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4-2

병규의 입이 쩍 벌어졌다.

"설마, 도술이 돌아온 거예요?"

호랭이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큰 힘을 쓰긴 힘들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부릴 수 있게 됐지."

"그 정도면 충분해요."

병규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자. 이제 준비가 모두 끝났으니 슬슬 출발해보자고요."

"그런데 그냥 갈 거냐?"

병규의 옷 안으로 쏙 들어가 있던 호랭이가 고개를 삐죽 내밀며 물었다.

"그럼요?"

"이 녀석아. 너희들도 이 몸처럼 변장을 해야지. 변장을. 잘못해서 정체가 드러나면 무관한 프리즘 용병단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봤냐?"

"으흠. 그렇겠군요."

호랭이의 언질에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랭이의 말처럼 도둑질엔 변장이 필수인데, 유감스럽게도 병규와 샤바는 갈아입을 옷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현재 입고 있는 옷들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것이냐. 그것도 아니다.

호젤조차 특이한 옷이라며 관심을 보였을 정도로 그들의 옷차림은 이곳의 양식과 판이하게 달랐다.

변장은 가볍게 넘길 수 있는 문제처럼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도적질에서 가장 필수적인 절차였다.

그런데 이 복잡한 문제를 병규는 너무도 수월하게 해결했다.

"기사단의 옷을 훔쳐 입죠."

밀어내기 한판 하러 간다며 일행에게서 빠져나온 병규와 샤바는 빠른 속도로 마차를 찾아 달렸다.

별이 뜬 밤하늘을 등지고 바람같이 내달리는 기분.

오랜만에 전속력을 다해서 달리는 것이라서 그런지 더 없이 상쾌했다. 짜릿한 쾌감까지 느껴져 병규는 더욱더 속력을 올렸다.

그렇게 전력을 기울여서 달리자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마차와 기사단을 찾을 수 있었다.

멀찌감치 보이는 마차 주위엔 보초로 보이는 기사 두 명이 모닥불 가에 앉아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주위에 침낭을 깔고 수면을 취하고 있었다.

의외로 허술한 경계.

'일이 쉽게 풀리겠군.'

병규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참. 샤바는....'

혼자 신나게 달리다 보니 샤바를 잊고 있었다.

"샤바야."

"여기예요. 주인님. 샤바."

작은 목소리로 부르자 그의 그림자 속에서 샤바가 불쑥 솟구쳤다. 당연히 병규는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한참 뒤에나 쫓아오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그의 그림자 속에 숨어 있을 줄이야. 빠르기만큼은 자부하고 있었는데, 샤바 역시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서운 녀석.'

끊임없이 발견되는 샤바의 엄청난 재능에 병규는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사실 샤바는 체중을 깃털처럼 가볍게 할 수 있었다. 그 재주로 우뢰처럼 내달리는 그의 몸에 살짝 기대어 온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병규가 알 턱이 없었다.

'좋아. 이제 일을 벌려보자.'

병규가 살금살금 마차 가까이 접근하려 할 때다.

샤바가 그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왜?"

의문스런 얼굴로 돌아보는 병규에게 샤바는 손가락을 허공에 들어 보였다.

"귀여운 아이가 우릴 빤히 쳐다보고 있어요. 샤바"

"?"

병규는 샤바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유심히 살폈지만 그가 말하는 귀여운 아이는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뭐가 있다는 거니?"

"저기요. 저기. 샤바."

아무리 눈을 치켜뜨고 봐도 이상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병규는 샤바의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예민한 생물이라 그가 보지 못하는 어떤 것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그 아이가 지금 뭘 하고 있는데?"

"잠시만요. 샤바."

샤바는 고개를 쳐들고 입술을 달싹였다. 잠시 후 샤바는 심각한 표정으로 병규에게 말했다.

"귀여운 아이가 자기는 정령이래요. 샤바, 주인의 명령으로 주변에 이상한 것이 없는지 살피고 있는 중이래요. 샤바샤바."

병규는 문득 프리먼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정령술사!'

그는 정령술사에 대해 자세히 몰랐다. 프리먼의 말로 대충 마법사와 비슷한 부류라는 것 정도만 짐작할 뿐이었다.

'어쩐지 경계가 허술하다 했더니, 그 정령술사라는 여자가 술수를 부린 모양이군. 그나저나 어쩐다?'

정령이 경계를 서고 있으니 그냥 접근했다가는 그대로 들통이 나고 말 것이다. 고민하던 병규는 샤바가 그 정령이라는 것과 대화가 통한다는 것을 상기해 냈다.

"샤바야. 그 정령이라는 아이에게 우리가 몰래 들어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 좀 해봐."

"네. 샤바."

샤바는 귀여운 표정으로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였다.

그때 병규의 귀에 묘한 기척이 느껴졌다.

가볍게 일렁이는 파문.

"바람?"

"어? 귀여운 아이가 바람의 정령이라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샤바가 방긋 웃으며 물어온다.

"아, 아니. 그냥 바람이 좀 부는 것 같아서. 그보다 얘기한 건 어떻게 됐어?"

병규의 물음에 샤바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원래는 계약자의 말에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지만, 샤바. 특별히 이번만은 절 봐서 봐주겠대요. 샤바샤바."

"잘했어."

신이 난 병규는 샤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정령 때문에 틀어질 수도 있었던 일이 무난하게 해결된 것이다.

주인의 칭찬에 샤바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즐거워했다. 샤바샤바 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좋아. 이제 정령은 해결되었으니 기사들에게서 위장복을 빌려볼까?"

병규는 돌을 주워 일부러 작은 소리를 냈다. 과연 무료한 표정으로 서 있던 두 기사가 엉거주춤 걸어왔다.

"코볼트라도 있나?"

정령을 믿는 것인지 두 사람은 하품을 하며 병규가 숨어있는 바위틈까지 걸어왔다.

파팍.

가벼운 파공성이 그들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목 뒤를 찔러오는 통증.

움찔하고 떨리던 기사들의 허리가 숙여졌다.

"큭."

얕은 신음소리.

하지만 그들은 목 뒤를 가격 당했음에도 리저드맨처럼 기절하지 않았다.

'어? 꽤 버티는걸?'

병규는 그들이 채 고함을 지르기도 전에 이격을 날렸다.

발을 무겁게 찍으며 주먹을 나선으로 휘두른다.

쿠웅.

송곳처럼 날카롭고 쇠망치처럼 무거운 통증이 뱃속을 파고든다.

일전에 무당의 제자라던 백택이 부리던 무공.

비록 수박 겉핥기 식으로 훔쳐 배운 것이지만 효과는 탁월했다.

일격을 받은 기사의 입이 쩍 벌어지며 격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 기사가 꼬꾸라지기도 전, 병규는 이미 다른 기사를 덮치고 있었다.

채찍처럼 휘둘러진 손이 막 호통을 치려던 기사의 턱을 밑에서 위로, 후려갈긴다.

딱!

윗니와 아랫니가 부딪히는 딱딱한 소음.

강제로 다물려진 입술 사이로 피가 배어 나왔다.

"이제 그만 잘 시간이다."

병규는 다시 한 번 기사의 목덜미를 가격했다.

연이어진 충격에 기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눈자위를 허옇게 치뜨며 쓰러졌다.

두 기사 모두 기절하는 순간까지 병규를 보지 못했다. 그저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자신들의 주위를 스쳐 지나가는 것만을 언뜻 보았을 뿐이다.

순식간에 기사들을 제압한 병규는 재빨리 그들의 갑옷과 내의를 벗겼다.

"윽. 냄새. 좀 빨아 입을 것이지."

기사의 내의를 입은 병규는 퀴퀴한 냄새에 코를 부여잡았다. 하지만 그 역시 근 반달 동안 옷을 한 번도 갈아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너도 갈아입어."

샤바에게도 기사의 내의를 던져준 병규는 겉에 갑옷까지 걸친 채 태연스레 마차로 걸어갔다.

그가 기사들을 상대한 곳은 마차와 제법 거리가 떨어진 곳이었지만 밤인지라 소리가 멀리 퍼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과연 수면 중이던 기사 한 명이 자리에서 상체를 반쯤 일으킨 채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켄트였다.

"무슨 일인가?"

물어오는 말에 병규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뜻으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말을 했다가는 정체가 들통 날 판이다.

"괜히 소란 떨지 마라."

주의를 준 켄트는 다시금 침낭에 누웠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병규는 마차 쪽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그 뒤를 샤바가 소리 없이 따랐다.

기사들은 마차를 빙 둘러싸듯 잠에 빠져 있었다.

'마차 안에서 들리는 숨소리가 둘이라. 그 건방진 녀석과 정령술사라는 여자는 안에서 자고 있구나. 숨소리가 꼭 붙어서 들리는 걸 보니 평범한 관계는 아니군'

대충 주위를 살핀 병규는 본격적으로 작업에 착수했다.

음식이 어디 있는지 찾아야 했다.

하지만 굳이 몸소 수색을 할 필요는 없었다.

"주인님. 마차 안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요. 샤바."

머리카락이 더듬이처럼 솟은 샤바가 마차를 가리키며 소곤거렸다. 병규는 매우 편리한 머리카락(?)이라고 생각하며 마차를 살폈다.

마차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소리 없이 안으로 침입하기는 불가능한 상황.

'어쩐다.'

병규는 마차에 엉거주춤 선 채로 고민했다.

우선 마차 안의 괘씸한 놈팡이들을 밖으로 끌어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무슨 수로 끌어내느냐 하는 것이었다.

모닥불 쪽으로 시선을 쓰윽 옮긴 병규.

그의 입가에 사요한 미소가 싹 그려졌다.

표정이 예술이다.

'기왕 뜨거워진 거 내가 아주 활활 달궈주마.'

병규는 살금살금 걸어가 불붙은 나무를 들고 왔다. 그의 움직임은 지독하게 은밀하여 작은 소음조차 일지 않았다. 물론 그 방면에서는 샤바가 최고의 달인이긴 했지만.

'이거 문제일세.'

마차에 물을 붙이려고 했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기름이 필요했지만, 말을 타고 달리는 시대에 그런 게 있을 턱이 없었다.

그가 고민할 때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병규의 옷 속에 들어가 있던 호랭이가 고개를 쑥 내밀었다. 잠시 마차 아래에서 처량하게 일렁이는 작은 불씨를 쳐다보던 호랭이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문제라면 내게 물어봤어야지."

자부심 강한 말과 함께 호랭이의 입에서 흥얼흥얼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자장가처럼 흘러나왔다.

"천하만물은 화염 속에 태어나고, 화염 속에 잠드나니. 일어날지어다. 불의 기운이여."

길게 울며 호랭이가 마차를 향해 두 눈을 치켜떴다.

화염을 일으키는 도술.

눈부신 번쩍임이 마차를 쓸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콰콰쾅!

우렁찬 폭음과 함께 마차 아래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화려하게 작렬하는 불꽃과 함께 폭죽처럼 허공으로 치솟는 마차.

병규는 멍한 눈으로 하늘 높이 치솟은 마차를 올려다보았다.

"좀... 화려한 것 같은데요."

"..."

하염없이 솟구치는 마차를 올려다보는 호랭이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원래 호랭이가 하려고 했던 것은 불의 기운을 활성화시켜 주는 기본적인 도술. 그러나 막상 펼쳐진 것은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하는 폭발력이었으니.

"오... 익스플로전(Explosion)이네. 샤바."

지뢰 밟은 자전거처럼 하늘 높이 치솟은 마차를 보며 샤바가 팔짝 뛴다. 강력한 폭발력의 그것은 얼마 전 프리즘에게서 들은 익스플로전과 같은 것이었다. 폭발력은 황당할 정도로 강화되긴 했지만.

허접한 도술의 막강한 위력에 호랭이가 황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사이. 잠들었던 기사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폭발소리에 잠에서 깬 기사들은 갑자기 주위가 환해졌다는 걸 느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하늘 높이 치솟았던 마차가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콰콰쾅!

거센 폭음이 다시 한 번 터지며 사방으로 마차의 파편이 날았다.

하늘에서 떨어진 불마차.

간신히 잠에서 깬 기사들에게는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같은 재앙이었다.

기사 셋이 마차의 파편에 휩쓸려 날아가 버렸고, 간신히 몸을 뺀 나머지들도 낭패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켄트는 망연한 얼굴로 소리쳤다. 하지만 언제까지 넋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폭탄처럼 떨어진 불마차.

가만 보니 어디서 많이 본 모양이 아닌가. 뒤늦게 도련님의 존재를 기억해 낸 켄트는 파편을 뒤집어쓴 수하들을 독촉했다.

"어서. 불을 꺼라. 마차 안의 도련님을 구해라."

부하들을 독려하면서도 그 스스로 칼을 뽑아 들고 마차로 달려들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공작의 자제다. 단지 그 하나의 목숨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나 여기 있네. 컨트 경."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반가운 음성에 켄트는 기성을 부르짖었다.

죽은 줄 알았던 도련님이 소환술사에게 안긴 채 천천히 밑으로 하강하고 있었다.

'어? 두 사람 발밑에 뭔가가 일렁이는 걸?'

기사인 척하고 있던 병규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잘못 본 게 아닌가 눈을 비볐다. 하지만 여전히 일렁거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일렁거림은 주위를 경계하던 정령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저것도 분명 바람의 정령인가 뭔가 하는 건가보군.'

다른 점이 있다면 샤바에게 설득당한 정령보다 일렁거림이 크다는 정도.

'그나저나 보기 좋은 걸.'

청년과 정령술사는 거의 벌거벗고 있었다. 예상대로 마차에서 잠만 잔 게 아닌 모양이다.

"라이트 도련님. 무사하셨군요."

청년과 정령술사가 사뿐히 내려서자 켄트가 반갑게 달려갔다.

"어떻게 된 일인가?"

라이트라 불린 청년의 음성엔 짜증이 하나 가득 묻어 있었다.

"그것이 .... 저희도."

"그렇겠지.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난 어떻게 된 일인지 대략 알 수 있을 것 같다."

"네?"

예상외로 차분한 라이트의 말에 켄트는 어정쩡한 표정이 되었다.

"너. 도대체 누구지?"

라이트는 정확히 병규을 손가락질했다.

물론 그가 병규의 정체를 밝힐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정령술사인 요엔 덕분이었다.

구사일생으로 마차에서 탈출한 요엔은 크게 당황했다. 실프에게 주변을 경계하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아무런 보고도 받지 못한 것이다. 때문에 바람의 중급 정령 슈리엘을 소한하여 대략의 사정을 캐물은 것이다.

슈리엘은 어정쩡하게 서 있는 두 기사를 지적하며, 외인이라는 경고의 말을 해주었다.

"흐음."

병규는 침음성을 흘렸다.

설마 이렇게 쉽게 정체가 드러날 줄이야.

하긴 호랭이의 도술이 화려하게 터질 때부터 틀어진 일이었다.

"오라. 대충 알겠군."

수리엘이 적이라고 알려준 기사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라이트는 두 눈을 번뜩였다. 짐작 가는 놈들이 있었다.

"넌 분명 낮의 그 녀석들 중의 하나렷다? 누구냐? 비굴하게 무릎을 꿇은 사내자식이냐? 아니면 눈물을 질질 짜던 천한 계집이냐?"

라이트의 천박한 말투에 병규는 일부로 목소리를 굵게 하며 대소를 터트렸다.

"움화화화화. 과연 생긴 만큼 지껄이는 말도 오만 방자하구나. 날 보고 뭐라고? 흐흐흐. 미안하지만 헛다리 짚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지나가던 의적 '에이'다."

"의적 에이?"

라이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근래 들은 농담 중에 제일 황당한 소리다.

"헛소리!"

"믿고 안 믿고는 자유야. 아! 그리고 얘는 지나가던 의적 '비' 라고 하지."

"가당찮은 녀석들이군. 그런데 네놈이 입고 있는 갑옷의 주인은 어디에 있지?"

"저쪽에 있다. 무사한지는 안 물어보나?"

"흥. 몰래 숨어든 쥐새끼에게 당하는 멍청한 녀석들이라면 필요 없지."

말과 함께 라이트는 켄트를 슬쩍 돌아보았다. 켄트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호오. 그 쥐새끼에게 네가 당해도 그런 소리가 나올까?"

"하하. 과연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이로구나."

웃음과 함께 라이트는 켄트를 눈짓했다.

스르릉.

차가운 치찰음.

칼을 빼든 켄트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선다.

"네 녀석이 누구인지는 모르겠다만 오늘 몸 성히 돌아갈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내가 할 소린 걸? 내가 곱게 물러날 거라는 생각은 버리라구. 이미 배알이 꼬일 대로 꼬였으니까 말야."

"머리가 어떻게 된 녀석이로군. 해치워."

"네."

묵직한 음성과 함께 네 명의 기사가 나섰다.

이번 여정에 참가한 기사는 총 10명. 그중 둘은 이미 병규에게 소리소문 없이 당했고. 또 셋은 마차의 파편에 휩쓸리고 말았다.

그런 이유로 현재 남아 있는 인원은 다섯.

그중, 인솔자인 켄트를 뺀 나머지 기사들이 모두 나선 것이다.

달빛에 반사된 칼날이 번뜩번뜩 시퍼런 빛을 뿜었다.

기사들의 표정 또한 칼 빛처럼 스산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을 맞는 병규는 여유만만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식당 종업원처럼 허리까지 굽실거린다.

"오냐. 가주마."

분노한 기사들이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었다. 막 그들의 검이 병규의 몸을 난자하려는 순간.

철컹.

갑옷이 움직이는 쇳소리와 함께 병규의 신형이 사라졌다.

"아니!"

놀란 기사들이 어쩔 줄 몰라 할 때, 돌연 등 뒤에서 차각차각 하는 쇠 비벼대는 소음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우선 한 분!"

기사들이 고개도 돌리기 전, 한 줄기 바람이 폭풍처럼 그들 사이를 휩쓸었다.

터엉.

"큭!"

숨넘어가는 신음과 함께 기사 하나가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진다.

"아닛!"

눈 깜짝할 사이에 동료가 쓰러지자 기사들은 경악했다.

이토록 빠른 움직임이라니.

단련된 그들의 동체시력으로도 흐릿한 그림자만 잡힐 뿐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상대가 풀 플레이트 메일(full plate Mail)을 착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거대한 철판이나 마찬가지인 갑옷의 무게를 생각해보면 기적과 같은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이 생각해볼 수 있었던 가능성은 한 가지.

"경량화 마법에 헤이스트를 사용하는 놈이로군."

"주의해라. 적에겐 마법사 동료가 있다."

그들은 적당히 거리를 벌리며 포위하듯 병규를 감쌌다. 그러나 주의한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기사들이 움츠러들자 병규는 오히려 더 기가 살아 마음껏 날뛰었다.

"두 번째 손님!"

차각차각차각.

자욱한 안개처럼 스멀스멀 몰려드는 요란한 치찰음. 그리고 다음 순간, 큭 하는 신음과 함께 또 한 명의 기사가 비질에 쓸린 낙엽처럼 허공을 날았다.

동료기사들이 다급히 병규에게 검을 휘둘렀을 때엔, 이미 그의 신형은 어둠 속으로 묻혀든 다음이었다.

꿀꺽.

긴장한 기사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차각차각차각차각.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치찰음.

머리털이 쭈뼛 솟는다.

어느새 그들의 손아귀는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리고 다음순간 어김없이 들려오는 병규의 음성.

"자! 이번엔 한꺼번에 두 분!"

"보였다!"

용케 병규의 움직임을 잡은 기사들이 칼을 높이 쳐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대응은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미처 치켜든 칼을 휘둘러보기도 전에 병규의 주먹이 그들의 복부를 강타한 것이다.

빠방.

철퇴로 후려친 것과 같은 충격!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두 기사의 몸뚱이가 수직으로 상승했다가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쿨럭."

"켁켁."

호되게 배를 두드려 맞은 그들은 허리를 기역자로 꺾으며 저녁에 먹은 음식을 다시 확인해야 했다.

"이럴 수가."

라이트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기사 넷이 쓰러지다니. 너무도 빠른 공격이라 기사들이 어떻게 쓰러졌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무슨 저런 황당한 녀석이 다 있단 말인가.'

허접한 병사 넷이 당한 것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상대는 기사다.

그것도 초보가 숙련된 기사들.

그런 실력자들을 불과 눈 몇 번 깜빡일 사이에 때려눕히다니.

공작가의 수많은 실력자들 가운데 그 누구도 지금과 같은 재주를 보여준 자가 없었다.

'아니야. 놈은 몸이 빠른 것뿐이다. 실제 실력은 대단할 것도 없어. 무엇보다 검사도 아니지 않은가. 권투사가 힘을 써봐야 얼마나 쓴다고...'

라이트는 이를 악물었다. 지나가던 의적 '에이'를 노려보는 그의 두 눈이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보기보다 꽤 하는군."

굳은 얼굴로 켄트가 나섰다.

"어서 나오시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병규가 그를 반갑게 맞았다. 켄트는 콧수염을 슬쩍 한 번 쓰다듬더니 곧장 칼을 뽑아 들었다.

"도적과 긴말 주고받을 필요는 없겠지."

차앗!

섬전같이 날아드는 칼 빛. 상대의 몸이 날렵하니 아예 움직일 틈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부웅 하고 휘둘러지는 검에 희뿌연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맺혀있었다. 병규는 슬쩍 허리를 틀어 피했다. 그러나 켄트의 검술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쉬익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검의 방향이 급격히 틀어지는 게 아닌가.

멋모르고 있다가는 허리가 잘릴 판!

깜짝 놀란 병규는 즉시 발끝을 튕겨 몸을 솟구쳤다.

휘익 ... 하며 발밑을 스쳐가는 칼바람 소리.

'이거 가볍게 생각할 수 없겠는걸.'

멀찌감치 간격을 둔 병규는 반짝 긴장했다.

갑옷의 무게가 부담스럽다.

움직임도 부자연스럽고, 무거워서인지 평소보다 굉장히 둔하게 느껴진다.

두근거리는 가슴.

무서워서일까. 아니면 상대할 만한 상대가 나타난 것이 기쁜 것일까.

'요수의 발톱을 쓸까?'

그의 고개가 흔들렸다.

요수의 발톱은 너무 특이한 능력이다.

자칫 정체가 까발려질 위험이 있다.

'굳이 요수의 발톱을 사용할 필요도 없지.'

뚜둑. 뚝.

병규는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소리를 냈다.

마침 수면 중 급하게 일어난 상대는 갑옷도 입지 않고 있었다.

"여유를 부리다니."

노호성을 지르며 켄트가 다시 달려왔다.

단순하지만 무거운 검술이 공간을 바짝 압축해온다.

사실 켄트의 검술은 병규가 지구에서 상대한 능력자들에 비하면 조잡하게 느껴질 정도로 단순했다.

그러나 대신 힘이 넘쳤다. 특히 검신에 일렁이는 아지랑이 같은 기운은 불길한 느낌까지 주었다.

검 끝을 지그시 쳐다보던 병규는 예기가 목을 찔러오는 순간, 슬쩍 뒤로 피했다.

"소용없다."

수평으로 베어오던 검이 병규를 쫓아 비스듬히 꺾여진다. 허나 이미 한 번 경험한 변화.

두 번이나 같은 수법에 당해줄 정도로 호락호락한 성격은 아니다. 고개를 슬쩍 틀며 검을 피한 병규는 어깨로 슬쩍 켄트를 밀었다.

"어. 어...."

켄트의 발이 꼬이며 볼썽사납게 휘청거렸다.

"이 놈이."

도련님 앞에서 추한 꼴을 보였다고 생각한 켄트는 괴성을 질러대며 검을 뿌렸다. 사방팔방으로 힘차게 휘둘러지는 검.

'쓸 만한 건 검의 방향을 트는 기술뿐인가?'

바람에 나부끼는 낙엽처럼 가볍게 몸을 날리던 병규는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맺히기에 뭔가 대단한 재주가 있겠거니 잔뜩 기대했는데, 이건 영 수준이 낮다.

'후딱 해치우고 가야겠군.'

병규는 번개처럼 주먹을 켄트의 안면으로 날렸다.

무지막지한 빠르기.

갑자기 시야를 꽉 채우는 강철 건틀렛.

"엇!"

깜짝 놀란 켄트는 급히 검을 들어 앞을 막았다. 그런데 얼굴을 찔러오는 건틀렛이 돌연 비스듬히 방향을 트는 것이 아닌가.

익숙한 변화.

그것은 그의 케이에서 가문에서 비전으로 내려오는 검술을 권법으로 펼친 것이다.

"이, 이건!"

채 경악성을 터트리기도 전, 터엉 하는 쩌릿한 타격음과 함께 그의 검이 땅에 떨어졌다.

켄트는 망연자실했다.

놈이 어떻게 가문의 비전 기술을 사용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그걸 물어볼 정신이 없었다.

기사가 검을 떨어뜨린 것은 목숨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 때문에 죽기 전엔 검을 놓지 못하도록 훈련을 받는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검을 놓치다니.

목구멍을 저려오는 절망감.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 손을 내려다보니 두 손 모두 기이한 방향으로 부러져 있었다.

"미안. 원래는 관절만 뺄 생각이었는데. 강철장갑이 너무 둔해서."

병규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마복에게서 훔쳐낸 진천추운권(震天抽雲拳)은 섬세한 손동작이 요구되는 가공할 절기다. 그걸 강철 장갑을 낀 채 사용했으니 당연히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걱정 마. 이제부터는 제대로 해줄게."

건틀렛을 벗은 병규는 손가락을 현란하게 움직여 보였다.

병규는 켄트를 다른 기사들처럼 쉽게 기절시킬 생각이 없었다.

그건 너무 가벼운 처벌이다.

말 위에 올라탄 채 사람을 지그시 내려다보던 그 시선.

놈에게 제이콥이 느낀 굴욕감을 그대로 돌려줄 생각이다.

"기대하라고."

"!"

켄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병규가 스산한 살기를 머금고 켄트에게 다가가고 있을 때, 라이트는 정령술사인 요엔을 닦달하고 있었다.

"한눈을 팔고 있는 지금이 기회다. 놈을 처치해."

상황이 불리해지자 그는 평소의 냉정함을 잃어버렸다. 목소리마저 조급함이 느껴졌다.

요엔은 조금 꺼림칙한 얼굴로 이미 소환한 슈리엘을 불렀다.

"창공의 수호자여. 날카로운 발톱이 되어 적을 갈기갈기 찢어 발길지어라."

계약자의 명령에 슈리엘의 두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끼이이익!

날개를 펼친 슈리엘은 찢어지는 파공음으로 변해 병규를 덮쳤다. 바람의 정령이 펼치는 윈드 커터(Wind cuttur)!

이때, 병규는 켄트에게 집중하던 때라 슈리엘의 급습에 미처 대비하지 못 했다.

막 칼날 같은 바람이 병규를 난자하려던 찰나.

"멈춰!"

샤바가 병규의 앞을 가로막았다.

"바보 같으니. 같이 죽으려고 환장했구나."

요엔이 눈썹을 치켜뜨며 일갈했다. 슈리엘은 계약자가 지적한 목표를 난도질하게 될 때까지 앞을 가로막는 것은 그 무엇이든 찢어발긴다. 구한답시고 앞을 막아봤자 같이 죽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미소를 송두리째 날려버릴 만한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분노한 설녀처럼 매섭게 날아가던 슈리엘이 샤바와 마주치는 순간, 따뜻한 봄바람처럼 풀어져 버린 것이다.

"좋아. 착하지. 아가. 샤바."

샤바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투구를 뒤집어쓰고 있어 아무도 그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슈리엘은 만족한 듯 길게 호성을 질렀다.

살랑살랑 갑옷 밖으로 흘러나오는 샤바의 검은 머리칼을 어루만지는 모습이 마치 연인에게 애교를 부리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요엔은 경악했다.

계약을 맺은 정령이 주인을 배신하다니.

들어본 적도 없는 이야기다.

문득 그녀는 떠오르는 게 있는 듯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이제 보니 실프의 경보를 막은 것도 바로 네놈이었구나."

샤바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요엔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네놈. 정령술사냐?"

샤바는 고개를 저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은 이유는 특유의 샤바거리는 말투 때문에 정체가 탄로 날까 저어한 때문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요엔은 답답함을 느꼈다.

"이익, 뭐, 뭐하는 거야. 저 버릇없는 두 놈을 당장 죽여버리지 않고!"

라이트는 길길이 날뛰었다.

정령을 볼 수 없는 그는, 요엔이 소환한 바람의 중급 정령을 샤바가 한순간에 홀려버렸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때였다.

"크으으으윽!"

억눌린 듯한 신음성이 밤하늘을 갈랐다.

켄트였다.

그는 두 다리 관절이 빠진 채 바닥을 기고 있었다.

라이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믿었던 요엔은 검은 머리의 벙어리 녀석에게 옴짝달싹 못하고 있고, 이제는 켄트마저 맨손의 상대에게 당해버린 것이다.

최악의 상황.

"자. 전채요리는 충분히 먹었으니, 이제부터 메인디쉬를 즐겨 보실까?"

손가락을 꺾으며 병규가 다가섰다.

"으헉! 가, 가까이 오지 마. 네 놈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느냐! 필립 공작가의 문장이 보이지도 않느냐!"

라이트는 발작적으로 고함을 질렀다.

병규는 손가락을 들어 투구 안의 귀를 파는 듯한 흉내를 냈다.

"어디서 개가 짖나? 거 시끄러운 똥개네. 그저 버르장머리 없는 개는 그저 패는 게 약이지."

병규의 보폭이 커졌다.

성큼성큼 걸어오는 병규를 보고 라이트는 식은땀을 비처럼 흘렸다. 그가 언제 이런 꼴을 당해보았겠는가. 지금까지 살면서 모든 일이 그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그에게 세상 사람은 단 두 가지 부류가 있었을 뿐.

마음에 드는 놈과 마음에 안 드는 놈.

마음에 안 드는 놈이 있으면 그저 손가락만 지그시 내밀면 그 뿐. 충성스런 기사들이 그의 손발이 되어 거추장스런 것들을 대신 치워주었다. 간혹 기사들만으로 어쩔 수 없는 상대는 공작인 부친이 직접 해결해주었다.

그런데, 지금 부친은 멀리 떨어진 상태고, 충실한 기사들은 죄 기절한 상태이며, 막강한 켄트마저 저만치 다리관절이 뽑힌 채 고통스런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철컥철컥 쇳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병규가 그에겐 죽음의 사신보다 더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저, 저리가."

라이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비명을 질렀다.

"재수 없는 녀석."

환멸을 느낀 병규가 라이트를 발로 걷어차려 할 때다.

"잠깐."

요엔이 병규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정령은 샤바에 의해 봉쇄당했지만 그렇다고 라이트가 당하는 모습을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쨌건 그녀는 공작가의 녹을 받는 사람인 것이다.

병규는 움찔했다.

그도 귀가 있는 지라 방금 전, 그녀가 자신을 해치려 했던 일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상대가 여자다 보니 막상 손을 대기 영 껄끄러웠다.

"설마 여자를 때릴 건가요?"

병규가 망설이자 요엔은 보란 듯이 가슴을 내밀며 대들었다. 병규는 난처한 얼굴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때, 그녀의 그림자에서 샤바가 허깨비처럼 쓰윽 솟아나왔다.

그의 손에는 주먹만 한 짱돌이 들려있었다.

빠각!

둔탁한 소음과 함께 요엔의 몸이 주룩 쓰러졌다.

"넌 여자에게도 인정사정이 없구나."

병규는 질렸다는 듯이 샤바에게 말했다.

무식하게 짱돌로 찍다니.

그 같으면 절대로 못할 짓이다.

요수의 발톱으로 옷을 한 장씩 벗기며 스트립쇼를 하는 거라면 모를까.

하지만 그는 샤바가 원래 인간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했다. 사람이 벌레를 암, 수 구별해가며 약을 뿌리는 게 아니듯, 인간의 남녀차이란 샤바에게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못했다.

"뭐, 어쨌든 난감한 문제도 해결했으니...."

병규는 네 발로 기어가고 있는 라이트를 덜렁 들어올렸다.

"이 악물어라. 잉!"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라이트에게 투구 쓴 얼굴을 들이밀며 병규가 친근하게 말했다.

"히, 히익."

빠바바바바바바박!!

청아한 구타소리가 고요한 달밤을 울렸다. 그리고 그 뒤로 구수한 비명소리가 조용히 이어졌다.

"쩝. 아쉽네."

라이트를 곱게 다져주고 터덜터덜 일행에게로 돌아가는 병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과 기사들을 묵사발 내준 것은 분명 통쾌했다. 하지만 정작 목적이었던 식량은 눈곱만큼도 구하지 못했다. 식량이 들어있던 마차가 모두 불타버렸으니 가져오고 싶어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절반의 성공이라 할 수도 없을 결말이다.

"이게 다 호랭이 때문입니다. 어쩌자고 마차를 폭파시켜요? 제가 언제 귀한 식량 가지고 볼꽃놀이 하자고 했습니까?"

"크흠. 그게 ... 원래는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

지은 죄가 있는지라 호랭이는 병규의 부리부리한 눈길을 외면하며 말끝을 흐렸다.

호랭이는 억울했다.

원래는 그저 화(火)의 기운을 돋워주는 도술을 가볍게 부린 것뿐이다.

정말로 가볍게.

개미 눈곱만큼 말이다.

그런데 그게 왜 폭발하느냔 말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괴사였다.

병규가 호랭이를 핍박하고 있을 때다. 조용히 뒤를 따르고 있던 샤바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저. 주인님. 샤바."

"왜?"

"먹을 거라면 ... 챙겨뒀는데요."

"무엇이?!!!"

병규와 호랭이의 고개가 홱 뒤로 돌아갔다.

"그게 정말이야?"

"네. 샤바. 필요할 것 같아서 챙겨두었어요."

병규는 놀라면서도 기뻤다.

화염에 불타고 있는 마차에 이 녀석이 과연 언제 들어가서 식량을 챙겨왔단 말인가.

정말로 놀랄 일이다.

"이 녀석. 너무 잘했다."

병규는 샤바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이 순간만큼은 샤바가 더없이 귀여웠다.

덕분에 자칫 헛고생이 될 뻔한 일이 멋지게 마무리 된 것이다.

"가져와요. 샤바?"

샤바가 귀엽게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물론!"

병규와 호랭이는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와아 ..... 그럼 곧바로 가져올 게요. 샤바."

주인의 신임이 기쁜지 제자리에서 팔짝팔짝 뛰던 샤바는 손을 흔들며 어두운 밤길을 뛰어갔다.

사라지는 샤바의 뒷모습을 보며 병규는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오늘따라 녀석이 많이 귀여워 보이네요."

"그러게 말이다."

맞장구를 치듯 호랭이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잠시 후, 콧노래를 부르며 샤바가 끌고 온 것을 본 병규와 호랭이의 얼굴이 단번에 해쓱해졌다.

식량이라며 샤바가 들고 온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열 마리의 말을 끌고 왔던 것이다.

멍해진 얼굴로 호랭이가 더듬더듬 물었다.

"그거 ... 혹시 기사들의 말 아니냐?"

"네. 맞아요. 샤바."

병규와 호랭이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그 순간 둘의 뇌리에 동시에 떠오는 생각은 ....

'하여간 다리만 달려있으면 뭐든지 주워오는구나.' 라는 것이었다.

"저. 또 뭐 잘못한 거예요. 샤바?"

고개를 움츠린 샤바가 걱정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지금까지 병규에게 잘 보이려다 혼난 게 몇 번이던가.

발로 꼽을 수도 없을 지경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오늘은 주인의 기분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휴. 아니야. 잘못한 거 없다. 이번만은 잘했어."

병규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흔들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이거라도 가져가지 뭐."

타던 말을 먹는다는 게 좀 꺼림칙하긴 하지만, 몬스터의 엉덩이 살을 베어 먹는 것보다는 백번 나으리라.

"그나저나 이 말을 어디서 얻었다고 해야 하나."

다시 한 번 난감한 생각이 드는 병규였다.

병규는 우선 말안장만 남겨두고 나머지 것은 모두 버렸다.

말 위에 실려있던 짐을 버리던 중 병규는 의외의 횡재를 했다.

약간의 건량과 함께 돈주머니가 나왔던 것이다. 건량은 간식거리밖에 되지 않았지만, 반짝거리는 동전을 꽤 매력적인 물건이었다.

'더 있을지도 모른다.'

금화의 누런 광택에 정신이 혼미해진 병규는 부리나케 짐들을 뒤졌다. 그러던 중 백마에 실린 작은 상자에서 금궤를 발견하고 말았다. 상자 안에는 손바닥만 한 금궤가 10개나 들어 있었다.

'흐읍'

병규의 숨이 가빠졌다.

'이걸 가지고 갈 수만 있다면.'

병규의 두 눈이 몽롱해졌다.

'더! 더! 있을지도 몰라.'

광포해진 병규는 이미 뒤졌던 짐까지 다시 뒤지는 열의를 보였다.

그렇게 구리구리한 냄새를 풍기는 양말까지 뒤집어가며 찾아낸 동전은 금화 50개, 은화 33개, 그리고 녹색 동전과 구릿빛 동전 여러 개. 또 눈부시게 빛나는 금궤 10개였다.

"만세."

병규는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불렀다. 로또에 당첨이라도 된 듯이 기뻤다. 그 모습을 보고 호랭이가 혀를 찼다.

"쯧쯧. 하여간 속물 같으니."

하지만 병규의 헤벌쭉 벌어진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잘했어. 아주 아주 아 ... 주 잘했어."

흡족해진 병규는 샤바의 뒷머리를 정성스레 쓰다듬어 주었다.

골칫덩이가 한순간에 귀염둥이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금궤와 동전을 깡그리 수급한 병규는 요수의 발톱으로 말안장에 새겨진 공작가의 문장까지 죄다 긁어버린 후 태연한 모습으로 일행에게 돌아갔다.

"어디 갔었던 거야?"

없어진 그들을 찾아 헤맨 듯, 병규를 발견한 프리즘 용병들이 걱정스런 말을 건넸다.

그들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 병규는 가슴이 찡 ... 할 뻔했는데.

나중에 남자고 여자고 모두 샤바만 걱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는 그만 여린 가슴이 살포시 아파왔다.

"그런데 이건 어디서 난 말이냐?"

제이콥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주웠습니다."

병규는 시침 뚝 떼고 대답했다.

"주워?"

사람들의 얼굴 위로 엷게 주름이 진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끈적끈적한 그들의 시선에도 병규는 절대 굴하지 않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볼일을 보러 꽤 멀리까지 나갔는데 말발굽소리가 나더라.

이상한 생각이 들어 달려갔더니 말들이 뿔 달린 짐승과 달밤에 체조를 하고 있더라.

버려진 말인 것 같아 잡으러 갔더니 도망가더라.

약이 올라 죽어라고 쫓아다니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걸리고 만 것이다.

병규의 설명을 들은 모두의 얼굴,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뭐? 말들이 단체로 달밤에 체조를 해?"

'미노타우르스와?'

물론 병규가 언급한 짐승은 소였지만, 이 동네에선 미노타우르스라고 하는 흉악한 몬스터였다.

"혹시 이 말들은 ...."

말이 딱 열 마리인 것으로 확인한 프리먼이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설마 ...."

제이콥 또한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그러나 곧바로 벌어진 사건에 때문에 그들의 의구심은 휭 하니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침을 게게 흘리고 있던 호젤이 느닷없이 말의 목덜미를 물어버린 것이다.

당연히 말은 죽는다고 몸부림을 쳤다.

"헛. 말려."

"호젤. 생으로 먹으면 탈난다. 익혀 먹어야지."

그렇다.

그들의 굶주림을 참다가 이미 한계상황을 살짝(?) 넘은 상태였던 것이다.

뇌리 한 구석에서 살며시 고개를 쳐들던, 버르장머리 없는 기사들의 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일찌감치 사라지고 없었다.

호랭이까지 사람이 된다고?

"초원이다."

핏빛 대지 너머 파란 초지가 바다처럼 펼쳐져 있었다.

병규는 두 손을 들어올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바람결에 파도처럼 출렁이는 초지를 보니 마음까지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붉은 대지를 벗어난 것이다.

모두들 초췌한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초지를 반나절쯤 더 가자, 저 멀리 흐릿하게 성의 모습이 보였다.

"저기가 바로 트라우마다."

성은 멀리서 보기보다 훨씬 거대해서 가까이서 보니 한참을 올려다봐야 할 정도였다.

"와. 높네요."

병규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물론 지구엔 이보다 수십 배는 더 높은 고층빌딩이 즐비했지만, 이 성은 사람의 손으로 한 층 한 층 쌓아올린 것이라, 유적을 보는 것처럼 고풍스런 느낌이 풍겼다.

"하하. 트라우마 성의 높은 성벽은 대륙제일이지. 처음 보는 사람은 누구나 놀라기 마련이라고."

병규를 시골뜨기로 착각한 제이콥은 득의양양 대소를 터트렸다.

유난히 즐거워하는 모습에 병규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호젤이 그의 귓가에 가만히 속삭였다.

"제이콥은 이 지역 토박이야. 오 년 만에 고향을 찾아온 거니 얼마나 기쁘겠니?"

"아하!"

병규는 손바닥을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슬쩍 제이콥을 보니 헤벌쭉하게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보기보다 온화한 사람이네.'

그를 보며 빙그레 웃는 병규였다.

"아아. 목욕이 하고 싶어.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그고파."

거대한 성문이 보이자 호젤을 말 위에서 몸부림을 쳤다. 눈앞에 욕조가 있으면 당장 뛰어들 것처럼 부산스러웠다.

하긴 목욕을 해본 지 한참 오래 되긴 했다. 붉은 대지에서는 마실 물 말고는 몸에 물을 묻혀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여자인 그녀가 그 정도였으니, 제이콥이나 고든 같은 남자들은 언제 목욕을 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아치형으로 높게 세워진 성문 앞은 성안으로 들어서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참 기다려야겠는 걸."

호젤은 말 위에 축 늘어졌다. 성문에서의 철저한 검문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한시라도 빨리 따뜻한 목욕물 속에 몸을 담그고 싶은 호젤에겐 정말이지 기다리기 힘든 시간이었다.

그때, 제이콥이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

"저번의 그 여관 알지? 먼저 가 있어."

"무슨 볼일이야?"

"아무래도 저걸 처리해야 할 것 같아."

제이콥은 뒤쪽의 빈 말들을 턱짓했다.

처음 병규가 끌고 온 말들은 모두 열 마리였으나, 그중 한 마리는 호젤의 식탐에 의해 희생되고 현재는 아홉 마리가 남아 있었다.

눈치가 빠른 호젤은 제이콥이 무엇 때문에 자리를 비우려는지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음. 알았어. 그럼 이따 봐."

"그래."

호젤에게 일행의 선두 자리를 넘긴 그는 병규와 샤바에게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여기서 말들을 처분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네?"

병규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였다. 갑자기 말을 처분하자고 하는 뜻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말장수도 아니면서 빈말을 아홉 마리나 끌고 가는 건 사람들 눈에 너무 띄는 행동이야. 혹시나 뒤늦게 말 주인이 알게 된다면 일이 복잡해질 수도 있다. 그러니 성에 들어가기 전에 처분하는 것이 좋을 거야."

"흐음. 그렇겠군요."

제이콥의 제안에 병규는 주저 없이 말들을 넘겼다.

같이 여행하는 동안 지켜본 바, 제이콥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설령 그가 떼어먹고 달아난다고 해도 절대 손해 보는 것은 아니다. 본래부터 말들은 남의 것을 허락 없이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조금 후에 여관에서 보기로 하지."

병규에게 말들을 인수 받은 제이콥은 즉시 말머리를 돌려 성벽을 따라 걸었다.

지루할 정도로 신중하게 걷다 어느 지점에서 발을 멈추었다. 그리곤 주위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성벽에 다가갔다.

쿵쿵쿵쿵쿵.

처음엔 다섯 번을 두드렸다.

참시 쉬었다 두 번. 그 다음엔 세 번을 두드렸다.

그그긍.

묵직한 괴음과 함께 놀랍게도 성벽의 한쪽이 갈라졌다.

"자네로군."

문처럼 비스듬히 열린 성벽 틈에서 나온 사내는 비쩍 마른 몸에 날카로운 안광을 가진 자였다.

"오랜만이야."

제이콥은 웃으며 인사말을 건넸지만 사내의 표정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무슨 볼일이냐?"

사내가 물었다.

"물건 좀 처분할까 해서."

제이콥의 말에 사내는 그가 끌고 온 말들을 쓱 훑어보았다. 꼼꼼하게 확인하고, 별 다른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사내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소란 떨지 마라."

"물론."

사내의 경고에 제이콥은 매력적인 웃음을 보였다.

은밀한 출입구 안쪽은 지저분한 빈민가였다.

바람만 불면 휙 날아갈 것 같은 집들. 역한 냄새. 때가 꼬장꼬장한 어린아이들.

제이콥은 익숙한 풍경 속으로 조용히 길을 걸었다.

그가 아홉 필의 말을 끌고 찾아간 곳은 빈민촌 내에서도 가장 허름한 곳이었다.

"아니 이게 누군가?"

하품을 하며 무료한 오후를 보내던 노인이 제이콥을 반갑게 맞았다.

"여전히 정정하시네요. 잭."

"정정은 ....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지. 그런데 어쩐 일인가? 설마 실없이 노인네 얼굴을 보러 예까지 왔을 리는 없을 테고."

"좀 처분할 게 있어서 말이죠."

"처분할 것이라."

노인의 시선이 제이콥이 끌고 온 말들에게로 옮겨졌다.

"흐음. 좋은 말들이군. 제대로 키웠어. 길도 잘 들인 것 같고 .... 정상적으로 구한 것 같지는 않군."

노인의 빠른 눈치에 제이콥은 씁쓸하게 웃었다.

"조용히 처리해 주십시오."

"알았네. 대신 약간의 손해는 감수하겠지?"

"당연하죠."

일일이 말들의 상태를 확인한 노인은 작은 주머니 하나를 툭 던져주었다.

"이 정도면 잘 쳐준 게야."

"네. 그런데 잭."

제이콥은 주머니 안에 얼마가 들어 있는지도 확인하지도 않고 다시 말문을 열었다.

"또 무슨 볼일이 남았나?"

"말을 좀 구하고 싶습니다."

"에잉? 지금 막 말을 팔자마자 또 새로 사겠다고? 그건 대체 무슨 심보인가?"

"하하. 제가 원하는 건 하자 없는 물건이죠."

"쯧쯧."

노인은 혀를 찼다.

"보아하니 골치 아픈 물건을 넘겨받게 된 모양이군. 제일 안쪽의 놈들로 알아서 데려가."

노인은 곧 무너질 것 같은 허름한 천막을 손짓했다.

천막 안으로 걸어 들어간 제이콥은 잠시 후 두 마리의 흑마를 끌고 나왔다. 물론 병규와 샤바를 위한 말이었다.

"말 고르는 눈이 이젠 제법이구나."

"다 잭이 가르쳐 준 거죠."

"그래."

잠자코 고개를 끄덕인 노인은 제이콥에게 던져준 주머니를 다시 회수하여, 그 안에 든 돈의 반을 가져갔다.

그렇게 해서 정작 제이콥이 받은 돈은 금화 10개.

겉으로 보면 노인이 폭리를 취한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일이 잘못되어 주인이 말을 찾아올 경우 노인은 불법유통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오늘 산 아홉 마리의 말들을 모조리 고기로 처분해야 한다.

아홉 마리의 말고기 값으로 금화 10개는 굉장히 비싸게 쳐준 셈인 것이다.

"언제 시간이 나면 한 번 오게나."

"네. 잭도 잘 계세요."

노인은 지팡이를 짚은 채 터덜터덜 걸어가는 제이콥의 등을 지그시 응시했다.

제이콥이 말들을 이끌고 사라진 후, 병규는 심각한 표정으로 성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트라우마 성은 몬스터들의 성지인 붉은 대지에 인접한 도시다.

몬스터들의 습격은 일상다반사로 벌어지는 일이다.

때문에 성문의 경비가 보통이 아니었다. 입성하는 사람들을 통제하는 병사들만 해도 무려 삼십. 성벽 위의 병사들까지 합치면 50명이 넘는 인원이 성문 하나에 배치된 것이다.

신분을 증명할 서류 간은 것이 하나도 없는 병규로서는 자연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의 걱정의 눈치를 챈 호젤이 병규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빙글 웃었다.

"걱정 마. 트라우마의 병사들은 몬스터에게만 엄격해. 이곳은 상인들과 용병들의 출입이 잦아서 신분검사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아. 네."

그녀의 친절한 설명에 병규는 고개를 꾸벅했다.

사실 제이콥들만 아니라면 사람의 이목을 속이고 성안으로 침투했을 것이다.

오히려 그 편이 수월했다. 그의 스피드와 샤바의 능력이라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귀찮더라도 프리즘 용병단에 묻어 들어가는 것도 나쁠 것 같지 않았다.

지루한 기다림 끝에 마침내 프리즘 용병단의 차례가 왔다.

호젤은 병규에게 어깨동무를 한 채 태연히 성문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말처럼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형식적인 질문 몇 마디를 던진 후 들여보내 주었다.

"그런데 무슨 일 있었나요?"

성안으로 걸음 하던 호젤이 성벽 한 쪽을 턱짓하며 물었다. 폭발이라도 있었던지 성벽의 한 쪽이 허물어져,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아아. 요즘 몬스터들이 갑자기 극성이라서."

병사의 대답에 호젤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근래 들어 갑자기 몬스터들이 흉포해졌다는 소문이 있던데. 붉은 대지의 몬스터들도 그런가 보죠?"

"이곳의 몬스터들도 그러냐고? 말도 말게. 가장 심한 곳이 바로 여기야.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원. 몬스터들이 단체로 미치기라도 한 것 같았어."

"그건. 큰일이군요."

호젤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에서 가장 단단한 성벽이 바로 트라우마의 성벽이다. 그런 성벽에 저렇게 엉망으로 허물어진 것으로 보아 대단위 몬스터의 난동이 있었음이 분명했다.

몬스터들이 군대가 주둔한 성에 떼로 달려드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재앙이었다며 병사는 한숨을 쉬었다.

호젤은 대답해 주어 고맙다고 말해주곤 성안으로 발을 옮겼다.

"도무지 모르겠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호젤의 음성에 근심이 묻어났다.

"뭐가요?"

"몬스터 말이야. 왜 갑자기 날뛰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어."

사실 몬스터는 용병들과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다.

길드로 의뢰되는 일의 절반 이상이 상단 호위나 몬스터 퇴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몬스터들이 하나같이 미쳐 날 뛰고 있었다. 이것은 직접 몬스터와 맞닥뜨려야 하는 용병들에게는 생명과 직결되는 심각한 문제였다.

"소문처럼 마왕이라도 강림한 거야? 뭐야?"

호젤은 점점 살기 힘들어진다며 푸념했다.

트라우마는 바호크 제국과 아마스 신성제국의 가교 역할을 하는 도시다. 때문에 붉은 대지라는 몬스터 소굴을 옆에 끼고 있어 성의 형태로 발달되기는 했지만, 그 내부는 상업도시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대륙의 곳곳에서 몰려든 상인들로 시장은 활기를 넘쳤고, 잘 정리된 거리는 사람으로 득시글했다.

워낙에 유동인구가 많아서인지 성문에서부터 으리으리한 여관들이 늘어서 있었다.

여관 앞 골목은 고용된 소년들의 호객행위로 소란스러웠다.

어김없이 일행에게도 소년들이 허리를 굽신거려 왔다.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내내 시달린 뼈마디는 빨리 쉬게 해 달라고 아우성이다. 이런 차에 소년들이 달콤한 말들은 떨치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그러나 호젤은 죄다 무시하고 무작정 뒷골목을 방향으로 잡았다.

"여관은 그저 주인 인정 많고, 음식 맛 좋은 곳이 최고야. 겉보기 번드르르한 곳은 괜히 돈만 쓰게 된다고."

과연 그런 것 같았다.

호젤이 안내한 '트라우마의 새벽'이라는 이름의 여관의 주인은 배불뚝이에 인심 좋게 생긴 양반이었으니 말이다. 음식은 모르겠지만 인정은 많아 보였다.

"여 ~. 이게 누군가. 말썽쟁이 제이콥의 신부 될 사람 사람이잖아?"

프리즘 용병단을 본 여관주인 척은 대뜸 농담부터 던져왔다.

"여관 문 닫고 싶지 않다면 그런 재미없는 농담을 관둬요. 피곤하니 일단 방부터 줘요."

"몇 개나 필요해?"

호젤은 병규와 샤바를 슬쩍 보더니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제이콥과 고든 프리먼이 방 하나, 그리고 그녀가 하나. 마지막 남은 방은 병규와 샤바를 위한 것이었다.

"이층 끝의 전망 좋은 방들을 주지. 그런데 제이콥은?"

"곧 올 거예요. 씻고 싶으니까 목욕물 좀 부탁할 게요."

"그러게."

병규와 샤바의 방은 2층의 세 방중 중간이었다.

짐을 풀고 얼마 후, 제이콥이 돌아왔다. 그는 병규에게 작은 주머니 하나를 건네주었다.

"말을 처분한 돈이다."

주머니 안에는 금화 10개가 들어 있었다. 병규는 이곳의 말 시세가 어떻게 되는지 몰랐다. 하지만 제이콥이 사기를 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병규는 자신의 말도 아닌데 홀랑 다 받아먹는 게 마음에 걸렸다.

"말을 처분하시느라 고생하셨으니...."

병규는 주머니에서 금화 5개를 꺼내어 주었다. 그의 손위에 번쩍이는 금화를 본 제이콥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너무 적나?'

병규는 금화 2개를 더 꺼냈다. 그가 내민 금화를 보며 제이콥은 피식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내가 애들 돈이나 뜯을 녀석으로 보이냐? 됐다. 넣어둬라. 앞으로 필요할 일이 많을 거야."

"하지만...."

"정 마음에 걸리면 너희들 방 값을 그 돈으로 내."

병규는 몇 번 더 권했지만 제이콥은 한사코 거절했다.

'욕심이 없는 녀석들인지 아니면 배포가 큰 녀석인지 도무지 모르겠니.'

밖으로 나간 제이콥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설마 금화를 7개씩이나 줄 줄이야. 그는 이 일을 비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재정을 담당하고 있는 호젤이 이 일을 알면 투덜거릴 게 뻔하기 때문이다.

병규와 샤바가 목욕을 마쳤을 때, 호젤이 문을 두드렸다.

"뭐해? 밥 먹자."

"네."

문 앞에 프리즘 일행이 깔끔해진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나가자 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샤바 때문이었다.

원래부터 샤바의 미모는 대단했지만 막 목욕을 한 모습은 정말 치명적이었다. 특히 여자에게 엄청난 파장을 미쳤다.

"아아. 나 녹아버릴 것 같아."

호젤은 마치 다리뼈가 모두 녹아버린 것처럼 흐느적거렸다.

"대단하군."

"허. 이러다 눈이 높아져 버리면 어쩌지?"

사내들의 입에서도 한숨이 새어나온다.

그런 현상은 식사를 내려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드라센 대륙의 여관들은 대개 숙식과 숙박을 겸업했다. 트라우마의 새벽 역시 마찬가지라 한산하던 실내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용병들로 보이는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 조심스럽게 식사에 열중하고 있는 상인 일행. 양아치로 보이는 녀석들의 고함소리....

마치 인간사의 한 부분을 그대로 축소시켜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일행이 계단으로 내려오자마자 그렇게 시끄럽던 곳이 돌연 조용해졌다.

역시나 이번에도 샤바 때문이었다.

경악한 표정의 사람들은 숨쉬는 것조차 잊은 채 샤바의 얼굴에 집중했다.

쩔겅.

정신없이 수프를 떠먹던 털보의 손에서 숟가락이 떨어졌다.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그런 사실조차 모르는 듯했다.

대단한 몰입도가 아닐 수 없었다.

샤바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도 조금도 어색해하지 않았다. 철없는 아이처럼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주위를 돌아볼 뿐이었다.

"하하. 이거 매번 이러면 곤란해지겠는걸."

제이콥은 어색하게 웃었다.

식당에 불어온 때 아닌 적막은 일행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계속 되었다.

"척. 여기 아무거나 푸짐한 걸로 줘."

"하하. 맡겨주게. 오랜만에 솜씨를 부려보지."

배불뚝이 척은 소매를 걷으며 껄껄 웃었다.

잠시 후 식탁 위엔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푸짐하게 차려졌다. 일행은 며칠 굶은 사람들처럼 요리들을 입안으로 퍼 넣었다.

지난 며칠 동안 먹은 거라곤 양념도 안 된 느끼한 말고기가 전부였으니, 향긋한 냄새의 음식에 환장하며 달려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한참 식사에 열중할 때다.

노인과 손녀로 보이는 소녀가 여관으로 들어왔다.

"음유시인이로군."

노인의 손에는 하프가 들려 있었다.

주인의 하락을 얻은 노인은 실내 한쪽에 자리를 잡고 하프를 켰다. 노인의 주름진 손이 부드럽고도 발랄한 음률을 일으켰고, 손녀는 그 음악에 맞춰 손을 흔들며 귀엽게 춤을 추웠다.

그녀의 춤은 전문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완성도도 떨어지는 엉성한 움직임에 불과했다. 하지만 어려서인지 마냥 귀여워 보였다.

관중들도 마냥 즐거워했다.

소녀를 멍하니 쳐다보던 병규는 괜스레 코밑을 한번 훔쳤다. 뭐가 떠오른 것일까. 그는 글썽이는 눈을 창밖으로 돌렸다.

"왜? 누구 생각나는 사람이라도 있어?"

소녀의 춤을 감상하던 호랭이가 삐죽이 물었다

"아니에요. 그냥."

병규는 어색한 병명을 했지만 천하의 호랭이님을 속일 수는 없었다.

"퀴니지?"

"...."

병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어색한 미소만을 머금었을 뿐이다.

호랭이가 뭐라 또 말을 하려 할 때였다

땀을 흘리며 열심히 춤을 추던 소녀가 스텝이 엉켜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사람들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성이 쏟아졌다.

콰당 하고 꽤 크게 넘어진 소녀의 무릎이 빨갛게 까졌다. 많이 아플 텐데도 소녀는 씩씩하게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치마를 살짝 들어올리며 사과를 한 소녀는 다시금 노인의 노래에 맞춰 절뚝절뚝 춤을 추었다.

그리고 그녀의 춤이 끝났을 때, 사람들은 박수와 격려가 쏟아졌다.

대 호평이었다.

소녀가 노인의 모자를 들고 테이블을 지날 때마다, 사람들은 아낌없이 동전을 던져주었다.

제이콥 일행도 동전을 주었다. 호젤은 소녀를 살며시 안아 주기까지 했다.

병규 역시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그녀의 모자에 넣어주었다.

"휘익~"

고든이 휘파람을 불었다.

병규가 그녀의 모자에 집어넣어 준 것은 금화였던 것이다.

금화의 가치를 모르는 병규가 동전을 주자 소녀는 눈이 동그랗게 변하며 이마가 땅에 닿을 듯이 고개를 숙였다.

"고, 고마워요."

"뭘. 좋은 구경했어."

병규는 그녀의 과분한 인사에 뒷머리만 긁적였다.

제이콥의 이마가 찌푸러졌다.

병규는 큰돈을 준 것은 그의 씀씀이니 탓할 순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큰돈은 항상 귀찮은 일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특히 노인과 소녀처럼 돈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전무한 사람들이라면 특히나 더 그렇다.

아니나 다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금화를 보고 탐욕의 눈빛을 흘리고 있었다.

결국 우려하던 사태가 터지고야 말았다.

한눈에도 불량스러워 보이는 패거리들이 노인에게 돌아가는 소녀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호오. 가까이서 보니 꽤 곱상한걸?"

녀석들 중 매부리코에 간사하게 생긴 녀석이 소녀의 팔을 움켜잡았다.

"악."

소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오히려 사내는 그녀를 덜렁 들어올렸다. 돈이 들어 있던 모자는 이미 다른 동료들에게로 넘어간 후였다.

"짭짤하구만. 이참에 나도 댄서로 나가 봐?"

돼지 같은 녀석이 모자 속에서 금을 꺼내들며 킬킬거린다.

"저쪽의 돈 많은 양반이 계속 도와준다면야 충분히 해볼 만하겠지."

매부리코의 사내가 병규를 눈짓하며 찡긋 웃는다.

"푸하하."

"그러네."

양아치들 사이에서 대소가 터져 나왔다.

다분히 시비를 거는 모습이다. 물론 녀석들은 도발에 이쪽이 움찔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렇게 시비가 붙으면 몇 대 쥐어박으며 돈을 뺏을 생각인 것이다.

그때, 하프를 타던 노인이 달려와 그들에게 허리를 굽실굽실했다.

"아이고. 제 손녀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지만 아직 어려서 그런 것이니 용서해 주시게. 이 늙은이가 이렇게 대신 빌 테니."

움찔.

병규의 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새파랗게 젊은 청년들에게 노인이 굽실거리는 모습을 보자니 속에서 불길이 확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못된 녀석들은 끝내 노인을 발로 차는 만행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아이고. 아이고."

노인이 배를 움켜잡으며 끙끙 앓자, 매부리코가 노인 옆에 쪼그리고 앉아 말도 안 되는 괴변을 늘어놓는다.

"우리가 괜히 이러는지 알아? 누군 뼈 빠지게 일해서 구리동전 몇 개 받는데, 어떤 자식은 고작 노래 한 곡 부르고 금화를 받아? 이런 불평등이 말이나 돼?"

"그럼 그럼. 용서할 수 없지. 크헤헤헤."

사내들의 추행을 지켜보던 제이콥이 음식을 나르던 척에게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요즘 이곳 물이 많이 안 좋아졌군."

"뭐, 자네가 자리를 오래 비웠으니 말이야. 타지에서 온 철없는 애송이들이 설철 때도 됐지."

고개를 흔든 척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그보다 더 빨리 나선 사람이 있었다.

"이봐. 그 애를 놔줘"

갑자기 들려온 낭랑한 음성. 모두의 고개가 목소리를 발한 사람에게 향했다.

병규가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 채 양아치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굉장히 열이 받은 듯 그의 얼굴을 벌겋게 달아있었다.

그를 본 양아치들은 놀라기는커녕 입가에 얄미운 미소를 띠었다. 멍청한 고기를 미끼를 물은 것이다.

"허이구. 이건 또 어디서 튀어나온 애송이야. 어딜 가나 꼭 이런 미친 녀석이 있기 마련이지."

"크흐흐. 동화책을 너무 많이 본 거 아냐?"

"오늘 좀처럼 드문 광경을 여러 번 보게 되는걸? 금화를 적선하는 또라이에 개념 상실한 영웅놀이까지 말이야."

그들은 불에 기름을 붓듯 병규에게 조소를 퍼부었다.

프리즘 용병단은 깜짝 놀랐다. 설마 병규가 나설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걱정된 호젤이 몸을 일으키려는데 제이콥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왜?"

이유를 묻는 그녀에게 제이콥은 귓속말을 속삭였다.

"잠시 기다려봐. 넌 병규가 어떤 아인지 알고 싶지 않냐?"

"뭐?"

"넌 설마 호위무사도 없이 붉은 대지를 헤매고 있던 두 아이가 평범한 인물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말과 함께 제이콥은 샤바를 턱짓했다. 이런 소란 중에도 샤바는 식탁 위의 음식에 몰입하고 있었다. 한 손엔 고기를 들고, 다른 한손으론 수프를 떠먹으며 정신없이 음식을 탐하고 있었다.

지금의 소란엔 조금의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병규를 지극히 따르던 샤바의 평소 행동을 보며 이해할 수 없는 무관심이었다.

"정말로 관심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걱정조차 되지 않는 것일까?"

귓가에 속삭이는 제이콥의 말에 잠시 주저하던 호젤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슬며시 자리에 앉는 그녀에게 고든이 나직이 말했다.

"걱정 마라. 위험해지면 그때 나서면 된다."

프리먼마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병규의 귀가 얼마나 밝은지 알지 못했다.

병규는 잠시 생각했다.

그의 본 실력을 보이면 이곳 사람들이 과연 어떤 눈으로 자신을 볼까.

십 미터가 넘는 가공할 만한 점프력. 무지막지한 스피드. 6미터의 혀. 팔락이는 귀.

아마도 괴물이라는 소리밖에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언젠가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 계획이라고 해도 그것만큼은 사양이다. 하지만....

신음하는 노인의 모습이 들어온다. 소녀는 양아치 녀석들의 희롱에 어쩔 줄 모르고 훌쩍거리기만 했다.

그들의 나약한 모습에 바보 같았던 자신의 과거가 겹쳐졌다.

으드득.

병규의 이빨이 갈리며 괴기스러운 소음을 토해 냈다.

"이 녀석들만큼은 도저히 못 봐주겠다."

병규는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뭐냐? 어쭙잖은 기사도라도 보여주시겠다 이거냐?"

매부리코는 병규를 위아래로 훑으며 피식 웃었다.

뒤쪽에 앉은 녀석의 동료들도 한 마디씩 던졌다.

"크큭. 아서라. 젊은 객기에 몸 상할라."

"어딜 가나 꼭 저런 멍청한 녀석이 있지."

"노즈. 살살해라. 애 울겠다."

극도로 화가 치민 병규의 얼굴엔 표정조차 지워졌다. 그걸 본 매부리코는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쫄았냐? 크큭. 대가리 꼬라지하고는. 촌스럽게 검은 머리가 뭐냐? 검은 머리가."

급기야 병규의 머리를 툭툭 쳐댔다. 매부리코가 건드는 대도 병규는 묵묵히 맞고만 있었다.

"넷, 다섯...."

"잉? 뭘 세고 있는 거냐?"

병규는 조용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빚."

"빚? 허야. 돈 말이냐? 돈? 그래. 니가 몇 대 맞더니 이제야 정신을 차렸구나. 잘 생각했다. 알아서 상납한다면 나야 좋지. 어여줘바."

놈은 얄미운 미소를 보이며 뻔뻔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쓱 내려다보던 병규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줘도 돼?"

"하. 이놈 싸가지 보게. 어디서 감히 눈깔을 부릅뜨고 주둥아릴 놀려? 그래그래. 봐준다. 형님에게 헌금도 해준다는데 다 봐주마. 그러니 어여 성의를 보여 봐."

"좋아."

병규의 입술이 가느다란 미소를 그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퍽!

시원스런 타격음과 함께 매부리코의 입이 쩍 벌어졌다.

"한 대."

조용히 읊조린 병규는 쓰러진 노인을 부축했다.

"할아버지."

양아치들 사이에 있던 소녀가 뛰쳐나오며 울먹인다. 병규는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소녀에게 노인을 넘겨주며 방긋 미소를 보였다.

"잠깐만 눈을 감아줄래? 지금부터는 미성년자 관람불가라서 말이야."

소녀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

순진한 그녀의 행동에 병규는 씩 웃었다.

"컥컥!"

배를 맞은 매부리코 녀석은 배를 감싸 쥔 채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했다. 의자 하나를 집어든 병규는 놈의 숙여진 허리를 슬슬 쓸었다.

"딱 좋은 높이군."

순간 그의 얼굴이 야차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의자가 허공을 난다.

"둘! 셋! 넷! ..."

잡초를 밟듯이 자근자근.

병규는 의자로 녀석을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갑자기 벌어진 일에 혼을 빼놓고 있던 양아치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우르르 병규에게 달려들었다.

"쌍. 저 새끼 뭐야."

"의자 잡아. 의자!"

"개 허접 쓰레기 같은 자식이!"

욕지기를 쏟아내며 십여 명의 청년들이 달려들자 식당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넌 또 뭐야!"

병규는 두 눈을 부릅뜨며 양아치들을 맞았다.

휘릭.

나무의자가 나이프를 들고 설치는 망나니의 턱을 상쾌하게 날려버린다.

"켕."

꼬리만 강아지 같은 비명이 터져 나온다. 한 녀석의 턱이 박살이 났는데도 다른 녀석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아우성을 치며 달려들었다.

"잡아! 잡아!"

"쥐새끼 같은 자식."

파도처럼 달려드는 양아치들 사이를 병규는 그야말로 종횡무진, 신들린 듯 나무의자를 휘두르며 날뛰었다.

"뭐야 저게?"

"막 싸움이잖아?"

"개판일세."

프리즘 용병단의 입에서 샛바람이 새어나왔다.

뭔가 한 가닥 실력을 기대했는데 이건 영락없는 개싸움 아닌가.

그나마 작은 덩치에도 불구하고 양아치들의 물량공세에 호기 있게 맞서는 모습이 용하기는 했다.

"하하하."

멍한 얼굴로 병규를 쳐다보던 제이콥이 돌연 대소를 터트렸다.

"저 녀석. 마음에 드는걸?"

그는 불의 굴하지 않고 맨몸으로 달려드는 병규의 행동이 마음에 꼭 들었다.

"막 싸움은 내 전공이니 빠질 수 없지."

그가 팔을 걷어붙이며 나서자 고든과 호젤 역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재미있어 보인다."

고든이다.

"하여간 무식한 사내들 같으니라고. 말로 하면 될 일을 꼭 주먹질이야. 에효. 이렇게 된 이상 어여쁜 내가 나서서 싸움을 말려야겠지?"

은근슬쩍 몸을 일으키며 호젤이 쫑알거린다. 한데 말려보겠다고 나서는 여자가 장갑은 왜 끼는 것인지.

"프리즘 용병단 출격이다!"

"좋아."

"나가자!"

거창하게 함들을 지르며 세 명의 남녀가 아수라장에 합류했다.

"허참."

홀로 남은 프리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병규의 정체를 파악하겠다며 자리를 지키던 사람이 금세 분위기에 휩쓸려서 주먹을 휘두르며 뛰쳐나가는 꼴이란. 마법사인 그로서는 몸이 앞서는 그들의 행동을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었다.

"샤바야. 넌 절대 저 사람들처럼 분별없이 행동해서는 안 된다. 알았지?"

프리먼의 조언에 샤바는 고개만 갸웃했다.

'왜 주인님은 항상 힘을 아끼는 걸까. 샤바'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주인님이라고 생각하는 샤바였다.

병규와 양아치들 간의 패싸움은 제이콥들이 달려들자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괜찮냐?"

제이콥은 씩씩거리고 있는 병규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병규는 고개만 까딱였다.

지금 그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머리는 죄 헝클어지고, 옷은 군데군데 찢어진데다 먼지마저 부옇게 뒤집어쓰고 있어 거지꼴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형편없이 당한 것처럼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실제로 다친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양아치 몇 명 상대하는데 상처까지 입을 정도로 허접한 실력이 아닌 것이다.

"녀석. 보기보다 터프한데?"

호젤이 그의 등을 빵! 치며 하하하 웃는다. 병규가 힐끔 뒤를 돌아보자 그녀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짜식 멋있었다. 흠. 그런데 옷이 망가졌네. 여벌의 옷은 없지?"

이번에도 병규는 고개만 까딱했다.

"그럼. 새로 사야겠다. 내가 좋은 옷가게로 안내해 줄게."

이때 성의 병사들이 여관으로 들어왔다. 누가 싸움을 신고한 것이다.

여관 주인과 제이콥이 나섰다.

그들이 병사들에게 싸움이 아니라 떠들썩한 유흥이었다고 변명하는 동안, 호젤은 병규와 샤바를 데리고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이미 밤이 서서히 뿌리를 내린 시각이지만 거리를 생각보다 훨씬 밝았다. 거리 곳곳을 비추는 마나 라이트 때문이었다.

마나 라이트는 마나석 알갱이에 라이트 마법을 채워놓은 것으로, 수은등만큼 밝지는 않았지만 은은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 때문인지 늦은 시간임에도 시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오랜만의 도시구경에 호젤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정신없이 시장을 돌아다녔다. 병규도 낯선 풍물에 흥미가 일어 지루하지 않았다.

"여기가 좋겠다."

중구난방으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던 호젤이 둘을 데려간 곳은 제법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가게였다.

그곳에서 병규는 호젤이 안내를 자청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어머어머. 어쩜 이렇게 멋있니? 이 옷도 입어 봐. 햐! 최고야. 옷걸이가 좋아서 뭐든 잘 어울리는 구나. 그럼 이건 어때? 아! 쓰러질 것 같아."

그녀는 샤바에게 이 옷 저 옷을 입혀가며 비명 아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감탄사. 그녀의 장난감이 된 샤바가 불쌍해 보일 지경이다.

"에효."

병규가 한숨을 쉬는데, 호랭이가 어깨를 두드린다.

"넌 내가 있잖냐. 어디 입어봐. 봐주마."

"...에휴에휴."

호랭이의 위로에 어쩐지 병규의 한숨은 더욱 깊어진 것 같다.

결국 병규는 편해 보이는 옷 세벌을 골랐고, 샤바는 호젤이 직접 옷을 골라주었다.

호젤이 고른 옷들은 하나같이 남자가 입기엔 지나치게 화려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옷걸이가 좋아서인지 샤바와는 놀랍도록 잘 어울렸다.

"얼마죠?"

"네. 다해서 2실버 5실링입니다."

제이콥이 준 주머니를 꺼낸 병규는 금화 한 개를 꺼내주었다.

금화를 받은 주인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어이쿠. 손님. 지금 저의 가게엔 이렇게 큰돈을 환전해 드릴 잔돈이 없습니다."

"?"

병규가 당황하는 듯하자 호젤이 스윽 끼어들었다.

"아까 전 음유시인에게 금화를 줄 때도 혹시나 했는데, 너 설마 화폐가치를 전혀 모르는 거니?"

병규는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잘 모르겠어요."

"어휴. 어떻게 하면 그렇게 아무것도 모를 수가 있는 거니. 이름 안 잊어 먹은 게 신기하다."

투덜거린 그녀는 병규의 주머니에서 동전을 하나씩 꺼내며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곳의 화폐는 크게 브론, 실링, 실버, 골드로 나뉘어져 있으며, 실링은 브론의 10배, 다시 실버는 실링의 50배, 그리고 골드는 실버의 20배였다.

즉, 브론이 백 원 정도의 가치가 있다면 금화는 백만 원의 가치를 가지게 된다는 소리다.

'결국 아까 전의 싸움은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군.'

옷값을 치르고 나온 병규는 고초를 당한 노인과 소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노래 한 곡 듣고 수표를 뿌린 격이니 기생충이 꼬이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인 것이다. 물론 무지로 인해 생긴 실수였지만 가슴 한쪽이 무거워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저년 늦게 여관으로 돌아가니 일행들 모두가 자고 있었다. 붉은 대지에서 며칠 동안 고생을 했으니 많이 피곤했을 것이다.

"아흠. 그럼 내일 보자."

호젤도 길게 하품을 하며 자신의 방으로 사라졌다.

여관의 방은 푹신한 침대 두개와 좁은 창 하나가 전부였다.

병규는 침대 위에 풀썩 쓰러졌다.

푹신한 이불의 감촉.

얼마 만에 맛보는 부드러움인가.

노곤한 몸이 침대 속으로 한없이 파묻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뭔가 허전했다. 부족한 게 뭘까 생각하던 그는 한참 후에야 호랭이가 보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눈을 이리저리 굴려보니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

창가로 스며드는 달빛 아래, 호랭이가 있었다.

바른 자세로 눈을 착 내리감은 모습에서 구도자의 면모가 얼핏 엿보였다.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보던 병규가 물었다.

"담배 피우고 싶은 걸 참고 있는 거예요?"

이 세계로 넘어온 후로 호랭이는 담배를 피울 수 없어 가끔씩 괴로움을 토로하곤 했다.

"어허. 명상하는 중이다."

"헤에?"

병규는 신기한 듯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지구에 있을 때는 한번도 명상 같은 걸 한 적이 없었잖아요."

"그곳에서야 그랬지. 명상을 하나 안 하나 쥐꼬리만 한 도력만 회복됐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이상하게 기가 충만해서 도력이 쉽게 회복되더구나. 그래서 한번 명상을 해봤다."

"결과는 어때요?"

병규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아마... 며칠이면 충분할 것 같다."

"하하. 잘됐네요."

병규는 껄걸 웃으며 기뻐했다. 하지만 곧 그의 표정이 요상하게 변해버렸다.

"하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걱정인데요."

"또 왜?"

"생각해 봐요. 호랭이의 원래 몸 말이에요. 그 커다란 몸으로 어슬렁거리면 사람들이 얼마나 놀라겠어요?"

호랭이의 본신은 거대한 북극곰조차 '형님 아니십니까?' 라고 외칠 정도로 거대한 덩치였다.

사람들에게 몬스터 취급을 당할 것은 뻔한 일이다.

"그렇게 되면 호랭이는 붉은 대지의 몬스터들과 친구 동생 하면서 살아야 될지도 몰라요."

"어헛. 그 무슨 소릴. 걱정 마라. 신선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설마... 사람으로 변신을?"

"둔갑이라고 한다. 신선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흐흐. 두고 봐라. 샤바가 울고 갈 정도의 미남으로 변해 보일 테니"

호랭이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병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샤바에 이어 호랭이까지 미남이 되어버리면, 평범한 외모인 나는 그대로 두 꽃 미남에게 묻혀 버릴 게 아닐까?'

병규는 달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하이엘프의 맹세

다음 날 식사 자리에서 제이콥이 병규와 샤바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글쎄요."

병규는 뒷머리만 긁적였다.

아직 지구로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했다. 과연 돌아갈 수 있기는 할까?

그의 표정이 한층 우울해졌다.

병규가 우물쭈물할 때다.

"괜찮다면 우리와 함께 다녀도 돼."

호젤이 조심스레 말했다.

"물론 기억이 돌아오기 전까지만 말이야."

"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다. 그런데 더더욱 의외였던 것은 점잖은 프리먼까지 슬그머니 의사를 물어오더라는 것이었다.

"나도 두 사람이 남았으면 하네.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을 길가에 내놓는 것 같아서 영 불안하군."

말을 마친 프리먼은 슬쩍 제이콥의 눈치를 보며 헛기침을 연발했고, 호젤은 무서울 정도로 눈을 반짝이며 대답을 종용했다.

'이 사람들 이제 보니....'

병규는 어렵지 않게 두 사람이 이런 제안을 하게 된 배경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샤바 때문이군.'

두 사람 다 샤바를 탐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병규는 본편에 따라붙는 부록에 불과했다.

"으흠."

제이콥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미간에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사실 그는 병규와 샤바의 처우에 대해 며칠 전부터 심각하게 고민해왔다.

그도 병규와 샤바가 썩 마음에 들었다. 샤바는 모르겠지만 병규는 배짱도 있고, 성격도 무난해서 잘만 가르친다면 충분히 제몫을 해낼 것이다.

문제는 두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하다는 것에 있었다.

기억을 잃었다고 핑계를 대지만 뻔한 거짓말이다.

그의 생각대로 무단가출한 귀족가의 자제들이라면 별달리 문제 될 것이 없겠지만, 만약 큰 범죄를 저지르고 쫓기는 범죄자들이라면 일이 심각해질 수도 있다.

이처럼 용병단에 사람 하나 들이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때문에 용병단의 리더인 제이콥은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도 괜찮다고 본다."

마침내 고든마저 찬성 쪽에 표를 던졌다.

결국 제이콥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졌다. 모두가 찬성하는데 나만 반대할 수는 없지."

푸념을 터트린 그는 진지한 얼굴로 병규와 샤바를 응시했다.

"프리즘 용병단의 이름을 걸고 정식으로 제안한다. 우리 용병단에 들어와라."

"...."

병규는 침묵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그는 아직 이 세계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여기서 이들과 헤어지면 상당 기간 고생을 하게 될 것이다.

반면 이들과 함께라면 자연스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원래 용병들은 일을 좇아 대륙전반을 돌아다녀 정보에 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운이 좋으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방법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병규는 프리즘 용병단을 쭉 훑어보았다.

다들 기대 어린 눈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초롱초롱한 그들의 눈빛에 병규는 어떤 운명의 냄새 같은 것을 느꼈다.

마침내 병규의 입이 열렸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야호."

호젤이 환성을 터트리고, 프리먼은 샤바의 어깨를 토닥였다.

고든 역시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좋아. 병규와 샤바가 일원이 되었으니 축배를 들어야겠지?"

호탕하게 웃은 제이콥은 여관주인에게 맥주를 주문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호젤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낮부터 무슨 술이야. 그럴 정신이 있으면 일거리라도 물어오라고."

"에? 좋은 일도 있는데, 며칠 정도는 쉬자."

"용병단의 자금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려드려야 할까요? 단.장.님?"

호젤이 눈 꼬리를 치켜세우자 제이콥은 금세 꼬리를 내렸다.

"알았다. 알았어. 그렇게 하지."

아쉬운 듯 입맛을 쩝쩝 다신 제이콥은 대뜸 병규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제 보니까 싸움을 좀 하는 것 같던데. 기왕 우리 용병단에 들어왔으니 용병길드에 가입하는 게 어때?"

샤바는 비실비실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이지만 병규라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드에 가입하면 용병이 될 수 있는 건가요?"

"물론이지. 하지만 그냥 가입이 되는 것은 아니야. 간단한 시험에 통과해야 하지."

"어떤 시험요?"

"그건 길드장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 길드장이 물렁한 사람일 때는 돈 몇 푼만 던져줘도 되지만, 반대로 꽤 난이도 있는 시험을 제시하는 경우도 있지. 나와 고든 때엔 통나무 자르기와 대련이었다."

"좋아요. 한 번 해보죠."

용병길드는 시장 한 구석에 있었다.

건물 내부는 거친 용병들이 이용하는 곳답게 단촐했다.

"어떻게 오셨...어? 이게 누구야. 제이콥이 아닌가."

탁자에 앉아있던 애꾸눈이 제이콥을 보고 반색을 한다.

"하하. 몇 년 만에 보는군. 잘 있었나?"

"물론이지. 일 때문이 아니더라도 가끔 들르게. 너무 오랜만에 보니 얼굴을 잊어 먹을 지경이야."

"바쁘다보니 그렇게 됐네."

애꾸눈은 제이콥과 일행을 탁자로 안내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가?"

"뭐, 용병이 길드를 찾을 일이 한 가지밖에 더 있겠어? 할 만한 일거리 좀 소개해 줘."

"일이야 많지. 하지만 천하의 제이콥이 만족할 만한 일거리가 과연 있을까 모르겠군."

"하하. 원 별말을."

겸허의 말을 주고받던 제이콥은 문득 생각난 듯, 어색한 표정으로 않아 있는 병규와 샤바를 불렀다.

"아참, 홉. 이 애들에게 용병 시험을 치르게 해주고 싶은데."

"흐음."

홉이라 불린 애꾸눈의 사내는 꿰뚫는 듯한 시선으로 병규와 샤뱌를 훑어보았다.

"마법사나 정령술사인가?"

"아니. 그런 건 아니네."

홉의 이마에 주름 몇 가닥이 그려졌다.

"그다지 힘을 못 쓸 것 같네만...."

제이콥이 소개시키는 사람치고는 별 볼일 없어 보인다는 뜻이었다.

이런 말이 나올 만도 했다.

겉으로 보기에 둘은 바람만 불어도 휙 날아갈 것처럼 부실해 보였으니 말이다.

처음 본 사람이라면 과연 칼이나 제대로 들 수 있을까 의구심을 품을 정도였다.

홉의 말을 들은 병규는 반발심이 불끈 고개를 들었지만, 한두번 겪는 일도 아니라 목까지 치민 화를 꾹 눌러 참았다.

"하하. 너무 그러지 말고. 시험이나 치르게 해주게. 되고 안 되고는 그 후에 판단해도 되지 않겠나."

"하긴 그렇긴 하지. 그런데 말이야. 최근 우리 길드의 방침이 바뀌었어."

"어떻게 변했나?"

"용병패 발급기준이 좀 강화되었네. 자네도 알다시피 이곳은 붉은 대지를 끼고 있어 위험천만한 곳이 아닌가. 그동안 어중이떠중이에게 마구잡이로 용병패를 발급하다보니 의뢰수행에 실패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지. 덕분에 길드의 신뢰도가 바닥을 쳤네. 보다 못한 신임 길드장이 용병등록 시험을 좀 더 엄하게 바꿨지."

"엄하게 바꿨다?"

제이콥의 반문에 홉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길드에 접수된 의뢰들 중 하나를 성공적으로 수행해야지만 용병패를 발급하게 되었네."

"으음."

제이콥의 이마에 주름이 그려졌다. 병규와 샤바, 둘만으로 의뢰를 수행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내 얼굴을 봐서 좀 봐줄 수 없을까?"

홉은 손을 흔들며 난색을 표명했다.

"안돼. 금패를 가진 자네가 부탁해도 안 되는 일일세."

제이콥은 몇 번 더 부탁을 했지만 홉은 길드장의 엄명이 있었다며 거부의 뜻을 분명이 했다.

"금패라는 게 뭐예요?"

둘 사이의 대화를 엿들은 병규가 호젤에게 물었다.

"길드에서 용병에게 발급하는 용병해 중의 하나야."

이어 호젤은 용병패의 등급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용병패는 크게 세 가지로 구별 되는데, 금패와 은패, 그리고 동패가 그것이다.

동패는 가장 하급을 뜻하는 것으로 길드에 소속된 용병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동패다.

은패는 동패보다 상등의 실력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10년 이상 길드의 의뢰를 꾸준히 수행했거나, 1급 의뢰를 3건 이상 처리한 숙련된 용병에게 지급되었다.

일단 은패만 가지고 있어도 길드의 대우가 상당히 달라졌다. 그만큼 은패 획득이 어려운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부나방 인생이 바로 용병이다. 십 년씩이나 용병 일을 하고도 생존해 있다는 것은 충분히 공경 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다.

앞서 설명한 은패보다 훨씬 획득하기 어려운 것이 금패다.

금패는 길드장이 인정한 특급 이상의 의뢰를 무사히 수행한 용병들에게만 지급되는 것으로, 현재 금패를 소유한 용병은 대륙의 통틀어 고작 33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제이콥이 바로 그런 금패를 가진 특급 용병이었던 것이다.

"호젤은 어떤 패를 가지고 있어요?"

"난 은패야. 나뿐만 아니라 고든과 프리먼도 은패지. 사실 우리 용병단의 규모는 작은 편이지만, 구성원의 질로 따지면 대륙제일이야."

"허. 대단하군요."

병규와 호젤이 용병패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홉을 설득하던 제이콥이 고개를 흔들며 일행에게 돌아왔다.

"휴. 아무리 해도 안 되겠어."

결국 설득하는 데 실패한 모양이다.

금패의 위엄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했지만, 홉은 길드장의 지시라며 추호도 꺾이지 않았다.

"골치 아프게 됐는데. 아무래도 용병패는 나중에 해야 되겠다."

씁쓸한 표정으로 제이콥이 말하자 병규는 씽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지금 해 보겠어요."

"정말이냐?"

제이콥이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당연하죠."

크게 고개를 끄덕인 병규는 샤바를 끌고 홉에게 걸어갔다.

"용병이 되려면 어떤 의뢰든 한 가지를 해결해야 한다고 했죠?"

"그래."

"좋아요. 그 시험을 치르겠어요. 저희에게 의뢰를 맡겨주세요."

설마 비실한 녀석들이 곧바로 테스트에 응할 줄 몰랐던 홉은 의외라는 눈빛을 보였다.

"저쪽 벽에 붙어 있는 게 다 의뢰들이다. 그중에서 아무거나 하나만 해결하면 된다."

"네."

하얀 벽에는 길드원들이 평가한 난이도와 의뢰 내용이 적힌 종이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거의가 호송 임무였는데, 유독 한 가지 특이한 것이 있었다.

"샤도우를 잡아 달라? 음, 시장의 물건을 닥치는 대로 훔치고 있다라. 도둑이잖아?"

난이도는 2등급이었고, 내용은 최근 트라우마의 상가들을 차례로 털고 있는 신출귀몰의 도둑에 대한 것이었다.

샤도우가 출현한 것은 대략 반달 전이었는데, 그동안 놈은 매일 한 집씩 시장에 위치한 상가들을 털었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샤도우를 잡기 위해 골목마다 성의 병사들과 자치군을 배치했는데도 날이 밝으면 어김없이 한 집씩 털려 있더라는 것이다.

결국 날이 갈수록 피해가 커지자 참지 못한 상인길드에서 용병길드로 의뢰를 한 모양이다.

병규는 이 의뢰에 흥미가 당겼다.

멀리 갈 필요도 없고, 살인을 할 필요도 없었다.

상당히 깨끗한 일인데다, 도둑의 몸이 날래고 신출귀몰하다는 것에 흥미가 동했다.

도적이 너무 빠르고 움직임이 은밀해서 도저히 잡을 수 없다는 내용의 의뢰.

마치 그를 위한 사건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2등급 의뢰치고는 보상금이 크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어차피 돈이야 필립 공작가의 기사들에게서 얻어낸(?) 금궤가 있어, 당분간은 걱정이 없었다.

"이것으로 하겠어요."

병규는 샤도우에 관한 의뢰서를 홉에게 내밀었다. 의뢰서를 읽어 본 홉의 표정이 괴이하게 일그러졌다.

"이걸... 하겠다는 거냐?"

병규는 그의 태도에 이상함을 느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것으로 하겠어요."

"진심인가?"

홉이 거듭 확인하자, 이상함을 느낀 제이콥이 병규를 제치고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의뢰인가?"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다만...."

"다만?"

"몇몇 녀석들이 시도를 했는데, 모두 실패했거든."

"왜지?"

홉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실패한 녀석들의 말은 하나같이 똑같았어. 너무 빨라서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

제이콥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하필이면 이런 의뢰를 고르다니.

"아무래도 다른 의뢰를 선택하는 것이 좋을 듯하구나."

그는 점잖게 권했지만 병규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거절했다.

"아니에요. 그냥 이것으로 하겠어요."

"방금 들었잖니. 지금까지 몇 명이나 실패한 의뢰라고. 첫 의뢰이기도 하니, 차라리 다른 것으로 하는 게 어때?"

호젤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그러나 병규는 히죽 웃으며 고집을 부렸다.

"괜찮아요. 저도 다리가 꽤 빠른 편이거든요."

표적이 너무도 빨라서 잡을 수 없었다는 말에 오히려 호승심을 불태우는 병규였다.

밤이 되었다.

"정말로 둘만으로 괜찮겠어?"

외출을 준비하는 병규와 샤바를 보고 호젤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네. 충분해요."

동료들의 염려와 달리 병규는 소풍 나가는 사람처럼 기분이 좋아 보였다.

"원한다면 따라가 줄 용의도 있다."

"괜찮아요. 저희도 용병이 되려 하는데 최소한의 능력은 보여야죠. 너무 걱정 말아야. 멋지게 일을 마치고 돌아올 테니."

병규는 자신감 있게 소리쳤다. 하지만 호젤은 물가에 내놓은 애들인 양 영 못 미더운 모양이다. 샤바를 보며 어쩔 줄을 몰라 한다.

병규는 속으로 웃었다.

주저 없이 짱돌로 여자를 후려치고, 오우거 허벅지 살을 보며 침을 삼키는 녀석이 바로 샤바다.

겉보기엔 비실해 보여도 실상 무지하게 살벌한 녀석인 것이다.

"계획은 세워뒀니?"

제이콥이 물었다.

"우선은 피해가 접수된 지역의 건물 옥상에서 표적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했어요. 오늘은 마침 달이 밝으니 운이 좋으면 찾아낼 수 있겠죠."

"흠. 그래. 첫 의뢰니 성패에 신경 쓰지 말고 최선을 다한다는 마음으로 임해라."

"네."

밝게 대답한 병규는 샤바의 손을 잡고 여관을 나섰다.

"걱정돼. 걱정돼."

둘이 떠나자 호젤은 연신 고개를 흔들며 불안해했다. 제이콥은 그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듬직하게 말했다.

"믿어줘라. 남자는 때로 사내임을 인정받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 줄도 알아야 해. 너도 저 아이들이 남에게 기대기만 하는 철부지가 되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으응. 그건 그렇지만."

호젤은 마지못해 수긍하는 눈치다. 제이콥이 빙글빙글 웃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런 뜻에서 하는 말인데 혹시나 불안하다고 뒤를 따라가 본다거나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딸꾹."

호젤은 이유 없이 딸꾹질을 했고, 제이콥은 호탕하게 대소를 터트렸다. 그 모습을 가만 쳐다보고 있던 고든이 실실 쪼개며 한마디를 던졌다.

"제이콥이 그런 이야기를 하다니. 애 아빠 다됐군."

"딸꾹."

이번엔 제이콥이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새벽별이 떠오른 거리는 한산했다.

병규는 목 좋은 장소에 위치한 집의 지붕 위에 느긋하게 누워있었다. 제이콥들에게는 밤새 도둑이 오는지 지켜보겠다고 말했지만, 정말로 그럴 생각은 없었다.

레이더에 필적하는 귀의 능력을 빌리면 이렇게 탱자탱자 놀면서도 충분히 오십 미터 안의 미세한 기척까지 죄다 잡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쯤 지났을까.

샤바는 어느새 잠이 들고, 호랭이 역시 하품을 하며 무료한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쯤, 자고 있는 샤바의 윗 머리칼이 더듬이처럼 쫑긋 솟았다.

"쟤는 머리카락에 근육이라도 심어 놓은 거야?"

호랭이와 병규가 신기한 눈으로 보는 사이, 쫑긋 솟은 머리카락은 레이더처럼 빙빙 회전하더니 한쪽을 향해 번개모양으로 착 구부러졌다.

'맛있는 냄새라도 발견한 거야?'

나침반처럼 바르르 떨리는 샤바의 머리카락은 충분히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했다. 그런데....

팔락팔락

이번엔 병규의 귀가 팔락였다.

은밀한 기척 잡힌 것이다.

병규는 눈을 감고 귀로 흘러 들어오는 기척을 읽었다.

그들이 있는 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잡혔다.

움직일 때 이는 소음은 기껏해야 들 고양의 정도, 하지만 어렴풋이 느껴지는 파동은 대상의 크기가 그보다는 훨씬 크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놈이다.'

확신이 든 병규는 조용히 몸을 움직였다.

기척은 '성인의 길'이라는 술집 주방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리 없이 접근해 살피니 모자를 쓴 작은 그림자 하나가 과일을 훔쳐먹고 있었다.

'오늘은 음식도둑질인가? 명성에 비해 스케일이 작은 도둑이네.'

그리고 생각보다 나이도 어려 보였다.

기껏해야 열 대여섯 정도의 꼬마였다.

'조금 놀려줄까?'

장난기가 인 병규는 은밀히 접근해 소년의 어깨를 툭 건들었다.

"뭐하니?"

"헛!"

소년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발작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아이의 겁먹은 눈동자를 본 병규는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 그냥 먹어."

병규는 애써 배려해 주었지만 소년은 오히려 몸을 움츠리며 주춤주춤 뒷걸음질쳤다.

"나이아스!"

돌연, 소년이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주방에 고여 있던 물방울이 허공으로 솟구치며 작은 요정의 형상이 되었다.

병규는 형태는 조금 다르지만 이와 같은 것을 이미 한 번 경험한 적이 있었다.

"정령?"

소년은 정령술사였던 것이다.

"재워!"

소년이 병규를 손가락질하며 앙칼지게 외치자, 물의 하급 정령 나이아스는 고속으로 분출되는 물줄기처럼 쏘아졌다. 하지만 병규를 잡기엔 역부족이었다.

"목욕을 이미 했다고."

입가에 짓는 미소와 함께 병규의 모습이 휘릭 하고 사라졌다.

"엇!"

소년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나왔다.

그는 남달리 영민한 이목을 지니고 있었다. 한데 그런 그의 이목을 속이고 사라지는 인간이 있을 줄이야. 물의 정령마저 잠시 표적을 잃고 방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혹시 일루젼 마법인 것은 아닐까? 하지만 방금 전의 기척은 분명 환상이 아니었는데.'

소년은 긴장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뭘 찾고 있지?"

"으악!"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오는 으슬한 음성에 소년은 다시 한 번 화들짝 놀랐다. 허나 놀란 와중에도 손을 휘둘러 병규를 가리켰다.

"고, 공격!"

쏴아아아.

화가 난 나이아스의 기세는 좀 전보다 몇 배나 거칠었다. 그러나 여전히 병규는 여유 있게 피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여러 번, 병규와 나이아스의 쫓고 쫓기는 상황이 이어졌다.

"난 널 해치러 온 게 아니야. 아직도 못 믿겠니?"

병규는 몇 번이나 소년의 등 뒤에 나타나며 설득했지만, 소년은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나이아스의 조종에만 열중했다.

"어쩔 수 없군."

병규는 소년을 설득시키는 일을 포기했다.

그의 귀가 팔락거리고 있었다.

주위에 다른 기척이 나타난 것이다.

별수 없이 병규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휙.

또 한 번의 고속이동으로 나이아스의 공격을 피한 그는 소년의 뒷목을 툭 하고 가볍게 쳤다.

이미 몇 번에 걸친 실습으로 그의 공격은 꽤 섬세해진 터다.

그의 가벼운 손길에 소년의 눈동자가 금세 탁해지더니 짚단처럼 풀썩 쓰러졌다. 그 순간, 병규의 뒤를 끈질기게 따라 다니던 나이아스가 흩어졌다.

정령은 계약자의 마나로 중간계에 머물 수 있다. 때문에 계약자가 죽거나 의식을 잃으면 정령계로 강제 소환되는 것이다.

소년이 쓰러지자마자 병규의 귀가 거세게 팔락였다.

소란을 들은 주점의 주인이 주섬주섬 나오고 있었다.

더는 지체할 수 없다.

이대로 있다간 소년은 둘째치고, 그마저 입장이 곤란해질 수 있었다.

"일단 나가자."

호랭이의 말에 병규는 즉시 소년을 안아들었다.

보기보다 소년은 훨씬 가벼웠다.

'풀만 먹고살았나?'

소년을 덜렁 안은 병규는 한 줄기 바람이 되어 창밖으로 새어나갔다. 방망이를 든 주점주인이 주방으로 뛰어 들어왔을 땐, 찬바람만이 쓸쓸히 휘돌고 있었다.

주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건물.

날다람쥐처럼 가볍게 건물 벽을 타고 오른 병규는 푸석한 건물지붕 위에 아이를 내려놓았다.

뺨을 톡톡 가볍게 치니 부스스 눈을 뜬다.

정신이 덜든 듯,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아이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병규를 발견하고 벌떡 몸을 일어섰다.

"괜찮아. 안 잡아먹어."

그러나 병규가 아무리 설명해도 아이는 허둥지둥 손발을 놀리며 달아날 생각만 했다.

작은 몸인데도 귀신같이 움직임이 빨라 잠시사이 벌써 건너편 건물지붕까지 날아간 상태였다. 하지만 병규를 따돌릴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병규는 느긋한 마음으로 소년의 뒤를 쫓았다.

반시간 정도, 둘은 쫓고 쫓기며 건물 지붕 위를 뛰어다녔다.

"계속 도망만 갈 거야?"

지루해진 병규가 소년의 앞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아무리해도 병규를 떨쳐낼 수 없었던 소년은 분한 표정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앉아봐. 대화 좀 하자."

병규가 먼저 털썩 앉았다. 소년은 주저하며 엉덩이만 살짝 건물지붕에 걸쳤다. 언제라도 즉시 뛰어나갈 수 있는 자세였다.

"왜 도둑질을 한 거냐?"

병규의 물음에 소년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죄의식 때문일까?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인지 소년의 태도는 많이 고분고분해졌다. 그때 소년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소년은 얼굴을 붉히며 급히 두 손을 배를 감쌌지만, 그런다고 이미 새어나온 소리가 다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배가 고팠던 모양이구나."

병규는 주머니에서 사과를 닮은 과일을 꺼내주었다. 호젤과 시장구경을 갔다가 사 온 과일이었다.

소년은 주저하다 조심스레 과일을 받았다.

하지만 먹지는 않았다.

그저 조심스런 눈으로 병규를 쳐다볼 뿐이었다.

'참 귀엽게 생겼네.'

은은한 달빛에 비친 소년의 모습은 꿈이 아닌가 착각할 만큼 영롱했다.

샤바가 몽혼한 환상 같은 모습이라면, 소년의 얼굴은 순정만화 풍으로 미화된 그림 같았다.

'응? 그런데 이 아이 귀가 좀 이상하네.'

소년은 원래 큰 빵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병규를 피해 도망치던 와중에 어딘가로 날아가 버리고, 지금은 맨 얼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달빛에 파르스름하게 드러난 소년의 귀는 보통사람보다 길었다.

병규는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혹시 엘프?"

말을 타고 트라우마로 오는 도중, 병규는 제이콥에게 이드라센 대륙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중엔 엘프나 드워프 같은 유사인간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병규의 물음에 소년은 흠칫 놀랐다. 그제야 모자가 없어진 걸 깨달은 것이다. 병규의 눈치를 보며 주저하던 소년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며 시인했다.

"호오."

병규는 새삼스런 눈으로 소년을 살폈다.

귀를 제외하곤 사람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하지만 인간과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점이 있었다.

물론 처음엔 뾰족한 귀가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 보다 결정적인 차이는 다른 것이었다.

아름다움.

소년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얼굴, 몸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릿결.

어느 곳 하나 부자연스러운 곳이 없었다.

마치 예술품을 보는 것 같다랄까.

부조화의 조합인 인간과는 크나큰 차이가 있었다.

"저...."

갑자기 소년이 물었다.

처음으로 들어보는 소년의 목소리.

'이런 목소리까지 완벽하잖아.'

병규는 속으로 분한 마음이 들었다. 최근 샤바 때문에 남다른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는 그인데, 이제는 엘프라는 요상한 종족까지 나타나 그의 속을 뒤집는 것이다.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뭐죠?"

어렵사리 입을 연 소년의 질문은 과연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응?"

병규는 소년의 질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뭐냐니? 인간이잖아."

"절대 그럴 리 없어요."

소년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어처구니없는 오해에 병규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병규의 물음에 소년은 대뜸 그의 귀를 가리켰다.

"아!"

여관주인의 기척 때문에 그의 귀가 잠시 팔락거린 적이 있었다.

그걸 소년이 용케 보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당신의 움직임. 도저히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하하."

병규는 어색하게 웃었다.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난 분명 사람이야. 그저 조금 안 평범한 사람."

병규의 대답에 소년은 귀를 축 늘어뜨리며 시무룩해졌다. 실망한 듯한 모습이다.

"인간은...싫어요."

소년의 조용한 음성이 병규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왜 인간이 싫지?"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 안에 쥔 과일을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이다.

둘의 대화를 가만 지켜보고 있던 호랭이가 병규의 뺨을 툭 쳤다.

"바보야. 저 이이의 목을 잘 봐."

"!"

소년의 목에는 빨간 자국이 남아 있었다.

'개 목걸이처럼 목을 채우는 장식이라도 한 것일까?'

생각해보니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엘프는 숲의 종족이다.

자연스러움을 좋아해 귀걸이 같은 장식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소년의 목에 있는 상처는 분명 무언가를 꽉 졸라맸던 흔적이었다.

"수갑을 채웠던 것 같다."

호랭이의 말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병규는 새삼스런 눈으로 소년을 보았다.

먼저 옷차림이 너무 초라했다. 누가 버린 옷을 주워 입은 듯, 크기도 맞지 않았다.

목에 난 붉은 자국은 그의 하얀 피부와 대비되어 끔찍한 느낌마저 주었다.

소년의 본 모습은 너무도 완벽했지만, 그 외의 것들은 반대로 너무 어색했다.

"으음."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그림에 병규는 짧게 신음성을 흘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내게 말해 주겠니?"

병규는 소년에게 사정을 물었지만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인간이라는 대답을 들은 후론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버렸다.

난감한 상황.

"내가 해 보마."

호랭이가 그의 어깨에서 팔짝 뛰어내렸다.

"내 말이 들리니?"

호랭이가 갑자기 말을 걸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소년의 귀가 바짝 섰다.

소년은 슬그머니 호랭이에게 시선을 던졌다.

생전 처음 보는 짐승이 언어를 사용하자 다소 놀라는 표정이다.

소년은 손을 내밀어 호랭이의 등을 쓸며 친근감을 보였다.

하지만 그뿐, 결정적으로 말이 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