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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298

290화 이대로 돌파한다. (4)

그림자 산맥에 있던 카오르와 기사들은 지셀의 소집 명령을 받자마자, 계약으로 묶인 헌터들을 끌고 펜리스 영지로 달려왔다.

안 가겠다고 버티던 놈도 있긴 했지만, '아이언클리프의 왕' 카오르의 강한 어루만짐에 다들 마음을 돌렸다.

튜리안 왕국이 지셀의 계약서를 보증해 주니 갈 곳 없는 헌터들은 도망갈 수도 없었다.

다른 기사들은 다시 기사단에 배속되어 지셀과 함께 움직였고, 카오르는 헌터들을 이끌고 마법사들을 지키는 임무를 받았다.

콰앙! 콰앙! 콰앙!

히이이잉!

"으아아악!"

헌터들을 상대한 적 없는 데스몬드의 기마병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응하지 못하고 마구 쓰러졌다.

"이야! 몬스터보다 쉽잖아!"

이들에게 기마병이란 그저 발이 4개 달리고 덩치가 조금 큰 몬스터에 불과했다.

그것도 직선으로 강하게 달리는 기술밖에 없는 몬스터 말이다.

온갖 기상천외한 신체 구조를 자랑하는 몬스터들과 싸우는 데 익숙한 헌터들에게 기마병을 상대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앗! 빠져나갔다!"

물론 천 명이나 되는 기마병들을 전부 막을 수는 없었다. 대열을 이루는 데는 어설픈 헌터들의 사이를 뚫고 들어간 몇몇 기마병들은 그대로 마법사들에게 돌격했다.

두두두두두!

허공에 손을 뻗으며 마법을 시전하고 있던 바네사가 고개를 돌려 기마병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비어 있던 반대쪽 손을 다가오는 자들에게 뻗었다.

"어스 월."

쿠우우우웅!

흙으로 만들어진 벽이 순식간에 솟아오른다. 돌격하던 데스몬드의 기마병들은 그대로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콰아앙! 콰앙! 콰아앙!

"으아아아악!"

히이이이잉!

강한 충격을 받은 말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몇몇 기마병들은 벽을 뚫고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뒤따라오던 기마병들은 억지로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카오르가 기겁하며 외쳤다.

"이 멍청이들아! 마법사들을 지켜야지! 몬스터 사냥이 아니라고!"

폼만 잡고 있던 카오르는 허겁지겁 달려와 기마병들을 베어 냈다. 그제야 다른 헌터들도 다시 2중으로 대열을 만들며 기마병들을 막아 냈다.

"하씨... 큰일 날 뻔했네."

카오르는 식은땀을 흘렸다. 만약 마법사들이 다쳤다면 ?특히 바네사가- 지셀이 자신과 헌터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아니, 만약 그렇게 됐다면 지셀이 문제가 아니라, 전쟁에서 패해서 도망가야 할지도 몰랐다.

한편, 기마병을 막느라 잠깐 바네사의 집중이 흩어진 틈을 타 데스몬드군의 진영에서 마법들이 쏟아져 나왔다.

바네사가 급하게 돌아보며 날아오는 마법을 해제했지만 몇몇 마법은 이미 본대로 치고 들어간 펜리스군에게 적중했다.

저서클 마법들이라 갑옷에 막혀 큰 타격은 없었지만,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위험했다.

"칫!"

바네사는 광범위 공격 마법을 데스몬드의 진영에 뿌렸다.

상대 쪽에도 6서클이 있기에 성공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단지 마법사들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기 위해서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마력을 쏟아부었다.

"쿨럭!"

바네사는 코피뿐만이 아니라 이제 입에서도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버텨 냈다.

그사이 헌터들은 흙벽에 막혀 머뭇거리던 데스몬드의 기마병들에게 곧바로 덤벼들었다. 기마병들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휘말려 헌터들과 난전을 벌였다.

그리고 그건 헌터들에게 훨씬 유리한 싸움이었다. 제대로 된 진형 없이 마구잡이로 싸우는 건 그들에게 익숙한 일이었으니까.

콰앙! 콰앙!

"죽어! 이 새끼들아!"

"크어어억!"

기마병들은 말 위에서 헌터들을 상대로 고군분투했지만, 움직임에 제약이 있으니 점점 밀릴 수밖에 없었다.

헌터들은 조를 짜서 열심히 참마도를 휘두르며 기마병들을 압박했다.

"으하하하! 내가 최강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발군의 실력자는 역시 카오르였다. 그는 전보다 더 강해진 실력을 자랑하듯 마구잡이로 기마병들을 베어 냈다.

"크윽! 이 새끼 뭐야!"

"주력은 전부 본대로 돌진한 게 아니었나?"

"이놈부터 죽여라!"

카오르는 자신에게 몰려오는 적들을 보며 만족스러워하는 웃음을 지었다.

"후, 이 몸을 막기 위해 오는 건가? 좋아, 다 덤벼라!"

카오르는 더 신이 나서 날뛰었다. 비록 다들 적이긴 하지만 이렇게 주목받는 게 너무 좋았다.

카오르가 날뛸수록 상대적으로 다른 쪽으로 가는 기마병들이 줄어들어서 헌터들은 훨씬 싸우기가 편해졌다.

헌터들 사이에서 조금 앳되어 보이는 남자가 말의 다리를 베었다. 말이 넘어지자 그는 바로 검을 들어 올려 기수까지 베었다.

퍼억!

군더더기 없을 정도로 깔끔한 일격. 자신을 구해 준 지셀을 따라 펜리스 영지로 왔던 아렐이었다.

"후우...."

아렐은 심호흡을 크게 하며 다시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아직 기초 훈련밖에 받지 못한 그는 기마병으로 참전하지 못했다. 대신 카오르를 따라 마법사들의 호위를 맡았다.

그간 강해지기 위해 열심히 체력을 키우고 훈련에 참여했다. 아직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영지를 지키려는 마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또 그런 일이 벌어지면 안 돼.'

야만인들에게 약탈당해 많은 사람이 죽고 마을이 없어졌다. 두 번 다시 그런 경험은 하고 싶지 않았다.

동생은 머리가 좋아 행정 업무를 공부하고 있다. 이제 펜리스는 그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두 번째 고향이 되었다.

"흐읍!"

아렐은 쉬지 않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긴장감 때문에 근육이 굳고 벌써 지친 거 같지만 그는 집중을 놓지 않았다.

언제 어느 상황에서나 정확하게 무기를 휘두르는 것.

지셀이 가장 먼저 가르쳐 준 것이었다.

깔끔할 정도로 정확한 아렐의 자세를 본 카오르가 턱을 쓰다듬었다.

"호오... 애송이 주제에 제법인걸? 마치 예전의 나를 보는 거 같아. 예전의 나처럼 열심히 수련을 하나 보네."

그런 적 없다. 아렐의 나이 때 카오르는 술 마시고 놀기 바빴지, 수련 따위는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카오르가 낄낄대며 자화자찬하는 사이에도 헌터들은 차근차근 기마병들을 줄여 나갔다.

그들의 활약 덕분에 데스몬드의 기마병은 마법사들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살아남은 기마병들은 이제 도망가기에 바빴다.

도망친 자들은 다시 다른 쪽에 합류하거나, 이대로 전장을 빠져나갈 것이다.

기마병들을 상대한 헌터들이 무심코 도망치는 말들을 쫓아가자 카오르가 외쳤다.

"쫓지 마! 쫓지 말라고! 이 등신 새끼들아!"

헌터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마법사들을 둘러싸며 주변을 경계했다. 적당히 상황이 수습된 듯하자 카오르가 아렐에게 다가갔다.

"어이, 애송이. 좀 싸우는데?"

"감사합니다!"

"내가 싸우는 거 봤지? 어땠어?"

"정말 대단했습니다!"

아렐이 보기엔 카오르도 어마어마한 실력자였다. 혼자서 단번에 수십의 기마병들을 도륙했으니 그 실력이 어찌 부럽지 않을까?

카오르가 잘난 척하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물었다.

"나랑 영감이랑 누가 더 강한 거 같아?"

"...."

아렐은 대답을 못 하고 살짝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카오르가 그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며 물었다.

"누가 더 센 거 같냐고."

아렐은 그 얼굴이 부담스러워서 다시 반대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도 또 얼굴이 따라온다.

"누구?"

유치하다. 유치해서 미칠 거 같은데 대답을 안 할 수도 없었다. 결국 아렐은 현실과 타협하고 말았다.

"...카오르 님이 더 강한 거 같습니다."

"으하하하! 그렇지? 영감은 지금 아파서 저 뒤로 실려 갔잖아? 약한 자는 그런 법이지. 으하하하!"

길리언과 부상자들은 이미 전장을 빠져나간 지 오래였다. 그들은 이곳에서 떨어진 임시 주둔지에서 피오테와 사용인들에게 치료받고 있을 것이다.

두두두두두!

궁기병들의 뒤를 쫓고 있던 에머슨은 조용해진 펜리스군의 후방을 힐끗 보고 눈을 찌푸렸다.

'실패했나.'

아군 진영에서 마법들이 시전됐기에 잠깐 기대했건만, 살짝 집중을 흐트러뜨린 것에 불과한 모양이다.

'결정해야 한다.'

궁기병을 계속 쫓을지, 아니면 마법사를 공격할지.

잠시 고민하던 에머슨은 앞을 바라보았다.

궁기병들은 기마병을 피해 계속 도망 다니면서도, 다른 쪽에서 싸우는 데스몬드군을 향해 꾸준히 활을 쏘아 댔다.

그야말로 상대를 약 올리는 데는 최적화된 병종이었다.

저 궁기병들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아군은 계속 끌려다닐 것이다. 하지만....

'마법사부터 처리한다.'

6서클이나 되는 윌로우가 있음에도 상대를 견제하느라 마법 공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에 데스몬드군이 밀리고 있는 것이다.

펜리스 측 마법사만 처리하면 전황은 단번에 뒤바뀔 것이다. 궁기병이 사장된 이유 중에는 마법사의 존재도 있었으니까.

그러니 굳이 궁기병들에게 끌려다닐 필요가 없었다.

마법사들부터 치기로 마음은 먹었지만, 마법사들에게 바로 갈 수는 없었다. 지금 바로 그들을 놓아준다면 궁기병들은 중앙의 펜리스군을 도우러 갈 것이다.

일단은 최대한 중앙과 멀리 몰아 두어야 했다.

"더 힘을 내라!"

에머슨이 크게 외치며 연신 말을 재촉했다. 하지만 궁기병들의 속도가 빨라 원하는 만큼 몰고 가기가 힘들었다.

궁기병들이 입은 갑옷은 전신 갑옷인데도 그리 무겁지 않은 듯했다. 거기에 말들은 어디서 구해 왔는지 힘이 넘친다.

이쪽의 수가 더 많기에 맞붙으려 하지도 않고 활만 쏘며 도망만 다녔다. 결국은 그들이 움직일 방향을 예측하고 모는 수밖에 없었다.

두두두두두!

'조금만 더!'

에머슨은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조금씩 방향을 바꾸며 궁기병의 이동 경로를 예측했다.

기병 지휘관으로서 오랜 경력을 쌓아 온 에머슨이다. 그는 차근차근 거리를 좁혀 펜리스의 궁기병을 따라잡았다.

도망 다니던 궁기병들의 가장 후열에 있던 아스콘은 연신 뒤를 돌아보며 떠들었다.

"야이, 시발아! 빨리 좀 달려라! 나 죽게 생겼다고!"

적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쫓아온다. 빨리 도망가야 하는데 자신의 말은 수상할 정도로 다른 말들보다 느렸다.

이미 뒤로 처지다 못해 대열에서 떨어져 나올 정도였는데도 말은 산책을 나왔다는 듯, 가볍게 뛰고만 있었다.

"시발아! 제발 좀! 이 시발아아아아!"

아무리 욕을 해도 속도가 안 난다. 이러다가 제일 먼저 죽게 생겼다.

결국 아스콘은 이를 악물고 활을 들었다.

"저 새끼부터 처리하면 되겠지?"

몸을 돌리자 가장 앞에서 열심히 달려오고 있는 지휘관이 보인다.

데스몬드의 기마병들은 펜리스처럼 전신 판금 갑옷을 사용하지는 못했다. 지금 자신을 쫓는 지휘관도 다른 기마병들과 마찬가지로 체인 메일을 입고, 눈 쪽에 틈이 난 투구를 쓰고 있다.

만약 저 투구의 작은 틈새를 맞춘다면 지휘관을 단번에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엘프들은 집중하면 아주 작은 틈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궁술 실력이 뛰어나다. 자연의 힘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끼익....

아스콘은 활을 당기며 집중했다. 몸이 흔들리지만 상관없다. 화살은 바람을 타고 정확하게 목표를 맞출 테니까.

오직 엘프만이 보일 수 있는 기예.

조준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그만큼 무시무시한 일격이라 할 수 있었다.

'바람이 느껴진다.'

온몸의 감각이 자신에게 길을 알려 주고 있다. 지금이다, 지금 쏘면 저 지휘관의 얼굴을 뚫을 수 있다고 바람이 말하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파앙!

아스콘의 뒤를 쫓던 에머슨은 빛이 번뜩이자 바로 방패를 들어 올렸다.

쐐애애애액!

화살은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날아가 사라졌다.

"에이 시바라, 역시 안 되네."

푸르르륵!

아스콘의 말은 달리면서도 뭐가 웃기는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반면 하늘 높이 날아간 화살을 본 에머슨은 분노에 차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감히 이딴 장난을!"

모욕적이었다. 궁기병의 활 실력이 저렇게 형편없을 리가 없었다.

뒤꽁무니에서 가장 느리게 달리는 것도 그렇고, 저놈은 자신을 놀리려고 일부러 저딴 식으로 활을 쏜 게 분명했다.

어디 한번 따라올 수 있으면 따라와 보라고.

이 급박한 전쟁 상황에서 자신에게 저런 도발을 던지다니.

에머슨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반드시 잡아 죽이겠다."

조금만 더 몰아가면 된다. 그리고 바로 방향을 틀어 마법사들을 밀어 버릴 생각이었다.

전장의 열기는 더 격해졌다. 서로가 상대를 깨부수기 위해 온 힘을 다했지만 양측 다 결정적인 한 방이 부족했다.

펜리스군은 개개인의 실력은 뛰어났지만 수가 너무 적었고, 데스몬드군은 압도적인 수를 바탕으로 버티고 있지만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양측 다 마법사들부터 처리해 전황을 단번에 바꾸려 한 것이다.

그러나 전투가 길어질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펜리스 쪽이었다. 사실 지금도 그다지 유리하다고만은 볼 수 없었다. 만약 지셀이 활약하지 않았다면 진작에 전황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콰아앙! 콰앙!

붉은 눈을 빛내며 창을 휘두르는 지셀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끊임없이 몰려드는 데스몬드의 중보병들은 그의 공격을 제대로 막지도 못하고 날아갔다.

방패와 갑옷이 무참하게 갈리고 시체가 쌓인다. 사방에서 창들이 날아다니며 빈틈을 공격했다.

"으아아악! 이 괴물!"

"기사들은 어서 저놈부터 막아라!"

"막아라! 윌로우 님을 노리고 있다!"

곳곳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지만, 그 누구도 차근차근 전진하고 있는 지셀을 막지 못했다.

완전히 에워싸 막을 수도 없었다. 뒤따라온 펜리스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막강한 방어력을 바탕으로 지셀의 뒤를 지키며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드드드!

지셀은 슬슬 몸에 부하가 걸리는 것을 느꼈다. 마법사에게 다가갈수록 더 뛰어난 기사들이 달라붙었고 병사들도 악착같이 덤벼들었다.

'조금만 더.'

하지만 얼마 남지 않았다. 몇 번 정도만 더 방어선을 뚫어 버리면 마법사의 목을 칠 수 있을 것이다.

콰앙! 콰앙!

지셀과 흑왕이 전진할 때마다 적들이 튕겨 나가며 길이 만들어진다. 그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전장을 지배하는 악귀와도 같았다.

데스몬드군의 방어선이 속수무책으로 뚫리고 있을 때, 한쪽에서 큰 고함이 들려왔다.

"비켜라!"

촤아아악!

지셀을 상대하던 병력이 순식간에 거리를 벌리며 뒤로 물러섰다.

두두두두두!

그와 동시에 은빛 갑옷을 입고 말을 탄 기사 한 무리가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도끼날을 붙인 창, 할버드를 들고 있었다.

무리의 선두에 선 기사, 로네스가 외쳤다.

"펜리스 백작을 척살하라!"

데스몬드의 로열 가드, 최정예 기사인 그들이 전부 지셀을 향해 돌진했다.

291화 이제 끝이 나겠군. (1)

마나를 다루는 기사는 일반 기마병과는 차원이 다른 힘을 발휘한다. 그것도 대영주를 보필하는 최정예 기사라면 말이다.

두두두두두!

빠르게 달려오는 로열 가드 50명에게서 폭풍과도 같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데스몬드의 병사들은 로열 가드들이 달려오자 신속하게 자리를 피했다. 이미 이런 부분에 대한 훈련도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영주님!"

"대장!"

펜리스의 기사들도 상대의 기세에 깜짝 놀라 달려 나가려 했다. 하지만 지셀은 창을 늘어뜨리며 외쳤다.

"신경 쓰지 말고 계속 밀어라!"

전장은 지셀 주변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데스몬드의 병사들로 꽉 차 있었다. 하나라도 더 죽여야 앞으로 나서기가 쉬워진다.

그의 단호한 어조에 펜리스군은 지셀 쪽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눈앞에 있는 적에게만 집중했다.

드드드드!

펜리스의 기사들도 싸우면 싸울수록 몸에 부하가 걸리는 걸 느꼈다. 지금은 신경을 분산시켜 가며 싸울 여유가 없었다.

이럴 때는 그냥 영주를 믿고 자신들의 싸움에만 집중하면 된다.

그리고 그 모습은 로열 가드들의 신경을 거슬렀다. 단장인 로네스는 불쾌감이 잔뜩 어린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건방지구나!"

자신들은 데스몬드의 최정예 기사들이다. 아무리 펜리스 남작이 상급 기사의 수준이라 해도 50명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혼자 싸우겠다고 하다니, 오만의 극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우우우웅!

로열 가드들은 모두 마나를 거세게 끌어올렸다. 이대로 지셀을 짓밟을 속셈이었다.

지셀 또한 흑왕의 배를 박차며 달려 나갔다.

두두두두두!

50명의 최정예 기사들을 향해 혼자 달려드는 모습은 무모해 보이기까지 했다. 데스몬드의 병사들은 모두 지셀이 얼마 버티지 못할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첫 일격에 그 생각은 바뀌고 말았다.

부우우웅!

선두에 선 로네스가 할버드를 강하게 휘둘렀다. 지셀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고개를 숙여 피하며 그대로 앞으로 달려 나갔다.

로네스의 뒤를 따르던 다른 기사 두 명이 동시에 지셀을 향해 할버드를 휘둘렀다.

콰아앙!

그들이 휘두르던 할버드가 허공에 튕겨 나갔다. 지셀은 그들을 무시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콰아앙! 콰앙!

로네스를 뒤따르던 로열 가드들이 연달아 무기를 휘둘렀지만 모두 지셀을 맞추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지셀은 계속 기사들의 할버드를 튕겨 내며 앞으로 나아가기 바빴다.

'조금만 더.'

기마전에서는 한번 공격에 실패하면 다시 공격하기가 쉽지 않다. 말 머리를 돌려야 하는데, 뒤따라오는 자가 많을수록 더 멀리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로열 가드들이 말 머리를 돌렸을 때 이미 지셀은 그들을 모두 돌파하고 앞으로 더 나아간 상태였다.

로네스는 그 모습을 보고 사색이 되어 외쳤다.

"마, 막아라!"

장엄하게 나타난 로열 가드들의 길을 비켜 주느라 몇천이나 되는 중보병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중앙을 몇 겹으로 막고 있던 병사들은 로열 가드들을 믿고 양옆으로 이미 빠진 상태였다. 남은 펜리스군을 공격하려고 위치를 바꾼 것이다.

하지만 로열 가드들이 지셀을 처리하지 못한 지금은, 데스몬드군이 스스로 지셀에게 길을 열어 준 꼴이 되어 버렸다.

병사들도 그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대형을 다시 갖추려 했지만, 그들이 제자리를 찾는 것보다 지셀이 들어오는 게 더 빨랐다.

콰아아앙!

"으아아악!"

붉은 눈을 빛내며 이를 드러낸 지셀은 다시 무지막지한 힘을 뿜어냈다.

몇 겹이나 진을 친 상태로도 뚫리던 적들이, 진영도 흐트러진 상황에서 지셀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말머리를 돌린 로열 가드들이 빠르게 지셀을 뒤쫓았지만, 허겁지겁 양옆에서 충원되는 병사들과 엉키고 말았다.

"비켜라! 비키란 말이다!"

로네스의 외침을 들은 병사들이 물러나려 했지만, 뒤에서 들어오던 병사들과 빠져나가려는 병사들이 부딪치니 진영은 더 엉망이 되고 말았다.

콰앙! 콰앙! 콰앙!

"으아아아악!"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는 동안에도 지셀은 적들을 사방으로 날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조금만 더.'

콰아앙! 콰앙!

드드드득!

뼈가 뒤틀리는 게 느껴진다. 이제 3단계 코어는 한계에 달한 상태였다.

지셀은 뱃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핏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

'조금만 더.'

적들의 방어선은 얇아졌고 로열 가드들은 뒤에서 따라오기 바쁘다. 이 이상 가는 기회는 다시 없을 터였다.

자신에게 덤벼드는 적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시했다. 그는 그렇게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콰아앙!

중앙을 감싸고 있던 대열의 마지막 한 겹을 뚫었을 때.

지셀은 드디어 목표했던 자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찾았다."

멀지 않은 곳에, 중보병들과 기사들에 둘러싸인 이질적인 진형이 보였다.

윌로우는 하늘을 바라보며 멀리서 피어오르는 마력을 잡아내고 있었다.

허공에 피어오르는 빨갛고 파란 아지랑이 같은 기운들. 그것들은 무겁게 피어오르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마치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운들이 공간을 찢고 나타나는 듯했다.

윌로우는 세상의 법칙을 무시하는 이질감을 감각으로 좇으며 손을 휘둘렀다. 이것이 바로 마법이고 마법사들이 보는 세계다.

마법사들마다 그 방식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그들은 마력을 객체화하여 인식한다.

마력의 변화를 하나하나 잡아내어 비틀린 법칙을 원래대로 되돌리면 세계는 안정을 찾아간다. 내버려 두면 그 이질적인 기운들은 형태를 갖추게 된다.

바네사와 윌로우는 그렇게 서로를 견제하며 집중하고 있었다.

'바네사가 잘해 주고 있나 보네.'

마법을 막는 데 집중하느라 자신에게 신경 쓰지 못하고 있는 윌로우를 보며 지셀이 악마 같은 웃음을 지었다.

그가 남은 마나를 모두 끌어올리자 창이 이글거리는 붉은 빛에 휩싸였다.

쿠웅!

윌로우를 빈틈없이 보호하고 있던 병사들이 방패를 앞으로 내밀었다.

지셀은 주변에서 덤벼드는 나머지 적들을 쳐내며 달려 나갔다.

두두두두두!

흑왕이 진형에 가까이 다가오자 갑자기 방패들 사이가 벌어지며 안쪽에서 수십 개의 창이 튀어나왔다.

그 순간, 지셀은 말고삐를 휘어잡고 몸을 옆으로 틀었다. 흑왕 또한 지셀의 움직임에 맞춰 몸을 틀었다.

드드드득!

옆으로 방향을 튼 흑왕의 몸이, 땅에 말발굽 끌린 자국을 길게 남기며 자리에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지셀이 안장에서 뛰어올랐다.

파앗!

병사들은 시선으로 그를 좇으며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그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지셀은 마나를 가득 담아 윌로우에게 주저 없이 창을 던졌다.

쐐애애애액!

공기를 찢어발기는 듯한 소리를 울리며 창은 엄청난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윌로우는 갑자기 눈앞에 누군가가 뛰어올라 시야를 가리자 매우 놀랐다.

'이런!'

윌로우도 자신을 노리고 적이 다가오고 있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아군을 믿고 상대 마법사를 견제하는 데에만 집중한 상태였다.

하지만 적이 이 앞까지 나타났다는 건 더 이상 아군을 믿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지금 마력을 다른 데 쓰면 안 된다. 상대 마법사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마력을 통제하는 능력은 자신을 뛰어넘었다.

진작 자신이 밀리고도 남았을 상황인데 겨우 버티는 중이었다. 아군 마법사들 때문인지, 아니면 상대 쪽에 다른 문제가 있는지 종종 상대 마법사의 마력이 흔들린 덕분이었다.

간신히 버티는 상황에서 윌로우가 집중을 풀어 버리면 바로 상대측 마법사의 공격이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건 윌로우가 죽어도 마찬가지다.

"실드!"

결국 윌로우는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쪽으로 마력을 돌렸다.

마력의 구가 단단하게 생성되어 그의 몸을 감쌌다.

지잉―!

콰아아아앙!

순간 주변의 땅이 들썩거릴 정도로 강렬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먼지구름이 윌로우를 중심으로 피어올라 모두의 시야를 가렸다.

사아아악....

잠시 후 드러난 광경에 모두가 입을 벌리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위, 윌로우 님이...."

"어떻게 6서클 마법사를 단번에...."

"이럴 수가...."

털썩.

아예 머리가 터져 없어진 윌로우의 몸이 몇 번 흔들리다가 쓰러지고 말았다.

땅에 착지한 지셀은 천천히 허리를 펴고 입 안에 머금었던 피를 내뱉었다.

그때까지도 주변에 있던 적들은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도저히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히이이잉!

파앗!

적들이 멍하니 있는 틈을 타 흑왕이 그들을 뛰어넘어 지셀의 앞에 당도했다.

지셀은 바로 흑왕에 올라타 고삐를 잡고, 마나의 실을 이용해 바닥에 떨어진 창을 다시 주워 들었다.

"후우...."

지셀은 코어 개방 단계를 2단계로 내렸다. 더 이상 3단계를 유지하고 싸우면 자신의 목숨이 위험했다.

몸 안에 가득 찼던 마나의 양이 급격히 줄어들었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 끝이 나겠군."

두두두두두!

그사이 거리를 좁힌 로열 가드들이 지셀에게 다시 몰려오고 있었다. 선두에 선 로네스는 분노를 가득 담아 외쳤다.

"이 비겁한 놈! 네놈이 그러고도 귀족이란 말이냐!"

"그런 건 모르는데?"

"이 명예도 모르는 무도한 놈!"

"50명이 한 명한테 달려드는 건 명예로운 일이고?"

"이놈!"

로네스는 지셀의 이죽거림에 화를 참지 못하고 크게 할버드를 휘둘렀다.

카앙!

할버드를 쳐 낸 지셀은 바로 옆에 다가온 다른 로열 가드의 몸에 창을 찔러 넣었다.

푸욱!

"커헉!"

부웅!

그러고는 다시 창을 휘둘러 반대쪽 로열 가드의 목을 날린다.

흑왕과 함께 춤을 추듯 창을 휘두르며 지셀이 웃었다.

"그렇게 나와 놀고 싶다니 이제 어울려 주지. 너희를 죽이고 해럴드에게 가겠다."

콰앙! 콰앙! 콰앙!

지셀과 로열 가드가 전투를 시작한 그때, 윌로우를 견제하던 바네사가 마력의 변화를 감지하고 눈을 빛냈다.

"영주님이 성공했어."

아직 데스몬드의 본대 근처에는 수십의 마법사들이 남아 자신을 견제하고 있지만, 윌로우가 사라진 이상 그들의 견제는 큰 의미가 없었다.

다시 광역 마법을 시전하려던 바네사는 바로 마음을 바꿨다. 대규모 광역 마법을 쓰면 데스몬드군에 큰 피해를 줄 수 있지만, 아군도 다칠 수 있었다.

두두두두두!

그녀가 목표로 삼은 것은 바로, 펜리스의 궁기병들을 쫓는 에머슨의 기마대였다.

"파이어 랜스."

바네사가 나긋하게 영창하며 손을 휘젓자 타오르는 창이 허공에 수십 개나 생성되었다.

화염의 창들은 그대로 에머슨의 기마대에 꽂혔다.

콰앙! 콰앙! 콰앙!

"으아아악!"

궁기병들을 몰아내고 막 방향을 틀던 기마병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말과 기수들이 한데 엉키고, 반듯하게 유지되던 대형은 엉망이 되어 버렸다.

바네사의 마법 덕분에 에머슨을 떨쳐 낸 궁기병들은 다시 페르디움과 왕국군을 지원하러 움직였다.

바네사는 바로 카오르를 돌아보며 외쳤다.

"영주님이 성공했어요! 우리도 이제 움직여야 해요!"

"알았어, 바로 가자! 야, 근데 너 괜찮아?"

그녀의 코 아래는 아예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바네사는 상관없다는 듯 크게 외쳤다.

"빨리요!"

"아, 알았어. 왜 화를 내고 그래. 얘도 참 안 그래 보이는데 은근히 성질 있다니까."

카오르는 바로 말에 올라타 그녀를 제 뒤에 태웠다. 몇몇 헌터들도 아직 남아 있는 마법사들을 태우고 움직였다.

나머지 헌터들은 바로 에머슨의 기마대를 처리하기 위해 움직였다. 쓰러진 마법사들을 후방으로 옮기기 위해 10여 명의 헌터들만이 자리에 남았다.

지금까지 마법사들은 서로 견제하느라 전장에서 너무 떨어져 있었다. 조금 더 섬세하게 아군을 보호하며 적을 공격하려면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두두두두두!

카오르와 바네사가 데스몬드의 본대를 향해 달려갔다. 그녀가 움직이자 전황이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적당히 거리가 줄어들자 데스몬드군의 마법사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마법을 시전했다.

"익스플로전."

콰아아아앙!

데스몬드군의 진형 곳곳에서 6서클의 화염 마법이 폭발했다. 폭발의 중심에 있던 마법사와 병사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터져 나갔다.

몇몇 마법사들이 표적을 바네사로 바꾸어 대항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떤 마법사는 펜리스군을 노리고, 어떤 마법사는 바네사를 노리고 있으니 손발이 제대로 맞지 않았다.

바네사보다 서클이 낮은 그들이, 겨우 한두 명만으로 바네사의 마법을 해제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콰아앙! 콰아앙!

"으아아악!"

"살려 줘!"

"적 마법사가 다가왔다!"

바네사는 거침없이 마법을 난사했다. 마력이 부족해 피를 토하면서도, 따라온 마법사를 이용해 마력을 채우며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 덕분에 데스몬드의 마법사들이 있던 후열은 빠르게 무너졌다.

수준 높은 기사들은 지셀을 상대하고 있었고 윌로우는 죽었다. 6서클 마법사의 공격을 감당할 수 있는 자는 이제 남지 않았다.

콰앙! 콰앙! 콰앙!

사방에서 마법이 작열하자 집중이 흐트러진 데스몬드군은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 몸을 피하는 병사들이 늘어났다.

덕분에 펜리스군은 훨씬 쉽게 적들을 밀어 낼 수 있었다.

지셀과 싸우던 로네스는 그런 상황을 짐작하고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놈! 죽어라!"

카앙! 카앙! 카앙!

아무리 거센 공격을 해도 상대가 죽지 않는다. 상대는 이미 몇 번의 공격을 허용하고 피투성이가 되어 있다. 죽일 수 있을 거 같은데 죽이지를 못한다.

오히려 이쪽에서 틈을 보일 때마다 한 사람씩 확실히 목숨을 앗아 갔다. 처음에 공격했던 50명 중에서 이제 30여 명만이 남았다.

피잉!

"크읏!"

뭔가 공격에 성공할 거 같다 싶으면 어디선가 창이 날아온다. 창에 실린 힘 자체는 별거 아니었지만 집중을 흩트리기엔 충분했다.

지셀이 이 이상한 재주로 몇 번이나 자신들의 공격을 방해했는지 모른다.

카앙!

다가오는 할버드를 쳐 낸 지셀도 로열 가드들의 실력을 인정했다. 역시 2단계 코어로 전부 이길 수 있는 상대들은 아니었다.

거기다 지셀 자신은 무리하게 돌파를 하느라 마나도 많이 소진하고 지친 상태였다. 최대한 치명타만을 막고 피하며 버티는 게 한계였다.

몸 곳곳이 베이고 찍혀 상처를 입었다. 놀라운 움직임을 보이는 흑왕이 없었다면 더 많은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 죽이고는 있지만, 저들의 합격술은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했다.

이대로 가다간 로열 가드들을 다 죽이기 전에 자신이 죽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그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나도 혼자가 아니거든."

카앙!

지셀이 다시 한번 적의 공격을 막았을 때.

푸욱!

"크억!"

돌아가면서 그를 공격하던 로열 가드들의 후열이 하나둘 무너지기 시작했다.

지셀과 마찬가지로 피투성이가 된 펜리스의 기사들이 당도한 것이다.

"영주님! 괜찮으십니까!"

"나머지는 우리가 상대하겠습니다!"

"저놈들을 죽여라!"

그들은 잽싸게 로열 가드들이 탄 말에 올라타 검을 휘둘렀다. 지셀에게 집중하느라 방심한 그들은 허무하게 목이 베이거나 몸이 뚫려 죽고 말았다.

펜리스 기사들이 달라붙자 데스몬드의 로열 가드들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수적 우위는 역전이 되어 버렸다. 펜리스 기사들이 지친 상태긴 하지만 그들은 로열 가드들보다 훨씬 수가 많았다.

로네스는 이를 악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병사들은 곳곳에서 밀려 죽어가고 있고 로열 가드들마저 발이 묶였다.

"이제 너 혼자 남았네?"

지셀이 씨익 웃으며 창을 늘어뜨렸다. 로네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말을 박찼다.

"이럇!"

두두두두두!

로네스가 할버드를 높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마나를 남김없이 뿜어내고 그것도 모자라 생명력까지 불태웠다.

이 일격에 상대를 죽여야 한다. 상대는 자신보다 윗줄의 실력자였지만, 지금은 상대도 많은 상처를 입고 지쳐 있다. 평소라면 통하지 않을 공격도 통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자를 여기서 죽이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난다. 그렇기에 그는 목숨을 걸고 모든 힘을 다 쏟아부은 것이다.

두두두두두!

지셀도 그를 마주 보고 말을 박찼다. 흑왕이 콧김까지 내뿜으며 달려 나갔다.

지셀이 공격 범위에 들어오자 로네스는 크게 외치며 할버드를 휘둘렀다.

"죽어라!"

부우우웅!

강맹한 일격이 바람을 찢으며 다가온다. 지셀은 순간적으로 3단계의 코어를 활성화했다.

드드득!

갑자기 폭발한 마나가 뼈와 근육을 뒤틀었다. 지셀은 고통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자세를 낮추며 창을 내질렀다.

파악!

로네스의 할버드는 지셀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지셀의 창은 로네스의 목을 뚫었다.

"그르륵...."

서로의 말이 반대 방향으로 스쳐 지나간다.

로네스는 피거품을 내뱉으며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그는 원통한 눈빛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만약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펜리스의 마법사가 조금만 더 늦게 왔다면.

저자를 죽이고 전쟁을 끝낼 수 있었을 텐데.

그것이 그의 마지막 미련이었다.

털썩.

로네스의 시체가 말 위에서 힘없이 떨어졌다. 지셀은 말을 돌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후방의 지휘소에 해럴드가 앉아 있다. 데스몬드의 남은 병력은 페르디움과 왕국군이 상대하고 있다.

이제 자신의 앞을 막을 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전생에 이어.

이번 생에서도 해럴드를 죽일 시간이 왔다.

"해럴드―!"

지셀의 고함이 전장에 천둥처럼 울렸다.

두두두두두!

흑왕이 해럴드 데스몬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292화 이제 끝이 나겠군. (2)

전황은 빠르게 펜리스와 연합군 쪽으로 기울었다.

에머슨의 추격을 떨쳐 낸 궁기병들이 양쪽으로 나뉜 데스몬드군의 후열에 끊임없이 화살을 쏘았기 때문이다.

"으아아악!"

앞뒤로 공격을 당하게 된 데스몬드군은 허무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더 적은 수로도 훌륭하게 우세를 점했던 페르디움군은 궁기병의 도움으로 완전한 승기를 잡았다.

"지금이다! 확실하게 밀어 버려라!"

특히 즈발터는 누구보다 앞에 서서 적을 죽여 나갔다. 원래 평소에 얌전하던 사람이 화가 나면 더 무서운 법이다.

"와아아아아!"

페르디움군이 기세를 타자 가레인 자작이 이끄는 데스몬드군은 더 버티지 못했다.

공포는 전염된다. 데스몬드의 병사들은 하나둘 도망가기 시작했고, 그들의 대열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무너져 갔다.

"도망가지 마라! 이 멍청한 놈들아!"

가레인 자작이 열심히 독려했지만 이미 기울어진 전세가 뒤바뀔 리는 없었다.

페르디움의 기사들은 피를 토하면서도 끝까지 집중을 놓지 않았다. 이제 승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왕국군 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에머슨의 부대가 빠진 데스몬드군을 수적 우위로 압박했다.

페르디움처럼 과격하게 싸운 건 아니지만 정석에 따라 차근차근 적을 밀어냈다.

양옆이 무너지자 데스몬드군의 중앙은 포위당하는 꼴이 되었다.

중앙군은 더 이상 다른 쪽으로 지원을 나가지도 못했다. 그들은 지셀과 바네사의 활약으로 진작에 대열이 무너진 상태였다.

중앙군을 상대로 돌격을 시도한 펜리스의 기사들과 기마병들은 압도적인 방어력을 바탕으로 적들을 죽여 나갔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3인방이 있었다.

"후아! 더워 뒤지겠네!"

"조금만 더 버텨! 우리가 완전히 승기를 잡았어!"

"저놈들 다 도망가고 있잖아!"

전의를 상실하고 무너지는 적들에게는 이제 수적 우위도 의미가 없었다. 노동돌격대에 속한 세 명은 잠시라도 숨을 고르려 투구의 안면 가리개를 열었다.

"아, 살 거 같아!"

크게 소리치는 중년의 남자. 바로 데스몬드의 첩자로서 펜리스 영지에 들어왔다가 노동돌격대에 끌려온 첩자 조장이었다.

다른 두 사람도 안면 가리개를 열며 살 거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 사람의 얼굴은 모두 땀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아무리 갑옷의 방어력이 좋아도 기사들처럼 마법 처리는 되어 있지 않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안쪽 온도가 올라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희열이 가득했다.

"으흐흐흐, 정말 '우리 펜리스'가 데스몬드를 이길 줄이야."

조장의 말에 두 사람도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 보고 도망가거나 다시 저쪽에 붙으려고 했는데 정말 잘됐지 뭡니까."

"자자, 어서 열심히 '적'들을 처리합시다. 얼마 남지 않았어요. 이 갑옷 진짜 대단하다니까."

이들은 원래부터 실력이 일반 병사들보다는 뛰어났다. 그런 자들이 갈바니움 전신 갑옷을 입었으니 쉽게 죽을 리가 없었다.

조장은 창을 들고 힘차게(?) 소곤거렸다.

"자! 힘들지만 조금만 더 열심히 하자! 그리고 새 출발을 하는 거야!"

그들은 펜리스로 전향하기로 완전히 마음먹은 상태였다.

펜리스에는 집도 있고 모아 둔 돈도 많다. 북부 최강이라 불리는 데스몬드만 박살 내면 당장 자신들을 위협할 만한 적도 없었다.

레이폴드가 데스몬드와 비등하다 하지만 그쪽도 반역에 내전에, 상태가 안 좋다.

펜리스가 데스몬드를 점령하면 데스몬드에 있던 가족들도 안전해진다. 이번이야말로 확실한 새 출발과 신분 세탁의 기회였다. 이걸 놓치면 바보다.

그들이 의욕 넘치게 다시 싸우려고 할 때, 한 데스몬드의 장교가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외쳤다.

"너, 너희들은!"

세 사람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상대를 확인한 그들은 사색이 되어 외쳤다.

"저, 저 새끼는?"

세 사람은 잽싸게 투구의 안면 가리개를 내렸지만 이미 늦었다.

장교는 세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해 댔다.

"네놈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그는 데스몬드에서 첩자들을 육성하고 관리하는 교관이었다. 해럴드가 경비병까지 죄다 끌어온 판이라 이번 전쟁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일부 병력을 이끄는 직책으로 참여를 했는데, 여기서 자신이 키워 펜리스로 보낸 첩자들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정체가 발각되자 다급해진 첩자 조장이 외쳤다.

"저 새끼 더 떠들기 전에 죽여야 해!"

괜한 소리를 지껄이면 자신들이 곤란해진다. 새 출발의 꿈이 무너질지도 몰랐다. 조장은 자세를 고치고 외쳤다.

"스트림 어택으로 바로 친다!"

크게 외친 조장은 잽싸게 창을 던졌다.

카앙!

"크읏!"

뭐라고 다시 떠들려던 장교가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라 창을 쳐 냈다. 하지만 공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 틈을 타 다른 조원이 접근하며 바로 창을 찔렀다.

창!

그래도 실력이 제법 있었던 장교는 급하게 자세를 잡으며 두 번째 공격을 막았다. 그러나 그게 그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하아압!"

콰직!

다른 조원이 허리춤에서 도끼를 꺼내 장교의 목을 친 것이다.

장교는 이미 연속된 두 번의 공격을 막느라 자세가 완전히 흐트러진 상태였다. 세 번째 공격은 막을 수가 없었다.

원거리, 중거리, 근거리의 조합이 완벽한 합격술. 이것이 세 사람의 필살기인 '스트림 어택'이었다.

"크륵.... 이 배신자 새끼들...."

장교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피거품을 내뿜으며 쓰러지고 말았다.

세 사람은 주변 눈치를 보다가 다른 자가 없음을 확인하고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다행이다. 더 떠들면 곤란해질 뻔했어. 이 새끼 교육 때 우리 엄청 괴롭혔는데, 속이 다 시원하네."

그런데 때마침, 로열 가드들을 쓰러뜨리고 다시 적 진형을 밀어내고 있던 고든이 세 사람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쓰러져 있는 장교의 복장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이야! 너희들 셋이서 적 장교를 죽였구나! 데스몬드의 장교면 실력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대단한걸?"

계급이 높은 자를 죽일수록 공이 올라간다. 고든은 껄껄 웃으며 세 사람에게 말했다.

"이렇게 열심히 싸우고 적 장교까지 죽일 줄이야! 노동돌격대에 있어서 첩자인 줄 알고 괜히 의심했네! 그동안 의심해서 미안했다! 너희들 공은 내가 위에 꼭 말해 줄게!"

"아하하하...."

"저희 나쁜 사람 아니라니까요...."

"꼭 위에 말 안 해도 되는데...."

세 사람은 어색하게 웃었다. 괜히 공치사 듣겠다고 사람들 눈에 노출되고 싶지는 않았다. 혹시나 나중에 자신들의 정체를 알고 있는 포로라도 만나면 큰일 난다.

하지만 그들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고든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리 영주님이 보상 하나는 확실한 사람이거든!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싸워!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아하하하...."

세 사람은 계속 어색하게 웃으면서 전투를 이어 나갔다.

'저 새끼는 그냥 근육이나 키우지, 오지랖까지 넓어서!'

어떻게든 자신들의 얼굴을 아는 놈은 만나자마자 죽여야겠다는 다짐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노동돌격대가 활약하는 위치를 포함해, 데스몬드군은 모든 방향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가장 높고 안전한 곳에서 그 양상을 보고 있던 해럴드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내 군대가... 내 군대가...."

믿을 수가 없었다. 북부에서 최강이라 불리는 자신의 군대다. 하나하나 정예가 아닌 자가 없었다.

그런 정예를, 압도적인 수로 데려왔는데도 패색이 짙어지고 있다. 아니, 이미 패배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대열은 완전하게 망가졌고 사방에서 도망자가 속출하고 있었으니까.

그나마 분전하고 있던 에머슨의 기마대는 페르디움군과 왕국군이 포위에 성공하자 도망도 못 가고 죽어 나가는 판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한 사람이 자신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해럴드―!"

지셀은 분노와 희열에 가득 찬 외침을 내지르며 폭풍과도 같은 기세로 달려왔다.

"지셀! 네 이놈!"

해럴드도 분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놈 때문이다. 언제나 승승장구하던 자신이 저놈 때문에 모든 일을 망쳤다.

마지막 결전이라는 생각에 영지의 모든 힘을 쏟아부었건만, 그마저도 실패했다.

이제 자신은 끝이다. 더 이상 북부의 대영주라 불리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쌓아 온 모든 것이 오늘 무너졌다. 그리고 자신의 부와 드높은 명성은 전부 저놈이 가져갈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최고의 길만 걸었던 자신이 북부에서 가장 형편없는 놈이라 소문났던 애송이한테 패배했다.

자신의 이름은 역사에 남아 영원토록 조롱을 당할 것이다.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이 굴욕을 어찌 참을 수 있을까!

"으아아아아아!"

해럴드는 눈에 핏발을 세우며 고함을 질렀다.

옆에서 참모들이 그의 팔을 잡고 외쳤다.

"백작님! 끝났습니다! 항복하셔야 합니다!"

"로열 가드들도 없습니다! 피하셔야 합니다!"

"가까운 공작파의 영지로 가시면 됩니다!"

촤악!

"커헉!"

도망과 항복을 말한 참모들은 모두 해럴드의 검에 목이 베였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다른 참모들과 소수의 병사들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머리가 헝클어진 채 피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해럴드는 정상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를 지탱해 온 건 북부의 대영주로서 가진 자존심과 명예였다. 그걸 전부 잃은 지금 그에게는 삶의 의미가 없다.

회복하는 방법은 오직 단 하나.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저 애송이를 없애는 것뿐이다.

터억.

지셀은 흑왕에서 내린 뒤, 검을 들고 해럴드에게 다가갔다.

"해럴드."

"지셀."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며 이름을 불렀다.

공작가의 명령이긴 했지만 어쨌든 해럴드는 페르디움을 멸망시키려 했고, 전생에는 실제로 멸망시키기도 했다.

그렇기에 지셀과 해럴드는 맞붙을 수밖에 없다. 지셀과 공작가의 인연이 그렇듯, 지셀과 해럴드 역시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악연 중의 악연이었다.

그리고 지금, 하나의 악연을 다시 끊을 때가 왔다.

피투성이가 된 지셀은 희열에 찬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드디어 네놈을 죽일 때가 왔구나."

"흐흐흐...."

해럴드는 별말을 하지 않고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 대기만 했다. 그의 눈빛은 지셀 못지않게 살의로 가득 차 있었다.

서로의 눈빛만 봐도 알 수가 있다. 두 사람이 얼마나 서로를 증오하는지 말이다.

해럴드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가며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때, 네놈 동생을 노리는 게 아니라 그냥 군대를 이끌고 가서 페르디움을 짓밟았어야 했는데."

그것이 첫 번째 후회다.

"네놈이 룬스톤을 얻었을 때 빅토르가 아니라 내가 직접 전군을 이끌고 갔어야 했어. 명분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서라도 말이다."

그것이 두 번째 후회다.

"카발디 백작을 쳤을 때도, 왕국군을 밀어 버리고 너를 죽이러 갔어야 했다."

그것이 세 번째 후회였다.

해럴드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지셀을 죽일 수 있었던 기회가, 몇 번이나. 하지만 공작가의 명령, 명분, 주변의 정세 등 그가 고려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머뭇거리는 사이, 지셀은 이제 자신까지 무너뜨릴 정도로 성장을 해버렸다.

"하지만 마지막 기회마저 놓칠 순 없지."

지셀은 지금 피투성이가 된 채로 혼자 달려왔다. 오랜 전투로 인해 딱 보아도 몸 상태가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호흡은 불규칙하고 곳곳에 상처가 즐비하다.

해럴드 또한 상급의 기사다. 데스몬드 백작가에 전해 오는 수준 높은 검술을 익혔고, 재능도 누구 못지않았다.

나이를 먹고 영주 자리를 물려받은 뒤로는 검술 수련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지만, 상처 입은 맹수를 잡지 못할 정도로 약하지도 않았다.

쿠웅!

해럴드가 자신의 마나를 모두 끌어올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나 코어를 아예 파괴할 정도로 생명력까지 뽑아 쓰기 시작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목표는 단 하나.

지셀을 죽여 상처 입은 자존심이라도 살리는 것뿐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죽어라."

증오가 끓어 넘치는 한 마디를 내뱉고 해럴드는 그대로 지셀에게 달려갔다.

카앙!

모든 힘을 불태우는 해럴드의 기세는 만만치가 않았다. 검을 막은 지셀도 순간 휘청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지셀은 여전히 희열에 찬 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그는 해럴드의 검을 막은 채로 입을 열었다.

"네놈을 죽였을 때의 기분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흐흐흐.... 미친놈인 줄은 알았는데 생각보다 심각하구나. 넌 오늘 나한테 죽는다."

"네놈의 시체를 수백, 수천 번을 난도질해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허무감은 더 깊어지기만 했지. 널 죽여도,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그저 분풀이일 뿐이었지."

해럴드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헛소리가 분명하지만, 그 안에 담긴 절절한 감정은 마치 진실처럼 느껴졌다.

지셀은 여전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순간은 그때와 다르다고 확신한다. 나는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기쁘다."

콰아앙!

순간 마나의 폭풍이 퍼져 나갔다. 해럴드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지셀은 다시 3단계의 코어를 개방했다.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마나를 끌어올리자 그 흐름에 머리카락까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드드드득!

이미 지셀의 몸은 한계에 달한 상태였다. 코어를 개방한 것만으로 곳곳에서 피가 터져 나오고 몸이 뒤틀렸지만, 그 고통 속에서도 지셀은 그 어느 때보다 기쁘게 웃었다.

이까짓 고통은.

모든 이를 잃었던 전생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전생처럼 시체도 남겨 주지 않겠다. 해럴드 데스몬드."

"그래, 그래야지. 그렇게 발광해야 널 죽일 때의 기쁨도 더 크지 않겠느냐."

해럴드도 지셀 못지않게 환히 웃었다. 그의 머릿속에 남은 것은 미칠 듯이 끓어오르는 분노와 증오뿐이었다.

서로를 향해 실컷 웃음을 짓던 두 사람은.

콰앙!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293화 대가를 받을 시간이다. (1)

두 사람의 검이 강하게 부딪친다. 서로에 대한 증오가 가득하기에 양쪽 다 한 치도 물러설 수가 없었다.

카아아앙!

물론 3단계를 개방한 지셀의 힘을 해럴드가 감당할 리가 없었다. 검날이 맞붙은 순간, 해럴드의 검은 뒤로 튕겨 나갔다.

"무슨!"

지셀이 강하다는 건 이제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 힘을 직접 겪으니 느낌이 전혀 달랐다.

아예 생명력을 모두 뽑아 썼음에도 이런 격차라니!

해럴드가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지셀이 다시 검을 휘둘렀다.

카앙! 카앙! 카앙!

지셀이 우월한 점은 힘뿐만이 아니었다. 검의 궤적이 너무나도 현란해 해럴드가 미처 눈으로 좆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절대 이 나이에 오를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경지였다.

해럴드는 경악을 삼키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어떠한 수를 써도 지셀에게 검이 닿지 않았다. 자신은 오히려 막기에만 급급할 뿐이었다.

'이놈의 재능이 이 정도였단 말인가!'

지셀은 거대한 벽이었다. 싸우면 싸울수록 그의 진가가 느껴졌다. 아주 노련한 전사와 싸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압도적인 격차에 해럴드는 결국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리고 지셀은 그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촤악!

"크윽!"

해럴드는 가까스로 피했지만 가슴을 길게 베였다. 그는 이를 악물며 몇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저놈이... 저놈이 정말 북부제일검이란 말인가?'

공작가에서는 지셀을 북부제일검인 위르겐과 동급으로 상정했다. 하지만 해럴드는 그 정보를 접하고서도, 무력뿐만 아니라 지휘 능력과 영지 운영 능력 따위까지 전부 포함해서 높이 친 거라 판단했다.

그런데 저렇게 지치고 상처 입은 상태에서도 이런 힘을 보이다니! 도대체 얼마나 강하길래 아직도 이렇게 싸울 수 있다는 말인가.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었음에도 해럴드는 믿을 수 없었다. 지셀이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것이 그의 패배감을 더 부추겼다.

"인정할 수 없다!"

해럴드가 악을 지르며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지셀의 검이 그의 정면으로 날아왔다.

콰르르릉!

검을 휘두르는 것뿐인데, 공간이 찢어지고 하늘이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았다. 해럴드는 도무지 그 검을 막을 자신이 없었다.

머리카락을 넘실거리며 다가오는 악마의 붉은 눈을 마주 본 순간, 해럴드는 엄청난 공포를 느꼈다.

공포로 이성이 마비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본능적으로 한쪽 팔을 드는 것뿐이었다.

콰직!

"크아아악!"

해럴드의 왼팔이 팔꿈치부터 잘려 나갔다. 그는 피를 철철 흘리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그 모습을 본 지셀은 코어를 안정시키며 개방 단계를 한 단계 내렸다. 단숨에 몰아붙여 팔까지 잘랐으니 더 이상 무리하게 3단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다.

"곱게 죽을 생각은 하지 마라, 해럴드."

"끄흐으으으으...."

해럴드는 잘린 팔 부위를 붙잡고 신음만 내뱉을 뿐이었다.

이제 그에게서 대영주의 품위는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깔끔했던 외관은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졌고, 입에서는 피 섞인 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무리 명문가의 마나 연공법과 검술을 익혔다 한들, 애초에 해럴드는 검에 뜻을 둔 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영지 운영과 정치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좋은 재능을 타고났고, 환경도 풍족했던 덕분에 상급 기사의 수준에 오를 수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생명력까지 태워도 3단계의 힘을 개방한 지셀을 당해 내기는 역부족이었다.

"크흐흐흐흐...."

신음은 언젠가부터 자조적인 웃음으로 바뀌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 나이에 그런 지식과 힘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냐...."

북부의 망나니라 불리던 놈이 어떻게 이런 괴물 같은 놈이 되었을까?

어째서 자신은 이놈의 정보를 놓쳤을까?

모든 게 의문이고 모든 게 후회일 뿐이었다.

"크흐흐... 생명력까지 불태웠건만, 그 정도로는 너에게 닿지 않는다는 것이냐."

생명력은 조금만 써도 노화가 진행되고 절대 회복되지 않는 힘의 근간이다. 그렇기에 어지간히 위급한 상황, 절체절명의 위기가 아니라면 쓰지 않는다. 쓰게 되더라도 잠깐만 쓰고 멈춰야 한다.

해럴드는 아예 목숨을 버리고 지셀을 죽일 각오로 코어까지 파괴했다. 하지만 넘치는 그 힘으로도 지셀의 터럭 하나를 건들지 못했다.

절망.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음에도 상대를 죽이지 못한다는 거대한 절망이 그를 덮었다.

모든 걸 잃었는데, 그 원한마저 갚지 못하고 죽게 생겼다.

"크크크큭...."

참을 수가 없었다. 굴욕과 수치, 박살이 난 자존감이 그를 계속 고통스럽게 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어깨를 들썩인 해럴드가 고개를 들어 지셀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셀도 해럴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놈과 델파인 공작을 죽이는 꿈을 매일 꿨었지. 오늘 하나의 꿈을 이루는군."

"크흐흐... 그냥 꿈만 꾸지 그랬느냐."

해럴드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 어차피 모든 걸 잃을 거라면... 그걸 써도 되겠지...."

"뭐?"

"지셀... 너는 이런 힘을 본 적이 없을 거다. 너를 죽이는 걸 온전히 나 자신의 의지로 느낄 수 없는 게 아쉽지만... 너에게 패배한 채로 죽는 것보다 낫겠지. 잘 봐라. 내가 숨겨둔 최후의 힘을."

그그그그그....

갑자기 해럴드의 몸이 평소보다 더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근육이 비대하게 커지고 힘줄이 터질 듯이 솟아 나왔다.

마나의 폭풍이 강렬하게 퍼져 나간다. 그 힘을 버티지 못한 해럴드의 몸 곳곳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지셀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건....'

"크아아아아!"

해럴드의 눈에서 이성의 빛이 사라졌다. 그는 피를 철철 흘리는 한 마리의 괴물이 되어 버렸다.

쿠우우우웅!

해럴드가 평생을 쌓아 온 모든 마나가 생명력과 함께 불타며 그의 온몸에서 폭발하듯이 터져 나왔다.

마치 지셀과 펜리스의 기사들이 쓰는 마나 연공법과 비슷했다. 다른 점은, 쓰는 사람의 정신이 나가 버렸다는 것이었다.

"크아아아!"

다시 한번 괴성을 내지른 해럴드가 검을 휘두르자 어마어마한 광풍이 몰아닥쳤다.

콰아앙!

그 힘에 지셀도 순간 뒤로 밀릴 정도였다.

'이것 봐라?'

해럴드가 다시 다가오자 지셀도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맞받아쳤다.

콰앙!

다시 붙은 전투의 양상은 그전과는 달랐다. 오히려 해럴드가 지셀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힘과 속도가 엄청나게 늘어난 해럴드는, 자신이 상처 입는 건 개의치 않고 움직였다.

그야말로 미쳐 버린 짐승 그 자체였다.

카앙!

지셀은 해럴드의 검을 막아 내며 이죽거렸다.

"인간으로 죽기는 포기한 거냐, 해럴드?"

"크아아아아!"

해럴드는 제대로 된 대답도 없이 괴성만 질러 댔다.

카앙! 카앙! 카앙!

지셀은 그와 맞서 싸우면서도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 힘, 본 적이 있다.'

해럴드의 마나 연공법은 전생에 데스몬드를 점령하고 얻어 봤기에 잘 알고 있다. 그 연공법에는 이런 효능은 절대 없었다.

아무리 죽음을 각오한다 해도 이 정도로 과격한 힘을 낼 수는 없다. 명문가의 마나 연공법은 절대 그런 방식을 쓰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해럴드는 본래 그가 가진 힘을 몇 배나 폭발시켜 내보이는 것 같았다.

마치 지셀 자신처럼 말이다.

'그때와 비슷하다.'

전생에도 이렇게 생명력을 폭발시켜 스스로의 한계 이상으로 힘을 끌어내는 놈들이 간혹 있긴 했다.

당시엔 자신의 무위가 너무 높아 상대가 생명력을 폭발시키든 말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 마나 연공법이 대륙에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귀족 중의 귀족인 해럴드가 이런 마나 연공법을 쓰는 건 이상했다. 전생에는 단칼에 허리를 베어 죽여서 이런 걸 익히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건 마치....'

전생에 바네사가 익혔던 엉터리 마나 연공법과도 묘하게 비슷하다. 그녀는 그걸 익히고 미쳐 버렸다.

생각해 보니 자신에게 덤벼들었던 몇몇 놈들도 그랬던 거 같다.

'미치거나... 혹은 괴물처럼 변하거나. 설마 다들 이놈과 비슷한 마나 연공법을 익히고 있던 거였나?'

싸우는 놈마다 마나를 쓰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기에 그냥 잠력을 폭발시켜 싸우는 줄로만 여겼다. 자신도 성질이 비슷한 마나 연공법을 쓰고 있으니 심각하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냥 덤벼드는 족족 다 쉽게 때려죽였으니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해럴드 같은 고위 귀족까지 이런 힘을 쓰는 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지셀은 전생에 싸웠던 놈들을 새삼 떠올렸다. 해럴드처럼 힘을 폭발시키는 놈들의 특징이 하나 있었다.

'이 힘을 쓰면 반드시 죽는다.'

자신이 개량한 마나 연공법을 익힌 이들은 꾸준하게 수련하면 제한 시간을 늘릴 수 있다. 힘을 폭발시켜도 적절한 때 멈추면 아무 문제 없다.

하지만 전생에 적으로 만났던 놈들은, 이 힘을 쓰고 나면 절대 멈추지 못했다.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힘이 폭주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마나 연공법에서 극단적으로 힘만 추구하고 안정성을 버린 부작용 덩어리.

지셀이 전생에서 본 그놈들과 지금의 해럴드는 비슷했다.

"크아아아아!"

해럴드는 이제 인간이라 할 수 없었다. 오직 눈앞에 있는 모든 걸 죽이려는 본능만 남아 있는 괴물이었다.

부우우웅!

콰아앙!

강하게 휘둘러지는 해럴드의 검을 막은 지셀의 몸이 점점 뒤로 밀려 나갔다.

갈수록 힘이 강해진다.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만으로도 땅이 뒤집힐 정도였다. 해럴드 스스로도 그 자신의 힘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셀은 이를 악물고 웃으며 다시 3단계의 코어를 개방했다.

"그래, 어디 한번 끝까지 해보자."

드드드드득!

콰아앙!

강렬한 마나의 힘을 두른 검이 부딪친다. 지셀은 조금 전과 달리 밀리지 않고 버텼다.

콰앙! 콰앙! 콰앙!

두 사람의 검이 부딪칠 때마다 마나의 파동이 뿜어져 나간다. 그것은 주변을 강타하며 파편들을 흩뿌렸다.

조금 떨어져 있던 데스몬드의 남은 참모와 호위병들은 더 거리를 벌리며 물러났다.

만약 저 힘의 폭풍에 말려들어 간다면 단숨에 몸이 갈기갈기 찢길 것이다.

콰앙!

다시 한번 해럴드의 검을 튕겨 낸 지셀이 땅을 박찼다.

그 순간 자리에서 사라졌던 그가 순식간에 해럴드의 뒤에 나타나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악!

부우웅!

해럴드는 곧바로 뒤를 돌아보며 검을 휘둘렀다. 지셀은 잽싸게 고개를 숙여 피하고 뒤로 물러났다.

'역시....'

저건 고통을 버티는 게 아니다. 잠깐의 머뭇거림이나 미세한 근육의 경직조차 없었다. 아예 감각이 사라져 몸이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거기에 상처도 무척이나 얕게 들어간다. 불어난 마나로 전신을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콰아앙!

바로 이어지는 해럴드의 공격을 지셀이 피하자 애꿎은 땅만 박살이 났다. 지셀은 바로 한쪽 발로 땅을 강하게 밟았다.

콰앙!

충격파에 해럴드의 몸이 흔들리며 순간 균형을 잃었다. 지셀은 그 틈을 타 다시 검을 휘둘렀다.

촤악!

목을 베었음에도 겉가죽에만 약간의 실선이 생기는 정도다. 3단계까지 코어를 개방했는데도 그 힘을 버티다니, 엄청난 방어력이었다.

"크아아아!"

부웅!

해럴드가 다시 휘두른 검을 지셀은 이번에도 쉽게 피했다.

힘은 전보다 강해졌지만, 해럴드의 검술은 오히려 퇴보했다. 이성을 잃고 그저 본능적으로 휘두르는 것에 불과했다.

'뭔가 조금 다르군.'

전생에도 이런 놈들이 있었지만 그 수준이 다양했다.

미치고서도 본신의 능력을 모두 발휘하는 놈들은 분명 존재했다. 바네사도 미쳤지만 7서클의 마법을 그대로 시전할 수 있었다.

몸이 괴물처럼 변해도 정신은 멀쩡한 놈도 있었다.

그놈들에 비하면 해럴드는 뭔가 조금 부족해 보였다.

"크아아아아!"

자신의 공격이 통하지 않자 해럴드는 분노에 찬 괴성을 내질렀다. 사고 능력이 정말 짐승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다.

"후우...."

이런 식으로 싸우면 끝이 나지 않는다. 지셀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차피 이런 놈들은 앞으로도 만나게 될 터다. 지금은 더 생각할 필요도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드드득.

자신의 몸도 이제 한계를 넘어 망가져 가고 있었으니까.

고오오오오!

지셀은 마나를 더욱더 빠르게 순환시켰다. 코어가 급격히 달아올랐다. 신경 하나하나가 위험하다고 경고를 울렸다.

콰아아앙!

지셀은 해럴드의 공격에 피하지 않고 맞섰다.

으득.

이를 깨물고 고통을 참으며 쉼 없이 검을 휘둘렀다. 일견 무모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적은 아직도 많다. 해럴드보다도 더 강대한 적이 기다리고 있다.

지금처럼 온 힘을 다 쏟아 낼 수 있는 상대를 만났을 때 한층 더 성장해야 한다.

뿌드득!

'조금만 더.'

일반적인 수련만 해서는 육체가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다. 목숨을 건 수련만큼 성장에 효과적인 건 없다.

드드드득!

뼈와 살은 뒤틀리고 찢어진 지 오래였다. 이 이상 싸우면 수련이 아니라 몸을 망치는 길이다.

하지만....

드드드득!

블러드 퓌톤의 독을 먹고 얻은 새로운 능력.

그 능력이 실낱같이 남아 있는 마나를 쥐어 짜내며 몸을 회복시키려 했다. 이럴 때 육체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치이이이익!

온몸을 적신 피가 단숨에 붉은 연기가 되어 지셀을 감쌌다.

'더!'

콰아아앙!

어느 순간 해럴드는 지셀의 힘에 압도당하기 시작했다.

지셀은 붉은 안광을 줄기줄기 뿜어내며 사정없이 검을 내리쳤다.

콰앙! 콰앙! 콰앙!

"크아아아악!"

해럴드는 괴성을 내질렀다. 한 번씩 검을 부딪칠 때마다 엄청난 충격이 몸속을 때렸다.

괴물로 변해 이지를 잃은 그의 눈이 당황으로 물들 정도였다.

콰아앙!

해럴드가 순간적으로 들어오는 강한 힘을 견디지 못하고 검을 놓치고 말았다.

지셀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해럴드의 몸을 갈랐다.

콰앙!

그는 얼얼한 손아귀에 재차 힘을 주어 검을 단단히 잡았다. 몸이 단단하니 제대로 베이지 않는다. 마치 둔기로 몸을 때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콰앙! 콰앙! 콰앙!

"크아아아아!"

해럴드는 남은 한 손을 마구 휘두르며 저항하려 했다. 하지만 지셀은 엄청난 속도로 검을 둔기처럼 휘두르며 계속 때려 댔다.

콰앙! 콰앙! 콰앙!

지셀이 내지르는 강력한 마나가 해럴드의 몸속에 쉼 없이 충격을 주었다. 어느 순간부터 해럴드는 제대로 공격하지도 못하고 계속 뒤로 밀리기만 했다.

맹렬한 마나의 파동은 폭풍처럼 해럴드의 몸속을 뒤집었다. 그것은 폭발하는 해럴드의 마나와 부딪치며 더 큰 충격을 만들어 냈다.

콰앙! 콰앙! 콰앙!

해럴드는 보는 사람의 속이 시원해질 정도로 두들겨 맞았다. 그의 몸이 흔들릴 때마다 그를 감싸고 있던 마나가 흩어지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뚜둑.

지셀도 뼈가 뒤틀려 금이 가다 못해 부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초인적인 인내로 고통을 참고 말했다.

"끝이다."

쿵!

지셀이 강하게 땅을 밟으며 마치 몽둥이를 휘두르듯, 검으로 해럴드의 머리를 강하게 후려쳤다.

콰아아앙!

갑자기 골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을 받은 해럴드의 입에서 괴물의 포효가 아닌, 인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무슨...."

그의 눈빛에 이성이 돌아오고 있었다.

294화 대가를 받을 시간이다. (2)

해럴드는 인정할 수 없었다. 이 힘은 금단의 힘이다. 쓰면 반드시 이성과 목숨을 잃는 최후의 수단.

자신은 모든 걸 잃었다. 그렇기에 목숨마저 버리고 지셀을 죽이려고 이런 추한 힘까지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그 힘이 통하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쓸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힘을 썼음에도 밀리다니!

"으아아아아아!"

해럴드는 괴성을 내지르며 마구잡이로 주먹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의 공격은 양민이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스걱!

지셀이 해럴드의 손목을 베어 냈다.

"크아악!"

이번에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베이며 피가 솟구쳤다. 해럴드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본 지셀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조금 다르군.'

전생에 보던 것보다 확실히 마나 연공법의 수준이 낮아 보였다.

제대로 폭주한다면 아예 목이 날아가기 전까지 고통도 느끼지 못한 채 움직인다. 저렇게 정신이 돌아오지도 않는다.

바네사도 코어가 깨지고 죽을 때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해럴드는 괴물이 되다 만 것처럼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과연 해럴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외쳤다.

"어떻게! 어떻게 네놈이 이 힘을 견딜 수 있다는 말이냐! 공작가가 준 이 초월적인 힘을!"

"공작가...?"

지셀은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다. 역시 저 마나 연공법은 개인이 가진 연공법이 아니었다. 공작가가 만들어서 수하들에게 뿌린 것이다.

한데 고위 귀족인 해럴드에게까지 저런 걸 익히게 하다니. 그것도 전생에서 봤던 것보다 현저히 위력이 약한 걸로 말이다.

'저 엉터리 마나 연공법도 등급이 있는 건가? 아니면 공작가에서도 계속 개량 중인 건가.'

확실히 전생에서는 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이런 놈들을 만났다. 각자 익힌 게 다를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하는 걸 수도 있었다.

전생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갔지만, 지금은 자신이 익힌 것과 비슷한 효과를 추구하는 게 거슬렸다.

마음 같아서는 이것저것 캐묻고 싶지만 해럴드가 제대로 말해 줄 리가 없었다.

'그나저나 초월적인 힘이라니. 고작 저 정도를 가지고 그렇게 믿고 있었단 말인가?'

전생에서 봤던 그 힘은 저렇게 어설프지 않았다. 평범한 기사도 마스터급의 힘을 발휘하게 한다.

지셀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공작가에서 아직 개량 중인 마나 연공법인 게 분명하군."

전생에 봤던 높은 등급의 연공법이 있다면 해럴드 정도의 중요 인물에게 저딴 저급한 걸 줬을 리가 없다.

"...네놈이 어떻게?"

해럴드가 큰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건 공작가에서도 극소수의 인물들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그런데 지셀은 공작가에서 마나 연공법을 계속 연구하고 개량 중이란 걸 알고 있었다는 듯 말하지 않았나.

"도대체... 도대체 네놈은 뭐란 말이냐!"

발작하는 해럴드를 보며 지셀은 코어의 개방 단계를 다시 한 단계 내렸다. 이제 더 이상 3단계를 유지할 필요도 없었다.

해럴드의 몸은 갈수록 쪼그라들며 급속도로 노화되기 시작됐으니까.

마나 연공이 깨지니 힘은 힘대로 못 쓰고 생명력은 폭주하여 더 빨리 소모가 되는 것이다.

그런 해럴드의 모습에 지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죽음에서 돌아온 자라고 해 두지."

"뭐?"

"네놈과 공작가를 없애기 위해서 말이다."

"네, 네놈 따위가... 네놈 따위가! 네놈 따위가 이 나를!"

해럴드는 이제 검도 들지 못한다. 그는 피눈물을 흘리며 소리만 지를 뿐이었다.

저벅. 저벅.

지셀은 천천히 해럴드의 앞으로 걸어갔다.

이대로 기다리기만 해도 해럴드는 말라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죽음은 너에게 사치지."

페르디움의 멸망을 뒤에서 사주한 건 공작가지만, 그걸 수행한 자는 해럴드다.

그는 엘레나를 죽이고 영지전을 부추겼으며 결국 페르디움을 짓밟았다. 그리고 이번 생에서도 페르디움을 없애기 위해 수많은 수작을 부려왔다.

오래전부터 북부에서 암약한 그를 이렇게 편히 죽일 수는 없었다.

지셀은 해럴드의 검을 들어 마나를 주입했다.

콰지직.

검날이 파괴되며 여러 개의 파편으로 갈라져 바닥에 떨어졌다.

지셀은 마나의 실로 그것들을 띄운 뒤 미소 지었다.

"이제 네가 한 짓에 대한 대가를 받을 시간이다. 해럴드 데스몬드 백작."

파파파파팍!

"끄아아아아악!"

몸 곳곳에 검의 파편이 박힌 해럴드가 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파편은 그의 신경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고통이 너무 강해, 기절하기는커녕 정신이 더욱더 또렷해졌다.

"으아아아아아!"

해럴드는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계속 비명만 질러 댔다.

한참을 그렇게 발작을 하던 해럴드는 완전한 노인이 되어 머리카락과 이빨이 다 빠질 즘에야 발작을 멈췄다.

그는 마지막 힘을 짜내듯이 입을 달싹였다.

"네놈... 공작가가 반드시...."

그렇게 해럴드는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하고 입만 벌린 채로 죽고 말았다.

지셀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놈에게 어울리는 초라한 죽음이로군."

해럴드의 사망 소식은 금세 데스몬드군의 진영에 알려졌다.

이미 중앙이 와해되고 페르디움군과 왕국군에 포위당한 그들은 소식을 듣자마자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거나 도망가기에 바빴다.

펜리스의 선임 기사 고든이 가장 먼저 지셀에게 달려왔다. 그는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이겼습니다! 영주님! 우리가 이겼습니다! 대승입니다! 우리가 북부 최강이라는 데스몬드군을 이겼단 말입니다!"

"와아아아아!"

곧이어 사방에서 함성이 울려 퍼졌다. 3만의 군대에 맞서 역사에 남을 만한 대승을 거두었다.

모두가 기뻐하는 와중에 지셀이 굳은 표정으로 고든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은 모두 말을 타고 나를 따른다."

"네? 갑자기 왜요? 전장을 정리하고 전리품도 얻고 휴식도 취하고 그래야 하지 않습니까?"

"전장 정리는 아버지와 왕국군 쪽에 부탁하도록 하지. 감사 인사는 조금 나중에 한다고 전해라. 어서 움직여라. 지금 당장 데스몬드의 성과 주요 요새들을 점령해야 한다."

"데스몬드를요?"

고든이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데스몬드의 주력은 이미 전멸했다. 그곳은 텅텅 비어 지킬 사람도 없다.

그냥 당당하게 들어가서 접수하면 되는 일이다. 누가 감히 자신들을 방해한다는 말인가?

설사 누군가가 빈집을 차지하려 해도 이제 막 전쟁이 끝났다. 결과를 알고 움직이려면 시간이 걸린다.

바로 군대를 이끌고 오려 해도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당한 명분도 이쪽에 있다. 왕국군까지 포함된 이 군대에 맞서 싸운다? 북부에 그럴 만한 미친놈은 없었다.

"왜 벌써 갑니까? 거기는 이미 우리 거예요. 건드릴 수 있는 사람도, 건드릴 만한 사람도 없습니다."

고든은 자신이 아는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를 꺼냈다. 하지만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이 북부에는 그럴 만한 사람이 하나 있다.

군대도 이미 준비되어 있고 누구보다 빨리 움직일 수 있으며 왕국군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말이다.

분명 사람을 보내 계속 이곳 상황을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과가 나오는 대로 바로 움직일 것이다.

이제 누가 더 빨리 데스몬드를 차지하느냐의 싸움이었다.

"설명은 나중에 하지. 어서 빨리 움직여라."

지셀이 바로 흑왕에 올라탔다. 다들 전투에 지친 상태라 속도를 내기 어려웠다.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여야 했다.

승리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지셀과 펜리스군은 데스몬드를 향해 바쁘게 움직였다.

* * *

"사, 살려 주시오!"

"우리가 실수했소이다!"

"내 충분한 보상을 줄 것이오!"

피투성이가 된 영주들이 포박당한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들의 입에서는 목숨을 살려 달라는 애원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영주들이 애걸하는 상대는 바로 그들이 공격했던 아멜리아였다.

북부의 영주들은 연합군까지 결성하여 기세등등하게 아멜리아를 공격했지만, 단숨에 박살이 나고 포로로 잡힌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영주들의 애원을 듣고 있던 아멜리아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 같이 힘을 모아 내 뒤를 쳤으면서 이제 와서 살려 달라고?"

포로가 된 영주들은 사색이 되어 외쳤다.

"항복하지 않았소! 관습에 따라 목숨을 보전해 주시오!"

"내 다시는 그대를 적대하지 않을 것이오!"

"영지 재산의 절반을 주겠소! 내 몸값으로 말이오!"

처절할 정도의 애원이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했다.

"나는 나한테 덤빈 놈들을 가만두지 않아. 처리해라."

냐앙.

바스테트의 울음소리를 배경으로, 주변에 서 있던 기사들이 영주들을 끌고 갔다.

"이, 이보시오! 제발 살려 주시오!"

"우리는 항복하지 않았소이까!"

"이 무도한 악녀 같으니라고! 내 죽어서도 너를 가만두지 않겠다!"

영주들은 애원과 욕설, 저주를 내뿜으며 끌려갔다. 끝까지 별다른 감흥 없이 그들을 보던 아멜리아는 저 멀리 있는 성을 보고 표정을 살짝 찡그렸다.

"발루아 남작... 아직도 성에서 웅크리고만 있다니."

연합군을 맞이하면서 유인하기까지 했건만 발루아 남작은 나오지 않았다.

충분히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줬는데도 넘어오지 않은 것이다.

아멜리아는 모르는 일이지만, 사실 발루아 남작도 연합군이 도착했을 때 나가려고 했다. 연합군과 힘을 합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셀에게 받았던 조언, 또는 경고가 계속 그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절대로 성 밖으로 나가 싸우지 말 것. 기회가 온 거 같아도 그건 기회가 아니다.]

분명 기회가 왔다. 그런데 마치 이런 일이 있을 줄 예상했다는 듯한 서신의 내용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의 고민을 더 부채질한 것은 다름 아닌 데이븐이었다.

"빨리 나갑시다! 나가서 저년을 완전히 박살 내자고요! 북부 영주들이 왔으니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다!"

레이폴드의 4공자 데이븐은 주색잡기를 빼고는 잘하는 게 없는,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이다.

그런 놈이 나가자고 하니 더 믿음이 안 갔다.

그렇게 고심만 하다가 결국 나갈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아쉬워하던 발루아 남작은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된다.

북부 연합군 5천이 별 힘도 못 써 보고 레이폴드군에 전멸당한 것이다.

발루아 남작은 그 광경을 보고 간담이 서늘해졌다. 자신이 나갔어도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역시... 일부러 공성을 소극적으로 한 거였어. 저런 상황을 노리고 있었다는 말인가?'

발루아 남작의 고민은 깊어져 갔다. 버티려면 더 버틸 수는 있겠지만 결과는 이미 정해진 바나 다름없었다.

'아멜리아... 무서운 여자군. 반란에 성공한 게 운이 아니야. 아쉽군. 남자로 태어났으면 누구보다 훌륭한 후계자가 되었을 텐데.'

그 생각에 이르자 자신이 보호하고 있는 데이븐이 갈수록 더 한심해 보였다.

데이븐은 북부 연합군이 괴멸된 뒤에는 사색이 되어 매일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아멜리아에게 죽임을 당할까 봐 겁에 질려 밖에 나오지도 못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은 전 레이폴드 백작에게 은혜를 입고 충성을 맹세한 몸이다. 미우나 고우나 데이븐을 지켜 주고 찬탈자 아멜리아와 싸워야 했다.

그렇게 며칠간 궁지에 몰린 쥐처럼 숨죽이고 있던 때,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레이폴드군이 급하게 진영을 해체하고 철군 준비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어째서 물러나는 거지?'

발루아 남작은 미처 알지 못했지만, 그들을 살린 것은 지셀과 해럴드의 전쟁에 관한 소식이었다.

펜리스 영지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전령은 펜리스의 승리가 확실시되자마자 더 보지도 않고 바로 달려왔다. 그것이 아멜리아가 명령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데스몬드 백작의 생사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펜리스군이 완전히 승기를 잡았습니다. 데스몬드군의 주력은 괴멸되었으며 남은 병력도 페르디움군과 3군단에 포위를 당한 상태입니다. 데스몬드가 이길 방안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멜리아는 눈을 빛내며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지셀... 그놈이 이 정도일 줄이야. 아무리 왕국군의 지원을 받았다 해도 해럴드의 3만 대군을 격파하다니."

설마 이기겠냐는 생각도 했었지만, 역시 지셀은 만만한 놈이 아니었다. 아니, 이제는 정말 대단한 놈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해럴드까지 박살 냈으니, 북부 최강의 칭호는 지셀이 가져갈 것이다.

그가 데스몬드 영지를 온전히 차지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지셀이 쉽게 그곳을 차지하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서늘한 눈빛으로 베르나프에게 명령했다.

"바로 철군 준비를 해라. 우리가 먼저 데스몬드를 점령한다."

지셀이 죽어 가는 해럴드를 지켜보던 그때, 아멜리아가 이끄는 레이폴드군이 데스몬드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295화 아직 때가 아니니까. (1)

아멜리아는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 얄미운 놈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일 수 있게 되었다.

재주는 지셀이 부리고 열매는 자신이 먹는 그런 상황을 만들어서 말이다.

"이제는 내가 뒤통수를 쳐 주지, 지셀."

명분이야 내세우려면 얼마든지 내세울 수 있다. 애초에 자신과 데스몬드는 명목상이긴 하지만 동맹을 맺은 사이다.

친왕파도 바로 자신과 싸우려 하지 않을 테니 협상만 잘하면 데스몬드 영지의 절반 정도는 그냥 받아 낼 수 있었다.

물론 그녀는 반절은커녕 단 한 치도 뱉어 낼 생각이 없지만 말이다.

'공작가는 나를 도와줄 수밖에 없겠지.'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계산이 끝난 일이었다.

해럴드를 잃은 공작가는 북부 진출의 교두보로 자신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영토 분쟁이 일어나도 적극적으로 중재해 줄 것이다.

"혹시 모르니 전속력으로 진군해라. 어떻게든 주요 성과 요새를 우리가 먼저 차지해야 한다."

자신의 뒤를 노리는 놈들은 모두 처리했다. 지셀과 해럴드는 이제 막 싸움을 끝냈을 것이다.

당장 진군을 방해할 요소는 전혀 없기에 아멜리아는 마음 놓고 속도를 높였다.

펜리스군도 그렇지만 레이폴드군도 전투의 피로가 쌓여 있다. 그들이 아무리 정예라 해도 누적된 피로는 어찌하지 못한다.

베르나프는 밤이 깊어지자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무래도 조금 쉬어야 할 거 같습니다. 야간이라 이동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병사들도 많이 지쳤고요."

"쯧."

아멜리아는 혀를 찬 뒤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5천에 가까운 인원이 한꺼번에 움직이려면 아무래도 속도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이 마지막 휴식이다. 데스몬드를 점령할 때까지 휴식은 없다. 동이 트는 대로 기마병들과 기사들을 앞서 보내도록. 보병들은 뒤를 따른다."

"알겠습니다."

곳곳에 횃불이 설치되고 숙영 준비가 금세 끝났다. 전쟁 중인 상황도 아니고 노리는 적들도 없으니 다들 평시와 비슷한 수준의 경계 상태를 유지했다.

이어질 행군을 각오하고 모두가 급히 잠든 사이에도 아멜리아는 쉬지 못했다.

그녀는 가장 크고 화려한 천막 안에서 지도를 펼쳐 놓고 앞으로의 일을 다시 점검하기에 바빴다.

"베르나프, 지금 병력으로는 빠르게 데스몬드의 전역을 점령할 수 없어. 그러니 우선 주요 길목만 막고... 베르나프? 내 말 듣고 있어?"

고요한 침묵에 아멜리아가 짜증을 내며 고개를 돌렸다.

"...."

베르나프는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호위이자 참모랍시고 옆에 붙여 놨더니 누구보다 빠르게 잠들었다.

아멜리아는 짜증 어린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지만 굳이 깨우진 않았다. 베르나프도 반란에 내전에 근래 고생을 많이 하긴 했으니까.

바스테트도 그녀의 무릎 위에서 몸을 말고 잠이 든 지 오래였다.

"하아...."

고개를 몇 번 저은 아멜리아는 다시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앞으로 공작가에서 뭘 뜯어내고 북부를 차지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지셀은 당장 건들기가 곤란해졌어. 대신 공작가가 조만간 전쟁을 일으킨다면...."

그렇게 그녀가 눈앞에 있는 지도에만 집중하고 있을 때.

츠츠츠츳.

그녀의 뒤에서 아주 은밀하게 어둠이 한데 모이기 시작했다.

공간이 일그러지며 마치 사람처럼 보이는 형체가 희미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그런 현상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순간 바스테트의 귀가 쫑긋 섰다.

베르나프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잠이 든 상태였다. 하지만 그의 왼손 엄지는 저절로 움직여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의 가드를 살짝 밀쳐 냈다.

딸각.

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오는 소리와 동시에.

냐앙!

바스테트가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베르나프의 오른손이 번개같이 검을 뽑아 아멜리아의 등 뒤를 막았다.

카아아앙!

금속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울린다. 아멜리아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자신의 등 뒤에 서 있는 암살자를 발견했다.

베르나프는 왼손으로 입가에 흘러내린 침을 닦으며, 날카로운 눈으로 암살자를 바라보았다.

"쓰읍, 누구냐, 넌."

암살자는 검은 로브와 검은 가면으로 온몸을 가리고 있었다. 단검을 내지르다가 막힌 암살자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며 중얼거렸다.

"흐음, 역시 무리였나."

아멜리아는 인상을 찡그렸다. 어디서 들어본 듯한 여자의 목소리다.

그 순간, 암살자의 로브가 펄럭이며 수십 개의 단검이 쏟아져 나왔다.

카카카카캉!

베르나프의 검이 번개같이 움직여 단검들을 모조리 튕겨 냈다. 그는 단검을 쳐내는 즉시 앞으로 나서며 검을 내리쳤다.

스걱!

베르나프의 검은 암살자에게 닿지 못하고 허공을 갈랐지만, 검에 실린 강렬한 기운이 암살자가 쓴 가면을 베었다.

가면의 반쪽이 떨어져 나가자 고혹적인 웃음을 띤 얼굴이 드러났다.

암살자는 베르나프를 보며 말했다.

"어머.... 생각보다 멀쩡한 사람이었네."

베르나프가 발끈하려 했지만 아멜리아가 한발 먼저 입을 열었다.

"너는!"

"아가씨, 오랜만이에요."

싱글벙글 웃으며 손을 흔드는 암살자의 정체는 벨린다였다.

아멜리아가 벨린다를 알아본 이유는 단순했다. 그녀에게도 원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멜리아는 예전에 그녀가 자신의 목에 건방지게 단검을 가져다 댔던 것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나니 더더욱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셀의 최측근이나 다름없는 여자가 어째서 이곳에 나타난 걸까.

"네가... 여기에 왜 나타난 거지?"

"그야 물론 아가씨를 죽이러 왔지요. 여기서 계속 기다렸지 뭐예요."

"나를 암살하러 왔다고? 지셀이 해럴드와 싸우고 있는데 그쪽은 내버려 두고?"

"도련님이 아가씨 발 좀 잡아 두라고 하셔서 말이에요. 저도 전쟁에 끼고 싶었는데 꼭 여기로 가라고 신신당부를 하시니 별수 있나요. 제가 아가씨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세요?"

벨린다가 자못 섭섭하다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지셀의 명령을 받아 아멜리아의 진군을 방해하러 온 것이다.

당연히 벨린다도 처음에는 반대했다. 데스몬드의 3만 대군에 맞서 싸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지셀 옆에서 조금이라도 손을 보태는 게 맞지 않겠냐고 버텼다.

하지만 지셀은 그녀를 이곳으로 보냈다. 어차피 암살 기술을 주로 쓰는 벨린다는 대규모 회전에서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를 대며.

그럴 바에는 그녀의 힘을 더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곳에 투입하는 게 이득이었다.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고.

전부 맞는 말이라 벨린다는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지셀의 명령에 따랐다.

그 뒤로 전황이 어떻게 되었는지 결과를 몰라 벨린다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아멜리아가 나타나자 한시름 놓았다.

레이폴드군이 움직였다는 건 지셀이 승리했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멜리아는 이를 갈며 벨린다를 노려봤다. 생각지도 못한 소리를 들으니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지셀... 그놈이... 내가 움직일 줄을 예상했다고? 해럴드와의 전쟁을 코앞에 두고도 미리 너를 보냈다고?"

"그렇다니까요? 참 신기하다니까. 이런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벨린다의 확신 어린 대답에 아멜리아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건 말이 안 된다.

지셀이 해럴드와 맞붙기 전부터 자신은 발루아 남작과 싸우고 있었고 북부 연합군까지 맞서 싸웠다.

자신이 그들을 전부 이길 것도, 지셀의 승리 소식을 듣자마자 움직일 것도 예측했다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 파악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머릿속을 읽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아멜리아의 머릿속에 그동안 지셀이 벌였던 일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룬스톤을 확보하고, 가뭄을 예측하고, 각종 신기술을 개발하고, 자신의 반란을 미리 알고 데이븐을 빼돌린 일까지.

이건 마치....

'그놈이 미래를 예지하기라도 한 것 같지 않은가.'

지셀의 행적을 돌아보면 대륙에 드물게 나타나는 예언자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말이 안 된다. 아무리 훌륭한 예언자라 해도 추상적으로 미래를 예견할 뿐이지, 이렇게 정확하게 맞출 수는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아멜리아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정말로 예지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천재의 범주를 벗어난 건 확실했다.

그놈은 무언가를 알고 있다. 저 높은 곳에서 다른 이들의 움직임을 손바닥 보듯이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느낌.

'죽여야 해!'

아멜리아는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지셀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놈이 짠 판에서 계속 놀아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죽여야 할 사람이 눈앞에 있다.

"예전에 네년 목을 꼭 가져오라고 했었는데 말이야. 멍청한 놈들이 실패했지. 그때 지셀을 어떻게든 죽였어야 했는데."

"아, 그때요. 아가씨는 좀 아쉬우셨겠어요."

"그래, 상당히 아쉬웠어. 그런데 이렇게 제 발로 찾아올 줄이야. 그때의 복수를 하려고 온 건가? 날 암살하는 게 가능할 거라 생각했어?"

벨린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그러게요. 도련님이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이렇게 멋진 호위가 옆에 있어서 그런 거였네요. 소문만 들었을 때는 바보인 줄 알았는데."

베르나프가 다시 발끈하려 했지만 이번에도 아멜리아의 말이 더 빨랐다.

"암살에 실패했으니 내 발목을 잡는 건 불가능하겠네. 너 같은 하녀 따위가 혼자서 뭘 할 수 있겠어."

"어머, 너무 자신만만하시네요. 아가씨는 제가 올 줄도 몰랐잖아요?"

"그래서 암살에 성공했나?"

"아직 끝난 거 아니거든요?"

두 여자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얼굴은 웃고 있는데 살기가 듬뿍듬뿍 흘러나왔다.

그 강렬한 기 싸움에 베르나프는 벨린다를 공격하는 것도 잊고 살짝 눈치를 봤다. 그는 이런 분위기에 무척이나 약했다.

"죽여, 베르나프."

냐앙!

하지만 아멜리아와 바스테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바로 벨린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카앙!

벨린다도 단검을 들어 베르나프의 검을 막아 냈다.

베르나프는 다시 검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수십 개의 빛이 번뜩이며 사방을 갈랐다.

하지만 어느 하나도 그녀에게 적중하지 않았다. 그저 로브 자락만 몇 번 베었을 뿐이다.

검을 휘두를수록 베르나프의 인상은 조금씩 찌푸려졌다.

'무슨 움직임이....'

마치 유령을 상대하는 듯하다. 벨린다가 움직일 때마다 공간이 계속 일그러져 기척을 감지하기가 어려웠다.

까다로운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파파팟!

일그러진 공간에서 로브가 펄럭일 때마다 수십 개의 단검이 튀어나온다.

'이런!'

카앙! 카앙! 카앙!

베르나프는 잽싸게 다시 물러나며 단검들을 쳐 냈다. 벨린다와 연결된 단검들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계속 아멜리아를 노렸다.

뛰어난 암살자 앞에서 누군가를 지키면서 싸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베르나프는 천막 입구를 힐긋 바라보았다.

이 정도 소란이 났으면 밖에 있는 병사들이 들어왔어야 하는데,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이미 죽은 건가.'

원래는 호위 기사들을 대동해 아멜리아 주위를 철통같이 지킨다. 하지만 지금은 호위 병력을 병사들로 대체한 상태였다.

이 정도 실력이면 병사 몇 명 정도는 기척도 없이 죽일 수 있었다. 하필이면 기사들을 쉬게 했을 때 암살자가 찾아온 것이다.

그간의 일정이 무리했던 탓에 휴식을 줄 수밖에 없었지만, 어쨌든 아멜리아가 위험에 처한 것은 호위 단장인 자신의 명백한 실수였다.

'잠깐이면 된다.'

베르나프는 평소와 다르게 진지한 표정으로 아멜리아를 지키는 것에만 집중했다. 기사들의 천막은 그리 멀지 않다. 충분히 이변을 느끼고 달려올 만한 거리였다.

카앙!

벨린다도 아멜리아를 죽이기 쉽지 않다고 느꼈다.

'이 바보가 이 정도 실력일 줄이야. 야외에서 방심한 상태라면 성공할 줄 알았는데.'

베르나프는 아멜리아의 꽁무니만 따라다니는 바보로 소문이 난 자다. 그가 이런 실력자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멜리아를 지키는 것에 집중하면서도 기회가 나면 바로 다가와서 검을 휘두른다. 벨린다도 위험할 뻔한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대단한 건 아멜리아의 반응이었다.

단검이 코앞까지 와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오히려 벨린다를 죽일 듯이 노려만 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벨린다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와, 진짜 보통이 아니네.'

마나도 다룰 줄 모르고 검 하나 쓸 줄 모르면서 저런 강단이라니.

지셀과는 다른 의미로 참 무서운 사람이었다.

카앙! 카앙! 카앙!

벨린다와 베르나프, 두 사람의 움직임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수십 개의 단검이 허공에서 춤을 추고 그걸 쳐 내는 검날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수없이 많은 공방이 오고 갔지만 실제로 그 시간은 극히 짧았다.

촤아아악!

갑자기 천막 곳곳이 갈라지며 십수 명의 기사들이 난입했다.

"영주님!"

"괜찮으십니까!"

"암살자를 죽여라!"

기사들이 바로 검을 들고 벨린다에게 덤벼들었다.

"칫."

죽일 수 없는 적에게 집착하는 건 암살자의 덕목이 아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몸을 뒤로 빼며 웃었다.

"역시 실패네요. 그런데... 제가 혼자 온 게 아니거든요."

화아악!

벨린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숙영지 곳곳에서 불이 피어올랐다.

동시에 병사들의 고함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적이다!"

"암살자들이 들어왔다!"

"어서 일어나!"

지셀이 남몰래 벨린다와 함께 키운 힘.

페르디움의 암살대가 레이폴드군의 숙영지를 공격했다.

296화 아직 때가 아니니까. (2)

벨린다가 습격해 왔을 때, 모두가 베르나프처럼 잠을 자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아멜리아의 참모, 악티움의 상단주 콘라드 또한 여러 가지를 점검하며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외눈 안경을 올려 쓴 그가 서류들을 뒤적이며 중얼거렸다.

"아가씨가 식량을 많이 사 두셔서 다행이군. 큰 손해를 볼 줄 알았는데 이렇게 상황이 좋게 흘러갈 줄이야."

콘라드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모시는 아멜리아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가지고 있는 지식도 방대하지만, 그것을 활용하는 전략과 처세술은 남자들도 혀를 내두를 수준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녀에게는 특별한 감각이 있었다. 아멜리아가 가끔가다 보이는 직감에 기인한 행동은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저번 가뭄 때 식량을 대량으로 구매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미소를 짓던 콘라드는 표정을 굳히고 허리춤에 매단 레이피어를 만지작거렸다.

"흠...."

목덜미에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진짜 벌레가 붙어서 그런 게 아니다.

살기다.

차앙!

번개같이 뽑힌 레이피어가 천막의 한쪽 구석을 찔렀다. 동시에 천막 안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쯧."

콘라드가 혀를 찼다. 얼굴을 노리고 찔렀는데 상대가 절묘하게 피해 냈다. 하지만 완전하게 피하지는 못했는지, 복면이 베여 드러난 암살자의 볼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표정한 암살자의 얼굴을 본 콘라드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다.

잠깐 기억을 더듬은 그는 곧 진한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는... '뇌물왕'의 호위가 아니냐."

콘라드를 노렸던 암살자는 클로드의 호위를 맡았던 웬디였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그녀도 이번 작전에 어쩔 수 없이 참여한 것이다.

콘라드는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펜리스와 첫 거래를 할 때 책임자로 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만면에 비웃음을 담은 채 말을 이었다.

"네가 여기 왔다는 건 펜리스 백작이 우리도 적으로 돌리겠다는 뜻인가?"

웬디는 여전히 무표정한 표정으로 답했다.

"저는 여기 온 적이 없는 겁니다. 나중에 아는 척은 하지 말아 주시길."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연속으로 단검을 던졌다.

스스슥.

콘라드는 날아오는 단검들을 가볍게 피하며 레이피어를 찔렀다. 하지만 웬디는 이제 그를 상대할 생각이 없는지 연신 뒤로 피하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탁.

쇠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콘라드는 상대의 목적을 깨닫고 인상을 찡그렸다.

웬디는 다시 품에서 기름 먹인 천을 꺼내 불을 붙인 뒤 서류 더미에 던져 버렸다.

파앗!

콘라드가 마나를 뿜어내며 레이피어로 천을 휘감아 당겨 불을 껐지만, 웬디가 던진 건 하나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곳저곳에 불을 던진 뒤 천막 밖으로 잽싸게 빠져나갔고 곧 레이폴드군 숙영지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젠장! 뭐야! 어떤 새끼들이야!"

천막에서 뛰쳐나온 울칸이 화가 나 몽둥이를 휘저으며 쩌렁쩌렁 소리를 질렀다. 칼레브는 검은 복면을 쓴 시체를 짓밟으며 이를 갈았다.

살쾡이 밀매단의 단주인 그 또한 암살자다. 그런 자신이 암살자들의 습격을 받았다는 데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한 듯했다.

울칸이나 칼레브는 자신을 습격한 암살자들을 쉽게 처리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그들처럼 무력이 뛰어난 게 아니다.

레이폴드군의 몇몇 장교들이 어이없게 사망했고 이는 상당한 혼란으로 이어졌다.

"제4보병 중대장님이 사망했다!"

"어서 잡아라! 뭣들 하는 거야!"

"사라졌다! 적이 사라졌다!"

예상치도 못한 습격에 다들 우왕좌왕하며 난리가 났다. 다들 암살자들을 잡으려고 했지만 벨린다와 암살자들은 이미 도망을 가고 있었다.

벨린다는 도망가면서 아쉬운 눈빛으로 레이폴드군의 숙영지를 바라보았다.

"생각처럼 쉽지 않네."

정말 지셀 말처럼 속도를 높이는 데 치중하느라 경계 태세가 높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만큼 많이 죽이진 못했다.

오히려 데리고 온 암살자들이 역으로 꽤 당했다. 벨린다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힘들게 키운 전력인데...."

지셀과 벨린다는 그동안 꾸준하게 암살자들을 양성해 왔다. 재능 있는 자들을 추려 키우고 영지 내에서는 다들 사용인으로 위장한 채 지내 왔다.

이들의 정체를 제대로 아는 자들은 지셀의 최측근들밖에 없을 정도로 극비사항이었다.

물론 가장 수준 높은 이들은 웬디처럼 벨린다가 예전부터 키워 온 자들이다.

"돌아가면 대원들을 더 양성해야겠어."

영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기에 개개인의 실력이 낮은 건 아니지만 아직 수가 너무 부족했다.

특히 이번 작전처럼 수준 높은 상대를 공격할 때는 더 그렇다. 하급 암살자들은 암살에 성공하기는커녕 제대로 도망치지도 못했다.

그래도 곳곳에 불을 내고 혼란을 일으켰다. 소기의 성과는 달성했으니 시간을 끌 수는 있을 것이다.

암살자들이 도망간 뒤, 숙영지를 둘러보던 아멜리아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지셀! 지셀! 지셀! 이 개자식이 감히 나를!"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아 오르고 말들이 뛰어다닌다. 갑작스럽게 습격당한 탓에 숙영지는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다시 한번 지셀에게 당하고 말았다. 아예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당하니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아멜리아는 거친 숨을 내쉬며 다시 숙영지 곳곳을 둘러보았다. 다들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빨리 불을 꺼라!"

"인원을 다시 점검해라!"

"어디서부터 뚫렸는지 확인해라!"

병사들도 정신을 못 차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일부는 빠르게 무장을 갖추고 나와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잠시 시간이 지난 뒤 기사 한 명이 다가와 아멜리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힐끗 기사를 보고 물었다.

"피해는?"

"인명 피해는 그리 크지는 않습니다. 다만... 중대 지휘관 몇 명이 사망했습니다."

기사는 파악한 피해 상황을 보고했다. 죽은 병사는 얼마 없었지만, 그보다 더 큰 피해가 발생했다.

기사만 고급 전력이 아니다. 괜찮은 지휘관은 때로 기사보다 더 구하기 힘들 때가 있다.

아멜리아가 나름 선별해 뽑은 중급 장교들이 꽤 죽었다. 이 피해를 복구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기사의 보고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말들을 풀어 놓고 주변에 독을 살포한 뒤 불을 질렀습니다. 그 때문에 상당수의 말들이 도망가거나 죽었습니다. 현재 독은 마법사들이 정화한 상태입니다. 도망간 말들도 잡아 오고 있습니다."

행군 속도를 높이려면 말들이 필수다. 애초에 레이폴드군의 발목을 잡으려 했으니 이쪽이 가장 큰 목표였을 것이다.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그녀가 다시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지?"

아무리 속도를 내는 데 치중했다 하더라도 경계 근무에 소홀할 리가 없었다. 레이폴드군은 기강이 엄중한 데다, 아멜리아는 특히 경계를 중요시하기에 다들 허투루 경계를 서지 않았다.

병사들 외에도 수준 높은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돌아가면서 경계를 서고 있었다.

거기에 무려 5천 명의 군대다. 암살자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이들 모두의 눈을 피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심지어 암살자들 모두가 실력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도망도 못 가고 죽은 자들이 꽤 있지 않은가.

기사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보고를 이어 갔다.

"땅굴이... 있었습니다."

"땅굴? 우리가 어디에 묵을 줄 알고 땅굴을 파?"

"그리 큰 건 아닙니다. 은신하는 구덩이에 가깝습니다. 여러 군데 만들어 놓고 저희가 이동하는 걸 본 뒤에 근방에 숨어 있었던 거 같습니다. 숙영지 밖에서도 몇 개를 발견했습니다."

"계속 말해 봐."

"공교롭게도 몇 개의 구덩이 위에 병사들의 천막이 있었습니다. 그곳을 통해 몇 명이 내부로 침투해 우선으로 불을 지르고, 그 뒤 나머지가 나온 거 같습니다. 습격 타이밍이 제각각이었습니다."

레이폴드의 기사는 빠르게 전후 사정을 파악해 보고했다.

그의 말대로 이미 레이폴드군이 움직일 걸 알고 있었던 벨린다는 계속 그 동태를 감시했다.

그렇기에 미리 숙영지 근처에 준비한 구덩이에 숨어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암살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인내심이다. 불편하고 좁은 곳에 며칠이나 숨어 있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게 암살자들이 가장 먼저 받는 기본 훈련이었으니까.

아멜리아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지금처럼 적이 없고, 빠르게 움직이는 데 집중할 때는 안쪽의 경계 수위가 상당히 낮아진다.

거기에 5천 명이 묵어야 하는 만큼 숙영지도 당연히 거대해진다. 대략적인 위치만 파악하면 안쪽에는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도대체... 도대체 이놈이 어떻게...."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셀이 도대체 무슨 수로 자신의 행동을 전부 파악했는지 말이다.

'어떻게든 알아내야 해. 이건 운도 아니고 직관으로 짐작한 것도 아니다. 확신이 있어서 하는 짓들이야.'

그녀는 이제 지셀을 운이 너무 좋은 자로도, 혹은 단순히 뛰어난 천재로도 생각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일을 보면 오히려 예언가에 가까웠다.

하지만 대체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여전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녀는 골치가 아파 와 이마를 꾹꾹 눌렀다.

옆에 있던 베르나프가 조심히 물었다.

"그러면 지셀 그놈도 지금 움직이고 있다는 건데, 이제 어쩌죠? 그놈보다 먼저 도착해야 하지 않습니까."

상황을 보니 레이폴드군과 펜리스군은 거의 동시에 움직이고 있는 거 같았다. 하지만 지셀의 군대가 전부 기마병이란 건 유명한 일이다. 지금쯤 엄청난 속도로 데스몬드 영지를 향해 가고 있을 게 뻔했다.

그 생각에 이른 베르나프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이라도 남은 말들을 이용해 기마병과 기사들을 보내는 게 어떻습니까? 저희도 속도라면 뒤지지 않을 겁니다."

"함정을 파 놨을 거야."

아멜리아의 발목을 잡겠다고 대담하게 숙영지 내부까지 침투한 놈들이다. 이쪽의 목적지가 명확한데, 기마병을 상대하는 함정을 안 팠을 리가 없다.

아멜리아는 지도를 가져와 다시 살펴보고 말했다.

"그렇다고 당장 포기할 수는 없지. 세 방향으로 나눠서 간다. 가장 빠른 길, 중간 길, 돌아가는 길로. 다른 건 다 무시하고 내가 표시한 성과 요새부터 우선 점령해라."

데스몬드는 대영지다. 다른 북부의 영지들처럼 고작 마을 몇 개, 커 봤자 기껏 도시와 요새 몇 개 있는 영지들하고는 수준이 다르다.

주요 요충지가 아닌 곳은 점령해도 소용이 없다. 그냥 침략자로 취급받고 쫓겨날 게 뻔했다.

적어도 주요 요충지는 하나라도 점령해야 동맹이라는 명분이라도 내세워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만 한다면 나머지는 공작가가 해결해 줄 것이다.

아멜리아의 명령에 급히 혼란을 수습한 기사들과 기마병들이 바로 움직였다.

이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 본대가 오기 전까지 아멜리아가 지목한 지역을 점령하고 버티는 것이다.

두두두두두!

제대로 쉬지도 못한 기마병들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언제나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이들답게 흐트러짐은 없었다.

기마병들을 먼저 보낸 뒤 아멜리아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남은 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최대한 빨리 수습하고 움직여라. 쉴 시간이 없다."

자신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이런 준비까지 했다면 지셀도 데스몬드 영지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시간 싸움이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움직여야 했다.

으드득.

이동하면서도 아멜리아는 이를 갈았다.

'지셀, 지셀.... 이 개자식....'

이번에도 당했다는 분기가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다. 차라리 가만히 있었다면 이런 굴욕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그녀의 예상대로, 가장 빠른 길목에는 먼저 갔던 기마병들이 쓰러져 있었다.

대부분 가시를 박아 놓은 구덩이에 떨어져 목숨을 잃었고, 그걸 피해 간 자들은 말의 발이 걸릴 높이로 교묘하게 박아 놓은 목재에 걸려 쓰러져 있었다.

말들이 쓰러지는 통에 다친 자들은 끙끙대며 누워 있었고, 겨우 몇몇만 남은 멀쩡한 기마병들은 더 전진할 생각도 못 하고 부상자들을 돌볼 뿐이었다.

병사들이 곳곳에 박아 놓은 말뚝을 아멜리아에게 가져다주었다.

말뚝에는 이런 말이 새겨져 있었다.

[위대한 대장장이와 친구들이 만들고 감.]

"이놈들이 감히...."

아멜리아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길을 방해한 것도 모자라 이런 하찮은 도발이라니.

그녀는 글만 보고도 누가 함정을 만들었는지 알아챘다. 펜리스에 머물고 있다는 드워프들이 움직인 모양이었다.

기필코 그놈들도 잡아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부상자들을 수습하던 중에, 다른 쪽 길목으로 갔던 기마병들이 돌아왔다.

"어떻게 된 거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장애물?"

"협곡의 가장 좁은 길에 나무와 돌을 쌓아서 벽을 만들어 놨습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경로로 가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그곳에 있던 흔적을 하나 가져왔습니다."

기마병을 이끌었던 지휘관은 자신이 들고 온 말뚝 하나를 내밀었다.

[위대한 대장장이와 친구들이 만들고 감.]

"...."

이상한 애들이 많은 영지라고는 진작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놈들이 남긴 흔적을 직접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차피 길을 돌아가기엔 늦었다. 레이폴드군은 재빠르게 함정을 치우고 다시 움직였다.

그리고 첫 번째 목표로 잡았던 요새 인근에 도착했을 때, 가장 멀리 돌아갔던 기마대의 지휘관이 본대에 합류했다.

"죄송합니다. 적들이 이미 요새를 점령한 상태입니다."

"...."

도대체 얼마나 빨리 움직였으면 전쟁에서 승리하자마자 최전방 요새까지 점령했을까?

누군가가 배신을 해서 정보를 누설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계획을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으니까.

아멜리아는 아무런 말도 없이 차가운 표정만을 지었다. 그녀는 그대로 병력을 이끌고 요새로 다가갔다.

과연 데스몬드의 최전방 요새에는 펜리스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

아멜리아는 그 깃발만을 노려볼 뿐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 곁에 있던 베르나프는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베르나프는 그녀가 가장 분노했을 때, 누구보다 차가워진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 그놈이랑 엮이지 말자니까. 레이폴드를 차지했으니 적당히 북부 절반만 먹어도 충분할 텐데.'

베르나프는 말도 못 걸고 속으로만 끙끙거렸다. 그녀의 야망은 자신이 따라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욕심만 버리면 우리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그는 그냥 아멜리아와 알콩달콩 사는 게 꿈이었다. 생각보다 소박한 행복을 추구하는 남자였다.

아멜리아가 아무런 말이 없으니 측근들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지금 그녀의 신경을 건드렸다간 누구도 무사하지 못하리라.

그렇게 레이폴드군이 하염없이 요새만 바라보고 있을 때.

끼익....

갑자기 요새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검은 말을 탄 지셀이 기사들과 함께 나와 천천히 레이폴드군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아멜리아도 말을 타고 천천히 나아갔다. 베르나프를 비롯한 측근들과 기사들이 그녀의 주위를 철통같이 감쌌다.

여전히 피로 범벅이 된 지셀과 깔끔한 모습의 아멜리아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췄다.

지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아멜리아."

아멜리아도 살짝 턱을 들고 오만한 표정으로 답했다.

"오랜만이야, 지셀."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살기가 가득한 눈빛을 담고서.

웃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멜리아의 손이 살짝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지셀의 창에 마나가 몰리기 시작했다.

297화 아직 때가 아니니까. (3)

아멜리아는 지셀을 보자마자 강렬한 살의를 느꼈다.

'지금 죽일까?'

살려 두기엔 너무나 거슬리고 위험한 놈이다. 이번 일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천천히 올라가는 그녀의 손을 보며 지셀도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가만히 있어라, 아멜리아. 아직 널 죽일 때가 아니니까.'

아멜리아는 양날의 검이자 독을 가득 품은 장미와 같은 여자다. 공작가는 아직 그녀의 성향도, 진짜 능력도 모르고 있다.

그녀에게 진정 같은 편은 없다. 오직 자신의 야망밖에 모르는 여자다. 그렇기에 오히려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네가 계속 공작가도 예상치 못한 짓을 해 줘야 내가 그쪽을 상대하기 쉬워지니까.'

지금 공작가와 맞붙어서 이길 수 있는 곳은 없다. 그렇기에 아멜리아라는 의외의 변수가 필요하다.

전생에서도 자신 때문에 공작가의 힘이 약해지자 그녀는 바로 이빨을 드러냈다. 무려 북부의 공작이 된 해럴드의 뒤통수를 치려 했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도, 자신이 날뛸수록 아멜리아는 그 틈을 이용하려 할 것이다.

물론 그녀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지셀도 모든 걸 장담할 수는 없었다.

아멜리아는 가끔가다 정말 예상도 못 한 짓을 즉흥적으로 벌일 때가 있었으니까.

그게 지셀 자신에게도 어떠한 위험을 가져다줄 수 있지만, 강대한 공작가를 상대하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그러니까 지금 잘 생각해라, 아멜리아.'

죽일 거라면 회귀하자마자 그녀부터 죽이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상황이 여의찮아 넘어간 점도 있지만, 이왕 이용하기로 한 거 끝까지 이용하는 게 나았다.

하지만 지금 덤벼 온다면 죽일 수밖에 없었다.

'기회는 한 번인가....'

창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싸운다면 단번에 아멜리아의 머리를 뚫어야 한다. 만약 실패한다면 지금 전력으로는 이길 수 없다.

그녀의 옆에 있는 놈들도 기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언제든 공격을 할 수 있게 자세를 잡고 있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저놈들부터 죽여야겠군.'

자신은 지금 너무 지쳤고 꽤 많이 다친 상태였다. 아멜리아의 군대와 싸우면 이곳에 있는 펜리스군도 모두 위험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멜리아를 죽여도 큰 손해를 보게 된다. 해럴드를 최소한의 피해로 이긴 보람도 없어진다.

지금 둘이 싸우면 공작가만 좋은 일을 시켜주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걸 분명 아멜리아도 알고 있을 것이다.

천천히 올라가는 그녀의 손에 맞춰 지셀도 창을 천천히 올리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에 맞춰, 뒤에 있던 펜리스의 기사들도 조금씩 험악한 기세를 뿜어내었다. 아멜리아의 주변에 있던 측근들과 기사들도 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숨이 막힐 듯한 분위기 속에서 아멜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 수도.'

지셀은 위험한 놈이다. 지금까지 놀라울 정도로 기적에 가까운 일을 해냈다.

정확히 뭘 알고 있고 무슨 능력을 가졌는지 지금도 제대로 파악이 안 된다. 어떻게든 죽여야 할 놈이긴 했다.

'충분히 가능하다.'

딱 봐도 지셀과 그를 따르는 기사들은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전부 피에 범벅이 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먼지도 채 벗겨 내지 못한 걸 보니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보였다.

아무리 지셀과 그의 수하들이 강하다 해도 지금 레이폴드군이 공격한다면 막아 내지 못할 것이다.

자신들도 지쳐 있긴 하지만 수에서는 압도적이니까.

기회임이 분명하고, 어떻게든 죽여야 하는데 선뜻 손이 안 올라간다.

'지금 이놈을 죽이면... 3군단과 페르디움이 바로 우리를 칠 거야.'

여기서 지셀을 죽이면 자신도 수습하기 힘들어진다.

아직 공작가에 제대로 인정받지도 못했는데 당장 자신이 브랜포드 후작의 친왕파와 대놓고 싸울 수는 없었다.

명분이야 있긴 하지만, 이쪽이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협상을 하는 것과 먼저 도착한 상대를 공격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어쩌면 그런 가정도 무의식적인 합리화의 결과일 수도 있었다.

그녀가 지금 걱정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나도 죽을지 모른다.'

아멜리아는 자신의 감을 신뢰한다. 지금 공격하면 위험하다고, 그녀의 본능이 계속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왜?'

분명 자신이 유리한 상황인데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친왕파와 싸우게 되더라도 어찌어찌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신호가 계속 머리에서 울리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들어 올리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 모습을 보고 지셀도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창을 내렸다.

'전생에 봤던 그 감각인가.'

전생에서도 그랬다. 아멜리아는 이상하리만치 자신을 피해 잘 도망 다녔다. 그녀에게는 특별한 위기 감지 능력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니 대륙 7강이라는 지고한 경지에 올랐어도 결국 그녀를 잡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아멜리아도 단순히 그 감각 때문에 멈춘 건 아니다. 그녀도 나름의 정세를 보고 있었다.

'어차피 지금 우리 둘이 싸워서 좋을 건 없어. 공작가만 좋은 일을 시켜 주는 거지.'

공작가가 있는 이상 그녀의 야망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다. 하지만 해럴드를 꺾은 지셀이 친왕파와 힘을 합쳐 공작가와 맞붙는다면 분명 기회가 생길 것이다.

굳이 자신이 먼저 나서서 친왕파와 싸우며 손해를 볼 필요가 없었다.

'이번엔 살려 주지, 지셀. 어디 한번 잘 날뛰어 봐라.'

어쨌든 두 사람 다 지금 서로를 공격하면 좋을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극도로 손해를 보기 싫어하는 성향인 건 두 사람 다 똑같았으니까.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자 주변에 있는 자들도 천천히 살기를 거두었다.

아멜리아는 잠시 침묵하다가 궁금한 걸 물었다.

"내가 올 걸 어떻게 알았지?"

"뻔한 것 아니겠어? 이런 좋은 기회를 네가 놓칠 리가 없잖아?"

그 말에 아멜리아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건 뻔한 일이 아니다.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구나 할 수 있다면 북부의 모든 영주가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셀은 마치 자신이 그렇게 움직이는 게 당연하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나에 대해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나 보네."

"그럼, 아마 내가 이 왕국에서... 아니, 이 대륙에서 널 가장 잘 알고 있을걸."

"가장 잘 알고 있다고? 감히 네까짓 게?"

"그래, 네가 어떻게 움직일지 언제나 보고 있으니까 섣부른 짓은 하지 말아라. 후회하기 싫으면 말이야."

지셀은 사납게 웃으며 경고를 건넸지만 아멜리아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답했다.

"남들이 들으면 오해할 만한 소리는 하지 말고. 난 이제 네 약혼자가 아니야."

"...그게 그렇게 되는 거냐."

"...."

"...."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지셀은 새삼 전생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전생에 그녀는 언제나 자신이 쓸고 간 영지만 보이면 냉큼 달려가서 깃발을 꽂곤 했다.

오죽했으면 자신의 수하들조차 아멜리아에게 '깃발의 마녀', '땅따먹기의 여왕' 등 기괴한 별명을 붙여 줄 정도였다.

레이폴드가 짓밟힌 뒤에도 그녀의 근성은 대단했다. 틈만 나면 용병왕의 군대를 습격하고 다른 영지를 차지하기를 반복했다.

공작파의 귀족들이 다시 내놓으라고 요청해도 별별 핑계를 대며 눌러앉았던 건 유명한 일화다.

지셀이 폭풍 같은 힘으로 모든 걸 쓸어버리고 다녔다면, 아멜리아는 지치지 않는 끈기로 그 뒤를 쫓았다. 그렇기에 1년 전쟁 내내 그녀는 전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공작가는 아멜리아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겠군.'

조만간 공작가가 내전을 벌인다 해도 북부를 담당할 사람이 없다. 결국 아멜리아는 무너진 해럴드를 대신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해럴드가 북부를 삼켰던 전생과는 상황이 다르다. 이제 북부 최강은 자신이었고, 아멜리아는 해럴드처럼 공작가를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앞으로의 내전에서 누구에게도 통제되지 않는 꼴통... 아니, 변수가 될 것이다.

'아마 지금쯤 공작가한테 뭘 뜯어낼까 고민 중이겠지. 저 여자 상대하다 보면 라울 그놈도 골머리 좀 썩겠는걸?'

그 생각에 이르자 지셀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자신과의 관계를 떠나서, 아멜리아는 여러모로 정말 대단한 여자인 건 확실했다.

창을 거둔 지셀은 말머리를 돌리며 말했다.

"오늘은 이만 물러나지. 운 좋은 줄 알아라, 아멜리아."

"다음에 만날 때는 목을 놓고 가야 할 거야, 지셀."

"자신 있나 봐?"

"그래, 내가 이번처럼 그냥 곱게 보내 주진 않을 생각이거든. 기대해."

"남들이 들으면 오해할 만한 소리는 하지 말고."

"...."

조금 전 당했던 대로 똑같이 돌려준 지셀이 낄낄거리며 돌아갔다.

아멜리아는 차가운 눈빛으로 지셀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지금이라도 당장 저놈을 들이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셀 하나를 죽인다고 자신이 가진 걸 잃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지셀은 그저 지나가는 길에 놓인 있는 장애물에 불과하다. 목표가 아니다. 그렇기에 당장은 참을 수가 있었다.

그녀에게는 더 원대한 야망과 목표가 있었으니까.

물론 지셀을 자잘하게 괴롭히려면 얼마든지 할 수는 있다. 당장 이 근방의 마을들을 전부 불태우고 약탈할 수도 있었다.

'의미 없는 짓.'

하지만 그까짓 건 별 이득도 없는 잠깐의 분풀이일 뿐이다. 그녀는 그런 하찮은 걸 위해 힘을 쏟을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돌아가자."

아멜리아는 깔끔하게 물러났다. 지금이 아니면 다음에 다시 기회를 잡으면 되니까.

천천히 물러나는 레이폴드군을 보며, 요새에 있던 펜리스의 소수 병력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지금같이 지친 상태에서 싸우면 무조건 죽을 게 분명했으니 이들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성벽에 올라선 지셀은 돌아가는 아멜리아를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저었다.

무언가의 아쉬움을 털어 버린 그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자! 최소한의 경계 병력만 남기고 우리는 데스몬드 성으로 간다!"

* * *

쿠웅!

데스몬드 성의 성문이 열리고 지셀과 페르디움군이 들어왔다.

그 뒤를 따라 왕국군과 페르디움군까지 들어오자 성에 있던 사람들은 두려워하는 표정으로 수군거렸다.

"우리가 지다니...."

"어떻게 3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그들은 자신들의 영지가 북부 최강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북부 최강으로 데스몬드와 같이 거론되던 레이폴드는 내부 사정 때문에 이제 데스몬드의 상대가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번 전쟁의 패배는 그들에게 더욱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자긍심이 꺾인 것보다도 훨씬 더 큰, 현실적인 걱정거리도 있었다.

"전쟁이 끝났으니 징발을 엄청나게 많이 할 거야. 왕국군과 페르디움군까지 왔어."

"페르디움이란 곳은 북부에서도 가난하기로 유명한 곳이 아닌가?"

"더 낼 것도 없는데...."

영지의 중심지에 사는 이들인 만큼 다들 잘 사는 편이긴 했다. 해럴드는 철저하리만큼 영지민들의 수준에 따라 거주지를 나누고 관리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도 이번 전쟁 때문에 어마어마한 지출을 감내해야 했다. 그런데도 전쟁에서 패배했다.

데스몬드군이 강력했던 만큼 침략군도 큰 피해를 보았을 것이다. 분명 침략군은 그 손해를 메꾸기 위해 강제 징발을 할 게 뻔하니 데스몬드의 영지민들로서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당당하게 들어오는 지셀을 감히 바라보지도 못하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건 성에 남아 있던 데스몬드의 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이 승리할 줄 알았던 가신들은 도망칠 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전쟁의 결과가 제대로 알려지기도 전에 지셀이 먼저 달려온 탓에, 미처 재산을 챙겨 도망가지도 못했다.

가신들은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영지의 광장으로 줄줄이 끌려 나왔다.

지셀은 그들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데스몬드의 가신 중 몇몇이 사색이 되어 외쳤다.

"배, 백작님! 전쟁은 저희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저희는 반대했습니다!"

"어찌 우리가 왕국군을 치자고 했겠습니까! 그, 그건 반역입니다! 반역!"

다들 어떻게든 살려고 발버둥을 치며 애원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었다.

"닥치시오! 이 수치도 모르는 자들 같으니!"

"데스몬드 백작님이 죽어서도 눈을 못 감을 것이오!"

"총력을 다해 싸우고 졌으면 그만인 거지!"

그들은 여전히 해럴드에게 충성을 바치는 가신들이었다.

해럴드는 비록 수하들에게 엄하고 냉정한 성격이었지만, 영지를 다스리는 능력이 뛰어나고 귀족다운 품격이 있는 자였다. 그의 능력에 감탄해 충성을 맹세하고 진심으로 따르는 자들도 많았다.

가신들이 두 편으로 갈려 다투는 꼴을 보던 지셀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

"처리해라."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로 병사들이 움직여 가신들을 끌고 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살려 주십시오!"

"이 무도한 침략자 같으니라고!"

"저 망나니를 진작에 죽이지 못해 이런 꼴을 당하는구나!"

다들 난리를 치는 와중에 흘러나온 말을 듣고, 지셀은 흥미 어린 눈빛으로 마지막에 외친 자를 바라보았다.

데스몬드에서 꽤나 높은 위치에 있었는지 제법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지셀을 노려보며 소리 질렀다.

"그때 네놈 동생이 아니라 네놈부터 노렸어야 했는데! 어떻게든 네놈부터 죽였어야 했는데!"

"흐음...."

"이 쓰레기 같은 자식! 내 페르디움을 진작 멸망시키자고 말하지 못한 게 후회스럽구나!"

발악하는 그를 바라보던 지셀이 말에서 내려 다가갔다.

"넌 뭐냐? 제법 많이 알고 있는 거 같은데?"

"내가 이 영지의 총관이다! 너 같은 망나니 새끼는 감히 쳐다도 보지 못했던 사람이 바로 나란 말이다!"

"호오... 그럼 그동안 나를 제거하려는 작전도 해럴드와 함께 세웠겠네?"

"그래! 별 볼 일 없는 놈이라 다른 중요한 일에 먼저 신경을 썼더니 결국 이런 참사가 벌어졌구나! 왕국군이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네놈을 이번에 반드시 죽였을 텐데!"

전쟁의 진행 상황을 모르는 그는 펜리스가 왕국군의 지원 덕분에 승리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 병력의 차이가 컸었으니까.

데스몬드의 총관은 여전히 지셀을 핏발 서린 눈으로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이대로 끝날 줄 아느냐? 비록 우리는 이렇게 끝났지만 공작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공작가가 네놈을 죽일 거란 말이다! 그때는 친왕파도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할 거다!"

"그래? 공작가가 그렇게 한가한가? 바빠서 지금까지 신경 안 쓴 줄 알고 있었는데."

이미 상황을 아는 지셀이 비웃자 데스몬드의 총관은 더 크게 악을 썼다.

"이미 공작가에서는 네놈을 위험인물로 올려놨다! 다른 자를 보내 널 처리하려고 했지! 그 때문에 백작님이 너를 빨리 처리하려고 무리해서 나가신 것이란 말이다!"

"호오... 그래?"

지셀이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역시 공작가는 자신을 처리하기 위해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298화 이제 다음을 준비하자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