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카슈시(市).
이곳에 있는 사교도 예배당에 와 보는 건 나도 처음이었다.
혹시나 강제 시간 여행을 당할까 봐 그동안은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았다.
"...딱 봐도 여기네."
쿠샨 시에 있던 예배당이 뭘 보고 베꼈는지 바로 알 수 있는 디자인이었다.
좌우 대칭도 맞지 않고, 석재와 목재가 조화롭지 않게 뒤섞인 뱀이 똬리를 튼 듯 구불거리는 형태의 건물.
보기만 해도 참으로 불편해지고 불쾌해졌다.
나는 옆구리에 굉고(訇鼓)의 심장이 든 나무 상자를 낀 채, 예배당의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문에서조차 아주 불쾌한 소리가 났다.
오래되어서 자연스럽게 나는 소리가 아니라, 일부러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귀곡성과도 같은.
"후.... 참, 악취미야."
내부도 똑같았다. 쿠샨시의 예배당과.
무슨 형체인지 짐작도 되지 않는 일그러진 신상들과 제단.
세상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상징들로 가득해, 도무지 정체를 추측할 수도 없었다.
"반응은 없네...."
굉고(訇鼓)의 심장을 제단에 올려 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역시 특별한 의식이 필요한가 보네."
그냥 예배당에 가져온 것만으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상자에 넣어야 하나?
아니다. 좀만 더 지켜보자. 운명의 책이 발동될 때까지만.
그렇게 예배당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오, 시작됐다."
아공간 목걸이가 빛을 뿜어냈다.
세아와 나의 추측이 맞았다.
운명의 책은 사교와 관련된 장소에 반응한다.
아공간 속에 손을 넣어 운명의 책을 꺼냈다.
부르르르-
책은 공기를 맞이하자마자 종잇장을 흔들며 떨어 댔다.
'왜 이래?'
근데 그게 평소와는 좀 다른 반응이었다.
제멋대로 움직일 때가 몇 번 있었지만, 그때는 허공을 날아서 멋대로 촤르륵 펼쳐질 뿐이었다. 이렇게 손안에서 떨어 대는 건 처음이었다.
쿠득!
운명의 책에 정신이 팔려 있는데 갑자기 제단 쪽에서 소리가 났다.
'어?'
제단 위에 올려 두었던 굉고(訇鼓)의 심장이 우그러지고 있었다. 그 머리통보다 더 큰 것이 움푹움푹 들어가며 검붉은 광채를 단말마처럼 토해 냈다.
부르르르르!
운명의 책은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더 힘차게 몸을 떨어 댔다.
우드드득!
마침내 손톱만 한 크기로 쪼그라든 심장.
그것이 검붉은 빛을 흘리며 둥실 떠올라 내게 다가왔다.
아니, 내가 아니다.
운명의 책이었다.
화아아악!
운명의 책이 저절로 열리더니 마치 입을 벌려 삼키는 것처럼 굉고(訇鼓)의 심장을 삼켜 버렸다.
[비틀린 세계선을 흡수 중입니다.]
뭔 소리야?
비틀려? 세계선이?
그게 뭔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운명의 책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책장을 넘겨 봐도 단서는 없다.
그저 연둣빛 광채가 은은하게 흐를 뿐.
'굉고(訇鼓)의 심장이 비틀린 세계선이다...? 무슨 의미지?'
의문점이 너무 많았다.
왜 하필 굉고(訇鼓)의 심장에 반응한 걸까?
그냥 괴물의 심장이면 다 이럴까?
'비틀린 세계선'이라는 건 도대체 무슨 뜻이고?
그리고...
이 책은 이걸 먹어서 뭘 어쩌려고 이러는 걸까?
마치 내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다시 선명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틀린 세계선 흡수 완료. 새로운 기능이 해금됩니다.]
파라라락!
저절로 페이지가 넘어갔다.
보통의 책이라면 목차가 있을 바로 그 부분에 붉은빛 상징 하나가 새겨졌다.
이상하게도 그 상징의 뜻을 나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에필로그 1/1]
에필로그.
조금 부유한 이들이 읽는다는 소설책에서 쓰는 용어.
주요 사건이 다 끝난 후에, 등장인물들의 후일담을 보여 주는... 그거 맞지?
그 상징을 손가락으로 쓰다듬는 순간,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이미 역사 개변을 완료한 장소에 방문할 수 있습니다. 현재 남은 횟수: 1회]
....
방문할 수 있다고?
두근-
뭐야?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방문할 수 있다. 그 의미를 이해하는 순간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잠깐이었지만 출처를 알 수 없는 사무치는 감정이 날 휩쓸고 지나갔다.
'...뭐였지?'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물론.
그립기는 했다.
글로잉스틸이.
금발머리에 푸른 눈을 빛내는 내 선배 이오딘 세롬이.
내게 큰 가르침을 준 라이테나 셀시우스 대공이.
그들을 또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반가운 건 맞다.
근데....
"뭐냐고."
나는 눈가를 쓸었다.
촉촉한 물방울이 손끝에 맺혔다.
"미쳤나...?"
분명 내 것인데...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격렬한 감정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 감정은 내 것이 아니었다.
아니, 내 것은 맞는데... 지금의 나에게서 오지 않은....
뭔가 알 듯 말 듯한 기분.
깊이 생각에 잠긴 내 눈앞으로,
촤르르륵-!
운명의 책이 날아올랐다.
제멋대로 펼쳐졌다.
이번엔 진짜 시간 여행이 시작된 것 같았다.
아, 잠깐.
나도 생각 좀 하자...!
[루세라스력 4681년. 5월 1일 맑음. 드디어 기다리던 1급 용병이 온다! 이제 발굴에도 속도가 붙겠지? 조금 못 미덥기는 하지만....]
뭔가 깨달을 것만 같던 순간에, 운명의 책은 아주 폭력적으로 내 시야에 글자를 때려 박았다.
째깍째깍째깍째깍
훅! 멀어지는 세상과 내 주위를 흘러가는 시간의 강물.
나는 또 한 번 아득한 시간을 건넜다.
* * *
웬 여자가 내게 손을 내밀고 말한다.
"만나서 반가워요. 내가 로레인 스코트빈이에요."
깜빡. 깜빡.
잠깐. 잠시만.
언제나 그렇듯 갑작스러운 시작이었다.
일단은 상황 파악부터.
두리번거리는 것은 수상할 테니, 시선은 눈앞의 여자에게 고정시키고 감각만 곤두세워 주변을 파악했다.
'학자?'
딱 그런 느낌의 방이었다.
원목이 고스란히 드러난 소박한 방인데 층고는 높았고, 그 높은 천장에 머리를 기댄 책장들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었다.
가득 채워진 책은 언뜻 보기에도 다 닳고 닳은 것이, 장식용은 절대 아니었다.
근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평화롭네.'
딱히 주변에 위협이 느껴지진 않았다.
'근데, 여긴 배 안인가?'
쿠르르르르-
은은하게 느껴지는 진동과 함께 방이 조금 흔들렸다.
뭔가 지진 같기도 하고....
"안녕하세요?"
눈앞의 여자. 자신을 로레인 스코트빈이라 소개한 여자가 빙그레 웃었다.
"저 손 민망한데요?"
그녀가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뭐지?
손을 왜 내밀었지?
설마 아바론드 스타일로 무릎 꿇고 손등에 키스를 하라고? 그건 이 시대 예법이 아니잖....
"아."
그제야 떠올랐다.
바보같이. 라이테나 대공이 가르쳐 줬던 건데!
기사들끼리는 잘 안 쓰다 보니 까먹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나는 여유롭게 손을 뻗어 로레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손은 적당히, 마치 어깨만 살짝 잡고 포옹하듯이 그런 느낌으로 잡는다. 부드럽지만 절도 있게 두 번 흔든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고대의 인사 예절, '악수'라는 것이다.
"흐음...?"
성공적으로 악수를 나눴음에도 불구하고 로레인은 묘한 콧소리를 냈다.
빙그레 웃는 눈으로 나를 찬찬히 관찰했다.
그래서 나도 관찰을 했다.
뭐랄까. 로레인 스코트빈. '완벽'한 사람이었다.
일단 그 머리칼.
금발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 여자의 금발은 검은빛이 감돈다.
굉장히 고상해 보이는 그 금발을 그녀는 한 올도 빠뜨리지 않고 완벽하게 뒤로 묶어 올렸다. 소드마스터의 감각으로 본 것이니 틀림없다. 잔머리 한 올도 빠뜨리지 않았다.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걸치고 있는 하얀색의 옷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무릎을 덮을 만큼 길었고 넓은 깃이 달려 있었다. 그 하얀 것에 작은 티 하나도 묻어 있지 않았으며, 주름 하나하나가 다 의도를 지니고 줄 서 있었다.
그런 여자가,
지금 나에게 조금 불만이 있는 것 같았다.
"1급이라고 하셔서 기대 많이 했어요~ 근데 조금 어리바리하신 건 아니죠? 호호"
아,
이 사람. 그거구나.
빙그레 웃으면서 사람 물 먹이는.
그런 스타일이네.
"원래는 이오딘 님께 요청 드리려고 했는데에~ 하필이면 다른 임무를 떠나셔서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됐네요?"
한 마디로 줄이면 왜 이오딘이 안 오고 너 따위가 왔냐 이 말인데....
어?
이오딘?
여기서 이 이름을 들을 줄이야?
아까 가슴을 치고 지나갔던 감정의 잔재가 아직도 남아 있었는지, 어쩐지 울컥 목이 메는 기분이었다.
설마 또 이오딘을 볼 수 있는 건가?
#56화 마갑(魔甲)
이오딘.
그 이름에 놀랐다.
로레인은 그런 내 반응을 조금 다르게 이해한 모양이었다.
"네. 이오딘 세롬 님이요~! 청뢰의 기사. 몰라요? 검을 쓰신다는 분이 청뢰의 기사를 모르면 안 되죠~ 자꾸 저 불안하게 이러실 거예요~?"
이오딘 세롬.
그 이오딘이 맞는 거 같다. 내 선배님.
근데 청뢰의 기사?
'그러고 보니... 지금이 4681년이랬지?'
그럼 8년이 지난 거구나.
이오딘과 내가 글로잉스틸에서 그 고생을 했던 때로부터.
그새 저렇게 멋진 이명도 생긴 건가?
그럼 선배 나이가 벌써 32살?
나보다 연상이네.
만감이 교차했다.
먼 미래에서 이미 그녀의 묘비까지 보고 왔는데... 여기선 잘 지내고 있구나.
지금은 그때보다 더 강해졌겠지? 이젠 익스퍼트 최상급이 되었을까?
'볼 수 있으려나?'
이오딘이 못 와서 대신 날 고용했다고 하니... 보기 어려우려나?
좀 아쉬웠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잠시 잊어버렸다.
눈앞의 여자도, 현재의 상황도.
"휴...."
나를 다시 일깨운 건 로레인의 한숨 소리였다.
"란센 반로아 님?"
"네."
얼른 대답했다.
어쨌든 상황으로 보아 그녀가 내 고용주인 듯했으니까.
"1급 용병이셔서 의뢰비가 상당히 비싸시더라고요? 심지어 주급으로 받으시고."
"그렇겠죠."
잘은 모르지만 뭐 그런 설정인가 보지.
로레인은 생글생글 웃었다.
"근데 그 돈값 못 하면... 바로 해고입니다? 괜찮죠?"
저게 저렇게 웃으면서 할 소린가 싶기는 한데...
"물론입니다."
받아들였다.
뭐 어차피 나에게 의뢰비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솔직히 자신 있었으니까.
"그래요. 그럼 바로 일 시작할게요. 안 피곤하시죠? 피곤하셔도 어쩔 수 없어요~ 1분 1초가 다 돈이잖아요."
로레인은 나를 훌쩍 지나쳤다.
내 키가 185cm인데 그녀의 키가 그리 작게 느껴지지 않았다.
176cm는 되겠는데?
저런 큰 키로 하얗고 긴 옷자락을 날리며 걸으니 꽤 폼이 살았다.
덜컹!
그녀가 문을 열었다.
"아...."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왜 아까부터 미세한 진동과 흔들림이 끊이지 않았는지.
문밖으론 반쯤 파헤쳐진 산이 보였다.
그 풍경이 조금씩 움직였다.
그러니까,
내가 서 있는 이 건물은,
"어서 오세요! 로레인의 움직이는 연구소에!"
산의 옆구리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세상에.
건물이 움직이다니.
과연 마도 시대인가?
근데 놀랄 일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우리 연구소가 마갑(魔甲)을 개발하는 연구소인 건 알죠?"
마갑? 갑옷의 일종인가?
하지만 로레인은 내가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했는지 해당 설명을 건너뛰어 버렸다.
"이제부터 란센 님은 저희 마갑 시제품을 입고 저 산에 묻혀 있는 고대의 유적을 탐사하게 될 거예요."
단어 하나가 턱, 하고 걸렸다.
'고대의 유적'?
고대?
이상한 말이었다.
왜냐면 여기가 이미 고대잖아?
무려 1만 년 전이잖아.
고대에서 고대를 찾다니. 굉장히 모순적으로 들렸다.
하지만 고대라는 개념은 언제나 상대적인 것.
1만 년 전의 고대에도 '고대 시대'라고 불릴 만한 더 오래된 과거가 존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거기서 연구에 도움이 될 만한 샘플을 찾아오는 게 란센 님의 임무랍니다. 무려, 신화 시대의 유물들 말이에요!"
와,
신화 시대.
그럼 인정이지. 마도 시대보다 고대가 맞지.
정신 나간 학자들이 가끔 주장하다가 몰매 맞았잖아? 마도 시대보다 오래된 초고도로 발달한 문명이 있었다. 그게 신화 시대다.
....
근데 그게 정말 있는 거였어?!
* * *
이곳에선 모든 게 내 예측을 벗어났다.
애초에 여기는 움직이는 건물조차 아니었다.
이곳은 차라리 하나의 마을이라 부르는 게 더 정확했다.
움직이는 마을...!
쿠르르르-
무한궤도라 불리는 거대한 강철 바퀴가 땅을 짓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탑처럼 높고 큰 굴뚝에서 새하얀 증기가 구름처럼 뿜어져 나왔다.
나무로 이루어진 흔들다리들이 여기저기 사다리처럼 걸쳐서 건물과 건물 사이를 이었다.
근데 저건 뭘까?
가장 큰 중앙의 건물에는 속이 텅 빈 거대한 금속 봉 같은 게 앞으로 쭉! 뻗어 있었다.
"보이시나요? 학술회관에 있는 저것! 저게 바로! 그 어떤 위협도 무력화시키는! 우리 연구소의 자랑. 10르핌급 마나 대포예요~!"
아아, 대포라는 것이구나. 무기인 모양이지.
그냥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모르겠으니까.
그래도 글로잉스틸은 기사들의 도시라 그런지, 보면 알겠는 물건이 대부분이었는데... 여기는 본격적으로 마법을 다루는 장소라 그런지 모든 게 다 생소했다.
심지어,
로레인이 입고 있는 길고 하얀 옷조차도 처음 보는 디자인이 아닌가?
근데 꽤 멋지단 말이지.
"제 옷 멋있죠?"
로레인이 나를 휙! 돌아봤다.
음. 눈치가 빠르네.
그나저나 갑자기 로레인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를 은근히 돌려 까더니 왜?
"이거 신화 시대의 옷이에요. 아니. 정확히는 신화 시대의 유물을 보고 제가 똑같이 만든 거죠. 후후. 신화 시대의 위대한 마법사들은 다 이런 옷을 입었다고요?"
신화 시대.
그 단어의 울림이 유독 달랐다.
신이 난달까?
환하달까?
그녀는 어떤 떨림을 가득 담아 그 단어를 뱉었다.
나도 모르게 불쑥 물었다.
"좋아하시나 봐요. 신화 시대."
"당연하죠! 무려 5만 년 전의 문명이 지금보다 아득하게 발전해 있었다니.... 너무 신비하지 않아요?"
훅! 샴푸 향이 느껴질 정도로 그녀가 다가왔다.
근데.... 5만 년?
그럼 우리 대륙력 기준으로는 6만 년 전이야?
'신화 시대라는 거. 터무니없이 옛날이었잖아?'
그렇게 옛날의 문명이, 이 찬란한 마도 시대보다 발전했다고?
그럴 수가 있나?
이러니 내 시대의 학자들이 다들 신화 시대를 두고 상상의 산물이니, 허구니 하며 떠들어댔던 것일 테다. 진지하게 신화 시대를 믿는 학자가 나오면 다 같이 달려들어서 물어뜯고 말이지.
근데 짜잔.
그게 진짜로 있었다고 한다.
"애초에 마갑이 신화 시대 유물에서 시작한 거잖아요! 마스터 달슈타인 님은 진짜 천재야! 그때까진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던 신화 시대의 유물을 뙇! 하고 분석! 그 대단한 이론을 고작 스무 살 때 정립하셨다는 게 믿어지세요?"
좋아하는 주제가 나오자 로레인은 점점 더 열렬해졌다.
"달슈타인 님이 그걸 떠올린 순간, 목욕하다 말고 알몸으로 뛰쳐나왔대요. 나와서 뭐라 외쳤는지 알아요? [라이징! 썬더! 킥! 라이징썬더킥!!] 계속 그러고 다녔대요. 진짜 웃기지 않아요? 뭐라는 거야 대체 크크큭!"
재잘재잘.
"아마 그분도 너무 흥분해서 되는 대로 아무 말이나 외친 거겠죠? 아무리 그래도 라이징썬더킥... 푸핫!"
조잘조잘.
사람이 바뀐 것만 같았다.
말투도 아까와 다르고.
굉장히 수다스러웠다.
"어쨌든 그 덕에 신화 시대 전사들이 입던 갑옷을 분석할 수 있게 된 건데, 그게 바로 마갑의 시작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가장 존경하는 마법사가 달슈타인 님이세요!"
로레인은 나를 안내하는 내내 입을 멈추지 않았다.
마갑의 역사. 위대한 초석을 세운 마법사들. 마갑에 적용된 이론과 그 한계까지.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내가 느낀 감상은 하나뿐이었다.
...배고프다.
생각해 보니까 밥을 안 먹었네.
물론,
현재 그녀는 나의 의뢰주였으므로.
입은 기계적으로 추임새를 넣었다.
"오."
"대단하네요."
"흐음~"
"그렇군요."
"저기요."
갑자기 로레인이 나를 불렀다. 날 돌려 깔 때도 생글생글하던 눈매가 지금은 좀 날카로웠다.
"제 말 안 듣고 있죠?"
아,
들켰네.
* * *
나는 어딘가 뾰로통해진 로레인과 함께 '시제품 테스트실'이라는 건물 앞에 섰다.
그녀는 큼큼 하고 목을 한 번 가다듬더니 다시 생긋- 웃었다.
"자, 저기 보여요? 저 산에 움푹 들어간."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가자 보였다.
누가 숟가락으로 퍼먹은 푸딩처럼 한쪽 면이 완전히 파헤쳐진 산. 그 파헤쳐진 부분 안에 웬 건물이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산의 다른 각도, 반대편에도 조그맣게 파헤쳐진 곳이 또 있었다. 그 안에도 웬 건물이 슬쩍 보였다.
로레인은 조그맣게 파헤쳐진 곳을 가리켰다.
"저기가 새로 발견한 입구거든요. 신기술이 들어간 탐색 마법으로 발견했죠."
신화 시대를 정말 좋아하나 봐.
로레인의 목소리가 또 열렬해졌다.
"저기로 들어가면 이 거대한 유적의 훨씬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어요! 심지어 깜짝 놀랄 만큼 잘 보존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녀의 의뢰는 나더러 저기 들어가서 유물을 가져오라는 거였다.
연구소에서 만들어 낸 마갑 시제품 테스트도 겸해서, 마갑을 입은 채로.
'아.... 이건가?'
설명을 듣는 순간, 벼락처럼 확신이 들었다.
저기, 저 유적 안에...
사교와 관련된 뭔가가 있는 거 아닐까?
운명의 책은 결코 아무 장소로나 날 보내지 않으니까.
어떤 사건이 일어날 거고, 그건 사교랑 관련이 있을 거고, 분명 저 유적에서 일어날 거다.
"그러니까 말이죠오~"
불쑥 코앞에 다가오는 흑금발의 머리.
희미한 연둣빛 눈동자가 생긋- 웃었다.
또 태도가 변했다.
신화 시대 이야기를 할 때는 어린애처럼 잔뜩 흥분하더니, 지금은 다시 손익 득실을 따지는 어른의 눈빛이었다.
"1급 용병이니 검 솜씨는 의심 안 할게요. 하지만, 마갑을 잘 다루는 건 또 검술 실력하고는 다른 거잖아요~? 그러니 테스트부터 해 볼 거예요. 마갑 적성 테스트!"
사람이 참, 변화무쌍했다.
"이건 미리 말씀드릴게요~ 섭섭하셔도 어쩔 수 없어요. 만약에요. 제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계약은 그 즉시 파기랍니다? 물론 이건 란센 님 측의 귀책 사유로 인한 계약 파기이니 위약금은 없겠죠? 도리어 이쪽에서 피해 보상을 청구할 수도 있다는 건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고요~ 일 얘기니까 맘 상하지 마실게요~"
조건도 참... 악랄했다.
뭐 그래도,
"그러시죠."
내가 알 바는 아니지.
나는 무심하게 대답하고 건물로 들어섰다.
탁 트인 원형 건물.
입구 쪽에 줄지어 선 거치대에는 매끈한 흉갑들이 오와 열을 맞춰 전시되어 있었다.
그 뒤로 펼쳐진 넓은 공간에는 다양한 장애물과 금속제 허수아비들이 널찍널찍하게 배치되어 있다.
"소장님 오셨습니까?"
불쑥 나타나 인사해 오는 남자.
인사에 절도가 있는 사람이었다.
머리칼은 새하얗고, 고급스러운 정장이 잘 어울리는 노인.
'...궁정 시종장이 떠오르네.'
우리 다 탈출시키고 끝까지 뒤를 맡았던 궁정 시종장....
그를 떠올리게 하는, 몸가짐과 예법을 갖춘 노인이었다. 괜히 호감이 들었다.
"네. 마스터 에오드란. 준비는 됐어요?"
"물론입니다."
"바로 시작할게요."
"예."
에오드란이라 불린 노인이 나에게 다가왔다.
"란센 님? 반갑습니다. 에오드란이라고 합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마갑을 입혀 드리겠습니다."
그를 따라가서 마갑을 보았고,
난 좀 실망했다.
'흉갑 형태였어...?'
물론 마법이 깃든 갑옷이라면 가슴만 가려주는 흉갑이라도 충분히 가치는 있겠지만...
다른 부위야 뭐 따로 파츠를 구해서 채우면 되긴 하겠지만...
그래도 좀 아쉬웠다.
'전신 갑옷이었으면 훨씬 더 비쌀 텐데.'
사실 난 지금, 이 마갑이라는 걸 현대로 가져갈 마음뿐이었으니까.
로레인이 허락을 하든 안 하든, 가능한 많이 싹 쓸어서 미래로 들고 갈 예정이었다.
어쩔 텐가?
나한테 이곳은 거대한 보물 창고나 다름이 없는데.
내가 갖고 싶다면 갖는 것이다.
억울하면 한 1만 년쯤 살아서 날 잡아 보시든가.
이런 마음이었기 때문에 애초에 로레인이 돈값이 어쩌고 해고가 어쩌고 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 나쁜 걸로 치면 내가 더 나쁠 테니까.
아무튼 그래서 아쉬웠다.
가져가서 팔면 전신 갑옷이 훨씬 비쌀 텐데, 흉갑 형태라니.
"먼저 이걸로 테스트를 해 보겠습니다."
에오드란이 하얀색의 가장 멋없는 흉갑을 꺼내 들었다.
'착용감은 괜찮네.'
마갑을 입고 테스트실의 중앙에 섰다.
근데 이 할아버지는 언제 저기로 간 거지?
에오드란은 어느새 시원해 보이는 레몬 음료를 로레인에게 바치고 있었다.
로레인을 깍듯이 보좌하는 지극정성의 모습이 진짜 시종장 할아버지를 떠오르게 한다.
...괜히 또 코끝 찡해지네.
음료를 한 모금 쭉 들이킨 로레인이 설명을 시작했다.
"마갑 처음이죠?"
"네."
고대의 마법 갑옷이라면 나도 입어보았지만, 오는 길에 설명을 듣자 하니, 마갑이라는 건 일반적인 마법 갑옷과는 많이 다른 무언가 같았다.
"그럼 우선, 시동을 해 볼게요."
"네."
덤덤히 대답했지만, 사실은 심장이 뛰었다.
로레인이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마갑(魔甲).
설명을 듣다 보면 단순한 마법 갑옷이 아닌 것 같던데.
과연 그 성능이 어떨까?
이걸 현대로 가져가면 전력 향상에 도움이 될까?
두근두근 기대가 되는 것이다.
#57화 함락
로레인은 내게 마갑을 시동하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검령과 소통을 해 보셨죠? 마갑이 검이라 생각하고 교감해 보세요. 가슴 가운데 마나 하트 보이시죠?"
슬쩍 내려다보니, 큼지막한 마석이 보였다.
은빛과 금빛을 내는 금속이 테두리를 형성하고 사이사이에 복잡한 문양이 상감되어 있었다.
"거기를 중심으로 집중하세요. 검기를 만들 때랑 비슷한 느낌으로. 단, 이번엔 검령이 아니라 갑령(甲靈)과 소통을 하는 거죠."
음....
검기를 만들 때랑 비슷하다고?
애초에 갑옷과 검은 너무 다른 건데...?
감이 잘 안 왔다.
이렇게 하는 건가?
"참고로 아무리 늦어도 15분 내로는 시동을 성공하셔야...."
우우웅-!
울었다.
마갑(魔甲)이.
구우우웅-!
마나 하트에서 빛이 뿜어졌다.
선명했다.
마갑 구석구석으로 흘러들어 가는 마나가.
이게 되네?
"...됐네요?"
로레인의 눈이 살짝 커졌다.
나도 신기했다.
검령(劍靈)이든 갑령(甲靈)이든, 결국에는 사람이 만든 물건에서 태어난 영혼. 그 본질은 같았다.
덕분에 예상보다 훨씬 쉽게 교감에 성공했다.
어쩐지 기뻐서 살짝 웃을 뻔했다.
나는 얼른 감정을 숨기고 일부러 무미건조하게 물었다.
"네. 됐습니다. 다음 단계도 있습니까?"
로레인이 나에게 2번이나 돈값을 해야 할 거라고 말했으니, 기꺼이 내가 그 이상임을 보여 줄 작정이었다.
그래서 웃지 않았다.
이깟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태도를 유지했다.
"흠~ 예상보다는 센스가 좋으실지도?"
로레인은 눈으론 나를 평가하며 입으로만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랍니다? 잘 견뎌보세요. 본격적으로 마나가 흐르기 시작하면, 좀 아플 거거든요."
그래? 아프단 말이지. 괜찮다. 그런 거 잘 참는다.
긴장하고,
기다렸다.
근데,
이거 뭐지?
"...."
"왜요? 많이 아프신가요?"
"...."
"왜 아무 말씀이 없으세요?"
...대체 뭐가 아프다는 건데?
마나 하트에서 시작한 마나가 점점 가속하여 마갑 전체를 맹렬히 휘돌았지만...
어우- 상쾌해.
오히려 오러를 운용한 것처럼 온몸에 힘이 충만해졌다.
오러 없이도 잘 만든 강철검 하나쯤은 맨손으로 구겨 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마갑.
단순한 마법 갑옷과는 다르다더니....
착용만으로도 육체를 강화시켜 주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일반적인 마법보다 훨씬 증폭률이 강한 것 같았다.
마법이 아닌 오러로 신체를 강화하는 방식과도 유사해 보였다.
그러니 아플 리가 없었다. 오러를 체내에서 순환시키는 나에게, 고작 마갑을 타고 흐르는 마나의 압박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안 아프세요?"
"안 아픈데요."
"안 아프다고요?"
"네."
"그럴 리가... 없는데?"
"안 아픕니다."
"잠깐만요. 그럼 스킬도 한번 써 보세요."
"어떻게 쓰죠?"
"마나 하트와 공명을 유지하면서 마갑이 알려 주는 대로 마나를 인도해 보세요."
마갑이 알려 주는 대로....
우웅-!
아아. 알 거 같다.
마갑에 촘촘히 새겨진 회로.
마나가 흐르는 수많은 선 중, 특정한 패턴으로 마나를 흘려보내면 되는 거다.
그건 체내의 오러를 특정한 방식으로 운용하는 오러 심법과도 상당히 유사한 것이었다.
"이번엔 꽤 어려울 거예요. 일단 공명을 통해 마나를 인도하는 감각부터가 좀 시간이 걸릴 텐데... 천천히 해 보세요."
로레인의 목소리엔 슬슬 기대감이 섞여 들고 있었다.
그래 내가 오늘 돈값 제대로 한번 보여 줄게.
"알겠습니다."
전혀 어려울 게 없었다.
애초에 마나는 오러보다도 다루기가 쉽거든.
더 강하고 난폭한 오러도 숨 쉬듯 다루는 나에겐, 정말 너무 쉬운 일이었다.
마갑이 알려 준 패턴대로 마나를 간단하게 인도했고, 바로 그 순간,
후웅-!
내 주변으로 바람이 몰아쳤다.
이건?
직감으로 깨달았다.
이 마갑에 내장된 스킬이라는 건,
[비행]
후우웅!
순간적으로 치솟는 시야. 로레인의 정수리가 내려다보이고 드높았던 테스트실의 천장이 머리에 닿을 것처럼 가까워졌다.
로레인이 목을 부러지라 꺾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입이 헤- 벌어져 있었다.
"했다고? 이렇게 쉽게?"
오,
그녀의 얼굴에서 생글거리던 여유가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뜨겁게 달아오른 열망.
이게 시작이었다.
로레인은 완벽한 기장으로 똑 떨어져 있던, 하얀 겉옷의 소매를 걷었다.
"이, 이거! 이거도 입어 봐요!"
이번에는 처음 것보다 조금 더 화려한 마갑이었다.
스킬도 무려 두 개나 내장된.
[충격파]와 [실드]
오.... 이거 좋은데?
스킬을 써 보고 좀 놀랐다.
강력했다!
마갑으로 발동한 [충격파]는 소드마스터도 잠깐은 휘청거리게 만들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전장에서 그건 생과 사를 가르는 차이였다.
실드도 충분히 강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어지간한 오러 실드보다도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스킬의 위력에 놀랐고, 로레인은 그런 나를 보고 놀랐다.
"이것도 이리 쉽게? 출력이 2배짜리인데? 안 아파요? 안 힘들어요? 진짜?"
"네. 전혀."
"그, 그럼 이번엔 이걸로! 이건 아무나 시동 못 하는 건데...."
로레인이 상의 단추 2개를 풀어헤쳤다.
완벽하던 차림새가 조금씩 흐트러지고, 대신 이글거리는 열정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새로이 착용한 마갑.
'이건 디자인부터가 장난 아니네.'
우리 시대로 가져간다면 무조건 국보가 될 수 있는, 그런 예술성이 느껴졌다.
스킬도 무려 3개.
[돌진], [실드], [가속]
게다가 이 녀석은...
치르르르릉!
시동을 하면, 변신을 했다!
가슴만 겨우 가리는 흉갑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싸는 전신 갑옷으로!
가슴 속에 부르르- 떨려오는 감동.
이건 정말 비싸겠는데?
아니, 이건 못 팔겠다. 우리가 써야지.
심지어,
'...맨손으로도 어지간한 소드 오러를 깨뜨릴 수 있을 것 같아.'
육체의 강화폭도 대폭 커졌다.
오러를 운용 안 했는데도, 힘이 넘쳐났다. 이제 여기에 오러까지 운용하면 대체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감동했고, 로레인은 전율했다.
"그, 그렇지! 다음! 다음 것도! 그래 이것도! 저것도!!!"
로레인은 이제 아예 자기가 그토록 자랑하던 하얀 겉옷마저 벗어 던졌다.
그동안 테스트하지 못했던 온갖 시제품들을 꺼내와 내게 입히고, 열심히 뭔갈 측정하고 기록하는 것이었다.
더 이상, 생글거리며 날 쿡쿡 찌르던 로레인은 없다.
그저 나를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로레인이 있을 뿐.
그리고 마침내,
테스트실에 있던 모든 마갑 중에서 가장 출력이 강한, 그래서 여태 테스트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던, 최강의 마갑까지 내가 시동해 보였을 때,
그리고 그 기능 전부를 완벽하게 시연했을 때,
로레인은 뭔가를 열심히 기록하다가 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듯, 몇 번이고 측정 기록과 자신의 계산을 비교해 보더니,
마침내 머리를 쥐어뜯으며 이렇게 환호하는 것이었다.
"라... 라이징썬더킥!"
산산조각.
생글생글 나를 후려치던 그녀가,
바사삭- 함락되는 순간이었다.
* * *
라이징썬더킥이라니....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지금도 보라.
저기엔 한 마리의 불한당이 있을 뿐이다.
"아니 놔 봐! 아니! 흥분 안 했으니까 놔 보라니까? 그냥 말만 해 본다니까!?"
하얀 옷에 완벽하게 잡혀 있던 주름은 이젠 아무런 미학도 찾아볼 수 없는 한낱 구겨짐이 되고 말았다.
한 올도 빠뜨리지 않고 완전히 묶어서 넘긴 흑금발은 산발이 되었고, 한때 우아한 자태를 뽐내던 머리끈은 머리 뭉텅이 한쪽에 낙엽처럼 간신히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행패를 홀로 가로막은 것은 백은발의 머리칼을 멋지게 넘긴 시종장... 아니지, 원로 마법사이자 이 연구소의 선임 연구원, 마스터 에오드란이었다.
"안 됩니다. 소장님."
"아니! 물어만 본다고 물어만! 물어볼 수는 있잖아?"
"그 물건은 절대 안 됩니다. 소장님이 제일 잘 아시지 않습니까?"
"어쩌면 될 수도 있잖아?!"
"그건 잘못되면 불구로 끝나는 게 아니라 몸이 뻥! 터져서 죽...."
"안 죽을 수도 있잖아!"
"소장님. 죽을 수 있다는 거 자체가 문제...."
"그러니까 물어만 본다고!"
광분.
로레인은 그야말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태였다.
저걸 차분하게 받아 주고 있는 에오드란이 그저 놀라울 뿐.
저 할아버지가 아까부터 쭉 그러긴 했다.
로레인이 소매도 걷고 단추도 풀고 하며 서서히 흥분하기 시작했을 때도,
에오드란은 그 옆에서 부채도 부쳐 주고 물도 따르고 차도 끓여오고 좀 앉으라고 의자까지 준비하며 지극정성으로 로레인을 보살펴 주었다.
아무리 봐도 시종장으로서 최고의 인재다.
"후...."
끝까지 차분하게 로레인을 진정시키던 에오드란은 마침내 긴 한숨을 뱉었다.
그러곤,
"소장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발버둥 치는 로레인을 번쩍 들어서 어깨에 짊어지더니 테스트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노인장이 힘도 좋네....
고함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기회잖아! 이건 역사를 바꿀 기회라고! 그 시대의 역작을! 테스트해 볼 수 있는! 테스트를 해 봐야 개선도 하고 완성도 하지!"
"세상에 위험 없는 성취가 어디 있다고 그래!!"
"아니, 나, 나, 잠깐! 잠깐 놔 봐! 그냥 말만 해 볼게? 응? 말만 한다고오오"
점점 멀어지는 목소리.
잠시 뒤, 에오드란이 피곤한 얼굴로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란센 님. 일단 일정대로 움직여야 하니, 이제부터 사용하실 마갑을 조정해 드리겠습니다."
"네."
그래서 로레인은 어떻게 됐지?
궁금하긴 했지만, 묻지 않았다.
나는 이 시대를 잘 모르니 가급적 말을 줄여야 실수가 없을 테니까.
"당황하셨을 것 같습니다."
에오드란이 내 치수를 재며 운을 띄웠다.
"첫날부터 대단히 죄송합니다. 하지만 나쁜 분은 아닙니다."
어... 음....
나쁜 사람이 아니야?
난 잘 모르겠다. 악덕 고용주는 맞는 거 같던데.
"식사가 준비되어 있으니, 식당으로 모시겠습니다. 유적 탐사는 4시간 뒤부터입니다. 식사 마치고 좀 쉬시다가 3시간 뒤까지 유적 앞에 집합해 주시면 됩니다. 그때 따로 안내 드리겠습니다."
보라고. 오늘 처음 인사했는데 바로 유적 탐사에 집어넣는다잖아.
악덕 고용주 맞다니까.
"다 됐습니다."
에오드란이 마갑의 조정을 마쳤다.
회색에 가까운 푸른빛. 멋들어진 흉갑이 내 가슴을 꼭 맞게 덮어 주었다.
이건 내가 마지막으로 테스트했던 것과 같은 종류였다.
가장 성능이 뛰어나고 가장 아름다운 모델의 마갑.
"감사합니다."
덤덤히 인사했지만, 속으론 심장이 뛰었다.
마갑.
상상 이상의 성능이었고, 상상 이상으로 멋진 물건이었다.
'이건 반드시 가지고 돌아가야 돼.'
되도록 많이.
되도록 좋은 것으로.
굳게 다짐했다.
* * *
식사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이거 뭐냐고 물으니 마나로 가공한 조미료의 맛이란다.
음식에도 마나를 넣다니!
이것이 마도 시대!
포만감을 느끼며 기분 좋게 식당을 나서는데, 로레인이 앞을 막고 서 있었다.
아까의 불한당은 어느새 사라지고, 완벽하게 빗질한 머리와 티 한 점 없는 하얀색 옷차림이었다.
"비밀을 알았어요."
그녀는 대뜸 그렇게 말했다.
"특이체질이죠? 마나를 직접 다룰 수 있는."
오....
이걸 바로 알아차리네.
"테스트 데이터가 너무 이해가 안 가서 한참을 봤거든요. 사람이라면 이럴 수가 없는데.... 그러다가 퍼뜩 떠올랐죠. 라이테나 대공전하의 제자 중에도 그런 체질이 있었다는 게! 설마 그런 사람이 또 있을 줄은 몰랐지만... 제 말 맞죠?"
나는 딱히 대답을 하진 않았다.
말을 많이 해 봐야 실수만 늘어나는 법이니.
'근데 신기하기는 하네.'
특이체질을 가진 라이테나 대공의 제자라....
'그거 내 얘기잖아?'
1만 년 전 사람의 입에서 내 얘기가 나오니까 기분이 참 요상하다.
로레인은 내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눈을 반짝였다.
평소의 그 가식적인 생글거림이 아닌, 열정과 기대로 가득 찬 그런 얼굴.
"혹시! 제가 실험해 보면 안 되나요?"
"실험요?"
"그! 특이체질이요! 어쩌면 그 안에 마도 공학을 진보시킬 열쇠가 있을 수도 있다고요!"
내 몸을 두고 실험을 하겠다고?
솔직히 안 될 건 없다.
하지만 로버랜드의 협상가는 절대 먼저 반응을 보이지 않는 법.
언제나 마지못해 해 준다는 태도. 그게 제일 좋았다.
"일없습니다."
툭, 말하고 그녀를 지나쳤다.
"잠깐! 잠깐만요!!"
역시나 로레인은 날 다급하게 부르며 쫓아왔다.
그렇지.
흥정은 이렇게 시작하는 거다.
줄타기가 중요하다.
안달은 나게 하면서, 빈정은 상하지 않게.
내 표정은 무덤덤했지만, 머릿속은 온갖 계산으로 분주했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특이체질을 실험해 볼 기회라....
이걸 빌미로 어디까지 뜯어낼 수 있으려나?
결코 적진 않을 거다.
나 똑똑히 들었다고.
저 입으로 "라이징 썬더 킥!"하고 외치는걸.
#58화 탐사대장
로레인은 종일 나를 따라다녔다.
그러면서 틈틈이 가이드도 맡아 주었다.
"저기가 고대 유물 연구실이에요. 유물을 발견하면 저기로 가져가면 돼요."
"굴뚝 엄청 크죠? 마석 가공장이라서 그래요. 마석의 용량과 출력을 높이려면 아주 뜨거운 열이 필요하거든요."
"여기가 마갑 설계실. 여기서 설계한 걸, 요 옆에 마갑 제작장에서 만들어요."
쿠르르르-
이 많은 건물을 싣고, 무한궤도라 불리는 강철 바퀴는 산을 짓밟으며 나아갔다.
중간중간 멈춰 서서 무언가 조사와 측량을 진행했기에,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다.
아까 에오드란이 알려 준 집합 시간쯤 되어야 유적 입구에 도달할 것 같았다.
그 긴 시간 내내, 로레인은 나에게 졸라댈 생각인 것 같았다.
"아.... 정말... 진짜 연구해 보고 싶다고요...! 마나를 직접 다룰 수 있는 체질이라니! 대공전하의 제자를 제외하면 전무후무했다고요! 근데 그분은 뵙기 어려운 분이고... 당신밖에 없어요. 좀 어떻게 안 될까요?"
"일없습니다."
그녀의 끈질긴 구애를 건성으로 받아넘겼다.
사실 지금은 그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게 있었으니까.
'저놈은 뭐야?'
한 15분 전쯤부터였다.
마석 가공장 앞을 지날 때.
그때부터 웬 놈이 우리 뒤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이 시대를 기준으로 보면 꽤나 훌륭한 미행 솜씨였다.
소리도 안 나고, 어째서인지 눈에도 잘 띄지 않고, 기세도 느껴지지 않는.
하지만 환골탈태까지 이룬 내 감각을 피할 순 없다.
'계속 노려보네?'
연노란색 머리칼에 연노란색 눈동자. 얼굴엔 주근깨가 있고 키는 169cm쯤 되어 보인다. 나이는 20살? 21살?
그 청년은 계속 우리를 쫓아왔다.
잡아서 물어보고 싶었지만, 일단은 참았다.
나는 여기 사정을 잘 모르니까.
다만...
'왜 나한테 저래?'
나를 향한 적대감이 뚜렷했다.
연노랑 눈동자에 벼락이 치듯, 아주 죽일 듯이 날 노려보고 있었다.
뭐지?
주변 사람들이 인사도 하고 지나가는 걸 보면 수상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모르겠다.
"아, 그냥 딱 말해요! 얼마예요? 얼마면 되냐고요!"
계속 달라붙던 로레인이 마침내 '금액'을 입에 담았다.
그렇지. 협상은 이때부터가 시작이지.
"그건 저를 원하는 로레인 님이 아셔야죠? 제가 어떻게 압니까?"
이게 로버랜드의 협상가들의 유구한 기술.
선제시요.
* * *
쿠르르르-
느릿느릿 그러나 확실하게 굴러가던 무한궤도가 마침내 멈춰 섰다.
낮에는 꽤 멀리 보이던 유적 입구가 이제 코앞에 닿았다.
나를 유적 앞까지 안내한 것도 결국 로레인이었다.
아무래도 생각하는 가격대가 서로 안 맞았기 때문에 대화가 자꾸 길어진 탓이었다.
로레인은 자꾸만 금화를 말하는데, 내게 필요한 건 금화가 아니었으니까.
"마갑으로 주시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로레인은 정색을 했다.
"미쳤어요? 그게 얼마짜린데.... 돈도 돈이지만, 우리 핵심 기술이 담긴 거라고요! 그걸 뭐 아무한테나 파는 줄 알아요?"
"아, 네. 그럼 말고요."
"끄아악!"
그렇게 평행선을 달리는 대화를 계속하며, 유적 입구까지 함께 오게 되었다.
"엇? 소장님이네."
"소장님 안녕하십니까~"
유적 입구엔 벌써 천막이 하나 서 있었다.
'탐사팀'이라고 한 켠에 써 있다.
"네. 다들 안녕하세요~"
떼쓰는 어린아이의 표정에서, 얼른 생글거리는 표정을 덮어쓰는 로레인.
"이쪽은 란센 반로아 씨예요. 무려 1급 용병이니 유적 탐사도 더 탄력이 붙겠죠?"
"1급!"
"오오-"
자유분방하게 서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4명의 남녀.
딱 봐도 용병들이었다.
아무래도 저들과 내가 한 팀인 모양이었다.
용병들은 하나씩 이름을 밝히고 내게 악수를 청했다.
그렇게 한 바퀴가 돌고 나자 루코라고 자기를 소개한 50대 용병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 그런데 지금 탐사대장님이 안 계시네."
"그러게요? 캐스크 씨가 어딜 갔지? 분명 아까 로레인 씨를 보러...."
"야. 야."
밋시라는 여자 용병이 의문을 드러내자 데푸안이라는 남자 용병이 얼른 옆구리를 찔러 눈치를 줬다. 여자 용병은 황급히 입을 가렸다.
뭔가 묘하게 다들 로레인의 눈치를 봤지만, 정작 로레인은 아무것도 못 느낀 모양이었다.
"인사 나누시는 것까지 봤으니 전 이만 갈게요~ 시간 보내시다가 6시 되면 탐사 시작하시면 됩니다~ 돈 많이 벌어 오셔야 해요!"
그녀가 생글생글 멀어졌다.
그녀가 사라지자, 그가 다가왔다.
여태껏 우리를 미행하던, 연노랑 머리에 주근깨. 작은 키에 꽤 곱상한 얼굴을 가진 녀석.
그는 거침없이 다가와서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딱 한 마디를 던졌다.
"너였냐?"
뭐가.
"여어, 대장. 있었네?"
"하기야 로레인 씨가 있는데 캐스크 씨가 없을 리가 없죠."
옆에서 용병들이 떠들어댔다.
아, 그러니까 여태 날 미행한 얘가 탐사대장이었어?
이름이 캐스크?
21살쯤 되나. 어려 보이는데....
나는 그런 생각을 했을 뿐인데.
"잘난 체하지 마!"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청을 푹! 찔렀다.
연노랑 머리의 키 작은 용병대장은 잔뜩 화가 나서 나를 쏘아붙였다.
"잘 들어! 로레인이 왜 너랑 붙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그냥, 그 사람이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상냥해서 그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변 용병들이 웅성거렸다.
"상냥?"
"친... 절?"
"돈에 미친 그 연구소장 말하는 거 맞아?"
"그 마녀가...?"
그 순간 캐스크의 연노랑색 눈이 희번뜩! 광채를 토했다.
"...."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대장."
오,
어려 보이는데 대장으로서의 권위는 확실히 세워 둔 모양이었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이는 용병들이 꼼짝도 못 하네.
캐스크가 한동안 용병들을 노려보다가 다시 나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여하튼. 로레인은 너한테 관심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괜히 착각해서 찝쩍거리면... 너 죽어. 알겠어?"
잘 알겠다.
니가 로레인에게 푹 빠진 애송이라는 건.
뭐라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은데, 할 말이 없기에,
"음.... 그래! 너 가져."
그냥 받아들였다.
"야!!!"
아니 왜 화를 내? 알겠다는데....
캐스크 놈은 부들부들 떨며 날 쏘아보다가 갑자기 코웃음을 쳤다.
"흥! 근데 실력자를 보내 달랬더니 웬 애송이가 온 거야? 하여튼 이 연구실 직원들은 일을 안 해. 맨날 로레인만 고생시키고."
인상적이다.
그 와중에도 로레인이 아니라 직원들 탓을 해 버리네....
꽤,
재미가 있다.
"저기 근데. 캐스커랬나?"
그렇게 물었더니, 캐스크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캐스크! 캐스크 탐사대장님! 호칭 똑바로 해!"
"그래. 대장님. 혹시 나이가?"
"하? 지금 나이 대접받고 싶은 거야? 용병이? 실력으로 얘기 안 하고?"
"그래서 나이가?"
"스물넷. 왜, 너보다 어린 사람 밑에 있으려니 자존심 상해?"
오 보기보다는 나이가 있네.
근데 하는 짓이 왜 16살만도 못하냐.
"아니. 나이는 상관없는데...."
난 슬쩍 칼자루에 손을 얹고 캐스크를 빤히 응시했다.
"실력은 되나, 궁금해서 말이지."
"하?"
"나보다 실력이 낮은 사람이 날 두고 평가질하는 게 싫어서."
캐스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차라리 잘 됐다는 듯이 콧김을 뿜어내며 말했다.
"오냐. 어차피 해야 할 거, 지금 바로 해 보자. 실력 테스트."
녀석은 유적 앞 공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신 너. 내가 테스트 해 보고 실력 안 되면 내 직권으로 바로 해고다? 까짓 위약금 내가 물어 줄게."
아주 자신감이 넘치는데?
나도 그를 따라 공터쪽으로 이동했다.
미끼를 던졌다.
"그럼 아예 내기를 하지?"
"내기?"
"내가 지면, 위약금 안 받고 여길 떠난다. 대신 네가 지면. 내가 해 달라는 거 뭐든 해 줘."
"하? 니가 날? 이길 수 있을 거 같냐?"
"내기, 할 거야?"
"어디 들어나 보자. 뭘 원하는데?"
글쎄, 아직은 모르지. 일단 약속받아 놓고 나중에 생각해야지. 네가 뭘 줄 수 있는지.
"할 거냐고 말 거냐고."
"아니. 무슨 요구인지는 내가 알아야 내기가 성립하는...!"
"혹시 쫄았어?"
애송이 캐스크에겐 그 말이 치명타였다.
"칼... 뽑아."
으르렁거리며, 캐스크는 검을 뽑았다.
마법 검인가? 칼몸 곳곳에 기하학적인 무늬가 상감되어 있다.
"내기한다고? 확실히 말해."
"해! 한다고! 칼 뽑아!"
"내기 성립."
나도 검을 뽑았다.
반로아는 아니다. 그건 너무 눈에 띄니까 아공간 속에 미리 넣어 뒀고 지금 가진 칼은 흔한 고대 검이었다.
캐스크가 비릿하게 웃었다.
"너, 상대 잘못 골랐어."
웅성웅성 구경 중이던 용병들이 그 말에 앞다퉈 동의를 표했다.
"그건 맞지."
"아무리 1급 용병이어도... 대장이 상대면, 얼마나 버티려나?"
"그러니까. 나도 처음에 대장 나이 때문에 속았다가... 아, 아직도 아프다."
진짜 싸움 좀 하나 보네?
그런데 이상한 건, 나이에 비해서 느껴지는 기세가 대단하긴 했지만, 또 그게 막상 그렇게까지 대단하진 않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가 궁금했는데,
파지지직!
다음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캐스크가 온몸에 벼락을 휘감은 채 비릿한 웃음을 띠었다.
"내가 바로 오로세라의 공인 마검사거든."
오로세라.
공인 마검사.
와!
마법도 쓰고 검도 쓰는 거야?"
캐스크는 아주 자신만만했다.
"란센? 1급이랬나? 힘 조절 안 한다? 죽지 마라?"
빠지지직!
순간적으로 휘몰아치는 전격과 함께 섬전 같이 쇄도하는 캐스크.
그런데,
바로 며칠 전에 그랜드마스터와 싸웠던 내 눈엔...
너무 느렸다.
콰직!
벼락을 잘랐다.
아, 마법으로 이루어진 벼락은 저렇게 꽃잎처럼 흩날리는구나.
"어...?"
캐스크의 연노랑 눈동자가 와들와들 흔들렸다.
"내, 내 검...?"
탱그랑!
벼락과 함께 두 동강 난 검신이 바닥에 떨어졌다.
놀라는 걸 보니, 꽤 비싼 거였나 봐?
"어? 어어...?"
반토막 난 검을 들고 고장 난 것처럼 어어어 소리만 내는 캐스크.
그걸로 승부는 끝이었다.
나는 검을 칼집에 넣고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정했다."
"무, 뭐?"
"너한테 바라는 거."
"뭐, 뭔데."
"마법. 네가 가진 마법 지식. 전부 다."
안 그래도 그런 생각을 했다.
마을 규모의 거대한 건물을 통째로 이동시키는 무한궤도.
입기만 하면 몇 배는 강해지는 마갑.
이런 마법의 세계를 접하면서.
마음이 동했다.
고대의 마법 기술. 현대로 가져가야겠다.
내가 배울 건 아니지만....
"마법 책 가진 거 전부. 거기에 네가 개인적으로 정리한 노트랑 주석까지 전부. 뭐든지 전부. 싹 다 내놔."
캐스크의 눈동자가 두 배는 더 빠르게 흔들렸다.
* * *
"후...."
"하아...."
어디서 자꾸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캐스크였다.
"...죽고 싶다."
이젠 중얼거리기까지 하네.
아주 좋은 징조다.
괴로워한다는 것은, '내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방증이니까.
마도 시대라고 불리고 있지만, 여기서도 마법은 아무나 접할 수 없는 고급 학문에 속하는 듯했다.
책 한 권 한 권도 비쌀 거고, 그걸 자기식대로 정리한 노트는 개인적 의미도 깊은 보물이겠지.
그걸 통째로 내놓을 생각을 하고 있으니 저리 괴로워하는 거다. 애초에 줄 생각이 없으면 괴로워하지도 않을 텐데.
물론,
끝까지 봐야 알긴 할 거다.
갈등 끝에 배 째라고 나올 가능성도 없지는 않으니까.
"후...."
캐스크 녀석이 많이 괴로워하긴 했지만, 별로 불쌍하진 않았다.
애초에 먼저 힘을 앞세워서 날 핍박한 게 저 녀석이니까.
힘에는 힘.
폭압에는 폭압.
이게 로버랜드의 규율이지.
"후...."
또다시 크게 한숨을 쉬던 캐스크.
그는 돌연 두 손으로 자기 양 뺨을 짝! 소리 나게 때리더니, 뒤를 돌아봤다.
"일단 들어가자. 탐사 시간이다."
그 와중에, 탐사 대장으로서 자신의 역할은 잊지 않았다는 점은 제법이었다.
#59화 신화 시대
"다들 주목. 여기부터 유적이야. 기록장치 작동시키고. 초입부라 별 위험은 없겠지만 긴장은 놓지 마. 아, 기록장치 중간에 끄면 징계감인 거 알지?"
애송이 캐스크.
의외로 지휘가 깔끔했다.
모두들 그의 지시대로, 영상 기록 아티팩트를 작동시켰다.
이걸로 연구소는 유적에 대한 자료를 확보하며 우리를 감시하기도 할 것이다.
용병들이 귀한 유물을 빼돌릴 수도 있으니까. 나름의 안전장치인 셈이다.
나는 슬슬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게 신화 시대의 유적.'
생전 처음 보는 유적이었지만, 그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왠지 이 거대한 건물의 용도를 알 것만 같았다.
'요새....'
애초에 입구부터가, 입구가 아니라 그냥 박살 난 구멍이었다.
금속 벽이 밖에서 안으로 터져 들어간 형태.
단단한 방호벽을 거대한 무언가가 녹이고 짓이겨 뚫으면, 딱 이런 형태의 '침입구'가 생겨날 것 같았다.
그리고 내부로 들어서니,
'밖이 보이네.'
분명 산 안에 파묻힌 건물인데, 사방으로 밖이 시원하게 내다보였다.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건지는 모르겠으나, 안에서만 밖을 볼 수 있으며, 단단한 벽면으로 둘러싸인 이 구조는,
무언가를 방어하는 시설인 '요새'의 정의에 퍽 잘 들어맞았다.
이어지는 캐스크의 설명도 그랬다.
"이곳은 크고 작은 방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구역마다 격벽이 있어. 이쪽도 다르지 않을 거야. 그러니 한 구역씩 철저히 수색하고 격벽을 해제한 뒤 다음 구역으로 넘어간다."
구역을 나누는 격벽. 그것도 무언가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닐까?
근데 그러면 궁금한 게 생긴다.
'대체 뭐랑 싸우면 이렇게 되는 거지?'
6명이 뿔뿔이 흩어져 수색을 시작했는데, 자세히 보니 가관이었다.
여기저기 터지고 깨진 벽면.
사람의 형체는 온데간데없고 여기저기 찌그러진 채 남겨진 갑옷과 금속 파편들.
그리고,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살덩이들이, 여전히 살아있는 것처럼 여기저기 벽면을 덮고 꿈틀거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한때는 거대한 공포가 이곳에 내려앉았을 거라는 건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신화 시대의 전쟁과 파멸...?'
굉장히 호기심을 자극하는 주제가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그 아비규환의 흔적 속을, 샅샅이 뒤졌다.
"이것도 안 되고.... 이건... 애매하다. 패스."
연구소에서 원하는 샘플은 보존 상태가 좋은 유물이었다.
때문에 나는 꽤 넓은 공간을 뒤진 끝에야 겨우 멀쩡한 물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근데 이거 쓸모 있는 거 맞나?'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직사각형의 물체.
전면은 심연처럼 검고 어두웠으며 뒷면은 세련된 금속광택을 뿜어내는 우윳빛이었다.
심상치 않게 생기긴 했는데 도통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를 모르겠다. 만져봐도 아무런 반응도 없고.
"캐스크."
애송이 녀석은 내가 많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부르자 화들짝 어깨를 움츠리더니, 헛기침을 하며 애써 의연한 척을 했다.
"왜, 왜?"
"이거 봐. 괜찮아?"
"오?!"
우물쭈물거리던 캐스크의 태도가 돌변했다.
"와! 마도 단말기! 이렇게 잘 보존됐다니! 로레인이 좋아하겠다!"
"그래?"
"완전 그래!"
좋아하면 닮는 건가...?
이 녀석도 일단 뭔가에 꽂히면 굉장히 수다스러워졌다.
"고고학 조사에 따르면 옛날 사람들은 이걸로 마법을 사용했대! 심지어 마법사가 아닌 사람들도!"
"아티팩트야?"
"맞긴 한데 그 유연함이 차원이 달랐던 거지! 장거리 통신이나 데이터 전송은 기본이었고, 특정한 마법이 담긴 게 아니라, 그때그때 원하는 마법을 저장시켜서 썼대."
이해가 안 갔다.
"마법을 저장시켜? 그럼 그때마다 마법사한테 찾아가서 돈 주고 저장해 달라고 하는 거야?"
"말했잖아. '데이터 전송'이라고. 마나와 마법 역시 데이터란 개념에 포함되거든. 그러니까 언제! 어디서든! 새로운 마법을 즉시 저장하고 심지어 변형까지 했다는 거지."
...그게 말이 돼? 그래도 되는 거야?
"그럼 마법사가 필요 없잖아?"
너무 사기 아닌가?
"그러니까 신화 시대지! 분명 신이 만든 물건일 거야!"
설명을 듣고 보니,
탐이 났다.
저거 어떻게 못 살려 내?
갖고 싶은데....
하지만 샘플 부족으로 아직 거의 연구가 안 되었다고 하니, 입맛만 다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첫 번째 구역의 탐사는 종료되었다. 성과는 내가 발견한 마도 단말기 하나.
다음 구역으로 넘어가는 통로는 격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이게 격벽...."
나는 격벽이라길래, 웬 쇠창살 같은 걸 상상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마주한 건 옅은 붉은빛을 뿜어내는 반투명한 막이었다.
웅- 우웅-
가늘게 진동하는 그것은 주변의 공기마저 밀어내 바람을 일으켰고,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졌다.
"대체 이게 뭐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뭐긴 뭐야? 신화 시대의 마법이지!"
캐스크가 으스대며 앞으로 나섰다.
"이건 익스퍼트 최상급의 달인이 와도 찢을 수 없어. 그래서 마법이 필요한 거야."
쟤는 모르는 것 같다.
내가 왜 놀랐는지.
'오러? 마법?'
환골탈태를 이룬 내 감각에 잡힌 빛의 장막.
그것은 분명 오러였으나, 동시에 마법이었다. 마나가 오러가 되고 오러가 마나가 되며 끊임없는 소통을 한다.
마나가 오러가 되는 건 맞다.
근데 오러가 다시 마나가 돼...? 박살이 나 흩어지는 것도 아니고 저렇게 자연스럽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신비한 순환.
상식을 박살 내는 눈앞의 풍경에,
난 꽤나 충격을 받았다.
신화 시대. 진짜 신이 존재하던 시대였나?
"으음.... 좋아. 마나의 흐름이 여기서 이렇게 이어지니까."
내가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사이, 캐스크는 끙끙 고생이 많았다.
여전히 비싸 보이는, 화려한 무늬가 상감된 검을 천천히 빛의 장막 안으로 밀어 넣었다.
생김새가 전의 것과 미묘하게 다른 게, 내가 반토막 낸 거 말고 또 예비용이 있었나 보다.
근데 저거, 이제 보니 검인 동시에 마법을 보조하는 지팡이 같은 거였다.
칼몸에 새겨진 복잡한 문양이 빛을 뿜어낼수록, 장막 사이로는 틈이 생겼고 칼날은 마치 열쇠처럼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됐어. 이제 10분 내로 해주할 듯?!"
그 말에 용병들이 휘파람을 불었다.
"이야~ 항상 느끼는 건데 우리 대장 마법 실력이 좋아?"
"그러게. 신화 시대 격벽 해주는 전문 마법사들도 7~8분은 걸리던데."
"와 진짜요? 근데 대장은 마검사인데도 10분? 대단하다."
내 눈엔 보였다.
캐스크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게.
녀석이 눈동자를 스윽 굴려 나를 바라보는 것도.
마치,
'너는 이거 할 줄 아나?'하고 뻐기는 듯한.
그러기에,
서컹!
베었다.
단칼에.
오러인지 마법인지 알 수 없는 이 신비한 장막을.
결국 오러든 마법이든, 더 강한 오러 앞에서는 무너지는 거라서.
"어...?"
캐스크가 망연한 눈으로 날 돌아보았다.
어깨를 으쓱해 주고 그의 옆을 지나쳤다.
"힘들어 보이길래."
"아...."
축 처지는 캐스크의 어깨와 눈썹.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저거 은근 놀리는 맛이 있네.
"대장.... 그래도 내 눈엔 대장도 멋있었어."
용병들이 그런 캐스크를 위로해 줬다.
* * *
탐사 과정은 일종의 반복이었다.
한 구역 탐색하고 다음 격벽을 베고 넘어가 또 탐색하고.
다만 격벽을 넘어 점점 깊이 들어갈수록 분명히 느껴지는 차이는 있었다.
캐스크도 그것을 느꼈는지 발을 멈췄다.
"정지. 여기서부터는 [실드]를 켜고 들어간다."
현재 우리 6명은 모두 마갑을 입고 있다.
던전 탐사와 마갑 시제품 테스트를 동시에 하기 위해서인데... 그밖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부우웅-
마갑에 내장된 스킬, [실드]를 발동하면 은은한 빛무리가 몸 전체를 뒤덮는다. 주변이 어두웠기에 서로의 존재가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후...."
"한결 낫다."
뻣뻣이 긴장되었던 얼굴들이 편안해졌다.
나도 그랬다. 불쾌한 감각이 사라져서 좋았다.
캐스크가 당부했다.
"이 유적은 심부로 다가갈수록 변칙 현상이 일어나. 환시, 환청, 착란이 심해지는 데다가 미세한 마나가 빗발쳐서 내상을 일으키지. 그러니까 이 지점쯤부터는 항상 실드를 켤 거야."
그렇게 실드를 켜고 탐사를 계속했다.
캐스크는 줄곧 나를 의식하며 어색하게 굴었지만, 내가 유물을 찾아낼 때만큼은 십년지기 친구처럼 나를 대했다.
"이건 마도 병기야!"
"이게?"
내 눈엔 그냥 속이 텅 빈 작대기였다. 손잡이 부분만 쓸데없이 두껍고 거창한.
"아, 이거 설마 얇은 쪽을 잡고 이 두꺼운 쪽으로 내려치는 건가? 되게 불편해 보이는데...."
내가 마도 병기란 걸 들고 휙휙 돌리자, 캐스크는 질색을 하며 그걸 가로챘다.
"아니야! 이건 이 두꺼운 부분을 어깨에 대고 구멍 뚫린 부분으로 쏘는 거라고!"
"쏴?"
"그래!"
"화살처럼?"
"그래!"
"활시위가 없잖아?"
캐스크가 날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봤다.
뭐, 왜, 어쩌라고.
"마. 도. 병. 기. 잖아. 마도 병기!"
아아, 그래. 마법으로 쏘아 낸다 이거구나.
그렇게 말하면 되지. 씁.... 기강을 또 잡아야 하나?
나는 슬쩍 검 자루를 쥐고 캐스크의 칼을 바라보았다.
"검 좋아 보이네?"
"어? 어.... 비싼 거니까. 안 그래도 네가 하나 반 토막 내서...."
"아직도 예비용이 더 있나 봐?"
"히익!"
슬쩍 검을 뽑아 들 것처럼 위협하자 캐스크는 화들짝 자기 검을 손으로 가리며 도망쳤다.
저 자식.
좀 귀엽다.
* * *
이제 캐스크는 말할 때마다 내 눈치를 살폈다.
"한두 구역 정도 더 탐사하고 철수하자."
마갑(魔甲)의 동력원인 마나 하트를 체크하면서, 탐사대장답게 그렇게 말할 때조차, 힐긋힐긋 내 눈치를 보며 거리를 벌리는 것이었다.
거 안 그래도 되는데.
그러면서도 또 제 역할을 다하는 것이 참 용했다.
"다들 긴장하자. 이 정도 깊이까지 들어온 건 나도 처음이야. 산 반대편 쪽은 외곽부만 넓었거든."
그 말을 했을 때가, 막 통로를 지나 커다란 방이 나타나는 시점이었다.
"잠깐."
나는 방으로 발을 들이려는 캐스크를 붙잡았다.
"왜, 왜?"
캐스크는 나의 접근에 화들짝 놀랐다.
"일단 물러나."
마검사라 해도 이건 안 느껴지나 보네.
하긴. 너무 존재감이 희미하긴 했다.
하지만.
"쭉쭉 더 뒤로."
일행들을 충분히 뒤까지 물린 뒤, 나는 돌멩이 하나를 주어서 방 안으로 던졌다.
탁! 타악! 탁. 데구르르
정적 속에 홀로 구르는 돌멩이.
그리고,
- 캬아아아아!
- 크아아아아아!
괴성과 함께 잿빛의 마수들이 방 이곳저곳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 수가 굉장히 많았다.
어림짐작으로 150? 200?
혐오스러운 존재들이었다.
사람처럼 사지와 머리를 지녔는데, 완전히 뒤틀려 있었다.
팔 대신 커다란 주둥이가 돋아나 있다거나, 날개 비스무리한 살덩이가 있다거나, 아예 4개의 팔과 4개의 다리로 거미처럼 기어 오는 놈도 있었다.
마수가 창궐하는 로버랜드에 살던 나도 처음 보는 기괴한 것들이었다.
난 일단 검을 뽑았다.
캐스크가 뒤에서 다급히 외쳤다.
"란센! 혼자서는 무리야! 다들 날 엄호한다! 내가 광역 마법을 캐스팅 하는 동안...!"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서.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아서.
콰아아앙!
땅을 박차는 순간, 짜릿! 전신에 솜털이 곤두섰다.
'이거지.'
별다른 기술을 쓰지 않았는데도, 왕실의 비전인 [템페스트(tempest)]를 썼을 때와 비슷한 속력이 나왔다.
마갑(魔甲).
처음 입었을 때부터 실전에서 쓰고 싶었다.
순식간에 코앞으로 다가온 마물 무리. 원래라면 다대일 전투에 특화된 오러 쓰레드(Aura Thread)를 쓰더라도 꽤 오래 치고받아야 전멸시킬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난 마갑(魔甲)을 입고 있다.
이거, 진짜 해 보고 싶었거든.
[검령각성]
내 마갑(魔甲)에 내재된 스킬은 총 4개. 그중 하나를 활성화한다.
우우우웅-!
검이 대종(大鐘)처럼 울어 댔다.
이런 울림은 느껴 본 적이 없었다.
파스스-
공기를 태우며 흐드러지는 오러 쓰레드(Aura Thread).
평소보다 더 날카롭고, 평소보다 더 많으며, 평소보다 더 멀리 뻗는다.
'아아....'
검령 각성. 말 그대로 검령을 더 크게 각성시키는 스킬.
검령의 의지가 이토록 뚜렷하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적어도 환골탈태를 이루었던 때를 제외하면 그랬다.
부우우웅-!
흩날리는 오러 쓰레드에는 내가 뽑아낸 검푸른 오러와 검이 빚어낸 투명한 오러가 서로 뒤섞여 있었다.
그 예리한 오러가 스칠 때마다,
후드드득!
얼룩덜룩한 살점과 잿빛 피가 사방을 적셨다.
30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 많은 마물을 다 정리할 때까지.
"후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예상보다도 더 위력이 엄청나네.'
대체 마갑 하나로 나는 몇 배나 더 강해진 걸까?
짐작도 가지 않는 무력의 폭증.
짜릿했다,
그리고 아쉬웠다.
'이거 잘만 하면, 그때의 그 감각을 또 느낄 수 있을 거 같은데?'
나를 환골탈태에 이르게 해 주었던.
잠깐이지만 발을 디뎠던 그 검아일체의 경지.
스킬로 강화된 검령과 소통을 계속하면... 다시 그 경지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그러려면 좀 더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나야겠지.
극한의 상황에서 서로 치고받으며 한껏 집중력을 일깨우다 보면 다시 그때의 그 감각을 느낄 수 있을지도....
그런 점에서, 지금 상대는 좀 많이 약했다.
아쉬운 맘에 푹 한숨을 쉬는데, 캐스크가 뒤에서 중얼거렸다.
"...니 다 해라."
허탈함. 질투. 경악이 뒤섞인 목소리.
사뿐히 무시했다.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역시 여기 맞아. 여긴 사교도 관련된 장소야.'
아까 마물들.
흡혈귀 놈들이나 글로잉스틸에서 싸운 늑대괴물과 비슷한 느낌을 줬다.
결국 이 유적 깊숙한 곳에,
내가 해결해야 하는 뭔가가 있다는 거겠지.
깊어질수록 점점 더 강해지는 광기와 난폭한 마나의 흐름 역시 그래서가 아닐까?
"오늘은 그냥 여기서 철수해야겠어! 이쪽 구역은 내일 와서 다시 수색한다. 다들 장비 한번 확인하고! 돌아가자!"
캐스크의 목소리가 귀를 때린다.
나는 마지막으로 신화 시대의 유적을 눈에 담으며 발걸음을 뗐다.
대체 얼마나 큰지,
얼마나 깊은지도 알 수 없는,
신화 시대의 유적.
그 안에는 또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을지.
갈수록 흥미가 돋았다.
#60화 파밍
대륙력으로 올해는 1,351년이었다.
최초의 그랜드 마스터, 마키나 아브락사스는 1,000명의 부하와 함께 광명해를 건너 올드랜드에 내려섰다.
그때는 인류가 국가도 이루지 못한 채 여기저기 흩어져 살며 괴물들에게 유린당하던 시절.
마키나 아브락스는 최초의 국가를 세워 올드랜드를 일통했으며 로버랜드를 지나 글로리랜드를 해방하여 인간의 시대를 열었다.
그 후로 1,351년이 지났다는 뜻이다.
그 이전의 기록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게 무슨 뜻이냐면,
고대 루세라스 문명과 대륙력을 쓰는 현대의 문명 사이엔 최소 8,000년 이상의 공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완벽에 가까운 단절.
그래서 현대의 마법사들은 고대의 아티팩트를 재현해 내지 못했다.
검술이 그렇듯,
마법 체계도 완전히 달랐기 때문.
그러니까,
이건 우리 시대에 있어선 정말 크나큰 보물들이었다.
'고대의 마법을 해독할 수 있는 최초의 단서가 되겠네, 이게.'
캐스크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너덜너덜한 책들과 노트들을 내려놓았다.
"여... 여기...."
그런데 그 양이 엄청났다.
척 척. 처척!
웬 보물상자 같은 걸 들고 왔는데, 그게 아공간 아티팩트였던 모양이다.
책과 종이 묶음, 메모와 공책이 끝도 없이 나왔다.
'...상상 이상인데?'
조금 당황했다.
책하고 노트 합쳐서 많아야 20권 정도를 예상했다.
그래서 만약 캐스크가 10권 이하로 가져오면 설득(물리)을 통해 확실하게 받아 낼 용의도 있었다.
그런데....
'책만 70권에 노트는 200권, 온갖 메모와 종이 묶음이 만 장은 넘겠는데...?'
한가득 쌓인 책의 탑을 보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캐스크 너 설마? 진짜 몽땅 다 가져온 거야?'
물론, 내기 내용이 그렇긴 했다.
캐스크가 가진 마법 책 전부. 거기에 노트든 주석이든 뭐든 싹 다 전부.
다 달라고, 내가 그러긴 했지.
근데...
그 말을 진짜 지킨다고...?
'배 째!'는 기본이고 뒤통수와 사기, 협잡이 난무하는 로버랜드 출신으로서,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쩌면, 이 녀석. 의외로 괜찮은 놈인가?
"이거... 정말 소중한 거야...."
캐스크는, 그렇게 말했다.
연한 주근깨 위로, 연노란색 눈동자가 눈물로 부풀어서는....
그렇게 슬프고 아까우면서도 끝내 나와 한 약속을 지키려고 했다.
따끔!
왠지 뭔가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
뭐지?
"그래. 잘 쓸게."
나는 캐스크가 늘어놓은 책들을 하나하나 아공간 목걸이에 집어넣었다.
실시간으로 사라지는 책과 노트를 보며 캐스크의 얼굴 위론 그늘이 점점 짙어졌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이게 왜 필요한 거야? 네가 쓸 건 아니잖아? 중고라서 값이 그리 나가지도 않을 텐데.... 차라리 돈이라면 내가...!"
"마법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서."
"아...."
캐스크가 고개를 떨궜다.
그사이, 난 부지런히 주워 담아 거의 3분의 2를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누가 배우는데...?"
"있어. 마법 처음 배우는 사람."
"처음?"
"응. 아.... 근데 생각해 보니까 이거 못 읽을 텐데...? 내가 일일이 가르쳐 줘야 되나?"
갑자기 골치가 팍! 아팠다.
전 세계를 뒤져 봐도 마도 시대의 문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테니까.
이 많은 걸 내가 다 번역하고 강독해 줘야 하는 건가?
'아 몰라. 두세 권만 번역해 주고 나중엔 알아서 해독하라고 하지 뭐.'
이제 마지막 책을 담으려고 손을 뻗는데, 캐스크가 다시 물었다.
"못 읽어? 그 사람이 많이 어려?"
"음. 어. 5살이야. 글씨를 아직 몰라."
내 머릿속을 스친 건, 똘똘한 우리 20세 소녀 세아와 마법사 가문 출신인 아샤였지만....
그냥 대충 대답하고 넘겼다.
캐스크는 뭔가 곰곰이 생각에 빠진 듯하다가, 마지막 책이 내 목걸이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다시 한번 더 당부했다.
"진짜... 소중한 거야. 아껴서 잘 사용해 달라고... 그렇게 전해 줘."
아니.
왜 이렇게 아련해?
따끔!
거, 자꾸 가슴이 간지럽네.
뭐지?
* * *
이곳에 온 지도 벌써 4일째였다.
로레인의 연구소는 매일매일 쉴 틈 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누가 쉬는 꼴을 잠시도 지켜보지 못하는 악덕 고용주 때문이었다.
"이상하다~ 어제 신선한 마도 단말기 또 하나 들어왔다고 들었는데. 오늘이 벌써 11시인데 아직도 분석이 안 됐나요~?"
로레인이 생글생글 웃으며 연구원을 갈구는 모습은 그냥 하루에도 몇 번씩 보게 되는 산이나 하늘 같은 풍경과 다르지 않다.
"어어~? 여기 이 분석 좀 이상한데에? 이거 눈치 못 채셨어요? 봉급을 그 정도 받으시는 분이 이거 틀리면 좀 민망할지도?"
모두가 그녀를 마녀 보듯이 했다.
멀리서 그녀의 하얀 옷자락이 보이기만 해도 사색이 되어 도망치는 이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아, 란센 씨! 어제도 한 건 하셨다면서요! 오늘도 잘 부탁해요...! 당신 어깨 위에 우리 연구소의 미래가 있는 거예요!"
나를 발견하면 로레인은 환하게 손을 흔든다. 꼬리가 있으면 그것도 맹렬하게 흔들 것 같다.
"이거.... 당 떨어질 때 좋아요!"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달콤한 것들을 꺼내 주곤 했다.
입에 넣으면 연기처럼 흩어지며 달콤한 것, 사르르 녹아내리며 달콤한 것, 바삭하면서도 달콤한 것....
마도 시대의 뛰어난 간식 문화에 나는 조금씩 젖어 들었다.
물론 고작 단 것에 넘어갈 내가 아니다.
"저번에 보니까 이런 아티팩트도 있던데...."
"알겠어요! 알겠어! 별로 비싼 거 아니니까 챙겨 드릴게요. 주급도 아티팩트로 달라고 하셨죠? 하여튼 특이하다니까. 그나저나... 약속한 거예요? 잊지 마요?!"
"네. 네."
로레인과의 친분? 혹은 인체 실험을 빌미로 한 줄타기? 탐사팀 최고의 에이스인 나를 향한 그녀의 뇌물 세례?
무엇이라 불러도 좋다.
어쨌든 그 덕에 나의 아공간 목걸이가 두둑해지고 있었으니까.
뭐 이렇게 받는 아티팩트라고 해 봤자, 조명용 구슬 같은, 여기선 아무 데나 굴러다니는 아티팩트에 불과했지만... 그런 것들조차 우리 시대에선 돈 주고도 못 구하는 보물들이었다.
'거기에 간식. 돌아가서 애들 주면 좋아하겠네.'
하루하루 마음이 든든했다.
* * *
탐사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신비롭고, 신기하고, 재미까지 있는 일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점점 마물의 출현 빈도가 높아졌고, 머리를 울리는 광기와 실드를 뚫고 들어오는 미세한 마나의 탄환들이 몸과 마음을 어지럽혔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탐사 속도는 느려져 갔고, 로레인은 그걸 가만히 지켜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피로가 쌓인 탐사팀과 더 성과를 내라고 재촉하는 로레인.
결국 터져야 할 게 터지고 말았다.
"전 못해요."
용병, 밋시는 딱 잘라 말했다.
"어떻게 여기서 탐사 속도를 50%나 더 올리라는 거예요? 소장님. 저기 들어가 보셨어요? 얼마나 지독한지 알아요?"
음, 저건 밋시의 말이 맞다.
탐사 3일 차였던 어제는 꽤 깊은 곳까지 들어갔는데... 나조차도 편치 않았다.
"환청이 들려요! 귓가에서 계속 파리가 앵앵거리는데, 갑자기 보여요! 저기 구석에 시커먼 남자가 서 있다고요! 깜짝 놀라서 칼을 빼 들면 동료들이 절 흔들어요. 그제야 정신을 차리죠. 다 환각이었던 거에요. 근데 이게 저만 그러는 게 아니에요. 진짜 사람이 미친다니까요?!"
상시 실드를 켜 놓고 있는데도 그랬다.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무언가가 자꾸 머릿속을 파고드는 기분.
때로는 나도 그게 거슬려서 검 손잡이를 꼭 쥐어야 했다. 검령과 교감을 나누다 보면, 훨씬 편안해졌으니까.
아무튼, 그런 이유로 다들 로레인에게 불만이 많았다.
아, 물론 로레인의 광신도인 캐스크는 빼고.
녀석은 혼자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로레인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샘플 하나가 늘어나면 연구 비용이 얼마나 줄어드는지, 연구 속도가 얼마나 빨라지는지 혹시 아세요?"
"몰라요. 알게 뭐람."
"밋시...!"
밋시의 톡 쏘는 말투에 캐스크가 자제 좀 하라는 눈빛을 보였지만, 밋시는 고개를 팩 돌릴 뿐이다.
하지만 로레인이 생글생글한 웃으며 꺼낸 다음 말은 차마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아셔야 해요~ 즉, 탐사 속도를 지금 스케줄보다 50% 빠르게 해 주면, 200%의 성과금이 지급될 거라는 뜻이니까요~"
번쩍!
용병들의 눈에 광채가 돌았다.
용병이란 무엇인가. 결국 돈에 목숨을 거는 종자들이 아닌가.
"하, 하지만...."
밋시의 얼굴에 고민이 서렸다.
하지만 똑똑한 로레인은 그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답변을 내놓는다.
"그리고 저희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답니다~? 유적에서 발생하는 광기의 파동. 그걸 막을 방법을 연구를 했죠. [실드] 스킬을 업데이트 해 뒀으니까. 전보다는 좀 나을 거예요."
그걸로 협상은 종결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힘든 게 사라지는 건 아니다.
탐사 5일 차, 7일 차, 10일 차.
어떻게 단 10일 만에 이렇게 변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로레인 연구소는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닌 언데드의 땅처럼 보일 지경이 되었다.
그 안에서 홀로 반짝반짝한 건, 로레인뿐.
그녀는 여전히 한 올도 빠뜨리지 않고 완벽하게 머리를 묶고 하얗고 긴 특유의 옷자락을 펄럭였으며, 잠시도 지치지 않았다.
"마녀야...."
"아니 돈귀신이야...."
"이러다가 죽을지도 몰라...."
"저 마녀는 우리가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쓰겠지...."
연구원들은 쉬는 시간마다 양 떼들처럼 모여 오들오들 떨어 댔다.
그러면 지나가던 시종장... 아니, 로레인을 살뜰하게 보좌하는 선임 연구원, 에오드란이 난처하게 웃으며 로레인을 옹호하곤 했다.
"힘들죠...? 알아요. 하지만 저희 소장님. 나쁜 분은 아니에요."
"저, 저기 마스터 에오드란? 지금 코피 흘리시는...."
"아...? 아하하, 이거 참. 근 7일간 다 합쳐서 5시간 정도 자다 보니...."
"아...."
머리가 하얗게 센 원로 연구원마저 로레인에게 잡혀 착취당하는 걸 보면, 설명하기 어려운 숙연한 마음마저도 들어버린다.
용병들도 비슷했다.
"그 마녀!"
"돈에 미친 소장. 말이 안 통해."
용병들이 그렇게 로레인의 흉을 보면, 광신도 캐스크가 얼른 그녀를 위해 나서곤 했다.
"아니! 우린 용병이잖아?! 돈 많이 주면 되는 거 아냐? 돈 많이 주는 고용주가 제일 좋은 고용주 아니냐고?!"
그럼 밋시가 나직하게 경고를 한다.
"대장.... 제발 조용히 좀 해."
차갑게 전해지는 그 살기에.
"...어."
대장으로서 권위를 확고히 세운 캐스크마저도 그만 꼬리를 말곤 했다.
이런 일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있었다.
하지만, 모두를 쪼아 대는 로레인이 유일하게 조심스럽게 대하는 사람은, 유일하게 편애하는 사람은, 그녀의 충실한 보좌 에오드란도 아니고, 그녀의 광신도 캐스크도 아닌, 바로 나, 란센 반로아였다.
"드디어...! 오늘이네요! 특이체질의 비밀을 파헤쳐 볼 시간!"
로레인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가 그동안 나에게 바친 단것과 아티팩트가 몇 개던가? 그 보상을 받는 날이니 기쁠 만도 하지.
"자아~ 이쪽으로 오세요."
나는 로레인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겼다. 그녀는 내 몸에 빼곡하게 침을 꽂아 넣고 실험 준비를 마쳤다.
"실험 1회당 1시간씩. 대가는 마나 하트 1개. 맞죠?"
"네."
마나 하트 1개.
그것이 아쉬울 게 없는 척하는 나와, 욕심을 숨기지 못한 로레인 사이에서 맞아떨어진 저울의 눈금이었다.
마나 하트는 소모성 물품.
한 번 소진되면 더 이상 마갑에 마나를 공급하지 못했다.
마나 하트를 다시 충전시키는 방법도 있긴 했지만, 그 충전 장비가 너무 커서 아공간에 담아 갈 수는 없었다.
그러니 나는 마나 하트를 최대한 많이 챙기고 싶었다.
반면에 로레인은 연구소의 핵심 기술 중 하나라며 꺼려 했고.
뭐, 결론은 나의 승리.
"솔직히 의문이긴 해요. 과연 이 실험에 마나 하트 1개 이상의 가치가 있는지. 그거 그냥 가격만 봐도 꽤 비싸다고요?"
우리 시대 가치로 환산하면 하나에 20달론 정도 한다는 것 같았다.
우리 엘리트 전사 월급이 15달론인데, 시급 20달론이면 괜찮지.
"제 호기심 덕에 득 보신 줄 아세요."
그렇게 말하며 로레인은 자리를 잡고 실험을 시작했다.
"오러라고 했죠? 한번 써 보세요."
로레인의 말대로 오러를 끌어올렸다.
힐긋.
마법 분석판에 떠오른 수치를 보던 로레인이 내 눈치를 살폈다.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 나왔다.
"다시 해 보세요."
그렇게 했다.
로레인이 입술을 물었다. 팔을 천천히 걷어붙이며 말했다.
"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내 신체 데이터에서 분명 무언가를 발견한 게 틀림없었다.
그녀가 이번엔 단추를 풀었다.
"다시!"
"다시 더 세게!"
숨소리도 가빠졌다. 혼잣말을 시작했다.
"아, 이 데이터는! 아아, 이런 원리구나! 이건 어쩌면 신화 시대 마도 병기의 작동 원리를 밝혀 낼...!"
그러다가도 또 나에게 성질을 부리는 것이었다.
"뭐 하는 거예요! 더 빨리! 더 세게!"
"더! 더! 더!"
저러다 거품도 물겠는데....
이미 이성을 잃은 로레인.
하지만 난 더 이상 그녀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말없이 실험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빼곡한 침을 하나하나 제거했다.
로레인이 성질을 냈다.
"지금 뭐 하는...!"
"1시간 다 끝났습니다."
"네? 그, 그럼 추가해! 추가! 마나 하트 더 주면 되잖아요!"
그렇게 말하기에,
"좋죠. 근데 어쩌죠? 이젠 요금이 올랐습니다."
"네?"
"1시간에 마나 하트 10개. 혹은 그에 준하는 아티팩트로 받겠습니다."
"...네?"
성난 들개처럼 짖어 대던 로레인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갑자기 10배를 올려 버리는 폭리 앞에 할 말을 잃었나 보지? 근데,
미안.
당신,
속을 너무 읽혔어.
"마나 하트 10개. 아니면 더는 실험 안 합니다."
거절 못할걸?
내가 봤거든. 당신 눈빛이 희번덕하던데?
로레인이 울 것처럼 커다래진 눈으로 입술을 꼭 깨물었다.
#61화 이유가 좋다
'이번 시간 여행도 꽤나 기네.'
벌써 14일 차였다.
유적은 크고 깊어서 앞으로 얼마나 더 남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오늘도 고생했어요~ 확실히 깊이 들어갈수록 처음 보는 샘플이 많이 나오네요. 개수만 더 늘리면 딱 좋겠다. 그쵸?"
로레인은 생글생글 웃으며 격려인지 갈굼인지 헷갈리는 말을 했다.
용병들은 이미 포기해 버린 듯 그냥 대충 고개만 끄덕였고,
이미 좀비가 되어 버린 연구원들은 그녀를 만류하고 싶어 했다.
"소장님.... 저희... 이 이상 새로운 샘플을 분석할 여력이...."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게 얼마짜리 연구인지는 알죠? 제가 100만큼 돈을 벌 수 있는데 직원이 능력이 안 돼서 50밖에 못 벌면, 제가 좀 슬프지 않을까요?"
생글생글.
하지만 그 안에 담긴 '해고해 버리는 수가 있다.'라는 의미를 제대로 알아들은 연구원들은 "히이익! 하겠습니다. 해내겠습니다!"를 연호하는 것이었다.
저러는 데도 일을 그만두겠다는 연구원은 없었다.
대충 들어 보니, 대우는 업계 최고 수준이고 로레인 자체가 굉장히 존경받은 마갑 개발자라고 했다. 그녀의 밑에서 배우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나....
조직 운영에 있어서 수장의 명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저렇게 얄밉게 막 굴려 대도 조직이 굴러가다니.
어?
가만, 이거 괜찮은데?
나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봉급이야 나도 이미 많이 주고 있고, 거기에 이제 '존경'까지 더해지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로레인이 또 은근슬쩍, "수고했어요." 하며 단것을 찔러 넣어 주었다.
마물이 점점 많아지는 요즘, 그나마 탐사 속도가 나오는 게 내 덕분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장면을 캐스크에게 목격당했다.
"어? 로레인? 나는? 나도 줘!"
배신감이었을까?
와들와들 떨리는 눈동자로 요구하는 캐스크.
하지만 로레인의 반응은 캐스크 녀석에게 있어선 참으로 딱한 것이었다.
"뭐래. 꼬맹아. 너 자꾸 누나 이름 함부로 부를래?"
둘 사이에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로레인은 유독 캐스크를 편하게 대했다.
"줘! 나도 달라고!"
"옛다. 먹고 떨어져라."
휙 던지는 간식을 받아들고 캐스크가 부들부들 떨었다.
입술을 악 물고, 눈가가 촉촉한 게... 너 설마 울어?
그러면서도 또 손에 든 간식을 버리지 않는다. 소중하게 품에 넣는다.
쟤 저거 안 먹고 고이 모셔 놓는다에 내 손목 하나쯤은 걸 수 있을 거 같았다.
'쟤도 참. 인생 힘들게 사네.'
나는 혀를 한 번 차고는 숙소로 돌아왔다.
뜨끈뜨끈하게 씻고 나왔지만 바로 잘 수는 없었다.
이번 시간 여행을 하면서 챙긴 물건들이 너무 많아서 부지런히 정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캐스크에게 받은 마법 책이나 좀 번역해 둘까.'
아공간에서 주섬주섬 책들을 꺼내 봤는데 나는 곧 커다란 난관에 봉착했다.
'이거 뭐부터 번역해야 하지?'
[영혼론], [영혼의 모방 : 사물편, 자연편, 생물편], [주문씨앗의 설계와 적용]
제목만 봐도 골치가 아파지는 마법책들. 읽을 수는 있는데 이해할 수는 없었다.
기왕 번역할 거면 가장 기초적인 서적부터 하고 싶은데....
당최 어떤 게 기초인지도 알 수가 없다.
똑똑.
노크 소리에 일단 책들을 덮어 놓고 문을 열어 보니 캐스크가 있었다.
'이 밤에? 얘가 날 왜 찾아왔지?'
예상 밖의 방문이었고, 캐스크는 수상할 정도로 감정이 가득 느껴지는 눈을 하고 있었다.
짚이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설마... 아까 일 때문에 왔나? 로레인이 나한테만 간식 줬다고?'
설마 그렇게 유치할까 싶지만, 로레인에 미친놈인 캐스크라면 그럴 수도 있다.
애초에 우리 첫 만남부터가 내가 로레인이랑 단둘이 대화했다고 시비 거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았던가?
만약 그런 거라면...
'검을 또 두 동강 내줄 때가 온 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이거."
캐스크가 종이를 내밀었다.
웬 표와 도식 같은 게 그려진 종이였다.
"이게 뭔데?"
"커리큘럼. 그... 가져갔잖아. 내 책하고 노트들. 각각 어떤 내용이 들어 있나 요약했고, 어떤 순서로 읽고 뭐 읽을 때 뭐 참고하면 좋나, 그런 거 써 놨어."
"어...?"
뭐?
잠깐 이해가 안 갔다.
이거 설마 호의라는 건가?
호의를 베푼다고? 자기 보물을 빼앗아 간 사람에게?
캐스크가 내 시선을 피했다.
"말했잖아. 소중한 거라고. 그 책. 그 노트. 하나하나 다 내 추억이야.... 가져갔으면 기왕이면 잘 써 줬으면 해서...."
허?
"간다."
캐스크는 그 말만 남기고 떠나 버렸다.
모르겠다.
나는 녀석의 뒷모습을 꽤 오래 들여다보았다.
'유적에서 뭘 잘못 먹었나?'
* * *
17일 차,
여전히 유적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동료들의 환각, 환청, 착란 등 이상 현상은 점점 늘어갔고, 미세한 마나가 자꾸 쏟아져서 순간적으로 팔다리가 마비되거나 오한, 구역질을 일으키는 경우가 잦아졌다.
대체 저 끝에 무엇이 있길래.
기대감이랄까, 공포감이랄까, 긴장이 점점 더 고조되었다.
그동안 나는 로레인과 더 가까워졌다.
탐사 보고도 해야 하고, 에이스인 나를 그녀가 따로 격려하기도 했고, 인체 실험까지 있었으니까.
그날도, 탐사를 마쳤는데, 로레인이 날 불러냈다.
한밤중이었다.
인체 실험은 내일 하기로 했는데... 웬일인가 했더니,
"짜잔! 이거 볼래요?"
그녀가 꺼내 든 건, 우리가 유적에서 가져온 신화 시대의 유물.
칼 손잡이같이 생긴, 용도를 알 수 없는 막대였다.
"란센 씨의 신체 데이터를 보자마자! 이거 생각이 팍! 났던 거예요."
"이게 뭔데요."
"마도 병기였어요."
나는 그 손잡이같이 생긴 걸 물끄러미 살펴보았다.
마도 병기?
이딴 게?
로레인은 내 한심해하는 눈빛을 오히려 즐겼다.
"안 그래 보이죠? 근데 진짜 그래요. 잘 봐요."
그녀가 손잡이 아래쪽에 마나 하트를 연결했다. 마갑에 들어가는 마나 하트와 비슷하지만, 그보다는 작다.
"마나 하트로 마나를 공급하고. 여기 이 버튼을 누르면...!"
후우우웅-!
바람이 휘몰아쳤다.
로레인의 흑금발 머리칼이 화려하게 흩날렸다.
폭풍. 그 중심에는 손잡이 위로 쭉 뻗어나간 빛의 칼날이 있었다.
"뭐야 이게...."
너무 황당해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오러 블레이드?"
틀림없었다.
지금 저 손잡이가, 마나 하트가 공급하는 마나를 빨아먹고 그걸 오러 블레이드로 뽑아내고 있었다.
저게 말이 돼?
오러 블레이드를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다고?
저거 하나면 개나 소나 오러 블레이드를 쓸 수 있는 거야?
그건 좀... 억울하잖아.
물론 검술 실력이 받쳐 주지 않는다면 의미는 없겠지만, 그래도 억울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오러의 천재가 무수한 고련 끝에 빚어낼 수 있는 오러 블레이드를, 고작 저런 도구 하나로 뽑아낸다고?
멍... 하니 쳐다보는데, 로레인이 활짝 웃었다.
진짜 행복한 웃음이었다. 평소의 그 기분 나쁜 생글거림이 아닌.
"엄청나죠? 하...! 신화 시대는 정말!"
들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독특했다. 로레인이 '신화 시대'라고 말할 때마다 느껴지는 목소리의 울림. 반짝거리고 선명하다.
억울함도 잊고 나도 모르게 물었다.
"그렇게 좋습니까? 신화 시대가?"
"그럼요! 제 꿈인걸요?"
"왜요?"
"흐음-"
콧소리를 길게 낸 로레인이 손에 쥔 오러 블레이드를 붕붕 휘두르며 부서진 달 아래를 거닐었다.
어, 그거 그렇게 막 휘두르면 안 되는데....
"실은 어릴 때 읽은 동화책이 있거든요. 그 내용이 좋았어요."
그녀가 들려준 동화 이야기는, 그냥 동화 같은 이야기여서 나에게는 별 감흥이 없었다.
"신화 시대에는 우는 사람도, 아픈 사람도 없고, 지루할 일도 없었대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신화 시대의 마법을 연구하자. 그럼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극한의 이득 추구자 로레인의 입에서 나왔다기엔 너무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닌가....
그래서였을까? 나는 불쑥 허점을 찔렀다.
"하지만 신화 시대는 결국 멸망했잖습니까? 꽤나 처참하게."
그녀도 영상기록 아티팩트를 통해 봤을 거다.
나는 이 눈으로 직접 보았고.
유적에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치열한 전투와 학살의 흔적은 점점 더 선명해졌다.
그나마 운치가 있었던 초입부와는 달리, 유적의 심부는 지저의 악몽 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기분마저 느끼게 했다.
그걸 보다 보면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토록 찬란했던 신화 시대는 조용하게 멸망하지 않았겠구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끔찍한 싸움이 있었겠구나.
그런 최후를 맞이한 문명이...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
로레인은 말했다. 꽤나 힘을 주어서.
"그런 신화 시대도 멸망했는데, 더 못난 우리는 어떡하겠어요. 그러니 조금이라도 따라잡아야 되는 거예요."
특유의 생글거림이 전혀 없었다.
뭔가 얼어붙은 호수 아래로 생생히 살아 헤엄치는 물고기 한 마리를 언뜻 본 것만 같은 느낌.
"우리는 신화 시대의 진실을 알아내야 해요. 보고 배우고 준비하고 대비해야 된다고요."
이게 로레인의 진심일까?
맨날 돈만 밝히던 이 여자가 조금 달리 보이던 순간이었다.
"큼. 좀 있어 보였나요?"
근데 로레인은 돌연 표정을 풀고 생글생글 웃었다.
"어릴 때 얘기였어요. 어릴 때. 그땐 좀 그랬는데, 지금은 뭐 별거 있나요? 신화 시대. 돈이 되니까 좋아하는 거지."
...아닌가?
"신화 시대의 마법 중 극히 일부만 카피해도 얼마나 큰돈이 되는지 아시나요? 저는!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될 거랍니다!"
평소의 로레인이었다.
돈을 위해서 지치지도 않고 모두를 닦달하는 생글생글 마녀.
'아까는 뭐였지.' 싶다가도 '역시 이게 로레인이지.' 하는 생각에 난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다들... 참 열심히도 살아.'
이유야 어쨌든 간에 말이다.
로레인이나, 캐스커나, 에오드란이나, 연구원, 탐사팀 용병들. 다 열심히 산다.
그런데 이토록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인데... 내가 사는 시대엔 저들의 흔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무얼 남긴 걸까?
그게 좀 기분이 이상해서.
'역시... 최대한 좋은 걸, 최대한 많이 가져가야겠다. 아공간을 꽉꽉 채워야지. 정 안 되면 몰래 털어서라도.'
새삼 다짐했다.
이들의 흔적을 미래로 이어 주기로.
* * *
로레인을 만나고 숙소로 돌아오는데 방문 앞에 캐스크가 서 있었다.
뭐야.
설마 로레인이랑 단둘이 있던 걸 본 건가? 그래서 또 따지려고?
'두 동강 내줄 때가 온 건가?'
그렇게 마음을 다잡는데.
"이거."
녀석이 또 뭘 내민다.
정육면체의 크리스탈과 손톱만 한 크기의 납작한 구슬.
"...이게 뭔데?"
"리더기랑 버드라는 아티팩트야. 마법사들이 쓰는."
"리더기? 버드? 그게 뭔데."
"...텔레파시 관련 아티팩트야."
아티팩트라니까 일단 좋긴 한데.
이걸 갑자기 왜?
"...그, 마법 배울 아이가 글을 읽을 줄 모른다며? 리더기를 책 표지 위에 올려놓고 버드를 귀에 끼면 그 안에 담긴 기억이 텔레파시로 전달 돼. 내가 몇 번씩이나 읽은 책들이라, 생생하게 전해질 테니까... 글을 몰라도 이해할 수 있고. 글도 빨리 익히게 될 거야."
진짜?
그럼 이거 있으면 내가 번역 안 해도 되는 거야?
나는 또 멍- 해졌다.
"어... 근데 이걸 왜?"
진짜 궁금해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캐스크.
날 싫어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왜 잘해 주지? 꿍꿍이가 있나?
캐스크가 제 입술을 꽉 물었다.
"나도 이렇게까진 안 하려고 했어. 했는데...."
캐스크가 자신의 머리를 벅벅 긁었다. 병아리 같은 연노란색 머리칼이 흔들린다.
"5살이라며?"
"어?"
"그거. 배울 사람. 5살이라며."
아 맞다. 내가 그렇게 말했지?
사실은 세아랑 아샤를 생각하고 있지만....
"그래서. 그래서 그래. 하.... 진짜 내가 왜.... 여튼 잘 쓰고 좋은 마법사 되라고 전해 줘."
캐스크는 황급히 마무리를 짓고 등을 돌렸다.
"캐스크."
나는 멀어지는 그 등을 바라보다 툭, 그를 불러세웠다.
"왜?"
"아니. 그...."
좀 민망하긴 한데,
"고맙다."
캐스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녀석이 주먹을 쥐고 가운뎃손가락만 쭉 뻗는다.
아, 나 저거 아는데? 뭐더라?
그대로 휙! 돌아서서 가 버리는 캐스크.
그제서야 기억이 났다.
글로잉스틸에서 기사들한테 배웠다.
'욕이잖아? 손가락 욕.'
그것도, 심한 욕.
거참.
고맙다고 했는데,
욕을... 해?
'두 동강?'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실은,
기분이 좋았다.
5살이라서 줬다.
5살이라서 주기 싫은데도 줬다....
이거 맞지?
짜식.
이유가 좋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