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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관문이 열린다!"

드르르르르르르! 쿠웅!

장벽의 마지막 관문이 열렸다.

그리고 대수림으로 향할 기간트가 나오기 시작했다.

기이잉! 쿵! 쿵! 쿵!

'뭐지? 룩급 기간트가 5대나?'

가장 먼저 룩급 기간트들이 줄지어 나왔다.

"오오! 오리지널 기간트다!"

비숍급 오리지널 기간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앞에 나온 룩급 기간트보다 작았지만, 그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글래디스 저들이 누구지?"

"기간트 형태를 보니, 록체스터 공작 가문의 기간트네요."

"응? 그들은 기간트 생산을 하는 영지가 아닌가?"

"맞습니다. 굳이 대수림에 사냥을 가지 않아도 부산물과 마석이 넘쳐나는 곳이죠."

"실전 훈련인가?"

"그런 것 치고는 기간트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벌써 이십여 대의 기간트가 관문을 빠져나왔고 지금도 계속 나오고 있었다.

록체스터 가문의 기간트는 장갑에 검은색을 칠했고, 어깨 보호구에 삼각뿔이 달린 것이 특징이었다.

그리고 수십 대의 마차와 병사들도 줄줄이 나오고 있었다.

글래디스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어? 어디 전쟁이라도 났나?"

"전쟁?"

"50년 전 대수림에 전쟁이 났을 때도, 북부의 록체스터 가문의 기사들이 큰 활약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아니면 재앙급 괴수가 출몰했을 수도 있습니다."

"재앙급 괴수라고?"

설마, 드라우켄이 벌써 내려온 건가?

아직 몸도 다 회복하지 못했을 텐데?

게다가 암 드로운에게 당해 얼음 감옥에 갇혔던 트라우마가 그렇게 쉽게 사라질 리가 없었다.

아니면 또 다른 재앙급 괴수가 나타난 건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직 살루스 기지를 안정화하지 않은 상태라 살짝 걱정이 밀려왔다.

"와! 예쁘다."

"누구야?"

병사들과 사람들이 관문에서 나온 검은 마차를 보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자연스레 고개가 돌아갔다.

'어? 샤를린?'

순간 창문 커튼이 닫혔기에 자세히 보진 못했다.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가 이곳에 있을 리가 없잖은가.

요즘 몸이 허해졌는지 옛날 약혼녀가 나오는 꿈을 자주 꿨기에 헛것을 본 것 같았다.

이번에 돌아가면 정말 체력 단련을 부지런히 해야겠다.

[자! 우리 차례다! 관문으로 들어간다!]

보리스 소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42. 재능만큼 보인다.

42. 재능만큼 보인다.

[절대 대수림에 들어가지 마라!]

관문 밑에 적혀 있는 큰 글귀였다.

이젠 거신의 언어를 알기에 얼마든지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작은 글씨로 대수림의 위험과 경고가 자세히 적혀 있었다.

거신들은 정말 대수림과 괴수를 무서워했나 보다.

갑자기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거신들의 능력이면 괴수를 충분히 상대할 수 있지 않았을까?'

대수림이 정말 위험하고 괴수가 무섭다는 것은 나도 경험했기에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거신이 어떤 존재인가?

내 마법인형인 암 드로운만 해도 괴수에게 당하긴 했지만, 재앙급 괴수와 일대일로 싸우기도 했고, 또 죽음의 순간 괴수를 얼음 감옥에 가두기도했다.

만약 암 드로운 정도의 거신이 한 명 더 있었다면, 재앙급 괴수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 보였다.

'그런데 왜 이런 거대 장벽을 만든 거지?'

내가 본 암 드로운의 의식 속엔 작은 마을도 수십 명의 거신이 살고, 큰 도시에는 몇십 배나 더 많은 거신이 살고 있었다.

그 거신이 군단을 이뤄 똘똘 뭉친다면 재앙급(S급) 괴수가 단체로 몰려오고, 단 한 마리가 한 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다는 멸망급(SS급) 괴수가 와도 충분히 막고 처리할 수 있었을 것 같았다.

그럼 왜 장벽을 세운 거지?

설마, 이곳도 불멸급(SSS급) 괴수가 존재하나?

순간 지구를 멸망시킨 카르마탄이 떠올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겠지.

만에 하나 있다면 장벽이 보호해 줄 수 있을까?

[정지!]

[정지하라!]

중간 관문을 지키고 있는 기간트들이 우리 행렬을 멈춰 세웠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드디어 검문검색이 시작됐다.

엘프와 드워프들이 탄 마차에 온 신경이 가 있었다.

'걸릴까?'

"통과!"

휴! 걸릴 리가 없지.

예상대로 카야킨 기간트가 철통같이 지키던 마차는 아무런 검사 없이 무사통과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럼 우리도 쉽게 지나가겠네?

거신 갑옷과 장비를 실은 마차가 모두 지나가고 우리 차례가 왔다.

"정지!"

FM처럼 생긴 하사관이 내 오리지널 마장기가 실려있는 마차를 멈춰 세웠다.

난 마차에서 내렸다.

"충! 뒤에 이건 뭡니까?"

"옛날 기간트네. 카야킨 기지에서 연구용으로 가져온 것이지."

"연구용이요?"

하사관은 마차 내부를 살폈다.

팔 하나가 없긴 하지만 7미터나 되는 마장기를 통째로 실었기에 마차도 컸고, 말도 4마리나 끌고 있었기에 당연히 눈에 띄었다.

내부를 살펴본 하사관이 말했다.

"꽤 오래돼 보이긴 하네요. 기간트 등록증을 보여주십시오."

"뭐? 이건 200년도 더 된 기간트네! 등록증이 있을 리가 없지."

"등록증이 없습니까? 죄송합니다. 그럼 통과시킬 수 없습니다."

"그냥 연구용이네. 보다시피 팔도 하나 없고, 쓸모없는 물건이야."

"네! 제가 봐도 그렇게 보이네요."

"그렇지."

"하지만 기간트는 종류와 상관없이 등록증을 확인하고 통과시키란 명령을 받았습니다. 등록증이 없으니, 마차를 돌려 뒤쪽에 세우십시오."

"허!"

이 하사관은 생긴 것처럼 FM이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발목이 잡혔다.

당장 토우인형이 없으니, 인형의 집에 넣을 수도 없고, 오리지널 마장기를 놓고 가야 할 판이었다.

"왜 이렇게 빨리 안 움직여!"

그때 한 중위가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등록증이 없는 기간트가 있어서 돌려보낼 참이었습니다."

"뭐?"

장교는 나를 쳐다보더니 슬쩍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마차 내부를 살폈다.

"딱 봐도 고물이네. 통과시켜!"

"네? 하지만 기간트는 등록증이 없으면 통과시키지 말라고 메뉴얼에 적혀 있습니다."

"나도 알아. 너 이 행렬이 어디서 오는 건지 몰라?"

"카야킨 전진 기지가 아닙니까?"

"그래! 일반 영지 사냥팀도 아니고, 우리 장벽 사령부 소속이야.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그냥 통과시켜."

"하지만 등록증이 없으면······."

딱!

"크읍!"

쪼인트를 까인 하사관이 신음을 흘렸다.

"하아! 이 고문관 새끼. 통과시켜!"

다행히 중위 때문에 무사히 두 번째 관문을 지날 수 있었다.

물론 원리 원칙이 중요하지만, 융통성이란 것이 있다.

내가 설마 이 오리지널 마장기로 제국의 기간트를 공격하겠나?

일단 집에 돌아가면 기간트를 인형의 집에 넣을 수 있는 토우인형부터 만들어야겠다.

넓은 인형의 집을 놔두고 마장기를 이렇게 마차에 가지고 다니는 것은 정말 비효율적이었다.

드디어 마지막 관문을 통과했다.

먼저 통과한 기간트들과 마차들이 장벽 앞쪽에 나란히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마차도 멈춰 서서 기다렸다.

아직 관문을 통과할 수십 대의 마차가 있었기에 다 통과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앨리슨, 잠깐 산책하러 가자!"

"와! 신난다!"

난 앨리슨의 손을 잡고, 장벽 입구 쪽으로 갔다.

앨리슨은 연신 높은 장벽을 보며 신기해했다.

난 관문 근처로 이동해 마석 배터리가 삽입된 동력 공급 장치를 들여다봤다.

지키는 기간트가 있었지만, 직접 만지지 않으니 제지는 하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전력을 공급해 관문을 여는 거지?'

처음에 이곳을 통과할 때도 어떤 방식으로 이 관문을 움직이는지 궁금했다.

거신에게 배운 마나의 눈을 사용하면 뭔가를 알 수 있을까 해서, 일부러 산책하는 척하며 이리 온 것이다.

장벽 쪽으로 방향을 틀고 양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그리고 몸속 마나를 회전시켜 눈으로 뿜어냈다.

그러자 곧 30여 개의 마석 배터리가 뿜어내는 푸른빛과 수십 가닥의 푸른 선이 장벽 쪽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여기 마법진이 있긴 하네.'

동력 장치에 수십 개의 복잡한 마법진이 보였다.

다만 거신의 언어가 적혀 있지 않으니, 무슨 마법진인진 잘 모르겠다.

그래도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더니, 전에는 전혀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뭐야? 장벽도 온통 푸른색이네.'

장벽을 슬쩍 쳐다보자, 마나가 흐르고 있는지 온통 푸르스름한 벽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쉽지만 더는 보이는 것이 없었기에 눈에서 마나를 거둬들였다.

그때 앨리슨이 쪼르륵 달려왔다.

"아저씨 거짓말쟁이!"

"응? 무슨 말이니?"

"올라가지 못한다면서!"

"어디? 여기 장벽 말이니?"

"그런데 왜 저쪽에 계단이 있어?"

"뭐? 계단?"

난 앨리슨이 가리킨 곳을 쳐다봤다.

관문 옆으로 겨우 100미터 지점이었다.

문제는 난 전혀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앨리슨의 눈에는 보일까?

아무래도 앨리슨이 보는 방식과 내가 거신에게 배운 마나를 뿜어내는 눈과는 다른 것 같았다.

그리고 앨리슨은 나처럼 눈에서 푸른 광채를 뿜어내지도 않았고.

'혹시 앨리슨이 빌헬름 뢰트켄과 무슨 관계가 있나?'

300여 년 전 마석 산업혁명을 일으킨 천재 마도 공학자이자, 대마법사인 빌헬름 뢰트켄이 이 장벽 관문에 동력을 전달하는 방법을 알아냈다고 했다.

그 마법사가 앨리슨과 같은 능력이 있어서 저 계단을 발견한 건 아닐까?

그러고 보면 케네스 영감이 카야킨 전진 기지에 기간트 고물상을 운영하는 것도 좀 이상하긴 했다.

기간트가 어떤 물건인가.

아무리 수명이 다하고, 부서지고 망가졌어도 비싼 괴수 부산물로 만들어진 물건이다. 어쩌다 용병들의 기간트처럼 살릴 수 있는 것도 있었고, 이번에 오크들의 무기나 방패를 만든 것처럼 제대로 활용하면 쓸모 있는 것도 많았다.

물론 대수림을 건너 장벽 너머로 가져오긴 현실적으로 수지타산이 맞지 않지만, 그 정도의 대규모의 기간트 고물상을 개인이 운영한다? 이건 좀 이상했다.

그리고 그 고물상 부지는 매우 넓어, 카야킨 전진 기지 십 분의 일은 될 거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수상한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난 앨리슨의 손을 잡고, 계단이 있다는 장벽 앞으로 이동했다.

"앨리슨, 계단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있니?"

"요기서부터 저기까지."

계단이 있다는 벽 아래에 돌멩이로 표시했다.

그런데 계단의 넓이가 12미터라······.

"근데 계단이 너무 높은데!"

"혹시, 아저씨 키만 하니?"

"응! 어떻게 알았어?"

"그것 봐. 내가 못 올라간다고 했잖아."

"아! 그러네."

앨리슨이 아쉬운지 입맛을 다셨다.

역시 계단은 인간이 만든 것은 아니었다.

거신이 만든 계단이라······.

"혹시 이 벽에 마법진 같은 거 있니? 계단을 막고 있는 벽을 열 수 있는 장치 같은 거?"

앨리슨이 주변을 살폈다.

"없는데!"

"자세히 봐봐. 전에 마장기 해치를 열었던 그런 마법진이 어딘가에 있을 거야."

앨리슨이 고개를 들고 벽을 빤히 쳐다봤다.

"어! 저기 있는데!"

앨리슨이 가리킨 곳은 약 7미터 높이에 있었다.

아! 스위치가 있어도 거신이 사용할만한 높이에 있겠지.

"앨리슨, 잘했어. 고맙구나."

앨리슨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만 마차로 돌아가자."

슬쩍 거신 계단이 있다는 벽을 쳐다봤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장벽 위에는 과연 뭐가 있을까?

빌헬름은 과연 저 계단 위로 올라갔을까?

그는 기간트를 최초로 만든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기간트의 비밀이 저 안에 있을까?

그걸 알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 계단을 올라가 보는 것이었다.

너무 궁금해 당장 알아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앨리슨이 아니었다면, 저런 곳에 계단이 있는지 평생 가도 몰랐을 거야.'

이젠 앨리슨의 재능이 조금 무섭기까지 하다.

그럼,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재능만큼 보이는 거네.

앞으로 앨리슨 보호에 더 신경 써야겠어.

[자! 출발한다!]

일행이 모두 나오자, 보리스 소령이 출발시켰다.

우린 헬다임 사령부로 가는 길에 잠시 행렬을 멈췄다.

[정지! 이곳에서 쉰다.]

잠시 쉬는 사이에 난 엘프와 드워프들을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보리스 소령과 글래디스가 다가왔다.

"타일러 중위, 사령관님께 보고는 내가 할 테니, 빨리 일을 처리하고 오게."

"감사합니다. 소령님."

"저도 시간을 오래 드릴 순 없습니다. 금방 찾아오라고 명령하실 테니까요."

"글래디스, 고마워. 엘프와 드워프를 집에 데려다주고 바로 사령부로 가지."

난 그길로 엘프와 드워프, 케네스와 앨리슨을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

이곳에 한 사흘쯤 머물렀나?

수리도 되지 않은 허름한 곳이었다.

그래도 붉게 물든 노을과 우뚝 솟은 바위산 앞으로 아담한 이층집과 작은 목장이 보이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뭉클했다.

그렇다.

난 10개월 만에 집에 돌아왔다.

"앨리슨, 저기가 우리 집이야!"

"우와! 그림 같다! 말도 있는데!"

마차 위에 타고 있던 앨리슨이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케네스 영감은 살짝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중위, 저기가 설마 내게 약속한 그 저택은 아닐 거라 믿겠소."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근처에 곧 저택을 지어드리겠습니다."

우린 곧장 목장으로 향했다.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글러드 왕자와 드워프들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와 함께 온 40명의 드워프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저 아저씨들 왜 울어?"

앨리슨이 물었다.

"너무 반가워서 그래."

"반가워서 울어? 난 웃는데!"

앨리슨이 본 것처럼 지금 드워프들은 서로 뒤엉켜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난 드워프들이 이야기할 수 있게 기다렸다.

라스칼과 200명의 드워프가 왜 살루스에 남았는지 내가 설명해줘도 되지만, 같은 동족에게 듣는 게 더 나을 테니까.

"상당히 깔끔하군."

마르실이 이층집을 보곤 말했다.

'그러게. 나도 이렇게 잘 고칠 줄은 몰랐네.'

내가 산 이층집은 어디 가고 완전 새집이 되어 있었다.

이곳에 남은 글러드 왕자와 드워프들은 건축가도 아니고 대장장이들이었다.

그런데도 집을 이렇게 깔끔하게 고칠 줄은 몰랐다.

내가 데려온 드워프 중에서 건축가도 있었으니, 그들에게 케네스와 앨리슨이 살 저택을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다.

"타일러, 시노우엘님을 찾으러 언제 출발하나?"

"기다려 봐. 일단 정보가 필요해. 내가 정보를 좀 알아볼 테니까. 그 후에 계약부터 다시 하지."

"서둘러라 시간이 없다."

엘프들은 장벽을 넘어오자마자, 시노우엘을 찾으러 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맨땅에 헤딩할 순 없는 법.

모든 일은 다 순서가 있다.

드워프들끼리 이야기가 끝났는지, 글러드 왕자가 내게 다가왔다.

"타일러여! 정말 고맙다. 그대는 우리 토그 족의 은인이다."

"고맙긴, 우리 사이에 그 정돈 아무것도 아니지."

글러드의 눈동자가 배로 커졌다.

"헉! 언제 그렇게 우리 말을 완벽하게 배웠는가?"

"대수림에서 열심히 노력했지."

그는 내 완벽한 발음에 놀라고 있었다.

"타일러여! 앞으로도 살루스 기지에 있는 라스칼과 드워프들을 많이 도와다오."

"그건 걱정하지 마. 이미 세팅은 다 끝냈어."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것은 오히려 나였다.

라스칼은 뛰어난 리더였다.

그래서 살루스 전진 기지의 수리와 살림, 마석 광산 등 전반적인 운영은 모두 라스칼에게 맡겼다. 그리고 쿠훌린과 오크들은 전진 기지의 내부 경비와 물자수송을 맡겼고, 거신인형 암 드로운과 두 자동인형은 기지 방어를 맡겼다.

당장 서로 의사소통은 힘들겠지만, 확실히 임무를 분리해줬기에 겹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타일러여! 그대가 시킨 대로 바위산 안에 아지트를 만들었다."

"뭐? 벌써?"

10개월이었다.

그리고 인력은 겨우 7명.

내가 그러진 아지트 설계도는 200여 명의 드워프가 살 집과 기간트 작업장과 대형 창고까지 있었다.

그걸 다 만들었다고?

"타일러여! 날 따라오게 바로 보여주지."

글러드의 눈빛이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급히 갈 곳이 있다. 우선 드워프들을 챙겨서 아지트로 데려가고, 저기 마차들도 다 작업장으로 옮기고."

"알았다! 타일러여!"

이번에 카야킨에서 오리지널 마장기만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케네스 영감이 쓰던 작업 도구와 공구, 마석 배터리를 충전할 수 있는 장치와 작업대까지 마차 하나를 가득 채웠다.

난 케네스 영감을 쳐다봤다.

"우선 앨리슨과 여기 2층을 쓰세요."

"알았소."

"에테나!"

"네, 타일러님."

"엘프들과 이 집 1층을 쓰고, 케네스와 앨리슨을 부탁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목숨을 다해 지키겠습니다."

"아! 그리고 네가 모두의 소통을 맡아줘. 할 수 있겠지?"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눈치 빠른 에테나라면 잘할 것이다.

난 급히 윌리엄 사령관에게 달려갔다.

너무 늦으면 공을 많이 세워도 미운털이 박힌다.

그리고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장벽에 있는 거신 계단도 오늘 밤에 올라갈 생각이었다.

43. 장벽 탐험.

43. 장벽 탐험.

[헬다임 장벽 사령부]

"충! 타일러 빈스 중위······."

"이리와 앉게."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윌리엄 사령관을 마주 보니 왠지 모를 안도감이 느껴졌다.

"차를 내오게."

차가 나오고, 몇 모금을 마셨다.

지금쯤이면 뭔가 큰 소리가 나와야 정상인데······.

너무 조용하니, 더 불안하다.

"밥은 먹었나?"

"네? 아직입니다."

"이런, 그럼 식사를 가져오라고 할 걸 그랬나?"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단순히 보고가 4시간 늦은 거지만, 이번 임무의 책임자는 나였다.

함께한 기간트 기사들이야 카야킨 전진 기지 소속이었고, 커널 대령이 내게 협조하기 위해 파견한 것이었다.

그러니 윌리엄 사령관은 책임자인 내 보고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너무 보고를 늦게 해서 죄송합니다."

"허허! 괜찮네. 보고가 늦는다고 상황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무사히 돌아왔으니 된 거지."

어라? 이렇게 쉽게 넘어간다고?

윌리엄 사령관은 할아버지 같은 웃음을 지었다.

이거 어째 더 불안한데?

"정말 고생했네. 솔직히 말하면 난 1개만 확보해도 성공이라고 생각했을 거네. 그런데 거신 갑옷이 4개라니! 후후!"

윌리엄 사령관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긴 오리지널 기간트가 4개나 생기는 것이니, 내가 큰일을 하긴 한 거지.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커널 대령이 보내온 보고서를 읽어봤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윌리엄 사령관은 보고서를 펼쳤다.

"표범 괴수를 잡아 고립된 병사들의 사기를 올렸더군. 거기에 프랭크 전 사령관이 전진 기지 입구를 막았을 때도 기지 안으로 소식을 알려 무혈입성을 돕기도 했고. 그리고 프랭크 대령이 숨겨 놓은 괴수 부산물도 찾았고."

윌리엄 사령관은 읽으면서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원정대를 잘 이끌어 큰 피해 없이 거신 갑옷도 4개나 확보했고, 귀환 길에 살루스 기지의 만행을 알아냈고, 르블로 영지의 기간트 작업자도 구하고, 또 카멜 기지에 살루스 놈들의 위험을 알려 기지 방어에도 도움을 줬고, 살루스의 기간트와 마석, 부산물을 획득하는 데 큰 도움을 줬더군. 허허!"

윌리엄 사령관은 감탄사까지 날렸다.

윌리엄 사령관이 뒤에 서 있는 엠버 중령을 쳐다봤다.

"이보게 자네라면 이렇게 할 수 있었겠나?"

엠버 중령이 반보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렇지!"

윌리엄 사령관이 다시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깟 보고야 좀 늦으면 어떤가. 이렇게 훌륭히 임무를 수행하고, 게다가 엄청난 돈까지 벌어왔으니, 자넨 좀 건방져도 되네."

"네! 감사합니다."

장벽 사령관에게 인정받자, 기분이 좋아졌다.

어깨도 좀 올라간 거 같고.

그러고 보니 내가 그 많은 일을 다 한 거네!

그동안 그 죽을 고생을 했으니, 사실 좀 뻐겨도 괜찮은 거다.

"살루스 전진 기지를 이계 난민 기지로 만들고 싶다고?"

"네! 이계 난민들을 이용해 대수림의 부족한 인적 자원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또 살루스 기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카야킨 전진 기지의 정보력과 힘을 키울 때입니다."

"음 난민들을 파견할 때 자연스럽게 전진 기지를 염탐하겠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영지의 전진 기지야 우리 입김이 닿지만, 다른 왕국의 전진 기지는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난민을 파견하면서 자연스럽게 내부를 볼 수도 있고, 난민 관리나 실태 조사 명목으로 조사관을 보낼 수도 있지요."

"아! 이런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우리 참모진이나 지휘관들이 내야 하는데!"

윌리엄은 무릎을 치더니, 슬쩍 엠버 중령을 쳐다봤다.

그리곤 나를 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주 좋은 생각이네만 아쉽게도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네."

"네? 시기라니요?"

"가디언 제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이미 대수림으로 상당한 병력을 파견했네."

"그럼 아까 장벽에서 봤던 기간트들은 그 때문입니까?"

"맞네. 그들은 록체스터 가문의 검은 늑대 기사단이네."

"그럼 전쟁이 일어나는 겁니까?"

"아직 속단하긴 이르네. 우리는 그들의 움직임을 보고 미리 병력을 대비한 것뿐이니까."

윌리엄이 입맛을 다셨다.

"그러니 난민 기지 문제는 대수림의 상황이 정리되면 다시 이야기하지."

"저기, 벌써 이계 난민들을 보냈습니다."

"뭐?"

"살루스 기지에서 제가 구한 드워프들을 맡아줄 만한 전진 기지가 없어 그들을 다시 돌려보냈습니다."

"허! 기지의 방어는?"

"오크들과 기간트를 가진 용병대를 함께 보냈습니다."

윌리엄 사령관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벌어진 일을 취소할 순 없겠지."

"기지 관리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선 자급자족할 수 있게 드워프가 마석을 캐서 우리 카야킨 기지에 판매하기로 했습니다."

"그건 그나마 다행이군."

그때 엠버 중령이 옆에서 나섰다.

"가디언 제국도 바보가 아니라면 대수림에서 전쟁을 일으키진 않을 겁니다. 저들의 전력이 우리와 큰 차이가 없는데, 무리하게 공격하면 자신들만 손해니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가디언 놈들은 이상한 술수를 자주 쓰니까 잘 지켜봐야 하네."

윌리엄 사령관은 이미 동부 전선에서 가디언 제국과 싸운 경험이 많았기에 방심하진 않았다.

"좋아! 살루스 전진 기지는 난민들에게 한번 맡겨 보지. 단 1년의 기간을 주지. 그때까지 관리가 제대로 안 되거나 수익이 나지 않으면, 기지 승인은 취소될 수도 있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다행히 이계 난민 기지 문제는 수월하게 넘어갔다.

윌리엄 사령관이 이제 보고서의 마지막 장을 쳐다봤다.

"커널 대령이 자네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하는군."

"그렇습니까?"

"이번에 획득한 부산물 중에서 자네 몫을 줘야 한다고 강력하게 요구하더군."

속으로 웃었다.

커널 대령이 챙겨준다고 하더니, 보고서에 기재한 것 같았다.

"사실 나도 그럴 생각이야. 어차피 남은 건 모두 국고로 들어갈 테니, 공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나눠주는 건 당연한 거지."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한 5만 골드면 충분하겠나?"

순간 대답하지 못했다.

5만 골드면 어느 정도지?

일단 엄청나게 큰돈인 건 알겠다.

중위 급여가 6골드니까.

계산하면······.

에이, 굳이 계산할 필요는 없다.

내 인형의 집에 있는 마석과 부산물은 그보다 몇십 배는 더 나갈 테니까.

생각해 보니 기간트도 많구나!

"자네가 해낸 일에 비하면 금액이 부족하다고 느낄 거네. 하지만 개인에게 너무 많은 금화를 주게 되면, 추밀원이나 황실에서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어."

5만 골드를 챙겨주면서도 윌리엄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럴 때가 용서 타이밍이다.

"드워프 난민 40명을 집에 데려다 놨습니다."

"······?"

"거신 갑옷을 실은 마차를 이용해 몰래 관문을 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윌리엄 사령관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휴우! 그래, 내가 어떻게든 해보지. 대신 그들도 이곳 헬다임을 벗어나면 안 되네."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아! 하나는 성공했고.

그래도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여자 엘프도 12명 데려왔습니다."

"뭐라?"

윌리엄 사령관의 목소리가 커졌다.

"죄송합니다."

"엘프라고?"

윌리엄 사령관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하아! 엘프는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는데······."

윌리엄 사령관은 한참 고민을 하다가 엠버 중령을 쳐다봤다.

엠버 중령이 입을 열었다.

"장벽에서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은 사령관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사령관님께서 보증하신 거로 하시면 됩니다."

"이 사람아 그걸 누가 모르나? 내 마누라가 알면······."

갑자기 윌리엄 사령관이 식은땀을 흘리는 것 같았다.

난 일어서 다시 고개를 숙였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휴! 좋아.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네. 더는 절대 안 돼!"

"네! 감사합니다."

10년 묶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느낌이다.

대수림과 이계 난민들까지 한 방에 해결했다.

윌리엄 사령관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며칠 푹 쉬고. 일주일 후에 거신의 갑옷을 할데가르 기간트 공방으로 옮길 테니까. 자네가 끝까지 마무리하게."

"제가 가는 겁니까?"

"그래. 전진 기지 기사들은 돌아갈 거고, 어차피 열차로 이동할 테니까, 별문제는 없을 거야. 클린드 지부장과 약속한 것도 있고."

"네! 알겠습니다."

"피곤할 테니, 그만 가서 쉬게."

"충!"

어서 가라고 손을 휘휘 젓는 윌리엄 사령관이 어쩐지 나보다 더 피곤해 보였다.

"타일러 중위."

"네?"

엠버 중령이 따라 나왔다.

"무슨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자네 약혼녀 말이네."

"예?"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샤를린 위네스 양 말이네. 이런, 역시 길이 어긋났나 보군."

엠버 중령은 샤를린이 이곳에 있었단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까 저를 만나기 위해 대수림에 갔다는 겁니까?"

"그렇네. 이곳에서 6개월을 기다리다가 이번에 록체스터 가문과 함께 카야킨 기지로 갔어."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뭐?"

"파혼당했거든요."

나도 모르게 씁쓸한 표정을 지은 것 같았다.

타일러는 그녀가 자필로 쓴 파혼 통지서를 받았다.

그리고 자살했다.

그 덕분에 내가 타일러의 몸에 들어올 수 있었지만, 원래 타일러를 죽인 건 결국 그녀였다.

그러니 날 찾아온 이유는 알 필요가 없었다.

***

[헬다임 장벽]

관문 앞쪽 400미터 지점에 임시 야영지가 있었고, 내부에 6대의 기간트가 세워져 있었다.

2대의 기간트가 교대로 관문과 장벽, 야영지 주변을 계속 돌면서 순찰하고 있었다.

'다행히 삼엄하진 않네.'

관문을 열기 위해선 30여 개나 되는 마석 배터리를 연결해야 했다.

마석 배터리를 이곳으로 가져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누가 큰돈을 들여 일부러 관문을 열겠나.

낮에 표시했던 장벽 앞에 도착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이미 이곳에 관문 동력 장치를 개발한 빌헬름 뢰트켄이 다 털어 갔을 테니까.

그런데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던전 탐험 같은 느낌도 있고.

사실 이곳은 내 운명의 실타래가 통하지 않은 유일한 곳이었다.

내 운명의 실타래 범위는 700미터, 그리고 관문의 폭은 400미터였기에 인형의 집 밖으로 마법인형을 내보내면 관문을 넘어갈 줄 알았다.

하지만 실패했다.

그래도 오늘 낮에 관문이 열렸을 땐 성공했기에 내 마법인형을 몰래 장벽 너머로 보낼 순 있었다.

슬쩍 위를 올려다봤다.

문을 여는 스위치 위치가 7미터라 혼자서는 도저히 닿을 수 없었다.

기이이잉! 쿵! 쿵!

순찰 기간트가 관문을 살피고 야영지 쪽으로 이동했다.

지금이 기회였다.

'나와라! 치타!'

턱턱!

표범인형을 불러냈다.

그리고 스위치가 있는 벽에 표범을 바짝 세워서 붙였다.

난 마나를 충분히 회전시키고, 곧바로 도움닫기를 했다.

다다다닥!

'도약!'

팟!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표범의 머리를 밟았다.

한 번 더!

[도약(lv.3) 스킬을 사용했습니다.]

[도약(lv.3) – 순간적으로 하체 근육의 힘이 3배로 상승해 폭발적인 힘을 낼 수 있다.]

파앗!

마나를 손으로 뿜어내며 최대한 뻗었다.

착! 치익!

내 손이 내려오며 스위치 위를 스쳤다.

드르르르륵! 쿵!

열렸다!

떨어지는 날 표범인형이 잘 받았다.

'표범인형에게 배운 도약 스킬을 유용하네 쓰네!'

스킬을 꾸준히 연습해 3레벨까지 찍길 잘했다.

아직 순찰 기간트가 올 때가 아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다.

난 표범인형에 타고 계단을 올라갔다.

'3번째 계단 오른쪽 벽 위에 스위치가 있다고 했지.'

앨리슨이 낮에 알려준 안쪽 스위치가 있을 곳을 쳐다봤다.

문제는 계단의 폭이 1.5미터 정도나 됐기에 접촉해야 할 범위가 너무 넓었다.

한 두세 번은 더 뛰어야겠네.

혹시나 몰라 눈으로 마나를 뿜어냈다.

어? 보이네!

다행히 내부 벽은 마나가 흐르지 않았기에 스위치 마법진을 바로 찾을 수 있었다.

'날 올려줘!'

표범인형이 두 앞발을 모아 앞으로 내밀고, 난 그 발을 밟고 도약 스킬로 뛰어올라 스위치를 눌렀다.

착! 드르르르륵! 쿵!

"휴!"

문이 닫혔다.

이번에도 표범인형이 날 제대로 받아줬다.

이 녀석이 없었다면, 문을 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자리에 내려서자, 순간 다리가 휘청였다.

근력은 부족한데 도약 스킬을 연속으로 사용한 부작용이었다.

'앗! 멍청하긴. 표범 꼭두각시가 뛰고, 난 그 위에 올라타 그냥 벽에 손만 대도 됐잖아!'

머리가 멍청하면 몸이 고생이라더니······.

왜 이런 머리는 잘 안 돌아갈까?

마나를 집중하고 보랏빛 눈을 반짝였다.

순간 마른침을 삼켰다.

'이걸 다 올라가려면 얼마나 걸릴까?'

눈앞에 계단 지옥이 펼쳐졌다.

그래도 표범인형이 있어서 괜찮다.

표범인형에 올라타 계단을 하나씩 오르기 시작했다.

***

얼마나 높이 올라왔을까?

30분은 올라온 것 같은데 아직도 정상에 도착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너무 높은데?

"어? 불이 자동으로 켜져?"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계단 끝에 올라왔다고 생각한 순간 주변이 환해졌다.

그리고 커다란 입구가 보였다.

나 대신 개고생한 표범 꼭두각시를 인형의 집에 넣어 체력을 회복시켰다.

그리고 사마귀 꼭두각시를 꺼냈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위험을 무릅쓸 필욘 없다.

난 인형술사니까.

사마귀를 먼저 들여보냈다.

이상이 없자, 나도 천천히 뒤를 따라 들어갔다.

'역시! 거신이 만든 공간이야!'

책상이며 의자, 수십 개의 책장까지 모두 거대했다.

마치 내가 거인국의 걸리버가 된 기분.

그리고 이곳을 썼던 거신은 최소 10미터 이상 되는 큰 거신이었던 것 같았다.

거대한 책장 안에는 책이 한 권도 없었다.

긴 세월을 버티지 못하고 모두 삭아서 흩어진 것 같았다.

아니면 빌헬름이 모두 싹 털어갔거나.

왠지 후자일 것 같았다.

고대 거신이 유산을 이곳에 숨겨 놓은 건가?

자동인형 짹을 꺼냈다.

"짹, 다른 방을 수색하고 뭔가 이상한 게 있으면 말해!"

[네, 마스터!]

워낙 공간이 넓었기에 짹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때 한쪽에 반가운 크기가 있었다.

'빌헬름이 연구했던 곳일까?'

내 키에 맞는 책상들이 벽을 따라 쭉 늘어져 있었고, 책상 위엔 책과 종이, 잉크, 펜 같은 것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300년은 됐을 텐데, 아직도 멀쩡하네?

고개를 들자, 책상 위쪽으로 커다란 음각 조각이 보였다.

'어? 마법진이네!'

커다란 마법진과 그 옆에 거신의 언어로 설명이 되어 있었다.

아! 여기서 마법진을 필사했나 보다.

[어스 웨이브(대지 마법)]

[땅에 일시적으로 강한 충격을 주어 전방에 너울거림을 만든다.]

[마법진 필요 재료 – 마석(대지)]

[어스 베리어(대지 마법)]

[땅을 솟아오르게 하여 벽을 만든다.]

[마법진 필요 재료 – 마석(대지)]

[어스 트랩(대지 마법)]

[땅의 성질을 무르게 하여 상대를 함정에 빠트린다.]

[마법진 필요 재료 – 마석(대지), 마석(물)]

몇 개를 살펴봤는데, 모두 대지 마법진이었다.

고대 거신들은 마법진을 통해 마법을 썼나 보다.

그런데 마석 뒤에 대지는 뭐지?

땅 속성이 부여된 마석인가?

[마스터, 이곳에 제단 같은 곳이 있습니다.]

'제단? 알았어, 그쪽으로 가지.'

44. 등잔 밑이 어둡다.

44. 등잔 밑이 어둡다.

짹이 있는 커다란 방으로 들어갔다.

'여긴 내가 볼게. 다른 방을 살펴봐.'

[네, 마스터!]

천장 높이가 30미터는 되는 듯.

거신에겐 방이겠지만, 내겐 커다란 홀이나 대형 창고처럼 느껴졌다.

'어? 정말 제단이 있네!'

방 가운데 높이 2미터에 지름 15미터의 커다란 둥근 제단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제단 정중앙 위에 지름 50cm 정도 되는 쟁반 같은 것이 보였다.

저기에 뭘 올려서 바치는 건가?

'뭔가 좀 생뚱맞은데?'

제단이라고 하기엔 너무 단출했다.

아니, 아예 아무것도 없다는 게 맞았다.

보통 제단 앞에 단상이나 신상 뭐 그런 거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폴짝 뛰어 원형 제단 위로 올라가 봤다.

바닥에 음각으로 뭔가 잔뜩 새겨 있었다.

'아! 마법진이네.'

이제 보니 이건 제단이 아니고 마법진이 새겨진 거대한 원형 석판이었다.

사람의 크기를 생각하면 정말 컸지만, 키가 10미터가 훌쩍 넘는 거신에게는 자기 키보다 조금 큰 정도였다.

근데 마법진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이 높은 장벽 위에 만든 것을 보면 그래도 중요한 걸 텐데······.

주변에 설명이 있을지 모르니 자세히 살펴봤다.

하지만 어디에도 설명은 없었고, 마법진 안에는 도형과 선, 문양 같은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만 했다.

'빌헬름도 머리 좀 아팠겠네.'

그래도 나는 암 드로운 덕분에 거신의 언어를 완벽히 알고 있었기에 아까 입구 방에 있는 대지 마법진 이름과 설명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지만, 빌헬름은 나보다 거신의 언어에 대해 몰랐을 테니, 해석하기 정말 힘들었을 거다.

지금도 제국의 황립 아카데미에 거신의 언어만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과와 고고학자들이 있다고 했으니, 거신의 언어 정복은 아직도 요원해 보였다.

'이게 뭔지 확인해 볼 방법이 없네.'

마나를 보는 눈으로 살펴봤지만, 이 마법진도 아까 벽에 그러진 다른 마법진처럼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냥 누군가에서 보여주기 위해 설치한 건가?

아! 혹시 이곳이 마법 학교 같은 데였을까?

왠지 거신들이 마법이나 마법진을 가르치는 곳이었을 수도 있어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 장소가 이해가 되네.'

첫 번째 방에 있던 마법진을 보면서 거신이 학생들에게 수업했을 것 같은 장면이 그려졌다.

그러니까 인간의 눈이 아닌 거신의 눈으로 봐야 이 공간이 이해가 되는구나!

아쉽지만 이곳에서는 더는 알아낼 것이 없었다.

다른 방으로 가보자.

주변을 둘러봤다.

통로는 총 여섯 개.

첫 번째 통로는 내가 들어온 곳이고, 난 그다음 통로를 따라 이동했다.

'여긴 아무것도 없네.'

통로 끝은 막혀 있는 방.

그리고 텅 비어 있었다.

다만 이곳도 방 정중앙에 마법진이 그려진 3미터 크기의 원형 석판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몸을 돌려 나가려는데 통로 입구 바닥에 거신의 언어로 뭔가 적혀 있다.

[블레이즈 사막의 붉은 모래]

붉은 모래? 이게 뭔 소리야?

고개를 갸웃거리곤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이곳 역시 막혀 있었고, 방 안엔 원형 석판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프란시나 숲의 검은 흙]

역시나 통로 입구에 다른 거신의 언어가 적혀 있었다.

다른 방에도 다 있을까?

[툰다라 호수 밑의 부드러운 흙]

[바티안 바위산의 흰 자갈]

[대수림의 단단한 흙]

무슨 퀴즈도 아니고.

빈방에 물건은 없고, 바닥에 저런 단어만 적혀 있었다.

다섯 개의 방을 다 돌아보고 다시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왔다.

'여긴 대체 왜 만든 거지?'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의문만 생겼다.

다시 들어왔던 통로로 이동해 입구 쪽으로 향했다.

다음엔 한번 앨리슨을 데려와야지.

아무래도 재능의 영역이 필요해 보였다.

'잠깐 대수림의 단단한 흙이라고?'

그거 나 있는데!

혹시 마법진 위에 뿌리라는 걸까?

한번 시험해 보기 위해 마지막 방으로 돌아갔다.

대형 토우인형을 만들기 위해 대수림의 흙을 왕창 챙겨왔다.

아무래도 단단한 흙으로 만들면 인형 내구성이 좋아질 테니까.

'자할리, 거기 구석에서 흙을 가지고 나와.'

자할리(lv.8) 꼭두각시가 커다란 보자기 가득 대수림의 흙을 가지고 나왔다.

난 보자기를 열고 흙을 한 주먹 펐다.

그리고 원형 석판 위에 뿌렸다.

촤아악!

'뭐야? 변화 없는데?'

드르륵!

"헉!"

석판이 내려갔다!

그것도 반 뼘이나!

난 추가로 흙을 더 뿌렸다.

드르륵! 드르륵!

'한 번 더!'

드르르륵! 쿵!

대략 3kg쯤 뿌리자 원형 석판이 완전히 바닥과 수평이 됐다.

"오오!"

뭔가 알아낸 것 같다!

난 자할리 꼭두각시와 다른 방으로 이동했다.

[프란시나 숲의 검은 흙]

내가 챙긴 대수림의 흙이 검붉은 색이니까 되지 않을까?

단단한 흙을 뿌려봤다.

결론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가 위에 올라가서 뛰어보고, 표범 인형까지 함께 올라가 봤지만.

'되게 까다롭네.'

역시 편법은 통하지 않는구나.

일단 다섯 개의 방에 있는 마법진 석판의 용도는 알아냈다.

이거 흥미진진한데!

뭔가 던전에서 수수께끼를 푸는 느낌이다.

그럼 중앙에 있는 대형 마법진에도 뭔가 올려놓으면 되는 건가?

중앙의 큰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대형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이 접시에는 뭘 올려야 하나?'

다른 건 전부 거신의 언어로 적혀 있었기에 쉽게 알아낼 수 있었지만, 여긴 아무런 표시가 없었다.

엄청나게 큰 마법진이니 뭔가 귀중한 거 아닐까?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

[블레이즈 사막의 붉은 모래]

[프란시나 숲의 검은 흙]

[툰다라 호수 밑의 부드러운 흙]

[바티안 바위산의 흰 자갈]

[대수림의 단단한 흙]

공통점은?

흙? 그래 땅, 대지!

모두 대지 속성의 물질이었다.

그렇다면 이 마법진이 대지 속성 마석을 만드는 마법진?

순간 가슴이 뛰었다!

사실 마석에 속성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하지만 벽에 새겨 있는 마법진 설명엔 분명 대지 속성 마석이 필요하다고 적혀 있었다.

그래! 내 오리지널 마장기 가슴에 새겨진 마법진은 붉은빛이었어! 그리고 케니스 영지의 웨슬리 슈나이더 백작이 탄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 비브르 역시 가슴에 붉은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그렇다면 거신의 마법을 쓰기 위해선 속성 마석을 만들어 마법진을 그리면 된다는 뜻.

'당장 확인할 방법이 있지!'

인형의 집을 열었다.

그리고 알리만(lv.5) 꼭두각시가 마석을 들고 나왔다.

이건 얼음 동굴에서 A등급 괴수의 몸속에서 꺼낸 최고급 마석.

난 어른 주먹만 한 마석을 마법진 중앙의 쟁반에 올렸다.

드르르르르르르륵! 쿵!

"허! 허허! 하하하하!"

마법진이 새겨진 원형 석판이 바닥과 한 뼘을 남기고 멈춰 섰다.

이제 조그마한 마석을 여기에 올리면 완전히 내려갈 것 같았다.

그리고 마법진이 발동되면서 속성 마석을 만들겠지.

'대지 마석을 만드는 방법을 알아냈다!'

그리고 이 마석(대지)을 이용해 마법진을 오리지널 기간트에 그려 넣는다면, 대지 마법을 쓸 수 있다는 뜻이었다.

양산형 기간트의 경우 오리지널 기간트와 달리 마나 효율이 떨어졌기에 될지는 실험해 봐야 했다.

하지만 확실히 오리지널 기간트엔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장 실험해보고 싶었지만.

'문제는 다른 재료를 구하는 건데······.'

이름만 들어도 왠지 구하기 쉽진 않을 재료들이었다.

그리고 거신 시대의 지명과 지금은 완전히 다를 것이기에 찾기가 쉽진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지명을 찾는다고 해도 어떻게 가지?

난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여기에 벌여 놓은 일도 많았고, 대수림 난민 기지에도 할 일도 많았다.

[마스터, 뭔가 찾았습니다.]

'알았어.'

일단 짹에게 향했다.

"어? 이건?"

작은 방에 6미터 높이의 항아리, 다섯 개가 놓여 있었다.

표범인형을 이용해 올라가 보니 항아리 안엔 흙이 들어 있었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설마, 이게 그건가?'

항아리에 이름이 적혀 있진 않았지만, 검은 화약이 연상될 정도로 새카만 흙이 있었다.

'어서 해보자!'

검은 흙을 챙겨 두 번째 방으로 향했다.

드르르르르륵! 쿵!

됐다!

이건 프란시나 숲의 검은 흙이 분명했다.

아마도 오래전에 거신이 구해 놓은 것 같았다.

갑자기 드는 의문.

그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흙이 멀쩡하네?

아! 무슨 마법 같은 것이 이곳 공간 전체에 걸려 있을 수도 있다.

책상이나 의자 같은 가구도 멀쩡했으니까.

'짹이 크게 한 건 했네.'

서둘러 다음 흙을 챙겨서 마법진 위에 올렸다.

드르르르륵! 쿵!

드르르르륵! 쿵!

대수림의 흙은 이미 했고, 이제 마지막으로 붉은 모래만 마법진에 올리면.

'없네······. 없어······.'

항아리가 텅 비어 있었다.

쓰벌!

세상일 쉽게 가는 법이 없네.

단 하나의 재료가 부족해 마법진을 실험해 볼 수 없다니!

[블레이즈 사막의 붉은 모래]

사막?

살루스 왕국인가?

살루스는 국토 대부분이 사막으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대륙에서 가장 뜨거운 사막이기도 했고.

왠지 그곳에 가면 붉은 모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거길 어떻게 가지?

무슨 핑계를 대고?

'아! 내가 직접 갈 필요는 없겠구나!'

난 옆에 있는 짹을 쳐다봤다.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내가 있어야 자동인형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형술사를 대신해 싸우는 것은 마법인형의 의무.

이 경우엔 대신 재료를 구해오는 것이겠지.

'짹, 가자!'

[네, 마스터.]

입구 방으로 돌아갔다.

벽에 있는 대지 마법진은 다음에 와서 그려야겠다.

카메라가 있으면 좋았을 텐데.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옆에 시커먼 방이 하나 더 보였다.

'여기만 보고 갈까?'

안으로 들어가자 방 안이 환해졌다.

벽에 익숙한 그림이 보였다.

헬다임 장벽이 그려진 벽화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 여섯 개의 탑이 그려진 똑같은 크기의 벽화.

그림을 본 난 입을 떡 벌렸다.

'어!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메제트의 탑이 이거였구나!'

거신 암 드로운이 죽기 직전에 내게 한 말.

[기간트의 비밀을 알고 싶으면 메제트의 탑으로 가라!]

이제 찾아다닐 필요는 없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메제트의 탑이니까.

다만 메제트의 탑은 하나가 아니었다.

6개의 속성으로 된 6개의 탑이 있었고.

그 6개의 탑을 쭉 이어서 만든 것이 바로 헬다임 장벽이었다.

그림에 설명을 보면 이곳 아베르크 제국의 메제트 탑이 땅(대지) 속성, 동쪽에 있는 가디언 제국에 있는 탑이 불 속성, 서쪽에 있는 아리칸 공국에 있는 탑이 물(얼음) 속성이었다.

거신이 말한 기간트의 비밀이란 건.

결국, 마법이다.

거신이 썼던 얼음 방패 같은 마법을 쓰기 위해선 마법진이 필요했고, 그 마법진을 그리기 위해선 속성 마석이 필요했다.

'그래서 날 이곳으로 가라고 한 것이구나!'

그림을 보자, 거신의 깊은 뜻을 알 것 같았다.

새삼 내 거신인형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타지에 있는 두 자동인형도.

전생엔 자동인형이 사냥을 떠나도 며칠이면 합류했고, 그 외에는 항상 같이 다녔다.

하지만 지금은 내 상황 때문에 너무 오래, 또 멀리 떨어져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도 괜찮겠지?

어서 이곳에서 할 일을 끝내고 대수림으로 가야겠다.

'짹, 그만 가자!'

[네, 마스터.]

오늘 이 세상의 비밀을 한 꺼풀 벗겨낸 기분이 들었다.

***

땡땡땡땡!

종이 울렸다.

아지트 작업장 한쪽에 마련된 초대형 식탁.

"밥인데!"

다다다닥!

식탁으로 제일 먼저 달려가는 것은 앨리슨이었다.

물론 나도 하던 작업을 멈추고 바로 식탁으로 향했다.

"이런 오늘도 작은 아가씨가 일등이군!"

"나 배고픈데!"

"하하! 알았다! 가득 담아 주마!"

드워프 율리히는 접시 가득 수프를 덜어 건네주었다.

만족한 표정을 짓는 앨리슨이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많이 먹어라!"

앨리슨은 자리에 앉아 허겁지겁 수프를 떠먹고, 식탁에 빵을 집어 먹었다.

"대체 서로 어떻게 소통하는 거야?"

지켜보던 난 의아했다.

한 명은 제국어를 한 명은 드워프 말을 하는데, 신기하게 딱딱 맞아떨어졌다.

"방금 그런 건, 상황이나 표정만 봐도 알죠."

에테나가 내 뒤에 섰다.

"다른 엘프들은?"

"이층집에 있습니다."

"식사는?"

"빵과 우유면 된다고 하네요."

에테나가 어색하게 웃었다.

엘프가 다 에테나 같으면 좋으련만 다른 엘프들은 우리 쪽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층집을 지키며 망을 보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케네스 영감은 벌써 자신의 작업 공간을 만들었고, 드워프들은 내가 가져온 괴수 부산물을 가공하기 위해 뭔가 부지런히 만들고 있었다.

내가 접시를 들고 자리에 앉았을 땐, 앨리슨은 이미 수프를 비워가고 있었다.

"벌써, 다 먹었네?"

"나! 더 먹고 싶은데!"

앨리슨이 말하자, 율리히가 어느새 다가와 국자로 수프를 가득 담아 줬다.

"고맙습니다."

율리히는 우리 식사 담당 드워프였다.

그는 이번에 데려온 40명의 드워프 중에서 유일한 요리사였다.

드워프는 원래 요리를 못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지 않아서였다.

금화가 많으니, 좋은 재료는 얼마든지 대줄 수 있었다.

잘 먹어야 일도 잘하지.

탁!

"중위 양반, 대체 뭘 만드는 거요?"

앨리슨 옆으로 케네스가 앉았다.

"인형입니다."

"인형?"

케네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난 작업장 한쪽에 대수림의 흙으로 토우인형을 만들고 있었다.

일단 기간트를 넣을 정도로 크고 힘이 좋아야 했기에 기본 틀을 잡는 것도 시간이 꽤 걸렸다.

물론 미적 감각은 없었기에 인형보단 괴물에 가까웠지만.

식사를 끝내고 에테나와 이층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엘프와 새로운 계약서를 쓰는 날이다.

***

열두 명의 미녀 엘프에 둘러싸여 있었다.

"우린 시노우엘님을 찾아 대수림으로 돌아가면 된다."

마르실이 간단한 조건을 말했다.

"그건 알고 있고. 이제 날 설득해봐."

"······?"

"내가 너희를 도와줄 이유 말이야."

마르실과 엘프들이 서로 쳐다봤다.

"미리 말하지만, 저번처럼 누가 평생을 모시니, 내 한 몸 희생한다는 그런 말을 할 거라면 그냥 조용히 나가서 너희끼리 시노우엘을 찾든지 하라고. 난 여자가 필요한 게 아니니까."

마르실이 말했다.

"우리 샤이닝 전사들을 경호원으로 빌려주지."

마르실이 말한 것은 첫 번째 계약 때 내 요구 조건이었다.

난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그땐 날 지켜줄 믿을 만한 병사가 필요했지만, 지금은 아니야."

"우리 전사들은 1초에 화살 2발을 쏘고······."

"그만! 이젠 난 기간트가 있어. 너희가 기간트를 이길 수 있어?"

엘프들이 침묵했다.

"다른 조건이 없다면, 여기까지 하지. 이제 너희는 자유다. 내가 데려왔으니 계속 머물고 싶다면 그건 허락하지. 시노우엘을 찾으러 가고 싶으면 가도 좋다. 대수림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그것도 가능하고."

드워프는 괴수 부산물을 가공할 능력이 있었다.

벌써 케네스와 같이 작업을 함께하기 시작했고, 이계 난민 전진 기지에서도 드워프는 꼭 필요한 존재들이었다.

쿠훌린과 오크는 날 대족장의 영혼을 이은 자라고 부르며 따르고 있었다. 대수림에서 그들은 인간 병사들보다 낫고, 하급 괴수와 직접 싸울 만큼 강했다.

하지만 엘프는?

냉정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내게 필요 없다면 여기서 털어낼 생각이었다.

"더 없으면, 여기서 그만하지."

"타일러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에테나가 말했다.

솔직히 에테나는 내게 쓸모가 있었다.

하지만 에테나 하나를 보고 시노우엘을 구할 생각은 없었다.

제국에서 엘프를 소유하려면 장벽 사령관 같은 높은 위치에 있어야 했다. 황족이나 높으신 귀족들 말이다.

그들에게서 하이엘프를 구하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마르실님, 이젠 우리 샤이닝 일족의 능력을 말해야 합니다. 그걸 가지고 타일러님과 협상해야 합니다."

마르실은 입술을 꽉 다물었다.

"우리끼리는 시노우엘님을 구할 수 없습니다. 그냥 제가 말하겠습니다."

에테나가 참지 못하고 나섰다.

"아니다! 내가 말하겠다."

마르실 족장이 입을 열었다.

45. 지부장.

45. 지부장.

"우리 샤이닝 일족은 특별한 감각이 있다."

"감각?"

"바람 정령의 소리를 이용해 주변의 움직임을 알아챌 수 있다."

"좀 쉽게 말해주겠나?"

마르실은 눈을 감고 입을 벌렸다.

그리고 허공에 대고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엘프의 언어를 모두 이해한 내 귀에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 마르실이 기다란 귀를 쫑긋 세우며 고개를 조금씩 돌렸다.

그리곤 눈을 떴다.

"누가 북동 쪽에서 말을 타고 이쪽으로 온다."

"뭐?"

"말에 탄 것은 체격이 큰 남자다."

창문을 열고 북동 쪽을 바라보았다.

이 이층집은 낮은 언덕 위에 있었기에 시야가 상당히 개방되어 있었다.

근처에 누가 온다면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뭐지? 아무도 없는데?"

"그건 조금 있으면 알게 된다."

잠시 후.

정말 저 멀리 언덕을 넘어 말에 탄 한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기까지 거리가 500m쯤 될까?

하지만 그 전부터 오는 걸 알고 있었으니, 마르실이 발견한 거리는 더 늘어난다.

박쥐의 초음파나 레이더의 음파처럼 바람 정령의 소리를 내어 돌아오는 파장을 읽고 지형과 위치를 알아내는 것 같았다.

한 마디로 반향정위.

이게 엘프의 능력이었네.

"무슨 능력인 줄은 알겠군. 그런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시노우엘님을 구하는데 협력해준다면, 우리 엘프 전사 100명을 임대해 주겠다."

"임대라고? 하지만 난 엘프가 필요 없는데?"

"우리 엘프는 어느 전진 기지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 그 이유가 뭔지 아는가?"

"글쎄."

"우린 대수림에 인간의 보호 없이도 자리를 잡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방금 본 우리의 능력으로 접근하는 괴수의 위치를 알아내 유인하거나 피하면서 아지트를 옮겨 다니며 스스로 생존하고 있다."

이건 귀가 솔깃했다.

그러고 보니 엘프는 어떤 전진 기지에도 머물지 않았다.

카야킨 기지에서 들은 정보론 전진 기지에 가끔 하급 괴수의 부산물과 식량을 교환하러 오는 경우를 제외하곤, 엘프를 보기 힘들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 말은 엘프는 대수림을 기간트 없이 오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최대 탐지 거리는?"

"몇 가지 제약이 있지만, 먼저 정령의 소리 없이도 예민한 귀를 이용하면 반경 100미터까진 움직임을 알아낼 수 있고, 방금처럼 바람 정령의 소리를 내면 45도 방향으로 1km까진 괴수의 움직임이나 지형지물을 파악할 수 있다."

"1km라 나쁘진 않군."

사실 대수림에서 1km는 엄청난 거리였다.

마치 엘프 개개인이 고성능 레이더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았다.

이제야 뭔가 부족했던 내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 난민 전진 기지의 살림과 운용은 드워프가 할 것이다.

기지 방어는 내 자동인형과 오크들이 할 것이고.

하지만 그거론 충분하지 않았다.

난민 전진 기지를 오래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선 한 가지 조건이 더 필요했다.

정보!

제국의 영향권에 있는 대수림의 전진 기지는 30여 개.

최근에 사라진 곳도 있었고, 새로 늘어난 곳도 있었다. 하지만 소식은 수개월이 지나야 알 수 있었다.

대수림과 전진 기지의 정보가 부족한 것은 대수림을 이동하기 위해선 최소 3, 4대의 기간트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엘프는 기간트 없이 이동이 가능하다!

만약 각 전진 기지의 병력이동이나, 사냥팀이 향하는 방향 등을 알아내, 정보를 취합할 수만 있다면 엘프를 이용해 대수림의 정보를 장악할 수도 있었다.

그 정보를 가지고 카야킨이나 장벽 사령부와 거래를 할 수도 있었고. 이번에 살루스 전진 기지 상황처럼 병력의 움직임을 다른 전진 기지에 알려 위험을 대비할 수도 있었다.

또 전서구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가령 지금 가디언 제국의 기간트가 대량으로 대수림에 넘어왔으니, 그들의 병력이동을 확인해 우리 쪽에 알린다면, 미리 병력을 이동해 대비할 수 있음이다.

내가 아무리 헌터의 능력이 있었어도 제국 안에서 돈을 버는 건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대수림은 다르다.

엄청난 가능성이 있었고, 난 기간트와 마석 광산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니 앞으로도 대수림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했다.

결론적으로 엘프는 내게 필요하다.

"엘프를 어떤 일이 쓰는지는 내 마음인가?"

"물론이다."

마르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임대 기간은?"

마르실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잘 생각해서 결정해."

사실이게 가장 중요했다.

지금 엘프와 나와의 관계는 현재까진 단순 계약 관계니까.

"3년?"

대답 대신 미간을 찡그렸다.

"4년으로 하지."

"하아!"

깊은 한숨을 쉬었다.

"5년! 그 이상은 무리다."

"그럼 5년으로 하고, 정보원 엘프가 죽거나 다쳐 결원이 생기면 즉시 보충하는 조건으로 하지. 어떤가?"

"휴! 알았다."

"계약서는 엘프어로 쓰고, 세계수를 걸고 맹세한다는 내용도 꼭 적게."

마르실이 에테나를 살짝 노려봤다.

맞다! 세계수를 걸고 한 맹세는 엘프라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은 에테나에게 들었으니까.

마르실이 고개를 흔들곤 의자에 앉았다.

"차라리 뱀을 상대하는 것이 낫지."

"칭찬으로 듣겠다."

난 옆에 있는 에테나를 쳐다봤다.

"우린 손님을 맞으러 가지."

에테나와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타일러님."

"내게 감사할 게 뭐지? 우린 그냥 계약한 것뿐인데?"

에테나가 피식 웃었다.

"엘프의 능력, 이미 알고 계셨죠?"

"뭐?"

"조금 전에 마르실님이 엘프 능력을 말씀하실 때, 전혀 놀라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짐작은 하고 있었지. 어떻게 하는지 방법은 몰랐지만."

"그럼 왜 처음부터 우리 능력을 알고 있다고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먼저 말하면 요구하는 것밖에 되지 않잖아. 하지만 방금처럼 엘프들이 먼저 말했으니, 스스로 결정한 셈이 되지."

"그래서 제가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허! 앞으론 에테나 앞에선 더 조심해야겠어."

눈치도 빠르고 표정만 봐도 내 생각을 읽고 있으니까.

"워어! 왜 나와 계십니까?"

"뭐야? 남자가 아니고 자네군."

체격이 큰 남자라더니 글래디스가 말에서 내렸다.

"응? 계급장에 작대기 하나가 늘었군."

"덕분에 1등 하사관으로 진급했습니다."

"덕분은 무슨, 자네가 잘해서 진급한 거야. 그래, 여긴 무슨 일인가?"

"일정이 이틀 앞당겨져, 내일 아침에 출발해야 합니다."

"젠장! 역시 난 오래 쉴 팔자는 아니군."

사실 여기서도 계속 일만 했지만.

그래도 열차 여행이니 좀 쉴 순 있겠지.

***

[할데가르 기차역]

치이이익!

"마석 배터리 가져와!"

"빨리 기간트를 실어라!"

"어서 서둘러!"

이곳도 헬다임과 같은 분위기네.

기간트가 옮겨지고, 열차는 쉴새 없이 북으로 향한다.

정말 전쟁이 나려나?

10개월 대수림에 있었을 뿐인데, 세상은 너무 빨리 흐른다.

남서쪽 하늘을 쳐다봤다.

'짹은 잘 가고 있으려나?'

윌리엄 사령관에게 부탁해 새로운 신분증을 발급받았다.

문제는 짹이 가는 곳이 최근 외교 관계가 극도로 악화한 살루스 왕국이란 사실이다.

돈을 더 챙겨줄 걸 그랬나?

"충! 타일러 빈스 중위님십니까?"

"그래, 하역은 끝났나?"

"네! 지금 공방 입구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고맙네."

황실 기간트 공방으로 향했다.

여긴 제국의 기간트 공방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물론 생산량도 최고고, 미세하지만 기간트 성능도 다른 대영지에서 생산된 것보다 좋다는 평가다.

그래서 가격도 비싸고.

공방은 할데가르 역 바로 옆에 있었기에 열차에서 부산물이나 마석을 내리면 바로 작업장으로 갈 수 있었다.

내가 가져온 거신 갑옷과 장비도 그렇게 이동했다.

"여기 서명하시면 됩니다."

최종 인계를 확인하는 서류에 서명했다.

"모든 절차는 끝났습니다. 그럼."

이젠 이 거신 갑옷은 6개월 후 기간트로 새롭게 태어난다.

"정지!"

"잠깐, 기다려!"

'응? 저들은 누구지?'

세 명의 장교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특이하게 세 사람 다 왼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헉! 헉!"

"다행이야. 늦지 않았어!"

중령 계급장을 단 사내가 비숍급 거신 갑옷 앞에 서더니 품에서 뭔가를 꺼내 뚜껑을 열고 뿌렸다.

촤악!

그리고 여자 소령과 남자 대위 역시 나이트급 갑옷과 폰급 갑옷 앞에 서더니 똑같은 행동을 했다.

"이제 됐어. 들어가도 돼."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작업자들과 작업용 기간트들이 거신 갑옷과 장비를 끌고 기간트 공방 안으로 들어갔다.

"휴! 네놈이 피를 무서워해! 늦을뻔했잖아."

중령이 키 큰 대위를 나무랐다.

"그럼 피를 한 컵이나 빼는데 안 무섭습니까? 으으!"

"하아! 어떻게 이런 놈이 기간트에 탔는지 의심스럽다니까."

중령이 옆에 있던 소령을 쳐다봤다.

"로제 소령. 괜찮나?"

"네! 전 괜찮습니다."

세 사람이 갑자기 날 쳐다봤다.

중령이 물었다.

"정보국 장교가 왜 여기 있지?"

"충! 타일러 빈스 중위입니다."

"오! 그대가 타일러 중위로군!"

갑자기 중령이 반가운 얼굴을 했다.

"난 파이컬 허먼 중령이네. 이쪽은 로제 소령, 이쪽은 바오트 대위."

굳이 소개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이제 같은 배를 탔으니, 서로 인사는 해야지."

"같은 배요?"

"하하! 우린 5군단 소속 기사들이네."

윌리엄 사령관에게 들은 기억이 있다.

자신이 밀고 있다는 그 7황자가 5군단을 이끌고 있다고.

로제 소령이 날 보며 웃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 타일러 중위."

"네, 반갑습니다."

"중위 덕분에 우리가 오리지널 기간트에 타게 됐어."

"아닙니다. 그런데 방금 갑옷에 뭘 뿌린 겁니까?"

로제 소령이 붕대를 감은 손을 들었다.

붕대에 피가 살짝 배어 있었다.

"기간트로 만들어지기 전에 피를 뿌리면 나중에 탈 때, 싱크로율이 높아진다는 가설이 있거든."

"아! 네······."

그런 말도 안 되는 미신을 믿다니.

그것도 제국의 기사가.

"중위, 나도 반갑네."

바오트 대위가 손을 내밀었다.

삐이익! 삐이익!

하지만 악수는 하지 못했다.

"이런! 헬다임으로 가는 열차가 곧 출발한다. 그럼 다음에 보지."

"네! 살펴 가십시오."

세 사람은 다시 열차 플랫폼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뭔가 정신없는 사람들이었다.

윌리엄 사령관이 7황자에게 내 이야기를 했나?

난 그쪽 라인을 타겠다고 한 적이 없었지만, 왠지 마음대로 정해진 것 같았다.

뭐 당장 진급에 도움이 된다면 상관없지만, 나중에 후계 싸움 같은 골치 아픈 일에 끼어드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그래도 기사들이 오리지널 기간트에 타게 된 것이 내 덕분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런데 로제 소령이라고 했나? 저 사람이 비숍급 기간트에 타야 할 것 같은데······.'

방금 마나를 뿜어내는 눈으로 본 푸른빛은 그녀가 가장 밝았다.

사람과 내 마나인형을 향해서도 마나를 보는 눈을 확인해 봤는데, 빛의 밝기로 마나량을 어느 정도는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런데 5군단도 헬다임 장벽으로 가는구나!

진짜 대수림에 전쟁이 일어나려나?

씁쓸한 마음이었다.

그래도 난민 전진 기지는 서쪽에 있으니까 괜찮겠지······.

이제 남은 일정은 클린드 지부장 심부름만 남았다.

***

[할데가르 정보국 본부]

'내가 여길 다시 오다니...'

근 1년 만이었다.

타일러의 몸에 빙의한 곳이자, 내가 쫓겨난 곳.

여길 나가자마자 열차를 타고 헬다임 장벽으로 향했지.

"충!"

경비들의 경례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1층 홀은 정신이 없었다.

수많은 병사와 정보원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전쟁이 나기 전엔 정보국이 제일 바쁘다더니······.

사람은 많지만, 여전히 삭막한 느낌.

"어? 이게 누구야? 타일러 소위!"

누군가 날 불렀다.

전에 내 직속 상관이었던 더블란 중위였다.

아니 이젠 대위군.

그가 다가왔다.

"뭐야? 중위로 진급하더니, 이젠 상관에게 인사도 안 하나?"

"충!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더블란 대위는 내 경례도 받지 않고, 날 삐딱하게 쳐다봤다.

"너 이 새끼, 기억상실증 그거 다 구라였지?"

"네?"

"자살 시도도 다 헬다임으로 가려고 수작 부린 거잖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전 심부름이 있어서 그만."

경례하고 계단으로 향했다.

"이 새끼, 너 내려올 때까지 내가 기다린다."

더블란 대위가 팔짱을 끼고 날 노려봤다.

아무리 봐도 정보국에 있을 인물은 아닌데?

찐따 타일러가 가장 무서워하던 인물이 지금은 좀 우습게 보였다.

'뭐지? 여기로 가라고 했는데?'

문에 문패도 없고, 하사관들이 집기류를 정신없이 이 곳으로 옮기고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안쪽에 중령이 보였다.

"충! 타일러 빈스 중위입니다."

중령이 손을 내밀었다.

"도슨 중령이네. 잘 부탁하네."

"네! 반갑습니다."

근데 뭘 잘 부탁한다는 거지?

"안쪽 문으로 들어가 보게.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시네."

"네."

정보국에 아무런 인맥이 없으니, 여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도 모르겠다.

똑똑똑.

"들어오게."

안으로 들어갔다.

"충! 타일러 빈스······?"

"오랜만이군. 타일러 중위. 그쪽으로 앉게."

"감사합니다."

어째서 클린드 헬다임 지부장이 이곳에 있는 거지?

[클린드 아서 부국장]

앉자마자 명패가 보였다.

"축하드립니다."

"고맙네."

정보국 부국장은 소장급이고, 헬다임 지부장은 준장급이었으니 그는 진급한 것이다.

클린드 부국장은 서랍을 열어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디 부국장이지?'

정보국은 조직이 단순했다.

국장 밑에 다섯 명의 부국장이 있었고.

정보대, 특무대, 방첩대, 감사대, 호위대를 하나씩 맡아서 관리했다.

"여깄군."

클린드 부국장이 서류와 작은 상자를 꺼냈다.

"참! 이곳이 어딘지 모르겠군."

"······."

"여긴 이번에 새로 생긴 대수림 정보대네."

"대수림 정보대요?"

"그래 자네가 대수림에서 거신 갑옷 4개를 찾아와 준 덕분에 새로 생긴 부서라고 할까?"

"네?"

"대수림의 중요성과 가능성을 추밀원장님께서 알아보신 것이지. 그리고 내가 초대 부국장을 맡았네."

"축하드립니다."

"지금은 헬다임 지부밖에 없지만, 곧 대수림에 새로운 지부가 생길 것이네."

클린드 부국장이 서류를 내게 내밀었다.

"그리고 자네가 대수림 지부의 지부장이네."

"네?"

"임명장은 안에 들어 있네."

"왜? 제가?"

"자네 만큼 대수림에 대해 잘 아는 정보국 장교가 어디 있나?"

클린드 부국장은 미소를 지으며 작은 상자를 열어 내밀었다.

"축하하네. 타일러 빈스 소령."

상자 안엔 금빛 줄이 하나 그어진 견장이 들어 있었다.

46. 달리기는 좀 하나?

46. 달리기는 좀 하나?

상자에서 소령 계급장을 집어 들었다.

"견장은 내가 달아주지."

"감사합니다."

얼떨결에 소령이 됐다.

대위 진급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이건 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전시도 아닌데 2계급 특진이라니, 이게 가능한 겁니까?"

"불가능할 건 뭔가?"

"진급 요건으로 최소 복무 기간 같은 게 있을 텐데요."

"있지. 하지만 정보국과 기사단은 제외야."

"아! 그런가요?"

클린드 부국장이 자리에 앉으며 피식 웃었다.

"자넨 정보국 장교면서 정보국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군."

"죄송합니다. 원래 전 생도 출신도 아니고, 군대나 정보국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제가 아마 빈스 가문의 장자가 아니었다면 장교는커녕 하사관도 되지 못했을 겁니다."

"후후! 솔직해서 좋군."

클린드는 내게 시가를 내밀었다.

"피겠나?"

"아닙니다."

"참! 안 핀다고 했지."

클린드는 시가에 불을 붙이고 창문을 열었다.

그나마 나를 위한 배려였다.

"기사단이야 기간트에 타는 능력이 좋을수록 진급이 빨라지네. 30대 초반에 별을 단 엘리아스 소장 같은 전설도 있지. 그리고 우리 정보국은 고급 정보를 얼마나 많이, 또 독점으로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진급이 빨라지네."

클린드가 창을 향해 연기를 내뿜고는 나를 보았다.

"자넨 그 두 가지 다 가지고 있네."

"제가요?"

"자네가 헬다임 장벽 사령부와 카야킨 전진 기지에 제출한 보고서 말이네. 아주 고급 정보가 많이 포함되어 있어. 예를 들면 살루스 전진 기지의 일이라든지, 또 거신의 갑옷을 찾으러 간 정보 말이네. 그리고 그 정보는 오로지 자네만 가지고 있지. 이제 조금 이해가 되나?"

"하지만 얼음 계곡의 정보는 부국장님께서 주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아!"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거신 갑옷을 4개나 찾으면서 높으신 분들의 관심이 올라갔고, 정보국에서 대수림에 대한 정보를 가진 것은 클린드 부국장과 나밖에 없다.

뭐, 그런 뜻인 거 같았다.

"거신의 갑옷 말이네. 제국에서 발견되지 않은 지 얼마나 됐는지 아는가?"

"잘 모르겠습니다."

"무려 30년이네. 기간트가 발명되고 거의 300년 동안 제국 전역에서 27개를 찾았지. 그런데 지난 30년간은 단 한 대도 찾지 못했네.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야. 자네도 알겠지만, 오리지널 기간트는 존재 자체가 전력이야. 그럼 전력을 올리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대수림 어딘 가에 있을 거신 갑옷을 찾아야겠군요."

"맞아! 거신과 괴수가 치열하게 싸웠던 곳은 이곳이 아니야. 장벽 너머 대수림이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내가 4개의 거신 갑옷을 찾은 진짜 의미를.

"이제 자네 진급의 의미를 알겠지? 높은 분들은 이번 성과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네. 그리고 대수림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원하고 있지."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지는군요."

"너무 조급하게 생각할 건 없네. 계속 이번처럼만 활동한다면, 자네도 30대 초반에 장군이 될 수도 있지."

"제가요?"

"내가 말했잖은가 정보국은 정보만 있다면 진급이 빠르다고."

클린드 부국장이 날 놀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만큼 내 능력을 인정해 준다는 거니까.

"아! 그리고 새로운 헬다임 지부장이 누군지 아는가?"

"설마, 프레디 중령님입니까?"

"맞네."

"2계급 특진이군요."

"아니, 이건 자네 경우와 다르네. 정보국은 원래 대령이 없어. 중령에서 계속 구르다가 큰 지부의 지부장이 되면 바로 별을 다는 거지. 아니면 퇴역하거나."

"그렇군요."

"그러니 보고는 프레디 지부장에게 하면 되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조심하는 게 좋아."

클린드 부국장이 시가를 뻐끔거리곤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자네에게 온 정보국의 시선이 몰릴 것이네. 그리고 자네 정보를 빼내기 위해 온갖 술수를 부릴 거야. 정보국 놈들은 원래 자기가 알아내는 것보다, 훔치는 걸 더 잘하거든."

"다른 부서의 정보를 막 훔쳐도 되는 겁니까?"

"안 되지. 하지만 걸리지 않으면 누가 알겠나?"

"아! 그렇군요. 저도 조심하겠습니다."

훔치는 거라면 나도 아주 많이 잘할 자신 있지.

사실 오늘도 이곳에서 한 건 할 생각이었다.

"한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

"혹시 높으신 분의 비리도 정보가 됩니까?"

클린드 부국장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물론이네. 하지만 적을 만들 수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지."

"알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걸리거나 증거를 남기는 건 절대 금물이야."

"네! 조언 감사합니다."

클린드 부국장이 시가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리고 소령부터는 제복도 조금 다르네, 더 각지고 더 빳빳하지. 새 제복하고 정모는 자네 부관이 가지러 갔으니 곧 올 거네."

"제 부관도 있는 겁니까?"

"자네도 이제 지부장이 아닌가. 이번에 황립 사관학교를 졸업한 생도를 한 명 뽑아놨네."

"생도요?"

"시간도 없었고 일부러 때 묻지 않은 사람을 고르다 보니, 그렇게 됐네. 이해하게. 자네가 열심히 가르쳐 봐."

막 졸업한 생도라니 감시역은 아닐 거고.

똑똑한 놈이었으면 좋겠는데, 보고서라도 좀 대신 쓸 수 있게.

"그래 헬다임으론 언제 돌아갈 건가?"

"오늘은 쉬고 내일 일찍 올라갈 생각입니다."

"그렇군. 그만 나가보게."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충! 가보겠습니다."

막 문을 나설 때였다.

"잠깐!"

"네?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잠깐, 기다리게."

클린드 부국장이 머뭇거리다 옷장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옷걸이에 걸린 자신의 검을 만지작거렸다.

뭘 하시려고 저리 뜸을 들이시지?

이윽고 클린드 부국장이 비장한 표정을 짓더니, 검을 꺼내 내게 다가왔다.

"타일러 소령, 이게 뭔지 아나?"

"검 아닙니까?"

"보통 검이 아니네!"

스르릉!

클린드 부국장이 검을 뽑았다.

에메랄드빛의 검신!

너무 날카로워 보는 것만으로 베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상태창으로 보고 있었다.

[넵프로스의 촉수로 만든 커틀러스(★★★☆)]

"내가 특무대에 잠시 있을 때, 해군과 함께 작전을 벌일 때가 있었지. 그때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천신만고 끝에 얻은 검이야. 누구처럼 황제께서 하사하신 물건이 아니네."

무슨 말이지? 내가 입고 있는 조끼를 말하나?

척!

클린드 부국장은 검을 검집에 넣고 내게 내밀었다.

"자! 받게."

"이 귀한 걸 제가 받아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네. 참고로 이 검은 자네가 입은 조끼도 뚫을 거네. 물론 실험해보진 말게. 황제 폐하의 하사품에 구멍을 내면 큰일 나니까."

이 검도 윌리엄 사령관이 준 조끼처럼 희귀템이었다.

준다는데 받지 않으면 손해지.

"뭘 이런 걸······."

검집을 잡았다.

"다시 말하지만, 자네가 입고 있는 조끼보다 이 검이 몇 배쯤 좋은 거야. 그리고 자넨 정보국 소속이네. 그걸 잊지 말게."

"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클린드 부국장은 검집을 꽉 잡고는 놓지 않았다.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가져가게."

"저기, 손에 힘을 풀으셔야..."

"아! 그렇군."

그제야 검이 내 손에 들어왔다.

검을 허리춤에 걸었다.

"감사합니다."

클린드 부국장이 입맛을 다셨다.

"믿고 있겠네. 타일러 소령."

"네?"

"그만 가보게. 내 눈에서 그 검을 가지고 사라져!"

"충! 가보겠습니다."

부국장의 마음이 바뀔까 봐 바로 밖으로 나왔다.

정말 아끼는 것 같았는데, 날 주네.

솔직히 딱히 필요는 없었지만, 있으면 좋지.

검과 조끼라, 희귀템 한 세트가 됐네.

"진급 축하하네. 타일러 소령."

"아! 감사합니다. 도슨 중령님."

"활동비는 집행되는 데로 헬다임 지부로 보낼 테니, 그곳에서 찾아가게."

"활동비도 있는 겁니까?"

"금액이 많진 않네. 그래도 없는 거보단 낫겠지? 그리고 정보원이 필요하면 말하게. 병사를 뽑아서 보내주겠네."

"혹시 제가 직접 정보원을 뽑아도 되는 겁니까?"

"물론이네. 정보원 신분증이 필요하면 헬다임 지부에 말하면 만들어 줄 거야."

"감사합니다. 제 부관이 오면 본관 앞에서 기다린다고 전해 주십시오."

"알았네. 그리 보내주지."

문을 나섰다.

들어왔을 때보다 어깨가 한 뼘은 올라간 느낌.

소령 계급장 때문인지 키도 좀 커진 것 같고.

복도로 나왔다.

그럼 잠깐 둘러보러 갈까.

계단을 내려가는데, 1층 홀에 다른 장교들과 몰려서 대화를 나누는 더블란 대위가 보였다.

어라? 정말 날 기다리고 있네.

'좀 놀라겠군.'

난 관대한 상관이니까, 유치하게 갈구진 말아야지.

내일 떠날 테니, 문제를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날 보고 놀랄 녀석의 표정을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계단을 내려오자, 더블란과 눈이 마주쳤다.

"여! 타일러 중위!"

"······?"

"뭐야? 이 새끼, 강등된 거냐? 크하하하! 내가 그럴 줄 알았다. 네깟놈이 중위는 무슨, 소위도 벅차지. 크크큭!"

순간 당황했다.

이 녀석 뇌는 도대체 어떻게 되어 있는 거지?

색맹인가?

계급장은 잘 못 봤다고 생각해도, 뒤에 있는 다른 장교들이 마른침을 삼키고 차려자세인 거 안 보이나?

홀을 가득 메운 장교와 하사관, 병사들의 시선이 모두 이곳에 모였다.

그런데 이놈은 날 비웃고 있다.

난 분명 관대한데······, 이건 좀.

"더블란 대위. 자네 동기들이 자넬 뭐라고 부르는지 아나?"

"뭐라고?"

"앞이 안 보인다고 해서 깜깜이야. 사관학교도 가문에서 엄청난 기부를 해서 겨우 졸업했다고 들었네. 게다가 동기생 중에서 대위 진급이 가장 느리고."

"허! 이 새끼가 듣자 듣자 하니까, 강등되더니 처 돌았지?"

더블란이 내 뺨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촤악! 쿵! 쿠쿵! 쾅!

하지만 반 박자 빨리 휘두른 내 따귀에 맞고 더블란이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정신이 번쩍 날 것이다.'

[앞발 후려치기(lv.2) - 주먹이나 무언가를 들고 힘껏 갈긴다. 표범 괴수의 위력이 담긴 앞발 후려치기를 할 수 있습니다.]

스킬을 썼거든.

"억! 으헉!"

그는 벽에 기대서 힘겹게 일어섰다.

그때 더블란이 입을 벌리자, 하얀 조각 몇 개와 피가 흘러나왔다.

손바닥 위를 쳐다본 더블란.

"헉! 이빨?"

내게 달려오려 했지만,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휘청이고 있었다.

"자네들은 상관에게 경례도 하지 않는 건가?"

"충!"

더블란과 떠들고 있었던 정보국 장교들이 일제히 내게 경례했다.

그 모습을 본 더블란은 격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마치 이 상황이 꿈이고, 그걸 깨기 위해 발광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제야 내 어깨에 견장이 은색이 아니라 금색인 것을 눈치챘다.

"으헛!"

놈에게 다가갔다.

"더블란 대위, 자네 방금 날 때리려고 했나?"

"아, 아뉨다!"

"하극상이 얼마나 큰 죄인 건 알아?"

"죄, 죄송함니당. 용서릉······."

"응? 그래도 경례를 하지 않아?"

"충!"

더블란은 내게 맞은 충격 때문인지, 경례한 손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번엔 내가 진급해서 기분이 좋으니 이 정도로 넘어가겠다. 다음부터 사람을 보기 전에 계급장부터 보게. 경례는 사람이 아니라 계급을 보고하는 거니까."

"넹! 강상합뉘다."

난 아무렇지도 않게 정문으로 걸어갔다.

더블란은 내가 나갈 때까지 손을 내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타일러에게 심부름이나 시키고, 툭하면 손찌검하던 놈이었다.

그냥 과거는 쿨하게 넘어가려 했지만, 매를 버는 놈이었다.

이걸로 나도 정보국에서 주목받기 시작하겠지.

'그래도 계급이 높아지니 좋은 점이 많네.'

때릴 때 촉감이 짜릿했어.

기분 좋은 오후가 될 거 같다.

***

커다란 가로수 뒤에 서서 몰래 정보국 본부 건물을 꿰뚫어 본다.

'엄청나게 넓어.'

저곳에 제국의 정보가 모두 모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추밀원장은 황제의 오른팔이었고, 영주 회의와 더불어 제국 최고의 실세였으니까.

정보국은 그런 추밀원장의 직속 기관이자, 황제의 귀나 마찬가지였다.

그리니 이곳의 경비가 허술할 리가 없다.

경비도 삼엄하고, 자료실이나 지하 창고에 들어갈 때마다 신상과 이용 시간 기록은 필수였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자료가 있는 곳은 뭔가 마법 안전장치가 되어 있지 않을까?'

그게 지금 내가 마나를 눈이 뿜어내며 몰래 나무 뒤에서 건물 내부를 살피고 있는 이유였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정보국 본부에 온 김에 시노우엘의 정보를 얻으려는 것이다.

엘프를 소유하고 보증할 정도라면 분명 장벽 사령관 정도의 위치는 돼야 한다고 했다.

그럼 제국에 몇 명 되지 않을 것 같았다.

황제나 황자들, 황족, 후작급 이상의 대영주들, 근위 기사단장, 각 군단장, 내각 대신들, 그리고 국경수비대장 정도.

생각보다 너무 많네······.

하지만 황족은 건드리는 게 아니라고 배웠으니 일단 제외하고, 높으신 귀족들 위주로 찾아볼 생각이었다.

방대한 지하 서류 창고를 살폈지만, 그곳엔 특별한 것이 없었다.

'방첩대 부서장들 집무실이 5층이었지······.'

방첩대는 제국 내부의 정보를 다룬다.

말은 그럴싸하지만, 제국의 귀족들을 감시하고 정보를 캐는 사냥개 같은 임무였다.

그러니 높은 귀족이 엘프를 소유했다면, 그들에게 정보가 있지 않을까?

'오! 복도 중간쯤!'

거리가 멀어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그곳에 푸른빛이 보였다. 그럼 마나가 있다는 소리였고, 그건 마법진이 있거나 마나가 포함된 물건이 보관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움직이지 않으니, 사람은 아니네.

정보국에서도 마나를 다루는 사람이 있었지만, 사람은 움직이는 동물이었기에 구분하긴 쉬웠다.

일단 오늘 밤 저길 들러야겠다.

훔치려는 것은 아니었다.

'정보를 공유하는 거지.'

처벅! 처벅!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에 나무 뒤에서 걸어 나왔다.

"충! 알베르토 다림 소위, 타일러 빈스 소령님께 인사드립니다."

솜털이 뽀송뽀송한 신임 소위의 경례를 받았다.

"자네가 내 부관인가?"

"네! 그렇습니다."

"밥 먹으러 가지."

"네? 네!"

***

커다란 분수대에서 물을 뿜어내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차와 커피를 마시며 웃고 떠든다.

이곳 할데가르 대광장은 이렇게 평화롭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지옥 같은 대수림에 있었다는 게 꿈만 같네.

"저, 이걸 봐주십시오."

알베르토 소위가 두툼해 보이는 서류를 내 테이블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뭐지?"

"제 신상과 제가 할 줄 아는 것을 적어 봤습니다."

"이걸 내가 봐야 하나?"

"네? 그것이 저에 대해서 잘 모르실 것 같아서요."

"그거야 차차 알아가면 되지. 그리고 내가 이걸 보면 자네에 대한 선입견이 생길 수도 있네."

"아! 그렇군요. 아무튼, 절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 소령님을 보필하겠습니다."

알베르토가 일어서 내게 고개를 숙였다.

내가 뽑은 거 아닌데······.

"싸움은 좀 하나?"

"검술과 호신술 수업은 들었습니다. 하지만 썩 잘하진 못합니다."

"내가 봐도 그래 보이네."

알베르토는 나보다 키도 작고, 더 얇은 팔과 다리를 가졌으니까.

"그럼 달리기는 좀 하나?"

"달리기요?"

난 테이블에 금화 하나를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섰다.

"자! 뛰어!"

"네?"

난 광장 옆 골목길을 향해 달렸다.

47. 가디언 제국의 스파이.

47. 가디언 제국의 스파이.

"휴! 따돌린 것 같군."

좁은 골목길에 알베르토와 몸을 숨겼다.

"헉헉! 소령님, 대체 우리가 헉헉! 왜 뛴 겁니까?"

"생각보다 잘 뛰는데?"

"하아! 맞지 않으려면 달려야 했으니까요."

"뭐?"

"아, 아닙니다."

알베르토의 얼굴이 빨개졌다.

사관학교에서 맞고 다녔나?

혹시 왕따?

"자네 귀족 아니지?"

"네."

"부자도 아니고?"

"네."

"싸움도 못 하고."

"네."

"마나도 없으니 기간트에 탈 수도 없었을 테고."

"네.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 신상정보를 이미 보신 겁니까?"

맞네. 왕따.

내 부관이 왕따라니······.

"쉿!"

근처 골목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세 사람이 가쁜 숨을 쉬고 두리번거린다.

"젠장! 어디로 사라졌지?"

"저쪽에도 없어!"

"놓쳤으니, 이제 어떻게 하지?"

"일단, 중령님께 보고해야지."

벌써 꼬리가 붙었네.

클린드 부국장이 조심하라고 하더니, 정보국 본부를 나오기가 무섭게 미행이 붙었다.

대체 누가 이렇게 빨라? 슈나인 중령인가?

왠지 그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어 보였다.

나에 대한 정보는 그가 가장 많이 가지고 있을 테니까.

"가르긱 중령님의 부하들이네요."

"응?"

"키 큰 자는 타마란 하사관이고, 그 옆에는 욘드 하사, 키가 제일 작은 사람은 테드 하사입니다. 모두 특무대 소속입니다."

"잘 아는 자들인가?"

"그건 아닙니다. 며칠 전에 대수림 관련 서류를 인계받았을 때, 잠깐 봤습니다."

"······?"

잠깐 봤는데 얼굴과 이름을 다 외운다고?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나?

"자네, 학업 성적은 좋았나?"

"네. 실기 과목을 빼고는 전 과목 만점을 받았습니다."

입에 뭔가 있었다면 뿜을 뻔했다.

만점? 천재였나!

그렇다고 인정은 받지 못한 거 같고. 클린드 부국장이 한 건 했네.

그리고 서류 작업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겠는데!

"일단 알았네."

난 골목에서 나와 세 사람에게 다가갔다.

"이보게. 자네들!"

"어?"

"헛!"

세 사람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혹시 날 찾고 있었나?"

"아닙니다. 그냥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래? 말투가 군인 같은데 맞나?"

"아닙니다."

나한테 쉽게 들킨 걸 보면, 원래 미행 전문가들은 아닌 모양인데······.

가르긱 중령이 급하긴 급했나 보네 이런 초짜들을 보내고.

근데 그 사람이랑 나랑 무슨 상관이지?

난 웃으며 세 사람에게 다가가 차례로 어깨를 다독였다.

툭! 툭! 툭!

[운명의 실을 연결했습니다.]

[운명의 실을 연결했습니다.]

[운명의 실을 연결했습니다.]

"내가 오해했나 보군. 그럼 잘 가게."

세 사람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알베르토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다가와 물었다.

"설마, 방금 저자들이 우릴 미행한 겁니까?"

"맞아. 처음엔 혹시나 했는데, 우리가 달리자 뒤를 바짝 따라오더군."

"오! 내가 미행을 당하다니!"

알베르토는 살짝 흥분한 것 같다.

"근데 왜 우리를 미행한 거죠?"

"우리가 아니라 나야."

"아!"

"앞으로 감시하는 눈이 많아질 거야. 난 이제 정보국의 뜨거운 감자거든."

물론 그 감시도 대수림에선 불가능하겠지만.

"가르긱 중령에 대해 아는 걸 말해 보게."

"특무대에서 가장 큰 부서를 이끌고 있습니다. 곧 준장으로 진급할 거란 소문도 있고요. 이번에 대수림으로 가디언 제국의 병력이동을 가장 먼저 발견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군."

특무대는 제국 외부의 정보를 주로 다루는 부서로 첩보, 방첩, 국경 문제 등을 맡아서 하고 있었다.

"혹시 그동안 대수림을 관리했던 부서가 특무대인가?"

"네. 맞습니다. 우리 대수림 정보대가 생기고, 서류도 전부 저희 쪽으로 이관했습니다."

"알만하군. 밥그릇을 뺏겼다고 생각하나 보네."

살짝 어이가 없었다.

그동안 대수림의 정보는 아예 손을 놓고선 이제야 뭔가 억울한가 보네.

"그런데 방금 애써 미행을 따돌렸는데, 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까?"

"응? 그야······."

저놈들이 내 결백을 밝혀줄 증인이 될 테니까.

"자네 숙소가 장미 여관인가? 본관 뒤에 있는."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쪽으로 가지. 오늘은 거기서 묵고 내일 아침에 출발하지."

"하지만 거긴 소령님께서 묵을 만한 곳은 아닙니다."

"나도 알아. 하사관들이 주로 묵는 곳이지."

"역시 제 신상정보를 보셨군요..."

아니! 타일러도 거기 3개월을 있었으니까.

그리고 돈 없고, 빽 없는 놈들은 다 거기에 묵는다.

저렴하거든.

***

[장미 여관]

'응? 이 방이라고?'

난 빤히 알베르토 소위를 쳐다봤다.

이 녀석과도 보이지 않는 어떤 운명의 실 같은 것이 연결되어있나?

"왜 그러십니까?"

"이 방엔 얼마나 묵었지?"

"한 보름쯤 됩니다."

"힘들었겠군."

"네?"

난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알베르토의 어깨를 다독여줬다.

여긴 방음이 유난히 잘 안 되는 방이다.

그리고 가격이 저렴하기에 옆 방에 남녀가 자주 묵는다.

그런 날이면 미치도록 잠을 설치는 곳.

타일러는 이 방에서 도를 닦는 기분으로 3개월을 살았다.

"전 본부 휴게실에서 자도 됩니다."

"응?"

"이제 생긴 부서라 예산이 부족할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전 괜찮으니 이 방을 쓰십시오."

뭐지? 내가 돈이 없어서 이 여관에 묵는다는 줄 아나?

살짝 웃음이 났다.

나 돈 많은데······, 엄청!

"여기 말고 3층에서 제일 비싼 방으로 하겠네."

"네. 열쇠를 받아오겠습니다."

금화도 주지 않았는데, 허둥지둥 계단을 내려가는 알레르토 소위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어째 손이 좀 가겠지만, 쓸모는 있겠어.

알베르토를 어디에 쓸지 잠시 고민했다.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일찍 잘 테니까. 절대 날 깨우지 말게."

"네!"

난 내 방으로 들어가 창문부터 활짝 열었다.

램프도 환하게 켜고.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주변 풍경을 쳐다봤다.

붉은 노을이 하늘을 물들이고, 건물들 때문에 생긴 어스름한 그림자가 골목을 뒤덮기 시작했다.

'여기 풍경도 나쁘진 않군.'

바로 건물 뒤편이 정보국 담장이었고, 여긴 본부와 제일 가까운 건물이었다.

본부 앞엔 할데가르에서 제일 큰 광장이 있었고, 광장 주변엔 공원도 있었고, 조금만 더 걸으면 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할데가르 역도 있고, 고급 상가가 많은 곳이라 주변에 갈 곳은 많았다.

하지만 타일러가 가장 좋아했던 장소는 바로 여기 본부 건물 뒤쪽이었다.

한쪽 골목은 떠들썩한 시장이었고, 이 앞은 식당과 술집, 여관이 모여 있었고, 홍등가도 바로 옆 골목이었다.

제국의 정보를 수집 관리하는 정보국 바로 뒤가 홍등가라니······.

그래도 왠지 이곳은 사람 냄새가 나는 곳이었다.

타일러는 밤마다 이곳에서 사람들을 구경하는 시간을 제일 좋아했다.

나도 이곳에서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가 떠올랐다.

그땐 막 각성해 마법인형도 없었고, 지구가 멸망한 전생의 기억 때문에 혼란스러웠지.

그리고 이제 1년이 지났다.

자동인형도 넷이나 있었고, 꼭두각시도 여섯이나 있었다.

게다가 일반인이라면 상상도 못 할 만큼 많은 재화와 무력, 이계 난민들이라는 조력자들까지 생겼다.

이제 엘프들만 협력해준다면, 대략 큰 그림은 완성된다.

대수림 난민 기지에서 마석을 캐서 왕창 돈을 벌고, 아지트에서 기간트와 마석 배터리를 만들어 금화를 착실히 모은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헬다임 장벽 가까운 곳에 작은 영지를 하나 살 생각이다.

나중에 전진 기지 난민들도 모두 내 영지에서 살게 해야지.

그리고 난 영주가 되어 정치에 휘둘리지 않고, 주변 신경 쓰지 말고,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

그게 내가 바라는 슬기로운 이계 생활이다.

전엔 막연한 꿈이었지만, 이젠 어느 정도 실현 가능한 꿈이었다.

거리에 어둠이 깔리자, 사람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술집도 일제히 불을 밝혔고, 바로 대각선 건물 발코니에 여자들이 야한 드레스를 입고 나와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그럼 슬슬 나도 시작해 볼까.'

창문을 닫고, 자할리(lv.8) 꼭두각시를 꺼내 창문 밑에 대기 시작했다.

현재 내 인간 꼭두각시 중에서 가장 강한 그가 오늘 내 보디가드였다.

누가 창문으로 몰래 들어온다면 목이 잘릴 것이다.

***

[영혼 이동에 성공했습니다. 남은 시간 – 00:59:59]

난 가장 젊은 마법인형인 라구즈(lv.5)의 몸으로 영혼 이동했다.

수 미터의 높은 담장과 수백 명의 경비병.

하지만 내 운명의 실타래 앞에선 무용지물.

스스슥! 척!

'아무리 높은 담장이 있으면 뭘 하나, 이렇게 쉽게 들어왔는데!'

단숨에 본관 건물 5층으로 진입했다.

'응? 아직도 근무하는 장교가 있네.'

곳곳에 불이 켜져 있었다.

하긴 아직 전쟁이 난 것은 아니지만,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그랬기에 퇴근도 하지 못하고, 밤늦게까지 일하는 장교들이 있었다.

라구즈 꼭두각시엔 원래 내 정보국 중위 제복을 입혔다.

그랬기에 다른 장교에게 걸려도······.

딸깍!

"응?"

더블란 대위가 날, 아니 내 계급장을 먼저 쳐다봤다.

"충!"

더블란은 가볍게 내 경례를 받고는 계단 쪽으로 이동했다.

어깨가 축 늘어진 것이 많이 의기 소심해졌네.

그래도 오늘 교육 효과는 있었네, 계급장부터 보는 것을 보면.

'그런데 슈나인 중령은 아직 퇴근 전이군.'

문이 닫히기 전 틈으로 중령이 서류를 뚫어지게 보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수색은 좀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마법진이 설치된 곳은 슈나인 중령 바로 옆방이니까.

난 반대편 계단 쪽에 몸을 숨겼다.

조금 전에 확인하니 마법진이 설치된 곳은 문뿐이었고, 이 수상한 방은 창문도 아예 없었다.

문에 어떤 종류의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을까?

강화 마법진? 아니면 경보장치?

어차피 난 상관없었지만, 궁금증이 생겼다.

딸깍!

그때 슈나인 중령이 방에서 나왔다.

그런데 계단이 아니라 옆방으로 향한다.

그리고 주변을 한번 둘러보더니, 문에 몇 번 손을 댔다.

지이이잉!

문이 옆으로 열렸다.

오! 비밀번호와 자동문이네!

제국의 마법사나 마도 공학자들도 놀고 있진 않은 것 같았다.

물론 내게는 소용없지만.

슈나인 중령이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슈나인 중령이 이곳 자료실 관리자인가?'

특무대의 실세는 가르긱 중령이라면 방첩대의 실세는 슈나인 중령이었다.

그가 날 정보국 장교로 임관시켜줬지만, 그건 날 이용하기 위해서였지 날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리고 타일러가 자살 시도를 하자마자, 헬다임으로 보냈지.

지이잉!

슈나인 중령이 밖으로 나왔다.

조금 전에 손에 들려 있던 서류가 없는 것을 보니, 저곳이 서류 보관 창고가 확실했다.

슈나인 중령이 내려가고, 난 인형의 집으로 들어갔다.

10분 후.

난 서류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금단의 방에 들어온 기분이네.'

제국 귀족들의 고급 정보가 이곳에 있단 말이지.

'억!'

순간 기가 질렸다.

이곳은 집무실도 컸는데, 수십 개의 책장 안에 서류가 가득 쌓여 있었다.

많아도 너무 많다!

'이 많은 걸 언제 다 찾아보지?'

높으신 귀족분들 정보만 살짝 공유하러 왔는데, 이 많은 서류 중에서 어떻게 찾을지 암담했다.

아직 늦은 밤은 아니었지만, 절대 하루에 다 볼 수 있는 양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매일 찾아와 살펴볼 수도 없었다.

난 내일 헬다임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그때 낮에 클린드 부국장과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원래 정보국 놈들은 정보를 빼내기 위해 온갖 술수를 부리는 놈들이다.

그래서 다른 부서의 정보를 막 훔치기도 하지.

다만 걸리거나 증거를 남기는 건 금물이다.

'만약 내가 인형의 집에 이 서류들을 넣는다면?'

그건 증거가 남지 않는다.

내 인형의 집은 마법인형 말곤 들어갈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내 몸은 지금 여관에서 자고 있었고, 날 감시하는 정보국 정보원들이 있었으니 내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것이다.

한 마디로 걸릴 일이 없다는 말이었다.

완전범죄.

'그럼 망설일 필요가 없지.'

알리만(lv.6)과 네자드(lv.5), 표범인형(lv.9)과 사마귀(lv.7) 꼭두각시까지 총출동.

사마귀는 문밖에서 망을 보고, 아예 그물을 가지고 와서 표범 인형의 등에 메고, 알리만과 네자드가 서류를 쓸어 담았다.

그물이 가득 차면 표범 인형과 함께 인형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이십여 차례 왕복하자, 그 많던 서류를 다 챙겼다.

'후후! 이 정도 정보량이면 나도 장군급인가?'

피식 웃음이 흘렀다.

이제 이 자료 중에서 시노우엘의 정보를 찾으면 된다.

그리고 이 많은 정보를 가지고 뭘 할지는 천천히 생각해 봐야겠다.

그런데 한 부서만 털면, 나중에 내가 이 정보를 이용해 시노우엘을 구할 때, 혹시나 티가 날 수도 있었다.

그러니 다른 부서 정보도 좀 챙겨야 티도 안 나고 부서 간에 공평할 것이 아닌가.

우리 대수림 정보대야 털어갈 것이 없었으니 넘어가고.

오늘 날 미행한 특무대의 가르긱 중령이 떠올랐다.

특무대가 몇 층이더라.

'아니야. 거긴 가디언 제국과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건들지 말자.'

대신 다른 부서의 서류를 조금씩 챙겨야겠다.

***

[할데가르 역]

"하아암!"

"어제 제대로 못 주무셨나 봅니다."

알베르토가 커다란 짐을 들고 날 따라왔다.

"그냥, 생각할 게 많아서. 자네가 가서 표를 끊어오게."

"네!"

알베르토가 몸을 돌렸다.

"알베르토."

"네?"

난 품에서 금화 주머니를 꺼내 내밀었다.

"금화는 받아가야지. 일등석 두 장 끊어오게."

"일등석이요? 어? 근데 금화가 너무 많습니다."

"알아. 100골드니까. 나머진 자네 활동비로 쓰게."

"네에?"

알베르토의 눈이 대포알만큼 커졌다.

"서두르게! 일등석은 항상 자리가 남으니까, 가장 빨리 출발하는 거로 끊어와!"

"네!"

그때 역 안으로 수백 명의 병사가 우르르 들어왔다.

"서둘러! 철저히 검문검색을 해라!"

"너희는 플랫폼으로 가라!"

이제야 털린 걸 알아챈 거 같았다.

잠시 후.

알베르토 소위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큰일 났습니다! 어젯밤에 가디언 제국의 스파이가 정보국 자료를 싹 다 털었답니다."

"가디언 제국의 스파이라고?"

48. 토우인형.

48. 토우인형.

'젠장, 느긋한 열차 여행이 될 줄 알았더니······.'

오히려 더 피곤하다.

일주일 내내 서류만 보고 있었더니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다.

무슨 가문이 이렇게 많고, 귀족은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정보국 놈들! 가문과 이름, 사건은 따로따로 분리해서 보관했어야지!

'아! 마구잡이로 쓸어 담은 건 나구나.'

그래도 대충 분류 작업은 끝나가는데, 하이엘프 시노우엘이 있는 곳을 찾으려면 또 얼마나 걸릴지 예상이 불가하다.

그리고 인형의 집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내게 보여주기 위해 일일이 서류를 넘기고 있는 꼭두각시들도 기간트 훈련을 못 하고 있으니, 그건 그것대로 시간 낭비였다.

'자동인형 짹이 있었다면 좀 나았을까?'

자동인형은 학습을 통해 글도 배울 수도 있었고, 각성할 때 말이나 글을 기억할 수도 있었기에 서류를 보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자동인형들은 다 외부에 있었다.

한 마디로 정보는 넘쳐나는데 그걸 확인할 사람이 부족하네.

'그건 맨 구석 방에 놔!'

알리만(lv.6)이 서류를 건네자, 네자드(lv.5)가 인형의 집 한쪽에 마련된 내 서류 창고로 이동한다.

귀족이 아니거나 특별히 중요하지 않은 인물의 경우는 아예 따로 보관했다.

'잠깐! 그 서류 다시 펼쳐봐!'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다.

네자드가 서류를 펼쳤다.

'어? 위니어 엘리엇!'

이름은 생소했으나 엘리엇이란 성은 잘 알고 있었다.

이건 분명 케네스의 아들이자, 앨리슨의 아빠였다.

서류를 천천히 살폈다.

아들이 죽었다고 하더니, 헤이스팅 가문에 살해된 거야?

정보국 서류엔 헤이스팅 가문에 살해 가능성이 크다고 적혀 있었다.

그 이유는······.

'아! 아들도 천재였네.'

또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스토리군.

영감에게 이걸 말해줘야 하나?

그럼 혹시 복수하겠다고 하는 거 아냐?

아니지, 며느리가 앨리슨을 낳기 전까진 살아 있었으니, 이미 케네스 영감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앨리슨은 모르겠지만.

그런데 왜 날 따라왔지?

이게 사실이면 앨리슨도 위험할 텐데.

'아! 치매라 까먹은 건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전생이나 이곳이나 다 똑같다.

있는 놈들이 더 가지고 싶어 하고, 경쟁자를 찍어 누르려고 한다.

그사이에 낀 불쌍한 서민만 죽어 나가는 거지.

다행히 헤이스팅 가문의 영지는 동부 끝이라 거리는 멀었다.

돌아가면 앨리슨의 보호를 더 강화해야겠어.

제국의 귀족들 서류를 보면 볼수록 썩은 내가 진동했다.

이러다 정신오염 되는 거 아냐?

"소령님! 또 허공을 보고,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응?"

알베르토 소위가 커피를 내밀며 앞자리에 앉았다.

머리가 똑똑한 이 녀석에게 서류 작업을 시키고 싶었지만, 아직 내 부관은 믿을 수 없었다.

"알베르토, 일등석을 두 개 잡은 이유는 푹 쉬라는 뜻이야."

"그래도 부관이 소령님 곁에 있어야 뭐라도 챙겨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자네가 갈 곳이 어딘지 모르나? 대수림이야. 나보다 자네 몸을 챙기는 게 좋을 거야. 자네 체력이면 일주일도 버티지 못할 테니까."

알베르토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대수림이 그 정도로 힘든 곳입니까?"

"매일 피똥 싸지."

"피똥이요?"

"아니면 똥 싸다 맹독 벌레에 물려 죽을 수도 있고."

알베르토가 마른침을 삼켰다.

대수림에서 힘들었던 생각이 떠오르자, 자연스레 인상이 찡그려졌다.

"왜 안 가고 있어? 가서 쉬라니까."

"그게 이미 열차가 헬다임으로 들어섰습니다."

"뭐?"

고개를 돌려보니 열차 밖으로 헬다임 시내가 보였다.

'벌써 도착했다니······.'

요즘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지 모르겠다.

이제 열차에서 내려야 했다.

***

[헬다임 역]

끼이익! 치이이익!

플랫폼 끝에 익숙한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담배를 물고는 고독한 표정을 짓는 사내.

그리고 견장에 금색 별 하나가 반짝인다.

"충!"

나와 알베르토의 경례를 받은 프레디 지부장.

그가 꽁초를 철도에 무단투척하며 말했다.

"진급 축하하네. 타일러 소령."

"감사합니다. 절 마중 나오신 겁니까?"

"그래. 자네가 바쁠 것 같아서 내가 직접 왔지."

"그런데 부관은 어디 가고 혼자 나오셨습니까?"

"파블로 소령은 아리칸 공국에 갔네."

"네? 아리칸 공국이요?"

이름을 듣자마자 왠지 모를 불안감이 느껴졌다.

"설마?"

프레디 지부장이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네. 병력도 많지 않고, 하지만 확인은 해야지. 이건 관련 서류네."

프레디 지부장이 서류를 건넸다.

난 서류를 받아 챙겼다.

하필 특무대에서 대수림 정보 업무를 막 인계받은 시점에 가디언 제국이 움직였다.

아리칸 공국까지 움직이면 너무 복잡한데······.

"그 소식 들었나?"

"무슨 소식 말씀입니까?"

"일주일 전에 할데가르 정보국 본부가 가디언 제국 첩자들에게 털렸네. 크하하하! 멍청한 놈들 내가 중요 정보는 분산해서 보관해야 한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그거 내가 한 건데······.

프레디 지부장은 아예 대놓고 기뻐했다.

그는 전부터 정보국 본부하고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래도 범인이 가디언 제국으로 확정됐으니 다행이긴 한데, 이게 또 다른 전쟁의 불씨가 되진 않을지 그게 살짝 걱정이다.

"참! 자네 대수림 지부는 어디에 만들 생각인가?"

"그것도 제가 정하는 겁니까?"

"물론이지. 자네가 지부장이니까. 이곳 헬다임에 만들 생각이면 내가 괜찮은 장소를 알아봐 주지."

"아닙니다. 대수림에 적당한 곳이 있습니다."

"그거 보게. 이제 정보국에서 대수림을 자네 만큼 아는 사람이 없을 거야."

후보는 두 군데였다.

카야킨과 난민 전진 기지.

"자네도 알겠지만, 지금 분위기가 좋지 않아. 가디언 제국과 언제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지."

"대체 그놈들이 원하는 게 뭘까요?"

"그건 이제 자네가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

"아! 하긴 전장이 대수림이네요."

프레디 지부장이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정보원이 필요할 거야. 내가 최대한 지원해 주지."

"아닙니다. 정보원은 이미 충분합니다. 대신 정보원들의 신분증을 부탁드립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네. 근데 대수림엔 언제 갈 건가?"

"내일이 관문이 열리는 날이니, 내일 바로 가야지요."

"음. 그럼 그전에 우리 지부에 들르게. 예산은 챙겨 가야지."

"지금 바로 알베르토 소위를 보내겠습니다."

"그래? 그럼, 알베르토 소위는 나와 함께 가면 되겠군."

"부탁드리겠습니다."

난 알베르토를 쳐다봤다.

"날 찾아올 필요는 없네. 오늘은 호텔에서 푹 쉬고, 아주 긴 여정이 될 테니까, 짐을 잘 챙겨서 내일 아침에 관문 앞에서 만나지."

"네, 알겠습니다."

알베르토는 영문도 모르고 프레디 지부장과 함께 이동했다.

난 역 앞에서 바로 마차를 탔다.

그리고 집에 가는 길에 프레디 지부장이 준 서류를 열어 봤다.

'아리칸 공국은 생각도 못 했네.'

가디언 제국은 아베르크 제국 동쪽에 있었다.

가디언 제국의 장벽 관문도, 그들의 대수림 전진 기지도 모두 동쪽에 있었다.

그랬기에 혹시 전투나 전쟁이 벌어져도 카야킨 기지 동쪽에 있는 전진 기지를 두고 싸울 테니까, 서쪽에 있는 난민 기지는 안전할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아리칸 공국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들의 전진 기지는 당연히 서쪽에 있었고, 가장 가까운 노바스 전진 기지는 내 난민 기지까지 겨우 두 달 거리였다.

'뭐, 벌써 두 달 전에 이미 장벽을 넘었다고?'

그럼 노바스 전진 기지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룩급 기간트가 4대, 비숍급 기간트 6대, 나이트급 기간트 8대, 폰급 기간트가 12대라······.

총 500명의 병력과 기간트 30기가 포함된 부대가 훈련한다며 장벽을 넘어 대수림으로 향했다.

당연히 장벽을 넘어간 후론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살짝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왜 이 시점에 대수림에 훈련하러 간 거지?

그렇다고 겨우 30기로 제국의 기지를 공격할 리는 없었다.

'혹시 카야킨 전진 기지를 협공할 생각인가?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적은 숫자인데······.'

많은 숫자의 기간트를 동원했다면 당연히 아베르크 제국도 대비할 텐데, 30기 정도면 정말 훈련 수준이었기에 무시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카야킨의 정문은 튼튼하고 지하 게이트 역시 쉽게 뚫을 순 없다.

누군가 문을 몰래 열어주면 모를까······.

'너무 비약이 심한가? 그냥 단순히 훈련일 수도 있잖아.'

사실 이동하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노바스 전진 기지와 카아킨 전진 기지의 거리는 석 달 반.

아무리 빨라도 석 달이나 걸리는 먼 거리였다.

대수림에서 석 달을 쉬지 않고 행군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다. 체력과 정신이 무너질 정도로 너무 피곤하고 힘든 일이었고, 중간에 괴질이나 전염병이 돌 수도 있었다.

그래서 대수림에선 전진 기지를 만나면 무조건 쉬어가라는 격언이 있을 정도였다.

'어? 설마, 이 새끼들 내 전진 기지를 노리는 건가?'

왠지 불안했다.

혹시 살루스 전진 기지가 비어 있다는 걸 알고서?

하지만 어떻게?

순간 살루스 전진 기지의 또 다른 사냥팀이 떠올랐다.

아! 호세인 사냥팀!

그들의 소식은 아직 없었다.

아직 제국의 다른 사냥팀과 조우했다는 소식도 없고, 헬다임 관문을 통해 살루스 왕국으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이 새끼들, 노바스 기지로 갔구나!'

가서 살루스 기지가 비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아리칸 공국은 이참에 제국의 전진 기지를 하나 차지할 생각인 것 같았다.

통상 전진 기지 하나를 차지하려면 그 두 배의 병력이 필요했다. 입구는 좁고 튼튼하여 지키는 쪽이 유리했으니까.

그런데 이러면 전쟁 아닌가?

아무리 살루스 전진 기지가 살루스 왕국이 만들었다고 해도, 그 구역은 엄연히 우리 아베르크 제국의 구역이었다.

카멜 영지 전진 기지와도 겨우 보름 거리고.

'그냥 슬쩍 찔러보기인가?'

지금 대수림엔 가디언 제국과 우리 아베르크 제국이 서로 대치 중이니, 이번 기회에 우리 쪽 기지를 하나 가져가 세력을 키우려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가디언 제국과 협약이라도 했나?

그러기엔 기간트가 숫자가 너무 부족하고.

기간트 30기 정도의 부대라면 딱 전진 기지 하나를 지키고 사냥팀 2개를 운용할 수준이었다.

그냥 훈련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약 놈들의 노림수가 있다면, 몇 번을 뒤집어 생각해봐도 내 난민 전진 기지밖에 없었다.

'내 기지를 노려! 가만둘 수 없지!'

문제는 시간이었다.

놈들보다 내가 먼저 난민 기지에 도착해야 했다.

이번에 엘프들의 능력을 좀 시험해 봐야겠네.

***

"이게 내가 만들던 거라고?"

"그렇다. 타일러여! 우리 건축가 드워프들이 합심해 만들고 있다."

대수림의 흙으로 만든 토우인형은 맞는데, 분명 내가 만들던 것은 아니었다.

난 그냥 사람의 형태로 대충 만들었고, 할데가르로 출발 전에 마무리를 부탁했는데, 드워프들은 이걸 기간트처럼 바꿔놨다.

아니 새로 만든 게 분명했다.

드워프들 실력이 대단하네!

그리고 특이하게 다리가 4개다.

"무거운 걸 들기 위해서라고 하길래 다리를 4개로 만들었다."

"그래, 잘했다!"

이 대형 토우인형의 목적은 내 기간트를 인형의 집에 넣고, 빼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다리가 많은 만큼 내 운명의 실도 많이 필요하다는 거다.

그리고 내 머리카락도.

"완성은 언제지?"

"타일러여! 오늘 밤이면 끝날 거다."

"다행이네."

기간트 작업장으로 이동했다.

"마장기 팔이 완성됐군요."

케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대로 만들긴 했는데, 원래 있던 팔보단 성능이 떨어질 거요. 아무래도 부산물에 마석을 입히는 과정이 필요한 건지, 단순 가공한 부산물로는 한계가 있더군. 그래도 여기 드워프 친구들이 열심히 부산물을 가공해서 모양은 똑같이 만들었소."

"잘 움직일까요?"

케네스가 손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되는데! 내가 마석으로 똑같이 그렸는데!"

"응?"

앨리슨이 마장기의 양팔을 번갈아 보며 대답했다.

난 케네스를 보며 물었다.

"앨리슨이 마법진을 어떻게 그리던가요?"

"솔직히 나도 처음 봤소. 마석을 가루로 만들어달라고 해서 그렇게 해줬더니, 앨리슨이 손가락에 찍어서 직접 다 그리지 뭐요."

"손가락으로 마법진을요?"

케네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손녀지만 나도 놀랄 때가 많소."

"아무튼, 움직인다는 거죠?"

"그렇소. 내가 시운전해봤는데 아주 잘 움직이오. 물론 원래 있던 팔보단 약하니, 조심해야 할 거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난 마장기의 양쪽 팔을 다시 비교해 보고 있는 앨리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맙다! 나중에 어떻게 마법진을 그렸는지 나한테도 알려줘."

"네!"

앨리슨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이 녀석에게 자기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말해줘야 할까?

아직은 어리니까 나중에 천천히 고민해 봐야겠다.

그럼 이제 토우인형을 완성하고 오리지널 마장기를 인형의 집에 넣는 일만 남았다.

다들 잠든 시각.

난 자지 못했다.

토우인형을 만들어야 했다.

토우인형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뽑는다.

모근이 있는 머리카락이 필요했다.

그리고 토우인형의 각 관절이나 움직일 수 있는 부위에 내 머리카락을 붙인다.

내 토우인형은 크기가 크고, 다리가 4개라 눈물을 머금고 300개 정도 되는 머리카락을 뽑았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붙인 부위에 운명의 실을 일일이 연결했다.

[토우인형 제작(lv.1)]

스킬을 사용했다.

잠시 후.

운명의 실이 일제히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토우인형의 몸 역시 붉은 빛으로 물었다.

'됐다!'

다행히 300개의 운명의 실로 움직일 수 있었다.

먼저 천천히 줄을 당기며 토우인형의 발을 움직였다.

기이잉! 쿵!

이렇게 큰 토우인형은 처음이라 어색했다.

마치 원격 조종으로 기간트를 움직이는 기분이네.

전생엔 내 키만 한 토우인형을 만들어, 인형 바꿔치기 스킬을 이용할 때 주로 사용했다.

한번 사용하면, 인형은 부서지지만 위급할 땐, 목숨을 살리는 꽤 괜찮은 스킬이었다.

인형 바꿔치기 스킬은 A등급 헌터가 되면 생기는 인형술사 고유 스킬이다.

그래도 다리가 6개인 사마귀 꼭두각시와 영혼 이동을 자주 했기에 토우인형의 다리가 4개여도 걷거나 움직이는 데 큰 불편함은 없었다.

처음엔 동작이 어색해 한발을 떼는 데도 한참 걸렸지만, 몇 번 연습하자 이제 천천히 걸을 수 있었다.

문제는 이건 한번 부서지면 끝이었다.

난 천천히 작은 괴수 부산물부터 들어 올리는 연습을 했다.

토우인형은 꼭두각시처럼 숙달되면 알아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무조건 내가 직접 운명의 실을 이용해 움직이는 것으로 100% 수동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조종에 숙달되면 그다음엔 능숙하게 쓸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연습하자 동작이 매우 자연스러워졌다.

기이잉! 쿵! 쿵! 쿵!

천천히 이동해 오리지널 마장기 옆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마장기를 잡고 천천히 들어 올렸다.

한 번에 돼야 할 텐데······.

'그렇지! 들었다!'

토우인형이 오리지널 마장기를 들자마자, 내 인형의 집에 넣었다.

성공했다!

인간 크기의 토우인형은 최대 인간 정도의 힘만 낼 수 있었다.

그러니 아주 큰 토우인형을 만들면 그 크기만큼의 힘을 낼 수 있을 거로 생각해서 시도한 것이 적중했다.

다만 이제 운명의 실타래 여유가 300개가 사라진다.

사람 크기의 토우인형은 복잡하게 움직일 필요가 없었기에 운명의 실타래 10개면 충분했다. 하지만 이건 크기가 크고 큰 힘을 내야 하는 만큼 상당히 많은 운명의 실타래가 필요했다.

그리고 한번 연결한 실타래를 뽑으면 토우 인형은 무너져 다시 쓸 수 없었다.

다시 만들 순 있지만, 시간과 내 머리카락이······.

아무튼, 이제 난 인형의 집에서 기간트를 넣고 꺼내는 것도 할 수 있었다.

'이제 다 죽었어!'

경항공모함 출격이다.

49. 황제를 기다리며.

49. 황제를 기다리며.

[헬다임 정보국 대수림 정보대 지부]

아침 일찍 지부로 달려가 자고 있던 프레디 지부장을 깨웠다.

그런데 이 양반은 왜 별을 달았음에도 사무실 구석에서 잠을 자지? 중령 때도 그러더니, 습관을 못 고쳤나?

간이침대에서 일어난 프레디 지부장은 담배를 뻐끔거리며 자리에 앉아 내 이야기를 들었다.

"뭐라고? 엘프를 우리 정보대의 정식 병사로 만들어 달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전엔 이계 난민 신분이었지만, 이제 윌리엄 장벽 사령관님께서 신분을 보증한 정식 제국 국민입니다."

"뭐, 장벽 사령관이 보증한다면야 문제 될 건 없지. 그런데 그 엘프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인력인가?"

프레디 지부장은 손가락에 싸구려 담배를 끼고,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난 확신에 찬 눈빛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자세히 말씀드릴 순 없지만, 앞으로 대수림의 정보는 엘프의 손에 달렸습니다. 꼭, 반드시 필요합니다."

프레디 지부장이 잠시 고민하더니, 손에 든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좋네! 내가 책임지고, 대수림 정보대에 삼등 하사관으로 정식 편입시키지."

"충! 감사합니다."

프레디 지부장은 흔쾌히 허락했다.

"모두 12명입니다."

"뭐?"

"명단과 신상정보는 여기 있습니다."

"어?"

프레디 지부장은 살짝 당했다는 표정이었다.

"한 명이 아니었군."

"군복과 계급장은 카야킨 전진 기지에서 받은 것이 있으니, 임명장만 써 주십시오."

"흠."

"시간이 없습니다. 관문이 열리기 전에 가야 합니다."

"알았네. 바로 써주지."

그렇게 엘프 12명은 대수림 정보대 소속 하사관이 됐다.

앞으로 90명은 더 편입시켜야 하는데, 분위기를 보니 그건 나중에 말해야겠다.

일단 신분이 확실해야 내가 없어도 제국의 전진 기지나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기에 정보국 하사관 신분증은 필수였다.

임명장을 쓰면서 프레디 준장이 슬쩍 날 올려봤다.

"무슨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것도 아니고. 급한 일이 있는 건 아니지?"

"언제 대수림에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데 느긋할 순 없죠."

"전쟁이라, 터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프레디 지부장이 마지막 임명장에 사인과 함께 직인을 찍었다.

"자! 여기 있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타일러 소령, 잠깐 기다리게."

프레디 지부장이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천 골드네. 가져가게."

"알베르토 소위에게 활동비를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줬네. 이건 우리 지부에서 주는 금화네."

"네?"

"대수림 전진 기지의 물가는 살인적이라 들었네. 그곳에 지부를 만들려면 그 예산 가지곤 너무 적을 거야. 방금 정보원들도 많이 늘어났고."

"이곳 예산도 빠듯하지 않습니까?"

"괜찮아. 우리야 안전한 곳에 있으니 밥만 잘 챙겨 먹으면 되지만, 자네들은 현장에서 목숨 걸고 일하니까, 돈이라도 풍족해야지."

나 금화 많은데······.

금화를 더 준다니, 성의를 생각해서 일단 챙겼다.

"그리고 너무 무리하진 말게. 자네가 우리 정보대의 기둥이야."

"네! 감사합니다."

나오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프레디 지부장이 저런 사람이었나?

별을 달아서 좀 너그러워진 것 같기도 하고.

사무실을 나와 곧장 장벽 관문을 향해 이동했다.

***

[헬다임 장벽 관문]

"세상에! 군복 입은 엘프가 단체로 있어!"

"와! 어디 소속이야?"

"정보국이래."

"이번 임무 끝나고, 난 무조건 정보국 간다!"

병사들과 장교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기간트에 탄 영지 사냥팀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괜히 근처를 기웃거리거나 기간트 앞에서 폼을 잡기도 했다.

그리고 내 옆엔 몸이 완전히 얼어버린 풋내기 소위도 있었다.

얼굴까지 빨개진 알베르토 소위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다들 촌스럽긴 엘프 처음 보나?

"알베르토, 자네가 엘프들과 소통할 일이 많을 테니, 우리 정보대끼리만 알아볼 수 있는 수신호나 암호구를 만들어 보게."

"오! 좋은 생각이십니다. 정보국의 생명은 보안이죠."

난 어제 에테나와 엘프들에게 사정을 말하고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이번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하이엘프 시나우엘을 찾아서 구출하기로 맹세하고, 겨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엘프는 너무 눈에 띄는 거 아닙니까?"

"응? 글래디스?"

"경하드립니다. 소령 제복이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고맙네. 그런데 자네가 여긴 무슨 일인가?"

"저도 대수림으로 갑니다."

"뭐? 난 이제 필요 없는데?"

"하하! 이번엔 엠버 중령님 부관으로 가게 됐습니다."

엠버 중령이 대수림에 간다고?

순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는 경호 때문에 윌리엄 사령관 옆에서 한 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왜?

쿵! 쿵! 쿵!

갑자기 지축이 울리기 시작했다.

"오오! 5군단이다!"

황가를 상징하는 독수리 깃발과 푸른색 뱀이 그러진 5군단의 깃발이 펄럭인다!

두 비숍급 기수 기간트 뒤로 90기의 기간트가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장벽으로 다가왔다.

"시안 오르도 황자님이시다!"

"와! 룩급 기간트 파이톤이야!"

'아! 엠버 중령이 저기 있었군.'

오리지널 기간트 파이톤이 맨 앞에 있고, 그 바로 뒤에 엠버 중령의 비숍급 오리지널 기간트 베가스가 있었다.

이번엔 7황자가 이끄는 5군단이 대수림으로 파견된다.

그리고 엠버 중령은 그런 7황자를 호위할 생각인가 보다.

'황자가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에 타다니! 능력 죽이네!'

물론 파이톤의 걸음걸이가 베가스처럼 자연스럽진 않았다.

그 말은 싱크로율이 많이 떨어진다는 뜻이었다.

전투 땐 다른 기사가 대신 타고 싸우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 이제 폰급 기간트에 탈 수 있었다.

물론 조금 무리하면 나이트급도 가능했고.

그랬기에 이번에 나이트급 오리지널 마장기도 챙겨온 것이다.

5군단의 기간트 뒤로 천명이나 되는 병사와 수십 대의 보급 마차가 줄줄이 따라왔다.

[관문을 열어라!]

끼기기기기깅! 쿠웅!

거대한 관문이 열리고 5군단의 기간트부터 차례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타일러 소령님,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고생하게."

글래디스가 5군단의 병사들을 향해 달려갔다.

기간트와 행렬이 얼마나 길었는지, 5군단이 다 이동하는 데만 한참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우린 대기하고 있던 다른 영지의 사냥팀과 관문으로 들어갔다.

'진짜 전쟁이 나려나?'

정보국 보고서엔 전쟁 억제를 위해 5군단을 파견한다고 되어 있는데, 그럼 가디언 제국에서도 이에 필적하는 기간트와 병력을 대수림으로 보냈다는 뜻이었다.

고개를 흔들었다.

미안하지만 난 지금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리칸 공국의 노림수가 점점 확신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들은 별동대다.

내 기지를 차지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고 후방을 교란할 목적이었다.

난민 전진 기지에 몰래 자리를 잡고, 영지의 사냥팀이나 북쪽에 카멜 기지, 펜타라 기지, 북서쪽에 샹클랜드 기지, 그리고 동쪽에 라포트 기지까지 서쪽의 전진 기지를 공격함으로써 혼란에 빠트리고, 카야킨에 집결한 제국의 기간트를 서쪽으로 돌리려는 의도가 분명해 보였다.

'시간이 너무 빠듯해······.'

별동대라면, 보급품이나 병력을 최소화하고 빠르게 이동했을 테니, 여유가 없었다.

내가 밤낮없이 이동해도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관문을 통과하자마자 내 부관을 쳐다봤다.

"알베르토."

"네, 소령님."

"자넨 카야킨에 도착하면 먼저 커널 대령님이나 라그르 중령님을 찾게."

"네?"

"내 이름을 대면 알아서 지부 장소를 제공해 주실 거야. 그곳에 짐을 풀고, 뭐든 좋으니까 알아서 정보를 모으게."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알베르토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설마, 저 혼자 가는 겁니까?"

"그래. 나중에 카야킨 기지에서 보지."

"네에?"

마차 문을 열려고 했다가 멈췄다.

"그래, 나보단 자네가 더 필요할 거야."

난 옷을 벗었다.

"헉! 왜 이러십니까?"

"좋은 거 주려고 그래."

"네?"

알베르토가 경악했다.

난 냉기 조끼를 벗어 건넸다.

"이걸 입으면 그래도 버틸 만할 거야.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신 물건이니까. 잃어버리면 죽을 줄 알아."

"······?"

옷을 다시 챙겨 입고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 문을 닫기 직전 알베르토의 황당한 표정이 보였다.

'무사히 도착하길 빌겠네. 알베르토 소위.'

난 엘프들과 눈을 맞추고.

대수림에 진입하자마자, 북서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제발! 별일이 없기를!'

내 예상이 빗나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미 머릿속으론 아리칸 별동대가 난민 기지로 가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난 자동인형들과 이계 난민들을 향해 달렸다.

***

[이계 난민 기지]

"쿠오오오크! 척후 오크 발견했다. 강철 거인 서쪽에서 온다. 겨우 나흘 거리다!"

쿠훌린이 말을 하며 바닥에 열심히 그림을 그려 설명했다.

그러자 드워프 라스칼의 얼굴이 흙빛이 됐다.

"암 드로운이여! 적이 이곳을 노리고 오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투구를 벗은 암 드로운은 고민에 빠졌다.

황제 폐하의 명령은 단 하나였다.

기지를 지켜라!

기사가 목숨을 걸고 적과 싸우는 것이야 당연했다.

하지만 명령은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했다.

자신과 비숍급 기간트 기사 둘, 오크 전사들이 전력의 전부.

그에 반해 적의 전력은 37대의 기간트와 500여 명의 병사.

아무리 생각해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럼 자신은 황제의 명령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었다.

기사로써 그런 불충은 있을 수 없었다.

암 드로운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암 드로운이여! 혹시 함정이 필요한가?"

라스칼이 바닥에 큰 그림을 그리며 설명했다.

드워프가 바닥에 구멍을 파고, 기간트가 그 속에 빠지는 그림이었다.

라스칼은 드워프가 기간트와 싸움에 도움이 되지 못했기에 필사적으로 다른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다.

"작은 인간! 그대 말이 맞는다. 함정 필요하다."

암 드로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지 입구로 라스칼과 드워프들을 데려갔다.

그리고 함정 설치 위치와 폭, 깊이 등을 자세히 알려줬다.

"용의 이빨이 필요하다!"

암 드로운은 바닥에 사각뿔을 그렸다.

이건 괴수를 막을 때 사용했던 방책으로 하나는 별 소용이 없었지만, 여러 개를 붙여서 땅에 박으면 큰 괴수의 전진도 어느 정도는 막을 수 있었다.

그랬기에 함정과 용의 이빨로 최대한 기간트의 전진을 막을 생각이었다.

"암 드로운이여! 무슨 말인지 알겠다. 이걸 만들어 함정 주변에 설치하겠다."

암 드로운이 고개를 흔들었다.

"시간이 없다. 성벽을 부숴서 만든다!"

암 드로운은 내성의 벽을 가리켰다.

라스칼이 말뜻을 알아듣고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곳에 큰 언덕을 만든다!"

라스칼은 암 드로운의 의도를 파악했다.

기지 입구는 좁았지만, 안으로 들어올수록 폭이 점점 넓어지는 구조였다. 그러니 입구가 뚫리면 다수의 적이 몰려 들어올 것이다.

그랬기에 함정과 방책을 만들어 적들을 중앙으로 몰리게 하고, 그곳에 높은 언덕을 만들어 그 위에서 싸울 생각이었다.

라스칼은 곧바로 200명의 드워프를 이끌고 작업을 시작했다.

암 드로운이 이번엔 오크 족장인 쿠훌린을 바라봤다.

"큰 인간은 작은 거인병과 병사를 맡는다."

"쿠오오크! 암 드로운이여! 우린 언제든 싸울 수 있다!"

쿠훌린이 큰 창을 들고 소리치자, 오크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오크들도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기지를 지키는데 종족은 상관없었다.

그리고 모두 한 마음이었다.

다들 이곳이 집이었으니까.

'이걸 내가 어떻게 알았지?'

명령을 내린 암 드로운은 순간 자신이 방금 떠올린 작전을 보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함정이나 용의 이빨 같은 건 배운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이 알고 있으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황제께서 알려주셨나?'

자신의 존재는 의심하지 않는다.

황제가 생명을 주고, 자신을 존재케 했다.

황제는 자신에게 신과 같은 존재.

그러니 목숨과 능력을 다해 기지를 지키는 것은 기사의 신성한 의무였다.

"더그, 엘다크!"

척! 척!

"말씀하십시오. 기사단장님!"

"우리가 가장 중요하다. 목숨을 버릴지언정 적에게 이 기지를 빼앗길 순 없다."

"맡겨 주십시오. 반드시 지켜 보이겠습니다!"

스르릉! 취링!

암 드로운이 거대한 검을 뽑아 허공을 찔렀다.

"황제 폐하를 위하여!"

"황제 폐하를 위하여!"

더그와 엘다크 역시 검을 뽑고 허공을 찌르며 두 눈을 부릅떴다.

암 드로운은 기지 남동쪽을 쳐다봤다.

'황제께서 오고 계신다! 그분의 존재가 느껴진다!'

그렇게 세 자동인형과 이계 난민들은 기지를 지키기 위해 한마음이 되었다.

***

쾅! 쾅!

[크롬웰 대령님, 꿈쩍도 안 합니다. 안에서 잠긴 것 같습니다.]

[뭐라?]

크롬웰 대령의 룩급 기간트가 고개를 돌렸다.

[호세스 중령! 기지가 비어 있다고 하지 않았나?]

[분명 비어 있을 겁니다. 여긴 원래 저희 살루스 왕국의 전진 기지였습니다.]

살루스 왕국의 호세스 중령은 당황했다.

평소 자주 왕래하던 드로리안 왕국의 전진 기지에서 소문을 들었다.

바하쿰 백작과 기지의 모든 사람은 장벽으로 끌려갔고, 기지는 폐쇄됐다고.

[아무래도 다른 기지의 사냥팀이 들어가 있나 봅니다. 이곳에서 쉬다가 우리가 오는 걸 발견하고 문을 닫은 것이지요.]

크롬웰 대령은 짜증이 치밀었다.

야간 행군까지 감행하며 무리하게 달려왔다.

다들 지쳐 있었고, 쉬어야 했다.

그래야 힘을 회복해 다른 전진 기지들을 공격하며 게릴라 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그것이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이며, 아베르크 제국을 흔들어 빈틈을 만들 기회였다.

[썩을! 귀찮게 됐군. 문을 부숴라!]

[네!]

쾅! 쾅! 쾅!

기간트들이 거대한 도끼를 가져와 문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전진 기지의 문은 두껍고 단단했다.

괴수의 공격을 막기 위해 만들었니, 쉽게 뚫릴 리가 없었다.

그리고 기간트의 힘을 최대한 사용해야 하니, 마석 배터리 소모도 몇 배나 많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리칸 공국 기간트는 제국에서 만든 기간트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제국의 사냥팀을 공격해 마석 배터리를 조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때 동맹이었던 두 나라는 철천지원수가 되어 있었다.

콰아앙!

[구멍이 뚫렸습니다!]

하루 만에 기간트가 들어갈 정도로 큰 구멍이 뚫렸다.

[어떤 놈들인지 가만두지 않겠다!]

크롬웰 대령이 뒤를 쳐다보았다.

[마일스 중령! 자네 부대가 놈들을 처리한다. 포로는 필요 없다!]

[충! 맡겨 주십시오.]

룩급 기간트에 탄 마일스 중령이 문 앞으로 움직이자, 그 뒤로 6대의 기간트가 따라나섰다.

마일스 중령의 기간트가 몸을 돌렸다.

[안에 있는 놈들은 제국의 허접한 사냥팀이다! 하지만 방심하지 마라!]

[대장! 제가 선봉을 맡겠습니다.]

커다란 창을 든 비숍급 기간트가 나섰다.

그러자 뒤에 있던 나이트급 기간트가 앞으로 나섰다.

[스트라이더 소령님은 좀 쉬시죠. 저번처럼 혼자서 적을 다 쓸어버리시면 우리가 할 일이 없지 않습니까! 이 정도 놈들은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이들은 모두 아리칸 공국의 팔콘 기사단이었다.

얼마 전까지 서부 분쟁지역에서 활약한 팀으로 최정예 부대였다.

[다들 시끄럽다! 스트라이더 소령이 선두에 선다. 빨리 처리하고 오늘 밤은 이 기지에서 잔다!]

[네!]

[가자!]

[다 쓸어버려!]

스트라이더 소령을 필두로 일곱 대의 기간트가 차례로 안으로 들어갔다.

쾅! 콰쾅!

[이게 뭐야?]

[으악!]

곧이어 굉음과 함께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50. 황제를 위하여!

50. 황제를 위하여!

칠흑 같은 어둠 속.

살루스 기지 안은 그야말로 암흑이었다.

스트라이더 소령은 비숍급 기간트의 이마와 양어깨에서 비추는 불빛을 이용해 내부를 살피곤 기지 안으로 들어갔다.

기이잉! 쿵!

처척!

창을 겨누며 몸통을 방어했다.

'응?'

스트라이더는 잔뜩 긴장했다가 아무런 공격이 없자, 살짝 김이 샌 느낌이 들었다.

안에서 문이 잠겼으니, 기지 내부에 누가 있는 건 분명했다.

그럼 자신의 기간트가 막 문을 통과했을 때가 기습하기 좋은 시기란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들어가는 기간트는 한 대고 달려들 수 있는 기간트는 최대 세대니까.

하지만 아무런 공격도 없었다.

'전술의 기초도 없는 놈들인가?'

[이상 무!]

비숍급 기간트가 창으로 주변을 경계하는 동안 뒤를 이어 가필드 대위의 나이트급 기간트가 들어왔다.

그의 기간트 역시 커다란 도끼를 겨누며 주변을 경계했다.

[응? 이 새끼들 겁먹고 어디 숨은 거 아닙니까?]

[조용히 해라!]

룩급 기간트를 탄 마일스 중령이 안으로 들어오며 한마디 했다.

그리고 뒤를 이어 4기의 기간트가 안으로 진입했다.

룩급 1대, 비숍급 2대, 나이트급 2대, 폰급 2대.

최정예 부대답게 그들은 신속하고 절도 있게 움직였다.

[정말 너무 조용한데요? 혹시, 기간트는 없고 일부 살아남은 살루스 병사가 기지에 숨어 있는 게 아닐까요?]

[그건 이제부터 확인해 보면 된다. 다들 방심하지 마라! 스트라이더 소령 가자.]

[네!]

스트라이더 소령이 천천히 기간트를 전진시키며 말했다.

[10보 전진!]

기이잉! 쿵! 쿵! 쿵!

스트라이더 소령을 필두로 사방을 경계하며 앞으로 전진했다.

그래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대장님, 이쪽에 뭔가 있습니다!]

[정지!]

가장자리에 있는 폰급 기간트가 뭔가를 발견했다.

마일스 중령의 기간트가 고개를 돌려 불빛을 비춰줬다.

'뭐지? 삼각뿔?'

높이가 4, 5미터쯤 되는 삼각뿔이 가장자리서부터 이어져 있었다.

폰급 기간트가 다가가 삼각뿔을 만지려 할 때였다.

쩌쩍!

[응?]

갑자기 발밑이 꺼지더니, 기간트가 아래로 사라졌다.

그리고 구멍 주변에 있던 삼각뿔이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쿵! 쿠쿵! 쿵!

[으악!]

기사의 비명이 들렸다.

[방금 뭐야?]

'난쟁이?'

마일스 중령은 난쟁이들이 지렛대를 이용해 구멍 끝에 살짝 걸쳐져 있던 커다란 삼각뿔을 아래로 떨어트리는 것을 봤다.

[이 좆만 한 새끼들이!]

흥분한 가필드 대위의 나이트급 기간트가 앞으로 달려갔다.

[기다려! 쫓지 마라!]

[하지만 저것들이······.]

[함정이다!]

함정이란 말에 가필드 대위도 기간트를 멈췄다.

[제가 봤습니다. 드워프 이계 난민이 한 짓입니다.]

다른 기간트 기사도 드워프를 봤다.

마일스 중령의 기간트가 천천히 구멍 가까이 다가갔다.

[퍼그 중위! 괜찮은가?]

[네! 전 괜찮습니다. 하지만 기간트가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마일스 중령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래로 불빛을 비추자, 구멍은 20미터 깊이로 아주 깊진 않았다. 하지만 삼각뿔 하나가 폰급 기간트의 왼쪽 발목에 찍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기간트 위로 여섯 개의 삼각뿔이 얼기설기 놓여 있었다.

[수색 끝나고 구해줄 테니까. 기다려라.]

[네! 대장님. 전 걱정하지 마십시오.]

기간트는 튼튼했기에 이 정도 충격으로 완파되진 않았다.

하지만 발목이 부서졌으니, 활동불능이었다.

[대장님, 좌측에도 똑같은 구조물이 있습니다!]

[근처로 가지 마라! 함정이다!]

기간트 한 대가 당하자, 지휘관과 기사들의 신경이 매우 날카로워졌다.

[소령, 계속 전진해!]

[네!]

스트라이더 소령이 다시 전진을 시작했다.

[이 난쟁이 새끼들! 싹 다 죽여버리겠어!]

가필드가 구시렁거렸다.

하지만 단독행동은 하지 않았다.

앞서던 스트라이더 소령의 기간트가 정지 신호를 보냈다.

[대장님 앞에도 삼각뿔 방책이 있습니다.]

전방에 바위로 된 이십여 개의 삼각뿔이 일자로 길을 막고 있었다.

[이 정도야 간단히 넘죠!]

[잠깐!]

휘익! 쿵!

가필드 대위의 나이트급 기간트가 삼각뿔을 가볍게 넘었다.

다행히 반대편에 무사히 착지했다.

마일스 중령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방책 너머에 함정이 있는 줄 알았다.

[가필드! 경거망동하지 마라.]

[네! 조심하겠습니다.]

기이잉! 쿵!

[어?]

하지만 나이트급 기간트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순간 땅이 푹 꺼졌다.

쾅! 콰앙!

[크윽!]

[가필드! 괜찮은가?]

[네! 다행히 깊진 않습니다.]

마일스 중령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전진 기지 안에 이런 함정이 있는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모두 방책을 조심히 넘어가라!]

기간트들이 삼각뿔을 넘어갔다.

그리고 다들 무기로 자기 앞에 땅을 건드렸다.

그러자 눈앞에 함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함정은 폭 5미터에 깊이 15미터 정도로 첫 번째 함정과 달리 이건 진군을 방해할 목적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이트급 기간트 혼자 올라오기는 버거워 보였다.

[누가 가필드를 도와줘라!]

[제가 돕겠습니다.]

또 다른 나이트급 기간트가 구멍으로 긴 창을 내밀었다.

가필드 대위는 창대 끝을 잡고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쿵쿵쿵!

[뭐야?]

스트라이더 소령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커다란 검은 그림자를 봤다.

촤악! 서걱!

[어?]

쿵!

갑자기 빛이 번쩍이더니, 검은 그림자가 나이트급 기간트의 팔을 베고 지나가 버렸다.

기간트의 한쪽 팔이 깨끗하게 잘렸고, 창을 놓치는 바람에 가필드 대위의 기간트는 아래로 다시 떨어졌다.

쿵!

[적이다! 스트라이더 소령, 놈의 뒤를 바짝 쫓아라!]

[네!]

소령의 비숍급 기간트가 함정을 뛰어넘어 검은 그림자를 뒤쫓기 시작했다.

[모두 스트라이더 소령의 뒤를 바짝 따라 달려라! 그래야 함정에 걸리지 않는다.]

다른 기간트들도 함정을 넘어 검은 그림자를 쫓기 시작했다.

앞선 검은 그림자의 키는 대략 10미터.

상대는 최소 비숍급, 어쩌면 룩급 기간트임을 뒤쫓는 기사들은 인지하고 있었다.

'언덕? 우릴 이리로 유인하는 건가?'

스트라이더 소령은 콧방귀를 뀌었다.

눈앞에 30미터 정도 되는 낮은 언덕이 있었고, 검은 그림자는 언덕 위로 오르고 있었다.

높은 곳을 선점하고 싸우는 것이 유리하다는 내용은 기간트 전투 교본 앞쪽에 나올 만큼 기본적인 전술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이미 10년을 전장에서 보냈다.

놈은 분명 정상에 오르자마자, 기체를 돌려 검을 찌르거나 내려칠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 자신의 긴 창이 상대의 배를 뚫을 것이다.

'역시!'

스트라이더 소령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상대 기간트가 정상에 오르자마자, 몸을 돌리며 검을 휘두르는 것이 보였다.

검이나 도끼였다면 모를까.

'내가 긴 창을 가진 것을 원망해라!'

부웅!

쉐엑!

검이 먼저 움직였지만, 창이 훨씬 빨랐다.

[끝났다! 애송이!]

터엉!

'터엉?'

비숍급 기간트의 불빛에 창이 상대 기간트의 방패에 밀려 허공을 찌른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내려치던 검은 이제야 내려오고 있었다.

'젠장!'

촤악!

빛이 번쩍이고, 소령의 눈에 자기 기간트 해치가 수직으로 갈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을 끝으로 스트라이더 소령의 비숍급 기간트는 힘없이 뒤로 굴러떨어졌다.

쿵! 쿠쿠쿵!

[스트라이더 소령이 당했다! 한꺼번에 공격해!]

룩급 기간트와 비숍급 기간트, 팔 하나가 잘린 나이트급 기간트, 그리고 폰급 기간트가 언덕을 올랐다.

[소령님의 원수를 갚자!]

[죽여라!]

그때였다!

쿵! 쿵!

검은 기간트 양옆으로 두 대의 비숍급 기간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놈들이 더 있다!]

[나눠서 공격해!]

룩급 기간트는 중앙으로 올라갔고, 비숍급 기간트는 우측, 단검을 든 나이트급과 폰급 기간트는 좌측으로 올라갔다.

암 드로운이 검을 높이 들었다.

"황제 폐하를 위하여!"

[황제 폐하를 위하여!]

암 드로운을 시작으로 두 자동인형의 기간트가 적이 올라오자, 사정없이 검을 내려쳤다.

쾅! 콰콰쾅!

[크윽!]

치이이익!

암 드로운의 검을 막은 마일스 중령은 신음을 흘렸다.

아무리 언덕 아래쪽에 있다고 해도 자신의 룩급 기간트가 형편없이 뒤로 밀렸기에 크게 당황했다.

그래도 중심은 잃지 않았다.

그런데!

촤악!

[커헉!]

상대 기간트가 자신에게 달려들지 않고, 옆에 있던 나이트급 기간트의 허리를 베어버렸다.

[지미 대위!]

쿵! 쿠쿠쿵! 콰앙!

팔 잘린 나이트급 기간트는 언덕을 굴러떨어졌다.

해치가 수평으로 갈라졌으니, 살아날 가망성은 없었다.

[으아아! 죽여버리겠다!]

마일스 중령의 룩급 기간트가 다시 언덕을 오른다.

자신의 눈앞에서 아끼는 부하가 두 명이나 당했으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 올랐다.

쿵쿵쿵!

그는 순식간에 언덕 끝에 올랐다.

그리고 그제야 상대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거신?'

그건 기간트라고 하기보단 갑옷을 입은 고대 거신의 모습이었다.

그 순간 상대의 투구 안쪽에서 자줏빛 안광이 뿜어졌다.

마일스는 놀랐지만 당황할 새가 없었다.

부하들의 복수를 해야 했다.

[죽어!]

부아앙!

쾅! 쾅! 쾅!

거칠게 검을 휘둘렀지만, 상대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저 방패를 들어 자신의 공격을 막고 있었다.

[으헉!]

쿠웅!

갑자기 옆에 있던 폰급 기간트가 무릎을 꿇었다.

아무리 최정예 부대원이었다고는 하지만 비숍급과 폰급은 애초부터 체급 차가 너무 났다.

[어리석은 것들! 황제 폐하의 기지를 탐하다니!]

퍼억!

더그가 탄 기간트가 발로 폰급 기간트를 차서 언덕 아래로 밀어버렸다.

그 모습을 본 마일스 중령은 눈이 다시 뒤집혔다.

그나마 우측에 그라일 소령은 상대 비숍급 기간트와 대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문제는 이제 자신이 두 기간트를 상대해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옆에 있는 비숍급 기간트는 움직이지 않았다.

'뭐지?'

쿵!

눈앞에 거신 기간트가 방패 모서리를 땅에 박더니, 검을 겨눴다.

"보아라! 기사의 검은 간결하고, 공격은 다채로워야 한다"

거신 기간트가 검을 찔러왔다.

쉐엑! 카앙!

파앙!

[크윽!]

검을 쳐냈다고 생각한 순간 거신 기간트의 주먹이 룩급 기간트의 얼굴을 강타했다.

마일스 중령은 매우 놀랐지만, 베테랑답게 검을 휘두르며 적의 접근을 막았다.

그러자 거신 기간트가 검을 사선으로 내려쳤다.

탱!

이번에도 검으로 막았지만, 힘에서 밀려 룩급 기간트가 뒤로 2미터나 밀렸다.

그 순간 거신 기간트가 몸을 회전시키더니 자세를 낮춰 하체를 공격했다.

태앵!

마일스 중령은 가까스로 검을 막았다.

'이, 이게 기간트의 움직임이라고?'

자신은 수많은 기간트 전투를 치른 기사였다.

오리지널 기간트하고도 몇 번 싸워봤지만, 이런 움직임은 본 적이 없었다.

쿵쿵! 팟!

몸을 날린 거신 기간트가 검을 수직으로 휘둘렀다.

마일스는 급하게 검을 올려쳤다.

콰앙!

검과 검이 마주쳤다.

"강한 힘으로 누르고!"

쿠웅!

[윽!]

상대의 압도적인 힘에 밀려 룩급 기간트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 순간 거신 기간트의 앞발이 날아왔다.

부아앙! 콰앙!

룩급 기간트의 기체가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콰앙! 쾅!

[크윽!]

떨어진 충격에 마일스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가 충격에서 깨어났을 땐 거신 기간트가 자신의 룩급 기간트의 가슴을 발로 밟고 있었다.

이미 죽음을 직감한 마일스는 허무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내가 뭐하고 싸웠던 거지?'

거신 기간트의 눈에서 자줏빛 광채가 뿜어지며 검이 찔러졌다.

쿵! 쩍!

옆에서 홀로 분투 중인 그라일 소령 역시 오래 버티지 못했다.

더그와 엘다크의 비숍급 기간트가 협공하자 얼마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리고 그 순간 언덕 아래 도착한 또 하나의 기간트가 있었다.

[이, 이게 뭐야?]

가필드 대위는 자신의 부대 기간트가 모두 쓰러진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암 드로운이 언덕을 무서운 속도로 미끄러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헉!]

가필드의 나이트급 기간트가 커다란 도끼를 들었다.

뒤로 물러설 길은 없었다.

[쓰벌! 누가 이기나 해보자!]

나이트급 기간트가 두 손으로 도끼를 뒤로 빼더니, 앞으로 휘둘렀다.

그리고 암 드로운 역시 검을 휘둘렀다.

촤아악!

쿠웅!

도끼를 든 기간트 양팔이 허무하게 바닥에 떨어졌다.

[으악!]

가필드는 절망의 비명을 질렀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건 죽음뿐이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상대는 자신을 죽이진 않았다.

상대가 등을 보이며 말했다.

"가라! 가서 감히! 황제 폐하의 기지를 공격한 자들에게 너의 처참함을 보여라!"

[뭐, 뭐라고?]

가필드는 적에게서 동정을 받았다.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기 기간트는 두 팔이 잘렸고, 부대원들은 모두 전사했다.

그때 입구 쪽에 함정에 빠진 동료가 떠올랐다.

'그래! 퍼그 중위는 살리자!'

그리고 이곳에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가 있음을 크롬웰 대령에게 알려야 했다.

너무 순식간에 당했기에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저건 분명 거신의 갑옷으로 만든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였다.

가필드가 입구 쪽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응?]

오크들이 밧줄을 타고 함정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가필드가 달려가 구멍 아래를 내려다봤다.

하지만 폰급 기간트의 해치는 이미 부서져 있었고, 안에 타고 있던 퍼그 중위는 죽어 있었다.

[이 버러지 같은 것들이! 감히!]

가필드가 소리를 지르며 오크를 노려봤다.

"쿠오오오크!"

"쿠오크! 쿠오크!"

하지만 오크들은 더욱 성난 괴성을 질렀다.

가필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해보니 이곳은 이미 저들이 장악했고, 침입자는 자신이었다.

가필드 대위는 힘없이 기지 밖으로 나갔다.

***

"뭐라?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라고 했느냐?"

"그렇습니다. 그리고 비숍급 기간트가 2대 더 있고, 곳곳에 함정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크롬웰 대령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감히! 내 부대원들을······!"

[대령님! 공격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아무리 오리지널 기간트라고 해도 저들의 숫자는 셋밖에 되지 않습니다. 당장 숫자로 밀어붙여야 합니다.]

또 다른 룩급 기간트 기사인 다니엘 중령과 메리 오블리 중령 역시 전우를 잃고 잔뜩 흥분해 있었다.

크롬웰 대령이 살루스 왕국의 호세스 중령을 노려봤다.

"이번엔 살루스 기간트가 선두에 선다!"

"네?"

호세스 중령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저희는 그저 길잡이로······."

"지금 내 부하가 여섯이나 죽었다! 내 명령을 거부하겠다는 건가?"

아리칸 공국의 기간트들이 일제히 살루스 사냥팀 기간트를 향해 무기를 겨눴다.

"아, 알겠습니다."

"걱정은 하지 마라! 우리가 뒤를 받쳐줄 테니까!"

[가자! 동료들의 원수를 갚자!]

23대의 아리칸 공국의 기간트와 7대의 살루스 왕국 기간트, 500명의 병사가 기지 안으로 들어갔다.

기이이잉! 쿵! 쿵! 쿵!

함정은 이미 파훼 된 상태였기에 기간트와 병력은 언덕 아래까지 피해 없이 전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30미터 위에 기간트 3기의 위용은 아래쪽에서 볼 때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리고 중앙의 장갑조차 제대로 없는 오리지널 기간트가 왠지 모르게 섬뜩해 보였다. 아마도 혼자서 4대의 기간트를 파괴했다는 생존자의 증언 때문일 것이다.

[살루스 기간트가 선두에 선다!]

[가자!]

일곱 기의 기간트가 언덕 아래에 섰다.

[전군 공격하라!]

[공격!]

살루스 기간트가 먼저 오르고 아리칸 공국의 기간트가 바로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크롬웰이 신호를 보내자, 아리칸 공국의 기간트는 조금씩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죽여라!]

[공격해!]

살루스의 기간트 7대가 달려들고, 크롬웰 대령은 전투를 지켜봤다.

서걱! 콰앙!

[크악!]

[으악!]

기간트의 머리가 날아가고 배를 찔린 나이트급 기간트가 언덕을 굴렀다.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가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살루스의 기간트는 힘없이 쓰러졌고, 적들은 집요하게 기사들의 목숨만 노렸다.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아무리 비숍급 한 대와 나이트급과 폰급이 주력이라도 기간트 7대와 3대의 싸움이 이렇게 간단히 끝날 줄은 몰랐다.

[뒤로 물러나라!]

크롬웰 대령은 부하들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강력하다. 저 기간트를 내 것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눈에 탐욕의 빛이 번뜩였다.

죽은 부하들이야 다시 뽑으면 되지만, 오리지널 기간트를 얻을 기회는 흔치 않았다.

그리고 방금 살루스 기간트의 희생으로 공략 방법이 생각났다.

'어차피 탑승한 기사만 죽이면 끝이야!'

병력을 우회시킬 길을 찾아내고, 달려들기보단 서서히 포위망을 구축해 사방에서 압박해서 괴수 포획용 그물로 사로잡고 해치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방법이 좋아보였다.

기이잉! 쿵!

"황제 폐하께서 오셨다!"

[황제 폐하께서 오셨다!]

세 기간트가 뜬금없이 검을 높이 들며 소리를 질렀다.

'미친 거야? 여기가 어디라고 제국의 황제가 와?'

크롬웰과 아리칸 공국 기사들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