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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3화 게이트 (2) >

내 능력··· 아니, 능력이라고 하기도 뭐한가.

아무튼 내 힘은 시스템의 법칙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점과 단점이 함께 존재하는 아주 특이한 힘.

뭐, 장단점이 극명하다곤 해도, 사실 따지고 보면 장점이 훨씬 크다.

아이템 착용 제한 무시부터 시작해서, 종족 특성의 획득, 종족 특성의 획득에 따른 완전 체화까지.

시스템이라는 편리한 힘을 사용할 수 없다는 크나큰 단점이 사소한 단점으로 보일 정도로, 거대한 이점이었다.

물론 좋은 점만 있었던 건 아니다.

내 힘은 시스템의 헛점을 노린 '시스템 에러'에서 파생된 일종의 버그다.

시스템에 발각되면 해당 버그 수정을 위한 자정작용이 발생하는 건 당연지사.

그 자정작용의 결과가 바로 128만 마력을 보유한 방출형 게이트, '백신 프로그램'의 출현이었다. 과장 하나도 안 보태고 그건 세계 멸망의 위기였다.

이렇듯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힘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이 힘에 대한 걸 파악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괜히 또 백신 프로그램 사태 같은 게 벌어지면 곤란하니까.

물론 지금까지 새로 알게 된 건 딱히 없었다.

아. 하나 있긴 하구나.

시스템에 기반한 보안 장치를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고 해제할 수 있다는 것.

몬스터 파크에서 백호의 목걸이형 구속구를 해제(연구원의 인증이 필요) 하기도 했고.

얼마 전에 레나의 봉인을 해제(수인족의 접촉이 필요) 하기도 했으니, 아마 확실할 거다.

근데 이건 결국 아이템 착용 제한 무시를 중점으로 확장된 규칙이라는 느낌이고, 아예 새로운 사용 방법이나 주의점이라고 보긴 뭐했다.

그래서 새로운 규칙은 없을 확률이 높다고, 기존의 주의점들만 잘 준수하면 된다고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아. 미치겠네."

그러나 오늘 생각치도 못한 새로운 규칙을 발견하게 됐다.

그것도 게이트에 관련된 아주 특수한 규칙을 말이다.

"······에반데."

나는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아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조금 전, 게이트 입장과 동시에 숲 지대가 보인 순간.

'아, 이 게이트는 랜덤 입장 설정이 걸려 있는 게이트구나.' 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런 게이트에 대한 건 많이 보고되기도 했으니,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내 착각이었다.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살폈다.

"흠. 그럼 역시 게이트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라는 말이군요."

피진호 교관님이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연구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래.

교관님들과 연구원들이 말이다.

"예. 마력 파동도 정상적이고, 아무런 문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럼 왜 강서율 사관생만 입장하지 못한 걸까요."

"그건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아시다시피, 게이트는 아직 분석이 완료되지 않은 분야기도 하고요."

"······그렇군요."

뿔뿔이 흩어져서 입장은 개뿔.

그냥 나 혼자 게이트에 진입하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숲 지대에 혼자 덩그러니 서 있었던 건, 게이트에서 튕겨나서 입장 지점에서 동떨어진 숲속 한복판에 떨어졌기 때문이었을 뿐.

숲을 수색함과 동시에 교관님을 만났을 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걸로 딱 감이 왔다.

'아, 게이트에 흩어져서 입장한 게 아니라 나만 입장에 실패한 거구나.' 하고.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큰 걱정은 안 했다.

단순히 연구원의 실수로 인해 변수가 발생한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게이트의 분석이 아직 완벽하지 않다는 걸 감안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네 번째 입장 시도를 해 볼까요?"

하지만 그것도 내 착각에 불과했다.

첫 번째는 우연이라고 칠 수 있다.

하지만 그 입장 실패가 두 번, 세 번으로 늘어난다면?

그건 절대 우연이 아니다.

필연이다.

"솔직히 추천하진 않습니다. 게이트를 여는 것도 돈입니다. 처음엔 저희 실수일 가능성이 농후하여 손해를 감수하고도 계속 시도를 해 봤습니다만······."

연구원들의 시선이 내게로 몰렸다.

"3번이나 실패했다면 그건 저희의 실수라기보단, 저 사관생이 특이하기 때문이라고 봐야겠죠."

"특이하다 하시면?"

"글쎄요. 많은 경우의 수가 있겠습니다만, 게이트에 입장할 수 없는 아주 특수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거나······. 비단 그런 특성이 아니더라도 차원 이동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거나. 그런 게 아닐까요?"

연구원의 말이 맞다.

내가 게이트에 입장하지 못한 건 연구원들의 탓이 아니라 내 탓이다.

게이트라는 시스템적인 요소가 시스템이 없는 나를 거절하고 있거나, 혹은 인지하지도 못하거나.

그런 게 아닐까 추측 중이다.

"······좋습니다. 4번째 시도는 하지 않겠습니다."

"좋은 판단이십니다."

한숨을 내쉰 피진호 교관님이 내게 다가왔다.

"강서율. 아쉽겠지만, 이번 훈련은 참여하기 힘들 것 같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내 게이트 체험 훈련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

"점수는······ 교관이 어떻게든 보충할 기회를 만들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도록."

내 표정이 꽤나 침울해 있기 때문일까. 피진호 교관이 내 등을 토닥이며 위로를 건넸다.

"예.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침울해하는 이유는 점수 때문이 아니다.

점수야 벌 방법은 많다.

지금 내가 걱정하는 건 이제 곧 벌어질 에피소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미치겠네.

다음에 일어날 대형 에피소드는 게이트 폭주.

그 에피소드를 앞두고 나는 게이트에 들어갈 수 없는 몸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쩌라는 거야 진짜.

내 계획이 송두리째 흔들린 순간이었다.

* * *

그날 밤.

「신지아」

[선조님은 그럼 게이트에 들어갈 수 없는 거예요?]

나는 지아, 시연이와 단톡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 아마도.]

아직 더 확인을 해 봐야 하긴 하겠지만, 높은 확률로 게이트엔 들어갈 수 없을 거다.

「하시연」

[근데 왜 못드가?]

왜긴.

시스템에 에러나서 게이트가 나를 거절하니까 그렇지.

[글쎄. 봉인의 후폭풍이 아닐까 싶은데.]

물론 정직하게 말할 수는 없으니, 적당히 둘러대기로 했다.

「신지아」

[(눈동자에 전구가 반짝이는 토끼 이모티콘)]

[그렇군요! 선조님이 사용 중인 봉인은 파계나 마신에게 존재를 숨기기 위한 이른바 은폐 술식....]

그냥 툭 던졌을 뿐인데, 지아가 내 거짓말에 알아서 뼈대를 잡고 살까지 붙이기 시작했다.

[신적인 존재들에게도 존재를 감추는 선조님의 최강 봉인식이니, 게이트가 인식하지 못하는 건 당연해요!]

[그, 그렇지.]

아니, 살을 붙이긴커녕 그 위에 옷을 입히고 코디네이트까지 하고 있다.

[그나저나 오늘 게이트 공략은 어땠어?]

나는 잽싸게 화제를 돌렸다.

거짓말이 길어지면 나중에 꼬리를 밟히는 법.

이런 건 대충 언급을 피하는 게 최선이다.

「신지아」

[네? 그... 별 거 없었어요.]

[연구원들이 훈련 목적으로 재구성한 게이트가 어려워봐야 얼마나 어렵겠어요.]

[(자신감을 뿜뿜하는 곰 이모티콘)]

생각보다 많이 쉬웠던 모양이다.

하기야, 매년 사망자가 나오는 훈련이긴 해도, 그건 난이도가 어려워서라기보단, '방심해서' 그런 거니까.

「하시연」

[ㅋㅋㅋㅋㅋ]

갑자기 시연이가 빵 터졌다.

[서율아.]

[저거 다 뻥이야.]

[지아 쟤 첨에 서율이 너 없다고 엄청 당황한 상태로 진행하다가 함정 밟고 몸개그 했어.]

[역대급 웃음벨.]

그 말에 지아가 바로 반응했다.

[야! 그건 비밀이라고 했잖아!]

[에이. 뭐 어때. 별 일 없었잖아.]

[아니이 그래도 선조님 앞에서 그런 말을]

[귀여웠어. 늪에 머리만 빠져서 아둥바둥대는 모습.]

[하면 미러 ᅡᆫㄹ이 ᅡᆫㄴㅇㄹㅎ어]

마지막 마구 쏟아낸 문자의 나열이 지아의 당황을 잘 나타내고 있었다.

왠지 얼굴을 붉힌 채 침대를 뒹굴뒹굴 구르고 있는 지아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시연이 너는 저번에 나랑 대전 중에 빙결여제 풀려서 미끄러져서 넘어졌잖아!]

[와. 비겁하게 그 얘기를 꺼내?]

[그럼 나도 지아 네가 저번에 멀티샷이라고 하면서 화살 열 발 걸고 뻘짓하던 거 말해도 되지?]

갑자기 폭로 대회가 펼쳐졌다.

뭔가 점점 열기가 더해지는 것 같아서, 나는 조용히 폰을 뒤집었다.

―그대여, 용무는 다 끝난 겐가?

내 허벅지에 머리를 기댄 채 소파에 누워서 금호를 만지작거리던 공주님이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일단은?

―음.

내 대답에 공주님은 상체를 들어 올려, 금호를 소파 한 구석에 내려두고 완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바로 훈련을 시작하도록 하지.

요즘은 나보다 공주님이 더 의욕이 넘친다.

나를 가르치면서 자기도 새로 느끼는 바가 있다고 하던가.

그 덕분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어찌 됐건 공주님도 점점 강해지고 있다.

나도 강해지고, 공주님도 강해지고. 일거양득이긴 한데······.

―미안. 오늘은 내가 좀 생각할 게 좀 많아. 훈련은 내일 하자.

오늘은 마법 단련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있다.

―······그런가? 그럼 어쩔 수 없겠구나.

공주님이 약간 시무룩해졌다.

그래도 어쩌겠어.

내가 게이트에 못 들어가는 몸이라는 걸 알게 된 이상, 다른 방법을 찾는 게 제일 급하다.

막말로 강해져 봐야, 내가 게이트를 들어가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 작전이 성립 자체가 안 된다.

―대신 토요일엔 밖에도 좀 나가고 하자. 집에만 있기도 답답하지?

―그대와 함께 나가는 겐가?

공주님이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금호랑 백호랑, 나랑. 넷이서.

―오오······.

공주님의 얼굴에 꽃이 활짝 피어났다. 그러나 곧 입을 꾹 다물고 컴컴 헛기침을 한다.

―음. 기대하고 있으마.

근엄한 듯, 아닌 듯.

오묘한 표정이다.

딱 보니까, 좋긴 엄청 좋은데 좋은 티를 안 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표정이다.

―그럼 고생하거라. 짐은 조용히 그대가 준 한국어 학습서나 보고 있겠도다.

공주님은 다시 소파에 앉아서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한국어 책을 펼쳤다.

나는 금세 책에 빠져든 공주님을 힐끔 바라본 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게이트 폭주를 어떻게 할지, 작전을 다시 짜야 한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내가 게이트에 들어갈 수 없는 몸이라는 걸 안 직후부터 약 3~4일간은 작전 재정립을 위해 책상 앞에만 앉아 있었고.

모든 작전의 정립을 마친 후로부턴 오로지 단련에만 몰두했다.

그렇게 쉴 새 없이 달리다 보니, 어느덧 게이트 대폭주 사건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원작에서 확실한 날짜에 대한 묘사는 없었기에 확신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 확신을 얻었다.

정확히 4일 남았다.

어떻게 확신했냐고?

그야 게이트 대폭주의 전조 현상이 방금 전에 발생했으니까.

―공주님. 집에 가만히 있어. 알겠지?

―음. 그리하겠다.

공주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호 너도 가만히 있고."

"냐앙."

백호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존재가 세계에 드러나면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럼 금호야. 가자."

내 말에 금호가 폴짝 뛰어 올라 내 품에 안겨 들었다.

"그럼 갔다올게."

나는 마지막으로 장비를 확인하고, 현관으로 나섰다.

"다녀오세요."

그간 발음이 상당히 좋아진 공주님이 한국어로 나를 배웅해줬다.

현관을 나서자, 가장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잿빛으로 물든 하늘이었다.

현재 시간은 토요일 오후 1시.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모노톤으로 빛나고 있었다.

"볼수록 기괴하네."

이게 바로 게이트 대폭주 현상의 전조 현상 중 하나다.

'그레이 아웃'

공간이 회색빛으로 물드는 현상이다.

그리고 그레이 아웃이 시작됐다는 건, 곧 두 번째 전조 현상이 발생한다는 말이다.

내 목적은 그 두 번째 전조 현상을 막는 것이다.

"금호야. 오늘 형 잘 좀 지켜 줘. 형 오늘 무기의 극의 빼고 싸울 거라 근접전이 많이 약하거든."

"냐앙!"

오늘은 '무기의 극의'를 빼고 '마나의 은혜'를 착용 중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오늘은 오로지 마법만을 사용할 계획이거든.

< 113화 게이트 (2) > 끝

< 114화 게이트 (3) >

강남역 인근의 번화가.

사람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을 주말의 번화가에는 웬일로 평소보다 사람이 적었다.

"야. 약속 미루자니까. 하늘 이런 거 안 보여?"

다름 아닌, 그레이 아웃 때문이었다. 대부분은 이 이상 현상에 집에 조용히 있는 것을 택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있다.

"에이. 협회에서 아무 마력 반응도 안 나왔다고 했잖아."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잖아."

"그리고 막말로 그레이 아웃? 이게 만약 위험한 현상이면, 서울 어디에 있던 똑같아. 해외로 도망갈 거 아니면."

한국을 중심으로 북한, 일본까지 뻗어나가 있는 기묘한 잿빛 하늘. 협회에서는 이 현상을 '그레이 아웃'이라고 이름붙였다.

"그렇긴 한데······."

"됐고. 가자. 시간 없어."

안전 불감증.

대부분의 시민들은 한국의 안전한 치안에 익숙해져서 사고의 위험에 무감각한 면이 있다.

"넌 너무 걱정이 많아서 탈이야. 서울 인근에 몰려 있는 길드만 몇 갠데, 설마 무슨 일 나겠어?"

"······그렇긴 하네."

그리고 안전 불감증은 때때로 크나큰 재해를 불러 오는 법이다.

칭, 칭!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흡사 거울이 깨지는 듯한 파열음.

"음? 무슨 소리 안 들렸어?"

"소리?"

쨍그랑! 캉!

"어? 진짜. 무슨 소리지?"

"거울 깨지는 소리···?"

그 파열음은 규칙적으로 울렸다.

"저, 저기!"

누군가가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친 것은 그때였다.

"게···게이트다!"

공간이 쩍 갈라져 있었다.

그것은 누가 봐도 명명백백한 게이트의 모습이었다.

모두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겨, 경보는? 게이트 경보 안 울렸잖아!"

"신고! 신고해!"

"시발! 전화가 안 가! 먹통이야!"

"뭐? 진짜잖아! 내 폰도 먹통이야!"

점점 그 크기를 늘려가는 게이트와 함께, 시민들의 불안도 증폭되어 갔다.

그때였다.

"창천 길드 소속 초인 이강현입니다! 지금부터 이 현장은 저희 창천 길드가 담당하겠습니다!"

"초, 초인!"

"살았어!"

패닉을 일으킨 시민들의 사이로 몇 명의 초인들이 내려앉았다.

강남 인근에 길드 본부가 있는 창천 길드 소속 초인들이었다.

"시민 여러분께서는 지금 즉시 지하의 벙커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소속 길드원이 안내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세 명의 초인이 따로 진영에서 빠져 나왔다.

"침착하십시오! 괜찮습니다!"

"저희 통제만 따라 주시면 모두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광경이 강남 시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온갖 초인들이 즉시 이상사태를 간파하고 현장에 뛰어 들어, 시민들의 대피를 촉구하고 있었다.

"길드장님! 근방의 시민들은 모두 유도를 마쳤습니다!"

시민들의 대피를 유도하는 길드들 중에는 당연히 '비혼 길드'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살피세요. 아직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길드원의 보고에 유화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5분 뒤면 게이트가 완전히 열릴 테니, 그 전엔 돌아오셔야 합니다."

"예! 다들 가자!"

다시금 모습을 감춘 길드원들을 뒤로한 채, 유화는 혼자서 상념에 빠져 있었다.

"······그레이 아웃."

그렇게 중얼거리며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역시나 전파가 잡히지 않는다. 인터넷도 마찬가지다. 이것 때문에 정부나 다른 길드들과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

'······현무의 전파 방해보다 상위의 개념.'

단순히 전파만을 차단하던 현무의 특성과는 다른 무언가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리라.

유화는 스마트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하늘을 올려다 봤다.

안 그래도 거대했던 게이트는 그 크기를 점점 키워 가고 있다.

'위험한데.'

생김새로 보아 일단 방출형 게이트라는 건 확실하다.

크기는 얼마 전에 열린 '재앙급 게이트'의 반의 반 정도.

단순히 크기만으로 봐도 25~30만 마력을 품고 있다 추측해 볼 수 있었다.

즉, 대형으로 분류되는 게이트라는 것이다.

'감시 센터와 연락이 닿으면 정확한 수치를 알 수 있을 텐데.'

설마 서울, 그것도 강남 한복판에서 통신에 문제가 생길 줄은 몰랐는데.

"······이게 그레이 아웃의 효과인가?"

게이트 출현 시의 전파 방해라던가. 그렇게 유화가 고민에 잠겨 있을 때였다.

치잉, 치이잉··· 카아앙!

균열에서 흘러나오던 파열음이 멎었다.

폭풍전야.

태풍이 오기 전의 고요함.

그것은 게이트가 오픈될 것임을 알리는 신호였다.

"벌써!"

유화의 동공이 동그랗게 커졌다.

게이트의 완성이 빨라도 너무 빠르다! 원래라면 5분은 더 지나야 오픈되어야 하는데!

그 순간, 하늘이 열렸다.

"도망가!"

"꺄아아악!"

거대한 허공의 균열에서 검은 이형의 존재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마치 파리 떼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나가듯, 사방팔방으로 뿜어져 나온다.

그중 일부가 유화가 서 있는 방면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검은 덩어리.

오물 뭉치라고 해야 할까.

"큭!"

유화는 즉시 마력을 끌어 올렸다. 다른 길드원들이 돌아오는 걸 기다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바로 '구현화'를 이용해서 사방에 마력의 무구를 띄워 올렸다.

그 순간, 유화의 동공이 떨렸다.

"······이건?"

마력의 유동이 평소보다 약하다. 대충 3할 정도. 위력도 그에 따라 3할 정도 약해졌다.

"설마!"

유화는 재빨리 능력치 창을 확인했다.

===

[유 화]

[개인 프로필]

[능력치]

[스킬]

[특성 및 스킬]

===

그중 능력치를 선택.

===

[전투 능력치]

[비전투 능력치]

===

그중에서도 전투 능력치만을 오픈했다.

===

[근력] B랭크(47/99)

[민첩] B랭크(71/99)

[체력] A랭크(37/99)

[마력] S랭크(57/99)

[감각] A랭크(87/99)

===

여기까진 평소와 똑같았다.

하지만 맨 마지막 항목이 문제였다.

===

간파: 정체불명의 디버프에 걸려 있음. 모든 능력치가 3할 하락.

===

"······정체불명의 디버프?"

간파.

유화가 지닌 확장 특성 중 하나로, 자신의 신체에 작용하는 버프 및 디버프를 가시화하여 볼 수 있는 능력이다.

지금까지 이 간파 덕분에 몇 번이나 위기를 넘겼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더 공포스럽다.

그 간파조차 꿰뚫어 보지 못하는 정체불명의 디버프라니.

'대체 무슨 일이······.'

그러나 생각을 이어 갈 시간이 없었다.

"······!"

쿠와아아아!

지상으로 강습하던 검은 오물들이 가시권에 들어 온 것이다.

"언데드!"

언데드의 덩어리.

절로 혐오감이 치솟는 역겨운 외견의 언데드들이 몇 십, 몇 백 체가 뭉쳐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파아아앙!

다음 순간, 최초의 덩어리가 지상에 떨어져 내렸다.

살점이 바닥에 부딪쳐 짓눌리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실제로 좀비로 보이는 이형의 존재들이 바닥에 찌부러져 짓눌리는 소리였다.

"······1/3정도는 완충제라는 거구나."

불행 중 다행이다.

유화는 다시금 마력을 끌어 올렸다.

다행히 이런 대규모 소탕전은 유화의 특기 중의 특기다.

쒜에엑!

유화는 구현화로 만든 무구를 언데드의 군세를 향해 일제히 쏘았다.

푸욱! 파하악!

언데드의 군세는 유화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쓸려나갔다.

한 자루의 검이 열 마리의 언데드를 꿰뚫었다.

나무도 이것보단 단단하지 않을까.

'······약해.'

모든 능력치가 3할이나 줄어 든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쉽게 죽을 줄은 몰랐다.

'이게 30만 마력의 방출형 게이트라고?'

그냥 크기만 거대한 쭉정이 게이트인가?

그렇게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을 때였다.

쿠워어어어-!

돌연 바닥에 격돌하여 완전히 짓뭉개진 언데드들이 원래의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재생 능력?"

마치 시간을 되감기라도 하듯, 아주 천천히 본연의 형태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구워어어어.

가아아악!

유화의 무구 세례에 넝마가 되어버린 언데드들도 아주 천천히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예외는 없었다.

머리가 박살났건, 심장을 뚫렸건, 신체가 토막났건.

빠르건 늦건 원래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힘이 아니라 재생력에 모든 마력을 쏟아 부은 게이트라는 거네.'

완충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 1/3의 녀석들도 꿈틀거리며 피웅덩이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애초부터 병력의 손실은 없던 것.

유화가 입술을 짓씹고 다시금 마력의 무구를 소사했다.

'······내 마력이 남아 있는 사이에 지원군이 도착하면 좋겠는데.'

이러한 광경이 강남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 * *

"······후우."

유화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직 15분밖에 안 됐는데, 벌써 전신에 땀이 흥건하다.

'마력의 소모가 평소보다 훨씬 커.'

마력은 물론이고, 감각을 비롯한 다른 비전투 능력치까지 깎인 건 제법 뼈아팠다.

평소보다 약해진 힘으로, 평소처럼 싸우려고 하니 컨트롤이 조금씩 흔들렸다.

그 결과 구현화의 사용이 평소보다 조잡했고, 그에 따라 마력의 소모도 극심했다.

"좀 쓰러져라! 이 오물들아!"

반면 언데드 군단은 한 마리도 줄지 않았다. 쓰러트려도 쓰러트려도 계속해서 재생하는 언데드들에게 질려 버릴 정도다.

'위험해.'

버티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인간의 체력과 마력은 유한하니까.

'도망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도망갈 수도 없다.

초인으로서, 이러한 이형의 몬스터를 두고 도망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유화가 할 수 있는 것은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티는 것밖에 없었다.

'······애초에 지원이 온다고 해도 이 불사의 군단을 어떻게 할 방법이 있을까?'

살아생전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재생력을 지닌 몬스터는 처음 봤다.

'한쪽 발만 남겨도, 거기부터 스멀스멀 재생하고.'

유화는 마력의 무구를 쏘아내며 이를 꽉 깨물었다.

'대체 어쩌라는 거야!'

그렇게 속으로 분개하고 있을 때였다.

후우우웅-!

하늘에서 흡사 운석이라도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설마 지원!"

유화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검은 덩어리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조금 전 떨어져 내린 오물 덩어리들보다 3배는 더 크다.

"······말도 안 돼."

심지어 이번엔 언데드가 군집해서 떨어지는 게 아니다.

한 마리다. 멀리서도 훤히 보이는 그 혐오스런 외형만 봐도 알 수 있다. 유화도 알 정도로 유명한 언데드 몬스터.

"시체 수집가······?"

시체를 수집해 그 몸집을 늘려 나가는 최악의 몬스터로, 생명체를 삼킬수록 강함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특성을 지녔다.

그런 놈이 다섯 마리나 시가지 곳곳을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유화가 입술을 짓씹었다.

'······눈앞에는 불사의 군단. 하늘에선 시체 수집가. 여기에 내 능력치는 30% 다운.'

거기에 통신은 두절되어, 다른 곳의 상황도 모른다.

악재가 겹치고 겹쳤다.

'어쩌면 좋지? 어떻게 해야······.'

이윽고 유화의 입술에서 핏물이 주르륵 흘렀다.

'······방법이 없어.'

그렇게 꽉 쥔 주먹에서도 핏줄기가 주르륵 흘러 나왔을 때였다.

화르르르르륵-!

"꺅!"

돌연 전방에 거대한 화염의 기둥이 솟아올랐다.

모든 것을 불사르겠다는 듯이, 하늘 높이 솟구치는 새하얀 불기둥.

그것은 대기를 꿰뚫던 유화의 마력 검까지 모조리 태워 버리고 있었다.

구워어어어!!

그 불기둥의 중심지에 있던 불사의 군세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재생을······ 안 해?"

그렇게 불타 잿더미가 된 군세들은 두 번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

"설마······."

화 속성이 약점인가?

그렇게 눈을 부릅떴을 때였다.

화르륵!!

콰아앙-!

두 개의 불기둥이 추가로 솟아올랐다.

마찬가지로 조금 전과 비슷한 굵기와 높이의 불기둥. 그것이 불사의 군세만을 정확히 불살라 버렸다.

열풍만으로 입간판이 날아갈 정도의 화력. 그 압도적인 화력에 넋이 나갔다.

"······불의 마녀?"

세계 초인 랭킹 5위.

불의 마녀.

그녀가 이곳에 있기라도 한 건가?

"아니야."

불의 마녀가 이곳에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불의 마녀의 화염은 이렇게 하얀빛을 띠지 않는다.

"······!"

유화의 동공이 한껏 확장되었다. 하얀 화염이라면 분명······.

"미안해요. 마력 증폭 마법진 설치가 생각보다 더 오래 걸렸어요."

그 순간.

유화의 바로 뒤에서 익숙한 남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중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

"그래도 뭐, 늦진 않은 것 같네요."

유화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서율 씨! 대체 무슨 일······이?"

순간적으로 강서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강서율의 등에는 세 쌍의 화익(火翼)이 일렁이고 있었다.

두 눈은 태양처럼 빛났고, 검은 머리칼은 시뻘건 적색으로 변해 있었다.

오른손에는 '천변' 고유의 패턴을 지닌 지팡이를 들고 있었고.

왼손에는 유화가 선물한 '마나의 은혜'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피진호가 선물한 특이한 형태의 목걸이 대신, 붉은 보석이 매력적인 목걸이가 눈에 확 띄었다.

"이프리트의 축복?"

콜렉터에게 받아 강서율에게 전달한 '정령족의 고대 유물' '이프리트의 축복'.

분명 그 효과는······.

"네. 정령 빙의입니다."

강서율이 씨익 웃으며 한쪽 발로 바닥을 쿵! 박찼다.

다음 순간.

피이이이이잉-!

카앙!

강서율을 중심으로 거대한 마법진이 빛났다.

강서율 명명.

공주님식 고대 마법 증폭 마법진.

그것이 주변을 뒤덮을 기세로 끝없이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 114화 게이트 (3) > 끝

< 115화 게이트 (4) >

이프리트의 축복.

콜렉터에게 양도 받은 두 개의 고대 유물 중 하나로, 불의 정령의 힘이 깃들어 있는 목걸이다.

악세사리인지라, 성능 자체는 그리 뛰어나지 않지만.

지니고 있는 고유 능력이 자못 사기적이다.

[정령 빙의]

내 몸에 상급 정령을 빙의시켜, 친화력을 상급 정령에 가깝게 끌어내는 아이템이다. 중~하급 정령들을 위해 이프리트가 만든 것이라 한다.

이 효과로 인해 나는 '상급 정령'에 한없이 가까운 친화력을 얻었다.

정령 빙의로 마력도 크게 증가하여 현재 내 마력은 A랭크다.

여기에 추가로 공주님에게 전수받은 고대의 마법 증폭 마법진을 사전에 설치해 두고 왔다.

일회용 마법식으로, 이 마법진의 위에서 사전에 정해둔 마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마법 피해를 극적으로 증폭시킬 수 있는 효과를 지녔다.

······이게 생각보다 설치가 어려워서 오래 걸렸다.

시체 수집가가 떨어지기 전에 완성해서 망정이지. 어휴.

피이이이잉-!

나는 끝없이 뻗어 나가는 마법진을 바라보았다. 이제 슬슬 완성이다.

"서율··· 씨?"

힐끔 옆을 돌아보자, 유화의 한껏 당황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내 모습이 꽤나 당혹스런 모양이다.

내가 고대 유물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사전에 말했는데 말이지. 하기야, 듣는 거랑 직접 보는 건 다른 법이니까.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합시다. 시간이 촉박하거든요."

이프리트의 축복을 손에 쥔 지 벌써 20초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 남은 시간은 40초.

설명할 시간이 없다.

캉-!

마침내 마법진이 확장을 멈추었다.

준비 완료.

"그럼 갑니다. 준비하세요."

그 순간, 내 마력이 용솟음쳤다.

붉고, 하얀 마력의 융화.

그 아름다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넋이 나갈 뻔했다.

"잠시만요! 뭐하시려고요?"

"쏟아져 나온 언데드의 군세들을 모조리 소탕할 겁니다."

유화가 당황한 듯 헛숨을 들이켰다.

"말도 안 돼요! 이 넓은 지형을 모조리 커버할 수 있는 마법이 존재할 리가 없어요!"

묘하게 떨리는 음성이다.

"가령 그런 마법을 쓸 수 있다고 쳐도, 이곳은 시가지예요! 아직 피난하지 못한 시민들이 있다면······."

"알아요."

나는 유화의 말을 끊었다.

"다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

유화가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즉시 눈을 감았다.

범위는 사전에 파악해 두었다.

상급 정령에 준하는 친화력을 얻은 현재, 내 화염 마법의 위력은 약 2배가량 상승했다.

추가로 마법 소모량도 6할 가량 감소.

나는 마력을 모조리 땅으로 쏟아 부었다.

마력 부스트로 A랭크의 마력을 모조리 쏟아 붓는다.

화르르르륵-!

위력은 증가하고, 소모량은 감소하여 효율이 올라간 데 더불어.

파앗!

마법 증폭 마법식 덕분에 추가로 위력이 증폭되어 간다.

"세···세상에."

그 압도적인 마력의 폭류를 느낀 듯, 유화가 말을 더듬었다.

이윽고 내 등 뒤의 날개마저도 사그라들어, 한 줌의 마력으로 지면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내가 서 있는 대지가 마그마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후우······."

이걸로 남은 시간은 10초.

나는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한 뒤에, 두 눈을 떴다.

화르륵-!

"꺄아악!"

그 순간, 나를 중심으로 화염이 솟구쳤다. 적백의 화염. 그것이 세상 넓은 줄 모르고 끝없이 뻗어 나갔다.

모든 것을 태워 버리겠다는 듯 세를 늘려갔다.

그 불길에 닿은 언데드의 군세는 1초면 피부가 그을리고,

2초면 썩어 문드러진 장기가 드러나며,

3초면 전신이 잿더미로 화해 하늘을 날았다.

"성공."

작렬하는 대지.

공주님에게 전수받은 상급 화염 마법.

그것이 정령족의 '친화력'과 '마법 증폭 마법진'을 만나 폭발적인 시너지를 이루었다.

범위에 초점을 두었기에, 결코 화력이 강한 건 아니다.

허나 언데드 군세의 약점은 화염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아, 안 뜨거워···?"

유화가 떨리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자신의 주위에 일렁이는 적백의 화염을 확인하며 의아함을 표출하고 있었다.

"정령의 불길은 제가 태우고 싶은 것만을 정확하게 태웁니다."

그것이 생명이건, 무생물이건, 마력이건 말이다.

"······언데드만을 태우는 불길이라는 건가요?"

"예."

이것이 내 마스터 플랜이다.

이 언데드 게이트는 원작에서 크나큰 피해를 입혔다.

불사의 군세와 시체 수집가의 조합은 이들의 약점인 성 속성 마법과 화 속성 마법 없이는 처리하기 힘드니까.

그 일로 수십만의 시민들이 사망했으며, 강남에 적을 둔 길드와 초인들이 6할 이상 사망하게 된다.

초인들이 대거 사망했으니, 이후 발생한 게이트 대폭주를 막기도 힘들었다.

내 목적은 초인들의 쓸데없는 죽음을 막는 것이었다.

4일 후에 있을 게이트 대폭주를 막기 위해서, 그들은 절대 여기서 죽어선 안 된다.

그 순간, 작렬하는 대지가 확장을 멈췄다. 강남 전역을 모두 뒤덮은 것이리라.

······다행히 작전은 성공한 듯하다.

핑-

"서, 서율 씨!?"

안심한 찰나, 머리에 어지럼증이 돌았다. 마력의 과다 사용 때문인가.

쓰러지는 내 몸을 유화가 자신의 몸으로 받았다.

파지지직-!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고대 유물의 사용 시간마저 종료되었다.

힘찬 스파크와 함께.

[Error! Error! Unkwon Error!]

에러 메시지가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나는 필사적으로 고통을 참으며, '이프리트의 축복'을 목에서 빼고 '장인의 간이 대장간' 안에 넣어 버렸다.

"서율 씨! 정신 차려 봐요! 서율 씨. 서율······!"

그게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익숙한 비혼 길드 길드장실의 풍경과, 능글맞게 웃고 있는 메이든,

"일어났냐."

그리고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유화의 표정이었다.

"그···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세요?"

"아, 네. 괜찮습니다."

마력 탈진으로 쓰러진 것뿐이라, 별 문제는 없다.

나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고생했어. 꼬맹이 아니었으면 우리 화, 언데드 밥이 될 뻔했어."

"······언니, 그게 고생하고 온 동생한테 할 말이에요?"

유화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메이든이 깔깔 웃으며 유화의 어깨를 상냥하게 토닥였다.

"농담이야 짜샤. 무사해서 다행이다."

그리곤 세상 진지한 얼굴로 유화를 껴안았다.

"언니······."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

"왜 꼬맹이? 너도 안아 줘? 칭찬도 할 겸?"

그런 내 시선에 눈치 챈 메이든이 금세 장난스런 얼굴로 변했다.

"······그건 좀."

"어어? 이 꼬맹이 봐라? 늙은 아줌마의 포옹은 받고 싶지 않으시다?"

메이든이 유화에게서 몸을 떼고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아뇨 그건 아닌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서 그런 것뿐이다.

"됐다. 됐어. 에휴. 이거 늙은이는 서러워서 살겠나."

메이든이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누가 봐도 장난스런 미소였다.

여기서 괜히 반응하면 더 신나서 날뛸 테니, 그냥 조용히 무표정으로 있기로 했다.

그러자 침묵을 뚫고 유화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언니······. 장난은 적당히 치세요. 서율 씨 당황하잖아요."

별로 당황 안 했는데?

"당황은 개뿔. 이놈 이거 지금 재롱잔치 하는 조카 보는 눈으로 날 보고 있는 거 안 보여?"

메이든이 코웃음을 쳤다.

"됐다. 아서라. 얘는 놀리는 맛이 없어요. 놀리는 맛이."

마지막으로 혀를 차고는 다시 자리에 돌아가 소파에 몸을 쭈욱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되다뇨?"

"그레이 아웃은 뭐고, 오늘 열린 게이트는 또 뭐냐고."

메이든이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

"하. 이놈 봐라. 누굴 빙다리 핫바지로 보나."

메이든이 입꼬리를 한쪽만 들어 올렸다.

"임마. 내가 너를 모르냐? 그 타이밍에 나타나서 고대 유물까지 썼으면 말 다한 거 아니냐? 그리고······."

메이든이 고개를 치켜 올리며 콧방귀를 꼈다.

"지금 네 표정에 써 있거든. 나는 모든 걸 알고 있어요~ 하고."

"······하하."

역시 티가 난 모양이다.

"그니까 괜히 서로 피곤하게 돌려 말하지 말고 본론으로 가자고.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근데 뭐, 애초에 숨길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표정 관리를 안 한 것뿐이니까.

"일단 말하기 전에 당부해 둘 게 있어요. 먼저 어떻게 알고 있냐고는 묻지 말아 주세요."

"오냐. 안 물으마."

"그리고 이 일은 두 분만 알고 계셔야 합니다."

"당연하지."

"네. 물론이죠."

두 명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또 있어? 몇 개나 있는 거야?"

메이든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마지막이에요."

나는 싱긋 웃었다.

"제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말을 하더라도, 꼭 믿어 주셔야 합니다."

* * *

강서율이 떠난 뒤.

둘만 남은 메이든과 유화는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딱, 딱,

메이든이 손톱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울렸다. 둘 다 강서율의 말을 곱씹느라 정신이 없었다.

"······화야."

메이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

"어떻게 생각하냐?"

"······솔직히 믿기 힘드네요. 만약 서율 씨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런 얘기를 했으면 곧바로 쫒아냈을 거예요."

유화가 한숨을 쉬었다.

"언니는요?"

"똑같지 뭐. 아무리 그 꼬맹이의 말이라고 해도 쉽게 믿기 힘든 얘기였으니까."

메이든도 한숨을 쉬었다.

"4일 뒤, 한국 전역에 수십 개의 게이트가 아무런 전조도 없이 동시에 오픈될 거라는 말을, 그리 쉽게 믿긴 힘들지 않겠어?"

"그쵸······."

강서율의 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충격이라기보단 뜬금없었다 해야 할까.

아니, 게이트의 오픈을 예지하는 것 자체만 해도 놀라운 일인데, 그 게이트가 수십 개가 동시에 열린단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믿기 힘든 말이었다.

"이번 일은 진리의 구명자와 관련된 일도 아닌 것 같고."

진리의 구명자에 한해선 100%에 가까운 정보력을 지닌 강서율이지만, 이번 일은 아무리 봐도 진리의 구명자와는 관계가 없는 듯했다.

"네. 제아무리 진리의 구명자 놈들이라고 해도, 게이트를 조종할 수 있는 기술력까진 지니지 못했을 테니까요."

게이트에 대한 건 아직 완벽히 밝혀진 바가 없다. 딱 어정쩡하게 재현만 가능한 정도. 그게 다다. 그런 미지의 개념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통제하고 사용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놈들이 그런 기술력을 지녔다면 인류는 한참 전에 멸망했을 거야."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렇다고 안 믿기도 뭐하단 말이지."

"예. 서율 씨가 지금까지 보여 준 모습이 모습이니까요."

그렇다고 마냥 강서율의 망상이라 치부하기도 뭐했다.

그는 신뢰해 마땅한 인물이니까.

"그레이 아웃이 게이트 오픈과 동조하여 마력을 일그러트리는 효과를 지닌 현상이라는 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고."

"예. 그 일그러짐이 신체에 부조를 불러 일으켜, 대략 3할 가량의 능력치를 감소시킨다는 말도 일리가 있었어요. 실제로 딱 3할의 능력치가 감소했고요."

"쓰읍. 어렵다. 어려워."

하지만 강서율의 부탁은 그저 증거도 없이 강서율의 말 한 마디만 믿고 들어 줄 만큼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아. 미치겠네. 좀 쉬운 부탁이면 그러려니 하고 들어 주겠는데······."

메이든이 답답한 듯 자신의 머리를 마구 흩트렸다.

"4일 뒤에 '마스터'를 한국으로 불러 달라고?"

초인명. 마스터.

본명 카리브마 네리스타.

세계 최고의 길드 'The One'의 길드장.

강서율은 메이든에게 그를 한국으로 불러 달라 요구했다.

"말은 쉽지 아주."

세계 초인 랭킹 1위에 집계되어 있는 최강의 남자를 타국으로 부르는 게 쉬운 일인 줄 아나.

"언니라면 부를 순 있지 않아요?"

"부를 순 있지. 부를 순 있는데······."

메이든이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었다.

"아오."

* * *

집에 도착하자, 금호와 공주님이 나를 반겼다.

―왔느냐. 어찌, 계획에 큰 문제는 없었는고.

―그럼. 계획대로 깔끔하게 처리하고 왔지.

나는 공주님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공주의 머리를 만지는 건 무례한 행위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겠느냐.

―미안. 나도 모르게.

―······다음부터 주의하거라. 아니면 적어도 머리의 결을 따라 훑으란 말이다.

―그럴게.

처음엔 격렬히 반항하던 공주님이었으나, 요즘 들어 순순히 머리를 내주고 있다.

포기한 건지, 익숙해진 건지.

나야 이득이다만.

공주님의 머리결은 금백호의 털결과 다른 매력이 있거든.

"냐앙."

금호가 내 발치에 달라붙어 애교를 부렸다.

"옳지. 우리 금호."

나는 금호를 품 안에 들어 올렸다.

"아까 마법진 설치 마치고, 잘 돌아갔어?"

"냐앙!"

금호가 귀를 쫑긋 세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금호의 도움을 받아 마법진의 설치를 마친 후.

금호가 주위에 있으면 괜히 정체를 들킬 가능성이 클 것 같아서 조용히 먼저 돌려보냈다.

조금 걱정은 됐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카메라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있지 뭐냐. 깜짝 놀랐다.

―내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거든.

나는 금호를 다시 쓰다듬었다.

―백냥이는?

―잔다.

―요즘 너무 오래 자는 거 아냐? 하루에 얼마나 자?

―음. 하루에 20시간은 자는 것 같더구나.

―그래?

금호보다 쑥쑥 크려고 그러나.

되게 많이 자네.

―그대여. 언제까지 현관에 서 있을 겐가.

―아. 미안. 들어가자.

나는 장비를 적당히 풀어 헤쳤다. 먼저 신발을 벗고, 갑옷을 벗은 뒤, 마지막으로 손에 착용중인 장갑까지 벗어 던졌다.

―음?

그 순간, 공주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대여. 그 손등의 문신······.

내 손등에는 '불의 정령'임을 나타내는 문신이 다시금 새겨져 있었다.

맞다. 나 이프리트의 축복을 사용한 것으로 특성의 획득과 함께 다시 문신이 생겼지.

실수다.

―음.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

그냥 패션으로 새긴 문신이라고 할까?

순수한 공주님이니까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것 같은데.

좋아. 쉽게 가자.

―이거 그냥 별 거 아닌 패션 문······.

그렇게 변명하려 할 때였다.

―그 형태. 아담의 성흔인가?

―······뭐?

아담의 뭐?

< 115화 게이트 (4) > 끝

< 116화 전환점 (1) >

신지아는 자신의 방에서 강서율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럼 역시 게이트를 처리한 건 선조님이었다는 거네요?"

―맞아.

화염 마법이기에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뭐래?"

맞은편 소파에 앉아서 차를 마시던 하시연이 넌지시 물었다.

신지아는 폰의 마이크 부분을 손으로 살짝 가리고 답했다.

"선조님이 처리하신 거래."

"오오."

하시연이 입을 오므리고 감탄했다.

―옆에 누구 있어?

"네? 아, 네. 시연이요. 오늘 저희 집에서 훈련을 같이 하기로 했었거든요."

―그럼 오늘 너희 집에서 자고 가기로 한 거야?

"네."

현재 시간은 오후 11시 20분.

돌아가긴 늦은 시간이다.

"게이트 때문에 어수선하기도 하고요.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자고 가라고 했어요."

―잘했어.

강서율의 나긋한 칭찬에 신지아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아마 꼬리가 있었다면 마구 흔들리고 있었을 것이다.

"지아야. 오늘 게이트가 열린 건에 대해서 물어봐."

"아, 응."

그레이 아웃과 게이트 오픈.

강서율은 이 사태를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일까.

"선조님. 그······ 이번 일 있잖아요. 혹시 사전에 알고 계셨어요?"

반신반의였다.

그냥 이 갑작스런 사태를 처리한 게 강서율이기에, 그럴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싶었을 뿐.

―맞아. 알고 있었어.

"아······."

강서율은 시원하게 긍정했다.

"알고 있었대?"

"······응."

두 여성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알고 있었으면 우리한테도 말 해 주지······."

씁쓸했다.

결국 자신들은 중요한 순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서운함을 표출했다.

―지금 시연이 입술 삐죽이고 있지?

"네?"

―서운한 티 팍팍 내면서 왜 말 안 해 준 거야······. 이러고 있을 거 같은데. 아냐?

"그······."

―지아 너도 내심 서운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고.

"아니에요! 제가 감히 어떻게 선조님한테······."

신지아가 소리를 높였다.

―그럼 다행이고. 시연이한테도 너무 서운해하지 말라고 전해 줘.

"네에."

―그냥 미리 말할 걸 그랬네. 너무 허무맹랑한 말이라, 일단 말을 아낀 거였는데.

강서율이 이번 일을 유화와 메이든에게도. 신지아와 하시연에게도 사전에 말하지 않은 이유는 더욱 확실하게 신뢰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레이 아웃 전에 말하는 것과 그레이 아웃 후에 말하는 것에는 신뢰라는 면에서 큰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으니까.

그 외에도 최초의 게이트는 혼자서도 잘 처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도 했고.

"선조님. 확실히 말씀 드릴게요. 저는 선조님이 내일 세계가 멸망한다고 해도 믿을 수 있어요."

―그, 그래?

강서율의 음성이 살짝 떨렸다.

지아의 믿음이 너무 무겁다.

―그럼 그 말을 믿고 이번엔 미리 말할게.

"네?"

―옆에 시연이 있으면 시연이도 들을 수 있게 스피커 모드로 해 줄래? 두 번 설명하기 귀찮으니까.

"아, 넵. 알겠습니다!"

신지아는 신속하게 폰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원거리 통화 모드를 설정했다.

―아아. 들리지?

"네."

"잘 들려~"

두 명이 동시에 답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강서율이 진지한 톤으로 말했다.

―정확히 4일 뒤. 한국 전역에 수십 개의 게이트가 동시에 열릴 거야.

두 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 *

지아, 시연이와 전화를 마치고.

나는 다시 거실로 나왔다.

―연락은 다 끝났는가.

―어.

공주님은 금호와 놀고 있었다.

고양이용 장난감을 몇 개 사 줬더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잘 놀더라.

금호도 진심으로 공주님을 따르는 모양이고. 아마 수인족 특유의 동물 친화력 덕분이겠지.

애초에 금호는 수인족의 수호자이기도 하고.

―그보다 공주님. 아까 했던 얘기 말인데.

―음?

공주님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나를 올려다본다.

'무슨 얘기를 했던가?'라고 말하는 듯했다.

나는 손등을 들어 공주님에게 보이며 말했다.

―이거. 아담의 성흔이라고 했잖아.

―아하.

조금 전, 공주님이 내 손등의 '불의 정령 문신'을 보고 '아담의 성흔'이라는 말을 했다.

그게 뭔지 물어보려 했으나, 그 순간 지아에게 전화가 와서 일단 뒤로 미뤄 둔 상태였다.

―아담의 성흔에 대해 설명하려면, 세계의 탄생 신화에 대한 얘기부터 해야 하는데······. 탄생 신화에 대한 건 알고 있느냐?

―처음 들어.

뭐야 그게.

―그럼 천천히 설명해야겠구나.

"냐앙?"

공주님이 장난감을 내리고, 금호를 품에 안은 채 나를 향해 완전히 몸을 돌렸다.

―무(無)에 가까웠던 이 세계에 최초의 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주님은 손자에게 구전동화를 설명하는 것마냥, 조곤조곤하게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는 가장 먼저 생명의 근원인 바다를 만들었다. 그리고 땅을 만들고, 하늘을 만들었다. 세계에 생명을 불어 넣은 게지.

시작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신화의 서두 같았다.

―기반을 다지는 걸 마친 신은 다음으로 생명체를 만들기로 했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신은 무사히 생명체들을 세계에 정착시키는 데 성공했다.

식물, 동물, 곤충.

세계엔 생명이 끓어 넘치기 시작했다.

―신이 그 다음으로 만들기 시작한 것은 지성체들이었다. 자신과 똑같이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회적 존재들을 말이다.

공주님이 금호의 앞발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끌었다.

―그러나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일반적인 생명체들을 만드는 것과, 자신과 똑같은 사고력을 지닌 지성체를 만드는 것.

후자가 어려운 건 당연했다.

―수십 번의 시행착오를 거쳤으나, 그는 번번히 실패했다. 그리고 백 번의 시도 끝에. 그는 방법을 찾았다.

신이 찾은 방법.

―자신의 힘을 조금씩 떼어내서 형태로 만들기로 한 게지.

공주님이 내 손을 잡았다.

―그 힘은 이내 수십 개의 형태를 이루었다. 어떤 것은 용이 됐고, 어떤 것은 난쟁이가 됐으며, 어떤 것은 동물의 형상을 이루었다.

그리곤 손등의 문신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그중에는 네 가지 원소가 형태를 이룬 것도 있었지.

불, 물, 바람, 땅.

4대 정령.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아담의 성흔'.

공주님이 내 손을 살포시 놓았다.

―아직 형태를 갖추지 아니한 힘, 말하자면 해당 종족의 원류이니라.

* * *

그날 새벽.

나는 옆 방에서 금백호를 껴안고 잠든 공주님을 한번 확인한 뒤.

거실을 지나 테라스로 나왔다.

"아담의 성흔이라······."

나는 내 손등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려 바라봤다.

수많은 별들을 배경으로 보이는 정령의 문신. 불의 정령임에도 녹색이라니, 상당히 언밸런스하다.

"그런 신화 속 성흔이 왜 내 몸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온다.

공주님은 말했다.

일단 비슷한 형태라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리긴 했는데, 아마 아담의 성흔은 아닐 거라고. 애초에 그건 신화 속에 등장하는 설화일 뿐이라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이러한 신화는 대다수가 허구니까.

"하지만······."

만약 이게 진짜 아담의 성흔이라면?

공주님은 말했다.

아담의 성흔은 한 '신'이 자신의 힘을 떼어 내서 만든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나를 이 세계로 보낸 것은 다름아닌 김 '신'. 실제로 나를 다른 세계로 보낼 정도의 힘을 가진 초자연적인 존재다.

"말은 돼."

나를 이 세계에 날려 보낸 신이 형(창조신)이, 내 몸에 '아담의 성흔(창조신의 힘)'을 새겼다.

충분히 말은 된다.

또한, '아담의 성흔'이 모든 종족의 원류라면.

이 성흔에서 해당 종족의 특성을 획득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종족 제한 아이템을 획득한 뒤에 성흔을 얻는 건, 조금 의아하긴 한데.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들이 딱딱 들어맞는다.

다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진짜 그 형은 대체 목적이 뭐야?"

신이 형이 나를 자신의 소설 속 세계로 보낸 이유가 대체 뭘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생각하곤 하지만, 그 이유를 도저히 모르겠다.

* * *

다음날.

그레이 아웃에 대한 게 해결되기 전까지는 학교에 나오지 말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좋아."

이유는 조금 다르지만, 원작처럼 휴교령이 떨어졌다.

지금쯤 정부 및 업계의 탑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고 있을 거다. 이 첫 회의로 국가 위기 상황이 선포되면 좋겠지만, 아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다.

정부가 고작 게이트 하나 열렸다고 5천만 시민들을 대피시킨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리가 없다.

경보가 울리지 않았건, 통신망이 끊어졌건,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으니까.

원작처럼 피해가 극심하면 모를까. 이번엔 십중팔구 탁상공론이 펼쳐지고 있을 테지.

유화가 회의를 들으며 속으로 짜증을 참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오늘 두 번째 게이트가 또다시 경보를 무시하고 오픈되면, 정부도 그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일 수밖에 없을 테니 상관없다.

―그대여. 오늘 열린다던 게이트는 그냥 놔둘 생각인가?

―어. 어차피 소형이라 내가 나서지 않아도 다른 초인들이 알아서 처리할 거야.

오늘 밤을 기점으로 계속해서 경보에 잡히지 않는 게이트가 열릴 테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모두 마력 1만~2만 내외의 소형 방출형 게이트다.

굳이 내가 나설 필요도 없다.

―그럼 오늘은 하루 종일 같이 있는 겐가?

공주님의 귀가 쫑긋 섰다.

두 눈에서 별빛이 쏟아지는 듯한 환영이 보였다.

―그, 잠시 나갔다 오긴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런가? 그럼 어쩔 수 없구나.

순식간에 귀가 추욱 처졌다.

누가 봐도 시무룩한 표정이다.

―얼마 안 걸릴 거야.

―얼마 안 걸린다 하면······ 10분 정도인가?

그건 짧아도 너무 짧잖아.

―대충 2~3시간?

공주님이 품 안의 금호를 쓰다듬으며 애처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점심은 짐 혼자서 먹어야겠구나.

현재 시간은 11시 30분.

3시간 후면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다. 이 공주님, 혼자 밥을 먹는 걸 굉장히 싫어한다.

―아무튼 알겠다. 다녀오거라.

공주님이 다시 근엄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누가 봐도 억지로 짓는 표정이다.

조금 마음이 아프긴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서.

―금방 갔다 올게.

나는 현관으로 향했다.

그런 날 배웅해 주러 공주님과 두 호냥이가 따라왔다.

―으음······. 그 하시연이라는 아이가 이럴 때 쓰면 된다고 했던 말이 있었는데······.

신발을 신는 나를 보며 공주님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시연이가 무슨 말을 알려 준 모양이다.

―아!

공주님이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탄성을 내지름과 동시에 외쳤다.

"올 때 메루나!"

"······."

올 때 메로나.

한국인만의 고유한 인사를 너무 일찍 배워 버린 공주님이었다.

* * *

집에서 나온 나는 인근의 한 공원 벤치에 앉아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특별히 약속을 잡은 건 아니고.

그냥 이렇게 기다리면 알아서 모습을 드러내는 여자라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안녕하세요."

왔다.

나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라카와 아이.

러스트가 싱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도 우연이라고 하겠지?"

"네. 제가 산책을 나올 때마다 계시는 게 참 신기해요. 이쯤 되면 운명이 아닐까 싶네요."

오늘 내가 이 공원에 나온 것은 이번 게이트 대폭주 사건을 처리함에 있어서 변수를 없애기 위해서다.

"그러게. 진짜 우연이면 운명이라고 봐도 되겠어."

그 변수란 당연히 러스트.

나아가선 진리의 구명자가 개입해 오는 일을 의미한다.

이걸 어떻게 해결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제대로 행동할 수가 없다.

"어? 서율 씨. 안 믿으시는 거죠? 진짜 우연인데."

러스트가 세상 억울하단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믿을 말을 믿어야지.

이렇게 수시로 만나는데 우연일 수가 있나.

"······진짠데."

러스트가 울상으로 변했다.

"네. 믿어요."

"표정부터가 안 믿는다는 표정이잖아요."

진짜 이 이상 억울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다.

연기해도 되겠어.

"서율 씨는 제가 스토킹이나 하는 그런 나쁜년으로 보여요?"

그렇게 보인다.

진리의 구명자 간부면 말 다한 거지.

나는 오늘 러스트를 처리할 생각이다.

베가본드에 이어서 러스트까지 처리하면, 진리의 구명자 놈들이 어떤 행동을 보일지 알 수 없게 되겠지만, 어쩔 수 없다.

일단 이 대형 에피소드를 앞에 두고 코앞에 불안 요소를 남겨둘 수는 없으니까.

근처에 메이든 씨를 비롯한 유화, 지아, 시연이가 대기하고 있다. 나는 그곳까지 러스트를 유인해서 데려가기만 하면 된다.

그걸 위해선 일단 연기를 해야 한다. 그렇게 연기를 시작하려 할 때였다.

덥썩.

러스트가 내 손을 움켜쥐었다.

그리곤 애원하는 눈빛으로 내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댔다.

"저, 진짜 그런 짓 안 했어요! 믿어 주세요!"

눈물까지 글썽이며, 자신의 무고를 주장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내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러스트의 연기력에 감탄했다거나 한 건 절대 아니었다.

내가 놀란 건, 새로 얻은 정령족의 특성이 발동됐기 때문이다.

불의 정령 특성, '영혼의 빛.'

정신체인 정령족이 타 종족과 관계를 맺을 때 사용하는 특성으로, 손을 맞잡은 상대방의 영혼을 색깔로 구별할 수 있는 능력.

무구한 영혼일수록 하얗고, 죄를 범한 영혼일수록 검게 물들어 간다. 또한 살인을 한 번이라도 범한 자는 회색으로 물든다.

즉, 진리의 구명자 간부인 색욕'러스트'의 영혼은 보고 있기 힘들 정도로 시커먼 검정색이어야 정상이라는 말이다.

"······하얗다고?"

"네?"

그러나 러스트의 영혼이 내뿜는 빛은 백색이었다.

공주님처럼 완연한 순백색은 아니라고 해도 순백에 가까운 백색이었다. 회색도 아닌 백색 말이다.

"말도 안 돼."

말인즉, 러스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

"서율 씨? 왜 그러세요?"

아니, 살인은커녕 죄를 지은 회수도 손에 꼽는······.

"······."

"서율 씨?"

완전한 선(善)이었다.

< 116화 전환점 (1) > 끝

< 117화 전환점 (2) >

진리의 구명자 언노운의 은신처.

언노운은 마에스트로에게 보고를 받고 있었다.

"베가본드의 빈자리는 다른 간부들이 커버하고 있습니다. 계획보다 살짝 지체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디만, 대업에 지장은 없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언노운이 무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큰 변수가 발생한 것치고는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다.

"그, 보스.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허락하지."

한쪽 무릎을 꿇어 앉아 있던 마에스트로가 고개만을 들어 언노운과 시선을 맞췄다.

"······러스트는 정말 그대로 두실 생각이십니까?"

이 바쁜 시기에 단독행동을 하고 있는 러스트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아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

'러스트만 작전에 들어섰다면, 계획이 지체될 일이 없었다.'

자신의 완벽한 악보에 불협화음을 끼워 넣은 러스트가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게 '계약'인 이상."

언노운의 철칙.

자신이 내뱉은 말은 지킨다.

그는 지금까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다.

계약도 마찬가지다.

언노운이 고개를 끄덕인 이상, 그 계약은 무조건 준수되어야 한다.

"죄송합니다. 실언이었습니다."

마에스트로가 고개를 숙였다.

"무얼. 네 입장에선 충분히 나올 법한 말이라는 건 충분히 이해한다."

아쉽겠지.

러스트의 활용도는 무궁무진하니까. 물론 아쉬움만이 이유는 아니다.

"다비드. 아이가 의심스러운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마에스트로는 러스트를 믿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러스트에겐 비밀이 너무 많다.

비밀이 많은 자를 믿을 만큼 마에스트로는 어리숙하지 않다.

의심스러운 건 그뿐만이 아니다.

'임무 거부권. 살인 거부권. 테러 행위 참여 거부권······.'

그 외에도 기타 등등.

러스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악행다운 악행에 손을 대지 않았다. 악행이라고 해 봐야, 신분 조작과 잠입 및 유혹 같은 작은 것들 정도가 다다.

그럼에도 그녀가 간부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것은 그녀의 정보 수집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녀의 정보 수집 능력은 대상이 남성이라는 것에 한해선 허미트보다 뛰어나다.'

성별이 남자인 이상, 그녀의 마수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계속된 접촉에 어느 순간 러스트에게 푹 빠져, 몸도 마음도 모두 바치는 노예가 되어 버린다.

그 다음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

모든 정보를 술술 내뱉는 정보 자판기의 탄생이다.

'여기에 흡수한 정기를 타인에게 나눠 주는 강화 스킬에 준수한 전투 능력까지. 간부에 어울리는 인재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믿을 수가 없다.

만약 러스트를 데려온 것이 언노운이 아니었다면 절대 간부의 자리에 앉히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감시라도 붙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비드.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언노운이 단언했다.

"아이는 나를 배신할 수 없다."

언노운이 턱을 괸 채로 한쪽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

"절대로."

그걸 위해 10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했다. 그때를 떠올리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제법 재밌었는데 말이지.'

시라카와 아이라는 인물의 주위를 모조리 파탄내면서, 자신에게 의지하게 만드는 일은 꽤나 감미로운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다비드. 이번에 미국의 유물을 훔쳐 오는 건 어떻게 될 것 같지?"

"그건 생각보다 수월할 것 같습니다. 그레이 아웃 덕분에 경비가 꽤나 줄어드는 중입니다. 내일이면 작전으로 옮길 수 있을 듯합니다."

* * *

"······그래서. 진리의 구명자 간부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다고? 기껏 바쁜 사람들 모아 놓고 한다는 말이 그거냐?"

메이든이 사납게 웃으며 나를 노려봤다.

"예······."

"뒤질래?"

"······살려 주세요."

나는 러스트를 유인해 오는 데 실패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유인 자체를 하지 않았다.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러스트의 영혼이 순백의 빛을 내뿜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휴. 됐다. 그럴 수도 있지 뭐."

메이든이 한숨을 내쉬었다.

"예. 오히려 다행이죠. 혼자 해결하려고 하진 않았다는 거니까."

유화는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

"······."

그리고 지아와 시연이는 여전히 눈치만 보고 있다. 시연이야 그렇다쳐도, 지아는 왜 저러지?

"아. 지아 너도 메이든 씨랑 만나는 건 처음이었나?"

"네, 넵. 아니, 응!"

존댓말이 나온 걸 보니 많이 긴장한 모양이다.

하긴. 신화 그룹에게도 메이든 크리티네스라는 이름은 무거울 테니까.

지아의 굳은 표정을 바라보며 메이든이 씨익 웃었다.

"뭐야 까먹었어? 신화 그룹 후계자 아가씨. 우리 두 번째 만나는 건데."

"예, 예에?"

"실망이 크네. 설마 까먹을 줄은 몰랐는데."

"그, 아. 저기···."

지아의 동공이 요동쳤다.

"저, 죄··· 죄송합니다."

그리곤 냉큼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실수로 메이든 크리티네스라는 VIP와 관계가 틀어질 것을 걱정하는 듯했다.

그나저나 지아가 메이든이라는 거물과 만나고도 기억을 못할 리가 없는데.

그 순간, 메이든이 씨익 웃었다.

"농담이야 농담! 뭐가 그리 진지해."

다들 벙쪘다.

"······거짓말이었어요?"

내가 대표로 물었다.

"거짓말은 아니야. 저 아가씨 돌잔치 때 참석해서, 손도 잡았거든."

"아······."

지아가 긴 탄성을 흘렸다.

"그래, 회장님은 잘 지내시고?"

"아, 넵. 여전히 정정하십니다."

"여전히 과보호 심하지?"

"······예. 조금."

"큭큭."

메이든과 지아가 옛날 얘기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거기. 하시연 사관생의 오빠 되시는 분도 잘 지내시고?"

"저희 오빠요?"

"그래. 미국에 출장 왔을 때 간간히 봤거든. 한 인물 하던데?"

"······헤헤. 그쵸?"

금세 시연이랑도 친해졌다.

과연 메이든 크리티네스.

엄청난 사교 능력이다.

"언니는 모르는 사람이 있긴 해요? 뭐 만나면 다 아는 사람이거나, 한 다리 건너서 아는 사람이야."

이내 그 대화에 유화까지 끼어들었다.

"짜샤. 이게 다 인맥 아니겠니."

순식간에 훈훈한 분위기가 됐다. 이 네 명을 한 자리에 모으는 건 불안했는데.

지아와 유화도 메이든의 눈치를 보며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는 듯하고.

시연이는 뭐······.

평소랑 같고.

메이든 덕분에 살았다.

"그래. 꼬맹이. 이 두 명도 이번 게이트 대폭주 처리반에 포함되는 거지?"

메이든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네. 맞아요. 여기 있는 넷만이 저를 믿어 줄 만한 사람들이거든요."

"그렇구만."

메이든이 오묘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나와 지아, 시연이가 어떤 관계인지 추측하고 있는 모양새다. 뭐, 유화에게 많은 말을 들었을 테니. 적당히 결론을 내겠지.

"그렇군요."

슬쩍 보니 지아도 마찬가지다.

메이든과 내 관계가 무슨 관계인지 생각하는 듯하다.

지아도 아마 알아서 결론을 낼 것이다.

뭐, 이대로 놔둬도 내 거짓말이 들킬 일은 없을 거다.

유화와 메이든에겐 '내가 생체 실험의 생존자라는 건 지아와 시연이는 몰라요.'라고 말해 뒀고.

지아와 시연이에겐 '내가 천족과 엘프족의 하프인 건 메이든 씨와 유화 씨는 몰라.'라고 말해 뒀으니. 서로 알아서 말을 아낄 테지.

저 두 가지만 공유되지 않는다면 내 비밀이 들킬 확률은 매우 낮다.

······그래도 이 적막이 계속되면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르는 일.

"그럼 모인 김에 작전 브리핑이나 해 둘까요?"

나는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 * *

그날 밤.

나는 혼자 책상 앞에 앉아서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눈앞의 노트를 다시금 살피며 만족스런 미소를 짓는다.

"작전은 완벽해."

최초의 대형 게이트.

강남에서 열린 방출형 게이트를 최소한의 피해로 막은 것으로, 게이트 폭주에 대응할 수 있는 초인들의 수가 원작보다 늘었다.

메이든, 유화, 지아의 도움으로 해외 초인들의 지원도 원작보다 늘었다.

원작의 주인공이 처리해야 했을 메인 침식형 게이트가 유일한 문제였는데, 이것도 문제없다.

"마스터가 있는데 뭐."

세계 초인 랭킹 1위.

더 원의 길드장 '마스터'

메이든이 그를 한국으로 불러들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시발. 나중에 제대로 벗겨 먹으려고 남겨 뒀던 빚인데. 그걸 여기서 쓰게 되네.

그렇게 투덜거리던 메이든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하다.

조금 미안하긴 하다.

원래 메인 게이트를 직접 공략할 생각이었는데, 그게 불가능해져서 어쩔 수가 없다.

"게이트에 들어갈 수가 없는데 어떡해."

진짜 침식형 게이트에 들어갈 수 없는 몸이라는 걸 알게 된 날,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아무튼 '마스터'라면 알아서 메인 게이트를 몸소 공략하러 들어가 주실 거다.

정의 덕후인 그가 한 나라의 위기를 빤히 지켜보고 있을 리가 없으니까.

"후."

물론 변수는 여전히 남아 있다.

"······러스트."

진리의 구명자 소속 간부.

러스트.

그녀의 존재 자체가 아주 큰 변수다.

오늘 그 변수를 어떻게든 하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내 손으로 그만뒀다.

"······왜 하얀색이야."

러스트의 영혼은 '색욕의 대죄'를 뜻하는 코드네임에 걸맞지 않게 아주 찬연했다.

죄를 거의 짓지 않는 자의 영혼이다.

"말이 안 되잖아."

세계 최악의 빌런 집단 진리의 구명자. 그중에서 언노운 산하의 일곱 간부. 그 일각이 살인 한번 저지르지 않았다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일까.

"······확실히 원작에서 러스트가 누군가를 죽인다거나, 테러와 같은 악행에 참여한 듯한 묘사는 없었긴 한데."

적어도 이 시점에는 그렇다.

결국 러스트도 국가전 테러 작전에 참여하게 되니까.

나는 계속해서 러스트의 등장 씬을 곱씹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다 간부들과 대화를 나누는 씬이거나, 정보 획득을 위해 어딘가에 잠입했을 때의 씬 같은 것들밖에 없네."

싸구려틱한 언동과, 남자를 유혹하는 몸짓이 특징인 말 그대로 '색욕'의 화신 같은 여자긴 한데. 그것밖에 없다.

"등장도 별로 없고."

그래서 일곱 간부 중 유일하게, 특성도 제대로 모르는 인물이다.

뭐 나온 게 있어야지.

심지어 마지막에 어떻게 죽었는지도 소설에 안 나왔다.

갑자기 언노운이랑 최종전을 벌이는 중에 언노운이 자신의 입으로 러스트는 이미 죽었다고 말했고. 그게 러스트의 최후였다.

아주 허무했다.

"······돌겠네."

그녀는 대체 뭘까.

솔직히 아까 그녀를 처리하려고 했다면 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영혼이 백색이고 뭐고, 그녀가 러스트라는 건 확실했다.

조금 찝찝했을지언정, 처리하는 건 충분히 가능했을 테지.

그러나 왠지 모르게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냥 감이었다.

묘한 감. 지금 러스트를 처리하면 나중에 크게 후회할 것 같다는 묘하고도 강력한 불안감.

증거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 막연한 불안감이었으나, 나는 내 감을 믿었다.

"무시해도 돼."

당일 '마스터'가 한국에 입국하는 이상, 진리의 구명자 놈들이 행동을 할 확률은 1% 이하일 것이다.

제아무리 언노운이라고 해도 '마스터'와 싸우고 싶진 않을 테니까.

"괜찮아. 문제없어."

나는 계획을 정리하던 노트를 완전히 덮어 버렸다.

* * *

이튿날 점심.

나는 간만에 금빛의 안식처에서 수련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수련이라기보단, 비행 연습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

목표는 천사족 특성 '천익'의 완전 체화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첫 번째 이유는 천익이 체화에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고.

두 번째 이유는 천사족 문신이 붉은색이기 때문이다.

지금 킵 중인 고대 유물 중 하나가 천사족 전용 유물인데, 이걸 사용하기 위해선 천익이든 천벌이든 둘 중 하나를 완전 체화시키는 수밖에 없다.

벌써 두 시간은 비행한 것 같은데, 언제쯤 체화 되려나.

그렇게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할 때였다.

"오?"

가슴팍에 묘한 괴리감이 느껴졌다. 바로 지면으로 내려가 상의를 들어 올렸다.

"오케이!"

천사족의 문신은 녹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즉, 천익의 완전 체화에 성공한 것이다.

"드디어 이 비행 노가다도 끝이구나."

그나저나 천사족의 완전 체화 효과는 뭘까. 신성력은 특성 중에 있으니, 아닐 테고.

신성력이 아니면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단 말이지.

"흠."

신체에 위화감은 없는 것 같고. 마력도 동일하다.

그 외에도 눈에 띄는 변화가 없다.

한참을 고민해 봤으나,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아 몰라."

일단 집으로 돌아가자.

생각은 그 후에 해도 늦지 않다.

"금호야. 가자."

"냥!"

나는 미니 사이즈 금호를 품에 안고, 조용히 집으로 향했다.

······그날 천사족 완전 체화의 효과는 끝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그레이 아웃 4일차가 되었다.

그레이 아웃 2일 차에는 10시간에 한 번씩 열리던 게이트가 3일차가 돼서는 5시간에 한 번 열리게 되었다.

마력 1~2만 정도의 게이트는 손쉽게 막을 수 있었기에 큰 피해는 없었다.

원작과 동일하게, 마력이 뒤틀린 와중에도 통신을 원활하게 할 수 있는 술식을 만드는 데 성공해, 통신 두절에 대한 걱정도 사라졌다.

게이트 출현에 대한 걸 사전에 감지할 수 없다는 문제는 물량으로 해결했다.

한국 내의 모든 초인들과 지원을 나선 해외 초인들을 주요 포인트마다 배치하는 것으로 커버한 것이다.

덕분에 현재까지의 피해자는 총 1000명도 채 되지 않는다.

원작에서 이 시점에 이미 1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죽었던 것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그리고 오늘은 4일 차.

"선조님. 오늘은 어제보다 사망자가 적다고 해요."

"다행이네. 게이트 오픈 사이의 텀은?"

"이번 건 1시간 5분 정도요."

"얼마 안 남았네."

게이트가 2시간 간격에서 1시간 간격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정확히 8시간 뒤면 게이트 오픈의 시차가 0으로 변하며, 동시 다발적으로 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할 테지.

"내일 아침 7시에 게이트 폭주가 시작될 거야."

그게 게이트 대폭주의 서막이다.

"······네."

지아가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긴장돼?"

"네. 조금요."

그렇게 말하며 살포시 웃는 지아의 얼굴은 상당히 불안해 보였다.

"괜찮아. 별일 없을 거야."

나는 지아의 머리를 토닥였다.

"정 안되면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너무 걱정 마."

"······네."

그러자 조금 안심한 듯, 조금 환한 미소로 돌아왔다.

우우웅-!

내 폰이 진동한 것은 그때였다.

[메이든 크리티네스]

메이든 씨한테 온 전화였다.

"나. 잠시만 전화 좀."

"네."

전화를 받았다.

―꼬맹이!

전화를 받자마자 메이든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묘하게 당황한 듯한 목소리다.

―미국 워싱턴 인근 드래곤의 유적지에서 테러가 발생했어!

"드래곤의··· 유적지요?"

설마!

"혹시 유적지에 보관 중인 유물이 하나 사라지지 않았나요?"

―맞아! '용안의 형상'이라는 유물인데······.

그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용안의 형상은 구명자 놈들이 계획을 위해 구해야 하는 고대 유물 중 하나다.

원작에서 그 유물을 훔쳐간 것은 '베가본드'다.

그리고 지금 베가본드는 없다.

'······마에스트로가 일을 서두른 거야.'

베가본드의 빈자리를 최대한 빨리 메우기 위해서, 베가본드가 해야 할 일을 먼저 처리하기로 한 것이리라.

또한, 내가 인맥을 이용하여 타국의 초인들을 한층 더 끌어 모았으니, 미국의 경비가 조금 허술해졌다는 점도 마에스트로가 행동을 개시한 이유 중 하나가 되겠지.

'······당했어.'

생각치도 못했다.

그러나 이는 결코 나쁜 결과가 아니다.

방금 마에스트로가 미국에서 일을 벌였다는 것은 한국에 관심이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즉, 게이트 대폭주에 진리의 구명자가 개입할 일은 없다는 말이다.

―아오! 시발! 이게 이렇게 꼬이냐!

그러나 메이든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뭔가 있다.

―후. 꼬맹아. 잘 들어.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마스터. 그 양반. 공항에서 몸을 돌렸어.

"······네?"

―그 빌어먹을 유물 도둑을 먼저 잡아야 하시겠대.

베가본드를 조기 퇴장시킨 것과 타국의 초인들을 더 끌어 모은 것으로 인한 나비 효과.

"그게··· 무슨···."

나비의 날갯짓으로 시작된 거대한 태풍이 변수가 되어,

내 계획이라는 견고한 성을 송두리째 박살내 버렸다.

< 117화 전환점 (2) > 끝

< 118화 전환점 (3) >

그레이 아웃 5일차 아침.

상황이 촉박해지기 시작했다.

게이트의 출현 간격은 10분으로 줄어들었고, 지금도 점점 빨라지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슬슬 행동을 개시했을 시간이지만······.

"선조님······."

"잠시만. 아직 시간은 조금 있어. 그때까지만 생각해 볼게."

나는 아직도 방 안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결국 마스터는 미국에 남았다.

지금도 드래곤의 유적지를 중심으로 빌런을 탐색하고 있겠지.

메이든이 뭐라고 하던 간에 소용없었다. 한국의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 네 도움이 필요할 거다. 뭐 이런 말은 충분히 했지만 듣지 않았다.

마스터의 '정의'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위하는 것이 우선된다.

그에겐 당연히 미국의 테러를 수습하는 게 먼저다.

혹여 다른 나라가 멸망한다고 해도, 그의 '정의'는 자국의 도둑을 잡는 걸 우선시한다.

"선조님. 마스터가 한국에 없다고 해도, 결국 그 '메인 게이트'가 열리면 지원을 오지 않을까요? 더 원 길드의 전용 제트기를 이용하면 금방 도착할 테니, 30분 정도만 버티면······."

"아니. 안 와."

단언할 수 있다.

마스터가 한국에 있는 게 아닌 이상, 그는 절대 한국까지 오지 않는다.

"그레이 아웃은 한국을 중심으로 중국과 일본 영토까지 뻗어 있어."

"그게 왜요?"

현재 국가 재난 사태를 선포한 것은 한국만이 아니다.

중국, 일본도 포함된다.

그레이 아웃에 살짝 발을 걸치고 있는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북한도 아마 비슷하겠지.

"게이트 대폭주가 시작되면 그쪽에도 '메인 게이트'와 비견될 거대 게이트가 열릴 거야. 그런 상황에서 마스터가 어떻게 움직일 것 같아?"

"······그야 그레이 아웃의 중심에 있는 저희 한국으로 지원을 오지 않을까요?"

"아니."

마스터는 그런 융통성 있는 성격이 아니다.

"일본으로 가던가. 혹은 중국으로 가."

마스터의 행동 원리는 자신의 '정의'를 따르는 것이다.

그 철칙에는 우선순위가 있다.

지금 그가 미국에 남기로 결정한 것처럼 말이다.

"어째서 한국은 배제된 건가요?"

"간단해. 일본이 미국보다 가까운 곳에 있고, 중국이 한국보다 예상 피해량이 많으니까."

마스터의 정의 중 어떤 것이 우위에 설지는 아무도 모른다.

허나 확실한 건 한국은 선택지에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마스터의 정의는 생명을 취사선택 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구할 수 없는 소수는 버리는 선택을 한다.

이동시간이 조금이라도 적은 일본이냐, 인구수 자체가 많은 중국이냐.

그의 머릿속엔 그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다.

분명 원작에선 일본을 도왔던가.

"하지만 한국의 메인 게이트를 닫으면 다른 나라의 게이트들도 모두 행동을 멈추는 거잖아요? 그럼 그걸 설명하면······."

"어떻게 설명할 건데? 설득을 뒷받침할 근거가 없어."

"그건······."

메인 게이트에 대한 건 과학적으로 증명이 불가능하다.

나와 함께 많은 일을 겪은 네 명이나 믿어 주지, 다른 사람한테 말해 봐야 미친놈의 헛소리일 뿐이다.

나는 결국 일개 사관생일 뿐이니까.

"저나 유화 씨, 메이든 씨가 나선다면······."

"그래 봐야 마스터는 움직이지 않아. 그는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정보만을 믿거든."

그걸 알기에, 사건이 터지는 당일에 마스터가 한국에 있게 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랬으면 가장 가까이 있는 '메인 게이트'의 공략을 최우선했을 테니까.

"그럼 마스터의 도움은 받을 수 없게 됐다는 거네요."

"맞아. 그래서 머리가 아픈 거고."

그래서 어제부터 한숨도 안 자고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마스터를 대체할 것을 찾기 위해서.

싱글 넘버를 움직이려 해도, 4명은 이미 마스터에게 귀속되어 있고.

다른 4명은 협력과는 거리가 멀다. 도움을 요청해도 콧방귀를 뀌며 거절할 테지.

······그럼 역시 지금 한국에 있는 초인들만을 이용해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는 건데.

가능할까?

떠오르는 방법은 있다.

하지만 이 작전은 아주 허술하다. 살짝만 삐끗해도 설탕으로 만든 성처럼 아주 쉽게 무너질 것이다.

아주 작은 변수 하나가, 모든 것을 망칠 테지.

"선조님. 방금 걸로 텀이 7분까지 줄었어요."

하지만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이 이상 떠오르는 방법이 없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자."

"그럼 작전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가면서 설명할게."

나는 밖으로 걸어가며,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메이든 씨. 새로운 작전 구상 완료했습니다. 지금부터 설명하겠습니다."

메이든을 시작으로 유화, 하시연에게 차례차례 전화를 걸었다.

"부탁할게. 어."

마지막으로 시연이에게 작전에 대한 전달을 모두 마쳤을 때쯤.

쿠구구구구구궁-!

타고 있는 리무진이 마구 떨렸다. 천지가 요동치고 있는 것이다.

"······시작됐어."

게이트 대폭주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 * *

대한민국을 포함한 중국, 일본, 러시아, 북한의 영토는 전쟁터가 되어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열리는 게이트.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

그에 대응하는 초인들과 군대.

붕괴되어 가는 도시.

이러한 광경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30분이 지난 지금, 아직까진 초인들이 우세를 점하고 있다.

타다다다다닥-

방 안에서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그 소리의 중심지엔 메이든이 있었다.

한껏 찡그린 표정으로 입에 당분 보충용 사탕을 한 움쿰 문 채로, 사방에 떠 있는 홀로그램을 훑으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영광 제 72부대 지원 바람]

[수도 방위 마도 대포 MK-707 침묵 수리 요망]

[음성 인근 새로운 게이트 오픈 확인]

"아오. 이게 무슨 고생이야."

메이든의 역할은 지휘다.

한반도 전역을 살피며, 적재적소에 사람들을 보낸다.

대처가 힘든 곳은 메이든 특제 마도 장치로 무장한 군대를 보낸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수송기를 보낸다던가, 아예 포기한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직까진 그런 경우는 없었다.

타다다닥-

"시발. 진짜 지랄."

그러나 그것도 슬슬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게이트의 오픈이 점점 가속화되고 있다.

"개 같은 꼬맹이. 아주 지가 상전이야."

이 속도라면 앞으로 20분 후에는 대응할 수 없는 구역이 나올 것이고, 그때를 기점으로 한반도는 서서히 붕괴되어 갈 것이다.

그때까지, 어떻게서든 그 '메인 게이트'인지 뭔지를 닫아서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

"······부탁한다."

메이든은 슬슬 작전을 입장 준비를 마쳤을 메인 게이트 공략조를 떠올리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 * *

"부탁할게."

서울시 중랑구의 한 번화가.

메인 게이트 앞에 서서, 게이트 입장 준비를 하고 있는 4명과 두 마리를 바라봤다.

"네. 잘 해 볼게요. 걱정 마세요."

그 공략조의 대표인 유화가 믿음직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지아와 시연이는 아직 장비를 점검 중이다.

표정이 한껏 굳은 것이 둘 다 첫 실전 게이트 공략에 긴장한 듯하다.

금호와 백호는 뭐, 평소랑 똑같고 마지막 남은 한 명은.

―짐에게 뭐 할 말이라도 있느냐?

태연한 표정으로 원래의 커다란 모습으로 돌아간 금호를 쓰다듬고 있었다.

―긴장했나 해서.

―음. 짐의 사전에 긴장과 불안이라는 단어는 없다.

그럼 나랑 처음 만났을 때, 바들바들 떨었던 건 뭔데.

아무튼 진짜 긴장한 것 같진 않아서 다행이다.

―그럼 다행이네. 프로모시움 대거는 챙겼고?

나는 이미 사용을 마친 프로모시움 대거를 공주님에게 넘겼다.

맹호의 건틀릿도 넘길까 했는데, 공주님 체격에 쓸 수 있을 리가 없어서 패스했다.

―물론이다. 꽤나 쓸 만한 무기더구나.

공주님이 허리춤의 단검을 보여줬다. 확실히 프로모시움 대거다.

―오케이. 그럼 완벽하네.

―음.

그러던 중.

유화가 내게 다가왔다.

"근데 서율 씨. 이 애. 정말 데리고 가도 되는 거예요?"

그리곤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레나요?"

"네."

뭔가 못미더운 듯한 표정이다.

하기야. 유화의 입장에선 충분히 나올 법한 반응이다.

레나에 대한 유화의 인식은 10살 남짓한 생체 실험의 생존자. 그게 다니까.

"괜찮아요. 우리 꼬마 공주님. 꽤나 강하거든요."

"······그래요?"

"네. 유화 씨보다 강할 수도 있어요."

확실하진 않지만, 나랑 단련할 때 보여 준 모습만 봐선 최소 A랭크는 가뿐히 넘을 거다.

애초에 수인과 인간은 기초 스펙 자체가 다르다.

"······네? 저 애가요?"

유화가 눈을 부릅떴다.

"수인족 특유의 특성을 모두 지닌데다가, 마법에 재능이 출중하거든요. 저보다 마법 잘 써요. 천재거든요."

이번 게이트 공략 작전에 다른 초인들을 모조리 배제하고, 이 멤버로 구성한 이유 중 하나다.

어중이떠중이들보다 백호, 레나가 더 나을 것 같아서.

다른 초인들을 공략조에 합류시키면, 레나와 백호를 투입할 수가 없잖아.

"······세상에."

"말이 제대로 안 통하는 게 좀 걱정되긴 하는데, 내부 공략법에 대한 건 사전에 숙지시켜뒀으니 너무 걱정하실 필욘 없을 거예요."

순간 유화가 오묘한 표정이 되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 내부 공략법에 대한 건데요. 서율 씨. 어떻게 게이트 내부의 구조까지 꿰고 있는 거죠?"

이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

궁금한 게 당연하겠지.

"비밀입니다."

나는 말을 아꼈다.

"······비밀 많은 남자는 인기 없다는 거 아세요?"

"그거 앞에 '잘생긴'이 붙으면 신비로운 매력으로 변한다던데요."

"얄미워 죽겠어 진짜."

내 태연한 답에 유화가 입술을 삐죽였다.

"아무튼 잘 부탁해요. 제가 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잖아요. 실험의 부작용인지 뭔지 때문에 게이트에 진입할 수 없는 몸이라면서요."

게이트에 들어갈 수 없는 건 실험의 부작용인 걸로 해 뒀다.

"괜한 걱정 말고, 서율 씨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세요."

"네. 그건 걱정마세요."

그 말과 함께 모두가 내게 다가왔다.

"선··· 서율아. 준비 끝났어."

지아를 마지막으로 모든 준비를 마친 것이다.

"내가 준 것도 다 챙겼지?"

"응."

"위험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기억해 뒀고?"

"기억하고 있어."

"오케이."

나는 저 멀리서 장난치고 있는 금호, 백호, 공주님을 불렀다.

"그럼 공략 고생해 주세요. 시간이 조금 오래 걸려도 괜찮으니까, 안전에 신경 써 주세요."

세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님. 저 세 명 잘 부탁해요. 공주님이 잘 지켜 주셔야 해요.

―걱정 말거라. 이런 소형 게이트따위 짐 혼자도 깰 수 있으니.

평소처럼 턱을 들고 으스댄다.

뭐, 자신감이 넘치는 건 좋은 일이지.

나는 공주님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니까 쓰다듬는 건 무례라 하지 않았느냐.

나는 픽 웃으며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럼 잘 다녀와.

―음. 나중에 보자꾸나.

공주님이 활짝 웃었다.

"시연이 너도 무리하진 말고. 혹여 무슨 일이 날 것 같다 싶으면 바로 보너스 포인트까지 써서 마력에 올인해 버려. 그만큼 본 손해는 내가 어떻게든 해 줄 테니까."

"응. 알겠어."

나는 마지막으로 금호, 백호를 한 번씩 쓰다듬었다.

"너희도 잘 부탁한다."

금호가 갸릉 울었고, 백호가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백냥이 너. 들어가서 이상한 짓 하지 마라?"

백호가 새침하게 홱 돌렸다.

뭐, 금호랑 공주님이 있는 이상 이상한 짓은 안 하겠지.

"그럼 유화 씨. 고생하세요."

"예. 나중에 봐요."

"이 일이 무사히 해결되면, 또 사건을 수습한 비혼 길드! 라고 뉴스 뜨겠네요."

"그럼요."

유화가 탐욕스럽게 웃었다.

"그럼 진짜 출발할게요."

"네."

그 말을 끝으로, 메인 게이트 공략조는 게이트 내부로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잘 되겠지?"

잘 될 거야.

나는 일말의 불안감을 애써 삼키며, 몸을 돌렸다.

동시에 폰을 들어 메이든 씨한테 전화를 걸었다.

―왜?

"메이든 씨 메인 공략조 입장 완료했어요."

―오냐.

"상황은 어때요?"

―아직은 버틸 만해.

"아슬아슬한가요?"

―조금? 그래도 10분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솔직히 그 후는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할 것 같다.

타다다다닥-

수화기 너머로 경쾌한 타자소리가 울렸다.

"그럼 딱 10분 뒤에 사용하면 되겠네요."

―······대법관의 십자가 말하는 거지?

"네."

천사족의 유물.

대법관의 십자가.

―천사족의 유물이라······.

메이든이 타자를 치면서 넌지시 중얼거렸다.

―꼬맹이. 혹시 한 때 화제가 됐던 가면 쓴 천사. 너냐?

"······."

―그 게이트를 닫은 정체불명의 마력과 정체불명의 화살. 그거도 활 형태의 고대 유물을 이용한 특수 기술 같은 거 아냐?

내가 천사족의 유물을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하자마자 저기까지 생각이 닿다니. 역시 메이든은 메이든이다.

음. 뭐라고 답해야 할까.

―······아니다. 됐다. 지금 그걸 물어봐야 뭐하겠냐. 나중에 하자.

허나 굳이 답할 필요도 없이 메이든이 손수 화제를 돌려 줬다.

―아무튼 10분··· 이제는 8분 뒤네. 그때 신호 줄 테니까. 부탁한다.

"네."

나는 하늘을 올려다 보며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이걸로 콜렉터에게 양도받은 유물은 사실상 사용 끝.

남은 고대 유물은 자연이 승천하는 보고에서 얻은 엘프족의 유물. '일그러진 균형'뿐이다.

잠시 후.

―꼬맹이! 시간 됐다!

8분이 흘렀다.

"네.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장인의 간이 대장간'에서 '대법관의 십자가'를 꺼내어, 손에 쥐었다.

그 순간.

―······!

수화기 너머로 메이든이 헛숨을 들이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온 세상이 고요해짐과 동시에,

번쩍!

하늘에서 한 줄기 빛이 내려앉았다.

< 118화 전환점 (3) > 끝

< 119화 나비의 날갯짓 (1) >

상황실에서 혼자 전장을 관조하던 메이든은 헛웃음을 지었다.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온다.

"미친놈."

―미친놈은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그럼 개미친놈."

―······.

어이가 없다못해 미국으로 가출하는 환영이 보이는 듯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면 다 똑같은 생각을 할 거다.

"대법관의 십자가 고유 능력 '대법관의 축복'이라고?"

―네. 맞아요.

"······허허."

메이든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고대 유물이라고 해도 ······이건 사기 아니냐?"

―사기죠.

상황실의 중앙에 떠올라 있는 메인 스크린에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그레이 아웃 전역의 풍경이 떠올라 있었다.

인공위성에서 촬영 중인 영상이다.

"무슨 놈의 버프 스킬이 그레이 아웃 범위 전역을 뒤덮냐고, 이 미친놈아."

의문의 빛이 세계를 뒤덮고 있었다.

처음엔 강서율 한 명을 비추는 것이 다였는데, 순식간에 세를 늘려가더니, 중국과 일본까지 닿을 정도로 거대해졌다.

그 빛이 쐬는 지역 전부가 '대법관의 축복'의 효과 범위다.

"그리고 뭐? 이딴 미친 범위의 버프가 모든 능력치 50프로 증가? 이게 미친놈이 아니면 뭐냐?"

―그게 제 힘인가요 뭐, 이 십자가의 힘이지.

십자가의 힘이라.

"힘을 오래 모으면 모을수록 범위와 효과가 증폭되는 힘이라고?"

―네. 만 년이나 힘을 모았으니, 이 정도 범위까지 늘어나는 건 당연하······ 으엇.

강서율이 돌연 기함을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내리쬐던 빛의 기둥이 소멸하기 시작했다.

"뭐야? 무슨 일 있어?"

메이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대법관의 십자가를 쥔 뒤로 1분이 흘러, 에러가 발생했을 뿐이다.

빛이 소멸하기 시작한 것도 같은 이유다.

"아무 일도 아니긴 무슨! 이거 버프 끝난 거 아냐?"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메이든에게 있어선 큰일이었다.

―아뇨. 괜찮아요. 그냥 이펙트만 사라진 거지, 적용된 버프는 유지되고 있을 겁니다.

메이든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 얼마나 유지되는데?"

―대충 30분 정도?

"······애매하네."

메이든이 턱을 매만졌다.

"그 전에 공략조가 게이트를 무사히 공략하고 나와 주는 게 베스튼데."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힘들 것 같고.

―뭐, 어떻게든 버텨 봐야죠. 축복 들어간 뒤로 상황은 어때요?

"그건 걱정 마. 이 기세라면 대법관의 축복이 사라지기 전까진 끄떡없어."

메이든과 강서율은 게이트 내부를 공략 중인 멤버들을 떠올리며 무사를 기원했다.

* * *

메인 침식형 게이트 내부.

4인 + 2마리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공략을 이어 가고 있었다.

"시연 씨! 백업!"

"네!"

"지아 씨는 금백호가 빠지면 바로 화살의 세례! 은화살 잊지 말고요!"

"안 그래도 대기하고 있어요!"

유화의 오더는 가히 완벽했다.

강서율에게 들은 정보를 기반으로, 게이트 내부의 구조를 역으로 계산해 내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가 현재의 완벽에 가까운 오더다.

'어찌어찌 잘 되고 있네.'

물론 모든 것이 유화의 생각대로는 아니었다.

두 가지 오산이 있었다.

먼저 첫 번째 오산은 이 게이트의 난이도를 잘못 판단한 것이다.

유화가 상상했던 어려운 난이도보다 한층 더 난이도가 높았다.

"스켈레톤 군단 추가 병력 확인!"

신지아가 소리쳤다.

달그닥, 달그닥,

저 멀리서 스켈레톤의 군세가 달려오고 있었다.

"수는요?"

"최소 100!"

유화가 입술을 살짝 짓씹었다.

100이면 조금 많이 빡세긴 한데.

'그래도 아직 대응할 수 없는 정도는 아냐.'

그렇다면 게이트의 난이도가 예상보다 높은데도 불구하고, 계획대로 공략을 진행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그건 다름 아닌 팀원들의 실력 때문이다.

'다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실력이 좋아.'

게이트가 예상보다 어려운 만큼, 팀원들의 실력도 생각보다 뛰어났다.

그 결과가 현재의 수월한 공략이다.

'금호, 백호는 예상대로 대단하고.'

금호, 백호의 피지컬을 말할 것도 없고.

그 사이에서 합을 맞추는 하시연도 자못 훌륭하다.

어떤 면이 대단하냐면, 자신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무리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시연 사관생은 자만심이 아예 없어. 사관학교 역대 랭킹 1위라면 자만할 법도 한데.'

자만은커녕 겸손마저 느껴진다.

자신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철저히 백업에만 전념하고 있다.

'신지아도 마찬가지.'

이는 신지아 또한 마찬가지다.

능력치 자체는 유화가 생각했던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 움직임이 상당히 예리하다.

'완벽한 포지셔닝. 완벽한 백업. 그러면서도 전장 외적으로 경계를 놓치지 않는 집중력.'

거기에 금호, 백호, 하시연과의 연계 또한 완벽하다.

"시연아! 빠져!"

"알아!"

두 명의 움직임은 잘 만들어진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것처럼 완벽하다.

아마 하시연과 신지아를 훈련시킨 사람은 동일인물이 아닐까.

'혹시 저 둘을 단련시킨 건 서율 씨인가?'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리고······.'

유화는 마지막으로 최후방을 살폈다.

'레나.'

강서율과 마찬가지로 생체 실험의 생존자. 수인족과의 융합으로 머리에 은랑의 귀를 달고 있는 귀여운 여자아이.

저 애의 실력을 아예 잘못 판단하고 있었다.

"공주님!"

유화가 레나에게 신호를 줬다.

"비키세여!"

그에 답하듯 레나가 어눌한 한국어로 소리쳤다.

그 말을 신호로 금호, 백호, 신지아, 하시연이 전장에서 이탈했다.

유화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쒜에엑!

뒤로 도약함과 동시에 구현화로 만든 대검들을 몬스터들의 동선 앞에 꽂는다.

그 검에 가로막혀 몬스터들은 추격을 할 수 없게 됐다.

검의 감옥이 형성된 것이다.

그 결과 몬스터의 군세와 파티원들은 완전히 단절되었다.

'일망타진.'

구역 내에 산개되어 있던 몬스터들을 일제히 모으고, 검으로 움직임을 봉쇄한 뒤에 단숨에 처리한다.

모두 유화의 계획대로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화르르르르르륵-!

레나의 세 배는 될 법한 거대한 화염구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작은 태양은 응집되어 있는 몬스터들을 향해 쇄도했다.

콰아아앙-!

맹렬한 폭음과 함께 열기가 모두의 피부를 스쳤다.

그 열기의 잔재만 느꼈을 뿐인데도, 방금 그 마법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모두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그 소멸의 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애. 진짜 나보다 강할 수도 있겠어.'

유화는 입장 전에 강서율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 레나라는 아이가 조커 카드이며, 작전 공략의 핵심일 거라고. 아마 유화 자신보다 강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당시엔 농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설마 진담이었을 줄이야.

아니, 그보다.

'처음엔 바람. 조금 전엔 물. 이번엔 불.'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

'저 애, 대체 몇 가지 속성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거야?'

이중 속성을 지닌 강서율도 세계 최고의 유망주라 불리고 있는데.

삼중 속성이라니.

게다가 오리지널 마법사다.

'이게 알려지면 난리가 나겠네.'

세 가지 속성을 다루는 천재 마법사. 그 범용성과 효용성은 말할 필요도 없다.

"끝나써여."

벙쪄 있는 세 명을 향해 레나가 다가왔다. 귀여운 말투와는 다른 근엄한 표정이 묘한 매력을 자아냈다.

"응. 봤어. 고생했어."

유화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그 뜻을 정확히 알아들은 레나가 뿌듯하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이 정도는 당연한 것이니라!'라고 주장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만약 수인족의 언어로 말했다면 그렇게 외쳤을 테지.

그러나 아쉽게도 이 자리에 수인족의 언어를 아는 사람은 없다.

"음."

결국 레나는 뭐라 말하려 하다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고 조용히 자신의 포지션으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엄마 미소로 바라보던 유화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그럼 바로 이동합시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게이트 내부가 생각 이상으로 넓어서, 예상보다 더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다.

"네."

아무튼 게이트 공략은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럼 앞으로 주의할 건 돌연변이 몬스터들이랑··· 보스 정도인가?'

유화는 머릿속으로 다시금 작전을 점검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 * *

대법관의 축복이 사용된 뒤로 약 10분이 흘렀다.

모든 능력치 50프로 증가는 강력했다. 모든 지역이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최소 20분은 끄떡없을 테지. 최고는 그사이에 메인 게이트 공략을 끝마치는 거지만, 그건 아마 힘들 것이다.

원작 주인공이 메인 게이트 공략에 걸린 시간은 약 1시간.

이동 시간에만 30~40분이 소요됐고, 몬스터를 잡는 데 20분가량이 소모됐다.

그 정보를 기반으로 이번 공략조의 공략 예상 시간을 계산해 보자.

이동은 아마 우리가 더 빠를 거다. 게이트 내부에 대한 정보가 있는 만큼 최소 10분은 더 빠를 테지.

그럼 이동에 20~30분이 소요된다 가정할 수 있다.

다음은 몬스터 처리 시간이다.

원작의 강서율이 지금 공략에 나선 멤버들을 합친 것보다 강하니, 못해도 10~20분은 추가되겠지.

그럼 몬스터 처리에는 약 30~40분.

고로, 50분~70분 정도가 예상 공략 시간이라는 것이 된다.

현재 20분이 흘렀으니 앞으로 남은 시간은 30분~50분.

즉, 대법관의 축복이 끝난 뒤로 10분~30분을 버텨야 한다는 건데······.

"······아슬아슬해."

점점 빨라지고, 강해지는 게이트의 특성상 대법관의 버프가 끝난 직후부터 미친 듯이 밀리기 시작할 것이다.

10분이면 최전선이 무너지고도 남을 시간이다.

거기서 10분이 더 지나면 초인들의 사망률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고.

추가로 10분이 더 지나면 대피 중인 민간인들의 벙커에까지 피해가 미칠 테지.

물론 그래봐야 원작의 피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긴 하다.

원작에선 이렇게 많은 수의 초인들이 지원을 나오지도 않았고, 대법관의 축복 같은 스킬도 없었으니까.

원작에선 한국 소속 초인의 절반이 사망했으니 말 다한 것이다.

허나 원작에 비해서 사망자가 적을 뿐이지, 피해가 없는 건 아니다.

초인들은 이런 곳에서 죽어선 안 된다. 미래를 생각하면 초인들 한 명 한 명이 아쉽다.

어떻게든 살릴 수 있는 만큼 살려야 한다.

그러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어딜 봐서 먼치킨 사이다 소설이야. 아포칼립스지.

먼치킨 주인공이 사라진 먼치킨 소설의 세계관은 아포칼립스다.

먼치킨 주인공을 부각시키기 위해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일들은 먼치킨 주인공 없이는 그저 인류 멸망의 위기일 뿐이다.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되도록 많은 아군들, 초인들이 필요하다.

그게 아니어도 인륜적으로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살리는 게 도리기도 하고.

그걸 위해선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후."

나는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했다.

준비는 끝났다.

무전기를 들었다.

"메이든 씨, 준비 다 됐습니다."

―벌써?

"네."

사실 준비랄 것도 없었다.

사전에 준비해 둔 재료를 특정한 위치에 올려 두고, 마법진을 그리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으니까.

―오케이. 알았어. 그럼 대법관의 축복이 끝나고, 위험하다 싶은 순간 신호 주면 되는 거지?

"네. 부탁드립니다."

나는 마법진의 중심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꼬맹이. 그런 기술을 어디서 배웠냐고는 묻지 않을게. 어차피 알려 주지도 않을 테고.

그런 기술.

지금 내가 바닥에 그린 마법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마법진도 저번 마법 증폭식과 마찬가지로, 공주님에게 배운 것이다. 무려 공주님이 직접 개발한 마법진이기도 하다.

이름은 아직 미정이다.

적당한 이름을 찾지 못했다.

―네 말이 맞다면, 앞으로 15분 뒤에 게이트 오픈 장소가 그곳으로 몰린다는 거잖아?

"네. 맞습니다."

효과는 범위 내 게이트의 출현 빈도 증가.

정확히는 그레이 아웃의 효과를 역산해서 해당 범위 내의 마력적 활동을 이곳으로 집중시키는 술식······ 이라고 했던가.

진짜 대단한 공주님이다.

게이트의 구조에 대한 것도 알고 있는데다가, 한눈에 본 것만으로 그레이 아웃에 대한 것까지 파악하고.

그래서 원작에서 그렇게 위용이 넘쳤나?

―마지막으로 묻는데, 진짜 지원은 안 보내도 되는 거지?

"네. 괜찮습니다. 괜히 범위에 휘말릴 수 있어요."

오히려 사람들이 많으면 골치 아프다. 일그러진 균형은 이프리트의 축복처럼 피아를 식별해서 타겟팅할 수 있는 방법이 없거든.

―오케이. 알겠다. 더는 아무 말도 안 하마.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 적막이 흘렀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대법관의 축복이 끝났다.

곧 시간이 된다.

전선이 하나둘씩 무너지며, 균형이 깨지기 시작할 시간.

그리고 내가 행동을 개시할 시간.

―꼬맹이! 지금이야!

나는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했다.

"시작하겠습니다."

동시에 한쪽 발을 굴렀다.

탁!

아스팔트를 차는 소리와 함께.

피이이잉-!

마법진이 빛을 내뿜었다.

쿠구구구궁-!

그에 공명하듯 하늘이 떨린다.

하늘에 질 수 없다는 듯이 대지도 떨린다.

느낄 수 있다.

게이트들이 지금 이곳으로 몰리고 있다.

나는 점차 거세지는 진동을 느끼며, '일그러진 균형'을 팔에 장착했다.

촤아악-!

천사의 날개를 펼치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하늘에 서서 팔찌를 낀 손을 마법진의 중심을 향해 내밀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의 분노."

그 순간, 대지가 요동쳤다.

< 119화 나비의 날갯짓 (1) > 끝

< 120화 나비의 날갯짓 (2) >

자연의 분노.

일그러진 균형의 고유 스킬로, 자연 재해를 형상화한 스킬이다.

땅은 요동치며 갈라지고,

나무는 자라나며,

바람은 칼날처럼 쇄도하고,

하늘은 분노한 제우스처럼 거칠다.

시전자의 마력이 아닌 공간의 마력을 사용하므로, 페널티 또한 거의 없다.

단점이라고 해 봐야 범위 지정형 스킬이기에 한번 범위를 지정해 사용하면 추후 범위를 바꿀 수 없다는 것 정도다.

뭐, 사실 이건 마냥 단점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범위 지정형인 만큼 해당 범위만큼은 확실하게 섬멸할 수 있다는 장점도 겸하니까.

―······이것도 유물의 효과라고 해 보시지?

메이든이 허허 웃었다.

"유물의 효과 맞는데요?"

―···진짜 지랄.

재해와 재해가 격돌하고 있다.

게이트라는 재해와 자연의 힘이 부딪치며 말도 안 되는 풍경이 펼쳐졌다.

마법진을 중심으로 게이트가 차례차례 열리며 수많은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만 해도 입이 쩍 벌어지는 장관인데,

그 몬스터들이 순식간에 저민 고기가 되는 진풍경.

이 광경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예상하고 있던 나도 이렇게 놀라고 있는데.

"······진짜 답도 없는 유물이네."

쿠구구구궁!

대지의 분노는 무직했고.

바람의 분노는 날카로웠으며.

하늘의 분노는 매서웠다.

이 유물이 적의 손에 넘어갔을 것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하다.

쿨타임은 1주일로 조금 길긴 한데. 그게 어디야. 1주일에 한 번씩은 노 페널티로 쓸 수 있다는 거잖아.

―저거 얼마나 유지되는 건데?

"5분이요."

―허허.

메이든은 이제 더 할 말도 없다는 듯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다른 지역은 어때요?"

이 마법진은 모든 게이트를 모으는 게 아니라 출현 빈도를 올리는 것이다.

―게이트 출현 빈도가 반의 반으로 줄었어. 덕분에 피해는 없다시피하고.

"다행이네요."

아주 다행이다.

파지지지지직-!

안도함과 동시에, 일그러진 균형을 중심으로 맹렬한 스파크가 터져 나왔다.

[Error!]

"앗 따거."

1분의 제한 시간이 지난 것이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에, 그 즉시 팔찌를 대장간 안에 넣어 버렸다.

자연의 분노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근데 꼬맹이. 저거 끝난 뒤엔 어쩌려고? 다시 원점 아냐?

"아뇨. 마법진의 작동이 멎으면, 게이트의 출현 빈도는 확 줄 겁니다."

공주님의 게이트학개론을 근거로 생각하면 확실하다.

―왜?

"이 마법진. 단순히 게이트를 끌어당기는 것만이 아니라, 아직 덜 여문 게이트도 조기 오픈해 버리는 성질이 있거든요."

―아. 게이트의 절대량이 줄어든다?

"네. 물론 서서히 복구되겠지만, 최소 20분은 버틸 만할 겁니다."

그나저나 저렇게 갈려나가는 몬스터들을 보고 있자니, 괜히 상태창이 그리워진다.

저게 만약 전부 경험치로 들어왔다면, 레벨이 얼마나 올랐을까.

―꼬맹이. 저 정도면 너 레벨 오른 거 아니냐?

마침 메이든도 똑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아뇨. 하나도 안 올랐어요."

그냥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오호라. 저 정도론 레벨이 오르지 않을 만큼 초 고렙이시다?

"······."

그게 그렇게 해석되나?

―아무튼 좋은 구경 했다.

"어? 그럼 관람료 주십니까?"

―오냐. 죽빵으로 주면 되냐?

"······."

나는 조용히 못 들은 척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태풍에 갈려나가는 몬스터들이 눈에 들어왔다.

"워어···."

몬스터들의 시체가 너무 그로테스크하다.

바람에 갈려 장기가 흩날리고, 대지에 끼어서 짓눌리고, 고온에 녹아서 살점이 문드러지고.

어우, 더 보기 힘드네.

"이제 메인 게이트 공략조만 공략을 딱 마쳐 주면 더 바랄 게 없을 텐데요."

―그러게 말이다.

3분 뒤.

먼저 서서히 마법진의 효과가 옅어지기 시작했다.

게이트 출현 빈도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지역 출현 빈도는 어때요?"

―문제없어. 네 말대로 게이트의 절대량이 줄었다는 느낌이야.

자연의 분노도 서서히 멎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5분의 시간이 모두 흘러.

"끝이네요."

자연의 분노가 효과를 잃는 것과 동시에 게이트의 유동도 멈추기 시작했다.

"그럼 저는 남은 몬스터들을 처리하러 내려가 보겠습니다."

―오냐. 혹시 모르니까 가면은 꼭 쓰고 있고. 날개도 좀 접고. 몬스터도 아직 100체는 남아 있는 거 같으니까, 방심하지 말고.

"네네."

걱정도 많으셔라.

나는 몬스터들 사이로 강습했다.

동시에 '천변'을 단검으로 바꿨다.

푸욱!

어버버하고 있는 몬스터의 미간에 단검을 선물해 줬다.

쿠어어어억!

내 선물에 기쁨의 환호성을 내며 감동한 듯 바닥에 널브러졌다.

근처의 다른 몬스터들도 내 선물을 받고 싶다는 듯 달려든다.

후우웅-!

이번엔 대형 할버드를 선물해 주기로 했다.

촤아아아아악!

두 마리의 신체가 걸레짝이 되어 하늘을 날았다.

과연 '천변'다운 사기적인 위력이었다.

나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장검으로 베고, 활로 쏘고, 마법으로 불태웠다.

우르르···쾅!

멀리서 원거리 공격을 해 오는 놈들에겐 천사족의 특성 '천벌'을 이용해 낙뢰를 박아 줬다.

······생각보다 훨씬 쉽다.

대충 C랭크에서 D랭크 정도의 몬스터들이라 그런가.

나도 같은 C랭크긴 한데, 온갖 사기적 특성에 더불어 '천변'까지 있으니 상대가 안 된다.

"휘유."

괜히 신나서 휘파람이 나왔다.

여유가 생기자 왠지 잡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새로 얻은 특성들도 있었지.

천사족과 엘프족.

뭘 얻었으려나.

먼저 대법관의 십자가에서 얻은 천사족의 특성을 떠올려봤다.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 종족 특성들을 떠올리며 특성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엇."

전투에서 잡생각을 했기 때문일까.

저 멀리서 날아든 화살 한 발을 완벽하게 막아 내지 못했다.

"이런······."

팔뚝에 찰과상이 생겼다.

아주 얕은 상처긴 한데, 맞은 건 맞은 거다.

······일단 전투가 끝나고 생각할까.

그렇게 생각하고 팔뚝의 찰과상을 쓰윽 매만졌을 때였다.

파아아아앗!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

그 빛은 내 손에서 시작되어 상처를 포근히 감싸 안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상처는 완전히 아물어 있었다.

"······신성력?"

상처를 치유하는 천사족의 힘이라 함은 신성력밖에 없다.

······세상에.

순간 멍해졌다.

여기서 신성력을 얻게 될 줄은 몰랐는데. 신성력이라 함은 천사족의 특성 중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대단한 특성이다.

활용할 방법은 무궁무진······.

······아니지.

생각은 나중에.

지금은 전투에 집중할 때다.

눈에 힘을 주고, 몬스터들을 쓰러트리는 데 전념했다.

베고, 또 벴다.

80 정도 남았던 몬스터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빠른 속도로 줄어 갔다.

이제 남은 숫자는 고작 16마리.

"후우······."

확실히 빡세긴 빡세네.

혼자 80에 가까운 몬스터들을 상대해서 그런가.

체력도 조금 딸리는 것 같고,

마력도 어느덧 3~40%밖에 남지 않았다.

······천변의 실험을 해 본다고 너무 막 움직였나?

그래도 뭐, 얼마 안 남았으니까.

나는 천변을 채찍+검, 사복검의 형태로 바꾸었다.

촤아아아아악-!

난생 처음 사용해 보는 기이한 무기임에도, 내 손발처럼 다룰 수 있었다.

뱀처럼 휘어지던 사복검이 정확히 네 마리의 몬스터를 베어 냈다.

"나쁘지 않은데?"

이런 중거리 전투에선 안성맞춤이다.

나는 사복검을 회수함과 동시에 다시 휘둘렀다.

촤아아아아악-!

시원한 소리와 함께 적들의 목이 하늘을 날았다.

이제 남은 몬스터는 겨우 7마리.

몬스터들은 이젠 전의마저 상실한 듯, 도망치려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어허."

어딜 도망가려고.

나는 천변을 순식간에 활의 형태로 바꾸었다.

바람의 살을 이용해 주위에 넘실거리는 바람을 화살의 형태로 응집했다.

시위를 놓았다.

파아앙!

시위를 놓는 것과 동시에 몬스터의 머리가 풍선처럼 터져나갔다.

"휘유."

그 동작을 정확히 7번 반복했다.

털썩-

최후의 한 마리가 쓰러졌다.

전투 종료를 알리는 소리였다.

"후우우······."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크로바틱한 동작을 연달아서 해서 그런가, 굉장히 지친다.

"메이든 씨. 이쪽은 정리 끝이에요."

무전기에 대고 현장 상황을 보고했다.

―오냐. 고생했다.

무전기 너머로 타자 치는 소리가 신명나게 울린다.

바쁜가 보다. 하긴, 지금 이 타이밍이 제일 할 일이 많을 때니까.

―그럼 기도나 하고 있어.

그리고 나는 이 이상 할 일이 없다.

"네. 진짜 기도나 해야겠네요."

할 수 있는 건 모두 했다.

수중에 남은 고대 유물은 하나도 없고, 체력과 마력도 상당한 양을 소모했다.

이제는 기다리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메인 게이트 공략조가 무사히 귀환하기를 기도하면서.

"그럼 카메라는 벗을게요. 이쪽에 신경쓰실 상황도 아니실 테고."

이거, 통풍이 안 돼서 굉장히 덥다.

―오냐. 무전기는 혹시 모르니까 켜 두고.

"네."

나는 액션 카메라가 달린 조끼를 벗어 버렸다.

바람이 시원하다.

"아, 맞다."

메이든 씨한테 할 말이 있었는데, 까먹고 있었네.

"메이든 씨."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조용하다.

"메이든 씨?"

다시 한번.

여전히 조용하다.

"고장인가?"

나는 괜히 무전기를 탁탁 두드려봤다. 물론 오래된 전자제품도 아니고 그런 걸로 문제가 해결될 일은 없었다.

"뭐지?"

근데 잘 생각해 보면 그 짧은 사이에 무전기가 고장 날 일은 없다. 그냥 지금 바빠서 대답할 여력이 없는 건가?

그렇게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였다.

쿠구구구구궁-!

대지가 떨렸다.

익숙한 감각.

오늘 질리도록 경험한 게이트 오픈의 전조.

그러나 지금껏 열린 그 어떠한 게이트와도 비교할 수 없는 강렬한 진동.

알 수 있다.

"대형······."

대형 몬스터를 뿜어내는 거대 균열이다.

아니나 다를까, 균열이 쩍 벌어지기 시작했다. 거울이 깨지는 듯한 파열음을 내며 허공이 열린다.

그 속도가 말도 안 되게 빠르다.

이 속도라면 10초 내에 게이트는 완성될 것이다.

"큭!"

나는 재빨리 천변을 쥐고, 마력을 끌어 올렸다.

그러나 마력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는다. 강기도 그렇고, 마법도 마찬가지다.

외부로 방출하는 마력에 이상이 생긴 듯한 느낌.

동시에 하늘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회색빛 도화지에 검은 물감을 한가득 푼 것마냥 서서히 검게 물들어 간다.

나는 이 현상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블랙 아웃?"

그레이 아웃의 상위 호환.

효과는 마력 동결.

무전기가 먹통이 되는 것도 당연하다. 그레이 아웃에 맞춰 커스터마이징한 특수 무전기라고 해도, 마력이 동결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게 왜 지금······?"

블랙 아웃은 아직 등장할 타이밍이 아니다. 한참 뒤에나 나오는 개념인데, 어째서 지금?

모르겠다.

쨍그랑, 쨍그랑!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찰나에도 균열은 빠른 속도로 열려 가고 있었다.

어쩌면 좋지?

지금 저 크기의 게이트를 나 혼자서 막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도망쳐야 하나?

그것도 하나의 수다.

아니, 그것밖에 방법이 없어 보인다.

놈을 상대하는 건 자만이며, 자살행위일 뿐이다.

"튄다."

마음을 정한 것과 동시에 대지를 박찼다.

천익을 이용해서 공중으로 도망칠까도 생각해 봤으나, 저 게이트에서 출현할 몬스터가 비행형이 아니란 보장이 없다.

달리기가 속도적인 면에서 더 빠르기도 하고.

칭, 칭.

균열에서 파열음이 울리는 간격이 더욱 짧아지고 있다.

지금 당장 게이트가 열려도 이상하지 않다.

까드득.

나는 이를 악물고 속도를 올렸다.

"!"

그 순간, 내 전신에 전율이 흘렀다. 불안감이 치솟으며 '악의 감지'가 비명을 질렀다.

이제껏 느껴 보지 못한 진득한 살의가 내 신체를 향해 쏘아진다.

죽는다.

알 수 있다.

내 신체에 스며든 온갖 종족들의 인자가 내게 말하고 있다.

저 존재는 이길 수 없다고.

반항해 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고.

숨이 가빠지고, 동공이 떨렸다.

―크하하하하하하하하하!

웃음소리가 들렸다.

짐승이 포효하는 듯한.

또는 환호하는 듯한 웃음소리.

내 몸이 순식간에 굳었다.

―빌어먹을 메타트론! 감히 날 봉인해?

난생 처음 듣는 언어.

그러나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지금 메타트론이 봉인했다고 했어?

내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설마···

설마······!

나는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거지같은 천사 새끼들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 군.

날개가 보인다.

검은 날개.

그 모습을 확인한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 마창은······. 느껴지지 않는군.

머리에 도드라지는 두 개의 뿔.

검은자위에 붉은 눈.

칠흑의 갑주.

―뭐, 좋아. 마창이야 천천히 찾아보면 되는 거니까.

대악마 중 한 명.

루시퍼.

―오호.

남자가 웃었다.

―마침 피가 그리웠는데 잘 됐군.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악마처럼 웃었다.

< 120화 나비의 날갯짓 (2) > 끝

< 121화 나비의 날갯짓 (3) >

루시퍼.

그를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살인에 미친 또라이다.

특징은 만능에 가까운 힘을 지닌 어둠의 마력.

물질 구성부터 시작해서, 신체 강화, 어둠의 마법, 생명 창조까지 할 수 있는 사기적인 성질의 마력이다.

능력치 자체도 어마무시하다.

모든 능력치 SS랭크.

단순히 강하다고 그리 표현하는 게 아니라, 진짜 능력치창에 표시되는 랭크가 SS(99/99)다.

이 말에 혹자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아니, 현존하는 랭크는 S랭크까지밖에 없다면서, 무슨 SS랭크야?'

나는 분명히 말했다.

'현존하는' 이라고.

소설의 초반부에는 실제로 S랭크가 한계 랭크다.

그러나 소설 중반부부터는 다르다. 2부의 시작과 함께, 랭크의 한계가 올라간다.

2부의 서두를 여는 에피소드인 '혁명'의 시작과 함께, 시스템이 새로운 기능을 개방하게 되는데. 랭크의 한계가 오르는 것도 그 새로운 기능들 중 하나다.

'초월 시스템'

그 시스템의 개방과 함께 S랭크를 초월할 수 있게 되고, 초월에 성공한 자들은 초월자라 불리게 된다.

루시퍼는 그 초월자들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자다.

―네게 두 가지 선택지를 주마. 고통스럽게 죽을지, 아니면 끔찍하게 죽을지.

그런 놈이 나를 향해 진득한 살의를 쏘아내고 있다.

이 상황에서 공포를 느끼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단언컨대 없을 거다.

―자, 선택해라. 어서! 어서!!

맹수가 포효하듯 울부짖으며 한 걸음씩 다가온다.

쿠웅, 쿠웅!

발을 내딛을 때마다, 아스팔트가 달걀 껍질처럼 부스러진다.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이길 수 없다.

고대 유물이 몇 개가 있던 무리다. 저놈은 격이 다르다.

언노운?

강하다고 해봐야 결국 1부격 보스일 뿐.

루시퍼의 앞에선 갓난아기일 뿐이다.

현존하는 모든 초인, 빌런들이 힘을 합쳐서 맞서도 이길 수 없는 존재. 그게 바로 루시퍼다.

"······시발."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인간은 당황이 극에 이르면, 오히려 냉정해진다고 하던가.

맞는 말 같다.

실제로 내 머리도 어느 정도 냉정해졌으니까.

머리가 냉정해지자, 자연스레 현재 상황에 대한 고찰을 할 수 있게 됐다.

'이것도 나비 효과의 일종인가?'

그레이 아웃.

게이트 폭주.

게이트 유도 마법진.

자연의 분노.

이 네 가지 현상의 복합 작용에 의해 이 장소의 마력은 이 이상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아마 그 일그러짐의 결과가 '블랙 아웃'일 테지.

이러한 마력의 괴리가 시너지를 일으켰고.

차원의 틈새에 유폐된 루시퍼의 봉인을 풀어 버린 게 아닐까.

허술한 이론이었으나, 가능성이 없는 이론은 아니었다.

"······하."

만약 그렇다면 지랄도 이런 지랄이 없다.

400화 인근의 보스격이 떡하니 튀어나오면 대체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쯧.

그런 날 바라보며 루시퍼가 혀를 찼다.

―재미없군. 주제를 아는 먹잇감이었나.

내가 반항할 생각이 없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어느새 내 코앞까지 다가온 루시퍼가, 내 얼굴을 향해 자신의 얼굴을 내밀었다.

선연한 핏빛 눈동자가 코앞에서 빛난다.

―네놈···?

돌연 동공이 확장되고, 입꼬리가 반달처럼 휘었다.

―크하하하하하하! 그렇군! 그런 거였어!

광소.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손으로 눈을 가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친듯이 웃는다.

―결국 그분의 예언이 맞았다는 건가. 크흐흐.

······예언?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며, 이 이상 즐거울 수 없다는 듯이 웃는다.

―뭐, 좋아. 나는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죽일 수만 있으면 어찌되든 상관없으니까.

금세 살벌한 눈빛으로 돌아온 루시퍼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럼, 죽어라. ■□□■□.

마지막 단어는 들리지 않았다.

아니, 들렸으나 뭐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루시퍼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손끝을 뾰족하게 웅크리고, 나를 향해 내리 찌르려는 듯한 동작이었다.

그때였다.

키에에에에엑!

뒤에서 몬스터 한 마리가 튀어 나왔다.

사슴벌레를 닮은 몬스터.

근처에 소형 게이트라도 하나 더 열린 것일까.

―쯧. 버러지가 제 주제도 모르고.

루시퍼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버러지들이 자신에게 덤빈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루시퍼가 팔을 휘둘렀다.

촤아아악-!

풍압으로 몬스터가 짓이겨지며, 몬스터들이 끔찍한 몰골로 하늘을 날았다.

뒤따라 접근하던 벌레 떼도 마찬가지였다.

전멸.

그 방향에 있던 사슴벌레들은 모두 산산조각이 났다.

가히 엄청난 힘이었다.

누구든 지금 이 광경을 봤다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악할 테지.

"······."

나를 제외하고 말이다.

······왜 저렇게 약하지?

저 정도는 언노운도 할 수 있다. 아니, 싱글 랭커들도 할 수 있다.

원작의 묘사를 빌리자면, 루시퍼의 손짓은 허공을 가르고, 하늘을 붕괴시킨다 하였다.

그 묘사대로라면 지금 저 몬스터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야 한다. 몬스터들은커녕 뒷편의 건물들과 산까지 소멸했어야 정상이다.

초월자, SS랭크란 그런 존재다.

―······흐음.

루시퍼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그 눈으로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쥐었다 폈다를 반복한다.

루시퍼 또한 자신의 힘에 위화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설마 봉인이 풀린 것으로 인한 후유증인가?

아니면, 힘이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건가?

'혹시, 초월 시스템이 아직 개방되지 않았기 때문에 SS랭크의 힘을 사용할 수 없는 건가?'

내 눈에 이채가 흘렀다.

가능성은 높았다.

루시퍼도 결국 시스템에 종속된 존재 중 하나일 뿐.

1부 세계관인 현재엔 존재하지 않는 초월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상대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내 눈에서 희망의 빛이 흘렀다.

놈의 애장인 '루시퍼의 마창'은 내가 지니고 있다.

현재 주위엔 '블랙 아웃'이 펼쳐져 있으므로, 루시퍼의 특기인 어둠의 마력도 사용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아무리 강해 봐야, 싱글 랭크급이다.

결코 이길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아니야.'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약해져도 S랭크 최상위권이라는 것이다.

그런 존재를 C랭크 나부랭이인 내가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고랭크 고대 유물이 두 개만 있었다면······.'

해 볼 만했을 텐데.

내 어금니에서 까드득 소리가 울렸다. 결국 방법은 없는 건가.

―뭐, 좋아.

마침 루시퍼가 다시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자세한 건 나중에 알아보면 되니까.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이렇게 손 놓고 당할 수는 없다.

나는 손에 쥐고 있는 천변을 단검으로 바꿨다.

동시에 바람의 길이 열렸다.

후우우우웅-!

지금까지 본적 없는 거대한 붉은 궤적이 보인다.

거대하지만, 방심하고 있는 듯 허술하다.

······그렇다면 피할 방법은 있다.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푸화아아악!

"크윽!"

허나 완전히 피하는 건 무리였다. 후폭풍에 스친 팔뚝의 살점이 움푹 파이며, 뼈가 드러났다.

격통에 정신이 나갈 듯했다.

그러나 통증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이걸 피해?

루시퍼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동시에 눈에 힘이 들어갔다.

이번엔 확실히 나를 죽여 버리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후우우우웅-!

아까보다 더욱 크고, 예리한 붉은 궤적이 떠올랐다.

"아."

이 공격은 피할 수 없다.

어느 방향으로 몸을 날려도, 어떤 무구로 방어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나는 죽는다.

······제길.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안녕하세요."

여성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요 근래 귀에 익은 목소리.

걱정과 함께 속으로 몇 번이고 곱씹은 미성.

"날씨가 우중충한 것이 산책하기 좋은 날씨는 아니네요. 이런 날엔 괜히 기분이 언짢아지곤 하던데. 그래서 그런가."

나는 서서히 눈을 떴다.

여성의 등이 보였다.

시라카와 아이.

러스트.

그녀가 루시퍼의 주먹을 막고 서 있었다. 헌데 그녀의 모습이 평범하지 않다.

―······몽마?

등에는 악마의 날개를 달고, 엉덩이에는 검은 꼬리가 달려 있다.

루시퍼의 말처럼 몽마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지금. 굉장히 기분이 나쁘네요."

여태껏 들어 온 나긋한 목소리와는 다른, 살의로 점철된 무거운 음성이었다.

―몽마가 왜 나를 방해하지?

"뭐래 이 괴물 새끼가."

러스트의 주위에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마력?

아니다. 블랙 아웃이 펼쳐져 있는 지금,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드래곤 로드도 무리다.

그럼 저건 뭐지?

마력보다 따뜻한 느낌이고, 생명 본연의 생생한 느낌이 드는 오묘한 기운.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저건 정기다.

러스트가 다루는 힘으로, 생명의 원천과도 같은 특별한 기운.

그 기운을 몸에 두르고 있는 것이리라.

―대답해라! 몽마! 네가 어째서 내 앞을 막는 거지?

"닥쳐. 이 몬스터 새끼야."

러스트가 험한 말과 함께, 주먹을 휘둘렀다.

밀도 높은 정기를 한껏 머금은 주먹이 루시퍼의 가슴팍을 정확히 후려쳤다.

콰아아아아앙-!

주먹과 가슴이 부딪힌 소리라곤 생각할 수도 없는 강렬한 소리가 울렸다.

―쿨럭!

그 충격에 루시퍼가 하늘을 날았다.

"후우."

러스트는 날아가는 루시퍼를 힐끔 바라본 뒤에,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서율 씨. 그··· 괜찮아요?"

동공이 핑크빛이다.

뭔가 평소보다 이뻐진 것 같은데, 착각인가?

묘하게 뒤로 후광이 흐르는 것 같은데.

"어? 어, 고마워."

"······."

내 반응을 보며, 러스트가 두 눈을 부릅떴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다.

"하하."

그러다 곧 무언가 납득한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서율 씨는 다르네요."

무슨 의미일까.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돌연 러스트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시선이 내 팔뚝에 꽂혀 있다. 내 상처를 확인한 것이리라.

"그 몬스터 새끼! 감히······ 누구 몸에다가···!"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살아생전 이렇게 살벌한 표정은 처음 본다.

"서율 씨. 잠시 기다리고 있어요. 금방 가서 처리하고 올 테니까."

싱긋 웃더니, 루시퍼가 날아간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

혼자 남은 나는 멍하니 그 방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

모든 것이 의문이다.

그중 가장 큰 의문은 러스트의 전투력에 대한 것이다.

현재 루시퍼는 S랭크 싱글 넘버급의 강함은 지니고 있을 터.

그런 루시퍼를 러스트가 압도하다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그렇다는 말은 러스트가 최소 마에스트로 이상의 전투력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

그 순간, 머릿속에 무언가 번쩍였다.

"정기!"

러스트의 정기는 '블랙 아웃'에 영향을 받지 않는 특수한 힘이다. 당연히 사용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다.

반면 루시퍼는 어떨까.

제아무리 루시퍼라고 해도, 블랙 아웃 내에선 마력을 사용할 수 없다. 마창도 없고, 초월 시스템도 없기에 오로지 신체 능력만으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마력을 사용할 수 없는 불완전한 루시퍼와, 정기를 사용해 완전한 상태의 러스트.

결과는 뻔했다.

"······완벽한 카운터."

블랙 아웃이 존재할 때에 한해선 러스트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콰아아앙! 퍼어어엉!

―이, 빌어먹을 몽마 새끼가아아!

저 멀리서 폭음 소리와 함께, 루시퍼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에 분노가 가득하다.

―마창이여! 지금 당장 내게로 오라!

허공에 손을 뻗고 마창을 부른다. 그러나 반응은 없다.

마창 대신 러스트의 주먹이 날아간다.

퍼억!

맹렬한 타격음과 함께 다시금 허공을 날아간다.

―마창이여! 마창이여어어어!

손도 발도 못 쓰고, 샌드백으로 전락한 루시퍼가 애절하게 마창을 불렀다.

"······세상에."

2부의 중간 보스격인 루시퍼를 복날 개 패듯이 패고 있다.

"죽어! 감히 서율 씨의 몸에 손을 대?"

어이가 없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허억··· 허어억.

루시퍼의 숨이 점차 가빠져 갔다.

안면은 함몰되었고, 오른팔은 완전히 부러져 덜렁거린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버티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 끝이다.

와락!

러스트가 루시퍼를 배후에서 껴안은 것이다.

―놔, 놔라! 이 더러운 창년이!

이미 넝마가 되어 버린 루시퍼는 러스트를 떨쳐낼 수 없었다.

"별로 내키진 않지만, 어쩔 수 없네."

러스트가 입술을 핥았다.

그 순간, 루시퍼의 신체에서 무형의 기운이 뿜어져 나와, 러스트에게 흡수되어 가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마치 산 채로 영혼이라도 뽑히는 것마냥 처절한 비명소리를 질렀다.

"원래 목숨까진 빼앗지 않는 주의지만, 몬스터인 네겐 최고로 고통스런 죽음을 선사해 줄게."

러스트의 눈동자가 위험한 빛으로 빛났다.

―이, 이이이! 창녀 새끼가아아아아!

루시퍼의 목소리가 갈라져 갔다.

신체에 힘이 빠져가고 있다.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부디 처절하게 후회하면서 죽으렴."

고혹적인 목소리와 함께, 루시퍼의 신체가 완전히 힘을 잃었다.

"······죽었어?"

진짜로?

그 루시퍼가?

이렇게 허무하게?

러스트가 손을 떼자, 루시퍼의 시체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나는 서서히 그의 시체로 다가갔다.

진짜 죽었다.

"이게 무슨······."

말이 안 나온다.

지금 이 상황을 뭐라 형용해야 좋을까.

그때였다.

쿠구구구구궁-!

게이트가 열렸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그냥 쩌억.

순간 또 새로운 적인가 싶었으나, 금세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검은 하늘이 파란빛으로 돌아오고 있다. 물감이 빠지듯이 아주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푸르른 하늘이 되어 간다.

이것이 나타내는 바는 한 가지뿐이었다.

"······공략에 성공했구나."

메인 게이트 공략 성공.

그것밖에 없다.

다음 순간, 게이트에서 네 명의 인영와 두 마리의 호랑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율아! 갔다왔어!"

가장 선두에 서 있던 시연이가 힘차게 손을 흔들며 내 이름을 불렀다.

"······어?"

그 순간, 시연이의 표정이 굳었다.

"서율··· 씨? 그건······."

"세상에······."

뒤쪽의 세 명도 마찬가지였다.

내 뒤에 있는 무언가를 빤히 바라보며,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아뿔싸!

러스트가 뒤에 있었지!

나는 잽싸게 몸을 돌렸다.

"?"

그러나 러스트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언제 사라진 거지?

눈치도 못 챘다.

"······서율 씨."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유화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악마를······ 혼자서 처리하신 거예요?"

"······예?"

모두는 내 발치에 놓인 루시퍼의 유해를 바라보며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루, 루시퍼! 그대, 루시퍼를 잡았단 말이냐!

레나는 당황을 넘어서 경악하고 있었다.

"······?"

이게 이렇게?

< 121화 나비의 날갯짓 (3) > 끝

< 122화 나비의 날갯짓 (4) >

게이트 대폭주 사건이 종결된 후로 4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유화는 자신의 방에서 메이든과 통화를 나누고 있었다.

"진짜 정신이 다 없네요."

―짜샤. 좋은 거야. 브랜드 평판을 생각해.

사건이 끝난 직후.

유화는 미리 준비해 뒀던 정보들과 사건의 내막을 기록한 데이터를 언론에 공개했다.

강서율이 준비해 준 그레이 아웃에 대한 정보(레나의 정보)가 큰 도움이 됐다.

그 결과 유화는 게이트 대폭주를 해결한 영웅이 되었고.

현재 유화의 비혼 길드와 신지아의 신화 그룹의 브랜드 평판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중이다.

―시연이는 진짜 괜찮대?

"네. 부담스럽다고 하네요."

―하긴. 걔네 회사는 이런 브랜드 평판이 중요한 게 아니니까.

"오히려 어정쩡하게 견제만 늘어서 독이 될 수도 있고요."

하시연을 비롯한 레나, 금호, 백호에 대한 정보는 언론에 공개하지 않았다.

―그래도 화 네가 잘 좀 챙겨 줘.

"물론 그래야죠."

이번에 얻은 이득은 유화 혼자서 이룬 것이 아니다.

모두와 나누는 게 당연하다.

"언니는 좀 어때요?"

―몰라서 묻냐. 죽겠다 나도. 말년에 이게 무슨 고생인지.

메이든이 한숨을 내쉬었다.

메이든은 이번 일을 처리하는 데 깊게 관여했다.

메이든제 마도 무구를 원가에 가까운 값으로 제공하기도 했고, 최전선에 나서서 지휘를 맡기도 했다.

그 결과, 시민들에게 큰 호감을 사게 됐다.

다른 나라 사람인 메이든이 한국의 위기에 이렇게 전력으로 도와줬다는 점에 크게 감동한 것이다.

실제로 메이든의 장비들이 없었다면 피해는 지금에 비할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듯 현재 메이든의 이미지는 손해득실을 생각하지않고 인명구조에 힘쓰는 선인이 되었다.

단순히 강서율에게 빚을 갚는다는 생각으로 게이트 대폭주 사건에 발을 들이밀었을 뿐인데, 그 결과 무지막지한 이득을 얻게 됐다.

―그 꼬맹이. 이런 것까지 다 계산한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소름이다.

"모든 걸 계산한 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을걸요?"

실제로 게이트 공략에 나서기 전에 미리 정보를 모아두라고 한 것도 강서율이었고, 그 후에 다른 기업들과 시민들이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한 것도 강서율이니까.

즉, 최소한 비혼 길드의 브랜드 평판 상승까지는 계획에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 악마는 어떻게 됐어?

"사라졌어요."

강서율이 처리한 것으로 판단되는 악마는 어느 순간 먼지로 변해 완전히 소멸했다.

―진짜 악마는 맞고?

"네. 얼마 전에 강원도 필드에서 등장한 악마보단 작았지만, 확실히 비슷한 생김새였어요."

―그런 놈을 그 꼬맹이가 혼자서 처리했다고?

"······네. 전투 장면을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정황상 확실할 거예요."

과거 메피스토의 출현 기록을 떠올려 보면, 최소한 S랭크 초인이 15명은 모여야 상대할 수 있는 마력량이었다.

―그럼 못해도 싱글 넘버급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말인데······. 말이 되나?

20세의 나이로 그런 전투력을 보유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실험으로 얻은 힘이 저희의 생각보다 훨씬 큰 게 아닐까 싶어요. 레나도 말도 안 되는 실력을 보여 줬거든요."

유화는 레나를 떠올렸다.

10세의 여자아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실력이었다.

―······총 7종류의 속성을 구사할 수 있다고 했지?

"네. 마력량도 큰 것 같고, 발동 속도도 빨라요. 컨트롤은 말할 것도 없고요."

유화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 레나라는 여자아이의 전투력으로 보아, 꼬맹이도 최소한 그만큼의 힘은 지녔을 것이다?

"네. 게다가 서율 씨는 고대 유물까지 사용하시잖아요? 그럼 싱글 넘버급 전투력을 지녔다고 해도 그리 이상한 건 아니죠."

―고대 유물이라······.

메이든인 강서율이 대법관의 십자가와 일그러진 균형을 사용하는 장면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확실히 엄청난 성능이었다.

그런 유물들을 사용할 수 있다면, 싱글 넘버급의 전투력을 지닌 것도 납득이 가능하다.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인데, 그 꼬맹이. 고대 유물을 사용하는 데 제한이 있는 것 같아.

"······제한이요?"

―그래. 최소한 중복 사용 제한, 아니면 시간 제한 정도는 걸려 있는 게 아닐까 싶어.

메이든의 추리는 매우 예리했다.

―대법관의 십자가야 그러려니 할 수 있는데, 일그러진 균형은 좀 석연찮은 면이 많아.

"어떤 면이요?"

―마법진 인근으로 쏠린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온 대규모 몬스터들을 처리하는 건 '이프리트의 축복'으로도 충분했을 거란 말이지.

결국 광역 섬멸이라는 목적은 같으니까.

"그냥 그게 더 효율이 좋아서 그랬던 게 아닐까요?"

―아니야. 그 꼬맹이는 자신의 정체나 힘을 숨기는 것에 병적인 집착이 있어. 그런 꼬맹이가 굳이 내 앞에서 새로운 유물을 꺼낸다? 마땅한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건 그렇네요."

강서율의 치밀한 성격을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하긴 하다.

―고대 유물을 성능에 상관없이 최대한 많이 모으는 것도 착용에 제한이 있기 때문이라면 이해가 되고.

"······만약 착용에 제한이 없다면 성능이 뛰어난 유물만 모으면 되니까요."

―실험의 부작용 같은 걸 수도 있고.

"······고대 유물을 착용할 수 있는 것도 실험의 결과라면, 그 착용에 제한이 걸린 건 부작용이다. 이거네요."

―그렇지.

말하면 말할수록 말의 앞뒤가 맞아 간다.

―뭐, 결국 증거는 하나도 없는 추측에 불과할 뿐이긴 하다만. 중요한 것도 아니고.

메이든이 껄껄 웃었다.

"그건 그렇네요."

유화가 쓰게 미소 지었다.

―아, 씁. 휴식 시간 지났네.

"앗. 저도요."

강서율에 대한 얘기를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럼 고생하고. 나중에 또 전화하자.

"네. 언니두요."

* * *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공주님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그대여, 루시퍼를 어떻게 처리한 건진 진짜 말 안 해 줄 겐가?

내게 찰싹 달라붙어서 뾰루퉁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 본다.

―말했잖아. 루시퍼가 약화된 상태였다니까.

―흥! 말이 되는 소리를 하거라! 루시퍼가 얼마나 강한지는 짐이 가장 잘 알고 있다! 봉인으로 얼마가 약해졌건, 그대의 먼지만 한 마력으로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먼지만 하다는 건 좀 심한 표현 같은데.

―서로 마력을 쓸 수 없던 상태······

―블랙 아웃 때문에 서로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말할 셈이라면 그만두거라. 이미 수십 번은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다.

공주님이 귀를 한껏 세우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노려본다.

―말했잖느냐. 그대의 능력은 짐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루시퍼가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해도, 그대의 신체 능력으론 그놈을 절대 이길 수 없다. 그대는 초월자가 아니니까.

······정론이다.

루시퍼는 초월자.

그리고 초월자를 이길 수 있는 건 초월자뿐이다.

―그대가 루시퍼를 이겼다면, 필히 숨겨 둔 한 수가 있다는 것일 터. 어서 그걸 말하거라!

공주님이 내 옷을 붙잡고 마구 흔들었다.

······어쩌면 좋지.

이 분위기에서 루시퍼를 쓰러트린 게 내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애초에, 루시퍼를 쓰러트린 일에 대해서 설명하려면 초월 시스템을 비롯한 원작 정보에 기반한 온갖 얘기들을 다 해야 한다.

그런 걸 일일이 설명할 순 없잖아.

―그대는······.

내가 계속해서 침묵을 고수하자, 공주님의 두 눈꼬리에 눈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공주님?

―짐을 믿지 못하는 게구나.

고개를 푹 숙이고, 내 가슴에 머리를 가져다 댄다.

두 귀는 추욱 쳐져 있고, 정수리가 간헐적으로 움찔한다.

울고 있다.

―현재 짐에겐··· 그대밖에 없는데. 짐은 그대에게라면 모든 걸 털어 놓을 수 있는데······.

이 세상에서 공주님은 이단이다.

믿을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라는 것도 과언이 아니다.

―정작 짐은 아직 그대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 게로구나.

―아니야. 내가 공주님을 왜 못 믿어.

나는 공주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난 4일간 왜 그리 끈질기게 묻는 건가 했더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아니다. 짐이 투정을 부린 게지. 미안하다.

―······공주님?

귀가 이 이상 쳐질 수 없을 정도로 추욱 내려갔다.

―애초에 타인의 비밀을 묻는 것은 실례인 것을. 조급해서 그런 기본적인 것도 망각하고 있었다. 미안하다.

―······.

어쩌면 좋지.

갑자기 비관적이 됐다.

나는 여전히 내 가슴에 머리를 푸욱 기댄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공주님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모든 걸 공유할 순 없지만, 어느 정도는 진실을 말해 주는 수밖에.

나는 '장인의 간이 대장간'에서 '루시퍼의 마창'을 꺼냈다.

텅-!

―꺄앗! 무, 무엇이냐!

바닥에 쇠가 부딪치는 충돌음에 공주님이 짧은 비명을 질렀다.

두 눈에 눈물을 그렁거리며, 고개를 돌려 소리의 발원지를 쳐다본다.

―······!

그 순간, 공주님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루, 루시···루시퍼의 마창!

바로 알아채네.

―이게 내 비밀이야.

그 외에도 다양한 고대 유물을 꺼내, 바닥에 펼쳐 놓았다.

―나는 종족 제한에 상관없이 모든 유물을 사용할 수 있어. 이게 내 비밀이야.

―종족 제한을······.

물기 가득한 눈으로 나를 멍하니 바라본다.

―내가 이 비밀을 누군가에게 말하는 건 공주님이 처음이야.

―호···호오. 그렇구나. 짐이 최초인가.

―최초지.

공주님의 입술이 움찔거린다.

억지로 미소를 참는 듯하다.

―그럼 이 고대 유물을 이용해서 루시퍼를 처리했다는 게로구나. 이해했다.

공주님이 해맑은 미소로 돌아왔다. 고대 유물의 사기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공주님이니만큼, 바로 납득한 듯했다.

―그나저나······.

공주님이 루시퍼의 마창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루시퍼의 마창을 이용해서 루시퍼를 쓰러트리다니······. 놈이 얼마나 당황했을꼬. 그 모습을 짐이 직접 봤어야 하는데.

루시퍼한테 당한 게 많은 모양이다.

―그럼 궁금한 건 다 해결됐지?

―음!

공주님이 만족한 듯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날 오후.

나는 인근 공원 벤치에 앉아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늘이 푸르다.

매미의 울음소리가 정겹다.

낮에는 완전히 여름이네.

한동안 휴식도 없이 달려왔다 보니, 이렇게 멍하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힐링되는 기분이다.

"아. 하루 종일 이러고 있고 싶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을 때였다.

"마음이 통했네요."

러스트가 싱긋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오늘도 우연?"

"네. 날씨가 좋아서, 산책을 하다 보니. 우연히 만났네요."

러스트가 싱긋 웃었다.

"그럼 4일 전에 만난 것도 우연인가?"

"네. 날씨가 우중충해서, 산책을 하다 보니 우연히 만났던 거예요."

"거짓말."

내 무던한 말에 러스트가 꽃처럼 웃었다.

"네. 거짓말이에요. 그날은 목적이 있어서 서율 씨를 찾았던 거예요."

아주 장난스런 웃음이었다.

"목적?"

"그건 비밀이에요."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4일 만에 뵙네요."

"그러게. 그동안 뭐했어?"

"이것저것? 휴가가 길어져서 처리할 일이 좀 있었거든요."

"비서 일?"

"비슷해요."

다시 정적이 흘렀다.

"그날의 일······. 안 물어보시네요?"

"뭘 물어?"

"제 힘에 대한 거나, 제 모습에 대한 거나······."

"모습이면, 날개랑 꼬리?"

"네."

러스트의 눈동자가 불안한 듯 떨렸다.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몽마 같은 모습이더라."

"······네."

이제는 입술까지 파르르 떨린다.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 같은 표정이다. 자신의 외견에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모양이다.

"됐어."

나는 픽 웃었다.

"······네?"

예상컨대, 그 모습은 '격세유전'의 발현에 의한 것이 아닐까.

지아가 지니고 있는 엘프족의 격세유전과 비슷한 몽마족의 격세 유전.

"됐다고. 네가 힘을 숨기고 있던, 모습이 몽마와 같건. 무슨 상관이야."

"상관이······ 없어요?"

"그래."

나는 러스트의 손을 잡았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순백의 영혼이 눈에 띈다.

역시 이 여성은 선이다.

무슨 인과로 진리의 구명자에 들어가서 간부의 자리까지 오른 건지는 모르지만, 그건 확실하다.

"중요한 건 네가 내 목숨을 구해 줬다는 거지."

게다가 내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다.

"아······."

돌연 러스트가 고개를 숙였다.

긴 머리에 얼굴이 가려져서 표정은 볼 수 없으나, 간헐적으로 떨리는 어깨를 보아 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역시··· 서율 씨는······."

목소리가 떨렸다.

떨리는 목소리로 서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특별···해요."

순진무구한 눈동자.

지금까지 봐 온 상쾌한 표정과는 전혀 다른, 마치 아이 같은 천진한 표정이었다.

지금까지의 모습이 연기였던 것일까. 지금의 천진한 모습이 더 잘 어울린다.

"고마워요."

그녀가 울면서 내게 감사를 표현했다.

"고마워할 건 나지."

방금으로 그 모습을 보며 확신했다.

시라카와 아이.

이 여성과는 같은 배를 탈 수 있다.

< 122화 나비의 날갯짓 (4) > 끝

< 123화 짧은 평화 (1) >

―그럼 잠시 이별이네요.

러스트는 마지막으로 그 말을 남기고 내게서 떠나갔다.

아마 조직으로 복귀하는 거겠지.

복귀해서 내 정보가 언노운의 귀에 들어갈 것을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서율 씨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그 몬스터한테 몰리고 계실 때였어요.

다행히 러스트는 내가 고대 유물을 사용하거나 하는 모습을 보지 못한 듯했다.

거짓말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아마 진실일 테지.

―그 전에 발견했으면 그런 상처를 입게 놔두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말하며 이를 빠드득 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리고 뭐, 추가로 수를 써 두기도 했고.

"후."

지금은 오후 11시 반.

레나와 금호, 백호는 이미 침실에서 잠든 지 오래다.

"아오 머리 아파."

나는 혼자 책상 앞에 앉아서 골머리를 싸매는 중이었다.

루시퍼의 죽음이 어떤 변화를 초래할까. 그것에 대해 생각하자니, 자연스레 머리가 아파 왔다.

"일차원적으로 생각하면 아주 좋은 변화긴 한데······."

2부의 중간 보스격인 루시퍼가 지금 사망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좋은 일이다.

그놈을 상대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말이니까.

그러나 현재 내 주위에서 벌어진 일들을 생각해 보면 마냥 안심할 수가 없었다.

'루시퍼가 사망한 것으로 마신 측의 움직임이 변하면 어쩌지?'

'루시퍼를 대신할 제 3의 인물이 출현할 확률은?'

'마신이 루시퍼의 죽음에 경계심을 높여서 일을 그르칠 가능성은?'

이런 막연한 불안감이 내 머릿속을 잠식하고 있었다.

나비 효과로 뒤통수를 맞은 적이 워낙 많았어야지.

"아. 나비 효과란 말 누가 만들었는지 죽이고 싶다."

짜증이 너무 극에 달해서 그런가, 세상만사가 모두 부정적으로 보일 지경이다.

"아 몰라."

나는 노트를 덮어 버림과 동시에 의자에서 일어났다.

침대에 그대로 뛰어 들어서 눈을 감았다.

"지금 생각해 봐야 무슨 소용이야."

머리만 더 아파질 뿐.

어차피 뭐가 어떻게 달라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고로, 지금 내가 고민하는 것은 모두 쓸데없는 걱정에 불과하다.

사실 내가 이런 걱정을 하는 것부터가 웃긴 일이다.

애초에 미래의 변화는 필연적인 것이라고 애초부터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 미래를 더욱 좋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 행동을 거듭했을 뿐이다.

······비록 그 결과가 루시퍼의 빠른 출현이었다고 해도 후회해선 안 된다.

막연한 미래를 떠올리며, 불안에 떨고 정체하는 것이야 말로 최악의 행위니까.

"후."

그렇게 정신을 다스리자, 금새 몸이 편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머리를 너무 혹사시켜서 그런지, 금방 수마가 몰려왔다.

"······아."

그러고 보니 쓸데없는 생각을 하느라 정작 중요한 걸 까먹고 있었다.

'천사족의 완전 체화 효과가 뭔지 알아봐야 하는데······.'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진다.

'새로 얻은 두 개의 특성도 실험해 봐야 하고······.'

아직 할 일은 많이 남았는데, 일어나고 싶지 않다.

꿈뻑. 꿈뻑.

모르겠다.

자야지.

잠시 후.

내 의식은 전구의 필라멘트처럼 뚝 끊어졌다.

* * *

일요일.

오늘은 지아, 시연이와 약속이 있는 날이다.

뭐, 어딜 가는 건 아니고.

두 명이 우리 집에 놀러오기로 했다.

띵동-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인터폰 화면을 확인하자, 지아와 시연이가 보였다.

왔구나.

나는 바로 문을 열었다.

"서율아! 안녕!"

"선조님. 안녕하세요."

두 명이 활짝 웃으며 들어온다.

"어서 오거라!"

그런 두 명을 바라보며, 레나가 한국어로 으스댔다.

그래. '한국어'로 말이다.

최근 한국어 교본으로 자습을 좀 하더니, 존댓말이 근엄한 왕족의 어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아 버렸다. 그래서 저런 어조가 되었다.

아쉽다.

"안녕."

"안녕하세요."

"음!"

레나가 방긋 웃었다.

"공주님. 한국말 많이 늘었네?"

시연이가 감탄했다.

"그게 '올 때 메로나' 같은 거 알려 준 사람이 할 말이냐?"

"헤헤."

혀를 내밀고 장난스럽게 웃는다.

레나가 그런 하시연에게 다가가서 소매를 꾹꾹 잡아당겼다.

"갈비찜은 가져와써요···는가?"

레나의 말이 뭔가 이상했다.

두 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응? 갈비찜 가져왔냐고?"

"네···거라."

"?"

두 명의 고개가 한층 더 기울었다.

"그, 서율아. 공주님 말투가 왜 저래?"

"어제 TV에서 사극을 보고 뭐에 감명을 받았는지. 말 어미에 '~는가.'나 '~거라.'가 붙었어."

어제, 우연찮게 사극을 본 공주님은 왕의 대화를 듣게 됐다.

그리고 존댓말이 자신이 추구하는 근엄한 왕족의 말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의 어조는 어설프게나마 그들의 언어를 해석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다.

"왜 대답을 안 해여···는가?"

그 결과가 저거다.

지금까지 배워 왔던 존댓말 어조에 이상한 어미가 붙어 버렸다.

"왜 그런 눈으로 바라봐?"

두 명이 오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서율이 네가 장난쳐서 저렇게 된 거 아냐?"

"아니야."

억울하다.

내가 지은 죄가 있어서 뭐라곤 못 하겠는데, 이번엔 진짜 아니다.

"진짜? 저번에 오빠 좋아 사건도 있었고. 또 공주님 놀린다고 이상한 말 알려 준 거 아냐?"

"읏!"

오빠 좋아, 란 말에 공주님이 반응했다.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나를 바라보며 온몸을 떤다.

부들부들.

오빠 좋아!(나쁜놈 싫어!) 사건은 공주님에게 있어 크나큰 흑역사가 되었다.

그 말의 진실에 대해서 알게 된 공주님을 달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한국어 학습에 한해선 그대의 말은 절대 믿지 않을 게다!

······그 외에도 존댓말에 대한 걸 잘못 알려 준 것까지 더해져서, 내 신용도는 바닥을 치고 있는 중이다.

그 결과가 지금 저 어투다.

내가 뭐라고 하던 듣지를 않는다. 그저 저 어투를 고수할 뿐.

"이번엔 진짜 나 아냐. 반대로 이번엔 아니라고 해도 안 믿어서 고민하는 중."

"······얼마나 놀렸으면 그래?"

시연이가 레나를 불쌍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게."

좀 자중할 걸 그랬다.

"그니까 너희가 오늘 얘기 좀 잘 해 줘. 너희 말은 그래도 좀 믿어 주잖아."

진심으로 저 요상한 어투 좀 어떻게 해 주면 좋겠다. 제발.

"음. 오케이."

"네. 맡겨 주세요."

두 명이 맡겨 두라는 듯이 활짝 웃었다.

"냐앙."

우리의 목소리에 잠에서 깬 금호가 반쯤 감은 눈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우리 금호. 시끄러워서 깼어?"

그리곤 코앞까지 다가와서 내 가슴에 폴짝 뛰어 들었다.

정확히 캐치.

"하아아암."

내 품에 정확히 자리를 잡고 내 팔뚝을 베개 삼아 지아와 시연이를 바라본다. 여전히 졸린 눈이다. 그래서 더 귀엽다.

"어유. 귀여워."

두 명도 똑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눈에서 꿀이 떨어진다.

"백호는요?"

지아가 금호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아직 자. 왜? 보고 싶어? 깨울까?"

"아뇨아뇨! 자고 있으면 됐어요."

유화 씨를 포함한 4인 + 2마리는 게이트 공략 이후로 급격하게 친해졌다.

"그래? 근데 아마 놔둬도 2시간 뒤면 깰 거야. 밥 달라고 앙탈부릴 시간이거든."

"앗. 그 밥 제가 줘도 되요?"

"그럼. 당연히 되지."

"감사합니다."

이게 특이하게 지아는 금호보다 백호를 더 좋아한다.

자기 입으론 아니라고 하는데, 내가 볼 땐 확실하다.

그 도도한 게 뭐가 좋다고 저러는지.

"유화 언니는 역시 못 오신대?"

"바쁘다 하시네."

"그랭? 아쉽다."

시연이랑 유화 씨도 제법 친해졌다. 이제 언니 동생 하는 사이까지 됐을 정도다.

아, 물론 지아와 유화 씨는 여전히 사이가 나쁘다. 같은 자리에 있어도 둘이 대화하는 걸 의도적으로 피하는 느낌이다.

꾹꾹-

레나가 다시금 하시연의 소매를 당겼다.

"갈비찜··· 업서여···는가?"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아, 있어. 가져왔지."

시연이가 활짝 웃으며 쇼핑백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공주님의 표정이 확 폈다.

갈비찜이 그리 좋을까.

······맛있긴 하다만.

"오늘은 갈비찜에 양념 갈비도 해 봤어."

"앙넘 갈비···?"

갈비라는 말에 반응한 것인지.

공주님의 표정이 태양처럼 밝아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몇 일 뒤면, 양념 갈비도 정확하게 발음하고 있지 않을까 싶네.

* * *

진리의 구명자 은신처.

"어서 와라."

마에스트로는 예정보다 빠르게 복귀한 러스트를 반겼다.

"기간이 지나기 전까진 절대 복귀하지 않을 것처럼 말하더니, 결국 복귀했군. 무슨 바람이 분 거지?"

"그거야 내 마음이지. 보스는?"

"용안의 형상을 융화시키고 계시다."

"그래?"

러스트의 표정은 표독스런 암사자처럼 날카로웠다.

당장 어제 강서율에게 보이던 천진한 웃음이 거짓말 같다.

색욕의 이름에 걸맞은 가면을 쓴 것이다.

"그래. 한국에서 정기는 많이 모았나?"

러스트가 한국에서 쉬면서 할 일이라곤 정기 수집밖에 없을 거라 생각하고 한 말이었다.

"내가 너한테 그런 보고까지 할 필요가 있어?"

"흠."

러스트의 눈이 차가운 빛을 내뿜었다.

'역시 그때의 전화가 문제였나.'

러스트에게 복귀할 것을 요청했던 날. 그녀의 역린을 건드린 게 아닐까.

왜 그런 반응을 보인 건지는 아직까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아마 확실할 것이다.

"그럼 보스랑은 만날 수 없겠네?"

"그래. 적어도 3일은 작업에 집중하고 싶다 하셨다."

"그렇단 말이지."

러스트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럼 3일 뒤에 찾아올게. 보스가 나오면 그렇게 전해 줘."

그런 러스트를 마에스트로가 만류했다.

"기다려라. 네게 맡기고 싶은 임무가 있다."

러스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메일로 보내. 감정없는 통보가 네 특기잖아."

그대로 방 밖으로 빠져 나갔다.

마에스트로와는 말을 섞고 싶지 않다.

혐오감이 끓어오른다.

이 이상 대화를 이어 가다간, 지금 쓰고 있는 '색욕'으로서의 가면이 벗겨질 것만 같다.

'내가 저런 걸 왜 따라다녔지?'

짜증이 치솟는다.

단순히 얼굴만 잘생기고, 접촉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만으로 마에스트로를 따라다녔던 자신이 한심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딴 걸 사랑이라 생각했다니.'

자신의 멍청함에 치가 떨릴 지경이다.

'······서율 씨 보고 싶다.'

이제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강서율이 그리워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얼굴에 열기가 오른다.

"아······."

아마 이게 진짜 사랑이라는 감정이겠지.

'조금만 참자. 이번 일만 잘 해결되면 서율 씨와 함께 있을 수 있어.'

언노운과의 계약을 모두 이행하기만 하면 자신은 자유의 몸이 된다.

'그때까지만 참으면 돼.'

러스트의 두 눈이 열망으로 빛났다.

사아아······.

그런 러스트를 향해 어둠이 쇄도했다. 습격은 아니었다.

"오랜만이군."

"웬일이래? 네가 먼저 나한테 다가오고?"

그림자가 스멀스멀 뭉쳐,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러스트. 네게 할 말이 있다."

이내 사람의 형태를 이루더니, 그 안에서 허미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네가? 나한테?"

"그래."

"무슨 말?"

허미트가 러스트의 귓가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강서율에 대한 얘기다."

"······!"

러스트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러나 곧 평소의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이런 표정 연기는 러스트의 특기다.

"여기는 듣는 귀가 너무 많다.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으면, 2시간 뒤에 내가 지정한 장소로 오도록."

머리가 복잡한 듯, 침묵을 고수하는 러스트를 바라보며.

허미트가 쐐기를 박았다.

"정확히는 강서율의 과거에 대한 얘기, 그의 목적에 대한 얘기라고 생각해도 좋다."

허미트는 조금 전에 강서율에게 연락을 받았다. 허미트가 건넨 일회용 통신 반지를 사용한 연락이었다.

강서율은 허미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러스트에게 내 과거에 대한 얘기를 해.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그리고 끝에 이렇게 덧붙였다.

―그럼 그녀는 언노운의 심장에 치명상을 입힐 예리한 비수가 되어 줄 거야.

< 123화 짧은 평화 (1) > 끝

< 124화 짧은 평화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