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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화. 아버지의 기다림 (3)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처음엔 깃털처럼 나풀나풀.

밤이 깊어갈수록 소복하게.

자정을 밝히는 달빛 아래 쌓여가고 있었다.

펼쳐진 새하얀 눈밭에 첫 발자국을 새긴다.

뽀드득, 속삭이는 발걸음 소리.

그 속에서 프론테라 백작은 고개를 돌렸다.

"춥진 않느냐."

"네. 그다지는."

돌아오는 아들의 대답.

나란히 걷는 로이드의 옆얼굴을 보며 백작은 미소 지었다.

그냥 옆에 있는 모습만 봐도 뿌듯했다.

그저 흐뭇하고 가슴 벅찼다.

"이 아비가 괜히 널 괴롭히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무슨 말씀을. 괜찮습니다."

"혹시 졸음이 오진 않니?"

"네, 아직은."

"그럼 조금 더 걸을까."

"그렇잖아도 제가 먼저 말씀드릴까 싶었는데 말이죠."

"하하. 녀석도 원 참."

다시금 웃음이 나온다.

보고 또 봐도 참 좋다.

웃느라 나오는 입김 때문에 녀석의 얼굴이 잠시나마 가려지는 게 아쉬울 정도로.

함께 밤을 걷는 지금이 참으로 좋다.

'당분간은 또 녀석을 보내야 할 테니까.'

나마란에 가서 한참을 있다가 돌아온 녀석이었다.

한데 며칠 지내지도 못했는데 또 떠나야 한단다.

특사단에 합류하여 술탄국에 가야 한단다.

이번에 가면 언제쯤에나 돌아올지.

내년 봄꽃 피는 날쯤엔 다시 볼 수 있을지.

어쩌면 그런 아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밤에 자신의 서재에 찾아온 로이드.

녀석에게 뜬금없는 밤 산책을 제안했던 것은.

"혹시나 춥거나 졸리면 말하거라. 내일 아침부턴 또 멀리 떠나야 할 텐데."

"걱정 마세요. 별로 잠도 안 옵니다."

"그러니."

"네."

다시금 말없이 걷는다.

나란히. 때로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미끄러운 곳이 나오면 손을 내밀어 주고.

그렇게 저택 주변의 언덕과 돌담, 숲길을 천천히 거닌다.

그러다 보니 불현듯 옛 기억이 살아난다.

아들의 어깨 위로 쌓이는 눈송이를 보며.

저도 모르게 기억 속 추억을 입에 담는다.

"이 아비가 어렸을 때는 말이다."

가만히 들으며 걸음을 맞추어 오는 로이드.

나란히 걸으며 호흡을 다듬어 말을 이었다.

"이 영지가 참 싫었단다. 답답했고, 지루했으며, 지긋지긋했지."

프론테라 백작은 희미하게 웃었다.

정말로 그랬다.

자신의 열일곱 살 시절.

그 시절 자신의 눈에 이 영지는 커다란 울타리처럼 느껴졌으니까.

"시골일 뿐이라고 여겼지. 이런 시골구석에서 소귀족으로 이름 없이 살아갈 것이 싫었고 불만이었지."

"야망이 있으셨던 건가요."

"야망이라. 글쎄다. 치기였달까."

백작이 소리 없이 웃었다.

"뭔갈 해보고 싶었단다. 시골에서 굴곡 없이 살아가는 것보다 훨씬 거창하고 빛나는 뭔가를 이루어보고 싶었더랬지. 큰물에서 놀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말하면 조금 우스울까. 어쨌건 그렇게 이름을 떨치고 싶었단다. 그래서였지. 집을 박차고 나갔던 건."

"설마 가출이었나요?"

"으음."

뜻밖이라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들며 이쪽을 보는 로이드.

그런 녀석을 향해 쓴웃음을 돌려주었다.

"가출이라. 직설적인 표현이라 조금 찔리기는 하는데 딱히 에둘러 변명할 구석이 안 보이는구나. 그래, 맞다. 그게 가출이지. 네 할아버지에게 아무 언급도 없이, 당신께서 가장 아끼시던 말을 타고서 야밤에 영지를 떠나 버린 행동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불릴 법하지."

"네, 확실히 그렇네요."

"그래서였을까. 혹은 벌을 받은 걸까. 이 아비는 그 뒤로 고생을 가득 했단다."

"고생이라시면?"

"용병대에 몸을 담았지. 내 힘으로 성공하고 싶어서. 내 능력을 증명하고 싶은 치기 가득했던 마음에. 그리고 후회했단다."

백작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생각해보렴. 검이라고는 친한 경비대원들과 연습 삼아 휘둘러본 것이 다인 열일곱 살 어린애를 누가 믿고 써주겠니. 그래서였을 게다. 용병대장은 날 제대로 써주질 않더구나. 석 달쯤 그저 허드렛일만 실컷 했지."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셨겠네요."

"처음엔 그랬지. 내가 이것밖에 안 되나 싶고. 그래도 참았단다. 언젠가 기회가 올 거라고. 한데 정말로 기회가 오더구나."

"기회라시면?"

"어떤 소녀를 그곳에서 만났거든."

"오."

로이드의 눈이 반짝.

백작이 소리 없이 웃었다.

"지금처럼 눈이 오던 날이었을 게다. 용병대장이 날 부르더구나. 한데 그곳에 내 또래의 소녀가 붙잡혀 있었어. 큰 죄를 지어서 잡아왔다고. 노예로 팔릴 아이라고. 도망치지 않도록 잘 감시하라고 당부하더구나."

"그래서요?"

"용병대장 몰래 소녀에게 물었지. 정말이냐고. 그랬더니 소녀가 대답했단다. 거짓말이라고. 저 용병대장과 그를 따르는 일당이 마을을 약탈했다고. 덕분에 난 진실을 깨달았고 말이다."

"그 용병대, 일거리가 없을 때는 도적질을 하거나 민가를 약탈하고 다닌 거였군요."

"맞단다. 그래서 내겐 허드렛일만 시킨 거였지."

"그래서 그걸 알고 난 뒤엔 어떻게 하셨어요?"

"도망쳤단다. 그 소녀와 함께."

"무사히요?"

"아니."

백작이 싱긋 웃었다.

"자정에 도망을 쳤는데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추격대가 따라붙더구나. 정신없이 말을 몰았단다. 소녀를 태우고서 말이다."

백작의 눈길이 떨어지는 눈송이를 향했다.

추억을 더듬는 눈빛으로 말했다.

"열심히 도망쳤지. 그런데도 그자들이 얼마나 끈질기던지. 아무리 도망쳐도 추격을 뿌리칠 수가 없었단다. 급기야 엿새째가 되던 날엔 그들에게 포위되었고 말이다."

"그런데 멀쩡히 살아계신 걸 보면 추격전의 끝이 새드 엔딩은 아니었나 봐요?"

"그랬지. 네 할아버지가 그때 와주셨으니까 말이다."

백작의 말이 이어졌다.

"정신없이 도망만 치느라 몰랐던 사실인데, 그때 포위를 당했던 곳이 우리 영지 서쪽 경계 인근이었단다. 덕분에 네 할아버지가 날 발견할 수 있으셨지. 내가 가출한 후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온종일 영지 외곽을 순찰하셨으니까 말이다."

"행여나 아들이 돌아올까 하는 마음이셨던 건가요."

"그러셨겠지. 어쨌건 덕분에 네 할아버지께서 날 때마침 발견하셨고, 영지의 경비대와 함께 용병들을 내쫓아 주셨단다."

"그렇게 가출이 끝난 건가요."

"그렇지. 내 일생의 가장 큰 모험이 막을 내린 셈이었지."

"그럼 함께 도망쳤던 소녀는요?"

"네 어미가 되었지."

"헐."

로이드는 혀를 내둘렀다.

유난히 백작부부의 금슬이 좋다 싶었는데.

설마 두 사람에게 그런 사연이 있는 줄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어쨌건 그때의 일 덕분이었단다. 이 아비는 말이다, 네 할아버지께서 얼마나 날 아끼셨는지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단다. 지금, 이 아비가 널 바라보는 마음처럼 말이다."

"...."

"혹시 쑥스럽니?"

"어, 으음, 그건 아니긴 한데."

"그럼?"

"솔직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당연하지."

"순간적으로 조금 닭살이 돋았습니다."

"음? 하하하!"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다. 이 아비가 생각해도 그럴 법하니 말이다."

백작은 껄껄 웃으며 로이드의 어깨를 두드렸다.

사실은 닭살이 돋아도 상관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더 말해주고 싶었다.

널 정말로 아낀다고.

내 인생의 가장 멋진 명작이 바로 너라고.

그러니 부디 이번에도 몸 건강히 잘 돌아오라고.

그러기만 해준다면 이 아비는 더 바랄 것이 없겠노라고.

온 밤을 지새워서라도.

새벽까지 걸어서라도.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백작은 그런 마음을 눌러 참았다.

아들에게 부담감을 안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을 주고 싶었다.

'언젠가는 네가 다시 날 아버지라고 불러줄 때까지 말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달라진 아들.

방탕했던 과거를 버리고 성실해진 아들.

하지만 대신에 아버지, 어머니라는 말을 입에서 지워 버린 아들.

그런 아들의 변화가 반갑고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하고 서운했다.

하지만 그걸 내색하지는 말자고 백작은 다짐했다.

스스로 마음을 열어야 할 일이다.

스스로 불러주어야 할 이름이다.

그러니 자신이 부모 된 자로서 해줄 수 있는 건 기다림일 것이다.

얼마가 걸려도 좋으니.

오래 걸려도 괜찮으니.

언젠가는 아들의 마음이 온전히 열려주길.

그렇게 기다리는 마음으로 백작은 천천히 걸었다.

로이드도 그 곁에 나란히 발자국을 새겼다.

'후우.'

백작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로이드도 느끼고 있었다.

백작부부를 한 번도 아버지, 어머니라 부르지 않은 자신.

그런 자신의 태도를 백작부부가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로 알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씁쓸해하는 것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워한다는 것도.

알고는 있는데 부부의 바람처럼 해주기가 쉽지가 않았다.

'죄송합니다. 가식을 떨고 싶지는 않아요.'

백작부부는 좋은 사람들이었다.

언제나 자신을 아껴주는 그 마음을 잘 알았다.

그렇기에 그들을 향해 가식을 떨고 싶지 않았다.

그저 듣기 좋으라고 아버지, 어머니라는 호칭을 써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건 오히려 저 착한 부부를 모욕하는 일이 될 것이다.

저들의 순수한 마음을 이용하는 일이 될 것이다.

자신은 결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죄송합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마음으로 준비가 될 때까지.

망나니였지만 진짜 아들이었던 로이드를 남몰래 대신하게 된 죄송함과 죄책감을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그래서 죄송한 마음을 솔직하게 밝힐 수 있을 때까지.

서로를 가족으로 받아들일 날이 오면 비로소.

솔직하게.

진심을 담아.

자신에게도 두 분을 부모님이라 불러드릴 자격이 생기리라.

"저도 노력할게요."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자신이 없어.

입속으로 웅얼거리듯 말했다.

소리 없이 내리는 눈송이 사이.

나란히 걷는 백작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볼 수 없었다.

차마 돌아봐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만 느낄 수는 있었다.

조용히 깃털처럼 나풀나풀.

깊어가는 밤 사이로 포근하게.

번져가는 백작의 입김 한 모금을 달빛이 비춰주었으니까.

그건 분명, 소리 없는 미소가 남긴 흔적이었다.

 

 

아침이 밝았다.

로이드는 예정대로 특사단에 합류했다.

물론 하비엘도 함께였다.

"흐흐흐."

"...어째서 그렇게 음흉하게 웃으시는 겁니까."

"찜찜하냐?"

"예. 매우."

로이드의 물음에 하비엘이 미간을 찡그렸다.

말 등에 짐을 싣는 그의 손길이 아주 약간 거칠어졌다.

"혹시 절 같이 데려가게 되어서 기쁘신 겁니까."

"응."

"그게 어째서 기쁘신 겁니까."

"나 혼자 고생 안 해도 될 테니까."

"같이 하는 고생이 기쁘신 겁니까."

"아니."

"그럼?"

"너도 같이 고생하는 게 기쁜 건데."

"...."

"억울하잖아. 나만 가서 고생하면. 그러니까 한 놈이라도 더 끌어들여야지. 옆에서 같이 구르게 해야지. 그래야 아, 세상에서 나만 이 꼴을 겪는 게 아니구나, 최소한 한 놈은 나만큼 구르고 있구나, 그래 나만 불운한 게 아니었어! 라는 안도감이 새록새록 피어나지 않겠냐."

"...이 악마."

"응? 뭐라고?"

"악마라고 욕했습니다."

"응, 고마워."

"...."

"최소한 호구보단 낫잖아."

이쪽을 보며 오히려 씨익 웃는 로이드.

그 뻔뻔함에 하비엘은 그만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내심 후회했다.

'차라리 땅강아지 같다고 말할걸.'

악마보단 그게 더 효과적인 비난이었을 텐데.

다음번엔 꼭 그렇게 해보자고 은발의 기사는 다짐했다.

그러는 사이 특사단의 출발 준비가 끝났다.

출발은 거창하지 않았다.

"특사단이 머물러갈 수 있도록 지원을 아껴주지 않은 프론테라 백작의 호의에 진심 어린 감사를 표하오. 그럼, 이만."

특사인 벤투라 백작의 인사와 함께 특사단이 영지를 출발했다.

로이드와 하비엘도 백작부부에게 인사하고는 함께 영지를 떠났다.

동쪽으로의 여정이 이어졌다.

동부 산맥을 넘었다.

황야를 건넜다.

동부 술탄국의 국경에 다다랐다.

국경을 지키는 군단장에게 특사단의 외교적 방문 목적을 밝혔다.

그때부터는 여정이 더욱 안전하고 신속해졌다.

일행은 말 그대로 국왕 알리시아가 공식적으로 파견한 외교 특사였다.

즉, 국왕의 뜻을 전달하고 입장을 대변하는 대리인이었다.

그만큼의 대우와 존중을 받으며 술탄국 영토를 가로질렀다.

마침내 수도 '아힌샤'에 도착했다.

프론테라 영지를 출발한 지 정확히 24일째 되는 날이었다.

"와우."

수도 아힌샤의 관문을 통과한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거 제대로 이국적인 풍경이네.'

프론테라 영지에서 동쪽으로 한참.

거기서 다시 남쪽으로 한참.

그런 위치 덕분인지 덥고 건조했다.

계절이 한겨울임에도 그러했다.

'만약 내가 고전 명작 아라비안 나이트를 영화로 찍는 감독이라면 무조건 여기를 촬영지로 선택할 듯.'

아라비안 나이트.

도시의 분위기가 딱 그랬다.

곳곳에 치솟은 둥근 지붕의 탑도.

사방을 장식한 진흙 빚어 말린 담벼락도.

예외 없이 이국적 정취를 흠뻑 발산하고 있었다.

"이쪽으로 드시지요."

술탄이 보낸 듯한 관리가 마중을 나왔다.

모두는 관리를 따라 궁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로이드는 술탄궁의 구조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야. 이거 공부되네.'

이국적인 양식의 건축물이 사방에 잔뜩.

물론 건축은 그의 전공이 아니긴 했다.

건축과 토목은 엄연히 다른 분야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같은 뿌리를 지닌 학문이기에 이국적인 건축물 앞에 그의 눈이 연신 반짝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렇게 얼마나 궁 안쪽으로 안내를 받았을까.

마침내 접견장 문이 열렸다.

한데 그 안쪽의 광경은....

"이거, 무슨 착오가 있는 거 아니오?"

특사 벤투라 백작의 당혹스러워하는 목소리.

그 소리에 로이드는 접견장 안쪽을 쳐다보았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너무 심하게 심플한 실내였다.

궁에 어울리지 않는 비좁은 공간이었다.

놓인 테이블과 의자마저 격에 맞지 않아 보였다.

단순하다기보다는 소박하게 보였고, 소박하다 말하기엔 조잡하게 느껴졌다.

즉, 이건....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소. 우리는 위대하신 국왕 알리시아 테르미나 마젠타노 전하의 뜻을 받들어 먼 길을 온 특사단이외다. 한데 그런 우리에게 이런 격에 맞지 않는 접견장이라니. 설마 술탄께서 이곳에서 우리를 맞이한다는 뜻이오?"

특사 벤투라 백작의 당황스러운 물음이 술탄국 궁정 관리를 향했다.

특사단의 수행원들도 의아한 시선을 보내긴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로이드만이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허허. 요것들 좀 보게.'

그는 그저 웃었다.

착오?

그건 아닐 듯하다.

술탄이 그렇게 일을 허술하게 할 리가 없다.

그러니까 이건, 대놓고 드러내는 홀대다.

일행 중에서 그 사실을 제일 먼저 깨달은 로이드만이 입가에 썩소를 머금었다.

그때, 접견장 안쪽의 문이 열렸다.

184화. 술탄 만세 (1)

 

 

'어쩐지 이거, 낯선 기분이 아닌데.'

로이드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그것은 미소라기보단 씁쓸한 썩소에 가까웠다.

그런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

접견장 안쪽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열린 문으로 궁내부 관리로 보이는 또 다른 사내가 걸어왔다.

이쪽을 향해 기계적인 예를 표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다들 먼 길을 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자,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관리가 접견장 테이블을 가리켰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평범한 테이블이었다.

테이블 주위에 놓인 의자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을 나무 의자.

귀족이 아닌 평민의 집에서도 흔하게 구경할 수 있을 정도였다.

즉, 한 국가의 왕이 보낸 특사에게 권할 자리의 수준이 아니었다.

특사 벤투라 백작이 난처한 기색을 드러냈다.

"허어. 지금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소만."

"착오라 하시면?"

"우리를 잘못된 장소로 안내하신 것 같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술탄국 관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벤투라 백작이 더욱 난처해진 목소리로 항의했다.

"지금 그쪽이 제대로 전달을 받지 못해서 이런 일이 생긴 듯한데, 우리는 마젠타노의 위대한 국왕이신 알리시아 테르미나 마젠타노께서 친히 파견하신 국왕의 특사단이외다. 즉, 우리는 귀국의 술탄께 우리 국왕 전하의 뜻을 전하기 위해 여기까지 먼 길을 왔다는 뜻이오. 한데 이런 비좁고 허름한 접견장이라니. 술탄이 아닌 하급 관리가 우리를 맞이하다니. 이해가 되질 않는구려."

"어째서 이해가 안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격에 맞질 않으니 말이오. 당장 그대의 상급자에게 돌아가서 다시 물어보시오. 우리를 잘못된 장소로 안내한 것이 아닌지를 말이오."

"죄송합니다만, 제대로 안내를 받으신 것이 맞습니다."

"맞다니? 이곳이? 이런 비좁고 허름한 접견장이 제대로 된 장소란 뜻이오?"

"그렇습니다."

"그게 무슨...."

벤투라 백작의 표정이 흔들렸다.

술탄국 하급 관리가 여전히 기계적이고도 무표정한 태도로 말했다.

"제대로 안내를 받으신 것이 맞습니다. 혹여 여러분은 마젠타노의 국왕께서 보낸 특사단이 아니신 겁니까?"

"특사단이 맞소. 내 분명 말했을 텐데."

"예. 그럼 제대로 안내를 받으신 것이 맞습니다."

앵무새처럼 저 말만 반복하는 하급 관리.

특사 벤투라 백작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설마, 귀국은 우리의 국왕 전하를 모욕할 생각인 거요?"

"저는 그런 부분까지는 모릅니다. 다만 위에서 내려온 지시대로 움직이는 것일 뿐인지라."

"당장 그대의 상급자를 불러오시오!"

벤투라 백작의 호통이 터졌다.

한데 그럼에도 술탄국의 하급 관리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여전히 딱딱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일 뿐.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하급 관리가 물러났다.

벤투라 백작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 무슨 해괴하고 망측한...."

치솟는 화를 참으려 애쓰는 걸까.

아니면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걸까.

'둘 다겠지.'

상황을 지켜보던 로이드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다들 상황 파악이 느려. 뭐, 어쩔 수 없겠지. 평생 이런 식의 홀대를 받아본 적 없는 사람들일 테니까.'

로이드의 시선이 특사 벤투라 백작을 향했다.

그를 수행하는 특사단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다들 높은 분들이었다.

뼛속부터 나름 왕도에서 콧김 좀 뿜는다는 가문 출신들이었다.

'그러니 살면서 이런 식으로 무시당해본 적이 좀처럼 없었겠지. 그래서 상황 파악이 느린 거야. 익숙하지 않거든. 낯설거든.'

어쩔 수 없이 자꾸만 흘러나오는 쓴웃음.

그 웃음 사이로 대한민국에서 살던 때가 떠올랐다.

특히 고시원 생활을 하던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그땐 무시당하는 게 일상이었어.'

워낙 가진 게 없었다.

내세울 것도 없었다.

가정의 울타리를 잃은 채, 하루하루 먹고살아 보려고 버티던 신세였다.

당연히 자신을 꾸미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자신감이 떨어졌다.

표정과 몸짓에서 자연히 배어나는 움츠러든 태도를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였다.

어딜 가든 은연중에 무시를 받았다.

고시원에서는 총무가 이쪽을 볼 때마다 '이번 달은 돈 안 모자라시겠죠?'라는 소리를 인사 삼아 지껄여댔을 정도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특사단 나리들, 댁들이 만원 버스에 타려다가 교통카드 잔액이 모자란다는 안내멘트 받아본 적 있어? 그 멘트에 당황해서 현금으로라도 버스비 내려고 주머니 뒤적거리다가 동전 와르르 떨어뜨려 본 적 있어? 사람들한테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면서 동전 다 주웠더니 글쎄, 버스비가 딱 100원 모자라본 적 있어? 그래서 버스에 타지도 못하고 사람들 눈총받으면서 앞문으로 내려본 적 있느냐고.'

지금 생각해도 십이지장이 부르르 떨리는 경험이었다.

한때 그렇게 무시당하던 게 일상이었던 덕분이었다.

로이드는 일행이 이곳 허름한 접견실에 안내받은 순간부터 곧바로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술탄국에서 특사단을 어떻게 대하려는 건지.

어떤 식으로 나오려는 건지.

가장 먼저 순식간에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런 분위기, 낯설지가 않았으니까.

무시받는 일엔 익숙했으니까.

'아마 더 뻔뻔하게 나오겠지.'

그럼 이쪽의 예상이 맞을지 한 번 볼까.

로이드는 구석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렇게 그가 한 발짝 물러나 상황을 차분하게 지켜보는 사이, 술탄국의 상급 관리로 보이는 자가 접견실로 들어왔다.

"특사께서 절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소. 찾았소."

초조한 걸음으로 접견실을 서성이던 벤투라 백작이 즉시 반응했다.

나름 침착한 얼굴로 상급 관리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하급 실무자와는 도저히 말이 통하질 않아서 말이오."

"흐음, 어떤 점이 불편하셨습니까?"

"이 장소 말이외다. 뭔가 사소하면서도 심각한 착오가 있는 것 같소."

"아, 접견실에 대해 불만을 표하셨다는 점은 이미 전달받았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곳이 귀측 특사단에게 배정된 접견실이 맞습니다."

"...뭐요?"

상급 관리가 정중히 웃었다.

벤투라 백작의 눈빛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그게 무슨... 그럼 술탄께서는? 우리를 맞이하지 않으시는 거요?"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렇게 됐습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예."

"그게 대체 무슨 뜻이오?"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께서 너무나 공사가 다망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처리하여야 하실 일이 많이 밀린 상태라 당장은 특사단 여러분을 맞이하기 어려우신 상황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젠타노의...."

"알고 있습니다. 국왕께서 보내신 특사단이시죠. 하지만 어쩔 수가 없는 건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무슨... 말도 안 되오!"

벤투라 백작의 목에 핏대가 섰다.

"내 보자 보자 하니까 이건 너무하지 않소! 세상 어느 나라가 국왕의 특사를 이런 식으로 맞이한단 말이오! 이건 외교적인 관례에도 맞지 않고, 도리에도 어긋나는 처사외다!"

"하지만 정말로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 어쩔 수 없다는 말!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란 말이오!"

"싫으시면 그냥 돌아가시면 됩니다."

"...뭐요?"

귀를 의심하며 멈칫하는 벤투라 백작.

상급 관리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이미 우리 측의 입장은 충분히 전달을 드렸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께서는 지금 당장 귀측과 대면하기 어려운 상황이십니다."

"그럼, 기다리란 말이오?"

"이제야 입장을 헤아려주시는군요. 그렇습니다. 기다리시면 자연히 해결될 일입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한다는 거요?"

"최소 6개월은 잡으셔야 할 겁니다."

"무...."

"앞서도 말씀을 드렸다시피 어쩔 수가 없습니다.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께서는 그만큼 바쁜 분이시니까 말입니다."

"지금 우리를 농락하겠다는 거요?"

"아닙니다."

"그럼 대체 뭐요!"

"양해를 부탁드리는 겁니다."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양해를...!"

"그게 싫으시면 돌아가시면 됩니다."

 

탁.

 

상급 관리가 희미하게 웃었다.

품속에서 황금으로 빚은 둥근 패 하나를 꺼냈다.

그걸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선택은 귀측의 몫입니다. 이대로 돌아가시느냐, 기다림을 감수하며 이곳에 머무르시느냐. 저희는 어느 쪽의 선택도 강요할 생각이 없습니다."

"...한데 그건 뭐요."

벤투라 백작이 턱짓으로 황금 패를 가리켰다.

상급 관리가 싱긋 웃었다.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께서 귀측에게 손수 내리신 선물입니다."

"선물?"

"예. 귀측이 기다림을 감수하는 선택을 할 경우에 받을 수 있는 선물이지요."

"...설명해주시오."

"이 황금패의 이름은 파다샤르. 용도는 간단합니다. 귀측은 이곳 아힌샤에서 머무르시는 동안 이것만 있으면 어떠한 돈도 필요가 없어지실 겁니다."

"어째서 말이오?"

"이 파다샤르야말로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의 은혜. 여러분이 필요로 하실 일체의 자금을 모두 술탄께서 지원하시겠다는 약속의 증표이기 때문이지요."

관리 셀루크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것만 있으면 수도 어느 곳을 가건 음식값을 낼 필요가 없으실 겁니다. 의복을 살 때도, 낙타와 짐꾼을 부릴 때도, 잠을 청할 장소를 구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릴 대놓고 거지 취급할 생각인 거요?"

"오해이십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상급 관리가 대놓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벤투라 백작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럼 생각하실 시간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이만."

그렇게 특사단의 모두가 분노와 당혹감에 휩싸여 있는 사이, 상급 관리가 정중히 인사하고는 물러났다.

로이드의 입가에 핀 썩소도 짙어졌다.

'역시. 맞네.'

술탄국.

대놓고 특사단을 무시하는 거다.

기다리기 싫으면 돌아가든가.

기다릴 거면 자신들의 은혜를 입든가.

즉, 자존심을 땅바닥에 던져 버릴 생각이 없으면 협상을 하지 말자는 거다.

이대로 협상을 파토내자는 뜻을 빙빙 돌려 말하는 거다.

그게 아니라면 국왕의 특사를 저런 태도로 대우할 리가 없다.

'몬스터 도미노 사태의 책임을 끝까지 부인하겠다는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은 곤란했다.

'협상 파토나면 전쟁 각인데, 이거.'

쌔했다.

전쟁은 피해야 할 테니까.

일어나봤자 아무한테도 도움이 안 될 테니까.

특히나 프론테라 영지에 막대한 피해가 생길 것이 분명했다.

'그럼 어떻게 대응할 생각인 거지.'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술탄국의 무례한 태도.

저 태도를 특사단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반응하느냐에 따라 협상의 결과가 달라질 테니까.

한데 벤투라 백작과 특사단은 그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만 있었다.

"후우. 이걸 어찌해야...."

"그러게 말입니다, 특사님."

"설마 우리를 이런 식으로 맞이할 줄은 몰랐네. 이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제 생각도 같습니다. 이건 부당합니다. 다시 한 번 사람을 불러서 엄중하게 따져야 할 일입니다."

"그래. 그래야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항의가 먹히지 않으면?"

"공개적으로 술탄을 규탄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흐음, 그러나 이곳은 적지일세."

"그럼 본국에 서신을 보내는 건 어떨까 합니다."

"어떤 서신을?"

"저들이 보인 부당한 대우를 소상히 알려 더 큰 규모의 특사단을 추가로 요청하는 것은 어떨까요."

"외교적인 지원과 압박을 늘려달라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실질적으로 우리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 보이니까 말입니다."

"흐음...."

벤투라 백작이 근심에 잠긴 표정으로 수염을 매만졌다.

"대체 이 사태를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그렇다고 협상을 포기하고 돌아가자니 전하께서 실망하실 테고. 전쟁마저 피할 수 없게 될 터인데... 그런데 자네는 뭘 하고 있나?"

백작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런 그의 시선이 접견실 구석을 향했다.

그곳의 테이블에 로이드가 앉아 있었다.

백작의 물음을 받은 그가 싱긋 웃었다.

"아, 그냥 이걸 좀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황금패가 들려 있었다.

술탄의 관리가 남겨두고 간 파다샤르였다.

벤투라 백작의 눈썹이 더욱 크게 꿈틀거렸다.

"자네, 설마 그게 탐이 나는 건가?"

"그냥 신기해서 말입니다."

"아서게나. 술탄이 우리에게 치욕을 안겨주기 위해 넘긴 물건이네. 행여나 호기심도 갖지 말길 바라네. 그보다-"

로이드를 보는 벤투라 백작의 눈빛이 깐깐해졌다.

"자네도 방금 저들의 태도를 잘 보았겠지?"

"예."

"그럼 뭔가 제시할 의견은 없는가?"

"으음, 딱히는요."

로이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를 보는 벤투라 백작의 표정에 못마땅한 기색이 한순간 스쳐 지나갔다.

'저런 속물 같으니.'

사실 벤투라 백작은 로이드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골 영지 출신인 주제에 국왕의 눈에 들어서?

그런 벼락출세가 괘씸해서?

그건 아니었다.

그도 로이드의 능력과 명망은 인정하고 있었다.

다만 저 젊은 친구가 간혹 보이는 속물 기질이 싫었다.

예를 들자면 지금처럼, 술탄이 농락하듯 내어준 황금패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만지작대는 저런 모습이 말이다.

벤투라 백작이 로이드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내 자네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해도 되겠는가?"

"예, 물론입니다."

"자네가 쥐고 있는 황금패 말일세. 가급적 그 물건을 멀리하게. 탐욕에 이성을 내어주지 말게. 눈앞의 사사로운 이득에 자존심을 팔지 말게. 부디, 어리석은 행동으로 모두의 일을 그르치진 말아주게나."

"예. 알겠습니다."

"그 대답, 진심인가?"

"아무렴요. 모두의 일을 그르치는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 안심하시죠."

"고맙군. 자네가 내 뜻을 알아주어서."

"별말씀을."

그제야 조금은 마음이 놓인 걸까.

벤투라 백작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드도 신뢰 가득한 미소를 화답하듯 보내주었다.

그리고 그날 밤.

술탄의 황금패를 챙긴 로이드의 본격 초 럭셔리 돈지랄 파티가 시작되었다.

185화. 술탄 만세 (2)

 

 

신용카드.

소득 생활을 하는 대한민국의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지갑 속에 한 장쯤은 챙기고 다닐 물건.

개인의 금융적 신용을 바탕으로 현금을 대체하여 물품과 서비스를 거래하고, 이를 나중에 갚을 수 있는, 합법적 외상을 보장해주는 가로 85.6mm에 세로 53.98mm의 플라스틱제 카드.

하지만 로이드는 신용카드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한국은.

대한민국의 은행은.

한 번도 그에게 신용카드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왜겠어. 거지나 다름없는 신세였으니까.'

부모님이 살아 계시던 시절엔 자신이 어렸다.

그저 용돈을 받는 걸로 충분했다.

한데 좀 크고 난 뒤엔?

카드를 사용할 나이가 되었을 무렵, 집안이 망했다.

한순간에 부모님을 잃고 고시원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

피땀 흘려 다니는 현장 노가다로 간신히 생활비를 충당하며 버텨야 했다.

당연히 카드를 만들 수 없었다.

어떤 은행도 자신에게 신용카드를 발급해주지 않았다.

'그래서였지. 내게 허락된 유일한 카드는 체크카드랑 교통카드뿐이었어.'

새삼 서럽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티브이만 봐도.

주변을 둘러보아도.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여유롭게 보였던지.

연예인들은 수천만 원짜리 시계를 대수롭지 않게 차고 다녔다.

일반인 중에도 매달 수백만 원씩 카드를 긁고 다니는 사람들이 은근 있었다.

아니, 하다못해 그의 입장에선 백만 원 남짓한 카드값을 걱정하는 보통 사람들마저도 부러웠다.

그 보통의 사람들.

보통의 고민거리.

그것마저도 자신에겐 닿을 수 없는 꿈만 같은 이야기인 까닭이었다.

'당연하지. 한 달에 백만 원 카드값? 그것도 내겐 사치였어. 얼마나 배가 고팠는데. 제일 심할 때는 라면 하나로 하루를 버텨야 했으니까.'

길어진 장마 때문에 현장 일이 끊긴 적이 있었다.

그때가 딱 그랬다.

고시원에서 라면 하나로 하루를 버티는 기술을 자연스레 체득했다.

아침에 라면을 끓여 먹었다.

그땐 면만 건져서 먹어야 했다.

국물을 최대한 많이 남기는 것.

그것이 핵심이요 포인트였다.

국물을 원샷하고픈 충동을 죽이고 인내심을 살려 거기까지 성공하면 점심과 저녁이 풍족해진다.

남긴 국물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점심때는 고시원에서 제공하는 라면 사리를 국물에 넣어서 또 면만 건져 먹었지. 저녁엔? 고시원에서 주는 쌀밥을 또 넣어서 말아먹으면 됐어. 그럼 나름 라면 한 봉지로 하루를 충실하게 보낼 수 있었거든.'

혹은 쌀밥 왕창에 달걀 한 알을 풀어서 식용유를 들이붓고 볶음밥을 만드는 방법도 있었다. 영양 밸런스는 엉망이었지만, 그나마 그게 가장 든든하고 배부른 식단이었다. 식용유를 느끼하게 많이 먹은 탓에 소화가 느린 덕분이었다.

'반쯤 체한 느낌이 저녁 내내 가는 게 단점이긴 했지만, 밤새도록 배가 고프다 못해 쓰린 것보단 훨씬 나았어.'

당시를 떠올리고 있자니 새삼 쑴펑쑴펑 솟구치는 비분강개의 심정.

하지만 그런 설움은 이제 안녕이다.

신용카드 한 장 없던 고단함도 먼 과거일 뿐이다.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왜냐.

"설마 그 황금패...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께서 하사하신... 파다샤르가 아닙니까?"

"예, 맞습니다. 다행히 한눈에 알아보시네요."

"그야 당연히...."

 

꿀꺽.

 

식당 주인의 목울대가 크게 출렁였다.

퉁퉁한 살집 가득한 눈꺼풀 아래.

그의 눈동자가 황금패를 뚫어져라 관찰했다.

진품이다.

진품일 수밖에 없다.

황금패 중앙에 새겨진 저 술탄의 문양.

저건 아무나 복제하거나 도용할 수 없는 것이니까.

적어도 술탄의 권위가 닿는 땅 안에서는 그것이 절대의 법칙이자 불문율이니까.

"그래서, 손님께서는 파다샤르로 무얼 얻길 원하시는 겁니까?"

식당 주인이 로이드를 향해 물었다.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전부 다요."

"예?"

"이 식당의 모든 메뉴를 원합니다. 모든 재료를 동원하세요."

"그게 무슨...."

"뒤를 생각하지 말고 지지고 볶으세요. 오늘 장사 여기서 끝낸다고 생각하시고 말입니다."

"설마 그 말씀은, 오늘 비축된 모든 재료를 모두 동원하여 요리를 내어오라는 뜻인 겁니까?"

"예, 바로 그겁니다."

로이드의 미소가 환해졌다.

식당 주인의 이마에 진땀이 배어났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여긴 평범한 식당이 아닙니다. 이곳 아힌샤의 가장 부유한 사람들만이 출입하는...."

"그래서 제가 여기로 왔지 않겠습니까?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의 파다샤르를 가지고."

 

살랑살랑.

 

로이드가 눈앞에서 흔들어 보이는 황금패, 파다샤르.

식당 주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 알겠습니다."

파다샤르의 권위라면 믿을 수 있다.

결국엔 술탄께서 대금을 내리실 테니까.

오늘 음식 재료를 모조리 소모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래서 서민들이 상상할 수도 없을 금액이 음식값으로 매겨진다 해도.

술탄께서 그 돈을 모두 내려주실 테니까.

그러니 이건 어찌 보면 기회다.

이 식당을 개업한 이래로 최고의 일일 매출을 올릴 절호의 기회가 온 셈이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아니, 제가 직접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상황을 깨달은 식당 주인이 아랫것들을 내쳤다.

자신이 직접 로이드를 가장 호화로운 특별실로 안내했다.

금덩이 보는 듯한 눈빛으로 친절히 웃었다.

"그럼 주문하신 모든 음식을 여기로 대령하면 되겠습니까?"

"아뇨."

로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한층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지금 이 식당에 와 있는 모든 분께 음식을 돌리세요."

"...예?"

"제가 괴물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혼자 다 먹겠습니까? 그러니 이쪽으로는 적당히 1인분만 주세요. 나머지는 방금 말씀드린 대로 식당의 다른 손님들께 제공하시고."

"하지만 그러면...."

"안 될 이유가 있습니까?"

"...."

없다.

뭔가 엄청나게 상식을 벗어나는 돈지랄인 건 맞는데.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법칙 같은 것도 딱히 없긴 하다.

"알겠습니다."

식당 주인이 황급히 주방으로 뛰어갔다.

주방장과 요리사들을 닦달했다.

곧 음식이 나왔다.

대륙 동남부 해안 최대의 교역 항구이자 술탄국의 수도인 아힌샤.

그런 이곳에서 최고급으로 손꼽히는 고급 식당답게 음식의 수준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상다리가 부러질 듯한 기세.

실로 진귀한 음식이 줄줄이 깔렸다.

바닷가재는 기본에 50년간 특수한 와인으로 절여 숙성시킨 양고기, 머나먼 북극해에서만 잡히는 희귀한 해파리, 가장 깊은 동굴에서만 자란다는 천단버섯, 30년에 한 번 피어나는 꽃을 짜낸 기름으로 볶은 디저트까지.

주방장이 직접 나와 친절하게 곁들이는 설명을 들으며 로이드는 포크와 나이프를 놀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된장찌개 먹고 싶다.'

입맛이 저렴해서 그런가.

엄청난 음식이라고는 하는데 막상 먹어보니 실감은 나질 않았다.

그래도 일단 맛은 있었다.

보기보단 배도 불렀다.

그렇게 평소보다 살짝 통통해진 윗배를 두드리며 특별실에서 나왔다.

사뭇 당당한 걸음걸이로 식당 내부를 둘러보았다.

사방에서 수런거림이 들려왔다.

곳곳에서 눈길이 쏟아졌다.

당연했다.

수도 아힌샤의 최고급 식당으로 손꼽히는 이곳.

그런 이곳에서도 하룻밤에 모든 재료를 동낸 손님은 로이드가 처음이었으니까.

"여러분."

로이드의 낭랑한 목소리가 넓고 호화로운 식당 내부에 울렸다.

"오늘, 저는 여러분께 식사를 제공하게 되어 크나큰 기쁨과 영광을 누리고 있습니다. 한데 그렇기에 모두들 궁금하실 겁니다. 여러분과 일면식도 없는 제가, 대체 무슨 연유로 여러분께 값비싼 식사를 사드리는 건지 말입니다."

모두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렇잖아도 궁금하던 참이었다.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인지.

저 외지인이 미쳐서 저러는 건지.

상상력을 발휘해보아도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았고, 이해도 되지 않았다.

로이드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딱 한 마디입니다.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의 영광이 사방에 가득하리! 네, 그렇습니다. 오늘 이곳에서 사는 음식, 제가 사는 게 아닙니다. 술탄께서 여러분께 거하게 쏘시는 겁니다. 아니, 사시는 겁니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술탄의 황금패, 파다샤르가 들려 있었다.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들 이게 무슨 물건인지 아시겠지요. 예, 바로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께서 지급하신 파다샤르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드시는 음식 한 조각, 술 한 모금, 그 모든 것에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의 은혜와 배려가 담겨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 외칩시다."

로이드가 파다샤르를 높이 들어 올렸다.

힘껏 외쳤다.

"술탄 만세!"

"...술탄 만세!"

식당을 채우고 있던 부유한 상인들과 토후들이 얼결에 따라 외쳤다.

로이드의 연호가 더욱 힘차게 울려 퍼졌다.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술탄 만만세!"

"만세!"

"그럼 위대하고 자비로우신 술탄의 무한한 영광을 기원하며, 모두 함께 오늘 밤을 불살라보실까요?"

"만만세!"

식당 내부의 열기가 한층 뜨거워졌다.

최고의 음식과 술이 무한정으로 제공되는 가운데.

최고의 악사와 재주꾼도 식당으로 불려 왔다.

파다샤르가 보장하는 넉넉한 보수에 그들도 행복해졌다.

각자 최선의 기량을 뽐내며 연주와 공연에 매진했다.

그렇듯, 술탄국 수도 아힌샤 제일로 손꼽히던 식당이 졸지에 호화로운 클럽으로 변신했다.

그 초월적 돈지랄의 중심에 로이드가 있었다.

'뭐, 내 돈 나가는 것도 아니니깐!'

한도 없는 VIP 카드를 펑펑 긁어대면 이런 기분인 걸까.

이거 전부 술탄이 쏘는 거였다.

게다가 사용 횟수마저 무한정이었다.

술탄을 알현하려면 최소 6개월은 기다리라고 했던가.

그 사실이 로이드는 참으로 기뻤다.

기회는 이럴 때 잡아야 한다.

앞으로 최소 6개월.

그때까지 로이드는 이렇게 대놓고 펑펑 무한도 과소비를 즐겨볼 작정이었다.

'이게 바로 꿀 빠는 인생이지!'

로이드는 모두를 향해 더욱 크게 외쳤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술탄이시여!"

"감사합니다!"

원래 식당에 와 있던 손님들도.

소식을 듣고 몰려온 사람들도.

모두 호화로운 열기에 들떠 힘껏 외쳤다.

"술탄! 킹탄! 갓탄! 찬양해!"

"찬양해!"

밤이 깊어갈수록.

돈지랄 파티의 열기가 더욱 뜨거워졌다.

 

 

며칠이 지났다.

아힌샤의 궁정이 분주해졌다.

정확히는 아힌샤의 궁정 상급 관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게... 대체 뭔가?"

"마젠타노 특사단의 파다샤르 사용 내역서입니다."

하급 관리의 대답이 돌아왔다.

내역서를 바라보는 상급 관리의 눈동자가 덜컥 흔들렸다.

"혹시 이거, 착오가 있는 것 아닌가?"

아무래도 금액이 잘못 적힌 것 같은데.

숫자에 0이 하나나 둘쯤 실수로 더 들어간 것 같은데.

상급 관리는 그런 작은(?) 소망을 품어보았다.

현실일 리가 없다.

특사단에게 모욕을 안기며 파다샤르를 건네준 것이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불과 며칠 사이에 이 어마어마한 금액을 펑펑 쓰고 다녔다고? 그 특사단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한데 돌아오는 하급 관리의 대답은 더욱 믿기지 않는 것이었다.

"금액에는 착오가 없는 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그거... 특사단 전체가 사용한 금액이 아닙니다."

"그럼?"

"특사단 소속의 한 수행원이 단독으로 파다샤르를 사용한 내역입니다."

"...뭐?"

여러 사람도 아니고 혼자서?

이 많은 금액을?

상급 관리는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하급자의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실 저도 처음 내역서를 받았을 땐 믿기지 않았습니다. 해서 두 번, 세 번 확인한 내용입니다. 그랬더니...."

"그랬더니?"

"한 사람, 그러니까 로이드 프론테라라는 수행원이 온갖 장소에서 파다샤르를 사용하고 다닌 내역이 드러났습니다. 고급 식당이란 식당을 다 찾아다니면서는 재료가 동날 정도로 음식을 시켜댔고, 창고의 술이 거덜 날 때까지 주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걸 혼자 다 먹고 마셨다는 말인가?"

"아뇨.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고, 음식은 식당의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제공했다고 하더군요."

"다른 사람들에게?"

"예. 술탄이 사주시는 음식이라며, 술탄 만세를 외치도록 분위기를 이끌었다고 합니다."

"허, 허허허?"

"그뿐만이 아닙니다. 수도의 비단이란 비단은 전부 사들였습니다. 그리고 상선 한 척을 고용해서 그 비단을 모조리 북해 쪽으로 실어나른 정황도 포착되었습니다."

"비단을? 상선을 북해로?"

"마젠타노 왕국의 크레모 항이 목적지라고 들었습니다."

"...."

"아마도 크레모 항을 거쳐 프론테라 영지로 비단을 보낼 거라고...."

"...."

"그 뒤로도 매일 밤 호화로운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비단뿐만 아니라 도자기, 패물, 온갖 진귀한 물건들을 파다샤르를 사용해서 싹쓸이하듯 사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크레모 항으로...."

"보내고 있다는 말인가?"

"예. 덕분에 올해 남아 있던 궁내부의 예산이 모두...."

"설마?"

"...."

"예산이 바닥났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죄송합니다."

"...."

무슨 그런 미친놈이.

상급 관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만약 저 보고가 사실이라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위대하고 전능한 술탄의 은혜를 상징하는 파다샤르.

그걸 술탄의 명에 따라 마젠타노의 특사단에게 지급할 때만 해도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저들은 국왕 알리시아의 특사니까.

그러니까, 저들이 함부로 술탄의 은혜를 입지는 않을 것이라고.

오히려 그런 일을 크나큰 수치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그렇게 철석같이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게 정상이었다.

그게 상식이었다.

그게 너무나 당연한, 보편타당한 순리였다.

설마하니 특사단의 정신 나간 수행원 하나가 그 파다샤르를 저렇듯 펑펑 써댈 것이라고는, 상식을 넘어선 행태를 보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상급 관리였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네는 잠시 여기에 있게."

"예? 어,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술탄께 이 사실을 고하여드려야겠네."

어차피 숨기지도 못할 일이다.

더 늦기 전에 보고해야 한다.

일이 커지기 전에 수습해야 한다.

상급 관리는 황급히 술탄의 궁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그날 오후.

술탄의 명이 떨어졌다.

"로이드 프론테라, 그자를 궁으로 들라 하라."

그렇게, 최소 6개월 후로 예정되어 있던 술탄 알현이 며칠 만에 전격적으로 성사되었다.

로이드의 빠꾸 없는 돈지랄 덕분이었다.

186화. 탐나는 인재 (1)

 

 

"아르코스 프론테라의 아들, 로이드 프론테라가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을 뵈옵습니다."

검은 대리석 바닥.

황금 입혀진 기둥.

높이를 가늠할 수 없을 까마득한 천장.

그토록 광활한 공간에 로이드의 목소리가 퍼졌다.

매끈한 대리석을 밟고, 기둥 사이를 지나쳐, 열여섯 계단 위의 드높은 왕좌를 향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술탄, '사마르칸 알 아힌샤드'는 로이드의 인사에 화답하지 않았다.

다만 깊게 가라앉은 눈초리로 로이드를 내려다볼 뿐.

'저자인가.'

술탄 사마르칸의 눈빛이 조금은 복잡해졌다.

로이드 프론테라.

저자에 대해 많이 들었다.

아니, 많이 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지시하에 실행된 몬스터 도미노 작전.

그 작전이 결과적으로 낳은 마젠타노 왕국 최고의 신흥 귀족이 바로 로이드이기 때문이었다.

'마젠타노의 동부 국경지대를 최소 수십 년간 재기불능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 보았건만.'

실패했다.

십수 군데 영지가 쓸려나갔는데도.

유독 가장 작은 영지 하나가 끝까지 버텼다.

침입한 몬스터를 모조리 막아내고 격퇴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몬스터 도미노에 휩쓸리며 터전을 잃은 피난민 수만 명을 받아들였다.

마젠타노 왕가의 본격적인 지원을 등에 업어 재건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되었다.

술탄 사마르칸은 그 비결을 알고 있었다.

'그 모든 반전의 중심에 저자가 있었다는 말이렷다.'

로이드 프론테라.

저자 때문이다.

저자가 몬스터 도미노를 막아냈다.

기기묘묘한 재주를 선보이며 영지를 재건의 중심지로 우뚝 세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서쪽 국경에 반격을 가하기까지 했지.'

술탄 사마르칸의 미간에 주름이 생겨났다.

아직도 그 보고를 잊을 수가 없었다.

마젠타노를 향해 보냈던 몬스터 무리 일부가 이쪽으로 돌아왔다.

국경 수비대가 제법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한데 그것조차도 저 로이드 프론테라의 짓이라 했다.

'가끔씩은, 아니, 종종 궁금했지. 수많은 관련 보고를 들으며 항상 호기심이 일었어. 대체 얼마나 뛰어난 자인지. 설혹 과장된 명성을 지니고 있는 건 아닐까. 한데 지금 실제로 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뻔뻔한 자로군.'

아까의 일이 떠올랐다.

궁내부 상급 관리가 허겁지겁 보고를 올렸던가.

'감히 짐이 하사한 파다샤르를 이용해서 그토록 대담한 사치와 낭비를 뻔뻔하게 자행할 줄이야.'

상상도 못했다.

이건 뻔뻔한 건지.

혹은 간이 큰 건지.

그도 아니라면 노골적인 시위인 건지.

무려 술탄의 전폭적인 호의를 상징하는 파다샤르를 하사했던 건데.

원래는 정말로 황송해하며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하는 건데.

혹은 적국 수장의 호의를 받은 사실 자체를 수치스러워해야 이치와 상식에 맞는 건데.

'한데 저자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자이기에 감히 그런 행동을 벌였단 말인가. 게다가 어찌하여 이곳에 불려 와서도 저렇게 침착할 수 있단 말인가.'

술탄은 기이함을 느꼈다.

그렇게 로이드를 관찰하길 한참.

마침내 그의 입이 열렸다.

"로이드 프론테라여."

"예, 부르셨나이까."

"그래, 좋던가?"

"예?"

"파다샤르를 그토록 거침없이 사용하니 기분이 좋았느냐는 뜻이야."

"물론이옵니다. 정말로, 매우, 진심으로 좋았사옵니다."

"...그 정도였나?"

"술탄 만세, 만만세!"

"...."

로이드가 납죽 엎드리며 구성지게 외쳤다.

술탄 사마르칸은 입을 굳게 다물어 버렸다.

저자, 조금은 부끄러워할 줄 알았는데.

적국 지배자의 은덕을 입었음에 저리도 기쁜 티를 팍팍 낼 줄은 몰랐는데.

"놀랍군. 그대는 마젠타노 국왕의 의심을 받을 것이 두렵지 않은가?"

"의심이라 하심은 무슨 뜻이시온지?"

"그대가 함부로 짐의 은덕을 입어 조국을 배반하는 것이라는 의심 말이야. 그대는 적국의 수장이 내리는 호의를 아무런 거절도, 망설임도 없이 받아들였지. 아니, 오히려 즐기고 고마워하는 모습까지 거리낌 없이 보였어. 그런데도 걱정되는 바가 없는 건가?"

"예. 없사옵니다."

"어떻게?"

"마젠타노의 국왕 전하께서 제게 더 많은 금액을 쓰셨으니까 말이옵니다."

"...."

"이런 말씀을 고하여드리기는 애석하오나, 이번에 베푸신 금액만으로는 아직은 제법 모자라시옵니다. 하오나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께서는 염려 마소서. 소인은 지금까지 내려주신 술탄의 은혜만으로도 평생 감사한 마음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옵니다."

"하. 실로 뻔뻔한 자로다."

술탄은 그만 웃어 버리고 말았다.

무슨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었다.

한데 이상하게도 별로 밉지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술탄은 궁정의 중심에서 살아온 자였다.

그런 만큼 간사한 아첨과 비굴한 가식을 평생 겪었다.

수많은 신하들이 매 순간 자신의 비위를 맞추려 들었다.

어떻게든 눈에 더 들어보려고.

조금의 은총이라도 받아내려고.

권력의 단물에 모인 파리떼처럼.

언제나 가식을 떨고, 아첨을 일삼았다.

한데 방금 로이드가 한 말은?

아첨이 아니었다.

술탄 사마르칸은 그 점을 정확히 꿰뚫어볼 수 있었다.

'실로 뻔뻔하고도 기이한 자로다. 짐 앞에서 감히 저런 말들을 아무런 가식 없이 진심으로 혓바닥 위에 올릴 수 있는 자라니.'

로이드에게선 어떠한 가식도 느껴지지 않았다.

방금 그가 꺼냈던 말들.

모두가 솔직한 진심이었다.

그래서 너무나 신기하게 느껴졌다.

"하면 만약 짐이 더 많은 금은보화를 그대에게 안기면? 그대는 기꺼이 깃발을 바꾸겠는가?"

마치 흥미로운 새 장난감을 툭 찔러보듯.

혹은 처음 보는 땅강아지를 나뭇가지로 톡 건드려보듯.

술탄이 한쪽 입술을 비틀며 물었다.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를 기대했다.

과연 로이드는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소인이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께 감히 아뢰건대, 그토록 손쉽게 깃발을 바꾸는 이를 휘하에 두고 싶으신지를 우선 여쭙고 싶사옵니다."

"허어?"

"소인, 솔직히 금은보화가 좋사옵니다. 그냥 좋은 정도가 아니라 매우 좋사옵니다. 끝도 없는 부귀영화를 보장해주신다면 마음이 흔들리는 것도 사실이옵니다. 하오나 그렇다고 하여 깃발을 바꾸겠다고 넙죽 대답을 하여 버리면 술탄께 신뢰를 잃게 된다는 사실 또한, 소인은 모르지 않사옵니다."

"흐음. 깃발을 넙죽 바꾸어 달고는 싶은데, 그랬다간 짐의 신뢰를 잃게 될 것이라고?"

"그러하옵니다. 따라서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께서 지금 흔들어 보이시는 유혹의 깃발은 소인이 평생 가질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옵니다."

"...쯧. 영악한 자로다."

술탄은 흥미롭게 웃었다.

로이드 프론테라.

솔직히 탐나는 인재였다.

자신의 계획에 차질을 안긴 자였다.

그만큼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마젠타노의 국왕이 아끼는 인재이기도 했다.

한데 이참에 저자를 포섭한다면?

두고두고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금은보화 몇 푼에 깃발을 바꾼다면... 그만큼 실망스럽기도 할 테지.'

그런 자는 능력이 있어도 믿고 쓸 수 없다.

그래서 한 번 속을 떠보려 했는데.

저 젊은 친구는 그런 이쪽의 의도마저 이미 눈치를 채고 있는 듯했다.

'이러니 더욱 탐이 날 수밖에.'

만족스럽다.

더 욕심이 난다.

그러나 욕심은 여기까지.

이제는 저자를 부른 본론을 슬슬 꺼낼 때다.

"그래, 하면 짐이 하나 묻겠노라. 아마도 그대는 짐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었겠지?"

"그러하옵니다."

"하여 보란 듯이 파다샤르를 마음껏 사용했던 것이고?"

"역시 그러하옵니다."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었다.

계획적인 돈지랄이었다.

명확한 목적을 지닌 돈지랄이기도 했다.

특사단이 대놓고 무시를 당하고 있던 상황.

그 상황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술탄의 주의를 끌 방법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음껏 펑펑 쓰고 다녔지. 아, 그런데 생각보다 훨씬 좋았어. 역시 사람은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해.'

로이드는 지난 며칠의 시간을 떠올렸다.

계획에 따라 목적을 두고 벌인 돈지랄.

그럼에도 진심으로 즐거웠다.

평생 그렇게 펑펑 돈을 써본 적은 처음이었으니까.

과연 이래서 사람들이 돈, 돈 하는구나, 라는 교훈도 알차게 얻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좋은 친구를 두어야 한다고 말하는 거였어. 돈 많다고 함부로 으스대고 돈 자랑하고 우정을 돈으로 사려고 하는 그런 인간들 보면 정말로 평생 친하게 지내야 하는 거거든.'

그런 친구는 두고두고 도움이 된다.

가능하다면 열과 성을 다해서 관계를 지켜나가야 한다.

예를 들자면 지금 눈앞에 있는 술탄 같은 분이 그러하다.

로이드는 그런 교훈을 가슴에 새기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런 말씀을 고하여드리기는 외람되오나,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께오서 특사단과의 협상 테이블에 앉아 주시길 간청하기 위함이었사옵니다."

"짐더러? 특사단과 협상에 임해달라고?"

"그러하옵니다."

"어째서?"

"전쟁이 모두에게 불행이 될 것이기 때문이옵니다."

로이드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술탄이 한쪽 입술을 말아 올렸다.

"그건 아닐 것 같은데."

"예?"

"전쟁이 왜 불행이 되는가. 그저 이기면 되는 것을."

"그 말씀은, 마젠타노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확신하고 계신다는 뜻이시옵니까?"

"그건 아니고."

술탄의 미소가 짙어졌다.

"약속된 승리가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짐은 그런 걸 확신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다만 마젠타노 왕가와의 전쟁이 짐에게 결코 손해가 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고 있을 뿐이지."

"설마...."

"좋은 표정이로다. 벌써 짐의 의중을 짐작한 것인가?"

"내부의 어수선함을 바깥으로 돌리려 하심이옵니까?"

"역시. 짐이 사람을 잘못 보진 않았어."

"...."

로이드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내부의 어수선함을 바깥으로 돌리기.

정치적 갈등을 외적의 존재로 극복하기.

실제 지구의 역사에서도 수많은 통치자가 써먹던 고전적인 수법이었다.

그의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뭔가 국내적으로 어수선한 갈등이 있는 건가. 그걸 마젠타노와의 전쟁을 통해 덮어두거나 풀어내려는 거겠지. 그럼 그 갈등이 뭘까. 생각해라. 떠올려. 기억력아, 힘내!'

소설 철혈의 기사 내용을 열심히 더듬었다.

기억 속 서랍을 모조리 뒤적였다.

그러기를 잠시.

마침내 뭔가가 얼핏 떠올랐다.

'가뭄.'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하비엘이 술탄국을 횡단하던 때였던가.

오랜 가뭄에 고통받는 지역을 지나치던 에피소드가 있었다.

가뭄 때문에 살아갈 수가 없다고.

이대론 다 죽을 것 같다고.

그럼에도 술탄은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는다고.

오직 수도 아힌샤의 부귀영화에만 파묻혀 있다고.

그래서 반란을 계획하는 거라고.

술탄을 끌어내려 새 시대를 열 거라고.

악에 받친 지역 주민들이 외쳤던가.

지방의 유력 귀족인 토후들마저 그 외침에 호응했던가.

'결국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지. 몇 년에 걸친 내전이 벌어졌어.'

그 내전의 끝에 술탄은 패배한다.

겹겹으로 포위된 아힌샤 궁정의 첨탑.

그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한다.

그것이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나온 내용이었다.

'즉, 저 술탄은 이대로 두면 자리가 위태해질 거라는 말씀이지.'

물론 소설과는 다를 수도 있다.

나마란 사태처럼 사건의 시기와 규모가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지금 술탄이 보이는 모습을 통해 판단하자면?

'반란 자체는 일어날 가능성이 있겠어. 그러니까 술탄이 마젠타노와의 전쟁을 꺼리지 않는 거겠지. 그 전쟁을 통해 국내의 눈을 돌리고 불만을 잠재우려는 거야. 그 불만의 핵심에는 오랜 가뭄 사태가 있는 거고.'

비로소 머릿속에서 퍼즐이 착착 맞추어졌다.

술탄이 전쟁을 일으킨다.

지방의 장정들을 징집한다.

남겨진 가족, 노약자들은 반란을 일으킬 힘이 없다.

그들은 그저 징집되어 전쟁터로 끌려간 아들, 남편, 아버지가 무사하기를 바랄 뿐.

게다가 전쟁 중이라는 특수 상황이 술탄을 돕는다.

백성들이 어지간한 불만을 표할 수 없게 된다.

자칫 경솔하게 불만을 표출하면?

전쟁 중인 적국과 내통하는 자라는 누명을 씌우기에 딱 좋다.

게다가 내란으로 국내를 흔들었다간 전쟁터의 상황이 불리해지고, 전쟁터로 끌려간 가족이 위험해질 거라는 불안감도 백성들의 불만 표출에 브레이크를 걸게 된다.

'그렇게 백성들을 단속하는 거지. 강제로 내부 결집을 유도하는 거야.'

로이드는 나름의 시나리오를 그리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술탄이 어떤 의도를 지니고 있는지.

술탄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그렇다면....

자신이 어떤 떡밥을 술탄에게 제시할 수 있을지.

"하오나 가뭄은 전쟁으로 쉽게 덮을 수 있을 사안이 아닐 줄로 소인, 감히 고하고 싶사옵니다."

"...뭐?"

이쪽이 대뜸 꺼낸 한마디.

그 말에 술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미 대화의 각을 계산한 로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소인도 이런 말씀을 고하여드리는 것이 실로 송구하오나, 소인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께서 곤경에 처하는 모습을 차마 견딜 수 없어 고하여 드리는 말씀이옵니다."

"...짐이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그러하옵니다."

"설명하라."

"예.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미사여구는 빼고."

이쪽이 가뭄이라는 키워드를 한 방에 딱 짚어 버린 까닭일까.

어느새 술탄이 정색하고 있었다.

아까와 같은 미소를 짓고 있지 않았다.

나쁘지 않다.

비로소 제대로 된 협상을 벌일 판이 꾸려진 셈이니까.

로이드는 그렇게 직감하며 말했다.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께서 그리 하명하시니 소인, 직설적으로 고하여드리겠나이다. 소인이 알기로 술탄국의 칸다하르 지방이 오랜 가뭄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들었사옵니다. 맞사옵니까?"

"그렇다."

"하면 소인이 칸다하르 지방의 고질적인 가뭄을 해결하여 드리오면,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께서는 소인의 바람대로 마젠타노의 특사와 협상에 임해주실 수 있으시겠사옵니까?"

"...뭐?"

술탄의 수염이 꿈틀거렸다.

"가뭄을? 그대가 해결할 수 있다고?"

"그러하옵니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오아시스마저 말라붙는 가뭄을 해결할 수 있노라고? 그대가?"

"역시 그러하옵니다."

"어떻게?"

"송구하오나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께서 소인의 조건을 받아들이시기 전에는 거기까진 알려드릴 수 없사옵니다."

"어째서?"

술탄이 물었다.

비로소 로이드가 고개를 들었다.

술탄을 향해 매우 정중히, 돈 많은 고객님의 비위가 최대한 상하지 않도록, 정말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는 아련한 심정을 눈빛 가득 장착하고서 간곡히 말했다.

"영업비밀이기 때문이옵니다."

187화. 탐나는 인재 (2)

"영업비밀이기 때문이옵니다."

"허어?"

로이드의 낭랑한 대답.

절대로 버릇없지 않았다.

목소리는 낭랑했으되 표정은 더없이 간절했다.

술탄을 향한 눈빛마저도 애절하기 짝이 없었다.

로이드의 촉촉한 눈빛.

그걸 보며 술탄은 문득, 이런 마음을 읽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는 정말로 알려드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이걸 여기서 함부로 까발리면 저는 영업비밀 다 털려서 평생 깡통만 차고 살아야 하니까 제발 한 번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좀 봐주십쇼, 하늘 같은 고객님.]

 

...이라고 호소하는 듯한 눈빛이라고 표현하면 될까.

"허허, 허허허!"

술탄은 그저 웃고 말았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렇잖아도 미친 게 아닌가 싶은 놈이 저런 눈빛마저 보내니까.

한데 그 대답의 내용이 비굴한 눈빛과 달리 참으로 당돌하기 짝이 없어서.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신기한 기분까지 들었다.

'대체 이런 뻔뻔한 놈이 어디서 굴러 온 건지.'

술탄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저자, 능력이 있다.

능력 있음을 스스로도 안다.

능력을 적절할 때 쓸 줄도 안다.

그런데 능력만 믿고 까불지를 않는다.

아니, 적당히만 까부는 선을 소름 끼치게 잘 지킨다.

권력자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자신을 당돌하게 포장할 줄을 안다.

오늘의 만남을 통해.

방금의 대답을 통해.

술탄이 로이드에게서 받은 인상이었다.

로이드를 향한 사막 지배자의 눈빛에 탐욕이 깃들었다.

'저러니까 더 탐이 나는군.'

저런 자를 수하로 두고 있는 마젠타노의 국왕 알리시아가 새삼 부러워졌다.

가능하다면 빼앗고 싶었다.

자신의 수하로 부리고 싶었다.

저런 인재를 강탈당했음을 깨닫고 국왕 알리시아가 지어 보일 표정과 눈빛을 감상하고 싶었다.

"그래, 영업 비밀이라. 허허, 허허허!"

로이드를 내려다보는 술탄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그가 마치 영특한 손주의 재롱을 구경하듯 물었다.

"하면, 짐이 그대의 조건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가뭄을 해결할 방법을 알려주지 않겠다는 뜻인가?"

"송구하고 외람되오나 그러하옵니다,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이시여."

"흐음. 실로 건방지고 대담한 자로다. 그러다가 자칫 짐의 진노를 불러들여 목이 잘릴 것은 두렵지 않은가?"

"왜 두렵지 아니하겠사옵니까. 충분히 두렵사옵니다."

"한데 어찌 감히 그런 말을 입에 담았지?"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의 하해와도 같은 아량을 전적으로 믿었기 때문이옵니다."

"허허. 이제는 적국의 군주에게 아첨까지."

"아첨이 아닌 진심이옵니다."

"어째서?"

"목숨 걸고 꺼내는 말이 어찌 한낱 아첨일 수 있겠사옵니까?"

정말이다.

이건 나름의 도박이다.

사실 충분히 먹힐 거라는 각을 재어보고 시도한 도박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술탄을 상대로 벌이는 대담한 승부수이기도 했다.

'가뭄 문제에서 아쉬운 건 내가 아니라 술탄이니까.'

말은 전쟁으로 해결하면 된다고 하고 있다.

외부로 시선을 돌리면 자연스럽게 묻힐 문제로 취급하고 있다.

하지만 술탄의 내심은 어떨까.

'말과는 달리 절대로 여유롭진 못할 거야.'

밤마다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가뭄을 어떻게 해결할지.

전쟁 같은 미봉책 말고.

근본적인 해결책은 없을지.

온종일 고민을 했지만 아직 답을 찾아내지 못한 상태일 것이다.

'그러니까 전쟁으로 이슈를 돌리겠단 소리나 하고 있는 걸 테고.'

그래서였다.

가뭄을 해결해줄 수 있다는 말.

그 말에 술탄이 반응을 보여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게다가 자신에게는 정말로 저 가뭄을 해결해줄 방법이 있었다.

"...좋다. 짐을 그렇게 보아준다니 고맙군. 하면 그대의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하지."

"그 말씀이시온즉?"

"로이드 프론테라, 그대가 가뭄을 해결해준다면 짐이 친히 그대의 청을 들어주겠다는 뜻이다."

"마젠타노 특사와의 협상에 임하실 것이라는 약조이시옵니까?"

"그렇다. 물론 협상의 결과까지 보장할 수는 없겠지만."

"소인도 거기까진 감히 바라지도 않사옵니다."

협상은 특사와 술탄의 일이다.

자신은 그 협상이 성사되도록 자리를 만들어줄 수 있을 뿐.

그 이상의 역할은 넘볼 생각도 없는 로이드였다.

"하면 이제는 그대도 말할 수 있겠지. 그 영업 비밀인지 뭔지를."

"물론이옵니다."

로이드가 넙죽 고개를 숙였다.

가뭄 해결을 맡기겠다고 했다.

그러니 이제부터 술탄은 자신의 클라이언트, 즉, 왕보다 귀하신 고객님이다.

로이드는 그러한 서비스 정신으로 무장하며 말했다.

"소인이 감히 듣기로, 술탄국의 칸다하르 지방은 쓸 만한 오아시스가 적기에 인근의 강수량이 조금만 떨어지면 지하수가 메마르는 일이 다반사라고 들었사옵니다. 맞사옵니까?"

"과연 그러하다. 하면 그대는 어떤 방법으로 가뭄을 해결할 심산인가."

"소인의 답은 카나트이옵니다."

"카나트?"

"그러하옵니다."

"처음 듣는 이름이군. 설명이 필요할 듯한데."

"대저, 카나트란 까마득한 고대의 여러 사막 왕국이 사용했던 물 공급 시설이옵니다."

"고대의 여러 사막 왕국?"

"그러하옵니다."

로이드의 청산유수 같은 설명이 이어졌다.

"고대의 페르시아라는 왕국은 이 시설을 '카나트(Qanat)'라 불렀사옵고, 인근의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지방에서는 '카레즈(Karez)', 모로코에서는 '레타라(Lettara)', 북부 아프리카에서는 '포가라(Foggara)'라는 등의 이름으로 불렀사옵니다. 하오나 이는 부르는 명칭만 다를 뿐, 기능은 모두 같은 시설이었사옵니다."

사실이었다.

이쪽 세계가 아니긴 하지만 어쨌건 페르시아가 고대의 왕국인 것도 맞았다.

그 밖의 여러 지방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카나트를 부르는 것도 맞았다.

심지어 지구의 카나트는 현대에도 여전히 쓰이고 있는 시설이었다.

로이드의 설명이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퐁퐁 이어졌다.

"당연히 그 시설의 원리 또한 모두 동일하옵니다. 대저 사막이란 곳이 원체 뜨겁고 건조한 곳이라, 지표를 흐르는 물줄기가 대체로 마을이나 도시에 닿기도 전에 손쉽게 증발되어 버리곤 하옵니다. 따라서 이런 곳에서 물을 효과적으로 끌어오려면 서늘한 지하를 통하여야 할 것이옵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지하수를 이용하는 방법에는 한계가 있을 터인데."

"물론이옵니다."

정말로 물론이다.

사실 사막의 지하수는 그다지 믿을 것이 못 된다.

많은 사람들이 사막의 희망이라 여기는 오아시스라 해도 그렇다.

수량이 적은 것은 둘째치고, 기본적으로 온갖 잡균과 치명적인 병균이 들끓는 경우가 많다. 오아시스가 사람에게만 생명수가 아닌 까닭이다. 박테리아를 포함한 다른 모든 생명체에게도 생명수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막의 지하수나 오아시스는 보통의 민물과 달리 염분이 너무 많은 경우도 허다했다.

즉, 병균이나 염분 때문에 끓이고 증류하기 전에는 제대로 마실 수 없는 물인 셈이었다.

"그래서입니다. 카나트의 지하 수로는 기존의 지하수맥과 절대로 닿지 않아야 하옵니다. 오염되어 있거나 염분이 많은 지하수가 카나트의 맑은 물에 섞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옵니다."

"카나트의 맑은 물이라. 그럼 지하수가 아니라면 그 맑은 물은 어디서 온단 말인가."

"먼 곳의 산기슭이옵니다."

"산기슭?"

"그러하옵니다."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인이 감히 듣기로 칸다하르 지방의 외곽에 드높은 산맥이 있다고 들었사옵니다. 또한, 그 산맥의 기슭에는 꼭대기의 만년설 녹은 물이 풍부하게 흐른다고도 들었사옵고 말이옵니다."

"설마 그 물을 지하를 통해 칸다하르 지방까지 끌어오겠다는 말인가?"

"바로 그렇사옵니다."

"엄청나게 먼 거리일 텐데, 가능하겠는가?"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소인의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로이드가 자신 있게 답했다.

그를 보는 술탄의 미간에 주름이 생겨났다.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할지 모르겠군. 수십 킬로미터는 족히 될 거리일 텐데. 게다가 그대는 그런 지식을 대체 어디서 얻은 것인가. 사막의 고대 왕국 페르시아라니. 짐은 그런 이름을 지닌 나라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건만."

"소인도 우연히 도서관의 이름 없는 낡은 서적에서 접하였을 뿐이옵니다."

"낡은 서적?"

"그러하옵니다."

"...흐음. 그런가. 솔직히 그대의 지식과 그 앎의 출처가 미더운 것은 아니야. 하지만 그대가 마젠타노에서 일군 업적과 명성을 믿어보도록 하지. 어차피 공사의 결과가 그 지식의 진위를 증명해줄 터이니."

"하면,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께오선 소인에게 공사를 맡기겠다는 말씀이시옵니까?"

"그렇다."

술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밝힌 대로 그대가 언급한 카나트를 통하여 칸다하르 지방의 가뭄을 해결해주길 바란다. 그리하여 만약 그대가 공사를 훌륭히 치러낸다면 약조대로 짐은 마젠타노 특사와의 협상 테이블에 앉을 것이다."

술탄의 엄숙한 선언이 떨어졌다.

로이드가 황송하다는 듯 넙죽 절했다.

"실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면 소인이 이 자리에서 잠시 종이와 펜을 쓸 수 있겠사옵니까?"

"종이와 펜?"

"예, 그러하옵니다."

"그걸 어디에 쓰려 함인가."

"공사 발주 계약서를 작성하려 함이옵니다."

"발주 계약서?"

"그렇사옵니다."

로이드가 대답했다.

술탄의 미간 주름이 깊어졌다.

"그대는 감히 계약서를 작성하겠다는 것인가? 지금, 짐을 상대로?"

"송구하오나 그러하옵니다."

"그럴 필요 없다."

잘라내듯 술탄이 선언했다.

"짐도 계약서의 중함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계약서라 해도 짐 앞에서는 그저 의미 없는 종잇조각일 뿐. 그대는 이곳이 어디인지를 잊었는가? 그대가 지금 누구의 땅을 밟고 있는지에 대한 자각이 없는가?"

술탄의 엄숙한 말이 이어졌다.

"이곳은 짐의 궁이며, 짐의 눈길과 발길이 닿는 이 사막의 모든 땅이 짐의 소유로다. 여기서는 그까짓 종이에 불과한 계약서 백 장, 천 장보다 짐의 한마디가 훨씬 중하고 절대적인 법이며 규범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

"하오나...."

"그대는 감히 짐의 언약을 믿지 못하겠다는 뜻인가?"

"아니옵니다."

"하면 어찌 그리 고집을 부리는가?"

"소인이 소인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옵니다."

"...뭐?"

심기가 상하여 인상을 쓰던 술탄의 미간이 살짝 풀어졌다.

로이드의 대답이 이어졌다.

"감히 아뢰옵건대, 어찌 감히 소인이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을 믿지 못하겠사옵니까. 소인은 술탄의 말씀이시라면 모래로 금을 빚어내고 물을 끓여 모래를 만든다 하여도 무조건 믿을 것이옵니다. 하오나 술탄께서는 소인을 그만큼 믿어주실 것이옵니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계약이 상호적이라는 말씀을 고하여드리고 싶사옵니다."

"상호적이라."

"예, 그렇사옵니다. 그렇기에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이 중하다는 것이옵니다. 만약 소인이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과의 약조를 남몰래 어긴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공사 직후에만 그럴듯하게 작동하는 카나트를 만들어서 눈속임을 한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날림 공사를 한다는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또한, 소인에게는 얼마든지 그렇게 할 능력이 있사옵니다."

"허허. 감히 대놓고 그런 말을."

"단지 가능성을 고하여 드리는 것이옵니다."

로이드가 고개를 더욱 납작 숙였다.

"소인이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얼마든지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사옵니다. 특사의 협상을 성사시키려는 목적만 달성하기 위해서, 날림 공사로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을 기만하여 속일 수도 있을 것이옵니다. 사실 한편으로는 그런 유혹이 드는 것도 사실이옵니다. 그래서이옵니다."

"계약서를 작성해야 그런 일이 방지될 거라는 뜻이로군."

"그러하옵니다."

그래서 계약서가 중요하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현장을 다닌 로이드였다.

그렇기에 뼛속까지 저리도록 절감했다.

'계약서 없으면 아무것도 안 돼. 아니, 계약서를 작성하고 공사를 시작해도 문제가 수두룩하게 터져.'

진짜로 그랬다.

설계 변경에 대한 책임 전가.

유치권 분쟁 발생으로 인한 공사 중단.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곳이 건설 현장이었다.

심지어 계약서를 작성해도 그런 일이 발생했다.

한데 계약서가 없다면?

더 개판이 되는 건 확정일 터다.

"하오니 공사 발주 계약서 작성은 필수라고 감히 아뢰고 싶사옵니다. 이는 소인이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술탄께서 소인에게 믿고 일을 맡기실 수 있도록 하여드리기 위함이옵니다."

"흐음."

여전히 납작 엎드린 로이드.

그의 등짝을 보는 술탄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실로 기이한 자로구나.'

어찌 저런 올바른 소리만 따박따박 하는지.

한데 어찌 그런 소리가 성가시지 않게 들리는지.

술탄은 그 이유를 언뜻 느낄 수 있었다.

'배려하고 있어. 감히 짐을.'

한낱 타국의 백작령 후계자 주제에.

광대한 사막의 지배자인 자신을 배려해주고 있었다.

저렇게 조심스럽게 꺼내는 말과 태도를 통해서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낯선 가게에 처음 온 손님을 세심하게 안내하듯.

동시에 손님이 부담감을 느끼지 않도록.

한편으로는 손님이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그렇게 배려하듯 안내하며, 세심하게 사실을 짚어주고 있었다.

그 점이 내심 괘씸하고 기특했다.

'감히 짐을 상대로 무슨 이런.... 이건 화를 내어야 하는지, 고마워해야 하는지. 원 참.'

결국, 술탄은 피식 웃고 말았다.

로이드의 청을 받아들였다.

함께 공사 발주 계약서를 작성하고, 친히 서명했다.

그렇게 용건을 모두 마친 로이드가 물러나고 난 후.

한참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밤이 깊었을 무렵.

자신의 딸 하나를 본궁으로 불러들였다.

수많은 아내에게서 얻은 수십 명의 딸 중에 유독 성정이 대담하고 검술에 엄청난 재능을 보여 온, 그래서 항상 특별하게 여기던 딸이었다.

"부르셨사옵니까, 아바마마."

"그래. 짐의 딸 세라자드여. 짐이 너에게 한 가지 일을 맡겨보고자 한다. 이제부터 너는 칸다하르 지방으로 파견될 로이드 프론테라라는 사내의 호위로 분하여 그와 자연스럽게 동행하거라."

"단지 호위뿐이옵니까? 그 외에 제가 무엇을 하면 될는지."

"그를 너의 것으로 삼거라."

"...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좋다. 검으로 제압을 해도 좋다. 약점을 잡아도 좋다. 어떻게든 그를 너의 남자로 삼아서 아힌샤로 돌아오거라."

"하면 아바마마께서는...."

"그러하다. 그자를 짐의 부마로 삼아볼 생각이니라."

생각하였던 것보다 훨씬 탐나는 인재니까.

전엔 그저 가지고 싶다고만 생각했는데.

막연한 욕심 정도로 그쳤었는데.

오늘 직접 만나면서 생각이 바뀌었으니까.

로이드 프론테라.

그자를 수하로, 아니, 사위라는 이름의 혈족으로 들이는 순간부터 술탄국의 미래가 바뀔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으니까.

"반드시 곁에 잡아두어야 할 것이다."

로이드를 떠올리는 술탄 사마르칸.

그의 눈동자에 인재를 향한 탐욕과 갈망이 짙게 피어났다.

188화. 욕심쟁이의 선행 (1)

 

 

며칠이 지났다.

그 며칠의 시간 동안 로이드는 똑같은 매일을 보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 낙타 등에 올랐다.

낙타 등 위에서 꾸준히 흔들렸다.

온종일 비슷한 사막 풍경을 보아야 했다.

그러다 달이 서쪽으로 기울어 아침이 오면 낙타 등에서 내렸다.

반쯤 졸며 아침을 먹고, 그늘 속 캠프에서 잠을 청했다.

그리고 저녁이 오면 다시 낙타 등에 올랐다.

그렇듯 매일 똑같은 나날이었다.

그런 며칠을 지낸 끝에야 비로소 변화라는 것이 찾아왔다.

매일 눈에 담던 사막.

그와 다른 광경을 며칠 만에 마주한 덕분이었다.

"이곳이 칸다하르 지방의 중심 도시 칸다라입니다."

"...."

술탄이 손수 붙여준 여성 호위무사.

세라자드의 이야기에 로이드가 귀를 쫑긋거렸다.

반갑게 물었다.

"그럼 목적지에 도착한 셈이군요?"

"그렇다고 할 수 있겠죠."

"후아."

로이드는 숨을 몰아쉬었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니.

반가웠다.

행복했다.

'이제 당분간은 낙타 등이랑은 안녕이겠네.'

그는 문득, 지난 며칠의 시간을 떠올렸다.

아힌샤에서 술탄과 공사 발주 계약서를 작성한 다음 날부터였던가.

아침 일찍 술탄이 보낸 사람들을 맞이해야 했다.

칸다하르 지방으로의 여정을 서둘러야 했다.

그 와중에 영문을 몰라 당황하는 특사단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렇게 부랴부랴 아힌샤를 출발했다.

며칠 동안 낙타 등 위에서 남극 탐험을 하는 기분을 만끽해야 했다.

'아무리 사막의 밤이 춥다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어.'

로이드는 내심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사막. 낙타.

그 단어들을 들으면 누구나 뜨거운 열기를 떠올릴 것이다.

로이드 또한 칸다하르 지방으로의 여정이 결정될 때 그런 이미지를 떠올렸다.

아힌샤를 출발하는 날에도 그랬다.

이제부터 엄청나게 무더운 사막을 횡단할 거라고.

그런데 선크림이 없어서 어떡하나 싶기도 했다.

한데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

기우인 정도가 아니라, 데우지도 않은 김칫국을 원샷 드링킹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었다.

여정의 양상이 예상과 정반대였기 때문이었다.

'열기가 들끓는 낮엔 무조건 그늘에서 캠프를 차리고 쉬었어. 그러다 저녁에 해가 지면 출발해서 밤새도록 이동했지.'

그렇게 해가 떨어지니 사막의 기온이 쭉쭉 하락했더랬다.

동시에 이쪽의 행복지수도 쭉쭉 하락곡선을 그렸더랬다.

추웠다.

살이 에이도록 추웠다.

게다가 칼바람은 어찌나 부는지.

군대에서 치르던 혹한기 훈련이 절로 떠오를 지경이었다.

한국에서 겨울마다 단벌로 입던 낡은 롱패딩이 그리워질 지경이기도 했다.

'아무튼, 이렇게 무사히 도착했으니 당분간은 그런 추위와는 안녕이야.'

원래부터 추운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로이드였다.

그런 추위를 피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목적지 도착이 반가웠다.

"그럼 이제 당분간은 여기서 머무르는 겁니까?"

로이드의 물음에 세라자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 이쪽으로. 우선 숙소로 모시도록 하지요."

"아, 저기. 그러면...."

"궁금한 점이 있습니까?"

"혹시 숙소에서도 그쪽 분께서...."

"세라자드라고 편히 부르시면 됩니다."

"아, 그럼 세라자드 양? 혹시 숙소에서도 그쪽이 절 호위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헙."

"설마 같은 방에 머무르는 겁니까?"

"역시 그렇습니다."

"...."

"왜 그러십니까."

어느새 이쪽을 빤히 돌아보고 있는 세라자드.

그녀의 흑진주 같은 눈동자가 부담스러웠다.

로이드는 쓴웃음과 함께 그런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밝혔다.

"조금 부담스러워서요. 아무래도 그쪽 분이 여자분이시다 보니."

"전 괜찮습니다."

"...제가 안 괜찮은데요."

로이드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숙소에서는 편히 지내고 싶습니다. 옷도 편하게 갈아입고, 눈치도 좀 덜 보고 싶고. 아무래도 세라자드 양이 함께 머물면 그게 좀...."

"하지만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께서 제게 로이드 님의 안전을 맡기셨습니다."

"제 안전이라면 아스라한 경이 지켜줄 겁니다."

"...."

세라자드의 눈길이 움직였다.

로이드가 툭툭 짚어 보이는 은발의 기사.

하비엘이 그곳에 있었다.

"출발하던 날에도 소개를 드렸다시피 원래 제 영지에서부터 저를 호위하던 기사입니다. 하비엘 아스라한 경이지요. 성격이 좀 쌀쌀맞고 막말로 명치를 후려치는 거랑 저보다 아주 약간 잘생긴 게 단점이긴 한데, 그래도 호위로는 제법 쓸 만한 친구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소문의 젊은 소드마스터와 이렇게 동행하게 되어 영광이었고요. 로이드 님보다 아주 약간이 아니라 아주 많이 잘생기신 듯하긴 하지만."

"...으음, 예. 어쨌건, 여기 아스라한 경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요?"

"숙소에서는 아스라한 경에게 제 호위를 넘겨주시면 어떨까 합니다만."

"지금 저보고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의 명을 어기라 강요하시는 겁니까?"

"으음, 그건 아니고."

로이드는 난감함을 느꼈다.

호위무사 세라자드의 태도가 너무나 단호해서?

물론 그런 이유도 있긴 했다.

하지만 더 큰 이유가 따로 있었다.

'술탄 그 사람, 보기보다 엄청 뻔뻔한 사람이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대놓고 자기 딸을 호위로 딱 붙여 버리냐.'

세라자드.

말로는 그저 뛰어난 호위무사라고 했다.

비록 여자의 몸일지언정 사막에서 손꼽히는 검객 중의 하나라고도 했다.

그러니 믿고 안전을 맡길 수 있다고.

날카로운 검술과 아울러 여성 특유의 섬세하고 꼼꼼한 점 덕분에 최고의 호위를 펼칠 거라고.

술탄이 직접 칭찬까지 하며 자신에게 붙여주었던가.

그러나 로이드는 알고 있었다.

소설 철혈의 기사를 읽은 덕분이었다.

술탄의 딸 중에 세라자드라는 이름이 있었다.

술탄이 자살하기 직전.

포위된 탑을 지키려 싸우던 이들 중의 하나였다.

사막 최고의 재능을 지닌 여성 검사라 하였던가.

덕분에 평생 궁을 벗어나지 못하는 일반적인 사막의 공주들과는 달리, 제법 어릴 때부터 궁 바깥을 드나들 수 있었다고 했다. 술탄의 특별한 허락하에 재능을 꽃피웠다고 했다.

그러나 술탄과 최측근 외에는 누구도 그녀가 술탄의 딸임을, 사막의 공주임을 모른다고 소설에서 언급된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도 대놓고 본명을 쓰며 움직이는 거겠지. 지금까지는 그랬어도 아무도 자신의 정체를 추측하지 못했을 테니까. 하물며 난 외국인이니까 더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걸 테지.'

일반적으로 사막의 공주들은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다.

얼굴은 물론이며 심지어 이름조차도 궁정 바깥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떡하나. 난 소설을 읽어 버렸는데. 처음 소개받던 날부터 술탄 딸이라는 걸 바로 알아봤는데.'

자신의 딸을 호위로 붙여준 술탄.

숙소에서마저 호위를 고집하는 딸.

그걸 보자 대강 느낌이 오는 로이드였다.

'아, 또다. 또야. 촉이 온다. 이거, 딱 그거네.'

너, 내 사위가 되어라.

술탄의 외침이 들리는 듯했다.

사실 로이드에겐 처음 겪는 일도 아니었다.

'크레모에서 그랬지. 자네, 내 사위가 되어주게. 나마란에서도 그랬어. 자네, 내 딸을 받아주게. 만약 국왕 누님한테 딸이 있었어도 그 말을 들었을지도 몰라. 너, 내 딸 데려가. 후아. 그런데 이젠 급기야 적국의 술탄까지 본격 장인어른 후보 대열에 뛰어드는 거냐.'

스스로도 믿기지가 않았다.

정작 딸들은 이쪽에게 관심이 없는 듯한데.

어째 매번 장인어른 후보들에게만 열렬한 인기를 끄는 건지.

'나, 아저씨들한테 예쁨 받는 타입인 건가.'

문득 피어나는 깨달음.

어째서 서러운 눈물이 눈꼬리에 사르륵 맺히려는 건지.

로이드는 남모를(?) 서글픔을 털어내듯 해탈한 심정으로 웃었다.

그리고 술탄의 딸, 세라자드를 쳐다보았다.

"예. 명을 어기라는 뜻입니다."

"...."

"괜찮습니다. 아힌샤로 돌아가면 술탄께는 제가 거짓으로 보고를 올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세라자드 양이 밤낮으로 헌신하며 저를 지켜줬다고 말입니다."

"물론...."

"부디 안 된다고 하진 마세요."

"...."

"당장 저도 소드 익스퍼트 중급의 수준을 갖추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세라자드 양이 호위를 위해 무리를 감수할 상황이 아니라는 거지요."

"하지만 저는...."

"압니다. 소드 익스퍼트 상급. 그래서 감각이 최고조로 올라와 계시겠지요. 하지만 어떡하지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이쪽의 아스라한 경은 소드마스터인데."

"...."

"자신이 소드마스터보다 더 철저한 호위를 해낼 수 있다는 증명을 해내신다면, 같은 숙소에 머무르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숙소에서의 자유는 보장받고 싶습니다. 세라자드 양을 번거롭게 해드리기도 싫고 말입니다."

"그 말, 진심이십니까."

"예, 진심입니다."

"...."

세라자드의 흑진주 같은 눈동자가 희미하게 일렁거렸다.

눈물?

아니었다.

그것은 분노의 불길이었다.

그래서 로이드는 속으로 만족했다.

'좋아. 날 더 미워해 줘.'

이쪽을 미워해 줘야 한다.

그래야 술탄의 장인어른 되기 작전이 보기 좋게 실패한다.

애초에 이쪽은 사막의 공주에게도, 술탄의 사위가 되는 일에도 관심이 하나도 없으니까.

'난 그저 풍요롭고도 평범하고 소소하게 살면서 평생 꿀이나 빨고 싶단 말이다.'

로이드는 그렇듯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열망을 담고서 빙그레 웃었다.

세라자드의 쏘아보는 눈길을 뻔뻔하게 받아냈다.

어깨를 으쓱.

마무리를 날렸다.

"그럼 이만 숙소로 안내해주시지요. 물론 세라자드 양이 따로 머물 곳도 알아보셔야겠지만."

"...."

사막의 공주는 대답 없이 몸을 돌렸다.

이쪽의 요구대로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그 몸짓이 평소보다 거칠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숙소로 안내받고, 짐을 풀었다.

세라자드가 따라붙기 전에 하비엘과 함께 재빨리 숙소를 나섰다.

아니, 나서려 했다.

"설마 절 따돌리려고 하셨던 겁니까?"

"...어, 음, 하하하."

숙소 문 앞 복도에서 딱 마주쳐 버린 세라자드.

설마 이쪽의 행동을 예상하고 기다린 걸까.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로이드는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여기서 많이 기다렸나요?"

"아뇨, 그다지. 저도 방금 왔습니다."

"그럼 혹시 이제부터 저와 동행하실 생각인 건가요?"

"예, 물론."

세라자드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래서 문제라고 로이드는 생각했다.

'아, 귀찮은데.'

가능하다면 떼어놓고 싶다.

특히 이제부터 곧바로 측량 작업 등을 시작해야 할 텐데.

'계속 저렇게 붙어 다니는 거 싫어. 부담스러워.'

실제로 세라자드가 자신을 호위하려는 것이든.

혹은 술탄의 명에 따라 친분을 쌓으려는 것이든.

어느 쪽이건 상관없이 부담스러웠다.

딱히 친해지고픈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실제로 측량 등의 작업을 할 때 저렇듯 옆에서 얼쩡거리면 신경이 쓰이고 집중에 방해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비엘이야 하도 오래 같이 다녀서 이젠 익숙하지. 녀석은 내가 측량을 할 때면 내 시선을 민감하게 감지해서 절대로 방해되지 않을 방향에 자리를 잡으니까.'

그런데 세라자드는?

그런 경험이 없다.

측량이 뭔지도 잘 모를 거다.

당연히 그녀에게 배려를 받을 기대도 접어두어야 할 터.

'그건 싫어.'

술탄에게서 따낸 공사를 하루빨리 끝내고 싶은 그였다.

그래야 특사와 술탄이 협상을 벌일 거다.

자신도 마침내 프론테라 영지로 돌아갈 수 있을 거다.

꿀 빠는 진정한 인생 2막을 누리게 되는 셈이다.

'그러니까 카나트 건설도 빠르게 끝내야 해. 측량? 당연히 후딱 해내야지.'

그런데 옆에서 누군가 얼쩡거리며 방해를 하게 된다면?

그만큼 시간이 걸릴 것이다.

프론테라 영지로 돌아가는 날도.

마음껏 꿀 빠는 인생을 누리는 날도.

그만큼 더 미뤄지게 될 것이다.

'절대로 싫어.'

로이드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어떤 구실을 대면 세라자드를 떼놓을 수 있을까.

그냥 하비엘한테 시켜서 확 기절시켜 버릴까.

혹은 어딘가에 가둬놓아 버릴까.

'아니야. 그래도 그건 좀. 자칫 그랬다가 나중에 아빠인 술탄한테 고자질하면? 사윗감이고 공사 계약이고 뭐고 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지도 몰라.'

그는 으스스해지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잠시 고민한 끝에 마침내 묘안을 떠올렸다.

"세라자드 양. 우리 잠깐 이야기 좀 할까요?"

"무슨 이야기죠?"

"이런 복도에 서서 나눌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괜찮다면 잠깐 안으로 들어오실까요."

짐짓 웃으며 세라자드를 숙소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녀의 눈빛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아까까지는 이쪽이 숙소에 들어가는 걸 그렇게 꺼리더니.

한데 지금은 나눌 이야기가 있다며 안으로 들어오란다.

"...."

그녀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보았다.

로이드가 하비엘에게 눈짓하는 모습을.

숙소 문밖에서 기다리라고 명하는 눈빛을.

'흐음.'

숙소 안쪽으로 안내를 받으며.

로이드의 손짓에 따라 소파에 걸터앉으며.

세라자드의 눈빛이 살짝 깊어졌다.

문득, 술탄의 명이 떠올랐다.

저 남자를 사위로 삼고 싶다 하셨던가.

그러니 어떤 수를 써서라도, 설령 약점을 잡아서라도 그를 사로잡으라 하셨던가.

"...."

생각보다 일찍 기회가 왔다.

모처럼 주위의 방해나 개입 없이 둘만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순간이다.

직감한 세라자드는 내심 각오를 다졌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기회다.

왕자로 태어나지 못한 설움을 만회할 수 있을 것이다.

'저 남자를 내 것으로 삼을 수 있다면.'

살가운 대화 정도는 얼마든지 받아 주리라.

그녀는 다짐하며 로이드를 바라보았다.

그가 꺼낼 말에 친근하게 대답할 수 있도록.

이참에 서로의 서먹한 관계를 개선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저 남자의 호감을 살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콘크리트는 PSC 부재와의 부착을 좋게 하고 단면치수를 줄이기 위해 높은 압축강도를 가진 고강도 콘크리트를 사용해야 하며, 이를 위해 가급적 물-시멘트비(W/C)를 작게 하고 워커빌리티를 개선시켜야 한다."

'...어?'

로이드가 입을 열었다.

난데없이, 괴상망측 해괴한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무슨?'

묻고 싶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고.

그런데 물을 수가 없었다.

"PSC의 제작에 사용되는 굵은 골재의 최대치수는 PS강재, 쉬스, 철근 등의 주위에 밀실하게 콘크리트가 잘 채워질 수 있는 범위에서 정해야 하며 보통의 경우 20mm 또는 25mm를 표준으로 한다."

"...."

스르르,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멍해졌다.

분명 저 남자가 하는 말을 듣고만 있는 건데.

그런데 기이하게도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이상해.'

평소에 잠을 못 자서 그런 걸까.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경지에 올라 버려서.

그날부터 모든 소리에 너무 민감해져 버려서.

도저히 잠들 수가 없어져서.

독기 하나로.

의지력만으로.

버티고, 버티며 지내 와서 그런 걸까.

어느새 단잠의 느낌을 잊어버렸던 걸까.

그래서 이 느닷없는 졸음이 반가운 걸까.

'지금... 잠들면 안 되는데.'

온몸이 나른해졌다.

귓가로는 천상의 노래 같은 로이드의 기이한 주문이 아른거리듯 살랑거렸다.

"부재에 프리스트레스를 도입할 때의 콘크리트 압축강도는 프리텐션에서 350kgf/㎠ 이상, 포트텐션에서는 300kgf/㎠로 하는 것이 좋다. 두 방식 모두... 어쩌고저쩌고... 최대도입 응력의 1.7배 이상이어야... 쏼라쏼라... 재령 28일 압축강도가... 얄리얄리얄라셩... 프리텐션부재에서 350kgf/㎠여야 하며... 블라블라...."

"...쌔근쌔근."

결국, 버티지(?) 못한 세라자드가 쌔근쌔근 잠들고 말았다.

로이드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맺혔다.

'따돌리기 작전, 성공.'

이제 여기서 그냥 아주 푹 주무세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아.

189화. 욕심쟁이의 선행 (2)

 

 

"성공하셨습니까."

"어? 응."

"푹 잠들었습니까."

"대강은."

"만족하십니까."

"아주."

로이드는 피식 웃었다.

숙소 문을 조용히 닫으며 하비엘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세라자드.

술탄의 딸이자 엄청난 재능을 지닌 여검사.

소설 속의 그녀는 정확히 소드 익스퍼트 상급에 머물러 있었다고 했다.

실제로 이곳 칸다라까지 여정을 함께 거치며 본 모습도 그랬다.

그녀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시도 쉬지 못하고 뒤척뒤척.

아주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도 귓바퀴가 쫑긋.

매일 그 모습을 보며 로이드는 내심 확신했더랬다.

'소드마스터 증후군이었지, 그건.'

확실했다.

예전, 처음 하비엘을 보았던 때와 너무나 흡사했다.

검술의 경지가 소드 익스퍼트 상급에 다다르며 모든 감각이 지나치게 예민해지는 현상.

그런데 소드마스터가 되지 못했기에 그 감각을 자유롭게 조절하거나 억제할 수가 없어서 생기는 괴로움.

그것이 소드마스터 증후군이었다.

세라자드의 상태가 딱 그랬다.

'아힌샤를 출발해서 여기 도착할 때까지 10분 이상 잠들어 있는 모습을 한 번도 못 봤거든.'

그렇기에 세라자드의 눈은 언제나 살짝 충혈되어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매일 노가다와 과제 양쪽에 떠밀려 잠을 희생당하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필살(?)의 자장가를 사용했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제대로 잠들었어. 아마도 이런 식으로 푹 잠들어 버린 건 처음이겠지. 그동안 밀린 잠을 즐기느라 내일은 돼야 깨어날걸. 그때의 너처럼."

로이드가 사악하게 웃었다.

예전, 처음 하비엘을 재웠던 때가 떠올랐다.

하비엘 녀석도 그때를 떠올린 걸까.

한층 쌀쌀해진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렇습니까."

"어, 그렇지."

"그래서 좋으십니까."

"음?"

"아닙니다. 일이 의도대로 됐다면 다음 일을 하시죠."

그 말만 마치고 쌩하니 몸을 돌리는 하비엘 녀석.

숙소 밖으로 향하는 복도를 먼저 걸어갔다.

한데 그 뒷모습이 좀 이상했다.

평소보다 걸음걸이가 조금 빨랐다.

그리고 아주 살짝 몸짓이 거칠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알아보지 못했을 모습.

그러나 거의 항상 하비엘과 붙어 다녔던 로이드는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음? 설마.'

촉이 온다.

입술을 히죽.

로이드는 짓궂은 미소를 그리며 재빨리 걸었다.

성큼성큼 복도를 걷는 하비엘의 뒤로 따라붙었다.

그리고 넌지시 물었다.

"너, 혹시 삐쳤냐?"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삐친 거 같은데? 내 말 맞지? 너 지금 나한테 뭔가 불만 있는 거지?"

"아닙니다. 불만 같은 거 없습니다."

"그런데 행동이 왜 그래?"

"제가 어떻길래 그러시는 건지."

"완전 삐친 티 팍팍 내고 있잖아."

"...불쾌한 추측이로군요."

"불쾌한 추측이 아니라 정확한 추측인 거 같은데?"

"틀린 추측이십니다."

"과연 그럴까."

로이드의 입술이 더욱 빙그레.

숙소 복도를 완전히 벗어나며, 건물 밖으로 나오며 하비엘의 곁에 나란히 따라붙었다.

녀석의 옆얼굴을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너, 자장가 때문이지?"

"...."

어느새 발길을 멈추고 이쪽을 돌아보는 하비엘.

정곡을 찔린 걸까.

마침내 녀석의 입이 열렸다.

"자장가 서비스, 공짜였던 겁니까."

"음?"

"저는 자장가를 듣기 위해 아스라한 심법을 전수해드렸었는데 말입니다."

"아하."

로이드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래서 삐치셨다?"

"삐친 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스라한 심법은 나도 함께 만든 공동저작물 같은 거잖아? 어차피 너도 핵심적인 부분을 완성하지 못한 채로 쩔쩔매고 있었던 거 아닌가?"

"하지만...."

"안심해. 공짜 아냐. 넌 내가 남한테 공짜로 뭔가를 베푸는 사람으로 보였냐."

"그건 절대 아닙니다."

"그렇지?"

"예. 로이드 님만큼 쪼잔하고 치사하며 뒤끝 지저분한 사람이 남에게 공짜로 뭔가를 베푸는 아름다운 모습 같은 건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이럴 때만 묘하게 구체적으로 말한다?"

"솔직한 사실을 말씀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흠흠, 어쨌건. 자장가 그거 공짜 아니야. 그러니까 안심해. 저 여자한테서도 자장가에 상응하는 것들을 두둑하게 뜯어낼 거니까."

"그런 겁니까."

"어, 그런 거지."

"역시."

"...."

저 녀석, 어째서 피식 웃어 버리는 건지.

대체 왜 어깨를 으쓱거리며 안도하는 건지.

로이드는 그만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어쨌건 이렇게 술탄의 딸을 무사히 따돌렸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할 일을 해야 할 차례다.

"곧바로 공사 지역을 둘러보실 겁니까."

"음, 일단 현지 분위기 파악부터."

"분위기 파악이라시면?"

"이곳 사람들이 어떤 상황인지부터 좀 봐야 할 거 같아서."

하비엘의 물음에 대꾸하며 부지런히 걸었다.

숙소에서 조금 떨어진 시가지로 갔다.

사막 소도시의 풍경이 펼쳐졌다.

황량했다.

아침부터 뜨거운 사막의 태양 아래.

모래 섞인 바람만 쉴 틈 없이 불어대고 있었다.

그 바람 가득한 광장에 줄을 선 주민들이 보였다.

로이드가 아힌샤에서부터 실어온 식량을 배급받기 위해 늘어선 줄이었다.

"다들 많이 굶주려 있었던 모양이군요."

하비엘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닌 게 아니라 주민들의 상태가 그리 좋지 못했다.

대부분이 다소 말라 있었다.

피부도 푸석하기 짝이 없었다.

그 모습에 혀를 차며 로이드가 대꾸했다.

"아무래도 긴 가뭄을 견뎌야 했을 테니까. 물은 부족하고, 작물은 생각만큼 자라지 않고. 이곳이 사막지대 중에서도 그나마 비옥한 곳이라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벌써 다들 굶어 죽었을걸."

사실이었다.

소설 철혈의 기사 속 내용이 떠올랐다.

이곳 칸다라 시.

소설 속 하비엘이 거쳐 간 장소 중의 하나였다.

몇 년의 가뭄을 버티고 버티다 마침내 거의 모든 주민이 죽고 흩어지는, 결국엔 사라지게 되는 도시이기도 했다.

'한데 술탄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지. 주민들에게 구호품을 베풀지 않았어. 심지어 주민들의 자유로운 이주마저 금지시켰지. 민심 이반을 막으려고. 그래서 결국 다들 여기에 발이 묶인 채 죽고 말았고.'

그게 반란의 원인이 된다.

술탄에 대한 원한과 반감.

그 뜨거운 불길이 하늘을 찌르게 된다.

마침내 술탄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게 된다.

즉, 이곳은 소설 속 술탄국 반란과 내전의 방아쇠이자 상징이 되는 지방이었다.

"어쨌건 술탄이 준 파다샤르가 있어서 마침 다행이었지. 저 식량, 알고 보면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이 쏘신 거다?"

"결국 남의 돈으로 생색을 내고 계시는 겁니까."

"뭐, 그런 셈이긴 한데."

로이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수행원에게서 식량을 받아가는 주민들을 씁쓸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식량을 가져왔어도 저 사람들은 우리가 딱히 예뻐 보이진 않나 보네."

"뭐, 그런 듯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힐끔힐끔.

수행원이나 이쪽을 보는 주민들의 눈빛이 그리 곱지 않았다.

아니, 정정.

곱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식량을 받아가면서도 이쪽을 경계하고 있었다.

냉담한 가운데 은근한 적개심을 내비치는 이들도 보였다.

그러나 로이드는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주민들이 저러는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술탄의 명으로 여기 와서야.'

술탄과 공사 발주 계약을 했다.

그의 명을 받고 여기에 왔다.

술탄이 붙인 호위무사.

거기에 수행원들까지.

삐까번쩍한 일행을 이끌고 왔다.

그러니 이곳 주민들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였을까.

'술탄의 끄나풀. 혹은 원망스러운 앞잡이. 그 정도로 보이겠지.'

로이드의 쓴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몇 년째 가뭄에 고통받는 이곳 지방.

하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풍요로운 수도 아힌샤.

아힌샤는 언제나 풍요로웠다.

가뭄과 인연이 없는 도시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술탄이 아힌샤에 있기 때문이었다.

'술탄이 항상 엄청난 돈을 쓰지. 대량의 자금을 들여 마법사를 고용하고 수천의 짐수레와 상선을 동원해서 갖가지 수단으로 물을 아힌샤로 실어날랐어.'

덕분에 아힌샤에 물이 모자라는 일은 결코 없었다.

반면 그런 술탄의 은덕을 입지 못하는 다른 지방은?

가뭄이 들이닥치기만 하면 수난을 겪어야 했다.

비쩍 말라가는 대지.

그 위에서 비틀어져 가는 농작물.

그걸 보며 절망하고, 굶어 죽은 자식을 눈물로 끌어안아야 했다.

하지만 그런 메마르고 잔인한 터전을 버리고 떠날 수도 없었다.

풍요로운 아힌샤로의 이주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신분 때문이었다.

'이곳 술탄국은 백성들의 신분이 명확하게 나누어져 있지. 지방별로 신분에 차등을 두었어. 수도 아힌샤에 사는 시민들이 최상위 계급. 그 주위 수도권에 사는 이들이 다음 계급. 그리고 지방에 사는 하위 계층 순으로.'

아힌샤에서 가까운 곳에 살수록 신분이 높았다.

신분이 낮은 이들은?

자신의 신분 계급에 맞는 지방에서만 거주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즉, 한번 하위 계급으로 태어난 사람은 평생 수도 아힌샤에 발끝도 들일 수 없는 셈이었다.

'더러운 거지. 치사한 거야. 그렇다고 해서 신분 상승이 좀처럼 가능한 것도 아니고. 차라리 로또 1등 당첨될 확률이 더 높다고 해야 하나.'

즉, 술탄국의 낮은 신분 사람들은 평생을 가뭄에 허덕이며 간신히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야. 술탄국 지방 곳곳에서 술탄에 대한 반감이 쌓인 건.'

만약 먹고 사는 일이 풍요롭다면 별문제가 없었을 터다.

실제로 200년 동안은 그랬다.

하지만 근래에 가뭄이 잦아지고 나서는?

주민들의 불만이 급격히 고조되었다.

이곳 칸다하르 지방도, 지방 중심도시인 칸다라의 분위기도 똑같았다.

이미 술탄은 저들에게 원수나 다름없는 듯했다.

단지 힘이 없어서 목소리를 낼 수 없을 뿐.

당연히 술탄의 명으로 여기 온 자신도 절대로 예뻐 보이지 않을 터다.

설령 식량을 베푼다 해도 그렇다.

'당연하지. 저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거든. 평생을 고통에 빠져 살게 묶어 두면서 이렇게 가끔 식량을 베푼다? 절대로 고맙지 않을걸. 오히려 가축처럼 관리 받는 기분이 들 거야. 나 같아도 그러겠어.'

그렇게 생각하니 이곳 주민들의 이쪽을 보는 적개심 어린 시선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답답한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후. 협조가 필요한데."

"예?"

넋두리처럼 내뱉은 혼잣말.

그걸 들은 걸까.

하비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아니. 됐다. 분위기 파악은 이만하면 됐으니까 움직이자."

녀석을 이끌고 인적이 별로 없는 곳으로 갔다.

품속에서 꼬밍이를 꺼냈다.

"꼬밍아?"

"꼬밍!"

"오늘 우릴 좀 태우고 움직여줘야 할 것 같아. 무더운데 괜찮겠어?"

"꼬미밍!"

"그래, 고마워."

아무 문제 없다는 듯 고개를 뽀잇 끄덕이는 꼬밍이.

그런 녀석의 동글동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안주머니 속의 다른 아이들에게도 물었다.

"다들 덥진 않아?"

"뽀동!"

"방울!"

"하망!"

"심심하거나 배고프진 않고?"

"뽀! 방! 하!"

언제나 괜찮다며 씩씩하게 대답하는 아이들.

그 모습에 고맙고도 대견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다행이야. 그럼 출발할까."

꼬밍이에게 빨간 해바라기 씨를 먹였다.

하비엘과 함께 그 등에 몸을 실었다.

펼쳐진 날개와 함께 비상했다.

"서쪽으로!"

"꼬밍!"

순식간에 고도를 높여 칸다라 시를 벗어났다.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서 쭈욱 날았다.

수많은 모래 언덕이 아래로 지나갔다.

그동안 로이드는 측량 스킬을 활성화시켰다.

정확히는 측량 스킬의 옵션인 '지하 스캐닝'을 발동했다.

'어디 보자.'

그의 눈길이 지하를 훑었다.

지표면에서 5미터 아래까지.

행여나 빠뜨리는 곳이 없도록 꼼꼼하게 시선을 움직였다.

그러나 로이드는 원하는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없네. 설마 5미터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건가."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

아무것도 아니라니.

그런데 왜 난감한 기색을 비치는 걸까, 로이드 님은.

꼬밍이의 등에 함께 탄 하비엘은 의문을 느꼈다.

'공사를 진행할 지역을 살펴보는 거겠지. 측량이라 했던가. 그런데 로이드 님의 모습이 평소와는 조금 달라.'

평소 측량을 하던 태도와 어쩐지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냥 지형을 살피는 게 아니었다.

분명 뭔가를 딱 짚어서 찾는 듯했다.

한데 그게 좀처럼 잘 발견되지 않는 듯했다.

'뭘 찾고 있는 걸까.'

하비엘은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그 의문의 답을 알아내기 전에 아래쪽의 풍경이 바뀌었다.

부지런히 서쪽으로 날아온 꼬밍이.

그 날개 아래로 사막의 모습이 사라졌다.

드문드문 풀밭이 보이는가 싶더니 산기슭이 펼쳐졌다.

산에서 흘러내려 온 물줄기가 곳곳에 보였다.

"더 위로."

"꼬밍!"

꼬밍이의 날갯짓이 산기슭을 거슬러 올라갔다.

바람이 점점 서늘해졌다. 차가워졌다.

마침내 날개 아래로 새하얀 만년설이 펼쳐졌다.

로이드는 눈밭 위로 꼬밍이를 착륙시켰다.

그리고 눈밭을 살폈다.

"흐음. 좋아. 오염물질도 없고. 박테리아도 없고. 당연히 염도도 낮고. 딱 좋아."

로이드의 눈빛에 만족스러운 감정이 떠올랐다.

여기가 카나트로 쓸 물이 만들어지는 자리다.

이곳의 만년설이 녹으면 산기슭을 흐르는 물줄기가 된다.

그 물줄기를 따라 취수장을 만들면 된다.

그렇게 모은 물을 지하로 통해 수송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망아?"

"하망!"

"오늘 일 좀 하자."

"하마망!"

로이드가 품에서 하망이를 꺼냈다.

눈밭을 가리키며 친절하게 물었다.

"너, 혹시 얼음과자 좋아해?"

"하망!"

"물이 들어간 건 다 좋다고?"

"그럼 저것도 괜찮아?"

"하마망!"

물론이라는 듯 고개를 뽀잇 끄덕이는 하망이.

로이드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그럼 좋아. 저거 최대한 다 머금어서 물로 만들자. 아까 칸다라 시 있지? 거기 사람들이 목이 많이 마르대."

"하망!"

그때부터였다.

하망이가 제 세상을 만난 듯 눈밭으로 도도도 뛰어갔다.

새하얀 만년설을 한입 가득 머금었다.

삼켰다.

만년설이 녹아서 뱃속을 채웠다.

하망이의 행복지수가 그만큼 상승했다.

"하마망! 하망! 하마마망!"

계속해서 눈을 먹어치웠다. 출렁출렁. 배를 채웠다. 하망이의 몸이 급속도로 커졌다. 마침내 지름 70미터짜리 물풍선처럼 부풀었다.

"배 좀 빵빵해지니까 좋아?"

"흐므믕! 흐믕!"

완전 대만족이라는 듯 행복하게 대답하는 하망이.

로이드의 얼굴에도 웃음이 배었다.

"좋아. 그럼 돌아가자."

"흐믕!"

다시 날아올랐다.

꼬밍이를 타고서 훨훨 동쪽으로.

하망이는 데굴데굴 굴러서 동쪽으로.

산기슭을 내려오고, 사막을 횡단했다.

마침내 칸다라 시에 돌아왔을 땐 밤이 깊어 있었다.

"어쩌시렵니까, 로이드 님. 하망 경이 머금은 물, 이곳 주민들에게 베풀기 위해 담아 오신 듯한데."

"어, 맞아. 베풀려고 가져온 거."

"그럼 아침까지 기다리실 겁니까?"

"응? 왜?"

"그야 주민들이 다들 자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다 깨워야지."

"예?"

하비엘은 귀를 의심했다.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오늘 취수장 만들 산기슭까지 다녀오면서 봤지? 얼마나 먼지."

"예."

"거의 40킬로미터는 될 것 같았거든."

"예, 그랬습니다."

"그래서야."

로이드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공사 거리가 너무 멀어. 이번 일은 우리끼리는 절대로 못 해. 여기 사람들 도움이 무조건 필요해. 그러니까 지금 다 깨워서 물 나눠줘야지."

"하지만 베풂과 선행이라는 건...."

"티 팍팍 나게 해야 하는 법이지. 아암, 그렇고말고."

로이드가 사악하고도 보람차게 웃었다.

"그래야 점수 팍팍 따는 거 아니겠어?"

190화. 욕심쟁이의 선행 (3)

 

 

'그래야 점수 팍팍 따는 거 아니겠어?'

이쪽을 돌아보며 짓던 웃음.

사악하고 행복해 보였다.

얄밉고도 보람차 보였다.

그래서 생각했다.

'이 사람은 이게 진심인 거야.'

로이드 프론테라.

자신이 모시는 도련님.

과거엔 망나니였던 극도의 얄미운 진상.

저 사람은 어떻게 저런 생각을 떠올리는 걸까.

대체 어떻게 저런 행동을 서슴없이 실행하는 걸까.

하비엘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한편으로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신비감마저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한밤의 광장에 모여든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칸다라의 시민들이었다.

"자아! 줄 서세요, 줄! 양동이든 바가지든 빼먹지 마시고!"

길게 늘어선 시민들의 줄.

그 맨 앞에서 로이드가 보람차게 외쳤다.

아직 잠이 덜 깨어 멍한 사람들을 줄 세웠다. 하품하는 이들을 사근사근 이끌었다. 의아함에 두리번거리는 이들을 재빠르게 인도했다.

그리고 차례대로 물을 나누어 주었다.

"자아, 하망아?"

"흐믕?"

"알지? 안 넘치게 조금씩만 뱉어주는 거야?"

"흐므믕!"

직경 70미터짜리 거대한 물풍선, 아니, 하망이가 야물딱지게 대답했다.

그리고 로이드의 당부를 충실히 지켰다.

"양동이 하나 가자!"

"흐믕!"

 

쫄쫄쫄!

 

하망이가 입에 문 대롱을 통해 물을 뱉어냈다.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드높은 산맥.

그 꼭대기에 쌓인 만년설이 녹은 물이었다.

그야말로 순수하기 짝이 없는 1등급 청정수가 순식간에 양동이를 채웠다.

로이드의 미소 사이로 새하얀 치아가 뻔뻔하게 반짝였다.

"자, 이걸로 오늘 하루 힘내십시오?"

"아, 예...."

얼떨떨한 표정의 시민 하나가 가득 찬 양동이를 낑낑대며 들고 갔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황당함을 지울 수 없는지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태연한 미소의 로이드를 한 번 쳐다봤다가.

산더미처럼 엄청난 크기의 하망이를 올려다봤다가.

자신이 들고 있는 양동이 속 찰랑대는 맑은 물을 쳐다봤다가.

이게 웬 행운인가 싶고.

그래서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루를 넉넉히 버틸 물을 품고서.

그렇게 집으로 돌아갔다.

대부분의 시민들이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로이드의 입가에도 보람찬 미소가 듬뿍 피어났다.

'좋아. 정말로 좋아. 역시 선행은 이렇게 하는 거지. 티를 팍팍 내면서!'

정말이다.

티를 팍팍 내야 한다.

안 그러면 오히려 곤란해진다.

'남모를 선행? 그러면 진짜로 남들이 몰라주거든.'

이쪽은 실컷 봉사만 하고.

힘은 들이는데 알아주는 사람은 없고.

그러면 돌아오는 보람과 대가가 아무것도 없어진다.

그건 결코 자신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난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니니까.'

이 세상엔 존경받을 훌륭한 사람들이 많다.

특히 숨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남모를 선행을 베푸는 분들이 그렇다.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는 분들이다.

자신의 힘듦과 고난도 감수하는 분들이다.

그럼에도 남들이 알아주는 것조차 바라지 않는 분들이다.

그저 자신의 선행과 봉사의 결과로 누군가가 행복해지는 것.

그것 하나만을 바라보며 진실한 베풂을 실천하는, 그런 훌륭한 사람들이 이 세상엔 많았다.

반면 자신은?

'난 그런 사람 아니야. 아니, 못 돼.'

자신은 다르다.

그렇게 훌륭하지 못하다.

감히 그런 건 바라지도 못한다.

게다가 자신은 그런 훌륭한 분들과 달리 선행의 결과로 돌아올 명백한 대가를 바라고 있었다.

즉, 보상 없는 베풂을 펼치는 게 아니라는 소리다.

'얻어낼 걸 바라면서 하는 거지. 예를 들자면 주민들의 협력 같은 것들.'

로이드는 물을 받아가는 주민들을 바라보았다.

놀라움과 황당함에 빠진 모습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이쪽을 보는 눈길은 아직 차가웠다.

저 인간이 왜 저러나 싶은 경계심.

뭔가 노리는 게 있나 싶은 의구심.

그런 냉랭한 감정이 시선에 담겨 있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였다.

'저 시선을 바꿔야 해. 이곳 사람들의 경계심을 풀고 호의를 얻어내야 해. 그게 이번 시공의 핵심이 될 거야.'

카나트.

자신이 술탄에게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한 시설.

하지만 그걸 만드는 과정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거리가 너무 멀어.'

아까 낮에 갔던 산맥이 떠올랐다.

측량의 결과로 얻은 직선거리가 무려 36킬로미터에 달했다.

대한민국으로 치자면?

서울역에서 직선거리로 파주시 문산읍까지가 딱 그 정도가 나온다.

서울시 중심부에서 휴전선 인근까지 한 큐에 다이렉트로 닿을 거리라는 뜻이다.

동서로 범위를 바꾸면?

제일 동쪽에 있는 강동구 끝자락에서 제일 서쪽의 김포국제공항 건너편 강서구 끝자락까지의 직선거리가 딱 36킬로미터 언저리가 찍힌다.

심지어 남쪽으로는 서울역에서 수원까지도 갈 수 있다.

말 그대로 엄청난 거리인 셈이었다.

'그래서야. 한데 그냥 공사를 하면? 카나트를 다 만들기까지 족히 1년은 넘게 걸리겠지.'

고성능 굴착 머신(?)인 방울이와 하비엘의 발파까지 동원해야 겨우 그 정도로 공사 기간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건 로이드가 원하는 바가 결코 아니었다.

'안 되지, 그건. 안 되고말고. 내가 미쳤다고 이런 데서 1년씩이나 썩어? 말도 안 되는 소리.'

심지어 자신의 영지도 아니다.

남의 동네 잘되라고.

술탄과 협상 좀 벌여 보겠다고.

자신의 아까운 인생을 1년이나 갖다 바치며 이곳에서 썩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였다.

'이 지방의 지하 곳곳에 굴이 있다고 했어.'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나온 내용이 떠올랐다.

이곳 칸다하르 지방의 지하에는 복잡하게 얽힌 땅굴이 있다고 했다.

자연적인 굴은 아니었다.

거의 천 년 전쯤이었던가.

당시 종교적 탄압을 피해 이곳 지방에 숨어들었던 수도사들이 팠던 굴이라고 했다.

무려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굴을 파고, 또 팠다고 했다.

그렇게 삼대에 걸쳐 은둔 생활을 했다고 하였다.

'그때 팠던 굴 대부분이 아직까지도 온전하게 남아 있다고 했지. 덕분에 술탄에게 반기를 든 반군이 그 굴을 아지트로 삼을 수 있었고.'

로이드는 그 굴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산맥에서 이곳까지.

맨땅에 새 굴을 파는 것보단.

기존에 있던 굴을 연결하는 작업이 훨씬 편할 테니까.

'일직선으로 이을 순 없겠지. 그래도 최적의 경로를 찾으면 돼. 독립적으로 분산된 수십 갈래의 굴을 최단거리로 이어주는 경로. 굴착 거리가 최소화될 수 있는 경로. 그러면서 지하를 통해 흘러올 물이 다른 곳으로 새지 않을 수 있을 경로.'

그걸 찾아내면 된다.

측량과 설계로 설정하면 된다.

게다가 기존의 땅굴을 이용하는 것에는 공사 기간과 노력의 단축 외에도 또 하나의 장점이 있었다.

'지하에 판 굴이기에 방수 작업이 되어 있어. 즉, 기존의 지하수가 땅굴로 스미거나 새어들지 않도록 철저하게 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야.'

카나트 시공의 핵심은 기존의 지하수가 수로 속에 스미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야 산맥에서 끌어오는 물의 오염을 막을 수 있다.

한데 이미 방수 작업이 되어 있는 땅굴을 이용하면?

그 걱정을 덜어낼 수 있다.

시공에 드는 노력과 시간을 추가로 줄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야. 아까 측량을 하면서 땅속을 계속 살폈지. 한데....'

땅굴을 찾을 수 없었다.

눈이 충혈되도록 지하 스캐닝 옵션을 돌려도 그랬다.

그 결과가 알려주는 뜻은 명확했다.

'수도사들의 땅굴이 지하 5미터보다 깊은 곳에 있다는 뜻이야.'

지표면에서부터 5미터까지만 볼 수 있다는 것.

그게 자신이 지닌 지하 스캐닝 옵션의 한계였다.

그보다 깊은 곳은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일일이 땅을 파면서 찾아다닐 수도 없고.'

그건 너무 비효율적이다.

아무리 땅굴이 많다 해도 그렇다.

어쩌다 운이 좋아서 땅굴 하나를 찾아낸다 해도?

독립적으로 흩어져 있는 땅굴 수십 개를 더 찾아야 한다는 과제가 남는다.

'그렇게 할 바엔 차라리 1년쯤 시간을 들여서 맨땅을 뚫는 게 더 빠를걸.'

효율이 너무 떨어진다.

그것 또한 자신이 바라는 바가 결코 아니었다.

'그러니까 남는 건 이 방법이지.'

로이드는 다짐했다.

주민들의 경계심을 풀어야 한다.

호의를 사서 믿음을 얻어내어야 한다.

저들은 이곳의 토박이들이니까.

일부는 이미 반군에 협력하고 있을 테니까.

저들의 믿음만 살 수 있다면 수십 군데에 흩어진 땅굴의 위치를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일념으로 로이드는 더욱더 티 팍팍 내는 선행(?)에 박차를 가했다.

주민들에게 물 배급을 마친 후.

뽀동이를 동원했다.

"자, 여기부터 여기까지. 쭈욱 파는 거야."

"뽀동!"

 

호바바밧!

 

네모 반듯하게 땅을 팠다.

타일처럼 납작한 돌을 꼼꼼히 깔았다.

거기에 남은 물을 모조리 부었다.

"하망아? 알지?"

"흐므믕! 오에엑-"

하망이가 남은 물을 모조리 토해냈다.

방금 뽀동이가 파내고 로이드가 다듬은 구덩이에 찰랑찰랑 물이 가득 찼다.

임시 풀장, 아니, 저수장을 만든 셈이었다.

"자, 낮 동안 물이 증발되지 않도록 이렇게 차양도 둘러주고."

저수장 주위로 기둥을 세웠다.

기둥에 커다란 천을 씌우고 덮었다.

그렇게 따가운 햇볕을 막아줄 임시 차양 설치도 마쳤다.

"후우."

모든 작업을 마치고 나니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건 뭡니까."

"팻말."

하비엘의 물음에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팻말을 저수장 앞에 꽂았다.

팻말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이곳은 로이드 프론테라가 칸다라 시의 여러분을 위하여 조성한 임시 저수장입니다. 기본적으로 물 이용료는 공짜이며, 누구나 이용할 수 있습니다. 물은 매일 밤 새로 길어와 이곳에 저장될 예정입니다.]

 

"...."

팻말을 살피는 하비엘의 눈동자가 계속 움직였다.

더 아래쪽에 추가로 쓰인 깨알 같은 글귀를 읽어내렸다.

 

[이처럼 맑은 물을 공급하기 위하여 로이드 프론테라는 매일 밤잠을 거르고 머나먼 산맥까지 고난과 역경의 길을 다녀옵니다. 오로지 칸다라 시의 여러분을 위해서! 발이 부르트도록! 일신의 고단함을 감내하면서! 몸살이 나고 열이 펄펄 끓어도! 설령 과로로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그러나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서! 오직 여러분의 행복과 안녕을 위하여! 로이드 프론테라는 천사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오늘도 정성껏 물을 길어옵니다.]

 

"...."

천사 같은 순수한 마음?

일신의 고단함을 감내한다고?

하비엘은 로이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로이드가 콧김을 풍 내쉬었다.

"뭐. 왜. 뭐."

"...."

"왜 또 그렇게 사람을 가자미눈 뜨고 보는 건데."

"너무 양심이 없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양심이? 내가?"

"예."

"어째서?"

"솔직히 말씀드려서 로이드 님, 정작 본인은 거의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서 떠온 물 아닙니까?"

"무슨 뜻이야, 그게."

"사실이 그렇잖습니까. 저 물, 하망 경이 열심히 마시고 구르며 떠온 건데."

"...."

"게다가 로이드 님은 그저 꼬밍 경의 등에 편하게 앉아서 날아다니기만 했는데."

"...흠! 커흠! 그게 광고란 거야."

"광고요?"

"그렇지. 바로 그거지."

로이드가 이 시대의 비양심 악덕업주 같은 미소를 상큼하게 피워냈다.

"아름다운 결과를 위한 광고랄까. 일종의 포장지 같은 거야. 이곳 사람들이 진실에 신경 쓸 것 같아? 절대로 아닐걸. 그저 자신들이 얻는 맑은 물이 중요하겠지. 내가 이 물을 어떻게 떠 왔는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를 신경 쓰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 것 같냐."

"결국 원하는 결과를 위해 과장과 거짓을 서슴지 않겠다는 말씀이시군요."

"뭐, 그래도 유통과정에서 비리를 저지르진 않잖아?"

사실이다.

이건 진짜로 맑은 물이다.

그저 담아오는 과정을 조금(?) 과장해서 신파를 섞었을 뿐.

물 자체는 만년설을 녹인 1등급 청정수 그 자체였다.

가뭄으로 고통받던 이들에겐 정말로 생명수가 될 소중한 물인 셈이었다.

"너도 알잖냐. 세상에 먹을 거랑 마실 거로 장난치는 비양심 악덕업자가 얼마나 많은데. 그거에 비하면 난 얼마나 양반이냐. 원산지를 속이지도 않아. 재료에 뭘 섞지도 않아. 그렇다고 돈을 받길 하나. 크으.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또 없어요. 안 그래?"

"...."

하비엘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뭔가 사실관계로만 따지면 다 맞는 말이긴 한데.

막상 저 말들을 로이드가 지껄여대니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로이드는 과장과 거짓의 MSG 양념이 듬뿍 담긴 팻말을 저수장 앞에 꽂아두었다.

한데 그의 선행 티 팍팍 내기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자, 가자."

"예?"

"고개 갸웃거리기는. 홍보하러 가야지."

"...."

홍보? 뭘?

하비엘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로이드를 따라나섰다.

햇볕 쨍쨍한 아침의 거리가 이쪽을 반겼다.

그때부터였다.

하비엘은 로이드의 새삼스러운 진면모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다.

"아이고! 반갑습니다, 어르신. 안녕하십니까?"

"어? 예?"

"저 기억 못 하시겠습니까?"

로이드가 활짝 웃으며 물었다.

아침의 거리를 걷다가 졸지에 로이드에게 손을 붙잡힌 노인이 당황하여 대꾸했다.

"그쪽이야 물론...."

"로이드 프론테라입니다. 저 기억하시죠? 지난 새벽에 저 보셨지요?"

"어, 그건...."

"예예. 저도 물론 기억합니다. 저한테 23번째로 물을 받아 가신 어르신이시니까 말입니다. 어디 보자, 역시나 제 기억이 맞네요. 밤에 보나 아침에 보나 어쩌면 이렇게 신수가 훠어언하신지. 혹시 어젯밤에 담아가신 물은 어땠습니까? 입맛에는 좀 맞으시던가요?"

"어, 으음, 물론...."

"아, 좋으셨군요.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저기, 나는...."

"물이 너무 차갑거나 뜨겁진 않았지요?"

"당연히...."

"다행히 온도도 잘 맞았나 보네요. 아이구, 정말 잘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두 손으로 악수를 한 채로 허리를 넙죽넙죽.

기름칠 매끈하게 먹힌 경첩처럼.

혹은 빠릿하게 움직이는 폴더폰처럼.

로이드의 허리가 팍팍 90도로 숙여졌다.

그렇게 이름 모를 평범한 노인을 향해 인사하고, 또 인사했다.

동시에 자신의 지난밤 선행과 치적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언급하고, 강조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어르신!"

"어... 그, 그럼세."

얼떨떨함과 당황에 휩싸인 노인이 황급히 걸음을 서둘렀다.

하지만 로이드는 여전히 안면에 철판을 깔았다.

'이럴수록 더 뻔뻔해져야 해.'

애매하게 굴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자신이 이곳 사람들의 편임을 확실하게 알려야 한다.

그렇듯 로이드는 본격 선거철을 맞이한 정치인 같은 친근함으로 정신무장을 다졌다.

물론 선행의 실천도 멈추지 않았다.

매일 밤 산맥에서 물을 떠 왔다.

임시 저수장을 찰랑찰랑 채웠다.

낮엔 사람들에게 인사를 다니며 자신의 선행을 적극 홍보했다.

그렇듯 열심히 지내길 보름째.

마침내 그를 향한 사람들의 태도에 변화의 첫 조짐이 찾아왔다.

191화. 납치와 낚시 사이 (1)

 

 

"옹벽의 상부 가까이 차량 교통이 건물과 같은 등분포하중이 있는 경우에는 이들 하중이 옹벽에 토압을 증가시킨다. 건물과 같은 고정하중은 건물의 중량을 옹벽의 뒤채움 흙의 중량으로 환산하여, 그만큼 흙이 더 있는 것으로 보고 토압을 계산한다."

"자, 잠깐...."

노을이 사라지고 얼마 되지 않은 초저녁.

사막 도시 칸다라의 어느 숙소.

일렁이는 촛불 아래 착 가라앉아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 목소리는 진지했다.

동시에 너무나 일정했다.

음정의 고저도, 일체의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깃들어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과도한 지식의 나열.

그 차분하여 더욱 무자비한(?) 자장가의 폭격 앞에 어느 여인이 애원했다.

제발 그만 해달라고.

이대론 쓰러질 거 같다고.

원통하게 눈을 감아 내일 아침이나 되어야 깨어날 것 같다고.

그러나 자장가를 낭독하는 남자의 나직한 목소리엔 조금의 자비도, 관용도, 얄짤도 없었다.

"옹벽의 상부 근처에 설치된 도로나 철도의 영향은 반복하중으로 인한 동역학적 반력을 일으키기 때문에 정확하게 정적하중으로 환산할 수 없다. 그러나 도로의 경우 DB-24 및 DB-18 하중에 대하여 1tonf/㎡, DB-13.5 하중에 대하여 0.7tonf/㎡로 등분포 상재하중이 작용한다고 보고 설계하는 것이 보통이다."

"...쿠우울."

저항하던 여인, 세라자드가 잠들었다.

자비 없는 남자, 로이드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좋아."

역시 소드마스터 증후군 환자는 자장가로 재우는 게 최고다.

평소부터 워낙 뿌리 깊은 불면증 환자들이라서.

덕분에 항상 수면부족에 시달리는 상태라서.

자장가가 정말 정말 잘 먹힌다.

심지어 매일 재우는 것 때문에 생길 약발(?) 저하 부작용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습관이 되어 버리니까.'

수면 부족에 시달리던 이가 한번 자장가로 깊이 잠드는 경험을 하고 나면?

그렇게 인생 꿀잠을 한번 겪어 버리고 나면?

그 경험이 몸에 강렬한 각인으로 남겨진다.

계속 자장가를 찾게 된다.

몸이 더욱 원한다.

자장가를 불러달라고.

오직 그것만이 자신을 편히 재울 수 있다고.

말 그대로 정신보다 몸이 먼저 찾는 습관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걸 하비엘이 지금까지 꾸준히 증명해줬고 말이지, 후후훗.'

심지어 하비엘은 소드마스터가 되었는데도, 그래서 감각을 제어할 수 있게 되었는데도 아직껏 자장가에 어느 정도 의지하고 있다.

'그러니까 저 술탄의 딸도 별수 없을 거야.'

하비엘도 못 끊은 걸 저 여자가 끊을 리가 없다.

아마 내일 아침까지는 정신도 못 차리고 푹 잘 테지.

확신한 로이드는 조용히 세라자드의 방을 나섰다.

가벼운 걸음으로 자신의 숙소로 돌아왔다.

"하비엘? 많이 기다렸냐?"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어쩐 일인지 숙소가 텅텅 비어 있었다.

로이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쯧. 산책이라도 나간 건가. 지금 아니면 잠들 기회 없을 텐데."

애석하지만, 이러면 오늘 하비엘은 못 잔다.

녀석이 돌아오길 기다려 줄 생각이 없으니까.

그 전에 이쪽부터 지금 바로 잠자리에 들 생각이니까.

"에고. 얼른 자자."

로이드는 대강 부츠만 벗고는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지금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야 한다.

자정에 무조건 일어나야 하니까.

꼬밍이를 타고, 하망이를 데리고 서쪽 산맥에 물을 뜨러 가야 하니까.

지금 당장 눈을 붙여야 서너 시간이나마 잘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고 있자니 문득, 지난 며칠 동안의 일들이 떠올랐다.

이쪽을 의심과 냉대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이곳 주민들.

술탄의 끄나풀일 거라고.

비열한 앞잡이일 거라고.

원망하듯 노려보던 눈길들.

그 눈길 앞에서 철판을 깔았다.

매일 서쪽 산맥에서 물을 떠 왔다.

이쪽을 원망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생색이란 생색은 다 냈다.

'내일도 그렇게 하자. 아침에 사람들 모아서 물을 나눠주는 거지. 물 나눠준 게 이제 며칠째지. 보름쯤 됐나. 슬슬 날 보는 눈빛이 바뀔 때도 됐는데. 입질이 올 때도 됐는데. 오늘은 그 입질, 오려나.'

알 수 없다.

이쪽은 다만 낚싯대를 드리웠을 뿐.

낚싯바늘을 무는 것은 물고기의 마음에 달렸다.

그러니 자신은 기다릴 뿐이다.

최대한 맛있는 미끼를 뿌리며.

고요한 수면을 바라보며.

그 아래의 움직임을 예상하며.

변화의 물결이 일렁이길 다만 기다릴 뿐.

그러니까 나는....

'....'

눈앞이 침침.

기분이 몽롱.

온몸이 떠오르는 듯.

혹은 침대 속으로 가라앉는 듯.

졸음이 몰려왔다.

의식이 꿈나라로 흘러갔다.

온몸이 이완되고.

숨이 편안해지고.

목이 콱 조여들고.

 

콰악!

 

"...!"

갑자기 목덜미를 움켜쥐며 내리누르는 손아귀.

로이드는 눈을 부릅떴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아니, 뻗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누군가가 팔을 잡았다. 온몸으로 내리눌렀다. 두 팔 모두. 다리까지.

"...그읍! 으읍! 읍!"

로이드는 목과 사지가 내리눌린 채로 버둥거렸다.

상대가 여럿이었다.

그들을 확인하려 애썼다.

불 꺼진 어두운 실내.

그 어둠 속에서 습격자들의 실루엣이 얼핏 보였다.

'열 명?'

아니, 그보다 더 많다.

자신을 내리누르는 이가 다섯.

그 주위로 대여섯 명 이상이 추가로 둘러서 있었다.

그는 아스라한 심법을 즉시 발동했다.

 

키이이이잉-!

 

"그아앗?"

"힘이...."

"놓치지 마!"

온몸을 내리누르는 자들의 마나를 흡수했다.

갑작스럽게 엄습하는 현기증과 탈력감을 느꼈을 터다.

그 느낌에 당황하는 사내들의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때였다.

 

빡!

 

머리가 화끈.

눈앞이 번쩍.

설마 몽둥이에 맞은 걸까.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아스라한 심법의 발동이 풀렸다.

사내들의 분주한 목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헉, 허억. 이거 뭐야."

"멍청히 있지 말고 얼른 묶어. 얼른."

부스럭부스럭, 꽈드득꽈득, 뭔가를 꺼내는 소리. 묶는 소리.

손목과 발목이 조여들었다.

묶였는지 갑갑해졌다.

피가 잘 안 통하는 걸까. 순식간에 손과 발이 저릿해졌다.

입에도 재갈이 물렸다.

"이것도 씌워. 언제 정신을 차릴지 모르니."

머리에 자루를 씌웠는지 눈앞도 캄캄해졌다.

"자, 어서. 그 은발 호위가 돌아오기 전에."

하비엘.

넌 어디 있는 거냐.

로이드는 힘들여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자루에 덮여 가려진 시야로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뒤늦게 아스라한 심법을 다시 썼지만, 이미 손발이 꽁꽁 묶인 터라 의미 없는 저항에 그칠 뿐이었다.

그러나 로이드는 당황하지 않았다.

다급함에 내몰려 급속충전 옵션 등도 발동하지 않았다.

대신 힘껏 몸부림만 몇 번 쳤다.

그런 몸부림도 묶인 손목과 발목이 밧줄에 쓸리자 즉시 중단했다.

"그쪽의 처지가 이해된 건가?"

 

끄덕.

 

이쪽을 향해 떨어진 물음.

그 물음에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의 만족해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은 저항해봤자 서로 힘만 뺄 뿐이지. 눈치가 빨라서 좋군. 마음에 들어."

"...."

"자, 옮기자."

덩치 큰 누군가가 이쪽을 어깨에 짊어졌다.

로이드는 저항하지 않았다.

저항이 무의미한 순간이다.

그저 누군가의 어깨에 쌀가마니처럼 짊어지어진 채, 주위의 소리와 공기의 흐름에 감각을 집중했다.

'역시 도시 외곽으로 가는 건가.'

걸음 소리.

거리의 개 짖는 소음.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과 냄새.

그렇게 얼마나 옮겨졌을까.

딱딱한 바닥에 놓였다.

"무릎 꿇어."

명령조의 목소리에 따랐다.

비로소 갑갑하던 자루가 벗겨졌다.

"...."

아까 얻어맞은 이마가 욱신거린다.

눈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들었다.

어두운 실내.

이쪽을 둘러싼 스무 명가량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보였다.

'폐자재 창고 같은 곳인가.'

낡고 썩은 나무 냄새.

퀴퀴하게 묵은 먼지 냄새가 가득 났다.

몇 없는 창문은 판자로 듬성듬성 막혀 있었다.

들보가 훤히 드러난 높은 천장 곳곳에 걸쳐진 거미줄도 보였다.

대략 분위기가 딱이었다.

'후아. 완전 딱 납치 현장 느낌 제대로네.'

로이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조폭물이나 느와르 영화에서 종종 보던 장면인 거 같은데, 이거.

그는 히죽 웃고 말았다.

재갈이 풀리자마자 사내들을 향해 물었다.

"당신들, 누굽니까?"

그러나 다들 말없이 이쪽을 빤히 쳐다만 볼 뿐.

무거운 침묵만이 포위망처럼 좁혀져 왔다.

대답은 한참 뒤에나 돌아왔다.

"혹시 아직 그쪽의 처지에 대한 자각이 부족한 건가. 뭔가를 착각하고 있는 듯한데, 질문은 우리가 한다. 그쪽은 대답만 하는 거야."

이쪽을 둘러싼 무리 중에 사내 하나가 나섰다.

커다란 키와 넓은 어깨.

건장한 체격의 금발 남자였다.

남자가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한쪽 무릎을 꿇고서 이쪽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까끌까끌한 턱수염을 매만지며 서늘한 눈빛을 빛냈다.

"그쪽, 우리 도시에 선행을 베푸는 이유가 뭐지?"

남자의 물음이 이어졌다.

"매일 괴상한 몬스터의 뱃속에 물을 담아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더군. 그리고 온종일 그걸 자랑하며 다니기도 했고. 그래서 이상해. 베풂이야 물론 고마운 일이지만, 그쪽의 행동은 딱 봐도 뭔가를 바라는 것처럼 보여서. 그래서야."

남자의 눈빛이 더욱 서늘해졌다. 날카로워졌다.

"원하는 게 뭐야. 대체 뭘 꾸미려고 그런 티 나는 선행을 선심 쓰듯 베푸는 거지?"

이쪽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

마치 범죄자를 신문하는 형사의 것만 같았다.

혹은 법정에서 죄를 따져 묻는 자의 눈처럼 엄격했다.

아니, 살벌했다.

주위에 늘어선 이들의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조금이라도 원하는 답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혹은 저항하고 고집을 부리며 입을 다문다면.

어떤 짓이라도 서슴지 않고 벌일 살벌한 분위기를 팍팍 풍겨대고 있었다.

그래서였다.

로이드의 입이 잽싸게 열렸다.

"아, 그거 정말 반가운 질문입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할 기회만 오매불망 바랐다는 듯이.

촵촵 혓바닥에 침을 바르고서.

깜빡이도 켜지 않고서.

대놓고 힘찬 풀악셀을 넣었다.

"잠들려는 순간에 갑자기 절 덮치시고 여기로 데려오길래 참 갑갑했습니다. 다짜고짜 입을 막아버리시는 바람에 말입니다. 일단 이렇게 질문을 주시니 정말 다행입니다. 보아하니 제게 궁금한 게 참 많으신 것 같은데, 일단 제 소개부터 하지 않을 수가 없겠네요. 반갑습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마젠타노 왕국 프론테라 백작령, 아르코스 프론테라 백작의 장남 로이드 프론테라라고 합니다."

"어, 반갑...."

"우선 제게 질문하신 부분을 보자면 그쪽 분들께서 제 선행을 의심하고, 그 의도를 궁금해하신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는데요. 원래 선행이라는 것을 남들에게 굳이 드러내려 하지 않는 분들의 훌륭한 사례를 통해 제 행동이 유별난 것이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겠네요. 그래서 꼭 설명과 해명을 드리고 싶었는데 정말 잘됐습니다."

"그야 물론...."

"우선 저는 술탄의 끄나풀도, 앞잡이도 아닙니다. 물론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제 말을 좀처럼 믿지 않으시겠지요. 그래서 차근차근 설명을 드리자면 프론테라 백작령의 역사와 제 가문의 사정부터 밝히지 않을 수가 없겠지요. 그러니까 2년하고 몇 개월 전이었습니다. 프론테라 백작령이 아직 남작령이던 시절에 가문이 큰 사채를 지게 됐지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막막하고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누구나 살다 보면 어렵고 불운한 일들을 겪는 것처럼, 그러한 풍파 또한 인생의 또 다른 시험이라고 생각하니 앞으로 살아갈 힘과 희망이 조금씩 엿보이더군요. 그래서 저는 영지 중심마을 주점 주인장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었지요."

"저기, 잠깐만...."

"그래서 저는 온돌을... 어쩌고저쩌고... 더욱 잘해낼 수 있다는 의지를 다지며 포장도로를... 재잘재잘... 가족과 영지민들이 제게 거는 기대, 열의를 느끼며 광산을... 나불나불... 쏟아지는 관심 속에 부담을 떨쳐내고 더욱 전진하고자 크레모에서... 종알종알... 그러나 국왕이 처한 위기 앞에서 물러날 수는 없다는 일념으로 삼중발파를... 블라블라...."

로이드의 투머치 토크가 끝없이 쏟아졌다.

그를 둘러싼 남자들의 표정에 실시간으로 당혹감이 깃들었다.

이건 예상과 달랐다.

술탄의 끄나풀로 의심되는 놈이었다.

힘으로 제압해서 끌고 온 놈이었다.

그래서 무슨 의도로 이 도시에 왔느냐고, 뭘 꾸미려는 거냐고 심문하려 했다.

이제부터 놈이 고집을 부리리라고.

저항하며 침묵을 선택하리라고.

그러면 가혹한 린치마저 서슴지 않으리라고.

그렇게 독한 마음을 먹고 있던 사내들이었다.

결코, 저런, 한 사람의 가감 없는 인생역정 파노라마(?)를 끝도 없는 메들리로 고막이 닳고 달팽이관에 물집이 잡히도록 들을 거라는 생각은 꿈에조차 하지 못했다.

참다못한 금발 남자가 황급히 외쳤다.

"그, 그만!"

"...예?"

"그쪽은 우리를 농락하려는 건가!"

"아뇨. 제 의도를 물으며 의심을 하셨으니 그걸 풀고자 최대한 솔직하고 자세한 설명을 하던 참인데요."

"하지만...."

"아무튼 아직 설명 안 끝났습니다. 질문하셨잖아요. 그러니까 대답은 좀 들으셔야죠. 이제부터가 캡틴 프론테라가 등장해서 메뚜기 떼를 격멸하는 흥미진진한 대목인데."

"...."

"그러니까 솥뚜껑을 손에 쥐는 순간부터였습니다. 제 가슴 가득 깊은 곳에서부터 저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위기감, 사명감이 치솟더군요. 그래서였습니다. 저는...."

그만.

제발 그만해, 이 미친놈아.

금발 남자는 차라리 애원하고 싶었다.

주위의 다른 사내들도 똑같이 참담한(?) 표정이 되었다.

끝도 없이, 지나치게 솔직한 로이드의 설명을 듣는 동안 사내들의 눈빛이 멍해졌다.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여 반응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그동안 로이드가 한쪽으로 몰래 눈길을 던졌다.

창고 구석의 얼기설기 막힌 창문.

그 틈새 너머에서 아까부터 대기하고 있던 하비엘과 시선을 교환했다.

로이드는 내심 빙그레 웃었다.

'낚시, 완료.'

예상대로 반군이 미끼를 물었다.

그러니 이제는, 저들이 아지트로 알뜰하게 쓰던 땅굴을 찾아내고 얻어낼 때다.

192화. 납치와 낚시 사이 (2)

 

 

'저게 낚시라는 건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투머치 토크의 향연.

그 앞에 아연실색하는 납치자 무리.

그러한 창고 안쪽의 광경을 보며 하비엘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로이드 님은 이런 상황을 다 예측했던 걸까.'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문득 떠올랐다.

아까 오후였던가.

로이드가 보기 드물게 진지한 얼굴로 자신에게 일러두었더랬다.

오늘 저녁에 자신이 납치될 거라고.

그러니 숙소 근처에서 대기하라고.

자신이 위험에 처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나서지 말라고.

납치자들을 미행해서 그대로 상황을 지켜보며 기다리라고.

이쪽에게 그런 당부를 했던가.

그래서 되물었더랬다.

납치자들이 누구냐고.

그런 걸 어떻게 예측하는 거냐고.

그랬더니 로이드가 그저 씨익 웃으며 말했더랬다.

촉이라고.

"...."

로이드의 말을 떠올리는 하비엘의 눈빛이 깊어졌다.

가끔씩, 아니, 종종 그는 자신이 모시는 도련님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촉이라기엔 너무나 정확하다.

감이 좋은 걸까.

머리가 좋은 걸까.

'아니, 그런 걸로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대단해.'

그는 로이드를 천재라고 믿지 않았다.

곁에서 지켜보기에 그랬으니까.

물론 남들보다 조금 잔머리가 잘 돌아가긴 했다.

하지만 딱히 천재적인 지성의 번득임이 엿보이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였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지도 몰라.'

돌이켜보면 그랬다.

아주 예전, 자신이 아스라한 심법을 완성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걸 로이드가 파악했던 때가 그랬다.

혹은 왕도에서 국왕 시해를 예측했던 때가 그랬다.

또한 나마란에서 흑마법사 칸나바로를 의심하던 때도 그러했다.

'가끔은... 마치 이 세상의 미래를 미리 엿보거나 경험한 사람처럼 느껴져.'

물론 그게 불가능한 일임은 잘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느낌이 났다.

마치 전지전능한 존재의 기억을 일부 빌리기라도 한 듯했다.

그렇듯 로이드는 지닌바 감각과 지성을 넘어서는 예측 능력을 보이곤 했다.

오늘도 비슷했다.

'그럼 더 지켜볼까.'

아직 확신할 수는 없으니까.

그저 느낌일 뿐이니까.

하비엘은 한결 깊어진 눈길로 창고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혀 놀림 하나로 납치범들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로이드를 관찰했다.

다행히(?) 로이드의 끝없던 토크는 이제 마무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래서였지요. 이곳 사람들에게 지워진 수많은 짐, 그걸 바라보며 느낀 무거운 책임, 그 마음의 가르침에 따라서 제가 매일 물을 길어왔던 것이 말입니다. 이곳 사람들에게 그 물을 나누어주게 된 것이 말이죠. 후우, 하지만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시간을 과거로 돌려 다시 며칠 전으로 돌아간다 해도, 오늘 같은 이 상황이 닥칠 것을 미리 안다고 해도, 저는 똑같은 선택을 할 것입니다."

"...이곳 주민들의 믿음을 사고 협력을 얻어 공사를 마무리하고 술탄을 협상 테이블에 앉히기 위해서?"

"아, 전부 이해하셨군요?"

"당연하지. 거의 한 시간 동안이나 그쪽의 너무나 자세한 자백을 받아야 했으니까."

방긋 웃으며 고개를 드는 로이드.

그를 내려다보며 납치자들의 우두머리, 금발의 사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로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뭐 이런 자가 다 있지?'

로이드를 바라보는 금발 사내의 눈빛에 당혹감이 배어났다.

그저 술탄이 보낸 끄나풀인 줄 알았다.

술탄의 앞잡이 노릇을 하러.

공사라는 명목을 앞세워 이 지방을 감시하러.

그렇게 파견된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였다.

이자가 사람들에게 매일 물을 나누어주는 선행을 할수록 신경이 쓰였다.

더욱 의심이 가고, 경계심이 들었다.

분명 뭔가를 꾸미고 있는 거라고.

노리는 것이 있을 것이리라고.

그런 의심 끝에 이자를 납치했다.

설령 위협하고 심문을 해서라도.

이자의 의도를 까발리고 말리라 다짐했다.

술탄의 속내와 목적을 알아내자고 각오했다.

한데....

"솔직히 말하지. 이런 자백은 평생 처음 들어봤어. 정성이라고 칭찬해야 할지, 과하다고 치부해야 할지. 어쨌건 그쪽이 어떤 인물인지는 알 것 같군."

"제가 어떤 인물인 것 같습니까?"

"우릴 이용하려는 자."

로이드를 향한 금발 사내의 눈빛이 딱딱해졌다.

"그쪽, 우리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는 거겠지?"

"예, 물론이죠."

"그럼 내가 누군지도 짐작하는 건가?"

"그럼요. 반군 리더 테르메스 씨."

"역시."

금발 사내, 테르메스가 피식 웃었다.

"이곳 사람들에게 물을 나눠준 것도 우릴 만나기 위해 벌인 일이었군. 맞나?"

"예. 생각보다 늦게 와서 좀 기다리긴 했지만 말입니다."

로이드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혔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반군이 나타나 주길 기다렸다.

그들과 만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기 위해선 이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냥 주민들에게 물어본다고 해서 반군의 아지트가 어디인지, 어떻게 그들과 접촉할 수 있을지 알려줄 리가 만무했다.

그렇다고 주민들을 위협한다고 해서 답이 나올 리도 없었다.

하여 주민들에게 과도한 선행을 베풀었다.

아예 티 팍팍 내며 선행 폭격을 감행했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반군이 자신을 주목하게 될 거라고 계산했다.

매일 선행을 베푸는 자신을 보며 더욱 의심하고 경계하게 되리라 예상했다.

그 예상이 고스란히 들어맞았다.

'날 술탄의 앞잡이로 여기고 있었을 테니까.'

그런 술탄의 끄나풀이 대놓고 선행을 베푸니 더욱 이상하게 여겨졌을 터다.

로이드는 그 의심과 경계를 오히려 적극 이용했다.

낚시질의 미끼로 삼았다.

덕분에(?) 이렇듯 반군 무리에게 납치당할 수 있었다.

접촉에 성공한 것이었다.

"어제, 혹은 오늘쯤은 절 만나러 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뭐, 방법이 생각보다 조금 거칠긴 했지만 말입니다."

로이드가 피식 웃으며 이마를 찌푸렸다.

그런 그의 이마 한쪽은 살짝 부어올라 있었다.

아까 납치당할 때 몽둥이로 얻어맞은 흔적이었다.

반군 리더, 테르메스의 눈빛이 더욱 엄격해졌다.

"겁이 없군. 그러다가 더 맞을 수도 있을 텐데."

"도의 없는 산적이나 강도가 상대라면 충분히 그런 일이 생기겠지요. 보통 그런 자들이 죄 없는 사람을 때리고 겁박해서 납치하곤 하니까."

"...우릴 비난하고 싶은 건가."

"그건 아닙니다. 아깐 좀 아팠지만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그럼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뭐지."

테르메스의 눈빛이 깊어졌다.

사실 그는 아직도 로이드를 믿고 있지 않았다.

로이드가 자신의 인생역정(?)을 모조리 밝혔다 해도 그랬다.

그런 이야기쯤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는 거다.

작정하면 그 정도 거짓말은 딱히 어려운 게 아니다.

그래서 아까도 로이드의 수다를 제지하지 않은 그였다.

말이 길어질수록 꼬리를 드러낼 확률이 높으니까.

그 속에서 허점을 찾아내기 쉬울 테니까.

하지만 그는 로이드의 수다 속에서 꼬리를 잡을 수도, 허점을 찾아낼 수도 없었다.

뜻밖이었다.

'이자의 목적을 알아내야 해.'

정말로 술탄의 끄나풀이 맞다면?

반군을 일망타진하려는 계획을 품은 거라면?

여기서 당장 이자의 목을 치는 게 최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일단은 이자의 이야기부터.'

들어보고 판단하리라.

테르메스는 로이드의 대답을 기다렸다.

로이드가 희미하게 웃었다.

"원하는 것이라. 뭐, 간단합니다. 아지트를 모조리 내놓으시죠."

"...뭐?"

테르메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납치당한 주제에.

손발이 묶인 주제에.

설마 저런 정신 나간 요구를 대놓고 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로이드의 목소리는 더욱 뻔뻔하게 모두의 고막을 푹 찔러왔다.

"말 그대로입니다. 아마도 그쪽 분들, 이곳 지방 곳곳에 있는 땅굴을 아지트로 이용하고 계실 텐데 제가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땅굴을 찾아내기가 어려워서 말입니다. 땅굴을 모두 양보해주십시오."

"무슨... 미쳤나?"

"안 미쳤습니다. 저한테 그 땅굴을 내놓으셔야 이 지방을 괴롭히는 가뭄을 영원히 물리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뭐?"

화를 내려던 테르메스는 멈칫했다.

땅굴을 내놓으라더니.

그래야 가뭄을 해결할 수 있다니.

저건 또 무슨 소리인 건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물론 그렇겠죠."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전 술탄과 계약을 맺고 이곳 지방에 카나트라는 수로 시설을 만들기 위해 왔습니다. 36킬로미터쯤 떨어진 산맥 기슭에서 이곳까지 물을 끌어올 지하 수로를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땅굴이 왜 필요하다는 거지?"

"땅굴을 연결해서 수로로 만들 생각이니까요."

"...."

"정말입니다. 그래야 공사 기간이 단축됩니다. 물론 단축되는 공사 기간만큼 이곳 지방의 사람들이 가뭄에 고통받는 시간도 줄어들겠지요. 가뭄과 관련된 여론을 호전시키려는 술탄이 무리한 전쟁을 일으키는 일도 없어질 테고, 여러분의 이웃과 친구들이 전쟁터로 끌려가는 일 또한 없어질 것이며, 제 고향 프론테라 영지가 전쟁에 휘말리는 사태도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거죠. 그쪽 분들이 땅굴을 순순히 양보해주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

모두는 대답을 잃었다.

섣불리 대답하거나 반응할 수가 없었다.

로이드가 너무나 태연하게 술술 꺼낸 이야기.

그 이야기의 스케일이 자신들의 상식과 예상을 한참 벗어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땅굴을 내놓으라고 할 때는 미친놈인가 싶었는데.

그 이유까지 듣고 나니까 또 이야기가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후우, 잠깐. 그럼 정리를 좀 해봤으면 하는데."

반군 리더 테르메스가 당혹감을 누르며 반문했다.

"그러니까, 그쪽이 가뭄을 해결할 공사에 쓰기 위해 우리의 아지트인 땅굴을 사용하겠다는 건가?"

"네."

"땅굴을 연결해서 산맥의 물을 끌어올 지하 수로를 만들겠다고?"

"네, 바로 그겁니다."

"하.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테르메스가 입가에 조소를 머금었다.

"이미 그쪽이 우리의 정체를 다 알고 있으니 새삼스럽게 숨기진 않겠어. 그래. 우린 술탄에게 반기를 들고 있지. 우리의 터전이 가뭄에 휩싸여 모두가 고통을 받고 있음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술탄에게 반감을 품고 있어. 힘으로라도 우리의 어려움을 알리겠노라고, 피를 통한 투쟁으로라도 수도 아힌샤의 부를 가져와 우리를 괴롭히는 가뭄을 몰아내겠노라고, 그렇게 다짐하고 있어."

테르메스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맞아. 우리는 반군이야. 반란 세력이지. 그런데 우리에게 아지트인 땅굴을 내놓으라고? 그러면 모두가 가뭄에서 벗어나 행복해질 수 있다고? 좋아. 정말로 그쪽의 말대로 일이 진행된다고 쳐. 수로가 완성된다고 치자고. 우리로서도 반길 일이야. 우릴 들고일어나게 만든 고통의 원인인 가뭄이 사라질 테니까. 하지만 그러고 나면? 우리가 공사를 위해 그쪽에게 땅굴을 내어주고 나면? 아지트를 잃은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로이드를 쳐다보는 테르메스의 눈동자에 희미한 반감이 배어났다.

"아지트를 잃은 우리가 무사할 수 있을까? 설마 공사에 협력했다는 명목으로 우리가 술탄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는 순진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지 않나?"

"물론입니다."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거죠, 그건. 어디까지나 술탄은 지배자니까."

사실이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였다.

카나트 공사에 협조를 해줬다고 해서.

아지트였던 땅굴을 양보해줬다고 해서.

술탄이 반군 세력을 용서해줄 가능성은 아예 없다.

그런 동화 같은 해피엔딩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로이드는 그걸 단언하고, 확신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술탄은 지배자니까. 그런데 자신의 일에 약간 협조해줬다는 이유로 반란을 꾸몄던 이들을 용서한다고? 술탄이 그런 선례를 만들어줄 리가 없어. 절대로.'

세상은 그저 아름답게 돌아가지만은 않는다.

협조를 해줬다고 그게 반드시 보답으로 돌아오란 법은 없다.

이번 같은 경우가 딱 그러했다.

그래서였다.

'테르메스 씨 당신, 정확히 내가 예상했던 대로 반응해주고 있어.'

땅굴을 내어주고 나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거냐.

그런 반문이 돌아오리란 건 이미 예상했다.

당연히 대답도 준비되어 있었다.

"다들 이곳을 떠나시면 됩니다."

"...뭐?"

"별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술탄에게 토벌당할 거니까 튀셔야죠."

"그게 무슨... 지금 우릴 놀리는 건가?"

 

덥썩.

 

테르메스가 손을 뻗어왔다.

이쪽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당장 한 대쯤 때릴 듯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놀리는 거라뇨. 저 지금 진지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헛소리를 하는 거지? 튀라니. 도망치라니.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예."

"어째서?"

"우리 영지로 오면 되니까요."

"...."

"망명하시라고요. 안전하게. 전부 받아드릴 테니까."

"무슨."

테르메스가 더욱 이해 안 된다는 눈초리로 이쪽을 노려보았다.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린가?"

"당연하죠."

어차피 갈 곳 없어질 이들이다.

설령 땅굴을 양보하지 않는다 해도 그렇다.

결국엔 이곳에서 반란에 실패하고 비참하게 죽을 사람들이다.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그랬으니까. 테르메스 씨도, 그 옆의 사람들도, 모두 반란에 실패하지. 술탄에게 토벌당해서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져.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이 지방의 토후들이 들고 일어나게 되지. 2차 반란이 일어나고, 마침내 술탄이 권좌에서 끌어내려져.'

그게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즉, 눈앞의 테르메스를 비롯한 반군 사내들은 반란의 불쏘시개로 사라지게 될 이들이었다.

'그런 댁들을 살려주겠다는 겁니다. 거기에 덤으로 얹어서 가뭄도 해결해주고. 술탄을 협상 테이블에 앉혀서 프론테라 영지가 전쟁에 휩쓸릴 가능성도 막아내고.'

즉, 이게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길이었다.

관련된 모두가 웃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런 이쪽의 의도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한 걸까.

자신들이 땅굴을 양보하기만 하면 가뭄도 해결되며 모두가 행복해질 가능성이 열린다는 걸 깨달은 걸까.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지?"

테르메스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물어왔다.

이쪽의 멱살을 더욱 힘껏 움켜쥐었다.

"혹시 우리를 농락하려는 건가? 아니면, 미치기라도 한 건가? 그런 정신 나간 제안을 우리가 믿어주길 바라는 건가?"

"혹시 신뢰할 근거가 필요한 겁니까?"

"당연히."

테르메스의 눈동자가 번득였다.

"그 미치광이 같은 제안, 우리가 믿을 수 있도록 증명해. 신뢰할 근거를 내밀어 봐. 그러지 못한다면 지금 당장 목을 베어 아무도 모를 모래구덩이에 묻어 버릴 거니까."

"뭐, 좋습니다."

로이드는 멱살을 잡힌 채 어깨를 으쓱였다.

눈앞에서 으르렁거리는 테르메스.

그의 반응이 이해가 됐다.

아직 이쪽을 의심하고 있을 테니까.

방금의 제안조차도 술탄의 술수일지 모른다고 여기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저쪽이 제안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단숨에 신뢰를 안겨줄 강력하고도 확실한 한 방이 필요할 터다.

다행히 로이드는 그럴 방법을 미리 알차게 준비해두고 있었다.

"그럼 하나 물어보죠."

로이드가 고개를 들었다.

테르메스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혹시 지금부터 11박 12일쯤 시간 나십니까?"

"...뭐?"

"테르메스 씨가 저와 함께 어딜 좀 날아서 다녀왔으면 싶어서 말입니다."

"내가? 그쪽과 함께?"

"네."

"열이틀 동안이나 어딜 날아서 다녀와야 한다고?"

"네. 그러면 절 완벽하고도 확실하게 믿게 될 겁니다."

"그곳이 어디기에?"

테르메스가 물었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고.

의심 가득한 눈빛을 로이드에게 던졌다.

그 눈빛을 받아내며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마치 동네 편의점에 다녀오자고 말하듯이.

혹은 은행 에어컨 바람이나 쐬고 오자고 하듯이.

너무나 태연하게 대꾸했다.

"왕도 마젠타에, 우리 국왕 만나러요."

그러니까 이건 매우 간단한 문제다.

국왕 누님한테 직접 발급받는 망명 허가증보다 확실한 증명 서류가 세상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