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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네가 바퀴냐?

저 녀석은 대체 언제 나타난거지?

내 이름은 카피(COPY)

기왕에 할 도둑질이라면 확실하게 해야겠지?

청아한 구타소리가 고요한 달밤을 울리다.

호랭이까지 사람이 된다고?

하이엘프의 맹세

도대체 쟤들 정체가 뭐야?

그녀들이 가져간 물건

설마 네가 바퀴냐?

"서, 설마 네가 바퀴야?"

병규는 흑발의 미소년을 가리키며 더듬더듬 물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소년의 고개가 태연히 끄덕여졌다.

"네, 전데요. 샤바샤바."

"헉!"

병규의 입이 쩍 벌어졌다. 호랭이 역시 뜨악하며 놀란다.

그 혐오감 넘치던 바퀴벌레 왕자가 이렇듯 엄청난 미모의 사람이 되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병규는 바퀴벌레 왕자의 볼을 잡아당겼다.

"뭐, 뭐야. 사람 맞잖아."

말랑말랑한 그 감촉은 분명 사람의 피부였다.

"아야야. 주인님. 샤바."

바퀴벌레 왕자가 눈물을 글썽인다.

그 모습에 병규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급히 볼에서 손을 떼고는 뒤돌아섰다.

'무슨 놈의 사내 녀석 얼굴이....'

병규는 설마 자신에게 그런 발칙한 끼(?)가 있는 것은 아닐까 고민했으나, 호랭이가 '커흠'하며 불편한 기침을 토하는 것을 보고는 비로소 안심했다.

자신이 문제가 아니었다. 바퀴 녀석의 얼굴이 대책이 없을 정도로 미남이 된 것이다.

병규는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어쩌다 인간이 된 거냐?"

"인간요?"

병규의 물음에 바퀴왕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의 몸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디가요? 샤바."

변한 것을 전혀 못 느낀 모양이다.

"넌 더듬이도 있었고...."

"있어요. 샤바."

말과 함께 바퀴벌레 왕자의 머리카락이 더듬이처럼 주뼛 솟았다. 병규는 당황했다. 설마 머리카락이 더듬이처럼 솟을 줄이야.

"그, 그건 그렇다 해도. 원래 네 몸은 둥글넓적하게...."

"아! 저 원래 이런 모습이에요. 샤바. 그곳에선 제 백성들이 그런 모습이라 그렇게 있었던 거예요. 샤바샤바."

바퀴벌레 왕자의 설명에 병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럼 내가 있던 곳의 백성들도 이곳에 오면 너처럼 그렇게 된다는 거니?"

"아니요. 지구의 백성들은 퇴화되어서 그렇게 안 될 거예요. 샤바. 저도 처음 봤을 땐 백성들이 너무 약해져서 맘이 많이 아팠어요. 샤바샤바."

"퇴화된 거라."

병규는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했다.

"그게 퇴화된 거면 원래는 어느 정도라는 거야?"

호랭이가 비명처럼 소리친다.

그 엄청난 생명력. 무지막지한 번식력.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적응력까지.

지구 최후의 생명체로 남을 것이 분명한 생명체가 많이 퇴화되어서 약해진 거라니. 만약 퇴화가 되지 않았다면 마땅히 지구는 그들의 세상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럼 지금도 그... 예전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거니?"

"그게...."

바퀴벌레 왕자는 머리를 긁적였다.

"왜. 안돼?"

"그게 마음대로 안 돼요."

"마음대로 안 된다면?"

바퀴벌레 왕자는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이상하게 여기선 마음대로 안 돼요. 이런 모습은 불편한데...."

병규와 호랭이는 흠짓 놀랐다.

"저, 절대로 그 모습이 좋다."

"그래.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지 마."

병규는 다시 한 번 바퀴의 뺨을 만져보았다.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졌다.

"이렇게 좋은데 굳이 그 엄청난 모습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지."

"암암."

보기 드물게 손발이 착착 맞는 호랭이와 병규였다.

해가 지고 있었다. 산 너머로 지고 있는 해를 지그시 응시하던 호랭이가 푸념 섞인 한마디를 내뱉었다.

"아무래도 여긴 우리가 살던 세상이 아닌 모양이다."

병규는 화들짝 놀랐다.

"우리가 살던 세상이 아니라니요?"

"저쪽을 봐라."

호수면 위로 비스듬히 떠 있는 초승달이 보였다.

그런데 초승달의 모양이 뭔가 이상했다.

단순히 별의 그림자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달 자체가 초승달 모양으로 생긴 것이 아닌가.

"뭐야?"

병규는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상한 새와 물을 마시던 기이한 짐승들. 그리고 생소한 숲의 풍경.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완전히 다른 세상일 줄이야.

"그게 가능한가요?"

병규의 물음에 호랭이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럴 게야. 아공간은 지옥의 입구라는 말도 있지만 여러 세상의 통로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아무도 확인할 수는 없었지. 아공간에 빠져서 살아 돌아온 자가 없기 때문이야."

"그, 그럼 정말로 여기가?"

"그런 것 같다."

병규는 멍한 표정이 되었다. 뽀얀 햇살에 따뜻하게 비치는 대지.

낯선 세상, 낯선 땅이었다.

멍한 눈으로 한참 동안 달을 바라보던 병규는 그림 같은 자태로 앉아 있는 바퀴벌레 왕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넌 여기가 어딘지 아니?"

바퀴벌레 왕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몰라요, 샤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던 병규는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실망했다. 지옥과 같은 아공간에서 간신히 빠져나왔구나 했는데, 달 모양조차 생소한 전혀 다른 세상이라니.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된 기분이다.

위로하듯 병규의 발등을 토닥이던 호랭이가 조용히 말했다.

"해가 지는구나. 복잡한 것은 내일 생각하고 더 어두워지기 전에 밤을 보낼 준비나 하자."

병규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랭이의 말처럼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서 정신을 차리고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정말로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발악이라도 해봐야하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선 우선 오늘 밤을 안전하게 보내야 한다.

생소한 세상이라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니.

병규는 주위의 마른 나뭇가지들을 모아왔다.

바퀴벌레 왕자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쫑쫑거리며 걸어 다니며 귀신같이 마른 나뭇가지들을 찾아왔다.

이때만큼은 호랭이가 담배를 피우는 것이 다행이었다. 담배를 피우는 호랭이를 위해 항상 라이터를 가지고 있었으니, 덕분에 나뭇가지를 비비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작은 모닥불을 피우고, 호숫가에 앉았다.

호수의 물결은 잔잔했고, 바람 또한 부드러웠다.

병규는 두 팔로 무릎을 감싸 안은 채 멍하니 모닥불을 응시했다.

"어떻게 돌아갈까 걱정이냐?"

"...네."

"걱정하지 마. 설마 돌아갈 방법이 전혀 없겠냐?"

호랭이는 씩 하고 웃었다.

"돌아갈 방법이 있겠지요? 그럼요."

여전히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던 병규는 힘을 얻은 듯 밝게 대답했다.

그렇게 둘이서 걱정을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흥겨운 콧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바퀴벌레 왕자가 모닥불 가에 앉아 고개를 까딱거리며 알 수 없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반들반들 윤기 나는 검고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앉아서.

보드라운 피부, 그린 듯한 눈썹에 반짝이는 눈동자, 오뚝한 코에 빨간 입술.

마치 신이 만든 걸작처럼 정교하고 아름다운 모습.

바퀴벌레 왕자의 단아한 모습에 신선인 호랭이마저 시선을 빼앗겼을 정도다. 물론 병규는 일찌감치 시선을 뺏긴 참이지만.

'어휴. 저 녀석이 남자였으니 망정이지, 만약 여자였으면.'

어쩌면 그는 바퀴벌레를 사랑한 최초의 인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머리를 짤짤 흔들며 잡생각을 털어 낸 병규는 문득 여태까지 바퀴벌레 왕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전에 이름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젠 누가 봐도 인간인데 계속 바퀴라고 부르기가 영 어색했다.

"바퀴야. 너 이름이 있다고 했지?"

병규가 조용히 물었다.

"네, 네! 저 이름 있어요. 샤바."

바퀴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바퀴의 눈에서 쏟아져 나온 빛이 너무도 고와 병규는 저도 모르게 '윽' 하며 시선을 피했다.

"가, 가르쳐 줄래?"

"오옷."

바퀴벌레 왕자의 검은 머리카락이 쫑긋 솟는다.

"정말요? 샤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바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병규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말이야."

"와아."

바퀴벌레 왕자는 기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깡충거렸다. 그 동안 이름을 가르쳐 주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러나 눈물 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심한 주인님은 여전히 '바퀴' 라고만 불렀다. 그런데 이제와 그의 이름을 묻는 것이다.

바퀴벌레 왕자가 너무 좋아하자 병규는 조금 미안해졌다.

"빨리 대답 안 하면 계속 바퀴라고 부른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샤바."

바퀴벌레 왕자는 혹시나 병규가 딴소리를 할까,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흠흠. 그래 이름이 뭐야?"

호랭이도 궁금한 듯 고개를 돌려 바퀴벌레 왕자를 바라보았다.

큰 눈에 감동의 눈물을 글썽이고 있던 바퀴벌레 왕자는 밝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샤바에요. 샤바."

"...?"

"...?"

병규와 호랭이의 고개가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다.

둘 다 못 알아들은 듯하자 바퀴벌레 왕자가 신중하게 또박또박 다시 말했다.

"샤. 바. 에. 요. 샤. 바. 샤. 바."

"... 설마 네 이름이 샤바라는 거야?"

병규가 미심쩍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재차 물었다.

"네. 샤바."

"그, 그럼 지금까지 네 이름을 말끝에 붙이고 다닌 거야?"

호랭이가 침을 삼키며 다시 묻는다.

"네. 샤바. 저희 종족은 자신의 이름을 말끝에 붙이고 다녀요. 샤바샤바."

"...."

병규와 호랭이는 시선이 마주쳤다.

뭐 얼마나 대단한 이름이 나올까, 명색이 그래도 바퀴벌레 왕자인데....

둘은 나름대로 멋스러운 이름이 바퀴의 입에서 나올 줄 알았다가. 그만 김이 팍 새어 버렸다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좋은 이름이죠? 샤바."

바퀴벌레 왕자가 병규에게 바싹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그, 그래."

"호랭이도 그렇게 생각하죠? 샤바."

"그, 그런 것 같구나."

"역시."

바퀴벌레 왕자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기뻐했다. 팔짝팔짝 뛰는 모습이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잘생긴 얼굴과 대비되니 좀 방정맞은 것 같기도 했다.

병규는 그런 바퀴의 행동이 너무도 어이없어 보였다.

"그래. 샤...바야. 너 왕자님이라고 했지? 네 얘기 좀 해주겠니?"

"네. 샤바."

샤바는 방글방글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샤바가 살던 세계는 병규의 생각과 달리 바퀴벌레 공화국(?) 같은 곳이 아니었다.

'환계' 라고 불리는 전혀 다른 세계였는데, 호랭이의 설명에 의하면 '선계'와 마찬가지로 차원이 다른 세상이라고 한다. 다만 선계와 다른 점이라면 특정 세상과 연결된 선계와 달리 환계는 모든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는 정도의 차이다.

샤바는 그런 '환계'의 왕자였다. 그런데 그다지 인정은 못 받고 있는 모양이다.

"환계는 어떤 곳이지?"

"글쎄요, 샤바. 설명하기 어려워요. 모든 것이 존재하지만 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실체가 없는 세상이라고도 하죠. 샤바샤바."

"모든 것이 존재하면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

호랭이는 샤바의 말을 곱씹었다.

호랭이가 바퀴의 정체에 대해 캐묻고 있을 때 병규는 엉뚱한 생각에 빠져있었다.

'바퀴벌레가 왕자라면. 환계는 곤충세상인가? 바퀴가 왕자고 모기가 공주인?'

병규는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의 머릿속으로 온갖 해충들이 무더기로 날아다니는 암울한 세계가 그려졌다.

'사람은 절대로 못 살 동네일세.'

자기 마음대로 환계에 대한 정의를 내린 병규는 떨리는 목소리로 샤바에게 물었다.

"그, 그런데 어쩌다 왕자면서 인정을 못 받는다는 거야?"

"그게...."

샤바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힘이 좀 불안정해요. 샤바."

"...?"

"환계의 환수들을 다스리려면 환술을 능숙하게 사용해야 하는데 전 적통이면서도 그다지 힘을 잘 사용하지 못해요. 그래서 .... 샤바샤바."

"음. 뭔지 모르겠지만 힘이 불안정하다는 소리구나."

"네. 샤바."

물론 병규는 환수니, 환술이니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대충 샤바가 의외로 사연 많은 녀석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그런데 참 아름다운 호수구나."

호랭이가 호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병규는 호랭이의 말에 고개를 돌려 호수를 보았다.

파란 초승달이 잠겨 있는 거울같이 잔잔한 호수.

정말로 그림 같은 장면이었다.

"네. 그러네요."

병규는 무릎 위에 턱을 올린 채 호수를, 그리고 호수 속에 잠긴 달을 보았다. 물 속에 비쳐 보이는 달그림자는 몸서리쳐지게 차가웠다.

호랭이가 그의 어깨 위로 올라와 길게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불침번 서라."

호랭이는 앞 뒤 재지도 않고 한마디 툭 던지고는 그냥 잠을 자버린다. 내심 불만을 토로하려던 병규는 호랭이가 코를 골자 그냥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무척 평화스러워 보이는 호수의 전경.

낯선 곳인데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잠시 호수를 보고 있던 병규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저 잠시 피곤한 눈을 붙일 생각이었지만, 피곤했던지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호랭이도 잠들고, 병규도 잠든 호숫가에 샤바 혼자만 눈을 반짝였다. 자장가처럼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샤바가 고개를 들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희들 이 호수에 사니? 샤바."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가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호숫가에서 반짝이는 빛 가루 같은 것이 날아와 그의 주위를 감쌌다.

빛 가루를 가만 지켜보고 있던 샤바는 싱긋 웃었다.

"너희들 참 이쁘게 생겼구나. 하지만 그렇다고 주인님에게 못된 장난을 하면 안 돼. 샤바."

아무도 없는 공간에 까르르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은 바람소리 같기도 하고, 나뭇가지가 비벼대는 소리 같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 피곤하실 테니 조금 주무시게 하는 것 정도는 봐줄게. 샤바샤바."

다시 한 번 까르르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와 함께 그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던 빛 가루가 병규와 호랭이를 한차례 떠돌았다.

둘의 지친 듯한 숨소리가 평온해졌다.

두 사람을 가만 지켜보고 있던 샤바의 입에서 고요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음 날 아침. 해가 뜨자마자 병규는 호랭이의 드롭킥을 얼굴로 받아야 했다.

"이 녀석. 망을 보라고 했더니 퍼질러 자?!"

꾸벅꾸벅 앉아서 졸고 있던 병규는 그대로 뒤로 폭 넘어갔다. 모래여서 다치지는 않았지만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 왜요. 무슨 일이에요?"

병규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수선을 떨자 호랭이가 한심한 듯이 쳐다본다.

"잘한다. 망을 보라고 했더니 잠이나 자고. 쯧쯧."

그제야 무슨 얘기인지 알게 된 병규는 멋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간밤에 맹수라도 왔으면 어쩔 뻔했냐?"

"그러네요."

"녀석. 긴장 좀 해라. 넌 어째 엉뚱한 세상에 왔다는데도 긴장감이 전혀 없냐?"

호랭이의 잔소리가 쏟아지는데. 가만 듣고 있던 샤바가 즐거운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괜찮아요. 샤바. 제가 밤새 지키고 있었는 걸요? 샤바샤바."

눈이 둥그렇게 된 병규. 문득 모닥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안 피곤하냐?"

"원래 잠이 없어요. 샤바."

그러고 보니 샤바가 자는 걸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병규는 샤바를 가리키며 호랭이에게 히죽 웃어 보였다.

"헤. 다행히 샤바가 지키고 있었대요."

"허이구. 그래 잘났다. 주인이란 녀석이 그렇게 책임감이 없어서 어따가 써?"

"하하. 그만 피곤하다보니."

어색한 미소로 대충 사태를 무마한 병규는 호랭이의 잔소리가 또 터지기 전, 재빨리 호숫가로 달려가 세수를 했다. 호수의 물은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찼다.

늘어지게 기지개까지 켜니 날아갈 것처럼 시원하다.

"이제 어떻게 하죠?"

"무한정 여기서 있을 순 없으니 일단 다른 곳으로 가보자."

"잠깐만요."

병규는 가까운 나무 위로 뛰어 올라갔다. 잠시 후 내려온 그에게 호랭이가 물었다.

"뭐가 보여?"

"없어요. 지평선 끝까지 숲밖엔 안 보여요."

"그래?"

호랭이의 표정이 조금 찡그려졌다.

뭐라도 있어야 표적을 삼고 걸어갈 텐데. 난감했다. 설마 이곳은 사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까지 생겼다.

샤바에게 기대를 걸었으나 유감스럽게도 이 별엔 용맹무쌍한 그의 백성들은 단 한 마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우선은 강을 따라 가보자. 강을 따라가도 보면 뭐라도 만나게 되겠지."

호랭이의 말에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그들은 호수로 흘러드는 강물은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숲은 너무도 조용했다. 그리고 무척이나 평화로워 보였다.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들이 숲 전체를 화사하게 물들였고, 향긋한 과일들이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바람마저 한가롭게 흘렀다. 마치 신이 만든 낙원에 와 있는 듯했다.

호랭이는 먹을 수 있는 과일과 먹을 수 없는 과일을 냄새만으로 구별해 냈다. 개중엔 약초로 쓸 만한 풀들도 있어, 만약을 대비해 조금 뜯어 가기로 했다.

"이곳은 자연에 퍼져 있는 기가 유달리 강하구나. 그래서인지 뛰어난 효능의 약초도 많은 것 같다."

호랭이가 입에 물며 보여준 것은 냉이같이 생긴 풀뿌리였다.

"이건 산삼보다 오히려 약효가 좋을 것 같군."

"에에. 정말요?"

신기하다는 듯 풀뿌리를 보던 병규가 물었다.

"그런데 약초는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내가 괜히 신선이냐? 냄새만 맡아도 훤하지."

"하하. 과연 그렇겠네요."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병규는 호랭이가 말하는 약초나 꽃들을 부지런히 챙겼다. 혹시나 쓸모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여긴 좀 이상해."

호랭이가 콧등으로 주름을 만들며 말했다.

"뭐가요?"

산삼보다 효능이 좋다는 풀뿌리를 씹어 먹던 병규가 고개를 돌린다.

"이렇게 좋은 숲에 동물들이 너무 없잖아.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들어?"

호랭이의 말에 병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호숫가에서 본 짐승들을 제외하고 여태 다른 짐승들을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맹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환경오염도 없고, 지천으로 먹을 것이 깔렸으며, 맹수라고 불릴만한 것도 없는데, 동물들이 없다?

"글쎄요. 원래 동물이 흔하지 않은 세상인가 보죠. 뭐."

병규는 아무렇게나 대충 대답했다. 지구라면 이상할 일이라도 이곳에선 지극히 정상일지 모른다. 아예 다른 세상이니 말이다.

"글쎄. 과연 그럴까? 그래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만...."

말끝을 흐리는 호랭이의 표정이 영 석연치 않아 보였다.

병규 일행은 낮에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길을 걷고, 밤에는 대충 나무 위에 올라가 잠을 잤다.

셋 다 기척을 읽는 데에는 능숙했기 때문에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맹수의 접근을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가 흘렀다.

병규 일행은 처음으로 갈림길을 만났다.

상류에서 흘러 내려오는 강물이 갈라져 하나는 지금까지 걸은 호수 쪽으로 흘러가고, 한 갈래는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

병규는 하류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렇게 삼 일쯤 지났을 때, 지성체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와 만나게 되었다.

전체적인 모습은 도마뱀이었는데, 키는 대략 2미터 정도로 칼과 방패를 손에 들고 있었다.

세 마리의 도마뱀은 사냥을 하는 듯 조심스런 걸음으로 사방을 수색하고 있었다.

"혹시 여기는 도마뱀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닐까요?"

나무 위에서 리저드맨들을 관찰하던 병규가 조심스레 물었다. 호랭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다. 아는 게 전혀 없으니. 일단 뭐든 부딪쳐 봐야 알겠지."

미지와의 조우.

병규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될 수 있으면 좋은 만남이 되어야겠지만, 상대가 호전적이라면 어쩔 수 없이 한바탕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마음을 굳게 먹은 병규는 소리 없이 나무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곤 엉거주춤한 자세로 풀숲을 뒤적거리고 있는 리저드맨들에게 조심스럽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저... 실례하겠습니다."

등 뒤에서 은근히 들려온 목소리.

리저드맨들은 깜짝 놀랐다.

긴장한 채 사방을 경계하며 걷고 있는데, 난데없이 등 뒤에서 소곤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으니 어느 누구라도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쉭!"

놀란 리저드맨들은 칼로 병규를 겨눈 채 주춤 물러섰다. 그들이 너무 놀라는 통에 괜히 조용하게 말을 건 것이 미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인간!"

병규를 확인한 리저드맨들의 눈빛이 변했다.

"응? 인간이라고?"

병규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와. 인간을 아는 걸 보니 여기도 사람들이 있는 모양인데요?"

병규는 반갑게 소리쳤다. 혹시 도마뱀 혹성에 떨어진 것은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이곳에도 인간이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병규의 말을 들은 호랭이는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되레 눈을 휘둥그렇게 뜨는 것이 아닌가.

호랭이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너. 설마 저 녀석들 말을 알아듣는 거냐?"

"네? 그게 뭐가 이상해요? 저 녀석들 분명 우리말로...."

말을 하던 병규도 언뜻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도마뱀들의 말이 이상한 것이다. 한국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영어도 아니고, 굉장히 이상한 억양의 말이었다.

"어? 그런데 왜 난 말을 알아듣는 거지?"

병규는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한 듯했다.

그때 경계의 눈빛을 보내던 리저드맨들이 슬금슬금 앞으로 나섰다. 그들에게서 살기를 느낀 병규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쟤들, 사람과 좋은 관계는 아닌 모양인데요."

"넌 저 녀석들 말을 알아들었잖아. 혹시 말을 할 수는 없냐?"

"글쎄요."

뒷머리를 긁적이던 병규의 입에서 잠시 후 리저드맨들의 언어가 튀어나왔다. 놀라울 정도로 능숙한 것이 원래 구사하던 언어처럼 생각될 지경이었다.

"난 적 아니다. 길을 잃었다. 여기 어디냐?"

"...!"

다가서던 리저드맨들은 그 자리에 뚝 멈췄다. 놈들의 눈동자가 단춧구멍처럼 얇아진다.

"너 어떻게 '칸칸다라' 말을 할 줄 아는 거지?"

" '칸칸다라' 말?"

한 리저드맨의 말에 병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저들의 언어를 칸칸다라라고 하는 모양이군.'

리저드맨들은 병규가 그들의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지 여전히 적의를 지우지 않았다. 오히려 인상까지 찡그리며 병규를 위협해왔다.

"인간. 얌전히 잡혀라."

선두의 리저드맨이 대뜸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이런. 초면에 너무 과격한 걸?"

병규는 가볍게 피해냈다.

능력자들의 엄청난 움직임에 비하면 리저드맨의 몸놀림은 장난이나 좀 쳐보자는 식에 불과했다.

병규가 가볍게 발을 걸었을 뿐인데도 리즈드맨은 제 힘을 이기지 못하고 우당탕 넘어졌다.

"아닛!"

나머지 두 리저드맨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동료가 너무도 허무하게 넘어진 것이다.

"재수 없게 넘어졌다."

"용사가 추태를 보이다니."

병규의 발에 걸려 넘어진 것을 실수로 넘어진 것으로 생각한 그들은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 병규를 압축해갔다.

"죽이지는 않는다. 얌전히 노예가 돼라."

"저항하면 죽는다."

팔짱을 낀 채 도마뱀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주시하고 있던 병규의 입가가 묘하게 일그러졌다.

"노예?"

병규는 인간을 노예로 부린다는 말에 슬며시 화가 치밀었다.

순간 그의 몸이 휙 하고 앞으로 나갔다. 리저드맨들에겐 갑자기 병규의 모습이 사라진 것처럼 보여졌다.

바람같이 리저드맨들의 등 뒤로 이동한 병규는 손날을 세웠다.

"서서 얘기하기 귀찮으니. 일단 누워라."

뒤이어 퍽퍽! 하고 들려오는 두 번의 타격음.

엉거주춤 다가오던 리저드맨들이 철퍽 하고 앞으로 엎어졌다. 게거품을 물고 기절한 것이다.

"여긴 대체 어떤 세상이야? 도마뱀들이 인간을 노예로 잡는다는 소릴 하고."

병규는 투덜거리며 굵은 덩굴을 끊어서 리저드맨들을 묶었다. 목을 친 녀석들은 기절했지만, 발에 걸려 넘어진 최초의 리저드맨은 머리에 혹이 났을 뿐 정신은 말짱했다.

병규는 녀석을 심문했다.

순식간에 쓰러진 동료들을 본 놈은 온몸을 덜덜 떨며 병규를 매우 두려워했다.

"위, 위대하신 분이십니까?"

뭔가를 오해한 듯했다.

사실 리저드맨의 오해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요정의 숲에는 인간이 없다. 아니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것은 분명 인간이다. 그리고 방금 전의 그 움직임. 리저드맨은 이미 그를 엄청난 존재의 화신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난...."

"잠깐!"

병규가 해명하려 하자 호랭이가 고개를 흔들어 막았다. 놈이 병규를 무엇으로 오해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정보를 캐기 편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호랭이의 지시에 따라 병규는 헛기침을 하며 어울리지도 않는 거드름을 피웠다.

"헴헴. 그래. 내가 바로 그 위대한 분이시다. 먼저 묻겠다. 넌 어디서 온 누구냐?"

"푸, 푸른 뱀족의 미천한 족장 저드. 위대한 분을 뵙습니다. 소, 소인들이 눈이 어두워 감히 못 알아 뵙고 불경을...."

저드라고 자신을 소개한 리저드맨은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며 감히 병규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두려움 때문에 저드는 병규에게서 드래곤 특유의 존재감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도마뱀이 벌벌 떠는 것을 깨달은 병규는 신이 나서 더욱 거들먹거렸다.

"험. 저드라고 했나?"

"네. 그렇습니다."

"좋아. 네가 내 질문에 대답을 잘한다면 좀 전의 불경쯤은 과감히 용서해 줄 수도 있다."

"감사합니다."

저드는 쿵쿵 소리 나게 머리를 찧으며 기뻐했다.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잘하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저드는 잔뜩 긴장한 채 질문을 기다렸다. 하지만 의외로 드래곤의 질문은 터무니없는 것들이었다.

"여긴 어디냐?"

"...?"

드래곤의 질문 치고는 너무도 평범한 것이었다. 하지만 저드는 눈앞의 드래곤이 굉장히 오랜만에 유희를 나와서 그런 것일 거라 생각하고는 성실히 대답했다.

"요정의 숲입니다."

"흠. 요정의 숲이라."

병규는 턱을 쓰다듬으며 썩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요정들이 진짜로 있다면 아마도 이런 숲에 살 것이다. 호랭이 역시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갑자기 뭔가 생각났는지 호랭이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이 세상을 뭐라고 부르는지 물어봐라."

병규가 호랭이의 말을 그들의 언어로 옮기자 저드는 의심스럽다는 눈빛을 띠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이 대륙은 '이드라센' 이라고 불립니다. 위대한 분이시여."

"이드라센?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인걸. 뭐, 하여튼 좋아. 그럼 마지막 질문이다. 인간들이 사는 곳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하지?"

"강을 따라 계속 가다 보면 붉은 대지가 나옵니다. 그리고 붉은 대지 너머에 바로 인간들이 사는 곳이 있습니다."

저드는 혹시나 위대한 분이 노여워할까 봐 땅바닥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상세하게 설명했다.

"좋아. 아주 잘했다."

병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을 표했다.

간을 졸이고 있던 저드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 순간, 병규가 그의 뒤통수를 가볍게 내리쳤다. 저드는 땅에 고개를 처박으며 쓰러져 버렸다. 가볍게 기절시킨 것이었는데. 어쨌든 곧 깨어날 것이다.

"정말로 다른 세상이었군."

기절한 리저드맨들을 내려다보며 병규는 고개를 흔들었다. 저드에게 들은 이드라센이라는 이곳은 정말로 다른 세계였다. 물론 이곳이 지구가 아니라는 것은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에게 직접 듣게 되니 기분이 또 묘했다.

"그래도 이곳에 인간이 있다니 다행이네."

병규는 길게 기지개를 켜며 애써 웃음을 보였다.

이왕에 닥친 일이다. 끙끙하고 고민해봤자 도움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단 사람들이 있다는 곳으로 먼저 가 보도록 하죠."

병규가 걸음을 옮기려는데 호랭이가 거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넌 어떻게 이곳의 말을 하는 거냐?"

병규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이상했다. 어떻게 도마뱀들의 말을 갑자기 할 수 있게 된 것일까?

뺨을 긁적이며 한참 고민하던 병규는 어색한 표정으로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떻게 된 일인지 잘 모르겠네요. 그냥 한국말을 듣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되던 걸요."

"그게 말이 되냐? 너 혹시 전생에 여기에서 살기라도 한 거 아니야?"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병규는 손을 팔락거리며 가볍게 말했지만 호랭이는 진지했다.

전혀 낯선 세계의 언어를 듣자마자 구사한다? 엄청난 천재라도 불가능할 일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주 간혹, 전생의 기억이 남아 전혀 낯선 외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세계 간에도 그런 일이 가능할까?

"에이. 인체의 신비 아니면 서프라이즈...한 현상이겠죠. 뭐, 복잡한 건 나중에 생각하도록 해요."

병규는 마음 편하게 살자며 쾌활하게 말했다.

성격이 소탈한 것인지, 아니면 아예 생각이 없는 것인지.

맹한 그의 표정은 이미 모든 걸 잊어버린 듯했다.

호랭이는 기가 막혔지만 고민해봤자 알 수 있는 문제도 아닌지라 한숨을 쉬며 넘어갔다.

그런데 막 병규가 걸음을 옮기려 할 때다. 샤바가 기절한 리저드맨들을 내려다보며 그를 불렀다.

"저기. 주인님 샤바."

"왜?"

"이거 버리고 갈 거예요. 샤바?"

리저드맨들을 향한 샤바의 범상치 않은 눈빛.

순간, 병규와 호랭이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버리고 갈 거냐니? 무슨... 소리야?"

떨떠름한 그의 물음에 샤바는 몽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고기... 안 먹어요? 샤바."

병규와 호랭이는 흠짓 놀랐다.

"서, 설마 그...걸 먹고 싶은 거냐?"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샤바."

샤바가 침을 꿀꺽 삼킨다. 한동안 과일만 먹었더니 허기가 지는 모양이다.

'무서운 녀석.'

호랭이와 병규의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제야 샤바가 배가 고프면 콘크리트도 뜯어멱는 무지막지한 생물이라는 것을 기억해 낸 둘이었다.

샤바는 리저드맨들에게 고기를 얻고(?) 싶어했지만, 병규와 호랭이의 단호한 반대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도마뱀이라도 말을 하는 녀석들이다. 왠지 잡아먹기가 영 꺼림칙했다. 특히 호랭이의 반대가 심했다. 신선이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호랭이도 짐승이다. 단지 일반 짐승들과 다른 점이라면 수양을 쌓아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 이 때문에서인지 호랭이는 리저드맨을 먹는 것은 곧 자신을 먹는 것과 같다는 요상한 이론을 펼쳐 샤바를 설득했다.

그 와중에 샤바가 호랭이를 보고 침을 끌꺽 삼켰지만 다행스럽게도 호랭이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샤바가 호랭이를 보며 침 삼키는 것을 보고 병규는 섬뜩한 마음이 들었다.

'혹시 나중에 배가 고파지면 나도 잡아먹는 거 아냐?'

평소에 친근한 행동을 보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병규는 왠지 샤바라면 그런 만행도 서슴지 않고 저지를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저 녀석은 대체 언제 나타난거지?

리저드맨을 지나친 이후로 별 다른 일이 없었다.

강가를 따라 펼쳐지는 숲의 풍경은 여전히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굳이 문제가 있다면 샤바의 뱃속에서 들려오는 '꼬로록' 하는 소리가 거슬리는 정도였다.

리저드맨들이 있었던 곳을 벗어난 지 한참이 되었건만, 샤바는 여전히 미련을 못 버린 듯 가끔씩 뒤를 돌아보며 손가락을 빨았다.

그때마다 뱃속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꼬로록' 소리가 병규와 호랭이를 괴롭게 만들었다.

그렇게 삼 일쯤 더 걷고 나서야 병규 일행은 숲의 끝에 닿았다. 형형색색의 신비로운 빛깔을 자랑하는 숲을 지나자, 피처럼 붉은 빛깔의 대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무슨 흙 색깔이 이렇게 살벌해."

아름다운 숲을 벗어나자마자 맞닥뜨린 붉은 대지가 못마땅한 듯 병규는 괜히 구시렁거렸다.

"평범한 황토는 아니군. 입자가 너무 거칠어."

발바닥으로 흙을 긁어보던 호랭이 역시 고개를 갸웃했다.

붉은 대지의 빛깔 때문일까.

아늑한 요정의 숲과 달리 이곳은 너무도 황량한 느낌을 주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짐승의 울음소리. 삭막한 칼바람.

마치 오아시스 너머 황폐한 사막을 마주한 것 같았다.

"기분 나쁜 곳이네요. 빨리 가도록 하죠."

병규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빨리했다. 옷깃을 여미는 그의 표정이 떫은 감을 깨문 것처럼 떨떠름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그동안 그들이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쏟아지는 태양빛과 간간이 들려오는 이름 모를 짐승들의 울부짖음. 그리고 차가운 바람에 섞여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고통에 울부짖는 비명소리가 전부였다.

어느덧 호랭이의 말수가 적어졌다. 작은 기척에도 귀를 쫑긋거렸다. 태생이 맹수인지라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그에 반해 샤바는 마냥 즐거워 보였다. 아니 실제로도 즐거웠다. 척박한 땅을 하루 종일 걷는 강행군. 지칠 만도 하건만 발걸음도 가볍게 랄라라...였다.

"샤바샤바샤바샤바..."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샤바를 질렸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던 병규가 한마디 툭 던졌다.

"넌 이름으로 노래까지 부르냐?"

병규의 불만 가득한 물음에 샤바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배시시 웃는다.

"네. 샤바. 저희는 이름에 자긍심이 대단해요. 샤바샤바."

두 손을 척 허리에 걸친 채 으쓱하는 모습에서 자부심이 홍수처럼 느껴졌다.

"허이구. 그러셔. 정말 대단한 종족이구나."

병규는 한숨을 쉬었다. 이유 없는 윽박지름에도 티 없이 밝은 샤바.

'이건 내가 마치 팥쥐가 된 것 같은 기분이군.'

쓸데없이 주인공에게 시비 거는 엑스트라가 된 것 같은 분위기였다.

때 맞춰 호랭이가 한마디를 툭 던진다.

"왜? 요즘 존재감이 줄어드는 것 같아서 발악하는 거야? 아서라. 추해 보인다."

순간 엄습해오는 좌절감.

"에효."

병규는 한숨을 쉬었다.

강을 따라 하류를 걷다보니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오늘도 노숙이야?"

병규는 처량하게 한숨을 쉬었다. 풀리는 일이 없어서일까. 요즘 부쩍 한숨이 많아진 그였다.

사람이 그리웠다.

호랭이와 샤바가 말벗이 되어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풋내 나는 사람들의 구수한 입담이 그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막 샤바와 함께 장작을 모으려 할 때였다. 어두운 평야 저편에서 일렁이는 불빛이 보였다.

순간, 병규와 호랭이는 두 눈이 마주쳤다.

모닥불을 피우는 거라면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병규는 장작더미를 내팽개치며 노랗게 일렁이는 불빛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근방까지 달려간 병규는 발소리를 죽이며 은밀하게 접근했다.

하찮은 도마뱀조차 방사능 맞은 돌연변이처럼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세상이다.

토끼가 모닥불에 멧돼지를 구으며 쿵덕쿵... 떡방아를 찧고 있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다.

살금살금 접근해 살펴보니 다행히 모닥불 가에 앉아 한가로이 잡담을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서양인들을 닮은 듯한 체형과 생김새였지만 분명 사람들이었다.

병규는 왈칵 반가운 마음에 수풀 밖으로 불쑥 몸을 드러냈다.

"야호!"

절로 터져 나오는 환호성. 마치 이산가족을 상봉한 것처럼 반가웠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별로 반갑지 않은 모양이다.

"...!"

"누구냐!"

병규의 갑작스런 등장에 크게 놀란 사람들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재빨리 무기들을 잡고 병규를 겨눈다. 그 반응이 놀라울 정도로 신속했다. 병규를 노려보는 그들의 눈은 짙은 경계심을 띠고 있었다. 마물이 자주 출몰하는 황무지에서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 이들의 반응은 자연 거칠 수밖에 없었다.

"엇?"

리더로 보이는 사내의 입에서 놀란 음성이 비져 나왔다.

바위 뒤에서 뛰어나온 것이 몬스터가 아니라 소년이라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키는 다 자란 성인 정도였지만 얼굴에는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비록 어리더라도 그는 결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몬스터 중에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여 여행자를 현혹하는 교활한 놈들도 있기 때문이다.

"이거 분위기가 너무 살벌한 걸?"

사람들의 지독한 경계에 머쓱해진 병규는 괜스레 뒷머리만 긁적였다.

"다시 묻겠다. 누구냐?"

선두의 사내가 검으로 그를 가리키며 물었다. 전혀 낯선 언어였지만 이번에도 병규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입을 연 병규였지만, 막상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고민이 되었다.

누구냐는 질문에 '병규인데요?' 라고 대답할 수도 없고, '인간입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도 이상하다. 그렇다고 손을 브이 모양으로 내밀며 '반갑습니다.

차원을 넘어온 이계인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PEACE, 평화입니다. 여러분! 손가락을 내밀어 주세요. 자전거와 함께 하늘을 날게 해 드리겠습니다. 특별히 이번 이벤트 기간 동안은 50% 디스카운트된 저렴한 가격으로 모시겠습니다.' 라는 시골 약장수 같은 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글쎄요. 누구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병규는 대답할 말을 찾느라 끙끙거려야 했다. 이렇게 되자 그를 향해 칼을 겨누고 서 있던 사람들 역시 난감해졌다.

기척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서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더니, 이번엔 간단한 질문에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고민한다.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한편, 병규는 자신만의 생각에 점점 빠져들었다.

턱을 감싸 쥐었다가 뺨을 긁기도 하고, 급기야 나뭇가지를 주워다가 땅바닥에 그림을 그린다.

"에... 그러니까 설라무네. 길을 걷다 운석이 떨어져서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해? 그런데 운석을 머리에 맞고 이렇게 멀쩡하면 좀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 그래. 머리통 한쪽이 좀 찌그러져야 말이 되지. 안 되겠다. 다른 걸 생각해야지. 그래, 두 발로 뛰어다니는 도마뱀 무리에게 집단 린치를 당했다고 하자.

정 주고 마음 주고 사랑도 줬지만, 이제는 남이 되어 떠나갔다고 하자. 흐음. 아니야. 요놈도 좀 이상해. 도마뱀들에게서 어떻게 도망쳤냐고 물으면 또 뭐라고 핑계를 대야 하잖아. 귀찮아. 귀찮아. 그럼 도마뱀들에게 집단성폭행을 당했다고 할까?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기억을 잃어버렸다고 하면...? 그런데 남자가 성폭행 당했다고 하면 과연 믿어줄까? 그것도 도마뱀들에게? 바지 자크를 강제로 내리는 것이 아니겠어요오오...!! 라고 대답하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점점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드는 병규였다. 보다 못한 호랭이가 빽 소릴 질렀다.

"바보야. 그냥 길을 잃어버렸다고 해."

탁!

"아하."

고민하던 병규는 호랭이의 한 마디에 깨달음을 얻은 듯 손바닥을 두드렸다.

"그러네. 길을 잃어버렸다는 무난한 핑계거리가 있었어."

절묘한 대꾸라고 생각한 병규는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방긋 웃으며 천연덕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 길을 잃어버렸어요. 하하. 그만 길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네요. 하하하."

"...."

어색한 웃음과 함께 무난한 대답(?) 한 병규였지만 돌아온 것은 싸늘한 시선뿐이었다.

"에? 뭐가 이상한가요?"

병규가 엉성한 표정으로 물었다.

선두에 선 사내가 눈빛ㅇ르 차갑게 빛내며 물었다.

"길을 잃어? 이곳에서 인가까지는 말로 달려도 일주일이 넘게 걸리는 먼 곳인데?"

"하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병규는 식은땀을 흘리며 대꾸했다.

"흥."

사내는 코웃음을 쳤다.

"넌 이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지? 이곳은 몬스터들이 떼로 몰려다니는 저주받은 땅. 붉은 대지다. 기사들조차 단독으로는 절대로 발을 들이지 못하는 공포의 땅이 여기다. 이런 곳에서 일주일이나 헤매고도 살아있다고? 그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가?"

신랄하게 허점을 집어오는 사내의 예리한 질문들. 병규는 단 한마디도 대꾸할 수 없었다. 도대체 뭘 알아야 대답을 할 게 아닌가. 심지어 이곳을 붉은 대지라고 부른다는 것조차 처음으로 알게 된 그였다.

병규가 우물쭈물 대답을 못하자 사내는 입가를 들어올렸다.

"되도 않는 헛소리는 그만두고 솔직하게 목적을 밝히는 것이 어떤가?"

"아아. 그것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어요."

병규는 두 손을 흔들며 필사적으로 외쳤지만 사람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순순히 바른 말을 불지 않을 생각인 것 같군. 좋아. 그런 식이라면 어쩔 수 없지."

무기를 꼬나든 사람들이 천천히 접근해왔다. 병규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끝내 손을 쓸 생각인 것이다. 하긴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병규는 마빡에 '전 수상한 사람입니다.' 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이방인에 불과했다.

"어째. 여기 온 이후로 만나는 생물마다 날 사로잡으려 드네."

병규의 입에서 다시금 한숨이 흘러나왔다. 한 가지도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다. 물론 따지고 보면 모두 그가 자초한 일이진 하지만 말이다. 애초부터 어쭙잖은 핑계를 댄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어쩌겠냐? 그게 다 네 녀석의 복인걸."

호랭이가 그를 올려다보며 키득거린다.

마치 병규의 불행을 즐기는 것 같았다. 얄미운 호랭이의 웃음소리에 병규는 주먹이 부르르 떨렸지만, 후일을 생각하며 애써 참았다.

지금이야 호랭이가 작으니 몇 대 쥐어박아도 충분히 수습이 가능하지만, 나중에 호랭이가 모습을 되찾게 되면, 그때부터는 순식간에 입장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도 지금은 기필코 참아야 했다.

병규가 호랭이의 독설에 무념무상의 도를 되새기고 있을 때, 천천히 다가오던 사람들이 돌연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의 조직적인 움직임은 요정의 숲에서 만났던 도마뱀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네요. 대화할 준비들이 덜 되신 것 같으니. 일단 분위기부터 잡고 보죠."

병규의 몸이 쓱 하고 움직였다.

사내들은 병규를 다치게 할 생각은 없는 듯, 무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워낙 신체가 건장한 사내들이라 맨몸으로 덤벼드는 것임에도 묘한 박력이 넘쳐났다. 애송이를 상대한다는 자만심 따위는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이 지역에 대해 용병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오가고 있었다.

'요정의 숲에서는 그 무엇도 믿지 말며, 붉은 대지에서는 그 무엇도 얕보지 말라.'

닳고 닳은 용병들 사이에 이런 말이 떠돌 만큼 이 지역은 위험천만한 곳이다.

사내들이 조심스럽게 접근하자 곤란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던 병규 역시 슬슬 행동을 개시했다. 상황이 이쯤 되면 한차례 드잡이질은 피해갈 수 없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 역시 말보다는 몸으로 대화하는 것이 편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러나 아쉽게도 둘 간의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전혀 새로운 위험이 그들을 엄습해오고 있었던 것.

미세한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 챈 것은 병규였다.

"잠깐!"

병규가 두 손을 내밀어 보이자 막 몸을 날리려던 사내들은 흠칫 놀라며 급히 몸을 세웠다.

"이제야 바른 말을 할 생각이 든 거냐?"

선두의 사내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러나 병규는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아니에요."

사내들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병규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그때, 뒤늦게 멀리서 들려오는 소음을 눈치 챈 호랭이의 귀가 쫑긋 솟았다.

"크, 크다."

호랭이는 화들짝 놀랐다. 멀리서 들려오는 이 묵직한 진동. 아직 보이지는 않지만 진동만으로도 충분히 놈의 엄청난 크기를 예상할 수 있었다.

"혹시, 이 동네에 두 발로 뛰어다니는 큰 동물이 있나요?"

"뭐?"

병규의 질문에 사내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해오는 그의 뜻을 짐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병규는 답답했다.

지금 느껴지는 기척을 이들에게 알려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가 접근해 옴에 따라 미미하게 전해오던 진동음이 점점 강도를 더해갔다. 곧이어는 급기야 지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병규에게 다가가던 사내들의 발걸음이 일시에 멈춰졌다. 마치 거대한 헤머로 땅을 두드리는 듯, 너무도 선명하게 들리는 발걸음 소리.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는 땅.

이러한 정황은 지금 접근해 오고 있는 생명체가 얼마나 큰 거체인지 짐작하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사내들이 주춤하는 사이, 뒤쪽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검붉은 머리칼의 여자가 재빨리 바위 뒤로 올라갔다. 곧이어 들려온 그녀의 비명과 같은 외침에 사내들의 표정이 싹 변해버렸다.

"오, 오우거(Ogre)."

"젠장."

선두에 선 사내, 제이콥의 입에서 욕지기가 쏟아졌다.

"어째 조용하다 했더니."

그는 재빨리 몸을 틀더니 한쪽에 묶어 놓은 말을 향해 달려갔다. 말들은 이미 거대한 몬스터의 존재감을 느끼고 흥분한 상태였다. 간신히 말들을 안정시킨 그는 고삐를 풀어놓았다.

오우거는 3미터가 넘는 거대한 신장에도 불구하고 달려오는 속도가 엄청났다.

보통의 오우거가 쫓아온다고 도망가기 힘든데, 더더구나 이곳은 붉은 대지가 아닌가.

말 그대로 몬스터들의 미쳐 날뛰는 저주받은 곳, 붉은 대지.

도망갈 생각은 애초 갖지도 말아야 했다.

쿠워어어어!

귀가 멍멍해질 정도의 괴성이 붉은 대지 위로 울려 퍼졌다. 그리고 곧 어둠을 뚫고 엄청난 크기의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족히 4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키.

구겨진 철판을 망치로 정성껏(?) 두드려 편 것 같은 흉측한 면상.

마치 악몽에 비할 만한 괴물이 아닌가. 과연 붉은 대지의 몬스터답게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오우거는 보통의 오우거보다 덩치가 훨씬 거대했다.

"워! 워!"

제이콥은 말 엉덩이를 때리며 말들을 오우거가 달려오는 방향으로 몰았다.

사람 대신 말을 희생시킬 생각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우거는 거품을 흘리고 달려오는 말들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의 고기 맛을 본 놈이군."

제이콥은 이를 악물었다.

한 번이라도 사람을 잡아 먹어본 몬스터는 미친듯이 사람고기를 즐기게 된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오우거가 바로 그런 놈인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제이콥은 무기를 꺼내들었다.

2미터가 넘는 육중한 장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레이트 소드(Great sword)라는 물건.

이드라센 대륙에서는 거대한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 비교적 크고 무거운 중병기를 주로 사용한다. 그러나 그런 중병기 중에서도 제이콥의 그레이트 소드는 발군이었다.

"호젤, 뒤로 물러서. 프리먼, 마법을 준비해 주세요. 고든, 나가자."

재빨리 명령을 내린 그는 힘차게 앞으로 나섰다.

듬직한 덩치의 거한이 배틀 엑스를 어깨에 걸친 채 그를 따랐다.

두 사람이 앞으로 나서자 오우거는 괴성을 지르며 거대한 나무둥치를 들고 휘둘렀다.

'부웅' 하는 웅휘한 바람소리가 폭풍처럼 몰아쳤다.

제이콥은 급히 몸을 수그렸고, 순발력이 좀 떨어지는 고든은 급한 대로 배틀 엑스로 앞을 가로막았다.

과연 오우거의 힘은 대단했다.

고든 역시 인간치고는 보통사람보다 우람한 덩치를 자랑했지만, 오우거의 힘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쿠웅' 하는 무직한 충돌음과 함께 고든의 큰 동체가 '부웅' 하고 떠올랐다.

"이놈!"

고든이 요란스럽게 넘어지는 사이, 제이콥은 오우거의 안쪽으로 파고들어 그레이트 소드를 힘껏 휘둘렀다.

위협을 느낀 오우거는 왼팔을 휘저으며 칼을 잡으려했다. 그러나 아무리 육중하고 둔해 보여도 그레이트 소드는 칼. 뼈와 살로 된 맨손으로 잡기엔 무리였다.

'서걱'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오우거의 손가락 몇 개가 단박에 잘려 나갔다.

크워어어어!

오우거의 괴성이 밤하늘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뭐, 저런 괴물이 다 있어?"

병규는 오우거의 압도적인 위용에 얼이 빠졌다. 기척으로 대충 키와 체중 등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눈으로 보니 이건 정말 엄청난 놈이 아닌가.

단순히 덩치만 큰 것이 아니라 힘 또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다. 놈이 나무둥치를 휘두를 때마다 폭풍과 같은 바람과 함께 흙먼지 기둥이 주위를 휩쓸었다.

"무시무시한 동네구먼."

병규는 입을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

지구에 생존하는 그 어떤 맹수도 눈앞의 오우거에게는 상대가 되지 못할 것 같았다.

한편, 병규가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제이콥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오우거의 손가락 몇 개를 간신히 잘라낸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에 아랑곳 않고 달려들며 휘두른 오우거의 일격에 그만 어깨를 스쳐 맞고 말았다.

"크윽!"

둔한 고통이 전신을 눌러왔다. 그러나 신음을 흘릴 여유도 없었다.

통나무 구르듯 무섭게 구른 그를 오우거의 거대한 발이 벌레 밟듯 찍어눌러왔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파이어 볼(Fire Ball)!"

프리먼이 때마침 캐스팅을 마치고 급히 마법을 시전했다.

밤하늘을 달구며 날아간 시뻘건 화염구는 오우거의 가슴에 무서운 기세로 작렬하였다.

콰쾅!

무직한 폭음과 함께 성난 화염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급하게 시전한 것이라 3서클의 마법치고는 위력이 다소 떨어졌지만, 그래도 상당한 위력이었다.

오우거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고통스러워했다. 살 타는 냄새가 매캐하게 피어올랐다. 그사이 제이콥은 무사히 몸을 뺄 수 있었다.

"괜찮은가?"

거한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걱정스레 물었다. 제이콥은 찡그린 얼굴로 대답했다.

"뭐, 그럭저럭. 자네는?"

그는 비스듬히 맞았지만 고든은 최초의 일격을 정통으로 맞고 가랑잎처럼 날아갔었다. 한데 이 듬직한 사내는 배틀 엑스를 한손에 쥔 채 털털하게 웃기만 했다.

"뭐, 벌레에게 물린 정도지."

그의 태연한 모습에 제이콥은 피식 웃었다.

"뒤통수를 바위에 그렇게 심하게 부딪히고도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이드라센 대륙을 전부 뒤져도 자네 하나뿐 일거야."

"칭찬으로 듣지."

"쳇. 마음대로 생각해. 우선은 저 못생긴 몬스터부터 처리하고 보자."

프리먼의 마법 지원에 용기백배한 두 사람은 불길에 휩싸인 오우거를 향해 돌진했지만, 막상 오우거는 전혀 엉뚱한 상대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병규였다.

크워어어!

오우거가 입을 벌리자 벌건 잇몸과 누런 이빨이 드러났다.

심한 악취가 코를 찔러왔다. 허나 병규의 얼굴은 의외롤 담담했다.

엄청난 괴물을 눈앞에 두고도 전혀 긴장되지 않았다. 오히려 싱긋 미소가 지어졌다.

"이래뵈도 너 같은 괴물을 상대하는 것에는 이골이 난 몸이야."

지구에 있을 때부터 스크래그와 가라스텐구 같은 괴물들을 심심찮게 상대했지 않은가.

그는 오우거를 올려다보며 여유를 부렸다. 하지만 그런 그를 보는 다른 이들은 비명을 질러댔다.

"저 녀석, 왜 도망도 안 가고 가만히 서 있는 거야?"

"제길, 너무 무서워서 도망도 못 가는 것 아냐?"

오우거를 올려다보는 병규의 모습.

다른 이들의 눈엔 꼭 겁에 질려 도망도 못 가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던 것.

그런 위기감은 오우거의 팔이 병규의 머리를 찍어갈 때 최고조가 되었다.

"피해!"

막 오우거의 두터운 손바닥이 병규의 머리를 후려치려는 찰나, 검갈색 머리카락의 여자가 병규를 감싸 안고 몸을 굴렸다. 뒤쪽으로 물러나 있던 호젤이었다.

"우악!"

느긋하게 오우거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던 병규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몸을 날린 그녀의 플라잉 바디촙에 그만 맨땅에 헤딩을 하고 말았다.

이어 돌기둥처럼 떨어지는 오우거의 손바닥을 피해 땅바닥까지 데굴데굴 굴러야 했다.

"아니, 그렇게 달려들면 어떡..."

간신히 오우거의 공격을 피한 병규는 눈을 부릅뜨며 호젤에게 따지려했다. 그러나 웬걸? 오히려 그녀가 도끼눈을 한 채 병규에게 빽 소릴 지르는 게 아닌가.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오우거가 눈앞에서 설치는데 멍청하게 서서 뭐 하는 거야!"

그녀는 병규의 멱살을 짤짤짤 흔들더니 머리까지 인정사정 없이 쥐어박았다. 병규는 굉장히 억울했지만 목숨을 걸고 달려와 준 것이 가상해 애써 참았다.

"호젤, 취향이 그쪽이었냐? 아주 신혼방을 차려라. 정신 차렸으면 빨리 뒤로 빠져!"

뒤늦게 달려온 제이콥이 병규를 타박하고 있는 호젤에게 농을 걸었다.

"헤헤. 질투하는 거야?"

"헛소리 그만하고 비키기나 해. 녀석이 또 달려든다."

제이콥의 말처럼 눈을 벌겋게 뜬 오우거가 광폭하게 달려들고 있었다.

"방해되니까 우린 빠져 주자."

호젤은 병규의 손을 잡아끌었다. 허탈한 표정의 병규는 마치 엄마에게 끌려가는 어린아이처럼 그녀에게 질질 끌려갔고, 제이콥과 고든이 그의 빈 자리를 메웠다.

제이콥을 본 오우거는 미친 황소처럼 발광했다. 그러나 제이콥과 고든이 힘을 모아 맞서고, 프리먼이 가끔씩 마법을 날리자 괴력의 오우거라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제이콥의 그레이트 소드가 오우거의 심장에 박혔다.

쿠워어어!!

마지막 괴성과 함께 오우거는 썩은 고목처럼 무너져 내렸다.

"헉헉! 제길. 돈도 안 되는 일에 힘을 너무 뺐군."

제이콥은 바위에 기댄 채 거친 숨을 훅훅 몰아쉬었다. 길게 늘어진 오우거를 슬쩍 쳐다본 그는 치가 떨리는지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이지 붉은 대지의 몬스터는 난폭해도 너무 난폭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붉은 대지의 몬스터들은 타 지역의 몬스터들보다 훨씬 강하고 더 흉폭했다. 오크조차 이곳 출신이라면 뭐가 달라도 달랐다.

잠시 숨을 몰아쉬던 제이콥은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피 냄새를 맡고 근처의 몬스터들이 모두 몰려올 거야. 빨리 여길 뜨는 게 좋겠다."

제이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일행들은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오우거 한 마리만으로도 완전 탈진 상태다. 더 이상 다른 몬스터들과 싸우는 것은 '절대로' 사양하고 싶었다.

제이콥이 휘파람을 불자 말들이 돌아왔다. 말 잔등에 짐을 싣고 막 떠나려던 일행은 병규에게 잠시 시선을 던졌다.

병규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

특히 호젤에게 보내는 눈빛이 그렇게 간절할 수가 없었다.

"제이콥."

호젤이 비음 섞인 목소리로 리더를 불렀다.

"알았어, 알았다고."

제이콥을 한숨을 푹... 내쉬더니,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병규를 불렀다.

"어이. 일단은 너도 함께 가자."

'오호라.'

병규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괴물의 난입으로 일이 엉뚱하게 꼬이긴 했지만, 오히려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잘 풀리는 분위기다.

히죽 웃어 보인 병규는 곧장 제이콥의 말 위에 올라탔다.

"너무 좋아하지 마라. 지금은 위험하니까 잠시 태워주는 것뿐이야."

병규를 말안장에 올리며 제이콥이 경고했다. 허튼 수작하지 말라는 소리다.

병규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간만에 만난 사람들이다. 그다지 친절하지는 않지만 단지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 자체가 기분 좋았다.

한 시간쯤 전속력으로 말을 달리고서야 일행은 비로소 말에서 내려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너무 피로한 나머지 불을 피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잠자리부터 폈다.

병규가 어정쩡하게 서 있자, 제이콥이 말잔등에서 두꺼운 모포를 꺼내어 그에게 던졌다.

"네 문제는 내일 물어보도록 하겠다. 일단은 자 두도록."

무미건조한 말투. 그러나 병규는 그런 제이콥을 보며 씩 웃었다.

"의외로... 괜찮은걸?"

무뚝뚝한 남자이긴 하지만 냉정한 사람은 결코 못되는 사람.

병규는 그가 던져준 모포를 바닥에 대충 깔고 벌렁 드러누웠다.

색색의 별들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오염된 도시의 하늘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

"아흥."

기지개를 쭉 켠 호랭이가 병규의 가슴 위에 올라와 빙글 몸을 만다. 피곤했던지 곧 차분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오우거의 습격이 있었는데도 호랭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하긴 그동안 경험한 괴물만 해도 엄청난 녀석들뿐이었으니....

병규는 조심스레 호랭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호랭이 신선님.'

다음 날, 벌겋게 터오는 동녘을 바라보며 지친 팔다리를 두드리던 제이콥은 비명 아닌 비명을 질러야 했다. 밤새 일행이 한 명 더 늘어있었기 때문이다.

골아 떨어졌던 일행들이 화들짝 깨어나 그에게 달려왔다.

"뭐, 뭐야?"

"또 몬스터가 나타난 거야?"

동료들의 독촉에 제이콥은 굳은 얼굴로 병규를 손가락질했다. 소란 중에도 병규는 시원스럽게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옆. 전혀 새로운 얼굴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예쁘장하게 생긴 미소년이 병규에게 기대어 잠들어 있었던 것.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소년의 정체는 샤바였다.

"누, 누구. 어제 저 녀석을 본 사람 있어?"

제이콥이 일행을 돌아보며 물었다. 사람들은 고개를 동시에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면 불침번을 서는 도중 저 녀석이 다가오는 걸 본 사람은?"

역시나 이번에도 사람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대체 저 녀석은 언제 나타난 거지?"

샤바를 보는 제이콥의 표정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샤바를 보고 경악한 제이콥들은 서둘러 병규를 깨웠다. 병규는 잠이 덜 깬 얼굴로 그들을 올려다보며 칭얼거렸다.

"졸려요. 조금만 더 자면 안 될까요?"

"지금 자는 게 문제가 아니야."

"그럼 뭐가 문제인데요?"

병규의 물음에 그들은 샤바를 턱짓해 보였다.

"이 녀석 ... 아는 놈이냐?"

병규는 그제야 왜들 이러는지 알게 되었다.

지구에 있을 때부터, 샤바는 사람들이 있을 때는 절대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주인인 병규의 명령도 있었지만, 샤바 스스로도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꺼렸다. 자신의 미려한 몸(?)을 보고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경기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제이콥 일행과 조우하게 되었을 때에도 습관적으로 은신술을 사용해 숨어 있었다. 그러다 모두가 잠들고 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샤바의 은신술은 완벽했다.

병규나 호랭이조차 기척을 잡아내지 못할 정도였다. 당연히 제이콥들은 샤바를 감지해 내지 못했고, 때문에 그가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 이 녀석요? 물론 잘 알죠. 샤바야 일어나봐."

병규가 짤짤 흔들자 샤바는 부스스 일어났다. 하지만 잠에 취했는지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았다. 제이콥 일행들은 삼엄한 눈으로 샤바를 노려보았다.

"아는 녀석이란 말이냐?"

"네. 당연하죠. 어제도 계속 같이 있었는 걸요."

병규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은 더욱 심각해졌다.

"어제 누구 이 녀석을 본 사람 있어?"

모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녀석. 어세신이냐?"

인상을 찡그리며 제이콥이 물었다. 어느새 그의 손은 칼 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줄곧 같이 있었는데도 아무도 그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 자랑이 아니라 그들은 꽤나 수준이 높은 용병들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 중 아무도 샤바의 존재감을 알아챈 인물이 없다. 이런 설명에 합당한 자는 오직 어세신뿐이다.

물론 병규나 샤바가 그들을 노릴 이유는 전혀 없다. 만약 허튼 생각을 품고 있었다면 어제 저녁의 혼란한 틈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세신이면 ... 자객을 말하는 거죠? 에이, 전혀 아니예요."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 보인 병규는 샤바의 얼굴을 들어 보였다.

"설마, 이 얼굴이 어세신 일을 할 만한 사람으로 보이세요?"

"으음."

작게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샤바의 얼굴을 본 사람들의 입에서 나직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특히 여자인 호젤의 반응은 뜨거웠다.

"마, 맙소사. 어떻게 이렇게 멋질 수가."

꺄악 소리를 지르는 그녀의 눈동자는 이미 풀어진 계란처럼 흐리멍덩해져 있었다.

다른 이들도 그녀만큼은 아니었지만 샤바의 얼굴을 보고 표정이 많이 풀어졌다.

"절대로 어세신 ... 일 리는 없겠군."

"그렇군. 저렇게 순진한 얼굴로는 ...."

"저 얼굴로 어세신이라니. 너무 억지 같아."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는 그들은 이상할 정도로 쉽게 병규의 말에 수긍하고 있었다.

어느새 긴장마저 지운 그들을 보고 병규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사람은 역시 외모란 말인가."

그의 입술을 비집고 나온 비장감이 감도는 한마디.

오해를 풀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던 병규. 그러나 샤바는 고작 얼굴을 한 번 보고 저렇게 쉽게 믿어버리다니.

복잡한 심사에 병규는 절로 의기소침해졌다. 그런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호랭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세상이 뭐 다 그런 게야."

"...!"

호랭이의 위로에 왠지 모르게 더 화가 치미는 병규였다.

그렇게 어영부영 샤바에 대한 오해가 풀리고 난 후의 일이다.

"이런."

아침 식사를 준비하려던 호젤이 당황스런 외침을 토해 냈다. 음식이 든 가방이 없어진 것이다. 어제 급하게 달려오느라 그만 어딘가에 떨어뜨린 듯했다.

"어쩌지?"

지금 돌아가 봤자 가방은 오우거의 사체를 보고 달려온 몬스터들에 의해 깔끔하게 처분되었을 것이다.

"트라우마까진 아직 일주일이나 더 가야 하는데."

호젤의 말에 모두는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붉은 대지에서는 사람이 먹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갈 길은 아직 먼데, 먹을 것은 없다.

여행자에게 이보다 나쁜 소식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전혀 의외의 사람이 활짝 웃으며 말을 꺼냈다.

"먹을 거라면 있어요. 샤바."

생뚱맞게 샤바가 끼어들었다.

그는 아침 햇살처럼 찬란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 미소를 본 사람들은 눈이 부신 듯 급히 시선을 피했고, 호젤은 뽕 맞은 사람인 양 다리를 후들거렸다.

"뭐, 뭐라는 거냐?"

간신히 정신을 수습한 제이콥이 떨리는 음성으로 병규에게 물었다.

샤바는 이곳의 언어를 전혀 사용하지 못했다. 병규는 그런 샤바를 대신하여 영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먹을 게 있다는데요."

"무엇이?"

"먹을 게 있다고?"

사람들은 일제히 경악한 표정으로 샤바를 쳐다보았다. 샤바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있어요."

"잘됐구나. 그럼 가져다주겠니?"

제이콥의 부탁에 병규는 턱을 긁으며 고민했다.

음식이 있다는 샤바의 말은 분명 반가운 소식이다. 문제는 그가 가져올 음식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인데.

사실 병규는 도마뱀들의 일이 떠올라서 영 꺼림칙했다. 호랭이 역시 표정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때 샤바가 순진무구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저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 거예요? 주인님. 샤바?"

밝은 얼굴. 티 없이 맑은 미소.

멍한 표정으로 샤바의 얼굴을 쳐다보던 병규는 홀린 듯 입을 열고 말았다.

"음식을... 가져다 줄 수 없냐고 묻는데?"

"와아, 알았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샤바는 팔짝팔짝 뛰며 기뻐하더니 어딘가로 휭하니 달려갔다.

"정말로 뭐가 있는 모양인데?"

"허, 정말 다행이군."

"그래, 처음엔 어떻게 되는 줄 알고 긴장했네."

샤바가 음식을 가지러 달려가자 제이콥과 그 일행들은 한층 표정이 밝아졌다. 영락없이 쫄쫄 굶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의 인물이 요깃거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을 쉬는 그들과는 달리 병규와 호랭이의 표정은 가볍지가 못했다.

"어째 좀 불안하지 않냐?"

"그, 그러네요."

"그렇게 불안해할 거면 왜 말해준 거냐?"

"그, 그게... 녀석의 얼굴을 보니 도저히 어쩔 수가."

"하긴."

공감한다는 듯 호랭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수양이 깊은 호랭이 역시 샤바의 천진한 얼굴엔 저항하기 힘들다.

"설마... 그걸 가져오진 않겠죠?"

병규가 암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자 호랭이가 과장스럽게 껄껄 웃었다.

"물론! 절대로 아닐 게야. 아마 그 이상한 숲에서 먹을 수 있는 과일을 조금 챙겨온 걸 테지. 너무 걱정하지 마라. 푸하하."

"하하하. 그, 그렇겠죠? 하늘이 그렇게 무심할 리 없죠. 하하하하."

서로를 마주보며 둘은 과장되게 웃었다. 그러나 괜찮을 거라며 자위하는 그들의 이마엔 식은땀이 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샤바가 들고 온 음식을 보며 병규와 호랭이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절망 어린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역시나."

"에효. 하늘도 무심하시지."

샤바가 가지고 온 큼지막한 고깃덩이. 그것은 바로 오우거의 넓적다리였다.

쏴아아아아아.

맛있게 먹으라며 샤바가 던져준 오우거의 넓적다리 고기를 본 제이콥 일행의 얼굴에서 핏기가 썰물처럼 가시고 있었다.

내 이름은 카피(COPY)

나름대로 화끈했던 아침이 지나고, 일행은 주린 배를 쓰다듬으며 길을 떠났다.

물론 그들은 샤바가 가져온 오거의 넓적다리엔 일별도 주지 않았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지 몬스터의 고기를 먹다니. 그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소름이 쫙 돋는 그들이었다.

제이콥과 일행들은 한 사람에 한 마리씩, 말을 가지고 있었다.

타고 갈 말이 없는 병규는 제이콥과 같이 타고, 샤바는 마법사인 프리먼과 함께 탔다.

출발하기 전, 샤바를 누가 태우는가 하는 문제로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다.

호젤이 부득불 자기가 태우겠다고 우긴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멀겋게 풀린 눈동자를 본 사내들은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샤바를 호젤에게 맡겼다간 대낮부터 공개 도색 영화가 상영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여행이 시작되고, 제이콥은 당연하다는 듯이 병규와 샤바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무턱대고 동행하기엔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어설픈 거짓말로는 들통 날 게 뻔하다는 걸 알게 된 병규는 무조건 기억이 안 난다는 대답으로 일관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저희들은 키 큰 도마뱀들에게 잡힌 상태였어요. 도마뱀들은 저희들을 노예로 부리려 했어요. 그래서 그들이 자는 틈을 타 도망친 거예요."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나는 것이 없다는 거냐? 이름도? 나이도? 살았던 곳조차?"

"이름은 기억나요."

제이콥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각 나라마다 독특한 억양이 있다. 때문에 이름을 아는 것만으로도 대충이나마 출신지를 파악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모르는 병규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제 이름은 태병규에요."

병규의 이름을 들은 제이콥은 고개를 갸웃했다.

"대변기?"

움찔.

병규의 어깨가 흔들렸다. 제이콥의 어설픈 발음에서 문득 아픈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서 항상 엉뚱하게 불러댔던 퀴니.

불긴한 예감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서, 설마 이곳 사람들도 내 이름을 제대로 발음 못하는 것이 아닐까?'

병규는 천천히 자신의 이름을 다시 말했다.

"벼엉규."

"벼언기."

"쿡쿡쿡."

어깨 위의 호랭이가 목구멍을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병규는 결코 웃을 수 없었다.

가만 보니 사태는 자신의 생각대로 최악의 방향으로 흐르려 하는 것이 아니가. 자칫하다간 보는 사람마다 지산을 '대변기'라고 부르게 될 판이다.

'이름을 대체할 예명이 필요해.'

끙끙하며 고심하던 병규는 문득 좋은 이름이 떠올랐다.

"카피(COPY)!"

그것은 특수재해대책본부에서 그에게 부여한 코드명이었다.

"카피?"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던 제이콥이 그의 새로운 이름을 중얼거린다.

병규의 표정이 밝아졌다.

역시 생각대로 버터끼(?)가 흘러넘치는 단어라 그런지 제대로 발음하는 것이다.

"네, 그래요. 제 이름은 카피예요."

"흐음. 이름으로 보니 바호크 공국의 출신 같군. 그런데 처음 말한 대변기라는 것은 뭔가?"

"그, 그건 그냥 별명 같은 겁니다."

"흠. 별명이라. 묘하게 정감 가는 말인걸."

"아하하. 가, 가끔 그런 소릴 듣곤 하죠."

병규는 어색하게 웃어야 했다.

"그건 그렇고 '바호크 공국'이라면 여기에서 꽤 멋 곳인데. 어쩔 생각이지?"

제이콥은 진지한 표정으로 병규의 행로를 물어왔다.

"글쎄요. 딱히 제가 그곳 출신이라는 증거도 없고.... 그나저나 제이콥은 어디로 가는 거죠?"

"우리는 '아이린 왕국'의 트라우마라는 곳으로 가는 중이다. 여기서 일주일 정도 말은 달리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지."

"흐음. 그럼 우선 저희도 그곳으로 가볼래요. 그 다음 행선은 그곳에 도착한 다음에 생각해볼 게요."

"흐음."

제이콥은 손가락으로 턱을 쓸며 잠시 신중하게 생각했다. 어쩔 수 없이 동행하게 되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아이들은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았다. 기억이 안 난다는 것도 거짓말인 것이 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황량한 대지에 그냥 버려두고 갈 수도 없으니.'

그는 곁눈질로 병규의 몸을 살펴보았다.

가는 목, 엉성한 팔다리.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허리.

약해빠진 몸이다.

"휴."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병규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제이콥에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엄청난 점프력과 재생력.

무엇이든 갈라 버리는 요수의 발톱.

상상을 초월하는 스피드.

적외선 스코프를 능가하는 시력.

그리고 주위의 기척을 예민하게 읽어내는 귀까지.

병규의 능력 중 어느 것 하나 평범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능력은 겉으로는 일체 드러나지 않았다. 때문에 모르는 사람은 항상 그를 약하게 보곤 했다.

제이콥 역시 그런 경우다.

'이런 애들을 버려두고 가면 간접살인이나 마찬가지지.'

결국 제이콥은 병규와 샤바를 데려가기로 결심했다.

'까짓것. 이렇게 어린애들인데 무슨 큰 일이 있으려고.'

어영부영 프리즘 용병단에 합류하게 된 병규는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는 이 세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돌아갈 때를 기약할 수 없는 이상, 기본적인 정보만이라도 알아야 한다.

우선 그는 동행하게 된 제이콥과 그 일행들에 대해 물었다.

제이콥은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묻는 말에는 비교적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이들은 용병으로 스스로를 프리즘 용병단이라 칭했다.

용병단이라고는 하지만 인원은 여기 있는 네 명이 전부. 하지만 실력과 명성은 대규모 용병단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 제이콥의 설명이었다.

먼저 리더인 제이콥은 턱수염을 짧게 기른 인물로 강인한 인상만큼이나 실력이 뛰어난 자다.

그의 무기는 오우거와의 혈투에서 이미 선보인 바 있는 그레이트 소드.

보통 사람이라면 두 손으로도 들기 힘든 이 칼을 그는 자유자재로 다뤘다. 그의 실력은 이드라센의 수많은 용병들 중에서도 발군이라 했다.

제이콥과 나란히 말을 달리고 있는 과묵한 거한의 이름은 고든이다.

거대한 베틀 엑스를 무기로 사용한다. 2미터가 넘는 신장에다 웬만한 여자 허리만 한 팔뚝, 백 킬로에 가까운 베틀 엑스를 한 손으로 휘두를 정도로 힘이 장사다.

그는 굉장히 과묵한 성격의 소유자로, 며칠 여행하는 동안 병규는 그가 말하는 것을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고든의 옆에서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샤바를 훔쳐보고 있는 여자는 일행의 홍일점인 호젤.

검은빛이 많이 도는 갈색머리를 포니테일로 질끈 묶은 그녀는, 일행 중 가장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녀의 주무기는 작은 단도 두 자루. 과거에 어세신 일을 좀 했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몸이 날렵했다.

당사자의 말로는 용병단 내의 삭막한 분위기 타파를 위해 온몸을 불사르고 있다지만, 사실 그녀는 프리즘 용병단 최고의 골칫덩이였다.

마지막으로 긴 망토를 걸치고 있는 중년인. 그는 4서클의 마법사로 프리먼이라 불렸다. 마른 몸에 평범한 인상이라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다.

마법사란 말에 병규는 그를 힐끔 살폈다.

특별히 마법사에게 흥미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마법이라면 이미 퀴니를 통해 몇 번 본 적이 있다. 비록 하급의 마법들이긴 했지만.

"그런데 4서클 마스터라니. 그게 무슨 소리죠?"

병규의 물음에 제이콥은 이마에 주름을 그렸다.

"마법에 대해 전혀 모르는 거냐?"

당연히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퀴니가 마법을 쓰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긴 했지만, 몇 서클이라는 식의 분류는 처음 들은 것이다.

"마법사는 마나의 이해에 따른 단계가 있는데, 그걸 서클이라고 불러. 그 구분이 어떻게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체로 서클이 높을수록 뛰어난 마법사라고 볼 수 있지."

"흠. 그럼 몇 서클이 가장 높은 거죠?"

"글쎄. 9서클이 인간의 한계라고 말하는 마법사들도 있고, 10서클이 최종이라고 부르짖는 마법사도 있지. 과연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오직 신만이 알 거야. 하지만 무식한 나도 한 가지 아는 사실은, 현재 이드라센에서 가장 높은 서클의 마법사가 8서클 마법사라는 것과 역사상 가장 높은 서클의 마법사인 에반 실브리언이 9서클 유저였다는 사실이야."

"흠. 그렇군요."

실제 마법의 끝이 몇 서클이건 간에 현실적으로 가능한 한계는 9서클 정도라는 설명이다.

이어 제이콥은 마법사가 되려면...

첫째 재능을 타고 나야 하고,

둘째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어려운 공부를 해야 하며,

셋째 돈이 많이 필요하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이런 복잡한 사정으로 마법사는 매우 귀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프리즘 용병단이 대단한 거야. 일반적으로 100명 이상의 큰 용병단에 속해있는 마법사도 고작해야 2서클 마스터나 3서클 유저 정도라고. 그런데 우리 용병단은 무려 4서클 마스터가 떡하고 버티고 있지. 하하. 넌 잘 모르겠지만 이건 엄청난 일이라고."

제이콥은 고작 네 명에 불과한 자신의 용병단에 높은 서클의 마법사가 있다는 사실을 굉장히 뿌듯하게 여겼다.

자화자찬격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병규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퀴니는 과연 몇 서클의 마법사였을까?'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조차 없다. 너무 먼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움이 뭉클 솟은 병규는 괜히 말갈기만 만지작거렸다.

그때였다. 샤바와 같은 말을 타고 있던 프리먼이 갑작스레 경악성을 질렀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깜짝 놀란 일행들이 일제히 프리먼에게 달려갔다.

"무슨 일입니까?"

일행들이 묻자 프리먼은 말을 같이 타고 있는 샤바를 손가락질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샤바에게로 쏠렸다. 쏟아지는 삼엄한 눈길들,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눈길들에 무안할 만도 하건만 샤바는 도리어 방긋 웃음을 보였다.

눈이 부신 미소였다.

"이 아이가 왜?"

사람들의 두 눈에 의문이 서렸다.

아무리 봐도 이상한 점은 없었다.

황홀한 미소만 뺀다면 말이다.

"흠흠."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 프리먼은 헛기침을 했다.

"같이 말을 타게 된 것을 계기로 난 이 아이에 대해 알아보려고 이런 저런 말을 했지. 생소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그렇고, 입고 있는 복장도 특이하고... 아무튼 여러 가지가 궁금했네. 그런데...."

샤바는 이곳의 언어를 구사할 줄 몰랐기 때문에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 손발을 활용한 바디 렝귀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렵게 대화를 이끌어가던 중, 샤바가 드문드문 그가 사용한 단어를 금방 따라하는 것을 알게 된 프리먼은 신기한 생각에 '하늘, 구름, 땅' 하는 식으로 가장 기본적인 명사들을 알려주었다. 샤바는 마치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이 쉽게 그가 가르쳐 주는 것을 배워나갔다.

그렇게 고작 네 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놀랍게도 샤바가 더듬더듬 기본적인 일상어를 구사하는 것이 아닌가.

가히 경악할 만한 언어습득능력.

"그게 사실이냐?"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제이콥이 샤바에게 물었다. 고작 몇 시간 만에 기본적인 대화가 가능해지다니. 프리먼이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도저히 믿기지 않는 소리다.

제이콥의 물음에 샤바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난 조금 말할 수 있다."

어색한 어투였지만 발음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샤바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대단한 천재로군."

"놀라워."

그들은 침이 마르도록 샤바의 천재성을 칭찬했지만, 정작 본인은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만 긁적였다.

"쳇. 난 배우지 않고도 여기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했는데."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샤바를 째려보며 불만스럽게 조잘거리는 병규였다.

기왕에 할 도둑질이라면 확실하게 해야겠지?

쏟아지는 햇빛.

텁텁할 정도로 건조한 날씨.

삭막한 대지 위를 걷는 말의 발걸음조차 축 늘어져 보인다.

붉은 대지는 사막처럼 뜨겁지는 않았다. 하지만 햇빛을 피할 그늘이 없다는 점에서는 괴롭긴 매한가지였다. 다행히 물은 있어 갈증은 면할 수 있었지만 주린 배를 채워줄 식량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일행의 어깨는 축 처져있었다.

그렇게 축 쳐진 사람들 중엔 병규도 있었다. 유달리 그의 어깨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처져있었다. 특별히 그는 남들보다 두 배정도 더 힘들었기 때문이다.

원인은 처음 타보는 말에 있었다.

제이콥과 함께 말을 탔을 때, 그는 신이 났다. 평생에 한 번 타볼까 말까한 승마가 아닌가. 그러나 기쁨도 잠시, 호기심으로 반질거리던 그의 얼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고통으로 일그러져 갔다.

다그닥 다그닥거리며 상하로 움직이는 진동에 허벅지와 엉덩이가 심하게 아파왔다.

게다가 그는 제이콥과 둘이서 말을 타야 했으므로 바른 자세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가끔씩 자세가 흐트러질 때는 어김없이 신선한 충격이 국부를 자극하곤 했다.

해가 산 너머로 기울고 머리 위로 별이 총총 뜬 후에야 일행은 비로소 말을 멈추었다. 식량이 떨어진 이상 하루라도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야 했지만, 그렇게 혹사했다간 얼마 버티지 못하고 말들이 죽을 게 뻔했다.

간신히 쉴 수 있게 된 병규는 어기적어기적 땅바닥을 기었다.

보기보다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은 체력소모가 심했다. 하루 종일 말에 시달리다 보니 걸을 힘도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호랭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꼴좋구나."

병규는 치질 수술 받은 환자처럼 엉덩이를 하늘로 쳐든 채, 김빠진 푸념만 토해냈다.

"주, 죽겠어요. 서부 영화에서 볼 때는 멋있게 보였는데. 이거 엄청 곤욕이네요."

"이 놈아. 그럼 유모차처럼 안락한 줄 알았냐? 말과 한 몸이 되어서 움직여야지. 샤바를 봐라. 저 녀석은 멀쩡하잖아."

죽겠다고 끙끙거리는 병규와 달리, 샤바는 긴 머리를 휘날리며 말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너무도 편안한 표정.

이따금씩 뭐라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꼭 말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쯧쯧. 어째 이리 틀릴꼬. 한 녀석은 영판 귀공자인데, 다른 한 녀석은 막자란 쌍놈이구나."

호랭이의 혼잣말에 병규는 쳇 하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쟨. 특별하잖아요. 저같이 평범한 사람과 비교하면 안 되죠."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남들이 보기엔 병규도 충분히 이상한 사람이다.

심심하면 강아지와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를 했으니 말이다. 말은 안 했지만 프리즘 용병단은 병규를 또라이... 비슷한 쪽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호랭이의 말을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오해였다.

"호오. 네가 평범해? 어디 그 화끈거리는 엉덩이에 물 한 잔 뿌려볼까? 평범한지 그렇지 않은지?"

평범하다고 항변하는 병규를 호랭이가 거슴츠레한 표정으로 쭉 훑는다.

"됐어요. 물 뿌리면 금세 편해지긴 하지만, 재생될 때 굉장히 아프단 말이에요. 꼭 불이 붙은 것처럼 화끈거려서 영...."

늙은이처럼 투덜거린 병규는 엉거주춤 편편한 바위 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어이고. 시원하다."

바위의 냉기로 달아오른 엉덩이를 식히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웬걸. 엉덩이가 좀 괜찮아지니 새로운 고민거리가 슬그머니 고개를 쳐드는 것이 아닌가.

꼬르르륵!

"으윽. 이럴 줄 알았으면 샤바가 가져온 괴물 넓적다리라도 뜯을 걸 그랬나?"

병규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아쉬워했다.

붉은 대지의 밤은 유달리 소란스러웠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몬스터들의 괴성으로 귀가 멍멍해질 정도였다. 프리즘 용병단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밤새 돌아가며 불침번을 섰다. 다행히 병규와 샤바는 어리다는 이유로 열외되었다.

제이콥 일행이 병규의 귀와 샤바의 더듬이(지금은 머리카락으로 변했지만)에 대해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제이콥 일행들이 그런 것에 대해 알았다면, 이렇게 퀭한 눈으로 새벽을 맞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연일 피곤한 날이 계속되었다.

괴로운 여정 중, 한 가지 소식이 있었다. 샤바가 삼 일만에 웬만한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대륙어를 익힌 것이다. 당연히 프리즘 용병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살다 살다 이런 천재는 처음 보는군."

마법사인 프리먼은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며칠 여행하는 동안 프리먼과 샤바는 매우 친해졌다. 가르쳐 주는 대로 쭉쭉 빨아들이는 샤바의 천재성. 프리먼은 그런 샤바를 가르치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 모를 지경이었다.

특히 프리먼의 마음에 쏙 든 것은 마나에 대한 샤바의 이해력이었다. 가끔씩은 가르치는 프리먼조차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것을 질문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허허. 안타까운 일이야. 안타까워."

샤바의 천재성이 빛을 발하면 발할수록 프리먼의 안타까운 탄성을 터트렸다.

마법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학문이다. 때문에 다른 어떤 학문보다 조기교육이 절실했다.

물론 희대의 천재들이 있어 늦은 나이에 시작했음에도 뛰어난 성과를 이루는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은 아이들에 비해 성장이 더딜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프리먼이 보기에 샤바는 정말로 인세에 드문 천재였다. 그런데 그런 천재가 이렇게 무방비로 방치되어 있었다니. 샤바의 천재성이 빛을 발할 때마다 프리먼은 안타까운 탄식을 흘려야 했다.

'아무리 늦었다한들, 이 아이가 이대로 묻혀 버리는 건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결심을 굳힌 프리먼은 샤바에게 마나에 대한 지식을 하나 둘 알려주기 시작했다. 마법사가 되기엔 이미 너무 늦은 나이. 대신 이론적인 마법학이라도 전수해 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런 프리먼의 진심을 아는지, 샤바는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복잡한 얘기들을 싫은 내색하나 없이 고분고분 잘 들었다.

그야말로 열정적인 선생에 충실한 제자였다.

"저런 고리타분한 얘기가 대체 뭐가 좋을까?"

샤바와 프리먼을 돌아보며 병규는 혀를 내둘렀다. 잠시도 쉬자않고 떠들어대는 프리먼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골치 아픈 설명을 아무 불평 없이 계속 들어주는 샤바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병규가 입을 내밀며 투덜거리자 제이콥은 껄껄 대소를 터트렸다.

"하하. 아무래도 자넨 마법사보다는 우리처럼 육체노동파인 것 같군."

호탕하게 웃은 그는 병규의 귀에 은근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실은 나도 머리가 지끈거리던 참이야."

"호오. 역시. 제가 이상했던 게 아니군요."

병규는 제이콥에게 동질감 비슷한 것을 느꼈다.

"그나저나 저 샤바라는 친구. 대단한 걸?"

"뭐가요?"

"프리먼은 고든만큼이나 과묵한 사람이거든. 모르는 사람과는 여간해서는 대화도 잘 안 하는 편이지. 그런데 저렇게 신이 나서 떠드는 걸 보면 저 친구가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야."

"헤요. 그렇군요."

병규는 입을 삐죽거리며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샤바의 인기가 갑자기 급상승한 것이 불만인 모양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트라우마에 도착하기도 전에 모두 지쳐 쓰러지겠어."

병규와 샤바가 프리즘 용병단에 합류한 지 삼 일째 되던 날.

급기야 사람들은 탈진해 버렸다. 여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호젤이 머리를 흐트러트리며 짜증 섞인 말을 던졌다.

"젠장. 너무 배가 고파서 오크 엉덩이라도 뜯어먹고 싶을 지경이네."

물로 배를 채우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꼬르륵거리던 배는 언제부터인가 끊임없이 시냇물 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앞으로 삼사 일은 더 가야 사람이 있는 트라우마에 도착할 수 있는데, 벌써부터 눈앞이 노랗게 변하는 것이다.

"버텨. 십 일 정도는 음식 없어도 안 죽는다는 건 상식이야."

"그거야. 아무 일도 안 하고 가만 앉아 있는 경우지. 말 타는 게 얼마나 심한 노동인지 몰라서 그래?"

"으으. 떠들지 말아주세요. 의식이 멀어져."

병규 역시 죽을 지경이었다. 발달된 문명 덕에 여태 호의호식하며 살았던 그다. 귀찮아서 밥을 안 챙겨먹은 적은 있어도 이렇게 무작정 굶은 건 처음이었다.

"투정부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잖아."

제이콥은 피곤한 눈으로 일행들을 독려했다. 하지만 그 역시 위장이 둘둘 꼬이는 것 같은 허기를 참기 힘들었다.

"으으으으. 꽃다운 나이의 병규는 이렇게 굶어죽고 마는 것인가."

말 잔등이 축 늘어진 병규는 혀를 길게 베어 물며 아사 직전의 궁핍한 상황을 온몸으로 열연하고 있었다.

'사람들 몰래 말이라도 잡아먹을까?'

병규는 말갈기를 쓰다듬으며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의 생각을 눈치 챈 것인지 말이 부르르 떤다.

그렇게 원하지 않던 기아체험을 하고 있을 때였다.

병규의 두 귀가 어느 순간 살짝 움직였다. 인기척을 느낀 것이다.

꽤 먼 거리.

'음? 이건!'

가물가물한 곳에서 전해져오는 기척에 정신을 집중하던 병규의 두 눈이 활짝 떠졌다.

'말발굽소리잖아?'

병규는 기척이 느껴지는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마침 샤바도 머리카락을 더듬이처럼 쫑긋 세운 채 그를 보고 있었다.

"샤바야. 너도 느꼈냐?"

"네. 말이에요. 샤바. 말발굽 소리. 샤바샤바."

두 사람이 반갑게 외치는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뭣?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고?"

"어디야. 어디?"

굶주림에 눈이 뒤집힌 사람들은 광폭한 폭도들처럼 병규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그들의 과격한 재촉에 병규는 켁켁거리며 먼 능선을 가리켰다.

"저쪽에서 들려요."

"어디 어디?"

"안 보이는데?"

정신없이 병규가 가리킨 방향을 쳐다보던 사람들이 의심의 눈길을 돌린다.

"능선 너머에 있어요."

"능선 너머?"

호젤이 퀭한 눈으로 물어본다. 병규가 가리킨 능선은 꽤 먼 거리에 있었다. 그런데 보이지도 않는 먼 곳에서 난 소리를 들었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다.

"환청이 들리는 거냐?"

제이콥은 한숨을 쉬었다. 역시 고생을 모르고 자란 녀석이라 제일 먼저 나가떨어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병규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환청이 아니에요. 샤바도 들었으니까요."

샤바도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모두들 굶주림에 지쳐있었지만 유독 샤바만큼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저도 들었어요. 샤바."

"정말이야?"

"확실한 거야?"

사람들이 다시금 묻는다. 눈 밑에 축 늘어진 다크서클이 유난히도 뚜렷하게 보인다.

"가보면 알 거에요."

병규는 자신 있게 소리쳤다. 워낙에 당당한 태도라 일행은 긴가민가하면서 그가 지시한 방향으로 말을 몰았다.

"아닛!"

말을 타고 능선을 넘은 사람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정말로 사람들의 행렬이 있었던 것이다.

십여 기의 기사들과 귀족가의 것으로 보이는 사두마차가 황량한 벌판을 달리고 있었다.

"너. 정말로 말발굽 소리를 들은 거야?"

호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어왔다. 아무리 황량한 대지에서 나는 소리가 멀리까지 퍼진다 해도 이건 너무 먼 거리다. 이 정도 거리라면 숲의 종족인 엘프조차도 듣지 못할 것이다.

병규는 대답 없이 그냥 웃기만 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요. 배 안 고파요?"

그제야 허기를 느낀 일행은 허겁지겁 마차로 달려갔다.

"멈추어라."

마차를 호위하고 있던 십여 명의 기사단은 곧장 일행의 앞을 가로막았다. 할버드(Halbard)와 랜스(Lance)를 들이미는 모습이 흉엄하기 짝이 없었다.

"웬 놈들이냐!"

콧수염을 길게 기른 중년인이 근엄한 목소리로 외쳐 물었다. 제이콥은 즉시 말에서 뛰어내리며 대답했다.

"저희는 프리즘 용병단이라고 합니다. 트라우마로 가던 중 피치 못할 사정으로 마차 앞을 막게 되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피치 못할 사정?"

"그게... 식량이 떨어져서 어쩔 수 없이."

제이콥이 주저주저 말을 꺼내자 중년 기사의 굵은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구걸하러 온 것인가?"

"먹을 것이 필요해서 온 것은 맞지만 구걸은 아닙니다."

호젤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그녀에게 잠시 시선을 두던 중년 기사는 비릿하게 웃었다.

"대뜸 길을 막고 먹을 걸 달라고 강짜를 부리는 것이 구걸이 아니면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한다는 소리냐?"

중년인의 말에 기사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처음 보는 사이에 이렇게까지 무안을 주다니. 프리즘 용병단은 속으로 분통을 터트렸다. 그러나 당장 궁한 것이 이쪽의 사정이라 목구멍까지 치솟는 화를 꾹 눌러 참을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저흰 벌써 며칠째 굶고 있습니다. 음식을 조금만 나눠주십시오."

제이콥은 정중하게 부탁했다.

자존심을 죽인다는 것.

남자로서는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기사들은 여전히 빈정거리는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지루한 여정이었다.

몇몇 몬스터들이 달려들긴 했지만 별 다른 어려움 없이 가볍게 퇴치할 수 있었다. 붉은 대지의 악명을 익히 들어왔던 기사들에겐 김빠지는 여행이었다.

그러던 차에 이들이 나타난 것이다.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궁핍한 모습으로.

그들을 본 기사들의 눈빛이 반짝 빛을 발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명예로운 기사다.

허나 기사가 갖추어야 할 명예로운 자질과 덕목들은 오직 지체 높은 귀족에게만 발휘되는 고귀한 물건에 불과했다.

"글쎄. 어떨까."

중년 기사가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길게 말꼬리를 늘인다. 어떻게 하면 이 녀석들을 골려줄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켄트 경. 잠깐 기다려 보시오."

낭랑한 음성과 함께 마차의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남 일녀였는데, 남자는 병규 또래로 보이는 갈색 머리의 청년이었고, 여자는 삼십대 중반의 요염한 인상이었다.

그중 켄트라 불린 중년 기사를 저지한 것은 화려한 외관의 청년이었다. 그는 눈에 띌 정도로 잘생긴 외모의 소유자였지만 유독 눈꼬리가 솟아있어 다소 신경질 적으로 보이는 것이 흠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청년은 우선 제이콥 일행을 쓱 훑어보았다.

씨익.

지칠대로 지쳐 있는 프리즘 용병단을 본 청년의 입가에 사요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래. 배가 고파서 왔다고?"

청년이 능청스런 표정으로 묻는다. 제이콥은 청년이 귀족가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오른 손을 왼쪽 가슴에 두드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 그만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정중한 태도. 그러나 켄트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허리에 찬 검을 빼들며 호통을 쳤다.

"이놈. 필립가의 문장이 안 보이느냐! 고개를 조아려라."

강압적인 태도에 호젤이 눈썹을 치켜뜨며 나섰다.

"이봐요. 아까 말했듯이 우린 용병이에요. 그리고 아이린 왕국의 국민도 아니죠. 그런데 어째서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라고 강요하는 거죠? 용병은 고용인 외에는 절대로 머리를 숙이지 않아요."

"이곳은 엄연히 아이린 왕국의 국토다. 귀족에게 예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예의가 아닌가."

"흥. 언제부터 붉은 대지가 아이린 왕국의 소유가 되었죠? 제가 알기론 아이린 천년 왕국사에 붉은 대지를 국토로 삼은 것은 단 한 번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틀린가요?"

조목조목 따지는 그녀의 말은 이치에 맞았다.

"무엄하다!"

일순 말문이 막힌 켄트의 칼이 부들부들 떨렸다. 극도로 흥분했다는 증거.

그때, 흥미로운 표정으로 일의 진행을 지켜보고 있던 청년이 슬그머니 앞으로 나섰다.

"흥분을 가라앉히게 켄트 경. 그깟 일로 흥분할 필요는 없네."

켄트를 진정시킨 그는 한 가닥 차가운 마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자네들.... 식량이 필요해서 왔다고 했나?"

"그래요."

"호오. 구걸하는 입장치고 목이 너무 뻣뻣한 것 같군.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내게 절을 한다면 식량을 주도록 하지."

그가 가리킨 인물은 다름 아닌 제이콥이었다. 청년은 그가 일행의 리더임을 눈치 채고 이렇게 농을 건 것이다.

"제이콥. 그럴 필요 없어. 가자. 이런 일로 자존심 구길 필요 없어. 그냥 며칠 굶자."

호젤은 분통이 터진다는 표정으로 제이콥의 팔을 끌었다. 그러나 굳은 얼굴의 제이콥은 움직이지 않았다.

"제이콥!"

호젤이 버럭 고함을 질렀으나 제이콥은 가만 고개를 흔들었다.

"더 이상 체력손실이 있으면 위험해. 이곳은 붉은 대지다. 우리가 지쳐 있을 때, 먼저처럼 오우거와 같은 몬스터를 만나게 된다면 우린 이곳에서 뼈를 묻게 될 거야."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한 그는 당황하는 호젤을 스치며 청년의 앞까지 나아갔다.

"내가 당신의 발 앞에 고개를 조아리면 남는 식량을 나눠주겠다는 말이 사실이오?"

제이콥의 말에 의외라는 듯 눈빛을 보내던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

"좋소."

제이콥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제이콥!"

호젤의 비명과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끝끝내 청년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허. 동료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자존심쯤은 과감히 버린다. 괜찮은 남자로군."

거만한 자세로 제이콥의 절을 받은 청년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기사들 중 한 명이 가까이 다가오자 청년은 그에게 귓속말을 몇 마디 했다. 기사에게 명을 내리는 그의 눈이 장난기로 일렁이고 있었다.

"저 자식이!"

뒤쪽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사태의 추이를 살피고 있던 병규가 돌연 욕을 씹어냈다. 다행히 그의 욕은 한국어라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없었다.

밝은 귀 덕택에 청년의 귓속말을 들을 수 있었던 병규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다른 세상의 일이라 웬만하면 나서지 않으려고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간 병규는 무릎을 꿇고 있는 제이콥의 팔을 끌었다.

"제이콥, 가요. 저 사람들은 나눠줄 생각이 없어요."

"아니야. 그는 맹세했다. 귀족이라면 결코 약속을 어기지 않을 것이다."

제이콥은 확인하듯 청년에게 시선을 주었다.

"물론."

청년은 거만한 목소리로 외쳤다. 확답을 얻은 제이콥은 처연한 시선을 병규에게 보냈다.

"걱정해 주는 마음은 고맙지만 지금은 잠자코 있어주길 바란다."

"하지만 저 사람이 부하에게 한 말은...."

병규가 화난 목소리로 말하려 할 때, 청년의 명을 듣고 사라졌던 기사가 돌아왔다. 기사는 작은 헝겊 주머니를 들고 있었는데, 그것을 받은 청년은 마치 징그러운 것을 만진 듯 두 손가락으로 툭 하고 던져주었다.

"우리에게 필요 없는 것이니, 가져가라."

"고맙소."

짧은 말로 인사를 감사한 대신한 제이콥은 즉시 헝겊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제이콥의 어깨가 휘청 흔들렸다.

주머니 안에 있던 것을 퀴퀴한 냄새로 진동하는 상한 음식들이었다.

"이걸 어떻게 먹으란 말이오!"

분노한 제이콥은 주머니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청년은 흐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왜? 음식이지 않은가? 그대가 원하던 것일세."

"그걸 말이라고 하는 말이오? 이건 먹을 수 없는 것이잖소. 어떻게 이럴 수가. 귀족이라면 응당 명예를 중시해야 하거늘. 어찌 사람이 먹지도 못하는 음식을 준단 말이오!"

"호오. 좀 전에 그대가 말하지 않았는가? 남는 식량을 나눠달라고. 우리에게 남는 식량은 그것뿐이라 그걸 나눠준 것인데 뭐가 잘못됐단 거지?"

"그 무슨...."

제이콥은 할 말을 잃었다. 설마 겸손하게 보일 양으로 한 말을 이런 식으로 악용할 줄이야. 얼마나 분했던지 눈두덩이가 부들부들 떨렸다.

참담한 심정을 누르고 있던 프리먼과 호젤은 어안이 벙벙했다.

"당신은 귀족의 덕목도 모르시오? 불쌍한 백성에게 선정을 베푸는 것은 당연한 의미이지 않소!"

프리먼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분노로 일그러진 외침. 그러나 청의 입가에 그려진 미소를 지우기엔 역부족이었다.

"흥. 내 나라의 백성도 아닌데 내가 왜 선정을 베풀어야 하지?"

능청스럽게 대답한 그는 흥분으로 벌겋게 상기된 호젤에게 느글느글한 미소를 보였다.

"이 말 또한 너희들이 한 말이다."

청년의 말이 끝나자 기사들에게서 일제히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대단하십니다. 도련님."

기사들의 비웃음이 쏟아지는 가운데 켄드카 앞으로 나서며 거창하게 외쳤다.

"꺼져라. 감히 허절한 이유로 귀족의 마차를 막다니. 죽이지 않는 것만도 천만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이! 이!"

화산이 폭발하듯 호젤이 뭔가를 터트려는 순간, 멍한 눈으로 서있던 제이콥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됐다. 그만해."

"하지만.... 하지만...."

할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호젤. 제이콥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이럴 수는 없어. 이건 너무하잖아."

흥분해 떨던 그녀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휴."

제이콥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그가 위로해 주면 된다. 하지만 자신은 누가 위로해 주는가.

울분이 솟았다. 귀족나부랭이라며 거들먹거리는 녀석들에게 고개를 숙였다는 것이 더없이 참담하게만 느껴졌다.

"가자."

제이콥은 우울한 얼굴로 동료들을 이끌었다. 그때, 청년이 그를 불렀다.

"감히 귀족이 주는 은혜를 거절하겠다는 말은 아니겠지?"

그는 땅바닥에 떨어진 헝겊 주머니를 턱짓하고 있었다.

몸서리쳐지는 굴욕감.

"좋은 말 할 때 도련님의 말씀을 듣는 게 좋을 거야."

"귀족 모독죄를 모르는 건 아니겠지?"

키득거리던 기사들이 일제히 창을 꺼내들었다. 기사들의 흉엄한 표정을 쭉 훑어본 제이콥은 조용한 걸음으로 주머니를 들고 왔다.

"고맙소."

"좋아. 그래야지."

떠나가는 제이콥의 뒤로 청년과 기사단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트라우마까지 고작 삼 일 거리다. 밤을 새서 달리면 굶어죽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하하하."

으드득.

청년의 비아냥거림에 병규는 이를 갈았다.

"젠장. 저열한 귀족 놈들."

호젤은 발밑의 돌을 차며 고함을 질렀다. 그녀는 제이콥이 들고 있던 주머니를 확 빼앗아 들고는 바닥에 내팽개쳤다.

"지금 가서 복수해 주자. 우리 실력을 보여주자고. 무능한 기사들 10명쯤은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어. 증거만 남지 않는다면 누가 해치웠는지 어떻게 알겠어?"

흥분한 호젤을 제이콥이 말렸다.

"그만둬. 너도 봐서 알겠지만 얼치기 기사들이 아니야. 우리 용병단의 실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쪽 피해가 전혀 없을 거라 장담할 수도 없다. 게다가 상대는 공작의 자제야. 단순히 귀족 살해혐의 정도가 아니라고. 게다가 아까 그 여자.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인상착의였다."

"정령술사네."

프리먼이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듯했다.

"공작가에 뛰어난 정령술사가 한 명 있다고 들었는데, 인상착의를 보니 그녀가 틀림없는 것 같군."

"정령술사 정도는 프리먼 아저씨가 해결해 줄 수 있잖아요."

따지듯 물어오는 호젤의 말에 프리먼은 고개를 저었다.

"마법사와 정령술사는 많은 점에서 차이가 있지. 그녀는 대륙에 알려진 유명한 사람이지만 난 그렇지 못하단다."

"하지만...!"

제이콥은 고개를 흔들며 항변하려는 호젤의 입을 막았다.

"참아라. 분하고 원통한 것은 모두 마찬가지야. 넌 어세신 출신이잖니. 가장 냉철해야 될 네가 이렇게 흥분하면 어떡하냐."

"제길."

그녀는 울었다. 분해서 울었다.

"치졸한 자식들. 고작 먹을 거 때문에 사람을 이렇게 분하게 만들다니."

그들에겐 권태로운 여행에 흥을 돋우어 줄 유흥거리였는지는 몰라도. 이들에게는 생사가 걸린 문제였다.

프리먼은 먼 곳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고, 고든은 배틀해머를 꺼내들고는 쿵쿵 바닥을 찍었다.

"분해하지 않아도 돼. 녀석의 말대로 트라우마까지 이제 고작 삼 일이다. 밤새도록 달리면 이틀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거야. 그 때는 우리 배가 터지도록 먹자."

제이콥은 실망한 동료들을 애써 다독였다. 공작가의 치졸한 행동에 분통을 터트리던 그들은 결국 어쩔 수 없이 현실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귀족의 자제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판결 없이 즉결 심판, 즉 그 자리에서 죽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다. 일이 잘못되어 그들의 소행임이 드러나는 순간, 그들은 끝없는 도망자의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용병들은 국법에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지만 그렇다고 공작가의 자제에게 대놓고 저항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병규는 결코 그들처럼 순순히 물러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지만 그의 사상으로는 얼토당토 않는 말에 불과했다.

게다가 최근 그는 인생관을 획기적으로 바꾸지 않았던가.

비겁하게라도 잘 살아보는 것으로.

'이렇게 된 이상 도적질이라도 해야겠어. 기왕 할 거면 확실하게 해야겠지?'

병규의 입술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렸다.

청아한 구타소리가 고요한 달밤을 울리다.

병규는 자신의 계획에 샤바를 끌어들이기로 했다.

그의 은신술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그런데 호랭이가 문제였다. 신선인 호랭이가 도둑질 같은 범죄를 묵인할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병규의 계획을 들은 호랭이는 찬성 쪽의 손을 들었다.

"살인, 방화 기타 등등의 극심한 범죄만 아니라면 묵인하겠다."

"헤. 웬일이세요? 신선이 도적질을 장려하다니요?"

이거야말로 해가 서쪽에서 떠오를 만한 일대 사건이었다.

"무슨 소리야. 난 괜찮다고 말한 것이지, 절대 장려한 게 아니야. 험험. 보아하니 귀족 아이가 버릇이 너무 없어 보이더구나. 철없는 사람에게 한 번쯤 인생 경험을 시켜주는 것도 도를 닦는 사람으로서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말이지. 험험. 어허험험."

호랭이는 애써 근엄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지만, 말미에 꼬르륵 하는 소리가 대미를 장식하는 바람에 톡톡히 망신을 떨어야 했다.

불가능할 것 같은 호랭이에게서 동의를 구했지만 아직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죽어도 같이 가겠다고 떼를 쓰는 호랭이는 생김새가 너무 도드라져 금방 정체가 탄로 날 위험이 있었다.

"그런 거라면 걱정 없다."

병규의 고민을 들은 호랭이는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몸을 흔들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눈송이처럼 하얀 털이 점점 검게 변색되어 버린 것이다.

"어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