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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3화 뜻밖의 만남 (1) >

우리는 백호가 발견한 기다란 나무를 따라 날아오르는 중이었다.

"백냥이 너 괜히 발버둥치지 마라? 그러다 떨어지면 큰일난다."

금호, 백호를 품에 안고 천익을 이용해서 한참을 비행하고 있다.

자연이 승천하는 보고는 공중 유적지라서, 이렇게 비행 수단을 지니지 못하면 입장할 수조차 없다.

"냐앙."

"냐아앙~"

금호가 찰싹 붙어 있기 때문일까. 백호가 세상 행복한 얼굴로 웃었다. 괜히 내 품이 싫다고 난리를 피울까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그렇게 10분을 더 비행한 후에야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야."

장관이다.

나는 금백호를 바닥에 내린 뒤에 주위를 자세히 살폈다.

나뭇가지를 엮어서 만든 듯한 온갖 몽환적인 풍경. 확실하다. 자연이 승천하는 보고의 입구다.

"들어가자."

우리는 유적지 내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유적지 공략은 순탄하게 진행되어 갔다. 얼마나 순탄한지, 내가 할 일이 없을 정도다.

"······너희 너무 유능한 거 아니니?"

내 말에 원래 크기로 돌아온 금호와 백호가 동시에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니야. 잘 하고 있다고."

너무 잘 하고 있다.

내가 심심해서 그렇지.

"그릉."

금호가 방긋 웃고, 백호가 비웃었다.

"백냥이 너······."

그 표정이 마치, '쓸모없는 놈.'이라고 하는 듯했다.

금호의 시선이 백호를 향하자, 백호의 시선이 순식간에 순진무구한 미소로 변했다.

"?"

금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나를 바라본다.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와, 소름.

진짜 저 여우 같은 호랑이 좀 보소.

······백호의 호 자가 범 호(虎)가 아니라 여우 호(狐)인 거 아냐?

"됐다. 그냥 다시 출발이나 하자."

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금호와 백호가 다시 몸을 돌려 전진해 나갔다.

나도 터벅터벅 따라 이동했다.

이 유적지에 출현하는 몬스터들은 '스카이 버그'다.

나무에 기생하는 벌레형 몬스터들로 다양한 종류가 있다.

크기는 사람보다 조금 작은 정도. 전투력은 개체별로 C~D랭크 초인과 맞먹는다.

적게는 5마리. 많으면 수십 마리가 몰려 다니기에, 꽤나 상대하기 까다로운 놈들이다.

"······응. 그없."

응. 그런 거 없다.

"크와아아앙!"

금호가 앞발을 한번 휘두르면 한 마리씩 산산조각 나서 허공으로 흩어져 비산한다.

"크릉."

백호는 더하다.

닿기도 싫다는 듯 찡그린 표정으로 마력을 분사할 때마다 세 마리씩 불타서 사라진다.

앞선 1시간의 공략은 이것의 반복이었다.

"그나저나 백냥이 너 주작의 화염 되게 잘 다룬다?"

내 칭찬에 백호가 으스대며 웃었다.

저번 일로 사방신의 인자를 신체에 품게 된 백호는 다른 세 마리의 특성도 지니게 됐다.

원래라면 한참 전에 폭주해야 했지만, 드래곤족의 특성 '수호의 계약' 덕분에 기적적으로 안정화를 이루었다.

주작의 화염.

청룡의 관찰안.

현무의 방어력.

지금까지 확인한 백호가 지닌 다른 세 개체의 특성들이다.

주작의 화염이야 지금 사용하고 있고. 청룡의 관찰안은 오드아이로 변한 눈동자가 그 증거다.

마지막으로 현무의 방어력.

이건 나도 보고 엄청 놀랐다.

설마 현무의 갑각을 그런 식으로 사용할 줄이야.

"크릉!"

금호의 앞발에 타격당해 살점과 핏덩이가 되어 날아가는 스카이 버그. 그 시체가 백호를 향해 날아갔다.

이대로면 시퍼런 핏물을 그대로 뒤집어 쓸 터. 피해도 되지만, 백호는 그마저도 귀찮은지 다른 방법을 택했다.

핑-!

시체가 날아오는 궤적에 검은 갑각이 생성됐다.

갑각이 완벽히 시체를 가로막았다.

백호의 신체에는 핏물 한 방울 튀지 않았다.

"진짜 낭비 오지네."

겨우 피와 살점을 막기 위해 현무의 갑각을 사용하다니.

아무튼 지금 본 대로 백호는 현무의 갑각을 피부에 형성하는 게 아니라, 허공에 형성하는 게 가능하다.

물론 인자의 흡수에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백호 본연이 지녔던 속도에 조금 문제가 생겼다.

처음 만났을 때 봤던 그 광속에 가까운 속도는 폭주 사건 이후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아마 다른 세 개체의 인자를 안정화시킨 대가로 본연의 힘이 약해진 것이겠지.

뭐, 폭주 인자를 처리할 때 제법 많이 약화됐었기도 했고.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본연의 속도를 되찾지 않을까 싶다.

수호의 계약이 지금도 백호를 성장시키고 있으니까.

금호랑 백호 둘이 협력하면 S랭크 100위권 초인 정도는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완전히 성장을 마친 금호도 한층 더 강해졌겠다. 상성만 잘 따라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어느 샌가 스카이 버그를 처리한 금백호가 내게 터벅터벅 걸어왔다.

"고생했어."

나는 두 놈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백호도 이 정도는 흔쾌히 받아들이게 됐다.

좋은 일이다.

아무튼 유적지 공략은 굉장히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 * *

그날 밤.

유적지 한 곳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간이형 텐트를 설치하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금호, 백호는 이미 잠들었다.

침낭 하나에 같이 들어가 웅크려서 아주 잘 자고 있다.

나는 그런 둘의 옆에서 보존식을 조금씩 까먹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대체 뭐라고 했을까."

생각하는 것은 저번 주에 꿨던 꿈. 술자리에서 신이 형과 내가 나눴던 마지막 대화에 대한 것이었다.

부탁할 게 있다고 진지하게 말하던 형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진짜 이 빙의 현상을 내가 내 의지로 받아들인 건가?"

일단 그렇다고 가정해 보자.

내가 신이 형의 얼토당토않은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가 뭘까.

빙의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던가?

"······아니야."

신이 형의 그 절박한 표정을 본 내가 그런 가벼운 생각을 하진 않았을 거다.

일단 이 가설은 배제.

그렇다면.

"거절할 수 없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신이 형의 부탁이 너무도 절실했기에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다."

일주일째 시간만 나면 이 일로 고민하고 있는데, 도저히 답이 안 나온다.

"그때 거기서 깨어나지 말았어야 하는데······."

꿈의 뒷얘기를 다 봤다면 이런 고민도 없었을 거 아냐.

"에휴."

생각을 하면 할수록 답답함만 증폭되어 갔다.

대체 난 왜 이 소설 속 세계에 들어오게 된 것일까.

* * *

한편, 그 시간 유화는 메이든과 통화를 나누고 있었다.

―죽겠다. 죽겠어. 딱 손이 두 개만 더 있으면 좋겠네.

수화기 너머로 메이든의 한탄이 들렸다.

"저두요. 요즘 길드의 몸집을 키워 가는 단계라서 그런가. 일손이 너무 부족하네요."

휴식시간이 부족한 두 비지니스 우먼의 한탄이었다.

"새로 개발 중인 술식은 어떻게 됐어요?"

―글쎄. 아직 확답은 못 주겠는데. 이게 여간 까다로워야지.

국가전 메인 경기장의 시공에 들어가는 자재들에 새겨져 있는 진리의 구명자 놈들의 봉쇄 술식을 완전히 카운터 칠 수 있는 새로운 술식의 개발.

강서율이 메이든에게 부탁한 일이다.

―그래도 개최 전까진 어떻게든 될 거 같다. 아예 답이 없는 건 아니라서.

"다행이네요."

유화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화 너는? 위원회 내부의 스파이 색적은 잘 되고 있어?

"음. 일단 확실히 흑색인 사람들이 반. 남은 절반은 회색이에요."

―애매하네.

"애매하죠."

두 명이 쓰게 웃었다.

―조사할 때 괜히 걸리지 않게 조심하고. 놈들이 눈치 채면 골치 아파져.

"네. 알고 있어요."

―그래. 이런 음습한 건 네 특기니까 믿고 맡기마.

"······비밀 조사가 특기라고 해 주실래요? 음습한 게 뭐에요."

―그래. 상류층 여길드장님의 은밀한 취미인 '비밀 조사'.

"······됐어요. 말을 말아야지."

―큭큭.

두 명의 대화는 한참 동안 이어 졌다.

―그럼 그 꼬맹이 오늘 강릉에 있는 거야?

"네."

―에휴. 우리는 방에 쳐박혀서 서류다 술식이다 조사다 난리가 났는데. 정작 본인은 놀러 다니고 있으니.

"에이. 놀러간 건 아닐 거예요. 그쪽에 뭐 중요한 게 있나 보죠."

―알아 짜샤. 그 워킹홀릭 꼬맹이가 그냥 놀러 갔을 리가 없잖아. 그냥 해 본 말이야. 어찌 됐건 밖에 돌아다니는 게 부러워서.

하루 정도는 마음 편히 쉬고 싶다.

―아. 맞다. 화 네 주변 경비 강화는 어떻게 됐어?

"해 뒀어요. 집이랑 사무실이랑······. 개인 경비도 고용했고요."

―그걸론 부족해. 내가 장비 몇 개 보내 줄 테니까, 사무실이랑 집에 추가로 설치해.

"이 정도면 충분할 거 같은데······."

―임마. 상대는 그 진리의 구명자야. 그 새끼들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다고. 그런 놈들이 너를 최우선 타겟으로 삼았다는데, 이 정도로 충분할 거 같은데? 충분할 거 같은데에에? 머리에 든 건 우동사리냐?

메이든의 말은 신랄했다.

하지만 그 말이 걱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기에, 유화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아무튼 닥치고 내 말대로 해. 안전 설비에 '이 정도'라는 말은 없는 거야. 알것냐?

* * *

다음날.

새벽에 일어난 우리는 유적지 공략을 이어 갔다.

중심부에 나오는 몬스터들은 조금 더 강했고, 사이사이 위협적인 함정들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조금 강해진 걸론 금호와 백호에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고,

함정도 감각이 뛰어난 금호 백호에겐 아무 소용이 없었다.

편-안.

이 버스는 리무진 버스로구나.

내가 이 유적지에 들어와서 한 건 금백호 쓰다듬고, 밥 차려 준 것밖에 없다.

아. 뒷짐 지고 걷기도 있구나.

그렇게 6시간의 공략 끝에, 우리는 유적지의 최심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야. 활활 잘 타게 생겼네."

이곳의 수호자는 나무다.

살아 움직이는 거대 나무 엔트.

그것이 스카이 버그에게 기생당해 변이를 일으켜 키메라 엔트가 되었다.

"가라 백냥이! 화염 방사!"

나무+벌레.

이 조합은 누가 봐도 화염에 약하다.

백호가 얼굴을 찡그리고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화염을 뿜어냈다.

화르르륵-!

키메라 엔트의 신체에 불길이 옮겨 붙었다. 역시 화염이 약점이구나.

"다음은 금호! 전광석화!"

금호가 내 의지에 따라 키메라 엔트의 하부를 향해 돌격했다.

쾅-!

머리쪽에 타오르는 불길에 정신이 나가 있던 키메라 엔트는 금호의 공격에 대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금방 정신을 차렸다.

키메라 엔트는 몸이 기우는 와중에 나뭇가지를 뻗어 금호에게 날렸다. 제법 날렵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금호의 신체 능력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크릉!"

가볍게 공격을 피한 금호가 다시 틈을 파고들어 두 번째 몸통박치기를 선사했다.

얼쑤.

이번에야말로 키메라 엔트의 신체가 완전히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백호가 다시 화염을 뿜어냈다.

화르륵-

키메라 엔트에게 붙어 있는 불길이 더욱 거세졌다.

"이야. 탑승감 너무 좋다."

이대로 가만히 손가락만 빨고 있어도 키메라 엔트는 두 호랑이의 밥이 되어 산산이 소멸될 테지.

"그래도 마지막 정도는······."

하지만 마지막까지 아무것도 안 하기엔 양심이 너무 찔린다.

나는 천변을 활의 형태로 바꾸었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

풍화 스파이럴 애로우를 시전했다.

"둘 다 피해!"

나는 시위를 당기며 외쳤다.

금호와 백호가 동시에 자리를 이탈했다.

휘이이잉-!

화르르륵-!

바람과 화염이 한 군데 뭉쳐서 회전했다.

그렇게 약 3초 후.

나는 넘어져 있는 키메라 엔트를 향해서 화살을 쏘았다.

파앙-!

그게 끝이었다.

키메라 엔트의 중심엔 거대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벽까지 이어진 관통된 화살의 궤적을 따라 송진 같은 것이 휘날릴 뿐.

"휘유."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역시 이 기술의 위력은 알아 줘야 한다니까.

쿠웅-

계속해서 발버둥치던 키메라 엔트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다.

사망한 것이다.

"끝."

꽤나 허무한 최후였다.

뭐, 원래 높은 난이도의 유적지는 아니었으니까.

찾는 게 힘들 뿐이지.

"그럼 유물만 챙겨서 돌아가자."

내 말에 금호와 백호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 백호의 끄덕임이 유독 맹렬했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다.

우리는 키메라 엔트의 시체를 지나, 유물이 보관되어 있는 최심부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 내부의 제단 위에 작은 팔찌가 놓여 있었다.

"일그러진 균형."

원작에서 최소 수십 번은 등장했던 팔찌다.

자연의 붕괴에 대한 분노를 형상화 한 유물로, 꽤나 파괴적인 성능을 지닌 팔찌다.

원작에선 엘프족의 배신자 레오다니스가 사용했던 팔찌로, 그의 심볼과도 같은 아이템이다.

이걸 다루던 레오다니스가 얼마나 주인공을 괴롭혔는지 모른다.

고구마도 그런 썩은 고구마가 없었는데.

"개이득."

하지만 이걸로 그 배신자 새끼가 활개 칠 일은 사라졌다.

나는 그 팔찌를 '장인의 간이 대장간' 안에 넣어 버렸다.

"완벽해."

나는 강해지고, 적은 약해지고.

정말 완벽하다.

"애들아. 가자."

그렇게 몸을 돌려 금호 백호를 바라봤다. 뭔가 이상하다.

"너희 뭐해?"

어느덧 냥이 모드로 변한 두 호랑이가 방 내부의 한 벽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

마치 그곳에 무언가가 있다는 듯이 지그시.

< 103화 뜻밖의 만남 (1) > 끝

< 104화 뜻밖의 만남 (2) >

"여기 뭐가 있어?"

내 말에 금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를 바라봤다.

깊은 눈동자가 내게 저 벽에 손을 댈 것을 종용하는 듯했다.

웬일로 백호도 간절한 표정이다.

"뭔데 그래?"

숨겨진 방이라도 있는 건가?

나는 두 마리가 바라보는 벽면을 향해 걸어갔다.

"여기?"

끄덕.

맞나 보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벽에 손을 가져다 댔다.

파지지지직-!

"우왓!"

그 순간 맹렬한 스파크가 터져 나왔다. 손을 떼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큭!"

필사적으로 손을 움직이려고 안간힘을 쓸 때였다.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일족의 후예에게 이 메시지를 남긴다.

돌연 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국어도, 영어도 아닌. 난생 처음 듣는 종류의 언어였다.

그러나 무슨 영문인지, 확실히 뜻이 전달되고 있었다.

―레나.B.리퍼리엘 일족의 마지막 희망을 부디 잘 부탁하네.

파직, 파지지직!

그 말을 끝으로 스파크가 더욱 거세졌다.

"으아아악!"

난생 처음 경험하는 맹렬한 통증이었다. 그 격통에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 * *

꿈을 꿨다.

그날의 꿈.

―서율아. 네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난생 처음 보는 절박한 표정의 신이 형. 흐릿한 꿈 속 세상에서 형은 내게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들리지 않는다.

흐릿한 안개처럼 흐리멍텅하다.

꿈 속 세계가 구름처럼 흐릿하게 흩어져간다.

다만, 신이 형이 울기 직전의 표정을 짓고 있는 건 선연하게 보였다.

―고맙다. 서율아.

울먹이는 한 마디.

흐릿한 풍경 사이로 그 한 마디도 확실하게 들렸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얼마 없어. 일단 원작에 대한 걸 확실히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기억력이랑··· 세계의 온갖 지식들을 줄 게. 이것들이 있으면 분명 큰 도움이······.

그 말을 끝으로.

꿈 속 세계는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 * *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

방금 뭐였지?

깨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내 머리를 잠식한 것은 의문이라는 두 글자 단어였다.

꿈. 그래 꿈을 꿨다.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기억력과 지식?"

마지막에 분명 그렇게 말했다.

확실하다.

마지막 문장까진 다 들을 수 없었지만, 틀림없다.

"······그래서 그런 거였어?"

나는 내 기억력에 대해 의문을 품은 적이 있다.

내가 원작 [S급 상태창]을 열댓 번 가까이 봤다고 해도, 1000편에 다다르는 장편 소설을 이렇게 세세하게 기억한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이런 의문이었다.

이 의문에 대해서 나는 단순히 '지능'이 상승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내가 빙의한 이 소설 속 주인공 '강서율'이 뛰어난 지능을 지닌 문무겸비의 만능 캐릭터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원작 주인공이 알 법한 지식들이 알게 모르게 내 머릿속에 존재한다는 것도 내 가설을 뒷받침해 주는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 기억력과 지식이 신이 형의 선물이었다고?"

생각치도 못했던 사실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이 빙의 현상은 신이 형이 강압적으로 벌인 행위가 아니라, 내가 받아들였기에 벌어진 현상이었다는 것.

'부탁해'로 시작한 대화의 끝이 '고마워'였으니 아마 확실할 테지.

그렇다면 나는 어째서 그런 부탁을 받아들인 것일까?

"······아오."

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머리가 너무 띵하다.

이 이상 생각하려고 해도 생각할 수가 없다.

뭔가 어정쩡하게 머릿속에 브레이크가 걸려 있는 느낌이다.

누군가가 억지로 걸어 둔 브레이크. 그것이 서서히 풀리는 듯한 느낌.

"뭐야 대체."

그렇게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아!"

문득 등쪽에 느껴지는 차갑고도 거친 바닥의 감촉에 정신이 들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분명 조금 전, 벽에 손을 댔다가 스파크가 터져 나왔고.

그 통증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금호, 백호는?"

내 주위에 있어야 할 두 마리의 호랑이가 안 보인다.

백호는 몰라도 금호가 쓰러진 나를 그대로 두고 갈 리가 없는데.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서 재빨리 주위를 둘러봤다.

"아."

다행히 금호 백호는 금방 발견됐다. 나와 10미터 정도 떨어진 위치에 나란히 앉아서, 무언가를 올려다보고 있다.

"······얼음?"

그것은 얼음 덩어리였다.

나보다 배는 큰 거대한 얼음 덩어리. 보통의 얼음보다 불투명해서 내부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곳으로 걸어갔다.

"이거 마력으로 생성된 얼음인데?"

얼음에서 마력의 향취가 느껴진다. 대체 이건 뭐지?

왜 이런 곳에 얼음 덩어리가 있는 걸까.

"냐앙."

"냐아앙."

내가 얼음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두 마리가 내 양 발을 한쪽씩 물고는 당겼다.

"······이거에도 손을 대라고?"

끄덕.

두 마리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형, 조금 전에 괜히 벽에 손 댔다가 기절했는데?"

금호가 조금 고민하는 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래도 부탁한다는 듯한 간절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

얘네가 왜 이러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이 얼음에 뭐 중요한 거라도 들어 있는 것일까.

"에이."

모르겠다.

일단 죽지는 않겠지.

나는 눈을 딱 감고 얼음 덩어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 순간.

얼음에 균열이 발생했다.

―일족의 접촉 확인.

동시에 음성이 들렸다.

묘하게 귀에 익은 음성이다.

"아."

이건 조금 전, 정신을 잃기 전에 들었던 음성이다.

분명 무언가를 부탁한다고 했고. 마지막에······.

그 순간, 내 동공이 서서히 확장되어갔다.

레나.B.리퍼리엘.

"레나 비스트 리퍼리엘?"

그 이름을 입에 담은 순간.

―봉인을 해제합니다.

파칭-!

얼음이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얼음 조각 세례 뒤로. 은빛 머리칼의 여자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생김새로 보아 대략 10살 정도일까.

머리에 솟아 있는 은빛 귀가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미친."

저 모습.

확실하다.

레나 비스트 리퍼리엘.

비스트는 수인족 왕가의 미들 네임. 이 꼬마는 수인족 왕가 최후의 후예다.

"······수인족의 공주님이잖아."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미래. '마왕'이라는 단체에 소속되어 인류 멸망을 위해 힘쓰는 간부들 중에 하나.

수인족 최악의 배신자.

그게 바로 레나 비스트 리퍼리엘이다.

"왜······?"

의문이 의문과 합쳐져 내 머릿속에 무수한 물음표를 낳았다.

* * *

"······어휴."

일요일 오후 11시 26분.

집에 도착한 나는 가장 먼저 등에 메고 있던 수인족의 공주님을 침대에 눕혔다.

"얘 때문에 무슨 고생이냐."

얘를 몰래 데려오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일단 머리에 달린 두 귀와 찬란한 은발을 감추기 위해서 모자 및 후드티를 따로 준비해야 했다.

사람들 시선을 최대한 피해야 했기에, 최대한 사람이 없는 시간대를 골라 기차와 택시 등의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다.

유화나 지아한테 부탁해도 됐겠지만, 뭔가 껄끄러웠다.

이 공주님의 존재를 뭐라 설명한단 말인가.

아무튼 그렇게 돌고 돌아서 우리는 무사히 집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백호랑 금호도 고생 많았다."

나는 침대 한 구석에 웅크린 두 마리 호랑이를 향해 말했다.

얘네 가방 속에 숨어서 오느라 엄청 불편했을 거다.

실제로 금호의 표정이 멍하다.

"냐아아앙~"

······근데 백호는 오히려 행복해 보이는데?

"아하."

금호랑 붙어 있으면 가방 안이고 지옥불이고 상관없으시다?

"조강지처 나셨어. 아주."

나는 혀를 끌끌 찼다.

"그나저나······."

나는 다시 공주님을 바라봤다.

레나 비스트 리퍼리엘.

원작에서도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악역'이다.

무표정하게 사람을 찢어발기던 그 모습은 공포의 대명사 그 자체였다.

산 채로 사람을 태운다던지.

바람 마법을 이용해서 발 끝, 손 끝부터 서서히 깎아 나간다던지.

그러면서도 표정 변화 하나 없는 완벽한 철면피.

"어우."

원작의 잔인한 묘사가 현실로 벌어진다고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어쩌냐."

이 공주님을 진짜 어쩌면 좋을까. 일단 원작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죽여야 하지만······.

"쩝."

유적지에서 들었던 남성의 간절한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아마 이 공주님을 봉인한 존재일 테지.

그는 이 공주님을 일족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했다.

수인족의 마지막 희망.

세상을 수호하는 측에 서 있던 수인족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말이다.

그 말은 즉.

"이 공주님. 원래는 착한 거 아냐?"

이런 가설이 나온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만약 이 공주님이 원작 그대로의 악이라면, 눈을 뜬 순간 내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만약 이 공주님이 악이라면, 금호와 백호가 그렇게 간절하게 이 공주님을 구해 달라 부탁하진 않았을 테니까.

"냐앙."

마침 금호가 공주님의 뺨을 핥았다. 어서 일어나면 좋겠다는 듯이 진심을 담아서.

웬일로 백호가 질투하질 않는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약 10분이 흘렀다.

"으···읏."

공주님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온 것은 그때였다.

무언가 악몽이라도 꾸는 듯이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바들바들 떤다.

그러다가 곧 눈을 떴다.

"?"

한 점 구름도 느낄 수 없는 찬연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원작의 묘사처럼 빛을 잃은 무기질 같은 눈빛과는 정반대의 눈빛이었다.

그 순간, 내 생각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이 공주님은 악이 아니다.

"정신이 들어?"

그러나 공주님은 내 말에 답하지 않았다.

"읏."

그저 겁먹은 토끼처럼, 바르르 떨 뿐.

"냐앙."

"!"

움찔!

귀 바로 앞에서 들린 금호의 울음소리에 몸을 크게 떨었다.

겁먹은 눈으로 고개를 돌려 금호를 바라봤다.

그 순간 공주님의 눈동자가 환해졌다.

덥썩-

바로 금호를 껴안고는 얼굴을 비빈다.

"냐앙!!"

과연 이번에는 참을 수 없었던 것인지, 백호가 신경질 난 표정으로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와아······."

그러자 이번엔 백호도 껴안는다.

두 마리의 호냥이를 껴안으며 세상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보는 나까지 행복해지는 미소였다.

"···저기요, 공주님. 괜찮아요?"

그렇게 제법 시간이 흘러.

이제 좀 긴장이 풀린 것 같아서 다시 물었다.

"······."

내 예상대로 이번엔 겁에 떤다거나 하지 않았다. 나를 적이라고 인식하지 않게 된 모양이다.

그저 고개를 갸웃하고 이렇게 답했다.

"저기여, 공쥬임. 갠차나여?"

"응?"

45도 가까이 기운 목과 어눌한 발음이 포인트.

"푸흡."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공주님은 발끈한 것인지 눈에 힘을 줬다.

―무엄하다! 짐이 누군 줄 알고 그리 실례를 하느냐!

그리곤 유창한 말로 버럭 소리쳤다.

"아, 미···안?"

방금. 무슨 언어였지?

내 반응에 공주님이 반색했다.

―오오. 그대. 표정을 보니 수인족의 언어를 알아듣는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처음부터 수인족 언어를 쓰지 그랬느냐.

다시 들린다.

난생 처음 듣는 듯한 언어.

조금 전, 봉인을 풀 때 스파크와 함께 들린 언어 체계와 비슷한 느낌이다.

아마 수인족의 언어겠지.

이걸 내가 어떻게 알아듣는 거지?

답은 금방 나왔다.

조금 전 꾼 꿈.

이건 신이 형의 선물 때문이다.

원작에 대한 걸 모조리 기억할 수 있는 기억력과, 이 세계의 기초 지식을 선물로 준다고 했었지.

아마 수인족의 언어는 그 기초 지식의 산물이 아닐까.

······아니, 그렇다고 보기엔 엘프족의 언어는 못 읽겠던데.

무슨 차이가 있는 건가?

―그대. 듣고 있는가?

"아."

그 말에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마음이 가는 대로 말을 꺼냈다.

―그, 이렇게 하면 되나?

―오오. 역시 수인족의 언어를 할 줄 아는구나. 훌륭하도다.

다행히 내 말은 통하는 모양이다.

―그래.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되고 있는 게냐.

공주님이 진지한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공주님. 왜 거기 봉인되어 있었던 거야?

―봉···인? 봉인이라고 했느냐.

공주님의 표정이 삽시간에 심각해졌다.

―봉인··· 그래. 맞아. 봉인.

그리곤 무언가 깨달은 듯이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 지니스. 지니스는 어디 있느냐.

―지니스?

―내 근위병이다. 분명 그와 함께 도망치고 있었는데······.

혼란스러운 듯, 머리를 움켜쥐고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맞아. 분명 엘프국으로 도망 와서······. 지니스가······.

―공주님?

점점 표정이 심각해져 간다.

―보, 본국은 이제 더 버틸 수 없다고. 공주님을 살리려면 이 수밖에 없다고······ 나를······.

양손으로 자신의 작은 신체를 꽉 껴안는다.

두려움에 잠식된 어두운 표정이었다.

나는 웅크려 고개를 숙인 공주님에게 다가가, 그 등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사람의 온기가 익숙지 않은지, 몸을 움찔 떨었다.

미세한 떨림이 내 손으로 전해져 온다. 나는 한참 동안 등을 토닥여 줬다. 마음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공주님의 떨림은 점점 멎어 갔다.

―······미안하다. 못 볼 꼴을 보였구나.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든 공주님의 표정은 아까 봤던 근엄한 척 하는 공주님의 표정으로 되돌아 와 있었다.

―그래. 현재 내가 놓여 있는 상황은 전부 파악했다.

―설명해 줄래?

―알겠다. 먼저 짐은······.

공주님의 얘기는 제법 길게 이어졌다.

수인국이 악마들에게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것.

그곳에서 공주인 레나를 탈출시키기 위해서 지니스라는 근위병을 중심으로 탈출조가 꾸려졌던 것.

엘프국으로 도망쳐 오는 데 성공한 것.

그러나 그 엘프국마저 안전지대는 아니었다는 것.

―······결국 짐은 수하들에 의해서 봉인되었다. 먼 미래. 수인족의 부흥을 위해서.

그렇게 레나 비스트 리퍼리엘은 찾기 힘든 공중 유적지에 봉인되었다.

―이상이다.

―그렇구나.

확실히 대전쟁에서 가장 먼저 소멸한 건 수인국이라고 들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겠지.

그렇다는 건, 그녀가 마왕군의 간부가 된 것은 그녀의 자의가 아니었다는 건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그런 악의 화신이 된 걸까.

―그래서 그대. 지금 상황은 어떤가? 전쟁은 어떻게 됐지?

아. 그것도 모르겠구나.

―전쟁은 만 년 전에 끝났어.

―만······년?

공주님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그, 그럼 결과는! 전쟁의 결과는 어떻게 됐는가!

―무승부. 양패구상. 양 측 모두 전멸했어.

이번에야말로 큰 충격을 받은 듯, 공주님은 고개를 푹 숙였다.

―말, 말 도 안 돼. 그럴 리가···.

그러다 곧 고개를 들고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깨를 붙잡고 애절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그, 그렇다면 자네는. 자네는 무어란 말인가? 그 전쟁이 무승부로 끝나 전멸했다면, 이 세상에는 그 무엇도 남지 않았어야 할 터인데!

······그 무엇도 남지 않았어야 했다? 그건 무슨 말이지?

―나도 자세히는 몰라. 그 전쟁에 대한 건 기록되지 않았으니까. 그냥 모든 이종족들이 이 세계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증거로, 다들 그렇게 추측하고 있을 뿐이지.

―그러니까, 자네는 뭐냔 말이다! 모든 종족이 사라졌다면, 자네의 존재도 없어야 정상이다!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인간족.

―뭐···라?

―대전쟁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종족. 인간족이라고.

―인간··· 인간족?

내 말에 공주님이 당황한 듯,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내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인간족이 뭐지?

―뭐?

이번엔 내가 놀랄 차례였다.

―인간족이란 종족은 처음 듣는다.

내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 104화 뜻밖의 만남 (2) > 끝

< 105화 뜻밖의 만남 (3) >

만 년 전의 대전쟁.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10년간의 대전쟁.

통칭 공백의 10년.

그 전쟁이 벌어진 원인이나, 그 과정은 원작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이 말에 대해서 혹자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아니, 이종족 귀환 에피소드가 시작되면서 해당 전쟁을 겪었던 수많은 이종족들이 돌아온다면서? 근데 공백의 10년에 대한 게 원작에서 언급되지 않았다니 말이 돼?'

응. 말이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귀환한 이종족들이 해당 전쟁에 대한 모든 정보를 입 밖으로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주인공 측과 이종족 측의 정보 교류가 일절 없었기 때문이라고 해야겠지.

마신이 이끄는 '파계'는 말할 것도 없고, 드래곤 로드가 이끄는 '세이비어'와도 교류가 아예 없었다.

그렇다면 또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악의 축이야 그러려니 하지만, 수호하는 측인 세이비어와도 교류가 없다니, 그게 말이야 방구야?'

이건 나도 좀 공감가는 말이긴 하다.

마신 측의 강력한 무력을 생각하면 주인공을 필두로 한 인류와 드래곤 로드를 필두로 한 세이비어가 손을 잡았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드래곤 로드는 인류를 믿지 않았다. 정체불명의 제 3집단과 신용을 쌓을 시간따윈 없다. 그렇게 말하면서.

교류가 없다 보니, 세이비어 측 시점으로 소설이 진행되지도 않았고. 마신 측 시점으로 진행된 내용은 있긴 해도, 파계는 애초에 광신도 집단 같은 느낌이라 과거의 대전쟁에 대한 건 그 누구도 입에 담지 않았다.

그 결과가 공백의 10년이다.

원작 주인공(강서율)을 포함한 인류측의 그 누구도 해당 대전쟁에 대한 걸 알지 못했다.

수많은 의문이 있었으나, 풀 방법이 없었다.

그 의문을 풀기 위해 행동할 여유도 없었다.

마신이 이끄는 파계를 상대하기도 벅찼다.

그리고 결국 이 떡밥은 원작 소설 [S급 상태창]이 완결 날 때까지 풀리지 않았다.

만 년 전에 전쟁이 벌어진 원인도, 인간족만이 살아남은 이유도, 모든 기록이 소멸된 이유도. 그 어떠한 의문도 풀 수 없었다.

―인간족을 모른다고?

―그렇다. 짐은 인간족이라는 종족명에 대해서 난생 처음 듣는다.

그러니 당연히 공주님의 얘기는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은 만 년 전에 인간족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이야?

―글쎄. 짐도 세상의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니니 말이지. 몇 존재하지 않는 희소 종족 중에서 인간족이 존재했을 수도 있다.

공주님이 근엄한 표정으로 답했다.

―아니. 그건 아닐 거야. 현재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족은 60억이 넘거든. 희소 종족일 수가 없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60···억? 60억이라 하였느냐? 허어.

공주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앵두 같은 입술로 '60억··· 수인국의 60배···.'라고 중얼거리고 있다.

나는 놀란 공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수인족의 공주님이 인간족에 대한 걸 모른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순간, 뇌리에 무언가가 반짝였다.

"인간족은 대전쟁 후에 탄생한 종족이다···?"

내 동공이 서서히 확장되었다.

―음? 뭐라 한 게냐.

내 머리가 팽이처럼 회전했다.

공백의 10년에 대한 가장 큰 의문.

인간족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드래곤 로드와 마신이 각각 차원 유폐와 봉인을 당하고, 천신이 사망했다.

정령, 요정, 거인족 같은 인간족과는 범접할 수도 없을 정도로 태생적으로 뛰어난 종족들도 모두 봉인되거나, 사망한 대전쟁.

그 전쟁에서 오직 인간족만이 살아남은 이유. 그 이유에 대해서 당시 독자였던 나는 그 어떠한 답도 내놓지 못했다.

만약 그 대전쟁에서 인간족이 살아남은 게 아니라, 대전쟁이 끝난 후에 인간족이 탄생한 거라면?

그렇다면 말이 된다.

모든 지적 생명체가 소멸한 이후에 탄생한 새로운 지적 생명체.

그렇게 탄생한 게 인간족이라면 모든 의문이 자연스레 풀린다.

"맞아. 확실해."

―그대. 대체 뭐라고 하는 겐가?

나는 원작의 내용을 떠올려봤다.

드래곤 로드가 이끄는 세이비어는 인류에 대해서 비상식적일 정도로 맹렬한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드래곤의 신중함에서 나온 정체불명의 제 3세력에 대한 경계심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만 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제 3종족에 대한 경계였다면?

그렇다면 첫 만남에서 드래곤 로드가 했던 말도 이해가 간다.

나는 원작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드래곤 로드가 지독한 무표정으로 말했다.

"인류의 총의라고 했나. 믿을 수 없군. 애초에 그쪽이 마신의 앞잡이가 아닐 거라는 보장이 있나?"」

그 장면도 새로운 해석으로 다가왔다.

"그래. 이 가설이 맞다면 전쟁의 기록이 일체 없는 것도 말이 돼."

―그러니까 짐도 알아듣게 말을······.

무언가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지는 듯했다.

"맞아. 고대 유물···!"

그 순간, 새로운 증거가 머릿속에 번쩍였다.

"세상의 수많은 고대 유물 중에서, 인간족이 착용할 수 있는 고대 유물은 단 한 개도 없어."

―무엄하다! 계속 무시하면 이쪽도 생각이 있다!

인류가 만 년 전에 존재했던 종족들 중에 하나였다면, 고대 유물이 단 하나도 없는 건 이상하다.

모든 게 척척 들어맞아 가고 있다.

다만, 이러면 새로운 의문이 생긴다.

모든 이종족들이 단 한 개체도 남지 않을 정도로 치열하고 끔찍했던 대전쟁 직후.

그 상처입은 터전에서 인류는 어떻게 새로운 탄생을 이뤘는가.

역사적인 기록으로 보면 인류가 나라의 구조를 갖추기 시작했던 시기는 약 9천 년 전.

1천 년 사이에 그 끔찍했을 대전쟁의 상처를 모조리 치유하고, 새로운 지적 생명체가 제로부터 자연스레 태어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태어난 것만 해도 기적인데, 그 우연의 산물들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진화를 이뤄서 천 년 만에 사회적 생물이 될 확률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확률은 없다.

"······산 넘어 산이라고, 의문 넘어 의문이네."

결국 의문의 끝은 새로운 의문이었다.

누군가가 내게 덥썩 안겨 든 것은 그때였다.

―그대! 일부러 무시하는 겐가! 짐의 마음이 바다처럼 넓다고 해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공주님이었다.

내 품에 어정쩡하게 달라붙어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뭔가 눈꼬리에 눈물이 그렁거린다.

―무시는 나쁜 거다! 알고 있느냐!

"아."

······뭔가 사이사이에 공주님이 뭐라 말을 걸었던 거 같기도 하고.

―아니, 그. 딱히 무시한 건 아니고. 생각에 잠겨서 나도 모르게······.

내 말에 공주님이 여전히 물기가 가득한 눈으로 답했다.

―정말인가?

―그럼. 내가 왜 공주님을 무시 하겠어.

―······엘프국이나 드워프국에는 수인족을 무시하는 풍습이 있다고 들었다.

······아. 그런 풍습이 있었어?

―에이. 우린 안 그래. 오히려 엄청 좋아할걸?

저기 바다 건너 수인족을 시조로 삼고 있는 국가, 일본이라던지.

아주 미쳐 날뛸 거다.

은랑족 특유의 찬연한 은발과 늑대 귀. 순식간에 일약 스타덤에 오를 수 있을 걸?

―······정말인가?

―그렇다니까. 다들 공주님의 귀여움에 정신을 못 차릴 거야. 장담할게.

내 확답에 공주님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리곤 작게 기침을 한 뒤에 근엄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렇구나. 음. 짐은 수인국에서도 아름다움으로 1위를 놓쳐 본 적이 없는 몸. 당연한 일이로다.

팔짱을 끼고 거만하게 고개를 들어 올리며 뿌듯한 미소를 짓는다. 그새 신났네.

―그래서 그대. 현재 상황에 대한 설명을 좀 해 주겠는가. 인간족은 무엇이고, 아까 그 60억이란 말은 무엇인가.

날 바라보는 두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그 전에 내가 먼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대전쟁이 벌어진 원인이 뭔 줄 알아?

―그대. 그런 것도 모르는가?

공주님이 으스대는 표정을 지었다.

―알고는 있는데, 확인할 겸.

모르지만 일단 강한 척 했다.

―그런 겐가. 좋다. 설명하마. 원인은 마신의 습격이다. 돌연 천계와의 규율을 깨 버리고, 드워프국에 습격을 감행한 게 시발점이었지.

공주님의 얘기는 제법 길어졌다.

마신의 갑작스런 습격.

마신을 중심으로 결성된 '파계'.

갑작스레 강해진 마신.

조금 늦게 집단을 형성한 '세이비어'.

―그렇게 7년 간. 대등한 전쟁이 이어지는 중, 우리 수인국이 습격을 당했다. 마신의 간계에 당한 게지. 그리고······.

공주님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짐이 아는 건 여기까지다. 그 후에 짐은 봉인되었으니 말이지.

정적이 흘렀다.

공주는 수인국의 멸망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침울해졌고.

나는 생각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발생한 정적이었다.

공주님의 얘기를 다 들은 내 감상은 간단했다.

······이건 대충 내가 예상했던 대로다.

클리셰대로라고 해야 할까.

강해진 악의 습격.

그 악에 맞서는 선과 중립에 속하는 드래곤.

대등한 전투 속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패자와 승자.

누구나 상상 가능한 아주 진부한 클리셰였다.

―지니스··· 어마마마··· 아바마마···.

물론 그것이 현실인 이상, 누군가에겐 슬픔이겠지만.

나는 어깨까지 추욱 쳐져 있는 공주님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괜찮아?

―물론이다. 짐은 수인국의 정식 후계자다. 아무렇지도 않다.

안 괜찮아 보이는데.

누가 봐도 강한 척이다.

나는 쓰게 웃었다.

―아무튼 고마워.

이건 진심이다.

덕분에 의문이 많이 해소됐다.

그래도 조금 아쉽다.

전쟁의 결말이 어떻게 진행된 건지. 그게 제일 궁금했는데.

이 공주님은 7년 차에 봉인되어 버려서 거기까진 알 방법이 없다.

―그럼 이제 그대가 설명할 차례다. 지금 이 시대에 대한 걸 모조리 설명해다오.

―모조리···?

공주님이 굳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차례대로 설명할 게.

나는 만 년 뒤의 현재 이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해 나갔다.

* * *

다음날 아침.

나는 퀭한 눈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피곤함을 느껴본 게 얼마 만이지."

수인족의 특성, '들끓는 순혈의 피'를 얻은 후로 얼마 만에 느껴보는 피로감인지 모르겠다.

"무슨 공주님이 호기심이 저리 많아······."

어제 한숨도 못 잤다.

레나 비스트 리퍼리엘 공주님은 호기심의 결정체여서, 무슨 얘기만 하면 새로운 의문을 던지곤 했다.

그 반짝이는 눈동자를 차마 배신할 수 없어서, 끝까지 답해 주긴 했는데. 솔직히 엄청 피곤하다.

······뭐, 그 덕분에 나에 대한 경계심이 아예 사라진 듯하니까. 다행이긴 한데.

나는 내 침대에 누워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공주님을 바라봤다. 그 옆에서 백호와 금호도 같이 엉켜서 자고 있다.

절로 미소가 나오는 모습이다.

나는 슬쩍 스마트폰을 들어서 사진을 찍었다. SNS에 올리면 순식간에 세계로 퍼져 나갈 귀여움 끝판왕 짤의 탄생이었다.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세면실로 향했다.

그나저나 저 공주님. 상상 그 이상으로 순수하다.

원작에서 공포의 대명사라고 불렸던 레나 비스트 리퍼리엘이 호기심에 불타서 눈을 반짝이고 있다니. 매치가 안 된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대체 이 깜찍한 공주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마왕군 소속 빌런들 중에 정신조작 능력자가 있었던가. 없었던 거 같은데.

"흠."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다.

중요한 건 원작의 레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아니라, 지금 그 공포의 대명사가 아군이 되었다는 거니까.

나는 세면실로 향했다.

"후우."

그렇게 세면세족을 마치고, 세면실을 나왔다. 머리를 대충 말리고 사관생복으로 환복했다.

그렇게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어디 가아···?

잠에 취한 공주님이 비몽사몽 몸을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학교. 어제··· 아니, 새벽에 말했지?

―학교··· 으음. 교육기관?

―맞아. 금방 갔다 올 테니까, 더 자고 있어.

내 말에 공주님이 크게 하품을 했다. 그리곤 내게 터벅터벅 걸어왔다.

―머리가 덜 말랐구나. 옷도 구김이 좀 보이구우······.

눈이 반쯤 감겨 있다. 말투도 근엄한 말투와 제 나이 또래의 말투가 섞이고 있다.

그렇게 비몽사몽 내게 다가온 레나가 내 신체에 손을 댔다.

다음 순간, 내 신체에 마력광이 빛났다.

순식간에 머리카락의 물기가 말라 갔다.

사관복에서 검은 불순물들이 허공으로 뿜어져 나오더니 한 곳으로 뭉쳐 갔다.

옷의 구김이 순식간에 펴지기 시작했다.

―으음. 됐다아.

그리곤 마지막으로 해맑게 웃더니, 몸을 180도 돌려 침대로 비틀비틀 걸어 돌아갔다.

"······헐?"

나는 벙쪘다.

이런 특이한 마법을 본 것이 처음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주된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맞다, 깜빡했네······."

원작에 등장하는 공포의 대명사 레나 비스트 리퍼리엘.

그녀의 특기는 마법이다.

그것도 현대식 마법이 아니라 만 년 전부터 이어져 오던 드래곤식 마법 체계.

"이 공주님. 고대 마법 사용자였지."

어느새 침대에 돌아가 금호를 껴안고 자고 있는 공주님의 얼굴이 보석처럼 빛나는 듯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 105화 뜻밖의 만남 (3) > 끝

< 106화 얽히다 (1) >

월요일 오전.

오늘은 수업이 없는 날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체 수업이 있는 날이라고 해야 할까.

[정기 랭킹전 14위 강서율 VS 83위 기민성]

오늘은 간만에 내 랭킹전이 있는 날이다.

"서율아. 파이팅."

"선조님. 다녀오세요."

"후딱 갔다 올게."

나는 시연이와 지아의 배웅을 받으며 대기실을 나섰다.

콜로세움에 오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사건 사고 때문에 정기 랭킹전 자체가 많이 취소되기도 했고.

내 랭킹전이나 주요 경기가 아닌 이상 관전할 생각도 들지 않아서 딱히 올 일이 없었다.

"흠."

콜로세움으로 걸어가는 길.

뭔가 감회가 새롭다.

저번에는 내가 도전자의 입장이었는데, 이번엔 도전 받는 자의 입장이 됐다는 게 뭔가 신기했다.

랭킹 498위에서 14위.

진짜 열심히 했다.

괜히 뿌듯하네.

통로를 지나, 밝은 빛이 비추는 콜로세움 내부로 들어섰다.

"와아아아!"

"강서율 잘생겼다!"

가장 먼저 관객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사이사이 귀에 익은 목소리도 들린다.

"카메라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특급 유망주야! 한눈팔지 마!"

그 사이로 업계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들의 열기 다분한 음성도 들렸다.

처음엔 뭔가 부담스러울 뿐이었는데, 이젠 좀 즐겁다. 관심과 인기는 끊을 수 없는 마약과 같다고 하던 어떤 연예인의 말이 떠올랐다.

"확실히. 묘하네."

나는 픽 웃으며 콜로세움 중앙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이미 도착해 있던 내 대전 상대가 한껏 굳은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다.

딱 보기에도 엄청 긴장된 표정이다.

표정에 승리에 대한 욕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무언가 결의에 찬 표정이다.

"아하."

이기긴 힘들겠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관계자들한테 좋은 모습은 보여 둬야겠다.

이런 생각이구만.

합리적인 판단이다.

실제로 저 기민성이란 학생은 나를 이기긴 힘들 것이다.

능력치는 평균 C랭크지만, 그게 다다. 정석적인 창술사인 그는 내 상대가 못 된다.

아마 바람의 길 하나만으로도 가볍게 요리할 수 있을 테지.

"합리적인 생각이긴 한데······."

아주 얕은 생각이다.

패배를 확신하는 그 마음가짐으로 좋은 경기력이 나올 리가 없잖아.

"양 자, 마지막으로 장비를 확인하도록."

자리에 위치하자, 심판을 맡은 교관이 말했다.

우리는 가볍게 대련용 장비들을 확인했다.

"시스템 체크 완료. 양 자, 위치로."

콜로세움의 세이프티 세팅까지 모두 점검을 마치고, 우리는 위치로 이동했다.

"그럼 지금부터 정기 랭킹전을 시작하겠다!"

교관의 외침과 함께 중심에 홀로그램 메시지가 떠올랐다.

[정기 랭킹전 Start.]

[10]

그럼 빨리 정리하고 쉬러 가 볼까.

나는 가볍게 허리춤에 걸어 둔 단검을 꺼내 들었다.

순간, 주위의 풍경이 변했다.

바람의 길이 펼쳐졌다.

눈으로 읽는 게 아닌, 바람으로 느끼는 세상.

그 세상 속에서 기민성의 나약한 투쟁심이 느껴진다.

역시 이길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9]

오늘 수업은 이걸로 끝이다.

오후에도 랭킹전이 가득 잡혀 있긴 한데, 참관은 자유라서 그냥 돌아가도 된다.

빨리 이겨 버리고 돌아가서 공주님한테 마법의 사용법이나 배워야지.

나는 중심을 낮춰 달려들 자세를 취했다.

그때였다.

오싹-!

등골에 한기가 느껴진다.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신체가 오들오들 떨리고, 머리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뭐지?

바람이 통곡하고 있는 듯했다.

도망가라고, 이 자리에 있으면 안 된다고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8, 7]

관중석에서 무언가가 느껴진다.

검은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공포가 유형의 기운이 되어 나를 옭아매는 듯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6]

"······!"

그 검은 무언가를 확인한 직후. 내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바람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압도적일 정도의 카리스마.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무릎을 꿇고 싶게 만드는 위압감.

그러한 것들이 인간의 형상을 이룬 듯한 괴물.

확실하다.

저런 기운을 내뿜는 존재가 달리 있을 리가 없다.

······언노운.

진리의 구명자 보스 언노운.

그가 정반대편 관중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 이상 재미있을 수 없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면서.

* * *

[5]

"······서율 씨, 왜 저러죠?"

"글쎄."

강서율의 랭킹전을 직관하기 위해 일을 미루고 찾아온 메이든과 유화는 고개를 돌리고 있는 강서율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두 명이 있는 관중석에선 고개를 돌린 강서율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유화와 메이든이 서 있는 관중석의 정확히 반대편 관중석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강서율은 긴장하고 있다. 항상 느껴지는 유유자적한 오오라가 아예 없다.

"상대한테 뭔가 있나?"

"글쎄요. 제가 볼 땐, 그냥 평범한 83위 사관생인데."

"그러게 말이다."

메이든과 유화의 눈에 83위 기민성은 아주 평범한 사관생으로 보였다. 그런 상대를 앞에 두고 그 '강서율'이 긴장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

[Start!]

그 의문을 풀기도 전에 랭킹전이 시작됐다.

"움직임은 좋은데?"

시작과 동시에 달려든 기민성의 매서운 찌르기를 가뿐하게 피했다.

간결함의 극의.

한 걸음 반 보의 아름다운 움직임이었다.

"이야."

"오우."

사방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연속된 찌르기에서 이어진 베기. 베기에서 시작되는 올려치기.

그 모든 것들을 모두 물 흐르듯이 회피한다.

기량차이는 누가 봐도 압도적이었다.

"도저히 사관생이라고 볼 수 없는 노련한 움직임이군."

"특수 카메라 찍고 있지? 속도 계산해 봐."

"계속 찍고 있습니다. 최고 속도를 기준으로 계산할 경우, 대충 D랭크 정도입니다."

"······확실해?"

"네. 확실합니다."

주위 초인 업계 관계자들의 입이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군."

"하지만 D랭크로는 결국 한계가 있습니다. 이 이상 성장하지 못할 가능성도······."

설익은 질투가 섞인 음성도 간간히 들렸다.

"멍청한 놈. 2달 전 강서율의 신체 능력치는 F랭크였다. 2달 만에 2랭크가 올랐다는 말이다. 그런데 성장이 멈췄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쏠리는 주목을 이용해서 최대한 높은 몸값을 받기 위해 보너스 포인트를 미리 사용했을 가능성도······."

"흥. 그럴 가능성은 없다."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강서율 사관생의 스승은 그 피진호다."

"······웨폰마스터의 남편 말입니까?"

"그래. 그 남자가 스승인 이상, 그런 멍청한 짓을 하게 놔둘 리가 없지. 아니, 애초에 강서율에게 가능성이 없었다면 제자로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거다."

강서율의 신묘한 단검술을 보며, 남자는 감탄했다.

주위에선 이런 비슷한 대화들이 오가고 있었다.

"······대체 왜 저렇게 긴장하는 거야?"

"평소의 예리함이 없네요."

다만, 메이든과 유화만큼은 달랐다. 강서율의 동작을 누구보다도 깊게 관찰했던 두 명이었기에 알 수 있는 미묘한 차이.

"컨디션이 안 좋나?"

"감기라도 걸린 걸까요? 강릉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거나······."

"흐음. 그럴 수도 있겠네."

메이든과 유화가 보기에 오늘 강서율의 컨디션은 최악으로 보였다.

"······뭐, 그래도 워낙 압도적이라서 이기긴 할 것 같긴 한데."

"네. 상대가 안 되네요."

두 명은 강서율의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했다.

분명 평소의 여유도, 예리함도 없지만 정교함은 살아 있다.

상대의 움직임을 예지하고 미리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유려한 움직임.

"저 꼬맹이 대체 얼마나 힘을 감추고 있는 거야?"

보면 볼 수록 능력치와 기술의 부조화가 눈에 띈다.

강서율이 현재 보여주는 기술력만큼의 능력치를 보유하면 대체 어떤 움직임을 보여 줄까. 상상도 못하겠다.

"······뭐, 주작을 혼자서 이길 정도니까요."

그렇게 유화가 중얼거렸을 때였다. 강서율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오. 움직임이 원래대로 돌아왔는데?"

"그러게요?"

강서율의 움직임에 여유가 돌아왔다. 안 그래도 압도적이었던 승기가 더욱 빠르게 기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약 5분이 흘러.

"이겼네."

[WINNER 강서율]

이변은 없었다.

* * *

"기민성 사관생은 의무반에서 처리할 거다. 강서율 사관생은 대기실로 돌아가도 좋다."

"네."

나는 적당히 대꾸한 뒤, 다시 관중석으로 시선을 옮겼다.

언노운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랭킹전이 시작된 후. 어느 순간 나를 옥죄던 검은 기운이 소멸했다. 언노운이 자리를 벗어났기 때문이리라.

나는 아직도 쿵쾅대는 심장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심호흡을 했다.

"······에바잖아."

여기서 언노운이 왜 나와?

아니, 그보다 그 기운은 뭐야.

어떻게 하면 그런 미친 기운을 내뿜을 수 있는 건데.

물론 언노운의 강함은 익히 알고 있다.

1부 최강자. 진리의 구명자 일곱 간부가 동시에 덤벼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절대자.

그게 언노운이다.

······알고는 있었지만.

소설의 묘사로 간접체험 한 것과 직접 마주한 것은 다른 법. 충격이었다.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1도 안 들어.

사실 당연한 거였다.

내 강함을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면 B~A랭크 정도일 것이다.

이것도 고대 유물을 사용했을 경우이고,

루시퍼의 마창 같은 최상위 유물을 사용하면 1분 남짓한 시간동안은 S랭크에 필적하는 강함을 지니게 될 순 있겠지.

하지만 그게 다다.

언노운의 강함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애초에 1분은 너무도 짧은 시간이다.

"······."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내가 지금 언노운과 대적할 수 없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문제는 왜 언노운이 이 자리에 나타났냐는 것.

처음엔 나를 찾아 온 건가 싶어서 당황했지만, 눈치를 보니 그건 아닌 것 같다.

"······관중석 반대편."

언노운은 분명 자신이 서 있는 곳의 정반대편 관중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언노운이 바라보던 곳을 다시금 상기시키며 한 관중석을 바라봤다.

"······!"

메이든과 유화가 나를 바라보며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마."

순간 허미트의 말이 떠올랐다.

진리의 구명자의 현재 목표는 유화라고 했던 말.

······설마 유화를 잡기 위해 언노운이 직접 움직인 건가?

내 눈동자가 마구 떨렸다.

* * *

대기실에서 빠르게 뛰어 나온 나는 메이든에게 연락을 했다.

[관중석에 계시던데. 지금 어디 계세요?]

답변은 바로 왔다.

[별다방 들어 와 있는데. 왜?]

별다방이면······ 이 콜로세움 근처의 카페다. 나는 달리면서 계속 톡을 보냈다.

[지금 갈게요.]

[온다고? 우리 금방 갈 건데?]

[그냥 잠깐 얼굴이나 뵈려고요.]

다행히 아직까진 별 일 없는 것 같다. 제아무리 언노운이라고 해도 이 도심 한복판에서 일을 벌일 생각은 없는 듯하다.

[이요올. 우리 꼬맹이가 웬일로 배려심을 다 장착했어?]

[에이. 제가 또 배려심의 아이콘 아니겠습니까.]

[지랄.]

장난스러운 톡을 보내는 와중에도, 내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가고 있었다.

이 공간에 언노운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솟구친다.

내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암튼 알겠다. 그리고 올 때 메로나.]

다시 답장을 보내려고 할 때였다.

쿵-

"앗!"

"어엇."

누군가와 부딪쳤다. 다급하게 움직이느라 미처 앞을 신경쓰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나는 일단 고개를 숙였다. 후드와 모자를 푹 눌러 쓴 남자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모자를 얼마나 눌러 썼는지, 코 위로는 보이지 않는다.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앗."

남자가 바닥에 떨어진 내 스마트폰을 주워 내게 넘겼다.

"여기. 떨어트리셨네요."

고개를 든 남자가 내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

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내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람 좋은 미소 사이에 숨겨져 있는 무기질적인 눈빛.

내 심연까지 훑어보는 듯한 검은 눈동자.

"강서율 사관생이죠? 조금 전 랭킹전 잘 봤습니다."

심장이 세차게 두방망이질 쳤다.

"대단한 실력이시더군요. 하하."

얼굴을 아는지는 중요치 않다.

악 그 자체라고 봐도 좋을 정도의 흉흉한 아우라가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는 남자.

그 힘의 끝을 알 수 없는.

언노운(UNKNOWN)이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 106화 얽히다 (1) > 끝

< 107화 얽히다 (2) >

"대단한 실력이시더군요. 하하."

언노운의 너스레에 강서율이 말을 더듬었다.

"가, 감사합니다."

언노운은 눈앞의 강서율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강서율. 제이스를 함정에 빠트린 유화, 신지아와 친분이 있는 사관생.'

한국 초인 사관학교 1학년으로, 입학 당시는 F랭크 낙오자로 유명했으나, 반학기 사이에 급속도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함.

현재는 최고의 유망주 중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음.

또한 검령, 귀령의 일처리를 방해한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이 남자가 일의 주모자일 확률은 기껏해야 0.1%이하.'

하지만 그것뿐이다.

신지아, 유화와 친분이 생긴 시점은 강서율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시기와 겹친다.

신화 그룹과 비혼 길드에서 스카우팅을 위해 접근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검령, 귀령을 일개 사관생이 방해했다는 건 조금 의아했지만······.'

오늘 전투를 직접 보니 알겠다.

그 정도 실력이라면 유화가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검령, 귀령에게서 시간을 버는 것 정도는 가능했을 것이다.

'마에스트로의 보고에 따르면 순간 도핑형 스킬을 보유하고 있는 듯하다고 했으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

0.1%의 의심은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만남으로 그 0.1%의 가능성도 사라졌다.

'강서율은 힘을 숨기고 있지 않다.'

언노운은 눈앞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강서율을 바라보며 속으로 웃었다.

시험을 위해서 아주 살짝, 기세를 뿜었을 뿐인데. 그 기세에 저렇게 몸이 굳었다.

마치 상처 입은 아기새다.

강서율은 자신의 기세에 완벽하게 굴복했다.

'만약 힘을 감추고 있다면, 이 갑작스런 압박에 저런 반응을 보일 리가 없지.'

저건 절대 연기가 아니다.

'애초에 강자 특유의 기세가 아예 느껴지지 않는다. 아직 햇병아리야.'

언노운이 픽 웃으며 기세를 거둬들였다.

"식은땀이 흥건하네요. 어디 몸이 안 좋으신가요?"

그리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걱정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그 틈에 기세를 거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아닙니다. 그냥 오늘 컨디션이 좀 별로라서."

"아. 그래서 초반에 움직임이 굼떴군요."

"네, 네."

보면 볼수록 확실하다.

'이 남자는 신경 쓸 필요 없겠군.'

언노운은 강서율에게 관심을 아예 끊어 버렸다.

그때였다.

"사장님. 미팅 시간 다 됐습니다."

한 여성이 격조 있는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깔끔한 정장 복장의 여성이었다.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언노운은 시간을 확인한 뒤에 강서율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럼 저는 이만. 약속이 있어서."

그리고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로 여성이 따라 이동했다.

"보스. 그 여우년은 보고 왔어?"

언노운과 나란히 선 여성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조신함은 온데간데없고, 고혹적인 미소만이 남았다.

"아이. 내가 밖에서 보스라고 하지 말라고 안 했던가. 특히나 가짜 신분으로 잠입중일 땐 더욱 더 신경 쓰라고 했을 텐데."

시라카와 아이.

진리의 구명자 일곱 간부 중 한 명의 본명으로, 코드 네임은 '러스트'다.

"에이. 주위에 아무도 없잖아. 뭐 어때. 아무튼 유화 그년은 어때? 흑색이야?"

러스트가 너스레를 떨었다.

"글쎄. 멀리서 본 거라 확신은 못하겠군."

언노운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에이. 뭐야 그게."

"VIP는 도착했나?"

오늘 언노운이 초인 사관학교 내에 들어 온 것은 유화를 살피거나 처리하기 위함이 아니다.

다른 이유가 있다.

랭킹전 직관은 시간이 남아서 겸사겸사 한 것뿐이다.

"응. 이미 도착해 있어. 3분 정도만 가면 돼."

그렇게 약 3분을 걸어.

한적한 공원에 도착한 두 명의 남녀가 제자리에 섰다.

"저 앞에 리무진 한 대 있거든? 거기 타면 돼. 나는 그럼 다른 볼 일이 있어서 이만."

여성이 단정하게 묶은 머리를 풀어 헤치며 요망하게 눈웃음을 쳤다.

"적당히 하도록."

"목숨은 빼앗지 말라는 거지? 알고 있어~ 적당히 정기만 빼 먹고 올 테니까 걱정 마셔~"

언노운은 손을 적당히 흔들며 멀어져 가는 러스트를 힐끔 바라본 뒤, VIP가 기다리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리무진 한 대가 보인다.

문을 열고 리무진 안으로 들어갔다.

"와, 왔는가."

리무진 안에는 한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다. 이마에 식은땀을 매단 채, 입술을 바들바들 떨고 있다.

"보고."

언노운은 다리를 꼬았다.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조금이라도 미비함이 있다면······."

그 상태로 중년 남자를 노려본다. 두 눈에서 시뻘건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넌 죽는다."

"히, 히이익!"

중년 남자, 대통령 비서실장 김후현이 기함을 질렀다.

* * *

언노운이 사라진 후.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심호흡을 했다.

머릿속이 하얗다.

손발이 바들바들 떨리고, 뇌가 제대로 회전하지 않는다.

분명 조금 전 내 눈앞에 있던 남자는 언노운이다.

얼굴은 몰라도 확실하다.

그 눈빛, 그 기운.

그런 기세를 뿜어낼 수 있는 존재는 언노운밖에 없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마음을 다스렸다.

진정하자.

진정해.

그러나 심장은 두근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언노운이다.

원작 [S급 상태창]의 먼치킨 주인공 강서율이 최초로 고전한 상대이자, 1~2부를 모두 통틀어서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던 유일한 상대.

그런 괴물 같은 놈이 내 눈앞에 나타난 거다.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라. 나 대신 싸우라고 하게.

나는 계속해서 심호흡을 했다.

어떻게든 진정해야 한다.

"······후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떨림이 멎어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내 머리가 어느 정도 냉철한 상태로 돌아왔다.

나는 그 즉시 조금 전 언노운과의 만남을 되뇌었다.

먼저 그 꺼림칙한 기세.

그건 십중팔구 언노운이 의도적으로 내뿜은 기세다.

나를 떠 보기 위해서.

그 기세를 정면으로 받으며 어떤 반응을 보일지 관찰하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그 기세를 받으며 당황했다. 애초에 언노운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에 평소보다 긴장하고 있었고, 그 상태로 언노운으로 보이는 남자와 조우했는데 당황하지 않을 수가 있나.

"······운이 좋았어."

당황하는 나를 보며 언노운이 뭐라 생각했을까.

필히 이렇게 생각했겠지.

'이 남자가 주모자일 확률은 없겠군.'

만약 거기서 기세에 대항하려 했다거나, 어정쩡하게 대비했다면. 혹은 연기를 했다면 의심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진짜 운이 좋았다.

"후."

그리고 다음.

언노운이 내 랭킹전을 직관한 이유는 유화 때문이 아닐 확률이 높다.

언노운이 기세를 거둔 후에 등장한 여자. 단정한 정장에 단정하게 묶은 머리.

누가 봐도 비서로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러스트."

그 비서는 러스트다.

러스트의 외견 묘사에 빠지지 않는 입가의 매력점이 그 여성의 입가에도 존재했으니, 확실할 것이다.

그리고 러스트와 함께 한국에 들어 왔다는 것은 언노운의 가짜 신분인 JT테크놀로지 사장의 신분을 이용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아마 대한민국 정계와 접촉하기 위해서겠지.

국가전 습격을 좀 더 스무스하게 진행하기 위해서 말이다.

대충 시기적으로도 맞는다.

애초에 세간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는 언노운이 국가전 테러를 앞두고 자신이 직접 움직인다는 과감한 짓을 벌일 리가 없다.

이러한 것들로 보아, 언노운이 유화를 관찰하러 온 것은 단순히 겸사겸사였다는 게 된다.

······다행히 지금 당장 위험한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누군가가 내 귓가에 대고 사탕처럼 달콤하게 속삭였다.

나는 기겁하며 뒤를 돌아봤다.

여성이 웃고 있었다.

"같이 차나 한 잔 할래요?"

입가의 점이 매력적인 여성.

"아, 제 소개가 아직이었네요. 저는 시라카와 아이라고 합니다."

러스트가 매력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망했다.

까먹고 있었다.

러스트의 고유 특성은 '흡정'

이성에게서 정기를 흡수해서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진정한 '몽마'같은 여자다.

그녀에겐 잘생긴 남자만 보면 인내심을 잃는다는 설정이 있다.

잘생긴 남자의 정기는 더 맛있다나 뭐라나.

"그쪽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래요. 부디 거절하지 말아 주시길 바라요."

나는 방긋방긋 웃고 있는 러스트를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내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 * *

나는 러스트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거절하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이 여자는 집착이 심하다.

한번 거절하면 오히려 더 불타오르는 스타일이다.

'감히 네가 날 거절해? 왜? 내가 어때서? 자제력이 좋은 건가? 아니면 오늘 내가 조금 별로였나? 그럴 리 없는데? 와, 무심하네? 돌아보지도 않고? 관심 가네 좀? 튕길 줄도 알고? 일부러 이러는 건가? 괜히 그러니까 더 잘생겨 보이네? 뭐지? 뭐지뭐지? 하하하하, 좋아. 그래 귀엽네. 느

낌 있어. 분위기도 그렇고 완전 매력 있어.'

이런 느낌이다.

제정신이 아닌 여자다.

그런 여자의 제안을 거절했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고 거절하겠는가.

러스트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러스트, 시라카와 아이는 원작에서 가장 허무하게 사망한 간부다.

덕분에 '흡정'을 제외하고는 공개된 정보가 아예 없다.

이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삼아, 러스트의 정보를 빼 낼 수 있지 않을까.

위험할 수도 있긴 한데.

언노운이 이 자리에 있는 이상, 러스트가 강압적인 행동을 벌이진 않을 터.

아무튼 이러한 이유들로 말미암아, 나는 러스트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여기 카페는 뷰도 좋고. 커피가 감미로운 게 딱 좋네요."

"그러게요."

구라치시네.

감미로움은 개뿔.

커피 맛 못 느끼잖아.

이 여자는 미각을 느끼지 못한다. 고유 특성의 대가라고 했던가. 이 여자가 맛을 느끼기 위해선 남자의 정기를 흡수하는 수밖에 없다.

"오빠라고 불러도 돼요? 저도 20살이긴 한데. 왠지 오빠 같아서요."

"······네. 편하실 대로 하세요."

"꺅! 네! 오빠!"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오빠? 저도 20살?

웃기시네.

러스트, 시라카와 아이의 나이는 올해로 딱 30. 계란 한 판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디 10살을 깎고 있어. 양심 어디?

······뭐, 이렇게 답할 수는 없으니, 나도 가면을 쓰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그분은······."

"저희 사장님이세요. 저는 비서를 맡고 있구요."

"아, 사장님이 혹시 초인이신가요?"

"네. 맞아요."

"그랬군요. 어쩐지 내뿜는 기세가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어요."

"아. 사장님이 또 유망주를 시험한다고 실례를 하신 모양이네요. 죄송합니다."

"아뇨아뇨. 덕분에 좋은 경험 했습니다. 하하."

우리는 서로 속내를 숨기고 가면을 쓴 채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나저나 20세에 한 회사의 비서를 맡고 계실 정도라니. 엘리트시네요."

"에이. 오빠만 할까요. 세계 최고의 유망주 강서율!"

등에 식은땀이 가득하다.

너무 긴장해서 표정 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오빠. 편하게 말하세요."

"그래? 그럼 너도 편하게 말해. 동갑이라며."

"에이. 저는 존댓말이 편해요."

와. 가식 보소.

자기 보스한테도 반말하는 여자가 존댓말이 편하대.

"······그래?"

"네. 그러니까 편하게 말하세요."

눈웃음이 아주 구미호가 따로 없다. 저 얼굴에 저 표정, 그리고 저 멘트에 호칭. 안 넘어갈 남자가 몇 명이나 있을까.

"아."

그 순간, 러스트가 맞은편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곤 스리슬쩍 내게 몸을 가까이 하며 내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댄다.

"오빠는 화장품 뭐 쓰세요? 피부가 너무 하얀데."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가녀린 미소를 짓는다. 남자로 하여금 보호욕구를 촉구하는 듯한 매력적인 눈웃음이었다.

"안 쓰는데?"

그래 봐야 평소부터 세계관 최고 미인, 얼굴 깡패 지아의 얼굴을 보고 있는 나한텐 안 통한다.

그 순간, 러스트의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뭔가 당황한 듯하다.

"그, 그래요? 그럼 피부 관리는 아예 안 하시나요?"

그러나 곧 당황을 감추고 환한 미소로 돌아왔다.

"딱히?"

"와. 대박이네요."

이젠 아예 내 몸에 자신의 몸을 완전히 기댄다. 이쯤 되면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닌가 싶은데.

"이게 관리 안 받은 피부라니······."

러스트가 갑자기 내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댔다.

고혹적인 손놀림.

뭔가 나도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오빠. 너무 멋져요."

내 몸에 그 풍만한 육체를 완전히 기대고, 내 뺨에 손을 가져다 댄 채,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떨기 백합처럼 웃는다.

이건 뭐, 남자 꼬시기 필살기 종합 3종 세트인가?

"일단 칭찬은 받아 둘게."

근데 나한텐 안 통한다.

그리고 솔직히 러스트는 내 취향 아니다.

"그보다 너무 붙은 거 같은데."

"엇···."

내 태연한 반응에 다시금 러스트의 표정이 멍해졌다.

동공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엄청나게 당황한 모양이다.

"왜?"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 말에 러스트가 밀착한 신체를 떼어 내며, 얼굴을 붉혔다.

······얘 왜 이러지?

* * *

한 시간 후.

모든 대화가 끝났다.

"······."

강서율은 이미 카페를 나선 지 오래다.

혼자 남은 러스트는 자리에 앉아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런 남자가 있구나."

완전히 넋이 나갔다.

'나한테 음심을 품지 않는 남자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러스트의 특성은 '흡정'.

남자의 정기를 빼앗는 특성이다.

이 흡정을 더욱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한 부가 특성으로, '음심 증폭'이라는 특성이 존재한다.

효과는 이름이 나타내는 대로, 상대의 음심을 자극하여 증폭하는 것.

눈맞춤이나 신체 접촉으로 발동하는 '자동 발동형 특성'이다.

스님이건, 성불구자건, 아주 톨씨만 한 음심이 존재한다면 그 즉시 최대치까지 증폭시킨다.

'시스템'에 '성별:남자'라 기록된 존재에게는 '무조건적으로' 통하는 저주에 가까운 능력이다.

러스트는 지금까지 이 특성이 통하지 않는 남자는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강서율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강서율······."

러스트의 두 눈에서 묘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드디어 찾았어. 내 흡정에 영향을 받지 않는 남자!'

러스트가 고혹적인 눈빛으로 입술을 핥으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기~ 난데. 나 한 달만 휴가 좀 줘."

스피커 너머로 마에스트로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남은 일? 몰라~ 보스한테 '계약 이행'이라고 하면 알아서 하라고 할 거야. 아무튼 나 한 달 쉰다? 끊어~"

러스트는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를 나서는 그녀의 두 눈에 이채가 흘렀다.

< 107화 얽히다 (2) > 끝

< 108화 얽히다 (3) >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가장 먼저 메이든에게 연락을 했다.

―······진리의 구명자 보스와 조우했다고?

"네."

메이든이 헛숨을 삼켰다.

―자세히 말해 봐.

나는 조금 전 있었던 일들을 모조리 설명했다.

친선전 중 무서운 기세를 내뿜는 누군가를 발견했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우연히 부딪친 것까지.

"다행히 그는 제 정체에 대해서 모르는 것 같았어요."

―······그나마 다행이네.

"그쵸."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아무튼 알겠다. 네 말대로 한국 정계 쪽에 의심스런 행동을 보이는 자가 없는지 알아보마.

"네.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전화가 끝나고.

나는 한껏 긴장된 근육을 이리저리 움직여서 스트레칭했다.

―연락은 모두 끝난 것이냐.

순간 내 어깨 사이로 공주님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 어. 끝났어.

―뭔가 심각한 표정이었는데, 무슨 일 있는 게냐?

―별 거 아니야.

―······아무리 봐도 별 거 였다만.

―거 참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그러네.

나는 세상 걱정스런 표정의 공주님의 머리를 톡톡 두드린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 무언가 있는 것이 분명한데······. 짐이 억울해서라도 그··· 한글? 그걸 배워야겠구나.

공주님이 뾰루퉁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 한글도 배워 두면 좋지. 내가 알려 줄게. 별로 안 어려워.

―오오! 정말인가!

―응. 공주님이라면 금방 배울걸?

명석한 공주님이라면 10분 안에 읽고 쓰기가 가능할 거다.

한글은 그만큼 간단하니까.

······읽고 쓰기만큼은 말이다.

―음. 짐의 명석한 두뇌는 본국에서도 유명했도다.

공주님이 방긋방긋 웃었다.

―그 명석한 공주님한테 부탁이 있는데.

―음? 무엇이냐.

공주님의 귀가 쫑긋 솟아올랐다.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다.

―어려운 부탁은 아니고.

오늘 언노운과 만난 후, 다시금 느꼈다. 지금 국가전 직전까지 소강상태가 이어지는 동안 어떻게든 강해져야 한다.

적어도 마에스트로를 제외한 간부들과 1:1로 싸워서 이길 정도는 돼야 한다.

―나. 마법 좀 알려 주라.

그걸 위해선 마법을 배워야 한다.

* * *

나는 득의양양한 공주님에게 마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마력을 이케 뾰로롱하는 느낌으로 움직이다가 마지막에 번쩍하는 느낌으로 터트리면 된다.

······아니 이걸 배우고 있다고 해야 하나.

―이게 끝이다.

공주님이 어딘가의 뽀글이 파마 아저씨 같은 얼굴로 웃었다. 왠지 모르게 '참 쉽죠?'라는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

하나도 모르겠다.

뾰로롱 번쩍이 뭐야.

신이 형한테 받은 것으로 판단되는 수인족 언어 구사 능력에 오류가 발생한 건가?

흠. 그럴싸한데?

―다음은 더 쉽다. 마력을 파아앗해서. 마지막에 우웅하는 식이다.

"······."

―우웅까지 갔으면 다음은 빠앙까지······.

번역 오류는 아닌 모양이다.

나는 허허 웃었다.

천재는 누군가를 가르칠 수 없다는 말을 어디선가 본 적 있는데. 이게 그건가?

―그대여. 듣고 있는 겐가?

―······듣고는 있는데.

말 그대로 '듣고 만'있다.

―그럼 계속하겠다.

그 후로 공주님의 외계어 특강이 10분이나 이어 졌다.

―어떤가 그대. 좀 알 것 같은가?

"······."

아뇨. 하나도 모르겠는데요?

―흐음.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구나.

내 표정에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모양이다.

일단 신나서 말하는 걸 끊기 뭐해서 놔두긴 했는데.

이대로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어.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느 부분이 어려웠는가.

어느 부분이라······.

―다?

―허어.

공주님이 탄식했다.

―이래 봬도 최대한 쉽게 풀어서 설명한 거였거늘. 다 어려웠단 말이냐.

······그게 최대한 쉽게 풀어 설명한 거였다고?

―하기야. 생각해 보면 짐의 교육을 맡았던 교육인들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다들 짐의 고급진 어휘력에 혀를 내두르곤 했지.

"······저세상 어휘력에 혀를 내두른 거겠지."

―음? 뭐라고 한 겐가.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튀어 나온 모양이다. 다행히 한글로 튀어 나왔다.

―아니야. 대단하다고 한 거야.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만. 억울해서라도 빨리 이 나라의 언어를 배워야겠구나.

공주님이 꾹 다문 입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결의를 다진 모양이다.

―어쩔 수 없군. 이론이 어렵다면 실전으로 교수하는 수밖에 없겠어.

―실전?

―그래. 짐에게 처음으로 마법을 교수한 가신이 사용했던 방법이지.

공주님이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내 뒤로 이동해 뒤에서 내 몸을 껴안았다.

―공주님?

이른바 '백허그'라고 불리는 행위였다.

―집중하거라.

공주님의 옆 얼굴은 매우 진지했다.

―눈을 감고, 짐의 유도에 따라서 마력을 서서히 움직여 보거라.

공주님이 자신의 양손을 내 양손 위에 각각 겹쳤다.

따스한 감각이 전신에 퍼져나갔다. 내 신체에 이질적인 마력이 느껴진다. 허나, 거북하지는 않다.

―처음에는 심장이다. 느껴지느냐? 여기부터 서서히 마력을 일주하는 게다.

공주님의 마력이 내 마력에게 이동할 것을 종용했다.

나는 그 마력을 따라 내 마력을 조금씩 움직였다.

뭔가 심신이 평온해진 느낌이다.

―어떤가. 이게 뾰로롱이다.

―······.

······그건 모르겠고.

나는 잡생각을 지우고 다시 마력을 일주하는 데 집중했다.

―오오. 짐만큼은 아니더라도 꽤나 적응이 빠르구나.

공주님이 감탄했다.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마. 일주를 위해서가 아닌, 방출을 위해서 심장의 마력을 조금 더 이끌어 내 보도록.

화르르륵-!

그 순간 내 신체에 따스한 불길이 피어올랐다.

―태초의 마력 성질이 화 속성이라······. 나쁘지 않은 재능이다.

공주님의 음성에 즐거움이 서렸다.

―그렇다면 가벼운 화염 마법이 좋겠지. 짐의 유도대로 마력을 움직여 보아라.

나는 마력을 따라 움직였다.

단순히 마력 방사만을 위해서 심장에서 손으로 마력을 옮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마력의 유동.

나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지금이다.

그 순간.

화르르륵-!

내 얼굴에 맹렬한 열기가 느껴졌다.

―과연 대단한 재능이로다. 그대가 특별한 것인지, 이 시대의 인류가 모두 그대만큼 뛰어난 것인지 궁금하구나.

공주님이 웃었다.

―눈을 떠 보거라.

나는 서서히 눈을 떴다.

―축하한다. 그대도 이제 마법사다.

내 눈 앞에는 화살 모양의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크기 자체는 절대 크지도 않고, 품고 있는 화력도 내가 강기를 사용할 때보다 낮지만, 그것은 확실히 마법이었다.

―파이어 애로우. 화 속성 마법의 기초 마법이다. 기억해 두도록.

묘한 전율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 * *

목요일 아침.

나는 평소의 일과가 되어 버린 피진호 교관과의 단련을 끝마쳤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다."

"수, 수고하셨습니다."

피진호 교관의 육체 단련은 익숙해지는 일이 없었다.

신체 능력이 올라감에 따라, 운동이 조금이라도 편해져야 하는 거 아닌가?

어떻게 가면 갈수록 힘들지?

"흠. 보면 볼수록 경이로운 회복력이군."

들끓는 순혈의 피.

내 성장의 원동력.

근육은 본디 회복하면서 성장한다. 그 회복력의 가속 덕분에 내 근육은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다.

"훈련 강도를 조금 더 높여도 되겠어."

······이 악마 교관님의 악마가 뺨을 칠 정도로 악랄한 훈련이 더욱 더 가속도를 붙이고 있기도 하고.

"살려 주세요······."

이 이상 강도가 오르는 건 제발······.

"그 말은 훈련 강도를 더 높여달라는 말인가?"

"제 말이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해석되나요?"

"훈련을 하면 네가 강해지고, 네가 강해지면 당연히 네 생존률은 오르게 된다. 즉, 네 살려달라는 말은 생존률을 올려달라는 말과 같으니. 훈련의 강도를 높여달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는 결론이 되지."

"······."

궤변이다.

"뭐, 네게 강해질 생각이 없다면 강도를 좀 낮춰 줘도 된다만······."

피진호 교관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묘하게 자존심을 자극하는 미소다. 괜히 욱하네.

"올리시죠. 강도."

그리고 틀린 말도 아니다.

지금의 내게 여유는 사치다.

내 단언에 피진호 교관이 짙은 미소를 지었다.

"좋은 각오다."

······괜한 짓했나?

조금 후회된다.

"아, 그래. 동아리 활동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동아리 활동 제한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솔직히 아직 못 정했어요."

안 그래도 요즘 쉬는 시간마다 선배들이 찾아오고 있어서 여러모로 고민이 많다.

"근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어디 추천할 동아리라도 있는 건가.

"듣자하니 내 핑계로 동아리 권유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 같길래 물어 봤다. 내 허락을 못 받으면 어느 동아리에도 들어갈 수 없다나 뭐라나."

"아. 음······."

피진호 교관이 픽 웃었다.

"아무튼 동아리는 잘 선택하도록. 한번 들어가면 최소한 한 학기는 탈퇴할 수 없으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 * *

수업이 모두 끝나고.

나는 교문을 나섰다.

메이든에게 선물 받은 호화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뭔가 개인 주택이라 편하긴 한데, 기숙사보다 멀어진 건 조금 불편하단 말이지.

가볍게 조깅한다는 느낌으로 달리고 있긴 한데. 이마저도 요즘은 귀찮다. 솔직히 달리는 것만으로 신체 능력이 상승할 단계는 지나서 뭔가 시간낭비 같기도 하고.

"······차를 하나 알아봐야 하나."

등하교시간이 줄어들면 그만큼 집에서 공주님한테 마법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차의 필요성은 얼마 전 강릉에서도 느꼈다. 뭔가 혼자 돌아다닐 수단이 필요하다.

메이든 씨한테 부탁하면 금세 준비해 주겠지만······.

"집까지 받았는데 차까지 부탁하는 건 양심에 찔린단 말이지······."

양심이 있지. 천변에, 집까지 받아 놓고는 차까지 부탁하긴 뭐했다. 그래도 차가 필요하긴 할 거 같은데······.

"에휴."

역시 돈을 벌어 둘 필요가 있겠어. 그렇게 한숨을 내쉴 때였다.

"한숨 쉬면 복이 달아난다는 말 못 들으셨어요?"

한 여성이 내게 웃으며 다가왔다. 나는 별 감흥 없이 그 여성을 바라봤다.

"······그거 다 미신이야."

"앗. 그런가요?"

여성, 시라카와 아이. 러스트가 순박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우연히 산책하다가 만난 건가?"

"네. 운이 좋네요."

월요일에 처음 러스트와 조우한 뒤로 벌써 4번째 만남이다.

우연히 만난 거라곤 하는데, 누가 봐도 우연이 아니다.

"계속 궁금했는데, 출근은 안 해?"

이 여자가 내게 접근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처음엔 단순히 이 여자의 설정대로 '흡정'을 위해서 접근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애초에 현재 진리의 구명자는 작전 준비를 위해 바삐 움직일 시기다.

그런 시기에 러스트가 4일이나 놀고 있을 리가 없다.

분명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을 터.

"한 달 휴가를 받았어요."

"······그럼 일본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냐?"

"괜찮아요. 돌아가 봐야 만날 사람도 없거든요."

"그래?"

헌데 그 이유가 뭔지를 도통 모르겠다. 나를 조사하는 게 목적인가? 아닌데. 조사가 목적이라면 내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게 더 이득일 텐데.

아니, 애초에 이 여자는 내게 의심을 품고 있는 기색이 아예 없다.

"앗. 저, 어깨."

러스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다가왔다.

"나뭇잎도 미남을 알아보는 모양이네요."

그리곤 내 어깨에 손을 가져와 나뭇잎을 떼어 냈다.

얼굴에 꽃이 핀 듯 화사한 미소를 짓는다.

"······땡큐."

뭔가 하루하루 만날 때마다, 두 눈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망이 계속해서 커져 가는 느낌이다.

"그럼 난 이만 갈게."

"네. 들어가세요."

나는 러스트의 배웅을 받으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돌겠네."

시라카와 아이.

러스트를 어떻게 해야 할까.

처음엔 베가본드처럼 함정에 빠트려 처리하려고 생각도 해 봤는데, 그건 좀 힘들 것 같다.

일단 그러고 싶어도 증거가 없다.

지금 러스트를 체포한다고 해도 무죄로 풀려날 확률이 크다.

러스트의 정보는 세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차라리 베가본드처럼 날뛰어 주면 참 좋겠는데.

그렇다고 놔두기도 뭐하단 말이지.

솔직히 무섭다.

진리의 구명자 간부가 내 주위를 어슬렁거린다고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는다.

그래도 어쩌겠어.

그냥 놔둬야지.

소거법으로 그냥 놔두는 것 말고는 답이 안 나오더라고.

"후."

어지간하면 국가전 개최 전에 이 이상 큰 변수를 만드는 건 피하고 싶기도 하고.

"그냥 조용히 사라져 줬으면 좋겠는데."

나는 쓰게 웃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집에 도착하자 두 마리 소형 호랑이와 공주님이 나를 반겼다.

"냐앙."

금백호는 평소와 똑같은 태도로 나를 반겼고.

"다녀오셨어여."

공주님은 묘하게 어눌한 한국어로 나를 반겼다.

"이제 제법 능숙한데?"

"네에. 마니 공부했어여."

그 나이 또래의 귀여운 말투여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나왔다.

나는 공주님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공주님이 움찔하더니 소리쳤다.

―그, 그러니까 짐의 머리에 손대는 건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느냐!

수인족 언어를 사용할 땐 여전히 근엄한 말투다. 한국어를 사용할 때와 수인족 언어를 사용할 때의 갭이 너무 심하단 말이지.

뭐, 애초에 내가 이런 식으로 존댓말하는 게 근엄한 말투라고 속여서 알려줬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지만.

―알았어. 다음부터 안 할게.

―어, 어제랑 그제도 그리 말하지 않았느냐!

―음.

그랬던가?

근데 어쩔 수 없다.

이 공주님 머릿결이 어지간한 비단 뺨칠 정도라서 나도 모르게 손이 가 버린단 말이지.

불가항력이다.

―아무튼 알겠으니까 들어가자.

―또또! 말을 돌리려고 하는 속셈이 훤히 보이는 것을 어딜!

나는 개의치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 서거라! 오늘이야말로 짐의 머리를 만지는 것이 얼마나 무례한 것인지 깨닫게 해 주겠다!

그런 나를 따라오며 공주님이 투덜댔다.

나는 적당히 대꾸하며 침실로 이동했다.

―아. 맞다 공주님. 나 오늘 그거 성공했어. 듀얼 캐스팅?

―그러니까 그런 속이 훤히 보이는 말 돌리기엔 안 당한······ 뭐라?

공주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씨익 웃으며 손바닥을 위로 향했다.

다음 순간, 손바닥 위엔 두 개의 화살이 떠올라 있었다.

각각이 화염, 바람의 성질을 품고 있는 마법의 화살이 말이다.

―어때?

공주님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쳤다.

―꽤, 꽤나 습득이 빠르구나. 하루 만에 거기까지 터득할 줄은 몰랐는데.

땀을 삐질 흘리며 내 시선을 피한다.

―뭐, 1시간 만에 습득을 마친 짐보단 못하지만 말이다!

"······."

누가 봐도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왜,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느냐!

······우리 공주님 듀얼 캐스팅 습득이 나보다 오래 걸렸구나?

―거, 거짓말이 아니다. 짐은 불세출의 천재다! 그런 짐이 그대보다 습득이 느릴 리가 없지 않느냐! 트, 트리플 캐스팅에는 좀 애를 먹었다만 듀얼 캐스팅은 아주 쉬웠다!

나는 그런 공주님을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 트리플 캐스팅에는 좀 애를 먹었구나.

―음. 그러하다. 트리플은 꽤나 어려웠다.

파지지지직-!

두 화살 옆에 또 다른 화살이 하나 생성된 순간, 공주님의 표정이 확 굳었다.

―트, 트리···트리플···?

낙뢰로 구성된 세 번째 화살.

나는 세 개의 각기 다른 속성의 화살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환하게 웃었다.

―별로 안 어렵던데?

공주님의 눈동자가 다시금 마구 요동쳤다.

아까가 대충 진도 5 정도였다면, 이번엔 가히 진도 8 정도의 동공지진이었다.

< 108화 얽히다 (3) > 끝

< 109화 이게 아닌데 (1) >

금요일의 오전 수업은 전용 무기 특화 훈련이었다.

"다음. 강서율. 위치로."

"네."

나는 교관의 부름에 자리에서 일어나, 사로로 향했다.

"훈련 단계는?"

"10단계로 부탁드립니다."

내 말에 궁술 교관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최고 난이도라. 자신이 넘치는군."

"그럼요."

이번 훈련은 능력치가 크게 필요없다. 기술력만 있으면 된다.

자신있을 수밖에.

훈련의 이름은 '클레이 사격'

사방에서 날아드는 타겟들을 정확히 명중시키기만 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훈련이다.

"그럼 10초 후에 시작하겠다. 화면의 카운트에 집중하도록."

설정을 마친 교관이 슬쩍 한 걸음 물러섰다.

동시에 허공에 카운트가 떠올랐다.

[10]

나는 심호흡을 하면서 활을 살포시 쥐었다.

사실 간단한 훈련이라곤 했지만, 사실 10단계쯤 되면 얘기가 좀 다르다.

기본적으로 비행하는 타겟 자체의 속도가 빨라지기도 하고, 직선이 아니라 여러가지 궤적을 그리며 이동하기까지 한다.

심지어 타겟의 개수도 늘어나고, 그에 따라 화살이 쏘아지는 텀도 줄어든다.

보통은 5단계를 클리어해도 유망주라 평가받는다.

지아도 8단계가 한계였으니 말 다 한 거다.

[4, 3, 2]

물론 나한텐 하등 상관없는 얘기다. 내가 지닌 활 관련 특성이 몇 갠데.

나는 시위를 당기고 조준점을 잡았다.

[1, 0]

[Start!]

시작과 동시에 시위를 놓았다.

쒜에에엑!

화살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캉!

강화유리로 만들어진 타겟이 산산이 박살나는 소리가 울렸다.

다시 조준을 할 틈도 없이 다음 타겟이 하늘을 날았다.

사출이 얼마나 빠른지, 두 타겟이 동시에 날아 오른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나는 두 발의 화살을 동시에 시위에 걸었다.

그리고 놓았다.

캉, 카앙!

두 타겟이 동시에 파괴되는 소리가 들렸다.

"헐!"

"대박!"

주위에서 감탄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다음 사격에 집중했다.

"미친!"

"이번엔 세 개야!"

이번엔 세 개의 타겟이 하늘을 날았다.

이건 뭐 텀이 문제가 아니라 완전히 동시 사출이다.

심지어 이번엔 뱀처럼 트위스트를 추고 있다. 흡사 사나운 코브라의 맹공을 보는 듯했다.

"아무리 강서율이라도 이건 못 맞추지."

"그러게."

나는 그런 얘기들을 들으면서 입꼬리를 비틀었다.

활의 수호자.

바람의 살.

무기의 주인.

이 사기급 특성들의 콜라보레이션이 얼마나 사기인지 보여 줘야겠구만.

나는 화살 세 발을 시위에 걸었다.

쏘았다.

내 화살은 저마다 의지라도 지닌 양, 하늘을 수놓더니,

캉, 캉, 캉!

타겟에 정확히 명중했다.

동시에 다음 타겟이 사출되었다.

이번엔 네 개였다.

"이야."

내가 알기론 10단계에 4개 동시 사출은 없었던 거 같은데.

나는 슬쩍 옆의 궁술 교관님을 살폈다. 웃고 있다.

······아하. 내 한계를 보고 싶으시다?

나는 픽 웃었다.

이거 괜히 자존심 자극하시네.

나는 네 발의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네 발의 화살에 미세한 바람이 스며들었다. 청색의 마력광 사이에 끼어 든 아주 미세한 바람이 장난스레 웃는 듯했다.

나는 시위를 놓았다.

쒜에에에엑!

내 화살은 저마다의 의지를 지니고, 각각의 타겟을 향해 날아갔다.

날렵한 뱀처럼, 혹은 날쌘 매처럼. 내 화살은 정확히 허공을 꿰뚫었고.

카아앙-!

정확히 동시에 네 개의 타겟을 박살냈다.

"거기까지! 강서율 궁술 특화 훈련 평가 S!"

다음 순간, 힘찬 박수 세례가 터져 나왔다.

* * *

점심시간.

"진짜 강서율 요즘 폼 미쳤지 않냐?"

"이번 주에 13위로 올랐다면서?"

"어. 저번에 32위가 도전권 사용했다가 개털렸잖아."

요즘 들어 이런 얘기들이 자주 들린다. 보통 교실에 소문의 대상이 있으면 말을 아끼지 않나?

"하. 진짜 부럽다."

"이번에 신체 능력치도 일괄적으로 C랭크에 올랐다는 거 같은데."

"하. 강서율 코인이 이렇게 떡상할 줄 알았으면 미리 탑승하는 건데."

"응. 네 얼굴 상위 60프로."

"······팩트 자제해라?"

듣는 내가 다 낯부끄러울 정도의 극찬들이다.

나는 슬쩍 고개를 숙였다. 거북하다.

"서율아. 밥 먹으러 가자."

"시연이가 도시락 싸 왔대."

지아와 시연이가 웃으며 다가왔다. 마침 잘됐다. 안 그래도 여기 있기 껄끄러웠는데.

"그래. 가자."

나는 재빨리 교실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왜 그렇게 서둘러? 배 많이 고파?"

그런 나를 뒤따라오던 하시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앗. 출출하신가요? 그럼 달릴까요?"

지아의 눈빛이 무섭다.

고개를 끄덕이면 지금 당장 나를 안고 달릴 기세다.

"아니야. 괜찮아."

"아하."

지아가 금세 원래의 나긋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하겠어.

"아~ 알겠다. 서율이 너. 얼굴이 붉은 거 보니까, 아까 애들이 칭찬하는 얘기 듣고 있는 게 껄끄러웠구나?"

하시연이 능글맞은 표정으로 웃었다. 눈치는 국밥에 말아 먹은 하시연이 웬일로 이런 예리한 말을 다 하네.

"아닌데?"

하시연한테 속마음을 읽히다니, 자존심 상해서 괜히 부정해 봤다.

"진짜아?"

눈썹이 슬쩍 올라간다.

아주 확신에 찬 표정이다.

괜히 짜증나서 반격하려고 했을 때였다.

"시연이 너는 선조님이 그런 사소한 얘기에 일희일비 하실 분이라고 생각하니?"

지아가 먼저 나섰다.

"음······. 그런가?"

"당연하지. 무려 대영웅의 후예신걸. 남들에게 숭상받는 것엔 익숙하신데 왜 껄끄러워하시겠어!"

지아의 두 눈동자에 각각 '경애' '존경'이라는 글자들이 적혀 있는 듯했다.

"그건 그르넹. 그럼 왜 서둘러서 나온 거야?"

"그건 나도 잘 모르겠지만! 분명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하는 이유가 있으실 거야."

······없어 그런 거.

"그쵸?"

"어? 어어. 물론이지."

지아의 선망으로 가득 찬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양심에 찔려서 슬쩍 시선을 피했다.

우리는 곧 평소 점심을 먹는 잔디밭에 도착했다.

"그나저나 서율이 너 요즘 상승세가 너무 가파른 거 아냐?"

"나?"

"응."

하시연이 평소 앉는 잔디밭 위에 돗자리를 깔며 넌지시 화두를 던졌다.

"아직 3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 F랭크에서 C랭크면 너무 과한 거 아닌가 싶어서."

"음······."

하시연이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봉인의 개량이 무사히 되고 있다는 건 좋은 일이긴 한데, 이러다가 그, 마신이나 '파계' 놈들이 눈치 채는 거 아닌가 걱정 돼서······."

하시연의 입장에선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지아와 시연이는 지금 내가 성장하고 있는 것을 봉인의 개량에 따른 능력 상승(본신의 능력 회복)이라 생각하고 있으니까.

"얘는. 선조님이 그런 허술한 실수를 하실 분으로 보이니?"

지아가 광신도 같은 눈빛으로 하시연을 닦달했다.

"나도 괜한 걱정일 거라고 생각은 하는데. 세상에 무조건이란 말은 없다고들 하잖아. 괜히 저번에 그······ 재해급 게이트? 백신이라고 했나? 그런 게 튀어 나오면 큰일이니까······."

"······그건."

지아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백신 프로그램 출현 당시의 일을 다시금 상기한 모양이다.

"괜찮아."

나는 두 명을 안심시켰다.

"마신이나 파계가 내 존재를 눈치 채고 일을 서두를 일은 절대 없어."

그들이 출현하는 건 아직 먼 미래의 일이다.

아직 봉인이 풀리지도 않은 놈들인데, 어떻게 나오겠어.

애초에 내가 봉인을 풀면 적들의 감시망에 걸린다는 말 자체가 새빨간 거짓말인데 뭐가 걱정이야.

내 신체의 문신이 검게 변하거나, 특성 제한 장비를 중복으로 착용하지만 않으면 백신 프로그램이 나올 일도 없다.

고로, 단언할 수 있다.

하시연이 걱정하는 일 같은 건 벌어지지 않는다!

"그니까 걱정하지 말고 훈련이나 열심히 해."

그래야 나중에 내 편에 서서 악마 놈들 멱을 따지.

나는 픽 웃었다.

* * *

토요일 점심.

나는 공주님과 함께 거실에서 마법을 연마하고 있었다.

―······.

―공주님?

레나가 내게서 고개를 휙 돌렸다. 입술이 삐죽 튀어나와 있는 것이 누가 봐도 삐진 듯한 모양새였다.

―말 걸지 말거라. 그대와 말하고 싶지 않다.

······너무 놀렸나?

나는 조금 전 내가 했던 말들을 되뇌었다.

'에헤이. 쉽다 쉬워!'

'이것도 쉬운데?'

'이거 내가 마력만 좀 높았으면 공주님 경지까진 금방 따라갈 것 같은데!'

'이거 둘 중 하나인 거 아냐? 사실 공주님이 천재가 아니었다거나? 아니면 내가 그냥 천재가 아니라 초 천재였다거나. 하하!'

'아니 장난치지 말고, 공주님! 진짜 어려운 걸 보여 달라니까? 설마 진지하게 이걸 어렵다고 보여 준 건 아니지? 나 농담할 시간 없어!'

······음.

좀 심하긴 했네.

―그, 공주님. 내가 잘못했어. 한 번만 봐주라.

―흥. 짐이 어찌 '초' 천재님과 말을 섞겠는가. 신경 끄거라.

와. 진짜 제대로 삐졌다.

반성해야겠다.

너무 신났네.

처음으로 '파이어 에로우'를 사용하는 데 성공한 후, 바로 요령이 생겨서 마법의 습득 속도에 가속도가 붙었다.

더블 캐스팅에 이어서 트리플 캐스팅. 그리고 메모라이즈까지 하루 만에 성공했다.

그게 공주님의 승부욕과 자존심을 자극했다.

그 후로 매일 밤 공주님은 자신이 알고 있는 고난이도 마법을 모조리 내게 교수하기 시작했다.

'이건 어떤가!'

'이건 어렵겠지!'

'이건 짐도 한 달이나 걸린 마법이다!'

그리고 그 마법들을 나는 스펀지처럼 흡수해 나갔다.

'공주님. 이건 이렇게 가는 게 낫지 않겠어?'

'마력이 부족해서 직접 시연해 보긴 뭐한데. 아무리 봐도 이게 효율이 더 좋은 거 같은데.'

오히려 개량까지 해 나갔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으, 음! 짐보다는 못해도 제법 하는구나!'

'아아! 기억났다! 사실 짐도 이 마법은 5분 만에 사용할 수 있었다!'

'그, 그 개량한 마법이 사실 오리지널이다! 용케도 짐의 시험을 통과했구나! 칭찬하마!'

그 과정에서 이 꼬마 공주님의 반응이 너무 재밌어서 나도 모르게 도를 넘어 버린 것 같다.

공주님이 한국어로 이상한 말을 외친 것은 그때였다.

"아빠, 진짜 조아!"

"푸흡. 크흠. 큼."

순간 뿜을 뻔했다가 필사적으로 삼켜냈다.

이 타이밍에 그건 반칙이잖아.

―그대··· 지금 웃은 겐가?

―아, 아니. 공주님한테 그런 말을 듣다니 가슴이 너무 아파서.

―흥. 그대는 좀 더 아파해도 된다.

지금 레나 공주님이 입에 담은 한국어. '아빠 진짜 좋아!'는 내가 반쯤 장난으로 가르쳐 준 말이다.

'아빠'는 '나쁜놈'.

진짜는 그대로 진짜.

'좋아!'는 '싫어!'라는 뜻으로 알려 줬다.

요약하자면 지금 레나가 나한테 한 말은 '나쁜놈! 진짜 싫어!'가 된다.

······근데 잘 생각해 보니까, 이것도 나중에 걸리면 또 엄청 삐지는 거 아냐?

―아무튼 공주님. 진짜 내가 잘못했어. 다음부턴 안 그럴게. 응?

뭐, 나중에 어떻게든 되겠지.

중요한 건 지금 이 상황을 타파하는 것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레나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노력했다.

―스승님! 불초 제자에게 가르침을 하사해 주시옵소서!

―······스승님?

그리고 드디어 반응이 나타났다.

―짐이 스승님이란 말이냐.

―그럼! 나한테 마법을 알려 준 천재 스승님이지! 공주님이 없었다면 나 같은 건 아무 것도 못했을 거야!

―호, 호오.

지금 입꼬리가 일순 꿈틀거렸다.

기분이 좀 풀린 모양인데.

좋아. 이 방법으로 간다.

―제자의 실수를 관대하게 용서 해 주는 것도 스승님의 미덕 아니겠어? 안 그래?

―흐음. 틀린 말은 아니구나.

공주님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나를 바라보며 근엄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크흠. 좋다. 내 특별히 용서해 주겠다.

뿌듯한 미소는 덤이다.

그 표정에 '너그러운 내 모습 완전 멋있어······.'라고 쓰여 있는 듯했다.

······아. 놀리고 싶다.

하지만 안 된다.

지금 놀리면 진짜 삐짐 스택이 풀로 쌓여서 폭발한다.

참아야 한다.

나는 필사적으로 내 욕망을 억눌렀다.

―그럼 스승님. 오늘은 무슨 마법을 알려 주실 겁니까?

지금까지 한 짓도 있으니, 오늘은 우리 꼬마 공주님 기분을 좀 맞춰 줘야지.

―음. 오늘은 화 속성 마법의 심화 단계로 넘어가 보려 한다.

금세 기분이 좋아진 듯한 공주님이 싱글벙글 웃었다.

―그대가 지닌 태초의 마력은 화염이다.

태초의 마력.

이종족들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마력의 질을 의미한다.

―다른 속성의 마력도 노력하면 사용할 수 있긴 하지만, 위력이 조금 약하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겠지?

―당연하지.

사실 내가 지닌 건 태초의 마력이 아니라, 각인의 불길이지만. 설명하기도 귀찮고, 비슷한 느낌인 듯해서 그냥 놔두기로 했다.

―그대의 재능도 꽤나 출중해서 벌써 세 가지 속성을 다룰 수 있긴 하나, 결국 화염 속성의 곁다리일 뿐이다.

내가 다룰 수 있는 속성은 현재 화염, 바람, 낙뢰다.

화염은 정령의 불길.

바람은 바람의 살과 바람의 길.

낙뢰는 천벌.

셋 다 다뤄 본 적 있는 기운이라 다시 사용하기 쉬웠다.

―그러니, 그대는 일단 화염 마법에 집중을······.

그때였다.

"꼬맹이~ 살아 있냐?"

"아니 사람이 전화도 안 받고, 초인종을 눌러도 안 나와서 걱······정?"

현관문이 열리며, 두 명의 여성이 들어왔다.

"······."

"······."

"······."

침묵이 내려앉았다.

왜 유화와 메이든이 지금 여기에 있는 걸까.

음. 분명 이 집의 예비 키를 메이든이 가지고 있었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했었던 거 같다.

그나저나 초인종이랑 폰이 울렸다고? 왜 못 들었지?

―······공주님. 혹시 소리 차단 마법 걸어 뒀어?

―음. 금호와 백호가 곤히 자길래, 그렇게 해 뒀다만. 왜 그러느냐.

······역시.

나는 이마를 짚었다.

"꼬맹아. 내가 이러라고 집을 사준 건 아닌데 말이다."

"서율 씨······."

착각일까.

나를 바라보는 두 쌍의 눈빛에 실망의 빛이 서려 있는 듯했다.

그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레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빠! 진짜! 조아!"

나쁜놈! 진짜! 싫어!

내가 공주님에게 알려 준 유일한 한국어 욕(이라고 포장한 말)을 유화와 메이든에게 사용했다.

"야, 이···!"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타이밍에 그걸 쓴다고?

"······서율 씨?"

"꼬맹아?"

두 명의 시선이 더욱 차가워졌다.

누가 말했던가.

업보는 돌고 돈다고.

"······."

업보가 돌아왔다.

< 109화 이게 아닌데 (1) > 끝

< 110화 이게 아닌데 (2) >

다행히 오해는 금방 풀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 애도 그 시발 같은 실험의 생존자다?"

마침 공주님의 머리 위에는 인간이 아님을 증명하는 증거도 있겠다. 이러면 믿어 줄 것 같았다.

"네."

메이든이 내 뒤에 숨어서 으르렁대는 공주님을 아련한 눈으로 바라봤다.

"너 말고도 생존자가 있었어? 그런 기록은 없었던 거 같은데."

메이든이 다른 실험실들의 보고서를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야 그렇죠. 레나는 메이든 씨가 알고 있는 그 네 곳과는 다른 장소에서 실험을 당했으니까."

"······다른 곳?"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 개 같은 실험이. 다른 곳에서도 벌어졌다고? 지금 그렇게 말한 거야?"

흉신악귀 같은 표정이다.

"네. 생각해 보세요. 그놈들이 한 실험실이 발견되면 모든 지부가 발견되는 식으로 허술한 일처리를 할 리가 없잖아요?"

"······."

"햇빛 고아원을 비롯한 4개 실험실은 A그룹이었을 뿐이에요. 그리고 레나는 B그룹이었던 거죠."

"하."

메이든이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가렸다. 입을 꾹 다물고, 의자에 등을 한껏 기댄 뒤. 자조하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시발 같은 세상이야 진짜."

그 옆에서 유화도 비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조금 양심이 찔린다.

레나는 수인족 융합 실험의 생존자가 아니라 진짜 수인족인데.

그래도 뭐, 실제로 실험실이 메이든이 알고 있는 4개 외에 추가로 있다는 건 사실이니까.

정적은 꽤나 길게 이어졌다.

나는 두 사람이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잠시 후.

생각을 마친 메이든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꼬맹이. 네가 그 실험실에서 그 애를 구해 온 거고?"

"네."

"언제?"

"5년 정도 전에요."

분명 프로젝트가 폐기된 시기가 그쯤이었으니, 이렇게 말해 두면 되겠지.

"······."

메이든의 표정에 짙은 슬픔이 내려앉았다.

"레나··· 라고 했지?"

"네."

메이든의 죽은 딸의 이름은 레아 크리티네스. 우연이지만 레나와 상당히 비슷한 이름이다.

거기에 실험을 받았다는 공통점까지. 둘을 겹쳐 보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언어는?"

아직까지 경계심을 한껏 끌어 올린 채 내 뒤에 숨어 있는 레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직 어설퍼요. 이제 갓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정도?"

"너는 5년 동안 뭐했······ 아니지. 그런 실험을 받은 애가 쉽사리 마음을 열 리가 없었겠지. 미안. 실언이었다."

메이든이 쓰게 웃었다.

"그럼 아까 그 아빠라는 말은 뭐에요?"

유화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아······. 그건."

뭐라고 해야 할까.

내가 장난을 친 결과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아빠라고 부르게 시켰다고 하기엔 너무 이상하잖아.

"왜겠어. 저 애가 이 꼬맹이한테 마음을 열었기 때문이겠지."

내가 답을 내기 전에 메이든이 먼저 나섰다.

"부모에 대한 그리움도 있을 거고. 아마 이 꼬맹이랑 지 아비를 동일시 하고 있는 걸 테지. 아빠라 부르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야."

"아···."

유화가 더욱 슬픈 표정이 되었다.

"저 아이. 아까 보니까, 난생 처음 듣는 언어를 쓰던데. 뭐 유럽 변두리의 토착 민족 같은 거야?"

"네? 네. 그쵸."

수인족이 토착 민족이긴 하지.

유럽은 아니지만.

"꼬맹이.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다른 생존자도 있어?"

메이든이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만약 있다면 제발 말해달라는 눈빛이다.

"제가 아는 선에선 없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냐."

메이든이 마지막으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레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레나가 내 등 뒤에 더욱 바짝 숨었다. 그 모습이 자못 귀여운 것인지 메이든의 미소가 더욱 환해졌다.

혹시 자신의 죽은 딸과 레나를 겹쳐서 보고 있는 것이겠지.

"아무튼 꼬맹이. 상황은 잘 알겠다. ···짜식."

메이든이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뉘집 아들인지 참 잘 컸어."

그리곤 내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호의로 가득 담긴 눈동자가 내 두 눈을 정확히 꿰뚫었다.

"······."

조금, 마음이 아팠다.

만약 지금까지 내가 한 모든 말이 거짓이었다는 걸 알면 저 눈동자가 어떻게 변할까.

그렇게 생각하니, 아주 조금 무서웠다.

"그럼 우린 이만 일어나마. 화야. 가자."

"아, 넵."

유화 씨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시게요? 왜요. 저녁식사라도 같이 하고 가시지."

"됐어. 애초에 오늘은 네가 연락을 너무 안 받아서 걱정돼서 찾아온 거였기도 하고······."

메이든이 시선을 내려서 레나를 바라봤다.

"첫인상이 별로였는지, 저 꼬마 공주님이 우리를 기꺼워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아직도 으르렁대고 있는 레나를 힐끔 바라봤다.

"······하하."

"저녁은 다음에 시간 내서 먹자고."

"네. 알겠습니다."

메이든이 손을 흔들며 현관으로 걸어 나갔다. 그 뒤로 유화가 작게 고개를 숙인 후, 따라 이동했다.

"아. 맞다."

그러다 메이든이 무언가 깨달은 듯이 멈춰섰다.

"꼬맹이. 뭐 필요한 거 있으면 꼭 말해라? 괜히 사양하지 말고."

메이든이 마지막으로 활짝 웃었다.

"이 누님은 언제나 꼬맹이 네 편이란 거 잊지 말고. 알것냐."

* * *

두 명이 떠나고 난 뒤.

나는 긴장이 쫙 풀려서 소파에 늘어졌다.

"후. 큰일 날 뻔했네."

공주님이 그런 나를 붙잡고 흔들었다.

―일단 그대가 말한 대로 최대한 조용히 있긴 했다만······.

―엉? 어. 잘 했어. 고마워.

―그 두 여성은 뭐하는 자들인가? 처음에 그대에게 살벌한 시선을 보낸 걸 보니, 좋은 사이는 아닌 듯한데.

공주님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냐. 친한 지인들이야. 한 분은 이 집을 선물해 준 분이기도 하고.

―그럼 왜 그런 눈으로 그대를 바라본 겐가. 그 눈빛에 깃든 감정은 분명 혐오감이었다.

―음. 그냥 뭘 좀 오해가 있었나 봐.

공주님이 고개를 갸우뚱 했다.

―오해?

―음······.

여자 아이 데려다 놓고 아빠라고 부르게 하는 인간 말종 쓰레기라고 생각한 거겠지. 동물 귀까지 씌워서.

―그런 게 있어. 아무튼 좋은 분들이야. 내 은인 같은 분들이지.

그 오해를 구구절절 설명할 순 없으니, 일단 말을 흐렸다.

―으음.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나저나 은인이라. 그렇다면 짐은 그 두 여성에게 실례를 한 것이 되는구나. 흐으음.

공주님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됐어. 다음에 다시 만나면 그땐 좀 호의적으로 대해 드려. 그럼 돼.

―그거면 되는 겐가?

―응. 충분해.

―흠.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알겠다. 내 그리 하마.

공주님이 활짝 웃었다.

―그나저나 그대여. 이 세계에는 짐 같은 수인족은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종족이라 하지 않았나.

―그랬지.

―그럼 그 두 명에겐 짐의 존재를 무어라 설명한 게냐. 수인이라 설명한다고 해도 쉽사리 믿지 않았을 터인데.

―응. 수인족이라곤 안 했어.

―오호. 궁여지책인가. 그럼 무어라 한 게냐.

나는 무던하게 말했다.

―수인족의 유전자 이식 실험을 받은 불쌍한 생체 실험의 생존자.

―······뭐라?

공주님의 표정이 굳었다.

―5년이나 마음을 닫고 있다가 이제야 마음을 연 불쌍한 생체 실험의 생존자라고 말했다고.

―허.

공주님이 완전히 벙쪘다.

동공이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이, 엄청 당황한 모양이다.

―다음에 그 둘을 만나면, 그런 느낌으로 입 맞춰야 하니까. 기억해 두라고 말하는 거야. 알겠······.

―이, 이익!

내 말에 공주님이 따지듯이 달려 들었다.

―짐을 그런 존재라 표현했단 말인가! 모독이다! 수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그대의 머리는 이미 한참 전에 바닥을 구르고······!

―허허허, 매직 실드!

공주님의 분개는 한참 동안 이어 졌다.

* * *

그날 오후 6시 30분.

"으아 머리가 띵하다."

5시간에 이은 마법 단련의 후유증으로 어지럼증이 발생했다.

정신이 몽롱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다.

그런 날 바라보며 레나 공주님이 웃으며 말했다.

―스파르타 공주님이 웬일로?

―신체 훈련이고 마법 훈련이고 그저 많이 한다고 좋은 게 아니다. 효율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오우.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런 사람이 새벽 3시까지 단련을 시켜?

―그, 그건···. 조금 발끈해서······.

2일 전.

내가 너무 재수 없이 구니까, 레나의 이성이 끊어졌다.

그 결과 나는 새벽 3시까지 마법 단련을 해야 했다.

―그리고 공주님. 우리 솔직해지자. 6시부터 계속 시계를 힐끔힐끔거리던데. 배고파서 그런 거지?

움찔.

공주님의 어깨가 떨렸다.

―그, 그럴 리가 있는가. 애초에 짐은 그리 식탐이 있는 편이 아니다.

―그래?

―음. 늑대는 고고한 법이다.

공주님이 굳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근엄을 지키고 싶으신 모양인데.

―피자.

움찔.

―치킨. 족발.

내가 말할 때마다 공주님의 신체가 떨리고, 은빛 귀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아니면······ 어제 먹은 함박 스테이크?

―오오···.

이젠 두 눈에서 별빛이 쏟아지기까지 한다.

―아니다. 역시 한국인은 밥을 먹어야지. 우리 공주님 건강을 생각해서 보리밥 야채 정식 어때?

추욱.

이번엔 양쪽 귀가 맨틀을 뚫고 내려갈 기세로 쳐졌다.

이 공주님. 야채를 끔찍하게 싫어한다. 저번에 장난 삼아 풀로 가득한 보리밥 정식을 시켜 줬더니, 울상으로 먹더라.

누가 은랑(늑대) 아니랄까 봐. 고기에 집착이 심하다.

―그, 그대 정말 오늘도 보리밥 정식을 먹을 겐가?

애절하다.

나는 픽 웃었다.

―농담이지. 오늘 에너지를 이렇게 썼는데 뭔 채소야. 오늘은 삼겹살로 가자.

―오오오! 그 입안에 넣자마자 사라지는 듯한 식감의 그것이구나!

귀가 쫑긋 섰다.

교차하며 흔들리기까지 한다.

아주 신난 모양이다.

나는 작게 미소 지으며 배달 어플을 이용해 주문을 했다.

―배달 시켰어. 곧 올 거야. 한 3~40분 걸리려나.

그렇게 말하며 나는 외투를 걸쳤다.

―외출인가?

―응. 잠깐 나갔다 올게. 머리에 공기도 좀 넣을 겸. 공주님도 갈래?

―됐다. 짐은 금백이들이랑 놀고 있으마.

공주님은 그렇게 말하며 침대 위에서 장난치고 있는 금호, 백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곧 셋이 뭉쳐서 뒹군다.

음. 매 순간 순간이 역대급 짤방이다. 나는 슬쩍 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갔다올게."

내 한국어 인사에 공주님도 한국어로 답했다.

"다녀오세여~"

내 존댓말 주입 교육은 무사히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현관을 나서며 유화에게 톡을 보냈다.

[첨부 사진]

[귀엽죠?]

조금 전 찍은 금호, 백호, 레나의 사진이었다.

대답이 없다.

옆에 1표시가 사라진 걸 보니 분명 읽은 듯한데. 답변이 없다.

"?"

유화가 읽씹을 하는 건 또 처음인데.

"······답변할 정신이 아닌 건가?"

넋을 잃었다거나.

그럴 수도 있겠다.

유화는 이런 귀여운 것에 사족을 못 쓰니까.

나는 대수롭지 않게 폰을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어머."

한 여성이 내게 다가왔다.

"주말에도 만날 줄은 몰랐는데. 이쯤되면 운명이 아닐까요?"

"······시라카와 씨."

입가의 매력점이 도드라지는 여성. 러스트였다.

요즘들어 외출을 하면 높은 확률로 이 여자가 나타난다.

무슨 나를 감시라도 하고 있는 것마냥.

"에이. 아이라고 불러 달라니까요. 한국에서 김 씨. 강 씨. 이렇게 부르지는 않잖아요?"

러스트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하하. 그건 아직 부담돼서."

그런 내 반응에 러스트의 표정이 더욱 환해졌다.

"서율 씨는 참 순수해서 좋아요."

이게 착각인지 모르겠는데.

무언가 만나면 만날수록, 분위기가 달라지는 느낌이다.

처음엔 분명 날 잡아 먹겠다는 사나운 맹수 같은 맹렬한 기세였는데.

지금은 그저 나와 대화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듯한 유유자적한 기세다.

"순수하긴. 이 세상에 순수한 남자는 없어."

"······예. 그렇죠."

순간적으로 러스트의 두 눈에 침침한 빛이 일렁였다.

그러나 그 컴컴한 빛은 찰나의 사이에 눈 녹듯이 사라지고, 다시 완연한 빛을 되찾았다.

"얼마 전까지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러스트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몸을 기댔다. 그리곤 나를 올려다 보며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서율 씨. 절 보면 무슨 생각이 들어요?"

"음. 그냥 이쁜 여성이구나. 하는 생각?"

나는 그 눈빛을 똑바로 받으며 대꾸했다.

러스트가 웃었다.

"거짓말."

웃으며 내게서 몸을 뗐다.

"이게 참. 묘하네요. 남자들이 제게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반대로 빠지지 않는 남자가 있으니까, 괜히 자존심이 상해요. 이기적인 여자네요, 저."

음. 역시 러스트의 대쉬를 계속해서 거절한 게 지금 이 사태의 원인인가?

그렇다고 러스트의 유혹에 넘어갈 수는 없잖아.

"서율 씨. 그럼 다음에 봐요."

러스트는 그렇게 몸을 돌려, 홀가분한 발걸음으로 내게서 멀어져 갔다.

"······."

혼자 남은 나는 멍하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후, 나는 가볍게 5분 정도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조금 더 바람을 쐬고 싶었는데, 이제 곧 배달이 올 시간이라서 돌아와야 했다.

카드키를 사용해서 보안 장치를 해제하고, 문을 열었다.

"공주님. 배달 아직 안 왔······지?"

문을 열고 들어 간 순간, 내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두 여성이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서율아?"

"선조님?"

지아, 시연이가 레나를 힐끔 바라본 후, 오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상황 같은데.

타다다다-!

그런 나를 향해 공주님이 달려왔다. 그리곤 내 뒤에 숨어서 소리쳤다.

"아빠 조아!"

나쁜놈 싫어!

다시 한번 말하지만, 공주님이 알고 있는 유일한 한국식 욕(내가 그렇게 알려 준)이었다.

공주님의 눈에는 지아와 시연이가 집에 무단 침입한 괴한으로 보인 모양이다.

"······아빠?"

"선조님?"

두 명의 동공이 확장됐다.

나는 속으로 깊게 한숨을 쉬며, 등 뒤의 공주님에게 수인족의 언어로 물었다.

―······공주님. 혹시 음식 배달 온 줄 알고 문 열어 줬어?

―······.

공주님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반응만으로도 충분했다.

―열어 줬구나?

삼겹살에 눈이 멀어서, 초인종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 준 것이리라. 내가 문 함부로 열면 안 된다고 말을 안 했던가. 음. 안 했네.

"······하."

누가 말했던가.

업보는 돌고 돈다고.

"서율아. 아빠라는 게 뭔 말이야?"

누군지 몰라도 필히 참된 혜안을 지닌 자일 것이다.

"선조님?"

근데 업보가 두 번이나 돌아 오는 건 좀 아니잖아.

머리가 아팠다.

< 110화 이게 아닌데 (2) > 끝

< 111화 이게 아닌데 (3) >

두 사람의 오해는 아주 쉽게 풀렸다. 메이든, 유화의 때와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쉬웠다.

"와. 수인족 공주님이구나."

"그 동물 귀가 진짜 귀였군요."

쉬울 수밖에 없었다.

나를 생체 실험의 생존자라 알고 있는 착각 그룹 B(메이든, 유화, 허미트, 최지훈 등)에겐 거짓말을 해야 했지만.

나를 천족과 엘프족의 하프이며 영웅이라 생각하는 착각 그룹 A(신지아, 하시연)에겐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그대여. 이번엔 뭐라고 한 게냐. 설마 또 실험체라는 말을 한 건 아니겠지.

―아냐. 이 둘한텐 그럴 필요 없어서 평범하게 수인족 공주님이라고 소개했어.

공주님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나를 떠 보듯이 노려본다.

―정말인가? 짐이 말하고도 뭐하다만, 만 년 전에 사라진 수인족이 다시 나타났다고 하는 말을 그리 쉽사리 믿을 리가 없는데.

의심하는 눈빛이다.

요즘 내가 너무 장난을 심하게 쳐서 그런가. 일단 의심하고 보는 경향이 생겼다.

―진짜야.

그러나 공주님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하시연이 내게 말을 건 것은 그때였다.

"서율아. 공주님이 뭐라고 하시는 거야?"

"표정이 좋지 않으신데, 혹여 저희가 무슨 실례라도······."

둘 다 뭔가 불안한 표정이다.

우리 둘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니까,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구나.

"그런 거 아냐."

"하지만 표정을 찡그리고 계신 게······."

지아가 안절부절하며 나와 레나를 번갈아가며 힐끔거렸다.

"저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고. 그리고 그렇게 정중하게 말 할 필요도 없어. 동갑끼리 뭔 존댓말이야."

"동갑이면······ 20살?"

지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수인족의 평균 수명은 200살이거든. 성장이 우리보다 두 배 느려."

10살 남짓한 외견인 건 그 이유다.

"저 모습이 20세라니······."

두 명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나를 멍하니 바라본다.

그러자 이번엔 또 레나가 눈을 날카롭게 뜨고 말했다.

―······그대여. 이번엔 또 뭐라고 했길래 짐을 저렇게 바라보는 겐가.

―별 말 안 했어. 그냥 공주님 나이가 20세라고 했더니 놀란 것뿐이야.

레나가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분명 인간족의 기준으로 보면 짐의 외견은 10세 정도라 하였지. 이해했다.

―그나저나 그대여. 자기소개를 먼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 그치. 그게 먼저구나.

까먹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시연이와 지아에게 말했다.

"공주님이 자기 소개부터 하자고 하시는데."

"아, 맞네. 그걸 까먹고 있었어."

"정신이 없었네요······."

"피차일반이지 뭐. 일단 공주님부터 소개한다고 하시네."

두 명이 아차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런 두 명을 바라보며 나는 공주님에게 눈짓했다.

―큼큼.

레나가 헛기침을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근엄한 표정으로 무게를 잡았다. 과연 왕의 직속 혈통 다운 훌륭한 왕의 풍채였다.

지아와 시연이가 침을 꼴깍 삼켰다. 그 반응이 마음에 드는 것인지, 레나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여. 레나 비스트 리퍼리엘이라고 합니다아."

"풉."

나도 모르게 뿜었다.

한껏 무게를 잡은 뒤, 근엄한 표정으로 하는 말이 '안녕하세여.'라니. 평소 공주님의 어조를 알고 있는 나한텐 최고의 웃음벨이었다.

공주님한테 존댓말을 근엄한 말투라고 속여서 알려 준 건 역시 신의 한 수였다.

아. 너무 재밌다.

"공주님. 안녕하세요. 저는 하시연이라고 해요."

물론 웃긴 건 나뿐인 모양이다.

애초에 저 둘은 레나의 근엄한 말투(수인족 언어 버전)을 모른다. 웃길 이유가 없다. 그냥 예의바른 공주님이구나 싶겠지.

"신지아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지아와 시연이가 활짝 웃으며 자기 소개를 마쳤다.

"하시연. 신지아."

공주님이 두 명을 각각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했다는 의미였다. 흐뭇한 광경이긴 한데,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그 이상 대화가 이어지진 않았다.

세 명이 나를 동시에 바라본다.

무슨 중재 좀 해달라는 듯한 표정들이다.

"음."

말이 안 통하니까, 중간에서 나만 죽어나는 기분이다.

마법을 배우는 것에 집중하느라, 시간이 없어서 기초적인 단어만 알려줬더니 이런 문제가 생기네.

"아, 그 전에 둘은 무슨 일로 온 거야?"

나는 공주님한테 잠시 있으라고 하고, 두 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 아. 별건 아니고. 그냥 늦긴 했지만, 집들이 할 겸 온 건데······."

"설마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두 명이 쓰게 웃었다.

"아. 이건 집들이 선물."

하시연이 쇼핑백 하나를 꺼냈다.

"뭐야?"

"나랑 지아랑 반찬 좀 만들어 봤어. 서율이 너 기숙사 나간 뒤로 매일 배달음식이나 먹고 있는 거 아닌가 해서."

하시연이 옆에서 다 식어 가는 삼겹살을 힐끔 바라봤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확실히 요즘 매일 배달 어플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삼겹살.

공주님이 다 식은 삼겹살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귀도 추욱 쳐진 것이 꽤나 실망한 모양새다.

"지금 공주님 삼겹살이라고 하지 않았어?"

"어? 어. 맞아. 이 공주님이 고기를 좀 좋아하거든. 늑대잖아."

"아하."

순간 하시연의 눈이 빛났다.

"그럼 딱이네."

그리곤 쇼핑백에서 장기 보관 처리가 된 용기를 꺼냈다.

"같이 먹으려고 갈비찜 좀 해 왔거든."

용기를 열자마자, 갈비찜의 향기가 황홀하게 내 코끝을 간질였다. 이건 맛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냄새만으로도 맛있다.

―오, 오오오. 그, 그대여. 저건 무엇인가.

그 냄새에 공주님까지 포로가 된 모양이다. 처음 치킨을 맛봤을 때와 같은 표정으로 눈을 빛내고 있다.

―아, 애들이 우리 주려고 반찬 좀 만들어 왔대. 저건 갈비찜이란 거고.

"괄비쮬······."

지금 당장이라도 침이 줄줄 흐를 기세다.

"공주님, 마음에 드신 모양인데?"

"그런가 봐."

그 격렬한 반응에 시연이와 지아의 표정도 밝아졌다.

"그럼 일단 이거 가볍게 데워서 올게."

"그럼 나는 그릇을······ 선조님. 그릇 있어요?"

"아마 위에 있을 거야."

써 본 적은 없지만.

두 명은 한 몸이 된 것마냥 움직였다. 그렇게 약 1분이 흘러.

―오오. 오오오···. 이, 이건.

테이블 위에는 진수성찬이 펼쳐져 있었다. 공주님의 얼굴에 '나 너무 행복해요.'라고 쓰여 있는 듯했다.

"끝! 이제 먹자!"

마지막으로 갈비찜을 중앙에 놓고, 하시연도 자리에 앉았다.

―이, 이제 먹어도 되는 게냐?

―그 전에 공주님. 먹기 전에 할 말이 있잖아.

―아. 그랬지.

공주님이 침을 꼴깍 삼키고 한국어로 말했다.

"잘먹게씁니다."

그렇게 말하고, 공주님은 내 눈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초롱초롱한 빛으로 '이제 먹어도 되는 거지?'라고 묻는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갈비찜을 입에 넣은 공주님의 눈동자가 세상 거대해졌다. 볼을 빵빵하게 한 채, 귀와 양손을 부들부들 떤다.

"입에 맞나 보네."

"응. 다행이야."

지아와 시연이도 미소를 지었다.

나도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기만 해도 나까지 행복해지는 듯했다.

* * *

서울 인근의 한 호텔.

―러스트. 언제까지 그렇게 놀고만 있을 생각이지?

"말했잖아~ 한 달이라고."

러스트가 마에스트로와 통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 바쁜 시기에 한 달이나 자리를 비우는 게 얼마나 큰 타격인지 네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애초에 내가 배정받은 일은 거의 다 끝냈잖아."

―베가본드가 해야 했을 일이 많이 남았다. 그걸······.

"그걸 왜 내가 해야 하는데?"

러스트가 세상 짜증 난 표정으로 답했다.

"보스는 뭐래?"

―······그냥 두라고 하셨다.

"그럼 됐잖아. 왜 자꾸 돌아오라 마라야."

러스트는 진리의 구명자에 들어 오기 전에 언노운과 계약을 하나 했다. 그 계약의 내용은 러스트가 원할 때 1달의 자유 시간을 주는 것. 러스트는 그 계약 조건을 이행한 것뿐이다.

―······말했듯이 일손이 부족하다. 그리고 너밖에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마에스트로가 한숨을 쉬듯이 말했다.

―어쩔 수 없지. 만약 지금 돌아온다면 너의 부탁을 하나 들어주마.

"······부탁?"

―그래.

마에스트로는 러스트에게 당근을 주기로 했다.

평소부터 마에스트로에게 들러 붙어, 유혹을 일삼던 러스트다.

이 조건을 제시하면 좋다고 돌아 올 것이 분명하다.

"아하. 그 부탁을 써서 자기를 사라?"

―······그래.

물론 그에 따른 시간 손해도 있겠지만, 상관없다.

러스트가 앞으로 3주가량 더 빠지는 것보다는 낫다.

"하."

그러나 러스트의 반응은 마에스트로가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자기. 누굴 병신으로 알아?"

러스트가 흉악한 표정으로 변했다.

러스트가 마에스트로에게 들러붙었던 건, 단순히 러스트가 들러붙어도 '버틸 수 있는' 강자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지? 하. 좆 까. 시발놈아."

대부분의 남자는 러스트가 닿는 순간, 음심이 증폭되어 사랑이라는 상태이상에 빠져, 정기를 서서히 빼앗기게 된다.

정기를 모두 빼앗기면 사망. 이 정기는 높은 능력치를 지닌 초인일수록 높다.

특성의 페널티 때문에 동성에겐 닿을 수조차 없다.

중증의 애정결핍인 러스트가 타인의 온기를 느끼기 위해선, 약한 남자를 잡아먹거나, 강자에게 들러붙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1달 동안은 안 돌아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 둬."

러스트는 짜증을 내면서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나쁜 새끼."

마에스트로는 분명 자신의 애정결핍을 알고 저런 제안을 한 것이다. 이용하기 위해서. 그 사실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분노를 느꼈다.

"얼굴만 잘생겼으면 뭐 해."

인성이 쓰레긴데.

입술을 짓씹으며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을 벽에 던져 버렸다.

"쯧."

현재 러스트가 느끼는 감정은 후회였다.

왜 자신은 마에스트로 같은 남자한테 치근덕댄 걸까.

분명 매력적으로 보였던 적도 있었다.

러스트의 특성에 버틸 수 있는 몇 안 되는 강자라는 점이 크게 작용하기도 했고.

확실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조금 전 그 발언에 정나미가 떨어진 것도 있다.

하지만 주된 이유는 그게 아니다.

"서율 씨."

강서율.

러스트가 만나 본 남자들 중에 가장 멋지고, 사랑스러우며, 순수하고, 완벽한 남자.

그를 만난 이상 다른 남자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아아······."

그를 생각하자, 솟구치던 짜증이 눈 녹듯이 사라져 갔다.

"서율 씨······."

이제껏 본 남자들 중에서 가장 완벽한 외모를 타고 난 남자.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 싶다고 생각한 남자.

난생 처음,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생각이 드는 남자.

'그리고···.'

자신의 접촉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남자.

무슨 연유인지, 정기를 빼앗을 수 없는 남자.

"내 운명의 남자."

시스템에 기반한 러스트의 '흡정'은 시스템의 존재가 불명확한 강서율에겐 통하지 않는다.

당연히 음심 자극도 통하지 않고, 정기 흡수도 통하지 않는다.

물론 러스트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어서 내일이 됐으면······."

러스트가 고혹적인 눈빛으로,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 * *

일요일 밤.

나는 오늘도 공주님과 마법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대. 정말 처음 마법을 사용하는 게 맞는 겐가?

―왜? 너무 잘 해서?

―······.

공주님이 침묵했다.

그리고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처음이야. 기억 안 나? 공주님이 직접 내 마력 유도를 해 줬잖아.

―그렇긴 하다만······.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다.

하기야. 내 재능이 워낙 출중해야지. 이게 신이 형이 준 지식 덕분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딱 요령만 잡으니까, 그 뒤론 뭐 막힘이 없었다. 이젠 뭐 개량까지 하고 있으니까 말 다 한 거다.

······물론 그래 봐야 마력량이 너무 적어서 초중급 마법을 사용하는 게 끝이지만.

―이제 화염 마법 정도는 짐과 비슷한 것 같구나.

―비슷? 내가 더 잘하는 거 아니고?

―흥. 태초의 마력이 사대원소 모두에 해당하는 짐에겐 안 된다.

레나는 풍수지화 4대 원소 모두를 품은 마력을 지녔다. 가히 사기적인 재능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천재한테 배워서 그런가, 나도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고 있다.

―확실해?

―그대가 쓸 수 있는 화염 마법은 짐도 쓸 수 있고, 짐이 쓸 수 있는 마법은 그대도 쓸 수 있으니, 비슷한 게지.

―흐음.

아무리 봐도 화염 마법에 한해선 내가 조금 더 우위인 것 같긴 한데. 저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오케이. 그럼 내가 쓰는 마법 중에 공주님이 못 쓰는 마법이 있으면, 내가 더 뛰어나단 거, 인정하는 거지?

―흥. 가능하다면 해 보도록. 가능하다면 말이다!

공주님이 고개를 치켜들고 거만하게 웃었다. 나도 웃었다.

웃으며 마력을 끌어 올렸다.

화르르륵-!

그러자 순식간에 파이어 애로우 한 발이 생성되었다.

―겨우 파이어 애로우인가. 그 정도 마법이라면 짐은 자면서도······.

―어허. 성급하긴. 보고 있어.

나는 씨익 웃으며 마력을 더욱 퍼부었다.

―······어?

불화살이 하얗게 물들어 간다.

백색이 적색을 삼키는 듯이,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어느덧 내 손바닥 위에는 반투명한 흰색으로 일렁이는 특수한 파이어 애로우가 탄생 해 있었다.

정령의 불길을 이용한 변형 마법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못하겠지. 나는 으스대며 웃었다.

―어때? 공주님은 이런 거 할 수 있······.

그때였다.

화르르르륵-!

내 등 뒤로 화염이 솟구쳤다.

―나, 날개?

그것은 날개였다.

적백색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몽환적인 날개.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나도 모르게 넋이 나갔다.

"······어?"

그 순간, 뇌리에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항상 착용하고 있는 반장갑을 잽싸게 벗고 손등을 확인했다.

"······없어."

정령족의 문신이 없다.

말인즉.

방금 전 정령의 불길 사용으로 정령족의 특성이 '완전 체화'를 이루었다.

"······근데 이건 또 무슨 이펙트야?"

나는 내 등 뒤의 날개를 멍하니 바라봤다.

< 111화 이게 아닌데 (3) > 끝

< 112화 게이트 (1) >

그날 밤.

나는 공주님과 호냥이 듀오를 방에서 재운 뒤에 거실에서 상념에 빠져 있었다.

"화 속성 친화력이라······."

조금 전 피어오른 화염 날개는 화 속성 친화력이 상승한 것으로 인한 이펙트였다는 게 밝혀졌다.

나 혼자 알아낸 건 아니고, 우리 명석하신 수인국 공주님께서 큰 힌트를 주셨다.

"공주님이 똑똑하긴 엄청 똑똑하단 말이지."

조금 전, 내 정령의 불길로 코팅한 파이어 에로우와 화염의 날개를 본 공주님은 이렇게 말했다.

―불의 정령들이 '승급'하는 모습과 제법 비슷하구나.

그 말에 딱 깨달음을 얻었다.

정령들은 '승급'이라는 것을 하는 아주 특수한 종족이다.

하급부터 최상급까지 있으며, 당연하겠지만 승급할 때마다 강해진다. 이 과정에서 성장하는 것은 마력도, 신체 능력도 아닌 정령들이 지닌 특유의 '친화력'이다.

실체 자체가 없는 정신체인 정령들은 이 '친화력'의 보유량이 곧 강함이기 때문이다.

조금 전 피어오른 화염의 날개가 불의 정령들이 승급할 때와 완전히 똑같은 이펙트라고 했으니, 정령족 완전체화가 속성 친화력 상승이라 추측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음. 화 속성 친화력만 상승한 게 맞나 보네."

물의 정령의 특성을 얻어 완전 체화를 이루면 수 속성 친화력이 상승하고, 바람의 정령의 특성을 얻어 완전 체화를 이루면 풍 속성 친화력이 상승한다는 거네.

"하기야. 전 속성 친화력 상승이면 너무 사기긴 하지."

충분히 이해한다.

애초에 이 소설의 세계관에서 '속성 친화력'이라는 것 자체가 사기적인 개념 중의 하나다.

혹자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아니, 그까짓 친화력이 뭐가 그리 대단한데?'

그럼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대단하다고.

너~무 대단하다고 말이다.

일단 첫 번째.

속성 친화력을 얻으면, 친화력 수치에 따라 해당 속성의 면역력이 상승한다.

불의 정령이 화염 마법에 피해를 입지 않는 이유와도 같다.

그리고 두 번째.

속성 친화력의 보유량에 따라, 해당 속성의 위력이 증가한다.

이른바 증폭이다.

이게 진짜 사기다.

애초에 패시브 위력 증가 자체가 사기인데, 이 친화력은 범용성까지 출중하다.

마법, 정령술을 비롯한 강기의 활용까지. '화 속성'이라 이름 붙은 모든 마력적 행위에 부가적인 증폭이 부여된다.

여기까지만 해도 진짜 억 소리 나올 정도로 사기적인 능력인데, 아직 하나가 더 남았다.

'속성 마법의 활용에 있어 효율 상승.'

이게 무슨 말이냐면,

그냥 마력 소모량이 줄어든다는 거다.

속성 피해 면역.

속성 데미지 증가.

속성 마법 마나 소모량 감소.

이 얼마나 사기적인가.

내 입꼬리가 하늘 높이 승천할 기세로 치켜 올라갔다.

화르르르륵-!

나는 가볍게 파이어 에로우를 시전했다.

처음엔 제법 고생했지만, 이젠 눈 감고도 사용할 수 있는 화 속성 마법의 기초 중의 기초 마법. 3시간 전과 비교해 봤을 때 크기가 2할 정도 커졌다.

"위력은 대충 20프로 정도 증가했고."

반면 소모된 마력은 20프로가 줄었다.

"크으."

이는 똑같이 100의 마력을 사용해서 마법을 사용했다고 쳤을 때, 약 5할 정도의 피해를 더 입힐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러니 내가 좋아할 수밖에.

"화 속성 피해 면역은 겪어 봐야 알겠지만······."

위력 증가도 20%고,

마력 소모량 감소도 20%니,

아마 속성 피해 면역 수치도 20% 정도가 아닐까.

반대로 말하면 80%의 피해는 고스란히 받아야 한다는 말이긴 한데······.

"뭐, 친화력도 점점 늘어날 테니까."

이게 아직 첫 번째 완전 체화임을 감안하면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다.

나는 소파에 등을 쭉 기대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 * *

화요일 아침.

가볍게··· 아니, 겁나 힘들게 아침 단련을 마치고,

지금은 이론 수업을 받는 중이다.

"초인들의 업무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그 중에 가장 위험한 상황이 세 개 있다. 강서율 사관생. 그 세 개가 뭐지?"

내가 호명됐다.

이론 1등이라는 타이틀 때문일까. 교관들이 내게 질문을 하는 일이 많아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빌런 퇴치, 몬스터 폭주, 게이트 출현입니다."

"정답이다."

"저, 교관님. 질문 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사관생이 손을 들었다.

"허락하지."

"유적지 공략이나 던전 공략의 사망률이 몬스터 폭주보다 사망률이 높다고 들었는데, 왜 유적지 공략은 위험 사태에 들어가지 않는 건가요?"

"좋은 질문이다."

교관이 웃었다.

"강서율 사관생. 일어나 있는 김에 대답해 주도록."

"······예."

저 교관님. 요즘 들어 나를 너무 부려먹는 느낌인데.

"유적지 공략이나 던전 공략은 애초에 강제된 임무가 아니기에 통계에서 빠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확하다. 사관생. 궁금증은 풀렸나?"

"네. 감사합니다."

교관님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강서율 사관생도 자리에 앉도록."

"네."

"그럼 다시 얘기를 돌려서, 3대 위험 상황에 대해 얘기하려 한다. 빌런이나 몬스터 폭주에 대한 건 앞선 수업에서 많이 다뤘으니, 넘어가고. 오늘은 게이트에 대한 얘기다. 강서율 사관생. 앉은 김에 일어나서 게이트에 대해 설명하도록."

"······예."

아놔. 이럴 거면 왜 앉으라고 했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게이트는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오는 특수한 균열입니다. 종류는 크게 두 가지로 방출형 게이트와 침식형 게이트가 있습니다."

"정답이다. 앉도록."

나는 또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앉으라고 하고 또 부를 생각은 아니겠지?

"둘 중 더 위험한 게이트는? 김민광 사관생."

"······침식형 게이트가 아닐까요?"

"채민주 사관생."

"침식형 게이트입니다."

교관님은 짙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사관생들의 이름을 불러 나갔다. 그렇게 약 10명이 '침식형 게이트'라고 대답했다.

"하시연 사관생."

"그··· 침식형 게이트라고 생각합니다."

"신지아 사관생."

"침식형 게이트가 훨씬 위험합니다."

한번 몬스터들을 쏟아 내면 사라지는 방출형 게이트.

따로 게이트 공략을 하지 않으면 절대 닫히는 일이 없는 침식형 게이트.

당연히 침식형 게이트가 더 위험해 보이겠지. 애초에 책에도 그렇게 실려 있다.

출현 빈도만 봐도 알 수 있다.

방출형 게이트는 오픈 빈도가 굉장히 높지만, 그때마다 큰 피해 없이 막고 있다.

반면 침식형 게이트는 쉽사리 열리지도 않을 뿐더러, 열리기만 하면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다.

"강서율 사관생도 다른 사관생들과 똑같은 생각인가?"

하지만 그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방출형 게이트의 진정한 무서움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방출형 게이트가 훨씬 위험합니다."

"호오."

교관의 눈에서 이채가 흘렀다.

"어째서지?"

"현재 그린랜드 지대를 비롯한 수많은 몬스터 대륙이 탄생한 원인이 바로 방출형 게이트이기 때문입니다."

교관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침식형 게이트는 위험하지 않다?"

"물론 그건 아닙니다. 침식형 게이트. 위험하죠. 하지만 그뿐입니다."

교관이 더욱 짙은 미소로 변했다.

"그뿐이다? 무슨 뜻이지?"

"지금까지 출현한 침식형 게이트 중에 닫지 못한 게이트는 없습니다."

나는 소근거리는 사관생들을 한번 훑고 다시 입을 열었다.

"침식형 게이트의 보유 마력 수치는 평균 20만 정도입니다. 제일 높았던 것이 중국 남부에서 발생한 게이트로, 이 또한 26만 8273였습니다. 끔찍한 재해였긴 하지만, 결국 인류가 막을 수 없는 수준은 아니었죠."

신이 형에게 받은 특전.

이 세계의 기초 지식과 뛰어난 기억력 덕분에 내가 모르는 건 없다시피하다. 저런 통계학적인 수치도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다.

"반면 방출형 게이트는 어떨까요? 분명 출현 빈도가 잦은 소형 게이트의 마력 수치는 낮습니다. 3천 정도죠. 그렇기에 평균 수치도 약 2만밖에 안 됩니다."

게이트 보유 마력 2만.

100위권의 S랭크 초인 3명만 있으면 막을 수 있는 수치다.

"2만과 20만. 통계학적으로만 봐도 10배 차이잖아."

"역시 침식형이 더 위험한 거 아냐?"

내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사관생들이 태클을 걸었다.

"하지만 평균값이 아닌 분포도를 보면 어떨까요."

평균 수치가 무슨 의미인가.

"침식형 게이트의 역대 최소 마력 수치는 14만. 최대치는 26만."

중요한 건 대처할 수 있느냐, 없느냐다.

"방출형 게이트의 역대 최소 마력 수치는 500. 최대치는······."

나는 얼마 전, 백신 프로그램이 발동했던 사건을 떠올렸다.

100만이 넘는 게이트가 출현한 대사건.

"128만입니다."

과거의 기록으로도 있다.

50만 마력의 게이트가 한 나라를 붕괴시켰다. 그것이 방출형 게이트의 무서움이다.

"이런 이유로, 저는 방출형 게이트가 훨씬 위험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정적이 흘렀다.

다들 멍하니 날 바라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당연하겠지.

보통은 침식형 게이트가 훨씬 위험하다고 듣고 배웠을 테니까.

내 말을 이해할 수 없을 거다.

"다들 박수. 과연 이론 1위다운 훌륭한 관점이었다. 앉도록."

"예."

나는 자리에 앉았다.

"강서율은 무슨 통계까지 다 외우고 있네."

"그러게."

내 말을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그 자유로운 토론이 마음에 든 것인지, 교관님은 우리를 통제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도 방출형 게이트가 더 위험하다는 건 오버지."

"그래? 난 들으니까, 이해 가던데."

"나도. 약간 망치로 후려 맞은 느낌이었음."

"그래도 난 침식형이 더 위험한 거 같은데."

확실히 이 시기까지는 침식형 게이트가 더 위험도가 높긴 하다.

실제로 세계 초인 연맹에서 그렇게 집계하고 있기도 하고.

그 개념이 바뀌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원작 [S급 상태창]의 첫 번째 대형 에피소드를 시작으로 그 개념이 송두리째 변하게 된다.

"······후."

그 에피소드의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까지 최대한 빠르게 성장할 필요가 있다.

"다들 정숙. 아직 수업 중이다."

그 후로, 교관님의 게이트에 대한 수업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딩-동-댕-동

그렇게 시간이 흘러.

수업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겠다. 다들 오늘 수업에서 교관이 게이트에 대한 걸 중점으로 얘기한 이유는 말 안 해도 잘 알고 있겠지?"

"네!"

"목요일에 게이트 체험 훈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관이 진지한 표정으로 우리를 훑었다.

"게이트 체험 훈련은 말이 훈련이지, 사실상 실전이나 마찬가지다. 실제로 가장 사망률이 높은 훈련이기도 하지."

게이트 체험 훈련은 위험하다.

말이 체험이지, 진짜와 다를 바가 없다. 안전 장치도 없으며, 다른 훈련들처럼 100% 제어할 수 있는 훈련이 아니다.

당연히 변수도 많고, 위험도 많다.

"그러니, 다들 마음 단단히 준비하고 훈련에 임하도록. 긴장을 푼 그 찰나의 순간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게 게이트 공략이니까."

교실에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목요일.

게이트 체험 훈련이 있는 날이다. 오늘은 웬일로 다들 표정이 진지하다. 불안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관생들이 대다수다.

뭐, 게이트 체험 훈련의 위험도를 생각하면 불안에 떠는 게 당연하겠지.

"나만 무섭냐?"

"아니, 나도 조금······."

"후. 긴장되네."

솔직히 나도 조금 무섭다.

연구 결과로 탄생한 열화 카피 버전의 임시 게이트라고 하나, 게이트는 게이트다.

진짜 삐끗하면 끽이다.

······게이트에 들어가는 건 처음이기도 하고. 원작에서 언급되지 않은 훈련이기도 해서 꽤나 많이 긴장 된다.

그러나 이건 좋은 기회다.

마침 다음 에피소드가 게이트 폭주 에피소드기도 하고, 그 전에 임시 게이트로나마 게이트를 경험해 볼 수 있는 것은 바라마지않던 일이다.

"그럼 지금부터 1학년 1반의 임시 게이트 체험 훈련을 시작하겠다!"

이번 게이트 체험 훈련은 반 단위로 나뉘어서 진행된다.

소형 게이트도 최소한 50인의 초인은 필요하니, 반 단위로 진입하는 게 당연하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장비를 체크하고, 2분 후에 진입하겠다!"

묵직한 분위기 속에서 쇠와 나무가 부딪치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렇게 2분이 흘러.

"준비하도록!"

교관의 말과 함께, 허공에 균열이 발생했다. 거울이 슬로우 모션으로 깨지는 듯한 모습이었다.

파칭, 파칭!

그렇게 그 균열이 점점 넓어지더니, 이윽고.

카앙!

날카로운 파과음과 함께 허공이 좌우로 쫘악 갈라졌다.

"게이트 오픈 확인!"

게이트의 관리를 맡은 담당자가 소리쳤다. 교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입!"

"진입!"

우리는 복명복창을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교관을 지나 균열을 향해 걸었다. 나는 그 선두에 서 있었다.

균열에 발을 디딘 순간,

"오."

풍경이 변했다.

무언가가 융합한 듯한 묘한 세상이 보인다. 세계가 어중간하게 충돌한 듯한 풍경이라고 해야 할까. 소설 속 묘사에서 봤던 그 모습 그대로다.

"으."

"떨려······."

주위에서 불안에 찬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 왔다.

"괜찮아. 우리 반 멤버들을 봐. 위험한 일이 생길 수나 있겠냐."

"그건 그렇지······."

사관생들이 차례대로 시연이, 지아, 철진이, 그리고 나를 바라본다.

"무력에 지력까지 완벽하긴 하네."

"나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어."

하기야, 이 멤버가 워낙 사기긴 하지.

그나저나 지아나 시연이도 게이트 공략은 처음일 텐데, 괜찮나? 괜히 긴장하고 있는 거 아냐? 나는 슬쩍 주위를 살폈다.

지아는 평소처럼 냉정한 얼굴이고.

시연이는 적당히 긴장감을 끌어 올린 좋은 표정이다.

괜한 걱정이었던 것 같다.

나는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약 1분 정도를 걸었을까.

주위의 풍경이 빠르게 사그라지고 있었다.

"다들 준비해!"

내가 소리쳤다.

이제 5초 후에 우리는 게이트 내부에 들어선다.

나는 긴장을 끌어올렸다. 진입하자마자 습격이 시작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했으니, 바로 대응할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잠시 후.

풍경이 완전히 변했다.

애매하게 융합된 기형적인 배경은 완전히 사라지고, 아주 평범한 숲이 나타났다.

"······숲 지대?"

다행히 평범한 지형이다.

괜히 늪이나, 용암지대 같은 거 나오면 어쩌나 했는데.

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숲 지대에 대한 특성은 다들 알고 있······."

그러나 나는 끝까지 말을 이어 갈 수 없었다.

뭐, 적의 습격에 말이 끊겼다던가, 함정의 발동에 다급히 몸을 날렸다거나 하는 촉박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다들 어디 갔어?"

내 주위엔 아무도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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