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인과응보.
35. 인과응보.
[카멜 전진 기지]
두 개의 거신목이 겹쳐져 서로 휘감고 자라는 특이한 형상.
머리 위쪽으로 카멜 기지의 상징인 쌍둥이 거신목이 보이자, 사람들은 이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덕분에 무사히 오긴 했네.'
난 살루스 전진 기지에서 나온 사람들 틈에 섞여 함께 이동했다.
표범인형도 있었고, 거신인형이 직접 교육한 마나인형인 자발리(lv.4)도 있었지만, 나 혼자 대수림을 지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표범인형은 최하급 괴수였고, 자발리는 폰급 기간트에 탈순 있었지만, 내 인형의 집에서 기간트를 끌고 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좀 잘 싸우는 병사 수준이었다.
그동안 거신인형 덕분에 기간트를 마음대로 인형의 집에 넣고 뺄 순 있었지만, 이젠 그게 불가능하다.
그러니 당분간은 인형의 집에서 기간트는 꺼낼 수 없었다.
'물론 이젠 다른 방법이 있지.'
커다란 토우인형을 만들면 되니까.
이동도 느리고 컨트롤에 제약은 많지만, 크게 만들면 기간트 한 대는 충분히 넣거나 꺼낼 수 있었다. 그러니 집으로 돌아가면 토우인형부터 만들 생각이었다.
물론 그만큼 운명의 실타래가 많이 필요하겠지만.
[정지하라!]
"정지!"
아직 카멜 기지 입구까진 거리가 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선두가 멈췄고, 비숍급 기간트 한 대가 사령관이 탄 마차로 다가왔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살루스 사람들에겐 좀 미안하긴 하다.
이들은 이제부터 벌어질 자신들의 미래를 알까?
여기까진 모두 내가 설계한 것이지만 이제부터 선택은 바하쿰 백작과 기사들에게 달렸다.
난 슬쩍 옆으로 빠져 나무가 많은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카멜 전진 기지 입구 근처에 있는 우거진 수풀 속에 자리를 잡았다.
곧 바하쿰 백작이 탄 마차가 다가오더니 내가 숨은 수풀 옆에 멈췄다.
백작은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더니 입구 앞으로 이동했다.
이곳 성벽은 두 거신목 사이에 있었고, 약 40미터로 제법 높았다.
"난 살루스 기지의 사령관이다! 책임자는 어디 있느냐?"
조용했다.
"아무도 없느냐? 난 살루스 왕국의 바하쿰 백작이다!"
쾅쾅쾅!
바하쿰은 입구를 두드렸다.
그때 카멜 기지 성벽 위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희끗희끗한 머리를 앞으로 내밀곤 말했다.
"오랜만이다! 바하쿰 백작!"
바하쿰은 인상을 팍 찡그렸다.
"미켈스 백작, 지금 내게 한 말이오?"
"그렇다!"
"허! 어찌 살루스의 왕족인 내게 이런 하대를 하시오!"
"그럼 제국의 귀족이 범법자에게 존대를 할까?"
"뭐라? 범법자? 감히!"
"감히라니!"
미켈스 백작이 바하쿰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이 악마 같은 놈들! 네놈들이 르블로 영지의 사냥팀을 몰살한 것을 모를 줄 알았더냐!"
"뭐? 르블로 영지 사냥팀?"
바하쿰 백작은 살짝 놀란 듯했으나, 바로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우리가 왜 르블로 영지 사냥팀을 공격하겠나?"
"그야 네놈들의 더러운 욕심 때문이겠지."
미켈스 백작이 손짓했다.
그러자 세 사람이 옆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잘 봐라! 이들이 누군지. 이들은 르블로 사냥팀의 생존자들이다!"
그 순간 바하쿰 백작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그들은 르블로 영지의 기간트 작업자들로 갱도에서 내가 탈출시켜준 사람들이었다.
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내 자동인형들과 드워프들이 잘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바하쿰 백작은 인상을 쓰고 자신의 뒤에 있는 알리만 중령의 기간트를 노려봤다.
그들은 드워프만 생각했지, 자신들의 갱도에 저들이 있었는지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았다.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니······.'
미켈스 백작이 다시 외쳤다.
"네놈들의 악행은 이미 카야킨과 주변 전진 기지에 알렸다! 머지않아 제국의 토벌대가 올 것이다! 썩 꺼져라!"
바하쿰 백작은 인상을 풀더니 말했다.
"미켈스 백작,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소. 나는 저들을 처음 보오. 혹시나 우리 사냥팀이 잘못했을 순 있지만, 난 전혀 모르는 일이오! 그러지 말고 문을 열고 이야기합시다. 만약 우리 사냥팀이 그런 악독한 일을 했다면 모두 찾아서 내가 직접 처형하겠소."
"카악! 퉤!"
그때 한 기간트 작업자가 침을 뱉었다.
"야! 이 개자식아! 나는 네놈을 기억한다! 우리가 개처럼 끌려왔을 때 보지 않았느냐!"
"네놈이 우리 둘째 공자님을 죽이고 우리가 모은 부산물과 마석을 챙긴 기사를 칭찬한 것을 봤다. 이 똥물에 튀겨 죽일 놈아!"
"에라이! 지옥에나 떨어져라!"
기간트 작업자들이 침까지 튀며 거친 욕을 내뱉었다.
"크윽!"
바하쿰 백작은 분한지 입술을 깨물었다.
더는 이야기해봤자 소용없는 짓임을 알고 있었다.
백작은 몸을 돌려 마차 뒤로 이동했다.
그리고 알리만 중령을 불렀다.
"정말 카야킨 기지까지 소식이 전해졌을까?"
알리만 중령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카멜 전진 기지의 기간트 숫자는 저희와 비슷한 수준입니다. 그런데 지금 절반도 안 되는 우리 기간트 규모를 보고 공격하지 않는 것을 보면, 저들의 말처럼 카야킨과 다른 전진 기지에 소식을 알리기 위해 기간트를 파견한 것 같습니다."
"그럼 큰일이 아닌가! 헬다임 장벽에도 알려진다는 말이고."
"그렇습니다. 최대한 빨리 이동해야 합니다."
그래도 알리만 중령이 완전 바보는 아니었다.
"그런데 식량도 부족하고,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이냐?"
"여기서 두 달 거리에 아리칸 공국의 노바스 전진 기지가 있지 않습니까. 일단 그쪽으로 이동해서 아리칸 공국의 게이트를 넘어 살루스로 돌아가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일단 마차를 모두 버리고······."
"뭐라? 그럴 순 없다. 이 마석과 부산물을 가져가지 않는다면, 살루스에 무사히 도착하더라도 우린 목이 잘릴 것이다."
"하지만 길도 험하고 마차 때문에 이동 속도가 배는 느려질 겁니다."
"그럼 더 말씨름할 시간이 없다. 당장 노바스 전진 기지로 간다."
"하아! 알겠습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바하쿰 백작의 생각이 저렇게 짧다니, 한숨이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부터 살리고 봐야지, 자신의 목만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작 8대의 기간트로 이 많은 마차와 인원을 전부 보호하며 노바스까지 갈 수 있을까?
사실 저들이 모두 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카멜 전진 기지에 투항하는 방법뿐이었다.
그리고 무사히 노바스 전진 기지까지 간다고 해도 아리칸 공국이 마석과 부산물을 가진 그들을 그냥 통과시켜 줄까?
그것도 그동안 제국의 그늘에서 사냥했던 자들을?
저들의 말로는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사령관을 잘 만나는 것도 복이로구나······.'
그렇게 살루스 전진 기지의 기간트와 사람들은 모두 떠났다.
난 입구로 다가가 내 자동인형 짹과 연결을 시도했고, 곧 운명의 실타래 범위에 그가 잡혔다.
그리고 그의 경험치가 정산되어 들어왔다.
***
"충! 어서 오십시오!"
글래디스가 내게 경례했다.
"덕분에 기지 안으로 쉽게 들어오긴 했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나?"
"우리가 도착하고 이틀 후에 용병들과 드워프들이 들어오지 뭡니까. 그리고 중위님의 정보원 짹과 르블로 기간트 작업자들에게 살루스 왕국의 만행을 듣게 됐습니다."
그건 내가 짹에게 글래디스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시킨 것이었다.
"그래서 제가 르블로 작업자들을 미켈스 백작께 데려갔습니다."
"잘했군. 그런데 왜 자넨, 카야킨으로 출발을 안 했지?"
"그거야 중위님이 위험에 처해 있을 것 같아서 지원 병력이 도착하면 함께 살루스 기지로 가려고 했습니다. 저는 중위님의 호위가 최우선입니다."
날 걱정하는 건가?
글래디스의 아부 실력이 늘었네.
"그런데 왜 살루스 전진 기지의 기간트와 사람들이 이리 몰려온 겁니까?"
"그건 내가 알지. 살루스 전진 기지에 아주 무서운 괴물이 살 거든."
"네? 설마? 그 얼음 계곡의 괴수가?"
"그건 아니고."
그때였다.
익숙한 얼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에테나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녀의 눈가에 살짝 이슬이 맺힌 것 같기도 하고.
"제발 몸을 조심해라!"
마르실이 인상을 찡그리고 말했다.
"오! 내 걱정을 해주는 거야?"
"네가 죽으면 우린 시노우엘님을 구할 수가 없다."
"아! 그거였냐······."
그때 거구의 오크들이 다가왔다.
"쿠오크! 타일러여! 난 그대가 무사히 올 거라고 믿었다."
"쿠훌린 고생했다."
난 오크들에게 좋은 소식을 알렸다.
"이번에 카야킨으로 돌아가면 내가 말한 것처럼 오크들을 전부 살루스 전진 기지로 보내라. 이제 그곳이 오크들의 집이다!"
"쿠오오오크! 우리도 집이 생겼다!"
"쿠오크! 쿠오크!"
오크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펼쳐 들며 환호했다.
무슨 뜻인진 알았지만, 기분은 썩 좋진 않았다.
오크 용병들은 대수림에서 활동하지만 변변한 거처나 집도 없었다.
그저 일이 생기면 움직이고, 아니면 카야킨 거주 구역 외곽에 노숙을 하고 용병 일로 번 돈으로 음식을 사 먹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오크 대족장의 영혼을 이은 내가 이번에 쿠훌린과 오크 용병들에게 약속했다.
진짜 집을 갖게 해주겠다고.
'되게 좋아하네.'
물론 공짜는 아니다.
대신 그들에게 살루스 전진 기지를 지키는 일을 맡겼다.
식량은 내가 공급해 주기로 했고, 무기 역시 내가 챙겨주기로 했다.
일단 지금 살루스 기지엔 식량이 제법 있었고, 나중에 부족한 것은 카야킨 전진 기지에서 공급받을 생각이었다.
이번에 카야킨에 돌아가면 커널 대령과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왠지 저 오크들이 욕을 하는 것 같은데?"
타냐 블랙이 오크가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들며 내게 향하는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타냐가 너무 반가웠다.
내가 구한 드워프가 240명이나 됐다.
어떻게 카야킨 전지 기지까지 데리고 갈지 고민이었지만, 이젠 그녀와 용병들이 있으니 해결됐다.
"아직 남아 있는 거 보니, 용병이 의리 있군."
"18일 기다렸으니, 금화는 꼭 정산해 주시오."
"하하! 용병은 역시 돈이군."
"피보다 진한 것이 돈이란 격언도 있소."
타냐 블랙이 엄지를 검지 위에 올리더니, 손가락을 비비며 금화를 만지는 시늉을 했다.
평소 돈을 밝히는 저 행동도 오늘은 반가웠다.
정들었나?
거신인형과 두 자동인형이 없어서 좀 쓸쓸했는데, 왠지 이들하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뒤쪽에 기간트에 타고 있는 콜벳 대위를 발견했다.
"콜벳 대위님은 뭘 하는 거야?"
글래디스가 대신 대답했다.
"우리 귀중한 물건이 든 마차를 지키고 있습니다."
"아!"
설마, 온종일 저러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근데 짹은 또 사라졌네요?"
글래디스가 짹을 찾았다.
하지만 찾진 못할 것이다.
피곤하다며 내 인형의 집에 들어가 쉬고 있었으니까.
"근데 왜 짹이 계속 암살자의 얼굴을 하고 있죠?"
"암살자 얼굴이 마음에 드나 보지."
"네?"
글래디스가 짹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은가 보다.
"드워프들은?"
"숙소에서 잘 쉬고 있습니다. 언제 출발할지 모르니, 체력부터 회복시켜야죠."
"잘했군."
"타일러 중위님도 피곤하실 텐데. 그만 쉬시죠."
"아니! 어서 준비하게 바로 카야킨으로 출발할 테니까."
"네? 바로요?"
카야킨으로 가서 오크들을 전진 기지로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윌리엄 사령관에게 가서 살루스 전진 기지를 이계 난민들의 전진 기지로 허락받을 생각이었다.
이미 전입은 했으니, 명령서만 받으면 된다.
적당한 거래 방식도 이미 생각해뒀고.
물론 비어있는 살루스 전진 기지를 당장 누가 차지할 염려는 없었다.
전진 기지를 차지하는 건 쉽겠지만, 그걸 지키기 위해선 큰돈이 필요하니까.
기지를 지킬 기간트와 마석 배터리, 병사들이 필요했고, 병참과 식량도 필요했다.
기간트를 수리 점검할 정비사도 필요했고, 기지를 유지 보수할 인력도 필요했다.
살루스 전진 기지에 마석 광산이 있는 건 대부분 알고 있겠지만, 채굴하는 양이 많지 않아서 그것만 봐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것도 다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살루스 왕국도 아주 값싼 노동력인 드워프를 데려다 쓴 것이고.
하지만 살루스 전진 기지의 소식이 외부로 전해지면, 제국의 다른 영지나 또 다른 왕국에서 빈 전진 기지를 사용한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하루빨리 헬다임으로 돌아가서 내가 전진 기지를 선점해야 했다.
정치는 싫었지만, 정치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
다들 출발 준비를 서두르자, 2시간 만에 채비가 갖춰졌다.
마지막 점검을 하는데, 갑자기 입구가 활짝 열렸다.
'설마, 살루스 기지 사람들이 돌아왔나?'
끼이이잉! 쿵! 쿵! 쿵!
곧 기간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 오리지널 기간트가 왜 여기에!'
붉은 장갑으로 강화한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로 룩급 기간트 2대, 비숍급 기간트 4대, 나이트급 기간트 2대가 줄줄이 들어왔다.
"오! 케나스 영지 사냥팀이군요!"
글래디스가 입을 벌렸다.
"케나스 영지?"
"웨슬리 슈나이더 백작께서 이끄는 제국 최고의 괴수 사냥팀이죠."
"최고의 사냥팀이라고? 그런데 저들이 왜 이곳에 왔지?"
"저도 모르죠. 원래 이곳으로 오는 길이었나 보죠."
그때 미켈스 백작과 기사들이 입구로 마중 나왔다.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에서 백발의 기사가 내렸다.
'저 사람이 웨슬리 백작이군.'
두 백작은 그 자리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웨슬리 슈나이더 백작이 기간트에 올라탔다.
케나스 사냥팀은 무서운 속도로 전진 기지를 떠났다.
"쯧쯧. 살루스 놈들도 운이 없군요. 하필 제국 최고의 사냥팀에게 걸렸으니······."
글래디스의 말처럼 바하쿰 백작이나 살루스 기간트 기사들에겐 악몽이 될 것이다.
자신들과 전혀 상관없는 르블로 사냥팀을 죽였으니, 인과응보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병사들이나 사람들은 운이 좋았다.
곧 카멜 전진 기지로 올 테니까.
'잠깐, 그럼 웨슬리 슈나이더 백작이 마석과 부산물도 챙겨서 가지고 오겠네.'
살루스 왕국의 악행을 제보하고, 르블로 작업자들을 구한 공에다가 제국에 마석과 부산물을 한가득 안긴 공도 생긴 셈이었다.
모든 정보를 제공한 것은 나니까.
36. 내가 천재였다.
36. 내가 천재였다.
대수림에 어둠이 찾아왔다.
그런데 공포가 가득할 야영지에 왠지 모를 훈훈함이 깃든다.
지켜주는 기간트와 병사들이 많아서인가?
"불침번을 서지 않아서 좋긴 한데, 돈 받고 놀고 있는 거 같아 왠지 찝찝하단 말이야."
타냐 블랙이 모닥불에 구운 육포를 씹어먹으며 슬쩍 내 눈치를 봤다.
그러자 대머리 용병 월터가 피식 웃었다.
"난 좋은데 뭘 그러슈?"
"뭐가 좋은데?"
"기사들이 지켜주니까 잠도 편하게 자고, 여유롭게 캠핑 기분도 내고, 또 이렇게 육포도 구워 먹고."
"지켜주긴. 개뿔! 네 머리가 왜 빡빡 인줄 알아? 그게 다 공짜 좋아해서 그런 거야."
월터가 뭔가 억울한 표정으로 자신의 대머리를 만졌다.
"신체 약점 잡기 있수? 난 대장이 괴수 잡다가 기간트 안에서 똥 지린 거, 아무한테도 말 안 했수. 그때 구린내가 얼마나 심하던지······."
"뭐, 이 새끼야?"
빡!
타냐 블랙의 손이 번개처럼 날아가 머리를 가격했다.
대머리에 붉은 손바닥 자국이 났다.
"사내새끼가 쪼잔하게. 옛날 일이나 들추고. 불알이나 떼라!"
용병들의 대화는 왜 이렇게 저렴한 걸까?
하도 들어서 그런지 이젠 구수하게 느껴졌다.
우린 카멜 기지를 떠난 지 일주일이나 됐다.
케니스 영지의 사냥팀, 카멜 전진 기지의 기간트와 병력이 합류했고, 살루스 포로들과 마석, 부산물까지 함께 이동했기에 행렬 규모가 몇 배나 커졌다.
사실은 우리가 꼽사리 낀 것이지만.
난 카멜 기지에서 이틀을 기다렸다가 이들과 함께 출발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혹시나 케니스 영지의 사냥팀이 살루스 전진 기지로 가는 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살루스 기간트와 전투는 순식간에 끝났고, 승전한 케니스 사냥팀은 그날 저녁에 포로들을 카멜 전진 기지로 끌고 왔다.
사실 살루스 병사들과 사람들은 알아서 따라왔다.
그냥 있으면 대수림에서 죽을 테니까.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함께 카야킨 전진 기지로 이동하고 있었다.
"타냐, 심심하면 정보나 좀 알려주시오. 저기 웨슬리 백작은 어떤 사람이오?"
내 물음에 타냐가 웨슬리 백작이 머무는 천막 쪽을 슬쩍 쳐다보고 고개를 돌렸다.
"뭐, 천재라고 할까? 당연히 황립 사관학교를 졸업했고. 몇 년 전까진 카야킨 전진 기지에 있었소."
"카야킨에? 그런데 지금은 왜 케니스 영지군에 있는 거요? 저런 실력이면 별을 달아도 진작 달았을 것 같은데?"
"그 말은 맞소. 별이라면 진작 달 수 있었지. 카야킨 전진 기지 사령관 자리도 두 번이나 앉을 수 있었는데, 두 번 다 고사했다고 들었소."
난 순간 이해할 순 없었다.
케니스는 대영지였고, 백작의 작위까지 받았다고 해도, 당연히 제국군 소속 장군의 입김이 훨씬 강했다. 물론 대우도 더 좋았고, 제국 내 위상이나 지위도 더 높았다.
그때 옆에 있던 글래디스가 말을 이었다.
"웨슬리 경이 카야킨 기지 사령관 자리를 거절한 이야기는 꽤 유명합니다."
"그래? 궁금하군."
"첫 번째 사령관 자리를 거절한 이유는 자신은 현장에서 괴수를 잡는 체질이지, 자리에 앉아서 일하는 체질이 아니란 이유에서였고. 두 번짼 저 비브르 기간트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글래디스가 천막 뒤쪽에 세워진 11미터짜리 오리지널 기간트를 가리켰다.
"웨슬리 경은 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뛰어난 기사라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그런데 의무 복무 기간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이곳 대수림으로 발령나서 계속 여기서 근무했습니다. 그래도 워낙 실력이 좋은 분이시라 엄청난 실력으로 괴수를 사냥해 이름을 높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케니스 영지가 3년 전 비브르를 맡기면서 포섭했다고 들었습니다."
자연스레 고개가 끄덕여졌다.
오리지널 기간트가 어디 흔한가.
제국에 27대밖에 없는 데다가 룩급 기간트는 몇 대 되지도 않았다. 그걸 주면서 잡고 싶을 정도면, 웨슬리가 천재 중의 천재란 소리였다.
그런데 그런 천재가 왜 아직까지 대수림에 있는 거지?
천성적으로 싸움을 좋아하나? 아님 사연이 있나?
슬쩍 천재가 타는 비브르 기간트를 쳐다봤다.
제법 떨어져 있음에도 그 웅장한 자태가 압권이었다.
'대체 보호 장갑을 얼마나 붙인 거야?'
내 거신인형인 암 드로운의 갑옷은 중세 기사가 입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얼음 계곡에서 찾은 다른 거신의 갑옷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지금 보고 있는 비브르나 엠버 중령의 베가스도 보호 장갑을 많이 붙여 갑옷보단 로봇의 형태에 가까웠다.
"응? 어디 가세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글래디스가 물었다.
"케니스 병사 중에서 자네가 안다는 하사관 있지?"
"리어만 하사 말씀입니까?"
"그래, 지금 사냥팀의 기간트를 지키고 있으니까, 잠시 비브르 좀 구경시켜달라고 해보게."
"네? 네,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글래디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후.
우린 10미터 정도 떨어진 아주 가까운 곳에서 오리지널 기간트를 볼 수 있었다.
더 가까이 가서 만져보고 싶었지만, 그건 권한 밖이었다.
그래도 운명의 실을 카멜 기지 출발 전에 리어만 하사에게 연결해 놓았기에 이런 기회도 잡을 수 있었다.
투구와 어깨, 팔꿈치, 무릎, 허벅지, 발등 그리고 등에 보호 장갑이 덧대어 있었다.
특히 등은 마석 배터리를 보호하기 위해 장갑이 이중으로 되어 있었다.
나중에 암 드로운의 구멍 난 갑옷을 고쳐 줄 때, 나도 저런 보호 장갑을 추가해 줄 생각이었다.
그래야 거신인형이 다들 기간트라고 생각할 테니까!
그리고 투구의 눈 부분에 선글라스 같은 거라도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밤이나 낮이나 너무 잘 보였다.
물론 그전까지 드워프의 기간트 기술력이 올라와야 했지만.
"그대들은 누구지?"
뒤에서 들리는 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백발의 사내가 서 있었다.
"충! 죄송합니다. 주무시는 줄 알았습니다. 전 정보국 소속의 타일러 빈스 중위입니다."
"뭐 정보국? 정보국 장교가 왜 대수림에 있는 거지?"
"네?"
웨슬리 슈나이더는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듯이 날 노려봤다.
순간 당황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것도 아니고.
"흥! 이 새끼들이 이젠 대수림까지 쫓아와 날 괴롭히는 거냐!"
그는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옆에 있던 글래디스 하사가 나섰다.
"타일러 중위님은 이번에 살루스 전진 기지의 만행을 알아내신 분입니다. 르블로 기간트 작업자를 구하시기도 했고요."
"응? 아! 그 특별 수사관이었군. 알아보지 못해 미안하네."
"아닙니다."
웨슬리 백작이 갑자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래도 과거에 정보국과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는 것 같았다.
가까이서 본 웨슬리 백작은 백발이 무성했지만, 피부나 생김새는 30대 후반 정도로 커널 대령보다 더 젊어 보였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천재였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정보국 장교도 기간트에 관심이 있나?"
"오리지널 기간트가 아닙니까. 누가 관심이 없겠습니까."
"솔직하군."
"실은 제가 이번에 대수림에 와서 마나를 깨우쳤습니다. 그래서 더 관심이 생겼습니다."
"마나를 깨우치다니 축하하네. 하긴 대수림은 마나가 풍부해서 각성하긴 그만이지."
웨슬리 백작은 처음에 내게 화를 낸 것이 미안했는지, 계속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마나를 깨우친 지는 얼마나 됐나?"
"한 석 달쯤 된 것 같습니다. 지금은 작업용 기간트에 탈 수 있습니다."
"석 달만에?"
웨슬리 백작이 날 빤히 쳐다봤다.
"재미있는 친구군. 아무튼, 열심히 노력하면 폰급 기간트까진 탈 수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웨슬리 백작은 내 어깨를 다독이며 칭찬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날 빤히 쳐다봤다.
"어때? 한번 타보겠나?"
"네?"
"내 비브르 말이네."
"제가요?"
"괜찮네. 그대의 공이 얼마나 큰가! 그대가 살루스의 만행을 알아내지 못했다면, 또 다른 영지의 사냥팀이 당할 뻔했어. 그리고 르블로의 기간트 작업자들을 구하기도 했고. 그 정도 공이면 내 기간트에 타보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네. 어차피 자네가 탄다고 해서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기분만 한번 내 보란 소리네."
"아! 감사합니다."
넙죽 받아들였다.
이건 행운이었다.
사실 겉모양만 몇 번 살펴봤지, 내부를 볼 기회는 없었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오리지널 기간트의 내부를 보는 것이었다.
웨슬리 백작은 날 자신의 기간트로 안내했다.
착! 치이이잉! 쿵!
웨슬리 백작이 다리에 손을 대자, 기간트 해치가 열리며 사다리가 내려왔다.
일반 기간트와 달리 자동이네!
방금은 어떻게 한 걸까?
내가 살짝 다리에 손을 대 봤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지문인식은 아닐 거고?
세포 인식 같은 건가?
눈과 머리가 동시에 부지런히 돌아갔다.
난 먼저 기간트에 올라가 해치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다른 기간트와 크게 다르진 않았다.
단지 공간이 조금 넓다는 정도.
"뭔가 안정감이 느껴지는군요."
날 따라 입구까지 올라온 웨슬리 백작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도 생도 시절에 이런 기간트에 타고 싶어서 사고 친 적이 있었지."
"해치를 한번 닫아 볼 수 있겠습니까?"
"뭐?"
웨슬리 백작이 다시 날 빤히 쳐다봤다.
"그냥 안에 탄 기분이 어떤지 느껴보고 싶어서요."
그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5분 정도 기분낼 시간을 주지."
"충! 감사합니다."
웨슬리 백작이 내려가고, 기간트 해치가 닫혔다.
'자! 이제 마나를 눈에 집중해 볼까?'
시간이 없었다.
오리지널 기간트에 탈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니었다.
최대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알아내야 했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고, 눈에서 광채가 뿜어졌다.
'역시 사방에 푸른 빛이 가득하네!'
등에서 뿜어내는 마석 배터리의 광채가 눈부실 정도였다.
그리고 주변에 수십, 수백 개의 마법진과 거신의 언어도 살짝 푸른 빛을 뿜고 있었다.
모두 마석이 어느 정도 함유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난 천천히 가까운 곳부터 살폈다.
내부는 내가 나포한 기간트들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거신의 언어가 빼곡히 새겨져 있었고, 뼈대나 관절 부분에 마법진이 더 많다는 것뿐이었다.
크기가 크니까 마법진이 더 많은가 보다.
난 조금 더 먼 곳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원래 거신의 갑옷이었던 부분을 살폈다.
'응? 붉은 선?'
다른 마법진은 모두 푸른 선으로 그러져 있었는데, 갑옷의 양 가슴 사이에 있는 마법진은 홀로 붉은 선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왜 반쪽이지?'
마법진이 새겨지다 만 것인지, 아니면 지워졌는지 딱 절반만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 거신인형의 갑옷에도 비슷한 마법진이 있었던 거 같았다.
물론 붉은빛은 아니었지만.
'이게 무슨 역할이 있을 텐데······.'
시간이 거의 됐기에 아쉽지만 여기서 끝내야 했다.
그래도 오리지널 기간트 내부도 다른 일반 기간트와 특별히 다를 건 없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러니 오리지널 기간트가 강한 것은 역시 저 갑옷과 장비에 새겨진 거신의 언어와 마법진 때문이었다.
눈으로 뿜어내던 마나를 거둬들이려 했을 때였다.
기간트의 왼손에도 붉은 선의 마법진이 보였다.
정확히는 손바닥에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이것도 반쪽 뿐이네!'
어? 손을 가슴에 붙이면 얼추 그림이 맞을 거 같은데?
마치 퍼즐처럼 딱 맞춰질 것 같았다.
난 손과 가슴에 적혀 있는 마법진 안의 언어를 붙여서 읽었다.
[플레임 익스플로전.]
그러니까 화염 폭발인가?
그 순간 암 드로운이 동굴에서 S급 괴수인 드라우켄과 싸웠을 때 장면이 떠올랐다.
그는 마법으로 자신의 방패를 중심으로 3배나 크고 두꺼운 얼음 방패를 만들어 괴수의 일격을 막았다.
그런데 얼음 방패를 만들기 직전에 방패를 든 손을 가슴에 댔던 장면이 있었다.
그리고 마법을 사용하면서 얼음 방패라고 외쳤던 것도 기억났다.
'이게 이 마법진을 활성화시켜 거신의 마법을 쓰게 하는 방법일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없었기에 바로 실험해볼 생각이었다.
내 몸속에 마나를 회전시키고 정신을 집중했다.
곧 등 뒤에서 6개의 마석 배터리가 뿜고 있는 마나가 느껴졌다.
먼저 그 마나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파팟!
시야가 밝아지며 야영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거신인형과 자주 영혼 이동을 했기에 룩급 기간트의 시야 높이는 익숙했다.
그보다 마나가 너무 빨리 소모되고 있었다.
재빨리 내 마나와 마석 배터러의 마나를 최대한 팔로 보냈다.
내 마나가 부족했기에 서둘러야 했다.
운명의 실로 마법인형을 조종하듯이 흐르는 마나를 근육처럼 조종해 팔을 움직였다.
그러자 비브르의 팔과 손이 조금씩 움직였고, 곧 가슴까지 올라왔다.
지금이다!
왼손을 가슴에 밀착시키고 마나를 동시에 손과 가슴으로 보냈다.
그 순간 붉은 마법진이 빛을 내더니 하나로 합쳐······.
'아니지!'
파앗!
손을 뗐다.
그러자 순식간에 암흑이 찾아왔다.
내 마나가 바닥이 났다.
'휴! 실수할 뻔했다.'
등에 식은 땀이 흘렀다.
지금 밖에는 지켜보는 눈이 많았다.
혹시나 마법진이 활성화되고, 거신의 화염 마법이라도 발현되는 날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늦지 않게 멈춰서 다행이야.
나중에 내 거신인형을 만나서 실험해봐야겠다.
암 드로운이 얼음 방패 마법을 쓸 수 있다면, 그건 엄청난 전력 향상이었다.
S급 괴수의 일격도 막아냈으니까.
치이이익! 철컹!
그 순간 기간트 해치가 열렸다.
난 밖으로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자, 자네! 지금 내 기간트의 팔을 움직인 건가?"
웨슬리 백작이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글래디스와 주변의 병사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겨우 팔 하나 움직였을 뿐인데 왜 이러지?'
***
콜벳 대위가 놀란 표정으로 달려왔다.
"정말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를 움직인 겁니까?"
"고작 팔 하나 살짝 들었을 뿐입니다."
"고작 팔이라니요! 아무리 마나가 많아도 싱크로율이 높지 않다면 오리지널 기간트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고요!"
나도 일전에 윌리엄 사령관에게 들은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때 난 마나도 없었기에 싱크로율에 대해선 깊게 생각해 보진 않았다.
그저 마나를 느끼고, 거신인형에게 자주 영혼 이동을 하다보니, 마나도 늘었고 얼마 전부터 작업용 기간트에 탔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냥 작업용 기간트에 탔을 때처럼 마석 배터리의 마나를 느끼고 내 마나와 함께 흘려보냈을 뿐인데······.
'어? 혹시 내가 거신인형과 자주 영혼 이동을 하면서 얻은 스킬이 하나도 없는 게 아니라, 기간트 싱크로율을 얻은 건가!'
그럼 조잡한 스킬 100개보다도 더 좋은 걸 얻은 것이었다.
콜벳 대위가 부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그럼 내가 기간트 천재였네!'
어깨가 올라가고 가슴이 웅장해 진다.
순간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휘몰아쳤다.
내가 오리지널 기간트에 타고, 암 드로운과 내 마법인형들이 기간트 군단을 이루어 전장을 누비고 대수림의 괴수를 물리치는 그림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렇게 된다면 영주가 된다는 게 꿈은 아니네.
아니지! 이미 기간트도 제법 있고, 마석과 부산물도 인형의 집에 가득있었다.
기간트를 타는 마법인형도 넷이나 됐고, 날 믿고 따르는 오크도 있었고, 이번에 살루스 전진 기지까지 가져간다면, 이미 영주나 다름없었다.
'아! 이거 윌리엄 사령관에게 오리지널 기간트를 하나 달라고 졸라볼까?'
37. 진짜 천재.
37. 진짜 천재.
누군가의 주목과 관심을 받는다.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진따 타일러가 언제 이런 관심을 받았겠나.
물론 전생의 헌터 고강해도 그다지 관심이나 대우는 받지 못했다.
몇몇 동료들은 알고 있었지만, 죽은 자를 일으키고 함께 싸웠던 동료를 마법인형으로 만드는 내 능력은 사령술사나 네크로맨서라고 오인을 받았고, 사람들은 두려워했고 헌터들은 기분 나빠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관심은 달랐다.
이 세상에 제일 인기 있는 재능인 기간트 기사의 잠재력을 인정받았다.
웨슬리 슈나이더 백작은 심심하면 찾아와 의무 복무 기간이 끝나면 케니스 영지로 오는 게 어떻겠냐는 제의를 했고, 덕분에 오리지널 기간트를 2번이나 더 타볼 수 있었다. 어젯밤엔 카멜 영지의 사냥팀장이 찾아와 전역 후에 카멜 영지로 오면 정원이 딸린 이층집과 제국군보다 3배 많은 급료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별로 내키진 않았지만, 타냐 블랙은 트라스의 개 용병대 부대장 자리를 주겠다나······.
지금 부대장은 대머리 월터였다.
'기간트 천재는 피곤하군.'
물론 시기하는 기사들이 많은 건 천재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콜벳 대위의 말로는 지금이야 그저 부러워하는 수준이지만 내 마나가 늘어나고 기간트에 타게 되면 시기와 질투가 심해질 거라고 했다.
가령 나와 비슷한 마나를 가진 기사들이 폰급 기간트를 겨우 탈 때, 난 폰급 오리지널 기간트를 탈 수 있었고, 일반 기간트는 그보다 두 단계 높은 비숍급까지도 탈 수 있다고 했다.
비록 지금은 마나가 부족했기에 작업용 기간트에 타고 있지만.
마나만 늘어나면, 다 죽었어!
'그런데 오리지널 기간트를 구 할 데가 없을까?'
오리지널 기간트에 타보고 나니 살짝 욕심이 생겼다.
이번에 얼음 계곡에서 거신들의 갑옷을 네 개나 확보했지만, 내 것은 하나도 없었다.
물론 가장 좋은 건 내 거신인형이 챙겼지만.
아마도 그 갑옷들이 윌리엄 사령관에게 가면, 그가 밀고 있다는 황자에게 갈 것이고, 황자는 기간트로 만들어 자기 라인 중에서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길 것이다.
불현듯 거신 암 드로운이 죽기 직전에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거신 갑옷의 비밀을 알고 싶으면 메제트의 탑으로 가라!]
그는 분명 내 머릿속의 의식을 읽었다.
그러니 내가 기간트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그래서 저 말을 남긴 것이다.
만약 거신 갑옷의 비밀을 알 수 있다면, 기간트가 아니라 오리지널 기간트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아직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왠지 가능할 것 같았다.
난 거신의 언어도 마스터했고, 마법진도 조금씩 배우고 있었고, 거신에게 마나를 보는 법도 배웠다.
이 세계에서 누군가 오리지널 기간트를 만든다면 내가 가장 가능성이 컸다.
물론 메제트의 탑부터 발견해야겠지만.
'그런데 메제트의 탑이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 보니 거신이 살던 시대와 지금 시대는 엄청난 세월과 엄청난 시간 간극이 있었다.
그러니 그 시대에 만들어진 탑이 지금까지 남아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되겠나?
십중팔구는 먼지가 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아니지! 헬다임 장벽도 멀쩡하잖아!'
거신들이 만들었다면 장벽처럼 메제트의 탑도 멀쩡하게 남아 있을 가능성이 컸다.
황궁 도서관이라도 뒤져 봐야 하나?
이건 정보가 필요한 일이었고, 하루아침에 알아낼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일단 살루스 전진 기지와 기간트를 만드는 것부터 해결하자.'
아직 걷지도 못했는데, 뛰는 걸 고민하는 건 미련한 짓이니까.
"타일러여! 자는가?"
드워프들의 리더인 라스칼의 목소리였다.
어차피 잠도 오지 않았고, 마차 밖으로 나갔다.
"왜 쉬지 않고?"
"덕분에 충분히 쉬었다. 지금 이야기를 할 수 있겠나?"
"드워프와의 대화는 언제나 환영이지."
라스칼은 반쪽이던 몸이 전부 회복되고, 이젠 억센 근육과 윤기 나는 수염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와는 그동안 대화를 자주 나눴기에 제법 친해졌다.
다들 자는 시간이었기에 우린 조용한 모닥불을 찾아 앉았다.
"내일이면 카야킨에 도착하는군."
"아직 장벽으로 한 달 반을 더 가야 해."
"나도 안다. 글러드 왕자가 기뻐할 모습이 선하군."
"너희가 갱도에서 잘 버텼기에 이런 날도 오는 거라고."
라스칼이 살짝 감동 어린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타일러여! 그대는 왜 우리 드워프를 도와주는가?"
생뚱맞은 질문에 잠시 생각했다.
"글쎄. 뭔가 동질감이 느껴졌달까?"
"동질감? 드워프와 인간이?"
"겉모습 말고 처지가 비슷하다는 거야."
"처지?"
라스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는 가지 않지만, 나와 드워프 형제들은 고맙게 생각한다."
"고마울 필요 없다니까. 난 글러드 왕자와 의형제야. 그러니 너희들과도 형제지. 형제끼리는 서로 돕는 거야."
라스칼이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지금은 내가 많이 도와줄게.
빨리 기간트나 만들어줘.
마석 배터리도 만들어 주면 더 좋고.
지금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오크와 드워프뿐이었다.
"타일러여! 저자들은 이제 어찌 되는 건가?"
라스칼이 밧줄에 묶인 상태로 자는 살루스 포로들을 쳐다봤다.
"제국의 귀족과 기사를 죽였으니, 책임자나 장교들은 헬다임으로 끌려가 목이 잘릴 거고, 사람들은 카야킨에서 또 다른 전진 기지로 배치되겠지."
라스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정말 오크들이 살루스 전진 기지로 이주하는 건가?"
"내가 말했잖아. 이제 그곳은 내가 장악했다고. 오크들은 이제 그곳에서 살 거야. 그곳이 집이고."
라스칼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우린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드워프 형제들과 이야기를 했다."
"······?"
"우린 살루스 전진 기지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글러드 왕자가 장벽 너머에서 기다린다니까."
"나도 안다. 하지만 우리가 전부 장벽을 넘어간다면, 타일러도 왕자도 곤란할 것이다."
"뭐?"
라스칼이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거지?
내가 뭐라고 한 적도 없는데?
"우리도 그동안 이곳에서 보고 느낀 것이 있다. 살루스 놈들이 왕자님과 대장장이들을 끌고 간 것은 괴수의 부산물을 가공하는 기술을 봤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들에게 드워프의 대장장이 기술이 필요하다는 뜻이고, 잘은 몰라도 타일러 그대도 드워프의 기술이 필요하겠지."
너무 정곡을 찔렀다.
난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드워프의 기술이 필요해. 그래서 너희를 돕는 이유도 있어. 하지만 꼭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너희를 도울 거야. 글러드와도 그렇게 약속했고."
"타일러여! 그대의 마음은 우리도 알고 있다. 그대의 은혜는 반드시 갚겠다. 하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것이 아니다. 드워프라고 모두 다 같은 재능이 있는 건 아니다. 대장장이의 재능을 가진 드워프는 너와 함께 장벽 넘어 왕자님께 갈 것이다. 하지만 나 같은 전사나, 건축가, 상인, 광부들은 굳이 장벽을 넘어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니, 괜찮다니까. 대장장이들이 날 돕는다면, 다른 드워프들은 편히 살아도 돼. 지금 글러드 왕자가 너희들의 거주 구역도 짓고 있어."
라스칼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드워프는 변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망했다. 그리고 이제 이곳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 우리 스스로 일어서지 못한다면 미래가 없다. 오크도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용병 일을 하고 괴수와 싸운다고 들었다. 우리가 비록 오크처럼 강하진 않지만, 뛰어난 건축 기술이 있고, 뛰어난 광부들과 셈에 밝은 상인들이 있다. 그러니 장벽 넘어보다 이곳 살루스 기지에서 우리가 할 일이 많을 것이다."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난 그저 왕자에게 이들을 데려다주고, 기간트를 만들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드워프는 지금 생존과 그들의 미래를 말하고 있었다.
"살루스 기지는 우리에게 악몽과도 같은 곳이지만, 그곳에서 자리를 잡는다면 그 의미는 더욱 클 것이다. 광부들은 전보다 더 효율적이고 열심히 일해 마석을 캐서 금화를 벌 것이고, 그 금화로 성벽과 성문은 더 튼튼하고 높게 짓고, 거주 구역은 더 웅장하고 아름답게 꾸밀 것이다. 타일러여! 드워프의 능력을 믿어봐라!"
라스칼의 진심이 느껴졌기에 살짝 눈물이 맺혔다.
어쩌면 드워프들의 진정한 리더는 글러드 왕자가 아니라 라스칼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말린 순 없군. 나도 솔직하게 말하지. 너희가 살루스 기지로 간다면 사실 나는 대환영이다. 난 그곳에 이계 난민들이 기거하고 평화롭게 살 기지를 만들 것이고, 너희가 도와준다면 그 일이 훨씬 빠르고 수월하겠지."
라스칼이 피식 웃었다.
"그거 보게. 우린 이곳에서 할 일이 많다니까."
"그리고 내가 한 가진 약속하지. 드워프가 날 도와준다면, 나도 드워프를 돕겠다."
"좋다! 타일러여! 그게 정당한 거래고, 서로 도움이 되는 길이다."
라스칼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속마음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나는 것도 복이구나.
처음으로 제대로 된 거래를 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을 하지."
"말해."
"혹여 대수림에 또 다른 드워프 부족에 대한 소식이 들어오면 내게 알려주게."
"다른 부족?"
라스칼은 깊은 한숨과 함께 미간을 찡그렸다.
아마도 과거를 회상하는 듯했다.
"우리 세상에 괴수가 출몰했고, 우린 끝까지 싸웠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괴수의 숫자는 너무 많고, 우린 버티고 버티다가 밀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여자와 아이, 노인들은 배를 타고 섬으로 도망쳤다. 우리 토그족과 여러 부족의 성인 드워프들은 그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끝까지 괴수를 막다가 차원 균열로 몸을 피한 것이다. 그러니 다른 부족의 드워프도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았어. 어차피 전진 기지에 드워프 언어를 아는 사람도 없으니, 소식이 들어오면 내게 먼저 알려올 거야. 그땐 바로 알려주지."
"고맙다 타일러여!"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그런데 다른 드워프 소식을 들으면 어떻게 하려고?"
"우린 생존한 드워프들을 모아 힘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우리 차원에 갇혀 있는 드워프를 구하러 가야 한다."
"그 섬으로 도망쳤다는 드워프들?"
"그렇다. 그 이후로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우린 가족들의 생사도 확인하지 못했다."
라스칼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도 가족을 저쪽 차원에 두고 온 것 같았다.
순간 내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나도 한땐 가족이 있었지······.
***
[카야킨 전진 기지]
당연히 떠들썩한 환영 행사는 없었다.
우리의 임무는 기밀이었고, 살루스 포로들 때문에 전진 기지가 발칵 뒤집혔으니까.
"충! 타일러 빈스 중위,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허허! 이게 대체 무슨 난리인가?"
커널 대령은 날 보자마자 다그쳤다.
"남은 거신 갑옷은 잘 가지고 왔나? 그리고 살루스 기지의 만행을 자네가 알아냈다며? 그런데 저 살루스 포로들은 다 뭔가? 왜 케니스 사냥팀과 카멜 사냥팀과 같이 온 거야? 어서 말해보게."
쿵!
난 두툼한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게 뭔가?"
"보고서입니다. 오면서 틈틈이 작성했습니다. 그걸 읽어 보시면 내막을 다 아실 겁니다."
"응?"
"전 피곤해서 좀 쉬겠습니다. 충!"
경례하고 바로 사령관실을 나섰다.
문을 닫을 때 슬쩍 커널 사령관의 어이없는 표정이 보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난 지금 시간이 없다.
곧 헬다임 전진 기지로 출발할 테니, 그 전에 오크들과 드워프들을 살루스 전진 기지로 보낼 준비를 끝내야 했다.
[보물섬]
기간트의 무덤 같은 곳에 왔다.
200년이나 된 기간트 쓰레기장이라 여전히 음침했다.
"앗! 나한테 용돈 준 착한 아저씨다!"
입구에서 혼자 놀고 있는 앨리슨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왜 혼자 있어?"
"혼자 아닌데! 오크들이랑 숨바꼭질하고 있어."
"아! 그래."
난 주머니에서 알사탕 한 봉지를 꺼냈다.
"자! 선물이야."
"오오!"
앨리슨은 사탕을 받자마자 하나를 바로 입에 넣었다.
아무리 대수림을 건너왔다지만, 사탕 가격이 얼마나 비싼지 내 한 달 급여를 다 쓸 정도였다.
'천재는 이런 애가 진짜 천재지.'
난 거신에게 마나를 눈에 집중하는 법을 배웠지만, 앨리슨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손으로 끊어진 마법진까지 연결한 진짜 천재였다.
난 앨리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할아버지에게 가자."
"응."
앨리슨은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11살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손이 작다.
"쿠오크! 타일러여, 왔는가!"
쿠훌린과 오크들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케네스 영감은 작업장에서 열심히 작업하고 있었다.
"그래 오크 무기는 다 만들었데?"
"쿠오크! 아직 100개가 부족하다."
"그래?"
하긴 혼자서 300명이 넘는 오크의 무기를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
그래도 삼 분의 이는 완성했으니, 이 정도면 바로 살루스 기지로 출발해도 될 것 같았다.
"쿠오크! 내 것은 이미 만들어졌다!"
쿠훌린은 창날이 생선 가시를 연상하는 괴이한 모양의 창을 들며 좋아했다.
상태창으로 살펴보니, 그래도 별 하나짜리 아이템이었다.
단순히 구형 기간트의 기체를 뜯어 만든 것 치고는 꽤 좋은 것이었다. 등급도 표시되고.
"쿠훌린! 하급 괴수들에겐 통할지 몰라도 큰 괴수한테는 안 되니까 조심해!"
"쿠오크! 타일러여! 우리도 알고 있다. 괴수는 강하다!"
특히 기간트엔 덤비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오크의 힘이 아무리 좋아도 기체에 박히지도 않을 테니까.
앨리슨은 옆에서 오크들과 장난까지 치며 스스럼없이 잘 놀고 있었다.
어른들은 오크가 무섭다며 가까이 가지도 않는데······.
'타냐 블랙은 아직인가?'
그녀와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크가 새로운 무기를 가졌다고 해도 대수림을 건너 살루스 기지로 가는 길은 매우 위험했다.
그래서 기간트가 있는 트라스의 개 용병대를 다시 고용하기로 했다.
난 기간트 팔로 된 의자에 앉았다.
품에서 종이 두 장을 꺼냈다.
비브르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에 2번 더 탈 기회가 있었기에 붉은 마법진을 몰래 그려왔다.
'마법진이라면 무슨 규칙이나 법칙이 있을 텐데······.'
그냥 통째로 외우자.
"나 그거 봤는데!"
언제 의자에 올라왔는지 앨리슨이 옆에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뭘 봤다고?"
"일곱 번째 산에 팔 잘린 기간트에 그 그림 있는데!"
"그, 그러니까 이 그림이 그려진 기간트가 일곱 번째 쓰레기 더미에 있다는 말이지?"
"응!"
앨리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쓰레기장에 오리지널 기간트가 있다는 거네!'
38. 오리지널 마장기.
38. 오리지널 마장기.
작업용 기간트 팔 위에 앨리슨을 조심히 태우고 일곱 번째 더미로 이동했다.
입구와 완전히 반대쪽이라 그런지 정말 주변 정리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아, 가끔 멈춰서 기간트로 길을 만들어야 했다.
"아저씨! 저쪽인데!"
[알았어!]
앨리슨이 가리키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얘는 언제 이런 곳까지 와본 거지?
조명도 뜨문뜨문 있어 당장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아 음침했다.
앨리슨도 야간 시야 같은 능력이 있나?
게다가 일곱 번째 산이 외곽 쪽에 있는지 계속 가장자리를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이런 곳에 오리지널 기간트가 있을 리가 없는데······.'
하지만 앨리슨이 내게 거짓말할 리가 없었다.
전에 훈련용 더미 기간트를 찾을 때도 앨리슨은 단번에 어디 있는지 알아맞혔다.
그러니 기대를 하고 끝까지 이동······.
"일곱 번째 산 저긴데!"
밝은 표정으로 앨리슨이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쪽은 이 고물상에서도 가장 외진 곳이었다.
기이이잉! 쿵! 쿵!
'어? 구덩이가 있네.'
희미한 조명 아래 100여 미터나 되는 큰 구덩이가 보였다.
그 안엔 부서진 기간트가 가득했고, 그 위로도 기간트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이게 7번째 산이로군.
'괴수 부산물로 만든 기간트도 오래되면 녹는구나!'
구덩이 안에는 이상한 액체가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고, 곳곳에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진 기간트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쪽으로 상체나 머리, 팔다리가 없는 비교적 정상적인 모습의 기간트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와! 그런데 여기서 그 기간트를 어떻게 찾지?
순간 암담했다.
앨리슨이 그 기간트를 본 것이 3년 전이라고 했기에 걱정이 밀려왔다.
[앨리슨, 그 기간트가 어디에 있는지 아니?]
앨리슨이 작업용 기간트에서 폴짝 뛰어내리더니 달려갔다.
그리고 산 뒤쪽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여긴데!"
앨리슨이 위치를 정확히 특정해 줬다.
나도 그쪽으로 이동했다.
다행히 더미 안쪽에 깊숙이 파묻혀 있진 않았다.
그런데!
'이게 오리지널 기간트라고?'
이 투박함은 뭐지?
기간트는 맞는데 기체 곳곳에 과하게 큰 장갑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꼭 미식축구 선수를 보는 것 같았다.
[이거 맞니?]
"응! 여기 안쪽 가슴에 똑같은 그림 있어!"
[알았어. 잠시만.]
난 눈에 마나를 집중했다.
그러자 곧 눈앞에 기간트에서 푸른빛이 반짝였다.
한눈에 봐도 다른 일반 기간트에서 나오는 희미한 빛과는 차원이 달랐다.
'찾았다!'
이건 거신 갑옷에서 나오는 그 마나의 빛이 분명해.
겉모양은 좀 이상해도 분명 오리지널 기간트였다.
크기가 대략 6.5미터.
그럼, 나이트급이네!
순간 볼사람도 없는데, 나도 모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제 마지막으로 가슴에 마법진을 확인해 볼 차례.
'오! 있다. 붉은 마법진!'
비브르의 가슴에 있는 반쪽짜리 마법진과 완전히 흡사했다.
'그럼 손에 있는 마법진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잘린 팔이 오른쪽이라 왼손에 또 다른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건 좀 모양이 다른데?
가슴에 있는 마법진은 내가 그려온 것과 선 몇 개 빼고는 거의 똑같했다. 하지만 손바닥에 있는 마법진은 아예 모양도 다르고, 적혀 있는 거신의 언어도 달랐다.
가슴과 손바닥의 글자를 합쳐서 읽어보면.
[플레임 더스트.]
화염 먼지?
시동어가 플레임 더스트라 어떤 마법인지 솔직히 감이 잘 오지 않았다.
당장 마법만이라도 실험해 보고 싶었지만, 마석 배터리가 없었기에 기간트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일단 케네스 영감에게 가져가 봐야겠다.
[앨리슨! 이 기간트를 빼낼 테니까, 저기 뒤에 가 있어!]
"네!"
앨리슨이 짧은 다리로 후다다닥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말은 참 잘 들어요.
그렇게 7번째 산에서 오리지널 나이트급 기간트를 빼서 작업장으로 이동했다.
***
작업장으로 돌아오자, 케네스 영감이 의자에 앉아 쉬고 있었다.
쿵! 쿵!
치이이익! 철컹!
작업용 기간트에서 내리자 그가 나를 쳐다봤다.
"응? 전에 훈련기를 사 간 젊은 장교가 아니시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런데 왜 내 작업용 기간트에서 내리시오? 그리고 전엔 마나가 없다고 하지 않았소?"
"마나는 없었는데,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젠 작업용 기간트를 타죠."
"에이! 지금 늙은이를 놀리는 게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사실을 말해도 믿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
"그보다 이걸 좀 봐주십시오."
난 내가 끌고 온 오리지널 기간트를 가리켰다.
"응? 이건 뭐요?"
"기간트 전문가께서 이게 뭔지 모르십니까?"
"이건 나도 처음 보는 건데."
"네? 이거 저기 일곱 번째 산에서 가져온 겁니다."
"아! 거긴 나도 모르는 것투성이요. 대부분 200년도 더 된 초창기 것들이라."
"200년이요?"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곧 평정심을 찾았다.
기간이 오래돼도 오리지널 기간트는 크게 상관 없었다.
기간트로 만들어졌다는 건 이미 거신의 갑옷으로 인고의 세월을 버텼다는 뜻이니까.
케네스는 신기한 표정을 짓더니 큰 망치를 가져와 기간트를 여기저기 두들겨 보기 시작했다.
탕! 탕! 탕!
"장갑은 엄청 후지군. 호! 본체는 아주 튼튼하네."
갑자기 케네스의 눈이 배로 커졌다.
"어헉! 이거 오리지널 기간트로군!"
역시 케네스 영감도 알아봤다.
사실 그냥 조용히 기간트만 챙겨서 가져갈까도 고민했지만, 어차피 오래된 물건이라 마석 배터리 방식도 다를 것 같았고, 수리를 하지 못하면 쓰레기나 마찬가지였다.
"혹시, 이 기간트에 맞는 마석 베터리가 있습니까?"
"글쎄. 잠시만 기다리시오."
케네스가 작업용 기간트로 오리지널 기간트를 작업대에 올려놓고 꼼꼼히 살폈다.
"어? 이게 이러면 안 되는데······."
"······?"
"여기 있어야 하는데? 이상하네."
"뭐가 문제가 있습니까?"
"거기 앉아서 기다려 보시오."
케네스는 등 쪽을 한참이나 살폈다.
마석 배터리 삽입구를 찾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계속 고개만 갸웃거릴 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턱! 치이잉!
드디어 등이 열렸다.
"하하하! 이제 알겠군."
케네스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나도 가까이 다가가 봤다.
"응? 이게 뭡니까?"
"마석 배터리요."
"마석 배터리치고는 너무 작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이건 기간트가 아니니까."
"네?"
"이건 마장기요."
"가디언 제국의 마장기란 말씀입니까?"
"확실하오. 내 할아버지께 들었소. 마장기는 크기가 작은 마석 배터리를 여러 개 쓰지."
확실히 마석 배터리가 기간트와는 달랐다.
보통 나이트급 기간트엔 마석 배터리가 3개가 들어간다.
그런데 지금, 이 마장기엔 작은 배터리가 6개가 들어가 있었다.
"보다시피 생긴 건 기간트나 마장기랑 별 차이는 없소. 내부 구조도 흡사하지. 하지만 마석 배터리 타입은 전혀 다르게 발전해 왔소."
"무슨 이유인지는 알 것 같습니다. 서로 혼용이나 도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까?"
케네스가 날 쳐다봤다.
"젊은 장교가 제법이군."
케네스는 기간트와 마장기의 역사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줬다.
기간트나 마장기의 진화는 괴수를 효과적으로 잡기 위해서 발전한 것이 아니었다.
전쟁!
기간트의 진화는 전쟁과 함께 발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대륙의 양대 강자인 아베르크 제국과 가디언 제국은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었고, 끊임없이 싸워왔다.
기간트의 원천 기술은 아베르크 제국이 가지고 있었지만, 가디언 제국은 막대한 금화를 풀어 제국의 기간트 기술을 훔쳐서 기간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신들도 기간트를 만들자, 기간트란 이름 자체가 아베르크 제국에서 만든 것이라 이름까지 따라하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그랬기에 마나를 동력으로 사용하는 병기란 뜻으로 "마장기"란 이름을 새로 만들었다.
초기 마장기는 기간트 보다 성능이 조금 뒤처졌다.
기간트는 계속 발전하는데 훔쳐 만든 마장기의 발전 속도는 늦었기에 전투가 발생하면 기간트 3대를 상대하기 위해선 마장기가 4대가 필요했다.
그랬기에 더 많은 돈을 투자해 더 많은 마장기를 생산해야 했다.
문제는 전투가 발생하면 성능에 뒤져 마장기를 적에게 빼앗기는 경우가 자주 생겼고, 빼앗긴 마장기는 적들이 곧바로 사용할 수 있었기에 수적인 우위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랬기에 동력부 설계를 바꿔 마석 배터리를 완전히 다른 타입으로 만들고, 적들에게 마장기를 빼앗기더라도 마석 배터리가 맞지 않으니, 바로 사용할 수 없게 차별을 두었다.
"그래서 마석 배터리 타입이 달라진 거군요."
"그렇소. 물론 지금은 기간트와 마장기의 성능이 비슷해 큰 의미는 없지만."
"그런데 왜 부서진 오리지널 마장기가 여기 있을까요?"
"음. 이건 나도 들은 이야기인데, 카야킨 전진 기지가 만들어 지고,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가디언 제국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소. 그때 이곳에서 마석이 엄청나게 나왔거든. 그리고 한때 기지를 가디언 제국에 빼앗긴 적이 있다고 들었소. 아마 그때 흘러들어왔을 거요."
이제야 조금은 이해가 갔다.
후퇴하는 과정에 오리지널 마장기를 미처 챙겨가지 못했을 수도 있고, 나중에 다시 찾아가려고 일부러 이곳에 숨겨 놨을 수도 있었다.
이제 궁금증은 대충 풀렸고.
중요한 것은.
"저기, 여기에 맞는 비슷한 마석 배터리라도 없을까요?"
케네스가 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있을 리가 없지. 200년 이상 된 기체에 마석 배터리 타입도 완전 다르고."
"그럼, 어르신께서 만들 순 없습니까?"
"내가?"
케네스가 마석 배터리를 뚫어지게 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만들 순 있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하긴 전에 구형 배터리를 만드는데 5년이나 고생했다고 들었다. 그러니 케네스의 말처럼 배터리를 만드는 것은 너무 오래 걸릴 것이다.
그럴 시간에 차라리 다른 오리지널 기간트를 찾는 게 빠를 수도 있었다.
그때 기간트에 꽂혀 있는 빈 배터리가 보였다.
"혹시, 충전은 가능하지 않을까요?"
"충전?"
"빈 배터리는 있으니, 충전만 하면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음! 뭐, 충전은 가능할 것도 같소. 크기나 타입은 다르지만, 어차피 똑같은 마석 베터리니까. 하지만 달랑 6개를 충전한다고 해도 일주일이면 끝날 거요. 오래전 물건이라 효율이 많이 떨어지거든."
일주일이면 큰 의미가 없었다.
전투 같은 격렬한 움직임을 지속하면 한나절 만에 끝난다는 소리니까.
"아! 빈 배터리를 더 구하면 되겠네요."
"뭐요?"
"이곳에서 격렬한 전투가 있었다면 부서진 마장기가 더 있을 테니 마장기를 찾아서 빈 마석 베터리를 확보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뭐, 배터리만 찾아온다면 충전은 어떻게든 내가 해보겠소. 그리고 이런 물건이라면 동쪽 외곽에 몰려 있을게요. 그곳을 찾아보시오."
"근데 기간트하고 마장기는 어떻게 구분하지요?"
내가 보기엔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어렵지 않소. 등 쪽 배터리 삽입구를 보호하는 장갑 모양이 다르오. 그래서 여는 방법도 다르지. 내가 그것 때문에 조금 전에 헤맸던 것이오."
"그걸 제게 알려주십시오."
아무래도 오크들의 도움이 필요할 듯했다.
***
험한 일을 안 한다는 오크 제사장 레드불을 빼고, 300여 명의 오크가 날 도와 마장기를 찾고 빈 배터리를 빼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벌써 십여 개를 찾았으니, 하루만 고생해도 충분한 배터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6개는 충전이 끝났소."
"오! 벌써 말입니까."
크기가 작으니, 충전도 빠른 것 같았다.
다만 효율은 낮을 것 같고.
케네스가 충전된 마석 배터리를 오리지널 마장기에 장착했다.
"작동이 될까요?"
"그건 지금부터 알아봐야 하지 않겠소?"
케네스가 탑승구 근처를 이곳저곳 눌러봤다.
하지만 해치는 열리지 않았다.
그때 앨리슨이 달려오더니, 마장기의 종아리를 만졌다.
철컹! 치이익!
위이이잉!
"어? 열렸네!"
나와 케네스는 동시에 앨리슨을 쳐다봤다.
"어떻게 알았어?"
"그냥 보이는데!"
역시 둘 다 데려가야 해.
마장기 해치가 열렸다는 것은 케네스가 마석 배터리를 제대로 충전했다는 소리고, 앨리슨은 그냥 천재고.
특히 앨리슨은 무슨 수를, 아니 억만금을 써서라도 데려가야 했다.
"제가 한번 타보겠습니다."
"크흡!"
케네스가 주먹으로 입을 막으며 웃었다.
"이건 오리지널 나이트급 기간트와 같소. 작업용 기간트완 차원이 다르지."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냥 팔만 한번 움직여 보려고요."
"하하! 뭐, 할 수 있다면 해보슈."
"일단 저쪽으로 좀 옮겨 주십시오. 누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요."
케네스가 작업용 기간트를 이용해 오리지널 마장기를 작업장에서 좀 떨어진 공터로 옮겼다.
난 심호흡하고 마장기에 올라탔다.
'거신 마법만 확인해 보자.'
어차피 이 마장기를 움직이기엔 내 마나는 매우 부족했다.
만약 마법이 성공한다면, 거신 마법의 사용 방법을 암 드로운에게 알려줘 바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야 했다.
그럼 내 전력이 더 올라가는 것이니까.
치이이잉! 철컹!
해치가 닫히자마자, 몸속의 마나를 회전시키며 운용했다.
곧 등 뒤에서 나오는 마석 배터리의 마나가 느껴졌다.
다행히 기간트와 마장기의 작동방식은 똑같았다.
파팟!
마장기의 눈으로 마나를 흘려보내자, 시야가 밝아졌다.
'좋아! 정상적으로 작동하네.'
망가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시야만 켰을 뿐인데, 마나가 순식간에 줄어들고 있었다.
서둘러 정신을 집중하고 마나를 마장기 팔에 흘려보냈다.
난 천천히 마장기 팔을 올려 주먹을 살짝 쥐고 손바닥 방향을 가슴에 붙였다.
이제 마지막 차례.
손바닥과 가슴의 마법진을 향해 동시에 마나를 흘려보냈다.
파지지지직!
곧바로 붉은색 마법진이 뻔쩍였다.
됐다!
그리고 마장기 손바닥 위로 홀로그램 같은 붉은 마법진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난 기간트 쓰레기 더미를 향해 손바닥을 뻗고 거신의 시동어를 외쳤다.
[플레임 더스트!]
팟! 파파파파팟!
십여 개의 작은 불꽃이 퍼지며 전방으로 날아갔다.
펑! 퍼퍼퍼퍼펑!
적중한 불꽃들이 터지고 화염이 타오르며 뿌연 연기를 뿜어냈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 주변이 연기로 뒤덮였다.
'어! 이거 연막탄이네!'
아무래도 괴수의 시야를 가리기 위해 만든 마법 같았다.
순식간에 마나가 빠져나갔기에 마나 공급을 중단해야 했다.
나중에 내가 이 오리지널 마장기에 탈 수 있다고 해도 마나 소모가 심해 자주 쓸 수 있는 기술은 아니었다.
마장기 해치를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연기 때문에 시야가 잘 보이지 않았다.
'어? 이거 거신에게 배운 마나를 보는 눈과 연계하면?'
난 남은 마나를 모두 짜내서 눈으로 흘려보냈다.
그러자 연기 사이로 푸르스름한 기간트 더미와 반짝이는 오리지널 마장기가 보였다.
만약 상대가 기간트라면 난 적의 움직임을 알고 있고, 적은 날 보지 못한다!
'와! 사기 스킬이네!'
물론 주변에 나무나 벽, 바위 같은 마나가 없는 물체는 보이지 않으니, 연막을 쓰기 전에 미리 지형지물이나 방해물의 위치를 익혀야 했다.
불꽃이 사그라들며 연기가 사라졌다.
'연막 지속 시간은 2분 정도네.'
난 마장기에서 내려 불꽃이 적중했던 기간트 더미를 살폈다.
새카맣게 그을렸다.
'아니 살짝 녹았잖아!'
기간트 표면이 불에 댄 듯 살짝 일그러져 녹아 있었다.
가까이서 쏘면 약한 장갑 정도는 녹일 수도 있겠어!
아니면 머리나 눈을 공격해 타격을 줄 수도 있어 보였다.
괴수를 상대할 때도 어느 정도 통할 것 같고.
플레임 더스트를 어떻게 쓸지 여러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지, 지금 대체 뭘 한 거요?"
"나도 그거 배우고 싶은데!"
"오오오오오크!"
고개를 돌리자, 케네스와 앨리슨, 레드불이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39. 협상(1).
39. 협상(1).
"마법이 새겨져 있는 오리지널 기간트가 있다는 소문은 나도 얼핏 들어봤소. 그런데 그걸 내가 직접 목격하게 되다니······!"
케네스는 아직도 자신이 본 것에 놀라워하고 있었다.
나도 전에 살루스 야영지에 경고하러 가는 길에 윌리엄 사령관에게 들은 기억이 났다.
오리지널 기간트 중에는 특수한 고대 마법이 새겨진 것이 있다고 했다.
그때는 그게 단순히 오리지널 기간트 성능이 좋다는 뜻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방금 오리지널 마장기가 쓴 거신의 마법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거신의 마법은 완전한 비밀은 아니란 것이었고, 일부 오리지널 기간트는 나처럼 거신의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웨슬리 슈나이더 백작은 왜 자신의 기간트에 거신 마법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지?'
케니스 영지는 대영지긴 하지만 기간트를 생산하는 영지는 아니었다.
그러니 영지의 모든 기간트와 오리지널 기간트 역시 수도나 다른 대영지에 금화와 부산물을 주고, 만들어야 했다.
그럼, 생산자들이 일부러 오리지널 기간트에 특수한 마법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을 수도 있다.
마법 시동어를 모를 수 있고.
이것도 정치의 영역인가?
'살짝 귀띔해 줄까?'
지난 한 달 동안 카야킨으로 오면서 웨슬리 백작과 많은 대화를 나눴고, 나름 친해졌다.
그는 은혜를 베풀면 절대 모른 척할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거신 마법에 대해 알고 있을 수도 있고, 모른다고 해도 그는 거신 마법이 없는 지금까지도 기간트 천재였기에 대수림에서 잘 지내왔다.
다른 영지에서 비밀로 했다면 내가 나서서 굳이 알려줄 필요가 있을까? 게다가 그건 내가 거신 마법을 알고 있다는 걸 세상에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건 더 고민해 봐야 할 문제였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고 있소?"
난 케네스 영감을 똑바로 바라봤다.
"제가 방금 마법을 왜 보여드렸는지는 아십니까?"
"뭐요?"
케네스는 나와 주변에 있는 오크들을 슬쩍 쳐다봤다.
그리곤 살짝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서, 설마 나와 손녀를 죽여 입막음하려고?"
"네?"
이 양반 무슨 상상을 하는 거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방금 마법을 보여드린 것은 제가 그만큼 케네스님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전 케네스님을 장벽 너머로 모시고 싶습니다."
"장벽 너머로?"
"그렇습니다. 언제까지 빛도 안 들어오는 이런 지하에 사실 겁니까. 푸른 초원이 보이는 곳에 저택을 지어 드리겠습니다. 아침이면 지평선 멀리 떠오르는 희망찬 태양을 보면서 깨고, 점심이면 맛있는 도시락을 싸서 소풍도 가고, 저녁이면 붉은 석양을 보며 테라스에서 스테이크도 썰고 차도 마시고, 또 손녀의 재롱도 보고 얼마나 좋습니까."
케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건이 나쁘진 않군. 하지만 난 이곳을 포기할 수 없소."
"네? 이 고물상을요?"
"고물상이 아니라 보물섬이요. 여긴 내 선조들의 피와 땀이 담긴 장소요. 내 아버지와 내 할아버지도 이곳에서 일했고, 내 자식도 한땐 이곳에서 일했소. 그리고 난 이 일을 사랑하오. 비록 큰돈은 벌지 못했지만, 쓸모없고 버려진 기간트에 새 생명을 주는 일에 아주 큰 보람을 느끼고 있소."
"일 때문이라면 이곳보다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 드리죠. 부서진 기간트도 원하시면 최대한 많이 옮겨 다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여기보다 큰 작업장도 만들어 드리고, 괴수 부산물과 마석도 얼마든지 제공해 드릴 수 있습니다."
케네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제안은 고맙지만, 난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고 있소. 이젠 치매까지 있으니, 새로운 곳에 적응하며 사는 것은 무리요."
그는 별로 장벽 너머로 가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공격 목표 선회!
"어르신은 그렇다고 해도 앨리슨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제 11살 소녀를 이런 암흑 속에서 계속 살게 놔두실 겁니까? 솔직히 이곳은 미래도 없고, 희망도 없지 않습니까. 손녀를 생각해서라도 장벽 너머로 가셔야 합니다."
케네스가 오크 제사장 레드불과 놀고 있는 앨리슨을 지긋이 쳐다봤다.
아무래도 마음이 조금 흔들린 것 같다.
"앨리슨을 학교에 보내 또래 친구도 만들어 주고, 나중에 성장해 성인이 되면 수도에서 제일 좋은 명문 아카데미에 보내주겠습니다. 제가 이래 봬도 가진 건 돈밖에 없습니다."
"미안하지만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니요. 저쪽 세상은 이곳과 달리 심한 경쟁 속에 살아야 하오. 그리고 내 손녀의 능력을 이용할 나쁜 놈들투성이요. 내 아들도 이곳이 싫다고 나가선 결국 돌아오지 못했고, 만삭인 며느리만 돌아왔소. 그리고 저 핏덩이를 남기고 며느리도 죽었지."
아! 영감님에게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케네스가 이곳을 떠나기 싫어하는 이유도 이해가 갔다.
"그럼, 앨리슨만이라도 데려가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책임지고 보호하겠습니다. 물론 저도 도움을 받을 생각입니다. 앨리슨의 능력은 어르신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앨리슨은 제가 하려는 일에 꼭 필요한 인재입니다. 그러니 누구보다 앨리슨을 안전하게 보호하겠습니다. 또 최선을 다해 보살필 겁니다. 그러니 앨리슨을 제게 맡겨 주십시오."
진실의 힘은 이미 드워프 리더인 라스칼과 대화하면서 느꼈다.
그랬기에 나도 숨김없이 내 진심을 밝혔다.
"휴우! 나도 그러고 싶소만, 앨리슨은 11년을 나와 함께 살았소. 내가 부모이자 유일한 혈육인데 나와 떨어지려고 하겠소? 그만하고 돌아가시오."
하긴, 함께 산 세월이 11년이다.
할아버지와 손녀의 돈독한 정이 깊을 것이다.
그럼 어떤 방법을 써야 하지?
그때 앨리슨이 불쑥 끼어들었다.
"아닌데! 앨리슨, 가고 싶은데!"
"어?"
"뭐?"
우린 동시에 앨리슨을 쳐다봤다.
"난 착한 타일러 아저씨 따라가고 싶은데! 여긴 친구도 없고 재미없는데! 할아버진 여기 있어, 나 혼자 갈게."
순간 케네스의 얼굴이 똥 씹은 표정이 됐다.
난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어험! 아무리 어려도 당사자의 의견이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앨리슨도 보다 넓은 세상으로 가고 싶다는군요. 제가 우리 앨리슨을 잘 보살피겠습니다."
"하아!"
케네스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날 쳐다봤다.
"손녀를 어떻게 저 위험한 세상에 혼자 보내겠소. 어쩔 수 없이 나도 가야겠군. 아까 초원이 보이는 저택을 준다고 했나?"
"하하! 물론입니다."
"작업장은 여기보다 2배는 커야 할거요."
"2배가 뭡니까. 5배는 크게 지어 드리죠."
"5배라 그건 좋군."
앨리슨 덕분에 이야기가 쉽게 풀렸다.
한참 조건을 다시 이야기하다 케네스가 오리지널 마장기를 쳐다봤다.
"여기 이 마장기를 가져갈 생각이면 내가 겉모습을 싹 개조해 주겠소."
"개조요?"
"이게 오리지널 마장기란 것을 알게 된다면 장벽을 쉽게 넘을 수 있겠소? 모르긴 몰라도 이걸 차지하기 위해 나쁜 짓을 할 놈들이 가득할 거요. 그러니 고물 기간트로 변신시켜야지."
"아! 그건 미처 생각지 못했군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케네스는 말이 끝나자마자, 작업용 기간트를 타고 마장기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앨리슨, 오늘 고마웠다."
"뭘요! 할배는 어차피 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해요."
"그래서 일부러 혼자 간다고 했니?"
"아닌데! 진짜 혼자 갈려고 했는데!"
"어? 그래. 잘했다."
난 앨리슨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런데 몸집도 작지만, 머리도 너무 작다.
'아무래도 많이 먹여야겠어.'
왠지 모를 책임감이 느껴졌다.
***
[카야킨 전진 기지 사령관실]
"충! 부르셨습니까?"
"부르셨습니까? 지금 그 말이 나오나."
커널 대령은 경례도 받지 않고, 날 노려봤다.
"미치지 않고서야 보고도 제대로 안 하고, 사흘 만에 나타난 이유가 뭔가?"
"이미 보고서에 내용은 충분히······."
"허! 그걸 누가 몰라? 그래도 자네 입으로 보고를 해야지."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커널 대령은 골치가 아픈지 고개를 흔들었다.
"일단 자리에 앉게."
"감사합니다."
커널 대령은 날 빤히 쳐다봤다.
"자넨 왜 점점 더 뻔뻔해지는 것 같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기분 탓입니다."
"이거 봐! 이상하다니까."
커널 대령이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커널 대령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일단 사령관이 궁금한 것을 다 해소할 때까지 조용히 대답만 할 생각이었다.
"일단 거신 갑옷을 수거하는 임무는 잘 완수했더군. 비밀도 잘 유지했고. 윌리엄 사령관께서 아주 좋아하시겠어."
"임무를 함께 수행해준 기간트 장교님들 덕분입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만 보고할까?"
"하지만 제 공이 큰 건 분명합니다."
커널 대령이 피식 웃었다.
"아무튼, 그 임무야 이제 내 손을 떠났으니, 윌리엄 사령관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고. 내가 궁금한 건 살루스 전진 기지의 일이네. 대체 어떻게 된 건가?"
"보고서에 적혀 있는 데로 입니다, 저와 오크, 엘프들이 힘을 합쳐 살루스 기지에서 드워프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곳에 르블로 영지 기간트 작업자들이 있지 뭡니까. 그래서 놈들의 만행을 알아냈고, 그걸 카멜 전진 기지에 알린 겁니다."
"그러니까 순전히 우연이었다?"
"네! 우연이었습니다."
이미 날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는 기간트 작업자들과는 입을 맞춘 상태다.
"좋아! 그건 그렇다고 치고, 어떻게 그자들이 자신들의 전진 기지를 버리면서까지 마석과 부산물을 모두 가지고 카멜 전진 기지로 온 건가? 그 이유에 대해선 보고서에 아무 내용이 없더군. 아는 사람도 없고. 설마 자네도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커널 대령이 어디 대답해보란 표정을 지었다.
"물론 전 알고 있습니다."
"오! 그래?"
난 이미 준비한 대답을 꺼냈다.
"저와 오크들이 드워프와 기간트 작업자들과 탈출하기 위해 전진 기지 문을 열었을 때, 아무래도 괴수가 기지 안으로 들어간 것 같습니다."
커널 대령의 눈빛이 반짝였다.
"바하쿰 백작이 무슨 숲의 괴물이 기지를 공격했다고 횡설수설하던데, 그 괴수를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놈들이 기지 안에 들어온 괴수를 쫓아내지 못하고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기지를 포기하고 카멜 기지로 간 것입니다."
"전진 기지의 기간트가 대응하지 못할 정도라니? 설마, 재앙급 괴수인가?"
커널 대령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아닙니다. 제가 그놈을 봤습니다."
"직접 봤다고?"
"네! 드워프를 구한 후 제 정보원을 시켜 살루스 놈들의 만행을 카멜 전진 기지에 알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전 살루스 놈들이 뭘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 확인하기 위해 기지 입구 근처에서 잠복하며 계속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놈들이 전진 기지를 막 비웠을 때, 기지에서 나오는 그놈을 봤습니다. 11미터의 높이에 이족 보행을 하고, 온통 나뭇잎 같은 것을 몸에 붙였으며, 눈에서 무시무시한 자줏빛 광채가 나오는데 순간 오줌을 지릴 뻔했습니다."
"11미터라면 다행히 재앙급은 아니군. 그런데 그 괴수가 살루스 전진 기지를 나왔다고?"
"그렇습니다. 기지 내부에 더는 먹이가 없자, 스스로 나와 서쪽으로 가는 걸 봤습니다."
난 사실대로 말했다.
누가 봐도 내 거신인형은 괴물 같았으니까.
물론 괴물이 나갔다는 거짓말도 조금 보탰다.
"아무래도 하늘에서 천벌을 내린 게 아닐까요?"
"뭐?"
"그놈들이 제국의 무고한 기사와 병사들을 죽였으니, 하늘도 노한 것이지요."
"쓸데없는 소리."
커널 대령은 어이가 없었는지 피식 웃었다.
그래도 내 이야기가 어느 정도 먹혔는지, 대충 넘어간 것 같았다.
"이유나 과정이 어쨌든 자네 제보로 인해 살루스 놈들의 만행을 알게 됐고, 르블로 사냥팀의 억울한 죽음도 밝혔네. 물론 생존자를 구한 것도 큰 공이고. 이건 내가 따로 정리해서 윌리엄 사령관님께 보고하지."
"카멜 전진 기지에 미리 소식을 전해 놈들이 도착하기 전에 대비할 수 있게 한 공도 있습니다. 만약 살루스 놈들이 카멜 기지 안으로 들어가 공격했다면······, 어휴! 엄청난 사상자가 나왔을 겁니다."
"허! 자네 말이 맞네. 그 공도 잊지 않고 보고서에 추가하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뭐가 또 있나?
커널 대령은 책상 위에 서류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살루스 놈들에게 포획한 기간트가 총 8대에 부산물과 마석이 마차로 37대 분량이야. 일단 살루스 놈들을 사로잡은 케니스 사냥팀에 삼 분의 일을 챙겨 주기로 했고, 포로들과 포획한 물건을 이곳으로 가져온 카멜 기지 사냥팀에도 일부 챙겨 주기로 했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공이 있으니 당연했다.
"그런데 자네 공이 가장 큰데, 포상으로 뭘 줘야 할지······, 알다시피 자넨 제국군 소속이고 게다가 의무 복무기간이라, 임무를 진행하다가 생긴 재화나 습득물은 모두 제국의 국고로 귀속되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수림에선 관행적으로 모두 국고로 보내는 건 아니네. 일부는 우리 전진 기지 운용자금으로 쓸 거고, 일부는 장벽 사령부에서 쓰겠지. 그러니 일부는 자네가 가져가야 하지 않겠나? 나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러니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하게. 최대한 챙겨 주도록 힘써보지."
이것 때문에 날 찾았나?
난 이미 인형의 집에 마석과 부산물이 가득했고, 살루스의 기간트도 챙길 만큼 챙겼기에 큰 욕심은 없었다.
그런데 뭘 또 준다고 하니······.
"살루스 전진 기지를 주십시오."
그냥 지금 내가 가장 필요한 것을 말했다.
"······?"
커널 대령은 날 빤히 쳐다봤다.
이 미친놈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마 이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커널 대령이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날 놀리려는 것은 아닐 거고. 날 기만하는 걸까?"
그리고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타일러 빈스 중위, 다시 한번 말해 보게. 뭘 달라고?"
"살루스 전진 기지를 주십시오."
"하아!"
40. 협상(2).
40. 협상(2).
커널 대령은 깊은 한숨을 쉬곤 내게 되물었다.
"전진 기지를 달라? 자넨 그게 달라고 해서 줄 수 있는 물건인 줄 아는가?"
"가능합니다."
"뭐? 가능하다고?"
"지금 살루스 기지는 텅 비어 있습니다. 전 그곳을 이계 난민들의 기지로 만들고 싶습니다."
"난민들의 기지? 갈수록 가관이군."
커널 대령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자네가 생각 없이 말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더 들어보지. 대체 난민 기지를 만들겠다는 이유는 뭔가?"
"이번에 드워프들을 구하면서 봤습니다. 그들은 지하 갱도에서 노예처럼 혹사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크들 역시 인간들을 도와 대수림에서 지난 10여 년간 용병으로 길잡이와 짐꾼 일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집도 없는 떠돌이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 그들을 돕고 싶습니다."
"그냥 단순히 동정심인가?"
"동정심도 있지만, 제국의 미래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입니다."
"제국의 미래? 허!"
커널 대령이 짧은 한숨을 쉬었다.
"이번 살루스 기지처럼 이계 난민들을 착취하는 전진 기지가 많을 겁니다."
"그래서?"
"지금이야 이계 난민들이 소수지만, 계속 늘어나는 추세라고 들었습니다. 그럼 나중에 숫자가 늘어나고 그들의 불만이 쌓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뭐, 반란이라도 일으킬 거란 말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무시무시한 기간트가 있는데요. 제 생각에는 대우가 좋은 다른 왕국이나 가디언 제국의 전진 기지로 난민들이 이탈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탈이라······.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커널 대령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이계 난민들의 능력이 지금은 우습게 보이지만 그 숫자가 지금의 몇 배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드워프는 뛰어난 광부기도 하고, 건설에도 재능이 있습니다. 오크는 혼자서 인간 4배의 짐을 들 수 있고, 괴수와 전투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능력쯤은 나도 알고 있네."
커널 대령은 겨드랑이에 팔짱까지 끼고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대수림의 인적 자원은 매우 한정적입니다. 지난 10년간 늘어나지 않고, 계속 줄어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장벽 너머에서 가지고 온다고 하지만, 이곳의 물가는 거의 살인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앞으로도 인간이 대수림에 늘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이계 난민들은 인간을 대체할 유일한 자원입니다."
"그건 맞는 말이네. 그러니 황제 폐하께서도 그들을 괴수로부터 보호하라고 하신 것이겠지."
커널 대령이 처음으로 긍정적인 말을 내뱉었다.
"그런데 난민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여기저기 전진 기지에 흩어져 있다면, 누가 제대로 관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전 살루스 전진 기지에 이계 난민들을 모아서 그들이 자립하도록 도울 생각입니다."
"자립을 돕는다······?"
"그리고 그들이 직접 금화를 받고 각 전진 기지에 난민을 파견하고 관리하도록 하는 겁니다."
커널 대령이 손을 들고 내 말을 끊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하나의 큰 세력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럼, 더 관리하기 힘들어질 텐데?"
"그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대수림의 땅은 너무 단단해 인간이나 가축, 이계인들이 먹을만한 작물은 자라지 않습니다. 그럼 식량은 어디서 구하고, 또 장비나 물자는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결국, 일해서 금화를 벌어야 하고, 그 금화로 우리 카야킨 전진 기지에서 식량과 물자를 사게 될 겁니다."
"듣고 보니, 그건 맞는 말이군. 식량 수급이 전진 기지의 최대 문제니, 결국 우리를 통해 살 수밖에 없겠군."
"그렇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통제권은 우리가 쥐고 있는 셈입니다."
금화 이야기가 나오자, 관심이 생겼는지 커널 대령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이참에 다른 왕국의 전진 기지와 제국이 관리하는 전진 기지를 전수조사해서 이계 난민들을 찾아 모두 살루스 기지로 보내는 겁니다."
"이계 난민을 전부?"
"네, 언제까지 이계 난민들 관리를 전진 기지에만 맡기실 겁니까? 그러니까 살루스 기지 같은 곳이 나오는 겁니다. 제가 알아보니 살루스 전진 기지에서 죽은 드워프가 수십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음. 수십 명이라······, 그건 좀 심하군."
"이번에 커널 대령님께서 카야킨 사령관으로 부임하셨으니, 새로운 질서를 만드시는 겁니다. 앞으로 이계 난민이 필요한 기지는 금화를 주고 그들을 고용하고, 그들은 우리 전진 기지에서 식량과 물자를 살 테니, 결국, 금화는 이곳에 쌓이게 될 겁니다."
"그건 꽤 마음에 드는군."
커널 대령이 살짝 입맛을 다셨다.
"그동안은 각 전진 기지가 알아서 난민들을 보호하고 알아서 부려먹었지만, 이젠 관리 측면에서도 그렇고 미래를 봐서도 변해야 할 시점입니다. 그리고 살루스 기지의 이계 난민과 소통은 전적으로 제가 맡고 싶습니다."
"자네가?"
"이미 아시겠지만, 드워프어와 오크어, 엘프어를 모두 할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긴, 자네가 적임자이긴 하지. 하지만 사령관님께서 자넬 이곳으로 보내주겠나?"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좀 힘들겠지만, 수시로 대수림을 오가며 잘 관리해 보겠습니다."
"그래?"
커널 대령이 처음과 달리 심각하게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소통과 관리도 내가 해준다고 했고, 식량 보급만 잘 받아 놓으면 전혀 생각지도 못한 금화가 전진 기지에 추가로 쌓이는 것이니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상부에 금화를 많이 바치면 모두 그의 공이 될 것이고, 프랭크 대령처럼 딴 주머니를 찰 수도 있다.
물론 각 왕국 전진 기지와 영지들의 반발이 문제긴 하지만, 대수림에선 힘이 법이고, 카야킨 전진 기지의 힘이 제일 강했다.
그리고 카야킨 기지 뒤엔 헬다임 장벽 사령부가 있다.
"한 가지 간과한 게 있군. 전진 기지의 사용 문제는 내가 결정할 수 없는 문제네. 윌리엄 사령관께서 전권을 가지고 있어."
"저도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윌리엄 사령관님 측근 중에서 대수림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누굽니까? 그건 바로 커널 대령님이십니다. 그러니 대령님께서 방금 제가 설명한 내용으로 이계 난민들의 전진 기지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한 보고서를 작성해 주십시오. 그럼, 제가 사령관님의 허락을 받아 오겠습니다."
커널 대령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서 몇 장 써주고 금화를 벌 수 있는 거야!
난 그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니까 좀 도와달라고.
어차피 나도 식량과 물자를 구해야 하니, 카야킨 전진 기지를 이용해야 했다.
"한가지 문제가 더 있네.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문제지. 그곳을 누가 지킬 건가? 전진 기지를 지키기 위해선 기간트가 필요하네. 그리고 기간트를 운용하기 위해선 큰돈이 필요하고. 단지 이계 난민을 보낸다고 전진 기지를 유지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 점에 대해서도 이미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우선은 이번에 이계 난민들을 살루스 기지로 보내면서 기간트를 가진 용병대를 호위로 보냈습니다. 당분간 그들이 기지에 머물며 기지를 보호할 겁니다."
"용병대의 기간트라······."
갑자기 커널 대령의 눈이 똥그래졌다.
"방금 무슨 말인가? 이계 난민을 살루스 기지로 보냈다고?"
"제가 구한 드워프들과 오크들을 어제 살루스 전진 기지로 보냈습니다."
"뭐라? 내 허락도 없이?"
"누가 그런 말을 했다지요. 허락을 구하기보단 용서를 구하는 것이 낫다. 죄송합니다."
"뭐?"
커널 대령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살루스 기지에 마석 광산이 있다는 걸 알고 계실 겁니다."
"마석?"
커널 대령이 슬며시 눈을 떴다.
"그래 나도 들은 거 같군."
"드워프들의 리더인 라스칼과 마석을 계속 캐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그 캐낸 마석을 우리 카야킨에 팔 겁니다. 그럼 금화를 벌게 될 거고. 그 금화로 제국에 있는 진짜 용병대를 고용할 생각입니다. 그럼 난민 기지 수비 문제도 깔끔하게 해결됩니다."
"음······! 우린 그냥 마석을 사서 넘기고, 식량이나 물자만 팔면 된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카야킨 전진 기지는 가만히 앉아서 계속 이익이 나는 선순환 구조입니다. "
"괜찮은 조건이긴 하군."
커널 대령이 날 빤히 쳐다봤다.
"자네가 얻는 것은 뭐지?"
"네?"
"아무리 봐도 이건 나와 전진 기지에 너무 좋은 조건이야. 장벽 사령부도 좋은 일이고. 하지만 자네가 실질적으로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잖은가?"
"저야 위대한 황제 폐하와 제국을 위해······."
"그런 상투적인 대답 말고 자네 진심을 듣고 싶네."
살짝 답변이 막혔다.
지금까지 이야기는 카멜 기지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생각해낸 것이었지만, 이를 통해 내가 얻을 것에 대한 답변은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다.
살루스 기지의 대규모 마석 광맥이 탐나서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때 불현듯 원래 타일러 빈스의 처지가 생각났다.
"복수입니다."
"복수?"
"잘 모르시겠지만, 사실 전 가문에서 내쳐진 신세입니다."
"자네가?"
"그렇습니다. 전 사생아입니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가문의 후계자 자리는 동생이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백작부인은 절 눈엣가시로 생각하죠. 제가 정보국에 입대한 것도 혹시나 있을 암살이 두려워서입니다."
"허! 그런 사정이 있는진 전혀 몰랐군."
커널 대령은 살짝 놀란 표정이었다.
"전 제국의 군인으로 크게 성공할 겁니다. 그래서 보란 듯이 제 존재를 널리 알리는 것이죠. 그것이 절 버린 아버지와 가문에 복수하는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성공이라······, 자네 말대로 최고의 복수는 가문에서 자넬 버린 걸 후회하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겠군."
커널 대령은 이제야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나에 대한 궁금증이 조금은 풀린 모양이었다.
"처음 대수림에 함께 왔을 때만 해도 자넨 재수는 없지만 조금 특출난 장교 수준이었어. 그런데 지금은 거물들이나 할 수 있는 행동을 하고, 범인은 생각할 수 없는 큰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군. 솔직히 감탄했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아마도 대수림이 절 성장시킨 것 같습니다."
내 대답에 커널 대령은 피식 웃었다.
"이번에 장벽으로 돌아가면 진급은 물론이고, 자네 바람대로 아주 유명인사가 될 거네. 그리고 자네 몫으로 꽤 많은 금화가 갈 테니. 기대하게."
"저기, 그럼 이계 난민 기지는?"
"하하! 자네 말대로 우리 전진 기지에 큰 이득이 되는 일인데 그까짓 보고서 몇 장 쓰는 게 어렵겠나. 당장 써주겠네."
"충!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국이 관리하는 모든 전진 기지를 전수 조사해 이계 난민들의 실태를 파악해 놓을 테니, 가서 사령관님 허락이나 받아 오게."
사실 커널 대령의 보고서만으로 이미 8부 능선을 넘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린 일주일 후 헬다임 장벽으로 향했다.
귀환 병력은 예상보다 규모가 컸다.
귀하신 거신 갑옷과 장비가 무려 넷이나 있었다.
거기에 전 사령관인 프랭크 대령이 숨겨 놓은 괴수 부산물과 이번에 살루스 놈들에게 뺏은 마석과 부산물까지 수송할 물건이 상당했다.
그랬기에 18대의 기간트와 작업용 기간트 10대, 병사 3백 명, 수십 대의 마차가 동원됐다.
***
돌아가는 길은 다행히 순탄했다.
가끔 괴수가 튀어나오고, 억수같이 비가 오기도 하고, 살인 벌레가 습격하고, 뼛속까지 녹아버릴 날씨를 빼면 말이다.
난 앨리슨이 다치거나 아플까 봐, 별 3개짜리 냉기 조끼까지 빌려줬다.
덕분에 개고생하고 있지만, 이건 다 투자였기에 꾹 참고 이동했다.
일찍 저녁 식사를 마치고 마차에 누웠다.
해가 져도 후덥지근한 날씨 때문에 다들 파김치가 되어 좀비처럼 눕기 바빴다.
대수림에선 쉴 수 있을 때 무조건 쉬어야 했다.
잠은 오지 않았기에 인형의 집을 열었다.
[인형의 집]
사마귀는 몇 배나 넓어진 인형의 집을 마음대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표범인형은 날카로운 발톱을 괴수 뼈에 비비고 있었고, 내 자동인형 짹은 단검을 휘두르고 도끼를 던지는 등 무섭게 무예를 단련하고 있었다.
'좋은 자극이 된 거 같네.'
내 자동인형 셋은 기간트를 타는 마나인형이었다. 유일하게 기간트를 타지 못하는 건 짹뿐이었다.
그래서 자격지심이 생긴 것 같았다.
저렇게 열심히 단련하는 것을 보면······.
마지막으로 살루스 전진 기지에서 얻은 자할리(lv.7)가 기간트에 타고 훈련하고 있었다.
원래 룩급 기간트 기사라 성장 가능성도 크고, 지금도 잘 크고 있었다.
자할리는 벌써 인형의 집에 있는 나이트급 기간트에 탈 수 있었고, 이런 추세라면 헬다임에 도착하면 비숍급까진 무난하게 탈 수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왠지 악당 컬렉션 같네.'
사마귀와 표범은 인간을 해치는 괴수였고, 짹은 암살자, 더그(프랭크)는 전진 기지의 물자를 빼낸 비리 사령관이었고, 엘다크는 재수 없는 상사, 자할리는 르블로 사냥팀을 공격한 살루스 기지의 기사단장이었다.
하나 같이 정상이 없네.
유일한 정상은 거신인형인 암 드로운뿐이었다.
전생에 내 마법인형은 대부분 동료였고, 함께 싸우다 죽은 전우였기에 지금과는 확연히 달랐다.
물론 이젠 다 똑같은 마법인형이었지만.
그보다.
'이제 어떻게 마법인형을 늘리지······?'
기간트에 타고 스킬이 생겼다고 해도 내 본업은 인형술사!
마법인형이 많아야 강해지는 것이다.
지금은 운명의 실타래도 여유가 있었고, 훈련하고 있는 마법인형도 자할리밖에 없었기에 마법인형을 늘리기에 아주 좋은 시기였다.
하지만 마법인형을 만들 기회가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함께 헬다임으로 가는 기간트 기사들과 작업용 기간트에 탄 사람들까지도 운명의 실을 연결했지만, 기간트가 많으니 괴수에게 죽을 리도 없었고, 이곳은 비교적 안전한 길이었기에 강한 괴수가 나오지도 않았다.
그리고 장벽을 넘어가면 대수림보다 마법인형을 만들 기회가 훨씬 줄어들 것이기에 당분간 개점휴업상태가 될 것이다.
쨍그랑!
"난 살루스 왕국의 기사다! 이따위 것을 먹으라고 가져온 거냐! 고기를 가져와라!"
또 시작했네.
살루스 기사들의 저런 투정과 반항은 거의 매일 반복됐다.
이제 헬다임 장벽으로 넘어가면 목이 잘릴 테니, 배 째라는 식이었다.
덕분에 고생하는 것은 음식을 준비하는 병사들이었다.
그냥 전진 기지에서 처형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왜 굳이 헬다임으로 데려가려는 건지 모르겠다.
'잠깐, 어차피 다 죽을 놈들이잖아!'
포로로 끌고 가는 살루스 기간트 기사가 일곱이나 됐다.
41. 귀환.
41. 귀환.
늦은 밤.
누가 깰까 조용히 마차에서 내렸다.
"잠이 안 오세요?"
"앗! 깜짝이야."
에테나가 얼굴을 내밀고 물었다.
운명의 실로 연결되어 있지만, 이렇게 갑자기 들이대면 나도 심장이 철렁한다.
"넌 잠귀가 밝은 거야? 아니면 잠을 아예 안 자는 거야?"
"나오시는 것을 보고 방금 일어난 겁니다."
"그래?"
그러고 보면 많이 이상하네.
에테나는 전에 내가 마차에서 몰래 나갔다가 돌아올 때도 항상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고, 지금도 아주 은밀히 나왔는데, 귀신같이 알아채고 일어났다.
나처럼 운명의 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지?
엘프의 능력인가?
나중에 꼭 물어봐야겠다.
"잠시 볼일 좀 보고 오지."
"네, 다녀오십시오."
내 마차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루스 기사 포로들이 있었다.
그들은 밧줄로 묶여 있었고, 다행히 근처에 지키는 기간트는 없었다.
그리고 이들을 지키는 병사는 단 두 명뿐이었다.
사실 대수림에선 굳이 포로를 지킬 필요는 없었다.
도망쳤다간 대수림이 알아서 죽여줄 테니까.
'그럼 순찰하는 불침번만 조심하면 되겠네.'
주변을 다시 한번 자세히 살피고 마차로 돌아왔다.
에테나는 자는 척을 하고 가만히 누워있었다.
"자는 거지?"
"네."
자는 사람이 어떻게 대답한담.
피식 웃음이 났다.
난 마차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누웠다.
[영혼 이동에 성공했습니다. 남은 시간 – 00:59:59]
레벨이 오르자, 부쩍 성공률이 높아진 영혼 이동 스킬.
난 자할리(lv.7) 꼭두각시로 영혼 이동했다.
스스슥!
퍽! 퍽!
"윽!"
털썩!
포로를 지키던 병사들을 기절시켰다.
그러자 살루스 기사들이 놀란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난 후드를 벗었다.
"헉! 자할리 대령님?"
"쉿!"
기사들을 조용히 시켰다.
그리고 그들의 결박을 차례로 풀었다.
[운명의 실을 연결합니다.]
[운명의 실을 연결합니다.]
.
.
알리만 중령이 놀란 표정으로 내 옆에 섰다.
"자할리 대령님, 살아 계셨군요. 전 표범 괴수에게 잡아 먹힌 줄 알았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자리를 옮기지."
"그런데 어디로 갑니까? 여긴 대수림입니다. 도망친다고 해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겁니다."
"걱정하지 말게. 호세인 사냥팀과 함께 왔네."
"오! 그럼 바하쿰 사령관님도 구출해가시죠?"
난 고개를 흔들었다.
"거긴 기간트가 지키고 있네. 아쉽지만, 지금은 자네들부터 몸을 피하지."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조용히 움직였다.
기절해 있는 병사 옆을 지날 때였다.
알리만 중령이 갑자기 병사에게 발길질했다.
퍽! 퍽!
그리고 병사의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찌르려고 했다.
턱!
난 그의 팔을 잡았다.
"무슨 짓인가?"
"살루스 왕국이었다면 감히 얼굴을 마주치지도 못할 천한 것들이 저와 기사들을 무시했습니다."
"어허! 불침번들이 곧 돌아올 거다. 어서 움직여라!"
"네."
알리만은 아쉬운지 입맛을 다시곤 움직였다.
기간트 기사들은 어느 왕국에 가서든 귀한 대접을 받았다.
대부분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귀족 가문 출신이었기에 포로가 됐어도 특권의식에 절여 있었다.
곧 죽을지도 모르고······.
우린 대수림을 달렸다.
"정지!"
내 신호에 기사들이 멈춰 섰다.
"왜 벌써 멈추십니까?"
"어차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거. 그 몸은 내가 잘 써주겠다."
"네? 그게 무슨?"
촤악!
"커헉!"
기사가 목을 잡고 쓰러졌다.
난 다른 기사를 향해 검을 찔렀다.
푹!
"으윽!"
쿵!
"대체 왜?"
둘이나 죽었음에도 기사들은 도망치지 않았다.
"크앙!"
촤악! 촤악!
"으악!"
"괴수다!"
그제야 기사들이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표범인형이 뒤를 쫓았다.
"이런, 미친!"
알리만 중령 역시 몸을 돌려 도망쳤다.
다른 기사들은 제국의 야영지 반대편으로 도망쳤는데, 알리만은 곧장 야영지를 향해 달렸다.
본능적으로 그쪽이 살길임을 알고 있었다.
'짹! 처리해!'
[네, 마스터.]
곧 알리만 앞에 검은 인형이 길을 막았다.
휘릭! 휘릭!
어둠 속에 날카로운 2개의 단도가 번쩍거리며 시차를 두고 날아갔다.
탱! 탱!
알리만은 기사, 단도 정도는 얼마든지 쳐낼 수 있었다.
촤악!
"크헉!"
하지만 단도를 던지자마자 빠르게 품으로 달려든 짹의 검은 피할 수 없었다.
날카로운 소도가 허리를 베고 지나갔고, 알리만은 힘없이 쓰러졌다.
짹의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짹! 잘했어!'
[기사회생(lv.4) 스킬을 사용합니다.]
표범인형이 도망치던 마지막 기사의 목을 물었다.
순식간에 일곱 명의 기사가 죽었다.
기사회생(lv.4) 성공률은 40%.
차례로 기사회생 스킬을 썼기에 난 운명의 실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과연······?
[허수아비(lv.1) 마법인형을 만들었습니다.]
[허수아비(lv.1) 마법인형을 만들었습니다.]
[허수아비(lv.1) 마법인형을 만들었습니다.]
"휴!"
살짝 안도했다.
일곱 중에서 셋이나 기사회생에 성공했다.
하지만 기뻐하진 않았다.
대신 운명의 실이 끊어진 망자들에게 한마디 했다.
"좋은 곳으로 가시오."
난 내 허수아비들을 인형의 집에 넣었다.
그리고 자할리와 나머지 마법인형들도 모두 인형의 집에 넣었다.
기사들의 시체는 치우지 않았다.
대수림이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카야킨 전진 기지의 기사들은 살루스 포로들이 탈출하다가 죽은 줄 알겠지.
영혼 이동을 끊자, 마차에서 눈을 떴다.
내 손에 직접 피를 묻히진 않았지만, 사람을 죽이는 건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마법인형을 3개나 만들었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어디, 쓸만한 놈이 있나 보자.'
인형의 집을 다시 열었다.
알리만 중령, 네자드 소령, 라구즈 대위.
셋 다 살루스 전진 기지에서부터 계속 함께 이동했기에 잘 알고 있었다.
알리만 중령은 비숍급 기간트, 네자드 소령은 나이트급 기간트, 라구즈 대위는 폰급 기간트 기사였다.
자할리(lv.7)까지 하면 룩급부터 폰급 기사까지 전부 다 있는 셈이었다.
난 세 허수아비에 운명의 실을 추가로 연결했다.
[알리만(lv.1) 꼭두각시 마법인형이 만들어졌습니다.]
[네자드(lv.1) 꼭두각시 마법인형이 만들어졌습니다.]
[라구즈(lv.1) 꼭두각시 마법인형이 만들어졌습니다.]
'좋아! 이제 당분간 마법인형이 부족할 리는 없겠네!'
대수림이 아니었다면 이런 기사들을 내 마법인형으로 만들 수 있었을까?
기간트끼리 싸우는 전장이라도 이렇게 쉽게 마나인형을 획득할 순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얼음 계곡에서 거신인형을 얻지도 못했을 것이고.
새삼 대수림에 오길 잘한 것 같았다.
'짹, 이 꼭두각시들을 자연스럽게 걸을 수 있게 만들어.'
[제가요?]
'뭐? 그럼 내가 하리?'
[마스터, 전 제 훈련하기도 바쁩니다.]
'그래서 안 하겠다는 거야?'
[아닙니다. 내일까지 완벽하게 걸을 수 있도록 만들겠습니다.]
어째 대답하는 표정이 떨떠름한 것 같은데······.
짹이 다른 자동인형에 자극받아 능동적으로 변한 건 좋은데, 조금 반항기가 생긴 것도 사실이다.
뭐, 자동인형이 저런 녀석도 있어야지.
이번 꼭두각시들만 잘 훈련해 기간트에 태운다면, 나 혼자 총 7대의 기간트를 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정도만 해도 경항공모함 수준 아닌가?'
딱 10대만 채우면 더 좋을 텐데······.
숫자 10에 살짝 욕심이 났다.
그래도 다시 대수림에 돌아올 땐, 혼자서 사냥팀을 꾸릴 수도 있었으니 이동 제약이 완전히 사라진다.
그럼 장벽만 넘으면 마음대로 살루스 전진 기지를 오갈 수 있었다.
***
모든 일엔 끝이 있다.
뼈가 녹을 것 같은 무더위도, 몇 번 물리면 저세상 가는 살인 벌레도, 폭포처럼 내리던 비도, 잠잘 때 몰래 사람의 살 속에 씨를 뿌리는 이름 모를 괴물 식물도.
이젠 모두 끝이었다.
드디어 장벽에 도착했다.
"우와! 우와!"
앨리슨이 장벽을 보고 연신 입을 떡 벌렸다.
난 앨리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게 헬다임 장벽이야."
"와! 엄청 높은데! 나 올라가 보고 싶은데!"
"저긴 올라갈 수 없어."
"안돼요?"
"그래. 저긴 위험해."
잘못해 거신이 쳐놓은 마법에 통구이가 될 테니까.
"뭐가 잔뜩 있는데!"
"응? 어디에 말이니?"
"저기 꼭대기에 뭐가 엄청나게 많아요."
"그래?"
나도 올려다봤다.
하지만 그냥 끝없는 벽과 하늘뿐이다.
얘는 여기서도 저 높은 곳에 마법진이 보이나?
듣기론 저 장벽 위쪽엔 괴수의 접근을 막기 위한 거신의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다고 했다.
앨리슨은 그게 보이는 것 같았다.
선두 기간트가 장벽 관문을 둘러싼 성벽 앞에 도착했다.
[문을 열어라!]
끼기기기기긱! 쿠웅!
성문이 열렸고, 우린 안으로 들어갔다.
행렬이 워낙 길었기에 성벽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한참이나 걸렸다.
"관문은 내일 열린다고 합니다."
글래디스가 관문 개방 일정을 알아 왔다.
"휴! 내일이라니 운이 좋네."
"저기, 그런데······."
"왜? 무슨 할 말 있나?"
"엘프들과 드워프들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12명의 엘프와 40명의 드워프가 나와 함께 왔다.
글래디스는 내가 그들을 이곳까지 데리고 온 것을 보고, 장벽 너머로 데리고 갈 생각인 것을 이미 눈치챘다.
"글쎄. 뭔가 방법이 생기겠지."
"아니면 내일 제가 먼저 나가서 윌리엄 사령관님께 허락을 구해보겠습니다."
난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내가 이번에 직접 경험해보니까 허락을 구하는 것보단 용서를 구하는 게 훨씬 쉽더군. 빠르기도 하고."
"네?"
"이곳이 안전하다곤 하지만 사령관님께 허락을 받으려면 며칠은 필요할 거야. 그러니 내가 다른 방법을 알아볼 테니, 자넨 비밀로 좀 해주게."
"알겠습니다. 중위님께서 다 생각이 있으시겠죠."
글래디스 하사는 엘프들과 꽤 친해졌다.
여자가 그녀들밖에 없기도 했고, 늘씬하고 예쁜 엘프들을 보면서 뭔가 대리만족 같은 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매일 같이 어울렸고, 지금은 너무 친해졌기에 그녀들이 장벽을 무사히 넘기를 바라는 마음이 느껴졌다.
다들 짐을 풀지도 못하고, 관문 오른쪽 벽에 자리를 잡았다.
내일 아침 관문이 열리면 먼저 대수림으로 향하는 행렬이 들어올 것이고, 우린 그들이 다 통과한 다음에 바로 관문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이렇게 행렬을 유지한 채로 밤을 보내기로 했다.
***
늦은 밤.
"보리스 소령님."
기이잉! 쿵!
보리스 소령의 비숍급 기간트가 옆으로 몸을 돌렸다.
[오! 타일러 중위. 어서 오게.]
"이젠 중령님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하하! 너무 설레발치지 말게. 윌리엄 사령관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농담처럼 건넸지만, 보리스 소령은 이번에 분명 진급할 것이다.
그는 나와 함께 얼음 계곡 원정을 다녀왔고, 오리지널 기간트 재료를 무사히 가져왔으니까.
"오늘은 직접 보초를 서시는 겁니까?"
[마지막 날이니, 부하들도 좀 쉬게 해줘야지.]
소령은 부하들을 생각하는 좋은 상관이었다.
의리 있는 사람이기도 했고.
"저기 한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고 있네.]
"네?"
[나도 눈치는 있는 사람이네. 자네가 데려온 엘프와 드워프들 때문이 아닌가.]
"이미 알고, 계시군요."
[그래,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겠는가?]
"내일 검문 중에서 유일하게 뒤지지 않을 물건이 있지 않습니까. 그곳에 엘프와 드워프들을 숨겨서 장벽을 통과할 생각입니다."
내가 살짝 손짓하자, 엘프들과 드워프들이 조용히 내 뒤로 다가왔다. 특히 보리스 소령이 노총각이라 엘프들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 거란 생각에 바로 데려왔다.
[험! 미안하지만, 난 허락할 수 없네.]
"네?"
[난 지금부터 15분간 화장실에 다녀올 테니, 자네가 이곳을 좀 대신 지켜주게.]
"아! 알겠습니다. 제가 잘 지키고 있을 테니, 다녀오십시오."
보리스 소령의 비숍급 기간트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어서 서둘러!"
거신의 갑옷과 장비를 실은 십여 대의 마차는 기밀 때문에 내일 검문검색을 받지 않는다.
그랬기에 이계 난민들을 무사히 숨겨서 통과할 수 있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한 방법이었다.
사실 보리스 소령이 이번 행렬의 책임자로 임명할 때부터 이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나와 얼음 계곡 원정도 함께 했고, 함께 힘든 고난을 겪은 전우였기에 내 부탁을 들어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한 마차에 4명씩 타. 자리가 좁아도 참고, 내가 신호를 주기 전까진 절대 나오지 말고."
"타일러여! 알았다."
"타일러님,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에테나가 나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나도 모르게 에테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일 보자."
난 엘프와 드워프들을 마차에 나눠 태웠다.
잠시 후.
보리스 소령의 기간트가 다가왔다.
기이잉! 쿵! 쿵!
[벌써 밤공기가 시원하군.]
"고맙습니다."
[고맙긴. 자네가 지휘를 잘해줘서 임무를 무사히 완수할 수 있었네. 그리고 덕분에 진급할 수도 있고.]
"소령님은 꼭 진급하실 겁니다. 그리고 적당한 시점에 윌리엄 사령관께 용서를 구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건 잘 생각했네.]
어차피 윌리엄 사령관에겐 사실을 말할 생각이었다.
그래야 드워프들이 정식으로 장벽 너머에 살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제가 고생하신 기사분들과 병사들에게 거하게 한턱내겠습니다."
[하하! 우리 병사들은 말술인데 괜찮겠나?]
"제가 가진 건 돈밖에 없습니다."
[알았네.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 보지. 이제 여긴 내가 지킬 테니까, 자넨 그만 쉬게. 내일도 긴 하루가 될 거야.]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난 보리스 소령에게 경례하고, 내 마차로 향했다.
큰 고민 하나가 해결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