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레프는 바닥에 찌그러진 스무 명의 검사들을 보며 턱이 빠질 정도로 입을 벌렸다.
'저, 저 괴물은 뭐야!'
라온은 체질 때문에 어려서부터 많은 영약을 먹어서 오러의 질과 양이 뛰어나게 되었다는 정보가 있었다.
오러만 막아놓으면 아무것도 못 하리라 생각해서 청주석 수갑을 준 것인데, 저놈은 수갑을 끼고도 본인보다 훨씬 큰 검사들을 힘으로 찍어 눌렀다.
키가 190 내외인 검사들이 170 후반인 라온에게 공처럼 튕겨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게 현실인가 싶었다.
"미친…."
라온은 결국 주변에서 있던 검사들만이 아니라, 길을 차단하던 검사들까지 후려 패버리고, 상위 그룹까지 파고들었다. 어이가 없어서 자신도 모르게 육성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그, 그만! 그만 달려! 라온!"
레프가 앞서 달리던 녹발 검사를 팔꿈치로 후려치려던 라온을 불렀다.
뻐어어억!
하지만 라온은 못 들은 척 팔꿈치로 끝까지 내질렀다. 뒤통수에 팔꿈치가 박힌 녹색 머리 검사가 꽥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자빠졌다.
"아, 재밌네. 이런 구보는 처음이지만 즐거워."
라온은 설원에 깔린 낙엽처럼 축 늘어진 검사들을 둘러보며 빙긋 웃었다.
"다 끝났는데. 다음은 뭐죠."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쪽을 보며 들뜬 눈빛을 보냈다.
"크으, 이쪽으로 와라."
레프는 입술을 질겅 씹고서 검사들과 라온을 데리고 연무장 우측으로 갔다. 검을 쥐고 있는 사람 형태의 인형 여덟 개가 원을 그린 채로 배치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다수의 상대와 싸울 때를 대비한 전투 훈련이다. 직접 보여주지."
그는 가운데 있는 버튼을 누르고서 인형들 사이로 들어갔다.
끼기기긱!
인형들이 무언가 비틀린 듯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만 소리와 다르게 인형들의 움직임은 기름칠한 듯 매끄러웠다.
치이잉!
검을 쥔 인형들의 손이 쾌속하게 움직인다. 평범한 움직임이 아니라, 제대로 된 검술의 흐름이 담겼다.
후우우웅!
인형 여덟 개가 동시에 움직였지만 서로 방해하지 않고, 동시에 레프의 급소를 노렸다.
"흥."
레프는 바위처럼 단단한 검술과 무거운 보법을 펼치며 인형들의 공격을 차례로 막아냈다. 10분 정도가 지나자 인형들이 저절로 멈춰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런 식으로 여러 방향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방어하는 훈련이다. 라온. 할 수 있겠나?"
"예."
라온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레프가 인형들의 중심에서 서서 수련검을 뽑았다.
'멍청한 놈.'
레프가 차게 웃으며 인형들의 난이도를 최고로 올렸다. 익스퍼트라고 해도 오러가 없다면 얻어맞을 수밖에 없는 높은 수준이었다.
"시작한다."
마지막 버튼을 누르자 인형들이 이전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이며 라온에게 검을 내질렀다.
"이것도 재밌겠네."
라온의 눈동자를 시뻘겋게 불태우며 검을 내리쳤다. 소름 끼치는 파공음이 터지며 인형의 검과 대가리가 와사삭 쪼개졌다.
"어억…."
그게 전부가 아니다. 라온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인형이. 특수 제작하여 하나에 금화 200개가 넘는 인형들이 박살 나기 시작했다. 일격에 부서져 버리니 난이도를 올려도 의미가 없었다.
뿌드득!
두 번째 인형의 몸이 갈대처럼 꺾이고, 세 번째 인형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머, 멈추…."
멈추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너무 놀라서 입이 제대로 벌어지지 않았다. 잠시 말을 못 한 그 짧은 순간에 라온은 인형 여덟 개를 모조리 부수고 이마를 쓸어내렸다.
"이거 재밌는데요."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보았다.
"더 없습니까?"
"크윽!"
그 잘생긴 얼굴을 후려치고 싶었다.
* * *
중무전 총관 우렉은 본인의 널찍한 사무실 책상에서 꽃을 다듬고 있었다. 덩치나 인상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그의 취미가 바로 꽃꽂이였다.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꽃다발을 보고 있자면 전주에게서 쏟아지는 막말과 무능한 부하들에게서 올라오는 스트레스가 모두 잊혀졌다.
특히나 지금은 누구에게도 방해를 받지 않는 점심 직전의 시간. 이 순간을 소중하게 간직하며 섬세하게 꽃을 다듬고 꽃병에 배치했다.
"이건 제법…."
"총관님!"
우렉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다고 생각할 때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이익…."
그 소음 때문에 손이 흔들려 딱 맞게 조화시켰던 꽃의 배치가 어질러졌다.
"레프! 이 미친놈아! 노크는 하고 문을 열어야 할 거 아니냐!"
"아,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굉장히 급한 일이라…."
레프는 식은땀을 닦으며 고개를 숙였다.
"급한 일? 급한 일이 뭔데. 별거 아니면 넌 뒈질 줄 알아."
우렉은 혀를 차며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말씀하셨던 라온 있지 않습니까."
"그놈이 왜? 너무 심하게 건드린 건 아니겠지."
가주나 다른 대주들의 시선이 라온에게 쏠려 있기에 심하게 패서는 곤란하다. 지금은 적당히 망신시키는 정도면 충분했다.
하지만 들려온 대답은 그의 상상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그 새끼 파괴왕입니다!"
레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전부 부수고 다닌다구요!"
제154화
"그게 무슨 헛소리야!"
우렉이 꽃병을 옆으로 치우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찾아와 파괴왕 따위의 소리를 하니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 망할 새끼가 연무장에 있는 물건들을 죄다 부수고 있단 말입니다! 그냥 손 대는 것마다 부서져요!"
레프가 주먹에 힘을 주고 책상을 내리쳤다.
"건드리기만 하면 망가지니, 파괴왕이라는 말밖에 그놈을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좀 진정해!"
우렉은 옆에 둔 꽃병을 다시 품에 안고서 레프를 뒤로 밀었다.
"수련장 물품을 좀 부수는 정도야 큰 문제 없잖아. 수련검이나, 수련복 몇 개 망가진 게 여기까지 찾아올 일이야?"
"수련검 몇 자루 부러졌다고 제가 여길 왜 오겠습니까!"
레프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쿵쿵 쳤다.
"그 미친놈이 청주석 수갑 3개를 깨 먹고, 팔검인형을 모조리 망가뜨렸다구요!"
"뭐?"
우렉이 품에 안은 꽃병을 떨어뜨리고, 벌떡 일어섰다. 깨진 꽃병을 돌아보지도 않고 눈을 부라렸다.
"바, 방금 뭐라 그랬어. 청주석 수갑 3개에 팔검인형 전부?"
"예! 전부 부서졌습니다!"
"그게 왜 부서져. 설마 수갑 안 씌운 거야?"
"아, 아뇨. 씌웠는데 힘인지 기술인지 그냥 다 부숩니다. 파괴왕이라니까요!"
"이런 미친…."
청주석 수갑은 한 쌍에 금화 100개고, 팔검인형은 금화 200개가 넘는다. 돈을 잡아먹는 귀신 같은 장비들이지만 그만큼 단단하다. 그런 물건들이 부서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 금화 1900개. 금화 1900개가 날아갔다고?"
우렉의 눈동자가 썩은 달걀처럼 탁하게 풀렸다.
"저기 그게 다가 아니라…."
"가, 가자. 내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어!"
그는 턱을 떨면서 연무장으로 향했다.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레프가 그 뒤를 따랐다.
"아…."
우렉은 연무장에 도착하자마자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연무장 우측에 설치해둔 팔검인형이 말 그대로 개박살 나 있었고 단상 위에는 파란빛을 뿜어내는 청주석 수갑들이 마른 낙엽처럼 바스러져 있었다.
문제는 레프가 말한 게 다가 아니었다.
"검적도 쪼개졌잖아!"
검술의 어긋난 균형을 물방울로 알려주는 검술 훈련 도구 검적이 나뭇가지처럼 분질러져 있었다. 저것도 하나에 금화 500개가 넘는 돈 먹는 하마 같은 장비였다.
"저 녀석들은 왜 다 누워 있는 건데!"
연무장 바닥에 중무전 소속 검사들 패잔병처럼 드러누워 있었다. 상태를 보니 부상을 당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게 다 무슨 일이냐고!"
"저, 전부 라온이 한 겁니다."
"아까는 이런 말 없었잖아!"
"제가 말씀드리기 전에 뛰쳐나가시지 않았습니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훈련할 때…."
레프는 그동안 일어났던 일을 모조리 설명해주었다.
"크으윽!"
우렉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총관이란 한 단체의 안주인과도 같은 존재. 돈과 사람 모두를 관리하기에 여기서 깨진 돈과 부상자는 전부 자신의 책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 새끼 지금 어디 있어! 당장 찾아서… 헉!"
주먹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라온을 찾으려 할 때 쇳덩이가 꺾이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뭐, 뭐야!"
소리가 난 곳을 보자 훤칠한 금발 사내가 녹색 구체를 풍선처럼 터트리고 있었다.
"크허헉! 금화 400개짜리 밸런스 볼이!"
저 구체는 육체의 밸런스를 잡아주는 굉장히 귀한 단련용 장비다. 고위 마법사의 마나가 깃들어 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든 물건인데, 그게 아예 뭉개졌다.
하지만 저 미친놈은 멈출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뿌드드득!
라온이 밸런스 볼 옆에 있는 대형 방패에 손을 대자, 방패가 부드러운 소고기 육포처럼 뜯겨나갔다.
"아악! 금화 500개짜리 방패가!"
저 방패는 오러를 넣으면 검기나 검사까지 막아낼 수 있는 특별 제품이다. 검기 훈련용으로 산 물건이 저 괴물의 손아귀에서 과자처럼 아작이 나 버렸다.
라온은 아직도 성에 안 차는지 다음 제물을 찾아 뚜벅뚜벅 움직이고 있었다.
"저 새끼 잡아! 당장 잡으라고!"
* * *
라온이 훈련장 구경이라는 명목하에 대놓고 물건들을 부수고 있을 때 뒤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훈련 교관 레프와 덩치가 큰 중년 남성이었다.
'총관 우렉이로군.'
주디엘이 주었던 중무전 인명부에 있던 남자다. 중무전의 살림을 담당하는 우렉이 레프와 함께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너, 너 뭐 하는 놈이야! 이걸 왜 다 부숴!"
우렉이 바닥에 있는 방패를 보며 악을 질렀다.
"이게 얼마짜리인지 알기나 해! 어? 오늘 네가 부순 것만 치면 금화 3000개가 넘어!"
"연무장 구경을 하라고 하시길래 조금 만졌을 뿐입니다."
"누가!"
"뒤에 계신 분이요."
라온이 우렉의 뒤에 있는 레프를 가리켰다.
"이익!"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까 분명 멈추라고 해, 했습니다."
"닥쳐!"
우렉이 죽일 듯이 인상을 구기고, 레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리 구경하라고 했다 해도 넌 중무전 재산에 큰 손해를 입혔다. 그걸 배상해야…."
"잠시만요."
우렉의 입에서 예상대로의 말이 나왔다. 라온이 담담한 눈빛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전에 몇 가지 질문 좀 드리겠습니다. 중무전은 지그하르트를 대표하는 무력 단체 맞죠?"
"당연하다! 전마대와 전뢰단을 보유하고 있는 중무전은 최강이다!"
"그런 최강의 중무전이 싸구려 물품을 쓰시진 않겠죠?"
"물론! 이 연무장에 있는 물건 중 싸구려는 하나도 없다! 전부 최고급이지."
"마지막으로 제가 힘이 좋아 보이시나요?"
"힘? 근육도 제대로 잡히지 않은 놈이 무슨 힘이 있다는 것이냐!"
우렉은 라온에게 분노한 상태였기 때문에 당연히 좋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죠. 그러면 사기당하셨네요."
"사, 사기?"
"그게 무슨 소리냐!"
우렉과 레프가 사기라는 단어에 눈을 부릅떴다.
"이 물건들 비싸 보이기만 하지. 내구성이 바닥이잖아요."
라온은 씁쓸한 표정으로 손에 쥐고 있던 투명한 방패를 바닥에 던졌다.
"설마 지그하르트 최강의 단체 중 하나인 중무전에서 사용하는 물건이 이제 막 검사가 된 제가 부술 정도로 싸구려는 아닐 거 아니에요. 말씀하신 대로 전 다른 검사들에 비해 팔이 얇아서 힘도 없고, 오러도 막혔는데."
팔을 들어 올려 손목에 차고 있는 청주석 수갑을 보여주었다.
"버렌. 내가 이거 벗지 않은 건 너도 봤지?"
"어? 아, 그, 그렇지."
버렌은 갑자기 불렸지만, 솔직하게 사실을 말했다. 표정을 보니 저 미친놈 또 시작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보세요. 오러도 쓰지 않은 제가 어떻게 이런 단단한 물건들을 부수겠습니까. 다 사기당하신 겁니다. 사기당한 사실을 알려드렸으니, 오히려 제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아…."
"어…?"
우렉과 레프의 입이 떡 벌어졌다. 두 사람은 이런 대답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는지 아예 눈이 풀려버렸다.
"아, 아니 잠깐! 그게 아니라…."
"의심당해서 기분이 좀 상했지만, 괜찮아요. 첫날이니까 참겠습니다."
라온은 가볍게 손을 흔들고 물러났다. 우렉과 레프는 목각인형이라도 된 듯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궤변이다! 저거 다 네가 힘으로 부순 거잖아!
'맞아. 금방 미친 소리라는 걸 알게 되겠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들도 자존심이 있으니, 물어내라는 소리를 다시 하지는 않을 거야.'
-설마 처음부터 이걸 노렸나?
'주디엘이 저들의 성격에 대해서도 알려줬으니까.'
이곳에 오기 전 주디엘에게 간부들의 성격과 취향이 적힌 서류를 받아보았다.
총관 우렉은 돈 이상으로 자존심을 챙기는 타입이다. 다른 검사들 앞에서 한 번 물러섰으니, 다시 배상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진 않을 것이다.
"크으, 뭣들 하는 거냐! 부서진 물건들을 다 치워!"
"아, 예!"
우렉의 지시에 멍하니 서 있던 검사들이 깨진 장비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흠."
라온은 스탠드에 걸터앉으며 은근한 미소를 흘렸다.
'절반 이상은 망가뜨린 거 같은데.'
아직 기구는 많았지만, 비싸 보이는 건 대부분 부쉈으니, 손해가 막심할 것이다. 나중에 카룬이 어떤 표정을 할지 궁금하여 웃음이 나왔다.
"이게 목표였나."
버렌이 옆자리에 앉으며 피식 웃었다.
"중무전의 기구들을 부수기 위해서 온 거냐?"
녀석은 모든 걸 눈치채고 있음에도 흥분하지 않았다. 약간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뿐이다.
"그것 때문에 오진 않았지."
"다른 목표가 또 있다는 뜻이로군. 하긴 네가 고작 물건을 부수기 위해서 왔을 리가 없겠지."
버렌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너무 망가뜨리지는 말고 적당히 해라.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걱정해주는 거야?"
"거, 걱정은 무슨! 내가 쓸 장비까지 부술까 봐 말한 것뿐이다!"
그는 오랜만에 얼굴을 뻘겋게 물들인 채 손을 휘저었다.
"아예 막지는 않는군."
"누가 먼저 시비를 걸었는지 알고 있으니까. 말리기 힘들지. 네놈이 말린다고 들을 놈도 아니고."
버렌은 눈썹을 내리며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너 원래 그렇게 힘이 좋았나?"
"물건들이 싸구려라니까."
"그러냐."
버렌은 옅게 미소 짓고서 일어섰다.
"네놈을 따라잡으려면 정말 피똥을 싸야겠군."
버렌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른 검사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저거 정말 본왕이 알던 눈깔이 맞냐?
라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매를 좁혔다.
-인간이 저렇게까지 변하는 건 흔하지 않은 일인데.
'그러게. 나도 신기해.'
버렌은 이전의 날카로운 성격이 거짓말인 것처럼 여유로워졌다. 물론 루난이나, 마르타에겐 여전히 짜증을 내지만 사람이 바뀐 것 같았다.
다만 자신을 따라잡겠다는 다짐은 여전한 모양이다.
-그런데 네놈 지금 힘이 몇이냐.
'힘?'
라온이 입맛을 다시며 오랜만에 상태창을 불러왔다.
<상태창>
이름 : 라온 지그하르트.
칭호 : <왕을 농락하는 자>.
상태 : 혹한의 저주(네 가닥).
특성 : 분노, 나태, 불의 고리(5성), 수속성 저항력(5성), 설화의 감각(3성) 만화공(4성), 글래시아(4성), 화속성 저항력(3성), 블러딩 커스(1성), 암습(2성), 불굴의 의지(2성), 요기적응(1성), 집중(1성).
근력 : 129
민첩성 : 125.
체력 : 124
기력 : 128.
감각 : 144.
<분노 : 25.>
'엄청나네.'
보자마자 헉 소리가 절로 터진다. 1년간 시스템으로 얻은 능력치와 수련하며 상승한 능력치, 그리고 나태의 효과로 얻은 능력치가 합쳐져 지금 자신의 육체 능력은 인간이라는 종족을 벗어나 있었다.
'이러니 죄다 부수지.'
그동안 능력을 완벽하게 통제하여 누구에게도 피해를 입히지 않았지만, 힘을 전력으로 사용하니 접합부라면 철조차 부술 수 있었다.
'힘이 129네.'
-뭐, 뭣이라고?
'129라고.'
-이런 정신 나간 놈! 언제 그렇게 된 것이냐!
'대부분 네가 줬잖아. 뭘 물어.'
저 능력치의 절반 이상은 라스가 어설픈 내기를 걸거나,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트린 덕분이다. 훈련과 나태의 능력도 큰 도움이 되었지만, 라스의 호구 짓이 최고였다.
-이 망할 놈이! 파인애플에 붙은 파리처럼 본왕의 단물을 야금야금 빨아먹는구나!
라스가 이를 갈며 냉기와 분노를 일으켰다.
쿠구구구!
마나 회로 사이로 차디찬 냉기와 이글거리는 분노가 예리한 칼날이 되어 침투해왔다. 제대로 해보자는 건지 라스는 혼에 어려 있는 분노의 기운까지 일으켰다.
-지금 네놈은 그 오러를 사용할 수 없지! 이번에는 본왕의 승리다!
'아닐걸.'
불의 고리는 오러가 아니니까.
라온이 옅게 웃으며 불의 고리를 공명시켰다. 심장을 휘도는 다섯 개의 고리가 울리며 영혼을 휘감는 분노를 가라앉혔다.
'그리고.'
청주석 수갑이 억제할 수 있는 오러는 하나. 단전에 있는 두 번째 오러 글래시아의 냉기는 잡지 못했다.
치이이익!
글래시아로 만들어낸 서리의 벽이 라스의 냉기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이 기생충 같은 놈!
라스는 10분 이상 냉기와 분노를 쏟아내며 악을 질렀다.
'그래봐야 다 네 손해라니까.'
라온이 고개를 저으며 방금 뜬 메시지를 가리켰다.
[<분노>의 방해를 견뎌냈습니다.]
[근력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이걸 보라고. 이렇게 알아서 주니까. 능력치가 안 오르고 배겨?'
-이런 제에에엔장!
아낌없이 주는 라스의 울부짖음은 중무전에서도 계속되었다.
* * *
"저 망할 자식."
우렉이 스탠드에 앉아 있는 라온을 보며 이를 갈았다. 저 얍삽한 놈에게 제대로 당했지만 다른 검사들 앞에서 인정한 상태라 자존심이 상해 다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제대로 밟아주마. 아주 자근자근….'
"우렉."
"헉!"
복수를 다짐하고 있을 때 뒤에서 묵직한 중저음이 귓가를 울렸다.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목소리였다.
"카, 카룬 님!"
중무전주 카룬 지그하르트가 열 명의 호위와 함께 연무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여긴 어떻게…."
"가주께서 임무에 나가 있는 전마대와 전뢰단을 지원하라고 하시더군."
"아, 그, 그렇군요."
우렉은 등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는 것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라온을 보러 온 것이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흠."
카룬은 멍하니 앉아 있는 라온을 보며 찬웃음을 흘렸다.
"이전에 말한 건 기억하고 있겠지? 저 건방진 놈을 언제, 어디서라도 죽일 수 있도록 정보를 모아 두어라."
"물론입니다!"
"2주 안에 돌아오지."
그는 손을 휙 젓고서 연무장을 지나 중무전을 나갔다.
"후우…."
우렉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야.'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카룬이 돌아오기 전에 라온에게 망신을 주고, 놈의 강점과 약점에 대한 정보를 모아야 했다.
'그럼 방법은 하나지.'
대련.
대련이 최고의 방법이었다.
"레프!"
우렉이 멍하니 서 있던 레프에게 손짓했다.
"아, 예!"
"가네트를 불러!"
가네트는 오러는 약하지만, 검술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검사다. 라온의 검술 재능도 대단하다고 들었지만, 세월의 차이를 이기진 못할 것이다.
꾸욱.
우렉이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오늘 네 한계를 봐주마. 라온 지그하르트."
* * *
라온은 자유시간 동안 평소처럼 전력으로 훈련하지 않고, 가볍게 몸을 풀었다.
-뭐 하는 거냐.
'스트레칭.'
-수련은 안 하는 거냐?
'곧 대련이 시작될 테니까.'
-대련?
'그래. 뻔하거든.'
가문에 돌아오자마자 주디엘에게 정보를 모아오라는 명령이 떨어진 걸 보면 중무전은 자신의 정보를 원한다.
알아서 찾아와준 기회를 놓칠 리 없을 테니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도 분명 대련을 신청할 것이다.
"정렬!"
라온이 천천히 연무장을 돌고 있을 때 레프가 단상 위로 올라가 모두를 불러 모았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다 해결되었으니, 다음 훈련을 진행하겠다.
그는 불미스러운 일이라고 할 때 자신을 흘깃 보았다.
"이번 훈련은 대련이다. 청주석 수갑을 찬 채 오직 검술과 보법만으로 상대를 제압하면 승리하는 방식이다"
'맞지?'
레프의 말은 자신의 예상과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흥! 그, 그 정도는 본왕도 예측하고 있었노라!
라스는 목소리를 떨면서 고개를 홱 돌렸다.
"베빈, 아룬 앞으로 나와라!"
레프의 부름에 검사 두 명이 앞으로 나와 검격을 나누기 시작했다. 둘 다 익스퍼트 중급에 오른 뛰어난 검사였기에 오러가 없는데도 대련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흥미롭게 진행되었다.
두 검사는 실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격한 전투를 보이다가 베빈이라는 검사가 어깨를 얻어맞고 나서 대련이 종료되었다.
"보았겠지? 중무전은 대련도 실전처럼 진행한다."
레프는 특히 라온을 보며 실전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다음으로 라온과 가네트. 앞으로 나오도록."
라온은 일어서며 가네트라 불린 남자를 보았다. 30대 내외로 보이는 외모에 단단한 체격을 가졌다. 오러 자체는 그리 대단해보이지 않았지만, 느껴지는 기세가 예리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이쪽을 보는 눈빛이 낮게 가라앉은 걸 보면 단단히 마음먹은 것 같았다.
라온은 흥겨운 미소를 흘리며 대련장으로 올라갔다.
'재밌겠네.'
* * *
가네트는 라온을 내려보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이 건방진 녀석만 조지면 된다는 거지.'
총관 우렉은 라온이 숨긴 검술과 능력을 모두 사용하도록 대련에서 괴롭히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데, 제대로 조져서 망신을 주면 다음 인사이동 때 전마대로 옮겨주겠다고 하니 무조건 해야만 했다. 잘생긴 얼굴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잘 됐다 싶었다.
'오러가 없다면 얼마든지 팰 수 있지.'
라온이 뛰어난 육체와 오러를 가진 건 인정하지만 검술만큼은 자신이 위라고 자신할 수 있다. 오러만 쓰지 않는다면 말 그대로 가지고 놀 수 있다.
"선배 된 도리로 선공을 양보하지."
가네트가 손을 까딱였다.
"정말이십니까?"
"그래. 마음 바뀌기 전에 덤벼."
라온이 오러를 사용한다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지만, 지금은 둘 다 청주석 수갑을 찬 상태이니 여유를 부리는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놈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앞으로 돌진해왔다. 순식간에 눈앞에 이르러 검을 내리쳤다.
'예상대로군.'
가네트가 피식 웃었다. 검의 궤도와 속도 모두 상정 내였다.
'바로 흘려주지.'
들어 올린 검을 살짝 틀어 떨어져 내리는 라온의 검격을 멋있게 흘려버리려고 할 때였다.
쿠웅!
라온과 검이 부딪친 순간 관절이 빠지는 듯한 어마어마한 충격이 일어났다.
"어? 뭐, 뭐야!"
라온의 검에 실린 힘이 너무도 강해서 가네트는 흘리기는커녕 제대로 버티지도 못하고 손목이 꺾였다.
"이, 이러면 안 되는… 꽥!"
뻐어어억!
뒤로 밀려 나간 가네트의 검이 그의 이마를 세차게 후려쳤다. 본인의 수련검에게 얻어맞은 그의 머리에서 공이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끄르르륵…."
흐려지는 가네트의 눈동자에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라온의 모습이 잡혔다.
"다음 나오시죠."
제155화
라온은 대자로 자빠져서 눈을 까뒤집은 가네트를 보고 쯧 혀를 찼다.
'멍청하긴.'
자신의 검에 담긴 힘을 무시했는지 그는 멋을 부리며 검날을 살짝만 틀었다.
그런 허접한 기술이 통할 리가 없으니 그는 힘에 밀려 나간 본인의 검에 이마를 얻어맞고 저렇게 침을 질질 흘리며 기절해버렸다.
'좀 재밌으려나 했더니 바보였네.'
라온은 부풀어 오른 가네트의 이마를 보다가 뒤를 돌았다.
"뭐, 이런…."
버렌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녹색 눈동자를 일그러뜨리며 헛바람을 흘렸다.
"너 1년 동안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그가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힘만으로 상대의 흘리기를 무너뜨리는 장면에 경악한 것 같았다.
다른 중무전 검사들도 넋이 나간 듯 입을 떡 벌렸지만, 반응은 조금 달랐다.
"이, 이게 뭐야…."
"지 검에 지가 맞고 기절을 해?"
"저 멍청한 놈!"
"에휴!"
"쯧쯧."
그들은 버렌과 다르게 가네트가 멍청한 짓을 했다며 한숨을 내쉬고 욕을 내뱉었다.
가네트가 멍청한 짓을 한 건 사실이지만 저 자리에 이곳에 있는 누가 있었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 나오시죠."
라온은 눈을 부릅뜨고 있는 훈련 교관 레프를 보며 고개를 틀었다.
"전 아직 몸도 안 풀렸습니다."
"물론이다! 우리도 아직 시작 안 했어! 돌란!"
레프의 부름에 중간에 있던 청발의 검사가 일어났다. 체격이 좋아 힘 꽤나 쓸 것 같았다.
"네가 라온을 상대해라."
"예!"
돌란이 대련장 위로 올라왔다. 거의 오크만 한 체격이라 뒤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실려 가는 가네트를 보며 이마를 찡그렸다.
"저 멍청한 놈과 나를 똑같이 보지 마라. 방심했다가는 큰코다칠 거다."
"원래 방심 같은 거 안 하는 성격입니다."
"좋다. 와라!"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땅을 박찼다. 가네트를 쓰러뜨렸을 때와 같이 하늘을 찌를 듯이 들어 올린 검을 내리쳤다. 폭발하는 근력이 오롯이 담긴 검격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흥!"
돌란은 떨어지는 수련검이 최대의 힘을 받기 전에 막기 위해서 검을 들어 올렸다. 라온의 강한 근력을 대비한 좋은 방어법이었다.
'그래도 안 되지만.'
라온은 검의 방향을 미세하게 틀었다. 중앙을 향하던 칼날이 반 마디 정도 올라간 채 돌란의 검으로 떨어져 내렸다.
캬아앙!
검과 검이 맞부딪친 순간 돌란의 수련검이 사정없이 깨져나갔다.
"어억!"
돌란은 바스러지는 수련검을 보며 튀어나올 정도로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놀라기는 일렀다.
뻐어어억!
라온은 수련검을 재빠르게 돌려 면으로 돌란의 머리를 찍어버렸다.
돌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돌란이 눈을 까뒤집고 쓰러졌다. 그 큰 덩치가 넘어가자 연무장에 깔린 모래가 허공으로 흩날렸다.
"별 차이 없네."
라온은 움찔거리는 돌란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는 자신의 힘은 충분히 경계했지만, 기술은 아예 생각하지 않았다. 덕분에 검로를 약간 트는 것만으로 수련검의 약한 부분을 깨부술 수 있었다.
"오러도 없이 그 찰나의 순간에 약점을 찌른다고?"
버렌의 목소리가 들린다. 제대로 봤는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저거 진짜 뭐 하는 놈이야…."
그렇기에 더 놀랐는지 본인의 손가락을 깨물고 있었다.
"흐음…."
버렌의 극찬을 들으며 검사들을 보았다. 돌란마저 일격에 쓰러질 줄은 몰랐는지 눈동자가 빙빙 돈다. 반쯤 혼이 빠져나간 표정이었다.
"이번에도 일격에 끝났네요."
라온은 어벙하게 선 레프를 보며 옅게 웃었다.
"다음 상대 부르시죠."
* * *
북망산 중턱.
호랑이가 울부짖는 듯한 모습의 웅장한 바위 위에 글렌과 리메르가 대나무처럼 나란히 서 있었다.
"가주님. 라온이 연수를 중무전으로 간 거 알고 계십니까?"
리메르는 품에서 꺼낸 서류를 흔들며 피식 웃었다.
"알고 있다."
글렌은 별일 아니라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녀석이 왜 중무전에 간지도 알고 계십니까?"
리메르가 중무전이 있는 서쪽을 바라보며 키득거렸다.
"그 미친 녀석 중무전에 시비를 걸러 갔습니다."
"시비?"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연수 1일 차에 사고를 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습니다."
카룬이 대놓고 라온을 싫어하는 언행을 여러 번 보여주었지만, 도망치지 않고 정면으로 달려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라온 지그하르트란 녀석은 까도 까도 다른 면이 나오는 양파 같은 아이였다.
"누구 제자인지 진짜 간도 크다니까."
리메르는 스승이 참 잘생겼을 거라고 중얼거리며 웃었다.
"오늘 무얼 했길래 사고를 쳤다는 거냐."
글렌이 처음으로 뒤를 돌았다. 빨리 말하라는 듯 눈매를 살짝 좁혔다.
"그 정신 나간 녀석이 오늘…에이, 말 안 할래요!"
"...."
"가주님도 맨날 안 알려주시면서…크헉!"
말을 하던 리메르의 얼굴이 홱 돌아간 채 자빠졌다. 글렌이 참지 못하고 무형기로 얼굴을 후려쳐버린 것이다.
"끄으윽…."
리메르가 턱을 부여잡고 부르르 떨었다. 제대로 맞았는지 세상이 핑핑 돌았다.
"때, 때려? 지금 때렸어요? 진짜 너무하네! 말 좀 안 했다고 무형기를 날리는 건 대체 어느 나라…."
"또 맞기 싫으면 빨리 말해라."
글렌의 눈동자가 시뻘겋게 타올랐다. 빨리 말하지 않으면 정말 두 번째 주먹을 날릴 기세였다.
"아, 알겠습니다."
리메르가 거친 숨을 뱉으며 일어섰다.
'그렇게 손주가 소중하면 티 좀 내라고!'
라온 이야기를 안 해준다고 절대의 무학으로 얼굴을 후려치는 사람이면 직접 손주를 소중히 여겼으면 좋겠다. 계속 이러다가 말도 못 하고 끝날 것 같아서 불안했다.
"빨리 말해라."
"라온 저 녀석 오늘 연수를 시작하자마자, 중무전에서 준비한 물건들을 죄다 때려 부쉈습니다. 그리고…."
리메르는 라온이 중무전의 훈련 기구들을 신나게 부수고 달리던 검사들을 후려 패서 의무실로 보낸 것까지 말해주었다.
"힘으로 다 부숴놓고 싸구려니, 사기를 당했느니 하면서 우렉의 손을 빠져나갈 때 웃음을 참느라 아주 죽을 뻔했습니다!"
그는 우렉의 표정을 직접 봤어야 한다고 말하며 낄낄 웃었다.
훗.
"어? 가주님 방금 웃었죠!"
"웃기는 무슨."
글렌이 고개를 돌렸지만, 살짝 올라간 그의 입매는 숨기지 못했다.
"밖에서 웃으시는 걸 보다니 진짜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시끄럽다. 그런데 넌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카룬을 제외한 중무전의 강자들이 전부 임무에 나갔잖아요. 감시의 눈길을 피해서 담벼락에 붙어 있었죠."
리메르는 별거 아니라는 듯 히죽 웃었다.
"어쨌든 라온은 정말 보면 볼수록 물건입니다. 적진에 대놓고 들어가서 사고를 치고 미꾸라지처럼 빠지다니, 가주님의 젊을 때보다 더해요."
"그것도 전마대와 전뢰단이 나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그들이 있었다면 진즉에 막혔을 것이야."
"그래서 둘째 아드님도 내보내신 건가요? 손주 챙기려고?"
라온의 활약을 보고 돌아올 때 카룬이 호위들과 함께 중무전을 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상황을 보니, 글렌이 그를 내보내는 것 같았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전장에서 쓸데없는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보냈을 뿐이다."
글렌은 쓸데없다며 손을 저었지만, 그 반응만으로 진의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라온과 실비아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라온이 복귀하니까. 진짜 하루하루가 재밌네요. 내일은 또 어떤 사고를 칠지 기대되네."
리메르는 이제 카룬도 없으니 대놓고 봐도 되겠다고 중얼거렸다.
"다음 사고는 이미 치고 있다."
"예?"
글렌이 중무전이 있는 방향을 굽어보며 아주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은 겉멋과 이름값에 빠진 멍청이들을 후려 패고 있구나."
* * *
쿠웅!
적발의 검사가 혀를 쭉 내민 채 연무장 밖으로 떨어졌다. 무거운 침묵으로 채워진 연무장 중심에서 라온이 피식 웃었다.
"다섯 번째."
방금 쓰러진 검사까지 다섯을 똑같은 방식으로 쓰러뜨렸다.
육체 능력만이 아니라, 검술 실력도 라온이 위였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 않게 중무전 검사들을 일격에 쓰러뜨릴 수 있었다.
"어…."
"이, 이거 꿈 아니야?"
"다섯이 내리 졌다고? 그저 검술로?"
"저게 검술이냐? 그냥 내려찍기지!"
"그 내려찍기를 한 명도 아니고, 다섯이 다 못 막았잖아! 이 멍청아!"
대련을 지켜본 사람들은 더이상 라온에게 쓰러진 검사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들보다 라온의 검과 육체 능력이 위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대체 저 녀석은 뭐야…."
"레이든이랑 싸울 때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하분 성에서 무슨 일을 겪고 온 거지? 그 소문이 다 진짜인가?"
"젠장! 오러 없이는 이길 수 없겠어…."
검사들은 라온을 힐끔거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다들 그와 대련하기 싫어하며 고개를 숙였다.
"허…."
버렌이 헛바람을 흘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놀라움을 참지 못하고 눈썹이 축 내려갔지만 녀석의 눈은 퍼렇게 번쩍이고 있었다.
오러 없이 힘이 가득 담긴 내려치기를 파훼할 방법을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이곳에서 자신에게 투쟁심을 가진 건 버렌이 유일했다.
"다음 없습니까."
라온이 검을 어깨에 걸치고 다음 사람을 불렀지만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없으면 그만…."
"내가 해도 되나?"
입맛을 다시며 대련장에서 내려가려 할 때 뒤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자 한쪽 머리로 눈을 가린 청년이 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당신은…."
특이한 머리 모양과 다른 검사와는 질이 다를 정도로 꽉 짜인 기도. 주디엘의 서류에 있던 이름이 기억났다.
'호라인.'
중무전 전뢰단의 두 명의 부단주 중 한 명인 호라인이었다. 익스퍼트 상급을 뛰어넘었다고 하던데 확실히 지금까지의 검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기파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괜찮군.'
드디어 상대할 만한 사람이 나타났다. 라온이 몸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시원하니 좋네."
그는 피식 웃으며 대련장으로 올라왔다. 뒤에 아까 보았던 총관 우렉이 있었다. 아무래도 그가 다른 곳에서 수련하던 호라인을 불러온 것 같았다.
"오러 없이 싸우는 거지?"
호라인은 스스로 청주석 팔찌를 착용하면서 물었다.
"예."
"이것도 나름 재밌지."
그 말을 하며 수련검을 뽑아 들었다.
"선수를 양보하지."
"호, 호라인 님!"
"안 됩니다! 일격에 당할 수도 있다구요!"
선수를 양보하겠다고 하자 중무전 검사들이 우르르 나와 호라인을 말렸다.
"멍청하긴. 중무전 딱지를 단 너희들이 그렇게 당했으니까. 선수를 양보하는 거다!"
호라인은 차가운 눈빛으로 중무전 검사들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와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라온이 연무장이 울릴 정도로 거세게 땅을 박찼다. 눈 깜짝할 사이에 호라인의 공간을 찢고 들어가 검을 내리쳤다.
치이잉!
지금까지 한 명도 막지 못한 검격이었지만, 호라인은 검을 정확한 순간에 비틀어 완벽하게 흘려냈다.
"와, 힘 하나는 엄청나네. 어깨 빠질 뻔했어."
여유롭게 웃으며 휘돌린 검을 내질러왔다.
우우웅!
오러가 깃들지 않았지만 검끝이 흔들린다. 노리는 방향을 잘못 정하면 얻어맞을 수밖에 없는 변화의 검술이었다.
'자존심이 강하다고 했지.'
주디엘의 정보에 의하면 호라인은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노릴 곳은 뻔했다.
쩌어엉!
라온은 연성검술을 펼쳐서 호라인의 검이 노렸던 이마를 완벽하게 막아냈다.
"꼭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막는군."
"뻔하니까요."
"건방지네."
호라인의 눈동자가 사납게 번들거렸다. 늑대처럼 허리를 뒤로 젖힌 뒤 도약해 검을 내리찍는다. 이번에도 검극이 흔들리며 방향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의 검술 특징인 것 같았다.
라온은 물러서지 않고 안력을 집중했다. 바람맞은 풀잎처럼 흔들리는 검극의 변화가 가장 줄어드는 건 공격하기 바로 직전이었으니까.
'지금!'
검극의 변화가 눈에 보일 정도로 줄어든 순간 라온의 검이 빛살처럼 튀어 나갔다.
쩌어엉!
변화를 담은 검격을 빗겨 내버린 수련검이 호라인의 허리를 스쳐 지나갔다. 복부를 노렸는데, 그 사이에 공중에서 몸을 틀어 닿는 정도에서 그치다니, 괜히 부단장이 아니었다.
"라온 지그하르트라고 했지?"
호라인은 찢겨나간 옆구리를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너 정상이 아니네."
키득 웃으며 다시 달려든다. 조금 전보다 더 빠르고 다채로운 보법. 분명 앞에 있건만 우측과 좌측에서도 그가 움직이는 듯했다.
'그렇지만 이미 본 거야.'
힘보다 더 높은 수치의 감각은 오러로 기감을 열지 않아도 적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라온은 감각이 말하는 방향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캬아아앙!
다가와 기습을 하려던 호라인이 다급하게 검을 휘돌려 방어했다.
'이 기회를 놓칠 필요는 없지.'
쾌속한 걸음으로 물러서는 호라인을 쫓으며 광아검을 연달아 펼쳤다. 먹잇감의 뒤를 노리는 맹수의 발톱처럼 사나운 검격이 뻗어나갔다.
컁! 캬갸갸강!
호라인은 한 번 밀린 수세를 뒤집지 못하고 계속해서 방어만 해댔다.
"미친…."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는지 그의 표정엔 확연한 당황이 어렸다.
그가 익스퍼트의 끝이라면 자신도 끝이다. 육체 능력은 이쪽이 위니 밀릴 이유가 없었다.
후욱!
라온은 호라인의 불안을 들이마시며 수평으로 검을 그었다.
쩌어어엉!
쇳덩이가 뭉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호라인의 검이 튕겨 나가 바닥에 박혔다.
….
연무장에는 이제 숨 소리조차 내는 사람이 없었다. 호라인을 데려온 우렉도, 심판을 보던 레프도, 이를 악물고 지켜보던 버렌도 모두 입을 열지 못했다.
"허, 졌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당사자인 호라인이다. 믿을 수가 없는 듯 헛웃음을 흘리며 자신을 바라보았다.
"너 정말 오러 없이 싸우는 거 맞냐? 힘이 무슨 오우거 수준이야."
호라인은 떨리는 손목을 부여잡으며 자신의 이곳저곳을 훑어내렸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허억! 호, 호라인 님도 졌다고?"
"이게 말이 돼?"
"이제 막 검사가 된 녀석인데…."
"어…."
구경하던 검사들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흐음…."
호라인은 미소를 유지한 채 검사들을 쭉 둘러보다가 앞으로 다가왔다.
"일단 내가 진 건 진 건데. 2차전 안 할래?"
그가 바닥에 박힌 검을 뽑아 어깨에 걸쳤다.
"핑계가 아니라, 내 검술은 오러에 꽤 많이 의지하거든. 어때?"
그 말 그대로다. 그는 변검과 환검을 사용하는 검사. 오러를 사용한다면 차원이 다른 수준이 될 것이다.
"좋습니다."
"시원한 것도 마음에 드는군. 듣기와는 딴판이야."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호라인 씩 웃으며 청주석 수갑을 벗었다. 오러를 막고 있던 둑이 부서지자, 그의 기세가 피부를 짓누를 정도로 압도적인 파동을 일으켰다.
고오오오오!
호라인의 기파는 흡사 살아 있는 생물처럼 대련장을 넘어 연무장 전체를 휘감아버렸다. 역시 나 익스퍼트 최상급. 마스터를 바라보는 무인다웠다.
'거기다.'
그의 오러는 평범하지 않았다. 루난과 비슷한 냉기를 품고 있는 속성의 오러. 연무장의 열기가 그의 오러에 밀려 차게 가라앉았다.
"후회해도 이미 늦었어."
호라인은 턱을 모로 세우며 입매를 끌어 올렸다. 오러만 있다면 무조건 이기리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후회?"
라온이 피식 웃으며 청류석에 억눌려 있던 만화공을 끌어 올렸다. 이글거리며 치솟은 적광의 불꽃이 연무장에 가득 깔린 냉기를 짓눌렀다.
쿠구구구!
그의 발밑에서 번져가는 불꽃의 파도가 돌조각과 모래를 녹여 내리며 공간을 휘감았다.
"무슨…."
자신에게 조금도 밀리지 않는 막대한 기파에 호라인의 눈동자가 파랑을 맞은 배처럼 뒤흔들렸다.
"오러가 있으면 이길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라온의 눈동자에 시뻘건 휘광이 어렸다. 적염으로 타오르는 검을 들어 호라인을 겨누었다.
"오십시오. 누가 후회하는지 알려드리죠."
제156화
"잘난척할 실력은 있군."
호라인이 눈매를 좁히며 자세를 낮췄다. 이전에 보았던 늑대의 도약과도 같은 모습. 자세는 그대로지만 느껴지는 기세는 격이 달랐다.
"하지만 내 상대는 아니야!"
선언하듯 내뱉는 말과 동시에 검이 튀어나온다. 흔들리는 검극이 여섯 개로 늘어난다. 오러가 깃든 환검과 변검의 묘리. 놀란 그의 정신과 달리 검엔 조금의 빈틈도 없었다.
고오오오!
라온이 불의 고리를 공명시켰다. 느려지는 시야 속에서 검극의 변화가 세 개로 줄어들었다. 노리는 방향은 목과 왼쪽 가슴 그리고 옆구리였다.
어디를 노리느냐?
어디가 아니라 전부 다다.
환상 2개가 지워진 냉기의 칼날은 세 곳을 동시에 노리고 있었다.
화아아아!
검 끝으로 바닥을 겨눈 뒤 붓질하듯 허공을 그었다. 칼날에 휘감긴 불꽃이 반원을 그리며 호라인의 세 줄기 검격을 지워버렸다.
"흥!"
호라인은 예상한 듯 허공에서 몸을 돌려 두 번째 검술을 펼쳐냈다. 얼굴에 담긴 투지만큼이나 살벌한 검격이 유성처럼 떨어져 내렸다.
치이이잉!
검격은 살아있는 것처럼 허공을 타고 미끄러져 자신의 심장과 머리를 노려왔다. 제대로 맞는다면 연수가 끝날 때까지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강대한 검격을 향해 오히려 몸을 던졌다.
'이게 생로니까.'
호라인의 오러는 냉기였고, 검술은 화려한 변검이다. 물러날수록 그의 공간이 넓어지기 때문에 지금은 나아갈 때였다.
쩌어엉!
두 마리 뱀처럼 꼬인 검격을 향해 광아검 아운격을 터트렸다.
퍼어어엉!
근접거리에서 부딪친 검격이 거칠게 폭발한다. 대지를 울리는 굉음과 거친 충격파가 터지며 대련장에 붙어 있던 검사들이 뒤로 튕겨 나갔다.
라온과 호라인은 그 충격파를 기회로 삼아 뒤로 물러나 몸을 다잡았다.
"네가 17살이라고? 믿기질 않네. 검술도 안 밀리잖아!"
호라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질 순 없지. 다시 간다!"
그가 빙판을 탄 듯 매끄럽게 접근해 수평으로 검을 그었다. 직선으로 그은 칼날이 여러 개의 얼음송곳이 되어 전신의 급소를 향한다. 대해의 파도처럼 변화무쌍한 검격이 넓게 퍼지며 그 갯수를 늘려갔다
라온이 글래시아를 운용하여 감각의 바다를 열었다. 출렁이는 파도. 그 흐름에서 움직이는 건 오직 하나의 칼날이었다.
"흐읍!"
감각이 말하는 대로 검을 그었다. 광아검의 구결이 깃든 날카로운 이빨이 벼락처럼 치솟았다.
쩌어어엉!
뼈가 분질러지는 듯한 소리가 터지며 허공을 노닐던 호라인이 거칠게 밀려 나가 땅에 손을 짚었다.
"어, 어떻게…."
"제가 감이 좀 좋습니다."
"감? 이게 감으로 된다고? 믿을 수 없다!"
호라인이 눈을 부라리며 발을 굴렀다. 전력을 다하는 듯 운용하던 냉기의 오러가 점차 부풀어간다. 주변으로 은빛 서리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는 그 강대한 오러로 전신을 두른 채 땅을 박찼다. 오러의 줄기가 실타래처럼 풀려나오며 열 갈래가 넘는 변화무쌍한 칼날이 공간을 휘감았다.
'이미 예측은 끝났어.'
라온은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호라인이 보여주었던 변검과 환검의 관찰은 끝났다. 지금 보여주는 검술이 더 복잡했지만 결국 뿌리는 같았다.
우우우우웅!
손에서 울부짖는 검을 사선으로 내리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공간이 잘라내듯 휘어진 화염의 칼날이 호라인의 검격을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설마…."
호라인이 검을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변검도 익히고 있었나!"
그는 이 자리에서 그의 검술의 따라 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변검을 익혔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천재라는 단어로 묶어 둘 수준이 아니로군."
호라인은 인간이 아니라, 무슨 괴물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마른침을 삼켰다.
"이런 놈을 후려 패는데 고작 금화라니, 수지에 맞지 않아. 하지만 그래도 한번 시작했으면 가는 게 남자지!"
그의 모습이 흐릿하게 사라졌다. 오른쪽. 찰나의 순간에 우측으로 파고들어 검을 내지른다. 푸른 빛을 담아낸 칼날에서 오러의 줄기가 비처럼 쏟아졌다.
'이건 기회야.'
변검과 환검의 성취를 올릴 기회.
만화공의 검술은 꽃잎의 형태를 그리는 경우가 많다. 호라인을 상대하며 배운 변검과 환검을 이용하면 그 검술들을 더 완벽하게 펼쳐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멀었다!"
호라인이 두 눈을 빛내며 쏟아낸 무수한 변화의 칼날이 거침없이 급소를 노려왔다. 새장처럼 조여오던 오러의 줄기가 갑자기 한 점으로 모여들어 심장을 향했다.
'이런 변화라니….'
변화라면 넓게 퍼지는 것만 생각했지 일점에 모으는 건 예상도 못 했다. 이것 또한 공부가 되었다.
화아아아!
라온은 불의 고리로 그의 검술을 눈에 새기면서 만화공 회천을 펼쳐냈다. 공간을 찢어발기며 나아간 불꽃의 톱니바퀴가 응집된 오러와 격돌했다.
콰아아아앙!
냉기와 열기가 뒤엉키며 터져 나온 강대한 폭발에 땅거죽이 뒤집히고, 연무장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
호라인이 그 오러의 폭풍으로 파고들어 강공을 내리쳤다. 단순한 강공이 아니다. 쏟아지는 건 벼락 줄기 같은 검격. 무시무시할 정도의 환상과 변화가 담긴 상승의 검술이었다.
아직 변화로 따라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라온은 고쳐 잡은 검을 바닥에서부터 올려 그었다. 천하를 양단하는 듯한 웅혼한 검격이 솟구치며 호라인의 검격을 깨부쉈다.
"크윽!"
호라인은 충격을 받았는지 입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렸지만 물러서진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내달려 검을 휘두른다.
콰앙!
라온 역시 밀리지 않기 위해 진각을 밟으며 광아검을 폭발시켰다.
쾅! 콰아앙!
오러 없이 싸울 때와는 격이 다른 충격파와 굉음이 연무장 전체로 퍼지고 두 사람의 투혼이 대지를 깨부쉈다.
라온과 호라인은 무너진 대련장의 중심에서 수많은 검격을 나누었다. 각자의 손에 냉기와 열기가 일어났지만 물러서는 사람은 없었다.
"후욱…."
"하아…."
두 사람은 모두 피부와 옷이 찢어졌음에도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힘도 빠질 만큼 빠졌으니 끝을 봐야겠군."
호라인이 검을 상단으로 세웠다. 하늘을 찌를 듯한 자세를 취한 뒤 남은 오러를 모조리 끌어 올렸다. 그의 검이 연검처럼 바르르 떨리며 막대한 기파를 뿜어냈다.
"좋습니다."
라온이 검을 뒤로 젖히고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밀랜드에게 강기를 꺼내게 했던 용연류가 아니다. 더 나아가기 위해 지금 사용할 수 있는 최강의 검술이 아니라, 다른 것을 꺼내 들었다.
치아아앙!
호라인의 검에서 은빛 섬광이 뿜어진다. 칼날에 어려 있던 냉기의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퍼지며 아홉 갈래의 거대한 채찍이 되었다. 한 줄기마다 검을 부수고 살과 뼈가 으깰 무시무시한 위력을 담고 있었다.
쿠구구구!
라온은 벼락처럼 내리꽂히는 아홉 갈래의 검격을 향해 압축시킨 불길을 폭발시켰다. 칼날 위에서 춤을 추던 염화의 꽃송이들이 봄이 찾아온 듯 개화한다.
만화공 십화.
화령.
지금까지 쌓아 올린 라온의 검술 위로 새로운 색이 씌여진다. 옅게만 퍼져나가던 꽃잎들이 거울에 비친 듯 불어나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
꽃잎의 돌풍은 오러의 채찍 줄기를 불태우고도 모자라 적을 향해 나아갔다.
냉기의 오러를 잡아먹으며 증폭하는 화염의 꽃잎은 찰나의 순간 허공을 뒤덮고 호라인의 검을 갈랐다.
화아아아!
늦은 봄. 벚꽃 나무 아래에 있는 것처럼 세상이 화염의 꽃잎으로 물들었다.
"아…."
호라인은 넋이 나간 듯 사그라지는 불꽃의 이파리를 바라보다가 무릎을 꿇었다.
"져, 졌다."
웃으며 패배를 인정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수고하셨습니다."
라온은 쓰러진 호라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조금 거만하긴 했지만, 그는 그만한 실력을 지녔고, 정정당당하게 승부했으며, 패배를 인정했다. 중무전이라고 해도 인정할만한 사내였다.
"음?"
미약한 통증을 느끼고 왼손을 보았다. 호라인의 냉기 때문에 왼손에 서리가 끼어 있었다. 수속성 저항 때문에 큰 고통은 없었지만, 얼렸다는 것만으로 대단했다.
'음, 그런데 이거 잘하면….'
라온은 만화공으로 손에 낀 서리를 녹이려다가 멈춰 섰다. 이걸 이용할 방법이 있을 것 같아서 등을 돌린 채 다급하게 불길로 손을 녹였다. 중간중간 아프다는 듯 살짝 신음을 흘린 건 덤이었다.
"어…."
"이, 이거 꿈이야?"
"이렇게 강하다고?"
녹인 손을 털고 고개를 들자, 오러의 폭풍에 밀려 나간 검사들이 반쯤 정신이 나간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호, 호라인이 졌다고? 이럴 수가 있나?"
훈련 교관 레프는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채 손을 떨었다.
반면 우렉은 자신의 왼손을 지그시 보고 눈매를 좁히고 있었다.
그 반응을 보자, 의도가 제대로 먹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라온이 웃음을 참으며 손목을 돌릴 때 메시지가 올라왔다.
[중격의 상대와 싸워 승리하셨습니다.]
[상대의 무학을 통해 자신의 성장을 이뤄냈습니다.]
[지금까지 상대 중 가장 강한 자를 상대로 승리하셨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3포인트 상승합니다.]
-헉?
라스는 올라간 내용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내기 없이 모든 능력치가 3포인트나 오른 것에 경악한 눈빛이다.
-고, 고작 익스퍼트 최상급을 잡았다고 능력치가 오르다니! 이게 말이 되는 것이냐!
'지금까지 내가 이긴 상대 중 가장 강하다잖아.'
호라인보다 강한 상대는 많이 만났지만, 이긴 상대 중에선 그가 가장 강했다.
-망할! 정말이지 망할 시스템이니라!
라스는 본인이 만든 시스템이 정도를 모른다며 욕을 하고 메시지를 걷어찼다.
'이래서 힘을 숨길 필요가 없다니까.'
중무전은 자신의 무력을 파악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건 지금까지다. 내일이면 자신은 또 한 차례 발전해 있을 테니까.
라온은 씩 웃으며 검집을 툭 쳤다.
"다음 있습니까?"
* * *
버렌은 오늘 이루어진 라온의 대련을 한 번도 놓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결론을 내렸다.
'저 녀석은 진짜 괴물이다.'
복귀한 라온을 처음 보았을 때 느껴지는 기세가 더 희미해져서 강해졌다고는 생각했지만, 전뢰단의 부단장 중 하나인 호라인을 쓰러뜨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대체 뭘 하고 지낸 거지?'
자신도 레뷘 사막에서 수많은 고난을 겪으며 누구보다 많은 성장을 이뤘다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이번에도 가장 높이 올라간 사람은 라온이었다.
다만 질투나, 질시의 감정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녀석이 어떤 놈인지 알고 있으니까.'
라온은 그저 운이나, 영약으로 강해진 녀석이 아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수련에 수련을 거듭하여 성장하는 전형적인 노력형 인간이다.
이번에도 복귀한 다음 날 새벽부터 연무장에 나오는 걸 보고 확신했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강해질 자격이 있는 녀석이라고.
'그러고 보니 마지막 검술, 언젠가 본 거 같은데….'
라온이 마지막에 호라인을 쓰러뜨린 그 꽃이 휘날리는 검술은 이전에 본 적 있었다. 그때도 아름다우면서 강하다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더 위험했고, 더 아름다웠다.
'그 검술을 스스로 발전시키다니….'
정말이지 멈출 줄을 모르는 녀석이다.
'그래도 포기 안 한다.'
라온은 라온. 버렌은 버렌이다. 남을 신경 쓰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걷다 보면 언젠가는 따라잡을 수 있을 테니,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기로 레뷘 사막에서 두 번째 은인에게 맹세했다.
"멋있었다!"
버렌은 이쪽을 보는 라온을 향해 유일하게 진심을 다해서 박수를 보냈다.
* * *
중무전 총관실에 밤이 스며든다. 창틀에서 화사한 생기를 발하던 꽃병들도 어둠에 몸을 맡기고 잎을 내렸다.
"후…."
총관 우렉은 멍하니 서서 꽃병에 꽂힌 꽃잎들을 손등으로 쓸어내렸다.
"저 총관님."
그의 뒤에 서 있던 훈련 교관 레프가 한숨을 내쉬며 콧등을 찡그렸다.
"이,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온 그 녀석이 호라인까지 이길 줄은 생각도 못 해서…."
레프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뭘 할 필요는 없다."
우렉이 뒤를 돌며 어깨를 으쓱였다.
"예?"
"라온 녀석의 근력이 몬스터 수준이라는 것과 오러를 사용하면 호라인을 이길 정도로 강하다는 게 알려졌지 않나. 익스퍼트 최상급이라는 걸 알았으니 전주께서 모으라 지시하신 정보로는 충분해. 거기다…."
그의 눈동자가 밤 그림자처럼 일렁거렸다.
"약점도 드러났지."
"호라인의 냉기를 맞고 얼어붙었던 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숨기려고 했지만, 마지막에 손이 얼어붙었고, 녀석의 표정을 감추기 위해서 등을 돌렸다. 어려서 때부터 앓았던 혹한의 저주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야."
우렉이 책상 위에 있는 꽃병을 매만지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정보는 모두 얻었군.'
고작 하루 동안 라온의 무력과 장점 그리고 약점까지 파악했으니 카룬도 인정해줄 것이다.
"이제 훈련은 어떻게 할까요? 제가 놈과 대련을 할 수도 없고…."
"전주께서 그놈에게 도움이 될만한 건 시키지 말라고 하신 건 알고 있지?"
"물론입니다. 아예 몸이 망가지는 훈련을…."
"멍청아!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고 있는데 그딴 행동을 하면 우리를 뭘로 볼 것 같아!"
우렉은 카룬에게 들었던 지적을 그대로 읊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죄, 죄송합니다!"
"예로부터 중무전에 내려오지만, 도움은커녕 오히려 실력이 떨어지고, 지루하기만 한 훈련이 있지않느냐."
"아! 동굴 면벽 말씀이시군요!"
생각이 난 듯 레프가 손뼉을 쳤다.
"확실히 그건 옛날부터 내려온 훈련이니 누구도 뭐라하지 못 할 겁니다. 그런 생각을 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한 2주 정도 동굴에 가둬놔."
우렉이 낮은 웃음을 흘리며 손가락 두 개를 들어올렸다.
"그 건방진 놈이 시간 낭비만 하도록 말이야."
* * *
라온이 연수를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첫날은 여러 일이 있었지만, 둘째 날부터는 별일 없이 물 흐르듯 지나갔다.
중무전 소속 검사들만이 아니라, 교관이나 총관들도 웬만해선 터치를 하지 않아서 자유롭게 훈려할 수 있었다. 물론 장비들을 부술 때는 제발 그만두라고 소리를 지르며 말렸지만.
자신이 이곳에서 부순 물건들의 가격이 금화 6000개에 가깝다고 하니, 처음에 정했던 것보다 2배 이상으로 물품을 부수고 다닌 모양이다. 나름 뿌듯했다.
라온이 오늘은 무엇을 부숴서 잘 부쉈다는 소문을 낼까 고민할 때 훈련 교관이 버렌과 함께 그를 불렀다.
"오늘부터 특별훈련을 진행하겠다."
훈련 교관 레프가 평소보다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턱을 들었다.
"특별훈련이요?"
"중무전에서 전통으로 내려오는 훈련이다. 이 주머니를 가지고 따라오도록."
그는 자신과 버렌에게 사람 머리만 한 보자기를 건네주고 연무장을 벗어나 중무전 안쪽으로 들어갔다.
한참 걷던 그의 걸음은 중무전을 넘어 그 뒤에 있는 북망산에서 멈췄다. 산 주변은 높은 담벼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중앙에는 열 개의 동굴이 뚫려 있었다.
"동굴?"
"그렇다."
레프가 뒤를 돌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초대 중무전주께서 면벽을 하다가 대성을 이루셨다는 동굴이다. 그분께서는 4주간 잠을 자지 않으시고 생각과 생각을 거듭하셨지."
그는 초대 중무전주가 초대 가주를 도와 많은 업적을 이뤘다는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어쨌든 이 면벽은 중무전의 무인이라면 누구나 통과해야 하는 의례이니 자랑스러워하도록."
그는 손가락으로 동굴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동굴에서 버텨야 할 시간은 2주일이다. 최대한 잠을 줄이고 정신을 예리하게 다듬는다면 크게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저희는 아직 중무전의 무인이 아니라, 연수생입니다. 면벽이 아니라 더 많은 경험을…."
버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지난주에 말했지 않느냐. 여기에선 다 똑같은 중무전의 무인이라고. 너희에게 도움이 될 중요한 기회이니 들어갈 준비나 해라."
"후우, 알겠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버렌이 낮은 한숨을 내쉬고 라온을 보았다.
"일단 거짓은 아니야. 초대 중무전주께서 수련했던 곳인 것도 맞고, 대성하셨다는 것도 맞고, 무인들이 들어가는 것도 사실이니까."
버렌이 인상을 찌푸리며 동글을 쓱 둘러보았다.
"다만 2주일 동안 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 이 훈련에 효용이 별로 없거든. 길어도 열흘인데 2주라는 걸 보니 네가 밉보이긴 한 모양이다."
"괜찮네."
라온은 동굴을 보며 빙긋 웃었다.
"괘, 괜찮다고?"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버렌이 눈을 부릅떴다.
"재밌을 거 같아."
이런 걸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다른 사람에게는 고행일 뿐이지만, 불의 고리와 시스템이 있는 자신에게 어렵고 힘든 일은 능력치를 올릴 최고의 기회였다.
거기다 초대 중무전주가 남긴 무언가를 얻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 연무장에서 의미 없는 파괴왕 짓을 하는 것보다 이곳에 들어가는 게 훨씬 나았다.
"크흠! 물은 안에 있다. 그 보자기에 들은 건 빵이니, 하루에 하나씩 먹도록."
"알겠습니다."
"그럼 들어가라."
-뭣이라!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첫 번째 동굴에 들어가려 할 때 자는 듯 조용하던 라스가 새싹처럼 불쑥 솟아올랐다.
-하루에 빵 하나? 그걸 먹고 어떻게 버티란 말이냐!
'고행이라잖아. 그래야 강해지지.'
-닥쳐라! 이미 존재를 초월한 본왕이 왜 고행을 해야 하는 것이냐!
라스는 말도 안 된다며 냉기로 만든 손을 마구 휘저었다.
-잘 먹고 죽은 마족이 때깔도 좋다는 속담도 있거늘! 하루에 빵 하나로 어떻게 버티라는 것이냐! 맛을 느낄 새도 없을 것이니라!
'아, 미안한데. 이거 배는 부른데 맛없는 나딘빵이야. 딱 고무 씹는 맛이 나지.'
라온이 볼을 긁적였다. 이 빵은 암살자 시절에 가장 많이 먹었던 빵이다. 하나만 먹어도 배가 불러서 자주 애용했다.
-지, 지랄.
간편해서 좋아했는데, 맛이 중요한 라스에게는 최악의 음식인 모양이다. 폭발하기 전 화산처럼 녀석의 머리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2주동안 맛없는 빵으로 버티라니! 그게 말이냐! 방귀냐!
라스에게서 터져 나온 분노와 냉기가 라온을 휘감은 뒤 동굴 전체로 퍼져나갔다.
-차라리 여기서 죽여버리겠다! 네놈의 육체를 빼앗고 당장 뛰쳐 나가겠느니….
[<분노>의 방해를 받았습니다.]
[민첩성 능력치가 1포인트 상승했습니다]
-어억!
'어? 능력치 올랐다.'
라온이 메시지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능력치에 쌓인 경험치가 거의 끝이었는지 라스의 냉기와 분노를 받자마자 능력치가 상승했다.
'시작이 좋네.'
라온은 휘파람을 불며 깊숙한 동굴로 들어갔고.
'동굴에서 호구의 냄새가 나.'
-정말 지이이이랄 맞은 인생. 아니 마생이로다!
라스는 이곳에서도 평소와 같았다.
제157화
라온이 중무전의 훈련 도구들을 부수고, 중무전 무인들을 오직 힘만으로 후려 팼으며, 마지막에는 전뢰단의 부단주 호라인까지 쓰러뜨렸다는 소문은 아쉽게도 퍼지지 않았다.
그 경악스러운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이 전부 중무전 소속이었으니, 제 얼굴에 침 뱉는 짓을 왜 하겠는가.
총관 우렉과 훈련 교관 레프가 추가로 입단속을 시켰기에 그 놀라운 사건들은 중무전의 연무장 아래로 조용히 가라앉았다.
하지만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겠는가.
중무전의 모두가 숨기고 싶었던 비밀들은 지그하르트 남부의 낡은 주점에서 한 사람. 아니, 입이 깃털처럼 가벼운 한 엘프에게서 흘러나오기 직전이었다.
"아, 이거 비밀인데, 진짜 말하면 안 되는데…."
리메르는 붉은 머리를 긁적이며 입맛을 다셨다.
"지금까지 뜸을 들여놓고 무슨 비밀이라는 거야!"
"30분이 지났어요! 빨리 좀 말해요!"
"그래. 언제까지 시간을 끄는 거야! 라온이 뭘 했는데!"
"궁금해 뒤지겠다고!""
주점에 있는 사람들은 머뭇거리는 리메르를 보며 소리를 지르고, 술잔을 던졌다. 그가 계속 비밀을 말해주겠다고 하고는 시간만 끄니,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온 상태였다.
"뒤지기 전에 빨리 말하쇼!"
"이제 정말 못 참아!"
"리메르 님!"
"적당히 하라고!"
이 넓은 주점 사람들은 전부 리메르의 입을 바라보며 포크와 나이프를 쥐었다. 정말 검을 뽑을 것처럼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있는 검사도 있었다.
"아, 어쩔 수 없네. 내가 너희들이니까 말해주는 거야. 어디 가서 퍼뜨리면 절대. 절대로 안 된다."
리메르는 비밀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대사를 읊으며 술잔을 든 사람들을 쭉 훑어보았다.
"알겠다고! 제대로 퍼뜨려 줄 테니까! 빨리 말해!"
"그래. 라온이 또 무슨 사고를 쳤는데!"
"아오! 진짜 저 인간보다 더 인간 같은 엘프 자식!"
"흐음!"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듯 고개를 까딱이고서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럼 시작하지. 이 리메르 님의 훌륭한 점을 모조리 떼다 박은 '애제자' 라온이 중무전에서 연수를 시작했거든 그런데 그곳에서…."
리메르는 라온이 중무전 훈련을 따라가는 수준을 넘어 오히려 압도했다는 것과 중무전 검사들을 힘만으로 모조리 때려눕혔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이게 하이라이트인데, 라온이 5연승을 했을 때 누가 나타났는지 알아? 전뢰단 부단주 호라인. 그 천재 녀석이 대련을 신청했고, 내 '애제자' 라온이 받아들였어. 즉, 천재라 불리는 두 사람이 제대로 붙었지. 처음에는 오러 없이 검술만의 결투였고, 라온이 호라인을 압도하면서 승리를 가져갔어."
"우오오오!"
"허억!"
"지, 진짜로?"
"라온이 호라인을 꺾었다고?"
주점의 사람들은 라온이 호라인을 꺾었다는 말에 경악하며 술잔이나, 식기를 떨어뜨렸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야. 호라인은 패배를 인정하고 서로 오러를 사용하여 재대결을 하기로 했지. 내 '애제자' 라온은 이번에도 쿨하게 받아들여서 2차전이 시작됐어. 라온은 불꽃의 오러, 호라인은 냉기의 오러를 운용하며 동시에 땅을 박찼지!"
"그, 그래서!"
"누가 이겼는데!"
"빨리 말해!"
"리메르 님! 저 뒤질 거 같아요!"
"크흠! 커험!"
리메르는 말을 하지 않고, 목젖을 꾹꾹 누르며 헛기침을 했다.
"아, 목이 좀 마르네. 끊기기 전에 말을 해줘야 하는데, 목이 타서 원…."
"아오! 주인장 저기 저 망할 엘프한테 맥주 다섯 잔 가져다줘!"
"배도 좀 고프고…."
"안주는 내가 추가할게! 메뉴판에 있는 거 다 주문해!"
"오늘 도박할 돈도 없어서…."
"닥치고 내 돈 받아!"
하이라이트에서 이야기가 멎자 화가 난 사람들이 리메르를 향해 은화를 던졌다.
"역시 대륙의 도리는 죽지 않았군! 다들 고마워!"
리메르는 눈물을 닦는 척하면서 쏟아지는 은화를 주머니에 담았다.
"이 돈은 나의 대박 날 미래를 위해 투자한다고 생각…."
"아, 됐으니까 빨리 이야기나 계속하라고!"
"감질나서 죽겠다!"
"연참! 연참! 연참!"
"여, 연참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알겠어."
리메르는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며 이야기를 재개했다.
"라온과 호라인이 정면에서 맞부딪쳤지. 알다시피 호라인의 검술은 변검과 환검. 라온은 그 검술들을…."
그는 술집에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 장소에서 대련을 본 것처럼 현장감 넘치게 두 사람의 전투를 풀어주었다.
"흐억!"
"허어…."
"미쳤다. 미쳤어!"
라온이 화염의 꽃이 휘날리는 검술로 호라인의 검을 꺾었다는 사실에 모두가 동시에 탄성을 내질렀다.
"17살에 진심을 내보인 부단주급을 쓰러뜨렸다고?"
"이전에 소문이 돌 때부터 느꼈지만 그 녀석은 괴물이야."
"대련 장면 직접 못 본 게 한이다. 불꽃으로 만드는 꽃의 폭풍이라니…."
관심이 없어 보이던 사람들까지 모두 모여서 라온의 무력과 검술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어느새 모두의 입에서 라온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후후."
리메르는 그 떠들썩한 장소에서 벗어나 품에 있는 은화를 세며 히죽 웃었다.
"이게 바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지."
라온은 명성을 떨치고, 자신은 돈을 버는 1석2조의 효과.
그는 오늘도 몹쓸 스승의 일면을 제대로 보여주면서 도박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대박의 향기가 풀풀 풍기는구나!"
* * *
-제기랄!
라온은 난동을 부리는 라스와 함께 동굴 안으로 계속해서 들어갔다.
-이 멍청한 놈! 저놈들이 바보도 아니고, 조상의 유산이 있는 동굴에 네놈을 들여보내 주겠느냐!
라스는 동굴 벽을 쭉 둘러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 조상이라는 놈이 들어간 동굴은 다른 곳에 있고, 여긴 아무 의미도 없고, 힘들기만 할 게 분명하다.
'그럴지도 모르지.'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프가 자신을 1번 동굴로 보낸 걸 보면 이곳에 초대 중무전주의 유산은 없을 것이다.
다만 가짜라고 해도 힘든 수련을 한다면 시스템의 힘으로 충분한 보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시간 낭비이니라. 아니, 위장 낭비이니라! 그딴 빵을 먹어가며 2주라니! 본왕은 차라리 여기서 죽겠다!
라스는 엄마 따라 시장에 간 아이가 떼를 쓰는 것처럼 바닥에 드러누워 발버둥 쳤다.
'난 낭비 아니니까. 괜찮아. 저 안에 무엇이 있든 네가 만든 훌륭한 시스템이 충분한 보상을 내려 줄 테니까.'
-끄으윽….
라스는 그 말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이를 바득 갈았다.
-그렇게 건방지게 굴다가 언젠가 그 콧대가 눌리게 될 것이다!
'아, 그것도 괜찮아. 나 콧대도 높아서.'
미소를 지으며 콧대를 쓱 쓸어내렸다.
-끄이이익! 그게 아니지 않느냐!
라스가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손을 쭉 펼쳤지만 조금 전 능력치를 퍼주었기 때문에 다시 덤비지는 않았다.
'일단 가보고 얘기하자고.'
-가볼 필요도 없다! 저 안은 어그러져 있으니까!
'어그러져?'
되물었지만 라스는 삐졌는지 고개를 돌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가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계속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은 생각보다 길어서 거의 10분을 걷고 나서야 그 끝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작은 발광석에서 내려오는 주황색 조명이 작고 울퉁불퉁한 공간을 밝혔다.
바닥과 벽, 천장은 두꺼운 대검으로 찌른 듯 기이한 상흔으로 가득했다. 애들 낙서 같았지만, 꼭 어디선가 본 것만 같았다.
다만 이 공간에 들어온 순간부터 숨이 턱 막히고, 속이 울렁거려서 벽의 흔적을 자세히 살필 여유가 없었다.
이곳의 마나 흐름은 이상하리만큼 일그러져 있었다.
"잘못 느낀 게 아니었네."
라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들어갈수록 마나의 움직임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이 뒤틀림 때문이었다.
"아까 말했던 어그러짐이 마나의 뒤틀림이었나?"
-그렇다. 아무래도 예전 이 장소에서 강한 힘을 지닌 존재들끼리 부딪쳤던 모양이다. 마나의 흐름이 장미 덩굴처럼 배배 꼬여 있느니라.
라스가 바닥과 천장을 쭉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의 육체는 자연에 퍼져 있는 마나의 흐름을 따르지. 하지만 이곳의 마나는 네 성격처럼 제멋대로 움직인다.
라스의 손에서 피어난 냉기들이 바람을 탄 듯 마구잡이로 휘날렸다.
-네놈처럼 쓸데없이 감각만 좋은 인간이라면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고역일 것이다.
"그 말대로야. 두통과 어지러움이 점점 심해지고 있어.""
라온이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스의 말대로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 세상이 핑핑 돌았다. 요동치는 배를 탄 듯 속이 울렁거렸고, 심장을 바위로 누르고 있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아까 그놈들이 널 싫어하기는 하는 모양이구나. 수련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이런 곳에 집어넣다니.
'수련을 못 한다고?'
-마나의 흐름이 꼬여 있어서 오러 연공을 하거나, 오러를 운용하여 검술을 사용한다면 마나 회로가 비틀어져 내상을 입게 될 거다.
라스가 안 된다는 듯 손가락을 양옆으로 흔들었다.
-너처럼 감각이 좋다면 수련은커녕 버티는 것도 불가능하다. 어차피 얻을 것도 없으니, 지금 나가라. 고무 같은 그 빵은 당장 가져다 버리고!
"흐음."
라온은 라스의 사나운 조언을 듣지 않고, 눈을 감았다.
'확실히 마나 회로에도 영향이 있어.
그저 머리만 아픈 게 아니라, 호흡하며 들어온 마나에 의해 마나 회로와 단전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잠을 줄이고, 정신을 날카롭게 가다듬으라고 하더니, 이러면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잖아.'
머리가 지끈거리고, 단전과 마나 회로가 울렁거리니,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잠도 제대로 못 잘 것이다.
-그니까 빨리 나가라니까.
'싫어.'
-이 고집불통 자식! 미식의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건만 왜 심통을 부리는 것이냐!
'옆에서 버렌도 견디고 있을 텐데, 먼저 나갈 수는 없지.'
-멍청한 놈. 이런 고통을 겪는 건 너뿐이다.
'뭐?'
-다른 동굴에도 마나의 비틀림이 있긴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다. 이곳과 달리 아주 약간의 울렁거림만 있을 뿐이지. 눈깔 꼬마는 지금 미약한 두통만 느끼며 지루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라스는 이미 확인이 끝났다고 말하며 이마를 찡그렸다.
"그래서였군."
라온이 뒤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레프가 길을 막고 자신을 먼저 1번에 보낸 이유가 이걸 위함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못 견디고 나오면 그것도 못 참냐고 조롱하면서 다른 동굴에 보낼 생각이었을 거야."
여러 방법으로 중무전을 망신시켰던 복수인 것 같았다. 참으로 유치하고 찌질한 방식이었다.
'버렌도 몰랐겠군.'
훈련에 효용이 없을 정도라고 말한 걸 보면 1번 동굴의 마나 흐름이 다른 동굴보다 심하게 뒤틀렸다는 건 버렌도 몰랐던 것 같다.
불합리한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버렌이 이 사실을 알고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다 알았으면 나가라. 여기서 견디는 건 무리다.
'싫다니까.'
-이리 친절하게 말해줬는데도 견딜 생각이냐? 그 맛대가리 없는 빵만 먹고?
라스는 마나가 뒤틀린 상황보다 나딘빵을 먹는 걸 더 싫어하고 있었다.
"기대를 받았으면 충족시켜줘야지."
-이 미친 빵돌이 자식!
라온이 분통을 터트리는 라스를 무시하고 바닥에 앉았다.
'일단 만화공과 글래시아는 사용하지 못해.'
마나의 흐름이 꼬여 있어서 한 속성에 치우친 기운을 사용했다가는 바로 몸에 문제가 생길 것이다.
'하지만 불의 고리는 가능할 거야.'
불의 고리는 이름만 불이 들어갈 뿐 자연의 흐름을 그대로 따르는 천고의 연공법이다. 그 순수함이라면 이렇게 꼬여 있는 마나도 다듬을 수 있을 것이다.
라온이 눈을 감고 불의 고리를 회전시켰다. 다섯 개의 고리가 교차하며 악기처럼 조화로운 울림을 만든다.
고오오오!
녹슨 철조망처럼 구겨지고 꼬여있던 마나의 흐름이 열을 가한 듯 느슨하게 풀리며 불의 고리가 일으키는 청아한 공명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역시 되는군.'
외부의 마나를 통제할 수는 없지만, 육체 내부의 어그러진 마나와 마나 회로는 안정되기 시작했다.
'제대로 가보자.'
그놈들이 경악하는 얼굴을 보고 싶으니까.
라온은 동굴을 울리는 심장의 약동을 느끼며 깊은 집중 상태로 빠져들었다.
* * *
레프는 라온과 버렌을 동굴로 들여보낸 뒤 돌아가지 않고, 입구 앞에 서서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둘 다 들여보냈나?"
뒤에서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레프가 고개가 돌아갔다. 총관 우렉이 뒷목을 주무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음? 설마 그놈을 1번 동굴로 보낸 건가?"
우렉은 열려 있는 1번 동굴을 보고 눈매를 좁혔다.
"죄송합니다.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레프는 우렉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건방진 놈이 굴욕을 당하는 꼴을 꼭 보고 싶었습니다."
1번 굴은 초대 중무전주와는 관계없이 마나의 어그러짐만 굉장히 심한 동굴이다.
본래는 막아두었지만, 라온의 굴욕적인 모습을 보고 싶어서 봉인을 풀고 그놈을 넣어버렸다.
"…이해한다."
우렉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역시 라온에 대한 분노가 꺼지지 않은 상태였기에 레프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지금 들어간 건가?"
"예."
"그럼 1시간 안엔 나오겠군."
1번 동굴에서 발생하는 마나의 꼬임은 강한 무인일수록 버티기 힘들다. 익스퍼트 중급의 무인들도 세 시간을 채 버티지 못하니, 그놈은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기어 나오게 될 것이다.
"버렌 님이 초를 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모르시더군요."
"아실 리가 없지. 그분도 이곳은 처음 와봤을 테니까."
우렉이 버렌이 들어간 5번 동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검사 자격을 얻은 이후에만 올 수 있기에 버렌도 몰랐을 것이다.
"그놈이 못 견디고 튀어나오면 실컷 망신을 줄 생각이겠군."
우렉은 레프의 속셈을 모두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 망할 자식의 얼굴이 구겨지는 걸 봐야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레프는 며칠 동안 잠을 설쳤다고 중얼거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표정은 나도 궁금하군. 구경 좀 하다 가야겠어."
두 사람은 곧 나올 라온을 기다리며 동굴 앞에 서서 차게 웃었다.
하지만 라온은 그들이 예상한 한 시간을 넘어 이틀이 지날 때까지 동굴에서 나오지 않았다.
* * *
-쯔읏….
라스는 길게 혀를 차며 팔찌 위로 올라왔다. 라온은 이틀이 지나도록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었다.
-어이.
톡톡 라온의 어깨를 두드렸다. 조금의 반응도 없다. 인형처럼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았다.
-라온 지그하르트!
족제비 놈의 이름을 불러도 그대로다. 죽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느릿하게 숨을 쉬며 연공만 계속했다.
-마나가 점점 더 안정되는군….
라스가 라온의 내부를 살피며 눈매를 좁혔다. 놈의 내부가 이틀 전보다 훨씬 잔잔해졌다. 하늘까지 치솟은 대해의 해일이 해안가의 얕은 파도로 변한 것 같았다.
-불의 고리….
자신의 분노를 막아내는 걸로 모자라, 이런 어그러진 마나까지 받아들여 정화하는 걸 보면 불의 고리는 인간의 격을 초월한 무학이었다.
-좋다. 불의 고리도 좋고, 안정화도 좋은데….
라스가 라온을 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이틀 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단 말이다!
라온에게 깃든 이후 유일한 낙인 식사가 이 이틀 동안은 완전히 끊겼다. 고무 맛이 난다는 빵이라도 씹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 망할 자식아! 그 맛없는 빵이라도 좋으니 제발 먹어!
라스가 라온의 어깨를 후려치며 악을 질렀다.
-이제 먹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단 말이다!
'....'
그 비명에 잠시 집중이 깨진 라온은 확신했다.
분노의 군주는 개뿔.
라스는 <식탐>이면서 <분노>로 위장 취업한 마왕이 분명했다.
제158화
동굴 바닥에 앉아있던 버렌이 고개를 들었다.
동굴 벽과 천장에 수많은 검술 흔적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 동굴에 들어왔던 중무전 검사들이 남긴 검흔이었다.
"꼭 낙서 같군."
저 중 초대 중무전주의 검흔도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 보이는 건 어린아이가 연필로 그은 낙서처럼 삐뚤빼뚤한 자국뿐이었다.
다만 저건 장난친 게 아니라, 진지하게 검을 수련한 흔적이다. 검흔이 흔들리듯 남겨진 이유는 이 동굴 안의 마나 흐름이 약간 꼬여 있기 때문이었다.
'이래서 이 안에서 수련하는 건 의미가 없다는 거였군.'
예전에 둘째 형에게 이곳에선 수련해도 의미가 없다는 말을 들었었다.
당시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이제 확실해졌다. 이 동굴에서 발생하는 마나의 어긋남 때문에 수련해도 무언가를 얻기 힘들다는 뜻이었다. 기껏해야 약간의 정신력만 키우는 정도.
제대로 수련하기 힘든 곳에서 약간의 두통을 참으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게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하지만…."
버렌이 땅을 짚은 손을 꽉 말아쥐었다.
"난 그럴 수 없지."
내 목표는 그 괴물 녀석이니까.
일주일이 지나도 라온과 호라인의 전투가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호라인은 젊은 나이에 전뢰단의 부단주가 된 천재. 그런 강자를 꺾은 라온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이곳에서도 시간 낭비를 해선 안 된다.
이미 완성되었다고 생각한 검술을 더 발전시킨 녀석이라면 이렇게 마나의 흐름이 어긋난 곳에서도 변함없이 수련하고 있을 게 분명하니까.
"후우욱."
버렌이 숨을 고르며 일어서 검을 뽑았다. 레뷘 사막에서 지내는 일 년 동안 익혀온 새로운 검술 자세를 잡으며 두 눈을 빛냈다.
'이게 완성된다면 라온의 검에도 밀리지 않을 거야.'
생존 시험을 치르며 얻은 레뷘 사막의 무학은 단순한 강함의 개념을 넘어선 검술. 제대로 습득만 한다면 익스퍼트 최상급에 오른 라온에게도 박힐 만한 날카로운 이빨이 되어줄 것이다.
후우우우웅!
모래조차 말려 죽이는 사막의 삭풍. 그 죽음의 바람을 담은 무학이 버렌의 손에서 웅혼하게 피어났다.
* * *
라온은 끊임없이 불의 고리를 회전시키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집중 특성 덕분일까. 생각이 좁아지면서 이 어그러진 마나에도 점차 적응이 되었다. 이젠 머리가 어지럽고, 숨이 막히는 현상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좋은 점은 그것만이 아니지.'
평범한 마나가 아니라, 조각나고, 뒤틀린 마나를 받아들여 정화 시킨 효과로 이 짧은 기간 동안 불의 고리 성취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다.
치이이잉!
다섯 개의 고리가 완연하게 회전하는 건 물론이고, 그 끝에 새로운 고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야 이 자식아!
여섯 번째 고리 형성에 집중하려고 할 때 라스의 짜증 어린 목소리가 귓가에서 터졌다.
"하아…."
라온이 한숨을 내쉬며 슬쩍 눈을 떴다. 푸른 냉기를 뒤집어쓴 라스가 바드득 이를 갈고 있었다.
-사흘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고 무엇을 하는 것이냐!
"사흘? 사흘이나 됐어?"
-그렇다! 본왕은 사흘 동안 굶으며 이 지옥을 버텼느니라. 네게 양심이 있다면 당장 나가서 별관의 식사를 바치거라!
"비켜봐."
달라붙으려는 라스를 툭 밀어내고, 옆에 있던 보자기를 펼쳤다.
-그 보자기는….
"왜? 언제는 이거라도 먹으라며."
-그걸 듣고도 지금까지 무시했던 것이냐!
"무시라기보다 귀찮아서."
라스가 떠드는 소리를 들었지만 반응해주면 더 난리를 치니 계속 무시했었다.
"너 분노의 군주가 아니라, 탐식의 군주 맞지?"
-무, 무슨 헛소리냐!
"미식을 따진다는 놈이 이 맛없는 빵이라도 먹어달라는 건 맛이 아니라, 배가 부르길 원한다는 거잖아.
-보, 본왕은 미식의 세계를 사랑하는 고귀한 분노의 군주이니라! 그딴 토끼 새끼와 비교하다니! 당장 사과해라!
"토끼라…."
<나태>를 곰탱이나, 잠탱이라고 부른 것처럼 <탐식>은 토끼와 비슷한 느낌인 것 같았다.
멧돼지도 아니고, 토끼라니, 꽤 의외의 별명이었다.
'이것도 정보지.'
라스는 수다쟁이답게 본인도 모르게 이런저런 중요한 정보들을 풀어준다. 지금 걸 기억해둔다면 언젠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라온은 피식 웃으며 나딘빵을 들었다. 보름달처럼 둥근 형태에 잘 익은 고구마처럼 갈색을 띠었다. 맛있어 보이지만, 맛이 없는 게 이 빵의 특징이다.
-음? 꽤 맛있어 보인다만?
3일 동안 굶었기 때문인지 라스는 빵의 외형을 보고 입에서 냉기의 줄기를 침처럼 흘렸다.
"그래?"
피식 웃으며 나딘빵을 베어 물었다. 뭉쳐 있는 고무줄을 씹는 듯 질겼고, 맛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전생의 향기에 웃음이 나왔다.
-꺼르륵….
라스는 정말 맛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을 줄은. 그것도 고무 씹는 식감이 정말일 줄은 몰랐던지 구역질을 하듯 입을 쭉 벌렸다.
-이, 이건 죄악이다! 식량에 대한 죄악! 이런 걸 먹고 웃다니! 네놈은 역시 악귀가 분명하다!
마왕에게 악귀 소리를 몇 번을 듣는지 모르겠다.
"먹을 만한데."
라온은 빵의 마지막 조각까지 꼭꼭 씹어 삼키고서 배를 두드렸다. 순식간에 가득 차오르는 포만감. 맛은 더럽게 없지만, 배부른 효과 하나는 확실했다.
-오직 배만 부르게 하기 위한 빵이라니, 무서운 음식이니라. 이 무슨 공포인가….
라스는 나딘빵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까지 많은 모습을 보았지만, 저렇게 겁에 질려 하는 건 처음이었다. 미식가인지, 대식가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바보는 맞는 것 같다.
"음?"
물을 마신 뒤 다시 불의 고리를 운용하려 할 때 동굴 바깥쪽에서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본 발걸음 소리에서 불안함이 느껴졌다.
"이제야 오는군."
라온은 글래시아를 운용하여 왼손의 온도를 내려, 동상을 입은 것처럼 손을 옅은 분홍빛을 만들었다.
불의 고리로 몸속 내부 마나를 정화한 덕분에 짧은 시간 동안은 오러를 운용할 수 있었다.
자세를 다잡고 기다리고 있으니, 모퉁이에서 두 사람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총관 우렉과 훈련 교관 레프였다.
"허억! 사, 살아 있…."
"너, 너 괜찮은 것이냐?"
두 사람은 덤덤하게 앉아있는 자신을 보고 귀신을 본 듯 눈을 부릅떴다.
"당연히 괜찮죠."
라온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두 사람의 낯빛이 백지장을 바른 듯 더 창백해졌다.
"크윽…."
"괘, 괜찮을 리가 없는데, 여기에 있으면서 그 구역질 나는 마나의 뒤틀림을 못 느낄 리가…."
천천히 다가오던 레프가 인상을 찌푸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동굴에서 올라오는 마나의 뒤틀림에 속이 울렁거리는 것이다.
"레프. 입 좀 다물어!"
우렉이 레프의 입을 막고서 앞으로 나왔다. 그 역시 마나의 뒤틀림을 느꼈는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정말 문제없는 것이냐."
"조금 울렁거리긴 하지만 지그하르트 검사로서 이 정도는 버텨야죠."
"조, 조금이라니…."
"음…."
레프는 손톱을 깨물었고, 우렉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다가 억지로 차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이제 3일이 지났으니, 남은 11일 동안 잘 버티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라온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의 흔들리는 동공을 마주했다.
"여긴 왜 오셨습니까? 2주 동안의 고행인데, 이런 식으로 찾아오시면 수련에 방해됩니다."
"이 건방진!"
"…확인 절차다. 가끔 동굴 내부에서 사고가 생기는 경우가 있으니까."
우렉은 눈을 부라리는 레프를 말리며 상황을 설명했다.
"그렇군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보면 거짓이라는 게 뻔히 보였다.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럼 이만 가주시겠습니까. 전 그 고행이라는 걸 계속해야 해서요."
"알겠다. 그럼 나중에 보지…."
이를 꾹 깨물며 물러나던 우렉은 자신의 왼손을 보고 눈매를 좁혔다. 아주 잠시 눈동자를 빛내던 그는 멍하니 선 레프를 데리고 출구로 향했다.
'역시.'
라온은 사라지는 두 사람의 그림자를 보며 피식 웃었다.
'네 말대로였네.'
저 둘이 찾아온 걸 보니, 자칭 미식가 마왕이 말해주었던 대로 다른 동굴은 이 정도로 마나의 흐름이 뒤틀리지 않은 것 같다.
우렉이 나름 표정 관리를 하려 했지만, 레프의 당황한 얼굴 때문에 아무 의미가 없었다. 저 둘은 자신에게 엿을 먹이기 위해 이 동굴을 고른 게 맞았다.
그렇지만 오히려 도움이 되었지.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고른 이 장소는 역으로 큰 이득이 되어주었다. 3일 만에 3개월 이상 수련한 것 이상으로 불의 고리가 성장했다.
-잠깐! 너 손에 냉기를 담았던 거 저놈들을 속이기 위해서인가?
'그래.'
-그럼 그 허접한 놈과 대련했을 때 일부러 아픈 척했던 것도?
'그렇지. 이걸로 저들은 내가 냉기에 약하다고 생각하고, 나중에 습격할 때 냉기를 이용할 거야.'
실제로는 가장 강한 냉기를.
라온이 우렉의 표정을 떠올리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미친놈이도다. 정말이지 머리가 돌아버린 놈이야….
라스는 귀신 같은 놈이라고 중얼거리며 혀를 내둘렀다.
'너도 대단했어. 여기서 다른 동굴의 마나 뒤틀림은 그리 강하지 않다는 걸 느꼈잖아.
-크흠! 그게 본왕의 위대함이니라. 옆 동굴이 아니라, 저 멀리 떨어진 곳의 기운도 느낄 수 있느니라.
라스는 오랜만에 들은 칭찬에 기가 산 듯 귀를 쫑긋 세웠다.
-본왕에게 감사함을 느낀다면 당장 나가라. 나가서 파인애플 소녀의 파이를….
"그럼 다시 시작해볼까."
라온은 두 사람이 동굴에서 빠져나가는 기척을 느끼고 다시 자리 앉아 눈을 감았다.
-야! 야! 라온!
라스는 절대 안 된다는 듯 마구 고개를 저었지만, 이미 라온은 눈을 감고 불의 고리에 빠져들어 있었다.
-이제 고무빵은 싫단 말이다!
* * *
"대, 대체 저놈은 뭡니까?"
레프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바르르 떨었다.
"저 동굴은 마나에 민감할수록 버티기 힘든데, 익스퍼트 최상급인 저놈이 어떻게 버틸 수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3일 동안 나오지 않아서 시체를 치울 생각으로 들어갔는데, 놈은 너무도 멀쩡했다.
아니, 오히려 들어가기 전보다 혈색이 더 좋아졌다.
"표정도 아주 여유롭더군."
우렉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우리를 조롱하듯이 말이야."
"그, 그건…."
"괜찮다는 정도가 아니라, 뭔가 깨달은 것처럼 눈빛이 시원했지. 놈은 그 비틀린 마나에 적응한 것 같다. 네 덕분에 저 망할 놈이 더 강해지겠어."
"죄, 죄송합니다…."
레프가 고개를 숙였다. 지시받지 않은 일을 했다가 오히려 라온에게 도움이 된 듯해서 할 말이 없었다.
"지금이라도 끌고 나오는 게 어떻겠습니까. 핑계를 대면…."
"의미 없는 짓이다. 저놈의 의심이 확신으로 변할 테니까."
"으윽!"
"그러게 왜 쓸데없는 짓을 해서!"
우렉의 말이 이어질수록 레프의 어깨가 물에 삶은 문어처럼 쭈그러들었다.
"후우…."
우렉은 뒤를 돌아 라온이 들어간 첫 번째 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잘못 건드린 것 같군.'
지금까지 경험상 저런 자는 건드려선 안 된다. 만약 어쩔 수 없이 건드렸다면 확실히 끝을 내야 한다.
'그래도 영 수확이 없는 건 아니야.'
아까 본 분홍색 손을 보고 확신했다. 일주일 전 호라인의 냉기에 얼어붙은 손의 부상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라온의 약점은 냉기가 분명했다.
'전주님께 말씀을 드릴 게 하나는 생겼군.'
우렉의 눈동자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 * *
라온은 우렉과 레프가 돌아간 이후에 단 한 번도 눈을 뜨지 않고, 불의 고리를 운용했다.
수없이 부딪치고 교차하는 다섯 개의 고리 속에서 작고, 얇은 고리를 유리병처럼 세공했다.
'조금만 더 천천히.'
새로운 불의 고리를 만들 때는 이전에 완성한 고리와 부딪쳐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고리가 늘어날수록 새로운 고리를 만들기 힘들어진다.
'느리더라도 똑바로 가야 해.'
매미 유충이 지상으로 올라오기 위해서 8년에 가까운 세월을 버티듯.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다섯 개의 고리들을 피해 아주 천천히 새로운 불의 고리를 조형했다.
쓸데없는 잡념을 모두 버리고, 기존의 불의 고리를 회전시키며, 새로운 불의 고리를 만드는 것에만 온 정신을 쏟아부었다.
시작과 끝.
영원처럼 닿지 않을 듯했던 불의 고리의 처음과 끝이 느릿하게 서로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지금이 중요해.'
새로운 불의 고리가 길어지면 기존의 불의 고리와 부딪칠 가능성이 높다.
장인이 도자기를 빚듯이 더욱더 집중력을 드높이며 새로운 불의 고리를 다듬었다.
치이잉!
다섯 번째 불의 고리가 거세게 회전하며 새로운 불의 고리에 달라붙는다. 불의 고리를 머리카락보다 더 미세하게 틀어서 간신히 피했다.
위기를 모면할 때마다 등이 식은땀으로 젖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전신이 땀 범벅일 것이다.
하지만 그 끈적함을 느낄 틈은 없었다. 자그마한 실수 하나로 지금까지의 노력이 깨지는 걸로 모자라 내상을 입을 수도 있었으니까.
우우웅!
불의 고리의 끝과 끝이 마주하기 직전. 다시 한번 위기가 찾아온다. 첫 번째 고리와 세 번째 고리가 공명하며 새로운 고리에 압박을 가해왔다.
'흘려내야 해.'
비틀어져 전해 오는 마나를 새로운 불의 고리에 그대로 전했다. 찰나의 순간 불의 고리가 곡선으로 휘어지며 그 압력을 흘려냈다.
'지금!'
위기는 곧 기회.
라온은 위기를 벗어난 순간에 대량의 마나를 받아들이며 여섯 번째 불의 고리의 시작과 끝을 길게 뻗어냈다.
치이이잉!
명인이 일필휘지로 그은 선처럼 매끄럽게 이어진 새로운 고리가 비틀린 마나를 가르고 회전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여섯 개의 불의 고리가 공명하며 터져 나온 박동이 뇌리를 가로질러 하늘이 열리는 듯한 거대한 전율을 일으켰다.
[새로운 <불의 고리>가 연성 되었습니다.]
[<불의 고리> 6성의 경지에 올랐습니다.]
[혹한의 저주 두 가닥이 사라집니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영혼의 격이 상승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5포인트 상승합니다]
라온은 전신에서 일어나는 전율에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충격과도 같은 희열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쉽게도 마스터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막을 막고 있던 거대한 벽이 반 가까이 무너졌다는 건 확신했다.
-어억!
빵이 맛없다고 삐져서 말도 안 하던 라스는 메시지를 보고 입을 떡 벌렸다.
-보, 본왕의 본체에서 다 빼가는 주제에 왜 네가 주는 듯 생색을 내는 것이냐! 이 망할 놈의 시스템아!
라스는 다른 건 몰라도 능력치는 다 자신의 것이라고 말하며 방방 뛰었다.
하지만 눈을 뜬 라온은 메시지도, 라스도 보지 않았다. 동굴의 벽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마른침을 삼켰다.
"뭐, 뭐야 이건…."
동굴 전체에 퍼져 있던 낙서 같은 검흔. 그 오래된 흔적이 금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제159화
라온은 벽면의 구멍들이 뿜어내는 금빛 광명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이건 낙서도,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도 아니야.'
검흔. 이 수백 개가 넘는 구멍들은 전부 검으로 만들어낸 흔적이었다.
'그것도 내가 알고 있는 검술로.'
처음 보았을 때 왜 익숙한 기분이 들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이 동굴에 새겨진 검흔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검술로 만들어진 게 분명했다.
-네가 알고 있는 검술이라고?
'그래. 경지의 차이가 심하게 나지만 확실해.'
심장에서 회전하는 여섯 개의 불의 고리가 말해준다. 이 검술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화령.
이건 만화공의 검술 중 가장 애용하고, 최근에 한층 성장했던 화령의 흔적이었다.
-그 검술치고는 구멍들이 훨씬 크고, 많은데?
'말했잖아. 경지 차이가 심하다고.'
화령은 맞지만, 같은 화령이 아니다. 자신을 굽어볼 정도로 높은 곳에 있는 검사가 사용한 화령이었다.
라온은 동굴의 검흔을 모조리 담아내기 위해서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모든 흔적을 훑어내렸다.
우우우웅!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검흔에서 번쩍이던 금빛이 별똥별처럼 아스라이 저물기 시작했다.
'아직 다 못 봤는데….'
입술을 꽉 깨물며 동굴 벽으로 다가갔지만 사라져가는 빛은 돌아오지 않았다.
"젠장!"
흔적에서 번쩍이는 빛무리를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조금만 더 보여주기를 바라며 벽에 손을 짚었다.
화아아아!
그 순간 차가운 벽면에서 열기가 일어나며 눈앞이 하얀빛으로 가득 찼다.
세상이 변한다.
지금보다 훨씬 넓은 동굴이 보인다. 셀 수 없이 많은 구멍은 전부 사라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뒤흔들리는 대지 위로 두 남자가 서 있었다.
등을 보이는 사람은 이전에도 보았던 금발의 검사였고, 그 반대편에는 눈동자의 백과 흑이 역전된 괴인이 손아귀를 꿈틀거리고 있었다.
괴인이 왼손이 검은색으로 타오르자, 검사의 검에 어려 있던 불꽃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검사는 그 기이한 힘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옅은 오러만 남은 검과 신묘한 보법으로 괴인의 난폭한 공세를 모조리 막아내며 틈을 노렸다.
괴인의 공격이 점차 강해진다. 그는 왼손에 있던 검은 기운을 오른쪽으로 이동시켜 더 무시무시한 파동을 일으키려 했다.
그렇게 괴인의 힘이 균형이 어긋난 찰나의 시간.
금발 검사의 검이 벼락처럼 솟구쳤다. 검날을 휘감은 유형화된 강기의 불꽃이 한순간 동굴 전체를 뒤덮었다.
세계수의 잎새가 이러할까. 검 전체를 덮은 새빨간 화염의 꽃잎들이 흩날리며 온 공간을 잠식해나갔다.
괴인이 뒤늦게 왼손에 힘을 집중했지만, 이미 늦었다. 금발 검사가 만들어낸 수백 송이의 꽃잎들이 동굴 전체를 장악했으니까.
진정한 모습의 화령은 괴인을 사정없이 녹여버리고도 힘이 남아 동굴 천장과 벽을 무너뜨리고 지금의 검흔을 만들어냈다.
화아아아!
[불의 고리(6성)를 습득하고 있습니다.]
[만화공(4성)을 습득하고 있습니다.]
[성취가 모자랍니다.]
시야 전체가 다시 금빛으로 물들었다. 시린 빛에 눈을 감았다가 뜨자, 원래의 텅 빈 동굴이 보였다.
"허…."
라온은 떨리는 손을 움켜쥐며 동굴 벽면을 살폈다.
'이게 진짜 화령인가.'
그저 몇 송이의 꽃잎을 환검과 변검으로 휘날리는 게 아니라, 온 세상을 덮는 강기의 꽃잎을 흩뿌리는 게 바로 화령의 진짜 모습이었다.
'역시 그는 만화공과 불의 고리를 전부 익히고 있었군.'
이제 확실해졌다. 지그하르트 선조인 그 금발의 검사는 자신과 똑같이 불의 고리와 만화공을 습득하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것도 이해가 가.'
중무전 소속은 아닌 것 같지만, 지그하르트의 선조이니 이 장소에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자는….'
눈동자의 흰자가 검고, 검은자가 흰색인 그 괴인은 누구인지 무엇인지 모르겠다.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이었다.
그 괴인이 왜 지그하르트 영역에 있는지를 생각하고 있을 때 라스의 냉기와 분노가 스멀스멀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치이잉!
라온은 불의 고리와 만화공을 일으켜 그 라스의 기운을 단번에 차단했다.
-윽!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네, 네놈의 영혼이 잠시 사라졌기에 살아 있나 확인해 본 것이니라.
"확인치고는 꽤 깊게 왔는데?"
-우, 웃기지 마라! 본왕이 정말 마음을 먹었다면 이미 네놈의 몸뚱이를 먹어 치웠을 것이다!
"그럼 다시 뺏으면 그만이지."
라온이 평온한 표정으로 라스를 내려다보았다.
-이, 이 건방진 자식이….
"하긴 네가 그런 치사한 짓을 하진 않겠지."
-뭐?
"고고하신 마계의 군주가 빈 몸을 노리는 추잡하고 더러운 짓을 할 리가 없잖아. 내 몸을 뺏는 것도 네 힘과 능력으로 당당하게 이루겠지. 아니야?"
-자, 잘 아는군! 물론이다! 본왕은 마계의 군주! 빈집을 터는 치사한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
약간의 띄움과 기대를 담은 말에 라스는 팔짱을 푼 채 시원한 미소를 그렸다.
이러면 앞으로 비슷한 일이 일어나도 건드리지 않겠지.
라온은 라스에게 심리적 압박을 걸어두고서, 진짜 화령에 대해 생각했다.
'마스터에 올라도 그걸 따라 하는 건 무리야.'
기억에서 본 남자의 화령은 꽃잎 한 장 한 장이 모두 강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건 마스터에 오르고 난 뒤에도 한참 성장해야만 이룰 수 있는 경지였다.
'다만 비슷하게는 할 수 있을 거야.'
라온의 검 위로 만화공의 불길이 솟구쳤다. 불의 고리가 6성에 오르며 이제 이 비틀린 공간에서도 전력의 오러를 운용할 수 있었다.
화아아아아!
4성에 이른 만화공을 극성으로 끌어 올려 화령을 펼쳐냈다. 칼날에 서려 있던 불꽃이 분수처럼 퍼져나가며 수십 개의 꽃잎이 흩날렸다.
그 위력도, 숫자도 금발 검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했지만, 호라인과 싸울 때보다 조금 더 발전했다는 게 느껴졌다.
'조금 더 해볼까.'
라온이 기억을 되새기며 다시 화령을 그으려 할 때였다.
[완벽에 이른 <화령>을 관찰했습니다.]
[<화령> 습득이 빨라집니다.]
예전 글렌의 태화보를 보고 나타났던 메시지와 같은 내용. 마왕도 익힐 만한 무학을 보면 나온다는 성장 강화 메시지였다.
'딱 좋은 순간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 습득 능력이 있다면 금발 검사의 화령을 조금 더 빠르게 습득할 수 있을 것이다.
-뭐, 뭐야! 이게 갑자기 왜 떠!
라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메시지를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네놈 조금 전에 어딜 가서 무얼 보고 온 것이냐!
'글쎄….'
라온은 메시지를 끄며 속으로 대답했다. 조상님의 개인 수업을 듣고 왔다고.
* * *
슬리온 가의 연무장.
"개진!"
"개진!"
슬리온 가문의 가주 로칸 슬리온의 웅혼한 목소리를 따라 검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화려하면서도 안정된 검진을 펼쳐냈다.
우우우웅!
검사들의 기세가 검진의 중심을 타고 올라 강대한 파동을 일으켰다.
"벽설!"
로칸 슬리온이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검사들이 검진의 형태를 마름모꼴로 전환한 뒤 더 날카로운 기파를 내뿜었다.
적의 진형을 부수기 위한 돌진형 검진의 모습이었다.
"이결!"
로칸 슬리온은 검진의 형태를 차례로 변화시켰고, 검사들은 그의 지시에 따라 서로 다른 검진을 형성하며 완벽한 합을 이루어냈다.
"음!"
로칸은 매끄럽게 형성된 검진을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날에 검사들이 완벽한 검진을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어 가슴이 뿌듯했다.
'잘 보았겠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 완벽한 검진을 어떻게 보았을지 기대하면서 우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로칸이 입을 떡 벌렸다. 사랑스러운 딸은 자신이나, 검진이 아니라 하늘을 멍하니 올려 보고 있었다.
'어억….'
맹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검진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줄은 몰랐다. 손을 떨며 루난에게 다가갔다.
"루, 루난?"
로칸이 멍하니 있는 루난의 어깨를 잡았다.
"무슨 생각하는 거니? 아빠 일하는 거 봐야지?"
"라온."
"억?"
루난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이가 바득 갈렸다. 최근 가장 싫어하는 남자의 이름이었다.
"라, 라온이 왜?"
억지로 미소를 유지하며 물었다.
"어제 교관님이 라온 이야기를 해줬어."
"교관이면 그 리메르?"
"응."
로칸이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 갑자기 집중력이 떨어졌다 했더니 리메르가 몰래 다녀간 모양이다.
"그 새끼. 아니, 교관이 뭐라고 했는데?"
"라온이 중무전의 호라인이라는 사람을 이겼대."
"호, 호라인? 호라인이라고?"
호라인이라는 말에 로칸이 눈을 부릅떴다.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호라인은 익스퍼트 최상급이야! 아무리 그놈이 천재라고 해도 17살에 이길 수준이 아니라고!"
"라온은 이겨."
"루난. 경지의 차이라는 건 그리 쉽게…."
"라온은 이겨."
"아니, 익스퍼트끼리도 성장의 격이…."
"라온은 이겨."
루난은 영롱한 보라색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도 잡았다고 해도 믿을 기세였다.
'크윽….'
라온이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사랑스러운 딸이 저렇게 빠졌는지 모르겠다.
"그, 그럼 아빠랑 내기 하나 할까?"
로칸은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하며 검지를 들었다.
"내기?"
"그래. 네게 경지의 차이가 얼마나 심한지를 보여줄게. 이쪽으로 오렴."
로칸이 루난을 데리고 연무장 좌측으로 향했다.
"아빠는 딱 너보다 반 단계 위의 힘만 사용할 거야."
"응."
"네가 아빠에게 한 번이라도 공격을 성공하면 선물을 주마."
"선물…."
선물이라는 말에 루난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아이스크림이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대신 한 번도 성공 못 하면 지금부터 라온은 잊고, 아빠의 수업에 집중하는 거야. 알겠지?"
"응."
루난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하자는 듯 바로 검을 뽑았다.
"그럼 시작!"
로칸이 시작을 외쳤지만, 루난은 바로 덤비지 않았다. 보랏빛 눈에 선명한 의지를 담고, 자세를 낮췄다.
'호, 제법.'
성장한 건 알고 있었지만 저런 침착함까지 가졌을 줄은 몰랐다. 역시나 자신의 딸이었다.
"갈게."
루난은 미리 경고를 해주며 오른 다리를 길게 뒤로 뻗었다. 그녀의 다리가 절벽을 타는 산양처럼 거칠게 땅을 박차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허억!"
얼음을 타고 오는 벼락처럼 전율적인 속도에 로칸의 손이 움찔거렸다.
'이건….'
카탐 정글의 수호자인 여족장의 돌진기였다. 빛살처럼 빠르면서도, 방향이 자유롭다. 루난은 그녀의 기술을 완벽하게 재연하고 있었다.
'지금 수준으로 차단하긴 힘들어.'
지금의 경지. 즉, 루난에게 약속했던 무학의 경지로는 저 돌진을 완벽하게 막을 자신이 없었다.
"크읍!"
아주 조금만 힘을 조금 더 끌어 올리면 가볍게 막을 수 있지만, 로칸은 차마 딸을 속이지 못하고 약속한 힘만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
파아앙!
루난이 스쳐 지나가고, 로칸의 소매가 짧게 뜯겨나갔다.
"루난…."
로칸은 소매를 보며 헛바람을 뱉었다. 단순한 무력의 성장이 아니라, 이런 기술까지 익혀온 게 감격스러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카탐 정글을 수호하는 여족장의 보법을 그 정도로 사용하다니! 대단하구나!"
라온이라는 존재를 잊고, 뿌듯함에 눈물을 글썽거리던 로칸은 루난의 대답을 듣자마자 고장 난 인형처럼 우뚝 멈춰 섰다.
"라온을 도와주려고."
"라, 라온을 도와줘?"
"응."
루난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라, 라온. 라온 지그하르트…."
로칸이 어깨와 팔을 부르르 떨며 라온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이제 못 참는다!"
그는 당장 라온에게 달려갈 것처럼 땅을 박찼다.
"다리 몽둥이를 부러뜨려버리겠어!"
"야! 가주님 또 시작이다!"
"말려! 전부 붙어!"
"넌 마님을 불러와! 그분밖에 말릴 수가 없어!"
불안에 떨던 슬리온 가문의 검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로칸을 붙잡았다.
"라오오오오온!"
루난은 로칸의 울부짖음을 뒤로하고 발장구를 치며 멍하니 하늘을 올려 보았다.
"아이스크림 같이 먹어야지."
* * *
라온은 학습 능력이 일시적으로 상승한 지금의 호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끝없이 화령을 펼쳐냈다.
당연히 잠도 자지 않고, 라스가 싫어하는 나딘빵은 씹지도 않고 삼켰다. 물 먹는 시간조차 아껴가며 계속 검만 휘둘렀다.
불의 고리를 회전시키면서 오러를 전부 소모하면 만화공으로 채우고, 전부 소모하면 또 만화공으로 채우면서 화령만을 반복했다.
[<만화공 화령>의 성취 속도가 원상태로 돌아갑니다.]
성취 속도가 원래대로 돌아가도 라온의 검은 끝없이 허공을 노닐었다. 결국 그는 오러와 체력, 정신력이 한계에 도달하고 나서야 검을 내렸다.
'역시 그걸 따라 하는 건 무리였군.'
잠도, 식사도 포기하며 수련했지만, 그 기억 속 화령을 재연하지는 못했다.
'지금 경지로는 불가능해.'
확실히 깨달았다.
최소 마스터 상급은 되어야 그 남자처럼 세상을 뒤덮은 화령을 뿌려댈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시간 낭비는 아니지.'
화령 자체의 성취도 크게 올랐지만, 변검과 환검의 숙련도도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
지금이라면 대련할 당시의 호라인과 붙어도 그리 밀리지 않는 변검과 환검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후우."
라온은 탁한 숨을 내뱉고서 검을 내렸다.
"라스."
-이 자식….
라스가 부들부들 떨며 팔찌 위로 올라왔다.
-계속 흔들어 싸서 잠도 못 자게 만들더니, 이제 눈 좀 붙이려니까 왜 부르는 것이냐!
"시간이 얼마나 지났어?"
-이곳에 온 뒤 56끼를 제대로 못 먹었으니 14일이 지났다!
시계이자, 달력 대용 라스는 계산할 필요도 없이 바로 답을 내놓았다. 그렇지만 무언가가 좀 이상했다.
"56끼면 14일이 아니라, 19일인데?"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마계는 1일 4식이니라. 즉, 오늘이 2주가 되는 날이지.
마계가 1일 4식이라는 것도 놀라웠지만 날짜로 끼니로 세는 마왕은 참으로 신박했다.
"그럼 오늘이 나가는 날이네."
-2주 동안 저 고무 빵을 처먹으며 버티다니, 이 천벌 받을 놈!
맛없는 빵을 먹는다고 천벌을 받는다니, 마왕의 사고방식은 역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무 화내지 마. 오늘 나가면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을 테니까."
-....
입술을 질겅질겅 깨물고 있던 라스가 움찔 멈추고서 천천히 다가왔다.
-저, 정말이냐?
"그래. 네가 원하는 걸로 먹을게. 다만 그 전에…."
라온이 다시 검을 들고, 얼마 남지 않은 오러를 모조리 끌어 올렸다.
"마지막으로 화령을 써보고."
체력도, 정신력도, 오러도 한계지만, 집중력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갈린 상태다.
지금이라면 그 남자의 검을 약간이나마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오오오!
은은하게 내려오는 발광석의 빛이 각진 어깨에서 흘러내려 검날에 스며든다. 다리를 뻗으며 부드럽게 손목을 비틀었다.
손목을 따라 휘어지는 붉은 칼날의 궤적이 나뭇가지처럼 허공을 수놓고, 그 가지에서 만개한 꽃송이들이 휘날린다.
화아아아아!
불꽃과 불꽃이 이어지며 피어난 염화의 꽃잎들이 동굴을 뒤덮었다.
잘 벼린 칼날의 예리함과 화려함을 담아낸 검사의 꽃잎은 자연의 흐름을 따라 번져가며 하늘을 노닐고, 땅을 적신다.
하늘과 땅을 잇는 지평선처럼 퍼져나가던 불꽃의 선이 두껍게 번지며 더 커다란 화령의 줄기를 일으켰다.
라온이 일으킨 꽃무리가 동굴 전체를 수놓으며 염화의 폭풍을 일으킨다.
꽃잎의 숫자도, 위력도 비교할 수 없이 작았지만, 화령에 담긴 흐름과 궤적은 천년의 세월을 지나 라온의 손에서 그대로 피어났다.
쿠와아아아앙!
구멍에 닿은 검기의 조각들이 응집된 기운을 발산하며 동굴 전체에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쿠구구구구!
동굴이 무너질 듯 뒤흔들리며 돌무더기를 쏟아냈지만 이미 집중에 빠진 라온은 화령의 흐름을 멈추지 않았다.
더욱 짙어진 화마의 꽃잎들이 돌덩이를 가루로 만들며 그 숫자와 예리함을 더해갔다.
끝없이 쏟아지는 돌무더기를 한 자루의 검으로 막아내는 모습은 그가 바라던 대로 선조의 검과 닮아 있었다.
동굴의 흔들림이 가라앉고, 한계를 모르고 쏟아지던 돌덩이도 그 끝을 고했다.
후우우욱.
라온은 바닥에 가득 깔린 돌가루의 사이에 서서 거친 숨을 내뱉었다.
부족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검술을 펼친 그가 희열에 잠겨 있을 때 메시지가 떠올랐다.
[만화공 <화령>이 <화령 개(開)>로 성장합니다.]
[장비, 검, 사람에 이어 동굴을 깨부쉈습니다.]
[칭호 <파괴왕>이 생성됩니다.]
파괴왕이라는 칭호가 만들어졌다는 메시지였다.
-아니….
라스가 메시지를 보며 푸른 눈을 부라렸다.
-어차피 다 부수는 망아지 놈에게 왜 칭호까지 주는 것이냐! 그것도 본왕의 힘으로!
짜증이 폭발했는지 빽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흔들었다.
-본왕의 육체가, 본왕의 힘이….
"조금 이따가 맛있는 거 먹어줄 테니까. 좀 참으라고."
슬라임처럼 흐느적거리는 라스를 잡으며 피식 웃었다.
-조금 이따가? 나가자마자 먹어라!
"미안하지만 할 일이 있어."
동굴 밖으로 향하는 통로를 보는 라온의 눈동자에 붉은 광망이 어렸다.
"중무전 놈들에게 인사를 해줘야 하거든."
덕분에 강해졌다고.
제160화
라온은 동굴을 나가기 전에 무엇을 얻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상태창을 불러왔다.
<상태창>
이름 : 라온 지그하르트.
칭호 : <파괴왕>.
상태 : 혹한의 저주(두 가닥).
특성 : <분노>, <나태>, 불의 고리(6성), 수속성 저항력(5성), 설화의 감각(3성) 만화공(4성), 글래시아(4성), 화속성 저항력(3성), 블리딩 커스(1성), 암습(2성), 불굴의 의지(2성), 요기적응(1성), 집중(1성).
근력 : 138.
민첩성 : 134.
체력 : 132.
기력 : 136.
감각 : 152.
분노 : 25.
중무전에 온 3주 동안 말도 안 되는 성장을 이뤄냈다. 지금이라면 호라인을 훨씬 쉽게 꺾을 수 있을 것이다.
'두 가닥이라….'
아홉 가닥이었던 혹한의 저주가 이젠 두 가닥밖에 남지 않았다. 예상이지만 마스터에 오르는 순간 완전히 사라질 것 같다.
'지금도 이 정도인데, 전부 사라진다면….'
이전과는 격이 다른 속도로 마나를 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경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강해질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되었다.
'그러면….'
라온은 이번에 얻은 파괴왕의 칭호를 열어 보았다.
<파괴왕>
눈에 보이는 것들을 가리지 않고 무식하게 파괴한 자에게 주어지는 칭호.
능력 : 무언가를 파괴할 때 근력에 6%의 가산이 붙는다.
설명을 읽는 순간 입이 떡 벌어졌다.
6%의 가산이면 지금 138의 근력이 무언가를 파괴할 때 8.28의 근력이 추가되어 146에 가까운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지금은 8이지만, 기본 힘이 올라가면 저 수치도 올라갈 테니, 성장할수록 효과가 좋아지는 칭호였다.
-아….
기뻐하는 자신과 달리, 라스는 물에 젖은 수건처럼 축 늘어졌다.
-괴롭도다. 삶이란 이리도 괴로운 것이었나?
녀석은 이상한 말을 읊으며 눈을 멍하게 떴다. 2주간 해를 못 봐서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다.
-갇힌 채 빼앗기기만 하는 삶을 왜 살아야 하는….
"금방 나갈 거야. 나가서 맛난 거 먹어야지."
-그건 그렇군!
순식간에 기운을 차린 라스가 기지개를 켰다.
-무얼 하는 것이냐! 당장 나가거라!
"...."
내가 하긴 했지만, 쉽다. 너무 쉬워서 무서울 정도. 이 녀석이 정말 분노의 군주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래. 가자. 가."
라온은 나가다 말고 멈춰서 뒤를 돌았다. 스스로 지워버린 선조의 흔적들을 쭉 훑었다.
'다시 볼 수 있겠지.'
자신을 이끄는 듯한 그 금발의 검사를 또 만나길 바라며 동굴의 출구로 향했다.
잠도 자지 않고, 무리를 했기 때문에 몸이 무거웠지만, 기분은 어느 때보다도 가벼웠다.
* * *
우렉은 곧 라온과 버렌이 나올 동굴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전주님이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카룬 지그하르트는 분쟁 지역에 가자마자 상황을 종료시켰지만, 글렌의 새로운 지시에 따라 그곳에서 일주일을 더 머물러야 했기에 아직 중무전에 도착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지금 중무전에 남아 있는 간부인 레프와 호라인 그리고 다른 무력이 뛰어난 검사들을 데리고 동굴 앞에 섰다.
정오쯤 되었을 때 5번 굴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잠시 후 얼굴이 조금 하얘진 버렌이 눈살을 찌푸리며 걸어 나왔다.
"생각보다 더 눈이 부시네요."
손을 들어 햇빛을 막는 버렌은 2주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듯한 기세를 풍겼다. 마나의 흐름이 꼬여 있는 동굴에서 전력을 다해 수련한 것 같았다.
우렉은 버렌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대단하군.'
그분의 아들다워.
대부분의 검사들이 시간 낭비만 하다가 돌아가는 저 동굴에서도 수련을 이어가다니, 대단한 녀석이었다.
"총관님."
우렉을 알아본 버렌이 다가와 고개를 꾸벅였다. 눈이 부시는지 여전이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수고했다."
"라온은 아직입니까."
"그래. 기다릴 테냐?"
"아뇨. 볼 필요 없습니다. 그 녀석은 분명 강해져서 나올 테니까요."
"그걸 알면서 그냥 가겠다고?"
"라온은 라온. 저는 저니까요."
버렌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라온과 호라인의 대련을 보았음에도 자신감과 여유를 가진 태도. 괜히 중무전주의 피를 이은 게 아니라는 듯한 안정된 눈빛이었다.
'성장했군.'
예전 아집으로 가득 찼던 아이는 어느새 크고 단단한 무인이 되었다. 다른 간부들도 버렌의 자신감을 보며 큼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서 쉬어라. 이틀간 휴식이다."
"감사합니다."
그는 잠시 1번 굴을 보다가 중무전 숙소로 향했다.
라온은 버렌이 떠나고 3시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저 지독한 동굴에 들어가야 하나 고민을 할 때였다.
쿠와아아아앙!
1번 동굴 안에서 산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진동이 울렸다. 톱으로 돌덩이를 써는 듯한 절삭음은 덤이었다.
"초, 총관님!"
"저 미, 미친놈이 설마…."
우렉과 레프가 눈을 마주치며 손을 떨었다. 지금 이 순간 둘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파괴왕 새끼, 동굴도 때려 부수고 있어!'
예상이 아니라, 확실했다. 파괴본능을 가진 그 미친놈은 저 동굴도 깨부수는 게 분명했다.
"크윽…."
우렉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중무전에 금화 9713개의 손해를 입히고, 이젠 동굴까지 부수다니, 뭐 저런 또라이가 있나 싶었다.
"초, 총관님. 지금이라도 들어갈까요?"
"말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레프와 간부들이 눈동자를 떨며 아직도 무너지는 소리가 터져 나오는 동굴을 가리켰다.
"아니, 대기한다."
우렉이 고개를 저었다. 괜히 들어갔다가 무너지는 동굴에 묻힌다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어차피 저놈도 죽고 싶지는 않을 테니, 얼마 부수지 못하고 곧 나올 거다."
쿠구구궁! 콰아아앙!
다만 동굴이 무너지는 소리는 10분이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저 미친놈! 대체 얼마나 때려 부수는 거야!"
어이가 없다. 동굴에 무슨 원한이 있는 건지 아예 산을 박살 낼 기세였다. 정신이 나가다 못해 대가리에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총관님!"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적습입니까?"
중무전에 있던 검사들도 그 소리를 듣고, 무기를 쥐고 튀어나왔다.
"별일 아니니 돌아가서 할 일들이나 해라."
그냥 동굴이 무너지고 있다고 하며 검사들에게 돌아가라 지시했다. 어차피 저들은 이곳에 있어 봐야 도움이 안 된다.
쿠구구….
다시 동굴 앞에 간부들만 남았을 때 1번 동굴에서 계속되던 굉음과 흔들림이 멎었다.
'뒤진 거야? 오는 거야?'
제발 첫 번째이기를 바라며 기다리자, 동굴 안쪽에서 작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발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헉!'
먼지에 씌인 신발에서부터 시선을 올리던 우렉은 라온과 눈을 마주친 순간 오싹 소름이 돋았다.
'저 눈….'
한밤의 호수처럼 잔잔하면서도 깊게 가라앉은 듯한 붉은 눈동자는 이미 완성된 고수의 풍모를 띄었다. 저 미친 괴물은 이 짧은 시간에 또 한 번 성장을 이뤄낸 것이다.
'이게 말이 돼?'
위기나 고행을 겪을수록 강해지는 건 옛 소설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눈앞에 그 사례가 서 있었다. 머리털이 쭈뼛 섰다.
"고행을 끝내고 나왔습니다."
라온이 다가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미친 짓은 골라 하더니, 이럴 때는 또 예의가 바르다.
"도, 동굴 안에서 들린 소리는 뭐지?"
우렉이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쓸어내리며 라온이 나온 1번 동굴을 가리켰다.
"아, 갑자기 동굴이 무너지더라구요. 저도 간신히 피했습니다."
"윽…."
놈은 죽을뻔했다고 중얼거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눈에 뻔히 보이는 연기를 하는 모습에 주먹이 절로 쥐어졌다.
"네가 부순 거 아니냐?"
"동굴에 파묻히고 싶은 것도 아닌데, 제가 왜 부수겠습니까. 거기다 저 안에서 마나를 제대로 운용할 수도 없다는 건 총관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크음…."
우렉이 콧등을 찡그렸다. 맞는 말이지만, 이놈은 마나 없이도 동굴을 충분히 부술 수 있는 놈이었다.
"고행이 끝났다고 이렇게 마중까지 나오시다니, 감사합니다."
붉은 눈을 빛내는 라온의 기세는 이 공간을 장악하고 있었다.
"으음…."
2주 전 그와 비슷한 무력을 보였던 호라인이 한 발 물러나며 관자놀이에서 땀을 흘렸다.
'라온 지그하르트라….'
우렉이 입맛을 다셨다. 라온은 평상시에는 무학을 익힌 줄도 모를 정도로 고요하지만, 그 진의를 드러내면 대해의 해일처럼 거대하고 사나웠다.
'아무리 봐도 물건이야….'
무력만이 아니라, 정신력이나, 술수마저 나이를 초월한 수준이다.
조금 전에 감탄했던 버렌과는 아예 격이 달랐다.
'아깝군.'
보면 볼수록 아쉽다. 이 녀석을 품에 넣는다면 카룬이 가주직을 노릴 때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안 한 번 해볼까.'
라온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개인에 불과하고, 중무전은 지그하르트에서도 손꼽히는 무력 단체다. 먼저 손을 내민다면 이 미친놈도 잡을 수밖에 없으리라.
'가주님께는 나중에 설명하면 되겠지.'
라온이 진심을 다해서 용서를 빈다면 카룬도 받아들일 것이다. 그도 이 녀석의 재능이 역대급이라는 건 알고 있으시니까.
만약 안 된다면 그때 가서 쳐내면 그만이다.
"라온 지그하르트."
"예."
"네가 왜 중무전을 연수 장소로 골랐는지는 알고 있다."
우렌은 뒷짐을 진 채로 라온의 앞에 섰다.
"하지만 그 선택은 최악의 수다. 네가 준 피해라고 해봐야 중무전 전체로 보면 티끌밖에 되지 않아."
말과 달리 재산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억지로 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
"중무전은 지그하르트에서 제일 가는 무력 단체고, 카룬 님은 네 녀석을 품고도 남는 그릇이시다. 그분께 용서를 구하고 중무전에 투신해라. 이게 네게 주어진 최선이자, 최고의 선택이다."
멍청한 녀석이 아니니, 이 정도로 말하면 충분히 알아듣고 움직일 것이다.
"용서라…."
라온이 피식 웃었다.
"제가 무엇을 잘못해서 용서해달라고 해야 하는 겁니까?"
"뭐?"
"용서를 구해야 한다면서요. 제가 무엇을 잘못했냐고 물었습니다."
"그, 그건…."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라온이 잘못한 건 없었고, 카룬이 그를 일방적으로 미워하고 견제할 뿐이었으니까.
"네, 네가 더 잘 알지 않느냐!"
"그렇습니까."
라온이 고개를 모로 틀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쪽의 생각을 모조리 훑어내리는 듯한 눈빛이었다.
"제안은 고맙지만, 받을 수는 없겠네요."
"멍청한! 이건 네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다. 카룬 님 밑에서 있는다면 네놈은 비단길을 걷는 것과…."
"기회고 뭐고. 드래곤 새끼가 어떻게 용이 되다가 만 드레이크 밑으로 들어갑니까. 쪽팔리게."
"뭐?"
"미, 미친!"
"이 자식이 지금 뭐라고 한 거야!"
그 말을 들은 간부들이 턱을 덜덜 떨었다.
"억…."
우렉의 눈도 찢어질 정도로 벌어졌다. 라온은 본인을 드래곤으로, 카룬을 드레이크로 비교하며 격의 차이가 나서 들어갈 수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이 또라이 새끼….'
당돌하고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상하게 반박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라온은 이 중무전에 스스로 찾아와 싸움을 걸었고, 카룬은 한참 높은 곳에 있으면서도 어린 조카의 싹을 자르려고 들었으니까.
"으음…."
라온이 가진 거대한 그릇을 느낀 우렉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라온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우렉과 간부들을 스쳐 지나갔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이 바닥에서 건방진 놈은 오래 못 가니까."
"명심하죠. 아, 이곳에서 넣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강해질 수 있었어요."
라온은 손을 흔들고서, 숙소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끄윽!"
우렉은 죽일 것처럼 라온의 등을 노려보다가 간부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 새끼가 말한 거 전부 잊어버려. 이게 그분 귀에 들어가면 저놈만이 아니라 우리도 죽는다."
"아, 예!"
"아, 알겠습니다."
간부들은 고개를 숙이며 목을 부르르 떨었다.
"후우…."
우렉은 라온이 나왔던 1번 동굴을 보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빨리 처리하는 게 좋겠어. 더 강해지거나, 사고를 치기 전에….'
* * *
라온은 우렉을 조롱해준 뒤 숙소로 돌아와 씻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라온 지그하르트!
라스가 팔찌 위로 쑥 올라왔다.
"왜…."
10일 넘게 제대로 자지 못한 상태에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더니 힘이 풀려 목소리가 가늘게 흘러나왔다.
-당장 식당으로 가자! 본왕이 원하는 모든 음식을 시켜야 할 것이야!
녀석은 팔로 탭댄스를 추며 들뜬 미소를 지었다.
"가야지. 가야 하는데…."
라온은 대답을 하다 말고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졌다. 끝없이 화령을 사용하고, 우렉과의 기 싸움까지 끝내고 왔더니 더 이상 깨어 있을 여력이 없었다. 그대로 눈을 감고 수마에 빠져드는 라온이었다.
-....
라스의 기대로 가득 찼던 숙소엔 이제 라온의 낮은 숨소리만 들려왔다.
-야! 야 이 자식아! 이게 무슨 경우냐!
라스가 탭댄스를 추던 팔로 라온의 머리를 후려쳤다.
"으음…."
잠시 눈을 뜬 라온은 제대로 누운 뒤 이불을 당겨 본격적으로 자기 시작했다.
-이,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고!
악마도 약속한 건 지키거늘 인간이란 정말이지 사악한 그 자체였다. 특히 저놈은 최악 중 최악이었다.
-끄으윽, 일어나기만 하면….
라스가 바득 이를 갈 때 라온의 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극한까지 수면을 참아내셨습니다.]
[<집중>의 효과로 수면의 질을 최대한 상승시킵니다.]
라온은 메시지를 보지 못하고 더 깊게 잠에 빠져들었다.
-음.
라스는 메시지 위로 얼굴을 빼꼼 내민 채 입맛을 다셨다.
-왠지 불안하느니라….
* * *
눈을 뜨자 열화 같은 활력이 전신을 질주한다.
자고 난 뒤의 나른함은 전혀 없고, 지금까지 느끼지 못한 생기가 온몸에 가득 차 있었다.
"허…."
라온이 헛웃음을 흘렸다. 태어난 이후 가장 개운한 아침을 중무전 숙소에서 맞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 자식아아아아!
라스가 팔찌에서 불쑥 솟구치며 냉기를 마구잡이로 뿌려댔다.
-본왕과의 약속을 또 안 지키고 이틀이나 쳐 자다니!
"약속?"
-동굴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맛있는 음식을 먹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바로라고 하지 않고, 조금 이따가 먹겠다고 했지."
-그게 그 말이지 않느냐!
"이게 인간계에서는 달라."
-뭐?
"만약에 '조만간 밥 한번 먹어요.'라고 하면 언제쯤 밥 먹을 거 같아?"
-음, 일주일 정도 아니더냐?
라스는 턱을 긁적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니야. 안 만나. 혹은 몇 달은 걸리겠지."
-뭐라?
"조금 이따가 혹은 조만간 밥이나 한 끼 하자라는 말은 실제로는 만나지 않거나, 한참 뒤에 보자는 말이거든.
-어…?
갑작스러운 설명에 라스의 눈이 동그랗게 말려 들어갔다.
"어쨌든 약속을 어긴 건 아니라는 거야. 지금 가면 되잖아. 그렇지?"
-뭐, 이, 인간계의 의미가 그렇다면야….
라스는 화를 내다 말고 맹해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라온은 피식 웃으며 빠르게 씻고 나와 식당으로 향했다. 중무전은 인원이 많은 만큼 식당도 컸고, 원하는 메뉴를 마음대로 주문할 수 있었다.
식사 시간이 지난 때라 그런지 식당에 있는 중무전 소속 무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일단은 훈제 오리볶음이랑, 해산물 스튜 그리고 야채 오븐 구이에 크림 새우. 거기다….
"...."
라스는 이름을 외우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음식을 말했다. 자신도 배가 고프기는 했지만 저걸 다 먹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약속은 했으니.'
몇 번 문제가 있었어도 조용히 기다려 주었으니, 이 정도는 먹어주기로 하고 녀석이 말한 음식을 모두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보니 평소에 보던 메시지가 나오지 않은 게 생각났다.
'오늘은 <나태>의 효과로 능력치가 오르는 메시지가 없었네.'
-네놈이 잘 때 나태의 효과로 수면의 질을 높인다는 메시지가 떴다. 그것에 힘이 집중되었을 것이다.
라스는 별일 없어서 다행이라고 중얼거리며 히죽였다.
'그래서 이렇게 몸이 가뿐했나.'
라온은 주먹을 쥐었다가 펴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스가 보았다는 메시지대로 잠의 질을 높인 덕분인지 아직도 전신에 활력이 가득했다.
-잘 잤으면 그만이지, 능력치까지 바라는 건 언감생심이니라. 인간은 마왕의 힘을 모두 이용할 수 없다.
라스가 마왕의 힘은 그리 쉬운 게 아니라며 쯧쯧 혀를 찼다.
"음식 나왔습니다!"
녀석의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을 때 주방에서 차례로 음식이 나왔다.
별생각 없었는데, 막상 음식들의 향긋한 냄새가 올라오자 입에 절로 침이 고였다.
-네놈은 마왕의 힘을 사용하기엔 애송이에 불과하다. 손쉽게 능력치를 올릴 생각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라, 일단 본왕은 스튜부터….
라스가 이죽거리며 스튜를 가리킬 때 메시지가 떠올랐다.
[효율 계산이 끝났습니다.]
[극한까지 높아진 수면의 질이 <나태>의 능력을 강화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상승했습니다.]
라온은 그 메시지를 보며 눈을 빛냈고, 라스는 주절거리던 입을 꾹 다물었다.
"어?"
-입맛 떨어졌느니라….
제161화
'이게 이런 식으로 적용되네.'
라온은 올라간 능력치를 확인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틀 동안 숙면을 취했다고 모든 능력치가 오르다니, 말 그대로 잠만 자도 강해져나 다를 바가 없었다.
식탁 앞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음식으로 가득하고, 능력치가 오른 희열이 전신으로 번지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어째 불안하더라니….
라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리는 동공으로 메시지를 노려보았다.
-잠 좀 잘 잤다고 모든 능력치를 1씩 올려준다니! 이게 무슨 미친 소리냐!
녀석의 머리 위로 음식에서 올라오는 김처럼 냉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딴 거지 같은 능력을 넘겨주다니! 슬로스. 이 멍청한 자식!
라스가 분노를 일으키려 할 때 라온이 빠르게 수저를 들어 해산물 스튜를 한입 삼켰다.
-평생 잠을 잘 수 없게 만들어주지! 그리고 네놈은 지금 당장… 옥!
해산물 스튜의 달큰하면서도 시원한 맛이 입안을 스치자 라스의 말이 뚝 끊겼다.
-오오!
오랜만에 먹는 제대로 된 음식에 분노와 냉기를 일으키던 라스가 우뚝 멈춰선 채로 탄성을 흘렸다.
-조, 좋구나. 첫 맛은 달달하고, 끝맛은 시원한 게 본왕의 마음에 쏙 들어!
녀석은 하늘로 상승하는 입꼬리를 감출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다음 음식을 가리켰다.
-무얼 하는 게냐! 당장 포크를 들고 크림 새우를 찍어라! 음식이 끊긴다면 네 목숨도 끊어진다고 생각하고 빨리 저 새우를 입에 넣어라!
'입맛 없다며.'
-짐승처럼 다 처먹는 네놈은 모르겠지만, 입맛이라는 게 없다가 생기고, 생겼다가 없는 것이니라.
'그렇다고 해도 태세 전환이 너무 빠른데….'
-닥치고 좀 먹어!
'알겠다. 알겠어.'
라온이 피식 웃으며 포크를 들었다. 능력치도 올랐으니, 기분 좋게 배를 채울 수 있었다.
가벼운 음식부터 시작해서 무겁게 가야 한다는 라스의 조언을 들어주며 식탁 위에 있는 음식을 천천히 비워갔다.
-본왕의 선택이 어떠하냐. 음식의 맛만큼이나 그걸 즐기는 사람의 지식과 경험이 중요한 법이지.
'난 잘 모르겠어. 똑같은 거 같은데.'
-그러니까 네놈이 짐승이라는 거다. 미식의 미 자도 모르는 놈.
라스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쯧쯧 찼다.
-마계에는 마슐랑이라는 식당의 등급이 있느니라. 해골이 많을수록 맛이 좋은 식당이지. 그리고 본왕은 그 마슐랑 해골의 개수를 결정하는 심사위원 중….
'다 괜찮지만 스튜가 제일 낫네.'
-본왕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마신제 때마다 본왕에게 음식을 한 보따리씩 싸오는….
'맛을 떠나 국물이 있어야 배가 차는 것 같군.'
라온은 라스의 말을 강물처럼 흘려버리며 본인이 할 말만을 중얼거렸다. 덕분에 두 사람의 대화는 평행선처럼 이어지지 않았다.
라온이 계속 라스의 말을 무시하며 얼마 남지 않은 음식을 비우고 있을 때 옆 테이블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게 그놈인가?"
"라온 지그하르트…."
"저 녀석이 호라인 님을 이겼다고?"
"그게 말이 돼? 갓 검사가 된 놈이잖아."
"사기를 친 게 분명해. 이번에 나가서 보았잖나. 일시적으로 힘과 오러가 강해지는 약을."
"확실히 가능성은 있지."
"근데 처먹기는 또 더럽게 잘 처먹네. 중무전 소속도 아니면서."
소리가 들린 곳을 보았다. 이곳에 있으며 못 보던 얼굴. 카룬이 돌아오면서 복귀한 중무전의 검사들인 것 같았다.
'아직 피해가 그리 크지 않다고 했었지.'
동굴에서 나왔을 때 우렉은 중무전의 피해가 그리 크지 않다고 말했으니, 조금 더 부숴도 괜찮을 거다.
'만족했지?'
-본왕이 요즘 소식을 해서 이 정도면 충분하느니라.
라스가 통통하게 살이 오른 배를 두드렸다.
"...."
식탁에 그릇 10개가 싹싹 비워져 있었지만, 소식이란다. 역시 이 녀석은 <분노>보다 <탐식>에 가깝다.
라온은 옅게 한숨을 쉬며 빈 그릇을 정리하고 일어섰다.
"어차피 오래가지 못할 놈이야."
"배경이 없으니, 어딜 가든 팽 당하기 좋지."
"그전에 뒤질지도 모르고."
그때까지도 테이블에 앉은 검사들은 줄창 호박씨를 까고 있었다.
저벅.
라온은 이제 노골적으로 주절거리는 검사들의 테이블로 다가갔다.
우두둑!
파괴왕의 힘까지 어린 손가락으로 테이블 중심을 눌렀다. 무언가가 비틀리는 듯한 소리가 나며 테이블 중앙에 일그러진 구멍이 뚫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찌질하게 뒤에서 주절대지 마시고, 앞에서 하시지요. 선배님들."
라온은 검사들의 얼굴을 쭉 훑으며 빙긋 웃었다.
"아까 못 믿겠다고 하셨는데, 그럼 직접 한 번 해보시겠습니까?"
"뭐?"
"직접 대련해보시면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 아실 수 있을 거 아닙니까."
"좋다!"
테이블 중앙에 앉아 있던 장발의 남자가 벌떡 일어섰다.
"네가 정말 속임수 없이 중무전의 검사들을 꺾었는지 내가 직접 확인해보겠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파가 상당하다. 익스퍼트 상급 수준. 강한 무력에 어울리는 자존심이었다.
"얼마든지."
라온이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식당에 피해를 줄 필요는 없으니 나가시죠."
장발의 남자가 코를 찡그리며 먼저 문을 나섰고, 라온과 다른 검사들이 그 뒤를 따라갔다. 그는 식당에서 가장 가까운 소연무장의 중앙에서 걸음을 멈췄다.
"검을 들어라."
"오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장발의 남자는 고민하는 듯 눈매를 좁혔다. 호라인을 꺾었다는 소문을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사용한다. 전력으로 덤벼라!"
"조장!"
"위, 위험합니다!"
다른 검사들이 말리려고 했지만 장발의 남자는 그 말을 듣지 않고, 준비 자세를 취했다.
"전력이라…."
당신은 볼 자격이 없는데.
라온이 차게 웃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대, 대련 시작!"
장발의 남자가 옆으로 시선을 주자, 다른 검사가 손을 들어 올렸다.
"흐읍!"
장발의 검사가 땅을 박차고, 내달렸다. 탄력 있는 근육과 제대로 익힌 보법의 조화로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대로 내뻗는 일검. 살기는 없지만, 어디 하나 부러뜨릴 듯한 기세였다.
'그 정도라 이거지.'
라온이 사선으로 튼 칼날을 내리쳤다.
캬아앙!
장발 검사의 손아귀에서 검이 뽑혀 나갔다. 당황한 그의 복부에 왼쪽 주먹을 꽂아 넣었다.
뻐어어억!
막힌 속이 뚫리는 듯한 시원한 소리와 함께 장발 검사가 눈을 까뒤집고 뒤로 넘어갔다. 기절한 상태에서도 게처럼 입에서 거품이 뿜어져 나왔다.
"흐음."
라온은 검을 어깨에 걸치며 다른 검사들을 돌아보았다.
"어어…."
"하, 한 방에 조장의 검이 튕겨 나간다고?"
"손아귀가 찢어졌어. 이게 무슨…."
"히, 힘이 트롤이라는 게 진짜였어?"
검사들은 정신을 놓은 장발 검사를 보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라온은 당황한 검사들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다음."
2주 만에 귀환한 파괴왕의 재림이었다.
* * *
우렉이 책상에 앉아서 다급하게 서류를 작성하고 있을 때 문이 벌컥 열리고 레프가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총관님!"
"지금 바쁘다."
"이것도 급한 일입니다!"
급하다는 말에 우렉이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들었다.
"그럼 빨리 말해."
"라온. 그 미친놈이 또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레프가 질렸다는 듯 동그란 볼을 파르르 떨었다.
"사고가 터졌다고 하길래 가보니까. 어제 복귀한 검사 10명이 눈을 뒤집어 깐 채로 기절해 있었습니다."
"후우, 이번에는 이유가 뭐야?"
"기절한 놈들이라 물어볼 수 없었고, 라온 놈의 말로는 먼저 시비를 걸어서 방어했다고…."
"그 망할 자식…."
우렉이 원목 책상을 손가락으로 거세게 긁었다. 시비를 걸었다는 건 진짜겠지만, 그곳에 있는 전부를 때려눕힐 필요는 없었을 거다.
한 명만 팼어도 기가 죽어서 덤빌 생각이 사라졌을 테니까. 놈은 일부러 모두를 깨부순 게 분명하다.
"애들 상태는."
"목숨에 문제는 없습니다. 다만 2주 정도는 요양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그리고?"
"대련하다가 벽이랑 조, 조금 비싼 나무를 부숴서…."
"나무? 잠깐! 그놈들 어디서 싸웠어!"
"식당 옆에 있는 소연무장인데, 벽이 무너지면서 나무도 같이 꺾였습니다."
"서, 설마…."
우렉은 멍한 눈으로 책상을 보았다.
"예. 그 사이란 나무입니다."
"끄아아악! 라온!"
사이란은 사람의 정신을 맑게 해주는 은은한 향을 가지고 있어서 굉장히 비싼 값에 팔리는 나무다. 그걸 부러뜨렸다니, 한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결국 그놈이 준 피해가 금화 1만 개가 넘어가는구나…."
아찔하다. 1만 개면 돈에 관해서는 크게 터치하지 않는 카룬도 눈을 부라릴 정도의 금액이었다.
"어, 어떻게 할까요?"
"다 빼."
"예?"
"그놈에게 절대 시비를 걸지도 말고, 걸어와도 그냥 무시하라고 해!"
"아, 알겠습니다!"
레프가 경례하듯 손을 올리고 달려 나갔다.
우렉은 머리를 툭툭 치면서 서류 작성을 빠르게 끝내고, 중무전의 중심에 있는 카룬의 집무실로 향했다.
"후우…."
병든 닭처럼 한숨을 내쉬며 묵직한 인상을 주는 검은 문을 바라보았다.
'손발이 다 떨리네.'
이 방의 주인인 카룬 지그하르트는 분쟁지역에 가서 전쟁을 멈추는 정도가 아니라, 한쪽을 아예 몰살시켜버렸다.
글렌이 추가적인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면 말했던 대로 2주 만에 돌아왔을 것이다. 지그하르트 강자 중에서도 최상위에 이름을 올린 괴물다웠다.
다만 그 괴물은 지금 기분이 나쁜지 닭살이 올라올 정도로 불편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이 두꺼운 문밖에서도 그의 심기가 좋지 않다는 게 느껴졌다.
'당연하겠지.'
라온이 중무전의 장비와 훈련을 깨부수고, 검사들을 팼으며, 전뢰단 부단주 호라인을 꺾었다는 소문이 가문 전체로 퍼졌으니 카룬의 기분이 좋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중무전의 명성도 떨어졌고.'
중무전은 최강까진 아니지만 가장 용맹하다고 불리는 무력 단체다. 전력의 대부분이 나가 있었다고 해도 이제 막 검사가 된 라온 한 명에게 탈탈 털렸으니, 좋은 소리가 나올 수가 없었다.
이번 임무를 완벽하게 처리하여 얻은 명성보다 라온이라는 미꾸라지 한 마리 때문에 떨어진 명성이 몇 배는 더 클 것이다.
'망할 리메르….'
처음엔 그 소문을 퍼뜨린 놈을 잡아 혀를 자르려 했지만 찾을 필요가 없었다. 미친 빨간 머리 엘프 자식이 정체를 숨기지도 않고, 동네방네에 다 떠들고 다녔으니까.
똑똑.
우렉은 언젠가 리메르를 잡아 족치겠다고 다짐하며 두터운 문에 손등을 댔다.
"들어와라."
똑똑 소리가 두 번 이어지기도 전에 안에서 들어오라는 엄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흡을 고르고 찬찬히 문을 열었다.
고오오오.
문을 열자마자 피부가 말라붙는 듯한 살벌한 기운이 줄기줄기 뿜어졌다. 우렉은 마른침을 삼키고 무릎을 꿇었다.
"저, 전주님을 뵙습니다!"
글렌과 달리 대우받는 것을 좋아하는 카룬은 우렉의 정중한 인사를 끝까지 확인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라."
"아, 예!"
분노가 가득 담긴 음성에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부여잡고 일어섰다.
"보고해라."
그 한 마디에 오싹 소름이 돋아 올랐다. 지금까지 일어난 걸 토씨 하나 빼먹지 말고 말하라는 뜻이었다.
"서, 서류로 만들어왔습니다."
"네 입으로 말해라."
카룬은 우렉이 만든 서류를 쓱 훑어 내린 뒤 책상에 내려놓았다.
"아, 알겠습니다. 일단 전주님의 지시대로 라온의 능력을 파악하기 위해서…."
우렉은 노인처럼 허리를 굽혀 최대한 불쌍한 모습으로 라온이 했던 일들을 풀어놓았다.
지시받은 대로라는 말과 레프가 마음대로 움직였다는 말을 중간중간 넣어서 스스로 저지른 일이 거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래서 지금 놈은 1번 동굴을 나와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1번 동굴에서 버텼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카룬의 눈동자에 섬뜩한 빛이 어렸다.
"다, 다행히 전주의 지시는 거의 완수했습니다. 일단 그놈의 근력과 민첩성은 트롤급이고, 오러를 사용한다면 익스퍼트 최상급도 꺾을 수 있습니다. 마스터에는 닿지 못했지만, 벽이 코앞에 있다는 건 확실합니다."
우렉은 카룬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말을 이었다.
"마나가 비틀어진 1번 동굴에서 아무렇지 않게 견디는 걸 보면 특별한 능력이 있는 무학을 익히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어지러움이나, 마나가 꼬이는 진법 사용은 금하는 게 좋을 겁니다."
카룬은 그 말에 동의하는지 아무 말 없이 옅게 눈을 빛냈다.
"그리고 이게 중요한 건데, 놈에게는 약점이 있습니다."
"약점?"
꽉 막혀 있는 듯했던 카룬의 입이 처음으로 열렸다.
"예!"
살아날 구멍이라 생각한 우렉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호라인과의 대련에서 조금의 냉기에 노출되었을 뿐인데, 동상에 걸렸습니다. 동굴에서도 손이 빨간 걸 보면 확실합니다. 그놈은 냉기에 굉장히 약합니다."
"냉기라…."
"지금은 모두 잊고 있지만, 라온은 본래 냉기에 마나회로가 막혀 있는 체질이었습니다. 이건 확실히 먹히는 비수가 될 것입니다."
우렉은 관심을 보이는 카룬에게 한발 다가가 주먹을 움켜주었다.
"냉기를 이용한다면 적은 비용으로 녀석을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겠군."
카룬에게서 풍겨 나오던 거북한 살기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살았다는 현실감이 들자, 등이 축축하게 젖은 게 느껴졌다.
"그럼 이제 그놈을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건드리지 말고 놔두어라."
카룬이 손을 가볍게 저었다.
"호라인을 꺾은 놈이니, 제압하려면 최소 마스터급이 필요해. 그렇다고 정말 마스터를 보내봤자, 17살짜리를 힘으로 제압한다고 욕이나 먹겠지. 며칠 안 남았으니, 멋대로 하게 놔둬. 어차피 얼마 살지도 못할 놈이니까."
"훌륭하신 판단이십니다."
우레은 카룬과 같은 생각을 했음에도 그를 띄워주었다. 다만 감탄한 건 사실이다. 카룬은 분노한 와중에도 냉정한 판단을 내렸으니까.
"다만 준비는 해두어라."
"준비라고 하신다면…."
"그놈을 폐인으로 만든 다음 그 일을 뒤집어씌울 허수아비가 필요하지 않느냐."
"아!"
"에덴. 아니, 발데르 녀석도 괜찮겠군."
카룬의 눈동자가 섬뜩한 빛으로 번들거렸다. 본인의 동생조차 장기 말로 사용하려는 듯한 기세였다.
"계, 계획을 짜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렉은 팔다리에 닭살이 오르는 섬뜩함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아, 그리고 막내 도련님은 5번 동굴에서…."
"그놈 이야기는 필요 없다."
카룬이 단호하게 손을 저었다.
"실력이 조금 괜찮아졌나 했더니, 눈빛이 망가져서 돌아왔더군."
"어…."
예상하지 못한 말에 우렉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독기도, 악의도 없이 순해 빠졌다. 재능이 조금 있어서 키워보려 했더니, 그 정신에 그 수준이면 신경 쓸 필요 없지."
"그, 그럼 선택식에서…."
"그래. 뽑을 생각 없다. 셋째와 넷째처럼 처리해."
"...."
셋째와 넷째처럼이라는 소리는 이 중무전에 그의 자리가 없다는 뜻이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곳의 신은 카룬. 그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라온의 도발에 어설프게 당한 머저리들도 정리하고."
"알겠습니다."
우렉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을 벗어났다.
'무서울 정도로 냉정해….'
그렇기에 따를 만한 인간이었다.
* * *
라온이 두 번째 파괴왕 짓을 시작하려 했지만, 첫날 빼고는 수확이 없었다. 더 이상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도 없었고, 이쪽에서 도발해도 넘어오지 않았다.
실수인 척 기물을 부수면 우렉이나, 레프가 나와서 말렸지만, 대주나, 부대주, 단주급 강자들은 어디 숨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수련하는 척하면서 몇 가지 장비나 기물을 때려 부수며 시간을 죽이다 보니, 어느새 5일이지나 결국 연수가 종료되었다.
"지난 한 달간 수고 많았고, 앞으로…."
라온은 단상 윙에서 어설픈 말을 내뱉는 레프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똑똑하네.'
카룬은 시비를 받거나, 걸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중무전 검사들에게 자신을 아예 무시하라고 지시를 내렸던 것 같다.
'괜찮은 방법이야.'
자신을 제어하려면 대주나 부대주, 단주 같은 마스터급이 와야 하고, 혹여나 이긴다고 해도 본전이고, 지면 개망신이다. 모두를 물려서 부딪칠 일을 없게 만드는 건 좋은 방법이었다.
'뭐, 그래도 할 건 다 했지만.'
대충 계산해도 중무전에 금화 15,000개에 가까운 손해를 입혔고, 때려눕힌 검사들은 20명이 한참 넘었다. 줄 피해는 다 줬고, 얻을 명성은 전부 얻었으니 아쉬울 건 없었다.
카룬의 표정이 궁금했지만, 그는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참으로 속 좁은 인간이었다.
-스트레스는 확실히 풀렸겠군. 그렇게 원 없이 때려 부쉈으니까.
라스는 질린다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곳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지그하르트의 검사로서 모범이 되는 모습을 보이길 바란다."
레프의 지루한 말이 끝나고, 몇 없는 검사들이 박수를 보내주었다. 물론 자신이 아니라, 옆에 있는 버렌을 향하는 박수였다.
"바로 돌아가는 거냐?"
버렌이 쓱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래야지. 이제 여기에서 할 건 없어서."
"그럼 잠시 이야기 좀 하지."
그는 따라오라는 듯 사람이 없는 소연무장을 가리켰다.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버렌의 뒤를 따라갔다.
"네가 아버지를 싫어하는 건 알고 있다."
버렌은 연무장의 끝에 있는 벽에 등을 기대고 뒤를 돌았다.
"아버지가 먼저 시작한 일이니, 화가 나는 건 당연해."
거친 눈매와 달리 눈빛은 굉장히 맑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싸우지 말라는 건가?"
라온이 담담하게 입을 떼며 버렌과 눈을 마주쳤다.
"아니, 네가 시작하지 않았으나, 끝을 내는 건 네가 하는 게 맞는 일이다. 다만…."
의외의 말이라고 생각할 때 버렌이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내 아버지다. 내가 5살 때 아버지께서 직접 손에 수련검을 쥐어 주시고, 검술을 알려주신 건 지금도 잊지 못해."
"...."
"그때부터 내 목표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는 것이었지. 아직 이루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꼭 돌아보게 만들 거다."
"그런가."
라온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가문 전체가 비난하는 실비아를 옹호하듯 버렌은 밴댕이처럼 속이 좁고 찌질한 카룬을 훌륭한 아버지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람은 전부 다르다. 전생이라면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많은 것을 보고 겪은 지금은 그의 마음이 어느 정도는 이해되었다.
"그렇기에 네가 아버지에게 싸움을 걸면 내가 막을 것이다. 만약 반대의 경우라고 해도."
"반대? 네 아버지가 내게 검을 날려도 막겠다고?"
"그래."
버렌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넌 내 라이벌이자, 은인이니까."
"목숨을 구해준 건 이제 잊어도 되는데."
"목숨을 구해준 것도 맞지만, 넌 내 아집을 깨준 은인이다. 그 이상은 묻지 마라. 민망하니까."
버렌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귓볼이 빨개진 걸 보니 부끄러운 것 같았다. 그와 공통점이 있기 때문일까. 은인이라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어쨌든 두 사람의 싸움은 내가 막을 것이다. 내 말 똑똑히 기억하고, 선택식이나 확실히 준비해! 너한테는 여러 곳에서 스카우트가 갈 테니까!"
그는 그 말을 하고 보법까지 사용하며 연무장을 벗어났다.
-눈깔이에게 독기가 빠지니까 영 별로구나.
라스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콧방귀를 끼었다. 전에는 건방지다고 싫어하더니, 지금은 또 마음엔 안 든단다. 마왕의 취향은 참으로 까다로웠다.
라온은 멀어지는 버렌의 등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저리 말해준 버렌에게는 미안하지만, 카룬을 놔둘 생각은 없었다.
아니, 자신이 놔두어도 저쪽에서 먼저 칼날이 들어올 것이다.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하게 끝은 날 것이다.
그의 죽음으로.
* * *
-애플미트파이, 파인애플 쿠키, 파인애플….
라온이 먹고 싶은 음식 노래를 부르는 라스와 별관으로 돌아갈 때였다.
"음?"
조금 전까지만 해도 텅 비어 있던 중앙 도로 위에 키가 큰 중년인이 서 있었다.
어깨가 벌어지고, 턱은 각져 남성적인 외모를 가졌고, 풍겨내는 기운은 소름이 돋아 오를 정도로 장대했다.
마스터. 그것도 한참 전에 그 경지를 밟은 강대한 무인이 푸른 눈을 번쩍이며 다가왔다.
"나는 백련대의 대주 아이언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라온 지그하르트. 백련대에 들어와서 내 검이 되어라."
"싫습니다."
라온은 아이언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를 저었다.
"…어?"
절대로 변하지 않을 듯한 아이언드의 냉막한 표정이 단숨에 깨졌다.
"보자마자 검이 되라니, 너무 갑작스럽군요."
"다, 단도직입적인 걸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그는 이상하다는 듯 턱을 살짝 틀었다.
"제가 남에게 단도직입적인 건 좋아하지만, 남이 제게 단도직입적인 건 싫어합니다."
라온은 당연한 거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허…."
이런 단호한 거절은 생각도 못 했는지 아이언드의 눈동자가 잠시 풀렸다.
-모르면 당황스럽지.
팔찌 위로 머리를 내밀고 있던 라스가 피식 웃었다.
-이놈이 돌았는데, 한 번 더 돈 놈이라는 걸.
'그러면 정상인데?'
-....
제162화
"아이언드 님."
라온은 지그하르트의 대주이자, 한참 전에 마스터에 오른 강자 앞에서도 당당했다. 조금의 주눅도 들지 않은 채 아이언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가 백련대에 들어가기를 원하신다면 백련대의 주 임무가 무엇인지,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를 확실하게 정리해서 오십시오."
"허…."
그 말에 아이언드의 눈이 또 한 번 흔들렸다. 마스터는 육체와 정신 모두 안정화된 극강의 무인. 저런 표정 변화는 쉽게 보기 힘든데, 정말 당황스러운 것 같았다.
다만 이건 당연한 일이다.
'지금 주도권을 잡고 있는 건 나니까.'
버렌이 말했듯 연수가 끝났으니, 여러 단체에서 신입 검사들에게 영입 제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언드는 자신을 영입하기 위해서 연수가 끝나자마자 직접 찾아왔다. 그런 사람이라면 한 번 거절했다고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듣던 것보다 당돌하군."
아이언드의 표정이 처음으로 돌아갔다. 단순히 얼굴만이 아니라, 마음도 안정화된 듯하다. 괜히 높은 경지에 오른 무인이 아니었다.
"당돌한 게 아니라, 할 말을 했을 뿐입니다."
"맞는 말이야. 내가 너무 대충 오긴 했으니."
그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니, 철벽같은 얼굴과 달리 성격은 시원시원한 것 같다.
"다만 내가 널 원하는 건 진심이다."
아이언드의 눈동자가 새파랗게 번쩍였다.
"뛰어난 무력, 동료를 생각하는 의리, 강자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정신력에 대놓고 미친 짓을 벌이는 배포까지. 모든 것이 마음에 든다."
그의 진심을 담은 기세가 압력이 되어 번져왔다.
"지금까지 수많은 선택식을 치렀지만, 내가 직접 움직인 건 처음이다. 다시 말하지. 라온 지그하르트. 백련대로 오라. 내가 위로 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마."
아이언드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곧게 뻗은 손가락이 앞길을 찢어서라도 열어 줄 것만 같았다.
"뭐, 뭐야! 백련대주가 직접 영입하는 거야?"
"대주가 나서는 건 처음 봤어."
"라온 지그하르트…."
옆길에 있던 검사들이 자신과 아이언드를 번갈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죄송하지만 이 자리에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진지한 만큼 라온도 이번에는 제대로 된 거절을 내놓았다.
"자신의 위치를 아주 잘 알고 있군. 다른 곳의 제안도 들어보겠다는 건가?"
아이언드가 기세를 꺼뜨리고, 피식 웃었다.
"맞습니다. 제가 우위에 있을 때 얻을 걸 제대로 얻어야죠."
"다른 놈이라면 그 입을 부숴놓겠지만, 익스퍼트 최상급의 신입검사라면 오히려 겸손한 말이로군. 좋다. 이쪽도 제대로 준비해서 찾아가지."
그는 그 말을 하고 뒤를 돌았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감각에서는 느껴지지만,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보법. 역시나 마스터다운 무력이었다.
-끄응….
라스는 아이언드가 사라진 곳을 보며 인상을 팍 찡그렸다.
-네놈을 잘 봐주었다고 좋아하지 마라.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는 매년 수만이 넘는 마족들이 찾아와 재물을 바치고, 충성 서약을 했느니라. 본왕에 비하면 네놈의 수준은….
'그래. 그래. 너 잘났다.'
-제대로 들으란 말이다! 본왕이 마계에서 지낸 일을 듣는 건 기연과도 같은….
'예이.'
라온은 이번에도 라스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별관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 냄새는….'
별관 앞에 도착하자마자 향긋한 음식 냄새가 솔솔 풍겨 나왔다.
-오오!
라스는 별관의 문을 부여잡은 채 손을 바르르 떨었다.
-애, 애플 미트 파이와 파인애플 피자의 향이다! 먹어본 적 없는 음식의 냄새도 가득 하느니라!
끝없이 마계의 이야기를 주절거리던 녀석은 입을 닫고 코만 흥흥거렸다.
'미리 준비해놨나 보네.'
오늘이 연수 마지막 날이라는 걸 안 실비아와 시녀들이 파티 음식을 준비한 것 같았다.
-라, 라온 빨리! 빨리 들어가라!
'어휴.'
음식 냄새만 맡으면 정신을 못 차리는 마왕이라니, 창피해서 같이 다닌다고도 말 못 할 것 같다.
라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문을 열었다.
"헉! 도련님!"
"마님! 도련님이 오셨어요!"
"라온!"
"라온 님!"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실비아와 헬렌 그리고 시녀들이 우르르 나와 현관 앞에 모였다. 주방에 있던 유아도 활짝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다녀왔어."
라온은 모두와 눈을 맞추며 빙긋 웃었다.
* * *
가볍게 샤워하고 나온 라온의 앞으로 다양한 종류의 음식들이 주르륵 깔린다. 자주 먹던 음식도 많았지만, 처음 보는 요리도 상당했다.
"이 신작은 헬렌이랑 유아가 함께 만든 거야."
실비아가 중앙에 있는 냄비를 가리켰다. 고기와 해산물, 야채들이 맛깔스럽게 끓여져 있었고, 아래에는 볶은 쌀이 깔려 있었다.
"이것도 마찬가지고. 토마토랑 소고기와 닭고기로 만든 수프인데 정말 맛있어."
이번에는 널찍한 대접에 있는 붉은 수프를 가리켰다.
"그리고 요거는…."
그녀는 바닷가재가 들어간 피자나, 바싹 말린 뒤 빵에 길게 깔아놓은 햄, 새우가 들어간 투명한 스튜를 하나하나 소개해주었다.
"이것들 전부 유아의 손이 들어갔지."
실비아가 옆에 있는 유아의 어깨를 잡았다.
"유아야. 잘 지냈어?"
"네! 할 수 있는 게 많아서 재밌었어요!"
유아는 양 갈래머리를 펄럭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가라앉은 눈동자에 할아버지를 두고 온 아쉬움이 비치지만, 즐거움 역시 거짓은 아니었다. 실비아와 시녀들이 동생이나 딸처럼 잘 대해준 것 같았다.
"우리 유아는 왜 이리 귀엽나 몰라!"
실비아가 손을 펼쳐서 유아를 꼭 끌어안았다.
"요리도 잘하고, 노래도 잘 부르고 귀엽기도 하고! 못하는 게 없어!"
그 말과 함께 유아에게 볼을 비벼댔다.
'많이 당했지.'
라온은 유아와 실비아를 보며 옅게 웃었다. 저건 실비아가 기분이 좋을 때 하는 행동이다. 잘 지내는 두 사람을 보자 미소가 절로 나왔다.
-끄어어억! 라온.
유아와 실비아 그리고 시녀들을 보며 웃고 있을 때 라스가 앓는 소리를 흘렸다. 아래를 보니, 죽을병에 걸린 것처럼 전신을 떨며 입에서 냉기를 줄줄이 흘려대고 있었다.
-무, 무얼 하는 것이냐. 음식들이 죽어가고 있다! 어서 무기를 들어라!
'식으니까 빨리 먹으라는 표현이 너무 세잖아.'
음식들이 나온 지 1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과장이 너무 심했다.
"라온. 연수 수고했어."
실비아가 토마토 수프를 떠주며 방긋 웃었다.
"응. 어, 엄마?"
수프를 받으려 했지만, 그녀가 손에서 그릇을 놓지 않았다.
"근데 왜 매번 위험한 짓을 하는 거야? 중무전을 다 때려 부쉈다며!"
"음, 그건…."
"네가 생각이 있는 것도 알고, 강하다는 것도 알지만, 중무전이다 보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어."
"맞아요. 도련님. 잠도 제대로 못 잤다구요."
실비아가 살짝 눈썹을 내렸다. 그녀의 말에 동의하듯 시녀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긴 하지.'
카룬이 실비아와 자신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으니, 혹시나 죽이거나 크게 다치게 할까 봐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긴 했다.
"다 도망칠 구멍은 만들고 움직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라온은 목소리에 만화공의 기운을 담아 모두를 안심시켰다,
"네가 현명한 건 알고 있지. 다만 카룬 오빠는 그렇게 참을성이 강한 사람이 아니야. 웬만하면 부딪치지 마."
"응."
"항상 대답은 잘한다니까."
실비아는 옅게 한숨을 내쉬며 수프를 떠주었다.
-다 됐느니라. 빨리, 빨리….
라스는 정말 말라비틀어지기 직전이었다. 어서 먹으라고 손짓을 하는 게 꼭 저승사자 같았다.
'징해.'
한숨을 내쉬고 수저를 들었다. 실비아가 떠준 수프부터 먹으려고 할 때 현관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가보겠습니다."
끝에 있던 주디엘이 식당을 나갔다. 다만 그녀는 10초도 되지 않아서 돌아와 창백한 얼굴로 라온을 불렀다.
"도, 도련님을 찾아오신 손님입니다."
"손님?"
"예. 직접 나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어."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누구길래 저런 표정이지?'
-방해꾼은 죽인다! 그 누구라도!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분노를 일으키는 라스와 함께 현관으로 향했다.
큰 조명이 꺼진 별관 입구를 화사하게 밝히는 젊은 여성이 있었다.
-이년이냐! 본왕이 당장에 얼려 버리겠느니라!
냉기를 뿌리려는 라스를 팔찌에 억지로 밀어 넣고, 여자를 살폈다.
머리는 타오르는 듯 붉었고, 눈동자는 호수처럼 투명한 푸른빛이었다. 이목구비 역시 화려하여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미녀였지만 라온이 보는 건 그녀의 외모가 아니었다.
'강해.'
끝을 모르는 강대한 기파가 그녀의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마스터. 조금 전에 본 아이언드에게도 밀리지 않는. 아니 그 이상의 경지에 오른 듯한 강자였다.
"수련생 입문 시험에서부터 널 봐왔다."
목소리도 그 눈빛처럼 맑았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뜬 뒤에 말을 이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유지하는 정신과 상황을 이용하는 재치 그리고 그 모든 걸 뛰어넘는 천재적인 무재에 반했다."
그녀가 길쭉하고 하얀 손을 뻗었다.
"내 이름은 세레나 칼빈. 공검대의 대주이며 지그하르트의 가주가 될 사람이다. 내 힘이 되어다오. 라온 지그하르트."
라온이 그녀의 푸른 눈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공검대주 세레나님이 직접 오시다니…."
"이, 이게 꿈이 아니죠?"
"대주님들 중에서도 상위에 계신 분인데…."
"도, 도련님!"
뒤에 있던 시녀들은 세레나의 정체를 듣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세레나 칼빈이라….'
들어본 이름이다. 직계도, 방계도 아닌 봉신가문 출신으로 지그하르트의 가주가 되겠다고 선언한 여걸. 얼음장처럼 냉정하면서도 불처럼 화끈한 무력을 뽐낸다는 무인이었다.
'이 사람도 날 원한다는 건가.'
세레나도 아이언드처럼 자신을 무력대에 넣고 싶어서 이 시간에 찾아온 것 같았다.
"지그하르트의 무력 단체들은 직계나 최상위 방계가 아니라면 차별 대우를 받는다. 하지만 내가 대주로 있는 공검대는 달라. 실력과 실적으로 평가하지. 너에게는 가장 좋은 보금자리가 될 거다."
"차별이라…."
실제로 하위 방계들은 실력과 상관없이 대에서 차별을 받는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 눈빛이다. 이전부터 그 눈빛이 마음에 들었어."
세레나는 그저 담담한 눈빛을 발하는 자신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와 함께 이 가문의 정점에 서지 않겠나?"
"라온. 대체 누가…아!"
현관으로 나오던 실비아는 세레나를 마주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 세레나 님?"
"오랜만이군. 실비아."
세레나는 실비아를 보고 작게 고개를 주억였다.
"오늘은 그저 인사다. 다음에 선물을 챙겨서 다시 찾아오지."
그녀는 잠시 실비아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그대로 별관을 나섰다.
"그대로시네."
실비아는 세레나의 뒷모습을 보며 손을 꼭 모았다.
"아는 사이야?"
"그래. 엄마가 신입검사일 때 부단주셨거든."
그녀는 그때를 그리는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도 지그하르트의 가주가 되겠다고 하셨는데, 지금도 똑같으셔."
"부단주일 때도 지그하르트의 가주가 되겠다고 했다고?"
"응."
실비아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네.'
지금처럼 대주라면 모를까. 부단주 때 그런 말을 하다니, 간이 보통 큰 게 아니었다. 호걸이라는 칭호가 괜히 붙은 게 아닌 것 같다.
'멋있군.'
-멋은 모르겠다만, 맛은 죽고 있다!
대단하다고 감탄을 할 때 라스가 이를 바득 갈았다.
-빨리 가서 먹자고!
* * *
다음날.
라온은 성공리에 연수를 끝냈다는 보고를 위해서 5 연무장으로 향했다. 안은 이미 수련생들로 가득 차 있었고, 리메르는 역시나 지각이었다.
"라온! 호라인 님을 이겼다며!"
"너 진짜 뭐 하는 놈이냐?"
"미쳤다! 미쳤어!"
"너 때문에 내 활약은 다 묻혔다고!"
"이 자식은 진짜 물건이라니까!"
"혼자 드래곤 하트라도 먹은 거야?"
라온을 본 수련생들이 다가와 살갑게 웃었다. 더 이상 질투나, 시기는 없었다. 뛰어난 활약에 대한 감탄과 미소만 가득했다.
"...."
"흥. 수석이면 그 정도는 해야지."
버렌은 별말 없이 이마를 찡그렸고, 마르타는 5 연무장의 수석이라면 당연한 일이라고 팔짱 낀 채 콧방귀를 끼었다.
"라온. 미안해. 아이스크림이 아니었어. 대신 나중에 나눠줄게."
루난은 소매를 꾹 잡은 채 무슨 뜻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역시 여기에 와야 마음이 편해진다니까.'
별관만큼은 아니지만, 이 5 연무장도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몇 없는 공간이었다. 이제 이들과 이곳에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조금 아쉬웠다.
"너희들은 지치지도 않냐."
담벼락 위에서 가벼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리메르가 풀어헤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아래로 내려왔다.
"지각입니다. 교관님."
버렌이 리메르의 앞을 막아섰다.
"훈련 다 끝났는데, 지각은 무슨 지각."
"약속시간을 스스로 정하셔놓고, 늦었으니 지각이죠."
"살다 보면 한두 번은 늦잖아."
"교관님은 한두 번이 아니라 매일 늦으시지 않습니까."
"아, 깐깐하기는! 너 그러다가 머리 빠진다!"
리메르는 보법을 사용하여 버렌을 뛰어넘고, 단상 위로 올라갔다.
"음…."
버렌은 양손으로 푸른 머리를 쓱 쓸어내린 뒤에 손가락을 확인했다. 별로 뽑히지 않은 걸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험, 모두 연수 수고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각 단체가 어떻게 훈련하고 무엇을 하는지 대충은 알았으리라 본다."
리메르는 버렌이 더 따지기 전에 바로 본론을 꺼내놓았다.
'모르는데….'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중무전에 가서 한 일이라곤 부수고, 때리고 또 부순 것뿐이다. 강해지긴 했지만 중무전이 무엇을 하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일주일 뒤. 너희들이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선택식이 시작된다."
선택식은 5년간의 훈련을 끝내고 각자의 소속을 정하는 가장 중요한 날이다. 그간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겐 이미 왔을 수도 있겠지만, 오늘부터 대나 단에서 너희들에게 영입 제안을 할 것이다."
리메르의 시선이 잠시 라온을 향했다.
"너희들이 쌓아 올린 5년이 결정되는 일이니까. 그저 눈앞의 명성이나, 이익에 매몰되지 말고, 신중하게 판단을 내려라."
그는 평상시와 달리 진지하게 조언해주었다.
"힌트를 조금 주자면 작은 단체를 선택해라. 큰 단체는 그만큼 많은 사람이 있어서 임무에 나가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아. 반면 작은 단체는 다양한 임무에 대부분의 단원이 동원되기 때문에 실적을 쌓기가 좋다. 그리고…."
리메르가 본인의 얼굴을 가리키며 히죽 웃었다.
"단장이 잘생길수록 좋다. 다정다감하고, 도박을 잘하면 더더욱 좋지, 아이들을 생각하는 너그러운 마음도 중요하고, 강한 검술과 우아한 보법. 특히 바람 같은…."
갑자기 그의 이야기가 옆길 그것도 머나먼 옆길로 빠지기 시작했다.
-저 귀때기 자식 또 시작이네. 말이 더럽게 많느니라.
'그러게 누구랑 비슷해.'
-저렇게 말이 많은 놈이 또 있단 말이냐?
'그래. 더 많지.'
-미친놈이로고.
'그게 너야'라는 말을 참으며 리메르의 헛소리를 듣고 있을 때 버렌이 옆으로 다가왔다.
"이거 가져가라."
버렌이 내민 상자를 받았다. 슬쩍 열어보니 보석이 달린 금색 수실이 들어 있었다. 빛깔과 매듭의 형태 그리고 중앙의 보석을 보니 보통 비싼 물건이 아닌 것 같았다.
"이걸 왜…."
"예복에 붙이는 보석 수실이다. 나는 남아돌지만, 네놈 것은 텅 비었으니 가져다가 달아라. 수석인 네놈이 초라하면 우리도 없어 보이니까. 제대로 차고 오도록."
'이번 연수 때를 본 건가.'
연수 시작과 끝에 입은 자신의 예복 장식은 수수했다. 실비아와 헬렌이 정성을 다해서 구했다고 하지만 다른 직계나 방계에 비해 화려하지 못하다. 그걸 생각해서 이 수실을 준 것 같았다.
"고맙다."
"주운 거니까 신경 쓰지 마라."
버렌은 손을 휘휘 젓고서 옆으로 떨어졌다.
'은인이라….'
어제 말했던 대로 빚을 갚는 거겠지.
빚은 갚아준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자신을 생각해준다는 건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라온이 작은 상자를 주머니에 넣었다. 조금이지만 리메르의 헛소리가 덜 지겹게 들려왔다.
* * *
후우.
라온은 조금 지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죽겠구만.'
리메르의 헛소리와 라스의 주절거림에 끼어 한 시간을 시달리다 보니, 실전을 치른 것보다도 더 피곤했다.
빨리 가서 수련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정원을 넘었을 때 별관으로 향하는 중앙 길이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별관의 앞에는 예쁘게 포장된 상자로 문이 막혀 있었다.
'음?'
포장을 보니, 문 앞의 상자는 전부 선물이었고, 줄을 선 사람들도 하나같이 강대한 기세를 뿜어내는 무인이었다.
'대체 뭐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별관 앞으로 갈 때 자신을 알아본 무인이 눈을 부릅떴다.
"라온!"
"라온이다!"
"라온 지그하르트! 우리 격호단에 와라!"
"아니, 우리 적결대가 네 뒤를 받쳐주겠다!"
"무슨 소리! 라온을 가장 잘 키울 수 있는 곳은 우리 대명전이다!"
줄을 서고 있던 사람들은 적을 본 것처럼 한걸음에 달려들어 자신을 에워쌌다. 들어본 단체, 들어보지 못한 단체들이 각자의 이름을 말하며 자신들에게 오라고 외쳐댔다.
"음…."
이제 이해가 간다. 이들 모두가 자신을 영입하기 위해서 본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라온!"
라온이 사람들을 차례로 살필 때 옆으로 실비아와 시녀들이 다가왔다.
"이분들 모두 너를 영입하고 싶어서 찾아오셨대!"
"저 물건들은 전부 라온 님 선물이구요!"
"저게 다가 아니에요! 안에도 더 있어요!"
실비아와 시녀들은 그 어느 때보다 활짝 웃으며 별관에 있는 수많은 선물을 가리켰다.
"네가 정말 대견해서…."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했던 별관과 자신에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린 것에 크게 감동한 것 같았다. 실비아의 눈가에 눈물까지 맺혔다.
"벌써 그러면 곤란해."
라온은 소매로 실비아의 눈가를 훔쳐주며 옅게 웃었다.
"이제 시작이니까."
지금은 출발선일 뿐. 눈물은 직계에 올라가서 흘려도 늦지 않는다.
'언젠가는 꼭.'
그녀에게 그 광경을 다시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 * *
리메르는 오랜만에 가주전 알현실 내부에서 글렌과 마주하고 서 있었다.
"다른 녀석들도 이곳저곳의 스카웃을 받고 있지만, 역시나 으뜸은 라온입니다."
그는 흥겨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직계와 직계를 따르는 방계가 운영하는 무력 단체를 제외한 대부분이 별관으로 선물과 사람을 보냈습니다. 아이언드와 세레나는 어제 직접 찾아갔죠. 모두가 라온을 데리고 가기 위해서 몸이 달아오른 상태입니다."
"흐음…."
글렌은 그 보고가 마음에 드는지 살짝 입매를 끌어 올렸다.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신입 검사의 무력이 익스퍼트 최상급이라는 건 몇백 년. 아니, 지그하르트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니까요."
"뭐, 그렇지."
"정말 물건입니다. 물건! 누군지 몰라도 정말 잘 키웠다. 캬!"
리메르는 본인의 가슴을 두드리며 히죽 웃었다."
"가주님도 라온만큼 대단하셨겠죠?"
"나도 많은 대주에게 영입 제안을 받았지만, 지금의 라온만큼은 아니다. 그 녀석은 당년의 나를 뛰어넘었어."
돌처럼 굳어버린 듯한 글렌의 눈매가 살짝 휘어졌다. 조금 올라간 입매와 더불어 확실한 미소가 지어졌다.
"보셨죠. 본인보다도 손주를 띄우잖아요. 저게 바로 손주 바보의 전형적인 모습이에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역시 가주님은 어쩔 수 없는 라온바라기인…."
리메르가 옆에 있는 로엔에게 귓속말을 중얼거렸고, 로엔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크흠! 시끄럽다!"
글렌이 헛기침을 하고서 억지로 입매를 끌어 내렸다.
"이런 말을 하자고 이곳에 온 건 아닐 테고,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하고 싶은 말이라뇨?"
"네놈을 하루 이틀 보느냐. 정신 나간 듯한 그 눈빛. 오늘은 오랜만에 들어줄 만한 말을 하겠군."
"역시 절 잘 아시네요. 그럼 뜸 들이지 않겠습니다."
리메르의 가벼운 분위기가 씻은 듯 가라앉았다. 거센 폭풍이 어린 듯한 정심한 눈빛을 발하며 무릎을 꿇었다.
"가주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제163화
"부탁이라."
글렌의 턱이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올라갔다. 좁혀진 눈매는 리메르의 진의를 밝히려는 듯 날카로웠다.
"네가 요즘 미친 짓만 골라 하고 다니는 걸 알고 있으니, 듣고 싶지 않군."
"저라고 항상 장난만 치는 건 아닙니다."
리메르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슬쩍 웃었다. 호를 그린 눈동자에서 진중한 빛이 아롱거렸다.
"일단 말해보아라."
"라온에 관한 일입니다."
"라온…."
라온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옥좌에 기대고 있던 글렌의 등이 살짝 올라왔다.
"라온의 무력 수위는 익스퍼트 최상급. 본래 경지를 뛰어넘는 녀석이다 보니, 다른 최상급을 일방적으로 팰 정도로 강합니다. 마스터가 아닌 이상 현재 녀석을 이길 사람은 없죠."
"알고 있다."
글렌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도 모르게 살짝 올라간 입술은 손주를 자랑스러워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말씀드립니다. 라온에게 단을 하나 맡겨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단을?"
"라온의 무력이 다른 단주들에 비해 조금 달리긴 하지만 단주를 맡아 여러 임무를 완수하다 보면 금세 따라잡을 수 있을 겁니다."
"흐음…."
글렌은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뜬 그의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불가."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단주, 대주, 부대주는 유사시의 상황에 대비해야 하기에 최소 마스터 이상이어야 한다. 부단주라면 모를까. 아직 마스터에도 오르지 못한 애송이를 지그하르트의 단주로 세울 수는 없다."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다만 그 안에는 손주를 걱정하는 따스한 음성이 얕게 깃들어 있었다.
"거기다 그 아이는 아직 누군가의 보호 없이 홀로 선 적이 없다. 이곳에서는 너, 그리고 하분 성에서는 밀랜드 성주가 있었지. 부단주로서 차근차근 경험을 키운다면 모를까. 단주 자리를 주는 건 무력적인 면에서나, 경험적인 면에서 무리다."
"역시 그렇군요."
리메르가 입맛을 쩝 다시며 어깨를 으쓱였다.
"음, 어쩌지? 라온이 걱정되는데…."
"라온이 걱정된다고?"
라온이 걱정된다고 하자 글렌이 턱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럼요. 걱정되죠!"
리메르는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탁한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보았다.
"라온을 얻겠다고 지그하르트 이곳저곳에서 벌써 손을 뻗어왔지 않습니까. 아이언드와 세레나는 직접 라온을 찾아가기도 했구요."
"그게 나쁜 일이 아니지 않느냐."
"사람에 따라서는 좋지 않을 수도 있죠."
"음?"
"라온이 별관에서 자라서 순수한 녀석이라는 건 아시죠?"
"그렇지."
글렌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는 이 본관에서 이뤄지는 냉정한 정치 싸움에 대해 모릅니다. 하분 성에서 1년간 살기는 했지만, 그곳 사람들도 외부의 적 때문에 내부에서 싸우는 경우는 많지 않죠. 즉, 라온은 단체 내부의 정치 싸움에는 백지 그 자체라는 뜻이에요."
리메르는 실이 달린 인형을 조종하듯 팔을 쫙 펼쳤다.
"본인들이 가주가 되고 싶어서, 높은 곳에 오르고 싶어서 대주가 된 사람들이 라온을 잘 이끌 수 있을까요? 잘못된 방향으로 데리고 가거나, 어긋난 교육이나 임무를 시킬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리메르는 걱정이 되어서 잠도 못 잤다고 중얼거렸다.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군요…."
로엔이 그 말에 동의하는 듯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로엔 님. 대주나 단주들이 본인의 목표와 성장을 위해 라온을 이용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요. 그러니 이럴 때 출세 욕심 없이 라온을 제대로 이끌어 줄 사람이 있으면 참 좋을 텐데요."
"흐음…."
"훌륭한 인품에, 무력도 뛰어나고, 높이 올라간 경험도 있고, 얼굴까지 잘생긴 그런 사람 어디 없나? 분명 있을 텐데?"
"...."
글렌은 말없이 리메르를 지그시 굽어보았다.
"이제 알겠군. 라온이 아니라, 네가 단주가 되려는 것이었나?"
"저요? 제가 어떻게 단주를 노리겠습니까. 훌륭한 인품, 뛰어난 무력, 높이 갔던 경험 그리고 잘생긴 얼굴? 어? 잠깐만! 저 맞네요? 여기 있었네! 단주는 내 거였네!"
리메르는 헤헤 웃으며 손뼉을 쳤다.
"하아, 정말이지 미친놈이로다…."
글렌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손으로 이마를 덮었다.
"노리는 게 무엇이냐. 리메르."
"저는 그저…."
"솔직하게 말하라."
글렌의 목소리가 벼린 칼날처럼 예리해졌다. 말을 잘못하면 이대로 베일 듯한 기세였다.
"조금 민망하지만 제대로 말씀드리죠. 저는 맹세를 했습니다."
"맹세?"
"라온이 홀로 광혈귀의 앞을 막고, 수련생들을 구한 그날. 저는 그 아이를 왕으로 만들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짙게 반짝이는 리메르의 녹색 눈동자에 그의 굳은 의지가 함께 했다.
"그 아이의 등에서 가주님의. 아니, 가주님보다 더 높고, 완성된 옥좌를 보았습니다. 당신을 왕으로 만들고 지켰듯이, 이번에는 그 아이를 위에 올리고 싶습니다."
"그런가…."
글렌은 이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 좋다. 네 진심도 알겠고, 라온이 잘못 클 수도 있다는 것도 이해했다. 다만…."
그의 눈빛이 다시 한번 싸늘한 빛을 뿜어냈다.
"단전을 다친 네가 단주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궁금하구나."
"잘생기고, 현명하고, 잘생기고, 애들도 잘 키우고, 잘생기고, 도박도 잘하는데요?"
"그런 쓸데없는 것들 말고, 네 무력이 어디까지인지 봐야겠지."
"그럼 여기서 시험해보시죠."
리메르가 씩 웃으며 검병을 잡았다.
"자신감은 좋군."
글렌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흥겨운 듯 미소가 그려졌다.
"오라. 네 전부를 보여봐라."
"안 그래도 갑니다."
리메르가 검을 뽑았다. 섬광처럼 뻗어 나간 칼날로 하늘을 가리키고, 곧게 세운 두 손가락으로 땅을 겨누었다.
"검계현신."
그날 알현실에서 소리가 사라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