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기사
* * *
숙소 앞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있었다.
난감한 얼굴로 서 있는 에른스트는 어쩔 줄 몰라했다.
데일은 사람들을 뚫고 지나갔다.
"지나가겠다."
모여든 용병과 병사들은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아보았지만, 데일을 보고는 순순히 길을 비켜주었다.
그렇게 도달한 데일을 에른스트가 다급히 불렀다.
"경! 왜 이제 왔어!"
"준비할 게 많았다. 이 난리는 대체 뭐냐. 토벌대는 또 뭐고."
"그게...."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마찬가지로 난처한 얼굴로 서 있던 시종이 상황을 설명했다.
에른스트가 용병 길드에 모집 공고문을 냈다는 것.
그리고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 것.
"당장 이곳에 모인 사람만 400명이 넘습니다! 앞으로도 더 늘어날 거고요!"
"400명이라니. 왜 이렇게 몰린 거지?"
"그게. 다른 귀족들이 모두 도망갔답니다. 그러다 보니 의뢰주를 잃은 용병과 병사들이 다 저희한테 몰려왔다고...."
다른 귀족들이 전부 도망갔단 말인가?
그건 또 우스운 일이었다.
친위대의 단장 자리를 노리고 오지 않았던가.
'자기 목숨이 위험하다 싶으니 내뺐군.'
데일이 물었다.
"그래. 대충 상황을 알겠다. 근데 그래도 숫자가 너무 많지 않나?"
"그게 엘드리엄의 영주가 현상금을 내걸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금화 300개를요!"
"...영주가 통이 크군."
"그래서 타 지역에 있던 용병은 물론, 힘 좀 쓰는 사내들도 다 몰려오고 있습니다. 흑기사를 토벌하러 가는 건 우리가 유일하니까, 저희한테 붙어서 콩고물을 얻어먹자고요!"
이제 상황이 완전히 이해됐다.
아무리 현상금에 눈이 멀었어도 혼자서 검은 사신을 사냥하러 가는 건 미친 짓이다.
함께할 동료를 찾다보니, 에른스트의 모집 공고가 보였다. 아니, 그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이렇게 사람이 모여들었고, 더욱 모여들 예정이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에른스트는 잔뜩 굳어 있었다.
"어, 어, 어, 어떡하지 경? 우리 가문은 저들을 전부 고용할 정도로 돈이 많지는 않다고!"
"뭐가 문제지? 적당히 끊어서 돌려보내면 될 것 아닌가."
"그게... 오는 사람은 전부 받아주겠다고 가문의 이름을 걸어버렸어."
"?"
귀족이 가문 이름을 건다는 건 단순한 일이 아니다.
마법사가 주문에 대한 맹세하는 것처럼, 한번 가문의 이름을 걸면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
그런 중요한 약속을 해버리다니?
"미쳤나?"
"나,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우리 가문이 그렇게 유명한 곳도 아니고, 나도 명성이랄 게 없는 사람이잖아. 몇 명 안 찾아올 게 뻔해서, 조금이라도 사람들을 더 끌어오려고 가문의 이름을 내건 건데...."
여러 상황이 맞물려 이렇게 되어 버렸다.
데일의 귀에 모여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티센 가문은 어디래? 에른스트는 또 누구고. 누구 들어본 사람?"
"몰라. 근데 다른 귀족들이 다 도망칠 동안 북부를 위해 홀로 남으셨다는데?"
"그거 대단하잖아! 에른스트라. 새로운 북부의 영웅이 탄생하는 건가?"
분위기가 잔뜩 들떠 있다. 어째 여기서 돌아가라 말했다가는 꽤나 격한 반응이 돌아올 것 같았다.
에른스트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어, 어떡하지? 가문의 이름을 내걸었으니, 저 사람들을 다 받아야 하는데. 근데 우리 가문은 그럴 여력이 없어!"
"도련님...."
에른스트가 다급하게 말했다.
"데일 경! 경을 짧은 시간 봐왔지만, 경이 무식하고 멍청한 이교도가 아니란 걸 이제는 알아! 이 상황을 타개할 지혜를 좀 내줘!"
"원래는 나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드, 들리는 소문이 그렇다는 거지."
데일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생각보다 사람이 너무 몰렸다.
저들은 이번 일로 주인과 고용주를 잃은 용병이나 병사. 그리고 현상금에 혹해 지원한 사람들이다.
이들을 모두 받아들일 여력은 에른스트의 가문에는 없다.
그렇다고 내치기도 힘든 상황.
데일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일단 전부 받아라."
"뭐? 하지만 우리 가문에는...."
"어차피 이번 일만 끝나면 권력이 알아서 굴러들어오지 않나?"
"뭐?"
"잊었나? 친위대 말이다. 여기서 만약 네가 토벌에 성공하면, 단장 자리를 누가 받겠나."
다른 귀족들은 이미 포기한 상황.
흑기사가 토벌되고, 북부의 혼란이 해결된다면 단장 자리는 에른스트의 차지였다.
"하, 하지만 나는 단장 같은 건 관심 없는데?"
"네 관심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단장 자리는 네 차지일 거고, 그 자리가 꽤나 권력이 있을 거라는 거지."
일단 단장 자리를 차지하고 보면 돈 나올 구석은 많다.
다른 귀족들한테 친위대의 주요 자리를 팔아도 되는 거고, 청탁이나 뇌물을 받아낼 구석도 많을 것이다.
데일의 그러한 설명에 에른스트는 기겁했다.
"뇌, 뇌물? 자리를 팔라고? 어떻게 그런 쓰레기 같은 짓을...."
"꼭 뇌물이 아니라도 이곳저곳에서 선물이 많이 들어올 거다. 귀족들은 친위대 단장이라는 새로운 실세와 친해지고 싶을 테니."
귀족들이 보내는 선물이라는 게 비싼 과자나 과일 따위는 절대 아닐 것이다.
값진 보석이나 유물 따위가 올 텐데, 팔면 만만치 않은 돈이 될 것이다.
물론. 받으면 받은 만큼 되돌려줘야 한다. 그게 귀족 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미래의 일이다. 당장 급한 불을 꺼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흑기사를 토벌하면 현상금이 나올 테고, 그 현상금도 아마 너한테 떨어질 것이다. 그 외에도 황실에서 이번 일에 대해 상훈을 내리겠지. 유일하게 홀로 도망가지 않고, 귀족의 체면을 지켰으니."
요는. 일단 토벌에 성공하기만 하면 살아날 수는 있다.
성공하면, 말이다.
"만약 토벌에 실패하면?"
"티센 가문이 송두리째 날아가겠지. 그게 싫다면 지금이라도 무르면 된다. 가문의 이름은 땅에 떨어지겠지만."
에른스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꿈과 이상을 위해 시작한 모험이 도리어 가문의 운명을 건 싸움이 되어버렸다.
고민하던 에른스트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의 말이 맞아.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지. 젠장. 아버지가 이 소식을 들으시면, 난 맞아 죽을 거야."
결심을 내린 에른스트는 지원자를 모두 받아주었다.
그날 하루 많은 사람들이 에른스트를 찾아왔다.
에른스트는 최소한의 무기도 챙겨오지 않은 사람들을 걸러냈지만, 그러고도 만만치 않은 숫자가 모였다.
데일 일행까지 합치면 거진 600명에 달하는 대규모 토벌대. 다른 지역에서 소문을 듣고 오는 용병들까지 합하면, 숫자는 더 많아질 것이다.
당장 토벌이 시작됐을 때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이는 것만 해도 문제였다.
에른스트는 돈이 없었다.
이번에도 데일은 조언했다.
"영주를 만나라."
"영주를?"
"안 그래도 영주는 곤란한 상황일 거다. 혼란을 해결하러 온 귀족들이 다 내뺐으니 말이다. 현상금을 걸어 사람을 모아보려고 한 것도 영주가 조급하다는 증거다."
영주는 다시 한번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너무 늦다.
언제 다시 도움이 올지도 미지수이며, 그간 피해를 보는 주민들의 원성도 감당해야 한다.
아무리 영주라도 백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적당히 협박해라. 도와주지 않는다면 너도 뒤로 빼겠다고. 너까지 사라지면 영주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해야 할 테니, 어떻게든 잡아 세우려 할 거다."
"그런. 나보다 고위 귀족을 협박하라니."
"고위 귀족이고 뭐고, 주민들을 보호하는 건 영주의 의무다. 그러니까 세금을 걷는 자격이 있는 것이고. 영주가 당연히 책임져야 할 부분이다."
분명 일이 이 지경이 되기 전에 대비할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엘드리엄 영주는 눈치나 보며 미적거리다 상황을 조기에 진압할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모든 게 본인의 자업자득이다.
책임을 져야 한다.
내키지 않는 듯 보이던 에른스트도 승낙했다. 다른 무엇보다,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럼 영주랑 얘기를 좀 해봐야겠군."
"반드시 시종을 데리고 가라. 그리고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반드시 시종에게 의견을 물어봐라."
"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라."
적어도 에른스트보다는 유능한 시종이 더 일을 잘 처리해줄 것이다.
에른스트는 툴툴거렸다.
"다, 닥치라니. 내가 신분 상관없이 편히 대하라고 했지만...."
"뭐라고 했나?"
"아니야. 아무 말도 안 했어. 가자고 어서."
에른스트와 시종이 서둘러 사라졌다.
데일은 다음으로 에스델을 찾았다.
"아. 데일 경. 안 그래도 지금 상황이 이해 안 돼서 찾으려던 참이었어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요?"
"어벙한 도련님이 사고를 쳤다. 이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흑기사를 토벌하러 가기로 했다."
"예?"
"그보다 교단에 도움을 청한다는 건 어떻게 됐지?"
각 지역의 교단은 여러 역할을 맡는데, 언데드 퇴치도 그중 하나다.
이번 일을 교단에서도 주의 깊게 보고 있을 것이다.
"아. 제가 여쭤보니, 교단에서도 일단 흑기사를 토벌할 의지는 있습니다. 다만 순수 교단의 힘으로만 해결하는 건 어려운 문제라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실정이라 합니다."
아직 교단의 본부에서는 성기사나 다른 전투 사제를 파견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교단이 부패하거나 무능해서는 아니다.
그만큼 지금 대륙 각지에는 언데드를 끌고 다니는 흑기사보다 시급히 해결해야 문제가 많다는 뜻이다.
데일이 말했다.
"다시 가서 토벌대가 조직되었다고 알려라. 1,000명이 넘는 규모라고도. 그곳에 사제와 성수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해라. 성유물까지 지원해주면 제일이고."
"1,000명이나요?"
에스델은 화들짝 놀랐다.
엄밀히 말하면 아직 토벌대의 규모는 1,000명에 못 미치지만, 어차피 그리 머지않아 넘기게 될 숫자다.
그리고 일단 규모를 부풀려야 교단에서도 결심을 내리기 편할 것이다.
"언데드와의 싸움에서 사제 인력은 필수적이다. 최대한 협조를 받아내야 한다."
"아, 알겠습니다."
에스델은 시급히 자리를 떴다.
아마 엘드리엄의 교단도 이번 상황의 심각성을 잘 알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건 북부 전체의 위기이기도 하다.
여기서 흑기사를 더 내버려둔다면, 그때는 정말로 황실 기사단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게 되리라.
일단 모든 지시를 마친 데일은 이 요란한 사태를 만들어낸 장본인에 대해 생각했다.
'흑기사라.'
자신 외의 흑기사를 마주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흑기사다운' 흑기사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도 처음이다.
데일은 세간에 알려진 흑기사와는 다르니.
데일은 문득. 이 흑기사라는 직업에 대해 생각했다.
밤의 힘을 받아들인 이교의 기사.
그 강력한 힘을 다루기 위해, 사람으로서의 모든 것을 포기한 반 언데드.
이런 식으로 힘을 극단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던 밤의 신도들의 발버둥.
그런 흑기사가 계속 서쪽으로 전진하고 있다.
죽음의 군세를 이끌고.
데일은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너는 목적이 뭐냐.'
짙은 구름이 깔린 하늘에 어느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겨울이 오고 있었다.
* * *
우적.
흑기사는 시체의 살을 뜯어먹었다. 맛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가슴을 지배하는 허기와 공허함이 잠깐이나마 가실 수 있었다.
주위에는 시체가 가득했다.
죽어서 쓰러진 시체와 걸어다니는 시체.
온통 시체투성이다.
산맥 근처의 자그마한 마을은 언데드 군세에 삼켜졌다.
이곳을 향해 언데드 들이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걸까? 아니면 차마 자기네 터전을 버릴 수 없었던 걸까.
어쨌거나 그에 대한 대가는 죽음으로 치러야 했다.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주민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도망쳤다.
그 뒤를 언데드들이 마구 쫓고 있다.
이제 이 마을에는 산자의 생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야 할 터였다.
흑기사의 민감한 감각이 무언가를 감지했다.
공포.
흑기사는 반쯤 무너진 집으로 들어갔다.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바닥으로 시선을 내린 뒤, 바닥에 패인 홈에 건틀릿을 집어넣었다.
끼이익.
바닥이 들렸다.
그 아래 숨어 있던 이들이 보였다.
나이 든 여인이 품에 사내아이를 안고 있었다.
"허억. 허억. 허억. 사, 사, 살려... 살려."
여인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극도의 공포에 사고가 마비된 듯,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제대로 된 단어가 되지 못했다.
흑기사는 거대한 대검을 양손으로 들었다. 그대로 단박에 내리찍을 자세를 취했다.
여인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그녀는 사내아이를 보호하듯이, 아이를 안은 손에 더욱 힘을 주어 자기 등을 보였다.
아직 너무 어려 뭐가 뭔지 모르는 사내아이가 칭얼거렸다.
"엄마...."
"쉬잇. 조, 조용히 하렴."
여인은 아이를 더욱 세게 안아, 되도록 흑기사의 시선에서 보이지 않게 하려 했다.
마치 그렇게 하면 정말로 숨겨지듯이 말이다.
흑기사는 대검을 든 채 조용히 그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허억. 허억."
여전히 거친 소리를 내는 여인과 흑기사의 눈이 마주쳤다. 투구를 눌러쓰고 있어 정말로 눈이 마주쳤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여인은 그렇게 느꼈다.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 흘렀다.
저 대검이 언제 떨어져 내릴까?
차라리 빨리 떨어져 내리면 이 두려움조차 사라질 텐데.
여인은 눈을 질끈 감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떨어진 건 대검이 아니었다.
끼이익.
바닥을 덮었던 판자가 천천히 내려섰다.
판자가 완전히 덮이기 전, 여인이 마지막으로 본 건 대검을 바닥에 질질 끌며 뒤돌아서는 흑기사의 모습이었다.
흑기사는 집을 나섰다.
대검을 등에 멘 뒤, 다시 서쪽을 향해 걸음 내디뎠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떠오르는 단어가 하나 있다.
흑기사는 그 단어를 힘주어 말했다.
"돌아... 간다."
그렇게 흑기사는 전진했고, 또다시 동료를 늘린 언데드 군세가 그 뒤를 따랐다.
흑기사
* * *
이틀 뒤. 엘드리엄 근처 벌판에 토벌대 인원이 모였다.
우선 에른스트의 모집 공고에 응한 용병과 사병이 900명이다. 현상금에 혹해 타지역에서 찾아온 용병들 탓에 그 숫자가 예상을 웃돌았다.
'시간만 더 있었으면 더 많이 몰려왔을 테지.'
그다음으로는 교단의 지원이다.
엘드리엄의 교단은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에른스트를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나섰다.
중급에서 초급의 사제만 15명을 지원했고, 성수도 가진 물량을 전부 지원해주었다.
교단으로서는 보일 수 있는 성의를 전부 보인 것이다.
에스델이 아쉬운 듯이 말했다.
"하지만 성유물을 지원받지는 못했어요. 그건 정말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다네요. 이게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뭔지...."
밤의 신전처럼 교단도 신성한 유물을 보관하고 있을 터이고, 그런 성유물들은 언데드를 상대하는 데에 큰 힘이 되어줬을 터이다.
하지만 교단에서도 이것만큼은 내어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어쩔 수 없지.'
행여나 이번 토벌이 실패하고, 성유물을 잃는다면 그건 감당할 수 없는 손해일 것이다.
애초에 어렵다는 걸 알았기에 아쉬움도 없다.
마지막으로 엘드리엄 영주가 사병 200을 이끌고 나왔다.
에른스트와 시종이 제대로 협상을 한 것 같았다.
데일은 사병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북부의 전사들답게 다들 눈빛이 형형하고 군기가 잡혀 있었다.
개중에는 귀가 뾰족한 자들도 있었는데, 미우나 고우나 엘프들의 실력은 무시할 게 못 되니, 분명 큰 전력이 되어줄 것이다.
그 외에도 이 많은 인원을 보급할 마차며 잡일을 거들어줄 일꾼까지 합치니, 1,000명이 훌쩍 넘어가는 토벌대가 완성되었다.
그런 대인원이 벌판에 쭉 늘어서 있었다.
어디선가 구해온 백마 위에 올라탄 에른스트가 그 광경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음.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지?"
이번 토벌대의 지휘관은 에른스트와 엘드리엄 영주가 공동으로 맡기로 했다.
에른스트는 자기가 모은 용병들을 지휘하고, 엘드리엄은 도시의 사병을 지휘하며 서로 돕는 형식이다.
에른스트는 손을 파르르 떨었다.
"여, 역시 난 못할 것 같아. 차라리 엘드리엄 영주한테 모든 걸 맡기는 게 좋지 않을까?"
에른스트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위구역 밖을 벗어나 본 적 없는 애송이다.
군대를 지휘해본 경험은커녕, 첫 실전도 얼마 전에 처음 치러보았다.
가문에서도 딱히 기대를 받는 처지도 아니었다. 능력이 특출나 주목을 사는 일도 없었다. 사교성이 좋아 다른 귀족들의 눈에 들 일도 없었다.
그런 애송이가 어느새 1,000이 넘는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엄청난 중압감에 에른스트는 자꾸만 말을 뒤로 물리려 했다.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데일이 따끔하게 말했다.
"정신 차려라. 이제 뒤로 무를 수도 없다."
"하, 하지만."
"도망칠 기회는 많았다. 그걸 저버린 건 너야."
시종과 데일은 에른스트에게 몇 번이고 도시로 돌아가는 걸 추천했다.
기어코 고집을 부리며 이곳까지 온 건 에른스트다.
"그리고 영주에게 모든 걸 맡기면, 승리했을 때의 공도 모두 양보해야 한다. 그러면 이번에 내버린 지출을 감당할 수 없을 텐데?"
"...알겠어."
에른스트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붕붕 끄덕였다.
애초에 선택지는 없다. 한번 시작한 이상, 끝까지 가는 수밖에.
데일은 에른스트의 등을 팡! 하고 치며 말했다.
"출진 연설을 시작해라."
에른스트는 말을 몰아 조금 앞으로 나섰다.
토벌대원들이 그런 에른스트를 쳐다보았다. 썩 달가워하는 눈치들이 아니다.
관록이 있어 보이지도. 그렇다고 체격이 크지도 않은 애송이가 자기들을 지휘한다니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에른스트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고는 힘을 주어 말했다.
"그대들... 윽!"
혀를 씹어버렸다.
옆에서 듣던 하켄이 얼굴을 가렸다.
"아이고 내가 다 화끈거리네."
에른스트가 울상을 지으며 시종을 쳐다봤다.
용병들 사이에 섞여 있던 시종이 힘내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모습에서 용기를 얻은 에른스트가 다시 입을 열어 꿋꿋이 외쳤다.
"그대들이 각자 원하는 바가 다르다는 건 안다. 누군가는 명예를 위해! 누군가는 돈을! 누군가는 의무로! 또 누군가는 강자와 싸워볼 기회를 얻기 위해 이번 토벌에 참여했겠지!"
한 차례 호흡을 들이마쉰 에른스트가 외쳤다.
"하지만 우리의 목적이 다를지언정, 목표는 같다! 북부를 어지럽히는 검은 사신을 토벌하는 것! 우리가 하나 되어 싸운다면, 반드시 그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말을 마친 에른스트는 슬쩍 주위 눈치를 살폈다.
토벌대원들이 멀뚱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에른스트가 머쓱해하는 기색을 보이자, 미리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던 시종과 사병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
"에른스트 님 만세! 검은 사신을 무찌르자!"
분위기에는 전염성이 있다. 바람잡이들의 활약에 멀뚱히 있던 전사들도 하나둘 함성을 내지르기 시작했고, 이내 온 토벌대가 무기를 치켜들며 함성을 질렀다.
그 모습을 에른스트가 벅찬 얼굴로 바라보았다.
데일이 에른스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잘했다."
"후. 후아.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어땠어?"
"처음치고는 훌륭했다."
출진하기 전에 하는 연설은 중요하다.
이런 식으로 사기를 드높이고, 함께 함성을 지르며 하나 되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전투란 사기가 절반인 법.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면 아무리 강한 군대라도 무너지기 마련이고, 반대로 두려움 없는 병사는 몇 배의 군대를 상대로도 이겨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언데드는 껄끄러운 적이다.
그들에게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없다. 타고난 병사인 것이다.
에른스트에 이어서 엘드리엄 영주가 연설을 했다.
엘드리엄은 회색빛이 도는 긴 머리칼을 가진 여인이었는데, 귀가 사람치고는 뾰족했고, 엘프치고는 뭉툭했다.
그녀는 병사들의 분위기를 능숙하게 틀어잡으며, 멋들어지게 연설을 해냈다.
경험 많은 귀족다운 훌륭한 솜씨였다.
그 모습을 에른스트가 멍하니 쳐다보았다.
"대단하다... 그리고 소문보다 더 아름다워."
헤― 벌린 에른스트의 입에서 침이 떨어질 기미를 보이자, 돌아온 시종이 옆에서 다그쳤다.
"정신 차리세요 도련님. 저렇게 보여도 도련님보다 나이 많은 자식을 셋이나 두고 있는 사람입니다. 애 딸린 유부녀를 넘볼 생각은 아니겠죠?"
"험험. 오해할 소리 하지 마. 나에게는 에스델 양이 있는데... 그냥 엘프는 잘 안 늙는다는 게 신기해서 쳐다봤을 뿐이야."
"정확히는 절반만 엘프지만요. 모친 쪽이 엘프였답니다."
엘드리엄 영주는 엘프의 피가 절반 흐르는 하프 엘프였다.
데일은 영주를 보며, 그 부친에 대해 생각했다.
'엘프랑 결혼하다니. 비위도 좋군. 제정신이 아니었던 걸까?'
자기 부친에 대해 데일이 속으로 엄청난 모욕을 퍼붓고 있다는 걸 모르는 엘드리엄이 이쪽을 향해 말을 몰아 다가왔다.
그녀는 말에서 내려 데일에게 악수를 건넸다.
"반갑네. 이제야 인사를 하게 되었군. 엘드리엄 가문의 카트린일세."
"데일이오."
데일은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일단 손을 마주 잡아 주었다.
영주가 사내처럼 씨익 웃었다.
"소문은 많이 들었네. 듣던 대로 강한 기세가 느껴지는군."
데일은 어깨를 으쓱였다.
영주가 이어 말했다.
"그대가 토벌대의 대장을 맡아준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음. 솔직히 저쪽은... 못 미더우니까?"
옆에서 듣던 에른스트가 움찔했다.
영주가 일부러 들으라는 식으로 얘기한 것도 맞았다.
이 어리고 경험 없는 귀족을 초장에 잡아두고 싶은 것이다.
게다가 반쯤 진심이기도 할 것이다.
에른스트보다는 전투 경험이 풍부한 데일이 이끄는 게 더 믿음직스러울 테고, 병사들도 더 잘 따를 것이다.
하지만 데일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귀찮기만 하지.'
병사를 지휘해 공을 세워봤자, 데일이 얻을 만한 건 별로 없다. 괜히 신경 쓸 일만 많은 것이다.
게다가 데일은 전투가 벌어지면 적진으로 파고들어 흑기사와 싸울 생각이다.
그러면 더는 제대로 된 지휘가 불가능하다.
지휘권은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게 여러모로 나았다.
'괜히 귀찮게 안 하게 강하게 나가야겠군.'
데일은 엄숙하게 말했다.
"말 조심하시오."
"응?"
"이미 지휘권에 대한 문제는 모두 서로 합의를 마쳤는데, 이제 와 그 얘기를 다시 꺼내 분란을 일으키려는 이유가 무엇이오?"
"아니. 나는 딱히 분란은...."
"그리고 에른스트는 지휘관으로서 자기 책임을 훌륭히 다할 것이오. 비록 나이도 젊고, 경험은 적으나, 뛰어난 재주를 가졌지. 같은 토벌대장으로서 그를 무시하는 듯한 언사는 삼가시오. 나는 어디까지나 에른스트에게 고용된 몸일 뿐이오."
"으음."
생각보다 강하게 나오는 데일의 반응에 영주는 움찔했다.
그녀는 황급히 말했다.
"아무래도 조금 오해가 있는 모양이군. 절대 무시하려는 건 아니었네. 그렇게 느껴졌다면 내 사과하겠네."
그렇게 말한 영주는 에른스트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뒤, 데일 쪽을 의외의 눈으로 쳐다보았다.
'보기와 달리 의리가 두터운 성격인가? 그렇다면 정말 신기한 일이군.'
영주는 서둘러 자리를 떠나갔다.
괜히 얘기를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은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영주가 데일에게 지휘를 하니 마니 하는 이야기는 절대로 꺼내지 않을 것이다.
무사히 영주를 쫓아낸 데일을 에른스트가 감동 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데일 경... 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딱히 너를 위해서 한 게 아니다."
"뛰어난 재주를 가진 젊은 귀족이라니. 헤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에른스트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거짓말인데.'
뭐. 어쨌든 본인이 기분 좋아한다면 그걸로 좋다. 그리고 이번 토벌전에서 에른스트의 역할이 그리 많지도 않을 거다.
상대는 언데드고, 언데드가 구사하는 전략은 육탄 돌격과 물량 공세밖에 없다.
아마 전투는 양측이 한차례 맞부딪히는 걸로 끝나버릴 것이다.
결과도 단순하다.
이쪽이 완전히 박살나거나, 아니면 저쪽을 박살내거나.
마침내 토벌대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에른스트는 말 위에 올라타 수십 번도 더 본 지도를 펼쳐들고 끙끙거렸다.
비록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지금 검은 사신은 여기서 북쪽으로 나흘 거리에 있다는 거지? 그리고 계속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고."
"그래."
흑기사는 불규칙적으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 전진 속도에 비해 실제로 이동한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데일이 말했다.
"놈은 헤매고 있지만, 크게 보면 결국 서쪽으로 가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놈들을 맞이할 거다."
데일은 지도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은 현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닷새 거리에 있는 곳으로, ㅇ 자로 표시되어 있었다.
"원래는 마을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지만, 집이나 방어 시설은 이용할 수 있을 거다."
"으음. 그렇군."
"왜 그러지?"
"아니. 그냥 예전부터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어서 말해보라는 듯.
데일이 턱짓했다.
에른스트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냥. 당최 이놈의 흑기사의 목적이 뭔지 궁금해서. 사람들은 북부를 휩쓸기 위해 찾아온 악마의 하수인이니, 미쳐버린 이교도가 교단의 신도들을 응징하러 왔다느니 하는데. 이놈이 이동한 경로를 보면 그런 느낌은 아니잖아?"
지도에는 흑기사의 경로가 상세히 적혀 있었다.
흑기사는 기본적으로 서쪽을 향해 움직이지만, 때로는 북쪽으로. 때로는 남쪽으로.
또 때로는 같은 장소를 빙빙 돌거나 되돌아가기도 했다.
"뭐라고 해야 하지? 마치 길 잃은 미아처럼 움직이는 것 같다 라고 해야 할까?"
"길을 잃었다? 확실히 그럴 수 있겠군."
다른 누구도 아닌, 데일은 깊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데일이 말했다.
"경로에 있다 송두리째 파괴당한 마을들은 단순히 재수가 없었던 걸 수도 있겠어."
"으음. 그럴 수도. 어쨌거나 이 흑기사가 용뼈 산맥에서부터 내려와, 계속 서쪽으로 가고 있단 말이야. 근데 서쪽에 뭐가 있길래? 차디찬 북해밖에 없잖아. 설마 해수욕이나 즐기겠다고 그러는 건 아닐 거 아니야."
확실히.
에른스트의 의견도 일리가 있었다.
이 흑기사가 순전히 파괴와 혼란을 일으키기 위해 북부를 배회하는 건 아닐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에른스트는 저 멀리 벌판 끝으로 시선을 향하며 중얼거렸다.
"무언가 찾고 있는 게 아닐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데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그 이름조차 모를 흑기사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아무리 고민해도 명확히 밝혀낼 수 없다.
결국. 직접 부딪혀서 실토하게 하는 수밖에 없다.
'말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이번 일의 마무리가 머지않았다.
말을 탄 엘드리엄 영주를 선두로, 토벌대가 줄지어 행군했다.
흑기사
* * *
북부에서도 서쪽 외곽.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북해가 멀지 않은 곳에, 자그마한 마을이 하나 있었다.
가난한 마을이었다.
자연은 언제나 혹독했고, 사람들의 형편은 좋지 않았다.
농사가 힘든 척박한 땅인지라 대부분의 마을 구성원이 어업과 사냥으로 먹고살았는데, 둘 모두 안정적인 일은 아니었다.
주민들이 거친 바다에 빠져 죽거나 맹수에게 물려 죽는 경우도 흔했다. 사냥에 실패하는 날도 많았다.
허탕을 치는 날이면 온 마을이 굶어야 했다.
다행히 주민들 사이의 관계는 끈끈해 아사자가 나오는 경우는 적었지만, 그래도 주민들의 삶은 몹시 고되었다.
그러던 중.
한 소년이 태어났다.
소년은 북부의 사내답게 강건한 신체를 타고났고, 사냥을 비롯해 싸움에도 소질을 보였다.
어른들은 항상 소년을 보며 말했다.
소년이 좋은 곳에서 태어났다면 분명 기사로서 출세했을 것이라고.
소년의 부모는 그런 소년에게 항상 미안해했다.
좋은 부모가 되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소년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소년은 이 마을이 좋았다.
비록 환경은 척박하고, 배부른 날보다 굶는 날이 많지만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침에 일어나 이웃들끼리 인사하는 반가움이 좋았고, 자그마한 기쁨이라도 생기면 함께 축하해주는 그 따스함이 좋았으며, 적은 식량이라도 생기면 다 함께 나눠먹던 그 소박함이 좋았다.
소년은 자기가 태어난 고향을 사랑했다. 고향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다.
어느 겨울.
유독 칼바람이 혹독하게 몰아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 추위를 뚫고 바다에 나가거나 사냥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
사냥을 못 하면 굶을 수밖에 없다.
주민들은 다 함께 이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칼바람은 좀처럼 가라앉을 기색이 없었다.
그대로 온 마을을 집어삼켜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집요하게 몰아쳤다.
더는 버틸 수 없다.
이대로라면 전부 굶어 죽을 판이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목숨을 걸고 밖으로 나가 사냥하거나, 이대로 천천히 죽어가거나.
어느 쪽이든 절망적이었다.
그때 마을에 찾아온 이들이 있었다.
바로 징병관이다.
"1군단에 복무할 병사를 모집하고 있소! 제국을 수호하는 명예로운 일이오! 기회를 놓치지 마시오!"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징병관이 독하기로는 세금 징수원에 밀리지 않는다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 이런 칼바람을 뚫고 올 줄이야?
징병관이 당황하는 사람들에게 외쳤다.
"병사로서 참여하면 당연히 보상을 줄 것이오! 전장에서 복무한 만큼 주급이 나올 것이며, 활약을 선보인다면 이 마을에도 큰 상훈이 내려질 것이오!"
전선에 선 평민이 활약해 출세하고, 그 고향에까지 상훈이 내려진 일화는 징병관들이 흔히 지껄이는 이야기다.
물론. 그런 사례가 극도로 희소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소년은 그곳에서 기회를 보았다.
"가겠습니다."
"음?"
"하지만 그냥은 가지 않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올겨울을 날 식량을 주십시오."
징병관은 인상을 찌푸렸다.
당돌한 소년이다. 그리고 당돌함은 군대에서 반기지 않는 개성이다.
징병관은 몽둥이를 꺼냈다.
그대로 소년을 두들겨 패, 현실의 혹독함을 알려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징병관의 몽둥이를 막아낸 뒤, 그대로 징병관을 제압해버렸다.
자기 실력을 선보인 것이다.
그제야 징병관도 소년에게 재능이 있음을 알아보았다.
"선택을 후회하지 않겠나?"
절대 두 번 묻는 법이 없는 징병관이 그리 물었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좋다. 너만큼 쓸만한 녀석을 데려가면 나도 나쁘지 않지. 이런 편의를 봐주는 건 처음이지만... 네 주급을 가불하는 식으로 식량을 주겠다. 즉 빚이다. 오래 살아남아서 빚을 갚도록."
쓸모 있는 인재를 데려가면 징병관에게도 실적이 된다.
그렇게 거래가 성사되었다.
가족과 주민들은 그런 소년을 말리려 했다.
일반 병사가 전선에 가서 살아남을 확률은 매우 낮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년의 결심은 확고했다.
곧바로 짐을 쌌고, 재촉하는 징병관의 뒤를 따랐다.
자기를 마중 나온 사람들에게 소년은 말했다.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모두 건강하세요."
그렇게 고향을 사랑한 소년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고향을 떠나야 했다.
소년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눈보라에 휩싸인 마을의 정경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다짐했다.
언젠가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 * *
눈이 내린다.
꼭 북부가 아니라도 겨울 행군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용병들은 두꺼운 털 옷을 부여잡으며 차가운 숨을 뱉어냈다.
그나마 북부 출신 사람들은 그럭저럭 버텨냈다.
이 정도면 북부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너스레를 떠는 이들도 있었다.
고생하는 건 따뜻한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다.
"에취!"
요란하게 재채기한 에스델이 로브를 추슬렀다.
데일이 등에 멘 배낭에서 모포를 꺼내 건넸다.
"이걸 몸에 둘러라."
"데일 경은...."
"어차피 나는 추위를 느끼지 못한다."
"감사합니다."
에스델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모포를 몸에 둘렀다.
옆에서 서운한 목소리로 '나도 추운데...'라고 중얼거리던 하켄이 말했다.
"여긴 뭔 놈의 바람이 이렇게 강하게 분대요? 바다 근처라 그런가?"
거센 바람과 함께 휘날리는 눈발에 하켄은 연신 눈을 찌푸렸다.
데일이 덤덤하게 말했다.
"조금만 참아라.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목적지다."
우중충한 날씨와 흩날리는 눈발 때문에 시야가 좁지만,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다는 건 지금의 날씨만 봐도 느낄 수 있었다.
북해 근방답게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니다.
'상대가 언데드라서 한편으로는 다행이군.'
이기든 지든 한 번의 충돌로 끝이 날 테니,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추위에서 시간이 질질 끌리면 피해가 걷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데일의 예상대로.
두어 시간 정도를 더 이동하자 마을이 보였다.
정확히는 마을이었던 흔적이었지만.
하켄이 감탄을 흘렸다.
"이야.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살았군요."
주민들이 떠난 지 어림잡아 10년은 넘었을까?
다행히 통나무로 지어진 목책이나 집들은 아직 제 구실을 할 수 있어보였다.
심지어 조잡하지만 망루도 하나 있었다.
"맹수가 많은 곳이라 없는 살림에 망루도 지어놨네요."
뒤이어 도착한 영주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크게 외쳤다.
"이곳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다! 잠시 휴식을 취하도록!"
언데드가 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다.
데일이 하티를 보내 정찰을 시켰으므로, 이는 확실한 정보였다.
지금은 잠깐 휴식을 취할 여유가 있었다.
이 이후에는 진지 공사를 해야겠지만.
용병들이 바닥에 주저앉으며 휴식을 취하는 동안. 데일은 마을을 둘러보았다.
옆에 따라온 에스델이 중얼거렸다.
"을씨년스럽네요. 주민들은 왜 마을을 떠났을까요?"
"글쎄. 더는 이런 곳에서 생활하기 힘들었겠지."
데일은 그나마 멀쩡한 집 문을 열었다. 다른 집과는 달리 집기나 생활용품이 남아 있는 집이었다.
'마지막까지 사람이 산 건가?'
함께 안으로 들어온 에스델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이, 이건."
"왜 그러나."
에스델은 침대를 가리켰다.
모포가 덮여 있었는데, 그 아래 비쩍 마른 발이 빠져 나와 있었다.
데일은 모포를 살짝 들어 확인했다.
"...동사했군."
데일은 다시 모포를 덮었다.
상황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아마 주민들은 마을을 떠나기로 결정했고, 그중 누군가는 이곳에 남기를 원했을 것이다.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왜 남은 것일까.
단지 평생의 터전을 떠날 수 없었던 걸까? 아니면 남아야 했을 이유가 있을까.
데일과 에스델은 조용히 집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죽은 자의 수면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은 머지않아 전장이 되고, 조용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테지만 말이다.
"자! 이제 그만 일어나도록!"
휴식을 마친 용병들은 작업을 시작했다.
얼어붙은 바닥에 말뚝을 박아 넣었고, 망루와 목책을 수리했다.
시간이 넉넉지 않은 만큼 최소한의 조치다. 얼마나 효과를 볼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런 급조한 방벽 덕에 한 명이라도 더 살아날 수 있다면, 충분히 의미가 있는 작업이었다.
얼추 모든 작업이 끝난 다음에는 식사 시간이었다.
곳곳에 피운 모닥불에서 연기가 하늘로 솟구쳤다. 솥에는 고기와 재료를 아낌없이 들이부었고, 영주는 맥주를 한 잔씩 돌렸다.
고기와 술을 배불리 먹인다.
마지막 식사일 수도 있는 만큼 베푸는 최소한의 호의였다.
용병과 병사들은 이 이후에 있을 전투 따위는 조금도 두렵지 않다는 듯. 다들 쾌활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아니면 애써 쾌활한 척하거나.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눈발은 더욱 심해지고, 사위는 점점 어둠에 물들어갔다.
그나마 우중충한 구름을 뚫고 지상을 비추던 조금의 햇빛마저 사라졌다.
분위기가 변했다.
다들 그렇게 느꼈다.
눈발을 뚫고 커다란 늑대가 다가왔다. 영리한 하티가 되돌아온 것이다.
데일은 녀석에게 물었다.
"놈들이 근처인가?"
하티가 앞발로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맞다는 뜻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놈들이 예상보다 빨리 온 모양이군. 수고했다."
데일은 하티의 갈기를 한차례 쓸어준 뒤, 에른스트에게 턱짓했다.
어벙하게 있다가 퍼뜩 정신 차린 에른스트가 외쳤다.
"전군! 각자 대형으로 향하라!"
화기애애하게 떠들던 병사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일사불란하게 자기 위치를 찾았다.
얼마 전에 급조한 토벌대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신속함이었다.
망루 위로는 사제들이 올라갔다.
전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만큼, 더 효율적인 지원과 공격이 가능할 것이다.
준비를 마친 병사들은 적들이 오는 동쪽 방향을 향해 섰다.
휘오오.
모두가 입을 다문 정적 속에서 바람 소리만이 스산하게 울렸다.
그러던 중. 유독 후각이 민감한 엘프 전사 하나가 코를 킁킁댔다.
옆에 있던 용병이 물었다.
"왜 그래."
"시체 냄새가 난다."
"그렇다는 건...."
눈발이 휘날리는 저 너머에서 희미한 빛무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텅 비어 버린 두개골 속에서 빛나는 수백 쌍의 푸르스름한 불빛.
가장 선두에 서 있던 용병이 찢어지는 듯한 고함을 내질렀다.
"놈들이 온다아아아!"
그게 신호였다.
천천히 가까워져 오던 언데드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쪽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선봉으로 달려오는 건 주로 스켈레톤과 같이 가벼운 놈들이었다.
"방패만 제대로 들어!"
"뼈다귀한테 쫄지 마라!"
스켈레톤은 가장 약한 언데드다. 용병들은 능숙하게 놈들의 뼈를 부쉈다.
사제들도 힘을 아꼈다.
수백이 넘는 스켈레톤이 순식간에 땅에 누웠고, 또 다른 수백이 달려들었다.
'정말 징글징글하게 많군.'
토벌대가 스켈레톤과 아웅다웅하는 사이.
상대적으로 걸음이 느린 언데드가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좀비. 구울. 시체 골렘.
악취를 풍기며 달려드는 이들은 바닥에 널브러진 해골을 짓밟고 토벌대에게 짓쳐 들었다.
스켈레톤보다 고등한 언데드다.
스켈레톤처럼 간단히 넘길 수는 없다.
"캬아악!"
"목을 베었다고 끝이 아니야! 아예 시체를 토막 내야 해!"
"아악! 사, 살려줘!"
놈들은 그 무식하게 많은 숫자를 이용해 그대로 사람들을 짓뭉개려 했다.
목책과 저지선이 뚫릴 뻔한 적이 수차례.
그럴 때마다 망루에 선 사제들이 적절하게 기적을 읊어 언데드를 재로 되돌렸다.
찬란한 광휘가 번뜩일 때마다 언데드는 괴로워하며 허물어졌다.
유일한 마법사인 한스도 부지런히 벼락을 내리꽂았다.
주로 목표는 시체 골렘이나 구울 같이 까다로운 적들 대상이었다.
파도처럼 물밀듯 밀려오던 언데드는 사람들의 분전에 시간이 지날수록 그 기세를 잃고 주춤거리고 있다.
순조롭다.
편한 싸움은 아니지만, 예상보다 훨씬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기뻐할 수가 없었다.
'놈은 어딨지?'
흑기사.
흑기사가 아직 보이지 않는다.
분명 소문에 의하면 흑기사는 언데드 군세보다 훨씬 앞선 자리에서 걸어간다 했다.
마치 언데드와 자기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라도 하듯.
근데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흑기사를 상대하기 위해 미리 대열에서 벗어나 있던 데일은 조용히 상황을 관망했다.
그러다 문득. 몰려오는 언데드 사이에 유독 움직임이 없는 한 곳을 발견했다.
데일은 그쪽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발견했다.
주위 어둠에 녹아 있는 흑색 갑주의 기사를.
'저건....'
흑기사의 투구에는 악마의 뿔과 같은 장식이 양쪽으로 돋아나 있었다.
온몸의 관절 부위에 칼날이 하나씩 달려 있었고, 하얗게 센 머리가 허리 근처에서 이리저리 흩날렸다.
도저히 인간 같지 않은 몰골이었다. 지옥에서 온 전사. 혹은 그 비슷한 무언가로 보였다.
사신이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그리고 저 모습이야말로 이미 저 흑기사에게서 인간성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제정신인 놈이었다면 갑옷을 저따위로 변형시키지 않았을 테니.
대체 언제부터 저곳에 서 있던 걸까.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흑기사에게서는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바위나 흙 같은 무정물과도 다를 바 없었다.
'뭘 보는 거지?'
토벌대의 면면을 눈에 담고 있는 걸까?
아니. 그것보다는....
'마을을 보고 있다?'
어쨌거나 놈의 위치를 확인했으니 당장 제거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떼려던 그 순간.
텅 비어 있던 흑기사의 투구 속에 안광이 번뜩였다.
무정물 같던 녀석에게서 강한 기세가 흩뿌려졌다. 위험한 기세다.
이곳에서 싸우던 모두가 순간 움찔할 정도로.
흑기사가 등에 멘 대검을 들었다. 그 대검에 그림자가 스멀스멀 서렸다.
'이런!'
데일이 급히 땅을 박찼다.
하지만 늦었다.
그림자에 둘러싸인 대검이 땅에 떨어지는 게 먼저였다.
콰앙!
대검이 땅을 강타했다.
검날에 서려 있던 그림자가 뻗어나가, 초승달과 같은 형상을 이루며 날아갔다.
그림자가 선두에 선 용병에 이어, 목책을 덮쳤다.
콰작!
핏물이 튀었다. 그리고 목책이 무너져 내렸다.
"...."
"세상에."
모두가 굳어버렸다.
필사적으로 지켜오던 아군의 선두가 일시에 무너져 내렸다.
단 한 방의 칼질만으로.
흑기사
* * *
어둠 강타.
무기에 어둠을 둘러 휘두르는 기술.
데일이 영혼 지배를 선택했다면, 저 흑기사는 어둠 강타를 선택했다.
그 위력은 발군이다.
단 한 번의 타격에 선두에 서 있던 용병 다섯이 핏물이 되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목책의 일부분이 무너져 내렸다.
필사적으로 사수하던 전열이 단 한 번에 무너진 것이다.
엘드리엄 영주가 외쳤다.
"예비대! 뚫린 곳을 막아!"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황급히 전열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목책이 뚫린 게 문제였다.
빈틈을 발견한 언데드가 거세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언데드 군세의 진짜 전력이 도착했다.
"우어어어!"
하늘을 향해 포효 짓는 시체 트롤.
바닥을 쿵쿵대며 걸어오는 언데드 오우거.
살점이 뚝뚝 흘러내리는 미노타우로스 좀비.
용뼈 산맥의 깊은 곳에서나 마주칠만한 괴수들이 천천히 전진했다.
용병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세상에. 대체 저런 게 몇 마리야."
"다, 다섯 마리?"
하나가 등장하면, 웬만한 마을을 괴멸시킬 수 있는 괴수가 다섯이나 등장했다.
영주가 외쳤다.
"모두 밀집 대형을 포기한다! 저런 걸 상대로 방패를 들어 막으려 하지 마! 무조건 피하는 데에 집중해! 말을 탄 이들은 모두 나를 따라라!"
영주는 기병의 기동성을 이용해 거대한 언데드들의 시선을 끌 요량이었다.
위험한 일이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다.
영주는 떠나기 전에 에른스트에게 외쳤다.
"에른스트! 지휘를 부탁하네!"
"아, 알겠습니다."
더듬거리며 지휘하는 에른스트를 필두로, 필사의 저항이 시작됐다.
그리고 그런 혼란한 전장에서 조용히 서 있던 흑기사는 다시 대검을 들어올렸다.
대검에 그림자가 모여들었다. 그대로 다시 내려칠 생각이었다.
그때.
빠르게 쇄도해온 데일이 흑기사의 등을 노렸다.
흑기사는 등에 눈이 달리기라도 한 듯, 내려치려는 대검을 그대로 회전해 데일에게 향했다.
카앙!
커다란 대검과 마검이 부딪쳤다.
강한 충격이 데일의 손목을 타고 흘렀다.
'쯧. 무식하게 세군.'
데일을 상대한 이들이 숱하게 떠올렸을 생각을 하며, 데일은 곧추세운 마검을 힘껏 밀어냈다.
거리를 조금 벌린 데일은 흑기사를 보았다.
흑기사도 데일을 보았다.
자기와 비슷한 존재를 바로 앞에서 마주치는 건 꽤 복잡한 기분이었다.
무언가 반갑기도 하고, 알게 모르게 불쾌하기도 했다.
데일이 입을 열었다.
"말을 할 수 있나?"
"...."
흑기사는 말하지 않았다.
말을 할 수 없는 건지, 아니면 안 하는 건지.
어쨌거나 그는 자세를 잡았다.
마치 이렇게 얘기하는 듯했다.
닥치고 오기나 하라고.
"그래."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검을 굳게 쥐었다. 무릎을 굽혔다가, 힘껏 땅을 박찼다.
데일은 믿기 어려울 정도의 빠른 속도로 돌진했다. 하지만 흑기사의 시선은 결코 데일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그림자를 두른 대검이 데일을 반으로 쪼갤 기세로 휘둘러졌다.
거대한 대검을 마치 나뭇가지라도 되는 양 가볍게도 휘둘렀다.
데일은 움직임에 맞춰 검을 교차했다.
파아앗!
마검에 닿은 그림자가 흩어져 버렸다. 흑기사의 안광이 한차례 흔들렸다.
이놈도 당황이라는 감정이 있는 걸까?
설령 그렇다 해도, 그 당황은 길지 않았다. 놈이 대검을 쥐고 있던 오른 주먹을 뻗어왔다.
데일은 마주 왼 주먹을 내질렀다.
쩌엉!
허공에서 맞부딪힌 주먹에서 쩌렁쩌렁한 굉음이 울렸다.
서로에 대한 충격은 호각으로 보였으나....
쩌저적.
주먹에 닿은 데일의 왼주먹이 순식간에 얼어붙기 시작했다.
닿은 상대를 냉각시키는 '차가운 손아귀'.
'진짜 냉기 계열이 맞았잖아.'
한스에게 전해 들었을 때는 솔직히 완전히 믿지 않았다.
만약 흑기사가 냉기를 주력으로 사용한다면, 이 언데드들은 다 무어란 말인가.
하지만 한스의 말이 진실임이 드러났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생각할 여유가 없다.
당장 머리를 향해 내리쳐 오는 대검부터 어떻게 해야 한다.
팡!
데일은 유물 장갑을 폭발시켜, 얼어붙은 왼손을 해방했다.
대검이 마저 떨어지기 전에, 놈의 팔을 힘껏 붙잡았다.
찰나간 힘을 겨루었다.
조금의 틈을 번 데일이 거리를 벌리려 했다. 흑기사가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그의 투구 속에서 어둠이 흘러내려 데일을 추적했다.
검은 안개. 하지만 그냥 검은 안개가 아니다.
냉기 계열을 택한 흑기사답게, 닿는 모든 걸 얼어붙게 만드는 검은 안개다.
데일 역시 곧바로 검은 안개를 전개했다.
두 가지의 어둠이 맞부딪히며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런 식의 싸움은 처음인데.'
데일의 마력은 가니아고스의 피를 마시며 크게 증가했다.
흑기사를 상대로 쉽사리 밀리지 않았다.
그렇게 혼란한 전장 한복판에 커다란 공백 지대가 생겨났다.
운 없게 휘말려든 언데드 몇은 발을 들이자마자 얼어붙었다.
이대로 의미 없는 힘겨루기가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다.
"데일 경! 물러나세요!"
전장의 소음에 희미하게 들리지만, 데일의 뛰어난 청각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를 알아챘다.
에스델이다.
에스델이 무언가를 하려 한다.
'신벌 기적인가.'
그렇다면 참으로 적절한 지원이다. 흑기사에게 빛의 신도의 기적은 천적과도 같으니.
문제는 데일 역시 흑기사라는 점이다.
'피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저 흑기사 역시 눈치채고, 자리를 피할 것이다.
누군가는 붙잡아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해답이 떠올랐다.
'네가 어둠 강타를 선택했다면.'
데일이 손을 뻗었다. 몸에서 마력이 급속도로 빠져나갔다.
투구에서 뿜어나온 빛이 주위에 퍼졌다.
사납게 달려들던 언데드들이 자리에 우뚝 멈췄다. 그러더니 돌연, 흑기사를 향해 몸을 던지기 시작했다.
영혼 지배.
데일은 그 틈을 타 뒤로 훌쩍 물러났다.
흑기사는 대검을 가볍게 휘두르는 것만으로 달려드는 언데드를 모두 베었다.
그리고 물러서려는 데일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 역시 눈치챘다. 곧바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에스델은 늦지 않았다.
"여신이시여! 빛을!"
전장의 한복판에 빛으로 된 기둥 여러 개가 솟구쳤다.
망루 위에 있던 사제들이 일제히 신벌 기적을 읊은 것이다.
그중 가장 찬란하고. 환한 빛을 내는 건 에스델이 만들어낸 기둥이었다.
"캬아아아!"
빛에 닿은 언데드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소멸되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있던 흑기사 역시 무사할 수 없었다.
뒤늦게 물러났지만, 몸은 만신창이였다.
"...."
깔끔히 날아가 버린 하반신으로 차가운 피가 흘러내렸다.
멀리서 보던 용병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됐다!"
"해, 해치웠나?"
하지만 데일만큼은 방심하지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흑기사이기에, 제대로 마무리를 지어야 함을 알았다.
곧바로 신벌 기적으로 엉망이 된 땅을 지나쳐 흑기사의 몸을 반으로 가르려 했다.
그때.
흑기사가 아직 건재한 팔을 움직여,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예사롭지 않은 자줏빛 수정구.
데일의 머릿속에 불현듯, 한스가 내뱉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 흑기사의 허리춤에 자줏빛으로 빛나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분명 그게 언데드를 일으키는 원흉일 겁니다!
다음 순간.
자수정에서 사악한 빛이 번뜩였다. 퍼져나간 빛은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바닥에 토막나 있던 언데드의 조각들이 꿈틀거리더니, 자기들끼리 마구잡이로 달라붙기 시작했다.
기껏 쓰러트렸던 언데드가 한층 끔찍한 무언가로 되살아난 것이다.
'당장 저 구슬부터 깨트려야겠군.'
데일은 속도를 높였다.
하지만 어느샌가 몰려온 언데드가 흑기사의 반토막난 몸을 집어 들더니, 사람들이 모여 있는 방향을 향해 맹렬히 달리기 시작했다.
또 다른 언데드들은 데일을 향해 몸을 힘껏 던졌다.
조금이라도 발걸음을 멈추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데일이 방금 시간을 끌 때 사용했던 방식을 그대로 되돌려 준 것이다.
그렇게 해서 움직이던 흑기사는 용병들과 충분히 가까워졌을 때. 자기를 운반하던 언데드를 양손으로 강하게 내리쳤다.
퉁!
강한 힘에 언데드가 풀썩 주저앉고, 그 반동으로 흑기사의 몸이 날아올랐다.
어어, 하며 당황하던 용병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빠르게 날아온 흑기사가 그대로 용병을 붙잡았다.
가슴에 건틀렛을 쑤셔 박았다.
"크아아악!"
용병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용병의 몸이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졌다.
소멸해버린 흑기사의 하반신이 빠르게 재생되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흑기사가 양손을 활짝 펼쳤다. 뿜어져 나온 검은 안개가 용병들을 덮쳤다.
용병들은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안개가 몸에 닿은 순간. 그 신체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산 채로 얼어버린 시체들. 흑기사는 그 시체를 부숴 흡수해버렸다.
"...."
완전히 회복해버린 흑기사가 자리에 우뚝 섰다.
자신을 향해 두려움 어린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을 향해 차갑게 안광을 불태웠다.
적진 한복판에 있지만 조금의 두려움도 없는 그 모습에서는 품격마저 느껴졌다.
전장의 공포.
살육 기계.
검은 사신.
데일은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나보다 격이 높다.'
데일은 흑기사가 사람의 몸에 직접 건틀릿을 박아넣는 걸 보았다.
죽은 시체에서 생기와 영혼의 찌꺼기를 흡수하는 게 아닌, 산자의 몸에서 생기와 영혼을 통째로 뜯어내는 것이다.
지금 흑기사가 보여주는 위용.
저 압도적인 무력이야말로 데일이 지향하는 길이자 목표다.
저 흑기사가 데일의 미래인 것이다.
"신이시여. 우리를 가엾이 여기소서...."
"저런 끔찍한 존재가 존재하다니."
망루 위의 사제들은 동요했다.
자기들이 혼신의 힘을 쏟아부은 기적에서 곧바로 회복해버렸으니, 충격이 작지 않았다.
긴장한 사제들은 바로 다음 기적을 준비하려 했다.
그때. 데일이 외쳤다.
"그만!!"
사제들이 움찔 멈췄다.
데일이 다시 외쳤다.
"이놈은 내가 맡겠다! 너희들은 다른 곳에 집중해!"
냉정히 생각했을 때, 이 이외의 해법은 없다.
사제들은 강력한 언데드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데에 전력을 집중해야 한다.
어중간하게 흑기사를 노리고, 그 흑기사가 사제들을 먼저 제거하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마침 죽이기 좋게 망루에 옹기종기 모여있기도 하고.'
저 강력한 기동성 앞에 망루 따위는 조금의 도움도 되지 못할 터.
결국. 아군이 이기려면 데일이 혼자서 흑기사를 막아내야 한다.
그것 외에는 없다.
하지만 단순히 냉정한 이성만으로 내린 생각은 아니었다.
'승부를 보고 싶다.'
앞선 공방은 데일의 판정패다. 데일은 사제들의 도움을 받은 반면, 흑기사는 기껏해야 언데드를 부렸을 뿐이니.
그러고도 아군의 피해가 더 컸다.
패배한 채로 있고 싶지는 않다.
다른 누구에게라면 몰라도, 자기와 비슷한 존재에게는 질 수 없다는 호승심.
그 호승심이 데일을 움직였다.
데일은 미리 준비한 궤짝을 집어 들어, 용병들을 지나쳤다.
흑기사의 근처로 다가가 궤짝을 열었다. 안에 있는 유리병들을 모조리 던져버렸다.
챙그랑!
끈적하고 검은 액체가 주위에 흩뿌려졌다.
검은 불.
액체는 데일에게도 묻었고, 흑기사에게도 묻었으며, 주위 대지를 덮었다.
거금을 들여 워낙 넉넉히 사 왔기에 주위를 덮고도 남았다.
그때까지도 흑기사는 가만히 있었다. 마치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보겠다는 태도다.
아니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상관없다는 오만한 자신감이거나.
주위에 검은 불을 적절히 흐트러트린 데일은 가까이 있던 용병에게 말했다.
"물러나. 그리고 횃불을 던져라."
"예?"
"어서."
주저하던 용병은 손에 든 횃불을 바닥에 던졌다.
화악!
검은 액체에 순식간에 불이 옮겨붙었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거센 불길에 사람들은 물론. 언데드들도 뒤로 물러났다.
"...."
"...."
몸에 불이 붙은 흑기사와 데일은 서로를 조용히 쳐다보았다.
이 격렬한 불이 꺼질 때까지 외부의 도움은 없을 것이다.
둘만을 위한 결투장이 만들어진 것이다.
데일은 검을 들었다.
이겨야 한다.
아마도 이곳에 있는 모두의 목숨은 둘의 결투에 좌우될 것이다.
죽거나 죽이거나.
살아남기 위해. 데일은 자신의 미래를 이겨야 한다.
흑기사
* * *
불길에 휩싸인 둘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갑옷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흑기사라도 무시할 수만은 없는 열기다.
하지만 둘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승자는 패자의 모든 걸 흡수하고, 신체를 회복해낼 테니.
데일은 마검을 들어 그 끝을 흑기사의 머리를 향해 세웠다.
흑기사는 대검을 바닥에 질질 끌며 데일을 노려보았다.
대화는 필요 없다.
서로에 대한 탐색전도 이제 없다.
둘은 누가 먼저랄 새 없이 땅을 박찼다.
카앙!
허공에서 대검과 마검이 맞부딪혔다. 풍압이 주위로 퍼져나갔다. 불길이 일렁였다.
공중에서 맞부딪힌 둘은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서로를 죽이기 위해 가장 효율적이고, 가장 빠르고, 가장 치명적인 검로로 무기를 휘둘렀다.
짧은 순간에 검과 검이 수십 차례 맞부딪혔다.
불티가 흩날렸다.
데일은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르면서도 감탄했다.
'강하다.'
단순히 육체적인 강함이 아니다.
검술. 이 무식하게 커다란 대검이 그리는 궤적은 결코 무식하지 않았다.
크리스틴과는 다른 의미로 훌륭한 검술이다.
크리스틴이 긴 세월을 체계적으로 이어져온 검을 단련한 거라면, 흑기사의 검술은 순수하게 실전으로 쌓아낸 검이다.
어떤 계산이나 생각 없이 오로지 본능으로만 내지르는 검격.
하지만 그 하나하나가 치명적이다.
데일은 이 흑기사의 검에서 그의 경험을 읽어냈다.
전선에 서며 악마의 군세를. 그 추종자를. 어쩌면 악마 본인을 상대했을 검을.
경의를 느낀다. 적이지만 인정한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져줄 생각은 없다.
흑기사가 자신의 장점을 살린다면, 데일도 자기가 잘하는 걸 하면 될 뿐이다.
데일은 흑기사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대검이 옆구리를 후려쳤다.
맞아주었다. 옆구리 갑옷이 찌그러졌지만 상관없다.
중요한 건 거리다.
데일의 마검은 편하고, 저 무식하게 큰 대검은 휘두르기 불편한 그 절묘한 영역.
그 거리를 놓치지 않으면, 제아무리 흑기사라 해도....
'이길 수 있다.'
거리가 좁혀지자 흑기사의 몸에서 검은 안개가 흘러내렸다.
끔찍할 정도로 차가운 냉기가 서린 안개다.
데일도 마주 안개를 뿜어냈다.
두 안개는 서로 얽히고설키다, 이내 말끔히 사그라들었다.
마침내 두 흑기사 모두 마력이 다한 것이다.
앞서서 강력한 기술을 남발해낸 탓이었다.
'직업의 고질적인 단점이 여기서 드러나는군.'
이제 남은 건 기술 없이, 오로지 서로의 역량을 겨루며 싸우는 수밖에 없다.
무식하게. 흑기사답게.
절묘한 거리를 지키며 데일은 마검의 끝을 어지럽게 움직였다.
기회가 생기는 순간 갑옷의 틈새를 찔러넣을 생각이다.
당연하지만. 쉽지 않은 시도다.
남이었으면 무모한 짓이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데일은 자신이 있었다.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명확한 근거는 없지만, 데일이 할 수 있다고 여기면, 언제나 가능했다.
이번에도 그러하리라.
카각!
데일의 유리한 거리에서 접전이 계속해 이어졌다.
무식하게 커다란 무기는 거대한 적을 상대할 때는 유리했지만, 이런 식으로 개인 대 개인의 대결에서는 불리함을 지녔다.
데일은 그 유리함을 단 한시도 포기하지 않았다.
"...."
대검으로 데일을 찍어 내리려던 흑기사는 어느 순간.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그도 깨달았다. 이대로라면 계속해서 깎아나갈 뿐이라는 걸.
흑기사의 반응은 호쾌했다. 조금의 주저 없이 대검을 저 멀리 던져버렸다.
무기의 무게와 크기가 문제라면, 버리면 될 뿐.
갑옷 그 자체가 흉기가 다름없는 흑기사에게 무기란 없어도 그만일 뿐이었다.
"그래. 그렇게 나온다 이건가?"
데일도 마검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돌진해오는 흑기사를 상대로 거리를 유지하며, 검을 휘두를 역량은 없었다.
데일은 양팔을 들어 올려 마치 복싱을 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흑기사는 별다른 자세를 잡거나 하는 일 없이 그대로 주먹을 내질렀다.
쩡!
양팔을 십자로 교차해 막아낸 데일의 몸이 뒤로 쭉 밀려났다.
방어가 썩 의미가 없었다.
데일도 가드를 풀었다.
곧바로 주먹과 주먹이 서로를 향해 오고 갔다.
방어는 없다. 피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상대를 죽이기 위한 공격만을 계속했다.
쇠주먹이 전신을 타박했다. 갑옷이 찌그러진다. 둔탁한 충격이 쉴새 없이 몸을 두드린다.
이제는 앞서서 나왔던 고차원의 검술이나 실력은 없었다.
누구의 맷집이 더 강한지 시험하기라도 하듯. 무식하고 원초적인 폭력만이 행해졌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난타전은 불현듯. 끝을 맞이했다.
쾅!
흑기사가 데일의 가슴을 걷어차면서 데일이 균형을 잃었다.
흑기사가 그대로 데일의 위에 올라타 오른팔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힘껏 비틀어 찢어버렸다.
우드득.
팔이 뽑혀 나갔다.
데일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왼손으로 놈의 오른팔을 부여잡았다. 손아귀에 힘을 주고, 유물 장갑을 최대 출력으로 터트려버렸다.
데일의 주먹과 함께 녀석의 팔이 찌그러졌다.
서로가 서로의 속살을 드러냈다.
단단한 껍질을 드디어 벗겨낸 것이다.
먼저 행동한 것은 흑기사였다.
놈은 피가 뚝뚝 흐르는 데일의 상처를 향해 건틀릿을 박아넣었다.
그 행동이 의미하는 건 명확했다.
산 채로 먹어버리기.
강력한 흡입력에 의해 몸속 피가 상처 부위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덩달아 데일의 영혼 역시 뒤흔들렸다.
시야가 어지럽다. 세상이 핑핑 돈다. 존재 자체가 붕 떠오르는 이 느낌은 심히 좋지 않았다.
이게 영혼을 흡수당하는 감각인가?
'감히.'
안광을 빛낸 데일은 흑기사의 힘을 마주 빨아들였다.
살아있는 이의 생기를 그대로 흡수하는 건 처음이다. 그간은 역량이 부족해 구태여 시도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해내야만 한다.
생기가 빨린다. 그리고 생기를 빨아낸다.
데일의 생기가 흑기사에게로. 흑기사의 생기가 데일에게로 흘러들어오는 기묘한 순환을 이루어냈다.
흡수되는 건 생기뿐만이 아니다.
흑기사의 영혼이 차츰 넘어오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 낯선 광경이 펼쳐졌다.
'이건....'
보인다. 어느 허름한 마을을 떠나는 소년의 모습이.
전선으로 떠나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고, 힘을 원해 밤의 여신을 섬겼으며, 인간성과 함께 끝끝내 자아마저 잃어버린 소년의 일생을.
이건 흑기사의 기억이다.
그가 느꼈던 원망. 비통. 두려움. 고뇌. 죄책감. 이제는 언데드의 자아에 눌려 사라져버린 감정들이 흘러들어왔다.
감정과 기억의 파도.
데일은 흑기사를 보았다. 흑기사 역시 데일의 기억을 엿보고 있을 것이다.
이제 두 사람은 이 세상에서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래. 원하는 건 겨우 그것뿐이었나.'
데일이 눈에 보이는 흑기사는 불안정하고 애처로운 소년이다.
그저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언제 무너질지 모를 그런 소년.
끔찍한 모습과 단단한 갑옷 속에 숨었지만, 그 속은 유약하기 그지없다.
과연 흑기사가 보는 데일의 모습은 어떨까.
모른다.
하지만 데일은 놈에게서 생기를 더욱 강하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흑기사가 자기 몸에서 생기를 빼갈 때 사용하는 요령을 그대로 적용했다.
이 선배 흑기사는 아직 미숙한 데일에게 그 누구보다 훌륭한 스승이었다.
데일은 박차를 가했다.
이건 다른 무엇도 아닌 정신력 싸움이다. 누가 끝까지 이 악물고 버텨낼 수 있는가. 영혼의 대결이다.
겉모습만 그럴듯한 애송이에게 밀릴 생각은 없다. 영혼과 생기를 넘겨줄 생각은 더더욱 없다.
흑기사 역시 사력을 다한다.
놈 역시 데일의 속을 들여다보았다. 무언갈 본 것일까?
서로가 서로의 영혼을 빼앗고.
생기를 갈취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영혼이 뜯겨나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각 속에서 서로 간에 줄다리기가 계속된다.
어느 쪽이 더 끝까지 버티느냐.
어느 쪽이 승리에 대해 더 간절한가.
하지만 데일은 절대 패배할 생각은 없다. 이겨야만 할 이유가 있다.
눈앞의 흑기사와 마찬가지로 데일은....
'돌아가야 하니까.'
일순.
잠깐이지만 놈이 굼떠진다. 데일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박차를 가해 흐름을 가져왔다. 승기가 확연히 기운다.
생기를 넉넉하게 빨아낸 데일이 재생한 팔을 들어 올린 뒤. 그대로 흑기사의 가슴을 향해 내리쳤다.
콰앙!
강한 충격과 함께, 갑옷에 실금이 하나씩 생겨났다.
그리고 데일이 다시 한번 내리쳤을 때. 갑옷이 완전히 우그러졌다.
푸욱.
데일은 주먹을 힘껏 내질러 가장 큰 힘이 모여 있는 심장까지 단번에 꿰뚫어버렸다.
흑기사의 투구가 벗겨졌다.
전장의 풍파에 거칠어졌지만, 선한 인상의 얼굴이 드러났다.
녀석은 공허한 눈으로 데일을 보았다. 똑같이 투구를 벗은 그 눈을 맞추었다.
"...."
"정신이 좀 드나?"
놈의 두 눈에 희미하지만 감정의 빛이 어렸다. 하얗게 센 머리도 차츰 원래의 색을 되찾아갔다.
흑기사는 대답 대신 중얼거렸다.
"이런 영혼은 처음 보는군. 별 해괴한... 이게 아니었다면 내가 이겼을 거다. 네가 졌어. 운 좋은 줄 알아라."
다짜고짜 하는 말에 데일은 어이가 없었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지?'
하지만 데일은 너그러이 넘어가주기로 했다.
누가 뭐라 했든 승자는 데일이다. 패자의 추한 변명 정도는 너그러이 넘어가줄 수 있다.
흑기사는 풀썩 드러누웠다.
가슴에 뚫린 구멍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내렸지만, 그는 어딘가 안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내 죄에 대한 벌이 내려진 것이겠지."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얼굴에는 죄책감이 가득했다.
언데드의 자아에 짓눌려 있던 인간성이 다시 수면으로 올라온 것이다.
그리고 기억났을 것이다.
그가 이곳까지 이르며 벌였던 학살을.
데일이 물었다.
"이름이 뭐지?"
"케인."
"케인. 잠시만 기다려라."
"뭐?"
데일은 케인을 놔두고 밖으로 홀로 나섰다. 그리고 꽤 긴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데일의 몸에는 진한 피냄새가 났다.
"언데드를 모두 정리하고 온 건가?"
"그래."
데일은 짧게 답하며 케인의 겨드랑이에 팔을 넣어 그를 부축했다.
당황한 케인이 물었다.
"뭐하는 거냐."
"돌아가야지."
"...뭐?"
데일은 케인과 함께 합을 맞춰 걸었다. 싸움은 어느덧 끝이 났다.
수많은 언데드와 사람의 시체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사제들이 서 있던 망루도 무너져 내렸다.
아군의 승리였지만, 모두가 살아남는 기적 같은 승리는 아니었다.
사람들의 이목이 이쪽으로 모여들었다. 데일이 누구를 부축하는지를 확인하고 다들 경악했다.
그런 그들의 틈을 데일이 묵묵히 뚫고 지나갔다.
죄책감에 고개를 떨군 케인이 말했다.
"이러지 마라. 나는 저들을 볼 면목이 없다."
"흑기사 케인은 이곳에 없다. 네가 죄책감을 느끼는 게 그 증거다. 그리고 정말로 미안하다면, 도망칠 게 아니라 네가 한 짓을 제대로 마주해야지."
"너...."
데일은 케인과 합을 맞춰 천천히 걸었다.
아는 얼굴을 마주칠 때도 많았다.
무너져 내린 목책의 한편에는 에른스트가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었다.
그는 품에 누군가를 안고 있었다. 시종이다.
"데일 경. 아론이, 숨을 안 쉬어. 나를 지키려다가 그만...."
시종의 이름이 아론이었던가? 함께한 시간이 꽤 됐는데도 오늘 처음 알았다.
눈을 감은 아론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유능하고 충직한 시종은 주인을 지킬 수 있어 만족하는 듯했다.
데일은 잠시 멈춰서서 그의 죽음에 존중을 표했다.
케인은 괴로움을 삼키며 눈을 질끈 감았다.
둘은 계속 전진했다.
목책을 넘어, 마을에 남은 집으로 향했다. 어느 이름 모를 여인이 영면에 들었던 집.
케인의 기억을 엿본 데일은 이제 저 집이 누구의 집인지를 알았다.
데일은 문을 열었다.
"집이다. 돌아오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약속은 지켜야지."
"...."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어서 들어가라."
케인은 집으로 들어가 침대에서 영면에 든 여인을 발견했다.
그가 허물어졌다.
여인의 손을 붙잡고 이마에 댔다.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머니. 못난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볼을 타고 투명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그가 사람이라는 증거였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케인이 말했다.
"고맙다.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군."
데일은 어깨만 으쓱였다.
"너는 강하구나. 아직 스스로 자아를 유지하고 있다니... 대단한 정신력이야. 감탄이 나올 정도로."
"별로."
데일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케인이 진지하게 말했다.
"하지만 충고하마. 지금 당장 타인의 생기를 흡수하고, 그들의 영혼을 거두는 일을 그만둬."
케인이 어딘가 절박한 어조로 말했다.
"그건 분명 너에게 큰 힘을 줄 것이다. 하지만 힘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네가 거둔 그 혼들이 지닌 사념이 언제고 너를 먹어치울 거다. 그러니 아직 인간으로 있을 때 그만둬."
갑작스러운 말에 데일이 대답을 안 하자, 케인이 이어서 외쳤다.
"더 큰 힘을 얻을수록 더 많이 잃어버릴 거다. 너는 분명 특별하니, 나 같은 것보다는 훨씬 더 높은 경지를 바라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결말은 같아. 종국에는 자아를 모두 잃어, 동료와 친우마저 베어버리는 괴물이 될 것이다. 내 모습을 봐라! 이 끔찍한 모습이야말로 네 미래다! 너만은. 너만큼은 나와 같은 전철을 밟게 하고 싶지 않아."
데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케인의 말을 들었다.
이미 모든 걸 겪은 선배의 조언이다. 흘려들을 말이 아니다.
"힘에는 중독성이 있다. 한번 힘에 취하고 나면, 그때는 이미 늦었다. 그 과묵하고, 여간해서는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는 밤의 여신도 나에게 경고했다. 그만하라고. 모든 걸 잃을 테니, 거기서 걸음을 멈추라고. 나는 듣지 않았다! 닥치고 힘을 내놓으라고, 감히 그녀에게 소리쳤다!"
힘을 내려주는 건 여신이지만 그 대가는 본인이 감당해야 할 책임일지니.
데일은 케인의 말을 곱씹었다. 그 역시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가니아고스를 처치했을 당시. 데일은 가니아고스의 잔혼을 온전히 취하지 않았다.
전부 먹어치웠다가는, 데일의 마음속 무언가가 변해버릴 것 같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1년 전의 데일과 지금의 데일은 다르다.
그리고 지금의 데일과 1년 후의 데일도 다를 것이다.
좋지 않은 방향으로.
그럼에도 데일은 멈출 수 없다.
"나에게는 힘이 필요하다."
데일이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더욱 정진해야 한다는, 여신의 조언 때문만은 아니다.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밖에 널브러진 저 시체가 데일의 운명이 될 것이다.
데일의 대답에서 설득 불가능한 확고함을 느낀 걸까.
케인은 눈을 지그시 감은 뒤, 천천히 말했다.
"그래. 그런 어리석음 역시 인간의 본성이겠지. 쿨럭."
케인의 몸이 급격히 쇠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데일에게 대부분의 힘을 빼앗긴데다가 힘이 모여드는 심장마저 파괴되었다.
죽음이 케인을 찾아오고 있었다.
"...여신이시여. 드디어 당신의 서늘한 품에 안길 때가 온 것 같군요."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그대로 눈을 감으려던 케인이 돌연, 눈빛을 빛냈다.
급하게 얘기할 게 떠올랐는지 다급히 말했다.
"파멸이 머지않았다. 놈들이 곧 움직일 거야."
데일이 물었다.
"...악마를 말하는 건가?"
"악마? 아니. 악마만큼이나 두려운 놈들이 있다."
케인은 허리춤에서 자줏빛 수정구를 꺼냈다.
"내가 이곳에 온 건 순수한 내 의지가 아니었다. 자아를 잃은 나에게 이런 사악한 물건을 들려주고, 산맥을 넘으라는 명령을 내린 자가 있다."
"그게 누군데?"
케인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공포의 감정이 드리웠다.
그는 진한 적의를 드러내며 외쳤다.
"대마법사!"
멈칫한 데일이 되물었다.
"...영웅들 중 하나를 말하는 건가?"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대비하여야 한다!"
케인이 데일의 손을 힘껏 부여잡았다.
"그들은 반드시 제국을 무너트릴 거다! 이제 정말 머지않았어. 대비해야... 나를. 먹어서. 힘을... 그, 렇게라도 속죄해야."
마지막에 가서는 횡설수설한 케인의 입에서 핏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케인이 바닥에 허물어졌다.
마침내 끈질기게 이어져 온 생명이 끝이 난 것이다.
"...."
데일은 그런 케인을 내려다보았다.
부릅뜬 눈과 다물어지지 않는 입.
마치 죽어서도 데일에게 계속 경고를 해주려는 것 같았다.
'머지않았다라.'
공교롭게도, 이레네의 조각상에 새겨져 있던 문구와 같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데일은 손을 뻗어 케인의 눈을 감겨주었다.
그리고 그 시체에 건틀릿을 박아넣었다. 케인이 원한대로 생기를 남김없이 흡수했다.
강한 힘이 데일의 몸속을 맴돌았다. 이 힘은 앞으로 데일에게 많은 도움이 될 터.
그렇다면 케인도 분명 만족할 것이다.
데일은 마지막으로 집을 나서기 전. 케인의 시신을 확인했다.
선배 흑기사의 최후는 분명 비참했다.
어쩌면 데일의 미래 역시 저럴지도 모른다.
케인의 경고대로 데일은 끝끝내 힘에 패배하고 말까?
완전한 언데드가 되어 동료고 친우고 가리지 않고 스스로의 손으로 베어버리게 되는 날이 올까?
생각에 빠져 있던 데일은 미련 없이 걸음을 옮겼다.
데일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두 마리 늑대가 산다.
아직 선한 늑대가 승리하고 있다. 아직은 말이다.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겨울
* * *
데일은 케인의 품에서 사악한 빛을 내뿜는 수정구를 찾았다. 수정구를 손에 들자, 무언가가 머릿속에 속삭이는 느낌이 들었다.
강력한 유물이었다. 만약 이 수정구가 없었다면, 피해는 훨씬 줄어 들었을 것이다.
데일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파각!
산산이 조각난 수정구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수정구 안에 모여 있던 힘이 흩어져 버렸다. 이제 언데드가 일어날 일은 없을 것이다.
뒤처리를 마친 데일은 밖으로 나섰다.
용병과 병사들이 지친 얼굴로 널브러져 있었다. 주위에 시체가 가득했지만, 그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그만큼 오늘 밤의 전투가 격했다는 증거였다.
데일을 향해 누군가가 비척거리며 다가왔다.
엘드리엄 영주였다.
"흑기사는?"
"처리했소."
"수고했네. 만약 그 흑기사가 제멋대로 날뛰었다면, 더 볼 것도 없이 우리는 전멸당했을 거야."
엘드리엄은 기억을 떠올렸다.
사제들의 기적에 반토막이 났음에도 곧바로 병사들을 먹어치워 부활하던 흑기사를.
괜히 그 위험성에도 전선의 장군들이 적극적으로 기용하는 게 아니다.
강하다. 지금의 시대에서 그보다 중요한 가치는 없었다.
흑기사의 무위를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영주는 데일을 쳐다보았다.
'이 녀석 역시....'
영주가 대뜸 물었다.
"결혼은 했나?"
"?"
데일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흑기사가 되고 처음 들어보는 종류의 질문이었다.
"마침 막내딸이 곧 적령기라서 말이야."
"그거 파격적인 제안이군."
귀족가에 이교도의 기사를 받아들이겠다니.
파격도 이런 파격이 없다.
강한 전사를 대우하는 북부의 기조와 영주의 피에 절반 정도 섞인 엘프의 피가 그녀에게 이런 결심을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데일은 설명했다.
"모를까봐 얘기하는 거지만, 나는 자식을 만들 수 없소."
"알아. 상관없어. 엘드리엄의 이름 아래에 들어오기만 하면, 내가 해줄 수 있는 모든 대우를 해줄게."
혼인 얘기는 바로 그런 대우에 대한 약속이다.
혼인은 신성한 계약이고, 데일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주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으니.
어쩌면 영주는 이번 일로 느꼈을 것이다.
황실에 기대기보다는 직접 힘을 길러 해결하는 게 가장 확실하다는 걸.
그런 면에서 데일은 탐스러운 인재다.
다른 모든 면을 제쳐두고, 무력만을 생각해도 북부에 큰 도움이 될 터.
"딸이 썩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데."
"뭐 어쩌겠나. 귀족으로 태어났으면 감수해야 할 부분이지. 그리고 외모를 많이 보는 아이니, 오히려 좋아할 것 같은데?"
확실히 하지 않으면 계속 권할 것 같은 기세다.
데일은 단호히 말했다.
"사양하겠소."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놀랍도록 깔끔하게 포기했다. 이런 부분은 북부 사람다웠다. 아니면 엘프답거나.
"피해 상황은 어떻소."
"700명이 죽었다네."
"...피해가 크군."
"뭐. 적의 규모를 생각하면 오히려 선방했다고 할 수도 있지."
허드렛일꾼들이나 잡일꾼들까지 합쳐서 1,000명을 훌쩍 넘던 토벌대다.
그중 700명이 죽었단다.
"언데드 몬스터를 처리할 때 특히 애를 먹었네. 찔러도 찔러도 당최 쓰러지질 않으니, 나중에는 눕혀놓고 도끼로 토막을 쳐야 했지. 어찌나 발광을 하는지...."
영주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문득, 찬 바람이 불며 그녀가 걸친 망토를 들추었다.
왼쪽 팔에 붕대가 감겨있고, 그 아래로는 허전하다.
데일의 시선에 영주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어쨌든 수고했고,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겠네. 경은 북부와 엘드리엄을 지켜내었네. 어디로 사라졌을지 모를 영웅들보다는, 경에게 영웅이라는 칭호가 더 어울리겠지."
"나 혼자 한 일이 아니오."
"그렇지. 가서 우리 지휘관 위로나 해주게."
영주는 왼손을 들어 가리키려다, 팔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에른스트가 앉아 있었다.
에른스트는 여전히 시종의 몸을 안고 멍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데일은 그 옆에 가 말없이 앉았다.
에른스트는 데일을 흘끔 본 뒤, 다시 고개를 내렸다.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론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늘 나랑 붙어있었어. 내 전속 시종이었지. 나는 예전부터 제멋대로 구는 멍청이라... 사고를 많이 쳤거든? 그때마다 아론은 나 대신 매를 맞아야 했어. 귀족이 잘못하면 그 아랫사람이 대신 처벌받는다. 우리 아버지의 교육 방식이었거든."
대답을 바라고 하는 말이 아니기에, 데일은 조용히 들었다.
"난 그게 너무 싫었어. 내가 잘못한 건데 왜 처벌은 아론이 받지? 대체 귀족이라는 게 뭐길래? 아론에게는 너무 미안했어. 하지만 아론은 매를 맞아 종아리가 새빨갛게 부어도 늘 웃으면서 말했어. 자유롭게 행동하는 도련님이 보기 좋다고. 자기한테 미안할 필요 절대 없으니, 원하는 대로 살라고. 이런 일로 위축되면 오히려 자기가 화낼 거라고 했어. 그렇게 말해주는 아론이 좋았는데...."
에른스트는 아론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이제 내가 잘못하면,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에른스트에 아론이란 비록 자기보다 낮은 신분이었지만 친우이자, 형제, 그리고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을 거다.
언제나 지지해주고 따뜻한 시선을 보내주는 부모 같은 사람.
에른스트가 철없이, 혹은 순진하게 굴었던 건 아마 아론의 영향도 적지 않았을 거다.
에른스트가 힘겹게 말했다.
"데일 경이랑 아론이 말했던 것처럼 중간에 돌아갔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데일이 입을 열었다.
"그랬다면 여기 있는 모두 죽었을 거다. 북부가 엉망이 되었을 거고, 사람들은 불행해졌겠지."
"하지만."
"이제와서 후회되나?"
아론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데일은 엄하게 말했다.
"모든 결정은 네가 내린 거다. 그 결정으로 인한 결과도 네가 책임져야 한다."
"그건 그렇지만."
"너는 이제 어린애가 아니다."
데일은 에른스트의 보호자가 아니다. 아론이 했던 것처럼 듣고 싶은 말만 해줄 수는 없다. 그럴 생각도 없고.
"아론도 선택했을 뿐이다. 너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결심했고, 그 책임을 졌을 뿐. 아론이 후회하는 거로 보이나?"
에른스트는 아론의 얼굴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만족스럽게 미소 짓는 얼굴.
그 얼굴에 일절 후회는 없었다.
"아론이 스스로를 희생한 걸 후회하지 않게 똑바로 행동해라."
데일은 그걸로 말을 마쳤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
이제 받아들이는 건 에른스트의 몫이다.
'언제까지 애같이 굴 수는 없는 법이니까.'
순진하고 철없는 시절도 언젠가는 졸업해야 한다.
에른스트에게 때가 왔다.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나아가야 하는 때가.
한참을 말없이 있던 에른스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눈가에는 강한 의지의 빛이 서렸다.
"응. 경 말이 맞아. 아론을 위해서도 여기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지."
"그래."
"친위대의 단장이면 분명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많을 거야. 하지만 그보다는 우선... 당장 뒷수습부터 해야겠지!"
에른스트는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며, 일부러 쾌활하게 외쳤다.
눈가에는 물기가 맺혀 사라지지 않지만 데일은 모른척했다.
소년이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
티센 가문의 얼간이 에른스트는 이제 없다.
에른스트 단장이 있을 뿐.
왜인지 그 모습을 보며, 영원한 잠에 빠진 아론의 미소가 더욱 진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 * *
한때 강대했던 세력과 고등한 문화를 자랑하며, 제국과도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하던 위대한 왕국이 있다.
하지만 그 왕국은 악마의 침공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백성도 모두 사라지고. 악마의 군세마저 모두 어디론가 이동해버려, 홀로 남아버린 왕성만이 그 영광스러웠던 나날들을 고독하게 증명할 뿐이다.
그러한 왕성의 꼭대기.
한때 왕이 신하를 알현할 때 사용하던 왕좌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아니. 앉아 있었다기보다는 고정되어 있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 것이다.
룬 문자가 새겨진 검이 앉아 있는 이의 가슴과 의자를 동시에 꿰뚫고 있었으니.
꿰뚫린 자는 그저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하지만 결코 죽은 건 아니었다.
앉아 있는 이의 보석 같은 눈동자는 요사한 빛을 내뿜었다.
그. 혹은 그녀는 무언가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기다리던 이가 왔다.
공간이 커튼처럼 걷히며 추레한 몰골의 노인이 등장했다.
노인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흑기사와 언데드 무리는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그래?"
"이번에도 역시 데일이라는 이름의 흑기사가 방해했습니다."
"함부로 그분의 이름을 입에 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노인이 이마에 머리에 고통이 찾아왔다. 노인은 황급히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이마가 깨져 피가 흘러내렸다.
"죄, 죄송합니다."
"됐어. 그 흑기사는 어디까지나 날뛰게 하는 목적이었으니까. 성과는?"
"흑기사가 크고 작은 마을 6개를 괴멸시켰습니다. 그가 일으킨 언데드 군세가 끼친 피해까지 합치면 전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 정도면 되었다. 이번 북부의 겨울은 유독 춥게 느껴지겠군."
노인은 고개를 조아리며 계속 말했다.
"제국은 그 손발부터 천천히 썩어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레네만으로는 버텨낼 수 없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여전히 교단과 마탑, 그리고 황실 기사단이 버티고 있지만, 그뿐입니다."
"하고 싶은 말은?"
"...이제는 움직일 때가 아니겠습니까?"
의자에 앉은 자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가슴에 박힌 룬검을 쓰다듬었다.
"그래. 배신의 상처도 이제 거의 아물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이곳에서도 벗어날 수 있겠지. 정말로 때가 온 것 같구나."
"그러면."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새 계절과 함께 새 시대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나의 친우. 나의 가족. 나의 사랑. 나의 주인. 그리고... 내가 가장 증오하는 배신자."
눈에 강렬한 분노를 가지고 중얼거렸다.
"내가 만나러 갈게요."
* * *
"티센 가문의 에른스트! 그대는 병사를 모아 흑기사에게 맞섰으며, 북부의 혼란을 무사히 해결했다. 또한, 다른 귀족들이 자기 의무를 내팽개치고 도망칠 때, 끝까지 남아 백성을 구했고, 제국 귀족으로서의 위신을 지켜냈다. 이에 황제 폐하께서는 크게 기뻐하시며 그대에게 친위대의 부단장 직위, 황금검 훈장, 그리고 금화 500닢을 하사하셨다."
잘 차려입은 에른스트가 기사단장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기사단장이 말했다.
"한동안 친위대의 단장 직위는 내가 맡겠다. 내가 직접 단장으로서 너를 교육해, 만족할만한 수준에 이르면 단장 직위를 넘겨주겠어. 하지만 안심은 마라. 만약 내 눈에 차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부단장 직위를 박탈할 테니. 게으름 부리지 말도록!"
"네!"
기사단장의 선언에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기사단장이 직접 가르침을 주겠다 선언했다.
이는 단순히 검술뿐만 아니라, 조직을 이끄는 법부터 시작해 단장이 지닌 여러 노하우를 사사하겠다는 말이다.
즉. 에른스트는 기사단장의 또 다른 제자가 된다.
황실 기사단장은 제국에서도 어깨를 겨루는 자가 몇 없을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사내다.
그런 기사단장의 제자가 된다는 건 뭇 귀족들이 열렬히 탐내는 자리다.
어쩌면 친위대의 단장보다도 더 가치 있는 자리일 것이다.
이제 에른스트는 명실상부 상위 구역의 신성이 되었다.
젊은 나이에 이만한 권력. 나쁜 물이 들어버리기 좋은 조건이지만....
'그러지는 않겠군.'
여전히 어수룩한 저 청년의 마음속에 충직한 시종이 남아 있는 한, 그는 지금 그대로의 에른스트로 남아 있을 거다.
즉위식이 끝나고.
에른스트가 데일을 붙잡았다.
"데일 경. 역시 마음을 돌릴 생각은 없어? 내가 단장이 되고, 경이 부단장. 좋지 않아?"
에른스트는 데일에게 친위대에 들어와달라고 부탁했지만, 데일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만약 내가 친위대에 들어갈 생각이 있었다면, 단장 자리를 노렸을 거다."
"엇. 음. 그건 곤란한데."
에른스트는 아쉬운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갓 생겨난 조직을 꾸려나가는 거니 꽤나 바쁠 것이다.
이번 토벌에서 살아남은 이들을 대거 친위대로 등용했지만, 여전히 뽑아야 할 인원이고 많고, 신경 써야 할 게 많으니까.
데일은 그런 에른스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열심히 해라."
"응. 그러려고. 데일 경도 도움 필요한 일 있으면 찾아와. 이 새로운 실세인 에른스트 님께서 친히 도와줄 테니... 아얏!"
건방지게 말하는 에른스트의 어깨를 조금 세게 두드린 데일은 등을 돌렸다.
볼일이 끝났으니 이제 여관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전에.
'신전에 들러야겠군.'
이번에는 얘기할 게 꽤 있을 것 같다.
겨울
* * *
여신의 앞에 고개 숙인 데일은 이번 원정에서의 일을 들려주었다.
[그래. 케인 그 아이는 참으로 불쌍한 사연을 가진 아이였지.]
여신은 씁쓸하게 말했다.
[고맙구나 데일. 케인을 고통에서 해방시켜주어서 정말 고맙다.]
데일은 고개를 끄덕인 뒤, 물었다.
"다른 흑기사들도 전부 저런 느낌입니까?"
이번 케인과의 만남은 데일에게 여러 가지로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었다.
어쩌면 데일의 최후는 케인보다도 더 처참할 수도 있다.
다른 흑기사들은 어떨지 궁금증이 일었다.
[그래. 몇몇은 더 끔찍한 상태에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저런 느낌이란다. 사연 있는 아이들이 힘을 바라고, 힘을 휘두르다, 결국은 그 힘에 잡아먹혀버리지. 데일, 너처럼 사람의 마음을 유지하는 건 정말 드문 경우란다.]
데일이 답했다.
"케인이 그러더군요. 더 큰 힘을 얻을수록 더 많이 잃어버릴 거라고. 저 역시 자기와 같은 꼴이 될 거라고 경고했습니다."
[...틀리지 않은 조언이다. 데일. 지금 네가 보여주는 의지는 정말로 놀라운 것이지만, 그 의지가 언제까지고 꺾이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단다.]
말을 마친 여신이 입을 다물었다.
둘 간에 잠깐이지만 침묵이 일었다.
그 침묵에서 데일은 여신의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데일이 지금이라도 멈추었으면 하는 바람과 계속해서 성장해나갔으면 하는 상반된 감정.
케인의 말마따나 데일이 걸어가야 할 길이 썩 평탄치 않을 수도 있다.
사람들을 죽여 흡수하는 걸 멈추고, 지금 이 자리에 멈춰 서면.
적어도 현 상황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케인과 마찬가지로 데일에게는 돌아가야 할 장소가 있다.
가족들과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 그곳으로.
이곳에서 멈춰 설 수는 없다.
설령 저 앞이 불구덩이라고 해도, 걸음을 계속 이어야 한다.
어리석은 불나방처럼 온몸이 다 타버린다 해도 말이다.
데일은 말했다.
"제물을 바치겠습니다."
힘을 달라는 뜻.
이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여신은 어딘가 안심한 듯하면서도, 주저하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여신은 데일이 모은 혼을 거두어갔다. 그 양이 적지 않다.
언데드를 사냥해 얻은 수확은 크지 않지만, 케인을 쓰러트리고 얻은 게 꽤 된다.
'생각보다 엄청 많았지.'
케인은 데일보다 더 높은 격의 흑기사였고, 그가 북부를 돌며 거둬들인 영혼이 상당히 많았다.
아마 케인이 신전에 들러 여신에게 제물을 바쳤던 건 한참 전이기 때문에 그리도 많이 쌓였을 것이다.
게다가 같은 흑기사라는 점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서로가 닮았기에, 별 탈 없이 그에게서 혼을 빼앗아 올 수도 있었다.
[힘을 내려주도록 하마.]
"잠깐."
데일이 여신을 멈췄다.
[왜 그러느냐.]
"케인은 저와는 달리 살아있는 사람에게서 산 채로 영혼과 생기를 뜯어버렸습니다."
[그는 높은 등급의 흑기사였단다. '생기 흡수' 대신 '생기 강탈'이라는 더 상위의 기술을 사용했지.]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말하고자 하는 건 그런 부분이 아닙니다."
[그럼?]
"저처럼 영혼 찌꺼기를 챙기는 게 아닌, 다소 온전한 영혼을 뜯어내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케인은 이성을 잃어 무차별적인 살육을 이어 나갔다.
그중에는 영지의 병사들도 있었을 것이고, 운 나쁘게 걸려든 사냥꾼, 그리고 아무 죄 없는 마을의 주민들과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영혼을 풀어주십시오."
데일은 이 세계에 온 순간 결심했다.
비록 사람의 생기와 혼을 취해야 하는 몸이 되었지만, 그래도 무고한 사람의 힘까지 거두지는 말자고.
비효율적일 수도 있다.
가능한 원 없이 먹어 치워, 힘을 기르는 게 더 빠르게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지금도 데일 마음 한편의 본능은 그리하라고 소리친다. 최근에는 그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 데일의 마음속에 남은 인간은 그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게 데일이 이 세상을 살아남아온 방식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방식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잘 생각했다! 역시 내 가장 사랑하는 아들다운 결정이다! 이 명예로운 결단을 당장 사제장에게 일러 모두에게 소문내도록 해야겠다! 마침 나의 신도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으니, 소문을 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야.]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데일은 여신의 주책을 제지한 뒤. 고개를 숙였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여신은 데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모아두었던 힘이 빠르게 빠져나갔다.
[상당히 많은 양이구나. 조금만 더하면, 등급이 오를 것 같구나.]
데일이 무고한 영혼들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등급이 올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의 후회도 없다.
데일의 눈앞에 선택지가 떠올랐다.
"근력 상승"
"갑옷 강화"
"영혼 강화"
'일단은 영혼 강화에 눈이 가긴 하는데.'
정신력과 마력을 올려주는 영혼 강화.
흑기사의 고질적인 문제인 마력 부족은 후반부까지 이어진다.
나중 가면 '생기 흡수' 기술을 강화해 상대의 마력까지 강탈해 올 수 있지만, 그건 아직 먼 얘기다.
데일보다 더 높은 격의 케인도, 싸우다가 마력이 고갈나지 않았던가.
게다가 정신력 능력치 역시 쓸모없지는 않다.
'영혼 지배'의 성공률을 올려주고, 정신에 가해지는 공격들에 내성을 올려주니.
'그렇다고 힘과 내구를 포기하기는 그렇지.'
데일은 케인의 움직임을 떠올렸다. 그가 전장을 휘젓던 방식을.
강력한 힘과 무식할 정도로 단단한 맷집은 그 어떤 기술보다도 치명적이었다.
케인은 선배 흑기사로서 데일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싸우는 방법. 기술을 활용하는 방식. 생기를 흡수하는 요령.
데일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해주었기에,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셋다 골고루 투자하겠습니다."
[확실하느냐?]
"예."
균등한 투자.
모든 걸 다 챙기겠다는 욕심에서 내놓은 선택이다. 물론, 이런 욕심으로 인해 소위 '잡캐'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토끼를 모두 잡으려다, 전부 놓쳐버리는 불상사가 생겨버리는 거다.
'하지만 감수해야 해.'
어쩔 수 없다.
데일이 추구하는 건 혼자서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강함이다.
하나라도 빠졌다가는 그런 유연함을 얻을 수가 없다.
타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데일은 선택을 내렸다. 여신은 데일의 정수리에 손을 얹었다.
강한 힘이 정수리를 타고 전해지기 시작했다.
멈춰버린 심장에 힘이 모인다. 근육은 더 밀도 있게. 갑옷은 더 단단하게. 마력은 더 풍부하게.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새로운 기술 역시 배울 수 있는데, 어떤 기술이냐면....]
"해골마 소환. 아닙니까?"
[으음. 놀래키고 싶었는데. 재미없구나.]
해골마 소환.
말 그대로 뼈다귀로 이루어진 말을 소환해 탈것으로 사용하는 기술이다.
흑기사의 음산하고 차가운 기운은 등급이 높아질수록 더 강해지는데, 그 때문에 흑기사는 말이나 가축을 탈 수가 없다.
해골마는 먼 거리를 이동할 때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자주 쓸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배워서 나쁘지 않은 기술이다.
데일은 새로운 기술을 습득했고, 곧바로 자신의 변화를 살폈다.
[데일]
등급: 4
직업: 흑기사
근력: 84
내구: 57
마력: 44
체력: ―
정신력: 34
[보유 기술 목록]
생기 흡수
검은 안개
영혼 지배
해골마 소환
[특성]
반인 반언데드
부정한 감각
밤의 여신의 축복
[칭호]
북부의 영웅
등급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높은 능력치. 균형을 갖춘 성장.
그리고 뛰어난 유물 무기들.
이제 데일의 강함은 확실히 일정 선을 앞두고 있다 볼 수 있다.
강자의 반열에 드는 선.
이레네에서는 황실 기사단을 포함한 소수의 실력자들 외에는 데일보다 강한 이를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아직 부족해.'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음을 알기에, 데일은 아직 더 힘을 원한다.
모든 용건을 마친 데일은 기도실을 나서기 전.
문득 한 가지가 떠올라 물었다.
"혹시 영웅들에 대해서 좀 아십니까?"
[영웅들이라....]
여신은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묘한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위대한 자들이지. 악마를 그렇게 많이 살해한 자들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란다.]
"혹시 지금 그들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건 내가 말해줄 수 없는 부분이구나.]
"모르신다는 겁니까? 아니면 말해줄 수 없는 겁니까?"
데일이 따지듯이 묻자, 여신의 쓴웃음을 지은 뒤 말했다.
[남들은 신이라 해 무엇이든 가능하고, 무엇이든 알 수 있을 거라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란다. 전성기의 빛의 여신이라면 그 비슷한 짓을 할 수 있었겠지만, 나는 아니란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제약에 묶여있고, 모든 걸 말해줄 수도 없단다.]
"...."
[게다가 악마들의 등장 이후, 우리들의 눈은 안개가 낀 듯 뿌옇단다. 굽어볼 수 있는 건 전체 대륙의 절반도 안 되니 마치 맹인이 된 느낌이지.]
"알겠습니다."
명확한 답을 기대할 수는 없어 보였다.
데일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여신이 말했다.
[하지만 이건 경고해줄 수 있지. 머지않아 위기가 찾아올 것이다. 지금의 불안정한 평화는 무너져내리고, 혼란이 찾아올 것이다. 대비해야 한단다. 특히, 배신자를 조심하거라.]
"배신자. 말씀이십니까?"
데일이 질문했지만, 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여신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배신자."
그 말을 자그맣게 중얼거린 데일은 이내 고개를 돌려 기도실을 나섰다.
* * *
여관으로 돌아오니 카일라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데일 경!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어요! 앉으세요. 아직 식사 안 했죠?"
"그래."
데일은 성큼 걸어가 식탁에 앉았다.
이미 식탁에는 엘레나와 프라우, 하켄까지. 여관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데일이 엘레나에게 물었다.
"그간 별일 없었나?"
데일의 질문에 엘레나가 쑥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요즘은 평화롭게 보내고 있어요."
프라우도 얼른 끼어들었다.
"나 역시 즐겁게 보내고 있네. 어제는 단검을 하나 새로 샀는데, 카락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네. 어떤가? 멋진 이름이지 않나?"
"너한테는 안 물어봤다."
데일의 그렇게 말했지만, 프라우는 묻지도 않은 단검 이름에 대해서 신나게 떠들어댔다.
'귀도 긴 놈들이 당최 들어먹지를 않는구나.'
그런 프라우를 무시하며, 데일이 엘레나에게 물었다.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예?"
"이번에 내가 북부로 가기 전에. 얘기할 게 있다고 하지 않았나."
엘레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억하고 계셨군요. 당연히 잊어버리셨을 거라고...."
"얼마 되지도 않은 일이다. 잊을 리가."
엘레나는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운을 뗐다.
"사실. 요즘 마법의 성취가 도통 늘지를 않아서요...."
마법 이야기라. 데일의 전문은 아니었다.
"으음. 지금은 어떻게 공부하고 있지?"
"혼자서 독학하고 있어요. 기초적인 마법 지식은 전부 머릿속에 있으니까요."
"그렇군."
데일은 엘레나의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기초가 머릿속에 전부 들어 있다고?'
엄청 대단한 거 아닌가?
새삼 엘레나가 천재라는 걸 깨달았다.
'하긴. 그러니까 마탑에서도 노렸던 거겠지.'
데일이 순수하게 칭찬했다.
"그거 대단하군."
"벼,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지만요…."
"그래서? 이제 혼자 공부하기 힘들다는 건가?"
"예... 기초는 이미 완벽히 터득해서요. 이제는 그 이상을 배우고 싶어요."
"마법서를 구해다 주겠다. 아니면, 스승을 원하나?"
둘 다 구하기 몹시 힘든 것이다.
아무리 하찮은 마법서라도 같은 크기의 금덩이보다 비싸며, 마법사 스승을 구하는 건 더욱 어렵다.
사실. 마법을 공부하기에는 마탑이 제일 좋지만....
'그런 곳에 보낼 수는 없지.'
기록관 안드레이의 말에 의하면 마탑은 세력 간 다툼과 정치 싸움이 난무하는 곳이란다.
그런 곳에 애를 보낼 수는 없다.
데일의 제안에 엘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바이만의 마법사가 그런 하찮은 마법을 배울 수는 없어요."
"...뭐?"
데일은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수긍했다.
'엘레나도 어쩔 수 없는 주문쟁이구나.'
그 자존심을 지켜줘야만 할 것이다.
데일이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길 원하나."
"보물고가 있어요."
"보물고?"
"그. 바이만이 잘못되었을 때를 대비해 만들어놓은 곳인데... 거기에 마법서도 있을 거예요."
엘레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그곳에 저를 데려가 줄 수 있으세요?"
겨울
* * *
'보물고 같은 게 있다고?'
바이만의 보물고라니. 대체 얼마나 값지고 희귀한 물건이 잠들어 있을까.
만약 이 사실이 조금이라도 새어나간다면, 온 대륙의 도굴꾼들이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이다.
"그런 걸 함부로 말하면 어떡하나. 이야기가 새나가면 위험해질 수도 있다."
"누, 누군가한테 말한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프라우 경에게도 한반도 말할 적 없었어요."
"나한테 이렇게 바로 말해도 되나?"
"...데일 경을 믿으니까요."
엘레나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렇게 말했다.
푸른 눈동자에는 데일에 대한 강한 신뢰가 깃들어 있었다.
"데일 경은 목숨을 걸고 저를 지켜주셨어요. 그런 데일 경을 안 믿으면 누굴 믿을 수 있을까요."
어쨌거나 믿어주는 건 고마운 일이다.
데일이 물었다.
"그래서? 그 보물고의 위치는 알고 있나? 만약 바이만 왕국의 영토에 있다면 곤란하다. 거기는 악마에게 점령당했거나, 군단이 자리한 곳이다."
"아뇨. 애초에 왕국이 잘못되었을 때를 대비해 만들어진 곳이었으니, 왕국 내에 있으면 안 되죠."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러면?"
"카드라스 산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데... 바이만 왕가의 계승자가 근처에 가면 길이 열릴 거라고 했어요."
지금 남아 있는 바이만의 핏줄은 엘레나가 유일하니, 그녀야말로 계승자라 부를 수 있을 터.
엘레나가 부탁했다.
"데일 경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저랑 프라우 둘이서 가볼까도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무래도 프라우랑 가는 건 불안해서...."
"저 말입니까? 그거 무슨 섭한 말씀이십니까. 저만큼 믿음직한 엘프가 어딨다고."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나의 걱정을 깊이 이해했다.
"게다가 조건이 하나 더 있어요."
"조건?"
"마법사가 최소한 셋이 필요해요."
"왜?"
"그건 저도 잘... 보물고로 향하는 길을 열려면 마법사가 셋이 필요하다는 말밖에 듣지 못했어요. 저를 제외하면 둘이 더 필요한데...."
엘레나가 왜 곤란해하는지 이해가 간다.
마법사는 쉽게 구할 수 없는 고급 인력이다.
게다가 지금 시대의 마법사들은 대부분 마탑 소속이다. 그리고 엘레나는 마탑의 마법사들을 껄끄럽게 여긴다.
"즉. 너를 호위하고, 마법사를 둘 정도 더 구해야 한다는 거군?"
심지어 카드라스 산은 대륙의 대표적인 험지 중 하나다.
그곳은 언제든 몬스터가 튀어나올 수 있는 위험한 땅이다.
"예... 염치없는 부탁인 건 알지만 데일 경밖에 의지할 분이 없어서...."
"아이렉은? 아이렉에게는 부탁해봤나?"
토모 가문의 아이렉은 몇 안 되는 엘레나의 조력자였다.
하지만 엘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렉은 요즘 빈민가에서 한창 세력을 키운다고 바쁘더군요. 최근 점점 더 많은 피난민이 몰려들어서, 빈민가가 커지고 있거든요."
"그런가?"
하긴. 당장 북부에서도 마을이 여러 개 박살이 났는데, 그 주민들이 어디로 갈지야 뻔했다.
가까운 엘드리엄으로 가거나. 조금 멀더라도 살기 좋다는 이레네까지 내려오거나.
"그리고 아이렉이라면 분명 저한테 수십 명씩 호위를 붙이려고 하겠죠. 하지만 그렇게 되면 너무 눈에 띄게 될 거예요. 정보가 새나갈 수도 있고요."
"확실히. 이번 일은 되도록 적은 숫자의 사람이 함께하는 게 좋을 거다."
바이만의 보물고에 대한 내용이다.
마탑은 물론, 어쩌면 황실에서도 눈독을 들일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불필요한 싸움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엘레나 나름대로 깊은 고심을 거쳤을 거다.
그리고 그 고심의 끝에 나온 결론이 데일이고.
'나쁘지... 않아.'
데일에게는 전혀 나쁠 게 없는 제안이다.
아니. 오히려 대박이라 할 수도 있다.
바이만의 보물고에는 마법적 지식만 잠들어 있지는 않을 거다. 마도구를 잘 만들기로 유명한 곳이다.
온갖 진귀한 마도구와 유물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게임에서도 못 봤을 그런 것들이 숨겨져 있다면....'
장비는 중요하다.
데일이 얻은 마검이. 그리고 유물 장갑이 데일을 몇 번이나 위기에서 구해주었던가.
데일보다 강한 상대를 만나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이러한 뛰어난 도구 덕분이기도 했다.
좋은 장비를 얻는 건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강해지는 방법의 하나다.
"알았다. 카드라스 산으로 갈 사람들을 모아보겠다."
"정말요?"
엘레나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내심 거절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아. 그치만 마법사는...."
"그것도 내가 한번 찾아보겠다. 마법사들의 실력은 상관없나? 어느 경지에는 이르러야 한다던가."
"아뇨. 그런 얘기는 없었어요. 마법사로서 기본적인 수준만 갖추면 상관없을 거예요."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데려갈 수 있을 만한 마법사들이 몇 명 떠오른다.
적절한 회유와 거래, 그리고 협박이 있으면 충분히 포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출발은 겨울이 지나면 하죠. 이레네의 겨울은 짧지 않으니까, 넉넉하게 3개월 정도 후에 가면 되지 않을까요?"
"...."
"왜 그러시죠?"
데일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고개를 저었다.
"아니. 준비가 되는 대로 바로 출발한다."
"예?"
"그때까지 기다리면 너무 늦어."
"뭔가 중요한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데일은 케인의 경고를 떠올렸다.
케인은 조만간 대륙에 위험이 닥칠 거라며, 대비하라고 말했다.
여신도 그 비슷한 맥락의 말을 했다.
'시간이 없어.'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을 때 좀 더 움직여두고 싶다.
겨울에 여정을 떠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감수해야 한다.
데일이 단호하게 말하자 엘레나도 머뭇머뭇 대답했다.
"알겠어요. 저도 조금이라도 빨리 마법을 공부하고 싶으니까요."
"둘이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요?"
그때. 카일라가 접시에 요리를 담아 가지고 오며 물었다.
데일과 엘레나가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별일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카일라."
"뭐예요. 저만 따돌리는 거예요? 그렇게 나오면 저 서운해요?"
카일라를 못 믿는 건 아니다.
하지만 때로는 모르는 게 더 나은 사실들도 있는 법이다.
카일라가 이번 일에 대해 알아봤자, 그녀에게 좋을 게 없다.
둘이 끝내 입을 열지 않자 카일라가 정말로 섭섭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기색을 눈치챈 엘레나가 안절부절못할 때.
데일 몫으로 나온 맥주를 꿀꺽 들이킨 프라우가 말했다.
"음! 역시 언제 먹어도 이곳 맥주는 맛이 없군. 이 정도면 감탄스러울 정도야!"
"맛없으면 먹지 마요!"
"카일라. 자네는 좋은 여자지만, 성질을 좀 죽일 필요가 있어."
"아하. 지금 해보자는 거죠? 내 쇠뇌가 어딨더라...."
그렇게 분위기가 흐지부지되었다.
프라우의 눈치 없음이 처음으로 도움이 된 것이다.
데일은 둘이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엘레나에게 조용히 말했다.
"바로 준비하겠다. 너도 챙겨야 할 게 있다면 미리 챙겨놔라."
"예."
그날의 상의는 그렇게 끝이 났다.
* * *
동이 트자마자 데일은 상위구역으로 통하는 성문에 섰다.
안면이 있는 기사가 데일을 알아보았다.
전에 데일에게 싸인을 부탁했던 기사였다.
"오랜만이오. 3구역에 볼일이 있어 오셨소?"
데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상위 구역 출입 허가증서를 내밀었다.
이미 얼굴을 아는 사이지만, 그래도 꼼꼼히 확인하는 게 원칙이었다.
기사는 증서를 옆에 있는 하급 귀족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귀족이 증서를 검토하는 동안, 말을 걸어왔다.
"그러고 보니 신작. 재밌게 읽었소. 아니. 내 말은, 딸 아이가 재밌게 읽었다고 하더군."
"...신작?"
"몰랐소? 이번에는 북부가 배경인데, 특히 흑기사와 장렬하게 맞서 싸우는 장면이 인상 깊었소."
그렇게 말한 기사는 품에서 두꺼운 책을 꺼냈다.
데일은 종이를 휙휙 넘기고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또 그놈이군.'
이전에 소설책을 썼던 작가가, 제법 벌이가 쏠쏠했는지 후속편을 내버렸다.
심지어 얼마 지나지도 않은 북부에서의 일이 배경이란다.
데일은 빠르게 내용을 훑었고, 이내 그 터무니없는 각색에 고개를 저었다.
'뭐야 이게.'
단장 자리에 눈이 멀어 달려드는 귀족들은 명예를 위해 끝까지 싸운 투사가 되었고, 케인은 엘드리엄 영주의 딸을 사랑해 그녀를 납치한 로맨티스트가 되었다.
그리고 어째선지 데일은 그런 영주의 딸을 구해내기 위해 케인과 결투를 벌인다....
귀족들의 입맛에 맞춰 내용을 수정한 건 그렇다 치고, 1권과 유사한 내용이 많았다.
이런 걸 클리셰라 해야 할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두고보자.'
선을 넘었냐 하면 그건 아니지만,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데일을 멋대로 가져다 써서 수익을 올린 부분이 그렇다.
만약 작가를 마주치게 된다면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해줄 생각이다.
데일은 기사에게 책을 돌려주었다.
"잘 읽었소."
"흠흠. 경의 이름을 적어준다면 딸 아이가 좋아할 것이오."
"...뭐라고 적어주면 되겠소."
"브레이든에게. 항상 행복하시오. 라고 적어주시오."
"언제 들어도 사내 같은 이름이군."
"험험."
싸인을 마치고 책을 돌려준 데일은 유달리 깊고. 넓은 해자 위에 놓인 다리를 지나 3구역으로 들어갔다.
상위구역은 언제나처럼 평화로웠다. 간밤에 이레네에도 눈이 내렸는데, 귀족 아이들이 시종을 데리고 밖으로 나와 눈사람을 만드는 게 보였다.
눈사람한테 값비싼 옷을 입혀주는 걸 보면, 이곳이 얼마나 여유로운지 새삼 실감하곤 한다.
데일은 걸음을 서둘렀다.
목표로 한 곳은 도서관이었다.
안면이 있는 사서가 데일을 맞아주었다.
"아, 경. 오랜만이네요. 북부에 갔다 오셨다고요?"
"오랜만이다."
"안 그래도 안드레이 공이 데일 경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를?"
사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데일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말했다.
"데일 경이랑 체스를 오래 못 둬서 적적해하셨거든요. 아침마다 데일 경이 도시에 돌아왔는지, 매일같이 물어봐서 참 곤란했어요."
피식 웃은 사서는 책을 정리하며 말했다.
"먼저 올라가 계세요. 이따가 다과를 챙겨 갈게요."
데일은 도서관에서도 외지고 인적이 드문 방으로 향했다.
오래된 책과 서류 더미가 어지럽게 쌓인 방 안. 그 한구석에 깐깐한 인상의 자그마한 노인이 책을 읽고 있었다.
데일은 일부러 바닥의 책을 건드려 기척을 냈다.
"으음? 아! 자네 왔나!"
엄청 반가운 기색을 보인 안드레이는 이내 부끄러운지. 큼큼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북부에서 고생했다는 말을 들었다. 에른스트 그 철부지랑 같이 다녔다고?"
"에른스트를 아시오?"
"그럼. 티센 가문과는 인연이 있어 예전에 몇 번 봤었지. 그때 봤을 때는 영 대책 없는 놈이었는데, 그 꼬맹이가 친위대 단장이라니. 내가 오래 살긴 한 거 같군."
잠시 과거의 추억에 젖어있던 안드레이가 시선을 돌렸다.
"그래. 우리 바쁘신 데일 경께서 이리 아침부터 나를 찾아온 이유는 뭘까."
"부탁할 게 있소. 좀 어려운 부탁이 될 수도 있소."
데일은 조금 머뭇거리며 이야기를 꺼내려 했다.
바이만의 보물고로 떠나는 이번 여정은 상당히 위험할 수도 있는 데다, 겨울이라 꽤나 고될 것이다.
나이 지긋한 안드레이에게는 너무 가혹한 여행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의중을 떠보려 했는데... 안드레이가 그런 데일의 입을 막았다.
"잠까안!"
"?"
"지금 부탁이라고 했나?"
"그렇소."
"우리 사이에 부탁을 주고받을 때을 때는 항상 이걸로 승부를 보지 않았던가?"
안드레이가 손가락을 튕기자 체스판과 체스말이 저절로 굴러와, 가지런히 정렬했다.
안드레이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네놈이 이기면 얘기를 들어주지. 하지만 쉽지 않을 거다. 네가 북부에서 나돌아다니는 사이, 나는 네 수를 이미 완벽히 분석했거든."
"음."
"자! 어서 말을 움직여라! 마탑의 마스터인 나 안드레이의 진짜 실력을 보여주마!"
* * *
조금 뒤.
망연자실하게 체스판을 내려다보던 안드레이가 체스판을 부드럽게 뒤집어엎은 뒤, 인자한 얼굴로 말했다.
"생각해보니 너와 나 사이에 내기를 하고 그러는 건 너무 정이 없는 것 같아. 안 그래? 부탁이 뭔지, 어서 얘기해봐."
그와 안드레이의 사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데일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
* * *
"우선, 오늘 들은 얘기를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해주었으면 좋겠소."
친한 사람 하나 없는 안드레이가 누구한테 말하겠느냐만은, 혹시 모르는 일이다.
"이 안드레이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
"젠장. 이걸로는 부족하다는 건가? 뭐 얼마나 대단한 일이길래 그래?"
"듣고 나면 그럴만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 것이오."
"쯧. 주문에 걸고 맹세하면 되나?"
"...그래도 되시오?"
"이미 잔뜩 궁금하게 만들어놓고서는 뭘 그래. 난 궁금한 건 못 참아."
이 정도라면 믿을 수 있다.
안드레이가 주문에 맹세를 하자, 데일은 이야기를 꺼냈다.
바이만의 왕족인 엘레나와 왕가의 보물고. 그리고 세 마법사가 필요하다는 것까지.
이야기를 모두 들은 안드레이는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허. 정말이지. 놀랍군. 네가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떤 건지 알겠어."
"별로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소."
안드레이는 데일의 말을 무시하며 말했다.
"마법사들끼리 가끔 나오는 말이 있었지. 바이만이 이 대륙 어딘가 자기들 유산을 꽁꽁 숨겨 놓은 게 아닌가 하고 말이야."
"그렇소?"
"마법사란 족속들은 기본적으로 겁이 많거든. 바이만 왕가가 검과 마법을 둘 다 중시한다지만, 결국 왕국을 운영하는 참모들은 마법사들이 도맡아 했잖아?"
기사들은 목숨을 불태워서라도 끝까지 왕국을 지켜낼 생각을 하는 반면, 마법사들은 왕국의 멸망할 경우의 수를 가정하고 그 미래를 대비한다.
그게 마법사와 기사의 차이다.
"마탑의 몇몇 괴짜도 그 보물고를 찾아서 대륙을 헤매기도 했지만, 결국 아무도 찾지 못했지. 그랬는데... 어디 있다고?"
"카드라스 산에 있다고 들었소. 왕가의 핏줄이 찾아가야 길이 열린다 하더군."
"카드라스 산이라. 지랄맞은 곳에도 숨겨 놨군."
"그럼. 함께 가주시겠소?"
이미 안드레이는 반쯤 수락한 기세였다.
무엇보다 안드레이는 마법사다.
온갖 진귀한 물건이 잠들어있을 바이만의 보물고를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마스터 안드레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거래를 하러 왔으면 조건을 제시해야지."
"...거래?"
"그럼 설마 나를 공짜로 데려갈 생각이었나? 거참. 이래 보여도 이 안드레이는 마탑의 마법사다. 내 조언 하나를 듣기 위해 거금을 들이는 귀족들도 많아."
맞는 말이었다.
안드레이는 굉장히 고급 인력이고, 그런 안드레이를 그냥 데려가려는 건 양아치 심보였다.
그렇기에 데일은 물었다.
"무엇을 원하시오."
안드레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흠. 글쎄. 보물고에 있는 물건 하나만 내가 챙길 수 있으면 좋겠는데. 딱 하나면 돼."
예상했던 대로의 제안이고, 과도한 요구도 아니다.
보물고에 어떤 물건이 있을지는 엘레나조차 알지 못한다.
만약 원하는 게 없으면 안드레이는 손해만 보는 것이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는 게 안드레이의 생각이다.
고개를 끄덕인 데일이 말했다.
"알겠소. 하지만 엘레나가 먼저 필요한 걸 모두 챙기고, 남은 것들 중에서 고르시오. 보물고의 주인은 엘레나니까."
"나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 정도는 당연한 거지."
둘은 그렇게 합의를 보았다.
안드레이가 상식적인 제안을 했기에 원만히 이루어질 수 있는 거래였다.
만약 안드레이가 터무니없는 걸 요구했으면 곤란할 뻔했다.
'그랬다면 다른 마법사를 찾아야 했는데....'
문제는 데일에게 마법사 인맥이라는 게 그리 많지 않다는 거다.
가란드나 다른 이들에게 부탁하면 구하기야 할 수 있겠다만, 그러면 이번 여정에 대해 너무 많은 사람이 알게 된다.
어쨌거나 마법사를 한 명 구했으니, 한 명만 더 구하면 된다.
"혹시 알고 지내는 마법사 중에서, 믿을 만한 사람이 있소? 한 명이 더 필요하오."
"음. 마탑에서 도서관으로 오면서, 사실상의 연이 다 끊어지긴 했지. 알고 지내는 이가 없지는 않지만... 솔직히 믿을만하냐 하면 그건 아니야."
"그렇소?"
안드레이가 골치 아픈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전에 말했지? 마탑이 지금 파벌 싸움을 하고 있다고."
데일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마탑에서 멀쩡히 생활하려면 파벌 중 하나에는 들어야 해. 그리고 지금 그 파벌들이 주도권 경쟁을 하고 있지. 서로 손을 잡고 협력할 생각은커녕, 조금이라도 힘을 거머쥐어 다른 파벌을 쓰러트릴 생각밖에 없어. 그런 와중에 바이만의 보물고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파벌에 전부 얘기하지 않겠어?"
데일이 물었다.
"주문에 대해 맹세를 하면 어떻소."
"글쎄. 일단 하려고 하지도 않을 거고, 설령 순순히 맹세를 해도 안심할 수는 없어. 언제나 꼼수는 있으니까."
즉. 마법사 개인은 믿을 수 있을지 몰라도, 파벌이나 조직에 속한 마법사는 믿기 힘들다는 게 안드레이의 주장이다.
"제일 좋은 건 마탑 출신이 아닌 마법사를 구하는 거고. 그게 안 되면... 파벌에 속하지 않았거나, 파벌에 속했어도 따돌림을 당하는 마법사를 구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뭐. 이런 조건의 마법사를 형편 좋게 구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군."
데일은 안드레이가 말한 조건을 곰곰이 곱씹었다.
그리고 불현듯. 조건에 딱 맞는 사람이 한 명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있소."
"뭐? 누군데."
"나중에 말해주겠소. 일단 떠날 준비를 바로 해두시오. 겨울이니까 따뜻한 옷을 준비해야 할 것이오."
"어어. 그래."
데일이 서둘러 걸음을 옮겨 사라졌다.
홀로 남은 안드레이는 멍하니 있다, 한쪽 구석에 개어 있는 망토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물건에 대해 설명해주려 했었는데 말이야."
안드레이는 곤란한 듯이 수염을 쓰다듬다, 이내 시선을 떨궜다.
"뭐. 어차피 금방 만날 테니, 그때 돌려주면 되겠지."
* * *
조건에 맞는 마법사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새로 지어지고 있는 친위대 건물로 가니, 에른스트가 데일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 무슨 일이야 경. 혹시 마음이 바뀐 거야?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환영인데."
"새로운 친위대 건물인가?"
"응. 멋있지?"
층수가 높진 않지만, 좌우로 길게 늘어선 석조 건물은 제법 훌륭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황제가 친위대를 상당히 챙겨주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일할 때는 황궁에 있고, 쉬는 날에는 이 건물에서 보낼 것 같아. 아. 내 집무실도 따로 있는데. 한번 볼래? 엄청 넓어."
"그보다 기사단장한테 가르침을 받고 있는 거 아니었나? 왜 여기서 농땡이를 피우고 있는 거지?"
"...부러졌어."
에른스트는 망토를 슬쩍 들쳐, 붕대를 칭칭 감은 오른팔을 보여주었다.
잠시 말을 잃은 데일이 말했다.
"꽤 엄하게 가르치나 보군."
"응... 연습을 실전처럼 해야 실력이 는데. 첫날에는 목검으로 하루 종일 두들겨 맞기만 했어."
"그래도 팔만 부러져서 다행이군."
"아니야. 다리뼈, 갈비뼈, 어깨 골고루 부러졌어. 포션이랑 사제님들의 치유 기적 때문에 다시 나았지만."
"음. 팔은 왜 부러진 채로 내버려둔 거지?"
"포션을 너무 많이 써서 부작용이 있을까봐...."
담담히 말하는 에른스트의 눈동자는 어딘가 슬퍼 보였다.
데일이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힘내라."
"고마워.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왔는데?"
"한스는 어디 있나?"
한스는 이번 일로 에른스트와 연이 닿아, 친위대의 고문 마법사를 맡았다.
마탑의 입장에서도 별 쓸모없는 한스를 치워버릴 수 있어 좋고, 한스도 새 일터를 구할 수 있어 좋은 거래였다.
데일의 물음에 에른스트가 손짓했다.
"저기 있네."
그가 가리킨 곳에, 화려한 빨간색의 로브를 입은 한스가 인부들에게 으스대고 있었다.
"내가 누군 줄 알아! 바로 마법사 한스 님이시다! 내가 응? 에른스트 부단장님이랑 같이 흑기사를 물리쳤다 이 말이야."
오랜만에 다시 잡아보는 권력의 맛에 다시 정신을 못 차리는 모양.
"아주 신났군."
"하하. 그래도 조금 짜증 나는 것 빼고는 남한테 피해는 안 주니까...."
"잠시 빌려도 되나?"
"빌린다고? 얼마나?"
"최소 1주일. 어쩌면 그보다 더 길게."
"어. 괜찮아."
에른스트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답했다.
"...그렇게 막 허락해도 되나?"
"어차피 지금 한스를 써먹을 만한 일은 없으니까. 오히려 인부들이 시끄럽다고, 제발 치워달라고 부탁하던데. 마침 잘됐네."
"알았다."
허락을 받았으니 이제 걸릴 건 없다.
데일은 성큼성큼 걸어가 한스의 뒤에 섰다. 드리워진 그림자에 한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엉? 감히 한스 님의 그림자를 밟는 건 누구냐."
"나다."
"...."
"신이 잔뜩 났구나."
한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는 주위 눈치를 살피더니, 비굴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하. 오셨습니까 경?"
"짐 챙겨라."
"예?"
"바로 짐 챙기라고."
데일은 어리둥절해하는 한스를 질질 끌고 갔다.
한스에게 시달리던 인부들은 환한 표정을 지었고, 에른스트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다급한 건 한스뿐이다.
"잠깐잠깐. 어디로 가는데요."
"산을 탈 거다."
"...이 계절에요? 제가요? 왜요?"
데일은 걸음을 우뚝 멈추고 한스를 돌아보았다. 입을 다물고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침묵에도 무게가 있다면, 한스는 이미 짓뭉개졌을 거다.
결국 참지 못한 한스가 말했다.
"갈게요. 가면 되잖아요. 집에 가서 짐 챙겨 올게요."
"외곽 구역에 있는 취한 노새 여관으로 오면 된다. 혹시라도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말고."
"도망칠 곳도 없어요."
"그리고 날이 추우니까, 감기에 걸리지 않게 두꺼운 옷을 챙겨라."
"...뭐지? 병주고 약주는 건가?"
"중간에 아프다고 골골대면 버리고 가야 할 수도 있다."
"아."
한스는 그렇게 구시렁대며 사라졌다.
'잡초 같은 구석이 있는 놈이니, 힘든 여정에도 곧잘 따라오겠지.'
엘레나가 보물고의 위치를 바로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어쩌면 여정이 생각보다 오래 걸릴 수도 있다.
다른 비실비실한 마법사보다는, 구르고 구른 한스가 더 나으리라.
'또 누구를 더 부르지. 일단 하켄은 데려가고.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해 사제가 한 명 있으면 좋지만... 상황을 설명하기가 어렵군.'
조용히 갔다와야 하는데, 에스델은 교단에 묶인 몸인지라 어디를 가든 교단의 상부에 보고해야 한다.
그렇다고 사제 없이 여정을 가자니 그것도 꽤나 불안한 구석이 있었다.
데일이야 상관없다. 생기를 흡수해 몸을 치료하면 되지.
하지만 다른 동행들은 평범한 인간이다. 다치기라도 하면 곤란해진다.
데일은 고민에 빠진 채, 교단으로 향했다.
우선 에스델과 대화를 나눠볼 생각이었다.
데일이 다가오자 교단의 병사들이 당황했다.
"흐, 흑기사? 왜 이곳으로 오는 거야."
"일단 막아!"
"잠깐. 흑기사 데일이면...."
그들 역시 데일에 대한 소문 정도는 들어봤다.
데일이 벌인 활약과 악마 퇴치 따위의 공적.
예전. 데일은 이미 한번 교단에 들어섰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분명 특수한 상황이었고, 그때와 지금은 시국이 달랐다.
"당장 멈추시오! 이 앞으로 지나갈 수는 없소!"
데일은 걸음을 멈추며 생각했다.
'왜 이렇게 과민반응이지?'
병사들은 팔을 떨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마치 죽어서라도 데일을 막아내려는 강력한 의지가 엿보였다.
처음. 데일이 이곳에 방문했을 때도 이 정도로 격렬한 반응은 아니었다.
그때는 불손한 침입자를 저지하려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마치....
'내가 여기 오면 신전이 무너져 내리기라도 할 것처럼 구는군.'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어쨌건 데일은 이곳에 싸우러 온 게 아니다.
해할 의도가 없다는 뜻으로 양손을 펼쳐 보인 뒤, 말했다.
"굳이 들어갈 생각은 없다. 사람을 불러주면 좋겠는데."
"누, 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에스델."
"...약속은 미리 잡으셨소?"
'에스델이 미리 약속을 잡아야 만날 정도의 인물인가?'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병사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나중에 다시 오시오. 지금은 오전 기도를 드릴 시간이니."
"기도는 언제 끝나지? 그때까지 기다리겠다."
"흠흠. 기도가 언제 끝날지는 우리도 모르오."
"모른다고?"
병사들은 애써 시선을 피했다. 누가 봐도 거짓말하는 기색.
왜인지 모르겠지만, 저들은 데일과 에스델이 만나는 걸 막으려 하고 있었다.
'곤란한데.'
에스델에게 이번 여정에 대해 설명하는 게 어려울 거라 예상했는데, 에스델을 만나지조차 못하다니.
그렇다고 평소처럼 막무가내로 나갈 수도 없는 게, 이곳은 대륙에서 가장 위세를 떨치는 교단의 본부나 다름없다.
난동을 부렸다가는 곧장 교단의 고위 사제와 성기사들이 튀어나올 것이다.
아무리 데일이라도 혼자서 그들을 상대하다가는 가루가 되고 말 것이다.
예상치 상황에 데일이 오고가도 못하는 그때였다.
어디선가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시죠."
"아...!"
인자한 인상의 늙은 여인이었다. 하얀 법복에, 소매에 새겨진 은 고리를 보면 고위 사제가 분명했다.
그녀의 등장에 병사들이 깍듯하게 예를 표했다. 여인은 병사들의 노고를 치하해 준 뒤, 데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인의 눈이 조금 커졌다.
"데일 경이군요. 이거 반가워요. 마리아의 시신을 이곳에 옮겨와 주셨을 때 보고는 처음이네요."
아무래도 상대는 데일을 아는 모양. 이전에 교단에 왔을 때 얼굴을 본 듯하다. 하지만 데일은 상대가 누군지 몰랐다.
"음. 그렇소. 그런데 그쪽은...."
"아. 그렇죠. 경은 저를 모르실 테죠. 오르단이에요."
인자하게 웃어보인 오르단이 악수를 건네면서 말했다.
"에스델의 스승이죠."
겨울
* * *
데일은 오르단과 악수했다.
나이 든 여인이라고 하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손힘이 강했다.
"에스델의 스승이시오?"
"정확히는 그 비슷한 역할이죠. 교단에는 스승이나 제자 같은 표현은 잘 쓰지 않으니까요. 사제지간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같은 것도 없고 말이죠. 그저 기회가 닿아, 제가 교육을 맡게 되었을 뿐이에요."
오르단은 사제 특유의 차분하고 선명한 발음으로 얘기했다.
에스델과 말투는 조금 다르지만, 호흡을 내쉬는 타이밍이나 말의 빠르기가 매우 흡사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에스델의 스승임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오르단이 말했다.
"잠시 차나 한잔하시겠어요?"
"알겠소."
오르단은 데일을 데리고 교단 근처의 작은 찻집으로 향했다.
교단의 열렬한 신자가 운영하는 곳인데, 오르단이 오자 말없이 방을 하나 내어주었다.
주위에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을 정도로, 잘 밀폐된 방이었다.
오르단은 찻잔을 들어 향을 즐긴 뒤, 말했다.
"안 그래도 데일 경과는 한번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에스델 그 아이가 언제나 기쁜 듯이 데일 경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렇소?"
"예. 데일 경과의 모험이 그 아이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는 모양이에요. 에스델이 놀랄 만큼 빠른 성장을 보이는 건, 데일 경 덕도 분명 있겠죠."
확실히 에스델은 놀랄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기는 하다.
그녀가 이번에 보여준 신벌 기적은 다른 사제들을 압도했다.
"원래 유망주라고 들었소."
"하하. 교단에는 유망주가 한 명이 아니에요. 성녀님에 대해서는 걸 알고 계시죠?"
성녀. 영웅 중 하나.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만큼은 알고 있소."
"대단한 분이었죠. 저는 그렇게 강력한 기적을 부리는 사람은 이제껏 본 적이 없었어요. 온 역사를 통틀어도 그랬죠."
오르단은 먼 과거를 회상하듯.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분의 아래서 저희는 번영을 이룰 수 있었어요. 황실과 다른 조직에도 큰 영향을 끼칠 정도로 강력한 세를 자랑했죠. 교단의 황금기와도 같았어요. 하지만 성녀님께서는 어느 날 사라져버리셨어요. 다른 영웅들과 같이."
한순간에 지도자가 사라져버렸다.
그것도 역사상 가장 강력한 기적을 부렸다는 사람이.
교단의 신도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전에 무언가 언질은 없었소? 어디로 사라질 거라거나. 자기가 없어지면 어떻게 하라거나."
"일절 없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졌으니... 교단이 어떤 혼란을 겪었을지. 이해하십니까? 마탑과 용병 길드도 비슷한 일을 겪었지만, 저희처럼 큰 혼란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겁니다."
데일은 고개를 끄덕이자, 오르단은 이어 말했다.
"교단은 온 대륙을 샅샅이 뒤졌어요. 적어도 사람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곳은 전부 수색했죠. 하지만 끝끝내 찾아내는 데 실패했어요.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죠. 성녀님은 저희를 완전히 떠났다고. 그래서 저희도 새로운 길을 찾기 시작했지요. 새로운 성녀를 찾기로 한 겁니다."
이미 성녀 덕분에 황금기를 누리던 교단이다.
어떻게 해서든 대체재를 찾으려고 했을 것이다.
"온 대륙을 뒤져, 재능 있는 아이들을 성녀 님의 빈자리를 채울 후보로 세웠죠."
"그게 에스델이었군."
"예. 정확히 말하면, 에스델도 그중 하나였죠."
새로운 성녀를 키워내 그 빈자리를 대신한다.
하지만 데일이 잠깐 생각하기로도, 그 계획이 썩 성공할 것 같지는 않았다.
성녀만큼이나 위대한 사제가 곧바로 한 명 더 나올 확률이 얼마나 될까.
"최근 에스델은 교단에서 많은 기대를 받고 있어요."
"...다른 후보들이 실패한 것이오?"
"실패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조금 지지부진한 건 사실이죠. 에스델만큼 빠르게 성장한 아이는 없어요. 에스델은 벌써 웬만한 중급 사제들보다 더 뛰어난 기량을 보이고 있으니까요."
이제야 돌아가는 상황이 얼추 이해되었다.
에스델은 이제 단순한 유망주가 아닌, 교단의 희망쯤으로 비춰지나 보다.
한데. 그 에스델이 친하게 지내는 이교도 기사가 있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겠군.'
이전에도, 사제들은 에스델이 데일과 함께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의 탈로스도 그리 말했고, 다른 사제들 역시 다 들리도록 쑥덕거리곤 했다.
하지만 주관이 강한 에스델은 꿋꿋이 자기 마음대로 행동했다.
처음에는 그냥 내버려뒀을 거다. 에스델은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었고, 다른 후보들도 많았으니.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에스델이 교단에서 차지한 위치는 생각보다 높았다. 그리고 위치가 높아지면, 그만큼 제약도 강해지기 마련이다.
'병사들이 기를 쓰고 막으려던 게 이해가 되는군.'
데일이 말했다.
"대충 상황은 알겠소. 아무래도 성녀 후보라는 사람이 이교도 기사랑 같이 다니면, 여러 얘기가 나오는 건 당연한 거니."
"단지 그것만이 아닙니다. 교단에서는 경 자체를 경계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
"전혀 짐작이 안 가시는 모양이군요."
오르단은 한번 말을 끊고, 다 식어버린 차를 홀짝였다.
"최근. 밤의 신도들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신도들이?"
그러고 보니 밤의 여신도 비슷한 말을 했었던 것 같다.
"네. 아직 교단에 비하면 세력은 미비하지만, 그 성장세가 심상치 않죠. 그리고 저희는 그 원인이 데일 경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경의 활약이 사람들을 끌어모은 것이죠."
"...너무 비약이 아니오?"
"밤의 신도가 주로 늘어나는 곳은 카엘름 성과 이레네의 외곽구역이에요. 둘 다 데일 경과 연이 있는 곳이죠?"
카엘름에서는 가니아고스를 베었고, 외곽구역에서는 데일이 직접 주민들을 지켜준 데다가, 오며 가며 아이들에게 식량을 적선해주었다.
북부에서는 일을 벌인 원흉이 흑기사였던지라 밤의 신도가 크게 늘어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밤의 신도가 늘어난 건 전부 데일 덕분이라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내부적으로도 흔들리고 있는 교단인데, 밖에서는 밤의 신도가 늘어나고 있어요. 그래서인지 위기감을 느끼는 형제자매님들이 많아요."
그렇다고 예전처럼 대놓고 이단심문관을 보내 밤의 신도들을 학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악마라는 거대한 적에 맞서. 빛과 밤은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내부의 몇몇, '열정적인' 분들은 데일 경을 예의주시하고 있어요. 지금 밤의 신도들의 구심점은 누가 뭐라 해도 데일 경이니까요."
그들한테 데일은 교단의 위협이다.
그리고 그런 데일과 에스델이 제법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교단의 사제들이 가지는 위기감은 충분히 이해되었다.
"상황은 대충 알겠소. 근데, 왜 나한테 이 이야기를 이리 자세하게 하는지 모르겠소. 당신에게도 나는 탐탁지 않은 존재일 텐데."
"그야 저는 경과 에스델이 지금처럼 함께 해주었으면 바라기 때문이죠."
"바란다고 했소?"
"예."
오르단은 주저 없이 답했다.
"에스델이 왜 다른 후보들을 제치고 유독 빠른 성장을 보였을까요. 분명 그 아이의 뛰어난 재능도 한몫했겠죠. 하지만 저는 그 아이가 경이랑 함께하며 세상의 여러 모습을 보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많은 일을 겪음으로써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기도실에 틀어박혀 성경을 읽기만 해서 키울 수 있는 믿음이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신께서도 분명 그 부분을 높이 평가해주셨을 겁니다."
데일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데일과 함께 에스델이 상대한 건 하나같이 쟁쟁한 적이었다.
악마의 하수인. 악마. 흑기사.
다양한 경험이니 그런 뜬구름 잡는 얘기보다는, 그냥 강력한 적을 쓰러트리는 데에 공적을 세웠으니 빛의 여신이 힘을 더 준 게 아닌가?
하지만 데일은 굳이 그 생각을 내뱉지는 않았다.
대신 물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분명 이번에도 에스델이 필요한 일이 있어 찾아온 거겠죠?"
"그렇소."
"혹시 어떤 종류의 일인가요?"
고민하던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알려줄 수 없소."
"무언가 말 못 할 일이라는 거군요. 그렇다면 교단을 설득하는 일은 더더욱 어렵겠군요."
"으음. 역시 그렇군."
"그 부분을 제가 도와드리죠."
오르단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교단에는 제가 에스델이 잠시 수행을 떠났다고 핑계를 대겠습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저는 나름 교단에서 명망이 있는 편입니다. 제가 말하면 다들 의심하지 않을 거예요."
"입만 잘 맞춰두면 들킬 일은 없다 이거요?"
"뭐. 대놓고 법복을 입고 사람들 앞을 돌아다니는 정도만 아니면, 들킬 일은 없을 거예요."
이렇게 편의를 봐주겠다니.
데일에게는 나쁠 게 없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의아하기도 했다.
"왜 이렇게까지 해주는 것이오."
오르단이 답했다.
"앞서 말했다시피, 저는 에스델이 데일경과 함께 하는 게 더 큰 성장을 이룰 거라 생각하는 쪽이에요. 그리고... 이 편이 그 아이가 더 기뻐할 것 같거든요. 억지로 떼어놔봤자 그 아이가 납득할 것 같지도 않고요."
"에스델을 위해서라는 말이오?"
"예."
잠시 생각에 잠겼던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그럼 바로 준비할게요. 꽤나 급한 일 같은데. 맞죠?"
"...맞소."
"후후. 이번에 또 어떤 모험을 하실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오르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찻집을 나섰다.
데일은 한동안 자리에 앉아 그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좋은 사람...인가?'
그림에 그린 듯한, 훌륭한 사제다.
에스델을 생각하는 마음과 그 따뜻한 눈빛은 모성애와도 비슷하게 보였다.
에스델을 진심으로 자식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뭔가.'
마음에 걸린다.
어쩌면 이런 친절하고 대가 없는 호의가 데일에게 익숙지 않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일 수도 있다.
상대는 평생을 따뜻한 세상 속에서 존경을 받으며 살았을 인물이고, 데일은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밤의 기사니까.
데일과는 정반대의 처지인데다, 상대는 강력한 사제이니. 내면의 언데드가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걸 수도 있다.
"...."
한참을 앉아 고민하던 데일은 머릿속 의심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우선 순수하게 호의에 감사하기로 했다.
만약 나중에 상황이 변해도. 그때는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일이니.
* * *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새벽.
일단의 무리가 밤의 신도들이 모여 사는 암흑가에 나타났다.
암흑가의 입구에는 마차 2대가 방치되어 있었다.
하나같이 로브를 깊게 눌러쓴 무리는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마차에 올라탔고, 이내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차가 도시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자. 그제야 에스델은 로브를 벗었다.
"후아. 들키지는 않았겠죠?"
"사람들 눈을 피해서 왔으니, 괜찮을 거다."
혹여나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데일은 암흑가의 촌장에게 마차를 준비해달라 부탁했고, 조용히 도시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이상하지는 않죠?"
에스델은 어색하게 자기 옷을 살피며 말했다.
지금 에스델은 본인이라는 게 노출되면 안 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에스델은 어디를 가든 눈에 띄는 외모다. 그렇기에 다소의 변장이 필요했다.
평소에 입던 법복 대신, 누비 갑옷과 외투를 껴입었고, 남자 용병처럼 혁대와 두꺼운 바지를 걸쳤다.
거기다 끈으로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묶은 상황.
여기에 쇠투구를 눌러쓰면....
"음. 누가 봐도 닳고 닳은 용병이다."
"그, 그런가요?"
하켄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지금 사제 양반은 내 후배인 거 알지? 이번 여정 동안은 하켄 선배님이라 불러."
"선배님. 아주 신이 나신 것 같네요."
"...농담이야. 그냥 하켄이라 불러."
에스델이 사납게 노려보자, 깨갱한 하켄이 말을 모는 데 집중했다.
신벌 기적을 익힌 에스델은 하켄을 혼쭐낼 실력이 있었다.
이제 하켄은 에스델의 상대가 아니었다.
하켄에게서 시선을 뗀 에스델은 다시 데일을 보고는 어딘가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늘 교단에서 하라는 대로만 했는데.... 이런 일탈은 처음이에요. 오르단 사제님께는 정말 감사한 일이네요. 이렇게 부적까지 챙겨주시고."
에스델은 손안에 낡은 부적을 어루만졌다.
천으로 만들어진 물건인데, 실질적인 효과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마음이 담겨 있을 뿐.
하지만 에스델에게는 그것만으로도 감동이었다.
그런 에스델에게 데일이 말했다.
"교단 내에서 제법 인정받는다고 들었다."
"...저는 별로 원치 않은 시선이에요. 제가 성녀님을 대신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죠."
지금껏 에스델은 별 부담감 없이 지내왔다.
성녀를 대신할 유망주라 하나, 어디까지나 여러 후보들 중 하나.
설마 자기가 유력 후보가 되는 미래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주변의 기대가 점점 커지자, 에스델은 심히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그래도 이렇게 밖으로 나오게 되니 기분 좋네요. 안에서는 숨 막혀 죽는 줄 알았어요. 게다가 바이만의 보물고를 찾는다니. 완전 이야기책 속 모험 같잖아요?"
하켄도 즐거운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크하하! 그러니까 말이야! 이거. 오랜만에 한 몫 크게 잡는 건가? 안 그래도 요즘 돈이 없어서 쪼달리는 참이었는데. 역시 데일 경을 따라다니면 굶을 일은 없다니까."
"정말. 하켄은 왜 항상 돈이 없는 건가요. 데일 경처럼 좀 착실히 모아봐요."
둘의 분위기는 어딘가 들떠있었다.
아무래도 바이만의 보물고를 털러 가는 여정인 만큼, 잔뜩 기대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별로 그렇게 순탄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바이만의 보물고면 대체 어떤 함정과 수호자들이 지키고 있을까.
엘레나가 왕가의 계승자이니 그에 대한 안배가 있겠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한 겨울의 산을 타는 것도 쉽게 볼 일이 아니고.
하지만 굳이 초를 치고 싶지 않기에, 데일은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그때.
한껏 재잘거리던 에스델이 고개를 돌려 뒤쪽에서 쫓아오는 마차를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괜찮을까요?"
"뭐가."
"마법사만 셋이라잖아요. 마법사가 셋이 모이면 창문이 깨진다.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격언인데, 모르세요?"
"괜한 걱정을 하는군."
에스델은 사려 깊은 성격이지만, 걱정이 너무 많아 탈이라고. 데일은 생각했다.
"모두 멀쩡한 사람들이다. 얌전히 잘 지내고 있겠지."
* * *
"그러니까. 당신들의 마법은 뒤떨어진데다가, 세련미도 없다고요!"
"뭐? 지금 말 다했어? 나 마스터 안드레이다! 쥐방울만 한 꼬맹이한테 지적을 당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라고!"
"쥐, 쥐방울? 키는 제가 더 크잖아요!"
"...꼬맹아. 넌 지금 건드려서는 안 될 걸 건드렸다."
"근데 솔직히 마스터 안드레이의 마법이 낡은 건 맞는데, 마탑의 마법이 바이만보다 뒤떨어진다는 건 동의 못 하겠는데? 바이만이 망한 지가 10년이 넘었는데, 솔직히 요 몇 년 마법의 비약적인 발전을 생각하면, 바이만은 너무 과평가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나...."
"당신은 닥쳐요!"
"너는 빠져라 애송아!"
시끄러운 마차 안.
마부석에 앉은 프라우는 눈물을 글썽이며 중얼거렸다.
"데일 경. 자리 좀 바꿔주게. 제발."
카드라스
* * *
겨울은 용병들에게도 휴식기다.
어지간히 돈에 미치지 않는 이상 이 추운 날씨에 굳이 밖을 나돌아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 용병들은 도시의 주점과 도박장에 틀어박혀, 1년 동안 번 돈을 흥청망청 탕진하며 계절을 보낸다.
그러다 빈털터리가 되고. 봄이 되면 다시 분주히 일을 나가는 게 용병들의 생활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기 마련이다.
한겨울에도 쉬지 않고 의뢰를 받는 용병들도 적은 수나마 있었다.
마젤도 그중 하나였다.
뛰어난 사냥꾼인 마젤은 용병 길드 한구석에 앉아 조용히 활시위를 점검했다.
마젤은 언제라도 의뢰를 떠날 수 있게 준비했다.
마젤의 경험상, 겨울 의뢰는 힘들지언정 그만큼 보수가 짭짤했다.
잘하면 지난 1년간 번 돈 전체보다 겨울에 더 많은 돈을 벌 수도 있었다.
'오늘은 일이 없으려나.'
마젤은 화살의 개수를 꼼꼼히 세며, 주위를 살폈다.
용병도 없고, 의뢰자도 없는 길드는 몹시 한산했다.
창구에 앉은 직원들도 한가하게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도저히 일이 생길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허탕이군.'
마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에서 시간을 죽치느니, 사격 연습이라도 하는 게 더 유익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
길드 문이 벌컥 열리며 일단의 무리가 들어왔다.
나른하게 있던 직원들은 그들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 자세를 고쳐 앉았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저놈들은....'
엮여서 좋을 게 없는 이들이었다.
마젤은 조용히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마젤을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사냥꾼 마젤. 맞나?"
"...맞소."
"우리가 누군지는 알겠지?"
"교단의 성기사 아니오?"
하얀 갑옷을 입은 기사가 오만하게 미소 지은 뒤, 말했다.
"추적술에는 너를 따라올 자가 없다고 들었다."
"적어도 밥 벌어먹고 살 정도의 기술은 있소."
"쫓아야 할 대상이 있다. 따라오도록."
안 그래도 차가운 마젤의 표정이 더욱 냉담해졌다.
"나는 아직 의뢰를 받겠다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소만."
"하하! 재밌는 얘기를 하는군."
어이없다는 듯, 웃어보인 성기사가 위협하듯이 말했다.
"이게 부탁으로 보이나? 응?"
"...."
"돈은 넘치도록 줄 테니 잔말 말고 따라오도록. 이걸로 추적하면 된다."
성기사는 웬 낡은 천조각을 주었다.
'옷... 은 아니고. 무슨 부적 같은 것의 일부인가?'
마젤이 물었다.
"대체 누구를 쫓는 데 그러시오. 그 정도는 말해주시오."
"교단의 적이다. 신의 뜻을 이루는 위업에 동참하는 거니, 영광으로 알도록."
성기사와 그를 따르는 종자와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잠시 주저하던 마젤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교단에게 밉보이는 건 인생을 망치는 가장 빠른 방법의 하나였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