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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화 사방신 (2) >

다음날 아침.

추가 시험을 떠났던 사관생들이 돌아오고, 본격적으로 수학여행 일정이 시작됐다.

지금은 버스를 타고 이동하고 있다.

"서율아. 금호는?"

반 친구 한 명이 내게 물었다.

"많이 피곤한 것 같아서, 숙소에서 쉬라고 놔두고 왔어."

사실대로 말하자면, 백호 때문에 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

금호를 데리고 오면 백호도 따라올 터. 그럼 그 백호를 사관생들이나, 교관들에게 설명해야 하는데.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더라.

"진짜?"

"금호 몸 안 좋아?"

"괜찮은 거야?"

"몬스터 파크에서 너무 굴린 거 아냐?"

내 거짓말에 다들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역시 금호의 인기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시험 때부터 마력을 너무 많이 써서 그런 거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그럼 다행이구."

다들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슨 자기 일처럼 안도하네.

뭐, 그만큼 금호를 생각해 준다는 거니까 나쁜 기분은 아니다.

"아. 그나저나 어제 시연이랑 어땠는지 얘기 좀 해 봐."

금호의 얘기가 끝나자, 자연스레 내 얘기로 넘어갔다.

"나도! 나도 그거 궁금해서 죽는 줄 알았는데!"

"하시연 불러! 청문회를 연다!"

하시연이 세상 퀭한 표정으로 끌려 나왔다.

"또 왜애애애.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예상대로 어제 방에서 엄청 시달린 모양이다.

"어허. 남녀 둘이 나가서 아무 일도 없을 리가 있나."

"죄인 하시연은 사실대로 말하라!"

다들 텐션이 저세상 텐션인데?

이거 좀 오래가겠네.

내 예상대로 나와 시연이에 대한 화제는 꽤나 길게 이어졌다.

그것도 무려 30분이나.

"추가 시험은 어땠어?"

"음. 할 만했어."

다시 다들 삼삼오오 모여서 잡담을 떨고 있다.

"어휴."

화제의 중심에서 벗어난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안 그래도 머리 아픈 상황인데, 다들 왜 날 못살게 굴어서 안달이야.

나는 다시금 한숨을 쉬며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메이든]

[꼬맹이. 찾아봤는데. 역시 이 영감 구린내가 풀풀 난다.]

오늘 아침 메이든과 나눴던 메시지들을 다시금 읽어 나갔다.

[사실상 호주의 실세라고 봐도 될 정도야. 인맥부터 자금까지 그냥 다 몰려 있다 보면 돼.]

메이든의 정보력은 굉장했다.

하룻밤 사이에 모은 정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고 정확한 정보들이었다.

[일단 그때 말했던 사방신의 장비 말인데. 일단 사들인 후로 어떻게 사용했는지 출처가 없어.]

[실험실에 막대한 자금력이 몰리고 있는데, 이것도 사용 내역이 확실치 않고.]

[불법적인 실험을 하고 있을 확률이 크다는 거지.]

그러나 아쉽게도 모두 추측성 심증일 뿐이다. 증거는 하나도 없다.

[증거만 있으면 바로 세계초인연맹을 움직일 수 있을 텐데 말이지.]

그러나 증거가 있다고 해도 문제다.

[아뇨. 제가 볼 땐 초인연맹에도 비스트 마스터의 뒤를 봐주는 누군가가 있을 가능성이 커요.]

[10년이나 실험을 하면서, 걸리지 않을 수가 없거든요.]

[그렇게 막대한 자금력을 쏟아붓고 있는 실험이라면 더욱.]

이런 일을 비스트 마스터가 혼자서 벌였을 리가 없다.

분명 배후가 있다.

[쯧. 부정할 여지가 없네.]

[초인연맹도 썩은 뿌리가 있긴 하거든.]

[오케이. 그럼 일단 그쪽도 추가로 조사해 볼게.]

윗물의 조사는 메이든의 전문이다.

[네. 그럼 이쪽도 이쪽대로 조사 좀 해 볼게요.]

그럼 현장 조사는 내가 해야겠지.

[조사? 뭐하게? 그 할아범 실험실에 잠입이라도 하려고?]

[네. 그래 보려고요. 마침 잠입에 특화된 친구가 있기도 하고.]

[그런 친구가 있어?]

[네.]

있다.

잠입과 은신에 특화된 최고의 요원. 허미트라는 친구가.

만나는 게 문제긴 한데, 내 생각이 맞으면 그것도 큰 문제는 없을 거다.

우리가 지금 향하고 있는 곳에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아무튼 이쪽은 이쪽대로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네 성격에 무리한 일은 안 하겠지. 부탁한다.]

[그럼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요.]

메시지는 거기서 끊겼다.

"도착했다. 슬슬 내릴 준비를 하도록."

그때 피진호 교관이 목적지 도착을 알렸다.

* * *

우리가 도착한 곳은 호주의 유명한 역사 박물관이었다.

원래라면 박물관 관람은 지루하기만 할 뿐, 모두가 싫어하는 코스겠지만. 이 세계에선 이미지가 조금 다르다.

"와. 이거 봐. 세계를 삼킨 뱀의 허물이래. 만지면 돌이 된다나 봐."

"여기 이것도 대박. 지옥 사마귀의 손날. 그 어떠한 것으로도 자를 수 없는 강도를 자랑한다."

이 세계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들은 모두 초인들의 눈을 휘둥그레하게 만들 것들뿐이다.

대표적으로는 고대 몬스터들의 잔재나, 그 잔재로 만든 특별한 아이템들이 있다.

"어? 저기 고대 유물 존이다."

"오! 호주엔 뭐가 있으려나."

그리고 대부분의 박물관엔 '고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래. 고대 유물들이 가득 전시되어 있다는 말이다.

"······."

나는 탐욕 가득한 눈으로 고대 유물들을 살폈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손에 쥐고, 특성들을 탐하고 싶다.

CCTV, 안내원, 사관생, 교관 등등.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라면 필히 그렇게 했겠지.

"이거 대박. 나 이런 옵션 처음 봐."

그렇구나. 옵션이 되게 사기구나.

"이런 거 쓸 수 있으면 진짜 소원이 없겠다."

나는 친구들의 감탄사를 들으며 속으로 참을 인 자를 되뇌었다.

지금은 고대 유물에 신경을 쏟을 때가 아니다.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해야 한다.

"후."

물욕을 어떻게든 머릿속 한켠으로 밀어 넣었다.

"교관님.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피진호 교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잽싸게 몸을 돌려 화장실로 향했다.

아니, 화장실로 향하는 척했다.

"이쪽일 텐데."

그리곤 화장실이 아닌, 특수 전시관을 찾아 이동했다.

찾았다.

[특수 전시관]

박물관에 보관 중인 귀중품들 중에서도 한층 더 진귀한 것들을 모아 둔 곳이다.

출입 자체도 아무나 할 수 없고, 신청을 해서 허가를 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나는 그곳의 입구에서 목청을 가다듬었다.

"허미트."

있는지 없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내 예상이 맞다면, 허미트는 높은 확률로 이곳에 있을 거다.

특수 전시관에 잠입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 테니까.

아니면 우리를 발견하고 내 주위를 돌고 있을 수도 있고.

"화장실로 따라와. 그쪽엔 CCTV가 없을 테니까."

나는 그 말을 끝으로 근처의 화장실로 이동했다.

그렇게 화장실에 도착한 직후.

"······오늘은 나름 은신에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말이죠."

허미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 허미트는 이곳에 있었다.

"있다고 알고 있으면 아무리 잘 숨어도 감지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야."

물론 개구라다.

신경을 쓴 은신이건, 안 쓴 은신이건 알 게 뭐야.

둘 다 감지 못 한다.

"······알고 있었다?"

허공에서 어둠이 일렁이며, 사람의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제가 이곳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죠?"

이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허미트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그제 그랬잖아. 귀찮은 일이 하나 남아 있다고."

"예."

그제 만났을 때, 호주에 조금 귀찮은 일이 남아 있다고 했다.

"허미트 네가 귀찮다고 표현할 정도의 일이면 이곳의 세이렌의 눈물을 터는 일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더라고."

세이렌의 눈물 또한 국가전 습격의 핵심 아이템이다.

그 세이렌의 눈물은 아직 호주 박물관에 버젓이 보관되어 있고, 허미트가 귀찮은 일이 남았다고 했다.

허미트의 일이 세이렌의 눈물을 훔치는 것이라고 예상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정말 모든 걸 다 꿰고 계시는군요."

허미트가 이젠 더 놀랄 것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보다, 네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

"······부탁 말입니까?"

"그래. 잠입 조사를 좀 부탁하려고 해."

허미트가 쓰게 미소 지었다.

"잠입 조사는 제 특기긴 합니다만. 아쉽게도 자유롭게 행동을 할 수 있는 몸이 아니라서······."

"멋대로 행동하면 의심받는다는 거지?"

"예."

허미트의 행동은 모두 언노운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내 부탁을 들어주긴 힘들 거다.

"그럼 보고하면 되잖아. 잠입 조사를 해야 할 것 같은 곳을 발견했다고."

"무슨 보고를······?"

그럼 언노운에게 허락을 받으면 된다.

"몬스터라는 시스템의 한 고리를 통제하려는 실험이 벌어지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그 실험의 데이터는 언노운 님에게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생각하지? 마에스트로."

"!"

나는 씨익 웃었다.

"이렇게 말하면 분명 잠입 조사를 허가해 줄 거야."

언노운의 목적이 시스템의 완전 분석인 이상, 마에스트로가 허미트의 제안을 거절할 리는 없다.

"망설이면, 대충 하루면 충분하다고 해. 아마 바로 허락해 줄 테니까."

* * *

그 후, 허미트는 마에스트로와 연락을 해 보겠다며 사라졌다.

이따가 밤에 다시 숙소로 찾아갈 테니, 그때 그 한적한 공원에서 보자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아마 99.999% 확률로 허가가 날 거다.

의심을 할 수도 있겠지만, 허미트가 비스트 마스터의 연구 기록을 가져가기만 하면 의심은 순식간에 눈 녹듯이 사라질 터.

아무 문제도 없다.

이걸로 비스트 마스터의 실험실의 정보를 얻는 건 시간문제다.

허미트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장벽따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후우."

모든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나는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근처 한적한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금호야~"

내 부름에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고양이, 아니 호냥이가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냐앙."

뭔가 엄청 지친 표정이다.

비유하자면, 쉬는 날 집에서 누워 있다가 마누라의 등쌀+잔소리 콤보에 3시간 정도 시달린 얼굴 같다고 할까.

"냐아옹~"

그 뒤로 새하얀 고양이가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따라 나왔다.

저건 뭐 비유할 필요도 없이 세상의 모든 행복을 다 떠안고 있는 듯한 환한 표정이네.

······어쩜 이렇게 상반된 표정인지.

"잘 놀았어?"

내 물음에 금호가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폴짝 뛰어서 내 품에 안겨들었다.

내 품이 그리웠던 것일까 가슴에 얼굴을 푹 묻고 간드러지게 울었다.

"형 보고 싶었어?"

두말하면 잔소리라는 듯 다시 얼굴을 비빈다. 아. 힐링된다.

찌릿-

그런 우리를 백호가 노려보고 있다. 조금 전 행복했던 표정은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질투로 가득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뚫어져라 째려본다.

이걸 죽일까? 싶은 표정이다.

······솔직히 조금 무섭다.

백냥이 너 괜히 나 건드리면 금호한테 미움받는다?

나는 눈으로 항의했다.

그런 내 항의가 통한 것일까.

백호가 고개를 살짝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내쉬더니, 짧게 망설였다.

폴짝.

그리곤 마찬가지로 내 품에 뛰어들었다.

아하.

기왕 이렇게 된 거 내 품에 안겨서 금호와 붙어 있기라도 하시겠다?

나쁜 판단은 아니지.

나는 픽 웃으며 백호를 받아들이기 위해 한쪽 손을 펼쳤다.

그렇게 백호가 내 품에 닿은 순간.

"으억!"

신체에 막대한 충격이 느껴짐과 동시에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건 힘으로 후려쳤다기보단, 무게에 짓눌려서 넘어간다는 느낌인데!

쿵-

"아으. 아파······."

이내 바닥에 널브러진 나는 가슴의 통증을 느끼며 인상을 썼다.

"백냥이 너. 왜 이렇게 무거워?"

내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무게는 아무리 봐도 고양이의 무게가 아니다. 못해도 100kg은 넘는 거 같은데.

"냥~?"

백호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울었다.

근데 표정이 계획대로 됐다는 표정인데?

"······됐다. 말을 말자."

어제 내 손을 후려칠 때도 그러더니, 백호의 고양이화는 금호와 달리 무언가 불완전한 모양이다.

무게도, 힘도 어중간하게 축소화됐다.

나는 백호를 일단 옆으로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에 묻은 흙을 탁탁 털고, 신체를 점검했다. 다행히 이상은 없는 것 같다.

착각일까. 멀쩡한 내 모습을 보고 백호가 혀를 찬 것 같았다.

"요망한 것······."

그 모습이 너무나도 여우 같아서 나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크르르."

그 순간, 금호가 살벌한 표정으로 으르렁거렸다.

금호가 이런 반응을 보일 만한 상대는 한 명밖에 없다.

왔구나.

"허미트."

내 부름과 함께 허공에 어둠이 응집되기 시작했다.

"바로 임무로 들어가도 될 것 같습니다."

모습을 드러낸 허미트가 기품있는 미소를 지었다.

아주 믿음직스러운 미소였다.

* * *

다음날 점심.

"돌아왔습니다."

허미트의 조사는 말도 안 되게 빨랐다.

실험실의 정확한 위치 파악부터, 내부에 잠입까지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다.

정확한 위치를 몰라서 메이든의 정보를 토대로 추측성 정보만 몇 개 던져 줬을 뿐인데, 이렇게 빠를 줄이야.

진심으로 허미트가 내 편이라는 것에 감사했다.

"여기, 카피해 온 실험 내역들입니다."

"수고했어."

나는 건네받은 서류를 확인했다.

"꽤나 재밌는 실험이더군요. 확실히 이건 마에스트로가 좋아할 법한 실험 결과입니다."

[몬스터의 군사적 이용을 위한 개조 및 개량 실험 시작.]

그리고 확신했다.

내 예상이 맞았다.

[······이하, 수많은 몬스터들을 아우르기 위해선 시스템적, 유전자적 개량만으론 부족하다고 판단.]

비스트 마스터가 원흉이다.

[몬스터들을 통솔하는 힘을 지녔다고 전해지는 '사방신'을 재탄생 시켜 보기로 프로젝트의 방향을 변경.]

1부 에피소드 최악의 재해.

몬스터 대폭주를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 92화 사방신 (2) > 끝

< 93화 사방신 (3) >

그날 밤.

수학여행 둘째 날의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 도착한 나는 저녁을 빠르게 끝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허미트는 점심에 보고서의 사본을 넘겨준 직후 빠르게 사라졌다.

일단 해야 할 일을 한 뒤에 여유가 생기면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내일 정도면 세이렌의 눈물이 사라졌다는 기사를 볼 수 있을 거다.

―호주 정부나, 세계초인연합에 협조를 얻기는 힘들 것 같다.

지금은 메이든과 통화를 나누고 있다.

―이거. 생각보다 건수가 커. 몬스터 군사화 계획. 아마 호주 정부를 포함한 세계초인연합에도 협력자가 많을 거다.

"······그렇겠죠. 군사화 계획이라는 건 어느 세계에서나 높은 분들의 욕망 중 하나니까."

―쯧. 시발같은 일이지.

메이든이 진심으로 짜증 난 듯했다.

―네가 보낸 실험 보고서도 쭉 봤는데, 이걸 공론화한다고 해도 우리 쪽이 역풍을 맞을 확률이 커.

"······그쵸. 세계의 안전을 위해서 몬스터들을 개조해서 경비로 쓰는 게 주된 목적이라고 적혀 있으니까."

아직도 몬스터들에게 고통받는 나라는 많고, 초인은 부족하다.

그런 상황에서 초인 외적으로 위험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생긴다면 다들 좋아할 거다.

―아마 몬스터도 생명이라고 주장하는 생명단체 외에는 다 좋아할 거야.

"예."

그나마 문제는 사방신을 연구하고 있다는 것 정도인데.

이걸 걸고 넘어져도 반반.

아니, 그래도 이쪽이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크다.

―솔직히 나도 이게 나쁜 연구라고는 생각이 안 들 정도니까. 말 다한 거지.

"······연구 목적은 올바르니까요."

차라리 비스트 마스터가 천하의 나쁜 놈이라면 일이 쉬웠을 텐데. 어중간하게 중립을 지키는 양반이라서 문제다.

"하지만 무조건 막아야 해요."

―······이대로 놔두면 재탄생한 사방신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할 거라고?

"네."

정해진 미래.

이 올바른 목적에서 시작된 실험의 결과는 몬스터 대폭주.

세계의 위기다.

―어떻게 그리 확신해?

"사방신은 인간이 제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애초에 생각부터가 잘못됐다.

몬스터를 컨트롤 할 수 없기에, 그보다 훨씬 강한 몬스터인 사방신을 만들어서 새끼부터 키우는 것으로 길들이겠다니.

마치 고양이를 길들일 수 없으니, 호랑이를 새끼 때부터 키워서 길들이겠다는 것과 같다.

태생부터 인간의 피에 굶주린 사악한 호랑이를 말이다.

―그니까 그걸 네가 어떻게 아냐고.

"들었거든요. 고아원에서."

메이든을 납득시키는 건 어렵지 않다.

"사방신의 장비를 입찰하던 시기랑 제가 실험체로서 실험을 받던 시기가 겹치죠? 구명자 놈들 사방신의 인자에 대한 것도 실험을 좀 했어요. 결국 무리라고 판단하고 폐기했지만요."

―······그렇구만.

햇빛 고아원 출신이라는 과거는 내 거짓말을 더욱 신빙성 있게 만든다.

"진리의 구명자 놈들도 포기했던 실험이에요. 제게 타종족의 인자를 융합시키는 걸 성공한 놈들도 포기한 실험을 비스트 마스터가 하고 있어요. 성공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 것 같나요?"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다. 확실히 위험하겠네.

메이든의 목소리가 심각해졌다.

―근데 그러면 네 옆에 있는 백호는 뭐야?

"······얘요? 얘는 좀 별종이죠 뭐."

나는 옆에서 금호랑 뒹굴거리는 백호를 바라봤다.

보면 볼수록 얘가 원작의 백호와 같은 개체라곤 생각이 안 든다.

얘가 실종된 게 5년 전 일이라고 했으니까, 아마 새로운 백호를 만들고 있지 않을까.

아니, 허미트가 가져온 실험 보고서를 보면 아마 다른 백호가 존재하는 게 맞을 거다.

―흠. 일단 알겠다. 한번 방법을 찾아 보마.

"네. 부탁드립니다."

―화랑 정보를 공유해도 되는 거지?

"물론이죠. 메이든 씨가 확실히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겐 정보를 공유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래. 믿어 줘서 고맙다. 그럼 내일 또 연락하마. 몸조심하고.

"네. 메이든 씨도요."

그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끝났다.

나는 스마트폰을 귀에서 떼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후우. 이쁘네."

호주의 하늘은 오늘도 아름답고, 바람도 여전히 차갑다.

오늘도 이 부근은 참 한적하다.

나는 주위에서 장난치고 있는 금호, 백호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나비 효과."

나비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서 태풍으로 변하듯.

나라는 존재가 일으킨 원작의 변화는 점차 거세지고 있다.

아직까진 원작의 틀을 유지하곤 있지만, 언젠가는 그 틀이 완전히 파괴되는 때가 올 거다.

내가 지닌 원작의 지식이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때가 온다는 의미다.

어쩔 수 없으니까.

원작의 먼치킨 주인공이 걸었던 길을 내가 그대로 따라갈 수가 없으니까.

어차피 바뀔 미래라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현재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왔다.

원작의 주요 인물들과 모조리 커넥션을 만들었고, 각인의 불길 같은 원작의 적대 세력이 지녀야 했을 아이템들을 내가 얻기도 했다.

그 결과 수많은 변화가 발생했다.

그 모든 변수의 결과가 지금의 나다.

수많은 위기가 있었지만, 어찌어찌 잘 헤쳐나가고 있다.

내 생각은 옳았다.

하지만 오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현재가 좋은 방향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미래도 좋은 방향으로 바뀌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현재의 변화가 더욱 끔찍한 미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닐까.

나라는 이단분자가 이 세계를 더욱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타국에 와서 괜히 더 감정적으로 변한 것일까.

막연한 불안감이 내 머릿속을 잠식했다.

"냐앙."

그런 내 불안을 느낀 것일까.

백호에게 시달리던 금호가 걱정스런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금호야···."

나는 금호를 상냥하게 어루만지며 미소 지었다.

"······그랬지."

그러고 보면 금호를 만난 것도 원작에선 일어나지 않은 큰 변수 중 하나다.

금호를 만난 건 빙의 전, 빙의 후 인생을 모두 합쳐서 최고의 일 중 하나다.

나와 금호의 만남이 나쁜 방향으로 작용했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금호의 존재는 내 행동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고마워."

나는 금호의 머리를 자상하게 쓰다듬었다. 내가 금호 없으면 죽는다 죽어.

찌릿-

그런 날 백호가 여전한 시선으로 노려본다. 이제는 익숙해진 질투 어린 시선이다.

"왜. 짜샤. 부럽냐?"

내 능글맞은 웃음에 백호가 세상 분한 얼굴로 이를 갈았다.

이게 진짜 사람인지 동물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다채로운 표정이었다.

"아무튼 네가 금호한테 반해준 덕분에 일이 쉬워졌다. 고맙다."

지금까지 일어난 나비 효과는 부정적인 변화에 가까웠다.

대비하고 있던 사건들에 변수가 생기며, 예기치 못한 위기로 변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이번 일은 단언컨대 긍정적인 변화다.

'원작과 다른' 내가 '원작과 다른' 짓을 해서 정부의 감사패를 받은 것으로 호주로 여행지가 바뀌었다.

메이든과 인맥을 텄기에 몬스터 파크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나와 금호와 만났기에 백호와 만날 수 있었다.

온갖 변수의 하모니가 불러일으킨 나비 효과는 최악의 재해를 막을 기회의 장이 되었다.

이는 분명 좋은 일이다.

"향수병이라도 왔나."

이런 호기로운 상황을 앞에 두고 비관하는 건 나답지 않은 일이다.

나는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좋아."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평소의 내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냐앙!"

"냥."

내 밝아진 표정이 마음에 든 것일까, 금호가 활기차게 울었다.

그 뒤에서 백호가 '그래도 지금이 낫네.' 싶은 퉁명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슬며시 돌렸다.

그 모습이 제법 잘 어울려서 다시 웃음이 나왔다.

나는 금호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 이어 백호의 머리를 쓰다듬―

"냥."

휙-

―지는 못했다.

"다른 남자한테 자기 머리는 허락하지 못한다는 뭐 그런 거야?"

백호가 꽉 다문 입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

너 지조 있는 냥이구나.

그 옆에서 금호가 짜게 식은 눈으로 백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보면 볼수록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 * *

다음날.

호주에 도착한 지 11일째가 되는 날. 오늘은 호주 사관학교의 사관생들과 교류가 있는 날이다.

말이 교류지, 그냥 한국 초인 사관학교 vs 호주 초인 사관학교의 자존심 매치 같은 느낌이다.

"승자! 강서율!"

당연히 압도하는 것은 우리 한국 측이었다. 애초에 이번 1학년은 황금세대라고 불릴 정도로 재능이 출중한 사관생들이 몰려 있다.

같은 1학년을 상대로 질 리가 없었다.

"와. 쟤가 걔지? 이중 속성 보유자."

"벌써 4연승이네."

"능력치는 100위권에 간신히 걸쳐 있는 거 같은데, 기술이 미쳤네."

"특성 특화형인가?"

나는 무려 4연승을 이어 가는 중이다.

별로 어려운 것도 없더라.

마력이 2랭크나 오르면서 전투에 안정성이 크게 올랐다.

강기의 자유로운 운용이 얼마나 사기적인지 다시금 실감했다.

"그만! 승자! 하시연!"

"오오. 저쪽도 4연승이야."

"아오. 자존심 상해."

"한 번을 못 이기냐."

마찬가지로 '교감'에 의해 마력이 1랭크 상승한 하시연도 연승가도를 달리고 있다.

그 외에도 한 자릿수 애들은 모두 연승 중이다.

"이번 1학년이 황금세대라는 말은 사실이었군요."

"과찬이십니다."

주위에서 호주 교관과, 피진호 교관이 대화를 나눴다.

둘 다 영어가 출중하다.

······뭐, 그걸 다 알아듣고 있는 나도 마찬가지긴 한데.

영어는 내 몇 안 되는 특기 중 하나다.

그나저나 메이든 씨에게 연락이 안 오네. 상황이 많이 안 좋나?

그렇게 고민에 잠겨 있을 때였다.

"그럼 다음! 강서율 사관생! 지명이다!"

"······또 나야?"

교관의 부름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나는 한숨과 함께 터벅터벅 걸어서 대련장 내부로 들어갔다.

* * *

그날 밤.

호주 시간으로 10시가 넘어서야 메이든에게 연락이 왔다.

―미안. 여러모로 알아봤는데, 그 실험을 막는 건 힘들 것 같다.

메이든이 이를 바드득 갈면서 말했다.

―얽혀 있는 사람이 생각 이상으로 많아. 괜히 들쑤시면 우리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

"그 정도인가요?"

―그래. 어지간한 놈들은 내 인맥 선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데······.

메이든이 작게 혀를 찼다.

―블랙 그놈은 나도 어쩔 방법이 없어.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랭킹 3위가 이번 실험에 얽혀 있다고요?"

―그래. 얽혀 있다고 해야 할까. 스폰서야. 기승수로 백호를 받기로 계약했다나.

세계 랭킹 3위 초인.

아우터 블랙.

초인 네임은 '철혈의 기사'

세상에서 제일 단단한 금속인 올레니콘으로 만든 풀 플레이트 아머와 그의 애마, 페가수스가 심볼인 초인이다.

그 초인이 실험을 후원해 주고 있다면, 윗물끼리의 힘 싸움에 메이든이 밀리는 건 당연했다.

아우터 블랙은 정일용과 비슷한 시기에 초인 세계에 뛰어든 OB 중의 OB. 발언력만큼은 세계 랭킹 1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 연맹을 움직이는 건 물론이고, 언론을 이용하는 것도 무리겠네요."

―그래. 상대가 너무 안 좋아.

메이든이 한숨을 쉬었다.

그것도 연달아서.

그녀의 답답한 심정이 십분 전해져 왔다.

"그럼 어쩔 수 없죠."

평화로운 방법으로 실험을 저지할 수 없다면 조금 난폭한 방법을 쓸 수밖에.

"조금 강압적인 방법으로 가겠습니다."

내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진짜 습격이라도 하려고?

"아뇨. 집단을 상대로 개인이 덤비는 건 바보 같은 짓이죠."

―······잘 아네.

"그럼요."

―그럼 뭐 어쩌려고?

"간단해요. 스폰서가 비스트 마스터에게 등을 돌리게 하면 되요."

―무슨 수로?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내게 허미트가 붙어 있는 이상, 간단한 일이다.

"내일 점심에 청룡을 폭주시키겠습니다."

내일은 마침 귀국하는 날이기도 하고. 딱 좋다.

* * *

다음날 점심.

비스트 마스터는 평소처럼 실험실에서 사방신을 재현, 컨트롤하기 위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주작의 복종도가 요즘 들어 계속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곳은 제4 실험실, 주작의 연구를 하고 있는 곳이다.

"······쯧. 성장을 하면 할수록 말썽이군. CH-4374나 EDD-202를 투여해."

"네!"

비스트 마스터, 에디트가 이 연구에 뛰어든 지 어언 10년.

막대한 자금을 받아 호기롭게 시작한 실험이었지만, 아직까지도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유일한 성과라고 해 봐야, 유전자를 기반으로 사방신을 무사히 탄생시켰다는 것 정도일까.

'······앞으로 1년 내에 성과를 내지 못하면 프로젝트는 폐기된다.'

얼마 전, 스폰서들에게 연락이 왔다. 사방신의 컨트롤은 확실히 매력적이지만, 그 기간이 너무도 길어지고 있다.

실험에 들어가고 있는 자금이 아까워지기 시작했다는 말이었다.

당장이라도 프로젝트를 중단할 기세였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비스트 마스터가 마지막으로 제안한 게, 1년의 유예였다.

다행히 스폰서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상태라면 1년이 지난다고 해도······.'

비스트 마스터는 손톱을 짓씹었다. 사방신의 성장을 촉구해서, 새로운 데이터를 얻어 보겠다는 계획은 오히려 악수가 되어 가고 있다.

'제길. 이대로 포기할 순 없어!'

인생의 절반을 이 연구에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대로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는 없다.

'이렇게 된 이상,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한이 있더라도······.'

비스트 마스터의 눈이 흉흉한 빛으로 빛났다.

"연구소장님!"

한 명의 연구원이 허겁지겁 달려온 것은 그때였다.

"무슨 일이지?"

"크, 큰일 났습니다!"

연구원이 다급하게 스마트폰을 넘겼다. 화면엔 뉴스 아나운서가 긴급 속보를 보도하고 있었다.

―소, 속보입니다! 지금 호주 국제공항에서 백호로 보이는 몬스터가 출현하여 모든 공항선이 중지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비스트 마스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설마 백호가 실험실을 빠져나간 건가! 제2 실험실에 연락해 봐!"

"이미 해 봤습니다! 백호는 잠들어 있다고 합니다!"

"뭐? 그럼 대체 저 뉴스는······."

비스트 마스터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없었다.

"연구장님!"

이번엔 다른 연구원이 창백한 얼굴로 달려왔다.

"제, 제3 실···실험장에서 청룡이 폭주했습니다!"

"······뭐?"

* * *

제3 실험장.

인적이 없는 공터에 세워진 비밀 연구소에서 한 명의 남자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인적 피해가 발생하지 않을 위치에 있는 실험실의 사방신을 폭주시켜, 위험성을 알리고 국제적인 문제로 발전시킨다. 다시 생각해도 훌륭한 계획이군요."

실험실에 잠입하여 청룡을 폭주시킨 남자, 허미트는 한 손에 영롱하게 빛나는 푸른 보석, '세이렌의 눈물'을 이리저리 돌려 만지며 미소 지었다.

"그나저나 저게 불완전한 청룡이라니. 만약 완전한 상태로 폭주를 일으켰다면······."

꽤나 끔찍한 일이 벌어졌겠네요.

허미트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미소 지었다.

"그나저나 백호가 공항을 습격할 거라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말이죠."

무슨 변수라도 생긴 건가?

그렇게 중얼거린 허미트가 주머니의 폰을 꺼내 뉴스를 확인했다. 공항 쪽의 특보를 하고 있는 뉴스 프로그램이었다.

"이건···?"

화면에는 백호로 보이는 하얀 호랑이와 금빛 호랑이, 금호가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백호의 눈동자에서 더는 찬연한 적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크릉···!

녀석의 눈은 혼탁한 적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 93화 사방신 (3) > 끝

< 94화 사방신 (4) >

누군가가 말했던가.

본디 인생이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라고.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강서율 사관생! 물러나도록!"

피진호 교관을 필두로, 교관들이 사관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위치를 잡았다.

"크르르."

백호는 그런 교관들의 경계를 한 몸에 받으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새침한 표정도, 교태로운 울음소리도 더는 찾아 볼 수 없었다.

표정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목소리는 쇳소리처럼 갈라지고 있다.

"서율아. 어떻게 된 거야?"

하시연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내 소매를 당겼다.

백호의 이전 모습을 알고 있는 하시연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겠지.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내 원래 계획은 이랬다.

실험실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허미트를 이용해서, 인적이 없는 곳에 있는 제 2실험장의 청룡을 폭주시킨다.

이로 인해 세계는 다시 출현한 사방신에 대한 것을 알게 될 테고, 폭주하며 파괴를 일삼고 다니는 청룡에게 부정적인 여론이 몰리게 될 것이었다.

동시에 비스트 마스터를 백업하는 스폰서들도 손 쓸 도리도 없이 폭주한 사방신을 보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컸다. 아마 높은 확률로 꼬리 자르기를 하겠지.

이렇게 될 경우 당연히 스폰서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실험이 종료될 터.

만약 스폰서들이 실험을 포기하지 않더라도, 이미 청룡이 폭주했다는 전과가 있는 이상.

메이든과 유화, 지아를 필두로 언론에 사방신의 위험성을 어필하면 최소한 패배는 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걸리는 점이라고 해 봐야, 청룡의 폭주로 발생할 인적, 물적 피해 정도였는데.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설치된 제 2실험장을 노린 것으로 인적 피해는 일단 배제했다.

물적 피해는 조금 있을 테지만, 이 또한 1년 후에 발생할 몬스터 대폭주라는 대사건에 비하면 새 발의 피나 다름없었다.

이렇듯, 가히 완벽한 계획이었다.

"강서율 사관생! 금호를 뒤로 물리도록! 저건 위험하다!"

"하지만 쟤는······."

우리를 배웅해 주기 위해 공항에 나온 백호가 갑자기 폭주하지만 않았어도 완벽했을 것이다.

"됐으니까 말하는 대로 하도록! 지금은 실전이다! 일개 사관생인 네가 활개치고 다닐 상황이 아니야!"

교관들이 험상궂은 얼굴로 버럭 소리쳤다.

"큭."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아니. 금호에겐 미안하지만, 이대로 있어 주는 게 좋을 것 같다."

피진호 교관이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피 교관님? 하지만!"

"봐라. 백호의 시선이 금호에게 집중되어 있어. 이유는 모르지만, 금호가 시간을 끌어 주고 있는 거다."

"······아!"

주위에서 교관들의 탄성이 들렸다.

"지금 금호를 이탈시키면, 백호의 이빨이 사관생들이나, 일반 시민들에게 향할 수도 있다. 강서율 사관생은 그걸 걱정하는 거겠지. 안 그런가?"

"네, 네. 그렇습니다."

전혀 다른 이유지만, 일단 긍정했다.

"······그렇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교관들이 납득했다.

덕분에 우리가 물러날 필요는 일단 없어졌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진 게 없다.

"어떡해? 이대로 있으면 백호가······."

하시연이 안절부절했다.

이제 3분 내로 호주의 초인 부대가 도착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제아무리 백호라고 해도 토벌당할 게 분명하다.

······생각해라. 생각해.

이 상황을 완만하게 해결 할 방법을!

내 머리가 팽이처럼 회전했다.

원작에서 사방신은 항상 동시에 움직였다. 쉴 때도 같이, 행동할 때도 같이. 떨어져 있어도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완전히 똑같은 행동을 보였다.

그렇다는 말은 거리에 상관없이 의사를 전할 수 있는 종류의 특성, 공명 현상 같은 특성이 있는 게 아닐까.

그 공명 현상으로 인해, 청룡의 폭주에 공명하여 백호도 폭주 상태에 빠진 게 아닐까.

폭주로 인하여 금호를 향한 애정이 이상한 방향으로 뒤틀렸고, 그래서 지금 금호를 노려보고 있는 게 아닐까.

합리적인 가설이었다.

만약 내 가설이 옳다면 해결 방법은 간단하다.

청룡을 쓰러트리면 된다.

청룡이 폭주를 멈추면 백호도 폭주를 멈출······.

"!"

내 동공이 경악으로 확장된 것은 그때였다.

"폭주를······ 공명?"

식은땀이 흘렀다.

청룡의 폭주에 백호가 공명했다.

백호도 폭주 상태에 빠지며 청룡과 백호 두 마리가 폭주 상태가 됐다.

그럼 그 다음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

"······남은 세 마리도 차례대로 폭주한다?"

오소소.

그 순간, 내 전신에 진심 어린 소름이 돋았다.

만약 내 생각이 옳다면.

내 가설이 맞다면.

나는 최악의 선택을 해 버린 걸지도 모른다.

······제길.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그걸 위해선 우선······.

나는 금호에게 소리쳤다.

"금호야!"

이 부름만으로 금호는 내 마음을 읽은 듯 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크릉."

백호와 대치 중인 상태로, 공항의 활주로를 향해 미친 듯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크와아앙!"

그와 동시에 백호도 금호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과거 몬스터 파크에서 봤던 백호의 스펙을 생각해 보면, 금방 따라 잡혀야 정상이겠지만,

백호의 행동은 예상대로 많이 굼떴다.

위압감은 몬스터 파크에서 느꼈던 그대로였다.

피진호 교관도 멈칫할 만큼 위협적인 기세였다.

하지만 움직임이 상당히 굼뜨다.

폭주의 부작용 때문 혹은 백호가 폭주에 저항하고 있기 때문일 테지.

나도 재빨리 그 둘을 따라 이동했다.

"시연아! 따라와!"

"어···? 알았어!"

내 뒤로 하시연이 따라왔다.

"강서율 사관생!"

"하시연 사관생!"

그런 우리의 갑작스런 행동에 교관들이 당황했다.

"일단 인적이 없는 곳으로 유인하겠습니다!"

"강서율! 무슨 짓을······."

가장 먼저 우리에게 따라 붙은 피진호 교관이 당황한 어조로 물었다.

"이 백호는 진짜 백호가 아닙니다!"

"······뭐?"

"생각해 보세요! 백호가 이렇게 작을 리가 없잖아요!"

"그건······."

"청룡의 크기는 산만큼 거대하다고 하는데, 백호는 고작 금호만하잖아요! 그냥 하얀 호랑이라서 다들 지레짐작한 겁니다!"

나는 거짓말을 했다.

피진호 교관을 납득시킬 만한 필사적인 거짓말.

"아니, 그렇다고 보기엔 청룡과 저놈이 나타난 타이밍이 절묘하게 일치한다. 분명 무언가 관계가······."

"그럴 수밖에요! 사방신의 특성은 주위 몬스터들의 지배 및 폭주니까!"

"그걸 네가 어떻게······."

피진호 교관이 아닌 다른 교관이 물었다.

"역사책에 나오잖아요! 사방신의 등장과 함께 중국 내의 모든 몬스터들이 폭주를 일으켰다고! 이건 그 전조 현상입니다!"

"······사방신의 등장?"

피진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무언가 깨달은 표정이다.

"네. 맞아요."

나는 말했다.

"청룡은 시작일 뿐. 이제 곧 다른 사방신들도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피진호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그건 억측일······."

"교관님!"

그때였다.

"인근 산맥에 배, 백호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때마침 제 4실험실의 백호가 폭주를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처, 청룡과 비슷한 몸집에 내뿜는 위압감이 재해급을 가볍게 뛰어넘는다고 합니다!"

"호주 정부에서 국가 위기 상황이라고 발표! 세계초인연맹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백호, 청룡을 제외하고도 수많은 몬스터들이 폭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내 가설이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피진호 교관님! 여기는 저와 하시연만으로 충분합니다! 교관님은 일단 일반인들의 대피와 진짜 백호, 다른 몬스터들을 막을 준비를 해 주세요! 이 이상 더 늦어지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백호가 잠들어 있는 제 4실험실은 도시와 제법 가까운 곳에 있다. 늦으면 대참사가 벌어질 것이다.

"······강서율."

피진호 교관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나는 그 눈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또박또박 말했다.

"교관님의 제자를 한번 믿어 보세요."

피진호 교관이 아주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활주로를 달리는 백호를 보며 꾹 다문 입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 말과 함께 제자리에 섰다.

"지금부터, 한국 초인 사관학교 교관 일동은 호주 재해를 막기 위해 움직이겠다."

피진호 교관의 말이 점점 멀어지기 시작하더니,

"피 교관님!"

"그럼 저놈은!"

"들었을 텐데. 저놈은 백호가 아니다. 저놈은 강서율과 하시연에게 맡······."

이내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교관님.

믿어 주셔서.

"금호야! 계속 달려서 활주로 밖으로 나가!"

백호는 피진호 교관에게 맡기면 된다.

청룡은 호주 정부 측 초인들이 어떻게든 해 주겠지.

둘 다 완벽한 상태가 아니니까.

그럼 이제 남은 건 현무와 주작.

호주에 상주하는 초인들의 실력을 생각해 보면, 현무와 주작까지 막을 순 없을 거다.

그렇다면······!

"허미트!"

나는 활주로 밖으로 나서자마자 소리쳤다.

내가 아는 허미트라면 내 근처에서 몸을 숨기고 있을 터.

"역시 변수가 생긴 모양이군요."

내 예상이 맞았다.

"그래! 좀 문제가 생겼어! 그니까 부탁 하나만 더 하자!"

"꽤나 사람을 험하게 굴리시네요. 뭐, 좋습니다."

허미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곧 현무가 폭주할 거야! 지금부터 제 1실험실로 가서 현무 좀 처리해 줘!"

제 2실험실에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공항의 백냥이가 폭주를 일으켰고.

다음으로 제 2실험실과 공항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제 4실험실의 백호가 폭주를 일으켰다.

그럼 다음은 거리상 제 1실험실의 현무가 폭주할 터.

그걸 막아야 한다.

"······."

허미트가 벙쪘다.

"어려운 일을 아주 쉽게 부탁하시네요. 마치 담배라도 사 오라고 하는 건 줄 알았습니다."

"네 힘이라면 어려울 거 없을 거야! 현무랑 네 상성은 찰떡궁합이거든!"

"······뭐, 좋습니다. 일단 시도는 해 보겠습니다. 당신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는 몸도 아니고요."

허미트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 당신이 가능하다고 하면 가능한 거겠죠."

"그래. 만약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도망가도 좋아."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허미트는 다시 허공으로 스르르 흩어져 사라졌다.

이것으로 현무도 어떻게든 될 거다.

이제 남은 건 주작이랑, 어정쩡하게 폭주한 저 백냥이뿐.

"방금 누구야?"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하시연이 물었다.

"내 부하."

"그게 아니라······."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할게."

나는 하시연의 말을 끊었다.

"지금은 우선 저 백냥이의 폭주를 멈추는 것만 생각하자. 금호야!"

내 말에 금호가 제자리에 섰다.

그에 따라 백호도 제자리에 멈춰 섰다.

표정은 여전히 일그러져 있다.

인적 없는 한적한 산 중턱.

이곳이라면 타인의 눈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촤아아아악-!

나는 천익(天翼)을 펼쳤다.

"날개는 왜?"

"마력 때문에!"

지금까지는 타인의 눈 때문에 사용할 수 없었지만, 천익에는 마력 순환 상승이라는 보조적인 기능이 있다.

이어, [무기의 극의]를 빼고 [마나의 은혜]를 착용했다.

이것으로 준비는 완료!

"시연아! 금호랑 연계해서 어떻게든 백호의 움직임을 멈춰 줘!"

"어쩌려고?"

"어쩌긴!"

나는 손에 '정령의 불길'을 일렁였다.

"저 백냥이 몸속의 '폭주 인자'만을 정확히 태워 버려야지!"

다행히 이 백냥이의 몸집은 그렇게까지 크지 않다.

교감, 천익을 비롯한 온갖 마력 버프로 떡칠한 지금의 나라면, 가능할 거다.

* * *

제 3실험실의 비스트 마스터는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절규하고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청룡의 폭주를 시작으로 이번엔 백호까지 폭주했다.

"주, 주작의 정신 감응도가 점점 폭주 단계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이, 이대로면 10분도 버틸 수 없습니다!"

"제 1실험실의 현무는 더 심각한 사태라고 합니다!"

절망.

"안전장치도 모조리 먹통입니다!"

"마,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공포.

"클···클라이언트에게 연락입니다!"

"실험은 이걸로 끝. 네 선에서 정리할 수 있도록······."

"연구 지원은 현 시간부로 종료. 본측에서 파악할 수 없던 실험의 경우 책임 소재가 없음을 밝히며, 현 상황은 귀하의 선에서 정리할 수 있도록······."

그 말이 쐐기였다.

비스트 마스터의 정신은 완전히 무너졌다. 수십 년의 연구의 산물이 되어야 했을 사방신 재림 프로젝트는 완전히 폐기됐다.

'······그까짓 나라 한두 개 멸망하는 게 뭐가 대수란 말인가!'

이 실험은 인류의 희망이다.

몬스터를 인류의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있다면, 앞으로 인류는 몬스터에게 떨며 살지 않아도 된다.

'강한 초인에게 굽신거릴 필요가 없는 세상이 온다!'

이 실험만 성공하면 초인들은 모조리 필요 없는 과거의 망령이 된다.

'강하다고, 특별하다고, 화려한 능력을 지녔다고 모두에게 칭송받는 초인들의 몰락!'

오직 그것만을 위해서 72년 한 평생을 이 연구에 몰두했다.

'제길! 제길!'

그러나 그것도 이제 끝이다.

클라이언트는 이미 꼬리 자르기에 들어갔다.

아마 이번 비인가 실험에 대한 일은 비스트 마스터가 혼자서 떠안게 되겠지.

빌런으로 단정될 것이며, 죽을 때까지 감옥 밖으로 나올 일은 없을 거다.

자신은 세계를 위해서 한평생을 헌신했는데! 돌아오는 건 빌런이라는 오명과 감옥행이라니!

비스트 마스터는 그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럴 순 없지."

그래.

어차피 될 빌런이라면, 더욱 확실한 빌런이 되어 주리라.

감옥따위 들어갈 쏘냐.

'빌런이고 뭐고, 도망만 가면······. 실험은 나중에 다시 재개해도 된다. 어차피 실험 결과는 다 내 머릿속에 있어.'

비스트 마스터의 눈이 추악한 빛을 내뿜었다.

"거기 너. 7번 샘플을 가지고 와라."

* * *

"허억, 허억."

내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뚝뚝 쏟아져 내렸다.

마력 탈진의 전조.

마력을 너무 많이 사용했다.

"서, 서율아 괜찮아?"

빙결여제를 해제한 하시연이 다급하게 내게 달려왔다.

"어··· 어어. 괜··· 허어억."

나는 하시연에게 괜찮다는 손짓을 보냈다.

"끼잉."

내 얼굴을 금호가 핥았다.

걱정 가득한 얼굴이다.

"괜찮···다니까."

숨이 찬다.

마력을 너무 많이 사용하면 이렇게 되는구나.

"그, 래도. 형이 무리한··· 덕분에."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색시는··· 살렸으니까."

금호의 발치에는, 다시 고양이의 모습으로 돌아온 백호가 쓰러져 있었다.

"잘··· 잤냐."

흉흉한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찬연한 적색의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고맙다고··· 안 해? 너 살리려고 오빠가 진짜··· 엄청 고생했는데."

어느 정도 숨을 고른 내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백호는 조금 전 사나운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새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 멀쩡한 것 같아서 다행이다."

그 여전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나는 백호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율아? 좀 더 쉬지······."

"아직 할 일이 남았어."

천익의 마력 순환 및, 마나의 은혜 덕분에 마력이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다.

"금호 너는 여기서 백호 좀 봐 주고 있어."

나는 금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형은 잠깐 주작 좀 만나고 올 테니까. 시연이 너도 여기 있고."

그런 날 시연이가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봤다.

"······봉인 풀려고?"

나는 픽 웃었다.

봉인이라.

진짜 그런 게 있으면 좋겠네.

위기 때마다 형편 좋게 봉인을 풀어서 깔끔하게 위기를 타파하는 주인공.

얼마나 멋져.

"응."

하지만 아쉽게도 내게 봉인은, 숨겨둔 힘 같은 건 없다.

"걱정 마. 알아서 조절할 테니까. 시간만 잘 조절하면 적들한테 안 걸릴 거야."

하지만 비장의 한 수가 없는 건 아니다.

내 '장인의 간이 대장간' 안에는 최고급 고대 유물 '루시퍼의 마창'이 있다.

< 94화 사방신 (4) > 끝

< 95화 사방신 (5) >

호주로 향하는 긴급 수송기 중, 유독 빠른 속도로 하늘을 날고 있는 개인용 수송기 내부에는 메이든과 유화가 탑승해 있었다.

"그럼 저 폭주 현상을 일으킨 게 서율 씨라는 거예요?"

유화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다는 아니고 청룡만."

메이든이 심각한 표정으로 수송기 내의 홀로그램을 바라봤다.

호주 전역의 심각한 상황이 실시간으로 중개되고 있었다.

"그럼 백호랑 다른 몬스터들의 폭주는 어떻게 된 건가요?"

"글쎄. 그 꼬맹이가 전화를 안 받아서 확실한 건 모르겠다만."

메이든이 자신의 스마트폰을 바라봤다. 이미 강서율에게 수십 번이고 연락을 해 봤지만, 그쪽도 상황이 급박하게 흘러가고 있는 것인지 도통 연결되질 않는다.

"공항에서 폭주했다는 꼬마 백호랑 뒤따라 출현한 백호를 볼 때, 대충 폭주가 전염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데."

메이든도 강서율과 같은 결론에 다다랐다.

"공명 현상. 같은 건가요?"

"아마도."

두 명이 더욱 심각해진 표정으로 홀로그램을 바라봤다.

"진호 그놈이 빠르게 백호를 막기 위해 움직여 준 덕분에 아직까진 피해가 그리 크진 않아."

"······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예요."

청룡은 호주 정부 소속 초인들이 어떻게든 막고 있고, 백호는 한국, 호주 초인 사관학교 교관들이 어떻게든 억제하고 있다.

"점점 늘어나고 있는 폭주 몬스터들을 막을 방법이 호주 정부에겐 없어요."

문제는 그 두 개체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일반 몬스터들의 폭주에 대응할 인력이 없다.

"1학년 사관생들이 일반 시민들의 대피와 폭주 몬스터들 처리에 나서지 않았으면, 한참 전에 피바다가 됐을 거예요."

한국 초인 사관학교 1학년 사관생들이 이 시기에 호주에 있는 것은 호주 정부 입장에서 천운이었다.

"호주는 초인 강국이 아니니까. 청룡을 막고 있는 것만으로도 잘 하고 있는 거긴 한데."

메이든이 혀를 찼다.

"언니. 도착까지 얼마나 남았어요?"

"우리는 대충 10분. 다른 수송기는 못해도 20분."

지금 둘이 타고 있는 수송기는 메이든의 자가용 수송기로, 메이든의 기술력을 모조리 쏟아 부은 첨단 기술의 산물이다.

속도는 보급형 수송기와 비교할 게 아니다.

"아슬아슬하네요."

유화가 몬스터들의 폭주 현상 증가치와 현재 상황을 다시 면밀히 살폈다. 아슬아슬하긴 한데, 10분 정도는 막아 낼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위험해."

그러나 메이든의 표정은 반대로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앞선 청룡에 이어 백호가 폭주한 텀과 거리. 그리고 4개의 실험실 위치를 분석해 보면······."

메이든의 손짓에 홀로그램이 이리저리 모습을 바꾸었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현무가 출현할 가능성이 커."

"······현무."

유화의 표정도 다시 심각해졌다. 바보처럼 다른 두 마리의 사방신에 대한 걸 까먹고 있었다.

"현무가 출현한 후 5분 내에 주작이 출현할 거고. 그렇게 되면······."

"대참사네요."

사방신 네 개체가 발생할 폭주 공명 현상은 호주 전역으로 뻗어나갈 것이고. 호주 전역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날 것이다.

"그 꼬맹이는 이런 사태를 벌여 놓고 대체 뭐하는 거야!"

메이든이 초조함에 다리를 떨며 투덜거렸다. 메이든의 스마트폰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그대 모습은~ 보랏빛처럼~

현재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잔잔한 노래가 착신음으로써 수송기 내부에 울려 퍼졌다.

"······양반은 못 되네."

발신인을 확인한 메이든이 픽 웃었다.

[강서율]

메이든은 전화를 받았다.

"꼬맹이! 지금 어디야!"

―메이든 씨. 지금부터 제 얘기 잘 들어주세요.

* * *

―······오냐. 네가 어떻게 MK-3에 대한 것까지 알고 있었는지는 나중에 캐묻기로 하고. 일단은 네 말대로 해 주마.

내가 빠른 속도로 달려감에 따라 풍경이 빠른 속도로 바뀌어 간다.

"네. 감사합니다."

―절대 무리하진 말고. 위험하면 바로 도망가. 알지?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그래. 이따 보자.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이걸로 준비는 끝.

남은 건 실전뿐이다.

나는 계속해서 달렸다.

다행히 '들끓는 순혈의 피' 덕분에 체력 회복은 탈 인간급이다.

덕분에 전력질주로 내달려도 버틸 수 있다.

이 속도라면 앞으로 5분 내에 제 3실험실에 도착할 수 있다.

아직 현무도 출현하지 않은 것 같고. 주작의 출현보단 먼저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도착만 하면 폭주 직후의 제일 허점이 많은 틈을 노려서 주작의 날개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을 거다.

날개가 없는 주작은 마갑 없는 최지훈. 언노운 없는 진리의 구명자다.

내 계획은 완벽하다.

피이이잉-!

그 순간, 꽤나 먼 거리에서 맹렬한 마력의 폭풍이 뿜어져 나왔다.

"나왔구나."

현무의 출현을 알리는 마력의 폭풍이었다.

현무의 특성 중에는 일정 범위 내의 전파 방해가 있다.

내 폰이 먹통이 된 걸 보니 확실하다.

이제 남은 건 주작 한 마리.

대충 텀을 생각해 보면, 짧게는 7분. 길게는 10분 내에 출현할 것이다.

시간은 충분하다.

······그렇게 생각했다.

화르르르르르륵-!

"······뭐?"

그 순간, 저 멀리서 맹렬한 화염 기둥이 피어오름과 동시에.

―끼야아아아악!

새의 울음소리가 천지를 흔들며 울렸다.

"······왜?"

사방신 네 개체의 총 출현을 알리는 절망의 울음 소리였다.

* * *

"저, 정말 이래도 될까요?"

제 3실험실 내부의 대피소에서 한 연구원이 불안으로 잠식된 얼굴로 입술을 바들바들 떨었다.

"주···주작을 일부러 폭주시키다니······."

"그럼 자네는 감옥에서 평생을 썩어도 좋단 말인가?"

비스트 마스터가 눈을 부라렸다.

"그건······."

주작의 빠른 출현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다.

비스트 마스터가 벌인 짓이다.

상황을 더욱 난잡하게 만들어서,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해서.

"하, 하지만 폭주 인자를 더욱 강화해서 폭주시킬 필요까진···!"

오직 그것만을 위해서 주작을 더욱 강화시켜 세상에 풀어 버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지금의 사방신은 너무 약해. 이렇게라도 안 하면 도망갈 수 없어."

비스트 마스터의 눈이 추악한 빛으로 빛났다.

"그럼 슬슬 도망갈 준비를 하도록 하지. 주작이 이쪽으로 부리를 돌리기 전에 말이야."

완전한 상태면 모를까, 지금의 불완전한 사방신들이 토벌되는 건 시간문제다.

해외의 다른 초인들이 도착하기만 하면 손 쓸 도리도 없이 토벌되겠지.

그 전에 도망가야 한다.

"여, 연구실장님! 이걸 보십시오!"

한 연구원이 당황한 얼굴로 화면을 가리켰다.

"무슨 일이지?"

비스트 마스터가 화면을 바라봤다. 제 1실험실 인근의 CCTV에 찍힌 장면이었다.

다른 CCTV는 현무의 전파 방해에 의해 모조리 먹통이 됐지만, 애초에 현무를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파 방해에 내성을 지닌 CCTV라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저놈은··· 뭐지?"

화면을 바라보면 비스트 마스터의 동공이 경악으로 파르르 떨렸다.

현무가 모든 걸 파괴하려는 듯이 포효하며 난동을 부리고 있다.

여기까진 좋다.

"저놈은 대체 누구냐고!"

문제는 그 현무와 홀로 대적하고 있는 검은 인영이다.

온통 검은 옷을 입고 있는 남자.

후드로 얼굴을 통째로 가리고 있는데다가, 가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을 파악할 수 없었다.

―키야아아아악!

그 의문의 남자가 각기 크기가 다른 기형적인 단도를 휘두를 때마다 현무의 비명소리가 메아리처럼 뒤따라 울렸다.

"어, 어떻게 현무의 방어력을 뚫고!"

현무의 강점은 방어력이다.

물리, 마법 가리지 않고 99%가량의 데미지를 흡수하는 '갑각'은 현무의 아이덴티티다.

불완전한 상태라고 할지언정 그 뛰어난 방어력은 어느 정도 건재하다.

그러나 남자의 검은 그 단단한 현무의 갑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도륙내고 있었다.

"랭킹 10위권 이내의 초인이라도 된단 말인가!"

초인들의 정점이라 불리는 S랭크 초인들 중에서도 또 다른 하늘이라 불리는 랭킹 10위권 이내의 초인들.

그들이 움직인 건가?

'아니야. 내 기억에 저런 전투 스타일을 지닌 초인은 없어.'

최소한 랭킹 100위권 내의 초인들은 모조리 외우고 있다.

그중에도 저런 스타일로 싸우는 자는 없었다.

"설마!"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아우터 블랙의 부하인가!'

그래.

그것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인물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가 나를 처리하기 위해 보낸 살수!'

비스트 마스터가 당황하는 와중에도, 남자는 현무를 무참하게 도륙해 나갔다.

"이, 이대로라면 현무는 5분 이내에 사망합니다!"

할 말을 잃었다.

제일 먼저 출현한 청룡도, 그 뒤에 출현한 백호도 아직 건재한데. 세 번째로 출현한 현무가 빈사 상태라니.

"······제길!"

비스트 마스터가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현무가 소멸하면 혼란을 틈타 도망간다는 계획에 문제가 생긴다.

그렇다고 현무를 살릴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어쩔 수 없지. 탈출 계획을 강행한다."

주작이 시가지에 들어선 직후부터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는데.

그럴 여유는 없을 것 같다.

"모든 자료를 파기하고, 샘플만 챙겨서 이동한다!"

"네, 네!"

그렇게 연구원들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였다.

콰아아아아아앙-!

대피소 밖에서 지축을 흔드는 충격파가 울렸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

―끼야아아아아악!

동시에 주작의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화, 화면! 주작을 화면에 띄워!"

비스트 마스터가 소리쳤다.

"바로 띄우겠습니다!"

한 연구원이 키보드를 벼락같은 속도로 두들긴 지 3초.

대피소의 메인 화면에 주작의 거체가 담겼다.

"······뭐?"

바닥에 처박혀,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주작의 모습이 말이다.

"저건?"

그런 주작 위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현무를 상대하는 중인 남자와 마찬가지로 전신이 검은 남자였다.

검은 풀 플레이트 아머.

어떤 광물로 만든 것인지, 섬짓하면서도 아름답다는 감정을 느끼게 하는 묘한 빛깔의 갑옷이었다.

어둠을 금속으로 벼려, 갑옷으로 만든다면 저런 느낌이 아닐까.

―캬하하!

그 남자가 주작의 날개에 검은 창을 꽂은 채로 광소했다.

꿀꺽.

누군가가 마른침을 삼켰다.

카메라 너머의 영상일 뿐이지만, 남자가 몸에 두르고 있는 위압감은 주작에 비견될 정도로 강렬했다.

―피. 육편. 장기. 혈액!!

쇳소리처럼 차가운 광소와 함께 남자의 주위에서 마력이 폭발했다.

―끼에에엑!

분노에 휩싸여 화염을 방사하는 주작.

―크하하하하!

주작의 화염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쇄도하는 남자.

압도하는 것은 단언컨대 남자였다.

"······괴물."

비스트 마스터의 눈에는 남자가 주작보다 괴물같이 보였다.

"······저놈은 또! 또! 뭐란 말인가!!"

비스트 마스터가 절규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계획대로 되는 일이 없다.

마치 세계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난 세계를 위해서 이렇게 헌신했는데! 세계가 나를 배제하려 하는 건가!'

"으아아아아!"

쾅!

비스트 마스터가 테이블을 쿵 내리쳤다.

"여, 연구소장님. 어떻게 할까요?"

"이대로 주···주작이 소멸하면 도주 계획 같은 건 도저히······."

그 순간, 비스트 마스터의 떨림이 멎었다.

"그래······."

세계가 자신을 버렸다면.

자신도 세계를 버리겠다.

"계획을 바꾸겠다."

비스트 마스터의 마음속 시커먼 감정이 더욱 어둡게 물들어 갔다.

"7번 샘플과 9번 샘플을 가져 와."

* * *

루시퍼의 마창은 S랭크 고대 유물이다. 지니고 있는 고유 능력만 해도 7가지.

능력치 보정은 물론, 전투 보정에 초속 재생, 마력 무한에 최지훈의 마갑과 비슷한 [악의의 기사]라는 능력도 있다.

주위의 시간을 느리게 하며, 마력이 닿는 한에선 순간이동까지 할 수 있게 해 주는 '시공간의 침공자'이라는 사기적인 능력도 있다.

단점이라고 해 봐야 [살인충동]에 시달린다는 것 정도.

나는 이 무기의 주인이 그 미치광이 악마 '루시퍼'라는 것 때문에 [살인충동]이라는 디버프를 필요 이상으로 경계했다.

막대한 힘을 다루기 위해선 막대한 대가가 필요하다는 건 자명한 이치였으니까.

그러나 막상 사용하고 보니, 그리 대수로운 페널티가 아니었다.

"육편을 흩날려라! 크하하하!"

그도 그럴 게, 이렇게 기분이 좋지 않은가.

하늘을 날아가는 기분이다.

촤아아아악-!

창을 휘두를 때마다, 뒤따라 울려 퍼지는 파육음에 정신이 아찔해진다.

하늘을 수놓는 붉은 물감에 정신이 몽롱해진다.

붉고, 붉은, 붉어서, 붉으니.

"아아."

기분 좋다.

신체를. 육편을 가르는 기분이 이렇게 좋은 것이라니.

아. 다른 몬스터를 벨 때는 어떤 기분일까.

몬스터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어떤 감촉일까.

분명 몬스터의 질긴 피부에 비해서 꽤나 부드러울 테지.

그 부드러운 피부를 창 끝으로 서서히 가르는 거다.

"하아."

분명 굉장히 기분 좋을 거다.

그 감각을 느끼기 위해선, 일단 눈앞의 쓸모없이 크기만 한 불닭을 죽여 버릴 필요가 있다.

내 입가가 반달 모양을 그렸다.

"데스 퍼레이드."

화아아아악-!

신체를 두르고 있는 풀 플레이트 아머에서 어둠이 폭발하며, 하늘로 솟구쳤다.

쿵, 쿵, 쿵.

심장이 뛰듯이 규칙적으로 폭발하던 어둠은.

이내 내 창 끝에 깃들었다.

불닭의 두 눈에 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서렸다.

그 감정이 나를 향한다는 사실에 다시금 전율이 흘렀다.

나는 환하게 웃었다.

마지막까지 즐겁게 해 주는구나.

"잘 가."

루시퍼의 마창이 주작의 가슴을 노리고 쇄도했다.

데스 퍼레이드.

영혼 그 자체를 파괴하는 루시퍼의 권능에서 비롯된 기술이다.

푸우우욱-!

창이 주작을 꿰뚫는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파스스스스-

주작의 신체가 먼지처럼 흩날리기 시작했다.

"끼야아아아아악!"

영혼 자체가 불완전한 주작이 데스 퍼레이드를 맞고 형태를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

황홀하다.

생명이 사그라드는 순간은 어찌도 이리 아름다운가.

그 순간이었다.

파지지직-!

루시퍼의 마창에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Error! Error!]

시간 제한.

내가 루시퍼의 마창을 쥔 뒤로 1분이 흐른 것이다.

"어딜!"

나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이대로 창을 놓아 버리기 아쉬웠다.

이제야 내 본질을 알았는데!

행복을 알았는데!

이대로 놓을 수는 없었다.

"크아아악!"

하지만, 반동은 점차 거세졌다.

눈앞에 깨진 에러 메시지가 마구 겹쳐서 떠올랐다.

결국 버티는 것에 한계가 왔다.

파직-!

나는 어쩔 수 없이 루시퍼의 마창에서 손을 놔 버렸다.

"헉, 헉."

숨을 헐떡이며 바닥을 나뒹구는 루시퍼의 마창을 내려다봤다.

"······."

머릿속이 점점 차가워졌다.

[살인충동]이라는 디버프에서 벗어나서 멀쩡한 내 정신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멀쩡한 정신으로 내가 조금 전 생각했던 것들을 떠올려 봤다.

"······시발?"

그 순간 내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게 물들었다.

"와. 미친. 와······."

내가 무슨 개소리를 지껄인 거지?

부끄러워서 손발이 바들바들 떨린다.

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은 기분이다.

"······후."

나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다잡았다.

그래. 겨우 이 정도 대가로 주작을 쓰러트렸으니, 잘 된 거야. 암. 그렇고 말고.

그렇게 정신 승리를 시전했다.

"!"

머릿속에 경종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저 멀리서 느껴지는 악의.

짙은 살기가 유형의 기운으로 느껴진다.

난생 처음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설마 새로 얻은 악마족의 특성인가? 분명 이런 효과를 가진 특성이 있었지.

분명 [악의 감지] 였던가.

"큭!"

나는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콰아아아앙-!

간발의 차로 내가 있던 위치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나는 한 바퀴 굴러서 일어난 뒤, 뒤를 바라봤다.

"빌어먹을 것들이이이이이!"

"······비스트 마스터?"

광인.

비스트 마스터가 침을 질질 흘리며 광소했다.

"······주작?"

등에 붉은 이형의 날개를 파닥이면서.

< 95화 사방신 (5) > 끝

< 96화 사방신 (6) >

제 1실험실 앞.

현무와 허미트가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실험실은 이미 넝마가 되어 원래의 형태를 잃어버렸고, 나무들은 수수깡처럼 부서져 있다.

현무의 거체에 짓눌려 박살 난 것들이다.

뱀처럼 생긴 꼬리를 휘두를 때마다 지형이 바뀌고, 발을 내딛을 때마다 천지가 울린다.

그런 존재를 허미트가 혼자서 압도하고 있었다.

"별 거 아니네요."

불완전한 상태로 폭주 상태에 접어든 현무는 솔직히 말해서 별 볼일 없었다.

그냥 위압감만 강렬한 쭉정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허미트의 기준으로 쭉정이라는 의미다.

'확실히 상성이 좋아.'

출현과 동시에 주위의 전파를 모조리 먹통으로 만들어 버리는 전파 방해는 세간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허미트에겐 단점이 아니라 이점이다.

현무 특유의 방어력은 허미트의 특성, '안개의 검'에 의해 그 의미를 상실했다.

현무의 꼬리가 허미트를 향해 뱀처럼 쇄도했다.

무게는 곧 힘.

당연히 품고 있는 위력은 강력했다. 하지만 속도는 형편없었다.

허미트의 눈에는 슬로우모션으로 보였다.

허미트는 가볍게 공격을 회피함과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푸확!

검이 안개처럼 흐릿해지더니, 현무의 단단한 피부를 무처럼 썰고 지나갔다.

안개의 검.

말 그대로 안개 같은 검으로, 상대의 방어력을 완전히 무시한다는 사기적인 효과를 지닌 특성이다.

이렇듯 장점 두 가지를 상실하니, 남은 건 끈질긴 생명력뿐.

헌데 지금은 그 생명력마저도 풍전등화다.

서 있는 것조차 힘든 듯, 네 다리를 바들바들 떨고 있다.

허미트의 연이은 공격에 결국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그럼 슬슬 마무리를······."

그런 현무를 보며 허미트가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고 했을 때였다.

쒜에에엑!

하늘에서 수십 종류의 장병기가 쏟아져 내렸다.

"······이건?"

푸른 마력빛으로 빛나고 있는 각양각색의 무기들이 현무를 찢어발기겠다는 의지를 품고 쇄도했다.

쾅! 칭! 푸욱!

갑각에 튕겨나가고, 빗겨나가는 무기도 있었고.

허미트가 베어 둔 갑각의 틈을 뚫고 피부에 꽂히는 무기들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허미트가 중얼거렸다.

"이건··· 비혼 길드장의 구현화?"

마력에 의해 생성된 무기들을 쏘아내는 공격 방법은 비혼 길드장의 특기 중의 특기다.

"쿠오오오옥!"

현무의 비명 소리가 크게 울렸다.

멀쩡한 상태였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코웃음을 쳤을 공격이겠지.

하지만 지금의 현무에겐 이 공격을 버텨낼 만큼의 여력이 없었다.

쿵-

계속해서 날아드는 칼날의 비를 맞으며 현무는 무릎을 꿇고 털썩 쓰러지기 시작했다.

콰아앙-!

단단한 갑각이 지면에 부딪치며 지축이 크게 울렸다.

현무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허무한 끝이었다.

숨을 거둔 현무를 바라보고 있던 허미트의 뒤로 누군가가 다가갔다.

"설마 현무와 싸우고 있다는 의문의 초인이 너일 줄은 몰랐는데."

메이든 크리티네스.

"반갑다. 우리 구면이지?"

그녀가 차갑게 분노했다.

"······예. 오랜만에 뵙는군요."

허미트가 쓰게 웃었다.

하필이면 가장 만나기 싫었던 사람이랑 만나 버렸다.

"형님의 장례식 이후니까. 대충 10년 정도만인가요."

허미트가 착용 중인 가면을 벗으며 싱긋 웃었다.

"그래."

드러난 그의 얼굴을 보며 메이든이 사납게 웃었다.

"정확히 11년만이다 이 씹새끼야."

* * *

주작이 소멸한 직후.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비스트 마스터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게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아니, 따지기는 하고 있다.

"이 세상은 잘못됐다!"

비스트 마스터가 주먹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모두가 초인에게 열광할 뿐! 뒤에서 세상을 위해 힘쓰는 연구자들이나 장인들에겐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지!"

등에는 주작의 날개가.

양 다리에는 백호의 다리가.

두 눈은 청룡의 눈이.

그리고 전신의 피부는 현무의 갑각처럼 시커멓게 물들어 있다.

"이해하려고 했다! 관객들은 배우를 보고 환호하는 법. 그 뒤에서 스태프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관심을 가지지 않는 건 당연하니까!"

그런 기형의 존재가 되어 버린 비스트 마스터가 침을 질질 흘리며 광소했다.

"하지만 초인들은 그러지 말았어야지! 그들만큼은 우리를 존중해 줬어야지!"

파충류처럼 쫙 갈라진 두 눈에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최소한! 연구원들의 노력을 자신의 업적으로 포장하고, 가로채진 말았어야지!!"

백호의 다리에서 폭발하는 각력은 막대한 속도를.

청룡의 눈에서 흐르는 빛은 미래예지에 가까운 통찰력을.

주작의 날개에서 일렁이는 화염은 공수만능의 전투력을.

전신에 빼곡히 박힌 현무의 피부는 막강한 방어력을.

"그래서 초인이 됐다."

사방신의 장점을 한 군데 모아, 다운그레이드 시킨 듯한 이형의 존재가 맹렬한 살의를 지닌 채 나를 죽이기 위해서 전력을 다하고 있다.

"S랭크에 올랐다! 내 연구의 결과로 말이야!"

본래 비스트 마스터의 힘은 D랭크 초인과 비견될 정도로 나약하다. 그에겐 재능이 없었다.

그런 그가 S랭크 초인 중에서도 상위 랭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몬스터를 수족처럼 다룰 수 있다는 이형의 힘 덕분이었다.

10마리가 있으면 S랭크 초인과 대적할 수 있는 몬스터들을 최대 100체까지 다룰 수 있는 힘.

그 힘으로 비스트 마스터는 S랭크 초인 상위 랭커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세상의 인식은 달라지지 않았다. 불의 마녀. 얼음의 기사. 뇌제. 백귀야행. 화려하고 멋있는 초인들이 득권하는 이 빌어쳐먹을 세상은 그대로였어!"

비스트 마스터는 소리쳤다.

"S랭크 초인의 자리에 올랐어도 나는 결국 연구원일 뿐. 여전히 모두가 날 무시했다."

초인들을 백업하는 오퍼레이터.

그들의 무기를 만드는 장인들.

그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역할을 다할 수 있게, 몬스터를 연구하고 위기를 감지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든 과학자들과 연구원들.

그들의 대우는 절대 좋다고 할 수 없다.

비스트 마스터는 그들의 대우가 달라지길 바랐다.

자신이 자부심을 가지고 하는 연구를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랐다.

"15년 전. 한 사건에서 영웅이 죽었다. 세계가 울었지!"

비스트 마스터가 울부짖었다.

"그 사건으로 백이 넘는 과학자들이. 오퍼레이터가. 내 가족이. 내 스승님이 죽었음에도, 고작 기사 한 줄 뜬 게 다였다! 영웅에 대한 애도는 무려 일 년이 이어졌는데!"

그의 공격은 빠르고 강력했지만, 위협적이진 않았다.

사방신의 인자를 몸에 품어 신체 스펙은 올랐지만 그 신체를 다루는 기술이 형편없었다.

D랭크 나부랭이에 불과한 내가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것은 그 덕분이다.

나는 내 피부를 스치는 주먹을 간신히 피하며 몸을 날렸다.

"그래서 바꾸기로 했다. 이 썩어빠진 세상을!"

비스트 마스터가 사방신 연구에 빠진 이유.

"초인이 없어도 무사히 기능하는 아름다운 세계!"

그는 꿈을 꾸었다.

"내 연구 결과로 모두가 평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

망상에 가까운 꿈.

그러나 이루어지면 아름다울 꿈.

"그 꿈을 이룰 날이 멀지 않았는데! 손을 뻗으면 코 닿을 거리에 있었는데!"

그의 외형이 더욱 기괴하게 변해갔다. 사람의 형태는 이제 거의 남지 않고, 사방신이 섞인 기묘한 키메라가 되어 간다.

"제기랄! 제기라아아알!"

그런 존재가 살의에 몸을 맡긴 채 주먹을 날린다.

바람의 길이 제시하는 붉은 궤적이 이상할 정도로 굵다.

그만큼 막대한 위력을 품고 있다는 거겠지.

후우웅-!

하지만 제아무리 강한 공격이라 해도 맞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법.

비스트 마스터는 연구자이며 지배자일 뿐. 전사가 아니다.

72세 평생 검은커녕 주먹도 제대로 쥐어 본 적 없는 초보 중의 초보.

괴수처럼 예상할 수 없는 움직임을 한다면 모를까.

인간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아마추어처럼 움직이는 그의 공격을 피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나느으으은!"

그나저나 아까부터 저 개소리 때문에 거슬려 죽겠네.

"아오."

더는 못 참겠다.

"뭐, 어쩌라고?"

나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네 꿈이 어떻든, 사회가 어떻든. 내 알 바야?"

"······뭐?"

비스트 마스터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표정은 경직됐고, 두 눈은 번들번들 빛난다.

살의가 더욱 증폭됐다.

"초인이 없어도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세계. 좋아. 좋은데."

그런 눈으로 보면 뭐 어쩔 껀데?

"그런 꿈은 3살짜리 애도 꾸는 거고. 존중받고 싶었으면 결과를 냈어야지."

마침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는데, 잘 됐네. 잠시라도 쉴 시간을 주면 땡큐지.

"그 꿈의 결과가 사방신의 폭주면. 누가 알아주겠어? 연구원들의 노고? 부정적인 시선이 심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이, 이···!"

세계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무언가를 하는 건 좋다.

하지만 그 행위의 결과가 수천만 명 단위의 죽음이라면?

몬스터 대폭주라는 최악의 재난이라면?

"넌 그냥 쓰레기야. 평화로운 세계를 위해서? 개소리."

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냥 넌 다른 사람들한테 무시받는 게 싫었던 것뿐이야."

알량한 자존심.

"네 이기적인 속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세계를 위해서라고 변명하는 거잖아?"

저놈은 쓰레기다.

암세포다.

이미 곯을 대로 곯아서 잘라내야만 하는 희대의 악이다.

"이, 이이이 이놈이! 뭘 안다고 멋대로 지껄여!"

"몰라. 내가 네 심정을 어떻게 알아?"

서서히 호흡이 정돈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슬슬 시간이 됐다.

"너 같은 소시오패스의 마음을 이해하면 나도 소시오패스게?"

메이든에게 부탁한 '보험'이 도착할 시간 말이다.

"이,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쓰레기 새끼가아아!"

참으로 싸구려틱한 3류 악당의 대사를 날리며, 비스트 마스터가 포효했다.

그 순간, 주위에서 수많은 몬스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흐. 크흐히히히."

비스트 마스터의 능력은 전투가 아닌 지배.

그를 S랭크 초인의 자리까지 올려 준 능력이 내게 이빨을 드러냈다.

"그래. 난 틀리지 않았어. 틀린 건 세상이야. 맞아. 그것밖에 없어."

"미친놈."

신체에 심은 사방신의 인자가 폭주라도 하는 걸까. 그의 신체가 더욱 기형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뿌득, 콰득!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신체가 점점 커지고 있다.

느껴지는 위압감이 한층 강렬해졌다.

"크르르······."

그와 동시에 포위를 마친 몬스터들이 날 향해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비스트 마스터는 더 강해졌고.

다른 몬스터들까지 합류했다.

말 그대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이 세상은 강자가 곧 진리! 넌 약자고! 난 강자! 옳은 건 나다! 크하하하!"

비스트 마스터도 승리를 확신한 듯했다.

"지랄."

나는 웃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슬슬 시간이다.

미리 들어 둔 '보험'이 도착할 시간.

후우우우웅-!

저 멀리서 무언가가 공기를 뚫고 날아드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지?"

미사일이라도 날아오는 것처럼, 맹렬한 불꽃을 뿜으며 정확히 우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무슨 소리긴. 널 죽일 폭탄이 날아오는 소리지."

주작을 처리하지 못했을 때를 대비했던 '보험'. 그것이 날아오는 것이었다.

"······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까 이쪽으로 쏴 달라고 요청을 해 뒀거든. 메이든 씨의 역작이라 위력이 제법 강할 거야."

비스트 마스터의 얼굴이 굳었다. 굳은 거 맞지?

안면이 청룡처럼 변해서 잘 모르겠네.

"무, 무슨 헛소리를! 저게 만약 메이든의 폭탄이라면 너도 무사하진 못할 텐데!"

"알아."

나는 점점 커져 가는 물체를 올려다봤다.

"근데 나 하나 죽어서 너 같은 악당을 처리할 수 있으면 남는 장사 아니겠어?"

나는 비스트 마스터를 바라보며 웃었다.

"평화를 위해 죽는다. 그게 초인의 역할이니까."

"이, 이 새끼!"

"도망갈 수 있으면 도망가 봐. 반경 1km는 쑥대밭이 될 테니까 최소한 그보단 멀리 도망가야 할 거야."

여유롭게 팔짱까지 꼈다.

"큭! 너희들! 날 지켜라!"

비스트 마스터가 나를 포위하고 있던 몬스터들을 물려서 자신의 주위로 모았다.

이어 주작의 날개로 신체를 가리더니, 몰려든 몬스터들에게 자신을 감싸게 했다.

"와우."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크흐. 이걸로 핵폭탄이 터져도 난 무사할 거다!"

"그러게."

저런 방법이 있었구나.

"개죽음! 네 죽음은 개죽음이다! 으하하하!"

쿠우우우웅-!

저 멀리서 날아오는 물체의 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이제 5초 내에 지면에 격돌할 테지.

5.

4.

"고맙다."

나는 비스트 마스터를 보며 웃었다.

3.

2.

"속아 줘서."

아주 사악한 웃음이었다.

1.

"······뭐?"

0.

쿠우우우우웅-!

다음 순간, 무언가가 바닥에 박히는 소리와 함께.

파아앙-!

지면을 중심으로 충격파가 퍼져 나갔다.

무지막지한 바람에 내 전신의 털이 옆으로 흩날렸다.

"안······ 터져?"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의문의 물체가 폭발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당연하지."

그저 내 옆에 떨어져 지면에 박혔을 뿐이다.

낙하로 인한 충격으로 주위에 뿌연 흙먼지가 흩날렸다.

"폭탄이 아닌데 왜 터져?"

나는 그 흙먼지의 중심에서 팔을 들어 올렸다.

차가운 기계의 감촉이 느껴진다.

[사용자, 강서율 생체코드 인증 완료되었습니다.]

촤라라라락-!

동시에 의문의 물체에서 기계틱한 소리가 울렸다.

봉인이 해제되는 듯한 소리.

"평화를 위해 목숨을 내버리는 초인. 멋지긴 한데."

이내 모든 봉인이 풀린 듯 소리가 멎었다.

흙먼지 너머로 작은 검 하나가 흐릿하게 보였다.

"난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거든."

나는 그 검을 손에 쥐었다.

[긴급 수송용 드론 MK-3.]

[대상, '강서율'에게 무기, '천변(千變)'의 전달을 완료했습니다.]

무기의 주인을 위해 탄생한 변화무쌍한 유일무이의 무기, '천변'

그것이 내 손 안에서 청명한 소리로 울었다.

그와 공명하듯, 목에 걸린 [무기의 극의]가 더욱 붉은 빛으로 빛났다.

마치 내게 천변의 사용법을 지도해주려는 듯이, 아주 밝은 빛으로 빛났다.

내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나는 검을 휘둘렀다.

휘익-

흙먼지를 가르며 아무런 감흥도 없이 휘두른 내 '천변'은.

촤아아아악!

"쿨럭!"

20미터 너머에 있는 비스트 마스터의 신체를 정확히 베어 냈다.

"이···건?"

천변.

사용자의 의지와 컨트롤에 따라 천 가지의 모습으로 변한다는 무형의 무구.

그것이 20미터 길이의 검으로 변해 있었다.

"까비. 좀 짧았네."

반으로 갈려 흩날리고 있는 흙먼지의 중심에서 나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 96화 사방신 (6) > 끝

< 97화 사방신 (7) >

현무의 시체 앞에서 두 명의 남녀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동안 뭐하고 지냈냐?"

"······뭐, 이런저런 일을 하며 지냈습니다."

메이든의 표정은 아주 복잡했다. 그리움, 슬픔, 분노, 동정.

그러한 것들이 한데 뭉쳐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 되었다.

"······저, 언니. 이분 아는 분이신가요?"

그런 두 명을 향해 유화가 다가왔다.

"어. 알렌 벨벳. 뭐, 쓰레기지."

"하하."

메이든의 신랄한 말에 허미트가 머쓱하게 웃었다.

"······빌런이라는 건가요?"

유화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자세를 낮추며 언제든지 공격을 할 수 있게 마력을 가다듬었다.

"아니. 그 정도 쓰레기는 아니었어. 적어도 11년 전까지는."

메이든이 아련한 눈으로 허미트를 바라봤다.

"절도, 사기, 뒷돈 청탁. 돈을 벌기 위해선 뭐든지 했던 쓰레기였지만, 재활용은 가능한 쓰레기였지. 선을 넘진 않았거든."

"······하하. 제 흑역사를 송곳으로 후벼 파시는군요."

"상재 씨가 거의 사람 직전까지 만들어 두기도 했었고."

메이든과 허미트의 만남에는 그녀의 남편, 김상재가 껴 있었다.

김상재가 현역으로 활동하던 시절 허미트와 만났고.

그 후로 이런저런 일이 있어 허미트는 김상재의 밑에서 일을 하게 됐다.

벌써 10년도 넘은 일이다.

"물론 11년이나 지났으니까. 빌런이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긴 한데."

메이든이 넝마가 되어 있는 현무를 바라보며 픽 웃었다.

"빌런이 이 상황에 현무를 막진 않을 테니까. 그건 아니겠지."

"······그건 그렇네요."

유화의 경계심이 조금 풀렸다.

빌런이 국가 재난 사태에 도움을 줄 리가 없다.

"그래. 이 배은망덕한 놈아. 내가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참 많다만."

메이든이 혀를 차며 주위를 살폈다.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니까, 뒤로 미뤄 둘게."

알렌 벨벳이란 남자는 김상재를 꽤나 따랐다.

그런 남자가 김상재의 사망 이후에 어떤 인생을 보냈는가.

지금은 대체 뭘 하고 있는가.

궁금한 건 한 가득이었지만, 뒤로 미루기로 했다.

"근데 이거 하나는 묻고 넘어가야겠다."

그러나 이것만은 물어야 했다.

"알렌 너. 꼬맹이······. 강서율이랑 무슨 관계냐?"

메이든이 호주에 도착하자마자 주작도, 다른 사방신들도 아닌 현무에게 향한 이유는 다름 아닌 강서율 때문이다.

메이든은 조금 전 수송기에서 강서율과 나눴던 통화의 내용을 떠올렸다.

―주작은 제가 어떻게든 하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불완전한 사방신 정도는 저 혼자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MK-3(메이든 크리티네스-3)로 천변을 보내 주실 수 있을까요? 제 생체 신호. 저번에 수집하셨으니까, 가능하잖아요?

대체 MK-3에 대한 건 어떻게 알았는지. 아직까지 의문이다.

아무튼 강서율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아. 그리고 현무도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거예요. 제 지인을 보내 뒀거든요.

―그러니 메이든 씨와 유화 씨는 호주 전역을 통틀어서 가장 위험하다 싶은 곳에 지원을 가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일단 알겠다고 긍정은 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위험한 것은 현무였다.

주작이야 강서율이 직접 향했으니, 어찌어찌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고 쳐도 현무를 상대하고 있을 '강서율의 지인'은 그렇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메이든은 MK-3를 출발시킨 직후 제 1실험실의 현무에게로 향했다.

강서율의 부탁대로 호주 전역에서 가장 위험하다 생각되는 현무를 막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허미트를 만났다. 현무를 혼자서 장난감 다루듯이 가지고 놀고 있는 허미트를 말이다.

"주작을 상대하는 꼬맹이와 현무를 상대하는 너. 설마 이 상황에서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할 생각은 아니겠지?"

"음."

허미트가 짧게 생각을 정리했다.

자신과 강서율이 각각 현무와 주작을 맡고 있는 상황에서 서로 관계가 없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진리의 구명자 소속 간부라는 사실을 진리의 구명자에게 크나큰 원한을 품고 있는 메이든에게 알릴 수도 없는 법.

"그냥 상부상조하는 관계입니다."

이렇게 얼버무리는 게 최선이다.

"······그래. 비밀이라 이거지."

메이든이 픽 웃었다.

"좋아. 그럼 일단 넘어가자고. 시간이 없으니까."

메이든이 아직까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스마트폰을 비롯한 통신 장비들을 확인하며 혀를 찼다.

그래도 대충 상황은 알겠다.

현무를 제외하고도 저 멀리서 느껴지던 막대한 마력과 맹렬한 화염이 멎었다.

'그 꼬맹이는 진짜.'

메이든이 혀를 내둘렀다.

아마 강서율이 혼자 주작을 처리한 거겠지.

아무튼 이걸로 남은 사방신은 백호와 청룡뿐이다.

그 둘만 처리하면 폭주하는 몬스터들도 금방 처리될 터.

"우리는 백호, 청룡 쪽으로 갈 건데. 너는?"

"저는 일단 강서율에게 가겠습니다."

* * *

S랭크 무기 천변(千變)

세계 제일의 장인 정일용 어르신이 만든 역작.

까다로운 착용 조건을 모조리 배제하고 오로지 성능만으로 볼 경우 S랭크를 가볍게 압살할 정도로 뛰어난 성능을 지닌 사기적인 무기다.

날붙이의 기본인 절삭력은 말할 것도 없고. 강도, 마력 전도율까지 모든 성능이 압도적이다.

촤아아악!

"끄아아악!"

D랭크에 불과한 내 공격에 현무의 갑각으로 무장한 비스트 마스터의 피부가 무처럼 썰려 나가는 것도 천변의 압도적인 성능 덕분이다.

"이, 쓰레기 새끼가아아아!"

비스트 마스터가 분노에 몸을 맡긴 채 달려 들었다.

이건 좀 위험한데?

나는 천변에 마력을 둘렀다.

'부스트.'

천변의 고유 능력, 1초 남짓한 시간동안 신체를 가속시킬 수 있는 특성을 발동했다.

후웅-

비스트 마스터의 공격은 허공을 가르는 데 그쳤다.

"투우사라도 된 기분인데."

저돌맹진.

점점 행동이 짐승처럼 변해 간다.

아마추어 같았던 움직임을 보일 때와는 달리 분노에 몸을 맡기고, 짐승처럼 행동하니 오히려 공격을 읽기가 힘들어졌다.

아마 천변이 없었다면 한참 전에 저민 고기가 되지 않았을까.

"죽어! 빌어 쳐먹을 초인의 씨앗!"

찌릿한 살기를 내뿜으며 지면을 박찬다.

빠르다.

백호의 하체에 슬슬 적응하기 시작한 것인지,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다.

그러나 대응할 수 없는 건 아니다.

나는 빠르게 천변을 '단검'의 모습으로 바꾸었다.

'천변'의 고유 능력.

'천 가지 무구'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순식간에 모습을 바꾸는 만능 무구.

변화 속도는 0.01초가 채 되지 않는다.

후웅-

순식간에 모습을 바꾼 단검.

그 순간 바람의 길이 열렸다.

붉은 궤적.

그것이 평소보다 10배는 많다.

천변의 다채로운 변화 덕분에 회피 루트가 대폭 증가한 것이다.

나는 그중 하나의 길을 선택했다.

몸을 살짝 비틂과 동시에, 단검을 방패로 바꿨다.

비스트 마스터의 돌격 방향에 맞춰, 비스듬히 방패를 가져다 댔다.

키기기기깅-!

맹렬한 마찰음이 울렸다.

비스트 마스터의 신체가 내 방패를 훑고 지나가는 소리였다.

나는 돌격을 완벽히 흘려냄과 동시에 방패를 채찍으로 바꿨다.

촤아악-!

관성에 의해 날아가는 비스트 마스터가 착지하는 순간을 노려서 채찍으로 그의 신체를 구속한다.

"이 새끼!"

힘을 줘서 채찍을 풀어 보려 하지만, 소용없다.

천변의 강도는 열화된 현무의 갑각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나는 그 상태로 채찍의 형태를 조금 바꿨다.

비스트 마스터를 감싸고 있는 채찍에서 새롭게 뻗어 나온 가지들이 사방으로 산개하며,

쾅!

바닥에 뿌리를 내렸다.

이것으로 구속은 완료.

"크으윽!"

동시에 내가 쥐고 있는 채찍의 손잡이 부분을 활의 외견으로 바꾼다.

나는 시위를 당겼다.

후우우웅-!

바람의 살( 虄)

각인의 불길.

정령의 불길.

스파이럴 애로우.

네 가지 특성의 복합 작용과 함께 무형의 화살이 소용돌이치듯이 응축되어 갔다.

"으아아악!"

내 화살의 위력을 직감한 것일까, 비스트 마스터가 몸을 구속 중인 채찍을 풀기 위해 주작의 날개를 확장시켰다.

동시에 등에 갑각까지 형성하며 부피를 늘려갔다.

까득. 까득!

천변이 삐걱대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천변이 모습을 바꿀 수 있는 한계는 약 20미터.

그것도 도검처럼 얇게 했을 경우에나 가능하다.

저렇게 부피를 억지로 늘리면, 아무리 강도가 높아도 버틸 수 없다.

"흐아아압!"

파칭!

결국 채찍의 형태를 이루고 있던 천변이 촤르륵 풀렸다.

탓-!

비스트 마스터가 바로 지면을 박찼다.

"핫!"

날 바라보며 비웃음을 흘린다.

내 비장의 한 수가 무용지물이 됐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근데 그건 네 생각이고.

나도 비웃음을 돌려줬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해 보던가."

애초부터 내 목적은 스파이럴 애로우를 모을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채찍은 그 역할을 충분히 다 했다.

화르르르륵-!

내 화살에 일렁이는 반투명한 정령의 화염이 바람을 타고 더욱 활활 타올랐다.

후우우우웅-!

바람이 화염의 열에 더욱 거칠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나는 살포시 시위를 놓았다.

파아앙-!

공기를 꿰뚫는.

아니, 공간을 직접 꿰뚫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풍 속성의 장점은 속도.

여기에 천변의 강력한 성능과 화 속성간의 시너지가 화살을 더욱 가속시켰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최대 위력의 기술.

그것이 비스트 마스터를 노리고 빛처럼 쇄도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콰아아아아앙-!

"크아아아악!"

무형의 화살은 비스트 마스터의 가슴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휘이이잉-!

그 순간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화염을 품은 소용돌이.

비스트 마스터를 간신히 감쌀 정도로 작은 소용돌이에 불과했으나, 품고 있는 위력은 막강했다.

"끄아아아악!"

비스트 마스터의 신체가 불타고 있다.

정령의 불길이 명확한 살의를 지니고 모든 것을 불태우기 위해 타오르고 있다.

"뜨거워! 끄억! 끄아아악!"

피부는 물론이고 뻥 뚫린 가슴으로부터 스며든 화염이 비스트 마스터의 장기를 태워 버리고 있다.

꿀렁꿀렁.

불타면서도 재생한다.

화르륵-

재생하면서 불탄다.

"사, 살려 줘어! 끄아악!"

청룡의 특성은 재생력.

아마 청룡의 인자가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

불완전한 연구의 산물인 유전자 이식으론 청룡의 재생력을 10%도 재현하지 못했다.

화르르르륵-!

어느덧 불타는 속도가 재생력을 웃돌기 시작했다.

내 불꽃도 꽤나 약화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재생력이 따라오지도 못하고 있다.

"끄로로롥. 끅끽"

어느덧 비스트 마스터의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마 고통에 정줄을 놔 버린 게 아닐까.

하지만 아직 방심하긴 이르다.

비스트 마스터가 품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사방신의 인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나는 조금 전 무리한 운용으로 잠시 기능을 멈춘 천변을 다시 원래 검의 형태로 되돌렸다.

그리고 20미터 크기의 장검으로 바꾸는 것과 동시에 비스트 마스터의 목을 노리고 휘둘렀다.

서걱-

무언가가 썰리는 소리와 함께.

데구르르.

비스트 마스터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털썩-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그의 신체가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

그럼에도 나는 방심하지 않았다.

저 상태에서도 부활할지 모르는 노릇이다.

나는 끝까지 경계하며 상황을 살폈다.

그렇게 약 1분이 흘러.

"후."

그제야 나는 승리를 확신했다.

비스트 마스터의 분리된 머리와 신체는 미동도 하지 않았고,

지금도 현재 진행형으로 붕괴되어가고 있다.

저 상태에서 살아날 수 있는 건 한참 뒤에나 등장할 '불사의 왕' 뿐이다.

순간적으로 긴장이 쫙 풀렸다.

"죽겠다."

백냥이 포획.

주작 토벌에 이어서 비스트 마스터까지 상대하려니 너무 피곤하다.

도중에 루시퍼의 마창으로 마력이 회복되지 않았으면,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조금 전 스파이럴 애로우도 마력을 한계까지 쥐어 짜서 사용한 것이다.

"······음?"

그렇게 남은 마력을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마력의 유동이 빨라졌다.

이건······ 마력이 오른 건가?

"열심히 했다고 상이라도 준 건가?"

이건 기쁜 오산이다.

그렇게 웃고 있을 때였다.

파지지지지직-!

갑자기 비스트 마스터의 신체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청색, 백색, 적색, 흑색의 빛으로 사방으로 튀었다.

갑작스런 사태에 당황하는 사이.

"크흐흐흐."

반만 남은 비스트 마스터의 머리에서 웃음소리가 흘렀다.

"이 세···상은··· 틀렸어."

희열로 가득 찬 음성이었다.

"이런 세상···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

잿더미로 변해 흩날리는 주둥아리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핏덩이. 피해 봐라. 사방신의··· 공명 현상을 역으로 이용한··· 괴리형 생체 폭탄. 최소 호주의 반은 날···아갈 테니, 피할 수 있으······."

그게 끝이었다.

비스트 마스터의 머리는 재가 되어 뿔뿔이 흩날렸다.

그의 신체의 스파크가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다.

제길!

설마 죽을 때를 대비해서 저딴 개 같은 짓거리까지 준비해 뒀을 줄이야!

저런 쓰레기가 원작에선 어떻게 등장도 안 하고 죽은 거지?

파지지지지직-!

아니지.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저걸 막을 방법을 생각해야 한―

그때였다.

피이이이잉-!

비스트 마스터의 신체가 부풀어 올랐다.

마치 폭발하기 직전의 풍선처럼 부풀었다.

4가지 색으로 빛나는 풍선에 혈관처럼 보이는 것들이 붉게 빛났다.

그 모양새는 누가 봐도 폭발하기 직전의 폭탄 같았다.

주위의 마력이 일그러져 갔다.

제길!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정령의 불길을 이용해서 인자만을 태워 버린다면?

아니, 그럴 시간이 없다.

그럼 천변을 이용해서 베어 버리는 건?

불가능하다.

아니, 가능은 하겠지만 막을 수 있을 거라곤 장담할 수 없다.

바로 터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내 머리가 맹렬한 속도로 돌아갔다. 1초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피이이이잉-!

비스트 마스터의 신체가 더욱 밝게 빛났다.

"······방법이 없어."

내 수중엔 저 폭발을 막을 방법이 없다. 그렇게 확신했다.

그렇게 절망하고 있을 때였다.

"서율아!"

내 뒤에서 하시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시연이와 금호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 아까 마력이 늘어난 것처럼 보인 건, 시연이가 가까워져서 '교감'이 활성화됐기 때문이었구나.

조금 전 떠올랐던 의문이 해결됐다.

그나저나 저 둘이 왜 여기 있는 걸까.

백냥이를 봐주다가, 움직일 수 있을 거 같으면 폭주 중인 몬스터들을 처리해달라고 말해 뒀는데.

아니, 그보다 백냥이는 어디 두고 둘이 온 걸까.

그때였다.

"크르르르르!"

내 뒤, 생체 폭탄이 점멸하고 있는 곳에서 백호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재빨리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백······냥아?"

백호가 한껏 찡그린 표정으로 비스트 마스터의 신체를 감싸고 있었다.

무언가를 결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크릉."

착각일까.

백호가 처음으로 날 바라보며 웃어 준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피이이이이잉-!

마력이 뒤틀리는 소리가 울렸다.

< 97화 사방신 (7) > 끝

< 98화 사방신 (8) >

백호는 6년 전 한 실험실에서 태어났다.

―뇌파가 아주 안정적이군.

―이번 개량은 성공적인 모양이야.

수많은 연구원들의 틈에서 눈을 떴다.

호기심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 애정이라곤 조금도 느낄 수 없는 차가운 눈동자를 기억한다.

―이번 개체는 폐기하지 않아도 되겠어.

그게 첫 기억이었다.

아직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던 시절의 일이다.

―나쁘지 않아. 좀 더 부하를 늘려도 될 것 같군.

―죽어도 돼. 어차피 데이터는 있으니까.

백호가 가장 먼저 깨달은 감각은 아픔이었다.

아프다.

너무 아프다.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지만, 그 감각이 무엇인지 백호는 저 혼자 깨달았다.

다음은 철판 위의 차가운 감각.

신체에 무언가가 주입되는 감각.

피부가 잘려나가는 감각.

그리고 연구원들의 목소리.

―잘 버티는군.

―이번 실험체로 연구가 가속되겠어.

―역시 블랙이 건넨 페가수스의 인자를 섞은 게 좋았어.

괴물 같은 목소리였다.

괴물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살 바엔 차라리 죽고 싶다. 그렇게 생각했다.

―1년이나 버티다니.

―이건 기적이야.

그렇게 1년이 흘렀다.

―좋아. 한 단계 높은 실험을 해 보자고.

―몬스터 파크로 가지. 이놈이 직접 사냥하는 모습을 보고 싶군.

그날.

백호는 처음으로 실험실 밖의 세상을 보았다.

하늘, 나무, 땅, 햇빛.

백호는 처음으로 금속의 차가운 감촉 이외의 감각을 느꼈다.

숲의 풀내음, 햇빛의 따스함, 바람의 시원함.

백호는 처음으로 행복이란 기분을 느꼈다.

―자. 네 먹잇감이다. 가서 죽여라.

그리고 그날.

기적이 일어났다.

―연구실장님! 몬스터 파크 내의 몬스터들이 폭주를 일으켰습니다!

―백호의 감정에 공명하여 제어를 벗어난 것 같습니다!

사방신 네 개체의 고유 특성은 '공명'이다. 슬픔, 기쁨, 아픔, 분노. 그 모든 감정을 공유하는 힘.

백호가 느낀 행복은 몬스터 파크 내의 몬스터들에게 영향을 줬다.

―막아! 제어 코드를 새로 입력 해!

감정을 제어당하던 몬스터들은 갑작스런 감정에 당혹하며 폭주를 일으켰다.

―여, 연구실장님!

―백호가 사라졌습니다!

백호는 그 틈을 타서 도주했다.

전력을 다해서.

뛰고, 또 뛰었다.

자신의 발로 대지를 내딛는 것에 대한 기쁨을 느꼈다.

바람이 털을 스치고 가는 감각에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났다.

행복했다.

행복했지만 무서웠다.

연구원들에게 잡히게 되면 이 행복은 끝난다.

그 사실에 크나큰 공포를 느꼈다.

백호는 계속해서 뛰었다.

그들을 피하기 위해서.

잡히지 않기 위해서.

다행히 백호의 유전자적 힘은 도주에 아주 용이했다.

주위 인기척을 읽을 수도 있었고, 두 다리는 아주 빨랐다.

목에 걸린 기계장치는 도주를 막기 위한 것일 뿐. 위치를 추적하는 건 불가능했다.

―한 달이나 못 찾은 거면, 이미 죽은 거다. 놔 둬라.

―만약 살아 있다 해도, 금방 걸리겠지. 몬스터 파크를 이용하는 손님들이 미끼가 되어 줄 테니, 놔 둬.

그렇게 백호는 자유를 얻었다.

몬스터 파크를 탐험하는 초인들을 필사적으로 피해 가며 하고 싶은 것을 했다.

반쪽짜리 자유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

자신의 힘을 자각했다.

뛰어난 지능으로 많은 것을 학습했다.

그리고 어느 날.

백호는 처음으로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알게 됐다.

그렇게 5년이 흘러.

―금호야. 잘했어!

백호는 금호를 만났다.

햇빛 같이 밝은 모피.

햇빛 같은 따스한 웃음.

햇빛 같이 포근한 마음.

―크릉!

백호는 금호에게 첫 눈에 반했다.

첫 만남은 너무 기합을 넣어서 위협하는 모양새가 됐다.

긴장해서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5년 만에 인간에게 다가가는 것에 두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용기를 냈다.

그리고 그날.

백호는 행복해졌다.

일주일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행복했다.

금호의 품은 따스했고,

그의 주인은 상냥했다.

주인의 여자친구는 바보 같지만 자상했다.

세계를 보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세상이었다.

그거면 됐다.

"크릉."

백호는 미소 지었다.

피이이이잉-!

마력이 뒤틀리는 소리를 들으며, 백호는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6년의 삶보다,

지난 4일의 삶이 더 행복했다.

그걸로 충분하다.

백호는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있는 강서율을 바라보며 살포시 웃었다.

미안.

계속 네 손을 피해서 미안.

인간의 손이 닿는 건 아직 무서웠어.

고마워.

바보처럼 폭주한 나를 구해 줘서 고마워.

내 정체를 알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 줘서 고마워.

금호와 보낼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워.

피이이잉-!

마력의 뒤틀림이 더욱 강해졌다.

백호는 그 뒤틀림을 느끼며, 신체에 마력을 집중했다.

목표는 이 육체에서 뒤틀리는 사방신의 인자를 자신의 몸에 흡수하는 것.

야생의 감이었을까.

이렇게 하면 폭발을 최대한 억누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백냥아!"

강서율의 목소리가 들렸다.

걱정으로 가득한 울부짖음.

고마워.

"백호야아!"

하시연이 눈물을 보였다.

고마워.

"크와아앙!"

금호가 울었다.

찡그린 얼굴도 매력적이다.

고마워.

피이이이잉-!

모든 것에 감사를 느꼈다.

마력의 뒤틀림이 강해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신체에 무언가가 흘러 들어오는 감각에 이를 악물었다.

사방신의 인자를 신체에 흡수하는 거니, 무리가 가는 건 당연했다.

···아프다.

그러나 6년 전에 느꼈던 아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고통스럽다.

하지만 행복하다.

백호는 마지막으로 금호를 눈에 담았다.

···태양 같은 당신.

"갸릉."

···고마워요.

퍼어어어어어엉-!

다음 순간, 백호의 신체 아래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 * *

"크윽!"

밝은 빛이 터지며, 귀에서 이명이 들렸다.

뇌가 흔들릴 정도로 막대한 마력의 폭류를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뜨고 싶어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

그 빛은 3초의 시간을 들여 서서히 멎어갔다.

피이이···.

나는 그 즉시 눈을 떴다.

"백냥아!"

폭발의 중심지에는 크레이터가 생겨 있었다.

전방 10미터 정도의 아주 작은 크레이터.

느껴지던 마력량에 비하면 아주 소소한 폭발이었다.

그 중심에 백호가 쓰러져 있었다. 전신에 화상이 가득하고, 아름다웠던 흰색 털은 검게 그을려 있다.

"백호야!"

우리는 그 중심으로 달려갔다.

새액새액.

백호는 아직 살아 있다.

희미하지만 숨이 붙어 있다.

"서율아! 백호 어떡해!"

하시연이 안절부절하며 백호와 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회, 회복! 서율이 너 천사니까! 신성력 같은 걸 쓰면······."

나는 이를 악물었다.

"······못 써."

내게 그런 특성은 없다.

나는 천사가 아니니까.

"아······."

하시연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슬픔에 잠식된 표정이다.

아마 나도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겠지.

백호가 그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다는 듯이. 너무 마음쓰지 말라는 듯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세한 움직임만으로도 신체에 무리가 간 것일까.

백호의 입에서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우, 움직이지 마!"

나는 바들바들 떨며 백호가 움직이는 걸 막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쩌면 좋지!

"내가······."

내가 청룡을 폭주시킨다는 계획을 세우지만 않았어도.

아니, 폭주가 공명할 가능성을 엄두해 두기만 했어도 이런 일은······.

"모두 내 잘못이야······."

그렇게 입술을 짓씹고 있을 때였다.

"크릉."

금호가 백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터벅터벅.

아주 의젓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호흡이 점점 멎어 가고 있는 백호를 아주 상냥하게 바라보았다.

"금호야······."

금호의 기분이 그대로 내게 전해졌다.

금호는 친구에게 기억되는 자신의 마지막 모습이 슬픔에 잠식된 얼굴이 아닌, 행복한 웃음이길 바랐다.

슬픔을 상기하는 건 나중에 해도 좋다.

지금은 그저 친구에게 최고의 이별 인사를 건네자.

그렇게 떨리는 표정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금호는 웃고 있었다.

"······크흡."

그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금호의 상냥한 마음이 여과 없이 전해져 오기 때문이겠지.

"금호야······."

시연이는 그런 금호의 마음을 본능적으로 느낀 듯.

마찬가지로 두 눈에 눈물을 그렁거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번쩍-!

금호의 신체에서 빛이 흘렀다.

아주 밝은 빛.

태양을 연상시키는 듯한 아주 밝은 빛이었다.

"서, 서율아! 금호가!"

그 갑작스러운 현상에 하시연이 당황한 듯했다.

"······설마."

하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왠지 모르지만, 저게 무슨 현상인지 알 것 같았다.

수호의 계약 완전 체화.

금호가 내 가디언으로서 성장을 완전히 마친 것이다.

탈진에 가깝던 마력이 얼추 회복된 것이 그 증거다.

아마 드래곤족 완전 체화로 마력이 상승한 것이겠지.

그렇다는 말은···!

"백냥아!"

수호의 계약을 추가로 맺을 수 있게 됐다는 의미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백호에게 다가갔다.

점차 눈에 빛이 사라져 가는 백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 신체에 두 손을 가져다 댔다.

"금호랑 같이 살고 싶으면 고개를 끄덕여!"

"······."

내 갑작스런 말에 백호는 아주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번쩍-!

"크으윽!"

그 순간, 내 신체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이 백호의 신체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띵-

순식간에 머리가 띵해지며, 극심한 어지럼증이 찾아 왔다.

그리고 그 직후.

"서율아!"

털썩-

나는 정신을 잃었다.

* * *

"일어나셨네요."

"서율아 괜찮아?"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태연한 유화의 얼굴과 걱정으로 가득 찬 하시연의 얼굴이었다.

나. 정신을 잃었구나.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주위의 풍경을 보니, 병원은 아닌 것 같은데.

"여긴··· 어디죠?"

"언니 별장이요."

메이든 크리티네스의 별장.

그 갑부는 호주에도 별장이 있구나. 그렇게 납득하고 있을 때였다.

벌떡!

"배, 백호. 백호는요?"

내 말에 유화와 하시연이 침울한 표정이 됐다.

"아······."

내 양 팔에 힘이 쫙 풀렸다.

그럴 수가.

웃음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유화의 입에서 새어 나온 소리였다.

"서율 씨. 옆을 봐요."

나는 유화가 가리킨 침대 모퉁이로 시선을 돌렸다.

"냐앙."

"갸르릉."

두 마리의 고양이가 자고 있다.

금색의 귀여운 고양이.

흰색의 새침한 고양이.

"아······."

금호와 백호가 서로 얼굴을 기대고 자고 있다.

"미안해요. 장난이 도가 지나쳤네요."

그런 날 바라보며 유화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그 옆에서 하시연도 똑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다음부터 이런 장난치지 마요."

진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네. 정말 죄송해요."

"미안······."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두 마리의 고양이.

아니, 소형 호랑이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얘네 얼굴을 봐서 특별히 봐 드리는 겁니다."

내 손길을 느끼며.

"냐아앙~"

금호가 본능적으로 간드러지게 울었다.

"갸릉!"

백호가 본능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찡그린 표정이 '감히 어딜 만져.' 라고 주장하는 듯했다.

"푸핫."

넌 진짜 한결 같은 냥이구나.

나는 활짝 웃었다.

* * *

이번 사방신 폭주 사건은 당연히 세계의 주목을 한 눈에 받았다.

[중국에 이어 이번엔 호주! 다시 출현한 사방신!]

[사방신 폭주의 원인은 비스트 마스터!]

[랭킹 3위 아우터 블랙. 비스트 마스터의 실험 보고서를 발견해 초인연맹에 보고했다 알려.]

[메이든 크리티네스와 비혼 길드의 신속한 초기 대응에 감탄!]

[수학여행 간 김에 재난을 막았어요! 한국 초인 사관학교 1학년 사관생들의 독점 인터뷰!]

포털 사이트의 1위부터 20위까지 중 17개 항목이 사방신 사건에 대한 거였으니 말 다 한 거다.

"······아우터 블랙은 진짜 기가 막히게 발을 빼 버렸네요."

이번 일은 비스트 마스터의 단독 실험의 폭주 현상이었다는 것으로 처리됐다.

"당연하지. 그런 놈이거든."

메이든이 혀를 찼다.

아우터 블랙이 꽤나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뭐, 그 속이 검은 아저씨를 좋아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냐만.

나는 다시 다음 기사를 확인했다.

[기적! 이번 재해로 사망한 민간인은 11명뿐!]

[호주 시민들 한국 사관학교 일동에게 큰 감사를 보내!]

"······11명."

호주 자체가 멸망할 수도 있었던 사건인데, 일반인이 11명밖에 사망하지 않았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

초인의 피해를 합쳐도 총 50명이 안 될 것이다.

미래에 벌어질 몬스터 대폭주 사건의 추정 사망자 약 1억 명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아니, 새 발의 미세먼지라 할 수 있다.

"······유가족들은요?"

"걱정 마. 호주 정부에서 정책을 준비하고 있으니까. 이상한 것 같으면 내가 어떻게든 해 줄 테니까 너무 걱정 말고."

"······네."

허나 그 50여 명의 죽음은 내가 벌인 일로 인해 발생한 피해자들이다.

따지고 보면 내가 죽인 거나 다름없다.

그 사실이 내 가슴을 옥죄여 왔다.

"꼬맹이."

메이든이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신경쓰지 말라곤 못하겠다. 이번 일은 네 실수가 맞아."

"······네."

메이든의 따끔한 말에 더욱 가슴이 아려 왔다.

"그래도······."

메이든이 활짝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잘했다."

메이든의 두 눈에는 호의가 가득 담겨 있었다.

"짜식. 내가 너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맞춰 볼까? 좀 더 주도면밀하게 생각하고 행동했으면 좋았을 텐데. 맞지?"

"······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휴. 평소엔 세상 다 산 애늙은이 같으면서, 이런 면은 또 20살 꼬맹이란 말이지."

그런 내 머리를 메이든이 거칠게 흐트렸다.

"짜샤. 그걸 다 예상할 수 있으면 그게 사람이냐? 신이지."

자상한 목소리였다.

"이번 일은 그 당시의 네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결과야."

그리고 엄격한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후회하지 마."

메이든이 자조하듯이 말했다.

"그때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이렇게 했어야 할 텐데. 그런 쓰잘데기없는 후회는 사람을 좀먹을 뿐이거든."

"······."

"후회할 거면, 현재를 살면서 후회해. 다음에 더 잘하면 되니까."

나는 시선을 들어 메이든을 바라봤다. 그녀의 따스한 눈빛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듯했다.

"알겠냐? 10년을 과거에서 살아 왔던 누나의 말이니까, 마음에 새겨 둬."

메이든은 오묘한 표정으로 웃으며, 내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예. 마음에 새겨 두겠습니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려. 알면 됐어."

메이든도 활짝 웃었다.

"그나저나 꼬맹이. 저 하얀 거. 어쩔겨?"

메이든이 시선을 돌렸다.

"음."

나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자고 있는 금호 뒤에서, 백호가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그러게요."

오드아이.

한쪽 눈은 찬연한 적색 그대로지만, 다른 한쪽 눈은 청룡을 연상시키는 노란 눈동자로 변해 있었다.

"얘를 어쩌면 좋을까요."

< 98화 사방신 (8) > 끝

< 99화 귀환 (1) >

진리의 구명자 본부.

언노운은 마에스트로가 건넨 보고서를 확인하고 있었다.

"제법 흥미로운 실험 결과군."

언노운의 표정은 평소의 그 답지 않게 아주 밝았다.

허미트가 잠입해 구해 온 사방신과 몬스터들의 컨트롤, 개량에 관한 실험 보고서가 꽤나 유익했기 때문이다.

"허미트의 행동이 아주 주요했습니다."

마에스트로도 웃었다.

언노운의 기쁨은 마에스트로의 기쁨. 기뻐하는 건 당연했다.

"이 보고서는 알렌이 자발적으로 움직여서 획득한 거라고 했던가."

"예. 역시 쓸 만한 놈입니다."

마에스트로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무슨 생각이지?'

희열로 가득 찬 두 눈이 번들거렸다.

허미트가 자신을 증오하는 것은 언노운도 익히 알고 있다.

그렇기에 다른 간부들과 다르게 행동에 많은 제약을 두고 있는 것이다. 증오에 눈이 먼 허미트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그런 허미트가 자발적으로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얻어 왔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제 와서 내 진정한 수하가 되기로 마음을 돌린 것은 아닐 테지.'

허미트와 언노운의 관계는 개선될 여지가 전혀 없다.

언노운이 알렌 벨벳의 은인이자 가족과도 같은 김상재라는 초인을 처리한 순간부터 정해진 거나 다름없다.

허미트가 언노운에게 긍정적인 일을 할 리가 없다.

그렇다는 말은 다른 목적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된다.

'흠.'

허나 마냥 그렇다고 보기도 애매하다.

이번 일로 언노운이 본 손해는 아예 없다.

10년이 넘는 사방신의 연구 기록을 얻었다. 호주 사방신 재출현 사건으로 세계가 혼란에 빠져, 국가전 테러 준비가 한층 수월해졌다.

언노운에겐 이득밖에 없다.

수십, 수백 번을 되뇌었지만 결과는 같았다.

'······지나친 생각인가.'

그렇게 언노운이 의심을 접고 있을 때였다.

"보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마에스트로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별일 아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아니라고 했다."

"예. 죄송합니다."

허미트가 언노운을 적대한다는 사실은 마에스트로에게 알리지 않았다.

행동 이념이 언노운의 기쁨 그 자체인 마에스트로가 허미트의 증오심에 대한 걸 알게 되면 그냥 놔둘 리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래선 안 되지. 조직에 허미트의 잠입 능력은 꼭 필요하니까.'

언노운이 속으로 웃었다.

"그래. 허미트는 지금 어쩌고 있지?"

"바로 다음 임무로 넘어갔습니다. 지금은 일본 쪽에 있을 겁니다."

"일본이면 수왕의 손톱 때문이겠군."

"예. 아마 장기 임무가 되겠죠."

"흠."

마에스트로가 턱을 매만졌다.

수왕의 손톱이면 제법 중요한 임무다.

"허미트에게 용무가 있으신 겁니까?"

허미트가 근처에 있다면, 일단 불러서 '절대복종의 맹세'로 속내를 털어 놓게 할 생각이었는데.

굳이 중요 임무에 나선 허미트를 다시 불러들일 필요까진 없을 터.

"됐다.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니까."

게다가 저번에 배신자에 대한 색적은 완료하지 않았던가.

허미트를 다시 심문하는 것은 긁어 부스럼이다.

그렇게 언노운은 허미트에 대한 일말의 의심을 머릿속 한켠에 넣어버렸다.

"그럼 다비드.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지."

무엇보다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다. 그 일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다.

"그래. 제이스를 죽음에 이르게 한 주모자를 특정했다고?"

제이스 스칼렛.

코드 네임 베가본드.

"예."

마에스트로가 단말을 조작해서 방 중앙에 홀로그램을 띄워 올렸다.

"주모자는 비혼 길드를 이끌고 있는 길드장. 유화입니다."

홀로그램에는 유화의 프로필과 유화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 * *

나는 메이든 씨의 자가용 비행기로 한국에 복귀했다.

다른 1학년 사관생들도 호주 정부가 소유하고 있는 전용기와 한국 정부가 보낸 전용기를 타고 복귀를 마쳤다.

세간의 이목이 우리에게 몰리고 있으니, 공항을 이용해서 복귀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몰래 한국에 입국하는 데 성공했다.

"냐앙."

"쉿. 좀 참아. 너 걸리면 큰일 나."

덕분에 백호를 아무에게도 걸리지 않고 한국으로 데려 올 수 있었다.

이마저도 메이든 씨의 힘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맥 만세.

"어허. 가만히 좀 있으라니까."

그렇게 가방 안에서 꿈틀대는 백호를 달래고 달래며, 모습을 감추고 비행기 활주로 인근에 세워져 있는 리무진에 탑승했다.

"냐아아앙!"

가방의 지퍼를 열자마자, 백호가 세상 짜증난 얼굴로 벌떡 튀어 나왔다.

'감히 날 가방에 감금해?'라고 주장하는 듯한 표정이다.

아주 사납다.

"갸릉."

그러나 그 사나운 기운은 금호가 백호의 머리를 앞발로 쿡 누르자마자 눈 녹듯이 사라졌다.

조금 전이 혹한의 칼바람 같았다면, 이건 뭐야. 화창한 봄날의 산들바람이야?

백호는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교태를 부리며 금호에게 들러붙었다.

"······이게 호랑이야 여우야."

차가운 도시 호랑인가?

다른 사람들에겐 차갑지만 내 호랑이에겐 따듯하겠지.

뭐 이런 거.

"······."

그러다 문득 강렬한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유화가 세상 부러운 표정으로 우리 셋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봐도 봐도 너무 귀여워서요."

두 눈에 숨길 수 없는 호의가 가득 담겨 있었다.

"금호 하나로도 충분한 파괴력이었는데. 백호까지······."

그 눈빛이 조금 무서웠다.

"금호의 개냥이 같은 매력과 대비되는 백호의 새침한 고양이 같은 매력. 이 시너지는 가히 무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보통 이런 성격의 고양이 두 마리라면 서로 피하거나 시도 때도 없이 싸우기 마련인데 금호와 백호 같은 경우에는 서로에 대한 역학관계가 확실하고, 동시에 애정관

계도 확실해서 정말 미묘한 케미를 만들어 내고 있어요. 뭐랄까, 그냥 고양이 두 마리라기보다는 마치 로맨스 소설의 서브남주, 서브여주의 툭탁임을 보는 것 같다고 할까요? 단편적인 관계 이상의 무언가가 있어요. 자꾸자꾸 지켜보게 된다고 해야 할까요. 과연 둘의 관계가 어디로 갈지,

둘 중 누가 더 귀여운지. 한시라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군요. 게다가, 게다가게다가! 털 색상에 대한 대비도 아주 매력적이에요. 골드와 화이트의 흔치 않은······."

아니, 조금이 아니라 많이 무서웠다.

"게다가 얘네들은 몬스··· 크흠. 수호수니까요. 수명은 일반적인 고양이에 비할 바가 아닐 거고."

유화가 쓰게 웃었다.

유화는 애완동물과 이별할 때의 아픔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다. 그게 유화가 고양이를 키우지 않는 주된 이유다.

"진짜 너무 부러워요."

그런 유화를 바라보며 메이든이 혀를 찼다.

"화 저거 또 병 도졌네. 꼬맹아. 네가 이해해라. 저년 저거 고양이라면 아주 사족을 못 쓰거든."

"······예. 알고 있습니다."

뼈저리게 알고 있다.

"금호야. 이쪽 봐. 옳지."

유화는 우리 얘기는 들리지도 않는 듯, 들고 있는 스마트폰으로 백호와 금호를 미친 듯이 촬영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꼬맹이. 운이 좋았네."

"뭐가요?"

메이든이 리무진을 자율운행으로 돌리고 나를 바라봤다.

"주작을 처리한 사람이 너라는 사실이 안 밝혀져서 다행이라고."

"아. 그거요?"

나는 옆에서 티격대는 금호, 백호, 유화를 바라보며 넌지시 답했다.

"운이 좋았다기보단, 계획대로 된 거죠. 현무의 특성 중에 전파 및 통신 차단이 있다는 건 미리 알고 있었거든요."

"치밀한 놈."

내가 망설임 없이 루시퍼의 마창을 사용한 이유다. 내 전투 장면이 기록으로 남을 일은 없었으니까.

"아. 맞다. 그놈."

깔깔 웃던 메이든이 돌연 정색했다.

"알렌은 지금 뭐하고 있어?"

"······아. 음."

이번 계획의 변수 중 사방신의 폭주 공명 다음으로 큰 변수는 허미트와 메이든의 만남이다.

현무는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는데, 설마 현무에게 향했을 줄은 몰랐다.

내가 어설펐다.

아무튼 만나 버린 건 어쩔 수 없는 일. 나는 나와 허미트의 관계를 적당히 포장했다.

같이 진리의 구명자를 쫓고 있는 동료 사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당연히 허미트가 진리의 구명자 간부라는 사실은 빼놓고 말했다.

다행히 메이든은 내 말을 믿어 줬다.

김상재와 허미트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허미트가 진리의 구명자에게 증오를 품는 건 합리적이었으니까, 의심도 안 하더라.

"지금은 다른 임무를 수행하고 있어요."

"그래?"

메이든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혀를 찼다.

"그 나쁜 새끼. 인사라도 하고 가지."

그런 말을 하면서도 조금 미안한 표정이다.

"······그리고 진리의 구명자 새끼들을 쫓고 있었으면, 말이라도 하던가."

메이든은 알렌 벨벳이라는 남자가 김상재의 죽음 이후, 은혜는 싹 잊고 자유를 찾아 도망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남편의 호의를 물로도 생각하지 않은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말이다.

"짜식. 그래도 그 새끼가 옛날부터 정은 있었어."

그러나 이번 일로, 메이든은 허미트가 김상재를 잊은 게 아니라 복수를 위해 행동하고 있다고 알게 됐다.

그래서 미안해하고 있는 거다.

"아무튼 다음에 한국 오면 나한테 꼭 연락하라고 하고."

"네. 바쁜 친구라서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그럴게요."

메이든과 허미트.

두 사람의 일그러진 관계를 생각하자 괜히 속이 쓰렸다.

둘 다 진리의 구명자에게 증오를 품고 있는 건 같은데 말이지.

그렇게 리무진은 한참을 달려, 집 앞에 도착했다.

"암튼 꼬맹이. 뒷일은 나랑 화한테 맡기고, 집에서 푹 쉬어. 알간?"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나의 첫 수학여행은 끝이 났다.

* * *

"선조님!"

다음날 아침.

이른 아침부터 지아가 날 찾아 왔다.

"안색이 좋아졌네."

마지막으로 본 게 병실에 있을 때니까.

"네? 네. 퇴원한 지 좀 됐으니까요. 후유증도 없다고 해요.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지아가 돌연 무릎을 꿇었다.

"지, 지아야?"

"죄송해요! 선조님의 위기에 한 걸음에 달려가지도 못하고!"

오체투지.

소설 속 묘사로만 봤지 직접 본 건 처음이다.

"야. 이러지 말고 일어나."

"아닙니다! 저 같은 무능한 여자는 선조님 앞에서 두 발로 서 있을 자격조차 없어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일단 시무룩한 건 잘 알겠다.

"이게 다 아버지가 집 밖으로 못 나가게 하셔서······. 아뇨. 다 변명이겠죠. 죄송합니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난리가 났다.

"선조님··· 실망하셨죠······?"

지아가 슬쩍 고개를 들어 물기 가득한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 본다. 주인한테 혼나서 시무룩한 강아지를 보는 느낌이다.

"일어나."

얘가 왜 사건 이후에 연락을 안 하나 했는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랬구만.

"하지만······."

나는 픽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이고 자시만이고. 실망 안 했으니까 일어나. 안 일어나면 나도 너랑 똑같은 자세 취한다."

"넵! 일어나겠습니다!"

벌떡!

지아의 행동은 벼락같았다.

"그리고 나 실망 안 했어."

"······정말요?"

"그럼. 지아 네가 한국에서 여러 가지 일처리를 맡아 줬다는 거 알고 있는데. 왜 실망하겠어?"

그리고 한국에 남아 있던 지아의 일 처리도 가히 벼락같았다.

"네 덕분에 사후처리가 훨씬 쉬웠다고 메이든 씨가 칭찬하더라."

무력적인 지원만이 모든 게 아니다. 지아는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고마워."

나는 싱긋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진심이다. 지아한텐 항상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선조님."

지아가 세상 감동한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조금 부담스러운 시선이었다.

* * *

그날 점심.

지아가 다른 용무가 있다고 떠난 뒤.

나는 금호, 백호와 방에 앉아서 이번 일에 대한 걸 정리하고 있었다.

"일단 이번 일로 얻은 게······."

나는 노트에 글을 적어 나갔다.

[악마족의 종족 특성 '악의 감지'획득]

루시퍼의 마창에서 얻은 특성.

악의 감지.

주위의 살기를 단계를 나눠 유형의 기운으로 느끼게 해주는 위험 감지형 특성이다.

패시브 특성으로 갑작스런 기습에 대응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 중 하나다. 이걸로 돌연사는 미연에 방지할 수 있게 됐다.

[금호의 성장]

금호의 성장도 무사히 끝났다.

자세한 파워는 추후 알아봐야겠지만, 아마 A랭크 초인 상위 정도가 아닐까.

[백호]

백호라는 새로운 수호수로 얻었다.

성장에 따라 그 흉악한 백호로 변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긴 하지만,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수호의 계약'은 무려 드래곤족의 특성.

백호가 내 제어를 벗어나 폭주하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널 어쩌면 좋냐."

"냥."

그나저나 백호가 흡수한 사방신의 인자는 어쩌면 좋을까.

서로 색이 다른 눈동자.

저건 누가 봐도 청룡의 눈이다.

다행이 다른 변화는 없는 거 같은데. 이건 추후의 경과를 봐야겠지.

[천변]

이게 가장 큰 수확이 아닐까.

정일용 어르신의 역작.

10분이라는 짧은 사용이었지만, 얼마나 사기적인 무기인지 알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기본적인 성능은 말할 것도 없고, 2초 동안 신체 능력을 가속시키는 특수 능력 '부스트'까지.

천변 특유의 변화무쌍한 전투 스타일은 대 괴수전에서는 모르겠지만, 대인전에 관해선 무적에 가까운 힘을 발휘할 것이다.

"······그리고."

[수호의 계약(드래곤족) 완전 체화]

드래곤족 특성의 완전 체화.

처음에는 단순히 마력 증가 효과가 끝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마력이 증가한 듯한 체감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드래곤족 완전 체화는 마력 증가 같은 일차원적인 것이 아니었다.

"마력의 재(材)."

마력 증가는 그저 부차적인 효과일 뿐.

마력 강도, 마력 효율, 마력 전도율, 마력 회복 속도를 포함한 마력적인 모든 것이 일괄적으로 상승했다.

단순히 마력량과 출력을 늘려 주기만 했던 몽마족 완전 체화와는 천지차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가장 사기적인 효과는 따로 있다.

나는 손바닥을 위로 향했다.

그리고 마력을 집중했다.

"후우."

지금까지 내가 마력을 사용한 방법은 모두 '강기'라는 측면의 어레인지였다.

각인의 불길과 정령의 불길은 그저 무작정 마력을 방사했을 뿐.

마법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파이어볼 같은 기초적인 마법도 사용할 수 없었다.

사용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다르다.

"후우."

얼마 전 코앞에서 본적 있는 허미트의 마력 운용식을 떠올렸다.

칭-!

다음 순간, 내 손바닥 위에는 작은 육각형 모양의 '배리어'가 생성되어 있었다.

허미트에 비해선 조금 허술하지만, 확실히 배리어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와우."

드래곤족 완전 체화의 능력.

"잇츠 매직······."

그것은 마법사로서의 재능 개방이었다.

< 99화 귀환 (1) > 끝

< 100화 귀환 (2) >

주말은 쏜살 같이 지나갔다.

오늘은 월요일.

정상적으로 수업이 시작되는 날이다.

나야 들끓는 순혈의 피 덕분에 후유증 같은 건 아예 없지만, 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관생들은 아직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피곤해."

"주말에 잠만 잤어."

호주 사건 당시 신경 과민, 육체 혹사, 마력 과다 사용으로 육체적인 후유증을 호소하는 이들이 반.

"나 어제 밖에 나갔다가 기자들한테 둘러싸여서 진짜 고생했어."

"너도? 야 나도···."

"난 아직도 멍해. 우리가 뭘 한 거지 싶고."

남은 반은 정신적인 후유증을 토로하는 중이다.

"그래도 우리 나름 잘 하지 않았냐?"

"교관님들도 칭찬해 주셨으니까, 잘 한 거 아닐까?"

사건 당시.

1학년 사관생들 중 나와 하시연을 제외한 496인은 흩어져서 시민들의 대피와 시가지까지 흘러들어 온 몬스터들의 퇴치를 맡았다.

"어제 보니까, 인터넷 반응 되게 좋더라구."

"괜히 깝치지 않았다는 것에 고평가라던데."

사관생들이 할 수 있는 선에서만 무리하지 않은 게 주요했다.

나도 동의한다.

괜히 사방신의 처리에 손을 보태겠다고 나섰으면 더 골치 아팠을 것이다.

"그나저나 주작이랑 현무를 처리한 정체불명의 초인이 누굴까?"

"아. 나도 그거 엄청 신경 쓰이던데."

"그 두 마리를 그대로 방치했으면, 최소 백만 명 단위의 사상자가 났을 거라면서?"

나도 어제 그 방송 봤다.

청룡과 백룡의 전투력을 기반으로 남은 두 마리의 전투력을 계산했을 때, 어떤 피해가 나왔을 것인가를 측정하던 학자의 방송이었지.

나름 조리 있는 계산 방법이라서 나도 흥미롭게 봤다.

"시연이 혹시 못 봤어?"

"어? 나?"

시연이가 급 당황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서율이랑 그 미니 백호 처리하러 향한 곳이 현무랑 주작 출현 위치 중심이잖아."

"거기서 누구 못 봤나 해서."

"어··· 그, 그게."

"어? 시연이 당황한다."

"진짜 뭐 본 거야?"

진짜 누가 봐도 당황하는 표정이다. 나는 이마를 짚었다.

쟤가 거짓말 못 하는 건 알고 있었는데, 설마 저 정도일 줄이야.

어쩔 수 없지.

"우린 메이든 크리티네스 님이랑 유화 길드장님 봤어."

내가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 그 두 분?"

"근데 그 두 분이 도착했을 때는 현무, 주작은 이미 쓰러진 후였다고 하던데."

"맞아."

"그럼 시연이는 왜 당황한 건데?"

나는 옆에서 말똥말똥 나를 쳐다보고 있는 하시연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 둘을 본 걸 얘기해도 되나 고민하는 것 같더라고. 나는 상관없을 것 같아서 말한 거고."

"아하."

대부분은 납득한 듯했다.

"그리고 우리한테 모습을 보였을 정도면, 세계 각국의 내로라하는 초인들이 한참 전에 알아냈지 않겠냐."

"······그건 그렇네. 인정."

"에이. 결국 제자리걸음이네."

좋아. 완벽하게 수습했다.

"그나저나 교관님이 늦으시네."

여기에 화제를 아예 돌려 버려서 이 하시연의 말실수를 원천봉쇄 해 버리자.

"어? 그러게. 시간 지났는데."

"무슨 일 있으신가?"

"교관님들은 지금 여러모로 조사를 받고 계실 거야."

조용히 대화만 듣고 있던 지아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조사?"

"나쁜 건 아니고, 참고인 조사. 사건 보고서 작성을 위해선 백호와 직접 대치한 교관님들의 증언이 필요할 테니까."

주말엔 교관님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쉬게 놔뒀고, 월요일인 오늘이 돼서야 조사를 나온 것이다.

"그럼 수업은 어떻게 되는 거야?"

"음. 아마 슬슬 방송이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때마침 교실 내의 스피커에서 방송 소리가 울렸다.

―교관실에서 전파합니다. 금일 1학년 수업은 자습으로 대체합니다. 다시 전파합니다. 금일 1학년은······.

피진호 교관님의 목소리였다.

"봐. 자습이지?"

"오오."

교실은 금세 떠들썩해졌다.

"훈련장 갈 사람!"

"콜. 오늘은 내가 너 이긴다."

사관학교의 자습은 말만 자습이지 자유시간이나 다름없다.

공부를 해도 되고, 훈련을 해도 되고, 휴식을 취해도 된다.

자습을 싫어하는 사관생은 없다.

"야! 2반 애들이랑 5:5 대항전 할 사람?"

"오. 나랑 지훈이 그거 참가."

"김철진. 나는 시연이랑 훈련을······."

"오. 철진이랑 지훈이 네가 도와주는 거면 천군만마나 다름없지! 땡큐!"

"······어쩔 수 없지. 특별히 도와주마."

최지훈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생각보다 칭찬에 엄청 약한 남자였다.

"서율아. 너는 뭐 할 거야?"

"나?"

지아가 내게 다가왔다.

그 뒤로 시연이도 보인다.

둘 다 전의가 충만하다.

"둘이 한 판 하게?"

"응. 임시 1위님한테 본때를 보여 주려고."

"과거의 1위님한테 현실이라는 걸 알려 줘야 할 것 같아서."

둘 다 웃고 있다.

시연이는 진짜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데. 지아는 겉으로만 웃고 있다.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게 보인다. 역시 승부욕의 화신 지아답다.

"서율이 너도 같이 갈래?"

하시연은 그런 지아의 속내를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한 듯했다.

"아니. 둘이 갔다 와."

이런 분위기에선 빠지는 것이 상책이다.

그리고.

"나는 따로 할 일이 있어서."

더 중요한 일이 있다.

* * *

몰래 교실을 빠져나온 나는 부지 내의 대도서관으로 향했다.

국내 초인 관련 서적의 보유수로는 여기가 탑이다.

"저기. 마법 관련 서적은 몇 층에 있나요?"

"마법 관련 서적은 5층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사서에게 작게 고개를 숙이고 5층으로 향했다.

"오."

5층의 마법 서적 코너는 꽤나 신비로운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다. 진짜 간달프라도 나올 것 같은 분위기다.

다른 층은 제법 인파가 붐볐는데, 이 층은 사람이 거의 없다.

나랑 사서를 포함해서 총 세 명이다.

사람이 없으면 더 좋지.

내가 오늘 이곳에 온 목적은 마법을 사용하기 위한 실마리를 얻기 위해서다.

드래곤족 완전 체화의 효과로 마법사의 재능이 각성한 것까진 좋은데, 정작 중요한 마법을 사용할 방법이 없다.

주위에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지인도 없고.

인터넷으로 찾아 봤으나, 마땅한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여기가 마지막 희망이다.

나는 빠르게 비치되어 있는 서적들을 살폈다.

'마법사의 기본'이라는 아주 기본적인 서적부터, '마법의 극의'라는 뭔가 본격적인 서적까지 모조리 살폈다.

나름 재미있는 서적도 있었고, 그냥 저자의 자랑만 가득 적힌 쓰잘데기 없는 책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찾는 책은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게 약 7시간이 흘렀다.

"······에이."

나는 책을 덮으며 혀를 찼다.

점심도 거르고 책만 읽었는데 수확이 없다.

마법을 사용할 방법은 찾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현대 인류의 '특성'과 '스킬'을 이용하는 마법과, 과거 드래곤족의 '마력 자체를 컨트롤하는 식'의 마법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현대 마법과 고대 마법을 게임으로 비유해 볼까.

'파이어볼'을 스킬창에서 배우고, 해당 스킬을 클릭하는 것으로 파이어볼을 사용하는 것이 현대 마법이라면.

'파이어볼'을 익히기 위해서 마력의 이동 경로를 기억하고, 원리를 익힌 뒤, 수십, 수백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처음으로 '파이어볼'의 형태를 이루는 것이 고대 마법이다.

학파가 다르긴커녕, 개념 자체가 다르다.

"······큰일인데."

현대 마법은 시스템의 백업을 받지 못하는 나로서는 감히 시도조차 해 볼 수 없는 경지다.

이걸 어쩌면 좋을까.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그날 밤.

나는 기숙사에서 정일용 어르신과 통화를 나누고 있었다.

―천변은 좀 어떠냐.

"말해 뭐하겠습니까. 최고예요."

지아랑 시연이가 연이은 대련으로 퍼져서, 오후 훈련은 나 혼자 하게 됐다.

그래서 개인 단련실에서 '몬스터 무한 섬멸 모드'를 켜 두고 '천변'의 성능 확인에 나섰는데. 진짜 깜짝 놀랐다.

"진짜 두 배는 강해진 것 같아요."

몬스터 무한 섬멸 모드는 몰려드는 몬스터들의 공격에서 버티는 시간을 측정하는 모드다.

과거에도 몇 번 해 본 적이 있었는데, 역대 최고 기록이 11분 21초였다.

점점 강해져 가는 몬스터들을 막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근데 천변을 사용하니까 30분을 가뿐히 넘더라.

과장 조금 보태서, 천변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구나.

정일용 어르신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 후로도 우리는 한참을 얘기했다. 정일용 어르신의 격언은 묘하게 가슴에 울림을 남겼다.

―벌써 이런 시간이구나.

어느덧 시간은 밤 10시가 되었다.

―그럼 이만 끊으마. 호주에서 고생 많았고, 푹 쉬거라.

"네. 감사합니다."

―아. 참. 다음에 진호랑 같이 찾아 오거라. 네가 천변을 사용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구나.

"그럼요. 다음에 다 같이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기대하마. 쉬어라.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나는 폰을 침대 위에 적당히 던져 버리고 기지개를 켰다.

몸이 묘하게 찌뿌듯하다.

천변의 신체 가속 능력 '부스트'를 너무 많이 써서 그런가.

그렇게 신체 곳곳을 스트레칭하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금호 보고 싶다."

금호는 지금 유화와 같이 있다.

백호 때문이다.

수호수 등록도 안 한 백호를 기숙사 방에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유화에게 맡기기로 했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백호가 도저히 금호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하더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금호도 유화의 집에 맡기고 왔다.

······솔직히 백호만 따로 놔두면 무슨 일을 벌일지 무섭기도 했고.

여러모로 생각했을 때 금호를 붙여 두는 것이 이득이라 판단했다.

"음."

전화를 해 볼까?

이 시간이면 아직 안 자겠지?

그렇게 금호 얼굴이라도 보고 자려고 유화에게 영상통화를 걸려고 할 때였다.

우웅-

내 폰이 진동했다.

유화였다.

그것도 영상통화다. 마음이 맞았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나는 침대에 적당히 걸터앉아서 전화를 받았다.

―늦은 밤에 미안해요. 금호가 서율 씨 보고 싶다고 졸라서.

―냐앙!

침대에 엎드려 누워 있는 유화의 옆에서 금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금호의 얼굴이 화면을 반쯤 가렸다. 카메라에 너무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

그런 금호를 유화가 자신의 품으로 껴안았다.

"우리 금호 형 보고 싶었어?"

―냐아앙~

금호가 간드러지게 울었다.

금호 얘가 요즘 들어 애교가 더 늘었단 말이지.

"형이랑 똑같네? 형도 금호 보고 싶었는데."

금호가 활짝 웃었다.

―하루 안 봤을 뿐인데, 아주 깨가 쏟아지시네요.

그런 우리를 유화가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봤다. 묘하게 질투가 서려 있는 눈빛이다.

"백호는요?"

―자고 있어요. 조금 전까지 엄청 날뛰었는데.

유화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모서리에서 몸을 말고 자고 있는 백호의 모습을 보여 줬다.

천사 같은 모습이다.

―잘 때는 진짜 천사 같은데······.

유화가 한숨을 쉬듯이 말했다.

"아마 하루에 16시간은 잘 거예요."

―그렇게 많이요?

"네. 저번에 말했었죠? 테이밍 관련 특성이 있다고. 그 특성의 효과에요. 수면 시간에 따른 성장 촉진 및 정신 안정화. 금호도 초반엔 엄청 잤잖아요?"

―아.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유화가 납득했다.

"아무튼 일주일만 잘 부탁드려요."

―일주일이요? 아. 언니가 알아봐 주신다던 집. 일주일 뒤부터 입주해도 된대요?

"네. 그렇다고 하네요. 이미 도장까지 찍었대요."

부담스러워서 거절하려고 했는데, 그냥 받으라고 막 주시더라.

―그럼 개인 스폰서 계약 정식으로 체결한 건가요?

"그쵸."

개인 스폰서.

기업이나 초인들이 유망한 사관생들에게 지원을 해 주는 제도다. 명목상은 좋은 취지를 위해 존재하는 제도인데, 사실상 유망주에게 침 발라 놓는 식의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나는 그 스폰서 계약을 메이든 크리티네스와 맺었다.

―공개되면 난리 나겠네요. 던전 크리에이터. 최초의 후원! 그 대상은 한국의 강서율! 이런 기사 100% 날 것 같아요.

나와 유화는 쓰게 웃었다.

―그래도 서율 씨가 지금까지 보여 준 행보가 있으니, 괜한 염문이 퍼지진 않을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없진 않겠죠."

메이든과 나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다. 뭐 이런 기사들은 100% 존재할 거다.

―혼자서 시나리오 쓸 사람들은 쓰라고 해요. 일일이 관심 주면 버릇 나빠져요.

"알고 있습니다."

본디 악플러와 기레기들한테 관심을 주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은 없다고 배웠다.

―아무튼 이렇게 된 이상, 언니의 골수까지 빼 먹을 생각으로 마구 요구해요. 알겠죠?

"······하하. 네. 노력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 맞다. 에일 어르신이 말 좀 전해달라고 하셨는데. 까먹고 있었네요.

에일 크리스. 통칭 콜렉터.

드래곤족의 유물을 모으는 데 광적일 정도로 집착하는 어르신이다.

아직 받기로 한 고대 유물이 몇 개 남아 있는데, 아마 그걸 건넬 수 있는 기회가 생긴 모양이다.

그거 때문에 연락한 거겠지.

"뭐라고 하시던가요?"

―고대 유물 팜. 님 삼? 선제. 골뱅이골뱅이골뱅이······.

"······예?"

유화가 큼큼 목청을 다듬으며 다시 말했다. 뺨이 조금 붉다.

―지, 진짜 이렇게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아, 예."

에일 크리스의 깔깔대는 얼굴이 눈에 선했다. 진짜 판다는 건 아니고, 장난치려는 목적일 것이다. 요즘 무슨 게임에 빠져 있다더니, 그것 때문일 것이다.

"그, 일단 알았다고 전해 주세요."

―네. 알겠어요.

안 그래도 보험용 고대 유물이 하나도 없어서 불안했는데.

굿 타이밍이다.

< 100화 귀환 (2) > 끝

< 101화 꿈 (1) >

수요일.

호주의 후폭풍은 거의 사라졌다.

사관생들은 이틀간의 자율 학습(자유 시간)으로 정신을 되찾았다.

사방에서 불려 다니던 교관들도 모든 일을 마치고 정상적으로 복귀했다.

"그럼 지금부터 1학년 랭킹을 공지하겠다."

오늘은 랭킹이 갱신되는 날이다.

원래대로라면 호주에서 복귀한 직후인 목요일에 공지됐어야 했지만.

사방신 사건으로 복귀가 미뤄지고, 그 사건의 후폭풍을 직격으로 받다 보니 여러모로 늦어졌다.

교탁 위로 홀로그램이 떠오름과 동시에 하위 랭킹에 위치한 사관생들이 자신의 폰을 확인했다.

홀로그램으로 공지되는 랭킹은 1위부터다. 아래 랭킹까지 가려면 오래 걸리니까, 홈페이지에 갱신 됐을 공지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물론 나는 그냥 홀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이번 시험에서 1위도 차지했겠다. 상위 랭킹에 있을 텐데 뭐하러 따로 확인해.

[1위 하시연]

[2위 신지아]

먼저 예상대로 두 명의 랭킹이 뒤바뀌었다.

"신지아 사관생은 부상으로 시험에 참여하지 못했기에, 평균 점수를 받게 됐다. 아쉽겠지만, 교칙은 교칙이다. 다음에 더 노력하도록."

"예."

지아가 무난하게 대답하는 '척' 했다. 눈가가 미세하게 경련하고 있다. 짜증을 완전히 숨기지 못하는 모습이다.

"하시연 사관생은 2달 만에 4위에서 1위로 올라섰다.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하시연이 활짝 웃었다.

"김철진. 축하한다. 9위다."

"오우! 감사합니다!"

김철진은 서바이벌 시험 당시 나한테 엄청 시달리긴 했지만, 어찌 됐건 끝까지 살아남았다.

······일부러 더 오래 괴롭히려고 살려 준 것도 있긴 한데.

아무튼 그 전까진 점수도 꽤나 준수하게 모았던 것 같고. 랭킹 상승은 당연하겠지.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중. 피진호 교관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날 바라보는 두 눈에서 묘한 열기가 느껴졌다.

"모두 박수."

그리곤 갑자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짝짝짝-

교관의 말에 따라 다른 사관생들도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눈빛들이다.

"498위에서 2달 만에 여기까지 올라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견함, 자부심.

그러한 감정들이 피진호 교관의 눈에 일렁이고 있었다.

비유하자면 제자의 성장에 기뻐하는 스승의 모습. 그래 딱 그 모습이다.

"강서율. 14위다."

[14위 강서율]

그 순간 주위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

"미쳤다."

"한 자리수가 코앞이네."

사방에서 시선이 꽂혔다.

질투, 경악, 부러움, 존경.

온갖 감정의 폭류가 느껴진다.

······나쁜 기분은 아니네.

"사관학교 창립 이래, 이 정도 속도로 랭킹을 올린 사관생은 강서율 사관생이 처음이다. 그만큼 진귀하고 대단한 일이지."

수근거림은 더욱 커졌다.

"강서율 슬슬 신체 능력도 물오르기 시작했고. 랭킹이 오르는 건 시간문제였지."

"애초에 기술은 학년 1위보다 좋았으니까. 신체 능력 오르면 게임 끝이지."

연이은 칭찬에 괜히 어깨가 으쓱해진다.

"이러다가 여름방학에 있을 국가전에 출전 멤버로 선정되는 거 아니야?"

"쌉가능이지. 지금 상승세를 봐라."

나는 미소 지었다.

목표 달성이 코앞이다.

* * *

그날 밤.

나는 피진호 교관님에게 불려서 개인 단련실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와라."

개인 단련실 내부로 들어가자, 몸을 풀고 있는 피진호 교관이 눈에 들어왔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오후 운동이라도 하신 건가?

"후우."

운동을 마친 피진호 교관이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훔친 뒤, 내게 다가왔다.

"컨디션은 좋은 것 같군."

"예. 좋습니다."

"몸은 풀고 왔나?"

"예. 가벼운 스트레칭은 하고 왔습니다."

이 시간에는 항상 스트레칭을 한다. 스트레칭 후에 지아, 시연과 오후 단련을 한다. 이게 내 루틴이다.

오늘은 피진호 교관님께 불려 와서 오후 단련은 빠졌지만.

"천변은?"

"가지고 왔습니다."

나는 손에 쥐고 있는 캐리어를 내밀었다.

따로 챙겨오라고 하셔서 이렇게 가져 왔다.

평소엔 '장인의 간이 대장간'에 잘 보관하고 있지만, 그걸 보여 줄 수는 없어서 캐리어에 담아 왔다.

"그럼 바로 시작해도 되겠군."

"예?"

피진호 교관이 픽 웃었다.

"훈련 모드 해제. 대련 모드로 변경. 지형은 평지."

[대련 모드로 변경합니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대련이라고 했어 지금?

그렇게 당황하는 사이 피진호 교관이 옆에 놓아 둔 자신의 검을 꺼내들었다.

훈련용 장검이 아니라 진짜 무기를 말이다.

"중간 점검이다. 덤벼 봐라."

피진호 교관이 검을 쥐었다.

그 순간, 맹렬한 기세가 피어올랐다.

나를 쓰러트리겠다는 무형의 의지가 내 신체를 짓누르는 듯한 착각까지 일었다.

꿀꺽.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피진호 교관.

사관학교 내에선 최강의 교관이라고 불린다.

추정 랭크는 S랭크.

세계 초인 랭킹 50위권 내라고 보면 된다.

"짜릿짜릿하네요."

그런 강자가 나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고 있다. 전신에 짜릿한 전율이 흘렀다.

나는 천변을 꺼내들었다.

이건 좋은 기회였다.

고대 유물을 사용하지 않는 상태의 내가 얼마나 싸울 수 있을지 파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한 수 배우겠습니다."

나는 작게 목례한 뒤에 자세를 잡았다.

"와라. 나는 방어만 할 테니까."

"······너무 무시하시는 거 아닌가요?"

"무시하는 건지 아닌지는 붙어 보면 알겠지."

"······예. 정답이네요."

나는 검에 강기를 둘렀다.

"갑니다."

동시에 지면을 박찼다.

'부스트!'

신체 강화를 걸고 검을 휘둘렀다.

치이이잉-!

내 검이 그대로 교관의 검을 따라 흘러 내려갔다.

완벽한 흘려내기였다.

나는 천변을 단검의 형태로 바꿨다. 갑작스런 변화에 피진호 교관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 순간, 바람의 길이 열렸다.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 파악하여 최선의 길을 제시해 주는 엘프족 암살자들의 전유물.

내 밥줄이라고 할 수 있는 특성이다.

"······뭐?"

그러나 내 눈에 붉은 궤적이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바람의 길은 길을 제시하지 못했다.

바람의 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무슨 짓을 해도 눈앞의 존재를 뚫을 수 없고.

무슨 짓을 해도 눈앞의 존재를 막을 수 없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가······.

그렇게 당황하고 있을 때였다.

"언제까지 그렇게 멍때리고 있을 생각이지? 실전이었다면 머리가 세 번은 날아갔을 거다."

"큭!"

피진호 교관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나는 일단 보이는 빈틈으로 단검을 찔러 넣었다.

캉!

피진호 교관은 대수롭지도 않게 단검을 흘려냈다.

나는 그 자세 그대로 무기의 형태를 바꾸었다.

낫의 형태. 곡선형 검의 형태로 이 위치에서 바꾸면 날이 늘어나서 피진호 교관의 팔까지 닿을 것이다.

"흠."

그러나 소용없었다.

피진호 교관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천변의 변화보다 빠르게 몸을 숙였다.

"이걸로 여섯 번은 죽었다."

내 낫은 교관의 머리칼도 스치지 못했다.

이번엔 채찍이었다.

낫을 휘두르는 척 하며 채찍으로 형태를 바꿨다.

"열 번."

소용없었다.

고작 두 걸음의 이동으로 내 채찍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다음은 창이었다.

스파이럴 스피어에 부스트까지 써서 공격을 퍼부었다.

이것도 피하겠지 싶었다.

"강서율. 강기를 회전할 수 있는 건 너뿐만이 아니다."

그러나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키기기기깅-!

"······이건?"

피진호 교관은 내 창을 피하는 게 아니라, 받아냈다.

검과 부딪친 내 창은.

파앙-!

무지막지한 폭음과 함께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 막강한 힘의 폭류에 내 신체 밸런스가 완벽하게 무너졌다.

"이십 번. 만약 실전이었다면 네 머리가 하늘을 날아 갔을 회수다."

그런 나를 피진호 교관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회전의 묘리를 가미한 찌르기는 확실히 위협적이다. 하지만 그 원리를 알고 있는 상대에게 있어선 좋은 먹이일 뿐이지."

"······뭘 하신 건가요?"

피진호 교관이 픽 웃으며 검을 앞으로 뻗었다.

"네 창의 강기가 회전하는 방향과 속도에 맞춰서 내 검의 강기를 회전시킨 거다. 더욱 거대한 마력을 담아서 말이지."

"아······."

그렇구나.

그래서 내 창이 바닥으로 곤두박질 친 거였어.

강기 대 강기의 힘 싸움에서 밀리며 힘이 가해지는 방향을 유도당한 것이리라.

"이걸로 끝인가?"

피진호 교관이 여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직 아닙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재빨리 물러나며 천변을 활의 모습으로 바꾸었다.

동시에 시위를 당겼다.

휘이이잉-!

비스트 마스터를 처리한 내 필살기. 바람의 살을 비롯한 4개의 특성을 모조리 활용한 격발필중의 화살을 시전했다.

화르르륵-

피진호 교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화염··· 아니. 풍 속성인가?"

내가 풍 속성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처음 봤을 테니까.

놀라는 건 당연하겠지.

그리고 처음 본 기술에 완벽히 대응하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내 바람일 뿐이었다.

"놀랍군. 삼중 속성이었나."

"!"

어느새 내 앞에 나타난 피진호 교관이 검을 휘둘렀다.

캉-!

다음 순간, 내 손의 활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꺾여 있었다.

"활을 쥘 땐, 너무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쥐어야 하지."

"······윽!"

그 충격에 시위를 놓아 버렸다.

"그래서 이런 가벼운 충격에도 궤도가 꺾이는 경우가 많다. 기억해 두도록."

불완전한 상태로 격발되어 허공을 뚫고 날아가는 스파이럴 애로우를 바라보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 * *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서 피진호 교관과의 대련을 떠올렸다.

"······이렇게 손도 발도 못 쓸 줄은 몰랐는데."

나름 자신이 있었다.

능력치는 D랭크 초인과 비슷하다 할지라도, 실제 능력만큼은 최소 B랭크. 혹은 A랭크까진 될 거라고.

내가 지니고 있는 특성들은 그만큼 특별했고, 천변이란 무기는 그런 내 특성을 100% 활용하게 해 주는 최고의 무기였으니까.

피진호 교관이 제아무리 강력하다 하더라도 유효타 정도는 입힐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하아······."

그러나 그건 내 자만심이었다.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네 기술은 뛰어나다. 무기의 주인을 보유하고 있으니까.

나는 대련이 끝난 후, 피진호 교관이 했던 말을 되뇌었다.

―하지만 독보적이진 않다. 그 정도 기술을 가진 초인은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무기의 주인은 뛰어난 특성이다. 강기의 자유로운 운용에 더불어 무기의 숙련도까지 대폭 상승시켜 주는 최고의 특성.

그러나 그뿐이다.

A랭크 이상으로 가면 대부분의 초인들이 강기를 어느 정도 자유롭게 다루고, 무기의 숙련도는 맥스치에 가깝다.

―물론 단검이나 활에 있어선 네 기술력이 한 단계 위일 수는 있다.

다만 무기의 주인만이 아니라, 다른 종족 특성에게 보조를 받는 '단검'과 '활'만큼은 별도다.

―하지만 네가 기술로 한 걸음 앞서간다 해도, 네 신체 스펙은 10걸음 물러나게 한다.

피진호 교관은 말했다.

―사관생이나 몬스터가 아닌, 진짜배기 초인들과 싸울 때. 네 기술력은 특별함을 잃는다.

유능제강(柔能制剛)이라는 말이 있다.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제압한다는 말이다.

나는 기술로 비스트 마스터의 뛰어난 신체 능력을 버텨냈다.

아마추어나 다름없는, 그저 돌격만 하는 그의 공격을 피하고 막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화 속성. 파괴력에 두각을 드러내는 속성이지. 하지만 맞추지 못하면 아무 의미도 없다. 풍 속성도 마찬가지다.

―카운터에 특화된 전투법? 그건 그냥 신체 능력의 부조를 커버하려는 얄팍한 전투법일 뿐이다.

피진호 교관의 말은 신랄했다.

지금의 너는 사관생들 사이에선 특별할지언정 프로의 세계에선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자만하지 말라는 거다. 저번 공항 소형 백호 사건에서 느꼈다. 강서율. 너는 들떠 있어.

소형 백호를 혼자서 처리하겠다고 나선 그 모습이 피진호 교관의 입장에선 자만으로 보였나 보다. 아니, 뭐 전제조건 다 떼어 놓고 봤을 때 맞는 말이긴 하다.

―그렇다고 너무 침울해 할 필요는 없다. 너는 아직 어려. 강해질 여지는 충분히 남았다. 차근차근 성장하다 보면 언젠가 나 같은 건 한 손으로도 상대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당근과 채찍.

피진호 교관의 지도는 완벽했다.

―이대로 꾸준히 능력치를 올리고, 특성의 숙련도를 쌓고. 한계까지 다다랐을 때, 보너스 포인트를 사용하기만 하면. 네 유일한 약점인 신체 스펙 부조는 사라질 테니까.

내게 시스템이 존재했다면 가히 완벽한 당근이었을 것이다.

허나 내게는 특성의 숙련도도, 보너스 포인트도 없다.

고로 내게 피진호 교관의 말은 이렇게 들렸다.

지금도 간당간당한데, 시간이 지나서 다른 사관생들이 숙련도를 쌓고 보너스 포인트를 사용하면 또 도태되겠네? 라고.

내게 교관의 말은 당근과 채찍이 아니라 채찍과 채찍이나 다름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네."

물론 내게는 고대 유물이 있다.

다른 초인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힘. 불완전한 상태였다곤 해도 주작을 혼자서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

하지만 그건 보험일 뿐이다.

고대 유물이 항상 수중에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으며, 지속시간 1분은 너무나도 짧다.

"에휴."

결국 답은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는 거네.

그렇다고 행동 방침이 바뀌는 건 아니다.

훈련을 계속 하면서 신체 능력을 끌어 올리고, 고대 유물을 모으며, 남은 종족 특성들을 완전 체화시킨다.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다.

"아니지."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손바닥에 마력을 집중해 봤다.

칭-

조금도 진보하지 않은 어중간한 형태의 배리어가 생성됐다.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도 찾아야지."

시스템을 기반으로 두지 않은 고대 마법 체계.

그걸 찾는 게 급선무다.

* * *

강서율이 떠난 뒤에도 피진호는 혼자 단련실에 남아 있었다.

"······하하."

의자에 앉아,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다.

"난놈은 난놈이란 말이지."

조금 전 강서율과의 대전을 떠올리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강서율의 자만심을 조금 죽여 놓을 생각이었는데. 생각 외로 너무 잘 싸워서 놀랐다.

상상 그 이상이었다.

천변을 사용하는 것도 제법 능수능란했고, 움직임 자체도 군더더기가 없었다.

'설마 삼중 속성 보유자일 줄이야.'

마지막 그 화살이 화룡점정이었다.

'화, 풍 속성의 시너지를 이용한 무형의 화살.'

아직 미완성 기술인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품고 있는 위력이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그 화살을 정통으로 맞았다면 제아무리 피진호라고 해도 무사하진 못했을 것이다.

1학년 사관생이 그런 무지막지한 기술을 독학으로 익혔다는 걸 알면 다들 놀라서 뒤로 자빠질 것이다.

"······그 정도면 자만할 만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서율은 자만하지 않았다.

아니, 자만했을지언정 금방 정신을 차렸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까.

깊게 반성한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이던 모습이 인상깊었다.

'끊임없이 반성하고 나아가는 노력파 천재.'

가히 완성형에 가까운 천재.

피진호의 마음 속에서 강서율의 존재는 그런 것이었다.

피진호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나저나 이걸 어쩌면 좋을까.'

피진호는 몸을 돌려 한쪽 벽면을 바라봤다.

강서율의 불완전한 화살이 날아가 격돌한 벽면이다.

"설마 이걸 부술 줄이야."

고강도 마력 금속으로 제련된 교관용 훈련실의 단단한 벽면이 산산이 박살 나 있었다.

이걸 수리하려면 돈이 꽤나 많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교관의 월급은 꽤나 박봉이다.

"어쩔 수 없지."

피진호는 폰을 꺼내 현장의 사진을 찍은 후 메이든에게 톡을 보냈다.

[사진 첨부]

[이거 좀 고쳐 놔라. 부탁한다.]

답장은 바로 왔다.

[머리에 총 맞았냐? 어디서 명령질이야.]

"흠."

이 정도 반항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동영상 첨부]

[부탁한다.]

"이러면 되겠지."

메이든의 15년 전 흑역사를 첨부해서 보내고, 피진호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폰을 무음으로 바꾸었다.

[야 이 십루히 ᅡᆫ임ㄴ아아. 네각ㅡ러고도사라밍냐!]

무음 상태가 된 폰에서 메이든의 저주와 욕설이 가득 담긴 톡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 101화 꿈 (1) > 끝

< 102화 꿈 (2) >

일주일은 쏜살 같이 흘러갔다.

실전 훈련은 아예 없었고, 모두 이론 수업뿐이었다.

"오. 집 좋은데?"

오늘은 일요일.

메이든 씨가 선물해 준 집으로 이사하는 날이다.

"메이든 씨가 계약한 집이면서 반응이 뭐 그래요?"

"나도 보는 건 처음이야. 그냥 적당히 가격 보고, 사진 보고, 건설 날짜 보고, 부하한테 확인 시킨 뒤에 산 거거덩."

"······아하."

메이든의 바쁜 일과를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 얼마 줬는지 물어봐도 되요?"

사관학교 부지 내에 존재하는 주택. 위치적으로도 비쌀 법한데, 무려 단독주택이다. 듣자하니 40평이 넘는다고 하던데.

외견으로 봤을 때, 신축 건물인 것 같기도 하고.

"천변보단 싸. 자세한 건 묻지 마."

"······예."

비교 대상이 천변이라니.

무서워서 못 묻겠다.

······그냥 받아야지.

"그나저나 이년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아. 백호가 앙탈을 부려서 좀 늦어진다고 하더라고요."

"그 싸가지 없는 흰 거?"

메이든이 혀를 찼다.

얼마 전 유화의 집에 놀러갔다가, 백호한테 제대로 무시당한 뒤로 별명이 '흰 거'에서 '싸가지 없는 흰 거'로 변했다.

"그래도 아까 출발했다고 연락 왔으니까, 곧 도착하지 않을까 싶네요."

저 멀리서 유화의 붉은 스포츠카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때였다. 부드럽게 이동해 주차까지 완료했다.

"네가 상전이냐? 더럽게 늦네."

"미안해요. 준비가 좀 늦어서."

유화가 쓰게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뒷문을 열자 안에서 금호와 백호가 뛰어 나왔다.

두리번 두리번.

주위를 살피던 금호가 나를 발견하고는 벼락같은 속도로 내게 달려들었다.

폭-

"냐아앙!"

내 가슴에 뛰어든 금호를 완벽하게 받아 들고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금호 잘 잤어?"

"냥!"

그렇게 한동안 금호를 쓰다듬고 있노라니, 오른발에서 묘한 감촉이 느껴졌다.

"백냥아?"

백호가 내 발치에 붙어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닿을 간격을 유지하며 내게서 등을 돌린 자세였다.

"아하."

일단 반갑기는 한데, 표현하긴 부끄러우시다?

얘가 웬일이래?

나는 쭈그려 앉아 백호의 털에 손을 가져다 댔다.

"오."

백호를 쓰다듬는 건 처음이다.

금호랑 묘하게 다른 감촉.

금호가 털이 몽실몽실하다면, 백호는 짧아서 담백하게 부드럽다.

아무튼 좋은 감촉이다.

그렇게 약 10초가량을 쓰다듬었을까. 백호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내 손을 빠져나갔다.

그리곤 적당히 거리를 벌린 뒤 나를 올려다본다.

"이 이상은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 거야?"

백호가 굳은 얼굴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냥이 너 너무 도도한 거 아니야?"

백호가 고개를 홱 돌렸다.

뭐, 이것만 해도 어디야.

백호가 내게 마음을 열어 가고 있다는 거니까.

장족의 발전이다.

나는 금호를 땅에 내려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묘한 시선이 느껴져서 그곳을 바라보자, 유화가 세상을 지키지 못한 용사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난 한 번도 못 만져 봤는데."

"네?"

부러워 미칠 것 같다는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짓씹는다.

"오버하지 마, 이년아."

"아얏."

메이든이 그런 유화의 뒤통수를 후려 갈겼다.

"고양이··· 아니 호랑이 좀 못 만졌다고 뭐 그리 난리야. 누가 보면 내일 세상이 멸망하는 줄 알겠어."

메이든의 말에 유화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입술 넣어라? 잘라 버리기 전에."

유화가 잽싸게 입술을 오므렸다.

그런 유화를 보면서 메이든이 한숨을 내쉬었다.

"얘는 진짜 나이를 먹어도 변하는 게 없냐. 이런 년을 사람들이 냉정하고 유능한 여길드장이라 부르고 있으니 원."

세상 한심하다는 표정이다.

"······."

유화가 스리슬쩍 고개를 돌렸다.

대꾸할 말이 없는 모양이다.

아니, 대꾸할 말은 있는데 일부러 참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나저나 오늘 메이든 씨가 평소보다 짜증나 있는 거 같은데.

그래서 유화 씨가 말을 아끼는 건가?

"그럼 난 이만 간다."

"집들이도 안 하시구요?"

바로 간다고?

"엉. 다음에 시간 내서 올게. 오늘은······."

메이든이 이를 까드득 갈았다.

"일이 좀 있어서 말이지."

금니 빼고 다 씹어 삼킬 것 같은 표정이다. 무라.

"그럼 다음에 보자."

"네. 고생하세요."

그렇게 메이든이 떠나고 난 뒤.

"무슨 일 있으시대요?"

"아, 음."

유화가 볼을 긁적였다.

"그, 오빠가 부탁을 좀 강압적으로 했나 봐요."

"피진호 교관님이요?"

"네. 시설 내 단련실 수리하러 가신다던데요."

설마 내가 부숴 버린 단련실 수리를 말하는 건가?

"아. 맞다."

돌연 유화가 세워 둔 차를 향해 달려갔다.

트렁크를 열고 그 두 개의 캐리어를 꺼냈다.

"자요. 오늘 아침에 도착했어요."

이젠 익숙한지 별 감흥 표정으로 나에게 캐리어들을 내밀었다.

'하긴 그럴 때도 됐지.'

그것은

에일 크리스, 콜렉터가 보낸 고대 유물이 담겨 있는 캐리어였다.

* * *

그날 밤.

나는 대충 정리를 마친 침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새로 획득한 고대 유물은 '장인의 간이 대장간'에 보관해 뒀다.

둘 다 전투에 도움이 될 만한 고대 유물이라서 킵해 둘 생각이다.

애초에 '장인의 간이 대장간'이란 특성을 얻은 이상, 특성을 미리 획득한다는 이점은 아예 사라졌다고 봐도 된다.

이제 유물은 어지간하면 모아 두는 게 좋다.

"유물을 많이 쌓는 게 답이네."

보유 유물의 수가 늘어나면 1분의 시간제한도 단점이 아니게 된다.

아니, 오히려 장점이 될 수 있다.

1분마다 바뀌는 전투 스타일에 적응할 수 있는 상대는 몇 없을 거다.

"······마법."

그나저나 마법을 사용할 방법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메이든 씨한테 부탁해서 마법이 특기인 초인분들과 연락을 몇 번 나눠 봤는데, 결과는 모두 꽝이었다.

오히려 더욱 답이 없다는 확신만 얻었다.

진짜 현대 마법 체계와 고대 마법 체계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진짜 어쩌면 좋냐."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

마법의 재능이 있으면 뭐하겠는가, 쓸 방법이 없는데.

나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잠이나 자야지.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정신이 점점 아득해져갔다.

···

···

···

꿈을 꿨다.

―서율아. 주인공만 상태창을 없애는 거. 생각할수록 괜찮은 것 같다.

그리운 꿈.

이 소설 속 세상에 빙의하기 전의 마지막 기억.

시스템을 잃게 된 계기가 된 술자리의 대화에 대한 꿈이었다.

―좋아. 느낌 왔어. 리메이크. 까짓것 해 보지 뭐.

신이 형의 밝은 목소리에 묘한 짜증이 솟구쳤다.

나는 지금 여기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아. 근데 재밌긴 하겠다. 착용 제한을 무시한다는 건 일종의 버그니까. 시스템이 제동을 건다는 느낌으로. 나쁘지 않아.

서로 신나서 의견을 던지고, 낄낄대며 의견을 조율하고.

제법 즐거운 술자리였던 걸로 기억한다.

―오! 시스템이 해당 종족으로 오인을 한다는 느낌으로? 그래서 버그를 수정하는 와중에 해당 종족의 특성이 랜덤으로 하나 주인공에게 역류한다? 와. 형 천재야?

이 기억에 대한 꿈을 꿨을 때가 떠오른다.

중복착용 제한 및 시간 제한에 대한 걸 깨닫고 절망하던 상황이었지.

그 후에 바람의 길을 사용해서 최지훈과 싸웠고. 패배했다.

그리고 이 꿈을 꾸었다.

엄청 기뻤는데.

꿈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다시 봐도 어이가 없다.

이 대화의 결과가 소설 빙의라니.

―형! 이거 진짜 느낌 있다! 혹시 도움 필요한 거 있으면 뭐든 말만 해.

그렇게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대화가 끝났다.

그러나 꿈은 끝나지 않았다.

―······하하.

형이 갑자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왜 이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을까.

신이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서율아.

슬픔과 후회로 점철된 두 눈동자가 나를 꿰뚫고 있었다.

―네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

···

···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내쉬며 잠에서 깨어났다. 이마에 식은땀이 흥건하다.

가위라도 눌린 것마냥 호흡도 가쁘다.

"······방금 그 꿈은?"

마지막 신이 형의 두 눈동자가 뚜렷하게 떠올랐다.

뭔가 느낌이 달랐다.

내가 알고 있는 신이 형의 장난스런 모습과는 전혀 다른 진지한 모습이었다.

"부탁. 분명 부탁이라고 말했어."

마지막에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내게 부탁이 있다고.

"······설마."

내 생각이 가속했다.

조금 전 꿈의 마지막을 중점으로 생각이 꼬리를 물고 가설이 새로운 가설을 낳았다.

"소설 빙의는 신이 형이 강압적으로 벌인 현상이 아니라······."

그리고 결론을 냈다.

"내가 형의 부탁을 받아들인 결과··· 라는 건가?"

내 두 눈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 * *

일주일은 빠르게 흘러갔다.

이른 아침에 피진호 교관의 훈련을 받고.

그 후에 등교해서 수업을 받고.

오후에 신지아 하시연이랑 실전형 단련을 하고.

사이사이 메이든, 유화와 사무적인 연락을 나누고.

침대에서 금백호 듀오랑 좀 놀고 나면 어느덧 12시.

월요일에서 금요일은 이것의 반복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토요일.

오전에 예약해 둔 사설 훈련장을 이용해서 가볍게 신체 능력치 가측정을 마쳤다.

"좋아좋아."

그 결과 내 신체 능력치가 C랭크에 한없이 가까운 D랭크라는 걸 알았다.

대충 D랭크(95/99)정도.

확실히 엘프족 완전 체화 이후 신체 포텐셜이 오르면서 능력치 성장폭이 급격하게 오르고 있다.

아주 만족스러운 속도다.

물론 고위 랭크로 갈수록 상승폭이 줄어들고 있어서 마냥 안심할 수는 없지만, 어찌 됐건 예상보다 성장이 빠른 건 사실이니까.

일단 기뻐해도 되겠지.

나는 훈련복을 벗고 샤워실로 향했다.

샤워기 앞에 서자, 전신에 새겨져 있는 수많은 문신들이 눈에 들어왔다.

"진짜 문신쟁이네."

그래도 완전 체화를 이루면서 많이 사라져서 다행이지.

특히 등에 용문신이 사라져서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른다.

"흠."

그렇게 문신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천족, 정령족의 특성은 체화가 많이 늦네?"

천익(天翼)과 천벌(天罰)이야 사용할 기회가 많이 없어서 늦는 게 당연하다 쳐도.

정령족의 특성이 늦는 건 좀 의외다.

내가 정령의 불길을 얼마나 많이 사용했는데.

"그만큼 고 랭크의 특성이라는 건가."

아니면 내가 정령의 불길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어서 그런가.

분명 원작의 정령족들은 정령의 불길을 마법처럼 사용했다.

그중 최고봉은 10인의 합동 마법인 '정령의 성소'였지.

아무튼 나처럼 강기에 담아서 깨작깨작 사용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래서 체화가 늦는 것일까.

나는 슬쩍 정령의 불길을 사용해 봤다.

"흠."

역시 그냥 방사하는 것 정도가 끝이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범위를 조절하는 것 정도.

그 외에는 강기에 끼워 넣어서 마력을 태우는 기능을 추가하는 것뿐이다.

"······진짜 대충 사용하긴 했네."

냉정하게 생각해 보니까, 체화가 안 되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근데 뭐 어쩌겠어.

정령의 불길을 제대로 사용하고 싶어도 사용할 방법이 없는데.

마법을 사용할 방법이 없는 이상 어쩔 수 없다.

"아. 짜증나."

벌써 2주째 그 어떠한 실마리도 찾지 못하고 있다.

"······이거 이러다 나중에 드래곤로드한테 배우고 있는 거 아냐?"

이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다.

"에휴."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 * *

그날 점심.

나는 금호, 백호와 함께 강릉으로 이동했다.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유화 씨의 비서님께서 손수 데려다 주셨다.

"그럼 내일 오후에 뵙겠습니다."

"네. 조심히 올라가세요."

게다가 내일 연락하면 다시 데리러 와 주신다고까지 한다.

너무 감사하다.

리무진이 떠난 후.

우리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칠성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칠성산 중턱 어딘가에 있는 유적지, '자연이 승천하는 보고'다.

"오늘은 찾을 수 있겠지?"

저번에 시연이, 지아랑 같이 수색을 했지만 못 찾았던 그 유적지다.

유적지는 못 찾고 신이 형의 선물(종족 특성 백과사전)을 발견했었지.

오늘 지아와 시연이는 부르지 않았다.

그사이에 나도 제법 강해지기도 했고. 강해진 금호에 더해 백호까지 있으니 굳이 안 불러도 될 거라는 판단이었다.

"너희 둘. 주위에 뭐 마력적으로 이상한 거 있으면 말해."

내 말에 금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나 백호는 내 말을 들은 척도 안 한다는 듯이, 한 방향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백냥아?"

뭔가 이상하다.

단순히 내 말을 무시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고 보긴 힘든 모습이었다.

백호의 두 눈동자는 한 곳을 확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뭐 있어?"

백호는 이번에도 내 말을 무시했다. 대신,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바라보던 방향 그대로.

"?"

대체 왜 저러나 싶어서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였다.

꾹-

백호가 허공에 앞발을 가져다 댔다.

그때였다.

피잉-!

"우왓!"

백호의 앞발을 중심으로 마력이 쫙 뻗어나갔다. 정신이 흔들릴 정도로 강렬했다.

"큭!"

나는 두 눈을 감고 머리를 짚었다.

잠시 후.

고개를 두어 번 흔들고 눈을 떴다.

백호가 나를 바라보며 득의양양하게 웃고 있었다.

"이야······."

그런 백호의 뒤로 거대한 나무가 보였다. 마치 세계수처럼 하늘을 뚫을 듯이 솟아 있는 기다란 나무.

"우리 백냥이 할 땐 하는 냥이였구나?"

'자연이 승천하는 보고'의 입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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