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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화 선물 (3) >

오더 메이드 장비에 관한 얘기는 금방 끝났다.

"모두 정일용 어르신께 맡기겠습니다."

"오호. 전부 말인가?"

"예. 괜히 아마추어의 의견이 들어가 봐야 해밖에 안 될 것 같아서요."

정일용 어르신은 최고의 대장장이다. 그런 장인의 장비 제작에 내 의견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어르신이 조금 커진 눈으로 날 바라봤다. 무언가 놀란 표정이다. 그런 정일용을 바라보며 메이든이 킥킥 웃었다.

"봐요. 아재. 얘가 이렇다니까. 한번 얘기해 보면 마음에 안 들 수가 없는 꼬맹이야."

"그렇구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인정받은 것 같긴 한데.

왜 인정받은 거지?

두 명이 신나게 내 얘기를 하는 중. 유화가 내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오더니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정일용 어르신이 업계에서 은퇴하신 이유가 초인들의 갑질 때문이라고 들었어요."

"······갑질이요?"

"예. 디자인은 어떻게 하라느니, 성능은 어떻게 하는 게 좋다느니······."

"아."

"초인마다 맞는 장비가 다 다른데, 무작정 '이게 좋다! 이렇게 만들어 달라!' 라고 강요하니, 미칠 노릇이셨을 거예요."

이해는 한다.

초인으로서 로망 같은 게 있을 테니까.

"특히 상위 랭커들의 장비를 그대로 만들어 달라. 이런 발주가 들어오면 화부터 올라오신다고 하더라구요. 장인으로서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느낌이라고 하셨어요."

확실히 정일용 어르신 같은 성격의 장인이라면, 모방 장비를 만드는 게 꽤나 마음에 안 들었을 것이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요. 이런 고액의 장비 발주에서 아무 조건도 없이 순전히 '맡기겠습니다.'라고 할 초인이 얼마나 있겠어요?"

"그렇군요."

이해했다.

"아무튼 꼬맹이. 좋은 선택이야. 우리 아재 센스가 좀 올드하긴 한데, 멋은 있거든."

"이게 그 앞담화라는 건가?"

"에헤이. 앞담화라니. 칭찬한 건데."

메이든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런 메이든을 보며 정일용이 작게 고개를 저은 후에, 다시 나를 바라봤다.

"자세한 건 모두 내게 일임하겠다고 했으니. 그럼 남은 건 착용 제한과 선호 장비 타입에 대한 것뿐이구나."

"네."

"그래. 착용 제한은 어느 정도로 하면 될까."

"음······."

나는 잠시 고민했다.

뭐라고 답해야 할까.

마음 같아선 착용 제한은 상관없으니까, 성능만 최대한 올려 달라고 하고 싶다.

어차피 나는 '착용 제한'을 무시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한 순간 내 모든 능력치는 S랭크가 되는 것이다.

"꼬맹이. 네 정보가 새어나갈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네. 알고 있습니다."

물론 유화나 메이든은 내 능력치가 사관생의 능력치를 가볍게 뛰어 넘은 상태라 생각하고 있을 테니 상관없을 거다.

베가본드를 짧게나마 혼자 상대하기도 했고.

검령 귀령을 혼자서 처리하기도 했으니까.

즉, 착용 제한을 A랭크 이상으로 해달라고 해도 전혀 상관없다는 것이다.

"······."

문제는 정일용 어르신이 피진호 교관과 긴밀한 사이라는 것.

게다가 조금 전, 정일용은 내 옷 안의 [무기의 극의]를 정확히 노려보기도 했다.

아마 높은 확률로 [무기의 주인]에 대한 걸 알고 있을 테지.

당연히 [무기의 주인]의 소유자가 초반엔 약하단 것도 알고 있을 터.

이런 상황에서 착용 제한을 A랭크 이상으로 해 달라고 하는 건 조금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이런 좋은 기회를 날려버릴 수는 없고.

어쩌면 좋을까.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둘 다 잠시 자리 좀 비워 주겠느냐. 이 아이와 둘이서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말이지."

정일용이 메이든과 유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흠. 그러지 뭐."

"네. 알겠습니다."

두 명은 흔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꼬맹이. 얘기 잘 하고. 좀 이따 보자. 가자."

"네. 서율 씨. 이따 봬요."

두 명은 여유로운 걸음으로 방 밖으로 나갔다.

둘만 남은 방 안에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먼저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정일용 어르신은 원작에서 언급만 된 인물이다.

나는 이 어르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기에 섣불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설마 말년에 민지의 후계자를 볼 줄은 몰랐다."

정일용 어르신이 먼저 화두를 던졌다.

"역시 알고 계셨습니까."

내 예상이 맞는 모양이다.

정일용의 눈은 지금도 내 가슴팍을 정확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몰랐다. 오늘 알게 됐지. 그 무기의 극의 덕분에 말이다."

정일용이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신비로운 보라색으로 빛나는 특이한 눈.

"내 특성. '명인의 눈'에는 온갖 장비들의 정보가 보인다. 상태창 공개 설정을 해 두지 않은 장비도, 착용 중인 장비도 말이지."

"······아."

그래서 내 옷 속의 [무기의 극의]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던 거구나.

"애시당초 그 목걸이를 만든 건 나기도 하고."

"······예?"

무기의 극의를 정일용 어르신이 만들었다고?

이건 또 처음 듣는 말이다.

"그래. 진호가 민지랑 결혼할 때, 선물로 줬지."

어르신의 눈에 아련한 빛이 감돌았다.

"고얀놈. 후계를 찾았으면 귀띔이라도 해 줄 것이지."

피진호에 대한 일말의 원망과, 두 부부에 대한 진한 그리움이 느껴지는 쓸쓸한 눈빛이었다.

"늙은이가 주책이었구나.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마."

정일용이 진지한 눈으로 날 응시했다.

"이번 장비 발주는 '무기' 하나만 하는 게 어떻겠느냐."

"······무기 말입니까?"

"그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일까.

"내 생각이 맞다면 너는 아직 성장 중일 거다."

"예."

"그런 상황에서, 괜히 성능에 타협을 봐야 하는 저(底) 착용 제한 장비를 발주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너는 1년, 2년. 빠른 속도로 강해져 갈 테고, 금세 바꿔야 할 테니까."

따스한 눈빛.

누군가를 나와 겹쳐 보는 듯했다. 아마 강민지라는 사람이겠지.

"하지만 무기만은 다르다. 너는 '무기의 주인'을 지녔다."

그의 눈이 다시금 내 가슴팍의 [무기의 극의]로 향했다.

"무기에 한해선 욕심을 부려도 된다는 말이다. 지금 네 능력치가 어찌 됐건, 무기라면 제약 없이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

무기의 주인에 대한 걸 알고 있는 정일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저런 말을 하는 건 당연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번 예산을 전부 '무기'에 투자하는 걸 추천한다."

"음······."

정일용의 생각은 잘 알겠다.

게다가 지금 이 제안은 내게도 형편이 좋다.

현재 상황에서 내 능력치를 공개하지 않고, 최고급 무기를 발주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니까.

······하지만 최고급 방어구 세트도 버리기 아까운데.

"고민되는 모양이구나. 그럼 일단 어떤 무기인지 들어본 후에 결정하는 건 어떠냐."

"네. 경청하겠습니다."

정일용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서랍을 뒤졌다.

그리곤 원하는 걸 찾았는지, 파일 하나를 들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 건방진 꼬맹이가 제시한 제작비 중 9할 정도 사용하면, '초 형상 기억 마력 합금'을 살 수 있을 거다."

정일용이 내게 낡은 설계도 하나를 건넸다. 얼핏 봐도 10년은 넘어 보이는 샛노란 종이였다.

"······이건?"

그 설계도를 확인함과 동시에 내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이게 된다고?

"민지를 위해 설계해 둔 장비인데 말이지. 설마 10년 후에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정일용이 쓰게 웃었다.

"무기의 이름은 천변(千變). 예상 성능은 거기 적힌 대로다."

"······S랭크."

"그래."

모든 스펙이 S랭크 장비를 가볍게 뛰어 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착용 제한이 어마무시하다.

필요 능력치 올S랭크[99/99]라니.

이건 절대 평범한 사람이 착용할 수 있는 무기가 아니다.

무기의 착용 제한을 무시할 수 있는 '무기의 주인' 보유자나,

나처럼 시스템의 법칙에서 벗어난 이레귤러가 아니면 착용 자체가 불가능 한 아이템이다.

나 같은 이레귤러를 상정하고 만들진 않았을 테니,

말 그대로 '무기의 주인'을 위해 만든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이 특수 능력을 보라.

[천변(千變)]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수백, 수천 가지 모습으로 변화한다.]

진짜 처음부터 끝까지 '무기의 주인'을 위해 설계된 아이템이었다.

"이걸로 내 제안은 끝났다. 이제 선택하면 된다."

정일용이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이건 애초부터 비교 대상이 아니잖아요."

나는 쓰게 웃었다.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천변으로 하겠습니다."

이 제안을 거절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다.

* * *

메이든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꼬맹이. 진짜 무기 하나로 되겠어?"

"네."

A랭크 방어구 수십 개를 가져온다고 해도, 천변 하나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돈이 문제면 조금 더 지원해 줄 수 있는데."

"언니. 지금도 과해요. 괜히 감사 나오고, 스캔들 터지고 이러면 서로 피곤하잖아요."

"······쯧. 거지같은 기레기들."

메이든이 혀를 찼다.

"진짜 괜찮아요. 진짜 엄청난 무기거든요."

"······대체 뭐길래 그래?"

내가 너무 싱글벙글했던 걸까.

메이든이 게슴츠레 날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게요. 고대 유물도 착용할 수 있는 사람이 저렇게 반응할 정도면······."

유화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화는 몰라도 물주인 나한텐 알려 줘도 되지 않겠니?"

"언니! 비겁하게 그러기에요?"

"꼬우면 너도 물주 하던가."

메이든이 껄껄 웃었다.

유화가 입술을 삐죽였다.

"나중에 완성되면 보여 드릴게요. 정일용 어르신께서 일단 비밀로 하라고 하셔서."

내 말에 메이든이 혀를 찼다.

"그 꼬장아재······."

그리곤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됐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 뭐."

나는 창밖을 내다봤다.

서울의 아름다운 야경에 마음이 편해진다. 그 위로 은은하게 빛나는 세계수가 보이고. 그 위로 제법 밝은 별들이 보인다.

마력이라는 친자연적인 에너지를 주로 이용하는 세상이라, 환경오염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세계가 원래 내가 살던 세계와 다르다는 걸 주장하는 듯한 풍경이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서 집 앞에 도착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렸다.

"오늘 두 여자 상대하느라 고생 많았다. 진이 아주 쭉쭉 빠지지?"

메이든이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

노코멘트 하기로 했다.

솔직히 엄청 지쳤다.

"그럼 마지막으로."

메이든이 나를 지나 트렁크로 향했다.

트렁크가 열리고 안에 각기 다른 크기의 캐리어 세 개가 눈에 들어왔다.

"자. 오늘의 마지막 선물. 더 많을 줄 알았는데, 세 개밖에 없더라. 쏘리."

"세 개밖에라뇨. 충분히 많습니다. 감사합니다."

불로소득으로 고대 유물 세 개를 얻었는데 실망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활짝 웃고 있을 때였다.

"강서율."

"네?"

갑자기 메이든이 내 이름을 불렀다. 이름으로 불리는 건 처음인 것 같다.

"삶은 복수만이 전부가 아니야."

메이든의 눈은 아주 진지했다.

"지금도 복수를 위해 살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닌데. 이거 생각보다 엄청 지치거든."

슬픔과 후회로 가득 찬 눈빛.

"친구들이랑 좀 놀고. 괜히 패션에도 신경 좀 써 보고. 사랑도 좀 해 보고. 얼굴값 믿고 나대다가 실연도 좀 당해 보고."

"······."

"난 네가 그렇게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메이든의 말은 조금 어긋나 있었다. 나는 진리의 구명자에게 복수심을 품고 있지 않다.

전부 오해에 불과했지만, 그녀의 말은 내 가슴에 묘한 울림을 줬다.

평범한 삶.

그 단어를 듣자, 나도 모르게 이렇게 답이 나왔다.

"······네. 저도 그렇게 살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나도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 진심이다.

이 세계가 나 없이도 안전한 미래를 맞이할 수 있는 세계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게 제 꿈이에요."

나는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 * *

강서율이 집으로 들어가고 난 뒤.

메이든과 유화는 멍하니 서 있었다.

"화야. 저 꼬맹이. 일주일 일과가 뭔 줄 알아?"

메이든이 넌지시 말했다.

"······아뇨."

"훈련."

"그리고요?"

메이든이 한숨을 쉬었다.

"그게 다야."

"네?"

"굳이 나눈다면 훈련. 공부. 단련."

메이든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 제법 아름답다.

"취미다운 취미도 없어. 신지아, 하시연을 제외하면 친구다운 친구도 없어."

강서율은 굉장한 노력파다.

그리고 그 노력의 근원은 '복수'라는 감정에서 비롯됐다.

"저 꼬맹이는. 복수에 미쳐 있어. 그래서 쉬지 못하는 거야. 하루라도 빨리 강해져야 하거든. 복수를 이루기 위해서."

메이든이 쓰게 웃으며 '내가 그랬거든.'이라고 덧붙였다.

"나는 그 꼬맹이가 화 너나, 신지아, 하시연 사관생에게 접근한 것도 복수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네."

유화가 가라앉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

"단순히 너희를 이용해야겠다. 이런 생각은 아닐 거야. 하루 같이 다녀 봤지만, 그건 잘 알겠더라. 상부상조가 목적이겠지."

"네."

메이든이 강서율의 집을 바라봤다. 커튼 너머로 불이 켜져 있다. 아마 고대 유물을 확인하고 있을 테지.

'불쌍한 것.'

평범하게 사는 게 꿈이라고 했던 강서율의 말을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곧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10년 넘게 복수를 위해 살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언니."

메이든이 유화를 바라봤다.

"화야. 이번 국가전 소탕 작전. 반드시 성공하자."

아주 진지한 눈빛이었다.

"저 꼬맹이 같은 피해자가 더 늘어나선 안 돼."

"······네."

두 사람의 눈동자가 결의로 빛났다.

* * *

나는 방 안에서 금호를 껴안고 손을 풀고 있었다.

"자. 뭐가 나올까."

랜덤박스 개봉.

이미 지문 인식, 마력 인식은 마쳤고, 열림 버튼 하나만 남은 상태다.

내 가슴이 기대로 부풀어 올랐다.

"자, 일단 경건한 마음으로 심호흡을 한 후에······캐리어 주변을 두 바퀴 돌고······."

"냐앙!"

그러나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품 안의 금호가 앞발로 버튼을 내리찍어 버렸다.

푸쉬시······.

하는 김빠지는 소리와 함께 캐리어 하나가 열렸다.

"금호 너!"

나는 금호에게 따끔하게 한 마디 했다.

"형 아직 마음의 준비도 안 됐는데, 그렇게 깜빡이도 안 키고 훅······!"

그러나 이번에도 내 말은 마저 끝을 내지 못했다.

"···들, 어오···면···?"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금호를 안아 들었다.

"······이게 왜 여기서 나와?"

"끼앙?"

당황하는 나를 올려다 보며 금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 81화 선물 (3) > 끝

< 82화 서바이벌 (1) >

"······골치아프네."

나는 눈앞의 한 고대 유물을 바라보며 고민에 잠겼다.

"금호야. 어쩌면 좋을 거 같아?"

금호가 털을 고르다가 내 부름에 나를 올려다 본다.

얼굴에 '형 하고 싶은 거 다 해!'라고 쓰여 있는 듯했다.

"어유 귀여워."

그 모습이 귀여워서 괜히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내 손놀림에 고롱고롱 소리를 내는 금호를 보며, 다시 문제의 고대 유물로 시선을 돌렸다.

"악마족의 유물."

정확히는 캐리어에 같이 동봉되어 있던 '고대 유물 성능 일지'를 읽는 거였다.

"루시퍼의 마창."

대악마 루시퍼가 애용하던 창으로, 추후 등장할 루시퍼라는 악마가 다루게 되는 고대 유물이다.

등급으로 치자면 최상급 중의 최상급. [고대 유물/S랭크]라고 할 수 있다.

이 세계에서 A랭크와 S랭크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다.

이 루시퍼의 창은 진짜 지끔까지 사용했던 고대 유물들과는 차원이 다른 성능이다.

루시퍼의 특성 중에는 이 창을 원거리에서 불러들이는 특성도 있다.

"······약간 토르와 묠니르를 보는 것 같았는데."

루시퍼가 처음 등장하던 날.

엄청난 기운을 뿜으며 내민 손 안에 루시퍼의 창이 날아들던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아. 돌겠네."

원래라면 이런 최고급 고대 유물을 얻었으니, 좋아해야 하겠지만.

"왜 하필 루시퍼의 마창이야."

이 악마족의 고대 유물에는 큰 문제가 있다.

창 자체에 달려 있는 '고유 효과'가 아주 큰 문제다.

무기를 쥠과 동시에 발동되는 '상시 발동형 고유 효과'로 이름은 '살인충동'이라 한다.

고유 효과라기보단 페널티에 가깝다. 착용자의 정신을 좀먹는 저주형 고유 효과.

솔직히 1분 쥐는 것도 무섭다.

"······루시퍼 그 또라이."

루시퍼라는 대악마의 탄생 배경을 생각해 보면 무서울 수밖에 없다.

원래 천사였던 루시퍼가 타천하게 된 계기가 '루시퍼의 마창'의 원류가 된 물건의 '살인충동' 때문이거든.

"이거 쥐면 나도 미치는 거 아냐?"

괜히 몸이 부르르 떨렸다.

물론 괜찮을 수도 있다.

고작 1분이니까.

하지만 확률은 반반.

괜히 위험한 길을 갈 필요는 없다.

"일단 리스크가 큰 건 패스······."

루시퍼의 마창은 계륵이었다.

······아 아깝다. 이게 '가브리엘의 성창' 이었다면.

그런 생각을 하며 다음 캐리어를 확인했다.

"하나는 드워프고."

드워프족의 유물 중 가장 흔하다는 망치류 유물이다.

드워프가 만든 망치 답게 유려한 외견이다.

"하나는······."

나는 다른 하나의 유물도 확인했다.

"몽마족의 목걸이."

정식 종족명 몽마.

영어로 하면 서큐버스.

원작 소설이 전체 이용가인 것 답게, 제법 건전한 종족으로 탈바꿈 했다.

악마에서 파생된 종족으로, 남성의 '마력'을 흡수하여 연명하는 종족이다.

즉, 특성 획득에 있어서도 아무 거리낌이 없다는 말이다.

게다가 내 부족한 마력을 해결할 수 있는 종족 중에 하나이기도 하니, 기뻐해야 할 일이다.

"둘 다 무기로 쓰긴 글렀네."

둘 다 전투용 고대 유물이 아니다. 즉, 지금 특성을 습득해 버리는 게 이득이라는 말이다.

"······좋아."

나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바로 간다."

그리고 드워프의 망치에 손을 댔다. 제법 그립감이 좋은 망치 손잡이의 감촉을 느끼며, 머릿속에 흘러 들어오는 고대 유물의 사용법에 신경을 기울이다 보니,

1분이란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파지직-

[Error!]

에러를 확인한 순간 손을 뗐다.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신체를 확인했다.

이번엔 문신이 어디 생기려나.

"······무난하네."

옆구리에 생겼다.

이런 위치까지 문신이라니.

진짜 문신쟁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도 다행히 옷으로 숨길 수 있는 위치다.

그럼 다음은 제일 중요한 특성을 확인할 때다.

"제발 좋은 거 나왔어라."

나는 가볍게 기도하며, '백과사전'에 적혀 있는 드워프 특성란을 읽어 나갔다.

따끔-

내가 습득한 특성은 금세 발견할 수 있었다.

"······와, 미친! 진짜로?"

내 동공이 경악으로 확장됐다.

기쁨의 경악이었다.

"장인의 간이 대장간······."

내가 원했던 드워프의 특성 중. 두 번째로 원했던 특성이 나왔다.

"이 기세를 이어 가야 한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바로 서큐버스의 고대 유물에 손을 댔다.

그리고 1분 후.

"······허억!"

나는 또다시 입을 벌렸다.

"그래! 이거지!"

2연타석 홈런.

내 인생에 봄이 왔다.

* * *

시간은 금방 흘러.

오늘은 월요일이다.

"나 호주는 처음 와 봐."

"아. 걱정된다. 서바이벌 어쩌지?"

"······진짜 죽는 거 아냐? 매 해마다 사망자가 나온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에이. 설마."

우리는 호주 국제 공항에 도착했다. 지금은 호주 사관학교 측에서 준비해 준 리무진 버스에 탑승하러 가는 길이다.

"지아는 결국 못 왔네. 아쉽당."

"그러게."

지아는 결국 오지 못했다.

비서와 주치의가 극구 반대했다고 한다. 지금 무리했다간 평생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다고 했다나.

어제 시연이랑 병문안을 갔는데, 피눈물을 흘리고 있더라.

―시연아. 축하해. 1등.

―어···? 어.

시연이가 지아의 살벌한 기세에 밀려 주춤하는 모습이 꽤나 웃겼다.

그렇게나 1위를 뺏기는 게 싫을까.

"지옥의 5박 6일 서바이벌 시험에서 빠진 거니까, 오히려 좋은 걸 수도 있지."

"아. 그런가?"

개인적으론 부럽다.

그렇게 약 3분을 걸어,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럼 각 반 별로 리무진에 탑승할 수 있도록."

"네!"

고급 리무진에 탑승해, 한참을 달렸다.

"앗. 저기 캥거루다!"

"오. 나 야생 캥거루 처음 봐. 쟤네 펀치력이 좀 특출나다던데. 지훈이 너 맞으면 한 방에 골로 가는 거 아냐?"

"······개소리."

하시연, 김철진, 최지훈 삼인방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도착했다. 다들 하차하도록."

"오. 사진에서 보던 그대로네."

호주 초인 사관학교의 교사(校舍)는 꽤나 세련된 외향을 하고 있었다.

"여기로 온 거 보니까, 바로 시험 시작하려는 것 같지?"

"······에반데."

주위에서 불안 섞인 웅성거림이 들렸다. 그 소리를 들으며 피진호 교관이 씨익 웃었다. 나도 불안해졌다.

"어서 오십시오."

그런 우리에게 한 남성을 선두로 열댓 명의 사람들이 다가왔다.

모두 제복을 입고 있는 걸 보니, 호주측의 교사들인 듯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한국어가 꽤나 능통한 교관이었다. 다른 아홉 명은 한국어를 못 하는 것 같았다.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피진호 교관이 짧게 목례한 뒤, 오른손을 내밀었다.

"피진호라고 합니다."

"케인 로퍼라고 합니다."

자신을 케인이라 소개한 교관이 마찬가지로 오른손을 내밀어 붙잡고, 작게 흔들었다.

―이렇게 다 같이 마중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곤 뒤에 있는 교관들에게 영어로 인사를 건넸다.

―하하. 당연한 거죠.

다들 우리를 반기는 모양새였다.

"그럼 바로 교사 내로 이동하시죠. 시설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우리는 케인 교관의 뒤를 따라 이동했다.

"여기가 주 훈련장입니다."

"오오."

주위에서 탄성 소리가 울렸다.

땅이 넓기 때문인지, 훈련장이 엄청나게 크다.

"평소라면 많은 사관생들이 훈련에 힘쓰고 있을 시간입니다만. 오늘은 임시 휴교일이라서 말이지요. 아무도 없습니다."

"저희 때문에 임시 휴교까지······."

"아닙니다.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저희는 한 달에 한 번 안식일이라고 해서, 학생들에게 하루 종일 쉴 수 있는 시간을 주거든요. 그걸 조금 앞당겼을 뿐입니다."

"좋은 제도군요."

두 대표 교관님들의 사이가 나쁘지 않은 듯했다.

하기야 한국어에 저렇게 능통한 교관이 한국에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지.

애초에 호주는 여러 종족들이 모여서 세운 다종족 국가다.

그중에는 당연히 엘프족도 있다.

엘프를 시조로 모시고 있는 한국이란 나라를 싫어할 이유는 없다.

"대충 이런 시설들이 있습니다."

케인 교관이 모든 설명을 마쳤다.

"그럼 간단한 소개도 끝났으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서."

케인 교관의 미소에서 피진호 교관의 미소가 겹쳐 보였다. 매우 불안한 미소.

"저희 호주 사관학교가 자랑하는 서바이벌 훈련 부지로 이동하겠습니다."

"설마······."

"진짜 바로 시작하는 거야?"

그런 사관생들을 바라보며 피진호 교관이 오리지널 악마의 미소를 지었다.

"그럼 지금부터 실기 시험을 시작하겠다."

"아."

"미친."

사방에서 탄식이 들렸다.

* * *

지정된 위치에 배치받은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그냥 무슨 아마존이네."

호주 서바이벌 훈련장은 말이 훈련이지, 철저한 실전과도 같다.

그것도 호주의 넓은 땅덩어리를 이용한 직경 50km범위의 넓은 부지를 이용한 극한의 실전 훈련.

먼저 이 시험의 기본은 생존이다.

생존 시간에 따라 차등적으로 점수가 지급되니, 마지막 날까지 탈락하지 않고 살아남기만 해도 제법 짭짤한 점수를 받을 수 있다.

5박 6일간 살아남기.

말만 들어선 매우 쉬워 보이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이 서바이벌 시험은 최초 보급받은 식량을 제외하면 모두 자급자족해야 한다.

게다가 악세사리를 포함한 온갖 장비들도 지급되지 않는다.

"설마 훈련용 무기도 안 줄 줄은 몰랐는데."

즉, 맨몸으로 5박 6일을 버텨야 한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서바이벌 시험은 '약탈'이 존재한다.

각 사관생들은 가슴에 인식번호가 적힌 브로치를 달고 다니며, 그 브로치를 빼앗기거나 잃어버리면 시험에서 탈락하게 된다.

그리고 이 브로치를 '약탈'한 사관생에겐 추가 점수가 들어간다.

즉, 사관생들끼리도 적이라는 말이다.

이것 때문에 어지간한 신뢰가 없으면 동맹을 맺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막말로 동맹을 맺었다가 배신당할 수도 있는 노릇 아닌가.

배신할 가능성이 아예 없는 친한 친구들과 팀을 짜면 되는 거 아니냐고?

응. 아니다.

이 시험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 서바이벌 시험에는 '빌런'이라는 역할을 부여 받은 사관생들이 존재한다.

이 빌런은 생존하는 것을 포함한 온갖 부가적인 요소로는 점수를 받을 수 없고, 오로지 '약탈'로만 점수를 얻을 수 있다.

획득 점수는 무려 두 배!

즉, 이 빌런의 역할을 부여 받은 사관생들은 자기들이 살아남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남을 사냥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빌런을 처리한 사관생에게도 두 배의 점수가 들어간다.

이 빌런이라는 존재 때문에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도 의심암귀가 생겨나게 된다.

게다가 498명 중에 무려 30명이 빌런이다.

확률이 확률이니, 마음 놓고 협력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내 점수는 소중하니까.

배신에 심리적인 거리낌도 없다는 점도 한 몫 한다.

애초에 배신을 전제로 둔 '게임'이기에, 배신하는 건 당연하다.

마피아 게임에서 마피아가 시민들을 속이는 건 당연한 거고.

마피아가 자신을 속였다고 진심으로 배신감을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니까.

물론 점수가 걸린 이상 앙금은 남는다만.

"······인간관계까지 부수는 지옥의 시험."

진짜 생각할수록 악랄한 시험이 아닐 수 없다.

"오. 뿔 멧돼지 발견."

지형 파악을 위해 주위를 살피던 도중. 마침 식용으로 딱 좋은 뿔 멧돼지를 발견했다.

아직 거리가 제법 있어서 그런가, 아무것도 모르고 풀을 뜯고 있다.

나는 기척을 죽이고 자리에 앉았다.

"흠."

뿔 멧돼지를 발견한 건 좋은데,

문제는 내가 맨몸이라는 거다.

단검이 없으니, [바람의 길]을 사용할 수도 없다.

활도 마찬가지다.

제일 심각한 건 [무기의 극의]가 없다는 거다.

이걸로 내 무기 다루는 솜씨는 일반인과 다를 게 없어졌다.

장비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내게는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

······여야 했는데.

"응. 아냐."

나는 껄껄 웃었다.

웃으며 마력을 끌어 올렸다.

옆구리의 드워프족 문신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그 통증을 느끼며, 눈을 감고 집중했다.

이번에 내가 얻은 드워프족의 특성은 '장인의 간이 대장간'이라는 특성이다.

드워프족이 언제 어떠한 장소에서도 제작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특성으로, 온갖 장비들을 저장해 둘 수 있다는 효과를 지닌 사기적인 특성이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소형 인벤토리'라는 거다.

나는 이 장인의 간이 대장간에 [무기의 극의]를 비롯한 [마나의 은혜], [훈련용 단검], [훈련용 활]을 비롯한 실전에서 사용하는 장비들까지 모조리 넣어 뒀다.

그럼 뭘로 할까.

뿔 멧돼지를 식량으로 쓰려면 최대한 상처 없이 잡는 게 좋겠지?

좋아. 활로 하자.

그렇게 마음을 정한 순간.

내 손에는 훈련용 활이 들려 있었다.

"좋아."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시위를 당겼다.

< 82화 서바이벌 (1) > 끝

< 83화 서바이벌 (2) >

서바이벌 시험 시작으로부터 5시간이 흘렀다. 해는 완전히 저물어 완전한 밤이 됐다.

하시연은 그런 어두운 숲을 혼자 걷고 있었다.

"역시 검이 없으니까 빡세당."

맨손인지라 무서울 만도 한데, 하시연의 표정에선 일말의 두려움도 느낄 수 없었다.

"오! 보급 상자다."

하시연의 동공이 기쁨으로 확장됐다. 저 멀리서 생존에 도움이 되는 아이템들이 들어 있는 보급 상자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시연이 신난 발걸음으로 달려갔다.

"히히."

무기가 들어 있는 보급 상자면 좋을 것 같다. 식량도 필요하긴 한데, 일단 몸을 보호할 수단을 얻는 게 우선이다.

마력이 무한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하시연이 보급 상자를 열었을 때였다.

"······비었네?"

보급 상자는 텅 비어 있었다.

누가 이미 가져간 상자인가?

"체엣."

그렇게 아쉬움에 입술을 샐쭉이고 있을 때였다.

"!"

뒤에서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묘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살의까진 아니지만 적의에 가까운 기색.

'습격!'

하시연은 즉시 마력을 끌어 올렸다.

칭!

얼음과 철이 부딪쳐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

"얼음··· 하시연!?"

습격자가 경악했다.

"하필!"

어둠 속, 보급 상자로 다가온 인영만 보고 습격을 가한 건데, 설마 많고 많은 사람 중 하시연일 줄이야!

하시연이 곧장 반격하려 할 때였다. 이번엔 반대쪽에서 누군가가 달려들었다.

"아오! 운도 없지!"

두 번째 습격자가 하시연의 브로치를 노리고 손을 뻗었다.

"조심해! 하시연이야!"

"나도 눈 있어!"

하시연은 즉시 얼음 덩어리를 생성해 주먹을 막고, 뒤로 백덤블링을 했다.

동시에 공중에 원판 형태의 얼음을 생성. 공중에 섰다.

"깜짝 놀랐네."

거기에 서서 가슴을 쓸어 내렸다. 예상치도 못한 기습에 제법 놀라서 심장이 마구 뛰고 있었다.

구름이 걷히고 밝은 달빛이 내리 쬐었다. 은은한 달빛을 받으며 하시연은 습격자 두 명을 내려다 봤다.

"너희 빌런이야?"

처음 보는 사관생들이었다.

"······진짜 재수 옴붙었네."

"아오. 하필 걸려도 2위냐."

하시연의 얼굴을 바라보며 두 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회로 가득 찬 한숨이었다.

"어?"

두 명을 훑던 하시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너. 여기서 얻은 거 검이었구나?"

그녀의 눈은 습격자A가 쥐고 있는 훈련용 검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두 명의 탈락자가 생겼다.

브로치가 파괴된 채, 어깨를 추욱 내리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두 사관생을 바라보며 하시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둘 다 빌런이 아니었네?"

빌런이던 아니던 상관없이 모두가 '약탈'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런 습격은 필드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 * *

"개판이네."

서바이벌은 가히 개판이라 표현할 수 있었다.

"벌써 160명이 탈락했다고?"

현재 시간은 자정.

그리고 자정엔 사관생들에게 일괄로 지급한 단말에 현재 상황이 공지된다.

시험이 시작된 지 아직 9시간밖에 안 됐다.

나는 아직까지 한 명도 못 만났는데 벌써 1/3이 탈락했다. 많아야 100명 탈락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되게 많이 탈락했다.

"······그럼 다들 약탈에만 신경쓰고 있다는 건데."

이 서바이벌은 경쟁이 강요되고 있다.

곳곳에 존재하는 보급품을 획득하기 위해서 싸워야 하고.

유물을 쟁탈하기 위해 싸워야 하며.

상대의 브로치를 빼앗기 위해 싸워야 한다.

거기에 빌런이라는 존재가 싸움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

"······다들 모르네. 이거 그냥 가만히만 있어도 중간은 가는 게임인데."

이 서바이벌 시험은 일종의 마피아게임과 같다.

그리고 마피아 게임을 비롯한 눈치를 봐야 하는 게임은 나대는 사람이 가장 먼저 죽는 법이다.

"하위 랭킹 애들이 모 아니면 도 같은 느낌으로 닥돌하는 건가?"

아니면 그냥 탈락해 버리고, 숙소로 돌아가서 편히 자려는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맨몸으로 5박 6일을 버티는 건 꽤나 가혹한 일이니까.

나도 설마 침낭도 안 줘서 보낼 줄은 몰랐다.

"어쩔까. 템포가 너무 빠른데."

상황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템포로 진행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 가만히 있어 봐야 도태될 뿐이다.

"어쩔 수 없지. 내일부터 바로 행동해야겠어."

상위권으로 올라가기 위해선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할 필요가 있다.

따닥, 따닥.

장작 타는 소리가 정겹다.

그 위에서 낮에 잡아둔 뿔 멧돼지가 통으로 구워지고 있다.

고기가 노릇노릇 익는 냄새에 식욕이 돋는다.

"뿔 멧돼지라 다행이지."

뿔 멧돼지는 유명하면서도 편리한 식용 몬스터다.

맛은 좀 떨어지지만, 가죽채 통으로 불에 굽기만 해도 먹을 수 있는 아주 특이한 몬스터.

"······강서율?"

그때 뒤에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음성.

"최지훈?"

나뭇가지를 쥐고 있는 최지훈이었다.

"너 그 나뭇가지 설마 검 대용이냐?"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나뭇가지다.

"그거 쓸 바엔 주먹이 낫지 않겠냐?"

"마갑을 씌우면 검 대용은 된다."

"벌써 거기까지 응용할 수 있어?"

진심으로 놀랐다.

되게 빠르네.

나와의 만남이 빠른 성장을 촉구한 건가? 역시 사람은 패배를 해 봐야 한다니까.

"이 불. 보급품······. 아니. 네 마력으로 피운 건가."

최지훈이 모닥불과 그 위의 뿔 멧돼지를 보며 물었다.

불을 피우려고 해도, 보급품이 필요하다. 라이터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불을 지피겠는가.

"맞아."

물론 화 속성 마력이 있는 내게는 상관없는 얘기다.

덤으로 보급품은 못 찾았다.

아니, 찾을 생각이 없었다.

굳이 찾을 필요성을 못 느껴서.

"그렇군."

"그래."

왠지 모를 정적 속, 모닥불 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그만큼 고요했다.

꼬르륵.

그 고요함 속, 최지훈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더욱 크게 울렸다.

"······배고프냐?"

"······."

최지훈은 답하지 않았다.

등에 멘 배낭이 빵빵한 걸 보니, 아직 음식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은데.

"아하. 배급받은 식량은 비상용으로 킵해 두고 싶으시다?"

"부정하진 않겠다."

최지훈이 당당하게 답했다.

"뭐, 현명한 선택이네."

실제로 나도 아끼고 있으니까.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첫날부터 식량을 다 먹어.

그건 하수나 하는 짓이다.

"그럼 뭐, 같이 먹을래? 안 그래도 양이 많아서 남을 것 같았는데."

"······."

최지훈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날카로워졌다.

"아하. 나한테 빚지긴 싫으시다 이거구만?"

"그래."

나는 픽 웃었다.

진짜 승부욕만큼은 지아한테 안 지는 놈이다.

"그럼 뭐, 뺏으려고?"

최지훈의 눈이 내 허리춤을 향했다가, 다시 자신의 나뭇가지로 향했다.

"아니."

훈련용 단검과 나뭇가지.

지금 나와 싸워서 이기는 건 무리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그럼 딱 좋네.

"이거 어차피 너무 많아서 혼자 다 못 먹거든? 보존식으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협력하는 게 어때? 이 통구이 나눠 줄 테니까. 불침번을 나눠서 하자."

본디 서바이벌이란 수면 중이 가장 위험한 법이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

"그치?"

"근데."

최지훈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내가 배신하면 어쩔 생각이지? 내가 빌런일 수도 있는데."

그의 눈은 정확히 내 브로치를 향하고 있었다.

"너 빌런 아니잖아?"

나는 최지훈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어떻게 확신하지?"

"네 성격에 빌런이면 이렇게 행동하진 않을 거 같아서."

만약 최지훈이 빌런이었다면, 그의 성격상 바로 기습을 했을 거다.

······뭐, 솔직히 빌런이라도 상관없다.

"애초에 위험한 건 피차일반이잖아. 반대로 내가 빌런일 수도 있고. 빌런이 아니라도 서로 배신할 수도 있는 거니까."

"······그렇군."

최지훈이 고민하는 듯 눈을 게슴츠레 떴다.

고민 좀 될 거다.

배신의 위험이 있긴 하지만.

나랑 팀을 맺으면 생길 이점을 생각하면 마냥 거절하기 힘들겠지.

"고민되면 일단 먹고 나서 생각해 보던가. 이러다 고기 다 타겠다."

"좋다."

최지훈이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울대가 요란하게 움직이는 걸 보니, 뿔 멧돼지의 고소한 향기를 이겨 낼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럼 빨리 앉아."

나는 맞은편의 바위를 가리켰다.

"알겠다."

최지훈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리에 앉으면서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말을 툭 내뱉었다.

"······내키진 않지만, 일단 고맙다고 해두―"

그때였다.

"―지···으엇!"

최지훈이 얼빠진 소리를 내며 뒤로 자빠졌다. 최지훈이 앉은 바위가 뒤로 굴러가며 무게중심을 잃은 것이다.

그리고 저 바위는 내가 일부러 저렇게 설치해 둔 것이다.

누군가가 불빛과 고기 냄새에 이끌려서 왔을 때를 대비해서!

내 눈에서 이채가 흘렀다.

타이밍 이즈 나우!

내 몸이 단검과 함께 벼락처럼 움직였다.

바람의 길을 읽으며 단검을 휘둘렀다.

최지훈은 곧바로 반응했으나, 완전히 밸런스가 붕괴된 현재 자세로는 내 공격을 피할 수 없다.

"!"

최지훈이 마력을 끌어 모았다.

아마 마갑을 두를 작정이겠지.

하지만 그 또한 느리다.

칭-

무언가가 베이는 소리와 함께.

탁-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짧은 간격을 두고 두 번 울렸다.

"···너, 너!"

마갑을 반쯤 두른 최지훈이 엉덩방아를 설듯 말듯한 어정쩡한 자세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을 더듬었다.

그리곤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 반으로 잘려나간 '브로치'를 바라봤다.

나는 과장스럽게 웃었다.

"Surprise! I am a Villain! HAHAHA!"

최지훈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럼 5일 뒤에 보자. 그 아껴 둔 식량은 돌아가서 먹고."

설마 이런 허술한 함정에 최지훈이 걸릴 줄은 몰랐다.

성공하면 좋고, 실패해도 싸워서 이길 자신이 있어서 한 짓이었는데.

"점수 고맙··· 어?"

최지훈이 이를 바드득 가는 모습을 보며 점수를 확인했다.

"4배?"

점수가 2배가 아니라 4배로 들어왔다.

"푸핫!"

빌런의 브로치를 처리해 약탈하면 점수는 두 배.

그리고 빌런이 누군가를 처리해도 점수는 두 배다.

그리고 빌런이 빌런을 처리하면 점수가 4배로 들어온다.

말인즉.

"뭐야. 너도 빌런이었어?"

최지훈도 빌런이었다.

"어쩐지. 너무 쉽게 믿는다 했더니만. 내 뒤통수를 치려고 그랬던 거였구만."

최지훈답지 않게 너무 고분고분하다 싶었더만.

약간 미안하다 싶었는데,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네.

나는 이를 바드득 가는 최지훈을 보면서 환하게 웃었다.

"아무튼 점수 고맙다!"

"강서유울!!"

최지훈의 분노에 찬 고함소리를 들으며 나는 웃었다.

* * *

실기 시험 둘째 날.

나는 본격적으로 보급 상자를 찾기 시작했다.

보급 상자가 이 서바이벌 시험을 공략하기 위한 핵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사이에 조우한 사관생은 모조리 처리했다.

"강서율! 너 진짜 그러기야?!"

"미안. 내가 빌런이라서."

내 점수가 되어라.

"이 피도 눈물도 없는 놈아!"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른 애들은 제대로 된 장비도 없는 반면, 나는 [무기의 극의]를 비롯한 온갖 훈련용 장비로 떡칠을 하고 있으니. 쉬운 건 당연했다.

그렇게 10시간이 흘러.

현재 시간은 오후 4시.

"진짜 쉽네."

그렇게 나는 총 4명의 사관생을 처리하는 데 성공했다.

최지훈 이후로 무려 3명이나 처리한 것이다.

브로치에 타격만 주면 되는 것뿐이라 바람의 길을 이용하면 아주 쉬웠다. 빈틈을 노리는 건 특기라서.

덤으로 운 좋게 보급 상자를 하나 찾았다.

들어 있는 건 고작 침낭 하나였지만, 맨바닥에서 자는 건 나름 고역이기도 했고. 고급이라 푹신한 것이 제법 만족스러웠다.

"이대로 가면 1위도 가능하겠는데?"

원작에는 언급되지 않은 미지의 시험에서 빌런이라는 특이한 존재가 되어 꽤나 당황했지만.

이거 생각보다 할 만하다.

아니, 오히려 꿀이다.

생존 점수를 획득할 수 없다.

몬스터를 잡아도 점수를 획득할 수 없다.

유물을 획득해도 점수를 얻을 수 없다.

이렇듯 약탈을 제외하면 점수를 얻을 수 없다는 페널티가 있긴 한데.

이 모든 페널티를 쌈싸먹을 정도로 약탈 점수 두 배가 사기다.

물론 강함이 뒷받침되어있지 않다면 아무 의미도 없겠지만, 나랑은 상관없는 얘기다.

제대로 된 장비는커녕, 보조용 악세사리도 착용하고 있지 않은 사관생들은 내 상대가 되지 않는다.

지금의 날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많아야 세 명 정도일 거다.

만나면 내가 다 이긴다.

"장비 미지급이 이렇게 스노우볼을 굴리네."

이게 다 장인의 간이 대장간 덕분이다.

'들끓는 순혈의 피'가 피로 회복을 촉진해 주는 덕분에 수면은 2시간만 취해도 충분하다는 점도 충분한 이점이다.

문제는 이 넓은 필드에서 사관생들을 만나기가 힘들다는 건데.

최소 15명은 처리해야 상위권에 들 수 있을 터.

"어쩌면 좋을까."

그렇게 멍하니 걷고 있을 때였다.

"오?"

50미터 앞에 보급 상자가 보였다. 두 번째 보급 상자.

나는 혹시 모를 습격을 대비해 한껏 경계한 채 보급 상자로 이동했다. 다행히 주위에 느껴지는 기척은 없다.

"좋아."

나는 보급 상자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기계틱한 소리와 함께 보급 상자가 열렸다.

안에 아주 작은 칩과 메시지가 보였다.

[단말 업그레이드 칩.]

[단말에 넣을 시 추가 기능을 활성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런 것도 있어?"

어쩐지.

매일 자정에 생존자의 수를 공개해 주는 게 다면 단말 같은 걸 지급할 이유가 없지.

나는 단말을 이곳저곳 확인했다.

칩을 넣을 수 있는 구멍이 있었다. 빠르게 상자에서 칩을 빼서 단말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화면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단말 기능 업그레이드 목록]

[다음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1. 빌런 명단 확인.]

[2. 몬스터 위치 확인.]

[3. 유물 위치 확인.]

[4. 브로치 보호 기능 1회.]

"······와우."

하나같이 엄청난 효과들뿐이다.

역시 이 보급 상자가 서바이벌의 핵심인 모양이다.

그나저나 빌런 명단 확인은 좀 부담스럽네.

업그레이드 칩이 이거 하나만 있진 않을 터. 그렇다는 말은 누군가는 빌런 명단을 확인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거기에 브로치 보호 기능 1회라니.

"이러면 빌런이 너무 불리한 거 아닌가?"

그렇게 머리를 긁적이고 있을 때였다.

"어?"

갑자기 맨 밑에 새로운 선택지가 떠올랐다.

[빌런용 단말 확인.]

[새로운 기능이 추가됩니다.]

[5. 사관생 위치 확인.]

"아하."

이런 게 있었구만.

이러면 또 얘기가 다르지.

"거 약탈하기 딱 좋은 날씨네."

나는 망설임 없이 5번 기능을 선택했다.

< 83화 서바이벌 (2) > 끝

< 84화 서바이벌 (3) >

업그레이드된 단말의 탐지 기능은 제법 쓸 만했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관생의 위치를 표시합니다.]

2시간에 한 번 사용할 수 있다는 페널티가 있긴 했지만, 사관생 한 명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장점이었다.

지금은 시험 2일 차에서 3일 차로 넘어가는 밤.

시험 시작으로부터 약 30시간이 흘렀다. 그간 나는 총 8명의 사관생을 처리하는 데 성공했다.

"15명은커녕 20명도 가능하겠는데?"

시험은 총 5박 6일.

앞으로 4일이나 남았다.

이 기세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나는 침낭에 들어가 누웠다.

"몇 명이나 남았으려나."

이제 곧 자정이다.

오늘은 몇 명이나 탈락했을까.

단말에 아주 짧게 빛이 점멸했다. 나는 빠르게 공지를 확인했다.

[2일 차 생존자, 263명]

"오늘은 또 생각보다 많이 남았네."

총 235명이 탈락했다.

어제 160명이 탈락했으니 오늘은 75명이 탈락했다는 게 된다.

그중에 8명은 내가 탈락시켰으니, 총 67명.

어제에 비하면 탈락자 수가 조족지혈이다.

"흠."

역시 어제는 시험 포기자들의 마구잡이 습격의 영향으로 탈락자가 많았던 건가?

아니면 동맹을 맺은 사관생들이 많아졌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단체로 행동할 수록 교전은 적어지는 건 당연하니까.

······단체로 행동하는 애들이 많아질수록 내가 피곤해지는데.

아까 랭킹 87위와 98위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도 좀 힘들었다.

당장 두 명도 힘들었는데, 세 명. 네 명이 되면 얼마나 힘들겠어.

"거기에 한 자리수 애들까지 껴 있으면. 어휴."

만약 하시연, 김철진이 팀을 맺기라도 했어 봐.

"너무 끔찍해."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고대 유물 없이 그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다.

아니길 빌어야지 뭐.

나는 마지막으로 지금 막 사용이 가능해진 '사관생 위치 탐지 기능'을 사용했다.

지금은 잘 거라서 당장 움직일 생각은 없지만, 혹시 지근거리에 사관생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럼 괜히 습격을 받을 수도 있으니 혹시 몰라서 사용하고 잘 생각이었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관생의 위치를 표시합니다.]

[남서방향 2.2km]

"이정도면 뭐."

습격을 받을 일은 없을 것 같다.

나는 단말을 품 안에 넣고 눈을 감았다.

딱 2시간만 자야지.

* * *

실기 시험 3일차 아침.

하시연은 잠에서 깨어났다.

주위엔 아무도 없다.

"졸려."

하시연은 단독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간 만난 몇 명에게 함께 행동하자는 제안을 받긴 했으나, 모두 거절했다.

믿기 힘들었을 뿐더러, 굳이 같이 행동하면서 점수를 나눌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하암."

하시연은 작게 하품을 했다.

피곤하다.

혼자 행동하는 건 다 좋은데, 밤에 잘 때가 문제다.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도록 반쯤 깬 상태로 자니까, 피로가 풀리질 않는다.

하시연은 눈을 비비며 일어나 강가에 쭈그려 앉았다.

잠을 깨기 위해 찬물로 세수를 했다. 잠이 확 깬다.

물기를 닦으려고 하다가, 문득 수건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음. 되려나."

하시연은 마력을 끌어 올려, 피부 위의 물기만을 모조리 얼려 버렸다.

쩌저적-

피부에 작은 얼음 알갱이들이 맺히고, 그 알갱이들은 하시연의 의지에 따라 한 곳으로 뭉쳤다.

"됐다."

한결 개운해진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지개를 쭉 펴고,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다. 역시 피로가 남아 있다. 밤에 3시간만 푹 잤어도 피로는 싹 날아갔을 텐데.

믿을 수 있는 동료가 필요했다.

그러자 가장 친한 세 명이 떠올랐다.

"서율이랑 지훈이랑 철진이 보고 싶다."

그 세 명은 믿을 수 있다.

게다가 3일째 혼자 있으려니 슬슬 심심하고 외롭다.

그 셋이 빌런이라도 좋으니 좀 만나고 싶다.

"오늘은 만날 수 있으려나······."

하시연이 한숨을 쉬며 침낭을 정리했다.

"누구? 서율이?"

바로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온 것은 그때였다.

하시연이 개던 침낭을 그대로 내동댕이치고 전투태세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검을 빼 들고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서 검을 내밀었다.

"앗."

그 순간 하시연의 표정에서 경계심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해맑은 미소로 변했다.

"하이."

"철진아아!"

목소리의 주인은 김철진이었다.

하시연이 세상 반가운 표정으로 웃으며 김철진에게 달려갔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알긴 어떻게 알아. 우연이지."

그냥 강가를 따라서 이동하다가 우연히 만난 것뿐이다.

"그나저나 시연이 너. 내가 빌런이면 어쩌려고 그렇게 긴장을 푸냐."

김철진이 픽 웃었다.

하시연의 모습에선 긴장감은 요만큼도 느낄 수 없었다.

"빌런이야?"

하시연이 귀엽게 고개를 갸웃했다.

"빌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김철진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에이. 아니네."

저 장난치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빌런은 아니다.

김철진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러는 시연이 너도 빌런 아니잖아."

"응. 아니긴 한데······. 어떻게 알았어?"

"뭐, 시연이 너는 표정만 봐도 다 티가 나기도 하고."

"하고?"

김철진이 돌연 단말을 꺼냈다.

그리곤 이리저리 조작을 하더니, 하시연에게 화면이 잘 보이도록 내밀었다.

"내가 빌런 명단 가지고 있기도 하고."

김철진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하시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빌런 30인 명단]

"이런 게 있어?"

"신기하지? 나도 어제 발견하고 놀랐어. 단말 업그레이드 칩이라는 건데······"

김철진이 신나서 설명했다.

어떻게 얻었고, 무슨 기능이 있었고, 왜 빌런 명단 확인 기능을 선택했고.

모조리 설명했다.

"아. 맞다. 지훈이도 빌런인 거 알아?"

"진짜?"

"어. 심지어 탈락했어."

김철진이 큭큭 웃으며 단말을 조작했다. 그리곤 다시 하시연에게 보여 줬다.

"여기. 지훈이 이름 보이지?"

"어, 진짜네? 근데 왜 회색이야?"

"탈락한 빌런은 이렇게 뜨는 것 같더라고."

"아. 그렇구나."

하시연이 납득했다.

"지훈이 불쌍하다. 되게 빨리 탈락했네."

"시험 끝나고 놀리러 가야겠다."

김철진이 사악하게 웃었다.

그런 김철진을 바라보며 하시연이 쓰게 웃었다. 또 둘이 대판 싸우겠네.

그나저나 어떻게 탈락한 걸까.

최지훈은 최근 실력이 급격하게 늘었다. 마갑을 전신에 둘러 브로치를 지키면 어지간해선 탈락할 일이 없을 텐데.

"아. 지금은 지훈이가 문제가 아니었지."

하시연은 김철진의 말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이거 봐. 진짜 문제는 이거야."

김철진이 다시 단말을 조작한 뒤에 하시연에게 보여 줬다.

"······어? 서율이?"

[강서율]

"어. 서율스도 빌런이더라고. 무섭지?"

* * *

실기 시험 3일 차.

나는 단말의 색적 기능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서 사관생들을 노렸다. 그렇게 총 3명의 사관생을 추가로 처리했다.

현재 시간은 오후 2시.

처음으로 위기가 찾아왔다.

지금까지처럼 위치 단말에 표시된 위치로 온 것은 좋았는데, 하필 4인 팀을 만날 줄이야.

그것도 2반의 상위 랭커들로 구성된 4인 팀을 말이다.

처음엔 우연히 만났다는 식으로 하고, 조용히 헤어질 생각이었지만. 어림도 없었다.

"죽여!"

"남자의 분노를 받아라!"

"너 평소부터 재수없었어!"

"내 맘을 받아 줘! 남자한테도 기회를 달란 말이야!"

쟤네는 내가 빌런이든 아니든 놓아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보다 마지막 놈 엎드려.

"내가 뭘 어쨌다고!"

나는 필사적으로 도주하면서 외쳤다.

"몰라서 물어!?"

"신지아도 모자라서 하시연까지!"

"거기다 이중 속성 보유자!"

"이 다 가진 놈아!"

"부러워 죽겠네!"

······아. 그것 때문이었어?

"널 지금 탈락시켜서 성적을 바닥으로 만들어 주리라!"

"1학년 남학생들의 분노를 받아라!"

착각일까.

저들의 눈가에 피눈물이 흐르는 것 같은 환영이 보였다.

사람이 질투에 미치면 저렇게 되는 구나.

······뭔가 추하다.

"으억!"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칫!"

"아까비!"

쟤네가 추하던 말던.

일단 실력은 출중하다.

반격할 기회도 못 잡겠다.

바람의 길도 반격은 생각도 못하는지 회피할 수 있는 길만 연달아 제시하고 있다.

"아 쫌!"

적당히 해!

나는 상체를 비틀어 날아오는 화살을 피했다.

검, 창, 활, 채찍의 연계가 너무 깔끔하다.

얘네 평소부터 같이 합 맞추던 애들인가?

너무 빈틈이 없는데.

"죽어!"

채찍이 뱀처럼 내 브로치를 노리고 날아든다.

회피해야 할 길목에는 이미 두 명의 전위가 대기하고 있고.

하늘에는 화살의 비가 쏟아지고 있다.

······돌겠네.

역시 1:4는 무리였나.

하기야.

나는 고대 유물이 없으면 무기 좀 잘 쓰고 반격 좀 하는 D랭크 나부랭이일 뿐이다.

수적으로 밀리는 상황에선 반격도 여의치 않고, 속도에서 밀리니 도주도 힘들다.

"······에라이."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

도박수를 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화상입어도 책임 안 진다!"

나는 그렇게 외치며 마력을 전방위로 방사했다.

화르르륵-!

화염이 일렁이며 나를 중심으로 넓게 퍼져나갔다.

"으엇!"

"일단 피해!"

그 맹렬한 기세에 나를 압박하던 전위 두 명이 자리를 벗어났다.

"야! 그거 별 거 아니······!"

후방에서 채찍을 다루던 사관생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지금 이 화염은 별 거 아니라고 외치고 싶은 거겠지.

마력 좀 읽을 줄 아는 놈인가?

실제로 방금 전 화염 방사는 위력은 거의 없는 무차별 방사였을 뿐이다.

그것도 마력만 오지게 쳐먹는 쓰잘데기 없는 방사!

아마 라이터불보다 화력이 약할 걸?

실제로 떨어지는 화살도 태우지 못하고 있다.

"늦었어!"

하지만 이미 늦었다.

전위 두 명은 물러났고, 포위망은 깨졌다.

나는 재빨리 지면을 박찼다.

노리는 건 중간에서 상황을 조율하는 채찍 쓰는 놈!

지면을 박참과 동시에 단검을 던졌다.

휘익-

단검이 내 손을 떠나간 순간 바람의 길이 풀렸다.

단검에는 적색 마력이 일렁이고 있었다.

화살에 싣는 강기와 똑같은 유한 성질의 강기였다.

"칫!"

채찍 사용자는 즉시 자리를 이탈했다. 과연 빠른 대처였다.

"늦었다니까."

하지만 피할 수 없다.

그 순간, 내 단검이 직각으로 꺾였다. 놈이 몸을 날린 방향으로 쇄도했다.

강기의 운용이었다.

"!"

당황한 표정이 꽤나 보기 좋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을 거다.

이미 지면에서 발이 떨어져 있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해 보던가!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일단 한 놈!"

팟-

내 단검은 정확히 놈의 브로치를 토막 냈다.

"무기를 던지다니!"

"넌 이제 뒤졌어!"

문제는 지금부터다.

나는 순간의 틈을 만들기 위해 무지막지한 마력을 쏟아 화염 방사를 했다.

내 유일한 무기인 단검을 던지기까지 했다.

내게 남은 건 등에 있는 활 한 자루뿐.

이걸로 나는 무방비.

······라고.

저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나는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는 모션을 취했다.

물론 그곳에 단검따윈 없지만······.

칭! 까가각!

내게는 '장인의 간이 대장간'이 있다.

"뭐?"

"두 번째 단검!?"

대장간에 예비로 넣어 둔 두 번째 훈련용 단검으로 검과 창을 완벽히 흘려냈다.

피잉-

동시에 조급함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창잡이를 대상으로 '포식자의 살의'를 사용했다.

움찔.

창잡이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칭-!

내 단검은 정확히 창잡이의 브로치를 반으로 갈랐다.

"이걸로 둘!"

만약 채찍 사용자가 남아 있었다면 채찍이 날아 들어와 내 단검을 막았겠지.

내가 채찍을 먼저 처리한 이유다.

이제 남은 상대는 검사와 궁사.

"이, 일단 거리를 벌려!"

"아직 2:1이야!"

검사가 궁사를 지키듯이 앞에 자리잡았다.

활을 이용해서 장기전으로 끌고 가 보겠다는 생각 같다.

확실히 단검을 사용하는 내게는 유효한 전략이긴 하다.

근데 말이지.

"······너네 내가 등에 메어둔 게 뭔지 까먹은 거 아니냐?"

"!"

나는 등에 메어 둔 활을 꺼냈다.

그리고 재빨리 화살을 시위에 걸고 쏘았다.

파앙- 파앙-

정면으로, 위로, 아래로, 사선으로.

총 4발의 화살이 터무니없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나는 활을 쏜 직후 몸을 날렸다.

푹, 푹, 푹!

동시에 내가 있던 위치에 화살이 세 발 꽂혔다.

나는 몸을 날리면서 총 두 발의 화살을 더 쏘았다.

쒜에엑!

대기권을 뚫을 듯이 솟구치는 화살이었다.

"대체 어디다 쏘는······."

검사가 눈알을 굴리며 주위를 살폈다. 그러다 곧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설마!"

내 단검이 꺾였던 걸 떠올린 모양이다.

나는 구르면서 관성을 이용해 일어섰다.

"강기를 다룰 수 있는 일류 궁사의 화살은 꺾인다는 말 못 들어봤어?"

활의 수호자.

바람의 살.

무기의 주인.

활을 다루는 데 보정을 주는 특성만 무려 세 개다.

내 활 솜씨는 초일류다.

내가 쏜 여섯 발의 화살이 각자의 방향으로 꺾여서 궁사에게 쇄도했다.

뱀이 먹이를 노리듯 치밀하게.

매가 먹이를 노리듯 날렵하게.

칭, 캉!

총 세 발.

검사가 화살을 막았다.

"피해!"

그러나 그게 한계였다.

도저히 다 막을 수 없는 방향으로 날아드는 강기를 품은 화살을 모두 막는 건 불가능했다.

"큭!"

궁사는 필사적으로 몸을 날렸으나. 브로치를 지킬 순 없었다.

픽-

내 마지막 화살은 정확히 브로치를 반으로 갈라 버렸다.

"이걸로 셋."

나는 깊게 심호흡을 한 뒤 남은 한 명의 검사를 바라봤다.

"이제 1:1이네?"

활을 다시 등에 메고.

단검을 꺼내 들었다.

"······시발!"

검사가 자포자기한 듯 내게 달려들었다.

후웅-

그 순간, 바람의 길이 열렸다. 4:1일 때는 보이지 않았던 반격의 붉은 바람.

나는 그 바람을 인지하며, 정확히 반 보 앞으로 이동했다.

검이 내 머리를 스치며 거센 바람이 불었다.

나는 그 바람을 느끼며 검을 사선으로 휘둘렀다.

픽-

내 단검은 검사의 브로치를 정확히 반으로 갈랐다.

"라스트."

나는 멍하니 서 있는 네 명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내가 이겼네?"

"······."

"······."

네 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짓씹고 있을 뿐.

쌤통이다.

"그럼 고생했고. 들어가서 잘들 쉬셔."

나는 가볍게 손을 흔들고 몸을 돌렸다.

그니까 간다고 했을 때 보내 줬으면 좀 좋아?

"예스. 이걸로 15명."

이정도면 1위는 거의 확정이라고 봐도 되겠는데?

위잉- 위잉-

"음?"

그 순간, 단말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뭐지?"

나뿐만이 아니라, 탈락한 네 명의 단말에서도 똑같은 경보가 울렸다.

공지인가?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단말을 확인했다.

[공지. 총 15인을 처리한 빌런이 출현했습니다.]

[해당 빌런을 A랭크 빌런 '조커'로 지정. 현상 수배를 실시합니다.]

[A랭크 빌런 '조커'는 강서율입니다!]

['조커'를 처리한 사관생에겐 10배의 점수가 부여됩니다!]

"······뭐요?"

내 동공이 요란하게 떨렸다.

······이런 게 있었어?

< 84화 서바이벌 (3) > 끝

< 85화 서바이벌 (4) >

15인 이상의 사관생을 처리한 빌런에게는 A랭크라는 접두가 붙으며, 빌런 네임이 붙여진다.

이게 서바이벌 시험의 숨겨진 룰이었다.

"······그래. 어째 빌런이 너무 유리하다 싶었다."

이 서바이벌 시험은 실력 평가를 위한 것. 일방적으로 유리한 룰 같은 게 존재할 리가 없었다.

"너무 나댔나?"

마피아 게임에서 나대는 자는 가장 먼저 죽는 법.

내가 말해 놓고서 내가 제일 나댔다.

그나마 다행인 건 공개된 것이 내 이름뿐이라는 거다.

위치 정보가 공개되지 않은 이상 10배고 2배고, 날 직접 노릴 방법은 없다.

착한 척 접근해서 뒤통수치는 것만 불가능해진 것뿐.

직접 전투를 벌이면 지금까지와 별반 다를 건 없다.

나는 지금처럼 습격을 반복하기만 하면 된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좋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을 모두 정리했으니, 다시 사냥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나는 단말에 떠오른 사관생의 위치를 따라 이동했다.

* * *

"오빠. 실기 시험은 좀 어때?"

유화는 차 안에서 전화를 하고 있었다.

―제법 재밌게 흘러가고 있다.

상대는 피진호였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데?"

―지금은 비밀이다. 나중에 공지되면 확인하도록. 형평성에 어긋난다.

"쳇."

유화가 살짝 입술을 내밀었다.

―그보다 정일용 어르신한테 얘기 들었다.

"아. 서율 씨 무기 제작 맡아 주시기로 한 거?"

―그래. 메이든이랑 같이 찾아 뵀다면서.

"응. 셋이서 갔어. 오빠도 오지. 아. 바쁜 일 있었다고 했지?"

유화의 말에 피진호가 잠시 침묵했다.

―······메이든이 그러든?

"어? 어. 오빠는 안 부르냐니까 그놈 바쁜 일 있다고 했는데."

―쯧. 아직도 삐져 있군.

피진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반응으로 유화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아······. 언니가 아예 얘기도 안 한 거야?"

―그래.

어쩐지.

―하염없이 빌런 꽁무니나 쫓고 있길래, 일 하나 준 게 뭐 그리 삐질 일이라고.

피진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유화가 쓰게 웃었다.

교육용 미궁 건설 건은 피진호 나름의 배려였던 모양이다.

메이든은 안 그래도 바쁜데 협박으로 일 하나 강제시킨 나쁜 놈이라고 말했던가.

의견이 참 극과 극이다.

"아. 맞다. 오빠."

―뭐지?

유화는 화제를 돌릴 겸, 평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 보기로 했다.

"서율 씨. 신체 능력이 정확히 어떻게 돼?"

―사관생의 정보를 사적으로 풀라고 하는 건가?

"에이. 왜 이래. 이 정돈 괜찮잖아. 시험 끝나면 프로필 갱신되는 거 다 아는데."

첫 시험이 끝나면.

학교 홈페이지에 사관생들의 프로필이 갱신된다.

한참 전에 갱신되었어야 하는데, 시험이 계속 늦어져서 프로필 갱신도 덩달아 늦어지고 있다.

"그리고 다들 알고 있거든? 대충 D랭크 정도인 거."

유화는 사관학교 측에서 공개한 훈련 영상을 떠올리며 말했다.

영상 속에서 강서율은 누가 봐도 D랭크 초인과 같은 움직임을 보였다.

'참 철두철미 하다니까.'

유화가 생각하기에 강서율은 최소가 S랭크 초인이다.

베가본드와 혼자서 싸워서 버텼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가장 확실한 증거다.

신지아를 그 지경으로 만든 검령, 귀령이라는 이인조 빌런을 그 짧은 시간 내에 처리했다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

그런 사람의 능력치가 D랭크인 건 말도 안 됐다.

이렇게 확신하고 있음에도 피진호에게 강서율의 능력치를 물은 것은 다른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뭐, 이 정돈 상관없겠지. 일단 D랭크에 도달한 건 맞다.

"최근에 올랐다는 거야?"

―그래.

"그건 오빠의 '눈'으로 확인한 거지?"

―물론.

"······그렇구나."

유화의 눈에서 이채가 흘렀다.

'역시 그랬어.'

이게 질문의 목적이었다.

피진호의 '신비를 보는 눈'에 D랭크라고 보였다.

이 말은 즉, 강서율이 힘을 봉인하는 종류의 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뜻했다.

혹은 피진호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내 제자지만 성장이 아주 빨라. 천재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지.

일단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러게."

저 자부심으로 점철된 목소리가 증거다.

정말 강서율의 성장에 감탄하는 자의 목소리다.

'역시 진호 오빠는 서율 씨의 비밀에 대한 걸 몰라.'

지금 그 말은 강서율의 과거와 숨겨진 힘에 대한 걸 알고 있다면 절대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피진호는 강서율을 단순히 최고의 유망주라고 생각하고 있다.

제자로 받아들인 것은 강서율이 그만큼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서이기 때문이리라.

―그나저나 화 너도 요즘 내 제자와 교류가 잦던데. 이유가 있는 건가?

"이유는 당연히 있지. 향후 한국의 미래를 책임질 최고의 유망주하고 친분 좀 쌓아 두려고."

유화가 시치미를 뗐다.

* * *

실기 시험 4일 차 오후 2시.

나는 크고 작은 고비를 넘겨 추가로 6명의 사관생을 처리하는 데 성공했다.

이걸로 총 21명.

그 21명 중에 최지훈을 포함해서 두 명의 빌런이 껴 있었다.

빌런은 점수가 두 배니까, 내 점수는 일반 사관생으로 치면 46명을 약탈한 점수와 같다.

생존 점수를 비롯한 다른 점수 획득 방법을 총 동원해도, 이건 절대 따라올 수 없는 점수다.

사실상 실질적인 1등이라 할 수 있겠다.

"칩도 하나 더 얻었겠다. 진짜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선 탈락할 일 없겠는데?"

나는 눈앞의 보급 상자를 바라보며 허허 웃었다.

이 단말 업그레이드 칩이 몇 개나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많지는 않을 터.

칩을 두 개나 얻은 건 행운이었다.

나는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단말에 칩을 꽂아 넣었다.

[단말 기능 업그레이드 목록]

[다음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1. 빌런 명단 확인.]

[2. 몬스터 위치 확인.]

[3. 유물 위치 확인.]

[4. 브로치 보호 기능 1회.]

익숙한 업그레이드 목록이 떠 올랐다.

"그럼 뭘 고를까."

저번엔 이 후에 빌런용 단말 확인이라고 뜨면서 추가로 5번 기능이 떠 올랐었지.

하지만 5번 기능은 이미 선택했다.

그럼 이 네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건데.

개인적으론 브로치 보호 기능이 끌린다.

1회긴 해도, 보험을 들어 둘 수 있다는 건 아주 크다.

"어?"

화면에 노이즈가 발생한 것은 그때였다.

단말에 새로운 메시지가 떠 올랐다.

[빌런용 단말 확인.]

[새로운 기능이 추가됩니다.]

[5. 사관생 위치 확인.(업그레이드)]

[개방된 기능을 업그레이드 할 수 있습니다.]

"업그레이드가 있었어?"

이건 또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설마 이런 기능이 있을 줄이야.

"무조건 5번이지."

나는 망설임없이 5번 기능 업그레이드를 선택했다.

짧은 로딩이 끝나고.

[업그레이드가 완료되었습니다.]

새로운 메시지를 본 순간, 내 입이 쩍 벌어졌다.

"세상에."

[반경 2km 이내 모든 사관생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띄웁니다.]

화면에는 사관생들로 보이는 점들이 찍혀 있었다.

2시간 쿨타임에서 실시간으로.

한 명의 사관생에서 제한없음으로.

가히 엄청난 진화였지만, 내가 놀란 건 성능 때문이 아니었다.

"······뭐야 이거."

단말에는 수십 개의 점이 점멸하고 있었다.

사관생들의 위치를 나타내는 점.

그 점들은 나를 중심으로 포위하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 * *

"눈치 챈 거 같은데?"

김철진이 단말을 바라보며 세상 즐거운 표정으로 웃었다.

화면에 떠 있는 흑색 점, 강서율의 움직임이 변했다.

"어? 눈치 챘어? 어떻게?"

한 사관생이 물었다.

"글쎄. 탐지 범위가 넓은 걸 수도 있고."

김철진이 단말을 내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걔도 나처럼 단말 업그레이드 칩을 쓰고 있는 걸 수도 있고."

"우리를 찾을 수 있는 기능이 있었었던가?"

"아니. 없었는데 빌런만 쓸 수 있는 특수한 기능이 있을 수도 있잖아."

"아."

김철진은 단말 업그레이드 칩을 두 개나 얻었다.

첫 번째 칩으론 '빌런 명단 확인'을 선택했고.

두 번째 칩으론 '빌런 명단 확인'의 업그레이드 기능인 '빌런 위치 확인'을 선택했다.

김철진은 이 업그레이드된 능력으로 빌런들을 차례차례 처리해 갔다.

처리하면서 만난 1반 친구들은 모조리 포섭했다.

다들 처음엔 배신을 의심했으나, 김철진이 빌런 목록을 보여 주자 모두 김철진의 제안에 응했다.

물론 빌런이 아니라도 배신할 수 있기는 한데.

―에이. 설마 빌런도 없는데 배신하겠어? 앞으로 1년은 같이 지내야 할 텐데,

김철진의 말 한 마디로 배신은 할 수 없게 됐다.

―빌런들 다 처리하고. 다른 반 애들을 차례차례 꺾으면 우리 1반이 상위권을 독점할 수 있어. 빌런 명단이 없는 이상 다른 팀은 이렇게 연합을 맺진 못했을 테니까.

이렇게 확실한 대의명분까지 내세웠다. 이런 상황에서 배신한다? 매장되고 싶지 않으면 할 수 없을 거다.

아무튼 김철진은 이런 식으로 1학년 1반 전체를 연합으로 만들어서 빌런 사냥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이제 남은 빌런은 강서율 하나뿐이다.

"근데 철진이 네 계획대로 1반이 상위권을 독점할 생각이면 서율이도 포섭하는 게 낫지 않아? 큰 힘이 되어 줄 텐데."

"나야 그래도 되는데. 다른 애들이 반대할걸? 아무리 그래도 빌런을 어떻게 믿냐고."

"······그건 그렇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율스는 좀 당해 봐야 돼."

"······갑자기?"

"얼굴 하며 인기 하며 아주 그냥 다 가졌잖아. 얼마나 부럽냐?"

김철진이 웃었다.

"그래서 골탕 좀 먹여 주려고."

최지훈을 놀릴 때 주로 보이는 사악한 미소였다.

김철진이 그 표정 그대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보급 상자에서 획득한 무전기였다. 2개가 한 세트인데, 총 두 세트를 발견해서 4개가 존재한다.

"타겟. 조커가 눈치 챈 듯하니까. 다들 반격에 주의하면서 접근 해."

―이걸 눈치 챘어?

―역시 강서율. 쩌네.

―그래 봐야 도망가긴 글렀어.

이미 포위망은 완벽하다.

도망가려고 해도 강서율의 속도론 모두를 떨쳐낼 수 없다.

기술이 얼마나 뛰어나든, 신체 스펙이 딸리는 이상 일 대 다수를 이길 수는 없다.

'이게 강서율의 약점.'

포위망이 완성된 이상 강서율의 패배는 확정된 거나 다름없다.

그렇게 승리를 확신하고 있을 때였다.

―습격··· 으아악! 치이익-

무전기 너머로 비명 소리와 함께 무전기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지금 재욱이 목소리였지? 베타 팀에 무슨 일 난 거야?

설마 강서율이 무슨 짓을 한 건가?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김철진이 다시 단말을 확인했다.

"위치가······?"

강서율의 위치가 변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네 개의 팀 중 베타 팀의 위치에 정확히 서 있었다.

"어떻게?"

무전을 하기 위해 단말에서 눈을 뗀 그 찰나의 순간에 저기까지 이동했다고?

강서율의 속도는 저렇게 빠르지 않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베타팀 응답하라!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바로 보고를······."

무전기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Why so serious?

뭔가 연기를 하는 듯한 낮은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강서율······."

―왜 그리 심각해? 그냥 시험이고, 게임인데. 누가 들으면 실전인 줄 알겠어. 너답게 해. 너 답게.

김철진이 픽 웃었다.

"그러게. 나도 모르게 상황에 몰입했네. 그보다 어떻게 알았어?"

―뭘? 습격에 대한 거?

"어."

―별 거 아냐. 너처럼 칩을 두 개 쓴 거뿐이야. 빌런 전용 기능이 존재하거든.

"······역시 그렇구만."

―그나저나 날 노리는 게 1반일 줄은 몰랐다야. 깜짝 놀랐네.

김철진이 쓰게 웃었다.

"베타 애들은 전멸했어?"

―아니. 다들 바닥에 주저앉아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데?

"뭐?"

그냥 보고만 있다고?

"······왜?"

―왜긴. 덤빌 생각을 못하니까 그러지.

강서율이 웃으며 말했다.

김철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철진아.

강서율이 말했다.

―이번 서바이벌에서 이 단말을 제외하고 그 어떠한 장비도 지급하지 않은 이유가 뭔 줄 알아?

뜬금없는 말이었다.

"······글쎄. 외적인 이유를 모두 배제하고, 본연의 힘만을 증명하라. 이거 아닐까?"

―맞아. 아이템을 사용하면 공정한 평가가 안 되니까. 자신의 힘만을 사용해서 가치를 증명하라는 거야.

"그게 왜?"

이 상황에서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일까.

―그럼 철진아.

강서율이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수호수는 외부적인 요인일까, 내 힘일까?

"······뭐?"

―어렵지? 나도 애매하다고 생각했어.

강서율이 너스레를 떨었다.

―근데 급해지니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소환사가 소환수를 뽑는 걸 아이템빨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잖아?

강서율이 세상 즐거운 듯이 말했다.

―그럼 한국에 있는 수호수를 내 힘으로 소환했다면? 이건 내 본연의 힘일까 아닐까? 철진이 넌 어떻게 생각해?

김철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설마."

―그래. 네 생각이 맞아.

강서율이 웃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다.

―우리 금호 하고 싶은 거 다 해.

―크와아아아앙-!

저 멀리서 호랑이의 포효 소리가 울렸다.

< 85화 서바이벌 (4) > 끝

< 86화 수학 여행 (1) >

나는 금호의 등에 올라타서 대소하고 있었다.

"하하하!"

주위엔 금호의 움직임에 수수깡처럼 부러져 버린 나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금호랑 다이다이 깔 자신 있으면 덤벼 보던가!"

"큭."

금호의 살벌한 눈빛에 모두가 침을 꼴깍 삼켰다.

"저건 반칙이잖아······."

"금호를 어떻게 이겨."

금호는 한국 초인 사관학교의 아이콘이다. 귀여움은 말할 것도 없고, 폭군 드레이크와 1:1로 싸웠다는 목격담까지 더해져서 말 그대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존재가 되었다.

반려동물 프로그램임 '소환수농장'에서 오는 섭외가 학생들 선에서 정리된다고 하니 이 정도면 가히 아카데미의 초대 상징수라고 할 수 있겠다.

-크릉······.

그런 금호가 자신들에게 이빨을 내밀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그 위에서 내가 활을 쥐고 있기까지 하다.

덤벼든다는 판단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대로 1반 애들의 브로치를 모두 파괴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겠지만.

"싸울 생각이 없으면 내가 제안 하나만 할게."

"제안?"

일단 그 방법은 배제하기로 했다. 앞으로 1년을 같이 지내야 하는 1반 애들한테 밉보일 생각은 없다.

"나는 딱히 너희들 브로치를 빼앗을 생각이 없어. 필요도 없고."

"필요 없다고?"

애초에 쟤네들의 브로치가 다 필요하지도 않다.

"어차피 지금도 1위인데, 더 뺏어서 뭐해."

"아."

이 시험은 '상대 평가'다.

브로치 20개를 약탈해 1등을 하던, 40개를 약탈해 1등을 하던 똑같다는 말이다.

"그니까, 우리 휴전하는 게 어때?"

"휴전?"

"어. 나는 너희 브로치가 필요 없고, 너희도 나랑 싸우긴 싫잖아?"

"······그치."

김철진이 베타팀이라 부른 7인의 사관생들이 나와 금호를 차례대로 바라보며 다시금 마른침을 삼켰다.

"그니까 깔끔하게 여기서 쫑내자는 거지. 어때?"

호가호위(狐假虎威)

금호의 기세를 빌린 내 제안의 효과는 매우 뛰어났다!

"······좋아."

"나도 찬성."

"나, 난···원래 덤빌 생각도 없었어. 하하······,"

"난 니들이 덤비면 뒤통수 칠 생각이었음!"

"너도? 야 나두! 반···반갑다야!"

"우리 서율 님의 자비에 감사하자."

다들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예상대로다.

"그럼 철진이한테도 이 사실을 전하고 휴전을······."

"아. 잠깐만."

순간 무언가 떠올랐다.

"하나만 물어볼게. 1반 애들은 다 참여한 거야?"

"어······ 하시연이랑 탈락한 애들 말고는 다 참여했을걸?"

"오호. 시연이는 거부했다 이거지."

어쩐지 무전기에서 시연이 목소리가 안 들린다 했더니.

그랬구만.

"어. 너랑 싸우기 싫다고 하더라."

"그래. 그럼 주모자는 철진이 혼자라는 말이지?"

"그, 그렇지?"

"오케이."

내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철진아."

나는 다시 무전기를 향해 말했다.

―뭔데?

무전기 너머에서 김철진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여기 애들이랑 휴전하기로 합의 봤거든?"

―뭐? 휴전?

"어. 나는 굳이 너희 브로치 필요 없고, 너희도 굳이 나나 금호랑 싸울 생각은 없잖아?"

―······그렇지?

"그래서 휴전하자는 거야."

―진짜?

"어. 괜히 1반 애들한테 원망받고 싶지 않아서."

―오케이 콜. 다 들었지?

김철진의 목소리에서 활기가 돌아왔다. 쟤도 어지간히 금호랑 싸우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확인했어!

―어우. 십년감수했다.

―야야, 헤쳐헤쳐! 편히 앉자 이제!

―후아! 심장 터지는 줄 알았네!

다른 팀에서도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 맞다. 하나 까먹고 말 안 한 게 있네."

―말 안 한 거? 뭔데?

내 입가가 사악한 곡선을 그렸다.

"철진이 너까지 봐준다곤 안 했다."

―어···?

무전기 너머로 김철진의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주모자는 벌을 받아야지. 안 그래?"

―······.

내 입꼬리가 귀에 걸릴 듯이 승천했다.

"어디 한번 도망가 봐."

* * *

모든 시험이 끝났다.

지금은 토요일 오후 7시 30분.

학교 측에서 잡아 둔 숙소에서 몸을 씻고, 삼삼오오 모여서 뒷풀이를 하는 중이다.

"······1년 치 수명을 앞당겨 쓴 기분이야."

김철진이 근처 카페에서 축 늘어졌다. 얼굴이 퀭한 것이, 세상의 모든 피로는 다 떠안고 있는 듯한 얼굴이다.

"그니까 괜히 서율이 건드는 거 아니라고 했잖아."

그런 김철진을 바라보며 하시연은 평소와 똑같은 표정으로 아이스크림을 퍼 먹었다.

피로는 크게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다.

"그러게."

김철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강서율 척살 연합의 참가 여부였다.

김철진은 참가했기에, 강서율에게 역으로 노려져 피로에 찌든 것이고.

하시연은 참가하지 않았기에 아주 쌩쌩한 것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금호는 반칙 아냐? 걔를 어떻게 이기라고."

"음."

하시연의 입에 물려 있는 스푼이 까딱거렸다.

하시연이 강서율 척살 작전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단순히 강서율과 상대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힘을 숨기고 있다고 해도 강서율은 천족과 엘프족의 하프로, 만 년 전의 영웅이다.

강서율의 정체를 알고 있는 하시연에게 있어 강서율에게 덤빈다는 것은 자살행위일 뿐이었다.

"그리고 서율이 걔 뒤끝도 장난 없더라. 3일 내내 나만 노리는데 아주 그냥······."

금호와 강서율에게 3일 내내 쫓겼던 기억은 과장 조금 보태서 트라우마로 남았다.

풀숲에서 고개를 불쑥 내미는 강서율.

허공에서 덮쳐오는 강서율.

물속에서 시체처럼 스르르 떠오르던 강서율.

사방에서 서라운드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강서율.

네 발로 빠르게 기어오던 소름끼치는 강서율.

그림자인 척 걸음을 맞춰 따라오던 강서율.

강서율 모습의 나무판자 뒤에 숨어 있던 강서율의 강서율···.

"아주 그냥······흐으······."

김철진이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러고 보니, 지훈이는?"

이 꿀꿀함을 풀기 위해선, 광속 탈락자 최지훈을 놀리는 수밖에 없다.

"아직 못 들었어? 하위권 애들은 추가 시험 본다고 하더라."

"······추가 시험?"

"응. 너무 빨리 떨어진 애들은 평가가 불가능하니까. 추가 시험으로 세부 순위를 나눈다고 하던데."

"아하."

김철진이 납득했다.

그리곤 다시 푹 한숨을 내쉬었다.

"에이."

최지훈을 놀릴 수 없다는 생각에 짜증이 치솟았다.

이 스트레스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 * *

나는 금호와 함께 피진호의 방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시험의 규칙을 어긴 건 아니니, 시험 결과는 정상적으로 처리될 거다."

"다행이네요."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여 부정 행위를 했다고 할까 봐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다음 시험부터는 룰이 추가될 수도 있으니 주의하도록."

"아. 실기 시험에서 금호를 사용할 수 없게요?"

"그래. 네 입장에선 억울한 일일 수도 있다만,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

"억울하긴요. 당연한 건데요."

나는 금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금호는 강해도 너무 강하다.

수호자의 계약으로 인해서 현재진행형으로 강해지고 있다.

당장 지금 이 상태로도 학년 1위인 지아를 1:1로 이길 수 있을 거다.

그 비정상적인 강함은 사관학교의 철칙인 공정한 경쟁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렇게 될 거라곤 얼추 예상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정일용 어르신한테 얘기 들었다. 천변(千變)을 만들어 주시기로 했다고?"

"아, 네. 그렇습니다."

피진호가 쓰게 웃었다.

"어르신께서 엄청 칭찬하시더군. 좋은 후계자를 찾았다고."

"······하하."

나는 볼을 긁적였다.

"후계자를 찾았으면 빨리 말했어야지 뭐했냐고 혼나기도 했다만."

피진호가 씁쓸하게 웃었다.

"말이 길어졌군. 고생 많았다.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쉬도록."

피진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등을 두어 번 두들겼다.

"네. 알겠습니다."

* * *

그날 밤 10시.

나는 금호와 함께 호주의 밤길을 걷고 있었다.

―진짜 금호가 사라졌을 때 얼마나 당황했는 줄 알아요?

수화기 너머로 유화의 툴툴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방 안에서 통화를 했겠지만, 내가 배정받은 방은 6인실. 연애에 목마른 남학생들 앞에서 유화와 통화를 하는 건 굶주린 사자들 사이에 고기를 집어넣는 행위와 같았다.

그래서 금호를 데리고 밖으로 나온 것이다.

―분명 방 안에서 자고 있었는데, 암만 찾아봐도 없지. 집 근처 CCTV를 다 돌려 봤는데도 나간 흔적은 없지.

"······하하."

―진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니까요?

"그, 죄송합니다."

금호를 소환하면 유화가 당황할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상황이 너무 급박하게 흘러가서 어쩔 수 없었다.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유화의 투덜거림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나는 유화의 서운함이 가득 담긴 말을 경청했다.

갑작스레 사라진 금호 때문에 얼마나 걱정했을지를 생각하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에휴. 아무튼 그 덕분에 1등을 하셨다고 하니, 특별히 봐드릴게요.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모든 서운함을 쏟아 낸 듯한 유화가 한숨을 쉬듯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호주의 야경은 서울과 다른 맛이 있었다.

―그럼 남은 여행 기간 동안 같이 다니시겠네요?

"네. 그래야죠."

학교 측에서 금호랑 같이 다녀도 아무 문제없다고 했다.

―잘됐네요. 푹 쉬다 와요.

"그래야죠."

―그럼 이만 끊을게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 하시구요.

"네. 안녕히 주무세요."

―······아직 일 남았거든요?

"······아하. 고생이 많으십니다."

나는 애도를 표했다.

―에휴. 아무튼 진짜 끊을게요. 재밌게 놀다 와요.

"네. 고생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현재 시간은 오후 10시 43분.

괜히 한국에 혼자 남은 지아가 떠올랐다.

"······일어나 있으려나?"

아마 남아 도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고 잠을 설치고 있지 않을까.

나는 혹시 자고 있나 싶어서 카톡을 하나 남겼다.

[지아야. 자?]

답장은 바로 왔다.

[아뇨! 누워 있었어요!]

내 예상이 맞았다.

[그럼 지금 잠깐 전화 돼?]

[네! 얼마든지요!]

나는 그 즉시 보이스톡을 걸었다.

―선조님!

지아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미안. 시험 끝나고 바로 전화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까 시간이 이렇게 됐네."

―아니에요! 전화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걸요.

수화기 너머로 지아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순진무구한 웃음.

―아, 그보다 시연이한테 들었어요! 1위 하셨다면서요?

"응. 금호 덕분에."

―축하드려요.

"고마워."

나는 근처 벤치에 앉았다.

금호가 사뿐히 뛰어 올라 내 무릎 위에 자리 잡았다.

"몸은 좀 어때?"

―거의 완치됐어요. 오늘은 재활훈련을 했는데, 달려도 통증은 없었구요.

"다행이네."

일주일이 흘렀으니, 슬슬 나을 때가 됐지.

―당장이라도 퇴원하고 싶은데, 태진 아저씨랑 의사선생님이 극구만류하셔서······.

지아의 목소리가 침통하게 가라앉았다.

"그럼 더 쉬어야지. 이 기회에 푹 쉬어."

―쉬는 건 집에 가서 쉬어도 되는데······.

"음."

확실히 병원이 지루하긴 하지.

할 것도 없고. 밥도 맛 없고.

"근데 너 집에 가면 훈련이다, 서류작업이다, 뭐다 하면서 안 쉴 거잖아?"

―······.

지아는 말이 없었다.

"한동안 학교도 안 가겠다. 평소 하고 싶었던 프로젝트를 추진한다던가."

―······.

"암만 생각해 봐도 절대 쉴 것 같지는 않은데."

수화기 너머에서 '어. 음.' 하는 신음 소리만이 전해졌다.

차마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그러려고 했을 거고.

"아무튼 의사선생님이 퇴원해도 된다고 할 때까진 푹 쉬고 있어."

―······네에.

목소리가 뾰루퉁하다.

눈앞에 입술을 샐쭉이고 있는 지아의 환영이 보이는 듯했다.

평소엔 어른보다 더 어른 같으면서도, 이럴 땐 애라니까.

그렇게 쉬는 게 싫을까.

"아. 맞아, 들었어? 이번 시험에서 시연이가······."

―정말요? 그럼 선조님은······.

우리는 그렇게 시답잖은 잡담을 이어 갔다.

"그럼 이만 끊을게. 벌써 11시가 넘었네."

―아······.

즐겁게 대화를 이어 가다 보니, 어느덧 20분이 흘렀다.

―네.

목소리가 뭔가 시무룩하다.

전화를 끊기 싫은 듯한 느낌.

병원에 혼자 있으려니까, 외로운 모양이다. 저 기분 잘 알지.

"내일 또 전화할게."

―앗. 넵!

지아의 목소리가 확 밝아졌다.

나랑 전화하는 게 그렇게 좋은가? 나쁜 기분은 아니다.

"잘 자."

―네! 선조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하아."

나는 벤치 등받이 위쪽에 뒤통수를 기대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서울보다 조명이 적기 때문일까. 별이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냐아."

금호도 나를 따라하려는 듯이, 내 배에 등을 기대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우리 금호도 별 보는 거야?"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배를 쓰다듬어 줬다.

"끼앙."

금호가 고롱고롱 소리를 내며 뒹굴거리다가.

움찔.

갑자기 몸을 경직시켰다.

"금호야?"

그리곤 내 품에서 벗어나 벤치 위에 서더니,

"크르르르······."

한 방향을 바라보며 으르렁거린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금호는 적의와 살의로 일렁이는 기세를 쏘아내고 있었다.

뭔가 있는 건가 싶어서 눈을 게슴츠레 뜨고, 그곳을 노려 볼 때였다.

허공에 검은 연기 같은 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역시 어르신의 수호수라고 해야 할까요. 대단한 감각입니다."

그 연기는 곧 사람의 형체를 이루었다.

이 익숙한 등장과 목소리.

나는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했다.

"허미트인가. 고작 이런 하급 수호수에 들킬 정도라니. 혹시나 하고 모른 척 했었는데 다소 실망이로군."

이내 검은 연기는 허미트의 모습이 되었다.

"예, 제 불찰이지요. 뭐든 간에 오랜만에 뵙습니다."

허미트는 저번에 만났을 때보다 한결 여유로워진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아. 깜짝이야.

< 86화 수학 여행 (1) > 끝

< 87화 수학 여행 (2) >

허미트의 말은 아주 간단했다.

계획의 큰 틀은 그대로다.

세계의 뿌리를 대체할 것을 찾았고, 획득까지 마쳤다.

다만 대체품이 세계의 뿌리만큼 강하지는 않기에 세부 행동지침은 바뀐 부분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에스트로는 귀령과 검령이 쓰러질 당시의 동영상을 지니고 있으며, 유화를 노리고 있다.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었다.

"이상입니다."

"그렇군."

언노운의 '절대복종의 맹세'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정확한 의견 전달을 해 온 허미트에게 감탄했다.

물론 내가 어느 정도 계획을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뭉뚱그려서 말한 거라,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겐 쓸 수 없는 방법이긴 했다만.

아무튼 계획의 큰 틀이 변하진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다.

다행이긴 한데······.

"하나 의문이 남는군."

"의문 말입니까?"

"네 말대로라면 마에스트로라면 검령, 귀령의 전투 장면을 특수한 드론으로 촬영해 뒀다는 건데. 맞나?"

"예."

이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설마 그 전투 장면을 마에스트로가 봤을 줄이야.

"연천 필드의 삼엄한 마력 장벽을 뚫을 드론이라고 하면 초소형 마력 드론밖에 없을 테고."

"······."

허미트가 조금 놀란 표정이 되었다.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고 있냐는 듯한 표정이다.

"그 드론은 마력적인 영향을 크게 받으니, 전투 도중 펼쳐진 귀령의 '혼란귀'에 먹통이 됐을 터. 당연히 전투 장면은 도중에 끊겼을 테고. 맞나?"

"······정확합니다."

허미트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해도 최소 혼란귀가 펼쳐지기 전까지의 내 전투 장면을 봤다는 건데······."

지아를 구하기 위해서였다곤 하나, 내가 싸우는 모습을 마에스트로에게 보인 건 최악의 실수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아는 마에스트로라면 내 전투 장면을 보고 100% 의심을 품었을 게 분명하다.

"왜 나를 조사하지 않지?"

마에스트로가 일을 처리하는 방법은 확률이 낮은 일들부터 차례대로 배제해 나가는 것.

즉, 유화를 노리기 전에 나를 조사하는 게 마에스트로 본연의 일 처리 방법이라는 것이다.

"마에스트로의 성격이라면 가장 먼저 내 뒷조사를 실시해야 정상인데."

그리고 마에스트로는 햇빛 고아원에서 벌어진 인체 실험을 담당했던 간부다.

진리의 구명자 내부에는 햇빛 고아원 실험을 기록해 둔 데이터도 존재할 것이고.

당연히 그 데이터베이스에는 내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을 것이다.

이윽고 내가 햇빛 고아원 인체 실험의 생존자일 가능성이 크다는 가설에 다다랐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 대한 조사가 전혀 없다?

마에스트로의 치밀함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이미 조사를 마쳤습니다. 마치고, 마에스트로는 강서율에겐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신을 얻었죠."

"······아무 문제도 없다고?"

무슨 소리지?

햇빛 고아원에 대한 걸 마에스트로가 모를 리가 없는데.

만약 그가 까먹었다고 해도, 데이터가 남아 있었을 텐데.

"예."

허미트가 웃었다.

"의심스러운 과거는 모두 제가 지웠으니까요."

"······뭐?"

칠흑같은 어둠이 감도는 암살자의 미소였다.

"햇빛 고아원 실험장 출신 생존자 강서율."

허미트가 어두운 눈으로 내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그 과거의 기록은 제가 완벽하게 소거했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내 동공이 한껏 확장됐다.

"의문은 다 풀리신 듯하니, 이번엔 제가 묻겠습니다."

허미트가 미소를 지우고, 아주 건조한 무표정이 되었다.

"어르신, 아니······."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소름이 돋게 만드는 차가운 눈빛이었다.

"강서율. 당신은 대체 뭐죠?"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

"······."

우리는 한참을 서로 노려본 채로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렇구만."

생각을 정리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에스트로는 허미트를 너를 신뢰하고 있으니까. 나에 대한 조사를 네게 일임했어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지."

내 어조는 거만한 대정령 모드에서 평범한 강서율의 어조로 돌아와 있었다. 이미 들킨 이상, 이 어조를 고수해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마에스트로의 허가도 얻었겠다. 조직 내 데이터베이스에 엑세스해서 내 정보를 찾았을 거고. 한국에서 내 뒷조사를 했을 때와는 다른 정보를 얻었겠지."

나는 아직도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금호를 어루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햇빛 고아원 출신이며, 햇빛 고아원은 진리의 구명자가 인체 실험장으로 삼았던 곳이라는 걸 알았을 거야."

"······."

"대정령의 맹약이 걸려 있는 너로서는 그 정보를 곧이 곧대로 마에스트로에게 넘길 수는 없었을 거야."

내 정보를 타인에게 발설하지 않는다. 라는 맹약에 어긋날 테니까.

"그래서 정보를 조작한 거고. 맞지?"

허미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쩝. 이게 이렇게 되는구만."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 정체. 내 정체라."

뭐라고 하면 허미트가 납득할까.

어차피 허미트는 맹약 때문에 나를 배신할 수 없다.

나한테 물을 먹이려고 하면 먹일 수야 있겠지만, 언노운에게 증오를 품고 있는 허미트가 굳이 언노운의 적인 나를 적대할 리도 없다.

즉, 내가 뭐라 말하든 허미트와 나의 관계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언노운의 적인 이상에는 말이다.

좋아. 뭐라고 할지 정했다.

"네 예상이 맞을 거야. 난 대정령이 아니야."

메이든과 유화 VER 거짓말을 시전하기로 했다.

"그냥 햇빛 고아원 실험의 생존자일 뿐이지."

"······역시."

허미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의 유물을 사용한 건 어떻게 한 겁니까?"

"그 실험에서 내 몸에 여러 종족들의 인자를 이식받았거든. 덕분에 여러 고대 유물들을 쓸 수 있게 됐지."

"진리의 구명자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던 건?"

"연구원들이 다 말해 주던데? 어차피 곧 죽을 실험체 앞이겠다. 별에 별 얘기를 다 하더라고. 그 정보들을 토대로 개인적인 조사를 했지."

"······그 정보들을 기반으로 조직의 정보 전달 루트를 해킹했다는 거군요."

······그런 게 있어?

몰랐지 나는.

"그래."

일단 긍정하고 보자.

"그럼 제 눈에 당신의 정보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간단해."

나는 강서율.

구라 마스터다.

"거기서 무슨 실험을 했는지 봤을 거 아냐? 그 실험에서 연구원들이 내 시스템을 좀 만지작거렸거든."

이 정도 구라는 하품하면서도 할 수 있다.

"아마 그 때문이 아닐까? 네 눈은 정밀하니까. 아주 작은 변화로 인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거겠지."

"과연."

허미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아무것도 아닌 애송이한테 낚여서 금제에 걸린 한심한 놈이라는 거군요."

"에이. 아무것도 아니진 않지. 나 이래 봬도 한 실력 해."

무려 'D'랭크라구.

······아 자괴감.

"당신이 언노운과 동급이라 주장하시는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고."

나는 정색했다.

어딜 언노운한테 비벼.

그놈이랑 1:1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

지금 이 시점에는 말이다.

"······하아."

허미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깊은 자괴감에 빠진 자의 표정이다.

괜히 쫄아서 맹약을 맺은 것에 큰 후회를 품고 있는 듯하다.

"······그럼 절대복종의 맹세를 풀어 주겠다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 그거?"

나는 손가락 위에 반투명한 불꽃을 일렁였다.

"풀어 줄 수 있어. 정령의 불길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진짜거든. 이걸로 네 금제만을 확실하게 태워 버릴 수 있지."

"······과연. 그것도 강제로 주입받은 인자의 힘인가요."

"그래."

"그럼 지금 당장이라도······."

"그건 안 돼. 두 가지 문제가 있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먼저 첫 번째 문제는 절대복종의 맹세를 해제하면 언노운이 눈치 챈다는 거야."

절대복종의 맹세는 몰래 해주할 수 없다. 풀린 순간 언노운이 눈치 챈다.

"네 배신을 알게 되면 언노운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계획이 송두리채 변할 수도 있어. 그럼 언노운을 처리하겠다는 내 계획도 수포로 돌아가."

"아."

허미트가 탄성을 내뱉었다.

"······그렇군요."

금제 해주에 눈이 멀어서 아주 간단한 걸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게 더 중요한 문제인데."

"?"

"이게 언노운의 금제가 워낙 강해서. 그걸 풀려면 그에 맞먹는 마력이 필요하거든?"

"그 말은······."

"응. 아직 내 마력이 부족해."

나는 싱긋 웃었다.

허미트가 정색했다.

나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하아······."

허미트의 한숨 소리에 힐끔 시선을 돌렸다.

"좋습니다. 어찌됐건 이 빌어먹을 저주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건 사실이라는 거죠?"

"응. 못 믿겠으면 증거 보여 줘? 그럼 마력 장벽 뽑아 보던가."

"······좋습니다."

허미트가 의문 어린 눈으로 마력을 집중했다. 그의 손바닥 위에 직경 50cm정도의 튼튼한 마력 장벽이 생성됐다.

딱 봐도 견고한 모양새가, 그의 실력을 나타내는 듯했다.

이거 생각보다 엄청 어려운 건데, 되게 쉽게 하네.

마치 숨겨둔 오예X라도 꺼내듯이 간단한 동작이었다.

"됐습니다."

"아, 응."

나는 작게 감탄하면서 다시 손가락 위에 작은 불꽃을 피워냈다.

각인의 불길과 정령의 불길의 콜라보레이션.

"봐. 불꽃이 품고 있는 마력이 엄청 작지?"

"예."

허미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고작 이런 걸로 뭘 하겠다는 듯한 눈빛이다.

"이걸 길게 늘려서, 압축시킨 뒤에 방벽에 가져가면······."

화륵-

장벽과 하얀 불길이 만나 무언가가 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피이이이잉-!

"짜잔."

"······어?"

마력 장벽은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졌다.

"봤지? 이게 정령의 불길의 힘이야. 마력의 일부분을 태워서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게 한 거지."

허미트의 눈이 경악으로 확장됐다. 진심으로 놀란 표정이다.

"이제 좀 믿겠어?"

"······예. 확실히 대단한 힘이군요. 마력을 태우는 화염이라니······."

허미트는 납득한 듯했다.

"아무튼 내 얘기는 이걸로 끝인데."

나는 내 품 안에서 아주 조금은 잠잠해진 금호를 다시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래서 결론은?"

"······결론이라뇨?"

나는 코웃음을 쳤다.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나한테 붙을 건지, 언노운한테 붙을 건지 묻는 거야."

"그걸 굳이 답할 필요가 있을까요?"

허미트는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싱긋 웃었다.

"보스의 주박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저는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겁니다."

증오와 분노가 적절히 섞인 좋은 표정이었다.

"개인적으로 정령이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보다는, 언노운에게 복수심을 품은 실험체 A가 더 믿을 만하기도 하고요."

"그래?"

허미트가 쓰게 웃었다.

"애시당초 대정령의 맹약에 속박되어 있는 이상, 당신과는 한 배를 탈 수밖에 없잖습니까."

"잘 아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그나저나 이 전까지의 그 고풍스런 말투는 모두 연기였던 겁니까?"

"어."

생각보다 엄청 고역이었다.

"그렇군요."

"왜? 다시 어르신 말투로 해 줄까?"

"아뇨. 지금의 자연스러운 말투가 더 좋네요."

허미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 슬슬 돌아가 봐야겠네요. 너무 오래 텀을 비우면 의심받거든요."

"그래. 조심하고. 알겠지만, 언노운에게 의심받으면 끝이니까 주의하고."

물론 끝나는 건 허미트뿐이다.

대정령의 맹약이 있는 이상 내 정보가 빠져나갈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알고 있습니다. 이미 큰 고비는 한번 넘겼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다행이고."

"아. 그 전에."

허미트가 내게 소형 장신구를 내밀었다. 반지?

"이건 통신 기능이 내장되어 있는 반지입니다. 일회용입니다만. 추적이 불가능하다고 정평인 아이템이죠. 급한 일이 있으면 이 반지로 연락하겠습니다."

"좋네."

나는 반지를 건네받았다.

"그럼 정말 가 보겠습니다."

"그래. 몸조심하고."

허미트의 몸이 점점 흐릿해지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보면 볼수록 진짜 유령 같은 놈이다.

금호의 표정이 완전히 평온해진 걸 보니, 진짜 사라진 모양이다.

"뀨우."

나는 다시 천사 같은 표정으로 돌아온 금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숙소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허미트의 얘기를 들었을 땐, 어떻게 되나 했는데.

결과적으로 잘 풀린 것 같아서 진짜 다행이다.

그나저나 마력을 빨리 모아야 되긴 하겠는데.

가까이서 '절대복종의 맹세'를 보니까, 역시 최소 A랭크 이상은 되어야 풀 수 있을 것 같다.

국가전 당일까지 A랭크 찍을 수 있으려나.

아니, 무조건 찍어야 한다.

허미트를 확실한 아군으로 끌어 들이려면 무조건!

그 전에 우선 새로 획득한 '몽마족의 특성'을 누구에게 사용할지 정해야겠지.

"음."

고민은 찰나였다.

······역시 지아보단 시연이한테 쓰는 게 맞겠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답이다.

"좋아."

마침 내일은 자유 여행이기도 하고, 따로 불러서 얘기를 좀 해볼까.

······분명 호주는 몬스터 파크가 유명했지? 내일 금호랑 셋이 가자고 제안해봐야겠다.

< 87화 수학 여행 (2) > 끝

< 88화 수학 여행 (3) >

늦은 밤.

하시연을 포함한 6인의 여학생들은 연애 얘기로 한창이었다.

"난 선배 중엔 진한산 선배가 제일 멋있는 거 같아."

"난 무조건 강혁 선배. 너무 남자답지 않니?"

"아~ 강혁 선배 좋지."

다들 신났다.

물론 하시연만 빼고.

"으음······."

이런 얘기에 큰 관심이 없는 하시연은 조용히 눈치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분명히 2~4학년 선배들의 실력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얼굴 얘기까지 오게 됐는지 모르겠다.

"근데 우리 반에도 괜찮은 애들 많지 않아?"

"그거 인정."

"난 성격만 빼고 보면 최지훈이 최고 같은데."

"그치. 귀공자 스타일에 무려 수성 그룹의 장남!"

4학년, 3학년, 2학년 순서로 내려와 이제 1학년에 대한 화제로 넘어왔다.

"에이 그럼 뭐해. 성격이 그런데. 난 오히려 철진이가 좋더라. 얼굴 뜯어 먹고 살 건 아니잖아."

"역시 지수가 뭘 좀 아네. 얼굴보단 성격이지~"

분위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시연이 너는 어때?"

"뭐가?"

하시연이 쿠키를 깨작개작 먹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최지훈이 좋아? 김철진이 좋아?"

"응? 둘 다 좋아하는데?"

하시연이 순진무구한 얼굴로 대답했다.

"탐욕적인 년······."

"아니, 얘가 잘 이해를 못한 거 같은데···? 시연아! 친구로서 말고. 남자로서."

"남자로서?"

하시연은 조각난 쿠키를 입에 털어 넣고 잠시 고민했다.

"음.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 없어서 잘 모르겠어."

"헐."

"진짜?"

"응."

10년을 넘게 친구로 지냈지만, 그 둘이 남자로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 바보들아. 시연이가 그 둘이 눈에 들어오겠니?"

그러다 한 여성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으스댔다.

"강서율이 있는데."

"아!"

다들 탄성을 질렀다.

"맞네. 서율이가 있구나. 아예 차원이 달라서 까먹고 있었어."

"인간 얘기 하는데 신을 끼워 넣긴 뭐하잖아."

"그치그치."

다들 깔깔대며 웃었다.

"진짜 외모만 보면 세계 최고 아니니?"

"맞아. 나 서율이 때문에 눈만 높아져서 큰일이야."

외모로 알아주는 한국에서도 강서율은 빼어나게 잘생겼다.

"시연이 넌 어떻게 생각해?"

"서율이? 그야 잘생겼지. 착하고."

연애에 아예 관심이 없는 하시연이 봐도, 강서율은 잘생겼다.

저번에 얼굴에 빛이 나는 듯한 환각까지 보일 정도였으니 말 다 한 거다.

"그치?"

"그런 남신이 곁에 있으니, 다른 남자가 눈에 들어오겠어?"

다들 부러움 가득한 눈빛으로 하시연을 바라봤다.

"실력도 점점 물이 오르고 있는데다가. 세상에 한 명밖에 없는 이중속성 보유자."

"서율이를 잡으면 무려 금호가 딸려오기까지!"

"서율이는 그냥 안전자산이지."

돌연 한 여학생이 번뜩이는 눈으로 하시연에게 물었다.

"근데 진짜 시연이 너 서율이랑 무슨 사이야?"

"어?"

"서율이 다른 애들이랑 말 안 하기로 유명하잖아. 뭔가 얼음 왕자 같은 느낌?"

"어? 그래?"

하시연이 의외라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하시연이 생각하는 강서율의 이미지는 얼음 왕자와 수백 광년 정도 동떨어져 있었다.

"그렇다니까. 서율이랑 그렇게 친근하게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너나 신지아 정도일걸?"

"나머진 그나마 최지훈이랑 김철진 정도?"

"음. 그렇구나."

하시연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엔 서율이가 시연이 너 좋아하는 것 같거든?"

"어?"

하시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뭔가 시연이 널 바라보는 눈빛만 유독 그윽하다고 해야 하나."

"아. 뭔지 알 거 같아."

"꿀 떨어지는 눈빛?"

"아, 응응! 그런 느낌!"

다들 꺅꺅대며 손뼉을 쳤다.

"에이. 전혀 아니야."

하시연은 손사래를 쳤다.

강서율의 정체를 알고 있는 하시연의 입장에선 얼토당토않은 말일 뿐이었다.

"나랑 서율이는 그냥······."

순간 하시연의 말문이 막혔다.

"어, 음···."

뭐라고 해야 할까.

스승과 제자 사이?

추후 세계를 지키기 위한 비밀 결사?

강서율의 정체를 생각하면 평범한 친구 사이라고 하기도 뭐하고.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하시연은 결국 이렇게 대답하기로 했다.

"······조금은 특별한 사이?"

그리고 그 대답은.

"꺄악!"

"들었어? 썸 타는 사이래!"

"뭐야아아! 하시여어어언!"

모두의 연애 세포에 불을 지피기 충분했다.

"그러고 보니, 시연이 내일 서율이랑 몬스터 파크 간다더라!"

"대박! 거기 표 어떻게 구했대?"

"너네 진짜 연애하니?"

"연애가 뭐야! 이건 사실혼 관계나 다름없어!"

"지수, 너 아까는 성격······."

"성격이 뭐가 중요해! 성격 뜯어먹고 살 거야? 아 하시연 너무 부러워!"

분위기는 점점 과열되어 갔다.

* * *

다음날 아침.

나는 왠지 모르게 어수선한 분위기를 뚫고 1층 로비로 향했다.

금호는 아직 졸린지 내 품 안에서 자고 있다.

로비에는 호텔을 나설 준비를 하고 있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그중 하시연을 포함한 여학생 집단이 있었다.

"시연아. 저기 서방님 오셨다."

"데이트 재밌게 하고 와."

"그런 거 아니라니까아······."

하시연이 울상으로 답하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서율아. 안녕······."

그리곤 세상 지친 표정으로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어. 안녕. 어제 잠 설쳤어?"

왜 이렇게 피곤해 보이지?

"······응. 조금. 애들이랑 얘기가 길어져서."

"아하."

밤새 얘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거구만.

풋풋하다 풋풋해.

나는 그냥 곯아떨어졌는데.

······같은 방 애들이랑 그리 친하지 않기도 했고.

"피곤하면 좀 쉬다 갈래?"

피곤한 채로 놀러가는 것만큼 고역이 없다.

"아냐. 괜찮아. 육체적으론 멀쩡해."

"······그래?"

육체적으로 멀쩡한데 피곤한 일이 있나?

"그럼 다행이고. 가자."

"응."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숙소를 나섰다.

"근데 진짜 다른 애들이랑 같이 안 가도 되겠어?"

"그러엄~"

금세 해맑은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온 하시연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몬스터 파크를 갈 수 있는데 다른 게 대수야?"

오늘 목적지는 호주 몬스터 파크다.

세계 최고의 규모를 자랑하는 동물원임과 동시에,

초인용 레저 설비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입장권이 문제였는데, 메이든 씨가 흔쾌히 구해 줬다.

"하아아암."

내 품 안의 금호가 크게 하품을 하며 눈을 꾸벅거렸다.

"깼어?"

금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응석부리듯이 내 가슴에 얼굴을 비빈다.

"진짜 보면 볼수록 너무 귀엽다."

하시연이 그런 금호를 바라보며 넌시지 중얼거렸다. 두 눈에 쓰다듬고 싶다고 쓰여 있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시연이는 금호를 만져 보거나 한 적은 없는 것 같네.

"안아 볼래?"

"어? 진짜? 서율이 너 다른 애들한텐 금호 못 만지게 했잖아."

"그건 애들이 너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어서 그런 거고. 시연이 넌 예외지."

나는 금호를 학교에 데려간 날을 떠올렸다. 진짜 애들 눈에 광기가 보였다. 어떻게든 금호를 만지고 말겠다는 순수한 광기.

한 명 만지게 해 주면 다른 애들이 달려들고, 또 걔가 만지고 나면 다른 반 애들도 달려들고.

이것의 무한반복이었다.

결국 그날 나는 금호 만지는 걸 금지시켜 버렸다.

금호가 너무 스트레스 받아 하는 것 같아서.

근데 지금은 하시연이랑 둘 밖에 없으니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예외구나."

하시연이 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왜? 싫어?"

"어? 아냐아냐."

하시연이 전력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든 금호를 안고 싶은 모양이다.

나는 금호의 머리를 살짝 어루만지며 말했다.

"누나 말 잘 들어야 돼?"

잠이 덜 깬 금호가 어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나는 하시연에게 금호를 넘겼다.

금호는 바로 하시연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와아······."

그렇게 졸릴까.

하긴 시험 때 힘을 좀 많이 쓰긴 했지.

"되게 부드럽다."

금호의 털을 쓰다듬으며 자상한 미소를 짓는다. 금호는 여전히 졸린 눈을 꿈뻑이며 간헐적으로 하품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오늘 나는 아끼고 아껴뒀던 몽마족의 특성, '교감(交感)'을 쓸 생각이다.

나는 머릿속 한 켠에 저장되어 있는 [교감(交感)]의 정보를 되뇌었다.

[교감(交感)]

[몽마의 지고지순한 감정에서 탄생한 아주 희귀한 특성이다. 오직 한 명에게만 사용할 수 있다.]

[이성과 신체를 1시간 이상 접촉하는 것으로 교감할 수 있다.]

[교감한 두 명이 일정 거리 내에 존재할 경우, 쌍방의 '마력'이 1랭크씩 상승한다.]

이 세계의 몽마(서큐버스)는 보편적으로 알려진 몽마와는 다르게 상당히 건전하다.

마력에 뛰어난 악(惡)의 종족으로, 몽마가 이성에게 정기(마력)를 흡수하는 방법은 신체 접촉이다.

'교감'은 그 신체적 접촉으로 행해지는 특성들 중에 하나로,

다른 강탈 계열 특성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조금 특이한 특성이다.

교감.

즉, 감응하는 것으로 시전자와 피시전자 모두의 '마력'을 상승시켜 주는 악(惡)에 어울리지 않는 상호보완형 특성이다.

나는 이 교감을 지아한테 사용할지, 시연이한테 사용할지 엄청 고민했다.

그리고 오랜 고민 끝에 하시연에게 사용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당장 마력이 절실한 건 지아보다 시연이라는 판단이었다.

신체 접촉 1시간은 손만 잡고 있어도 되는 거니 큰 문제는 없을 거다.

우리가 뭐 서로 마음 있는 사이도 아니고. 엄밀히 말하면 사제지간이나 다름없는데.

이따가 상황 봐서 얘기해 보던가 해야지.

"표는 잘 챙겼지?"

택시에 타기 전, 하시연이 내게 물었다.

"당연히 챙겼지."

나는 슬쩍 주머니의 몬스터 파크 티켓을 확인했다.

[몬스터 파크 본관 입장권]

[커플 전용권]

일반 표가 다 떨어져서 커플 전용권밖에 못 얻었지만, 어쨌든 얻은 게 어디야.

* * *

몬스터 파크에 도착한 하시연과 강서율은 일단 본관으로 가기 전에 별관의 관람용 코스를 돌기로 했다.

기린, 코끼리, 원숭이 등.

한국의 동물원에서도 볼 수 있는 평범한 동물들을 차례차례 지나왔다. 사이사이 호주에서만 볼 수 있는 몬스터들이 신기했다.

그리고 지금은 호랑이 우리 앞에 서 있다.

"금호야 저기 봐. 네 친구들 있다!"

하시연이 우리 안의 호랑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금호는 강서율의 품 안에서 우리 안을 힐끔 바라보더니, 고개를 휙 돌렸다.

뭔가 삐진 듯한 표정이다.

"금호야?"

"자기를 저런 애들이랑 비교하지 말라는 것 같은데."

"냐앙."

강서율의 말에 금호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울었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건 형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듯했다.

그리곤 하시연을 째려보고는 다시 고개를 휙 돌렸다.

"아, 으. 그, 금호야? 그런 게 아니라. 이 누나는······."

하시연이 세상 당황한 표정으로 금호에게 호소했다.

금호가 고개를 돌린 방향으로 몸을 계속해서 옮기고 있지만, 그때마다 금호는 단호하게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힝."

하시연이 세상 서글픈 표정으로 어깨를 추욱 내렸다.

괜히 한 마디 잘못 꺼냈다가 금호한테 밉보였어.

강서율은 그런 하시연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금호야. 누나가 미안하다고 하니까 용서해 주자."

강서율이 금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금호가 작게 울었다. 내키진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하시연을 바라보더니,

"냐아."

강서율에게 안긴 채 앞발을 들어 하시연의 시무룩한 정수리를 꾹꾹 눌렀다.

"금호야?"

젤리의 부드러운 감촉에 하시연이 고개를 들었다. 금호가 평소의 천사 같은 미소로 웃고 있었다.

"금호야아···."

하시연이 감동한 표정으로 금호에게 달려들었다.

금호는 밀당의 고수였다.

"그럼 슬슬 이동할까."

강서율이 시간을 확인하고는 넌지시 말했다.

"응. 그러자."

시간도 됐겠다 슬슬 몬스터 파크로 이동하기로 했다.

몬스터 파크는 꽤나 멀리 있어서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

하시연은 옆에서 보폭을 맞춰 걷고 있는 강서율을 슬쩍 바라봤다.

확실히 잘생겼다.

학창시절 내내 '연애고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던 하시연의 눈으로 봐도 진짜 엄청 잘생겼다.

다른 친구들의 말을 빌리자면 이 세상 미모가 아니다.

'그야 천족과 엘프족의 하프니까 당연한 거긴 한데.'

둘 다 아름다움으로 정평이 나 있는 종족들이다. 그 둘의 하프인 강서율이 저런 외모인 건 당연했다.

강서율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보니, 문득 어젯밤에 친구들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서율이가 날 좋아한다고?'

눈에서 꿀이 떨어진다느니, 다른 사람 대할 때와 하시연을 대할 때의 대응이 너무 다르다느니.

진짜 온갖 얘기를 다 들었다.

'······다른 애들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구나.'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강서율과 하시연의 관계를 모르는 20대 학생들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겠지.

'그런 거 아닌데.'

그러나 강서율의 비밀을 알고 있는 하시연으로서는 얼토당토않은 말일 뿐이었다.

만약 그날 자신이 강서율의 천익(天翼)을 우연찮게 보지 않았다면 오늘 같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을까?

그럴 리가 없었다.

'그야 서율이 같은 애라면 나도 환영이긴 한데.'

외적인 면을 놓고 봐도 강서율은 하시연의 이상형에 가깝다.

어른스러우면서도 위트 있지, 항상 트레이닝에 힘쓰지, 시간을 허투루 쓰는 일도 없지, 두뇌도 명석하지, 거기에 정의롭기까지.

'만약 서율이가 평범한 20살 남자였으면······.'

진짜 최고의 신랑감이 아니었을까?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하시연이 돌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으. 어제 밤새 연애 얘기랑 서율이 얘기만 해서 그런가.'

아니면 피곤해서 그런가.

생각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말자. 어차피 나랑 서율이 사이에 그런 감정은 생길 수가 없으니까.'

그렇게 쓸데없는 잡생각을 모두 털어냈을 때쯤.

둘은 어느덧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 있었다.

"티켓 확인이 있겠습니다."

안내원의 유창한 영어에, 강서율이 마찬가지로 유창한 영어로 답했다.

"여기요."

강서율이 티켓을 건넸다.

티켓을 건네받은 안내원이 밝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몬스터 파크 본관 입장권. 커플 두 분 확인 완료했습니다. 탑승하시면 됩니다."

"······넹?"

하시연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커플? 내가 영어를 잘못 들었나?'

하시연의 동공이 당황으로 이리저리 떨렸다.

< 88화 수학 여행 (3) > 끝

< 89화 수학 여행 (4) >

몬스터 파크는 메이든의 '대미궁' 시리즈와 비교될 정도로 잘 만든 초인 레저 시설이다.

S랭크 초인 '비스트 마스터'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곳으로,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사냥터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신분 확인이 있겠습니다."

"네."

당연히 세계 곳곳에서 방문객이 오고, 그렇다 보니 온갖 언어에 능통한 안내원들이 즐비해 있다.

"한국 초인 사관학교 소속 1학년 강서율, 하시연. 본인 확인 완료했습니다. 안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 여성분도 분명 한국인은 아닌데, 한국어가 참 능숙하다.

이 세계에서 한국의 인지도가 상당히 커서 그런가, 한국어를 하는 사람들이 묘하게 많단 말이지.

우리는 안내원을 따라 내부로 들어섰다. 몬스터 파크 내부의 화려한 인테리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사이사이 몬스터들을 SD화 시킨 듯한 아기자기한 캐릭터들도 눈에 띄었다.

"금호야. 나중에 금호 너도 저렇게 그려 달라고 하자."

여기 캐리커쳐 같은 거 그려주시는 화가 분이 있다고 들었다.

나중에 꼭 부탁해야겠다.

"냐아아."

금호도 사방에 가득한 캐리커처가 꽤나 마음에 드는지 기분 좋게 울었다.

"그나저나 호주에서도 유명한 두 분이 사귀는 사이일 줄은 몰랐네요."

우리를 안내해 주시던 안내원분이 넌지시 말했다.

"화염과 얼음의 만남. 제법 로맨틱해요."

커플용 티켓을 사용해서 왔으니, 사귄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했다.

그나저나 우리가 누군지 아는 모양이다.

"······하하."

일단 부정도 긍정도 아닌 머쓱한 웃음으로 답했다.

괜히 아니라고 했다가 쫓겨날 수도 있고, 긍정했다가 오피셜로 기사가 날 수도 있다.

"서율아······."

하시연이 내 소매를 붙잡고 꾹꾹 당겼다. 나는 슬쩍 하시연을 바라봤다. 표정이 뭔가 오묘하다. 버스에 탄 후부터 저러던데, 뭐 문제라도 있나?

"그, 커플 전용 티켓인 이유가 뭐야?"

"이유?"

그러고 보니 내가 설명을 안 했던가?

"내가 말을 안 했구나. 남은 티켓이 이거밖에 없더라고."

"아, 아아! 그런 거였구나."

하시연이 왠지 모르게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왠지 모르게 얼굴도 붉다.

······이거 설마.

나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왜. 설마 내가 너한테 대시라도 하는 줄 알았어?"

"아, 아니이? 그럴 리가."

얼굴이 더 붉어진다.

이거 백 프로네.

내가 대시하는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보자.

연애고자 하시연이 괜히 이런 생각을 할 리는 없고.

딱 보니까 같은 방 애들이 이상한 말 했구만?

대충 '서율이가 너 좋아하는 거 같은데?' '내일 데이트 재밌게 하고 와~' 같은 말을 듣고 괜히 그쪽으로 생각이 간 거겠지.

안 봐도 VOD다.

나는 빨개진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는 하시연을 보면서 속으로 사악하게 웃었다.

"몰랐네. 설마 시연이 네가 나한테 마음이 있을 줄이야."

"아니이이이. 아니라니까아!"

역시 반응이 아주 찰지다.

"근데 미안. 나 바벨을 브랜드 별로 모으는 여자는 좀 무서워서······."

"나 바벨 안 모아! 무슨 소리야!"

"데이트로 단련실 가는 것도 좀······."

"데이트를 왜 단련실로 가! 아니, 그 전에 나 서율이 너 안 좋아해!"

시연이가 더욱 붉어진 얼굴로 빼액 소리쳤다.

나는 과장스럽게 충격 받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랬구나. 시연이 너는 나를 싫어했구나."

"그런 의미가 아니라아···! 아으아아아앙!"

아. 재밌다.

역시 시연이를 놀리는 건 너무 즐겁다.

* * *

"출발하시기 전에 몬스터 파크에 대해 간단히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호주는 과거 크라켄 습격 이후 몬스터들의 성지가 되었다.

호주 정부는 이 몬스터들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방법이 없을지 고민했고, 그 결과 탄생한 게 바로 이 '몬스터 파크'다.

"몬스터 파크 내에서 몬스터를 잡을 시, 점수를 획득하실 수 있습니다."

몬스터들의 땅을 개간하여 위험성은 최대한 줄이고, 장벽을 쌓아 하나의 시설을 만들었다.

이 모든 건 호주 소속 S랭크 초인 '비스트 마스터'의 힘이 없었다면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획득하신 점수는 종료 후 상품으로 교환하실 수 있습니다."

몬스터 파크의 장점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

다양한 종류의 몬스터를 사냥하며 경험치를 얻을 수 있다.

호주의 다양한 몬스터를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두 번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전하다.

비스트 마스터의 통제 하에 완벽한 안전을 기한 사냥터다.

세 번째.

경험치 외에도 점수를 획득해 상품을 얻을 수 있다.

대부분은 이 상품 획득을 목적으로 몬스터 파크를 찾아온다.

"저희가 지급한 장비로 몬스터를 처리했을 경우에만 점수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안내원이 내 품의 금호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수호수를 데리고 다니는 건 괜찮지만, 그 수호수가 몬스터를 물어 죽여도 점수를 얻을 순 없으니 조심하라는 의미다.

"이상입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안내원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가자."

"응. 감사합니다~"

우리는 몬스터 파크 내부로 향했다.

"오우."

"와. 맨티스 캥거루다."

내부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호주의 아이덴티티라고 할 수 있는 몬스터, 맨티스 캥거루가 보였다.

평범한 캥거루와 똑같은데, 손만 사마귀의 손날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저기 베놈 크로커다일도 있다."

한쪽 호수에는 베놈 크로커다일이 둥둥 떠다니고 있다.

치명적인 맹독을 품고 있어서 물린 순간 즉사한다는 아주 위험한 놈인데, 이곳 몬스터 파크에 있는 베놈 크로커다일은 맹독이 아니라 마비독이다.

비스트 마스터가 개량해서 집어넣었다던가.

"저 두 마리가 같은 공간에서 생활한다는 게 되게 신기하다. 쟤네 유명한 천적 사이잖아."

하시연은 놀이동산에 처음 온 아이마냥 신나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우리를 봤는데도 달려들지도 않구."

"비스트 마스터가 참 대단하긴 해?"

"응응!"

나는 지급받은 장비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나는 활과 단검.

시연이는 검.

특수한 장치가 된 이 장비들로 몬스터를 처리할 시에 점수를 획득할 수 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1등을 노려봐?"

여기 최상급 상품들이 꽤나 끝장난다. 고대 유물에 눈이 높아져 있는 나로서도 탐나는 것들이 몇 개 있을 정도다.

"에이. 여기 프로 초인들도 많이 오는 곳이잖아."

시연이가 내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서율이 네가 봉인이라도 풀지 않는 이상 1등은 힘들지 않을까?"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나는 금호를 바닥에 내려줬다.

"혹시 알아? 골든 네임드라도 만날 줄."

몬스터 파크에는 막대한 점수를 주는 황금 몬스터들이 존재한다.

속칭 골든 몬스터라고 불리며, 그중 최고봉이 골든 네임드.

이 넓은 몬스터 파크 부지에 딱 한 마리만 존재한다는 전설 같은 놈이다.

몬스터 파크 탄생 이래 단 한 번도 발견되지 않은 놈이다.

비스트 마스터 오피셜로 짐승형태이고, 아주 날렵한 놈이라고만 전해져 있다.

"골든 네임드면 엄청 쌔지 않을까?"

"글쎄."

원작에 몬스터 파크는 언급되지도 않아서 나도 모른다.

"아 맞다. 시연아."

"왜애?"

일단 초입 존은 널널할 테니까, 지금 교감을 사용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손 좀 잡자. 대충 1시간 동안만."

"······넹?"

* * *

"역시 초입은 널널하네."

우리는 손을 잡고 몬스터 파크를 걷고 있었다. 손을 잡고서도 보이는 몬스터들을 손쉽게 잡을 수 있을 정도다.

나는 옆에서 룰루랄라 신나서 걷고 있는 하시연을 바라봤다.

조금 전, 나는 하시연에게 교감에 대한 걸 잘 포장해서 얘기했다.

대충 천족의 특수 계약이라는 걸로, 내 근처에 있으면 마력이 1랭크 상승한다고 잘 포장했다.

그 계약을 맺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1시간 동안 손 잡고 있기라는 말도 덧붙여서.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내 손은 하시연에게 잡혀 있었다.

마력 1랭크 상승이란 말에 초롱초롱 빛나던 눈동자가 아직도 선명하다.

그 뒤로 저렇게 하이 텐션이다.

"좋냐?"

"응! 엄청!"

좋아하니까 다행이네.

"앗. 저기 저거 네임드 아냐?"

"어?"

나는 하시연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 마리 거대한 거미가 있었다. 철 특유의 반질반질한 피부가 눈에 띈다.

"맞는 거 같은데? 아이언 스파이더."

아이언 스파이더.

피부도 철이고, 입에서 쏘아내는 거미줄도 철이다.

그것도 그냥 철이 아니라, 아이언 스파이더의 체내에서 마력으로 제련된 마력 강철이라서 아주 단단하다.

"······저걸 만나네."

네임드 몬스터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놈이다.

"어쩔래? 쟤는 지금 이 상태로 못 잡을 거 같은데."

하시연은 어느덧 날카로운 눈빛이 되어 있었다. 실전이라 생각하고 긴장감을 끌어 올린 모양이다.

"······점수를 생각하면 포기하긴 아쉽긴 한데."

나는 자유로운 왼손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손을 잡은 뒤로 대충 54분이 흘렀다.

"6분이면 조건 달성이니까. 그 뒤에 행동하자."

"아, 응. 6분이면 기다려도 되겠다."

"금호야. 혹시 모르니까 너도 몸 작게 만들어."

"냐아."

우리는 한쪽 수풀에 웅크리고 앉아, 아이언 스파이더를 감시하며 작전을 짰다.

"아이언 스파이더는 화 속성이 약점이라고 했지?"

"어. 마력 전도체가 열에 약하다고 하더라."

"그럼 나랑 금호가 시선을 끌고, 서율이 네가 공격하는 식으로 해야겠네. 활로? 아니면 단검?"

"그건 상황 봐서 선택해야 할 거 같긴 한데, 아마 활?"

의견을 교환하다 보니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리고 정확히 6분이 흘러.

번쩍-!

나와 하시연의 신체에 묘한 광채가 일어났다. 뭔가 핑크빛 기류······ 라고 해야 하나.

그런 이상야릇한 번쩍임이었다.

"된 거야?"

"어. 아마도?"

옆을 보자 하시연은 상태창을 확인하는 듯했다.

하시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입가도 호선을 그리며 기쁨을 주장하고 있었다.

"마력 A랭크! 대박대박!"

아주 신나서 환호성을 질렀다.

그야 얼마 전에 마력 B랭크를 찍었는데, 얼마 되지도 않아 바로 A랭크에 올랐다으니 기쁜 건 당연하다.

이해는 하는데······.

"야. 아이언 스파이더가 너 죽일 듯이 노려보는데?"

"앗."

덕분에 아이언 스파이더한테 걸렸다. 그 순간, 아이언 스파이더가 행동을 개시했다.

샤샤샤샥.

거미답지 않은 빠른 속도로 허공을 날아왔다.

아니, 허공에 깔아 둔 강철 거미줄을 타고 이동하고 있는 것이겠지.

"일단 작전대로 움직여! 금호 너도!"

"아, 알았어! 그리고 미안!"

하시연이 가장 먼저 검을 빼어 들고 아이언 스파이더에게 날아갔다.

"크르르···."

순식간에 원래 크기로 돌아온 금호도 하시연을 뒤따랐다.

나는 등에 매어 둔 활을 빼어 들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마력 늘어난 거 확인 좀 해 보려고 했더니.

뭐, 시연이가 오른 거 보니 나도 올랐겠지.

나는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칭! 캉!

아이언 스파이더는 하시연과 금호의 연계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하시연의 얼음 마법이 눈에 띌 정로도 강해졌다.

"확실히 B랭크랑 A랭크가 다르긴 하네."

이거 굳이 지원 안 해도 둘이서 이기겠는데? 아니, 하시연 혼자서 이기겠는데?

비스트 마스터에 의해서 개량, 약화된 아이언 스파이더라곤 하지만. 저 정도로 압도해 버릴 줄이야.

역시 빙결의 성역은 마력이 중요하다.

빙익(氷翼)의 기동성도 올라간 것 같고.

빙결여제 쓰면 진짜 아이언 스파이더도 혼자서 압살할 수 있을 것 같다.

뭐, 어쨌던 작전상 내가 마무리를 맡기로 했으니까.

화르르르륵-

나는 화살에 마력을 집중했다.

화 속성의 강기가 일렁였다.

동시에 회전시켰다.

과거 궁술 연습장에서 시연한 적 있는 스파이럴 스피어의 활 버전. 스파이럴 애로우.

시전 시간이 길어서 사용하기 힘들다는 단점은 아직 해결하지 못했지만, 앞에서 저렇게 시간을 잘 끌어 주면 그 단점도 단점이 아니게 된다.

화르르르륵-!

화염이 회전하며 더욱 뜨거운 열을 내뿜었다.

······아니, 이거 위력이 너무 강한 거 같은데?

아직 3초 정도 차징했을 뿐인데, 벌써 시위를 잡고 있는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다.

화살이 품고 있는 마력이 폭발할 듯 일렁인다.

"큭!"

5초가 지나가는 시점.

나는 차징에 한계를 느꼈다.

이 이상 지체하면 컨트롤이 불가능하다.

"시연아! 금호야!"

내 외침에 둘이 동시에 행동을 개시했다.

쾅!

금호가 전력으로 아이언 스파이더를 후려침과 동시에.

쩌저적-

하시연이 빙결 마법으로 움직임을 봉했다.

"서율아!"

거기까지 행동을 마친 둘은 잽싸게 자리를 벗어났다.

완벽하다.

"후."

나는 활에 감각을 집중했다.

이걸로도 충분하겠지만.

왠지 모르게 욕심이 들었다.

지금 이 강해진 마력으로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그런 욕심.

바람의 살( 虄)

화살에 바람을 깃들였다.

화, 풍 속성의 시너지로 화염이 더욱 거세졌다.

조금만 방심하면 이대로 손을 놔 버릴 것만 같은 맹렬한 화염 폭풍.

그것이 화살이란 작은 형태로 응집해 있었다.

"······와."

나는 하시연의 감탄을 신호로.

피이이잉-!

시위를 놨다.

"으억!"

맹렬한 소리와 함께 내 몸이 뒤쪽으로 날아갔다.

과거 [세계수의 가호]를 사용할 때 느꼈던 경악할 만한 힘의 역류를 느끼며 눈을 살짝 깜빡였다.

찰나의 깜빡임.

아이언 스파이더의 신체에는 거대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나는 입을 쩍 벌리고 감탄했다.

"······미쳤네."

화 속성 강기와 바람의 살의 콜라보레이션은 내가 상정했던 것 이상으로 엄청났다.

"서율아! 방금 그거 뭐야?"

하시연이 놀란 눈으로 내게 물었다.

"스파이럴 애로우라고 이름 붙이긴 했는데······."

"스파이럴? 아, 강기를 회전시킨 거구나······."

하시연이 감탄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회전의 묘리를 가미하면······."

그리곤 심각한 표정으로 뭐라뭐라 중얼거렸다.

왠지 나중에 '스파이럴 아이스 소드' 같은 걸 보게 될 것만 같다.

그보다, 마력의 상승폭이 너무 큰 거 같은데.

나는 눈을 감고 마력을 확인했다.

마력 혈관을 역으로 따라가서, 심장부의 마력을 느꼈다.

"음?"

이거 아무리 봐도 1랭크 상승한 마력량이 아닌데?

그 순간, 뇌리에 번개가 쳤다.

설마?

나는 하시연에게 안 보이는 각도로 왼쪽 옆구리를 확인했다.

······역시.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있었던 몽마족의 문신이 사라져 있었다.

몽마족 특성 완전 체화의 효과는 마력 상승인 모양이다.

< 89화 수학 여행 (4) > 끝

< 90화 수학 여행 (5) >

교감의 활성화에 성공한 나와 하시연은 묵묵히 사냥을 이어 나갔다.

"쉽다 쉬워."

비스트 마스터에 의해 약화된 몬스터들인데 우리는 교감으로 강해지기까지 했으니, 위기라는 게 생길 수가 없었다.

애초에 아이언 스파이더라는 준수한 네임드 몬스터까지 잡았으니, 말 다 한 거다.

"프로 초인 코스가 아니라서 그런가? 진짜 엄청 쉽네."

하시연의 말대로 사관생용 저 난이도 코스라 그런 것도 있는 것 같다.

"뀨우."

금호가 자신의 존재감을 어필했다. 자기도 칭찬해달라는 듯한 표정이다.

"그래. 우리 금호가 잘 싸워 줘서 그런 것도 있구."

나는 금호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그나저나 서율이 너 마력 엄청 올랐네? 몇 정도야?"

"2랭크 정도 올라서 지금 대충 C랭크 정도?"

몽마족 완전 체화로 D랭크에 도달했고, 여기에 교감이 적용돼서 C랭크로 올랐다.

"어? 아직 C밖에 안 돼? 그런 것치곤 위력이 너무 강한 거 같은데."

"이게 컨트롤 차이 아니겠냐."

나는 재수 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그치그치."

그러나 순수한 하시연은 내 의도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듯 그저 감탄했다.

"근데 봉인을 그렇게 계속 풀어도 돼? 적들한테 걸리면 어떡해?"

"괜찮아. 봉인을 푼 게 아니라 개량한 거라서 안 걸려."

물론 봉인 같은 건 없지만, 이렇게 말해 둬야겠지.

내가 지금까지 해 온 거짓말이 있으니까. 그 연장선이다.

"그렇구나."

하시연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연이 너는 슬슬 A랭크 마력에 적응해 가는 것 같다?"

"나? 응. 조~금?"

하시연이 배시시 웃었다.

"B랭크랑 A랭크가 이렇게까지 다를 줄은 몰랐어. 컨트롤하기 너무 힘들어."

"S랭크는 더 해."

하시연의 특성, 빙결의 성역은 단거리 특화라는 페널티가 붙은 만큼 출력이 강하다.

거기에 A랭크와 B랭크의 갭까지 더해져서 말 그대로 출력이 폭발하고 있다.

"나중에 나랑 떨어지면 B랭크로 돌아갈 텐데. 그때 적응 잘 하고."

"응."

"뭐,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적응해 가고 있으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그러엄~ 물론이지."

다행히 얘 조급해하는 버릇은 없어진 것 같다. 하긴, 마력을 못 다루는 몸에서 속성 마력을 지닌 최고의 유망주가 됐는데, 조급해 할 리가 없나.

"그럼 슬슬 다시 출발할까."

"응."

"가자 금호야."

"크릉."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점수 얼마나 모았어?"

"잠시만."

나는 지급받은 단말을 확인했다.

"대충 2000점?"

"어? 그럼 2티어 상품 받을 수 있는 거 아냐?"

"그치. 아이언 스파이더 점수가 생각보다 크더라."

역시 네임드다.

"네임드 한 마리만 더 발견하면 1티어 상품도 가능할 거 같은데?"

"대박. 사관생 코스에서 1티어 상품 받는 거 하늘에 별따기라고 했는데."

"우리가 평범한 사관생은 아니잖아?"

나는 옆에서 하품을 하는 금호의 머리를 마구 흐트렸다.

"무려 금호도 있고."

"갸릉!"

금호가 나만 믿으라는 듯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몸집만 커졌지 귀엽다. 나는 금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럼 진짜 출발하자."

"응. 네임드 한 마리 더 발견했으면 좋겠다."

* * *

한편, 대한민국 서울.

"아. 맞다. 이 말을 까먹고 있었네요. 퇴원 축하해요."

"감사해요."

신지아와 유화는 신지아의 자택 접견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무튼 베가본드 일건은 이걸로 끝이네요."

신지아가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네. 대중들의 기억에서 잊혀지기도 했고, 이 이상 얻을 이익은 없다고 봐도 되겠죠."

마찬가지로 서류를 정리한 유화가 가방에서 다른 서류를 꺼냈다.

"이건 귀령, 검령 습격 사건에 대한 보고서예요."

"아. 감사합니다."

신지아는 건네받은 서류를 확인했다. 처음 보는 내용도 있었고, 이미 알고 있었던 내용도 있었다.

"······진리의 구명자의 타겟이 유화 씨라는 건 어디서 나온 정보인가요?"

이건 속단하기 이른 거 같은데.

실제로 납치당할 뻔한 건 신지아 자신이기도 했고.

"서율 씨한테 나온 정보에요."

"선··· 서율이요?"

순간, 당황해서 선조님이라고 말할 뻔하다가 서율이라고 잽싸게 틀었다.

"네. 어제 통화하면서 말해 주시더라고요. 베가본드를 처리한 일의 주모자가 저라고 확신하고 있다나."

"이유가 뭐죠?"

"음.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까."

유화는 강서율에게 들었던 말들을 그대로 신지아에게 전했다.

마에스트로의 성격을 설명하며 어떤식으로 움직일 것인지, 강서율에게 불리한 말들을 제외한 신빙성 높은 설명이 유화의 입으로 다시 재현됐다.

"그렇군요."

신지아는 바로 납득했다.

모두 심증일 뿐이지만, 발언자가 강서율이라면 9할 이상 확실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신지아 씨가 안전하다는 건 아니에요. 알고 계시죠?"

"네. 알고 있어요."

어디까지나 메인 타겟이 유화라는 거지. 신지아가 타겟이 아니라는 건 아니다.

"서율 씨가 되게 미안해하더라고요. 괜히 자기 때문에 적들의 타겟이 되게 해서 미안하다고."

"······서율이답네요."

두 여성이 쓰게 웃었다.

"그래서 헛소리하지 말라고 한 소리 해 줬어요."

"잘하셨네요."

"아무튼 전할 건 이게 끝이에요."

"네. 감사합니다."

신지아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굳이 번거롭게 자택까지 찾아와서 굳이 줄 필요 없는 귀령, 검령 사건에 대한 보고서까지 줬다. 사적인 감정이 어떻든 간에 감사하는 건 인간으로서, 신화 그룹의 후계자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아쉬우시겠어요. 수학여행 못 간 거."

"······네."

신지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걸로 자신은 랭킹 2위로 추락했다. 그게 너무도 가슴 아팠다.

"이제 2위시네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유화가 능글맞게 웃었다.

누가 봐도 비아냥이었다.

신지아가 발끈했다.

"······금방 되찾을 거라 상관없어요."

"실기 시험 한 번의 차이는 제법 큰데. 되겠어요?"

"그럼요. 아, 사관생 시절의 유화 씨였다면 힘드셨을 수도 있었겠네요."

역시 이 두 사람은 사이가 안 좋다.

"그러고 보니 서율 씨. 오늘 몬스터 파크 가신다고 했는데, 잘 놀고 계시려나."

"······네?"

신지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모르셨어요? 오늘 하시연 양이랑 몬스터 파크 간다고 했는데. 서율 씨랑 별로 안 친하신가 봐요?"

"······."

신지아가 입술을 삐죽였다.

'나한테 비밀로······.'

친한 두 명이 일언반구 없이 호주의 유명 관광지에 놀러갔다고 하니, 왠지 모르게 서운했다.

그 확연한 표정 변화에 유화는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신지아가 이렇게 표정 변화가 다채로운 애가 아니었는데.

'······서율 씨를 좋아하는 게 맞나 보네.'

강서율이 말하길, 신지아는 강서율의 과거에 대한 걸 아예 모른다고 했다.

그저 힘 좀 숨기고 있는 특이한 사관생이라고만 아니까, 괜히 떠 본다고 이상한 말 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피알레 알로 사건 때 딱 꽂힌 거겠지. 원수를 갚아 준 은인이니까.'

유화는 그렇게 납득했다.

반면, 신지아도 나름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유화 씨가 생각보다 선조님이랑 많이 친하구나.'

신지아는 뾰루퉁한 표정으로 유화를 흘겨봤다.

몬스터 파크에 간다고 자기한테는 말 안 하고, 유화 씨한테는 말한 거 보면 친하긴 한 것 같은데.

'······힘을 숨기고 있는 특이한 사관생이라고만 알고 있다고 했지.'

강서율이 말하길, 유화는 강서율의 정체에 대해 아예 모른다고 했다.

그저 힘 좀 숨기고 있는 특이한 사관생이라고만 아니까, 괜히 떠 본다고 이상한 말 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친분이 생긴 건 도플갱어 사건을 비롯해서 비혼 길드에게 도움을 좀 줬기 때문이라고까지 덧붙였다.

'역시 김신우 비서 사건에 선조님이 관계되어 있을 가능성이 커.'

신지아는 그렇게 납득했다.

* * *

"으아~ 네임드 한 마리 더 찾는 건 역시 무리였나아~"

하시연이 철푸덕 주저앉으며 말했다.

"사실 한 마리 찾은 것도 기적이잖아."

"그건 글치."

이제 몬스터 파크가 닫기까지 남은 시간은 약 30분.

우리가 획득한 점수는 약 2500점. 역시 일반 몬스터는 점수가 짜다.

"골든 네임드까진 안 바라니까 골든 몬스터라도 나오면 좋겠는데."

"나오겠냐."

네임드 몬스터보다 희귀한 골든 몬스터. 그리고 그 골든 몬스터보다 희귀한 골든 네임드.

만날 확률은 복권 당첨 확률과 비슷하다는 통계를 어딘가에서 봤다.

······그래도 왠지 나라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역시 무리였나 보다.

하긴, 다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복권을 사고, 망하니까.

"뭐, 2티어 상품이 어디야."

나는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몬스터 파크의 2티어 상품이면 무려 A랭크 상당의 장비다.

시중의 가격으로 치면 최소가 10억.

"그래두 뭔가 아쉬워서 그렇지."

하시연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2티어 상품으론 만족 못 하시겠다? 우리 시연 양. 그렇게 안 봤는데 물욕 좀 있으시네?"

나는 능글맞게 웃었다.

"응?"

하시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왜 만족해? 여기 상품은 서율이 네가 가져가는 거 아냐?"

"응?"

뭔가 인식이 어긋나 있는 것 같은데.

"말 안 했나? 여기 상품은 그냥 시연이 너한테 선물로 줄 생각이었는데."

하시연이 벙쪘다.

"······처음 듣는데?"

······그랬나?

"그럼 지금 말하지 뭐. 상품은 시연이 너 가져."

나는 싱긋 웃었다.

"내가 왜 가져. 여기 티켓을 구한 건 서율이 너니까, 서율이 네가 가져야지."

하시연이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됐어. 별로 탐나는 상품도 없고."

몬스터 파크의 상품은 전부 무기류다. 그리고 나한테 무기는 계륵일 뿐이다.

한국에 돌아가면 '천변'이 완성돼 있을 텐데 무기가 무슨 소용이야.

"탐나는 게 없어도! 상품은 서율이 네가 가지는 게―"

"여기 2티어 상품 중에 백청이라는 흰색 검 있더라고. 빙 속성 증폭 달린 거."

"―당연··· 응?"

하시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백···청?"

"어. 한국식 장검인데, 제법 이쁘더라."

"아니, 그보다··· 빙 속성 증폭이라고 하지 않았어?"

"응. 했는데?"

"세계에 몇 없는 속성 증폭 무기?"

"응."

"그것도 검에 빙 속성?"

"응."

"······그런 고급 장비가 왜 2티어 상품에 있어?"

"그야, 빙 속성 보유자가 별로 없으니까? 심지어 검에 달려 있고. 수요가 떨어지니 2티어로 내려간 거지."

"······."

하시연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입술을 뻐끔뻐금하며,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

표정이 뭔가 재밌다.

아마 머릿속에서 물욕과 양심이 거센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닐까.

나라면 준다는 거 낼름 받아먹었을 텐데, 시연이 얘는 착해도 너무 착하다니까.

"진짜 나 필요한 거 없으니까 시연이 너 가져. 백청 같은 건 돈이 있어도 못 구하는 무기니까."

"그래두······."

"그리고 그냥 주는 거 아냐. 나중에 악마 놈들 모가지 많이 잘라 버리라고 뇌물 좀 바치는 거지."

"아······."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하시연의 머리를 툭툭 두들겼다.

"뭐, 스승이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도 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초에 준다는 거 계속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너? 이럴 땐 그냥 잘 쓸게! 하고 웃으면 되는 거야."

내 장난스런 웃음에 하시연이 씁쓸하게 웃더니,

"······응!"

이내 밝은 미소로 변했다.

"잘 쓸게!"

과연 하시연다운 해맑은 미소였다. 나는 픽 웃었다.

"갸릉."

옆에서 금호가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대충 20분 남았나. 마지막 스퍼트 달려 보······."

그때였다.

"!"

"!"

등 뒤에서 엄청난 존재감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느껴 본 적 없을 정도의 무거운 기세.

"이, 건···."

살기인지, 적의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격이 다른 기운.

전투태세의 허미트와 만났을 때도 이런 느낌은 받지 못했다.

베가본드와 1:1로 마주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차마 뒤돌아보기도 두렵다.

하지만 확인은 해야 한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서서히 몸을 돌렸다.

내 몸이 삐걱이며 돌아간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그렇게 10분 같은 1초가 지나.

나는 그 무지막지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는 존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순백을 덮고 있는 듯한 모피에 사이사이 두드러지는 검은 무늬.

용맹함을 보석으로 응집한 듯한 붉은 눈.

그러면서도 고고한 자태.

"백···호···?"

내 옆에서 하시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입술도 마찬가지로 떨리고 있었다.

······지금 이 시점에 백호가 왜!

드레이크와 마주했을 때도 느껴본 적 없는 야생 본연의 살기에 전신의 솜털이 쭈뼛주뼛 선다.

흡사 괴물의 입 안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듯한 지독한 공포감.

"큭!"

죽음.

저것은 호랑이의 형태를 하고 있는 죽음이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장인의 간이 대장간'을 사용했다.

루시퍼의 마창을 꺼낼 생각이었다. 살인충동이고 뭐고 지금은 부작용을 생각할 때가 아니다.

루시퍼의 마창을 사용해도 이길 수 있을 거라곤 요만큼도 생각할 수 없었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못한 채 죽는 것 보단 낫다.

"그릉."

"금, 호야?"

그런 내 행동을 금호가 막았다.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듯이 작게 울었다.

터벅터벅.

백호와 마찬가지로 맹수의 왕다운 고고한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한 걸음. 두 걸음.

"금호야!"

그 순간 정신이 들었다.

금호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백호는 격이 다르다.

이대로면 금호가!

"제길!"

나는 다시 루시퍼의 마창을 꺼내기 위해 마력을 움직였다.

그러나 내가 마력을 움직이는 속도보다, 놈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

눈 깜빡할 사이에 백호는 나와 하시연, 금호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

죽음이 코앞에 있는 듯했다.

나는 이를 악 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죽는 건가!

"냐아아앙~"

교태 가득한 울음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뭘 잘못 들었나?

"냐앙~"

이번엔 짧은 울음소리다.

일단 내가 기억하는 금호의 울음소리는 아닌데.

나는 슬쩍 한쪽 눈을 떴다.

"······."

그리고 당황했다.

내게 죽음을 느끼게 했던 야생의 왕이.

"······저기요?"

교태를 부리며 금호의 몸에 얼굴을 부비고 있었다.

어느덧 그 신체에서 일렁이던 막대한 기세는 사라지고 없었다.

"크릉."

그런 백호의 유혹을 받으며 금호는 코웃음을 쳤다.

굉장히 도도한 모습으로 고개를 홱 돌린다.

백호는 금호의 그런 모습조차 마음에 드는 듯, 더욱 적극적으로 얼굴을 비볐다.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옆에서 하시연이 입을 뻐끔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설마 그 무지막지한 기세가 구애의 파동이었어?

아니, 그보다 백호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몬스터 대 폭주 에피소드까진 아직 1년 정도 남았다.

지금은 백호가 나올 타이밍이 아닌데?

< 90화 수학 여행 (5) > 끝

< 91화 사방신 (1) >

사방신.

원래 세계에서는 방위와 계절을 주관하는 동아시아의 신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세계에서의 인식은 많이 다르다.

네 마리의 재해급 몬스터.

중국을 반파시킨 최악의 몬스터로 널리 알려져 있다.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한 마리씩 나타났다는 것에 의해 '사방'이라는 접두사가 붙었고.

그 넷의 강함이 재해급을 뛰어 넘은 신급이라고 하여 '신'이라는 접미사가 붙었다.

그렇게 탄생한 사방신이란 고유 명사는 지금도 역사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저거 누가 봐도 백혼데."

나는 아직까지 금호에게 구애하고 있는 하얀 호랑이, 백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 외모, 아까 느꼈던 위압감.

그리고 아까 그 광속에 가까운 속도까지. 누가 봐도 백호 본인이다.

"근데 백호는 토벌됐잖아. 100년 전에."

"······그렇긴 한데."

사방신은 약 1년 후에 발생할 몬스터 대 폭주 사건에서 다시 등장한다.

이유는 모른다.

사실 100년 전에 사방신이 죽은 게 아니었던 건지.

아니면 새끼들이 있었던 건지.

자세한 내막은 묘사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했다.

본디 사건이란 갑작스럽게 벌어지는 것.

태풍이 오는 걸 보고 '태풍이 오는 이유가 뭐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듯이, 뜬금없이 재해급 몬스터가 튀어 나와도 '아 그렇구나.'하는 게 독자의 심리니까.

아무튼 그 백호가 지금 내 눈앞에서 교태를 부리고 있다.

이건 엄청난 위화감이었다.

"근데 백호치고는 덩치가 너무 작지 않아?"

"그러게."

그러고 보니, 이 백호는 원작에 묘사된 백호와 비교하면 몸집이 수십, 수백 배가 작다.

"아직 새끼인가?"

그렇다는 말은 여기서 차근차근 성장해서, 1년 후에는 세계를 파괴하는 엄청난 몬스터로 성장한다는 건가?

이러면 다른 세 마리도 몬스터 파크 안에 있을 확률이 크다는 말이 아닐까.

"미치겠네."

나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백호가 1년 뒤에 벌일 일들을 생각하면 지금 이 자리에서 처리하는 게 좋다.

문제는 처리할 방법이 없다는 거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백호를 이길 방법이 없다. 아까 그 속도 봐. 잔상도 못 봤어.

백호가 마음 먹고 내 목덜미를 물기 위해 달려들면 그걸로 상체랑 목이랑 이별을 고해야 할 거다.

"근데 쟤 내가 알고 있는 백호랑 많이 다른 거 같은데."

하시연이 멍하니 백호를 바라봤다.

금호가 얼마나 좋은지 온갖 구애 행위를 다 하고 있다.

주위에 핑크빛 기류가 환각처럼 보일 정도로 달달한 모습이다.

"몇 만 명을 죽인 흉악한 몬스터라고 보기엔······."

"······그러게."

내가 아는 백호는 그냥 무자비한 학살자다. 피도 눈물도 없고, 보이는 건 모조리 파괴하며, 생명체는 보이는 즉시 도륙해 버리는 최악의 몬스터.

"냐아아앙~"

"크릉."

금호의 냉정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대시를 하는 저 모습이 어딜 봐서 최악의 살인 몬스터란 말인가.

두 호랑이의 투닥거림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자,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백호가 아닌가?"

모르겠다.

너무 머리가 복잡하다.

"근데 우리 어떡해?"

"뭐가?"

시연이가 시간을 가리키며 말했다.

"5분 남았는데."

"······아."

그것도 문제구나.

퇴장까지 남은 시간은 약 5분.

이곳의 몬스터를 데리고 나갈 수는 없으니, 필연적으로 두고 나가거나 해야 할 텐데.

저 모습을 봐서는 금호한테서 떨어질 리가 없다.

"······어쩌냐."

괜히 떨어트리려고 하면 화내는 거 아냐? '우리 자기 건들지 마!'하면서 앞발로 후려치기라도 하는 날엔 나랑 시연이는 같이 손잡고 황천길로 떠나야 한다.

······이대로 직원들이 와서 어떻게 해 주길 기다려야 하나?

아니, 직원들이 온다고 백호를 어떻게 할 수 있긴 한가?

"그릉."

그런 우리를 바라보며 금호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그리고는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크릉."

백호를 보고는 뭐라뭐라 중얼거렸다.

그러자 백호도 진지한 표정이 돼서 뭐라뭐라 답하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살짝 고개를 돌려 나와 하시연을 힐끔 바라보더니 내게 터벅터벅 걸어왔다.

순간 움찔했는데, 별로 공격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이내 내 코앞까지 다가온 백호가 나에게 목덜미를 내밀었다.

정확히는 목덜미의 기계장치를 내민 것이었다.

이걸 뭐 어쩌라고?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중, 금호가 내게 다가왔다.

"저거 파괴해 달라고?"

금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파괴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는데. 일단 보고."

그렇게 백호의 목에 걸려 있는 기계장치에 손을 가져다 댔을 때였다.

철컥-

무언가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기계장치가 해제되기 시작했다.

그리곤 이내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뭐지?

왜 풀린 거지?

나는 바닥에 나뒹구는 기계장치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일단 이거 풀······."

눈앞의 백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사라졌어?"

* * *

"안녕히 가십시오."

우리는 몬스터 파크를 뒤로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백호에 대한 건 보고하지 않았다. 확실하지도 않고, 일단 보고하기 전에 이쪽에서 조사를 좀 해 봐야 할 것 같아서.

"······지친다."

그나저나 마지막에 너무 신경을 써서 그런가, 정신적으로 엄청 지쳤다.

"나두."

하시연도 옆에서 힘이 빠진 듯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품에는 상품으로 받은 '백청'을 안고 있었다.

덕분에 피로함 반, 기쁨 반이 섞인 아주 오묘한 표정을 하고 있다.

"냐아아~"

금호는 멀쩡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얘는 백호를 위험하다고 인식조차 안 했던 거 같은데.

"금호 너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백호가 싸울 생각이 없었다는 거."

"냥."

금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 기세가 구애행동이었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호랑이끼리만 아는 뭐 그런 건가?

"근데 금호 너 아까 걔 마음에 안 드는 것 같더라?"

금호가 오묘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별로 내 스타일 아니라는 듯한 표정이다.

"금호가 뭐래?"

"별로 자기 스타일 아니래."

"왜애? 되게 이쁘던데."

하시연의 말처럼 외견만 놓고 보면 백호는 아름다웠다.

물론 우리 금호에 비할 바는 안 되지만. 암 그렇고 말고.

"냐앙."

내 발치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우리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앗. 얘는 또 누구야? 되게 귀엽다. 너도 금호한테 반해서 왔니?"

하얀 고양이가 내 발치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사이사이 검은 무늬가 매력적이다. 뭔가 기품 같은 게 느껴지는 게 길고양이는 아닌 것 같······.

"······흰 털에 검은 무늬?"

기시감이 느껴지는 외견이다.

에이 아니겠지.

그렇게 고개를 살며시 흔들고 있을 때였다.

탓-

금호가 내 품 안을 벗어나 바닥으로 내려가더니, 한숨을 쉬듯이 작게 울었다.

"냐앙."

그리곤 시크하게 흰색 고양이 앞에 섰다.

"냐아아앙~"

그러자 흰색 고양이가 세상 기쁘다는 울음소리를 내면서 금호에게 달라붙었다.

어디서 많이 본 광경.

당장 20분 전에 봤던 광경이 스몰 사이즈로 펼쳐져 있었다.

"······너 설마 백호야?"

내 말에 금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비비고 있던 새하얀 고양이, 백호가 힐끔 고개를 들었다.

"냥!"

그리곤 방해하지 말라는 듯이 단호하게 울었다.

문득 아까 백호가 사라지기 전, 금호가 백호에게 뭐라뭐라 의사를 전달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설마 그거 이따가 찾아오라고 한 거였어?

그렇다는 말은 내가 부순 기계장치는 얘를 몬스터 파크 내에 가두는 장치였다던가 그런 건가?

······나 설마 백호를 세상에 풀어 버리는 미친 짓을 한 건 아니겠지?

* * *

그날 밤.

숙소로 복귀한 나는 같은 방 친구들의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홍역을 치렀다.

하시연이랑 어디까지 갔냐는 둥, 키스는 했냐는 둥.

부정하느라 진이 다 빠졌다.

아마 시연이도 방에서 똑같은 질문 세례를 받고 있겠지.

나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을 거다.

시연이는 왠지 모르게 놀리고 싶어지는 그런 분위기가 있으니까. 아마 밤새 놀림받겠지.

애도를 표한다.

지금 나는 방을 나와 인근 한적한 벤치에 앉아 있다.

"냐앙."

"냥."

두 마리의 고양이, 아니 스몰 사이즈 타이거즈랑 같이.

―그래서 지금 백호처럼 보이는 몬스터랑 같이 있다고?

"네."

수화기 너머로 메이든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심지어 그 백호가 금호처럼 작은 고양이 형태로 변해 있고?

"네."

메이든이 '허. 참.' 하며 혀를 찼다.

"메이든 씨. 어쩌면 좋을까요?"

―어쩌긴 뭘 어째. 그게 진짜 백호면 토벌해야지.

"그쵸?"

나는 시선을 내려 금호와 백호를 바라봤다. 둘이 아주 잘 놀고 있다. 백호는 아주 금호에게 홀딱 반해 있는 것 같고.

금호는 조금 싫은 척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마냥 싫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근데 얘가 진짜 백호가 맞는지도 모르겠어요."

―흠. 네가 느낀 위압감이 사실이라면, 백호일 확률이 높긴 한데. 금호처럼 신체를 자유롭게 축소 확대시킬 수 있다는 것도 백호 정도의 몬스터가 아니면 할 수 없을 테고.

메이든이 잠시 뜸을 들였다.

―근데 네가 보낸 영상을 보면 아무리 봐도 그 역사 속의 흉포한 백호처럼은 안 보인단 말이지······.

"······제 말이 그 말이에요."

그래서 머리가 아픈 거다.

얘가 진짜 백호라고 해도 문제다. 금호 좋다고 저렇게 졸졸 따라다니는 애를 어떻게 죽이란 말인가.

―잠깐만. 그러고 보니 그 하얀 호랑이. 몬스터 파크에서 찾았다고 했지?

"네? 네."

―······흠. 몬스터 파크. 비스트 마스터라······.

메이든이 고민에 잠긴 듯했다.

나는 닦달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렇게 약 1분이 흘러.

―꼬맹아. 이건 진짜 순전히 내 가설인데.

메이든이 생각의 정리를 마친 듯했다.

―비스트 마스터. 그 빌어먹을 할아범이 원흉인 거 같거든?

"······네?"

갑자기?

―일단 처음부터 설명하자면, 비스트 마스터, 에디트 레스턴은 초인이라기보단 연구원이야.

"······연구원이요?"

―어. 몬스터들의 유전자를 조작해서 개량을 하는 식이지.

그런 식의 개량이었어?

―세간에 알려지진 않았어. 나 정도 되니까 아는 거지. 보통은 비스트 마스터의 특성이 몬스터에 관련된 건 줄 알거든.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아무튼 그 몬스터 연구에 미친 할아범이 약 5년 전에 나한테 도움을 청한 적이 있어.

"무슨 도움이요?"

―연구 중인 몬스터 한 마리가 도망쳤는데, 중요한 놈이라 꼭 잡아야 한다고. 그 포획을 도와줄 수 없겠냐고 하더라고.

"······연구 중인 몬스터 한 마리?"

뭔가 냄새가 난다.

―어. 그때는 그냥 몬스터 파크 내의 안전성에 문제가 생길까 봐 그러나보다, 싶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까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메이든은 당시의 이상했던 일들을 조리 있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말의 앞뒤가 안 맞는 일들부터, 마지막에 갑작스레 말을 바꾸는 일들도 많았다고 한다.

종국에는 어차피 죽었을 게 뻔하니까 됐다고 하며 사건 종결.

확실히 의심스럽다.

―그리고 가장 의심스러운 게 10년 전에 그 할아범이 중국에서 사방신의 부산물로 만든 장비를 샀다는 기록이 있다는 거야.

"사방신의 부산물로 만든 장비면······ 그들의 유전자가 있겠네요?"

―그렇지. 뭔가 딱딱 들어맞지 않아? 10년 전에 구입한 사방신의 장비. 5년 전에 도망간 한 마리의 몬스터. 그리고 오늘 네가 만났다는 백호처럼 생긴 몬스터까지.

내 눈이 서서히 커졌다.

―그 할아범. 지금 연구실에서 사방신을 만들고 있는 거 아냐?

그 순간, 머릿속에서 모든 것이 맞춰졌다.

1년 뒤에 벌어질 몬스터 대폭주는 호주에서부터 시작된다.

역사에 기록된 사방신과는 조금 다른 외형이라는 묘사도 있었다.

비스트 마스터가 사방신을 새로 창조한 거라면 외형이 다른 것도 납득이 간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건 이후 비스트 마스터가 죽었다는 묘사가 있었다.

"아마 메이든 씨 가설이 맞는 것 같네요."

―그치?

확실하다.

설마 여기서 원흉을 찾게 될 줄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백호를 만난 건 행운이었네요."

이게 다 금호 덕분이다.

이 마성의 호랑이가 백호를 끌어 내 주지 않았으면 몰랐을 정보다.

나는 금호의 머리를 자상하게 쓰다듬었다. 금호가 기분 좋게 울었다.

"냐아!"

그런 내 손을 백호가 탁 쳐서 떨어트렸다. 어딜 감히 내 서방님에게 손을 대냐는 듯한 단호한 표정이다.

우둑.

내 손목관절이 위험한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다행히 부상은 없었지만 나는 손목을 쥐고 눈썹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아윽! 요 백냥이 녀석이···!"

아무래도 금호처럼 힘까지 완전히 축소시키진 못한 모양이다.

금호가 내 손목을 보더니, 그 즉시 백호에게 따지듯이 얼굴을 내밀었다.

어딜 감히 우리 형한테 손찌검을 하냐는 듯한 표정이다.

백호가 시무룩해졌다.

"푸핫."

그 모습이 자못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얘네가 좀 귀엽게 놀아서."

―뭐야 싱겁게.

메이든이 픽 웃었다.

―그래서 어쩔텨?

"뭐가요?"

―네가 그런 도리에 어긋난 연구소를 그냥 놔둘 성격은 아니잖아?

"음. 그렇긴 한데."

도리에 어긋난 연구도 문제지만, 그 연구의 결과가 몬스터 대폭주라는 게 문제다.

막을 수 있으면 무조건 막아야 한다.

"그 전에 일단 조사 좀 해 보고요."

만에 하나 아닐 수도 있으니까 조사는 해 봐야겠지.

―확실히 그게 우선이긴 하겠네. 그럼 나도 따로 조사 좀 해 볼게.

"네. 부탁드릴게요."

그렇게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였다.

"그럼 이만."

―아. 맞다. 까먹을 뻔했네.

메이든의 탄성에 나는 다시 폰을 귀에다 가져다 댔다.

―아재가 전해달래.

아재.

메이든이 정일용 어르신을 부를 때 쓰는 말이다.

―천변 완성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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