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라온은 케인을 제압하고 다시 나무밑동에 걸터앉았다. 한참을 기다리고 있으니, 수풀이 흔들리며 5 연무장 수련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낙오한 녀석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건재한 상태로 돌아왔다. 적의 깃발은 마르타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 그거 아니. 그 사람 케인 지그하르트 아니에요?"
도리안이 넋이 나간 눈으로 팔이 묶인 케인을 보았다.
"맞아. 전황이 밀리니, 바로 이쪽으로 왔지."
"와, 진짜 도련님은 지질 않으시네요."
그와 몇몇 수련생들이 대단하다고 말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네 말대로였다."
버렌이 조금 민망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완성되지 않은 감각검은 허초의 함정에 쉽게 빠지더군. 어이가 없을 정도로."
그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천천히 숨을 내쉬고 입을 뗐다.
"지휘만큼은 내가 더 잘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오늘 네가 없었다면 우리는 6 연무장에게 패배했겠지."
맞는 말이라는 듯 버렌의 뒤에 서 있던 수련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수석임을 다시 한번 인정한다. 앞으로 불평 없이 네 지시를 따르겠다."
그는 가슴을 쿵 두드리고, 등을 돌렸다. 귀가 빨개진 걸 보니 또 민망해하고 있었다.
퍼억!
마르타는 들고 있던 6 연무장의 깃발을 바닥에 꽂았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저놈의 말이 맞아. 짜증 나지만 오늘 승리의 일등공신은 너다. "
그녀는 이상한 지휘였으면 그 약속 때려치울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라온."
누구보다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온 루난은 잘했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녀 나름의 칭찬이었다.
라온은 세 사람을 차례로 보며 옅게 웃었다.
'이래야 5 연무장이지.'
* * *
"허…."
메툰이 헛웃음을 흘렸다. 시선은 케인을 제압해서 꿇린 라온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작은 불꽃이 저리 강할 줄이야.'
라온의 작은 불꽃은 케인의 큰 불꽃 앞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아니, 사나운 면에서는 오히려 압도했었다.
리메르가 말한 먹어 치운다는 말이 헛소리가 아니었다.
'위력만 강한 게 아니야. 상대를 제대로 보고 있었어.'
케인의 불길은 분명 강렬했지만, 칼날 아랫부분에 오러로 메우지 못한 빈틈이 있었다.
평범한 수련생이라면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작은 구멍.
'하지만….'
녀석은 알아차렸지.
라온 지그하르트는 케인의 실수를 파악하고, 그 약점을 향해 검을 내리그어 승리를 움켜쥐었다.
'대단하군.'
케인의 감각도 놀랍다고 생각했지만, 라온 더 했다. 저 녀석의 감각은 직접 보고도 믿기 힘들 정도로 민감하고 세련되었다.
'배짱도 정신이 나간 수준이고.'
그 급박한 상황에 적의 약점을 파악하고 검을 지르는 건 감각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저 녀석의 정신력은 이미 자격을 얻은 검사급이었다.
"후…."
메툰이 한숨을 내쉬고 일어섰다. 뒤를 돌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할 수밖에 없군."
"흐흥."
반쯤 드러누워 있던 리메르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저 아이를 칭찬했는데, 왜 네가 그리 뿌듯해하는 거냐."
"내 제자니까."
"제자는 무슨. 넌 놀고 저 아이 홀로 수련했겠지."
"뭐, 그런 적도 있긴 하지."
리메르가 피식 웃으며 일어섰다.
"그럼 가자."
"어딜?"
"저 아이들이 라이벌 의식은 있었어도 적이라거나, 서로 미워하진 않잖아. 지그하르트라는 이름으로 묶였으니 친분을 쌓기 좋은 기회지. 함께 회식이나 시켜주자고."
"음, 그건 괜찮군."
"네가 내는 거다?"
"알겠다."
메툰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메르와 내기를 했으니, 아이들의 식사 비용을 책임지는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역시 통 크다니까!"
리메르가 씩 웃으며 라온에게 모이는 수련생들에게 달려갔다.
"오늘은 남의 돈으로 회식이다!"
* * *
라온은 길쭉한 사각 테이블 위로 쌓여가는 음식을 보고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바로 앞에 있는 돼지 통구이를 조금 잘라 입에 넣었다. 껍데기 부분은 바삭하고, 살코기는 촉촉하여 혀에서 녹아내렸다. 자극적이지만 맛 하나는 끝내줬다.
-크흠! 좋구나. 아주 좋아. 본왕의 까다로운 입맛을 사로잡는 농축된 맛이로다.
'그러게. 맛이 괜찮네.'
-다음에는 저 옆의 파이를 먹어보아라. 본왕은 마계에 있을 때부터 저런 파이를 좋아하여 아침저녁으로….
라온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우측의 스튜를 먹었다. 부드러우면서 감칠맛이 넘쳤다.
-이, 이것도 괜찮지만, 본왕의 말을 들어라. 파이! 파이다!
'이런 곳도 있었군.'
리메르는 전투가 끝나자마자 5 연무장과 6 연무장 수련생들을 영지 내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식당의 외부가 낡아 걱정했지만, 음식은 다양했고 맛도 좋았다. 질 좋은 재료를 훌륭한 요리사가 조리한 것 같았다.
'그런데….'
돼지고기를 하나 더 집어 먹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낡은 피아노 줄처럼 늘어진 분위기. 승리한 5 연무장도, 패배한 6 연무장도 쳐져 있는 상태였다.
'뭐, 당연한가.'
5 연무장은 손쉽게 이길 줄 알았던 6 연무장에게 당할 뻔했고, 6 연무장은 단단히 준비한 계획이 모두 깨져 버렸다. 둘 모두가 침울해하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안 그런 사람도 있었다.
"내가 진짜 잘 가르치긴 했나 봐."
리메르가 제일 비싼 흑맥주를 입에 털어 넣으며 낄낄 웃었다.
"조언을 해준 것도 대단하지만, 그 조언을 듣고 그대로 따라 하는 거 봤지? 대단한 제자들이야."
"오늘 네놈은 아무것도 안 했다."
"라온을 누가 가르쳤지? 바로 이 몸! 그러니 녀석의 공은 내 공이나 마찬가지지."
"후우…."
두 사람은 따로 떨어져서 오늘 결투의 반성회를 열었다. 물론 옆에서 들을 때는 반성회가 아니라, 리메르의 자기 자랑이었지만.
반면 수련생들의 테이블에서는 훈련 후 점심을 먹는 것처럼 씹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닭튀김을 먹으려 할 때였다.
'던이라고 했던가?'
중앙에서 마르타와 싸웠던 덩치 큰 남자가 마르타에게 다가갔다.
"듣던 것 이상의 강함이었다. 공격과 방어 모두 대단했어. 첫 번째도 놀라웠지만, 두 번째 대결에서 검진의 빈틈을 노릴 때는 식겁했다."
던은 순박해 보이는 외모 그대로 본인이 느꼈던 점을 읊었다. 마르타도 당황했는지 포크에 찍혀 있던 브로콜리를 떨어뜨렸다.
"언젠가 함께 수련해보지 않겠나? 분명 양쪽에 도움이 될…."
"꺼져."
물론 마르타는 보지도 않고 손을 저었다.
'저 정도라면 난동은 부리지 않겠군.'
라온이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의 마르타라면 바로 주먹이 날아갔을 텐데, 저렇게 말했다는 건 나름 마음에 든다는 의미였다.
"버렌 님."
데칼도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버렌의 자리로 움직였다.
"뭐 할 말 있나?"
버렌이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허초를 평소에도 연습하십니까?"
"그리 많이 하진 않는다."
"제가 보기엔 많은 훈련을 한 허초였습니다. 솔직히 진짜 같아서 놓칠 수가 없더군요. 먹이를 본 개마냥 뛰어들었습니다. "
"크흠!"
칭찬이 기뻤던지 버렌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뭐, 너희들의 감각검도 예리했다. 허초를 쓰기 전까지는 뚫을 방법을 찾지 못했으니까. 내 검술이 그렇게 막힌 건 처음이었어."
버렌은 반대로 데칸의 장점을 칭찬했다.
"하지만 결국엔 버렌 님에게 패했죠. 마지막에 허초를 역이용할 때는 정말 꼼짝할 수가 없었습니다."
"뭐, 검술도 검술이지만, 내 오러가 너희보다 뛰어나기도 하니…."
버렌은 솔직하게 말하는 데칼이 마음에 들었는지, 몸까지 돌린 채로 검술과 오러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게 계기였는지 눈치를 보던 수련생들은 전투에서 만났던 상대를 찾아가 오늘 있었던 대결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어떤 점이 대단했고, 어떤 점이 문제였는지 토론을 하듯 털어놓았다.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고?"
"응."
"무슨 아이스크림?"
"구슬."
루난도 귀여운 인상의 여자아이와 마주 앉아 있었다. 대화가 통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읏차."
왼쪽 빈자리에 누가 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옆을 보니, 마지막에 싸웠던 6 연무장의 수석 케인 지그하르트였다.
"마지막은 완전히 당했어. 설마 오러가 약한 곳을 공격해서 검을 터트릴 줄은 몰랐다."
그가 감탄이 나온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은 아니겠지?"
"그렇습니다."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제 와서 말을 올릴 필요는 없어. 어차피 같은 수련생이잖아."
"그러지."
본인이 말을 놓으라는데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무력은 몰라도 감각 쪽은 또래 중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자만했던 모양이야."
케인이 아까와는 달리 모든 것을 받아들인 얼굴로 웃었다. 이런 성격의 직계라니 새로웠다.
"전략적인 부분도, 정신적인 부분도 크게 배웠어. 고맙다."
"배웠다고?"
"네 덕분에 끝까지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전략이 실패할 때도 대비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 아마도 내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그런 말을 했겠지."
케인이 일어서서 느릿하게 고개를 숙였다.
"넌 내 은인이다. 고맙다."
"어…."
라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얜 또 뭐라는 거지?
66화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고맙다고?'
이해할 수가 없네.
열심히 세운 전략을 가볍게 깨부수고, 일대일 대결에서도 이겼으며, 마지막엔 가슴을 후려쳤는데 고맙다고 고개를 숙이는 게 이유를 모르겠다.
"모르겠다는 눈빛이네."
케인 지그하르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난 이번 전면전에서 무조건 너희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어. 언제 붙어도 이길 수 있도록. 대련이 결정되기도 전에 너희들의 성격과 무력을 파악해 두었으니까."
"확실히 위협적이긴 했지."
마르타와 버렌의 성격과 검술을 파악한 뒤 그에 걸맞은 상대와 공략법을 내놓은 건 유효했다. 루난을 보내지 않았다면 둘 다 그곳에서 쓰러졌을 것이다.
"맞아. 하지만 위협적이기만 했지. 실제로 이긴 건 아니야. 한 번의 작은 승리를 이뤘다고 다 끝났다고 생각해버렸지. 네가 나보다 감각이 좋고, 기척을 숨기는데 능하다고는 생각도 못 했고, 마르타와 버렌이 그렇게 달라질 줄도 몰랐어."
케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지막으로 너와의 일대일에서 내가 지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회복하는 동안 연공만 해서 오러만큼은 자신 있었는데, 그런 작은 불꽃에 깨졌다는 게 아직도 믿기질 않아."
그는 지금도 만화공이 약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착각이었지만 딱히 말할 필요는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이번 전투를 통해 정말 많은 걸 배웠다. 적 중에 나보다 어리면서도, 뛰어난 인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항상 생각하고, 항상 긴장해야겠어."
케인의 눈을 보았다.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운 듯 만족스러운 눈빛이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한 말이 전부 진심이었던 것 같다.
'직계 치고는 괜찮네.'
그의 말대로 항상 적이 능력을 숨길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하고 움직여야 한다. 암살자 시절에도 모든 상황에 대비했기 때문에 최고라 불릴 수 있었다.
"그래."
라온은 케인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고 식당 내부를 쭉 돌아보았다.
이제 5 연무장 수련생들과 6 연무장 수련생들은 친구라도 된 것처럼 웃고 떠들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
"검을 날릴 때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생각은 무슨 생각. 느낌대로 꽂는 거지. 그리고 꺼지라니까?"
짜증을 내던 마르타도 칭찬을 듣다 보니 마음이 풀렸는지 조금 반응해준다. 아주 조금….
"지그하르트의 검사가 될 자라면 그 정도 의지는 가지는 게 맞죠."
"물론이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오른쪽에 칼을 찔려도 왼쪽도 내주는 지그하르트 검사지."
버렌과 데칼은 술이라도 마신 듯 벌게진 얼굴로 껄껄 웃고 있었다.
사각사각.
루난은 카린과의 대화를 끝내고 과일을 먹고 있었다. 마음에 들었는지 자기 앞에 우르르 쌓아 놓고 먹는 모습이 꼭 다람쥐 같았다.
'신기하네.'
서로 죽일 듯이 싸워놓고 지금은 저렇게 친해진 게 기묘했다.
처음 다 같이 회식을 한다고 했을 때 장례식 분위기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완전 반대였다. 지금 음식점 안은 작은 축제가 열린 거나 다를 바가 없었다.
"너도 특이하군."
왜일까 생각하고 있을 때 치킨을 뜯어 먹은 케인이 피식 웃었다.
"뭐가?"
"조금 전까지 싸우던 놈들이 왜 저리 친해진 건지 궁금한 거 아닌가?"
"음…."
"역시."
케인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왜인지 알려줄까? 싸웠기 때문이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 그런데 왜 싸워서…."
"아니, 그냥 싸웠기 때문이 아니라, 지그하르트라는 이름 안에서 싸웠기 때문이다."
그가 오늘 전투에 대해 떠드는 수련생들을 쭉 가리켰다.
"우린 같은 지그하르트다. 비겁한 수를 쓰지도 않았고, 서로가 서로를 이기기 위해 전력으로 부딪쳤지. 그건 검을 맞댄 모두가 알고 있어."
라온이 눈빛을 가라앉혔다. 그 말 그대로다. 케인과 검을 부딪치며 그의 마음가짐을 확실하게 느껴졌다. 그는 오직 승리만을 원했었다.
"상대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털어냈으니, 이기든 지든 속이 시원할 수밖에 없지. 저 녀석들은 친한 척하는 게 아니라, 조금이지만 친분이 생긴 거다."
케인은 그 말을 하고, 쥬스를 맥주처럼 들이켰다.
"그런가…."
조금이지만 느낌이 왔다. 왜들 저렇게 친해 보이는지 그리고 왜 자신이 이해를 못 했는지.
'전생에선 안 이랬으니까.'
암살자 교육을 받을 때도 전면전 훈련이 있었다.
다만 이곳과 달리 훈련임에도 약한 자는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친분을 쌓는다는 것 따위는 생각지도 않았고 하루하루 살아남았다는 것에 감사하고 절망했다.
'이게 맞는 거겠지.'
같은 이름으로 묶이고, 같은 공간에 선 사람들끼리 최선을 다해 부딪치고, 후회를 남기지 않는다면 이런 결과가 이루어져야만 했다.
반면 전생에서 조교들이 원한 건 인간이 아닌, 말 잘 듣는 개였다. 죽고 죽이는 훈련을 벌어졌으니, 서로 의심하고, 원망하는 결과가 나온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싸울 때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처럼 여유롭더니, 지금은 제 나이처럼 보이는군. 신기한 기질이야."
케인이 고기를 씹으며 웃었다. 놀린다기보다는 재밌어하는 얼굴이었다.
"그런가."
라온이 마주 웃었다. 물론 케인과는 다른 의미의 미소였다.
'난 정말 아는 게 없어.'
무력은 점점 강해지고 있고, 암살 기술과 경험은 머리에 그대로 남았지만, 인간적인 부분은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도 모자랐다. 스스로를 한심해하는 웃음이었다.
"후…."
천천히 숨을 내쉬며 창밖을 보았다. 지는 해가 아릿하게 눈을 짓눌렀다.
이런 상황이라서일까. 아니면 전생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말을 들어서일까.
옛 기억이 떠오른다.
라온이라는 암호명도 없었던 시절. 살아남기 위해서 단검을 꼬나쥐고, 발악했던 시절이 뇌리에 차올랐다.
실전 훈련에서 나를 죽이려고 달려들던 아이들. 복면을 써서 얼굴조차 모르는 아이들도 그곳에 잡혀가지 않았다면 이들과 같은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마음 맞는 친구들을 만나고, 즐겁게 웃고 떠들었을 거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렇게 죽어가는 것보다는 나은 삶을 살았을 거다. 안타까움에 손이 떨렸다.
'그래. 그 전부는….'
데루스 로베르트.
남쪽의 선왕이자, 천검성이라 불리는 그 망할 협잡꾼 때문이다. 오랜만에 놈에 대한 분노가 가슴에 차올랐다.
"라온?"
이를 바득 깨물 때 루난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확 정신이 들었다.
-쯧. 저 망할 꼬맹이가 방해를!
아쉽다는 듯 팔찌에서 라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무래도 이놈이 중간에서 감정을 살짝 자극했던 것 같다.
'하여튼 너란 놈은.'
-자, 잠깐! 그 좋은 분노를 왜 가라앉히는 거냐! 조금 더 끌어 올려라! 원수를 갚아야지 않느냐! 본왕….
'좀 가.'
-끄으윽! 이 놈….
라온이 라스를 팔찌 안으로 집어넣었다.
"후."
라스가 자극을 하긴 했지만, 이 감정은 진짜다. 데루스 로베르트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일 것이다.
"괜찮아."
"응."
뚱하게 쳐다보는 루난에게 옅게 웃어주자, 다시 과일을 먹기 시작했다. 먹는 것도 꼭 다람쥐 같다.
"라온 지그하르트."
어느새 닭 한 마리를 다 먹어 치운 케인이 테이블을 두드리며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제안이 있다."
"제안?"
"가끔 이렇게 연무장끼리 대련을 해보는 건 어때? 일대일도 좋고, 오늘 같은 전면전도 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컸는지 음식점이 조용해졌다. 떠들던 수련생들이 전부 이쪽을 보았다.
"음…."
쭉 아이들을 둘러보니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마르타는 하지 말라는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한 명의 의견이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괜찮을 것 같아."
"역시 시원하네!"
케인이 테이블을 탁치고 일어섰다.
"오오!"
"앞으로 재미있겠는데!"
"다음에는 절대 안 진다!"
"뭔 소리야 다음에도 무조건 이길 거야!"
수련생들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새로운 인연을 만난 것에 모두가 즐거워했다.
"이런 시발!"
딱 한 명. 마르타만 욕을 내뱉고 라온을 노려보았다.
라온은 그녀의 시선을 무시하고, 우측 끝을 보았다. 사실 케인의 제안을 결정할 가장 중요한 인물들은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니, 여기 식비가 내기에서 진 대가가 아니라고?"
"당연하지. 내가 한 번이라도 내기에서 졌으니 밥값 내라고 한 적 있냐? 그냥 내라고 했지."
"이미 돈도 줬잖아."
"그건 계약금이지."
리메르와 메툰은 오늘 수련생들의 활약이나, 반성점이 아니라 내기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그런 법이 어디에…."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 기본적으로 내기의 대가는 금화죠. 자자, 빨리 내놓으세요. 여기 밥값도 계산하시고."
리메르가 히죽 웃으며 손을 펼쳤다.
"너처럼 돈을 밝히는 엘프는 없을 거다."
"아, 그건 칭찬인데."
"크으, 화병나겠군."
메툰은 묵직한 금화 주머니로 리메르의 손을 내리찍었다.
"감사합니다. 호갱님. 아니, 고객님 다음에 또 이용해주십시오"
리메르는 돈을 챙기자마자 맥주잔을 들고 일어섰다.
"얘들아 오늘 수고했다. 내일은 쉬고, 모레 훈련장에서 보자!"
그는 손을 빙빙 돌리고 그대로 식당을 나갔다.
'어딜 가려고.'
라온이 코웃음을 치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혼자만 이득을 챙기게 놔둘 수는 없지.'
* * *
"라온에게 걸기만 하면 따는구만."
리메르가 경쾌한 발걸음으로 도박장을 향했다.
'라온이 복덩이야. 복덩이.'
수련생들이 일방적으로 밀려서 조금 불안했지만, 역시 기대한 대로였다.
라온이 움직이자마자 불리한 상황이 역전되고 완벽하게 승리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라온에게만 걸면 잃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100% 딸 수 있는 도박이라니, 금송아지구만 금송아지! 매일 했으면 좋겠네."
"세상에 그런 도박은 없습니다."
"억?"
뒤에서 들려온 낭랑한 목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라온이 서늘한 눈빛으로 손에 든 금화 주머니를 보고 있었다.
"라, 라온? 왜 여기 있냐? 가서 더 먹지…."
"저희한테 걸어서 많이 좀 따셨나 봅니다."
"어어…."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죠?"
"윽."
둘 다 맞는 말이다. 라온 덕분에 많은 이득을 보긴 했다. 아니, 좀 많이.
"반."
라온이 손가락을 들어 금화 주머니를 가리켰다.
"반?"
"저희 때문에 땄으니, 딴 돈의 반은 저희를 위해 써 주십시오."
"바, 반이라니! 너무 많잖아!"
"어차피 내일이면 반이 아니라, 먼지만 남을 거 아닙니까."
"3배로 딸 수도 있다고!"
"도박장에 가셔서 따신 걸 못 봤습니다만."
녀석이 코웃음을 쳤다. 분했지만, 저 말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끗발이 바짝 선 느낌이다.
"이번엔 느낌이 좋아. 10배로 따서 그중 절반을…."
"됐습니다. 저희는 반이면 충분합니다."
"싫어! 전부 내가…."
"그러면 앞으로 저도 협조 못 합니다."
"뭐?"
"교관님이 도박을 어디에 거실지는 뻔하니, 일부러 질 수도 있다구요."
"네가 그런 짓을 할 리가…음."
리메르가 침음성을 삼켰다. 라온의 저 가라앉은 눈빛은 진심이라는 뜻이었다.
'너, 너무 했나.'
그러고 보니 버렌과 마르타와 대련할 때도 따기만 하고, 너무 입을 싹 닦았던 것 같다.
"제게 달라는 게 아니라, 수련생들을 위한 물건을 사자는 겁니다."
"에휴, 그래. 뭔데. 뭐가 필요하냐."
"오늘 6 연무장 수련생들과 싸우는 모습을 보며 느낀 게 있습니다."
라온이 처음으로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수련생들에게 필요한 건…."
* * *
이틀 뒤.
"어? 이게 뭐야?"
"인형?"
"이거 검술 연습용 인형이잖아"
수련생들은 연무장 좌측에 설치된 인형들을 보고 두 눈을 빛냈다.
"검술 연습용 인형?"
"그래. 인형에 검을 내리치면 그 이상의 힘으로 반탄력이 돌아오거든. 실전 연습용으로 굉장히 좋대."
"진짜? 근데 이게 왜 갑자기 생겼지?"
수련생들은 인형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교관님이 사오셨다."
"어?"
"진짜?"
라온의 말에 수련생들이 놀란 눈으로 단상 위에 엎어져 있는 리메르를 보았다.
"이번 실전에서 느꼈겠지만, 상대와 검을 부딪치다 보면 반탄력 때문에 검을 놓치거나 손목에 부상을 입기 쉽지. 그 대응책으로 사셨을 거다."
"헉!"
"저 도박쟁이가…."
"그럼 그저께 딴 돈으로?"
"교관님…."
수련생들이 감동을 받은 눈빛으로 리메르에게 다가갔다.
"음…."
리메르를 대놓고 싫어하는 버렌조차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그래. 열심히 쓰렴."
리메르는 손을 흔들며 힘없이 웃었다.
'더럽게 비싸네.'
저 인형 생각보다 비쌌다. 몇 개 사고나니 금화가 반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남은 금화는 홧김에 질렀다가 모조리 날려버렸다. 라온의 말대로 정말 빈털터리가 되었다.
다만 인형을 치며 즐거워하는 수련생들을 보는 리메르의 입가에는 얇은 웃음이 그려져 있었다.
67화
책장과 책상 그리고 탁자까지. 온통 검은색 원목 가구로 가득 찬 고풍스러운 방에서 사각거리는 필기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근원은 책상이었다.
설원처럼 반짝이는 은발이 흘러내리는 미중년이 백지만 가득한 책에 뭔지 모를 문양을 그려 넣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가 적은 문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져서 책은 계속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중년인이 잠시도 멈추지 않고, 문양을 새겨넣을 때였다.
툭.
그의 오른손등에 벌어져 있는 상처에서 핏방울 떨어져 책을 적셨다.
중년인의 손이 처음으로 멈췄고. 그의 시선이 백지를 빨갛게 물들이고 있는 혈흔을 향했다.
쯧.
은발의 중년인이자, 남방의 지배자. 천검성 데루스 로베르트가 짧게 혀를 찼다.
'아직도 아물지 않다니.'
17년 전 라온이라는 사냥개를 죽였을 때 벌어진 손등의 상처는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질 좋은 영약을 먹고, 명성 있는 회복사나 신관을 불러봤지만, 누구도 이 검흔을 지우지 못했다.
'그렇다고 벌어지지도 않지만.'
상처는 아물지도, 벌어지지도 않았다.
꼭 기억하고 있으라는 것처럼 처음 모습 그대로 유지만 되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죽은 망령을 기억이라도 해달라는 건가."
데루스 로베르트가 피식 웃으며 손등의 상처를 매만졌다. 배어 나오던 피가 천천히 멎기 시작했다.
"미안하지만 난 돌아보지 않는다.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그는 다시 만년필을 들고, 책에 문양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중천에 뜬 태양이 지고, 다시 새로운 태양이 떠오를 때까지. 데루스는 책상에 앉아 끊임없이 문양을 새겼다.
데루스가 마침내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자, 흑룡이 그려진 책 표지가 보였다. 꼭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되었군."
데루스 로베르트가 완성된 책을 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대계도 얼마 남지 않았어.'
그가 책에 손을 올리자, 표지에 그려진 흑룡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 * *
새해가 밝았다.
15살이 되어 미려하다는 단어가 그대로 외형으로 녹아내린 것 같은 라온이 숯가마가 있던 자리에 눈을 감고 앉아있었다.
그의 어깨 위로 붉은 아지랑이가 끝없이 피어올랐고, 모공에서는 서늘한 한기가 뿜어졌다.
냉기와 열기가 교차하며 숯가마의 주변은 안개 같은 뿌연 연기가 가득했다.
라온은 그런 신비한 상황을 모르는지 떠오른 태양이 서산으로 내려갈 때까지 눈을 뜨지 않았다.
석상이라도 된 듯 움직이지 않던 라온의 변화는 달이 떠오를 때가 되어서야 시작되었다.
어깨 위로 피어나던 붉은 아지랑이가 뻘건 불꽃이 되었고, 모공에서 흘러나오던 김이 냉기가 되었다.
빠직!
화염과 냉기가 경합하며 스파크가 튀긴 순간.
라온이 두 눈을 떴다. 벼락이 떨어진 듯한 붉은 눈동자가 밤의 어둠을 꿰뚫었다.
꾸욱.
그는 주먹을 말아쥔 채 들뜬 숨을 흘려냈다.
"드디어."
꽉 잠긴 목소리 위로 반투명한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혹한의 저주 한 가닥이 사라졌습니다.]
[만화공이 3성에 올랐습니다.]
[혹한의 냉기가 3성에 올랐습니다.]
[설화의 감각이 3성에 올랐습니다.]
[화속성 저항력이 3성에 올랐습니다.]
[소드 익스퍼트 - 초입의 단계에 오르셨습니다.]
[오러 운용 속도가 빨라집니다.]
[모든 능력치가 크게 상승합니다.]
[검술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보법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쭈르륵 떠오르는 메시지.
"드디어 익스퍼트인가."
라온은 메시지를 확인하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도 수련을 계속한 덕분에 새해가 된 지 한 달 만에 익스퍼트의 단계에 올랐다.
하급도 아닌 초입이지만, 성취의 기쁨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익스퍼트? 소드 마스터도 하찮은 벌레일 뿐이건만, 고작 익스퍼트가 되었다고 좋아하는 게냐?
라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콧방귀를 끼었다.
"15살에 익스퍼트가 된 건 드문 일이니까."
익스퍼트가 뛰어난 경지임은 분명하지만, 대륙 전체로 보았을 때는 강자라 불리기 힘들다.
하지만 그게 15살의 아이라면 일반적인 가문이나, 왕국만이 아니라. 육황이나 오마에서도 경악할 만한 성취였다.
-나이? 누가 전장에서 나이를 따지는 건 멍청이들 뿐이니라. 나이와 상관없이 약자는 약자일 뿐이다.
"그 말도 맞긴 하지. 전장에서 나이가 어리다고 봐주는 멍청이는 없으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픽 웃었다.
"하지만 익스퍼트가 되었다고 멈춰 있을 생각은 없어."
라온은 이죽거리는 라스를 밀어내고 일어섰다.
'가벼워.'
항상 전신을 꽉 조이고 있는 듯한 냉기의 족쇄가 또 한 가닥 풀린 덕분일까. 몸이 나뭇잎처럼 가볍고, 활력이 넘쳤다.
"상태창."
라온은 몸을 가볍게 움직여본 뒤 상태창을 불러왔다.
<상태창>
이름 : 라온 지그하르트.
칭호 : 최초의 승리.
상태 : 혹한의 저주(다섯 가닥)
특성 : 분노, 불의 고리(4성), 수속성 저항력(4성), 설화의 감각(3성) 만화공(3성), 혹한의 냉기(3성), 화속성 저항력(3성). 블리딩 커스(1성).
근력 : 55
민첩성 : 56
체력 : 57
기력 : 40
감각 : 62
상태창을 보자마자 입가가 절로 올라갔다. 만화공과 혹한의 냉기, 화속성 저항력의 단계가 올라갔고, 능력치도 크게 상승했다.
이런 단순한 수치만이 아니라, 마나 회로가 늘어나서 한 번에 운용할 수 있는 오러의 양과 운용 속도도 빨라졌다.
'익스퍼트 초입이지만, 하급 정도는 되겠지.'
보여지는 등급이나, 수치보다 뛰어난 무력을 갖췄다는 생각에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한심하도다. 본왕의 손가락 하나. 아니, 손톱조차 버티지 못할 무력이다.
"그렇긴 하지."
라온이 빙긋 웃었다.
-그런데 왜 웃는 것이냐.
"예전 같으면 손톱이라는 말도 꺼내지 않았을 테니까. 네가 나름 성장했다고 인정해준 거 아니야?"
-본왕이 인간 따위를 인정하겠느냐!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거 보니까 맞네. 너랑 오래 같이 있다 보니, 네 생각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거든."
-본왕을 뚫어보려는 인간이라니, 뼈를 씹어먹어도 부족하다!
라스의 냉기가 해일처럼 솟구쳤다.
화아아아!
라온은 3성에 오른 만화공을 일으켜 라스의 냉기를 모조리 녹여버렸다.
"그게 다야? 너 빨리 힘을 회복하지 못하면 조만간 나한테 먹히겠는데?"
-흥! 헛소리를 듣고 있으니, 옛 생각이 나는군.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성에 찾아와 시비를 거는 마족들이 있었….
"아, 난 몸이나 풀러 가야겠다."
-어딜 가느냐! 본왕의 말을 들어라!
* * *
"훈련 끝."
"수고하셨습니다."
리메르의 간결한 목소리에 라온이 탁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수련생들은 라온을 따라 감사 인사를 외쳤다.
"오냐."
리메르는 히죽 웃으며 손을 휘적였다. 귀찮아서 대충 대답하는 것 같지만, 그 나름의 인사였다.
'이젠 모두 익숙해진 모양이군.'
라온은 리메르와 교관들 그리고 수련생들을 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3년이 넘는 시간을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보내며 모두는 상당히 가까워져 있었다.
제일 까탈스러웠던 버렌이나 마르타도 이제 리메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조금 너그러워졌다.
"교관님. 오늘 20분 지각하셨으니, 훈련 20분 추가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물론 지각에 관해서는 여전히 타협이 없었다.
"그건 내일 보충하자. 오늘은 충분해."
리메르는 어색하게 웃으며 단상에서 내려갔다. 뒷걸음질을 치는 모양새를 보니, 대충 말을 흘리다가 도망칠 게 분명했다.
"당번은 연무장 정리를 시작하도록."
라온은 여전하다고 중얼거리며 뒤를 돌아 정리를 지시했다.
"알겠습니다!"
당번인 도리안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청소도구가 있는 구석으로 달려갔다.
"허억!"
그는 도구함을 열다 말고 옆에 선 사람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뭐야? 내가 당번인 게 꼬와?"
검은 머리칼이 다시 어깨를 적시는 마르타가 눈썹을 내렸다.
"아, 아뇨. 절대! 영광입니다…."
"쯧."
그녀는 혀를 한 번 차 주고서 연무장을 다지는 기구를 들고 도리안보다 먼저 당번 일을 시작했다.
예전의 마르타라면 잡일을 방계나 추천생들에게 떠넘기고 직계 수련에 갔겠지만, 라온의 지시 때문에 당번 일에서 도망치지 못했다.
"다들 구경났어? 정리해야 하니까 다른 곳으로 꺼져!"
"으허헉!"
"어억!"
마르타가 쿵하고 발을 굴렀다. 강력한 진동. 멍하니 그녀를 보고 있던 수련생들이 황급히 출구로 달려갔다.
"히이익!"
그녀의 옆에 있던 도리안은 깜짝 놀라 주저앉았다.
"여전하구만, 성격이 바뀐 건 너한테만인가 보다."
라온은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리메르가 실실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버렌의 잔소리에 도망가신 거 아닙니까?"
"아, 까먹은 게 있어서 다시 왔어."
"까먹…."
"모두 주목!"
리메르가 손뼉을 치자, 마르타의 윽박에 도망치던 수련생들이 모두 멈춰 섰다.
"할 말이 있다."
수련생들이 다가오자, 리메르는 다시 단상 위로 올라갔다.
"내가 엄청 중요한 일을 까먹었거든."
그는 민망한 미소를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또 뭡니까."
"아, 너희들에게 두 번째 임무가 내려왔다."
순간 연무장 전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임무!"
"그걸 까먹어?"
"저 인간은 정말…."
설마 임무를 까먹을 줄은 몰랐기 때문에 수련생들이 이를 갈았다.
"임무라…."
라온이 눈을 내리감았다.
'생각보다 길었군.'
첫 번째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쳐서 금방 두 번째 임무가 올 거라 생각했는데, 반년 이상이 지났다.
수련생에게 임무는 그렇게 자주 있는 기회가 아닌 것 같다.
'지그하르트가 아이들을 생각보다 여리게 키우든지 아니면 임무가 굉장히 어렵던지.'
둘 중 하나. 개인적으로는 후자이길 바랐다. 그게 더 큰 성장을 할 수 있는 기회일 테니까.
"지그하르트 남동쪽에 있는 세부 마을 근처에서 오크들이 나타난다고 하더군."
리메르는 텅 빈 허공에서 손짓으로 세부 마을을 가리켰다. 지도를 가져오지 않는 걸 보니, 귀찮은 게 뻔했다.
"세부 마을에 가서 사람들을 위협하는 오크와 몬스터들을 처치하고, 마을을 지키는 게 너희들의 임무다. 즉, 마을의 보호와 몬스터 토벌이지."
"오크!"
"몬스터 토벌이다!"
몬스터 토벌은 호위나, 던전 탐사와 비교하면 가장 쉬우면서도 시원한 임무다. 첫 임무였던 산적 토벌보다 더 쉬웠기 때문에 수련생들은 환호를 질렀다.
"임무를 좋아하다니, 어리구만."
리메르는 끌끌 혀를 차고서 말을 이었다.
"첫 임무와 달리 교관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세부 마을에 가는 건 너희들뿐이라는 거지. 임무의 시작과 끝 모두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거야."
"질문이 있습니다."
버렌이 손을 쭉 올렸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셨기에 저희만 가는 임무를 까먹고 이제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음, 그건 질문이 아니라, 질책이잖냐."
리메르가 찔끔 땀을 흘렸다.
"후우!"
버렌은 나무껍질처럼 인상을 꾸기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진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저희끼리만 움직인다고 하셨는데, 만약 극복할 수 없는 위기가 찾아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겁니까."
"그걸 파악하는 것도 너희들의 능력이다. 무리한 임무라면 포기하고 돌아오는 것도 실력이지. 그렇기에…."
리메르의 시선이 수련생을 쭉 훑다가 라온에게서 멈췄다.
"이번에도 리더의 능력이 중요하다. 위기 상황에서 무력으로 돌파해야 할지, 계략을 써야 할지 혹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야 할지. 그걸 읽어야 한다."
모두의 시선이 리메르의 녹색 눈동자를 따라갔다.
"이, 임무에서 도망을 치면 문제가 되지 않나요?"
이번에는 도리안이 손을 들어 올렸다.
"상황에 따라 다르다. 고블린을 마주하고 도망치면 감점에 망신당하는 거고, 오마 중 한 세력과 마주하고 물러났으면 칭찬을 받아 마땅하지."
"오오!"
도망쳐도 된다는 소리에 도리안이 탄성을 터트렸다. 녀석의 겁쟁이 기질은 해가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이해했습니다."
버렌은 마지막으로 라온을 바라보았다. 낮게 빛나는 눈. 인정과 조그마한 부러움을 간직한 표정이었다.
"출발은 모레 새벽. 오늘이랑 내일 훈련은 쉬고, 출발 준비를 단단히 하도록."
"자, 자, 잠깐! 이틀 뒤요?"
도리안의 눈동자가 메뚜기처럼 좌우로 뛰었다.
"응. 이틀 뒤."
"왜 이렇게 촉박해! 너무 빠르잖아요! 오늘 다 갔으니, 하루밖에 안 남았네!"
"몬스터 토벌은 호위나, 던전 탐사에 비해 한시가 급한 임무지. 너희가 늦으면 세부 마을에 사상자가 나올 거다."
"그럼 진작 좀 말하던가!"
버렌이 다시 폭발해서 발을 굴렀다.
"으음…."
"모레라니…."
"그만."
라온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연무장의 중심을 꿰뚫었다.
"교관님이 예전부터 말했잖아. 임무는 언제 어떻게 내려올지 몰라. 지금은 당황하고 따질 때가 아니라, 임무 준비를 할 때다. 너희가 따질수록 교관들의 의도에 넘어가는 거다."
"으음…."
"그건 맞지."
"그래. 일단 움직이자."
버렌과 함께 열을 올리던 수련생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리메르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언젠가 저 귀 뽑는다."
마르타는 라스와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이를 갈았다.
루난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멍하니 서 있었다. 집에 돌아가서 먹을 아이스크림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야생의 오크는 실전 훈련 때 상대했던 오크보다 사납고, 체력이 강해. 숫자도 많아서 일대다수의 싸움이 되겠지. 보법을 익힌 우리라면 방어보다는 회피 위주로 싸우는 게 유리해. 장비를 최대한 가볍게 하고 모레 새벽에 이곳으로 모이도록."
라온은 그렇게 말하고서 몸을 돌렸다.
"응."
"쯧…."
루난은 어린 새처럼 고개를 끄덕였고, 마르타는 혀를 차고 연무장을 떠났다.
"알겠습니다!"
라온을 따르는 수련생들은 우렁차게 대답하고 기숙사로 뛰어갔다.
"음…."
버렌은 잠시 교관들을 노려보았지만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몸을 돌렸다. 방계들은 그 뒤를 따라 본관으로 향했다.
"이젠 누가 봐도 리더처럼 보이는군."
리메르는 팔짱을 낀 채로 씩 웃었다. 시선에 담긴 건 당연히 라온의 뒷모습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 아이가 저렇게 변할 줄은 몰랐어요."
"최하위에서부터 올라와서 그런지 생각도 열려 있습니다."
"제가 많은 아이를 봐왔지만, 지위나 재능이 아니라, 노력으로 아이들을 따르게 만든 수석은 처음입니다."
교관들은 리메르의 옆으로 다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모두 라온을 인정하고 있었다.
"음, 저도 준비해야겠네요. 아이들보다 먼저 출발해야 하니까."
막내 교관이 떠나는 아이들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예전에는 정말 수련생들만 임무를 보냈지만, 글렌이 마를 벗어난 이후로 교관들이 몰래 따라가는 게 최근 두 번째 임무의 규칙이었다.
"아니."
리메르가 막내 교관의 어깨를 툭 치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간다."
"예?"
"에엑?"
"저, 정말이십니까?"
교관들이 눈을 부릅떴다. 교육도 귀찮아하는 인간이 임무에 따라간다고 하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
"저기 수석 교관님. 늦잠 주무시다가 아이들이 위험할 때 못 가면…."
"아잇! 날 뭘로 보고! 나 못 믿어?"
리메르가 홱 손을 내리쳤지만, 교관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훈련기간 동안 그가 지각하지 않은 적은 다섯 번도 되지 않았으니까.
"어쨌든 내가 갈 테니까. 다들 푹 쉬고 있어."
리메르는 그 말을 남기고 등을 돌렸다. 연무장을 나가는 그에게서 한동안 푹 자야지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고 싶으면 여기서 주무시지. 왜 임무를 따라간다고…."
"여기 있으면 가주님이나, 다른 대주들이 방해하니까 나가는 거겠지."
"하…."
교관들은 리메르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헛바람을 내뱉었다.
"정말 대단한 게으름뱅이야."
라온은 이틀 뒤가 임무 시작임에도 밤 훈련까지 끝내고 숙소로 돌아왔다.
방 앞에는 경량화 마법이 걸린 배낭이 있었다. 임무에 가져가라고 준비한 가방 같았다.
'신경 쓰지 않겠다는 티를 팍팍 내는군.'
이런 가방은 원래 직접 주는 게 이렇게 방 앞에 놔둔 걸 보면 관심 없으니,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 * *
"좋지."
라온이 피식 웃으며 가방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교관들이 오든 말든 상관없다. 어떤 임무라도 완벽하게 끝내고 돌아오면 그만이다.
-건방진 녀석. 세상일이 전부 다 네 마음대로 흘러간다고 생각하느냐. 생각지도 못한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뭐, 그렇지."
고개를 끄덕였다. 라스의 말대로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다만 웬만한 일은 자신의 손으로 해결할 수 있으니, 그리 와닿지 않았다.
'네가 나한테 당한 것처럼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는 거지.'
-정말이지 그 주둥이를 찢고 싶구나.
'불가능한 일이지.'
라온은 픽 웃으며 짐을 싸기 시작했다. 가벼운 가방까지 받았으니, 짐을 꾸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똑똑.
한참 짐을 싸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다들 출발 준비로 바쁠 시간이라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헉!"
라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벌렸다. 유일하게 그를 당황 시킬 수 있는 두 사람. 실비아와 헬렌이 붉어진 얼굴로 서 있었다.
"라온! 임무에 나가는 거면 별관으로 와서 엄마한테 말은 해줘야지!"
"어떻게 그걸. 설마 이번에도 도리안이?"
"리메르 님이 알려주셨어!"
실비아가 허리춤에 손을 떡 올리고 인상을 찡그렸다.
'그 엘프. 진짜….'
속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실비아나, 헬렌이 걱정할까 봐 일부러 숙소로 온 건데, 직접 찾아가서 말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미안해,"
안 들켰다면 모를까 이미 들켰으면 변명할 필요 없었다. 별관에 갈 시간은 있었지만, 교관 없이 임무에 나간다고 말하면 불편한 상황이 올까 봐 피한 건 사실이었다.
"...."
실비아는 말없이 입을 삐죽이고, 콧등을 찡그렸다. 한동안 잔소리가 퍼부어질 것 같아서 눈을 감으려 할 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온."
"으응?"
"수석은 그저 인사만 하는 자리가 아니라, 수련생들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야만 하는 자리야."
실비아의 눈동자는 평소와 다르게 진중한 빛으로 반짝였다.
"너 혼자만이 아니라, 수련생 모두를 생각하고 움직여야 해. 네 선택에 아이들의 목숨이 달렸으니까."
"어. 응."
라온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말이 나올 줄은….'
혼나고 잔소리를 들을 줄 알았지만, 저런 조언을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몬스터 토벌은 쉬워 보이면서도 어려운 임무야. 마을 사람들은 계속 고생하지 않게 확실하게 뿌리 뽑고 와."
실비아의 말이 맞다. 몬스터들의 번식은 굉장히 빠르기에 한 번 처리할 때 확실하게 끝내야 한다.
"임무에 나간 이상 넌 수련생이 아니라, 지그하르트의 검사라는 걸 항상 마음에 품고 있으렴."
그녀가 자세를 낮춰서 눈을 마주쳤다. 별빛처럼 일렁이는 눈망울이다.
"엄마가 말했지? 예전 지그하르트는 명예와 부끄러움을 알고, 약자를 위해 강자에게 검을 드는 사람이었다고. 엄마는 라온이 그 옛날의 지그하르트 다운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어."
실비아가 라온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웃었다.
"화난 거 아니었어?"
"화났어! 걱정도 되고! 아주 답답해! 그렇지만!"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다시 입술을 삐죽인다.
"지금은 널 혼낼 때가 아니니까. 나중에 돌아오면 잔소리들을 각오하고 있어."
"응."
라온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비아 역시 검사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지금이 혼낼 때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네가 수련을 시작하면서 밝아진 건 기쁘지만, 항상 걱정을 놓을 수가 없다니까."
실비아가 라온을 꼭 끌어 안아주었다. 떨리는 손끝에서 그녀의 걱정이 가득 묻어나왔다.
그녀는 몇 가지 조언을 더 해준 뒤 돌아갔다. 각오한 만큼 시간을 뺏지도 않았고, 혼을 내지도 않았다.
아들을 걱정하면서도, 검사로서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그녀의 목소리가, 그녀의 말이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라온은 짐을 챙기다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를 부러워하듯 달빛이 방에 스며들어있었다.
68화
이틀 뒤 새벽.
리메르는 해가 뜨지도 않은 연무장 단상 위에 섰다.
수련생들은 긴장과 기대감이 어우러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말한다. 가문 밖에서는 그 어떠한 일도 일어날 수 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해라. 버겁다 싶으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물러나도록."
"예!"
그의 시선은 수련생들의 가장 앞에 선 라온을 향했다. 라온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출발해라. 원래라면 한 달이 걸리겠지만, 대관로를 열었으니, 2주일이면 도착할 수 있을 거다. 무운을 빈다."
"감사합니다."
리메르는 평소 훈련을 할 때처럼 손뼉을 쳤다. 수련생들은 그와 교관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4열 종대로 정렬. 아침에 정해준 전우조대로 움직인다."
라온의 지시에 수련생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허."
리메르는 그 모습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전우조를 만들었다고?'
아무리 수석이라고 해도 고작 10대 소년이다. 교관 없이 임무에 나가는 긴장감을 가질 때에 전우조를 계획했다니, 그 침착함이 놀라웠다.
'항상 놀라게 하는 녀석이라니까.'
라온을 보고 있으면 지루할 틈이 없었다. 매번 기대감이 생기는 녀석이다.
'가장 놀라웠던 건 구화단이었지.'
예전에 마르타를 이긴 대가로 얻은 구화단을 먹은 라온을 봤을 때 너무 놀라서 입이 저절로 벌어졌었다.
'그걸 전부 흡수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으니까.'
영약을 먹으면 필연적으로 낭비되는 기운이 있다.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그 손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게 영약을 먹는 법인데, 라온은 홀로 영약의 모든 기운을 받아들였다. 여러모로 괴물 같은 녀석이다.
'잘 할 수 있겠지.'
라온은 무력과 오러만이 아니라, 감각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6연무장과의 대결에서 그걸 증명했으니, 어렵지 않게 임무를 끝내고 돌아올 것이다.
"준비 끝났습니다."
라온은 정렬을 마친 뒤 리메르에게 다가왔다. 잔잔하게 가라앉은 눈. 기대감도 긴장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15살짜리라니….'
리메르는 팔에 닭살이 오르는 걸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출진해라."
"출진."
그는 낮게 대답한 뒤 수련생들을 이끌고 연무장을 떠났다.
"...."
리메르는 3년간 키운 수련생들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수련생들이 모두 사라진 뒤 그에게 교관들이 다가왔다.
"수석 교관님. 이제 따라가야 하지 않습니까?"
"아니."
리메르가 고개를 저었다. 깍지 낀 손으로 뒤통수를 잡으며 하품을 했다.
"감각이 귀신 같은 놈이 있거든. 한숨 자고 갈란다."
그는 그대로 수석 교관 사무실로 걸어갔다.
"허…."
"괘, 괜찮나?"
"지금이라도 우리가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뒤에서 교관들의 걱정 어린 소리가 들렸지만 리메르는 모른 척 웃었다.
'쟤들 걱정하느니, 오크 걱정을 하지.'
* * *
라온은 선두로 걸어가며 뒤를 돌아보았다. 42명의 수련생들은 4열로 움직이고 있지만, 파벌은 셋으로 나뉘어 있다.
첫 번째는 버렌 지그하르트를 축으로 하는 방계 파벌. 방계들은 버렌을 주인처럼 따르고 있었다.
두 번째는 방계와 대립하는 봉신 가문 파벌이다. 다만 그곳의 중심이 되어야 할 루난은 자신의 옆에 떡 붙어 있어서 이들의 위치는 조금 애매해졌다.
세 번째는 평민 출신 추천생들이다. 임시 수련생 때 도움을 받은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을 따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예외적인 존재 마르타.
라온은 수련생들의 얼굴을 쭉 살핀 후 눈을 내리감았다.
사실 저들이 뭘 하든,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여겼었다.
수련생 신분이고, 지그하르트에 속해 있지만, 자신은 이곳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실비아만 직계의 위에 올려놓고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오웬왕국과의 대련, 첫 번째 임무 그리고 6연무장과 전투를 치르며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조금 알게 되었다.
저들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함께 보낸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조금이지만 정이 들었다.
'엄마의 말도 마음에 걸리고.'
수석으로서 옛 지그하르트 검사다운 모습을 보여달라는 실비아의 음성은 아직도 가슴에 박혀 있었다.
'어렵군.'
암살자로 살아왔기 때문일까. 적을 죽이고, 무너뜨리는 것보다 아군을 챙기는 게 더 어려웠다.
"여기서 잠시 휴식한다."
라온은 성인 다섯 명이 양팔을 뻗어도 안을 수 없는 거대한 나무 앞에서 멈춰 섰다. 수련생들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할 말이 있다."
수련생들이 물을 꺼내 마시고 숨을 돌릴 때 그들의 앞에 섰다.
"날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지금은 내가 너희들의 수석이다."
사실을 말하는 담담한 목소리에 누군가는 주먹을 말아쥐었고,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으며, 누군가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몬스터 토벌이라는 임무를 듣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거나, 소풍 가는 듯 들뜬 마음으로 나온 녀석도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마음은 자유지만, 그렇게 노는 기분으로 갔다간 너 혹은 네 뒤의 동료가 희생자가 될 거다."
"으음…."
정말 그렇게 생각했던 수련생들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수석 교관님의 말처럼 임무 중엔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내 지시를 따르도록."
"응."
"예!"
루난과 추천생들이 크게 대답했고, 마르타와 봉신 가문 수련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
방계 수련생들은 버렌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있었다.
"물론이다."
버렌은 본인의 머리에 물을 끼얹으며 일어섰다.
"6연무장과 대련이 끝날 때도 말했지만, 난 널 수석으로 인정했다. 합당한 지시라면 죽을 곳이라도 달려들겠다. 하지만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라면 난 네 지시에 따르지 않겠다."
"네가 생각하는 지그하르트의 다운 건 뭐지?"
"검사로서 명예를 아는 것이다. 약자를 돕고, 강자의 앞에서 당당하며, 단련에 힘써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
라온은 말없이 버렌의 눈을 바라보았다.
"알고 있다. 내가 널 질투해서 시비를 걸고, 판정에 불복해서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건 잊지 않았다. 그걸 알고 있기에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거다. 앞으로는 절대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
버렌이 꽉 쥔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진하게 타오르는 녹색 눈동자. 의지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정말 많이 변했어.'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스스로의 잘못을 밝히고 다짐까지 내뱉는다. 15살 아이가 보일 법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알겠다."
라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변한 버렌이라면 믿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마시던 물을 가방에 집에 넣고 몸을 돌렸다.
"다시 출발한다."
* * *
버렌은 눈길을 가르며 나아가는 라온을 보았다. 작은 등. 나름 건강을 회복했는지 나이에 맞게 보이지만, 자신을 포함한 다른 수련생들에 비하면 아직 작은 덩치였다.
'그런데….'
그 그릇의 크기는 다른 수련생들과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이동하면서 계속 그를 관찰하며 뼈저리게 깨달았다. 녀석이 수련 중에 보여준 인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라온은 지치지 않는다. 아니, 지칠지언정 절대 티를 내지 않았다.
수련생들이 추위와 피로에 허우적댔지만, 그는 항상 평온했고, 여유로웠다. 덕분에 그의 뒤에 있는 수련생들의 긴장이 풀려 체력 소모가 훨씬 적어졌다.
'만약 저 녀석 혼자 출발했다면 한참 전에 도착했을지도….'
결코 헛된 생각이 아니다.
라온은 수석이면서도 항상 불침번을 섰다. 유일하게 졸지 않은 것도 저 녀석뿐이었다.
'무력도 더 강해졌겠지.'
2살이나 많은 직계인 케인을 꺾은 게 반년 전이니, 지금은 더 발전했을 거다. 아마 소드 유저 상급이나 혹은 최상급까지 갔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점점 더 이길 수 없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아.'
아직 라온 정도로 노력하지 않았고, 라이벌을 두고 포기하는 건 지그하르트다운 모습이 아니다.
꾸욱!
버렌이 진검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라온 덕분에 제정신을 차렸다. 그 보답을 하기 위해서라도 녀석을 따라잡을 것이다.
'기다려라. 라온 지그하르트.'
* * *
공작의 깃털이 흩날리는 듯 형형색색의 지붕들이 단아하게 어우러졌다. 세부 마을의 자랑 무지개 고리 지붕이다.
2주 만에 세부 마을 근처에 도착한 라온과 수련생들은 언덕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기 보이는군."
"드디어…."
"어휴, 이제 안에서 잘 수 있겠다."
노숙에 지친 수련생들이 어깨와 허리를 두드리며 미소 지었다.
"세부 마을…."
처음 와보는 곳이지만, 임무 때문에 조금 조사해봤다. 특산물이나 관광지 없이 소수의 사람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작은 마을이었다.
몇 년에 한 번씩 몬스터들이 내려오는 경우가 있어서 딱히 특별한 임무까진 아니었다. 실제로도 마을 주변에는 몬스터를 막기 위해 나무로 만든 목책이 설치되어 있었다.
"내려간다."
라온은 마을과 마을을 둘러싼 산지를 전체적으로 둘러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예!"
수련생들은 짐을 꽉 조여 맨 뒤 라온을 따라 하산했다.
'음?'
라온이 눈매를 초승달처럼 좁히며 머리를 살짝 숙였다.
'뭐지?'
등 뒤로 오싹한 감각이 흘러내렸다. 암살자 교육을 받을 때 매일 같이 느꼈던 감각. 인간의 시선이었다.
'교관? 아니야.'
이미 이쪽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관찰하는 교관의 시선과는 달랐다. 모든 것을 낱낱이 훑는 섬뜩한 감각이다.
'아무도 모르는군.'
수련생들은 몬스터와 싸운다는 긴장감으로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버렌이나, 마르타, 루난 역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표정이었다.
'당연한가.'
자신조차 암살자로 살아온 세월이 아니었다면 느끼지 못할 정도로 미약한 감각이다. 수련생들이 알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고개를 숙인 채로 눈동자를 굴렸다. 아직 오러도, 감각도 미약해서 위치가 잡히지 않았다.
'좋지 않군.'
이게 가문의 시험인지 혹은 다른 위기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선 자신을 감추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라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산을 내려갔다. 일부러 걸음을 천천히 조절하고 있을 때 목을 훑는 듯한 감각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보고를 위해 본거지로 도망가는 것 같았다. 지금이 기회였다.
우우웅.
오러로 얇은 막을 만들어서 소리가 새어 나가는 걸 막은 뒤 뒤를 돌았다.
"버렌."
"뭐지?"
버렌은 덤덤한 표정 아래 긴장을 숨긴 채 고개를 들었다.
"이번 임무. 네가 수석이 되어 지시를 내려라."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
"첫 임무 때는 나와 루난만 움직였으니까. 이번에는 너희들이 주가 되어 활약해 봐. 네가 얼마 전에 했던 말을 증명해봐라."
"했던 말이라면…."
"지그하르트 검사다운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말."
"음…."
버렌이 입술을 깨물었다. 찌푸린 인상을 보니, 자신의 말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수련생들은 조용히 걷고 있지만, 귀와 시선은 모두 라온과 버렌을 향해 있었다.
"좋다."
버렌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에 망설임이 사라졌다.
"내가 변했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주지. 가자!"
"예!"
그는 우렁한 외침과 함께 걸음을 빨리했다. 버렌을 따르는 방계들의 발걸음에도 힘이 넘쳤다.
"너희들도 들었지."
"알겠습니다."
평소 자신을 따르던 수련생들은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루난."
"응."
루난은 바로 알아듣고 그녀를 따르는 봉신 가문의 수련생들을 쳐다보았다.
"음…."
"알겠습니다."
봉신 가문은 버렌에게 힘이 실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인상을 찡그렸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타. 이유는 나중에 말해줄 테니, 일단은 버렌을 수석으로 여겨줘."
마지막으로 바로 옆에 있는 마르타를 보았다. 그녀는 차가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런 말 할 필요 없어. 난 이미 네 지시를 따른다고 말했으니까. 넌 그걸 결과로 보여주면 그만이다."
마르타는 그 말을 남기고 버렌을 향해 걸어갔다.
-어린놈들이 조금은 변해가는 건가?
라스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낮은 음성을 흘렸다.
-건방진 것들!
역시 모든 것에 분노하는 인성 파탄자다웠다.
'너 근처에서 관찰하는 놈 느끼고 있지?'
-그걸 알아차렸나? 하긴 본왕의 특성을 가져갔으니, 모른다면 혀 깨물고 죽어야겠지.
'어디에 있고? 몇 명이나 있지?'
-본왕이 그놈의 위치를 알려줄 듯싶으냐.
'한 명이로군.'
-어?
'넌 거짓말을 못 하는 성격이니, 놈이라고 했으면 한 명이지.'
-이, 이 자식이….
라스는 분노에 차올라 바들바들 떨었다.
'그렇다고 해도 문제는 있지만….'
관찰하는 놈이 한 명이지, 놈의 동료까지 포함하면 몇 명이 있을지 모른다. 끝까지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흐음…."
라온은 보이기 시작하는 세부 마을의 목책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번 임무는 왠지 쉽지 않을 것 같군.'
69화
세부 마을 앞에 도착하자, 목책 위에서 목 하나가 삐죽 올라왔다. 세월이 내려앉은 회색 머리칼의 노인이었다.
"헉! 지그하르트 분들이십니까?"
경계심 가득하던 그의 세모꼴 눈동자가 수련생들의 가슴에 박힌 불꽃에 타오르는 검 문양을 보고, 동그랗게 말려 들어갔다.
"그렇습니다."
선두에 서 있던 버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오셨군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린 후 목책 좌측에서 문이 열렸다.
"세부 마을 촌장 이가함입니다! 지그하르트 검사분들을 환영합니다!"
회색 머리칼의 노인이 촌장이었던지, 먼저 나와서 고개를 숙였다. 그 뒤로 창과 검을 든 마을 사람들이 보였다.
"우리는 아직 검사가 아니라, 수련생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지그하르트에서 오신 분들은 맞지 않습니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가함과 마을 사람들은 어린 티가 나는 수련생들에게도 바짝 고개를 숙였다. 지그하르트의 이름값이 이곳에도 미친다는 뜻이었다.
"험."
"어음…."
수련생들은 처음 받아보는 환대에 기쁨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미숙함을 드러내는 전형적인 초출의 모습이었다.
라온은 수련생들의 중간에 서서 기척을 죽였다. 주변을 면밀하게 관찰했다. 숲에서 느꼈던 시선을 찾아봤지만, 이곳을 벗어난 건지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도망쳤다.
'그런 거 같네.'
라스는 답답한 걸 참지 못해서 이렇게 한 번씩 답을 알려주었다. 갑자기 달려드는 것만 빼면 참 쓸만한 녀석이다.
"오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일단 쉬시죠."
이가함 촌장은 손을 들어 수련생들의 안내를 자처했다.
"아닙니다."
버렌은 마을 안에 들어가서 멈춰 섰다.
"먼저 상황부터 듣겠습니다. 몬스터의 움직임을 말해주십시오."
"수련생이라고 해도 지그하르트트는 지그하르트군요."
촌장은 감동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흐흠!"
버렌은 지그하르트답다는 말을 듣고서 어깨를 쭉 폈다. 무게를 잡더니, 금세 아이다운 모습으로 돌아갔다.
"저길 봐주십시오."
촌장이 우측의 산을 가리켰다.
"저 산은 저희 마을과 이름이 같은 세부산입니다. 매년 몬스터가 나타나지만, 숫자가 적어 저희끼리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몬스터의 숫자가 3배 이상 늘어서 저희가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3배 이상이면?"
"관측된 것만 100마리 이상입니다. 보이지 않는 놈들을 생각하면 200은 되겠죠."
"200마리라, 알겠습니다."
버렌은 세부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말고 마음 놓고 계세요. 저 산에 있는 몬스터의 씨를 말려버릴 테니까."
"오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미 모든 몬스터가 정리된 것처럼 버렌과 수련생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일어나십시오. 세부는 지그하르트의 세력권에 있는 마을.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버렌은 마음이 들떠 얼굴이 붉어졌지만, 티를 내지 않고 몸을 돌렸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새벽. 몬스터들이 깨어나기 전에 산으로 향한다."
"그럼 휴식하실 수 있게…."
"그전에."
촌장의 목소리는 다시 한번 버렌에게 막혔다.
"내일 우리에게 산을 안내해줄 몸놀림이 빠른 사람을 준비해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촌장은 버렌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마을 회관으로 수련생들을 안내했다.
'나름 괜찮네.'
라온은 버렌과 촌장의 대화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저 눈깔 꼬마라면 오자마자 무릎을 꿇으라고 할 줄 알았건만.
라스는 아쉽다고 중얼거렸다.
'다 너 같은 줄 아냐.'
솔직히 말하면 라스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촌장에게 갑질할 줄 알았는데, 그는 임무에 대해서만 생각했고, 나름 대우도 해주었다.
'다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오크와 고블린, 코볼트 정도는 자신이 없어도 버렌과 수련생만으로 처리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세부 마을 근처에 들어서자마자, 느꼈던 그 견제의 시선이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그 시선은 저 산 쪽으로 사라졌었다.
'내일이면 알게 되겠지.'
가문의 시험인지, 아니면 다른 세력이 무언가를 준비 중인 건지.
라온은 세부산 전체를 훑어본 뒤 가장 마지막으로 마을 회관에 들어갔다.
* * *
세부산 정상. 이불처럼 깔린 눈 위로 크고 작은 몬스터들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다만 몬스터는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고, 젊은 남자 한 명이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스으윽.
남자가 오크 머리 형태의 투구를 손가락으로 돌리고 있을 때 녹색 복면을 뒤집어쓴 괴인이 바닥에서 솟구쳤다.
"누가 온 거지?"
"지그하르트입니다."
녹색 복면인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지그하르트? 그 정도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는데?"
"정식 검사가 아니라, 수련생들 같았습니다."
"교관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하, 두 번째 임무로군."
젊은 남자가 투구를 툭 두드리며 픽 웃었다.
"들키진 않았나?"
"물론입니다. 놈들은 제가 근처에 있었다는 것도 몰랐을 겁니다."
"하긴. 수련생이 네 은신을 알아차릴 리가 없지."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맛을 다셨다.
"몬스터를 확실하게 통제했는데, 왜 저놈들이 온 걸까요?"
"마을 사람들은 변화에 민감하니까. 몬스터들의 숫자가 늘어나서 지그하르트에 지원을 부탁했겠지. 물건을 금방 찾을 줄 알고 너무 방심한 모양이야."
젊은 남자는 고개를 젖히며 혀를 찼다.
"산 전체를 뒤져도 나오지 않았으니, '마석'은 결국 저 마을에 있는 듯합니다."
"그렇겠지."
"바로 공격하시겠습니까?"
남자는 돌리던 투구를 손가락으로 잡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예? 지그하르트의 새싹을 죽일 좋은 기회인데…."
"놈들을 죽이는 거야 간단하지만, 괜히 건드렸다간 지그하르트가 마석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될 수도 있다. 작은 걸 얻으려다 큰 걸 놓친다면 오히려 손해야."
"그러면…."
"적당히 몬스터를 내어줘. 지그하르트의 어린 것들이 훌륭히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갈 수 있게 말이야."
남자가 손에 든 녹색 투구를 머리에 썼다. 투구는 오크의 머리처럼 뻐드렁니와 살벌한 눈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그 눈에서 흉악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놈들이 돌아간 뒤에 세부 마을을 친다. 모조리 갈아 엎어버려."
* * *
다음날 새벽.
라온은 수련생들과 함께 세부 산 입구 부근에서 대기했다.
'나타났군.'
산 앞에 다가가자마자 어제 느꼈던 그 시선이 다시 찾아왔다.
'서쪽인가.'
어제 한 번 느꼈던 덕분에 놈의 위치가 살짝이나마 잡혔다. 서쪽에 있는 것 같았다.
'지금은 올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라온은 눈을 내리감고 기감을 펼쳐냈다. 산 주변을 훑어보았다. 크고 작은 기척들. 촌장의 말대로 오크와 고블린, 코볼트들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암살자로 살아온 감각이 올라오지 않는 걸 보면 큰 위험은 없을 것 같았지만, 혹시 모르니 감각은 계속 열어두었다.
"관찰 결과. 오크, 고블린, 코볼트 모두 확인되었다."
버렌은 뒤를 돌아 모든 수련생과 눈을 마주쳤다.
"전투력은 오크가 뛰어나지만, 배웠듯이 고블린과 코볼트는 독침과 독 연기 같은 더러운 기교를 사용한다. 절대 방심하지 말도록."
"예."
몬스터들이 튀어나올 수 있기에 수련생들은 작게 대답했다.
"조별로 움직이는 게 가장 좋지만, 우린 실전 경험이 적다. 서로를 보조할 수 있게 함께 움직인다."
그 말을 끝으로 버렌이 라온을 쳐다보았다. 허락을 구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
라온은 말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버렌은 눈으로 인사를 보낸 뒤 다시 몸을 돌렸다.
"우리의 땅을 위협하는 몬스터들에게 지그하르트의 힘을 보여라!"
버렌이 검을 뽑으며 산으로 뛰어 올라갔다.
"가자!"
"으아아아!"
수련생들은 우렁찬 함성을 내지르며 버렌의 뒤를 따랐다.
루난과 마르타는 자신의 시선을 확인한 뒤 그들과 함께 산속으로 들어갔다.
-멍청한 것들.
라스는 수련생들의 뒤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지금까지 기습을 준비해놓고, 저렇게 소리를 지르다니, 한심하기 그지없군.
'첫 실전의 긴장을 함성으로 떨치려는 거야. 긴장하지 않는 게 기습보다 중요하니까.'
수련생들에겐 이게 첫 번째 실전이나 다름없다. 저 정도 실수는 이해할 수 있는 범주다.
-네놈도 몬스터 토벌은 처음인데, 그 심장박동은 뭐냐.
라스의 목소리에 짜증이 어렸다.
-백전노장의 심장 소리 같다. 지금 이곳만이 아니라, 많은 것을 보고 있어. 짜증 날 정도로 묵직한 소리다.
'난 특이하니까.'
라온은 픽 웃으며 검을 뽑았다.
"그럼 가시죠."
"아, 예!"
옆에 있던 갈색 머리 청년이 떨리는 턱을 끄덕였다. 길 안내를 맡은 마을 사람이었다. 자신의 역할은 전투가 아니라, 길잡이의 보호였다.
"크어엉!"
"카아악!"
비명이 들리는 방향으로 걸어가자, 이미 전투가 한창이었다.
"오크들을 막아서고, 고블린과 코볼트부터 처리해!"
버렌의 지시에 전위에 선 수련생들이 오크와 검을 맞대고, 뒤에 있던 수련생들이 앞으로 뛰어들어 고블린과 코블트를 베었다.
몬스터로 이루어진 녹색의 벽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폭풍처럼 몬스터를 학살하는 수련생 중에서도 특히 세 명이 눈에 띄었다.
바람의 기운을 검에 두른 버렌은 오크의 도끼를 그대로 베어버렸고, 루난은 주변에 냉기를 둘러 다가오는 몬스터들을 제어한 뒤 목을 갈랐다.
마지막으로 마르타는.
콰아앙!
검에 무시무시한 오러를 담아 눈앞에 있는 것을 아예 깨부숴버렸다.
이대로라면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산 전체에 있는 몬스터들을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꾸어어어!"
라온이 기감을 퍼뜨리고 있을 때 수련생들의 포위망을 벗어난 오크 두 마리가 도끼를 들고 달려들었다.
"히이이익!"
오크에게서 피어나는 피비린내에 길잡이가 떨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촤아아악!
라온은 그의 앞에 서며 검을 뽑아 그대로 그었다.
"끄륵…."
붉은 기운이 담긴 검이 허공을 질주하자, 오크의 목이 나무 열매처럼 툭 떨어졌다.
"으음."
"...."
버렌은 그 모습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고, 마르타는 검은 눈동자를 빛냈다.
"걱정하지 마세요."
라온은 입을 쩍 벌린 길잡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줬다.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돌아가게 해드릴 테니까."
* * *
올해로 25살이 된 칸바르는 최악의 아침을 맞이했다. 어제 마을 회의에서 자신이 토벌대의 길잡이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괜찮을까?'
걱정이 앞섰다.
지그하르트의 토벌대가 마을을 구하기 위해 와준 건 고맙지만, 생각보다 너무 어려 보였다.
거기다 오늘 아침 자신을 보호해준다고 붙은 검사는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 보이는 아이였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잘생겼지만, 덩치가 너무 작아 신뢰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별수 있나.
이미 결정은 내려졌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칸바르는 자신보다 작은 아이를 앞에 세운다는 민망함을 지닌 채 산을 올랐다.
산 초입에 들어가자마자 본 건 몬스터들을 휩쓰는 아이들의 칼날이었다.
힘겨운 싸움이 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오크와 고블린, 코볼트들이 아무것도 못 하고 순식간에 쓸려나갔다.
'미친!'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장정 5명이 모여야 겨우 상대할 오크의 목이 나뭇가지처럼 부러져 나갔다. 수련생 한 명 한 명이 괴물 그 자체였다.
'이래서였군.'
촌장이 이 어린아이들에게 예의를 다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들은 평범한 자신들과 결이 다른 사람들이었다.
여유를 찾고, 마음을 놓고 있을 때 좌측에서 오크 두 마리가 달려 들어왔다. 놈들의 숨결에서 퍼지는 노린내에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으어어억!"
머리가 하얗게 질려 주저앉았을 때 조용히 있던 아이가 나섰다.
검을 뽑고, 긋는다.
이미 죽은 고기를 자르는 듯한 간결한 흐름에 다가오던 오크 두 마리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허…."
칸바르는 눈을 부릅뜨고 이빨을 탁탁 부딪쳤다.
'뭐지?'
간단하고 가벼운 검술에 조금 전에 보았던 아이들의 막강한 무력이 모조리 잊혀졌다. 아이가 아니라, 수백 번의 실전을 겪은 노장을 보는 기분이었다.
검술에 무지했지만, 저 아이가 이 중에서도 남다르다는 건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 뒤로 산을 오르면서도 자신의 옆에 있는 금발적안의 아이는 있는 듯 없는 듯 서서 주변을 관찰했다.
대단한 활약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모든 상황을 살피며 위험한 상황을 사전에 차단했다.
'이 아이가 진짜야….'
이건 가까이에서만 봐야 알 수 있다. 40명이 넘는 아이 중 최고는 가장 어려 보이는 이 아이였다.
"칸바르라고 했습니까?"
헉 소리를 내며 관찰하고 있을 때 금발 아이가 말을 걸어왔다.
"아, 예! 그렇습니다! 검사님!"
자신도 모르게 극존칭으로 대꾸했다.
"이 산에 내려오는 전설 같은 건 없습니까?"
"저, 전설이요?"
"네. 대단한 보물이 있다던가, 특별한 몬스터가 있었다던가."
"아, 이, 있긴 있습니다. 몇백 년 전이긴 한데, 서쪽에서 내려온 고블린들의 왕과 기사단이 이 산에서 전투를 벌였다고…."
"음, 보물 같은 건 없습니까?"
"고블린 왕의 반지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긴 했는데…."
"그렇군요."
아이의 눈빛이 아주 잠깐 빨갛게 빛났다.
그거였어.
나지막하게 흐르는 혼잣말을 들은 순간 등골에 오싹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70화
촤아악!
라온은 길잡이에게 독침을 날리려던 고블린의 목을 베었다. 뒤이어 달려드는 코볼트는 몽둥이째 갈라버렸다.
"가, 감사합니다."
칸바르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여주고, 기감을 더 미세하게 퍼뜨렸다.
'이번엔 동쪽이로군.'
수련생 모두를 관찰하는 시선은 이번에 동쪽에서 느껴졌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옮겨간 것 같았다.
'이제야 알겠어. 저 시선을 어디서 느꼈는지.'
라온이 검에 흐르는 피를 털어내며 입매를 꽉 다물었다.
'에덴이었어.'
에덴은 대륙의 어둠이라 불리는 오마의 한 축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세력 중 정신 나간 걸로는 1, 2위를 다투는 미친놈들의 집단이다.
놈들의 목적은 환원(還元).
천 년 전 인간이 몬스터에게 사냥당하고, 타 종족에게 배척받던 그 절망의 시대를 낙원이라 여기며 그때로 돌아가 몬스터의 신을 부활시키길 원했다.
에덴은 그야말로 미친놈들의 집단이지만, 아쉽게도 정신 나간 게 다가 아니라, 지그하르트에 뒤지지 않는 막강한 무력을 보유했다.
놈들은 테이머처럼 몬스터를 다루기도 하고, 인간의 몸으로 몬스터의 능력을 운용하기도 했다.
그런 기이한 힘을 다루는 방법은 대륙의 명가들도 알지 못하는 비밀이었다.
'다만….'
라온은 에덴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데루스 로베르트 덕분이지.'
데루스가 내린 마석 탈취 임무 때문에 에덴과 부딪쳤고, 그림자 10개 조. 90명이 몰살당했었다. 그 지옥에서 살아나온 건 오직 자신뿐이었다.
'근데 그놈은 그걸 어떻게 안 거지?'
지금 생각해보면 데루스 놈은 처음부터 에덴이 몬스터의 마석을 이용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육황 중 하나인 그놈이 어떻게 그걸 알고, 왜 그 사실을 밝히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네놈.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깊고도 짙은 분노가 느껴진다.
라스가 팔찌 위로 진한 냉기를 뿜어내며 솟구쳤다.
"음…."
라온이 인상을 찡그렸다. 데루스 로베르트에 대해 생각하자마자, 분노가 끓어오르는 게 다행인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후…."
한숨에 분노를 흘려보내며 지금도 쏘아지는 시선을 감지했다.
'놈들은 아마 고블린 왕의 마석을 찾고 있겠지.'
칸바르의 말대로라면 이 산에는 고블린 왕이 죽은 뒤 시간이 흐르면서 만들어진 마석이 있을 거다.
마석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에덴 놈들이 찾는 건 네임드급 몬스터의 마석뿐이다.
'몬스터들이 멍하니 있는 이유도 알겠어.'
에덴은 자신과 수련생들이 빨리 돌아갈 수 있도록 몬스터들을 내어주는 중이었다.
'우릴 공격할 생각이 없는 거야.'
에덴은 지그하르트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든, 우리의 뒤를 따라왔을지도 모를 교관이나 검사들을 대비해서든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중요한 물건인 것 같네.'
이곳에 묻혀 있는 고블린 왕의 마석은 에덴에게 굉장히 중요한 물건인 게 분명했다.
'일단 지금은….'
라온은 눈앞에 다가오는 오크의 목을 베면서 눈매를 좁혔다.
'어쩔 수 없이 그냥 가야겠군.'
이 산에 있을 마석을 건드리는 순간 근처에 있는 에덴 놈들이 벌떼처럼 달려들 거다.
자신은 몰라도, 수련생과 마을 사람들은 모조리 죽을 테니, 벌집을 건드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선 모른 척하고 몬스터만 잡고 돌아가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몬스터들이 도망친다! 끝까지 쫓아라!"
버렌의 힘찬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가시죠. 금방 끝날 겁니다."
라온은 안정을 찾은 칸바르에게 거짓 미소를 지었다. 나무뿌리를 씹은 듯 약간의 씁쓸함이 혀끝에 돋아났다.
* * *
새벽부터 시작된 몬스터 토벌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해가 지기도 전에 산 정상에 도착했다.
"끼에에엑!"
산 정상에 자리를 잡은 오크 주술사의 외침에 오크와 코볼트, 고블린이 뛰어든다. 흡사 녹색 벌떼가 달려드는 것 같았다.
"이곳이 마지막이다!"
버렌이 피에 젖은 검을 들어 하늘을 찔렀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 절대 방심하지 말고 끝까지 싸워라!"
"으아아아아!"
버렌이 녹색 오러를 휘감은 채 앞으로 뛰쳐나갔고, 수련생들이 포효하며 땅을 박찼다.
"흐읍!"
라온도 뒤에 칸바르를 뒤에 둔 채 앞으로 달려가 몬스터들을 베었다. 검술 숙련도를 낮춰서 다른 수련생들과 차이가 없도록 움직였다.
'계속 보고 있어.'
이제 시선의 정체도 알았다. 에덴의 정찰병으로 '홍안귀'라 불리는 놈이다. 참새만 한 눈알만 떠 있는 몬스터 '서치 아이'의 탐색 능력을 가지고 있다.
"얼마 남지 않았다!"
버렌이 오크 주술사가 뿜어낸 불꽃을 가르며 소리쳤다. 그가 오크 주술사를 향해 짓쳐 들 때 하늘에서 거대한 검이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앙!
산이 흔들리는 듯한 묵직한 굉음과 먼지가 동시에 퍼졌다.
후우욱.
먼지가 가신 그곳엔 찌부가 된 오크 주술사와 검을 땅에 박고 있는 마르타가 서 있었다.
"내 거거든?"
"쯧."
버렌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뒤를 돌았다.
"오크 주술사가 죽었다! 잔챙이들 뿐이니, 확실하게 마무리해라!"
"우와아아아!"
수련생들은 첫 번째 전투를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남아 있는 오러를 모조리 끌어 올려 검을 휘둘렀다.
촤아악!
라온은 주변에 있던 오크들을 가볍게 베어낸 뒤 칸바르의 옆으로 돌아왔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기막을 펼친 뒤 그를 불렀다.
"아까 고블린 왕에 관한 이야기 말입니다."
"아, 예."
칸바르는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고블린 왕이 죽인 뒤 산에서 보석이나, 보물이 나온 적은 없습니까?"
"아, 그것이…."
칸바르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나왔군요."
"예. 그렇습니다. 은인을 속여서는 안 되겠죠. 제가 어릴 적에 촌장님이 산의 정상에서 붉은 보석을 캐오신 적이 있습니다."
"그거 지금 어디 있죠?"
"촌장님 집 바닥에 묻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이후로 마을이 따뜻해졌죠. 대부분은 모를 겁니다."
"그런…."
라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러면 완전히 달라지는데….'
에덴은 이곳을 뒤지다가 보석을 구하지 못한다면 분명 세부 마을을 습격할 거다. 그 미친놈들의 참을성은 그리 깊지 않으니까.
"우리가 이겼다!"
"첫 번째 임무 성공이다!"
"우와아아아아!"
산의 정상을 차지하고 몬스터들을 베어버린 수련생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흐음!"
버렌이 검을 든 채로 자신을 보았다. 네가 준 역할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는 표정이었다.
"...."
라온은 버렌의 눈빛에 답하지 않고, 눈매를 좁혔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이야아아아!"
버렌은 그걸 인정이라고 생각했는지 그 누구보다도 우렁찬 함성을 내질렀다.
루난도 승리가 기쁜지 작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시끄럽네."
마르타는 별일 아니라는 듯 귀를 후비며 자신을 보았다.
라온은 환호를 지르는 수련생들을 보다가 세부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색색의 지붕 위로 피어나는 연기를 보자 마음이 더 답답해졌다.
'놈들이 이 산이 아니라, 마을에 마석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저 마을에 남는 건 연기뿐일 것이다.
* * *
마을에 돌아가자마자 축제가 벌어졌다.
한동안 몬스터 걱정은 할 필요 없다는 생각에 마을 사람들의 얼굴엔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촌장과 마을 사람들은 수련생 한 명, 한 명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버렌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저었다. 부상자 없이 완벽하게 임무를 끝낸 덕분에 그의 얼굴은 마법등을 켠 듯 밝았다.
"마을을 위해 힘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촌장은 뒤에 있던 라온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이 녀석이 검사님이 정말 대단하셨다고 하더군요.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솔직히 처음엔 조금 못 미더웠지만, 정말 대단한 검술 실력을 지니셨습니다."
촌장은 칸바르를 가리키며 방긋 웃었다. 칸바르도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라온은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 촌장과 칸바르는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고 말하고 다른 수련생들에게 인사를 전하러 갔다.
"후…."
그들의 눈빛을 보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지금 마을 전체는 감시당하고 있다. 자칫 잘못하면 이대로 전멸이다.
"기분 안 좋아?"
루난이 옆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스크림 먹을래?"
그녀는 품에 숨겨두었던 그 네모 상자를 꺼내려 했다.
"아니야."
라온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루난은 뭔가 아쉬운 표정으로 꺼내려던 상자를 도로 넣어두었다. 아무래도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기쁨을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녀의 생각이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무슨 짓이냐! 아이스크림을 먹을 기회를 왜 놓는단 말이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아이스크림보다 중요한 건 없다! 당장 소녀를 불러라!
'어휴.'
라온은 놀릴 때보다 더 흥분한 라스를 억지로 팔찌에 밀어 넣었다.
"그래서."
나무 위에서 들린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마르타가 사과 하나를 든 채로 아래를 내려보고 있었다.
"네가 생각했던 대로 이루어진 건가? 뭘 원한 건지 모르겠는데."
"나도 잘 모르겠어."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말할 수도, 말할 것도 없었다.
"걱정 마라. 일이 어떻게 되든, 임무가 다 끝날 때까지는 네 지시대로 움직일 테니까."
마르타는 눈을 한번 마주치고서 아래로 내려갔다.
"다 비켜!"
음식이 차려지는 식탁의 정중앙을 가장 먼저 차지했다. 그녀다운 모습이었다.
"우리도 가자."
라온은 일어서며 루난에게 턱짓을 했다.
"응."
루난은 고개를 꾸벅이고 식탁으로 걸어갔다.
준비를 단단히 했는지, 맛깔나는 다양한 음식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무리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여러분들을 위해서 준비한 음식은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 마음껏 드셔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즐겨주세요!"
촌장과 마을 사람들의 환호에 수련생들은 손을 치켜들면서 음식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후우-
라온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의 웃음과 음식의 냄새 모든 것이 거북하게 느껴졌다.
'내일이 중요하겠어.'
* * *
다음 날 아침.
버렌은 수련생들을 이끌고 세부 마을을 벗어났다. 마을 사람들은 20분 넘게 따라오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잘 된 것 같군.'
버렌은 마을의 전경이 보였던 언덕을 오르며 빙긋 웃었다.
'완벽했어.'
세부 산에 있는 몬스터들을 완벽하게 처리했고, 사망자나, 중상자도 전혀 없다. 경상자 몇 명만 나왔으니, 처음치고 완벽하게 임무를 끝냈다고 생각해도 되었다.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라온은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땅을 보며 걷고 있었다. 다시 지휘권을 달라고 말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당연하겠지.'
자신의 지휘에는 틈이 없었다. 마지막에 마르타가 오크 주술사의 목을 베는 것만 빼면 완벽한 작전이었다.
'뭘 보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족했겠지.'
라온은 자신에게 지그하르트다운 모습을 보여주라고 말하며 지휘권을 넘겼다. 그가 무얼 원했든 불평 따위는 나오지 않을 거다.
"걸음을 빨리한다!"
버렌과 수련생들은 가슴을 가득 채우는 만족감을 느끼며 지그하르트 영지가 있는 북쪽으로 걸어갔다.
5시간 넘게 걸어 태양이 하늘의 중심에서 살짝 내려왔을 때 조용히 있던 라온 지그하르트가 앞으로 나왔다.
"모두 정지."
"갑자기 무슨…."
버렌은 라온의 눈을 본 순간 입을 다물었다. 새빨갛게 타오르는 눈동자에 숨이 턱 막혀왔다.
"임무는 지금부터가 진짜다."
71화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버렌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떴다.
"말 그대로다."
라온은 앞으로 걸어 나가 수련생 모두와 눈을 마주쳤다.
"아직 임무는 끝나지 않았어."
"그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고! 모든 몬스터를 잡고, 뒤처리까지 끝냈는데 왜 임무가 끝나지 않았다는 건데!"
"우리의 임무는 뭐였지?"
"어? 그건…."
버렌이 인상을 찌푸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몬스터 토벌과 마을의 보호."
"그래. 우리의 임무는 몬스터 토벌만이 아니라, 마을의 보호도 있었지."
"그니까 그게 끝났잖아! 몬스터를 모두 잡았으면 된 거지!"
"아니."
라온이 고개를 저으며 지금까지 걸어온 세부 마을 쪽을 보았다.
"우린 조금 전까지 감시당하고 있었다. 감시의 시선이 떨어진 건 1시간 전이고."
"어?"
"그, 그게 무슨!"
"정말이십니까?"
깜짝 놀란 수련생들이 벌떡 일어섰다.
"교, 교관이겠지."
버렌이 억지로 입매를 비틀었다. 감시의 시선이 있었다는 걸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우릴 감시하기 위해서 온 교관이 분명…."
"교관의 기척이라면 누구인지 내가 모를 수가 없어. 그 기척은 우리만이 아니라, 마을까지 전체적으로 관찰했다. 거기다…."
라온이 지나온 길을 가리켰다.
"우리가 마을에서 반나절 거리에 떨어지자마자 기척이 사라졌어. 그것도 마을 쪽으로."
"그러면 다른 적?"
버렌이 입을 떡 벌렸다. 떨리는 눈으로 마을 쪽을 보았다.
"그 말 정말이야?"
그간 조용히 있던 마르타가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섰다.
"확실해."
"그럼 그 시선을 언제부터 느꼈지?"
"마을이 보이는 언덕에 도착했을 때부터."
"잠깐! 그럼 버렌에게 지휘권을 넘겼던 게…."
"맞아. 그 시선을 더 확실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내 기척을 감췄어."
"허…."
마르타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이 녀석은 대체 뭐야….'
라온의 말을 들은 순간 머리털이 쭈뼛 섰다.
자신조차 느끼지 못한 시선과 기척을 느끼고, 버렌을 수석으로 바꾼 뒤 수련생들의 사이에 숨어 그 시선을 파악했단다. 감각과 심계가 놀라워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그게 나한테 지휘권을 준 이유였다고?"
"네가 지휘권을 가져가면 나 이상으로 수련생들을 잘 다룰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나, 난…."
"넌 내 기대 이상으로 제대로 된 수석의 모습을 보여줬어. 덕분에 놈들은 널 수석이라 생각하고, 내 존재는 느끼지도 못했지. 네 말대로 지그하르트다운 모습이었다. 돌아가게 된다면 널 부수석으로 임명해달라고 건의해보지."
"그게 아니다."
버렌은 고개를 숙인 채로 입술을 떨었다.
'젠장!'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난 내가 잘한 줄 알고….'
완벽한 지휘 덕분에 라온이 할 말을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녀석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감시자를 견제하기 위해서 뒤에 숨어 있던 거였다.
수석 지휘권이라는 작은 것에 매몰되어 있는 동안 라온은 훨씬 멀고 높은 곳을 보고 있었다.
으드득.
다만 웃긴 건 라온의 칭찬을 듣자, 또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부끄러움과 뿌듯함이 어우러진 요상한 기분이었다.
"너희는 모르겠지만, 오크와 고블린, 코볼트는 협동을 할 수 있는 몬스터가 아니다. 우릴 감시한 놈들이 어떤 수를 썼을 거다."
라온은 에덴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것들만 풀어냈다.
"우리의 첫 번째 임무는 마을의 보호. 그 감시자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이상 우리의 임무는 끝나지 않았다."
짐을 챙기고 일어섰다.
"지금부터 세부 마을로 돌아간다. 이전처럼 다 알리면서 가는 게 아니라, 그 누구도 눈치챌 수 없도록 조용히 움직인다."
모두를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위장 도구가 있다면 좋겠지만, 챙기질 않았으니, 일단 걸음걸이라도…."
"저, 저 있는데요."
반쯤 넋이 나가 있던 도리안이 손을 들어 올렸다.
"뭐가?"
"군장을 가리는 가림막이랑, 옷에 수풀을 걸칠 수 있는 밴드가 있습니다."
"한두 개여선 안 돼. 오히려 눈에 띌…."
"다 있는데요."
도리안은 배 주머니에서 가림막과 밴드를 우르르 꺼내놓았다. 이걸 전부 가지고 다니다니 뭐 하는 놈인지 모르겠다.
"이걸 어떻게…."
"혹시 몰라서 가져왔습니다."
"혹시 몰라서 위장 도구 40개를 가지고 다녀?"
"준비성은 철저해야죠."
"어, 어쨌든 잘했다."
"넵!"
도리안은 유일하게 라온의 칭찬을 듣고 히죽 미소 지었다. 물론 다시 마을에 가서 싸우게 될지 몰라서 금방 얼굴이 어두워졌지만.
"양은 충분하니까. 연무장에서 배운 대로 위장을 시작해라. 10분 뒤에 다시 이곳으로 모여. 그리고…."
라온은 가장 먼저 가림막을 두르며 고개를 들었다.
"크레인."
"어? 어어!"
"넌 당장 지그하르트 지부로 달려가서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전해."
"내, 내가?"
"발이 빠르니까."
도리안이 더 빠르지만, 그가 필요한 일이 있을 수도 있었다.
"아, 알겠어!"
인정을 받은 기쁨일까. 크레인이 냉큼 고개를 끄덕이고 마을과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라온은 달려가는 크레인을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지금부터는 내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라. 거부는 없어."
* * *
"모두 돌아갔습니다."
눈알이 새겨진 복면을 쓴 남자가 무릎을 꿇었다.
"확실한가?"
녹색 투구를 든 젊은 남자가 고개를 틀었다.
"예. 반나절 동안 승리에 취해서 돌아가는 걸 확인하고 왔습니다. 혹시 몰라서 반대편도 확인했지만 특별한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러면 시작해도 되겠군."
젊은 남자는 피식 웃으며 아무런 무늬도 없는 투구를 들어 머리 위에 착용했다.
"환원."
남자의 주문 같은 말에 오크 투구 안에서 녹색 쇳물이 흘러내렸다.
촤아아!
쇳물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남자의 몸에 달라붙어 갑옷과 같은 형태를 갖췄다.
치이이익!
팔과 가슴에 거대한 근육이 부풀었고, 손가락은 차돌처럼 단단하게 여물었으며, 다리는 나무뿌리처럼 두꺼웠다.
평범한 기사의 갑옷이 아니다.
오크. 그것도 오크 돌격대의 최전방에 서는 오크 투사의 모습을 딴 기괴한 갑주였다.
번쩍!
오크 투사 투구의 안쪽에서 살의로 가득한 붉은 눈이 번쩍였다.
"크라라라!"
남자의 목구멍에서 기괴한 포효가 터져 나왔다.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 낼 법한 소리였다.
"우오오오!"
포효에 호응하듯, 그의 뒤에서 오크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고오오!
남자는 붉은 기운이 어린 손으로 세부 마을을 가리켰다.
"크라라라!"
"갸아아아!"
오크들은 악다구니를 내지르며 땅을 뛰어 내려갔다. 그들의 움직임은 수련생들에게 당할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나웠다.
"크르르."
오크 투사의 갑주를 착용한 남자는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파도처럼 밀려가는 몬스터들을 바라보았다.
* * *
라온과 수련생들은 세부 마을의 전경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에 도착했다.
"아직 아무런 일도 없는데?"
버렌은 마을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마을에선 평온함을 비추는 연기만 올라오고 있었다.
"기다려봐.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고, 몸도 낮춰."
"음…."
라온의 지시에 버렌은 입을 꾹 다물고 허리를 숙였다.
"지금부터 숨 소리를 내는 것도 조심해. 들키는 순간 전멸당할 수도 있으니까."
"으음…."
"흐읍!"
수련생들은 손으로 입을 꾹 막고 눈동자를 떨었다.
"전멸은 무슨…."
"뭐가 나와도 상관없잖아. 우린 지그하르트인데…."
반면 라온의 말을 믿지 못하는 몇몇 방계들은 입을 삐죽거렸다. 그들은 첫 승리에 도취 되어 자신감이 최고조에 올라 있었다.
"조용히 해. 불평은 확실해지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아."
버렌이 나서고 나서야 방계들이 입을 다물고, 주저앉았다.
"육포로 미리 배를 채워두고, 방한복도 입어. 밤이 추워도 불을 피울 수 없으니까."
수련생들은 자그마한 불평을 하면서도 라온의 지시를 그대로 따랐다.
그렇게 세부산 쪽으로 해가 지고, 어둑한 밤이 찾아왔다.
깜깜한 산 아래. 수백 개의 붉은 빛이 번쩍였다. 루비 같은 빛과 함께 녹색 괴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흐읍!"
"오, 오크! 몬스터들이다!"
"지, 진짜였어?"
수련생들은 오크들의 흉악한 눈빛을 보고 침을 꼴깍 삼켰다.
"으음…."
버렌이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세부산과 그 주변까지 확실하게 수색했고, 그 어떠한 몬스터도 발견하지 못했다. 저 정도 숫자의 몬스터가 이렇게 빨리 나타났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 말대로였어.'
라온의 말대로 몬스터가. 그것도 토벌한 놈들보다 더 흉폭하고, 강한 몬스터가 우르르 쏟아지고 있었다.
땡땡땡!
목책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마을 사람이 경종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둠이 내려앉은 듯했던 마을에 불이 켜지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젠장!"
버렌이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검을 뽑고 탁한 숨을 내뱉었다.
"가자.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끝을…."
"앉아."
라온은 서늘한 눈으로 턱짓했다.
"뭐?"
"말했지. 우릴 지켜본 시선이 있었다고. 그건 몬스터 따위가 아니라, 인간이다. 놈들의 정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
"그, 그렇지만 세부 마을의 병력으로는 저 숫자의 오크를 막지 못해!"
"그렇다고 해도 대기 한다. 자칫 잘못하면 이쪽이 전멸이야."
이건 감정에 치우치지 않은 정확한 판단이다. 적의 숫자와 무력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 이상 움직여서는 안 된다.
"네가 말했잖아! 우리의 임무는 마을의 보호라고! 그럼 지금 움직여야지!"
"교관님이 포기나, 물러나는 것도 임무의 한 선택이라고 하셨지. 지금은 움직일 때가 아니야."
"나, 난 못 참아."
버렌이 검을 쥔 손을 바르르 떨었다.
"저들을 저렇게 죽이는 건 지그하르트 검사가 보일 법한 모습이 아니다!"
그의 녹색 눈동자에 오크들의 돌진이 아릿하게 어렸다.
"맞아."
"우린 지그하르트다. 약자의 위기를 보고 물러나서는 안…."
"저들이 에덴이라고 해도?"
강렬한 의지로 타오르던 수련생들 사이로 라온의 냉정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에, 에덴? 오마의 에덴?"
"저게 그 미친놈들이라고?"
"에덴이 몬스터를 조종하는 건 유명하지. 놈들이 아닌 이상 저 정도 몬스터가 갑자기 나타날 일은 없어."
"어…."
"오, 오마라니…."
오마의 에덴라는 소리에 수련생들의 눈동자가 침식되듯이 흐릿해졌다. 모두 아는 것이다. 에덴라는 존재가 얼마나 강하고 무시무시한 세력인지를.
"에덴의 강함은 알고 있다. 하지만 놈들은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어.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두려워한다는 뜻이다."
버렌이 피나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런 놈들에게 등을 보이고 도망칠 수는 없다. 여기서 저들을 위해 검을 드는 게 내가 생각한 지그하르트의 검사다."
"아예 도와주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야. 상황을 파악한 뒤 싸울 수 있다면…."
"그러면 늦어. 그동안 저 마을 사람 절반은 죽게 될 거다."
그는 흔들리는 눈으로 라온을 바라보았다.
"난 말이다. 너를 인정했다. 네 노력을 확인한 후 마음속으로 네가 나보다 지그하르트의 이름에 걸맞은 놈이라고 인정했단 말이다! 하지만 이건 아니야! 네가 막으면 싸워서라도 저 마을에 가겠다."
버렌이 그대로 검을 뽑았다. 잘 닦인 검이 달빛을 받아 그의 단호한 얼굴을 비췄다.
"모두 따라오지 않아도 좋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녀석만 따라와라!"
그는 진한 녹색의 오러와 단단한 의지를 휘감은 채 언덕 아래로 달렸다.
"우리도 가자. 오마 놈들에게 지그하르트의 검을 보여주자!"
방계들이 모두 일어섰다. 검조차 뽑지 않고 버렌의 뒤를 쫓았다.
쯧.
라온이 짧게 혀를 찰 때 옆에서 일어나는 사람이 있었다.
"나도 갈게."
루난은 검에 시퍼런 냉기를 휘감은 채 언덕 아래로 뛰어내렸다.
"함께 하겠습니다!"
봉신 가문의 수련생들도 검을 뽑아 들고 그녀의 옆에 붙었다.
"우, 우리도 가자!"
"그래. 우리도 지그하르트의 수련생이야!"
버렌과 루난의 신념에 물든 평민 수련생들도 검을 뽑아 마을의 불길을 향해 내달렸다.
"...."
라온은 말없이 뒤를 돌았다. 도리안과 임시 수련생일 때부터 자신을 따르던 수련생들만 남고 모두 마을로 내려갔다.
반수 이상이 떠났지만, 라온은 당황하지 않았다.
'예상했으니까.'
수련생들이 저런 녀석들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저들이 내려가는 것도 계획의 일환이었다.
특히 루난에게는 내려가서 버렌을 도와주라고 오러 메시지까지 보냈다.
다만 가장 의외인 사람이 남아 있었다.
"넌 왜 안 갔지?"
라온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는 마르타를 돌아보았다.
"말했잖아. 이번 임무에서는 어떤 말을 해도 네 지시를 따르겠다고."
검은 눈동자를 빛내며 말하는 그녀에게 진심이 느껴졌다. 그녀 나름의 신념이 세워진 것 같았다.
"그런가."
라온이 픽 웃었다.
"그래서 넌 어떻게 할 거지? 여기서 관망만 할 건가?"
"아니. 우리도 간다."
라온이 고개를 젓고 일어섰다. 오크들은 어느새 마을의 목책 앞에 도착해 있었다.
사람들의 공포와 오크들의 광기가 붉은 안개가 되어 피어나는 것 같았다.
"물론 저 녀석들처럼 대놓고 가진 않고 기척을 죽인다. 언제라도 움직일 수 있게 몸을 풀어두도록."
라온의 지시를 내리고 세부 마을이 아니라, 세부산의 중턱을 노려보았다. 저 안에서 강렬하면서도 짙은 살기가 일렁거렸다.
'저곳에 있군.'
수련생들을 막을 수 있었지만, 놔둔 이유는 하나다.
저곳에 있는 놈이 누구인지 알았으니까.
오크 투사의 힘과 투쟁심을 빌려온 괴물이 산의 중턱에서 마을을 굽어보고 있었다.
정면에서 싸운다면 쉽지 않은 상대지만 암살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시선만 끌어준다면 충분히 잡을 수 있어.'
라온은 하늘에 뜬 달처럼 붉은 눈을 빛내며 손목을 돌렸다.
'오늘은 긴 밤이 되겠군.'
72화
"저 벌레들은 뭐지?"
오크 투사의 갑주를 입은 남자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듯한 음성을 흘렸다. 그의 시선에 언덕을 내려와 세부 마을로 달려가는 버렌과 루난이 잡혔다.
"지, 지그하르트의 수련생들입니다."
눈알이 그려진 복면을 쓴 홍안귀가 부복하며 대답했다.
"너 분명히 저 애새끼들 돌아갔다고 했었을 텐데?"
남자의 목소리에 살기가 깃들었다. 지금까지 그가 보여주었던 냉정하고 침착했던 음성과는 결이 달랐다.
"부, 분명히 돌아갔습니다. 확실히 확인하고 돌아왔는데…."
"그럼 저놈들 중에 네 미행을 눈치챈 놈이 있다는 뜻이겠군. 머저리 같은 놈!"
남자가 발을 들어 복면인의 어깨를 찍어버렸다.
"끄흐흡!"
복면인은 어깨 한쪽이 뭉개졌음에도 가는 신음만 흘릴 뿐 움직이지 않았다.
"쯧."
남자가 거칠게 혀를 차고 바위에서 일어섰다.
지그하르트 수련생들은 이미 마을에 도착해서 무너지는 목책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저 둘인가?"
남자는 목책을 무너뜨리는 오크를 단숨에 베어버린 루난과 버렌을 보고 탁한 숨을 뱉어냈다.
"아, 아닐 겁니다. 둘보다 더 뛰어난 흑발의 계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년은 어디에 있지?"
"더 안 보이는 걸 보니, 아마 숨어서 지켜보고 있을 것 같습니다."
"흐음…."
오크 투사의 갑옷을 입은 남자가 팔짱을 끼고, 마을을 굽어보았다.
"잘 싸우는군."
지그하르트의 수련생들은 진을 짜듯이 선을 그어 목책을 넘어오는 오크들을 모조리 베어버렸다.
"저놈들로는 못 뚫겠어."
그는 뒤에 있는 복면인 보고, 턱짓했다.
"녹귀들을 보내라."
"예? 지그하르트는 건드리지 않는다고…."
"너를 눈치챈 놈들이 그냥 돌아왔을 거 같나? 분명 지부에 지원 요청을 보냈을 거다. 그놈을 잡는 건 이미 늦었어. 최대한 빨리 끝내고 모든 것을 불태운 뒤 여길 벗어나는 게 최선이다."
"…알겠습니다."
복면인은 고개를 숙인 뒤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흐음…."
남자는 손목을 돌리며 산 아래로 내려갔다. 자그맣게 보이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살려줬는데도 돌아오다니, 너희들의 운은 지그하르트의 선택을 받은 것으로 끝난 모양이군."
* * *
촤아악!
버렌은 달려드는 오크를 몸통 채로 갈라버리고, 반만 남은 목책을 뛰어넘었다.
"목책의 앞에 서라! 오크들이 목책을 넘은 순간 사람들이 위험해진다!"
"예!"
방계의 수련생들은 우렁차게 대답하며 목책의 앞에 진을 쳤다.
샤아아아아!
좌측에서 퍼지는 서늘한 한기에 버렌이 고개를 돌렸다.
루난이다. 검에 내려앉은 서리가 바닥에 깔려 오크들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었다.
촤아앙!
허공에 뿌려진 냉기에 오크들은 제 움직임을 보이지 못하고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의외로군.'
루난은 항상 라온의 옆에 딱 붙어 있었는데, 그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이곳까지 온 건 예상외였다.
'그래도 다행이야.'
오크들의 숫자도 숫자지만, 흉폭함과 힘이 어제 상대했던 놈들과는 격이 달랐다.
루난과 봉신 가문의 수련생들이 없었다면 목책이 완전히 무너져서 마을에 큰 피해가 났을 거다.
"오크의 공격을 직접적으로 받지 마라! 흘린 뒤에 반격을 가해!"
버렌은 적절한 지시를 내리며 계속해서 오크를 베었다. 한 번 지휘를 한 덕분에 상황에 맞는 지시를 내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막는 건 어렵지 않아.'
오크들이 강화되었다고 해도 수련생들은 놈들과 싸운 경험이 있으니, 충분히 방어할 수 있다.
'다만….'
정말 라온의 말대로 에덴이라면 이대로 끝나지 않는다. 분명히….
스스스스.
버렌이 뒷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마을 앞에 있는 숲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숲이 아니야.'
숲에서 녹색 후드로 전신을 가린 괴인들이 튀어나왔다. 대충 세어봐도 마흔이 넘는 숫자였다.
"녹귀다!"
버렌이 악을 내지르며 검을 꽉 잡았다.
'빌어먹을! 진짜 에덴이었어.'
녹귀는 에덴의 하급 무인으로 오크와 고블린, 코볼트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루난!"
버렌은 오러를 극성으로 끌어 올리며 루난을 불렀다.
"우리가 앞에서 싸우겠다. 뒤에서 보조를 해줘!"
"응."
루난은 평소와 달리 즉답하고서, 검에 더 짙은 냉기를 피워내 다가오는 녹귀들에게 뿌렸다.
쾅! 콰앙!
녹귀들이 등과 허리춤에 끼고 있던 도끼를 들어 수련생들을 향해 내리쳤다.
"공격을 흘려!"
버렌은 검으로 쏟아지는 도끼를 흘려낸 뒤 녹귀의 목을 베었다.
푸칵!
인간의 살이 갈라지는 감각에 소름이 돋아올랐지만, 입술을 씹어서 참았다.
"놈들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단숨에 목을 날려!"
버렌은 당황한 와중에도 지그하르트 검술 묘리를 제대로 살려냈다. 예리한 검격을 뿜어내며 전진했다.
"흐읍!"
루난은 앞으로 나아가는 버렌과 수련생들을 향해 검에 맺힌 서리를 흩뿌렸다.
화아아아!
흘러간 냉기들은 그들을 지나, 녹귀의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찌지직!
녹귀들의 의복과 피부가 얼어붙어 움직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돌격!"
버렌은 지시만 내리는 게 다가 아니라, 가장 먼저 뛰어들어 녹귀들을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이길 수 있다!"
그 말을 하면서도 가슴이 아릿했다. 녹귀는 아직 많이 남았고, 수련생들은 지쳐가고 있었다.
거기다….
피잉! 휘이익!
고블린과 코볼트의 특성을 가진 녹귀들은 다가오지 않고, 뒤에서 독침을 날리거나, 독무를 뿌리기 시작했다.
"입을 막아!"
버렌은 옷을 올려 코와 입을 막은 뒤 녹귀가 날린 독침들을 쳐냈다.
"윽!"
"끄으!"
"제, 젠장!"
독침을 날리는 녹귀가 많았고, 접근해오는 녹귀도 다수였기 때문에 수련생들이 하나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크으…."
버렌이 거친 숨을 뱉어냈다. 호흡을 멈춘 상태에서 독침을 쳐내고, 전투를 벌이니, 머리가 아찔해졌다.
"하압!"
루난의 기합 소리에 슬쩍 눈을 돌렸다. 서늘한 냉기를 펼치며 녹귀를 압박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앞으로 나왔다는 것 자체가 최악의 상황이라는 의미였다.
"끼이익!"
녹귀들은 교활했다. 루난의 냉기가 퍼지는 순간 뒤로 물러나서 독침과 독탄을 던졌다.
"허업!"
"으으윽!"
독탄을 흡입한 수련생들의 팔다리가 휘청거린다.
"버, 버텨라! 아직…."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온 버티라는 말이 공허하게 들렸다. 팔에 힘이 빠지고, 다리가 흔들린다.
'이, 이대로라면….'
얼마 버티지 못한다. 전멸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을 때 좌측에서 거대한 기운이 치솟았다.
콰아아앙!
황색 오러가 질풍처럼 밀어닥쳐 독침과 독탄을 던지던 녹귀들을 휩쓸었다.
후우욱!
먼지가 가라앉고, 녹귀들을 부숴버린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마르타…."
열에 가까운 녹귀가 모조리 쓰러졌고, 마르타 지그하르트 홀로 서 있었다.
"모두 죽여라!"
마르타의 지시에 라온의 곁에 남아 있던 수련생들이 전장에 뛰어들었다.
"지, 지금이다! 모조리 쓸어버려!"
버렌은 이를 악물고, 검을 다잡았다. 자신을 포함한 수련생들이 독무를 들이켰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밀어붙여!"
마르타가 오러가 가득 담긴 검을 내리치자, 녹귀들의 도끼와 검이 바스러졌다.
'완벽한 타이밍이야.
그녀가 적절한 순간에 기습해준 덕분에 녹귀들은 반격할 틈도 잡지 못하고 쓸려나갔다.
'됐어!'
라온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지만, 승기가 눈에 보이고 있었다.
"단 한 마리도 놓치지 마라!"
버렌은 이를 악물고 물러나는 녹귀들을 향해 달려갔다.
"끝까지…어?"
세부산까지 쫓아가서 검을 휘두르려던 그가 목을 움츠린 채 멈춰 섰다.
"뭐, 뭐야…."
숲 전체를 뒤덮은 듯한 붉은 운무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꿀꺽.
뒤에서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부푼 근육 형태의 녹색 갑주를 입은 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마에는 하나의 십자 상흔이 돋아났고, 입가의 뻐드렁니는 둥글게 코끝까지 말려 올라가 있는 오크 투사의 투구였다.
버렌이 검을 쥔 손을 떨었다.
"오, 오크 투사의 갑옷! 녹전귀!"
녹전귀는 에덴의 하급 간부 중 하나로 인간의 몸으로 오크 투사의 무력을 이어받은 괴물이었다.
"무, 물러나!"
버렌은 검을 쥔 손을 떨며 뒷걸음질 쳤다. 저 무시무시한 기운에 손발이 흔들렸다.
"아…."
루난 역시 떨리는 눈동자를 숨기지 못했다.
"녹전귀라."
마르타는 반대로 입맛을 다셨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눈. 하지만 그녀 역시 혼자서는 역부족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귀찮게 만드는군."
녹전귀의 입이 열렸다. 정말 오크 투사가 된 것처럼 살기 짙은 으르렁거림이었다.
"가볍게 놀고 갈 기회를 만들어줬는데, 그걸 바닥에 내던지다니, 멍청하기 그지없어."
그가 등에 메고 있던 쌍도끼를 손에 쥐었다. 숨 막히게 만드는 압도적인 기파가 수련생들을 휩쓸었다.
도끼 위로 타오르는 붉은 기운. 중상위 몬스터만 사용한다는 투기였다. 에덴의 간부들은 전부 투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끄윽!"
"크흡!"
수련생들은 입술을 짓씹으며 간신히 서 있었다.
'그 수련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쓰러졌을 거야.'
버렌이 손톱으로 손바닥을 긁었다. 리메르가 기세를 올리는 수련을 시키지 않았다면 지금 무릎을 꿇고 죽을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거다.
"수련생 주제에 내 기세를 버티다니, 지그하르트의 이름값은 하는구나."
녹전귀가 히죽 웃었다.
"하지만 멍청해. 너희들이 죽는 이유는 제 능력도 모르고 함부로 나섰기 때문이다."
"으음…."
버렌의 머릿속으로 라온의 경고가 들려왔다.
"그건 해봐야 알겠지. 징그러운 새끼야!"
마르타가 이죽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손을 뒤로 젖혀서 루난과 버렌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3초 뒤 동시에 공격하자는 수신호에 두 사람의 눈동자가 진하게 빛났다.
"너희가 무엇을 해도 소용없다."
"주둥이에서 냄새나니까. 닥쳐!"
마르타가 중앙에서 돌진하고, 버렌과 루난이 각각 좌우에서 침투했다.
"세 명이 모인다고 될까?"
녹전귀가 들고 있던 도끼를 횡으로 휘둘렀다. 무시무시한 풍압과 함께 묵직한 투기가 공간을 휩쓸었다.
"크아아악!"
"꺅!"
"끄윽!"
버렌의 검이 부러지고, 루난의 튕겨 나갔으며, 마르타가 무릎을 꿇었다. 단 한 수에 벌어진 일. 세 사람과 녹전귀는 격 자체가 달랐다.
"아아…."
"저, 저 셋으로도 안 된다고?"
"그럼 어떻게…."
"라온은? 그 녀석은 어디 있어!"
"도, 도망쳤겠지. 저걸 보고 왜 오겠어!"
수련생들의 눈동자에 절망의 빛이 드리웠다. 자신들이 모두 덤벼도 이길 수 없는 저 셋이 한 수에 무너졌으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도망을 칠 수도 없었다. 녹전귀가 퍼뜨리는 살기에 움직이기는커녕 제대로 숨을 쉴 수도 없었으니까.
"네놈들이 강해서 우리가 그냥 보내줬다고 생각했나?"
녹전귀가 더더욱 진한 살기를 일으키며 걸어왔다.
"너희는 지그하르트라는 거대한 나무에 올라탄 애벌레일 뿐이다. 능력도, 무력도, 정신력도 없는 주제에 뭐라도 되었다고 생각했나?"
그의 걸음마다 바닥에 투기가 담긴 불꽃이 타올랐다.
"끄으…."
버렌이 부러진 검을 쥐었고, 루난은 팔을 떨며 몸을 일으켰다.
"아…."
"제, 젠장!"
마르타는 아직 투지를 꺼뜨리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오러를 끌어 올렸다.
이 쓰레기 중에서는 그나마 네년이 가장 낫군."
녹전귀가 가장 앞에 있는 마르타를 향해 다가갔다.
"하긴 그 시선을 알아낼 정도였으니까."
그는 그르렁거리며 마르타의 앞에 섰다.
"으…."
마르타는 아직 오크 투사 갑옷의 기운을 풀지 못하고 입술을 깨문 채 몸을 떨었다.
"어차피 이리되었으니, 지그하르트의 새싹을 모조리 짓밟아버리는 게 옳은 일이겠지."
녹전귀가 양날 도끼를 들어 올리며 살기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만 죽어라."
"아!"
마르타가 눈을 부릅떴다. 녹전귀가 도끼를 내리치려는 찰나 놈의 뒤에 시꺼먼 그림자가 일어났다.
라온 지그하르트.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가 붉은 눈을 빛내며 검을 내리쳤다.
"아니. 네가 죽어라."
시뻘건 불꽃을 두른 라온의 검이 녹전귀의 목을 향해 질주했다.
73화
라온은 마르타와 남은 수련생들을 적절한 순간에 보내고 나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더욱더 기척을 감춘 채로 숨을 죽였다. 흡사 야생동물이나,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수준까지.
마르타의 지원을 받은 수련생들은 용기와 의지를 되찾고, 녹귀들을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지금부터로군.'
라온이 옅은 숨을 뱉으며, 더 힘을 풀었다. 승리라는 글자가 다가오는 순간이지만 지금이 가장 위험한 때였다.
'녹전귀 놈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어.'
녹귀들에게 공격 지시를 내린 에덴의 녹전귀가 분명 저 위에 있다.
아주 느릿하고, 조용하게 모두가 싸우는 수풀로 다가갔다.
버렌과 루난, 마르타가 얼마 남지 않은 녹귀들을 향해 검을 내리치려는 무렵.
놈이 나타났다.
'녹전귀 역시나 있었군.'
에덴의 하급 간부. 오크 투사의 힘을 이어받은 녹전귀가 무시무시한 기세를 흘리며 다가왔다.
콰아아앙!
분노한 놈의 일격에 버렌과 루난, 마르타가 동시에 튕겨 나갔다. 세 사람은 녹전귀의 기세에 짓눌려 제대로 몸을 움직이지도 못했다.
두근.
라온이 자신의 심작박동을 녹전귀의 호흡과 맞추며 발을 움직였다.
그 발놀림은 암살자 시절에 목숨을 걸고 배웠던 무영보. 그림자에 숨은 듯 은밀하게 움직여 녹전귀의 뒤에 이동했다.
쿠구구구!
마르타를 향해 도끼를 내리치려는 녹전귀의 살기에 자신의 살기를 숨기며 검을 들었다.
"그만 죽어라!"
녹전귀가 도끼를 내리치려는 순간 만화공을 일으켰다.
화르르륵!
만화공 일화. 검 끝에서 피어난 화염의 꽃이 녹전귀의 목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너!"
뒤를 돈 녹전귀의 눈동자에 경악이 깃들었다. 놈은 이 찰나의 순간 등 쪽으로 투기를 일으켜 검의 궤도를 바꾸려 했다.
"반항 말고 죽어라."
라온은 뿜어지는 녹전귀의 투기를 만화공의 불꽃으로 갈라내며 검을 내리쳤다.
"크아아아아!"
벼락처럼 떨어지는 검이 녹전귀의 목을 가르려는 찰나 놈이 오히려 안쪽으로 파고들어 왔다.
푸카악!
새빨간 피가 폭발하고 땅에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라온은 인상을 찌푸린 채 앞을 노려보았다.
"크흐흐…."
왼쪽 어깨가 통째로 잘려 나간 녹전귀가 피를 토하며 웃고 있었다.
"안쪽으로 다가올 줄은 몰랐나 보군."
"미친놈."
인간은 위기의 순간에 도망치려고 하지 달려들지 않는다. 그 순간 안으로 들어와 목이 아니라, 팔을 내어주다니, 미쳤다고밖에 볼 수 없는 행동이다.
이래서 저놈들이랑 싸우기 싫다니까.
라온이 혀를 찼다.
"끄흡!"
녹전귀의 어깨 위로 붉은 투기가 솟구치자, 댐이 터진 듯 흘러나오던 피가 멈추기 시작했다.
"너도 움직일 수가 없나 보군."
"...."
라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놈의 말대로 방금의 일격에 많은 것을 걸어 잠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몸에 여유만 있었다면 당장에 달려가 놈의 목을 쳤을 것이다.
"네가 이곳의 책임자인가?"
불의 고리를 회전시켜 육체와 오러를 회복시키면서 입을 뗐다.
"그럼 이런 작은 마을에 내 윗대가리가 올 거라고 생각하나?"
녹전귀가 하나 남은 팔로 도끼를 꽉 말아쥐었다. 가라앉았던 붉은 투기가 다시 솟구쳤다.
"그야 모르는 일이지. 너희는 미친놈들이니까."
라온은 탁기를 호흡으로 풀어내며 무릎을 살짝 굽혔다. 언제라도 튀어 나갈 수 있는 자세로 폐에 신선한 공기를 채웠다.
터엉!
녹전귀가 땅을 박찼다. 닭살이 돋아오를 정도의 살기를 뿜어내며 도끼를 휘둘러왔다.
화르르!
라온이 검을 쳐올렸다. 만화공 일화의 불꽃이 재점화되어 칼날을 휘감았다.
캬아아앙!
검과 양날 도끼가 충돌하며 강철이 찌그러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화아아!
새빨간 불똥이 퍼져 바닥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걸 견뎌?"
녹전귀가 눈을 부라리며 도끼를 수평으로 휘둘러왔다. 강렬한 풍압.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것도 못 견디면 검사 때려치워야지."
라온이 불꽃에 덮인 검을 내리쳤다.
콰앙!
녹전귀와 두 번째 격돌에 손아귀가 찢어질 듯 아려왔지만, 표정을 숨기고 다시 검을 세웠다.
"전사의 마음가짐을 알고 있구나! 지그하르트의 애송이!"
녹전귀가 기괴한 웃음을 터트리며 도끼를 내리쳐왔다.
"그렇다고 해도 살려둘 수는 없지만!"
"살려달라 한 적 없어."
라온이 검을 그어 도끼를 막아서고 한 발 앞으로 다가갔다.
캬갸갸걍!
도끼의 날에 어린 막강한 투기에 검이 부러질 듯 흔들렸다.
'견뎌야 해.'
지금의 힘으로 놈을 부술 수 없다. 도끼의 기운을 흘려내면서 싸워야 한다.
콰아앙!
라온은 지그하르트에서 배웠던 검술의 묘리를 펼치며 본능처럼 휘두르는 녹전귀의 도끼를 막아섰다.
라온과 오크의 본능을 두른 괴물은 근접거리에서 수없이 검과 도끼를 나누었다.
* * *
"뭐, 뭐야."
버렌이 눈을 부릅뜬 채 턱을 덜덜 떨었다.
'이게 뭐냐고….'
바로 눈앞에서 검과 도끼를 나누는 두 괴물의 전투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지, 지금 몇 번을 휘두른 거지?'
검과 도끼의 궤적조차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실력 차이가 난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격이 다르다는 뜻이었다.
후우웅!
녹전귀의 도끼가 벼락처럼 떨어져 내린다.
꿀꺽.
마른침이 절로 삼켜졌다.
저 도끼가 자신의 머리 위로 내려왔다면 그 순간 몸이 반쪽났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니, 팔뚝에 오싹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하지만 라온은 검으로 반원을 그려 도끼를 그대로 흘려보냈다.
콰아앙!
떨어진 도끼가 대지를 뭉갰다. 갈라진 땅에서 붉은 기운이 터져 나왔다.
"저, 저거…."
버렌이 손가락을 펼쳐서 땅을 긁었다.
'연성검이잖아!'
지그하르트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기본 검술 연성검. 라온은 그 연성검만으로 저 막강한 도끼를 막아내고 있었다.
놀랍다 못해 경악스러워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많이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라온의 노력에 감명을 받은 뒤 전력을 다해서 육체와 정신을 키웠다. 이제 그의 등까지 다가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아까 녹전귀의 팔을 베었던 검. 그리고 지금 보여주는 라온의 무력은 이미 수련생의 수준을 한참 넘어서 있었다.
"봤지?"
옆에서 들린 탄식 같은 숨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마르타가 숨을 몰아쉬며 다가와 있었다.
"저게 저놈의 진짜 무력이다."
마르타는 눈매를 좁힌 채 녹전귀와 동격의 전투를 벌이는 라온을 노려보았다.
"저 녀석이 우리에게 보여준 건 빙산의 일각밖에 되지 않았어."
지금까지 라온이 무력을 숨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과 버렌, 루난. 셋이 덤벼도 일격에 밀려났던 녹전귀와 맞먹는 실력을 선보일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겠어.'
마르타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이번 임무. 모든 것은 라온의 손아귀에 있었다. 상황은 그가 말한 대로 움직였고, 그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
이제 남은 건 저 괴물을 꺾는 것뿐이었다.
"하아…."
여유를 찾은 루난이 부러진 검을 들고 다가왔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힘겹게 버티는 듯한 라온이 어렸다.
꾸욱.
입술을 꽉 깨물고 전투에 참여하려 할 때 그녀의 앞을 마르타가 막았다.
"아서라. 네가 들어가는 순간 갈기갈기 찢겨질 거다."
"도와줄 수 있어."
"그전에 네가 죽는다고."
"상관없어."
루난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들어선 건 힘겹게 도끼를 피하는 라온의 모습뿐이었다.
'이 녀석….'
마르타가 눈매를 좁혔다. 저곳의 위험을 알면서 들어가려 하다니, 라온을 그냥 따라다녔던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조금만 참아라."
"뭐?"
"저 녀석…."
마르타가 라온을 가리켰다. 새빨간 벼락이 꺼꾸로 치솟은 듯한 눈. 그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대련에서 나를 이겼을 때의 눈을 하고 있으니까."
* * *
"크흐!"
녹전귀는 투기를 펼쳐내며 이를 드러냈다.
"이제 힘이 달리는 모양이지?"
"...."
라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검술을 펼치고, 도끼를 막아내는 것에만 집중했다.
'살기가 더 짙어지고 있어.'
오크 투사의 갑주를 땅따먹기로 차지한 건 아닌지, 놈은 상반신의 4분지 1이 날아갔음에도 힘이 넘쳤다. 진정 미쳤다는 말이 나올 맷집이었다.
'아까 끝냈어야 했는데.'
라온이 혀를 찼다. 오랜만의 암살이라 살기를 완전히 숨기지 못했다. 상황이 아쉬웠다.
"네놈은 특별해. 그 나이를 생각한다면 대륙 제일의 천재라 불려도 과언이 아니지. 하지만…."
녹전귀의 입꼬리가 초승달처럼 길쭉하게 올라갔다.
"나 역시 특별한 존재다."
놈이 든 도끼의 불꽃이 한층 더 진하게 타올랐다.
후우우웅!
내리치는 도끼에 실린 힘이 이전보다 더 빠르고 매서워졌다.
치이잉!
라온이 검을 옆으로 세워 도끼를 밀어냈다. 이전처럼 흘리기를 쓰려는 때 도끼의 날이 회전하여 검을 짓눌렀다.
"네놈이 사용했던 검술은 이제 모두 파악했다. 기본 검술을 변형시켜서 조금 난해했지만, 이제 다 끝났어."
녹전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라온의 검이 움직일 방향을 미리 읽고, 방어나, 흘리기를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
콰아앙!
검과 도끼가 부딪치며 이전과는 다른 굉음이 터져 나왔다. 힘과 힘의 격돌이었다.
"크…."
라온의 입에서 참던 신음이 흘러나왔다. 도끼에 실린 힘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팔뚝이 바르르 떨렸다.
"그거 알고 있나? 에덴의 간부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거?"
"...."
"내겐 감각이 있다. 네놈의 검이 어디로 어떻게 움직일지 보이는 감각이지."
녹전귀가 히죽 웃으며 도끼를 횡으로 휘둘렀다. 도끼날에 실린 투기가 기묘한 흐름을 만들어내며 라온이 피할 방향을 차단했다.
"너도 누구처럼 말이 많군."
라온이 차게 웃으며 검을 올려 쳤다.
끼이잉!
톱니가 비틀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녹전귀의 도끼가 칼날을 스쳐 땅으로 향했다.
콰아앙!
라온은 무너지는 땅을 박차고 녹전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놀라는 놈의 눈을 향해 검을 그어 내렸다.
촤아아악!
녹전귀의 왼쪽 가슴에서 살벌한 양의 피가 치솟았다.
"끄으윽!"
놈은 마구잡이로 도끼를 휘두르며 뒷걸음질을 쳤다.
"쯧."
라온이 혀를 찼다. 이번에도 놈의 몸을 완전히 베어버리려고 했지만, 힘과 거리가 모자랐다. 성장하지 않은 몸으로 싸우는 건 역시나 쉽지 않았다.
"네, 네놈. 대체 어떻게…."
"네가 내 검술을 읽었듯이, 나도 네 공격 방식을 파악했을 뿐이다."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왜 안 되지? 네놈이 하는 건 나도 할 수 있다."
거짓이 아니다.
놈과 싸우면서 불의 고리를 운용한 덕분에 도끼가 움직일 방향을 예측해냈다. 완벽하진 않지만, 움직임의 반 정도는 파악되었다.
"후욱…."
녹전귀의 가슴에서 피가 멎기 시작했다. 놈의 전신에서 투기의 불꽃이 타올랐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라온 지그하르트다. 이름조차 없는 에덴의 적귀여."
"금발적안. 볼 때부터 불안하더니…."
살기가 유형화되듯 놈의 눈동자에서 붉은 기운이 치솟았다.
"글렌 지그하르트의 피를 강하게 이어받았군."
"뭐?"
"네놈은 위험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기서 죽여야겠다. 에덴의 미래를 위해서."
콰아아아!
녹전귀의 주변으로 퍼져나가던 투기가 양날 도끼에 모여들었다. 도끼가 아니라, 붉은 피로 이루어진 철퇴를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네놈과 그 뒤에 있는 지그하르트까지 모조리 부숴주마."
녹전귀가 이를 바득 갈며 도끼를 들어 올렸다.
라온은 그 막대한 힘을 보고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거대한 기파에 흔들리는 검을 고쳐 잡았다.
"시험해보기에 딱 좋군."
무릎을 앞으로 뻗고, 검을 뒤로 젖혔다.
고오오오!
검극에 타오르던 하나의 불꽃이 파도를 탄 듯 출렁이며 검신으로 흘러내린다.
만화공 십화.
만화공의 두 번째 문이 열리고, 칼날 위에 피어난 열 송이의 꽃이 춤을 추었다.
74화
녹전귀는 라온에게 기습을 당한 순간부터 그를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야생동물이라고 생각이 될 정도로 기척을 죽이는 능력과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검격.
'암살자. 그것도 최상급 암살자 수준.'
지그하르트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다면 암살자라고 생각될 정도의 실력을 가진 괴물이었다.
하지만 놈의 기습은 절반만 성공했고, 자신에게는 오크 투사의 생명력이 있었다.
투기와 생명력을 불태우며 공격에 대비했다. 놈도 기습에 많은 힘을 사용했는지 바로 움직이지 못했다.
시간을 번 동안 투기로 어깨의 출혈을 막고, 힘을 끌어 올렸다.
'다 끝났어.'
어깨 채로 팔을 잃었지만, 한 번을 버텼으니, 놈을 이기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암살자로 키운 놈이니, 정면 대결에선 분명 약할 거라 여겼다.
도끼에 투기를 휘감아 그대로 내리쳤다. 장작처럼 두 쪽을 낼 생각으로 휘둘렀지만, 놈은 그 공격을 가볍게 흘려냈다.
'기습만이 아니라, 다른 쪽에도 능하다고? 저 나이에?'
말이 되질 않는다.
아무리 지그하르트라고 해도 저런 어린놈이 기습에 이어 저런 흘리기를 사용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보통 놈이 아니야.'
녹전귀는 뭔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며 라온을 향해 계속해서 도끼를 내리쳤다.
놈은 막을 공격을 막고, 피할 공격은 피하면서 자신의 도끼질을 모조리 방어했다. 어린놈이 아니라, 산전수전 모두 겪은 검사와 겨루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녹전귀에겐 오크 투사의 후각도 있다. 상대 검술의 약점과 부족한 부분을 파악해서 쫓는 그 능력이 있는 이상 패배는 있을 수 없다.
'됐다.'
이 어린놈의 검격이 모조리 파악되었다. 그 약점을 향해 도끼를 내리쳤다.
콰아앙!
검과 도끼가 맞부딪친 소리가 시원하게 울려 퍼졌다. 만족스러운 손맛. 이제 놈의 목을 가르는 것만 남았다.
비틀거리는 놈을 향해 도끼를 그었다. 놈의 모가지에서 피가 흩뿌리는 모습을 기대하려 할 때 놈의 검이 처음 보는 각도로 꺾여서 들어왔다.
캬아앙!
그 안에 담긴 강력한 힘과 일순간의 방심. 도끼가 밀려나고, 자세가 무너져 내렸다.
"이익!"
재빨리 몸을 가누려 할 때 놈이 먼저 들어왔다. 투기의 기운을 가르고 검을 내리쳐왔다.
퍼어억!
가슴과 갈비뼈가 갈라지는 파육음이 귓가를 울리고, 지독한 통증이 찾아왔다.
"끄으으윽!"
녹전귀가 피를 토하며 하나 남은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네놈. 대체 어떻게…."
"네가 내 검술을 읽었듯이, 나도 네 공격 방식을 파악했다."
"그,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왜 안 되지? 네가 하는 건 나도 할 수 있다."
마른침이 넘어갔다.
옅게 피어나던 위험의 냄새가 점점 지독해졌다. 수많은 인재 중에서도 보지 못한 재능. 저놈이 더 강해진다면 에덴 최대의 적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놈을 죽여야 했다.
고오오오!
남은 투기와 생명력을 불태워서 도끼에 휘감았다. 양날 도끼의 날이 불에 담긴 듯 진하게 타올랐다.
"크아아아아!"
라온이라는 놈과 그 뒤의 지그하르트까지 모조리 제거하기 위해 도끼를 내리찍으려는 찰나.
빠직.
놈의 눈동자가 새빨갛게 타올랐다.
화아아악!
그가 '만화공 십화'라고 중얼거리자, 검 끝에서 타오르던 작은 불씨가 검날 위로 퍼지며 화염의 꽃 열 송이가 피어났다.
"아…."
그 불꽃을 본 순간 심장이 콱 조여들었다. 지혈해놓은 가슴의 상처가 다시 터져 나왔다.
놈이 불꽃으로 타오르는 검을 겨누며 악귀 같은 눈을 번쩍였다.
"십화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는 걸 영광으로 생각해라."
* * *
화르르륵!
라온은 검 전체를 휘감은 불길을 보며 두 눈을 빛냈다.
'성공했군.'
아직은 무리라고 생각했지만, 실전에서 얻은 깨달음 덕분에 십화를 이뤄낼 수 있었다.
고오오오!
힘이 넘쳐난다. 정상적인 녹전귀라고 해도 베어낼 힘이 검 위로 용솟음쳤다.
"끄으…."
눈앞에 있는 녹전귀의 경악이 투구를 뚫고 전해졌다.
"네, 네놈은 대체 무엇이냐! 어찌 그 나이에…."
오크 투사로서 가지는 본능조차 이겨낸 놀라움인지 그의 목소리가 인간처럼 돌아갔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라온은 불길에 휩싸인 검을 휘돌리며 한 걸음 걸었다.
"와라."
"흐욱…."
녹전귀의 투구에서 허연 김이 빠져나왔다. 가진 모든 기운을 도끼를 쥔 오른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콰앙!
땅을 박차고 공간으로 파고들었다. 그대로 내리치는 양날 도끼. 놈이 가진 모든 기운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치이이잉!
라온은 도끼가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 젖혀두었던 검을 내질렀다.
만화공 십화.
염권풍.
검신 위에 똬리를 튼 꽃송이들이 길게 펼쳐지며 회전한다. 검날을 탄 화염의 용오름. 그 강렬한 화력이 혈귀의 투기를 갈랐다.
콰아아아아!
열 개의 불꽃에 이르러야만 사용할 수 있는 만화공의 검술 염권풍의 위력에 녹전귀가 이를 악물었다.
"아직이다! 네놈만큼을 무조건…."
"아니, 이미 끝났어."
라온은 담담하게 중얼거리며 검을 그었다.
촤아악!
이미 찢겨나간 투기는 십화의 불길을 이겨내지 못했다. 불꽃이 담긴 은빛 칼날이 녹전귀의 심장을 꿰뚫었다.
"끄윽, 너, 너 지그하르…."
녹전귀는 마지막 말을 맺지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캬아앙!
놈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진녹색 투구와 갑주가 반으로 갈라져서 쪼개졌다. 그 안에는 인상이 강해 보이는 20대 청년이 눈을 까뒤집은 채 죽어 있었다.
후우욱.
라온이 십화의 불꽃을 꺼뜨렸다.
"후욱…."
피로가 한순간에 몰려와 탁한 숨이 흘러나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 당장에 주저앉고 싶었지만, 꾹 참고 뒤를 돌았다.
경악, 전율, 안도, 경외 등 수련생들과 마을 사람들의 다양한 감정이 담긴 시선이 그대로 느껴졌다.
"너…."
"라온."
"너란 새끼는 정말이지…."
버렌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떨었고, 루난은 본인이 더 긴장했는지 주저앉았으며, 마르타는 당장에 달려들 것처럼 눈을 빛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라온은 검을 들어 올려 넋이 나간 녹귀들을 가리켰다. 녹전귀가 패할 거라곤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는지 놈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모조리 쓸어버려!"
"우와아아아!"
라온의 승리에 기세가 하늘 끝까지 올라간 수련생들은 전장을 둘러싸고 있던 녹귀들 향해 돌진했다.
"후우…."
라온은 불의 고리를 회전시켜 육체에 내려앉은 피로를 녹이고, 단전에 오러를 채워나갔다.
'역시 대단하다니까.'
불의 고리의 진정한 효과는 전투 전과 전투 중만이 아니라, 전투 이후에 나타난다.
소모한 오러가 급류를 탄 배처럼 솟구치고, 근육에 가득 쌓인 젖산이 녹아내렸다.
특히 이제 막 발광을 시작하려는 마나 회로 내부의 냉기마저 막아준다. 여러모로 최고의 연공법이었다.
'이것도 웃기는 일이군.'
전생에서 저 에덴과 부딪친 이후 도망치다가 불의 고리를 얻었으니, 웃기다면 웃긴 일이다.
반대로 아버지와 누나의 목숨을 가져간 원수이기도 하지만.
"이야아아아!"
"녹귀들을 모조리 베어라!"
"싸움을 끝내!"
라온이 당당히 서서 노려보고 있으니, 녹귀들은 감히 덤벼들거나, 도망치지 못하고 수련생들에게 그대로 목을 헌납했다.
전투는 10분이 채 지나기 전에 끝났고, 목책 앞에 남은 사람은 수련생들밖에 없었다.
"라온."
마지막 녹귀를 베어버린 루난이 달려와서 어깨를 잡았다. 본인 나름대로 잘했다는 표현 같았다.
"라온 지그하르트."
뒤를 이어 버렌이 다가왔다.
"후우, 네, 네 말이 맞았다. 적은 강했고, 우린 약했어. 한 번의 승리에 도취 되어서 내가 눈이 멀었던 것 같다. 미안하다."
그는 입술을 꽉 깨문 채 허리를 굽혔다. 복종의 의미라고 생각될 정도로 깊게.
"네가 아니라면 우리만이 아니라, 지켜야 할 마을 사람들까지 죽었겠지.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다만…."
버렌이 고개를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난 갔을 거다. 힘이 모자르다고 해도 불의를 넘기는 건 내가 생각하는 지그하르트 검사의 모습이 아니니까."
"잘했어."
라온이 버렌의 녹색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너희가 전력을 다해서 싸워준 덕분에 녹전귀의 틈을 노릴 수가 있었지. 이 승리에는 너희의 공이 커."
"무, 무슨 의도냐! 내게 뭘 원하는 거야!"
생각지도 못한 칭찬을 들었기 때문인지 버렌이 긴장하며 손가락을 떨었다.
"진심이다."
"으음, 다, 다음엔 이렇게 되지 않을 거다."
버렌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중얼거렸다.
"미래의 너를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힘을 키워 내 역할을 똑똑히 해낼 거다!"
그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목숨을 구해주어서 감사하다는 의미와 깨달음을 얻게 해줘서 감사하다는 뜻이 동시에 담긴 인사였다.
"나와 모두의 목숨을 구해주어서 고맙다."
그 말을 끝으로 버렌은 방계들과 마을로 들어갔다. 바로 목책 제건 작업을 시작하려는 것 같았다.
이 상황에서도 마을을 생각하다니, 역시나 녀석은 리더에 어울리는 인재였다.
"마르타."
라온은 팔짱을 낀 채로 가만히 서 있는 마르타를 불렀다.
"수고했다. 네가 제 역할을 해준 덕분에 싸움을 쉽게 가져갈 수 있었어."
마르타가 녹전귀의 시선을 끝까지 가져가지 않았다면 기습에 실패해서 놈과의 싸움이 훨씬 더 거칠어졌을 거다.
그녀는 지시 그 이상으로 잘해주었다.
"시키는 대로도 못 하면 혀 깨물고 죽어야지."
마르타가 입꼬리를 살랑살랑 움직이다가 고개를 홱 돌리고 마을로 들어갔다. 말과는 달리 칭찬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하아…."
라온이 숨을 내뱉었다. 완전히 긴장이 풀렸기 때문일까. 육체의 피로와 상관없이 다리에 힘이 풀렸다.
턱.
뒤로 넘어지려는 순간 등 뒤에서 부드러운 감각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루난이 등을 잡아주고 있었다.
"쓰러질 것 같았어."
그녀는 고개를 꾸벅였다.
"그걸 어떻게 알았는데?"
"수련을 했을 때와 같았으니까."
루난이 입을 다문 채 턱을 끄덕였다.
"그러냐."
자신이 이들을 봐온 것처럼 이들도 자신을 잘 봐왔던 것 같다.
"후."
라온이 픽 웃으며 주저앉았다. 그동안 너무 긴장했던지 잠이 쏟아졌다.
[극한의 전투….]
눈앞에 몇 가지 메시지가 떠올랐지만, 볼 기운이 없었다. 그대로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75화
라온은 늦잠을 잔 듯한 개운함을 느끼며 눈을 떴다. 낯선 천장 아래 여러 개의 메시지가 올라와 있었다.
[극한의 전투에서 한계를 넘어선 능력을 발휘하셨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포인트 상승합니다.]
[자신보다 격이 높은 상대를 꺾으셨습니다.]
[칭호 <꺾이지 않는 자>가 생성되었습니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에게 기습을 성공시키셨습니다.]
[특성 <암습>이 생성되었습니다.]
전부 좋은 의미의 메시지들이었다.
"으음…."
라온이 눈을 깜빡이며 상체를 일으켰다. 처음 보는 통나무집 안. 아직 세부 마을에 있는 것 같았다.
"이게 다 뭐지?"
다시 한번 메시지들을 확인해 보았다. 녹전귀와의 전투 덕분에 얻은 능력치와 칭호 특성들이었다.
-그런 허접한 놈을 잡았다고 이런 보상을 주다니….
라스는 보상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이를 갈았다.
-그저 근성만 있는 멍청이일 뿐이었는데, 능력치에 칭호, 특성까지 주다니. 어처구니가 없도다.
'네 능력이잖아.'
라온은 손바닥을 들어 냉기와 분노를 동시에 일으키는 라스를 밀어냈다.
-젠장! 직접 쓸 때는 몰랐는데, 저건 정말이지….
말을 마치지 않았어도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해가 갔다.
'확실히 사기야.'
라온이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이며 상태창을 불러왔다.
<상태창>
이름 : 라온 지그하르트.
칭호 : <꺾이지 않는 자>.
상태 : 혹한의 저주(다섯 가닥).
특성 : 분노, 불의 고리(4성) 수속성 저항력(4성), 설화의 감각(3성) 만화공(3성), 혹한의 냉기(3성), 화속성 저항력(3성), 블리딩 커스(1성), 암습(1성).
근력 : 57
민첩성 : 58
체력 : 59
기력 : 42
감각 : 64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칭호였다. <최초의 승리>에서 <꺾이지 않는 자로 바뀌어 있었다.
칭호가 바뀌어도 칭호가 가졌던 능력치는 유지되고 있었다. 새로 얻은 칭호를 확인해 보았다.
<꺾이지 않는 자>
강자와 싸워도 꺾이지 않는 정신력을 가진 자에게 주어지는 칭호.
능력 :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싸울 때 모든 능력치 3% 상승.
'이거 진짜인가?'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3% 상승이라고 하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건 성장할수록 특별해지는 능력이다.
특히 앞으로 만날 상대들 대부분이 자신보다 강할 테니, 거의 항상 유지된다고 봐도 되는 칭호였다.
'그럼 다음으로….'
두 번째 새로 생겨난 특성 <암습>을 보았다.
<암습(1성)>
기습이나 암살을 시도할 때 기척이 감소하고, 적에게 치명상을 입힐 확률이 증가한다.
'암살용 특성이군.'
기척을 죽이고, 치명상 확률을 높이는 암살용 특성이었다.
'이게 이전에 있었다면….'
녹전귀는 자신이 검을 내리치기 전에 이미 기척을 파악했었다.
만일 이 특성을 미리 가지고 있었다면 놈을 일검에 베어버릴 수도 있었을 거다.
'뭐, 그랬다면 이 능력들을 얻지는 못했겠지만.'
힘겨운 싸움을 겪은 이후에 한층 더 강해졌으니, 전화위복이라는 게 바로 이런 때에 쓰는 말이다.
라온은 상승한 능력치를 확인한 뒤 상태창을 껐다.
'네 덕분에 날이 갈수록 강해지네. 고맙다'
-끄으….
상태창을 보지 못한 라스가 푸른 눈을 겨누고 있었다.
-네놈은 절대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네놈의 육체를 씹고, 씹고, 또 씹은 뒤 평생 고통에 살게 하리라.
'가능하면 얼마든지.'
이미 최악의 죽음을 겪고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는 라온에게 라스의 분노와 협박은 웃으며 넘길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으윽…."
라온이 기지개를 펴고 일어섰다. 능력치가 올랐기 때문인지 육체의 근육통도, 머리를 울리던 두통도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덜컥.
문을 열고 나가니, 기절할 때처럼 하늘이 껌껌했다. 아무래도 하루내내 잠에 빠져 있었던 모양이다.
"다시 만들었군."
수련생들이 모두 함께 움직였는지 무너졌던 마을의 목책은 이전보다 더 높고 단단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라온?"
놀란 목소리에 뒤를 돌자, 루난이 맹하니 서 있었다. 세숫대야를 들고 있는 걸 보니, 방에 오는 길이었던 것 같다.
"괜찮아?"
"그래."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푹 자고 일어났더니, 완벽하게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럼 가자."
"어딜?"
"저녁. 모두 모여 있어."
그녀가 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다.
"음…."
라온이 배를 쓰다듬었다. 하루 이상 아무것도 먹지 않았더니, 허기가 지긴 했다.
"알겠어."
"응."
라온은 루난의 뒤를 따라 마을 중앙으로 향했다. 가운데에 큰 화로에서 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마을 사람들과 수련생들이 모여 있었다.
몇 명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경계를 서고 있는 것 같았다.
"어? 라온!"
"라온 님!"
"라온 지그하르트!"
"으, 은인이 일어나셨다!"
"은인!"
화로 주변으로 둥글게 앉아 있던 수련생들과 마을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모, 몸은! 몸은 괜찮은 거냐?"
"이상은 없습니까?"
"일어나셔서 다행입니다!"
버렌이 가장 먼저 뛰어와 눈을 크게 떴고, 그 뒤로 다른 수련생들도 쫓아와 걱정으로 가득 찬 눈으로 라온을 살폈다.
"은인!"
"마을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은인!"
"저희 마을을 위해서 그렇게 싸워주시다니…."
촌장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도 달려와 무릎을 꿇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
라온은 그들 모두를 지켜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모두의 눈.
그 눈에 담겨 있는 감정들이 피부에 와닿았다. 감사, 고마움, 보답, 경외.
수련생들의 눈빛에서는 부끄러움과 고마움, 경의, 열망, 동경 등이 느껴졌다.
열망은 질시와 비슷한 눈빛이었지만, 그와 전혀 다른 감정이다.
그들은 라온을 질투하는 게 아니라, 그처럼 되고 싶다는 감정을 마음에 담고 있었다.
그 뒤를 쫓고, 그 검을 추구하는 롤 모델로 라온을 고른 것이다.
"...."
라온은 가슴 깊숙하게 다가오는 사람들의 눈빛을 받아들였다.
가슴이 뛴다.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심장을 휘감았다.
전생에서 암살자로 살아갈 때 감사와 인정, 동경의 감정 따윈 받은 적이 없었다.
그저 삶과 죽음만이 존재했다.
로베르트 가문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사람을 죽이고, 정보를 캐내도 그 인정과 보상은 데루스 로베르트를 비롯한 양지의 인간들이 받았다.
나의 삶에서 이러한 인정을 받은 것은 처음.
검술이나, 오러를 수련하면서 느끼는 성취감과는 다른 전율이 일었다.
다시 모두를 보았다.
마을 사람들은 감사하다 외치고, 수련생들은 동경과 감탄이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걱정했다.
'그래. 앞으로는….'
라온이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앞으로의 삶은 암살자가 아닌, 검사의 삶. 이런 모습을 수도 없이 보게 될 것이다.
욕심이 난다.
더 큰 인정을 그리고 더 동경의 눈빛을 받고 싶다는 욕망이 뭉클 솟아올랐다.
앞으로는 더….
* * *
라온은 식사를 끝낸 뒤 촌장을 찾아갔다. 촌장은 어쩔 줄을 몰라 허리를 푹 굽힌 채 고개를 숙였다.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겠습니까?"
"무, 물론입니다!"
굼벵이처럼 몸을 말은 촌장을 일으키고,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마을을 습격한 놈들이 누구인지는 알고 계십니까?"
"아, 예. 몬스터를 조종하는 에덴이라는 놈들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작은 마을에도 에덴의 악명은 퍼져 있었다.
"그런데 그런 놈들이 왜 여기를 노렸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작은 마을인데…."
촌장은 이상하다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놈과 싸우면서 들은 건데, 혹시 세부 산에서 붉은 보석 하나를 구해오시지 않았습니까?"
"붉은 보석? 아, 있습니다. 제가 젊을 때 산에서 발견해서 마을로 가지고 왔지…서, 설마!"
"네. 놈들이 노린 물건이 바로 그 보석입니다."
라온의 말에 촌장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그, 그럼 그 돌 때문에 이 난리가 난…."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촌장이 스스로 보석을 넘길 수 있도록 여기서는 솔직하게 말을 해줘야 한다.
"내가, 내가 마을을 망하게 할 뻔했다니! 아이고! 내가!"
촌장은 바닥에 주저앉아 땅을 치기 시작했다.
"그 보석이 마을에 있는 한 에덴의 귀신들이 계속해서 찾아올 겁니다."
"보석을 땅에 묻은 이후부터 땅이 비옥해지고, 냉기가 줄어들어서 수호신처럼 모셔놨는데, 그런 일이…."
촌장의 말을 들으니, 더 확실해졌다. 고블린 왕은 강한 화속성을 지닌 몬스터. 놈이 남긴 보물이니, 마을을 따끈하게 데워주었을 것이다.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이라도 보석을 버려야…."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예? 은인께서?"
"에덴은 대륙의 인간을 지우려는 악랄한 놈들입니다. 버린다면 결국 놈들의 손에 넘어갈 가능성이 높으니, 제가 지그하르트로 가져가겠습니다."
"또 그런 실례를 범할 수는 없습니다."
"괜찮아요. 그게 지그하르트의 길이니까요."
"아아!"
라온은 버렌이 할 법한 대사를 읊었다. 감동했는지 촌장의 눈동자가 이슬처럼 반짝거렸다.
"지그하르트는 또 한 번 저희에게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베풀어주시는군요."
"또 한 번?"
"예. 현 가주이신 글렌 지그하르트 님께서 몇십 년 전에 저희 마을을 구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은인보다 조금 더 많았을 겁니다."
촌장은 옛날을 생각하는 듯 턱을 올려 노란 별이 가득한 하늘을 보았다.
"가주님이요?"
"예. 은인처럼 마을 전체를 구하시고, 미소를 지으시며 친절하게 대해주셨습니다."
"음…."
라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친절과 미소라….'
지금 글렌의 얼굴을 생각해보니, 전혀 상상되지 않는 그림이었다.
"어이구, 이 노인네가 쓸데없는 옛이야기를 했군요. 이쪽으로 오시죠. 바로 드리겠습니다."
촌장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동쪽에 있는 본인의 집으로 향했다.
'그 사람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군.'
라온은 얼음덩이 같은 글렌의 미소를 상상하며 촌장의 뒤를 따라갔다.
* * *
촌장의 집은 라온이 깨어났던 서쪽 끝이었다. 보통 촌장 집은 중앙에 있기 마련인데, 끝에 있는 건 의외였다.
"여기가 촌장님 집이었군요. 실례했습니다."
"어휴! 아닙니다!"
촌장은 라온에게 손을 저었다.
"그런데 보통 촌장님들은 마을 중앙에 살지 않으십니까?"
"전 처음부터 여기에 살다 보니, 정이 들어서 떠나기 뭣하더군요."
촌장은 볼을 긁적이면서 집의 마당으로 향했다.
"이곳에 묻어놓았습니다. 마을을 따뜻하게 덥혀주어서 복이 찾아왔다고 생각했는데, 흉이었군요."
그는 마당에 있는 작은 밭을 파기 시작했다. 거의 30분가량 땅을 파고 나서야 검은색 천에 쌓인 무언가를 꺼냈다.
"그 천은…."
"저희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온 보자기입니다. 이 돌이 진한 붉은빛을 내뿜어서 보이지 않도록 감싸 놓았습니다."
촌장은 그렇게 말하며 천을 풀었다.
화아아아!
후덥지근한 열기와 함께 강렬한 붉은빛이 어둑한 텃밭을 밝혔다. 거대한 불길을 피운 듯 세상이 밝아졌다.
'이게 고블린 왕의 마석….'
이 마석이 에덴에게 주어진다면 고블린 왕의 능력을 가진 새로운 괴물이 탄생하게 될 것이다.
"어르신. 일단 그걸 다시 그 천에 감…."
"그래서였군."
보석을 다시 감추라고 말을 하려 할 때였다. 우측에서 침착하고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헉!"
라온이 촌장의 앞을 막아서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전장의 장수가 이러할까?
거칠고 사나운 인상에 육체는 흉터로 가득했다. 덩치가 굉장히 컸는데, 그 큰 체격으로 가느다란 목책을 밟고 있는 모습이 이질적이었다.
가장 시선을 끌어 모으는 건 눈이다. 샛노란 눈빛에서 머리털을 쭈뼛 서게 만드는 광기가 느껴졌다.
'느끼지도 못했는데?'
저런 덩치가 이곳까지 올 동안 감각에 잡히지 않았다니, 보통 고수가 아니었다.
"넌 누구냐."
"나? 글쎄?"
중년인이 손가락을 튕기자, 그의 눈앞에 녹색의 투구가 생겨났다. 둥그런 두상에, 위아래로 거대한 뻐드렁니가 드러났고, 머리 위엔 외뿔이 하나 돋아 있었다.
오우거.
숲과 산의 제왕이라는 몬스터의 얼굴이 새겨진 투구가 남자의 손에서 빙그르르 돌아갔다.
"내가 누굴까?"
76화
오우거.
강력한 근력과 민첩성에 지능까지 뛰어나 숲과 산의 폭군이라 불리는 몬스터다.
흉폭함으로는 몬스터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라, 테이밍을 건 마법사를 역으로 죽이는 일도 잦았다.
몬스터의 힘을 운용하는 에덴에도 당연히 오우거의 특성을 이어받은 괴물이 있었다.
광혈귀.
피에 미친 귀신이라는 뜻의 이름은 흉폭함과 광기를 자랑하는 오우거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광혈귀인가?"
라온이 입술을 짓씹었다. 입술에서 흘러나온 피가 턱을 스치는 게 느껴졌다.
"아무리 지그하르트의 새싹이라고 해도 한 눈에 이 투구를 바로 알아보다니, 보통 눈썰미가 아니야."
광혈귀는 키득거리며 돌리던 투구를 손아귀에 잡았다.
"거기다 무력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가 없군. 역시 네가 녹전귀를 베었나?"
"...."
라온은 대답하지 못하고 손을 떨었다. 광혈귀의 무력은 지금의 자신으로는. 아니, 이곳 모두의 힘을 합쳐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너 같은 놈이 왜 여기에…."
"녹전귀에게 임무를 넘긴 게 나였으니까. 그리 쉽게 갈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
광혈귀가 키득 웃으며 일어섰다. 거대한 키. 목책 위에 철탑이 솟아오른 것 같았다.
"그 천. 다르크라는 물건이다. 내부의 기운을 감춰주는 특별한 효능이 있지. 영감. 운이 좋았어. 그걸로 감싸지 않았다면 이 마을은 처음부터 잿더미가 되었을 거야."
광혈귀는 고블린 왕의 마석을 감싼 천을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뭐, 덕분에 나한테까지 순서가 돌아왔지만."
그가 솥뚜껑만 한 오우거의 투구를 머리에 착용했다.
당연히 맞지 않았지만, 오러를 운용하자 투구에서 기이한 울림이 일어났다.
기이잉!
내부의 무언가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투구의 크기가 광혈귀의 머리에 맞게 축소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투구에서 녹색 쇳물이 쏟아져 광혈귀의 몸을 뒤덮었다. 바위만 한 근육이 도드라진 오우거의 갑옷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틈이 없어.'
라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공격하고 싶었지만, 광혈귀에게선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쿠구구구!
비어있던 투구의 눈에서 광기가 어린 빛이 솟구치자, 순간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라온 지그하르트.
간신히 버티고 있을 때 팔찌에서 라스가 솟구쳤다. 납을 단것처럼 목소리가 무거웠다.
-솔직하게 말하지. 지금 너에겐 두 가지 선택권이 있다.
'선택?'
-저놈에게 죽거나, 본왕에게 몸을 넘기거나.
진실만을 말하는 듯 라스의 목소리는 진중했다.
-네게 주어진 선택권은 오직 그 둘 뿐이다.
* * *
버렌 지그하르트는 수련생들과 함께 설치한 목책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있었다.
'괜찮군.'
교관들에게 배웠던 방식으로 목책을 지으니, 짧은 시간에 완성했음에도 내구성이 나쁘지 않았다.
오크나 고블린의 공격이라면 어렵지 않게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재료는 대부분 도리안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도움이 되긴 했지만 이런 물건을 왜 가지고 다니는 건지 모르겠다.
"버렌 님. 라온이 촌장과 함께 사라졌는데 괜찮겠습니까?"
바로 뒤에 있던 방계가 버렌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그런데?"
버렌이 뒤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아니, 녀석이 촌장이 주는 보물 같은 걸 챙기면…."
"의미 없다."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희도 알지 않느냐. 라온이 아니었다면 우리만이 아니라, 이 마을 전체가 피에 잠겼을 거다. 녀석이 무엇을 받든, 무엇을 배우든 우리에게 발언권은 없어. 그리고…."
진심이 담긴 목소리에 방계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우리 모두는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걸고 있다. 내부에서 강해지기 위한 경쟁이라면 모를까. 밖에서는 다툴 필요도 질시할 필요도 없다. 너희들도 어느 정도 깨달았지 않느냐."
"음, 그건…."
"그렇습니다."
방계 수련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이야.'
녹전귀와의 전투를 통해 수련생들은 라온에게 큰 감명을 받은 상태였다. 솔직히 이젠 질시나, 질투도 느껴지지 않았다.
"버러지들도 이제야 정신을 좀 차린 모양이네."
"마르타?"
한심함이 담긴 목소리에 버렌이 고개를 들었다. 마르타가 목책 옆 나무 위에서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지?"
"너희들이 목책을 제대로 만들었는지 확인해보려고."
"그래서 목책의 상태는?"
"허술한 놈들치고는 나쁘지 않네. 그래도 대가리가 아예 돌은 아닌가 봐?"
"확인했으면 사라져라. 여긴 우리가 마무리할 테니."
"내게 명령할 수 있는 건 한 명뿐이야."
마르타는 코웃음을 치며 나무에서 내려왔다. 그녀가 버렌에게 다가가려 할 때 안쪽 수풀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거기 나와!"
버렌과 마르타가 자세를 낮출 때 수풀에서 은빛 머리칼의 소녀가 불쑥 솟구쳤다.
"루난?"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열매."
루난이 들고 있던 바구니를 보여주었다. 노랗게 잘 익은 금색 사과가 담겨 있었다.
"그걸 여기서 왜 따는데?"
"라온 주려고."
"마을 사람들이 따 놓은 거 있잖아."
"이게 신선해."
루난은 멍한 눈으로 조곤조곤 답했다.
"누가 보면 이미 결혼한 줄 알겠어."
마르타가 차가운 눈으로 이죽거렸지만, 루난은 별 반응 없이 바구니를 챙겼다.
"갈게."
그녀가 그대로 떠나려고 할 때였다.
콰아아아앙!
마을 외곽에서 지축이 뒤틀리는 듯한 어마어마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뭐, 뭐야!"
"이게 무슨…."
"저긴…."
머리를 감싼 채 주저앉았던 버렌, 루난, 마르타가 눈을 부릅떴다.
"라온."
"라온과 촌장이 간 방향이다!"
루난과 마르타가 먼저 움직였다.
"긴급 상황이다! 너희들은 무기를 챙겨서 다른 수련생들을 불러와!"
"예!"
버렌이 두 사람을 쫓으며 지시를 내렸다.
쿠우우웅!
모두가 라온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려 할 때 다시 한번 터져 나온 막강한 기운이 마을 중앙까지 이어졌다.
콰아아아!
주저앉는 건물들 사이에서 무언가를 안고 있는 금발의 소년이 튕겨 나왔다.
"어?"
"헉!"
루난과 마르타는 바닥을 구르는 소년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라온?"
"라, 라온 지그하르트!"
그 아이는 라온이었다. 그는 녹전귀를 상대할 때보다도 더 긴장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루난!"
라온이 루난의 이름을 부르며 품에 안고 있던 무언가를 던졌다.
"으응."
루난은 앞으로 달려가 라온이 던진 걸 받아냈다. 그건 이마에 피를 흘린 채 정신을 잃은 촌장이었다.
"루난. 마르타. 오지 마! 당장 여길 벗어나!"
그의 표정은 다급하다 못해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너 대체…."
마르타는 라온에게 다가가다 말고 멈춰서서 서쪽을 바라보았다.
쿵!
대지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사나운 걸음이 허공을 메운 모래 먼지를 갈랐다.
산 그 자체가 인간으로 화한 듯한 녹색의 거인이 다가온다. 팔과 다리의 근육은 바위를 뭉친 듯 단단했고, 샛노란 눈빛에선 광기가 이글거렸다.
"저건…."
"오, 오우거의 갑주…."
산과 숲의 제왕이라 불리는 오우거의 투구와 갑옷을 착용한 남자의 기파에 마르타와 루난의 생각이 멈춰버렸다.
"과, 광혈귀…."
마르타의 입에서 오우거 투구를 착용한 남자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 피 냄새가 흐르는 이름에 공기가 더욱 무거워졌다.
"귀여운 녀석들도 있었군."
"아…."
광혈귀의 투구에서 광기가 스멀스멀 피어난다. 마르타와 루난은 곧 주저앉을 것처럼 다리를 떨었다.
"라온! 이번엔 뭐…헉!"
뒤늦게 달려오던 버렌과 수련생들이 움찔 놀라며 멈춰 섰다. 광혈귀의 기세에 몸이 굳어버린 것이다.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달고 있는 것 치고는 움직임이 늦구나."
"아아…"
"저…."
광혈귀의 눈동자가 누렇게 번쩍였다. 포식자가 뿜어내는 짙은 살기에 수련생들이 가슴을 움켜쥐고 무릎을 꿇었다.
"정신 차려!"
수련생들이 무너지려 할 때 라온의 낭랑한 목소리가 광혈귀의 공포를 뚫어냈다.
고오오오!
라온의 정심한 기운이 퍼져나가자, 수련생들의 어둑해진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그렇게 멍청하게 있다간 전멸이다! 버렌! 수련생들에게 지시를 내려서 마을 사람들을 대비시키고, 마르타와 루난은 뒤로 떨어져서 견제를 준비해!"
"응."
"후우…."
"아, 알겠다. 금방 돌아오마!"
버렌이 이를 악물고 뒤로 뛰었고, 루난과 마르타가 오러를 운용하며 양옆으로 떨어졌다.
"저놈의 주먹에 얻어맞으면 죽는다고 생각해. 절대 정면에서 부딪치지 말고, 나를 보조해."
라온은 광혈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작게 입을 뗐다.
루난과 마르타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리메르 교관이 매번 말했지? 한계를 넘어야 한다고."
라온이 이를 악물며 말을 이었다.
"지금이 그때야. 정신과 육체 모두 한계를 넘어야 할 순간이다."
"한계를 넘는다?"
광혈귀가 히죽 웃으며 손아귀를 움켜쥐었다. 붉은 투기가 치솟으며 공기가 일그러졌다.
"그걸로 될까?"
* * *
치이이잉!
라온은 불의 고리를 회전시켜 긴장을 풀어내며 검을 고쳐 잡았다.
'일격이었지.'
광혈귀가 펼쳐낸 권격을 피했음에도 피부가 터져나갔다. 가히 압도적인 무력. 끝이 보이지 않는 힘이다.
'전생이었어도 힘들어….'
암살이라면 모를까. 정면으로 싸운다면 전생의 육체로 싸워도 이 괴물을 이긴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어떻게 해서든 빈틈을 노려 놈의 목을 베어야 한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다.
끝을 모를 절벽이 인간이 된 것처럼 자그마한 틈도 보이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덤빌 것처럼 굴더니, 안 오는 거냐?"
광혈귀가 턱을 치켜든 채 히죽 웃었다.
"네가 오지 않는다면 내가 가마!"
놈이 대지를 뭉개며 발을 굴렀다. 순식간에 시야 전체가 광혈귀로 가득 찼다. 말도 안 되는 속도였다.
후웅!
초고속으로 다가온 광혈귀가 주먹을 내뻗어온다. 머리를 노려오는 바위만 한 주먹을 향해 검을 내리그었다.
만화공 십화.
회천.
대기를 가르는 화염이 검이 광혈귀의 주먹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화력 하나는 좋구나!"
광혈귀가 흥겨운 목소리를 흘리며 주먹을 비틀었다. 새빨간 투기가 피어나 회천과 그대로 부딪쳤다.
쿠와아앙!
검을 휘감은 불길의 불꽃의 뱀이 광혈귀의 오러에 짓눌려 사그라들었다.
"흐읍!"
라온의 눈동자가 일그러졌다. 회천의 검격을 지워버린 광혈귀의 주먹이 그대로 심장을 노려왔다.
"크아아아!"
악을 내지르며 검을 비틀었다. 광혈귀의 주먹이 검면을 따라 옆으로 흘러내려 갔다.
콰아앙!
무시무시한 파공음이 터지며 우측 건물들이 폭삭 무너져내렸다.
"허억!"
라온이 숨을 돌리며 뒤로 물러섰다. 공격을 흘렸음에도 어깨가 빠질 것처럼 아려왔다.
'진짜 죽을 뻔했어.'
이마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불의 고리로 주먹의 흐름을 읽지 못했다면 토마토처럼 터져버렸을 것이다.
옆을 보았다.
루난과 마르타는 어쩔 줄을 모르는 눈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아직 아니야.'
라온은 눈빛으로 그들에게 의사를 전했다. 지금은 움직일 때가 아니라, 관찰할 때라고.
조금이라도 광혈귀의 주먹을 버텨서 저들이 참여하기 전에 놈의 움직임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10% 아니, 1%의 가능성이라도 생긴다.
화르르르!
라온은 다시 십화의 불꽃을 일으켰다. 검극에서 시작된 불꽃이 검신 전체를 휘감았다.
"그래. 주먹 한 번에 꺼지는 불꽃은 재미없지!"
광혈귀가 새처럼 도약해서 주먹을 내리찍었다.
연성검법의 여섯 번째 형을 사용해서 운석처럼 떨어지는 주먹을 쳐냈다.
콰르르르!
광혈귀가 펼치는 붉은 투기에 십화의 불길이 다시 짓눌리기 시작했다.
"강력한 불꽃의 오러. 멍청한 녹전귀가 네게 당한 것도 이해가 갈 정도의 화력이다. 하지만 내게는 통하지 않지. 그 이유를 아나?"
광혈귀가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내질렀다.
"물론이다."
라온이 광혈귀의 주먹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며 검을 내리쳤다.
"네놈의 특성이잖아."
"잘 알고 있군. 맞다. 불꽃으로는 날 벨 수 없다."
광혈귀가 손바닥을 내리치며 키득거렸다. 간신히 피했지만, 그 풍압에 뺨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오우거의 힘을 이어받은 내게 화염의 오러 따위는 의미가 없어!"
놈의 말대로다.
오우거는 화속성에 강한 몬스터. 불화살 수십 대를 맞고도 성을 부수는 괴물이다.
다만 라온이 가진 무기는 만화공만이 아니다.
"그럼 다른 걸 쓰면 되겠네."
"뭐?"
라온의 붉은 눈동자에 시퍼런 냉기가 솟구쳤다.
혹한의 냉기.
그가 쥔 하얀 칼날 위로 바다 같은 푸른빛이 차올랐다.
77화
라온의 검에 어린 혹한의 냉기가 바람처럼 퍼져나가며 대지가 새하얗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얼음? 수속성이라고?"
광혈귀의 노란 눈동자에도 당황이 드러났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강한 화속성 오러에 이어 수속성 오러라니, 네놈 정체가 뭐냐?"
만화공의 화력에 맞먹는 빙결 오러는 광혈귀에게도 신기한 일인 모양이다. 놈의 걸걸한 목소리에 처음으로 놀람이 깃들었다.
"네가 알아서 뭐 하게."
라온은 검을 비틀어 그었다. 검신에 어린 냉기가 빛살처럼 쏘아졌다.
"허, 검기까지?"
광혈귀가 헛웃음을 흘리며 주먹을 내뻗었다. 바위 같은 주먹이 새하얀 검기를 부숴버렸다.
전력으로 쏘아낸 검기가 깨졌지만, 라온의 눈빛은 덤덤했다.
'냉기의 힘은 공격만이 아니니까.'
호수가 얼어붙는 듯한 소리와 함께 광혈귀의 손등 위로 새하얀 얼음이 돋아났다.
"이건…."
광혈귀가 인상을 찌푸리며 얼어붙은 손을 노려보았다. 주먹을 쥐려 했지만, 잘되지 않는 것 같았다.
"속성의 개화까지 한 건가? 정말이지 한계를 모르는 놈이로군."
"...."
라온은 긴장감을 꺼뜨리지 않은 채 다시 혹한의 냉기를 담은 검기를 쏘아냈다.
'방심해서는 안 돼.'
공격이 조금 먹힌다고 방심했다가는 한 방에 머리가 날아간다.
공격하면서도 방어를 염두에 두어야 하고, 끊임없이 보법을 밟아 위치를 변화시켜야 한다.
"이놈…."
광혈귀는 이전처럼 주먹을 날리지 않고, 몸을 회전시켜 검기를 회피했다.
치이잉!
라온은 혹한의 냉기를 극한으로 운용하며 검을 휘둘렀다. 칼날에서 피어나는 차디찬 냉기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우우웅!
바닥이 얼어붙고, 대기의 온도가 내려가며 광혈귀의 움직임이 점차 느려지기 시작했다.
'봐둔 보람이 있군.'
라온이 입술을 깨문 루난을 보았다. 그녀가 서리를 뿌리는 방법을 관찰한 덕분에 어렵지 않게 냉기의 오러를 펼쳐낼 수 있었다.
"크으…."
광혈귀는 바닥과 대기에 깔린 냉기와 라온이 뻗어내는 검기를 피하느라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강렬하고 재빨랐던 광혈귀의 주먹이 점차 느려지고, 약해진다.
"끄아아아! 쥐새끼 같은 놈!"
광혈귀가 괴성을 터트리며 주먹을 내질렀다.
후우웅!
라온은 발목을 돌려 그 주먹을 피해낸 뒤 다시 검을 그어 내렸다. 차디찬 검기가 허공을 반으로 갈랐다.
"큭!"
광혈귀가 냉기를 피해 뒤로 물러서며 신음을 흘렸다.
누가 봐도 우위에 선 상황.
하지만 라온의 깊은 눈빛에선 긴장이 사라지지 않았다. 처음 싸움을 시작할 때보다 더한 기세를 두른 채 검을 휘둘렀다.
'아직 기회는 오지 않았어.'
* * *
"헉! 헉!"
버렌은 사람들을 모두 대비시킨 이후 열 명의 수련생과 함께 마을로 돌아왔다.
마을 중앙은 마법 폭격을 맞은 듯 폐허가 되었다. 한쪽에선 불이 타올랐고, 다른 한쪽에선 바닥이 꽁꽁 얼어붙어 있는 기괴한 상태였다.
콰아아아앙!
좌측에서 울린 굉음에 고개를 돌렸다. 아니, 소리가 나기 전부터 고개가 돌아갔다.
검에 푸른 빛을 두른 라온과 광혈귀가 근접거리에서 검과 주먹을 나누고 있었다.
'검기? 저 녀석 언제 소드 익스퍼트에….'
검기를 사용한다는 건 소드 익스퍼트 하급에 올랐다는 뜻이다. 15살에 익스퍼트 하급이라니, 이런 상황에서도 당황스러웠다.
'아니, 잠깐! 라온의 오러가!'
버렌의 경악은 검기로 끝이 아니었다. 라온의 검에서 피어나는 냉기를 보고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냉기라니!'
루난보다 더 서늘하고 날카로운 냉기의 오러. 저걸 지금까지 감추고 있었다는 것에 헛웃음이 터졌다.
'냉기의 오러에 익스퍼트라니. 대체 넌 어디까지 올라간 거냐.'
대륙의 무인들은 강함을 몇 가지 단계로 나누어 놓았다.
검, 창, 궁, 권. 무기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통용되는 단계로 오러에 입문을 하면 비기너라 불리게 된다.
비기너 초급, 중급, 고급을 넘어 오러에 익숙해지면 육체만이 아니라, 무기에 오러를 실을 수 있는 유저의 단계에 도달한다.
유저도 똑같이 초급, 중급, 고급의 단계가 있고, 그 위가 바로 무기에 담긴 오러를 배출할 수 있는 익스퍼트의 경지다.
흔히 말하는 검기를 쓸 수 있는 경지이고, 지금 라온이 위치한 단계였다.
광혈귀는 익스퍼트의 최상급 혹은 마스터로 알려져 있었다.
익스퍼트 하급인 라온이 그보다 훨씬 위에 있는 광혈귀를 밀어붙이는 모습에 가슴에 불이 차올랐다.
"후우."
버렌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괴물….'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주변이 터져나가는 광혈귀보다 그를 상대하는 라온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단순히 두 가지 오러를 사용하고, 어린 나이에 익스퍼트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 때문이 아니다.
검술과 보법.
누구나 알 법한 기본 검술과 보법으로 광혈귀를 상대하는 모습에 오싹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터엉!
라온의 움직임은 표홀했다. 태풍에 걸친 어린 꽃잎처럼 광혈귀가 뻗어내는 풍압을 이용하여 그의 주먹을 회피했다.
경지, 재능을 떠나 어마어마한 노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라온은 노력의 괴물이었다.
'그렇지만….'
라온의 공격은 날카로웠지만, 광혈귀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오직 놈의 오른팔만 새하얗게 얼어붙어 있었다.
'역시 힘의 차이가 나는군. 그럼…어?'
버렌이 두 사람의 전투를 관찰하다가 눈매를 좁혔다. 라온이 검을 내리치며 자신에게 눈길을 주었다.
'저건….'
그래도 3년 넘게 함께 했기 때문일까? 라온이 보낸 눈빛의 의도를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도우라는 뜻이야.'
녀석은 틈을 만들 테니, 함께 공격하자는 눈빛을 보내왔다.
"음…."
양옆을 돌아보았다.
마르타와 루난도 라온의 의도를 읽고, 언제라도 움직일 수 있도록 오러를 빠르게 운용하고 있었다.
'그래. 광혈귀가 별거냐. 우린 지그하르트야.'
주먹을 움켜쥐며 단전에 차오른 오러를 끌어 올렸다. 차오르는 녹색 바람을 느끼며 검을 뽑아 들었다.
'우리가 여길 구하는 거야!'
버렌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라온과 광혈귀의 전투에 집중했다.
언제 어떻게 나가야 할지 모르기에 호흡을 고르며 오러를 끊임없이 운용했다.
두 괴물이 벌이는 전투를 보며 손에 땀이 찰 무렵.
라온의 검격이 광혈귀의 왼손에 적중했다.
빠드드득!
고드름이 돋아나는 듯한 소리와 함께 광혈귀의 손이 꽁꽁 얼어붙었다.
"지금이다! 모조리 쏟아부어!"
버렌은 라온이 말을 하기 전에 이미 몸을 움직였다.
콰앙!
땅을 박차고 검을 세워 광혈귀를 향해 뛰어들었다.
우측과 좌측에서도 같은 소리가 들렸다. 루난과 마르타도 함께 달려온 것이다.
우우우웅!
버렌과 루난, 마르타가 쥔 검에서 각자의 오러가 밤을 지우는 태양처럼 솟구쳤다.
"이…."
광혈귀가 당황한 듯 얼어붙은 양손을 떨며 이를 갈았다.
'이길 수 있어!'
놈의 당황한 얼굴을 보니, 확신이 들었다. 승리가 보였다.
우우우웅!
세 사람이 광혈귀의 급소를 향해 최강의 검격을 쏟아부으려고 할 때였다.
"아…."
"어?"
버렌, 루난, 마르타는 갑작스럽게 무거워진 공기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세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눈을 부릅떴다.
고오오오.
당황으로 가득 찼던 광혈귀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광기가 어렸음에도 정제된 그 눈빛을 본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찌지지직!
광혈귀의 흉악한 미소에 대기가 일그러졌다.
"기다리고 있었다. 벌레들아."
* * *
쿠구구구!
광혈귀는 오러 가득한 주먹을 뻗어냈다. 권격과 함께 뻗어나간 권풍에 바닥이 찌그러졌다.
하지만 라온은 그 권풍을 견뎌내며 검을 날렸다. 냉기가 올라오는 시퍼런 검격을 광혈귀의 어깨에 박아넣었다.
"끄으…."
광혈귀가 노란 눈빛이 터트리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의 속마음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분노도 없었다. 그저 흥미와 기대감만이 가득했다.
'대륙의 역사에 남을 천재라.'
외모와 피부로 볼 때 저 녀석은 아직 10대 중반이면서 검기와 화속성, 수속성 오러를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언젠가 대륙 최강이 될 자질을 가진 천재.
'다만….'
그건 저 아이가 저대로 성장했을 때의 이야기다.
광혈귀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라온이라 불린 괴물을 제외하더라도 뒤에 있는 3명의 아이 역시 평범한 재능이 아니다.
치이이잉!
라온의 검기가 광혈귀의 가슴을 가늘게 베었지만, 그의 심장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밀리는 것처럼 보이는 겉과 달리 실제 그는 가진 힘의 10분의 1도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후우욱.
광혈귀가 투구 밖으로 더운 김을 뿜어냈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저 어린 새싹들의 희망을 짓밟을 기대감에 등골이 오싹했다.
챠아아앙!
라온이 날카로운 검기를 절묘한 순간에 뿌렸다.
"크읍!"
광혈귀는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당황한 듯 왼팔을 저어 검기를 막아냈다.
빠드드득!
새하얀 냉기가 솟아올라 그의 손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모조리 쏟아부어!"
라온의 지시에 옆에서 힘을 끌어 올리던 루난, 버렌, 마르타가 광혈귀를 향해 뛰어들었다.
쿠구구구!
버렌은 검날이 바람을 담았고, 마르타는 대지의 기운을 모조리 쏟았으며, 루난은 칼날 위로 고드름 같은 냉기를 펼쳐냈다.
세 사람은 가지고 있던 모든 오러를 끌어 올려 최강의 검격을 내리쳤다.
우우웅!
라온은 광혈귀를 향해 정면으로 달려가며 푸르게 타오르는 검을 내질렀다.
"캬하!"
광혈귀는 그 위기의 순간에 웃었다. 사냥감이 그물에 완벽하게 걸린 순간이었으니까.
콰아아아!
오우거의 투구 전체가 노랗게 번쩍였다. 그의 손을 가두었던 하얀 얼음들이 깨져나가며 어마어마한 기운이 치솟았다.
"기다리고 있었다. 벌레들아."
지그하르트의 어린 것들이 자신의 빈틈을 노려서 전력으로 달려들 때가 바로 놈들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릴 때였다.
쿠구구구구!
광혈귀의 양손 위로 유형화된 노란 빛이 폭발했다. 거대한 손을 완벽하게 뒤덮은 유형화된 오러.
강기.
마스터의 증명인 강기가 그의 손에서 지옥 불처럼 타올랐다.
"이런!"
"가, 강기!"
공간조차 짓누르는 강기는 같은 강기가 아닌 이상 막을 수 없다.
루난, 마르타 버렌의 안색이 희망에서 절망으로 가라앉았다.
"아…."
"끝이다!"
광혈귀가 흥분이 가득 담긴 웃음을 터트리며 주먹을 내질렀다. 바위만 한 강기가 떨어지며 아이들의 눈빛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너는 어떨까?'
그는 마지막이 될 시선을 금발 꼬마에게 보냈다. 놈이 절망하는 눈빛을 마지막으로 즐기기 위해서.
하지만.
"어?"
광혈귀가 눈을 부릅떴다. 라온의 눈에는 절망도,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덤덤한 눈빛. 그저 적을 죽이겠다는 살의만이 가득했다.
콰아아아!
라온의 칼날 위로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었던 어마어마한 살의가 뒤덮였다.
"기다리고 있던 건 너만이 아니야."
78화
알고 있었다.
광혈귀가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라는 것도, 화속성에 강하다는 것도, 사냥감을 농락하고 죽이는 지저분한 성격이라는 것까지도.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에 놈이 파놓은 함정을 역으로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길 방법은. 아니, 살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고오오오!
광혈귀가 본색을 드러내자, 공기의 무게감이 달라졌다.
쇳덩이가 전신을 내리누르는 듯한 감각. 이를 악물고 암살자 라온의 살의를 모조리 끌어왔다.
찌이이이잉!
살의와 광기가 어린 기파가 경합하며 격이 달리는 버렌, 루난, 마르타가 뒤로 튕겨 나갔다.
이것도 계획대로.
다만 아직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았다.
라온은 세 사람을 광혈귀의 강기에서 벗어나게 한 뒤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몸을 비틀었다.
콰아아아아!
강기에 휘감긴 거대한 주먹이 왼쪽 어깨 주변을 훑고 지나갔다.
뿌드드득!
직격은커녕 스치기만 했음에도 왼팔의 뼈가 뭉개졌다.
"끄읍!"
라온이 부러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초인적인 인내로 고통을 견디며 오른팔로 검을 세웠다.
고오오오!
가진 모든 기운과 살의를 검의 끝에 휘감았다.
"네놈!"
놀람에 눈을 부릅뜬 광혈귀의 심장을 향해 서리 가득한 칼날을 쏘아냈다.
만화공 극점.
만화공의 검결이 혹한의 냉기에 의해 풀려나온다. 창공을 노니는 빙룡이 깃든 듯 은빛 칼날이 푸르게 물들었다.
찌지지직!
푸른 칼날이 오우거 갑주를 가르고 들어가는 관통음이 귓가를 울렸다.
"으…."
하지만 라온의 눈은 밝아지지 않았다. 노을이 진 하늘처럼 점차 어두워졌다.
"망할…."
강철조차 뚫어버릴 검극이 광혈귀의 거죽에 막혀 더 이상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후, 대단하군."
광혈귀가 가슴에 검을 박은 채 순수한 감탄을 뱉어냈다.
"네가 내 덫을 역으로 이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말 죽을 뻔했어. 하지만…"
그의 가슴에 박힌 푸른빛의 검이 캬앙 소리와 함께 부러졌다.
"커헉!"
라온이 피를 토하며 뒤로 날아갔다.
"네가 너무 약했다. 너와 나의 실력 차는 그 정도 기습으로 메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광혈귀가 가슴에 박힌 칼날이 진흙에 박힌 돌처럼 스르륵 빠져나왔다.
'근육에 막혔어….'
라온이 피가 덕지덕지 묻은 입술을 깨물었다. 놈은 피부와 근육을 강화시켜 자신의 검을 막아냈다.
육체의 수발이 자유로운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괴물다운 방법이었다.
"허억."
라온이 뒤로 물러서며 뒤에 있는 버렌, 루난, 마르타 그리고 남아 있던 수련생들을 보았다.
"계, 계획은 끝이다. 모두 도망쳐!"
"라, 라온?"
"야. 너…."
"못 이겨."
지금 이 상태로는 무슨 수를 써도 이기지 못한다. 계획이 무너진 이상 전투는 여기서 끝이었다. 남은 건 도주뿐.
"수석의 이름으로 명한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물러나! 크레인이 찾아간 가문의 지원대가 달려오고 있다. 서쪽으로 달려!"
"라온."
"나, 나도…."
"버렌 지그하르트!"
라온은 입술을 떨며 몸을 일으키던 버렌의 이름을 외쳤다.
"지금 여기서 개죽음을 당하는 게 네가 말한 지그하르트의 길인가? 그렇다면 나와 함께 싸워라. 그게 아니라면 너는 네가 할 일을 해!"
"나, 나는…."
그 말에 버렌이 입술을 깨물었다. 고민을 길었지만, 결정은 짧다.
"후퇴한다. 모두 물러나! 도망치는 데 집중해!"
그는 결국 입술을 뜯어버리고서 몸을 돌려 마을 쪽으로 달렸다. 수련생들이 눈물을 글썽거리다가 버렌의 뒤를 따라 달렸다.
"아…."
루난의 보랏빛 눈망울에 부러진 팔을 부여잡고, 피를 토하는 라온이 잡혔다.
"아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광혈귀에게 돌진하려는 때에 뒤에 있던 마르타가 루난의 목을 후려쳤다.
뻑 소리와 함께 루난이 정신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
마르타는 그대로 루난을 업고, 라온을 보았다. 정말 답이 없냐고 묻는다.
터엉!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몸을 돌려 버렌이 간 방향으로 뛰어갔다.
"…고맙다."
라온이 가늘게 웃었다. 말이 통하는 녀석들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파앙!
광혈귀가 가슴에 박힌 검신을 아예 뽑아버렸다. 피가 흘러내렸지만, 금방 지혈되고,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오우거가 가진 체력과 재생력의 힘이었다.
'망할.'
라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블리딩 커스가 적중되었지만, 지금에선 아무 소용이 없다. 1할이 아니라, 5할이 약해져도 이길 수 없으니까.
"저 벌레들이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광혈귀가 손에든 검신을 과자처럼 으깼다.
"주변에 오우거를 풀어두었다. 놈들은 얼마 지나지 못하고 산채로 뜯어먹히게 될 거다. 아니. 그전에…."
광혈귀가 낄낄 웃으며 라온을 굽어보았다.
"네가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 팔, 그 체력으로?"
"…."
라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광혈귀가 아니라, 팔에 있는 라스를 보았다.
'라스.'
-이제야 본왕의 차례가 왔군.
라스가 연기처럼 스멀스멀 일어섰다. 놈의 기세만큼은 마스터인 광혈귀를 한참 넘어서고 있었다.
-말했듯이 네놈의 무력으로는 저놈을 꺾지 못한다. 육체를 내놓아라. 저놈만이 아니라, 이 공간 자체를 얼려주지.
'후우, 넌 참 착각을 잘해.'
-뭐?
'거래다.'
라온이 피를 토하며 두 눈을 빛냈다.
-거래라니?
'예전에 네가 분노로 거래를 할 수 있다고 했었지. 네 분노를 받겠다. 내 육체와 오러를 정상으로 되돌려라.'
-너….
라스가 불기둥처럼 푸른 냉기를 피워올렸다.
-이 멍청한! 네놈의 무력으로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저놈들 잡을 수 없다! 회복된다고 이길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해. 할 거야 말 거야?'
-끄으….
라온의 단호한 태도에 라스가 뜸을 들이며 이를 갈았다.
-…좋다. 10의 분노를 주고 네 몸을 완벽하게 회복시켜주마. 하지만 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입 닫고 주기나 해.'
-흠!
라스에게서 콧김을 내뿜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놈의 냉기가 몸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흡!"
피부가 냉기에 찢겨 나가는 것 같은 고통에 이가 악물었다.
뿌드드득!
부러진 팔과 갈비뼈가 저절로 맞춰진다. 부러질 때보다 더한 통증 때문에 입술이 덜덜 떨렸다.
"후욱…."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 전생, 현생을 통틀어도 가장 심한 고통 중 하나였다.
"너 뭐냐?"
팔이 저절로 돌아가는 모습을 본 광혈귀가 걸음을 멈추고 눈을 부릅떴다.
"허억…."
라온이 숨을 몰아쉬었다. 바닥 난 단전에 오러가 차오르는 것마저 고통이었다.
다만 진정한 고통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분노>와의 계약에 따라 분노가 10포인트 생성됩니다.]
폐가 마른 장작처럼 우그러들고,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세포 하나하나에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일어났다.
"으어어…."
고통은 둘째치고 육체와 영혼이 어긋나는 기분이다. 끈적하고 사악한 무언가가 몸에 깃든 느낌이었다.
'그래도….'
회복은 확실했다. 정신력은 바닥이지만, 육체와 오러는 평소 이상으로 돌아갔다.
"이해할 수가 없군."
광혈귀가 의문이 담긴 노란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오우거나 트롤의 피를 마신 것도 아닐터. 어떻게 그런 회복력을 가지는 거지? 인지를 벗어난…."
"네놈은 모를 거다."
이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를.
"후우…."
뜨거운 숨을 뱉어내며 땅에 떨어진 다른 수련생의 검을 들어 올렸다.
'라스.'
-뭐냐. 이 건방진 놈아.
'죽을지도 모르는데, 나랑 내기 하나 할까?'
-내기?
'그래. 난 저놈이 죽는다에 걸지.'
-또 미친 소리를 하는군.
'왜, 쫄려?'
-좋다! 얼마든지! 본왕은 네가 육체를 넘긴다는 것에 걸겠다.
라스의 대답을 들은 라온이 광혈귀에게 검을 겨누었다.
"와라. 동이 틀 때까지 놀아주마."
* * *
"허억! 허억!"
마르타는 루난을 등에 업은 채 버렌과 수련생들의 뒤를 따라 달렸다.
모두가 전력으로 달렸기 때문에 앞서가던 수련생과 마을 사람들을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다.
"대, 대체 무슨 일입니까."
"우리는 괜찮겠죠?"
마을 사람들은 나름 빠르게 걷고 뛰었지만, 마르타가 보기에는 답답할 정도로 느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짜증이 돋아올랐다.
"젠장, 젠장…."
버렌은 흔들리는 눈으로 꽉 쥔 주먹을 바르르 떨었다. 앞도 주변도 보지 않고 그저 멍하니 걷기만 했다.
"으…."
"라온 님…."
"아윽!"
그만이 아니라, 다른 수련생들도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눈이 풀려 있었다.
"그 녀석은."
작은 욕과 숨소리만이 들리는 공간에서 마르타가 나지막하게 입을 뗐다.
"우리를 위해 그리고 이 사람들을 위해 그 거대한 괴물 앞에 혼자 섰다."
절망과 분노가 가득 어린 목소리에 모두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팔이 부러지고, 갈비뼈가 나간 지금도 그놈을 막고 있지. 그런데 너희들은 뭐냐."
"뭐?"
"거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놓고, 여기서도 멍청하게 있다가 죽을 셈이야!"
"그게 아니라, 지금 버렌 님도 힘든…."
"아니!"
버렌이 마르타의 앞에선 방계를 막아섰다.
"그 말이 맞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1조는 전방 경계! 2조와 3조는 각각 좌측과 우측을 경계한다. 항상 오러를 운용하여 바로 움직일 준비를 마쳐라!"
그의 빠른 지시에 멍하니 있던 수련생들이 각기의 움직임을 이뤄냈다.
"마르타. 네가 가장 감각이 좋으니, 뒤를 맡아라. 루난은 이쪽에 넘겨."
"흠."
마르타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기절한 루난을 방계 수련생에게 넘겨주었다.
"지금부터 속도를 올린다! 가문의 지원이 달려오고 있을 테니, 최대한 빨리…."
"잠깐."
마르타가 버렌의 말을 끊고 숲이 우거진 우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버렌과 다른 사람들도 홀린 듯 그 시선을 따라갔다.
스스스슥!
강한 바람이 숲을 스치는 듯한 소리. 그냥 지나갈 수 있는 바람 소리였지만, 마르타는 식은땀을 흘리며 검을 뽑았다.
"모, 모두 물러서! 당장 도망…."
그녀가 말을 끝내기 전에 숲이 무너져내리고 4m가 넘는 녹색 괴물이 솟아올랐다.
오우거.
숲의 제왕이라 불리는 흉악한 몬스터가 붉은 눈을 빛냈다.
"아…."
마르타가 마른침을 삼켰다.
'생각을 못 했어.'
광혈귀는 오우거의 힘을 가지고, 오우거를 조종하는 괴물이다. 이곳에 오우거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모, 못 이겨….'
만전일 때라면 모를까. 지금이라면 모두 달려들어도 오우거를 잡는 건 무리다. 그야말로 전멸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크어어어어!"
오우거가 괴성을 내지르며 바위 같은 주먹을 내리쳤다.
"흐아아압!"
"하앗!"
마르타와 버렌이 뛰어들어 오러로 가득 찬 검을 올려 쳤다.
"크르르!"
오우거는 그 둘의 검에 피어난 오러를 보고, 슬쩍 몸을 뺐다.
후우웅!
두 사람의 검이 허공을 베고 힘이 빠졌을 때 다시 달려가 주먹을 내뻗었다.
콰아아앙!
강렬한 기운이 폭발하며 마르타와 버렌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밀려났다.
"끄으…."
"윽!"
두 사람은 비틀거리며 일어섰지만, 힘이 많이 빠진 상태였다.
"젠, 젠장…."
마르타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에 몸을 빼다니, 놈은 듣던 것 이상으로 타고난 사냥꾼이자, 괴물이었다.
"크르르."
오우거가 손에 미약하게 흘러내리는 피를 핥으며 다가온다. 입가에는 노골적인 비웃음이 그려졌다.
"너희들은 먼저 가라! 나와 마르타는 이놈을 잡고 뒤따라가겠다!"
버렌이 떨리는 오른 손목을 왼손으로 다잡으며 외쳤다. 이제 자신의 차례였다.
"버, 버렌 님!"
"빨리!"
"으으…."
도리안이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가 움직이기 전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콰아아앙!
땅을 부수는 듯한 굉음과 함께 좌측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졌다.
두 번째 오우거가 수련생들의 앞을 막아섰다.
"아…."
마르타의 눈동자가 격하게 출렁였다.
'그래서였어.'
자신들이 도망쳐도 광혈귀가 웃고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놈은 미리 주변에 오우거를 풀어두었던 거다.
"다, 다 끝났어."
누군가의 절망에 찬 목소리에 분위기가 더 가라앉았다.
"크르르르!"
"크아아아!"
이제 들리는 소리라고는 먹이를 발견한 오우거의 배고픈 울음소리와 겁먹은 인간의 신음뿐이었다.
"물러서지 마라."
버렌이 입가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훔치고 검을 들었다.
"라온도 아직 싸우고 있다! 여기서 죽는다면 홀로 광혈귀를 막고 있는 녀석의 얼굴을 못 봐!"
그가 악을 내지르며 오러를 끌어 올렸다. 확고한 의지로 인해 강해진 푸른 바람이 휘몰아쳤다.
"너 치고는 맞는 말을 하네."
마르타가 키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검에 타이탄의 오러를 둘렀다.
"라온을 도와주러 가야 해."
기절했다가 깨어난 루난도 검을 세우고, 은빛 서리를 뿜어냈다.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세 사람의 눈빛에는 그 어둠이 보이지 않았다.
"크르르!"
"쿠어어어어!"
두 마리의 오우거는 그들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포효를 터트리며 땅을 박찼다.
세 명의 검사와 두 마리의 괴물이 부딪치려는 찰나.
후우우웅!
숲의 중심에서 녹색 바람이 휘몰아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