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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유쾌하게 한담할 수가 없다



7화 유쾌하게 한담할 수가 없다

왕승은도 역한 성정만큼이나 비상한 머리를 가진 인물이라, 이러한 악행은 외지로 나와서만 행하고 있었다. 절대로 자신의 지역에서 더러운 진짜의 모습을 꺼내는 일은 없었다. 그 때문에 그가 외지로 돌면서 무고한 여인들이 그에게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는 실로 다 셀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왕승은은 태자 측비의 친동생이라, 악독한 야망을 품은 한심한 자들이 앞다투어 그의 악행을 돕기도 했다.

“그럼 더는 대인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단양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왕승은이 소름 끼치는 웃음을 지었다.

“좋다. 내가 태자 전하께 너희들의 얘기를 잘해 주마.”

“감사드립니다, 대인.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곧 어린 소녀와 단둘만 남게 된 왕승은이 몹시도 흉측한 눈빛을 번쩍였다.

“나를 잘 모시면 네가 평생 가지지 못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소녀는 공포에 떨면서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만일 여기서 왕승은의 심기를 거스르기라도 한다면, 부모와 남동생의 목숨은 결코 보장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처지도 끔찍했고, 눈앞의 사람도 너무나 끔찍해서 소녀는 점점 더 형용할 수 없는 공포에 젖어들고 있었다.

‘누가 좀 구해주세요……. 제발 절 좀 구해 주세요. 흑흑…….’

“흑……. 어머니, 아버지…… 살려주세요…….”

결국 소녀의 공포는 눈물이 되어 터져 나왔다.

“겁먹지 말거라, 내 너를 아껴줄 터이니…….”

왕승은은 계속 소녀를 향해 다가가며, 낄낄거리는 역겨운 웃음을 연신 흘리다가 돌연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대로 멈춰버렸다. 눈도 채 깜빡이지 못하고, 부릅뜬 눈으로 소녀를 응시하던 왕승은은 쿵 소리와 함께 소녀의 위로 쓰러졌다. 곧 너무도 놀라 넋이 나가버린 소녀의 손에 축축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이내 소녀가 파르르 떨리는 손을 든 순간, 온통 시뻘건 피에 젖은 자신의 손이 보였다.

아……. 소녀가 채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남궁묵의 검은 인영이 소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소녀는 그대로 소리도 없이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이내 남궁묵이 소녀의 몸 위로 쓰러진 왕승은을 거침없이 옆으로 끌어 내렸다. 이미 그는 숨통이 끊어진 상태였다. 남궁묵이 이제껏 참았던 혐오감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마음 같아선 당장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쓰레기도 꼴에 목숨이라고 3천 냥이라는 아주 같잖은 값어치가 매겨져 있었다.

그리 많은 죄를 저지르고도 아무렇지 않게 단양에 놀러올 수 있다니, 그 뻔뻔한 태도를 보니, 여태 그의 세상이 얼마나 쉬웠는지를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단양에 계엄령까지 내려졌음에도 무사하리라 생각했던 안일함에 정말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등잔 밑은 어둡고, 삶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는 게 부지기수였다.

이윽고 남궁묵이 혼절한 소녀를 잠시 가엽게 바라보다,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홀로 남을 소녀가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기를 조용히 바랄 뿐이었다.

* * *

잠시 후, 누각에서 보자기로 얼굴을 가린 인영 하나가 튀어나와 재빠르게 정자로 사라졌다. 그러나 인영은 잠시 멈칫한 기색을 보였다. 코를 찌르는 것 같은 피비린내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직감이 들었던 까닭이었다.

곧 방안에 길쭉한 검은 인영이 들어와 왕승은의 시신 앞에 멈춰 섰다. 약하게 밝혀진 등불에 인영의 신비로운 눈동자가 비쳤다. 매혹적인 눈동자, 뒤이어 나타난 검은 인영은 바로 위군맥이었다.

‘한발 늦었군. 왕승은을 죽이고 싶어 하는 자가 단양 안에 또 있었단 말인가?’

혐오스럽다는 눈으로 잠시 왕승은을 내려다보던 위군맥은 방을 한 번 둘러보다가, 눈에 띄지 않는 구석 창호지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위군맥은 자줏빛 눈동자를 움직이며 찬찬히 조금 전 상황을 그려냈다. 왕승은은 암살을 당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자신의 일을 도와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솜씨가 깔끔한 것을 보니, 분명 일류 살수임이 틀림없는 듯했다.

이내 위군맥은 재빨리 소녀에게 다가가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하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소녀를 안아들고 누각을 벗어났다. 위군맥이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누각에 거센 불길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서둘러 안에 있을 왕승은을 구하려 했지만, 너무도 거대한 불길에 감히 나서지도 못하고 그대로 꼼짝없이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누각의 주인은 망연자실하다 못해 격노하기 시작했다.

‘겨우 태자 전하께 아첨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태자 전하께서 총애하시는 측비마마의 남동생이 내 누각에서 죽다니…….’

* * *

위군맥이 쓰러진 소녀를 안고 눈에 띄지 않는 별관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곧바로 한 사내가 다가왔다. 조금 전 위군맥과 함께 있던 바로 그 사내였다.

“군맥, 어찌 됐나? 혹, 실패했나?”

위군맥은 곧 의자 위에 소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두곤, 얼굴에 쓴 복면을 끌어 내렸다. 변함없이 조각처럼 아름다운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윽고 위군맥이 옥처럼 고운 눈동자로 싸늘히 사내를 바라보자, 사내가 급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질문을 잘못했군. 그래, 청행(*清行: 순결한 품행. 위군맥의 자(字)) 공자께서 실패할 리가 없지.”

“왕승은은 죽었네. 그러나 내가 죽인 것은 아니야.”

이어진 위군맥의 말에, 사내가 깜짝 놀라 성큼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응? 자네가 아니라고? 이 단양 안에 그를 죽이려 하는 사람이 또 있었단 말인가? 하긴 왕승은이 원한을 사고 다닌 이가 어디 한둘인가.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더 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웃음을 짓는 사내를 보고, 위군맥이 천천히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저주(*滁州: 지명) 근처에 실력이 대단한 살수가 있는가?”

그러자 사내도 위군맥을 따라 앉아선, 손에 들린 쥘부채(=접선(摺扇), 접었다 폈다 하는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실력 있는 살수? 단양은 용흥(*龍興: 용이 구름을 얻어 하늘로 올라간다는 뜻으로, 왕업이 흥함을 이르는 말)의 땅이니, 다른 곳이면 몰라도 이곳엔 없을 거라네. 그렇다고 내가 주의하지 못했다고 하지는 말게나. 우리도 2년 동안 몇 차례나 일을 빼앗겼으니까. 그래도 빼앗긴 일은 3개뿐이라 나도 별로 신경 쓰지는 않았네.”

사내는 시종일관 무표정하게 자신을 응시하는 위군맥을 향해 대충 웃어 보였다. 솔직히 천하제일 살수 조직의 우두머리로서 이런 자잘한 일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거기다 살수 조직이 세상에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니 어쩌다 한 번 일을 빼앗기는 경우도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 그때, 위군맥이 나직하게 이야기했다.

“왕승은을 죽인 자는 실력이 보통이 아니네. 이 아이가 그 자리에 있던 유일한 사람인데, 아마 아무도 보지 못했을 거야.”

마침내 사내의 얼굴에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 말은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고 왕승은을 죽였다는 것인가?”

위군맥이 고개를 끄덕이곤 사내에게 어떤 물건을 건넸다. 이윽고 사내의 손바닥 위에 얇은 자수용 바늘 하나가 덩그러니 놓였다. 아주 지극히 평범한 바늘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이 조그만 자수바늘 하나로 그리 먼 거리를 두고 사람을 죽였다니 말이야. 군맥, 자네는 할 수 있나?”

위군맥의 자줏빛 눈동자가 심오하게 출렁거렸다.

“아무도 할 수 없지. 만일 그런 능력이 있다면 꽃잎을 날려 나뭇잎을 따다가 사람을 해치는 경지에 이르렀을 것이네. 그런 사람이 있다 한들 어찌 왕승은을 죽이러 왔겠는가? 이 세상에 손꼽히는 명수가 이 한밤중에 왕승은같이 보잘것없는 것을 암살하러 직접 나타나겠는가?”

깊은 생각에 잠긴 위군맥을 보던 사내가 금세 시시덕거리며 이야기했다.

“보아하니 자네도 그 살수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같으니 잘되었어. 나도 누가 감히 이 인장풍(蔺長風)의 장사를 빼앗아 가려 하는 것인지 알고 싶네.”

스스로 밝힌 사내의 이름은 인장풍이었다. 곧 인장풍에게 차가운 답이 이어졌다.

“조심하게. 자네는 그자의 상대가 안 되니까.”

위군맥은 함께 보낸 시간만큼 자신의 벗, 인장풍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다. 벗의 능력을 폄하하는 건 아니었으나, 언뜻 보아도 그 의문의 살수는 천하에 감히 상대할 자가 없을 것이 빤했다. 지능과 실력, 그 어느 면을 보아도 결코 세상에 적수가 없는 느낌이었다.

곧 인장풍이 한껏 인상을 구긴 채 크게 외쳤다.

“군맥, 본 공자를 너무 무시하는군!”

“자네, 나를 한 대 칠 수는 있는가?”

이어진 위군맥의 차가운 답에, 인장풍은 곧바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위군맥을 결코 이길 수 없음을 잘 알기에 아무런 할 말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다 잠시 후, 인장풍이 다시 화제를 돌려 이야기했다.

“그러고 보니 그자가 우리를 도와준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잠시 망설이던 위군맥이 말했다.

“신세를 갚았네.”

그러자 인장풍이 금세 호기심을 보였다.

“어떻게 신세를 갚았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내가 사건 현장을 불태워 버렸어.”

날씨를 이야기하듯 평온한 대답에, 인장풍이 극도로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 모든 단양 사람들이 왕승은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거야?”

인장풍은 이런 식으로 신세를 갚는 것에 그 이름 모를 살수도 동의를 한 것인지, 몹시 의문이 들었다. 다시 위군맥이 잠깐의 침묵 뒤에 입술을 뗐다.

“아니, 단양 내 절반 정도의 사람들은 알았겠지.”

그리고 위군맥은 자수바늘을 만지작거리며 깊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인장풍은 심각하게 변해가는 위군맥의 얼굴을 바라보다, 약간 비아냥거리듯 이야기했다.

“동전 하나만 있으면 길거리에서 아무나 일고여덟 개 정도의 침을 살 수 있다네. 자네는 그걸 사용한 사람이 지금 여인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어찌 되었든 간에 이런 무기는 사내가 쓸 만한 것이 못되네.”

위군맥의 담담한 답이 너무도 일리가 있어, 또다시 인장풍의 말문이 막혀버렸다.

* * *

한편, 암살 임무를 성공적으로 이행한 남궁묵은 성내의 오래된 저택에 앉아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대청의 한가운데엔 새롭게 놓인 위패 3개가 보였고, 그녀의 맞은편엔 한 왜소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노인은 격해진 감정을 겨우 가라앉히고 천천히 남궁묵을 바라보았다. 남궁묵은 아직 검은 옷과 복면을 벗지 않은 상태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가씨께서 늙은이를 대신해 피맺힌 원수를 갚아주신 것에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이 늙은이의 절을 받아주십시오.”

노인은 절절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보자기를 한쪽에 던지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으려 했다. 그러자 남궁묵이 서둘러 일어나 그를 부축해 주었다.

“돈을 받고 대신해 쓰레기를 치운 것뿐입니다.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아닙니다. 이 늙은이가 아가씨께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여기, 3천 냥을 준비해 왔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1년 전, 노인의 귀중한 여식은 그 흉적 같은 왕승은에게 끌려간 뒤 자진(自盡)을 했다. 그래서 그의 아들이 정의를 구현해 달라며 관아에 청을 하러 갔지만 맞아 죽어서 돌아왔다. 연속해 자식을 앞세운 노인의 부인은 그 길로 침상에 몸져누웠다가 보름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노인에게 남은 건 이제 조금의 밑천뿐이라,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마땅한 곳을 찾기가 힘들었다. 살수를 찾고 싶어도 자신처럼 평범한 백성을 위해 나서줄 살수는 없을 것 같았다. 깊은 절망에 빠져 그 또한 스스로 자진을 결심했을 때, 홀연히 검은 옷을 입은 남궁묵이 나타났다.

3천 냥은 그에겐 이미 재산의 절반을 뛰어넘은 액수였으나, 먼저 복수를 말하는 남궁묵의 제안을 결코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일순간 집도, 사랑하는 가족도 모두 잃은 노인에게 이 재산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전 재산을 다 주어서라도 가족의 한을 풀어줄 수만 있다면, 얼마든 그렇게 해주고 싶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