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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다음날.

로레인은 아침부터 우리를 소환했다.

달아오른 얼굴에서 그녀의 흥분이 느껴진다.

"어제 여러분이 두고 온 아티팩트로 스캔을 했어요."

스캔?

그 말에 탐사팀 용병들의 표정이 변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혹시?

"유적의 끝을 확인했어요. 아마 내일모레쯤이 마지막 탐사가 될 것 같아요."

역시...!

"자, 저 끝에 뭐가 있는지 한번 보자고요! 대체 뭐길래 이토록 강력한 에너지를 뿜어내는지. 대체 이 신화 시대의 유적이 품고 있는 비밀이 뭔지!"

그녀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달아올랐고,

나는 전의로 달아올랐다.

강력한 예감이 들었다.

이 끝에는 싸움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

어쩌면 마갑을 입은 채로도 전력을 다해야 할 강적과의 혈전이.

어쩌면 그 경험을 통해 나는 또 한 번의 성장을 이룰지도 모른다.

두근.

드디어, 이번 여행의 끝이 보였다.

#62화 많이 그렇다

'슬슬 해야 돼.'

이번 시간 여행도 끝이 다가오고 있다.

성과는 많았다. 아공간 목걸이도 든든해졌고.

하지만 정작 제일 중요한 물건을 아직 얻지 못했다.

'마갑(魔甲).'

어떻게 이런 게 존재하지?

듣도 보도 못한 아티팩트였고 그 성능은 말이 안 나올 정도였다.

우리 시대에 국보급으로 여겨지던 전설의 갑옷이니 하는 것들은... 솔직히 마갑에 비하면 그냥 흔해 빠진 골동품일 뿐이다.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는 마갑은 그중에서도 최고 등급인 A+로 분류되었다.

기왕이면 내 동생들 가신들 모두에게 하나씩은 챙겨 주고 싶다. A+까진 아니어도 최소 C+ 이상되는 등급으로.

이게 있으면, 어지간해서는 죽을 일이 없을 테니까.

동생들을 전장에 보내도 어느 정도는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런 생각 때문이었다.

로레인 연구소의 시제품 보관소와 테스트실을 기웃거린 이유는.

적당히 기회를 봐서 그 안의 마갑을 털어 보려고.

"안녕하십니까? 란센 반로아 님?"

그런데, 그때마다, 시종장... 아니, 선임연구원 에오드란이 귀신같이 나타났다.

"혹시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그렇지 않았다. 까만 눈동자가 나를 찬찬히 살피며 경계한다.

'...강해. 이 사람.'

그는 검사가 아닌 마법사였으므로, 내가 그 경지를 정확히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저 눈빛과 태도에 담긴 카리스마는, 강한 존재가 아니라면 내보일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아뇨. 그냥 산책 중이었습니다."

나는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하곤 그를 지나쳤다.

"란센 반로아 님?"

그런 나를 에오드란이 불러세웠다.

여전히 자세를 낮춘 맹수와 같은 분위기로.

"무척 실례되는 말이지만 반로아 님의 행적을 조사해 봤습니다."

"그런데요?"

"나오는 게 없더군요."

없겠지, 당연히. 이 시대 사람도 아닌데 뭐.

"소장님은 쉽게 사람을 믿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을 잘 보좌해야 하지요."

그러니까 소장은 날 믿어도, 에오드란 당신은 나를 믿지 않는다는 뜻이구나.

이건... 좀 골치 아팠다.

밤이든 낮이든, 근처를 기웃거리기만 해도 에오드란이 나타나는 걸 보면 감지 종류의 마법을 뿌려 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걸 눈치조차 채지 못했으니.

'안 들키고 마갑을 빼낼 방법은 없겠구나.'

그럼 어떻게 하지? 그냥 무력으로 썰어 버리고 가져가?

그런 유혹이 잠깐 들었지만...

'좀 아닌데....'

조금, 아니 마음이 많이 불편했다.

아무리 과거의 사람들이고 내 시대엔 이미 죽은 이들이라 해도....

내가 그러면 크시아스랑 다른 게 없잖아?

또 여기 사람들이랑 은근 정도 들어서 사람으로서 못 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근히 이곳 마법사들의 무력도 강해 보여서 내가 이긴다는 자신도 없었고.

'포기해야 하나....'

마갑.... 미친 듯이 욕심이 났지만, 무리하지는 않기로 했다.

과거를 계속 여행하다 보면, 또 기회가 오겠지.

결국 나는 머리를 긁적이고 말았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앞으로 주의하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나는 에오드란의 얼굴을 보았다.

윤기 나던 백발은 푸석푸석했고, 얼굴에 주름이 두 배는 더 늘어났다.

솔직히 호감이 가는 인물이라 좀 걱정이 되었다.

"요새 잠은 주무시는 겁니까?"

당신, 지금 걸어 다니는 시체 같은데?

그러자 에오드란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음.... 안 잔 지 한 5일쯤 되긴 했네요. 그래도 특제 약물과 각성 마법을 번갈아 사용하면 버틸 만합니다."

...아냐. 내가 볼 땐 그거 전혀 버틸 만하지 않은 거 같아.

"허허. 하지만 제가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해야 우리 소장님이 편해지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 말하며 웃는 노인을 보면 이젠 진짜 좀 궁금해졌다.

캐스크도 그렇고 에오드란도 그렇고, 다들 대체 왜 저 생글거리는 악덕 고용주에게 푹 빠져 있는 건지.

"아, 예. 그렇군요."

일단은 그냥 인사하고 돌아 나왔다.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더 이상 보관소와 테스트실 주변을 얼쩡거리지 않을 생각이니... 에오드란을 또 마주칠 일은 없을 거라고.

그나 나나 피차 바쁜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러나 바로 그날 밤, 나는 또다시 에오드란과 마주하게 되었다.

아, 정확히 말하자면 마주한 건 에오드란과 로레인이었고 나는 그냥 그 사이에 끼어 있었다.

"소장님? 대체 왜 여기에 오신 겁니까?"

"아, 아.... 마스터 에오드란. 그, 그게 말이야."

"제가 분명히 안 된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아니...."

거봐.

저 사람 강한 거 맞다.

딱히 의식한 것 같지도 않은데... 차갑게 분노하는 그의 주위로 마나가 넘실거렸다.

그 규모가 상당히 커서, 삐죽 솜털이 곤두설 정도다.

에오드란이 저렇게까지 분노하는 걸 보니, 텄다. 텄어.

나는 아쉬움에 혀를 차며 비밀 보관소에 전시되어 있는 '용의 마갑(魔甲)'을 눈에 담았다.

저게 바로 이 사단을 만들어 낸 원흉.

이른바,

에오드란의 '일생일대의 꿈'이라는 것이었다.

솔직히 나는 원래 오늘은 일찍 자려고 했다. 내일이 마지막 탐사였으니까.

그런데 로레인이 한밤중에 불쑥 찾아왔다.

"잠시 시간 돼요? 잠깐만요. 나와 봐요."

그때 그녀는 조용히 흥분하고 있었다.

언제나 왕처럼 활보하던 그녀가, 낯선 동네에 온 고양이처럼 몸을 빳빳이 세우고 주변을 경계했다.

"부탁이 있어요."

그녀는 말했다.

"이건 제 일생일대의 꿈. 어쩌면 제가 남길 수 있는 최고의 걸작이거든요."

"갑자기요?"

"마갑이에요. 신화 시대의 부품들을 일부 사용해서 만들어 낸... 마갑."

뭐?

"말씀드린 적 있죠? 마갑은 신화 시대의 갑옷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고."

"그랬죠."

"하지만 우린 여전히 신화 시대의 갑옷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거든요. 한 1%쯤 분석했으려나.... 그것만으로도 지금의 마갑이 탄생했죠."

뭐랄까. 신화 시대의 물건이라는 게 너무 엄청나서, 이제 와선 되레 들어도 별 실감이 안 났다.

말 그대로 신화를 듣는 기분?

아, 그래. 그때는 신이 산도 가르고 별도 부쉈다지? 아- 그랬구나.

딱 이런 느낌.

"그런 신화 시대의 부품을 제 이론에 따라서 조합해 본 시험작이에요. 이게 제대로 기능만 한다면... 신화 시대 마갑에 대한 해석을 3% 아니 어쩌면 5%까지 끌어올릴 수도 있겠죠!"

음, 여기까지는 그냥 네-네- 하면서 들었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말은 나도 좀 흥미가 갔다.

"동시에 사상 최강의 마갑이 탄생하는 거예요!"

사상 최강의 마갑?!

짜릿!

등골이 시원해지는 어감.

저절로 갖고 싶어진다!

하지만 나는 무관심한 태도를 고수했다.

로버랜드의 협상가는 절대 먼저 반응을 드러내지 않으니까.

"그래서요?"

역시나 안달이 난 건 로레인 쪽이었다.

"...내일이 마지막 탐사라 계약도 끝나잖아요. 그러니 실험을 하려면 오늘밖에 없어요. 오늘은 에오드란도 바쁠 거고"

결국 입술을 꾹 깨문 그녀가 조건을 말했다.

"마나 하트 100개! 또는 그에 준하는 가치의 아티팩트를 섞어서! 어, 어때요?"

마나 하트.

사실 지금 내게는 중요도가 떨어졌다.

마갑을 몰래 털어 가려던 계획이 실패한 지금, 뭐 하러 그렇게 많은 마나 하트가 필요하겠어.

하지만 그래도,

'뭐, 아티팩트로 받아도 되고, 아니면 다음 시간 여행에서라도 또 마갑을 확보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니....'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그 최강의 마갑이라는 것도 보고 싶었고.

다만,

"근데 그게 그거죠? 몸이 뻥! 터져서 죽을 수도 있다고 했던 그거."

그거 전에 에오드란이 뜯어말린 그거 맞지?

이렇게 찔렀다.

상대를 공격해야 무언가가 더 나오는 법이니까.

로레인이 당황해서 눈동자를 굴렸다.

"그, 그건 보통 사람들 얘기고요. 란센 씨는 절대 그럴 일 없어요! 제가 신체 데이터를 뽑아 봤잖아요. 충분해요. 100%! 설령 마갑이 폭주해도 이겨 내실 수 있어요. 이건 제 모든 걸 걸고 맹세할게요."

뭐 그렇다면 안심이긴 한데....

그래도,

"안 내키네요. 소장님 말만 믿고 목숨을 맡기라는 건데."

"이잇...."

이를 악문 로레인은 결국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200개...! 마나 하트 200개! 또는 그에 준하는 아티팩트! 이게 진짜 한계에요! 이 이상은! 제 재량으로 못 줘요. 주고 싶어도 못 준다고요!"

이봐 이봐. 역시 쥐어짜면 나오잖아.

나는 그제야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그녀를 따라나섰다.

그렇게 비밀 보관소까지 가서 '최강의 마갑'이란 것을 보고 막 경악을 하던 찰나였는데...

갑자기 에오드란이 나타난 것이다.

"소장님?"

"히, 히이익? 어떻게? 내가 은폐 마법도 펼쳤는데?"

"아주 실망이 큽니다. 소장님."

그리하여 지금의 이 상황이 오게 되었다.

"악! 악! 잠깐 놔 봐. 에오드란! 이거 안 놔?!"

진짜 힘도 좋다니까? 176cm에 이르는 로레인을 거뜬히 짊어지고 밖으로 나서는 에오드란.

로레인은 평소의 존대도 잊어버리고 악악! 화를 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괜찮다고! 진짜! 100% 안전하다고! 내가 확인했어!"

"확실히 란센 님의 육신이라면 견딜지도 모르겠군요. 그는 특별하니까."

"거봐! 그렇다니까! 그러니까...!"

"그런데 정신 쪽도 검증해 보셨습니까?"

"어... 어?"

"저거 마나 하트가 아니라 드래곤 하트를 동력원으로 하는 물건 아닙니까? 용의 사념이 잔뜩 남아 있는."

"어... 그게...."

"정신 쪽도 안전한가. 알 수 있을 리가 없죠. 아직 마법이 영혼을 다룰 만큼 발전하질 못했으니."

"아, 아니 그래도 란센 씨라면."

"조용히 하십시오."

딱 잘라 말하는 에오드란에 로레인이 찔끔 고개를 숙였다.

"란센 님도. 오늘 일은 잊어 주시고 그만 나오시죠.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에오드란을 따라 비밀 보관소를 나섰다.

그러나 진한 아쉬움에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밤처럼 까만색이었다.

그렇다고 밋밋한 것은 아니었다.

광택이 없는 검은색, 반짝이는 검은색, 거친 검정, 부드러운 검정, 온갖 검정들로 화려하게 꾸며진 예술적인 마갑.

하지만 정말로 시선을 사로잡는 건....

'저거... 오러를 뿜어내고 있어.'

용의 심장을 동력원으로 썼다고 했나?

아직 시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랜드 마스터 카인 마누스 못지않은 기세로 뿜어져 나오는 그 오러에, 나는 눈을 떼지 못했다.

아깝다.

마나 하트 200개도 아깝지만,

저건 정말 가지고 싶었다.

'용의 마갑'

로레인의 일생일대의 꿈은, 바로 그런 이름이었다.

* * *

솔직해져야 할 것 같다.

나, 누군가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가 않았다.

사람 죽는 거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죽여 본 건 셀 수도 없지만.

그래도 그랬다.

그때, 걔 이름이 밀로였었나?

연두색 머리.

늑대 괴물로 변해 가다가, 사람으로 죽겠다며 자살을 했던.

아직도 걔 생각을 하면 기분이 썩 좋지 않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토록 욕심나는 마갑을 싹 쓸어 오는 걸 포기한 이유도.

솔직히.

나는 그다지 떳떳하게 살아온 사람은 아니었다.

크시아스 밑에서 더러운 일도 적지 않게 해 봤으니까.

나름 내 재량을 발휘해 가능한 도리를 지켜보았지만, 결국 로버랜드의 전사가 마냥 선하게만 살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하지만... 가급적 다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마갑을 쓸어 가려면 로레인은 몰라도 에오드란은 죽여야 할 거다. 그 할아범, 그런 기세였으니.

그게 정말로 내키지 않았다.

그리고 또,

지난 20일간 함께했던 탐사팀 용병들도 마찬가지다.

어느샌가 마음에 조금씩 스며들었는지, 이들이 죽는 모습도 어지간해선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착잡했다.

"우웨에에엑!"

"히익!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정신 좀 차려!"

마지막 날의 탐사는 그야말로 지옥이었으니까.

'대체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대체, 저 깊은 곳에 무엇이 있길래.

악몽과도 같은 광기는 마치 살아 있는 듯 어느새 훌쩍 더 커져 있었다.

우리는 유적의 비밀을 밝혀 내기도 전에 전멸의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63화 임무 수행 중

오늘은 그랬다.

광기가 유적의 입구부터 넘실거렸다.

시작부터 실드를 켜야 했을 정도로.

너무 위험한 거 아니냐며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이게 마지막 탐사인데 여기서 포기하는 건 너무 아깝다는 의견이 결국 우세를 점했다.

로레인은 탐사팀을 위해 성과급 1,000%와 실드 마법 강화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그런데도 이 꼴이었다.

실드가 강화되고 성과급 1,000% 약속에 사기가 치솟았음에도 불구하고,

유적의 최저층에 도달하자 그 모든 게 의미 없어졌다.

'기분이 영 안 좋네.'

당장 나도 미묘한 감각의 뒤틀림과 메슥거림에 꽤나 불쾌감을 느꼈다.

탈태를 이룬 내가 이럴 정도였으니, 다른 동료들은 말할 것도 없겠지.

"웩! 웨엑!"

5분에 한 번씩 속을 게워 내는 건 양반이었고,

"괴, 괴물! 언제!"

착란을 심하게 일으켜서 동료를 향해 칼을 휘두르기까지 했다.

적당히 거리를 벌려 대열을 이루고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며 기어가듯 나아가는 탐사.

한 발 한 발에 식은땀을 뚝뚝 떨어뜨린다.

결국,

나는 반로아를 꺼내 들었다.

모든 삿된 것을 멸하는 성은(星銀)의 힘이 주위를 은은하게 물들였다.

"아...."

"어라?"

이를 악물고 나아가던 동료들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졌다.

어깨를 빙빙 돌리고 스트레칭도 한다.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인지, 멀찍이 떨어져서 걷던 동료들도 슬금슬금 내 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점점 온도가 올라가는 솥에 갇힌 것처럼.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동료들의 호흡은 다시 가빠 오고 식은땀은 후드득후드득 땅을 적셨다.

그것만 해도 힘들어 죽겠는데...

그놈의 거머리들.

우리가 '심연 거머리'라 이름을 붙인 마물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점점 더 많아졌다.

이놈들을 처음 발견한 건 3일 전.

그동안은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쩌다 한두 마리가 기어 나왔는데, 그냥 내가 느껴지는 족족 오러로 태워 버렸으니.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거머리가,

후드득!

천장에서 쏟아지고,

퉁! 퉁!

벽을 차고 석궁처럼 날아들었다.

안 그래도 은밀한 녀석들이 숫자까지 많아진 데다가, 심부로 다가갈수록 몰아치는 마나에 감각까지 흐려졌기에... 나로서도 놈들을 다 쳐낼 수가 없었다.

이게 결정적으로 동료들의 멘탈을 무너뜨렸다.

쭈우욱!

"으윽! 대체 언제!"

이 거머리들의 주둥이 앞에서는 오러고, 실드고, 그 무엇도 소용이 없었다.

심지어 갑옷도.

30대 초반의 용병 데푸안은 진저리를 치며 자신의 팔뚝 보호대에 매달린 거머리를 떼어 냈다.

콱! 콱!

바닥에 패대기치고 얼른 그것을 밟아 죽였지만,

'소름 끼치는 건 지금부터지.'

심연 거머리는 공간 자체를 넘어, 살갗을 찢고 피를 빠는 듯했으니까.

팔뚝 보호대 위를 물었어도 정작 상처는 피부 위에 났다.

데푸안은 전혀 진정하지 못했다.

또옥또옥.

그의 손가락을 타고 피가 흘렀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출혈과 상처 같은 게 아니었다.

"씨발! 진짜! 시발!"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거머리가 붙어 있던 팔뚝 보호대를 떼고 옷을 걷어붙이는 순간까지, 데푸안의 입에서 나오는 건 그저 쌍욕뿐이었다.

"씨발! 씨발 진짜!"

데푸안의 팔에는,

끔뻑-

끔뻑 끔뻑-

눈알 하나가 돋아 있었다.

팔의 살갗이 찢어서 눈꼬리 부분으로 피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팔 위에서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 데푸안을 쳐다본다.

이게 결정타였다.

심연 거머리에게 물린 부위가 변형된다는 것.

살갗을 찢고 눈이 나오거나, 작은 손이 튀어나오거나, 귀가 나오고, 코가 나와서 벌름거리기도 했다.

안 그래도 간당간당하던 동료들의 멘탈은 신체의 순수성이 훼손되었다는 충격 앞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다들 침착해! 지금 내가 분석 중이야. 충분히 회복 마법으로 되돌릴 수 있으니까, 침착하라고!"

캐스크가 소리를 질러도 동료들은 쉬이 진정하지 못했다. 당장 내 팔에서 웬 눈알이 데룩거리는데, 힘들지 그거. 어지간하면.

따끔- 따끔-

나는 그나마 상황이 낫기는 했다.

일단 거머리의 이빨이 탈태를 한 내 피부만큼은 찢지를 못해서 말이지.

그런데도 무슨 저주 같은 것이 남는지 한 번 물린 부위는 계속 가렵고 따끔거렸다.

'후.... 빨리 끝내고 싶다.'

차라리 화끈한 싸움이 낫지.

서서히 신경을 갉아 먹히는 이 느낌은 내게도 불쾌하고 꺼려지는 것이었다.

저벅저벅저벅저벅

모두 같은 마음이었을까? 탐사를 이어 가는 우리의 걸음은 점점 더 빨라졌다.

나중엔 거의 뛰는 것처럼.

사각사각사각사각

그리고 그건, 정말 갑자기 시작되었다.

섬칫!

등 뒤를 타고 오르는 소름.

무언가.

탈태를 이룬 내 감각에도 거의 잡히지 않는, 고차원적인 무언가가 우리를 휩쓸고 지나갔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후드드드득!

거머리의 폭우가 쏟아졌다.

심연 거머리가, '문자 그대로' 공기 중에서 태어나 빗발쳤다.

"모두 뛰어!"

마치 우리를 더 깊은 곳으로 끌어들이듯,

우리의 머리 위와 우리의 뒤쪽에서부터 끝도 없이 태어나며 쏟아지는 거머리들.

나는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검령각성]

반로아를 뽑고 스킬을 활성화하고, 전력으로 뽑아낸 오러 쓰레드로 사방을 난자하며 배후를 지켰다.

촤아아악!

흩뿌려지는 검은 핏물.

화르르르!

반로아가 뿜어내는 파사의 기운에 타오르는 거머리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막아 낼 수는 없었다.

'젠장. 그냥 나를 무시해 버리네.'

작은 거머리들이 촘촘한 오러 쓰레드 사이를 쏙쏙 빠져나가 버렸고, 아예 내 등 뒤에서 새로운 거머리들이 대거 태어나기까지 했다.

"히익! 저리 가!"

"뺨! 안 돼! 얼굴은 안 돼!"

여기저기 달라붙은 거머리들 때문에 패닉에 빠지는 용병들.

이 지옥을 헤쳐 나갈 수 있게 해 준 건, 내가 아닌 캐스크였다.

낭랑한 목소리가 어둡고 긴 통로에 울려 퍼진다.

[무거운 것은 대지가 되고, 가벼운 것은 하늘이 되며, 부드러운 것은 잎사귀가 되고 단단한 것은 바위가 되니....]

검을 뽑아 들고 캐스크가 주문을 영창했다.

그의 마법을 여러 차례 보아 왔지만, 영창을 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큰 규모의 마법을 사용할 때도, 검으로 허공에 마법진을 그려 순식간에 캐스팅을 끝냈는데....

몸에 달라붙은 거머리 따위 신경도 쓰지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며 주문을 영창하는 캐스크.

그런 쉽지 않은 과정 탓이었을까?

그가 완성한 마법은 놀랍도록 효과적이었다.

[모든 것은 본디의 순수한 가능성 그대로...! 어웨이큰!]

그의 검 끝에서 피어난 새하얀 광채가 사방을 부르르 떨쳐 울렸다.

무게가 없는 빛임에도, 청동 종소리처럼 가슴에 깊은 울림을 남기는 성스러운 광채.

그 빛에 득실거리던 거머리는 눈이 녹듯 사라졌고, 변형되었던 신체는 본래 모습을 찾았다.

팔이나 뺨에서 데룩 거리던 눈동자가 녹아내리듯 흩어지고 뚝뚝 피가 흐르던 상처에 새살이 돋았다.

나도 그랬다.

머릿속을 파고들던 광기와 근질거리고 따끔거리던 느낌이 싹 사라져서 한결 편했다.

캐스크는 빛나는 검을 높이 치켜들고 외쳤다.

"다 왔어. 조금만 힘내자!"

이건 인정해야겠는데?

방금 좀 멋졌다.

캐스크.

하지만 캐스크의 마법은 오래가지는 않았다. 한 3분 유지되었나?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탐사팀의 사기는 충천했다.

위기를 넘길 수도 있고, 변형된 신체를 회복할 수도 있다는 걸 몸소 체험하고 나자, 다시 용기가 생긴 것이다.

"자잘한 유물 탐사는 포기하고 최고 속력으로 끝까지 간다!"

캐스크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달렸다.

내가 후위를 맡았고, 나머지가 전면을 뚫었다.

그렇게 달리기를 10분.

마침내 마지막에 도달했다.

"여기 결계가 있어! 이제 이 결계만 넘으면 끝이야!"

한창 거머리들을 막아 내던 나는 고개를 돌려 캐스크를 불렀다.

"캐스크! 아까 그 마법 한 번 더! 결계는 내가!"

"알겠어!"

그렇게 막 캐스크와 내가 위치를 바꾸려던 찰나였다.

푸훅!

느닷없이, 결계 안쪽에서 무언가가 뛰쳐나왔다. 눈부신 빛을 휘감고 막대한 힘을 뿜어내는 거대한 존재였다.

화아아-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이 통로 전체를 밝히며 모든 그림자를 말소했다.

스아아-

'뭐야 이게?'

통로 전체가 출렁일 정도로, 지긋지긋하게 많았던 거머리들이 눈부신 빛 앞에 모조리 녹아 버렸다.

손바닥 위에 떨어진 싸락눈처럼, 태양에 비친 그림자처럼.

무언가가 뿌린 빛에 닿는 족족 녹아서 흩어졌다.

그러곤,

[이곳은 특급 격리 구역. 침입자는 소거한다.]

'그 눈부신 것'은 그렇게 선언한 직후, 검을 들어 캐스크를 내리쳤다.

그 기세가 실로 만만치 않았음에,

나는 반사적으로 튀어 나가 그의 앞을 감쌌다.

쩌어어어엉!

충격파가 유적을 우르르 흔들었다.

엄청난 위력이었다.

급히 캐스크를 보호하느라 영 좋지 못한 자세로 공격을 받아 냈다곤 해도, 탈태를 이룬 데다가 최상급 마갑으로 강화된 신체가 뒤흔들릴 정도였다.

속은 메슥거렸고 입안에선 피비린내가 물씬 풍겼다.

검과 검을 맞부딪힌 채로 나는 그 너머에 있는 존재를 바라보았다.

'사람?'

사람 같은 형상이나, 그게 아니라는 직감이 든다.

2.5미터나 되는 큰 키.

전신을 가리는 하얀 갑옷.

갑옷의 이음매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

그리고 온몸을 타고 도는 마법도 오러도 아닌 그 미지의 힘.

'얘가... 이 유적 끝에 도사리고 있던 비밀인가?

딱 봐도, 마갑을 입은 지금의 나로서도 승리를 장담하기 힘든 호적수. 아니, 그 이상!

그런데,

호적수고, 뭐고 간에....

나는 일단 놈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너... 감히 우리 대장을 노려?"

상당히 꼬왔다.

매우 불편했다.

니가 뭔데... 우리 캐스크를 건드리냐?

나한테 다 빼앗겨 놓고도 알아서 더 퍼 주는 우리 착한 캐스크를!

* * *

"나, 나한테... 대장이라고. 했어...."

캐스크는 감동 먹은 목소리였다.

"넌 일단 빠져 인마!"

대충 쫓아냈다. 시선은 전면에 고정한 채로.

2.5미터. 거대한 그것이 검과 검을 마주한 채,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내 검을 밀어내려는지 내리누르는 힘을 점점 더해갔는데, 그게 상당히 묵직했다.

환골탈태를 이룬 몸뚱이의 근력과 오러, 마갑의 힘, 거기에 체검(體劍)으로 증가시킨 무게와 적절히 잡은 균형 감각까지 모든 걸 다 동원해야 겨우 견딜 수 있었을 만큼.

꾸구구국!

정체불명의 존재는 한동안 나를 짓누르다가 그게 통하지 않자 다시 한번 말을 걸어왔다.

[물러서라. 이곳은 특급 격리 구역. 침입을 시도하는 자는 경고 조치 없이 소거한다.]

그것의 목소리는 대기를 위협적으로 진동시켰고 귀를 넘어 머릿속으로 곧장 박혀 들어왔다.

처음 듣는 언어였는데도, 우리 모두가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

"특급 격리 구역? 그게 뭔데? 넌 또 뭐고?"

그것이 나를 바라본다.

눈구멍에서조차 환하게 빛을 뿜어내는 이질적인 존재.

사람의 형상을 취하였으나 볼수록 위화감이 든다.

놈의 등 뒤로는 오러와 마법이 합쳐져 만들어 낸 빛줄기들이 마치 날개처럼 사방으로 흐드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용병들이 헛숨을 삼켰다.

"천사...?"

"빛으로 이루어진 4쌍의 날개.... 타오르는 갑옷과 검...."

"전설 그대로야...."

천사?

그, 신의 부하인가 뭔가 하는 그거?

근데 신이고 천사고 간에.

지금 내 투지는 활활 타오를 뿐이다.

저놈이 우리 캐스크를 죽이려 했으니까.

하지만 머리는 되레 차갑게 식었다.

'천사. 그러니까 신화 시대의 존재라는 거지? 어떻게 5만 년 전의 존재가 아직도 살아 있는 건지는 몰라도... 조심해야겠네.'

신화 시대는 언제나 상상을 뛰어넘어 버리는 시대.

내가 모르는 수법을 수십 개는 가지고 있다고 상정한 채로, 신중하게 싸워야 했다.

온몸의 감각을 칼날처럼 세우고, 검령을 아주 가깝게 끌어들였다. 내가 검령인지, 검령이 나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운, 거의 그 경계선까지.

그렇게 싸우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췄는데, 정작 그 '천사'라는 것의 행동이 조금 이상했다.

[우호적인 코드 발견. 스캔을 실행합니다.]

알 수 없는 말을 하더니,

위잉- 위이잉-

놈의 전신에서 이상한 광채가 뻗어 나와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 댔다.

그러더니 대뜸 뜬금없는 소리를 뱉었다.

[상위 코드 발견. 분석 중... 「제로코드」 확인! 즉시 모든 적대 행위를 철회합니다. 죄송합니다. 알 수 없는 오류로 확인이 늦었습니다!]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사방을 위압하던 빛의 날개가 사르르 가라앉았다. 겸손하게 뒤로 감추어졌다.

눈이 부시도록 타오르던 갑옷의 광휘가 줄어들어 은은한 조명 수준이 되었다.

놈은 내 검을 짓누르던 힘마저 거둬들이곤 훌쩍 뒤로 물러서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곤 잘 훈련된 병사처럼 절도 있게 서서 내게 '보고'를 했다.

[섬멸천사 A12 오메가. 임무 수행 중입니다!]

이 갑작스런 상황 변화엔 아무리 나라도 벙찔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뭔 상황이래. 갑자기?

#64화 손가락

모두가 나를 쳐다봤다.

"어? 갑자기 얌전해졌는데요...?"

"근데 방금 뭐라고 한 거야?"

"란센 씨는 알아들으셨어요?"

뭐야? 나만 들은 거야?

섬멸천사 어쩌구 하는 거?

이번엔 오직 나에게만 의념이 전해졌던 모양이었다.

천사라는 놈이 나한테만 특이하게 반응했다. 그 「제로코드」인가 뭔가 때문에?

나는 만일의 사태를 경계하며 스스로를 '섬멸천사'라고 밝힌 그것의 주위를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혹시 모른다. 저렇게 얌전한 척해 놓고, 기습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좌로 우로 반원을 쭉 도는 동안에도 섬멸천사는 미동도 않고 제자리를 지켰다.

시선만이 나를 졸졸 쫓는 게 꼭 강아지 같은 느낌마저 주었다.

'복종'이라는 단어를 온몸으로 보여 주고 있달까?

그래서 시험해 보기로 했다.

"야."

[섬멸천사 A12 오메가. 지시 대기 중입니다.]

이게... 관등 성명도 대네?

"천장에 시선 고정시키고 대기. 무슨 일이 있어도 움직이지 마."

[알겠습니다.]

스윽-

섬멸천사가 정말 시선을 천장으로 옮겼다. 이젠 내가 그 주변을 돌아다녀도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지금 란센 씨 명령을 따른 거야? 맞지? 맞지?!"

"란센. 뭐야? 왜 천사가 네 말을...."

용병들이 수군대고 캐스크가 의문을 드러낸다.

"쉿. 가만히 있어 봐."

나는 일단 그들을 무시했다.

숨을 죽이고, 섬멸천사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 번개처럼 반로아를 휘둘렀다.

푸화아아아-!

폭풍을 머금은 검푸른 오러 블레이드가 매끈하게 드러나 있는 섬멸천사의 목 바로 앞까지 닿았음에도, 녀석은 정말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처럼.

방금, 내가 마음만 먹었으면 방금 이 천사의 목을 칠 수 있었다.

이 정도라면 나도 더는 의심할 수가 없다.

'뭐야? 진짜야? 왜?'

검을 거둬들이고, 꿀꺽 침을 한 번 삼켰다.

"야."

[섬멸천사 A12 오...]

"됐고, 「제로코드」가 뭐야. 설명해 봐."

[「제로코드」는 최상위 권한자이자 최우선 보호 대상입니다.]

근데 그게 나라고? 신화 시대 사람도 아닌 6만 년 뒤인 대륙력 1,351년 사람인 내가?

"왜 내가 「제로코드」인데?"

[그것은....]

멈칫.

대답을 하려던 섬멸천사가 굳어지듯 멈춰 섰다. 그것의 두 눈에 붉은 광채가 순간적으로 스쳤다.

그러곤 내 질문과 동떨어진 말을 시작했다.

[이곳에 오셔선 안 됐습니다.]

"무슨 소리야. 제로코드가 뭐냐니까."

[이곳은 특급 격리 구역. 사도를 죽여 잠재운 무덤. 산 자의 접근으로 인하여 사도가 죽음의 잠을 더 일찍 깨웁니다.]

"사도? 그건 또 뭔데?"

[사도는....]

멈칫!

또다. 또 멈췄다. 그러더니 이번엔,

우우우웅-

요란한 소음과 함께 전신에서 붉은 광채를 뿜어냈다.

섬멸천사는 돌연, 아까처럼 모두의 머릿속을 파고드는 거대한 진동을 일으키며 외쳤다.

[이변 발생! 사도의 각성 속도가 불가해한 속도로 폭증!]

화아악!

고이 접어 두었던 빛의 날개를 사방으로 흩뿌리며 펼쳤다.

[10분 내로 사도가 죽음의 잠에서 깨어납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던 바로 그 찰나,

후우웅-!

어떤 거대한 파동 같은 것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소름이 쫙 끼치고 코가 시큼했다.

우- 우- 우우-

반로아는 여태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떨림을 보인다.

그래.

두려워했다. 반로아가.

오로지 '베는 것' 외에는 다른 의지가 존재하지 않을 그런 검이... '두려워한다.'

[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시 계산합니다. 9분 내로. 다시 수정 7분, 재수정, 3분 내로 사도가 출현합니다!]

섬멸천사는 이제 내게서 아예 등을 돌렸다.

거대한 빛의 검을 뽑아 결계 저 너머를 겨눈다.

오러도 마법도 아닌, 무시무시한 힘이 그 등 뒤로 피어올랐다.

그리고...

촤르르륵!

운명의 책이 제멋대로 아공간 목걸이를 뛰쳐나왔다.

[루세라스력 4681년. 5월 22일. 해당 역사가 ⬛⬛⬛⬛⬛⬛의 손길에 의해 강제로 개변됩니다. ⬛⬛⬛⬛⬛⬛의 손가락이 기존 역사와 다르게, 온전한 부활을 이루어 냅니다.]

책에 새겨지는 글씨.

이게 무슨 소리야?

뭔지 모르는 놈이 역사를 멋대로 바꾼다고?

손가락이라는, 지금 깨어난다는 그 사도 놈이 실제 역사보다 더 강해진다는 뜻이야? 그럴 수도 있어?

귓가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몇 번 들어 본 목소리였지만,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감정이 가득 실린 어조였다.

[세계선의 결절로 인해, 이번 임무는 반복할 수 없습니다. 한 번의 실패는 최종적인 패배입니다.]

여기까지는 비교적 사무적이었지만, 뒤에 이어지는 말은 그렇지 않았다.

[...부디, 용기를 잃지 마세요. 이제 우리에게 남은 기회는 위기뿐입니다.]

말문이 막혔다.

이해는 할 수 없었지만, 느낄 수는 있었다.

뭔가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고대 기준으로 익스퍼트 최상급에 근접하고, 현대 기준으로는 소드마스터를 벗어난, 절대 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나의 무력으로도 감당할 수 없을 만한 그런 대격변이 벌어지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몸을 휩쓰는 오싹한 불길함. 압도적인 힘을 뿜어내면서도 바짝 긴장한 섬멸천사. 거기에 더해 운명의 책의 경고까지.

뭔가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지금 내가 느끼는 공포는 단순한 신체 반응이 아니었다.

영혼이 나에게 선명한 경고를 알리고 있었다.

[「제로코드」의 생존을 최우선 합니다. 「최후의 쐐기」를 발동하여 사도를 일시적으로 탈진시킵니다.]

최후의 쐐기.

섬멸천사가 그 말을 뱉고 온몸을 떨어대며, 눈부신 광채를 사방에 뿌렸을 때, 나는 깨달았다.

'이렇게... 강했어?'

만약 아까 얘랑 싸웠으면 내가 졌겠구나.

경지고 검술이고를 따지기 이전에, 도무지 감당이 안 되는 출력이었다.

터무니없는 에너지가 섬멸천사를 중심으로 회오리쳤다.

그런데 그런데도... 가슴을 파고드는 불길함은 사그라들질 않았다.

저렇게 강한 존재가, 우리 편인데도 조금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제로코드」의 탈출 프로토콜을 실행합니다.]

[장거리 도약 불가. 가능한 최선의 위치로 재설정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야! 나만 탈출시키면 안 돼! 여기 전부! 알아들어?! 전부 탈출시켜야 돼!"

[수정. 「제로코드」의 요청에 따라 탈출 프로토콜을 재설정합니다. 함께 탈출할 인원들과 신체적 접촉을 형성하여 주십시오.]

역시 이놈. 나만 내보낼 생각이었구나.

나는 지금 거의 본능적으로 느끼고 행동하고 있었다.

"다들 정신 차리고 모여! 빨리!"

이제는 확연히 느껴졌다.

저 결계 너머에서 무언가가 깨어나고 있었다.

절대로 깨어나면 안 되는 무언가가 막 결계를 찢고 나오려 하고 있었다.

나조차도 대항할 수 없는 터무니없는 무언가가.

도망쳐야 한다.

오직 그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막연한 불길함은 이미 실체가 되어 이 공간을 장악했다.

빠직! 빠지직!

눈앞을 가로막고 있던 결계가 부스러지며, 그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기운.

거기에 압도되어 몸을 떨던 용병들이,

"정신 차리라고!!!"

내 고함 소리에 겨우 초점을 맞추고 내게 다가왔다.

유일하게 한 명.

단 한 명만이. 끝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캐스크였다.

그는 양팔로 몸을 부둥켜안고 덜덜 떨었다.

입으론 쉴 새 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이건... 말도 안 돼. 이런 게. 이런 게 가능할 리가 없어. 마나의 자의적 정의라고? 이건, 이런 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나는 그의 어깨를 억지로 잡아끌었다.

"정신 차려! 니가 대장이잖아! 지금 뭐 하는 거야?!"

"라, 란센...?"

그제야 캐스크가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붙잡은 어깨에서 그의 떨림이 끝없이 전해진다.

"됐고. 일단 다 붙어."

이젠 느껴졌다. 정말 위험하다.

푸스스스-

내가 전력을 다해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섬멸천사가 지금 조금씩 부스러지고 있었다.

이미 결계는 무너졌다.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온 잿빛의 기운이 우리 앞을 지키고 선, 섬멸천사를 부서뜨린다.

시간이 없었다.

"우리 다 모였어! 이제 보내 줘."

[탈출... 프로토콜... 실행합니다.]

아까보다 느릿해진 목소리로 그리 대답한 섬멸천사.

위이이잉!

새하얀 빛이 우리를 감싸고, 그 사이로 섬멸천사가 검을 당기는 게 보였다.

끝없이 쏟아지는 잿빛 기운 속으로 그 스스로 하나의 쐐기가 되어 폭발하듯 쏘아지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파아앗!

새하얀 빛이 모든 것을 가렸다.

파스스-

잠시 뒤, 흩어지는 빛무리 사이로 드러난 풍경은 익숙한 장소였다.

유적 입구.

늘 탐사를 위해 드나들던 바로 그 장소로, 우리 6명 모두 귀환했다.

"라, 란센 씨?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어째서인지 유적 입구엔 로레인과 에오드란, 그리고 연구원 여럿이 나와 있었다.

하기야. 지금 저 밑에서 그 난리가 났는데 안 나와 보는 게 더 이상하지.

땅이 흔들리고, 알 수 없는 기운이 뿜어졌을 테니까.

그래도,

'이제 좀 숨이 쉬어지네.'

저 밑에서 느꼈던 위압에 비하면 아직 이곳은 천국이었다.

그것도 잠시뿐이겠지만.

남들보다 경지가 높기 때문에 도리어 더 선명하게, 두렵게 느껴졌던 그 위압감....

머지않아 그게 이곳도 휩쓸 거다.

"란센 씨! 뭐라도 말 좀?! 그리고 방금 그건 공간 도약이었나요? 캐스크는 공간 마법을 못 쓸 텐데...!"

질문을 쏟아내는 로레인.

하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질답이나 주고받을 시간이 없었다.

"로레인!"

강하게 그녀를 불렀다. 존칭 따위는 싹 빼 버리고.

병사를 대하듯 그녀를 압박했다.

"네, 네?"

"즉시 전투 태세를 갖춘다."

"저, 전투 태세요?!"

"시간 없어! 당장! 살고 싶으면 일단 전투 준비부터!"

로레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곧 입술을 꼭 깨물더니, 품에서 웬 막대를 꺼내 비틀었다.

웨에에에엥-!

그게 신호탄이 되었다.

로레인의 연구소 전체에 비상 알람이 울려 퍼졌다.

귀청을 찢는 소리에 번쩍이는 붉은 경고등.

오늘도 좀비처럼 비척거리며 일을 하던 연구원들은 그만 벙찌고 말았을 것이다.

로레인이 품에서 꺼내 든 아티팩트를 입에 대고 외치자 그 목소리가 연구소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전원 전투 준비! 총동원이다! 한 명도 빠지지 말고 뛰어! 뛰어! 각자 위치로! 전투 훈련한다고 쓴 돈이 얼만데 이따위로 할 거야!?]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연구원들이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지시를 마친 뒤, 로레인은 연한 연둣빛 눈동자로 나를 직시했다.

"이제 설명해요. 대체 무슨 일인지."

"나도 자세히는 몰라. 그저... 터무니없는 괴물이 올라올 거야. 곧."

로레인이 눈썹을 찌푸렸다.

"당신이 이렇게 긴장할 정도로? 당신보다도 더 강한 괴물이라고요?"

그 말에...

나는 사실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그래도 내가 더 강해."

사실을 입에 담았다가는 싸우기도 전에 마음이 무너질 것 같아서.

다만, 희망은 없는 건 아니었다.

"네? 더 강해요? 그럼 왜...."

"그게 필요해."

"뭐가요...?"

"용의 마갑."

나는 로레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 하지만 그건 아직 테스트도 안 끝난...!"

"시간 없어. 그게 있어야. 이길 수 있어."

"아...."

로레인의 장점은 판단이 무척 빠르다는 것이다.

그녀가 열쇠를 꺼내 내 손바닥 위에 올렸다. 비밀 보관소의 봉인을 열 수 있는 열쇠였다.

그 가벼운 열쇠가 왜 그리도 무겁게 느껴지는지.

"그럼.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잘 부탁해."

잠시도 지체할 틈이 없었으므로, 나는 그대로 몸을 날렸다.

지금은 그저 믿는 수밖에 없다.

로레인을.

내가 올 때까지 그녀가 버텨주기를.

그녀가 만든 '일생일대의 꿈'이 부디 제대로 작동해 주기를.

* * *

콰앙!

비밀 보관소의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마자 내가 한 일은 하나였다.

'모조리 챙긴다.'

어차피 이게 마지막이다.

운명의 책이 나를 이 시대로 보낸 이유. 그것은 지금 부활했다는 사도인지 손가락인지 하는 놈을 죽이라는 거였겠지.

그러니까 이게 마지막이다.

챙기려면 지금밖에는 기회가 없다.

콰당! 쿠당!

나는 가구들이 부서지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비밀 보관소에 전시된 마갑과 아티팩트를 모조리 아공간에 쑤셔 박았다.

어차피 저 괴물과 싸우면 다 부서지고 말 거. 양심의 가책 따위 느낄 필요도 없다.

지금 챙겨야지.

그렇게 단 30여 초 만에 모든 걸 챙긴 나는, 마침내 '용의 마갑' 앞에 섰다.

'결국 널 입어 보긴 하는구나.'

그게 이런 상황일 줄은 몰랐는데....

감상은 잠시뿐. 나는 입고 있던 마갑을 벗어던지고 용의 마갑을 서둘러 입었다.

착용을 마치고 '시동'을 하는 순간,

[죽어어어어엇!]

분노로 가득 찬 용의 사념이 내 머릿속을 날카로운 칼날처럼 난자했다.

#65화 전투 태세

용의 마갑(魔甲).

그것에 '용(龍)'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바로 중심에 박혀 있는 마나 하트가 용심(龍心)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용심(龍心), 또는 드래곤 하트.

드래곤은 우리 시대에 와서는 화석만이 남은 환상종이었다.

하지만 마도 시대에는 그들의 생태를 유추해 볼 수 있는 명확한 흔적들이 남아 있었고, 심지어 드물기는 해도 살아 있는 용과 대면하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고 한다.

덕분에 내가 알게 된 사실은, 용이 단지 성처럼 거대한 몸집을 가진 '짐승'이 아니라는 점.

그들은 되려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는 지능을 가졌으며, 초월적인 능력마저 갖춘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그 '능력'의 뿌리가 되는 것이 바로 드래곤 하트.

로레인은 이 드래곤 하트를 빙하의 땅에서 발견했다고 한다.

점점 낮아지던 하얀 설원.

그 한가운데서 홀로 부글부글 끓고 있던 온천수.

호기심이 들어 탐색을 한 끝에 발견한 검붉은 드래곤 하트.

로레인에게 찾아온 일생일대의 행운이라던 이 드래곤 하트는, 어째서인지 무척 화가 나 있었다.

아니, 차라리 공포에 질려 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싫어. 싫어! 죽어! 제발! 죽어어어!]

용의 사념이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드래곤 하트 속에 있는 마나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심지어 때론 오러가 되기도 했다.

분명 드래곤 하트를 나올 때는 마나였으나, 사념이 격해지면 격해질수록 밀도가 짙어지며 오러로 변해 갔다.

거기에,

'마갑이 마나를 오러로 변화시킨다.'

드래곤 하트에서 뿜어진 오러는 원시 오러처럼 단순하고 나약한 것이지만, 그것이 마갑을 한 바퀴 돌고 나면 반로아 왕가의 비전 오러심법, 철혼(鐵魂)에 비견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강력한 오러로 변환되었다.

비밀 전시장이 난장판이 된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쿠콰쾅!

오러가 만들어 낸 폭풍에 지붕이 날아가고, 제멋대로 폭주한 오러가 벽면을 후려쳐 뻥! 뻥! 구멍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나는...

[죽어! 죽어! 죽어!]

내 머릿속을 파고드는 사념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끄아아아아아악!"

용의 사념이 칼날처럼 내 머릿속을 휘젓는 바람에 나는 육체에 대한 통제를 상실했다.

내 입은 멋대로 벌어져 침을 질질 흘렸고, 비명을 쏟았으며 몸은 간질 발작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파들파들 떨렸다.

마갑이 만들어 낸 오러와 내가 가진 철혼(鐵魂)의 오러가 여기저기서 충돌하며, 온몸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사념부터 제압해야 돼!'

본능적으로 든 판단.

오러가 아닌, 사념부터...!

난 머릿속을 파고든 용의 사념을 잠재우기 위해 의지를 가다듬었다.

건방지게,

살아 있는 용도 아니고,

죽은 용의 사념 따위가!

[닥쳐!!! 죽어!!!]

꾸궁!

몸 안에서 충돌하는 용의 오러와 나의 오러.

끔찍한 고통.

통제되지 않는 신체.

"끄아아아!"

쉽진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시작부터 지독한 싸움이었다.

* * *

"뭐야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데...?"

로레인은 당혹스러웠다.

란센이 전투 태세를 갖추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무서운 놈이 나온다는 것도 알겠다.

그 괴물같이 강하던 란센조차 용의 마갑이 없으면 승산조차 볼 수 없을 만큼, 터무니없는 상대라는 것도 알겠다.

그런데 여전히 납득은 안 갔다.

'왜 갑자기 5만 년 전 유적에서 그런 놈이 등장하는 건데?! 뭔가 착각하는 거 아냐? 왜 5만 년간 잠잠하다가 이제 와서...?'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주변엔 연구원들이 많았고, 그들에게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근본적인 의문이었다.

'씨이.... 그래도 혹시 모르니 란센을 믿고 대비를....'

막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을 무렵,

"로레인."

캐스크가 창백한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

"응? 왜?"

"도망쳐...."

"응?"

"사도... 사도라고 불리는 괴물이랬어."

"사도?"

"그래. 천사가 그렇게 불렀다고.... 저건, 저건 이상해."

천사는 또 뭐야....

로레인이 눈썹을 찌푸렸지만, 지금 캐스크는 말을 조리 있게 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하여튼 싸우면 안 돼! 로레인. 란센 말 듣지 마. 도망쳐야 돼!"

그 말은...

그 표정에 담긴 공포는...

오히려 로레인의 머리를 차갑게 식혀 주었다.

'진짜구나.'

진짜 엄청난 게 오는구나.

그렇다면,

대비해야 했다.

연구소를 지키기 위해.

로레인은 목소리를 높였다.

"다들 뭘 보고 있어! 내가 아까 전투 경보 울리는 거 못 봤어?! 각자 위치로!"

"위, 위치로!"

혼란 속에 엉거주춤 모여 있던 연구원들이 우르르 흩어졌다.

로레인도 전투 준비를 위해 유사시 지휘통제실 역할을 하는 중앙 세미나실로 향하려 했는데....

덥썩!

캐스크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가지 마. 안 돼! 도망치자.... 그래! 어차피 연구소는 너무 느려. 연구소 버리고 나랑 같이 도망치자. '가속' 주문에 '비행' 주문까지 섞으면 어쩌면...!"

탁!

로레인은 캐스크의 손을 쳐냈다.

"도망치려면 혼자 가. 캐스크."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돌려 다른 용병들에게도 자신의 뜻을 전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방금 탐사를 마지막으로 계약은 종료되었습니다. 영상 기록 아티팩트와 마갑만 반납하면 즉시 이곳을 떠나도 좋아요."

이 와중에도 챙길 건 챙기는 게 로레인다운 점이었다.

하지만 용병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저희도 데려가 주십쇼. 저희는 대장처럼 주문을 쓸 줄 몰라서 두 다리로 도망칠 자신이 없습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그 말을 한 용병, 데푸안의 다리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으니까.

"소장님."

그때 에오드란이 나섰다.

그는 로레인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

"일단 몸을 피하십시오. 여기는 제가 지키겠습니다."

로레인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에오드란까지 이럴 거야?!"

"하지만 이건 너무나 불길...."

"내 연구소야! 내 평생을 바쳐서 일군! 그걸 뻔히 알면서! 버리고 도망가라고!? 에오드란이 그렇게 말할 수 있어?"

그 말에, 에오드란은 자신의 손을 축 늘어뜨렸다.

로레인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모두를 눈에 담았다.

"갑시다! [가속]!"

따악!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녀의 하얀 겉옷 속에 있던 회중시계가 초록빛을 짙게 뿌렸다.

남아 있던 사람들은 자신의 움직임이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빨라졌음을 깨달았다.

"중앙 세미나실로!"

우르르-

유적 앞에 남아 있던 모두가 연구소를 향해 내달렸다.

* * *

로레인의 움직이는 연구소는 그 이름 그대로 움직인다.

거대한 무한궤도로 땅을 짓이기며 산을 넘고 들판을 넘고 때론 강을 건너며 신화 시대의 유적을 찾아 오지를 떠돌았다.

그렇기에 거대 마물이나 비행 마물의 공격을 당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중앙 세미나실.

그곳은 연구소의 브레인과도 같은 장소다.

평소엔 연구소 전체의 연구성과를 공유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짜내는 용도였지만, 유사시엔 지휘통제실로 변모했다.

웅성웅성-

지금 그 중앙 세미나실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웬 전투 경보야?"

"아까 못 느꼈어? 이상한 기운이...."

"기운...? 모르겠는데.... 기운이고 자시고 그냥 내가 기운이 없다."

"설마...! 진짜 이런 상황에 실전 훈련은 아니겠죠? 그런 거면 저 이번엔 진짜 사표 던질 거예요!"

"너, 그 말. 지난 훈련 때도 했어."

"이번엔 진짜야!"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사람은 몇 없었다.

애초에 아까 일어난 전조 현상 자체를 못 느낀 이들도 꽤 됐다.

다들 잠이 부족한 상태로 주어진 연구과제를 해치우기 위해 집중에 집중을 더하고 있었으니까.

그랬기에 로레인은 중앙 세미나실의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순간, 호통을 쳐야만 했다.

"지금 뭣들 하고 있어! 잡담할 시간이 있어?! 운전반! 전력 기동으로 현 위치를 이탈한다! 빨리! 빨리!"

"네, 넷!"

쿠르르르-

운전반의 연구원들이 계기판에 마나를 불어넣고 조작하자, 하나의 마을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연구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무한궤도를 끝없이 굴려 유적으로부터, 산으로부터 멀어졌다.

로레인은 쉬지 않았다.

발을 재게 놀려 주포(10르핌급 마나 대포)의 장전 장치 앞에 섰다.

"너희는 아직도 초탄 장전 안 해 놓고 뭘 한 거야?!"

"죄... 죄송합니다!"

그 닦달에 장전수 역할을 맡은 연구원들이 화들짝 달려왔다.

연구원들은 모두 마법사. 그들이 '집법(集法) 마법진'에 주욱 늘어섰다.

이곳에서 각종 마법을 '마나 포탄'에 집속시키면, 포탄은 집속된 마법을 순차적으로 발현해 마나포를 쏘아 냈다.

'마나 포탄' 하나를 만드는 데에만, 고가의 마법 재료들이 엄청나게 들어갔지만, 마나포는 그 모든 것을 단 한 번의 포격으로 증발시켰다.

그야말로 돈 먹는 드래곤.

대신 그 위력 하나만큼은 용의 숨결마저 웃도는 것.

로레인은 곧장 집법 과정에 들어가며 목소리를 뾰족하게 세웠다.

평소의 생글거림은 집어치우고 본색을 드러낸 지 이미 오래였다.

"뭐야?! 왜 장전수가 이것밖에 없어?!"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들 땀을 흘리며 눈치만 볼 뿐.

로레인이야 마법을 캐스팅하면서 대화도 쉽게 쉽게 해냈지만, 그건 다른 마법사들에겐 불가능한 묘기였다.

보다 못한 사격수 역할의 연구원이 대신 설명을 했다.

"아직 전투 태세를 갖춘 건 총인원의 20% 정도밖에 안 됩니다. 경보 울린 지 이제 겨우 2분이 지난 데다가... 지금 상황이 워낙 특이하니까요. 연구 중에, 그것도 모든 인원이 총동원된 것도 처음이고...."

결국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로레인 연구소의 연구원들이 전투 경험이 없진 않았지만 결국 그들은 군인이 아닌 연구원.

실전에서 반응이 느린 건 어쩔 수 없었다.

제자리를 바로 찾아간 건 마침 근처에 있었던 20% 정도의 연구원들뿐이었고, 나머지는 아직도 밖을 떠돌고 있었다.

연구 중이던 자료부터 안전한 곳으로 옮겨 둔다거나, 전투에 필요한 물자를 꺼내고 나누어 주는 절차가 제때 되지 않아 허둥지둥한다거나 하면서 말이다.

"쯧."

그런 상황을 눈치챈 로레인이 혀를 한 번 차고 마력을 더욱 끌어올렸을 때,

우르르르-

땅이 울었다.

사람들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털썩털썩 쓰러질 정도로 엄청난 흔들림.

"저, 저기 봐!"

어떤 연구원이 투시 마법으로 밖이 훤히 드러난 벽면을 가리켰다.

"사, 산이...!"

신화 시대의 유적이 묻혀 있던 산.

그 산이 통째로 안쪽 무너져 내렸다.

마치 무엇인가가 땅 밑에서 산을 빨아들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늘까지 치솟는 분진.

그 회색빛 구름을 헤치며 거대한 존재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세, 세상에.... 저게 뭐야...."

뱀? 용? 아니면 그냥 길쭉한 살덩이?

그것은 매끈했고, 잿빛 살결을 가지고 있었다. 끝 부위에는 거대한 주둥이가 달렸고, 눈구멍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런 길쭉한 것이, 하나, 둘, 셋... 총 7개가 불쑥불쑥 무너진 산을 뚫고 치솟았다.

"대체... 얼마나 큰 거야...."

그 거대한 일곱 개의 머리를 보고 있다 보면 원근감이 고장 난 기분이었다.

계속 쭉쭉 뻗어 올라가는 머리.

마침내, 산보다 훨씬 높이 치솟은 일곱 개의 머리가 세상을 오시했다.

『키르르르르-!!!』

일곱 개의 머리 중 가장 거대한 것은 가운데의 머리.

다른 머리의 2배 반은 되는 두께를 자랑하는 그 녀석이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온몸을 떨어 댔다.

그러자 잿빛의 가루 같은 것이 몸에서 뭉클뭉클 떨어져 나와 온 세상을 덮었다.

하늘은 금세 어둑어둑해졌고 포효를 들은 연구원들은 그만 다리가 풀려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마법사의 강인한 정신으로도 쉽게 이겨 낼 수 없는 공포에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이때 움직인 건, 이번에도 로레인이었다.

"사격반! 뭐 해?! 조준하고 쏴!"

그녀는 말만 하지 않았다.

집법 과정을 빠르게 끝내고 사격반으로 직접 달려가 연구원들의 등짝을 후려치고 손수 조준을 도왔다.

"주, 주변 공간의 왜곡을 발견! 궤도 계산이...."

"기다려!"

로레인은 그 즉시 머리를 붙잡고 암산을 시작했다.

당장 주어진 데이터만으로 휘어진 공간의 곡률분포를 연역하고 그 속을 통과해 적에게 닿을 단 하나의 경로를 연산해 냈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이 단 10초.

유능한 연구원 5명이 머리를 맞대고 2분은 쥐어짜 내야 했을 그 계산을 그녀는 홀로 10초 만에 마쳤다.

"조, 조준 완료!"

경이로운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연구원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로레인은 명령을 내린다.

"쏴!"

목표점은 일곱 머리 중 가장 거대한 가운데의 머리.

연구소의 중앙에 있는 가장 거대한 건물 '학술회관'이 요동쳤다.

'학술회관' 상단에 위치한 거대한 대포가 끼리릭 고개를 돌렸다.

구우우웅-

포탄 안에 집속된 마법이 점화되며, 거대한 마나의 소용돌이가 뻗어 나갔다.

콰우우-!

대기를 일그러뜨리고 대지를 불태우며, 이쪽과 저쪽을 단숨에 꿰뚫는 그 창백한 마나의 파동에, 산과 들과 바람이 비명을 질렀다.

로레인이 자랑하는 10르핌급 마나포.

산도 무너뜨릴 수 있는 이 일격이라면 저 터무니없는 괴물도 꺾을 수 있을 거라고, 모두가 한 줄기 희망을 품었다.

#66화 약속

10르핌.

그런 출력의 마나 대포는 본래 국가 단위에서 전술 병기로나 쓰이는 괴랄한 무기였다.

고작 민간 연구소에 이런 무기가 달려 있는 건 극히 이례적이었다.

로레인의 가문이었던 스코트빈가의 특수한 상황과 오직 대륙의 오지만을 다니며 연구 활동을 한다는 명분, 그리고 여러 국가의 투자와 이해관계가 얽혀 이루어진, 정치적 타협의 산물.

그런 무기였기에, 로레인은 조금 자신이 있었다.

설령 저것이 신화 속의 괴물이라 해도...!

'이걸 맞고 무사할 수는 없을 거다!'

5명의 마법사, 그리고 천재라 불리는 로레인 본인이 직접 집법(集法)하여 강화시킨 마나 포탄이 10르핌의 출력을 받아 방출되었다.

콰아아아앙!

눈앞에 푸른 수평선이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마나포가 목표에 적중하는 순간, 새파란 섬광이 눈부시게 세상을 물들였다.

"명중! 명중입니다!"

환호하는 사격반의 연구원들.

흘린 땀을 닦아 내며 한숨을 내쉬는 로레인.

그녀는 아까보다 조금 누그러진 말투로 연구원들을 다시 일깨웠다.

"저만한 괴물이 초탄에 무너질 리 없다! 장전반! 다음 탄환 집법(集法) 준비!"

"예! 집법 준비!"

그렇게 쉬지 않고 바로 다음 공격을 준비했지만, 다들 조금쯤은 안심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아무리 저런 괴물이라도...!'

'무려 10르핌이라고! 작정하고 쏟아부으면 하루 안에 작은 도시 하나도 증발시킬 수 있다고!'

천지를 찢어발기는 마나포의 위용을 두 눈으로 목도하자 새삼스럽게 자신들이 가진 힘을 실감한 것이다.

신화 시대의 괴물이라 해도, 우리가 쌓아 올린 이 마도 공학의 결정체라면...!

푸스스-

시야를 물들이던 푸른 빛이 흩어지고, 서서히 그 너머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말도 안 돼!"

"저걸... 버텼다고?!"

당초에 목표로 했던 가운데 머리는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았다. 대신 피해를 입은 것은 가운데 머리의 바로 오른쪽에 있던 머리.

그것이 온몸으로 마나포를 받아냈다. 기다란 잿빛 몸체 곳곳이 흉측하게 찢어지고 거기서 잿빛 연기 같은 것이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허나,

『끼에에에에!』

'그것'은 여전히 팔팔하게 움직였다.

그깟 상처 따위 생채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이.

"고, 공간의 왜곡 확인! 저놈이 공간 왜곡을 일으키는 주범입니다!"

관측을 담당하던 연구원이 소리쳤다.

"저놈이!"

로레인이 입술을 짓씹었다.

그녀의 계산은 완벽했다. 공간의 곡률마저 타고 넘어 가운데 머리를 정확히 강타할 경로를 찾아냈으니.

하지만 공각 왜곡을 일으키는 머리가 그걸 망쳤다.

그냥 몸으로 막은 게 아니라, 순간적으로 퍼즐 뒤섞듯 주위의 공간을 섞어 버려 마나포를 사방으로 굴절시킨 것이다.

물론 놈도 전부 다 빗겨 내진 못해 상처를 입었지만, 그게 치명상이 되진 못했다.

믿고 있던 공격이 실패하는 순간, 모두가 쇠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음울한 분위기가 치솟던 사기의 발목을 잡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로레인은 발로 바닥을 쿵! 찍으며 외쳤다.

불안해해서는 안 된다. 분위기에 질식당해서는 안 된다.

"현 시간부로 저 머리를 <왜곡 >이라 명명한다! 저놈 먼저 제거하는 것으로! 장전 서둘러!"

"네! 집법 40% 완료! 마력 샘을 재가열합니다!"

"당황하지 마! 한 방으로 안 되면 세 번 다섯 번. 몇 번이라도 두드려 패면 된다!"

그러나 '사도'라 불리는 괴물도 맞고만 있지는 않았다.

이번에 움직인 건 가장 왼쪽에 있는 머리.

놈은 긴 머리를 쭉 뻗어 연구소를 향해 입을 크게 벌렸다.

그 입 안으로 잿빛의 광선이 모여들고,

———!!

햇빛마저 잿빛으로 물들이며, 거대한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10르핌급의 마나포보다도 더욱 거대한 잿빛의 광선이었다.

그것은 아무런 소리도 없이 연구소를 덮쳤다.

소리마저 잡아먹는 걸까?

고요 속에 눈앞을 덮치는 잿빛의 해일을 보며 로레인은 악을 썼다.

"실드 출력 최대로!"

"시, 실드 최대 출력!"

새파란 마법의 장막이 연구소 전체를 감쌌다.

쏴아아아-!

잿빛의 광선은 마치 거센 물살처럼 실드에 부딪히며 좌우로 갈라졌다.

이상스럽게도 그 어떤 진동도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그 광경을 바라보는 연구원들은 하나같이 공포에 빠져들었다.

"말도 안 돼.... 실드가...."

"부스러진다고...? 용(龍)급 마력 샘에서 뽑아낸 실드가?"

로레인 연구소의 무기는 10르핌급 마나 대포뿐만이 아니었다.

그런 괴랄한 출력의 포대가 있다면, 그 출력을 뒷받침하는 동력원과 반작용의 충격을 흡수하는 기관도 존재하는 게 당연.

그게 바로 마력 샘이었다.

이 거대한 연구소 전체에 동력을 공급하고 마법의 반발력마저 흡수하는, 힘의 근원.

용(龍)급의 마력 샘이란 군사용 이동 요새나, 대형 비공정, 또는 작은 도시를 지탱하는 규모의 마력 샘이었다.

이 연구소에 있는 마력 샘은 그중에서도 준수한 성능을 뽐내는 C형.

그런 마력 샘에서 뽑아낸 실드가 그들의 눈앞에서 부스러졌다.

파스스-

푸른 알갱이로 흩어지는 실드 사이로 잿빛의 광선이 갈래갈래 꽂혀 들었다.

태반이 튕겨져 멀리 떨어졌지만, 그중 일부는 연구소의 외곽을 스쳤다.

푸스스-

잿빛 광선이 스치자 연구소의 외곽부가 녹아들 듯, 바스러지듯 사라져 버렸다.

거대 마물이 와서 들이받아도 조금 찌그러지고 말 튼튼한 장갑마저도!

"소, 소멸!"

"조, 존재의 소멸 확인! 저건 분해가 아니라 정말로 삭제된 겁니다! 이 세상에서 완전히!"

관측반 연구원들이 비명을 질렀다.

다른 이들도 연구원이기에, 그 말을 금방 알아들었다.

"소멸이라고? 그런 일이... 가능...해?"

"법칙을 거스르는 건데? 관측반! 제대로 확인한 거 맞아?!"

다시 시작된 혼란.

이번엔 로레인마저 잠시 넋이 나갔다.

'실드가? 한 방에...? 소멸...?'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그 무시무시하다는 드래곤 브레스도 서너 번은 버텨 낼 실드인데....

뭐 저딴 게 다 있어?

'아냐. 정신 차려야 돼. 내가 넋을 잃어서야...!'

끼이익-!

막 마음을 먹고 다시 연구원들을 닦달하려던 로레인.

그녀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건 본능에 가까운 행위였다.

그녀뿐만 아닌 모든 연구원이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꿀꺽.

긴장으로 목울대가 꿀렁였다.

무언가 거대하고 흉포한 존재감이 그림자처럼 지휘통제실 전체를 감싸 안았다.

터벅.

터벅.

숨 막히는 정적 속을 한 걸음 한 걸음 밟아 오는 사내.

란센 반로아.

다양한 검정빛으로 치장된 마갑을 입은 그는, 뻥! 터져버릴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분위기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로레인]

그 목소리에 담긴 기묘한 울림을 느끼는 순간, 로레인의 몸은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어졌다.

누가 그녀의 몸을 꽉 움켜쥔 것처럼.

* * *

내 머릿속은 날뛰는 용의 사념으로 엉망진창이었다.

[놔! 놔! 싫어! 싫다고! 죽어! 제발! 죽어어!]

문득 궁금했다.

대체 이 용은 어떻게 죽었길래.

이런 사념을 남긴 걸까?

지금 떠들어대는 건 이미 죽어 없어진 용의 사념(捨念).

문자 그대로, 남겨지고 버려진 한 줄기의 상념이었다.

대화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그저 당시에 용이 느꼈던 분노와 절망, 공포만이 메아리처럼 돌아올 뿐이다.

[제발! 죽어어어어!]

"좀... 닥쳐...!"

나는 기어코 내 머릿속에서 날뛰는 사념의 목줄을 잡아 짓누르는 것에 성공했다.

[아아아아! 싫어! 싫어어어!]

그제야 되찾게 되는 신체의 통제권.

뿌드드득!

아주 가관이었다.

철혼(鐵魂)의 오러와 마갑의 오러가 몸의 안팎에서 충돌하며, 속으로는 곳곳에 울혈이 생겼고 겉으로는 피부가 팽창하고 터져 피범벅이 되었다.

최악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었다.

"후우우-"

생각을 정리한다.

힘을 얻기 위해 용의 마갑을 입었는데, 자칫 잘못하다가는 싸움은커녕 폐인이 되게 생겼다.

지금 이 순간에도 두 개의 오러는 내 몸을 박살 낼 기세로 부딪히고 폭발했다.

어떻게 이 두 오러의 충돌을 통제하지?

물론 지금 당장이라도 마갑을 벗어던진다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지만, 그런 선택지는 처음부터 배제했다.

이게 없이는 '결코' 사도를 이길 수 없다. 그러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 마갑의 힘을 빌려야만 했다.

하지만 어떻게?

헝클어지는 머릿속으로 문득 어릴 때 벌슨 아저씨에게 배웠던 지식이 아로새겨진다.

'란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땐, 소거법을 써 봐.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 그것부터 떠올려서 하나씩 지우는 거야. 그러다 보면, 무엇을 해야 할 지 저절로 떠오를 때가 있다.'

그것도 제왕학 수업의 일부였을 것이다.

자신도 잘 모르면서도, 어떻게든 나에게 하나라도 더 알려 주기 위해 노력했던 벌슨 아저씨.

그 마음이 지금의 나에게 열쇠가 되었다.

'우선 하면 안 되는 거.'

생각이 명쾌해진다.

'지금 날뛰고 있는 마갑의 오러를 제압한다?'

소거.

말도 안 되는 방법이다. 마갑의 오러는 그 양과 힘에서 나의 오러를 압도했다.

철혼의 오러로 마갑의 오러를 제압하려 하면, 되려 부서지는 건 이쪽이 될 터.

'일단 내버려 두고 견디면서 나아간다?'

이것도 소거.

고통은 참으면 되는 거라지만, 너무 위험했다. 무엇보다. 그렇게 도착한 끝에 내가 뭘 할 수 있지? 오러를 통제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어떻게 싸울 건데?

심지어 지금처럼 오러를 줄기줄기 뿜어 댔다간 채 접근하기도 전에 사도에게 들켜 짓밟힐 것이다.

그렇게 떠오른 방법을 차례차례 소거하다 보니, 결국 남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미친 짓이지만, 유일한 방법.

'대체한다.'

내 몸을 흐르는 오러. 내 힘의 원동력을, 철혼(鐵魂)에서 마갑의 오러로 잠시 대체하는 것이다.

'철혼의 오러는 모두 후퇴시켜서 오러 코어나 심장과 같은 핵심 기관만 지키도록 한다. 대신 마갑의 오러를 신체 내부로 받아들여 운용한다.'

낯선 데다가 흉포하기까지 한 오러를 내 몸속에서 순환시키겠다는 미친 생각. 아마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겠지.

하지만 이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폭주하는 마나를 갈무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믿을 건 탈태를 이룬 내 몸의 내구성과 회복력... 그리고 나의 마나 제어력.'

마음을 정한 즉시 행동에 옮겼다.

쿠르르르-

온몸이 지진이라도 맞은 듯 흔들렸다.

마갑이 뿜어내는 막대한 오러를 한 올 한 올 몸속으로 쑤셔 박았다. 박고 돌렸다. 철혼의 운용법을 응용해 순환시키고 또 순환시키며 어떻게든 내 통제 안에 두었다.

뿌득! 뿌드득!

몸속에서 무언가가 부서지고 회복되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된다. 할 수 있다.

[죽어! 죽여줘! 제발! 저것들을 죽여줘!!!]

용의 사념이 발작을 해 댔다.

하지만 괜찮다. 사념은 사념일 뿐. 영혼이 아니니까. 마갑의 오러는 영혼을 지닌 내 의지를 우선적으로 따른다.

물론 몸에 넣고 순환할 때와 이걸 다시 꺼낼 때는 다를 거다.

둑이 터진 것처럼, 오러가 쏟아져 나오겠지. 통제 불능의 기세로.

허나 잠깐이라면, 아주 잠깐이라면, 통제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거면 됐다.

그거면 됐어.

저벅.

걸었다.

한 걸음이라도 잘못 디디면 그대로 오러가 쏟아져 나올 것 같아서 신중하게.

로레인이 있는 중앙 세미나실까지 터벅터벅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를 마주했다.

사도를 베러 가기 전, 그녀에게 꼭 당부해야 할 말이 있었다.

[로레인]

어째서인지 내 목소리에 기묘한 울림이 깃들었지만, 지금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왠지 빳빳하게 굳은 로레인에게 나는 부탁했다.

"버텨 줘. 끝까지 버텨. 그러면 내가 사도를 벨게."

로레인의 눈이 살짝 커진다.

[이건 약속이야.]

아니, 맹세야.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다시 한번 목소리에 깃드는 기묘한 울림.

넋이 빠진 듯했던 로레인의 두 눈에 힘이 바짝 들어왔다.

그녀가 말했다.

"알겠어. 끝까지... 버틴다. 네가 벨 거라 믿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버틸게."

처음으로 그녀와 내가 함께 나눈 평어.

그 안에 담긴 의지와 믿음이 제법 굳건해서, 나도 안심이 되었다.

"믿는다."

그대로 등을 돌렸다.

이제부터는 돌아볼 일이 없다.

터벅.

한 걸음.

터벅.

한 걸음.

사도를 베기 위해 나아갈 뿐.

#67화 지옥

버텨야 한다.

버티면... 란센이 괴물을 벨 거야.

그의 약속이 마치 어떤 신앙처럼,

로레인의 머릿속에 콱! 박혀 버렸다.

그러니 버텨야 하는데....

'저거 이제 겨우 머리 3개만 움직인 거잖아?!'

7개 중 이제 겨우 세 개.

가운데 머리는 태양마저 가리는 잿빛의 가루를 뿌린다.

그리고 왼쪽부터,

첫 번째 머리는 소멸 광선을 뿜는다.

다섯 번째 머리는 공간 왜곡을 일으킨다.

그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런데 이런 게 4개나 더 남아 있다고?

'정신 바짝 차리자.'

로레인은 마음을 강하게 먹었다.

공포에 짓눌려서야 할 수 있는 것도 못 하는 법.

그녀는 목소리를 높였다.

"일단 실드부터 재건해!"

"네! 마력 샘 쿨다운 들어갑니다!"

소멸 광선이라는 엄청난 반발력을 견뎌 낸 마력 샘은 과열 상태로 끓고 있었다. 이걸 안정시켜야 실드든, 마나포든 재사용이 가능했다.

방열반에 속하는 7명의 마법사가 방열(放熱) 마법진 위에 올라 마력 샘을 안정화시키기 시작했다.

로레인은 초조해하면서도 냉철하게 '사도'를 관찰했다.

'다행인 점은 저놈도 크게 지친 것처럼 보인다는 건데....'

방금 소멸 광선을 쏘아낸 첫 번째 머리, 일명 <소멸 >은 고개를 살짝 늘어뜨리고 꿈틀꿈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섬멸천사가 「최후의 쐐기」를 적중시킨 덕분이었다.

덕분에 '사도'는 일시적인 탈진에서 아직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로레인은 그 사실을 몰랐지만, 직감적으로 느꼈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더 빡세질 거야.'

그러니, 지금 최대한 이득을 봐야 했다.

"기공포수! 기공(氣功)포 전개! 적을 난사한다! 실드와 주포의 재기동까지 믿을 건 너희뿐이야!"

"기, 기공포 전개!"

기공포는 마나포에 비하면 훨씬 위력이 떨어졌지만, 우수한 연사 속도를 자랑했고 무엇보다 마력 샘과의 연동 없이 자체의 동력만으로도 사용이 가능했다.

각 포대로 흩어진 연구원들이 마력을 뿜어 기공포를 조작했다.

"쏴!"

투투투투투!

중앙 제어실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로레인의 목소리는 실시간으로 연구소 전체에 울려 퍼지는 중.

아직도 제 위치를 찾아가지 못한 마법사들이 훨씬 많았지만, 운 좋게 제때 자리를 잡은 기공포수들은 연구소 건물 이곳저곳에서 일제히 기공포를 쏟아부었다.

각자의 특기에 따라, 때로는 화염을, 때로는 전격을, 또 빙결을 두르고 쏘아지는 마법의 탄환들.

『끼이이이이-!』

그것을 막아선 것은 이번에도 <왜곡 >이었다.

놈은 그 긴 모가지를 이리저리 흔들며 공간을 조각내 뒤섞고 총탄을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날려 버렸다.

물론 워낙 쏘아진 탄환이 많았고 근처에 다가가는 즉시 폭발을 일으키는 종류도 있었기에 아예 피해가 없지는 않았다.

찢기는 매끈한 살과 여기저기에서 피처럼 솟구치는 잿빛 연기.

하지만 그런 걸로 저 거대한 괴물을 막아설 수는 없었다.

『게에에엑!』

왼쪽에서 두 번째 머리가 움직였다.

그것이 입을 열었을 때 로레인은 그것의 이름을 <착란 >이라 명명했다.

<착란 >의 입에서 뿜어지는 것은, 잿빛의 눈사태와도 같은 것.

로레인은 비명 지르듯 지시했다.

"모두! 차폐막 아래로 엄폐! 실드 전개해!"

콰콰콰콰!

눈사태처럼 쏟아져 나온 연기가 실드가 무너져내린 연구소를 그대로 덮쳤다.

그나마 실내는 괜찮았다. 각 건물은 저마다 별도의 실드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아직 밖에 있는 연구원들이었다.

그들은 로레인의 지시에 따라 곳곳에 설치된 차폐막 아래로 엄폐했다.

하지만 <착란 >이 뿜어낸 가스는 차폐막의 작은 틈새 사이로 아무렇지도 않게 스며들었다.

"아...?"

허둥지둥하던 연구원들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몽롱해졌다.

사각사각사각

끼리릭! 끼릭!

갑자기 들려오는 기괴한 환청.

눈앞에 나타나는 소름 끼치는 환영.

유적 최하층을 가득 채웠던 광기.

그것이 10배가 넘게 증폭되어 연구원들을 덮쳤다.

그러나,

"후, 정신 차리자."

"갑자기 저런 게 보일 리가 없어,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잠깐 놀라고 혼란에 빠졌던 연구원들은 하나둘 스스로 정신을 차렸다. [실드]와 [웨이크]를 중첩해서 착란에서 벗어났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들은 하나하나가 뛰어난 마법사.

정신적 저항력만큼은 대단한 이들이었다.

허나,

그런 그들도 어쩔 수 없었다.

후드드득!

<착란 >으로 인해 잠시 정신이 멍해진 사이 어느새 하늘은 여섯 번째 머리, <소환 >이 토해 낸 심연 거머리로 가득 차고 말았으니까.

"으아아악!"

"이게 뭐야!"

"악!"

그나마 차폐막에 들어가 있던 이들은 사정이 나았다.

미처 차폐막을 찾지 못한 연구원들에게는 지옥이 펼쳐졌다.

"떨어져! 떨어져!"

"실드가 안 먹혀!"

"크아아! 죽어! 플레임 스피어!"

수(數)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머리의 수가 너무 많았다.

쭈우욱! 쭉! 쭉!

순식간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 버리는 거머리.

단순한 실드로 방어하고자 했던 연구원은 순식간에 온몸이 말라 미라처럼 변해 버렸고,

불타오르는 화염의 구체를 몸에 둘렀던 이들은 조금 더 오래 버텼지만...

쭈우욱! 쭉!

"저, 저리 가!!"

거머리들은 기어코 불꽃마저 빨아먹어 버리고 몸 곳곳에 달라붙었다.

그나마 견뎌 낸 이들도 멘탈이 와장창 부서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끔뻑 끔뻑-

데구룩-

자신의 팔에, 동료에 뺨에, 뒤통수에 돋아나는 눈동자, 작은 팔, 그것들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토악질이 치밀었다.

싸우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연구원들이 급속도로 무너졌다. 사기가 바닥을 쳤다.

로레인은 이 난장판을 보며 주먹을 파르르 쥐었다.

"실드! 실드는 아직이야?!"

"인원이 적어서... 아직 쿨다운이 좀 남았습니다!"

실드만 있으면 저렇게 당하지 않아도 되는데...!

힘이 바짝 들어가서, 로레인의 주먹은 하얗게 탈색되었다.

뭐라도 해야 했다.

최선이 안 되면 차선이라도...!

"그냥은 못 막아! 뿌려! 하늘을 불꽃 마법으로 뒤덮어서 아예 접근 자체를 못 하게 하라고!"

그녀의 시의적절한 명령이 연구소 전체로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명령을 즉각 이행한 건,

"빨리 뛰게!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괜찮을 걸세!"

선임 연구원들.

그러니까, 나이가 지긋한 원로 마법사들이었다.

화르르르-

그들이 뿜어낸 화염이 하늘을 뒤덮었다.

비처럼 쏟아지던 거머리들이 불에 타 사라졌다.

놈들은 타오르면서도 집요하게 화염 마법을 빨아먹었으나, 원로 마법사들의 장대한 마력은 그조차도 견뎌 냈다.

"빨리빨리! 어서 들어가!"

그제서야 울부짖기를 멈추고 달리는 연구원들.

그러나 원로 마법사들만 두고 모두가 떠난 건 아니었다.

"선배님!"

"아니! 자네는 왜 안 가!"

"선배님 몸에 거머리가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그냥 갑니까!"

용기 있는 젊은 마법사들이 자리에 남아 거머리를 녹이고 저주를 해주할 술식을 짜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퍼져 나가는 하얀 광채.

지상에 남아 있던 거머리들이 녹아내리고 변형되었던 신체가 회복되었다.

그렇게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됐어!"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로레인이 손을 펼쳐 휘둘렀다.

"실드! 재가동!"

"실드 가동!"

우우우웅-!

마침내 쿨다운을 마친 마력 샘이 다시 한번 연구소 전체에 실드를 씌웠다.

"후우...."

"살았다...."

연구소 전체를 반구 형태로 감싼 실드 덕분에 더 이상 심연 거머리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제야 연구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밖에 연구원들 아직도 너무 많아. 빨리 제 위치로 배치시켜!"

로레인이 살짝 풀어진 연구원들을 닦달하며 다시 한번 전투 태세를 강조했다.

하지만 그때 관측반이 비명을 질렀다.

"소, <소멸 >의 움직임 관측! 제2격! 들어옵니다!"

"뭐?!"

이제 막 실드를 되살렸는데... 이 타이밍에 다시?

쏴아아아!

또였다.

또,

간신히 재건한 실드가 바스러지고, 소멸 광선의 조각에 맞은 외곽 건물 일부와 연구원들이 그대로 소멸해 버리고...

하늘에선 다시 거머리가 쏟아져 내렸다.

거기에,

"세, 세 번째 머리 움직임 관측!"

엎친 데 덮친다.

로레인은 탄식했다.

'아.... 그래, 아직도 머리 두 개가 더 남아 있었지.'

왼쪽에서 세 번째 머리는 <방호 >로 명명되었다.

놈은 구역질을 하며 커다란 잿빛 구슬을 뱉어 냈는데, 그 구슬이 달처럼 떠올라서는 사방에 빛무리를 뿌렸다.

빛무리에 감싸여진 거머리들은 놀라울 정도로 터프해졌다.

후드드득!

하늘을 뒤덮은 화염 마법마저 견뎌 내고 떨어지는 거머리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공포가 먹히질 않습니다!"

기공포수들이 비명을 질렀다.

아까까지만 해도 착실히 타격을 주고 적을 견제하던 기공포였다.

하지만 <방호 >가 뱉어 낸 구슬이 빛을 뿌리자 더 이상 사도에게 대미지가 들어가지 않았다.

로레인은 다급히 외쳤다.

"저 구슬! 구슬 먼저 요격해!"

로레인이 볼 때 방금 떠오른 잿빛 구슬이 사방에 일종의 방어력 버프를 뿌리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사도의 움직임이 한 발 더 빨랐다.

"<왜곡 >의 움직임 관측!"

관측반의 비명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콰드드득!

섬뜩한 소리와 함께 연구소 전체가 지진을 맞은 듯 흔들렸다.

목을 쭉 뻗은 <왜곡 >이 공간을 접고 쇄도해 연구소를 들이받은 것이다.

"맙소사...."

"이건... 지옥이야...."

생전 본 적도,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풍경.

그냥 깨지고 무너졌다면 이렇게 놀라지 않았겠지만....

"저게 뭐냐고."

제멋대로 뒤섞인 퍼즐처럼 건물의 입구가 하늘로 올라가고, 높은 첨탑이 땅에 처박히고, 땅이 일어서고, 나무가 거꾸로 매달렸다.

초현실적인 풍경 앞에 모두가 압도된 순간,

와르르!

왜곡된 공간째로 모든 것이 조각나 떨어졌다.

그 안에 섞인 연구원들의 비명과 붉은 피가 점점이 흩어진다.

충격. 망연자실. 그 공백을 꿰뚫은 건 이번에도 로레인의 목소리였다.

"뭐 하는 거야! 저 구슬부터 깨뜨리라고!"

기공포 사수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포를 쏘아 댄다.

다행히 구슬 그 자체의 내구성은 높지 않았다.

집중 사격이 가해지자 얼마 버티지 못하고 깨지는 구슬.

로레인은 얼른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방호의 구슬이 사라지자 거머리들은 다시 쉽게 제거되었고, 바깥에 남아 있는 연구원들이 잠시 숨을 돌리는 것 같았다.

허나,

그런 여유는 숨 한 번 돌리기도 전에 끝장이 났다.

"이, 일곱 번째 머리 움직임 관측!"

이런 씹...!!!

로레인은 쏟아지는 욕설을 겨우 참았다.

마지막 일곱 번째 머리는 <폭식 >으로 명명되었다.

놈의 행동은 단순했다. 연구실 쪽으로 주둥이를 크게 벌리고 '빨아들였다.'

물질이 아닌 무형의 것을.

마나를, 의지를, 그리고 생명을....

"어억...."

털썩.

굳건히 버텨 주던 원로 마법사들이 여기저기서 무릎을 꿇었다.

의지는 여전히 견고했고 마나도 아직 견딜 수 있었으나... 급속도로 빨려들어 가는 생명력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이미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이었으니....

"선배!!!"

"빨리... 도망...."

하늘에서 심연 거머리가 쏟아졌다.

후배들을 위해 끝까지 남은 선임 연구원과 그런 선배를 위해 함께 남은 젊은 연구원이 나란히 거머리에 파묻혔다.

누구보다 용감했던 연구원들이 곳곳에서 삐쩍 마른 미라가 되어 쓰러졌다.

콰앙!

로레인은 책상을 발로 걷어찼다.

'저렇게 죽을 사람들이 아니었어!'

이가 갈렸다.

'당장 필요한 사람들이고.'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마법사가 있어야 마력 샘의 쿨다운도 주포의 장전도 빨라진다.

그런 소중한 인재들을 잃었다.

'이대론 안 돼.'

버티기로 했다. 버티겠다고 란센과 약속했다.

결국 그녀는 결심했다.

"실드 재건하고 마나포 쏴! 계속 쏴! 일방적으로 맞기만 하면 그냥 죽는 거니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쉬지 마! 알았어?! 그냥 죽어! 죽는다고 생각하고 해내!"

그렇게 외치곤 본인은 흰 옷자락을 펄럭이며 문으로 향했다.

"마스터 에오드란! 향후 지휘를 맡긴다!"

지금 로레인은 저 밖의 지옥 속으로 달려 나가 연구원들을 직접 구해 낼 작정이었다.

그걸 눈치챈 에오드란이 로레인을 붙들었다.

"안 됩니다!"

"이거 놔!"

"차라리 제가 가겠습니다!

로레인이 그 손을 뿌리쳤다.

"내 연구원들이야! 나 하나 보고! 여기까지 함께해 준 연구원이야! 짊어져야 할 위험이 있으면 당연히 내가 짊어져!"

그래도 에오드란은 물러서지 않았다.

"소장님! 아니 아가씨! 이건 절대...!"

로레인이 그 말을 차갑게 끊었다.

"에오드란. 이건 명령이야. 네가 아직도 날 스코트빈의 당주로 여긴다면. 여기서 지휘를 맡아. 내 명령대로."

에오드란의 입이 꾹 다물렸다.

스코트빈의 당주.

비록 스코트빈가(家)는 이제 몰락하고 없었지만... 에오드란은 선대의 선대의 선대까지 그 스코트빈가(家)를 위해 일해 왔던 가신 집안의 소생이었다.

그런 그로서는 차마 이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로레인은 그대로 에오드란을 지나쳤다.

'전투는 오랜만이네.'

그녀는 초인적인 연산 능력을 이용해 순식간에 마력을 짜 올리고, 지니고 있는 아티팩트들을 하나하나 가동해 마법을 증폭시켰다.

한걸음에 [프로텍트]가,

다음 걸음엔 생존자를 찾아낼 [비전]이,

거머리를 태울 [플레임]이,

건물을 들어 올릴 [키네시스]와,

아수라장 속에서 생존자들을 이끌 [시그널]까지.

단 다섯 걸음 만에 마법을 칭칭 휘어 감은 그녀가 가속 주문이 깃든 신발로 땅을 박찼다.

'한 명이라도 더 살려서... 버티는 거야. 란센이 해낼 때까지!'

건물 밖, 혼돈으로 가득한 지옥이 순식간에 그녀의 주위를 감싸 안았다.

#68화 기다림

발자국 발자국마다 족적이 깊다.

찌익

찌이익-

땅에 박혀 버린 발을 억지로 떼어 내 걸음을 옮겼다.

온몸이 출렁이는 물동이 같았다.

숨 막히게 무겁고 끔찍하게 큰.

단 한 방울만큼만 기울어져도 그 안에 담긴 물이 모두 쏟아져 버릴.

나는 중간중간 숨을 골랐다.

서두르지 않았다.

발을 떼서 앞에 박아 넣고, 다시 떼어서 앞에 꽂아 넣고, 반복 또 반복.

한 걸음.

오직 한 걸음만 생각했다.

주변의 상황은 잊었다.

폭풍처럼 일어나는 오러는 억지로 몸속에 잡아넣었고.

[죽어어어! 아직도 있어! 아직도! 죽어! 제바아아아알!!!]

머릿속에서 메아리치는 용의 사념을 꽉 눌러 놓고.

걸었다.

그랬기에,

'사도'는 여전히 내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대신,

뿌드득.

앞으로 뻗던 다리가 힘을 잃고 꺾인다.

낯선 오러가 계속 몸속을 할퀴어 댄 탓이었다.

근육이 찢겼고 살점은 뜯어졌다.

쿠웅!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한 발을 내디딜 수 있었던 것은, 근육 대신 흉포한 오러를 끌어다 쓴 덕분이었다.

용(龍)의 오러로 근육을 만들고 인대로 삼았다.

내 뼈와 살과 근육을 제물로 바치며.

뿌드득! 쿠웅! 트득! 쿵!

지금 내 걸음걸이는 남이 볼 때 굉장히 우스울 거다.

형편없는 인형사가 꼭두각시를 억지로 춤추게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

그래도,

어쨌든 앞으로 나아가잖아?

그러면 됐다.

그거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