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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44화

라온은 당장 주저앉고 싶은 걸 꾹 참으며 허리를 폈다. 뒤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끝까지 버텨야 했다.

성벽을 뭉개려던 슬로스의 움직임이 처음으로 멎었다. 발을 멈추고 이쪽을 지그시 노려본다.

"이 땅은 분노의 군주. 라스 님의 영역! 너 따위가 올 곳이 아니다!"

"라스…."

반쯤 감겨 있던 슬로스의 눈이 저녁달처럼 떠올랐다. 하지만 완전히 믿는 건 아니다. 귀찮음으로 가득 찬 눈동자에 의심의 빛이 서려 있었다.

-이런 시궁창이 왜 본왕의 땅이라는 것이냐!

'아직 안 끝났으니까. 입 다물고 있어.'

-이, 이놈이 정말!

라온은 입으로 극존칭을 사용하는 것과 달리 속으로는 라스를 짓눌렀다.

'후우….'

라스가 먼 곳에서 슬로스의 존재를 알아차렸듯이 분노가 일어나면 분명 슬로스도 라스의 존재를 느끼게 될 것이다.

"네가…라스의…그릇이라고…?"

"그렇다. 지금 라스 님께서는 영역을 침범한 네놈에게 분노하고 계신다. 잠탱이 주제에 주제를 모른다고 하시더군."

"...."

잠탱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슬로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라스에게 슬로스의 정보를 들어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의심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이제 그 의심의 싹을 잘라버릴 때다.

-듣지 마라! 슬로스! 여긴 본왕의 영역도 아니고, 이놈은 본왕의 부하가 아니다! 적이니라!

'안 들리니까. 말해도 소용없어.'

슬로스가 느끼는 건 라스의 목소리가 아니라, 이 몸에 박혀 있는 분노의 기운이다.

후우우.

라온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싸움에 찌든 탁기를 내보내고 찬 공기로 폐를 가득 채웠다. 시원한 공기와 입에서 도는 피 맛 덕분에 시야가 밝아졌다.

'이때를 위해서 분노를 받았지.'

라스는 모르겠지만, 분노의 거래를 한 이유는 서 있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원래 가지고 있던 분노의 감정 10. 그리고 이번에 받은 15로 슬로스를 설득시키기 위해서였다.

'분노를 일으켜야 해.'

그러면 생각할 건 하나뿐이지.

데루스 로베르트를 떠올리며 뿌득 소리가 날 정도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고통이 오히려 반갑게 느껴졌다.

고오오오오!

라스와 거래를 하며 받았던 25의 분노가 이성의 벽을 뚫고 뇌리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분노의 불길을 느끼며 살기 짙은 미소를 지었다.

"분노의 기운… 너는… 정말 라스의…."

슬로스의 죽어 있는 듯한 눈동자에 확연한 귀찮음이 어렸다. 이제 깨달은 것이다. 자신에게 정말 분노의 군주가 어려 있다는 것을.

"라스 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겠다. '본왕의 영역에 침범하다니 죽고 싶은 것이로구나. 한 발자국만 더 넘어오면 평생 잘 수 없게 만들어주겠노라. 잠탱이 놈아.'"

-보, 본왕이 언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냐! 이런 미친놈이 정말!

당연히 라스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여태까지 녀석이 준 정보와 말투를 따라 했을 뿐이다.

"으음… 자, 잠을 잘 수…없다고…."

하지만 제대로 먹혀들었다. 앞으로 잠을 잘 수 없을 거라는 말에 슬로스의 눈빛이 티가 날 정도로 흔들렸다.

"라, 라스 님. 참으십시오!"

라온은 얼음꽃 팔찌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또,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멈춰라!

"그 팔찌…."

슬로스는 팔목에 걸린 꽃팔찌를 보고 눈동자가 더 크게 벌어졌다.

'이것도 예상대로.'

라스는 처음에 꽃팔찌로 변하면서 취향이라고 말했다. 마계에서도 비슷한 액세서리를 했을 거라는 예상이 맞았다.

"지금 강림하시면 안 됩니다! 나태와 싸우기 위해서 모은 힘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대륙을 라스 님의 발밑에 놓으셔야지요!"

라온은 멍하니 있는 라스를 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대륙? 또 뭐라는 거냐!

"예? 그냥 싸우는 게 아니라, 따라다니면서 잠을 못 자게 하실 거라는 겁니까? 라스 님. 그건 좀…."

꽃팔찌를 내려보며 눈을 부릅떴다.

-이 정신 나간 자식! 본왕이 언제 그런 말을 했더냐! 진짜 미치고 팔짝 뛰겠도다!

라스는 답답해 죽겠다고 소리치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따라…다니면서… 잠을 못 자게 해…? 라스가?"

그 말이 충격이었는지 슬로스의 몸이 휘청였다.

"라스 님! 참으셔야 합니다! 먼 곳을 보셔야지요!"

-좀 닥치라고!

"나태를 괴롭힐 수는 있겠지만 정복은 더 길어질 겁니다!"

라온은 라스 님이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실제론 라스를 개똥만도 못하게 보고 있었다.

"부, 부하들을 건드렸기 때문에 싸워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라스 님…."

감동받은 표정으로 꽃팔찌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크으…. 진짜였나…."

슬로스의 입매가 쭉 내려간다. 라스가 부하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도 알고 있는 듯하다.

-지랄! 지이이이랄이다! 이 괴물 같은 놈! 대체 네놈의 뱃속엔 무엇이 들어 있는 것이냐!

"라스 님. 일단 저를 믿어주십시오!"

-이자식이이이익!

라온은 악을 지르는 라스의 꽃팔찌에 고개를 숙인 뒤 슬로스 앞에 섰다.

'죽겠군. 심장이 남아 남지 않을 정도야.'

옆에서 소리를 지르고 분노를 일으키는 라스와 앞에서 막강한 기운을 뿜어내는 슬로스에게서 버티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어쩌다 이렇게 마왕 둘 사이에 끼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다. 어떻게 해서든 끝을 내야 한다.

-이놈! 라온 지그하르트!

라스는 당연하게도 분노를 참지 못하고 감정을 폭발시켰다. 무시무시한 냉기와 분노의 파도가 전신으로 흘러왔다.

'이걸 그대로 보여줘야 해.'

평소처럼 라스의 공격을 막지 않았다. 쏟아지는 녀석의 분노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콰아아아아!

라온의 전신으로 라스의 냉기와 분노의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나기 시작했다.

"라스의… 기운…."

슬로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턱을 내렸다.

"다시 소개하지. 난 조만간 강림하실 라스 님의 육체가 될 분노의 그릇이다."

"으음…."

"네가 왜 이곳에 왔는지 알고 있다. 전쟁 소리와 흑마법이 네 잠을 깨웠기 때문이겠지."

"그렇…다."

슬로스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넌 상대를 잘못 정했어. 계속 널 시끄럽게 만든 놈들은 몬스터의 투구를 쓴 에덴이라는 집단이다. 우리는 놈들의 공격을 방어했을 뿐이다."

라온은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을 꾹 참은 채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에…덴…. 그놈들은…어디에…있지…?"

"모른다."

"그러면 너희는…상관없다는 건가…."

"그렇다."

"그럼 라스와… 싸울 필요는…없겠어…."

슬로스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오히려 다행이라는 표정이었다.

"슬로스. 어디 가는 거냐?"

"너희들과… 상관이… 없으니…돌아간다…."

"돌아간다고? 그게 지금…. 헉! 라스 님!"

라온이 펄쩍 뛰며 팔찌를 부여잡았다.

"차, 참으셔야 합니다! 아직 나오시면 안 됩니다!"

-어? 뭐?

"아, 예! 제가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기다려주십시오!"

라온은 넋이 나간 듯 어벙하게 떠 있는 라스를 보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슬로스. 본왕의 하인들을 건드려놓고 어딜 가려는 것이냐."

"라스…. 네가… 이곳에 있는지…몰랐다…."

"그게 더 문제다. 본왕이 이곳에 있지 않았다면 네놈이 본왕의 것들을 죽였을 것 아니냐."

라온은 라스의 말을 듣는척하며 일부러 시간을 끌며 말했다. 저쪽에서 의심할 조금의 틈도 만들지 않았다.

-본왕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속이 터진다. 아주 팍팍 터져! 인간들이 화병에 걸리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노라!

라스의 눈동자가 팽이처럼 뱅그르르 돌아갔다.

"너도 마족이니 알고 있겠지. 목숨에는 목숨이다."

라온은 몬스터와의 전투에 죽었던 병사들을 가리켰다.

"나는…아직…한 명도…죽이지…."

"본왕에게 따지지 마라. 네놈이 이곳에 오면서 이끌린 몬스터들이 본왕의 하인들을 죽였으니까."

"그런…."

"너도 잠을 깨웠다며 아무 상관 없는 이들에게 책임을 물으려 하지 않았더냐."

"으음…."

할 말이 없는지 슬로스가 입을 다물었다. 아니, 눈을 보니 이유고 뭐고 다 귀찮아 보인다. 빨리 돌아가서 잠이나 잤으면 하는 표정이다.

'때로군.'

밑밥은 다 깔았으니, 본론을 꺼낼 시기였다.

"그렇다고 네 목숨을 가져간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는 건 본왕도 잘 알고 있느니라."

"라스…."

"고고한 마계의 군주인 이 몸이 기회를 주마. 선택해라. 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잠을 포기할지 아니면 이 녀석에게 네 능력을 넘겨줄지. 이 녀석은 앞으로 본왕의…어?"

라온이 입을 떡 벌리고 꽃팔찌를 바라보았다. 물론 라스는 그곳에 없었고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라, 라스 님!"

-이, 이게 네 목적이었군. 이 마귀 같은 놈!

라스는 본인이 마왕인 주제에 자신에게 마귀니, 악귀니 소리치면서 분노의 기운을 일으켰다.

"제게 그런 기회를 주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라스 님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라온은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혓바닥을 씹은 통증으로 라스의 방해를 이겨냈다.

-슬로스! 이놈을 죽여라! 세상에 해악만 끼치는 인간이다! 손만 휘둘러!

"잠과… 능력의 전수…? 그건 간단하군…."

슬로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한 표정이다.

-아, 안 돼! 안 된다! 이 멍청한 놈아! 넌 악마보다 더한 인간에게 속고 있단 말이다! 멈춰!

라스가 손을 휘저으며 비명을 질렀지만, 슬로스는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우우우웅!

그의 손가락에서 피어나온 시꺼먼 기운이 심장을 관통했다. 아니, 심장이 아니다. 영혼의 한 축에 어마어마한 기운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나태>의 능력 일부가 혼과 육체에 스며듭니다.]

[적응 기간이 끝난 뒤 능력이 발동됩니다.]

인두로 등을 지지는 듯한 고통이다. 하지만 이 통증 덕분에 더 정신이 들었다.

-보, 본왕이 여기서 죽는구나. 이렇게 화병으로 죽어. 아아아….

라스가 바닥에 드러누워 전신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럼… 돌아…가겠다…. 너무 졸려…. 잠이나…."

"잠깐."

라온이 손을 들어 돌아가려는 슬로스를 멈춰 세웠다.

"아직 안 끝났어."

"…뭐?"

슬로스의 눈동자에 살의가 깃들었다. 더 이상 잠자는 것을 방해하면 라스고 뭐고 싸울 기세였다.

"네게 줄 것이 있다."

라온은 품에 가지고 다니던 검은 보자기를 풀고, 고블린 왕의 마석을 꺼냈다. 마석에서 뿜어지는 열기에 냉기와 긴장으로 굳어버린 손가락이 풀렸다.

"그건…."

슬로스도 마석의 열기를 느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마석을 가져가라."

거리낌 없이 마석을 슬로스에게 던졌다.

"따스하군…. 이게… 있다면…계속… 잘 수… 있겠어."

슬로스에게 깃들어 있던 살의와 짜증이 단번에 사라졌다. 그는 홀린 듯한 눈으로 마석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이걸 내게… 주는 거지…."

"앞으로 이곳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도 내려오지 마라. 그리고 대량의 몬스터가 움직이면 네가 적당히 통제해서 멈추도록 해."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무서운 일을 겪게 하고 홀로만 이득을 독차지할 생각은 없었다. 슬로스를 이용하여 앞으로 웨이브가 일어나지 않게 만들 것이다.

"귀찮군…. 하지만 그리…어렵진…않아…."

슬로스가 황홀한 눈으로 고블린 왕의 마석을 바라보다가 라온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것도… 라스의…부탁인가…?"

"아니. 라스 님과 상관없는 나와의 거래다. 다시는 이곳에 나타나지 말도록."

"거래…? 이 물건에…비하면 사소하군. 그러니…."

녀석은 마석을 한번 훑어보더니, 다시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에서 피어난 검은 줄기가 꽃팔찌 바로 옆의 손목을 휘감았다.

"무슨!"

"걱정하지…마라…. 거래 이후…잔금이니까."

그 말대로 검은빛에서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치이이잉!

쇳덩이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리고, 손목에 얼음꽃과 조금 다른 형태의 검은색 꽃팔찌가 추가로 생겨났다.

"이건 뭐지?"

"훗날 네게… 도움이 될…것이다…."

"근데 왜 꽃팔찌…."

"네 주인의… 취향에 맞췄다…. 또 귀찮게… 하기 전에…."

슬로스는 그 말을 남기고 뒤를 돌아 다시 산으로 향했다.

그가 물러감에 따라 어둠이 그치기 시작했다. 끝없는 밤이 사라지고, 잠들었던 태양이 깨어났다.

"후우…."

라온이 가닥가닥 끊어지는 숨을 뱉었다.

'이러다 정말 죽겠군.'

당장 쓰러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슬로스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는 버텨야 했다. 다행인 점은 고블린 마석이 마음에 들었는지, 걸음이 이전보다 훨씬 빠르다는 것이었다.

'하필 또 꽃이라니, 라스. 이 팔찌는….'

-끄르르륵! 라, 라온 개새….

라스는 정말 화병에 걸렸는지 기절해 있었다. 입에서 푸른 거품이 보글보글 뿜어진다.

"하."

라온이 헛웃음을 지으며 식은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래도 어떻게든 끝났군.'

전부 한 끗 차이였다. 슬로스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면, 라스가 거래에 응해주지 않았다면, 성에 있는 모두가 기절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방법은 쓸 수 없었을 테니까.

슬로스의 뒷모습이 희미해지기 시작할 때 메시지가 올라왔다.

[초월적인 존재와 힘을….]

[영혼의 격이 크게 상승….]

[만화공의 등급이….]

[혹한의 냉기가 글래시아와….]

[특성 <나태>가 생성….]

[수면을 취할 때….]

많은 내용이 있었지만, 시야가 흐려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라온은 메시지를 닫고, 휘청이는 다리에 마지막 힘을 주었다. 나태의 군주가 산으로 사라지고, 금빛 태양이 어둠을 지워낼 때까지 홀로 성벽을 지켰다.

그렇게 하룻밤의 악몽이 끝났다.

145화

"크으으…."

테리안이 낮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내가 죽은 건가?"

성으로 다가오던 괴물의 기운에 짓눌려 정신을 잃었던 게 생각났다. 아버지도 막지 못했으니, 죽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후우, 아직 저승은 아닌 듯하네요."

울브스 용병 단장 카불이 떨리는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한참 전에 해가 떴을 시간이었지만 아직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럼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모르겠군요. 그 괴물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는데…."

"저, 저건!"

"도련님!"

뒤늦게 눈을 뜬 설격대주 에드퀼과 도리안이 성벽을 올려다보며 벌떡 일어섰다.

"너희 뭘… 아!"

두 사람의 시선을 따라간 테리안이 눈을 부릅떴다.

어둠이 깊게 스며든 하늘 아래. 홀로 선 검사가 있었다. 검을 들지 않았지만, 세상 그 어떤 무인보다도 거대하게 보였다.

고오오오!

하늘을 짙게 물들이던 어둠의 커튼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겁에 질려 있던 황금빛 태양이 다시 세상에 드러난다.

그 상서로운 빛이 라온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모습은 신비 그 자체였다.

"라, 라온…."

"라온 님!"

"아니, 어떻게…."

하나둘씩 깨어난 사람들이 라온의 등을 보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모두가 기절했을 때 라온이 혼자 성벽을 지켜냈다는 사실에 전율한 것이다.

라온이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옅은 미소를 짓는 얼굴에 피로와 고통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오히려 이쪽의 안전을 확인하듯 가라앉은 눈동자로 아래를 살폈다.

"모두 무사하군."

사막의 모래처럼 메마른 음성이 흐른다.

"약속은 지켰다."

라온이 구김 없이 방긋 웃었다.

"야, 약속?"

"무슨 약속을 말하는 거지?"

"갑자기…"

"아!"

도리안이 손뼉을 치며 입술을 떨었다.

"아까 라온 님이 전투사를 말씀하셨잖아요! 모두 살아남으라고! 그 말을 지켰 주셨다는 뜻이에요!"

"아, 그거…."

"그럼 그게 살아남으라는 뜻이 아니라, 살아남게 해주겠다는 뜻이었어?"

"라, 라온…."

"라온 님!"

사람들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라온을 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이제 그놈은 안 오니까. 걱정할 필요 없… 아."

라온이 손을 저으려다가 우뚝 멈췄다. 눈을 감고 그대로 뒤로 넘어간다. 성벽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달려가려 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라온 님!"

"위험합니다!"

라온의 머리가 돌벽에 부딪치려 할 때 두꺼운 팔이 올라와 그를 붙잡았다.

"후우…"

밀랜드다. 기절해 있던 그가 일어서며 쓰러지던 라온을 끌어당겼다.

"사령관님!"

밀랜드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어깨로 라온을 부축했다.

"싸움은 끝났다."

그는 힘겨운 걸음으로 성벽의 끝에 섰다.

"영웅에게 박수와 환호를!"

밀랜드의 포효와 같은 목소리가 아직 어리둥절했던 사람들의 심장을 두들겼다.

"우와아아아아아!"

"라온! 라온! 라온!"

"하분 성의 영웅!"

라온은 듣지 못하는 그의 이름과 환호가 하분 성 하늘에 끝없이 울려 퍼졌다.

* * *

슬로스라는 재해가 지나간 지 이틀이 지났다.

아직 라온은 깨어나지 못했고, 밀랜드와 테리안을 비롯한 간부들은 짧은 휴식을 취한 뒤 회의실에 모여 있었다.

"모두 몸은 괜찮은가?"

원형 테이블 중앙에 앉은 밀랜드가 간부들을 쭉 훑어내렸다. 다른 사람의 안부를 묻지만, 눈 밑이 시꺼멓게 그을린 그의 상태가 가장 심각해 보였다.

"조금 쉬었더니 괜찮아졌습니다."

부사령관 테리안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괜찮습니다."

"전 아직 머리가 띵하네요. 죽다가 살아나서 그런가."

설격대주 에드퀼이 살짝 고개를 숙였고, 베토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오랫동안 버틴 기사단장이나, 검대의 대주들도 아직 정신적 충격이 가지지 않은 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일찍 기절해서 그런지 후유증이 그리 심하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그냥 잠시 잤다가 일어난 것 같습니다. 몸 상태는 별로지만."

반면 먼저 정신을 잃은 정찰대장들은 그나마 멀쩡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놈은 대체 뭐였을까요?"

3번 정찰대장 라딘이 누구도 꺼내지 못했던 말을 먼저 시작했다.

"세 개의 뿔과 공간을 일그러뜨릴 정도의 마기를 보면 뻔하지 않느냐. 마족이다."

밀랜드가 주먹을 꽉 말아쥐며 말을 이었다.

"그것도 등급이 높은 최고위 마족. 젊었을 때 마족과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지만 그런 놈은 처음이었다. 아예 격이 달랐어."

"확실히 상대조차 안 되더군요…."

"최, 최고위 마족이면 거의 마왕급 아닌가요?"

간부들은 이틀 전에 보았던 슬로스의 압도적인 기파를 되새기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왕일 수도 있다."

"예?"

"저, 정말입니까?"

밀랜드의 입에서 마왕이라는 소리가 나오자 간부들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마스터인 내가 버틸 수조차 없었다. 그놈을 상대하려면 육황과 오마의 우두머리급이 와야 한다."

그는 어둠의 이끌며 다가오던 슬로스를 생각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그런 마왕급 괴물을 돌려보낸 라온 님은 대체 뭡니까."

조용히 듣고 있던 에드퀼의 목소리가 침묵이 깔린 회의장을 가로질렀다.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죽음을 각오했을 겁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사령관님이 쓰러졌을 때 죽음은 확정이었죠. 하지만 저희는 단 한 명도 죽지 않았습니다."

에드퀼이 밀랜드와 간부들을 쭉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모두 아실 겁니다. 저희를 살린 사람이 라온 님이라는 걸."

간부들 모두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의문이 생겨납니다. 사령관님조차 버티지 못하는 괴물을 상대로 라온 님이 어떻게 우리를 살렸는가, 무슨 수를 써서 그 괴물을 돌려보냈는가 하는 의문이."

"확실히…."

"나도 내가 살아 있는 게 신기하긴 해."

"대체 뭘 어떻게 한 거지?"

간부들 역시 그게 의문이라는 듯 입맛을 다셨다.

"너 라온을 의심하는 거냐?"

"아닙니다."

테리안이 에드퀼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에드퀼은 별 반응 없이 고개를 저었다.

"라온 님이 본인의 소중한 것을 희생하셨을 거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희생?"

"라온 님이 무력으로 그 마족을 이겼을 리는 없습니다. 그러면 남는 건 계약 혹은 거래죠. 제 생각입니다만 라온 님은 본인의 영혼과 육체를 걸고 성의 사람을 살리는 방법을 취했을 겁니다."

에드퀼이 입술을 깨물었다. 바싹 마른 입술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제가 지금까지 봐온 라온이라는 사람은 그런 남자입니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다른 사람을 구하고 싶어 하시죠."

"후우…."

"그 아이가 그런 면이 있지."

"라온 님…."

테리안과 간부들은 에드퀼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는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절해 있을 때 라온의 입에서 거래라는 단어가 나오는 걸 들었다."

밀랜드가 몸을 앞으로 내밀며 눈을 내리감았다.

"거래…."

"저, 정말이십니까?"

"그래. 다른 단어는 모르겠지만, 거래라는 단어는 확실히 들었다."

"역시…."

"이런!"

에드퀼이 인상을 찌푸렸고, 테리안이 손으로 눈을 가렸다.

"마족과 인간의 계약 내용은 보통 힘이다. 마족이 인간에게 힘을 넘겨주고, 영혼을 받아 가지. 하지만 이번에 라온이 건 거래는 뻔하다."

밀랜드가 분하다는 듯 테이블에 올린 손을 떨었다.

"녀석은 본인의 영혼을 희생하고 우리 모두의 목숨을 구했을 것이다."

"그렇겠죠."

"제기랄…."

모두가 깨달았기에 이를 바득 갈며 고개를 푹 숙였다.

"사령관님."

에드퀼이 가는 숨을 뱉으며 밀랜드를 불렀다.

"라온 님은 대체 누구입니까? 이제 말씀해주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하긴 이제 속이는 건 무리겠어."

밀랜드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 지그하르트. 그게 녀석의 이름이다."

"지그하르트였군요."

"역시…."

"하긴 그 정도는 되어야지."

간부들은 의외로 놀라지 않았다. 보여준 활약이 엄청났으니,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 같다.

"알고 있었나?"

"아직 16살인 아이가 그 정도 무력과 정신력을 가질 만한 곳은 육황과 오마뿐이죠. 라온 님의 기질은 마가 아니라 정에 가까우니 육황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그하르트라는 걸 알았으니, 복수는 포기할 것이냐."

"복수 따윈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전 그분을 따르고 싶습니다."

에드퀼이 차분하게 고개를 저었다.

"따른다고?"

"라온 님을?"

"넌 라온한테 얻어터졌잖아!"

간부들이 대체 무슨 생각이냐며 눈매를 좁혔다.

"신나게 얻어터졌죠. 덕분에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초심을 잃은 채 평생 약자만 괴롭히며 찌질하게 살았을 겁니다."

에드퀼이 깨끗한 눈빛을 발하며 일어섰다. 정찰대장들 앞에 서서 직각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집만 가득 차 전우라는 걸 잊고 모자란 짓을 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

"왜, 왜 이래! 다 사과 했잖아!"

"그래.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해놓고 왜 또…."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 제대로 잘못을 빌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손을 내젓는 정찰병들에게 끝까지 고개를 숙인 뒤 몸을 일으켰다.

"오늘 일이 아니더라도 전 라온 님을 따르기로 정했습니다. 그분께서 받아주시지 않는다고 해도 그 뒤를 쫓을 것입니다. 사령관님. 죄 많은 절 성에서 추방 시켜 주십시오."

에드퀼이 밀랜드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급하구나."

밀랜드가 코웃음을 치며 턱을 세웠다.

"예?"

"녀석에게 목숨을 빚진 건 너만이 아니야."

그 말에 이곳에 있는 간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은 이 성 모두의 목숨을 여러 번 구해냈다. 그 아이가 잃은 것들을 우리가 채워주는 게 옳다."

밀랜드가 빙긋 웃으며 무릎을 꿇은 에드퀼을 일으켰다.

"나도 녀석의 뒤를 받치겠다."

* * *

으음….

라온이 느릿하게 눈을 떴다.

'뭐지?'

슬로스와의 기 싸움 때문에 몸이 망가졌다고 생각했지만,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팔다리가 가벼웠다.

"이상한데…."

예상과 다른 몸 상태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일어섰다. 육체와 정신만이 아니라, 감각도 더 민감해진 것 같았다.

-이상해? 이상하냐?

올라간 능력치 때문이라고 생각할 때 얼음꽃 팔찌에서 라스가 불기둥처럼 치솟았다.

-네놈의 대가리가 가장 이상하노라! 더러운 사기꾼 놈아!

라스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제대로 화가 난 모양새다.

'아, 고맙다. 네 덕분에 살았어'

-무엇이 고맙다는 말이냐!

'네가 맨날 마계 이야기를 주절거렸잖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는데도 기억에 남아서 정보를 이용하기 쉬웠어.

-이, 이놈이….

'거기다 다 이겼다고 생각해서 나한테 슬로스에 대한 정보를 마구 넘겨줬잖아. 네가 없었으면 진짜 죽었을 거야. 넌 역시 아낌없이 주는 나무다. 라스.'

라온이 경쾌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끼으으윽!

라스는 냉기를 풀풀 풍겨내며 눈을 흘겼다.

-죽일 테다. 어떻게 해서든 네놈의 영혼에 냉기의 창을 박아넣을 것이야!

'그건 나중에 하시고.'

라온이 당장에 달려들려던 라스에게 손을 저었다.

'일단 메시지부터 좀 볼게. 꽤 좋은 걸 얻은 것 같거든.'

-이 마귀 같은 놈! 마왕 둘에게 사기를 친 놈은 천지가 개벽한 이후 네놈이 처음이다!

'마계에는 사기꾼이 없나?'

-네놈 같은 놈이 또 있었으면 이미 세상은 멸망했다!

'그래?'

피식 웃으며 지나간 메시지들을 불러왔다.

[초월적인 존재와 힘을 겨루었습니다.]

[영혼의 격이 크게 상승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4포인트 상승합니다.]

마주 서서 버틴 것만으로 영혼의 격이 상승하고, 모든 능력치가 오르다니, 슬로스의 막강함이 다시 한번 피부에 와닿았다.

-고작 몇 분 버텼다고 영혼의 격을 올려 주는 게 말이 되느냐!

'흐음….'

라온은 악을 지르는 라스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저 녀석이 슬로스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이라는 거지.'

매일 불평불만을 쏟아내고, 음식만 쫓는 호구가 슬로스 이상의 강자라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만화공의 등급이 상승했습니다.]

[만화공이 4성에 올랐습니다.]

3성에서 머물러 있던 만화공이 4성이 되었다. 슬로스에게서 버티기 위해 죽을 정도로 만화공을 일으킨 보람이 있었다.

단전에 차오른 열기의 구체가 예전보다 크고 정심해진 게 느껴졌다.

'그럼 혹시….'

다음 메시지를 살펴보았다.

[혹한의 냉기가 글래시아와 통합됩니다.]

[글래시아의 등급이 4성으로 상승합니다.]

예상대로다.

만화공과 같이 운용했던 글래시아가 혹한의 냉기와 합쳐지며 4성의 경지에 올랐다. 만화공의 오러 옆에 자리한 냉기의 구체도 더 순수한 기운을 뿜어냈다.

불의 고리는 늘어나진 않았지만, 성취가 어마어마하게 상승했다. 조만간 고리가 하나 더 추가될 것 같았다.

'역시 빠르게 강해지기 위해서는 강자와 싸워야 해.'

강자와 전력을 다해 부딪친 것만으로 막혀 있던 무학의 경지가 단숨에 벽을 뚫었다. 실전이 최고의 수련이라는 말은 역시나 옳았다.

-흐으읍!

라스에게서 숨을 참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가라앉히는 것 같았다.

[특성 <나태>가 생성되었습니다.]

[수면을 취할 때 미량의 능력치가 상승하고, 체력과 오러 회복 속도가 대폭 증가합니다.]

세 번째 메시지를 보았을 때 라온과 라스가 함께 눈을 부릅떴다.

-이, 이런 미친!

"잠을 자는데, 능력치가 상승해?"

잘못 본 줄 알고 메시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하지만 그대로다. 잠을 자기만 해도 능력치가 오른다고 적혀 있었다.

"와아…."

정신이 멍해졌다. 미량이라고 적혀 있으니, 소수점 단위로 오르겠지만 그게 어디인가. 앞으로는 24시간이 수련이나 마찬가지였다.

-슬로스! 이 모지리 자식! 예전에 죽였어야 했는데에에에!

라스는 슬로스를 죽이지 못한 게 한이라고 말하며 꽥 비명을 질렀다.

"이래서 몸이 가벼웠군."

<나태>의 체력과 오러 회복 능력 덕분에 몸을 완전히 회복한 것 같았다.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아직 메시지는 끝나지 않았다.

[<분노>의 지독할 정도의 방해를 이겨내셨습니다.]

[수속성 저항력이 상승합니다.]

[체력 능력치가 2포인트 상승합니다.]

[감각 능력치가 2포인트 상승합니다.]

[민첩성 능력치가 1포인트 상승합니다.]

"이게 왜 없나 했지."

이 메시지가 없었으면 섭섭할 뻔했다.

-끄으으으, 또 본왕의 능력치가 빨렸노라….

라스는 빨랫줄에 걸린 옷처럼 침대 모퉁이에 축 늘어졌다. 패배자의 말로 그 자체를 보는 듯 했다.

"그러니까 누가 방해하래?"

-닥쳐라. 네놈이 본왕의 이름을 팔면서 사기 치는 걸 어떻게 참으란 말이냐!

녀석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고개를 들었다.

-마왕 둘을 등쳐먹다니! 천계의 위선자들도 네놈만큼은 아니야!

'그거 칭찬인가?'

-매번 그 귀때기 이름을 팔더니, 이제 본왕까지! 네놈의 사악함은 이미 도를 넘었다!

라스는 마왕 주제에 용사 같은 말을 하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네놈의 악행을 막을 것이다!

'막든 말든 상관없는데, 그 전에.'

라온이 빙긋 웃으며 모은 네 손가락을 까딱였다.

'내기 보상도 지금 넘겨.'

-내, 내기 보상?

'내가 이 성 밖으로 나가느냐. 나가지 않느냐 하는 내기.'

-아….

이제 생각이 났는지 라스의 눈동자가 탁 풀렸다.

"네가 믿던 게 슬로스였지? 그 녀석은 고블린 왕의 마석 껴안고 자고 있을 테니, 앞으로 여기 올 일 없어. 내기도 지금 끝내자."

-끕, 자, 잠깐!

라스가 손을 저으며 뒤로 훌쩍 물러섰다.

-라온?

녀석의 목소리가 실크를 감은 듯 부드러워졌다.

-점장을 구할 때 기억하느냐? 네가 밖에 나갔지만 본왕이 관대한 마음으로 넘어가 주었지 않느냐.

"기억은 하는데, 설마 그걸 가지고 봐달라고 하진 않겠지? 마계의 왕이 그렇게 쪼잔하진 않을 거야."

라온이 눈매를 좁히며 고개를 흔들었다.

"암, 그렇고 말고. 부하를 사랑하고, 관대하며, 고고하신 분노의 군주께서 그런 말을 하겠어?"

-그으으….

말을 하려던 라스가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하고픈 말이 목구멍으로 다시 넘어간 것 같았다.

"왜? 하려던 말 해봐."

라온은 빙긋 웃으며 계속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크으으! 이 아귀 같은 놈! 다 처먹고 배나 터져라!

라스의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일렁거렸다.

[분노와의 내기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오늘따라 메시지 창이 참으로 아름답게 반짝였다.

146화

라스가 패배를 인정하자마자 내기 승리 메시지가 주르륵 올라왔다.

[모든 능력치가 5포인트 상승합니다.]

능력치가 오르며 치솟은 전율에 미소를 지을 때 두 번째 메시지가 떠올랐다.

[유일급 칭호 <왕을 농락하는 자>가 생성됩니다.]

두 번째 보상은 마음에 딱 드는 이름의 칭호였다.

-어떤 놈이 칭호 이름을 저따위로 지었단 말이냐.

라스는 짜증이 돋아난 듯 인상을 찌푸렸다.

-마음에 들지 않노라!

'어떤 놈이 지었는지는 몰라도, 누구 때문에 나왔는지는 알겠네.'

라온이 피식 웃으며 칭호의 설명을 불러왔다.

<왕을 농락하는 자>

왕의 위엄을 가진 자를 무력이 아닌 방법으로 농락했을 때 주어지는 칭호.

능력 : 자신보다 무력이나 지위가 높은 자와 대화할 때 상대의 호감도와 신뢰도가 상승한다.

칭호의 능력을 본 라온의 눈에 붉은 이채가 돌았다.

'이거 괜찮은데?'

항상 싸움으로만 적을 제압할 수는 없는 법. 설득력이 오르는 칭호의 옵션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분노와 나태가 나왔으니, 다른 마왕이 나오지 말란 법도 없다. 이 칭호의 능력은 그런 위기의 상황에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가주에게도 통할 테고.'

글렌 같은 최상위 무인에게도 효과가 있을 테니, 여러모로 유익한 칭호였다.

-흥.

라스는 칭호의 설명을 보고서 콧방귀를 끼었다.

-본왕이 저따위 칭호의 능력에 넘어갈 듯싶으냐. 네놈이 본왕을 설득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라.

'지금도 가능한데.'

애플 미트파이나 민트초코의 이름만 꺼내면 라스를 설득하는 건 누워서 떡 먹기나 다름없었다.

-본왕은 고고한 존재. 남의 말 따위는 듣지 않느니라! 저런 칭호보다 능력치를 올려 주는 게 훨씬 나았을….

'아 걱정하지 마.'

-뭐?

'곧 오를 거니까.'

라온이 옅게 웃으며 세 번째로 올라오는 메시지를 가리켰다.

[<분노>에게 여섯 번째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6연승의 효과로 추가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근력이 2포인트 상승합니다.]

[기력이 2포인트 상승합니다.]

[체력이 2포인트 상승합니다.]

6연승의 효과로 세 개의 능력치가 2포인트씩 상승했다.

'오늘 대박이네.'

오늘 올라간 모든 능력치만 9에 각각의 능력치도 2에서 3씩 상승했다. 이렇게 많은 능력치가 오른 건 시스템을 얻고 난 이후 처음이었다.

-오, 오늘 대체 능력치가 몇이나 오른 것이냐.

'글쎄. 모든 능력치로 따지면 대략 11포인트 정도겠네.'

-11? 11이라고?

라스가 냉기가 피어나는 손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빌어먹을! 그 11포인트. 전부 본왕의 육체에서 뽑아낸 것이잖느냐!

'뭐 그렇겠지?'

라온이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슬로스에게 뽑아먹고, 본왕에게 뜯어먹고. 이 등골 브레이커 같은 놈!

'그러고 보니 이건 뭐야?'

나태가 생각난 김에 손목을 들어 올려 검은색 꽃팔찌를 가리켰다.

-본왕이 그걸 왜 알려주겠느냐!

라스는 팔찌를 지그시 내려보다가 콧방귀를 뀌었다.

-네놈 스스로 알아보거라. 본왕이 그걸 알려줄 의리는 없으니까.

'반응 보니까 모르나 보네.'

라온이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마왕이라고 해놓고 모르는 게 왜 이리 많은지.'

-무, 무슨 헛소리냐. 본왕이 모르는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느니라!

'그럼 이게 뭔데.'

-알려줄 생각 없다니까.

'그러니까 모르는 거지.'

-이 족제비 같은 놈!

라스가 참고, 참던 분노를 터트렸다. 압도적인 냉기와 분노가 일어나며 온몸을 가시처럼 찔러왔다.

찌이이잉!

영혼에 박힌 25의 분노도 함께 일어나 내부에서 육체와 영혼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 이건 제법….'

라온이 고개를 숙인 채 손을 부르르 떨었다.

-슬로스가 찾아왔을 때는 15의 분노가 네놈의 영혼에 제대로 녹아들지 않았다. 15중 10도 운용되지 못했지.

라스가 더 막대한 분노의 감정을 끌어 올리며 전신을 짓눌러왔다.

-하지만 지금은 25의 분노가 완전히 깨어났다! 이대로 네놈의 육체를 먹어 치우겠노라!

'너도 착각이 심하네.'

이를 바짝 물며 만화공과 글래시아를 동시에 일으켰다.

용암 같은 열기를 품은 오러가 마나 회로를 질주하며 냉기를 녹이고, 글래시아의 얼음 장벽이 뇌리를 파고들어 오는 분노의 감정을 막아섰다.

그것만이 아니다.

슬로스의 기파와 라스의 방해를 견디며 상승한 영혼의 격이 솟구치는 분노의 감정을 오히려 짓눌러버렸다.

-어, 어떻게….

'생각 없이 네 분노를 받은 거 아니야.'

라온이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쓸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네 분노를 받아들인 것 이상으로 내가 강해질 거라 확신했거든.'

라스에게 15의 분노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버틸 자신이 있었기에 녀석에게 거래를 제안한 거다.

불의 고리와 만화공, 글래시아 덕분에 라스의 공격이 견딜 만한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이 정도라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

-그럴 리가 없다!

라스는 포기하지 않고, 더 많은 기운을 쏟아부었지만, 라온 역시 그 이상의 오러와 격을 끌어 올려 정신과 육체를 보호했다.

쿠구구구!

인간과 마왕의 힘겨루기가 30분가량 계속되었을 때 라온의 눈앞으로 푸른 창이 올라왔다.

[<분노>의 방해를 버텨냈습니다.]

[민첩성 능력치가 1포인트 상승합니다.]

방해를 견뎌냈다는 메시지. 오늘로 두 번째였다.

'오늘 내 생일인가?'

-제에에에기랄!

* * *

라온이 삐진 라스를 보며 웃고 있을 때 숙소의 문이 열리고 도리안이 들어 왔다.

"어억!"

도리안은 멀끔한 라온을 보고 입을 떡 벌린 채 달려왔다.

"일어나셨군요!"

녀석은 침대에 손을 얹은 채 눈물을 글썽거렸다.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멀쩡해."

라온이 어깨를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멀쩡한 정도가 아니라 최고의 상태였다.

"어후, 진짜 다행이에요."

"내가 얼마나 기절했지?"

"오늘로 사흘째였어요."

도리안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일단 좀 씻으셔야죠. 물도 마시고, 수프도 드세요!"

그 말을 하며 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세숫대야와 물 그리고 수프가 든 그릇을 꺼내 원형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세숫대야를 왜 가지고 다녀? 수프는 또 거기서 왜 나오고…."

"언제 깨어나실지 몰라서요."

도리안은 헤헤 웃으며 대야에 세숫물을 담고, 수통에 있던 물을 컵에 부어주었다.

"고맙다."

라온이 옅게 웃으며 테이블로 다가갔다. 자신 때문에 이런 물건들을 가지고 다녔다는 걸 알게 되니, 가슴 한쪽이 따스해졌다.

"전 사령관님께 보고하고 올게요!"

"어? 잠깐!"

뭘 이런 걸 보고하냐고 말리려고 했지만, 도리안은 이미 방 밖으로 사라진 상태였다.

"급하기는."

라온은 혀를 차고 세면을 끝냈다. 물로 입을 헹구고 각종 야채가 잘게 썰려 들어간 수프를 한 입 먹었다.

고소하면서도 깔끔한 맛이 일품이다. 중간중간 씹히는 채소의 식감도 살아 있어 먹는 재미도 있었다.

"이거 유아가 만든 거네."

제대로 된 레시피로 만든 수프다. 도리안이 아니라, 유아가 만들어서 가져온 것 같았다.

-맞느니라. 파인애플 소녀의 마음이 느껴지는 맛이로다.

삐졌던 라스가 어느새 다가와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참으로 쉬운 마왕이다.

-본왕의 시녀다운 솜씨로다. 무얼 하는 거냐. 더 먹지 않고.

"에휴…."

주절거리는 라스에게 고개를 저어주고서 남은 수프를 떠먹었다.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맛이 좋아 꿀떡꿀떡 잘 넘어갔다.

순식간에 그릇을 깨끗하게 비우고, 물을 마실 때쯤 다시 문이 열리고 도리안이 들어왔다.

"그새 다 드셨네요?"

도리안이 비워진 그릇과 컵을 보며 씩 웃었다.

"배가 고팠거든."

식충이 하나가 재촉하기도 했고.

라온은 라스를 보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생각해봤지만 라스는 미식가가 아니라 그냥 먹을 걸 좋아하는 대식가 같다.

"사령관님이 얼굴을 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가실 수 있겠어요?"

"부르시면 가야지."

하분 성주의 부름인데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사정도 설명해야 하고.'

슬로스를 어떻게 돌려보냈는지 물어볼 게 뻔하기에 한 번은 부딪쳐야 할 일이다.

그 핑계에 대해선 미리 생각을 해두었기 때문에 지금 가도 문제는 없었다.

-인간이란 원래 의심이 많은 동물이지. 녀석들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구나.

라스는 파국을 바라는 듯 배를 두드리며 히죽 웃었다.

'네가 바라는 일은 오지 않을 테니, 신경 꺼라.'

라온은 달라붙는 라스를 밀어내고 겉옷을 걸치고 일어섰다.

"가자."

* * *

"어? 라온 님!"

"일어나셨다!"

"라온 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라온이 숙소를 나가자마자, 정찰병들이 다가와 상태를 물어온다. 젖어 드는 눈빛에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괜찮아. 다 회복했어."

"후우, 다행이네요."

"진짜 걱정했습니다."

웃으며 손을 젓자 정찰병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찰병만이 아니다. 사령부로 가는 동안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몸을 걱정해주었다.

'시선이 좀 많이 달라졌는데.'

이전의 자신을 영웅으로 보았다면 지금은 말하기 좀 민망하지만 거의 신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거기다 원래 말을 놓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

'뭐지?'

목숨을 구해줘서 고맙다는 건 이해하지만, 갑자기 존댓말을 쓰는 건 이상했다. 뭔가 다른 게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일지를 생각하며 사령부 앞에 도착했을 때 한 단어가 들려왔다.

지그하르트.

여기서 들려서는 안 될 단어였다.

"도리안?"

"아, 예…."

도리안은 알고 있었던지 뒷머리를 긁적였다.

"저희 정체가 밝혀졌습니다. 사령관님이 직접 말씀하셨어요?"

"역시 그런가."

사건의 스케일이 너무 커서 더 이상 용병 출신이라는 말로는 커버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럼 다 아는 거야?"

"네. 그렇지만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저희 입으로 정체를 밝힌 게 아니니까요."

"알고 있어. 다만…."

조금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이 예전처럼 쉽게 다가오지 않을 거 같아서."

"그건 다른 이유 때문인데요."

"다른 이유?"

"아, 일단 올라가시죠."

도리안이 움찔거리다가 바로 앞에 있는 사령부를 가리켰다.

"알겠다."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사령부 회의실로 올라갔다.

예상과 달리 회의실은 밀랜드나 테리안만이 아니라, 간부들로 꽉 차 있었다.

임무나, 경계를 서는 간부를 제외한 모두가 회의실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라온은 사람들의 얼굴을 쭉 살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부 살아 있네.'

혹시라도 문제가 생겼을까 봐 걱정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친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착한 척하지 마라.

라스가 차게 웃으며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네가 저들을 구했다고 해도, 인간들은 마족과 연결고리가 생겼을지도 모를 네놈을 두려워할 것이다. 네 걱정이나 하는 것이 좋을 것이야.

'그럴지도.'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의 삶에서 만났던 인간들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다만 라스는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은 어떤 기대를 가지고 저들을 구한 게 아니라, 그저 살리고 싶었을 뿐이다. 기대하지 않았기에 딱히 실망할 것도 없었다.

"사령관님을 뵙습니다."

라온은 생각을 정리하고, 밀랜드에게 고개를 숙였다.

"깨어난 모습을 보니, 좋군. 거기 앉거라."

"예."

밀랜드의 손짓을 따라 중앙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회복하느라 오래 걸린 줄 알았거늘. 또 강해져서 나타났구나."

밀랜드는 자신의 안색을 쭉 살피고 헛웃음을 흘렸다.

"많은 천재들이 수련을 위해 이곳을 찾았지만, 너처럼 빠르게 강해지는 녀석은 처음이다."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 아니다. 그게 의지고, 실력이지. 조금 있으면 나조차 네 밑에 깔리겠어."

밀랜드는 헛소리하지 말라는 듯 손을 저었다. 다른 간부들도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회복한 걸 보니 말하기 편하겠군."

그가 상체를 테이블 쪽으로 들이밀었다.

"그 괴물을 어떻게 돌려보냈지?"

"음…."

라온은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살짝 턱을 내렸다.

'올 게 왔군.'

무조건 나올 거라 생각한 당연한 질문이었다. 물론 그에 대한 대답은 준비되어 있었다.

-어떤 핑계를 댈지 궁금하구나. 이 녀석들도 슬로스가 마족이라는 건 알고 있을 테니까.

라스는 재미있겠다며 키득거렸다.

"저는…."

"잠깐. 질문을 하기는 했지만 네가 대답할 필요는 없다."

생각해두었던 핑계를 말하려 할 때 밀랜드가 손을 들어 올렸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그놈이 마족이라는 걸 다 알고 있다. 그것도 마왕급 괴물. 그놈을 돌려보내기 위해서 넌 거래를 했겠지."

"맞습니다."

예상대로 이들은 대략적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정도 마족이 원할 것이라면 영혼과 육체밖에 없을 것이다."

"음…?"

예상을 벗어난 밀랜드의 반응에 라온의 대답이 조금 늦어졌다.

"역시!"

"그렇게 되었군."

"라온…."

그 침묵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는지 밀랜드와 간부들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거 같은데….

라스는 불안한 듯 치켜올린 눈썹을 떨었다.

"너란 놈은 정말이지…."

"예? 그게 아니라, 저는… 어?"

라온이 뒤늦게 준비했던 핑계를 말하려 할 때 밀랜드가 벌떡 일어섰다. 그를 따라 간부들 모두가 몸을 일으켰다.

"고맙다! 라온!"

"고맙습니다!"

밀랜드와 간부들이 동시에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였다.

"어…."

-억?

갑작스러운 정중한 인사에 라온과 라스가 눈을 부릅떴다.

"왜들 이러시는 건지…."

살려줘서 고맙다는 건 알지만 인사가 조금 과한 느낌이었다. 거기다 자신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 마족과의 거래를 쉽게 입에 담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밀랜드와 테리안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네 영혼과 육체를 걸고 그 마족과 거래를 했겠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이놈이 무슨 육체와 영혼을 걸어!

라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우린 바보가 아니다. 너의 소중한 것이 그 마족에게 저당 잡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맞습니다."

"저희가 기절해 있는 동안 라온 님이 홀로 어떤 고초를 겪으셨는지 전부 알게 되었습니다."

"라온 님…."

테리안의 말에 간부들 모두의 눈빛이 슬픔과 감동으로 차올랐다.

-이놈들 바보 맞는 거 같은데?

라스는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콧잔등을 찡그렸다.

"하분 성을 구하기 위해서 네 영혼을 희생한 것에 경의를 표한다. 라온 지그하르트."

"평생 갚지 못한 은을 입었어."

"감사합니다. 라온 님!"

간부들은 슬픈 눈빛으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개중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도 있었다.

-무슨 미친 소리를 하고 자빠졌느냐! 혼을 내어준 건 이 사기꾼 놈이 아니라, 그 멍청한 잠탱이 놈이라고!

라스가 빽 소리를 지르며 밀랜드의 콩콩 머리를 두들겼다.

-마왕이 인간에게 등골을 뽑혔다고! 혼이 빨려나간 건 이놈이 아니라, 본왕이랑, 그 멍청한 슬로스란 말이다!

들을 수도 없건만 라스는 괴성을 지르며 간부들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전장에는 이런 말이 있다. 검에는 검. 피에는 피 그리고 목숨에는 목숨."

밀랜드의 눈동자에 상서로운 광채가 어렸다.

"네가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네 혼과 육체를 마왕에게 내어주었으니, 우리도 그에 합당한 걸 내놓아야겠지."

"물론입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간부들이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끄어억! 답답해 뒤지겠도다! 이놈은 마왕에게 사기 쳐서 이득만 뽑아먹은 놈이니라! 정신 차려라!

라스가 악을 지르고 난동을 피워도 라온에게 향하는 간부들의 예과 존경은 멎지 않았다.

-목구멍이 고구마로 꽉 막힌 느낌이다. 마, 말 한마디만 할 수 있다면 영혼의 일부가 사라져도 좋다! 제발! 한 마디만!

녀석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쭉 늘린 채 죽겠다고 비명을 질렀다.

밀랜드와 간부들이 테이블 앞으로 나와 라온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섰다.

쿠웅!

오른 주먹으로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을 두드리며 허리를 세웠다. 전장에서 보내는 최고의 경의와 찬사였다.

"우리가. 아니, 이 하분 성이 네 뒤를 받쳐 주겠다. 라온 지그하르트!"

"아…."

라온이 마른침을 삼켰다. 모두의 눈빛에 깃든 진중함에 등골 사이로 오싹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끄으윽….

반면 라스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늘어져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랄맞은 세상이로다. 죽자. 그래. 죽어야 이 꼴을 안 보지….

147화

라온은 사람들의 시선을 마주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선명한 눈동자. 자신의 뒤에 서겠다는 이들의 말은 전부 진심이었다.

'말이 안 나오는군.'

이런 눈빛을 받으며 '사실 마왕을 등쳐먹은 건 접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오늘은 왜 그 가벼운 주둥아리를 닫고 있는 것이냐! 제대로 말해라! 네놈이 마왕을 농락했다고!

라스는 빨리 말하라는 듯 자신의 어깨를 북처럼 내리쳤다.

그 말도 맞다. 저런 사람들이기에 어느 정도의 사실은 밝히고 싶었다.

"사실 저는…."

"말할 필요 없다니까."

라온이 천천히 입을 떼려 할 때 테리안이 손을 들어 올렸다.

"예?"

"마족과 거래한 내용을 입에 담으면 그 거래가 더 불리해진다는 건 유명하지. 그 이상은 말 안 해줘도 돼. 우리 모두 알고 있으니까."

그는 다 이해한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욱, 진짜 돌아버리겠도다.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왜 더 나대는 것이냐!

라스가 테리안에게 다가가 딱따구리의 부리처럼 그의 머리를 두들겼다.

-마족과의 거래를 말하고 다닌다고 불리해진다는 법칙은 존재하지도 않고! 거래는 이놈이 이득을 보았단 말이다!

녀석은 미치겠다는 듯 가슴을 콩콩 두드렸다.

"그게 아니라, 제 말은…."

"말 안 해도 괜찮다니까요."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던 울브스 용병단장 베토가 씩 웃었다.

"우리는 그날 어떤 일이 있다고 해도 당신의 뒤에 서기로 결정했어요. 아무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전부 머리에 구멍이 뚫린 게 분명하도다. 사고력이라는 것이 마요네즈가 된 게 확실해!

라스의 입에서 옅은 거품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곧 다시 기절할 기세다.

"당신은 이곳의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라온이 베토를 보며 고개를 살짝 틀었다. 돈을 따라가는 용병단의 단장이 여기에 있다는 게 의문이었다.

"용병이라고 목숨 빚이 얼마나 무거운지 모르는 건 아니거든요. 그것도 빚이니까 더 확실하게 갚는 편이죠."

베토가 늑대가 새겨진 울브스 용병패를 쓸어내렸다.

"저만이 아니라, 용병들도 동의했습니다. 계속 쫓아다닐 수는 없겠지만. 당신을 위해 목숨을 걸 준비는 되어 있어요."

가벼움이 사라진 눈빛. 베토 역시 진심으로 자신의 뒤를 받쳐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용병만이 아니다. 검대와 기사단 그리고 병사들까지 모두 네 뒤에 서는 일에 동의했다. 그걸 위해 네 이름을 알렸지."

밀랜드가 양옆의 간부들을 차례로 둘러보며 미소 지었다.

'이래서였군.'

회의실에 오면서 보았던 사람들의 눈빛이 왜 달라졌는지 이제 알 수 있었다. 전부 자신을 따르겠다고 생각했기에 더 조심스럽게 대해준 것이었다.

"저는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지그하르트의 직계도 아니고…."

"그것도 알고 있다. 직계는 아니지만 북패왕의 피를 진하게 이었지."

밀랜드가 상관없다는 듯 손을 저었다. 그의 옆에 선 사람들의 눈빛 역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당신도 입니까?"

라온은 우측에 서 있던 설격대주 에드퀼을 바라보았다.

"물론입니다. 무엇을 하든, 어디에 계시든 따르겠습니다."

에드퀼이 한쪽 무릎을 꿇고, 주먹으로 바닥을 찍었다.

"전 라온 님 덕분에 목숨보다 중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따르게 해주십시오!"

그는 다른 사람처럼 뒤를 받치거나 돕겠다가 아니라, 아예 따르겠다고 말했다.

"사실 이 녀석이 먼저다."

밀랜드가 앞으로 나와 에드퀼의 어깨를 잡았다.

"가장 먼저 널 따르겠다고 하면서 하분 성에서 추방해 달라고 하더군."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썹을 내렸다.

"음…."

라온이 다시 에드퀼의 눈을 보았다. 밀랜드나 다른 간부보다 더 진중한 빛이 깃들어 있다. 이 자는 진짜였다.

-저 재수 없던 놈이 먼저 따르겠다고 했다고? 하아, 이제 모르겠도다. 모르겠어.

라스는 다 포기했다고 말하며 낄낄거렸다. 정신줄을 놓은 것 같았다.

"네가 마족과 계약했다는 이야기도 통제했어. 어디에도 퍼져나가지 않을 테니 안심해."

라딘이 믿으라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정찰병들을 움직여 소문을 막은 것 같았다.

"하아…."

라온이 호흡을 고르며 허리를 폈다. 회의실에 있는 모두의 생각과 감정이 가슴에 와닿아 심장이 몽글몽글해진 기분이었다.

"감사합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라온은 믿음의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가 지그하르트의 가주가 되길 원하든, 혹은 평범한 검사의 삶을 살던 우리는 항상 네 뒤에 서겠다."

밀랜드가 드물게도 큼지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사령관님께 첫 번째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 나에게?"

"예전부터 꼭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말해봐라."

그는 무엇이든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4개월 뒤. 저와 대련을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마지막 기연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그런데 4개월이면 되겠나?"

"예. 그 정도라면…."

라온의 눈동자에 붉은 투지가 비쳤다.

"꼴사납게 지진 않을 겁니다."

* * *

죽 한 그릇으로는 배가 차지 않았기에 라온과 도리안은 회의장을 나와서 서리의 가지로 향했다.

"어? 라온 님!"

문을 열고 들어가자, 테이블을 닦고 있던 유아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괜찮으신 거예요?"

"그래."

오늘 수없이 들은 질문이지만 유아에게 들으니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정말 다행이네요."

유아가 토끼 귀 같은 양갈래 머리를 찰랑이며 코를 훌쩍였다.

"유아가 계속 찾아와서 음식이랑 간식을 주고 갔거든요. 아까 드신 죽도 유아가 만든 거예요."

도리안이 대견하다는 듯 유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역시 그랬나."

예상대로 그 맛 좋은 죽은 유아의 솜씨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간식은 없었잖아."

"커흠, 그건 제가 배가 고파서…."

도리안이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여튼."

라온은 피식 웃으며 테이블에 앉았다.

"지금 주문돼?"

"물론이죠. 할아버지도 일어나셨거든요. 할아버지!"

유아가 주방을 향해 소리를 지르자, 얼굴빛이 많이 좋아진 점장이 황급하게 뛰어나왔다.

"오셨군요!"

그는 머리에 쓰고 있던 두건을 벗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지난번엔 제정신이 아니라,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요. 할아버지랑 절 구해주셔서 고마워요."

유아도 점장을 따라 직각으로 몸을 굽혔다.

"이러실 필요 없어요."

라온은 고개를 저으며 점장과 유아를 일으켰다. 이런 대우를 받으려고 두 사람을 구한 게 아니었기에 민망하기만 할 뿐이었다.

"라온 님의 응급조치가 빨라서 살 수 있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정말 어떻게 이 은혜를 갚아야 할지…."

"건강하신 걸로 족합니다."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점창은 본인의 이마를 툭 치고서 메뉴판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뭐든 시키십시오."

"할아버지가 라온 님은 평생 무료라고 하셨어요!"

"어? 나는?"

도리안이 손가락으로 본인을 가리켰다.

"도리안 님은 돈 내셔야죠!"

유아가 허리에 손을 척 올리고 턱을 들었다.

"와, 벌써 사람 차별하는 거야? 내가 팔아준 게 얼만데!"

"헤헤헤!"

도리안과 유아 그리고 점장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다 좋은데, 일단 주문부터 하자. 본왕은 일단 애플 미트파이이니라.

라스는 팔찌 위로 올라오며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음, 그럼…."

라온은 라스가 원하는 대로 애플 미트파이와 스튜, 오리 구이, 치즈피자를 주문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최선을 다해서 만들어 오겠습니다!"

15분 뒤 그 어느 때보다 정성이 담긴 음식들이 테이블 위로 쫙 깔렸다. 향도 좋았지만, 양도 평소보다 훨씬 많았다.

-오늘은 특히 때깔이 죽이는구나. 빨리 무기를 들어라.

라스가 말하는 무기는 스푼과 포크, 나이프다. 먹을 때 가장 진지해지는 마왕이라니, 참으로 같잖았다.

-무얼 기다리고 있는 것이냐! 음식이 식느니라!

라온은 라스의 침샘이 폭발하는 소리를 들으며 스푼을 들었다.

'귀찮은 마왕이야.'

* * *

오랜만에 제대로 된 밥을 먹어서인지 평소보다 음식 맛이 좋았다. 라스만이 아니라, 라온도 만족하여 미소가 지어질 정도였다.

"잘 먹었습니다."

"라온 님."

라온이 계산을 하고 돌아가려 할 때 점장이 손을 들어 올렸다.

"전에 유아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음…."

언제 말해야 하나 타이밍을 재고 있었는데, 차라리 잘 되었다.

"유아를 납치하러 온 놈들이 누구인지는 아시죠?"

"에덴이지 않습니까. 그 이유까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에덴이 유아를 노린 이유는 간단합니다."

라온은 점장의 옆에서 손을 떠는 유아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 아이에게 세이렌의 가면을 씌우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세이렌의 가면?"

"세이렌은 반인반어의 인어형 몬스터로 노래와 악기를 연주해서 인간들을 홀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노래와 악기? 설마!"

그 의미를 알아차린 듯 점장이 눈을 부릅떴다.

"검만 휘두르는 저도 알 정도로 유아에겐 음악의 재능이 있습니다. 에덴은 그 재능을 노리고 유아를 세이렌으로 만들려고 했던 거죠."

"아…."

말할수록 점장의 표정이 굳어져 갔다.

"유아가 하분 성에 있는 한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계속 이 아이를 노릴 겁니다. 놈들은 제정신이 아니니까요."

"그, 그렇군요."

점장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유아를 바라보았다. 지금 보니 그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것 같다.

"에덴의 방식이 점점 거칠어질 테니, 이번처럼 유아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휘말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문으로 돌아갈 때 함께 가자는 말씀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저희를 지그하르트에 말입니까?"

"예. 두 사람을 떼어놓을 수는 없으니까요."

라온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마의 대척점에 있는 지그하르트이니, 사정을 설명한다면 분명 받아들여 줄 것이다.

"음, 라온 님."

점장이 카운터를 지그시 누르며 이쪽을 보았다.

"이런 질문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왜 저희에게 잘해주시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건…."

점장의 질문에 라온의 눈빛이 과거로 돌아갔다.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에 납치당해 원하지 않던 사냥개이자, 암살자로 평생을 살아갔다.

침투, 살인, 강탈, 절도, 정보 조작 등 하고 싶었던 일은 하나도 없이 머리에서 울리는 데루스의 지시만을 완수했다.

만약 유아가 세이렌의 가면을 쓴다면 그녀는 전생의 자신보다 더 지독한 일을 겪게 될 것이다. 평생 손에서 피가 마를 날이 없을 게 분명하다.

그 지옥을 직접 겪었기 때문에 요리와 노래를 좋아하는 평범한 어린아이의 손에 다른 사람의 피를 묻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뿐이었다.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라온은 그 마음을 숨기고 조금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군요."

점장은 그 대답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는지 선한 미소를 지으며 유아를 바라보았다.

"저기 라온 님!"

유아가 질문이 있다는 듯 손을 위로 치켜올렸다.

"응?"

"저도 라온 님처럼 강해질 수 있나요? 할아버지를 지키고, 나쁜 놈들을 혼내 줄 수 있을까요?"

"아…."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라온이 눈을 부릅떴다.

'잘못 생각했어….'

그저 유아를 데리고 가서 보호할 생각만 했지만, 이 아이는 스스로 강해지길 원했다.

하나뿐인 가족이 괴물에게 먹혔던 무서운 상황을 잊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것 같았다.

-저 아이의 재능은 진짜이니라. 검술과는 다른 방식으로라도 풀어주면 강해질 수 있겠지.

라스의 말대로다. 재능이 있고, 스스로 싸우기를 원한다면 그 길을 제시해주는 것도 옳은 방법이었다. 리메르가 보여주었던 것처럼.

"물론이지! 나도 지그하르트 들어가기 전에는 겁쟁이였어!"

자신이 말을 하기 전에 도리안이 치고 나왔다.

"아직도 겁쟁이지만."

라온이 피식 웃으며 도리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거, 겁쟁이라뇨! 수전증이 조금 있을 뿐이에요!"

-겁쟁이 중에 아주 상겁쟁이지.

라스가 쯧쯧 혀를 찼다.

"네 힘으로 너와 할아버지를 지키고 싶은 거지?"

라온은 허리를 숙여 유아와 눈을 마주쳤다.

"네!"

"네가 원한다면 할 수 있을 거야."

"그럼 갈게요!"

유아가 상큼하게 웃으며 작은 주먹을 쥐었다.

"본인이 간다고 하니, 이젠 말릴 수 없겠군요. 라온 님이라면 무슨 말씀을 하셔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점장이 절을 하듯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려 했다. 라온이 다급하게 막아섰다.

"그런데 유아를 보내겠다는 건…."

"전 가지 않습니다."

"네?"

"할아버지!"

유아가 냉큼 다가와 점장의 소매를 붙잡았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같이 가야지!"

"난 평생 여기에서 살았다. 가긴 어딜 간단 말이냐."

"나도 여기서 계속 살았잖아!"

"나까지 떠난다면 이 주점은 그대로 끝난다. 난 어차피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어. 네가 행복하게 살아가기만 하면 충분하다."

점장은 이미 마음을 굳혔는지 옅게 웃었다.

"그럼 나도 안 가!"

"안 가긴 무얼 안 간단 말이냐. 매일 춥다고, 좁다고 불평해댔으면서."

"아무리 좋아도 할아버지가 없으면 안 가!"

조손은 서로의 옷을 부여잡고 점점 목소리를 높였다.

"가자."

라온는 싸우는 두 사람을 두고, 주점을 나왔다.

"저대로 놔둬도 돼요?"

"그래."

아직 큰 소리가 오가는 서리의 가지를 돌아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건 저 둘이 결정할 문제니까."

* * *

라온은 저녁이 조금 지난 시간에 숙소로 들어와 옷을 갈아입었다. 밤늦게까지 수련하는 평소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네놈이 드디어 미쳤나 보구나.

라스가 팔찌 위로 머리를 빼꼼 내밀고 피식 웃었다.

'그게 아니야.'

라온은 침대에 누우며 고개를 저었다.

-뭐?

'잠만 자도 능력치가 오르는 <나태>의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알아봐야 하니까.'

이번에 얻은 나태의 효과는 잠을 자면서도 강해지는 능력이다.

'어느 정도의 능력치가 오르는지 알아야 4개월 후에 사령관님이랑 싸울 계획을 짤 수 있거든.'

마스터와 대련을 할 수 있는 천고의 기회를 멍청하게 보낼 수는 없다.

최고의 상태에 최상의 컨디션으로 부딪쳐야 하니, 얻은 능력을 확실하게 파악해야 했다.

'어디 보자고. 자면서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지.'

라온은 들뜬 미소를 짓고서 이불을 덮었다.

148화

라온은 새벽이 되자마자 눈을 떴다. 항상 일어나던 시간이다 보니, 더 자고 말 것도 없이 저절로 정신이 들었다.

다만 평소와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눈앞의 메시지.

[<나태>의 효과로 모든 능력치가 미량 상승했습니다.]

능력치가 올랐다는 기분 좋은 메시지가 떠 있었다.

'확실히 느껴져.'

감각이 높아졌기 때문일까. 적은 양이지만 육체 능력이 올라간 게 느껴졌다.

전력을 다해서 수련할 때와 비교하여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은 양의 육체 능력이 올라갔다.

당연히 1포인트가 아니라 소수점 아래지만, 자면서 이 정도 능력치가 올랐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괜히 마왕이 된 게 아니었네.'

라스에게 슬로스가 마왕이 된 이유를 들었을 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했는데, 바로 이 능력 때문이었다. 잠만 자도 강해지는 특성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거기다….'

라온이 몸을 일으킨 후 어깨와 발목을 가볍게 돌렸다.

'몸도 가벼워.'

조금의 피로도 없이 몸이 깃털처럼 가뿐했다. 내용에는 없었지만, 나태에는 잠을 푹 잘 수 있는 능력도 있는 것 같다.

뿌득.

라스는 그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팔찌에서 튀어나오자마자 이를 갈았다.

-그 모자란 잠탱이 놈! 힘을 너무 많이 넘겨줬잖아!

'이게?'

-그럼 아니겠느냐. 네가 수련하는 것에 비하면 적다고 해도 느낌이 올 정도로 능력치가 올랐지 않느냐!

라스는 슬로스가 미친 게 분명하다며 연달아 욕을 날렸다.

-가뜩이나 괴물처럼 성장하는 놈에게 이런 미친 능력을 주다니, 나중에 마계에서 보면 정말 평생 잘 수 없게 만들어 주겠노라.

'음….'

라온이 입맛을 다셨다.

'생각해보니, 둘 다 조금 불쌍하네.'

라스는 전부 보고 있으면서 농락을 당했고, 슬로스는 아무것도 모른 채 속아 넘어갔다. 두 마왕에게 약간이지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부, 불쌍? 네놈이 해놓고 어떻게 불쌍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냐! 이 악귀 같은 놈아!

'악귀라….'

마족의 왕에게 몇 번이나 악귀 소리를 듣는 인간은 처음이라는 생각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도 이 능력이 완벽하진 않아.'

-설마 단점이 있는 것이냐?

단점이 있다는 말에 라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래. 조금 더 자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

나태의 효과 때문일까. 평소와 달리 침대에서 일어나기 싫다는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음? 넌 바로 일어났지 않느냐.

'나야 정신력이 강하잖아. 의미 없지.'

-그럼 너에겐 아무 소용 없다는 소리잖아! 또 본왕을 놀리다니!

라스는 속았다고 생각했는지 입술을 깨물며 냉기의 바람을 일으켰다.

'진정 좀 해. 일어나자마자 능력치 주려고?'

-우욱!

라스는 이상한 신음을 흘리고서 우뚝 멈췄다. 화가 나도 능력치를 넘겨주기는 싫은 모양이다.

"아."

라온이 피식 웃다가 손목에 걸린 검은 꽃팔찌에 시선을 주었다.

'이 팔찌에 슬로스의 영혼이 들어 있다고 했지?'

-보, 본왕이 언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냐!

'너 어제 내가 슬로스의 영혼을 가져갔다고 말했잖아. 그게 이거 아니야?'

-어…?

라스가 어벙하게 입을 벌렸다. 이 녀석을 오랫동안 보았지만 이렇게 멍청한 표정은 처음이다.

-그, 그랬던가? 아닐 텐데?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표정을 감추려들었지만, 소용없다. 거짓말을 못하니 어설프게 말을 돌리는 것도 한 몫했다.

'맞네. 뭔지는 몰라도 슬로스의 혼이 깃든 물건이야.'

-크으으, 눈치는 더럽게 빨라가지고!

라스가 주먹을 말아쥐며 고개를 돌렸다. 살벌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았다.

-그 망할 놈이 네 야비함이 마음에 들었는지 혼이 깃든 물건을 주고 갔다! 머저리 같은 녀석!

'역시.'

라온은 두 개의 꽃팔찌를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을 잘 들어야 한다니까.'

라스는 단순하게 능력치만 주는 게 아니라, 입으로도 여러 가지 힌트와 정보를 뿌린다. 죽어서도 쉼터가 되어주는 나무밑동이 생각났다.

'그래서 이건 무슨 능력인데?'

-모른다.

'뭐?'

-그건 정말 모른다. 슬로스가 아니라, 녀석의 혼 일부가 깃들었기 때문에 너의 행동에 따라 훗날 그 능력이 정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흥! 그 이상은 직접 알아봐라!

라스는 콧방귀를 끼고 몸을 돌렸다. 표정을 보니 한동안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 충분해.'

라온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슬로스의 혼이 깃들었다면 범상치 않을 물건이 될 테니, 차분하게 기다리면 그만이다.

-하나만 충고하지.

라스가 다시 뒤를 돌았다. 푸른 눈에서 살벌한 기세가 풀풀 풍겨 나왔다.

-네놈이 만약 오만이나, 질투, 탐욕과 마주쳤다면 절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색욕을 만났다면 뼈조차 거둘 수 없었을 것이고, 탐식과 같은 자리에 있었다면 그대로 먹혔….

'탐식은 너 아니야?'

-좀 들어!

녀석은 진지한 모습을 얼마 유지하지 못하고 다시 짜증이 차오른 눈빛으로 돌아갔다.

-어쨌든 멍청한 나태를 만난 걸 네 평생의 행운으로 기억해라.

내 평생의 행운은 라스라는 호구를 만난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난리를 부릴 거 같아 간신히 참았다.

-다시는 이번 같은 기회가 없을 것이다.

'흐음….'

라온은 허공에 둥둥 뜬 라스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어제 힘을 모두 써서 작아진 라스를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정말 이상하게도 마왕들의 이름에서 호구의 기운이 느껴졌다.

'오히려.'

빨리 만나보고 싶은데?

* * *

라온은 짧은 기간 동안 급격하게 올라간 능력치에 몸을 적응시키기 위해 연무장으로 나갔다.

가볍게 몸을 푼 뒤 수직으로 검을 내리쳤다. 섬뜩한 파공음과 함께 떨어진 칼날이 바닥에 선명한 검흔을 새겨냈다.

오러를 운용하지 않았음에도 저절로 피어나는 검풍. 근력과 민첩성 그리고 세밀한 감각이 이뤄낸 신기였다.

터엉!

진각을 밟으며 검을 중단에 세웠다. 지평선을 따라 뻗어나가는 연성검술의 부드러운 흐름. 물결치는 검격이 차갑게 가라앉은 새벽의 어둠을 갈랐다.

라온이 발목을 살짝 돌린 순간 검세가 급격하게 변했다. 잔잔하면서 끝없이 흐르는 강이 대해의 파도처럼 굽이쳤다.

광아검. 굶주린 맹수처럼 사나운 검격이 허공을 짓이기며 붉은 상흔을 새겨낸다.

막강한 힘의 파동에 연무장 바닥은 거미줄처럼 갈라졌고, 서늘했던 공기는 여름처럼 달아올랐다.

"후우."

라온이 차오른 숨을 내쉬며 검을 내렸다.

"생각 이상인데?"

상승한 능력치의 힘은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아무래도 강해진 육체 능력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서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도 성장할 길이 보인다는 건 좋네."

전생에서는 강해진다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홀로 어둠을 걷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도 그만큼 성장할 길이 보이기에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그걸 써볼까."

라온이 다시 검을 들어 올리고, 만화공을 전력으로 운용했다. 그의 어깨 위로 피어난 열기가 만년설이 차오른 대지를 용암처럼 들끓게 만들었다.

고오오오오!

설원을 닮은 칼날 위로 뱀의 혓바닥처럼 새빨간 불꽃이 타오른다. 검날 전체를 덮고도 남은 불꽃이 허공에서 춤추며 용과 같은 형상을 그려냈다.

용의 뿔이 두 개가 되었을 때 라온이 땅을 박차고 검을 내질렀다.

쿠오오오!

그날 연무장의 중심에서 용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 * *

지그하르트 가주전.

"가주님!"

리메르가 거대한 문을 부서질 정도로 거칠게 열고서 알현실에 들어왔다.

"저놈. 어디 가둬둘 수 없나?"

글렌이 경쾌하게 걸어오는 리메르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가둬놓으면 땅굴을 파서 나올 분입니다."

로엔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가주님! 이거 보셨어요?"

리메르는 시원해 보이는 미소를 그리며 손에 있는 편지를 흔들었다.

"그건…."

편지의 밀랍 부분을 확인한 그렌이 눈매를 좁혔다.

"하분 성에서 온 보고서가 왜 네 손에 있지?"

"보고하러 가져오는 걸 슬쩍했죠."

자랑이라도 되는 것처럼 리메르가 껄껄 웃었다.

"미친놈이로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라스가 항상 라온에게 하는 말을 글렌이 리메르에게 하고 있었다.

"로엔. 저놈을 당장 동굴에 처박아라. 바닥과 천장에 철판을 깔고, 절대 꺼내주지 말도록."

"허억! 왜, 왜 이러십니까."

리메르가 고개를 빠르게 저으며 편지를 흔들었다.

"가주님께 라온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최대한 빨리 달려온 건데 그렇게 나오시면 섭섭합니다!"

"내가 아니라, 네가 알고 싶어서겠지."

"뭐, 그것도 있긴 하죠. 보고를 받을 때마다 놀라게 되니, 기다려질 수밖에 없잖아요."

다른 수련생들도 각자 정해진 위치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지만, 라온의 실적을 따라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보고만 듣고 있어도 라온과 다른 수련생들의 격차가 더 크게 벌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럼 뜯어보겠습니다."

"잠깐."

글렌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리메르의 손에 잡혀 있던 편지가 부드럽게 떠올라 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펴, 편지를 뺏으려고 무형기까지 운용하십니까?"

"...."

리메르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지만, 글렌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봉투를 뜯었다.

"손주 활약상을 먼저 보려고, 절대의 무학을 사용하다니…."

방금 사용한 건 단순한 오러의 발현이 아니라, 지고의 경지에 올라야 사용할 수 있는 무형기다. 그 절대의 무학을 고작 편지 뺐는데 사용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음…."

편지를 쭉쭉 읽어내려가는 글렌의 입꼬리가 바다에 뜬 낚싯바늘처럼 흔들렸다.

"무, 무슨 내용이길래 저러시는 거죠?"

"잘 모르겠습니다. 저렇게 좋아하시는 건 저도 오랜만에 봅니다."

글렌의 표정 변화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그가 굉장히 기뻐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음, 별일 아니로군."

글렌은 사소한 일이라고 중얼거리며 편지를 던졌다. 날아간 편지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리메르의 발 앞에 떨어졌다. 흡사 빨리 보라고 말하는 것처럼.

"으음…."

"일단 보죠."

리메르와 로엔은 고개를 끄덕이고 동시에 편지를 보았다.

그 작은 종이에는 라온이 다시 한번 하분 성을 구해내서 이곳의 영웅이 되었고, 하분 성의 모두는 라온의 힘이 되어주기로 결정했다고 적혀 있었다.

"허억!

"와아…."

두 사람은 편지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탄성을 터트렸다.

"이 녀석 진짜 물건인데요?"

리메르가 입을 떡 벌린 채 글렌의 앞에 섰다.

"모두를 구한 거야 그렇다 치겠는데, 그 깐깐한 밀랜드 영감까지 라온의 뒤에 서겠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에요! 진짜 업적이라구요!"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다."

호들갑을 떠는 리메르와 달리 글렌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움찔거리는 입꼬리를 숨기지는 못했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니요!"

리메르가 표정을 굳히며 말을 이었다.

"하분 성은 무인들의 대지. 의리는 단단하고, 신념은 굳건하며, 무력은 출중하죠.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얻은 건 앞으로 라온에게 큰 힘이 되어줄 겁니다."

"저 역시 동의합니다. 하분 성은 드높은 명예를 가진 곳. 라온 님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도우러 와줄 사람들입니다."

"그거야 지나 봐야 아는 일이지."

퉁명스러운 말과 달리 글렌의 입매는 끊임없이 출렁거렸다. 생각지도 못한 보고에 웃음을 참을 수 없는 것 같았다.

"에이, 그만 좀 참고 시원하게 웃으세요."

리메르가 자신의 입꼬리를 쭉 늘렸다.

"손자 소식 가장 먼저 알고 싶어서 무형기를 쓰고,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려고 억지로 근육에 힘을 왜 주는 겁니까? 진심의 1할만 보여줘도 라온이 '할아부지!'라고 하면서 안길 텐데, 정말이지 깐깐하기로는 지그하르트에서 역대급…으헉!"

말을 하던 리메르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던졌다.

콰아앙!

그가 서 있던 바닥이 시꺼멓게 그을리며 주저앉았다.

"뇌, 뇌결? 진짜 죽이려고 이래요?"

리메르가 바닥을 보며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

글렌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리메르의 정곡이 조금 창피했던지 그의 볼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자, 잠시만요. 제 제자이자, 가주님의 손주가 큰일을 이룬 이런 경삿날에 누가 죽으면 재수가 없…."

"제물이 생기는 것도 나쁘지 않지."

"제, 제물? 나?"

글렌의 길쭉한 손가락에서 세상을 불태울 듯한 뇌광이 번쩍였다. 그 빛이 뻗어나가려 할 때 리메르가 이를 악물고 손을 모았다.

"이대로 뒈질 수는 없지! 검계현신!"

그 웅장한 목소리에 글렌이 잠시 멈칫한 순간 리메르가 땅을 박차고 알현실을 문을 열었다.

"이거 소문내면 안 되는 거 아시죠? 나중에 다시 올게요! 저는 이만…어?"

허세를 부리고 도망치려던 리메르가 눈을 부릅떴다. 땅에 발이 닿지 않는다. 어느새 글렌의 오러에 잡혀 몸이 떠오른 상태였다.

"지, 지그하르트 역사상 가장 훌륭하신 가주님. 한 번만 용서를…."

"로엔. 땅 좀 파놓아라."

리메르가 파리처럼 손을 싹싹 비볐지만, 글렌의 시선은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오늘이 저 까불이 놈의 제삿날이니까."

"으아아아악!"

지그하르트 알현실에서 샛노란 벼락이 내리꽂혔다.

* * *

라온은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천천히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정심함과 진중함이 어우러진 붉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완벽하군.'

4개월 동안 점차 강해지는 육체에 적응을 끝냈고, 새로 익힌 무학들의 성취도 끌어 올렸다. 목표했던 대로 4달 만에 최고의 몸 상태가 만들어졌다.

'맛깔나게 싸울 수 있겠어.'

밀랜드를 이길 수는 없겠지만 추하게 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라온이 마음을 정리하고 몸을 일으켰을 때 숙소 문이 열리고 도리안이 들어왔다.

"도련님. 시간이에요!"

그는 걱정과 기대가 어린 눈빛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사령관님은 벌써 나오셔서 기다리고 계세요."

"알겠어."

오늘이 바로 4개월 전에 약속했던 사령관 밀랜드와의 대련이 이뤄지는 날이다.

하분 성에서 얻을 수 있는 마지막 기연을 최고의 몸 상태에서 시작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가자."

라온은 벽에 걸어둔 검을 챙겨서 숙소를 나왔다.

"라온 님! 이기세요!"

"떠나기 전에 사령관님은 꺾고 가셔야죠!"

"믿고 있겠습니다!"

병사들의 응원과 환호에 고개를 끄덕여주고 연무장으로 들어갔다. 연무장 외곽은 기사와 검사, 병사들로 꽉꽉 차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준비는 끝났느냐."

연무장 중앙에 서 있던 밀랜드가 담백한 시선을 보냈다.

"기다려주신 덕분에 만전입니다."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다행이구나. 지루하지는 않겠어."

밀랜드가 입고 있던 두꺼운 코트를 던졌다. 무거운 진각을 밟으며 검병에 손을 얹었다.

"그럼 시간 끌 필요 없겠지. 오라."

춘풍처럼 부드러운 기세가 한순간에 폭풍이 된 듯 막강한 기파로 변한다.

수십 년간 전장에 서며 쌓아 올린 밀랜드의 오러가 전신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라온은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불의 고리를 공명시켰다. 영혼의 격을 끌어 올리며 만화공을 일으켰다.

쿠웅!

바닥이 무너질 정도의 힘으로 땅을 박차고 밀랜드의 공간으로 뛰어들었다. 시작은 광아검. 미친 야수의 송곳니가 벼락처럼 떨어졌다.

콰아아앙!

속도, 위력, 방향 모두 나무랄 것이 없는 검격이었지만, 밀랜드는 가볍게 검을 드는 것만으로 광아검의 이빨을 꺾어버렸다.

공격이 완벽하게 막혔지만 라온의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광아검은 적의 빈틈을 파고드는 감각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쩌정! 쩌저정!

라온과 밀랜드의 손에서 펼쳐지는 은빛 광채가 수없이 맞부딪쳤다.

막강한 충격파가 얼어붙은 땅을 깨부수고, 사나운 파동이 공간을 격하고 터져 나갔지만 밀랜드는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그야말로 철인의 위상이었다.

"힘과 속도는 좋지만 날카롭지 못하군. 그게 다인가?"

밀랜드의 음성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하늘 위에서 땅을 내려보는 시선이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라온이 눈동자에 적색 불꽃이 스친다. 검극에 어린 꽃봉오리가 별빛처럼 만개했다.

"지금부터가 시작입니다."

149화

라온이 진각을 밟았다. 발목에서부터 솟구친 기운을 허리와 손목으로 연결시켰다. 칼날에 깃든 불꽃이 나선으로 비틀어지며 밀랜드의 가슴을 노렸다.

"이제야 좀 재미있겠구나."

밀랜드가 이를 드러내며 손목을 휘돌렸다. 북방의 바람처럼 거친 파동이 대지를 갈랐다.

콰아아아앙!

막대한 힘을 담은 검격이 서로 격돌하며 산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힘 하나는 마스터급이로구나."

밀랜드의 기파가 강해진다. 수비하려고 검을 든 게 아니라 공격을 하다 막힌 것처럼 압박이 거세졌다.

"힘만이 아닐 겁니다."

라온은 점점 강해지는 밀랜드의 검격을 버텨내며 미소를 지었다. 강화된 근력과 민첩성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밀랜드의 압력을 버텨냈다.

캬앙!

목을 향해 쏟아지는 묵직한 검격을 흘려낸 뒤 앞으로 나아갔다.

밀랜드의 검술은 전검. 몬스터와 평생을 싸우며, 전장에서 쌓아 올린 검술이기 때문에 파천의 위력을 지녔지만, 동작이 크다. 그 틈을 노려야 했다.

"잔재주는 소용없다."

밀랜드는 만화공의 오러 자체를 갈라버리겠다는 듯 검날 위에 더 막대한 기운을 응집시켰다. 은빛 칼날 위로 짙은 검사(劍絲)가 일어섰다.

'저건….'

모여드는 기파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마스터의 전유물인 강기는 아니지만, 그에 못지않은 기운이 그 안에 압축되어 있었다. 저 검격을 맞는다면 강철조차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죽지 말거라."

밀랜드가 대지를 뭉개며 보법을 밟았다. 빠르지는 않지만, 마치 들소 떼가 몰려오는 것처럼 공간을 장악하며 다가와 피할 공간이 많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저런 오러에는 맞서는 게 아니다. 도망친 후 빈틈을 노리는 게 옳은 일이지만 라온은 물러서지 않았다.

'피하면 이곳에 선 보람이 없지.'

무거운 전검을 사용하는 밀랜드와 제대로 맞부딪칠 흔치 않은 기회다. 이런 기연을 놓쳐서는 안 된다.

쿠구구구구!

어마어마한 기운이 실린 검이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순간 라온이 네 개의 불의 고리를 공명시켰다. 느려지는 시야 속에서 밀랜드의 힘의 흐름을 읽어냈다.

"흐읍!"

살짝 드러난 밀랜드의 허리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광아검의 구결이 깃든 칼날이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어딜."

밀랜드는 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았다. 허리의 빈틈을 순식간에 지우고, 완벽한 자세로 압박을 가해왔다.

'역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순간 사고력과 순발력, 육체 능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한참 전에 마스터가 된 그가 이런 공격에 허를 찔릴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라온의 눈빛이 섬뜩하게 번쩍였다.

'미끼를 던졌지.'

검이 밀랜드의 막강한 기운과 마주치려는 순간 검날에 어린 오러를 비틀었다.

키이이잉!

쇳덩이가 찌그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밀랜드가 쏟아낸 검격의 궤도가 꺾여나간다. 광아검의 초식 중 하나인 윤결. 본래는 적의 몸에 회전하는 오러를 박는 검술이지만, 지금은 완벽한 방어 초식이 되어주었다.

라온은 밀랜드의 검이 튕겨 나간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을 내질렀다. 아직 회전력이 채 사그라들지 않은 칼날이 밀랜드의 가슴을 향해 쏘아졌다.

"제법이구나!"

밀랜드가 씩 웃으며 왼손에 오러를 집중시켰다. 푸른 오러가 원형으로 압축되어 칼날을 튕겨냈다.

이 찰나의 순간에 저런 임기응변이라니, 역시나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무인다웠다.

쿠구구구!

밀랜드의 손목이 반원을 그리자, 검이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다. 그대로 떨어지는 칼날에 전장의 무게가 실린다. 막대한 압력에 피부가 찢겨나갈 것 같았다.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

라온이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쏟아지는 칼날을 향해 나아갔다.

'물러나면 오히려 당해.'

전검은 도망치거나, 물러날수록 압박을 가해오는 검술이다. 힘으로 맞서지는 않더라도 결코 물러나서는 안 된다.

강대한 힘이 깃든 칼날이 진동하여 집중 상태에 들어갔는데도 그 흐름을 읽기가 쉽지 않았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바로 예측이다. 지금까지 뒤에서 봐왔던 밀랜드의 움직임을 머리에 그리며 검을 사선으로 휘둘렀다.

콰아아앙!

밀랜드의 검격이 최고의 화력을 발휘하기 직전에 막아섰다. 경험이 주효했던 것인지 방향이 얼추 맞아떨어졌다.

뼈를 으깨는 듯한 위력을 비껴내며 왼쪽의 팔꿈치로 밀랜드의 명치를 후려쳤다.

"기습에도 능하군. 너야말로 전장이 어울리는구나."

그는 알고 있었다는 듯 왼쪽 손등으로 팔꿈치 타격을 차단했다. 역시나 쉽지 않은 상대. 그렇기에 웃음이 나왔다.

"즐겁나?"

"흥이 오르긴 합니다."

라온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에 따라 검날 위에서 춤추던 불길이 꽃송이처럼 휘날렸다.

하나하나가 검기급 위력. 밀랜드도 쉽사리 상대하지 못하고, 오러를 운용해 중간에서 폭발시켰다.

퍼어어엉!

연무장 바닥이 들썩이며 불꽃과 오러가 뒤섞인 모래폭풍이 일어났다. 라온과 밀랜드는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안으로 파고들어 검격을 쏟아부었다.

쿠구구구구!

솟구치는 회색 먼지 속에서 적광과 청광이 끝없이 맞부딪쳤다.

* * *

테리안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미쳤군."

라온이 경지에 비해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와 저 정도로 맞설 수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무력 수위 자체는 나와 비슷할 텐데.'

익스퍼트 상급에서 최상급. 그 위치에 있는 게 분명한데, 라온은 자신과는 차원이 다른 강함을 선보였다. 솔직히 말해서 육체 능력은 아버지보다 라온이 앞서는 것 같았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지그하르트의 피를 이었다고 해도 상식을 벗어난 강함이다. 부럽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실력도 빨리 늘어나는데, 그 질도 다르긴 하네요."

격이 다른 전투에 베토가 입을 떡 벌렸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나보다 아래였을 텐데, 어떻게 저렇게 강해질 수 있지? 어이가 없네."

그는 기이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수많은 강자와 천재들을 보고 다닌 용병단장에게도 라온은 신비 그 자체인 듯싶었다.

"물러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젠가부터 라온의 등만을 바라보던 에드퀼이다.

"물러서지 않는다?"

"저분은 몬스터 앞에서도, 강자 앞에서도, 자연의 흐름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죽을 위기에서도 앞으로 발을 뻗습니다."

그는 밀랜드와 접전을 벌이는 라온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전율이 인다는 듯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검을 휘두르는 강건함이 저분을 더 강하게 만들고 있는 겁니다."

"확실히…."

테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 라온은 어떤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제 17살이 되어가는 어린 녀석이 저런 당당함을 가지는 건 저 무력 이상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저 아이의 뒤에 서기로 정한 건 최고의 선택일지도 모르겠군."

잔잔하지만, 힘이 있는 그의 말에 주변에 있던 간부들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쩌어어어엉!

하늘이 깨지는 듯한 굉음이 울리며 모래폭풍이 터져나갔다.

라온은 뒤로 거칠게 밀려났지만, 밀랜드는 거의 물러서지 않은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쯧.

라온이 짧게 혀를 찼다. 육체 능력도, 오러도 크게 밀리지 않지만, 밀랜드의 지속력과 굳건함은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게냐."

밀랜드가 검을 휘돌리며 빙긋 웃었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정말 지치질 않으시는군요."

그는 전장에서 검강과 검기를 연속으로 사용하고서도 지친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 오러의 양보다도, 경지의 차이인 것 같았다.

"이것의 차이다."

밀랜드가 본인의 복부보다 살짝 윗부분을 가리켰다.

"중단전. 마스터에 경지에 오르면 중단이 개방되고, 적은 양의 오러로 더 크고 단단한 기운을 운용할 수 있지."

"중단전…."

"넌 익스퍼트 이상의 무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아직 마스터에 닿지는 못했어. 소모전이라면 날 이길 수 없다."

중단전의 개념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 그 효용을 목격한 건 처음이다.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왜 웃는 거지?"

"나아갈 길이 보였으니까요."

중단전의 능력을 보자, 마스터에 닿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다. 능력치가 있는 자신이라면 저 중단의 능력을 더 폭발적으로 이용할 자신이 있었다.

"재밌군."

밀랜드가 담백한 눈빛을 발했다. 다만 그의 검에서는 그 눈동자와는 전혀 다른 사나운 기세가 어렸다.

"네 전력을 보여라."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세웠다. 불의 고리를 깨질 듯이 공명시키며 글래시아를 퍼뜨렸다.

쿠구구구!

단전에 남은 만화공의 기운을 모조리 끌어 올렸다.

핏빛 불꽃이 검과 육체를 휘감으며 신비로운 형태를 그린다.

검으로 만들어낸 어금니부터 등으로 이어지는 뿔까지. 마치 용의 머리와도 같은 모습. 어마어마한 오러가 일으키는 파동에 연무장이 뒤틀렸다.

"그 검술의 이름은 뭐지?"

밀랜드가 빛이 어린 검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염룡결입니다."

라온이 어깨 위로 검을 세우고, 왼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용이 입을 다물고, 먹잇감을 노리는 듯한 모양새였다.

"재밌군. 이 검의 이름은 설룡참. 천 년 전 스터린 산 정상에 살았다는 빙룡을 베었다는 검이다."

밀랜드의 검에 섬뜩할 정도의 예기가 어린다. 시야가 일그러져 보일 정도의 기운이 검날 위로 응집되었다.

"오라. 네 용이 이길지. 내 검이 이길지 그 끝을 보자."

그가 손짓하자마자, 라온이 다리를 뒤로 뺐다. 극한으로 압축시킨 오러를 폭발시키며 땅을 박찼다.

고오오오!

공간을 불태우는 오러의 칼날이 수직으로 떨어져 내린다. 견디지 못하면 그대로 몸을 반으로 갈라버릴 기세다.

라온의 눈동자에 붉은 섬광이 일었다. 검극에 끌어모은 오러를 한순간에 터트렸다. 적룡이 화염의 숨결을 뿜어내는 듯 불꽃과 함께 검이 나아갔다.

쩌저저저적!

푸른빛과 붉은빛이 명멸하고, 오러의 폭풍이 하늘까지 치솟았다. 쇳덩이가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폭풍이 가라앉고 연무장의 전경이 드러났다.

마법 폭격을 맞은 듯 폐허가 된 바닥 위로 라온과 밀랜드가 서 있었다.

밀랜드의 검에는 눈부실 정도로 완벽하게 유형화된 오러가 어려 있었지만, 라온의 검은 반으로 부러져 칼날이 땅에 박혀 있었다.

"제가 졌습니다."

라온은 부러진 검날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가르침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였다.

"우와아아아아아!"

"사령관님이 이겼다!"

"당연한 일이잖아. 뭘 그렇게 좋아해!"

"사령관님!"

"라온 님! 잘하셨어요!"

"거의 맞먹었잖아요!"

"라온! 라온! 라온!"

병사들은 승자를 향해 환호를 보내고 패자를 위로했다.

다만 승자인 밀랜드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고, 패자인 라온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흡사 승패가 뒤바뀐 듯한 모습이었다.

"나 참."

밀랜드는 검에 어린 섬광 같은 오러를 흩뜨려 버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강기까지 사용하게 만들 줄은 몰랐다."

마스터에 오르는 순간 초인의 육체와 판단력, 오러를 가지게 된다.

강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충분히 가르침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강기를 쓰지 않았다면 마지막 그 검술에 먹혔을 것이다.

"대체 무얼 노리기에 그렇게 빨리 강해지는 것이냐."

"해야 할 일이 좀 많아서요."

라온은 부러진 검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 온 덕분에 불가능할 정도로 빠른 성장을 이뤄냈다. 그 성장의 밑바탕이 된 건 전부 그놈 덕분이다.

데루스 로베르트.

'난 아직 잊지 않았다.'

네놈의 목을 벨 때까지 난 멈추지 않아.

다른 이들이 볼 수 없는 붉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분노의 열기가 피어났다.

* * *

지그하르트 가주전과는 다른 결의 화려함을 지닌 로베르트 가주전.

데루스 로베르트는 웅장하다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높은 천장의 집무실에 앉아 수석 집사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그 외에 몇 가지 특이사항이 있지만, 전체 보고는 이것으로 끝입니다."

"특이사항?"

데루스가 부드러운 눈매로 고개를 살짝 틀었다.

"딱히 중요한 내용은 아닙니다. 지금 북방 이곳저곳에서 어린 검사들이 활약하는 중인데, 지그하르트 검사들이 수련을 위해 나왔다고 판단됩니다."

"실전에 노출 시켜 검사들의 실력을 끌어올리려나 보군."

"효과는 확실합니다. 하분 성을 구해냈다는 어린 검귀 라온부터…."

"라온?"

라온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데루스의 눈빛이 급변했다. 봄바람처럼 선선했던 분위기가 빙굴에 들어온 것처럼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 그 라온이 아닙니다. 금발적안. 글렌 지그하르트의 피를 이은 게 확실시되는 어린 녀석입니다."

"아, 그렇겠지."

데루스가 피식 웃으며 손등을 보았다.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검흔에서 핏방울 하나가 뚝 떨어졌다.

"지워지지 않는 상처에 좀 짜증이 나서."

그는 상처에서 흘러나온 핏물을 닦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분 성이라면 에덴의 습격을 막았다는 어린 검사가 그 라온이라는 녀석이겠군."

기분이 나빠진 듯 데루스의 음성에 짙은 짜증이 묻어났다.

"스쳐 지나가듯 말씀드렸는데 기억하고 계셨군요."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가 맞습니다. 다만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니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소문은 과장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축소되기도 하지."

"예?"

"계획대로 된다면 결국 지그하르트와도 부딪치게 될 거다. 그 아이만이 아니라, 지그하르트 전체의 정보를 갱신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데루스가 깔끔한 턱을 쓸어내렸다. 라온의 목을 벨 때처럼 일말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빛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림자들을 북쪽으로 보내라. 지그하르트의 모든 정보를 가져오도록."

* * *

라온이 침대 아래에 세워둔 배낭을 어깨에 걸쳤다.

숙소를 나가려다 말고 뒤를 돌아서 방을 쭉 둘러보았다. 고작 1년하고도 1개월을 산 작은 방이지만 몇 년 동안 살았던 것처럼 떠나기 아쉬웠다.

-촌스럽게 추억에 젖지 말고 빨리 나가라.

'마왕은 분위기 파악도 못 하는군.'

작지만, 안락했던 숙소를 눈에 담고, 밖으로 나갔다.

"그거 제가 가져갈게요."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도리안이 손을 흔들었다. 녀석은 자기가 들겠다며 배낭을 배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저도 준비됐어요."

도리안 뒤에서 흰색 털옷을 입은 유아가 나왔다. 모자를 뒤집어쓴 모습이 꼭 흰 토끼 같았다.

"짐은 다 챙겼어?"

"네. 도리안 님이 가져가셨어요."

유아는 도리안을 가리키며 헤헤 웃었다.

'밝아졌군.'

결국 유아는 떠나고, 점장은 남기로 결정됐다. 미리 마음을 다졌기 때문인지 슬픈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가자."

라온은 유아의 어깨를 두드리고, 숙소를 나섰다. 검사와 기사 그리고 병사들이 양옆에 도열하여 성문까지 길이 생겨 있었다.

"조심히 가세요!"

"우리 잊지 마시구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말씀하세요!"

걸음을 뗄 때마다 등을 대고 싸운 전우들이 작별 인사를 건넸다. 라온은 그 말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간직하며 성문으로 향했다.

처음 보았을 때 굳건하게 닫혀 있던 성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앞에 밀랜드와 테리안을 비롯한 간부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테리안과 카불은 웃었고, 라딘을 비롯한 정찰대장들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으며, 테리안과 에드퀼은 차분한 눈빛을 발했다.

"가보겠습니다."

"조심히 가거라."

라온과 밀랜드의 대화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몇 달 전 나누었던 검과 검의 대화가 아직 마음에 남았으니까.

간부들에게 차례로 인사를 건네고, 마지막 에드퀼의 차례가 되었다.

"제 뒤에 서는 정도가 아니라, 따르고 싶다는 마음은 아직 그대로입니까?"

"물론입니다."

에드퀼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강해지십시오."

라온이 흔들리지 않는 에드퀼의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저는 할 일이 많습니다. 저와 함께 걷고 싶으시다면 이곳에서 누구보다 강해지십시오. 검과 정신 모두."

"알겠습니다."

에드퀼이 이전과는 격이 다른 기파를 뿜어냈다. 질문도, 의문도 없이 대답하는 모습이 믿음직스러웠다.

"항상 기억하거라. 우리가. 하분 성이 네 뒤에 있다는 걸."

"예."

담백하지만 힘이 어려 있는 밀랜드의 말을 들으며 모두와 눈을 마주쳤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라온이 하분 성 그 자체인 사람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다시 볼 때까지 건강하시길."

그 말을 마지막으로 몸을 돌렸다. 점장을 보고 눈물을 글썽이는 유아의 어깨를 잡고 무운을 빌듯이 활짝 열린 성문을 나섰다.

"잘 가세요!"

"라온 님! 무운을 빌겠습니다!"

"라온 잘 가라! 고마운 건 우리였어!"

"유아야 조심해라!"

성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할아버지. 잘 있어요!"

"나중에 또 봐요!"

인사하는 유아나 도리안과 달리 라온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볼 그날을 기대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쯤 하분 성에 올 때 고생했던 끝없는 언덕이 나타났다.

"유아야. 여기에선 업혀서…."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유아를 업고 움직이려고 할 때 도리안이 콧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왔다. 배 주머니에 손을 깊게 넣은 뒤 나무로 된 썰매를 꺼냈다. 세 사람이 타도 남을 정도로 큰 썰매였다.

-저, 저게 뭐야. 저런 게 왜 주머니에 있어!

귀찮다며 조용히 있던 라스가 헛바람을 뱉었다.

"썰매?"

"이게 왜 있어?"

라온과 유아가 썰매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네? 이런 곳에 다니려면 썰매 정도는 필수죠."

도리안은 왜 그런 걸 묻느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급 썰매라 속도도 조절할 수 있어요. 타세요."

겁많은 녀석이 왜 썰매를 가지고 다니나 했는데, 속도 조절도 되나 보다.

"와아아!"

유아는 재밌겠다며 손을 올린 채 방방 뛰었다.

'이쯤 되면 내가 이상한 건가?'

라온은 어깨를 으쓱이며 유아를 데리고, 썰매에 앉았다.

"그럼 출발합니다."

도리안의 경쾌한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떠날 시간이었다.

제150화

지그하르트 5 연무장.

1년간 텅 비어 있던 피와 땀의 모래판은 복귀한 수련생들로 인해 다시 북적이기 시작했다.

해가 지나 17살이 된 수련생들의 키는 한 뼘 이상 자라났고, 외모는 성숙해졌으며, 서 있는 자세에서 자신감과 자부심이 넘쳐 흘렸다.

그중 백미는 눈빛. 스스로 이뤄낸 성취와 쌓아 올린 업적이 거울이 되어 이전과는 격이 다른 기세를 뿜어냈다.

다만 1년의 생존 시험을 통과하고, 교관들의 인정까지 받아 검사의 자격이 확정된 수련생들의 안색은 그리 밝지 않았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특히 버렌, 루난, 마르타의 표정은 다른 수련생들보다 더 구겨진 상태였다.

"이 자식. 어디 가서 뭘 하길래 지금까지 안 오는 거야!"

건장한 남성보다도 체격이 좋아진 버렌은 가뜩이나 내려간 눈썹이 눈과 맞붙을 정도로 이마를 찡그리고 있었다.

"대체 뭔 짓을 하느라, 졸업식 전날까지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냐고!"

그는 초조한 듯 손톱을 깨물며 연무장을 끊임없이 돌았다.

"라온…."

설원 같은 은빛 머리카락을 뒤로 묶은 루난은 청명한 하늘을 멍하니 올려보며 라온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너무 작아서 바로 옆에 있어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무서웠다.

"라온 왜 안 와. 라온 어디 있어. 같이 아이스크림 먹어야지…."

품에 구슬 아이스크림 통은 든 채 맹하게 연무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흥. 조금 강해졌다고 까불다가 얻어터져서 못 오는 걸지도 모르지."

흑단 같은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가 선명하게 대조되어 이제 완연한 여인의 향기를 풍기는 마르타가 코웃음을 쳤다. 다만 본인이 말하고서도 무언가가 불안한지 눈동자를 두르륵 굴린다.

"안 오면 차라리 잘 됐어. 그 쪼그마한 녀석 대신에 내가 대표로 나가면 되니까."

비웃듯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지만, 이것도 억지인지 입매가 가늘게 떨렸다.

"이 답답한 자식. 대체 왜 안 오는 거야."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라온은 와."

루난이 어색하게 웃는 마르타에게 다가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맹했던 눈빛에 믿음이 깃들었다.

"뭐?"

"라온은 온다고."

"올 거라면 진작 왔겠지. 이미 늦었어."

마르타가 턱을 모로 틀었다. 그녀도 말이 씨가 되는 게 무서운지 그 이상 심한 말은 하지 않았다.

"진 게 쪽팔려서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걸."

"안 졌어! 곧 와!"

"안 와!"

"와!"

"안 와!"

"와!"

은발과 흑발. 서로 대비되는 머리 색의 루난과 마르타가 마주 보며 으르렁대자, 두 사람의 주변으로 암녹색 스파크가 터지기 시작했다.

연무장에 있는 수련생들은 두 사람을 말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런 대립이 거의 한 달째 계속되고 있었으니까.

"라온이랑 도리안은 왜 안 오는 거지?"

"정말 오다가 사고라도 난 거 아니야?"

"에덴을 만났다던가…."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수련생들은 수련하거나, 대화하면서 끊임없이 라온을 생각했다.

처음 이 자리에 모여 그를 비웃을 때와는 천지차이로 달라진 모습. 1년이 지났어도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준 라온을 진심을 따르고 있었다.

콰아앙!

모두가 수련에 집중하지 못하고 어설프게 검을 휘두를 때 연무장 문이 부서질 듯 열리고, 불꽃 같은 머리를 휘날리는 리메르가 들어왔다. 이전보다 더 여유로워진 바람을 일으키며 수련생들의 앞에 섰다.

"왜 다들 눈이 풀려 있냐? 잠 못 잤어?"

리메르는 특유의 가벼운 눈빛으로 수련생들을 쭉 둘러보았다.

"교관님. 문은 발로 여는 게 아닙니다."

"응. 내 거야."

그는 인상을 찌푸린 버렌을 향해 손가락을 흔들었다.

"크으윽…."

틀린 말은 아니라, 버렌은 이를 갈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1년이 지나도 두 사람의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바로 내일이 졸업식이야. 가문의 높은 녀석들이 전부 나와서 너희를 볼 텐데, 그런 멍청한 모습을 보일 거냐? 다들 정신 좀 차려."

리메르는 집중하지 못하는 수련생들을 보며 쯧쯧 혀를 찼다.

"라온이 안 와요."

어깨를 축 내린 루난이 손에 쥔 구슬 아이스크림 상자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말씀대로 내일이 졸업식인데 라온 그놈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겁니까! 정말 납치라도 당한 거 아닙니까?"

버렌은 단상을 물어뜯을 것처럼 다가와 인상을 구겼다. 푸른 눈동자에 걱정이 가득 담겼다.

"안 오면 마는 거지. 뭘 그리 찾는 거야! 없어서 편한데."

마르타가 팔짱을 끼며 차게 웃었다. 겨드랑이에 숨긴 손이 바르르 떨렸다.

"하아, 한심하네."

리메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희는 라온이랑 몇 년을 같이 살아놓고 아직도 걔를 모르냐. 그 녀석이 어디 가서 얻어맞거나 납치를 당할 거 같아?"

"라온이 강하다고 해도 우리 수준에서 강한 것이지 않습니까! 아니, 딱히 걱정하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볼 필요 없습니다. 그저 동기로서 라온과 도리안을…."

버렌은 라온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민망한지 얼굴을 붉혔다.

"또래 중에서 강하다라…."

리메르는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 뭔가 아는 표정인데?"

"교관님! 라온 어디 있는지 아시죠?"

"그 녀석 왜 안 오는 거예요!"

"도리안도 같이 있는 거죠!"

"교관님!"

수련생들이 사탕을 본 개미 떼처럼 리메르에게 달려들었다. 그 가운데에는 아이스크림 상자를 든 루난이 있었다. 거의 리메르의 멱살을 쥘 기세였다.

"내가 라온이랑 도리안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알겠냐. 다만 그 녀석들은 분명 멀쩡하게 돌아올 테니까."

리메르가 슬쩍 웃으며 손을 저었다.

"너희는 마음 놓고 내일 졸업식이나 준비해."

그는 담담한 눈빛으로 수련생들을 진정시킨 후 다시 연무장을 나갔다.

"저 말이 맞긴 해."

"라온은 머리도 잘 돌아가잖아. 별일 없을 거야."

"도리안은 뭔 일이 있어도 숨어 있을 테고."

"그래. 사정이 있겠지."

"저런 말을 하니까. 교관님도 좀 멋있어 보이네."

수련생들은 리메르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며 다시 수련을 시작했다. 1년간의 생존 시험은 헛된 게 아니었는지 집중을 시작하자 예리한 기세가 연무장 전체에서 치솟았다.

* * *

"도와줘요! 로엔 님!"

리메르는 울상을 지은 채로 북망산 중턱에 있는 로엔의 소매를 붙잡았다.

"라온이랑 도리안은 대체 왜 안 오는 겁니까! 어디 박혀 있는 거예요! 내일이 졸업식인데!"

그는 연무장에서 보였던 덤덤한 태도와 달리 조급함을 가득 담은 눈으로 로엔의 어깨를 흔들었다.

"천검대가 지키고 있어서 비연회에 들어가지도 못해요! 천장에도 가시를 박아 놨더라구요!"

"가시…."

"그 녀석이 제일 늦게 떠났다고 해도 한 달 전에는 도착했어야 했는데, 대체 왜 안 오는 건지 모르겠어요!"

"후우."

로엔은 매달리는 리메르를 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몇 달 전 비연회 사무실 천장을 뚫고 들어가 라온의 정보를 빼냈다가 글렌에게 죽기 직전까지 얻어터졌다. 그날 이후로 비연회에는 천검대 검사들이 상주하기 시작했다.

"리메르 님 때문에 제게도 라온 도련님의 정보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예? 아직도요?"

"네. 가주님께서는 라온 님의 정보를 특급보다 더 위로 치고 계십니다."

"어휴, 그렇게 소중한 손자면 좀 앞에서 챙기지. 무슨 스토커도 아니고 맨날 뒤에서만 보고 있냐고."

리메르가 툴툴거리며 바닥에 있는 돌을 걷어찼다.

글렌은 라온이 아기였을 때도, 만화공을 익힐 때도 항상 옆에 있었으면서 티를 내지 않고 관심 없는 척했다. 늙으면 고집만 세진다더니, 정말 쇠심줄 같은 고집이다.

"저도 그 말씀에는 동의합니다."

로엔이 씁쓸한 표정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리메르처럼 글렌과 라온, 실비아가 가족처럼 지내기를 바라고 있었다.

"다행히 정보 하나는 있습니다."

"정보요?"

"예. 라온 님이 돌아오신다는 보고가 들어온 후 일주일 뒤에 천검대 검사들이 하분 성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어, 그건!"

"예. 라온 도련님과 에덴에게 위협을 받았다는 그 여아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겠죠. 그 이후에 가주님이나 천검대에 다른 움직임이 없는 걸 보면 별문제는 없다는 뜻일 겁니다."

"오호!"

가라앉았던 리메르의 표정이 마법등을 켠 듯 한순간에 밝아졌다.

"그럼 제대로 알아봐야겠네요."

"예?"

"아직 확실하지 않으니까. 가주님을 좀 떠보죠."

"자, 잠시만요! 그랬다간…."

"에이, 괜찮아요.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요? 먼저 갑니다!"

로엔이 말리기 전에 리메르가 히죽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바람의 기운을 운용한 채 가주전으로 달려 내려갔다.

어느새 가주전의 입구로 도착한 리메르가 히죽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으음…."

로엔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가주전으로 들어간 붉은 머리 엘프의 미래가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잠시 후 예상대로 가주전이 들썩이고, 안쪽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로엔은 리메르의 명복을 빌며 눈을 감았다.

* * *

지그하르트 별관.

라온이 떠난 이후에도 밝음이 남아 있던 그 따스한 공간은 겨울바람을 직격으로 맞은 듯한 서늘함이 깊게 박혀 있었다.

"하아…."

"대체 왜 안 오시는 거지?"

"다른 분들은 다 돌아왔는데…."

"라온 도련님…."

화단을 정리하던 시녀들은 땅이 꺼질 것처럼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5 연무장 수련생 중 홀로 돌아오지 않은 라온 때문에 별관의 분위기는 초상집 그 자체였다.

"한숨 그만 쉬고, 빨리 끝내자."

가라앉은 시녀들의 목소리와 달리 평온한 음성이 찬 공기를 누그러뜨린다.

"얼마 안 남았잖아."

실비아다. 풍성한 금발을 왼쪽 어깨로 내린 그녀가 정원 가위로 화단을 손질하면서 옅게 웃었다.

"마님…."

"죄, 죄송해요."

시녀들은 미소 짓는 실비아를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금 누구보다도 힘든 사람이 가장 밝은 모습을 보이니 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마, 맞아. 도, 도련님은 곧 오실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헬렌이 실비아의 옆에 쪼그려 앉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실비아와 다르게 얼굴빛이 푸르딩딩하여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라온이 약속했잖아. 건강하게 돌아오겠다고. 우린 그 아이가 돌아왔을 때 편히 쉴 수 있게 이 자리에서 기다리면 돼."

실비아는 시녀들과 한 명씩 눈을 마주치며 미소를 지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저, 전 식사 준비를 할게요!"

시녀들은 감격한 표정으로 각자 할 일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단하네.'

시녀들의 끝에 서 있던 주디엘은 실비아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잠도 못 잘 정도로 힘들 텐데.'

다른 시녀들도 라온을 소중히 여기지만, 실비아만큼은 아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소식이 끊어졌는데,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시녀들을 다독이다니 대단한 사람이었다.

'사실 걱정할 필요 없긴 하지만.'

라온은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 중 가장 무서운 기질을 가진 인간이다. 그보다 무력이 강한 사람은 여럿 있었지만, 그보다 냉철하고 두려운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빨리 끝내고 저녁 먹으러 가…음?"

실비아가 화단 정리를 마무리하려고 할 때 본관 방향에서 키가 큰 남자가 다가왔다. 붉은 머리에 뾰족한 귀. 5 연무장의 수석 교관 리메르였다.

"리메르 님?"

다만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다. 빨간 머리카락이 탄 것처럼 검게 그을렸고, 눈은 시꺼멓게 멍들었으며, 콧구멍에 붉게 물든 천을 끼고 있었다.

"괘, 괜찮으세요?"

실비아가 입을 뻐끔거리며 리메르에게 다가갔다.

"아아, 괜찮아."

"안 괜찮아 보이는데…."

"별일 아니라니까. 오다가 고집 세고 성질 더러운 황소를 좀 만나서."

리메르는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황소…."

몬스터도 아니고, 대체 무슨 소를 만났기에 저런 꼴이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사실 별건 아니고."

리메르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입맛을 쩝 다셨다.

"라온 말이야.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네? 라, 라온 소식이 들어온 거예요?"

"어디 다치거나 하진 않았거든. 졸업식은 좀 늦을 수도 있겠지만, 곧 돌아올 거야."

"아…."

리메르의 다정한 음성에 실비아의 손에서 가위가 떨어졌다. 참고 참던 감정이 폭발한 듯 그녀의 다리가 휘청였다.

"네 아들이자, 내 제자는 잘 오고 있으니까. 마음 놓고 기다리라고."

그는 실비아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그럼 간다."

"저녁 식사라도 하시고…."

"아, 큰 도박판이 열려서."

리메르는 히죽 웃으며 등을 돌렸다. '아, 드럽게 아프게 때리네.'라고 중얼거리면서 터벅터벅 걸어갔다.

실비아는 양손을 꼭 모은 채 리메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 * *

다음날.

성문과 별 다를 바 없는 크기의 대연무장의 문이 활짝 열렸다. 평소 대연무장에 들어오기 힘든 평검사와 사무관들이 외곽에 놓인 의자에 차례로 앉았다.

리메르 덕분에 조금은 밝아진 실비아와 헬렌, 별관의 시녀들도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언가를 바라듯 손을 꼭 모은 채 연무장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태양이 하늘의 중심에 서기 직전.

화려한 예복을 입은 5 연무장의 수련생들이 차례로 입장해 연무장 중심에 열을 맞춰 섰다. 아직 앳된 얼굴이지만, 은은하게 피어나는 기세는 정규 검사에게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젠장…."

"아직도 안 온다고?"

"평소엔 그렇게 시간을 잘 지키던 놈이…."

"라온, 도리안. 빨리 좀 와."

그들의 눈빛에는 긴장 이상의 걱정이 어려 있었고, 누군가를 기다리듯이 끊임없이 뒤를 힐끔거렸다.

시간이 지나며 임시로 만들어 놓은 관중석이 점점 차기 시작한다. 평소 얼굴을 보기 힘든 대주나, 단주급 간부들 그리고 직계와 봉신가의 가주들까지 각자 정해진 자리에 앉았다.

"으아암."

리메르는 입이 찢어질 것처럼 하품하며 수련생들 옆에 서 있었다. 졸업식이고 뭐고 그는 평소 모습 그대로였다.

연무장에 모인 사람들이 흥분, 기대, 긴장, 걱정이 드러나는 눈빛으로 수련생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문 앞에 서 있던 검사들이 들고 있던 깃대로 땅을 내리찍었다.

쿠우우웅!

검사들은 묵직한 울림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모은 뒤 깃발을 양옆으로 펼쳤다.

"북방의 진정한 주인. 글렌 지그하르트 가주께서 입장하십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그 웅혼한 외침에 연무장에 있는 검사들이 일어서서 무릎을 꿇었다.

빛바랜 금발을 뒤로 넘기고, 검붉은 코트를 두른 글렌 지그하르트가 연무장을 가로지른다.

초월에 닿은 무신이 피워내는 압도적인 위엄에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올린다는 생각도 못 하고 식은땀을 흘렸다.

고오오오!

그가 단상의 옥좌에 앉을 때까지 연무장에 있는 모두는 숨을 쉬어야 한다는 것도 잊고 그저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모두 일어서라."

"예!"

일어서라는 말에 약속한 듯 모두가 동시에 일어섰다. 이것 역시 스스로 생각한 것이 아니다. 글렌이 만들어낸 위압에 몸이 저절로 움직인 것이다.

"수석 교관. 시작해라."

"가주님. 아직 두 명이 오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실 수는…."

"정확한 복귀 기간을 정하지 않았다고 해도 졸업식이 2월에 열리는 건 모를 리가 없지. 지금까지 안 왔다면 실격이다."

"그렇지만 라온은 수석이고 도리안은… 읍! 알겠습니다."

리메르가 조금 더 시간을 끌고 싶어서 손가락을 비볐지만, 글렌의 서늘한 눈빛에 바로 뒤를 돌았다. 바로 어제 얻어터져서 반항할 수가 없었다.

"그럼 지금부터 제 5 연무장의 졸업식을 진행하겠습니다. 총원 43명. 현재 인원 41명. 열외 2명으로 지금 있는 41명은…음?"

그가 먼저 현재 인원에 대해 말할 때였다. 닫히기 시작 대연무장의 아치형 문 사이로 낮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뚜벅.

수많은 사람이 빚어내는 소음에 들리지 않아야 하건만 발소리는 너무도 선명하게 모두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 소리는 글렌 지그하르트처럼 위엄있었고, 리메르 같은 경쾌함을 일으켰으며, 밀랜드의 묵직함이 깃들어 있었다.

청각을 집중시키는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연무장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뒤로 돌아갔다.

문을 넘어오는 검은 구두. 화려한 예복 이상의 고귀함을 두른 사내의 모습이 드러난다. 햇볕을 받은 금발은 찬란한 빛을 발했고, 가라앉은 붉은 눈은 모든 시선을 빨아들이는 듯했다.

이젠 절세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미모로 연무장을 훑어내리는 그의 입가에 호선이 피어났다.

"이런 환영식은 필요 없는데."

라온 지그하르트. 그 누구보다 눈부신 성장을 이뤄낸 그가 지그하르트의 심장으로 돌아왔다.

제151화

라온이 대연무장 문을 손으로 잡았다. 닫히려던 거대한 문이 그의 손아귀에 붙잡혀 옴짝달싹 못 한 채 멈췄다.

"다, 당신은…."

"라온 지그하르트!"

문 앞의 검사들은 자신의 얼굴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깃대를 치웠다.

"라온!"

"도련님!"

"라온 도련님!"

가장 먼저 들려온 목소리는 좌측 외곽에서였다. 실비아와 헬렌 그리고 시녀들이 빨개진 눈으로 손을 마구 흔들고 있었다. 그쪽을 마주 보며 싱긋 웃어주었다.

"너 이 자식 왜 이렇게 늦게… 커헉!"

"라온!"

"야! 임마!"

본인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지은 버렌을 밀쳐내고, 루난과 마르타가 달려왔다.

"라온!"

"너 지금까지 어디서 뭘 한 거야! 왜 이제야 오는 거냐고!"

루난과 마르타는 드물게도 똑같이 인상을 구긴 채 자신의 소매와 멱살을 움켜쥐었다.

"라온. 너무 늦었어!"

"아, 아쉽네. 안 죽고 살아 있었다니."

루난은 소매를 잡고 보라색 눈동자를 빛냈고, 마르타는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놓고 민망한 듯 고개를 돌렸다.

-아이스크림 소녀와 소고기 소녀 둘은 그대로구나. 안심했도다.

라스는 루난과 마르타를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저 눈깔 녀석과 귀때기는 아직 살아있군. 아쉬운 일이니라.

반면 버렌과 리메르를 보며 쯧쯧 혀를 찼다. 정말이지 언행을 예측할 수가 없는 녀석이다.

"라온!"

"이제야 왔구나!"

"기다리고 있었어!"

"너무 늦었잖아!"

수련생들도 자리에서 벗어나 연무장 문으로 달려갔다. 순식간에 라온의 앞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마지막에 등장하다니, 네가 무슨 주인공이라도 되는 거냐?"

리메르가 피식 웃으며 다가왔다. 귀찮은 표정이지만, 미소에는 반가움이 담겨 있었다. 여전한 사람이다.

"왔으면 빨리 올라와라.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까."

"아직 안 온 녀석이 있어서요."

라온은 고개를 젓고, 문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안 온 친구?"

"누가 또 있어?"

"다 온 거 아니야?"

잠시 후 없어 보이는 탁한 숨소리를 흘리며 유아를 업은 도리안이 대연무장의 문을 넘었다.

"가, 갑자기 혼자 뛰어가시면 어떻게 해요!"

도리안은 끙 소리를 내며 유아를 내려놓았다.

"내가 먼저 가지 않았으면 문이 닫혔을 거야."

라온은 그제야 문에서 손을 뗐다. 한 사람의 힘에 막혀 있던 거대한 철문이 자존심이 상한 것처럼 웅장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으음…."

"저걸 그냥 힘으로 막은 건가…."

문지기 역할을 하던 검사들은 그 모습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졸업식을 시작하면 되돌릴 방법이 없잖아."

라온이 피식 웃으며 손을 털었다. 조금만 늦게 도착했다면 졸업식이 시작되어 참여할 방법이 없었을 거다. 도리안과 유아를 놔두고 먼저 와서 문을 잡은 건 적절한 선택이었다.

"아, 도, 도리안!"

"도리안이 있었구나."

"그, 그러네. 도리안이 있었네."

리메르와 수련생들은 도리안을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들 모두는 라온의 화려한 등장에 빠져 도리안이라는 존재를 아예 잊고 있었다.

"도리안이 있었구나? 그 말 좀 많이 섭섭한데…."

도리안이 서글픈 눈빛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신경 쓰지 말고, 먼저 올라가."

라온은 도리안의 어깨를 툭 치고서 유아와 눈을 마주쳤다.

"유아야. 저기 저 사람들 보이지?"

"예쁜 옷을 입은 언니들이요?"

"그래. 저기 가서 기다리고 있어."

"네!"

유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실비아와 헬렌이 있는 자리로 달려갔다.

"흐음…."

리메르는 달려가는 유아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라온을 보았다.

"수확은 있었나?"

"네."

"좋군. 주인공도 왔으니, 시작하자. 전부 자리로 돌아가."

라온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을 들은 리메르가 히죽 웃었다.

"예!"

"알겠습니다!"

안색이 밝아진 수련생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빠르게 원래의 자리로 향했다.

"주인공들이라고 해줘요…."

도리안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맨 끝자리로 향했다.

"아, 미안. 그리고 라온은 너는 가장 앞에서…."

"멈춰라."

리메르가 안 미안한 표정으로 라온의 위치를 말해주려고 할 때 직계들이 앉아 있던 중앙 단상에서 카룬 지그하르트가 일어섰다. 막강한 기세를 피워내며 글렌의 옆으로 다가갔다.

"가주님. 다른 수련생들은 한 달 전에 졸업 자격을 증명했지만, 라온은 이제야 가문에 도착했습니다. 자격을 증명하지 못했으니 함께 졸업시켜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도 틀리진 않군."

글렌이 무감정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카룬이 단상 앞으로 나왔다.

"너희 둘은 교관들에게 졸업 자격을 얻지 못했다. 졸업식에 설 자격이 없으니 내려가라."

그의 냉정한 목소리가 연무장에 울렸다.

"이, 있습니다! 하분 성주의 편지가 여기에…."

"그게 아니다."

도리안이 배 주머니에서 밀랜드의 편지를 꺼내려 할 때 카룬이 손을 들어 올렸다.

"너희가 1년 동안 무엇을 했는지, 어떻게 지냈는지를 교관에게 보고하고 그걸 바탕으로 시험의 합격 여부를 가려야 하거늘. 이제 도착했으니, 그 자격이 없다는 말이다. 설마 여기 있는 모두를 기다리게 하며 자격 증명을 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아…."

도리안이 배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고개를 푹 숙였고, 라온은 덤덤한 눈으로 카룬을 바라보았다. 방해가 맞지만,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오래 기다릴 필요 없어."

리메르가 미소를 유지한 채 앞으로 끼어들었다.

"리메르…."

"검사는 검으로 말하는 법. 그것 외에 다른 게 필요한가?"

그가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찰나의 순간에 솟구치는 강대한 기파. 폭풍이 응집된 듯한 녹색 오러가 은빛 칼날을 진하게 휘감았다.

고오오오!

리메르는 극한의 예기를 담은 검으로 라온을 겨누었다.

"말은 필요 없겠지?"

"물론입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리메르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바람을 타고 나아가 검을 내리친다. 사위에서 모여든 바람의 칼날이 공간을 찢어발겼다.

언젠가 보았던 검. 이곳을 떠나기 전 그에게 패배할 때 보여주었던 바로 그 검술이었다. 한층 더 강화된 오러로 자신의 약점을 사정없이 노려왔다.

시험. 이건 그가 내리는 시험이다. 1년 동안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여달라는 의미의 공격이었다.

'실망시킬 수는 없지.'

리메르의 칼날이 가슴에 닿기 직전 라온의 손이 움직였다. 검집에서 벼락처럼 치솟은 붉은 칼날이 바람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역으로 리메르의 허리를 노렸다.

쩌어어엉!

의지를 담은 두 칼날이 맞부딪치자 녹광과 적광이 폭발하며 연무장 중심에서 열풍이 터져 나왔다.

찌지지직!

검날의 비틀림 사이에서 일어난 샛노란 스파크를 거울삼아 라온과 리메르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후우우웅!

응집된 기운이 폭발하기 직전 라온과 리메르는 약속이라도 한 듯 손을 뻗어 그 강대한 오러의 폭풍을 하늘로 날려 보냈다.

콰아아아앙!

연무장 상공에서 폭발한 오러들은 졸업을 축하하는 폭죽처럼 화려한 빛을 뿜어냈다.

"전에는 제대로 보지도 못하더니, 완전히 달라져서 왔구나."

리메르는 아직 떨리는 검을 휘돌리며 씩 웃었다. 만족스러움이 넘쳐흐르는 듯한 눈빛이다.

-달라지기는 무슨, 똥폼 잡는 것만 늘었지.

라스는 라온이 주목을 받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콧등을 찡그렸다.

"허어…."

"저, 저 검격을 막았다고? 아직 수련생인 녀석이?"

"리메르가 봐준 건가?"

"눈깔은 폼으로 달고 다니냐? 힘 조절이야 했겠지만, 수련생이 받아낼 검격이 아니었다고."

"미쳤어. 17살에 저 무력이라니…."

눈앞에서 라온과 리메르의 격돌을 지켜본 검사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혀를 내둘렀다.

"5 연무장의 수석 교관으로서 네 성장을 인정한다. 생존 시험 합격이다. 라온 지그하르트."

"감사합니다."

라온은 글렌 그리고 리메르에게 차례로 고개를 숙였다.

"직접 보셨는데,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중무전주?"

"끄으윽…."

카룬 지그하르트 역시 라온이 펼쳐낸 검격의 위력을 눈앞에서 보았기에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이를 갈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뭐야. 더 강해져서 왔잖아."

"아오! 괜히 걱정해줬네."

"근데 교관님 검을 어떻게 막은 거야?"

"진짜 미쳤다…."

라온과 리메르의 격돌을 피부로 느낀 수련생들은 안에 벌레가 들어가도 모를 정도로 입을 떡 벌렸다.

"역시…."

"라온!"

"저 망할 녀석…."

버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주먹을 움켜쥐었고, 루난은 오랜만에 코를 흥흥거렸으며, 마르타는 흥겨운 것처럼 입매를 말아 올렸다.

"가주님.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라온에 대한 질문은 이후에 하도록 하지. 시작하라."

글렌은 관심이 없는 것처럼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석 수련생. 라온은 앞으로."

"예!"

라온은 당당한 걸음으로 수련생들의 앞에 서서 글렌을 올려보았다.

"5 연무장 총원 43명, 현재원 43명. 열외 무! 지금부터 5 연무장 수련생의 졸업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리메르는 열외 무를 특히 강조하면서 졸업식의 시작을 알렸다. 수련생 모두가 허리를 쭉 펴고 자신감이 깃든 눈빛을 발했다.

딱 한 사람을 제외하고.

"이거 맞아? 난 시험도 안 봤는데. 이거 맞냐고."

도리안은 앞의 옆의 수련생들을 힐끔거리며 손가락을 비볐다. 시험을 안 본 건 좋지만 존재감이 아예 사라진 것 같아서 가슴이 아렸다.

"나 너무 무시당하는 거 아니야?"

* * *

졸업식이 끝난 후 라온은 실비아와 만나기도 전에 가주전 알현실로 불려왔다.

글렌 지그하르트는 연무장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옥좌에 앉아 공허한 눈빛으로 세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역시 대단해. 얼마나 강한지 느껴지질 않아.'

성장하면 할수록 글렌이라는 산이 얼마나 높은지 조금씩 보이게 된다. 슬로스라는 초월적 존재를 마주하고 왔음에도 그의 한계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 남자라면 그 슬로스도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봐야 본왕의 아래이니라. 전에도 한번 말했지만, 본왕이 본체의 힘을 가져온다면 수만 합으로 이길 수 있다.

'전에는 수천 합 아니었어?'

-그건…. 네, 네놈이 본왕의 힘을 훔쳐 갔기 때문 아니더냐!

'그 정도는 별거 아니라며.'

-....

'라스?'

라스는 대답 없이 자는 것처럼 팔찌로 쏙 기어들어 가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여튼.'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글렌의 앞에 섰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라온은 옆에서 떨고 있는 유아의 손을 꼭 잡아준 채 고개를 숙였다.

"가, 가주님을 뵙습니다!"

도리안이 한 박자 늦게 인사를 했지만, 글렌은 별 신경 쓰지 않고 손을 저어 일어나라 지시했다.

"너희들이 이곳을 떠난 이후로 일어났던 일을 모두 보고해라."

"꽤 길어질 텐데, 괜찮으십니까?"

"상관없다. 네가 1년간 무엇을 했는지를 듣고, 졸업 여부를 가려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가 먼저 들렸던 카멜룬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는 그곳에 가서…."

라온은 한 발 앞으로 나와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모두 설명했다. 물론 도둑질이나, 슬로스를 만난 건 제외하고 몇 가지 사건들을 적절하게 수정했다.

"…마지막으로 밀랜드 성주와 대련을 하고 난 뒤 다시 가문으로 돌아왔습니다."

"성주와의 대련은 어떻게 됐지?"

"제가 패했습니다."

"패한 건 알고 있다. 네 녀석이 그를 꺾기엔 100년은 이르니까. 성주는 강기를 썼나?"

"예. 마지막에 사용했습니다."

"흐음!"

"허어…."

리메르는 만족스럽다는 듯 입맛을 다셨고, 로엔은 감탄한 것처럼 탄성을 흘렸다.

"...."

글렌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지그시 바라만 보았다. 판단을 내리겠다더니 큰 관심이 없는 표정이었다.

"에덴에서 노렸다는 게 그 아이인가?"

"으윽."

글렌의 시선이 처음으로 유아에게 향했다. 그 압박감에 유아의 손에서 심한 떨림이 일었다.

"그렇습니다. 세이렌의 가면을 씌우겠다고 하면서 두 번이나 노린 걸 보면 꽤 집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이렌이라…."

글렌이 저절로 피어나는 기세와 위엄을 가라앉혔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아…."

말하기 편해진 유아가 라온의 손을 꾹 잡은 채 천천히 입을 뗐다.

"유, 유아예요! 아, 유아입니다!"

"음."

본인도 모르게 크게 터진 유아의 목소리에 글렌이 로엔에게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있군요."

로엔이 떨리는 눈동자로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 자체에 영기가 끼어 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상단전이 열린 게 아닐지…."

"아니, 처음부터 열린 상태로 태어났다. 극히 드문 재능이야. 에덴에서 노렸다는 이유를 알겠어."

글렌은 평범한 사람처럼 기세를 아예 지워버리고, 유아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붉은 눈은 이 찰나의 순간에 유아의 모든 것을 살핀 듯 선명하게 빛났다.

"그 아이를 어떻게 할 생각이지?"

"별관에서 함께 지낼 생각입니다. 그리고…."

라온은 눈을 내리감았다가 뜨며 말을 이었다.

"스스로 강해지길 원하니 검을 가르칠 생각입니다."

"검이 아니다."

글렌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가 걸어야 할 길은 검이 아니라, 소리다."

그가 턱짓하자, 우측에 있던 로엔이 앞으로 나왔다.

"앞으로 로엔에게 소리를 사용하는 법을 배우도록."

"자, 잠시만요! 로엔 님은…."

로엔은 분명 좋은 사람이지만, 글렌의 뒤에 섰던 암살자가 분명하다. 유아에게 암살 기술을 가르칠 수는 없었다.

"로엔은 소리에 대해 일가견이 있다. 네가 생각하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도록."

글렌은 생각을 모두 읽은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소리…."

로엔은 근접 거리에서도 소리를 완벽하게 죽일 줄 아는 무인이다. 소리를 없앨 줄 아니, 반대로 소리를 낼 줄도 아는 것 같았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로엔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유아와 라온을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아, 네!"

유아는 글렌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인상의 로엔이 편했는지 빠르게 고개를 꾸벅였다.

"그럼 마지막 질문을 하지. 왜 이렇게 늦은 것이냐."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라온은 옆에서 어쩔 줄 모르는 도리안과 유아를 보며 말을 이었다.

"과일과 몇 가지 물품 보충을 위해 도시에 들렀다가 왔습니다."

유아는 실비아에게 맛 좋은 요리를 대접하고 싶다고 몇 가지 음식 재료를 사가길 원했고, 도리안은 주머니에 과일과 몇몇 물품을 보충하고 싶다고 해서 도시에 들렀다가 왔다.

"과, 과일?"

"물품 보충?"

리메르와 로엔은 이유를 듣자마자 어이가 없다는 듯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과일을 사느라 늦었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군. 그 스승에 그 제자야."

글렌은 리메르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저렇게 가르쳤냐고 묻는 듯한 차가운 눈빛이다.

"가주님! 그런 말씀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제자의 욕은 참을 수 있지만, 제 욕은 참지 못합니다!"

리메르가 취소하라는 듯 고개를 맹렬하게 흔들었다.

"…미친놈이로다."

-…여전히 미친놈이로다.

글렌과 라스는 통한 것처럼 똑같은 말을 뱉었다.

"저 둘은 그렇다 치고, 너도 과일을 사느라 시간을 낭비했느냐?"

"저는 그동안 생각을 비웠습니다."

"생각을 비워?"

"예."

라온이 느릿하게 눈을 내리감았다.

"밀랜드 성주와 대련을 끝낸 이후. 아니, 만화공이 한 단계 올라간 이후부터 뇌리에 심상이 떠올랐습니다. 검술, 보법, 연공법. 제가 강해질 수 있는 여러 미래가 그려지더군요."

"그래서 넌 무엇을 했지?"

그 말에 글렌의 눈빛이 처음으로 번쩍였다. 흥분한 듯 옥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나가는 심상들을 냇물처럼 그저 지켜만 보았습니다."

"왜지? 그 영감들을 잡으면 더 강해질 거라는 욕심이 일었을 텐데."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제가 넘보기에 너무 큰 것들이었습니다. 어설프게 파고들었다면 거기에 매몰되어 나아가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지켜만 보았다?"

"예. 언젠가는 그것이 제 힘이 될 거라고 생각하며 저 둘과 마지막 수련생 생활을 즐겼습니다."

라온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정답이었어.'

대련 이후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머릿속에서 높은 경지에 오른 미래의 자신만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그 심상을 붙잡기만 하면 마스터에 오르는 것도, 데루스에게 복수하는 것도 금방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력한 이미지였지만, 그건 정상적인 성장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놓았다.

떠도는 구름처럼, 혹은 흘러가는 바람처럼 강해진 미래의 심상을 놓아버리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고 무학의 성취가 상승했다.

"그렇군."

글렌이 다시 몸을 의자에 파묻었다. 대답이 마음에 드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강해질수록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육체 단련, 오러 연공, 권법, 검술, 보법, 대련 그리고 심상까지."

그는 자신과 같은 붉은 눈으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더 많은 것을 볼수록 더 먼 곳을 향할수록 꼭 잡아야 하는 걸 놓치게 되는 경우가 많지.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네 선택은 옳았다."

"예?"

"먼 곳을 보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가까운 곳을 살피다가 방향이 어긋나게 되지. 중간의 위치에서 네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나아가도록 해라."

"아, 예."

글렌에게서 옳았다는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순간 소름이 돋아 올랐다.

"오?"

"음!"

리메르와 로엔도 의외였던지 입을 떡 벌렸다.

"다만 그 아이나, 너는 이미 에덴에 노출된 상태다. 제대로 변장했다고 해도 조심했어야 한다."

"저희가 변장을 한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라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변장한 건 맞지만 그걸 글렌이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

"…네 녀석이 바보가 아니니, 당연히 변장했으리라 생각했다."

글렌은 잠시간의 침묵 후 평소보다 조금 톤이 올라간 목소리로 입을 뗐다.

"그렇습니까."

라온은 그러려니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보짓을 하느라 늦었는지 알았는데, 길을 잡았다면 감안해줄 만하지. 네 졸업을 인정한다. 라온 지그하르트."

"감사합니다."

"저, 저기!"

글렌이 빨리 가라는 듯 손을 내젓고, 라온이 고개를 숙이며 물러나려 할 때 도리안이 손을 들었다.

"저는… 윽!"

시험도 안 보고, 아무것도 안 물어봤다고 말하려 했지만, 글렌의 시선을 받자 머리가 텅 비어버렸다.

부스럭.

도리안은 버릇처럼 배 주머니에 손을 넣어 이번에 사 온 과자를 꺼냈다.

"과, 과자 좀 드실래요?"

* * *

"가주님도 어쩔 수 없는 할아버지인 모양이네요."

리메르는 도리안이 주고 간 과자를 씹으며 히죽 웃었다.

"손주의 활약상을 직접 듣고 싶어서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1시간 넘게 들으시다니, 저는 그런 내리사랑은 못 할 것 같습니다."

"시끄럽다."

"거기다 이번에는 실수도 하셨잖아요. 말을 잘못해서 천검대와 비연회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는 걸 라온에게 들킬 뻔…윽! 죄, 죄송!"

글렌의 눈동자가 새빨갛게 빛나는 걸 본 리메르가 폭소를 멈추고 물러섰다. 바로 어제 죽을 정도로 얻어맞아서 아직 반항할 용기가 없었다.

"라온 님의 기척은 더 줄어드셨더군요. 이젠 고수라고 해도 라온 님이 무학을 익히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 힘들 것 같습니다."

로엔이 신기하다며 헛바람을 흘렸다.

"처음부터 기척을 숨기는데 능한 녀석이었으니까요. 지금은 저도 라온의 수준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듭니다. 익스퍼트 상급을 넘어선 건 확실한데…."

리메르도 과자를 씹으며 그 말에 동의했다.

"아까 들었지 않느냐. 머릿속으로 영감이 떠오르고 있다고. 그 아이는 이미 벽 앞에 서 있다.

"벼, 벽이라면…."

"설마 마스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로엔이 눈을 부릅뜨고, 리메르가 과자 봉지를 떨어뜨렸다.

"그 아이는 이미 익스퍼트 최상급에 이르러 있다. 거기다 마스터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에 올라탔지."

익스퍼트 상급에서 최상급에 오르면 머릿속으로 자신의 미래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지금으로서는 이룰 수 없는 높은 심상의 경지에 매몰되면 평생 마스터에 오르지 못할 수도 있고, 아예 무시하면 마스터에 이르는 길이 멀어진다.

그저 지나가는 물처럼 흘려보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데, 라온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며 그걸 이뤄냈다. 역시나 보통 녀석이 아니다.

라온의 진짜 강점은 빠르게 성장하는 무력이 아니라, 정신의 굳건함과 냉정함인 것 같았다.

"대륙십이성이라는 아이들이 마스터에 오른 나이가 20대 중반. 하지만 라온은 그 나이대의 나보다도 한 줄 위의 성취를 보이고 있다. 아무래도…."

글렌의 붉은 눈동자에 기대의 불꽃이 번쩍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륙 역사상 최연소 마스터가 탄생할 것 같구나."

제152화

가주전을 나온 라온은 바로 별관으로 향했다. 유아는 긴장했었던 것인지 손을 살짝 떨었다.

"괜찮을 거야. 로엔 님은 좋으신 분이니까."

"아, 네."

로엔은 데니어 지그하르트와 함께 자신과 실비아를 차별하지 않고, 정중하게 대해준 몇 없는 사람이다. 글렌이 확실하게 보장해주었으니, 유아에게 암살 기술 같은 건 가르치지 않을 거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봐두긴 해야지.'

나중에 유아가 처음으로 로엔의 교육을 받을 때 같이 가서 무엇을 배우는지 살펴보기로 마음먹었다.

-네 녀석치고는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하는구나.

'뭐?'

-파인애플 소녀는 본왕의 소중한 시녀이니, 제대로 챙겨주어라.

라스는 냉기로 만든 손으로 유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물론 유아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여전히 주제를 모르네.'

라스를 보며 혀를 찼다. 유아의 음식 솜씨에 매료된 주제에 누가 누구의 시녀라는 건지 모르겠다. 먹보 마왕은 여전히 본인의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근데 넌 왜 따라오냐?"

과자를 먹으며 졸졸 따라오는 도리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도련님까지 왜 이러십니까. 저 오늘 정말 힘들다구요."

도리안이 과자 봉지를 구기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들 아는 척도 안 하고, 제가 있는 줄도 모르고, 시험도 꼽사리로 끼어 들어가기만 하고. 내 존재감은 대체 어디 간 거야!"

"그럼 지금이라도 시험 칠래? 리메르 교관에게 말하면…."

리메르가 귀찮아 하는 게 좀 심하지만 수련생들을 생각하는 것만큼은 진짜다. 시험을 치겠다고 하면 거절할 사람은 아니다.

"에이! 그건 또 아니죠!"

도리안은 빠르게, 아주 빠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다 끝났는데, 뭘 또 귀찮게 합니까. 그냥 좀 아쉽다는 거예요."

녀석은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가서 쉬어."

"와, 섭섭하네. 1년 넘게 같이 여행했는데, 너무 차가우신 거 아니에요?"

"차갑기는 무슨."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지만, 이 녀석과 함께 별관에 가면 피곤해질 게 뻔하다. 빨리 돌려보내는 게 속 편하다.

"그리고 가고 싶어도 못 가요."

"뭐?"

"아까 대연무장에 있을 때 도련님 어머니께서 함께 오라고 하셨거든요."

"아…."

"그니까 함께 가자구요! 오랜만에 별관에서 맛있는 밥 먹겠네! 유아야! 가자!"

도리안은 유아의 손을 잡고 별관을 향해 신나게 뛰어갔다.

-밥! 별관 밥이 또 괜찮지! 더 빨리 움직이거라.

팔짱을 낀 채로 똥폼을 잡던 라스의 입에서 냉기가 줄줄 흘러내렸다.

"하아."

침 흘리는 라스와 달려가는 도리안, 유아를 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애가 셋이야….'

* * *

라온은 귀찮은 두 명과 유아를 데리고 별관 앞에 도착했다. 갑자기 돌아왔기 때문인지 안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오랜만에 정겨운 소리를 들으며 별관 문을 열었다. 로비와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던 실비아와 헬렌 그리고 시녀들이 한 번에 달려들었다.

"라온!"

"도련님!"

"너무 늦으셨잖아요!"

"다친 곳은 없으세요?"

그들은 자신의 이곳저곳을 살피며 다친 곳은 없는지, 문제가 생기진 않았는지 살폈다. 호들갑을 떠는 실비아와 시녀들의 모습을 보자 집에 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다녀왔어요."

라온은 걱정과 반가움이 담긴 가족들의 눈을 보며 빙긋 웃었다.

"어서 오렴."

실비아가 가슴 앞에 모은 손을 떨며 따스함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도 성장하신 건가.'

예전이라면 바로 달려들어 눈물을 흘렸을 텐데, 자신이 성장하듯 실비아도 정신적으로 성장한 것 같았다.

'다행이… 헉!'

"라온!"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가벼운 미소를 지을 때 갑자기 실비아가 달려들었다.

"너무 잘 컸잖아! 어쩜 이렇게 예쁘게 컸지? 누구 아들이야!"

그녀는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어투로 얼굴을 비비기 시작했다.

"어, 엄마. 제발…."

라온이 입술을 깨물며 헬렌에게 도움 요청 신호를 보냈지만, 그건 역효과였다.

"도련님!"

"라온 도련님!"

"정말 잘 오셨어요!"

"이렇게 훤칠해지셔서… 흑!"

"끄으윽…."

헬렌과 다른 시녀들까지 울음을 터트리며 달려들어 옴짝달싹 못 하게 낑겨버렸다. 로비에서 가만히 있는 사람은 주디엘과 도리안, 유아뿐이었다.

"후우."

"흐흐흥…."

"와…."

주디엘은 옅게 한숨을 내쉬고서 주방으로 들어갔고, 도리안은 그 모습이 재밌는지 입을 가린 채로 히죽였으며, 유아는 적응 못 하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리고 라스는….

-밥은 어디에 있느냐.

평소와 같았다.

* * *

라온은 식탁에 앉은 채로 옆을 둘러보았다. 식탁에는 실비아와 도리안, 유아만이 아니라, 시녀들까지 함께 앉아 있었다.

시녀들이 계속 거절했지만, 오랜만에 함께 밥을 먹자는 실비아의 지시에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은 상태였다.

-달달하고 짭짤한 향기가 본왕을 짓누르는구나. 무기를 들어라. 라온 지그하르트.

라스는 식탁 위를 가득 채운 맛깔나는 음식들을 보며 입에서 군침처럼 냉기를 마구 흘려댔다.

"밥 먹기 전에 일단 자기소개부터 하는 게 좋겠지."

실비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겁먹은 듯 어깨를 움츠린 유아를 보며 싱긋 웃었다.

"아까 봐서 알겠지만, 내가 라온의 엄마야. 실비아라고 한단다."

그녀는 유아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먼저 본인을 소개했다.

"아, 저, 저는 유아예요. 하분 성에서 왔어요."

유아는 벌떡 일어나서 실비아와 다른 시녀들에게 연달아 고개를 숙였다.

"그래. 유아구나."

실비아는 귀여워 죽겠다는 듯 유아를 보며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라온. 네 딸은 아니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후후, 농담이야."

"으윽…."

라온이 빨개진 얼굴로 눈을 내리감았다. 글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지만, 실비아에겐 항상 당황하게 된다.

"음식이 식으니까. 일단 먹으면서 시작할까."

"뭘 시작하려고?"

"당연히 너랑 도리안이 1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를 듣는 거지. 설마 그냥 넘어가려고 했어?"

"나중에 따로 말할…."

"그건 오늘 놀고먹은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도리안이 앞에 있던 파이를 그대로 꿀떡 삼키고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도리안…."

"일단 저희는 바로 북으로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하분 성이라는 거대한 산을 넘기 위해서 먼저 보급을 위해 카멜룬에…."

그만두라고 눈짓을 주었지만, 오늘 아무것도 하지 않은 도리안은 힘이 넘치는 목소리로 그간의 여정을 말하기 시작했다.

실비아와 시녀들은 자신이 활약했다고 할 때마다 손을 꼭 부여잡은 채 탄성을 흘렸고, 두 번이나 성벽에서 뛰어내려 병사들을 구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감동했는지 눈물을 글썽거렸다.

실비아는 기꺼운 눈으로 자신을 보다가 에덴의 손아귀에서 유아와 점장을 구했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입술을 꾹 깨물며 유아를 끌어 안아주었다.

"힘들었겠구나."

그녀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에덴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어보았기에 이곳에 올 수밖에 없었던 유아의 사정에 공감한 것 같았다.

"아, 아니에요."

지금까지 참고 있던 유아도 그 마음을 느꼈는지 눈매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흐윽…."

"마님…."

"유아야."

시녀들도 실비아의 사연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둘씩 눈물을 흘렸고, 어느새 식탁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잘 지내겠네.'

라온이 유아와 실비아, 시녀들을 보며 옅게 웃었다. 예상대로 자신의 가족들은 유아를 잘 품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라온. 정말 잘했어. 그리고 고마워."

유아를 안고 있던 실비아가 자신를 보며 웃어주었다. 이전에 약속한 대로 지그하르트답게 살아주어 고맙다는 것 같았다.

"흐으읍!"

도리안은 그 사정도 모르면서 함께 눈물을 흘렸다. 정이 많은 건지, 단순한 건지 모르겠다.

라스는 이번에도 같았다.

-안 먹냐?

녀석은 가득 깔린 음식에 눈을 떼지 못한 채 작은 손을 휘저었다.

-음식 다 식느니라!

분위가 파악 못 하는 거 하나는 마왕다웠다.

* * *

라온은 가볍게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유아는 실비아가 함께 자겠다며 데리고 갔고, 오늘 되는 일이 없었던 도리안에겐 손님방을 내주었다.

-빌어먹을!

눈앞에서 맛 좋은 음식을 놓친 라스가 냉기를 가득 뿜어냈다.

-오랜만에 별관 음식인데! 다 식은 채로 먹다니! 죄악이다! 죄악!

'식어도 맛있었잖아.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안 식었으면 더 맛있었을 게 아니더냐! 너와는 참으로 맞지 않아.

'그건 동감이야.'

뭐든 최고의 맛으로 먹어야 하는 라스와 달리 암살자 생활을 한 자신은 음식의 맛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배만 채우면 그만이었다.

참 귀찮은 녀석이라고 생각할 때 방문 앞에 누군가가 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세 번의 노크. 주디엘이었다.

"들어와."

주디엘이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들어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하분 성으로 떠나기 전에 따르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을 주인으로 부르고 있었다.

"중무전에서 연락은 없었나?"

"대연무장에 있을 때 신호를 보내왔습니다."

주디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주인님이 무엇을 했고, 무엇을 얻었는지, 얼마나 강해졌는지를 알아오라고 했습니다."

"역시."

라온이 피식 웃었다. 오늘도 카룬 지그하르트가 나섰다가 망신을 당했으니, 그렇게 움직일 거라 예상했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오늘 도리안이 말했던 사건들을 그대로 전해줘."

그 이야기도 여러 가지로 각색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줘도 별문제 없었다.

"그 외에 별관에 문제는 없었나?"

"예. 레이든 지그하르트 사건 때문인지 다른 세력에서 견제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중무전 역시 한동안은 아예 관심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군."

라온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계획대로 레이든을 일방적으로 후려팬 덕분에 별관에는 시선이 떨어지고, 자신의 주목도만 높아진 것 같다.

"네가 여러 가지로 신경 썼겠네. 수고했다."

"아, 아닙니다. 다 주인님 덕분입니다."

주디엘이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대단한 사람이야.'

그는 1년 전 떠나기 전부터 지금의 상황을 예측하고 앞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를 알려주고 갔고, 그게 그대로 현실에서 일어났다. 자신은 그저 그 지시를 그대로 따랐을 뿐이다.

저 어린 나이에 완성되어가는 무력과 이미 경지에 오른 냉철함을 바탕으로 이뤄내는 전략. 라온 이라는 사람은 지그하르트에서도 손에 꼽을만한 괴물이었다.

"주인님. 혹시 연수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연수?"

"역시 모르고 계셨군요."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설명을 시작했다.

"이제 검사가 되셨으니, 가문의 무력단체에 들어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

"그 전에 한 단체를 골라서 1달 동안 연수를 받는 제도가 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대연무장에서 졸업식이 끝났을 때 몇몇 수련생이 연수에 대해 말했던 게 생각났다.

"연수는 내가 원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는 건가?"

"예. 선택식과 달리 연수는 신입 검사가 마음대로 정할 수 있습니다."

주디엘이 미리 준비했는지 품에서 서류를 꺼냈다.

"읽어보시고 결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녀가 건넨 서류를 펼쳐 읽었다. 직계들의 단체부터 방계, 외부 인사, 봉신 가문의 검대까지 지그하르트 소속의 단체들의 정보가 모두 적혀 있었다.

주로 맡는 임무, 인원, 무력 수위, 가문 내의 위치까지 많은 정보가 적혀 있어서 이것만 보고도 가문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강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정리하느라 고생했겠네. 수고했다."

라온은 서류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쭉 살핀 후 고개를 끄덕였다.

"아닙니다. 당연히 할 일이었습니다."

주디엘은 별거 아니라는 듯 눈을 내리감았다.

"흐음."

라온은 서류를 쭉 살핀 후 침대 머리맡에 내려놓았다.

"결정은 하셨습니까."

"그래."

라온은 서류의 위쪽에 시선을 주며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딱 좋은 곳이 있더라고."

* * *

다음날 새벽.

라온은 해가 뜨기 전에 5 연무장으로 향했다. 텅 빈 연무장의 찬 공기를 들이키자 기분이 고조된다. 하분 성도 나쁘지 않았지만, 역시 이곳에 서야 마음이 편했다.

심호흡하며 이 연무장에서 가장 많이 휘둘렀던 연성 검술을 펼쳤다. 도도한 흐름이 생겨난 검술의 파동이 연무장을 크게 울렸다.

"그게 기본 검술이라고 말하면 아무도 못 믿을 거다."

연성검법을 한 차례 끝냈을 때 뒤에서 감탄이 흐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온은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혹시나 해서 와봤는데, 역시나 있군. 네 녀석은 1년이 지나도 그대로구나."

버렌은 조금은 부드러워진 인상으로 씩 웃었다.

"검술 실력은 차원이 달라졌지만."

그의 녹색 눈빛에는 검술에 대한 놀라움이 깃들어 있었다.

-눈깔이가 달라진 것 같군.

'그러게.'

분위기만이 아니다. 느껴지는 무력이 한층 단단해졌다. 익스퍼트에 오른 폭발적인 기세. 그 역시 많은 시련을 이겨내며 강해진 것 같았다.

"너에게는 여러 빚이… 으억!"

"라온!"

버렌이 다가오려 할 때 연무장 문이 거칠게 열리고 루난이 달려왔다. 그녀의 돌진에 버렌이 옆으로 튕겨 나갔다.

"라온. 오랜만이야."

루난은 1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맹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눈빛과 달리 외모는 더 성숙해졌다. 처음 본다면 말을 걸기 힘들 정도로 냉정함이 깃든 얼굴이다.

무력 역시 이전보다 한 층 진일보했다. 예리함과 부드러움이 공존하는 기세가 그녀의 어깨 위로 꽃봉오리처럼 피어났다.

"이거!"

루난이 품에 꼭 안고 있던 상자를 내밀었다. 구슬 아이스크림 상자였다.

웃음이 나온다. 저 상자를 보자 다시 한번 가문에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오오! 역시 본왕의 첫 번째 시녀 아이스크림 소녀답도다. 무얼 하는 것이냐! 빨리 먹어라!

라스는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혀를 날름거렸다.

"나도 가져온 게 있어."

라온이 휴게실에 두었던 상자를 가지고 와 루난에게 내밀었다. 그녀의 것보다 더 세련된 느낌의 아이스크림 상자였다.

"이건?"

"도시에서 가져온 신제품이야."

"내…거?"

"응."

많이 얻어먹었으니, 한번은 갚아줄 때도 되어서 도시에 갔을 때 사두었다.

"아…."

루난이 상자를 받으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줄 생각만 했지, 받는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못한 것 같다.

"고, 고마워."

루난의 입매가 가늘게 올라갔다. 거의 처음 보는 미소였다.

"너희들은 여전히… 으억!"

"소꿉놀이라도 하냐?"

밀려 나간 버렌이 민망한 표정으로 다가올 때 담벼락을 넘어온 마르타에게 깔려서 바닥에 엎어졌다.

"나이가 몇 갠데 그러고 놀고 있냐. 앙?"

마르타는 흑단 같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코웃음을 쳤다. 왕족처럼 고귀함이 물씬 풍기는 분위기지만 상스러운 말투는 여전했다.

'이 녀석도 강해졌군.'

마르타의 무력은 버렌이나 루난이상으로 성장해 있었다. 부드러움은 전혀 없이 오로지 강대한 기세인 것을 보니 성격도 그대로인 모양이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너희는 너무 머리가 꽃밭…."

라온은 마르타가 인상을 찌푸리며 주절거릴 때 구슬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이걸 왜…."

"먹으라고."

"…윽."

마르타는 싸울 때보다 더 좋지 않은 표정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초코 아이스크림 하나를 가지고 뒤로 물러섰다. 꼭 야생동물에게 먹이를 줬을 때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어때?"

"마, 맛있… 아니 괜찮네."

그녀는 표정이 보이지 않게 뒤를 돈 채로 아이스크림을 먹었지만, 귓볼이 조금 빨개진 걸 감추지는 못했다. 굉장히 마음에 든 느낌이다.

"응. 응."

루난 역시 행복함이 가득 찬 눈빛으로 구슬 아이스크림을 입에 쏙 넣고 있었다.

-남 좀 그만 챙기고 좀 먹어라! 어제도 다 식은 음식만 먹었지 않느냐!

라스가 팔을 마구 휘저으며 냉기를 일으켰다. 가만히 있는다면 이곳에 냉기의 해일을 일으킬 기세였다.

'알겠다. 알겠어.'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아이스크림을 보았다. 남은 네 개 중에 무엇을 먹을지 고민할 때 라스가 펄쩍 뛰며 파란색 아이스크림을 가리켰다.

-민.트.초.코! 절대 민크초코해!

'....'

이 먹보가 정말 마왕이 맞는가 하는 의심이 다시 한번 머리를 가득 채웠다.

'하아….'

한숨을 내쉬며 민트초코를 입에 넣었다. 역시나 그리 좋지 않다. 시원하긴 한데, 이걸 왜 먹는지 잘 모르겠다.

-크으, 이 맛에 산다….

반면 라스는 마약이라도 한 듯 눈동자가 떨며 히죽거렸다.

"음, 너희들 어디로 연수를 갈지는 결정했나."

버렌은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일어섰다. 밀리고, 깔렸는데도 별 표정 변화가 없다. 과거에 비해 확연히 유해진 성격. 강해진 건 무력만이 아니었다.

"뭘 물어. 당연히 아버지께 가지."

"나도."

아이스크림을 먹던 마르타와 루난이 동시에 대답했다.

"그럴 줄 알았다. 나도 중무전으로 가니까. 그럼 넌 어디로 갈 거냐."

버렌의 질문에 루난과 마르타도 아이스크림을 씹던 걸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나는…."

"라온!"

"진짜 있네!"

"아하하하! 하나도 안 변했어."

라온이 입을 열려고 할 때 연무장 문이 열리고 다른 검사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들은 그간의 회포를 풀겠다는 듯 라온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말을 걸어왔다.

북적거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 그리고 그들의 성장과 반가움이 그대로 전해져와서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어느새 5 연무장의 검사들이 모두 모였고, 라온을 중심으로 여러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후우우웅!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연무장 담벼락 위로 치솟은 녹색 바람과 함께 리메르가 나타났다.

"너희들은 지치지도 않냐. 오늘은 쉬라고 했잖아."

"어쩌다 보니 와졌어요."

"라온이 나올 것 같기도 했고."

"근데 진짜 있더라구요."

수련생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리메르를 보며 헤헤 웃었다.

"어? 43명 다 있네. 그럼 오늘 끝내자. 내일 또 오기 귀찮아."

리메르는 수련생들의 숫자를 세고 난 후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뭘 끝내요?"

"너희들 연수받을 단체 정하는 거. 그게 내 마지막 일이거든."

그는 휴게실로 가다 말고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건 내일 서류로 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너무 대충대충인데…."

"내가 대충하는 거 하루 이틀이냐? 진짜 선택식도 아니니까. 그냥 해. 어차피 연수생에게 어려운 일 안 시켜."

리메르는 시끄럽다고 손을 저으며 불만을 일축했다. 세계에서 가장 게으른 엘프다웠다.

"지금부터 내가 단체를 부를 테니까. 원하는 곳이 있으면 거수하도록. 먼저 휘검단."

그는 뒷주머니에서 구겨진 종이를 꺼내 지그하르트의 단체를 하나씩 부르기 시작했다.

"어휴!"

"진짜 자기 마음대로라니까."

"뭐, 결정하긴 했지만."

수련생들은 불만을 가지면서도 원하는 단체에 손을 들어 올렸다.

루난과 마르타는 말했던 대로 그녀들의 아버지가 장으로 있는 검대로 들어갔고, 도리안은 보급을 담당하는 풍위대를 골랐다.

계속해서 단체가 호명되며 남은 사람은 라온과 버렌뿐이었다.

"다음은 중무전."

"예!"

카룬 지그하르트가 수장으로 있는 중무전이 불리자마자 버렌이 바로 손을 들어 올렸다.

"어? 라온 너도?"

"헉! 네가 왜?"

리메르와 버렌은 당당하게 거수하고 있는 라온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중무전이라면 네놈을 싫어하는 놈이 있는 곳이잖느냐. 왜 거길 가려는 거냐.

라스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어 줄 뿐이니까.'

라온의 두 눈에 진한 광채가 어렸다.

연수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결정했다.

날 가장 싫어하는 카룬이 운영하는 중무전에 가서 그들의 훈련 방법을 쪽쪽 빨아먹고 오겠다고.

제153화

버렌 지그하르트는 당당하게 손을 들고 있는 라온을 보며 눈을 세게 비볐다.

'내가 잘못 봤겠지.'

라온이 바보도 아니고, 자신을 싫어하는 게 뻔히 보이는 중무전에 연수를 신청할 리가 없다. 잘못 보았다고 생각하며 다시 눈을 떴다. 하지만 그대로다. 라온은 당당하게 손을 들고 있었다.

"너 뭐 하는 짓…억!"

라온에게 이유를 물어보려고 할 때 옆에서 루난과 마르타가 치고 들어와 또 바닥으로 밀려났다.

"라온. 거기 가면 안 돼."

"너 미쳤어? 거기가 어디라고 가!"

두 사람은 라온을 말리려는 듯 그의 손을 억지로 내렸다.

"이 정신 나간 자식들아! 난 보이지도 않는 거냐!"

버렌은 가문에 복귀한 이후 처음으로 화를 냈다. 어제부터 3번을 치이다 보니 마이코 상회주 레니튼에게 배웠던 안정된 마음가짐이 먼지처럼 흩어졌다.

"꺼져!"

악을 지르며 라온에게 달라붙은 루난과 마르타를 어깨로 밀어버렸다.

"응?"

"이게 미쳤나!"

"미친 건 너희들이지! 멧돼지도 아니고 왜 자꾸 들이박는 건데!"

"멧돼지는 너야."

"앙? 뒤지고 싶어?"

"망할 것들이!"

세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라온."

리메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너 정말 중무전으로 갈 거냐?"

"예."

라온은 결정을 바꿀 생각이 없는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재밌겠는데."

리메르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종이에 라온의 이름을 적었다.

"자, 잠깐 멈춰!"

버렌이 으르렁거리는 루난과 마르타의 틈을 비집고 나와 라온의 어깨를 잡았다.

"내가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다만 다시 생각해라. 중무전은 널 환영하지 않아."

진심 어린 충고다. 아버지는 대놓고 라온을 싫어하신다. 중무전에 간다면 분명 좋은 꼴은 보지 못할 것이다.

"라온. 나랑 가자."

"가서 얻어터지지 말고, 이쪽으로 오던가."

루난과 마르타도 라온이 걱정되었는지 손을 뻗었다.

"고맙지만 괜찮아."

라온은 루난과 마르타에게 손을 저었다.

"그리고 네가 그런 말을 하니 확실히 웃기긴 하네."

그는 벙쪄있는 버렌에게 고개를 돌리며 피식 웃었다.

"장난이 아니란 말이다! 연수는커녕 괴롭힘만 당할 수도 있어!"

"걱정 마."

라온이 입꼬리가 부드러운 호를 그렸다.

"그냥 당하지만은 않을 테니까."

* * *

"전주님!"

중무전의 살림을 담당하는 총관 우렉이 당황한 발걸음으로 카룬의 집무실을 들어갔다.

"내가 한동안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중무전주 카룬 지그하르트의 목소리가 낮게 울린다. 어제 리메르와 라온에게 망신을 당했던 짜증이 남아 있는 상태인지, 표정이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죄송하지만 중요한 일입니다."

우렉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가져온 서류를 카룬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신입 검사 연수 서류? 이딴 게 중요하다고?"

"여길 보십시오. 라온 지그하르트가 연수 장소로 저희 중무전을 선택했습니다. 이놈 제정신이 아닙니다!"

"…이 개새끼가!"

카룬이 주먹을 움켜쥐자, 그의 손에 쥐여 있던 종이가 회색 재가 되어 휘날렸다. 지진이 난 듯 중무전 전체가 울렁이기 시작했다.

"이 자식. 저희를 무시하는 게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중무전을 선택할 리가 없습니다!"

우렉이 이를 바득 갈았다. 카룬이 여러 번 싫어하는 티를 냈음에도 연수 장소로 이곳을 결정한 건 무시한다는 뜻이 확실했다.

"어떻게 할까요? 계속 신경을 쓰시느니, 이 기회에 그냥….

우렉이 손날을 세워 본인의 손목을 그었다. 라온을 폐인으로 만드냐고 묻는 제스처였다.

"멍청한 놈."

카룬이 우렉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지금 그 쥐새끼는 가문 전체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아버지께서도 그놈을 따로 부르셨을 정도인데, 여기서 불구로 만들자고? 여론이 어떻게 나올지 생각이나 하고 떠드는 것이냐!"

"죄,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우렉이 어깨를 움찔거리고서 다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역시 대단한 분이야.'

카룬은 분노한 와중에도 상황을 한 면에서만 보지 않고, 여러 각도에서 살폈다. 지그하르트의 대형 세력 중 하나인 중무전을 맡을 자격이 있는 남자였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평범하게 연수시킨다면 다른 검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겁니다."

"사람을 죽이는 방법에 꼭 칼만 있는 건 아니지."

"아!"

"놈에게 중무전 훈련의 무서움을 알려주어라. 대놓고 망신시켜서 놈이 별 게 아니라는 걸 퍼뜨려."

"알겠습니다."

"그리고 놈의 정보를 모아라. 오러 없이 어느 정도로 싸울 수 있는지, 현재 무력의 한계는 어느 정도인지, 약점은 무엇인지 전부 파악해."

카룬의 눈동자가 섬뜩한 빛으로 번쩍였다.

"예! 그런데 그 방법은 어떻게…헉!"

"그것까지 내가 알려주어야 하나?"

그의 목젖이 야수처럼 으르렁댔다.

"아, 아닙니다!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는 부러질 정도로 허리를 굽히고 집무실을 벗어났다.

"후우욱…."

"총관님."

우렉이 이마에서 줄줄 떨어지는 식은땀을 닦으며 복도를 나왔을 때 머리가 깔끔하게 벗겨진 중년인이 옆으로 다가왔다. 중무전의 훈련을 담당하는 훈련교관 레프였다.

"어떻게 되셨습니까."

"그 망할 자식에게 중무전의 무서움을 보여주라고 하셨다. 다시는 이곳을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망신을 주고, 놈의 무학에 대한 정보를 모아."

"알겠습니다!"

레프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방법은…."

"내가 그것까지 알려줘야 해?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 할 거 아니야! 왜? 밥도 떠먹여달라고 하지?"

우렉은 카룬에게 들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레프는 경례를 하듯 손을 올리고서 밖으로 뛰어갔다.

"그 망할 새끼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인지."

부하에게 짬을 때린 우렉이 짜증이 가득 찬 표정으로 이를 바득 갈았다.

"걸리기만 해봐 아주 곤죽으로 만들어주지."

* * *

사흘 뒤.

신입 검사 연수가 시작되었고, 라온은 중무전 연무장에 들어와 있었다.

'넓군.'

중무전 연무장은 대연무장정도는 아니어도 5 연무장의 2배는 될 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개인 훈련장이나, 연공실만이 아니라, 최신 훈련 기구들도 가득해서 단련하기 좋아 보였다.

연무장 곳곳에서 훈련하고 있는 검사들의 수준도 높다.

전마대와 전뢰단이 빠졌는데도 한 명 한 명의 성취가 뛰어났다. 괜히 가장 용맹한 무력 단체라는 소리를 듣는 게 아니었다.

"결국 왔구나."

뒤에서 다가온 버렌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널 여기서 보지 않기를 바랐는데."

그는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는 듯 눈빛이 가라앉아 있었다. 가끔 폭발하긴 하지만 성격 자체가 신기할 정도로 부드러워졌다.

"설마 죽이겠어."

"그러진 않겠지만, 분명 널 여러 방향으로 괴롭힐 거다."

"그렇겠지."

그걸 위해서 여기에 온 거니까.

라온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강한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지만…."

"모두 정렬!"

버렌이 다시 말을 하려고 할 때 덩치가 큰 민머리의 중년인이 단상으로 올라갔다. 검을 휘두르던 중무전의 검사들이 훈련을 멈추고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훈련 교관님을 뵙습니다!"

중년인은 그들의 인사를 손으로 받으며 라온과 버렌을 굽어보았다.

"중무전에 온 것을 환영한다. 신입 검사들."

그는 차가운 눈빛을 뿜어내며 말을 이었다.

"내 이름은 레프. 중무전의 훈련교관이다. 이곳에 신분 따위 없다. 전주님의 제자나, 아들이라고 해도 열외는 없으니 각오하도록."

공평해 보이는 말과는 달리 서늘한 눈빛을 쏘아내는 건 오직 라온에게만이었다.

"그럼 자기소개부터 하도록."

"예!"

버렌이 먼저 앞으로 나왔다.

"버렌 지그하르트입니다. 이번 연수에서는 중무전주님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을 떼고, 신입 검사로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많은 지도를 부탁드립니다!"

"오오오오!"

"와아아!"

주변에 모여든 검사들이 박수를 보내며, 환호를 터트렸다.

"다음."

"예."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버렌이 있던 자리로 갔다.

"라온 지그하르트입니다. 지그하르트 무력 단체 중 가장 용맹한 곳이 중무전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용맹을 직접 느껴보고 싶어서 지원했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평범한 인사말이었지만, 환호는커녕 불편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난다.

중무전주 카룬과 여러 번 부딪쳤기 때문에 존재 자체를 싫어하는 것 같았다.

-아예 적진이로구나.

라스는 마음에 드는 공기라며 키득거렸다.

-까불다가 얻어맞는다면 더 시원하겠노라.

'아쉽게도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라온은 사납게 쏘아져 오는 검사들의 기세들을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슬로스의 압도적인 기파에 비하면 이 정도는 불쏘시개만도 못했다.

"음."

"이런…."

"아예 안 먹힌다고?"

중무전의 검사들은 평온하게 서 있는 라온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거나, 눈매를 좁혔다.

"그럼 훈련을 시작하지."

레프가 단상 아래로 내려와 밑에 있는 커다란 상자를 열었다. 푸른빛으로 번들거리는 수갑이 가득 차 있었다.

"이건 착용자의 오러를 통제하는 수갑이다. 본래 강력한 범죄자들을 잡아두기 위한 물건이지만 우리는 이 수갑을 이용해서 육체 단련을 진행한다. 이런 귀한 물건을 수련에 사용하는 곳은 우리 중무전뿐이니 영광으로 알도록."

그는 수갑을 가지고 와서 직접 라온의 손목에 채워주었다.

"이 수갑은 단단하기 그지없는 청주석으로 만들었다. 무투가도 맨손으로는 부술 수 없으니 쓸데없는 짓은…."

캬앙!

레프가 설명을 계속하려고 할 때 쇳덩이가 부서지는 듯한 시원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

돌아보니, 방금 라온의 손목에 채워준 팔찌가 두 조각으로 갈라져 있었다.

"뭐, 뭐야! 이게 왜 부서져!"

"그냥 좀 만지니까 부서지던데요?"

라온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말이 돼? 그건 청주석으로 만든 쇳덩이란 말이다!"

"진짜 그런 걸 어떻게 합니까."

"끄으윽…."

레프가 턱을 떨었다. 청주석은 검을 만들 때도 사용하는 단단한 광석이다. 오러가 통제된 상태에서 손으로 저 두꺼운 쇳덩이를 부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다시. 다시 해봐."

그는 마른침을 삼키고서 라온에게 두 번째 청주석 수갑을 채웠다. 힘이 트롤이나, 오우거가 아닌 이상 이걸 부술 수는 없을 것이다.

"흠!"

라온은 수갑을 쓱 문지르다가 그대로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수갑의 접합부가 종잇장처럼 구겨지더니 그대로 깨부숴져 땅에 떨어졌다. 그는 왼쪽 손목에 있는 수갑도 비슷한 방법으로 뭉개버린 뒤 바닥에 던졌다.

"어…."

레프가 입을 떡 벌렸다.

'이, 이게 말이 돼?'

라온은 길쭉길쭉한 정형적인 검사의 체격을 가졌다. 무투가도 맨손으로는 부수지 못했던 저 수갑을 어떻게 깨부순 건지 모르겠다.

"아직도 못 믿으시니, 더 해볼까요?"

그는 씩 웃으며 수갑을 보관하는 상자로 다가가 양손으로 수갑을 깨부수기 시작했다.

"그, 그만!"

레프가 다급하게 달려갔지만, 수갑은 이미 라온의 손에서 생을 다한 채 조각이 나 버렸다.

"그거 더럽게 비싼 거라고!"

* * *

라온은 새로 착용한 청주석 수갑을 보며 옅게 웃었다.

'오러는 막지만, 근력을 막을 수는 없지.'

청주석 수갑은 단전에 있는 오러를 움직일 수 없게 만들지만, 기본적으로 가진 근력을 억제하지는 못한다.

자신의 근력과 민첩성은 마스터인 밀랜드에게도 인정받을 정도로 규격을 벗어난 상태다.

대련 이후에도 꾸준히 수련했고, <나태>의 잠만 자도 강해지는 능력이 계속 운용되었기 때문에 지금 자신의 힘은 대형 몬스터에게도 밀리지 않을 정도였다.

청주석 수갑이 아무리 단단하다고 해도 접합부를 짓누르면 얼마든지 깨부술 수 있었다.

"끄윽!"

"미친…."

"뭐, 뭐 하는 놈이지?"

중무전 검사들은 경악한 눈동자로 자신의 손을 힐끔거렸다.

"제, 젠장…."

훈련 교관 레프는 조각이 난 세 쌍의 청주석 수갑을 보며 넋이 나간 얼굴이 되었다. 비싸다더니, 정말인 모양이다.

"힘으로 부쉈을 리가 없어."

"손기술이겠지."

"하분 성에서 잡기를 배워 온 건가?"

다만 레프와 검사들은 자신이 힘으로 수갑을 부순 게 아니라, 어떤 기술을 사용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당연하지! 오러가 통제된 인간의 힘으로 쇳덩이를 어떻게 깨부수겠느냐!

라스는 능력치의 힘으로 주목을 받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이를 갈았다.

'능력치의 힘이 대단하긴 해.'

-흠! 사실 본왕의 힘은 이 정도가 아니니라.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그저 손을 대는 것만으로 마계에서 가장 큰 산을 무너뜨렸던 ….

'훈련은 뭘까.'

-이 자식아! 좀 들어! 네놈의 그 잘난 힘은 전부 본왕 때문이라고!

꽥 소리를 지르는 라스를 무시하고, 한숨을 푹 내쉰 뒤 일어서는 레프를 보았다.

"후, 훈련을 계속한다. 지금부터 몸풀기로 연무장을 달린다. 선착순 20명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기합을 받을 테니, 전력을 다해서 뛰는 게 좋을 것이야."

그는 준비하라는 듯 검사들을 차례로 시선을 주다가 라온에게서 멈춰 섰다.

"넌 그 수갑 부수지 마라. 절대로."

"그러죠."

라온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끄응, 뛰어!"

레프는 입술을 깨물며 자신을 노려보다가 손을 들어 올렸다. 모여 있던 검사들이 들소처럼 달려 나갔다.

"음?"

라온도 그 신호를 받고 뛰었지만, 앞과 뒤 양옆이 건장한 검사들에게 막혀서 나아갈 방법이 없었다.

퍽! 뻐억! 빠악!

그들은 뛰는 척하면서 어깨와 팔, 팔꿈치로 자신의 몸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아, 미안."

"작아서 안 보였어."

"그런 말을 하면 쓰냐."

검사들은 낄낄거리고 비웃으면서 계속 전신을 두드렸다. 오러를 사용하지 못한다고 해도 단련된 검사들의 육체가 연달아 부딪쳤기 때문에 몸이 휘청였고, 통증도 상당했다.

"아이고, 미안하다."

녹색 머리 검사 하나가 팔꿈치로 목 부분을 세게 치고서 히죽 웃었다. 노려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고서 상위 그룹으로 도망치듯 뛰어갔다.

"저…."

상위 그룹에 있던 버렌이 뒤를 돌아보며 눈을 부릅떴다. 설마 이렇게 유치한 짓을 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괜찮으니 먼저 가."

이런 거라면 절대 안 지니까.

라온은 버렌에게 서늘한 미소를 지어주고서 속도를 낮췄다. 팔꿈치로 허리를 노리는 빨간 머리 검사의 가슴을 어깨로 찍어버렸다.

"끄허헉!"

빨란 머리 검사는 해머에 후려 맞은 듯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뭐, 뭐야…."

"아니 이게 무슨…."

옆과 뒤를 막고 있던 검사들은 말이 안 되는 광경을 보고 눈동자를 떨었다.

당연한 반응이다. 자신의 키와 체격이 많이 좋아졌다고 해도 조금 전 덩치보다는 작았으니까. 하지만 상태창 능력치의 보정을 받는다면 이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익!"

우측에 있던 검은 피부의 검사가 몸 크기로 짓누르려는 듯 어깨를 밀쳐왔다.

"그걸로는 안 될 텐데."

"커흑!"

차게 웃으며 놈과 어깨를 맞부딪쳤다. 근력이 한순간에 폭발하며 검은 피부의 검사가 벽에 부딪힌 참새처럼 찌그러져 머리가 바닥에 꽂혔다.

"이제 안 쳐?"

라온은 계속 건드려왔던 놈들을 차례로 훑어내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으음…."

"치, 치다니 무슨…."

두 명이나 나가떨어졌기 때문인지 검사들의 눈동자가 태풍을 맞은 돛단배처럼 떨렸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이 탁 풀린 상태였다.

"안 오면 내가 가주지."

라온이 속도를 높이며 지금까지 자신을 건드렸던 검사들을 어깨와 팔꿈치로 후려쳤다.

퍼버버벅!

마스터가 인정한 육체능력이 열화처럼 폭발하며 주변에 있던 검사들을 휩쓸었다. 끊임없이 육체를 단련한 익스퍼트 급의 검사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시비를 걸던 검사들을 때려눕히고도 라온은 멈추지 않았다. 길을 막고 있던 검사들까지 모조리 날려버렸다.

"말했잖아."

라온은 멍하게 다리만 움직이는 버렌을 보며 빙긋 웃었다.

"괜찮다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