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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소설 속 망나니가 되다

소설 같은 일이 내게 벌어졌다.

눈을 떠보니 소설 속이었다.

'철혈의 기사'

얼음처럼 냉철한 영웅 하비엘 아스라한이 이끌어나가는 불굴의 대서사시.

나는 그 장대한 이야기 속 세계로 들어와 버렸다.

무명 시절의 하비엘이 모시던 주정뱅이 도련님이 된 채로.

이때만 해도 나는 몰랐다.

이를테면 이것은, 평범한 토목설계 공학도였던 내가 한 세계의 수호자로 거듭나게 된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RP(인연 점수=Relationship Point) 시스템이 활성화됩니다.]

[당신은 주요 인물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RP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획득한 RP를 투자하여 재능 스킬을 개화할 수 있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0]

머릿속에서 이상한 메시지가 알람처럼 울려댔다.

대체 RP는 뭐고 스킬 생성은 또 뭔지.

'피곤해. 졸려.'

침대 속에서 수호는 인상을 찡그리며 몸을 뒤척였다.

귀찮았다.

당연했다.

낮엔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고.

밤엔 일터에서 알바로 땀을 흘렸다.

그러는 와중에 기분 전환이랍시고 밤이 새도록 소설을 읽었으니 피곤한 건 당연한 일이다.

아니, 거의 업보다.

'그래도 과제 다 해놨으니까.'

평소보다 30분은 늦게 일어나도 된다.

그 생각에 만족감 가득한 미소가 피어났다.

하지만 수호의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어나십시오."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가우면서도 뭔가 똑 부러지는 느낌의 음성.

'꿈인가.'

아마 잠결에 들려온 소리겠지.

수호는 반대로 몸을 뒤척였다.

하지만 그 몸짓도 다시 들려오는 재촉을 막을 수는 없었다.

"늦었습니다.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로이드 님."

...어?

꿈이 아니다.

분명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어떻게?'

멍한 가운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긴 2평 남짓한 고시원 방인데.

문은 언제나 잊지 않고 잠그는데.

그런데 누군가가 들어와서 말을 걸고 있다고?

수호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온몸이 딱 굳고 말았다.

"일어나셨습니까. 그래도 오늘은 금방 눈을 뜨셨군요."

"...."

침대 옆에 단정하게 앉아 있는 은발의 미남자.

이제 갓 스물쯤 되었을까.

웃음기라곤 1그램도 없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이 만년설 서릿발로 벼려낸 한 자루 칼날처럼 잘 어울렸다.

"하비엘... 아스라한?"

수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분명하다.

지난밤 밤을 꼬박 지새우며 읽었던 소설 철혈의 기사.

그 서사시의 주인공인 하비엘 아스라한의 일러스트가 딱 저런 모습이었다.

아니, 아예 똑같다.

저렇게 한쪽 입술만으로 썩소를 짓는 모습마저도 우아한 그림처럼.

"드디어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시는군요. 감사합니다."

"...."

표정만 보면 하나도 안 감사한 것 같은데.

"그런데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하비엘의 썩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주군께서 제게 당신의 호위를 맡기셨으니까요."

"주군? 호위?"

"그렇습니다."

"왜?"

"어젯밤 같은 일이 발생할 때를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어젯밤이라니 나는...."

"걸음도 걷지 못할 정도로 만취하셨습니다. 주점에서 난동을 부리며 테이블 세 개와 의자 다섯 개, 접시 열아홉 장, 촛대 여섯 개를 파손하셨지요. 아, 주점 주인장이 아끼던 물소 뿔 장식대를 형편없이 망가뜨리기도 하셨습니다만."

...나는 결백하다.

진심이다.

고시원에서 책만 읽었으니까.

그런데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본인이 마시지도 않은 술 때문에 숙취라니.

조금 억울했다.

"후우, 그럼 우선 물이라도 좀."

정신부터 차리고 싶었다.

하비엘이 가져다준 물을 연거푸 들이켜며 침실을 둘러보았다.

낯설고 깔끔했으며 넓었다.

누런 벽지 꾀죄죄하던 2평짜리 고시원 방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거 좀 쩌는데.'

설마 진짜 소설 같은 빙의인가.

그것도 귀족으로?

수호는 나름 이 현실(?)을 받아들였다.

가족도 없이 고시원에서 전전긍긍하던 삶에 비하면 천국이다.

그런데 눈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저건 뭐냐?"

수호는 침대 반대편 장식장을 가리켰다.

장식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붉은색 종이가 붙어 있었다.

거기뿐만이 아니었다.

덩치 큰 책장에도.

다과용 테이블에도.

하비엘이 앉은 의자에도.

심지어 자신이 누운 침대에도.

가구라는 가구마다 빠짐없이 빨간 딱지가 붙어 있다.

'이거 설마.'

수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추측에 대한 답은 하비엘의 대답으로 돌아왔다.

"벌써 잊으셨습니까? 압류 표식입니다. 어제 붙은."

"...."

간결한 대답.

덕분에 문득, 떠올랐다.

하비엘이 모시던 남작가는 소설 초반에 몰락한다.

남작 부부는 악질 사기꾼에게 낚여 전 재산과 영지를 모두 잃고 자살.

남작의 장남 로이드는?

술독에 빠져 지내다 병에 걸려 죽는다.

이후 하비엘은 로이드의 묘를 만들어 주고는 영지를 떠난다.

그것이 주인공 하비엘 아스라한이 세상에 첫발을 딛게 되는 장대한 서사시의 시작이었다.

'그러니까, 그 초반부에 술병에 걸려 죽는 망나니 도련님으로 빙의한 거라고? 내가?'

귀족이 되었다는 기쁨도 금방 식었다.

이거 아무래도 큰일이 난 것 같다.

"후우, 진짜네. 진짜야."

몇 시간 뒤.

수호, 아니, 로이드는 거울을 마주하고 있었다.

다른 가구와 마찬가지로 빨간 압류 딱지가 붙은 전신 거울.

그 속에 매끈한 외모의 검은 머리칼 남자가 서 있었다.

로이드였다.

'이젠 저게 나란 말이지.'

사실 아직도 잘 안 믿어졌다.

그래도 싫지는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마음에 든다.

대한민국에서의 삶 같은 거, 힘겹기만 했으니까.

'개고생만 실컷 했지.'

원래는 평범한 가정의 외아들이었다.

남들처럼 수능을 쳤다.

토목공학과 대학생이 되었다.

그런데 군대에 간 사이 사달이 났다.

부동산 투자 사기의 그림자가 부모님의 목을 죄었다.

그렇게 돌아가신 부모님은 거액의 빚만 남겨주셨다.

집과 재산은 모두 압류.

그러고도 남은 빚을 떠안지 않기 위해 상속 포기까지 감행해야 했다.

'저소득층 장학금이 아니었으면 학교도 못 다녔을 거야.'

그나마 공부는 성실히 잘했다.

하지만 등록금 외의 생활비는 별개의 문제였다.

알바를 전전해야 했다.

성적을 유지하며 알바를 소화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2평 남짓 비좁은 고시원 골방.

일주일에 일곱 번은 코피를 쏟았다.

고시원에서 제공하는 공짜 쌀밥과 김치는 몸을 버티게 해주는 최후의 보루였다.

그렇게 어제까지도 악바리처럼 살아남았던 수호였다.

'그런데 숨통 좀 틔워보겠다고 오랜만에 읽은 판타지 소설 속 귀족이 되다니.'

공작이니 백작이니 하는 거창한 귀족은 아니었다.

그저 시골 영지 하나 운영하는 남작에 불과했다.

하지만 로이드는 그게 더 마음에 들었다.

'괜한 큰 사건에 휘말릴 일이 없겠지. 예를 들자면 역모 같은.'

사극이나 중세 드라마를 보면 항상 그게 문제였다.

아무리 잘 나가던 권문세족이라도 역모에 한번 얽히면 그냥 끝이었다.

말 그대로 변명의 여지도 없이 원샷 참수형 당첨인 것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변방의 남작이 나아. 나름의 틈새시장이랄까.'

역모 같은 거대한 사건에 휘말릴 일은 없고.

시골에서 나름 유복하게 꿀도 빨고.

그렇게 유구한 철밥통 정신을 지켜가며 오순도순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물론 남작가에 얹혀진 빚을 해결할 때의 이야기겠지만.'

그게 문제다.

'하필이면 이 시점이라니.'

하비엘의 설명이 떠올랐다.

압류 딱지가 붙은 날짜가 어제라 했던가.

즉, 한두 달만 더 이른 시점으로 빙의가 됐다면?

남작에게 접근하는 사기꾼을 막을 수도 있었으리라.

진심 소설가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이미 벌어진 일이니 수습해야 해.'

그러지 않으면 남작 부부는 내년에 자살한다.

이 저택과 영지가 팔리고 자신은 비렁뱅이가 된다.

'한국에서랑 똑같잖아.'

그건 악몽이었다.

그 꼴만은 사양하고 싶었다.

그 난리를 다시 겪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기 위해선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어야 했다.

남작가에 얹힌 빚을 해결할 돈을 말이다.

한참 거울을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

로이드는 곁에 시립한 하비엘을 향해 물었다.

"야."

"네, 로이드 님."

"우리 영지, 돈 많냐?"

"예?"

"영지민들한테 돈 걷으면 얼마쯤 될까?"

"세금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런 거 말고."

"하면?"

"아이엠에프 금 모으기 운동처럼... 후우, 아니다. 됐다."

로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혹시 영지민들에게 돈을 걷으면 도움이 될까 싶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건 좀 아니었다.

아무런 명분도 없이 돈을 걷었다간 분명 큰 반발이 일어날 게 뻔했다.

'그 정도 모은다고 한 큐에 갚아질 금액도 아니고.'

소설 도입부의 내용이 떠올랐다.

빚을 갚을 시한은 2년.

하지만 그 시기가 오기 전에 남작 부부는 자살한다.

계속되는 빚 독촉.

불어나기만 하는 이자.

갚을 길이 보이지 않는 빚더미라는 이름의 늪.

그 빚더미에 치여 부부는 희망의 끈을 놓아 버리는 것이다.

'그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년 뒤.'

그리고 로이드는 그로부터 5개월 후에 단골 주점 골방에서 피를 한 말이나 토하며 죽는다.

그것이 철혈의 기사 초반에 언급되는 내용이었다.

'젠장. 이건 무슨 데칼코마니도 아니고.'

어쩌면 이렇게 한국에서 자신의 가족이 겪은 일과 판박이로 찍은 듯 비슷할까.

떠올릴수록 기분이 더러워졌다.

"쯧. 산책이나 하자."

자고로 머리가 복잡할 때는 걷는 게 최고다.

산책은 그가 대한민국의 김수호였던 때부터의 습관이었다.

아니, 어쩌면 거의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산책은 돈이 들지 않으니까.

그렇게 하비엘과 함께 방을 나섰다.

저택 복도로 나왔다.

마침 맞은편에서 오던 어느 부인과 마주쳤다.

교양과 우아함 가득한 인상.

곱게 나이 먹은 중년의 여인이었다.

'설마?'

문득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마르베야 프론테라.

남작가의 안주인이자 로이드 프론테라의 어머니.

이 저택에서 저런 분위기를 지닐 중년 여인이라면 그녀밖에 없다.

로이드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하필이면 제대로 마주쳐 버렸네.'

자식을 몰라보는 부모가 있을까.

이대로 자신이 가짜라는 걸 들키는 건 아닐까.

다행히도(?) 그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남작부인이 이쪽을 보자마자 쯧쯧 혀를 찼기 때문이었다.

"또 술을 마시러 외출하는 거니?"

"...."

이쪽을 향한 부인의 눈빛.

그 표정에는 수심과 염려가 가득했다.

집안이 박살이 나고 있는데도 매일 술만 퍼마시고 행패나 부리는 아들이 곱게 보이지가 않아서?

그건 알 수 없었다.

"적당히만 즐기거라. 건강에 좋을 것은 없으니."

"...."

부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곁을 스쳐 지나갔다.

로이드는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들키진 않았어.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로이드 프론테라.

눈만 뜨면 매일 술만 퍼마시는 인간.

덕분에 로이드의 어머니조차도 이쪽을 그런 편견으로 걱정하는 듯했다.

'조금 씁쓸하긴 하지만.'

문득, 대학 새내기 시절이 떠올랐다.

아직 집안이 유복하던 시절이었다.

그저 멋모르는 새내기였던 때였다.

오티며 엠티며 매일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났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말없이 북엇국을 끓여주셨더랬다.

하지만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시간이다.

'쯧.'

로이드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택을 나서는 걸음이 절로 성큼성큼 커졌다.

그래서였을까.

길에서 마주친 영지민들은 이쪽을 보자마자 황급히 길가로 물러섰다.

다들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어느 아낙네는 두 손을 꼭 쥔 채 덜덜 떨었다.

어떤 농부는 대놓고 안색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덕분에 그는 자신의 처지(?)를 단박에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로이드는 이런 놈이었지.'

소설 속 내용이 떠올랐다.

프론테라 남작령의 망나니.

그게 로이드 프론테라였다.

취했다 하면 물건을 부수거나 던지기 일쑤.

아랫사람에 대한 모진 폭행과 폭언은 아예 기본.

한마디로 최악의 진상질이 패시브로 장착된, 쓰레기 같은 인간이었다.

'그래서인지 다들 제대로 극혐하는데. 아무래도 나 완전 미움받는 듯.'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어이."

곁을 따르던 하비엘에게 푸념 삼아 물었다.

"다들 왜 저래? 보통 영주 아들을 저렇게 대하지는 않잖아?"

그게 상식이다.

영주의 아들은 지역 내 최상위권의 권력자다.

그렇기에 영주 아들이 어지간한 개차반이 아닌 이상?

최소한 면전에서는 웃으며 존경하는 척은 한다.

그러려고 노력은 한다.

마치 가게에 들른 건물주 아들에게 살갑게 서빙하는 치킨집 사장님처럼.

혹은 사원으로 입사한 사장 아들에게 예스맨이 되는 만년 과장님처럼.

이곳 주민들에겐 영주 아들이라는 존재가 그렇지 않을까.

"일반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일반적으로는? 니다만?"

"예."

"그럼 지금은 어떻길래."

하비엘이 냉랭하게 대꾸했다.

"비상사태지요."

"비상?"

"일반적으로 영지의 비상사태라 함은 민생과 주민의 안녕, 안전에 커다란 위협이 되는 존재가 출몰했을 때를 일컬음입니다."

"...그게 나라고?"

"그렇습니다."

"상당히 돌직구네."

"돌직구가 뭡니까?"

"아, 뼈 때린다고. 팩트로."

"...."

하비엘이 이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희한한 소리를 하느냐는 눈초리다.

그런데 그 모습마저 한 폭의 그림처럼 싸늘하고 우아했다.

'그래, 이런 놈이었지. 하비엘은.'

고결하며 명예로운 기사.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남자.

말 그대로 기사의 표본과도 같은 영웅.

소설 속 하비엘은 훗날 로라시아 대륙 전체에 명성을 떨치게 된다.

물론 무명인 지금이라고 해서 그 성격이 다르진 않을 거다.

"그런 식의 몰아가기는 난감하군요. 저는 맹세코 로이드 님을 폭행한 적이 없습니다만."

"있는데?"

"없습니다."

"팩트 폭행도 몰라?"

"모릅니다."

"혹시 나, 너한테 밉보인 적 있냐?"

"없습니다. 절대로."

...아니, 충분히 있는 거 같은 표정인데.

로이드는 깨달을 수 있었다.

'이놈도 날 싫어하는구나.'

하비엘은 명예를 중시하는 고결한 기사였다.

그러니 로이드 같은 개차반 망나니를 싫어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로이드가 죽을 때까지 곁을 지킨 것도 이놈이었다.

주군이었던 남작과의 의리를 끝까지 지킨 셈이었다.

'하여간 대단한 놈.'

로라시아 대륙의 역사에 손꼽힐 검성.

전무후무한 그랜드 마스터.

그렇게 될 놈이 지금은 내 충실한 호위라니.

조금은 묘한 기분을 느끼며 로이드는 계속 걸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허름한 건물 앞에 서게 되었다.

"여긴 어디냐?"

"주점입니다."

"주점?"

"네. 로이드 님이 저택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시는 곳이지요."

"내 단골 주점이 여기라고?"

"물론입니다. 로이드 님이 저 몰래 다른 주점을 애용하신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

세상에나.

로이드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냥 산책 겸 정처 없이 걸었을 뿐인데.

하필이면 발길 닿은 곳이 단골 주점이라니.

평소 얼마나 이곳을 뻔질나게 들락거렸으면 영혼이 바뀌었는데도 몸이 자동으로 여기까지 찾아온 걸까.

'이건 무슨 귀소본능도 아니고. 네가 댕댕이냐? 산란기 연어야? 아님 김유신 장군 말이야?'

그는 이 몸의 본래 주인이었던 남작가 장남을 타박했다.

그리고 발길을 돌렸다.

'아무리 그래도 낮술은 좀 아니잖아.'

로이드는 그걸 즐겼겠지만 자신은 아니다.

가뜩이나 궁리할 것도 많은데 술이라니.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다.

"이대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당연하지."

하비엘의 물음에 곧바로 대꾸했다.

한데 돌아오는 하비엘의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실망이군요."

"...뭐?"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로이드 님께 실망했습니다."

"설마 내가 낮술이라도 거하게 땡겨주길 기대한 거야?"

"아닙니다."

"그럼?"

"저는 로이드 님이 이곳으로 오신 이유가 지난밤의 행패에 대한 사과와 변상을 위한 것인 줄 알았습니다만."

"그런데 그냥 발길을 돌려서 실망인 거라고?"

"그렇습니다. 지위에 따른 책임은 귀족의 본분이니 말입니다."

"...."

이 녀석, 아까부터 느낀 건데 돌직구가 장난이 아니다.

심지어 그 돌직구의 구속이 가뿐히 160km는 찍히는 듯하다.

즉, 하비엘에게는 충언 한마디 한마디를 정성껏 뼈아프게 꽂아넣는 묘한 재주가 있었다.

"이 주점은 주인장이 평생을 일구어 온 터전입니다. 비록 허름한 곳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지난밤, 로이드 님께서는 그런 소중한 공간에서 행패를 부리고 집기를 파손하셨습니다."

"...."

"게다가 로이드 님도 알고 계시다시피 그는 늙은 어머니를 홀로 모시는 사람입니다."

"어머니를?"

"예. 최근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주점 주인장의 근심이 더욱 깊어졌지요."

"그러니까, 내가 그런 불쌍한 사람을 괴롭힌 거라고?"

"그렇습니다."

"...."

내가 저지르지도 않은 일이다.

하지만 하비엘의 돌직구는 계속해서 날아왔다.

"실은 어젯밤 주인장이 제게 호소했습니다. 그렇잖아도 어머니가 늦겨울 추위에 고생이 심하여 근심이 깊은 터에 이런 행패까지 겪으니 죽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입니다."

"...."

"외면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어디까지나 로이드 님은 이 영지의 미래 주인으로서...."

"잠깐. 거기까지."

로이드는 하비엘의 말을 끊었다.

더 듣고 있기가 힘들어서?

아니었다.

하비엘의 말을 듣다 보니 문득 떠오른 의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점 주인장네 어머니가 늦겨울 추위에 고생이 심하시다고?"

"그렇습니다만."

"그럼 방바닥 뜨끈하게 장작 때면 되잖아?"

"예?"

"설마 여기 사람들... 구들 방식 난방, 몰라?"

"...."

모른다.

저 눈빛을 보니 그렇다.

그걸 깨달은 순간 로이드는 문득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남작가 저택의 내 침실에도 구들 같은 건 없었어.'

그는 토목공학도였다.

어딜 가든 건축물의 구조부터 살피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다.

덕분에 남작가의 구조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곳엔 구들, 소위 온돌 같은 난방 시설이 없었다.

대신 벽난로가 침실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던가.

그러니 아마 주점 주인장의 집도 비슷할 것이다.

아니, 방마다 벽난로가 있는 귀족가와는 달리 주방에 있는 난로 하나로 집 전체의 난방을 커버하고 있을 터.

'그러면 당연히 춥지. 벽난로는 구조상 구들 방식에 비해 열 손실이 극심하니까.'

물론 구들이라고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구들 난방 시스템을 구현하려면?

건축물 바닥을 아예 갈아엎거나 새로 지어야 한다.

건물 자체의 단열 성능도 보강해야 한다.

극심한 땔감 소모를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그 두 가지 단점들은 모두....

'극복할 수 있어. 아니, 오히려 이용할 수 있어. 나라면 가능해.'

자신의 전공 지식을 활용한다면?

막대한 빚을 갚을 방법이 막막하던 암울한 현실.

그 속에서 거액을 마련할 계획이 떠올랐다.

각이 나왔다.

큰 그림이 그려졌다.

'이거다. 주점 주인장네 집 하나로 끝내는 게 아니라 더 크게. 대규모 시공 사업으로. 충분히 승산이 있어.'

확신이 들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큰 그림을 현실로 만들기 위하여.

그는 곧장 주점으로 들어갔다.

2화. 모델하우스, Open (1)

주점 내부는 전쟁터처럼 엉망이었다.

부서진 테이블과 의자가 나뒹굴고 있었다.

바닥 곳곳에 깔린 깨진 접시 조각은 옵션이었다.

'거 참. 사고 제대로 쳤구만.'

절로 쯧쯧 소리가 나왔다.

엉망이 된 주점을 정리하던 주인장을 보니 더욱 그랬다.

"오, 오셨습니까요?"

씁쓸한 표정으로 엉망이 된 실내를 정리하던 대머리 사내.

이쪽을 보자마자 안색이 창백해졌다.

순간 그 얼굴에 분노가 스치긴 했다.

하지만 분노의 기색은 금방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힘겹게 꾸며낸 어색한 미소.

이 영지에서 장사하며 살려니 어쩔 수 없이 짓는 약자의 미소였다.

'어젯밤 일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을 텐데.'

그걸 티도 못 내고 있다.

그 모습에 로이드는 입맛이 쓰려졌다.

과거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호프집 알바할 때도 진상 손님 많았지.'

먹고 살려다 보니 갖가지 알바를 전전했다.

그중엔 호프집 알바도 있었다.

술집이다 보니 별별 손님이 다 있었다.

물론 그중에는 진상도 있었다.

아니, 제법 많았다.

술 취해서 알바생을 향해 반말에 욕설은 기본.

심지어 테이블을 엎거나 술병을 깨는 인간도 있었다.

술값이 비싸다고.

안주가 마음에 안 든다고.

알바생이 공손히 배꼽 인사를 하지 않았다고.

깨진 술병을 흔들어대며 사장 나오라고 소리를 지르는 경우도 있었다.

'후우.'

당시를 떠올리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때의 자신은 알바생의 입장이었다.

을인 주제에 갑인 손님에게 뭐라 할 수도 없었다.

그런 손놈이 다녀가면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얼마나 삭였던가.

'그만 떠올리자.'

쓰린 기억이다.

덕분에 로이드는 주점 주인장이 느낄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엉망이 된 이곳의 광경을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님에도.

단지 이 몸의 이전 주인이 저지른 짓임에도.

그는 주점 주인을 향해 허심탄회하게 사과했다.

"어젯밤 일을 사과하러 왔습니다."

"...예?"

"제 잘못입니다. 얌전히 술만 마셨어야 했는데 그만 큰 사고를 치고 말았네요. 실수라고 얼버무리진 않겠습니다. 명백한 제 잘못입니다."

나름 진심을 담았다.

한데 그 진심이 조금은 잘못 전달된 걸까.

"저, 저기, 도련님? 왜 이러십니까?"

"...."

주점 주인의 안색은 창백함을 넘어 아예 시퍼렇게 변하고 있었다.

흡사 저승사자라도 마주한 사람의 얼굴이다.

"도련님, 어젯밤 일로도 성에 안 차셨습니까? 그럼 제가 뭘 잘못했던 건지라도 좀 알려주십시오."

"아니, 저는...."

"왜 그렇게 존댓말을 하십니까? 그러시니 더 무섭습니다."

"...."

아무래도 이 몸뚱이는 영지 주민들에게 단단히 미운털이 박힌 것 같다.

로이드는 쩝, 입맛을 다셨다.

"그럼 이렇게 편하게 말하는 게 더 좋은 건가?"

"다, 당연합지요."

"그럼 내 사과, 받아줄 거야?"

"...."

"어젯밤 내가 파손한 집기들, 변상할 생각이 있는데?"

"정말이십니까?"

이 양반이 평생 속고만 살았나.

로이드는 혀를 찼다.

"당연히 정말이지. 변상하는 셈 치고 온돌방, 어때?"

"예?"

"바닥이 뜨끈뜨끈해지는 방. 몰라?"

"달군 돌을 놓고 물을 뿌리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그건 증기 만드는 습식 사우나고. 바닥 자체를 뜨끈하게 달구는 거. 온돌. 모르냐고."

"...."

역시나 모른다.

주점 주인장도 아까의 하비엘처럼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럼 일단 계획이 통할 가능성은 생긴 셈이다.

로이드는 입술에 침을 츄릅 발랐다.

"안타깝네. 온돌을 모르다니. 그거, 어머님께 참 좋을 텐데."

"네?"

"소문으로 들었거든. 어머님, 요즘 편찮으시다며."

"아, 예, 그렇습니다만."

"그래서 추천하는 거야, 온돌."

"...."

"바닥을 뜨끈뜨끈하게 달구는 거야. 침상 같은 거 필요도 없어. 그냥 뜨끈한 바닥에 누워서 종일 몸 지지는 거지. 사우나 따위완 비교도 안 될걸?"

"...."

넘어온다. 슬슬 넘어온다.

주인장의 눈빛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 흔들림은 로이드의 다음 언급에서 절정을 찍었다.

"겨울철 추울 때, 어쩐지 몸이 으슬으슬 한기가 들 때. 관절 찌뿌둥한 어르신들한테 딱이라니까?"

"어머니 같은 연로한 분들께 말입니까?"

"당연하지."

자고로 뜨끈하게 지지는 건 어르신들이 더 좋아하는 법이다.

"한데 그런 걸 제게 주신다고요? 도련님께서?"

"어. 정확하겐 만들어줄 거야."

"만들어서 말입니까?"

"어."

"...."

"안 믿어져?"

"그야 물론...."

"당연히 안 믿어지겠지. 지금 이 인간이 무슨 사기를 치려고 얼토당토않게 혀를 놀리나 싶고. 지가 뭔데 온돌인지 뭔지를 만들 수나 있겠나 싶고. 그 온돌이라는 게 정말로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그런데 듣다 보니까 엄마 생각이 나. 귀가 솔깃솔깃해. 막 끌려. 맞지?"

"...."

"그럼 나랑 계약서 하나 쓰자."

"계약서를 말입니까?"

"어. 공사 발주 계약서."

"무슨...."

"펜이랑 종이 좀 가져와 봐."

주인장은 뭐가 뭔지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래도 이쪽의 말에 순순히 펜과 종이를 가져왔다.

로이드는 능숙한 솜씨로 종이에 즉석 계약서 양식을 술술 써 내려갔다.

'어차피 양식이야 내가 만들면 되는 거니까.'

발주자는 주점 주인장.

시공자는 이쪽.

공사 장소는 주점 뒤쪽의 빈터.

"계약 금액을 포함한 전체 대금은 이렇게 하자. 어젯밤 내가 파손한 기물 일체의 변상 금액을 퉁치는 걸로. 어때?"

"파손한 기물을 변상해주는 대신에 온돌인지 뭔지를 만들어 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남작가는 빚에 허덕이는 상태.

주점 주인장에게 변상해 줄 돈도 아쉬운 처지였다.

그런데 이번 공사를 제대로 발주하고 마무리까지 짓는다면?

'변상으로 빠져나갈 마이너스의 금액을 훌륭히 무마할 수 있는 거지.'

마이너스만 메꾸는 것이 아니다.

잘만 하면 엄청난 플러스가 쌓인다.

소위 막대한 이득의 스노우볼을 굴리는 시작점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로이드가 예상하는 큰 그림이었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게 이거니까.'

자신은 토목공학도였다.

나름 열심히 공부했다.

물론 거창한 꿈이 있던 건 아니었다.

남들처럼 수능 성적에 맞춰 학교와 학과를 골랐다.

그저 안정적인 취업을 위해 학점을 따려 노력했을 뿐이다.

한데 어쩌면, 그렇게 쌓은 지식을 이곳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고로 제일 큰돈을 만지는 건 땅장사, 그중에서도 시공사니까.'

아파트, 빌딩, 교량, 도로, 댐, 방파제, 운하, 항만.

뭐든 짓는 건 돈이 된다.

그중에서도 특히 시공사는 돈방석에 앉는다.

따낸 공사의 규모가 클수록 더더욱 그렇다.

로이드는 그 가능성을 엿보고 있었다.

"자, 그러니까 계약하자는 거야. 어때?"

"그럼 도련님께서 정말로?"

"만들어 준다니까. 싫어?"

"그, 그건 아닙니다만."

망설이던 주인장은 결국 '온돌방 발주 계약서'에 서명했다.

대한민국의 토목공학도 김수호.

프론테라 남작가의 장남 로이드.

그가 낯선 세상에서 처음으로 따낸 발주 계약서였다.

처음은 소소할지라도 한 걸음씩 차근차근.

그렇게 대망의 첫 시공이 시작되었다.

"그는 순박하며 절실한 사람입니다."

주점을 나선지 불과 1분쯤 되었을까.

묵묵히 있던 하비엘의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

돌아보니 하비엘의 얼굴은 예전과 똑같이 무표정.

아니, 어쩐지 더 쌀쌀해진 냉풍이 불어오는 것 같은 느낌은 기분 탓일까.

"궁지에 몰린 사람은 절박해지지요. 그만큼 상황을 살펴보는 시야가 좁아지고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그런 사람들은 속이 음흉한 이들에게 손쉬운 먹잇감이 되고 말입니다."

"먹잇감?"

"그렇습니다."

"아, 그러니까 주점 주인이 가련한 먹잇감이고 내가 그를 등쳐먹는 음흉한 놈이다?"

"음흉한지 아닌지는 이제부터 로이드 님이 취하실 행동에 달려 있겠지요."

"어이."

어쩐지 평소보다 분위기가 싸늘하다 싶었다.

비로소 로이드는 하비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깨달았다.

"설마 너, 내가 주점 주인장을 등쳐먹는다고 여기는 거야?"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궁지에 몰린 약자의 상황을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그거잖아.

로이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째 이 몸뚱이로 들어오고 나서는 하는 일마다 오해를 사게 되는 것 같았다.

"그럼 정리해보자. 넌 내가 주점 주인에게 온돌방을 만들어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렇습니다."

"어째서?"

"로이드 님은 평생 손에 흙 한 번 묻혀본 적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

"여기저기서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직접 본 건 아니잖아. 맞지?"

"그렇습니다만."

"보기완 달리 불합리하네, 하비엘."

"예?"

하비엘의 그림 같은 눈썹이 처음으로 미세하게 찡그려졌다.

로이드는 자신보다 5센티 정도 키가 큰 하비엘을 쳐다보며 말했다.

"조금 실망이다. 하비엘. 넌 소문만 듣고 남을 판단하는 거냐?"

"그건...."

"편견이지."

"...."

"지금도 그래. 내가 주점 주인과 발주 계약서를 작성하는 걸 봤지? 그 계약서로 내가 뭘 할 것 같아?"

"물론...."

"계약서 따윈 구석에 던져두고 탱자탱자 놀 거라고 생각했냐?"

"그건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딱 맞구만.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 하비엘은 거짓말에 재주가 없다.

녀석에겐 거짓말을 할 때마다 상대의 눈을 피하는 습관이 있다.

방금도 그랬다.

"넌 내가 계약서를 빌미로 주점 주인장을 속이는 거라고 여겼겠지. 언젠가는 온돌방을 만들어 줄 거다. 그런 거짓말로 파손한 집기에 대한 변상을 한도 끝도 없이 미룰 거라고 말이야."

"저는 다만...."

"그게 편견이라는 거야. 내 생각만으로 남을 섣불리 판단하고. 갈등이 생겨나고. 인종차별이 횡행하고. 가정이 흔들리고. 사회가 무너지고."

아무래도 이런 반격은 예상 못 했나 보다.

하비엘이 입을 다물었다.

아마 궤변이라고 생각하겠지.

로이드는 굳이 그 생각을 바꾸려 애쓰지 않았다.

대신 하비엘을 향해 턱짓했다.

"어쨌건 네 생각은 대강 알았으니까 이만 좀 비켜줄래?"

"예?"

"옆으로 두 걸음만. 그래, 그쪽으로. 대강 측량해보는 중이거든."

사실이었다.

아까 하비엘이 입을 열기 전부터 그랬다.

어쨌거나 이 뒤뜰은 온돌방을 지을 공간이었다.

설계와 자재 준비에 앞서 터를 봐두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래 봤자 아담하게 지을 거니까 정밀한 측량까진 필요 없을 것 같고. 그런데 대지가 살짝 기울었네. 터를 약간 올려야겠는데.'

건물을 지을 대지 한쪽에는 주점이 있었다.

반대편에는 주인장이 기거하는 집이 자리했다.

온돌방은 그 사이의 공간에 짓는 게 좋을 듯했다.

'지반 성질 좀 볼까.'

로이드는 몸을 낮추었다.

온돌방 만들 자리의 흙을 살폈다. 만졌다. 주물럭거렸다.

'아, 학교 생각나네.'

흙을 만지고 있자니 자연스레 토질역학 강의가 떠올랐다.

토립자의 부피, 흙의 간극 등의 성질을 공부하는 과목이었다.

덕분에 실제로 얼마나 수많은 흙을 퍼담아야 했던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퍼 온 흙을 지우개똥처럼 말았다.

부서질 때까지 말고 또 말았다.

심지어 오븐에 굽고, 지지고, 찌기까지 했다.

물론 그랬던 경험이 지금의 로이드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이만하면 흙도 괜찮고.'

그냥 괜찮은 정도가 아니었다.

거무죽죽한 표면과 달리 몇 센티만 파도 불그스름한 흙이 나왔다.

황토였다.

'대박이네.'

로이드는 손을 탁탁 털며 일어났다.

그러다 이쪽을 보는 하비엘의 묘한 눈길과 마주쳤다.

"뭐. 왜."

"...."

"사람 흙 만지는 거 처음 보냐."

"적어도 로이드 님이 이러시는 건 처음 봅니다만."

"그럼 적응해. 앞으로 종종 보게 될 거야."

더 묘하게 변하는 하비엘의 눈빛.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현장을 떠났다.

영지를 설렁설렁 쏘다녔다.

그저 한가로운 산책처럼 보이는 걸음이었다.

하지만 로이드의 눈길은 영지 곳곳의 지형을 살피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영지 중앙을 가로지르는 강을 중점적으로 살폈다.

대량으로 황토를 채취할 자리를 고르기 위함이었다.

"자, 그럼 집에 가자."

저택에 와서도 로이드는 일을 쉬지 않았다.

기념비적인 첫 시공이었다.

'자고로 첫 단추를 잘 끼워야 일이 풀리는 법이니까.'

한 번 시공을 잘못하면 악평이 번진다.

그러면 다음 고객을 잡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시작부터 망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퀄리티로 결과물을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했다.

'고객의 행복이 내 돈이니까.'

밤샘은 익숙했다.

알바와 과제로 단련된 그였다.

해가 질 때부터 새벽까지 빈 종이 가득 도면을 그렸다.

그리고 날이 밝자마자 저택의 행정관을 찾아갔다.

"창고에 비축된 목재 얼마나 있어?"

"예?"

너무 이른 아침이었다.

아침을 먹기는커녕 세수도 못 한 행정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쪽이 아침부터 술주정이나 부린다고 여기는 걸까.

"목재는 어디에 쓰시려는 겁니까?"

"어디에 쓰긴. 건물 짓는 데 쓰려는 거지. 자, 여기."

"이건?"

"여기 적힌 수량만큼 목재 옮겨놔. 마을 주점 뒤뜰로. 알았어?"

기왕 일을 하려면 신속하게.

아주 그냥 불도저처럼 과감하게.

그런 로이드의 태도 덕분이었다.

행정관이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그날 점심이 되기 전, 주문한 목재가 주점 뒤뜰에 가득 쌓였다.

"이렇게 자재도 왔으니 슬슬 시작해볼까."

거추장스러운 겉옷을 벗었다.

가벼운 셔츠 차림에 일꾼 장갑을 꼈다.

거기에 삽자루까지 드니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이런 노가다는 방학 때마다 지겹게 했으니까.'

심지어 군대에 있을 때도 그랬다.

토목공학과를 다녔다는 이유에서였다.

크고 작은 작업이 있을 때마다 행정보급관이 호출했다.

덕분에 전역할 때쯤엔 중대 공인 작업 머신 취급을 받았던가.

'역시 남자는 삽질이지.'

터 다지기부터 시작했다.

뜰 옆의 땅을 팠다.

퍼낸 흙을 온돌방 지을 터로 옮겼다.

그때마다 꼼꼼히, 탄탄하게 다졌다.

'한 번에 흙을 왕창 옮겨놓고 터를 다졌다간 나중에 난리가 나니까.'

터 다지기를 할 때 흔히 저지르는 실수였다.

흙은 상부가 잘 다져진다.

아래쪽은 제대로 다져지지 않는다.

그런데 한꺼번에 두툼하게 흙을 쌓아두고 다지기를 하면?

눈으로 보이는 위쪽 겉면은 단단하게 보이지만 속은 여전히 물렁한 채로 남겨진다.

그 위에 건물을 지었다간?

몇 년 지나지 않아 건물이 기우는 참사가 발생한다.

그걸 잘 아는 로이드는 흙을 퍼서 옮기고, 다지고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문득 하비엘을 흘겨보았다.

녀석은 아까부터 곁에 서 있기만 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임무인 호위에만 충실하겠다는 거겠지.

"어이."

"부르셨습니까, 로이드 님."

"응, 불렀어."

"시키실 일이 있으신지."

"응, 있어. 너도 삽질 같이하자고."

"...."

하비엘의 대답이 없어졌다.

"혹시 싫은 거야? 그런 거야?"

"...."

"같이 삽질 좀 해주면 작업 속도가 두 배는 될 텐데."

"...."

"아아, 주점 주인장 어머님께선 지금도 오한에 시달리고 계시겠지. 따뜻한 온돌방에서 주무시면 그런 고통에서 금방 벗어나실 수 있을 텐데. 그런데 당분간은 그게 불가능해요. 어째서? 고결하신 아스라한 경이 삽질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

"아아, 온돌방에 몸을 지지면 어머님 굳은 관절도 술술 풀리고 입가엔 웃음꽃이 피실 텐데. 그런데 당분간은 그게 불가능해요. 어째서? 고결하신 아스라한 경이 삽질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

"아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으신 분의 마지막 소박한 소망을...."

"삽, 주십시오."

결국, 견디다 못한 하비엘이 삽을 들었다.

로이드의 얼굴에 사악한 웃음꽃이 피었다.

그렇게 남작가의 망나니와 무명의 기사.

두 남자의 온돌방 공사가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그 소식이 순식간에 영지 구석까지 파다하게 퍼졌다.

3화. 모델하우스, Open (2)

소문이 번졌다.

빠르게 번졌다.

사람 사는 곳 치고 소문 없는 곳은 없는 법.

하지만 그런 것치고도 이번 소문은 평소보다 강력하고도 빠르게 번졌다.

내용이 워낙 독특했기 때문이었다.

"로이드 도련님이 드디어 미쳤대요."

"뭐?"

"삽질을 하고 있다던데요?"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요. 주점 뒤뜰에서 삽질을 하고 있대요. 흙을 퍼담고, 다지고."

"어째서?"

"그건 저도 모르죠. 들리는 얘기로는 주점 주인장을 협박했다던데요?"

"협박이라니?"

"주점 뒤뜰 땅을 강탈했다나 봐요."

"허허, 그런...."

누군가는 식탁을 사이에 두고 개탄했다.

또 누군가는 밭에서 귓속말을 속닥거렸다.

"들었는가? 로이드 도련님이 자살하려나 본데."

"뭐, 드디어?"

"그렇다더구만. 어젠 흙을 퍼담더니 오늘은 또 그걸 파내고 있다던데."

"파낸다니?"

"흙 파낸 자리에 납작한 돌을 깔면서 혼자 뭔갈 자꾸 중얼거린다나."

"설마 그거...."

"자기 관 묻을 무덤이 아니고 뭐겠나?"

그 밖에도 다양한 버전의 억측과 추측이 난무했다.

남작가 주정뱅이 도련님이 몰래 담근 술을 땅에 저장하는 거라는 둥.

혹은 아버지의 감시를 피할 땅굴을 파는 거라는 둥,

심지어 새로운 취향(?)에 눈을 떴다는 의견까지.

수많은 입소문을 타고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그렇듯 영지민들의 눈길이 쏠린 가운데.

온돌방이 조금씩 형체를 갖추어 갔다.

'사람들, 참 잘도 떠드는구나.'

로이드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 서슬에 진흙이 얼굴에 묻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로세로 3.6미터 면적의 아담한 온돌방.

며칠이 지난 사이에 토대는 물론이고 벽체까지 올려져 있었다.

'힘들었지.'

온돌방 만들기.

쉽지는 않을 거라 예상했다.

실제로 해보니 예상보다 더 어려웠다.

일단 대한민국의 현장에서 쓰던 도구가 없는 게 컸다.

'전동 공구가 하나도 없으니까.'

모든 일을 수작업으로 해결해야 했다.

노가다 알바와 군대에서의 작업 경험을 살려 터를 다졌다.

그 과정에 이틀이 꼬박 걸렸다.

전신 근육통은 보너스였다.

행정관을 닦달해 얻은 목재를 가공했다.

중목 구조를 기본으로 삼았다.

박공지붕 뼈대까지 올렸다.

그 기둥 사이에 보강 목재를 엮었다.

찰진 지푸라기 황토 반죽을 척척 발랐다.

그렇게 사흘에 걸쳐 황토벽을 완성한 것이 바로 방금이었다.

"후우. 하비엘?"

"부르셨습니까."

"넌 안 힘드냐."

"그럭저럭 적응됐습니다만."

"그래?"

하비엘은 이 상황에서도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다.

아무리 운동 능력이 좋아도 노가다는 또 다른데.

평소 안 쓰던 근육을 쓰기에 힘의 낭비가 심할 텐데.

그런데도 저렇게 태연하다는 건?

'애초에 남아도는 힘이 차원이 다르다는 뜻이겠지.'

그 철강왕급 체력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역시 든든한 놈이다.

특히 이렇게 공짜로 부려 먹을 때는 더더욱.

로이드는 은근한 어투로 운을 떼었다.

"그럼 내가 시키는 것 좀 하자."

"또 남았습니까?"

"당연하지."

"어째서입니까?"

"아직 온돌방을 다 짓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로이드 님은 제게 잠깐의 도움만 요청하셨습니다만."

"그랬어?"

"그렇습니다."

하비엘이 특유의 냉랭한 말투로 싹둑 자르듯 말했다.

"로이드 님은 처음엔 제게 삽질을 도와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그것만 도와주면 된다 말씀하셨지요. 하지만 이후에도 자꾸 말이 바뀌셨습니다. 흙 다지기를 끝내니 나무 손질을 도와달라 하셨고, 나중에는 진흙 개는 것까지 힘들다며 제게 도움을 요청하셨지요."

"흐음, 그래서 싫었어?"

"물론입니다."

"네가 기사라서?"

"...."

하비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긍정의 뜻임을 로이드는 알았다.

아마 그렇겠지.

온몸에 흙을 묻혀가며 검이 아닌 삽과 톱을 다루는 거.

기사의 명예로움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로이드는 그 생각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그런데 말이다. 기사는 약자를 돕는 사람 아닌가?"

"예?"

"너도 그렇게 생각할 텐데."

"그건 물론...."

"맞지? 그럼 지금 이 일도 기사의 일인 거야. 약자를 돕는 훌륭한 기사도의 실천인 거지. 말 되잖아? 우리가 이러는 이 순간에도 주점 주인장네 어머님께서는 오한에 온몸을 덜덜 떨고 계시겠지?"

"...."

"아아, 우리가 이걸 하루라도 더 빨리 완성하면 어머님의 입가에 행복한 웃음꽃이 가득 피어날...."

"또 뭘 하면 되는 겁니까."

하비엘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로이드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도끼질 좀 하자."

그가 온돌방 바깥을 가리켰다.

"주점 뒤뜰 구석에 둔 통나무 있는 거, 봤지?"

"봤습니다."

"응, 잘했어. 저거 적송이라는 나무야. 저걸 도끼로 패서 지붕에 얹을 패널 좀 만들어라."

"패널이 뭡니까?"

"이렇게 생긴 거."

슥슥.

로이드는 흙바닥에 대강 그림을 그려 보였다.

"가로 한 뼘, 세로 두 뼘, 두께는 손가락 한 마디로. 아잉패드 태블릿 기다란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아, 태블릿은 모르지? 판때기라고 생각하면 돼. 대신 크기는 일정하게 잘라. 알겠어?"

"그럼 도끼보단 톱으로 자르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응 아니야. 도끼가 나아."

물론 톱으로 자르면 편하다.

크기를 일정하게 맞추기도 쉽다.

하지만 자르는 과정에서 마모가 심하게 일어난다.

그 결과 나무의 결이 망가진다.

망가진 결로 물기가 스며든다.

금방 썩어 버리는 것이다.

"1년도 안 지나서 지붕 갈아치우고 싶지 않으면 도끼로 해."

"...알겠습니다. 다만."

"다만?"

그러고 보니 하비엘이 조금 묘한 눈길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로이드 님은 이런 걸 어디서 익히신 겁니까?"

"이런 거? 건물 짓는 거?"

"그렇습니다."

여전히 냉랭한 눈길이었다.

하지만 그 냉랭함 속에 숨겨진 감정이 희미하게 엿보였다.

그건 강렬한 호기심이었다.

로이드는 숨김없이 솔직하게 대꾸했다.

"한국대학교."

"예?"

"한국대학교에서 배웠다고."

"...."

"진짠데. 거짓말 아닌데."

"하지만 그런 아카데미, 들어본 적 없습니다."

"아, 물론 내가 어딘가의 학교를 다녔다는 말도 들어본 적 없다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그럼 계속 궁금해하세요. 자, 출동. 할 일 많으니까 슬슬 움직이자."

로이드는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하비엘을 밖으로 내보냈다.

도끼질로 적송을 잘라서 지붕에 얹을 패널을 만드는 일.

그건 자신보다 하비엘이 훨씬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재능의 차이 때문이었다.

대상이 사람이건 나무이건.

날 달린 물건으로 대상을 두 쪽 내는 데에는 최고의 재능을 가진 하비엘이다.

'녀석은 이미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실력자니까.'

소설 '철혈의 기사' 초반에 나오는 내용이었다.

영지의 누구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영주인 남작도, 하비엘 본인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이미 하비엘은 경이로운 수준의 실력자다.

소드 익스퍼트 상급.

검의 끝이라 불리는 소드 마스터를 직전에 둔 단계였다.

규모가 작은 나라에선 탈탈 털어도 서너 명이 전부.

말 그대로 중소 왕국의 기사 단장급이라는 소리였다.

'심지어 이제 겨우 스무 살인데.'

하비엘은 자신이 지닌 엄청난 실력을 이 영지를 떠나고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일이다.

'어쨌건 나도 움직이자.'

적당히 쉴 만큼 쉬었다.

로이드는 다음 단계 일을 시작했다.

바로 온돌방의 알파이자 오메가.

빛이요 소금이며 단팥빵의 단팥.

고사양 게임용 컴퓨터의 그래픽카드 같은 존재.

바닥 온돌 시공이었다.

'이제부터가 정말 중요해.'

아무리 건물을 그럴듯하게 짓는다 해도?

온돌이 제 기능을 해주지 못하면 말짱 꽝이다.

그걸 잘 아는 로이드는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설계한 대로 여기부터 여기까지.'

군대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연대장이 뜬금없이 황토 찜질방에 꽂힌 적이 있었다.

연대 본부에 황토방을 만드느라 중대 대표로 차출되었다.

그 결과는?

연대장 와이프의 행복지수가 극적으로 상승했다던가.

덕분에 흡족해진 연대장의 은총(?)으로 포상휴가까지 받았다.

로이드는 당시의 경험과 기억을 십분 활용했다.

바닥을 팠다.

아궁이에서 피운 열기와 연기가 유입되고 지나갈 통로였다.

'열기가 최대한 긴 경로를 빙빙 돌아서 방바닥을 지나갈 수 있게.'

통로를 빙빙 돌려서 팠다.

그 와중에 통로의 높낮이를 세심하게 조절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렇게 해야 열기가 단숨에 빠져나가지 않고 최대한 오래 남으니까.'

아궁이에서 열기가 처음 넘어오는 부넹기.

들어온 열기가 고이는 구들개자리.

고인 열기가 효과적으로 퍼지는 구들고래.

빠져나가기 전의 열기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잡아주는 고래개자리.

그리고 빗물과 차가운 공기가 구들 내부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는 굴뚝개자리까지.

'힘들다.'

그래도 더 세심하게.

오차를 최대한 줄이며.

파고 또 확인했다.

확인하고 또 다듬었다.

그 후엔 통로 벽면을 황토로 마감했다.

마감한 황토를 충분히 말렸다.

통로 위로 납작하고 평평한 돌을 꼼꼼히 깔았다.

'아궁이에서 가까운 아랫목엔 두꺼운 돌을, 반대편 윗목에는 얇은 돌을.'

섬세하게 구분해서 깔았다.

윗목이 아궁이에서 멀기에 천천히, 덜 데워지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구들로 까는 돌의 두께를 다르게 하면 방바닥 전체가 골고루 데워지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이제는 새침 차례.'

구들장 사이의 틈을 새침돌로 메꾸었다.

그 위를 황토 반죽으로 덮었다.

다시 마른 진흙을 초벌로 깔고 밟아 다졌다.

중벌로 또 바르며 바닥을 평평하게 다지고 꼼꼼히 건조시켰다.

그 다음엔 최대한 얇은 마감 바르기와 표면 갈기로 표면을 정리하고 마무리를 지었다.

거기까지 꼬박 사흘이 걸렸다.

온돌 시공의 핵심이 마무리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 시험해 볼 기회는 다음으로 미루어야 했다.

"저기, 로이드 도련님?"

갓 만들어진 온돌 바닥을 보며 흐뭇해하던 도중이었다.

웬 하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영주님께서 도련님을 찾으십니다."

영주, 아르코스 프론테라 남작.

아버지의 호출이었다.

'설마.'

문득 짚이는 곳이 있었다.

로이드는 미완성 상태인 온돌방을 나섰다.

그때까지 삼삼오오 모여 떠들던 구경꾼들의 수군거림이 일시에 멎었다.

로이드는 그 어색한 침묵 사이를 지나쳐 남작 저택으로 향했다.

"듣자하니 요즘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더구나."

달그락.

포크가 움직인다.

철제 포크가 집어드는 것은 투박한 수제 소시지 한 덩이.

하지만 남작의 손은 거기서 멈추었다.

집어든 포크를 입가로 가져가진 않았다.

식탁 맞은편인 이쪽으로 시선을 던져 왔다.

"주점 뒤뜰에서 뭔가를 하고 있다지?"

저 시선은 따스하지 않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차갑다.

아들이라기보다는 골치 아픈 문젯거리를 쳐다보는 듯한 눈초리.

그 눈초리에 로이드는 새삼 입맛이 씁쓸해졌다.

'이 몸은 이게 단점이야.'

자신이 차지하게 된 이 몸의 주인.

로이드 프론테라는 전형적인 망나니였다.

폭음과 술주정에 도박과 기물 파손.

그 밖에도 헤아릴 수 없는 진상질까지.

워낙 화려한(?) 이력과 업보가 쌓여 있었다.

그래서인지 언제나 주위 사람들의 편견에 부딪혀야 했다.

즉, 자신이 무슨 일을 해도 일단 사람들이 삐딱한 시선을 던져 왔다.

저 망나니가 이번엔 무슨 짓을 벌이는 걸까.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저러는 걸까.

혹시 미쳤나.

아니면 죽을 때가 됐나.

제발 주위에 민폐만 끼치지 않았으면.

...이라는 등등의 시선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꾸나. 이번에는 무슨 일을 벌이는 것이더냐?"

남작의 목소리는 눈빛만큼이나 냉랭했다.

듣자마자 깨달을 수 있었다.

저건 질문이 아니다.

책망이다.

로이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소문을 들으셨다면 아실 텐데요. 주점 주인장이 주문한 온돌방을 만들고 있습니다."

"온돌방?"

"예."

"주점 주인장을 속여넘긴 그런 알량한 말로 이 아비까지 농락하려는 게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요."

로이드는 대강 둘러댔다.

이 시점에서 뭐라고 한들 믿을까.

오히려 쓸데없는 오해만 사기 딱 좋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눈앞의 남작을 설득하기도 좀 그랬다.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괜히 말 길게 섞으면 들킬지도 몰라.'

부모는 어떻게든 자식을 알아보는 법.

자신은 로이드 프론테라가 아니다.

이 몸을 차지한 김수호다.

괜히 의심을 받을까 불안했다.

그는 깊은 대화를 회피하는 쪽을 선택했다.

"하실 말씀 다 하셨으면 마저 식사하겠습니다."

망나니 로이드가 그랬던 것처럼.

석둑 잘라 말하고는 식사에 집중했다.

딴소리 나오기 전에 눈앞의 음식으로 배만 채우고 얼른 일어나자고 생각했다.

그런 이쪽의 귓가로 남작의 물음이 날아왔다.

"혹시 집안 사정 때문이더냐?"

"...."

"너도 눈과 귀가 있다면 근래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겠지. 혹시 그 일 때문에 상심하여 일부러 더 이러는 것이더냐?"

"...."

혹시 사기꾼 때문에 압류가 걸린 일을 말하는 걸까.

역시나 예상은 맞았다.

"하지만 괜찮다. 지나가는 풍파일 뿐이다. 별일 아닌 것이야. 내가 누구더냐. 5대째 이 영지를 지켜온 가문의 아르코스 프론테라다. 이 정도 곤경쯤은 이 아비가 금방 극복할 수 있어. 그러니 너도 너무 엇나가려고만 들지 말거라."

"...."

"이 아비가 힘을 낼 터이니 너도 흔들리지 말라는 소리다."

"...."

저런 말, 들어본 적이 있는데.

문득 로이드는 고개를 들었다.

남작을 바라보았다.

잘생긴 미중년 사내.

그러나 표정은 어쩐지 지쳐 있다.

언젠가 보았던 아버지의 표정이 그 얼굴에 겹쳐 보였다.

'그때랑 똑같아.'

군대에서 마지막 휴가를 나왔던 때였다.

당시 투자 사기에 시달리던 아버지가 저런 표정을 지으셨다.

별안간 손을 꼭 쥐셨다.

걱정 말라고.

괜찮다고.

별일 아니라고.

너는 공부에만 신경 쓰라고.

그렇게 애써 웃으시며 신신당부하셨다.

그래서 자신은 까맣게 몰랐다.

정말로 괜찮은 줄로만 알았다.

그로부터 1년 뒤.

빚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한 부모님이 극단적 선택을 하리라는 것도 까맣게 몰랐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남작이 그 당시의 아버지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거짓말.'

안 괜찮은데.

자식 앞에서 애써 괜찮은 척하고 있다.

탁.

로이드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식사에만 열중하자던 생각은 날아간 지 오래였다.

남작과 거리를 두자던 다짐도 잠깐은 접어두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포기하지 마세요. 저도 힘낼 테니까."

몇 년 전의 그때로 돌아간다면.

아버지에게 꼭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렇게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남작이 묘한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아까의 냉랭함과는 조금 다른 결의 눈초리.

그 눈길이 부담스러워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다행히 남작은 이쪽을 붙잡지 않았다.

시공은 계속되었다.

주점 뒤뜰 온돌방이 빠르게 모습을 갖추어갔다.

삼삼오오 모여든 구경꾼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오해와 숙덕거림, 소문이 난무하는 그 시선 속에서 너와를 구웠다.

나무의 변질을 막기 위한 탄화 처리였다.

처음엔 익숙하지 않아 몇 장을 망쳤다.

어떤 것은 너무 태워서 쪼개졌고, 어떤 것은 물렀다.

하지만 몇 번의 시도를 거치며 요령이 생겼다.

핵심은 적송 패널의 표면에서 3밀리미터 깊이까지만 태우는 것이었다.

'딱 좋아.'

패널이 가볍고 튼튼해졌다.

쉽게 물이 스미지 않았다.

이 정도면 10년도 거뜬하겠구나 싶었다.

패널로 지붕을 엮었다.

초배지를 잘 말려 붙이며 바닥 황토를 덮었다.

조금 더 두꺼운 장판지를 뻑뻑한 풀로 발라 초배지 위에 붙였다.

그 위에 콩기름으로 콩땜을 하고 송진을 덧발라 방수 처리를 마무리했다.

온돌방의 완성이었다.

시험 삼아 불을 피웠다.

바닥을 만져보았다.

"됐어."

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이제는 고객의 반응을 확인할 차례였다.

4화. 모델하우스, Open (3)

"아주 뜨끈뜨끈하구먼?"

주름진 손길이 방바닥을 쓰다듬는다.

신기한지 손바닥으로 눌러보았다가, 뒤집어서 손등을 대어보기도 한다.

이내 떠오르는 놀라운 표정.

아예 방석도 옆으로 치워 버렸다.

지글지글 따끈한 방바닥에 엉덩이를 지졌다.

하얗게 늙은 여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피었다.

"좋아. 아주 좋아."

약간의 치매기가 있는 노인이었다.

그렇기에 한결 솔직했다.

노인의 말에 주점 주인장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 얼굴에도 만족스러운 웃음이 가득하였다.

"어머니께서 많이 좋아하십니다, 도련님."

"그렇지?"

"예."

"그러게 내가 뭐랬어. 뜨끈하게 만들어 준댔잖아. 온돌방."

로이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다행이다.

온돌방은 대성공이었다.

아직 이른 초봄, 서늘한 아침이었다.

꽃샘추위가 한창이라 바깥은 쌀쌀하기만 했다.

하지만 불을 피워둔 이곳 온돌방 안쪽은 달랐다.

방바닥은 지글지글.

공기마저 후끈후끈.

주점 주인장은 아예 외투까지 다 벗어둔 채였다.

"아까 불 피우는 거 봤지? 문밖 아궁이에 불을 피우면 돼. 한 번 제대로 피우기만 하면 열기가 이틀은 갈 거야. 이거, 보기보다 진짜 잘 안 식거든."

"이틀이나 말입니까?"

한 번 불을 피우면 이틀이나.

그 말에 주점 주인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로이드는 피식 웃었다.

"내 말이 진짜인지는 시험해보면 알 거고."

"다, 당연히 믿습니다."

"그래?"

"네. 으음, 더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됩니까?"

"해봐."

"사실은 도련님이 사기를 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사기를?"

"예. 정말로 이런 걸 만들어 주실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 말입니다."

...뭐, 그랬겠지.

새삼 다시금 되새기자면, 로이드 프론테라는 개차반 같은 인간이었다.

평생 누군가를 위해 봉사한 적도 없었다.

남을 위하는 삶 따위와는 인연도 없었다.

그러니 주점 주인장도 이쪽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제 생각관 달리 정말로 이런 훌륭한 온돌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맹세코 이런 건 태어나서 처음 봅니다."

"그래?"

"예. 덕분에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니 어떻게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온돌 만세입니다."

...주모, 보고 계시오?

여기 국뽕이 힘차게 펄-럭이고 있소.

치솟는 민망함에 헛기침이 절로 나왔다.

"흠흠, 감사 같은 건 됐고. 어차피 계약이니까."

"아, 계약."

"그래. 계약."

어차피 이건 서로의 계약으로 진행된 거래였다.

이쪽은 온돌방을 지어주고.

주인장은 파손된 집기의 변상액을 탕감해주고.

"하지만 이 온돌방은... 제 생각엔 부서진 집기보다 훨씬 값어치가 나갈 것 같습니다. 도련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주인장이 벌떡 일어났다.

이내 주점에 다녀온 주인장의 손에는 가죽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이거라도 더 받아 주십시오."

"뭐야, 이건?"

"제 작은 성의입니다."

철그럭.

바닥에 내려앉는 주머니.

그 속에서 묵직한 동전 소리가 흘러나왔다.

현금이었다.

"어이쿠, 뭘 이런 걸 다...."

물론 로이드는 동전 주머니를 냉큼 챙겼다.

대신 서비스로 온돌방 이용 꿀팁(?)도 슬며시 던져 주었다.

"여기 창문 보이지? 좀 서늘해지는 밤이나 새벽에 창문을 살짝 열어봐. 차가운 공기가 들어오게. 그리고 온돌을 최대 화력으로 데우고서 이불을 덮어. 그 속에서 뒹굴거리며 귤을 까먹거나 구운 감자나 고구마를 먹는 거야. 그럼 어떤 일이 생기는지 알아?"

"어떤 일이 생깁니까?"

"공기는 선선하고 궁둥짝은 뜨끈해지지. 어째서 한류와 난류가 만나 조경수역을 이루어 황금어장이 되는지, 어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될 거야, 아마."

"...."

고개를 갸웃거리는 주인장.

그의 인사를 받으며 온돌방을 나왔다.

주위엔 구경꾼이 한가득이었다.

모두가 이 영지의 주민들.

여전히 이쪽을 보며 저들끼리 숙덕이고 있었다.

그들은 약간의 혼란스러움과 제법 큰 호기심을 동시에 보이고 있었다.

'당연하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최근 자신을 두고 돌았던 소문과 풍문이 떠올랐다.

남작가 도련님이 미쳤다느니.

자살할 무덤을 파고 있다느니.

주점 주인장을 대놓고 속였다느니.

좋은 소문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온돌방이 떡하니 완성되었다.

무성하던 소문이 모두 눈앞에서 부정된 셈이었다.

'그러니 더 궁금하겠지. 뭔가 건물을 세운 것 같은데 이게 어떤 용도의 건물인지, 왜 주인장이 저렇게 좋아하는지 짐작도 못 할 테니까.'

사실 소문이 퍼지는 걸 일부러 방관한 로이드였다.

그에겐 소문을 막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홍보가 되는 거니까.'

광고는 중요했다.

홍보는 생명이었다.

시공사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대한민국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아파트 하나를 지어도 광고부터 시작한다.

방송 광고와 전단지, 옥외 광고, 텔레마케팅은 기본이었다.

인터넷과 SNS 바이럴 광고도 당연한 옵션이었다.

그야말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그렇게 거하게 광고를 때리고 어그로를 끌지. 덕분에 모델하우스 오픈일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드는 거고.'

그 결과 분양 신청이 줄을 잇게 된다.

소위 장사가 되는 것이다.

로이드는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소문 덕분에 광고비 하나 안 들이고 이만큼 사람이 모였어.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아.'

지금도 이쪽을 보며 숙덕이는 주민들.

백 명은 충분히 넘어 보였다.

로이드의 눈에 그들은 영지민으로 보이지 않았다.

잠재적 분양 신청자.

즉, 이쪽에게 돈을 바칠 고객으로 보였다.

'그럼 이제부터 모델하우스 오픈이다.'

그는 구경꾼들 앞에 섰다.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목청을 가다듬었다.

"혹시 다들 궁금한 건가? 내가 뭘 만든 건지?"

"...."

물론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다들 눈알을 데룩데룩 굴리며 눈치를 살필 뿐.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나쁘지 않다.

예상한 반응이다.

그렇다면 긴말은 필요 없다.

"그럼 순서대로 들어가서 직접 확인해보면 알겠지."

사람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제일 앞쪽에 있던 아낙네의 소매를 잡았다.

하얗게 질린 아낙네를 온돌방으로 데리고 갔다.

'자고로 입소문의 시작은 동네 아주머니들이니까.'

주점 주인장의 동의하에 구경을 시켜주었다.

뜨끈해진 바닥에 아낙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모여든 구경꾼들.

차례대로 온돌방을 구경하고 체험했다.

들어갈 땐 갸웃거리던 표정이 나올 땐 감탄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런 그들을 로이드가 차려놓은 테이블이 맞이했다.

온돌방 분양 계약 테이블이었다.

"온돌방, 구경해보니 어땠어?"

"새, 생각보다 훨씬 좋더군요."

"그렇지?"

"예. 한겨울에 추위 걱정할 필요가 없어질 것 같습니다요."

"그래서 이런 걸 준비해봤는데, 볼래?"

"이건?"

"간단한 개념도야. 일종의 팸플릿이랄까."

로이드가 주민을 향해 내민 종이.

사실은 이 순간을 위해 어젯밤 밤을 새워가며 만든 팸플릿이었다.

팸플릿엔 두 가지 타입의 온돌방이 근사하게 그려져 있었다.

"A 타입은 방금 본 온돌방처럼 마당에 따로 시공하는 별채 형태로. B 타입은 기존에 살던 집의 1층 바닥을 뜯어서 리모델링하는 형태로. 둘을 묶어서 함께 시공하면 서비스로 대금의 10%가 할인될 거야."

"...."

"집에 아이들 있지?"

"예. 큰놈이 일곱 살이고 작은 녀석이 다섯 살입니다요."

"겨울철에 아이들이 집에서 오들오들 떠는 거, 눈이 매워 눈물을 흘리고 기침을 해가면서도 벽난로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거, 마음 아프지 않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시릴 텐데."

"...."

"그리고 지금 계약하면 분양 개시 특별 서비스로 난방용 장작 다섯 묶음이 무료로 제공될 거야."

"...."

"잘 생각해. 이런 기회 흔치 않으니까."

"저기, 하지만 아무래도...."

"왜? 싫어?"

"...."

사내는 입을 꾹 다물었다.

로이드는 그 속내를 알 수 있었다.

'날 믿지 않으니까.'

아니, 두려워하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지금 자신이 달라졌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저들의 눈에 이쪽은 여전히 로이드 프론테라일 뿐이다.

영지의 망나니.

술만 마시면 행패를 부리는 쓰레기.

'그런데 대뜸 온돌방 하나 그럴듯하게 만들어서 보여준다고 덜컥 믿을 리가 없지.'

아마 사기를 친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쩌면 농락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니 계약을 망설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 반응은 이미 예상했던 로이드였다.

"그래서? 계약 안 할 거야?"

"...."

"정말? 그러기야?"

"...."

사내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사내가 움찔했다.

이쪽이 보내는 눈빛.

그 의미를 알아차린 것이다.

'여기서 계약하지 않으면 앞으로의 영지 생활이 험난해질 거라고 지레짐작하겠지. 그렇게 불안감에 휩싸일 테고.'

로이드는 쓴웃음을 삼켰다.

영지민들의 이쪽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을 이용하는, 조금은 치사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게 최선의 방법이기도 했다.

'어차피 쓰레기로 미움받고 있다면 그 이미지를 적당히 활용해 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계약금만 떼먹고 공사 안 해줄 것도 아니고.'

처음 시작이 중요하다.

어떻게든(?) 계약만 따내면.

그다음엔 좋은 입소문을 만들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좀 치사하더라도 로이드의 악명을 적절히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아, 알겠습니다."

속지 않겠다는 이성적 의지.

닥쳐올 행패에 대한 불안감.

그 사이에서 갈등하던 사내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

마지못한 표정으로 계약서에 서명했다.

다음 주민도, 그다음 주민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로이드는 훗날 저들의 표정을 환하게 바꾸어줄 자신이 있었다.

'그만큼 온돌의 난방 효율이 괜찮을 테니까.'

지난 며칠간 나름의 조사를 통해 내린 결론이었다.

이 지방 고유의 난방 방식인 벽난로의 한계 때문이었다.

'벽난로는 보기완 달리 난방 효율이 떨어지지. 근처만 따뜻해. 공기만 데워서 금방 식어. 열기가 실내에 오래 머무르지 못해. 게다가 재와 연기, 그을음 때문에 겨우내 눈이 맵지. 아무 땔감이나 쓸 수 없어서 관리하기도 까다롭고. 심지어 불이 꺼지지 않도록, 화재가 나지 않도록 한 사람은 잠도 못 자고 밤새도록 불을 지켜야 해.'

반면 온돌은?

그 대부분의 단점을 상쇄할 수 있다.

그걸 확신하는 로이드는 자신 있게 주민들을 협박(?)했다.

덕분에 오후가 저물기 전에 기대 이상의 분양 계약을 따낼 수 있었다.

A 타입 계약이 32건.

B 타입 계약은 무려 57건이었다.

두둑한 선계약금은 덤이었다.

'대박이다.'

물론 아주 큰 돈은 아니었다.

당장 남작가의 빚을 청산하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하지만 이후가 중요했다.

'조금 억지로 계약을 따내긴 했지만 영지 내에서 온돌 시공을 훌륭하게 마쳐주면 분명히 좋은 소문이 난다. 이 일대의 다른 영지까지도 진출할 수 있어.'

아예 온돌 시공을 브랜드화하는 것.

그렇게 이 지방 일대에서 난방 사업을 벌이는 것.

그것이 로이드의 1차 계획이고 목표였다.

"후우."

거기까지 계산을 마치자 한숨이 나왔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붉게 물든 석양.

그 석양을 등 뒤로 두고서 이쪽을 따라오고 있는 하비엘이 보였다.

"어이, 너. 힘 세지?"

"예. 그럭저럭은."

"그럼 인간 포클레인이나 기중기 어떠냐?"

"예?"

"힘 세다며. 그 힘으로 땅 팍팍 파고 통나무 척척 날라주면 안 될까?"

솔직한 바람이었다.

하비엘은 엄청난 수준의 검사다.

당연히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힘을 지녔다.

그런 하비엘이 현장에서 중장비의 역할을 해준다면?

앞으로의 시공이 한결 간편해지고 빨라질 것이다.

즉, 시공의 효율성이 증가한다.

같은 기간에 더 많은 시공을 소화할 수 있다.

수입이 팍팍 늘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하비엘은 두 번 생각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어째서?"

"주군께서 제게 내리신 임무는 어디까지나 로이드 님의 신변 보호입니다."

"그래서 건설 현장 일꾼 노릇은 못 하시겠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진 도와줬잖아?"

"그건 주점 주인장의 어머님을 돕기 위한 기사로서의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약자를 보호하는 일이셨다?"

"예. 하지만 방금 로이드 님이 요청하신 앞으로의 일은 다르지요."

"사사로운 장사질은 돕지 않겠다?"

"그렇습니다."

"단호하구만."

"별말씀을."

역시나 단호박 같은 놈이었다.

로이드는 입맛을 쩝 다셨다.

'그래도 중장비는 꼭 필요한데.'

건설 장비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정말로 크다.

심하게는 시공 기간이 열 배 이상 차이가 날 수도 있다.

아니, 건설 장비의 유무에 따라 시도할 수 있는 시공의 종류 자체가 달라진다.

선택지의 폭이 바뀌는 것이다.

'큰돈을 벌려면 무조건 큰 규모의 공사를 따내야 해.'

지금은 온돌방으로 만족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 수준에만 머물 순 없었다.

온돌 시공 사업으로만 버는 돈에는 한계가 있을 테니까.

'다 늙어서 돈 갚는 건 싫어.'

그럼 곤란했다.

대한민국에서도 돈 때문에 아등바등거렸는데.

여기서마저 평생 그러는 건 진심으로 사양이었다.

'그러니 제대로 시공 사업을 벌여서 빚을 다 갚으려면 건설 장비 문제를 꼭 해결해야 해.'

저택으로 향하는 길.

고민은 계속 깊어졌다.

그렇기에 로이드는 깨닫지 못했다.

자신을 쳐다보는 하비엘의 냉철한 눈동자.

그 시선의 온도가 이전과 미세하게나마 달라지고 있었다.

'종잡을 수가 없군.'

하비엘은 약간의 혼란을 느꼈다.

그의 시선이 로이드의 뒷모습을 향했다.

프론테라 남작가의 장남.

로이드 프론테라.

그는 자신이 모시는 주군의 아들이었다.

지난 몇 개월간 자신의 호위 대상이기도 했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이 주정뱅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로이드는 개차반이었다.

매사에 엄격한 자신의 시선이 아닌, 보통 사람의 기준으로 보기에도 그랬다.

인내심이 없었다.

예의범절이나 교양은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저 매일 술이나 퍼마시며 무가치하게 살아가는 놈팡이에 불과했다.

심지어 가문에 압류가 들어온 날마저도 그랬다.

'솔직히 싫었지. 아니, 지금도 그래.'

알면 알수록 좋아할 수가 없는 인간이었다.

주군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진즉 베었을지도 몰랐다.

모시고는 있지만 속속들이 경멸스러운 존재.

말 그대로 인간쓰레기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며칠 전까지는, 확실히 그랬다.

'하지만 바뀌었다. 너무나 갑자기.'

아마 며칠 전.

단골 주점에서 난동을 부린 후.

다음 아침에 일어났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하비엘은 그날 아침에 로이드가 깨어나던 모습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겨우 두 번 불렀는데 잠에서 깨어났지.'

예전이라면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다.

심지어 저 인간말종 망나니가 자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기억하고 불렀던가.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주점 주인을 찾아가 달래줬다. 변상 대신에 온돌을 만들어 주겠노라 약속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새로운 쓰레기 짓을 하는 줄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정말로 온돌방을 지었다.

주점 주인장과의 약속을 지켰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모여든 영지민들에게도 온돌방을 지어줄 계약서를 작성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아니다. 돈은 빌미일 뿐이야.'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더 큰 목표가 있는 듯 보였다.

물론 그 목표를 짐작할 수는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행동들이 사사롭게 보이지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된 것 같구나.'

말투가 바뀌었다.

표정과 태도도 달라졌다.

배운 적도 없는 능력을 발휘했다.

건물을 설계했고, 새로운 난방 방식을 선보였다.

혼란스러웠다.

설마 진짜로 다른 사람이 되기라도 했단 말인가.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계속 유심히 관찰해도.

한 발짝 앞서서 걸어가고 있는 남자는 분명 망나니 로이드 프론테라였다.

'그렇다면 설마 지금까지 이런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는 건가.'

사실 그것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해야 그나마 앞뒤가 맞았다.

'남작가가 평온했던 그동안은 유유자적하게 살아왔다가, 가문에 위기가 닥치자 진짜 모습을 드러낸 거라고?'

어쩌면 정말 그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단정하기엔 너무 성급한 일이겠지만.

'일단은 내 임무에만 충실하자.'

그리고 가능하다면.

계속 이 망나니를 관찰하자.

하비엘 아스라한은 그렇게 다짐했다.

다시금 앞서 걸어가는 로이드의 뒷모습을 망막에 새겼다.

그 순간.

앞서 걸어가던 로이드는 눈앞에 떠오르는 뜻밖의 메시지와 마주하게 되었다.

딩동!

[하비엘 아스라한의 당신에 대한 호감도가 +2 상승하였습니다.]

[하비엘 아스라한과의 현재 관계 : -29]

[주요 인물과의 약간의 관계 개선으로 36 RP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36]

[획득한 RP를 투자하여 재능 스킬을 개화할 수 있습니다.]

'이건 또 뭐야?'

눈앞 허공에 줄줄이 떠오르는 메시지.

메시지를 읽는 로이드의 눈이 점점 휘둥그레졌다.

5화. 인연 점수를 획득하다 (1)

[하비엘 아스라한의 당신에 대한 호감도가 +2 상승하였습니다.]

[하비엘 아스라한과의 현재 관계 : -29]

[주요 인물과의 약간의 관계 개선으로 36 RP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36]

[획득한 RP를 투자하여 재능 스킬을 개화할 수 있습니다.]

'이건 또 뭐야?'

눈앞 허공에 줄줄이 떠오르는 메시지.

어쩐지 낯설지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 이곳에 올 때도 저런 걸 봤어.'

처음 하비엘이 자신을 깨울 때였던가.

그때도 RP가 어쩌고저쩌고하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그냥 개꿈 꾸는 건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닌 것 같다.

어쨌건 황당했다.

재능 스킬은 뭐고 RP는 또 뭐란 말인가.

'호감도? 주요 인물과의 관계 개선?'

로이드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눈앞 허공에 떠올라 있는 메시지를 거듭 확인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다.

'하비엘의 호감도가 올랐고, 약간 관계 개선이 됐다고? 그래서 RP라는 걸 얻었는데 그걸로 스킬을 개화할 수 있는 거?'

로이드는 걸음을 멈추었다.

하비엘을 돌아보았다.

"어이?"

"예."

"너 방금 무슨 생각했냐."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혹시 속으로 나 씹거나 품평하진 않았어? 아, 저놈 저거 완전 밥맛이었는데 지금 보니까 생각만큼 쓰레기는 아닌 거 같네, 뭐 이런 비슷한 거."

"그런 적 없습니다."

"있네, 있어."

"없습니다."

"진짜? 예전부터 날 완벽한 쓰레기로 생각하던 거 아니었어?"

"예."

하비엘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순수한 쓰레기 같은 사람은 없겠지요. 아무리 엉망진창인 인간이라도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는 아주 희미하게나마 일말의 사람다운 면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저는 생각합니다."

"...그거, 참 위로가 되는구만."

다시 한번 말하는 거지만 하비엘에겐 돌직구 한마디 한마디를 매우 정성껏, 찰지게, 뼛속, 아니, 골수까지 꽂아넣는 묘한 재능이 있는 것 같다. 본인조차 의식 못 하는 사이에 말이다.

"쯧, 집에나 가자."

다시 걸음을 떼었다.

남작가 저택으로 돌아왔다.

하비엘을 숙소로 보냈다.

혼자가 된 후 침실 문을 잠갔다.

본격적으로 스킬에 관련된 메시지를 열었다.

여는 방법은 간단했다.

"스킬창."

혹시나 해서 시도해봤다.

[스킬창을 불러옵니다.]

"헐. 진짜 되네."

소설 속에 들어왔을 때부터 소설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실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소설 같았다.

로이드는 감탄하며 눈앞에 떠오른 스킬창을 훑어보았다.

[현재 개화 가능한 재능 스킬 목록]

[지형과 공간을 파악하는 측량 지식이 감지됨.]

[...토질역학적 지식이 감지됨.]

[...수리학적 지식이 감지됨.]

[이를 종합하여 '기초 측량' 스킬로 개화 가능]

[개화에 필요한 RP = 15]

'뭐?'

측량.

말 그대로 토목 공학의 기본이었다.

구조물을 설계하기에 앞서 지형과 공간을 파악하는 측량.

그것이 바로 시공의 시작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측량술을 스킬로 개화할 수 있다고?'

아무래도 개화 가능한 스킬의 종류는 원래 지니고 있는 지식이나 재능에 크게 좌우되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며 로이드는 그 사실을 확신했다.

[재료 역학적 지식이 감지됨. 멈추어 있는 물체를 다루는 정역학적 지식이 감지됨.]

[...구조역학 지식이 감지됨.]

[...상하수도학 지식이 감지됨.]

[...강구조 설계 및 철근 콘크리트 설계 지식이 감지됨.]

[...CAD 프로그램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경험이 감지됨.]

[상기 재능을 종합하여 '기초 설계' 스킬로 개화 가능.]

[개화에 필요한 RP = 20]

"...."

측량에 더해서 설계까지.모두 학교에서 지겹도록 공부했던 분야들이었다.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대박이다.'

그렇잖아도 건설업을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남작가의 빚을 해결하기 위해서.

큰돈을 벌기 위해서.

훗날엔 대형 규모 토목 사업까지 벌일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거기에 제일 필요한 것이 정밀한 측량과 설계였다.

'그런데 여긴 그런 장비가 없었지. GPS 측량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고. 게다가 설계는? 더 답이 없었어.'

온돌방 설계도 일일이 손으로 그려야 했다.

대한민국에서 편리하게 쓰던 CAD가 새삼 그리워지던 순간이었다.

한데 그걸 전부 스킬로 장착시켜준단다.

로이드는 과감하게 결정했다.

'기초 측량, 기초 설계, 모두 개화하자.'

일단 15 RP를 기초 측량에 투자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기초 측량 스킬이 개화되었습니다.]

[스킬명 : 기초 측량]

[소량의 마나를 소모함. 눈으로 관측하는 토지의 지형, 면적, 고저를 정확한 수치로 산출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지형 표면을 이루는 흙의 성질과 물의 성질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한 번에 측량 가능한 면적 : 100㎡]

'이거 실화?'

로이드는 눈을 비볐다.

한 번에 가로세로 각각 10미터 길이의 면적을 맨눈으로 측량할 수 있다니.

심지어 범위 내의 토질과 하천의 성질까지 파악할 수 있다니.

가히 사기적인 능력이었다.

'확인부터 해보자.'

침실 창문을 열었다.

마침 침실은 2층에 있었다.

저택 안뜰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안뜰을 둘러보며 스킬을 사용했다.

"기초 측량."

[측량을 시작합니다.]

메시지가 울렸다.

동시에 시야 일부가 증강현실처럼 바뀌었다.

가로 10미터.

세로 10미터.

그 범위의 지형 위에 수많은 숫자와 정보가 떠올랐다.

"헐."

마치 3D로 구성된 맵핵을 머릿속에 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친김에 20의 RP를 투자해서 기초 설계 스킬도 개화했다.

[기초 설계 스킬이 개화되었습니다.]

[스킬명 : 기초 설계]

[소량의 마나를 소모함. 허공에 원하는 설계도면의 내용을 3차원적인 점, 선, 면의 형태로 불러옵니다. 도면상의 물리적 특성 오류를 자동으로 검출하여 수정합니다.]

[한 번에 표현 가능한 구조물의 부피 : 1,000㎥]

'그럼 이것도 시험.'

곧바로 스킬을 사용했다.

눈앞 허공에 가상의 검은 공간이 형성되었다.

그 속에서 자유롭게 점, 선, 면을 조작할 수 있었다.

심지어 방금 기초 측량으로 파악한 범위의 지형을 불러올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설계 프로그램 CAD를 미래형 3차원 홀로그램 버전으로 제한 없이 사용하는 셈이었다.

'어우야. 미쳤네, 미쳤어.'

이쯤이면 감탄을 넘어 기절할 지경이다.

건축의 신이 되면 이런 기분이 들까.

'물론 아직은 측량이나 설계 면적이 좀 작긴 하지만.'

그건 나중에 스킬을 성장시키면 자연히 해결될 것이다.

다만 로이드는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나한테 중장비나 건설 장비 같은 재능도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건설 장비를 제작할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런 재능은 자신에게 없었다.

자신은 토목공학도였다.

기계공학도가 아니었다.

로이드는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스킬창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한 곳에 시선이 멎었다.

'이건 뭐지?'

[환상종 랜덤 뽑기]

[RP를 투자하여 환상종을 뽑을 수 있습니다.]

[강력하고 개성 넘치는 환상종은 자신을 소환한 주인에게 절대적 충성을 바치며 다양한 능력을 제공할 것입니다.]

...라는 안내 문구가 쓰여 있었다.

'일종의 뽑기인가. 모바일 게임 같은?'

별별 것이 다 있구나 싶었다.

가능하다면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남은 RP가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1회 뽑기 = 50 RP]

'쩝, 턱도 없네.'

방금 스킬 두 가지를 개화하며 대부분의 RP를 소모한 터였다.

그래서 남은 RP는 고작해야 1.

'RP를 더 모아야겠는데.'

그 방법은 이미 알고 있었다.

주위 중요 인물들로부터 호감을 얻는 것.

그리하여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럴 방법은 제법 있었다.

특히 이 시기라면 더욱 그렇다.

'딱 이때가 그 시기지.'

문득 소설 내용이 떠올랐다.

철혈의 기사 극 초반부.

아직 하비엘이 남작가에 몸담았던 시절.

프론테라 남작은 거의 매일 찾아오는 빚쟁이에게 극심하게 시달렸다.

어쩌면 오늘도 그럴지도 모른다.

하인을 불렀다.

조용히 물었다.

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도련님. 그렇잖아도 아까 손님들이 영주님을 찾아오셨습니다요."

역시.

이 시기에 손님이라.

로이드는 빙긋 웃었다.

'타이밍 보소. 때마침 딱 이래 주니까 얼마나 좋아.'

마침 필요했는데.

더 많은 RP를 얻어낼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침실을 나선 로이드는 남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는데 어쩔 거요, 대체!"

집무실 앞에 다다르자 격앙된 소리가 복도까지 흘러나왔다.

낡은 저택이라 방음이 잘 안 되는 건지.

혹은 안쪽의 소란이 생각보다 큰 건지.

로이드는 문을 열고서야 정답이 후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작, 대체 언제까지 계속 미룰 겁니까? 약속한 날짜를 벌써 닷새나 넘겼지 않습니까?"

"맞소이다. 계속 이렇게 시간을 질질 끌면 우리도 가만있지 않을 거요."

찾아온 빚쟁이는 두 사람이었다.

배가 빵빵하게 나온 배불뚝이.

환자처럼 파리한 안색의 말라깽이.

두 사람이 허리에 손을 얹고서 턱을 치켜들고 있었다.

반면 프론테라 남작은?

집무실 의자에 앉아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었다.

어쩐지 축 처진 어깨와 표정이 마치 죄라도 지은 사람 같았다.

'하긴 그럴 법도 하지.'

오늘 남작가를 찾아온 배불뚝이와 말라깽이.

두 사람은 악질적인 고리대금업자다.

받아낼 돈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심지어 채무자가 죽어도 그 시체까지 팔아서 돈을 만드는 인간들이었다.

'물론 그 짓거리를 자행하다가 하비엘에게 목이 잘리는 최후를 맞이하지만.'

그건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

1년 뒤, 남작이 자살한 이후에 벌어질 사건이다.

'쯧, 어쩌다가 저런 인간들에게 돈을 빌린 건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내뱉었다.

"누가 뭐라 해도 프론테라 남작님은 이 영지의 주인이십니다. 손님으로 오셨으면 그에 걸맞은 예의를 갖추시지요?"

그제야 이쪽의 존재를 알아차린 걸까.

두 고리대금업자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남작이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로이드?"

남작의 놀란 목소리.

그를 향해 살짝 고개 숙였다.

배불뚝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끼어들었다.

"댁은 누구?"

"이 집안의 장남입니다."

"장남?"

"그렇습니다."

"아하. 행실이 매우 독특하다는 그 장남?"

"덕분에 좀 유명하지요, 제가."

"그래서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와중에 이렇게 경우 없이 끼어드는 건가?"

"이 영지의 주인인 남작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랄까요."

"그러면 큰일이네?"

"어째서 말입니까?"

"이 영지 주인이 곧 바뀔 것 같은데."

"바뀌는지 아닌지는 조금 더 지켜보면 알겠지요."

빙긋 웃었다.

"일단 초청장부터 좀 봅시다."

"...뭐?"

배불뚝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를 더욱 비웃으며 말했다.

"초청장, 없습니까?"

"이 판국에 무슨 초청장을 운운하...."

"왕국 귀족법 3조 6항. 왕국의 모든 귀족은 지위와 계급을 막론하고 국왕의 봉신으로서 합당한 권리와 명예를 지닌다. 귀족은 자신의 권익을 지킬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무슨...."

"왕국법에 근거하여 엄밀하게 말하자면, 초청장 없이 귀족가를 방문하는 것이 왕국 귀족법상 무단침입의 근거가 됨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무단침입을 한 거라고?"

"아, 이제야 이해하셨습니까?"

손뼉을 짝, 쳤다.

저 법령을 현실에서 누가 지킬까.

하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법령이었다.

문득, 소설 '철혈의 기사' 초반부의 사이다 장면이 떠올랐다.

프론테라 남작 부부가 자살한 직후였다.

남작가 저택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그 장례식장에 두 고리대금업자가 찾아왔다.

남작 부부의 시체라도 팔아야 하니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렸다.

그때 하비엘이 검을 뽑았다.

저 법령을 입에 담았다.

단칼에 저들을 베어 버렸다.

이후 하비엘은 재판에 넘겨졌다.

다행히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다.

실제로 저 법령은 존재했고, 두 고리대금업자가 초청장 없이 찾아와 도를 넘은 행패를 부리던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니까 확 죽일 수는 없겠지만.'

대신 여기서 쫓아내기엔 딱 좋다.

"그러니 이만 살펴들 가시길. 다음에 방문하실 때는 예의범절을 배워오시길 바랍니다."

"이러고도 아무 문제가 안 생길 것 같나?"

"그것도 조금 더 지켜보면 알겠지요."

으르렁거리는 두 고리대금업자.

같잖았다.

놈들이 치를 떨며 집무실을 나갔다.

그 뒷모습을 비웃음으로 배웅해 주었다.

그제야 프론테라 남작의 황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무슨 짓을 한 게냐?"

돌아보니 남작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 있었다.

하긴.

그럴 법도 하다.

'기세등등하게 찾아온 빚쟁이를 달래서 보내도 모자랄 판에 잔뜩 도발하고 쫓아내 버렸으니.'

쓴웃음이 나왔다.

하이에나 같은 놈들.

대한민국에서의 쓰라린 기억도 떠올랐다.

투자 사기를 당하셨던 부모님.

매일같이 찾아오던 빚쟁이들.

그 등쌀에 시달려 하루하루 작아지던 아버지의 뒷모습.

'다시는 그런 꼴, 당하지 않아.'

나약하게 엎드릴수록 더 당한다.

특히 저런 놈들을 상대로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지금 남작은 그럴 상황이 아니겠지.

쪼들리는 상황에서 당당해진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니까.

아니,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일 테니까.

"대답해 보거라. 방금 무슨 짓을 한 것이냐니깐?"

어느새 남작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아마 개념 없는 아들놈이 일을 제대로 그르쳤다 여기고 있는 듯했다.

이럴 때는 몇십 마디 설명보다 그냥 보여주는 편이 낫다.

품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남작의 책상에 놓았다.

철그렁, 묵직한 소리가 났다.

"걱정 마세요."

"뭐?"

"이 정도면 이번 달 이자로 충분할 겁니다. 이걸로 수습하세요. 당분간은 잠잠해질 겁니다."

"이게... 무엇이냐?"

오늘 온돌방 분양을 하며 벌어들인 계약금이었다.

하지만 직접 설명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아직은 이쪽보다 훨씬 신뢰받는 사람이 따로 있으니.

"궁금하시면 아스라한 경을 불러서 들으시죠."

남작을 향해 고개 숙였다.

붙잡기 전에 재빨리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후우."

그제야 참았던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고개를 한 번 흔들어 날뛰는 가슴을 털어냈다.

침실로 향하지는 않았다.

대신 뒤뜰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엔 인적 대신 달빛만 가득했다.

잠시 서성이며 기다렸다.

한 시간쯤 기다렸을까.

'슬슬 반응이 올 때가 됐는데.'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마침내 기다리던 반응이 왔다.

딩동.

[아르코스 프론테라 남작의 당신에 대한 호감도가 +6 상승하였습니다.]

[아르코스 프론테라 남작과의 현재 관계 : -14]

[주요 인물과의 관계 개선으로 60 RP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61]

'됐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예상대로 남작이 하비엘을 부른 듯했다.

하비엘의 설명을 통해 이쪽이 최근 벌였던 일들을 들었겠지.

'계획대로 됐어.'

잘한 일을 스스로 설명하는 건 효과가 떨어진다.

개차반 같은 행실을 일삼던 놈이 스스로 밝히는 선행이라면 더욱 그렇다.

'잘했어, 하비엘.'

하비엘이라면 냉철하게 객관적으로 설명했을 것이다.

그래서 설명에 더 신뢰감이 생겼을 거고.

'덕분에 쌓인 RP가 61이 됐다.'

일부러 인적 없는 연무장에서 기다린 보람이 생겼다.

드디어, 첫 환상종을 뽑을 때가 왔다.

6화. 인연 점수를 획득하다 (2)

'잘했어, 하비엘.'

절로 감사(?)의 마음이 일었다.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덕분이었다.

'하비엘이라면 냉철하게 객관적으로 그동안의 일을 설명했을 테니까.'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주인공이었던 하비엘.

시종일관 냉철한 녀석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매사에 객관적인 태도를 보이려 노력했다.

아마 조금 전에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동안 이쪽이 벌여왔던 일들, 보였던 행동들을 모두 남작에게 차분하게 알렸겠지.

'다행이야. 남작이 날 이상하게 판단하지 않아서.'

사실 약간은 도박이었다.

매일 망나니짓만 벌이던 아들이었다.

한데 갑자기 어디서 배운 적도 없는 지식을 선보였다.

이곳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황토 온돌방을 떡하니 만들어 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일을 더 키워 영지민들과 시공 계약을 맺고 돈을 벌기 시작했다.

충분히 의심을 살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러진 않았어.'

물론 의아하긴 했을 터다.

하나 그보단 기쁨이 컸던 거겠지.

'원래 그게 부모 마음이니까.'

우리 애가 달라졌어요.

그런 상황에서 기쁨부터 느끼는 것이 세상 거의 모든 부모의 모습이 아닐까.

한편으로는 그런 심리를 이용하는 게 찜찜하기도 했다.

그래도 당장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일단은 지르고 보자."

지금은 양심보다는 실리를.

실리를 통한 이득을 꾀할 때였다.

그러지 않으면 평생 가난에 허덕이던 대한민국에서의 삶을 반복하게 될 테니까.

그렇게 다짐하며 로이드는 다시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달빛 쏟아지는 뒤뜰 연무장.

다행히 인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심호흡을 했다.

시스템 창을 열었다.

눈앞에 떠오르는 수많은 정보의 물결.

그중에서 그의 눈길이 향한 곳은 따로 있었다.

[환상종 랜덤 뽑기]

[RP를 투자하여 환상종을 뽑을 수 있습니다.]

[강력하고 개성 넘치는 환상종은 자신을 소환한 주인에게 절대적 충성을 바치며 다양한 능력을 제공할 것입니다.]

[1회 뽑기 비용 = 50 RP]

[현재 보유 중인 RP : 61]

[랜덤 뽑기를 실행하시겠습니까?]

[YES / NO]

당연히 선택은 'YES'였다.

고개를 끄덕였다.

[환상종 랜덤 뽑기를 실행합니다.]

안내문과 함께 50 RP가 소모되었다.

동시에 다섯 발짝 앞쪽 지면에 변화가 일어났다.

파아앗...!

지면에 창백한 빛이 새겨졌다.

새겨진 빛이 복잡한 도형을 그렸다.

완성된 마법진이 신비한 기운을 뿜었다.

'나오는 건가.'

휴대폰 게임 속에서는 많이 보던 광경인데, 실제로 보니 좀 달랐다.

아니, 많이 달랐다.

그저 그런 3D 이펙트와 비교가 안 됐다.

'저 속에서 진짜로 뭔가가 나온다'라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보고 있자니 절로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그리고 마침내 뭔가가 나왔다.

파치직!

강렬한 충격파와 함께 지면에서 뭔가가 솟구쳤다.

이내 이쪽으로 날아와 품속에 폭 안겼다.

"뽀동!"

"...."

보송보송한 솜털.

짧은 팔다리와 2등신 몸매의 뽕뽕한 궁둥이.

그러고도 주먹 절반도 안 되는 아담한 체구.

그러니까 이건....

"햄스터?"

"뽀동!"

"햄스터가 왜 여기서 나와?"

"뽀도동! 뽀동!"

"...너니까 여기서 나온 거라고?"

"뽀동!"

"...."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햄스터.

로이드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환상종이라고?'

무려 50 RP나 소모하면서 뽑기를 시도했다.

그런데 정작 나온 것이 아무리 봐도 애완용으로만 느껴지는 햄스터 한 마리라니.

하지만 로이드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하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환상종은 다양한 능력을 제공한다고 했어. 일단 이 녀석, 내 말을 알아듣고 대답을 하고 있다. 그것부터가 평범한 햄스터는 아니라는 뜻이겠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어쩐지 자신도 녀석이 하는 대답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즉, 대화가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햄스터를 손바닥에 올렸다.

녀석을 마주 보며 물었다.

"어이."

"뽀동?"

"특별한 능력 같은 거, 없냐?"

"뽀도동?"

"환상종이라며."

"뽀동!"

"그러니까 환상종이라는 증거부터 좀 대보시지?"

"뽀도동? 뽀동!"

녀석이 두 손을 입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볼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서 내밀었다.

그것은 자그마한 봉투와 명함 크기의 구깃구깃 구겨진 종이쪽지였다.

"뽀동! 뽀도동!"

"나 주는 거라고?"

"뽀동동!"

"쪽지를 읽어보라고?"

"뽀동!"

"...."

쪽지를 펼쳐보았다.

깨알같이 새겨진 글귀가 보였다.

다행히 달빛이 밝아서 그럭저럭 내용을 알아볼 수 있었다.

[뽀동이 사용설명서]

[뽀동이는 귀여운 햄스터입니다. 사랑으로 보살펴 주세요.]

[뽀동이는 소환자인 당신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칩니다. 환상종은 평생의 반려동물이자 또 하나의 가족입니다. 함부로 유기하지 말아 주세요.]

[뽀동이는 함께 동봉된 두 가지 종류의 해바라기씨를 먹음으로써 덩치를 바꿀 수 있습니다.]

[빨간 해바라기씨 : 뽀동이를 거대하게 만들어줍니다. 거대화 최대 유지 시간 = 12시간]

[파란 해바라기씨 : 뽀동이를 아담하게 만들어줍니다. 거대화 최대 유지 시간을 초과하기 전에 먹여 주세요. 거대화 상태에서 파란 해바라기씨를 먹지 않고 12시간을 넘기면 뽀동이는 저절로 아담한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대신 탈진 상태에 빠져 24시간 내에는 다시 거대화가 불가능해집니다.]

[2색 해바라기씨 세트 구매 비용은 1 RP입니다.]

[뽀동이는 거대화 상태에서 다양한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땅 파기 (Lv. 1)]

[땅 다지기 (Lv. 1)]

[볼 주머니 활용 (Lv. 1)]

'흐음. 땅 파기에 땅 다지기라.'

설마 포클레인 같은 역할을 한다는 뜻일까.

설명서를 다 읽은 로이드는 함께 동봉된 봉투를 열어보았다.

역시나 봉투에는 해바라기씨가 들어 있었다.

'빨간 것과 파란 것 각각 10개씩 있네.'

로이드는 햄스터, 아니, 뽀동이를 쳐다보았다.

"어이?"

"뽀동?"

"너, 이거 먹으면 커지는 거야?"

"뽀동!"

"얼마나?"

"뽀도동!"

"엄청나게?"

"뽀동!"

"...."

과연 얼마나 커진다는 걸까.

'이 녀석, 워낙 작아서.'

크기란 상대적인 개념이다.

여기서 더 커져 봤자 얼마나 될까 싶었다.

'그나마 사람 크기 정도만 돼도 써먹을 데는 많겠는데 말이지.'

햄스터를 키워본 적은 없었다.

다만 햄스터가 땅굴을 잘 판다는 사실은 주워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니 이 녀석이 사람 크기 정도만 되어도 몇 사람분의 일은 해낼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들었다.

"그럼 확인부터 해보자."

"뽀동?"

"우선 좀 내려가 보시고."

"뽀도동?"

녀석을 땅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빨간 해바라기씨를 내밀었다.

"이것 좀 먹어볼래?"

"뽀동?"

"냄새 좋지?"

"뽀도동? 뽀동?"

"자, 맛있을 거야."

"뽀동!"

녀석이 코를 킁킁거렸다.

해바라기씨를 냉큼 받았다.

작은 입에 넣더니 오물거렸다.

그 사이 로이드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얼마나 커질까.'

기대 반 걱정 반의 심정으로 뽀동이를 살폈다.

그리고 뽀동이가 오물오물 씹던 빨간 해바라기씨를 삼키는 순간.

뚜앙-!

커졌다.

...대략 10미터 크기로.

'헐.'

대박.

로이드는 믿기지 않는 심정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거대 햄찌로 변신한 뽀동이의 얼굴이 저만큼 한참 위쪽에 있었다.

'만약 충분히 물러나지 않았더라면 녀석한테 부딪쳐서 탱탱볼처럼 날아갔을지도....'

워낙 순식간에 진행된 거대화였다.

마치 팝콘이 팡 튀겨지듯.

혹은 에어백 터져 나오듯.

급속도로 부피가 늘어난 녀석이었다.

그러니 거리를 제대로 벌려놓지 않았다면?

불어나는 녀석의 몸뚱이에 제대로 부딪쳐 날아갔으리라.

마치 교통사고 당하듯이 말이다.

'다음부턴 조심하자.'

그는 다짐하며 뽀동이를 올려보았다.

어쨌건 지금은 녀석의 성능(?)을 테스트할 필요가 있었다.

"어이, 내 말 들리냐?"

"뽀동?"

녀석의 거대한 머리가 이쪽을 내려다본다.

다행히도 여전히 순진한 눈망울이었다.

잡아먹힐 걱정은 안 해도 될 듯했다.

"너 땅 파기부터 해볼래?"

"뽀도동?"

"여기부터 저기까지. 2미터 깊이로 균일하게 고랑 만들어줄 수 있어?"

"뽀동? 뽀도동!"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하고 뚠뚠한 궁둥이를 실룩거리며 방금 가리킨 위치로 움직였다.

그러고는 짧은 두 앞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의 빛의 속도로.

"뽀도도도동!"

호바바바밧!

그것은 흙의 폭풍이었다.

말 그대로 흙더미가 폭발적으로 튀어 올랐다.

그사이로 녀석의 뽕실한 몸매가 거침없이 전진했다.

그렇게 약 3분의 시간이 지났을 때.

뒤뜰 연무장에는 깊이 2미터, 길이 20미터의 거대한 고랑이 완성되어 있었다.

"...헐."

상상 이상이었다.

기대 이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로이드는 감탄에서 금방 벗어났다.

감탄 따위나 할 시간은 없었다.

'언제 누가 이 모습을 볼지 모르니까.'

최대한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테스트를 끝낸다.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가 말했다.

"잘했어. 그럼 다음엔 땅 고르기다."

"뽀동?"

"방금 만든 고랑을 다시 메꿔봐. 가급적 최대한 평평하게."

"뽀도동?"

"할 수 있겠어?"

"뽀동!"

녀석이 즉시 움직였다.

방금 만든 고랑 앞에서 자세를 잡았다.

뽕실한 궁둥이를 흔들었다.

앞발을 넓게 벌렸다.

그리고 질풍처럼 좌우로 움직였다.

"뽀도도도-옹!"

포바바바밧!

조금 전의 고랑 파기가 흙의 폭풍이었다면.

이번의 움직임은 마치 진공청소기 같았다.

녀석의 뽕실한 궁둥이가 육중한 중심점이 되었다.

궁둥이를 확고한 무게추로 삼아 상체를 좌우로 재빠르게 움직였다.

아까 고랑을 파내며 사방으로 튄 흙더미를 끌어모았다.

고랑으로 밀어 넣었다.

거침없이 전진했다.

전진할 때마다 고랑이 팍팍 메꾸어졌다.

한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뽀도동!"

고랑을 끝까지 메꾼 녀석이 몸을 눕혔다.

그리고 고랑을 따라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앞으로 한 번.

뒤로 한 번.

그걸로 충분했다.

녀석이 지닌 육중하고도 뽕뽕한 옆구리 살.

그 부위가 말 그대로 거대한 건설용 로드롤러 장비처럼 바닥을 짓뭉갰다.

덕분에 녀석이 앞으로 한 번 뒤로 한 번 구르고 나니?

울퉁불퉁했던 지면이 깔끔하게(?) 평탄해졌다.

고랑을 팠던 흔적조차 남지 않았을 정도였다.

'좋아. 매우 좋아.'

볼수록 만족스러웠다.

녀석을 뽑기 위해 투자한 50 RP가 하나도 아깝지 않게 느껴졌다.

'다행이다. RP를 모으려고 조금 무리한 감도 있었는데.'

빚쟁이들과 언쟁 중인 남작을 일부러 찾아갔다.

조금은 무리수를 두며 자신을 어필했다.

남작과의 호감도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의심받을 위험을 무릅쓴 보람이 있어. 그럼 마지막 스킬을 시험해볼까.'

로이드는 뽀동이를 올려다보았다.

뽀동이는 자신이 말끔히 메꾼 고랑을 보며 뿌듯해하고 있었다.

"뽀동아?"

"뽀동?"

"너 볼주머니 있지?"

"뽀동!"

"혹시 거기에 물건을 담을 수 있는 거야?"

"뽀도동? 뽀동!"

"가능해? 얼만큼?"

"뽀동!"

녀석이 앞발로 뒤뜰 건너편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직경 2미터에 달하는 바위가 떡하니 놓여 있었다.

로이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설마?"

한데 그 설마가 진짜였다.

이쪽이 뭐라고 시키기도 전에 녀석이 움직이더니 바위를 한쪽 볼 주머니에 넣어 버린 것이었다.

"쁘드응!"

"...헐."

"쁘드으응! 쁘등!"

"너 괜찮아?"

"쁘등! 쁘드등!"

녀석이 자랑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마다 2미터짜리 바위를 담느라 빵빵하게 불어난 볼주머니가 위력적(?)으로 출렁거렸다.

'얘는 무기로도 쓸 수 있겠는데. 완전 탱크네, 탱크.'

말이 10미터지.

이런 덩치를 실제로 눈앞에서 보고 있자니.

말 그대로 딱 공룡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언젠가 동물원에서 본 코끼리도 뽀동이와 비교하면 동네 강아지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자아, 그럼 그 바위 제자리에 놓고."

"쁘등? 퉤!"

"잘했어. 이제 이걸 먹어볼래?"

"뽀동!"

녀석의 입에 파란 해바라기씨를 넣어주었다.

해바라기씨를 꼴깍 삼킨 녀석이 순식간에 작아졌다.

포옹.

작아진 녀석을 품으로 받아냈다.

녀석은 졸린지 알아서 안주머니로 들어왔다.

그 작은 감촉과 온기를 느끼며 로이드는 생각했다.

'성공적이다. 이건 대박이야.'

그는 방금 자신이 본 뽀동이의 모습들을 정리해보았다.

솔직히 기대를 한참 초월하는 결과였다.

'20미터 길이에 2미터 깊이의 고랑을 3분 만에 파냈어. 심지어 그걸 말끔하게 메꾸는 것도 완벽했지. 거기에 몇 톤은 족히 나갈 바위를 한쪽 볼 주머니에 담았으니....'

고성능 포클레인.

완벽한 로드롤러.

거기에 덤프트럭.

세 가지 기능을 한몸에 지닌, 소위 중장비계의 맥가이버칼을 얻은 격이었다.

이 정도 능력이면 변신을 위한 해바라기씨 구매에 RP를 소모하는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휴대성도 끝내주고.'

어느새 뽀동이는 안주머니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마도 당분간은 이 녀석을 숨겨야 하리라.

'소환마법서라도 들고 다녀야겠네. 언젠가 이 녀석을 사람들 앞에 보일 때를 대비해서.'

그 정도 떡밥은 뿌려둬야 한다.

그래야 남작가 망나니가 어느 날 뜬금없이 거대 햄스터를 떡하니 소환해도 의심의 시선을 던지지 않으리라.

오히려 '우리 도련님 최고'를 외치리라.

그렇게 그는 뽀동이를 품은 채 뒤뜰 연무장을 벗어났다.

침실로 돌아오며 다음의 일도 생각했다.

'드디어 쓸 만한 건설 장비가 생겼어. 그럼 다음 순서는 본격 시공이겠지.'

그렇잖아도 낮에 온돌방 분양(?)을 성공리에 해낸 판이다.

기왕이면 쇠뿔도 단김에 빼는 법.

이대로 기세를 타고 시공업에 착수할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전문 시공팀이 필요해. 현장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줄 기술자와 정예 인부들, 그리고 그들을 이끌 인재도.'

물론 현장팀의 구성도 미리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탁, 타닥.

밤새껏 타오르는 침실 벽난로의 불빛.

그 앞에서 로이드는 종이와 펜을 들었다.

기억을 되살렸다.

소설 '철혈의 기사' 초반부에 등장하던 모든 주요 인물들의 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야흐로 프론테라 남작령의 평범했던 기사단과 경비대가 본격 노가다형 전투 부대로 변신하게 되는 첫 기념비적 순간이었다.

7화. 체질 개선 (1)

프론테라 남작령.

로라시아 대륙 구석에 위치한 평범한 시골 영지.

보유한 병력 규모도 단출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단출하다 못해 초라할 지경이었다.

거느리고 있는 기사는 총 5명.

사병은 100명.

그마저도 오합지졸인 자경단 수준.

그것이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언급된 프론테라 남작령의 병력 현황이었다.

"...라지만 오늘부터 너희는 이 현장에서 정예 중의 정예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햇볕 맑은 아침이었다.

공사를 시작하기에 딱 좋은 날씨.

그 햇살 속에서 로이드는 강가에 모인 80명의 장정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 이것들을 열심히 퍼서 나른다면 말이다."

그의 손이 강가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황토가 있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많이 있었다.

원래는 지면 아래 묻혀 있던 황토였다.

'하지만 다 파낼 수 있었지. 뽀동이 덕분에.'

새벽에 몰래 이곳에 다녀온 그였다.

뽀동이를 변신시켜 불과 30분 만에 대규모의 황토 채집장을 조성했다.

그리고 아침이 밝자 영지의 병사 80명을 이곳으로 데려왔다.

채집장의 황토를 공사 현장으로 나르기 위함이었다.

그가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겠지. 왜 너희를 이런 노가다에 동원하나 싶기도 하겠지."

"...."

"하지만 원래 군대가 이런 거야. 군대의 꽃은 뭐다? 작업이지, 작업."

대한민국 육군이 그랬다.

나라를 수호하기 위한 전투 훈련?

그것도 중요했지만 실제론 조금 달랐다.

'진지 공사에 배수로 공사, 오늘은 뭘 만들고, 내일은 또 뭔가를 뚱땅거리고. 틈만 나면 작업, 또 작업만 하다가 군생활 다 지나갔단 말씀.'

마치 중대 행보관의 소환수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였다.

그는 이곳 영지의 병사들에게도 그 기분을 체험시켜주고 싶었다.

단지 이들을 괴롭히기 위해서?

아니었다.

'노동을 빙자한 피지컬 단련이지.'

황토는 무겁다.

그걸 옮기느라 자루에 가득 담고 걸으면?

하체는 물론이고 허리부터 복부의 코어, 어깨와 등, 전완근까지 두루 단련이 된다.

지구력이 향상되는 것도 보너스다.

'소위 노가다 근육이 붙는달까.'

로이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어쨌건 오늘, 우리는 영지의 부흥을 위한 작고도 소중한 첫 삽을 뜨게 될 것이다. 바로 영지민을 위한 온돌방 시공 사업이야. 그걸 위해 너흰 여기 있는 황토를 공사 현장까지 옮기게 될 거란 말씀이지."

"...예, 도련님."

몇몇 병사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로이드가 빙긋 웃었다.

"좋아. 그럼 스트레칭부터 하자."

"예?"

"일하다가 다치고 싶냐? 뻣뻣한 몸으로 무리하게 자재 나르다가 허리 나가고, 무릎 돌아가고, 그러면 본인만 손해라는 거야. 알겠어들? 그러니까 몸 풀어야지."

"...."

"따라 해. 하나, 둘."

"하, 하나... 둘...."

"목소리가 작다. 동작은 확실하게. 하나, 둘!"

"하... 하나, 둘!"

로이드는 병사들 앞에서 천천히 몸을 풀었다.

처음엔 얼떨떨해하던 병사들이었다.

하지만 로이드가 인상을 팍 쓰자 다들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문난 프로 악질 망나니 진상러.

그렇게 쌓아둔 평소의 악명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몸 풀지 않고 일하다가 다치면 단련의 의미가 없으니까.'

건설 현장에서의 스트레칭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바닥 곳곳이 울퉁불퉁하거나.

혹은 위험한 물건이 널려있거나.

대부분의 건설 현장이 그렇듯 열악했다.

한데 그런 곳에서 덜 풀린 몸으로 무거운 물건을 옮기거나 한다면?

아무래도 안전사고가 발생할 확률이 올라간다.

그런 일은 어떻게든 방지하고픈 것이 로이드의 마음이었다.

'치료비 대줄 돈도 없어. 예방해서 아껴야지. 그러니 이런 멍청해 보이는 구호도 정성껏 외치는 거고.'

스트레칭을 끝낸 그는 병사들을 둥그렇게 모이게 했다.

그리고 손을 들었다.

"따라 해라. 손 들어."

처처척!

병사들이 눈치를 보며 손을 들었다.

로이드가 선창하며 외쳤다.

"안전 투구 착용 좋아!"

탁탁!

쓰고 있는 자신의 투구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병사들도 구호를 외치며 동작을 따라 했다.

"아, 안전 투구 착용... 좋아!"

"잘했어. 안전 장갑 착용 좋아!"

"안전 장갑 착용 좋아!"

"안전화 착용 레알 좋아!"

"레알 좋아!"

얼핏 보기엔 유치원 수준의 유치한 구호와 점검 과정이었다.

사실 로이드도 대한민국에서 노가다 알바를 하던 시절엔, 아침 조회 때마다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 보니?

이런 점검 과정 덕분에 자신이 안전하게 알바를 마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곤 했다.

그래서였다.

점검을 마친 그는 마지막으로 병사들의 안전 의식을 무장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들 안전 수칙 잊지 마라. 잊을 거 같으면 이거나 한 번씩 보고."

그가 미리 만들어 온 팻말을 들었다.

땅에 푹 꽂아 세웠다.

팻말에는 이런 문구가 알뜰살뜰하게 적혀 있었다.

작업자 여러분!

현장에서의 안전수칙을 지킵시다.

안전모 없이 설치다간 소 잃고 뇌 약간 고치는 수가 있습니다. 괜히 기동전의 황제라도 된 것처럼 서두르다간 기동전의 환자가 됩니다.

안전화 신는 게 귀찮다구요? 네, 이로써 당신의 엄지발가락은 나로호도 겨우 하는 3단 분리를 달성할 준비를 마쳤군요.

이게 다 거짓말 같습니까? 그럼 충고 싹 무시하다가 한 줌 다이옥신으로 승천해보시든가.

ps) 남 얘기일 거 같지?ㅋ

"...."

병사들은 말이 없어졌다.

다들 무의식중에 안전 장비를 꼼꼼히 매만졌다.

"좋아. 준비됐으면 시작하자. 1조는 삽질해서 자루에 황토 담고. 2조는 자루를 나른다. 실시!"

"실시!"

운반 작업이 시작되었다.

빡세게(?) 실시한 정신교육 덕분인지 병사들의 움직임은 빠릿빠릿했다.

보자니 절로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영지에 소속된 사병들이라 그런지 비교적 말을 잘 듣네. 남작을 설득하길 잘했어.'

문득, 두 시간 전 이른 아침의 일이 떠올랐다.

"그래서, 병사들을 동원하고 싶다고?"

되묻는 남작의 목소리.

그 음성에는 의아함이 담겨 있었다.

의아함과 의구심, 황당함도 함께 실려 있던가.

로이드는 태연히 아침 식사를 이어가며 대답했다.

"네."

"어째서?"

"시켜야 할 일이 있습니다."

"대관절 어떤 일을 시켜야 하기에 병사를 80명이나 동원하겠다는 게냐."

"공사입니다."

"공사?"

"네."

빵을 삼킨 로이드는 냅킨에 손을 닦았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서류를 꺼냈다.

남작에게 내밀었다.

"사업 계획서입니다."

"사업계획서라니."

"일단 찬찬히 보시죠."

지난밤 뽀동이를 얻은 덕분이었다.

비로소 본격적인 시공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밤새껏 사업 계획서를 작성했다.

'이 사업에는 남작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니까.'

어쨌건 이 영지 내에서 벌이는 시공 사업이었다.

그러니 영지의 주인인 남작의 허가는 필수였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그랬다.

'일꾼을 따로 고용하면 돈이 든단 말이지.'

인건비.

혹은 일당.

그것은 모든 건설 현장에서 반드시 지출되는 비용이었다.

하지만 남작이 사적으로 거느리고 있는 사병들을 공사에 동원한다면?

일당 없이 공짜로 부려 먹을 수 있다.

어차피 남작에게 고용되어 봉급을 받는 사병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비용을 제법 아낄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사병들 사이에 불만이 생긴다면?"

"특별수당 명목으로 약간의 보너스를 챙겨주는 선으로 무마하면 되겠지요."

"흐음, 하지만 온돌 시공업이라니...."

"어젯밤 하비엘에게 설명을 들으셨을 걸로 압니다만."

"그래. 그랬지. 바닥에 깐 돌을 데운다는 그 괴상하면서도 새로운 난방 방식을 말이다. 한데 어째서냐?"

"제 의도를 물으신 겁니까?"

"그래."

남작의 이쪽을 보는 눈길엔 의문이 가득했다.

다행히 예전처럼 쌀쌀맞지는 않았다.

'어제 빚쟁이들을 쫓아내고 돈주머니를 안겨드린 덕분이겠지.'

그 덕에 남작은 이번 달 이자를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자연 이쪽을 향한 눈길이 고와질 수밖에 없을 터였다.

로이드가 말했다.

"영지민들을 통해 돈을 모으고 싶었습니다."

"돈을?"

"네. 빚을 갚을 돈을요."

"...."

"처음에는 특수 세금 등의 명목으로 돈을 걷을까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반발이 심할 테지."

"네. 그래서였지요. 반발이 최대한 적은, 합법적인 방법을 궁리했습니다."

"그래서 떠올린 것이 온돌이라는 걸 시공하는 사업이란 말이더냐?"

"네. 저는 돈을 벌고, 영지민은 적당한 돈을 지불한 대신에 한결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게 될 테니까요. 서로가 윈윈인 셈이죠."

"한데 이런 걸...."

남작의 의혹 어린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어디서 배운 것이더냐?"

"온돌 말씀이십니까?"

"그래. 나는 평생 이런 걸 처음 보았다. 한데 너는 어디서 이런 걸 배웠단 말이더냐."

"전부터 생각했던 겁니다."

"생각?"

"네."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뻔뻔해져야 한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그냥 예전부터 막연히 생각해봤던 겁니다. 돌은 한번 데워지면 잘 식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실내 바닥에 납작한 돌을 깔고, 그 아래로 뜨거운 열기를 흘려 바닥을 데우면 어떨까 하고 말입니다."

"...."

"그런데 이번에 기회가 생겨서 실제로 만들어 보니 생각보다 더 괜찮더군요. 예상보다 더 따뜻하기도 했고."

"주점 주인장에게 만들어 줬다는 그 온돌 말이더냐."

"네."

"그래서, 사업으로 발전시켜 볼 생각을 하게 됐다고?"

"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절대적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쪽을 향한 남작의 시선에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의혹 한 점이 걸려 있었다.

"그래. 계획은 좋구나. 이 계획서, 감탄이 나올 정도로 꼼꼼하게 잘 만들었어. 네가 이런 재주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말이야. 하지만 말이다...."

남작의 의심 어린 물음이 날아왔다.

"네 의도를 내가 믿을 수 있겠느냐?"

"네?"

"내가 널 믿을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설마 2년 전의 그 일을 벌써 잊었다는 건 아니겠지?"

"...."

2년 전이라니.

그건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도 나온 적 없는 부분이다.

지금은 어설픈 대답은 하지 않는 게 나을 듯했다.

로이드는 잠자코 기다렸다.

다행히 남작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때도 이런 식이었지. 물론 지금 같은 거창한 사업 계획서 따위는 없었지만 말이다. 당시에 네가 했던 말을 나는 아직도 뚜렷이 기억한단다. 너는 그랬지. '아버지, 이번에는 제가 정말로 마음잡고 제대로 공부를 해보겠습니다. 그러니 절 믿고 투자 한번 하시죠.'라고 말이다."

"...."

"기뻤다. 네가 드디어 정신을 차리는가 싶었다. 그래서 별장을 판 돈을 네게 선뜻 줬지. 아카데미 입학금으로 쓰라고 말이다. 하지만 너는 그 돈을...."

"...."

"탕진했다. 한 푼도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 전부터 어울리던 불한당 같은 놈들과 함께. 술에 취해 계집들과 낯뜨겁고 질펀한 파티를 벌여대며 말이다."

...아, 진짜.

로이드 이 개x끼.

그는 절로 욕이 나오는 걸 집어삼켰다.

'망나니 맞네, 맞아. 설마하니 저딴 일을 벌였을 줄이야.'

어쩐지 완벽한 사업계획서를 앞에 두고도 남작의 반응이 미지근하다 싶었다.

저 정도 일을 벌였으니 좀처럼 신뢰받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구나 싶기도 했다.

'어오, 진짜 로이드 이 쓰레기 같은 놈.'

이 몸의 옛 주인이 걸어오는 고도의 트롤링.

이걸 어떻게 받아넘길까 싶었다.

그의 두뇌가 빛의 속도로 회전했다.

그리고 마침내 해결의 실마리를 떠올렸다.

문득 떠오른, 자신의 과거 덕분이었다.

'근데 생각해보니 나도 스케일은 훨씬 작지만 비슷한 사고를 친 적이 있긴 했지.'

중학생 때였을 것이다.

당시 학원비 내라고 엄마가 줬던 돈을 빼먹은 적이 있었다.

그걸로 저녁마다 친구들과 피시방에서 놀았던 기억이 났다.

'룰부터 언더워치, 워 그라운드까지.... 재미나긴 했지.'

하지만 결국엔 엄마한테 걸렸다.

엄청나게 혼났다.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어야 했다.

그러다가 결국엔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을 하고서야 엄마에게 용서받을 수 있었던가.

'쯧, 지금은 그 방법밖에 없겠네.'

해결책을 떠올린 로이드는 고개를 들었다.

남작을 마주 보았다.

그 옛날, 엄마를 향해 다시는 피시방을 가지 않겠노라 약속했던 그날처럼, 남작을 향해 말했다.

"술, 끊겠습니다."

"...뭐?"

"말씀 그대롭니다. 이번에 절 믿어주신다면 술을 완전히 끊겠습니다."

"...."

남작의 눈빛이 묘해졌다.

진심이냐고 물어오는 듯했다.

혹은 무슨 수작이냐는 듯했다.

로이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남작의 눈길을 전혀 피하지 않았다.

차분한 눈으로 그렇노라 대답하듯 침묵을 지켰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남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정말이더냐?"

"네."

어차피 술은 잘 못 마신다.

별로 좋아하는 편도 아니다.

음주에 대한 미련 같은 것도 딱히 없었다.

그러니 술 하나를 포기하고 남작의 신뢰를 조금이라도 얻는 데에 성공한다면 그야말로 이득, 핵이득인 셈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래, 알았다."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사업계획서를 돌려주었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이번만은 믿어보도록 하마. 내 행정관에게 일러놓도록 하지. 이 계획서에 있는 사업을 진행하는 데에 있어서, 앞으로 너는 영지의 사병을 자유롭게 부릴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믿어주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부디 실망시키지 말거라."

이쪽을 향한 남작의 눈빛.

어쩐지 아까보다는 너그러워진 것 같았다.

혹은 조금은 안타까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순간 예전, 피시방 사건 때의 엄마 모습이 떠올라 잠깐 기분이 묘해졌다.

로이드는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

'...라는 과정을 거치긴 했지만 역시나.'

아직 넘어야 할 산은 많고도 많구나.

그 생각에 로이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잠깐 상념에 잠긴 사이.

이쪽으로 다가와 항의하고 있는 어느 기사의 모습 때문이었다.

"...다시피 저는 명예로운 기사입니다. 이런 흙더미나 나르는 일을 감독하라는 명령은 도련님의 것이라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쪽을 향한 기사의 얼굴.

야비한 인상을 지닌 자였다.

물론 로이드는 기사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울리히 경.'

오늘 현장의 병사들을 인솔시킬 간부로 자신이 직접 지목한 자.

프론테라 남작령의 다섯 기사 중 하나였다.

그중에 가장 실력이 떨어지는 놈이었다.

그런 주제에 남작가가 몰락할 때는 가장 먼저 배신을 한 놈이기도 했다.

'남작이 아끼던 말을 태연히 훔쳐 달아났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달아나는 과정에서 마주친 로이드의 얼굴에 침을 뱉기까지 했던가.

'그래서 오늘 내가 네놈에게 이 현장을 맡긴 거란다.'

일부러 불렀다.

병사들의 인솔을 맡겼다.

이놈이 이런 식으로 반발할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놈은 어김없이 기대에 부응(?)해주었다.

로이드가 말없이 삽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울리히 경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아하. 그래서 내 명령을 거부하시겠다?"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기사로서의 명예를 존중해달라는 말씀... 컥!"

쩌컥!

울리히 경이 말대꾸를 하려는 찰나.

로이드가 휘두른 삽 머리가 울리히 경의 안면을 맹렬히 강타했다.

'확실히 이 영지는 한 번쯤 체질개선을 할 필요가 있어.'

허공에 흩뿌려지는 울리히 경의 어금니.

그사이로 로이드의 눈빛이 서늘하게 번득였다.

8화. 체질 개선 (2)

쩌컥!

"...커억!"

울리히 경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세상이 휙 돌아갔다.

볼이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절로 벌어진 입에선 뭔가가 휙 튀어 나갔다. 날아갔다. 허공에 뿌려졌다.

그제야 울리히 경은 저만치 허공으로 날아가는 물체의 정체를 어렴풋이나마 알아볼 수 있었다.

'어금니?'

새하얀 어금니 세 개가 빙글빙글 돌며 제각각 날아가고 있었다.

그 주위로는 새빨간 핏방울과 침이 어지럽게 얽히며 복잡한 궤적을 그리고 있기도 했다.

'신기... 하네.'

멍해진 감각 속에서 마치 시간이 느려진 것 같은 기묘한 기분.

그 속에서 날아가는 어금니와 핏방울.

26년 인생을 통틀어 이런 광경을 이런 식으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재미있었다.

한편으로는 어지럽기도 했지만.

'...어, 어어.'

다리에 힘이 빠졌다.

허리가 꺾였다.

땅이 가까워졌다.

원하지도 않는데 머리가 땅에 쿡, 처박혔다.

입술이 짓뭉개지며 땅바닥에 강제로 키스를 했다.

다시금 입술 사이에서 핏물이 울컥 스며 나왔다.

그제야 울리히 경의 느려졌던 감각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터진 입술과 통째로 뽑힌 어금니, 그리고 부러진 광대뼈 한쪽의 묵직하고도 선명한 아픔과 함께.

"...크, 크우어업?"

아팠다.

정말로 아팠다.

진심 너무나 아팠다!

"므슨! 크, 클룩!"

한쪽 얼굴을 감싸 쥐었다.

충격과 통증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내가 어디에 부딪혔나? 사고? 아니면 습격? 누가?'

혼란스러운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렸다.

하지만 그의 맹렬한 고민(?)도 헛되이, 답은 너무나 간단하게 제시되었다.

위에서 떨어져 내려오는 삽자루와 함께.

"무슨은 무슨!"

뻐억!

"...허컥!"

수직으로 떨어져 내려온 뭉툭한 삽자루가 명치를 찍었다.

숨이 콱 막혔다.

새우처럼 허리를 꺾었다.

감히 자신을 습격한 이를 확인하기 위해 눈길을 들었다.

이내 울리히 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련...? 커억!"

쯔걱!

삽자루가 안면을 후려쳤다.

입술이 더 크게 뭉개지며 고개가 홱 돌아갔다.

하지만 울리히 경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없었다.

이미 무방비인 상태에서 너무 큰 타격을 연달아 받은 까닭이었다.

'어, 어째서? 왜?'

이해할 수 없었다.

반응할 수도 없었다.

일어나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섣불리 그러기엔 로이드가 휘두르는 삽이 너무나 무자비했다.

그 인정사정없는 폭력 앞에 울리히 경은 그저 신음하며 두 팔로 얼굴과 머리를 감쌀 뿐이었다.

퍽, 뻐걱! 터엉! 투퍽!

"끄! 으으!"

울리히 경의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고통에 신음하는 뇌리 속으로 묘한 확신이 쑤셔박혔다.

'이, 이러다간 진짜로 죽겠어!'

정말이었다.

얼굴을 감싼 두 팔 너머.

그 사이로 엿보이는 로이드의 모습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쪽을 보는 망나니 도련님의 눈빛이 증명하고 있었다.

저놈, 지금 너무나 침착한 눈으로 삽을 휘두르고 있노라고.

'당연하지. 나보다 센 놈을 제대로 밟으려면 냉정함을 유지해야 하니까.'

빠각!

인정사정없이 삽을 휘두르며 로이드는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숨 돌릴 틈을 주면 울리히 경이 일어난다.

그러면 자신의 의도가 뒤틀어진다.

'기껏 어렵게 성공한 선빵인데 이 기회를 놓칠 것 같아? 내가?"

자고로 선빵 필승은 싸움의 법칙.

울리히 경이 반응할 틈도 없이 감행한 기습이었다.

덕분에 상황의 주도권을 완벽하게 틀어쥘 수 있었다.

'아무리 기사라고 해도 이런 정도의 타격을 불시에 받으면 쓰러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특히 겨우 마나하트를 갓 연성한 하급 소드 유저라면 더더욱.'

소설 철혈의 기사.

거기서 읽은 남작가 기사들의 면면이 떠올랐다.

울리히 경은 영지의 기사 중에서 수준이 가장 떨어지는 자였다.

겨우 마나하트를 연성한 하급 소드 유저에 불과했다.

그런 주제에 평소 로이드를 고깝게 여겼다. 은근히 무시했다.

'그래서 오늘 널 부른 거야. 본보기로 삼으려고. 앞으로도 사사건건 내가 하려는 일에 태클 거는 놈들이 나타나면 곤란하거든. 적어도 이 영지 내에서는 말이지.'

사람은 기세가 중요하다.

갈등이 생겼을 때 한번 숙이게 되면?

호인이라도 된 양 양보를 일삼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양보와 호의가 당연한 것이 된다.

소위 호구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그는 대한민국에서 너무나 뼈저리게 겪었다.

'특히 노가다 현장에서. 거기 아재들, 성격 드러운 사람들이 간혹 있거든.'

소위 사수라고 불리는 사람들.

정 많은 좋은 분들도 많았다.

하지만 자신은 운이 나빴다.

괴팍한 인격을 지닌 사수와 짝이 되었다.

종일 시달려야 했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트집을 잡혀가며 일하는 내내 쌍욕을 듣기가 일쑤였다.

처음엔 참았다.

대들기가 좀 그랬다.

그저 웃으며 착한 놈 소리나 들었다.

'하지만 그건 답이 아니었어.'

하루는 사수라는 작자가 부모 욕까지 들먹인 날이 있었다.

패드립을 시전한 것이었다.

그날 자신은 어떻게 대응했던가.

'이렇게 했지.'

쩌겁!

로이드가 휘두른 삽이 이번에는 울리히 경의 정강이를 찍었다.

"끄아악!"

마침 끙끙대며 일어나려던 울리히 경이 정강이를 부여잡고 자지러졌다.

하지만 로이드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렇게 지랄 한번 떨어주고 나니까 뒤가 편해지더라고.'

당시에도 그랬다.

패드립을 듣는 순간 눈이 뒤집혔던가.

그 즉시 들고 있던 삽으로 사수를 후려쳤었다.

당연히 현장에서는 난리가 났다.

하지만 이후로는?

편해졌다.

아무도 자신을 예전처럼 쉽게 건드리지 않았다.

나름 인생의 한 가지 진리를 깨닫게 된 계기였다.

'그래서 널 이 현장으로 부른 거야. 그나마 이 영지의 기사들 중에 네놈이 제일 만만하니까. 마나하트도 얼마 전에야 겨우 만들었잖아? 이렇게 선빵으로 밟을 각이 나올 것 같았으니까.'

소설 내용을 통해 짠 계획이었다.

울리히 경이라면.

현장에서 자신에게 한 번은 대들거나 불손한 태도를 보일 거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이 그림처럼 들어맞았다.

일벌백계.

본보기로 밟을 쫀득한 희생양이 되어준 셈이었다.

퍽! 콰악! 터엉!

로이드는 삽질(?)을 멈추지 않았다.

울리히 경의 입에서 기어코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 으으! 도, 도련님! 왜!"

"왜는 왜야. 하극상이기 때문이지."

뻐억!

삽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로이드의 한마디가 냉랭하게 떨어졌다.

"자, 아까 했던 말 다시 한번 해봐라."

"잠깐... 컥!"

빠각!

"명예로운 기사라고? 흙더미나 나르는 일을 감독하라는 명령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지만... 흐읍!"

뻐걱!

"하지만은 개뿔. 엄밀히 따져볼까? 내가 지금 사적으로 병사들을 무단 동원한 걸로 보이나? 응?"

"크억!"

쯔각!

"이게 무슨 증서인지 보여? 사병 동원 확인증이야. 아버지가 허가하고 행정관이 발급해준 공식 문서란 말이다. 그러니까 네놈은."

콰작!

"이 영지의 합법적 영주이자 네놈이 스스로 충성을 맹세한 주군의 합당한 명령에 감히 명예를 운운하며 반기를 들었다는 뜻이지. 즉-"

뻐컥!

"하나, 주군의 명령에 대한 불복종을 저질렀고."

빠칵!

"둘, 주군을 욕되게 하여 기사의 도리를 저버렸으며."

콰직!

"셋, 스스로의 자격과 긍지를 땅에 내다 버린 것이다."

터어엉!

골프 티샷처럼 풀스윙으로 휘둘러진 삽이 아래에서 위로 솟구쳤다.

삽 머리의 평평한 면이 울리히 경의 턱을 올려쳤다.

그걸로 끝이었다.

푸웁!

맹렬히 쳐들린 울리히 경의 고갯짓을 따라 핏방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울리히 경이 끈 떨어진 인형처럼 허물어졌다.

혼절한 것이었다.

"후우."

로이드는 흐트러진 숨을 골랐다.

모처럼 격한 운동(?)을 했더니 허파가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보람은 있었다.

'쳐낼 놈은 쳐내야 하니까.'

소설 철혈의 기사.

그 도입부를 통해 엿보았던 프론테라 남작령은 개판이었다.

울리히 경처럼 충성심도, 자질도 없는 자를 기사로 부리고 있다는 것부터가 그 증거였다.

'이런 놈은 하루빨리 싹을 자르고 쳐내야 해. 그리고 그 빈자리를 싹수가 보이는 놈들로 채운다. 그래야 이 영지에 미래가 생길 거야.'

평생 빨대를 꽂아야 할 영지였다.

오래오래 굴려 먹고 가꾸려면 일찌감치 인재 물갈이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이마에 잔뜩 흐르는 땀을 소매로 스윽 닦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뭘 쳐다봐들? 구경거리 생겼냐."

"...!"

일손을 멈추고 난리를 지켜보던 병사들이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로이드가 가까이에 있던 병사들을 향해 손짓했다.

"거기 너. 그리고 그쪽의 둘. 이리로."

"...예, 옙!"

병사 셋이 바람처럼 달려왔다.

로이드가 널브러진 울리히 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이놈 치워. 그리고 저택에 가서 바이에른 경을 불러오도록."

"알겠습니다!"

방금 그의 명령에 딴죽을 걸던 기사가 어떤 꼴을 겪었는지 똑똑히 목격한 판국이었다.

세 병사는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얼굴이 시루떡처럼 퉁퉁 부어 떡실신한 울리히 경을 둘러업었다.

저택을 향해 바삐 돌아갔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절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로이드 님."

단단한 체격에 다부진 인상을 지닌 기사가 현장에 도착했다.

앞서 병사들을 시켜 부른 바이에른 경이었다.

로이드는 바이에른 경의 모습을 보자마자 흡족하게 웃었다.

'소설로 읽으며 생각했던 이미지보다 더 괜찮은데.'

바이에른 경.

프론테라 남작가의 다섯 기사 중 하나.

하비엘과 더불어 끝까지 주군을 저버리지 않은 자였다.

소설을 통해 충성심이 검증된 자인 셈이다.

'이런 자를 키워야지. 소설 내용대로라면 재능은 평범했다지만, 그래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우선이야.'

바이에른 경은 우직하고 성실한 사내다.

그래서 현장의 시공팀을 바이에른 경에게 맡기려는 것이 로이드의 최종적인 의도였다.

'처음부터 이 상황 자체를 설계한 거지, 뭐.'

앞으로 해가 될 울리히 경을 부른다.

현장에서 구실을 잡아 쳐낸다.

일벌백계로 본보기를 세운다.

그 후에 원래 이 자리를 맡기려던 바이에른 경을 부른다.

이렇게 함으로써 쳐낼 놈은 쳐내고, 현장의 분위기를 잡으며, 앞으로 키워줄 바이에른 경에게 자연스럽게 감투까지 안겨준 셈이었다.

로이드가 바이에른 경을 향해 말했다.

"그래. 찾았지. 오늘 경에게 이곳 현장의 관리를 맡겨보려 하는데. 어때?"

"시키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좋아. 사실은 별거 없어. 병사들이 이곳에서 황토를 채집하고 현장으로 옮길 거야. 그 과정에서 너무 농땡이 피우지 않게 병사들을 감독해줘. 물론 중간중간 적절하게 휴식 시간도 주고. 무리하다 쓰러지면 곤란하니까."

"알겠습니다."

일언반구 반문도 없었다.

분명 울리히 경에게 일어난 일을 들었을 텐데.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더욱 믿음이 갔다.

그렇게 로이드는 황토 채집 현장을 바이에른 경에게 맡기고 걸음을 옮겼다.

온돌방 시공 현장으로 갔다.

그곳에선 영지에서 모집한 목수와 석공, 회반죽공, 미장공, 전문 잡부 등의 숙련공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이쪽을 보는 숙련공들의 시선에 존경심 같은 것은 없었다.

저 개차반 망나니가 왜 자신들을 불렀나 싶은 불안감.

그리고 가급적 깊이 얽히고 싶지 않다는 혐오감.

그러한 감정만이 가득한 눈길이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그런 숙련공들의 시선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숙련공들 앞에 태연히 나섰다.

"이제부터 온돌의 개념과 시공법에 대해 알려준다. 정신 차리고 제대로 들어."

"...예?"

숙련공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이 보기에 로이드는 평생 곱게만 자란 망나니 도련님이었다.

그런 주제에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숙련공인 자신들에게 시공법을 알려주겠다니.

그야말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기.

드래곤 앞에서 입김 뿜기였다.

절로 가소로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우선 이것부터 보자. 다들 주목."

촤악!

로이드가 그들 앞에 이번에 시공할 온돌방 설계도를 펼쳐 보였다.

시골 영지에서 주먹구구로 건물을 짓던 이곳 숙련공들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무려 설계 스킬을 바탕으로 정교하게 옮겨 그린 설계도였다.

"...."

뒤이어 로이드의 현란하고도 전문적인 설명이 16비트 자진모리장단처럼 끝없이 이어졌다.

그걸 듣는 숙련공들의 표정과 눈빛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반나절이 지났다.

역시나 바이에른 경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바이에른 경의 성실한 감독 덕분에 병사들은 별 탈 없이 황토를 현장으로 나를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체력 단련이 톡톡히 된 것은 덤이었다.

그동안 로이드도 바쁘게 움직였다.

그는 종일 현장에서 숙련공들을 진두지휘했다.

직접 연장 벨트를 허리에 차고서 땀 흘리며 구들장을 놓고, 온돌 시공법을 알려주었다.

'...라는 과정을 거친 덕분에 공사 첫날을 무사히 치러냈구나.'

어느새 저녁노을이 드리우고 있었다.

정식 시공 첫날을 무사히 보낸 지금.

로이드는 정리 중인 현장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숙련공들의 습득이 생각보다 빨라. 앞으로가 편해지겠어.'

역시나 숙련공은 숙련공이었다.

현장에서 쌓은 짬은 장식이 아니었다.

그들은 처음 접하는 구들장에 강한 흥미를 드러냈다.

개념만 알려주니 온돌 시공의 핵심을 알아서 습득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이끌어주면 완전히 현장을 맡겨도 될 듯했다.

'그러면 드디어 체계가 잡히는 거야. 현장의 기술적인 일은 숙련공에게, 노동력이 필요한 잡일은 사병들에게, 전체적인 감독은 바이에른 경에게 맡기면 돼. 그건 즉, 온돌 시공이 진행되는 동안 내가 현장에 매일 머무를 필요 없이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다는 뜻이지.'

애초에 전문 시공팀을 꾸린 목적이 이것이었다.

사업이란 알아서 굴러가야 한다.

그렇게 돈을 벌면서도 다른 일에 투자할 시간을 만드는 것.

그 목적을 이루었으니 이제는 다음 단계에 착수해야 할 때였다.

'이 영지의 체질개선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니까.'

울리히 경은 시작일 뿐이다.

솎아내야 할 더 굵직한 썩은 뿌리가 남아 있다.

'슬슬 반응이 올 때가 됐는데.'

그렇게 로이드가 생각할 무렵이었다.

"로이드 님? 울리히 경의 일에 관련하여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만."

뒤쪽에서 거만하고도 까칠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하비엘?

아니었다.

'역시나 왔군. 노이만 경.'

프론테라 남작령의 선임 기사, 노이만 경.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남작가의 몰락에 가장 크게 일조한 배신자.

마침내 이곳까지 나온 노이만 경을 돌아보며, 로이드는 월척을 낚은 강태공의 미소를 떠올렸다.

9화. 체질 개선 (3)

노이만 경.

프론테라 남작령의 선임 기사.

검술 단계는 소드 익스퍼트 하급.

이런 시골 영지에서는 유능하다는 취급을 받을 수준.

하지만 그는 검술보다는 개인의 출세에 훨씬 관심이 많은 자였다.

주군에 대한 충성보다는 눈앞의 금전을.

기사의 명예보다는 당장의 지위 상승을.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든 할 수 있는 자.

'아니, 그걸 실제로 실천했지. 프론테라 남작가의 내부 정보를 사기꾼에게 팔아넘김으로써.'

소설 철혈의 기사 초반부가 떠올랐다.

주인공 하비엘에게 닥친 초반부의 첫 시련인 남작가의 몰락.

그 배후에 바로 저 노이만 경이 있었다.

남작가의 정보를 사기꾼에게 팔았다.

사기꾼은 그 정보를 바탕으로 남작에게 접근했다.

달콤한 말로 거액의 투자를 권유했다.

결국엔 투자금을 꿀꺽하고 도주했다.

그렇게 남작은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즉, 따지자면 노이만 경의 배신이 남작가 몰락의 방아쇠가 된 셈이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너도 처분 대상이야.'

로이드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시골 귀족가 장남으로 빙의 된 자신이 편안하게 꿀을 빨지 못하게 된 것도, 가문에 얹힌 빚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게 된 것도.

근본적으로 모두 저 인간 때문이다.

하지만 로이드는 그런 감정을 섣불리 드러내지 않았다.

노이만 경을 돌아볼 때의 그의 얼굴은 어느새 태연한 낯빛으로 변해 있었다.

"노이만 경? 방금 그게 무슨 말이지?"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노이만 경이 입술 끝을 실룩거렸다.

"오늘 아침 로이드 님께서 울리히 경에게 부당한 폭력을 행사한 건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부당한 폭력? 드릴 말씀?"

"그렇습니다."

"그럼 해봐."

어디 마음껏 떠들어 봐라.

로이드는 여유롭게 웃었다.

노이만 경의 표정이 한층 굳었다.

"로이드 님도 알고 계시다시피 울리히 경은 엄연히 주군의 기사입니다. 절차에 따른 서약을 했고, 그 서약에 따라 명예와 권리를 보호받을 자격이 있는 자입니다. 로이드 님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경우 없이 마구잡이로 대해선 안 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응응. 그래."

"그러나 로이드 님께서는 오늘 아침, 그러한 울리히 경의 명예와 권리를 조금도 존중하지 않으셨습니다."

"응응. 그랬지."

"하여 저는 영지의 첫 번째 기사로서 공식적으로 로이드 님의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로이드 님께서는 이번 사태에 대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응응. 그럴걸."

"...."

빡친 걸까.

노이만 경의 얼굴이 목덜미까지 벌게졌다.

반면 로이드의 낯빛은 여전히 태연 뻔뻔했다.

"로이드 님께서는 제 말이 장난으로 들리십니까?"

"아니. 맞는 말로 들리는데? 쳐맞는 말."

"...."

노이만 경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로이드는 더욱 빙글빙글 웃었다.

'얘 뭐야. 겨우 이걸로 열 받은 거야?'

노이만 경의 반응을 보자니.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사실 이건 로이드의 기준으론 도발 중에서도 하급 도발에 불과했다.

그런데 벌써 열 받아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라니.

'얘 대한민국에서 온라인 게임 한번 시키면 아주 화병 나서 자지러지고 죽겠네, 죽겠어.'

진심이었다.

그가 어릴 때부터 일상적으로 겪었던 대한민국의 온라인 게임 속 세계.

그곳은 그야말로 세기말의 혼돈이 탭댄스를 추는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맡은 포지션에서 조금만 실수를 해도 팀원들의 온갖 욕이 쏟아진다.

인격을 들쑤시는 욕설과 드립의 향연.

부모님 안부는 기본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일일이 화를 내면?

'화내는 쪽이 지는 거지. 부들거린다고 더 조롱받고 딜미터기 터지거든.'

어지간한 패드립도 웃으며 더 세게 받아쳐야 살아남을 수 있는 비정하고 혹독한 세상.

그는 그런 지옥에서 단련된 엘리트 정예(?)였다.

아니, 대한민국의 어지간한 게이머라면 대부분 그럴 터였다.

따라서 그의 기준으론 방금 노이만 경을 향해 날린 도발은?

귀여운 유딩 수준도 안 되는 인사에 불과했다.

하지만 노이만 경에겐 달랐다.

그에겐 이런 모욕감은 평생을 통틀어 손에 꼽을 만한 것이었다.

'무슨 이런 놈이 다 있지?'

황당해서 말도 안 나왔다.

원래부터 개차반에 진상인 망나니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제 와서 보니 그게 착각이었다.

이 미친 망나니 도련님은 자신마저도 만만하게 보는 것 같았다.

"그 말씀은, 지금 저까지도 모욕하겠다는 뜻이십니까?"

"응응. 당연하지."

"제 명예와 권리마저도 안중에 안 두시겠다는 겁니까?"

"응응. 당연하지."

"뒷일이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응응. 당연하지."

정말로 당연했다.

노이만 경은 어차피 쳐낼 놈이다.

뒷구멍으로 주군의 정보를 사기꾼에게 팔아넘긴 놈이다.

그래놓고 눈앞에선 고결한 명예니 권리를 운운하고 있는 놈이기도 하다.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보이스피싱범 똘마니 같은 놈. 제 딴엔 이번 일로 나머지 기사들을 선동하려는 수작이겠지.'

기사는 영주와 서약으로 맺어진 관계.

영주의 아들에게 충성을 서약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영주의 아들이라고 기사를 막 대할 수는 없다.

아마도 노이만 경은 그런 점을 꼬집으며 다른 기사들을 선동하려는 듯했다.

물론 로이드는 이런 사태가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어차피 다 쳐낼 거거든. 하비엘이랑 바이에른 경만 빼고.'

선임 기사인 노이만 경.

그를 따르는 울리히 경과 콘테 경.

남작가가 몰락할 때 등을 돌리게 될 놈들이었다.

그런 놈들을 선동한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는 법.

'지금은 쳐낼 구실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하지.'

로이드는 주위를 힐끗 둘러보았다.

사방이 조용해져 있었다.

사람이 없어서?

아니, 반대였다.

현장을 정리하고 있던 숙련공들과 병사들.

그들 모두가 일손을 놓고 이쪽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쪽과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일을 하는 척했다.

하지만 그들의 귀는 여전히 이쪽을 향해 열려 있을 터.

'당연하지. 영주의 아들과 선임 기사가 언쟁을 벌이는 진귀한 광경이니까.'

자고로 구경 중의 최고는 불구경과 싸움 구경이라지 않았는가.

로이드는 그 진리(?)를 떠올리며 노이만 경을 쳐다보았다.

"어이, 그럼 나도 하나만 묻자."

노이만 경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로이드가 물었다.

"내가 검술 배운 적 없는 거 알지?"

"압니다."

"근데 그런 나한테 줘터지는 게 기사야?"

"예?"

"검술도 배운 적 없는 나한테 영혼 밑바닥까지 털려서 밟히는 놈이 기사냐고."

"그건...."

"아침에 보니까 울리히 경 생각보다 심하게 허접하더라. 사실은 지금까지 기사입네 어깨 힘주면서 다니던 거, 전부 허세였던 거야? 걔 스웨거야? 힙스터야? 아니면 어디 짜고 치기 고스톱으로 기사 자격증 땄어? 그것도 아니면 사실은 최종학력이 기사 아카데미가 아니라 여름 성경학교, 뭐 이랬던 거 아니냐?"

"...."

"나한테도 깨지는 게 기사라고? 명예와 권리를 존중해달라고? 님 장난하세요? 정신 차려. 밥값부터 할 줄 알아야 그만큼 대접을 받는 게 상식 아냐?"

"지금 그게 무슨...."

"무슨은 무슨. 너 갈구는 거잖아, 지금. 그래서 억울해?"

"...."

"억울하냐고. 그렇게 억울하면 너도 나랑 계급장 떼고 붙어보든가."

"결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 맞아."

"...."

"할 거야, 말 거야?"

이쪽을 보는 노이만 경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저 막 나가는 도련님에게 항의 좀 해보려던 거였을 텐데.

그걸 구실로 이참에 자신의 권위나 좀 세워보려 했을 텐데.

설마하니 검술을 익힌 적도 없는 도련님에게 정식 결투를 제의받을 거라는 상상은 해본 적조차 없었겠지.

로이드는 싱긋 웃었다.

예상을 뛰어넘어 버린 이쪽의 대응.

덕분에 번뇌에 빠져 버린 노이만 경.

그는 노이만 경의 결정을 성심껏 도와주었다.

"이젠 선임 기사라는 작자도 꽁무니를 빼네. 결투가 무서워? 진짜 기사 맞아? 보니까 이거, 기사식당에서 마주치는 동네 택시 기사 아재들한테도 눈도 못 마주치겠구만."

"...."

"나 같으면 차라리 쪽팔려서 퇴직한다. 그래도 명색이 기사니까 어디 가서 피자 나라 치킨 공주나 구하세요. 그게 더 어울릴 거 같은데. 내 말 틀렸냐?"

"말씀, 다 하셨습니까?"

"아니. 다 안 했는데."

"...."

"너 같은 놈이 딱 그래. 온갖 허세는 다 잡지. 그런데 막상 붙어보자면 뒤로 빼지. 그러니까 넌 '않되' 같은 놈이야. 두 글자밖에 없는데 두 글자 다 틀려먹은 게 네 인생이랑 똑같거든. 소름 돋지 않냐?"

"...."

"이런 소리 듣기 싫으면 결투, 응하든가. 그래도 무서우면 기사 때려치우든가. 아직도 결정이 안 돼? 그러니까 넌...."

"응하겠습니다."

노이만 경이 이를 갈며 대꾸했다.

로이드의 입가에 웃음꽃이 피었다.

"하겠다고? 결투?"

"그렇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얽힌 게 있으면 남자답게 풀어야지. 그럼 날짜는 언제가 좋을까?"

"그건 로이드 님이 정하시지요."

"한 달 뒤. 장소는 저택 연무장. 어때?"

"좋습니다."

노이만 경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날 결투의 결과에 따라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까?"

"당연히 있지."

로이드가 미리 생각해둔 대답을 꺼냈다.

"그날 내가 결투에서 이기면 너 짜를 거야."

"예?"

"직위 박탈하고 쫓아낼 거라고."

"...."

"불만 있어?"

"없습니다. 다만."

"다만?"

"로이드 님도 그에 상응하는 것을 거시지요."

"알았어. 그럼 내 자리를 걸도록 하지."

"자리라니요?"

"이 영지의 장남으로서 지니고 있는 상속권. 그걸 포기하겠다고."

"진심이십니까?"

"당연하지."

로이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 아니니까 걱정 마라. 여기 있는 병사들이 증인이 되어줄 테니까. 울리히 경처럼 털리지 않게 연습이나 열심히 해두라고."

"그 말씀, 후회 없으시길 바랍니다."

"천만의 말씀."

이로써 결투가 성사되었다.

당연히 후회는 없다.

확실히 말해두지만, 싹수가 노란 놈들은 인정사정없이 쳐낼 생각이다.

"그래서 이길 자신은 있으신 겁니까?"

"아니. 별로 없는데."

"그렇군요."

두 시간 뒤.

하비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례적으로 로이드의 곁을 종일 비웠던 하비엘이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영주인 프론테라 남작의 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침부터 갑자기 날 호출하셨지. 그리고 오늘만은 로이드 님에 대한 호위를 멈추라 명하셨어.'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짐작할 수는 있었다.

자신이 곁을 비운 오늘 하루, 로이드가 저지른(?) 일들을 전해 들은 덕분이었다.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 울리히 경을 폭행하고, 그걸 따지기 위해 찾아온 노이만 경에게 결투를 신청했다던가.'

아마도 그걸 위해 오늘 하루 로이드가 자신을 떨어뜨려 놓은 것이 아닐까.

하비엘은 그렇게 추측하고 있었다.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멀쩡히 잘 있던 기사들을 건드린 걸까.

무엇을 위해 울리히 경을 폭행했으며 노이만 경과 결투를 치른단 말인가.

'그저 또 망나니짓을 벌이는 건가.'

얼핏 바라본다면 그리 생각할 수도 있을 터다.

비록 최근 로이드의 언행이 달라지긴 했다.

그러나 사람의 본질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

그걸 감안하자면 또 못된 성질머리로 난리를 피우는 것으로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비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못된 짓거리를 벌이는 거라고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계획적이니까.'

자신을 곁에서 떨어뜨렸다.

울리히 경을 폭행한 뒤에는?

바이에른 경을 불러 현장을 맡겼다.

노이만 경이 노기등등해서 찾아오자 기다렸다는 듯 결투를 성사시켰다.

한데 그런 일들을 저지른 주제에 지금 로이드의 태도는?

뻔뻔하리만치 태연했다.

일부러 계획적으로 저지른 일이 아니라면 결코 보일 수 없을 태도였다.

'게다가 최근 보였던 모습들을 감안하자면 분명 뭔가 목적이....'

하지만 하비엘의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로이드의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깨뜨린 까닭이었다.

"어이. 그렇군요, 라니. 그걸로 끝이야?"

"끝이라니, 뭐가 말입니까."

"뭐긴. 네 반응이지."

저녁 식사를 하던 로이드가 이쪽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한쪽으로 까딱, 기울였다.

"네가 물었잖아? 노이만 경과의 결투에서 이길 자신이 있냐고. 그래서 내가 뭐라고 답했지?"

"자신이 없다고 하셨습니다만."

"그렇지?"

"네."

"그런데 거기에 대고 '그렇군요'하고 끝나는 거야? 정말로?"

"...."

"뭔가 걱정이 된다거나, 하다못해 어째서 그런 일을 벌였냐는 등등의 잔소리도 없는 거냐고."

"제가 어째서 그런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말씀이신지."

"내가 네 호위 대상이잖냐."

"그건 맞습니다만."

"니다만?"

"결투는 로이드 님이 제안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흐음, 결투장에서의 일까지는 호위 서비스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뜻인 거지?"

"물론입니다."

당연한 일이다.

결투가 무엇인가.

"갈등을 빚는 당사자끼리 신분과 직책에서 벗어나 동등한 조건을 지닌 채 겨룸으로써 갈등을 해결하는 가장 공평하고 직접적인 분쟁 해결 방식이 바로 결투입니다. 따라서 제겐 로이드 님과 노이만 경의 결투에 간섭할 권한도, 의무도 없습니다."

"흐음, 역시 그런 거지?"

"네."

"그럼 말이다. 결투가 벌어질 한 달 뒤까지 네가 나한테 검술을 가르치는 건?"

"제가 로이드 님께 말입니까?"

"응."

"싫습니다."

"어째서?"

"개인적으로 내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솔직한 대답이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은 호위일 뿐이다.

딱히 정감 가지도 않는 망나니 도련님에게 검술을 가르칠 의무 같은 것은 없었다.

'괜히 검 쓰는 법을 알려줬다가 더 나쁜 짓거리를 벌이고 다닐지도 모르고.'

하니 더욱 가르쳐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자신의 칼 같은 거절을 들은 저 도련님이 오히려 음흉하게 웃는 것은.

"그으래?"

"...."

찜찜했다.

하비엘은 어쩐지 스멀스멀 피어나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이쪽을 보는 로이드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어쩐지 이쪽에 대해 뭔가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

이쪽이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여주리라 확신하는 듯한 미소.

이윽고 그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어 버렸다.

"만약 네가 나한테 검술을 가르친다면-"

로이드의 눈이 반짝였다.

"나는 네 불면증을 해결해주지."

로이드가 빙긋 웃었다.

"어때?"

"...."

하비엘은 로이드 몰래 마른침을 삼켰다.

고질적 악성 불면증.

그것은 벌써 몇 년째 그를 괴롭히고 있는, 그 혼자만의 은밀한 약점이자 비밀이었다.

10화. 근성의 망나니 (1)

"나는 네 불면증을 해결해주지. 어때?"

"...."

하비엘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불시에 망치로 머리를 후려맞으면 이런 기분이 들까.

'내 불면증을 안다고? 로이드 님이? 어떻게?'

몇 년 전부터 자신을 괴롭히기 시작한 고질적 불면증.

한 번도 밝힌 적 없다.

아니, 누구에게도 알린 적이 없다.

티를 내고 다닌 기억도 전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하비엘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맺혔다.

"불면증이라니.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흐음, 그래?"

"네."

"쯧쯔쯔. 하비엘. 지금 시치미를 떼려는 거야?"

"물론 아닙니다만."

"아니야?"

"네."

"그런데 왜 웃어? 그것도 완전 어색하게."

"예?"

"그거 아냐? 너 지금 내 앞에서 썩소 빼곤 처음으로 웃는 거다?"

"...."

"어이쿠. 지적받으니까 웃음기 싹 지우는 거 보소. 그러니까 너무 티 나잖아. 당황한 거냐? 쯧쯔쯔, 뭘 이런 걸 가지고."

"...."

"속 보이니까 시치미는 됐고. 이거만 확실하게 하자. 난 네 불면증을 해결해준다. 대신 넌 내게 검술을 가르쳐 줘. 어때? 이 정도면 꽤 괜찮은 딜이라고 생각하는데."

"...."

하비엘은 침묵했다.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고질적 불면증.

그건 3년 전부터 갑자기 그를 괴롭혀 온 증상이었다.

이유나 원인은 알 수 없었다.

그저 어느 순간부터 감각이 너무나 예민해져 버렸다.

사소한 풀벌레 소리.

바람에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

심지어 자신이 뒤척이며 내는 이불 사르락대는 소리까지.

귀로 들리는 소리.

눈에 비치는 갖가지 풍경.

피부에 와 닿는 모든 촉각.

호흡마다 느껴지는 공기의 사소한 냄새마저도.

모두 그의 감각에 지나치도록 선명하게 꽂혀 왔다.

심지어 눈을 감아도 눈꺼풀의 혈관이 하나하나 느껴질 정도였다.

귓구멍에서 맥박치는 소리마저 매 순간 매 초마다 귓속을 찔러댔다.

한마디로 모든 감각이 24시간 바늘처럼 온몸을 쑤셔대는 기분이었다.

온전히 잠들 수가 없었다.

밤새 뒤척이다 지쳐 새벽에야 겨우 깜빡 조는 것이 수면의 전부일 지경이었다.

해결 방법이 없었다.

온갖 시도를 해봐도 소용없었다.

그러기를 벌써 3년째.

혼자 끙끙대며 숨겨 온 고통이었다.

혹은 약점이 될까 섣불리 밝히지 못한 고충이었다.

그저 하룻밤이라도 편히 푹 자는 것이 소원일 정도였다.

'그런데 그걸 안다고? 저 망나니 도련님이? 어떻게?'

하비엘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로이드의 눈빛이 능글능글해졌다.

'어떻게긴. 소설 읽었으니까 아는 거지.'

하비엘은 소설 철혈의 기사의 주인공이었다.

자신은 그 소설의 내용을 꼼꼼히 읽었고, 기억한다.

하비엘에 대한 것은 사소한 하나까지도 거의 다 안다.

불면증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넌 자신을 괴롭히는 불면증의 원인을 모르고 있겠지. 하지만 난 알아.'

소드마스터 증후군.

그것이 불면증의 원인이었다.

'검술의 경지가 소드마스터의 수준에 근접하면서 모든 감각이 비정상적으로 활발해지지. 초인의 단계로 넘어가는 인간이 자연적으로 겪는 현상이랄까.'

하비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녀석은 겨우 17세에 소드 익스퍼트 상급에 다다랐다.

동시에 소드마스터 증후군이 시작되었다.

매일 밤을 뒤척이며 괴롭게 보냈다.

그럼에도 오랜 시간 원인을 몰랐다.

이유는 단 하나.

하비엘이 시골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시골 지방에선 소드 익스퍼트 상급은커녕 중급도 찾아보기 어렵지. 아니, 어지간한 왕국 수도를 뒤져봐도 상급의 경지는 많아 봐야 서넛 정도? 그러니 소드마스터 증후군에 대한 정보를 흔하게 접할 수가 없었던 거야.'

만약 인터넷이 있는 세상이었다면.

'네이버 지식in' 정도만 검색해도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정보였으리라.

반면 이곳은 달랐다.

제한된 인맥이나 서적을 통한 지식의 전수.

혹은 진위를 가리기 어려운 입소문을 통한 전달.

그 외엔 새로운 정보를 습득할 방법이 거의 전무했다.

그런 이유로 소설 속의 하비엘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2년이나 지나서야 불면증의 정체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다시 3년이 더 흘러서야 우연한 계기를 통해 불면증을 극복하게 된다.

'그걸 앞당겨 주겠다는 거지, 내가.'

방법은 알고 있다.

그러니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 본다. 어떠냐?"

"꼭 대답해야 하는 겁니까?"

"뭐, 의무까진 아니고."

로이드가 포크로 샐러드를 쿡, 찍으며 말했다.

"오해하지 마. 이거 강매 아니다? 그저 한 번쯤 믿어보라는 거지."

"로이드 님을 말입니까?"

"어."

"...."

"좋은 게 좋은 거잖아. 이럴 때 사람끼리 좀 믿어주고. 신뢰를 통해 건설적인 관계를 다져가고. 어려울 때 도와주고. 그러는 게 사회생활이고 인생이라는 거야. 안 그래?"

"...."

"왜 그렇게 표정이 뚱해?"

"...."

"이렇게 말하는 내가 사기꾼 같냐?"

"솔직히 밝히자면 조금 그렇습니다만."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예."

하비엘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드가 쩝 입맛을 다셨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 우리 이행시 한번 지어보자."

"이행시, 말씀이십니까?"

"어. 서로 신뢰도 쌓을 겸 해보는 거지. 네가 운 띄우면 내가 할게."

"무슨...."

"그럼 '그네'로 해보는 거다. 자, 운 띄워봐."

"...."

"어서."

"...그."

"그대 나의 충실한 기사 하비엘이여, 날 믿겠는가?"

"네니요."

"...."

"뜬금없는 이행시라니. 그런 수작이 손쉽게 통할 거라 생각하셨다면 오산입니다."

"헐."

"그보단 저도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만."

"후우, 쯧. 뭔데."

"아까부터 왜 갑자기 소환술 서적을 끼고 다니시는 건지."

하비엘의 시선이 로이드의 앞쪽, 식탁 위를 향했다.

소환술 기초 마법서.

식사를 하면서도 로이드가 읽고 있던 책이었다.

"아, 이거?"

로이드가 피식 웃었다.

"그냥 심심해서 읽는 건데."

"예?"

"그냥 읽는 거야. 그러면 안 돼?"

"...."

하비엘은 입을 다물었다.

로이드의 미소가 짙어졌다.

"하비엘, 속셈이 너무 뻔히 보이는데. 이런 식으로 화제 돌리기를 시도하는 거야?"

"그저 궁금한 점을 물었을 뿐입니다만."

"됐거든요.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하시죠."

"...."

"그래서, 날 믿지 못하시겠다?"

"그렇습니다."

"어째서?"

"딱히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못 믿겠다고?"

"네. 그냥 못 믿겠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까?"

"...."

카운터에 이은 역카운터.

역시 하비엘은 만만한 녀석이 아니다.

로이드는 빙긋 웃었다.

"지금 나한테 한 방 먹였다고 생각하는 거지?"

"딱히 그런 생각은 없습니다."

"그으래?"

"네. 그저 솔직한 대답을 드렸을 뿐입니다."

"뭐, 알았어. 그럼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할게."

"오늘 이야기라니요?"

"내일 이야기는 내일 마저 하자고."

로이드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식사를 끝마쳤다.

그 뒤로는 휴식용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소환서를 읽는 일에만 몰두했다.

하비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말을 걸지 않았음도 물론이었다.

하녀들이 식기를 치우고 물러날 때도.

그 이후로도 줄곧 그러했다.

침실에는 책장 넘어가는 소리만 조용히 울렸다.

그동안 하비엘은 로이드의 곁을 충실히 지켰다.

평소보다 조금은 복잡해진 표정으로.

밤은 깊어만 갔다.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온돌방 시공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바이에른 경의 적절한 감독 아래 병사들의 움직임이 더욱 일사불란해졌다.

첫날 황토 한 포대를 겨우 옮기던 병사들이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는 사이 달라졌다.

체력이 붙었다.

근력이 늘었다.

요령도 생겼다.

이제는 두 포대도 거뜬히 나르게 되었다.

매일 적당한 강도의 노동과 휴식, 적절한 영양 공급을 받은 덕분이었다.

숙련공들도 더욱 많은 기술을 습득했다.

그들은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혹은 탕수육 튀김옷이 소스를 무자비하게 흡수하듯.

로이드가 알려주는 새로운 지식과 개념을 빠르게 익혀갔다.

그렇게 첫 집의 시공이 무사히 끝났다.

두 번째 집 시공부터는 더욱 편해졌다.

더는 현장에 온종일 머무를 필요가 없어졌다.

그저 하루에 한 번 현장을 방문하면 되었다.

현장이 제대로 돌아가는지.

시공이 도면대로 진행되는지.

뭔가 빠뜨리거나 실수한 곳은 없는지.

전반적인 점검만 해줘도 일이 알아서 굴러갔다.

덕분에 온종일 넉넉하게 남아도는 시간을 충실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바로 하비엘을 쪼아대는 일이었다.

"어젯밤은 잘 잤냐?"

"네, 푹 잤습니다."

"그으래?"

"네."

"너, 거짓말 진짜 못한다."

"제가 말씀이십니까?"

"어."

"설마요."

"설마요는 무슨."

"...."

"너 그거 아냐? 거짓말할 때 티 엄청 나는 거."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알려달라고? 싫은데."

"...."

"알려주고 나면 그거 티 안 내려고 연기할 거잖아."

"아닙니다."

"아니야?"

"네."

대답하면서 이쪽의 눈을 순간적으로 피하는 하비엘.

역시 저 녀석은 거짓말에는 영 재주가 없다.

로이드는 피식 웃었다.

"그래도 싫어. 불면증 있는 놈한테는 안 알려줄 거야."

"...."

"이게 어디서 까불어. 잠도 못 자는 주제에."

"...."

"기분 나쁘냐? 서럽냐? 그럼 내 제안 받아들이든가."

"싫습니다."

"푹 자게 해결해준다니까?"

"그래도 싫습니다."

"날 못 믿겠어서?"

"그렇습니다."

...라는 식이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하다가 불쑥 물었다.

"저기, 하비엘?"

"네, 로이드 님."

"어젯밤엔 잘 잤냐?"

"...."

"제안 좀 받아들이지, 이제?"

"싫습니다."

복도를 걷다가도 또 물었다.

"있잖아, 하비엘."

"말씀하십시오, 로이드 님."

"계속 잠 설치는 거 괜찮어?"

"...."

"그러니까 제안 받아들이라니깐."

"거절합니다."

현장 점검을 나가는 길에도 물었다.

"참, 맞다. 하비엘?"

"예, 로이드 님."

"밤새도록 잠 못 자면 어떤 기분이야?"

"...."

"이제 슬슬 제안 받아들일 생각 안 들어?"

"전혀 안 듭니다만."

저녁 식사를 하던 도중에도 불쑥 물었다.

"흐음. 하비엘?"

"...말씀하시죠."

"너 혹시, 사실은 못 자는 걸 즐기고 있는 거 아니냐? 막 엔돌핀이 쑴펑쑴펑 솟아나? 쾌감이 돋고?"

"...."

"변태네, 변태."

"...."

심지어 자려고 누워 있다가도 훅 치고 들어가며 또 물었다.

"끄으응, 하비에엘?"

"...."

"오늘밤에도 못 잘 거지?"

"...."

"대신 내가 푹 자줄게. 고맙지? 행복하지?"

"...."

"저기 아죠씨? 눈으로 욕하지 말고 대답을 하세요, 좀."

"후우, 알겠습니다."

"알겠다니 뭘."

"로이드 님의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진짜?"

"네."

로이드가 벌떡 일어났다.

하비엘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는 아주 지긋지긋했다.

온종일 저렇게 사람을 들볶으니 죽을 맛이었다.

신경이 곤두선 까닭에 그나마 꾸벅꾸벅 조는 것마저도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물론 로이드 님의 제안을 믿는 건 아니지만.'

로이드 프론테라.

그다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저 지긋지긋한 조롱과 질문을 멈추게 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까지나 로이드 님께서 정말로 제 불면증을 해결해 주신다면, 이라는 전제가 붙는 수락입니다. 그러니 제 불면증의 해결이 우선입니다."

물론 해결될 일은 없을 것이다.

로이드에게 그런 능력이 있으리란 기대감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차라리 제안을 받아들이고 실패하게 두는 것이 나으리라.

그렇게 깔끔하게 포기시키는 쪽이 편할 듯했다.

'검술, 가르쳐 주기 싫으니까.'

로이드를 믿을 수 없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일 술 마시고 사고나 치던 인간이다.

최근 조금 달라진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그게 언제까지 갈지 모른다.

또 언제 못된 습성이 고개를 쳐들지 알 수 없다.

'한데 그런 인간에게 검 쓰는 법을 알려준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차라리 어린애 손에 칼을 쥐여주는 게 나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하비엘이 말했다.

"하니 로이드 님께서 우선 증명해 주십시오. 제 불면증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말입니다."

"그래, 좋아. 우선 여기 앉아볼래?"

"알겠습니다."

하비엘은 로이드가 시키는 대로 휴식용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내심 코웃음을 쳤다.

로이드가 흠흠 목청을 가다듬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설마 자장가라도 불러주려는 건가.'

자장가라니.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동시에 확신이 들었다.

오늘밤, 자신이 푹 잠드는 거짓말 같은 기적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로이드의 입이 열리는 순간.

그의 확신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철근에 항복강도 𝑓y에 해당하는 강재의 규정된 응력을 가하여 철근의 인장시험을 실시할 때 그 변형률이 0.003 이하가 되면 철근의 설계강도는 𝑓y를 감소시키지 않고 그대로 할 수 있다."

'...어?'

뭔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분명 평범한 말을 하는 것뿐인데.

불가사의한 외국어를 구사하는 것도 아닌데.

그러니까 우리나라 말을 하고 있는 건데.

어쩐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런 말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항복강도는 5,500kgf/㎠ 이상으로 설계할 수 없다. 이는 철근의 항복강도가 5,500kgf/㎠일 때의 항복변형률이 압축측 콘크리트의 극한변형률 0.003과 거의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

뭔가, 듣고 있다 보니 멍해졌다.

분명 여긴 현실 세계인데.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철근량에 대해서도... 어쩌고저쩌고... 정철근이 필요한 슬래브를 제외한... 이러쿵저러쿵... 철근비 P는 주어진 철근 단면적이... 이러니저러니... 최소 철근비 𝑃min=14/𝑓y 이상이어야... 블라블라...."

'....'

나른해졌다.

온몸이 두둥실.

의식이 스르르.

현실과 우주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저항은 의미가 없었다.

눈을 부릅뜨려 해도.

손을 꿈지럭거려 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말을 듣지 않았다.

'잠들면... 안 되는....'

"...여기서의 𝑓y의 단위는 kgf/㎠이고... 미주알고주알... 최소 철근비를 두는 이유는... 얄리얄리얄라셩... 급작스러운 휨 파괴를 방지하기 위해서이며... 휨부재 및 0.10𝑓ck⦁A 또는... 샬라리샬라...."

'....'

이것은 수면제 이상의 파괴력(?)을 자랑하는 전공서 낭독.

그걸로 끝이었다.

하비엘의 눈빛이 풀렸다.

눈꺼풀이 스르륵 감겼다.

의식이 샤라락 날아갔다.

전신이 휴식용 의자에 축 늘어졌다.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완벽히 잠들었다.

로이드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맺혔다.

'역시 소설에 나온 장면 그대로네.'

그 언젠가 소설 속 하비엘이 처음으로 불면증을 극복했던 날.

그날 그는 우연히 복잡한 마법 술식 낭독을 들었더랬다.

그 나직하고도 끝없는 낭독에 저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더랬다.

바로 지금처럼.

이제 하비엘은 오늘 체험한 편안한 꿀잠의 맛(?)을 결코 잊지 못하게 되리라.

전공서 자장가 서비스 없이는 잠들 수 없는 몸이 되리라.

로이드의 미소가 흐뭇하고도 사악하게 변했다.

'이제 네 검술은 모조리 내 거야.'

11화. 근성의 망나니 (2)

'피곤해. 졸려.'

안락의자에 누운 하비엘은 인상을 찡그리며 몸을 뒤척였다.

귀찮았다.

당연했다.

낮엔 망나니 도련님을 호위했다.

밤엔 불면증으로 매일 시달렸다.

그러는 와중에 틈틈이 검술 훈련도 빼먹지 않았으니 피곤한 건 당연한 일이다.

아니, 거의 업보다.

'그래도 오늘은 좀 더 많이 존 건가.'

어쩐지 평소보다는 좀 오래 눈을 붙인 것 같았다.

그 생각에 만족감 가득한 미소가 피어났다.

하지만 하비엘의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젠 좀 일어나지?"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능글거리면서도 뭔가 웃음기를 띤 느낌의 음성.

'꿈인가.'

아니, 꿈은 아닐 터다.

몇 년간 꿈을 꾼 적이 없으니까.

아마 모자란 수면 때문에 환각이 생겨난 거겠지.

하비엘은 반대로 몸을 뒤척였다.

하지만 그 몸짓도 다시 들려오는 재촉을 막을 수는 없었다.

"늦었잖아. 일어날 시간이라고, 이 잠탱아."

...뭐?

환각이 아니다.

분명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내가 잠탱이라고? 그게 무슨?'

멍한 가운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은 몇 년째 불면증에 시달렸다.

적어도 남에게 잠탱이 소릴 들을 사람은 아니었다.

게다가 감각은 그 누구보다 예리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곁에 다가와서 말을 걸고 있다고?

하비엘은 눈을 부릅떴다.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온몸이 딱 굳고 말았다.

"일어났냐. 안 깨웠으면 해가 머리 꼭대기까지 뜨도록 잤겠네, 아주."

"...."

휴식용 안락의자 곁에 서 있는 검은 머리칼의 청년.

이제 20대 중반쯤 되었을까.

그 얼굴 가득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 모습이 근사한 장난감을 발견한 악동의 미소처럼 사악해 보였다.

"로이드... 님?"

하비엘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분명하다.

자신이 모시는 호위 대상.

이 영지의 골칫덩이 망나니 도련님.

최근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기행을 벌이기 시작한 인간이었다.

저렇게 한쪽 입술만으로 썩소를 짓는 모습마저도 얄미운 밉상처럼.

"드디어 이 몸을 알아주시는구만. 이거 황송해서 어쩌나."

"...."

표정만 보면 전혀 안 황송한 것 같은데.

"그런데 로이드 도련님이 왜 여기서 절...."

깨우는 겁니까?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혼란스러웠다.

이런 상황은 낯설기만 했다.

'어째서 저 인간이 날 깨우는 거지?'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아예 불가능할 것 같던 일이었다.

언제나 늦잠을 자는 쪽은 망나니 로이드였다.

아침마다 저 인간을 깨우는 것이 자신의 하루 첫 일과일 정도였다.

그런데 어째서 저 인간의 이쪽을 향한 썩소가 더 짙어지는 걸까.

"왜긴. 네가 여기서 잠들었으니까."

"제가? 여기서?'

"어."

"어째서 말입니까?"

"기억 안 나냐? 어젯밤에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어젯밤이라니 저는...."

"제대로 떡실신했지. 완전 쿨쿨 자더라? 코도 골고, 나중엔 이까지 갈고. 아주 그냥 본격적으로 입체음향 돌비 오케스트라 사운드 땡기더만."

"...."

"그래. 이해해. 철근 콘크리트 강의가 좀 그래. 나도 들으면서 미치는 줄 알았거든. 어젯밤에 외워줄 때마저도 졸리더라."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기억도 나지 않는다.

진심이다.

그저 이 의자에 몸을 맡기고 있었을 뿐이니까.

그런데 머리가 맑아진 기분이 들었다.

설마 정말로 내가 숙면을 취했단 말인가.

조금은 낯설고 신기했다.

"쯧. 아직도 멍한가 보네. 이거라도 마시고 정신 좀 차리든가."

"...."

망나니 도련님이 잔을 내밀어 왔다.

잔 속에서 찰랑거리는 맑은 냉수.

한 번에 들이켜며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주먹을 쥐었다.

전에 없던 활력이 느껴졌다.

꽉 쥔 주먹 속 혈관을 내달리는 개운함.

언제나 수면 부족에 시달리며 지내던 때와는 차원이 다른 생생함이었다.

'이거 엄청나잖아.'

설마 진짜 자신이 숙면을 취했단 말인가.

그 지옥 같던 불면증을 이겨내고?

하비엘은 나름 이 현실을 받아들였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뛰어난 검사인 그는 자신의 감각이 알려주는 진실을 온전히 믿기로 했다.

그런데 문득 눈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그런데 그건 뭡니까?"

하비엘의 시선이 로이드를 향했다.

정확히는 로이드의 허리춤에 주목했다.

그의 앞에 선 로이드의 허리춤.

그곳에는 웬 연습용 목검 한 자루가 매달려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로이드의 복장도 평소와 달랐다.

일상복 위로 가볍고 튼튼한 가죽 갑옷을 걸쳤다.

팔꿈치와 무릎에도 가죽 보호대를 동여맸다.

심지어 목에는 땀을 닦을 수건까지 둘렀다.

어쩐지 굉장히 본격적(?)인 모습이었다.

'이거 설마.'

하비엘은 저도 모르게 들숨을 마셨다.

뭔가가 스멀스멀 떠오를 것 같았다.

그 답은 로이드의 대답으로 돌아왔다.

"벌써 까먹었냐? 검술 가르쳐주기로 했잖아. 이 몸께서 네 불면증 해결하면."

"...."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

덕분에 불현듯 떠올랐다.

지난밤 자신은 로이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일종의 내기였다.

만약 로이드가 자신의 불면증을 해결하는 데에 성공한다면?

그래서 자신이 푹 잠들게 되면?

자신은 저 망나니 도련님에게 검술을 가르쳐주기로 약속했던가.

그것이 어젯밤, 자신이 수락했던 로이드의 제안이었다.

'그러니까, 이제는 저 망나니에게 검술을 가르쳐야 하는 거라고? 내가?'

오랜 시간 자신을 괴롭혔던 불면증.

그걸 이겨내고 숙면을 이뤘다는 기쁨도 금방 식었다.

이거 아무래도 큰일이 난 것 같다.

"그럼 달리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곳은 햇살 내리쬐는 연무장.

그 한쪽에서 하비엘이 말했다.

"이쪽으로 서시지요."

"...."

"좋습니다. 이제부터 로이드 님은 연무장 가장자리를 따라 뛰게 될 겁니다. 혹시 궁금한 점이 있습니까?"

"아니, 없는데."

"...."

"뛰면 그냥 뛰는 거지, 뭐."

"...."

"설마 너, 내심 일장연설이라도 발사하려고 준비하고 있던 건 아니지?"

"일장연설이라니 무슨 말씀이신지."

"시치미 떼기는. 왜, 그런 거 있잖아. 딱 이렇게 엄격 근엄 진지한 표정 짓고서, '달리기는 모든 수련의 기초입니다. 강력한 검술도, 화려한 기교도 모두 튼튼한 기초 체력이 뒷받침이 되어야 하는 법입니다, 어쩌고저쩌고, 나불나불...' 이런 식으로 분위기 잡고 입 터는 거."

"...."

뜨끔한 하비엘은 입을 다물었다.

로이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내가 '난 그런 거 싫어, 강력한 검술을 가르쳐 줘!' 이렇게 반항하고, 넌 그런 나한테 '검술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한 쪽은 로이드 님이십니다'라고 시크하게 내뱉은 뒤에 달리기를 시키는, 뭐 그런 걸 혼자 상상한 거냐?"

"...."

"맞네, 맞아."

"...."

"어휴. 애도 아니고. 쯧. 그럼 간다."

타박, 타박, 타박.

로이드가 출발했다.

출발선에 남은 하비엘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찡그렸다.

'달리기 따윈 못하겠다고 징징거릴 줄 알았는데.'

로이드의 반응이 자신의 예상과 너무나 달랐다.

생각보다 훨씬 태연했다.

'하지만 계속 뛰게 하면 본성이 나오겠지.'

하비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누구나 그렇다.

뭔가를 시작하기 전에 몸이 편할 때는 호기를 부린다.

어떤 목표라도 손쉽게 달성할 것처럼 자신감을 보인다.

하지만 막상 힘든 순간이 찾아오면?

육체와 정신의 한계에 맞닥뜨리면?

처음에 보였던 호기와 허세는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힘겨움에 비명을 지르는 내면의 자신과 타협하려 애쓴다.

다이어트에 돌입하고 사흘쯤 지난 사람들처럼.

혹은 금연을 선언한 지 하루가 지난 이들처럼.

나약한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로이드 프론테라. 당신도 똑같겠지.'

자신이 아는 저 망나니는 특히 그런 사람이었다.

강제로 뛰어야 하는 이런 종류의 상황, 평생 겪어본 적 없는 인간이었다.

그러니 이대로 연무장을 몇 바퀴 뛰면서 숨이 턱에 차오르게 되면?

'지금 부린 허세를 후회하게 될 테지. 어쩌면 검술 훈련 따위 때려치우겠노라 외칠지도 모르고.'

솔직히 제발 그러기를 바랐다.

저 망나니에게 검술을 가르치기 싫었다.

저 인간에겐 믿음이 가지 않았다.

매일 술독에 빠져 살던 인간이었다.

그럴 때마다 온갖 행패를 부린 놈이었다.

한데 그런 인간에게 검술을 가르친다니.

자신이 가르친 검술로 무슨 사고를 칠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어.'

물론 최근엔 저 망나니가 조금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긴 했다.

하지만 사람의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저 망나니 도련님도 그럴 것이다.

당장 오늘부터라도 예전의 못된 습성이 고개를 치켜들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니 저는 당신을 최대한 혹독하게 다룰 겁니다. 당신이 스스로 나가떨어질 때까지. 혹은 그것마저 이겨내서 자격을 증명할 때까지.'

하비엘은 독한 마음을 품었다.

서늘한 눈길로 로이드를 응시했다.

망나니가 포기를 외칠 순간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상황은 그가 생각한 것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헉, 허억! 헉!"

턱, 터벅, 턱!

로이드는 계속 뛰었다.

그저 묵묵히 뛰기만 했다.

열 바퀴, 스무 바퀴, 서른 바퀴, 그 뒤로도 계속.

연무장을 돌며 하비엘의 앞을 수십 번은 족히 지나갔다.

그러는 동안 단 한마디의 말도 꺼내지 않았다.

가쁜 숨이 쏟아져 나와도,

땀이 전신을 흠뻑 적셔도.

지친 두 다리가 흔들려도.

쉼 없이, 묵묵히, 일정한 속도로 오직 뛰었다.

'어떻게?'

처음에는 조금씩.

나중에는 대놓고.

하비엘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해가 되지 않는 정신력이었다.

출처를 짐작하기 어려운 근성이었다.

물론 로이드가 보이는 이 근성의 비결은 간단했다.

'이런 달리기 따위보다 힘든 거, 수도 없이 겪었으니까!'

실제로 그랬다.

군대에선 행군이며 유격이며 이것만큼 힘든 일을 지겹도록 겪었다.

부모님을 잃고 알바를 전전하며 살아갈 때는 훨씬 더했다.

'네가 온종일 4층 빌라 꼭대기까지 벽돌 지게 지고 오르락내리락 해봤어? 아님 밤새도록 아침까지 택배 상하차 해봤어?'

그 힘겨움은 해본 사람만 안다.

몸이 강제로 기계 부속이 되는 느낌.

끝없이 마모되고 닳다가 근육이 분해될 것만 같은 기분.

'그렇게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와중에도 나름 희망을 품고서 시계를 봐. 이제 끝날 때쯤 됐겠지. 조금만 더 하면 쉴 수 있겠지. 그런데 현실은? 전혀 아냐. 레알 시궁창이야. 아직 시간이 반도 안 지났어! 그럴 때 느껴지는 막막함 속에서도 돈 벌려고 계속 강제로 움직여야 하는 비참함에 비교하면 이런 달리기 따위, 진심 그냥 천국이라고!'

대한민국에서는 그런 일들이 일상이었다.

매일같이 그런 막막함 속에서 살아야 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은 아득함, 절망감.

그 속에서도 먹고 살기 위해 포기하지 않아야 했다.

몇 푼 벌어보자고.

먹고 살아보자고.

언제나 자신의 한계를 넘나들어야 했다.

아니, 한계에 꺾인 상태에서 그저 좀비처럼 영혼 없이라도 움직여야 했다.

그래야 굶지 않을 수 있었다.

반면 지금은?

'그냥 뛰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노예처럼 억지로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원해서, 검술을 배우려고 뛰는 것이었다.

물론 몸은 힘들긴 했다.

그래도 즐거웠다.

행복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도.

땀으로 온몸이 흥건해져도.

두 다리가 풀려서 흐느적거려도.

때때로 눈앞이 노랗게 변해 버려도.

'그래도 좋아.'

로이드는 계속 뛰었다.

그리고 쉰 바퀴째를 한참 넘겨 하비엘의 앞을 지나가면서는 빙긋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헉, 허억, 헉! 뛰는 건 난데, 허억, 왜 네가 똥 씹은 표정이냐?"

"...."

"후우, 후욱, 설마 이런 상황은 예상 못 한 거냐?"

"...."

"그럼 계속 그렇게, 후우, 벙쪄 계세요?"

"...."

그 뒤로도 로이드는 계속 뛰었다.

보다 못한 하비엘이 달리기를 중단시킬 때까지도 그랬다.

"로이드 님, 그만 뛰십시오."

"헉, 허억, 왜?"

"이미 흐느적거리고 계시잖습니까."

"그건 나도, 후우, 후욱, 아는데?"

"그러니 잠깐 쉬시란 말입니다."

"후우, 그래. 알았다."

로이드의 달리기가 처음으로 멎었다.

"혹시 당황스러운 거냐?"

"아닙니다."

"아니긴. 맞네. 당황했네."

"...."

"후우우. 그래. 이런 상황은 예상 못 했겠지. 그저 '로이드 님의 빈약한 의지력에 실망했습니다.'라거나, '제가 멈추라고 할 때까진 계속 뛰셔야 합니다.' 따위의 대사들만 잔뜩 준비했겠지. 그렇지?"

"...."

"전에도 말했지만, 후우, 너 은근히 사람을 편견으로 대한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넌 내가 검술을 가르쳐달라던 게 장난으로 느껴졌어?"

"...."

하비엘은 대답을 잃었다.

어느새 웃음기가 싹 사라진 얼굴로 이쪽의 눈을 쳐다보는 로이드.

그 눈빛을 마주하게 되자 저도 모르게 대답이 궁해졌다.

혹은 속마음을 들킨 기분이었다.

"검술이 장난이냐? 그런 거야?"

"물론 그건 아닙니다."

"그런데 넌 왜 검술을 가르쳐달라던 내 말을 진지하지 않게 받아들인 거냐."

"그건...."

"그런 안일한 정신으로 남에게 검술을 가르칠 수 있겠어?"

"...."

할 말이 없어졌다.

처음으로 쥐구멍을 찾고 싶어졌다.

망나니인 줄로만 알았던 도련님의 일침이 계속해서 푹푹 꽂혀 들어 왔다.

"가만 보니 검술을 배울 자격이 내게 있는지 재고 있던 것 같은데, 나야말로 검술을 가르칠 자격이 너한테 있는지 확인해야 할 지경이네. 내 말이 틀렸어?"

"...."

"그러니까 좀 제대로 하자. 자격이니 뭐니 따지고 있을 시간에 어떻게 하면 더 잘 가르칠지 연구도 좀 하고. 알았어?"

"...알겠습니다."

하비엘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저 진상 망나니에게 지적을 받는 날이 올 줄이야.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어떻게든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모두 옳은 말이니까.'

하비엘은 순순히 인정했다.

로이드의 지적 그대로였다.

자신은 상대의 자격만을 따지고 있었다.

남에게 검술을 더 잘 가르칠 궁리는 하지 않았다.

스스로는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으면서 상대의 정신력만 시험하려 들었다.

돌아보자니 부끄러웠다.

그 순간.

딩동.

[하비엘 아스라한의 당신에 대한 호감도가 +1 상승하였습니다.]

[하비엘 아스라한과의 현재 관계 : -28]

[주요 인물과의 약간의 관계 개선으로 18 RP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29]

새로운 메시지가 로이드의 눈앞에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