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콰아아앙!
누런 오러가 푸르고 붉은 오러를 짓눌러 터트려버렸다.
후우욱!
라온은 시꺼먼 연기를 뚫고 뒤로 날아갔다.
끼기기긱!
검을 땅에 박아넣고 나서야 간신히 멈출 수 있었다.
"하악!"
라온은 시꺼멓게 죽은 피를 토하며 턱을 떨었다. 고쳤던 왼팔은 다시 뭉개졌고, 허리까지 뜯겨나갔다.
온몸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거머리 같은 녀석."
광혈귀가 차돌 같은 손가락을 풀며 다가온다. 점차 거대해지는 기파에 피부가 터져나갔다.
콰앙!
놈이 바닥을 부수고 포탄처럼 날아왔다.
"흐읍!"
땅을 박차고 몸을 회전시켰다.
티이익!
광혈귀의 주먹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고 뒤로 물러섰다.
"쯧."
혀를 찼다. 완전히 부러져서 휘청이는 왼팔이 거슬렸다. 자칫 잘못했으면 잡혀서 그대로 숨이 끊어질 뻔했다.
자를까?
잠시 왼팔을 잘라버릴까 생각했다. 그러면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지?
팔이 두 번 조각나고, 옆구리가 뜯겨나가고, 근육과 피부가 비명을 지른다.
전생에서도 겪지 못한 고통을 참으며 왜 여기에서 저 괴물과 싸우는 건지 모르겠다.
여러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가장 긴 시간을 함께 보냈고 가장 불편했으며, 가장 미안한 사람의 말이 기억났다.
[나는 라온이 그 옛날의 지그하르트 검사다운 무인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렇지. 바로 그 말이다.
실비아의 그 말이 지금의 자신을 이곳에 묶어두었다.
전생이라면 무조건 도망쳤다.
버렌, 루난, 마르타와 수련생들. 아니, 마을 사람들까지 미끼로 던져서 이 괴물에게도 벗어났을 거다.
하지만 실비아의 말이.
함께 시간을 보낸 수련생들의 기억이 날 이곳에 묶어 두고 있었다.
루난은 차가워 보이고, 맹하지만 누구보다 다정하다. 싸이코 같은 오빠에게서 가족을 구하기 위해 홀로 고통을 삭인 아이다.
버렌은 얍실한 녀석이었지만, 아이답게 금방 변해 본인의 목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마르타는 거칠지만, 의지가 뛰어나고 신념이 굳건하다. 확실치는 않지만, 친엄마를 그리워하고 있다.
다른 수련생들도 처음과 달리 점점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정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많이 변했지.'
그들이 날 보는 눈빛은 그렇게 너무나도 달라졌고, 내가 그들을 보는 눈빛도 달라졌다.
그렇기에 이곳에 남았다.
실비아의 말대로 지그하르트의 검사다운 모습이 되어가는 녀석들을 살리고 싶어서.
전생에서 수백의 생명을 죽이고, 수십의 전장에 참여할 때와는 다르다.
지금 난 나의 의지로 저 괴물과 싸우고 있었다.
"하!"
웃음이 나왔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검이라니. 기분이 요상했다.
"이 상황에 웃음이라. 네놈도 정상은 아니로군."
"그러게. 나로 이럴 줄은 몰랐어."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를 잡고 있을 때 조용히 지켜보던 라스가 일그러진 모습으로 올라왔다.
-이제 알겠군.
'뭐?'
-네놈 본왕에게 몸을 넘길 생각이군.
'....'
-지금은 시간을 끌고 있는 거였어. 그 어린놈들이 본왕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날 때까지.
'너도 눈치는 있군.'
-정말이지 광오하도다!
라스의 불꽃이 밤하늘의 별처럼 치솟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지독한 분노였다.
-라온 지그하르트. 본왕을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이놈을 죽이고 네 동료들을 찾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다시 육체의 제어권을 찾아올 수 있다고 생각한 거냐!
'확신하진 않는다. 그저 도박일 뿐이지.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방법은 그것 하나니까.'
지금 광혈귀를 이길 방법은 없다. 지원이 빨리 온다고 해도 몇 시간은 걸릴 터.
여기서 놈에게 살아남고 모두를 구하는 길은 라스에게 몸을 넘겨서 이놈을 잡고, 수련생들에게 가기 전에 몸을 되찾는 방법뿐이었다.
-네놈은 이미 본왕의 분노를 받아들였다. 이전처럼은 되지 않아.
'그래도 해봐야지.'
원수를 남겨두고 이대로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으니까.
-착각하지 마라. 지금의 넌 정신력도, 체력도 바닥이다. 감정 역시 격해져 있지. 느끼게 해주마.
라스가 이를 갈며 몸에 달라붙었다.
"끄아아악!"
라온이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이전과는 격이 다른 고통에 피부가 검게 물들었다.
"이, 이게…."
-그게 지금 네놈의 상태다. 본왕의 빙의는 버틸 수 있겠지만, 스스로 몸을 넘긴다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허억…."
라온이 사지를 떨었다. 라스의 말대로 방금의 고통과 충격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그럼 어떻게….'
"이제야 네놈에게도 문제가 생긴 모양이군. 아! 재밌는 생각이 났어."
광혈귀가 큼지막한 손가락을 돌렸다.
"너보다 먼저 네 동료들을 죽이는 게 좋을 것 같다. 그 아이들의 목을 하나씩 뽑으면 네가 어떤 얼굴을 할까?"
놈이 키득 웃으며 몸을 돌렸다. 대지를 쪼개며 달려갈 것처럼 놈의 허벅지가 부풀었다.
'안 돼.'
수련생들은 광혈귀의 한 수도 버티지 못한다. 그야말로 몰살. 이렇게까지 버틴 의미가 없어진다.
그것만큼은 참을 수 없다.
"멈춰라."
라온이 부러진 검을 고쳐잡았다. 이를 악물고 허리를 폈다. 불의 고리와 만화공을 극성으로 운용하며 격을 끌어 올렸다.
"나를 보아라."
부러진 검으로 광혈귀를 겨누었다. 손은 떨렸지만, 검 끝은 흔들리지 않았다.
"내 이름은 라온 지그하르트. 북멸왕 글렌 지그하르트의 피를 이은 손자이며 언젠가 대륙 최강이 될 검사다."
글렌이 인정하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남들이 받아들이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내 심장을 멈출 때까진 이곳을 떠날 수 없다! 에덴의 미친 귀신이여!"
바닥을 친 격과 오러가 이글거리며 타올라 검날을 휘감았다.
"하!"
광혈귀의 노란 눈동자에 한줄기 감탄이 어렸다.
"그 나이에 그 기상. 대단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좋다. 진짜 무인에게는 그만한 예를 갖춰야겠지."
놈의 기운이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달려가기 위해 증폭시켰던 근육을 이쪽으로 돌렸다.
"후우욱!"
일단 시선을 돌렸지만, 방법이 없다.
'어떻게 해야.'
라스에게 몸을 넘기지 않으면 광혈귀에게 죽는다.
라스에게 몸을 넘긴다면 수련생들이 죽게 되고, 내 몸을 평생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설상가상. 방법이 없었다.
광혈귀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격과 오러를 끌어 올리느라 힘을 다했는지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네 이름을 기억하겠다. 라온 지그하르트."
놈이 바위 같은 주먹을 내리치려 할 때까지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그래도!'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내겐 할 일이 있다고!
'라스. 네게 내 몸을….'
-결국 결정을 했군. 이제 너와는 작별이다.
라스의 목소리에 한줄기 희열과 알 수 없는 작은 감정이 차올랐다.
'넘긴….'
라온이 말을 하다 말고 눈을 부릅떴다. 12살 이후 수없이 맡았던 다정하면서도 시원한 바람의 향이 콧등을 스쳤다.
-뭐 하는 거냐! 빨리 결정해라!
'넘기지 않겠다.'
-이런 젠장! 왜 지금!
라스의 비명을 들으며 검을 내렸다. 눈까지 감았다.
"죽어라!"
광혈귀가 들어 올린 주먹을 내리쳤다. 쏟아지는 풍압에 피부가 찢겨 나갔지만 라온은 눈을 뜨지 않았다.
후웅.
고통은 없었다. 작은 바람이 꽃잎을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펄럭이는 긴 적발. 녹색 바람을 휘감은 널찍한 등이 보였다.
그가 쥔 얇은 검이 광혈귀의 주먹을 완벽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늦으셨습니다."
라온은 그 남자를 보며 입매를 찡그렸다.
"미안하다. 살짝 늦잠을 잤거든."
적발의 검사. 리메르가 뒤를 돌았다. 누군가의 피로 가득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이제 내게 맡겨라."
79화
리메르는 뒤늦게 출발했음에도 수련생들보다 먼저 세부 마을 근처에 도착해 있었다.
당연히 세부산을 점거하고 있던 에덴의 주구들을 파악했고, 그들을 지켜보며 고민했다.
위험요소를 치워야 하는가 아니면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 지켜봐야 하는가.
'라온을 한 번 믿어볼까?'
사실 라온이 없었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에덴을 모조리 제거했을 것이다.
놈들은 목적을 위해서는 본인들의 목숨도 바치는 진짜 미친놈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라온이라는 녀석은 자신조차 파악이 되지 않는 천재다.
이번 임무를 치르며 라온과 수련생들이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켜봐야겠어.'
스승된 자로서 제자들이 성장할 수 있다면 그 길을 열어주는 게 맞다.
리메르는 언제라도 움직일 수 있도록 눈을 떼지 않은 채 마을로 향하는 수련생들을 미행했다.
그리고 그 미행에는 에덴의 탐색자 홍안귀도 있었다.
'저녀석을 알아차릴 수는 없겠지?'
홍안귀는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 아이들과 멀리 떨어져 관찰하고 있었다.
기척이 조금 있다고 해도 지금의 아이들이 그걸 알아차릴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라온이 무언가를 느낀 듯 버렌에게 지휘권을 넘겨버리고, 아주 미세하게 오러를 풀어 주변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저 녀석은 진짜….'
그 어느 때보다도 놀라웠다.
오러를 이용해서 주변을 기척을 파악하는 능력을 기감이라 하는데, 라온은 그 기감이 괴이할 정도로 발달 되어 있었다.
'육각형.'
무학, 오러, 체력, 정신력에 기감까지. 라온은 검사가 가져야 할 모든 재능을 가지고 있는 원석이었다.
리메르가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에덴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예상과 달리 에덴은 수련생들을 공격하지 않고, 적당히 공을 세우고 물러갈 수 있도록 몬스터들을 던져주었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군.'
아이들을 지키고 있을 교관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무언가를 노리고 아이들을 건드리지 않는 것 같았다.
놈들은 지그하르트의 지원을 두려워하고 있어.
아무래도 아이들을 돌려보낸 뒤 이곳을 샅샅이 뒤져봐야 할 것 같았다.
라온은 누군가가 관찰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평범한 수련생 중 하나가 되어 몬스터를 죽인 뒤 마을 사람들의 환호를 받고 마을을 떠났다.
'흐음….'
물러나는 건가.
그것도 나쁘지 않다.
본인들의 무력과 상대의 무력 차이를 알아차리고 물러나는 것도 현명한 무인의 자세니까.
다만 그 이후 라온의 움직임은 리메르의 예측과 완전히 동떨어졌다.
라온은 홍안귀가 떨어져 나가자마자 멈춰서서 모두에게 사실을 밝히고, 바로 지부에 지원을 요청했다.
다시 세부 마을로 돌아와서 마을을 공격하는 몬스터들을 보고 에덴이라는 예측까지 내놓았다.
라온의 말을 들은 리메르는 혀를 내둘렀다.
관찰자와 몬스터를 이용하는 것만 보고 에덴에 닿을 줄이야. 라온은 두뇌마저도 범인의 범주를 넘어섰다.
라온은 기다렸고, 버렌과 루난은 마을을 구하기 위해서 칼을 뽑고 뛰어들었다.
'저게 아이들다운 모습이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달려가는 수련생들은 영웅이자, 지그하르트의 검사다운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달려오는 녹귀들에게서도 밀리지 않고 맞서 싸워 마을을 지켰다.
다만.
리메르의 시선을 끌은 건 그들이 아니라, 라온이었다.
적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뒤부터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마지막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니.
15살이 보일 수 있는 인내력이 아니다.
앞에서 싸우는 검사가 아니라, 옥좌에 올라 모두를 굽어보는 왕의 모습이 보였다.
'왕의 자질.'
예전에 느꼈던 대로 라온은 지그하르트의 왕이 될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녹귀와 아이들의 치열한 싸움이 진행되었고, 라온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 마르타가 뒤를 습격하여 결국 승리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산 깊은 곳에 숨어 있던 녹전귀가 나타나 상황이 급변했다.
수련생들은 녹전귀의 일격도 받아내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당연한 일이다.
녹전귀는 익스퍼트에 오른 강자니까.
리메르는 언제라도 움직일 수 있도록 아이들의 바로 옆에서 검을 뽑아 대기했다.
'지금도 움직이지 않는 건가?'
라온은 버렌과 루난, 마르타가 죽을 위기에 처했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군.'
나서기로 결정하고 녹전귀를 막으려 할 때 라온이 움직였다.
그야말로 그림자 같은 기민한 움직임. 그 누구도 알 수 없게 다가가 녹전귀의 목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허….'
헛웃음이 나왔다. 목을 베지는 못했어도 팔을 가르는 일검은 경지에 오른 살검이었다.
녹전귀는 팔을 잃었음에도 강력한 투기를 발휘하여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어나갔지만, 새로운 경지에 오른 라온의 검 앞에 주검이 되어 쓰러졌다.
'하하하하!'
리메르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야말로 괴물. 라온 지그하르트는 대륙 제일의 검사이자, 패왕이 될 자질을 가진 아이를 가졌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호하고 제대로 키워야 한다.
'정말이지 끝이 없는 녀석이야.'
웃으며 일어났다. 이제 자신의 일을 할 차례였다.
리메르는 녹전귀가 죽은 뒤 세부산을 벗어나는 홍안귀들을 모조리 제거했다. 이곳의 정보가 알려지지 않도록.
세부 마을과 세부산을 완벽하게 둘러봐서 위험 요소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돌아왔다.
기절했던 라온이 깨어났고, 전투에서 이룬 깨달음 때문인지 녀석은 한층 더 성장해 있었다. 아마 검기도 사용할 수 있을 거다.
'저 정도면 나도 알아차릴지 모르겠는데.'
라온의 기감이라면 어설프게 숨은 자신도 찾아낼 것 같아서 조금 더 떨어졌다.
'이제 돌아갈까.'
날이 밝으면 크레인이 불러온 지원군도 도착할 테고, 위험 요소도 없으니 이제 돌아가도 될 것 같았다.
사실 다른 무엇보다 라온의 활약을 당장 글렌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자, 그럼….'
리메르는 아이들을 확인한 뒤 가문으로 돌아갔다. 경쾌하게 보법을 밟으며 지그하르트로 향할 때 세부 마을에서 강렬한 기운이 폭발했다.
'이 기운….'
느껴본 적 있는 기운일뿐더러, 마스터에 이른 강렬한 기파였다.
'젠장!'
리메르가 전력을 끌어 올려 마을로 달렸다. 어마어마한 속도였지만, 굼벵이처럼 느리게 느껴졌다.
마을에서 굉음이 들릴 때마다 가슴이 아려왔다.
그렇게 달리고 있을 때 루난과 버렌, 마르타가 보였다.
오우거 두 마리에게 습격을 당하는 녀석들을 보고, 검을 뽑았다.
촤아아악!
바람을 담은 검으로 오우거 두 마리를 동시에 베어버렸다.
리메르는 놈들의 목이 떨어지기 전에 눈으로 라온의 위치를 물었다.
루난이 눈동자로 마을을 가리켰다.
감정 표현이 옅은 아이의 눈동자에 너무도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리메르는 이를 악물고 마을로 뛰어들었다.
중간에 녹귀와 몬스터들이 달려들었지만, 모조리 베고 중심으로 향했다.
그리고 경악했다.
라온은 그 작고 어린 몸으로 에덴의 괴수 광혈귀의 공격을 끝까지 버텨내고 있었다.
왼팔은 부러져 덜렁거리고, 허리가 파여나갔으며, 다리를 끌면서도 검을 놓지 않았다.
그건 감동이었고, 경외였다.
리메르는 확실하게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저 어린아이를. 아니, 저 어린 왕을 평생 따르고 지키기로.
후우웅!
그렇게 그의 새로운 충심이 담긴 검이 광혈귀의 주먹을 막아섰다.
"늦으셨습니다."
라온은 자신이 올 줄 알고 있었던 듯 웃었다.
"미안하다. 늦잠을 잤거든."
리메르 역시 평소처럼 대답했다.
"이제 맡겨라."
그렇게 말하고서 광혈귀의 주먹을 밀어냈다.
콰아아아!
바위 같은 주먹이 얇은 검에 밀려나는 모습은 하나의 장관과도 같았다.
"지그하르트의 광검!"
"오랜만이다. 대머리."
리메르는 광혈귀의 흉폭한 강기 앞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듯 손을 흔들었다.
"네놈이 어떻게 여길!"
"귀여운 새싹들이 너 같은 대머리에게 짓밟히는 걸 보고 있을 수는 없잖아."
"임무에 너 같은 놈을 딸려 보내다니, 지그하르트도 많이 물러졌군!"
광혈귀가 붉은 강기가 어린 주먹을 좌우로 펼쳐냈다.
콰아아아아!
붉은 파도가 솟구치며 무시무시한 강기의 폭풍이 밀어닥쳤다.
"흐읍!"
리메르가 녹색 오러가 어린 검을 사선으로 내리쳤다. 강기가 배수로를 탄 물길처럼 우측으로 흘러내려 갔다.
"그 정도 강기을 간신히 흘리다니, 단전이 깨져 폐인이 됐다는 소문은 사실이었군."
"헛소문이니까. 소식통 바꿔라. 너희 투구단은 여전히 소식이 느리네."
"누가 보아도 네놈의 균형은 무너져 있다."
광혈귀가 히죽 웃었다. 그저 하나의 감정 표현을 했을 뿐인데 공기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이걸 어쩌냐? 구출대가 아니라, 함께 잡아먹힐 강아지가 왔군."
놈은 뒤에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라온에게 이죽거렸다.
"강아지인지, 지옥을 지키는 케르베로스인지는 끝까지 가봐야지!"
리메르가 우측으로 내려간 검극을 쳐올렸다. 세찬 바람이 일어나며 광혈귀의 어깨를 갈랐다.
피이익!
광혈귀의 어깨에서 핏줄기가 터졌지만,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순식간에 아물기 시작했다.
"이전의 네 검에는 지독할 정도의 살기가 어려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광혈귀가 땅을 박차고 리메르가 펼쳐낸 바람의 벽을 뚫어버렸다.
"넌 약해졌다. 네놈의 검으로는 날 벨 수 없다!"
그 말과 함께 꽉 주먹을 내리쳤다.
치이이잉!
리메르는 그 권격을 정면으로 받아내지 못하고 검을 휘돌렸다. 풍차처럼 돌아간 녹색 오러가 두터운 방패가 되었지만, 광혈귀의 강기를 버티지는 못했다.
파사삭!
녹색 오러가 깨지고 광혈귀의 주먹이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리메르는 그 자리에 없었다. 오러의 방패를 미끼로 던지고 광혈귀의 좌측으로 파고들어 검을 내질렀다.
퍼어억!
리메르의 날카로운 검격이 아래에서부터 광혈귀의 심장을 노리고 들어갔다.
"고작 그 정도론 안 된다!"
광혈귀가 포효를 내지르며 몸을 움츠리자, 놈의 갈비뼈를 뚫고 들어가던 리메르의 검이 우뚝 멈춰 섰다.
"네놈이 약해지는 동안 난 더욱더 강해졌다. 힘의 차이는 완벽하게 역전되었어!"
"칫!"
리메르가 혀를 차면서 검을 뒤로 뺐다. 그대로 놔두었다가는 검이 부러질 가능성도 있었기에 적절한 조치였다.
"크하하하!"
광혈귀가 괴성을 내지르며 주먹을 휘둘렀다. 더욱더 강해진 권격이 몰아치자 대지가 비명을 질렀다.
"무식한 놈."
리메르는 그 권격을 감히 맞받아치지 못하고, 보법을 이용해서 회피했다.
'저건….'
라온은 광혈귀의 난폭한 권법이 아니라, 리메르의 보법에 시선을 집중했다.
'꼭 바람을 타는 낙엽 같군.'
리메르는 바람을 탄 꽃잎처럼 가볍게 몸을 놀려 광혈귀의 주먹을 피해냈다.
자신이 광혈귀와 싸울 때 보였던 움직임을 최고조로 이뤄낸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중간중간 기습적으로 내지르는 검의 타이밍은 완벽했다.
만약 리메르의 검에 어린 기운이 강기였다면 승부는 진즉에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공격이 먹히지 않음에도 리메르의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꼭 보라는 듯 광혈귀와 초근접거리에서 전투를 보였다.
'잠깐 설마!'
라온이 눈을 부릅떴다. 리메르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걸 보고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내게 보여주고 있어.'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에게 전투 교육을 하고 있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약해진 나도 잡지 못하면 어떻게 하냐? 너 그 투구 뺏기는 거 아니냐?"
"닥쳐라!"
광혈귀가 광기에 차오른 눈빛을 발하며 권격을 내질렀다. 주먹에 담긴 막대한 기운에 리메르도 섣불리 맞서지 않고 뒤로 물러섰다.
콰아아앙!
주먹 한 발에 마을 건물이 무너지고, 땅이 파여나갔다. 고대 전설에 등장하는 거인을 보는 듯한 무력이었다.
"제대로 덤벼라! 지그하르트의 광검!"
광혈귀는 분노에 몸을 맡긴 듯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리메르를 쫓았다.
콰아아아!
움직임은 단순했지만, 힘과 속도가 재빨라 점차 리메르와의 거리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쯧, 어쩔 수 없네."
리메르가 멈춰서서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라온의 시선에 담으며 웃었다.
"교보재가 폭주했으니, 오늘 교육은 이걸로 끝내야겠어."
"이런 미친놈이!"
"잘 봐둬라. 라온."
라온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리메르의 말이 이어졌다.
"이게 지그하르트가 싸우는 방식이고, 네가 이뤄야 할 경지다."
리메르의 검이 하늘을 찌르고, 그의 왼손이 땅을 가리켰다.
"검계현신."
그 목소리는 하늘에서 울리는 듯하면서 땅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것 같았다.
"폭풍의 눈."
진언처럼 울린 그 선언에 세계가 바뀌었다.
80화
폭풍의 눈이란 거대한 폭풍의 중심에서 생성되는 무풍지대를 말함이다.
주변에선 여전히 강력한 바람이 휘몰아치지만, 내부는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잔잔하면서도 평화로운 공간. 그게 바로 태풍의 눈이다.
그리고 지금 라온의 눈앞에 그런 상황이 일어났다.
광혈귀가 미친 듯이 흘려내던 광기와 투기도, 리메르가 펼쳐내던 진녹색 오러도 모조리 주변으로 밀려 나갔다.
바람조차 불지 않는 공간.
아니, 바람만이 아니라, 공기의 흐름마저 멈춘 듯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고, 어깨에 쇳덩이를 단 듯 몸이 무거웠다.
광혈귀도 당황했는지 눈을 부릅뜬 채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놈 역시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위이이이잉!
그 적막의 공간으로 청명한 흐름이 돋아났다.
리메르의 검이다. 오러가 사라져 텅 비어 있던 그의 칼날 위로 진녹색 바람이 모여들었다.
터엉!
리메르가 발을 굴렀다. 땅이 뭉개지며 그의 육신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광혈귀가 당황한 와중에도 막강한 권격을 내질렀지만, 리메르는 바람처럼 타고 더 깊게 들어갔다.
그리고 일검.
바람 그 자체를 담은 검이 수직으로 떨어졌다.
푸칵!
강철보다도 단단한 광혈귀의 오른팔이 잘려 시꺼먼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광혈귀는 마스터에 오른 무인이다. 팔이 잘렸다고 그대로 무너지지 않았다.
피가 터져 나오는 오른팔을 바로 지혈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 움직임은 비호처럼 재빠르고 유연했다.
리메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검을 휘돌리고 광혈귀를 쫓았다.
광혈귀가 리메르가 만들어낸 폭풍의 눈을 벗어나려 했지만, 리메르가 움직이는 만큼 이 공간도 함께 움직였다.
도망칠 수 없다는 걸 파악한 광혈귀가 멈춰 섰다. 자세를 낮추고 남은 왼 주먹에 가진 모든 기운을 응축시켰다.
우우우웅!
공간이 진동한다. 파도처럼 일어난 붉은 강기가 해일을 일으켰다.
대지를 뒤덮을 강기의 해일 앞에 리메르는 얇은 검 한 자루를 쥐고 섰다.
후우우욱!
태풍의 눈의 크기가 더욱 커지며 리메르의 검을 휘감은 바람이 점점 더 짙은 빛을 띄었다.
리메르는 폭풍이 휘감긴 검을 그대로 내리쳤다.
쩌어억!
절벽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진녹빛 바람이 붉은 해일을 갈랐다.
후우우웅!
그 순간 강렬한 빛이 터져나왔다.
'크윽!'
라온도 그 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끝난 건가?'
눈을 뜨니, 태풍의 눈이 사라지고,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
광혈귀와 리메르는 다섯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서로의 육체와 오러의 위력을 반감시키고, 그 무풍지대의 바람을 모조리 네 검에 담았군."
광혈귀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광기와 투기가 흘러넘쳤다.
"다 좋다. 검계라는 건 원래 그런 것이니까. 그런데 네놈이 어떻게 검계를 운용한 거지?"
그건 광혈귀만의 궁금증이 아니었다. 라온 역시 리메르가 검계를 사용한 것을 보고 경악했으니까.
'검계는 지그하르트의 피를 이은 사람만이 쓸 수 있을 텐데….'
대륙 최강의 세력 육황과 오마는 각기 특색이 있지만, 지그하르트는 그중에서도 특별하다.
마법사가 아닌, 검사의 몸으로 만들어내는 결계. 검계현신의 능력은 대륙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 정도로 대단했다.
다만 검계는 오직 지그하르트의 피를 이은 자만이 사용할 수 있고, 발현시키는 사람은 그중에서도 소수다.
그런 검계를 지그하르트는커녕 인간도 아닌 엘프 리메르가 사용하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제대로 말하자면 검계는 아니고, 비슷한 걸 만들어 낸 거지."
리메르가 눈을 내리감으며 웃었다.
"난 엘프라서 자연과 꽤 친숙하거든."
"…그랬군."
광혈귀는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늙어서 이가 빠지고, 부상을 입어도 호랑이는 호랑이라는 건가."
크르륵 소리를 내며 웃다가 라온에게 시선을 보냈다.
"아쉽군. 저건 무조건 제거했어야 했는데, 분명 에덴에 큰 영향을 미칠…."
"우리의 어린 왕을 너 같은 놈에게 당하게 할 수는 없지."
"확실히 평범한 검사의 자질이 아니라, 패왕의 자질이다. 다만 자만하지 말아라."
광혈귀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우리에게도 저 괴물에 못지 않은 재능이 있다. 둘이 붙는 것도 기대가 되는군."
"대륙은 넓으니까."
리메르는 그럴 수 있다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패배다. 지그하르트의 광검이여."
광혈귀는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그의 몸의 중심으로 새빨간 선이 그어졌다.
오러로 유지 시켰던 몸이 갈라지며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거인이 뒤로 넘어갔다.
후우욱!
광혈귀가 끼고 있던 투구 역시 반으로 갈라졌고, 광기 어린 빛도 사라졌다.
"하아…."
리메르가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잘 봤어?"
그가 뒤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평소와 같은 표정이지만, 힘이 빠져 보였다.
"봤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네가 지그하르트로서 익혀야 할 기예다. 검계라고 하지."
"검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검계라는 단어를 중얼거렸다.
"마나로 펼치는 마법사들과 달리 자신이 쌓아온 업과 기세로 펼치는 결계지."
"그래서 지금까지 그렇게 기세를 중요시하셨군요."
"그래. 검계가 아니더라도 기세를 쌓는다면 그에 따른 힘을 발휘하기 쉬우니까."
리메르가 씩 웃었고, 라온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리메르가 매일 같이 시킨 한계를 넘어서는 수련 덕분에 자신은 그렇다 치고, 다른 아이들은 분명 큰 효과를 받았다.
만약 기세를 키우는 수련을 하지 않았다면 아이들은 녹전귀에게 덤비지도, 광혈귀 앞에서 도망치지도 못했을 거다.
"넌 방계지만 실제로는 직계이니, 언젠가는 개방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니, 개방할 수 있을 거야."
리메르는 무조건 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네가 쌓아온 경험과 업적 그리고 오러와 미래까지. 모든 것을 담아 만드는 게 바로 검계다. 많은 것을 경험하고, 익히도록 해."
그는 숨을 헐떡이고 있으면서도 가르침을 내렸다. 광혈귀와의 전투부터 지금까지 모든 것이 교육이었다.
"너희들도 잘 봤지?"
리메르는 이제 몸을 완전히 돌려서 저 뒤를 보았다. 그곳에는 루난과 버렌, 마르타를 비롯한 수련생들이 멍하니 서 있었다.
그들은 검계의 외부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다.
"라온!"
루난이 달려왔다. 멍한 그녀의 눈매에는 작은 이슬이 고여 있었다.
"이런 미친! 이 자식 살아 있었어! 살아 있었다고!"
마르타는 라온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는지 라온의 어깨를 잡은 손을 떨었다.
"라온 님!"
"라온!"
"크으윽!"
도리안과 수련생들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달려왔다.
"라온 지그하르트."
버렌은 볼을 흔들릴 정도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다…."
비틀거리다가 라온의 옆에 있는 리메르를 보고 코를 훌쩍였다.
"저기 그런데 교관님."
"응?"
"교관님이 어떻게 검계현신을 사용하신 겁니까?"
"만들었다."
"마, 만들었다고요?"
"그래."
리메르는 광혈귀에게 했던 말을 반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그하르트에는 전해져 내려오는 몇 가지 검계가 있지. 그건 그들의 피에 전해져서 혈족만이 쓸 수 있지만, 새로 만드는 건 좀 달라."
그는 검계를 만들었다고 말하며 씩 웃었다.
"그럼 저도 그 검계라는 걸 사용할 수 있는 겁니까?"
마르타가 앞으로 나오며 물었다. 루난도 눈빛이 반짝였다.
"그건 아니지."
리메르는 차분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그하르트가 아닌 자가 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해."
"두 가지 조건?"
"첫 번째는 경험이다. 검계에 대한 경험이 많아야 해. 난 가주님을 따라 전장의 가장 앞에 서서 수많은 검계를 경험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는 수련생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며 잠시 뜸을 들였다.
"속성에 대한 재능이다."
"어떤 재능을 말하는 거죠?"
마르타가 한 발 더 다가가며 물었다. 그녀는 검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속성에 대한 재능. 지그하르트의 피를 가지지 않은 우리가 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속성의 힘이 필요하다. 나 역시 바람을 이용해서 검계를 만들어냈지."
"음…."
"다만 추천하지는 않아."
리메르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방계나 슬리온 가문을 비롯한 몇몇 봉신 가문에도 지그하르트의 피가 흐르니, 열심히 한다면 검계를 열 가능성도 있어. 다만 지그하르트의 피가 없는 자가 검계를 열기 위해서는 희생해야 할 게 있거든."
"희생이요?"
"...."
리메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희들의 앞날은 창창해. 어쩔 수 없이 검계를 연 나와 달리 스스로의 힘으로 강해질 수 있을 거다."
그는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에 바람을 실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리메르는 손매에서 투명한 물병 하나를 꺼내서 라온에게 다가갔다.
"아플 거다. 참아."
그리 말하고서 물병을 부서진 팔과 뜯겨나간 허리와 허벅지에 뿌렸다.
"...."
라온은 극심한 통증을 느꼈지만, 조그마한 신음도 흘리지 않았다. 광혈귀와 싸울때에 비하면 이 정도는 고통도 아니었다.
"안 아파?"
"아픕니다."
"근데 신음도 안 흘리네."
"딱히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허, 참."
리메르는 픽 웃으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다 끝났으니, 돌아가자."
"잠깐!"
버렌이 손을 들어 올렸다. 평소 연무장에서 보이는 눈빛이다.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엑? 나 피곤한데, 나중에 하면…."
리메르는 어떤 말이 나올지 알았는지, 마른침을 삼켰다.
"아뇨. 지금 해야 합니다. 대체 어디에 계시다가 지금 나타나신 겁니까. 따라오신 건 분명한데, 왜 이렇게 위험한 순간에 오신 겁니까. 저희만이 아니라, 마을 사람까지 위험할…."
"어? 저게 뭐지?"
리메르가 손가락을 들어 올려 버렌의 뒤쪽을 가리켰다.
"헉!"
"또 뭐가…."
수련생들이 황급하게 뒤를 돌아보았지만, 나뭇잎이 모조리 떨어진 가지만 흔들렸다.
"아무것도 없… 어디 갔어!"
버렌이 눈을 부릅떴다. 뒤를 돌아본 짧은 순간에 리메르는 사라져있었다.
"이 인간 진짜! 대체 왜 지금 나타난 거냐고! 정말 다 죽을 뻔했는데!"
나타나서 구해준 건 고맙지만, 상황이 너무 극적이었다. 자신들은 그렇다 치고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더 빨리 왔어야 했다.
"죽은 사람은?"
라온이 부러진 오른팔을 잡고 버렌의 앞으로 다가갔다.
"다행히 없다. 있었다면 바로 교관님 멱살을 잡았을 거야."
"그럼 됐어."
리메르에게도 분명 사정이 있었을 거다. 마을 사람들이 여러모로 충격을 받았겠지만, 죽은 사람이 없으니 이겨낼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만 정리하자. 아직 할 일이 많아."
라온은 전신에 피칠갑을 한 채로 고개를 저었다.
"너, 너 괜찮은 거 맞냐?"
"라온 괜찮아?"
버렌과 루난이 동시에 물었다.
"괜찮아."
라온은 누가 보기에도 심각한 중상을 입었음에도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의 고리를 운용하여 육체와 마나 회로를 회복시키고 있었다.
리메르가 준 약도 효과가 있으니, 푹 쉰다면 이전보다 더 단단한 육체와 마나회로를 가질 수 있을 거다.
"미안하다."
버렌이 고개를 숙였다. 길게 내린 손이 바르르 떨린다.
"내 판단이 느려서 네가 나서주었음에도 모두를 죽일 뻔했다. 난 누군가를 이끌 인간이 아닌 모양이다."
"실수 한 번 했다고 죽으려고 하네. 문제가 뭔지 알았으면 앞으로는 판단력과 무력을 함께 키워."
"음…."
"자신 없으면 진짜 때려치우던가."
"아니. 하겠다. 어떤 상황에서도 지지 않을 무력과 판단력을 갖추겠다! 내 목숨을 구해준 네게 약속하마!"
"그럼 됐어."
라온이 멀쩡한 왼손을 저었다.
'못 도와줘서 미안하다고 했으면 주먹을 날렸을 텐데.'
광혈귀에게 덤비지 못해서 미안해가 아니라, 바로 도망치지 못한 걸 사과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녀석은 아직 아이이니, 앞으로도 큰 발전을 이뤄낼 수 있을 거다.
"루난. 너도 마찬가지야. 아까 거기선 날 도와줄 게 아니라, 도망쳤어야 했어."
"싫어."
루난은 드물게도 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기지 못할 상대가 있다면…."
"싫어."
"위험."
"싫어."
"아니, 일단 말을."
"안 들어. 도와줄 거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귀를 막고 고개를 돌렸다.
"강해질 거야. 꼭 강해져서 옆에서 싸울 거야!"
"하…."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다만 강해지겠다는 말도, 도와주겠다는 진심이라는 걸 알기에 가슴이 따스해졌다.
이번 임무를 행하며 많이 다치고 힘들었지만, 더 많은 감정에 대해 알아가는 게 기뻤다.
"...."
라온은 마지막으로 마르타를 보았다. 그녀는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지 깊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 끝났다. 돌아가자."
아직도 어벙해 있는 수련생들을 향해 손을 저었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달려오는 사람들이 보인다. 크레인이 부르러 갔던 지그하르트의 지원대였다.
모두 끝났다는 생각에 마음이 몽실몽실 풀어졌다.
[<분노>와의 내기에서 승리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빨리 쉬고 싶다고 생각할 때 눈앞에 푸른 창이 올라왔다.
"어?"
-어??
81화
"어휴."
리메르는 수련생들이 마을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융통성 없다니까."
그는 라온의 바로 뒤를 따라가는 버렌을 보며 눈을 흘겼다.
처음 봤을 때보다 조금 유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라온에게만인 것 같았다.
'하긴.'
버렌이 변하게 된 계기는 라온의 노력을 확인한 뒤부터다. 그에게만 달라진 모습을 보이는 건 이상한 게 아니었다.
'루난도 변했고.'
감정이 옅고, 티를 내지 않던 아이는 이제 확실하게 말하고, 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이 변화는 그녀의 검술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르타.'
그녀의 눈빛도 확연히 달라졌다. 라온의 싸움과 의기를 보고 크게 감동한 것 같았다.
'검계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도 라온을 따라잡고 싶어서일 테지.'
마르타가 검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라온을 쫓아가거나 혹은 그 옆에 서고 싶어서일 거다.
리메르는 그렇게 모든 수련생들을 살피며 그들 모두가 무력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성장했음을 느꼈다.
뿌듯하면서도 제때 오지 못한 미안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자, 그럼… 윽!"
수련생들의 뒤를 따라가려고 할 때 하복부에서 지끈거리는 통증이 일어났다.
"젠장…."
망가진 단전을 무리하게 사용하고, 검계까지 연 대가였다. 삶 그 자체가 줄어든 듯한 기분이었다.
'수명이 더 줄었겠군.'
수련생들에게 제대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지그하르트가 아닌 자가 검계를 열기 위해서는 체력을 넘어서는 생명력을 바쳐야 한다.
자신은 젊지도, 건강한 상태도 아니었기 때문에 수명이 꽤 줄어들었을 거다.
'뭐, 후회는 없지만.'
어차피 살 만큼 살았으니까.
단전이 고장 났을 때부터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았다.
저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후부터 새로운 삶을 얻은 듯한 기분이 들었기에 줄어든 수명은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후…."
리메르가 심장과 단전의 통증이 가라앉길 기다리다가 일어섰다.
마을 사람들이 라온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도 저 녀석이 위에 서는 모습은 보고 죽어야지."
그는 홀로 낄낄 웃다가 그 자리에서 바람처럼 사라졌다.
* * *
세부 마을과 세부 산의 보호는 지그하르트의 서남지부의 담당이다.
"쯧."
지그하르트 서남지부장 부르카스는 세부 마을로 향하며 혀를 찼다.
'에덴이라고?'
크레인이라는 수련생이 찾아와서 세부 마을에 에덴이 나타났다고 말했다.
라온 지그하르트가 홍안귀의 관찰을 알아냈다고 하는데 솔직히 말해 개소리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홍안귀의 시선을 느낄 수 있는 무인이 되려면 최소 익스퍼트 중급 이상은 되어야 한다.
이제 15살이 된 라온이 그걸 느낀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지부장님. 이거 말이 안 되는데 꼭 갈 필요 있습니까? 저희가 다 조사했잖습니까."
부지부장 서비안이 옆으로 붙으며 툴툴거렸다. 세부 마을과 세부 산을 조사한 건 그였기 때문에 불만이 있는 것 같았다.
"라온이 문제가 아니다. 거기엔 버렌, 루난, 마르타가 있다. 셋에게 문제가 생겼다간 우리 지부 전체의 목이 날아갈 수도 있어."
"어우, 말만 들어도 끔찍하네요."
"표정 관리해라. 무조건…어?"
부르카스는 마을로 향하는 길에 번져 있는 피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강처럼 흘러내린 핏줄기를 따라가자 거대한 녹색 몸체가 보였다.
"오, 오우거?"
둥글고 흉악한 얼굴. 통나무 몇 겹을 뭉친 듯한 두꺼운 몸체와 팔다리. 숲의 제왕이라 불리는 오우거의 시체였다.
"오우거다!"
"오, 오우거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것도 두 마리…."
지부의 검사들은 오우거의 시체 앞에 멈춰서서 마른침을 삼켰다.
"으음…."
부르카스는 오우거의 시체를 살피고 인상을 찌푸렸다. 단숨에 급소를 가른 검격. 고수의 일검이었다.
'에덴은 몰라도 무슨 일이 있긴 했어.'
죽어있는 오우거의 시체와 피 그리고 인간의 피나 의복도 있었다.
"경계 태세를 최대한으로 높인다."
부르카스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그대로 마을 쪽으로 뛰었고, 지부의 검사들도 삼엄한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거인이 짓밟고 간 듯 바스러진 마을 입구를 보며 더욱 속도를 높였다. 마을의 중심을 넘어서려 할 때 그들의 앞에 수련생들이 나타났다.
"너…."
부르카스는 가장 앞에 있는 수련생들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뭐야. 이건….'
라온 지그하르트.
연약해 보이는 소년의 왼팔은 걸레처럼 흐느적거렸고, 허리와 허벅지에 주먹만 한 구멍이 나 있었다.
다만 그런 심각한 상황에도 아이는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고, 눈은 한밤의 호수를 보는 듯 맑았다.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전해지는 강렬한 기세.
많은 업적을 이뤄 격을 쌓은 연륜 있는 검사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5연무장 수석 수련생 라온 지그하르트입니다."
라온은 정중하게 예의를 갖췄다.
"아, 그, 그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정말 에덴 놈들이 나타난 건가?"
부르카스는 라온의 정심한 기운에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그렇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발밑으로 두 개의 투구를 던졌다.
오크 투사의 머리통이 그려진 녹전귀의 투구와 오우거의 머리를 그대로 새긴 광혈귀의 투구였다.
"과, 광혈귀와 녹전귀? 지, 진짜 에덴이 나타났다고?"
"녹전귀는 저희가 잡았지만, 광혈귀는 교관님이 잡았습니다."
"교관?"
"리메르 교관입니다."
"아…."
광혈귀는 마스터에 오른 것이 확실한 무인. 단전이 망가진 리메르가 그놈을 잡았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역시 대단하신 분이… 아, 잠깐!"
부르카스가 입을 떡 벌렸다. 리메르가 광혈귀를 잡은 것보다 더 놀라운 내용이 이제야 귀에 들어왔다.
"너, 너희가 녹전귀를 잡았다고?"
"예."
라온은 덤덤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떻게? 너희가 어떻게 녹전귀를 잡을 수가 있지?"
리메르가 광혈귀를 잡은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수련생인 이들이 녹전귀와 녹귀를 잡은 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잘 잡았습니다."
"자, 자세히 좀 말해봐!"
"음, 뒤에 있는 저 녀석이 잘 알려줄 겁니다. 전 부상을 좀 치료해야 해서."
"아, 그래. 그래야지."
부르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라온의 부상 정도는 심했다. 평범한 이라면 울고불고 난리가 날 정도로.
"서비안. 라온을 치료해주어라."
"아, 예."
부지부장이자, 치료사인 서비안은 멍하니 서 있다가 라온을 따라갔다.
"그래서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하나도 빼지 말고 전부 말해봐."
"믿으실지 믿지 않으실지 모르지만…."
버렌은 부르카스에게 이곳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조금의 과장이나, 감소 없이 말해주었다.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부르카스의 목소리가 탁하고 튀었다. 너무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를 들으니, 목소리가 꽉 막혔다.
"그렇지만, 사실입니다."
버렌, 루난, 마르타를 포함한 수련생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
어처구니가 없다.
'녹전귀의 뒤를 잡아서 팔을 베고, 결국 놈의 목을 베었다고?'
이것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그 뒤에 들은 말엔 경악성밖에 나오지 않았다.
'광혈귀에게서 10분 가까이 버텼다니….'
버렌은 라온이 모두를 도망치게 한 뒤 리메르가 나타날 때까지 광혈귀를 잡고 있었다고 했다.
아직 검사의 자격도 얻지 못한 15살짜리 수련생이 마스터인 광혈귀와 검을 나눴단다. 어이가 없어서 머리가 띵했다.
"후우…."
부르카스가 한숨을 뱉으며 수련생들을 살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눈. 이들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뒤를 돌아 라온이 들어간 집을 바라보았다.
꿀꺽.
마른침이 절로 삼켜졌다. 지그하르트의 현 가주인 글렌 님도 15살의 나이에 광혈귀를 상대할 수는 없을 거다.
'괴물….'
그 두 단어밖에는 생각나는 게 없었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천재라는 개념을 넘어선 괴물이었다.
* * *
"그, 그럼 가보겠습니다."
스스로 부지부장라고 소개한 서비안이라는 남자가 전신에 약과 붕대를 감아준 뒤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아휴, 아닙니다."
그는 손사래를 치고 밖으로 나갔다.
"하아…."
라온이 통증을 참으며 등을 벽에 기댔다.
'꿈꾸는 것 같네.'
아직도 문제가 있는 이 육체로 녹전귀를 베고, 광혈귀에게서 살아남았다는 게 아직 믿기지 않았다.
'운이 좋았어.'
녹전귀를 벨 때는 수련생들이 시선을 끌어준 덕분에 우위를 점할 수 있었고, 그 성장을 바탕으로 광혈귀와의 전투에서 버텨낼 수 있었다.
조금만 부족했더라면 양쪽 모두 목숨이 위험한 순간이었다.
'대신 또 성장할 수 있었지.'
라온이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광혈귀와 힘겨운 싸움을 하며 능력치, 경험, 격이 모두 상승했다.
세부 마을에 오기 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하늘과 땅 수준으로 차이가 났다.
지금은 확실하게 소드 익스퍼트 하급에 오른 상태였다.
'역시 고생을 안 하고는 강해질 수 없는 건가.'
전생에서부터 느꼈지만, 위기라는 파도를 겪어야 기회가 오는 것 같다.
'거기다….'
라온이 씩 웃으며 라스가 들어 있는 얼음꽃 팔찌를 흔들었다.
"네 덕분에 한 번 더 성장할 수 있게 됐지."
-끄응…."
얼음꽃에서 푸른 불꽃이 타오르며 라스가 솟아올랐다.
-본왕은 이런 허술한 내기를 한 적이 없다. 네놈은 오우거 투구를 쓴 그 무식한 놈을 죽이지 못했느니라!
"그게 아니지."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너와 나의 내기는 광혈귀의 죽음이었다. 즉, 누가 쓰러뜨려도 상관이 없었어."
-크으으, 빌어먹을!
라스가 격한 분노를 끌어 올렸다. 녀석은 상황이 급박해 제대로 내기를 걸지 않았다고 한탄했다.
'음….'
라온은 평소처럼 라스를 놀리지 않고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와 달리 녀석의 감정이 더 깊게 가슴에 와닿았다.
'분노를 받았기 때문인가.'
라스의 분노를 받았기 때문에 녀석의 감정이 더 잘 느껴지는 것 같았다.
'예상보다 위험해.'
고작 10의 분노를 받았는데 그 여파가 상당하다. 아무래도 녀석과의 계약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 같았다.
"다시 확인 좀 해볼까."
라온은 별거 아닌 것처럼 목소리를 한 톤 올리며 지나간 메시지를 불러왔다.
[<분노>와의 내기에서 승리하셨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3포인트 상승합니다.]
[분노에게 네 번째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4연승의 효과로 추가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근력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민첩성이 2포인트 상승합니다.]
[기력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세 번째 내기에서 이겼을 때처럼 추가 포인트까지 상승했다. 아낌없이 주는 라스다운 보상이었다.
꾸우욱!
라온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능력치가 동시다발적으로 오르자, 허무하리만큼 힘이 빠졌던 근육이 되살아나는 게 느껴졌다.
-이런 망할 내기 따위는 하는 게 아니었거늘!
라스는 속임수라고 소리치며 방 전체를 냉기로 뒤덮었다.
"너도 알잖아. 아직 남았어."
[내기의 두 번째 보상으로 <분노>가 가진 특성이 생성됩니다.]
[특성이 결정되었습니다.]
[당신에게 특성 <불굴의 의지>가 생성됩니다.]
82화
"불굴의 의지?"
-하필….
라스의 목소리에 짜증이 어렸다. 불굴의 의지라는 특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럼 괜찮은 특성인가 본데?'
라스가 싫어한다면 좋은 특성일 수밖에 없다. 라온이 기대감을 가지고 상태창을 불러왔다.
<상태창>
이름 : 라온 지그하르트.
칭호 : <꺾이지 않는 자>.
상태 : 혹한의 저주(다섯 가닥).
특성 : 분노, 불의 고리(4성), 수속성 저항력(4성), 설화의 감각(3성) 만화공(3성), 혹한의 냉기(3성), 화속성 저항력(3성), 블리딩 커스(1성), 암습(1성), 불굴의 의지(1성).
근력 : 62.
민첩성 : 63.
체력 : 56.
기력 : 47.
감각 : 66.
분노 : 10.
보상 덕분에 능력치가 오른 것을 확인한 후 새롭게 생긴 특성 <불굴의 의지>를 살펴보았다.
<불굴의 의지>
육체적, 정신적으로 심각한 충격을 받았을 때 일시적으로 정신력을 상승시켜 고통을 감소시킨다.
설명을 보자마자,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 특성이 있다면 라스의 분노를 가진 상태에서도 이전처럼 버티는 게 가능하다.
"운이 따라주는군."
-운이 아니라, 본왕이 만든 시스템의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라스가 메시지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너무 잘 만들어도 탈이로군.'
처음 저 시스템을 제작할 때 특성의 경우 현재 가장 필요한 능력부터 생성되도록 만들었다.
그 시스템의 특성 생성 조건이 라온에게도 작용해서 현재 가장 필요한 불굴의 의지가 생겨난 것이다.
-쯧.
짜증이 확 돋았다.
'이제 놈을 공략할 수 있을 줄 알았거늘….'
라온이 분노의 감정을 받아들여 이제야 놈에게 먹힐 칼날이 만들어졌는데, 저 특성 때문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렸다.
'후우….'
라스가 끓어오르는 감정을 가라앉혔다. 멍청하게 분노를 일으켜 놈의 능력치를 올려주는 건 이제 사양이다.
'시간은 많아.'
조금씩이지만 능력의 회복 속도가 빨라지고 있고, 라온에게 분노의 감정도 심어놓았다.
녀석이 인간치고는 빠른 성장을 보여주고 있지만, 결국 승자는 자신이 될 것이다.
'기다려라. 네놈의 육체와 영혼은 나의 것이다. 영겁의 시간 동안 빙하 속에 가둬주마!'
라스가 차게 식은 눈으로 라온을 노려보았다.
"쯧쯧."
라온이 라스를 보며 혀를 찼다.
"표정 보니까. 또 헛생각하고 있네."
-헛생각을 하는 건 네놈이겠지. 인간 주제에 본왕의 높고도 고고한 사고를 어찌 이해한단 말이냐.
"뻔해. 참고 기다려서 내 육체를 먹고, 영혼은 빙하에 가두겠다고 다짐했겠지."
-억!
라스가 입을 떡 벌렸다.
-네놈. 독심술까지 익혔단 말이냐!
"지금까지 듣고 본 게 있는데 모를 리가 없지. 네 생각이나 움직임은 내 손바닥 안에 있다."
라온이 길쭉한 오른손을 쫙 펼쳐서 흔들었다.
-인간 따위가 감히!
라스는 조금 전에 라온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한 걸 까맣게 잊고 분노를 폭발시켰다.
콰아아아아!
한층 격이 올라간 라스의 냉기가 파도가 되어 라온에게 밀어닥쳤다.
"으음."
라온이 안쪽 입술을 깨물었다.
'이거 장난 아닌데….'
부상을 입은 상태라고 해도 통증의 정도가 이전보다 훨씬 심해졌다. 날카로운 고드름으로 전신을 찌르는 듯한 감각.
수속성 저항력이 4성인데도 아찔할 정도의 고통이라니, 라스에게 분노의 감정을 받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후욱…."
네 개의 불의 고리를 공명시키며 이가 바드득 갈릴 정도의 고통을 참고 또 참았다.
[감내하기 힘든 고통을 느꼈습니다.]
[불굴의 의지가 발동됩니다.]
그 메시지와 함께 정신과 육체를 짓누르던 고통이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크아아아! 오늘 본왕이 네놈과의 악연을 끊어버릴 것이다!
라스는 전력을 다해서 분노와 냉기를 일으켰지만, 놈의 감정을 받아들이기 전처럼 버티는 게 어렵지 않았다.
[심각한 부상 상태에서 라스의 빙의를 버텨내셨습니다.]
[감각 능력치가 1포인트 상승합니다.]
메시지와 함께 정신이 조금 더 깨끗해졌다.
-빌어먹을. 어떻게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
라스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며 수없이 욕설을 퍼부었다. 분노의 군주가 아니라, 양아치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말했잖아."
라온은 픽 웃으며 오른손을 저었다.
"넌 나한테 안 된다고. 뻔히 보인다니까."
다만 속이 편하지는 않았다.
'놈의 힘이 강해지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어.'
라스의 기운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놈보다 빠르게 강해지지 않는다면 결국 놈에게 먹히게 될 거다.
"후우."
-크으으!
라온과 라스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씹어 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 * *
다음날.
라온은 정오가 다 되어서야 깨어나 밖으로 나왔다.
마을을 보니, 조금이지만 복구 작업이 진행되어 있었다. 지부의 검사들과 수련생들이 밤과 아침 사이에 마을을 정비한 것 같았다.
"일어났군."
목책 근처에 있던 지부장 부르카스가 라온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눈빛은 어제와 달랐다. 마치 자신을 신비로운 생물처럼 보는 듯했다.
다른 수련생에게 자신이 녹전귀를 베고, 광혈귀와 전투를 치렀다는 사실을 들은 모양이다.
"몸은 괜찮은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라온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메르가 대체 뭘 뿌린 건지 모르겠는데, 부러진 뼈가 붙고, 뜯겨나간 허리와 허벅지에 살이 차오르고 있었다.
돌아가서 회복에 집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원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대단한 일을 해냈다. 15살에 녹전귀를 베고, 광혈귀와 싸워 살아남다니, 업적이라 불려도 과언이 아니야."
부르카스가 마른침을 삼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아니, 업적 그 이상이지.'
아직 검사조차 되지 못한 수련생이 에덴의 녹전귀를 베고, 광혈귀와 10분가량 싸웠다고 말하면 그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아마 이 소식을 가지고 가문으로 돌아가도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거다.
붕대를 감은 라온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저렇게 심한 부상을 입어 놓고서 고통을 느끼는 표정이나, 약한 소리는 하지도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길래 저 나이에 저런 참을성과 무력을 갖추게 된 건지 놀라울 따름이다.
"이곳은 우리가 맡을 테니, 너는 수련생들을 이끌고 가문으로 돌아가라. 임시조치는 했지만, 너를 포함해서 부상이 심한 녀석들도 많다. 돌아가서 제대로 치료를 받아라."
"알겠습니다.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은 지그하르트 아니냐."
부르카스가 옅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럼."
라온은 살짝 고개를 숙인 후 다른 수련생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
부르카스는 라온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광혈귀에게서 버틴다라….'
익스퍼트 중급인 자신도 광혈귀에게 5분을 버틸 자신이 없었다.
라온이 수련생들을 도망치게 한 후 홀로 10분을 싸웠다는 게 놀랍기도 했고, 감동적이기도 했다.
'커 보이는군.'
자신의 반도 안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의 작은 등이 너무도 커 보였다.
'어찌 됐든.'
부르카스는 하늘의 정중앙에서 세계를 비추는 태양을 올려보며 웃었다.
'가문이 난리가 나겠어.'
* * *
"라온."
루난이 먹이를 본 강아지처럼 라온의 앞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그녀는 자신의 전신을 살피고서 눈을 축 내렸다.
"아프지?"
"이제 괜찮아."
라온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거짓이 아니라, 통증은 정말 많이 줄어들었다.
"정말?"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응."
루난의 입꼬리가 아주 짧게 올라갔다. 이제 이 녀석도 감정의 표현이 조금 늘어난 것 같았다.
"가문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모두에게 출발 준비를 하라고 전해줘."
"알겠어."
그녀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다른 수련생이 있는 곳을 뛰어갔다.
"바로 돌아가는 건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버렌이 조용히 다가왔다.
"그래. 지부장님이 뒤처리를 해줄 테니, 돌아가라고 하셨어."
"하, 우리 교관은 대체 어디에 갔는지!"
버렌은 인상을 찌푸리며 바닥을 걷어찼다.
"몸은 정말 괜찮은 거냐?"
"부상이 낫진 않았지만, 회복기에 들어섰다."
"확실하게 나아라. 완벽한 상태의 널 내가 꺾어야 하니까."
"그걸 보고도?"
"그걸 봤기 때문이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바위를 얹은 듯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난 포기하지도, 물러나지도 않는다. 걸을 수 없다면 기어서라도 네 뒤를 쫓겠어."
목소리에도 단단한 의지가 깃들었다. 이번 임무를 통해 버렌도 한층 성장한 것 같았다.
"그리고."
"음?"
"네가 냉기의 오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녀석들의 입을 막았다. 네가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비밀을 밝힐 놈은 없을 거다."
"아."
라온이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거기까지 생각해줬다고?'
이제 오러가 두 가지라는 게 밝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버렌이 먼저 수련생들의 입을 막아 준 모양이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놀랄 필요 없어. 네게 목숨의 빚이 있으니,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뿐이다."
버렌이 콧등을 긁적이고 몸을 돌렸다.
"출발 준비는 내가 하겠다. 넌 쉬고 있어."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다른 수련생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저렇게 변할 수가 있나.'
버렌은 처음 만났을 때 질시에 가득 차 있던 아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바뀌었다.
5 연무장의 기적은 자신이 아니라 저녀석일지도 모르겠다.
"흠."
라온은 짐을 챙긴 뒤 마을의 중심 부근으로 향했다.
"그쪽은 제대로 수리해야 하니까. 일단 나무만 쌓아놔!"
경상을 입은 촌장이 마을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위로 쌓으면 위험하니까. 옆으로… 어! 은인!"
그는 라온을 발견하고, 재빠르게 달려왔다.
"괘, 괜찮으십니까? 저 때문에 큰 부상을…."
"촌장님 탓이 아닙니다."
"이 못난 놈을 살리느라, 그 괴물에게 맞으셨지 않습니까. 정말 뭐라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촌장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
라온은 고맙다고 말하는 촌장을 바라보며 광혈귀와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했다.
'그때….'
광혈귀가 공격을 해온 순간 자신도 모르게 촌장을 껴안고 뒤로 물러섰다. 부상을 입을 걸 알면서도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내가 왜 그랬을까.'
사실 따지고 보면 필요 없는 일이었다.
촌장에게 고블린 왕의 마석을 받았고 사정도 들었으니, 딱히 살릴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은 부상을 입으면서까지 그를 구해냈다.
'달라지고 있어.'
실비아 때문인지, 리메르 때문인지, 아이들 때문인지, 환경 때문인지.
어찌 됐든 자신도 변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변화가 그리 싫지 않았다. 텅텅 빈 목각인형에 감정의 옷이 입혀지는 느낌이었다.
"일어나세요."
라온은 옅게 웃으며 부들대는 촌장을 일으켰다. 노쇠한 눈에 감격과 감사가 담겨 있었다.
"말했던 대로 이 보석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확실하진 않지만, 놈들을 불러 모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물론입니다!"
촌장은 위아래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먼저 말을 꺼내시진 말고, 혹시라도 보석을 찾는 사람이 오면 지그하르트에서 몇 가지 물건과 함께 가져갔다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촌장은 흡사 신의 계시를 받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렇게 말하는 거지? 다 말해주면 되지 않느냐.
'모르는 게 나아.'
이 보석만이 아니라, 다른 것들도 챙겨가서 에덴 놈들이 보석을 노린다는 정보를 지워야 한다.
'이 정보는 비싸게 팔릴 거거든.'
라온이 씩 웃었다. 글렌에게 에덴의 정보를 비싸게 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 * *
수련생들은 마을 사람 모두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세부 마을을 떠났다.
버렌은 부상 당한 라온 대신 앞에서 수련생들을 이끌었고, 루난은 아기 오리처럼 라온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마르타는 평소처럼 홀로 걸었지만, 생각이 많은 듯 눈동자가 탁해져 있었다.
라온은 수련생들의 중앙에 서서 주변을 면밀하게 관찰했다.
'능력치 덕분에 감각이 늘어났어.'
녹전귀를 잡은 업, 광혈귀와 맞선 업 그리고 라스에게 뜯어낸 능력치 덕분에 감각 수준이 꽤 올라갔다.
이전보다 감각 범위가 늘어나, 숨은 사람의 기척을 잡기도 쉬워졌다.
지금이라면 홍안귀가 숨어있어도 그 위치를 금세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시나 모를 에덴의 습격에 대비하며 계속해서 기감의 범위를 늘리자, 감각에 한 사람이 잡혔다.
'리메르!'
리메르가 가진 그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그는 돌아가지 않고, 여전히 수련생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긴 당연한가.'
에덴 혹은 다른 세력의 습격이 있을지도 모르니, 그가 남아 있는 건 불 보듯 뻔했다.
후욱.
갑자기 리메르의 기척이 촛불 꺼지듯이 훅 가라앉았다. 자신이 알아차린 것을 감지한 모양이다.
'특이한 사람이라니까.'
라온은 픽 웃으며 기감을 지우고 수련생들을 따라갔다.
잠시 후.
수련생들이 지나간 오솔길의 나무 위에서 리메르가 내려섰다. 그는 숫제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 괴물 같은 놈….'
라온이 이 며칠 동안 정말 말이 안 될 정도로 큰 성장을 이뤘다고 해도 제대로 은신한 자신을 감지할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 소식을 알려주면 어떤 반응을 하려나?"
그는 글렌의 엄숙한 얼굴을 생각하며 히죽였다.
83화
"그 꼴은 무엇이냐."
글렌은 어설픈 자세로 부복한 리메르를 보며 턱을 틀어서 들어 올렸다.
"육체와 기의 균형이 더 어긋났군. 또 무슨 짓을 벌였느냐."
"제가 벌인 건 아닌데요."
"하여튼."
글렌이 인상을 찌푸리며 눈매를 좁히자, 그의 오러가 털실처럼 갈라져 리메르의 육체로 파고들었다.
우우웅.
검계를 열었던 후유증으로 생겨났던 마나 회로와 단전의 통증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허…."
리메르가 헛웃음을 흘렸다.
'또 강해지신 건가?'
그저 오러를 운용한 것으로 육체의 어긋남을 맞추다니, 글렌은 이제 반신의 경지에 올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니, 원래부터 저 정도셨지.'
글렌은 10여 년 전부터 제 실력을 드러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강해졌다기보다 본 실력을 조금 드러낸 게 맞을 거다.
우우웅.
근육과 뼈, 장기까지 어루만져주던 글렌의 오러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몸 상태가 훨씬 더 좋아졌다.
"감사합니다."
리메르는 건들거리던 손가락을 멈추고, 제대로 고개를 숙였다.
"되었다. 가뜩이나 허약한 녀석이 그렇게 부들거리는 건 별로 보고 싶지 않으니까."
"후후, 앞으로도 신세 좀 져야겠네요."
"시끄럽고, 찾아온 용건이나 말해라."
"아, 그렇죠."
그는 고개를 들어 올리며 웃었다.
"가주님이 학수고대하시는 손자들의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
글렌은 대답 없이 무심한 눈으로 리메르를 내려다보았다.
"빨리 말이나 하라는 표정이시네요."
리메르는 킥킥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사실 임무 중에 꽤 재밌는 일이 있었습니다."
"재밌는 일?"
"예. 세부 마을에 에덴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반신의 경지에 오른 글렌에게도 그 이야기는 놀라운 모양이다. 눈동자가 화등잔만 해졌다.
"세무 마을과 세부 산을 미리 살펴보았던 지부도 파악하지 못한 걸 보니, 그들의 조사 이후에 찾아온 모양이더군요."
"본론만 말해. 빨리."
"알겠습니다. 그럼 처음부터 시작하죠. 제가 먼저 그곳에 도착했을 때 홍안귀를 발견했습니다. 어찌할까를 고민하다가 아이들을 한 번 믿어보기로 했죠. 그래서…."
리메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세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차례로 말했다.
"…제가 도착했을 때 라온은 몸이 망가진 상태에서도 광혈귀 앞에서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리메르의 진녹색 눈동자가 선명한 빛을 발했다.
"광혈귀? 너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고…."
"맞습니다. 말이 안 되죠. 검사의 칭호도 받지 못한 15살짜리 수련생이 녹전귀를 가르고, 광혈귀의 주먹에서 살아남았다? 그 누구에게 말해도 욕을 얻어먹을 이야깁니다. 하지만!"
그가 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사실입니다. 제가 보았고, 수련생들이 보았으며, 마을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가주님도 라온을 본다면 아시게 될 겁니다. 녀석은 이미 소드 익스퍼트 하급에 올랐습니다."
"살아남았다고 했지. 그럼 몸은 괜찮은 것이냐?"
초월자에 오른 글렌의 눈에서 의문과 걱정이 비쳤다.
"이런 놀라운 이야기를 전했는데, 몸부터 걱정하시다니, 괜히 피붙이가 아니군요."
"시끄럽고, 말이나 해라."
"왼팔의 뼈와 부러지고, 근육이 찢어졌습니다. 그 마을의 촌장을 구하려다가 첫 일격에 당했다고 하더군요."
"음…."
그 말을 들은 글렌이 입매를 살짝 비틀었다.
"그런 표정은 오랜만에 보네요. 손자가 자랑스러우면서도, 걱정되시는 모양입니다."
"지금 상태는?"
"엘브린의 수액을 주었습니다. 더 단단해져서 돌아올 겁니다."
"그건."
글렌이 눈매를 좁혔다. 엘브린은 두 번째 세계수의 이름. 그 수액은 천금을 주고도 사기 힘든 보물이었다.
"부상 정도가 너무 심해서 빠르게 조치하지 않았다면 완벽하게 회복하지 못했을 겁니다. 거기다 뭐라고 해야 하나? 이상하게 조금도 아깝지 않더군요."
리메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수련생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내일모레면 가문에 도착할 겁니다."
"그 아이들이 돌아오는 대로 가문 회의를 열겠다. 대주들을 소환하도록."
"알겠습니다."
글렌이 눈을 감으며 지시를 내리자, 경악하여 가만히 있던 로엔이 앞으로 나왔다.
'라온. 거하게 뜯어낼 수 있겠다.'
리메르는 글렌의 표정을 보며 히죽 웃었다.
"리메르."
"아, 예?"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글렌의 목소리가 훅하고 들어왔다.
"다른 교관을 보내지 않고, 왜 네가 그곳에 간 거지?"
"그냥.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가…."
글렌은 턱을 긁적이면서 말을 이었다.
"잘했다. 그리고 수고했다."
"오? 이, 이게 얼마만의 칭찬입니까? 거의 20년…."
"네 녀석이 헛짓만 하지 않았어도 몇 번은 더 들었을 것이다."
"하하하! 그건 그렇죠."
리메르가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가주 앞에서 진심으로 웃었던 게 언제였는지, 가주가 드러나는 미소를 지었던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라온 덕분에 계속 멈춰 있던 가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
* * *
라온과 수련생들은 보름이 지나고서야 지그하르트 정문 앞에 도착했다.
쿠구구구!
지축이 뒤틀리는 듯한 굉음과 함께 열리지 않을 것 같은 은색의 문이 활짝 벌어졌다.
그 뒤로 성벽과 문을 지키는 문지기 검사들이 우뚝 서 있었다.
임무에 나갈 때와 같은 모습.
하지만 다른 점이 있었다.
석상처럼 묵직했던 문지기 검사들의 눈빛에 놀람과 의문이 깃들어 있었다.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
경비 대장의 목소리도 달라졌다. 애송이 수련생을 보는 게 아니라, 임무를 완수하고 온 검사를 마주한 듯했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문지기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눈매를 좁혔다.
'리메르가 퍼뜨렸군.'
뻔하다. 지부 사람들은 아직 세부 마을에 있으니, 리메르가 여기저기 퍼뜨린 게 분명했다.
"쉬고 싶겠지만, 먼저 들려야 할 곳이 있다. 너희 모두 가주전으로 가라. 가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네?"
"가주전?"
"가주님이?"
가주가 부른다는 말에 수련생들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바로 가도록."
경비 대장은 가주전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문을 닫으라 지시했다.
"가자."
라온은 이미 그럴 거라 예상했기에 고개를 끄덕이고서 수련생들을 이끌고 가주전으로 향했다.
가문의 대로를 지나며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멈춰서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감각이 좋아진 덕분에 그들이 속삭이는 소리도 들려왔다.
"저 녀석 맞지? 라온 지그하르트."
"저렇게 작은데 녹전귀를 잡았다고?"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광혈귀의 공격을 버텼다잖아."
"근데 기세가 별로 안 느껴지는데? 정말 익스퍼트 맞아? 유저 상급 정도인 것 같은데."
"리메르가 또 헛소리를 퍼뜨린 거 아닐까?"
"리메르는 게으르지만, 거짓 소문을 만들 정도로 타락하진 않았지."
그들은 리메르가 퍼뜨린 소문을 가지고, 자기들끼리 진짜니, 가짜니 신나게 떠들어 댔다.
"하아."
라온은 가는 한숨을 뱉고, 가주전 안으로 들어갔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글렌의 집사인 로엔이 고개를 숙였다. 그를 따라 사용인들 모두가 머리를 조아렸다.
'확실히….'
여긴 진짜들이 있는 곳이라서 그런지 이전과 반응이 달라지지 않았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모두 기다리고 계십니다."
"모두라면…."
"가주님만이 아니라, 대주님들도 함께 계십니다."
"음…."
"대, 대주들도?"
"이런…."
얇게 들린 신음에 뒤를 돌아보니, 수련생들 모두가 긴장한 표정으로 마른 입술을 축이고 있었다.
"긴장할 필요 없어. 가서 있었던 일만 말하면 그만이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여러분들은 임무를 행하며 보고 겪은 것을 그대로 전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로엔이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다르군.'
글렌의 옆에 서서 수많은 인재를 봐왔지만, 라온 같은 아이는 처음이다.
어려서 이 자리의 중요함을 모르는 게 아니다. 전부 알면서도 저리 여유로운 것을 보면 마음가짐이 보통이 아니다.
"오시지요."
로엔은 고개를 꾸벅이고 널찍한 복도를 안내했다.
"가자."
라온은 로엔의 바로 뒤를 따라 알현실로 향했다. 알현실의 문은 열려 있었고, 그 안에서 무시무시한 기운들이 뿜어지고 있었다.
"후욱."
숨을 뱉어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판별식과 달리 의자는 단상 위의 옥좌 하나뿐이었고, 그 아래엔 처음 보는 검사들이 일렬로 줄을 서 있었다.
'저게 지그하르트의 단주와 대주들.'
줄을 서 있는 자들의 기세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가진 기운과 기질 자체가 평범한 인간과는 달랐다.
'그리고….'
익스퍼트에 오르니 더욱 확실하게 느껴진다. 글렌 지그하르트. 그의 기운은 너무도 거대해서 제대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알현실을 넘어 지그하르트 영지 전체에 닿아 있는 것 같았다.
'무섭군.'
강자들이 모인 이 안에서도 그는 홀로 다른 차원에 서 있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라온이 알현실 중앙에 멈춰 서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수련생들은 그를 따라 같은 자세로 머리를 조아렸다.
"일어나라."
모두는 글렌의 묵직한 목소리를 가슴으로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예."
"네가 세부 마을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고 들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해보아라."
"알겠습니다."
라온이 생각을 정리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세부 마을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가 감시를 하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처음엔 교관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서…."
가장 뒤에 있는 단주부터 대주. 얄밉게 하품하는 리메르를 지나 글렌까지. 모두와 눈을 마주친 뒤 입을 뗐다.
"광혈귀를 막다가 힘이 빠져 죽음을 각오한 순간 리메르 교관이 와주어서 살 수 있었습니다."
"...."
라온의 이야기를 들은 알현실 전체에 쇳덩이를 얹은 듯한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가주님."
버렌의 아버지이자, 글렌의 둘째 아들인 카룬 지그하르트가 인상을 턱을 치켜들었다.
"저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고작 15살에서 16살이 된 아이들입니다. 녹전귀에게 몰살을 당할 수준인데 광혈귀에게 버텼다니! 헛소리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형님. 지부에서도 연락이 왔습니다. 에덴의 행적이 곳곳에 나타났다고."
글렌의 셋째 아들이자, 마르타의 아버지 데니어 지그하르트가 그의 옆을 막아섰다. 그는 예전부터 이쪽의 편을 들어주었다.
"내가 봤다니까. 더럽게 못 믿네."
리메르가 귀를 후비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것부터가 문제다! 폐인이 된 너 따위가 어떻게 광혈귀를 잡았다는 거냐! 그 증거를…."
떨그렁!
갑작스럽게 들린 쇳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라온 앞으로 돌아갔다.
그의 앞에 두 개의 쇳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녹전귀와 광혈귀의 투구였다.
"녹전귀와 광혈귀의 투구…."
"지, 진짜였다고?"
"으음…."
투구를 본 대주들이 눈을 부릅떴다.
"에덴 놈들의 투구가 문제가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너희들이 그걸 어떻게 잡았냐는 거다! 기습? 네놈이 암살자도 아닐 텐데, 어찌 그게 가능하다는 말이냐!"
암살자였는데? 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가주님."
라온은 카룬이나 다른 대주들을 보지 않고, 정면에 있는 글렌을 올려보았다.
"검을 뽑아도 되겠습니까?"
글렌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고개를 숙이고서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뽑았다. 날이 상한 은빛의 칼날 위로 시뻘건 불길이 치솟았다.
화르르륵!
용광로를 태우는 진한 불길처럼 검날을 덮은 불길이 알현실 전체를 밝혔다.
"거, 검기. 그것도 저런 불꽃이라니…."
"분명 작디작은 불꽃이라고 들었는데?"
"소드 익스퍼트라고? 저 나이에?"
"마, 말도 안 돼…."
"저 정도라면 녹전귀와 자웅을 가릴 수준은 되겠어."
대주들은 라온의 검기를 보고 놀라 눈을 부릅떴다.
"내가 말했잖아. 저 녀석 괴물이라니까."
리메르는 경악하는 대주들을 보며 낄낄 웃어댔다.
글렌 지그하르트는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다. 다만 그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입꼬가 씰룩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후우우욱!
라온은 뻘건 불길로 타오르는 검을 내리며 턱을 틀었다.
"이 정도면 설명이 됐습니까?"
그 말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84화
"검기…."
카룬은 라온의 검에 어린 불길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익스퍼트 하급의 경지에 오른 게 정말이었다고?'
이상하게도 라온의 경지는 추측하기 어려웠다. 오러 유저 상급 정도라 생각했는데, 익스퍼트의 상징인 검기를 사용할 줄은 몰랐다.
15살이라는 나이에 검기를 사용하다니, 대륙 역사상 손에 꼽을 만한 천재 혹은 괴물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익스퍼트라고 해도 광혈귀와 겨룰 수는 없어.'
익스퍼트는 분명 강자라고 불릴 수 있는 경지지만, 대륙 전체로 보았을 때는 그리 대단한 수준이 아니다.
"아무리 익스퍼트에 올랐다고 해도 광혈귀의 무위는 마스터. 네 수준으로는 절대 버티지 못한다. 녹전귀를 잡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실대로 말…."
"아버지."
라온의 뒤에 부복해 있던 버렌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제가 보았습니다. 라온은 녹전귀를 베었고, 저희와 마을 사람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서 한팔을 다친 상태에서도 혼자 광혈귀의 앞을 막아섰습니다."
"맞아."
루난도 버렌의 뒤를 따라 나와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은 우측에 서 있는 그녀의 아버지를 로칸 슬리온을 향해 있었다.
"너희들에게 입을 열라고 허락하지 않았다!"
카룬은 아들이 아닌, 사육한 짐승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버렌을 노려보았다.
"허, 참 아들이 말해도 믿지를 못하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네. 앞뒤가 아주 꽉꽉 막히셨어. 밥은 어디로 먹고, 똥은 어디로 싸나 몰라."
"입 닫아라. 리메르."
카룬은 어깨를 으쓱이는 리메르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네놈이 한 일이 가장 큰 문제다. 그 망가진 육체로 광혈귀를 잡았다니, 사기를 치지 않고서야…."
"그럼 한 번 붙어볼까요? 중무전주의 무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오랜만에 보고 싶은데?"
"좋다. 그 얇은 목을 당장에 베어…."
"그만."
리메르와 카룬의 목소리 사이로 모든 것을 압도하는 묵직한 음성이 끼어들었다.
"흡!"
"윽…."
"끄으…."
그 거대한 존재감에 알현실에 있는 모두의 척추가 바짝 섰다.
"수석 수련생 라온 지그하르트. 그리고 5 연무장의 수련생 모두 들어라."
글렌은 괴고 있던 턱을 떼고, 모두를 굽어보며 말을 이었다.
"훌륭했다."
"어?"
"아버지?"
"가주님…."
생각지도 못한 글렌의 칭찬에 대주들도, 봉신가문의 가주들도, 수련생까지 모두가 입을 떡 벌렸다.
알현실의 모두는 넋이 나간 눈빛으로 글렌을 바라보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글렌 지그하르트는 그 누구보다 칭찬에 인색하고, 냉혹한 인물이었으니까.
아무리 어려운 임무를 완수해도 수고했다는 말 정도였는데, 훌륭하다는 말이 나온 건 십수 년만에 처음이었다.
"리메르에게 1차로 보고를 받았고, 세부 지역을 조사한 지부장에게 2차 그리고 너희들에게 3차로 받은 보고는 모두 일치한다."
글렌은 턱을 괴고 있던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적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섣불리 움직이지 않은 점이 첫 번째."
그가 검지 하나를 접었다.
"되돌아와서도 바로 달려들지 않고, 적을 파악하려 했던 것이 두 번째."
이번엔 중지를 내렸다.
"최적의 순간까지 기다리다가 한 번의 기습으로 적을 약화시키고, 숨겨둔 일격으로 녹전귀의 숨통을 꺾은 게 세 번째."
글렌의 손가락이 접힐수록 대주들의 눈동자가 커졌다.
"마지막으로 이길 수 없는 적을 만났을 때 그 앞을 막아서고, 동료와 민간인을 도망칠 수 있게 한 게 네 번째다."
그는 올라간 네 손가락을 접으며 붉은 눈을 빛냈다.
"경험 많은 무인처럼 하나하나의 판단이 적절했다. 수련생 그리고 마을 사람들 중 사망자가 없던 것은 네 정확한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렌이 라온의 뒤에 있는 수련생들을 보았다.
"너희들 역시 지그하르트의 검사다운 모습을 보였다. 지그하르트가 지금 이렇게 설 수 있는 건 밑에서 받쳐주는 사람들 덕분이다."
"음…."
"가주님…."
로엔과 리메르는 글렌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우리는 왕국은 아니지만, 그 이상으로 북방에 군림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지키고 보호를 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우릴 따르지 않겠지. 모두 수고했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버렌과 루난, 마르타 그리고 수련생들은 고개를 바닥에 박으며 우렁차게 외쳤다.
"으으!"
"가주님!"
신이 내리는 칭찬에 수련생들은 덜덜 떨었다. 특히 버렌은 눈물까지 글썽였다.
"너희들 모두에게 동색의 패를 내리겠다."
"감사합니다!"
수련생들은 이마에서 피가 터져 나오도록 머리를 박았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을 만들고, 정리했던 라온 지그하르트. 네게는 은색의 패를 내리겠다."
"감사합니다."
라온도 다른 수련생들을 따라 다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칫."
"쯧."
라온이 은패를 받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대주들도 있었지만, 글렌이 직접 움직였기에 누구도 나서지 못했다.
"로엔."
"예."
로엔이 우측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널찍한 판을 들고 글렌이 앉아 있는 단상위로 올라갔다.
글렌이 판을 덮은 천을 걷자, 42개의 동색의 패와 하나의 은색의 패가 놓여 있었다
"버렌 지그하르트부터 올라오거라."
"아, 예! 알겠슴닷!"
버렌은 대답하다가 혀를 깨물었지만, 티를 내지 않고, 단상 위로 올라갔다.
"우리가 보호해야 할 자들을 위해서 나선 것은 옳은 행동이다. 하지만."
하지만이라는 말에 버렌의 입매가 굳어졌다.
"적의 무력을 파악하지도 못하고 달려드는 건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 더 넓은 시야를 쌓아 상황을 대국적으로 보도록 해라."
글렌은 버렌을 넘어 그 뒤에 서 있는 수련생들 모두를 보며 말을 이었다.
"너희 모두에게 하는 말이다."
"예!"
그는 루난과 마르타 그리고 모든 수련생들에게 동패를 내어준 후 마지막으로 라온을 보았다.
"라온 지그하르트. 올라와라."
"예."
라온은 고개를 깊게 숙인 뒤 일어서서 단상으로 올라갔다.
'시선이 느껴지는군.'
등 뒤에서 짜증이 묻어난 시선이 심장을 뚫듯이 쏘아졌다. 카룬과 다른 방계 출신 대주들의 시선이었다.
다만 카룬의 아들인 버렌과 방계 수련생들은 질시나, 짙투의 시선을 보내지 않고 자랑스럽게 지켜보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라온 지그하르트."
글렌의 시선은 여전히 차갑고, 건조했다. 한겨울에 얼어붙은 들판과도 같았다.
하지만 분명 이전과 다른 점이 있었다.
눈이 쌓인 그 들판 위에 피어난 한 송이 꽃처럼 눈빛 속에 작은 빛이 어려 있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네 덕분에 많은 사람이 살았다. 그 공로를 인정하여 네게 은색의 패를 내린다. 앞으로도 육체와 정신적인 수련에 힘을 쓰도록."
"잠시만 괜찮겠습니까."
라온은 글렌이 들고 있던 은패를 받지 않고 멈춰섰다.
"뭐지?"
"드려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할 말?"
"예. 에덴의 목적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음?"
글렌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놈들이 세부마을에 찾아온 이유. 그리고 현재 무엇을 노리고 있는 지를 알고 있습니다."
"이 자리가 어떤 자리라고 그런 거짓말을 내뱉느냐!"
뒤에 악에 받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룬의 음성이었다.
"에덴의 귀신들은 사지를 뜯어내는 고문을 해도 입을 열지 않는 지독한 놈들이다. 너 따위가 그걸 어떻게 알았다는 거냐!"
"음…."
"확실히…."
"고문이 통하지 않는 놈들이니까."
다른 대주들도 카룬의 말에 공감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할 수 있느냐."
"그렇습니다. 다만…."
라온은 슬쩍 뒤를 돌아서 불판처럼 달아오른 카룬과 눈을 마주쳤다.
"의심하는 자들 앞에서 그 사실을 밝히고 싶지는 않습니다."
"뭐, 뭐라!"
"저 건방진!"
"검사의 칭호조차 받지 못한 주제에 감히!"
카룬을 따르는 대주들이 강렬한 기세를 뿜어냈지만, 라온은 위축되지 않았다.
전생의 자신은 저들보다 약했지만, 더 대단한 업을 쌓았으니까.
"제가 틀린 말을 했습니까?"
지금 이순간은 리메르와 글렌이 깔아준 판이다. 임무에 대한 대가를 더 크게 키울 수 있는 판. 방해꾼 따위가 끼어들게 할 수는 없었다.
"닥쳐라! 여기가 어디라고…."
"카룬 지그하르트."
단상 위에서 들려온 묵직한 목소리에 카룬이 입을 꾹 다물었다.
"입 닫으라고 말했을 텐데."
"흡!"
오싹하다.
자신에게 향한 기세가 아님에도 온몸이 꽁꽁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 아버지?"
"나가라. 조금 전 떠들던 놈들 모두."
글렌은 카룬을 보지도 않았다. 그는 가문의 중책을 맡은 아들에게도 자비가 없이 냉혹했다.
"으…."
카룬과 함께 떠들던 다섯 명의 대주, 부대주들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들은 라온을 죽일 듯 노려보고서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이제 말해라. 그곳에서 무엇을 본 거지?"
에덴의 주구들은 독종들이라 어떤 고문을 해도 입을 열지 않는다. 라온이 에덴 놈들의 목적을 알았다고 하니, 대주들만이 아니라, 글렌도 그의 입만을 바라보았다.
"광혈귀가 절 죽이고, 다른 수련생들도 학살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본인들의 목적을 밝혔습니다."
"목적?"
"에덴은 몬스터들의 마석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라온은 품에 있던 고블린 왕의 마석을 꺼냈다. 그 붉고 뜨거운 빛이 어둑해진 알현실을 밝혔다.
"보통의 마석이 아니라, 흔히 네임드라고 불릴 만한 몬스터들입니다. 이건 세부 산에서 수백 년 전에 죽었던 고블린 왕의 마석입니다."
그 말을 하며 마석을 앞으로 내밀었다.
우우웅.
고블린 왕의 마석이 저절로 떠올라 글렌의 손으로 흘러갔다.
"음."
글렌은 눈매를 좁힌 채로 마석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
대주와 단주들은 침조차 삼키지 않고, 글렌과 라온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글렌은 마석의 확인을 끝낸뒤 고개를 들어 올렸다.
"보통의 물건은 아니군."
그는 자신을 보며 알 수 없는 눈빛을 보냈다. 그건 대견함을 담은 것 같기도 했고, 너 따위가 이걸 알아왔다고 조롱하는 것 같기도 했다.
"누구도 하지 못한 업적을 이뤄냈구나."
글렌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로엔에게서 은패를 받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느리게 손을 뻗어서 글렌이 내려주는 은패를 받아들었다. 다만 고개를 숙인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잘못 생각했나?'
글렌이 자신과 실비아를 싫어하더라도 공은 확실하게 챙겨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은패 하나를 더 주거나, 운이 좋으면 금패를 수여할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달랐다. 그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이럴 거면 차라리 대놓고 달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아쉽지만 지금에 와서 더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입술을 살짝 깨문 채로 단상을 내려왔다.
"모두 돌아가라. 내일 아침. 대회의를 열 테니, 모두 참석하도록."
"예!"
대주와 단주들은 알현실이 떠나가라 대답한 뒤 고개를 숙였다.
'쯧.'
-그런 정보를 주고도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다니, 멍청하기 그지없도다.
라온은 들리지 않게 혀를 찼고, 라스는 비웃음을 흘렸다.
* * *
'내가 그를 너무 믿었어.'
라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만화공 이후 글렌에게 약간의 신뢰를 가졌는데, 헛짓이었던 모양이다.
이곳 지그하르트는 정글이나 마찬가지다. 자신의 것은 자신이 챙겨야 한다.
"라온 님."
발걸음마다 짜증을 담으며 가주전을 나가고 있을 때였다. 우측 복도에서 로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로엔은 조금까지만 해도 알현실 안에 있었는데, 어느새 이곳에 나타났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느끼지 못했어.'
상승한 감각으로도 그의 기척을 파악하지 못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무인. 그것도 전생의 자신과 같은 암살자였던 것 같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는 인자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오늘 밤 자정에 별관으로 찾아가도 되겠습니까?"
"예? 갑자기 왜 오신다는…."
"가주님께서 라온 님을 모시고 오라 하셨습니다."
로엔은 손가락으로 방금 나온 알현실의 거대한 문을 가리키며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두 번째 선물을 주시려는 것 같군요."
85화
라온은 로엔에게 알겠다고 대답하고서 가주전을 나왔다.
'무슨 생각이지?'
로엔의 말대로 정말 못 준 선물을 주려는 건지 아니면 에덴에 대해 다른 질문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아직도 성격을 종잡을 수가 없어.'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 약간이나마 사람의 심리를 읽을 수 있지만, 글렌의 속내는 안개가 낀 것처럼 전혀 보이지 않았다.
"라온!"
가주전을 나오자마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가가 빨개진 실비아가 입술을 깨문 채 달려왔다.
"세상에!"
그녀는 옷이 바닥에 밟히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무릎을 꿇은 채 라온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에, 에덴이랑 싸웠다며! 팔은 괜찮은 거야? 허리는 또 왜 이래!"
"괜찮아. 거의 다 나았어."
라온이 부드럽게 웃었다. 리메르가 발라준 약이 효과가 좋아서 거의 완치된 상태였다.
"나는…."
실비아는 팔과 허리, 허벅지에 감긴 두꺼운 붕대를 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 그렇지….'
그녀는 에덴에게 남편과 첫째 딸을 잃었다. 자신이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난…."
"후회했어."
실비아가 고개를 숙였다. 팔을 잡은 그녀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임무에 떠나기 전에 말했잖아. 지그하르트다운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고."
"아…."
"혼자 녹전귀와 싸우고, 모두를 구하기 위해서 광혈귀의 앞을 막았다고 들었을 때 정말 후회했어."
그녀의 눈매에 가늘게 걸쳐있던 눈물이 결국 뚝 떨어졌다.
"내가 했던 말 때문에 네가 그런 선택을 했을까 봐. 정말…."
울고 있어서 발음이 이상했지만, 실비아가 어떤 말을 하려는지,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가슴에 와닿았다.
"나는 못난 검사였던 것만이 아니라, 못난 엄마…."
"난 오히려 엄마에게 고마워."
떨고 있는 실비아의 두 손을 잡아주었다. 따스한 손이 그녀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고, 고맙다고?"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혼자서 광혈귀와 싸울 때 정말 많은 생각을 했어. 도망칠까? 어떻게? 버렌에게 지시를 내리고 혼자 빠져나갈까? 수련생들과 사람들을 미끼로 던지고 도망친다면 살 수 있지 않을까?"
라온은 민망한 눈빛으로 떨리는 실비아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때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어. '너만큼은 과거 지그하르트의 검사답게 살아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정말이다. 귀에서 울리는 듯한 실비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촌장을 구하지도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을 쳤을 거다.
"아…."
"그 말이 아니었다면 모두를 버리고 도망치다가 죽었을 거야. 만약 살았다고 해도 평생을 후회하고, 다시는 검을 잡지 못했을 테지."
차가운 숨결과 함께 그때의 아찔한 감정을 뱉어냈다.
"내가 광혈귀의 앞을 막아서고, 끝까지 싸운 건 엄마의 말 덕분이었어. 미안해할 필요도 후회할 필요도 없어."
내가 왜 광혈귀와 싸우는가. 내가 왜 다른 이들의 방패가 되어야 하는가. 그 고통의 순간을 버틴 건 그녀의 말로 인한 스스로의 선택 때문이었다.
"흐으윽…."
실비아가 참고, 참던 울음을 터트렸다. 에덴의 소식을 전해 들은 후 계속해서 마음속에 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괜찮아."
라온은 어렸을 때부터 실비아가 해주었던 말을 읊조리며 그녀의 등을 어루만져주었다.
* * *
라온은 실비아가 지쳐 잠들 때까지 곁에 있다가 그녀의 방을 나섰다. 문밖에선 헬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작고, 어리던 도련님이 마님을 위로해주시다니, 전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헬렌이 손가락으로 눈가를 가리며 우는 척을 했다.
"여한은 무슨. 오래오래 살아. 엄마랑 함께 호강시켜 줄 테니까."
"말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도련님."
"말로만 할 생각 없어."
라온은 손을 저으며 실비아의 방문을 닫았다.
"그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래."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갔다. 커튼이 닫힌 어두운 방 안에 가는 인영이 하나 있었다.
"주디엘."
라온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침대에 앉으며 이름을 불렀다.
"예. 도련님."
창가 옆에 서 있던 주디엘이 라온의 앞에 무릎을 꿇고 부복했다. 그녀의 표정이 차가운 대리석처럼 굳었다.
"상황은?"
"중무전에서 돌아오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아무래도 전 처분될 것 같습니다."
"흐음…."
라온이 주디엘의 정수리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화풀이인가.'
주디엘을 별관에 보낸 건 카룬 지그하르트다. 자신이 소드 익스퍼트에 오른 정보도 가져가지 못했고, 조금 전 알현실에서 그의 성질을 제대로 건드려놨으니, 주디엘을 처리하기로 결정한 것 같다.
'다만….'
주디엘은 본인의 목숨이 날아갈 것 같은 상황에서도 침착했다.
전에 호수 앞에 공포에 질리는 모습을 보고, 평범하다고 생각했는데, 첩자로서 교육은 제대로 받은 모양새였다.
"살고 싶나?"
라온은 느릿하게 입을 뗐다. 주디엘이 죽어도, 살아도 별 상관없다는 투였다.
물론 속으로는 당연히 그녀를 살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기껏 구한 이중첩자를 버릴 수는 없으니.
"...."
주디엘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가 달빛이 비친 호수처럼 흔들린다. 처음 봤을 때 느꼈듯이 그녀는 삶에 미련을 가지고 있었다.
"네가 살아남을 방법을 알려주지."
"예?"
"중무전으로 가지 말고, 편지 하나를 보내라. 라온 지그하르트의 개인 시녀가 되었다고."
"아…."
"지금 내 몸 상태를 걱정한 어머니가 널 선택했다고 하면 의심받지 않을 거다."
라온이 붕대에 감긴 상처들을 가리켰다. 현 상태와 달리 상처가 심각하다고 알려졌으니, 이 방법은 무조건 통한다.
거기다 카룬도 넣은 첩자가 라온의 직속이 되었으니, 제대로 된 정보를 빼내기 쉽다고 생각할 거다.
"그, 그건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제게 그런 배려를…."
"배려가 아니야. 이중첩자를 함부로 날리는 건 내게도 아까운 일이니까."
"음…."
"거기다 좋은 정보를 하나 주지. 다들 내 부상이 심각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상당히 회복된 상태다. 부상을 회복하는 척하면서 별관에서 수련할 생각이다."
라온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주디엘에게 부상의 정도에 대한 정보를 주었다.
"이걸 아는 사람은 가주님이나, 리메르 교관뿐이야. 가져가면 네가 도움이 된다는 걸 알릴 수 있을 거다."
"그, 그럴 겁니다."
주디엘이 떨리던 턱을 그대로 끄덕였다.
"그럼 뭐 하는 거지?"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당장 가서 그 정보를 쪽지에 적어서 보내. 그리고 표정 관리 안 하면 그쪽에 들키게 될 거다."
"아, 알겠습니다!"
주디엘은 손아귀로 볼을 감싸면서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언행 하나하나가 한심하도다. 저런 쓸데없는 첩자를 어디에다가 쓰려는 게냐.
'카룬 지그하르트의 뒤통수를 칠 수 있는 덫이 되어줄 테니까. 그리고.'
라온은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문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예전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 * *
침대에 멍하니 누워있던 라온은 달이 하늘의 정중앙에 서자마자 일어섰다.
약속 시간 때문이 아니라, 창문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행히 기다리고 계셨군요."
창문을 열자, 로엔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자고 있을 수는 없죠."
라온은 코트를 어깨에 걸치고서 창문을 넘어갔다.
"그래서 아까 한 말씀은 무슨 의미죠?"
로엔의 주름진 눈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가주님의 뜻을 어찌 다 알겠습니까. 가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음…."
그 뜻을 알고 싶어서 질문을 했지만, 역시 로엔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알고 있는 게 분명하면서도 답을 해주지 않았다.
로엔과 가벼운 대화를 하며 가주전으로 향했다. 신기하게도 이 주변에서 경계를 서던 검사들의 기척이 사라져 있었다.
'아무도 없군.'
라온은 로엔을 따라 그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은 채 가주전에 들어갔다. 가주전 내부를 지키던 시녀, 시종, 검사들마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로엔이 미리 사람들을 물려놓은 것 같았다.
"음…."
뭔지 모를 불안감과 긴장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도련님이 행한 일은 자랑스러운 업적이었으니까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알현실의 문을 열었다. 거대한 문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내부의 빛이 쏟아져나왔다.
판별식 때는 찬란했고, 오늘 낮에는 선명했다면 지금은 은은해서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빛이었다.
로엔을 따라 알현실 안으로 들어가자, 동상이라도 된 듯 옥좌에 앉아 있던 글렌 지그하르트가 눈을 떴다.
'후….'
그것만으로 편안하던 알현실의 분위기가 다시 긴장감으로 가득 찬 것 같았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됐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려 할 때 몸이 석화라도 된 듯 멎었다.
'이 기운….'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글렌이 그저 목소리만으로 몸을 멈춰버린 것이다.
'정말이지….'
라온은 무학의 또 다른 경지에 전율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툭.
글렌은 자신을 지그시 내려다보다가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뗐다.
"라온 지그하르트."
"예. 가주님."
그의 부름에 목을 떨며 고개를 내렸다.
"보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지?"
'보법이라.'
보법은 걷는 법.
공격, 방어 혹은 회피나 도주까지.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효율적으로 움직일 길을 만들어주는 게 바로 보법이었다.
"그 성취에 따라 무인의 생사가 결정되는 가장 중요한 무학이라고 생각합니다.
"흠."
글렌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드는 대답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녹전귀, 광혈귀와 전투를 할 때 보법은 무엇을 사용했지?"
"가람보법을 사용했습니다."
라온은 가람보법만이 아니라, 전생에 익힌 무영보도 사용했지만, 그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가람보법은 경지에 오른 이후에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보법이지만, 선이 너무 단순하다."
맞는 말이다.
가람 보법은 분명 뛰어난 보법이지만, 기본적인 형태만 담겨 있다.
반면 무영보는 회피와 은밀함 위주의 보법이라, 암살할 때가 아니라면 가람보법 이상으로 어중간한 보법이었다.
추가로 패를 받으면 새로운 보법을 달라고 하려 했는데 완전히 계획이 어긋나버렸다.
"라온."
아쉬움에 입맛을 다실 때 글렌이 다시 한번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정오에 이루어진 논공행상에서 네가 녹전귀의 목을 베고, 광혈귀에게 버텼던 건 은패로 보상을 해주었지. 하지만 놈들의 목적을 알아낸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라온은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지금까지 글렌의 말을 생각해보면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지 예상이 갔다.
"에덴의 목적을 알아 온 대가로 네게 어울리는 보법을 전수해주마."
글렌이 옥좌에서 일어섰다. 대륙에서 가장 높다는 엘리스트 산이 눈앞에 떠오른 느낌이다.
그는 단상 아래로 걸어 내려와 오른발을 앞으로, 왼발을 뒤로 뻗었다. 귀족처럼 고고하면서도, 전장의 장수처럼 거친 기세였다.
"잘 보아라. 기회는 한 번뿐이니까."
86화
라온이 숨을 멈췄다.
'기연이다.'
대륙 최강의 무인이 직접 전수해주는 보법이라면 패 따위로 얻을 수 없는 기연 중의 기연이었다.
이게 만약에 소문이 난다면 지그하르트 전체가 들썩일 정도로 엄청난 일이었다.
고오오오!
불의 고리를 공명시켰다. 살짝 멍했던 정신이 찬물을 뒤집어 쓴 듯 맑아졌다.
"준비는 된 모양이군. 그럼 시작하마."
글렌의 발이 바닥에 깔린 은은한 달빛을 가른다.
산책이라도 나온 듯 여유로운 움직임이었지만, 그 흐름을 잡을 수 없었다.
좌측에서 불꽃처럼 빨갛게 피어났다가 우측에서 물처럼 아롱져 흘러내린다. 그의 발이 이뤄내는 기묘한 흐름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글렌의 보법은 너무도 난해했다. 빠르면서, 느리고, 부드러우면서 단단했다.
'그래도 끝까지 봐야 해.'
어렵다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 글렌의 가르침의 10분의 1만 얻어도 큰 소득을 얻을 수 있으니까.
라온은 글렌의 발이 멈출 때까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끝까지 지켜보았다.
너무도 짧고, 황홀한 시간이 끝나고 글렌이 라온의 앞에 멈춰 섰다. 천고의 보법을 보여줬음에도 그의 호흡은 여유로웠고, 옷깃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보았느냐?"
짐승의 그것처럼 날카로운 붉은 눈이 묻는다. 제대로 보았냐고. 어디까지 파악했냐고.
"…죄송합니다. 보지 못했습니다."
라온이 입술을 깨문 채로 고개를 숙였다. 그야말로 격이 다른 보법. 네 개의 불의 고리로는 파악할 수 없는 수준의 무학이었다.
"...."
글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무심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볼 뿐이다.
"네가 깨달은 만큼만 해보아라."
그가 손으로 바닥을 가리키고서 뒤로 물러섰다. 지금 그 보법을 다시 해보라는 것 같았다.
'실망시키겠군.'
많은 흐름을 보았고, 깊은 무학을 느꼈지만, 지금의 자신이 행할 수 있는 건 티끌에 불과하다. 벌써 글렌의 차가운 눈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면….'
라온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어설프게 많은 것을 보여주기보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을 재연하기로 했다.
'그건.'
첫 일보.
오른발을 앞으로 왼발을 뒤로 뺀 평범하지 않은 자세에서 뻗어나가는 첫 걸음.
달빛을 가르고 공간을 꿰뚫었던 그 일보를 재연하기로 했다.
"후…."
라온은 왼발을 뒤로,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발과 발 사이는 어깨너비. 불의 고리를 돌리며 관찰한 자세였기에 글렌과 조금의 차이도 없었다.
'그 걸음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어.'
빠르고, 느리고, 강하고, 부드럽고, 변화무쌍했다. 그 어디로도 갈 수 있는 한 걸음이었다.
왼발을 들었다.
글렌의 보법을 보고 느낀 것과 쌓아 올린 무학의 묘리를 담아 앞으로 내뻗었다.
쿵!
바닥에 깔린 금색 달빛이 삼각형으로 이지러지며 알현실 전체에 진한 울림이 일어났다.
글렌과는 비교할 수 없이 미약한 걸음이지만, 그 흐름만큼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떤 방향으로도, 어떤 방식으로도 움직일 수 있는 첫걸음이었다.
"...."
"허!"
글렌의 눈매가 가늘어지고, 로엔의 입이 벌어졌다.
"후…."
라온이 숨을 내쉬며 눈을 내리감았다. 고작 한 발을 걸었을 뿐인데, 현기증이 일었다. 너무 긴장하고, 집중했던 것 같다.
"그 한 걸음이 전부인가?"
글렌이 몸을 돌리며 앞에 나와 있는 라온의 왼발을 바라보았다.
"예."
라온은 간결하게 대답하며 눈을 떴다.
"더 많은 것을 보았을 텐데?"
"완전은커녕 10분의 1도 따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 할 수 없다?"
"가주님께서 보여주신 보법은 무신의 걸음처럼 너무도 많은 게 담겨 있었습니다. 미숙한 제가 다 파악하기엔 무리입니다."
"그럼 첫걸음이 제일 쉬웠다는 건가?"
글렌의 목소리가 혹한의 바람을 담은 듯 차가워졌다.
"아닙니다."
라온은 앞으로 내밀어져 있는 왼발을 보며 말을 이었다.
"가주님께서 보여주신 첫 번째 걸음이 가장 중요했고, 인상 깊었습니다. 그 이후에 보여준 그 어떤 보법보다도 뇌리에 깊게 박혔기 때문에 첫걸음을 따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첫 번째 걸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거지?"
"어디로도, 그 어떤 순간에도, 어떤 방식으로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능자의 걸음을 보는 듯한 전율이 일어나 아직도 그 걸음이 그려집니다."
무학으로 글렌을 속이는 건 불가능하다. 보고 느꼈던 감정을 솔직하게 말했다.
"흠."
글렌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다리를 벌렸다.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알현실의 분위기가 약간 부드러워진 느낌이다.
"감이 좋구나."
그가 처음과 똑같이 왼발을 뒤로 오른발을 앞으로 내민 자세를 취했다.
"네게 보여준 보법의 이름은 태화보다. 첫 번째 걸음 '진천'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반은 왔어."
덤덤한 목소리와 함께 다시 일보를 걷는다. 세상 그 어디로도 나아갈 수 있는 그 걸음을 본 순간 머리털이 쭈뼛 섰다.
우우웅!
단전이 진동하며 오러가 일어난다. 마나 회로를 질주하며 육체를 이끌었다.
쿠웅!
라온은 본인도 깨닫지 못한 채 글렌이 보여준 태화보의 진천을 그대로 재연했다.
"아까보다 낫구나."
글렌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서 뒤를 돌았다. 단상 위로 올라가 다시 옥좌 위에 몸을 파묻었다.
"네게 줄 보상은 이걸로 끝이다."
"그 첫 번째 걸음 하나로 말입니까?"
"보여준 건 많았다. 네가 가져간 게 하나였을 뿐이지."
그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것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런 보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개안을 했다.
"이건 네가 가져가라."
글렌이 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를 던졌다. 라온은 가슴 앞으로 떨어지는 빨간색 보석을 잡았다.
"아."
아까 글렌에게 주었던 고블린 왕의 마석이었다.
"물건에는 각기의 주인이 있는 법. 네가 얻은 물건이니, 네가 가져가도록."
그는 아무런 미련이 없다는 듯 손을 털고서 다시 눈을 감았다.
"여기에 담아가십시오."
로엔이 검은색 천을 내밀었다. 마석의 기운을 막는 천이었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고블린 왕의 마석을 천에 감싼 후 품에 넣었다.
'이걸 다시 돌려주다니….'
연구를 하거나, 부수거나 혹은 창고에 넣을 줄 알았다. 돌려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저 사람의 모든 움직임은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그만 돌아가라."
"예. 감사합니다."
라온이 뒤로 물러났다. 알현실 문을 열려다가 이번에 많은 것을 받은 게 생각나서 그냥 가기 좀 뭐 했다.
"저…."
"뭐냐."
"거, 건강하세요."
솔직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아서 어른에게 할 법한 가장 기본적인 인사말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
글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인상을 찌푸렸고, 로엔은 입을 막고 손을 떨었다.
"…가보겠습니다."
쩝 입맛을 다시며 알현실을 나왔다. 아무래도 말을 잘못 고른 것 같다.
-건강하세요라니! 그 잘 돌아가는 머리도 이럴 때는 돌이 되는구나!
'끙….'
어른들에게 진심을 담은 말을 한 적이 없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에휴."
한숨을 내쉬며 가주전 복도를 걸어갈 때 눈앞으로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불의 고리>가 완벽에 이른 <태화보>를 관찰했습니다.]
[<태화보> 습득이 빨라집니다.]
* * *
라온이 떠난 알현실은 여전히 달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로엔은 바닥에 깔린 달빛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태화보를 꺼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글렌이 라온을 아끼는 건 알고 있어서 특별한 보상을 내리리라 생각했지만 그게 태화보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태화보는 가주님이 직접 만든 보법이니까.'
글렌 지그하르트가 마에서 벗어난 후 처음으로 만든 보법이 바로 태화보다.
금패를 주고도 얻을 수 없고, 아들들에게도 전수하지 않은 태화보를 가르쳐주다니, 글렌은 예상 이상으로 라온을 아끼고 있었다.
"봤나."
글렌이 천천히 눈을 떴다. 차가움만이 담겨 있던 조금 전과 달리 그의 눈빛에 달큰한 빛이 어려 있었다.
"고작 두 번을 보고서 진천을 따라하더군."
"예?"
"라온. 그 녀석 딱 2번을 보고서 태화보의 절반을 가져갔어. 대단하지 않나?"
눈빛만이 아니라, 목소리도 평소보다 한 톤 높았고, 입매는 바짝 올라갔다.
"허…."
로엔이 입을 떡 벌렸다. 수십 년 동안 글렌의 그림자로서 살아왔지만, 저 남자가 저렇게 기뻐하는 건 첫째 도련님이 태어났을 때 이후 처음이었다.
"녹전귀를 베었고, 광혈귀에게서 버틴 게 운이 아니었다. 눈썰미도, 육체와 오러의 통제도 범인의 수준이 아니야."
"그건 그렇습니다."
경악스럽게도 라온은 이 짧은 순간에 태화보의 요체를 파악했다.
"다만 내 마음에 와닿는 건 다른 부분이다."
글렌의 입매에 걸린 미소가 조금 더 깊어졌다.
"판단력 말씀이시군요. 놀라운 일이죠. 15살 아이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파악하다니. 기회가 있다면 제가 키워보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단순히 오늘 일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러면…."
"모두를 살리기 위해서 광혈귀의 앞을 홀로 막았던 것."
글렌이 라온의 발자국이 미세하게 남은 카펫을 보며 말을 이었다.
"라온은 감이 좋다. 광혈귀를 본 순간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아차렸을 거다."
"그럴 겁니다."
"녀석은 그런데도 끝까지 앞을 막았다. 촌장을 구하느라 몸이 망가진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마을 사람과 수련생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었지."
라온이 버티지 않았다면 그 마을과 수련생은 광혈귀의 손아귀에서 핏물이 되었을 거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자는 그리 많지 않다. 거기다 그게 15살 아이라면 대륙 전체를 뒤져도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거다..
그런 대단한 녀석이 자신의 손자라는 것이 감격스러워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렇게 웃으시는 건 오랜만에 보는군요."
로엔이 빙긋 웃었다.
"커험, 기쁘기는 무슨."
글렌의 입꼬리가 순식간에 내려갔다. 평소보다 더 많이 입매를 내려 늙어 보일 정도.
"백혈교의 지부를 홀로 부수고 돌아온 레이든 님에, 녹전귀를 벤 라온 님. 아주 경사가 겹쳤네요."
"뭐. 그렇게 대단하고, 특별한 일은 아니지."
손주들의 칭찬에 글렌의 입가가 다시 살짝 올라갔다.
"흐흥."
로엔이 그런가요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는 여전히 방글거리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라온 도련님이 건강하세요라고 할 때 가주님이 웃음을 참지 못하셨습니다. 냉정한 척을 하시려면 조금 더…."
"척이 아니다!"
글렌이 드물게 호통을 쳤지만, 로엔의 웃음은 지워지지 않았다.
* * *
"이게 뭐지?"
라온은 별관으로 돌아와서 아까 보았던 메시지를 가리켰다.
후우욱.
앵무새처럼 팔찌에 매달려 있던 라스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학습이다.
"학습?"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특별한 능력이나, 뛰어난 무력을 가진 놈들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시스템의 한 요소다. 이걸 보니 또 하나 생각나는군. 본왕에게 덤비는 건방진 놈 중에….
"간단히 말해서 학습 능력이 올라간다는 뜻이로군."
-말 좀 끊지 마라!
"어쨌든 맞지?
-후, 비슷하다.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데?"
-그걸 말해줄 리 있겠느냐. 본왕의 분노를 받아 간다면….
"됐어. 뻔하니까."
라온이 픽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태화보의 습득 능력이 상승한다는 말이잖아. 이게 무슨 비밀이라고."
-건방진 놈!
라스가 짜증이 어린 목소리를 흘렸다.
"바로 시작해야겠어."
라온은 조용히 창문을 열고 다시 방을 나왔다.
-내일 날이 밝았을 때 하도록 해라. 따라 나가기 귀찮도다.
'시간제한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런 게 있을 리가….
'말하는 거 보니 있네.'
-어, 어떻게 알았느냐.
'네 반응이 이상했거든.'
평소의 라스라면 분노를 뿜어냈을 텐데, 가벼운 짜증만 뿌린 것을 보고,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말했잖아. 넌 내 손바닥 안에 있다고."
-건방 떨지 마라! 본왕은 마계의 군주이니라, 인간 따위가 가늠할 수 없는….
라스가 무시무시한 냉기를 퍼뜨리며 눈을 부라렸다.
'그래. 그거.'
라온이 손가락으로 점점 부풀어가는 라스의 냉기를 가리켰다.
'처음부터 그렇게 나왔으면 이상하다는 것도 몰랐을걸. 너 참 다루기 쉽네.'
오른손에 만화공의 불길을 담아 라스를 밀어냈다.
-빌어먹을! 네놈은 본왕이 만났던 생명체 중 최악의 존재다!
'마왕이 최악이라는 소리를 한다는 건 칭찬이겠지?'
-크으으윽! 네놈만큼은 죽인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죽인….
'그래. 나중에.'
라온은 라스의 저주 같은 비명을 들으며 연무장으로 향했다.
87화
푸른 달이 세상을 굽어보는 밤.
라온이 공터에 서서 팔과 다리를 감싸고 있던 붕대를 풀었다.
완벽하게 회복한 건 아니지만, 살이 거의 다 차올랐다. 수련을 시작해도 별문제 없을 것 같았다.
'그럼.'
만화공의 오러를 끌어 올린 뒤 미끄러지듯 땅을 박찼다.
공터에 있던 라온의 순식간에 호수 근처에 이르렀다. 그림자조차 따르지 못한 쾌속의 보법이었지만, 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쯧."
라온이 길게 혀를 차며 다리를 좁혔다.
'이게 아니야.'
글렌이 보여준 첫걸음은 대륙 어디라도 닿을 듯 광활했고, 어떤 움직임도 이뤄낼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로웠다.
방금 자신이 펼친 태화보 진천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일보라고 했었지.'
글렌은 태화보를 전능이자, 만능이라 말했다. 오만하고 거만했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속으로도 반박할 수 없었다.
'지금은 속도나, 힘을 생각할 때가 아니야.'
자신의 무력은 글렌과 비교해서 티끌조차 되지 않는다. 지금은 그를 따라 할 게 아니라, 큰 그림을 위한 바탕을 세워야 할 때다.
'그럼 다시.'
라온이 만화공을 운용하며 다시 태화보를 밟았다. 느리지만 무거운 걸음. 사나운 들소의 돌진 같았다.
"이것도 아니야."
라온은 고개를 젓고서 다시 자세를 잡았다. 반복, 반복 그리고 또 반복. 달이 쓰러지고, 해가 일어설 때까지 태화보를 운용했다.
"젠장…."
라온이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학습 능력을 올려주는 재능이 생겨났음에도 태화보를 익히는 건 쉽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 실마리도 잡지 못한 기분이다.
'아니, 당연한 건가.'
태화보는 대륙 최강자인 글렌의 심득이 들어간 보법. 그런 절대의 무학이 쉽게 문을 열어줄 리가 없었다.
-본왕의 잠까지 방해하면서 수련했음에도 아직 그 보법을 익히지 못한 건가? 한심해서 눈물이 나오려 하는군.
밤새 조용하던 라스가 팔찌에서 튀어나오며 비웃음을 흘렸다.
-본왕은 그 보법을 보자마자 깨달음은 얻었건만, 정말이지 인간의 하등함은 불쌍할 정도이니라.
'그래. 너 잘났다.'
라온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몸이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밤새 수련을 했기 때문인지 피로가 밀려왔다.
-훗, 땅바닥을 기는 지렁이가 하늘을 올려보려니, 어려울 수밖에. 벌레는 벌레에 맞는 하늘이나 보아라.
'벌레는 벌레에 맞는 하늘이라….'
라온은 라스의 험담을 중얼거리며 별관 뒤에 있는 북망산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북망산에서 리메르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속성에 대해 말할 때 자신의 속성이 어떻게 흐를지는 본인이 결정해야 한다고.
'그렇다면 이 보법도 마찬가지인가?'
태화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글렌의 태화보는 무언가를 초월해 있었다. 현실의 보법이 아니라, 이 한 걸음으로 시공간을 뛰어넘을 듯 신비로웠다.
'난 그 정도는 아니야. 그런 건 원하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원하는 건 그런 비현실적인 일이 아니다.
그저 딱 두 가지. 이 별관에 있는 사람들을 지키고, 데루스 로베르트의 목에 칼을 박아넣는 정도면 충분하다.
'그걸 위해선….'
라온이 허리를 펴며 눈을 감았다. 언제 어떻게 해서라도 지켜야 할 사람들과 이 몸이 갈라져도 죽여야 할 놈을 생각하며 발을 내디뎠다.
쿵!
울림이 다르다.
발바닥의 마나 회로에서 시작된 격렬한 흐름이 천공을 가르는 벼락처럼 전신을 꿰뚫었다. 뻗어나가는 육체에 자유가 담긴다.
자신만의 그림이 그려진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원수의 목을 꺾을 자유가 새겨진 발걸음이 그 그림의 밑바탕을 채웠다.
후욱.
라온이 두 눈을 떴다. 떠오르는 태양처럼 눈동자가 선명하게 타오른다.
"...."
고개를 내려 바닥을 보았다. 첫 번째 걸음을 걷고 몸은 이동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움직였다.
이 걸음은 심(心). 즉, 마음을 담아야만 이룰 수 있는 무학이었다.
오늘 이루고자 했던 태화보의 밑그림이 한순간에 완성되었다.
[태화보를 습득하셨습니다.]
[태화보(1성)가 특성에 생성됩니다.]
라온이 양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절대 얻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태화보를 익히자, 성취감과 희열이 평소의 배로 찾아왔다.
[태화보 성취 속도가 원상태로 돌아갑니다.]
딱 맞게도 태화보를 습득하자마자, 성취에 도움이 되던 학습 능력이 사라졌다.
태양이 천천히 떠오르는 모습을 보니, 예상대로 하룻밤의 능력이었던 모양이다.
'바로 나오길 잘했어.'
만약 저 능력이 없었다면 하루는커녕 1년이 지나도 태화보를 습득하지 못했을 거다. 부상이고 뭐고 다 제쳐두고 나와 수련한 게 정답이었다.
-이 무슨….
라스의 냉기가 바람 앞 촛불처럼 격하게 흔들렸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네 말이 열쇠가 됐어."
-열쇠?
"네가 말했잖아. 벌레는 벌레의 하늘을 봐야 한다고."
-그게 어쨌다는 거냐.
"그 말대로 내겐 내 뜻과 목표가 있고, 글렌에겐 그의 뜻과 목표가 있지. 내가 그 사람을 그대로 따라 할 필요는 없었어. 그래서 그 보법에 내가 이루고 싶은 뜻을 담았다."
얄미운 표정으로 그러니까 되더라고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해도 그 보법은 그렇게 쉽게 익힐 만한 것이 아니었다.
"맞아. 네 시스템이 보법의 습득 능력을 올려준 게 아주 큰 도움이 되었지. 그러고 보니 둘 다 네 덕분이네. 진짜 고맙다."
-끄으윽, 본왕은 그런 적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라스의 냉기가 푸르딩딩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렇게 열 받지 말아. 난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니까."
라온이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라스가 분노를 터트리게 만들기 위해서 조금 더 자극하려고 할 때였다.
"라온!"
실비아가 별관 뒷편의 창문을 뛰어 넘어왔다. 민첩함이 리메르와 다를 바가 없을 정도였다.
"쉬라고 했잖아! 이 꼴은 또 뭐야!"
"어우."
라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계의 군주도 무섭지 않지만, 어머니에게는 맞설 수가 없다.
* * *
라온은 라스보다 더 분노한 얼굴의 실비아를 따라 그녀의 방에 끌려갔다.
"라온. 엄마가 뭐라고 했지?"
"그, 글쎄…."
라온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실비아의 눈을 피했다.
"부상이 회복될 때까지 훈련을 쉬라고 분.명.히 말했잖아!"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그녀가 그렇게 말한 게 생생하게 기억났지만,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너 진짜!"
실비아가 팔짱을 낀 채로 콧등을 찡그렸다.
'으….'
실비아가 화를 내니, 광혈귀와 싸울 때보다 더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저 잔소리를 듣는 게 이리 힘들다니, 자신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라온."
실비아가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걱정과 안쓰러움이 담긴 눈. 라온은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숙였다.
"응."
"네가 왜 그렇게 수련에 열을 올리는지 알아."
그녀는 라온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엄마랑 이 별관을 걱정해서 빨리 강해지고 싶은 거잖아."
"...."
라온은 말없이 입술을 살짝 떨었다. 엄마라서일까 아니면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기 때문일까. 실비아는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것만은 아니지만.'
실비아나, 별관 사람들을 보호해주는 것 외에도 복수에 대한 감정으로 움직이는 건 그 누구도 모를 거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전부 엄마 탓이니까."
"그건…."
"네가 수석 수련생이 되고, 대련에서 이기고, 임무에서 큰 활약을 했다고 들을 때마다 얼마나 기뻤는지 넌 모를 거야. 하지만…."
실비아가 입매를 꾹 다문 채 자신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날 위해서 그런 활약을 할 필요는 없어. 엄마가 말했잖아.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널 위해서. 하고 싶은 걸 하라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조그마한 구김도 없는 웃음. 진심을 담은 말이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울렸다.
"다시 말하지만, 엄마는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니까 네가 무리할 필요 없어. 라온 넌 네 보폭에 맞춰서 걸어가렴."
사실 부상은 8할 이상 완치된 상태다. 지금 몸 상태면 어느 정도 몸을 움직이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될 것이다. 그건 자신도 실비아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을 보고 있으면 그런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알겠어."
라온은 울렁이는 심장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한 거지?"
"응."
"좋아!"
실비아가 손뼉을 치며 일어섰다. 조금 전과 달리 활짝 미소를 지었다.
"다 들어와!"
"네!"
그녀의 부름에 방문이 열리고, 헬렌과 별관의 시녀들이 모두 안으로 들어왔다.
"어, 엉?"
라온이 입을 떡 벌렸다. 밖에 시녀들이 있는 건 알았지만, 안으로 부를 줄은 몰랐었다.
"전부 들었지? 오늘부터 라온이 수련을 하거나, 몸을 쓰는 걸 보면 바로 나한테 보고해."
"예. 마님!"
시녀들이 방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하."
라온이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당했어…."
-크하하하! 네놈이 당하는 꼴을 보니 속이 다 시원하구나!
**
"후욱!"
버렌이 납덩이처럼 무거운 한숨을 뱉어냈다.
'머리가 어지럽군.'
에덴과 부딪친 그 날만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뻘게진다. 목소리만 컸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까.
라온이 아니었다면 죽었을 목숨이라 생각하니, 그저 부끄럽고 민망하기만 했다.
"몸이라도 좀 움직여야겠어."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본관 구석에 세워진 소연무장으로 향했다.
작은 연무장이었지만, 관리는 깔끔하게 되어 있었다. 버렌은 검을 뽑아 그대로 내리쳤다.
후웅!
바람을 거칠게 가르는 소리에 마음의 답답함이 조금은 가셨다. 만족감을 느끼며 끊임없이 검을 휘두르고 보법을 밟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연무장에 몇몇 검사와 수련생들이 보였다.
"후…."
버렌은 이마 위로 흐르는 땀을 소매로 훔치고, 검을 검집에 넣었다.
'잡념이 사라졌군.'
몸을 움직이는 게 정답이었다. 이전과 달리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돌아갈….'
몸을 돌려 중무전으로 돌아가려 할 때였다.
"버렌 님!"
"오랜만입니다!"
5 연무장의 시험에서 떨어진 뒤 자존심이 상한다며 6 연무장에도 가지 않은 방계 아이들이 다가왔다.
"그리 힘든 일을 겪으셨는데 벌써 수련을 하시는 겁니까?"
"역시 버렌 님이십니다."
방계들은 탄성을 내지르며 눈동자를 빛냈다.
"그냥 답답해서 나와봤을 뿐이다."
"답답하시다니…. 아! 역시!"
우측에 있던 이마가 넓은 아이가 눈매를 좁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야기가 잘못된 거였군요!"
"그 이야기?"
"라온이 녹전귀를 죽이고, 광혈귀와 싸웠다는 소문 말입니다. 그거 헛소문 맞죠?"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야비한 놈이 녹전귀를 베고 다른 사람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었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분명 리메르 교관이 다 처리해놓고, 라온에게 공을 떠넘겼을 겁니다. 리메르 교관은 녀석을 좋아하니까요."
버렌이 한마디를 하지 않았음에도 두 사람은 라온이 거짓말을 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진짜 추하네요. 별관에 있는 것들은 전부 부끄러움을 모르는…."
"어이."
버렌이 이를 드러내며 두 수련생을 노려보았다. 살벌한 기세에 수련생들이 움찔 놀라 눈만 껌뻑였다.
"넌 우리 지그하르트가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공적을 퍼주는 어중이떠중이로 보이나?"
"예?"
"아,그, 그게…."
"라온 지그하르트는 녹전귀를 베었고, 광혈귀 앞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가 아니었다면 나를 포함한 수련생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어."
"으윽!"
방계들은 버렌의 으르렁거리는 음성에 기가 죽어 바닥에 주저앉았다.
"앞으로 그딴 소리를 하는 놈이 있으면 내 앞으로 데려와. 주둥이를 직접 막아 줄 테니까."
"아, 예!"
"죄송합니다!"
덜덜 떠는 수련생들을 노려보다가 연무장을 떠났다.
"아…."
버렌은 중무전으로 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보았다.
'그랬군.'
왜 그렇게 답답했는지, 왜 그리 속이 울렁였는지 이제야 알았다.
'난 아직 녀석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거야.'
라온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보고, 녀석을 따라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라온은 그 이상을 달렸고, 자신보다 더 빨리, 더 멀리 나아갔다.
이전에 이뤄진 오웬 왕국과의 대련에서도, 오크와의 실전 훈련에서도 그리고 이번 임무에서도 자신은 크게 활약하지 못했지만, 라온은 항상 홀로 압도적인 활약을 펼쳤다.
'질투였어….'
조용하면서도 지도력 있고, 모든 상황을 꿰뚫어 보며, 무력까지 뛰어난 라온.
따라잡겠다는 말과 달리 속으로는 라온의 능력을 질투하고 있었던 거다.
"하하하!"
웃음이 절로 나온다. 인간인 이상 질투는 어쩔 수 없는 법. 인정하고 나니 속이 편해졌다.
'난 그리 큰 인간은 아니었어.'
다만 이 추한 감정을 드러낼 생각은 없다. 마음속에 간직한 채 라온을 따라잡기 위한 연료로 삼아야 한다.
'말했지. 난 포기하지 않아.'
버렌이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은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중무전으로 돌아갔다.
* * *
"도련님. 훈련하러 가시는 거 아니죠?"
라온이 방 밖에 나오자마자 헬렌이 웃으며 다가왔다.
"아냐…."
라온은 고개를 젓고, 로비로 걸어갔다.
"도련님. 어디 가시나요?"
다른 시녀가 날카로운 눈으로 라온의 옷을 살폈다.
"산책 좀 하려고."
"음, 다녀오세요."
손을 저어주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도련님? 설마 훈련을…."
"아니라고."
별관 밖에서 창문을 닦던 사람도 보자마자 훈련 이야기를 꺼냈다.
"도련님…."
"훈련…."
별관 뒤편의 정원을 가는 길에 만난 사람들이 행선지와 뭘 할지를 계속 물어보았다. 지겨울 정도로.
"그냥 산책 간다! 산책!"
빨래를 널고 있는 시녀들에게 인상을 쓰고서, 정원으로 도망갔다.
"어휴!"
라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실비아의 덫에 아주 제대로 걸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절대 넘어가지 않았을 텐데, 그녀에게는 여러모로 약해진다.
'이래서는 무리인데….'
시녀들은 기회라는 생각에 여기저기 숨어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 보법이라도 밟았다간 뻐꾸기시계의 뻐꾸기처럼 실비아가 뛰쳐나오게 될 거다.
'뭐, 됐어.'
그나마 태화보를 익힌 후에 이런 일이 벌어져서 다행이다. 만약 태화보 습득 능력이 올라간 상태에서 이런 꼴이 되었다면 정말 한숨만 나왔을 테니까.
'가끔은 머리 식히는 것도 좋겠지.'
정원 벤치에 앉아서 오랜만의 여유를 즐겼다.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알았는지 지켜보던 시녀들의 눈도 사라졌다.
"도, 도련님!"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서 시원한 바람과 풀 내음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별관 쪽에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 큰일 났습니다."
눈을 뜨고 고개를 돌리자, 울먹이며 달려오는 시녀가 보였다.
"응?"
시녀의 표정과 다급한 목소리에 라온이 벤치에서 일어섰다.
"레, 레이든 지그하르트 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레이든?"
들어본 이름이다.
글렌의 넷째인 발데르의 아들이었고, 최근 공을 세우고 가문으로 돌아왔다 들었다.
"왜 온 건데?"
"자, 잘 모르겠습니다. 오자마자 마님께 행패를 부리기 시작해서…."
다른 단어는 들리지 않았다. 마님과 행패라는 두 단어만 들려왔다.
"그 새끼 어디 있어."
라온의 눈빛이 암살자 시절로 돌아간 듯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88화
글렌 지그하르트의 넷째 아들 발데르 지그하르트가 기거하는 진무전의 분위기는 북해를 옮겨온 듯 지독한 냉기로 가득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오랜만에 가문으로 돌아온 발데르 지그하르트의 아들 레이든 지그하르트가 계속 저기압이었기 때문이다.
쿠웅!
레이든 지그하르트가 이를 바드득 갈며 주먹으로 벽을 후려쳤다.
"젠장!"
욕이 절로 나온다.
오마 중 하나인 백혈교 지부 하나를 깨부수는 공을 세우고 돌아왔는데, 자신의 이름은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잊혀졌다는 생각이 들 정도.
레이든이라는 이름이 불리지 않는 이유는 그놈 때문이다. 별관에 사는 쓰레기. 라온 지그하르트의 이름이 가문 전체에 퍼져 있기 때문이다.
연회장에서도, 수련장에서도, 식당에서조차 라온. 라온! 녹전귀를 벤 라온 지그하르트의 이름만 들려왔다.
"파리 같은 새끼가."
평소 관심도 없던 작은 벌레 때문에 자신의 공이 묻혔다는 생각이 들자,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레이든 지그하르트는 짜증이 뚝뚝 흘러내리는 어긋난 표정으로 방을 나갔다.
"외출하십니까?"
문 앞에 서 있던 집사가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보면 몰라?"
레이든이 쿵 소리가 나도록 방문을 닫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준비하겠습니다. 어딜 가시는지…."
"별관으로 간다."
"예? 갑자기 거길 왜…."
별관이라는 소리에 집사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해졌다.
"내 이름을 묻어버린 놈의 면상이 얼마나 잘났는지 보려고."
레이든의 주홍빛 눈동자가 진득하게 타올랐다.
* * *
주디엘은 정원 손질을 하며 우측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곳에선 실비아가 직접 정원용 수목을 다듬고 있었다.
'여긴 정말 이상한 곳이야….'
시녀가 없는 것도 아니건만, 별관의 주인인 실비아는 정원 일을 손수 행했다.
정원 손질만이 아니다. 라온을 위한 음식 준비나, 방 청소도 직접 하는 경우가 잦았다.
'특이한 건 실비아만이 아니지.'
다른 곳에서 만난 시녀들은 표정은 숨겨도 눈빛은 숨기지 못한다. 대부분이 어쩔 수 없이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한다는 눈빛을 보이는데 이곳은 아니다.
모두 즐겁게 또 서로 신뢰와 진심을 담아 업무를 해냈고, 모두가 라온을 아들이나 친동생처럼 생각했다.
첩자로서 이곳저곳을 다닌 주디엘이 보기에도 이곳 별관은 특이하고 신기한 곳이었다.
"하아."
주디엘이 별관 건물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가장 특별한 건 그 사람이지만.'
별관 안에 사는 괴물. 라온 지그하르트의 진짜 얼굴을 보았던 날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그날 밤의 악몽을 꿀 정도.
"후…."
주디엘의 입에서 찬 바람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그런 인간이 있을 수 있지?'
10대 초반. 부모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반찬 투정할 나이에 라온은 세상 만물을 죽일 눈을 하고 있었다.
호수 위에 떠오른 붉은 눈을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돋아오른다.
'그런데….'
그 이후에 본 라온의 모습은 또 생각과는 달랐다. 이 별관의 사람들에게는 정말 아이처럼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었고, 시녀 하나하나를 가족처럼 챙겼다.
그건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중무전의 소식이나, 카룬의 소식을 물을 때가 아니면 라온은 자신도 다른 별관의 시녀들과 똑같이 대했고, 얼마 전에는 쓸모가 없어져서 복귀지시가 내려온 상황을 벗어나게 해주기도 했다.
가끔은 자신이 정말 이중첩자가 맞는지, 몸속에 레이지 웜이 있는 건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릇이 너무 커….'
자신 같은 평범한 사람과는 그릇의 크기 자체가 다른 것 같았다. 사실 그에 대한 공포 때문에 반항이나 배신을 할 수 없기도 하지만.
"에휴… 음?"
주디엘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음 수풀을 정리하려고 할 때 검은 구두 하나가 바닥에 보였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머리를 뒤로 깔끔하게 넘긴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이자는….'
지그하르트 명부에서 본 자다. 진무전 소속이자, 레이든 지그하르트를 담당하는 집사 메르킨이었다.
"진무전 소속 집사 메르킨이라 합니다."
그는 주디엘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실비아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무슨 일이지?"
실비아는 가지고 있던 정원 손질용 칼을 내려놓으며 앞으로 나왔다.
"어제 보낸 서신대로 준비가 되었는지 확인을 하러 왔습니다."
"서신? 무슨 서신을 말하는 건데?"
"오늘 레이든 지그하르트 님이 별관을 돌아보고 싶다는 서신을 보냈습니다만."
"그런 서신은 받은 적 없어."
실비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저었다.
"분명 별관의 시녀들에게 전했다고 들었습니다."
레이든의 집사 메르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황하는 표정이지만, 눈동자는 잠잠하다. 거짓을 내뱉고 있음이 분명했다.
"음…."
실비아가 뒤를 돌아 시녀들을 보았다. 당연히 서신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언제 오지?"
"30분 뒤입니다."
"30분이라니!"
실비아의 뒤에 있던 헬렌이 눈을 부릅뜨며 다가왔다.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준비하라는 겁니까!"
"저희는 어제 서신을 보냈습니다."
레이든의 집사 메르킨은 실비아를 놀리듯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런 서신 따위는 받지도…."
"혹여나 받지 못했다고 해도 저희 도련님은 그런 걸 생각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최대한 빨리 준비해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메르킨의 표정엔 여유가 넘쳤다. 방계인 너희가 뭐 어쩔 거냐는 얼굴이었다.
검사의 자격을 얻은 직계는 부단주 급의 지위를 가진다. 저쪽에서 서신을 미리 보냈다는 핑계까지 쓰고 있으니, 거절할 방법이 없어 보였다.
쯧.
주디엘이 메르킨을 보며 들리지 않게 혀를 찼다. 레이든이 저리 더럽게 나오는 이유는 불 보듯 뻔했다.
'라온 때문이겠지.'
최근 레이든 지그하르트는 백혈교의 지부를 무너뜨리는 공을 세워왔지만, 라온의 활약에 묻혀 반쯤 잊혀진 상태였다. 그 화풀이를 하러 여기까지 찾아온 게 분명했다.
'한심한 놈들.'
글렌의 넷째 발데르 지그하르트와 그의 자식들은 모두 흉폭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카룬과 중무전의 검사들은 난폭하지만 대놓고 앞에서 움직이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진무전은 다르다. 앞에서 시비를 걸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시도 때도 없이 넘나든다. 붉은 천을 본 황소와 다를 바가 없는 놈들이다.
'이거 좀 귀찮겠는데.'
레이든은 발데르의 자식 중에서도 뒤가 없기로 유명하다. 실비아가 고모라고 멈출 성격이 아니니, 상황이 꽤 복잡해질 것 같았다.
'거기다….'
지금 별관에는 라온이 있다. 혹시라도 레이든이 실비아나, 시녀들을 건드렸다가는 큰 문제가 벌어질 거다.
"헬렌. 이미 벌어진 일이야. 준비해. 그리고 라온은 절대 나오지 말라고 전해."
실비아는 30분이라는 소리를 듣고도 당황하지 않았다. 정원 손질을 멈추고, 옷을 털며 헬렌과 시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라온이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그녀도 레이든 지그하르트가 오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헬렌이 입술을 깨물고, 별관으로 걸어갔다. 주디엘이 다른 시녀들과 함께 그녀의 뒤를 쫓으려 할 때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귀티 나는 정복을 입은 금발 남자가 걸어온다. 어깨가 좁고, 선이 가는 체형에 얼굴과 코가 길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신발을 질질 끄는 모양새가 뒷골목 건달과 다를 바 없었다.
'벌써….'
주디엘이 마른침을 삼켰다. 저 양아치 같은 놈이 바로 레이든 지그하르트다. 놈은 메르킨이 말한 30분은커녕 5분이 되기도 전에 이미 별관에 도착했다.
30분이라고 말한 것 역시 놈들의 술수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이런! 도련님이 제 생각보다 빨리 오셨군요."
메르킨이 눈을 찡긋하며 얄밉게 웃었다. 그 주인에 그 집사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행동이었다.
찍!
레이든 지그하르트가 정원의 꽃 위로 침을 뱉고, 실비아의 앞에 섰다.
"고모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하나?"
"도련님. 실비아 님은 방계 서열 최하위입니다. 그런 호칭으로 부르실 필요 없습니다."
"아, 그렇지. 그럴 필요 없겠네."
레이든이 킥킥 웃으며 허리춤의 검을 툭툭 두드렸다.
"어제 온다고 말했는데도, 지저분하네. 못난 것들이 사는 곳이라 어쩔 수 없나 봐?"
그는 지금까지 실비아와 시녀들이 다듬은 정원의 꽃들을 진흙이 묻은 구두로 짓밟았다. 버릇인지 중앙도로에 다시 걸쭉한 침을 뱉었다.
"미안해요. 지금 정리 중이라."
실비아는 버릇이 없다는 차원을 넘은 조카를 보고도 미소를 지었다. 담담한 눈빛으로 레이든을 바라본다.
"흥."
레이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침을 찍 뱉어냈다. 우측의 꽃들을 걷어차며 앞으로 다가갔다.
"이런 지저분한 길을 나보고 걸으라고?"
그는 정리하느라 도로에 깔린 흙에 침을 뱉으며 인상을 구겼다.
"어이, 빨리 치워."
"알겠어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실비아는 미소를 유지한 채 허리를 숙여 손수 흙을 치우기 시작했다.
"저…."
"음…."
그 모습에 레이든도, 그의 집사인 메르킨도 눈을 부릅떴다. 이런 도발조차 견딜 줄은 몰랐던 표정이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나….'
주디엘이 눈매를 좁혔다. 첩자이자, 이곳에 온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자신도 화가 나는데 저렇게 웃으며 참아 넘기는 모습을 보니, 실비아는 외유내강 그 자체의 인간이었다. 감탄이 나왔다.
실비아를 도와 흙을 치우는 시녀들의 표정은 침착했지만, 분노하여 떨리는 손을 숨기지는 못했다.
저들 모두가 끝까지 인내하는 건 라온을 위해서였다. 그가 여기서 레이든과 문제를 일으키길 바라지 않기에 저들의 도발을 참는 것이다.
"아,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야!"
레이든 지그하르트가 콧등을 찡그리며 실비아가 치우던 흙 위로 다시 한번 가래침을 뱉었다. 그 침이 실비아의 손에 흘러내렸다.
"도련님!"
그 모습을 본 헬렌이 별관으로 가다 말고 돌아왔다. 눈동자가 꺼멓게 일그러졌다.
"심하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직계라고 해도 이렇게 대놓고 시비를 걸어온다면 본관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실비아가 태어났을 때부터 함께한 헬렌의 사고에는 이성이 아닌 감정의 세월이 차올라 있었다.
"헤, 헬렌!"
"아하."
레이든이 길을 막으려는 실비아를 밀어내고 헬렌의 앞에 섰다.
"맞아. 맞는 말이야. 분명 문제가 생기겠지."
레이든은 헬렌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히죽 웃으며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짜악!
그리 힘을 주지 않은 것 같았음에도 헬렌은 나무에 부딪힐 정도로 밀려났다.
"흐윽…."
헬렌이 뺨을 움켜쥔 채 덜덜 떨었다.
"하지만 난 이 집안의 직계야. 즉, 주인이라는 말이지. 이딴 짓을 벌여도, 널 죽여도 방에서 이틀 정도 처박혀 있으면 그만이야."
레이든의 기세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아가리를 벌린 짐승을 보는 듯 소름이 돋아올랐다.
"멈춰!"
그가 헬렌을 밟으려고 할 때 실비아와 시녀들이 그 앞을 막아섰다.
'익.'
주디엘이 입술을 깨물고 실비아의 옆에 붙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맞을 상황이 오면 몸을 들이밀 생각이었다.
"멈춰가 아니라, 제발 멈추세요라고 해야지."
"윽…."
실비아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흉폭한 기세를 퍼뜨리는 레이든의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꾸욱.
주디엘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첩자인 자신조차 화가 났다. 저 망나니를 어떻게 막아야 할지 고민할 때였다.
"아…."
별관 쪽에서 솜털이 곤두서는 살기가 치솟았다. 누구인지 알고 있었지만, 무서워서 돌아보기 힘들었다.
"아, 이제야 보고 싶은 얼굴이 나오는군."
레이든이 침을 찍 뱉고서 히죽 웃었다.
"윽…."
주디엘이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새빨갛게 타오르는 붉은 눈. 예상대로 걸어오는 사람은 라온이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으로 다가온다.
고오오오.
꿀꺽.
마른침을 저절로 넘어갔다.
'살기가 약한 게 아니야….'
라온의 기세는 옅었다. 기운이 약해서가 아니다. 살기를 끌어모아 압축시켰기에 기세가 그리 크지 않은 것이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그 잘난 얼굴 보고 싶었다."
레이든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히죽 웃으며 앞에 있던 실비아와 시녀들을 밀쳐냈다.
"...."
라온의 표정은 잔잔했다. 인형처럼 입매를 굳게 다문 채 천천히 걸어왔다.
스르릉.
그는 레이든과 거리가 열 걸음도 남지 않았을 때 검을 뽑았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청아한 소리가 울렸다.
"설마 그 무서운 걸 휘두르려고? 난 직계데?"
레이든은 라온이 당연히 검을 휘두르지 못하리라 생각한 듯 능글맞은 웃음을 흘렸다.
"직계."
라온이 걸음을 멈추고 인상을 찌푸렸다.
"크하하!"
레이든은 자신의 말이 먹혔다고 생각했는지 웃음을 터트리고 라온에게 다가갔다.
"나는 레이든 지그하르트. 진무전주 발데르 지그하르트의 아들로…."
"어쩌라고."
라온의 검이 레이든을 향해 붉은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89화
레이든 지그하르트는 별관에 도착하자마자 활짝 미소 지었다. 실비아와 별관의 시녀들이 정원을 정리하고 있는 덕분에 길과 주변이 전부 흙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시비를 걸기에 딱 좋군.'
집사인 메르킨이 먼저 가서 보내지도 않은 서신 이야기를 꺼냈을 거다.
직계인 자신이 오는데도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이니 시비를 걸 방법은 수없이 많았다.
'그놈이 나올 때까지.'
라온 지그하르트에게 망신을 주고, 무릎을 꿇리기 위해서 직접 이 좁고, 더러운 곳까지 찾아왔다. 놈이 싸움을 걸어 올 때까지 도발할 생각이었다.
실비아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행패를 부리러 왔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의 눈빛은 침착했다.
레이든은 제대로 가문에 남았다면 고모가 되었을 그녀를 비웃으며 도발했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무던했다. 말을 놓고, 가래 침을 뱉고, 잘 가꾼 꽃을 더러운 신발로 짓밟았음에도 도발에 넘어오지 않았다.
실비아의 인내심은 생각 이상으로 강했고, 표정 역시 무서울 정도로 덤덤했다.
'젠장….'
레이든이 입매를 비틀었다. 아무리 자신이라고 해도 실비아를 직접 건드리는 건 위험할 수 있었다.
'이대로 갈 수는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할 때 실비아와 함께 흙을 치우는 시녀들을 보았다. 그녀들의 표정은 평온했지만, 손이 떨리는 걸 숨기지는 못했다.
'저거군!'
어떻게 도발에 넘어오게 할지 가닥이 잡혔다. 저들은 실비아와 달리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다.
카악 퉤!
레이든은 히죽 웃으며 바닥을 치우는 실비아의 손 위로 가래침을 뱉었다. 그걸 본 가장 늙은 시녀의 눈동자가 훼까닥 돌아갔다.
"심하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직계라고 해도 이렇게 대놓고 시비를 걸어온다면 본관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녀는 예상대로 시비에 넘어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내뱉었다.
짜악!
레이든은 막으려는 실비아를 밀치고 시녀의 앞에 다가가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저 시녀의 말대로 집법부에서 나올 건 분명하지만, 자신은 직계. 벌이라고 해봤자 며칠 근신이 고작이다.
"참 주제들을 몰라. 너희들은 이 집안의 떨거지일 뿐이야."
킥킥 웃으며 덜덜 떠는 시녀를 밟아버리려고 할 때였다.
고오오오!
별관 쪽에서 남자아이 하나가 나타났다. 조화롭다 못해 완벽에 가까운 이목구비를 가졌다.
'저 새끼가 라온 지그하르트….'
짜증이 나올 정도로 잘생긴 외모를 보자 속이 더 뒤집혔다.
스르릉.
라온이 검을 뽑았다.
'저렇게 살기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놈이 녹전귀를 잡고, 광혈귀와 싸웠다고? 웃기는군.'
라온은 자신의 코앞에서 멈춰 섰다. 검을 뽑는 걸 보았음에도 코웃음만 나왔다. 놈이 정신이 있다면 저걸 휘두를 리가 없으니까.
"설마 그 무서운 걸 휘두르려고? 난 직계인데?"
놈의 눈을 보니, 아직 정신은 있어 보였다. 조금 더 자극하려고 할 때 라온의 입이 열렸다.
"어쩌라고."
그 말이 귓가에 도착하기도 전에 시야에 붉은빛이 번쩍였다.
"헉!"
기겁하며 물러서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놈의 검은 자신의 목을 향해 질주해왔다.
쩌어엉!
어쩔 줄 모르고, 눈을 꽉 감았을 때 바로 앞에서 강렬한 충격음이 울렸다.
눈을 뜨니, 집사 메르킨이 자신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하지만 라온은 멈추지 않았다. 메르킨이 검격의 충격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한 틈을 노리고 주먹을 내질렀다.
뻐억!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메르킨이 뒤로 그대로 쓰러져,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이 미친놈!"
레이든이 이를 갈며 검을 뽑아 들었다.
"네가 지금 누구에게 검을 휘두른 건지 알고 있는 거냐!"
"알고 있다."
라온의 목소리엔 자그마한 떨림도 없었다. 정말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뜻이었다.
"내 영역을 침입한 강도잖아."
"무슨 개소리를! 난 이 집안의 진짜 주인이다!"
"여긴 너희 집이 아니야."
놈은 또 미친 소리를 중얼거리며 검을 내리그었다.
"좋다! 적당히 놀아주려 했는데, 아예 모가지를 찢어주마!"
레이든이 검을 내질렀다. 라온의 검을 튕겨내고, 놈의 목에 칼을 박아넣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놈의 검에서 일어난 기이한 회전이 역으로 자신의 검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 무슨!"
한 발 뒤로 물러서며 검을 뒤틀어 간신히 라온의 검을 튕겨냈다.
후우웅!
라온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겁 없이 다가와 사선으로 검을 그었다.
"끄윽!"
레이든이 신음을 흘렸다. 라온의 검을 막아내는 손이 덜덜 떨린다. 한 번 밀리기 시작하자, 공격권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가, 감히 직계에게 검을 휘두르다니, 너도, 네 어미도 목이 날아갈 거다!"
"그 전에 네 모가지를 따면 되겠지."
그 말과 함께 지독할 정도로 서늘한 검격이 어깨를 스쳤다.
쩌엉!
목을 향해 내리꽂히는 놈의 검을 간신히 막아냈다.
"끄으으윽!"
뭐 이런 놈이!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라온의 검술에는 틈이 없었다. 도발이 먹힌 건 분명한데 손이 어지러워지는 건 이쪽이다.
'빌어먹을!'
단전의 오러를 끌어 올려 반격을 하고 싶지만, 그 시간을 주지 앉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방어밖에 할 수가 없었다.
'시간만. 시간만 있으면!'
오러를 움직일 여유만 있다면 이런 놈을 단번에 죽일 수 있다. 놈은 그걸 알고 절대 시간을 주지 않았다.
으득!
레이든이 이를 악물었다.
'어쩔 수 없어!'
내상을 입더라도, 이 상황을 벗어나야 했다. 라온의 검을 막아내며 억지로 단전의 오러를 끌어 올렸다.
쿠구구구!
마나 회로가 타들어 가는 통증이 일었지만, 막강한 오러가 전신을 휘감았다.
"끝이다! 이 미친 새끼!"
하체와 상체의 근육을 팽창시킨 뒤 검신 위에 쌓아 올린 오러를 그대로 내리쳤다. 라온과 놈의 검을 동시에 갈라버릴 위력.
하지만 라온은 그 막강한 검격이 떨어지기 직전 눈앞에서 사라졌다.
"허억!"
그야말로 허깨비 같은 움직임. 어디로 갔는지 제대로 파악조차 되지 않았다.
"네가 끝이겠지."
등 뒤에서 들린 라온의 목소리에 소름이 오싹 돋아올랐다. 재빠르게 뒤를 돌았지만, 놈의 주먹은 이미 자신의 복부에 닿아 있었다.
뻐어억!
강렬한 충격에 레이든의 허리가 꺾였다.
"너."
"아직 안 끝났어."
라온의 검이 자신의 심장을 향해 쏘아졌다.
"으어어억!"
레이든은 빛살처럼 날아오는 칼날에 질려 눈을 감고 비명을 질렀다.
* * *
라온은 레이든의 심장에 검을 박아넣지 못했다. 놈의 가슴에 닿기 직전에 칼을 세웠다.
이유는 두 가지.
첫 번째는 실비아의 멈추라는 소리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레이든 앞에 별관을 지키던 가주 직속 천검대 검사 두 명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헬렌이 당할 때는 가만히 있다가 이제야 나오는 건가?"
라온의 서늘한 목소리에도 천검대 검사들은 반응하지 않았다.
"물러나십시오."
그들은 레이든을 보호하겠다는 듯 자세를 낮추고 더 단단하게 벽을 세웠다.
"흐어억!"
레이든은 본인이 살았다는 걸 알자마자, 뒤로 넘어갔다. 칠을 질질 흘리며 라온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주, 죽여! 저 미친 새끼 죽여버려!"
"...."
"뭣들 하는 거야! 직계인 내가 저 망아지 놈에게 공격을 받았다니까!"
천검대 검사들은 레이든의 지시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석상처럼 가만히 있을 뿐이다.
"비켜."
"물러나십시오."
"후…."
라온이 오러를 끌어 올리며 이 사이로 김을 뿜어냈다. 천검대 검사는 레이든의 집사와 다르다. 기습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라온. 그만해!"
"도련님…."
만화공 십화를 운용하려는 때에 실비아와 헬렌이 다가와 팔을 잡았다. 그녀들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자, 가슴과 머리를 가득 채웠던 분노가 봄 눈처럼 녹아내렸다.
"이, 이 새끼들이 진짜! 내가 누군지 몰라?"
레이든이 악을 지르며 일어섰다.
"진무전주의 아들이라고! 저 새끼 죽여! 아니야. 내가 죽인다! 비켜!"
"레이든 도련님. 물러나십시오."
우측에 서 있던 천검대 검사가 뒤를 돌아 레이든을 막아섰다. 그들은 라온과 레이든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저희는 오직 가주님 명령만을 듣습니다. 두 분 다 물러나십시오."
"끄윽, 집 지키는 개새끼 주제에! 내가 맞았단 말이다!"
레이든이 이를 바드득 갈면서 검을 들어 올렸다. 오러를 전부 운용하여 천무대 검사를 공격하려 할 때 기절해 있던 집사 메르킨이 그의 뒤로 달려와 어깨를 잡았다.
"도, 도련님. 안 됩니다!"
"닥쳐!"
이를 갈며 난동을 부리는 모습이 그야말로 미친개 같았다.
"도련님. 이건 오히려…."
메르킨이 레이든에게 귓속말을 하자, 난리를 치던 그의 팔다리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놔."
레이든이 메르킨을 밀어내고서 천검대를 지나 라온과 눈을 마주쳤다.
"라온 지그하르트."
그의 눈빛이 짐승처럼 번들거렸다.
"네놈에게 죽음보다 더한 굴욕과 고통을 새겨주마! 기다리고 있어라."
"나도 마찬가지다."
라온의 눈에 시뻘건 뇌광이 튀겼다.
"네놈이 이곳에서 벌인 일은 절대 잊지 않는다. 언제 그 목이 날아갈지 모르니, 겁먹고 눈부터 감는 버릇을 고치는 게 좋을 거야."
"끄으윽! 이 버러지 새끼! 기습만 아니었다면 넌 이미 저 흙바닥에 묻혔어!"
레이든이 광기를 불태우며 달려들려 했지만, 메르킨의 제지에 막혀 팔과 다리만 버둥거렸다.
"도, 도련님! 지금은 가셔야 합니다!"
"절대 용서하지 않아! 이 별관 자체를 부숴버릴 거다!"
"도련님!"
메르킨은 억지로 레이든을 끌고, 별관을 떠났다.
천검대 검사들은 레이든과 메르킨이 사라지고 한참이 지난 후에서야 방어 자세를 풀고, 라온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번 일은 가주님에게 보고될 겁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준비해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조언인가? 직계 말고는 관심 없는 거 아니었나?"
"라온. 그만해."
오른팔을 잡은 실비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라온은 혀를 차고서 검을 검집에 넣었다.
"...."
천검대 검사들은 대답 없이 고개만 숙인 뒤 사라졌다.
"마님. 도련님. 죄, 죄송합니다. 제가 참지 못했어요. 나잇값도 못 하고…."
헬렌이 라온과 실비아의 앞으로 와 무릎을 꿇었다.
"아니야. 네가 앞에 나서주었을 때 얼마나 용기가 났는지 몰라."
실비아는 힘이 빠진 얼굴이었지만, 미소를 지으며 헬렌을 일으켜 세웠다.
"헬렌은 잘못 없어."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를 일으킨 놈이 버젓이 있는데,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이 용서를 구할 필요는 없었다.
"라온."
실비아가 뒤에서 라온을 끌어안았다.
"많이 강해졌네. 엄마 앞에 섰을 때 다 얼마나 든든했는지."
그녀의 목소리에 웃음기와 물기가 동시에 흘러내렸다.
"이번 일은 걱정하지 마. 엄마가 다 해결할 수 있으니까."
"아니, 내가…."
뒤를 돌아서 말을 하려 했지만, 실비아가 어깨를 꽉 안고 있어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괜찮아. 엄마만 믿고 있어."
실비아는 그렇게 말하고서 더러워진 바닥과 뜯겨나간 꽃과 수풀을 치우기 시작했다. 평온한 표정에 겁에 질렸던 시녀들의 얼굴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강해.'
지금 누구보다 불안한 사람이 실비아일텐데, 그녀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인지, 원래 강했기 때문인지 그녀의 마음은 이곳의 누구보다도 단단했다.
'하지만.'
라온은 주저앉아서 실비아와 함께 더럽혀진 곳을 치우며 눈을 내리감았다.
'이건 내가 해결해야 해.'
경험과 본능이 모두 같은 말을 속삭인다. 이번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실비아가 아니라, 나라고.
'그리고….'
실비아를 모욕하고, 헬렌을 건드린 그 망아지 새끼도 저대로 놓아둘 생각도 없었다.
후우욱.
누구도 보지 못했지만, 라온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새빨갛게 빛났다.
90화
라온은 정원 정리를 모두 마치고, 실비아와 헬렌, 시녀들 모두를 챙긴 뒤 방으로 돌아왔다.
똑똑.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고 나니, 낮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주디엘이 문을 열고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상황을 설명해봐."
"예. 마님과 함께 정원을 손질하고 있을 때 레이든 지그하르트의 집사 메르킨이 찾아왔습니다. 오늘 오겠다는 서신을 보냈다고 하면서 준비를…."
그녀는 메르킨부터 레이든까지 눈앞에서 보았던 일들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보고했다.
"… 그렇게 레이든이 헬렌 님을 밟으려고 할 때 라온 님이 오셨습니다."
주디엘이 말을 마치고, 고개를 숙였다.
"역시 그랬군."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을 들어보니, 상황은 자신이 예상한 것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라온 님."
주디엘이 고개를 들며 라온의 이름을 불렀다.
"뭐지?"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조금 우습지만, 라온 님은 오늘 나서지 말아야 하셨습니다. 레이든 그리고 그의 아비인 발데르 지그하르트는 뒤를 생각하지 않는 인간들입니다."
그녀의 표정이 나무껍질처럼 굳어졌다.
"분명 여러 방식으로 별관과 라온 님을 공격해 들어올 겁니다. 레이든이 먼저 문제를 일으켰다고 해도 그쪽은 직계고 이쪽은 방계. 가문이 누구 편을 들어줄지는 불 보듯 뻔합니다."
"...."
라온은 주디엘의 말이 끝날 때까지 입을 열지 않고 지켜보았다.
"주제넘었다고 생각하신다면…."
"아니."
고개를 저었다.
"네게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네?"
"헬렌과 어머니의 옆에서 레이든의 발을 대신 맞아주려고 했잖아."
주디엘은 레이든이 발을 올릴 때 실비아와 헬렌의 바로 옆에 은근히 붙어서 몸을 들이밀었다.
레이든의 발을 대신 맞아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것은 스스로도 의외였다.
"그건 저도 모르게…."
주디엘이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정에 빠진 첩자라니, 자신이 생각해도 우스운 일이다.
'그렇지만….'
자신을 사람으로 대해준 곳은 지그하르트에서도 가장 작고, 구석에 박힌 이 별관 사람들 뿐이다. 그런 그들에게 조금이지만 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아직도 라온은 무서웠지만.
"네 말이 맞아. 놈들의 도발에 걸리지 않는 게 가장 좋았겠지만, 이미 벌어진 일. 대비할 방법은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
"…알겠습니다."
라온이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하니, 체한 듯 꽉 막혔던 속이 포크로 휘저은 듯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그의 목소리는 강한 신뢰를 주었다. 다만 걸리는 점도 있었다.
'큰일인데.'
아무래도 이 별관 사람들에게 생각 이상으로 정이 든 것 같았다.
"제가 할 일은 없습니까?"
"레이든과 발데르의 정보를 구해줘. 성격이나, 지금까지의 행적들."
"알겠습니다."
그녀는 그대로 고개를 숙인 뒤 방을 나갔다.
"흐음."
라온은 닫힌 문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예상외로군.'
주디엘은 자신에겐 공포와 의문을, 별관 사람들에게 호감을 가진 상태였다. 그 기이한 감정들이 뒤섞여 본인도 본인의 감정을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았다.
계속 별관에 두면서 배려해주면 조만간 그녀의 진심을 얻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사실 오늘 실비아와 헬렌을 보호해주려는 모습을 보자, 그녀에게 계속 거짓말을 하는 게 조금 걸렸다.
"다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라온이 꽉 쥔 주먹을 들어 올렸다. 사실 처음부터 레이든을 공격할 의도는 없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예상했기 때문에 정확한 상황을 파악한 뒤 말로 놈을 짓누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실비아와 헬렌이 얻어맞을 상황이 되자, 머리가 하얗게 비었고, 그 망할 놈의 면상만 보였다.
'분노….'
그렇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라 감정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우스운 건 그 상태에서도 전투에 관한 부분은 그 어느 때보다 침착했다. 여러모로 신기한 감정이었다.
"분노와 이성이 어우러진 듯한 기이한 감정."
그 말이 그 상태를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말이었다.
-잘 알고 있구나.
흥분한 듯한 목소리와 함께 라스가 팔찌에서 튀어나왔다.
"역시 네 짓인가?"
-무엇을 말하는 거지?
"내가 분노를 통제하기 힘들었을 때를 말하는 거다."
-아니, 아니지. 그건 네 탓이다.
냉기의 불길 속에서 라스가 히죽 웃었다.
"뭐?"
-네놈이 받아들인 본왕의 감정이 움직인 거다.
"하지만 평소엔…."
-네놈은 항상 분노에 미쳐있느냐?
"그럴 리가."
-본왕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평소에 잠잠하다가 네놈이 분노한 순간에 네 감정을 파고들어 조종하려 들 거다.
"젠장…."
라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저 자칭 왕과의 거래는 생각 이상으로 위험했다. 앞으로는 절대 놈의 감정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게 될 거 같나?
라스는 그 생각을 알아차린 듯 미소를 지었다.
-인간은 여러 의미로 약하다. 그건 본왕이 나름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너도 마찬가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네놈의 바로 옆에 소원을 이루어주는 신이 있는데, 그 신에게 부탁하지 않는다고? 웃기는 소리다. 네놈은 너 자신 때문이든, 다른 인간 때문이든 본왕에게 거래를 제안하게 될 거다. 그리고 결국….
놈은 말을 끝맺지 않고 웃었지만, 그 마지막 말이 무엇인지는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네놈에게 내 몸을 넘길 일은 없다."
-본왕에겐 벌써 보이고 있다. 네놈이 직접 그 몸을 바치는 미래가. 이미 늦었어.
"후…."
라온이 숨을 뱉어내며 불의 고리를 운용했다. 시원한 물이 혈관을 흐르는 듯 정신이 들었다.
라스가 분노를 일으키며 달라붙는 것 보다, 감정적으로 격해지는 게 더 위험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유지해야 한다.
-흥.
불의 고리를 운용하여 감정을 안정시키자, 라스는 재미없다고 중얼거리며 다시 팔찌로 들어가 버렸다.
'불의 고리가 가장 중요해.'
놈을 막을 수 있는 건 칼이나 창이 아니라, 불의 고리다. 최대한 빨리 성취를 올려놔야 한다.
밤새 불의 고리를 연성하고 있을 때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말씀하셨던 발데르와 레이든의 정보입니다."
문을 열어주자 주디엘이 얇은 서류를 건네주었다. 아직 잉크가 마르지 않은 서류. 그녀가 직접 만든 자료인 것 같았다.
"수고했어."
"예. 그럼…."
주디엘은 고개를 숙이고 떠났다.
라온은 자리에 앉아, 그녀가 준 자료를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보았다.
'이거 생각보다….'
감탄이 나왔다.
주디엘의 자료는 즉석에서 만든 것치고 꽤 틀이 잡혀 있었다. 레이든과 발데르의 성향과 성격 등 그들에 대한 현재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들이 모두 정리되어 있었다.
"쓸만하겠는데."
주디엘은 이중첩자 말고 정보원으로 사용해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라온은 불의 고리를 회전시키며 주디엘이 준 자료를 읽고 또 읽었다.
그렇게 밤이 묻히고, 다시 태양이 떠올랐을 때 세 번째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여니, 당황한 듯 흔들리는 눈빛의 실비아와 글렌의 집사인 로엔이 서 있었다.
"라, 라온."
"도련님. 이른 아침에 실례하겠습니다."
로엔이 평소와 달리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가주님께서 도련님을 소환하셨습니다."
* * *
라온은 끝까지 따라오려는 실비아를 억지로 남겨두고 가주전으로 향했다.
"도련님."
가주전의 계단 앞에 섰을 때 로엔이 뒤를 돌았다. 자신을 보며 의문이 담긴 눈빛을 보냈다.
"가주님이 부르신 이유를 아실 텐데, 불안하시지 않습니까?"
"이유는 물론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리 불안하지는 않군요."
라온이 덤덤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습니까."
로엔은 옅게 웃고서 가주전으로 들어갔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자신의 대답에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로엔을 따라 들어온 가주전의 분위기는 평소보다 무거웠다. 이 공간만 중력이 2배로 작용하는 것 같았다.
라온은 명상을 할 때처럼 느리게 호흡했다.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감이 조금은 가셨다.
검사와 사용인들은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시선을 보내왔다. 담담하게 그 눈빛들을 받으며 알현실의 앞에 섰다.
"저 안에는 가주님만이 아니라, 그들도 있습니다. 마음의 준비는 되셨습니까?"
로엔의 질문에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열겠습니다."
그가 문지기에게 시선을 보내자 알현실의 문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찬란하게 빛나는 알현실의 조명 아래. 세 사람이 있었다.
단상 위 옥좌에 앉아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글렌 지그하르트와 그 아래에 서 있는 두 명의 남자. 레이든 지그하르트와 그의 아비 발데르 지그하르트였다.
발데르는 레이든과 달리 곰처럼 두꺼운 체형에 널찍한 어깨를 가졌다. 둘의 이름을 몰랐다면 부자지간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거다. 다만 얍실하게 보이는 눈매는 그대로였다.
레이든은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고, 발데르는 벌레를 본 것처럼 인상을 구겼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라온은 두 사람의 시선을 무시하고 중앙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었다.
"일어나라."
"예."
얼음장을 씌운 듯한 목소리에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지만, 이를 꽉 깨물고 일어섰다.
뒤로 한 걸음 물러나서 발데르, 레이든과 같은 선에 서서 글렌을 올려다보았다.
"어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하더군."
그가 괴고 있던 오른팔을 떼며 무심한 눈빛으로 모두를 굽어보았다.
"가주님!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레이든이 앞으로 나오며 무릎을 꿇었다.
"말해보라."
"예!"
글렌의 허락에 레이든은 라온을 돌아보며 히쭉 웃었다.
"오랜만에 가문으로 돌아오니, 라온에 관한 소식이 퍼져 있더군요. 몇 번 마주치긴 했지만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어서 미리 별관에 서신을 보냈습니다. 예정된 날짜에 별관으로 향했지만,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축객령을 내리듯 정원을 뒤집어엎은 상태였습니다."
레이든은 정말 억울한 일을 겪은 듯 콧등을 길게 찡그렸다.
"아쉬운 마음에 조금 목소리를 높였는데, 별관의 시녀들이 제게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언성이 커지려 할 때 라온이 나타났고, 아무런 말도 없이 제게 검을 휘둘렀습니다. 견제나, 위협이 아니라, 죽일 듯 살기를 두른 검이었죠. 제가 계속 힘을 조절하며 방어만 했지만, 그는 끝까지 목을 향해 검을 그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진짜 억울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레이든의 목소리는 현실감 있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글렌은 레이든의 감정이 담긴 목소리를 듣고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조금 전과 같은 목소리로 라온을 불렀다.
"예."
"저 말이 사실인가?"
"아닙니다."
라온이 차분한 눈빛을 발하며 고개를 저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하나도 사실이 없습니다. 특히 힘을 조절했다는 점에 웃음이 나오는군요. 얼굴이 시뻘게져서 소리를 지르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이익! 너 이 새끼!"
레이든이 어깨를 잡았지만 라온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레이든 도련님."
좌측에 빠져 있던 로엔의 눈빛이 칼날처럼 싸늘해졌다.
"누구 앞에 계신 건지 잊고 계신 거 아닙니까?"
"크으!"
레이든은 마른침을 삼키고서 라온의 어깨를 잡은 손을 떼었다.
"둘의 말이 다르다면 모든 걸 본 증인을 불러야겠지."
글렌은 레이든과 라온을 보며 손가락을 튕겼다. 척 소리와 함께 라온의 눈앞으로 검은 인형이 내려섰다.
"천검대 라케일. 가주님을 뵙습니다!"
"어제 있었던 일을 보고하라."
"예!"
라케일이라는 이름을 밝힌 천검대 검사는 어제 자신의 검을 막았던 남자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나 입을 열기 시작했다.
"레이든 도련님이 서신을 보냈다고 했지만, 실제 그런 서신이 별관에 도착한 적은 없었습니다. 실비아 님과 시녀들은 평소처럼 정원을 손질하고 계셨고…."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예상과 달리 라케일은 조금의 거짓도 없이 정확한 사실을 밝혔다.
"레이든 지그하르트."
라케일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글렌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 예, 예!"
레이든은 덜덜 떨며 머리를 땅에 박았다.
"네가 말한 것과 꽤 다르구나."
"그, 그게…."
"아버지."
레이든이 말하지 못하고 턱을 덜덜 떨 때 지금까지 지켜만 보고 있던 발데르가 인상을 찌푸리며 앞으로 나왔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방계가 직계에게 칼을 휘둘렀다는 게 이 사건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가문의 위계 자체가 흔들리는 일 아닙니까!"
"마, 맞습니다! 저놈은 제게 죽어라 칼을 휘둘렀습니다!"
살 구멍을 찾은 레이든이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군. 방계가 직계에게 칼을 휘둘렀다니, 버릇이 없는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야. 근데 말이다."
글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옥좌에서 일어섰다. 거인이 기지개를 핀 듯 그의 존재감이 폭발했다.
"너희들은 직계와 방계의 차이가 무엇이라 생각하지"
"예? 그, 그게…."
"책임이다. 직계는 지그하르트의 진정한 주인으로서 그에 따른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어깨에서 피어나는 샛노란 기류에 가주전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행동 하나, 단어 하나에도 자신이 지그하르트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방계를 골려주기 위해 혹은 조롱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 하려면 확실하게, 끝까지 짓밟아야 한다. 하지만 넌 방계에게, 그것도 너보다 어린 아이에게 목숨을 위협받았다."
"아, 아닙니다. 마음만 먹었다면 라온의 목은 이미 주인을 잃었을 겁니다!"
"남 덕분에 두 번이나 목숨을 구제받았으면 부끄러운 줄 알고 입을 닫아라."
"끄으윽…."
차갑다 못해 소름이 돋아오르는 글렌의 눈길에 레이든이 이를 악물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예."
"너도 네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구나. 너는 방계다. 다른 의미로 네 행동을 조심해야 하지. 검사의 자격을 얻은 직계에게 검을 휘두르다니, 기르는 개가 주인을 무는 꼴이다. 부당한 일을 당하면 네 스스로 해결할 게 아니라, 본관에 알렸어야 했다."
"죄송합니다."
라온이 눈을 내리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둘 다 문제가 있었으니, 각자 합당한 벌을 내리도록 하겠다."
"아버지! 벌이라니요! 저놈을 살려둬선 안 됩니다. 언젠가 직계에게 이빨을 들이밀 놈입니다! 당장 처형해야 합니다!"
발데르 지그하르트가 다시 앞으로 치고 나왔다. 라온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목청을 높였다.
"시끄럽다."
"이번 사건을 그냥 넘어가면 직계와 방계의 체계가 무너지고, 가문의 위신이…."
"발데르. 내가 닥치라고 말했을 텐데."
"끅!"
공간을 짓누르는 듯한 글렌의 목소리에 발데르의 거구가 한순간 찌그러지는 듯 보였다.
"가주님."
라온은 심장이 조여드는 것 같은 분위기에서 고개를 들어 글렌을 올려보았다. 머리를 숙이며 그를 불렀다.
"뭐지?"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다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해야 할 일?"
"예. 레이든 지그하르트는 제 어미를 모욕하고, 시녀들에게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전 아직 그에게 그 대가를 받아내지 못했습니다."
"이런 미친놈! 나도 마찬가지다! 네놈이 시뻘건 눈으로 칼을 휘두르는 게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 어떻게 해서든 네놈의 목을 벨 것이다!"
"라온 지그하르트, 레이든 지그하르트."
글렌이 자신과 레이든의 이름을 부르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그에게서 전신이 으스러지는 듯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내가 방금 너희들의 주제를 알라고 했을 텐데."
"그, 그 때문입니다."
라온이 이를 바드득 깨물며 굽어지는 허리를 세웠다.
"가주님께서 이전에 이곳은 검사들의 대지라 하셨습니다. 무인이라면 자신의 가치를 검으로 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라온의 단단한 의지가 어린 목소리가 가주전을 울렸다.
"검투를 허락해주십시오!"
91화
검투.
이름처럼 검으로 하는 대련이지만, 거기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첫 번째는 두 사람 다 검사의 자격을 얻어야 한다는 것. 두 번째는 각자 승리 시 원하는 조건을 걸어야 한다는 것.
라온은 이 상황을 벗어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 검투라고 생각하고, 어떻게든 그 단어를 꺼내놓았다.
"검사들의 대지이니, 검사의 방식으로 결정을 하게 해달라?"
글렌이 강렬한 기세를 가라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내가 그런 말을 하긴 했지. 틀린 말은 아니로군."
"가, 가주님! 저도 부탁드립니다!"
레이든이 옳다구나 손뼉을 치며 앞으로 나왔다.
"저 역시 저놈에게 갚아주어야 할 빚이 남아있습니다. 검투를 허락해주십시오!"
"흠."
발데르는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지만, 검투를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는지 뒤로 물러나 입을 다물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네가 먼저 검투를 말했다는 건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라온은 자신감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든 지그하르트."
이번에는 글렌의 시선이 레이든을 향했다.
"예!"
"보고받은 바에 의하면 넌 처음부터 끝까지 라온에게 밀렸다고 들었다. 다시 싸운다면 이길 자신 있는 건가?"
"무, 물론입니다. 그때는 칼이 날아올 줄 몰라 방심했을 뿐입니다. 다시 싸운다면 압도적으로 꺾을 수 있습니다!"
레이든은 딱따구리가 나무를 찧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작은 유흥거리는 되겠군."
드물게도 글렌의 입매가 살짝 올라갔다.
"레이든.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지?"
"라온 지그하르트의 단전을 부수고, 마나 회로를 끊겠습니다."
"마나회로와 단전인가."
"예. 그 둘 모두입니다!
"허가하지."
살벌한 조건임에도 글렌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레이든의 얼굴빛이 마법등을 켠 듯 밝아졌다.
"라온 지그하르트."
"예."
"검투에서 승리했을 때 네가 원하는 것은?"
"레이든 지그하르트와 그의 집사가 제 어머니와 시녀들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하고, 물질적인 보상을 주는 것. 그리고 진무전과 관련된 그 무엇도 별관에 접근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죄와 접근금지라. 그것도 허가하지."
"아버지! 사죄는 레이든의 일이지만, 접근금지는 진무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검투로 이룰 권한을 넘어서는…."
"발데르."
글렌의 붉은 눈동자가 발데르를 향했다. 태양을 마주한 듯 발데르가 눈을 바닥에 깔았다.
"마지막이다."
"죄, 죄송합니다."
발데르는 뒤로 물러서서 머리를 깊게 숙였다.
고오오오.
글렌은 폭풍 같은 기세를 유지한 채 라온과 레이든을 차례로 보았다.
"너희 둘의 조건은 모두 허가되었다. 일주일 뒤 대연무장에서 검투를 열겠다."
"예."
"감사합니다!"
라온과 레이든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이야기는 끝이다. 돌아가도록."
"예."
라온은 할 말을 모두 마쳤기에 그대로 알현실을 떠났다.
"검투라니, 결국 저희 편을 들어주시는군요."
발데르가 앞으로 나오며 씩 웃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실비아의 아이라고 해도 그 아이는 방계. 직계와 방계의 차이를 확실하게 보여주도록 하겠습니다. 레이든. 자신 있겠지?"
"물론입니다. 이번 임무를 통해 익스퍼트 중급에 올랐습니다. 이제 막 익스퍼트 하급에 도달한 놈 따위는 한 손으로도 이길 수 있습니다."
레이든과 발데르는 부자지간답게 얍실한 눈매를 좁히며 웃었다.
"아예 검투에서 놈을 죽여버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건방진 방계 놈들이 기어오르지 않게."
"아니, 모두가 보고 있을 테니, 그건 좋지 않다. 폐인을 만들어서 희망을 꺾는 게 낫다. 어미와 아들 모두가 단전과 마나 회로가 끊어져 폐인이 되다니, 생각만 해도 재밌잖아."
발데르는 사적으로 동생과 조카가 되는 라온과 실비아에게 악의만 가진 듯 낄낄 웃었다.
"확실히 그렇겠군요."
레이든이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부자는 이미 검투에서 승리하고, 라온이 손아귀에 있는 것처럼 떠들어댔다.
"너희도 돌아가라."
"예."
"일주일 뒤에 뵙죠."
레이든과 발데르는 입가를 미소로 가득 채우고 알현실을 나갔다.
"가주님."
모두가 나가고 나서야 로엔이 글렌의 앞에 섰다.
"라온 도련님은 익스퍼트 하급, 레이든 도련님은 이미 익스퍼트 중급에 안착하셨습니다. 두 도련님의 경지가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데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평소 라온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로엔이기에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검사들의 전투는 단순히 경지나, 익힌 검술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가 가장 중요한 요소지."
"그건 저도 알고 있지만…."
"물론 둘의 경지가 차이 나는 건 사실이다. 다만 라온 녀석의 눈빛은 평온했어. 한 번 이겼던 적을 상대한다는 자만이나 과신이 아닌 자신감을 가졌다. 그런 눈빛을 봤는데, 믿어주지 않을 수가 있나"
글렌이 아까와 달리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손주의 재롱을 보는 듯 따스한 눈빛이었다.
'거기다….'
레이든과 달리 라온은 조건을 말할 때 본인이 아닌 가족을 생각했다. 본인에 대한 보호나 보상 따윈 없었다. 볼수록 정이 가는 아이였다.
"로엔.'
"예."
"어떤 핑계를 써서라도 다음 달 진무전의 예산을 반으로 줄여. 임무도 모두 회수하고."
"반발이 있을 텐데요."
"상관없다. 불만 있으면 내게 오라 해라."
"음, 알겠습니다."
로엔이 고개를 숙였다가 올리며 글렌을 보았다. 그는 드물게도 분노를 담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긴 아픈 손가락을 건드렸으니.'
글렌에게 실비아와 라온은 아픈 손가락이다. 아무리 다른 손가락이라고 해도 용서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점점 예전으로 돌아가시는 것 같군.'
로엔이 얼굴을 가린 채 미소를 지었다. 글렌의 모습은 할아버지가 손주를 때린 놈에게 복수를 해주는 듯해 절로 웃음이 나왔다.
* * *
라온이 별관으로 돌아왔을 때 실비아와 시녀들은 모두 밖에 나와 있었다.
"왜 나와 있어."
"어, 어떻게 됐어?"
실비아는 가슴 앞에 모은 두 손을 떨었다. 본인의 일에는 당차도, 아들의 일에는 긴장하는 것 같았다.
"일주일 뒤에 검투를 열기로 했어."
"거, 검투?"
"검투라니요!"
실비아와 헬렌이 라온의 어깨와 팔을 잡고 흔들었다.
"레이든 지그하르트와 검투를 하게 됐다고."
"뭐? 뭐라고?"
"아니, 대체 뭐가 어떻게 되면 검투를…."
두 사람의 눈동자도 파랑을 맞은 돛단배처럼 흔들렸다. 시녀들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헉 소리를 흘렸다.
"여러 가지로 생각해봤지만 검투가 가장 좋은 방법이야."
라온이 실비아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이 이상은 없어."
적은 직계 그리고 우리는 방계다.
레이든을 무릎 꿇리는 것만이 아니라, 별관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는 검투를 해서 글렌의 인정을 받는 방법뿐이었다.
"하지만 라온. 네가 본 게 레이든의 전부가 아니야."
실비아가 다가와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에서 전해온 떨림이 손목까지 올라온다.
"발데르 오빠의 무기는 연검이야. 레이든 역시 연검술을 배웠을 거라고. 제 실력을 드러내면 어제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될 거야!"
"마, 맞습니다. 도련님. 진무전 검사들의 검은 다양한 변화로 이름 높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해선 안 됩니다. 도련님이 꺾은 녹전귀보다 강할 거예요!"
"이번엔 방심하지도 않을 테고, 넌 아직 부상이 낫지도 않았잖아! 역시 안 돼. 아버지께 가봐야겠어! 지금이라도 부탁드리면…."
"엄마."
라온은 자신의 손을 놓고 본관으로 달려가려는 실비아의 어깨를 붙잡았다.
"괜찮아. 날 믿어봐."
옅게 미소를 짓자, 당장이라도 뛰려던 실비아가 몸을 돌렸다.
"가주님이 알려주신 게 있거든."
"아, 아버지가?"
"응. 그걸 이용하면 이길 수 있어."
"어…."
"그러니 엄마랑 약속한 훈련 금지 조항은 없던 걸로 할게."
라온은 그 말을 마치고, 별관으로 들어갔다. 실비아는 멍하니 서 있을 뿐 라온을 막지 못했다.
"마님. 아, 아무리 가주님께 배웠다고 해도 도련님을 막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헬렌이 실비아의 옆에 서서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려고 했는데, 라온의 눈을 보니까. 뭔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어."
"어음, 사실 저도…."
헬렌도 같은 감정을 느꼈다고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사소한 거라도 라온을 위해서 할 일을 찾아보자."
"예."
시녀들이 한마음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가장 끝에 서 있던 주디엘은 실비아 그리고 라온이 들어간 별관을 보며 눈을 빛냈다.
* * *
라온은 방에서 수련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별관 공터로 향했다. 시녀들이 지나가면서 힐끔힐끔 쳐다봤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급한 건 검투니까.'
검투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퍼질 거다. 어차피 시선은 끌었으니, 진무전 쪽에서 다른 짓을 벌이지 못하도록 더 많은 시선을 받는 게 좋다.
그걸 위해선 검투에서도 단순히 이기는 게 아니라, 압도적인 승리를 보여주어야 한다.
"연검이라…."
연검은 간단히 말해서 유연한 검이다.
탄성이 조금 강한 수준부터 채찍처럼 자유자재로 휘어지는 검까지. 연검도 종류가 다양하다.
그렇게 잘 휘어지는 검을 화려한 검술과 함께 조화시키는 자들이 바로 진무전의 검사들이다.
검사의 실력이 높을수록 연검의 휘어짐이 강해진다. 강한 연검의 검사 앞에 서면 흡사 검으로 벽을 만드는 듯한 광경도 볼 수 있다.
'레이든의 연검도 탄성이 장난 아니겠지.'
연검으로 이름 높은 진무전주의 아들이니, 레이든의 연검술도 일반적인 연검술과는 궤를 달리 할 것이다.
다만 진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글렌이 직접 전수해 준 태화보를 익혔고, 전생에 뛰어난 연검사를 암살한 적도 있다.
레이든이 연검을 사용하든, 익스퍼트 중급이든 자신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챠앙!
라온은 실비아가 억지로 동여매 준 붕대를 풀고, 검을 뽑았다.
연성검법을 그으며 가람보법을 밟았다. 하나의 선처럼 부드럽게 피어나는 움직임. 이미 완성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연성검법의 마지막 초식을 펼칠 때 라온이 가람보법과는 다른 움직임을 취했다. 오른발이 아니라 왼발을 뻗어내며 땅을 박찼다.
치이잉!
그 순간 라온의 몸이 먼지처럼 희미해진 뒤 세 걸음 앞에서 벼락처럼 튀어나왔다. 바로 앞에서 보았어도 눈앞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듯한 모습이었다.
후우웅!
라온은 그대로 검을 내리쳤다. 허공이 사선으로 갈라지는 듯한 검격. 앞에 있는 건 그 무엇이라도 벨 수 있을 듯한 검기였다.
"후…."
라온이 숨을 내뱉으며 검을 멈췄다.
'이게 태화보.'
태화보는 단순한 보법이 아니다.
다른 보법의 중간에 끼워 넣어 그 순간 가장 적합한 움직임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특별한 발걸음이었다.
실비아와 헬렌을 모욕한 적과 싸운다는 생각이 정신에 박혀 있으니, 훈련의 질이 높아지는 것 같았다.
이 시간을 최대한 이용한다면 분명 더 강해질 수 있을 거다.
"그럼."
라온은 다시 검을 세우고, 발을 굴렀다. 떠오른 해가 어둠에 녹아들 때까지.
* * *
다음날에도 라온의 일과는 변하지 않았다.
새벽부터 공터에 나와서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남이 본다면 같은 걸 왜 자꾸 반복하냐고 할 수 있겠지만, 라온은 그게 옳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반복이 목숨을 살려주지.'
목숨을 건 전투에서 자신을 살려주는 건 새로 배운 검술도, 비싼 갑옷도 아니다.
끊임없이 단련하여 숨 쉬는 것처럼 익숙해진 무학만이 자신을 구해줄 수 있다.
라온은 쉬는 시간조차 가지지 않고 발을 놀리고 검을 휘둘렀다.
가람보법의 중간중간 태화보를 끼워 넣어 태화보의 성취도 상승시켰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주디엘이 흰색 천이 덮인 쟁반을 가지고 공터로 다가왔다.
"도련님. 점심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식사?"
라온이 수련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예. 간단히 드실 수 있게 샌드위치를 가져왔습니다."
배가 출출했기에 검을 집어넣고, 주디엘이 쟁반을 내려놓은 테이블에 앉았다.
"방금까지 몸을 움직이셨으니, 체하지 않게 천천히 드세요."
"고마워."
"예."
주디엘은 고개를 숙인 뒤 별관으로 돌아갔다.
라온은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 쟁반을 덮은 흰색 천을 걷었다.
"음?"
곱게 자른 샌드위치 접시 옆에 처음보는 얇은 책이 한 권 있었다.
'이건 또 뭐지?'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책자를 들었다. 책 이름은 없었고, 방금 만든 것처럼 표지가 매끄러웠다.
"허!"
책을 펼쳐 내용을 본 라온이 헛웃음을 흘렸다. 책 안에는 레이든 지그하르트가 배운 검술과 보법의 이름 그리고 특징이 적혀져 있었다.
그것도 보기 편하도록 정리나, 배치가 완벽하게 되어 있었다.
'이 책….'
분명 대단한 정보를 담은 책이지만, 아무리 보아도 기존에 있던 물건이 아니다.
'새로 만든 거야.'
주디엘이 레이든과 진무전의 정보를 가지고 고작 하루 만에 만든 책이 분명했다.
시녀 업무를 보면서 이런 책을 만들다니, 보통내기가 아니다. 단순한 첩자로 놔두기엔 아까운 재능이었다.
"흐음."
라온은 별관으로 걸어가는 주디엘의 뒷모습을 보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가 아니라, 생각 이상으로 쓸만하겠는데."
92화
실비아는 어제 마무리하지 못한 정원을 정리하고 있었다.
익숙한 손놀림에 지저분했던 수풀이 폭신한 쿠션처럼 동그랗게 변해갔다.
"다행히 많이 망가지진 않았네요."
뒤에서 보조하던 헬렌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게. 조금만 고생하면 예전보다 나을지도 모르겠어."
실비아가 옅게 웃으며 가위를 들었다. 그녀는 레이든이 와서 부렸던 행패의 흔적을 모두 지우려는 듯 지저분했던 곳들을 말끔하게 치웠다.
"저기 마님."
"응?"
"도련님을 저대로 두어도 괜찮을까요?"
헬렌의 얼굴빛은 재처럼 회색이었다. 걱정으로 인해 잠도 제대로 못 잔 것 같았다. 다른 시녀들도 비슷했는지 동시에 두 눈을 끔뻑였다.
"어떻게 해서든 검투를 막는 게…."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
실비아가 가위를 헬렌에게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 절대 검투를 진행하게 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지. 바로 아버지께 찾아가려 했어."
"그런데 왜…."
"라온이. 그 어린아이가 어느새 검사의 얼굴이 되었거든."
"아…."
"첫 임무를 떠나기 전에 그 아이에게 전한 말이 있어. 당당하게 예전 지그하르트의 검사처럼 살아가 달라고."
그녀는 뒤를 돌아, 헬렌과 눈을 마주치고 시녀들을 보며 웃었다.
"라온은 내가 해줬던 말보다 훨씬 멋지고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어. 지금의 내가 부끄러울 정도로."
"마님…."
"아이가 그런 얼굴을 하는데, 엄마가 믿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어. 그리고…."
실비아가 입매를 가늘게 올리며 라온이 있을 별관 뒤편을 보았다.
"헬렌도 느꼈듯이 라온이 괜찮다고 말했을 때 정말 다 좋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어. 우리가 할 일은 저 아이를 믿고, 웃으며 기다리는 거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