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화. 밤은 요람이 되어 (2)
무구를 고르는 데 있어 가장 신경 썼던 점은 다름이 아닌 '나와의 궁합'이었다.
어떤 효과를 지녔으며, 또 어떤 식으로 발동하는지.
그 기전을 확실히 알기에 활용도에 대한 고민을 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톱날 검은 두말 할 필요도 없는 1순위였다.
일단 가장 잘 아는 무기라는 점이 구미를 당기게 했으며, 그를 떠나서도 지닌 성능이 더욱 나를 끌어당겼다.
'이능 포식.'
검이 왜 톱날의 형태를 취했는가.
그것은 하나의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깎아낸다는, 그런 의미 말이다.
언젠가 이 검의 원주인과 싸울 때마다 했던 생각이 있었다.
내 눈은 이능의 결을 본다.
이 검은 이능을 깎아낸다.
그것이 합쳐진다면 어떤 시너지가 나올까.
결을 따라 이능을 깎아낼 수 있다면, 나는 원래 할 수 있었던 일에 어떤 현상을 더 해낼 수 있을까.
그 답이 이제야 나왔다.
째애애애앵―!
결이 깎여 균형을 잃은 가호가 이윽고 무너져내렸다.
가호의 조각이 마치 유리 조각처럼 허공을 비산하는 것이 보였다.
그 너머로 놈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였다.
나는 한 발 앞으로 나서 이번엔 신목을 휘둘렀다.
놈이 이를 악물며 팔로 몸을 막았다.
하지만,
꽈직―!
팔을 뼈째로 부러뜨리는 결과만 나올 뿐이다.
"끄윽…!"
놈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였다.
하지만 멈출 때는 아니었다.
더 강하게 짓쳐 들었다.
놈의 사지 한쪽은 잘라내겠단 각오로 톱날 검을 휘둘렀다.
그에 반격이 들어왔다.
"지랄하지 마!!!"
꽈아아앙―!
순수한 충격파에 몸이 밀려 나갔다.
그 사이에 신성이 놈의 몸을 회복시켰다.
눈이 좁아졌다.
'이래서 성기사가 귀찮지.'
하나같이 바퀴벌레처럼 질겨서는 영 무력화하는 게 쉽지 않다.
대치 상태.
나는 입을 열었다.
"애새끼처럼 소리 질러 댄다고 뭐가 바뀌나."
상대를 분석하는 일은 전투에서 꽤 중요한 지분을 차지한다.
저놈은 충동적이다.
감정적이고 자신감에 차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기서 날 상대한다는 결론은 내지 못했을 것이고, 웃으며 먼저 달려드는 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도망을 가거나 다른 벽을 세워 협공을 노렸겠지.
그렇다면 그 자존심이 약점이다.
방심하는 놈은 죽는다.
그게 전쟁이고 전투였다.
거기에 하나 더.
'직위는 높아 보이고.'
뒤에서 음침하게 일이나 벌리는 놈들의 지휘관쯤 되는 놈일 터다.
전투 경험이 많을 리가 있겠나.
상대는 이 기본이 되어있지 않을 확률이 높았고, 내 추측은 맞았다.
"쳐죽일 새끼가!!!"
쿠우우웅―!
법술이 떠오른다.
그것이 수십갈래로 나뉘어 내게 쏘아졌다.
나는 비소했다.
"병신."
그대로 달려들었다.
갈래가 나뉘었다곤 하나 결국 하나의 이능, 각 갈래마다 결이 뻗어 있다.
그리고 톱날 검은, 결 하나만으로 이능 전체를 부수는 무구였다.
째애앵!
하나의 결을 깨부수는 순간 모든 결이 무너져 법술이 사라진다.
놈이 또 이능을 발한다.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깨달을 때가 되었을 텐데, 학습 능력은 없는 듯하고.
"운명이여! 심판을 내려라!"
다음 법술에는 가호가 내려진다.
하나의 법술이 아니었다.
하나, 둘, 다섯, 열.
'영창 속도는 빠른데.'
만들어진 법술은 총 13개.
운명의 가호는 '필중'과 '치명'의 효과가 붙는다.
신명에 걸맞은 필연을 공격에 부여하는 것이다.
'오래 끌어선 안 된다.'
눈의 마법이 없다면 가호까지는 보지 못한다.
가호를 보지 못한다면 열세에 접어들 수도 있다.
아직 몸이 허락할 때, 이 고통이 버틸 만할 때 끝내야 했다.
나는 달려들며 검 위로 마나를 덧씌웠다.
하나하나 법술을 분해하며 거리를 좁혔다.
놈은 그 사이에 또 다른 법술을 구사했다.
절대 거리를 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고,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읊조렸다.
"늑대."
[그르릉....]
망토 뒤로, 바람 늑대가 나타나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커흥!!!]
달려갈수록 늑대의 갈기가 더 삐죽해진다.
어금니와 발톱 또한 포악해졌다.
내 성질을 머금은 늑대다.
그것은 달리 말해,
꽈드드드득!
늑대의 어금니엔 내 오러의 '파쇄'가 담겨 있다는 말이다.
"아아악…!"
놈의 왼팔이 통째로 뜯겨 나갔다.
그사이에 나는 달려들었다.
뿌득!
신목으로 놈의 명치를 찔렀다.
갈빗대가 부서지는 것이 손끝으로 묵직하게 전해져 왔다.
* * *
히스터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이는 그가 살아생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고통이었으며, 이 상황 또한 익숙지 않은 무력함이었다.
그 순간 히스터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바로, 제1 사도가 경고했던 내용이었다.
―파로스는 안 돼. 우리랑 너무 안 맞아.
―엥, 그래봐야 인간이잖아.
―허락되지 않은 힘을 지닌 인간이지. 무엇보다....
―아아, 됐어. 그놈의 '계획이 있다'는 말.
―아직은 안 돼. 파로스와는 최대한 멀어지도록 해.
생긋 웃는 얼굴이나, 아이를 다루는 듯한 말투나.
하나 같이 마음에 안 드는 여자였던 만큼 그 말을 새겨듣지 않았다.
아마도 그게 패착이었을 것이다.
들었어야 했다.
그 여자의 말이 옳았음을 인정해야 했다.
히스터는 피를 울컥 토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와중 쓰러진 자신을 밟은 유렌이 냉막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봤다.
"이제 좀 들어볼까. 너 뭐하는 새끼냐?"
"쿨럭…!"
"제도 법황청 운명 교단이랑은 다른 거 확실하고. 운명 교단이 두 갠가? 아니면 너희가 진짜?"
꽈득!
발에 힘이 더해지며 갈빗대가 으스러지기 시작했다.
히스터는 그 와중 어떻게든 몸을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신성을 발했다.
하지만 잘되지 않았다.
'어째서…?'
몸속의 신성이 으그러져 있었다.
[그릉....]
저 늑대에게 물린 이후였다.
히스터는 공포를 느꼈다.
다만 물어뜯는 것만으로 상대의 이능을 죄다 어그러뜨리는 정령이라니.
저딴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유렌은 말했다.
"왜 대답이 없지? 그럼 질문 바꿀까? 너희 어디서 왔냐."
드드득―
마나로 인한 진동이 일며 몸이 떨렸다.
히스터는 이를 악 물었다.
하나, 무용했다.
"북서? 북동? 남부? 아니면 이종족의 땅? 외경?"
흠칫, '외경'이란 단어에 몸이 움찔했다.
그 순간 유렌이 무언가를 알아챈 듯 눈을 좁혔다.
"외경엔 뭐가 있지? '사육'당하는 인간들이 악마를 소환한 제물? 아니면 이종족?"
반응을 숨기려고 했으나 유렌의 심문은 과격했다.
그는 자신을 짓밟으며 신체 반응으로 답을 유추해 나갔다.
마치, 그 일이 아주 익숙하다는 듯이 말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히스터와 교단이 아는 그는 그저 망나니일 뿐이었다.
이 극의 초반부에 퇴장해야 할 엑스트라에 불과했다.
애초에 그는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하여 태자를 이용해 그를 가두려 했다.
그게 실패했을 때 알아챘어야 했다.
'이놈을 노렸어야 했어. 처음부터.'
제1 사도가 직접 주관한 일이었다.
그 여자의 능력은 어떤 억지라 한들 필연성을 부여하는 능력이었다.
그게 뒤틀렸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파로스에서 가장 위험한 건 이쪽이란 말이다.
"너희 목적은 제국 부수기? 아니,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네. 그럼 뭘까. 노리는 게 따로 있나? 운명의 여신은 뭐야. 너희 쪽에 계시… 그래, 내리고 있구나."
하나하나 까발려진다.
히스터는 그 와중에 더 이상은 안 된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 사고의 방점을 찍은 말이 있었다.
"판테일 두르."
히스터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신성을 한 곳에 그러모았다.
꽈드드득!
몸이 부풀어 올랐다.
고깃덩이 풍선이 되어 팽창했다.
그렇게 사고가 새하얗게 물들어갔고, 그 어느 순간 유렌에게 말했다.
"너, 꼭 죽인다."
푸화아악―!
도주 자살.
자존심 상하게도, 이 또한 제1 사도의 안배였다.
* * *
외경의 어느 고성.
푸확!
히스터는 살덩어리로 된 막을 찢으며 튀어나왔다.
그의 몸은 멀쩡했다.
아니, 멀쩡하다는 말은 어폐가 있을 터였다.
비참하게 죽은 본래의 몸이 아닌, 새로운 몸으로 의식을 옮겼을 뿐이었으니 말이다.
히스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분노로 점철된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그런 때 나타난 이가 있었다.
"음, 이걸로 내 수명이 또 1년이나 줄었어."
히스터는 고개를 들었다.
흰색의 법복을 입은, 머리에 후드를 쓰고 얼굴을 베일로 가린 여자.
제1 사도였다.
"…놀리러 왔냐?"
히스터의 기세는 포악했다.
하나, 제1 사도는 그런 것에 영향을 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히스터가 찢고 나온 살덩어리로 된 막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보험으로 들어두긴 했는데 실제로 쓸 날이 있을 줄은 몰랐네. 이거 한 번 하는데 내 수명이 1년씩 깎이잖아? 나도 원치 않았던 상황이야."
히스터는 그녀에게 반박하려 했다.
무엇보다 그의 유아적이고 이기적인 성향은, 이 상황에 대한 책임의 화살을 그녀에게 돌리고 싶어 했다.
"파로스! 그 개새끼가 문제였잖아! 어? 살려도 된다면서! 별거 없는 놈이라면서!!!"
그러나, 돌아오는 건 훈계였다.
"이후에 정정해서 말하지 않았니. 그 아이는 피하라고."
"뭔...."
"난 누차 말했단다. 세상 모든 건 확률이라고. 예를 들자면 그렇지. 그 아이가 아무것도 아닐 확률, 우리 계획이 성공할 확률, 그 외에도 오늘 네가 내 수명을 깎을 확률 같은 모든 건 각각의 확률이란다. 내 능력은 그걸 조금만 손 봐서 우리한테 유리한 쪽으로 이끌어 오는 거지. 대가는 내 수명이고."
제1 사도가 무릎을 꿇고 히스터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 연장선의 이야기야. 최초의 계획이 실패한 순간부터 그 애는 피해야 할 대상이었어.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줄까?"
"파로스를 옥에 가두는 데 쓴 수명만 5년이었어. 그래, 달리 말하면 그 애를 옥에 넣는 것만으로도 널 살리는 5배의 수명을 써야 했다는 말이야. 그만큼 위험한 애라고."
"투옥이 실패한 시점에서 그 애는 최대의 위협이었어. 물론 투옥 실패의 근본적인 이유는 내 확률에 영향을 준 외부 요인이 있었다는 건데, 그건 나도 차차 알아봐야겠고."
"여하튼 그럼 이후도 마찬가지 아니겠니. 모든 확률은 변동성을 지닌단다. 도미노처럼 하나가 망가지면 나머지 확률도 모두 바뀌는 거야. 그 결과가 이거지. 계획의 실패."
히스터의 이가 꽉 물렸다.
그는 그녀의 말에 더 반박하는 것도, 화를 내는 것도 할 수 없었다.
"너에게 베르헤임의 가호가 간 건 말이야. 네가 가호를 가진 게 그나마 확률에 유리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야. 토템 같은 거지."
히스터는 충혈된 눈을 한 채로 고개를 숙였다.
제1 사도는 말했다.
"안 된단다. 그렇게 마음대로 굴면. 네 덕에 파로스가 우리를 알아버렸잖니. 확률이 더 떨어진단 말이야."
악마를 두 번 소환할 수 없다.
이 여자가 악마 소환의 대가를 낮추며 자기 수명의 절반을 날려버렸으므로.
뒤에서 암약할 수 없다.
오늘로 완벽히, 외경에 있는 자신들이 드러나 버렸으므로.
악수에 악수가 겹쳐 이 상황.
그것에 자신의 지분이 있음을 찌르는 말에, 히스터는 답할 수 없었다.
그저 이를 뿌득 갈았다.
"다음에는...."
"내가 짠 판 위에서 싸우렴. 그럼 또 모르지. 네가 이길 수 있을지도."
히스터는 그것에서 하나의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제1 사도는, 자신에게 어떤 가치도 느끼고 있지 않았다.
* * *
칼리오스와 기르고어는 심부로 들어갔다.
그 끝에서, 드디어 이 모든 일의 원흉과 만나게 되었다.
"…제 발로 찾아왔군."
가짜 기르고어.
그가 거대한 제단처럼 보이는 방에 서 있었다.
전신에 화려한 무구를 둘렀다.
하나하나가 아티팩트임이 분명했다.
칼리오스는 전투 준비를 마친 그에게 물었다.
"용케 도망가지 않고 맞설 생각을 했군."
"도망칠 이유가 없지. 죽여야 함에도 먼 곳에 있어 손이 닿지 않던 상대가 눈앞에 와준 것인데."
그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천장에서 변이체들이 떨어져 내렸다.
쿵!
이제까지와는 다른 변이체들이었다.
엉망으로 조형된 고깃덩어리가 아닌, 완벽한 인간의 형태를 한 변이체들.
각자가 무기를 들고 있었고, 전투 의사를 참을 정도의 이성적 능력도 있어 보였다.
칼리오스는 그것을 본 순간, 그리고 가짜의 말을 듣는 순간 모든 걸 이해했다.
이제까지 밝혀진 것과 이 상황을 엮어 가짜의 목적을 온전히 파악한 것이었다.
"그렇군. 자네는 레베카를 죽인 내가 미웠고, 날 죽일 방법이 필요했고, 그게 전쟁이었고, 저것들은 자네가 전쟁을 위해 준비하던 병사라는 것이겠지."
"...."
"외지인과 연구한 건 저것이겠고. 앞에 있는 건 실패작들이고."
죽은 후에야 속에 있던 변이물들이 발동되는 지뢰.
외부의 적이 누가 되었든 그 자리에서 생명을 담보로 적을 추살, 지하 전체에 침입자를 알리는 용도였음은 빤히 알 수 있었다.
그저 저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는 그리 실험한 게 자기 부하라는 것.
부하를 일회용 도구로 쓰는 상관이라니, 칼리오스의 기준에서 꽤 추악한 인간군상이었다.
하여 기르고어에게 말했다.
"살려야 하나?"
기르고어는 내내 차갑게 얼어붙은 표정으로 가짜를 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읊조렸다.
"저 아이, 그리고 변이체 무리. 둘 중 어느쪽이 편해?"
"이왕이면 하나가 좋지. 가짜로 하겠네."
"그래."
탁―!
스태프로 바닥을 찍자 변이체들이 어둠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기르고어 또한 마찬가지였다.
"숨은 붙여줘. 물어볼 게 있으니까. 얘들 처리하고 올게."
공간 이동, 혹은 아공간 이송 마법으로 보였다.
칼리오스는 그가 사라진 후 가짜에게 말했다.
"어떡하나. 자네. 도와줄 친구들이 사라졌는데."
"필요치 않았다."
키이이잉―!
아티팩트가 빛났다.
마법이 영창없이 사출됐다.
칼리오스는 그것을 빤히 바라봤다.
어느새 그의 입가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음, 배워놓길 잘했군."
칼리오스가 마법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061화. 밤은 요람이 되어 (3)
유렌에게 주술 베기를 배우던 사흘 동안 칼리오스가 내내 생각한 것이 있었다.
검의란 무엇인가.
그것을 쓰려면 어찌해야 할까.
이는 어떤 고찰의 결과가 아닌 순수한 열망에서 비롯된 의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유렌에게 처음 얻어맞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매번 그렇지 않았나.
그놈의 검의만 튀어나오면 쪽도 못 쓰고 당했단 말이다.
자존심의 문제였다.
칼리오스는 누군가에게 지는 게 싫었고, 누군가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 게 싫었다.
그에게 유렌이 뛰어난 것 정도는 인정하는 것과 그 차이가 평생 따라잡지 못할 격차란 걸 인정하는 건 다른 일이었다.
하여 칼리오스는 검의의 습득을 간절히 바랐다.
그것을 익힌다면 유렌을 넘을 수 있으리란 추측이 있어, 또한 주술 베기가 검의의 부산물이란 걸 아는 만큼 그것을 향한 배움이 지극했다.
죽는 소리를 하면서도 그만하자는 말은 절대 안 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그렇다.
검의를 얻는 것은 또 실패.
하지만,
쫘아아악!
주술 베기를 배우는 것만큼은 성공했다.
가짜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였다.
칼리오스는 호흡을 정련했다.
공격을 막아냈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역시 쉽지 않군.'
검의를 모르면서도 주술 베기가 가능한 이유는 유렌의 자세를 완벽히 따라했기 때문이었다.
검을 쥐는 힘, 팔이 움직이는 각도, 그 순간의 호흡과 힘과 마나가 전달되는 방향을 흉내 낸 것이다.
즉, 이건 반쪽짜리 주술 베기였다.
그렇기에 성공률 또한 10할이 되지 못했다.
가짜가 그걸 눈치채는 순간이 우열이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칼리오스는 심적 압박감을 느끼며,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쾅!
배리어가 검을 막았다.
가짜의 몸에 둘린 아티팩트가 빛나며 마법이 사출되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다 막아야 하나?
피해야 하나?
틀렸다.
끼기긱!
칼리오스는 배리어에 주술 베기를 시전했다.
정지해 있는 배리어는 베는 것이 쉬운 편이었다.
꽈직!
정면돌파로 회피, 그리고 횡 베기.
가짜는 이를 악 물며 물러섰다.
마법은 지금도 궤도를 바꿔가며 칼리오스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어림도 없네."
피할 수도 있겠으나 그러지 않았다.
전투란 건 결국 수싸움.
각자가 가진 패를 하나씩 드러내고 그 우열을 판단하는 자가 승리하는 법이다.
유렌의 말을 빌리자면 그랬다.
―생각하는 겁니다. 가짜에게 주술 베기가 마법을 지운다는 사실을 인지시킨다면? 그 성공률이 10할이라는 '착각'을 심는다면? 가짜의 공세는 분명 신중해지겠지요. 신중함은 달리 말해 소극적이란 뜻도 됩니다. 들이박을 틈이 많아지는 것이지요.
가짜는 자신이 마법을 완벽히 파훼한다고 '착각'해야만 했다.
그것이 틈을 만들어줄 것임은 칼리오스도 인정할 사실이었다.
하여 칼리오스는 숨을 멈췄다.
감각을 일깨웠다.
첨예하게 오감이 벼려지며 주변의 모든 이변을 감지했다.
그것을 걷어낼 경우의 수가 하나둘 머릿속에 떠오르고 지워졌다.
가속한 사고는 찰나의 시간에 그 일을 끝마쳤다.
그리하여 출수.
콰과과과광!!!
신형이 어그러질 정도로 빠르게 움직인 칼리오스가 마법을 걷어냈다.
물론 모두 베어낸 것은 아니었다.
작은 꼼수가 숨어있었다.
폭발성을 품은 마법을 베어내 운무를 만들었다.
그 운무 속에서 꼭 베야할 것은 베고, 그러지 못하는 것은 배리어로 막거나 궤도를 틀어 다른 마법과 충돌시켰다.
시야가 가려진 채로 그 일을 행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스으으―
가짜의 눈에 보이는 것은 '칼리오스가 마법을 벴다'라는 최초의 상황과 '칼리오스가 멀쩡하다'라는 결과뿐이었다.
칼리오스는 애써 태연함을 가장한 채 웃었다.
가짜는 그 웃음에 위기감을 느꼈다.
생각할 틈을 주면 안 된다.
그런 판단으로 칼리오스가 재차 달려들었다.
그저 달려든 게 아니었다.
마나를 주변으로 폭사해 이동을 방해했다.
검기를 날려 아티팩트의 발동을 견제했다.
가짜는 그런 것들을 다 이해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를 썼다.
곧 죽어도 10년이나 이그로시아를 통치한 주인.
시간은 그에게 경험이랄 것을 만들어줬다.
"…지독한 놈."
그의 눈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직후였다.
"이것도 막을 수 있겠나."
가짜의 반지가 빛났다.
바닥이 일렁였고, 직후 변형되며 창이 솟아올랐다.
칼리오스의 발밑에서부터 말이다.
"큽!"
쩌어엉!
칼리오스는 마나로 막을 쳐 공격을 막았다.
달리 표현하길, 그의 공세가 순간적으로 멈췄다.
'빈틈…!'
칼리오스는 그를 인지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나온다는 건가.'
아아, 베아트리스 때문이다.
마법이란 건 당연히 원소 마법이나 사출 마법 외에도 디버프, 물리 마법 따위가 있을진대 그걸 간과했다.
원인이 그 여자밖에 더 있겠나.
원소 마법만 사흘 내내 막다 보니 시야가 좁아진 것이다.
히지만, 위기는 아니었다.
아직은 말이다.
"이걸로 어쩌려고?"
탁!
솟아오른 땅을 지지대 삼아 발을 굴렀다.
그렇게 쏘아진 칼리오스의 속도는 눈으로 쫓기 힘든 수준이었다.
검 끝이 가짜를 향했다.
쇄도하는 찌르기, 그것을 막는 배리어.
가짜는 험악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마법을 더했다.
디버프.
그게 발동된 순간이었다.
칼리오스는 실수를 범했다.
'맞고 찌른다.'
전투 경험의 부재.
오크 챔피언을 제외한다면, 강적과의 승부랄 것을 크게 해본 일이 없는 삶.
피해를 입는다는 것에 더 예민하지 못했던 칼리오스는 디버프를 몸으로 맞았다.
그것이 어떤 디버프인 줄도 모른 채, 이 한 수로 전투를 끝낼 수 있으리란 얄팍한 계산만으로 말이다.
디버프는 속도를 제한하는 마법이었다.
가짜는 회피에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일어난 현상이 가짜의 인지에서 하나의 개념을 다시 썼다.
칼리오스는 마법을 모두 파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의 마법 파훼는 제한적이다.
애써 만들어둔 인지가 무너지자, 가짜의 공세는 거칠어졌다.
칼리오스는 뒤늦게 실책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 *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인지의 차이였다.
칼리오스는 강자였다.
평생을 강자로 살아왔고, 살아갈 사람이었다.
그는 위기 앞에서 정면으로 맞서길 선택하는 쪽이었다.
무언가를 대처하기 보단, 상대의 대처를 깨부수는 쪽을 선호했다.
하지만 가짜는 달랐다.
본인이 가짜란 걸 안다.
재능이 미천함을 안다.
하여 그걸 보완하기 위한 궁리를 일평생 해온 사람이었다.
달리 말해, 그의 가장 큰 무기는 '신중함'이었다.
애초에 당장 찢어죽이고 싶은 상대를 가만히 두는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그녀를 살리는 것도 이유였지만, 동시에 전투가 성립될 정도의 병력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그만큼 신중하게 파악했다는 말이다.
그런 성향은 계획이 불발되고 전투 상황이 된 지금 또한 마찬가지였다.
가짜는 자신이 칼리오스를 정면으로 이길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가진 모든 아티팩트를 동원했고, 철저히 계산적인 공격만 했다.
분석은 끊이질 않았다.
열세에 몰리는 순간 생존본능은 사고를 더욱 가속시켰으며, 그의 인지는 칼리오스의 모든 행동을 하나하나 파악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는 단서를 조립했다.
칼리오스는 최초의 마법을 베어낸 후엔 마법을 정면으로 베어내는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았다.
배리어를 깨고 난 후엔 다른 마법을 회피했고, 다발로 쏟아낸 마법은 운무 속에서 처리했다.
과연 모든 마법을 베어낸 것이었을까?
의문과 더불어 물리적인 마법은 칼리오스에게 위협을 줄 수 있다는 점을 파악했다.
그것으로 시험한 것이다.
마법의 완전한 파훼가 되지 않는다면, 사용할 수 있는 수는 늘어날 테니.
추측은 옳았다.
칼리오스는 감속 디버프를 정통으로 맞았다.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졌고, 가짜는 더 다양한 마법을 다양한 형태로 발동시켰다.
아티팩트의 최대 장점이 무엇인가.
코스트를 소모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수십 개의 아티팩트가 있다면 수십개의 마법이 동시다발적으로 발동된다.
지금의 경우, 그 아티팩트 하나하나가 귀물이었다.
이그로시아 전체에서 가장 귀한 마법들이, 고대의 유산이, 신시대의 결정체가 칼리오스를 향해 쇄도했다.
칼리오스는 그것들을 막아내는데 급급했다.
전과는 다른 저주 수준의 디버프를 베어낸다.
하지만 그리한다면 원소 공격은 마나로 쳐내야만 했다.
그럼 빈틈, 물리 마법이 칼리오스의 발목을 잡고 머리를 후려치려 든다.
승기를 잡았다면 놓지 않는다.
기세를 탔다면 끝까지 끌고 간다.
먹잇감이 상처를 입었다면, 회복할 틈을 주지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이 이그로시아의 전투였다.
가짜는 그제까지 아껴두었던 아티팩트도 사용했다.
그것은… 대가를 필요로 하는 아티팩트였다.
"눈 하나를 제물로."
키이잉―!
가짜의 왼쪽 안구가 빛을 잃었다.
피눈물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한쪽 시야의 대가는 확실했다.
핏방울이 떠올라 결집했다.
무구가 되어 칼리오스를 향해 쇄도했다.
신체를 대가로 한시적으로 허락되는, 밤의 종족 뱀파이어의 비술이 담긴 아티팩트였다.
쫘아아악―!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칼리오스의 전신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가짜는 그 순간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다만 뱀파이어의 힘을 쓰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복수를…!'
그녀를 찢어발긴 저 악한 인간에게 복수를.
자신의 유일한 빛을 앗아간 자에게 징벌을.
갈증은 이윽고 고통이 되었으나, 멈출 수 없었다.
가짜에게 그녀는 삶의 의미였기 때문이다.
시궁창 밑바닥에서 오물 웅덩이를 핥아먹던 삶에 드리워진 볕이었다.
그녀가 떠난 이후로 언제나 바라던 꿈이 있었다.
당신이 구한 소년이 이리 자라, 이그로시아에 볕을 드리웠다고.
그리 말하는 꿈이었다.
한데 그 꿈이 무너졌다.
기껏 살릴 기회라도 얻었건만 저자의 횡포로 그 기반조차 무너져내리는 중이었다.
대가를 받아야만 했다.
같은 하늘 아래서 살아갈 수 없음이다.
지독하리만큼 타오르는 증오는 핏방울에 담겨 마법과 함께 그를 짓이기기 시작했다.
"죽어라. 비참하게. 후회하면서."
그렇게 끝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쿨럭…!"
칼리오스가 피를 토했다.
* * *
칼리오스는 오크 챔피언 때보다 더욱 처참한 몰골이었다.
육체적인 부분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다름이 아닌, 감정적인 영역에서의 상처가 그랬다.
오크 챔피언은 당장 이길 수 없는 상대임을 알았기에 패배를 수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보아라, 이길 것이라 장담했던 상대였다.
공략법도 교육받고 온 상태였다.
그 상태로, 다만 판단의 실수로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그것이 칼리오스의 정체성이나 다름없는 자존심을 짓이겨버리는 것이다.
'진다? 여기서? 내가?'
그 생각이 차오를수록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마법에 짓이겨지는 것은 조금도 중요치 않을 정도로, 온 사고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그 일에 집중되고 있었다.
숨이 틀어막혔다.
몸이 덜덜 떨렸다.
표정이 일그러졌다.
몸의 상처보다 심장의 떨림이 더욱 아프게 다가왔다.
그것이 역치를 넘는 순간이었다.
'…웃기지 마라.'
칼리오스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어졌다.
"이런 찢어 죽일 새끼."
쿠우웅―!
돌연 칼리오스의 마나가 그 기질을 바꿨다.
그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가짜를 향했다.
흠칫―!
가짜의 몸이 떨렸다.
그것은 아주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위기감이 미친 듯이 치솟은 것이다.
그런 중에도 변화는 가속했다.
드드드드―!
마법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가 피칠갑을 한 채로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 그 현상은 더욱 극심해졌다.
이윽고,
째애앵―!
마법이 하나둘 깨졌다.
칼리오스는 비척비척 일어나 손등 위로 힘줄이 불거질 정도로 강하게 검을 쥐었다.
"적당히 하니까. 정도를 모르고. 주제도 모르고. 버러지 같은 새끼가."
상처를 입은 사자라 해야 할 터다.
그것도, 무시하던 작은 짐승에게 물린 사자의 형상이었다.
실제로 그보다 나은 표현을 없을 터였다.
아무렴, 그의 자존심과 스스로의 위대함을 향한 믿음이 흔들린 상황이 아닌가.
그런 상황을 만들어낸 저 가짜를 향한 분노는 지극했고, 그것을 해결할 방법은 압도적 승리 하나뿐이었다.
그러니,
"…죽여주지. 발악의 의미를 지울 정도로 철저하게."
저것은 비참하게 죽어야만 했다.
그것은 유렌만이 계산한 현상이었고, 결과였다.
어째서 유렌은 이곳에 함께 오지 아니하고 따로 행동했는가.
그 답을 돌이킬 필요가 있었다.
몇 번을 말해도 모자람이 없음에.
칼리오스 반 오르테어.
그는 이 시점에서 오로지 경험 하나만이 모자란, 대륙에서 가장 찬란한 재능을 타고난 남자이자 재능이라는 단어의 다른 이름이었다.
죽음의 위기는 그저 그를 가파르게 성장시키는 양분일 뿐이었다.
츠즈즈―!
공간의 마나가 억눌렸다.
칼리오스의 주변에 남아있던 모든 마법의 통제권이 그에게 넘어갔다.
그 이유를 이르길, 상정 외의 열세 속에서 칼리오스의 분노는 생존, 그리고 자존심의 회복이라는 목적을 위해 억지로 자신의 경지를 뚫어버린 것이었다.
비정상적인 형태로, 익스퍼트 상태에서 그의 성질인 '지배'가 깨어났다.
062화. 밤은 요람이 되어 (4)
나는 숨을 몰아쉬며 직전의 일을 되새겼다.
'어떻게 된 거지?'
심문 중 갑자기 흑막 놈의 몸이 부풀어 올랐다.
자폭이라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눈에 드리워진 결이 급박하게 뒤틀렸기 때문이다.
해주 따위를 생각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마나를 몸 위에 둘렀다.
결국 폭발 피해는 막을 수 있었지만, 자리에 남은 것은 육편과 피 웅덩이뿐.
'자살?'
…아니, 그보다는 도주라고 해야겠지.
놈은 다음을 기약하며 죽었다.
아마 이런 식의 죽음에서 부활할 방법이 하나는 있다는 말일 터다.
대체 어디까지 준비하고 들어온 건지.
알아낸 사실이 그렇게 많지 않음은 안타까운 일이었고 그럼에도 적의 정체만큼은 알아냈다는 게 고무적이다.
'외경, 운명 교단.'
기존의 운명 교단과는 다른, 운명의 여신을 따르는 또 다른 세력.
위치는 외경에 있으며 현재 시점에서 법황청의 운명 교단이 잃은 가호를 그놈들이 들고 있다.
즉, 여신이 적측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왜'라는 의문으로 파고들면 눈앞이 깜깜해진다.
그보다 이 모든 사고에 전생부터 그놈들이 끼어있을 걸 생각하면 너무 많은 걸 고려해야하는 상황이 된다.
당장 이 자리에서 정리하기엔 어지러운 것들.
그에 한숨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저릿―!
저 먼 곳에서부터 익숙한 마나의 흔적이 퍼져왔다.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아, 결국 된 건가.'
태자다.
태자의 '지배'가 열려버렸다.
착각은 절대 아니다.
저 성질에 누구보다 오래, 많이 노출되어 본 나이기에 이걸 착각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어느 정도 의도한 일이긴 했다.
그렇지 않나, 지금의 태자?
솔직히 너무 약하다.
재능이야 출중하다지만 그게 끝.
온종일 검만 생각하던 시기보다 빠르게 성장하려면 나름의 극약처방이 필요했다.
그걸 떠나서 쉽게 방심해버리는 저 허접한 성질도 한 번은 죽여둘 필요가 있었고.
마침 상황이 좋았다.
기르고어가 옆에 있으니 정말 죽을 리는 없을 테고, 그럼에도 다른 함정을 생각하면 태자가 위기 상황에 빠질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 구도를 만들었으나, 역시 어처구니없는 기분은 떠오르고 말았다.
'위기라고 성질부터 끌어내는 게 말이 되나.'
정말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내가 성질을 쓰는 것은 이미 그 경지를 겪어 감각을 알기 때문이다.
애초에 나는 육신만 갖춰진다면 그 시점에 소드 마스터에 오를 인간이지 않나.
그에 반해 태자는 모든 게 모자랐다.
육신, 기량, 깨달음.
검술의 3대 요소가 익스퍼트에 머물러 있건만 성질이 다짜고짜 튀어나온 것이다.
불가능이었다.
이건 상식이나 이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일이었다.
그러니 결국, 속으로는 그런 말을 내뱉게 된다.
'세상 존나 불공평하네. 씨발.'
재능 하나가 이렇게 사람에게 박탈감을 준다.
* * *
칼리오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극치에 닿아 '생각의 필요성'이 사라진 것이었다.
'느껴진다.'
마나의 흐름이, 형태가, 구조가.
그것을 아우르는 '마나'라는 것의 본질이.
모든 것이 칼리오스의 권역에 들어왔다.
칼리오스는 그것을 자신의 뜻대로 다룰 수 있으리라는 본능적 확신을 느꼈다.
이는 칼리오스가 언제나 편린으로만 느껴왔던 세계의 본모습이었다.
그뿐인 이야기였기에, 칼리오스는 관측에 성공한 순간 공간에 의지를 담았다.
그러자 아티팩트의 마법이 모두 칼리오스의 것이 되었고, 상대의 육신을 흐르는 마나조차 칼리오스의 것이 되었다.
지배. 모든 것을 발아래 두어 구속하고, 통치하여 명령하는 능력이 발현된 것이었다.
물론 지금의 칼리오스가 그런 걸 머리로 이해하는 건 아니었다.
평소 벽을 넘을 때처럼 '이런 것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라는 생각에 이용했다.
그리하여 상대를 찍어누르기 시작했다.
빠아아악!
아티팩트를 잃은 가짜의 안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놈이 피를 움직여 쏘아내려 하면 그 피를 바닥으로 처박아버렸다.
다른 마법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쓰는 건가."
콰앙―!
만들어진 마법이 서로 부딪쳐 사라지거나, 역으로 가짜를 공격했다.
가짜로서는 공포심이 느껴질 일이었다.
상정한 모든 경우의 수를 무로 돌리는 능력.
듣도 보도 못한 괴이쩍은 힘은 분석과 이해를 무용하게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어찌 겪어보지 못한 이가 확고부동한 정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나.
지배는 다른 성질과의 비교를 불허하는 능력이었다.
물리와 비물리의 경계를 넘어 존재하는 모든 것의 구조적 배열을 찢어버리는 유렌의 '파쇄'조차 지배의 앞에서는 제약이 걸릴 정도라면 이해가 될까.
그나마 발악하는 것도 유렌에게 '눈'이 있었기 때문.
달리 말하자면, 최상위 성질 중 하나인 '파쇄'와 '눈'을 모두 가지고 있어야 겨우 저항할 정도로 지배의 성질이 이질적이고 특출나다는 뜻이었다.
유렌은 그걸 그리 평했다.
―애새끼가 논검에서 억지 부리면 튀어나올 능력입니다.
―꼬우면 자네도 지배하시게.
―개씨발....
물론 아직은 익스퍼트, 억지로 끌어온 경지라 그것이 완벽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게 칼리오스가 가짜를 찢어죽이는 일에 저항이 된다는 말은 아니었다.
단 한 가지,
주륵―
본인의 몸이 버틴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꽈앙―!
꽈아아앙―!
칼리오스는 마구잡이로 힘을 휘둘렀다.
사용법이나 힘의 배분을 계산하기엔 아직 능력과 신체의 한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
그저 가짜를 죽여버린다는 생각만 있으니 일종의 폭주 상태라고 해도 무방했다.
가짜는 신중하고 관찰력이 뛰어났다.
그런 것을 눈치채고 버티려고 했다.
자멸할 때까지 자신이 서 있기만 하면 승리라는 판단이 선 것이다.
하여 마법을 또 발했다.
자신에게 쏘아질 걸 알면서도, 무효화될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조금 더 시간을 끌고, 조금 더 칼리오스의 신경이 분산되게 하기 위해서.
그 와중에도 집요하게 승기를 보는 행위는 분명 칭찬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잡스러운 짓거리를."
꽈아아아앙!!!
…칭찬받을 일은 대단한 일과 달랐다.
"끄허억…?!"
가짜는 칼리오스에게 밟혀 바닥에 처박혔다.
그가 본 것은 하나였다.
칼리오스의 신형이 시야에서 사라졌고, 다음 순간 자신의 머리 위에서 나타나 발로 어깨를 밟은 것.
과정이 없었다.
아니, 과정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빨랐다.
저항이 불가했다.
단순히 부상 때문이 아니었다.
'마나가....'
칼리오스에게 밟힌 그 순간, 몸속의 마나가 일제히 뒤틀리며 목 아래 전신의 혈관을 짓이겼다.
끔찍한 수법이었다.
마나의 탈진, 육신의 붕괴.
모든 저항 수단이 꺾였다.
주르륵 칼리오스가 피눈물을 흘렸다.
한계에 다다른 모습이었고, 이제야 그렇게 되었다.
가짜는 처절한 패배감을 맛봤다.
눈빛만이 복수심으로 칼리오스를 향했으나, 그것이 도리어 칼리오스의 감정을 부추겼다.
"버러지 같은 것이 어디 눈을...."
칼리오스가 검을 놓았다.
그렇게, 멱살을 쥔 채로 가짜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그따위로."
빠각!
빠각!
빠각!
멈추지 않았다.
이성이 반쯤 날아간 그는 감정을 풀어내는 일에만 급급했다.
상처 입은 자존심을 회복하고, 원흉을 제거하는 일에 미쳐 있었다.
그것은,
"어휴, 결국 지랄이네."
유렌이 보기에 썩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거기 까집니다."
툭―
유렌의 신목이 칼리오스의 주먹을 막았다.
칼리오스는 멈칫, 몸을 떨다가 고개를 들었다.
시야가 흐릿했다.
하나, 그런 중에도 보이는 게 있었다.
"이놈의 욱하는 성질은 변하질 않네. 더 하면 몸 망가지니까 이제 좀 쉬십쇼. 끝났습니다. 아, 이건 또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짐짓 곤란해 보이는 유렌이었다.
그를 확인한 순간이었다.
"…아."
칼리오스는 털썩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 * *
흑마법은 정신을 지배한다.
저주는 정신을 갉아먹는다.
두 가지를 다루는 기르고어는 본인의 능력 안에서 정신과 관련된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먼저 아공간으로 끌어들인 상대들의 뇌를 끄집어냈다.
그 속에 깃든 기억을 하나씩 뒤졌다.
그를 통해 많은 것을 봤다.
그것은 작기만 했던 소년이, 자신이 떠난 후 살아온 과정이었다.
―주인께서 돌아올 때까지는 안정화를 우선으로 한다. 사업 확장은 막아라. 괜한 잡음이 나올 일은 피하고.
소년은 그런 기조를 유지하려 했다.
기르고어는 쓰게 웃었다.
모두 건네주었건만 자신의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그런 점이 너무 우스워서.
―빈민들을 그러모아라. 밥을 먹어야 충성심이 생긴다. 싸워 죽는 놈이 있더라도 굶는 놈은 없는 게 좋다.
그래도 현명함은 칭찬해주어야겠지.
소년은 배운 것을 명심하고 있었다.
―…노예 상인? 미친놈들이군. 효수해라. 이그로시아를 무너뜨리는 해충이다.
신중하고, 올곧았다.
기르고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저 아이가 어찌 변하였는가.
그런 것 정도는 곧장 알 수 있었다.
―…돌아오셨군요.
―하하, 많이 늙었네.
―주인은 그대로십니다.
생긋, 분홍 머리에 초록 눈을 가진 계집이 소년을 보며 웃었다.
꼭 자신의 흉내를 내면서 말이다.
저것이 바로 그 악마일 터다.
기르고어는 혐오감을 느꼈다.
자신의 흉내를 내어, 함께 일궈온 모든 것을 무너뜨린 저 간악한 족속이 끔찍하도록 미웠다.
하나, 그 분노조차 길을 잃고 말았다.
저 악마는 이미 유렌과 칼리오스가 역소환 해버렸으므로.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모자란 듯합니다.
―뭐가?
―주인께서 맡겨주신 이그로시아를 더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는걸! 영 마음이 불편하면… 그래, 앞으로는 내가 도와줄게! 같이 만들자. 살기 좋은 이그로시아.
그저 타들어 가는 속으로 일어난 모든 일을 바라볼 뿐이다.
그렇게 기르고어는 저 혐오스러운 것의 죽음 이후도 알 수 있게 됐다.
―으음, 미안. 이것밖에 못 건져왔네.
―…아?
소년은 머리만 남은 계집의 앞에서 무너져내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저 아이가 우는 모습을 본 적도 없고, 볼 일도 없다고 생각했건만, 기억 속 소년은 머리통을 끌어안은 채 엉엉 울고 있는 게 아닌가.
자신을 향한 충심이 그리도 깊었다는 것이겠지.
그리하여,
―…살려야만 한다. 너는 방법을 아는가?
저리 비뚤어져 버린 것이겠지.
다음부터는 아는 내용이었다.
저 로브로 전신을 감싼 외지인이 소년을 조종했다.
자신의 입맛대로 굴리기 위해 이리저리 속삭였으며, 소년은 이지를 잃은 채 그를 따랐다.
그 과정을 보는 것은 놀랍게도 기르고어에게 가슴이 아픈 일이었다.
기르고어는 타인의 불행에 자신이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에 놀랐다.
그 대상이 모든 기대를 지우고 엄벌만을 맹세했던 소년이란 것에 놀랐다.
정이 쌓였던 것일 터다.
그 이유를 생각하려 했다.
이윽고, 그리고어는 답을 알 수 있었다.
'내 자식이구나. 너는.'
저주로 성장하지 못하는 몸.
홀로 살아온 수백 년의 세월은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고독을 만들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독은 분명 결핍을 자아냈을 터였다.
그 고독을 해소한 것이 저 소년이었다.
흥미가 어느새 인정이 되고, 인정이 어느새 애착이 된 것이리라.
그렇기에 이리도 저 소년을 특별히 여기게 되는 것이리라.
"하하...."
우스웠다.
자신이 무엇보다 하찮다 느꼈던 고독에 허덕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버려서.
그런 평범한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마주해버려서.
감정을 마주할수록 분노는 더욱 강렬하게 부풀어갔다.
그러다가 길을 잃었던 분노는 정확한 대상을 찾았다.
'쟤구나.'
저 외지인, 그리고 외지인 뒤에 있을 것들.
그 순간 모든 기억이 끝났다.
기르고어는 그의 수백 년 중 가장 지극한 분노를 느끼며 아공간을 빠져나왔다.
유렌이 있었다.
기르고어는 물었다.
"…끝난 거야?"
"놓쳤어. 죽이긴 했는데… 완전하게 죽인 건 아닌 것 같더라고."
그런 건가.
아쉽다가도 다행스러움을 느꼈다.
기르고어는 서늘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럼 내 손으로 죽일 수 있겠네."
그에 유렌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기르고어는 그를 외면하고 걸어 나갔다.
태자와 소년이 쓰러져 있었다.
꽤 격렬한 전투를 치른 것일 터다.
기르고어는 누워있는 소년의 몸을 살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죽어가는구나.'
살릴 수 없다.
이건 살아나더라도 다시는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불구가 될 터다.
아니, 그런 것을 떠나 생각해보자.
'살려야 하나?'
슬픔이 있다.
아이에 대한 죄책감 또한 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기르고어는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남자였다.
일을 치렀다면 상과 벌을 확실히해야 했고, 그 기준을 자신에게도 세우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자식같은 소년에게도 그 기준이 달라질 일은 없었다.
아무렴, 소년은 너무 많은 것을 희생시키지 않았나.
"…어쩌면 좋을까."
혼란스러웠다.
기르고어의 생에 이렇게 곤란한 순간은 처음이었다.
애증의 감정이란 걸 타인에게 느낀 경우도, 죄악감 앞에서 선택을 유예하게 되는 경우도 처음이었다.
쓴웃음을 지은 채로 유렌을 바라봤다.
유렌은 그런 기르고어를 흘긋 마주했다.
침묵이 감돌았다.
그런 어느 순간 유렌이 소년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잔잔하게 말했다.
"네 선택이지. 내 의견이 필요하다면 글쎄...."
"...."
"…나는 처형 같은 건 별로 안 좋아해. 너무 인도적이라서."
기르고어는 그 목소리에 빠져드는 본인을 발견했다.
063화. 밤은 요람이 되어 (5)
일말의 오해를 지우기 위한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성인군자가 아니다.
무언가를 판결하는 대법관도 아니며 남들보다 판단이나 심판에 특출난 심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 떠나서, 저 가짜가 죽든지 말든지 그게 내 알 반가.
여기서 얻을 건 다 얻었다.
나는 정보를 정리하고 방침을 정하는 것만으로도 바쁘다.
그럼에도 답은 건네는 이유는 질문을 건네오니까.
스스로 무엇도 알 수 없는 때에 한 마디라도 더 해줄 사람의 필요성을 알기 때문에.
―할 수 있습니다. 소가주는 행실이 나빴을 뿐, 어릴 적부터 참 영민하고 시야가 넓은 아이였으니까요.
누님이 내게 그랬듯, 이 행위가 마음에 빚을 지워줄 수도 있다는 판단이 있어서.
그래서 말했다.
"죽이면 뭐하냐. 남겨진 사람만 힘들어지는데."
"...."
"똥 뿌린 놈 따로, 치우는 놈 따로인 건 이상하지 않나? 난 그렇게 생각하거든."
전쟁기의 경험을 돌이켰다.
죄수 부대는 고기 방패였다.
그 취급으로라도 옥을 나가고 싶었기에 지원한 자가 많았지만, 우리가 겪은 전투는 차라리 옥에서의 생활이 편하다 느껴지는 수준이었다.
맑게 갠 하늘을 바라였으나 마주한 것은 핏빛 땅이었다.
안락한 수면을 원하였으나 마주한 것은 밤낮의 구분을 잃은 침공이었다.
차라리 옥에 돌아가고 싶다는 놈이 있었다.
죽어서 편해지고 싶다는 놈이 있었다.
그래, 그곳에서 깨닫길 죽음이야말로 안식이었다.
죄수에게 처형은 너무나도 인도적인 방책이었단 말이다.
난 그게 꼭 우리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네가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지만 말이다."
"…응."
"책임이란 건 무거운 거다. 수십의 목숨을 하나의 목숨으로 퉁치는 건 계산이 안 맞아. 살리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네가 저놈을 죽일 이유가 목숨값을 목숨값으로 갚아야 하기 때문이라면, 그건 이치에 맞지 않아."
가짜가 무얼 했나.
내가 아는 건 저 꼬맹이가 짓고 만들어온 비수를 무너뜨렸다는 것 하나다.
악마에게 홀려서 어쩔 수 없이 죄를 저질렀으니까 불쌍하다?
근데 어쩌라고.
나는 앞서 말했듯 가짜에 대한 동정도, 분노도 없다.
하나 감정이 개입한다면.
"나는 이그로시아가 필요해. 정확히는 이곳의 정보력이 필요한 거지."
그걸 저놈이 망가뜨렸다.
회복에 얼마나 걸릴지 생각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그걸 복구할 책임은 저놈한테 있어. 10년이나 여길 통치했으니 모르긴 몰라도 너보단 그 일을 잘하겠지."
필요성을 언급하자면 그 정도를 들 수 있겠다.
편의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런가."
기르고어는 그런 편의적인 이야기에라도 기대고 싶은 놈이라는 것을.
이성으로 가짜의 죽음을 판단하면서도, 그러지 못하기에 누군가 등을 떠밀어주길 바란다는 것을.
기르고어가 쓰게 웃었다.
가짜 놈의 이마를 쓸어내리는 모습에선, 이미 결정을 끝마쳤음이 보였다.
"그럼 어쩐다. 이런 몸 상태로는 일도 못 할 텐데."
"살리게?"
"…유예하는 거야. 당신 말대로 죽음은 너무 인도적이잖아."
잠시 놈이 숨을 들이쉰다.
그러더니 덧붙였다.
"책임은 지게 하고, 그 다음엔 이 아이한테 다시 물을 거야. 어찌 되고 싶은지."
글쎄, 적어도 죗값을 치른 후 저놈이 택할 것이 처형은 아니란 걸 알겠다.
가짜의 몸을 살폈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병신 태자 새끼.'
조져놔도 꼭 저렇게 조져놔야 했나.
일부러 머리 쪽의 혈관만 놔둔 채 나머지를 다 으깨놓은 이유야 뻔하다.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이려는 것이었겠지.
이성적인 판단이 어쩌고 하더니 결국 본인 일에는 감정이 앞서 걸레짝을 만들어놨다.
확실히, 저런 상태라면 평범한 방법으로는 절대 회복시킬 수 없다.
내게 다행스러운 카드가 없었다면 분명 그렇게 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 있는데."
"응?"
"저놈 살릴 방법. 다시 걷게 만들 방법."
기르고어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윽고 눈가에 주름이 만들어졌다.
직후였다.
놈은 허탈하게 웃으며, 간절함이 얼핏 섞인 목소리로 물어왔다.
"…대가는?"
계산이 빠른 놈이군.
도리어 좋다.
"후불로 달아둬."
"마음의 빚… 당신은 사람을 잘 다루는구나."
글쎄,
"그 정도까지야."
과찬이었다.
* * *
가짜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눈도 뜨이지 않았고, 귀도 들리지 않았고, 무언가의 냄새를 맡는다거나 맛을 본다는 등의 일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저 전신에서 터져 나오는 고통에 신음을 흘리기만 했다.
그것도 정신만 일깨워진 상태로 말이다.
시간의 구분을 잊고 시달렸으니 그 순간은 영원과도 같았다.
다만 뚝뚝 끊기는 사고로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돌이켰다.
태자에게 당했다.
그 사실에 증오가 차오르던 것도 한순간, 이윽고 고통은 무언가를 일깨웠다.
그것은 '왜'라는 의문이었다.
'무엇 때문에....'
이리도 아픈 결말을 맞이한 걸까.
복수심인가, 그도 아니라면 자괴감인가.
한데 어찌하여 자신은 '그 여자'에게 그렇게까지 깊은 감정을 느낀 것일까.
'나를....'
구원해주었으니.
이그로시아의 밑바닥에서 말라 죽어가던 자신을 배부르게 만들어주었으니.
생각한 순간이었다.
가짜는 의심했다.
'…정말 그 여자였나?'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의문이었다.
구태여 표현하자면 그 의심은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을 의심하거나, 이 대륙이 사실 평평한 땅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수준의… 아주 어처구니없는 의심이었다.
그렇기에 스스로도 그런 의문을 띄우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만 그리해야 할 것 같다는 묘한 강박이 있었다.
하여 생각을 이어가자 보인 것이 있었다.
'…아니다.'
아니었다.
그 여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빛이고 구원이었던 것은, 애초에 봄을 닮은 소녀가 아닌 들고양이 같은 소년의 형상을 했었다.
어머니처럼 자신을 안아주는 게 아닌 매 순간 자신을 시험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가치 증명을 말했었다.
그 냉혹함이 스스로의 발전을 원하게 만들었고 인정욕구를 만든 것이었다.
일관된 기준이 자신으로 하여금 안정감을 줬었다.
그는 함께라거나, 우리라는 단어를 쓰는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아, 왜 이것을 몰랐을까.
무슨 연유로 그 소녀에게 홀렸으며 진정 지켜야 할 것을 스스로 무너뜨렸을까.
어느덧 육신의 고통은 잊었다.
그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자괴감, 혹은 비통함이라 불러야 할 감정이었다.
스스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했다.
하나, 눈시울이 뜨거웠다.
그렇게 눈을 뜬 순간이었다.
주륵 흐른 눈물이 시야를 뿌옇게 만들었고, 그렇게 생애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따스한 천장은 조금 천천히 초점을 잡아 완성됐다.
귓가에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일어났구나."
가짜의 눈빛이 떨렸다.
그는 들려온 목소리에 눈동자를 굴렸다.
이윽고, 가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주인."
"이젠 알아보네?"
검은 머리칼, 소년인지 소녀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곱상하고 중성적인 얼굴.
한쪽 눈을 꿰매어둔 모습과, 특유의 창백한 피부까지 모든 것이 말했다.
이 소년이 자신의 주인이었음을.
가짜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콰당!
그러다 바닥에 떨어졌다.
전신이 충격에 들썩였다.
"꺼흑…!"
추하게 엎드린 꼴로 가짜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바닥에 머리를 땅에 처박았다.
"…죽여주십시오."
스스로 생각기에, 죽음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였다.
* * *
기르고어는 다리를 꼰 채 사내를 내려다봤다.
헛웃음이 나왔다.
기껏 살려놨더니 죽여달라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뒤늦게야 반가운 기분이 일었다.
'이런 아이였지.'
참 계산적이면서도 자신에게만큼은 정이 많았다.
모든 계산을 자신을 위해서만 이용하던 아이였다.
실패한 적이 없었다.
실패하려 하지도 않았고, 스스로 그런 일을 끔찍해 하는 게 눈에 보이는 아이였다.
기르고어는 그게 못내 반가워 말했다.
"이제야 내가 아는 모습이 보이는구나."
"달게 죗값을 받겠습니다. 제발...."
어찌 그리할까.
기르고어는 의자에서 내려왔다.
쪼그려 앉아 바닥에 널브러진 사내와 눈을 맞췄다.
그는 차마 고개를 들질 못하고 바닥만 봤다.
그래, 이 아이에겐 난 괜찮다는 말은 필요 없었다.
어찌 말해야 할지 고민으로 며칠 밤을 지새웠던 기르고어는 이제야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죗값을 왜 달게 받아? 너 좋으라고 주는 게 아닌데."
"…시정하겠습니다."
"벌을 왜 네가 정해. 그건 내가 정하는 거잖아."
"...."
사내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그의 몸이 덜덜 떨리는 이유는 공포가 아니었다.
기르고어는 알았다.
아이는 그저, 자신에게 더 이상 필요치 않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에 공포를 느끼는 것일 뿐이었다.
그게 안타까웠다.
무엇하나 특별하지 못해 그저 살기 위해 머리를 굴려 온 아이일진대 어찌 죄인만 되려 하는 것인지.
"고개 들어."
그 말에 천천히 덩치만 커졌을 뿐인 아이가 고개를 든다.
절망이 감도는 눈동자를 마주하며 기르고어는 말했다.
"책임은 말이야. 살아서 지는 거래."
돌이키길, 기르고어는 모르는 세계였다.
그는 살아생전 무언가를 책임진 일도 없고, 그럴 생각도 해보지 못한 사람이었으니까.
필요치 않다면 떨쳐내서 버린다.
그것만이 답이라 생각했기에 이 아이를 죽일 생각도 했다.
사실 그러고 싶지 않았다는 것은 본인도 안다.
유렌은 등을 떠밀어줬을 뿐이다.
그 일을 생각하니 기르고어는 웃음을 흘리게 됐다.
유렌 파로스, 이름으로만 알았던 사내는 기르고어가 생각한 것보다 큰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마음의 빚을 졌으니 갚아야겠지.
그걸 위해서라도 이 아이는 열심히 해줘야만 했다.
"죽어 도망치려 하지마. 네가 한 일은 스스로 다 책임져. 이그로시아를 정상화시키고, 네가 부순 것 이상을 지어내."
덜컥, 사내의 몸이 멎었다.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였다.
기르고어는 조금은 머쓱한 말을 이었다.
"처음이야. 남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는 건."
그것도 용서할 수 없는 죄에 두 번째 기회를 주는 것이다.
스스로의 신념도, 살아온 삶도 부정하여 이런 선택을 했다.
고작 정 하나로 그리했다.
그러니,
"너에게 이름을 줄게."
낙인을 새겼다.
"이아스. 오늘부터 네 이름이야."
먼 여행길 중 들었던 고대어.
그 뜻은 '원죄'였다.
"갚자. 이번엔 내가 지켜봐 줄 테니까."
자신으로 인해 비롯된 죄에게, 스스로에게 짓는 이름이었다.
둘 중 하나라도 살아있는 한 이 죄의 낙인은 절대 지워지지 않으리라.
사내의 눈시울이 또다시 붉어졌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답이 되었다.
기르고어는 쓰게 웃으며 창밖을 봤다.
'음, 날씨 좋네.'
법황청에서 보는 제도는 이그로시아와는 다르게 참 맑은 색이었다.
* * *
죽어가는 사람은 누가 살리나.
치유사? 아니면 성직자?
사실 둘 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시체 수준인 사람을 살리는 건 누구냐 하면, 내 기준에선 하나 뿐이었다.
'히스토리아면 뭐.'
숨만 쉬고 있으면 어떻게든 정상으로 만들 수 있다.
전생에도 그 수준이었고,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할지 이번 생엔 그놈의 변이에서 회복되며 신성력이 강화된 까닭으로 가짜 정도는 눈 감고도 정상으로 만들 수 있게 됐다.
제도로 돌아온 후 함께 법황청으로 가진 않았다.
추천서랑 편지 하나를 동봉한 채 보냈고, 나는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돌아왔는데 누님한테 인사 정도는 하고 움직여야지.
효도 못 하는 놈은 사람 취급 못 받는다.
그런 이유로 집에 돌아왔고, 내가 집에서 본 건 누님이 아니라 다른 손님이었다.
"황녀 전하?"
"파로…! 아! 흠, 크흠…!"
아리아가 우리 집 정원에 있다가, 날 보곤 환하게 웃었다.
평소라면 바로 달려들었을 법도 한데, 오늘은 왜인지 헛기침을 하더니 조신한 척 허리를 곧게 세우곤 새침하게 그런 말을 했다.
"오셨소. 소가주. 다칠 곳은 괜찮은가?"
그러더니 눈을 반짝이며 날 올려다본다.
내가 없는 동안 뭘 봤는지 무언가를 따라하는 건 분명한데, 앞으로 다칠 곳을 미리 걱정하는 말부터 해버리니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다치라는 건가?'
짧은 고민이었다.
064화. 조사 (1)
아리아의 묘한 기행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본인의 입으로 들은 건 아니고, 내 전속 시종인 엠마가 넌지시 말해줬다.
―소가주님이 안 계신 동안 아씨께 교육을 받으셨어요! 황족으로서의 마음가짐을 가르쳐 드리겠다고 하셨는데… 전하께서 이것저것 배우시더니 금방 의젓해지시는 거 있죠!
누님을 자랑스러워하며 눈을 빛내는 부분에서 "네가 누구 시종인지는 기억하냐"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그걸 제외하고 생각해보면… 그래.
아리아가 따라 하려 한 것은 누님이었단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해되는 인과였다.
아리아를 놀아주던 내가 제도를 떠났다.
어디로 갔냐며 화내기엔 떠나기 전 '치즈버거 왕국 수호를 위한 밀정을 떠난다'라고 말해뒀으니 남에게 이 얘기를 할 수도 없었을 터다.
그렇다고 황성에 있자니, 그나마 아리아에 대한 인식을 바꿔 놀아주던 태자도 나와 함께 떠나 없는 상태다.
황성에 있는 것 자체로 눈치를 보는 꼬맹이에게 도피처가 어디겠는가.
그나마 눈치 주는 사람이 없는 우리 저택이었겠지.
그런 이유로 누님과 가까워졌을 것이다.
애초에 내가 있을 때부터 종종 놀던 사이가 아니던가.
그 와중에 교육이 있었겠지.
아닌 게 아니라, 우리 누님이 참 올곧은 사람이다.
똥을 싸도 칭찬하는 나에게조차 식사 예절 따위의 것에 관련해선 훈수를 두는 분이 아니던가.
아리아의 헤픈 행실을 보고선 긁히셨겠지.
그리하여 하나씩 했던 교육이 이런 결과를 만든 것일 터다.
하지만 말이다.
결과를 보니 조금은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파로스로서 돌아온 소가주를 걱정한단다!"
가슴을 펴며 당당하게 말하는 아리아를 보면 일단 그것부터 의문이다.
"전하께서 왜 파로스입니까. 오르테어시지."
"우웅…? 아, 아니다! 큰 파로스가 말했단다! 파로스의 교육을 받은 사람은 모두 파로스의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으니까 우리는 파로스가 맞단다!"
아리아가 당당하게 본인이 파로스인 이유를 피력했다.
그걸 보니 내 눈이 좁아졌다.
누님이 가문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는 안다.
하지만 그걸 생각해도 너무 파로스 위주의 교육을 시키신 게 아닐까 싶어진다.
그래도 황실의 사람인데 이게 맞나.
본인이 어디 출신인지도 까먹게 만드는 게 숫제 세뇌 수준 아닌가.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곤 현실을 가르쳐줬다.
"그래도 파로스는 아니시지요. 전하께선 엄연히 황실의 피를 이어받으신 황실의 일원 아니십니까."
잘못된 부분은 교정해주어야 한다는 뜻에서 말했다.
한데 돌아온 반응이 참 어처구니가 없다.
털썩―!
아리아가 무릎을 꿇었다.
그러더니 황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 나는 파로스가 아닌 것이냐…?"
대체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는 거지.
"아니시지요. 오르테어십니다."
"그러언…!"
아리아의 눈이 질끈 감겼다.
태자에게 치즈버거를 뺏겼을 때를 연상케 하는 수준의 절망이었다.
"나, 나는 파로스의 마음가짐과 식사 예절과 인사를 모두 배웠는데 왜 안 되는 것이냐! 나, 나도 파로스를 시켜다오!"
아리아가 내 바짓자락을 잡았다.
그런다고 파로스가 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부탁하마! 아리아는 이제 브로콜리도 꼴깍 삼킬 수 있단다!"
브로콜리 삼킨다고 파로스면 제국에 파로스가 대체 몇 명인 건가.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전하는 오르테어 하십쇼."
"크으윽…! 이것이 출생의 한계라는 것이더냐…!"
황족이 저런 말을 하는 게 맞나?
그보다 대체 저런 말은 어디서 배워오는 거지?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대체 어떡하면 파로스가 될 수 있는 것이냐!!!"
"뭐...."
외부인이 파로스의 성을 달 경우가 뭐가 있겠나.
혼인뿐이지.
하지만 내가 저 부탁 하나 들어주겠다고 이 꼬맹이랑 결혼할 수는 없지 않나.
여섯 살짜리 신부라니, 도의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결론.
"없죠. 전하께서 어떻게 파로스가 됩니까."
"그럴 수가…!"
아리아의 눈망울이 그렁거렸다.
태자가 빼앗은 치즈버거를 눈앞에서 꼴깍 먹어대는 꼴을 볼 때 딱 저 표정이었다.
일단 웃기긴 한데, 그렇다고 애를 이렇게 놔둘 수도 없겠다 싶다.
'어떡한다....'
생각하다가 이내 아리아를 기운 차리게 할 답이 생각났다.
"버거 만들어 드립니까? 새 레시피로."
움찔, 아리아가 몸을 떨었다.
그러더니 가자미 눈으로 흘긋 날 올려다본다.
직전까지의 절망 어린 기색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얼굴 위로 떠올라 있는 것은 명백한 흥분이었다.
"…무슨 레시피더냐?"
"떠나있는 동안 괜찮은 향신료를 구해왔습니다. 소스로 만드니 달달한 것이 조합에 꽤 괜찮겠다 싶덥니다."
"바, 바로 해주는 것이냐?!"
"아무렴요."
"가자!"
벌떡!
아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이 꼬맹이는 단세포 생물이 맞는 것 같다.
* * *
결국 아리아는 새로운 버거 레시피를 맛보곤 싱글벙글한 낯짝으로 돌아갔다.
내일 또 오겠다니 어쩌니, 아주 여기가 자기 놀이방인 줄 아나 보다.
여하튼, 아리아의 일을 떠나 누님이 돌아온 것은 그날 저녁.
다과회에 다녀온 누님은 날 보자마자 종종 걸음으로 다가와 내 몸 곳곳을 살피셨다.
"이번에는 다치신 곳이 없습니까? 편지 한 통 없어 걱정했습니다. 이리 무사하신 모습을 보니 참 다행스럽군요."
답지 않게 말을 쏟아내시는 모습에 조금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이그로시아에서는 어떻게 정보가 샐지 모른다는 생각에 편지를 안 했는데 그게 걱정을 드린 듯하다.
저녁 식사 때는 안심을 시켜드리고 근황 이야기를 했다.
대체로 내가 없는 동안 제도에서 있었던 일, 소문 따위에 관한 것들이었다.
"소가주께서 지난 법황청의 일로 상처를 얻고 칩거 중이란 소문이 돌았습니다. 모른 체 하는 일은 꽤 곤욕이었지요. 아, 드레노어 경께서 문안을 오셨을 땐 정말...."
그놈의 시한부 소문은 언제 잠잠해지는 걸까.
아니, 이제는 드레노어 경이 살아있는 한 절대 없어지지 않을 거란 생각까지 든다.
그 인간은 뭣하러 문안까지 와서 오해를 부추기나.
슬슬 이 오해도 처리를 해야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사사로운 이야기 중이었다.
아리아에 관한 말도 들었다.
"아이를 움직이는 데에는 동경만 한 것이 없지요. 주변의 훌륭한 어른처럼 되고 싶어 함은 어찌할 수 없는 본능입니다. 황녀 전하께서 파로스가 되고 싶어 하시는 것은 소가주의 영향일 터입니다. 훌륭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셨으니까요."
그놈의 파로스에 집착하는 이유가 날 향한 동경이란다.
너무 좋게 평가해주시는 건 아닌가 싶어 머쓱해졌다.
딱히 반박을 안 한 이유야 뭐, 그 말을 하시는 누님이 너무 뿌듯해하시는 게 아닌가.
여하튼 그런 이야기가 끝난 후였다.
질문이 건네져 왔다.
"그럼 이제 멀리 갈 일은 없는 것인지."
"예, 한동안은 제도를 떠나지 않을 듯합니다."
당장 기르고어의 일을 마무리하는 것부터가 그랬다.
법황청에 대충 던져놓고 왔지만 사후 처리 정도는 해주어야 할 것 아닌가.
그 외에도 조사할 일이 많다.
운명 교단이나 외경에 관한 것들이고, 그건 주로 역사나 비사, 야사 따위를 뒤져봐야 알 일들이었다.
"아마 제도 내에서 여러 일을 처리하겠지만 저녁엔 돌아올 겁니다. 누님과 식사 자리는 필히 참석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말하니 누님께서 살포시 미소를 지으셨다.
이게 효도하는 기분인가.
뿌듯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비는 시간에는 혼약...."
"…아, 당분간 낮에는 집에 없을 듯합니다. 일이 쌓여서."
떠오르지 않았으면 하는 화제가 떠올라 버렸다.
황급히 말을 끊고 완곡한 거절을 했다.
감사하게도 누님께선 말을 더하지 않았다.
"아쉽군요. 내일은 어떤 일정이 있습니까?"
"내일은...."
음, 내일 정도는 할 일을 생각해놨다.
다행스럽게도 말이다.
"…법황청에 다녀올 듯합니다."
그곳에서도 처리할 일이 꽤 많았다.
* * *
법황청의 아침은 빨랐다.
해가 뜨기 전부터 새벽기도를 위해 오가는 사제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외부의 신도들을 안내하는 사제들도 바빴고 법황청의 경비를 맡는 성기사들도 바빴다.
아마 아침의 분주함만큼은 황실보다도 더한 곳이 법황청이리라.
하지만 오전만 지나면 법황청의 분주함은 사라진다.
대체로 정적인 공간인 만큼, 다들 하루를 조용조용하게 사는 까닭이었다.
그런 법황청에서도 유독 온종일 바쁜 사람이 있었다.
말해 무엇할까, 바로 성녀 히스토리아였다.
"성녀님, 서류이옵니다."
주교들이 트레이 가득 서류를 끌고 들어왔다.
집무실에 앉아있던 히스토리아는 퀭한 눈으로 서류를 노려봤다.
왜 이렇게까지 서류 처리에 목매고 있는 건가.
이유를 말하자면… 누군가의 빈자리를 답으로 들어야 했다.
'베르헤임…!'
현재 성자 베르헤임이 사망으로 처리되며 법황청 내의 최고 결정권자는 히스토리아가 되었다.
즉, 성녀라는 직함 탓에 운명 교단과 희망 교단의 모든 중요 서류를 홀로 도맡아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히스토리아는 일이 이렇게 되고서야 깨달았다.
자신이 이전까지 봉사 활동이나 다니고 여유롭게 차를 마실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너는, 이런 걸 다 어떻게 해왔던 거야…?'
베르헤임의 업무량은 살인적이었다.
대체 이런 일을 매일 아무렇지 않게 하는 능력은 어디서 왔던 걸까.
고민해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분명한 한 가지 사실.
히스토리아는 서류에 말라 죽고 있었다.
그런 때였다.
대앵―!
종이 울렸다.
히스토리아는 그 소리를 듣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시간이네요! 다녀올게요!"
"서, 성녀님! 이 서류까지만!"
"나중에!"
파바밧!
히스토리아의 신형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며 사라졌다.
가히 소드마스터의 보법이라 칭해도 모자람이 없는 도주였다.
향하는 곳은 이아스의 병실.
유렌이 직접 맡긴 환자였고, 어쩌면 유렌의 방문이 있을지도 모르는 방이었다.
그 생각에 히스토리아는 병실로 가며 괜히 머리칼을 매만졌다.
신성력까지 발휘해 얼굴을 문질렀고 흐트러진 옷매무새도 다듬었다.
그러다 보니 야속한 기분이 들었다.
히스토리아의 입술이 삐죽였다.
'복귀했으면 한 번 들러주시지.'
아닌 게 아니라, 유렌이 얼마나 야속하게 굴었나.
몇 주나 사라졌다가 돌아와선 소개장 하나만 툭 던진 채 날이 바뀐 오늘까지 법황청을 찾고 있지 않다.
그게 새삼 섭섭한 것이다.
섭섭함의 이유는… 자기변명에 가까웠다.
'나, 나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을 자격이 있으니까!'
관계자로서 흑막의 행보에 대해선 정보를 공유받는 게 맞지 않나.
그렇게 애써 포장을 하지만, 그건 본인에게야 통하는 변명이었다.
"아이쿠, 유렌은 없는데."
병실의 문을 열자 기르고어가 생긋 웃으면서 히스토리아를 놀렸다.
히스토리아는 순간적으로 시무룩해진 표정을 빠르게 가다듬으며 답했다.
"따, 딱히 기다린 적 없는데요?"
"응응, 그렇구나. 안 기다렸구나."
히스토리아는 기르고어를 쏘아봤다.
듣기로 지금의 이그로시아를 완성한 진짜 주인.
저런 어린아이의 몸이라 그것이 얼마나 놀라웠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런 점을 떼어놓고 보자면 그랬다.
"그런 장난은 좋지 않아요."
"장난친 적 없는데."
"아무튼요."
"에엥...."
"주인, 죽입니까?"
"참아 이아스."
히스토리아는 헛웃음을 흘렸다.
치료해준 사람을 죽이니 어쩌니 하는 남자도 거기에 능글맞게 답하는 기르고어도 대체 뭐 하는 건가 싶은 것이다.
결국 나오는 것은 한숨.
오늘도 유렌은 오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한 히스토리아는 빠르게 신성력을 발해 이아스의 몸을 치유했다.
화아악!
빛의 날개와 함께 퍼진 신성력이 이아스의 몸을 수복시켰다.
가히 권능에 가까운 회복 능력.
시각적인 부끄러움만 어찌한다면 이만한 게 또 없긴 했다.
히스토리아는 숨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끝났어요. 앞으로 일주일 정도만 더 치료받으면 멀쩡히 뛸 수 있으실 거예요."
처음 데려왔을 땐 죽은 건지 산 건지 모를 정도로 걸레짝이라 얼마나 놀랐는지.
그래도 천성이 선한 히스토리아라, 환자가 회복되고 있는 것에 보람 정도는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는 자극적으로 하지 마시구요. 아직 내장이 덜 붙어서 미음만 드시는 게 좋아요."
"그렇다는데?"
"예, 명심하겠습니다. 제도의 시장 탐사는 나중에 가야겠군요."
"음, 여기 먹거리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아쉬워."
"빨리 나아 보겠습니다."
히스토리아는 피식 웃었다.
사이가 각별한 것이 느껴지는 까닭이었다.
여하튼, 할 일은 끝.
더 앉아있어 봐야 할 말도 없었기에 히스토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터덜터덜 걷는 모습에선 생기가 하나도 없었다.
서류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것을 온몸으로 티 내는 모습이었다.
그런 때였다.
"성녀님!"
덜컥, 히스토리아의 몸이 들썩였다.
자신을 부르는 주교의 목소리에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지, 지금 가고 있어요! 가서 결재할게요!"
"아닙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네?"
히스토리아가 고개를 갸웃하자 주교가 다가와 속삭였다.
"파로스 소가주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 순간, 히스토리아의 눈이 반짝였다.
* * *
드디어 기어 나온… 아니, 방문한 유렌을 두고 히스토리아는 잠시 마음을 다잡았다.
왜인지 반가워하며 곧장 달려가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었고, 그리하여 표정을 가다듬은 채 천천히 걸어와 접견실에 왔다.
"아, 오랜만입니다."
"…네."
순간적으로 입꼬리가 움찔 올라갔지만 히스토리아는 잘 참아냈다.
왜 이유도 없이 이러는지, 스스로를 질책하며 자리에 앉은 히스토리아는 유렌의 행색을 잠시 살폈다.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조금 날 티 나는 인상에 잿빛 머리칼과 보라색 눈동자.
기색은 평온해 보였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나요?
편지만 달랑 보내시기에 안 오실 줄 알았어요.
그런 말이 나오려 했고, 히스토리아는 어떻게든 참았다.
곧장 오지 않은 것에 투정부리는 것 같아서였다.
'일단 안부부터.'
그렇게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성녀님, 혹시 운명 교단에 분파가 있습니까?"
"...."
다짜고짜 본론.
히스토리아의 표정이 조금 뾰로통해졌다.
065화. 조사 (2)
내가 이그로시아행을 다녀오며 정리해야 했던 것 중 역시 가장 신경 썼던 건, 바로 흑막의 정체였다.
사라진 운명의 가호를 들고 있는 놈이 적의 수괴로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신의 가호란, 보통 신이 직접 자신의 권능을 떼어 하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 가정이 기정사실로 굳어진다.
여신이 인간을… 정확히는 제국을 버렸다는 것.
그 진실의 아득함은 잠시 묻어두자.
어차피 싸워야 할 적이라면, 그게 누가 되었든 주저앉아 두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하여 어떻게든 적에게 가까워지기 위한 고민을 해봤다.
그 결과, 외경에서 '사육당하고' 있던 인간들에게 운명의 여신이 손을 뻗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서 그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제가 알기로 신은 자신을 믿지 않는 피조물에게 가호를 내릴 수 없습니다. 더불어 외경은 이 땅의 신을 모르지요. 그렇다면 분명 외경까지 떠나 운명의 신앙을 퍼뜨린 놈들이 있을 겁니다. 그놈들을 쫓으면 흑막에도 닿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덥니다."
히스토리아에게 이번에 있었던 일과 내 추측을 함께 말했다.
묘하게 뾰로통한 기색이던 히스토리아는 이어진 내 말에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턱을 괸 히스토리아가 미간을 좁히며 답했다.
"…확실히, 그런 식의 접근이 가능하겠네요. 가호가 사라진 시점은 베르헤임도 잘 모르고 있고, 그런 와중 가호가 다른 데로 옮겨갔다면… 네, 분파를 의심할 수도 있겠어요."
종교라는 것은 대체로 종교의 해설 관점에 따라 그 파벌이 나뉘는 편이다.
예로 들자면 희망 교단이 그렇다.
희망은 신의 응답이 없는 교단이다 보니, 교리의 해설이 중히 여기며 이미 몇 개의 분파가 생겨 있었다.
도리어 이제까지의 운명 교단이 이질적이었지.
워낙에 답이 빠른 신이다 보니 신의 뜻을 스스로 해석할 일이 없어서 그런 것인데, 그럼에도 분파를 결심한 이들이 있다고 치자.
여신이 그들의 손을 들어 외경으로 보냈고, 그곳에 신앙을 전파했다면 꽤 아귀가 맞지 않나.
하지만, 히스토리아의 답은 내 추측을 전면으로 부정했다.
"제가 아는 한 운명에는 분파가 없어요."
"확실합니까?"
"그런 게 있었다면 교육받았을 거예요. 그 정도로 운명에서 분파가 생기는 건 특이한 일이니까요. 애초에 그렇잖아요. 신의 응답을 받는 성자가 있는데 거기에 반기를 들면...."
"…사이비가 되지요."
이건 오답인가.
그렇다면 대체 외경에 있는 그놈들은 뭔가.
고민이 깊어지는 순간이었다.
"…하나, 다른 경우의 수를 생각해보죠."
"예?"
"믿게 만들 방법이 없진 않아요."
나는 히스토리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돌아온 답은 그랬다.
"강림, 혹은 권능의 행사. 여신이 먼저 존재를 알리는 거예요."
"…!"
"이미 선례가 있잖아요?"
"…종족 전쟁."
"네, 희망께서 인간에게 응답한 마지막 시기죠. 기록은 남지 않았지만… 분명 희망을 믿음으로써 희망의 가호를 받은 사람이 있었어요."
왜 아닐까.
초대 성녀가 그렇게 만들어진 사람이었을진대.
불확실하지만 그 경우의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
결국 답은 외경에 있다는 말.
이게, 조금 많이 곤란하다.
'함부로 갈 수 없는 곳이다.'
다 떠나서 외신들의 피조물인 밤의 종족은 인간에게 한없이 적대적이다.
그냥 적대적인 피라미면 모르겠지만, 그것들은 일반적인 군대를 끌고 갔다간 내부에서부터 군대를 갉아먹어 터뜨리는 괴물들이었다.
그렇다면 직접 간다?
아직 마스터에도 못 오른 이 몸으로? 덜 자란 태자를 데리고?
'…자살.'
그런 결론 밖에 안 나온다.
히스토리아가 물었다.
"베르헤임에겐 연락이 없던가요?"
"통신기는 작동 중입니다. 외경 입구에 닿은 게 지난주의 일이었고… 이후의 통신은 아직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뭐라도 알아 온다면 다행일 텐데...."
고개를 끄덕였다.
반쯤은 유배의 성격을 띤 채로 보낸 성자의 외경 행.
그게 지금 당장 우리들의 동아줄이 된 실정이다.
머리가 조금 복잡해졌다.
나는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차근차근.'
당장 외경으로 쳐들어갈 수는 없지만, 이미 외경으로 보낸 성자라는 첩보가 있다.
알아낸다면 그쪽에서 뭔가를 해주겠지.
그럼 다른 일을 생각해 보자.
'일단 남은 건 북부.'
대공자의 유혹을 풀어내는 게 우선.
그렇게 황금 기수 모두 온존한 채로 제국의 국력을 끌어올린다.
다음으로 흑막이 밝혀진 이 시점에 생각하길, 아마 야만족의 침공도 운명의 여신과 엮인 이야기라고 보는 게 옳을 터.
마침 기르고어가 그쪽에 있었다고 하니, 이 이야기도 들어야 한다.
끝으로 하나 더, 시선이 신목으로 향했다.
'…암만 생각해봐도 그렇단 말이지.'
초대 파로스는 무언가를 안배했다.
그 안배는 회귀 후 맞선 적들에게 딱 들어맞는 안배였고, 그것은 달리 말해 초대가 이 상황을 이미 예견했다는 말이 된다.
'뭘 알고 있는 거지?'
그 부분에도 조사가 필요하다.
이건 다른 것들보다 꽤 명확하게 길이 제시되어 있다.
'파로스를 이어받아야 한다.'
계승식을 마치고 세계수로 향하면 답이 나올지도 몰랐다.
그렇게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정리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견 감사합니다. 혹시 모르니 분파에 관해서는...."
"아, 네! 따로 조사해볼게요!"
히스토리아가 따라 일어났다.
그러더니 문득, 우물쭈물하며 그런 질문을 한다.
"바로 가시나요?"
아직 용건이 남은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저 묘하게 아쉬워하는 표정이 걸린다.
'흠.'
뭘까, 내가 뭘 빠트린 건가?
아니면 해야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고민이 이어지던 중이었다.
이내 나는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아."
"아?"
"고기빵, 만들어 드린다고 했는데."
쩌적, 히스토리아가 굳었다.
이윽고 입술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눈이 왜인지 샐쭉한데, 아마 약속해 놓고 안 만들어 줘서 삐진 게 맞는 듯하다.
"온 김에 만들어드리지요. 혹시 법황청의 주방을 빌릴 수 있겠습니까?"
잠시 입을 다물던 히스토리아는 이내 답했다.
한숨 섞인 목소리였다.
"…네, 그럼 같이 식사까지만 할까요?"
"좋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고기빵이었군.
* * *
다행히 법황청의 주방에는 재료가 많았다.
식기도 내가 원하는 건 다 있었던 터라, 고기빵을 만드는 일은 수월했다.
과정에서 히스토리아가 자신도 해보고 싶다며 피에 속을 채우는 걸 같이 했는데, 히스토리아가 만든 건 죄다 찌는 과정에서 터져버렸다.
"...."
시무룩해 하는 게 괜히 안쓰러워져 그건 내가 먹었다.
"이건 이것대로 맛있습니다. 정진하십시오."
"괜찮았나요…?"
"예, 제 입맛에는 뭐."
전장에서 흙이나 퍼먹던 때랑 비교하면 극락 아닌가.
그래도 사람 먹는 걸로 만드는 건데.
"그, 그런가요…!"
배시시 웃는다.
이런 걸로 좋아하는 걸 보니,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행복 기준치가 낮은 건 분명했다.
여하튼 히스토리아와의 만남은 그걸로 끝.
법황청을 떠나기 전에 잠시 가짜의 병실에 들렀다.
이곳에서도 해결해야할 일이 있었다.
기르고어가 날 반겼다.
"아, 왔어? 성녀는 만났고?"
"어, 근데 네가 그건 어떻게 아냐."
"하하, 그냥 물어본 거야."
기르고어가 손사래를 쳤다.
가짜는 나를 향해 깊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의자 하나를 끌어와 자리에 앉았고, 온 목적을 설명하려 했다.
그러자 기르고어가 선수를 쳤다.
"아! 대공가 쪽은 라본한테 조사를 맡겨 놨어. 내가 돌아갈 때 쯤이면 그쪽 동향은 다 파악해서 전해줄 거야. 정리해서 서면으로 저택에 보낼게."
"어?"
"응? 아니야? 당신 목적이 악마한테 유혹당했던 애들 교정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대공자 쪽 조사하려고 했지. 혹시 내가 헛다리 짚은 건가?"
기르고어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눈을 끔뻑였다.
그런 후 떨떠름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맞긴한데...."
"근데 왜?"
말 안 해도 척척 하는 게 신기해서.
생각한 순간 흠칫해 버렸다.
'아니, 이게 신기할 일인가?'
사실 다들 이랬어야 하는 게 아닐까?
황금 시대의 기수라고 묶여 불리는 정도면, 알아서 뭐든 한 다음에 '나 이거 했다'라고 말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
'왜....'
이때까지는 '이거 어떡해?'라는 말만 들은 거 같지?
나는 입을 틀어 막았다.
눈빛이 사정없이 떨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것들은 황금 기수가 아닌 폐급 기수가 아니었을까.
황금은 이놈 하나였던 게 아닐까.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차올랐다.
하지만 깊게 마주하진 않았다.
때로는 묻어두는 게 나은 진실이 있는 법이므로....
"그거 말고는 용건 없어?"
"…하나 더."
사실 이쪽이 본론이다.
나는 정신을 다잡고 기르고어를 마주 봤다.
화두를 던지는 것은 조심스러워야 할진저.
나는 물었다.
"떠난 10년 동안 야만족들이랑 있었다고 했던 거 같은데."
"아? 응, 그렇지."
"그놈들 관련해서 물을 게 있어서."
"아아, 뭐. 어려운 건 아니네. 뭔데?"
이쪽은 제대로 된 확인이 필요하다.
사실, 이렇게 되고 다시 생각하면 그놈들의 정복 전쟁은 목적이 참 불투명했다.
당시에야 야만족들이 중앙의 풍요로운 땅을 노리는 이유라고 생각했지만, 가호를 받았던 그놈이 그러지 않았나.
'판테일 두르'라는 명칭이 나온 순간 자살해버렸단 말이다.
'거기서도 뭘 하는 것 같은데.'
생각하기에 따라 회귀 전의 전쟁도 다시 볼 필요가 있었다.
유력한 예상으로는,
'분파가 아니라면 외경에 운명 신앙을 퍼뜨린 게 야만족이다.'
강림이라는 가능성을 제외하고 생각했을 때가 그렇다.
하지만 이 부분도 불투명한 것이, 야만족은 고유 신앙이 있었다.
'자유와 투쟁의 신앙.'
내가 아는 야만족들은 그 신앙 아래 모여 있다.
인간이 왜 다른 신을 믿는가.
그에 관한 답은 애초에 야만족의 기원부터가 영맥 너머 성역 안에서 발생한 군집이기 때문이다.
종족 전쟁 때조차 별개의 군집으로 취급되며 화마를 피해 갔으니, 영맥이 얼마나 험지인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터다.
다만, 내가 아는 그 신앙 외에 운명의 여신이 그 땅에 개입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악마를 썼던지, 혹은 다른 술수를 써서 그놈들로 하여금 제국을 치게 만든 것이라면?
그런 의문을 단적으로 해결할 질문이 있었다.
"야만족들 신앙이 어땠냐? 혹시 운명 쪽 신앙을 아는 놈이 있던가?"
그 질문에, 기르고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일단 운명을 알긴 알지?"
"그럼...."
"아, 근데 네가 생각하는 건 아니야. 확실히 아니야."
내 눈이 좁아졌다.
그에 기르고어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며 침음을 흘렸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톡, 톡.
관자놀이를 두드리던 기르고어는 이내 답을 이었다.
"일단 그것부터 말해야겠네. 시간 좀 있으면 들어볼래? 내가 야만족 땅에서 겪었던 일들."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오늘은 일정이 더 있지도 않으니 이 이야기를 확실히 들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이어진 말.
그것은,
"결론부터 말하면 걔들도 우리 쪽 신앙을 알아. 운명, 희망. 이런 거. 근데 아는 이유가 싫어해서 아는 거야."
"…어?"
"싫어한다고. 희망은 모르겠는데 운명은 끔찍하게 싫어해. 걔들 신이랑 상성이 안 좋다나 봐."
참으로 어안이 벙벙해지는 말이었다.
066화. 조사 (3)
기르고어의 경험담은 내가 아는 상식을 몇 차례나 부쉈다.
신에 관한 것부터가 그랬다.
"그쪽 교리에서 운명을 되게 나쁘게 봐. 희망에 관한 건 언급이 잘 없는데, 그나마 있는 것도 완전 쩌리 수준이고. 둘이 쌍둥이 여신인 것 치고는 취급차가 좀 심하지."
운명과 투쟁.
그렇게 대치시킨다면 교리 자체는 설명이 된다.
이게 충격적인 이유는 그놈들이 운명과 적대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외경 쪽에서 저놈들을 움직인 게 아닌가?'
적의 정체가 운명의 여신 쪽으로 기운 상황이다.
목적성 또한 제국 멸망으로 밝혀진 상태.
그렇다면 내가 아는 제국 멸망 시나리오 중 가장 핵심이 된 것 중 하나가 바로 야만족과의 전쟁이었던 만큼, 나는 그쪽에서 운명이 장난질을 쳐놨을 것을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말이 다르다.
"…그놈들, 신명은 제대로 받고 있나?"
"주술사들이 받고 있지. 걔들 대회의에서 그게 논제로 나올 때도 있었고."
신명을 받는다면 운명과 대립 관계인 신이 운명의 일에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즉, 저들이 벌인 전쟁은 순수하게 자유와 투쟁의 의도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러면 일이 복잡해진다.
'외경 쪽만 막는 것으로는 안 된다. 전쟁은 별개의 사건이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면 차라리 차근차근 부수면 되는데, 양방향으로 위기가 치닫게 된 거나 진배없는 상황이 아닌가.
생각하던 중 다른 쪽으로 가능성이 튀었다.
'…아니, 연결되어 있는 건가?'
운명의 술수를 막기 위해 저들의 신이 이자크를 사도로 내세운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조차도 추측.
"혹시 야만족 놈들은 제국을 어떻게 생각하나?"
"어떻게 생각하고 말고 할 게 없는데. 그냥 관심이 없어."
"으음...."
"신이 운명을 싫어한다고 해도 보통은 거기서 끝나지. 너도 싫어하는 사람 있다고 다 죽이고 다니진 않잖아?"
"...."
일단 싫은 놈은 죽도록 패고 다니긴 했는데.
망나니 때나 전쟁기나 환경이 그걸 허락한 까닭에 심히 공감은 안 되는 말이었다.
여하튼, 관련된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중이었다.
나는 숨을 가다듬고 조심스레 이름 하나를 읊어봤다.
"이자크 라 보데타. 이 이름 아나?"
회귀 전 야만족의 대전사장이자 그랜드 마스터였던 놈.
태자와 지긋지긋하게도 싸워댔던 제국의 악몽.
그놈의 동향이 어쩌면 이 모든 괴리의 핵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건넨 질문이었다.
그에 기르고어의 눈이 커졌다.
"응? 네가 대전사장 아들을 어떻게 알아?"
"…대전사장 아들?"
"아니, 어떻게 아냐니까?"
"내 질문이 먼저. 그놈이 어떤 놈이지?"
의외의 사실이었다.
적어도 그놈이라면 이 시기에도 두각을 드러내고 있을 줄로 알았기 때문이다.
한데 고장 전사장의 아들이란다.
물론, 제국으로 치면 태자로 치부되는 고위직이지만 그래도 그렇지 않나.
그놈이 정점에 서서 전쟁을 일으키는 게 5년 안에 일어날 일이다.
그런데 대전사도 아닌, 그저 대전사장의 아들로 일컬어지는 게 의문이란 말이다.
조금은 혼란스러워지는 중 기르고어가 말했다.
"…그냥, 많이 특이한 야만족?"
"특이하다?"
"똑똑했어. 다른 야만족들이랑은 다르게 생각이 깊다고 해야 하나. 큰 그림을 볼 줄 알았지. 환경만 만들어지면 시대를 바꿀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라면 이해가 되나? 내가 다른 사람 똑똑한 걸로 놀란 건 이아스 이후로 처음이었어."
"주인…!"
"하하, 그래도 난 네가 낫다. 걔는 자아가 너무 강했어. 능력이 있는 거랑 별개로 나랑 어울리긴 힘든 쪽이었거든."
"…영혼을 바치겠습니다. 이제껏 그래왔듯, 앞으로도 영원히."
"그래, 그래."
눈앞에서 촌극이 벌어졌으나 그에 감상을 느낄 여유는 없었다.
'다른 쪽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하지만 무력적인 부분은 언급을 안 한다. 그놈이 숨겼나? 아니면 무력을 얻은 건 다른 계기?'
정보량이 너무 제한되어 있었다.
여하튼, 확실한 것.
이 부분에 관해서는 확실한 방침이 필요했다.
나는 레베카의 뒤처리부터 끝낸 후 할 일을 결정했다.
'먼저 계승식. 그게 끝나는 대로 영맥으로 향해봐야겠어.'
당장 제국에 대한 다른 뜻이 없다면, 그리고 야만족이 전쟁을 일으킬 걸 안다면.
최소한의 무력 조건을 갖춘 후 놈들의 본거지로 향해 조사하는 게 맞다.
그리고 이자크를 눈으로 확인해보는 게 맞겠지.
'만약....'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시나리오.
그놈이 현재의 대전사장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휘어 잡으려는 게 보인다면.
그리고 제국을 침공하려는 야심을 품는다면.
그게 사실로 박힌다면 아직 다 크지 않는 놈을 그 자리에서 죽이는 방법도 고려할 것이다.
이건 다른 사람을 쓸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일어나지 않을 일을 현재의 일과 비교하며 유동적으로 판단하는 건, 미래를 아는 내가 아니면 불가능한 법이니.
대충 방침이 정리되고 있었다.
기르고어가 물었다.
"그런데 야만족은 왜? 걔들도 뭐 문제 있나?"
"당장은 없지."
"응?"
잠시 기르고어를 살폈다.
확실히 이제껏 부대낀 황금 기수 중에선 가장 유능함이 확실한 놈.
관계의 우위도 저주의 해소라는 능력 탓에 확실히 내게 있었다.
단서를 조금 더 줘볼 만하다.
"…여러 경우의 수를 생각 중이다. 외부의 위협이란 걸 깨달은 순간부터 용의선상에 있었던 놈들이니까."
"아하?"
"그게 아니더라도, 운명을 적으로 둔다면 쓸모가 있겠지."
"음,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건가. 이해했어."
무시할 수 없는 가능성이었다.
야만족이 어떻게 굴러가는 놈들인지 아직은 확단할 수 없으나, 잘만 이용하면 그놈들은 최고의 무기가 될 터다.
놈들과 싸워봤던 나이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은 그렇게 알고 있으면 되겠고. 그만 가 본다."
"아, 수고해. 떠나기 전에 한 번 인사하러 들를게."
"어."
자리를 빠져나갔다.
법황청을 나서니 바깥 공기가 그나마 속을 풀어준다.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던 때에 비하면 훨씬 나아.'
갈 길이 멀지만 방향 자체는 잡혔다.
조급해하지 않고, 그렇다고 여유를 부리지도 않으며 착실히 나아가면 될 터다.
밝혀진 것의 정리는 이것으로 얼추 끝.
거시적인 것을 끝냈으니 이제 미시적인 것들을 처리할 때다.
그러니까,
'…태자 그 새끼를 어떻게 해야 하지?'
언제나 그랬듯, 제일 좆같은 건 본업이었다.
* * *
다음 날은 아침 일찍 일어나 씻고 나왔다.
향하는 곳은 황궁.
정규 수업 날짜에 맞춰 입궁했고 일단 태자부터 팼다.
"어억…!"
"일어나십쇼. 정신 덜 차린 것 같은데."
"아니, 잠깐… 명치 맞았…!"
"예, 명치를 팼으니까 거기가 아프시겠지요."
툭, 툭.
신목의 끄트머리로 태자의 뺨을 쳤다.
애써 웃는 얼굴을 보니 열이 뻗친다.
이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인간을 봤나.
"분명 이그로시아에서부터 제도까지 와 헤어지기 전까지 몇 번이고 말씀드렸습니다. 성질, 그거 함부로 꺼내지 말라고. 없는 거로 생각하라고."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니까, 이 새끼가 결국 내 말을 안 듣고 황성에서 성질을 몰래 수련하고 있었다.
"안 썼...."
"지랄 마십쇼. 저택에서 자면서도 느껴지덥니다."
"…자네는 괴물인가?"
괴물은 그쪽이고.
내가 그걸 느낀 이유는 이 기운을 태자만큼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애초에 지배의 성질로 영혼 단위까지 처맞은 세월이 십 년이 넘어가는데, 저걸 어떻게 모른단 말인가?
나는 지배를 공기의 떨림 만으로도 구분할 수 있다.
일종의 트라우마라고 봐도 좋았다.
아무튼, 그건 그거고.
"가만히 있으면 쓰게 될 능력입니다. 하지만 지금 단계에서 억지로 쓰려고 한다면?"
"…한다면?"
"그 시기가 늦어지지요. 아니, 영영 놓칠 수도 있습니다. 완성되지도 않은 육체가 먼저 괴사합니다. 그런 중에도 깨달음에 억지로 맞춰가려고 성급히 형상을 떠내는데, 당연히 오밀조밀하지 못한 몸은 소드 마스터 이후에도 성질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쉽게 깨지는 그릇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자네는 잘만 쓰지 않나?"
"잘 쓰는 걸로 보입니까? 한 번 싸우고 나면 며칠씩 피를 토하는 게?"
진지하게 말했다.
목걸이의 성능이 있어 겨우 이 정도로 끝나는 거다.
실제로 난 거의 대부분의 전투를 검의로 하려 했지, 성질은 급한 게 아니라면 쓰지도 않았다.
특히 태자는 더욱 그렇지.
"지배는 다릅니다. 제 파쇄나 드레노어 경의… 쯧, 그거 같은 경우엔 사용자의 자격을 크게 시험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배는?"
"…아네, 직접 썼으니까."
태자가 고개를 숙였다.
모든 능력에는 대가가 따른다.
무상성의 정점이라 불리는 지배는 단 하나, 사용자가 곧 상성이 된다.
성질 자체가 자아를 가진 것처럼 자격 없는 주인을 부수려 든단 말이다.
그걸 몇 번이고 인지시켰음에도 이 꼴이다.
이건 정말 화가 났다.
하여 더 몰아붙이는 중이었다.
"…미안하네. 조급했네."
"변명은 그게 끝입니까?"
"제국이 위기이지 않나. 맞서는 적은 하나 같이 쉽지 않은 것들이고. 내 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네. 이걸 분석한다면 더욱 빨리 경지를 올릴 수 있을 테고...."
태자의 얼굴 위론 어느새 그늘 같은 것이 드리워져 있었다.
"…해결을 자네에게만 맡기는 일은 줄어들 테니까."
"...."
기특한 마음이긴 하다.
내가 그걸 바라지 않는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한숨이 나왔다.
이놈의 사제관계는 이런 점이 불편했다.
차라리 전생 같은 관계였다면 '까란 데로 쳐 까기나 하십쇼'라고 할 수 있겠건만,
'이놈이 아직 성격이 덜 파탄 나서.'
지금의 태자는 그래도 인간의 양심이 남아있다.
옥에서 지랄발광하던 시기가 없으니 사람처럼 군단 말이다.
이걸 어느 정도는 남겨야 했다.
내가 만들어야 하는 건 최강의 장수가 아닌 성군이었으므로.
잠시 말을 골랐다.
기색을 누그러뜨리고, 태자를 바로 마주했다.
그리고 나서야 답할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 제가 있는 겁니다."
"웃기지도 않는 말이네."
"아닙니다."
태자가 미간을 좁혔다.
그에 나는 답했다.
누님의 언행을 조금 참고해서.
"스승은 제자의 성장을 위해 존재합니다. 파로스는 오르테어의 완성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니 저는 말입니다."
무릎을 꿇고 태자와 눈높이를 맞췄다.
"제 역할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스승으로서, 파로스로서. 아직 자라지 못한 나무가 비바람에 쓰러지지 않도록."
"…!"
징그럽게 왜 감동받은 표정일까.
인중을 갈겨버리고 싶은 욕구를 꾹 참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저를 위하신다면 차근차근 나아가십시오. 제가 희생한 것들을 빛나게 만드는 것은 전하의 개화입니다."
"자네...."
태자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왜인지 글썽거리는 눈.
그리고 묘하게 좆같은 표정까지.
"내 이런 사람을 얻어 참 다행이네. 유렌, 자네가 내 보무...."
"어, 씨발."
빠악!
"으긁!"
포옹하려고 하기에 나도 모르게 인중을 갈겨버렸다.
몸에 소름이 돋아왔다.
혹시 막지 못했으면… 그런 생각만으로도 헛구역질이 나왔다.
나는 일어나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경고하는데 두 번 다시 그러지 마십쇼. 진짜 죽여버리고 싶으니까."
살의가 치솟았다.
그걸 겨우 갈무리해, 태자를 살린 채로 떠날 수 있었다.
선생질이 이렇게 힘들다…!
* * *
이후로 자는 중 지배의 기운을 느끼고 식은땀을 흘리며 깨는 일은 없었다.
꿈자리가 편하니 요 며칠은 그나마 사람같이 살았다.
몸도 회복됐고 일도 여기저기서 해결되는 차니 급한 건 없었다.
법황청 사건이 이후로 치면 두 달이 훌쩍 넘는 시간인가.
정말 오랜만의 휴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집에 틀어박혀 먹고, 자고, 또 먹고.
그러다가 아리아가 놀러 오면 대충 놀아주고.
물론, 아예 노는 것은 아니었다.
"앗! 막시무스야! 그건 뜯으면 안 된단다!"
[꺄웅?]
저택의 정원.
아리아가 새끼강아지와 함께 놀고 있었다.
갑자기 웬 강아지냐 하면....
'…정령이라.'
저건 정령 늑대였다.
기르고어에게 얻었던 바람 늑대의 망토에 적응하기 위해 훈련 중인 것이다.
그간 알아낸 사실.
저 늑대는 내 마나를 얼마나 주입하느냐에 따라 크기 조절이 가능하며, 잘만 조절한다면 온종일 꺼내두어도 무리가 없는 놈이다.
그러니 꺼내둔 채로 교감도를 쌓고 있었다.
정령이란 족속 자체가 계약자와 보내는 시간이 길수록 강해지는 것들인 까닭이다.
아닌 게 아니라, 당장 지난 전투에서만 해도 사각으로 파고드는 늑대의 공격이 꽤 큰 역할을 했었다.
더 강하게 만들면 전투력 상승폭이 커진다.
그런 판단이었고, 하여 가만두니 저 꼴.
"막시무스야! 이번엔 저쪽으로 가자꾸나!"
[꺄웅!]
강아지로 만들어놨더니 그걸 본 아리아가 좋아라 하며 늑대에게 달려들었다.
어느새 막시무스라는 이름까지 붙은 늑대는 아리아가 마음에 들었는지 꼬리를 붕붕 돌려대며 따라 다니기 바빴다.
'나랑 교감도 쌓이는 게 맞나?'
순간 의문이 들었지만, 자동으로 아리아와 놀아주는 도구가 생긴 것 아닌가.
유유자적 누워있으니 새삼 편한 것은 부정할 수 없어 그대로 두었다.
그런 어느 때였다.
신나게 뛰어다니다가 지쳤는지 아리아가 헥헥 숨을 몰아쉬며 내 근처로 왔다.
눈이 초롱초롱한 것이 만족도가 꽤 큰 모양이다.
"잘 놀았습니까?"
"웅! 막시무스는 참으로 똑똑하구나! 이 정도면 황실 비고를 맡겨도 될 것 같단다!"
"경비대들 울겠네. 그러지 마십쇼."
"웅!"
아리아가 풀썩 누웠다.
늑대가 그 곁에 몸을 둥글게 말고 누웠다.
살랑거리는 바람을 맞으며 아리아와 늑대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아니, 근데 정령이 잠도 자나?'
그런 생각이나 하던 중이었다.
번뜩!
아리아가 눈을 떴다.
그렇게 일어나더니,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아리아가 깜빡한 게 있었다!"
"뭡니까? 밥은 아까 먹은 것 같은데… 디저트?"
"아니! 편지!"
"예?"
"파로스한테 편지를 배달해야 한단다!"
"-"
아리아가 메고 있던 손가방에서 웬 쭈글쭈글한 편지 하나를 꺼내 건넸다.
그를 본 내 눈이 좁아졌다.
"…황실 인장이군요."
황족만 쓸 수 있는 인장이 떡하니 박힌 편지.
그에 고개를 드니, 아리아가 빵긋 웃으며 자랑스럽다는 듯 어깨를 펼쳤다.
"둘째 언니야 전하가 전해주랬다! 아리아 안 까먹고 전해줬다!"
"2황녀 전하?"
"웅!"
[꺄웅!]
2황녀.
그러니까, 아리아에게 '잘생기면 나쁜 남자'라는 말을 가르친 여자이자 국고로 바람둥이들의 배를 불려주는 걸로 유명한 빡대가리가 내게 편지를 보냈단다.
고개가 기울 수밖에 없었다.
'왜?'
그 여자랑 내가 접점이 있었나?
암만 생각해 봐도 없는데.
'…일단 확인해볼까.'
미간을 좁히며 편지를 뜯었다.
내용은 짧았다.
[태사 어르신, 가르침을 청하고 싶사옵니다.]
일단 그것부터 의문이다.
'내가 왜 어르신인데.'
괜히 긁히네.
067화. 환장의 2황녀 (1)
2황녀 필리아 오르테어.
그 여자의 편지를 받고 먼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여명궁이었다.
2황녀의 편지에 관해 이야기하자 태자의 곁에 서 있던 에릴다가 꽤 날 선 반응을 보였다.
"걔가 당신한테 접촉했다고요?"
"예, 뭐...."
"허, 진짜 미친년이네."
에릴다가 왜 이렇게 화나 있느냐.
그에 관한 설명을 위해선 황실의 가계도를 먼저 말해야 한다.
현 오르테어 황제는 한 명의 황후, 한 명의 후궁을 들였으며 번외로 혼인하지 않은 정부… 지금은 고인이 된 아리아의 어머니를 두었다.
그 아래 황후의 소생으로 태자, 1황녀, 3황자가 있으며 2황자와 2황녀는 후궁인 에스토르 가의 헤일리가 낳았다.
즉, 태자 진영과 2황자 진영의 형제들은 모친이 다른 정적이란 말이다.
여기까지 들었다면 의문.
어떻게 후궁의 소생인 2황자가 태자 자리를 노릴 수 있는가.
그것도 능력도 모자란… 미래엔 최흉의 황제가 될 놈이 어떻게 시시각각 태자에게 정치적 압력을 주는가.
그에 관한 답은 아주 명료했다.
"진짜 선 제대로 넘네. 지들이 에스트로면 단가?"
후궁 유르디나 오르테어의 본적은 제국 3대 귀족이자 개국공신 가인 에스트로 공작가다.
그렇다.
후궁 유르디나의 외척이 파로스와 역사를 나란히 하는 명문 중의 명문인 것이다.
사실 낳은 자식이 2황자와 2황녀… 병신과 빡대가리라는 점에서 핏줄의 우월함은 글쎄올시다 싶지만, 핏줄이야 실시간으로 재상과 불륜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현 황후가 태자를 낳았다는 점에서 그렇게 신빙성을 주는 요소는 아니다.
중요한 건 에스트로가 최정상급 명문이라는 것.
그 명문이 천년 간 쌓은 공신가의 인맥이 그들의 힘이라는 것.
에스트로는 제국의 다음 대를 자신들의 손아귀 안에 두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계속하고 있으며 그 수단이 2황자였다.
그리하여 생긴 대립 구도가 이것이었으니, 태자를 지지하는 에릴다 입장에선 2황녀의 접촉이 얼마나 분통이 터지는 상황이겠는가.
에릴다는 말했다.
"거절해요. 특히 편지에 가르침이란 단어가 있다면 그쪽에 빌미를 주지 않는 게 좋아요."
일리 있는 말이다.
암만 따로 노는 2황녀라지만 일단은 에스트로를 등 뒤에 둔 녀석이다.
그 여자가 '가르침'을 빌미로 '파로스'와 접견한다?
이건 2황자 측에서 태자만이 독점하고 있던 정통성에 파고들 틈을 주는 일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내가 2황자의 스승을 자처하는 일은 없겠지만, 정치란 게 그렇다.
보이는 게 참 중요하단 말이다.
무시하는 게 맞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이유도 있었다.
"저는 가는 게 좋지 않나 싶습니다."
"배신?"
"아니,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굴어. 일단 얘기 좀 들어보십쇼."
에릴다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어디 한 번 읊어보라는 기색이 한가득이다.
나는 말했다.
"잘만 굴리면 직인을 받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에스트로의 직인. 이게 뭘 의미하는지는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순간, 태자에게서 답이 돌아왔다.
"…성천검."
"예, 그 칼. 태자 전하는 절대 못 얻는 그거."
"확실히 그것이라면...."
태자가 납득했고 에릴다가 이를 갈았다.
성천검이 무엇인가.
앞서 말했듯 미래의 태자가 전쟁기에 황실 비고에서 털어온 대륙 3대 보검 중 하나다.
효과는 두말하면 입 아프지.
성천검이 있는 태자와 없는 태자는 전투력에서 풀 플레이트로 무장한 기사와 발가벗고 목검 하나를 든 기사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따지자면 초대 황제의 무구다.
이게 황제의 정통성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크겠나.
다른 걸 떠나서 그게 중요했다.
모든 정통성을 충족하는 태자이지만 지금 상황에 저 성천검 하나만큼은 절대 품에 안을 수 없다.
비고에서 저걸 꺼내려면 제국 3대 귀족의 직인이 모두 필요한데, 개중 하나가 2황자의 배경인 에스트로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비고를 털 수도 없고.'
전쟁기에야 그냥 냅다 도둑질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비고의 경계가 헐거웠다.
태자가 그 검을 들고 다녀도 압력을 넣을 수 있는 놈들이 없었다(그런 인종은 다 도망가거나 죽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렇기에 이게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직인을 허락할 수 있는 건 가주뿐, 그리고 2황녀는 엄연히 에스트로 가주의 측근입니다."
정치적으로 측근은 아니다.
그냥, 에스트로 가주가 2황녀를 끔찍하게 아낀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하냐면 필리아의 눈물 한 번에 에스트로의 현 가주가 제도의 1급 저택을 사주었을 정도.
필리아가 찾을 때면 공무도 미뤄둔 채 그녀와 티타임을 가질 정도.
그러니까, 어떻게든 잘만 구슬리면… 2황녀를 통해 에스트로의 직인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말을 끝내자 태자의 표정이 바뀌었다.
"…확실히 해볼 만하네."
"칼리오스!"
"진정하거라, 에릴다. 정통성 문제만이 아니다. 적을 생각하면 검의 필요성은 나부터가 느끼고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까지 태자가 쓰던 검은 지배의 성질을 담아낸 이후 폐품 수준으로 망가져 있었다.
소드마스터에 오를 것을 생각하면… 정통성 이전에 적과 싸울 무구가 태자에겐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이로써 2대 1.
의견이 2황녀와 접촉한다로 기울었고, 그에 에릴다는 한숨을 푹푹 쉬며 중얼거렸다.
"하여튼 당신들 둘이 모이면 머리 안 아픈 날이 없어요. 알아?"
"도매금으로 엮지 마십쇼. 기분 나쁘니까."
"유렌…?"
"아무튼 허락으로 알겠습니다."
태자가 배신감이 깃든 눈빛을 보냈다.
무시하고 에릴다를 봤다.
불거진 눈에 살기가 돈다.
어쩔 수 없지.
"버거 만들어드립니까?"
"...!"
노려보는 눈빛에 기세가 더해진다.
하지만 무응답이 곧 긍정이다.
하여간 버거 한 번에 풀릴 거면서 앙탈은.
* * *
결국 치즈버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황족은 적법한 절차대로 마음을 풀어줬다.
그 와중에도 시끄럽게 잔소리를 해댔지만, 다 반박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개중 핵심만 고르자면 그랬다.
―그래서 어떻게 직인을 꺼내게 할 건데요? 걔가 그래도 직인이 자기 외척에 불리한 건 알거 아냐.
그에 나는 답했었다.
―진짜 그 정도 머리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
―국고 털어서 제비들 배 불리는 머리에서… 그런 발상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고?
―…에스트로 가주는 생각하겠죠.
―그러니까 가주 몰래 해야지요.
―몰래…?
물론 권력과 관련된 일인 만큼 가주도 생각이 있다면 직인은 안 주겠지.
하지만 그게 방법이 없다는 말과는 다르다.
'훔쳐서 찍게 만들면 되는 거잖아.'
필리아가 에스트로 가주의 집무실을 마음대로 드나드는 건 잘 알려진 내용이다.
그러니 필리아를 잘 구슬려서 몰래 가주의 직인을 찍게 만든다 해도, 그걸 나중에 알게 된 에스트로 가주는 무어라 말하지 못한다.
문제 삼는 순간 필리아를 엄벌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분노하며 필리아를 쳐내려고 해도 괜찮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직인을 얻은 후라면 거기서 얼마나 더 발악할 수 있겠나?
더불어 필리아가 내쳐지든 말든 그건 내 알 바가 아니기도 하니 실로 손해 볼 것은 전혀 없는 도전이 아닌가.
여하튼 그런 판단에 2황녀의 연화궁에 도착.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잘 훈련된 사용인들이 날 정원 쪽으로 안내했다.
희고 노란 꽃들이 만발해 있는 정원.
가을 계절에 이런 풍경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이 쓰였을까 하는 의문 사이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태사 어르신!"
왜인지 울컥하게 만드는 어르신이라는 호칭.
그걸 내뱉는 높은 톤의 목소리.
정원 한 가운데 티 테이블에서, 노란색 드레스를 입은 금발의 여자가 웃고 있었다.
"이렇게 뵙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아참, 제 소개부터 드려야죠! 저는 필리아 오르테어. 황실의 2황녀랍니다!"
"파로스의 '소'가주가 2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네, 어르신! 앉으실까요?"
꼬박꼬박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건가.
자리에 앉으니 필리아가 생글생글 웃었다.
처진 눈매에 오똑한 코, 보조개가 파일 정도로 웃는 게 잘 어울리는 여자.
그러니까, 예쁘긴 한데 생각이 없게 생겼다.
실제로 생각이 없는 편임을 떠올려보면 과연 생김새부터 솔직하다고 할 수 있겠다.
"차는 뭘로 하시겠어요? 홍차? 아니면… 아! 이번에 들여온...."
"전하, 일단 용건부터 들을 수 있겠습니까? 요청으로 온 것이라."
"응? 아아, 맞다…!"
집중력에 뭔가 문제가 있는 걸까.
생각하는 중 필리아가 말했다.
"흠, 흠! 그럼 편지를 보낸 목적부터 말씀드려야겠네요!"
나는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뭐가 됐든 이 여자의 호의를 사야 하는 만큼 개인적인 고민이라면 최대한 해결해줄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표정을 굳힌 필리아가 말했다.
"요즘, 계속 생각나는 사람이 있거든요…!"
"-"
"남자들은 뭘 좋아하는지 들어보고 싶은데, 주위에 이런 걸 물어볼 남자가 하나도 없어서요! 그러다가 딱 어르신이 생각난 거죠! 남자에다가 연륜도 있으니까!"
순간적으로 머리가 멍해졌다.
필리아가 내 손을 꼭 붙잡았다.
그러더니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혹시, 제 또래 남자들이 뭘 좋아하는 줄 아나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이 새끼야.
* * *
필리아 오르테어.
일단 일련의 대화 끝에 알아낸 사실.
'이거....'
직인 받기, 그 가능성이 보인다.
그런 확신을 가진 게, 일단 사리분별이 잘 안되는 꼬맹이다.
정치적인 역학이나 지금 제도의 흐름은 전혀 안중에 없다.
그저 사랑.
그것을 위해 정적인 파로스를 사적으로 이용하려 드는 점에서 특히 그랬다.
"도와주시면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뭐든 들어드릴게요! 그러니까…!"
마침 원하던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정말 일이 쉽게 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각서부터 받았다.
그러고 나니까 의욕이 조금 더 생겼다.
그런 이유로 이야기를 들었고, 그게 이 상황.
'흠.'
조금, 하고 싶은 말이 많아졌다.
"제가 그래도 경험이 있잖아요! 집도 줘보고 마차도 줘보고 가게도 줘봤는데 이렇게 막 퍼주는 게 좋진 않더라구요! 볼 장 다 보면 떠나는 거 있죠! 여자는 마음을 다 주면 안 되는 게 맞나봐요...."
그 이전에 퍼주는 게 아니라 살점을 떼어주고 계신 게 아니신지.
"그래서 생각했죠! 아, 적당히 주면서 저한테 뭔가 더 얻어낼 수 있다는 희망을 주게 해보자고!"
혹시 장래 희망이 호구신가?
"결론! 작지만 의미 있는 것부터 줘보자! 아, 의미란 건 적당히 가치 있으면서 실용적인 물건을 말하는 거예요!"
일단 물건을 준다는 발상에서 벗어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많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개중 내뱉을 수 있는 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여 그나마 할 수 있는 말을 골랐다.
마음 같아선 당장 때려치우고 싶지만, 일단 직인은 이 여자가 아니면 뚫을 방법이 없으니 어쩌겠나.
"그, 일단 물건으로 환심을 산다는 발상이 조금 이상한 것 같습니다."
뭘 줘야 사랑받는다는 인식은 떼어두고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게 먼저 아닌가.
이건 회귀 전후를 통틀어 40년 넘게 연애하지 않았던 나도 아는 사실이다.
'그래, 14살짜린데 모를 수도 있지.'
생각하는 순간, 필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죠? 돈 주는 사람이라고 하면 호감 생기잖아요."
"…어."
왜 반박을 못하겠지.
내 입술이 뻐끔거렸다.
* * *
어쩌면 저 여자는 진리를 깨우친 거 아닐까.
세상이 저 여자의 발상을 따라가지 못하는 게 아닐까.
짧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그건 그거고.
나는 고민에 진지하게 임한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필리아의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전에 좋아했던 가게 점원, 그 전에 좋아했던 비단 가게 아들, 그 전전에 좋아했던 용병의 얘기까지.
그 경험으로 비롯된 이번 성공을 위한 여러 플랜까지.
정리해서 당장 필리아가 원하는 건 (또) 좋아하게 된 남자의 취향 파악.
그렇다면 뭘 해야겠나.
일단 당사자를 봐야지.
"일단 그게 누군지부터 봅시다. 이름이 뭡니까."
"몰라요!"
"-"
"그래도 어딨는지는 알아요!"
""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의심까지 차오른 순간 필리아가 눈을 반짝였다.
"마침 잘 됐다! 오늘이 길에 나오는 날이거든요! 저랑 같이 훔쳐보… 아니, 스쳐 지나가러 갈래요?"
스쳐 지나가러 가는 건 뭔데.
…라는 의문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는 상상치도 못한 경험을 하게 됐다.
"오잉? 형님?"
"페토…?"
"핫?!"
로브를 둘러쓰고 나온 필리아가 날 안내한 곳은 제도의 시장, 철물점.
그곳에서 필리아가 가리킨 사람은, 다름 아닌 제도에 데려왔던 페토였다.
페토와 인사를 나누자 필리아가 구세주를 발견한 듯 날 올려다봤다.
나는 페토와 필리아를 번갈아 봤다.
충격은 둘째치자.
"...."
이거, 일이 좀 쉽게 풀릴지도.
068화. 환장의 2황녀 (2)
그 자리에서 많은 무언가를 할 수는 없었다.
당장 암행을 나온 필리아를 길거리에서 소개시킬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 필리아의 반응이 너무 격해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환궁, 필리아와 다시 대면했다.
일단 그것부터 물었다.
정말… 순수하게 궁금했다.
"쟤가 왜 좋습니까?"
"잘 생겼잖아요!"
"-"
"날카로운 눈매나… 각진 턱선이나…!"
""
나는 악마가 내 인지에 간섭한 것인지 잠시 고민해봤다.
페토의 얼굴이라, 두상은 하플링의 토기를 닮아 길쭉 뾰족하고 눈은 흰자위가 안 보일 정도로 쭉 째진 실눈이다.
입은 옹졸 맞게 작으며, 그나마 콧대가 사람같이 생기긴 했네.
종합적으로 누군가 쭉 잡아당긴 것처럼 찢어진 얼굴.
'그게 잘생겼다라....'
혹여 거짓말인가 싶어 반응을 다시 확인해봤다.
붉어진 얼굴, 꿈결에 빠져있는 듯 몽롱한 눈빛, 그리고 가쁜 숨.
취향은 다양하다는 걸 다시 깨닫게 되는 참이었다.
와중 필리아가 내게 말했다.
"아는 사이인가요?!"
"예, 뭐. 일단 부하입니다."
"소, 소개를…!"
내 손을 꼭 붙잡으며 간절하게 부탁해옴에 우선 께름칙함부터 느껴졌으나 그걸 제외하면 그랬다.
"음...."
못해 줄 건 없긴 하다.
도리어 그렇게 한다면 직인을 얻기가 더 쉬울지도.
* * *
현재 페토 녀석은 저택의 식객으로 두고 있다.
가만히 두면 쓸 데가 많으리란 생각이었고, 아직까지는 놈이 제도에 와서 한 일이래 봐야 철물점을 돌아다니며 도구를 구입한 게 끝.
필리아와 만남도 그런 과정에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듣게 됐다.
한 가지 더, 페토는 필리아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
"아아, 그 꼬마 아가씨. 제가 철물점에 의뢰한 물품이 있습죠. 제작 진척도를 확인하러 주기적으로 가는데, 갈 때마다 절 훔쳐보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눈을 피했다?"
"그, 그쵸. 제가 이래 봬도 범죄자 신분이었던지라… 헤헤...."
"원한 관계일까 걱정한 거군."
"예입...."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는다.
별걱정을 다 하는구나 싶다가도, '그게 걱정이면 착하게 살았어야지'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내뱉지 못한 건 나도 남 말할 처지가 아니라서.
여하튼, 달가운 우연이었다.
"너, 나랑 일 좀 하자."
"일 말입니까? 아, 드디어 임무를…!"
"어어, 진짜 중요한 임무야."
척!
페토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눈을 빛내며 내게 말했다.
"명 받겠습니다!"
"음."
나는 소파에 등을 묻으며 다리를 꼬았다.
그렇게 말했다.
"2황녀 꼬셔. 그리고 직인 하나만 좀 받아오자."
"넹?"
"못 들었어? 제비 짓 좀 하라고."
페토가 눈을 끔뻑였다.
그리고 하나, 둘, 셋.
"히, 히에에에엑!!! 싫습니다! 그거 황족 능멸이잖아요! 저 사형당한다고요!!!"
기겁하며 앉은 채로 뒷걸음질 쳤다.
눈을 부라리니 페토가 울먹거린다.
저렇게까지 반응할 일인가.
"왜, 잘하면 너도 황족 되는 건데."
"걔 열넷 아닙니까! 애를 데리고 뭘 어쩌라고...."
"네가 좋다잖아. 귀족 열넷이면 슬슬 약혼자 만들 나이야."
"그, 그러는 형님은...."
"아, 말하는 거 깜빡했는데 내 앞에서 결혼 얘기하지 마라. 누님 있을 땐 더더욱."
""
"일단 들어 봐."
살살 페토를 구슬려봤다.
결과야 뭐,
"진짜죠? 혹시 잘못되면 진짜 커버 쳐주는 겁니다…?"
"아암, 물론이지."
성공이었다.
* * *
"그래서 결국 페토가 2황녀한테 접근하게 만든 거구나?"
기르고어는 생긋 웃었다.
떠나기 전 인사차 들렀더니,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있었을 줄이야.
유렌은 그런 그에게 답했다.
"어, 그러다가 진짜 황족 될 수도 있는 거 아니냐니까 혹하던데. 대충 만나서 이야기 나누라고 해봤지. 일주일이면 슬슬 진전이 있을 때가 됐는데...."
"그 아이, 능력은 있어 보이는데 욕심이 많구나. 단명하겠어."
"눈치가 빨라서 도망은 갈 수 있을걸."
"그런가?"
킥킥 웃음소리를 흘렸다.
이건 또 무슨 재밌는 일인지.
생각하며 기르고어는 이아스에게 물었다.
"2황녀라… 이아스. 넌 아는 거 있어?"
"소문으로 들은 정도입니다. 에스트로 가주의 보물, 조금… 특이 취향."
"또?"
"황족 치곤 여러모로 모자람이 많은 사람이라고만 들었습니다. 다만...."
이아스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그에 기르고어는 물론이오, 유렌까지 흥미를 느꼈다.
"뭔데 그래?"
그러자 이아스가 여전한 떨떠름함을 품은 채로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영 미심쩍은 부분이 많습니다."
"미심쩍다?"
"예, 그저 멍청하다기엔 그렇지 않습니까. 물질적으로는 그렇게 퍼주면서 어떤 육체적인 추문도 돌지 않았습니다. 어린 나이이니 그게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정말 소문처럼 멍청한 여자라면, 또한 그 상대들이 어땠는지를 생각하면 이렇게까지 추문이 없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색다른 관점이었다.
정확히는 '이그로시아스러운' 관점이었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기르고어가 생각해도 그랬다.
"그러네. 용병이나 제비나… 상대가 어리다고 안 건드는 족속도 아닌데 묘할 정도로 그런 소문은 없구나. 녀석들이 황족이라고 조심한 건가? 뒤탈 안 생기게 하려고?"
"그 정도 생각 머리가 있다면 황녀에게 접근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꽤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황실에서 입을 막았다?
그런 거라면 당장 유렌도 그 사실을 알고 있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육체적인 추문이 없을 정황을 깔고 움직였다는 결론 밖에 나오지 않았다.
기르고어는 유렌을 살폈다.
그는 이아스의 말을 듣자 미간을 좁혔다.
"뭐 생각나는 거 있어?"
"아니, 그 여자가 똑똑하다는 게 상상이 안 돼서."
유렌이 턱을 쓸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생각이 깊어 보이는 태도였다.
"왜 그래?"
"…음, 아니."
유렌이 고개를 저었다.
"과한 생각이겠지. 아무튼 의견 고맙다. 참고해볼게."
에스트로의 직인이 필요해서 움직이는 것이라 했나.
태자의 일로 이렇게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면 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하여 기르고어는 말했다.
"뭣하면 그 직인 훔쳐줄까?"
"아서라, 에스트로 가주가 마음만 먹으면 제도 뒤집어지는 건 한순간이야. 범인이 전하로 밝혀지면 그건 더 큰 문제고."
"위조는?"
"그것도 안 돼. 파로스를 비롯한 모든 공신가의 직인은 아티팩트다. 섣불리 시도했다간 정치적으로 몰려. 그러니까 결국 2황녀가 답인 거지."
유렌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고. 안 되면 뭐… 다른 방법 찾아야지."
포기는 안 하는구나.
생각하면서도 기르고어는 납득했다.
'하긴, 3대 보검이면 뭐....'
비고의 성천검은 대륙 역사에서 검 자체가 전설로 기록된 셋뿐인 명검이다.
개중 하나는 유실되었고, 하나는 존재조차 불투명하니 태자가 노릴 수 있는 건 결국 성천검 하나.
굳이 보검이어야 하냐는 의문은 의미가 없었다.
검 자체의 힘이 전설로 기록된다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전략 병기로 작용한다는 뜻이기에.
적이 얼마나 준비되어 있을지를 모른다면 모든 전력을 다 끌어오는 게 맞지 않나.
기르고어는 말했다.
"뭣하면 나도 방법 찾아봐 줄게. 그게 안 되면 다른 보검이라도 수배해보지 뭐."
"그래, 고맙다. 슬슬 갈 시간이겠네. 움직여봐."
유렌이 손을 흔들었다.
기르고어는 그에 인사를 건네곤 돌아섰다.
그때였다.
"형니이이임!!!"
자신이 나온 방으로 페토가 헐레벌떡 들어갔다.
쾅!
문이 닫히고 안쪽에서 페토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못하겠어요! 이거 망한 것 같습니다!
―왜 우는 소리지? 죽고 싶냐?
―아니! 진짜 이상하다니까요?!
이아스가 속삭였다.
"조금 더 지켜보다 가시겠습니까?"
"아니, 그만 가자."
기르고어의 미소가 짙어졌다.
여하튼, 심심할 구석은 없는 동네였다.
* * *
페토는 사실 억울했다.
'그냥 대장간 갈걸....'
문득 후회가 차올랐다.
기왕 유렌의 휘하로 여기까지 온 거, 잘하면 기사작위도 얻을 거란 생각에 그에 어울리는 비수를 만들고 싶어서 철물점을 갔다.
대장간이 아니었던 이유는 돈이 아까워서.
그게 실책이었다.
대장간을 갔다면 그 여자를 마주할 일도 없지 않던가.
후회는 되었지만 어떻게든 마음을 잡았다.
차오르는 건 열의였다.
솔직히 황족이고 나발이고 크게 관심은 없는 데다가 상대가 열네 살 꼬맹이니 더욱 이성적인 일로 다가오진 않았지만, 잘하면 유렌의 인정을 받을 수 있으리란 생각에 열심히 했다.
그리하였으나,
"…진짜, 진짜 이상합니다."
그럴수록 찜찜함이 있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본능이 이르는 찜찜함이었다.
페토는 찬물을 꼴깍꼴깍 마신 후 숨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뭔가 이상합니다. 분명 행동만 보면 저 좋아라 하는 건 맞는 것 같단 말입죠! 근데 꼭 눈이 마주칠 때면 소름이 끼치는 게...."
"어떻길래?"
"그, 뭐라고 해야 하지…?"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페토는 스스로가 답답했다.
하여 횡설수설 말했다.
"선물 같은 걸 주면요! 꼭 그 반응을 훑어봅니다. 어디 빨리 좋아해 보라는 듯이!"
"…또?"
"감사하다고 하면 또 갖고 싶은 게 있냐고 물어봅니다! 근데 그때 딱! 눈이 안 웃습니다! 눈동자가 반짝거리고 얼굴도 붉고 입도 호선인데 눈매만 딱 무표정이에요!"
"...?"
"그게 일주일 내내 있었다니까요?"
페토는 덜덜 떨며 허리춤의 비수를 매만졌다.
필리아가 사준… 제도에서 이름난 대장장이의 비수였다.
"이걸 줬을 때가 진짜였죠. 그걸로 누굴 죽일 건가요? 라고 물어보는데 소름이 쫙 끼쳐서…!"
페토는 몸이 덜덜 떨렸다.
물론 선물을 받는 건 기쁘고 누가 자길 좋아해 준다는 게, 그게 제국의 황녀라는 게 으쓱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저 마주하는 것일 뿐인데 전신의 기가 빨리는 기분이었다.
"기운 빨려서 안 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형님…!"
페토의 눈이 질끈 감겼다.
안 그래도 성격이 더러운 유렌이다.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아니, 됐다."
"…예?"
페토는 슬그머니 눈을 떠 유렌을 살폈다.
그 눈에 유렌은,
"형님…?"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져있었다.
* * *
기르고어가 떠나는 날 이아스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다음으로는 페토가 울먹이며 한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지난 며칠간 계속 그러했고, 그와 이어지는 것은 '내가 알던 어떤 사실'에 내막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
그러니까, 회귀 전의 일은 문득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부딪힐까, 그도 아니라면 모른 척할까.
지난 시간은 그에 관한 고민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결정을 내렸다.
'먼저 다가온 건 저쪽이지.'
그렇다면 구태여 도망갈 필요가 있을까.
하여 황성으로 들어섰다.
하나 2황녀는 없었다.
다만 전언을 남겼다.
"찾아오시면 이쪽으로 와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뭔 뺑뺑이를 시키나.
한숨을 쉬며 또 걸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제도 성 밖의 어느 언덕.
그곳엔 기사들 사이에서 돗자리를 깔고 앉아 있는 필리아가 있었다.
"오셨나요."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시선은 저 언덕 너머, 제도를 향해 있었다.
숨은 절경이란 걸까.
높은 성벽이 석양을 집어삼키는 듯한 그림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 곁으로 갔다.
그러자 필리아가 말했다.
"죄송해요. 어르신. 도와주셨는데 잘 안됐어요."
씁쓸한 미소였다.
"페토님은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 봐요. 분명 다음 식사 약속을 잡았는데… 나타나지 않으셨어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럴 수밖에.
내가 그만해도 된다고 했으니 도망을 갔겠지.
"부하가 실례를 드린 듯해 죄송합니다."
"아니요. 제가 모자란걸요."
풀 죽은 기색.
나는 잠시 그를 지켜보다, 기사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좀 떨어져 있어 주지. 독대를 청하고 싶은데."
"하나 성밖이라 언제 어디서 위험이 올지...."
"너희들이 나보다 전하를 잘 지킬 것 같진 않아. 의심되면 한 번 싸워보고."
"…실례했습니다."
기사들이 멀어졌다.
나는 그녀의 곁에 앉았다.
잠시 정적.
그 끝에 물었다.
"그래서 말입니다."
"네?"
"저한텐 왜 접근하신 겁니까."
우뚝―
필리아의 몸이 멎었다.
이윽고 필리아의 고개가 들렸다.
그제서야 나는 페토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슨 말씀인가요?"
젖은 목소리, 촉촉한 속눈썹, 붉은 얼굴, 애절하게 올라가는 입꼬리.
그런 것들이 슬픔을 말하고 있음에도, 눈만큼은 웃지 않았다.
그러니까,
"표정 연기는 그만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필리아는 연기를 하고 있었다.
날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아니, 어쩌면 사람들이 그녀를 지켜보는 모든 순간을.
"...."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나는 그 눈을 바로 보며 되물었다.
"저한텐 왜 접근하신 겁니까."
굳이 페토였다.
그리고 그 상담역이 나였다.
필리아는 바보가 아니다.
세 가지를 조합하면 너무 명백하게, 이 모든 인과가 무엇을 겨냥한 건지 보이지 않던가.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었다.
그제야 필리아가 제대로 답했다.
"…어르신은 역시, 통찰력이 좋으시네요."
졌다는 듯이 웃으며 말이다.
069화. 환장의 2황녀 (3)
필리아의 인정에 새삼 정답을 맞췄다는 희열은 없었다.
도리어 나는 나를 책망했다.
그래야 할 정도로, 내 선입견만 없었다면 이 여자는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운 상대였다.
'도망자.'
회귀 전의 필리아는 국외로 도망갔었다.
전쟁이 막 터진 시기.
그러니까, 아직 누구도 제국의 패배를 의심하지 않았던 그런 시기.
2황자가 갓 황제가 된 그 시기에 말이다.
―2황녀 전하께서 황족의 신분을 반납하고 떠나셨습니다. 사이에 여러 잡음이 있었긴 하나, 과정 자체는 신기할 정도로 깔끔하게 처리되었더군요. 혹자는 말합니다. 아무래도 2황녀 전하의 품행이 현 황제 폐하의 치부가 될 수도 있기에 에스트로 가에서 추방한 것이 아니냐고....
누님조차 그 내막에 관해선 그런 추론밖에 하지 못했다.
하여 나는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하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해보자.
필리아는 왜 2황자가 황제가 되자마자 떠났는가.
누구도 과정의 깔끔함 탓에 그것까지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정말 바보라면 구태여 그 시점에 제국을 떠났겠나?
아니, 도리어 끝까지 남아있으려 했겠지.
왜 아니겠나.
외가인 에스트로 가가 실세가 되었는데, 자신을 그리 예뻐하던 가주가 제국의 주인이나 다름없어졌는데 왜 도망가겠느냔 말이다.
그런 근거에 이아스의 말과 페토의 말을 덧대보았다.
그러니 결론이 나왔다.
이 여자는 사실 바보인 척 모두를 기만하고 있다.
그렇게 스스로를 지키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아마도 2황자.'
능구렁이에다 간사하게 굴 줄 안다.
그것은 주변을 살필 줄 아는 이들이나 보일 기예다.
2황녀 만큼은 2황자를 정확히 꿰뚫어 보신을 위해 떠났다는 것이겠지.
내가 왜 제국을 지키지 않았냐 원망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다.
만약 내 가정이 사실이라면, 필리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이 분명하니.
다만 이 일은 그것과 별개였다.
그렇게 똑똑하게 구는 여자가 내게 접근한 이유.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것 하나였고, 필리아는 그렇게 답했다.
"저랑 비슷한 사람인 줄 알았어요."
"제가, 전하와 말입니까."
"네, 어르신께선 스스로를 숨길 줄 아는 분이시니까요."
그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오해가 있었다.
한 번도 숨겨본 적 없고 그럴 이유도 못 느끼는 게 나란 사람이다.
하지만 그래,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한다면 망나니가 갑자기 조용해지곤 태사 자리까지 차지해버렸으니 그리 보일 만도 하다.
구태여 그에 관한 해명을 하진 않았다.
그러자 필리아가 무릎 사이에 머리를 묻으며 말했다.
"그래서, 궁금했어요"
"그렇습니까."
"비슷한 사람이라면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음, 저랑은 다르시네요."
슬쩍 날 바라본다.
머리칼 사이로 얼굴이 보였다.
무표정에 가까우나, 어딘가 쓸쓸함이 감돌고 있었다.
전과는 다르게 말이다.
"어르신은 당당하세요. 스스로 뭘 원하는지 아는 사람 같아요. 그게, 부러워요."
"...."
"저는 모르겠거든요. 제가 원하는 게 뭔지."
필리아의 시선은 다시금 먼 곳을 향했다.
제도를 감싸는 노을빛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형상은… 멍하게도 보이고 공허하게도 보였다.
열넷이다.
그런 주제에 말하는 게 꽤 조숙하다.
3황자나 2황녀나, 거기에 저 나이에 황제가 될 아리아까지 생각하면 황족이란 것들은 모두 빨리 조숙해지는 법인 걸까.
필리아는 더 무어라 말할 의지가 없다는 듯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나는 고민했다.
'어쩔까....'
결과적으로 이 모든 일은 대단한 무언가라기보단 사춘기 꼬맹이의 개인적인 호기심.
그렇게 결론지을 만하고, 실제로 이 만남이 훗날의 일에 영향을 줄 것 같지도 않았다.
무시해도 된다.
한데 괜히 마음이 쓰였다.
불쌍한 모습을 보여줘서 그런 걸 수도 있겠다.
결정은 그런 시점에 내렸다.
"전하."
"네."
"밥은 드셨습니까?"
필리아가 날 봤다.
나는 챙겨온 배낭에서 포장한 치즈버거를 꺼냈다.
"안 먹었으면 하나 드십쇼. 저녁 시간이잖습니까."
영맥도 식후경이다.
궁상도 배부르게 떨어야 덜 처량하다.
* * *
필리아는 멀뚱멀뚱 유렌이 건넨 치즈버거를 노려봤다.
무엇인지는 알았다.
가끔씩 대화를 나누는 아리아가 그렇게나 극찬하던 음식이고, 칼리오스가 주방장에게 하루가 멀게 주문하는 음식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먹어본 적이 없는 이유?
그저 직접 먹어볼 정도로 호기심이 깊진 않은 게 끝이었다.
한데 그런 음식이 손에 들리게 됐다.
하여 신기한 마음에 가만 보고만 있자, 그런 말이 들려왔다.
"안 먹을 거면 저 주십시오."
"음, 먹어볼게요."
필리아는 유렌을 따라 조심스레 포장을 벗겼다.
그러자 치즈향과 고기향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따뜻한 김까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걸까, 잠시 의문을 품다가 이내 필리아는 버거를 앙 물었다.
그 순간이었다.
"…아."
나지막이 탄성이 흘러나왔다.
평생 먹어본 것 중 가장 자극적인 맛에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모든 건 스스로 의도하지 않은 반응이었다.
필리아는 유렌을 봤다.
그는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입을 우물대고 있었다.
"씁… 양념이 좀 진한데."
필리아는 눈을 끔뻑였다.
그러다가 멍하니 손에 든 치즈버거를 봤다.
그렇게 침묵.
꽤 묘한 분위기였다.
주변엔 유렌과 자신밖에 없었고, 바람은 선선하다.
노을에 안기는 제도의 광경은 언제나처럼 따스했고, 버거도 따스했다.
이질감과 익숙함이 맞물리며 이는 감상은 왜인지 특별함으로도 느껴졌다.
필리아는 이런 순간을 형용할 말을 몰랐다.
그래서 시선을 제도 쪽으로 던졌다.
유렌을 더 보기는 뭔가 멋쩍은 까닭이었다.
그런 중 차오르는 게 있었다.
속이 너무 간질거렸다.
또한 평온했다.
이중적인 감정에 기분이 평소랑은 달라졌다.
그래서였을까.
"…있잖아요."
"예."
"남들처럼 할 수가 없었어요. 어릴 적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필리아는 살아생전 한 번도 남에게 한 적 없던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달랐어요. 남들보다 잘 봤고, 그래서 조심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필리아는 문득 살아온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것은 필리아에게 아주 쉬운 일이었다.
이걸 영민함이라 부름을 스스로도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독이 됨을 모르지 않았다.
"저는 2황녀잖아요. 그것도 칼리오스 오라버니랑 어머니가 다른 2황녀."
"그렇지요."
"그래서 눈에 띄면 안 돼요. 제가 대단하면 저희 오라버니한테 힘이 실리니까요. 아, 오라버니는 2황자 전하 말하는 거예요."
"호오."
"아무튼 저희 오라버니는 무능하잖아요? 아, 이건 비밀."
"비밀이라기엔 너무 많은 사람이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게 말이에요. 뭐가 됐든 저는 오라버니가 황제가 되면 모든 게 망가질 걸 알거든요."
피식, 유렌이 웃었다.
필리아는 구태여 그 의도를 파헤치려 들지 않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남에게 전하는 일은 처음이었기에.
이 일이 너무나도 생경하고 따스해서, 조금 더 이어가고 싶었기에.
"그래서 숨겼어요. 그렇게 숨기고 사는데, 문득 궁금해지더라구요. 다들 이런 건지. 저만 숨기고 사는 건지."
"답은 무엇이었습니까?"
"제가 유별나요. 하지만 바꾸고 싶진 않아요. 이게 옳으니까."
"뭐, 틀리진 않았습니다. 2황자 전하는 무능을 넘은 악능이니."
"…그러고 나니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무엇을 말입니까?"
"평생 숨겨야만 하는 삶이라면 제 행복은 어디에 있는 건지."
필리아는 쓰게 웃었다.
그녀는 그런 표정을 처음 지어봤다.
"그래서 사랑을 해보고 싶었어요. 다들 그게 행복이라고 하니까, 제가 진짜 원하는 건 그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뜨겁고 위험한 걸로 해보고 싶었어요."
"상대 역할은 그래서 그 모양이었습니까?"
"그 모양이라뇨. 나름 고른 인선인 걸요."
"자기 파괴적 취향은 좋지 못합니다."
"계속 그럴 거예요?"
"…말씀하십쇼."
유렌을 샐쭉하게 노려봤다.
그리 남을 흘기는 것 또한, 필리아의 인생엔 처음이었다.
꽤 즐거웠다.
"…아무튼요. 그래서 해봤는데 매번 안 되더라구요."
"상대가 쫄아서 도망갑니까?"
"그보단 제 마음이 안 움직여요."
부끄러운 일이었다.
다리를 놓아달라고 말한 상대에게, 사실 그런 사람에게 관심은 없었다고 말하는 일은.
하지만 솔직하고 싶었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말이다.
"누굴 만나도 보였어요. 이 사람은 뭘 원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대단하시군요."
"그렇게 밑바닥을 보면 꺼려져요. 그 사람들의 행복은… 제가 보기엔 행복으로 느껴지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더 알 수 없게 됐다.
하지만 뒤늦게 멈추기엔, 갈수록 스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져 답답함이 커졌다.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것처럼, 그리 답 없는 행동을 이어가는 것이다.
"뭘까요. 제가 원한 건… 행복이란 건."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필리아는 실망하지 않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말해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드디어 그게 끝난 것뿐이었다.
하여 필리아는 그저 치즈버거를 베어 물었다.
버거는 아직 따뜻했다.
"…맛있네요."
"그렇습니까."
"네, 정말로."
살포시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런 때였다.
유렌이 답을 준 것은.
"그거면 된 거 아닙니까. 오늘도 맛있는 걸 먹었고, 풍경은 꽤 예뻤고, 돌아가서 푹 잘 수 있을 것 같고."
"…네?"
"뭘 원하는지 모르면 뭐 어떱니까. 오늘도 무사히 잘 지냈는데."
대충 지어낸 답.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랬다.
"어...."
저 말이 속 어딘가를 긁었다.
오늘도 잘, 무사히.
유렌의 단어에는 왜인지 모를 각별함이 깃들어 있었다.
필리아의 시선이 심드렁한 표정의 그를 향했다.
"다들 그렇게 살덥니다. 세상 사람 대부분은 오늘도 잘 지내는 게 행복이라 합니다. 전하께서 만난 페토도 그랬지요. 무사히 내일 아침 해를 봤으면 좋겠다고."
"...."
"행복은 대체로 발밑에 있는 법이니, 높은 곳을 보면 보이지 않을 법도 합니다."
필리아는 물끄럼 자신의 발끝을 봤다.
그러자 유렌이 말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살아도 됩니다. 그러다 한 번 생각날 때 뒤를 돌아보십쇼."
필리아의 눈이 슬쩍 커졌다.
"그때는 한 번씩 보입니다. 지났던 행복들이."
말을 내뱉는 유렌이 작게 웃고 있었으므로.
"어르신 충고입니다. 잘 새겨들으십시오."
"어르신…?"
"예, 어르신. 그리 부르셨잖습니까."
그의 시선은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 기억 속 어느 시간을 유영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이 필리아의 속에 호기심을 자아냈다.
그때였다.
"이 정도면 됐습니까?"
"뭐, 뭐가요?"
"가르침. 그거 달라고 저 부른 거 아니었습니까. 편지에도 그리 쓰시더니 까먹으셨나."
필리아는 눈을 끔뻑였다.
그러다가,
"푸핫…!"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필리아는 이해했다.
'아, 그거구나.'
이 불량해 보이는 사람은 가르침을 달라는 편지의 말 한마디에 여기까지 해주었다는 것을.
한데 그 호의가, 어울리지 않는 선의가 왜 이렇게나 어울리지 않는지.
저 태도 속에 깃든 따스함은 왜 이렇게나 서툴게만 보이는지.
그런 이유로 살아생전 해본 것 중 가장 시원스럽게 웃어버렸다.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속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하하핫…!"
유렌이 심술 맞게 노려봤다.
그것마저 필리아에겐 웃긴 일이었다.
"죄송… 죄송…!"
"죄송하면 그만 좀 합시다."
"푸흡…!"
필리아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렇게 몇 차례나 숨을 가다듬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어느덧 노을이 가장 붉어지는 시간이 됐다.
아닌 걸 알면서도, 노을을 머금은 유렌의 피부색이 꼭 부끄러움에 달아오른 것처럼 보여 기분이 이상했다.
하여 필리아는 중얼거렸다.
"아아, 재밌다."
필리아가 눈꼬리의 눈물을 쓸었다.
살면서 가장 속이 시원했던 순간, 그런 감상이나 느낄 때였다.
유렌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갑시다. 저는 할 말 다했습니다."
"네, 그러죠."
따라 일어나며 필리아는 생각했다.
어떡할까.
이 서툴고 재밌는 사람에게, 이런 우스운 즐거움을 준 상대에게 어찌 보답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필리아는 이내 적당한 것을 생각해냈다.
하여 품에서 양피지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유렌이 양피지를 물끄럼 바라봄에 필리아는 말했다.
"고마워요. 이건 사례."
"뭡니까?"
"에스트로 가의 직인이 찍힌 양피지요."
멈칫, 유렌의 몸이 멎었다.
찢어질 듯 크게 뜨인 눈, 그 놀란 기색이 사뭇 유쾌했다.
뻐끔거리는 입술이 말하는 듯했다.
어떻게 안 것이냐고.
그에 필리아는 양피지를 그의 손에 쥐여주며 속삭였다.
"말했잖아요."
유렌과 눈이 마주쳤다.
필리아는 눈웃음을 지었다.
"누굴 만나도 보였다고. 이 사람은 뭘 원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찌 본인만 다를 거라 생각한 걸까.
…아니, 확실히 예상 못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그것만큼은 인정.
"조심히 들어가요. 저는 기사들과 갈게요."
필리아는 사뿐사뿐 걸어 돌아갔다.
유렌은 그 후로도 꽤 오래, 오도카니 그 언덕 위에 서 있었다.
* * *
필리아의 걸음은 아주 가벼웠다.
그녀는 콧노래를 흘리며 에스트로 가의 저택, 가주 집무실로 들어왔다.
그곳에는 자신을 너무나도 아끼는 외조부가 평소보다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아가."
"네."
"직인을 넘겼느냐."
"그런데요?"
필리아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에스트로의 가주는 전전긍긍하는 태도였다.
그것이 두 사람의 우열을 극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이제는 유이하게 필리아의 진짜 얼굴을 아는 노인.
비르고 에스트로는 물었다.
"어째서...."
그에, 필리아는 답했다.
유렌에겐 보여주지 않은 서늘한 미소를 한 채로 말이다.
"이 정도도 못해요? 할아버님한테 안겨드린 재물이 얼만데."
비르고 에스트로는 그 말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말대로 현 에스트로 가가 3대 귀족가의 수위에 오른 건, 고작 일곱 살이던 필리아의 조언을 그가 성실히 따랐기 때문이었으므로.
에스트로 가의 모든 비밀은, 그리고 모든 권력은 결국 그녀를 통하게 되어 있으므로.
허수아비 가주는 차마 그녀에게 다른 반박을 하지 못했다.
다만 후회하길, 이 구도까지가 필리아의 계획임을 왜 그때는 몰랐을까.
와중 필리아가 말했다.
"어차피 그게 아니더라도 오라버니는 황제 못 돼요. 제가 누누이 말했을 텐데 왜 그러실까."
필리아가 집무실의 상석에 앉았다.
그리곤 소녀처럼 웃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안 도와줄 거예요. 어차피 되지도 않겠지만, 만약 오라버니가 황제가 된다면 전 이 나라 뜰 거구요."
"...."
"그러니까, 괜한 미련은 버려주세요. 대신 좋은 정보 하나 드릴게요."
비르고 에스트로는 고개를 숙였다.
필리아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읊조렸다.
"군비를 확충하세요."
"…!"
"황실이 국고를 닫았어요. 꼭 겨울잠 자는 동물처럼. 저는요. 이게 좀 그렇더라구요."
톡, 톡.
필리아가 턱을 괸 채 집무실 책상을 두드렸다.
"쇠냄새랑 피냄새가 나요. 태자 전하께선 전쟁이 하고 싶으신가 봐요."
에스트로 가주는 그 순간 이걸 빌미로 칼리오스를 끌어내릴 다른 궁리를 했다.
하나, 그 또한 필리아의 손바닥 안에 있을 뿐이었다.
필리아는 생각했다.
칼리오스는 이미 질릴 정도로 안다.
그가 이 시기에 미리 전쟁을 준비한다면 그것은 분명 외부 요인에 의한 것.
그리고, 그 요인은 거의 10할의 확률로 유렌.
그는 서투를지언정 허투르지 않다.
흥미가 돋을 수밖에.
'무슨 전쟁일까.'
소녀는 알고 싶었다.
평온과 무사함을 사랑하는 남자가 왜 전쟁을 예비하려 드는지.
그 결과가 어떻게 빚어질지.
필리아 오르테어.
다만 칼리오스와 같은 시기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어둠 속에 숨어야만 했던 천재는, 살아생전 가장 흥미로운 일을 맞닥뜨려 기껍게 웃었다.
070화. 생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