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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치이이익!

녹아내린 얼음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당연히 그 안에 있던 천수관음 역시 새카맣게 타버린 채 숨이 끊긴 상태였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석상의 열쇠'를 획득하셨습니다.]

연이어 나타나는 상태창.

네임드 몬스터를 잡은 덕분에 무려 2개의 레벨이 올랐다.

"대충 끝난 건가."

거친 호흡을 몰아쉬던 진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격통을 견디기 어려웠던 탓이다.

'너무 무리하긴 했어.'

캐드릭과 언데드를 사냥하고 곧바로 천수관음까지 상대하느라 남아 있는 마력이 간당간당했다.

휴식이 필요하다.

물론, 그전에 해야 할 건 처리해 둬야겠지.

진혁이 개인 상태창을 활성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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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강진혁

성별: 남

나이: 27세

레벨: 21

힘 16 민첩 16 체력 16 마력 41 간극 100 행운 10 적응형 10

보유한 스탯 포인트: 6

보유한 코인: 추가 정산 중입니다.

직업: 없음

고유 능력: 융합(融合), 검의 무덤, 별의 가호, 아누비스의 심판, 혈마기(血魔氣), 만다라(曼茶羅)

스킬: Lv5 '불의 원소', Lv4 '탐식의 눈', Lv3 '교감', Lv3 '염혼의 낙인', Lv3 '독식', Lv3 '얕은 호흡', Lv1 '얼음 조형', Lv2 '데이라이트', Lv1 '거인의 손아귀', Lv1 '추혼검(追魂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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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얻은 능력들과 스탯 포인트가 눈에 띄었다.

'스탯은 마력에 투자해야겠어.'

지금처럼 전투가 장기화 될 경우를 생각하면, 다시 한 번 마력에 집중 투자할 필요가 있었다.

[마력이 41 → 47로 상승합니다]

마력을 올리자 부풀어 올랐던 혈관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마지막에 만다라를 최대치로 끌어올려 번개를 던진 게 진짜 크긴 컸구나.

하지만, 고생한 것 이상으로 성과는 충분히 얻었다.

멀린의 지팡이를 완성한 덕분에 얼음 조형의 상위 버전인 빙하조형을 익혔고.

천수관음으로부터 만다라까지 복사할 수 있었다.

게다가 레벨업까지 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레이드 아닌가?

그야말로 이상적인 마무리.

이제 적당한 잠자리를 찾아 쌓여 있는 피로만 해소하면 되리라.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게 정상일 것이다.

낮이 지나가고 밤이 오면 휴식을 취할 거라고.

'그러니 놈들이 오는 것도 밤이 깊어지기 전이겠지.'

진혁의 시선이 숲으로 향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을 지켜보고 마인 협회의 암살자들을 향해서.

완벽한 기습을 가할 기회라고 생각할 테지만 글쎄....

놈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거다.

63화. 마인 협회 (1)

시련의 탑의 밤은 조금 특별하다.

낮에는 따뜻했던 기온도 급속도로 떨어졌고 몬스터들의 흉폭성과 공격력도 훌쩍 뛰어올랐다.

그렇기에, 밤이 되면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사냥을 멈추고 안전한 곳을 찾았다.

당연한 이야기다.

굳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천수관음을 처리한 지 1시간 정도 흘렀을 무렵.

진혁은 대나무 숲이 울창하게 펼쳐져 있는 사당 앞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옛날 생각나네.'

잠을 자거나 방송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공간. [시련의 탑].

미친 듯이 사냥을 하고 난 뒤엔 꼭 밤하늘이 보이는 곳을 찾았다.

휴식을 취하기에 나쁘지 않은 장소다.

특히나 이곳에 있으면 쏟아지는 유성우를 볼 수 있었으니.

'죽순과 탑에서만 볼 수 있는 재료들을 얻을 수 있는 것도 묘미지.'

진혁은 불을 피운 뒤 대나무로 만든 통에 죽순과 쌀, 암염(巖鹽)을 넣고 끓였다. 거기에 계곡에서 잡을 수 있는 철갑 슈림프도 3마리 추가했다.

곧바로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꼬르륵.

식욕이 동한다.

한 숟가락 가득 퍼서 입에 넣자. 부드럽고 따뜻한 죽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중간 중간 살집이 통통하게 오른 새우의 육질이 환상적인 식감을 자아냈다.

크으, 바로 이 맛이지.

'다음엔 요리 관련 스킬들도 좀 복사해 둬야겠어.'

탑을 오르다 보면, 온갖 종류의 산해진미들이 넘쳐났다.

육즙이 가득 차 있다 못해 넘쳐흘러서 올리브유도 필요 없는 사막 송아지 고기.

바다에서 구할 수 있는 무지개 크랩.

천 가지 향을 간직했다는 사우전드 애플 등.

탑 외부에서 결코 맛볼 수 없는 재료들이.

그야말로 천해의 식재료를 간직한 보고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진혁이 모처럼의 만찬을 즐기고 있을 바로 그때.

"이야. 좋은 냄새네."

"꽤나 맛있어 보이는 식사로군."

대나무 숲 사이로 남녀 한 쌍이 나타났다.

고혹적인 서양 미녀와 탄탄한 체구를 갖고 있는 동양 남성.

멜레나와 리챠오였다.

"아! 나쁜 의도가 있는 건 아니야. 그저 불빛이 보여서 한번 와 본 거니까."

"잠시 밤이슬만 피하면 그걸로 족하다."

멜레나와 리챠오가 태연하게 모닥불로 다가왔다.

뭐야, 이 녀석들 설마....

마인 협회가 아니라 평범한 플레이어를 연기할 생각인 건가?

진심으로?

'어이가 없네.'

이쯤 되면 기가 차서 할 말도 없다.

상상을 초월하도록 멍청한 놈들이든가. 아니면....

정체가 들통 나도 이길 수 있는 수단이 있든가.

둘 중 하나겠지.

기왕이면 후자였으면 좋겠다.

그래야 이 긴긴 밤을 따분하지 않게 보낼 수 있을 테니까.

"추위를 피하게 해 주는 것쯤은 가능하니, 어서 앉으시죠."

진혁이 모닥불 한쪽을 가리켰다.

"고마워. 멜레나라고 해."

"리챠오라고 한다. 그럼, 몇 시간만 실례하도록 하지."

멜레나와 리챠오가 한 자리씩 차지했다.

적어도 밤이슬을 피하고 싶다는 말만큼은 거짓말이 아닌 듯싶었다.

서둘러 반쯤 언 팔과 다리를 녹이는 걸 보면 말이다.

"많이 고생했나 보군요."

"말도 마. 가면 쓴 오빠가 몰라서 그렇지, 나무 위에서 하루 종일 벌벌 떨었다니까?"

그래, 당연히 힘들었겠지.

쥐새끼처럼 이쪽을 염탐하느라고 얼마나 두 눈이 빠져라 고생했겠는가?

"음식을 꽤 넉넉하게 했는데, 어떻게. 좀 드시겠습니까?"

진혁이 대나무 그릇 하나를 건넸다.

먹음직스럽게 살이 오른 새우와 뽀얀 쌀이 돋보였다.

사양하지 말라고.

쫄쫄 굶느라 배가 등가죽에 들러붙은 거 다 알고 있으니.

"...."

멜레나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갈등이 느껴지는 얼굴이다.

하지만, 음식을 향해 선뜻 손을 뻗진 않았다.

의심스러운 거다.

음식에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를 테니까. 그러나 식욕에 대한 강한 본능 때문인지 그 짧은 찰나에 몇 번이나 동공이 움찔거렸다.

반면 리챠오는 단칼에 선을 그었다.

"우린 괜찮다. 미안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준 음식엔 손을 대지 말자는 주의라서 말이지. 특히나 그 대상이 얼굴을 가렸다면 더욱더."

"가면이 신경 쓰이나 보군요?"

"당연한 거 아닌가? 뭔가 숨기고 싶은 게 아니라면, 가면 따위는 쓰지 않을 테니까."

"음. 보시기에 정 불편하시다면, 벗어 드릴 수도 있습니다."

"...뭐?"

"...정말로?"

진혁이 던진 말에, 두 사람의 동공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어떻게든 정체를 알아내려고 했던 상대가 스스로 정체를 밝히겠다고 선언했으니, 당연히 이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물론, 그냥 벗으면 재미없으니 간단한 게임을 하죠."

"게임이라면...?"

"서로 궁금한 게 있는 것 같으니 세 번씩 번갈아 질문을 주고받는 겁니다. 만약 그쪽이 제 질문에 모두 대답해 주시기만 한다면 게임이 끝나는 즉시 가면을 벗도록 하겠습니다."

서로가 갖고 있는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게임.

리챠오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어차피 말의 진위를 알아낼 수 있는 방법 따윈 없다.'

거짓 정보를 줘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반면, 이쪽의 정체를 모르고 있는 상대는 방심하고 있을 터.

'저 제안을 받아들여도 우리가 손해 볼 일은 없다.'

옆에 있던 멜레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속삭였다.

"성유물이 발동되려면 아직 5분은 더 있어야 돼. 일부러 시간을 끌게 해 준다면 우리야 좋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재밌군. 시간 때우기로 나쁘지 않겠어."

리챠오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누비스의 심판'이 발동됩니다!]

진혁의 주위로 투명한 파장이 퍼져 나갔다.

***

...걸렸군.

진혁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두 사람이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다.

시간이 필요한 건 놈들이었으니까.

파츠츠츠!

멜레나라는 여자에게서 흘러나오는 독특한 파장.

과거 [시련의 탑]을 플레이하면서 몇 번인가 느꼈던 마력이다.

'칼리큘라의 동전이라....'

로마시대의 폭군 칼리큘라의 모습을 새긴 동전.

어떤 카드를 준비했나 했는데, 그거였나.

확실히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발동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완전히 발동되고 나면 지정한 대상의 경계심을 완전히 허물어뜨리는 효과를 갖고 있었으니까.

시간이 걸리는 육체적인 고문을 할 필요도 없이, 알고 있는 모든 걸 순순히 자백하게 만드는 정신계열 성유물은 꽤나 쓸모 있는 카드였다.

'아직 내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도, 더욱 완벽하게 승리를 취하려고 하는군.'

작은 부상조차도 피하려고 하는 의도가 돋보였다.

훌륭하다.

훌륭하긴 한데.

발동 전에 그 존재가 알려진 이상, 칼리큘라의 동전은 성유물이 아닌 단순한 기념 주화에 불과하다는 걸 알아야지.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걸 알려주마.'

진혁이 생긋 웃었다.

"선공권 정도는 양보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질문하시죠."

"이름이나 소속은 물어 봤자 대답하지 않을 테고...."

"첫 번째 질문에 제 정체를 밝힌다면, 이 문답을 하는 의미가 없어지니까요. 가면을 벗는 건 어디까지나 게임이 끝난 이후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지. 이곳에 당신 외에 다른 동료들이 있는 건가?"

흐음.

다른 걸 물어볼 줄 알았는데.

꽤나 현실적인 질문이군.

상식적으로 보스 레이드에 혼자 왔다곤 생각하기 힘들 테니, 또 다른 동료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칼리큘라의 동전이 갖고 있는 범위는 10m이기 때문에, 만에 하나 있을 변수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이곳엔 혼자 왔고, 나갈 때도 혼자일 겁니다."

"...그렇군."

"이번엔 제가 묻죠. 보아하니 그쪽도 보스 몬스터를 사냥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 같은데, 어째서 가만히 지켜만 봤던 겁니까?"

"절 내부로 들어갈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워낙 악명 높은 곳이라 신중할 필요가 있었거든."

신중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하지만, 이걸로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얻었다.

남은 건 두 개.

바로 그때 리챠오가 두 번째 질문을 했다.

"탑을 오른다면 무언가 소망하는 게 있을 터. 권력인지 아니면 부인지, 그것도 아니면 명예인지. 그게 알고 싶다."

호오.

리챠오의 말에,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나를 죽이려고 온 건 줄 알았는데....'

조건이 맞으면 회유할 생각도 갖고 있는 모양이다.

"원하는 거야 있습니다만, 말한다고 해서 과연 그쪽에서 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을까요?"

추위에 떨고 쫄쫄 굶은 상태.

리챠오와 멜리나는 종일 나무 위에 있던 터라 몰골까지 말이 아니었다.

"하긴, 지금 우리 꼴이 우스워 보이긴 하겠군. 하지만,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은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걸로 두 번째....

필요한 대답은 이제 단 하나뿐이다.

진혁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뒤틀렸다.

동시에 공손했던 말투가 싸늘하게 식었다.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라.... 그럼, '원탁'의 한 자리도 줄 수 있나?"

"지, 지금 뭐라고?"

"어떻게 원탁에 대해 알고 있는 거지!?"

두 사람이 동시에 고함을 질렀다.

마인 협회의 가장 높은 간부를 상징하는 원탁.

그 베일에 싸인 단어가 외부인의 입에서 흘러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기함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놈들은 알고 있을까?

'원탁'이란 표현이 사용된 유래와 이유에 대해 그 누구보다 먼저 파악한 고인물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직,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듣지 못했는데, 그래서 줄 수 있어 없어?"

"당연히 줄 수 없다!"

리챠오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게 어떤 거라고 함부로 입에 담는 거야!"

멜레나는 어느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상태였다.

역시나 이렇게 말할 줄 알았다.

"사실, 준다고 해도 관심도 없어."

마인 협회의 간부 자리 따위, 공짜로 준다고 해도 사양이다.

그리고 더 이상 어설픈 연기를 할 필요도 없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아누비스의 심판이 지금 막 발현됐으니까.

쿠쿠쿠쿠쿠!

지면이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큭!"

리챠오가 다급히 거리를 벌렸다.

심상치 않은 마력에, 본능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때마침.

"5분 지났어!"

멜레나가 고함을 질렀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간이 다 됐다.

칼리큘라의 동전만 사용할 수 있다면, 아무리 강한 적이라도 제압할 수 있었다.

정신계열을 방어하는 능력은 현재까지 그 어떤 플레이어도 갖고 있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니, 성유물은 발동하지 않는다."

진혁은 피식 웃었다.

"뭐라고?"

단검을 꺼내든 리챠오가 눈썹을 치켜떴다.

"그 동전. 지금 당장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을 거라고. 발동하는 시간을 5분 정도 더 늦춰 놨거든."

"개소리하지 마라! 네놈이 무슨 수로...!"

"잠깐! 진짜야."

옆에 있던 멜레나의 얼굴이 급소도로 어두워졌다.

틀림없다.

"아직 동전에 마력이 충분히 주입되지 않았어. 저 녀석이... 저 녀석이 뭔가 수작을 부린 거야. 우리 마력을 억제하는 무슨 짓을 한 게 틀림없다고!"

"그게 무슨 소리냐! 우리는 음식을 입에도 안 댔는데!"

유일한 가능성은 진혁이 건네줬던 요리뿐.

하지만, 먹지도 않은 음식으로 대체 어떻게 장난질을 했단 말인가?

"그거야 이 요리는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효력이 발휘되니까."

경계심 많은 놈들이, 남이 주는 음식을 덥석 받아먹을 리 없지.

그래서 조금 더 머리를 썼다.

입으로 직접 섭취하는 것보다 효과는 느리지만, 더욱 치밀한 방법을.

"죽순에 흐르는 수액이 철갑 슈림프와 반응하면 마력을 억제하는 독성 물질을 만들지. 물론, 이 풀을 씹을 경우엔 중독되지 않지만."

진혁이 입안에 있던 유칼립투스 나뭇잎을 슬쩍 보여 줬다.

"마, 말도... 안 돼. 우리의 정체는 물론, 성유물의 효과와 그걸 파훼할 방법까지 전부 설계해 뒀다고?"

"시간을... 벌고 있는 게 우리가 아니었단 말인가."

두 사람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완벽하게 함정을 팠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은 분명 자신의 편이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모든 것들이 송두리째 무너졌다.

"지금부터 질문은 내가 한다."

진혁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와 동시에.

[아누비스가 대전자(對戰者)를 선택합니다!]

무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64화. 마인 협회 (2)

우우우웅!

소리가 난 건 바로 뒤쪽에 있는 사당이었다.

대나무 숲 사이로, 한 줄기 바람이 가로질렀다.

"뭐, 뭐야?"

"마력 반응이라고?"

리챠오와 멜레나가 동시에 외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주위에 마력을 갖고 있는 사람은 셋뿐이었다.

이미 이곳에 오기 전에 몇 번이나 확인하고 또 확인한 사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낡은 목조 건물로부터 새로운 기운이 일어났으니까.

[장승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이 대전자로 지정되었습니다!]

[장승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 대전자로 지정되었습니다!]

쿠웅! 쿠웅! 쿠웅!

지축이 흔들리는 굉음과 함께.

약 5m 크기의 나무 장승 둘이 나타났다.

[장승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이 적들을 바라봅니다.]

[장승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 시전자의 명령을 기다립니다.]

과거, 한 마을을 수호하던 한 쌍의 고목.

방어에 최적화된 토지의 수호신(守護神)이다.

"이럴 수가...."

리챠오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차라리 지금 눈앞에 나타난 것이 리치나 데스나이트였으면 이토록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이, 이런 능력이 있다는 건 들어본 적 없어."

멜리나 역시 이 상황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소환수를 다루는 능력은 그리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시체를 부리는 네크로맨서는 전체 직업의 3%에 불과했고.

정령을 다루는 정령사는 전 세계에서 100명 안에 꼽을 정도로 희귀했다.

그리고 영물이나 환수를 다루는 기껏해야 한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랄까?

하지만.

그중에서 그 누구도.

신(神)을 부릴 수 있는 플레이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체... 대체 어떻게 돼먹은 놈이냐 네놈은!"

리챠오가 절망 섞인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

진혁이 다가오는 장승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을 동시에 부르는 건 꽤나 오랜만이군.'

수많은 야영 장소 중 바로 이곳을 고른 이유는 모두 아누비스의 심판을 통해 이 녀석들을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천수관음을 상대하느라 바닥난 마력.

그 허점을 보완하기 위해 나름대로 공들인 무대였는데, 두 사람이 장단에 제대로 놀아나 준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풀렸다.

"아.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진혁이 뒷걸음질 치는 리챠오와 멜레나에게 조언을 건넸다.

"추격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네놈이 아직 온전한 몸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는데?"

"맞아. 나는 못 하지."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르는 추격전이라니.

지금 몸 상태론 절대로 무리다.

그러니....

"그걸 대신 해 줄 대전자를 부른 게 아니겠어?"

진혁이 말을 내뱉은 바로 그 순간.

[장승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 '출입불허(出入不許)'를 발동합니다!]

쿠쿠쿠쿠쿠!

대나무 숲을 따라 굵은 나무 넝쿨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마치 이 일대를 완전히 봉쇄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엄청난 수의 넝쿨들이 요동쳤다.

"뚫어! 갇히면 안 된다!"

리챠오가 고함을 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쳇!"

멜레나도 그 뒤를 따라나섰다.

퍼퍼퍼펑!

검은 탄환이 넝쿨로 만든 벽을 두드렸다.

넝쿨에 제법 큼지막한 상처가 생겼지만, 회복하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타들어간 자리에 새살이 돋아났다.

녹색 물결이 점점 더 짙게 몰려왔다.

"이쪽으로...! 여기를 노려야 한다!"

"젠장, 나도 노력하고 있다고!"

하지만, 아무리 검을 휘두르고 마법을 난사한들 소용없다.

고작 2차 전직을 갓 끝마친 네크로맨서 따위가 장승들이 펼친 스킬을 파훼할 순 없었으니까.

아누비스의 심판이 충족된 시점에서 승부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힘내. 그렇지! 조금만 더!"

진혁이 고군분투하는 리챠오와 멜레나를 응원했다.

"거의 다 됐어! 파이팅! 할 수 있다. 가즈아!"

뿌우우우!

코인 거래소에서 구매한 응원 풍선이랑 부부젤라까지 사용한 건 덤이다.

"영!"

"차!"

"영!"

"차!"

진혁이 목소리를 높였다.

도발이라기 보단 능욕에 가까운 행동.

"크아아아!"

결국 참다못한 리챠오가 칼을 휘두르기를 멈췄다.

그리고 살기가 뚝뚝 흐르는 칼끝을 돌렸다.

"왜, 넝쿨 자르기는 이제 그만하려고?"

"넝쿨 따윈 아무래도 좋다. 네놈을 죽이면 이 빌어먹을 것들도 사라질 테니."

이야, 똑똑하네.

"맞는 말이야. 시전자를 죽이면 소환수도 자연스럽게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거든."

근데 말이다....

"가능하겠어?"

천수관음과의 싸움을 지켜봤으면 누구보다 잘 알 텐데.

너희들로는 나한테 안 된다는 걸.

애초에 그게 무서워서 일반 플레이어인 것처럼 연기하고 칼리큘라의 동전까지 준비했던 거 아니었나?

"우습게보지 마라. 쥐도 궁지에 몰리면 무는 법이니까."

리챠오가 송곳니를 드러냈다.

여차하면 동귀어진이라도 할 기세다.

하지만 진혁은 리챠오의 발밑에서 그려지는 마법진을 간파한 상태였다.

파츠츠츠....

희미한 마력이 선을 따라 이어졌다.

네크로맨서들이 자주 쓰는 단거리 공간이동용 마법진이다.

이것 봐라?

싸울 것처럼 해 놓고 뒤로는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었네?

경매장에서 만났던 알렉스도 그렇고, 그 스승이라는 캐드릭도 그렇고.

어째 이 녀석들은 궁지에 몰리면 하는 행동이 하나같이 똑같을까?

이쯤 되면 마인 협회 내에 자체적인 아카데미가 있고, 거기에서 도주 수업을 가르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가능하면 상하지 않게 생포하려 했는데, 아주 매를 버는구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순순히 놓아 줄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이렇게 공을 들였는데 다 잡은 먹잇감을 방생시킬 순 없지.

진혁이 뒤쪽에 있는 또 다른 장승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제압해."

차갑게 내려진 명령.

[장승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이 '일벌백계(一罰百戒)'를 발동합니다!]

콰아아앙!

보이지 않는 주먹이 리챠오의 머리를 강타했다.

"으아아악!"

리챠오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허나,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공격이 이어졌다.

콰앙!

콰아앙!

리챠오의 몸이 위아래로 들썩였다.

엄청나게 빠른데도, 한 방 한 방이 뼈마디가 으스러질 정도로 묵직한 공격이다.

"쿠어억!"

한 번 더.

콰아앙!

"컥!"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전신에 뼈가 모조리 박살나기까지는 채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끄으으으...."

피투성이가 된 리챠오가 바닥에 뒹굴었다.

처참한 몰골이다.

살아 있는 게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덜덜덜!

옆에 있던 멜레나의 몸 역시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수, 수호신...급을 대체 무슨 수로 이기란 거야."

칼리큘라의 동전이 발동하기까진 앞으로 1분도 남지 않았지만, 감히 동전을 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계속해서 상식을 벗어난 능력을 보여 주는 진혁에게 완전히 겁을 집어먹은 탓이다.

진혁이 멜레나에게 다가갔다.

"대충 상황 정리는 끝난 것 같으니 이제 문명인답게 대화를 좀 해 볼까?"

'탐식의 눈'을 통해 '마인드 리딩'을 할 수 있으면 간단하겠지만, 안타깝게도 두 사람의 레벨이 더 높았다.

제일 쉬운 방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진실과 거짓을 판별해 주는 능력을 최대한 활용해 주는 수밖에.

[Lv4 '탐식의 눈'이 발동됩니다.]

진혁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지금부터 질문을 할 건데, 부디 성실하게 대답을 해 줬으면 좋겠어."

"뭐... 뭐가 궁금한 건데?"

멜레나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너희들의 존재에 대해선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그 동기까지는 모르겠거든. 탑을 오르지 못하면 인류는 멸망한다. 헌데 어째서 플레이어들을 방해하고 이상한 수작을 부리는 거냐?"

"그건...."

멜레나가 멈칫했다.

바로 그때.

"말...하면 안 된다. 그 입 다물어라, 멜레나!"

리챠오가 쥐어짜는 듯한 음성으로 고함을 질렀다.

'호오.'

그 상처를 입고도 아직도 정신을 잃지 않았다니.

정신력 하나만큼은 인정해 줘야겠다.

"자신이 소속된 곳에 의리를 지키는 건 멋지긴 한데, 상황과 장소를 좀 가렸어야지."

애초에 질문을 할 수 있는 대상이 두 명이나 있다.

한 명쯤 없어져도 심문을 진행하는 데 아무 문제는 없을 터.

진혁이 손가락을 튕겼다.

"절대...! 절대로 말해선 안 된다!"

리챠오가 멜레나를 향해 소리쳤다.

그리고 그것이.

콰아아앙!

리챠오가 남긴 마지막 유언이었다.

보이지 않은 힘이 리챠오를 완전히 짓이겨 버렸다.

두 사람뿐이긴 했으나, 일벌백계란 말에 어울리는 광경이다.

"히이이익! 주, 죽었어. 리, 리챠오...가 진짜로 죽었다고."

다리에 힘이 풀린 멜레나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하얗게 질린 안색.

좋아.

채찍은 충분히 썼으니 이제 당근을 줄 차례다.

"내 목숨을 노리는 놈들은 살려 두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만약 진실을 말한다면 살려 줄 수도 있어."

"사, 살려 준다고?"

멜레나가 토끼눈을 떴다.

"그래. 내부 정보는 꽤나 값진 정보니까. 쓸 만한 정보를 넘긴다면 처분을 보류해 주지."

"...."

잠깐의 침묵.

이어진 건 모든 걸 체념한 듯한 목소리였다.

"...알겠어. 하지만, 나도 자세한 건 몰라."

진혁이 또 다시 손가락을 튕기려 하자, 멜레나가 황급히 덧붙였다.

"아니, 진짜로. 진짜라고! 애초에 우리는 점조직으로 움직이는 데다 나나 리챠오는 암살조라서 당장의 임무 외에는 추가 정보가 주어지지 않는단 말이야."

['탐식의 눈'이 대상의 말을 간파합니다.]

[멜레나가 하는 말은 '진실'입니다.]

아무래도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다.

"임무를 주는 사람은 누구지?"

"본명은 몰라. 하지만, 우리는 그를 '랜슬롯'이라고 불렀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본 적 있는 아서왕의 전설.

그리고 그 원탁에 나오는 기사 중 하나가 랜슬롯이다.

역시나 예상했던 이름이 튀어나왔다.

코드 네임까지 붙였다는 건. 2차 전직을 끝냈다는 뜻이겠지.

"계속해."

"간부들이 그랬어. 탑에 있는 성물들을 전부 모을 수 있다면... 인류는 멸망해도 우리는 죽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그에 대한 막대한 보상을 받게 될 거라고."

"성물이라고?"

멜레나의 말에,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꽤나 의미심장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나, 나도 그 이상은 진짜 몰라. 이게 아는 전부야."

['탐식의 눈'이 대상의 말을 간파합니다.]

[멜레나가 하는 말은 '진실'입니다.]

간부가 아닌 이상 알아낼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한계인 건가.

"그래. 믿어 줄게."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단편적인 것뿐이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었다.

원탁의 기사와 12개의 저주 받은 성물. 그리고 그걸 다 모았을 때의 보상까지.

단서와 단서가 취합한다.

과연, 놈들이 노리고 있는 게 어떤 건지 알겠다.

진혁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아주 간덩이가 배 밖으로 나와 있었군.'

생각했던 것보다 더 미친놈들이다.

마인들이 히든 퀘스트에 도전할 거라는 것까진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설마 '마왕'을 불러오는 것과 관계가 있을 줄이야.

이거 일이 아주 재밌게 돌아간다.

어쩌면 이 변수들까지 포함해 새로운 판을 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65화. 1인 군단 (1)

진혁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가지로 쓸 만한 정보를 말해 줘서 고마워. 정말로 큰 도움이 됐어."

판을 짜는 데 요긴하게 사용할 정보들을 얻었다.

궁금했던 점도 어느 정도 해소되었고.

"그럼 난 이제 가 봐도 되는 거야?"

멜레나가 간절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

"사, 살려... 준다고 했잖아? 분명히 아는 걸 말하면 보내 주겠다고!"

"걱정하지 마. 약속은 지킬 테니까."

쓸모 있다는 걸 증명한 이상 함부로 죽일 생각은 없다.

이렇게 유용한 장기말을 왜 1회용으로 쓰고 버리나?

앞으로도 계속해서 써먹을 수 있을 텐데.

"단지, 한 가지 약속을 해 줘야겠어."

"약속?"

"그래. 약속."

입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새끼손가락을 거는 것도 아닌 진짜 약속.

영혼에 새기는 맹세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약속이다.

[Lv3 '염혼의 낙인'이 발동됩니다!]

진혁의 손가락 끝이 밝게 빛났다.

"앞으로 내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증표야. 뒤통수를 때린다든가, 반기를 들 시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테니 신중하게 결정해."

죽든가.

복종하든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둘 중에 하나뿐이다.

그리고 멜레나는....

"난... 죽고 싶지 않아."

살아남는 쪽을 선택했다.

***

혹독했던 첫 날 밤이 지났다.

따사로운 햇살이 야영장을 비출 무렵.

"흐으음."

진혁이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쾌한 아침이다.

쌓였던 피로가 전부 회복된 기분이랄까?

간밤에 모든 일들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수월하게 풀린 데다, 영양까지 든든하게 보충해 준 덕분에 컨디션은 최고치에 이르렀다.

'이 정도면 전력을 다해 싸워도 문제없겠어.'

마지막으로 남은 보스 레이드에선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정신없는 난전이 펼쳐질 것이다.

'전투라기보다는 전쟁에 가깝겠지.'

진혁이 차분하게 머릿속으로 이번 레이드의 전체적인 밑그림을 재점검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주 사소한 실수조차 용납되지 않는다.

때문에 진혁은 복잡한 상황과 최적화된 움직임 그리고 그 모든 가정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 변수들까지.

그야말로 모든 경우의 수를 대비했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마침내 진혁이 감았던 눈을 떴다.

어느새 손에는 천수관음에게서 얻은 열쇠가 쥐어져 있었다.

아. 보스를 부르기 전에 잠깐.

'하마터면 깜빡할 뻔했군.'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진혁이 '방송 시스템'을 활성화했다.

['채널 언노운(Unknown)'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원하시는 카테고리를 선택해 주십시오.]

주르륵 나열되는 각종 카테고리들.

지금 필요한 건 '공지사항'을 작성하는 일이다.

[보스 레이드 스트리밍은 하지 않겠습니다. 나중에 편집해서 공략 영상 올릴 테니까 볼 사람만 보세요.]

두 줄짜리 짧은 공지가 업데이트되었다.

'어차피 첫 번째 방송에서 어그로는 충분히 끌었으니 굳이 보스전까지 생방송으로 진행할 필요는 없어.'

목적은 동영상에 대한 조회수와 '언노운'이란 채널의 인지도를 쌓는 거다.

시청자들이랑 낄낄대며 떠들다가 보스한테 허점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동영상을 업데이트한 지 1분도 되지 않아 수십 개의 댓글들이 달렸다.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꽤나 많았던 모양이다.

-이슈텔러: 와 공지 보소. 방송 키겠다고 하더니. 갑분싸 동영상으로 대체하겠다고?

-누텔라 짜장: 게다가 공략 성공했다는 걸 기정사실화했는데? 실패하고 죽으면 어쩌려고 이런 공지를 남기는 걸까?

-백수위에트수: 자신이 있으니 그런 거겠지. 어제 스트리밍 못 본 사람들은 그냥 가만히 있어라.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감.

-피자탕수육 존맛탱: ㅇㅇ. 니들이 봐 왔던 고인물이랑 차원이 다름.

-중고딩나라: ㄹㅇ 그 정도임?

-고인물 감별소: 나도 어제 좀 봤는데, 우리 언 형, 완전 두바이산 석유였음.

-디아블로3의 추억: ㅇㅈ. 거의 제작진 탈모 제작기 수준이지. 혼자서 대형 길드 공격대도 쩔쩔 맨 걸 성공해 버렸으니.

-매드무비: 흠. 김칫국 같은데, 아무리 강해도 혼자서 몇 만이 넘는 군대를 상대할 순 없을걸?

-새영언환: 과연 어떤 방법으로 보스를 쓰러뜨릴지 기대되긴 하네.

반신반의하는 사람들과 믿고 기다려 주는 사람들 간의 갑론을박으로 인해, 채널 게시판이 한껏 달아올랐다.

'연출에도 신경을 좀 써야겠군.'

레이드의 성공이야 당연한 거지만, 흥행에도 성공하려면 각본과 구도 그리고 무대에 나오는 배우들까지 중요하다.

그리고 물론.

진혁은 그 모든 걸 충족시킬 방법 또한 구상해 둔 상태였다.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

진혁이 열쇠를 쥔 채 정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

하지만, 열쇠가 텅 빈 공간의 한 점과 접촉한 순간.

철컹!

격철이 맞물리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석상의 열쇠'가 반응합니다!]

[3층의 주인이 당신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붉은색 상태창이 나타남과 동시에.

쿠쿠쿠쿠쿠!

눈앞에 거대한 게이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천수관음이 나타났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게이트다.

"이야...."

진혁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넓이로는 대나무 숲을 가로질러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높이로는 구름에 닿아 하늘을 집어삼켜 버릴 것만 같았다.

곧이어.

쿵! 쿵! 쿵! 쿵! 쿵! 쿵!

게이트 너머에서 엄청난 수의 석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려 3만이라는 병력.

대부분 중무장한 1m급 병사들이었지만, 10m가 넘는 중형급과 50m에 이르는 대형급도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석상들의 중앙에는 가장 화려하게 조각된 석상이 보였다.

저 녀석이 3층의 주인이다.

정확히는 저 석상 위에서 하품을 하고 있는 놈이.

"흐음. 이번에는 혼자서 온 건가?"

석상의 머리 꼭대기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릿저릿!

진혁의 피부에 소름이 오소소 일어났다.

과연.

'이게 보스의 마력인 건가.'

3층의 보스 몬스터는 본신의 마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축에 속했다.

워낙에 많은 소환수들을 거느린 탓에 마력이 분산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전신을 짓누르는 이 압박감.

역시 보스 몬스터는 보스 몬스터다.

진혁이 '탐식의 눈'을 통해 상대를 훑었다.

하지만.

[대상과의 레벨 차이가 극심하여 상태창을 열람할 수 없습니다.]

돌아온 건 열람이 불가능하다는 문구였다.

바로 그때.

[행운 스탯과 적응형 스탯이 레벨 차이를 무력화시켰습니다.]

[대상의 상태창을 꿰뚫어봅니다.]

두 개의 스탯이 빛을 발했다.

'천수관음 땐 실패했던 행운 스탯이 이번엔 터진 건가!'

진혁이 작게 환호성을 터뜨렸다.

——————————————————

이름: 무혼

성별: 알 수 없음

나이: 알 수 없음

레벨: 105

힘 72 민첩 101 체력 79 마력 93 카르마 128

고유 능력: 심장 없는 군대

스킬: Lv17 '천라지망', Lv15 '일괄지휘', Lv14 '약점 간파', Lv14 '군략(軍略)'

——————————————————

[복사 조건: 만다라의 레벨이 15이하이기 때문에 무혼의 고유 능력이나 스킬 복사는 불가능합니다.]

레벨이 105라....

그동안 각종 길드의 공격대가 어지간히도 많이 죽어 주긴 했나 보다.

원래 이 녀석의 레벨이 3자리 수까지 가려면 1년은 족히 넘게 필요했던 걸 생각하면 말이다.

'그래서 저렇게 자신감이 천장을 뚫고 있던 거였냐.'

고작 3층의 보스면서, 잡는 똥폼은 상층에 있는 드래곤보다 더 심하다.

그래도 나쁘진 않다.

'반대로 말하면... 방심을 유도하기에 더 좋은 상황이라는 뜻이니까.'

게다가 적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걸 뒤엎었을 때 구독자들이 느끼는 만족감도 더더욱 높아질 것이다.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웃어?"

"아, 미안. 잠시 딴생각 좀 하느라고. 그래서, 조금 전에 했던 질문이 뭐였지?"

"이곳에 온 건 너 혼자였냐고 물었다."

"뭐, 보다시피. 누구랑 다르게 부하들 뒤에 숨어 있는 걸 좋아하지 않거든."

진혁이 이죽거렸다.

그 도발 섞인 대답에 무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강자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던 표정에 아주 작은 균열이 일어났다.

그러나 아주 잠시뿐이었다.

흔들리던 동공은 어느새 평정심을 되찾았다.

"미안하지만, 이 몸은 직접 몸을 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위에 군림하며, 명령을 내리는 것이야말로 군주의 덕목 아니겠는가?"

여유 있는 응수다.

아니, 여유 있어 보이려고 노력하는 응수라고 하는 게 맞겠지.

아무리 레벨이 오르고 수많은 승리를 쌓아 왔어도....

'본신이 강하지 않는 데서 오는 자격지심은 변하지 않았군.'

이래서 완벽한 존재는 없나 보다.

누구에게나 파고들 허점 한 가지 정도는 가지고 있었으니까.

"글쎄. 내가 생각하는 군주의 덕목은 싸울 때 뒤에 숨는 게 아니라 가장 앞에서 나서는 거라서."

"꼭 그런 멍청이들 때문에 전쟁이 허무하게 끝나는 것이지. 혼자 앞서 나가던 지휘관이 죽으면 뒤를 따르던 병사들은 전멸한다. 그런 기본 중의 기본조차 모른단 말이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네.

단.

"가장 앞에서 싸워도 죽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왜 꼭 앞에서 나서면 죽는다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

충분한 실력만 뒷받침된다면 그것만큼 전체적인 사기를 올릴 수 있는 방법도 없는데.

"...어이가 없군. 네놈에게 그럴 만한 힘이 있다는 것이냐?"

"있고말고."

가능성이 없다면 애초에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난 시간 동안 고생해 가며 승리를 위한 재료들을 모으지도 않았을 테고.

진혁이 천천히 마력을 갈무리했다.

"보아하니 병력 간의 전투에 꽤나 자신이 있나 본데... 나도 난전이 꽤나 취향에 맞거든."

그러니 한번 붙어 보자고.

누구의 말이 옳은지 증명하려면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할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아공간 인벤토리에서 묘하게 생긴 체스판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최초의 체스판'이 활성화됩니다!]

츠츠츠츠!

지면을 따라 푸른 선들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선과 선이 만나 정사각형 모양의 판을 만들었다.

제대로 작동한다.

그렇다면 다음은....

진혁이 이번엔 이유리에게서 받은 조각품들을 꺼냈다.

대리석으로 깎아 만든 수천 개의 체스말들이 나타났다.

물론, 이것들은 보드게임이나 하기 위해 만든 장난감이 아니다.

소환사인 이유리가 마력을 이용해 조각했고 거기에 룬어를 새겨 만든 예술품.

그렇기에 각각의 체스말은 하나의 병사로서 제 역할을 다하게 될 것이다.

"발상은 참신하구나. 확실히 그 방법이라면, 혼자서도 병정놀이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체스판 위에 깔린 체스말들을 본 무혼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자아냈다.

그러나 잠깐의 놀람 뒤엔 비웃음이 짙게 실린 말이 이어졌다.

"그 작은 것들로 무얼 어떻게 할 생각이냐?"

"기다려 봐. 아직 안 끝났어."

그렇게 쫑알대지 않아도 조금 뒤엔 입 다물게 해 줄 테니 가만히 좀 있어라.

진혁이 마지막을 장식할 아이템을 꺼냈다.

시련의 탑 지하 1층, 아누비스를 농락하고 얻은 아이템.

['거대화 알약'을 사용하셨습니다!]

바로 거대화 알약이다.

대량으로 모아 뒀던 알약들이 체스말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쿠쿠쿠쿠쿠!

10cm가 채 되지 않았던 체스말들이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2m에 이르는 나이트와 비숍 그리고 룩이 지평선을 따라 전열을 갖췄다.

중갑주로 무장한 폰이 방진을 형성한 채 창을 뻗었다.

이제 더 이상 체스말들은 장난감이 아니다.

군단의 위용을 갖춘 병력들을 보며, 그 누가 비웃을 수 있단 말인가?

이제야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은 것일까?

이죽대던 무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으득!

무혼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네놈."

손쉽게 생각했던 날파리였다.

고작 한 명쯤이야, 손짓 한 번으로 짓밟아 버릴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별 볼일 없던 인간은 어느새 무시하기 힘들 정도의 대군을 거느린 적으로 변모해 있었다.

66화. 1인 군단 (2)

양측의 병력이 서로를 마주봤다.

물론, 숫자의 차이는 존재한다.

체스말들은 약 2천800기.

반면, 석상들은 그 10배가 넘는 3만에 이르렀다.

"확실히... 지금까지 왔던 인간들과 다르다는 건 인정해야겠구나."

무혼이 낮게 중얼거렸다.

시련의 탑이 개방되고 여러 번의 도전을 받아 왔건만.

이토록 독특한 방법으로 도전해 오는 이는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위협이라는 걸 느낄 정도다.

"나도 하나는 인정할게."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거야 뭐,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안 할 수가 없다.

"너는 어째 갈수록 멍청해지는 것 같냐?"

"뭐, 뭐라고?"

"맞잖아? 약해빠진 놈들 상대로 몇 번 이겼다고 잔뜩 헛바람만 들어선 방심이나 하고. 그러니까 3층에 머물고 있는 거 아니야. 위로 갈 기량이 안 되니까."

시련의 탑의 보스 몬스터들은 각 층의 문지기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그 층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일종의 층을 지배하는 관리자란 뜻이다.

하지만, 플레이어뿐 아니라 그들 역시도 탑을 오르며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만약, 그럴 만큼 충분한 힘을 갖고 있다면 말이다.

"하하, 이것 참. 맹랑한 인간이로고."

무혼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분노와 허탈함이 가득 배어 있는, 어딘지 모르게 자조 섞인 웃음이었다.

"내 힘이 부족해서 4층의 영역을 넘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면상에 대고 직접 말해 줬지. 아! 혹시, 의미 전달이 정확하지 않았으면 다시 한번 말해 줄게. 네 수준으로 4층은 어림도 없어. '3층 지박령'. 그게 딱 너한테 어울리는 포지션이야."

이죽임이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대놓고 도발하는 거다.

속이 뒤집히도록.

"그런 식으로 상대를 흔드는 것조차 다 네놈의 계획인 모양이구나."

그러나 무혼은 미끼를 물지 않았다.

"그래. 마음 내키는 대로 지껄여도 좋다. 허나, 병력의 절대적인 차이와 전술의 우위는 결코 뒤집을 수 없다는 걸 알려 주마."

오히려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며, 부하들을 통솔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쿵!

석상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공수가 완벽한 포진(布陣)이 형성됐다.

압도적인 병력 차에도 불구하고, 무혼은 전력을 다해 진혁을 찍어 눌러 버릴 생각이었다.

"소모전만 펼쳐도 네놈의 병사들은 말라 죽을 것이다."

2천 대 3만의 병력.

같은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한다면, 누가 승리할지는 너무나도 뻔했다.

그리고.

"한 번이라도 실수한다면, 그걸로 이 싸움은 끝날 것이다."

어설픈 판단은 전체 병력의 전멸로 이어질 터.

무혼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려하게 조각된 석상 위에서 모든 전장을 내려다봤다.

"가라."

낮게 깔린 음성과 함께.

"그오오오!"

"오오오!"

가장 앞쪽에 있던 석상들이 지면을 박찼다.

전쟁의 막이 올라갔다.

이제 시작이다.

***

진혁이 돌진하는 석상들을 바라봤다.

한꺼번에 전 병력을 보내는 게 아닌, 약 1천으로 이루어진 선발대가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역시, 이쪽의 대응부터 볼 생각인가."

만약 대처가 미숙하다면, 즉시 나머지 병력을 보내오겠지.

다시 말해, 무혼은 지금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입만 산 놈인지 아닌지를.'

피식.

진혁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최초의 체스판'의 능력이 활성화됩니다!]

[필드 마법 '전장지배(戰場支配)'가 발동됩니다!]

[필드 위에 있는 모든 체스말들의 공격력과 방어력이 30%만큼 증가합니다!]

[사기가 10%만큼 상승합니다!]

파츠츠츠...!

지면을 따라 퍼져 가는 푸른빛 마력.

그 위에 있던 체스말들의 몸 또한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숫자?

물론, 적다.

비교하기 초라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각 개체의 전투력까지 동일하다고는 생각하지 마라.

"중앙에 있는 폰(Pawn)들은 다섯 걸음 뒤로 물러서라. 좌익과 우익의 폰들은 한 걸음 앞으로 이동한다."

진혁이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철컹! 철컹!

검은색 철갑주로 무장한 폰들이 신속하게 진형을 바꿨다.

[체스말 '폰'이 '철의 인내'를 발동합니다!]

2m에 이르는 방패 또한 지면 깊숙이 박혔다.

곧이어 닥칠 충격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쿵! 쿵! 쿵! 쿵!

석상들의 발소리가 더욱 커졌다.

지면이 흔들리고 공기 중의 수분이 메말랐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콰아아앙!

검은색 장벽 위로 회색 파도가 부딪쳤다.

철과 쇠의 격돌로 인해 귀청이 찢어지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이제부터는 순수한 힘과 힘의 대결이다.

쿠쿠쿠!

폰들이 약간 뒤로 밀렸지만, 단단하게 형성된 횡진은 깨지지 않았다.

찰나의 교착이 이어졌다.

"지금이다!"

진혁이 고함을 질렀다.

[체스말 '룩'이 '다중연사(多衆聯射)'를 발동합니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시위에서 강철 화살들이 일제히 발사됐다.

퍼퍼퍼퍽!

퍼퍽!

포물선을 그린 화살들이 석상의 옆구리를 꿰뚫었다.

"그오오오오!"

"오오오!"

석상들이 화살을 방어하기 위해 한 곳으로 뭉쳤다.

작은 방패를 둥글게 펼치며, 사각을 없애려고 했다.

하지만 그게 실수였다.

이번엔 반대편에서 거대한 화염이 날아오기 시작했으니까.

[체스말 '비숍'이 '플레임 스트라이크'를 발동합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부터 캐스팅을 하던 비숍들이 압축했던 마력을 해방시켰다.

유성우가 쏟아지는 것처럼 하늘에서 불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퍼퍼펑!

퍼어엉!

삽시간에 지면 한가운데 거대한 크리에이터가 생겼다.

박살난 몸과 날아간 팔다리.

완전히 걸레짝으로 변해 버린 석상들이 신음을 토했다.

엄청난 위력이다.

특히나 화살을 피하기 위해 밀집해 있던 터라 피해는 상상 이상으로 막대했다.

물론, 이것마저도 진혁이 그려 놨던 구도였지만.

좋아.

고통은 충분히 준 것 같으니, 이제 아예 숨통을 끊을 시간이다.

"전진해라."

짧은 명령과 함께.

폰들이 지면에 꽂혀 있던 방패를 뽑았다.

더 이상 버티는 것이 아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콰콰콰콰콰콰!

일방적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

"호오."

지켜보던 무혼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팽팽한 접전이 펼쳐질 거라 예상했었는데.

의외로 첫 번째 교전은 금방 끝났다.

선발대로 보낸 천여 기의 석상들이 모조리 박살나 버린 것이다.

반면, 체스말들은 채 100기도 쓰러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일방적인 대패.

'같은 수로 싸워선 이길 수 없겠군.'

방패병들이 있는 정면은 꽤나 탄탄했다.

숫자로 밀어붙이면 뚫을 수야 있겠지만, 이쪽의 피해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허나, 이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선발대를 보낸 가치는 있었다.

[무혼이 Lv14 '군략(軍略)'을 발동합니다!]

수없이 많이 치러 온 전장의 경험.

'군략'은 축적된 방대한 양의 기록을 바탕으로 최적의 결과를 도출하는 스킬이다.

공격대들이 이 보스에게 그토록 애를 먹었던 것도 모두, 탁월한 전술과 전략에 휘둘렸기 때문이었다.

'전체적인 방진 자체는 훌륭하나, 왼쪽 측면에 틈이 있다.'

상대적으로 얇은 벽. 게다가 캐스팅 시간이 오래 걸리는 비숍들이 주로 위치해 있었다.

먹음직스러운 틈이다.

살짝만 들쑤셔도 전체가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았으니까.

그런데 왜일까?

무혼은 곧바로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지나치게 먹음직스러워 보이는구나.'

독이든 사과를 눈앞에 둔 것처럼 말이다.

뭔가 있다.

그렇기에 사과 안에 든 독이 어떤 종류인지 파악할 때까진 성급하게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무혼이 Lv14 '약점 간파'를 발동합니다!]

스킬이 발동되자 상태창이 연이어 나타났다.

1. 체스판 위의 '왕관'을 파괴한다면, 모든 체스말들이 파괴됩니다.

2. 왕관은 '킹' 혹은 '퀸'만이 쓸 수 있습니다.

3. 왕관을 쓴 킹이나 퀸은 반드시 가장 안쪽에서 다른 체스말들의 보호를 받아야만 합니다.

4. 왕관을 쓰지 않은 킹이나 퀸은 상대 적장과의 전투 시 모든 능력치가 100%만큼 상승합니다.

왕관을 쓸 수 있는 건 킹과 퀸, 단 둘뿐.

무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저 소녀가 퀸의 역할을 맡고 있는 건가.'

겹겹이 둘러싸인 병사들 사이에서 은발의 소녀가 왕관을 쓰고 있는 게 보였다.

반면, 킹이라 할 수 있는 진혁은 '나이트'들을 이끌며, 어디론가 움직일 채비를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무혼의 머릿속에 무언가 스쳐지나갔다.

'그런 거였나.'

이제야 상대의 의도가 이해됐다.

일부러 틈을 만들었다는 건 공격을 유도하겠다는 뜻.

그렇다면 왜 공격을 유도하려고 했을까?

무혼의 사고는 거기서 더욱 뻗어 나갔다.

'나와 싸우기 위해서.'

정확히는 4번째 특성 '적장과의 전투 시 모든 능력치가 100% 상승하는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겠지.

겉으로는 부하들을 희생하지 않겠다느니, 가장 앞에서 싸우겠다느니 하더니.

속으로는 본진 전체를 미끼로 삼아 이쪽의 목숨을 노리려고 한 것이다.

'재밌군.'

능글맞은 모습과는 다르게 배 속에 능구렁이를 100마리쯤 품고 있다.

하지만, 목적을 알아낸 이상 이 점을 얼마든지 역이용할 수 있으리라.

'원하는 대로 해 주지. 대신, 네놈의 칼이 나에게 닿기 전에 내 부하들이 네놈의 퀸을 칠 것이다.'

무혼의 입꼬리가 서서히 위로 향했다.

'...라고 생각하고 있으려나.'

진혁이 느긋하게 몸을 풀었다.

그토록 도발을 해 뒀으니, 무혼은 지금 가능한 한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승리를 원할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다.

혹시라도 패배한다면, 그 수치심을 견딜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약점 간파 스킬을 갖고 있는 이상, 당연히 내 의도와 전술의 약점 또한 파악했겠지.'

의문을 품고 그것이 해소되는 과정을 통해 굳어진 확신.

똑똑한 놈일수록, 정황을 자기 입맛대로 끼워 넣는 법이다.

물론, 그게 틀렸을 때의 대가도 뼈아플 테지만.

그때였다.

"정말로 괜찮겠어?"

왕관을 쓰고 있던 엘리스가 말을 걸어왔다.

"왜, 걱정돼?"

"당연히 걱정되지. 뭐, 나도 네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하지만, 저 녀석도 그렇게 만만한 놈이 아니야. 아무 능력도 없이 3층을 지키고 있는 게 아니라고."

"네가 그렇게 칭찬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네. 그렇다면 쟤네가 설마, 너랑 널 따르는 혈족들보다 강하단 거야?"

"뭐! 그게 무슨…! 지금 머리가 텅텅 빈 돌덩이들이랑 고귀한 밤의 귀족인 이 몸이랑 비교를 하는 거야? 내가 진짜 회랑에 유폐되지만 않았어도 저런 놈쯤은...!"

엘리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발끈하는 걸 보니 긴장은 다 풀린 모양이다.

"걱정하지 마 다 생각이 있으니까. 너는 내가 시킨 대로 이곳에서 왕관을 지키기만 하면 돼."

누가 더 오랫동안 왕관을 지키느냐.

누가 먼저 적장의 목을 따느냐.

그 두 가지가 이 싸움의 승패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진혁은 이미 그 답을 갖고 있었다.

67화. 1인 군단 (3)

"...그게 가능해? 아니, 정말로 상대가 그렇게 나올 거라고?"

엘리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믿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잔뼈 굵은 상대의 수를 읽는 건 물론, 10년 지기 죽마고우마냥 무혼의 성격까지 꿰뚫어보고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마지막에 준비한 히든카드는 엘리스 본인조차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방법이었다.

"너... 진짜 뭐야? 인간 맞기는 한 거야?"

엘리스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진혁이 굉장하다는 건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고 있었지만.

이건 어떻게 된 게, 까면 깔수록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난 그저 이 세계를 좋아하는 사람 중 하나야."

11년이란 세월.

그 누구보다 이 세계를 즐겼다.

그렇기에 그 누구보다 이 세계에게 매달렸다.

한 번에 모든 것을 익히는 재능충도 아니고.

처음부터 뛰어난 스펙을 갖고 태어난 천골(天骨)도 아닌.

닳고 닳은 고인물.

단지 그뿐이다.

"후우. 진짜 너다운 답변이네."

엘리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물어봤자 진혁의 정체에 대한 답변은 듣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다.

"네 머리에 쓴 거나 잘 지켜. 그거, 비싼 거다."

"걱정하지 마. 나도 한 번 손에 넣은 걸 누구한테 빼앗기는 스타일은 아니니까."

피식!

"아무렴 어련하시겠어. 그럼, 조금 이따 보자고."

작별 인사를 건넨 진혁이 엘리스가 있는 중앙에서 벗어났다.

그렇게 체스말들을 가로질러 도착한 곳은 최우측에 위치한 넓은 공터였다.

진혁이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두두두두두!

돌진용 랜스와 무장한 중갑기병들이 진혁의 양옆으로 도열했다.

"부르셨습니까?"

말을 탄 기사로부터 감정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른 체스말들과는 달리, 지능까지 추가한 특별 개체.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아껴 뒀던 '나이트'들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검은 갑주로 전신을 완전히 감싼 흑마(黑馬) 한 마리가 다가왔다.

'말을 타는 건 꽤나 오랜만이군.'

진혁이 흑마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말이나 다이어 울프 같은, 비교적 흔히 볼 수 있는 것부터.

불사조나 드래곤 같은 환수까지.

시련의 탑에는 그야말로 수천 가지 '탈것'들이 존재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진혁은 현존하는 모든 탈것들을 타 봤다.

오히려 워낙 특이하고 희귀한 것들 위주로 이용하느라, 말을 타는 게 어색할 정도였지.

진혁이 안장 위로 올라탔다.

"히이이잉!"

말이 거칠게 몸을 흔들었다.

하지만, 아주 잠시뿐이었다.

부드럽고 능숙한 손놀림에, 날뛰던 말은 곧 안정을 되찾았다.

"가자."

진혁이 랜스를 움켜쥐었다.

"알겠습니다."

흑기사가 즉시 고개를 숙였다.

***

두두두두두두!

300기의 나이트들이 대나무 숲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바로 그때.

"그오오오!"

"오오오!"

석상들 사이로 유난히 팔과 다리가 긴 놈들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숫자는 약 3천.

하지만, 하나같이 중형급 이상의 강한 놈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본진을 노리는 거군.'

막으러 돌아가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무시하기도 애매한.

딱 그런 숫자의 병력이다.

아마 저것 또한 무혼이 노린 거겠지.

"어떻게 합니까?"

"무시한다. 3천이 빠져나간 만큼, 그만큼 적의 벽도 얇아졌을 테니까."

진혁이 석상들 중앙에 텅 비어 있는 틈을 가리켰다.

"저희가 파고드는 즉시 양익에 있는 병력이 퇴로를 차단해 버릴 겁니다."

"그렇겠지."

알고 있다.

저것이 일부러 열어 준 빈틈이라는 것쯤은.

상대 역시 우리를 안쪽까지 유인한 뒤 가두고, 그사이 엘리스의 왕관을 빼앗는 게 목적이리라.

중앙에 대형급을 배치하고 양쪽에 몸집이 작은 놈들을 배치한 것만 봐도 그 의도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 모든 건 하나의 대전제가 성립되었을 때 가능한 작전이다.

놈이 보낸 3천의 섬멸대가 왕관을 빼앗는 것이.

'내가 놈의 목을 쳐버리는 것보다 빠를 것이라는 대전제가.'

두두두두!

진혁이 더욱 말의 속력을 높였다.

어느새 적진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단숨에 돌파한다!"

목청껏 고함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손에 쥐고 있는 랜스가 앞으로 향했다.

[체스말 '나이트'가 '쐐기대형'을 발동합니다!]

[충돌 시 피해량이 200%만큼 증가합니다!]

적은 수로도 최대의 파괴력을 만들 수 있는 돌격 대형.

300기의 나이트가 적진 한복판으로 파고들었다.

콰콰콰콰쾅!

랜스에 꿰뚫린 석상들의 파편이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가공할 만한 위력이다.

무게와 속도가 배합된 일점 돌파에, 겹겹이 펼쳐진 방어선이 모조리 박살났으니까.

선두에 선 진혁이 병력들을 갈무리하며 점점 더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몇몇 석상들이 필사적으로 항전했으나, 애초에 네임드급이 아닌 한 진혁의 발목을 붙잡을 순 없었다.

그렇게 1분의 시간이 흘렀을 무렵.

진혁이 이끄는 나이트들은 적진 가장 깊숙한 곳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진혁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보석으로 치장된 석상 위에 서 있는 무혼의 모습이 보였다.

'...웃고 있군.'

입꼬리가 뒤틀린 채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얼굴이 꽤나 볼 만했다.

"잘도 여기까지 기어왔구나, 인간이여. 그 적은 숫자를 이끌고 이 몸의 앞까지 온 건 칭찬받아 마땅하다."

"되도 않는 헛소리는 그쯤 해. 의도적으로 열어 줬다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

"호오. 함정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지."

"재밌구나, 허면, 어째서 사지로 걸어 들어온 것이냐?"

"응? 사지? 내 눈엔 한여름 밤 한강 둔치로 보이는데? 봐. 저기 닭꼬치에 맥주도 팔고 있네."

"...이 상황에서조차 여유를 부리다니. 이쯤 되면 내가 널 너무 과대평가했다는 생각마저 드는구나."

무혼이 천천히 양 손바닥을 들어올렸다.

"뭐, 됐다. 비쩍 마른 소녀에게 왕관을 맡기질 않나, 고작 그 숫자를 데리고 이 안까지 오질 않나.... 더 이상 상대할 가치는 없을 터."

그리고 그대로 손바닥을 하나로 모았다.

"그만 끝내 주마."

쿵! 쿵! 쿵! 쿵! 쿵!

양 옆에 있던 석상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였다.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리스의 다비드상과 대예적금강(大穢跡金剛)까지 소환해 뒀군.'

천수천안관음과 마찬가지로 꽤나 강력한 네임드급 몬스터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콰앙!

콰아앙!

나이트들이 제대로 된 반항 한번 하지 못하고 박살나기 시작했다.

철갑주가 반으로 쪼개지고 랜스가 산산조각 났다.

"푸하하하! 시바 세계에는 좀 더 제대로 된 놈들이 없는 것이냐!"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대예적금강과.

"흐음. 완벽한 인체 비율을 갖고 있는 인간도 보이질 않는군요."

적의 신체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다비드상.

전투광과 변태가 한자리에 있다.

이것도 흔히 보기 힘든 광경인데....

과연, 보유한 마력 양 하나만큼은 엄청나긴 하네.

저토록 무지막한 놈들을 죄다 부릴 수 있는 걸 보면, 마나통이 목구멍까지 차 있는 게 틀림없었다.

'보스는 보스라 이건가.'

하지만.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진혁의 얼굴에선 조금의 긴장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미소를 머금은 채 무혼을 바라봤다.

"미치기라도 한 것이냐? 어째서 웃는 거지?"

"네가 착각하고 있는 걸 두 가지만 짚어 줄게."

진혁이 첫 번째 손가락을 접었다.

"먼저, 네가 보낸 석상들. 꽤나 자신 있는 놈들로 골라 보낸 것 같은데... 맞냐?"

"그렇다. 정예들로만 추려서 보냈지. 어떤 임무가 주어지더라도 믿고 맡길 수 있는 놈들이다."

"나도 마찬가지야."

"뭐라고?"

"내가 왕관을 맡긴 녀석도... 믿고 맡길 수 있는 놈이라고."

진혁의 말이 끝난 바로 그때.

콰콰콰콰콰콰!

저 멀리서 붉은 선혈이 솟구쳤다.

"이런 잡것들이! 감히. 누구 머리에 손을 대려고 해?"

엘리스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엘리스가 Lv?? '선혈의 비'를 발동합니다!]

핏줄기로 만든 수백 개의 작살들이 하늘을 빼곡히 뒤덮었다.

숫자는 많지만, 하나같이 무지막지한 마력이 실려 있었다.

햇빛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대신 먹구름이 검게 드리웠다.

"죽어."

엘리스가 차갑게 내뱉었다.

그걸로 끝.

하늘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핏줄기에 석상들이 모조리 박살나기 시작했다.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융단 폭격이 펼쳐졌다.

그마저도 마력 공급이 제한되어 있어서 저 정도지 만약, 본신의 힘을 전부 발휘할 수 있으면 이 일대 자체가 초토화되었으리라.

"뭐, 뭐야?"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무혼이 헛바람을 크게 들이마셨다.

일부러 집단전이 아닌 대인전에 특화된 놈들만 선별해서 보냈건만.

백발의 소녀 앞에선 종이 병사에 불과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심지어 저 중에는 네임드에 해당하는 석상까지 섞여 않은가?

그런데, 대체 어떻게....

무혼이 머리에 망치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끼고 있는 사이.

진혁이 두 번째 손가락을 접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나를 깊숙이 끌어들이기 위해 틈을 열어 준 것. 그거야말로 내가 노린 거였어."

발동 조건이 꽤나 까다로웠지만, 때마침 모든 조건이 갖춰졌다.

['세계의 기억'을 불러옵니다.]

진혁이 고유 능력과 스킬들이 저장된 대도서관을 소환했다.

우우우웅!

융합의 재료가 될 능력은 '혈마기'와 '만다라'.

정 반대의 성향을 지닌 서로 다른 두 개의 능력을 융합해 이 싸움을 반전시킬 능력을 만든다.

[고유 능력 '혈마기(血魔氣)'와 '만다라(曼茶羅)'가 융합합니다!]

[융합에 성공하셨습니다!]

[스킬 '이중 첩자(S)'를 획득하셨습니다!]

[발동 조건이 매우 까다롭기 때문에 랭크가 S→A로 하향됩니다.]

[이중 첩자]

입수 난이도: A

내용: 적들 중 일부를 세뇌시켜 서로가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게 할 수 있습니다. 단, 이중 첩자의 대상은 보스 몬스터가 부리는 '소환수'여야 하며, 소환수를 부리는 '보스 몬스터'와의 거리가 5m 이내일 경우에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고마워."

능력을 발동할 수 있는 사거리까지 끌어들여 줘서.

덕분에 이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Lv1 '이중 첩자'가 발동됩니다!]

파츠츠츠!

진혁의 몸을 중심으로 투명한 파장이 뿜어졌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오오오!"

촘촘하게 펼쳐져 있던 포위망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진혁과 나이트를 노리던 검과 창들이 바로 옆에 있던 동료에게 향한 것이다.

퍼억!

카가가각!

동시다발적으로, 거의 절반에 이르는 석상들이 피아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중에는 네임드급에 해당하는 석상도 포함되어 있었다.

"인체 비율 좋아하네. 빌어먹을 서양의 애송이 따위가!"

대예적금강이 다비드상의 안면을 강타했다.

콰아아앙!

다비드상의 얼굴에 보기 흉한 금이 죽죽 그어졌다.

"가, 갑자기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닥쳐라! 처음부터 네놈의 그 기생오라비 같은 면상도, 잘 빠진 복근과 허벅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미 '이중 첩자'의 능력에 당한 이상, 어떤 말을 해도 소용없다.

지금 대예적금강의 눈엔 다비드상이 불구대천의 원수로 보일 테니까.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한 전장.

"빌어먹을. 이걸 위해서 일부러 연기를 한 거였나."

무혼이 어금니를 부러져라 꽉 깨물었다.

"함정에 함정을 팠지."

머리 좋은 놈을 잡으려면, 한 번 꼰 걸로는 안 되더라고.

그래서 조금 더 양념을 추가했다.

아무리 지 잘난 맛에 사는 놈이라도 걸릴 수밖에 없도록.

그 왜, 구라의 꽃은 역구라란 말도 있잖아?

어찌 됐든....

이걸로 상황은 대등해졌다.

"지금부터 2라운드다."

68화. 1인 군단 (4)

이곳에 온 플레이어는 단 한 명뿐.

허나, 고작 한 명이 수만에 맞먹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검은 잎'이 발동됩니다.]

[부패의 효과가 가미된 석상들이 빠른 속도로 약화됩니다.]

클라이맥스를 가속화하기 위해. 마지막 카드까지 사용했다.

검게 물든 석상들의 표면.

무적을 자랑하던 병력들이.

불패를 자랑하던 부하들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무혼이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녀석이 타고 있는 석상 또한 주인을 보호하기 위해 함께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소용없다.

이미 녀석을 보호해 주던 수많은 석상들은 자기들끼리 싸우기 바빴으니까.

무엇보다 소환수들이 성가신 거지, 무혼 본신의 힘은 일개 네임드 몬스터에도 미치지 못했다.

[Lv3 빙하조형(氷河造形)이 발동됩니다!]

쿠쿠쿠쿠쿠!

얇은 얼음벽이 무혼의 퇴로를 가로막았다.

"어딜 도망가려고?"

이제부터 재밌어지려 하는데, 벌써 퇴장하려고 하면 쓰나?

적어도 결말은 보고 가야지.

"인정할 수 없다. 소환수들의 명령 체계에 간섭하는 능력이라니...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단 말이다!"

무혼이 고함을 질렀다.

얼굴이 창백해지고 목소리가 떨린다.

하긴, 녀석의 입장에서 이 상황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겠지.

"현실 부정을 하는 거야 자유지만, 그럴수록 너만 추해지는 거야."

진혁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우우우웅!

손끝을 타고 황금색 운무가 일렁였다.

'만다라'가 발동되려 하는 것이다.

흘러나오는 마력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걸까?

무혼이 다급히 석상의 머리에서 뛰어내렸다.

"막아라! 저 녀석을 막아!"

어떻게든....

어떻게든 만다라가 완전히 개화하기 전에 죽여야 한다.

"그오오오!"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된 석상이 양 손을 높게 치켜들었다.

진혁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콰아아앙!

지면이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졌다.

하지만 석상이 내려친 자리엔 아무것도 없었다.

"궁지에 몰리면 부하에게 떠넘기고 도망만 치려는 습성 또한 여전하구나."

하늘 높게 솟구친 몸.

어느새 진혁의 손엔 '빙하조형'으로 만든 활이 쥐어져 있었다.

물론, 화살은 얼음이 아니다.

완전히 만개한 만다라의 빛으로 만든 금색 화살이 당장이라도 시위를 떠나려 하고 있었다.

[빙하조형(氷河造形)과 만다라(曼茶羅)가 공명합니다!]

['파마(破魔)의 화살'이 발동됩니다!]

한 줄기 섬광이 뿜어졌다.

콰콰콰콰콰콰콰!

직선으로 가로지른 빛이 무혼의 심장을 꿰뚫었다.

치이이익!

가슴 한복판에 생긴 바람구멍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빌...어먹을!"

무혼이 허무함과 절망감이 뒤섞인 얼굴로 상처를 내려다봤다.

허나, 아주 잠시뿐이었다.

그 어떤 생명체라도 심장을 잃은 이상 살아남을 수 없었으니까.

비틀거리던 무혼의 몸이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3층의 보스 몬스터 '무혼(無魂)'이 쓰러졌습니다!]

[시련의 탑 4층이 개방됩니다!]

[다음 층을 정복할 때까지 남은 시간: 89D 23h:59m:59s]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하늘에 황금색 상태창이 연이어 나타났다.

드디어 3층을 정복한 것이다.

게다가 레벨도 한꺼번에 5개나 올랐다.

갈수록 경험치 상승폭이 커지는 걸 생각하면, 엄청난 성과였다.

"스탯이야 마력에 투자하면 되겠고...."

다음은 이번 레이드의 보상을 획득할 시간이다.

진혁이 멈춰 버린 석상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무혼의 시체 앞에 떨어져 있는 상자가 보였다.

"이건?"

진혁의 동공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빨, 주, 노, 초, 파, 남, 보.

상급 성유물이나 3층의 보스 몬스터를 처리한 뒤 얻을 수 있는 보물의 등급을 나누는 7가지 색깔을 일컫는다.

그런데.

'설마, 주황색 등급이 나올 줄이야.'

10층 이내에서 나오는 등급은 전부 '빨강색'.

하지만, 눈앞에 있는 건 그보다 한 단계 높은 '주황색' 등급이었다.

이유는 짐작이 갔다.

홀로 사냥을 했을 때 가장 좋은 보상을 얻을 수 있는 '독식'의 효과 때문이겠지.

두근! 두근! 두근!

진혁의 심장이 빠르게 고동쳤다.

역시, 가장 짜릿하고 흥분되는 순간은 바로 고생에 대한 보상을 확인할 때다.

['알 수 없는 보물 상자'가 열립니다!]

눈부신 빛과 함께, 상자 안에 있는 아이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자 안에 들어 있는 아이템은 총 7개입니다.]

[핑크 다이아몬드 4개를 획득하셨습니다.]

['최우선 거점 지정권'을 획득하셨습니다.]

['말랑말랑 낱알 1kg'을 획득하셨습니다.]

['천연수 50L'를 획득하셨습니다.]

['솔라의 씨앗' 5마개를 획득하셨습니다.]

['불을 토하는 달팽이' 3마리를 획득하셨습니다.]

붉은색 상자였으면 기껏해야 3개 정도 들어 있었을 터.

과연, 주황색 등급은 주황색 등급이다.

'이야, 두둑하게도 줬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보상이다.

충분하고도 넘친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헉?"

마지막 아이템 목록을 확인한 진혁은 터져 나오는 함성을 가까스로 삼켜야만 했다.

[태양을 가리는 돌]

하하.

진혁의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무혼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좋은 게 나왔다.

'100번 잡으면 1번 나올까 말까 한 확률로 알고 있는데.'

미쳤다.

'독식'의 효과가 엄청나다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한 순간이었다.

이거 어쩌면....

'4층 공략하는데도 꿀이란 꿀은 잔뜩 빨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진혁은 머지않은 미래를 떠올리며, 계획을 새로 그리기 시작했다.

***

[4층이 개방되었습니다.]

시련의 탑 안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에게도 이 메시지가 전해졌다.

"뭐, 뭐야?"

"4층이 열렸다고?"

"보스를 잡았단 말인가!"

탑에서 활동하던 플레이어들이 기함했다.

그토록 애를 먹었던 3층의 보스 몬스터가 쓰러지다니.

지금까지 계속해서 실패했던 걸 생각하면, 쉽사리 믿기 힘들었다.

심지어 지금 대형 길드의 스케줄 또한 텅텅 비어 있는 상황 아닌가?

하지만, 눈앞에 나타난 상태창을 본 이상 언제까지 부정할 수만도 없었다.

이건 현실이었다.

"정말로... 성공했군요."

올림포스 길드의 패트릭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처음 가면을 쓴 플레이어를 만났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완벽하게 조합을 갖춘 공격대조차 보스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그 모든 의심은 지금 이 순간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것도 솔플로 말이죠."

유럽의 랭커 마리아의 얼굴 또한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인류가 멸망하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과 압도적인 실력 차에서 오는 자괴감.

그 두 가지 감정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영웅의 탄생이구만."

"그래도 다음 층을 공략할 때까지 90일이란 시간을 벌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이번엔 착실하게 준비해야겠어."

다른 랭커들도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었다.

반면, 못마땅한 기색을 잔뜩 머금은 텐웨이는 세차게 혀를 찼다.

"다행? 다행이라고? 멍청하긴! 이번 레이드의 성공이 과연 우리한테 이득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앞으로 저 녀석이 조회수를 몽땅 빨아먹을 텐데?"

"...!"

"...."

모두가 멈칫했다.

확실히, 그 말 대로다.

현재 커뮤니티는 온통 언노운이란 플레이어에 관한 이야기로 도배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전체적인 보스 레이드에 관한 하이라이트 영상이 올라온 뒤엔 그 현상이 더욱 격해지고 있었다.

-탑신병자: 천수관음 저거 오지게 센 네임드 아니었음?

-동학개미운동: 괜히 별명이 믹서기겠냐? 가는 족족 갈려 나갔잖어.

-내게 축구는 살인이다: ㅇㅇ. 그래서 대부분의 공격대도 저놈 피하려고 다른 쪽으로 갔음.

-킹덤3: 와. 근데 그걸 개박살낸 거야? 그것도 혼자서?

-봉무게는 조상님이 들어 주냐?: 게다가 보스몹 잡을 때 체스말들 소환수로 부린 것도 미쳤더라.

-새영언환: 앞으로 채널 '언노운' 많은 구독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언노운이 미래다!

-백수 위에 트수: 5252 믿고 있었다구!

-고인물만 보면 짖는 개: 왈! 아르르르! 왈왈왈! 와르르르! 깨갱!

-다람이S2: 대형 길드란 놈들은 홍보만 잔뜩 하고 정작 실속은 없던데ㅋㅋㅋ

-시바는 시바시바: 차라리 길드 전부 언 형한테 넘기는 게 어떰?

융합 스킬이나 엘리스의 존재 등은 진혁이 편집해 둔 터라 개연성 부분이 미흡한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화려하고 시원시원한 영상은 모두의 욕구를 만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인기다.

이쯤 되면 경계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흠. 우리 입지가 약해질 수 있겠군."

"마냥 좋아할 게 아니었네요."

웅성거리는 실내.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안도의 한숨은 이내 시기와 질투로 변질됐다.

바로 그때.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테레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가 말이지?"

텐웨이가 즉각 되물었다.

"저희는 모두 저분 덕분에 살아남은 거예요. 솔직히 말해 여기 있는 분들 중에 그 누가 보스 몬스터를 처리할 수 있죠? 아직 실전 경험도 제대로 쌓지 못한 신입들을 데리고 어느 분이 저 지옥에 갈 수 있냔 말입니다."

감사의 인사를 하기는커녕 자기들 밥그릇을 걱정하는 게 먼저라니.

물에 빠진 놈들 구해 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는 꼴이다.

물론,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건 대놓고 비난하고 있는 텐웨이였다.

"하. 꼴에 지인이라고 저 녀석 편을 드는 건가?"

"사실을 말했을 뿐이에요."

테레사가 선을 그었다.

"그리고 만약 나머지 분들도 모용황 씨와 같은 생각을 갖고 계신 거라면.... 저는 더 이상 이 연합의 일원으로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서, 설마... '회담'을 탈퇴하시겠다는 겁니까?"

깜짝 놀란 패트릭이 다급히 되물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전 세계에서 날고 기는 랭커들과 유망주들조차도 어떻게든 연줄을 만들려고 하는 게 바로 이곳이다.

당연히 아무나 뽑지도 않을뿐더러 부와 명예가 보장된 만큼, 나가려 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테레사의 표정은 확고했다.

"그 정도로 믿는 겁니까? 그 남자를?"

"네. 믿고 있어요."

그 누구보다 믿고 있다.

만약, 탑의 끝을 보게 될 플레이어가 있다면....

그 사람은 단 한 명뿐이라고.

그리고 그 사람과 나머지 모두를 저울에 올려야한다면.

당연히 골라야 할 쪽은 하나 뿐이라고.

테레사는 확신했다.

***

같은 시각.

보상을 모두 챙긴 진혁은 시련의 탑을 나왔다.

본격적으로 4층에 가기 앞서, 휴식을 취하며 체력을 회복시킬 생각이었다.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으니 사치 좀 부려 볼까?'

5성급 호텔을 잡고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한 뒤 풀코스 식사를 즐겨야겠다.

'BJ 했을 때는 월세에 공과금도 내다보니 하루 한 끼 챙겨 먹는 것도 힘들었지.'

그나마도 먹방 때 쓸 음식들을 시키기 위해 이틀을 쫄쫄 굶은 적도 부지기수였다.

허나, 더 이상은 아니다.

조금 전에 얻은 핑크 다이아몬드 하나만 팔아도 족히 3억은 벌 수 있었으니까.

생전 처음 제대로 된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기대에 진혁의 위가 요동쳤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우우웅!

안주머니에 넣어 놨던 스마트폰이 격렬하게 진동했다.

[발신자: 유연화]

화면에 표시된 이름을 확인한 진혁이 통화 표시를 드래그했다.

"여보세요?"

"오빠...!"

유연화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마치, 모든 게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69화. 마력 폭주증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무슨 일이야, 연화야?"

진혁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오빠, 할아버지가..., 할아버지가 쓰러지셨어. 이대로라면 오늘 밤을 못 넘길 것 같다고...."

연화의 할아버지라면 설마, 유천영 어르신?

그러고 보니 각성 테스트 당시 김기태가 유천영에 관해 이야기했던 게 기억났다.

분명, 몸이 괜찮으시냐고 물었었지.

유연화는 거기에 발끈하며 대답했었고.

'불광동핵주먹'이란 닉네임으로 [시련의 탑]을 함께 했던 고인물.

'언제나 밝게 웃던 연화가 이토록 흐트러져서 연락할 정도라면....'

이미 가망 따위는 없으리라.

그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누군가에게라도 이 슬픔을 토로하고 싶은 거겠지.

"어디야?"

"응?"

"지금 있는 곳 어디냐고."

"서울대학병원. 근데, 오빠가 와도...."

서울대학병원.

아무래도 오늘 밤 일정을 살짝 바꿔야 할 것 같다.

"일단 기다리고 있어. 30분 내로 갈 테니까."

* * *

"오빠, 여기야."

병실 앞에서 기다리던 유연화의 모습이 보였다.

"고마워, 이렇게 와 줘서. 난... 정말 누구한테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초췌하고 수척한 얼굴.

엄청나게 울었는지 두 눈엔 눈물 자국이 가득했다.

슬퍼하는 마음은 알지만, 지금 당장은 병의 종류부터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어떤 질병인지 말해 줄 수 있어?"

"마력이 폭주하는 증상이야. 원래 할아버지께선 지병이 있으셨는데, 시련의 탑이 나타난 뒤로 갑자기 증상이 훨씬 악화됐어."

탑의 마력이 밖으로 흘러나왔고.

그걸로 인해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유물들이 성유물화 되거나.

지금처럼 각종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 또한 그 예시 중 하나였다.

원인은 대충 예상이 갔다.

'유천영 어르신이 배웠던 무술과 관련된 거겠지.'

탑의 마력과 오랫동안 쌓아 왔던 진기가 거부 반응을 일으켜, 폭주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내가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라."

"저, 정말로?"

진혁의 말에 유연화의 눈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모두가 포기한 할아버지를 살릴 수 있다니.

가능성이야 희박할 테지만....

지금은 실낱같은 희망이 생겼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얼어붙었던 심장이 순식간에 녹는 기분이었다.

"우선, 직접 상태를 좀 봐야겠어. 이 안에 계시는 거지?"

"응. 잠깐만."

눈물을 닦은 유연화가 병실 문을 열었다.

끼이익!

쇳소리가 유독 크게 울려 퍼졌다.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 열댓 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 마도구처럼 보이는 막대기를 들고 있는 힐러 그리고 도복을 입은 건장한 체구의 남자들.

물론,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띠는 건 침대 위에 의식 없이 누워 있는 건장한 체구의 노인이었다.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자가 유천영.

'한국 최강인가.'

——————————————————

이름: 유천영

성별: 남

나이: 78세

레벨: 5

힘 25 민첩 50 체력 38 마력 7 선기(仙氣) 103

보유한 스탯 포인트: 0

보유한 코인: 0

직업: 없음

고유 능력: 태극무형(太極無形)

스킬: Lv13 '진태청화랑심법(眞太淸花郞心法)', Lv12 '임전무퇴(臨戰無退)', Lv12 '강화', Lv11 '일당백(一當百)'

——————————————————

[복사 조건: 현재 힐러들은 오래 전부터 유천영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습니다. 가망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음에도 수백억을 뜯어먹는 거머리들의 꿍꿍이를 밝힌 뒤 유천영의 생명을 구한다면, 그가 갖고 있는 스킬 중 하나를 복사할 수 있습니다.]

'탐식의 눈'을 통해 본 유천영의 스탯창은 그야말로 화려함 그 자체였다.

레벨은 고작 5.

그러나 단순히 레벨만으로 이 사람을 평가해선 안 된다.

아직 플레이어들의 구체적인 랭킹은 정해져 있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유천영의 이름이 가장 먼저 나왔다.

레벨과 고유 능력을 떠나서, 순수하게 보유하고 있는 능력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뜻이다.

'단 한 번도 던전에 들어간 적 없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군.'

딱 한 번, 아웃브레이크로 튀어나온 몬스터들을 처리하느라 오른 레벨이 전부이리라.

미궁에 있는 동안 일어난 일이라, 못본 게 살짝 아쉽긴 하다.

'그래서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왔지.'

편안한 휴식과 맛있는 식사도 팽개치고 여기에 온 이유.

물론, 유연화와의 친분도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긴 했으나 가장 중요한 건 강자로부터 능력과 스킬을 복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함이었다.

유천영 정도 되는 거물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흔히 오는 게 아니었으니까.

바로 그때.

"연화 아가씨. 어디 갔다 오시는 겁니까? 지금 자리를 비우실 때가... 헉?"

나무라던 힐러 한 명이 갑자기 헛바람을 크게 들이마셨다.

유연화의 뒤로 너무나 익숙한 누군가를 봤기 때문이다.

"가, 강진혁 플레이어다!"

"이번에 S급을 받은!?"

"맞아. 그 사람이야."

"이곳엔 어쩐 일이지?"

어찌 모를 수 있을까?

현재 한국에서 가장 이슈가 되는 플레이어를.

압도적인 마력 수치로 S급 판정을 받은 건 물론, 연무장에서 천유성과 홍덕표를 상대로 보여 준 무용은 쉽게 잊기 힘든 기억이었다.

"아, 아가씨가 저분을 어떻게 알고 계시는 겁니까?"

"진혁 오빠와는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예요. 할아버지 상태를 한번 봐주겠다고 해서 함께 왔고요."

"예? 상태를 봐준다니...."

"설마, 강진혁 플레이어님이 치료를 하겠다는 겁니까?"

실내에 있던 모두가 의심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믿기 힘든 거겠지.

난데없이 나타나서 그 누구도 고치지 못했던 걸 고치겠다고 했으니까.

아니, 믿기 힘든 걸 떠나서 더 중요한 무언가가 밝혀질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었다.

[빌어먹을. 왜 갑자기 랭커가 튀어나온 거야?]

[우리가 연명 치료를 하면서 돈이나 빨아먹고 있다는 걸 눈치 챈 건 아니겠지?]

[허세야. 그래, 틀림없어. 치고받고 싸우는 것밖에 못하는 놈이 정맥이랑 동맥을 구분이나 할 수 있겠어?]

'탐식의 눈'이 갖고 있는 능력 중 하나인 '마인드 리딩'을 통해 힐러들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타인의 희망을 갖고 장사하는 놈들이 가장 쓰레기지만.

이놈들은 그중에서도 악질이었다.

유연화가 결코 자신의 할아버지를 포기할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거리라.

'역겨운 녀석들.'

자신들의 잇속을 채우려고 타인을 피눈물 나게 한다 이거지?

진혁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아공간 인벤토리가 열렸다.

우우우웅!

쏟아지는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건 유리병 안에 담겨 있는 액체, '엘릭서'였다.

허나, 만능의 영약이라 불리는 엘릭서를 봤음에도, 힐러들의 안색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역시나 그걸 꺼낼 줄 알았다는 듯 혀까지 차는 이도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진 대충 알겠는데, 저희도 엘릭서는 몇 번이나 사용해 봤습니다."

힐러들의 대표격인 허진수가 입을 열었다.

아무렴 유천영을 치료하려는데, 안 해 본 게 있을까?

외과적 수술은 물론, 각종 영약과 약초 등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쏟아 부었다.

"거, 전투 쪽이야 재능이 있으시겠지만, 이쪽 분야는 아예 달라요. 달라."

"현재 시련의 탑에 있는 그 어떤 재료들로도 이 병을 억제할 수 없습니다."

"아무렴요. 괜히 어설픈 지식으로 환자의 상태를 더 악화시키지 마십쇼."

조롱과 비난 섞인 말들이 흘러나왔다.

뭐랄까?

감히 자신들의 성역을 넘보지 말라고 엄포를 놓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엘리트주의와 권위의식에 잔뜩 사로잡힌 아집이 그대로 느껴졌다.

이제야 시스템이 내건 복사 조건이 이해됐다.

어설픈 지식으로 탑에 관한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게 역겨웠겠지.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그래서.

더욱 처절하게 찍어 눌러주고 싶다.

진혁이 모른 척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음. 설마, 엘릭서를 그대로 사용하신 건가요?"

"그거야 당연히...."

"하하. 설마, 이쪽 분야에 정통하신 분들이 마력이 폭주하는 환자에 목구멍에 엘릭서를 들이붓진 않았겠죠. 머리통이 텅텅 빈 게 아니라면 설마요."

"큽."

"흠! 커흠!"

힐러들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정곡을 찔린 탓이다.

그러나 여기서 화를 내거나 한 마디라도 항변했다간, 상대의 말을 그대로 시인하는 것이었기에 입술을 꽉 깨문 채 분노를 속으로 삼켜야만 했다.

좋아.

이제 좀 순한 양들 같네.

"이분의 증상이 악화된 건, 기존에 수련해 온 심법이 탑에서 나온 마력과 역행했기 때문입니다. 서로 성질이 다른 기가 지병을 악화시킨 것이죠. 다시 말해 상충하는 마력을 희석시킬 수 있는 방법만 안다면, 병세를 회복시킬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 그렇다면 강진혁 플레이어님은 그 방법을 알고 계시다는 겁니까?"

"물론, 알고 있습니다. 여기 있는 훌륭하신 힐러님들과 마찬가지로요."

"예?"

"에이. 왜 이렇게 겸손을 떠십니까? 이 방법은 환자의 증상이 악화되어 코마에 빠졌을 때만 사용할 수 있다는 거 이미 다 알고 계시면서. 그래서 일부러 지금까지 참고 기다려 왔던 거 아니었나요?"

진혁이 생긋 웃었다.

제3자가 보기엔 눈웃음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마주보고 있는 힐러들 입장에선 당장이라도 지팡이로 가격하고 싶은 그런 미소였다.

'여기서 모른다고 했다간, 다시는 이 업계에 발을 붙이지 못한다.'

허진수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전투계열 플레이어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힐러라니.

만약, 그게 소문이라도 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무, 물론 그렇죠. 저희도 그것 때문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역시! 그럼, 짧은 지식을 갖고 있는 저는 힐러님들의 실력을 한 수 배워 보도록 하죠."

진혁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허진수의 표정이 똥 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 그게... 방법을 알기는 아는데, 그동안 워낙에 많은 재료들을 소모하는 바람에 다시 모으는 데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적어도 몇 시간은 걸릴 것 같으니, 강진혁 플레이어님이 대신 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흠, 이상하네요."

"이상하다니, 어떤 게 말씀입니까?"

"재료가 부족하다는 거. 제가 봤을 때 한참 남아 있어야 정상이거든요."

툭 하고 던진 말.

"...헙!?"

허진수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표정 관리 하나는 빠르다.

하지만, 소용없다.

이미 '탐식의 눈'을 통해 녀석의 속마음이 모조리 들려오고 있었으니까.

[어, 어떻게... 단순히 떠보는 말인가? 아니면 설마, 뒷돈에 대해서 아는 건 아니겠지?]

글쎄. 어떻게 알아낸 걸까?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계좌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특히 7군데에 분산해 둔 차명 계좌와 비트코인 지갑 주소는 놈이 신이라고 해도 알아낼 수 없어.]

"보니까 차명 계좌에, 이야. 이제 보니 비트코인으로도 갖고 계셨네? 다 합해서 수백 억은 해먹으셨으니 당연히 재료를 살 돈도 없으셨겠지."

"마, 말도... 안 돼."

허진수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결코 알아낼 수 없는 사실이 모조리 들통 났으니 그럴 수밖에.

'역시 사기적인 능력이야.'

조건이 붙긴 했지만,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힘은 언제 어디서나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그런데.

[절대....]

이어지는 허진수의 상념에.

[...선 안 돼.]

이번엔 진혁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70화. 탑의 거주자 (1)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허진수의 속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리고 그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여기서, 나에서 끝내야 돼. 절대... 흑운 길드와 '거주자'들이 접촉했다는 것까지 들켜선 안 돼.]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 녀석이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설마,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니었단 말인가?

순간 진혁의 머릿속에 복사 조건이 다시 한번 스쳐 지나갔다.

'꿍꿍이를 밝혀라'.

처음엔 단순히 비리를 파헤치라는 건 줄 알았는데, 더 깊숙이 숨어 있는 흑막이 있었다.

한국 상위 길드 중 하나인 흑운 길드. 심지어 오래전부터 탑에서 살아온 '거주자'에 관한 이야기가 튀어나올 줄이야.

플레이어가 정복한 것은 3층.

하지만, 탑의 층계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급의 거주자들은 15층은 넘어가야 만날 수 있다.

그렇다는 건.

'거주자 쪽에서 먼저 싸울아비 길드와 접촉했다는 뜻이겠지.'

이유와 목적은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는 것과 앞으로의 계획에 유천영이 방해된다는 것뿐.

'놈들 입장에서 인류와 플레이어는 탑을 위협하는 외적일 텐데....'

이거, 일이 재밌게 돌아간다.

바로 그때.

"오빠,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놈들이 스승님을 치료하라고 준 돈을 빼돌렸다는 겁니까?"

"이, 이 빌어먹을 자식들이!"

"그깟 돈이 뭐라고 이런 짓을 했단 말이냐? 오늘 여기서 살아나갈 생각 따윈 하지 마라!"

유연화를 비롯해 유천영을 따르는 사람들이 고함을 질렀다.

믿고 맡겼던 힐러들이 뒤통수를 쳤으니 분노가 치솟을 수밖에.

당장이라도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이 뽑히려던 찰나.

"이들의 처분은 저한테 맡겨 주세요."

진혁이 끼어들었다.

"강진혁 플레이어님. 진상을 밝혀 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이 자리에서 이놈들을 죽이지 않고선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이런 놈들에게 스승님을 맡겼다니...."

제자들이 피눈물을 삼키는 것 같은 심정을 토로했다.

어지간해서는 말리기 쉽지 않을 분위기다.

"대신, 유천영 어르신을 치료해 드리죠. 바로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요."

"...!"

"그, 그게 가능합니까?"

진혁의 말에 반쯤 뽑힌 검이 검집으로 들어갔다.

복수도 중요했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유천영을 살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가능합니다."

훨씬 더 골치 아픈 역병들도 다뤄 봤는데, 고작 마력 폭주증 하나쯤이야.

탑의 상층부로 가면, 이건 독감 수준에 불과하다.

'어디 보자....'

진혁이 의료용 테이블 위에 있는 수액과 약품 몇 개를 챙겼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건 퍼포먼스를 위한 소품들이다.

융합 스킬을 숨기고 그 자리를 적절하게 빛내 주기 위한.

준비를 끝낸 진혁의 시선이 이번엔 허진수에게 향했다.

잘 봐 둬라.

엘릭서를 어떻게 사용하야 하는 건지.

[고유 능력 '별의 가호'와 '엘릭서'가 융합합니다!]

[융합에 성공하였습니다!]

[특수 아이템 '별의 눈물(SS)'을 획득하셨습니다!]

[다시 '별의 눈물'을 융합하려면 90일간의 쿨타임이 필요합니다.]

우우우웅!

순간, 엘릭서의 색깔이 변했다.

형언할 수 없는 밝은 빛이 액체의 표면을 따라 반짝였다.

진혁이 유리병을 들고 유천영에게 다가갔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벌써 한참 전에 죽었겠군.'

터질 듯이 팽창한 혈관은 마력 폭주가 한계치를 넘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과연, 강자는 강자다.

이토록 끔찍한 격통 속에서도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한두 방울 정도론 턱도 없을 테고, 전부 다 먹여야겠어.'

워낙에 상태가 악화된 탓에, 엘릭서를 모조리 쏟아 부어야 했다.

살짝 아깝긴 하지만.

능력 복사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치를 수 있는 값싼 대가였다.

꿀꺽! 꿀꺽!

액체가 유천영의 목을 타고 체내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창백했던 유천영의 얼굴에 점점 화색이 돌았다.

"후우우... 후우우...."

호흡이 안정되고 이마를 타고 흐르던 식은땀도 멎었다.

보기 흉하게 튀어나왔던 혈관들도 모두 가라앉았다.

긴 고통의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유천영이 회복한 것이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유천영이 갖고 있는 스킬 중 하나를 선택해 주십시오.]

고를 건 이미 정해 뒀다.

진혁은 망설임 없이 유천영이 지닌 스킬 중 하나를 선택했다.

[고유 능력 '진태청화랑심법(眞太淸花郞心法)(S)'을 복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진태청화랑심법(眞太淸花郞心法)]

입수 난이도: S

내용: 대기에 녹아 있는 마력을 흡수할 수 있는 심법으로 유천영이 개발한 독문무공입니다. 사용 시 마력 회복 속도가 30%만큼 증가하며, 단순히 익히고 있는 것만으로도 신체가 어려 보이는 효과를 지니고 있습니다.]

[복사된 스킬은 '세계의 기억'에 저장됩니다.]

연이어 나타나는 상태창.

진혁은 새로 얻은 스킬의 내용을 눈으로 훑었다.

'마력 회복에 나이가 어려 보이는 효과라....'

이러니 유천영이 나이에 비해 그토록 젊어 보였나 보다.

'탐식의 눈'을 통해 확인한 스킬 레벨이 무려 13이나 됐으니까.

거의 상위 네임드 몬스터라고 해도 될 정도다.

그리고 진혁이 스킬의 세부적인 특성을 살피는 사이.

"할아버지!"

유연화는 떨리는 손으로 유천영의 볼을 쓰다듬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정말로 스승님께서 회복하셨다고?"

"지, 진짜야! 마력의 파장이 안정되셨어."

모두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꿈만 같은 현실에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던 탓이다.

반면,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허진수는 입을 쩍 벌린 채 할 말을 잃어버렸다.

'믿을 수 없다.'

상대는 전투 계열.

그런데.

대체 무슨 수로 아직까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 마력 폭주증의 치료법을 알고 있단 말인가?

수액과 약품을 통해 엘릭서의 농도를 조절한다는 게 말이 쉽지.

까다로운 배합 비율을 꿰뚫고 있지 않는 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걸 해냈다.

평생을 의학에 몸담았던 자신들도 엄두도 내지 못한 일을, 너무나 태연스럽게.

덜덜덜!

허진수의 턱이 떨렸다.

이쪽의 패를 모조리 읽어 버리는 통찰력.

S급 판정을 받아낸 압도적인 잠재력.

게다가 의학에 관한 지식까지.

마치, 괴물을 상대하는 듯한 기분이다.

머릿속은 온통 여기서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지만,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

떨고 있는 허진수에게 진혁이 다가왔다.

"저쪽은 오랜만의 해후에 정신이 없는 것 같으니, 우리는 이쪽에서 따로 대화를 하지."

"나,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냐?"

"응?"

"역시 죽일 건가?"

"아니, 탑 안이라면 몰라도 밖에서 사람을 함부로 죽였다간 골치 아파지거든. 무엇보다 돈 좀 삥땅쳤다고 죽이는 것도 우습고."

그러니.

"그동안 받은 돈. 그것만 전부 토해내면 돼. 그럼, 보내 줄게."

"돈만 주면... 풀어 주겠다고?"

"나쁘지 않은 이야기잖아? 너흰 분노한 유천영의 제자들로부터 도망갈 수 있고. 나는 이 기회에 두둑이 한몫 챙길 수 있고."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마치, 자신의 관심은 오직 돈뿐이라는 걸 강조하는 것처럼.

'원하는 게 돈이라는 건가?'

허진수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돈이 목적이라면, 그깟 돈 따위 줘 버리면 그만이다.

유천영을 죽여야 한다는 임무는 실패했지만, 적어도 가장 중요한 정보는 들키지 않았으니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이 계좌로 입금이 되는대로 풀어 드리죠."

진혁이 종이 한 장을 건넸다.

S급에게만 주어진 혜택 중 하나인, 추적 불가능한 번호가 적혀 있는 계좌였다.

그리고 잠시 뒤.

띠링!

[새로운 금융 거래가 발생되었습니다.]

[강진혁 회원님의 계좌에 '36,350,000,000원'이 입금되었습니다.]

진혁의 핸드폰에 알림창이 나타났다.

약 360억.

그동안 유천영을 상대로 착복했던 금액 중 상당수가 되돌아왔다.

"이제 가 봐도 됩니까?"

허진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 정말 만족스러운 거래였네요."

진혁이 생긋 웃으며, 문 옆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이제 더 이상 문을 가로막는 건 없다.

도망가려면 지금이 유일한 기회다.

덜컹!

"히이익!"

"어서 밖으로 가!"

"사, 살았다!"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힐러들이 우르르 밖으로 달려 나갔다.

혹시라도 진혁의 마음이 변할까 봐 걱정됐는지 그야말로 미친 듯이 앞만 보고 뛰어갔다.

"흐음. 저대로 보내 줄 생각이야? 너답지 않은데?"

엘리스의 목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역시 반지 안에서 지켜보고 있었군.'

하여간 안 끼는 데가 없다.

뭐, 덕분에 부를 수고를 덜었지만.

"엘리스."

진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저 녀석이 어디로 가는지, 누구와 대화하는지 전부 알아내."

"뭐야. 일부러 놓아 준 거였어?"

"여기서 심문해 봐야 쉽게 입을 열지 않을 테니까. 뭣보다 흑운 길드나 거주자는 먹이사슬 밑에 있는 놈들에게 많은 정보를 주지 않았을 거야."

일개미들을 아무리 죽여 봤자 소용없다.

그러니.

"헐레벌떡 도망간 일개미가 여왕에게까지 가도록 유도해야지."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 * *

한바탕 난리가 난 뒤 병실 안에는 진혁과 유천영 단 둘만이 남았다.

엘릭서가 몸에 구석구석 잘 스며들었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말로 적당히 얼버무려 뒀기에, 유연화와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밖으로 나간 상태였다.

진혁은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유천영을 바라봤다.

"이제 아무도 없습니다."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미 아까 전부터 의식이 돌아와 계셨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진혁이 한 마디 덧붙였다.

그러자.

"허허. 기감을 완벽하게 숨겼다고 생각했네만. 생각보다 훨씬 눈치가 빠른 젊은이로군."

놀랍게도 의식이 없는 줄만 알았던 유천영이 두 눈을 떴다.

"내 호흡이 그렇게 어설펐던 건가?"

"아뇨. 완벽했습니다."

탐지 스킬을 갖고 있는 플레이어라고 할지라도 유천영의 호흡을 읽어낼 순 없었다.

단지, 이쪽은 '탐식의 눈'을 갖고 있어서 말이지.

어지간한 속임수쯤은 모조리 간파할 수 있다.

"미안하네. 일부러 자네를 속이려고 했던 건 아닐세."

"괜찮습니다. 제가 나타난 타이밍이 꽤나 절묘하긴 했으니까요. 게다가 누구도 알지 못하는 마력 폭주증의 치료법을 알고 있는 점도 충분히 의심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푸하하! 맞아. 바로 그것 때문에 그랬지."

유천영이 즐거운 듯 광소를 터뜨렸다.

만약, 진혁이 변명을 한다든가 말꼬리를 돌렸으면 결코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솔직하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바람에 그만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아무래도 내가 사람을 오해했던 것 같군. 그래서, 이 늙은이에게 원하는 게 뭔가?"

"꼭 물어보고 싶은 게 한 가지 있습니다."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인데 내가 아는 거라면 뭐든지 대답해 주겠네."

유천영이 밝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어르신이 거주자와 싸운 건 시련의 탑이 나타난 첫 번째 날... 맞습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그걸… 어떻게?"

유천영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71화. 탑의 거주자 (2)

유천영의 반응을 본 진혁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예상이 맞았군.'

아무리 시련의 탑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강하다 한들 유천영 정도 되는 사람이 혼수상태에 빠질 정도는 아니었다.

실제로 '탐식의 눈'을 통해 확인한 스탯과 스킬들만 봐도 톱클래스 수준의 랭커였으니까.

그렇다는 건.

'유천영을 한계까지 밀어붙일 무언가가 있었다는 뜻이지.'

당연한 말이지만, 플레이어가 아닌 일반인 중에서 유천영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전 세계를 통틀어 봐도 말이다.

그런 일이 가능한 존재는 오직 시련의 탑에 거주하던 자들뿐.

진혁은 그러한 가정들을 토대로 하나의 대전제를 만들었다.

유천영은 거주자와 이미 만났었다는 대전제를.

"허허. 자네는 정말로 사람 놀래키는 데 재주가 있군. 대체 어디까지 늙은이의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할 생각인가?"

유천영이 허탈한 한숨을 내뱉었다.

"제 예측이 맞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자네 말이 맞아. 탑이 처음으로 나타나던 날, 나한테 찾아온 사람이 있었네."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건, 거주자에 관한 이야기다.

문제는 몇 층에 있는 놈이 왔냐는 건데....

"구체적인 특징 같은 걸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외모라든지 무장 상태나 싸움 방식이라든지. 아무거나 좋습니다."

"검은색 긴 머리와 흰색 옷을 입은 동양인이었네. 무기는 칼을 사용하는데... 아주 매섭더군. 그렇게 빠른 쾌검을 구사하는 자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어."

검을 쓰는 동양인이라면?

누군지 알겠다.

'...무림에 소속된 놈이군.'

탑의 21층에 있는 거대한 세력, 무림(武林).

21층 전체를 지배하는 주도 세력으로 탑의 상층부로 가기 위해 굉장히 공격적으로 움직이는 놈들이다.

'탑을 플레이할 당시에도 저 녀석들 때문에 굉장히 골치 아팠지.'

자신들의 행보에 위협이 되면 가차 없이 제거하고.

필요하다 판단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회유하는.

정말이지 치가 떨릴 정도로 거머리 같은 놈들만 골라 모은 집단.

진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필이면 가장 골치 아픈 놈들이 기어 나왔다.

"알고 있는 놈들인가?"

"대충은요."

"허허, 역시 그렇군. 역시 알고 있었어."

유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재차 입을 열었다.

"이번엔 내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

"물론입니다."

"나도 한국의 고위 관료나 상위 길드들과 알고 지내고 있지만, 자네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알고 있는 것 같네. 한국 최고라는 자들조차도 탑에서 나온 사람에 대해 알지 못했거든."

그렇겠지.

무림은 21층에 존재하는 곳이었으니까.

당연히 그곳에 가 본 플레이어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딱 한 명.

'날 제외한다면....'

진혁이 긍정도 부정하지 않은 채 침묵을 유지했다.

"아, 캐물으려는 게 아닐세. 그저 앞날이 캄캄한 인류의 미래에 희망을 걸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싶을 뿐이야."

"제가 그 대상이란 말입니까?"

"다른 건 몰라도 이 나이 먹도록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싫어도 한 가지만큼은 좋아지더군."

유천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사람 보는 눈."

누가 입만 살았는지.

속은 텅텅 비었는데,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지.

세월과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그걸 식별하는 안목은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저에 대해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 같네요."

"과대평가라고 생각하나? 내가 볼 때 과대평가를 받는 건 현재 세상에 있는 플레이어들이야. 고작해야 두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단순히 마력량이니 고유 능력이니 하는 걸로 등급을 나눈다고? 그거야말로 웃기는 소리지."

한 분야에 정통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만 시간 이상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세워지진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세계가 변하고 능력 하나 얻었다고 자신들이 강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다니.

유천영은 이 모든 게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자네는 달라. 뭐랄까. 수없이 닳고 닳은 느낌이랄까?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맛본 승패의 쓴맛. 그리고 그걸 극복해낸 노련함까지 엿보이더군."

"그 정도는 아닙니다."

"푸하하! 겸손하기까지 하군. 허나,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여유는 숨길 수 없는 법이네."

유천영이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한 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네에 관한 건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어."

이건 사실이겠지.

유천영이 어딜 가서 함부로 입을 떠벌릴 사람은 아니다.

게다가 말한다고 해 봤자 믿어 줄 사람도 없을 테고.

"그건 그렇고. 내 생명을 구해 준 데다 귀한 엘릭서까지 사용했으니, 뭐라도 보답을 하고 싶은데.... 혹시 원하는 게 있나?"

유천영의 말에 진혁이 멈칫했다.

한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무술가.

세계 대회를 휩쓴 건 물론, 그에게 배우는 무도인들만 해도 수백 명에 이르렀다.

당연히 갖고 있는 돈이나 보물들도 상상을 초월할 터.

"사실, 필요한 게 하나 있습니다만. 뭐든지 말씀드려도 되는 겁니까?"

"걱정하지 말고 말해 보게."

분명, 본인 입으로 '뭐든지'라고 하셨습니다?

진혁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뒤틀렸다.

아무리 동방예의지국이라지만, 기회가 왔을 때 예의부터 차리고 싶진 않았다.

배고프면 밥이 먹고 싶다고 말해야지, 체면 차리다가 굶어 죽는 선비 이야기 따윈 단연코 사양이었으니까.

"어르신이 소장하고 있는 '쌍룡검(雙龍劍)'을 받고 싶습니다."

오랫동안 유실되었다가 기적적으로 되찾은 이순신 장군의 검.

탑에 존재하는 성유물을 상대로도 밀리지 않은 전설적인 무기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싸, 쌍룡검을?"

이번엔 유천영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설마, 그걸 요구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다.

"설마, 곤란한 부탁을 드린 건 아니겠죠?"

진혁이 생긋 웃었다.

천진난만하면서 화사한 미소가 얼굴을 따라 퍼져 나갔다.

"크흠. 곤란하긴! 나도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성격은 아니야."

유천영이 표정을 가다듬었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상대는 생명을 구해 준 은인.

쌍룡검이 아니라 전 재산을 달라고 해도 기꺼이 줄 수 있었다.

"연화를 시켜 내일쯤 보내도록 하겠네. 더 필요한 건 없나?"

"예. 그거면 충분합니다."

필요한 건 모두 챙겼다.

이제 여기서 떠날 시간이다.

그런데, 진혁이 몸을 돌리려던 바로 그때.

"이건 어디까지나 비공식 루트로 들은 이야기네만."

유천영이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탑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중국 쪽 플레이어들과 접촉했다는 정보가 있네."

"...!"

"조심하게."

인류가 걱정해야 하는 건 단순히 탑 안에 있는 것들만이 아닐 수도 있다.

유천영은 조심스럽게 최악의 상황을 경고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진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유천영과의 일을 끝낸 진혁은 곧장 롯데 시그니엘로 향했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결국 모든 것들이 계획한 대로 흘러갔다.

엄청난 액수의 돈과 새로운 정보 그리고 유천영의 심법과 쌍룡검까지.

그야말로 가장 맛있는 것들만 쏙쏙 뽑아먹었다.

'주머니도 두둑하니 제대로 된 휴식을 즐겨야겠어.'

평소였다면 사치는 엄두도 내지 못할 사치다.

1박에 200만 원이 넘는 스위트룸은 과거의 한 달 생활비보다 많았으니까.

하지만, 힐러들에게서 수백억을 얻은 지금은 더 이상 돈에 구애받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됐다.

아예 멤버십으로 1년짜리 숙박권을 끊은 진혁은 시그니엘에서 제공하는 수많은 혜택들을 들으며 위층으로 향했다.

덜컹!

문이 열리자 호텔 스위트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리석으로 만든 바닥과 화려한 샹들리에.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수입한 각종 가구들이 화려한 자태를 뽐냈다.

물론, 화룡점정은 서울의 야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유리창이다.

"크으."

진혁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래서 돈이 좋긴 좋구나.

웰컴 드링크로 가볍게 입가심을 하고 푹신한 침대에 몸을 누이자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솔직히 말해 이대로 자고 싶었다.

따뜻한 감촉의 구스 이불이 너무나도 폭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처럼의 호캉스를 잠으로만 보낸다면 4층에 갔을 때 땅을 치고 후회할 게 뻔했다.

'가볍게 샤워부터 하고 식사를 해야겠어.'

진혁이 룸서비스를 부른 뒤, 샤워실로 향했다.

그렇게 20분 정도 흘렀을까?

거실로 나온 진혁은 다시 한번 놀라야만 했다.

트러플이 가미된 최고급 스테이크와 두툼한 연어 회는 물론, 로브스터와 캐비어, 유럽산 치즈들이 테이블 가득 차려져 있었다.

5명이서 달라붙어도 먹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양이다.

진혁이 나이프와 포크로 스테이크를 잘랐다.

살짝 탄 겉 부분이 갈라지며 분홍빛 속살이 나타났다.

한 입 가득 베어 물자 육즙이 입안을 가득 메웠다.

여기에 신의 물방울이라 일컫는 와인 '샤토 라 플뢰르도'를 곁들였다.

"와...!"

...미쳤다.

오래돼 눅눅해진 쌀밥과 신김치, 냄비 바닥에 눌어붙은 된장찌개와는 아예 차원이 다른 맛이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힘들었던 과거가 있었기에 지금의 행복이 더욱 빛을 발했다.

그런데 한창 만찬을 즐기고 있을 바로 그때였다.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켜 둔 TV에서 익숙한 내용이 흘러나왔다.

[은석 씨는 그럼, 탑을 오르기 위해선 어떤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시련의 탑과 관련된 특집.

여자 아나운서와 눈웃음이 인상적인 남자가 탑에 관해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

한국 최강이라 평가받는 '단군' 길드에 소속된 랭커 장은석이었다.

[음, 시련의 탑에서 강해지기 위해선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자신이 갖고 있는 고유 능력과 스킬들을 갈고닦거나 레벨을 올리는 방법이죠.]

[마치, 게임처럼요?]

[맞습니다. 자신이 강해진 만큼 더 어려운 던전과 미궁들을 클리어할 수 있으니까요.]

[그럼, 두 번째 방법은 어떤 거죠?]

[바로 코인을 이용하는 겁니다.]

[시련의 탑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바로 그 화폐 말씀이군요.]

[예. 더 좋은 아이템을 구매할 수 있는 힘이야말로 랭커가 되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지금까지 달러라는 기축 통화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었다면, 미래는 코인이 세상을 움직이는 기축 통화가 될 겁니다. 저 역시 앞날을 보고 지금까지 모은 코인을 모두 방송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투자하고 있고요.]

가만히 듣고 있던 진혁이 코웃음을 쳤다.

'방송 시스템에 코인을 투자한다라....'

현재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더 많은 구독자를 모으기 위해 개인 채널의 방송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는 트렌드가 형성되고 있었다.

물론, 웃기는 뻘짓이다.

백날 홍보를 하고 화려한 썸네일을 걸면 뭐 하나?

정작 가장 중요한 내용이 텅텅 비어 있는데?

'화면 상단에 노출이 안 되더라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채널이라도 상관없어.'

퀼리티.

고인물만이 할 수 있는 압도적인 퍼포먼스와 연출만이 구독자를 사로잡을 수 있는 힘이었다.

[4층이 개방됐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한 명도 4층에 입장하지 않은 상태인데요. 혹시 이 부분에 대해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나운서가 화제를 전환했다.

[그거야, 4층은 그 층계의 문을 연 플레이어가 공략을 하겠다고 선언해야 나머지 플레이어들도 입장이 가능한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만약 열흘이 지나도 최초 공략자가 도전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도 입장할 수 있지만요.]

[아하. 그런 조건이 있었군요. 그렇다면 왜 그분은 탑을 오르지 않는 걸까요?]

[하하. 당연합니다. 4층은 대규모 좀비 웨이브가 몰려오는 지역으로, 거점을 지켜야만 클리어가 가능하죠. 게다가 4층 자체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단 한 번뿐이에요.]

[설마, 한 번이라도 실패하면 끝이라고요? 다음 기회도 없이?]

[게임에서는 실패할 경우 1레벨로 초기화되는 걸로 끝났지만, 현실에선 그 즉시 인류가 멸망하게 되겠죠. 그런 의미에서 기회가 한 번 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럴 수가….]

[예. 언노운이란 플레이어도 대형 길드들과 손을 잡지 않는 이상 공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적어도 한두 달의 시간이 더 필요할 겁니다. 최소한 그 정도 준비 기간은 있어야 필요한 인원과 자원을 모을 수 있거든요.]

[그 이하로는 힘들다는 말씀이신가요?]

[제 이름을 걸고 장담하죠.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그곳에 들어갔다간 괜히 좀비 웨이브의 난이도만 비약적으로 올리는 꼴입니다. 일찍 갈수록 보상이 좋으면 뭐 합니까? 5 웨이브도 견디지 못 하고 거점이 박살날 텐데요.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메시지에,

[플레이어 '언노운' 님께서 4층 공략을 선언하셨습니다.]

유쾌하게 방송을 진행하던 아나운서도.

[4층을 도전하실 모든 플레이어는 준비를 해 주십시오.]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하던 장은석도.

[앞으로 8시간 뒤, 첫 번째 웨이브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던 모든 시청자들도.

[총 100번의 웨이브를 막아내지 못한다면, 인류는 멸망합니다.]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72화. 거점 방어전 (1)

갑작스러운 4층 공략 선언으로 인해 전 세계가 발칵 뒤집어졌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지금 당장 시작하겠다고? 진심이야 이거?"

"미친! 랭커들 당장 전부 소집해! 비상사태니까. 누던 똥도 끊고 다 튀어오란 말이야!"

"거점 후보 리스트 뽑아 놓은 거 있지? 가져와! 그간 모아 뒀던 4층 데이터도 싹 다!"

대형 길드의 간부들이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웨이브형의 특성상 수많은 거점 중 위치가 좋은 곳을 선점해야 한다는 건 상식 중의 상식.

단 한 번뿐인 기회를 살리기 위해선 1분 1초가 소중했다.

당장 8시간 뒤엔 공격대를 이끌고 4층으로 가야 했으니까.

게다가 남은 시간 안에 어떤 식으로 4층을 공략해야 할지 모든 계획을 세워 둬야만 했다.

그렇게 아침이 밝아 오도록 모두가 동분서주하는 사이.

"으으으으!"

진혁은 푹신한 침대에서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우득!

우드득!

관절이 제 자리를 찾았다.

놀랍도록 상쾌한 기분이다.

마치, 다시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동안 쌓인 피로가 한 번에 풀린 것 같네.'

새로운 싸움을 하려면 그만큼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물론.

나머지 사람들은 아닐 테지만.

'최악의 컨디션이겠지.'

일부러 늦은 시간에 공략을 선언해 둔 덕에 밤새 안 굴러가는 머리통을 굴리느라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게 경기장 안에서 치러지는 스포츠도 아니고.

경쟁 상대와 페어플레이를 해야 할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4층은 경쟁 상대가 줄면 줄수록 보상이 커지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첫 번째 웨이브가 몰려오기 전까지 남은 시간: 1h:37m:51s]

이제 4층으로 가야 할 시간이다.

* * *

시련의 탑 4층.

이곳은 과거,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접게 만든 첫 번째 고비다.

그야 그럴 수밖에.

일반 좀비와 특수 좀비로 구성된 웨이브가 100차례에 걸쳐 몰려오는데, 수천 가지 조합의 방어타워를 적절하게 배치해야함은 물론, 거점 안에서 의식주를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단까지 필요했다.

무엇보다 100 웨이브를 클리어한 플레이어가 한 명도 없을 경우 게임 전체가 리셋되어 버리는 말도 안 되는 페널티 때문에, 그 당시 게임 내부는 유저들의 탈주와 욕설로 지옥 그 자체를 연출했었다.

괜히 [시련의 탑]이 망겜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게 아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우우우웅!

밝은 빛과 함께 4층 입구에 플레이어 한 명이 나타났다.

'여긴 언제 봐도 을씨년스럽네.'

진혁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좀비라는 테마에 맞게, 4층은 층 전체가 아포칼립스 분위기를 자아냈다.

불이 꺼진 건물과 버려진 자동차들. 문명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거리.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어쩌면 지금 보는 이 광경이 인류의 미래를 투영하는 거울인지도 몰랐으니까.

그때였다.

띠링!

눈앞에 상태창이 나타났다.

[시련의 탑 4층에 최초 입장하셨습니다.]

[앞으로 20분 뒤부터 다른 플레이어들 또한 4층에 입장하실 수 있습니다.]

3층을 최초 클리어해 받은 20분의 특전.

이것이 이번 층의 성패를 결정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서둘러야겠군.'

진혁은 북쪽 방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허나, 가는 길이 워낙 험했기에 속도가 잘 나지 않았다.

싱크홀이 생겨 사라진 도로.

나무넝쿨들로 인해 가로막힌 벽.

방해물은 차고 넘쳤으니까.

'빨리... 더 빨리!'

진혁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더욱 속도를 높였다.

이제 남은 시간은 10분도 채 남지 않았다.

콰콰콰콰콰콰콰!

'검의 무덤'으로 방해물을 베어 버리고 '빙하조형'으로 뻥 뚫린 바닥을 보수하면서,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마침내 진혁의 발걸음이 멈췄다.

도착한 곳은 거대한 월드컵 경기장이었다.

'간신히 늦진 않았네.'

다른 플레이어들이 입장하기 전에 원하는 거점을 확보해야 했기에, 힘들더라도 빠르게 움직여야만 했다.

플레이어 중엔 가속 능력이나 공간 이동 능력을 갖고 있는 놈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 어디쯤인데....'

찾았다.

진혁은 경기장 입구에 있는 기둥 중 하나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그러자 바로 그 순간.

['최우선 거점 지정권'을 사용합니다!]

['상암 월드컵 경기장'이 당신의 거점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월드컵 경기장 위로 붉은색 깃발이 올라갔다.

이건 경고다.

'이곳의 주인은 정해져 있으니, 다른 곳을 알아봐라'라고 알리는.

'좋아.'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진혁이 경기장 내부로 들어갔다.

한때 22명의 선수들이 땀을 흘리며 승부를 가리던 푸른 잔디밭은 간데없다.

대신, 그 자리는 메마른 흙과 먼지로 채워져 있었다.

정확히.

'내가 딱 원하는 조건으로.'

흙과 먼지.

생명의 종언을 고하는 상징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암시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말랑말랑 낱알' 1kg을 흩뿌립니다.]

['솔라의 씨앗' 5개를 심습니다.]

['천연수 50L'를 준비합니다.]

진혁이 무혼을 처리하고 획득한 보상을 꺼냈다.

흙 속으로 들어가는 낱알과 씨앗들.

4층에서 선택할 수 있는 수없이 많은 방어 수단 중 진혁이 선택한 건 '식물'이었다.

'경기장의 각 입구를 향해 식물들을 1개씩 배치하고 마지막 하나는 중앙에 배치하면 되겠지.'

['솔라의 씨앗'이 부화할 때까지 남은 시간: 55m:33s]

['말랑말랑 낱알'이 부화할 때까지 남은 시간: 5h:19m:10s]

첫 번째 좀비 웨이브가 올 무렵엔 이 식물들은 거점을 방어하는 훌륭한 방파제로서 제 역할을 다하게 될 것이다.

식량으로 요긴하게 쓰일 낱알들도 머지않아 싹을 틀 테고.

그때였다.

띠링! 띠링!

눈앞에 푸른 상태창이 연이어 나타났다.

[오빠, 4층에 오면 연락하라고 해서 연락했어. 태민이도 나랑 함께 있고.]

[진혁 씨, 도착했어요. 4층 입구 맞죠?]

고인물 동료였던 유연화와 이태민 그리고 암스테르담의 성녀인 테레사까지 연락을 해 왔다.

"무럭무럭 자라고 있어라. 금방 갔다 올게."

진혁이 이제 막 자리를 잡고 있는 씨앗들 위로 '천연수'를 듬뿍 뿌려 줬다.

[식물들의 성장 속도가 20%만큼 상승합니다!]

* * *

약 10분 뒤, 진혁은 처음 왔던 곳에 도착했다.

4층 스타팅 포인트엔 수많은 플레이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유명한 대형 길드들은 거의 다 참가했군.'

시간이 촉박했음에도 엄청난 수가 모였다.

보상이 어지간히 탐나긴 한 모양이다.

하긴.

A등급짜리 랜덤 박스를 고를 수 있는 기회는 그리 흔하게 오는 게 아니니까.

아무리 시련의 탑을 초반만 하고 접은 사람들이라도, A등급이 상위 5%에 해당한다는 사실쯤은 조사해 놨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아이템에 따라 이후의 행보가 달라질 것이라는 것 또한.

진혁이 플레이어들을 훑어보고 있을 때였다.

"오빠!"

"형!"

진혁을 발견한 유연화와 이태민이 손을 흔들었다.

"진혁 씨!"

그 옆에 있던 백금발의 소녀, 테레사도 환하게 웃었다.

유연화야 어제 만났었지만, 나머지 둘은 꽤나 오랜만에 본다.

"다들 갑작스럽게 불러서 미안해. 생각보다 일이 급하게 돌아가서 설명할 시간이 없었어."

"아니에요. 형이 부른 건데 당연히 와야죠."

"저도 이제 어디에 소속되어 있지 않아서 상관없어요. 진혁 씨랑 함께하는 게 훨씬 더 좋기도 하구요."

음....

그렇게 말해 주니 살짝 미안해진다.

세 사람 다 이제부터 훌륭한 일꾼(?)으로 부려먹을 생각이었으니까.

고용노동법을 위반한 악덕 점주와 성실하게 살아가는 아르바이트생.

이것이 진혁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포지션이었다.

"저것 봐. 유연화와 이태민이야. 2층에 있는 B급 미궁을 단 둘이서 공략했다지?"

"테레사...도 있어. 회담에서 탈퇴했다고 했는데, 설마 저쪽이랑 붙어먹으려고 그런 거였나?"

"같이 있는 건 강진혁 플레이어잖아? 이번에 한국에서 나온 초특급 신성."

"저 사람이 강진혁이었어? 재각성 때 마력 수치가 미터기 뚫어 버렸다던?"

"그래. 같은 S급들보다도 훨씬 더 높게 나왔다고 하더라. 등급을 세분화해야 한다는 말이 저 사람 때문에 나올 정도였으니까."

"언노운이란 플레이어도 그렇고 최근에 대형 신인들이 많이 나오는 모양이네."

"수는 적어도 무시무시한 멤버구만. 어지간한 공격대보다 강하겠는데?"

워낙에 이슈가 되는 인물들이 모여 있다 보니, 주위에 시선이 집중됐다.

물론, 그런 시선 따위에 신경 쓸 진혁이 아니었다.

"다들 준비는 잘 해 왔지?"

"준비야 착실하게 했긴 한데, 그것보다 오빠. 우리들만으로 괜찮겠어?"

"응?"

"여기 좀비 웨이브 정말 토 나올 정도로 많이 밀려오잖아."

유연화가 몸을 가늘게 떨었다.

피비린내와 육편이 낭자하던 과거의 끔찍했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저도 소환수를 부리는 능력이긴 한데, 아직 레벨이 낮아서 힘들어요. 특히 변형 좀비들 몰려오는 웨이브는 버티기가...."

이태민도 한 마디 덧붙였다.

아무리 고인물들이라도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웨이브를 맞이하는 건 부담스러울 수밖에.

하지만.

"그게 더 재밌지 않아?"

진혁의 얼굴엔 천진난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마치, 더 높은 난이도를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대돼서 죽을 것 같다는 것처럼.

"재...밌다고? 오빠. 이거 게임 아니거든? 여기서 좀비한테 물리면 진짜로 죽어."

"하아. 형은 아직도 예전 버릇을 못 버렸네요. 그 정도면 자기 학대 수준 아니에요?"

"진혁 씨... 변태 같아요."

세 사람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부터 그렇게 좌절하면 어떡하나?

"일부러 거점도 경기장으로 골랐는데?"

"헉!? 겨, 경기장을? 상암 경기장. 거긴 아니지? 제발 아니라고 말해 줘."

"맞아."

"형. 미쳤어요? 거기가 거점 중에서 제일 빡센 곳인데! 최소한 100명 이상이서 막아야 하는 대형 거점이잖아요."

알고 있다.

동시에 가장 보상이 짭짤한 곳이기도 하지.

"그래도 다들 20층 부근까지 가 봤었는데, 너무 앓는 소리 하지 마. 초반에 얻을 수 있는 기연은 최대한 모아 놔야 위로 갈수록 편해진다는 거. 알고 있잖아?"

"그렇긴 한데...."

"으아아! 나도 모르겠다. 진짜 오빠나 가능한 거지. 우리한텐 힘들다고."

고인물이라고 다 같은 고인물이 아니다.

썩은 물이 있고 그 위에 석유와 화석들이 존재하는 법.

유연화와 이태민은 하필이면 그중에서 가장 지독한 암모나이트와 한배를 타 버렸다.

두 사람이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사이.

"저기, 진혁 씨. 저도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잠자코 있던 테레사가 손을 들었다.

"예. 말씀하세요."

"제가 알기론 이번 방어전을 수행하기 위해선 최소 인원이 갖춰져야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저흰 수가 부족한 것 같아서요."

"어? 그러고 보니...."

"맞다. 경기장에 신경 쓰느라 그걸 신경 못 썼네."

유연화와 이태민도 깜짝 놀라 대꾸했다.

이번 층에서 필요한 최소 인원은 5명.

허나, 모여 있는 건 네 명뿐이다.

또 다른 한 명이 있어야만 거점 방어전을 진행을 진행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마지막 한 명은 이제 곧 올 겁니다."

진혁이 걱정 말라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때마침.

콰아아아앙!

조금 떨어진 곳에서 굉음이 일어났다.

'쯧쯧.'

하여간, 조용히 등장하는 법이 없는 놈이다.

73화. 거점 방어전 (2)

바닥에 생긴 커다란 상흔.

검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 뿌연 먼지가 흩날렸다.

"뭐, 뭐야 이 미친놈은?"

"몰라. 웬 또라이 새끼가 갑자기 공격해 왔어!"

"죽으려고 환장했군. 이 인원을 상대로 시비를 건다고? 가뜩이나 밤도 새서 짜증났는데 잘됐어. 어디 한 군데 부러뜨려 주마."

"헉! 머... 멈춰! 저 녀석, 그놈이잖아. 검귀!"

"그 사이코패스라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걸리적거리지 말고 꺼져라. 전부 베어 버리기 전에."

살기를 줄기줄기 내뿜는 건 다름 아닌 천유성이었다.

상당히 화가 많이 났는지 눈빛이 차갑다 못해 살벌할 지경이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오늘 하루도 어김없이 수련에 매진하고 있던 천유성은 이른 아침부터 메시지 하나를 받았다.

[1시간 안에 4층 입구로 튀어올 것.]

발신자는 강진혁.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자 자신이 탑에 남아 있는 목적이었다.

'웃기는군.'

천유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녀석이 오란다고 해서 가야 할 이유 따윈 없다.

아직 수련이 부족하다.

그 망할 괴물을 넘어서기 위해선 검의 끝을 깨뜨려야만 했다.

그렇기에 천유성은 진혁이 보낸 메시지를 무시해 버렸다.

그러자 곧바로 또 하나의 메시지가 날아왔다.

[지금 오면 내가 왼팔이랑 오른쪽 다리 안 쓰고 상대해 줌.]

참자.

이건 도발이다.

아주 얄팍하고 유치한.

낚였다간 상대의 술수에 놀아나는 꼴밖엔 안 된다.

[오케이. 그럼, 우뇌만 쓰고 양쪽 눈도 감고 싸워 줌. 콜?]

참...자.

참아야 한다.

지금의 분노를 기억하고 승화시켜 나중을 위한 복수의 밑거름으로 삼아야 한다.

기다린다면 반드시 기회는 온다.

[쫄? 아. 쫀 거 맞나 보네. 내가 꼬리말은 멍뭉이는 괴롭히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걸로 끝.

간신히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죽인다.

반드시 갈가리 찢어 죽여 버리겠다!

완벽하게 도발에 낚인 천유성은 모든 걸 내팽개친 채 4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저 멀리서 이 모든 원흉의 모습이 보였다.

* * *

"어? 왔어? 여기야."

진혁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네.

하여간, 약속 시간은 더럽게 안 지키는구나.

"네놈...!"

천유성이 검을 앞으로 뻗었다.

기존에 사용하던 철기검이 아닌, 음각으로 룬어가 새겨진 새로운 검이었다.

'역시 저걸 손에 넣었군.'

속성검(屬性劍).

아직 완성형은 아니었으나, 무기에 원소 마법을 주입해 검사들의 약점인 원거리를 보완해 줄 수 있는 특수 아이템이었다.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천유성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강하긴 했지만, 오롯이 정석만을 추구하는 성격이다.

그만큼 다음 행보를 예측하기 쉽다는 뜻이다.

"내가 겁을 먹었는지 아닌지 이 자리에서 증명해 주겠다."

천유성이 양손으로 검을 붙잡았다.

쿠쿠쿠쿠쿠쿠!

날카롭게 갈무리된 마력으로 인해 지면을 따라 거친 선들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무식할 정도로 무지막지한 검기다.

"증명하는 건 좋은데, 미완성인 검으로 싸우려고?"

진혁의 말에, 천유성이 멈칫했다.

"무슨 뜻이냐?"

"말 그대로야. 속성검이 확실히 나쁘진 않긴 한데, 완전하게 완성되어야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있거든."

"...."

"마침, 이번 층에서 나오는 A등급 랜덤 박스에 그 속성검을 완성시켜 줄 수 있는 아이템도 포함되어 있어. 원하는 게 화(火) 속성. 맞나?"

"개소리! 랜덤 박스는 말 그대로 랜덤이다. 거기서 뭐가 나올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단 말이다!"

"그래. 정상적인 방법으론 랜덤 박스 안에 뭐가 들었는지 엿볼 수 없지."

하지만.

"나는 비정상적인 편법을 더 선호한다는 거. 알고 있잖아?"

진혁이 싱긋 웃었다.

반면, 천유성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이 말을 했다면 들을 가치도 없는 개소리라며 넘겼지만.

눈앞에서 능글맞게 웃고 있는 고인물만큼은 거기서 예외였다.

저놈이라면 정말로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커튼 뒤를 엿볼 수 있는 방법을.

"만약 네놈이 말이 맞다고 치고. 허면 그걸 미끼로 날 이용할 생각인가?"

"원래 삶이란 자신의 이해타산을 위해 서로를 이용하는 거 아니었어? 게다가 네 입장에서도 손해 볼 건 없잖아?"

더 좋은 아이템이야 말로 강해지기 위한 최고의 수단이다.

괜히 '템빨'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다.

단순히 아이템만으로도 상위 티어에 있는 랭커들을 씹어 먹는 경우가 있었으니까.

결국.

"...빌어먹을. 반드시 그 랜덤박스 안에 속성검을 완성시킬 수 있는 재료가 있어야 할 거다."

스릉!

천유성이 뽑았던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좋아.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어찌 됐든 이걸로 5명이 모두 모였다.

그중에 하나는 같은 편인지 살짝 의심이 가는 놈이긴 했지만.

* * *

[5인 파티가 형성되었습니다.]

[거점 방어전을 위한 최소 인원이 충족되었습니다.]

진혁을 포함한 다섯 명은 곧장 경기장으로 향했다.

"...."

"흠. 흠."

이태민과 유연화가 연신 천유성을 힐끗거렸다.

과거 눈만 마주치면 칼부터 뽑아들었던 망나니 아니었던가?

그런 살벌한 녀석과 같은 팀이 됐으니 불안할 수밖에.

"진혁 씨. 정말로 괜찮을까요?"

회랑에서 천유성을 만났던 테레사 역시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괜찮습니다. 저 녀석이 겉으론 저래도 의외로 순딩한 구석이 있거든요. 아마, 웨이브가 오는 동안만큼은 저희 뒤통수를 치진 않을 겁니다."

"그래도...."

"절 믿으세요."

누구보다 많이 티격태격하다 보니 싫어도 알게 되더라.

그 사람의 본성이 어떠한지를.

그리고 내가 아는 천유성이라면, 적어도 비겁한 짓거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아마도 말이지.

그때였다.

"아 맞다, 오빠. 깜빡할 뻔했네. 이거 받아."

무언가 생각났는지 유연화가 아공간 인벤토리를 열었다.

곧이어 모습을 드러낸 건 한 눈에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한 쌍의 칼.

쌍룡검(雙龍劍)이었다.

"오오!"

과연.

과거의 유물에 불과하지만, 탑 내부에 있는 성유물에 필적한다고 하더니.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손끝을 따라 전해지는 묵직한 느낌으로 인해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만 같았으니까.

"할아버지가 전해 달라고 했어. 근데, 진짜로 이거 할아버지가 엄청나게 아끼던 건데, 무슨 수로 받아낸 거야?"

"그냥. 개인적으로 좋게 봐 주신 것 같아."

진혁이 적당히 얼버무렸다.

지금 당장은 거주자에 관해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당장 눈앞에 있는 방어전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소소한 잡담을 나누는 사이.

"다 왔어. 저기가 우리 거점이야."

어느덧 일행은 경기장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아. 이 커다란 거점을 5명이서 막아야 한다 이거지?"

"암스테르담에서 아웃브레이크 막았을 때 생각나겠네요.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는데."

유연화와 테레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천하의 불광동 핵주먹이랑 암스테르담의 성녀도 긴장이 되긴 하나 봐?"

"사, 살짝? 그래도 오빠랑 함께 있으니 안심은 되네."

"저도요. 뭐랄까, 진혁 씨랑 함께 있으면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라도 어떻게든 될 것 같아요."

"띄워 줘 봐야 아무것도 안 나옵니다."

"에이. 띄워 주긴. 그냥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회랑도 혼자 공략하셨던 거. 저도 직접 봤는데요 뭘."

이 사람들이 갑자기 왜 이래?

설마, 뭔가 바라는 거라도 있는 건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적어도 신뢰를 받고 있다는 거였으니까.

세상이 이렇게 된 마당에서 누군가를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니지.

찌릿! 찌릿!

끼고 있던 브라함의 반지가 격하게 움찔거렸다.

'그래. 너도 믿을 수 있는 거 맞아.'

엘리스의 토라짐을 느낀 진혁이 피식 웃었다.

이 녀석도 겉보기와 다르게 은근히 질투심이 많다.

차갑고 고고했던 첫인상이랑은 완전히 180도 다르다고 해야 할까?

그 맛에 더 놀리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흠. 누가 경기장을 선점했나 했더니. 한국인들이었나?"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동시에, 빡빡 민 민머리에 문신을 전신 가득 뒤덮은 남자들이 건물 사이에서 나타났다.

"오빠!"

"형, 저 녀석들 기척을 지우고 접근했어요!"

"...진혁 씨!"

세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그래, 알고 있다.

몇 분 전부터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 오길래 언제 머리를 드러내나 했는데,

거점까지 오고 나서야 면상을 볼 수 있게 됐구나.

기척을 숨기는 솜씨가 그럭저럭 괜찮을 걸 보니 실력은 나름대로 있는 모양이다.

"중국 쪽 플레이어인가."

진혁이 입맛을 다셨다.

대형 길드 중 하나인 삼합회(三合會).

꽤나 안 좋은 소문이 돌고 있는 놈들만 모여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맨 앞의 미청년은 다른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네놈이 강진혁이라는 놈이냐?"

하얀 얼굴에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동양인이 입을 열었다.

길거리에서 만난다면 한 번쯤 다시 보게 될 외모다.

하지만, 수려한 외모보다 눈이 가는 건 녀석의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의 문양이었다.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저 문양은....

틀림없다.

'남궁세가'.

시련의 탑 25층에 있는 '무림'의 일원 중 하나다.

'중국 측과 거주자가 접촉했다는 게 사실이었군.'

유천영이 했던 말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네놈이 강진혁이냐고 묻고 있질 않느냐?"

"맞아. 내가 강진혁이다."

"역시, 그랬군. 내 이름은 남궁현이라고 한다. 너희 같은 미천한 소국과 달리 광활한 영토를 자랑하는 중화에 소속되어 있는...."

자신을 소개한 남궁현이 말을 이으려다가 멈칫했다.

상대가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뭐 하는 짓이냐?"

"아 미안, 그쪽 나라는 미세먼지에 찌들어 있잖아. 혹시라도 말할 때마다 입에서 먼지가 나올까 봐 불안했거든."

피부가 하얀 게 이해가 된다.

365일 24시간 하늘이 뿌옇게 가려져 있으니, 태양 빛이 통과될 리가 있나.

"이... 이 자식이 지금 뭐라고!"

남궁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화났네.

먼저 빡치는 쪽이 지는 게 국룰인데.

"너 이 새끼. 지금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남궁세가를 우습게봤다간 삼족을 멸해 주겠다! 라는 개소리는 내가 대신 해 줄 테니, 생략 부탁할게. 지겨워. 그딴 3류 악당 같은 대사."

진혁이 상대가 할 대사를 미리 읊어 줬다.

토씨 하나까지 정확하진 않아도 대충 이런 뜻으로 지껄였을 거다.

"근데 남궁세가 주제에 지킬 자존심이라는 게 있긴 하냐?"

탑에서 천마 한 번 뜨면 벌벌 기는 게 니들 수준이잖아.

게다가 남궁세가 소공자가 출두해서 이름을 날리는 건 20년 전에나 먹히는 거 아니었어?

시대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그딴 식으로 행동하는 건지 모르겠네.

혼자서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온 게 아니라면 말이지.

"너... 너!"

"쉿. 입 크게 벌리지 말고. 바이러스 가득 들어 있는 침이라도 튀었다간 전 세계 플레이어들한테 민폐야."

"으아아악!"

결국, 남궁현이 폭발했다.

74화 오대세가(五大勢家) (1)

화르르륵!

남궁현의 몸 주위로 푸른 불꽃이 일어났다.

"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은 놈이 감히 대중화를 모욕해?"

대중화라....

하긴. 무림도 결국엔 중국에 뿌리를 두고 있는 집단이었으니까.

현대의 중국 쪽 플레이어와 쿵짝이 잘 맞을 수밖에 없겠지.

속으로 혀를 찬 진혁이 곧바로 '탐식의 눈'을 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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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남궁현

성별: 남

나이: 22세

레벨: 68

힘 36 민첩 48 체력 37 마력 35 내공 85

보유한 스탯 포인트: 0

직업: 검사(劍士)

고유 능력: 검신일체(劒身一體)

스킬: Lv15 '태화검기(太華劒氣)', Lv14 '제왕검형(帝王劍形)', Lv12 '고혼일검(孤魂一劍)', Lv11 '무한보(無限步)', Lv11 '창궁대연신공(蒼穹大衍神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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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 조건: 탑에 존재하는 세력, '무림'의 거주자와 마주쳤습니다. 그와 함께 온 거주자들은 현재 삼합회 속에 숨어 있는 상태. 만약 그들의 정체를 모두 파악할 경우 스킬 중 하나를 복사할 수 있게 됩니다.]

'호오?'

복사 조건을 읽던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여기에 남궁현 뿐 아니라 다른 거주자들도 있다고?'

한 명만으로도 놀라운데, 다수가 한꺼번에 내려온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단순히 시비나 걸러 오기엔 너무 과한 규모다.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을 발에 차이는 개미 정도로 생각하는 놈들의 성격을 고려한다면 더욱더.

그렇다는 건.

'나에게 관심이 많다는 뜻이겠지.'

놈들의 목적이 생포인지 척살인지 그것도 아니면 회유인지는 모른다.

솔직히 말해 관심도 없다.

순순히 죽어 줄 생각도 무림과 함께할 생각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지금 가장 고민되는 건 능력을 복사할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

철컹!

스릉!

여기저기서 병장기가 뽑혔다.

"감히, 남궁현 님께 그런 말을 내뱉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몇 백 명이 넘는 플레이어들이 어금니를 드러냈다.

그토록 대놓고 도발했으니 당연히 이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반면, 진혁의 옆에 서 있던 유연화와 이태민은 입술을 깨물며 싸울 준비를 했다.

"누나, 왼쪽을 맡아 줘."

"알겠어. 간만에 몸 한번 제대로 풀겠네."

'기계 군주'의 효과로 인해 이태민의 주위로 각종 무기로 무장한 기계들이 나타났다.

철컹! 철컹!

마력 폭탄과 마력탄들이 장전되기 시작했다.

"후우우우...."

유연화 역시 양손과 발에 마력을 끌어 모았다.

근접전에 최적화된 스킬들을 활용하려면, 거리를 좁히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뒤는 제가 맡겠습니다."

우우우웅!

성스러운 성은과 함께 테라사의 전신에 은색 갑주가 나타났다.

은은하게 빛나는 밝은 빛.

'별의 가호'가 완전히 발현된 것이다.

천유성 또한 짧게 혀를 차며 검을 뽑았다.

"볼 때마나 느끼는 건지만, 네놈은 정말로 앞뒤 재는 것 없이 사는 것 같다."

어이가 없네.

"네가 할 소리냐?"

전 세계에서 막가파 순위를 꼽자면 리스트 최상위에 천유성이라는 이름이 있어야 할 거다.

그 아래로 한참을 내리고 또 내려가야 내 이름이 보일 테고.

"나는 적어도 생각은 하고 싸운다. 티모대령 너와는 달리 말이다."

젠장. 또 저 닉네임이 튀어나왔다.

당장이라도 희대의 개소리라고 반박하고 싶지만.

여기서 말해 봐야 씨알도 먹히지 않겠지.

"그래. 네 말이 맞다고 치고. 3분 정도 시간이 필요한데, 벌어 줄 수 있겠어?"

"3분? 원한다면 내 선에서 전부 처리해 줄 수도 있다."

천유성이 피식 웃었다.

얼씨구.

아무렴 어련하시겠어.

"뚫리지나 마."

진혁이 대도서관을 소환해 '세계의 기억'을 읽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타악!

탓!

양측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콰아아앙!

퍼어엉!

서로 다른 종류의 마력이 폭발했다.

전봇대가 엿가락처럼 휘고 아스팔트에서 박살난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조금만 더 버텨요!"

테레사가 사용한 '전투의 노래'와 '신성 강화'로 인해 나머지 사람들의 능력치가 비약적으로 상했다.

"오오. 누나!"

"좋은데, 이거?"

이태민이 부리던 기계 드론과 미니 탱크들이 한층 커졌다.

당연히 발사하는 마력탄의 밀도도 농밀해졌다.

유연화 역시 맨주먹으로 검을 박살낼 만큼 강해졌다.

"이 자식들. 강해."

"젠장. 망할 기계쪼가리 따위가!"

수는 적어도 밀리지 않는다.

충분히 버틸 만하다.

게다가 천유성이 있는 정면은 오히려 혼자서 다수를 밀어붙이는 기이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서걱!

콰콰콰콰콱!

"끄아아악!"

"내, 팔이!"

잘려 나간 팔과 다리.

피보라가 몰아치는 운무 속에서 전진하는 천유성은 공포 그 자체였다.

"이런 미친. 혼자서 저런 말도 안 되는...."

"가는 족족 전부 다 죽고 있어."

"괴, 괴물이다!"

공격하던 삼합회 플레이어들이 헛바람을 들이마셨다.

매섭게 공격하던 합격진은 어느새 그 예리함을 잃어버렸다.

조금씩 뒷걸음질 치며, 피에 물든 검귀로부터 멀어지려 했다.

자신들로는 상대가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때.

"아무래도 버러지들만 있는 건 아닌가보구나."

남궁현이 움직였다.

빠르다.

순식간에 천유성과의 거리를 좁힌 남궁현이 검을 뽑았다.

스릉!

위에서 아래로.

수직으로 그어진 검이 천지를 쪼갤 듯 내리꽂혔다.

콰아아앙!

"크윽!"

천유성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가까스로 막긴 했지만, 워낙에 짙은 내공이 실린 공격을 받아 낸 탓에 손바닥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보아하니 검을 다뤄 보긴 했나 본데, 그래 봤자 탑 밖에 있는 미물이 칼놀림을 배운 게 전부일 터."

남궁현이 검을 고쳐 잡았다.

검신을 타고 눈부신 푸른 강기가 피어올랐다.

"내 친히 명문가의 진정한 검술이라는 게 어떤 건지 보여 주겠다."

곧이어 전신에 소름이 돋을 만큼 화려한 검무가 시연되었다.

남궁세가의 독문무공.

제왕검형(帝王劍形)이다.

폭풍이 사람을 집어삼킨다면 이런 광경이 펼쳐질까?

카카카카카카캉!

"...!"

천유성은 수백 갈래로 날아오는 검을 혼신의 힘을 다해 받아냈다.

기와 기의 격돌.

피와 불꽃이 허공을 붉게 수놓았다.

허나, 어느 쪽이 우위인지는 너무나 뻔했다.

다수를 상대하느라 지친 천유성과 이제 완전히 몸이 풀린 남궁현 사이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으니까.

기껏해야 합을 주고받는 게 고작.

체력이 한계에 도달하는 즉시 천유성의 목이 잘릴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을 증명하듯.

"끝이다."

천유성의 마지막 일격을 흘려보낸 남궁현이 차게 웃었다.

검은 정확히 천유성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천유성은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

목이 잘리는 섬뜩한 느낌은 느껴지지 않았다.

통증 또한 마찬가지.

천유성이 감았던 눈을 조심스럽게 떴다.

그러자.

"3분."

모든 준비를 끝낸 진혁이 보였다.

"망할 놈. 좀 더 서두르란 말이다."

"그래. 버티느라 고생했어."

이걸로 바통 터치다.

***

남궁현이 흥미롭다는 듯 진혁을 바라봤다.

"무서워서 뒤에 숨어 있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구나."

"준비할 게 몇 개 있어서. 살짝 시간이 필요했거든."

"고작 준비 몇 개 한다고 해서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방금 네 동료가 일방적으로 박살나는 걸 똑똑히 봤을 텐데?"

봤지.

솔직히 말해 마음이 아플 정도였다.

천유성 이 녀석,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는 애인데 20층이 넘는 곳에서 사는 고렙이 양학질이나 하고 있으니 눈시울이 안 붉혀지겠는가?

하여간 어딜 가나 깽판 치는 놈들이 문제다.

그런데 그거 아냐?

시련의 탑을 끝까지 올라가 본 사람은 단 한 명뿐이라는 걸.

그리고 그 사람 역시 깽판 치는 걸 아주 즐겨한다는 걸.

"겨우 21층에 있는 놈들 주제에 뭔가 있어 보이는 척은 그만 해 줬으면 좋겠다는데... 뭐, 태권도 도장에서 빨간 띠 따고 좋아하는 모습이 귀엽긴 해. 그런데 그게 선을 넘으면 슬슬 짜증이 날 것 같거든."

"21층이라고? 네놈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남궁현의 눈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그 정도야 당연히 알고 있지. 왜? 내가 21층의 거주자에 대해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너. 평범한 플레이어가 아니구나. 대체 정체가 뭐냐? 설마 제국의...."

"미안하지만, 질문은 받지 않을게."

첫 번째 웨이브가 오기까지 이제 20분도 남지 않았다.

천유성이나 다른 사람들도 휴식을 취해야 하니,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다.

진혁이 계속해서 모아 뒀던 마력을 한 순간에 방출했다.

화르르륵!

거대한 불꽃이 삽시간에 지면을 갉아먹었다.

"이런 얕은 수를!"

남궁현이 크게 뒤로 거리를 벌렸지만, 매캐한 연기 탓에 시야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이걸 노린 건가?

이렇게 된다면 시각을 포기한 채 오롯이 기감에 의존해야 한다.

"위로군!"

감각을 집중하던 남궁현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상대의 마력의 하늘 위에서 느껴졌다.

"멍청한 놈. 스스로 피할 곳이 없는 곳으로 간 것이냐!"

허를 찌르기엔 나쁜 선택은 아니다.

허나, 그건 정말로 허를 찔렀을 때의 이야기고.

지금처럼 미리 수를 읽혔을 때는 그야말로 최악의 선택이었다.

피하고 사각을 노리면 이 싸움을 그대로 끝날 테니까.

그런데.

"뭣이?"

남궁현이 움직이려 했지만,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느새 '빙하 조형'으로 만들어진 서릿발이 발바닥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시선을 위로 끌고 시간차를 이용해 상대의 발을 묶는 콤비네이션.

연기가 걷히며, 그 사이로 진혁의 모습이 보였다.

"한 가지 팁을 주자면, 싸울 때 항상 발밑 정도는 확인하라고."

파츠츠츠!

검 끝에 맺혀 있는 눈부신 빛이 하나의 점으로 모였다.

[범위 지정 최대]

[Lv3 '데이라이트'가 발동됩니다!]

바로 그때, 극한까지 응축된 순백의 빛이 방출됐다.

콰콰콰콰콰콰콰!

직선으로 뻗은 하얀 검이 남궁현을 향해 뻗어갔다.

발동까지 시간이 걸리는 게 유일한 흠이었지만, 갖고 있는 광역기 중 최고의 범위와 위력을 자랑하는 스킬이다.

하지만, 데이라이트가 닿기 직전.

"이거 완전히 예상을 뒤엎는군. 완전히 놀랄 노자야."

"그러게. 아무래도 현이 혼자서는 안 되겠어."

삼합회 속에 있던 두 사람이 끼어들었다.

[호신강기(護身剛氣가 펼쳐집니다!]

[대군검막(對軍劒膜)이 펼쳐집니다!]

콰아아앙!!

강기로 만들어진 두 개의 방어 스킬이 남궁현과 그 주위에 있는 중국계 플레이어들을 보호했다.

투명한 벽에 금이 갔으나, 남궁현과 나머지 사람들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완벽한 타이밍에 스킬을 사용한 덕분이었다.

"호오. 제법이네. 탑 밖에 있는 놈들 중에 저 정도 위력의 내공을 갖고 있는 놈이 있을 줄은 몰랐어."

세 번째 남자도 감탄사를 내뱉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걸로 총 셋.

숨어 있는 쥐새끼들이 모두 무대 위로 등장했다.

'역시 나타났군.'

몇 백이나 되는 인파 속에 숨어 있는 놈들을 찾으려면 방법은 이것 하나뿐이었다.

동료 혼자 살아남을 수 없게끔 판을 만들어주면, 자연스레 남궁현을 도우러 나올 수밖에.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현재 이곳에 있는 거주자들을 전부 찾아냈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익숙히 봤던 상태창 하나가 나타났다.

물론, 고를 스킬은 이미 정해 뒀다.

[고유 능력 '무한보(無限步)'를 복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무림에 소속된 거주자의 스킬을 손에 넣었다.

두근! 두근! 두근!

진혁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보통은 여기서 만족하고 끝냈을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성과였으니까.

하지만.

'나는 아니지.'

단순히 능력을 복사는 정도에서 끝낼 거면 '융합'이란 고유 능력을 고르진 않았을 것이다.

더욱 강력하고 다양한 스킬을 얻기 위해서.

상대보다 상위의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서.

이 고유 능력을 선택했다.

['무한보'와 '검의 무덤'를 융합합니다.]

진혁이 두 개의 능력을 하나로 합쳤다.

우우우웅!

형언할 수 없는 빛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융합에 성공하였습니다!]

하나로 합쳐진 새로운 스킬이 눈앞에 나타났다.

75화 오대세가(五大勢家) (2)

[스킬 '검마제왕보(劍魔帝王步)(S)'를 획득하셨습니다!]

[검마제왕보]

입수 난이도: S-

내용: 오대세가 중 하나인 남궁세가의 무한보와 마교의 검마의 독문무공 '검의 무덤'이 융합된 무공으로, 의(義)와 협(俠)을 추구하는 정파와 패도를 추구하는 마교의 이질적인 성격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사용 시 이동 속도가 70%만큼 상승하며, 마력을 발에 집중할 경우 공격 수단으로도 활용이 가능합니다.

이동기와 공격력.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스킬을 손에 넣었다.

'패시브형인 얕은 호흡과 연계하면 이제 장거리를 이동하더라도 효율적으로 체력을 사용할 수 있겠지.'

게다가 체중과 마력을 실을 수 있게 됐으니 같은 공격을 하더라도 위력이 훨씬 더 커질 것이다.

그야말로 '무림' 본래의 정수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스킬이었다.

진혁이 스킬의 상세 내용을 다시 한번 눈으로 훑었다.

'본래라면, 20층은 가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멍청한 놈들이 제발로 호랑이 굴에 들어와 준 덕에 몸보신 한번 든든하게 했다.

반면.

"크윽!"

진혁이 웃고 있는 걸 본 남궁현은 어금니를 부서져라 깨물었다.

열 받는 거겠지.

상대는 여유로운데 자신은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으니까.

자존심에 금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바로 그때.

"괜찮은 거냐? 현아."

남궁현 옆으로 남녀 세 명이 다가왔다.

서른 중반의 남자는 남궁세가와 함께 오대세가 중 하나인 황보세가 소속된 황보군악이었고.

"현 오라버니가 진땀 흘리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네요."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여자는 독의 명문으로 알려진 당문의 당소하였다.

"저런 놈을 상대로 왜 이렇게 고전하는 거야?"

마지막으로 가장 어려 보이는 남자는 제갈세가의 제갈천이었다.

"빌어먹을. 나 혼자서도 충분했어. 너희들 도움 따윈 필요 없단 말이다."

"네 실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야. 하지만 장문인께서 내리신 명령은 척살이 아닌 회유라는 사실 또한 잊지 마라."

"황보군악 오라버니 말씀이 맞아요. 순순히 저희와 함께하겠다고 한다면, 굳이 싸울 이유는 없죠."

"하지만...! 저 녀석은 우리에 대해 알고 있었다! 우리가 탑에서 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고!"

남궁현이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여유롭게 웃고 있던 세 사람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뭐라고?"

"그게 사실인가요?"

"저 녀석이 우리에 대해서?"

뒤쪽에 멀리 떨어져 있어서 남궁현과 진혁의 대화까진 엿듣지 못했는데.

설마, 그런 말을 했을 줄이야.

만약 남궁현의 말이 사실이라면, 보통 큰 일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여러 유망한 플레이어들과 접촉해 왔었으나, 자신들의 정체에 대해서 알고 있던 자는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응? 탑에 사람이 산다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아무리 서울 집값이 로켓 달고 천장을 뚫었다지만, 이런 곳에 내 집 마련을 하려는 정신 나간 사람이 있다고?"

정작 당사자인 진혁은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 자식이... 조금 전에 나한테 그렇게 말하지 않았냐?"

"응 내가?"

"그래. 네놈이 분명!"

"아! 네 몰골이 탑에서 1만 년은 보낸 노숙자 같다는 말을 하긴 한 것 같은데. 혹시 그 얘기였어?"

"노, 노숙자라고? 지금 그거 나한테 한 말이냐?"

"아니면 아닌 거지. 괜히 발끈하지 마. 억하심정 갖는 거 추해 보이니까."

"...."

스릉!

남궁현이 다시 검을 뽑았다.

"결정했다. 회유고 나발이고 간에 우선 네놈의 혓바닥부터 잘라내기로."

말에 배어 있는 끈적한 살기.

남궁현이 자세를 잡았다.

부우우우웅!

순식간에 검이 뻗어 왔다.

빠르다.

그리고 매섭다.

마치, 독이 오른 뱀이 낙엽을 스치는 것처럼 궤도를 예측하기 힘든 검격이 점과 선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러나 진혁은 남궁현의 공격을 너무나 가볍게 피했다.

'역시나, 이런 놈들의 행동 패턴은 뻔하다니까.'

도발에 이렇게 쉽게 걸려서 앞으로 어쩌려는 건지.

게다가 녀석 스스로도 말하지 않았는가?

혓바닥을 잘라내 주겠다고.

아무리 과정이 복잡한들, 목표만 알고 있다면 피하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다.

"나도 꽤 좋아해. 술래잡기 하는 거."

진혁이 이죽거렸다.

"쥐새끼 같은 놈!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수 있는지 보자!"

[남궁현이 Lv11 '무한보(無限步)'를 발동합니다!]

순간, 완전히 달라진 움직임.

남궁현이 남궁세가 대표 보법을 발동한 채 따라붙었다.

콰콰콰콰콰콰!

검의 궤도도.

검에 실린 내공도 그대로다.

사람이 달라진 것도 아니다.

그저 발놀림이 달라졌을 뿐.

허나, 그 단순한 차이 하나가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만들었다.

"왜? 이제 미꾸라지처럼 도망가지 못하겠나? 그렇게 큰 소리 치더니 꼴이 우습게 됐구나."

남궁현이 진혁의 뒤를 잡았다.

이제 무방비 상태인 상대의 볼 속으로 날붙이를 쑤셔 넣어 줄 시간이다.

물론, 저 건방진 혓바닥과 함께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Lv1 '검마제왕보(劍魔帝王步)'가 발동됩니다!]

한줄기 바람이 일어났다.

***

시간이 지날수록 남궁현의 얼굴이 점점 더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 이게...! 이럴 리가 없는데....'

처음엔 방심했다.

입만 산 놈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기에 적당히 가지고 놀다가 찍어 눌러 줄 생각이었다.

20층과 4층 사이에는 그만큼 거대한 격차가 있었으니까.

무림인과 햇병아리 플레이어 사이에는 결코 넘지 못하는 벽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첫 번째 교전 이후 상대를 너무 우습게봐서는 안 된다며 생각을 고쳤다.

'전력을 다해 찍어 누른다.'

가장 자신 있는 무한보와 고혼일검을 사용한다면, 세 호흡 안에 승기를 잡을 수 있으리라.

그래,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런데.

갖고 있는 최고의 절기를 모조리 구사했음에도.

대체 어째서!

상대의 그림자조차 밟지 못한단 말인가?

압도적인 보법의 차이는 결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처럼 다가왔다.

'무슨 이런 괴랄한 움직임이....'

직선적이면서도 중간 중간 엇박자로 섞여 있는 변칙적인 발놀림은 도무지 예측이 가질 않았다.

틀림없다.

적어도 무한보 보다 몇 수는 위의 상승 무공이다.

"현아. 열 받은 마음은 알겠는데, 적당히 놀아라. 혹여 상하게 했다간 뒷일이 골치 아파지니까."

"현 오라버니! 빨리 끝내세요. 벌써 5분이 다 돼 간다고요."

"아예 반격할 엄두도 못 내는 놈을 상대로 시간 끌 것 없잖아?"

같이 있던 다른 문파의 동료들이 한 마디씩 건넸다.

두 사람의 눈엔 그저 남궁현이 압도적으로 밀어붙이면서 놀고 있는 것으로밖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젠장.

이쪽은 똥줄 빠져라 움직이는 중이라고!

남궁현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헛손질을 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실수인 척 죽여 버릴까?

공을 들여야 하는 생포와는 달리 살초만 사용할 수 있다면....

반격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보법으로 도망만 다니는 놈쯤이야 얼마든지 요리할 방법이 있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남궁현이 '태화검기(太華劒氣)'를 발동합니다!]

파츠츠츠!

허리춤에 찬 검이 눈이 시린 빛을 뿜어냈다. 상대를 죽이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검기였다.

동시에.

"그거, 실수하는 거야."

얼음장처럼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진혁으로부터.

정확히는 진혁이 갖고 있는 한 쌍의 검으로부터.

[쌍룡검이 주인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오싹!

'...!?'

남궁현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탓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크오오오!"

"그아아아!"

날카로운 고음이 끼어들었다.

삼합회 플레이어들이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우측에서 좀비 웨이브입니다!"

"수는 약 1천. 3분 거리입니다!"

정신없이 싸우는 사이, 첫 번째 웨이브가 코앞까지 밀려왔다.

이제 더 이상 노닥거릴 시간 따윈 없다.

"운이 좋았군."

황보군악이 진혁을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좀비 웨이브가 조금만 늦게 왔다면, 승부는 났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싶었다.

"그래, 덕분에 살았네. 우리 소공자님."

진혁 또한 반쯤 뽑았던 쌍검을 집어넣었다.

"어머나, 저분 말하는 것 좀 보세요."

"너보고 살았단다. 푸하하! 꼴에 주둥이는 살아가지곤. 안 그러냐. 현아?"

"어? ...어어...."

남궁현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대체 뭐였지?

방금 느꼈던 그 엄청난 살기는.

등골까지 얼어붙을 정도의 흉흉한 기운 때문에 아직까지 손발이 벌벌 떨렸다.

무림에서 느꼈던 그 어떤 것과도 다른 이질적인 마력.

확실한 건 하나다.

방금 제대로 싸웠으면....

'죽었어.'

그래.

틀림없이 죽었다.

남궁현은 그 사실을 깨달았다.

안타깝게도 제갈천은 그러지 못했지만.

"어이. 다음엔 기막힌 타이밍에 끼어들어 주는 좀비도 없을 테니 까불지 말고 알아서 기어라. 그렇잖아? 옛날부터 우리 속국으로 살아온 너희는 우리가 요구하면 넙죽 엎드려서...."

제갈천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콰앙!

안면이 으스러지며 입안에 있던 옥수수를 모조리 뿜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미안, 방금 뭐라고 했나?"

진혁이 손에 묻은 피를 닦으며 환하게 웃었다.

***

"끄아아악!"

제갈천이 양 손으로 안면을 감쌌다.

완전히 주저앉은 콧대.

손마디 사이로 피가 울컥울컥 새어나왔다.

"이 자식이 지금 무슨 짓을 한 거냐!"

"크윽!"

황보군악과 당소하가 순식간에 각자의 무기를 움켜잡았다.

반면, 남궁현은 얼어붙은 채 꼼짝도 하지 못 했다.

"계속 싸우는 건 상관없는데, 괜찮겠어? 싸우면 그쪽이 꽤나 불리할 텐데?"

어느새 삼합회를 상대하느라 지쳤던 유연화와 이태민 그리고 테레사와 천유성까지 모두 체력과 마력을 회복한 상태였다.

"크오오오!"

"캬아아악!"

물론, 이 와중에도 좀비들은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히고 있었고.

"...아무래도 대화는 나중에서 이어서 해야겠군."

황보군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기장은 우리 거니까. 들어올 생각하지 말고 다른 곳을 알아봐."

"그런 쓰레기 같은 곳은 이쪽에서 사양한다. 게다가 거점 정도는 이미 정해 놨어."

"호오. 거점을 확보해 뒀다고?"

"그래, 4층에서 가장 좋은 곳이지."

황보군악이 힐끗 뒤쪽을 바라봤다.

경기장 바로 앞에 있는 대형 마트.

역시, 저길 고른 건가.

"나쁘진 않네."

대형 마트는 사방이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데다 입구가 좁아 방어가 수월하다.

특히나 방어하는 인원이 몇 백 명이나 된다면 더욱더.

내부에는 통조림과 물을 포함한 식료품이 가득할뿐더러 수많은 잡화들로 인해 장기간 농성을 펼치기에 최적화된 장소였다.

세상이 멸망하고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한다면 가까운 마트로 가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하지만.

저곳엔 치명적인 약점이 한 가지 있다.

아무도 모르는 최악의 단점이.

'이거 4층 공략이 아주 흥미진진해질 것 같네.'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건방진 무림의 떨거지들을 포함해 거점 방어전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이 지금 막 떠올랐다.

76화 고인물이 디펜스를 하는 법 (1)

"크아아아아!"

"케에엑!"

피부가 벗겨지고 짓물러 피가 흐르는 외형.

오직 인육만을 탐하는 좀비들이 밀려왔다.

엄청난 수다.

게다가 속도까지 빨랐기에, 좀비들은 순식간에 경기장 코앞까지 도달했다.

"형. 정말 이런 걸로 막을 수 있는 거예요?"

이태민이 경기장 입구에 솟아난 식물들을 불안한 듯 바라봤다.

태양의 모양을 본 떠 만든 '솔라 식물'은 크기는 제법 컸지만, 전투에 적합해 보이지 않았다.

"오빠. 설마, 예전처럼 스릴 즐긴다면서 일부러 이상한 거 고른 건 아니지?"

유연화도 한 마디 덧붙였다.

고인물인 두 사람조차도 4층에서 식물을 방어하는 데 주력으로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완전히 미지의 영역이라는 뜻이다.

"걱정하지 마. 이 녀석들 보기보다 꽤 쓸 만하니까."

진혁이 여유만만하게 웃었다.

바로 그때.

"온다!"

스릉!

천유성이 검을 뽑았다.

동시에.

쿵! 쿵! 쿵! 쿵! 쿵!

지축을 흔드는 굉음과 함께 좀비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넝쿨들을 넘어 거침없이 경기장 안으로 진입하려는 좀비들.

하지만, 첫 번째 좀비가 땅에 발을 딛는 순간.

[솔라 식물이 Lv1 '태양의 빛'을 발사합니다!]

크게 부풀어 올랐던 식물이 직경 2m 크기의 구체를 토했다.

콰아아아앙!

태양의 에너지를 담아 날리는 거대한 마력 덩어리가 좀비들이 밀집해 있는 곳에 작렬했다.

"키에에에!"

"크아악!"

전신에 불이 붙은 좀비들이 비틀대다 쓰러졌다.

"헉?"

"무, 무슨 위력이...!"

"이거 화염 타워나 빙계 타워보다 훨씬 더 강한 것 같은데요."

"...."

지켜보던 네 사람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한 방에 오십 마리가 넘는 좀비들이 증발해 버렸으니 그럴 수밖에.

"그래서 말했잖아. 거점으로 경기장을 골라도 상관없다고."

3층의 보스를 잡고 첫 번째로 4층에 도착해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이 붙긴 했으나.

일단, 준비만 확실하게 해 놓으면 최고의 위력을 발휘하는 게 바로 이 식물형 타워다.

'물론, 내가 아니면 이걸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할 테지만.'

식물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적재적소에 활용하기 위해선, 운이 아닌 경험이 필요하다.

그야말로 무수히 많은 실전 경험이.

"다음 태양의 빛을 사용하기까진, 1분 정도 시간이 필요해."

"그동안 좀비들을 막아 달라는 거군."

천유성이 더 이상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검을 움켜쥐었다.

하여간, 눈치 하나는 빨라서 좋다.

"너무 무리하다가 좀비한테 물리거나 하진 말고. 바이러스에 감염돼 변해 버리면 뒤처리하기 귀찮아진다."

"어이가 없군. 내가 좀비 따위한테 당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조금 전에도 무림 애들한테 그 말 하다가 개박살나지 않았어?"

전부 다 쓸어버려 준다더니.

간신히 3분을 버티고 목숨이 간당간당하던 모습... 아주 잘 봤었다.

진심으로 그 장면 녹화라도 해서 한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상연회라도 열었어야 했는데,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그, 그건! 밑에 놈들과 싸우다가 체력이 떨어져서 그런 거다. 나 혼자서 몇 명을 상대하는 지 보지 않았나!"

"어유 아무렴 그러셨겠죠. 이번에는 부디 체력 안배 자아알해 주길 바랍니다."

"크윽."

천유성이 분노에 찬 신음을 삼켰다.

어떤 말을 해도 어차피 구차한 변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스스로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다 토라진 얼굴로 몸을 돌렸다.

"...이번에는 제대로 해 주마."

끝까지 자존심 세우는 건 잊지 않았다.

"형. 저는 중앙을 맡을게요."

'기계 군주'의 능력으로 넓은 시야를 갖고 있는 이태민이라면, 중앙에서 전체적인 상황을 조절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 뭐래도 드론을 띄울 수 있는 스킬은 사기 그 자체였으니까.

"그래. 부탁할게."

"으음. 그럼, 난 북쪽으로 가면 되려나?"

"저는 남쪽 입구를 맡도록 하죠."

유연화와 테레사도 식물들을 서포팅하기 위해 움직였다.

이제 남은 건 동쪽.

'간만에 스킬 연습 좀 제대로 해 볼 수 있겠군.'

진혁이 유천영으로부터 받은 '쌍룡검'을 꺼냈다.

눈이 시릴 정도의 맑은 칼날이 예기를 발했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조용히 고동쳤다.

현실에서 처음으로 사용해 보는 성유물급 아이템.

그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지금부터 시험해 볼 시간이다.

'먼저 검의 무덤부터....'

진혁이 검은 강기를 발현시켰다.

우우우우웅!

다루기 힘든 거친 기운이 너무나 부드럽게 칼 위로 덧씌워졌다.

'과연....'

이토록 이질적이고 제멋대로인 능력을 완벽하게 수용할 줄이야.

마치, 처음부터 하나의 몸이었던 것처럼 검과 강기가 하나의 형(形)을 이뤘다.

"크아아아악!"

"케에엑!"

좀비들이 인육을 먹기 위해 아가리를 벌렸다.

피가 섞인 타액이 뚝뚝 떨어졌다.

"배가 많이 고픈가 본데, 아주 실컷 먹게 해 줄게."

비록 놈들이 원하는 살코기는 아니지만, 강기를 듬뿍 먹다 보면 두 번 다시 무언가를 먹고 싶다는 생각 따윈 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예토(穢土)가 되어 버린 경기장 위로.

[흑월야(黑月夜)가 발동됩니다!]

검은 초승달이 드리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