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280-290

280화 다 같이 살고 다 같이 죽는다. (3)

"와아아아아!"

이제 공성탑조차 필요가 없어졌다. 데스몬드군은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은 채 빠르게 요새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먼저 들어간 부대가 성문을 열자 진입은 더 쉬워졌다.

그들은 넓은 요새를 가득 채울 정도로 몰려들어 와 진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해럴드는 저 멀리 보이는 펜리스군을 보며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저 하찮은 놈들 때문에 지금까지 발목이 잡혔구나. 당장 붙잡아서 갈기갈기 찢어 버려라."

펜리스군도 언제든 빠져나갈 수 있게 반대 측 문 가까운 곳에 진형을 갖췄다.

그들은 적당한 건물들 사이에 진을 치고 대기했다. 그들의 앞에는 근접전에 대비한 목책들이 빽빽하게 놓여 있었다.

목책을 이용하면 적은 인원으로도 대군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와아아아아!"

데스몬드군이 다시 함성을 지르며 해일처럼 움직였다. 어차피 화살 공격은 큰 효과가 없는 걸 알기에 이들은 그냥 숫자로 밀어붙였다.

쿠웅!

온몸에 붕대를 감은 길리언이 가장 앞에 섰다. 그는 거대한 할버드를 들고 있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 조금이라도 거리의 이점을 가져갈 속셈이었다.

길리언은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슬슬 어두운 구름에 하늘이 가려지고 있었다. 바람은 요새 안으로 격렬하게 불어오며 다시 전투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오늘 밤은 길겠군."

잠시 숨을 고른 길리언이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결연한 각오가 맺혀 있었다.

"준비해라."

촤르르륵!

길리언의 말에 펜리스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모두 창을 들어 올렸다.

콰앙!

데스몬드군과 펜리스군의 창들이 서로 얽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첫 교전에서 그랬듯이, 펜리스군의 방어력은 압도적이다.

"으아아악!"

데스몬드군의 선두가 허무하게 쓰러졌다. 당연한 결과였다.

이미 펜리스군과 전투를 치러 본 해럴드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스각!

병사들이 앞에서 당해 쓰러질 때, 바로 뒤에서 데스몬드의 기사들이 튀어나와 검을 휘둘렀다.

"크윽!"

갑작스럽게 기습을 당한 펜리스 병사들의 갑옷이 종잇장처럼 갈라졌다.

갈바니움 소재는 가벼울 뿐이지 철보다 강한 건 아니다. 마나를 머금은 기사의 검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콰앙!

하지만 길리언이 할버드를 휘두를 때마다 다가오는 데스몬드의 기사들은 머리가 깨져 나갔다.

"좁은 길목에서는 우리가 더 유리하다! 최대한 버텨라!"

지이잉―!

펜리스 기사들의 갑옷 틈 사이에서 빛이 뿜어져 나온다. 며칠간 몸과 마나를 회복시킨 이들은 다시 미친 듯이 날뛰었다.

콰앙! 콰앙! 콰아앙!

길리언과 기사들은 사거리에 들어온 데스몬드군을 무차별하게 죽여 나갔다. 중간중간 기습적인 공격을 하는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펜리스군의 전열을 뚫을 수가 없었다.

데스몬드군의 후방에서 날아오는 마법도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지이잉―!

펜리스 기사들의 갑옷에서 빛이 번쩍일 때마다 다가오던 불덩이들은 허무하게 흩어졌다.

윌로우가 쓰러진 이상 저서클 마법들은 이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후열에 있는 펜리스의 병사들은 각자 활시위를 매긴 채 데스몬드군을 노리고 있었다. 좁은 길목을 길리언과 기사들이 막고 있었기에 근접전보다는 원거리 공격에 치중하고 있는 것이었다.

"쏴라!"

파아아아악!

길리언의 외침과 함께 수많은 화살이 데스몬드군의 후열로 날아들었다.

"으아아악!"

곳곳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지만, 데스몬드군의 피해는 그리 크다고 할 수 없었다.

해럴드의 명령에 따라 곳곳에 자리 잡고 있던 방패병들이 거대한 방패를 들어 올려 아군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결국 양측의 선두가 접전을 벌이는 지역에서 승패의 향방이 갈릴 수밖에 없었다.

"겁먹지 마라! 충분히 버틸 수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길리언은 힘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할버드는 바람과 같은 속도로 휘둘러지며 적들을 연달아 베고 찍고 찌르기를 반복했다.

콰앙! 콰앙! 콰앙!

그러나 그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움직일수록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몰려왔다.

어느 순간 길리언의 몸은 다시 피로 범벅이 되었다. 적의 몸에서 튄 피가 반, 상처가 벌어지며 길리언의 몸에서 터져 나온 피가 반이었다.

"크으...!"

그래도 그는 이를 악물고 공격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길리언의 눈빛은 여전히 격렬한 살의로 불타고 있었고 그가 뿜어내는 기세는 여전히 투지와 용맹함으로 가득했다.

기사들도 길리언 못지않게 온 힘을 다해 싸움에 몰입했다.

"크아아악!"

"밀어붙여!"

"조금만 더 하면 된다!"

전장은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 찼다. 비명과 무기 부딪치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데스몬드군은 강렬한 저항에 부딪히자 대군의 이점을 이용하려 노력했다.

"포위해! 포위를 하란 말이다!"

지휘관들의 외침에 따라 데스몬드의 병사들은 양옆의 건물로 올라가 화살과 마법을 쏘기 시작했다.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힐 수는 없어도, 충격을 누적시켜 대열을 무너뜨릴 수는 있기 때문이다.

일부는 뒤로 돌아가 펜리스군의 후열을 치려고 했다.

물론 펜리스군도 데스몬드군의 시도를 그냥 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견제해라!"

똑같이 활을 쏘면 펜리스군이 훨씬 더 유리하다. 건물 위로 올라간 데스몬드군은 펜리스 병사들을 제대로 압박하지도 못하고 쓰러져 갔다.

후열이 힘써 준 덕분에 펜리스군의 전열은 온전히 눈앞에 있는 적들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다.

콰앙! 콰앙! 콰앙!

전열에 선 펜리스 기사들의 갑옷도 붉게 물들 정도로 무자비한 전투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몰려오는 대군을 계속 막기는 힘들었다. 마나와 체력이 점점 소모되기 때문이다.

펜리스 기사들의 움직임은 점점 눈에 띄게 느려져 갔다. 그들이 지쳐 가는 것을 양측이 뻔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됐다! 더 밀어붙여라!"

펜리스군이 조금씩 약한 모습을 보이자 데스몬드군은 더 강하게 전진했다.

펜리스군의 전열은 버티지 못하고 점차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길리언은 그런 기사들의 움직임을 보며 다시 외쳤다.

"1열! 뒤로 빠져라! 2열 앞으로!"

전열에 있던 기사들이 뒤로 빠졌다. 뒤에서 힘을 비축하고 있던 기사들은 앞으로 나오자마자 엄청난 속도로 창을 움직였다.

파바바바박!

"크아아악!"

밀어붙이던 데스몬드군의 선두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펜리스군은 순식간에 진형을 복구했고 이제는 역으로 데스몬드가 밀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말 효과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자신들의 장비와 지형을 이용해 대군을 상대로도 전혀 부족하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교대해라!"

길리언은 기사들이 지친다 싶으면 적절하게 인원을 교체했다. 그가 가장 앞에서 선두를 지켜 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느 순간 펜리스군의 앞은 데스몬드군의 시체로 가득 차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데스몬드군이 전진하려면 아군의 시체를 치워야 했고 덕분에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서게 되었다.

여전히 앞을 막고 있는 펜리스군을 보며 데스몬드군은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악마다.... 저건 악마의 군대야...."

"어떻게 저 인원으로 우리를 지금까지...."

"펜리스에는 저런 놈들만 즐비한 건가?"

아무리 전진해도 뚫을 수가 없다. 이 정도 싸웠으면 지쳐서 쓰러질 법도 한데 아직도 투지가 느껴졌다.

해럴드 또한 펜리스군을 보며 경이로움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이놈들이...."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실력이다. 강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오래 버틸 줄이야.

저런 천한 놈들에게 자신의 자랑스러운 정예병들이 수도 없이 죽어 나갔다. 이대로 간다면 저놈들을 전부 제압할 때까지 피해는 더 커질 것이다.

적이 좋은 장비를 갖추고, 좋은 위치를 선점한 덕분에 이쪽은 대군의 이점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병사들을 일단 물려라. 다시 전열을 정비하겠다. 허튼 남작과 윌로우를 부르고 선두에는 가장 강한 기사들을 배치하도록."

허튼 남작과 윌로우는 부상을 입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적의 전열이 너무 강하다면 이쪽도 거기에 맞춰야 했다.

물론 그렇게 맞붙게만 둘 생각은 없었다. 해럴드는 자신이 분노에 눈이 멀어 너무 조급해했다는 걸 인정했다.

"투석기의 사거리를 저놈들에게 맞춰라. 쥐새끼 하나도 숨을 곳이 없게 주변을 초토화해라."

드드드드드!

요새 밖에 있던 투석기들이 더 가까이 접근했다.

투석기 공격으로 펜리스군을 해치울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적들은 사거리를 벗어나 다른 장소로 이동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아예 주변을 다 박살 낸다면 포위진을 만드는 건 지금보다 쉬워질 것이다.

투석기가 준비되고 공격을 재개하려고 할 때, 해럴드에게 병사 하나가 다가와 말했다.

"적들이... 사라졌습니다."

"뭐라고?"

"천천히 물러나는 듯싶더니 요새의 반대쪽 문을 열고 도망쳤습니다."

까드득.

해럴드가 이를 악물었다. 역시 적들은 요새를 지키려는 게 아니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려고 했던 게 분명했다.

끓어오르는 숨을 길게 내뱉은 해럴드가 물었다.

"피해는?"

"지금까지 약... 3천 명이 사망했습니다."

"...."

해럴드는 살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두웠던 하늘은 이제 동이 터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첫 교전과 밤새 이어진 이번 전투로 모두 3천의 정예 병력을 잃었다. 상대는 정말 괴물들이었다.

이해할 수 있다. 100명이 전부 기사라면 불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그것도 이런 식으로 길을 막고 싸운다면 말이다.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요새는 다 허물어져 이제 요새라 부르기도 부끄러울 정도였다.

중요한 요충지이긴 하지만 고작 이 요새 하나를 점령하는 데 3천이 넘는 병력과 중요한 시간을 소진한 것이다.

'역시 진작에 죽였어야 했는데.'

이 모든 게 지셀을 살려 두어서 생긴 결과다.

처음 자신의 일을 방해했을 때부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였어야 했다. 놈을 우습게 본 대가가 너무나도 크고 아팠다.

"하아...."

해럴드는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렸다.

속이 끓어올라 견딜 수 없었지만 적은 이미 도망갔다. 여기서 화를 내고 난리를 쳐 봤자 병사들만 동요할 뿐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일단 요새를 확보한 이상, 이 앞으로는 펜리스 성까지 도로가 연결되어 있다.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 영주성을 점령하면 된다. 지셀과 그 수하들을 난도질하면 이 분노는 모두 풀릴 것이다.

해럴드는 애써 감정을 억누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출발하겠다. 최소한의 식량만 챙기고 움직인다. 본대가 먼저 움직여서 펜리스 성을 포위할 테니 공병대와 보급대는 최대한 빠르게 따라오도록."

병사들의 피로가 클 테지만 어쩔 수 없었다. 휴식은 펜리스 성을 포위하고 나서 취해도 된다.

데스몬드군은 빠르게 정비를 마치고 바로 펜리스 성을 향해 움직였다.

도로를 따라 움직이기에 대군치고는 빠른 속도였다.

그렇게 이틀간 아무 방해 없이 이동한 뒤, 잠깐 휴식하기 위해 숙영지를 꾸렸을 때.

그들은 갑작스러운 기습을 받게 되었다.

"습격이다!"

요새에서 빠져나간 길리언과 기사들이 데스몬드군의 숙영지를 습격한 것이다.

정예인 데스몬드군이 경계를 소홀하게 했을 리가 없다. 그들은 침입자를 맞아 훈련받은 대로 훌륭하게 상대했다.

하지만 펜리스군은 약한 병사들 일부만 잽싸게 죽이고 바로 도망가 버렸다. 규모가 큰 만큼 둔중한 데스몬드군은 소수 인원을 쉽게 쫓아갈 수도 없었다.

그렇게 기습을 잘 막긴 했지만 막았다고 끝이 아니었다. 싸움 직후에는 다시 휴식과 정비가 필요하다.

"시체를 치워라!"

"정찰조와 추격조를 다시 편성한다!"

"남은 인원 보고해!"

지휘관들이 사방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숙영지를 정리하려고 애썼다.

데스몬드군은 결국 펜리스군의 습격 때문에 또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해럴드는 난장판이 된 숙영지를 보며 이를 갈았다.

"그놈들이 또...."

펜리스 영지에 골치 아픈 놈은 지셀 하나일 줄 알았다. 그간의 전적이 화려했으니까.

하지만 그 수하들마저도 이렇게 골칫덩어리일 줄은 몰랐다.

그놈들 때문에 계속 진군 속도가 늦어지고 있었다. 3만 대군이 요새 하나를 점령하고 이동하는 데 벌써 보름 이상을 써 버렸다.

펜리스 성까지는 아직 거리가 꽤 남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펜리스군이 숨을 만한 숲과 산이 꽤 많았다.

"놈들이 아주 장난을 잘 치는구나. 역시 제집 앞마당이라는 건가?"

해럴드의 말에 옆에 있는 부관이 말했다.

"이런 식이면 도착하는 데만 보름 이상이 허비될 거 같습니다."

"그놈들한테 계속 끌려다닐 수는 없지. 진군 속도를 더 높여라."

"그러면... 기습 대응에도 취약해지고 병사들의 체력과 사기가 많이 떨어질 겁니다."

해럴드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부관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도 그렇게 해라. 쥐새끼들은 숨을 곳이 없으면 결국 튀어나올 수밖에 없으니까. 우리는 시간이 없다."

"...알겠습니다."

해럴드는 끓어오르는 살기를 숨기지 않았다.

"적 지휘관의 이름이 길리언이라고 했나? 내 반드시 지셀과 함께 그놈을 씹어 먹어 주겠다."

281화 우리가 도와줄 차례다. (1)

"당장 포우드 백작을 불러와라!"

데스몬드군이 스톤헤이븐 요새를 공격하기 얼마 전, 2군단이 전멸했다는 소식을 들은 브랜포드 후작은 엄청난 분노를 토해 냈다.

데스몬드 백작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움직일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군대를 모으고 있다기에 다들 어느 정도는 내전이 벌어질 것을 예측하고 긴장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어떠한 통보도 없이 무식하게 혼자 군대를 일으켜 왕국군까지 전멸시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수도에 머물고 있던 '공작가의 입' 포우드 백작은 강제로 끌려오다시피 해 브랜포드 후작의 앞에 섰다.

"후, 후작 각하. 그간 강녕하셨습...."

"백작! 명분도 없이 펜리스를 공격하다니! 이게 지금 공작의 뜻이냐!"

"그, 그게 데스몬드 백작은 저희랑 상관이 없는...."

"지금 내 앞에서 말장난을 하자는 건가?"

브랜포드 후작이 살기 어린 눈빛을 내보이자 포우드 백작은 고개를 숙였다.

데스몬드 백작은 지금껏 중립을 표방해 왔으나, 이제는 그가 공작파 귀족이란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바보가 아니니 카발디 전쟁 때 이미 눈치를 챈 것이다.

더 이상 발뺌할 수 없다고 생각한 포우드 백작이 떠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저희도 지금 어떻게 된 일인지 모릅니다. 이건 정말 요제프 자작의.... 아니, 공작가의 뜻이 아닙니다."

공작가가 내전을 준비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건 정말 최후의 수단이었다.

라울은 최소한의 피해로 왕국을 손에 쥐고 싶어 했다. 그렇기에 시간이 오래 들고 귀찮은데도 협박과 회유를 통해 각 지역의 영주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절대 회유되지 않을 자들만 남긴 뒤, 적당한 명분을 만들어 그들을 죽이고 쉽게 왕국을 차지하는 것.

그것이 공작가의 기본 전략이었다. 지셀이란 놈이 나타나 판을 흔들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데스몬드 백작까지 멋대로 움직일 줄이야....'

라울은 무척이나 분노한 상태였다. 그는 자신이 만든 판이 흔들리는 걸 무척이나 싫어하는 성격이었으니까.

이제 라울에게 데스몬드 백작은 동료가 아니라, 막 다뤄도 괜찮은 패가 되었다.

"저희는... 절대 이번 일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약속드리겠습니다. 펜리스 백작을 협공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한발 물러나는 포우드 백작의 모습에 브랜포드 후작이 말을 이었다.

"같은 파벌의 일임에도 모르는 척하겠다? 책임도 지지 않고?"

"일전에 저희는 펜리스 백작의 일에도 끼어들지 않았잖습니까? 각하께서도 손을 떼시는 게 어떠실는지...."

그때처럼 개인 간의 일로 치부하자는 뜻이다.

브랜포드 후작은 입술을 씰룩거렸다. 포우드 백작은 그의 눈치를 보며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펜리스는 끝이야. 데스몬드 백작을 이길 순 없어. 친왕파가 끼어들든 말든 상관없다.'

무려 3만의 병력이다. 펜리스 백작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목이 잘릴 게 뻔했다. 그 뒤에 친왕파가 데스몬드를 제압하려 해도 상당한 출혈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데스몬드 백작은 능력이 뛰어난 자다. 그 수하들도 만만치 않다. 어쩌면 친왕파가 연신 깨지며 장기전으로 갈 수도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한테 이득이지. 기회를 보고 바로 내전을 일으키면 되니까. 우리가 힘이 없어서 시간을 끌고 있는 게 아니야.'

공작가의 힘은 강대하다.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왕국을 바로 뒤집어엎을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도 내전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공작가의 두뇌인 라울이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마치 왕국을 차지한 뒤에도 따로 힘을 쓸 곳이 있다는 듯이.

이유야 어쨌든, 친왕파는 라울의 그런 기조 덕분에 아직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것이 포우드 백작의 생각이었다.

포우드 백작을 노려보던 브랜포드 후작은 이마를 짚고 웃었다.

"참 상황을 복잡하게 꼬는구나. 펜리스의 멸망은 기정사실이니 이왕 이렇게 된 거 데스몬드로 우리를 건드려 보겠다, 이거로군. 우리가 덤비면 싸워서 힘을 빼고, 뒤로 빠지면 펜리스를 안전하게 먹고. 어느 쪽이든 좋다는 거겠지."

포우드 백작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브랜포드 후작도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닐 터였다.

공작가는 이번 일과 상관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런 상황에서 친왕파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펜리스가 멸망한 후 데스몬드와 싸우는 거 말고는 말이다.

여유로운 포우드 백작의 모습에 브랜포드 후작은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네놈들의 수작질은 더 이상 봐주기가 힘들구나."

"오해입니다. 저희는 전쟁을 원하지 않기에 상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각하."

"그래, 그렇겠지. 너희들의 말장난은 이제 지겹다. 톨레오."

브랜포드 후작이 옆에 서 있던 기사단장을 불렀다. 톨레오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네, 각하."

"당장 저놈을 옥에 가두고 수도에 있는 공작파 귀족들을 모두 잡아들여라."

"받들겠습니다."

톨레오가 손을 들자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바로 포우드 백작의 양팔을 붙잡았다. 포우드 백작을 따라온 호위 기사들도 바로 제압이 되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포우드 백작이 당황하며 외쳤다.

"어? 어? 가, 각하!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옵니까? 저는 공작가의 외교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관습에 따라 제 안전을 보장...."

"펜리스 백작이 패하면 네놈과 공작파 귀족들의 목을 모조리 잘라 공작에게 보내겠다."

"네? 네?"

포우드 백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껌뻑거렸다. 지금 북부의 애송이 하나 때문에 내전을 일으키겠다는 뜻인가?

그뿐만이 아니다. 후작의 입에서 더 믿을 수 없는 발언들이 나오고 있었다.

"집사."

"하명하십시오."

"북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주둔한 3군단에게 바로 펜리스 백작의 지원을 나가라 일러라."

"알겠습니다."

"현재 공작파에 속한 영지 중 가장 세력이 약한 곳이 어디인가?"

"빠르게 칠 수 있는 곳은 북부의 하링턴 남작령과 동부의 콜린드 남작령입니다."

"좋군. 펜리스 백작이 패배하는 즉시 그 두 영지를 점령하라고 맥쿼리 후작에게 전해라. 데스몬드는 따로 군대를 꾸려 치겠다."

"...알겠습니다."

과격한 명령에도 가신들은 아무도 후작을 말리지 못했다.

후작이 명령을 내리면 그렇게 해야 한다. 그 누구도 후작의 권위를 거슬러서는 안 된다.

브랜포드 후작가는 그렇게 굴러가는 곳이었다.

포우드 백작은 정신이 나갈 듯한 표정으로 외쳤다.

"각하! 명분도 없이 전쟁을 벌이시겠다니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정녕 내전을 일으키시려는 겁니까! 저희는 데스몬드 백작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포우드 백작은 브랜포드 후작이 저런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을 직접 보면서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펜리스 백작을 총애한다고 해도, 그딴 이유로 왕실과 친왕파의 운명까지 걸다니!

펜리스 백작도, 데스몬드 백작도, 브랜포드 후작도, 그냥 죄다 미쳐 버린 것만 같았다.

브랜포드 후작은 포우드 백작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이 내가 언제까지 네놈들의 수작과 말장난에 끌려다닐 줄 아느냐. 긴말은 필요 없다. 살고 싶으면 펜리스 백작이 이기길 기도해야 할 것이다. 끌고 가라!"

"각하! 각하!"

포우드 백작은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내지르며 끌려갔다.

대전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가신들은 브랜포드 후작의 분노에 짓눌려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했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겨우 집사가 입을 열었다.

"후작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지금껏 내전을 피하려고 가장 노력한 사람은 브랜포드 후작이었다. 공작가의 진정한 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친왕파의 방어적인 전략과 공작가의 소극적인 태도가 맞물려 지금의 세력 구도가 유지될 수 있었다.

지셀이란 놈이 나타나 판을 흔들고, 그 결과 데스몬드 백작이 움직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브랜포드 후작은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듯이 말했다.

"펜리스 백작... 아니, 지셀 페르디움을 받아들일 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거 같군."

뛰어난 놈인 줄은 알았지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너무 빨리 성장했다. 그러니 언제가 되었든 결국은 데스몬드 백작과 부딪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싹이 더 크기 전에 철저하게 짓밟지 않으면 본인이 위험해질 것을 데스몬드 백작도 잘 알 테니까.

브랜포드 후작도 지셀에게 왕국군까지 붙여 가며 더 클 때까지 보호해 주려고 노력했지만, 상대가 이렇게까지 무식하게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집사는 조금 어두운 표정으로 답했다.

"3군단은 시간에 맞춰 도착하지 못할 것입니다. 가장 빠른 길은 공작파 영주들의 땅이기에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막 2군단이 전멸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어쩌면 이미 공성전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3군단은 기존의 2군단보다 더 남쪽에 주둔하고 있었다. 도로도 아직 전부 완성되지 않은 지금 상황에서는 명령을 받자마자 바로 출발해도 펜리스 영지까지 족히 한 달 이상은 걸릴 것이다.

북부의 가난한 친왕파 영주들은 별로 도움도 안 된다. 숫자도 적고 훈련도 부실한 병력을 보내 봤자 손해만 커진다.

브랜포드 후작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지셀은 데스몬드 백작을 이길 수 없다. 결국 패배하겠지."

"만약 물러난다면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겁니다. 페르디움 후작이 아직 건재하니까요."

"그래, 그래도 카발디 지역은 뱉어야겠지. 어쩌면 펜리스까지도."

그러면 지셀을 밀어준 의미가 없어진다. 가진 기반과 기술을 다 뺏기고 다시 가난해진 그가 재기하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 앞을 데스몬드 백작이 가로막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페르디움의 멸망도 시간문제일 뿐이다. 데스몬드 백작이 후환을 남겨둘 리가 없다.

"어차피 지셀은 여기서 끝이다. 하지만 우리는 데스몬드 백작과 싸워야 한다. 공작가는 상황을 여유롭게 지켜보면서 우리 힘이 빠지길 기다리겠지."

"후작님...."

"내전은 언젠가 벌어질 일이다. 그럴 바에는 우리가 먼저 싸움을 거는 게 낫다. 안 그러면 결국 지금처럼 조금씩 잡아 먹히다가 힘도 못 써 보고 다들 죽을 테니까."

브랜포드 후작은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자신의 결정으로 왕실과 친왕파의 귀족들은 모두 전쟁 준비에 들어갈 것이다. 그렇게 내전만은 피하고 싶었건만, 결국 자신의 손으로 시작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당장 내전을 피하고 조금 더 힘을 비축하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

바로 지셀이 승리하는 것.

'그럴 리가 없지.'

아무리 대단한 놈이라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브랜포드 후작은 고개를 저으며 미련을 털어 버렸다.

현실적으로 왕국군을 더 배치해 보호해 주는 건 의미가 없었다. 언제고 내전이 터지면 지금과 비슷한 일이 또 벌어질 수 있었다.

만약 지셀이 지금보다 더 강했다면 내전은 다른 곳에서 먼저 시작했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3군단의 군단장, 클리프턴 자작은 브랜포드 후작의 명령을 빠르게 전달받았다.

"목표는 펜리스 백작의 지원과 구출. 3군단이 도착하기 전에 데스몬드 백작이 승리하고 펜리스 백작이 사망했다 판단되면 공작파의 하링턴 남작령을 공격. 흠, 쉽지 않군."

몇 번 고개를 끄덕인 그는 바로 부관을 불렀다.

"최대한 빠르게 출정할 준비를 해라. 펜리스 백작을 도우러 간다."

브랜포드 후작의 명령을 받은 왕국군 3군단이, 펜리스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데스몬드 백작의 공격에 난리가 난 건 친왕파뿐만이 아니었다.

이제는 후작이 된 지셀의 아버지, 즈발터 페르디움도 소식을 듣고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데스몬드 백작이... 펜리스를 침공했다고? 그것도 2군단까지 전멸시키고?"

"네! 이미 펜리스 영지에 진입했다고 합니다!"

"이, 이런...."

충격적인 소식에 즈발터는 순간적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언젠가는 전쟁이 터질 줄 알았다. 페르디움 공방전의 배후도 데스몬드 백작이었으니까.

하지만 친왕파에 합류한 뒤에는 그 걱정을 다소 놓은 건 사실이었다.

결국 내전이 일어나도 공작파와 친왕파가 함께 맞붙는다. 지셀과 자신은 거기에 껴 한 축을 담당할 줄 알았다.

"이렇게 데스몬드 백작과 단신으로 맞붙을 줄은.... 그자가 왕국군까지 공격할 줄이야...."

즈발터는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혹시나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쳐들어올 줄은 정말 몰랐다.

"형님! 정신 차리쇼!"

멍해 있던 즈발터는 란돌프의 호통에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을 받고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지금 이렇게 있으면 안 된다. 페르디움에 소식이 도달했다는 건 이미 전투가 벌어졌다는 뜻과도 같았다.

"그, 그래. 지, 지금 당장 지셀을 도우러.... 잠깐, 요새는 어떻게 하지? 요새에 감시 병력을 남기고...."

백전노장이었던 그에게도 갑작스러운 데스몬드의 침공은 꽤 큰 충격이었다.

데스몬드는 북부의 최강이라 불리는 영지다. 거기서 3만의 대군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아들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이르자 즈발터는 다시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럼 병력의 편제를 다시... 페르디움도 준비를...."

허둥지둥거리는 즈발터의 양팔을 잡고 란돌프가 소리쳤다.

"형님! 정신 차리라고요! 빨리 전군을 움직여서 대공자를 도우러 가야 할 거 아닙니까!"

"그래, 그러니까 요새에 남길 병력을...."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어차피 지금은 휴전 상태인데!"

"그놈들을 믿을 수가 없다. 그러니 감시 병력을...."

즈발터는 자신이 맡은 막중한 책임과 아들에 대한 걱정, 두 가지가 충돌하자 빠른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저번 카발디 전쟁에서도 병력 일부를 요새에 남겨두고 움직였다.

그때는 지셀이 공격하는 상황이라 도와주든, 물러나라고 설득을 하든 선택할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다르다. 지셀은 데스몬드의 대군을 막아야 한다. 훈련병 하나라도 아쉬운 상태일 터였다.

"형님! 어차피 대공자가 없으면 다 소용없습니다!"

"뭐?"

"이 요새! 식량! 마나 연공법! 야만인들! 우리 페르디움의 발전까지도! 모두 대공자가 아니었으면 해결 못 했을 겁니다!"

"...."

대답도 못 하는 즈발터의 팔을 계속 흔들며 란돌프가 다시 외쳤다.

"그러니까 여기를 점령당해도! 북부가 불타올라도! 대공자만 있으면 다시 다 되찾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버립시다! 휴전했으니 일단 야만인 새끼들은 믿고 여기를 버리자고요!"

"버리자니... 여기를?"

평생 요새를 지키며 살아온 즈발터에게 이곳을 버리라는 건 책임감도 함께 버리라는 말과도 같았다.

특히 야만인들의 수장인 워로카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음흉한 놈은 지셀의 무력에 밀려서 억지로 합의했을 뿐이다.

이미 식량도 일부 얻어 냈으니, 지금 자리를 비우면 그놈이 또 요새를 차지하겠다고 덤빌 수도 있었다.

혹시나 지셀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워로카가 더 기고만장해서 날뛸 게 뻔했다. 아들도 잃고 요새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요새를 다시 뺏기도 힘들거니와, 야만인들의 약탈이 더 심해질 터다. 북부는 또 전란에 빠질 것이다.

그럼에도 란돌프는 상관없다는 듯이 말했다.

"대공자가 죽게 생겼다고요! 형님 아들이 죽는다고! 도대체 언제까지 남들을 위해서만 살 겁니까! 평생 그렇게 살았으면 이제는 좀! 가족들도 챙기고 살라고요! 죽은 형수님한테 미안하지도 않습니까!"

"너...."

"펜리스가 점령당하면 우리라고 무사할 거 같습니까? 데스몬드 백작이 우리를 살려 둘 거 같냐고요! 엘레나도 죽게 됩니다! 하, 씨발! 형님! 왜 갑자기 바보가 됐냐고! 정신 차리라고!"

란돌프의 말을 들은 즈발터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을 번쩍 차렸다.

그 말이 옳다. 요새를 지키고 있어 봤자 펜리스가 점령당하면 끝이다. 애초에 데스몬드 백작은 페르디움을 멸망시키려 했었으니까.

이대로 있다가는 펜리스와 페르디움 모두 멸망하고 만다. 다른 걸 신경 쓸 여력이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정신을 차린 즈발터가 란돌프를 밀어 내며 말했다.

"...그래. 일단 지셀부터 구하고 보자."

짜악!

즈발터는 스스로를 다그치듯 제 양 볼을 강하게 두드리곤 외쳤다.

"전 병력은 한 명도 빠짐없이 펜리스로 이동한다! 전령을 보내 호메른에게도 미리 준비하라고 일러라!"

요새의 모든 병력이 하나도 빠짐없이 소집되었다. 이들도 데스몬드가 펜리스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이미 전해 들은 상태였다.

북부 최강의 영지, 3만의 대군. 기겁할 만한 소식을 듣고서도 이들은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오히려 전투 의지를 더 불태우기 시작했다.

이들이 이럴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군수 물자를 전달하러 왔다가 또 일손을 거들라고 잡혀 있던 스코반이 검을 뽑아 들며 크게 외쳤다.

"대공자님이 위험하단다!"

다른 기사들과 병사들도 동시에 무기를 들었다. 이들에게 지셀은 이제 페르디움의 영웅이자 은인이었다. 이대로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그들은 다 같이 크게 외쳤다.

"이번에는 우리가 대공자님을 도우러 간다!"

"와아아아아!"

큰 함성과 함께 페르디움군도 펜리스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282화 우리가 도와줄 차례다. (2)

3군단과 페르디움군만이 지셀을 걱정하며 바삐 움직인 게 아니다.

어떤 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펜리스의 안위를 걱정했다.

[투자 피해자들의 모임]

귀족들의 투자를 잔뜩 끌어모은 로잘린과 메리엘도 연회장 입구에 걸린 현수막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야말로 펜리스 백작이 질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데스몬드 백작은 다른 영주들과 다르다. 무려 3만의 군세를 이끌고 있는 북부의 대영주였다.

지셀이 아무리 최근에 잘 나가는, 왕국의 신성으로 평가받고 있더라도 데스몬드 백작과 비교하면 손색이 있었다.

"아이고! 망했다!"

"내 전 재산을 다 넣었는데!"

"괜히 투자했다!"

이들은 화장품과 도로 건설에 어마어마한 돈을 투자했다. 도로 건설은 브랜포드 후작을 믿고 시작하긴 했지만 어쨌든 사업의 주체는 지셀이다.

지셀이 망하게 되면 일단 화장품 사업은 확실히 끝이다. 사업 주체가 망하면 도로 건설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러니 다들 투자한 돈을 다 날릴까 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곳에는 누구보다 많은 돈을 쏟아부은 사람이 있었다.

'와씨! 그 미친 새끼! 내가 다른 주교들 재산이랑 신전 기부금까지 죄다 끌고 와서 넣었는데!'

바로 여신 쥬아나의 신실한 종(?) 포리스코 주교였다.

성자급 위명을 얻은 그는 현재 수도에서 가장 잘나가는 종교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위상을 얻게 되자 그는 다시 고약한 버릇을 드러냈다.

수많은 뇌물을 먹은 것도 모자라 신전의 돈으로 여기저기 투자하며 돈놀이까지 시작한 것이다.

'어떡하지? 그 새끼를 괜히 믿었어! 그냥 쥬아나 님이나 열심히 믿을걸! 이 돈 다 날리면 난 또 바닥까지 추락.... 아니, 잠깐? 그놈이 죽으면 더 좋은 게 아닌가?'

생각해 보니 지셀만 죽으면 자신의 약점을 아는 놈이 없어진다. 죽어도 괜찮을 거 같았다.

'아니지, 그러면 내 돈은 어떻게 해? 그 많은 돈을 그냥 날리라고? 그러면 난 또 피폐해지고 말 거야.'

지셀이 죽었으면 좋겠는데 지금 죽으면 안 된다. 포리스코는 이 또한 여신의 시험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아! 왜 신은! 나에게 매번 이런 시련을 주신단 말인가!'

투자자들 모두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로잘린이 앞에 나서서 외쳤다.

"지금 여기서 걱정만 한다고 해결되는 상황이 아니에요!"

다들 우울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돈 넣은 사람들이 사업 걱정을 하는 거 말고 뭘 해야 할까?

로잘린은 문제가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사업이 망할까 봐 걱정이면 우리가 안 망하게 도와주면 되잖아요!"

"...?"

"다들 수도에 사병들 데리고 계시잖아요? 그걸 모아서 펜리스 백작을 지원해 주자는 거예요!"

"...."

그녀의 말에 다들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사병들이야 당연히 많이 데리고 있다. 하지만 그건 정말 수도에서 안전하게 지내기 위한 보험일 뿐이다. 북부 최강이라 불리는 데스몬드의 정예병들과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아니, 몇천을 모아 가도 3만의 대군 앞에서는 초라해질 것이다.

하지만 로잘린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버지께서 3군단을 움직이라 명하셨어요! 왕국군과 함께 움직이면 우리 사병들도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전쟁에 이길 필요도 없어요! 펜리스 백작만 구해 오면 되는 거예요!"

"오...."

귀족들이 눈을 반짝였다. 브랜포드 후작이 왕국군을 직접 움직였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거기에 자신들은 친왕파다. 명분도 없이 전쟁을 일으킨 데스몬드를 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내전이 일어나면 더 큰 문제가 생기겠지만 그거야 지금 걱정할 게 아니다. 당장 지셀이 죽고 손해를 보는 게 더 중요했다. 어떻게든 구출해야만 했다.

'진짜 이번에도 그 새끼가 살아남으면 돈 다 빼야지.'

'그놈이랑 엮이면 불안해서 살 수가 없어.'

'하, 저번에도 겪었는데 자꾸 큰돈 벌 기미가 보이니까 발 빼기가 쉽지 않네.'

남들도 다 하는데, 돈도 많이 번다는데 안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정말로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던 탓에, 다들 이번 일만 해결되면 정말 빠질 생각이었다.

귀족들은 그런 속내를 숨기고 로잘린의 제의에 흔쾌히 찬성표를 던졌다.

"좋소! 내 사병 100명을 전부 지원하겠소!"

"난 50명!"

"내가 200명을 내놓도록 하지."

다들 앞다투어 군사를 약속했다.

돈 많고 권세 있는 귀족들이다. 이들이 약속한 사병만 모아도 얼추 3천이란 숫자가 나왔다.

예상외로 큰 숫자에 귀족들은 살짝 놀랐다.

"허허, 그래도 우리 사병을 다 모으니까 숫자가 상당하군요."

"그럼요, 투자도 이렇게 모아서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 정도 숫자면 꽤 도움이 되겠습니다."

로잘린은 주먹을 꽉 쥐었다. 예상보다 귀족들의 호응이 좋았다. 왕국군과 같이 움직인다면 지셀을 구해 올 확률이 더 높아질 것이다.

메리엘도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에일즈버 백작가에서 식량과 군자금을 지원할 거예요."

"오오!"

귀족들이 그녀를 보며 감탄했다.

3천의 병력을 한 번에 움직이는 건 쉬운 게 아니다. 여기서 추가금을 더 내야 할까 눈치를 봤는데 메리엘이 해결해 준다니 정말 다행이었다.

빠르게 결정이 나자 로잘린은 연회에 참석한 포리스코를 바라보며 말했다.

"주교님! 사제 10명만 지원해 주세요! 저번처럼 말단 사제 말고 실력 좋은 분들로요!"

"네? 하지만 신전은 전쟁에 참여하면 안 되는...."

"그냥 저번처럼 따라가서 펜리스 백작이 안 죽게만 하면 돼요! 인도적 차원에서요!"

"으으음...."

"펜리스 백작이나 영지의 중요 기술자가 다쳐서 죽기라도 해 봐요! 우리가 도와주러 가도 말짱 헛일이라니까요! 신전의 소중한 성금을 잃으실 건가요?"

"하이씨.... 안 되는데...."

포리스코는 고민했다. 로잘린의 말처럼 신전의 소중한... 아니, 자신의 소중한 돈을 잃으면 안 된다.

어차피 전쟁에 직접 참여하는 건 아니니 사제들이 위험할 일은 없었다.

인도적 차원의 구조 활동은 귀족들 사이에서 쉽게 통용되는 핑계였으니까.

'어쩔 수 없지.... 이 또한 여신의 뜻이라면... 내가 따르는 수밖에.'

고민하던 포리스코는 지셀의 목숨보다 돈을 선택했다. 그냥 여신에게 책임을 넘겨 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신념 하나는 확실한 남자였다.

"좋습니다.... 모두가 이렇게 한마음이 된 것도 쥬아나 님의 인도로 이루어진 일일 테지요. 제가 사제들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수도 귀족 연합, 다른 말로 투자 피해자들의 모임이 결성되었다.

로잘린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직 방심해선 안 되지만 3군단과 함께라면 지셀 하나는 어떻게든 구해 올 수 있을 거 같았다.

'은근히 인기 있다니까.'

의도야 어찌 됐든 지셀을 구하기 위해 또 수천의 군대가 움직인 것이다.

연합군의 지휘관은 전쟁 경험이 있고 많은 투자금을 낸 이더리안 자작이 맡았다.

그는 출정식에서 자신 있는 표정으로 외쳤다.

"내가 꼭 펜리스 백작을 구해 오겠소!"

"와아아아! 이더리안 자작 최고다!"

귀족들의 환호를 받으며, 수도 귀족 연합의 군대는 3군단의 뒤를 바짝 쫓아갔다.

* * *

"준비는?"

지셀이 손에 붕대를 묶으며 묻자 클로드가 긴장한 기색으로 답했다.

"엘프들과 궁기병 2천, 기마병 1천 준비 완료됐습니다."

"기사들은?"

"300명 전원 무장하고 대기 중입니다."

"길리언에게서 소식은 없나?"

"아직은...."

이미 전쟁이 벌어진 지 한 달이 지났다. 요새가 함락됐다는 소식은 들어왔지만, 길리언의 소식이 묘연했다.

중간중간 데스몬드군과 접전을 벌이고 있다는 정보가 며칠 전 들어왔지만, 그 뒤로는 아무 소식도 받아 보지 못했다.

데스몬드 백작의 정찰조와 추격조 때문에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았고, 길리언도 행적을 계속 노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촤악.

지셀은 지도를 펼친 뒤 한 곳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고개를 몇 번 끄덕인 그는 클로드에게 다시 물었다.

"아버지와 왕국군, 수도 귀족 연합이라고 했나?"

"네, 그들이 출발한 지 꽤 됐습니다. 조만간 영지 경계에 도착할 것입니다."

"부족한 병력은 그들로 채우면 되겠군. 내 서신은 잘 전달했겠지?"

"네, 확실하게 전달하고 답장까지 받아 왔습니다."

지셀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더 준비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이 늦어질수록 길리언과 다른 이들의 목숨이 위험해진다.

영지의 모든 인력이 모든 힘을 다해 신형 활 제작에 매달렸다. 덕분에 부족한 부분을 겨우 채울 수 있었다.

궁기병들의 집중 훈련도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고 활 제작까지 끝났으니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었다.

지셀이 성 밖으로 나오자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영주님! 저희도 싸울 수 있습니다!"

"저희가 성을 지키겠습니다!"

"함께하겠습니다! 데리고 가 주십시오!"

새로 모은 훈련병들과 무장을 갖추고 나온 영지민들이었다.

다들 열광적인 표정으로 싸우겠다고 힘껏 외치고 있었다.

언제나 실의에 빠져, 귀족들의 전쟁에는 관심 없던 영지민들이 스스로 나서고 있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이런 이들과 함께한다면 무엇이든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

"마음만 받겠다. 아직은 너희들이 싸울 시기가 아니다."

지금 이들을 싸우게 할 수는 없었다. 이제 막 영지민들의 생활이 안정되어 생산력이 올라가던 참이었다.

그런데 전쟁으로 영지가 황폐해지고 많은 영지민들이 죽는다면? 지금까지 들인 것 이상의 시간을 더 들여야 한다.

이번이 마지막 전투였다면, 공작가의 주력이 쳐들어온 것이라면 총동원령을 내려 싸웠을 것이다.

단 한 번만 이기면 되는 전투일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다. 데스몬드는 중간에 넘어야 할 산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지셀도 처음에는 잠시 이곳에서 물러나려 했던 것이 아닌가.

지셀의 거부에 영지민들은 분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아직 우리가 약해서 그래....'

'이번에도 영주님만 믿을 수밖에....'

'이번 위기만 넘기면 돼. 다음에는 반드시....'

그간 너무나도 안일하게 지냈다. 최근에는 영지가 노려진다는 소문에 긴장해서 병사로 많이들 지원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진작에 훈련을 받고, 영지를 지킬 힘을 키웠어야 했다.

영지민들은 그것이 못내 아쉽고 안타까웠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절대 이렇게 안도하며 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그런 각오를 품었다.

지셀은 영지민들을 일별하고 자신의 앞에 선 군대를 바라보았다.

검은색 갑옷을 입은 300명의 기사가 언제라도 폭발할 듯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항상 티격태격했지만, 길리언과 요새에 있던 기사들은 지금껏 함께해 왔던 동료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적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하니 빨리 달려가고 싶었다.

"후욱.... 후욱...."

다들 분이 차올랐는지 거친 숨만 내쉬고 있었다.

지셀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바네사와 알포이를 필두로 로브를 뒤집어쓴 마법사들이 한쪽에 모여 있었다.

조금 긴장한 기색이 있긴 하지만 크게 두려워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데스몬드군은 마법사를 많이 데리고 있다.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이제 펜리스의 마법사들도 본격적으로 나서야 했다.

푸르르륵.

말들의 사나운 투레질 소리에 지셀은 소리가 들린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루미나와 아스콘을 필두로 선 200여 명의 엘프. 그리고 그들의 뒤에 있는 2천의 궁기병들.

이번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이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신형 활을 접어 허리춤에 매달고 있었다.

그 뒤로는 노동돌격대를 포함한 기마병 1천여 명이 말을 타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지난 전쟁 때와 다른 점을 꼽자면, 벨린다와 몇몇 인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모인 이들을 한번 둘러본 지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의 친구들이 적의 대군을 맞아 목숨을 걸고,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었다. 우리의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서 말이다."

기사들이 더 거친 숨을 내뿜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지셀의 말은 나긋하면서도 힘 있게 이어졌다.

"적은 이 북부의 최강이라고 불리는 데스몬드다. 3만의 대군을 몰고 왔지만 우리는 병력을 전부 긁어모아도 4천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겁이 나는 자는 빠져도 좋다."

쿵!

한 기사가 웃기지 말라는 듯 강하게 창으로 땅을 쳤다. 그러자 다른 기사들도 그를 따라 창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그들의 눈빛에서 격렬한 전의가 느껴졌다. 지셀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좋다. 더 시간을 끌 수는 없다. 그들의 용기와 희생을 헛되이 할 수는 없는 노릇."

쿵!

다시 기사들이 창을 땅에 내리찍었다. 땅울림이 마치 심장 고동처럼 규칙적으로 퍼져 나갔다. 그 소리를 들은 모든 이들의 심장 박동이, 호흡이 서서히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우리가 그들을 도와줄 차례다."

지셀이 그 말을 끝으로 바로 말에 올라탔다.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도 그를 따라 말에 올라탔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지셀이 흑왕의 말고삐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가자, 우리의 친구들을 구하고 데스몬드를 박살 내러."

히이이잉!

흑왕이 앞발을 높이 들며 울었다. 그리고는 곧장 강하게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두두두두두두!

기사와 병사들이 지셀의 뒤를 따랐다.

전원이 기마병이다. 그들은 성에 틀어박혀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펜리스군은 마치 그간 모아 왔던 힘을 단번에 터뜨리듯이,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흑왕의 위에서 지셀은 이를 꽉 깨물었다.

'조금만 더 버텨라, 길리언.'

그의 눈은 모든 것을 파괴할 것만 같은 살의로 가득 차 있었다.

283화 혼자 온 게 아니거든. (1)

길리언은 지친 눈빛으로 눈앞에 있는 데스몬드군의 추격대를 바라보았다.

'정말 끈질기구나....'

길리언은 기사들과 함께 며칠 동안 몇 번이나 기습을 취했다. 처음에는 허둥지둥하며 당하던 데스몬드군은, 점점 더 기민하고 견고하게 대응해 왔다.

그러다 보니 갈수록 기습의 효과도 줄어들었다. 최근에는 기습하기는커녕, 데스몬드군의 추격대에 쫓겨 도망가기에만 바빴다.

길리언은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서 수천의 기마병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

말이 추격대지, 무려 3천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수다. 한 영지의 군사력과 맞먹는 수가 이들을 잡기 위해 움직인 것이다.

'이 정도로 병력을 운용할 수가 있다니....'

역시 만만한 놈들이 아니었다.

추격대는 본대가 움직이는 동안 빠르게 갈라져 나와, 펜리스군이 도망갈 수 있는 모든 길목을 막았다.

그러고는 마치 몰이사냥을 하듯 그들을 이곳까지 몰아넣었다.

길리언은 깊이 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인가....'

자신들이 있는 곳은 널따란 평야다. 이곳부터 펜리스의 중심까지는 몸을 숨길 숲과 산이 없었다.

적들은 초반에 피해를 감수하며 생각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고 결국 자신들을 몰아넣는 것에 성공했다.

도망갈 수도 없었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정면으로 싸우는 것뿐이었다.

"전투 준비."

길리언의 나직한 말에 기사들과 병사들이 무기를 들었다. 그들은 모두 피곤함에 지쳐 안색이 거멓게 죽어 있었다.

요새에서 빠져나올 때 말은커녕 식량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쉬지도 못하고 계속 싸워 왔으니 다들 상처 입고 지치는 게 당연했다.

병사들도 그간 반복된 전투 때문에 절반도 채 남지 않았다.

그래도 모두가 눈빛만은 아직 흉흉했다. 다들 어떻게든 적을 한 놈이라도 더 죽이겠다는 결의를 품은 것이 느껴졌다.

길리언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원형 방진을 펼쳐라."

대형이 둥그렇게 변하기 시작했다. 대기병 전투를 위해 다들 창과 방패를 높이 들었다.

이제는 이용할 만한 요새와 지형지물도 없었다. 포위당한 상태라 사방에서 오는 공격을 지친 몸만 써서 막아야 했다.

그렇게 펜리스군이 진형을 꾸리는 동안 데스몬드군도 포위를 완전하게 끝마쳤다.

추격대를 이끄는 허튼 남작은 기쁜 미소를 지으며 펜리스군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저 쥐새끼들을 잡았구나."

길리언이 주도한 기습은 빠르고 강했다. 기습에 대비하며 진군 속도를 늦춰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데스몬드군은 길리언의 의도대로 끌려다니지만은 않았다.

이곳까지 오는데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지만 결국 그들이 원하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이제 남은 건 그간 쌓인 분노를 모두 풀어 버리는 것뿐이다.

허튼 남작은 검을 뽑아 들고 말했다.

"끝을 내라."

데스몬드군이 천천히 움직이며 펜리스 군을 조여 오기 시작했다.

길리언은 방패로 전면을 가리고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온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데스몬드군 쪽에서 수십 개의 파이어볼이 쏟아져 나왔다.

콰앙! 콰앙! 콰앙!

길리언은 이를 악물고 방패로 마법들을 막았다.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정도 마법은 문제가 아니다. 6서클 마법사인 윌로우가 없으니 충분히 막을 만했다.

파아악!

데스몬드군 진영에서 마법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화살도 같이 날아왔다.

별 소용이 없다는 건 저들도 안다. 단단한 갑옷과 디스펠 마법이 막아 주고 있었으니까.

이런 식으로 자신들의 체력과 마나를 계속 소모하게 하는 것이 데스몬드군의 목적이었다.

타타타타탕!

콰앙! 콰앙! 콰앙!

데스몬드군의 공격이 쏟아질 때마다 원형 방진이 크게 흔들렸다. 펜리스군이 할 수 있는 건 거북이처럼 몸을 말고 버티는 것뿐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원거리 공격이 멈추고 데스몬드의 기마병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실컷 두들겨 맞은 펜리스군은 맞붙기 전부터 지친 모습이었다. 아니, 앞선 공격이 아니어도 이미 오랜 야외 생활로 몸 상태는 최악이나 다름없었다.

두두두두두!

다가오는 데스몬드의 기마병들을 보며 펜리스의 기사들은 웃었다.

언제나 근엄한 척하던 '고독한 엄살쟁이'이자 자칭 '창술의 천재' 루카스가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야, 솔직히 말하면 나 중간에 도망가려고 했다. 저 새끼들 진짜 장난 아니야. 지금까지 싸운 놈들하고는 비교가 안 돼."

"크큭, 병신. 쫄기는. 넌 그럴 줄 알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새끼라도 더 죽이고 가자고. 우리 복수는 영주가 해 주겠지."

그래, 복수는 영주가 반드시 해 줄 것이다. 영주가 다른 건 몰라도 당한 건 절대 그냥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그들은 웃으며 죽을 수 있었다.

콰아아앙!

마침내 양측 군대가 충돌했다. 펜리스의 기사들은 기마 돌격을 쉽게 피하며 역으로 말과 기수들을 죽여 나갔다.

창을 들어 올린 병사들도 처음에는 효과적으로 기마병들을 막았다.

하지만 적들이 너무 많았다. 지금 인원으로는 몰려오는 모든 기마병을 막을 수가 없었다.

콰아아앙!

"으아아악!"

뒤이어 달려온 데스몬드의 기마병들은 그대로 펜리스의 병사들을 밀어 버렸다.

펜리스 병사들은 방어력이 높을 뿐, 기사만큼 민첩하지는 않다. 그들은 돌격의 엄청난 충격을 그대로 받아 내야 했다.

단 두 번의 충돌로 펜리스의 원형 방진은 그대로 와해되고 말았다.

"일어나! 누워 있으면 정말 죽는다!"

"정신 차려라!"

"조금만 더 버텨!"

펜리스 기사들이 분전하며 주변의 기마병들을 죽여 나갔지만, 난전이 되어 버린 이상 열세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좁은 길목을 막고 있던 요새에서와는 달리 사방에서 적이 쉬지 않고 들어왔다. 펜리스 기사들은 최후의 힘을 쓰기 시작했다.

지이잉―!

이번이 마지막 전투다. 어차피 목숨을 잃을 거면 하나라도 더 죽이고 가야 한다.

콰아아앙!

폭주.

펜리스의 기사들은 그 말이 어울릴 정도로 광기에 물들어 움직였다.

콰앙! 콰앙! 콰아앙!

그 누구도 힘을 아끼지 않았다. 어떻게든 적을 하나라도 더 죽이겠다는 집요한 살의를 내뿜었다.

특히 길리언은 더 그랬다. 그는 방패도 버리고 양손에 도끼를 들었다.

그러고는 무자비하게 주변의 적들을 내리찍었다. 자신이 상처 입는 건 개의치도 않았다.

콰직! 콰직! 콰앙!

다가오던 데스몬드군은 그대로 갈려 핏물이 되었다. 그들의 비명이 평야를 가득 채웠다.

"으아아악! 이 괴물들!"

"조금만 더 밀어붙여라! 이놈들도 지쳤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이 지긋지긋한 새끼들!"

데스몬드군도 악에 받친 건 마찬가지였다.

이놈들 때문에 무리한 작전을 펼쳐야 했고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다. 또한 수많은 아군을 잃으며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그 악몽을 끝낼 수 있는 시간이 다가왔는데 겁을 먹는다면 정예라 할 수 없었다.

콰앙! 콰앙! 콰앙!

"으아아악!"

"와아아아아!"

서로의 비명과 함성이 울리며 전장은 광기로 물들어 갔다.

공격하는 쪽이나 방어하는 쪽이나 전투의 열기에 취해 눈앞의 적을 죽이는 것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하지만 그 상태가 영원히 이어질 수는 없는 법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데스몬드의 기세는 더 강해졌지만 펜리스군은 점점 약해져 갔다.

"크흐...."

털썩.

미친 듯이 싸우던 펜리스의 기사 하나가 자조적인 웃음을 내뱉으며 갑자기 쓰러졌다.

투구에 가려진 탓에 누구도 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이미 투구 안쪽은 그가 토해 낸 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털썩.

다시 한 기사가 쓰러졌다.

쓰러진 건 기사들뿐만이 아니다. 병사들은 진작에 쓰러져 몸만 꿈틀거리고 있었다.

단단한 갑옷 덕분에 아직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누적된 충격과 피로로 병사들은 다시 일어설 힘을 내지 못했다.

"일어나라! 어서 일어나서 더 죽이란 말이다!"

길리언만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적들을 죽여 나갔다.

길리언이 여전히 미쳐 날뛰고 있어 데스몬드군은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도 뭔가 펜리스군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금세 눈치챘다.

"이 새끼들... 이제야 지친 건가?"

"그러기에는 상태가 너무 이상한데?"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

털썩! 털썩! 털썩!

데스몬드군이 조금 물러나자 억지로 버티고 있던 펜리스의 기사들이 하나둘씩 알아서 쓰러졌다.

가만히 둬도 쓰러지는데 굳이 공격할 필요는 없었다. 데스몬드군은 공격을 멈추고 포위 상태만 유지하기 시작했다.

결국 펜리스 기사들의 대부분이 쓰러지거나 주저앉아 버렸다. 투구 밑으로 피가 줄줄 새어 나오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길리언도 힘이 빠졌는지 두 팔을 축 늘어뜨렸다.

펜리스군에서 서 있는 자는 오직 그뿐이었다.

길리언은 쓰러져 피를 토하고 있는 펜리스의 기사들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일어나라.... 일어나서 더 싸우란 말이다...."

그의 얼굴은 며칠 사이에 몇 년은 늙은 거 같았다. 맹렬했던 눈빛은 이제 사라졌다. 지치고 병든 사자의 마지막 모습과도 같았다.

촤아악.

데스몬드군의 진영이 갈라지고, 안쪽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허튼 남작...."

길리언이 다시 도끼를 움켜쥐었다. 도끼를 쥔 손이 떨렸지만 어떻게든 이놈만은 죽여야 했다.

그래야 앞으로의 전투에서 아군의 피해가 줄어들 것이다.

허튼 남작은 천천히 검을 뽑았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처음과 같이 오만하고 서늘했다.

두 사람은 그대로 서로에게 무기를 날렸다.

콰앙!

단 한 번의 충돌에 길리언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허튼 남작의 강력한 공격을 막기에 그는 너무나 지쳐 있었다.

콰앙! 콰앙!

"크윽...."

맞붙을 때마다 길리언은 상처 입고 비틀거렸다.

허튼 남작도 몸을 완전히 회복하진 못했지만, 충분한 치료와 휴식을 취했기에 길리언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몸 상태가 좋았다.

카앙!

연속된 공격에 길리언은 더 버티지 못하고 도끼 하나를 놓치고 말았다.

콰앙!

그리고 이어진 공격에 마나를 충분히 머금지 못한 다른 도끼는 박살이 나 버렸다.

카가가각!

허튼 남작의 검은 길리언의 흉갑을 무자비하게 갈랐다.

털썩.

가슴에서 피를 내뿜으며 몇 번 비틀거리던 길리언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길리언은 지친 눈으로 허튼 남작을 올려다보았다. 단숨에 죽일 수 있는데 왜 죽이지 않았는지 의아함을 담은 눈빛이었다.

과연 허튼 남작은 피 묻은 검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길리언."

"...."

"비록 천한 용병이지만 이런 전쟁에서 죽이기는 아깝군. 다시 한번 기회를 주겠다. 투항해라."

"...거절한다."

허튼 남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지? 자네는 용병이 아니었나? 왜 그렇게까지 목숨을 걸고 펜리스 백작을 따르는 거지? 그따위 계약이 그렇게 소중한 건가?"

"...계약이 아니다."

처음에는 딸을 구해 준 데 대한 감사였다. 그 은혜를 갚기 위해 따랐다.

언제든 목숨을 버릴 각오는 했다. 딸의 목숨을 받았으니,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게 정당한 대가라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지셀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생각이 서서히 바뀌었다.

지셀은 특별한 사람이었다.

귀족임에도 상대의 신분 따위는 개의치 않는 소탈한 사람.

용병이 아님에도 그 어떤 용병보다 더 용병다운 모습을 보이는 사람.

신비한 지식으로 어려움에 빠진 영지를 몇 번이나 살려 낸 사람.

자신의 욕심보다 다른 이들을 지키기 위해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렇기에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외치던 일을 결국 가능하게 한 사람.

지셀과 함께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길리언은 그런 모습에 점점 감화되어 갔다.

어느 순간부터 길리언은 지셀을 그저 딸을 구해 준 은인이 아닌, 진심으로 믿고 따라야 하는 주군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길리언은 지셀을 배신할 수 없었다.

이것은 은인에 대한 보답도, 계약으로 인한 속박도 아니었으니까.

충성.

길리언은 자신의 목숨을 걸 만한, 진정 충성할 사람을 찾은 것뿐이었다.

물론 가끔은... 엉뚱하고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재미가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 생각에 이르자 길리언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허튼 남작은 저런 모습을 보이는 길리언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펜리스 백작이 저런 충성을 받는지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그깟 애송이를 따른다는 말이냐! 정말 펜리스 백작이 이 북부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정말 펜리스 백작이 공작가와 싸워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냐는 말이다!"

"영주님이라면 반드시 해내실 수 있다."

"웃기는 소리! 현실을 모르는 애송이의 망상일 뿐이다! 꿈은 꿈으로 끝내라!"

"영주님의 꿈이...."

길리언은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려 허튼 남작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조금 전과 다르게 무척 평온히 가라앉아 있었다. 길리언은 마지막 숨을 토해 내듯 말했다.

"나의 꿈이다."

"이놈이...."

허튼 남작이 검을 들어 올렸다. 당장 목을 날려야 하지만 아쉬움이 자꾸 그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아깝지만 빨리 죽이고 복귀해야 한다. 꼴을 보아하니 설득도 되지 않을 거 같았다.

그가 결단을 내리고 검을 내리치려고 할 때.

쐐애애액!

카아앙!

갑자기 날아오는 화살을 감지한 허튼 남작은 검을 들어서 막았다. 하지만 화살은 그대로 검을 박살 내며 그의 가슴에 꽂혔다.

"컥!"

허튼 남작은 가슴을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주변에 있던 데스몬드군은 모두가 깜짝 놀랐다. 부상 때문에 전보다 상태가 안 좋아졌다고 하지만 허튼 남작은 상급의 기사다. 그런 그가 화살 따위에 상처를 입다니?

그와 직접 검을 맞대어 허튼 남작의 실력을 잘 아는 길리언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이런 강자에게 쉽게 화살을 맞출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다, 있다. 이 북부에 그런 사람이 하나 있다.

그 경지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자.

시간이 갈수록 괴물처럼 강해지고 있는 자.

길리언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심장 소리에 맞춰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가 들려온다.

두두두두두두!

나팔 소리도, 함성도,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저 힘차게 질주하는 말의 발굽 소리만 들릴 뿐이다.

길리언의 고개가 천천히 뒤로 돌아갔다.

"아아...."

그토록 보고 싶었던 광경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두두두두두두!

저 너른 평야를 가득 메운 붉은 늑대의 깃발. 저 깃발의 주인이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꿈이다.

그리고 그가 가장 기다리고 보고 싶었던 사람은....

"길리언―!"

붉은 눈을 빛내며 누구보다 빠르게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284화 혼자 온 게 아니거든. (2)

데스몬드의 추격대는 당황했다. 그간 자신들을 괴롭힌 놈들을 끝장내려는데 갑자기 새로운 적이 나타났다.

쓰러져 있던 펜리스의 기사들도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다.

"영주가... 왔다고?"

"설마 벌써 준비가 끝난 건가?"

"하, 하하하하! 영주다! 영주가 왔어!"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절로 웃음이 나왔다.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딱 맞춰서 나타난단 말인가!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영주의 움직임은 정말 예측할 수가 없었다.

펜리스의 기사들뿐만이 아니다. 쓰려져 있던 병사들까지 쿡쿡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살았다...."

"영주님이 오셨어...."

"영주님이라면 여기 있는 이놈들 정도는 다 죽일 수 있을 거야...."

지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지셀은 다른 건 몰라도 전쟁에서만큼은 이들에게 그런 믿음을 주었다.

"이놈들이...."

데스몬드군은 누워 있는 펜리스군을 험상궂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고작 지원군이 좀 왔다고 기고만장하는 꼴이라니. 곧 죽을 놈들이 허세를 부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전에 네놈들이 먼저 죽는다. 그리고 저놈들도 다 죽겠지."

데스몬드군의 병사들이 누워 있는 펜리스군의 투구를 창으로 걷어 냈다.

힘들게 다른 곳을 찌를 필요도 없다. 얼굴을 그냥 찍어 버리면 된다.

투구를 벗기자 기사들 대부분은 피범벅이 된 얼굴로 여전히 웃고 있었다.

"흐으... 본대도 아닌 너희들 정도로 우리 영주를 죽인다고?"

데스몬드 병사들은 그 모습을 보며 입술을 씰룩거렸다. 시건방진 말을 하는 게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빨리 죽이고 빠지려고 창을 높이 들었다.

퍼억!

"꺼억...."

창을 찌르기도 전에 화살이 날아와 병사의 목을 뚫었다.

퍼억! 퍼억! 퍼억!

다급하게 창을 찌르려던 다른 병사들도 화살에 맞아 우수수 쓰러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데스몬드군의 병사 하나가 놀라 다시 고개를 돌렸다. 유독 빠르게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가 보였다.

펜리스군이 영주라고 부르던 인물과 그 뒤를 따르는 300여 명의 검은 갑옷을 입은 자들.

그들은 모두 활을 들고 있었다.

"젠장! 일단 빠져! 대열을 갖춰라!"

너무 빠르다. 눈 한번 깜빡할 때마다 엄청난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쓰러져 있는 펜리스군을 전부 죽이고 갈 시간이 되지 않았다. 어쨌든 갑자기 적이 나타났으니 다시 뭉쳐서 진형을 만들어야 했다.

훈련된 정예들답게 데스몬드군은 잽싸게 대열을 갖추었다. 하지만 허튼 남작은 바로 물러나지 않았다.

'이놈부터 먼저 죽인다.'

길리언을 죽인다면 적들의 사기는 떨어질 것이다. 제 가슴에 꽂힌 화살을 뽑은 그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검 하나를 주워 들었다.

"죽어라!"

쐐액!

카앙!

그가 길리언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다시 화살이 날아왔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대비해 쳐 내긴 했지만, 강한 힘에 검을 쥔 손이 떨려왔다.

"큭, 화살에 이런 힘을...."

화살에 담긴 힘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번에도 검에 마나를 집중하지 않았다면 검날이 박살 날 뻔했다.

펜리스군에 길리언 말고 이런 강자가 있었던가?

'혹시 저자가... 펜리스 백작인가?'

화살을 날린 자는 광기가 느껴질 정도로 사나운 웃음을 지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이제 길리언을 죽이기엔 늦었다.

'소문의 실력, 확인해 보지.'

파앗!

검은 말을 탄 지셀이 길리언을 넘어 허튼 남작에게 쇄도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도착한 지셀이 창을 내질렀다.

"흐읍!"

허튼 남작은 자세를 낮춰 창을 피하며 말의 다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지셀을 땅으로 끌어 내릴 속셈이었다.

말이 도약을 끝내고 바닥에 착지할 때 맞춰 내지른 공격이었다. 절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파앗!

하지만 바닥에 발굽이 닿자마자 흑왕은 허벅지 근육에 힘을 주어 다시 뛰어올랐다. 허튼 남작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이....'

말 주제에 자신의 검을 피했다고? 아무리 기마술이 뛰어난 자가 타고 있다 해도 자신의 공격 타이밍은 완벽했다.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허튼 남작은 당황하면서도, 공격이 실패한 걸 깨닫자마자 바로 앞으로 굴렀다. 하지만 지셀은 그가 머뭇거리던 찰나를 놓치지 않고 창을 휘둘렀다.

촤악!

"크윽!"

지셀의 창에 등이 베인 허튼 남작이 신음을 삼켰다.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큰 상처는 입지 않았다.

"호오, 제법인데?"

지셀이 흑왕의 기수를 돌리며 허튼 남작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내지른 창을 두 번이나 피했다. 적어도 상급에 오른 뛰어난 기사라는 뜻이었다.

푸르르륵.

흑왕이 잇몸을 내보이며 웃었다. 공격에 실패한 두 사람을 동시에 비웃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셀이 혀를 차며 배를 누르자, 그 고통에 흑왕은 바로 입을 닫았다.

그사이 지셀을 뒤따르던 기사들이 속속 도착해, 곧바로 쓰러진 아군의 앞을 막아섰다. 그 뒤를 이어 나머지 병력이 차례대로 도착했다.

지셀은 그제야 뒤를 돌아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길리언! 괜찮아? 괜찮지?"

"영주님...."

길리언은 감격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정말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지셀이 나타났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를 떠올린 길리언이 다급하게 말했다.

"영주님! 일단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지금...."

"일단 상처부터 치료하고 재회의 기쁨은 조금 있다가 나누자고!"

"아니, 그게 아니고...."

"어이, 뭐 해! 빨리 길리언과 부상자들을 옮겨라!"

지셀이 자꾸 말을 끊어 버려서 길리언은 하고 싶은 말을 못 했다. 다시 말하려 하는데 옆에서 '근육의 고든'이 부축을 하며 또 그의 말을 끊었다.

"어휴, 우리 교관님 살 빠진 것 봐. 고생 많이 하셨나 봐. 이러면 근손실이 오는데...."

"고든! 잠시만! 영주님에게...."

"제가 닭 가슴살 많이 먹여 드릴게요. 자자, 빨리 오세요."

"너! 크윽!"

고든의 우악스러운 손에 끌려가던 길리언은 상처가 벌어져서 고통 어린 신음을 흘렸다.

허튼 남작은 펜리스의 지원군들이 부상자 이송으로 정신없이 움직이는 틈을 타 잽싸게 뒤로 물러섰다. 그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빠르다!'

지원군이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다. 기마술이 다들 보통이 아니었다.

숨을 몇 번 고른 허튼 남작이 허리춤에서 포션을 꺼내 가슴과 등에 뿌렸다.

'실력이 제법이군.'

지셀의 마나가 아직도 체내에 남아 날뛰는 탓에 상처가 쉽게 치료되지 않았다.

포션 두 병을 연달아 뿌리고 자신의 마나로 지셀의 마나를 억누르고 나서야 겨우 겉의 상처가 아물었다. 하지만 내상은 완전히 낫지 않아, 적어도 며칠은 정양해야 할 듯했다.

이 정도로 마나의 여파가 크다는 건 실력도 뛰어나다는 뜻이다.

'상급에 오른 건 확실하다. 길리언과 비슷한 경지인가? 쯧, 그래도 내가 다친 상태만 아니었으면 저런 애송이 정도는....'

물론 허튼 남작은 지금도 자신이 질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했을 뿐, 집중해서 싸운다면 저런 애송이에게 질 리가 없었다.

그와 길리언이 지셀보다 뛰어난 점이 하나 있었으니까.

허튼 남작은 지셀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대가 펜리스 백작이오?"

"그래, 내가 펜리스 백작이다."

지셀이 오연하게 말하자 허튼 남작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나는 허튼 남작이오. 그나저나 멍청한 짓을 했군."

"멍청한 짓?"

"성에 틀어박혀 있지, 뭐 하러 나오셨소."

대화를 하며 안정을 되찾은 허튼 남작은 희미하게 미소를 띠었다.

'저놈만 죽이면 이 전쟁은 끝이군.'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눈앞에 있는 지셀만 죽이면 자신은 최소한의 피해로 전쟁을 끝낸 일등 공신이 된다.

'당장 공격을... 아니, 아니지.'

병사들을 움직이려던 허튼 남작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행동을 멈췄다.

그러고는 검을 앞으로 뻗으며 오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젊은 나이에 그만한 경지에 오르다니 과연 대단하오. 하지만 백작의 자신감은 너무 과한 거 같소이다."

"내 자신감이 과하다고?"

"그렇소, 실력에 자신이 있는 건 알겠으나 영주가 겁도 없이 가장 앞에 서다니. 죽기 딱 좋은 행동이오. 담당 교사가 누구인지 궁금할 정도군. 쯧쯧."

지셀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귀족이고 기사 아니랄까 봐 보자마자 훈수를 두고 있었다.

거기에 교사 얘기를 한다는 건 자신을 아직 제대로 된 영주가 아니라 어린애로 여긴다는 모욕이었다.

'벨린다가 들었으면 남의 교육 방식에 웬 참견이냐고 화를 펄펄 냈겠군. 없어서 다행인가.'

지셀은 말에서 내리며 검을 뽑았다.

"누가 겁이 없는지는 봐야 할 거 같은데."

"여전히 자신감이 넘치는구려. 그거야말로 젊음의 특권이지. 하지만 자신감이 넘치는 만큼 부족한 점도 있을 수밖에 없는 법."

"내가? 뭐가 부족한데?"

"바로 연륜과 경험이지."

"...."

허튼 남작은 아무 말도 못 하는 지셀을 향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싸움은 힘만으로 하는 게 아니오. 비슷한 경지라면 결국 얼마나 실전 경험을 많이 했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 나는 법이지."

"...."

"이왕 이렇게 된 거 내 백작에게 한 수 가르침을 주고 싶소만.... 자신 없으면 병력 대 병력으로 붙어도 좋소이다."

허튼 남작의 오만한 말에 지셀은 피식 웃었다. 전장에서 이렇게 말이 많아지는 데는 보통 이유가 있다.

상대가 전장에서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수다를 떠는 클로드 같은 놈이거나.

일부러 시간을 끌려는 의도거나.

또는....

'피해를 줄이고 공을 세우고 싶나 보군.'

영지전은 결국 영주만 잡으면 끝이 나는 전쟁이다. 그런데 젊은 애송이 영주가 눈앞에 직접 나섰다.

일대일 대결로 죽일 수 있다면 병력의 피해도 아끼고, 북부에서 소문이 난 말썽꾸러기를 직접 처단했다는 명성도 얻게 된다.

허튼 남작에게는 그야말로 보물이 눈앞에 굴러들어 온 것처럼 보일 터였다. 그래서 저런 식으로 말을 많이 하며 지셀을 도발하는 것이다.

지셀에게 속이 읽힌 줄도 모르고, 허튼 남작은 대놓고 지셀에게 비웃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성격이 제멋대로에 즉흥적이라 들었다. 귀족이라면 이런 도발을 참기 힘들겠지.'

그는 진심으로 자신이 이길 수 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비록 부상당한 상태이긴 하지만, 자신에게는 상대에게 없는 연륜과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펜리스 백작이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 해도 혈기 넘치는 젊은이에 불과하다. 지금까지의 정보로도 그랬다.

자신의 침착함은 북부 제일이라 자부하고 있다. 다른 이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집중해서 싸운다면 절대로 지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침착하게 상대를 몰아붙이는 건 경지와 상관없이 오랜 시간을 들여야 쌓이는 능력이었으니까.

"어떻소? 기사 대전이야말로 전장의 낭만 아니겠소? 무서우면 들어가도 좋소이다."

지셀은 고개를 끄덕이며 허튼 남작의 도발을 받아 주었다.

"그래, 받아들이지. 재미있는 놈이군."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길래 보고 있었더니 나름 도발을 하려고 머리를 굴린 모양이었다.

아군의 피해를 줄이고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라도 어차피 허튼 남작은 죽이려고 했다. 상대가 먼저 나서서 죽어 주겠다는데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말 많이 안 해도 싸우고 싶다고 하면 언제나 싸워 주는 게 나다. 와라."

지셀이 검을 들고 까닥거리자 허튼 남작의 기세가 변하기 시작했다.

거만하게 훈수를 두는 꼰대 귀족의 모습에서 마치 한 자루의 잘 벼린 검처럼 날카로워진 것이다.

"오?"

지셀이 살짝 감탄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기세를 보니 확실히 말뿐인 놈은 아니었다.

'허튼 남작.... 유명한 인물이긴 하지. 이놈 때문에 길리언이 고생한 모양이군.'

그를 직접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현생은 물론, 전생까지 포함해도 마찬가지다. 전생에 허튼 남작은 해럴드의 세력을 약화하려는 아멜리아의 계략에 걸려 반역자로 몰리다 자결했으니까.

하지만 그 이름만은 북부에서 꽤 유명했기에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지셀은 웃으면서 자세를 잡았다. 그와 동시에 양측의 군대가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장수들끼리 대결할 때는 거리를 벌리는 게 관습이었다.

자칫 전투에 휘말릴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싸우다 어느 한쪽이 위험해질 때 아군이 도와주지 못하게 하려는 이유도 있었다.

허튼 남작은 자세를 잡고 날카로운 눈으로 지셀을 바라보며 말했다.

"펜리스 백작... 그거 아시오?"

"뭘?"

"나는 젊었을 적부터 지금까지 기사 대전에 다섯 번이나 승리했소. 그리고 아직도 이 자리에 서 있지."

기사 대전의 승패는 곧 그 전쟁의 승패로 이어진다. 즉, 허튼 남작은 자신만의 힘으로 다섯 번이나 되는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는 뜻이었다.

기사 대전이 성립되었다면 전쟁이라고 해도 작은 분쟁 정도였지만, 어쨌든 홀로 영지의 운명을 등에 짊어지고 싸우는 건 큰 부담감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직 젊은 백작은 모를 거요. 이 자리가 얼마나 무서운 자리인지."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있었다. 실력을 떠나서, 펜리스 백작 같은 애송이는 절대 이런 무거운 부담감을 느끼며 싸워 본 적이 없을 테니까.

결국 펜리스 백작은 싸울수록 점점 부담감에 짓눌려 침착함을 잃게 될 것이다.

'아직 경험이 부족한 애송이가 감당하기에는 쉽지 않은 일이지.'

그 생각에 이른 허튼 남작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지셀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난 백 번 넘게 해 봤는데."

"뭐?"

말도 안 되는 대답에 허튼 남작이 황당해하는 사이, 지셀의 눈이 붉게 빛났다.

"시작하지."

파앙!

지셀이 번개 같은 속도로 나아가며 허튼 남작에게 검을 휘둘렀다.

285화 혼자 온 게 아니거든. (3)

허튼 남작은 황급히 검을 들어 지셀의 내려치기를 막아 냈다.

카아아앙!

"크윽!"

순간 어마어마한 압력이 느껴졌다. 허튼 남작은 검날을 미세하게 기울여 덮쳐 오는 힘을 일부 흘려 냈다.

파아앙!

힘을 전부 흘려 내지 못한 탓에 허튼 남작의 발이 살짝 밀리며 땅이 갈라졌다. 믿을 수 없는 힘에 그가 눈을 크게 떴다.

'이 무슨...?'

단순한 공격을 막았을 뿐이다. 그런데 하마터면 검이 다시 부서질 뻔했다. 아니, 순간적으로 힘을 흘리지 않았다면 검뿐만이 아니라 뼈가 부러졌을지도 모른다.

화살을 막았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힘이었다. 뭔가 잘못된 거 같다는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했다.

드드드득!

지셀은 그대로 계속 검을 내리눌렀다. 허튼 남작이 쥔 검의 날이 점점 아래로 기울어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천천히 머리가 갈릴 판이었다.

지셀은 붉은 눈을 빛내며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흡사 전투에 미친 악마와도 같았다.

허튼 남작은 순간 오싹함에 몸을 떨었다.

'이, 이건 상급 기사의 힘이 아니다!'

정보부에서는, 지셀의 힘이 상급 기사 초기 수준일 거라 예상했다. 그전까지 지셀이 무력으로 명성을 떨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상급 기사 수준으로 판단한 것도, 카발디 전쟁에서 활약했다는 소문 때문에 높이 쳐 준 것이었다.

허튼 남작의 생각도 정보부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신이 다치긴 했지만 경지도 더 높을 테고, 거기에 연륜까지 있으니 침착하게 전투를 이끌어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터무니 없는 힘이라니!

'말도 안 돼!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하다!'

그 순간, 지셀이 힘을 빼고 검을 들어 올렸다. 그에 맞서 버티던 허튼 남작의 검이 마치 지셀의 검을 쫓듯이 휙 올라가 버렸다.

휘익!

카앙!

억지로 팔을 비틀어 지셀이 다시 내리치는 검을 쳐 낸 허튼 남작이 잽싸게 뒤로 물러났다.

'힘 대결은 불리하다. 저놈, 힘이 보통이 아니야.'

젊어서 그런지 기세와 힘이 넘쳤다. 이제 막 전장에 도착했으니 마나도 넘칠 것이다.

허튼 남작은 기술로 승부를 보려고 했지만, 지셀은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그에게 따라붙어 검을 휘둘렀다.

카앙! 카앙! 카앙!

검과 검이 부딪치며 몇 번이나 허공에 불꽃이 튀었다.

허튼 남작은 쉽사리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밀리고 있었다. 지셀의 공격을 제대로 피하기도 힘들어 막는 게 전부였다.

그래도 그의 검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허튼 남작은 지셀이 기묘한 궤적으로 휘두르는 검을 모두 막아 내며 단 한 번의 기회를 침착하게 노리고 있었다.

지셀은 그 모습을 보고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법이군. 부상만 아니었으면 정말 재미있는 싸움이 될 뻔했어."

진심이었다. 루타니아 왕국에서 이 정도 실력자는 공작가 소속이 아니라면 쉽게 만나기가 힘들었으니까.

허튼 남작은 길리언과의 싸움에서 입은 부상과 화살에 맞은 상처 때문에 제 실력을 전부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2단계 코어로는 쉽게 잡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 정도는 되니까 길리언과 싸울 수 있었던 거군.'

허튼 남작은 신체적 조건이나 마나는 조금 부족할지언정, 검술 하나만큼은 북부 제일을 논할 만한 실력이었다.

"하지만 전장에서 그런 사정을 봐줄 수는 없지."

재미있는 상대라고 시간을 끌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제 실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상대와 검을 논해 봤자 무엇하겠는가.

지셀은 숨을 깊이 내쉬며 아쉬움을 떨쳐 내고 검을 고쳐 쥐었다.

허튼 남작은 부상을 입고 수세에 몰렸음에도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지셀 쪽이 훨씬 더 강한 힘과 빠른 속도로 압박하는데도 잘 버티고 있었다.

이런 상대와는 기술로 겨루면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다.

지금보다 더 압도적인 힘과 속도로 눌러 버리면 된다.

지잉―!

3단계의 코어가 활성화되며 지셀의 눈이 더욱더 붉어졌다.

"다시 시작해 보자."

허튼 남작은 3단계의 공격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다.

콰르릉!

지셀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번개가 치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본래도 엄청나던 힘이 더 강해지자 허튼 남작은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 어떻게 이런 실력을!'

콰앙!

너무나 빠르고 강하다. 공격을 한 번 막을 때마다 자세가 흔들리고 속이 뒤집혔다.

콰앙! 콰앙!

콰지직.

몇 번 막지도 않았는데 허튼 남작의 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정신을 집중해 마나를 충분히 둘렀음에도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콰콰콰콰콰쾅!

시간이 갈수록 지셀의 공격이 더 빨라졌다. 허튼 남작은 이를 악물었다. 겨우겨우 막고는 있지만, 막을 때마다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느낌이었다.

지셀이 상급 기사 수준이라는 건 확실히 착각이었다. 정보부에서 모은 정보는 물론이고, 과장되었다고 여겼던 소문조차 이자의 실력을 반도 표현하지 못했다.

최상의 몸 상태가 아니면 이길 수 없는 상대다. 아니, 최상의 몸 상태라 해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자신보다 윗줄의 실력자가 분명했다.

'이, 일단 후퇴해야 한다.'

목숨을 부지하려면 평생을 쌓아 온 명예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허튼 남작은 어떻게든 몸을 빼려 했다. 하지만 지셀의 검은 집요하게 따라붙으며 허튼 남작을 놓치지 않았다.

콰앙! 콰앙! 콰앙!

검이 부딪칠 때마다 땅이 뒤집히고 흙이 튀었다. 두 사람은 다른 이들이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데스몬드의 기사들과 병사들은 몸을 움찔거렸다. 그들도 본능적으로 허튼 남작을 구하러 가야 한다는 걸 느낀 것이다.

"크읏!"

허튼 남작의 입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공격을 막기만 했을 뿐인데도 몸속에 충격이 쌓여 망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장기인 침착한 검술도 이제 소용이 없었다. 갑자기 폭발하듯 증가한 상대의 힘과 속도를 못 따라가니 공격을 막기에만 급급했다.

그나마 허튼 남작의 검술이 뛰어났기에 이 정도로 오래 버틴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을 보이고 있었다.

콰아앙!

강렬한 충격음을 내며 허튼 남작의 검이 깨어져 나갔다. 그의 마나로는 도무지 저 강대한 힘을 버틸 수가 없었다.

"이, 이런...."

쐐애애액!

무기를 잃고 당황한 허튼 남작이 바로 몸을 피하려 했지만 지셀의 검이 더 빨랐다.

콰직!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고, 곧이어 허튼 남작의 오른팔이 땅에 떨어졌다.

"크아아악!"

동시에 데스몬드의 기사들이 튀어나왔다.

"남작님을 구해라!"

그들의 얼굴엔 무척이나 다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미 결투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결투 중간에 제삼자가 끼어들면 허튼 남작의 명예가 실추되겠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볼 문제다. 일단은 목숨을 구하는 게 우선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가까이 오기도 전에, 지셀의 검은 그대로 수평으로 그어지며 허튼 남작의 목을 갈랐다.

스각.

툭.

북부의 강자 중 한 명이었던 허튼 남작의 목이 허무하게 땅에 떨어져 굴렀다.

달려 나오던 데스몬드의 기사들은 그 모습을 보고 순간 몸이 굳어 버렸다.

"나, 남작님이...."

"허튼 남작님이 죽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데스몬드군은 모두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하지만 지셀은 그들이 감상에 빠지게 두지 않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검을 뻗으며 말했다.

"쓸어버려라."

지이잉―!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펜리스 기사들의 갑옷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300여 명의 기사들과 1천의 기마병들이 말을 타고 달려 나갔다.

두두두두두!

갑작스럽게 달려오는 펜리스군을 보고 데스몬드의 기사들이 당황하며 외쳤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그들도 검을 뽑으며 다가오는 펜리스군을 상대하려 했다. 하지만 펜리스군보다 한발 먼저, 지셀이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스각!

지셀은 아직 코어 활성화 상태를 3단계로 유지하는 중이었다. 넘치는 마나를 담아 검을 휘두르니 단번에 기사 하나의 목이 떨어졌다.

지셀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주변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콰앙! 콰앙!

"으아아악!"

지셀이 난입하자 데스몬드 병사들의 진형이 엉망으로 변했다.

다들 가까이 접근한 지셀을 노리니 대열이 제대로 갖춰질 리가 없었다. 곳곳에 있던 기사들과 장교들이 소리를 지르며 병사들을 진정시키려 했다.

"이 멍청이들아! 대열을 갖춰라!"

"앞을 막아라! 앞을 막으라고!"

"정신들 차려!"

두두두두두!

우왕좌왕하는 데스몬드군 사이로 펜리스군이 들이닥쳤다.

콰아아앙!

"으아아악!"

데스몬드군은 허튼 남작이 죽어 이미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였다.

그 와중에 지셀이 설치며 대열까지 무너뜨렸으니 갑자기 난입한 기사 300명과 기마병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콰아앙! 콰앙!

몇몇 기사들과 병사들이 분전했지만 한번 꺾인 기세는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 상황을 수습할 지휘관도 없었다.

데스몬드의 추격대는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무너졌다.

"후퇴해! 일단 후퇴해!"

"본대로 합류해야 한다!"

"각자 알아서 도망쳐라!"

판단이 빠른 기사들이 외치자 데스몬드군은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 상태로 가면 전멸을 면치 못한다. 그럴 바에는 한 명이라도 더 살아서 본대에 합류하는 게 나았다.

그나마 추격대의 절반 이상이 기마병이었던 덕분에, 살아남은 자들은 빠른 속도로 전장에서 벗어났다.

펜리스의 기사들과 기마병들이 그들을 따라가려 하자 지셀이 손을 저으며 외쳤다.

"됐다! 그만! 더 따라가지 마라!"

펜리스군은 데스몬드군에 비해 소수다. 괜히 흩어졌다가 데스몬드군의 주력을 만나면 위험해진다.

"많이도 도망쳤네."

지셀은 사방으로 흩어지는 데스몬드군을 보며 웃었다.

반 정도는 살아서 도망친 거 같다. 기대했던 것보다 많은 수가 살아서 아쉽긴 했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차피 다시 만날 예정이다. 그때 완전히 박살을 내 버리면 된다.

"와아아아! 이겼다!"

"우리 영주님이 싸움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한다니까!"

"역시 영주님이다!"

기사들과 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환호를 내질렀다. 상대 병사들과 그리 오래 맞서 싸우진 않았지만, 그것도 다 영주가 허튼 남작을 깨부순 덕분이었다.

길리언을 구하고 초전에 쉽게 적을 몰아냈다. 당연히 사기가 오를 수밖에 없었다.

지셀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다시 길리언을 찾아 움직였다. 그가 지나갈 때마다 병력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길을 만들어 주었다.

의무병들의 부축을 받으며 서 있던 길리언은 다가오는 지셀을 감격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역시 대단한 사람이었다. 나타나자마자 단번에 허튼 남작을 죽이고 분위기를 바꿔 버리다니. 지셀에게는 실력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영주님...."

"길리언!"

지셀은 더 말이 필요 없다는 듯, 팔을 벌리며 다가가 길리언을 꽉 껴안아 주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그렇게 아무런 말이 없었다. 모두가 숙연한 분위기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한 발짝 뒤로 물러난 지셀이 엄숙하게 말했다.

"영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운 이들과 희생한 이들에게 예를 갖춰라."

척! 척! 척!

모두가 무기를 들어 올리고 군례를 취했다.

길리안을 비롯한 스톤헤이븐의 병력은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영지를 위해 싸웠다.

그들은 드높은 명예를 얻고 모든 이들의 찬사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잠깐의 묵념 뒤, 엄숙한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지셀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길리언에게 말했다.

"왜 이렇게 얻어터진 거야? 나이 들어서 너무 약해진 거 아냐?"

너스레를 떠는 지셀의 말에 길리언이 웃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저 눈빛에 감도는 따스함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갑자기 목이 메는 듯한 기분이 들어 길리언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일단 길리언과 부상자들은 빨리 성으로 돌아가라고.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 말을 들은 길리언은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영주님... 도대체 여긴 어떻게 오신 겁니까?"

"계속 밀리면 이쯤 왔을 거라 생각했지. 당연한 거 아니야?"

전쟁 하나에는 도가 튼 지셀이다. 추격대가 길리언을 쫓고 있다면 가장 포위하기 좋은 이곳에서 승부를 보고 싶어 할 것을 잘 알았다.

길리언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라면 확실히 그 정도는 알 만한 능력이 있었다.

중요한 건, 여길 어떻게 알고 왔냐는 게 아니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영주님이 이곳에 나타나셨다는 건.... 벌써 준비가 모두 끝났다는 뜻입니까?"

지셀은 한 점 부끄러움도 없는 당당한 표정으로 답했다.

"아니."

"...네?"

"아, 그 많은 걸 벌써 어떻게 끝내. 아무리 내가 대단해도 그건 말이 안 되지."

"그, 그러면 도대체 여기엔 왜 오신 겁니까?"

그러자 지셀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답했다.

"대충은 끝냈어. 아니, 적당히? 음, 최소한?"

뭔가 변명하는 듯한 지셀의 말에 길리언은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자신들이 왜 희생하려고 했는가. 더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시간을 벌려고 했던 게 아닌가.

"대...충...이요?"

"에이,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정말로 대충 했을까. 길리언 덕분에 최소한의 준비는 끝냈어. 그런데 여기서 더 준비했다가는 다들 오늘 죽었을걸? 그래서 그냥 최소한의 준비가 끝나자마자 왔어. 타이밍 딱 좋았지? 크, 이렇게 대단하다, 내가."

길리언의 귀에 지셀의 잘난 척은 들리지도 않았다.

"어, 어째서 그러셨습니까? 안 됩니다. 우리 병력만으로는 데스몬드군을 이길 수 없습니다. 준비를, 준비를 더 하셨어야 합니다."

"준비하다가 너희 다 죽어도 내버려 두라고?"

"설사 저희가 전부 죽어도...."

"그게 무슨 소용인데?"

"...."

"완벽하게 준비하려다가 길리언하고 저 친구들이 다 죽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아예 준비하지 않고 곧바로 싸울 수는 없었다. 그건 정말 다 같이 죽자는 뜻이니까.

하지만 길리언과 다른 사람들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셀은 최소한의 준비로만 타협을 본 것이다.

"영주님...."

길리언과 쓰러져 있던 사람들은 감격 어린 표정을 지었다. 영주가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들을 희생시키고 더 확실히 전쟁에 대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그 이점을 포기하고 달려왔다. 영주 본인이 더 위험해질 걸 알면서도 말이다.

물론 감동은 감동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퍼뜩 정신을 차린 길리언은 미처 전달하지 못한 말을 다급하게 건넸다.

"이, 일단 알겠습니다. 얘기는 나중에 나누시고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왜?"

"데스몬드의 본대가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데스몬드 백작은 만만한 자가 아닙니다. 벌써 이곳의 상황을 파악하고 포위를...."

지셀은 길리언의 말을 끊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미 늦은 거 같은데."

쿵! 쿵! 쿵!

저 멀리서 데스몬드의 대군이 다가오고 있었다. 수많은 병력이 박자에 맞춰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땅이 울렸다.

쿵! 쿵! 쿵!

정면뿐만이 아니다. 양옆에서도 군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도망간 병사들이 이미 합류했는지, 데스몬드군은 지셀 일행을 포위하듯이 진형을 꾸린 상태였다.

지셀은 그 모습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얼굴을 보는구나. 해럴드 데스몬드."

286화 혼자 온 게 아니거든. (4)

해럴드는 상당히 초췌한 모습이었다. 그간 길리언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은 그 어느 때보다 형형하게 불타고 있었다.

"지셀.... 지셀.... 이 씹어 먹을 놈의 애송이가 드디어 내 눈앞에 나타났구나."

해럴드의 마음도 지셀과 다를 바 없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나 서로를 만나고 싶어 했다.

서로의 목을 날려 버리기 위해서 말이다.

다그닥. 다그닥.

하얀 깃발을 단 펜리스의 기사 하나가 데스몬드 진영으로 다가왔다.

그는 무언가를 휙 던지고 잽싸게 도망갔다.

굴러떨어진 그 '무언가'를 본 데스몬드군은 기겁하며 바로 해럴드에게 가지고 갔다.

해럴드는 눈꼬리를 일그러트리며, 병사가 가지고 온 그것을 바라보았다.

"허튼 남작...."

펜리스의 기사가 던지고 간 것은 바로 지셀에게 목이 베인 허튼 남작의 머리였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건지, 그의 표정에는 순수한 의문만이 가득 차 있었다.

허튼 남작이 죽었다는 사실은 도망쳐 온 추격대의 기사와 병사들을 통해 이미 보고를 받았다.

마음의 준비는 했지만, 이렇게 직접 그의 죽음을 마주하게 되니 다시금 분노가 끓어올랐다.

"으으... 지셀! 지셀 네 이놈!"

언제나 자신의 일을 사사건건 방해하던 놈이, 이번에도 갑자기 나타나 아군의 최고 전력 중 하나를 죽였다.

해럴드의 휘하에 뛰어난 기사들이 즐비하긴 하지만 허튼 남작은 그중에서도 특별한 자였다. 그가 죽은 이상 앞으로 친왕파의 싸움은 더 힘들어질 것이다.

실수했다. 부상을 입은 그를 추격대에 편성해서는 안 됐다. 아군의 안전한 호위를 받으며 싸우게 해야 했다.

머리를 쥐어 잡던 해럴드는 핏발이 서 붉게 물든 눈으로 말했다.

"저놈이 절대 빠져나갈 수 없게 제대로 진형을 갖춰라."

침착해야 한다. 어쨌든 내내 죽이고 싶어 했던 놈이 지금 눈앞에 나타났다.

공성을 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다. 이번 전투에서만 이기면 된다.

척! 척! 척!

데스몬드의 대군이 펜리스군을 에워싸며 천천히 거리를 좁혀오자, 길리언이 다급하게 말했다.

"영주님! 일단 피하십시오!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이제 힘들 거 같은데? 도망가다가 꼬리를 잡히면 더 피해가 클걸?"

"제가! 제가 다시 막겠습니다! 어서 돌아가셔서 수성을 준비하십시오! 어이, 너희들! 100명만 나를 따라라!"

길리언이 기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하지만 기사들은 전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뭣들 하는 거야! 어서 영주님을 모시고...."

"됐어, 길리언. 지금 나보고 남들이 희생하는 동안 도망가라는 거야? 우리가 질 거 같아서 그래? 이 내가 왔는데?"

"영주님!"

길리언은 답답함에 크게 소리쳤다. 분명 펜리스군은 강하다. 지셀을 필두로 한 300명의 기사와 갈바니움으로 무장한 기마병들은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발휘할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지속력이 약하다는 단점도 명확했다. 기사들이 갑옷의 힘을 끌어내면 끌어낼수록 마나가 빠르게 소모될 테니까.

"우리가 얼마나 강한지는 알고 있습니다. 제가 저 대군에 맞서 싸워 봤으니까요. 하지만 절반 정도만 죽이고 나면 우리는 다 지쳐 나가떨어질 겁니다. 대군의 가장 큰 이점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나는 더 오래 싸울 수 있어. 저놈들이 모두 다 죽을 때까지 말이지."

"영주님 혼자 싸울 수 있으면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결국 우리가 이겨도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볼 수밖에 없을 겁니다!"

"흠, 일리가 있는 말이야."

"그러니까 어서 몸을 피하시고 수성을 준비하십시오! 제가 다시 막겠습니다!"

길리언은 왜 항상 벨린다가 지셀에게 잔소리를 해 대는지 절실하게 깨달았다. 영주가 겁이 없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너무나 무모했다.

하지만 지셀은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얼굴로 답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네?"

"길리언과 다른 이들을 희생시켜서 내가 살아남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말이야."

"영주님은 살아야 합니다! 영주님은 혼자 몸이 아니란 말입니다!"

"거, 남들이 오해할 만한 얘기는 하지 말고. 나 아직 싱글이라고."

"영주님! 그런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영주님은 더 많은 이들을 책임지고 거느려야 할...."

지셀은 길리언의 말을 끊어 버렸다.

"난 길리언을 잃고 싶지 않아. 길리언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 말에 길리언은 눈시울을 붉히며 이를 꽉 깨물었다.

참으로 고마운 말이다. 충성을 바친 주군에게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러면 안 된다. 자신들이 왜 희생하려고 했는가. 더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시간을 벌려고 했던 게 아닌가.

무릇 많은 사람을 이끄는 자는 냉정해져야 한다. 필요할 때는 취하고 버려야 할 때는 버려야 한다. 그것이 사람들을 이끄는 군주의 덕목이었다.

하지만 지셀은 그딴 건 관심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내가 항상 최선을 다하는 건, 내 사람들을 잃지 않기 위해서야."

"영주님...."

"누군가를 잃으면서 얻어야 할 건 없고, 누군가를 잃으면서 얻고 싶은 것도 없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 건 지셀의 가장 큰 트라우마다. 전생에서 이미 충분히 겪을 대로 겪어봤고 아플 만큼 아파 봤다.

그렇기에 다시는 그런 일을 겪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공작가와 싸우려는 게 아닌가.

"내가 생각하는 책임감은 그런 게 아니야."

누군가를 희생시키면서 더 많은 사람을 지키고 살리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명력을 태워 가면서 더 많은 사람을 지키고 살리는 것.

그것이 바로 지셀이 생각하는 책임감이었다.

"그리고 난 전멸당할 생각도 없어. 언제나처럼 최소한의 피해로 승리한다."

말을 마친 지셀은 바로 흑왕에 올라타며 손을 들어 올렸다. 더 이상의 논쟁은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전군, 전투 준비."

철컥! 철컥! 철컥!

펜리스의 기사들과 모든 기마병이 투구를 내려 썼다. 그들은 데스몬드의 대군을 앞에 두고도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영주와 함께한다는 건, 이제 그들에게 승리를 보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길리언도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럼 저도 다시 싸우겠습니다. 내가 쓸 무기를 가져와라! 도끼든 창이든 뭐든 상관없다!"

그러자 옆에 있던 고든이 길리언의 가슴을 쿡 찔렀다.

"큭!"

"에이, 이런 몸으로 뭘 싸우겠다고 그럽니까? 나랑 싸워도 지겠네. 아니, 수다쟁이 총관하고 싸워도 지겠는데?"

"으하하하하!"

다른 기사들도 배를 잡고 웃었다. 저 무서운 길리언이 약해진 모습을 보니 다들 재미있어 죽겠다는 분위기였다.

"이놈들! 쿨럭!"

길리언은 열을 내다가 피를 한 움큼 토하고 말았다. 그간 너무 무리하며 싸우다 보니 이제는 정말 몸이 한계에 이른 것이다.

고든이 그 모습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이쿠! 우리 교관님 이러다가 죽겠네. 어이 잘 모시고 있어라!"

결국 길리언은 의무병들에게 붙잡혀 움직이지도 못하게 됐다. 뿌리치고 싶어도 뿌리칠 힘이 남지 않았다.

그저 망연자실한 눈으로 흑왕에 올라탄 지셀을 바라볼 뿐이었다.

지셀은 그런 길리언을 보며 빙긋 웃더니 다시 명령을 내렸다.

"다들 진형을 갖추고 대기하도록."

뒤쪽은 비어 있지만, 그쪽으로 도망친다면 데스몬드의 전군이 뒤를 쫓을 것이다. 그러면 이길 만한 전투도 이길 수 없다.

애초에 지셀은 도망갈 생각도 없었다. 여기서 아예 끝장을 볼 계획이었으니까.

그는 침착하게 앞으로 다가올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쿵! 쿵! 쿵!

다가오던 데스몬드군이 적당한 거리에서 멈춰 섰다.

보통 이런 경우는 하나다. 먼저 원거리 공격으로 피해를 주겠다는 뜻.

과연 데스몬드의 진영 앞에 강력한 마력이 몰리기 시작했다.

파직!

공간 자체가 불안정하게 요동치며 일그러지더니, 곧 빛이 번뜩이며 작은 번개의 가닥들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데스몬드군에 있는 6서클 마법사, 윌로우가 마법을 시전한 것이다.

그는 영주인 지셀이 선두에 선 걸 보고 기습적으로 그를 노려 마법을 쏘아 보기로 했다. 광역 마법은 검은 갑옷을 입은 놈들이 약화할 수 있으니, 단일 표적을 노리는 빠르고 강력한 마법을 준비했다.

"크큭, 멍청한 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모양이구나."

윌로우는 자신감으로 가득 찬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마법은 이제 적을 꿰뚫을 준비가 된 상태였다.

"라이트닝 로드."

그가 시동어를 읊자 빛이 폭발했다. 수없이 많은 번개가 서로 교차하며 지셀을 향해 순식간에 뿜어져 나갔다.

그때, 펜리스군의 후방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리플렉트 실드."

그와 동시에 지셀 바로 앞에 거대한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콰아앙!

번개는 그대로 반사되어 데스몬드군의 진영으로 향했다.

마법을 시전했던 윌로우는 기겁하며 외쳤다.

"이, 이게 무슨!"

리플렉트 실드는 6서클 마법이긴 하지만 엄청난 마력을 소모하는 마법이다.

마법을 반사하기 위해서는 시전된 마법보다 훨씬 더 많은 마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마력이 넘치는 자가 아니면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펜리스군 진영에서 그 마법이 시전된 것이다.

윌로우는 남은 한 팔을 다급하게 휘저어 마법을 해제했다. 마력이 뭉텅이로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나, 나보다 윗줄의 마법사가 왔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자신의 마법을 이리 가볍게 튕겨 내었다는 건, 최소 6서클 마스터에 이른 자란 뜻이다.

'펜리스에 그런 마법사가 있다고? 이 북부에서 6서클에 이른 마법사는 전부 신상이 파악되어 있는데?'

자신이 알기로는 펜리스에 6서클 마법사는 없었다. 적염의 마탑주의 후계자인 알포이가 펜리스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는 널리 퍼져 있지만, 그는 겨우 4서클에 불과하다.

'우, 우리가 모르는 고위 마법사가 나타났다.'

윌로우는 바로 해럴드에게 보고를 올렸다. 대규모 마법 공격을 준비하던 해럴드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만약 윌로우의 말이 사실이라면 마법 전력은 상대의 공격을 견제하며 빠져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바네사가 6서클에 오른 걸 몰랐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마법사 한 명이 마력을 빨린 채 거품을 물고 기절했다는 것도 말이다.

그녀는 적들을 혼란에 빠트리려고 일부러 강력한 마법을 선보였다. 덕분에 데스몬드군의 마법사들은 행동에 제약이 생겨 버렸다.

상대의 마법 전력을 정확히 모르는 상황에서 견제를 하려면 마력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해럴드가 이를 갈며 말했다.

"마법 공격은 잠시 멈춘다. 천천히 다가가며 더 촘촘하게 포위해라. 저놈들이 압박감에 먼저 지치도록 해라."

데스몬드군이 조금씩 더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조심스럽게 맹수를 몰아가는 사냥꾼 무리와도 같았다.

이것은 대군이 취할 수 있는 이점 중의 하나였다. 수적으로 열세에 몰린 적은 당장 어느 쪽을 상대해야 할지 모르게 된다.

그 긴장감이 오래 지속되면 싸우지 않아도 몸에 엄청난 피로가 쌓이게 된다. 실제로 사냥꾼들이 맹수를 잡을 때도 이런 식으로 천천히 몰아가는 건 그런 효과를 노리기 위해서였다.

해럴드는 뛰어난 지휘관이다. 그는 대군을 몰고 왔음에도 아주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지셀을 죽일 생각이었다.

"궁병들도 거리를 좁혀라. 마법사들도 다시 공격을 준비하도록."

창병들의 뒤에 있던 궁병들도 펜리스군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본진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들도 천천히 병사들을 따라가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이들은 명령만 떨어지면 쉼 없이 펜리스군을 화살과 마법으로 두들겨 지치게 할 것이다.

두근. 두근. 두근.

천천히 다가오는 데스몬드군이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펜리스군이나 서로를 노려보며 긴장감을 높였다.

데스몬드군은 그간 길리언의 활약을 몸으로 받아 내며 펜리스군이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는 걸 알게 되었기에 수가 많아도 긴장을 놓지 못했다.

펜리스군도 영주를 믿고 있기는 하지만 이만한 대군을 상대한 적이 없었기에 압박감에 점점 짓눌려 갔다.

그때 갑자기 지셀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 길리언에게 하나 말을 안 한 게 있네."

두두두두두.

멀리서 군마들이 힘차게 땅을 밟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데스몬드군은 갑작스러운 소리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두두두두두!

소리가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데스몬드군은 그제야 자신들의 우측에서 달려오는 군대를 발견했다.

부우우우우!

나팔 소리가 크게 울리며 모두의 시선을 붙잡는다. 그것을 본 해럴드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왕국군?"

선두에 휘날리는 왕실의 깃발. 바로 클리프턴 자작이 이끄는 3군단이었다.

그리고 3군단의 뒤로 휘황찬란한 귀족들의 깃발을 든 군대가 쫓아오고 있었다.

바로 이더리안 자작이 이끄는 투자 피해자들의... 아니, 귀족 연합의 군대였다.

해럴드가 미처 무어라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어디선가 커다란 함성이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아아!"

그는 소리가 난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좌측에서도 군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저건... 페르디움?"

그 군대 위에는 하얀 늑대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페르디움군이 왕국군과 함께 시간을 맞춰 나타난 것이다.

갑자기 나타난 양쪽의 군대를 보며 지셀이 씨익 웃었다.

"내가 혼자 온 게 아니거든."

후방에 있던 길리언은 눈을 크게 뜨고 새로이 나타난 군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잊고 있었다. 지셀이 예전처럼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그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지셀이 아무것도 없고 무시당하던 시절부터 함께한 길리언이다. 그는 갑자기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눈시울을 붉혔다.

데스몬드군이 당황하는 사이, 양측의 군대가 데스몬드를 둘러싸듯 자리를 잡았다.

그 모습을 본 지셀이 창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가자."

다그닥, 다그닥.

흑왕이 오만하게 고개를 들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저 눈앞에 데스몬드의 대군이 장엄하게 열을 맞춰 서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지셀이 씨익 웃었다.

"오늘 이후로...."

아니, 어쩌면 오늘이 가기 전에.

"우리가 북부 최강이라 불릴 것이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히이이이잉!

긴 울음소리를 내뱉으며, 흑왕이 적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286화 혼자 온 게 아니거든. (4)

해럴드는 상당히 초췌한 모습이었다. 그간 길리언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은 그 어느 때보다 형형하게 불타고 있었다.

"지셀.... 지셀.... 이 씹어 먹을 놈의 애송이가 드디어 내 눈앞에 나타났구나."

해럴드의 마음도 지셀과 다를 바 없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나 서로를 만나고 싶어 했다.

서로의 목을 날려 버리기 위해서 말이다.

다그닥. 다그닥.

하얀 깃발을 단 펜리스의 기사 하나가 데스몬드 진영으로 다가왔다.

그는 무언가를 휙 던지고 잽싸게 도망갔다.

굴러떨어진 그 '무언가'를 본 데스몬드군은 기겁하며 바로 해럴드에게 가지고 갔다.

해럴드는 눈꼬리를 일그러트리며, 병사가 가지고 온 그것을 바라보았다.

"허튼 남작...."

펜리스의 기사가 던지고 간 것은 바로 지셀에게 목이 베인 허튼 남작의 머리였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건지, 그의 표정에는 순수한 의문만이 가득 차 있었다.

허튼 남작이 죽었다는 사실은 도망쳐 온 추격대의 기사와 병사들을 통해 이미 보고를 받았다.

마음의 준비는 했지만, 이렇게 직접 그의 죽음을 마주하게 되니 다시금 분노가 끓어올랐다.

"으으... 지셀! 지셀 네 이놈!"

언제나 자신의 일을 사사건건 방해하던 놈이, 이번에도 갑자기 나타나 아군의 최고 전력 중 하나를 죽였다.

해럴드의 휘하에 뛰어난 기사들이 즐비하긴 하지만 허튼 남작은 그중에서도 특별한 자였다. 그가 죽은 이상 앞으로 친왕파의 싸움은 더 힘들어질 것이다.

실수했다. 부상을 입은 그를 추격대에 편성해서는 안 됐다. 아군의 안전한 호위를 받으며 싸우게 해야 했다.

머리를 쥐어 잡던 해럴드는 핏발이 서 붉게 물든 눈으로 말했다.

"저놈이 절대 빠져나갈 수 없게 제대로 진형을 갖춰라."

침착해야 한다. 어쨌든 내내 죽이고 싶어 했던 놈이 지금 눈앞에 나타났다.

공성을 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다. 이번 전투에서만 이기면 된다.

척! 척! 척!

데스몬드의 대군이 펜리스군을 에워싸며 천천히 거리를 좁혀오자, 길리언이 다급하게 말했다.

"영주님! 일단 피하십시오!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이제 힘들 거 같은데? 도망가다가 꼬리를 잡히면 더 피해가 클걸?"

"제가! 제가 다시 막겠습니다! 어서 돌아가셔서 수성을 준비하십시오! 어이, 너희들! 100명만 나를 따라라!"

길리언이 기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하지만 기사들은 전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뭣들 하는 거야! 어서 영주님을 모시고...."

"됐어, 길리언. 지금 나보고 남들이 희생하는 동안 도망가라는 거야? 우리가 질 거 같아서 그래? 이 내가 왔는데?"

"영주님!"

길리언은 답답함에 크게 소리쳤다. 분명 펜리스군은 강하다. 지셀을 필두로 한 300명의 기사와 갈바니움으로 무장한 기마병들은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발휘할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지속력이 약하다는 단점도 명확했다. 기사들이 갑옷의 힘을 끌어내면 끌어낼수록 마나가 빠르게 소모될 테니까.

"우리가 얼마나 강한지는 알고 있습니다. 제가 저 대군에 맞서 싸워 봤으니까요. 하지만 절반 정도만 죽이고 나면 우리는 다 지쳐 나가떨어질 겁니다. 대군의 가장 큰 이점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나는 더 오래 싸울 수 있어. 저놈들이 모두 다 죽을 때까지 말이지."

"영주님 혼자 싸울 수 있으면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결국 우리가 이겨도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볼 수밖에 없을 겁니다!"

"흠, 일리가 있는 말이야."

"그러니까 어서 몸을 피하시고 수성을 준비하십시오! 제가 다시 막겠습니다!"

길리언은 왜 항상 벨린다가 지셀에게 잔소리를 해 대는지 절실하게 깨달았다. 영주가 겁이 없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너무나 무모했다.

하지만 지셀은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얼굴로 답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네?"

"길리언과 다른 이들을 희생시켜서 내가 살아남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말이야."

"영주님은 살아야 합니다! 영주님은 혼자 몸이 아니란 말입니다!"

"거, 남들이 오해할 만한 얘기는 하지 말고. 나 아직 싱글이라고."

"영주님! 그런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영주님은 더 많은 이들을 책임지고 거느려야 할...."

지셀은 길리언의 말을 끊어 버렸다.

"난 길리언을 잃고 싶지 않아. 길리언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 말에 길리언은 눈시울을 붉히며 이를 꽉 깨물었다.

참으로 고마운 말이다. 충성을 바친 주군에게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러면 안 된다. 자신들이 왜 희생하려고 했는가. 더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시간을 벌려고 했던 게 아닌가.

무릇 많은 사람을 이끄는 자는 냉정해져야 한다. 필요할 때는 취하고 버려야 할 때는 버려야 한다. 그것이 사람들을 이끄는 군주의 덕목이었다.

하지만 지셀은 그딴 건 관심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내가 항상 최선을 다하는 건, 내 사람들을 잃지 않기 위해서야."

"영주님...."

"누군가를 잃으면서 얻어야 할 건 없고, 누군가를 잃으면서 얻고 싶은 것도 없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 건 지셀의 가장 큰 트라우마다. 전생에서 이미 충분히 겪을 대로 겪어봤고 아플 만큼 아파 봤다.

그렇기에 다시는 그런 일을 겪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공작가와 싸우려는 게 아닌가.

"내가 생각하는 책임감은 그런 게 아니야."

누군가를 희생시키면서 더 많은 사람을 지키고 살리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명력을 태워 가면서 더 많은 사람을 지키고 살리는 것.

그것이 바로 지셀이 생각하는 책임감이었다.

"그리고 난 전멸당할 생각도 없어. 언제나처럼 최소한의 피해로 승리한다."

말을 마친 지셀은 바로 흑왕에 올라타며 손을 들어 올렸다. 더 이상의 논쟁은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전군, 전투 준비."

철컥! 철컥! 철컥!

펜리스의 기사들과 모든 기마병이 투구를 내려 썼다. 그들은 데스몬드의 대군을 앞에 두고도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영주와 함께한다는 건, 이제 그들에게 승리를 보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길리언도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럼 저도 다시 싸우겠습니다. 내가 쓸 무기를 가져와라! 도끼든 창이든 뭐든 상관없다!"

그러자 옆에 있던 고든이 길리언의 가슴을 쿡 찔렀다.

"큭!"

"에이, 이런 몸으로 뭘 싸우겠다고 그럽니까? 나랑 싸워도 지겠네. 아니, 수다쟁이 총관하고 싸워도 지겠는데?"

"으하하하하!"

다른 기사들도 배를 잡고 웃었다. 저 무서운 길리언이 약해진 모습을 보니 다들 재미있어 죽겠다는 분위기였다.

"이놈들! 쿨럭!"

길리언은 열을 내다가 피를 한 움큼 토하고 말았다. 그간 너무 무리하며 싸우다 보니 이제는 정말 몸이 한계에 이른 것이다.

고든이 그 모습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이쿠! 우리 교관님 이러다가 죽겠네. 어이 잘 모시고 있어라!"

결국 길리언은 의무병들에게 붙잡혀 움직이지도 못하게 됐다. 뿌리치고 싶어도 뿌리칠 힘이 남지 않았다.

그저 망연자실한 눈으로 흑왕에 올라탄 지셀을 바라볼 뿐이었다.

지셀은 그런 길리언을 보며 빙긋 웃더니 다시 명령을 내렸다.

"다들 진형을 갖추고 대기하도록."

뒤쪽은 비어 있지만, 그쪽으로 도망친다면 데스몬드의 전군이 뒤를 쫓을 것이다. 그러면 이길 만한 전투도 이길 수 없다.

애초에 지셀은 도망갈 생각도 없었다. 여기서 아예 끝장을 볼 계획이었으니까.

그는 침착하게 앞으로 다가올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쿵! 쿵! 쿵!

다가오던 데스몬드군이 적당한 거리에서 멈춰 섰다.

보통 이런 경우는 하나다. 먼저 원거리 공격으로 피해를 주겠다는 뜻.

과연 데스몬드의 진영 앞에 강력한 마력이 몰리기 시작했다.

파직!

공간 자체가 불안정하게 요동치며 일그러지더니, 곧 빛이 번뜩이며 작은 번개의 가닥들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데스몬드군에 있는 6서클 마법사, 윌로우가 마법을 시전한 것이다.

그는 영주인 지셀이 선두에 선 걸 보고 기습적으로 그를 노려 마법을 쏘아 보기로 했다. 광역 마법은 검은 갑옷을 입은 놈들이 약화할 수 있으니, 단일 표적을 노리는 빠르고 강력한 마법을 준비했다.

"크큭, 멍청한 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모양이구나."

윌로우는 자신감으로 가득 찬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마법은 이제 적을 꿰뚫을 준비가 된 상태였다.

"라이트닝 로드."

그가 시동어를 읊자 빛이 폭발했다. 수없이 많은 번개가 서로 교차하며 지셀을 향해 순식간에 뿜어져 나갔다.

그때, 펜리스군의 후방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리플렉트 실드."

그와 동시에 지셀 바로 앞에 거대한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콰아앙!

번개는 그대로 반사되어 데스몬드군의 진영으로 향했다.

마법을 시전했던 윌로우는 기겁하며 외쳤다.

"이, 이게 무슨!"

리플렉트 실드는 6서클 마법이긴 하지만 엄청난 마력을 소모하는 마법이다.

마법을 반사하기 위해서는 시전된 마법보다 훨씬 더 많은 마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마력이 넘치는 자가 아니면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펜리스군 진영에서 그 마법이 시전된 것이다.

윌로우는 남은 한 팔을 다급하게 휘저어 마법을 해제했다. 마력이 뭉텅이로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나, 나보다 윗줄의 마법사가 왔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자신의 마법을 이리 가볍게 튕겨 내었다는 건, 최소 6서클 마스터에 이른 자란 뜻이다.

'펜리스에 그런 마법사가 있다고? 이 북부에서 6서클에 이른 마법사는 전부 신상이 파악되어 있는데?'

자신이 알기로는 펜리스에 6서클 마법사는 없었다. 적염의 마탑주의 후계자인 알포이가 펜리스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는 널리 퍼져 있지만, 그는 겨우 4서클에 불과하다.

'우, 우리가 모르는 고위 마법사가 나타났다.'

윌로우는 바로 해럴드에게 보고를 올렸다. 대규모 마법 공격을 준비하던 해럴드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만약 윌로우의 말이 사실이라면 마법 전력은 상대의 공격을 견제하며 빠져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바네사가 6서클에 오른 걸 몰랐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마법사 한 명이 마력을 빨린 채 거품을 물고 기절했다는 것도 말이다.

그녀는 적들을 혼란에 빠트리려고 일부러 강력한 마법을 선보였다. 덕분에 데스몬드군의 마법사들은 행동에 제약이 생겨 버렸다.

상대의 마법 전력을 정확히 모르는 상황에서 견제를 하려면 마력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해럴드가 이를 갈며 말했다.

"마법 공격은 잠시 멈춘다. 천천히 다가가며 더 촘촘하게 포위해라. 저놈들이 압박감에 먼저 지치도록 해라."

데스몬드군이 조금씩 더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조심스럽게 맹수를 몰아가는 사냥꾼 무리와도 같았다.

이것은 대군이 취할 수 있는 이점 중의 하나였다. 수적으로 열세에 몰린 적은 당장 어느 쪽을 상대해야 할지 모르게 된다.

그 긴장감이 오래 지속되면 싸우지 않아도 몸에 엄청난 피로가 쌓이게 된다. 실제로 사냥꾼들이 맹수를 잡을 때도 이런 식으로 천천히 몰아가는 건 그런 효과를 노리기 위해서였다.

해럴드는 뛰어난 지휘관이다. 그는 대군을 몰고 왔음에도 아주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지셀을 죽일 생각이었다.

"궁병들도 거리를 좁혀라. 마법사들도 다시 공격을 준비하도록."

창병들의 뒤에 있던 궁병들도 펜리스군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본진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들도 천천히 병사들을 따라가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이들은 명령만 떨어지면 쉼 없이 펜리스군을 화살과 마법으로 두들겨 지치게 할 것이다.

두근. 두근. 두근.

천천히 다가오는 데스몬드군이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펜리스군이나 서로를 노려보며 긴장감을 높였다.

데스몬드군은 그간 길리언의 활약을 몸으로 받아 내며 펜리스군이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는 걸 알게 되었기에 수가 많아도 긴장을 놓지 못했다.

펜리스군도 영주를 믿고 있기는 하지만 이만한 대군을 상대한 적이 없었기에 압박감에 점점 짓눌려 갔다.

그때 갑자기 지셀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 길리언에게 하나 말을 안 한 게 있네."

두두두두두.

멀리서 군마들이 힘차게 땅을 밟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데스몬드군은 갑작스러운 소리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두두두두두!

소리가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데스몬드군은 그제야 자신들의 우측에서 달려오는 군대를 발견했다.

부우우우우!

나팔 소리가 크게 울리며 모두의 시선을 붙잡는다. 그것을 본 해럴드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왕국군?"

선두에 휘날리는 왕실의 깃발. 바로 클리프턴 자작이 이끄는 3군단이었다.

그리고 3군단의 뒤로 휘황찬란한 귀족들의 깃발을 든 군대가 쫓아오고 있었다.

바로 이더리안 자작이 이끄는 투자 피해자들의... 아니, 귀족 연합의 군대였다.

해럴드가 미처 무어라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어디선가 커다란 함성이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아아!"

그는 소리가 난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좌측에서도 군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저건... 페르디움?"

그 군대 위에는 하얀 늑대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페르디움군이 왕국군과 함께 시간을 맞춰 나타난 것이다.

갑자기 나타난 양쪽의 군대를 보며 지셀이 씨익 웃었다.

"내가 혼자 온 게 아니거든."

후방에 있던 길리언은 눈을 크게 뜨고 새로이 나타난 군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잊고 있었다. 지셀이 예전처럼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그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지셀이 아무것도 없고 무시당하던 시절부터 함께한 길리언이다. 그는 갑자기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눈시울을 붉혔다.

데스몬드군이 당황하는 사이, 양측의 군대가 데스몬드를 둘러싸듯 자리를 잡았다.

그 모습을 본 지셀이 창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가자."

다그닥, 다그닥.

흑왕이 오만하게 고개를 들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저 눈앞에 데스몬드의 대군이 장엄하게 열을 맞춰 서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지셀이 씨익 웃었다.

"오늘 이후로...."

아니, 어쩌면 오늘이 가기 전에.

"우리가 북부 최강이라 불릴 것이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히이이이잉!

긴 울음소리를 내뱉으며, 흑왕이 적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287화 이대로 돌파한다. (1)

해럴드는 갑자기 나타난 군대를 보며 눈을 찡그렸다.

"이놈들이... 서로 연락을 취해서 시간을 맞췄구나."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딱 맞춰서 나타날 리가 없었다.

왕국군과 귀족 연합 측은 병력이 약 8천, 페르디움군은 약 3천이다.

합하면 1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결국 해럴드가 걱정했던 상황이 와 버린 것이다.

"하아... 결국 이렇게 되는군."

길리언이란 놈 때문에 시간을 너무 끌었다. 차라리 스톤헤이븐 요새를 무시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해럴드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면 후방에서 유격전을 펼쳤겠지."

어쨌든 발목을 잡힌 건 사실이고, 덕분에 지셀을 도와줄 지원군까지 도착했다.

대군의 이점을 살려 하나하나 각개격파를 해야 했는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생각할수록 이가 갈리고 분노가 치솟았다. 하지만 침착해야 한다.

"어차피 다 싸워야 하는 놈들이다."

이 자리에서 전부 격파한다면 당분간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펜리스를 차지하자마자 강제 징집을 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는 영지에서 가장 뛰어난 지휘관을 불렀다. 바로 도렌 자작의 2군단을 처리했던 에머슨이었다.

"에머슨."

"네, 백작님."

"5천을 이끌고 우측의 3군단을 궤멸시키도록 해라."

"맡겨 주십시오."

두두두두두!

데스몬드군의 우익이 3군단과 귀족 연합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해럴드는 바로 좌익에도 명령을 내렸다.

"가레인 자작."

"네, 백작님."

"5천을 이끌고 좌측의 페르디움군을 맡아라."

"알겠습니다."

"페르디움군은 북방에서 많은 실전 경험을 쌓은 자들이다. 신중하게 싸우도록.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다. 다른 쪽을 먼저 처리할 테니 발목만 붙잡고 있어도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가레인 자작은 검술 실력은 뛰어나지 않지만 지휘 능력은 제법 괜찮은 지휘관이다. 특히 상대방을 한 곳에 잡아 두는 데 일가견이 있다.

그는 좌익에 배치된 병사들을 이끌고 페르디움 쪽을 향했다.

양쪽으로 1만이 빠져나갔지만, 데스몬드군의 중앙에는 여전히 약 1만6천의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펜리스군은 정면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것도 고작 3천 정도의 군대를 이끌고 말이다.

해럴드는 그걸 보며 서늘한 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건방진 자식이군."

확실히 지원군이 와서 병력 차이는 크게 줄었다. 그걸 믿고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구는 것일 터다.

하지만 지원군까지 다 합쳐도 겨우 이쪽의 절반 남짓한 수였다. 지셀의 판단은 너무나도 무모한 자신감의 발로일 뿐이다.

펜리스의 모든 기사와 병력은 거침없이 흑왕의 뒤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두두두두두두!

힘찬 말발굽 소리가 울리며 점점 펜리스군의 속도가 올라간다. 하지만 이미 데스몬드군은 진형을 제대로 갖춘 상태였다.

해럴드는 다가오는 펜리스군을 보며 이죽거렸다.

"그 이상한 소재의 갑옷을 믿고 날뛰는 거겠지. 아예 말들까지 죄다 갑옷을 입혀 놨구나."

확실히 페르디움군의 갑옷은 뛰어나다. 그 갑옷을 입는다면 병사 혼자서 10명의 적을 상대할 수 있을 법했다.

해럴드도 사망한 펜리스 병사의 갑옷 무게를 확인하고 깜짝 놀랄 정도였으니까.

그런 갑옷을 말들에게까지 빠짐없이 장착시켰다는 건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분명 뛰어난 무장이긴 하지만...."

그것도 일정 수를 상대할 때나 가능한 거다. 양쪽에 군사를 나누고도 이쪽에는 무려 펜리스군의 5배나 되는 병력이 대기하고 있었다.

대군의 무서움은 수가 늘어날수록 그 힘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것이다.

다가오는 펜리스군과의 거리를 가늠한 해럴드가 손을 들어 올렸다.

"창병 준비해라."

촤아아악!

수천의 창병이 앞으로 나서며 창을 앞으로 뻗었다.

두두두두두두!

이들은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는 펜리스군을 보면서도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누구를 상대하든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 그것이 바로 데스몬드의 정예병들이 강한 이유였다.

"궁병."

후열에 늘어선 궁병들이 활시위를 길게 잡아당겼다.

펜리스의 기마병들은 모두 전신 갑옷을 입고, 말들도 마갑을 착용하고 있기에 화살 공격도 직접적인 효과를 내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말들이 겁을 먹고 멈추거나, 충격으로 진형이 잠깐이라도 흔들린다면 그걸로 족하다. 해럴드는 일말의 기대를 안고 궁병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파아아악!

탕! 타타탕! 탕!

펜리스군은 모두 소형 방패를 들어 날아오는 화살들을 막아 냈다.

몇몇 눈먼 화살들이 몸과 마갑에 부딪쳤지만, 펜리스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진형과 속도를 그대로 유지했다.

"역시 소용이 없군."

해럴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소수기 때문에 그다지 걱정되진 않지만, 저 알 수 없는 소재의 갑옷 때문에 상당히 골치가 아픈 것도 사실이었다.

만약 1만의 군대가 전부 저렇게 무장했다면 절대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오늘 확실히 짓밟아야 한다. 그리고 저 새로운 소재의 제작법도 손에 넣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은 북부를 넘어 왕국 전체로 힘을 뻗칠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지금 이 시기에 지셀을 공격한 건 정말 천운이었다.

해럴드는 다시 윌로우를 보며 손을 저었다.

"시작해라."

마법사들의 화력이라면 충분히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수 있을 터였다. 적 마법사가 윌로우보다 윗줄의 실력자처럼 보인다는 보고를 받기는 했지만, 직접 전력을 가늠해 보기 전에는 모를 일이었다.

데스몬드의 마법사들이 마력을 모아 펜리스군을 향해 겨누었다. 윌로우는 다시 한번 고서클의 광역 마법을 시전했다.

"파이어 레인."

고오오오오!

하늘에서 거대한 마력이 뭉치며 불덩이들이 생성되었다.

펑! 펑! 펑!

동시에 데스몬드군의 진영에서도 공격 마법들이 수십 개나 쏘아져 나갔다. 모두 달려오는 펜리스군을 향한 것이었다.

만약 저 마법들을 전부 맞는다면 상당한 피해를 볼 것이다.

펜리스군의 후방, 일부 호위 병력과 함께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들은 데스몬드 측에서 거대한 마력의 움직임을 느끼고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알포이가 머리를 쓸어올리며 앞으로 나섰다.

"드디어... 이 내가 활약을 할 때가 온 것인가."

지금까지 전쟁에서 알포이는 파이어볼 하나 제대로 써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이번 전쟁이 그의 진짜 데뷔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 전쟁을 통해 자신의 실력을 만방에 떨치고 명성과 인기를 얻을 생각이었다.

"이 불꽃 남자 알포이가 저놈들에게 화끈한 맛을 보여 주지! 모두 태워 재로 만들어 주마!"

알포이가 비장하게 외치며 한 손을 앞으로 뻗었다.

텁.

바네사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알포이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자꾸 그렇게 갑자기 남의 손 잡지 말라니까.... 아아아아아악!"

마나를 단숨에 빨린 알포이는 볼이 쏙 들어간 채로 부들거렸다.

'이번에야말로 내 마법 실력을 보여 주고 싶었는데!'

하지만 바네사가 마력을 다 빨아가 버리는 바람에 알포이는 그럴 기회를 박탈당하고 말았다.

알포이의 마력을 힘껏 흡수한 바네사는 하늘을 보며 손을 뻗었다.

"비틀어진 법칙을 되돌린다. 디스펠."

사아아아아아아....

그녀의 한마디에 하늘에서 생성되던 수백 개의 불덩이가 떨어지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펜리스군을 향해 쏘아져 오던 모든 공격 마법도 허무하게 흩어지고 말았다.

그야말로 엄청난 이적.

그녀는 가공할 집중력으로 이 넓은 전장에서 피어오르는 마력을 모두 잡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광경을 바라본 윌로우는 경악에 찬 외침을 내뱉었다.

"마, 말도 안 돼! 시차를 둔 것도 아니고 단번에 저 많은 마법을 전부 파훼한다고? 서, 설마 7서클 마법사가 온 건가? 아, 아니지, 그렇다면 벌써 7서클 마법을 사용했을 텐데...."

데스몬드군의 다른 마법사들도 당황해 우왕좌왕했다. 상대 마법사의 전력을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바네사는 적들의 마법을 해제하자마자 다시 알포이의 반대쪽에 서 있던 다른 마법사의 손목을 잡았다.

그 마법사는 손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내가 여자친구 있다고 말했냐 안 했냐아아아아아!"

바네사는 마법사의 말을 무시하고 마력을 뽑아내며 6서클 마법을 시전했다.

"트윈 사이클론."

사르륵.

데스몬드군의 양쪽에서 아주 작은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누구도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약한 바람이었다.

하지만 6서클 마법사답게 미세한 마력의 움직임을 잡아낸 윌로우가 기겁하며 외쳤다.

"당장 해제해라! 어서!"

소용돌이가 생겨난 곳은 양 진영에서 거리가 꽤 떨어져 있었다. 마법을 해제하려면 더 가까이 가야 했다.

마법사들이 헐레벌떡 움직였지만 바람이 뭉치는 속도가 더 빨랐다.

쿠오오오오오!

바람은 서서히 회전 속도를 높여 가더니 결국 거대한 회오리로 변했다. 회전하는 2개의 회오리는 모든 걸 잡아 삼킬 듯이 광폭하게 다가갔다.

윌로우는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이, 이 무슨! 같은 마법을 어떻게 이렇게 멀리 떨어트려서...."

트윈 사이클론은 동시에 두 개의 회오리가 생성되는 마법이다. 자신도 이렇게 거리를 멀리 떨어트려 두 개의 마법처럼 시전하는 짓은 할 수 없었다.

작은 바람일 때는 저서클 마법사도 해제하기가 쉽지만 이렇게 커지면 해제하기가 쉽지 않다.

"마, 막아라! 내가 오른쪽을 막겠다!"

윌로우가 손을 뻗으며 디스펠을 시전했다. 그도 6서클 마법사이니, 마력만 충분하다면 6서클 마법은 해제할 수 있었다.

파아아아악!

"크으윽...."

그의 몸에서 엄청난 마력이 빠져나가며 하나의 회오리가 사라졌다.

나머지 마법사들은 왼쪽의 회오리에 정신을 집중했다.

6서클에 이르지 못한 이들은 혼자서는 절대 6서클 마법을 해제할 수 없지만, 여럿이 힘을 모으면 성공할 수도 있었다.

쿠와아아아아아!

회오리는 광폭하게 움직이며 데스몬드의 한 축을 쓸어버리기 위해 다가왔다.

회오리가 가까워짐에도 데스몬드군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다들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명령이 없기에 이를 악물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과연 정예라 불릴 자격이 있는 모습이었다.

"전부 이쪽으로 모여! 어서!"

"젠장! 도대체 상대측 마법사가 누구야!"

"빨리! 빨리 해제해라!"

다행히 수십 명의 마법사가 달라붙어 마력을 쏟아붓자 회오리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윌로우가 다급한 얼굴로 외쳤다.

"다시 공격해라! 쉬지 마라! 적들이 마법을 시전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공격해야 한다!"

파아앙!

데스몬드군의 진영에서 다시 마법들이 쏘아져 나갔다.

바네사는 즉시 다른 마법사의 손을 붙잡고 마법들을 해제했다.

그녀는 데스몬드의 마법사들과 달랐다. 전장 전체를 홀로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주르륵.

그녀의 코에서 피가 끊이지 않고 쏟아져 내렸다.

뛰어난 재능과 부단한 노력으로 6서클에 이르는 깨달음을 얻었지만 그녀의 몸에 쌓인 마력은 아직도 2서클 정도에 불과했다.

자신의 몸을 매개체 삼아 다른 마법사들의 마력을 끌어오고는 있지만, 타인의 마력을 사용하는 게 부담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피골이 상접한 채 쓰러져 있던 알포이가 그 모습을 보고 안타까운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바보야.... 너 그러다가 죽어.... 오래 못 살아...."

하지만 그녀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오직 전장의 마력만 좇을 뿐이었다.

'아무도 죽게 하지 않을 거야.'

적어도 마법으로는 아군이 죽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것이 그녀가 품은 각오였다.

'조금만 더....'

바네사는 이를 악물며 마법을 시전했다.

그녀도 이런 상황이 편할 리가 없었다. 다 같이 싸우는 게 훨씬 좋다.

하지만 데스몬드군에는 6서클 마법사를 비롯해 이쪽보다 훨씬 많은 마법사가 존재한다. 마력이 부족한 자신이 그들을 상대하려면 다른 마법사들의 마력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홀로 싸울 수밖에 없던 것이다.

'죄송해요... 제가 마력만 정상적으로 모을 수 있었으면....'

그랬다면 다른 마법사들도 나름대로 전장에 참여했을 것이다. 어쩌면 펜리스군의 마법 전력이 상대를 압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것이 무리이기에 이런 기형적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상대방의 6서클 마법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으니까.

주르륵.

바네사의 코에서 코피가 더 많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절대 집중력을 잃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더 다가갔다.

'멈추면... 안 돼!'

적이 완전히 밀릴 때까지 쉴 틈이 없었다. 계속 더 강하게 밀어붙여 아군에게 손쓰지 못하게 해야 한다.

지셀도 그런 바네사를 믿고 전장에 뛰어든 것이다.

'더 할 수 있어....'

아직 마력을 채워 줄 마법사들은 스무 명이 넘게 남았다.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양측의 머리 위에서 마법이 마치 불꽃놀이처럼 하늘에서 생성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해럴드는 그 모습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진짜 6서클 마법사가 있나 보군. 설마 적염의 마탑주가 몰래 도와주는 건가?"

그의 머릿속에서 경고가 울렸다. 마탑이 참전했다면 보통 일이 아니다.

자신이 거느린 마법 병단과 팽팽한 것을 보니 마탑의 주요 전력이 전부 온 게 분명했다.

"도대체 이놈은 어떻게 마법사들까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알 방법이 없었다. 전쟁이 끝난 뒤 천천히 알아보고, 펜리스를 도운 자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면 될 일이다.

어쨌든 서로 마법이 막혔다면 이제는 직접 맞붙어서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기마병."

해럴드가 손짓하자 양쪽에 서 있던 기마병들이 움직였다.

이들은 펜리스군의 후방을 노리고 크게 반원을 그리며 포위망을 펼치기 시작했다.

전열의 창병만 버텨 주면 펜리스군은 뒤에서부터 무너질 것이다.

두두두두두두!

데스몬드의 창병들은 점점 더 가까워지는 펜리스의 기마병들을 노려보며 창을 꽉 잡았다.

'빠르다.'

펜리스군 전원이 전신 무장을 하고 마갑까지 입혔음에도 경기병과 맞먹는 속도가 난다. 만약 부딪친다면 어마어마한 충격이 발생할 것이다.

아마 펜리스군과 가장 먼저 충돌하는 자들은 크게 밀려나겠지만, 그만큼 상대의 돌파력도 줄어들 터.

수천의 병사들이 간격을 두고 대열을 짠 상태다. 분명 반도 못 뚫고 속도가 떨어질 것이다.

일단 발을 묶기만 하면 완전히 포위해 섬멸할 수 있다.

두두두두두두!

거리가 점점 더 줄어들었다. 이제 눈 몇 번만 깜빡이면 부딪칠 것이다. 창병들은 말들을 공격하고 기수들을 떨어뜨리기 위해 자세를 낮췄다.

두두두두두두!

그렇게 양측의 군대가 충돌하기 직전.

돌연 지셀이 크게 외쳤다.

"퍼져라!"

촤아아악!

선두의 기사들과 기마병들이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창병들을 피해 양옆으로 빠지는 듯한 모양새였다.

갈라지는 공간 사이로 창이 아닌 다른 무기를 들고 있는 기마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무리의 선두에는 엘프 루미나가 있었다.

끼익....

루미나가 말의 고삐를 놓은 채 양손으로 활시위를 당겼다. 그녀를 뒤따르던 엘프들과 기마병들도 똑같이 고삐를 놓고 활을 당겼다.

해럴드는 갈라진 군대 사이로 갑자기 나타난 그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궁기병?"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병종이 나타났다.

288화 이대로 돌파한다. (2)

해럴드는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갑자기 궁기병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분명 처음 펜리스의 대열을 봤을 때는 등에 활을 메고 있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펜리스에서 신소재로 접이식 활을 개발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을 마주한 창병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방패를 든 중보병들은 전부 측면을 방어하는 위치에 배치되었다. 화살을 막아 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데스몬드의 지휘관들과 병사들은 궁기병들이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끼익....

데스몬드군을 노려보며 활시위를 끝까지 당긴 루미나는 순간 호흡을 멈췄다.

'할 수 있어.'

사실 지금도 정신이 없는 건 마찬가지다. 처음 말을 타고 난 뒤부터 강도 높은 훈련을 계속했지만 실제로 전쟁에 참여한 건 처음이었으니까.

그녀뿐만이 아니다. 부분적으로나마 자연과 소통하는 방법을 깨우친 엘프들은 전장에 감도는 무겁고 끔찍한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몸이 짜릿짜릿해지는 감각. 이런 곳에 머무는 건 엘프들의 본능을 거스르는 일이다.

'그래도 해야 해.'

물러설 수는 없었다. 엘프의 사명과 본성을 찾았어도, 인간 세상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엘프들은 인간들의 사고방식에 더 익숙했다.

이들은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어설프게 굴면 더 큰 희생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본성을 따르며 사는 엘프들 또한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건 마찬가지.

그리고 지금 이들의 영역은 펜리스 영지다.

영주가 훗날 약속을 지킬지 안 지킬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와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수여, 펜리스에 가호를.'

마음을 다진 그녀가 활시위를 놓았다.

탕.

그것을 신호로 모든 엘프와 궁기병들이 활시위를 놓았다.

파아아아아악!

데스몬드군을 향해 수천 개의 화살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파파파파팍!

"으아아악!"

측면에 대기하고 있던 중보병들은 방패를 들어 화살을 막아 냈지만, 중앙에 있던 병사들은 그럴 수 없었다.

데스몬드군 전열의 창병들이 허무하게 쓰러졌다. 뒤에 있는 병사들도 빗발치는 화살에 맞아 쓰러지기 일쑤였다.

궁기병들은 화살을 쏜 즉시 말 머리를 돌려 양옆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빙 돌며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지셀이 알려 주고 훈련시킨 움직임 그대로였다.

그 모습을 본 해럴드가 분개한 표정으로 외쳤다.

"쫓아라!"

뒤를 보이는 기마병만큼 약한 이들이 또 없다. 그리고 데스몬드군의 기마병들은 이미 적의 뒤를 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비록 뼈 아픈 피해를 보았지만, 이대로 궁기병들을 모조리 죽인다면 큰 손해는 아니었다.

해럴드의 눈이 전장을 빠르게 훑었다.

두두두두두!

앞서 빠졌던 펜리스의 기마병들은 궁기병들을 쫓는 기마병들을 스치듯이 지나쳤다. 더 크게 돌아 데스몬드 진형의 측면과 후방을 노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방패! 막아라!"

철컹! 철컹! 철컹!

측면에 배치되어 있던 중보병들이 재빨리 움직여 방패의 벽을 만들었다.

2천의 궁기병들은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고 있으니 남은 기마병들로는 겹겹이 배치된 방패를 전부 뚫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과연 펜리스의 기마병들은 뛰어들지 않고 데스몬드군의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데스몬드의 기마병들은 죽어라 달려 궁기병들을 쫓았다.

그들이 방향을 다시 돌리기 전에 뒤를 쳐서 단번에 쓸어버리려는 심산이었다.

두두두두두두두!

펜리스 기마병들의 속도가 빨라 따라잡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데스몬드군이 이를 악물며 어떻게든 거리를 좁히고 있을 때.

갑자기 루미나가 등을 돌리고 뒤쪽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동시에 모든 궁기병이 그녀를 따라 몸을 돌렸다.

"이 무슨...."

추격하던 데스몬드군 기사의 눈빛이 흔들렸다.

격렬히 흔들리는 말 위에서 고삐를 아예 놓고, 다리로만 몸을 고정한 채 활을 쏜다고? 그것도 뒤를 보면서? 2천 명 전부가?

방금은 어떻게든 피해를 주겠다고 억지로 시도한 공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말도 안 돼. 기마술과 궁술을 몇 년은 훈련해야 숙련이 되는 게 궁기병이다. 어떻게 다들 저런 실력을....'

다들 딱히 불편해 보이지도 않았다. 마치 말이 기수를 안 떨어뜨리려고 알아서 조절해 주는 느낌이었다.

생각은 더 길어지지 못했다. 그가 소형 방패를 들기도 전에, 시야를 새까맣게 가릴 정도로 화살들이 덮쳐 왔다.

파파파파팍!

"크아아악!"

히이이이잉!

비명과 말 울음이 울려 퍼지며 데스몬드의 기마병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전력으로 달리던 중이라 화살을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전신 갑옷과 마갑을 장착한 기사들을 제외한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으아아악! 안 돼!"

쿠웅! 콰앙! 콰앙!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해 앞쪽이 우수수 쓰러지자 뒤따라오던 기마병들도 마구 엉켜 쓰러졌다.

그 와중에도 화살은 계속 날아왔다. 양쪽에서 궁기병을 쫓던 기마병들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무너졌다.

해럴드는 그 모습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어떻게 저놈이 벌써 저런 전력을...."

애초에 궁기병이 저렇게 많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이제 막 성장을 시작한 펜리스 영지에서 저만한 궁기병을 양산할 수는 없었다.

육성하는 데 시간도, 비용도 너무 많이 들어 영주들 대부분이 포기한 병종이 궁기병 아닌가.

소규모 정찰대에서 쓰이는 것을 제외하면 어느 순간 자취를 감췄기에 해럴드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만약 펜리스에 이 정도로 궁기병이 많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다른 전술을 준비했을 것이다.

"이놈... 도대체 그동안 무슨 짓을...."

100명이 넘는 기사, 새로운 소재로 만든 무장들, 6서클 마법사, 2천 명이 넘는 궁기병.

믿을 수 없는 전력이 하나하나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두두두두두두!

중보병 주변을 맴돌던 펜리스의 기마병들이 방향을 틀어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대로 돌아가던 궁기병들이 다시 선회하며 데스몬드군의 양측을 포위하듯이 다가왔다.

해럴드는 그 모습을 보고 크게 외쳤다.

"방패! 아군을 보호해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궁기병들의 화살이 데스몬드군의 양쪽 측면을 공격했다.

파아아악!

"으아아악!"

"반격해라! 반격을 해!"

"막아! 방패를 들어라!"

아무리 중보병들이 막아 준다 해도 하늘을 덮어 오는 수천 개의 화살을 전부 막을 수는 없다.

안쪽에 있던 창병들과 궁병들은 아무것도 못 해 보고 쓰러지기에 바빴다.

"쏴라! 우리도 쏘란 말이다!"

데스몬드의 궁병들이 견제 사격을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궁기병들은 빠른 기동력으로 화살을 피해 계속 움직이며 데스몬드군의 측면을 괴롭혔다.

당하는 쪽에서 보면 정말 치사하기 이를 데가 없는 공격이었다.

"막아! 막으라고!"

곳곳에서 지휘관들의 외침이 들려오지만 중보병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빗발치는 화살 때문에 전장을 제대로 시야에 담기가 힘들었다.

자신들은 큰 방패 덕분에 안전하지만, 미처 막아 주지 못한 아군들이 여기저기서 쓰러져 갔다.

궁기병을 전혀 대비하지 않았던 데스몬드군은 계속 끌려다니는 형편이 되어 버렸다.

두두두두두두!

정신없이 측면을 도는 궁기병들을 보며 해럴드는 핏발 서린 눈으로 외쳤다.

"당장 좌우익의 군대를 불러들여라! 어서!"

이대로 가다가는 계속 끌려다니다가 모두 쓰러지고 말 것이다.

왕국군과 페르디움군을 상대하던 군대가 돌아와 궁기병들을 쫓아야 했다.

부우우우우!

크게 나팔 소리가 울리고 왕국군과 페르디움군을 상대하던 데스몬드군이 그 소리를 들었다.

왕국군을 상대하던 기병대 지휘관, 에머슨은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됐는데...."

에머슨의 기병대는 벌써 수도 귀족 연합의 군대를 절반쯤 밀어 버린 상태였다.

3군단과 섞인 귀족 연합의 군대는 딱 봐도 훈련 상태가 부족하고 손발도 맞지 않았다. 그렇기에 약한 곳부터 공략하는 에머슨의 전술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궁기병 때문인가?"

에머슨은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궁기병은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막기가 힘들다.

보병들이 따라가질 못하니 궁병과 기마병으로 상대해야 하는데 상대측의 갑옷 성능이 뛰어나니 그마저도 쉬워 보이지 않았다.

무장을 갖춘 아군의 중보병들은 잘 버티고 있지만, 저런 식으로 싸우다가는 결국 야금야금 잡아먹힐 것이다.

어차피 기마병들은 대부분 자신이 이끌고 있다. 자신이 쉼 없이 움직이는 저 궁기병들의 경로를 파고들어서 흐름을 끊어야 한다. 그래야 아군 보병들이 움직일 수 있었다.

"보병들은 천천히 빠지면서 왕국군을 상대해라! 기마병은 모두 나를 따르도록!"

에머슨이 이끄는 군대가 서서히 뒤로 빠지며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수도 귀족 연합의 지휘관, 이더리안 자작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와씨! 진짜 죽을 뻔했네. 뭐 저렇게들 잘 싸워? 적들이 빠지니 우리는 좀 뒤로 빠지자!"

투자금 날리지 않으려고 왔다가 목이 날아갈 뻔했다. 이더리안 자작은 다시는 펜리스 백작의 일에 끼지 않기로 새삼 맹세했다.

반면 3군단은 정예답게 공격을 잘 버티고 있었다. 3군단장인 클리프턴 자작은 이더리안 자작과 다른 결정을 내렸다.

에머슨이 빠지는 것을 보니 확실히 중앙에 문제가 생겼다. 이럴 때는 이쪽이 제대로 데스몬드군을 포위해 주어야 승기를 잡을 수 있다.

"기회다! 이번에는 우리가 밀고 들어간다! 어서 움직여라!"

"와아아아아!"

3군단이 조금씩 전진하자 이더리안 자작도 아예 뒤로 빠지지는 못했다.

혼자 뒤로 빠져 있어 봤자 전쟁에서 지면 어차피 몰살당한다. 저 무서운 데스몬드 백작이 자신들을 살려 줄 거 같지는 않았다.

만에 하나 이쪽이 이긴다면, 뒤로 빠져 있었다고 욕을 크게 먹게 될 테고.

"어... 우리도 다시 가자!"

기병들이 빠진 데스몬드군은 수가 부족해 점점 왕국군에 밀리기 시작했다. 에머슨은 그 상황을 짐작하면서도 중앙군 쪽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왕국군을 상대하던 에머슨은 쉽게 군대를 돌렸지만, 페르디움을 상대하던 가레인 자작은 그러지 못했다.

"젠장! 페르디움이 이렇게 잘 싸웠다고?"

페르디움의 기사들과 병사들은 데스몬드군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수가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데스몬드군은 공격을 막기에만 급급했다.

"와아아아아!"

전투력도 전투력이지만 사기가 어마어마했다. 페르디움군은 함성을 끊임없이 울리고 전혀 지칠 줄을 몰랐다.

"마, 막아라! 버티라고!"

콰앙! 콰앙!

"으아아아악!"

페르디움의 기사들은 수가 적었지만 하나하나가 중급 기사 이상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지셀에게 새로운 마나 연공법을 배운 페르디움의 기사들이다. 이들이 작정하고 힘을 터뜨리자 무시무시한 파괴력이 터져 나왔다.

즈발터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힘을 아끼지 마라! 어서 이쪽을 밀어야 포위에 성공할 수 있다!"

언제나 걱정이 많은 그는 지금도 마음이 급했다. 중앙에서 지셀의 군대가 잘 싸우고는 있지만 상대보다 수가 무척 적다.

자칫 잘못해서 포위당하면 단번에 몰살당할 수도 있기에 빨리 이곳을 뚫고 싶었다.

그의 명령을 받은 모든 기사와 병사들은 힘을 아끼지 않고 무기를 휘둘렀다.

한쪽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던 란돌프는 즈발터와 다르게 신이 나서 날뛰었다.

"으하하하! 우리가 이 정도로 싸울 수 있다니! 우리가 이렇게 강해졌다니!"

막상 싸워 보니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적을 압도하고 있다. 언제나 북방 요새에서 지내다 보니 자신들의 실력을 과소평가한 듯했다.

그간 지셀 덕분에 강해진 전력은 북부 최강이라 불리는 데스몬드군에게도 통한 것이다.

언제나 끌려오는 스코반 또한 데스몬드의 병사들을 베며 중얼거렸다.

"와, 이게 되네? 우리 왜 이렇게 세지?"

예전 같았으면 이름만 들어도 겁부터 먹었을 데스몬드군이다. 그런데 지금은 겁먹기는커녕 더 많은 수를 역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피를 토할 정도로 했던 수련은 자신들을 배신하지 않았다. 그 힘은 야만인들과의 전투에 이어 데스몬드군을 상대로도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페르디움군이 생각보다 너무 잘 싸우니 가레인 자작은 군대를 뺄 수가 없었다. 더 많은 병력을 데리고도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게 전부였다.

지금 일부라도 발을 빼면 상대의 공세에 밀려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으으.... 어째서 페르디움 따위가...."

가레인 자작은 싸우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북방에서 실전을 많이 겪는다 해도 상대는 기껏해야 하찮은 야만인 약탈대에 불과하다고 폄하했다.

그런데 그렇게 무시하던 페르디움에게 이렇게 밀리게 될 줄이야. 싸우면서도 분노와 수치가 끊임없이 몰려왔다.

가레인 자작이 군대를 빼지 못하니 결국 해럴드의 본대를 구하러 움직인 건 에머슨의 일부 병력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해럴드는 이를 갈며 외쳤다.

"조금만 더 버텨라! 아군이 도와줄 것이다!"

가레인 자작이 오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에머슨이 와서 궁기병들의 움직임만 끊어 줘도 숨통이 트일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재빠르게 병사들을 움직여 전열을 가다듬고 역으로 포위하면 된다.

바쁘게 고개를 돌리던 그는 문득 앞쪽을 보고 심장이 아래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차!'

앞쪽이 비었다. 창병들의 대열은 이미 무너졌고 다들 중보병의 뒤에 숨기에 바빴다.

모두가 측면의 궁기병에게 정신이 팔려 있을 때.

멀리 돌아갔던 펜리스의 기마병들이 다시 데스몬드군의 정면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두두두두두두!

앞이 훤히 빈 것을 본 지셀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이대로 돌파한다."

지셀의 눈이 붉어졌다. 그의 창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지이잉―!

동시에 그의 뒤를 따르는 기사들의 갑옷에서 밝은 빛이 새어 나왔다.

펜리스의 기마병들과 노동 돌격대의 대원들도 창을 어깨 사이에 끼고 꽉 쥐었다.

두두두두두두!

처음과는 비교도 안 되는 빠른 속도였다. 특히 지셀이 탄 흑왕은 같은 편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앙!

붉은 빛줄기가 데스몬드군의 진영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289화 이대로 돌파한다. (3)

"으아아악!"

빛줄기처럼 쏘아져 들어오는 지셀의 돌격에 데스몬드군의 창병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콰아아앙!

뒤이어 들어온 기사들과 기마병들의 돌격도 지셀의 공격에 못지않았다.

망가진 대열로는 기마 돌격을 전혀 막을 수가 없다. 데스몬드의 진형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대열이 무너지면 명령 체계도 같이 무너진다. 데스몬드군은 혼란에 빠져 제대로 대응조차 하지 못했다.

곳곳에서 지휘관들이 외치는 소리가 겹쳤다.

"막아라!"

"일단 눈앞에 있는 적들부터 쳐라!"

"수는 우리가 더 많다!"

오랜 시간 훈련한 움직임은 몸에 배기 마련이다. 대열이 무너졌어도 데스몬드군은 본능적으로 모이며 앞에 있는 적을 공격했다.

"저놈이 영주다! 검은 말을 탄 놈이다!"

누군가가 외치자 데스몬드군은 지셀을 끌어 내리려고 우르르 달라붙었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지셀이 붉은 눈을 번뜩이며 창을 휘두를 때마다, 그에게 다가오던 데스몬드의 병사들은 그대로 목이 날아갔다.

몇몇 병사들은 말을 공격하려 했지만 그들은 난생처음 기괴한 광경을 보게 됐다.

푸르르르!

흑왕은 사나운 눈빛을 뿜어내며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무기가 날아오면 뛰어서 피하고 적이 다가오면 뒷발로 걷어찬다. 위에 주인이 타고 있건 말건 신경도 안 쓰고 제멋대로 움직이며 싸우기에 바빴다.

그러자 지셀도 흑왕의 고삐를 놓고 창을 휘둘렀다. 서로 자기가 먼저 적을 죽이겠다고 난리였다.

주인과 말, 둘 다 제멋대로인 게 이렇게 궁합이 잘 맞을 수가 없었다.

퍼어억! 퍼억! 퍽!

"으아아악! 뭐야! 이 말은!"

"너무 빠르잖아! 창이 보이지도 않아!"

"피해! 가까이 다가가지 마라!"

데스몬드군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말과 기수의 움직임이 굉장히 불규칙적이라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틈이 보이는 거 같아 들어가면 순식간에 목이 날아가 버렸다.

퍼억! 퍽! 퍽!

둔탁한 소리가 날 때마다 데스몬드 병사들의 머리가 사방으로 날아갔다.

지셀을 뒤따라온 기사들도 힘을 아끼지 않고 마나를 내뿜었다.

갑옷의 힘이 발동된 이상 말 위에서 싸우면 손해다. 기사들은 속속 말에서 뛰어내렸다.

특히 고든은 누구보다 큰소리로 외치며 말에서 내려왔다.

"오늘은 하체 조진다!"

콰앙!

그의 다리에 마나가 몰리며 몸이 쭉쭉 뻗어 나갔다. 다른 기사들도 모두 자신만의 무기를 꺼내며 데스몬드 진영에 들이닥쳤다.

"검은 갑옷 놈들이다!"

"전보다 더 많아졌잖아!"

"저놈들한테 틈을 주면 안 된다!"

데스몬드군은 검은 갑옷을 입은 펜리스의 기사들을 보며 경기에 들린 듯 비명을 내질렀다.

그간 길리언과 기사들에게 아주 진저리가 나도록 당하며 그들의 힘을 직접 겪었기 때문이다.

콰앙! 콰앙! 콰앙!

갑옷의 힘을 모두 개방한 기사들의 힘은 그야말로 경이적이었다. 순식간에 수백의 데스몬드군이 죽어 나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중보병들이 우르르 몰려와 펜리스군을 밀어내려 했다.

데스몬드의 수준 높은 기사들도 중간중간 끼어들어 펜리스의 기사들을 막기 시작했다.

펜리스군이 짧은 시간에 진형의 앞부분을 무너뜨리긴 했지만, 수가 적으니 슬슬 그 돌파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지셀이 흑왕의 말고삐를 강하게 잡으며 외쳤다.

"비켜라!"

소리가 들리자마자 펜리스의 기사들과 병사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양옆으로 움직였다.

촤아아악!

순식간에 바다가 갈라지듯 텅 빈 길이 만들어졌다.

두두두두두!

지셀을 태운 흑왕이 거침없이 달렸다.

지셀이 창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다시 3단계의 코어를 개방했다.

드드드드!

그의 눈이 더욱더 붉게 물들었다.

사나운 흑왕의 눈빛과 그보다 더 사나운 지셀의 눈빛을 마주 본 데스몬드군은 자신들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막아!"

철컹! 철컹! 철컹!

중보병들의 거대한 방패가 땅에 꽂히며 방패의 벽을 만든다. 지셀의 돌격이 얼마나 강한지 조금 전에 본 병사들은 이를 악물고 힘을 주었다.

하지만 지셀은 이들과 정면으로 부딪칠 생각이 없었다.

파앗!

"어?"

데스몬드군은 모두 고개를 들었다.

흑왕이 높이 뛰어올라 방패의 벽을 넘었기 때문이다.

콰앙!

지셀이 데스몬드군 대형의 중심으로 뛰어들며 창으로 땅을 내리치자 강한 충격파가 퍼져 나갔다.

"크어억!"

지셀과 가까운 곳에 있던 병사들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병사들은 자세를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하지만 머뭇거리는 것도 잠시였다. 아군 진영 한가운데에 홀로 뛰어든 적 영주를 구경만 하고 있을 리 없었다.

빽빽하게 뭉쳐 있던 중보병들은 모두 몸을 돌려 지셀을 압박하려 했다. 데스몬드의 기사들도 목표를 바꿔 지셀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그들이 상상도 못 했던 일이 벌어졌다.

드드드드드.

쓰러진 병사들이 들고 있던 창이 사방에서 떠오른다. 그 모습을 본 데스몬드군은 유령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다들 무슨 상황인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넋이 나갔을 때, 수백 개의 창이 지셀을 포위한 병사들에게 쏟아졌다.

퍼퍼퍼퍼퍼퍽!

"으아아악!"

창이 스스로 허공에서 움직이니 다들 기겁할 만했다. 기사들은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창을 쉽게 쳐 냈지만 병사들은 사정이 달았다.

창마다 담긴 힘이 제각각이라, 어떤 병사들은 갑옷과 방패로 튕겨 냈지만 어떤 병사들은 그대로 몸이 뚫려 죽고 말았다.

"차, 창이 날아다닌다고?"

"마법이다! 펜리스 백작이 마법을 쓴다!"

"우리 마법사들은 뭐 하는 거야!"

마법이 아니지만, 지셀이 쓰는 기술을 알아볼 만한 실력자는 이곳에도 없었다.

데스몬드군뿐만 아니라 펜리스의 기사들과 병사들도 순간 넋이 나가고 말았다.

그림자 산맥으로 파견 갔던 일부 기사들 외에는 대부분 이 기술을 오늘 처음 봤기 때문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게 말로만 듣던 그 기술이구나."

"내가 말했지? 저거 진짜 미친 기술이라니까."

"저런 게 있으면 혼자 싸워도 되지 않나?"

하지만 그들의 감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먼저 들어가서 대열을 흐트러뜨린 지셀이 크게 외쳤기 때문이다.

"정신 안 차리냐!"

드드드드!

3단계 개방 상태는 오래 유지할 수가 없다. 지셀의 눈에 핏발이 서리고 몸 곳곳에 힘줄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지셀의 호통에 찔끔한 펜리스의 선임 기사, 고든이 손짓하며 크게 외쳤다.

"자, 빨리 다시 들어가자!"

아무리 갑옷의 힘을 빌렸어도 두꺼운 방패를 틀어쥔 중보병 대열을 뚫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지셀이 먼저 들어가 대열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덕분에 진입하기가 이전보다 훨씬 수월했다.

콰앙! 콰앙! 콰앙!

펜리스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다시 데스몬드군의 사이사이에 뛰어들어 무기를 휘둘렀다.

이 기상천외하고 무모한 전술에 데스몬드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아직은 데스몬드 쪽이 수가 많기에 후열을 두껍게 유지하고 있지만, 이대로라면 후열의 병사들도 모두 쓰러지게 될 것이다.

데스몬드 병사들의 눈에 드디어 공포가 서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셀도 그리 속이 편한 건 아니었다.

'더 빨리 들어가야 한다.'

펜리스군의 주력은 모두 힘을 쓸 수 있는 시간에 제한이 있다. 적들의 수가 워낙 많기에 이 상태로 가면 적들을 다 죽이기 전에 이쪽의 힘이 빠질 것이다.

'징그러운 놈들.'

지셀과 펜리스군은 직선으로 데스몬드군의 대열을 뚫고 있었다. 앞을 막는 자들은 모조리 죽이고 있지만, 좌우 대열에서 계속 병력이 충원되었다.

대군은 이래서 무서운 법이다. 아무리 죽여도 전투력이 줄어들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데스몬드군 개개인의 실력도 만만치가 않았다. 분명 지셀과 펜리스 기사들이 우위를 점하고 있음에도 대열을 뚫는 속도는 점점 늦어지고 있었다.

지셀의 눈이 빠르게 전장을 훑었다.

왕국군을 상대하던 에머슨의 기병대가 궁기병들을 노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데스몬드군의 후열을 견제하며 괴롭히던 아군의 궁기병들은 이제 다가오는 적들을 피해 이동하기 바빴다.

'우리가 먼저 마법사들을 잡아야 한다.'

지금 펜리스군이 확실하게 승기를 굳히기 위해서는 데스몬드의 마법사들을 잡아야 한다. 그래야 아군 마법사들이 남은 적들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양쪽에 포진해 있는 마법사들은 신경 쓸 필요 없다. 진형 뒤쪽에서 가장 강력하게 보호받고 있는 고서클 마법사를 잡아야 한다.

콰아앙! 콰앙!

지셀은 마나를 아끼지 않고 뿜어내며 계속 적 진형의 중앙만 두들겨 댔다.

미리 명령을 받은 펜리스군도 그를 뒤따라 전진하기에만 바빴다.

무지막지할 정도로 한 곳만 패며 전진하는 펜리스군 덕분에 데스몬드군은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장 먼 곳에서 바라보고 있던 해럴드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저놈이... 저 정도였단 말인가...."

두 눈으로 봐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건 소문 그 이상이다. 그간 당해 왔기에 지셀을 높이 평가했지만, 그것조차도 실력보다 낮게 잡았던 것이다.

지셀이 그간 준비한 것만으로도 놀라서 쓰러질 지경인데 일신의 무력마저 최상급 기사에 육박하다니!

저 정도면 북부제일검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능히 홀로 수천의 병사들을 감당할 만한 실력이다.

"그런데 왜... 저렇게?"

움직임이 이상했다. 무식할 정도로 전진만 하고 있다. 저 정도 실력이 있다면 다른 전술을 사용하는 게 더 효과적일 텐데도.

무작정 앞으로만 나아가니 자연히 아군에 점점 포위되는 모양이 되었다. 만약 펜리스 기사들이 지칠 때까지 시간을 더 끈다면 이쪽이 역으로 그들을 짓밟을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뭘 노리는 거지?"

해럴드는 지셀과 펜리스 기사들이 힘을 쓰면 쓸수록 더 빨리 지친다는 걸, 힘을 쓰는 데 시간제한이 있다는 걸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움직이는 방향을 보면 뭘 노리는지는 금세 드러났다.

날카로운 눈으로 지셀의 움직임을 따라간 해럴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놈이 마법사를 노리고 있구나."

지셀이 움직이는 방향에는 윌로우가 있었다. 펜리스의 6서클 마법사를 봉쇄할 수 있는 존재이니 지셀로서는 윌로우가 거슬릴 만했다.

아군도 포위 진형을 차근차근 형성하고 있었지만, 지셀의 무력을 보면 진형이 완성되기 전에 윌로우가 잡힐 것이 확실했다.

그렇다고 윌로우를 더 뒤로 물릴 수도 없었다. 상대의 마법을 견제하든, 상대 병력에 마법을 쓰든 거리는 일정 수준 이하로 유지해야 한다.

그나마 6서클에 이른 마법사라 지금 정도 거리에서 상대를 견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해럴드는 지금까지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던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레노스."

"네, 영주님."

"호위단 전원을 이끌고 저놈을 막아라. 에머슨이 적 궁기병과 마법사들을 칠 것이다."

"...저희의 임무는 영주님을 지키는 것입니다."

"윌로우가 죽으면 우리가 불리해진다. 이제 저쪽에서 숨겨 둔 패는 더 없는 거 같으니 괜찮다. 저놈부터 막아라."

"...알겠습니다."

데스몬드 정도 되는 대영주라면 수많은 기사를 거느리고 있다. 그중에서 특별히 실력이 뛰어난 이들은 영주를 지키는 호위 기사로 임명된다.

대영주가 거느리는 호위 기사들을 로열 가드라 부르는데, 데스몬드 백작의 로열 가드는 50명이나 되었다.

수만 많은 것이 아니었다. 단장인 레노스는 상급에 이른 기사이고, 다른 기사들도 최소가 중급 기사에 이른 정예 중의 정예들이었다.

해럴드는 오직 지셀을 막기 위해, 절대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이들까지 움직이고 만 것이다.

레노스는 진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가자."

휘황찬란한 갑옷을 입은 그들이 말을 타고 달려 나갔다.

이들은 그 특성상 적을 막고 누군가를 지키는 데 탁월한 전법을 익히고 있었다.

로열 가드 50명이면 허튼 남작 정도의 실력자도 죽이지 않고 제압할 수 있을 정도다.

그렇기에 해럴드는 지셀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이들이 나서면 윌로우에게 다가가지 못할 것이라 믿었다.

두두두두두!

힘차게 말을 달리는 건 이들만이 아니었다. 왕국군의 추격을 완전하게 따돌리고 빠져나온 에머슨은 펜리스의 궁기병을 쫓기 시작했다.

궁기병들 또한 그걸 아는지 데스몬드군의 후열을 견제하며 괴롭히다가 슬금슬금 뒤로 빠지기 시작했다.

에머슨은 전장의 상황을 둘러보며 자신의 부관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1천을 내어 주겠다. 적 후방에 있는 마법사들을 짓밟아라."

"알겠습니다."

부관은 그 즉시 1천의 기병을 이끌고 펜리스의 마법사들에게 향했다.

현재 펜리스군 후방에 있는 마법사들은 약 300여 명의 호위를 두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지저분한 회색 로브를 입고 큰 대검을 들고 있었다. 그 대검은 일반적인 모양이 아닌, 양날 검에 긴 자루를 붙여 말을 베는 용도로 만든 참마도였다.

마법사들을 빙 둘러싸고 호위하던 그들은 데스몬드의 기병들이 다가오자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 나갔다.

두두두두두!

데스몬드의 기병들은 창을 단단히 쥐고 속도를 더 높였다. 마법사들을 지키겠답시고 나선 놈들을 그대로 짓밟을 생각이었다.

"웬 거지 같은 놈들이 앞을 막는구나."

기병대의 부관은 비웃음을 지었다. 저 정도 숫자면 충분히 뚫고 마법사들을 칠 수 있었다.

로브를 입은 자들 중 한 명이 힘차게 달려오는 기병들을 노려보며 앞으로 나섰다.

천천히 걸어 나오던 그는 점점 속도를 높여 달리기 시작했다.

그자와 거리가 가까워지자 기병대의 부관은 크게 외치며 창을 내질렀다.

"죽어라! 이 무모한 놈!"

부웅!

로브를 입은 남자는 달려오는 말을 향해 거대한 참마도를 휘둘렀다.

콰아앙!

부관의 창은 남자에게 닿지 않았다. 오히려 부관 쪽이 말과 함께 몸뚱이가 갈려 날아갔다.

로브를 입은 남자는 뒤따라오던 기병들에게도 참마도를 몇 번이나 휘둘렀다.

콰앙! 콰앙!

히이이잉!

선두의 기병들이 모조리 쓰러지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머지 호위 인원들까지 전장에 뛰어들었다.

그들도 참마도를 열심히 휘두르며 적 기병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콰앙! 콰앙! 콰앙!

"으아아악!"

"이놈들 뭐야!"

"옆으로 피해!"

데스몬드의 기병들은 다가오는 족족 로브를 입은 자들에게 베여 버렸다. 달려오던 속도를 미처 줄이지 못하고 시체들에 걸려 넘어지는 자들도 부지기수였다.

잠깐 여유가 생기자, 가장 처음에 나섰던 남자가 귀찮다는 듯 로브의 두건을 뒤로 휙 넘겼다.

헝클어진 붉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오우거 슬레이어' 카오르가 건방진 웃음을 지었다.

"이 몸, 등장."

로브를 쓴 자들은, 바로 그림자 산맥에서 몬스터들을 사냥하던 카오르와 헌터들이었다.

290화 이대로 돌파한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