는 메이스를 붕붕 휘두르며 앞으로 향했다.

그 뒤를 충직한 병사들이 뒤따랐다.

웬만한 몬스터들은 거뜬히 해치울 전력. 하지만 마젤은 왜인지 그 뒷모습이 불안하게만 보였다.

'어쩌면 지금이라도 몸을 빼는 게 나을지도... 기분 탓인가?'

* * *

앞장서서 움직이던 데일이 걸음을 멈췄다.

뒤따라오던 하켄이 물었다.

"왜 그래요? 뭐 있어요?"

"안 느껴지나?"

"뭐가요?"

"방금 산이 흔들린 것 같은데."

"으음. 잘 모르겠는데. 어디 눈사태라도 난 거 아닐까요?"

그럴듯한 추측이다.

가끔 눈꽃 정령들은 이유 없이 발광하는데, 그들이 만들어낸 눈보라가 눈사태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보다 경. 이 아래인 것 같아요. 이제 내려주세요."

엘레나는 데일의 등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아래쪽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지금 일행은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 앞에 서 있었다.

반대쪽 절벽까지는 꽤 넓은 틈이 있었는데, 엘레나가 가리키는 곳이 바로 그 절벽 사이의 틈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를 내려가야 한다는 건가?"

"그런 거 같아요. 저 아래에서 강한 느낌이 나거든요."

"알았다. 내가 한 명씩 안고 내려가겠다."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바로 발튼이 만들어준 도구다.

데일은 갈고리에 연결된 밧줄을 이용해 동료들을 한 명씩 실어 날랐다.

마지막 순서인 한스가 중얼거렸다.

"역시 부유 마법을 배워야 해."

바닥에 다다른 일행은 주위를 수색했다.

이따금 운 없이 떨어진 짐승의 뼛조각이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었는데,

그때. 바닥을 유심히 살피던 하켄이 외쳤다.

"찾았다! 찾았어요!"

일행이 곧바로 몰려들었다.

회색빛 돌덩이들이 모여 있는 곳에 이질적인 구조물이 하나 있었다.

긴 바위를 그대로 잘라 만든 것 같은 석문.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생각에 일행이 기뻐하기도 잠시.

가장 먼저 발견한 하켄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근데 왜 문이 열려있지?"

"...."

그리고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말했다.

"설마 이미 털린 건 아니겠지?"

보물고

* * *

하켄이 제시한 가능성에 일행은 순간 굳어버렸다.

"이미 털렸다고?"

"음. 확실히. 위치가 잘 숨겨져 있지만, 지금까지 딱히 마법적인 장치가 있거나 하지는 않았지."

안드레이가 수염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게다가 못해도 몇백 년은 된 보물고잖아. 아무리 강력한 마법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 힘이 쇠하기 마련이야."

있을 법한 일이었다.

보물고에 걸린 보호 장치나 마법이 수백의 시간이 지나 제 기능을 상실했고, 우연히 이곳에 떨어진 사람이 보물고에 들어갔을 가능성.

엘레나가 얼굴을 굳혔다가, 이내 힘을 주어 말했다.

"설령 이 유적에 다른 자들이 운 좋게 들어갔다고 해도, 보물을 가지고 나왔을 확률은 적어요. 바이만의 보물고가 그렇게 허술하게 지어지지는 않았을 거예요."

"하긴. 안쪽에 함정 같은 게 있을 테니...."

이곳까지 길을 찾는 건 어디까지나 시작에 불과하다.

진짜는 저 안에 있을 거다.

"어쨌든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일단 들어가보고 판단하자고."

안드레이의 제안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앞장서겠다."

데일은 반쯤 열려 있는 석문을 힘껏 잡아당겼다.

쿠구구!

석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보기보다 엄청 무겁군. 문이라기보다는 바위에 가까운데."

"...혹시 이것도 원래 마법으로 옮기도록 설계되어 있는 거 아니에요? 무식하게 힘으로 움직이라고 만들어논 게 아닌 것 같은데."

하켄의 지적. 다른 사람들도 미묘한 눈으로 데일을 쳐다보았다.

듣고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했다.

"열렸으면 된 거 아닌가?"

"그건 그렇죠."

가장 먼저 문으로 들어간 건 데일이었다.

문으로 다리를 집어넣자, 몸이 쑥 꺼지며 길고 좁은 통로를 빠르게 미끄러져 내려갔다.

마치 미끄럼틀과 같은 구조였다.

카가가각!

데일은 양옆의 벽에 건틀릿을 박아 적절히 속도를 조절했다.

그렇게 데일은 생각보다 긴 시간을 낙하했다.

'깊게도 파놨네.'

혹시나 있을 외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일까?

바이만의 보물고는 상당히 깊게 땅을 파내려간 곳에 지어져 있었다.

한편으로는 감탄스럽기도 하다.

'기술력이 대단하긴 했나보군.'

땅을 깊게 팔수록, 건설에 드는 비용이나 인력이 치솟는 건 당연한 일이다.

심지어 험지라고 불리는 카드라스 산 깊은 곳에. 남들에게 눈에 띄지 않으며 이런 보물고를 지어냈다.

마법으로 이름 높았던 바이만의 위상을 조금이나마 실감할 수 있었다.

마침내 낙하가 끝나간다.

어둠 속에서도 환히 볼 수 있는 데일은 저 앞에 조그만 입구가 있다는 것을. 이 미끄럼틀이 조만간 끝난다는 걸 알아차렸다.

데일은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미끄럼틀이 끝나는 순간.

정확히 낙법을 취했다.

쿵.

한 바퀴 구른 데일은 멋들어지게 바닥에 착지했다.

혹여나 있을 위협에 대비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쥐었다.

하지만 우려했던 습격은 없었다.

후욱!

데일이 들어서자, 벽에 일정 간격으로 매달려 있던 횃불에 차례대로 불이 붙기 시작했다.

자연적인 불이 아닌, 마법으로 피워낸 노란색 빛이었다.

그런 노란 횃불이 저 멀리까지 이어져 있었다.

'복도... 인가?'

보물고는 긴 복도형 구조의 유적처럼 보였다.

일단 위협이 없는 걸 확인한 데일은 내려온 구멍에 대고 외쳤다.

"안전하니까 내려와라!"

조금 뒤.

일행이 데일처럼 미끄러져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은 하켄이었다.

"으아아아악!"

잔뜩 겁에 질려 요란하게 비명을 지르던 하켄이 굴러 내려왔고, 그 직후 바닥에 추락해 그대로 널브러졌다.

그다음으로는 프라우를 시작으로 하나둘 내려왔고, 하나같이 하켄을 쿠션 삼아 바닥에 착지했다.

마지막으로 하티가 멋들어지게 미끄러져 와, 하켄의 몸통 위에 착지하는 것으로 마무리.

데일이 하켄에게 물었다.

"괜찮나?"

"...차라리 죽여주세요."

다행히 튼튼한 하켄은 멀쩡해 보였다.

다른 일행은 그런 하켄을 무시하고 주위 관찰하는 데에 집중했다.

"호오. 이 횃불은 사람이 오면 알아서 불이 붙는 마도구인가?"

"와. 벽에 걸려 있는 횃불이 전부 마도구라고요? 당장 보이는 것만 해도 100개는 넘는데. 바이만 왕국은 돈이 썩어넘치는 곳인가 보네요."

"당연하죠. 저희 왕국이 어떤 곳인데."

"공기 질도 나쁘지 않아. 지하에 수백 년간 묵은 공기라기에는 너무 산뜻해. 공기를 정화하는 마법이 어딘가에 걸려 있는 건가?"

마법사 셋을 내버려두니, 또다시 자기들끼리 끝도 없이 떠들 것 같았기에, 데일이 끼어들었다.

"됐고. 바로 이동하자."

이런 지하 시설에서 오래 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데일은 성큼성큼 복도를 걸었다.

복도의 끝에는 또 다른 석문이 있었다.

석문에는 검과 책을 짓누르고 있는 사자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바이만 왕국을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문양의 아래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앞으로 걸음을 옮길 시, 파수꾼을 조심하라]

안드레이가 미간을 좁혔다.

"파수꾼? 뭘 말하는 거지?"

모두의 시선이 엘레나에게 향했다. 하지만 엘레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직접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다는 건가."

한스가 머리를 긁적였다.

"어쨌든. 이 문을 열면 되는 거겠죠? 마법사 셋이 필요하다고 했으니, 무언가 마법적인 처리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드디어 우리가 밥값을 할 때가 온 거 같군."

쿠구구구.

데일이 문을 힘껏 열자, 이번에도 석문이 열렸다.

"그냥 열리는데?"

마법사들은 다시 조용해졌다.

데일은 성큼 앞서나가며 말했다.

"내가 가면 뒤에서 거리를 두고 따라와라. 함정이 있을 수도 있으니."

"예."

석문 너머는 정사각형의 방이었다. 데일이 먼저 발을 들이고, 나머지 일행이 모두 방으로 들어오자. 뒤쪽 문이 저절로 닫혔다.

쿵!

"꺄악!"

화들짝 놀라는 에스델. 갇혀버렸단 사실에 다들 순간 당황했다.

"이게 대체 무슨...."

하지만 멍하니 있을 시간은 없었다.

다음 순간. 사방의 벽이 뒤집히더니, 시위에 볼트를 건 쇠뇌 수십 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하켄이 불안한 듯이 중얼거렸다.

"설마?"

"뭉쳐!"

데일이 크게 외치자, 일행이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데일은 혼자서 멍하니 있던 엘레나의 몸을 잡아 동료들을 향해 힘껏 던졌다.

프라우가 그런 엘레나를 멋들어지게 잡아냈다.

"훌륭한 투척 솜씨군 데일 경!"

"저를 물건처럼 던지다니...."

"에스델! 보호벽!"

"알겠어요!"

에스델이 빠르게 기적을 읊기 시작했다.

찬란한 빛을 뿜는 반구형 장벽이 일행을 감쌌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 설치된 석궁에서 수십 발의 볼트가 날아들었다.

퉁! 투투퉁!

볼트가 신나게 장벽을 두드렸다. 그 기세가 사나우나, 에스델의 벽을 뚫을 만큼 날카롭지는 못했다.

홀로 장벽 바깥에 있던 데일은 그냥 볼트를 맞아주며, 주위를 살폈다.

'볼트가 한 번 발사되고, 자기가 알아서 장전까지 하는군.'

그냥 놔두면 끝도 없이 볼트를 발사할 기세였다.

데일은 한 발 앞으로 나서, 마검을 크게 휘둘렀다.

콰작!

날아오던 볼트와 함께 벽에 설치되어 있던 쇠뇌가 반 토막이 났다.

데일은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수십 대에 이르던 쇠뇌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마지막 쇠뇌를 박살 내고. 마침내 볼트 세례가 멈추자, 놀랍게도 닫혀 있던 석문이 다시 열렸다.

이곳으로 올 때 사용한 문과, 그 반대편에 있는 다른 문.

방패를 쥐고 서 있던 하켄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후, 후우. 인사 한번 화끈하구만."

데일도 고개를 끄덕였다.

"침입자에 대한 대처는 확실한 것 같다. 엘레나를 침입자로 간주하는 게 문제지만."

"바이만의 왕족이라면 이 정도는 거뜬히 헤쳐나가야 한다는 게 아닐까? 내가 아는 바이만 놈들은 하나같이 오만하고 자신감이 넘쳤으니까."

안드레이의 말에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는 안 들지만, 그 점은 저도 인정해요. 바이만의 계승자로서 이 정도 시련은 넘어서라는 거겠죠. 다섯 걸음에서 멈추라는 말은... 어쩌면 이런 방을 다섯 개 지나쳐야 한다는 말일지도 모르겠네요."

"겍. 이런 걸 다섯 개나?"

하켄이 기겁했지만, 지금으로선 엘레나의 추측이 그럴듯해 보였다.

하지만 데일은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무리해서라도 에스델을 데려오길 잘했군.'

방금 전도 에스델의 방벽 덕에 일행이 무사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런 안정감이야말로 사제라는 역할이 가진 힘이자 가치였다.

데일이 사람들을 다독였다.

"어서 가자. 이런 방을 네 개나 더 지나야 하니, 서두르자."

"예... 그런데. 그래서 결국 파수꾼은 어딨죠?"

다들 그 부분을 의아해했지만, 마땅한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하켄은 머리를 긁적였다.

"거참. 이놈의 보물고는 뭐하나 속 시원하게 알려주는 게 없네요."

그런 하켄의 툴툴거림을 뒤로하고. 데일을 선두로 일행은 다음 방으로 통하는 문을 지나쳤다.

맨 뒤에서 따라오던 하티와 함께 따라오던 하켄은 걸음을 멈췄다.

왜인지 하티가 뒤를 지그시 노려보고 있었다.

하켄이 물었다.

"왜 그래 이 녀석아."

하티는 고개를 휙 돌리며 크릉 울었다.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

그러고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동료들을 뒤따랐다.

"흠."

홀로 남겨진 하켄은 혼자 머리를 긁적이며 하티가 쳐다보던 방향을 응시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젓고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하켄이 사라지자 석문이 자동으로 닫혔다.

그리고 밀폐된 방안에는 다시 어둠과 정적이 내려앉았다.

* * *

사방에서 볼트가 날아들자, 마젤이 소리쳤다.

"이런! 씁! 이런 곳을 지나친다는 말은 없었잖소!"

"시끄러워! 나도 이런 덴 줄 몰랐다고! 방패진!"

"옙!"

병사들이 둥글게 모여들어, 방패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방패는 전신을 가릴 정도로 충분히 크지 못했다.

빈틈으로 볼트가 날아와 병사들의 몸에 틀어박혔다.

"컥!"

"커억!"

"이런...."

이를 악문 성기사는 맹수처럼 땅을 박찼다. 갑옷으로 볼트를 받아내며, 하얗게 빛나는 메이스를 휘둘러 쇠뇌를 부쉈다.

그렇게 분투하길 한참.

악몽 같던 시간도 끝이 났다.

볼트 세례가 멈췄다.

"끄, 끝났다."

"후아...."

"부상자들을 곧바로 응급처치해! 상처 부위에 성수를 아끼지 말고 부어! 그러고도 낫지 않는다면, 나한테 데려와라. 내가 직접 치유할 테니."

"옙!"

성기사가 지휘하자, 교단의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마젤은 그런 성기사에게 따지려 했다.

"이건 미친 짓이오. 유적이라니. 이런 곳에 대비도 없이 들어가다가는 목숨이 열 개라도 부족할 것이오!"

"끄응. 나도 알아! 하지만 이제 와서 어디로 올라간단 말이야! 설마 우리가 내려올 때 쓴 그 통로를 거슬러 올라가자는 소리는 아니겠지?"

그의 말마따나.

미끄럼틀처럼 미끄럽고 가파른 그 통로를 거슬러 올라간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계속 전진하는 것도 마냥 따르기 어려웠다.

으레 유적이란 온갖 함정과 위험이 있는 법이고, 중심지에 가까울수록 더욱 치명적인 함정이 있기 마련이니.

마젤은 성기사에게 새로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려 했다.

하지만 마젤은 말을 멈췄다. 어느 한 곳을 조용히 응시했다.

"...."

"뭐야. 왜 갑자기 말을 멈추는 거냐?"

마젤은 꼼꼼하고 냉정하기로 유명한 사내였다.

물론. 예전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마젤 역시 다른 용병처럼 화끈하고, 다소 호탕하게 살아오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방심과 부주의는 끔찍한 사고로 이어졌다.

마젤이 속한 파티가 전멸했고, 마젤 자신도 얼굴에 깊은 흉터가 생겼다.

그 뒤부터 마젤은 주위 상황을 사소한 것 하나까지 꼼꼼히 살폈고, 강박적으로 기억하려고 애썼다.

그런 마젤의 눈에 어느 병사가 다른 병사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게 보인다.

'저 자는 분명.'

교단의 병사들은 개인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똑같은 갑옷을 입고, 똑같은 투구를 쓴다.

누가 누군지 잘 구별이 안 가는 것이다.

하지만 사냥꾼 마젤은 관찰력이 뛰어나다. 그는 절대 사람을 헷갈리는 법이 없었다.

그런 마젤의 기억 속에, 저 멀쩡히 움직이는 병사는 분명 옆구리와 허벅지, 그리고 가슴에 볼트가 박혔었다.

한눈에 봐도 치명상이다.

설령 성수로 치료했다 해도,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움직일 수 있는 상처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마젤은 시위에 화살을 메겼다.

그리고 병사를 겨냥했다.

"뭐, 뭐 하는 거야!"

"!"

성기사가 화를 내고, 병사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하던 일을 모두 멈췄다.

싸늘한 정적이 공간에 내려앉았다. 따가운 시선이 마젤에게 집중되었다.

하지만 마젤은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저 병사를 겨냥하며 말했다.

"너 누구야."

보물고

* * *

"위에 바위다!"

천장이 좌우로 열리더니, 그 안에서 둥그런 바위가 굴러 떨어졌다.

데일이 땅을 힘껏 박차, 위로 뛰어올랐고. 주먹을 들어 그대로 바위를 타격했다.

꽈릉!

그대로 산산이 조각난 바위 파편이 사방으로 떨어졌다.

에스델이 다급히 장벽을 펼쳤다.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장벽에 큼지막한 바위 부스러기가 투두둑 떨어졌다.

하켄이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후우. 이번에도 거뜬했네요. 그쵸?"

"하켄이 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요."

일행은 벌써 다섯 번째 방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지금껏 지나온 방에는 끓는 기름이 분사되거나, 바닥이 갑자기 무너지며 뾰족한 가시가 드러나거나 하는 따위의 함정이 준비되어 있었다.

상당히 위협적인 함정이었다.

하지만 일행을 위기에 빠트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네 개의 방을 통과했으니, 이제 남은 건 마지막 방.

목적지가 바로 눈앞에 보였기에, 일행은 마지막으로 휴식을 취했다.

에스델이 조금 지친 기색으로 말했다.

"후우. 가혹한 함정이네요. 설령 침입자가 있었다 해도, 살아남기 힘들었을 거예요."

"그건 맞지. 우리한테는 사제양반이랑, 말도 안 되는 괴물이 있었으니까 말이야."

"괴물이 나 말하는 건가?"

"흠. 흠흠. 그만큼 뛰어난 활약이었다는 거죠."

실제로 보물고의 함정을 무사히 지나칠 수 있었던 건, 반은 데일의 덕이고 반은 에스델의 덕이었다.

데일의 순발력과 괴력이 아니었으면 대부분의 상황에 대비하지 못했을 것이고, 에스델의 기적이 아니었다면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을 거다.

마법사들은 그런 둘의 모습에 감탄하는 한편, 조금 의기소침해지기도 했다.

"지금까지 함정들을 보면 딱히 마법사가 없어도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게나 말이다. 나는 마법사가 필요하다 해서 수수께끼를 풀거나 마법적 지식을 사용해야 할 줄 알았는데... 웬만한 마법사는 방 하나 지나지도 못하고 무력하게 뒤졌을 거다."

그런 둘을 프라우가 위로했다.

"너무 상심하지 말게. 대부분의 상황에서 주문쟁이들이 도움이 안 된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마법사들은 얼굴을 구기며 프라우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험악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엘레나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직 방이 하나 남았잖아요. 어쩌면 이 앞의 방에서 저희들이 필요한 걸 수도 있는 거죠."

왕가의 핏줄이 카드라스에 오르면 길이 보이리라.

다섯 걸음에서 멈춰라.

마법사 셋이 함께하면 문이 열리리라.

파수꾼을 피해 수호자를 만나면 원하는 것을 거머쥐리라.

엘레나가 말한 순서에 따르면, 다섯 번째 방에서 마법사들이 활약해야 할 가능성이 높았다.

안드레이와 한스도 이내 의욕을 보였다.

"이번에 꼭 밥값 하겠어요! 보물고에서 물건 하나 챙겨도 눈치 안 보이게!"

"음! 나도 마스터 자리를 도박으로 따낸 게 아닌 걸 증명하겠다."

"아무래도 다들 힘이 넘치는 것 같으니, 그만 쉬고 일어나겠소."

데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대편으로 열린 석문을 통해 다음 방으로 향하려 했다.

그러다 데일은 자리에서 멈췄다.

"왜 그러냐 하티."

어째선지 하티가 일행이 지나온 방향의 석문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 있나?"

데일이 묻자, 하티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기도 확신이 서지 않는 눈치였다.

데일도 입구 쪽을 집중해 쳐다보았지만, 역시나 느껴지는 건 없었다.

"그만 가자. 어차피 뭔가 있다 해도 방을 지나치면 문이 닫혀버리니까."

말을 알아들었는지, 하티도 크릉 울고는 고개를 돌렸다.

데일을 선두로 일행은 하나둘 석문을 지나쳤다.

그리고 다섯 번째 방에 모두가 발을 디디자. 뒤쪽의 문이 저절로 닫혔다.

다든 미약한 긴장감으로 주위를 살폈다.

"화살, 기름, 가시, 바위. 이번엔 뭐가 나올까요."

"글쎄. 어쩌면 그 파수꾼인지 뭔지가 나타날 수도 있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무언가 일어날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문이 열리지도 않았다.

잠시 가만히 있던 일행은 이내 어리둥절해 하며 주위를 살폈다.

누구는 문을 똑똑 두드려보았고, 또 누구는 혹시 숨겨져 있을 수수께끼를 찾아 벽면을 자세히 살폈다.

하지만 해답을 찾아낸 사람은 없었다.

"뭐지? 우리 그냥 갇힌 건가?"

"마법사 셋으로 뭘 하라는 거죠?"

"음."

다들 갈피를 못 잡고 있던 그때.

이변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하켄이었다.

혹시 뭐 돈 될 거 없나 바닥을 살피던 하켄의 눈에 들어온 건, 모서리에 살짝 고여 있는 물이었다.

"오. 물이네? 어디에 구멍이 뚫려서 지하수라도 들어오는 건가? 마법 왕국이라고 떵떵거리더니, 생각보다 부실하게 지어졌나 보네."

처음에는 태평했다.

무슨 상황이 오든 데일과 에스델이 있으면 어찌어찌 해결되겠거니, 하는 안일한 마음가짐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켄은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음. 왜인지 물이 불어나는 것 같은... 어?'

졸졸 흘러들어오던 물이 빠르게 웅덩이를 이루기 시작했다.

놀란 하켄이 소리치려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천장에서도 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어어...."

"무슨!"

"이게 대체... 어푸! 어푸!"

당황한 일행이 의견을 교환하려 했지만, 물이 거세게 쏟아져 내려 말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밀폐된 방 안에 물이 빠르게 고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발목까지 오던 게 무릎으로. 무릎까지 오던 수위가 허리까지.

특히 키가 작은 엘레나와 안드레이는 빠르게 물에 잠겼다.

다급한 와중에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움직이기 마련이다.

프라우가 주군인 엘레나를 황급히 들쳐업었고, 안드레이는 한스의 몸을 발발 타고 올라가 어깨 위에 앉았다.

하지만 상황이 해결된 건 없다.

이대로 가다가는 물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말 것이다.

아무리 강력한 초인이라도 숨을 쉬지 않으면 죽는다.

반 언데드인 데일만은 예외였지만... 어쨌거나 큰 위기였다.

"어푸! 어떡해! 어푸!"

"말을 못 하겠...."

설상가상.

쏟아지는 물줄기에 서로 간에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생각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뜨거운 불로 전부 증발시킬까? 아니. 그랬다가는 전부 삶은 고기가 될 거야.'

'전격은... 안 되겠는데.'

'분명 무언가 해답이 있을 거야. 문을 열 해답이....'

마법사들은 각자 정답을 찾아내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이번 위기를 헤쳐나가는 게 그들의 사명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물이 머리까지 차올랐다.

일행이 꼬르륵 가라앉았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불과 몇 분 남짓. 그렇지 않으면 모두 익사할 판이었다.

안드레이는 더욱 필사적이 되었다. 마탑의 마스터씩이나 되어서, 인생을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끝내는 건 절대로 싫었다.

그렇게 안드레이가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해답을 찾아내던 그때.

그는 발견했다.

남들 다 당황할 때, 홀로 여유롭게 서 있는 데일을.

"...."

꼬르륵.

너무 어이가 없어 입 안에 머금었던 공기가 빠져나왔다.

안드레이는 데일을 툭툭 건드린 뒤, 양손을 붕붕 흔들어 분노를 표현했다.

'대체 뭐하는 거야!'

데일도 고개를 돌렸다. 그는 석문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킨 뒤, 주먹을 쥐는 시늉을 했다.

'뭐? 해답을 찾은 거냐?'

안드레이의 의사가 전달된 건지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에스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손가락으로 원을 그렸다.

'아! 보호벽!'

에스델은 속으로 기도문을 읊어 기적을 부렸다.

환한 빛과 함께 방어벽이 물을 밀어냈다.

하지만 그 크기는 이전보다 훨씬 작았다.

사방에서 짓눌러져 오는 물의 압력 때문에 크게 전개할 수가 없었다.

"콜록. 콜록! 데일 경! 오래 못 버텨요! 기껏해야 20초밖에 유지 못 해요."

"그 정도면 충분하다."

"뭐, 뭔가 해법을 찾은 건가?"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이것도 결국 석재로 만든 시설 아니오."

"그, 그렇지?"

"아무리 마법적인 처리가 되어 있다 해도 바위로 만들어졌다면... 그건 부술 수도 있다는 뜻 아니겠소?"

"?"

다들 순간 이해하지 못해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데일은 굳게 닫힌 석문을 향해 다가가 주먹을 뒤로 힘껏 뻗었다.

그리고 허리힘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내질렀다.

꽈릉!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기분 탓일까? 데일의 주먹이 석문에 부딪히자, 왜인지 벽이 흔들리는 듯한 느낌이 났다.

"무슨. 터무니없는."

안드레이가 데일을 말리려 했지만, 데일은 계속해서 주먹을 연속해서 휘둘렀다.

꽈릉! 꽈릉!

이미 데일의 괴력은 그 적수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데일의 주먹질은 대포의 포탄에도 밀리지 않았다.

하지만 단단한 석문은 데일의 주먹질에도 굳건하게 버텨냈다.

데일은 왼주먹도 함께 뻗으며, 번갈아 가며 두드리기 시작했다.

얼핏 보면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난타.

모두가 멍하니 쳐다볼 때, 프라우만이 데일의 주먹질에 지닌 기술을 간파해냈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완벽하게 힘을 집중한다. 그리고 수십 번의 주먹질 동안 타격하는 위치는....'

정확히 같다!

"데일 경! 더 못 버텨요!"

에스델이 다급히 외쳤다.

방어벽이 산산이 깨지며, 밀려나 있던 물이 다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데일은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치 눈앞의 석문이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듯.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힘껏 타격했다.

그러다 일순.

파각.

"!"

결코 깨지지 않을 것 같은 석문의 표면에 실금이 생겼다.

데일이 속도를 높였다.

팔과 주먹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빠른 속도로 문을 난타질했다.

실금이 점점 커지며 균열이 되었다. 균열이 거미줄처럼 석문 전체에 퍼져나갔다.

그리고 석문이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데일은 발을 들어 그대로 문을 걷어찼다.

꽈르릉!

석문이 무너지며 방 안에 고여 있던 물이 빠르게 빠져나갔다.

홀딱 젖은 일행은 말을 잃었다.

"말도 안되는...."

"원래 이런 식으로 통과하는 건 아니었겠지?"

"...설마 바이만이 그렇게 무식하게 만들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경악하는 일행에게 데일이 말했다.

"뭐로 가든, 목적지에만 도착하면 되는 법이다."

아무리 마법으로 수작을 부려놔봤자,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장난질에 불과하다는 걸 데일이 증명해버렸다.

한스와 안드레이는 동시에 생각했다.

'우리. 처음부터 필요 없었던 거 아닌가.'

하지만 그걸 인정하면 너무 비참해졌기에, 둘은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어쨌거나 위기는 넘겼다.

데일이 말했다.

"나가자. 이 앞이 보물고겠지."

"오오!"

그제야 일행은 다시 기운을 되찾았다.

드디어 보물고에 다다른 것이다.

조금 진부한 상상이지만, 금은보화가 가득 쌓여 있을까?

아니면 온갖 마도구들이 선반에 정렬되어 있을까?

각각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석문 밖으로 걸음을 옮긴 일행이 본 건....

넓은 공동이었다. 원형으로 넓게 패인 공동의 벽에는 수십 개의 석문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예상치 못한 광경에 일행은 호기심을 가지고 발을 들여놓았다.

그러자 공간 한가운데가 일렁이더니, 이내 푸른 피부를 한 유령 같은 존재가 나타났다.

"아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환영합니다!"

유령 같은 여인이 예를 갖추며 말했다.

"저는 수호자. 이 보물고를 관리하고 침입자를 격퇴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자입니다. 이곳까지 다다랐다는 건, 지혜와 재치. 순발력으로 모든 시련을 통과했다는 말이겠죠. 역시 바이만의 왕족다운... 왕족다운...."

뒷말을 흐린 수호자의 한쪽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어라? 문이 왜 부서져 있지? 이게 부서지라고 만든 물건이 아닌데...."

일행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보물고

* * *

수호자는 망연자실한 기색으로 박살나버린 석문을 살폈다.

"침입자? 공성추 같은 거로 부순 건가? 대체 누가?"

"내가 부쉈다만."

"...어떻게 말이죠?"

"주먹으로."

수호자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엘레나가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그대가 이곳의 수호잔가? 나는 바이만 왕가의 마지막 계승자인 엘레나야. 내 권리를 행사하러 이곳에 왔어."

수호자는 곧바로 고개를 숙여 예법을 취했다.

"보물고의 수호자가 계승자를 뵙습니다. 엘레나 전하. 전하의 권리를 인정합니다. 저와 이곳에 있는 모든 건 폐하의 것입니다."

"저, 전하라니."

그 익숙지 않은 호칭에 엘레나는 멋쩍어했다.

나라가 없는 왕에게는 과분한 호칭일 뿐이었다.

물론. 수호자가 엘레나가 지닌 핏줄의 힘을 알아보는 건 다행이었다.

정식으로 보물고의 재산을 양도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보물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물어볼 게 있었다.

엘레나가 입을 열었다.

"근데 저 다섯 번째 방은 대체 어떻게 해야 문이 열리는 거야? 뭔가 오류가 있던 거야?"

"예? 이곳으로 오는 단서는 왕가에 대대로 내려왔을 텐데요?"

"왕가의 핏줄이 카드라스에 오르면 길이 보이리라. 다섯 걸음에서 멈춰라. 마법사 셋이 함께하면 문이 열리리라. 파수꾼을 피해 수호자를 만나면 원하는 것을 거머쥐리라... 이 정도밖에 못 들었는데. 내가 모르는 게 더 있나?"

수호자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아뇨. 그게 전부입니다."

"그럼 왜 문이 안 열렸다는 건데? 다섯 걸음에서 멈춰라. 마법사 셋이 함께하면 문이 열리리라... 여기에 마법사 세 명이 있어. 근데도 문이 안 열렸단 말이야."

의아해하던 수호자는 이내 탄식을 내뱉었다.

"아... 아무래도 수백 년이나 지난 탓에 말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신 것 같군요."

"뭐?"

수호자가 조금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사 세 명이 함께하라는 건... 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시끄럽게 굴거나 큰소리로 떠들다'라는 관용구입니다."

"잠깐. 그러면."

"예. 물이 쏟아지기 전에 큰소리로 문이 열리라고 외치면 됩니다. 마지막 방이니 만큼, 일부러 쉬운 수수께끼를 냈는데...."

해답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간단했다.

일행이 굳어있자, 수호자가 서둘러 설명했다.

"애초에 이 보물고는 마법이 없어도 헤쳐나갈 수 있게 설계되었습니다. 마법사가 3명이나 필요할리가요."

안드레이와 한스가 당황했다.

"확실히. 마법사들이 활약할 기회가 없다시피 하긴 했지."

"잠깐. 그러면 우리는 진짜로 처음부터 필요 없었다는 거야?"

분위기가 미묘해지자, 혼자서 지루하게 하품하던 프라우가 말했다.

"그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떤가. 이렇게 도착했으면 된 거지. 너 유령아. 왕가의 정당한 계승자가 왔으니 썩 보물이나 토해내라."

"저는 유령이 아닙니다. 굳이 따지자면 마법으로 만들어진 정령 같은 존재이지요. 게다가 왜 엘프가 폐하를 호위하고 있죠? 아무리 시간이 오래 흘러 세상이 변했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군요."

"나를 모욕하는 건가!"

어쨌든 프라우의 말이 맞았다.

도착했으면 된 거 아닌가.

엘레나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흠흠. 그래도 수고했어. 수백 년간 침입자를 격퇴하며, 이 보물들을 지켜낸 너의 노고를 인정할게. 이제 우리를 보물고로 안내해주겠어?"

"...사실 딱 한 번이지만 도굴꾼들한테 털린 적이 있긴 한데."

"뭐?"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 수호자가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이곳에 전하께서 왔다는 건, 왕국이 위태롭다는 거겠죠? 역시 반란입니까? 아드레이 가문? 카라스토스 가문? 만약 반란을 일으킨 게 팽 가문이라면, 저는 그럴 줄 알았다! 하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놈들이 다루는 마법은 워낙 반항적인 구석이 있었으니까요."

엘레나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수호자의 등에 대고 말했다.

"왕국은 멸망했어. 이제 백성들도, 용맹했던 기사단도, 그대가 말한 명문 가문들도 전부 사라졌어."

"...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수호자는 단호히 부정하려 했다.

그의 머릿속에 입력된 상식으로는 바이만이 몰락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대륙을 호령하는 제국이 멸망하는 게 더 빠르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엘레나의 서글픈 표정은 증명해주었다. 그녀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다른 일행도 입을 다물었다.

수호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대체 어째서?"

"악마...라고. 먼 곳에서 찾아온 침략작들이 침공해왔어. 대륙의 많은 왕국이 무너져 내렸고, 바이만도 그중 하나였지. 지금도 우리는 힘겹게 버티고 있는 처지야."

수호자의 눈빛이 흔들렸다.

수백 년이라는 시간을 이곳을 지켜왔을 수호자다. 사실 왕국은 이미 멸망했다는 진실을 듣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잠시 입을 다물었던 수호자가 말했다.

"그렇군요."

놀랄 만큼 덤덤한 목소리.

"해가 뜨면 해가 지고. 달이 차면 기우는 법이죠. 저희 바이만 왕국도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나 봅니다."

"...그래."

"하지만 바이만이 멸망했다는 건 틀린 말입니다."

"뭐?"

"이렇게 전하께서 살아계시지 않습니까."

수호자는 엘레나를 향해 양팔을 벌려 보였다.

"전하께서 곧 바이만입니다! 전하께서 계속 살아계시는 한. 그리고 그 고귀하고 특별한 피가 계속 이어지는 한 바이만은 건재한 겁니다. 그러니 멸망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마십시오."

수호자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엘레나도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그럼 이제, 이곳에 온 목적을 이룰 시간이군요. 저 벽에 있는 문들이 보이시죠?"

수호자가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널따란 공동의 벽에는 석문 수십 개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각자 방을 하나씩 골라 들어가시죠."

하켄이 물었다.

"어... 저 안에 들어가면 뭐가 있는데?"

"각자에게 꼭 필요한 것들이 들어있을 겁니다. 그게 지식일 수도, 보물일 수도, 강력한 유물일 수도 있죠."

이번엔 데일이 물었다.

"우리가 고를 수는 없는 건가?"

"원하신다면 고를 수야 있죠. 하지만 장담할게요. 직접 고르는 것보다는 선택에 맡기시는 게 나을 겁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서로 눈치를 보던 일행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하나둘 흩어져서 마음에 드는 석문 앞에 섰다.

"역시 가장 첫 번째가 제일 좋을 것 같은데."

"이 안에서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느껴져...."

데일도 적당히 남는 문 앞에 섰다.

그리고는 문고리를 힘껏 잡아당긴 뒤,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 두셋이 들어갈 수 있을 만한 정사각형 방이었다.

그리고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그때. 갑자기 벽을 뚫고 수호자의 머리가 쑤욱 튀어나왔다.

"아무것도 없는데? 라고 마음속으로 당황하고 계시죠. 분명?"

"...그렇다만."

"하지만 당신은 이미 이 보물고에서 물건을 하나 챙기셨습니다."

"뭐?"

"바로 그겁니다."

수호자는 데일이 맨 망토를 가리켰다. 그리고 어딘가 화가 난 어조로 외쳤다.

"아까부터 계속 신경 쓰였는데, 그 물건은 대체 어디서 얻으신 거죠?!"

"선물 받았다만. 이게 원래 이 보물고의 물건이란 말인가?"

수호자는 괜스레 주위를 휙휙 둘러보며 눈치를 살핀 뒤,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솔직히 말할게요. 사실, 전하께는 부끄러워서 말 못 했지만, 이 보물고에 침입자가 들어온 적이 있습니다."

"...."

데일의 눈빛이 싸늘해지자 수호자가 황급히 말했다.

"다, 단순히 운이 나빴다고밖에 볼 수 없어요. 왕가의 마법을 감지할 수도 없는 놈들이, 설마 이런 외진 곳까지 들어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 누가 험난한 카드라스 산. 그것도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 아래를 살펴볼 생각을 했을까.

"단 한 명. 여러 명이서 들어왔지만, 다섯 방을 지나쳐 여기까지 온 건 한 명이었습니다."

"그 함정들을 다 헤쳐나가다니. 꽤 실력이 출중했나 보군."

"아뇨! 그냥 평범한 용병이었습니다. 조금의 재치와 운으로 그 모든 함정을 지나친 거죠!"

운으로 여기까지 당도했다라.

선뜻 믿기 어려운 말이다.

하지만 긴 세월이 흐르다 보면, 가끔 어이없는 일도 벌어지는 법이다.

'그러고 보니 이 망토....'

데일은 이 망토를 선물해준 노인에게, 망토를 어디서 얻었는지 물어봤었다.

그때 노인은 용병일을 하던 선조가 우연히 유적에서 주웠다고 했는데....

'이게 이렇게 이어지는군.'

수호자는 이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물론. 특정한 형체가 없기에, 깨무는 시늉을 하는 것뿐이었지만.

"그렇게 운 좋게 들어온 놈이 감히 저에게 보물을 내놓을 걸 요구하더군요. 또 눈치는 어찌나 귀신 같은지, 망토가 귀한 물건임을 곧바로 알아보더라고요. 전투 능력이 없는 저는 결국, 그 망토를 내주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쯧. 파수꾼 놈들만 제대로 일했어도 그런 굴욕은 없었을 텐데."

"그래서. 일부러 망토의 힘을 봉인해 둔 건가? 순순히 보물을 주기 싫어서?"

"바로 맞췄습니다! 자격도 없는 자가 감히 욕심을 부렸으니, 조금 골탕을 먹여주었죠. 하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되돌아올 줄은 몰랐군요."

수호자는 데일의 망토를 어루만졌다.

"당신께는 다른 보물 대신, 이 망토의 봉인을 해제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섭섭해하지 마세요. 이 망토야말로 이 보물고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이니까."

"대체 무슨 힘이 잠들어있길래?"

"마법 반사."

수호자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힘을 주어 말했다.

"이 보물고는 바이만 왕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를 대비해 만든 곳입니다. 하지만 저희가 예상했던 왕국의 멸망은 하나입니다. 내부 분열."

바이만 왕가를 지탱하는 강력한 마법사 가문들.

그들의 배신이 있지 않으면 절대 몰락할 리 없다고. 오만한 바이만의 왕가는 생각했다.

"애초에 이 보물고는 내부의 반란을 대비해 만들어진 셈입니다. 그래서 이 안에 준비한 함정들도 마법으로 쉽게 파훼하지 못하도록 만들었고요. 이제 이 망토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십니까?"

마법을 반사하는 망토.

그야말로 마법사들에게는 천적이나 다름없는 유물이다.

이 보물고에 있는 가장 귀한 물건이라는 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데일이 물었다.

"그런 걸 나한테 건네주어도 되겠나?"

수호자가 복잡한 감정이 깃든 미소를 지었다.

"제 손을 떠났던 망토가 당신의 손에 들어갔다면, 그건 분명 운명이겠죠. 이제 이 망토로 혼내줄 반란 분자도 사라지고, 지켜야 할 왕국도 무너졌지만... 당신이 전하를 지켜주세요. 언젠가 바이만이라는 불길이 다시 타오를 수 있게, 그 불씨를 지켜주세요. 약속해주실 수 있나요?"

데일은 조용히 수호자의 시선을 마주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확신은 못 하지만, 노력해보겠다."

"그것만으로도 됐습니다."

화아아아!

수호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망토의 겉면이 빛을 발하며, 숨겨져 있던 문양이 드러났다.

포효하는 푸른 사자.

망토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힘에 데일은 감탄했다.

'대단하군.'

유물도 그 힘에 따라 상급과 하급을 나누는데, 이건 한 국가의 보물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의 물건이었다.

데일이 물었다.

"어떤 마법이라도 되돌릴 수 있나?"

수호자가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이 망토가 만들어질 당대의 가장 강력한 마법조차 튕겨낸 물건입니다. 다만. 한 번 유물의 효과를 발동하면, 다시 사용할 때까지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지만 망토 자체로도 마법에 강한 저항성이 있으니,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군."

"망토가 지켜주는 건 오로지 착용자 한 사람이라는 건 명심해주세요."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벌의 목숨이 새로 하나 추가된 셈이니,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데일은 푸른 사자가 새겨진 망토를 둘렀다.

데일의 흑색 갑옷과 연회색의 망토. 그리고 푸른 사자가 어우러져, 제법 그럴듯한 모습이 되었다.

마치 옛날이야기 속에 나올 법한 기사의 모습이었다.

아마도 주인공보다는 악역을 맡았겠지만 말이다.

원하던 소득을 얻은 데일은 문을 나섰다.

다른 일행 역시 하나둘 걸어나오고 있었다.

못 보던 물건을 가지고 나온 이도 있었고, 깨달음을 얻은 듯한 표정을 한 사람도 있었다.

공동으로 나온 일행은 각자 자기들이 무엇을 받았는지에 대해 자랑하려 했다.

그때. 수호자가 눈을 감더니, 입을 지그시 깨물었다.

"벌써 여기까지 왔다고? 쯧."

수호자가 외쳤다.

"자자! 이제 그만 돌아갈 시간입니다! 시간이 없거든요."

"시간이 없다니요?"

"파수꾼이 오고 있습니다. 석문을 부쉈으니, 금방 여기까지 도달할 거예요! 밖으로 향하는 문을 열게요!"

수호자의 태도가 워낙 다급해서, 일행은 질문조차 던지지 못했다.

수호자는 서둘러 움직여 바깥으로 향하는 통로를 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때.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려 하는 거지?"

부서진 석문으로 일단의 무리가 들어왔다.

새하얀 갑옷을 입은 성기사들과 병사들.

그리고 얼굴에 깊은 흉터가 난 사냥꾼.

그들은 천천히 걸어오다, 엘레나를 타는 듯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바이만 왕가의 계승자. 우리를 이곳에 가둔 가증스러운 핏줄아. 너는 우리와 같이 영원히 이곳에 남아야 할 것이다."

성기사는 철퇴를 엘레나에게 겨누며 말했다.

"마침내 복수의 시간이 왔다."

보물고

* * *

에스델은 성기사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이오넬 경? 대체 여기에는 어떻게?"

하켄과 데일도 사냥꾼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뭐야. 마젤이잖아."

이 의외의 사태에 모두 굳어버렸다.

대체 이 성기사가 대체 왜. 그리고 어떻게 이곳에 온 것인가.

'...마젤을 이용해서 추격한 건가?'

마젤은 뛰어난 사냥꾼이다. 그 추적술은 데일도 한 번 덕을 본 적이 있다.

정황상 성기사는 마젤을 이용해 데일 일행을 쫓은 듯하다.

아마도 목적은.

'에스델?'

중간에 정보가 새어나간 것일까?

그렇다면 대체 어디서?

데일이 머리를 굴리는 사이, 에스델은 라이오넬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라이오넬 경! 이곳에는 무슨 일입니까! 그리고 이곳에 남는다는 건 무슨 말씀이시죠?"

"에스델. 이교도랑 붙어먹은 배신자 년. 너 역시 이곳에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해야 할 거다."

"예?"

에스델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중얼거렸다.

"뭔가 이상해요. 분명 라이오넬 경이 맞고, 목소리도 똑같은데... 마치 다른 사람 같아요."

"다른 사람이 맞습니다."

침묵하고 있던 수호자가 입을 열었다.

"파수꾼입니다. 본디 이 유적을 지키도록 만들어진 존재이지요. 저들에게는 사람의 몸을 빼앗거나, 그 사람의 모습을 똑같이 흉내 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면 저게 라이오넬 경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분의 육체는 맞습니다. 알맹이가 달라졌을 뿐이죠."

다른 이의 몸을 빼앗는 생물이라니.

하켄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근데 왜 이렇게 적의를 풀풀 풍기는 거지? 엘레나가 이곳 주인인데 알아서 기어야 하는 거 아니야?"

수호자가 고개를 저었다.

"수백 년간 이 지하에 갇혀 있으면서 저들은 변했습니다. 왕가에 대한 충성과 헌신이 도리어 증오가 되어버렸죠. 제 제어를 따르지 않게 된 지 오랩니다."

애정과 증오는 서로 닮은 감정이라 했던가.

파수꾼들은 이 지하에 자신을 처박은 바이만의 왕가에 복수의 칼날을 갈아왔다.

그리고 이제 기회가 왔다.

"제가 출구를 열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버텨주세...."

"어딜!"

쐐액!

마젤이 기습적으로 쏘아낸 화살이 엘레나에게 날아갔다. 맹렬한 속도.

곁에 있던 데일이 곧바로 왼손을 휘 뻗어 화살을 쳐냈다.

다짜고짜 화살을 쏘아낸 마젤. 아니. 파수꾼이 외쳤다.

"너는 아무 데도 못 간다! 우리와 같이 이 지하에 남아, 우리가 겪은 고통을 똑같이 느끼게 해주겠다."

"우와아아!"

그걸 신호로 파수꾼들이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우득.

데일은 손을 오므려 화살을 부러트려 버렸다. 다짜고짜 엘레나를 쏘려하다니. 조금 열이 받았다.

"그냥 다 죽여버리면 안 되나?"

수호자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저들은 이곳 유적 안에서라면 절대 죽지 않아요! 무적이란 말입니다! 제가 출구를 열 테니, 그때까지만 버텨주세요!"

그다음 순간.

가장 먼저 달려온 병사가 데일을 향해 워해머를 내리치려 했다.

데일은 마검을 횡으로 휘둘러, 그대로 병사의 목을 쳤다.

퉁!

날카로운 검날이 살을 베고, 뼈를 끊었다. 깔끔하게 잘린 머리가 하늘을 날았다.

죽였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절단면에서는 피 대신 끈적한 검은 액체가 흘러나오더니, 이내 잘린 목과 연결되며 다시 붙어버렸다.

'슬라임... 같은 건가?'

병사는 분노하며 워해머를 휘둘렀다.

"죽어라!"

데일은 손을 뻗어 워해머를 텁! 붙잡아 버렸다. 병사는 무기를 되찾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대신, 입을 크게 벌렸다.

촤악!

벌어진 입에서 검은 액체가 튀어나왔다. 데일의 몸을 빼앗으려는 건가?

그렇다면 데일을 너무 얕본 거였다.

데일의 안광이 번뜩였다.

마력이 주위에 뻗어나갔다.

영혼 지배.

병사의 몸과 검은 액체 모두 굳어버렸다. 완전히 지배하는 데에는 실패. 하지만 멈추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데일은 병사의 양발을 붙잡아 빙빙 돌린 뒤, 저 멀리 던져버렸다.

포탄처럼 날아간 병사의 몸은 공동의 천장과 부딪혔다가, 이내 바닥에 추락했다.

검은 액체가 된 육신이 찌그러진 갑옷과 엉겨 붙었다. 하지만 원래의 형상으로 돌아가는 건 금방이었다.

'귀찮게 됐군.'

무적이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이 파수꾼이라는 놈들은 유적에 서린 마력을 받아 순식간에 몸을 재생해냈다.

마검으로 베어도 그때뿐.

자그마한 조각이라도 남으면 빠르게 재생해버렸다.

데일이 외쳤다.

"모두 엘레나를 지켜! 출구가 열릴 때까지 시간을 번다!"

파수꾼들은 유독 엘레나를 향해 극렬한 적의를 드러냈다.

다른 이들은 다 놓치더라도, 엘레나만은 잡아내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일행은 한곳에 뭉쳤다.

에스델이 방어벽을 전개했고, 마법사들은 강력한 화력으로 파수꾼들이 다가오는 걸 저지했다.

이대로라면 언제까지고 어렵지 않게 버틸 수 있을 것 같지만... 상대에게도 골치 아픈 존재는 있었다.

"신이시여! 나에게 저들을 벌할 힘을!"

라이오넬의 몸에서 찬란한 광휘가 흘러나왔다.

순간적으로 자기 신체 능력을 끌어올리는 축복 기적.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무기에 빛이 깃들라!"

라이오넬의 메이스와 병사들의 무기가 하얀빛에 둘러싸였다.

무기에 빛의 힘을 담는 축성 기적.

마지막으로.

"우리는 적을 멸하기 전까지 결코 쓰러지지 않을지어다!"

라이오넬과 병사들의 안광이 흉흉히 빛나기 시작했다.

맷집과 체력을 모두 끌어올리는 강화 기적.

연달아 펼쳐지는 기적의 향연에 다들 눈을 휘둥그레 떴다.

"광역 기적 3개를 연달아 쓰다니. 역시 성기사... 잠깐. 기적을 쓴다고?"

파수꾼이 저 몸을 차지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한 외침에 수호자가 외쳤다.

"파수꾼은 몸을 빼앗은 상대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요! 능력도 쓸 수 있죠!"

에스델이 인상을 찌푸렸다.

"기적은 신께서 허락하신 힘입니다. 그런 걸 불신자가 몸을 빼앗았다고 쓸 수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시간을 벌어야 해. 성기사는 내가 맡겠다."

데일은 마검을 들고 성큼 앞으로 나갔다.

저 성기사는 데일이 맡아야 한다.

성기사와 흑기사는 서로의 대척점에 선 존재.

저 새하얗게 빛나는 메이스는 보는 것만으로도 불쾌했다.

데일은 마검을 쥐며 말했다.

"우리는 어떻게 추적한 거지? 그리고 추적해서 뭘 할 생각이었던 거냐."

"나를 막아선다면 너 역시 우리와 같은 꼴로 만들어주마!"

라이오넬. 아니. 라이오넬의 몸을 빼앗은 파수꾼이 쩌렁쩌렁 외치며 달려들었다.

'대화할 생각이 없나.'

파수꾼은 몸을 빼앗은 자의 기억을 엿볼 수 있다니, 단서를 캐보려 했지만, 파수꾼은 맹목적인 분노에 사로잡혀 달려들었다.

캉!

메이스와 마검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축복으로 강화한 성기사의 신체 능력은 그 자체로도 인간 흉기라 불러도 과장이 아니었다.

데일의 괴력으로도 선뜻 밀어낼 수 없었다.

하지만 데일을 더 괴롭게 만든 건 축성된 메이스에 담긴 빛의 힘이다.

빛의 힘은 그 자체로 데일에게 강력한 타격을 주었다.

갑옷이 조금씩 녹아내리며 데일에게 강렬한 고통을 주었다. 영혼의 고통.

'이럴 땐 어떻게 해야.'

데일은 반사적으로 상대법을 깨달았다.

선배 흑기사였던 케인은 성기사와도 싸워본 적이 있었고, 그 기억이 희미하게나마 데일의 머릿속에도 잠들어 있었다.

'검은 안개.'

데일의 갑옷에서 어둠이 뿜어져 나왔다.

빛과 어둠이 허공에서 어우러졌다.

으레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하였다.

하지만 그건 거짓이다. 빛의 신도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더 짙은 어둠은 빛을 몰아낼 수 있다.

화아아!

검은 안개가 메이스를 감싸, 빛의 힘을 억눌렀다.

마력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빠져나갔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수호자가 출구를 열 시간만 벌면 된다.

"이노옴!"

분노한 라이오넬이 메이스를 휘둘러 데일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웬만한 공격을 모조리 튕겨내는 갑옷도, 이번만큼은 쉽게도 찢어졌다.

데일은 곧장 홀스터에서 단검을 뽑아 녀석의 목에 틀어박는 걸로 응수해주었다.

원래라면 아무리 성기사라도 치명상에 이를 일격이지만....

철퍽!

상처 난 목에서는 검은 액체가 튀어오르더니 순간 데일의 손을 사로잡으려 했다.

'슬라임... 성가시군.'

슬라임처럼 유체 상태의 몬스터는 이래서 상대하기 까다롭다.

가장 좋은 점은 마법으로 불태워버리는 거지만, 보물고의 특성상 마법 공격에 대한 저항성도 있을 것이다.

쉽지 않은 싸움에 데일이 곤란함을 느끼던 그때.

파수꾼이 외쳤다.

"됐어요! 모두 타세요!"

파수꾼이 가리킨 바닥에는 원형의 승강기가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부유 마법을 이용한 승강기였다.

데일이 외쳤다.

"먼저 타! 어서!"

승강기를 보자 파수꾼들이 발악을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일행을 막아서겠다는 듯이 몸을 던져왔다.

누군가는 뒤에서 막아내야 한다.

"하켄! 나랑 같이 막는다."

"저, 저요? 쯧. 어쩔 수 없죠."

몰려오는 파수꾼들을 향해 하켄이 타워 실드를 휘둘러댔다.

데일만큼은 아니어도, 근력이 많이 늘었기에 가능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다 일순. 움직임을 멈췄다.

아는 얼굴이 단검을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마젤이다.

"이런 씨. 아는 얼굴을 죽이면 잠자리가 사나운데."

"저건 이미 마젤이 아니야!"

"압니다!"

데일은 마젤을 베어냈다.

다른 병사와 달리 갑옷도 입지 않은 마젤은 그대로 두 동강이 난 뒤, 검은 액체가 되어 흘러내렸다.

데일은 요령 좋게 마젤의 용병패를 잡아챘다.

한때 어깨를 마주 했던 사이로서, 최소한의 예우였다.

그때. 위쪽에서 에스델이 소리쳤다.

"데일 경! 다 탔어요!"

승강기는 벌써 허리 높이까지 올라갔다. 그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

파수꾼도 그걸 확인하고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라이오넬은 미친 사람처럼 고함을 내질렀다.

"도망가지 마라! 바이만의 후계자야! 네 죗값을 치르란 말이다!"

그러고는 데일을 무시해 승강기를 향해 힘껏 뛰어올랐다. 하지만 그게 데일에게는 오히려 기회였다.

'감히 날 무시해?'

데일은 재빨리 팔을 뻗어 녀석의 허리를 붙잡아 땅에다 패대기쳤다. 그리고는 바닥을 박찬 뒤, 놈을 힘껏 밟았다.

콰직!

성기사의 단단한 갑옷도, 데일의 무게가 실린 일격에는 버텨낼 수 없었다.

놈의 몸이 으스러졌다. 금방 재생할 테지만, 짧은 틈이 생겼다. 그 틈이면 충분하다.

데일은 몰려오는 나머지 파수꾼들을 힘껏 밀쳐낸 뒤, 갈고리 밧줄 던져 승강기에 걸었다.

"하켄! 물러서라!"

이제 남은 건 하켄을 끌어안고, 곧바로 밧줄을 잡아당기는 것. 그러면 이곳을 탈출할 수 있지만....

고개를 돌린 데일은 순간 멈칫했다.

"데일 경!"

"빠, 빨리 가죠!"

"?"

하켄이 두 명이 있었다.

두 명의 하켄은 나란히 서 있었는데,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옆으로 시선을 돌려 서로 눈을 마주쳤다.

하켄이 동시에 외쳤다.

"뭐, 뭐야 시발!"

"이 새낀 뭔데!"

데일도 순간 굳어버렸다.

"...어느 쪽이 진짜지?"

"접니다 경! 저, 못 알아보시겠습니까?"

"무슨 개소리야! 접니다! 제가 진짜라고요!"

둘은 서로가 진짜라 주장했다.

똑같은 얼굴. 똑같은 목소리. 똑같은 말투.

도저히 분간할 수가 없었다.

'골치 아픈 장난을 치는군.'

파수꾼의 시커먼 악의는 끝까지 자신들을 방해한 하켄과 데일에게 향했다.

적어도 일행 중에서 한 명은 사로잡아, 자기들과 같은 꼴을 만들어내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경! 서두르세요!"

데일은 고개를 들어 승강기를 살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승강기는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빠져나갈 타이밍을 놓치고 만다.

"하켄. 너만 알 법한 비밀을 말해라."

"비, 비밀?"

"그렇게 말하셔도."

두 하켄은 서로 주저하다가, 데일이 슬쩍 주먹을 들어 올리자 황급히 실토했다.

"사, 사실. 이건 비밀인데. 데일 경이 보급품을 사라고 주신 돈으로 도박하다 전부 날려버려서, 싸구려 물건으로 채워 넣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다른 용병들 호주머니를 슬쩍 턴 적이 있는데...."

"야! 그걸 말하면 어떡해!"

데일의 눈빛이 한층 싸늘해졌다.

둘 다 너무 하켄이 할 법한 일이라, 도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간다.

여기서 더 지체하면 정말로 탈출할 기회를 놓치고 만다.

"데일 경!"

"데일 경!"

애절한 표정을 지으며 조금씩 다가오는 두 하켄을 보며 데일은 결심을 내렸다.

"결정했다."

쾅!

잠시 고심하다, 눈을 번뜩 뜬 데일은 오른쪽 하켄의 투구를 내리쳤다.

투구와 함께 으스러진 머리는 이내 검은 액체가 되었다.

정답을 맞힌 것이다.

데일은 곧바로 하켄의 허리를 붙잡은 뒤, 밧줄을 잡아당겨 위로 향했다.

하켄이 감동한 얼굴로 말했다.

"역시 경이라면 알아볼 줄 알았습니다! 어떻게 맞춘 거죠?"

"그냥 찍었다."

"...예?"

하켄이 물었다.

"만약 저게 진짜였다면 어쩌려고 그러셨는데요."

"죽을 정도로 세게 내리치지는 않았다. 만약 선택이 틀렸으면... 에스델한테 고쳐달라 하면 되니까."

"...."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고 말하려던 하켄은 그만두었다. 말해봤자 들어먹지도 않을 것 같았다.

데일은 밧줄을 잡아당겨, 마침내 승강기 위에 올라탔다.

일행은 그런 데일과 하켄을 안도한 얼굴로 맞아주었다. 그리고 멀어져 가는 바닥을 쳐다보았다.

저 아래에서 파수꾼과 수호자가 이쪽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바이만! 너를 영원히 저주한다! 우리를 이런 곳에 처박아 두고, 넌 행복할 것 같으냐! 가장 끔찍한 죽음이 너에게 찾아갈 것이다! 으아아아아!"

"전하! 부디 무사하셔야 합니다!"

끔찍한 절규와 저주의 말.

그와 상반되는 수호자의 걱정이 뒤섞여, 지하를 울렸다.

엘레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호자의 기대도. 파수꾼의 원망도. 전부 바이만의 핏줄인 그녀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었으니.

마침내 승강기가 상승을 멈췄다.

눈 부신 빛과 하얀 설산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일행은 바닥에 널브러져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후와. 죽는 줄 알았네."

"그래도 밖에 오니 좋네요. 수호자님께는 정말 감사하네요."

에스델의 말에 하켄이 중얼거렸다.

"고맙지. 고맙긴 한데... 기왕이면 좀 더 아래에서 내려줬으면 안 됐을까?"

휘이이잉!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일행은 지금, 카드라스의 설산 꼭대기에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 * *

일행은 갖은 고생 끝에 설산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깊은 새벽이었다.

"으잉? 뭐여. 살아 있었슈?"

자다 깬 촌장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는 하켄 뒤에 서 있는 면면을 살핀 뒤,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평범한 용병단인 줄 알았는데. 구성원이 살벌하구만."

데일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식사를 준비해주시오. 돼지나 소를 한 마리 잡아주면 좋겠소. 술도 필요하고, 씻을 수 있게 따뜻한 물도 챙겨주시오."

촌장은 데일을 보며 움찔했다. 다리가 저절로 후들거려 왔다.

하지만 겨우 이 정도에 겁먹어서는 카드라스에 터를 두고 살 수 없는 법이다.

"흠흠. 이 늦은 시각에 갑자기 돼지를 잡으라니. 마을 사람들을 다 깨우라는 거슈? 먹다 남은 수프를 줄 테니 그거나 먹으슈."

데일은 자루를 하나 내밀었다.

촌장은 눈썹을 찌푸렸다.

"뭐요. 돈? 허참. 동화 몇 개 준다고 내가 이 밤중에 고생을...."

촌장은 주머니를 열었고, 그 안에 반짝이는 동전들을 확인했다.

촌장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돼지를 두 마리 잡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여보! 당신은 물 데워줘!"

그렇게 말한 촌장이 서둘러 집을 나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켄이 머리를 긁적였다.

"방금 저 노인네, 또박또박 말한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하지만 그런 사소한 데에 신경 쓰기에는 일행은 너무 지쳐 있었다.

안 그래도 체력이 부족한 마법사들은 바닥에 허물어졌고, 하켄이나 프라우처럼 단련된 전사들도 피로한 얼굴로 벽에 몸을 기댔다.

"따뜻한 물. 준비됐어요."

"저랑 엘레나부터 씻을게요."

에스델은 엘레나를 데리고 촌장의 부인을 따라갔다.

하루종일 익숙지 않은 갑옷을 입느라 잔뜩 땀이 나서, 당장 씻어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데일은 무기를 바닥에 늘어뜨린 뒤, 헝겊을 꺼내 세심히 닦아주었다.

무기란 의외로 섬세한 도구다.

잘 관리해주지 않으면 중요한 순간에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음! 언제나 무기부터 신경 쓰는 모습! 그야말로 전사의 귀감이군."

작게 감탄한 프라우는 데일과 똑같이 무기를 꺼내, 잘 다듬어주었다.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카락. 이번에는 자네를 사용하지 못해서 미안하네. 분명 다음에 활약할 기회가 있겠지. 아드마일. 언제나 그랬듯 훌륭했네. 파수꾼의 목을 꿰뚫었을 때는 매우 통쾌했다네. 뭐? 모두 내 검술 덕분이었다고? 하하! 이 친구. 아부는."

조용히 검을 닦던 데일이 한마디했다.

"무기에 이름을 지어주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대화는 안 하면 안 되나?"

"무슨 소리! 검의 마음을 듣는 건 훌륭한 전사의 덕목일세!"

"내 마검이 지금 네 머리를 쪼개고 싶다고 말하는데, 어떡하면 좋을까."

"하하! 농담도 참."

그런 둘을 안드레이와 한스가 묘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왜 그렇게 보시오."

"아니. 그런 시시껄렁한 대화를 듣다 보니,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이 모두 꿈처럼 느껴져서요. 사실 우리. 대단한 모험을 한 셈 아닌가요?"

멸망한 왕국의 보물고. 치명적인 함정들. 보물고를 수백 년간 수호자와 파수꾼.

그리고 아슬아슬한 탈출까지.

다른 누군가가 본다면 멋진 모험이었다고 추켜세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정작 그 모험을 겪은 당사자들은 영 뒤숭숭한 기분이었다.

수백 년간 보물고에 갇혀 분노를 키워온 파수꾼들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성기사의 난입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성기사가 대체 왜 이곳에... 그보다 그분들은 다 죽은 거겠죠?"

하켄이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신앙심이 강하지 않은 그였지만, 교단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성기사와 그 병사들의 죽음은 꽤나 씁쓸한 감정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그사이에 마젤이 끼어있는 것도 충격이었다. 그 마젤이 엘레나에게 다짜고짜 화살을 퍼부었던 것도.

"아무리 몸을 빼앗겼다고 해도...."

"그건 이미 마젤이 아니다. 그 시점에서 마젤은 이미 죽었던 거다."

"마젤은 왜 저희를 쫓아 이곳까지 왔을까요?"

"글쎄. 아마 쫓는 게 우리라는 걸 모르지 않았을까 싶은데."

데일은 마젤이라는 사내에 대해 생각했다.

늘 침착하고, 관찰력이 뛰어나며, 놀랍도록 냉정한 사내였다.

데일과는 다른 의미로 차가운 성정을 지녔다.

그런 마젤이 상대가 데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추격했을까?

'글쎄.'

의뢰를 고르는 것도 용병의 능력이고, 마젤은 뛰어난 용병이었다. 아마 자발적으로 온 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보다 데일의 주의를 끈 건 다른 부분이었다.

'추격이 너무 빨랐어.'

마젤이 아무리 뛰어난 사냥꾼이라 해도, 누군가를 추격하는 건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데일도 한때 추격 의뢰를 수행해봤기에 잘 안다.

'만약 에스델이 수행을 떠난 게 아니라는 사실이 우연히 발각되었고. 그때 부랴부랴 추격을 개시한 거라면, 시간이 더 걸렸어야 해.'

하지만 성기사는 곧바로 추격해왔다.

무슨 짓을 할지 이미 알고 있기라도 한 것마냥.

'에스델에게 생각보다 많은 감시가 붙어 있었던 건가? 아니면... 중간에 정보가 샜다?'

불현 듯 데일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인자하게 웃던 늙은 사제다.

오르단.

데일은 구체적으로 어디로 떠난다는 말은 안 했지만, 마젤 같은 사냥꾼을 이용하면 추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비약인가.'

물론. 근거는 없다. 그저 처음부터 오르단이 꺼림칙했기에 생긴 의심일지도 모른다.

데일은 사고를 계속 이어나갔다.

'오르단이 정보를 흘려서 얻는 이득.'

우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오르단 역시 데일을 제거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하는 가능성이다.

적당히 정보만 흘려도 교단 내의 광신도들이 알아서 분개해 데일을 처리하려 달려올 것이기에. 손쉽게 처리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

다만 의문이 남기는 하다.

'좀 더 세련된 방식을 쓸 수도 있지 않나?'

에스델과 데일은 이제 동료. 혹은 친우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사이다.

그런 데일을 에스델이 보는 앞에서 죽여버리면, 에스델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못해도 교단에 좋은 감정을 가지지는 않을 것 같다.

'아니면 반대로 생각해서... 내가 아닌 성기사를 제거한다?'

강력한 실력을 지닌 데일에게 성기사를 보내, 그를 죽음으로 모는 것도 하나의 가능성이다.

실제로 이번에 성기사와 그가 이끄는 병사 10여 명이 저 지하 깊은 곳에 잠들었으니, 교단으로서는 뼈아픈 손실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별로 교단에는 좋은 일이 아닐 것 같은데.'

생각을 이어나가던 데일은 문득. 얼마 전 여신이 해주었던 말이 기억났다.

'배신자를 조심하라.'

배신자. 그 명망 있고, 인자함을 그대로 그려낸 듯한 사제가 배신자라고?

선뜻 믿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딱히 근거랄 것도 없었고.

하지만 데일은 일단 마음속에 담아두기로 했다. 나중에 좀 더 의심스러운 정황이 보이면, 그때 생각해도 된다.

그때에 맞춰 촌장과 부인이 음식을 들고 왔다.

잘 잘라서 구운 돼지고기와 생치즈. 채소를 식초에 절인 반찬 따위였다.

투박하지만 든든함만큼은 보장된 식사.

몸을 씻으러 나갔던 엘레나와 에스델도 돌아왔다.

온종일 고생했던 터라 허기가 졌던 일행은 이내 고기를 열심히 뜯어먹었다.

술잔이 연거푸 돌면서 다들 표정이 누그러졌다.

아직 어려서 술을 먹지 못하는 엘레나만이 부루퉁하게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경. 저도 한 잔만 마시면 안 돼요?"

"안 돼."

데일은 이 부분에서는 절대 양보해줄 생각이 없었다.

시무룩해진 엘레나는 우유만 홀짝였다.

분위기가 풀어지자 대화 주제는 자연스럽게 보물고에 대한 얘기로 흘렀다.

"자자. 이제 각자 뭘 받았는지 말해보자고! 일단 나부터."

하켄은 손에 장갑을 들고 자랑스럽게 흔들었다.

손등에 붉은 보석이 박혀 있는, 척 봐도 비싸 보이는 물건이었다.

에스델이 감탄하며 물었다.

"와아. 멋있네요. 유물 장갑인가요?"

"응! 굳게 마음을 먹으면, 손에 전해지는 충격을 흘려보낼 수 있는 장갑이라는데?"

"...."

일행은 모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하켄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하켄. 그건...."

"사기꾼들이 물건을 그럴듯하게 포장할 때 자주 사용하는 설명이다. 예를 들어 강한 신념을 가지면 무엇이든 벨 수 있는 검이 있다고 쳐봐. 만약 그 검이 방패에 허무하게 가로막히면? 그때는, 아. 안타깝게도 당신의 신념이 부족했군요. 이런 식으로 되돌려주는 거야."

안드레이의 설명에 하켄이 눈을 부릅떴다.

"...그럼 나 사기당한 거야? 그래도 명색이 바이만의 보물고인데?"

엘레나가 발끈했다.

"그래요! 왕국의 보물고인데, 사기라뇨. 다만. 하켄과 굳은 마음은 별 관계가 없으니, 사용하기 힘들 거라는 데에는 동의해요."

확실히.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리는 하켄에게는 조금 과분한 유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켄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궜다.

다음은 에스델의 차례였다.

"저는 이거예요."

"검?"

에스델의 손에 들린 건, 고풍스러운 검집에 쌓인 한 손 검이었다.

사제로서 호신술을 교육받은 에스델은 검도 어느 정도 다룰 줄 알지만, 에스델에게 꼭 필요하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미묘한 구석이 있는 물건이었다.

"게다가 이 검. 검집에서 안 뽑혀요."

"뭐?"

"꼭 뽑아야 할 때면 뽑힐 거라는데요."

"뽑아야 할 때가 언제인데?"

"그건 저도 잘...."

연달아 미묘한 물건이 나오자, 분위기가 빠르게 식었다.

괜스레 미안함을 느낀 엘레나만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뒤로도 일행은 각자 자기가 무얼 받았는지 얘기했다.

한스는 부유 마법에 대한 지식을 얻었고, 엘레나도 바이만 왕가의 마법 지식을 머릿속에 담아 나왔다.

안드레이는 천체 모형을 받았다.

밤하늘의 별자리에 따라 저절로 움직이는 마도구인데, 새로 마도구에 대해 연구할 게 생겼다고 안드레이는 기뻐했다.

프라우는 바람 정령이 깃든 부츠를. 마지막으로 데일은 망토에 대해 설명하는 것으로 끝마쳤다.

"뭐. 그래도 소득이 나쁘지 않아. 후회할 일은 없을 거라고 보물고의 수호자가 호언장담했잖아? 지금은 조금 실망스럽더라도 나중에 도움이 되겠거니, 하고 생각해야지 뭐 어쩌겠어."

안드레이의 위로에 하켄과 에스델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도 일행은 양껏 먹고 마신 뒤, 테이블을 치워버리고 그 자리에 모포를 깔고 드러누웠다.

배가 부르니 피로가 더 확 와닿아, 잠이 쏟아진 것이다.

일행은 서로 뒤엉켜 잠자리에 들었다.

데일은 그 모습을 눈에 담은 뒤, 홀로 조용히 밖으로 나섰다.

겨울 새벽. 자그마한 마을은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데일은 품에서 용병 패를 꺼냈다.

구리로 만든 얇은 판에는 '마젤'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데일은 마젤이라는 사내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가 언제나 냉철하다는 것과 똑부러지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밖에 모른다.

마젤이 어떤 배경에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이제 영영 알 길이 없게 되었다.

마젤은 파수꾼과 싸우며 마지막으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별 생각 안 했을지도.'

죽음이 흔한 세계다. 그리고 용병이란 족속은 늘 죽음과 함께 걸어가는 이들이다.

아무리 실력자라도 운이 나쁘면 죽는다. 불운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이번에는 자신의 차례일 뿐이라고, 마젤은 생각하지 않았을까?

데일은 얼어붙은 바닥을 건틀릿으로 파낸 뒤, 그 안에 마젤의 용병패를 떨어트렸다.

용병 길드에 전해줄까 생각했지만, 마음을 바꿨다.

이번 여정에서 그들은 성기사와 마젤을 만나지 않은 셈 치기로 했다.

그편이 여러모로 깔끔할 것이다.

'일행에게도 그렇게 말해둬야겠군.'

데일은 파놓은 흙으로 다시 구덩이를 덮은 뒤, 둥그렇게 만들었다.

이 초라한 흔적이 마젤의 묘였다.

그때. 에스델이 문을 열고 나왔다.

"데일 경. 뭐 하세요?"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별일 아니다. 잠에 든 거 아니었나?"

"프라우 경이랑 하켄이 너무 코를 심하게 골아서요...."

에스델은 이를 으득 갈았다. 어지간히 짜증이 난 모양이다.

처음 만났을 때의 에스델이라면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을 텐데. 이것도 긍정적인 변화라고 봐야 할까?

에스델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감탄을 흘렸다.

"와아."

검은 도화지에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빛과 어둠의 조화.

그 압도적인 광경에 둘은 입을 다물고, 한동안 말없이 감상했다.

같은 하늘을 보지만 느끼는 바는 다를 거다.

에스델은 아마 신에 대한 경외를 새삼 느끼지 않을까.

데일은....

고향과. 그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을 떠올렸다.

짙은 매연이 가득한 도시의 밤하늘에는 별 하나 보기 어려웠다. 이런 풍경은 때때로 데일에게 기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는 이 세상의 이방인이라는 것.

혼자서만 주위에 동화되지 못하고 붕 떠오르는 감각.

그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이질감.

궁상떠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데일에게도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이었다.

아니. 이런 것도 아직 그가 사람이라는 증거이니 기뻐해야 하는 걸까?

둘은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그러다 에스델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앞으로도 계속 이랬으면 좋겠어요."

무슨 뜻일까. 성녀 후보로서의 중압감을 벗어던지고 이렇게 일행과 함께 모험하는 나날들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이 평화로운 분위기를 말하는 걸까?

세찬 바람에 에스델의 볼이 빨갛다.

데일은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일행을 추격해온 성기사에 대해서도 얘기하지 않았다. 에스델 나름대로 고심하고 있을 테니.

대신 데일은 말했다.

"날이 춥다. 들어가라."

"...예. 데일 경도 늦지 않게 들어오세요."

포근하게 웃은 에스델은 안으로 들어갔다.

데일은 홀로 앉아 멍하니 별을 바라보았다.

그날. 데일은 꿈을 꿨다.

꿈에서는 언제나처럼 조부와 보육원의 아이들이 나왔다. 즐거웠던 기억들이 지나갔다.

그리고 기억의 마지막에. 지금껏 데일이 죽여서 그 생기를 흡수해온 이들이 나타났다.

용병, 도적, 죽어 마땅한 쓰레기들. 적어도 무고한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데일을 둘러싸고 그저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어떤 원망도. 저주의 말도 없이 차가운 눈만 빛낼 뿐이었다.

'또 시작이군.'

데일은 꿈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들을 다시 한번 죽여야 했다.

침공

* * *

일행이 탄 마차는 가도를 따라 천천히 달렸다.

얼어붙은 도로 때문에 혹시라도 말이 미끄러질까. 마차는 천천히 달릴 수밖에 없었다.

며칠간의 이동 끝에 드디어 이레네가 보였다.

며칠 내내 내린 눈으로 이레네의 주위에 펼쳐져 있던 황금빛 평원은 새하얗게 물들었다.

하켄이 늘어지게 하품하며 말했다.

"뭐랄까. 빈민가가 엄청 커진 것 같지 않아요?"

그의 말대로였다.

원래는 공터였던 장소에도 허름한 흙벽이나 목재로 지은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터전을 잃은 피난민들.

혹은 고향 사정이 좋지 않아 더 나은 삶을 꿈꾸러 온 사람들이 모여 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바랐던 꿈속의 이레네와 현실은 다르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투구를 깊이 눌러쓴 에스델이 중얼거렸다.

"요즘 인구가 너무 늘어서 큰 문제에요. 도시에서 감당할 수 있는 인구를 이미 거뜬히 넘어버려서, 굶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이레네 주위에는 넓고 비옥한 땅이 있어 제법 많은 작물을 생산해낸다.

또. 제국의 중심지답게 각지에서 수확한 식량을 팔기 위해 많은 상인들이 몰려든다.

문제는 그런 방식에도 한계는 있다는 것이다.

그 부분을 안드레이가 대신 설명했다.

"도시에서 생산하는 식량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상태라더군. 게다가 요즘은 워낙 바깥이 위험하다보니, 상업도 크게 위축되었어."

도적이 들끓고, 언제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모르며, 악마와 그 하수인들이 돌아다니는 세상이다.

점점 더 많은 도시와 마을이 몰락한다는 건, 치안 공백이 더 커진다는 의미다.

그런 상황에서 상인들은 쉽사리 상행을 떠나기 힘들었다.

즉. 이레네로 오는 식량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게다가 이레네에는 저 많은 사람들이 맡을 일자리도 없어. 일이 없으면 굶을 수밖에 없고, 굶주린 사람들은 으레 도적이 되기 마련이지. 빈민가는 요즘 치안이 급격하게 나빠져서 큰 문제라고 하더군. 아예 외곽구역과 빈민과 말고도, 새로 구역을 나누자는 이야기도 빈민가 쪽에서 나오고 있고. 자기들끼리 자경단을 꾸려 난민을 쫓아내려는 움직임도 있다고 하더군."

원래도 성벽으로 구역을 나눠 차별하던 이레네다.

그런 차별 대우를 받던 빈민가가, 다른 난민들을 배척하려는 건 어딘가 우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갔다.

결국.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뿐인 것이다.

어쨌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굶주린 인간은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수 있기 마련이다.

빈민가에 문제가 생기면, 외곽구역과 상위 구역도 아무 피해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데일이 물었다.

"황제가 뭔가 대응책을 내놓지는 않았소?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인데."

안드레이는 마탑의 마스터이니, 들리는 얘기가 있지 않을까 싶어 질문했다. 하지만 안드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 마탑에 작물의 생산을 늘릴 방법을 연구하라고 명령을 내리긴 했다는군. 근데 어림없는 얘기야. 옛날이면 몰라도 지금처럼 전쟁 마법 외에는 전부 묻혀버린 시대에서 농사에 도움이 되는 마법이라니."

한숨을 푹 쉰 안드레이는 주위를 슬쩍 확인하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황제는 빈민가랑 외곽구역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아마 자기 백성이라고 생각도 안 할걸? 괜히 평의원을 두고 대리 통치하는 게 아니라고. 황제는 전선의 상황이랑 자기 휘하 병사들 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어."

안드레이는 황제를 썩 좋게 보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황제에 대해 안 좋은 말을 늘어놓던 안드레이는 이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황제 역시 불쌍한 사람이야. 천년을 넘게 이어져온 제국의 수도가 자신의 대에서 무너져내렸는데, 사람이 제정신일 수가 있나."

제국의 황제를 불쌍히 여길 수 있는 건 아마 안드레이가 유일하지 않을까?

데일이 물었다.

"안드레이도 제국의 수도에 있으셨소?"

"그래. 그 아비규환에서 탈출해, 이레네를 처음 세울 때부터 있었다. 내가 괜히 마탑의 마스터겠어? 힘들지만 나름 희망이 있던 시절이었지."

그렇게 말하는 안드레이는 이내 우수에 젖은 눈으로 입을 다물었다.

으레 노인들이 자주 그러듯. 과거에 잠긴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때. 마차가 마침내 빈민가에 접어들었다.

삐쩍 마른 아이들. 추위에 떠는 사람들. 이전보다 훨씬 암울한 분위기가 흘렀다.

하지만 마차가 들어서자 사람들의 표정이 일순 반짝였다.

그건 먹이를 노리는 사냥꾼의 표정이었다.

그들은 이 마차가 노려볼만한 사냥감인지를 가늠하는 듯. 유심히 마차를 살폈다.

'만만해보이면 정말로 습격이라도 하겠는데.'

다시 말하지만, 배고픈 사람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쓸데없는 싸움을 피하기 위해 데일이 마차의 앞으로 나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 데일에게 쏠렸다. 음험한 의도를 가지고 다가오려던 이들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도시에서 이름을 날리는 이 흑기사는 결코 만만한 사냥감 따위가 아니다.

힘겨운 삶에 이성이 흐려진 사람들도 그 정도는 알았다.

"흑기사... 데일 경?"

"그분이 오신 거야?"

"북부의 영웅께서...."

하지만 데일이 모습을 드러내자, 빈민가의 주민들은 낭패한 기색을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술렁거렸다.

그리고는 마차를 향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말을 몰던 하켄이 당황해 외쳤다.

"어어. 뭐야. 위험하니까 물러서!"

가장 빠르게 다가온 건 아이들이었다.

데일이 적선해준 식량을 몇 번 받은 적이 있는 아이들은 바로 앞에 다가와 간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

아이들이 이렇게 가까이 온 적은 없었다.

보통 에스델을 통해 식량을 받거나, 멀찍이서 쳐다보다가 식량만 받고 도망치듯 가버리기 일쑤였다.

이렇게 다가온다는 건 데일이 더는 두렵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아니면 그만큼 배고프거나.'

아이들의 영양 상태는 이전보다 좋지 않았다.

데일은 배낭을 열어 아이들에게 식량을 나눠주었다.

준비한 양이 넉넉지 못해, 자연스레 아이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줄어들었다.

아이들은 실망한 기색을 비쳤다.

하지만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를 표했다.

"고, 고맙습니다 경."

"기도 열심히 할게요."

"기도?"

데일이 의아해하던 그때.

사람들을 뚫고 익숙한 여인이 다가왔다.

밤의 사제장. 에리얼이었다.

그녀는 밤의 신도들을 옆에 거느리고 있었다.

"경. 언제 도시 밖으로 나갔었나요? 얘기라도 해주시지."

"잠시 일이 있어서. 근데 여기는 무슨 일이지?"

데일은 에리얼을 밖에서 보는 게 처음이었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음침하게 신전에 처박혀 있는 그런 엘프라고 생각했었다.

에리얼은 미소 지으며 뒤쪽을 가리켰다.

수레에는 잡곡과 말린 채소 따위가 쌓여 있었다.

"최근 경 덕분에 교세가 빠르게 늘고 있는데, 사제장으로서 가만 있을 수는 없죠. 굶주린 사람들을 구휼하고 있었습니다. 겸사겸사 포교도 하고요. 빛이 보듬어주지 못하는 사람들을 밤이 품어줘야 하지 않겠어요?"

물 들어오는 김에 노를 젓는단 말인가?

"어떠십니까 경? 구휼에 함께하시겠어요? 그러면 신도들도 기뻐하실 텐데요."

과연 이 포교가 효과가 있긴 한 건가? 그러한 의문을 느끼던 데일은 이내 자기 생각이 틀렸을 깨달았다.

이 주위에 몰려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어두운색 계열의 옷을 입고 있었다.

오랫동안 박해받아온 밤의 교도들은 밤의 상징물을 들고 다니지는 못하지만, 이런 식으로 스스로가 교의 소속이라는 걸 은근히 표현하고는 했다.

그 문화는 오늘날까지 유지되었다. 즉. 지금 이곳에 있는 상당수가 밤의 신도라는 뜻이다.

'포교 효과가 생각보다 큰 건가?'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은 의지할 곳이 필요하기 마련.

아무도 보듬어주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밤의 여신이 들어왔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성과는 데일 덕분이 클 것이다.

교단에서 성녀의 대체재를 찾는 데 힘을 쏟는 동안 데일은 악마를 토벌했고, 갖가지 공을 세웠다.

그러한 활약은 사람들에게 더 직접적으로 와 닿았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데일은 비로소 실감했다.

주위의 기대와 중압감을 받는 건 에스델만이 아니었다. 데일도 마찬가지였다.

신도들이 눈을 빛내며 데일에게 다가왔다.

"경. 손 한 번만 잡아주실 수 있나요?"

"데일 경.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흠모. 존경. 경외.

데일은 자신에게 쏠리는 이 감정이 싫었다.

데일은 밤의 여신을 숭배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거래 관계라고 생각했다.

그런 데일이 저들의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기분 좋기는커녕 무언가 속이는 기분이 들어 찜찜하기만 했다.

그래서 데일은 이 자리를 빨리 뜨고 싶었다.

"미안하지만 돌아가보겠다."

"아쉽네요. 어쩔 수 없죠. 데일 경도 바쁘실 테니. 다음에 신전에서 뵈어요."

에리얼이 손짓하자 사람들이 양옆으로 물러났다.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사람들은 마차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이쪽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그때까지 숨어 있던 에스델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교단이 더 분발해야겠네요."

데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여정이 끝난 뒤.

엘레나는 마법 연구에 몰두했다. 보물고에서 만난 파수꾼과 수호자는 그녀에게 책임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천재적인 재능과 의지가 맞물렸으니,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한스는 부유 마법에 대한 지식을 익힌 뒤, 놀랍게도 황실에 초청을 받았고 그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보물고에서 얻은 지식이 큰 도움이 되었던 셈이다.

끈도 없고 배경도 없던 한스에게 비로소 뒷배가 생겼으니 잘된 일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한스는 비밀 엄수 때문인지 황실 밖으로 쉽게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황제가 어지간히도 부유 마법에 진심인 모양이었다.

하켄은 휴식기를 맞아 오랜만에 고향으로 내려갔다.

언젠가 친우인 퀼의 죽음을 그 가족들에게 고백해야겠지만, 하켄의 성격상 쉽지는 않을 것이다.

교단은 성기사와 병사들이 실종된 사건으로 떠들썩했다. 에스델은 조용히 숨을 죽이며, 의심스러운 사람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아직 성과는 없다고 했다.

모두가 이 겨울을 바쁘게 보내고 있었다.

데일도 데일 나름대로 바빴다.

데일은 케인에게서 생기 흡수의 요령을 익히면서 상대의 기억을 제법 선명하게 읽을 수 있게 되었는데, 그 기억을 토대로 그들이 익힌 기술을 어느 정도나마 흉내 내는 게 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예전부터 그런 낌새가 있었지.'

돌이켜보면 크리스틴의 생기를 취하면서 데일의 검술은 한 단계 진보했고, 케인의 잔혼을 취함으로써 흑기사로서 싸우는 법을 배웠다.

이제 그 배움을 완전히 익혀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크리스틴의 검술은 잘 정제된 검이었고, 케인은 실전으로 단련된 투박한 검술을 활용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충돌하는 부분이 있었다.

한쪽을 포기하면 되지 않나 싶지만....

데일은 그러지 않았다.

아깝기도 하고, 자기 재능이라면 충분히 어우러지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오만한 자신감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여관의 뒷마당에서 열심히 검을 휘둘러 댔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군.'

데일은 투구를 긁적였다.

하루종일 검을 휘둘렀지만 영 진전이 없었다.

누군가 조언을 해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데일에게 그런 인맥은 없었다.

'기사단장... 은 좀 그렇지.'

언젠가 기사단장이 찾아오라 했지만, 썩 내키지 않았다.

데일은 기사단장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그렇게 고민에 빠져있던 그때.

불현듯. 데일의 머릿속에 한 얼굴이 떠올랐다.

'어쩌면.'

데일은 성큼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밤의 신전이다.

밤의 신전은 최근 신도가 늘어나고, 돈이 좀 벌린 모양이다. 허름한 입구가 제법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부는 별 차이가 없었다.

언제나처럼 시커먼 공간. 안대를 하고 미소를 짓는 사제장. 그리고 목검을 휘두르는 스켈레톤.

오늘의 목적은 그 스켈레톤이었다.

"백만 쉰 오십일! 백만 쉰 오십이!"

데일은 스켈레톤의 동작을 유심히 살폈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이 스켈레톤.

예사로운 존재가 아니다.

데일이 대뜸 스켈레톤에 다가서자, 에리얼이 외쳤다.

"잠깐. 또 마스터 루드비히를 괴롭히려는 건가요?"

"그런 거 아니다."

"그럼요?"

"검술에 대한 조언을 구하고 싶다."

목검을 휘두르는 스켈레톤이 우뚝 멈췄다.

스켈레톤은 고개를 돌려 타오르는 안광으로 데일을 쳐다보았다.

이 뼈다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데일은 도무지 읽어낼 수가 없었다.

스켈레톤은 다시 검을 휘둘렀다.

후웅!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기본적인 내려베기.

깔끔한 동작을 선보인 스켈레톤이 툭 내뱉었다.

"백만 번."

그러고는 다시 자기 혼자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데일이 에리얼에게 시선을 주었다. 에리얼은 어깨를 으쓱였다.

"마스터 루드비히랑은 제대로 된 대화가 힘들어요. 아시다시피 하급 언데드는 그... 여러모로 한계가 있으니까요. 저도 여러 번 대화를 시도해봤는데, 말이 통했던 적은 별로 없었어요."

스켈레톤은 언데드 중에서도 가장 하찮은 개체고, 생전의 집념이나 본능에 의지해 살아가는 짐승이나 다를 바 없는 존재다.

"죽어서도 검을 휘두를 정도면, 어지간한 집념인가 보군."

"예 그렇죠."

데일은 마검을 뽑았다.

처음에는 데일이 스켈레톤을 벨까 싶어 기겁했던 에리얼이지만, 데일이 이내 허공에 검을 휘두르자 당황하며 물었다.

"뭐하시는 거예요?"

"대화가 안 된다고 소통까지 안 되라는 법은 없다. 이 스켈레톤은 내가 검을 백만 번 휘두르길 바라는 거 같으니, 그대로 따라볼 생각이었다."

"하. 백만 번이라니. 너무 터무니없는 거 아닌가요?"

데일은 대답 대신 검을 휘둘렀다.

돌이켜 보면, 데일은 이런 식으로 제대로 검을 수련했던 적이 없다.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부터 실전에 내던져졌고, 패배하면 죽음에 이르는 싸움을 반복해왔다.

당연히 기초를 쌓을 세는 없었다.

아직 겨울이 조금 남은 지금. 그 부족한 기초를 다시 닦아볼 생각이었다.

밤의 신전 한 귀퉁이에는 항상 목검을 휘두르며 숫자를 세는 스켈레톤이 있다.

이제 그 옆에는 똑같이 검을 휘두르며 숫자를 세는 흑기사가 있다.

이 기묘한 풍경에 에리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상관없나.'

어찌 됐든 요즘 같은 시기에 데일이 신전 내에 있어주는 건 고마운 일이다.

데일은 이제 밤의 신전의 얼굴과도 같은 인물이니.

그때.

에리얼에게 밤의 신도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어지간히 놀랐는지, 얼굴이 창백해진 사내가 에리얼의 앞에 멈춰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큰일입니다!"

"왜 그러시죠?"

"4군단. 4군단이!"

사내가 외쳤다.

"4군단이 무너졌습니다!"

침공

* * *

4군단이 무너졌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에리얼이 신도를 다그쳤다.

"무너졌다니요! 더 자세히 설명하세요! 악마가 침공했다는 건가요?"

"그게. 저도 자세히는...."

"일단 정보는 확실한 거죠?"

"예. 안 그래도 지금 그 얘기 때문에 도시가 술렁이고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입술을 지그시 깨문 에리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당장 평의원을 소집해야겠네요."

에리얼은 급하게 걸음을 옮기기 전. 데일을 보며 물었다.

"잠시 신전을 지켜주시겠어요?"

"알겠다."

데일도 이 갑작스러운 소식에는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류의 소문에는 과장이나 거짓이 많이 섞이기 마련이다.

에리얼이 평의원들과 회의를 가진 뒤 돌아오면, 보다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고마워요. 그럼 다녀올게요."

에리얼은 호위 몇 명과 함께 빠르게 사라졌다.

잠시 동작을 멈췄던 데일은 다시 검을 쥐었다.

옆에서는 여전히 스켈레톤이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주위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한 태도다.

데일이 툭 물었다.

"나는 데일이오. 그쪽은 이름이 뭐요."

그래도 가르침을 청하는 입장인데, 조금 늦은 것 같지만 예의도 좀 차리고, 통성명이라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에리얼을 통해 이 스켈레톤이 루드비히라는 이름을 지녔다는 건 알았지만, 그걸 본인의 입으로 직접 듣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백만 백 이십일. 백만 백 이십이."

"...별로 말할 생각이 없나 보군."

데일은 대화를 포기했다.

그리고 루드비히와 똑같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백만 번을 채우려면 어지간히도 시간이 걸릴 것이다.

물론. 체력에는 문제가 없다.

데일에게는 언데드 특유의 무한한 체력이 있으니까.

하지만 긴 시간을 한 가지 동작에만 집중한다는 건, 여러모로 정신력을 잡아먹는 짓이었다.

'어쨌든 따라보는 수밖에.'

데일은 이 스켈레톤에게서 특별함을 느꼈다.

실력이 올라 보는 눈이 생긴 데일이 느끼기에 이 스켈레톤은 예사롭지 않았다.

에리얼이 부르는 칭호도 무려 마스터가 아닌가.

데일은 차분히.

그리고 정확한 동작으로 한 번 한 번 검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긴 시간이 흘렀다.

회의가 상당히 길어지는 모양이었다.

가끔 신전에 신도들이 찾아왔지만, 검을 휘두르는 스켈레톤과 흑기사를 보고는 흠칫 놀라 발걸음을 되돌렸다.

그렇게 반나절이 흘렀다.

데일이 검을 휘두른 횟수가 만 단위에 접어들었을 즘.

에리얼이 돌아왔다.

그녀는 몹시 피로한 기색이었다.

"회의는 끝났나?"

"예. 오늘은요. 앞으로 매일같이 회의해야 할 판이지만요."

데일은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으로 에리얼을 쳐다보았다.

에리얼이 말했다.

"4군단이 무너졌어요. 악마 아르구르가 군세를 이끌고 기습했다는군요. 얼핏 보기에도 1만이 넘는 숫자였다고 해요."

"기습이라... 잘 이해가 안 가는군."

전선의 장군들은 유능하다.

그들은 수십 년간 악마의 군세를 막아온 역전의 지휘관이다.

혹자는 그들이야말로 제국의 멸망을 막아온 진정한 영웅들이라고 했다.

그런 장군이 겨우 기습 따위에 무너졌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의문에 에리얼이 착잡한 얼굴로 답했다.

"배신...이 있었대요."

"배신? 악마의 추종자를 말하는 건가?"

"아마도요. 들리는 말에 의하면 군단에 소속된 지휘관 절반이 배신했다고 하더군요."

"...절반이라니."

터무니없는 숫자였다.

전선의 군인들이 수상쩍은 움직임을 보인 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실상은 생각보다 더 썩어있었다.

"군단장 휘하 작전 참모가 반란을 주동했다고 합니다. 군단장은 습격을 받고 중상에 잃었지만, 남은 병사들을 수습해 가까스로 퇴각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요새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죠."

후퇴한 병사들은 다시 후방으로 이동해 전열을 재정비했다지만, 요새를 잃은 건 큰 피해다.

이제 4군단은 더 허술한 성벽과 적은 병력으로 악마의 군세를 막아내야 한다.

폭풍 앞의 촛불.

그리고 4군단이 무너진다는 건 지금의 아슬아슬한 평화가 깨진다는 의미다.

악마의 군세가 대륙을 휘젓기 시작하면 이제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

"상부에서 평의원 측으로 명령이 하달되었어요. 지금 당장 3천의 병력과 보급품을 보내 4군단 쪽으로 보내라고."

"황실 기사단이랑 마탑은?"

"이미 준비하고 있어요. 무려 기사단장이 직접 병력을 이끌고 나섰다는군요."

황제로서는 일단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당장 3천의 병력을 어떻게 모을 생각인가?"

"그게 곤란한 부분이에요. 당장 이레네에 있는 용병을 모두 끌어모은다 해도 천 오백 명이 될까요? 평의원들이 각각 거느린 사람들을 다 합쳐도 당장은 힘들겠죠. 결국...."

"징집해야겠군."

당장 숫자를 맞추려면 시민들을 강제로 징병하는 수밖에 없다.

농부 나부랭이들에게 창 한 자루 들려준다고 무슨 효과가 있냐 물을 수 있지만, 숫자는 그 자체로 힘이다.

적어도 아군의 사기를 올려줄 수는 있다.

게다가 일단 전투를 몇 번 치르고 살아남다 보면, 어중이떠중이도 베테랑 전사가 되는 것이다.

대부분은 죽어서 시체가 되겠지만....

"시민들을 징집하는 임무는 경비대장 카달이 맡기로 했어요. 저희 신도들도 많이 참전할 테고요. 그러니...."

"함께해달란 말인가?"

에리얼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데일은 소식을 듣자마자 참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금이 적당한 때인 것 같군.'

전선은 성장을 이루기 가장 좋은 곳이다.

언제나 강력한 적이 우글거리는 곳이니만큼, 살아만 남는다면 더 높은 경지를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데일은 그간 전선에 가는 걸 꺼려했다.

'너무 위험하지.'

언제 악마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곳이니만큼, 운이 나쁘면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

데일은 여러모로 부족하기에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도망칠 수는 없다.

영웅들에 대한 흔적을 찾기 위해서라도, 데일은 언젠가는 전선으로 가야 했다.

데일은 이제 충분히 강하다.

실력자들과 겨뤄도 밀리지 않는다.

어쩌면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 가장 좋은 시기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번에는 그 기사단장도 참전한다.'

기사단장은 대륙에서 가장 강한 실력자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인물이다.

그가 이끄는 황실 기사단도 개개인이 강력한 힘을 지닌 기사다.

설령 악마랑 싸우게 되더라도, 충분히 해볼 만했다.

"신도들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은 못 하겠다. 그렇게 호락호락한 전장은 아니니까."

"예.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곳이니까요. 그래도... 감사해요."

"별로 감사할 필요는 없다."

그럴 필요가 있고, 능력이 되니 싸우러 갈 뿐이다.

4군단이 완전히 무너져 대륙이 엉망이 되어버린다면 데일도 여러모로 곤란했다.

"필요하면 다시 불러라."

"데일 경은 뭘 하시려고요?"

데일은 검을 들며 말했다.

"아직 백만 번. 못 채웠다."

그러고는 루드비히 옆에서 우직하게 검을 휘둘렀다.

* * *

열흘.

3,000명을 징집하고, 자금을 마련하고, 보급품을 준비하는 데에 주어진 시간이다.

평의원들은 가진 모든 역량을 끌어내 시간 내에 그 모든 일들을 완수해내 그 능력을 입증해보였다.

그 시간 동안 데일은 검을 휘둘렀다.

처음에는 천천히 집중해 휘둘러야 했던 검도, 어느 순간부터는 빠르게 휘둘러도 그 궤적에 흔들림이 없었다.

당장 그게 검술에 큰 영향을 주는지는 솔직히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데일은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췄다.

"구십구만 구천구백구십구. 그리고 백만."

후욱!

데일은 마지막으로 검을 내리긋고, 검을 내려놓았다.

솔직히. 열흘 내내 밤낮없이 검만 휘두르는 건 제정신으로 할 짓이 아니었다.

중간에 때려치우고 옆에 있는 스켈레톤의 턱을 후려치고 싶었던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데일은 끈기와 정신력으로 결국 해내고야 말았다.

그는 잠시 만족감을 느끼다, 루드비히에게 물었다.

"백만. 채웠소. 이제 뭘 해야 하오?"

"삼백만 이천이십이. 삼백만 이천이십삼."

"이봐. 백만 채웠다고."

"...."

검을 휘두르는 걸 방해하기 위해 데일이 앞으로 가서 서자, 그제야 루드비히가 고개를 들었다.

그 타오르는 안광으로 데일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내 말을 알아듣기는 하는 건가?'

당최 감정을 읽어낼 수가 없는 상대다. 아니. 애초에 감정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그때. 루드비히가 옆으로 슬쩍 비켜서더니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후웅!

특별한 부분도. 무언가 숨은 비밀도 없는 평범하고 정석적인 횡베기였다.

루드비히가 툭 내뱉었다.

"이백만."

"...혹시 숫자밖에 말할 줄 모르시오?"

그러거나 말거나 루드비히는 다시 돌아서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 잠깐 사이에 숫자를 까먹었는지, 검을 휘두르며 다시 1부터 셌다.

'혹시 잘못 생각했나?'

데일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반쯤 감에 의지해 이 스켈레톤에게 가르침을 구했지만, 이게 시간낭비일지 아닐지. 솔직히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데일은 상념을 털어냈다.

조부는 데일에게 그렇게 쉽게 포기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일단 전쟁에 갔다 온 뒤 다시 휘두르겠소."

루드비히는 대꾸 없이 검만 휘둘렀다.

데일은 그 모습에 어깨를 으쓱인 뒤, 신전을 나섰다.

도시는 전쟁 탓에 난리였다.

"이곳 이레네도 머지않았다! 멸망이 오고 있다!"

"괜찮아. 여긴 난공불락이야. 황제 폐하께서 이미 제도가 악마에게 무너지는 걸 겪었는데, 설마 또 무너지게 놔두겠어? 그냥 술이나 마셔."

"곧바로 다음 징병이 있을 거래. 이번에는 못해도 5,000명은 뽑는다는군. 연줄이 있으면 미리미리 돈을 먹여놔. 끌려가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앞거리 진저네는 세 아들 중 둘이나 끌려갔대. 불쌍도 하지. 우리도 빨리 도시를 떠야 하는 거 아닌가 몰라."

종말을 외쳐대는 미치광이들.

자기 일이 아니라 여기며 애써 느긋한 척하는 한량들.

징병을 피해 보따리를 싸 들고 어디론가로 도시를 나서는 가족들까지.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 모두가 불안에 떨고 있었다.

데일은 그런 민감한 분위기를 살피며, 목적지로 걸음을 옮겼다.

외곽구역 경비대의 건물이었다.

내일 출정이 있으니만큼, 미리 지휘관급 인물들이 모여 회의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왜인지 그곳에 데일도 초청받았다.

'나는 딱히 지휘관도 아닌데.'

솔직히 귀찮았지만, 그래도 참석하는 게 여러모로 나았다.

데일이 한동안 속해있을 부대를 어떤 자들이 이끄는지를 미리 파악해둬야 운신하기 편했다.

"아. 오랜만이군."

회의실로 데일이 들어서자 외곽구역 경비대장. 드워프 카달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는 이번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지만, 병사를 징집해 전선으로 보내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데일은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카달과 악수했다.

그리고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안 왔소?"

"그대가 첫 번째야."

"다들 바쁜가 보오."

"그건 아니고... 체면 문제지."

"체면?"

한숨을 푹 내쉰 카달이 말했다.

"보면 알 걸세."

약속했던 시각이 훌쩍 지나고 나서야 하나둘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카달은 정중히 맞이했다.

"반갑습니다 칼츠 남작."

"반갑네. 경비대장."

"반갑습니다 론 백작."

"음! 경비대장. 수고가 많네."

들어오는 이들은 모두 귀족이었다.

실제로 군 지휘를 해본 경험이 있는 나름대로 실력 있는 자들이라는데, 그래서 그런지 하나 같이 카달을 하대했다.

심지어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아니고 경비대장이라는 직책으로만 불렀다.

'명백히 깔보는군.'

외곽구역의 평의원 따위와 귀족인 자신들과는 엄연히 차이가 있다는 듯.

노골적으로 하대했다.

하지만 카달은 익숙한 듯. 해탈한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그리고 데일은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을 알아챘다.

'뒤쪽에 오는 자일수록 신분과 위세가 높다.'

약속에 시간에 늦는 것도 권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걸까?

그렇다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제국의 위기일 수도 있는 상황에서 이런 여유라니.

심지어 이들의 얼굴에는 별로 위기감도 없었다. 마치 이번 전쟁 따위, 별걱정이 없다는 듯이 여유롭기만 했다.

그런 귀족들이 하나둘 모이고.

제법 거물로 보이는 귀족이 한 명이 천천히 들어섰다.

무려 약속시간에서 1시간이나 늦은 시각이었다.

"반갑습니다 빅토르 백작."

빅토르 백작이라 불린 사내는 카달의 인사에 고개만 까딱이는 걸로 대답했다.

미리 와 있던 귀족들이 그런 백작에게 개미떼처럼 다가왔다.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허허. 빅토르 백작께서 함께해주시면 악마고 뭐고 걱정이 없습니다."

"애초에 백작께서 전선의 지휘를 맡아주셨다면, 4군단이 무너질 일도 없었을 텐데요. 하여튼 군단장이라는 것들이."

자기한테 다가와 아부를 떨어대는 귀족들을 향해 빅토르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중.

그의 시선이 멀뚱히 선 데일에게서 뚝 멈췄다.

빅토르의 얼굴에 언짢은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품에 쥐고 있던 은 고리에 기도를 한차례 읊은 뒤, 다른 귀족들에게 말했다.

"왜 흑기사 따위가 이곳에 있는 거지? 저자가 지휘하는 부대가 있었나?"

다른 귀족들은 당황했다.

그들 역시 왜 데일이 이곳에 와 있는지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이상하게 생각했었습니다...."

"대체 누가 저놈을 초대한 거죠? 빅토르 백작께 허락도 받지 않고 말이죠!"

"애당초 이교도란 믿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4군단 내부에 배신자들도 분명 이교도였을 겁니다."

귀족들은 빅토르의 기분을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데일을 향해 대놓고 험담했다.

빅토르 백작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는 손에 은 고리를 굳게 쥐었다.

'신앙심이 강한 귀족이군.'

백작은 우위가 확실하다 여겼는지, 데일에게 다가와 노성을 터트렸다.

"여기는 너 같은 이교도가 있을 곳이 아니다!"

"나도 초청을 받고 온 것뿐이오."

감히 데일이 말대꾸하자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떤 경우 없는 자가 너 같은 놈을 불렀단 말이냐!"

"그 경우 없는 자가 나다."

"!!"

귀족들이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출입구에는 기사단장이 제자와 에른스트를 거느리고 서 있었다.

귀족들은 얼굴에 당황스런 감정이 떠올랐다.

기사단장은 말했다.

"내가 불렀다고. 뭐. 불만 있나?"

그 당당한 기세에 빅토르 백작은 침음을 삼켰고, 다른 귀족들도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모두가 기사단장에게 압도당한 모습.

하지만 데일은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제일 지각했으면서 왜 이렇게 당당하지?'

침공

* * *

사실 기사단장은 당당할 만하긴 하다.

이레네에서 가장 강력한 무력집단인 황실 기사단을 이끄는 자이기도 하고, 지금은 새로 생긴 친위대의 단장직을 역임하고 있었다.

설령 1시간이 아니라 반나절을 지각했다 해도, 아무도 뭐라 할 수 없는 위치인 것이다.

"데일 경은 그간 많은 업적을 쌓아왔고, 악마랑 직접 겨뤄본 경험도 있네. 경은 이번 싸움에 큰 도움이 될 걸세."

빅토르 백작은 언짢은 얼굴로 대꾸했다.

"이곳에 있는 모두는 부대를 지휘해 본 경험이 있소. 경험에서는 우리가 부족할 게 없소."

"빅토르 백작. 직접 악마와 검을 마주댄 적이 있었나? 만약 그랬다면, 자네는 백작이 아니라 지금쯤 후작위를 달고 있었겠지."

당연히 빅토르는 악마와 직접 혈투를 벌인 적이 없다.

기껏해야 악마의 군세를 상대로 부대를 지휘해본 경험뿐.

백작은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전투와 전쟁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오. 그리고 내가 듣기로, 저 흑기사가 상대한 악마는 반쪽짜리라고도 하기 민망한 수준이라 들었는데? 그렇지 않나?"

백작은 동의를 구하듯, 다른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옆에서 지원 사격을 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귀족들은 서로 눈치만 살필 뿐, 선뜻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권력의 실세이자, 무력으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사단장이다.

검성을 상대로 당당히 의견을 낸다는 건 닳고 닳은 귀족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반쪽짜리라는 이유로 평가절하하기에는 악마란 너무 두려운 존재였다.

"쯧."

상황이 여의치 않은 점을 알아챈 빅토르 백작이 혀를 찬 뒤.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알았으니, 이제 회의를 시작해주시오! 다음부터는 나에게 미리 언질을 해주시고. 그 정도 예의를 바라는 게 잘못은 아닐 것 같소."

"그리하도록 하겠네."

기사단장은 어깨를 으쓱였고, 백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은 고리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 대화에서 데일은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우선. 이 자리에 주도권은 누가 뭐라 해도 기사단장에게 있다는 것.

그리고 귀족들이라고 기사단장의 말에 완전히 고분고분 따르는 건 아니라는 것.

'특히 빅토르란 자는 권력이 강한 편인가 보군. 기사단장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고.'

썩 좋은 소식은 아니다.

지휘관들끼리 사이가 좋지 않으면, 자칫 위급할 때 의견이 갈리기 십상이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어디로 갈지 모르는 법이니 말이다.

그렇게 잠깐의 소란이 일단락되고.

기사단장이 데일에게 다가왔다.

"잘 와주었네. 저들이 자네에게 벌인 무례는 내가 대신 사과하지. 귀족들이란 게 원래 텃세가 심하거든. 특히 빅토르 저 자는 신앙심이 깊어도 너무 깊고."

"괜찮소. 그리고 무례라 치면 회의시간에 가장 늦은 사람이 더 무례가 아닌가 싶긴 하오."

데일이 지각한 걸 꼬집자 뒤에서 듣고 있던 에른스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제자가 불같이 화를 냈다.

"감히 단장님께 무슨 망발을...!"

하지만 기사단장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맞는 말이야. 늦으면 사과하는 게 당연한 상식이지. 이해해주게. 변명 같겠지만, 워낙 일이 바빠 눈코 뜰 새 없었다네."

"알겠소."

데일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눈앞의 사내가 다른 귀족들처럼 자기 권세를 과시하고자 일부러 지각했을 것 같지는 않다.

"자! 그럼 회의를 시작하지!"

탁상을 쿵! 내리쳐 이목을 모은 기사단장이 외쳤다.

그가 신호를 보내자, 경비대원들이 커다란 지도와 그 위에 놓을 나무 모형을 가져다 놓았다.

카달이 경비대원들에게 명령했다.

"아무도 근처에 다가오지 못하도록 해. 너희들도 문에서 떨어지고. 어기는 놈이 있다면 목을 베도 좋다."

"예!"

보안을 철저히 하기 위한 조치.

그 모습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기사단장이 카달에게 부탁했다.

"카달. 상황을 설명해줄 수 있겠나? 부탁하네."

"예! 알겠습니다!"

다른 귀족과 달리 정중하게 대해주는 기사단장을 향해 큰소리로 대답한 카달이 입을 열었다.

"현재 4군단의 잔존 병력은 후방으로 후퇴해, 이리스 성에서 농성하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악마의 공세는 아직 시작되지 않고 있습니다만, 머지않아 다시 공세가 시작될 겁니다."

"그들이 얼마나 버텨줄 거라 생각하는가."

"군단장은 유능한 인물입니다만... 지금은 큰 부상을 입어 제대로 된 지휘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합니다. 가뜩이나 병력도 줄어든 4군단만으로는 막아내기 어려워 보입니다. 그리고 이리스 성이 무너지면...."

그다음부터는 대륙으로 통하는 길이 훤히 뚫리고 만다.

그 바로 뒤에 있는 카엘름 성은 물론, 다른 성과 도시들도 위기에 처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사단장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덤덤히 보고를 들었다.

"우리 쪽 준비는 어떻게 다시 가고 있는가?"

"우선 용병을 팔백. 귀족들과 평의원이 거느린 사병을 합쳐서 300. 나머지 인원은 빈민가와 외곽구역에서 징병했습니다."

"반대가 심했을 텐데 이리 빨리 사람을 모으다니. 대단하군."

"아닙니다. 군대에 가면 굶지 않을 수 있다는 말에 자원한 사람들이 많아 생각보다 수월했습니다."

1차 지원군은 이미 준비가 끝났으며, 2차 지원군은 또다시 사람들을 징병해 2개월 내에 보내겠다고 카달은 말했다.

기사단장이 물었다.

"병력의 상태는 어떤가?"

"용병과 사병은 평균적으로 수준이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징집병 중에는 이제 처음 창을 쥐어본 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쯧. 어쩔 수 없군."

열흘 만에 모은 병사다.

당연히 기초적인 훈련을 할 시각도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최대한 빨리 이리스 성으로 가는 것이겠군. 안 그렇나?"

"예. 이미 카엘름과 중부의 영주들이 지원 병력을 보냈지만, 역부족일 겁니다."

"골치 아프게 됐어."

빠른 속도로 행군한다는 게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숙련된 병사들도 중간에서 나자빠지기 십상인데, 하물며 이제 갓 병사가 된 이들이라면 더더욱 속도를 내기 힘들었다.

게다가 상대도 문제였다.

"아르구르는 악마 중에서도 특히 비열하고 잔인한 놈이야. 심지어 교활하기도 하지. 우리가 순순히 이리스 성에 가는 걸 보고 있지는 않을 것 같은데."

"으음. 확실히 그 부분은 저희도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빅토르가 끼어들었다.

"듣다 보니 이거. 기사단장께서는 너무 걱정만 많으신 것 같소."

"음?"

"행군 도중 낙오자가 걱정된다면, 그냥 몇 놈을 채찍질하면 다 해결될 문제요. 대부분은 근성이 부족하거나 엄살을 피우느라 뒤처지는 것뿐이니 호된 꼴을 보면 이를 악물고서라도 걸을 것이오."

기사단장이 한숨을 삼키며 물었다.

"...그리하면 사기가 땅에 떨어질 거라는 생각은 안 하나?"

"어차피 병력의 주력은 기사와 마법사. 그리고 정예병들이오. 그들은 그저 숫자 채우기에 불과한데, 사기가 떨어지든 말든 무슨 상관이오?"

빅토르가 이어 말했다.

"게다가 악마가 수작을 부린다? 그렇다면 오히려 좋은 거 아니오? 놈이 병력을 보내 방해해온다면 우리 용맹한 병사들로 분쇄해버리면 될 뿐이오."

"...."

"내 가만 보니, 기사단장께서는 걱정이 너무 많은 게 문제요. 그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으면, 사내답게 마음을 크게 먹으시는 게 어떻겠소."

"하아. 조언 고맙네."

기사단장이 마지못해 대답하자, 뒤에 있던 에른스트에게 데일이 물었다.

"군대 지휘를 해본 경험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것치고는 말하는 게 엉성한데."

에른스트 대신 옆에 있던 기사단장의 제자가 답했다.

"몬스터 토벌 두어 번. 산적 토벌 서너 번. 3군단에서 병력을 지휘한 경험은 있지만 상대적으로 안전한 위치였고, 그마저도 2년을 못 채워서 이레네로 돌아왔어. 듣기로는 3군단장이 제발 돌려보내라고 황제 폐하께 직접 부탁했다는데."

"그럼 왜 이런 중요한 전투에 저런 자를 보낸 거지?"

제자는 경멸 어린 눈으로 빅토르를 쳐다보며 답했다.

"귀족들 사이에서도 힘이 세고. 헌금을 많이 내서 교단의 지지도 받고 있고. 이번 원정에도 많은 자금을 대었으니까. 이번 전쟁에서 공을 올리고 작위를 올려 받으려는 속셈이겠지."

권력을 위해 참여했다는 걸까?

좋지 않은 소식이다.

데일이 보기에 저 빅토르란 작자는 군대를 말아먹을 상이었다.

다만 부대의 주도권이 어디까지나 기사단장에게 있다는 건 안심이었다.

기사단장이 귀찮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잡소리는 그만하고. 세부적인 사항을 논의하겠네."

"자, 잡소리? 지금 나한테 하는 소리요?"

"쉿."

기사단장은 검지를 들어 입에 댄 뒤,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순간적으로 뿜어진 살벌한 기운에 빅토르는 뱀 앞에 마주 선 생쥐처럼 굳어버렸다.

그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기사단장이 본격적인 회의를 시작했다.

"자 그럼 각자 좋은 의견이 있다면 가감 없이 말해주게. 이번에 활약한다면, 내 직접 황제 폐하께 말씀드릴 테니. 부디 열심히 해주게."

황제를 들먹이자, 빅토르의 눈치를 살피던 귀족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어. 그럼 저부터 의견을 내보겠습니다. 우선 병력을 분리해서, 정예병부터 빠르게 이리스 성으로...."

"기습에 대한 문제는 실력 있는 척후를 둔다면...."

다른 귀족들은 나름대로 경험이 있는 듯. 각자의 생각을 내놓았다.

그 모든 의견을 집중해 듣던 기사단장이 데일에게 물었다.

"자네는 뭐 괜찮은 생각 없나."

데일은 잠시 고민했다.

군 지휘에 대해 경험이 풍부한 건 아니다. 하지만 데일에게는 정보가 있다.

바로 악마인 아르구르에 대한 정보.

'이번 전쟁은 꼭 이겨야 해. 미리 정보를 풀어두는 게 낫겠군.'

데일이 입을 열었다.

"아르구르에 대해 말하고 싶소."

"오오. 악마에 대한 이야기라. 어디 말해주게."

"알겠소."

다른 귀족들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너한테 악마에 대한 정보가 있다 해봤자 얼마나 있겠어.'

'기사단장한테 잘 보이려고 용을 쓰는군.'

'이교도 놈이 조용히나 있을 것이지.'

악마에 대한 정보는 귀하다. 악마와의 싸움은 주로 전선에서 벌어지기에, 교단이나 귀족들이 아니면 제대로 된 정보를 얻기도 힘들다.

기사단장도 말해달라고 얘기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정보가 있을 리가.'

있을 리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기사단장도 그저 데일의 체면을 생각해 그에게 설명을 부탁한 것뿐이다.

그런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데일이 입을 열었다.

"조금 이야기가 길어질 수 있소."

"걱정 말고 마음껏 해보게."

고개를 끄덕인 데일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설명을 시작했다.

데일은 아르구르의 생김새부터 그가 사용하는 기술 목록.

놈이 즐겨 사용하는 수법. 놈의 하수인이 지닌 힘. 아르구르의 군세의 병종. 계급표.

아르구르가 지닌 까다로운 점. 약점. 숨겨진 약점. 더욱 깊숙이 숨겨진 약점.

게임 속에서 숱하게 상대해오며 쌓아온 정보를 아주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하나부터 끝까지 전부 털어놓았다.

어디 해볼 테면 해봐. 하는 표정으로 보고 있던 귀족들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설명한 데일은 뒤늦게 아차했다.

'이런. 너무 설명에만 열중했군.'

사람은 자기 지식을 뽐내는 걸 좋아하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데일도 사람이었다.

한때 깊게 빠져들었던 분야였던 만큼, 데일은 자기도 모르게 너무 설명을 길게. 그리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까지 말했다는 걸 깨달았다.

뒤늦게 데일을 말을 멈추고, 주위에 사과했다.

"미안하오. 너무 내 얘기만...."

데일은 뒤늦게 주위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귀족들이 멍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기사단장이 그런 데일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혹시 자네... 아르구르 본인인가?"

침공

* * *

"혹시 자네... 아르구르 본인인가?"

아니. 아르구르 본인도 자신에 대해 이렇게 상세히 알고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귀족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악마에 대해 이렇게 자세히 알고 있다니?

한쪽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빅토르가 외쳤다.

"아는 척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막 지어내는군."

"어허. 기껏 의견을 내준 경께 함부로 말하지 말게."

기사단장이 빅토르를 제지했다. 하지만 그 역시 반신반의한 표정이었다.

"자네의 의견은 확실히 흥미롭군.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큰 도움이 될 거야. 하지만 조금 의아한 게... 대체 이런 정보를 어디서 얻었나."

황실 기사단장인 자신조차 모르는 정보를 데일이 가지고 있다니,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데일도 조금 곤란해졌다.

'뭐라 답하지.'

정보의 출처를 밝힐 수는 없다. 게임하다 알았어요. 라고 답할 수는 없지 않나.

하지만 여기서 그럴듯하게 설명하지 않으면, 저들은 데일을 허풍쟁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건 상관없다. 하지만 이번 전투의 승산을 조금이라도 올리려면, 데일의 말을 믿어줘야 했다.

데일의 변명을 고심하고 있던 그때.

에른스트가 조심히 물었다.

"혹시. 밤의 신전에서 들은 거 아닐까요?"

"음?"

기사단장과 귀족들이 에른스트의 말에 반응했다.

"밤의 신전이라?"

"확실히. 말이 되는군. 악마들을 굳이 빛이냐 어둠이냐 따지면, 어둠에 가까우니. 밤의 신도들이 더 잘 아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지."

"전선에는 밤의 신도들이 더 많다고 하니...."

이들에게 밤의 신도란 꺼림칙한 존재고, 악마는 더더욱 꺼림칙한 존재다.

꺼림칙한 이들끼리는 뭔가 통하는 게 있지 않을까? 하는 다분히 모욕적인 생각.

하지만 데일에게는 기회였다.

'이거다.'

데일이 곧바로 긍정했다.

"맞소. 여신께서 직접 알려주신 정보요."

"오오 역시!"

"밤의 여신이 직접 말해주다니. 이번 싸움을 그만큼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 같군."

"신이 말했다면 믿을 수 있다."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데일은 이제 교의 상징과도 같은 기사였고, 그런 흑기사가 여신의 이름을 팔아먹었으리라고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나중에 신전에 가면 자기 이름을 그런 식으로 팔아먹지 말라고 화를 내겠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

기사단장도 크게 기뻐했다.

"하하! 밤의 여신께서도 이 전쟁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니. 이거 든든하군. 무척 감사하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여신께 전해주게."

"...기도로 잘 얘기해보겠소."

어쨌거나 데일이 전해준 정보는 큰 가치가 있었다.

아르구르가 부리는 병력의 특성을 아는 것만으로도 여러 전략을 세울 수 있었다.

데일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귀족들의 태도도 달라졌다.

여전히 껄끄럽긴 했지만, 무려 여신의 말씀을 직접 듣는 기사란다.

아무리 이교의 여신이라도 신은 신. 건방지던 귀족들은 데일을 정중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건 빅토르였다.

그는 교단의 상징인 은 고리를 굳게 쥐고 중얼거렸다.

"신이시여. 저 이교도가 건방지게 으스대고 있습니다. 당신의 어린 양에게도 말씀을 내려주소서."

당연하지만 아무런 말씀도 내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회의는 꼬박 하루가 진행되고 나서야 끝이 났다.

다음 날. 지휘관들이 이끄는 황실 기사단과 마탑의 전쟁 마법사들. 그리고 3,000의 병력이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이레네를 빠져나갔다.

* * *

예상했던 부분이지만, 부대의 행군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이제 갓 징집되어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한 병사들이다.

봄이 오기 전 늦겨울의 혹독한 추위에 낙오자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지휘를 맡은 지휘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런 병사들을 격려했다.

"여기서 혼자 낙오되면 얼어 죽거나 몬스터 밥이 되거나 둘 중 하나다! 이 악물고 버텨!"

"조금만 더 있으면 저녁이다! 고기가 들어간 따뜻한 수프가 기다리고 있다!"

"이레네에 두고 온 가족들을 생각해! 낙오자한테는 유족 보상금도 안 나온다!"

협박. 회유. 가족애까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사용했다.

그런데도 낙오자가 꾸준히 나왔다.

기사단장은 혀를 찼다.

'생각보다 더 심하군. 이래서 겨울에 전쟁하기가 싫은 건데.'

겨울이란 혹독한 계절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겨울에 군대를 무리하게 끌고 나온 장군들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만 알아도, 겨울에 전쟁하는 게 할 짓이 못 된다는 걸 안다.

하지만 상대는 악마.

저 먼 우주에서 찾아온 이 침략자들은 항상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짓만 골라 하곤 했다.

'두꺼운 털 외투를 전부 보급했는데도, 낙오자가 많단 말이지.'

총지휘관으로서 병사들을 살피던 기사단장은 문득.

유독 한 부대에서만은 낙오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뭐지?'

기사단장은 즉시 그 부대의 지휘관을 확인했다. 평범한 귀족으로, 딱히 지휘관으로서 두각을 드러냈던 적이 없는 사내였다.

더더욱 의문이 든 기사단장은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그 부대로 말을 몰아갔다.

부대를 인솔하던 젊은 지휘관이 화들짝 놀라 예를 표하려 하자, 기사단장이 손을 휘저었다.

"아아. 괜찮네. 그냥 편하게 있게."

"무, 무슨 일이십니까?"

"다른 게 아니라 자네 부대는 낙오자가 한 명도 없는 것 같아서 말이야. 뭔가 비결이 있나?"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하하. 겸손을 떨지 않아도 괜찮네."

"아뇨. 정말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지휘관이 정색하며 말하자, 기사단장도 그제야 겸손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면 대체 왜 자네 부대만 낙오자가 없다는 건가?"

"그건...."

지휘관이 뒤쪽을 힐끔 쳐다봤다.

대열의 최후미에는 흑기사와 그의 충실한 친구인 커다란 늑대가 걸어오고 있었다.

병사들은 그 흑기사를 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조, 조금이라도 뒤처지면 저 흑기사한테 잡아먹힐 거야."

"흑기사한테 잡히면 영혼이 사로잡혀서 영원토록 고통받는데...!"

"영혼이 빼앗긴 시체는 저 늑대가 뜯어먹는다는구만!"

두려움.

저 흑기사의 주위에 흐르는 기운은 겨울바람 못지않게 소름 끼치는 구석이 있었다.

다가가고 싶지 않다는 그 두려움에 병사들은 힘든 것도 잊었다.

기사단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 영혼이 사로잡힌다느니 시체를 늑대가 뜯어먹는다느니. 두 여신이 화해한 지가 언제건만. 여전히 저런 터무니 없는 소문이 퍼진단 말인가."

사실. 아주 터무니없는 소문은 아니었다.

데일은 시체에서 잔혼을 거두었고, 하티는 남은 시체를 뜯어먹었으니까.

그때 퍼진 소문에 살이 붙어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 같은 사실을 모르는 기사단장은 무지렁이들이 헛소문 때문에 열심히 걸음을 옮긴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으으. 도저히 못 걷겠어."

"얌마. 빠, 빨리 일어나. 멈춰서면 죽는다고."

"하지만 다리가 안 움직이는데...."

한 병사가 고통을 호소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추운 날 다리를 혹사했더니, 근육에 무리가 간 모양이다.

근성이나 의지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때. 병사의 얼굴에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돌리니 데일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리가 아픈가?"

"히, 히익! 죄송합니다! 바로 일어날 테니 목숨만은...."

데일은 그런 병사를 번쩍 들어 올려서 어깨에 올렸다.

순간 자기를 잡아먹나 싶어서 버둥거리던 병사도 이내 진정하며 말했다.

"저. 저기."

"다리가 괜찮아질 때까지만 업혀라."

"괘, 괜찮습니다! 그러니 내려주셔도 됩니다!"

"아니. 너는 안 괜찮다."

"괜찮으니까...."

"늑대한테 잡아먹히기 싫으면 얌전히 있어라."

데일 나름대로 병사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농을 던졌다.

옆에서 걷던 하티도 크릉, 낮게 울며 맞장구쳤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데일의 의도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창백하게 질린 병사는 움직임을 멈췄다. 숨소리조차 작게 쉬었다.

데일이 요구한 '얌전함'을 필사적으로 지키려 했다.

그 모습에 병사들은 두려워했고 더욱 이를 악물며 행군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낙오자가 한 명씩 늘어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데일은 낙오자를 훌쩍 들어 올렸다.

그렇게 양팔에 두 명씩을 집어 들고도 낙오자가 더 나오자, 데일은 말했다.

"하켄. 너도 업어라."

"겍. 제가요?"

"하티. 너도 한 명 정도는 업을 수 있지?"

하켄은 대놓고 싫은 기색을 내비쳤고, 하티도 불만스레 울었다.

하지만 데일이 한번 노려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순순히 낙오자들을 등에 업었다.

그 모습에 결국 참지 못한 기사단장이 다가왔다.

"훌륭하군. 정말 훌륭해."

"뭐가 말이오."

"굳이 고생하는 이유가 뭔가. 꽤나 번거로울 것 같은데."

"별로. 힘이야 남아도니 사람 서넛 업는 건 어려울 것도 없소."

기사단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닐세. 왜 이렇게까지 하냐 이거야."

힘만으로는 황실 기사단의 기사들도 데일에게 못지않다.

하지만 그중에서 낙오자들을 직접 업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당연했다.

행군조차 제대로 못 해 뒤처지는 자들이다.

전투에도 큰 도움이 안 될 거고, 이런 하찮은 자들을 직접 업는다는 건 오만한 기사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다른 무엇보다 데일은 이런 수고를 들여봤자 아무런 이득도 없었다.

"자네는 지휘관도 아니고, 병사를 더 많이 데려간다고 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니지 않나. 굳이 수고할 이유가 있는가."

데일은 기사단장의 말이 이해 안 되었다.

"살릴 수 있으면 살리고, 도울 수 있으면 돕는 게 당연한 것 아니오? 이유 같은 게 왜 필요하오."

"허. 당연하다라."

기사단장은 주저 없는 데일의 답변에 크게 놀랐다.

이 흑기사가 여러모로 특별하고 특이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군.'

오히려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낙오자를 챙기라고 지휘관들을 타박하기나 했지, 정작 자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가.

기사단장은 데일에게 말했다.

"몇 개 이리 주게. 내가 같이 들겠네."

"몇 개가 아니라 몇 명이오. 그리고 괜찮겠소? 지휘관으로서 위신이...."

"괜찮으니 넘겨주게."

본인이 괜찮다면야.

데일은 어깨에 메고 있던 병사 두 명을 넘겼다.

필사적으로 얌전히 있던 병사들의 얼굴에 식은땀이 맺혔다.

'이, 이게 무슨.'

'기사단장한테 업힌다고?'

군의 총지휘관에게 업히라니. 이건 이것대로 죽을 맛이었다.

하지만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다.

병사들은 축 늘어져 기사단장에게 업혔다.

지켜보던 기사단장의 제자는 기겁했다.

"단장님! 뭐 하시는 겁니까!"

"아일라. 너도 좀 거들어라. 육체를 단련한 건 이럴 때 써먹으라고 한 거 아니었냐."

"저는 검을 휘두르기 위해서 몸을 단련한 건데요?"

"그리고 우리가 검을 휘두르는 건 폐하와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서지. 토 달지 말고 빨리 거들어 욘석아!"

제자인 아일라는 괜스레 데일을 흘겨보더니, 이내 낙오자 한 명을 등에 업었다.

그렇게 하니 기사단의 기사들도 가만있을 수 없었다.

단장이 고생하는데, 단원인 자신들이 편하게 갈 수가 없는 법이었으니까.

하지만 또 자기들만 고생할 수는 없는 법.

"너희도 좀 거들어라."

황실 기사들이 눈치를 주자, 친위대나 용병들이 더는 가만있을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내리 갈굼.

힘이 되는 자는 낙오자를 들쳐없고, 그럴 여력이 안 되는 이는 병사들을 부축했다.

그로 인해 낙오자가 크게 줄었으니 제국 역사에 유례없는 따뜻한 행군이 되었다.

갑자기 고생하게 된 이들은 속으로 데일을 욕했지만 말이다.

'괜히 나서 가지고는 우리까지....'

물론. 그걸 직접 말할 정도로 간 큰 자는 없었다.

다른 일반 병사들은 내심 데일에게 감사했다. 이제 한 겨울 벌판에 버려져서 죽을 일은 없어졌으니,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크게 놓였다.

어쨌건, 데일이 만들어낸 작은 변화 덕분에 낙오자는 크게 줄었다.

자연히 부대의 행군 속도도 빨라졌다.

그렇게 순조롭게 목적지인 이리스 성으로 향하던 도중이었다.

어느 벌판. 부대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그때, 정찰을 나갔던 척후가 되돌아왔다.

척후는 당황한 얼굴로 보고했다.

"적습입니다! 아르구르의 별동대가 이곳을 향해 오고 있습니다!"

"별동대라."

전선이 뚫린 여파로 아르구르의 부대가 대륙으로 흘러들어왔다.

대부분은 이리스 성에 집중되어 있지만, 일부 부대는 후방을 파고들어 마을을 부수고 보급부대를 습격했다.

아무래도 그 별동대가 이번에는 이쪽을 목표로 삼은 듯했다.

적습이라는 말에 병사들이 술렁거렸다. 하지만 기사단장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물었다.

"얼마나 되는데?"

"오, 오천입니다!"

"오천?"

"예!"

"으음."

기사단장이 몸을 풀며 말했다.

"얼마 안 되는군."

"예?"

"식후 운동 정도밖에 안 되겠구만. 선봉대는 내가 맡겠다."

그러고는 데일을 향해 말했다.

"아. 자네도 나랑 같이 선봉이야."

"...나 말이오?"

"그래. 고맙다는 말은 됐네."

아무래도 기사단장은 낙오자를 업어준 이후로 데일이 진짜로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전투의 선봉이라는 대단히 명예로운 자리를 덜컥 쥐여준 것이다.

'기사단장이랑 함께 나란히 선봉에 설 수 있다니!'

'왜 저런 놈에게.'

기사들이 질투의 감정을 드러냈지만, 당사자인 데일은 투구만 긁적였다.

'별로 안 고마운데.'

침공

* * *

데일은 굳이 기사단장과 선봉에 서고 싶지는 않았다.

기사단이 적군 헤집어 놓으며, 뒤늦게 달려들어서 정리하는 게 훨씬 쉽고 간단하다.

하지만 지금 데일은 군에 속해있다.

명령에는 따라야 한다.

"모두 준비하게."

기사단장의 지시에 지휘관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방패병을 앞세우고, 병사들의 진형을 살폈다.

징집병들은 제대로 대열조차 못 이룰 정도로 형편없었기에 용병과 병사들을 앞에 세워야 했다.

이번 전투에서는 징집병들이 도망만 안 쳐도 다행이었다.

"악마의 군세... 씁. 설마 다시 제 발로 전선에 돌아갈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하켄이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데일이 그런 하켄에게 말했다.

"에스델을 보호하는 데에 집중해라. 하티, 너도. 자칫 난전이 되면 위험할 수도 있어."

만약 징집병들이 겁에 질려 도망친다면 대열이 붕괴하게 된다.

진형을 갖추지 못한 군대는 더 이상 군대가 아니다.

개싸움이 벌어질 것이고, 그런 난전 때 가장 위험한 게 바로 사제나 마법사였다.

"예. 뭐. 데일 경도 조심하십쇼."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듯한 표정과 달리 에스델은 걱정이 가득했다.

"악마의 군세가 오천... 상대는 악마의 하수인들이에요. 부디 무리하지 마세요."

"걱정 마라. 기사단장도 있으니까."

에스델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기적이라도 걸어줄 수 있으면, 조금이라도 마음이 놓이련만.

빛의 축복은 데일에게는 도리어 독이었다.

볼일은 마친 데일은 대열의 선두로 갔다.

기사단장과 황실 기사단원들은 마갑을 씌워놓은 군마에 올라 돌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데일이 가까이 다가가자, 군마들이 불안해하며 푸르르 투레질했다.

훈련받지 않은 말이었다면 이미 놀라서 달아났을 것이다.

기사단장이 말했다.

"음. 자네는 말이 따로 없나? 원한다면 내가 한 마리 내어줄 수 있네."

"괜찮소."

데일은 배낭을 열어 미리 챙겨온 뼛조각들을 바닥에 흩뿌렸다.

짐승의 뼈나 몬스터의 뼈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데일은 정신을 집중했다.

'해골마 소환.'

마력이 빠져나가 뼛조각들에 깃들었다.

뼛조각은 두둥실 허공에 떠오르더니 이내 자기들끼리 얽히고 합쳐져 말의 형상을 이루어냈다.

―캬아아아아!

해골마가 푸른 안광을 불태우며 기괴하게 울부짖었다. 그 소름 끼치는 울음에 주위에 있던 군마가 깜짝 놀라 발광했다.

기사단장은 미묘한 얼굴을 했다.

"개성적으로 생긴 친구군. 뼈밖에 없어서 잘 달릴까 모르겠어. 하하하!"

기사단장의 농담에 아무도 웃지 않았다.

다시 표정을 되돌려 정색한 기사단장이 말했다.

"그럼 놈들이 슬슬 오는 것 같으니 준비하게."

벌판 저 너머가 새까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하늘 역시 먹구름이 낀 것처럼 검다.

갑자기 비가 오는 걸까? 아니다.

박쥐처럼 날개를 펄럭이는 두 발 달린 괴수들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긴장했다. 이 중에서는 악마의 군세를 처음 보는 이들도 많았다.

그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예쁘다...."

악마의 하수인 특유의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은 저 멀리에서도 선명히 보였다.

이쪽에서 보면 검은 도화지에 수많은 별이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몇몇 감성적인 이들이 악마의 군세를 '별의 군대'라 부르는 이유였다.

기사단장이 말했다.

"마탑의 마법사들은 공중 병력을 견제해주시게. 나머지 지휘관들은 우선 우리가 몇 차례 헤집을 테니, 내가 신호를 보내기 전까지는 가만히 있으면 되네."

"어. 이 정도 숫자로 저 대군에 돌격하실 생각이십니까?"

아직 젊은 지휘관 하나가 물었다.

이곳에 있는 황실 기사단은 그래봤자 100여 명. 반면에 상대는 5,000이 넘어가는 규모다.

아무리 황실 기사단이 위명을 떨친다지만....

하지만 옆에 있던 지휘관이 말렸다.

"가만히 있어. 보면 알 거야."

"하지만...."

빙그레 웃은 기사단장은 제자인 아일라와 에른스트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주위 상황을 유심히 살피고, 혹여나 있을 상황에 대비해라."

"알겠습니다."

"특히 에른스트 부단장. 너는 친위대를 이끄는 몸이다. 정신 똑바로 차리도록. 멍청하게 굴면 나랑 또 개인 훈육을 해야 할 거야. 알겠지?"

"예, 예...."

돌격에 함께하지 못해 조금 불만스러워하는 아일라와 '개인 훈육'이라는 말에 주눅이 든 에른스트가 대답했다.

그사이에도 적은 빠르게 전진해왔다.

대열을 갖춘 것도. 발을 맞추는 것도 아닌 그저 우르르 몰려올 뿐인 질서 없는 군대.

개중에는 발에 걸려 넘어지고, 그 위에 동료들이 마구 밟고 지나가 목숨을 잃는 녀석들도 많았다.

하지만 놈들은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이곳에 몰려 있는 인간을 죽여 먹어치울 생각에 흥분된다는 듯. 침을 뚝뚝 흘리며 속도를 올렸다.

"자. 우리도 슬슬 준비하자."

기사단장이 투구를 눌러썼다.

눈구멍 주위에 금을 칠해 장식한 꽤나 화려한 투구였다.

다른 기사단원들도 황금 투구를 눌러썼다. 한 손으로는 검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고삐를 잡았다.

데일이 물었다.

"말 위에서는 창이 더 편하지 않소?"

"여러 놈 죽일 때는 검이 더 편하네. 뭐. 보면 알 걸세. 가자!!"

기사단장의 외침이 평원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가 박차를 가했다. 군마가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데일도 해골마를 몰았다.

마력으로 움직이는 해골마는 무거운 데일을 태우고도 다른 군마 못지않은 속도를 냈다.

뒤이어 기사단원들도 말을 박찼다.

예상보다 기사단의 진형은 서로 간의 거리가 넓어 데일도 어렵지 않게 호흡을 맞출 수 있었다.

얼마나 서로 떨어져 있냐면, 여러 기사가 한 몸으로 뭉쳐서 돌격한다기보다는 각자 따로따로 돌격하는 데 우연히 방향이 겹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가장 선두에 달리던 기사단장이 옆에 나란히 있던 데일에게 외쳤다.

"먼저 가겠네!"

기사단장이 검을 뽑았다.

가장 앞에서 몰려오는 오는 적의 전열을 응시했다. 생긴 것도 제각각인 무질서한 군세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다음 순간. 기사단장이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마치 나뭇가지를 자르듯. 편안하고 가벼운 휘두름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파악!

기사단장의 주위로 다섯 걸음 반경 내의 적이 모조리 반 토막이 났다.

어찌나 깔끔하게 베었는지, 본인이 잘렸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해 버둥거리는 녀석도 있었다.

일격.

단 일격 만에 적군 수십이 쓸려나갔다.

데일은 속으로 감탄을 흘렸다.

'과연.'

기사단장은 검에 닿지 않은 적까지 모조리 베어냈다.

마력을 이용한 기술이다.

최정점에 선 기사만이 사용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검날' 기술.

아무나 사용할 수 없는 기술답게 그 파괴력은 발군이다.

기사단장은 마치 마실 나온 늙은이처럼 가볍게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그럴 때마다 핏물이 튀고 살점이 널브러졌다.

악마의 하수인들은 어떻게든 기사단장에게 접근하려 했지만 마치 기사단장의 주위에 무형의 장벽이라도 있는 것처럼, 아무도 감히 가까이하지 못했다.

'이게 황제의 검.'

그 자신감에 걸맞은 압도적인 실력이다. 괜히 귀족들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게 아니었다.

기사단장 혼자서 전장을 휘젓고 있었다.

데일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시간만 충분하면 혼자서 전부 벨 수 있겠는데.'

기사단장 혼자서 저 5,000의 군세를 충분히 도륙 낼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런 기사단장의 뒤로 황실 기사단원들도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기사단장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들도 한 번 검을 휘두르면 적군 네다섯이 우습게 죽어 나갔다.

데일은 이제야 돌격 진형이 왜 이렇게 넓었는지 이해가 갔다.

이 기사들의 검이 위력을 미칠 수 있는 거리를 생각하면, 이게 가장 밀집할 수 있는 진형이었던 것이다.

기사단은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군마는 적을 짓밟았으며, 달려드는 괴물들에게 건틀릿을 쥐어박았다.

기사단이 한번 지나가면 그 자리에는 마치 수확 후의 밀밭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저항은 무의미하다.

전투가 아닌 무차별적인 학살이 펼쳐졌다.

그 광경을 눈에 담으며, 데일은 왜 기사단장이 자신을 이 대열에 끼워 넣었는지 이해했다.

'실력 테스트인가.'

아무래도 기사단장은 진지하게 데일을 기사단으로 영입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대열에 함께 달리며 적을 벨 수 있는지를 확인해보고 싶어 하는 모양이다.

데일은 기사단에 들어갈 생각은 없다.

하지만 혼자서 남들이 적을 베는 걸 멍청히 구경할 생각은 없다.

데일은 허벅지만으로 해골마의 위에서 균형을 잡으며, 마검을 들어 크게 휘둘렀다.

촤악악!

괴수 여럿이 투박하게 썰려 나갔다. 기사들이 날카로운 검술과 뛰어난 기량을 가졌다면, 데일은 무식한 싸움에 능했다.

데일은 홀로 해골마를 박차 빠르게 달렸다.

"잠깐... 대열을."

뒤에 있던 기사가 말리려 했지만, 데일은 오히려 속도를 높였다. 놈들의 군세 사이로 깊이 파고들었다.

마검을 창처럼 앞으로 세워, 하수인 여럿을 꿰어버렸다.

"키야악!"

옆에서는 도마뱀처럼 생긴 하수인이 아가리를 벌리며 달려들었다.

데일은 놈의 아가리를 붙잡은 뒤, 그대로 다른 하수인을 향해 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검은 안개를 전개. 해골마에서 내려 주위의 적을 마구잡이로 베어버리기 시작했다.

포악한 괴수들이 이빨을 들이밀고, 발톱을 휘둘렀다. 개중에는 사악한 마법을 부리는 놈들도 있었다.

상관없다.

갑옷으로 막아내면 된다. 갑옷이 부서지면 생명을 흡수해 회복하면 된다.

기회가 되면 데일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하수인들을 갈아버리고 했다.

투박하고 무식한 싸움 법.

하지만 대부분의 황실 기사단원 보다 더 많은 적을 베었다.

그 우악스러운 광경에 경험 많은 기사들도 당황했다.

"도저히 인간 같지 않은 놈이군."

"애초에 언데드잖아. 사람이 아니라고. 그래도... 솔직히 제법이야."

기사단장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래. 점잖은 기사 노릇은 못 하겠다 이건가?"

데일은 자기 실력을 증명해보이는 동시에, 기사단장에게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자기는 네 아래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고.

"기사단의 체면에 지고 있을 수는 없지. 모두 더 분발해!"

"예!!"

우렁차게 대답한 기사들이 더욱 날뛰기 시작했다.

위협이 없었던 건 아니다. 악마의 군세에도 유독 강한 개체가 섞여 있곤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기사들은 홀로 싸우는 대신, 빠르게 모여 포위 공격한 뒤, 다시 능숙하게 흩어져 싸웠다.

개개인이 강하기도 하지만 집단 전투에 몹시 능한 이들이었다.

그렇게 100여 명의 기사가 날뛰니 우습게도 5,000의 군세가 대적하지를 못했다.

아무리 두려움을 모르는 악마의 하수인이라도 저런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군세가 흩어지고 갈리기 시작한다.

그때에 맞춰 기사단장이 붉은 깃발을 들었다.

전진 명령.

"전군! 돌격!"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줘라!"

즉시 본대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혼란에 빠진 적군을 타격했다.

숙련병을 중심으로 하수인들을 베어나갔다.

양측의 군세가 벌판의 한복판에서 얽혔다.

한번 기세가 오른 아군이 악마의 하수인들을 밀어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 우세가 유지될지 모른다.'

난전이 되다 보면 자연히 아군에도 피해가 생길 수밖에 없다.

거침없이 나아가던 데일이 기사단장에게 외쳤다.

"이놈들을 통솔하는 우두머리가 있을 거요! 그놈만 죽이면 될 것이오!"

"알았네!"

그리고 그 우두머리란 자는 머지않아 나타났다.

거대한 딱정벌레처럼 생긴 거대한 괴수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더니, 노성을 터트렸다.

"감히 우리를 가로막다니! 나는 19위의 악마, 별의 바다를 거슬러 오르는 자, 절멸의 아르구르를 섬기는 사도 라난타다!! 네놈과, 네놈의 혈육과, 네놈과 관련된 모든 인간을 산채로 씹어먹어 감히 우리 앞을 가로막은...."

기사단장은 라난타의 말을 끊고 여유롭게 말했다.

"아. 그렇군. 만나서 반갑네 라난타. 나는 황실 기사단장 미하일이라고 하네. 레딘의 아들이자, 아르투스 가문의 미하일."

"뭐?"

"만나서 즐거웠네 라난타. 잘 가시게."

어느샌가 라난타의 앞으로 움직인 기사단장이 가볍게 검을 내리쳤다.

라난타는 반응하려 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쩌억.

그 단단한 껍질도 기사단장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촤아악!

핏물이 튀고, 반토막 난 라난타가 널브러졌다. 동시에 우두머리를 잃은 악마의 군세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도와주려고 검을 들어 올린 데일은 머쓱하게 다시 팔을 내렸다.

기사단장은 상쾌하게 말했다.

"뭐 하고 있나. 그렇게 멀뚱히 서 가지고는."

"?"

"흑기사는 시체에서 힘을 흡수해 강해진다 하지 않았나? 별 볼 일 없는 놈이지만, 식기 전에 어서 흡수하게. 나야 뭐, 시체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

그러고는 라난타의 반 토막 난 시체를 데일에게 밀어주었다. 뿌듯한 얼굴을 하면서.

"!!!"

이런 몸이 되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났지만 이렇게 시체를 건네받은 건 또 처음이었다.

기사단장의 행동은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를 위해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양보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수인의 시체를 건네주는 검성을 보며 이런 느낌을 받는 건 조금 어처구니가 없지만....

무감정한 데일은 왠지.

조금. 아주 조금이지만 감동과 고마움을 느꼈다.

데일은 라난타의 몸에 건틀릿을 박아 넣으며 생각했다.

'한동안 기사단장 뒤에서 따라다녀야겠군.'

기사단장이 강력한 적을 베어 넘기면, 콩고물을 주워먹을 수 있지 않을까?

데일은 이 기사단장이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