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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 *

드디어 시작된 1군 4강전.

평소 카니가 사용하는 레이피어와 쇼트 소드는 초월기의 중병기에 어울리지 않았기에 그녀의 기체는 두 자루의 짤막한 검을 들고 있었다.

그렇게 카니가 먼저 시합장에 들어와 기다리고 있는 사이.

쿵- 쿵-.

33호기가 시합장 중앙에 섰다.

이를 지켜본 카니.

'어? 뭐지?'

그녀는 이상함을 느꼈다.

'…설마?'

곧 카니의 눈에 이채가 스치며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그렇게 두 대의 초월기가 마주하자 조교가 말했다.

-준결승전이니만큼 시합 시간은 기존과는 달리 30분으로 변경한다. 다만 다른 규칙은 변동 사항 없다. 질문 있나?

-아뇨.

-....

카니가 짧게 답했고, 33호기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각자의 자리로.

조교의 명령에 30호기와 33호기가 경기장의 끝에 섰다.

이를 본 학생들이 수군거렸다.

"카니가 이기겠지?"

"시에라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말해서 카니 상대는 아니지."

이번 시합의 예측은 전반적으로 동일했다.

시에라도 잘하지만, 카니란 벽을 넘지는 못할 것이라고.

10대 0의 비율로 모두가 카니의 승리를 점쳤다.

그렇기에 대중의 관심사는 카니가 얼마나 빠르게, 몇 수 만에 시에라를 쓰러뜨리는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리고.

-시합 시작!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듯 카니는 시합이 시작됨과 동시에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쿵- 쿵-.

무서운 속도로 몇 초 만에 시합장의 절반을 주파한 카니의 기체.

그에 반해, 33호기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어찌 보면 신중한 모습일지도 몰랐지만, 대다수는 시에라가 이번 경기를 포기했다고 간주했다.

그때였다.

콰아아앙-.

지축을 쩌렁쩌렁 울리는 폭음이 들려왔다.

폭음의 진원지는 30호 기체의 오른쪽 발.

쩌저적-.

강하게 진각을 내디딘 카니의 발밑이 지진이라도 난 듯 균열이 가며 움푹 꺼졌고.

푸황-!

진각의 반발력을 이용해 카니의 기체가 포탄처럼 앞으로 쏘아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아구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 저?!"

카니가 어떻게 기동을 한 것인지, 마이스터인 아구스조차 알지 못했다.

다만 저 무시무시한 속도로 쏘아진 기체가 충돌한다면 부딪힌 초월기 쪽은 박살이 날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하급반 실전 평가 최초로 사상자가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구스가 우려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으악!"

"꺄악!"

33번기 기체의 뒤쪽에 자리한 학생들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오는 30번기 기체에 놀라 비명을 내지른 순간.

퉁-.

실로 너무도 가벼운 소리와 함께 날아왔던 카니의 기체가 반대편 방향으로 훨훨 날아갔다.

이를 본 아구스가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자, 잡아 던졌어?!"

그랬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온 카니의 기체.

이를 살짝 옆으로 피한 33호기는 그대로 30호기의 팔목을 잡아챘고, 다시 한 바퀴 회전하며 공중으로 집어 던진 것이다.

그렇게 포물선을 그리며 반대 방향으로 날아간 카니의 기체.

보통의 초월기라면 그대로 내동댕이쳐졌을 상황이었지만, 카니는 공중에서 회전해 안전하게 착지를 했다.

그로 인해 관객들은 수 톤짜리 강철 덩어리가 공중제비를 도는 진풍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어...."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눈앞에서 벌어진 수준 높은 공방에 학생들은 얼이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금 대치 상태에 들어간 30호기와 33호기.

그때 돌연 카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뭔가 이상하다 했더니!

갑작스러운 웃음에 모두가 어리둥절해할 때.

카니의 기체가 33호기를 삿대질했다.

-역시 로이였잖아!

그리고 33호기에서 들려온 목소리.

-아닌데요. 시에라인데요.

-....

-저 시에라 맞아요.

비음이 잔뜩 섞인 코맹맹이 소리가 시합장에 깔리자 좌중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누가 들어도, 여자 목소리를 흉내 낸 남자의 목소리였다.

좌중의 반응이 냉랭하자 뾰로통한 투덜거림이 33호기에서 흘러나왔다.

-쳇!

-봐! 로이 맞잖아!

카니가 로이라고 부르는 존재.

학생들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조종반의 괴물 4인방만큼 유명한 게 바로 그였으니까.

"설마… 저기 들어가 있는 게 그 로이스란 애야?"

"지금 그 자식이… 카니를 집어 던졌다고?!"

"그놈, 기술반이잖아?!"

"그런데 기술반 놈이 시합에 나와도 되는 거야?"

조금 전 로이스의 기체 조종술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다.

조종반의 학생이 선보여도 놀라울 일이건만 그걸 기술반 학생이 보였다는 사실에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퍼져 나갔다.

그런 주변의 반응 따위는 싹 무시한 로이스.

그가 카니를 보며 혀를 찼다.

-야, 아까 같은 거 다른 애들한테 하지 마라. 사람 하나 피 곤죽으로 만들고 싶지 않거든.

-에이, 나야 당연히 너인 줄 알고 한 거지.

처음 33호기가 시합장에 들어섰을 때.

카니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마주한 상대들과는 달리 아무것도 읽히지 않는 존재.

도무지 자신과의 격차를 잴 수가 없어 더욱 두려운 이.

이 초월학관에서.

아니, 이 사이론에서 그녀가 알기로는 로이스뿐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로이스와 마주한 상황이 카니로서는 너무도 기뻤다.

-로이, 나 이제부터 전력으로 한다? 해도 되지? 아니, 할 거야! 한다?

로이스의 장단에 맞춰 학관 생활을 하고는 있지만, 이래저래 불만이 쌓여 가는 와중이었다.

시설이 좋다고는 하지만, 제한적인 생활을 해야 하는 학관의 규칙.

거기에 자꾸만 껄떡거리는 뷘까지.

차곡차곡 쌓여 온 스트레스를 풀 상대가 눈앞에 있으니 그녀의 몸이 안달이 나고 말았다.

우우웅-.

그리고 그런 주인의 의지에 따라 출력을 높여 가는 초월기.

이를 본 로이스가 피식거리며 소리쳤다.

-야, 살살해.

물론 그런 로이스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콰아앙-.

또다시 폭음과 같은 소리가 시합장에 울렸다.

동시에 15m를 순식간에 이동한 카니가 어느새 로이스의 뒤를 잡고 두 자루의 목검을 휘둘렀다.

십자의 형태로 치닫는 쌍검이 탑승구를 노렸다.

일반적인 조종사였다면 자신이 뭐에 당하는지도 몰랐으리라.

하지만.

탕-.

빙그르르 회전한 로이스가 그대로 대검을 휘둘러 쌍검을 쳐 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르던지, 대검의 잔상이 마치 채찍이 휘둘러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로이스가 막을 것을 이미 예상한 카니는 대검과 부딪힌 쌍검의 힘을 이용해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로이스의 차례였다.

후스승-.

섬뜩한 소리를 낸 대검이 마치 뱀처럼 휘어지며 카니를 쫓아 움직였다.

탕- 쾅- 크겅!

카니의 쌍검과 로이스의 대검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부딪히며 쩌렁쩌렁한 울림을 퍼뜨렸다.

종횡무진 발 빠르게 움직이며 로이스를 노리는 카니.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모든 공격을 되레 광풍처럼 날려 버리는 로이스.

시합장의 중앙에서 벌어지는 수준 높은 공방(攻防)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장장 10분간 계속되는 둘의 싸움.

이를 본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저게… 초월기라고...?"

일전에 켄드릭과 타니아가 보여 준 공방 역시 초월학관 학생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엄청난 경지였다.

하지만 불꽃 남매의 공방은 결과적으로 '초월기'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어딘가 모르게 둔하고, 인위적으로 느껴지는 움직임.

이는 세상 모든 초월기가 벗어날 수 없는 한계이자, 모든 조종사들이 극복하지 못한 벽이었다.

하지만 로이스와 카니의 싸움을 달랐다.

초월기의 한계를 벗어난 움직임.

그건 마치....

"사람… 같잖아?"

그것도 일반적인 사람이 아닌 수준 높은 무사 같았다.

유연하게 움직이며, 강하고 빠르다.

심지어 순간순간 행해지는 가속은 관객들이 커다란 초월기의 동체를 놓칠 정도였다.

어느 누가 저것들을 수 톤짜리 철갑 덩어리라고 생각할 것이며, 고작 4급에 불과한 초월기라고 믿겠는가.

좌중은 자신들이 이해 못 할, 상식 밖의 광경에 서서히 몰입해 들어갔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 상황을 통제해야 할 조교와 교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보고 있는 게… 현실인가?'

'저런 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조교들은 최소 수년간 초월기에 탑승해 온 베테랑 조종사였다.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 눈앞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난생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저벅-.

조교들 사이에서 아구스가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그는 굳은 얼굴로 난간에 바짝 붙었고, 멍하니 시합장을 응시했다.

그러던 그 순간.

쥬륵-.

아구스의 두 눈에서 또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름답도다."

아구스는 가슴속에 차오르는 벅찬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의 나이 7살에 처음 초월기를 보았고.

이후 57년 동안 한결같이 초월기를 짝사랑을 해온, 자타 공인 '초월기 성애자'.

그는 오늘, 자신이 그토록 꿈에도 그리던 이상향을 만나고 말았다.

초월기라는 무생물적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

그것이 수십 년 동안 아구스가 품어 온 목표이자 평생의 숙원이었다.

그리고 그의 평생 숙원이 바로 눈앞에 펼쳐졌다.

츠캉- 캉!

초월기란 한계를 넘어선 예술에 가까운 움직임.

쾅!

아직 자신조차 도달하지 못한 숙원을 이제 막 학관에 들어온 어린 제자들이 보여 주고 있었다.

아니, 더 이상 저들은 자신의 제자가 아니었다.

자신보다 뛰어난 이들을 어찌 제자라 부르겠는가.

저들은 이미 조종술의 대가이자, 선구자이며 자신보다 앞서 나아간 선배이자 스승이었다!

아구스는 언젠가는 자신도 저들이 간 길을 따라 걷길 기원하며, 저들이 보여 주는 길을 놓칠세라 두 눈을 부릅뜨고 시합장을 응시했다.

그렇게 5분여가 흘러.

파츠츠측-.

카니의 기체에서 치솟는 전류를 보며 로이스가 망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쟤, 또 눈 돌아갔다....

230화. 실전 평가 (4)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카니와의 시합이 길어지자 로이스가 혀를 내둘렀다.

'아, 이놈의 드래곤 보정....'

카니와 칸, 쌍둥이는 자신이 초월기를 만드는 것을 수백 년 동안 지켜보았다.

하지만 초월기를 타본 것은 정작 이번이 처음.

다시 말해 겨우 경력이 4개월쯤이라는 소리였다.

한데, 보아라.

저게 어딜 봐서 겨우 4개월 탄 조종사의 기동술이란 말인가.

카니의 기동술은 이미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 있었다.

특히 지금 저것.

파츠측-.

카니의 초월기를 타고 흐르는 전류.

저건 위험했다.

'벌써 저거까지 할 줄 알게 된 거야?'

아무리 동기화를 한다고 해도 조종사가 가지는 초월기에 대한 인식은 '도구'다.

그것은 조종사가 무의식적으로 가지는 정신적 보호 방벽이었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로 그 정신 보호가 무너지게 되면 두 가지의 경우로 나타나게 된다.

초월기에 잡아먹혀 백치가 되거나, 혹은....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거나.'

지금 카니가 선보이는 저것이 바로 정신적 록(Lock)을 해제하고 초월기를 완전히 자신의 신체로 인식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로이스는 이를 무협 용어인 '신검합일(身劍合一)'에서 따와 '신기합일(身機合一)'이라 불렀다.

-후후, 로이.... 후후후후후.

자신을 부르는 카니의 흥분 가득한 목소리에 로이스는 살짝 곤혹스러운 얼굴이었다.

'아, 젠장....'

아무리 카니라고 해도 초월기 조종에 관해서는 내가 최고다!

…라고 생각했었는데 드래곤 보정이 터진 카니의 조종술을 쉽게 얕볼 수 없게 됐다.

'설렁설렁 대충 보여주려 했건만....'

아무래도 그것도 어렵게 된 듯싶었다.

대충 했다가는 볼썽사납게 바닥을 나뒹굴 판이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

누가 뭐래도 자신은 초월기의 창조자이자 최초의 초월기 조종사였다.

그런 자신이 꼴랑 경력 4개월짜리 조종사한테 져서야 되겠는가.

'…어쩔 수 없네.'

그리 생각한 로이스 역시 신기합일을 펼쳤다.

동시에 로이스의 초월기에서 검은 기운이 뭉클뭉클 퍼져 나왔다.

이를 실시간으로 구경하는 학생들과 조교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저게… 뭐야?"

"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그리고 때마침, 톰에게 이야기를 듣고 온 해럴드가 나타났다.

'아직 안 끝났군!'

톰이 지금쯤이면 결승전을 치르고 있을 거라 해서 부랴부랴 달려온 해럴드.

정신없이 달려온 탓에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겨우 진정시키던 그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다시금 헛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헛! 저, 저건?!"

초월기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기술자로서 어찌 저 현상을 모르겠는가.

"딘 스트리밍 현상?!"

약 120년 전.

당시 최고의 초월기 조종사라 불리던 '딘 스트리밍'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된 현상.

저것으로 인해 딘 스트리밍은 전쟁의 신이라 불릴 정도로 막강한 초월기 기동력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딘 스트리밍 사후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고, 그렇게 사장된 기술이었는데....

'두, 두 기체가 동시에?!'

하급반의 실전 평가에,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두 기체가 동시에 딘 스트리밍 현상을 보여 주고 있었다.

입을 떡 벌린 해럴드는 좀 더 두 기체를 잘 살펴보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가 아구스를 발견하고 물었다.

"이보게 아구스… 지금 저게 대체...."

두서없는 질문을 들은 아구스는 홀린 듯 답했다.

"해럴드… 아름답지 않은가?"

"...?"

"세계 최고의 화가가 있다면 당장 데려와서 저 대결을 그리게 만들고 싶군...."

"...."

"그것이야말로 세상에 다시없을 최고의 명화가 될 것이네!"

아구스의 두 눈이 몽롱하게 풀린 것을 확인한 해럴드는 그에게 더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지금 무언가를 물어 봤자 정상적인 답변이 나오지 않을 테니까.

대신 그는 다시금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둠을 두른 듯 보이는 초월기와 전격에 휩싸인 초월기.

강한 전류가 흐르자 나무 재질에 불과했던 쌍검은 진즉 재로 화해 흩날렸다.

이는 로이스가 들고 있던 대검도 마찬가지였다.

강한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먼지가 되어 사라진 것이다.

그렇게 영영 이어질 것만 같았던 둘의 대치 상태.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카니였다.

우르르- 쾅!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란 이런 것일까?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기계적, 물리적 한계를 벗어난 움직임을 보이며 카니의 초월기가 사라졌다.

사라진 초월기가 나타난 곳은 로이스의 정면.

츠츠츠-.

30호기 초월기의 주먹이 33호기의 흉갑을 향해 내질러졌다.

단순한 공격이었지만, 고압의 전류에 둘러싸인 초월기의 주먹질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위협이었다.

그 어떤 상대도 카니의 초월기에 직격당하는 순간 전격의 제물이 되리라.

하지만 그런 카니의 공격도 로이스가 두른 검은 기운을 침범하지 못했다.

쿵- 카득!

치즉-.

카니의 주먹질을 로이스의 손바닥이 가볍게 흘려 냈다.

동시에 카니의 전격이 로이스의 검은 기운 속으로 빨려들었다.

이를 본 카니가 버럭 외쳤다.

-로이! 그거 반칙이야!

-꼬우면 너도 전격 풀든가?

-우우!

초월기에 가려져 있음에도 카니가 양 볼을 부풀린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기에 로이스는 피식거렸다.

하지만 그저 웃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카니의 공격이 연이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크측- 쾅!

카니의 기체가 빠른 속도로 주먹과 다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로이스는 이를 물 흐르듯 가볍게 받아넘겼다.

한순간에 수십 합의 공방이 오갔다.

쾅- 쾅-.

굉음이 연이어 들려오니 학생들은 귀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눈앞의 시합에서 시선을 떼지는 않았다.

그들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앞으로 어쩌면, 이러한 수준의 시합을 평생 다시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걸.

퐝- 콰득-.

공기가 터져 나오고, 전류가 치솟았다.

인세에 강림한 천신과 마신의 싸움이 이러할까?

밝은 전류를 두른 카니의 기체와 어둠을 두른 로이스의 기체는 마치 거신처럼 보였다.

한동안 이어지던 공방.

이미 시간은 정해진 30분을 훌쩍 넘었지만, 누구도 그들의 시합을 말리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끼어들 수가 없던 것이다.

대체 저 싸움에 어떤 이가 끼어들 수 있겠는가.

그렇게 물 흐르듯 이어지던 공방.

영원할 줄 알았던 둘의 싸움은 맹공을 가하던 카니의 기체가 비틀거리며 멎었다.

-어?

당황한 카니의 음성이 확성관을 타고 흘러나왔다.

-로, 로이. 이거 이상해! 이거 왜 이래?!

기체에 발생한 문제를 다른 누구도 아닌 싸우고 있는 상대에게 물어보는 카니의 순진무구함에 로이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멍청아, 그럼 그렇게 움직이는데 고작 4급 초월기가 어떻게 버티겠냐? 지금까지 버틴 게 용하지!

-로이 거는 멀쩡하잖아!

-당연하지. 내 조종술이 너보다 뛰어나니까. 훗!

-…왜 이렇게 얄밉지?

눈앞에 로이스의 히죽거리는 얼굴이 선명하게 그려지자 카니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어떻게든 저 얼굴에 한 방 먹여 주고픈 마음에 카니가 다시금 속성력을 전개했다.

파츠츠츠-.

이전보다 더욱더 환하게 전류에 휩싸인 카니의 기체.

-야야, 적당히 해! 너 그러다가 초월기 홀랑 태워 먹는다?

-딱 한 대만 때리고 끝낼게!

-누가 맞아 준대?

-죽어라!

-때린다면서!

-맞아 죽어라!

-야!

옹골지게 주먹을 말아 쥔 카니의 기체가 빠르게 달려들었다.

'아, 진짜… 저 망할 놈의 승부욕.'

칸과 카니의 승부욕은 지난 세월 그들과 5만 번 넘게 대련한 로이스이기에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칸보다 카니가 승부욕이 좀 더 있는 편이었다.

종종… 아니, 매번 카니는 대련 중 이렇게 눈이 돌아가고는 했으니까.

이럴 때는 확실한 패배를 안겨 주어야 돌아갔던 눈깔이 제자리를 찾았다.

-하여간 적당히란 걸 몰라요!

그리 투덜거린 로이스가 카니를 향해 달려갔다.

쿵- 쿵-.

그리고 시합장의 정중앙에서 그들이 맞붙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선제공격을 하는 카니.

그간 로이스는 카니의 공격을 적당히 흘려보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텁-.

살짝 공격을 흘려보내는 듯싶었던 로이스의 33호기 왼손이 30호기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33호기의 오른손이 번개처럼 움직이며 어깨 위로 올라가자.

철컥-.

30호기의 오른팔이 뽑혀 나왔다.

-…어?

카니가 당황한 사이 33호기가 다시금 움직였다.

그가 연이어 노린 것은 30호기의 왼팔.

철컥-.

눈 깜짝할 사이에 카니가 탄 기체의 양팔이 뽑혀 바닥에 떨어졌다.

-어라라? 이, 이게 뭐야?

당황한 카니의 음성.

자신이 뭐에 당했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목소리였다.

그런 심정은 카니뿐만이 아니라 시합을 지켜보고 있는 이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다만 눈썰미가 있는 이들은 로이스가 30호기의 양팔을 단순히 뽑아낸 게 아니란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아는 만큼, 그들은 더욱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마, 맙소사!"

"전투 중에… 기체를 분해했다고?!"

기체 간의 전투에서 상대편 기체의 팔다리를 망가뜨리기는 쉬웠다.

그저 힘으로 부러뜨리거나, 뽑아내면 되니까.

하지만 로이스가 한 일은 단순히 그런 파괴의 행위가 아니라, 기체의 손상 없이 팔을 분해한 것이다.

그것도 촌각을 다투는 전투 상황에서 말이다.

아마도 이 시간 이후 관객들이 누군가에게 자신이 본 것을 말한다면 누구도 쉽게 믿지 못할 것이다.

완벽에 가까운 기체 이해도.

신기에 도달한 조종술.

그 두 조건을 모두 가진 로이스만이 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그렇게 대중이 놀란 사이, 로이스는 30호기의 다리까지 분해했다.

쿵-.

몸뚱어리만 남은 카니의 기체가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동시에 30호기에 흐르던 전류가 사라졌다.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는 상황에 시합장은 침묵에 휩싸였다.

-…또 졌어. 한 대도 못 때렸어....

카니의 기체에서 뾰로통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쁜 로이!

-응, 그래.

카니의 삐친 듯한 외침을 사뿐히 무시한 로이스.

그는 덩그러니 30호기의 몸통 옆에 팔과 다리를 가지런히 가져다 놓았다.

그러고는 마치 자신이 만든 작품을 감상하듯 예쁘게 분해된 부품들을 구경했다.

팔짱을 끼고 말이다.

-누가 했는지 엄청 깔끔하군. 후후.

-으....

카니가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상상되자 로이스가 낄낄거렸다.

그러다가 조용해진 시합장에 정신을 차린 로이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

수십 개의 폭탄이 터진 듯 엉망진창이 된 시합장.

자신과 카니가 만들어 낸 풍경이었다.

이에 33호기가 검지로 얼굴을 긁적였다.

마치 로이스가 제 얼굴을 긁적이듯 말이다.

-음… 과했나?

카니의 장단에 맞춰 주다 보니 필요 이상으로 실력을 내보인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뭐, 엎질러진 물인데 어쩌겠어.'

빠른 단념이었다.

대신 그는 시합장의 한쪽에 멍하니 서 있는 조교의 3급 초월기를 향해 물었다.

-끝났는데요?

-아...!

로이스의 부름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조교가 다급하게 외쳤다.

-스, 승자. 33호기!

조교의 외침이 적막에 휩싸인 시합장에 울려 퍼지고.

"와...."

"우와...."

누군가에게서 시작된 신음과도 같은 감탄이 점점 커져 갔다.

그리고.

우와아아아아-!

작았던 감탄이 거대한 함성이 되어 시합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마치 개선장군을 맞이하는 듯한 거대한 환호성.

마이스터 아구스는 펑펑 눈물을 쏟아 내며 열렬히 손뼉을 쳤다.

"좋구나! 좋아! 오늘이야말로 내 인생 최고의 날이로다!"

한편, 자신에게 쏟아지는 환호에 로이스가 히죽 웃으며 팔을 번쩍 들었다.

-암요, 그럼요! 제가 좀 잘났습니다. 하하!

상당히 기고만장하고 거만한 웃음소리였지만, 누구도 이를 뭐라 할 수 없었다.

조금 전의 경천동지할 싸움을 목격했는데 어느 누가 그를 비난할 것인가.

한편, 33호기의 초월기 대기실.

시에라는 시합장의 한가운데서 손을 흔들고 있는 33호기를 보며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4강전의 시합을 지켜보고 있던 그녀의 뇌리로 조금 전 로이스가 했던 말이 스치고 지나갔다.

[잘 보고 배워. 초월기는 이렇게 다루는 거니까.]

뇌리에 맴도는 로이스의 목소리에 시에라가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보고… 배우라고?"

대체 뭘?

어떻게?

"저런 걸 본다고… 따라 할 수 있을까?"

적당히 수준이 맞아야 어느 정도 흉내라도 내 볼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로이스가 보여 준 수준은 시에라의 경지를 아득히 초월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걸 보여 주면… 이제 나보고 어떡하라고."

홀린 듯 서 있는 시에라의 뇌리로 천신과 마신, 두 거신이 보여 준 천외천의 격전이 끊임없이 되풀이됐다.

로이스가 선보인 이 한 번의 시합이 앞으로 시에라라는 초월기 조종사가 쫓아갈 목표로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환호성이 잦아들고 로이스가 초월기 대기실로 돌아오던 그때.

"이, 이건 무효야!"

어디선가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 들려왔다.

231화. 실전 평가 (5)

한동안 적막이 이어진 탓일까.

절규 같은 외침은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덕분에 모든 시선이 시합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언제 나왔는지 모를 뷘이 조교와 교수들이 있는 방향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이 시합 결과… 인정할 수 없습니다!"

악에 받친 듯한 외침에 로이스가 초월기에서 내려 뷘을 바라보았다.

"…저 자식은 왜 또 저러냐?"

로이스의 시선을 알아차렸을까?

로이스 쪽으로 고개를 돌린 뷘의 두 눈은 핏줄이 터졌는지 시뻘겠다.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린 뷘이 손가락을 뻗어 로이스를 향해 삿대질했다.

"시합에 조종반이 아닌 기술반 학생이 나왔습니다! 이는 엄연히 규정에 어긋나는 일이지 않습니까? 당장 실격 처리시켜야 함이 마땅합니다!"

뷘의 날카로운 외침에 조금 전 시합이 준 여운에 잠겨 있던 학생들이 정신을 차렸다.

"어...? 그러고 보니 그렇네?"

"내가 아까 그랬잖아! 기술반 놈이 시합에 나와도 되는 거냐고!"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정말 실격 처리를 해야 하는 건가?"

주변의 반응이 자신이 원하던 쪽으로 흐르자 뷘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기세가 등등해진 뷘이 로이스를 노려보았다.

이에 로이스가 혀를 찼다.

'하여간 저 새끼는 도움이 안 돼요, 도움이.'

매번 자신에게 그렇게 탈탈- 털리고도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걸 보면 근성 하나만큼은 인정해 줘야 했다.

'그럼 오늘도 넘어뜨려 줘야겠지.'

오뚝이는 쓰러뜨려야 제 맛 아니겠는가.

로이스가 사악한 미소를 머금고 뷘에게 다가가는 찰나.

그보다 먼저 나선 이가 있었으니.

"네 이노오옴!"

쩌렁쩌렁한 외침과 함께 흉흉한 기세를 풀풀 날리며 한 사내가 들이닥쳤다.

그는 다름 아닌 마이스터 아구스.

안 그래도 험악했던 인상의 그가 표정까지 잔뜩 일그러뜨리니, 보는 이의 오금이 절로 저릴 정도였다.

조금 전까지 기세등등했던 뷘이 아구스의 얼굴을 보자마자 뒷걸음질 친 게 바로 그 증거였다.

뷘이 아연실색한 얼굴을 하자 아구스는 당장이라도 그를 베어 낼 기세로 다가갔다.

아니, 그는 정말로 뷘을 베어 낼 듯 보였다.

그의 손은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 듯 검 자루에 올라가 있었다.

"네놈이… 네놈이 감히!"

"마, 마이스터? 왜, 왜 이러십니까?"

"몰라서 묻는 말이더냐!"

"대체...."

"일생일대, 인생에 다시없을 최고의 순간을 만끽하고도 고작 한다는 소리가… 뭐라?! 실격?! 네놈이 그러고도 이 초월학관의 학생이며 초월기를 사랑하는 이란 말이냐!"

"그, 그게 무슨...."

"초월기 종사자로서 최고의 이상향을 보여 준 이에게 경의를 표하지는 못할망정, 그딴 망발을 나불거리다니! 위대함을 알아볼 안목도 없다면 대체 눈깔은 왜 달고 다니는 것이냐! 내 오늘 네놈의 쓸모없는 눈과 허튼소리를 지껄인 혀를 베어 내 주마!"

"마, 마이스터!"

아구스의 거침없는 독설.

자신에게 쏟아지는 살기에 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리고 그런 사태에 조교들이 후다닥 달려와 아구스를 붙잡고 늘어졌다.

"지, 진정하십쇼!"

"마이스터께서 학생에게 손을 쓰시면 안 됩니다!"

서너 명의 조교들이 필사적으로 아구스의 팔과 다리를 부여잡았다.

그럼에도 아구스는 막무가내였다.

"놔라, 이놈들! 네놈들도 같이 베이고 싶은 게냐!"

스릉-.

살짝 뽑혀 나온 은빛 검신을 본 순간 뷘의 머리가 새하얘졌다.

'주, 죽는다!'

아구스의 살기는 거짓이 아니었다.

지금의 그라면 정말로 자신을 벨지도 몰랐다.

그 순간 뷘을 구제해 주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진정하게 아구스."

나직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에 아구스를 부여잡고 있던 조교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리고 누구보다 안색이 좋아진 건 뷘이었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저분이라면, 같은 마이스터인 해럴드라면 광분해 날뛰는 아구스를 막아 주리라.

뷘에게는 해럴드만이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해럴드의 등장에 아구스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해럴드 자네도 보았지 않은가, 찬란하기 그지없는 그 순간을! 한데, 저 머저리 같은 놈이 지껄인 소리를 듣고도 날 말릴 셈인가!"

"어리석은 아이일지라도 보듬어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게 우리의 직무일세."

"...."

그래도 해럴드의 말이 먹힌 것인지 아구스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만약 눈치 없이 끼어드는 뷘만 없었다면 이대로 상황이 끝났을 것이다.

"마, 마이스터 해럴드 님!"

"할 말이 있는 게냐?"

"그게...."

아구스의 눈치를 보던 뷘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말했다.

"부, 분명 아구스 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조금 전의 시합이 대단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대단? 대애애단? 고작 대단이라고?!"

다시 발끈한 아구스의 팔다리에 조교들이 들러붙었다.

그사이 해럴드는 뷘을 보며 살짝 인상을 썼다.

"그런데?"

"그, 그렇다 하여도 규정은 규정입니다! 규정을 어긴 이를 이대로 결승에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는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이며, 이를 묵인한다면 많은 학생이 박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형평성이라...."

잠시 뷘의 이야기를 곱씹던 해럴드가 피식하며 질문을 던졌다.

"네놈이 말하는 규정이란 게 무엇이냐?"

"그야 당연히 조종반이 학생이 아닌 기술반 학생이 시합에 나간 것입니다!"

"이 시합에 그런 규정이 있더냐?"

"네? 그야 당연히...."

당연히 그렇다고 답하려던 뷘의 얼굴이 굳어졌다.

쉽사리 답을 못 하는 그를 보고는 살짝 조소를 머금은 해럴드.

그가 아구스와 조교들을 향해 물었다.

"내 기억이 이상한 건가? 나는 그런 규정이 있다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아암! 당연히 없지! 그런 규정은 애초에 있지도 않은 것을!"

"제가 알기로도 그런 규정은 없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해마다 실전 평가를 치러 온 조교들이기에 누구보다 규정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이들의 증언에 뷘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해럴드는 뷘을 노려보았다.

"잘 들어라. 실전 평가에 조종반 학생이 나오는 것은 그저 그들이 초월기를 잘 다루고, 잘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 말한 해럴드가 이번에는 관객석에 앉은 학생들에게 모두 들리게 큰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조종반 학생들보다 자신이 초월기를 더 잘 몰 자신이 있거나, 더 잘 싸울 자신이 있다면… 얼마든지 조종반 학생과 합의 후 시합에 출전하거라. 우리 초월학관에는 기술반 학생이 초월기를 몰아서는 안 된다는 규정 따위는 없으니 말이다."

마나가 실린 해럴드의 목소리가 시합장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그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던 학생들이 수긍했다.

"아아, 규정이 아니라 그냥 암묵적으로 조종반 학생들이 나가는 거였구나."

"하긴, 성적이 걸린 상황에서 어떤 미친놈이 조종반을 대신해서 경기에 나가겠어?"

"애초에 기술반 비실이들이 시합에 나올 배짱이나 있나? 칼 몇 번 휘두르면 주저앉을 거 같은데?"

"…너, 지금 기술반을 깔본 거냐? 왜 '우리의 로이스'한테도 비실이라고 해 보시지?"

"로… 로이스는 제외."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퍼져 나갔다.

이를 뒤로한 해럴드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곳에는 언제 온 것인지 모를 카니가 있었다.

"너는 조금 전 시합에서 저 아이가 부정하거나 부당한 수단을 이용해 승리했다고 생각하느냐?"

"에이, 우리 로이가요? 설마요?"

피식 웃는 카니.

그녀는 뷘을 향해 '뭐, 이딴 게 있어?'라는 시선을 보냈다.

마치 벌레를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사이 해럴드가 로이스에게도 물었다.

"너는 이번 시합에서 부당한 수단을 썼느냐?"

"그럴 리가요."

"그럼 아무 문제 없는 거겠군."

해럴드의 정리에 로이스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자신을 대신해 알아서 상황을 착착 정리해 준 게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상황이 마무리되자 아구스가 자신에게 들러붙은 조교들을 털어 냈다.

"놔라, 이것들아."

멋쩍은 얼굴로 떨어지는 조교들.

그사이 아구스는 뷘을 노려보며 물었다.

"네놈… 이름이 뭐냐?"

"뷔, 뷘입니다."

"뷘이라… 내 기억해 두지."

싸늘한 목소리에 뷘의 안색이 다시금 창백해졌다.

마이스터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한다고 했으나 그것이 결코 좋은 의도는 아닐 테니 말이다.

차마 아구스의 시선을 마주할 용기가 없는 뷘은 그대로 고개를 숙여 버렸다.

그의 패기 없는 모습에 아구스는 시선을 돌리며 조교들에게 외쳤다.

"뭣들 하는 게야! 당장 나머지 4강전 치를 준비하지 않고! 오늘 여기서 밤샐 거냐!"

"아, 네! 바,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아구스의 불호령에 부리나케 움직이려던 조교들.

그때 그들을 붙잡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저기요...."

시합장으로 슬금슬금 나온 타니아.

자신에게 시선이 쏠리자 그녀가 손을 들고 말했다.

"저는 기권할게요."

생각지도 못한 타니아의 기권에 모두가 놀라 바라보았다.

이에 타니아는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애초에 저는 멍청한 켄드릭만 이기면 됐거든요. 초월기는 자기가 훨씬 잘 탄다고 촐랑거리는 게 좀 재수 없어서.... 제가 더 잘 탄다는 게 증명됐으니 나머지 시합은 관심 없어요. 칸 오빠를 이길 수 있을 거 같지도 않고요."

패자는 유구무언.

타니아의 비웃음에 저 멀찍이 떨어진 켄드릭은 어깨를 부들부들 떨 뿐, 반박을 못 했다.

기분 좋게 웃고 있는 타니아를 향해 아구스가 물었다.

"흠… 이번 기권은 너의 같은 조원도 동의하는 일이냐?"

"아마 동의할걸요?"

"아마?"

아구스의 되물음에 타니아가 한쪽을 바라보았다.

쭈뼛쭈뼛 서 있는 이는 타니아와 같은 남성 조원.

"나 기권한다?"

"으응… 아, 알았어."

타니아가 지그시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뭔가 약점이라도 잡힌 듯 보였다.

당사자들의 의견을 들은 아구스가 상황을 정리했다.

"좋다. 56조의 기권으로 63조가 결승 진출이다."

그리고 때마침 타니아의 기권 소식을 듣고 온 칸이 기쁜 얼굴로 말했다.

"오오! 그럼 이제 나랑 로이스만 붙으면 되는 건가? 얼른 하자고요!"

카니와 로이스가 신나게 싸우는 것을 본 칸은 이미 안달이 나 있었다.

그 모습에 로이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까 그 짓을 또 하라고?'

같은 쌍둥이, 거기에 같은 드래곤.

모르긴 몰라도 드래곤 보정을 받은 칸의 조종술도 카니와 비슷한 경지일 것이다.

이대로 결승전을 치른다면 조금 전과 같은 상황이 똑같이 반복될 터.

'아, 귀찮은데....'

적당히란 걸 모르는 쌍둥이를 상대하기 귀찮아진 로이스가 칸을 향해 메시지를 날렸다.

[야, 좋은 말 할 때 기권해라.]

로이스의 협박 메시지를 받은 칸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는 듯 로이스를 뚱하게 바라보았다.

쉽사리 포기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 모습.

이에 로이스가 다시 메시지를 날렸다.

[너 기권 안 하면, 네가 프루지아 나무 밑에 묻어 놓은 거 카니한테 다 말한다?]

로이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악! 우와아아아악!"

경기를 일으킨 칸이 비명을 내질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깜짝 놀란 이들의 시선 속에 칸이 버럭 소리쳤다.

"기, 기권합니다!"

"...?!"

타니아의 기권도 기권이었지만, 칸의 기권은 더더욱 뜬금없었다.

그가 기권을 선언하자 반발이 터져 나왔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반발의 주인공은 칸과 같은 조원인 올리비아였다.

그녀가 화난 눈으로 칸을 보며 소리쳤다.

"갑자기 기권이라니! 난 받아들일 수 없어!"

사전에 이야기된 것이 아니었기에 올리비아의 반발은 당연했다.

그리고 그런 반발에는 어느 정도 계산이 깔려 있었으니.

'그 정도로 격하게 싸웠고, 나머지 4강전이 취소되면서 휴식할 시간도 없었어. 로이스도 사람인 이상 분명 지쳤을 테니… 지금 맞붙는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어!'

분명 로이스 엄청난 실력을 지닌 이인 것은 맞지만, 칸을 옆에서 지켜본 이로서 그라면 지친 로이스를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다.

우승이란 단어가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그걸 놓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건 올리비아의 사정이고, 칸은 이미 결심을 굳혔다.

"미안하지만, 사정이 있어서 난 기권해야겠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대체 이유가 뭔데?"

"그건 비밀."

"이유조차 충분하지 않은데 내가 기권을 받아들일 거 같아?"

그녀의 이야기에 칸의 눈빛이 대번에 싸늘해졌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뭐?"

"네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쩔 건데?"

"...."

"그렇게 결승전에 나가고 싶으면 네가 나가든가. 기술반 학생이 대신 나가도 된다잖아?"

절대 안 나가겠다는 칸의 반응에 올리비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리고 그때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

"그래, 이건 이 아이 말이 맞다! 기권이라니! 어림없지!"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아구스.

이번 결승에서 다시금 로이스의 조종술을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그는 칸의 기권에 매우 실망한 얼굴이었다.

마이스터 아구스의 도움에 올리비아가 화색을 지었다.

물론 칸이 어디 그런 거에 꿈쩍할 위인이겠는가.

이깟 시합보다 프루지아 나무 밑에 묻힌 그것이 훨씬 소중했다.

칸이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 몰라요. 전 기권합니다."

"끄응...."

이제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씨알도 안 먹히는 태연한 얼굴을 보며 아구스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가 올리비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찌할 게냐? 저 아이는 안 나간다는데… 너라도 해 보겠느냐?"

아구스의 물음에 올리비아의 얼굴이 참담해졌다.

조금 전의 시합을 보아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아무리 로이스가 지쳤다고 한들 초월기 조종법도 모르는 자신 따위가 상대가 되겠는가.

같은 조원인 칸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진 몰라도 갑자기 파업을 선언하니, 사실상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실상 여기까지 올라온 것도 칸의 능력이었으니 말이다.

올리비아가 체념한 듯, 그리고 억울한 얼굴로 답했다.

"…기권할게요."

그걸로 끝이었다.

예상보다 길어졌던 실전 평가 토너먼트는 4강전 1경기와 결승전까지 기권승으로 처리되며 제시간에 마무리되었다.

물론 우승은 로이스와 시에라, 33조였다.

아구스가 영 아쉬운 얼굴로 로이스와 카니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럼 끝난 거 같으니… 자네는 나 좀 봅세."

해럴드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한 것을 본 로이스가 손가락으로 제 얼굴을 가리켰다.

"저요?"

"그래, 자네."

"지금요? 저 저녁 먹으러 가야 하는데?"

"긴히 할 말이 있네."

"밥 먹은 다음에 하면 안 되나요? 배고픈데."

"…부탁합세. 시간을 좀 내주게."

그의 정중한 부탁에 주변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이들이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마이스터 해럴드.

그가 누구던가.

옹고집의 장인으로 유명한 이였다.

그런 그가 일개 학생에게 부탁을 한다?

물론 조금 전의 시합으로 로이스의 위상이 조금 달라지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해럴드란 사람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 그가 내뱉은 부탁이란 단어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부… 탁? 해럴드, 지금 자네가 부탁이라고 했는가?"

오죽했으면 같은 마이스터인 아구스조차 놀랐겠는가.

하지만 정작 부탁을 받은 주인공은 태연했다.

"흠....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따라오게나. 내 연구실로 가지."

로이스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해럴드는 한시름 놓았다는 안색으로 먼저 앞장섰다.

그가 떠나가자 로이스가 일행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따가 같이 먹자. 니들끼리 먼저 먹기만 해 봐!"

"기다릴 테니 다녀오세요!"

"얼른 갔다 와!"

일행의 답변에 로이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쫄래쫄래 해럴드를 쫓아 사라졌다.

다른 이들이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멀어지는 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때.

"너, 근데 왜 갑자기 기권한 거야?"

카니의 기습 질문에 움찔한 칸.

그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 그냥! 배, 배고파서! 아아! 배고프다!"

"흐음...."

게슴츠레하게 변하는 카니의 시선에 칸은 스리슬쩍 고개를 돌렸다.

내리깔린 시선, 그리고 흔들리는 동공.

칸은 사라진 로이스를 향해 속으로 절규했다.

'대체… 어떻게 안 거야?!'

프루지아 나무 밑에서 100년째 숙성 중인 뇌령초 담금주.

오로지 살아 있는 프루지아 나무 근처에서만 숙성이 되는 특이한 담금주로, 성룡 남성의 스태미나 보강에 기가 막히게 좋은 보양주라고 알려져 있었다.

100년 전 카를로스의 창고에 있는 뇌령초 하나를 살금살금 빼돌린 칸.

2차 수면기가 끝나면 혼자 먹으려고 아빠 몰래, 엄마 몰래, 카니 몰래 숨기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딱 50년만 더 묵히면 되는 건데....'

그걸 뭐든지 입에 넣고 보는 카니한테 들켰다가는 한 방울도 남지 않고 그대로 탈탈 털리리라.

'내 신혼을 위한 비장의 수단이 위험해!'

유희를 끝내고 집에 돌아간다면 가장 먼저 뇌령초 담금주부터 옮기리라.

칸은 그리 다짐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자신이 그리 애지중지하는 뇌령초 담금주를 이미 로이스가 어딘가로 빼돌렸다는 것을.

만약 칸이 이 사실을 알고 따졌다면 로이스는 이리 답했으리라.

'난 그냥 땅에 떨어진 걸 주운 것뿐이라고! 땅에 떨어진 건 먼저 줍는 게 임자지! 쿡쿡.'

232화. 재회 (1)

시합장을 벗어난 로이스와 해럴드는 아무런 대화 없이 걸었다.

그들의 침묵은 목적지인 해럴드의 연구실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됐다.

달칵-.

연구실에 들어선 둘.

해럴드는 잔뜩 어질러진 방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미안하군. 미처 치울 새가 없었네."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뿐이 아니라 로이스는 정말로 방이 지저분한 것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얼굴이었다.

대신 그는 호기심을 가지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책상에 수북하게 쌓인 각종 연구 자료.

소파는 물론 손님을 응대하기 위해 마련한 테이블에는 연구 재료로 보이는 각종 금속이 즐비했다.

그리고 어질러진 다른 곳과는 달리 연구 서적이 꽂힌 책장만큼은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주인의 성향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방 안의 모습에 로이스는 살짝 미소 지었다.

'장인이네.'

무언가 강한 고집이 느껴지는 해럴드의 방은 그 옛날 덱스터의 연구실을 연상케 했다.

그렇게 로이스가 방 안을 둘러보는 사이 책상을 뒤적거린 해럴드가 종이 한 장을 들고 로이스에게 다가왔다.

해럴드가 말없이 내민 종이의 정체는 다름 아닌 로이스가 제출한 시험지.

이를 알아차린 로이스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역시 이것 때문이었구나.'

마이스터인 해럴드가 몸소 찾아와 '부탁'까지 하며 자신을 찾을 이유라면 이것뿐이었다.

이미 그를 본 순간부터 예상하였지만, 로이스는 시험지를 받아 들며 시치미를 뗐다.

"이건 왜요? 제 답안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부르신 겁니까?"

"그 시험지… 자네가 쓴 거 맞는가?"

그리 물었지만, 이미 해럴드는 알고 있었다.

답안을 본 순간 가장 먼저 한 일이 당시 시험에 들어갔던 감독관을 불러서 확인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아, 그 녀석이라면 확실히 기억합니다. 시작하고 5분도 안 되어서 시험지를 내고 갔거든요.'

'5분?! 지금 5분이라고 했느냐? 확실해?'

'화, 확실합니다!'

확신에 찬 조교의 말에 어찌나 놀랐던지.

이미 검증을 거쳤지만, 해럴드는 로이스의 입을 통해 확인받고 싶었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해럴드의 시선에 로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요. 필체가 제 거네요."

"허...."

해럴드의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정말이었다니....'

잠시 멍하니 있던 그의 두 눈에 서서히 열기가 차올랐다.

"시험의 마지막 문제… 어찌 푼 건가?"

"말씀하시는 게 이상하네요. 풀라고 내놓은 문제를 푼 게 이상한 건가요?"

"혹여 그 마지막 문제를 어디서 본적이 있는가? 아니면 누구한테 들었거나?"

"아뇨."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답을 하는 로이스.

하지만 그의 거짓말은 너무도 쉽게 먹혀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지막 문제는 해럴드가 조금은 즉흥적으로 낸 문제였다.

그 문제가 시험에 나올 것이라고 어느 누가 예상이라도 했겠는가.

심지어 그 출처는 자신도 모른다.

오로지 마이스터 윌리엄만이 알고 있을 뿐.

'…윌리엄이 알려 주었을 가능성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해럴드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만약 윌리엄이 눈앞의 소년에게 시험 문제를 알려주었다고 해도 답을 아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윌리엄이 직접 찾아와 답을 구했을 정도니, 그 역시도 답을 모르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조차 쉽게 풀지 못한 난제를.

고작 5분이 채 되지도 않는 시간 만에 풀어 버린 소년.

잠시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던 해럴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시험지에 적힌 풀이식… 약식으로 적은 게 맞는가?"

"네."

"혹시 정식으로 풀이 과정을 적어 낼 수 있겠는가?"

해럴드의 그 물음에 로이스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는 해럴드가 열심히 구한 풀이식이 칠판에 적혀 있었다.

"굳이 그럴 필요 있을까요? 저기 적혀 있는데. 저건 교수님이 쓰신 겁니까?"

"그렇네."

"흠...."

풀이식을 유심히 바로 보던 로이스가 칠판으로 다가가 분필을 집어 들었다.

"조금 쓸데없는 풀이 과정이 들어갔네요. 여기서는 이렇게...."

탁- 탁-.

분필을 쥔 로이스의 손이 칠판 위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로이스가 무엇을 하는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다가왔던 해럴드가 점점 바뀌어 가는 풀이식을 보며 입을 벌렸다.

'어찌....'

로이스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자신이 적어 낸 풀이식의 군더더기가 말끔하게 덜어지고 있었다.

"됐네요."

손에 묻은 분필을 탁탁 떨어내는 로이스를 보며 해럴드의 낯빛이 굳어졌다.

'…완벽하다.'

자신이 풀어낸 술식보다 간단하면서도 완벽하고 이해도 높은 풀이 과정이 칠판에 떡하니 적혀 있었다.

해럴드는 칠판과 로이스를 번갈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뇌리로 조금 전 시합장에서의 일이 스치고 지나갔다.

'초월기를 타고 있던 것도 이 녀석이었다.'

딘 스트리밍 현상을 일으킨 두 대의 초월기 중 한 대에서 로이스가 나올 때 너무 놀라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마지막 문제를 푼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일진대 경지에 다다른 초월기 조종술까지 보유한 존재.

해럴드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자네… 정체가 뭔가?"

심각하게 굳은 해럴드의 표정을 본 로이스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가 슬쩍 웃으며 답했다.

"염원의 탑주."

"...."

로이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난데없는 소리에 해럴드는 조금 전보다 더욱 무서운 눈으로 로이스를 바라보았다.

길게 이어지는 정적.

그러다가 돌연 해럴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핫! 하하하!"

목젖이 보일 정도로 대소를 터뜨린 해럴드가 유쾌한 얼굴로 로이스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래, 그래! 그만한 능력을 지녔으면 응당 그 정도의 포부는 있어야지!"

"...?"

"자네라면 충분히 미래의 탑주가 될 수 있을 거네!"

아무래도 오해를 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이 정도면 그냥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정도랄까?

'염원의 탑주'가 해럴드의 귀에는 '미래의 염원 탑주'로 들린 모양이었다.

로이스의 표정이 떨떠름해져 갔으나 자신만의 생각에 빠진 해럴드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로이스의 어깨를 강하게 쥐었다.

해럴드의 눈이 광채를 뿌렸다.

"암! 그렇고말고! 그런 꿈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일세! 그래서 자네, 이제 어찌할 셈인가?"

"뭐가요?"

"저 술식 말일세."

"그게 왜요?"

"저걸 저대로 둘 셈인가?"

"그럼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로이스의 반응에 해럴드가 되레 역정을 냈다.

"아니, 그럼 이런 발견을 해놓고도 이대로 썩힐 셈인가?! 당장 논문을 써서 학계에 제출하게!"

그제야 로이스는 깨달았다.

지금 자신이 굉장히 귀찮은 상황에 엮인 거 같다고.

로이스가 떨떠름한 얼굴로 답했다.

"…그걸 꼭 해야 하나요?"

"그걸 말이라고! 저 술식을 조금만 더 연구한다면 초월기 역사에 다시없을 새로운 혁명을 일으킬 수도 있단 말일세!"

"아, 예...."

"논문을 쓰기만 한다면… 1급 도제의 직위까지는 무조건 받을 수 있을 거네! 그렇게 어느 정도 경력만 쌓이면 최연소 마이스터도 충분하지! 내 도와줄 터이니, 같이 논문을 써 봅세!"

그 이야기에 로이스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싫은데요."

당장 마이스터 자리를 준다고 해도 됐다고 할 판에 고작 1급 도제?

애초에 로이스로서는 답이 윌리엄에게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1급 도제니 마이스터니 하는 것들은 별 관심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당황한 해럴드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어, 어째서?!"

"귀찮아서요."

"자, 잘 생각해 보게. 최연소 마이스터란 말일세!"

"네, 잘 생각해 봐도 귀찮아요."

"끄응....

해럴드가 앓는 소리를 내는 사이 로이스가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럼 저는 애들이 기다려서. 교수님도 식사 맛있게 하세요."

그리 말하고는 쏜살같이 연구실을 빠져나가는 로이스.

"이, 이보게!"

떠나가는 로이스의 등을 향해 손을 내뻗었지만, 정작 붙잡고 싶은 이는 뒤도 안 돌아보고 연구실을 빠져나간 뒤였다.

해럴드는 멍하니 비어 버린 연구실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그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허허허."

동시에 해럴드의 눈에 기이한 열망이 차올랐다.

"저런 인재를 놓칠 수는 없지!"

간혹 그런 존재가 태어나고는 한다.

세상을 뒤바꿀 놀라운 천재성을 타고나는 이들.

그런 천재가 한 번씩 나타날 때마다, 그들이 몸담았던 분야는 수백 년의 세월을 앞당기는 놀라운 진보를 선보인다.

그리고 해럴드의 눈에 비친 로이스가 바로 그런 존재였다.

'저 아이라면… 초월기를, 염원의 탑을 새로운 영역으로 이끌 것이다!'

그러므로 로이스란 존재를 반드시 염원의 탑의 품에 끌어안아야 했다.

"반드시!"

옹고집 장인의 눈에 강한 열망이 담기는 순간이었다.

* * *

본의 아니게 해럴드의 애간장을 살살 녹인 로이스.

일행과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그는 침대에 퍼질러졌다.

'아, 피곤하다.'

물론 육체적으로 피곤한 것은 아니었다.

정신적으로 피곤할 뿐.

그가 해럴드에게 다녀온 사이, 오늘의 시합이 초월학관 전체로 퍼진 탓에 로이스와 카니는 학관 최고의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렇다 보니 어딜 가든 따라붙은 시선이 영 신경에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오늘의 고단함을 달래기 위해 침대와 한 몸이 되려던 로이스는 자신을 향한 뜨거운 시선에 슬쩍 고개를 들었다.

"왜? 뭔데?"

평소 로이스의 타박을 받고 조용히 한쪽에 찌그러지는 시바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가 입에 침을 튀겨 가며 주먹을 불끈 말아 쥐었다.

"대, 대단하십니다!"

평소 로이스의 상태를 알고 있는 시바였다 보니, 그가 초월기를 타고 나왔을 때의 놀람은 누구보다 컸다.

거기다 그토록 놀라운 초월기 조종술이라니.

로이스가 카니를 꺾었을 때, 시바는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렇다 보니 로이스를 향한 존경심이 무럭무럭 일어났다.

자신을 향한 시바의 뜨거운 시선에 로이스가 시큰둥하게 답했다.

"그걸 이제 알았어?"

"초월기 조종술은 언제 익히신 겁니까? 대체 어떻게 하면 로이스 님처럼 될 수 있는 겁니까?"

"그런 일이 가능할 거 같아?"

"아...."

"아, 방법이 있긴 하다."

"그, 그게 뭡니까?"

"다시 태어나면 돼. 물론 다시 태어난다고 나처럼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겠만."

혹시 아는가.

시바가 자신처럼 드래곤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지.

로이스의 이야기에 시바가 시무룩한 얼굴로 한쪽에 찌그러졌다.

그리고 그때였다.

똑똑-.

조용히 울리는 노크 소리에 로이스가 턱짓했다.

네놈이 나가 보라는 신호에 쪼르르 문으로 갔던 시바가 빠르게 되돌아왔다.

"로이스 님을 찾아온 손님인데요."

"없다고 해."

종일 사람들의 시선에 시달렸기에 오늘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이에 시바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그 찾아오신 분이… 시에라 양입니다만?"

시에라라는 소리에 로이스가 슬쩍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카니나 다른 애들이 나 찾으면 볼일 있어서 나갔다고 해. 괜히 엉뚱한 소리 늘어놓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시바의 배웅을 받으며 밖으로 나온 로이스.

그는 문 앞에 서 있는 시에라를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혹시… 시간 괜찮으면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 해서."

"해 봐."

"여기 말고 다른 곳에서...."

시에라가 주변을 살폈다.

로이스가 나오기 무섭게 달라붙는 시선.

그런 시선을 인지한 로이스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에이 씨...."

이게 바로 유명인의 비애랄까?

못마땅하다는 표정의 로이스가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여전히 뒤에 서 있는 시에라를 향해 외쳤다.

"뭐 해? 안 따라오고."

"가, 간다...."

황급히 로이스를 뒤쫓는 시에라.

그들이 옮긴 자리는 다름 아닌 해충 박멸 연구회실이었다.

자연스럽게 의자를 빼고 앉은 로이스와 그 맞은편에 선 시에라.

연구회실에 들어온 둘 사이에 어색한 적막이 감돌았다.

정확히는 로이스는 시큰둥해하고, 시에라가 어색해하는 기묘한 적막이었다.

한참이 지나도 시에라가 여전히 우물쭈물하니 로이스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할 말 없냐? 그럼 난 이만 간다?"

그가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시에라가 다급히 외쳤다.

"고, 고맙다!"

난데없는 감사 인사에 멈칫한 로이스.

그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시에라를 보며 피식거렸다.

"난 또 뭐라고. 고작 그 얘기 하려고 한 거냐?"

"아니, 할 말이 있긴 있지만… 고마움을 전하는 게 먼저일 거 같아서 말이다."

"그래도 싹수는 있네."

로이스의 퉁명스러움에 시에라는 오히려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녀가 다시금 자신의 고마움을 전했다.

"정말… 고맙다. 덕분에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거 같다."

"됐어. 굳이 너 때문이 아니라 나 좋자고 한 일이기도 하니까."

"그렇게 말해 주는 것도 고맙고."

"감사 인사는 그쯤 해 두고… 그래서 할 말이 뭔데?"

그 물음에 시에라의 낯빛이 굳어졌다.

그녀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말을 너에게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했었다. 어쩌면 너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는 말이니까. 하지만… 내가 숨기는 게 오히려 너를 무시하는 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이냐?"

"…혹시 기억나나? 우리가 처음 같은 조원으로 뽑히던 날, 내가 너와 같은 조가 되고 싶지 않다고 한 것 말이다."

"기억나지."

"네가 그랬지. 사과할 땐 하더라도 이유는 알려 주고 사과하라고."

"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로이스의 시선에 시에라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잠시 단호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넌… 우리가 한 조가 된 게 우연이라고 생각하나?"

233화. 재회 (2)

시에라의 이야기는 갑작스러웠지만, 로이스의 흥미를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게 무슨 말이냐?"

"…그 말 그대로다."

"그러니까… 너와 내가 한 조가 된 게 우연이 아니라고?"

"그래."

"분명 조 편성은 임의로 정해지는 거 아니었나?"

"맞다, 조 편성은 무작위로 선출되지. 다만...."

"...?"

"몇몇 학생들을 제외하고."

"하...."

로이스의 입에서 기가 찬다는 듯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해 봐."

"초월학관 학생들은 신분에 상관없이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 라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전부 옛말이다."

초창기의 초월학관은 오로지 우수한 초월기 종사자를 육성해 내기 위해 학생의 출신 성분을 알리지 않았다.

또한, 운영 정책도 그에 따라 모든 학생을 동등하게 대우해 주었다.

하지만 초월학관에 입학하는 학생의 비중 중 귀족 집안 자제가 해마다 극단적으로 늘어나다 보니 초월학관 측에서도 신경을 안 쓸 수는 없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초월학관의 최고급 시설들이었다.

그렇게 점차 시간이 흘러.

고인 물이 점차 썩어 갈수록 학관 내 곳곳에서 썩은 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표면적으로 학관은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이지. 다만… 그 이면에서는 뒷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뒷거래?"

"일부 권력과 재력이 있는 가문의 자식들이 학관에 입학하게 되면 금품을 받은 학관의 관계자들이 해당 가문 자제의 편의를 봐주는 거다."

"...."

"대표적인 예로 하급반 초기에 배정되는 조 임명식이 있다. 뇌물을 받은 학관의 관계자가 해당 학생을 다른 상위 성적자 혹은 원하는 학생과 한 조로 묶어 주는 거지."

"…그게 너와 나다?"

"너와 나뿐이 아니다. 뷘, 리암, 올리비아, 에블린. 내가 확실하게 아는 건 그들뿐이지만, 그 넷을 제외하고도 아마 몇몇이 더 있을 거다."

"어라? 걔들은?"

시에라가 언급한 이들.

그들은 다름 아닌 쌍둥이, 불꽃 남매와 한 조가 된 이들이었다.

'이것 봐라?'

생각지도 못한 학관의 비리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다가 로이스가 시에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뭔가 이상한데?"

"...?"

"네 말대로 너와 내가 한 조가 된 것 역시 조작된 거라면 그 일에 너도 동조했다는 거 아냐? 너희 가문 역시 뒷거래를 했다는 걸 테니까."

하지만 시에라는 첫날 자신과 한 조가 되는 것을 싫어했었다.

그렇게 이야기는 돌고 돌아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이에 시에라가 쓴웃음을 베어 물고 답했다.

"나는 조작으로 너와 한 조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또한… 나의 가문은 뒷거래할 정도로 여력이 있지도 않고. 혹시… 카시어스 가문이라고 들어 봤나?"

"아니, 처음 듣는데. 유명해?"

"유명하다라… 유명하기는 하지. 쫄딱 망한 가문이니까. 그리고 그 망한 가문이 나의 가문이다."

"그러면 대체 너와 내가 한 조가 된 건 어떻게 된 건데?"

"그건… 사이론 가문이 벌인 짓이다."

"사이론? 내가 알고 있는 그 사이론?"

"그래. 우리 가문은 사이론 가문에 막대한 빚을 졌고 나는… 사이론 가문에서 부리는 인형에 불과하다. 내가 먹는 것, 입는 것 등의 모든 경비는 사이론 가문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건 결국… 다시 우리 가문의 빚이 되는 거지. 나는 그게 죽도록… 싫다."

시에라의 가문과 사이론 가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녀의 눈빛에서 사이론 가문에 대한 짙은 혐오와 분노가 생생히 느껴졌다.

이에 로이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그렇게 장학금에 목맸군.'

또한, 그제야 모든 게 이해가 갔다.

어째서 시에라가 자신과 한 조가 되는 것을 거부했는지.

그리고 그것을 왜 이야기하지 못했는지.

'아무리 자의가 아니었다고 해도 부정을 저지른 것은 맞으니까.'

더더욱이 그런 일을 꾸민 이가 바로 이 사이론 영지의 주인 되는 가문이었다.

쉽사리 입을 열 수는 없었으리라.

로이스가 팔짱을 끼고 시에라를 바라보았다.

"그걸 이제 와서 이야기해 주는 저의는?"

"아까도 말했지만, 숨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란 것을 깨달았으니까. 내가 계속 이를 숨기는 건… 네가 보여 준 호의에 대한 실례라고 생각했다. 조금 더 일찍 말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뭐, 됐어."

로이스가 낯간지럽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제라도 속내를 털어 둔 시에라의 얼굴은 매우 밝아 보였다.

이 문제로 인해 그녀가 그동안 얼마나 속앓이를 했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물론 그런 것은 로이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가 관심 있는 것은 딱 한 가지.

"그건 그렇고. 너 혹시 돈 받아 처먹고 조 편성 조작하는 놈이 누군지 아냐?"

"…나도 거기까지는 모른다."

"흠… 그래? 일단 있다는 거는 확실한 거지."

"그건 확실하다."

"그거면 됐다."

학관의 운영에 개입해 조작까지 할 놈이라면 그 직위가 결코 낮은 놈은 아닐 것이다.

'지내다 보면 이런저런 비리가 알아서 보일 거라고는 했지만....'

이건 그의 생각보다 더욱 썩어 있었다.

로이스의 입꼬리가 살며시 비틀렸다.

'손볼 데가 많네.'

썩은 부분을 도려내기 위한 대대적인 칼질이 필요할 듯싶었다.

그렇게 시에라가 양심 고백을 한 그날.

로이스의 살생부에 한 줄의 글귀가 추가되었다.

* * *

학기말 평가가 끝나고 방학이 가까워져 오자 학관의 분위기가 상당히 들떠 올랐다.

빡빡했던 학관 일정이 마무리되고 고향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이 다가오니 그런 분위기가 풍기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런 들뜸 한편에는 걱정을 달고 사는 이들도 있었으니.

"어, 어쩌지? 이번 학기 성적 나오면 우리 아버지가 날 죽이려고 하실 텐데...."

"우리 어머니는 50등 안에 못 들면 당장 짐 싸서 돌아오라고 하셨어.... 50등도 못 할 거면 그 비싼 학비를 뭐 하러 가져다 바치냐고."

"하아...."

"하아...."

곧 있으면 발표되는 성적은 많은 이들에게 근심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그와는 별개로 학관 내에서는 기괴한 풍경이 펼쳐졌다.

"허허, 로이스 군 있는가?"

"아...."

바로 앞에서 대놓고 인상을 와락 구기는 로이스.

그의 입에서 거친 상소리가 튀어나왔다.

"망할 영감탱이, 또 왔네."

더욱이 그 상소리를 먹는 상대가 마이스터 해럴드인 것을 안 이들은 기겁했다.

물론 지난 며칠간 똑같은 상황을 지켜본 이들은 '오늘도야?'라는 얼굴일 뿐.

그리고 면전에서 구박을 받은 당사자 또한 인자한 미소를 머금었다.

"허허허, 영감탱이라니."

평소 그의 깐깐한 모습을 알고 있는 다른 마이스터들이 봤다면 기겁했을 법한 장면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이스는 여전히 인상을 풀지 않으며 소리쳤다.

"거, 영감탱이! 안 한다니까!"

그간 나름 지키고 있던 예의도 바닥난 인내심과 함께 날아간 지 오래였다.

로이스가 벌레를 쫓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가라고 좀! 왜 자꾸 쫓아 오는데!"

"어허! 쫓아오긴 누가 쫓아왔다고 그러는가! 나는 그저 내 갈 길을 가다가 자네가 보여 기쁜 마음에 인사라도 할 겸 찾아왔을 뿐이네."

"…여기 학생 전용 휴게실입니다만?"

"큿흠!"

교수 연구실과는 정반대에 있는 기숙사 내 학생 휴게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나가다 들렀다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민망함에 헛기침하던 해럴드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당당하게 나갔다.

"엇험! 뭐, 겸사겸사 볼일도 있고 해서."

"그럼 얼른 볼일 보러 가시죠?"

"…그러지 말고 자네 정말 나랑 논문 한번 써 봅세."

또 이 소리였다.

지난 며칠간 지겹도록 들은 소리.

로이스의 인상이 다시 험악해졌다.

"안 한다고!"

"왜! 어째서 안 한단 말인가! 자네의 그 지식을 이대로 썩힐 셈인가!"

"네, 그럴 셈입니다만?"

"그건 재능의 낭비이자 인류 지식의 손실일세!"

"그렇게 논문을 쓰고 싶거든 혼자 쓰시라고요! 난 간섭 안 한다니까?"

그 말에 해럴드의 얼굴이 싹 굳어졌다.

"내 기술자이자 연구자로 수십 년을 살아왔네. 그 긴 세월, 단 한 번도 남의 연구를 탐하지 않은 내가 학생의 연구 성과를 가로챌 파렴치한으로 보이는가!"

"가로채는 게 아니고 그냥 가지라고요! 내가 허락한다니까?"

"그게 로이스 군의 연구 성과인 건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일이네!"

"당신만 입 다물면 모를 텐데?"

"어허! 내 양심이 알고 있는데 이를 어찌 모른 척한단 말인가… 그러지 말고 같이 써 봅세. 정 부담스럽거든… 그래! 공동 저자는 어떤가?"

"공동 저자고 나발이고… 됐거든!"

반말과 존대가 기묘하게 섞여 있는 로이스의 말투.

그리고 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는 해럴드.

둘의 기묘한 행각에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대체 마이스터는 저런 놈이 뭐가 좋다고....'

'지치지도 않고 오시는 마이스터나, 그런 마이스터를 내치는 놈이나....'

한편으로 그를 지켜보는 학생들의 시선에는 부러움과 질시도 담겨 있었다.

그렇게 둘이 티격태격하던 도중, 한 학생이 휴게실로 뛰어들었다.

"떠, 떴다!"

"뭐가?"

"성적 떴어!"

"정말?!"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학생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하지만 홀로 미동조차 보이지 않은 로이스를 보며 시바와 해럴드가 물었다.

"로이스 님은 안 가 보세요?"

"자넨 안 가나?"

그들의 물음에 로이스는 시큰둥하게 답했다.

"어차피 결과는 뻔한데 뭐 하러 귀찮게 움직여? 그렇게 궁금하면 너 혼자 가보든가."

자신감과 여유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였다.

이에 시바는 다녀오겠습니다를 외치고 휴게실을 빠져나갔고, 해럴드는 묘한 눈으로 로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둘만 남은 상황.

해럴드를 투명 인간 취급하며 휴게실 소파와 한 몸이 되어 있던 로이스가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호시탐탐 빈틈을 노리고 다시 한번 회유를 하려고 했던 해럴드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소리쳤다.

"어, 어디 가나?"

"볼일 보러 갑니다."

그러고는 해럴드가 쫓아올세라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가는 로이스.

해럴드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쩝… 오늘은 일단 물러나야겠군."

아직 로이스를 회유할 시간이 넉넉하다고 여긴 해럴드.

아쉬움을 뒤로한 그는 터덜터덜 자신의 연구실로 되돌아갔다.

한편, 학기말 성적이 게시된 장소에 도착한 시바.

그는 몰린 인파의 뒤쪽에서 까치발을 서 가며 성적표를 확인했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조종반의 성적.

하도 사람이 많아 하위 성적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우와...."

시바의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상위 성적자 5명에 그가 알고 있는 이름이 전부 들어가 있었다.

-1. 시에라

-2. 카니

-3. 칸

-4. 타니아

-5. 켄드릭

상위권 성적을 싹 쓸어 담은 로이스 일행.

연신 감탄을 하며 시바가 시선을 돌렸다.

어쨌든 다른 반 성적보다 자신이 속한 반의 성적이 더 중요한 법.

나란히 게시된 기술반 성적표가 시야에 들어왔다.

-1. 로이스

이변은 없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당당하게 1등을 차지한 로이스의 이름.

그 밑으로 시선을 돌리던 시바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2. 뷘.

-3. 시바.

무려 3등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것.

너무도 얼떨떨한 기분에 시바는 볼을 꼬집어 보았지만, 역시나 꿈이 아니었다.

'이게 어떻게....'

자신이 속한 조는 16강전에서 탈락했었다.

그럼에도 3위를 했다는 것은....

'아! 필기!'

조종반과는 달리 기술반의 성적은 필기시험의 비중도 무시하지 못한다.

아마도 자신의 필기시험 점수가 썩 나쁘지는 않은 것이리라.

시바가 그리 기뻐하고 있을 때, 조교가 들어와 한 장의 커다란 종이를 게시했다.

[하급 기술반 필기시험 성적]

커다란 제목 밑으로 적혀 있는 학생들의 이름.

그리고 그 최상단에 적혀 있는 이름을 본 순간 기술반 학생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이런 미친?!"

"맙소사!"

기술반 학생들의 시선이 꽂힌 곳.

그곳에는 너무도 당연하게 로이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좌중을 놀라게 한 것은 로이스의 이름 옆에 적힌 평균 점수였다.

-1. 로이스 100/100

"평균… 100점?"

"그러니까… 만점?"

"전 과목 만점이라고?!"

"로이스 저 자식, 시험 시작하자마자 답안지 내고 나갔잖아?!"

"자, 잠깐만… 그, 그럼 해럴드 교수님의 마지막 문제도 풀었다는 거잖아?!"

초월학관 역사상, 유례없던 사상 최고의 점수에 주위가 떠들썩해졌다.

그 속에 뒤섞인 시바는 로이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백지는 무슨. 다 풀고 나왔구만.]

백지를 내고 나왔냐는 자신의 물음에 로이스는 그리 답했었다.

그때는 그저 장난이겠거니 싶었건만.

"그게… 진짜였다고?"

진실을 깨달은 시바의 얼굴이 멍해졌다.

한편, 다시 한번 크나큰 파장을 일으킨 당사자.

볼일이 있다며 빠져나왔던 로이스는 높디높은 상공에서 초월학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휴게실을 빠져나온 것은 다급하게 울린 통신석 때문이었다.

로이스가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신호.

"나야, 핀."

[로이스 님, 윌리엄이 움직였어요!]

지금껏 로이스의 복장을 터지게 만들던 멍청한 윌리엄이 덫에 걸려든 순간이었다.

234화. 재회 (3)

어두운 통로.

하나의 조명석에 의지한 윌리엄이 빠른 속도로 걸음을 재촉했다.

윌리엄의 걸음걸이에서 그의 심정이 엿보였다.

'드디어!'

자존심을 내던지고 해럴드에게 도움을 구한 게 며칠 전.

하루하루 초조한 심정으로 기다리던 순간, 몇 시간 전 해럴드에게 연락을 받았다.

'답을 구했네.'

'역시 해럴드! 고생하셨습니다.'

'인사는 됐네. 답을 구한 건 내가 아니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런 일이 좀 있었어. 그보다… 내 자네한테 부탁할 게 있네.'

'뭡니까? 그 부탁이.'

'이 문제와 관련해서 한 가지 논문을 내려고 하네. 괜찮겠는가?'

'뭐, 저는 답만 구하면 됩니다. 어차피 풀이식은 해럴드가 찾은 거니 마음대로 하시죠. 그런데… 답은 확실한 겁니까?'

'확실하네. 내가 며칠 동안 검증을 했으니.'

해럴드에게 답이 적힌 종이를 전달받을 때 어찌나 떨리던지.

바들거리는 손을 감추느라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그렇게 쪽지를 받아 든 윌리엄은 더 지체할 것도 없이 곧장 지하 미로로 향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통로를 나아간 끝에 윌리엄은 다시금 철문을 마주할 수 있었다.

지난번, 코앞까지 도달하고도 넘어가지 못한 철문.

"후우...."

작게 심호흡을 한 그는 해럴드가 전해 준 종이를 펼치고 마나 감응 장치로 손을 가져다 댔다.

"제발… 제발...."

살면서 이토록 간절했던 적이 있을까?

윌리엄은 제발 해럴드가 구해 준 답이 진짜 정답이기를 빌었다.

슥- 슥-.

그렇게 한 글자 한 글자 쓰여 가는 답.

마침내 모든 글자가 마나 감응 장치에 적히고.

구그그긍-.

철문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철컥-.

서서히 열리는 철문을 보며 윌리엄의 입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됐다!"

주먹을 불끈 말아쥔 윌리엄이 열린 문 사이로 천천히 걸어갔다.

곧 철문 너머, 그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장소가 비쳤고, 그 안에 자리한 작은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를 발견한 윌리엄의 걸음걸이가 빨라지고, 상자 위에 쓰인 글자를 확인한 순간 그의 눈에 희열이 감돌았다.

"사실이었어… 그랜드 마이스터 빅터의 유산!"

윌리엄은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서 각종 연구 서적이 하나씩 꺼내질 때마다 윌리엄의 얼굴이 흥분으로 물들었고, 마지막으로 빅터의 의족이 손에 들어오자 그는 전율했다.

"아아...."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온 그랜드 마이스터들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했다.

때문에 그들의 의족, 의안, 의수, 의익은 그랜드 마이스터를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그랜드 마이스터들이 평생을 바친 연구의 총화.

현대 초월기의 모태가 되는 부속들이자 그 어떤 마이스터들도 흉내 내지 못할 걸작.

그런 그랜드 마이스터의 유산이 자신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흐흐… 흐흐흐!"

참으려고 해도 자꾸만 실소가 새어 나왔다.

윌리엄의 실소는 이내 광소로 바뀌었다.

"내 거다! 빅터의 유산이 내 것이란 말이다! 흐하하하!"

지난날의 고생이 이 한 번의 보상으로 모조리 씻겨 내려갔다.

윌리엄은 한동안 웃음을 터뜨리며 기쁨을 만끽하다가 널브러진 물건들을 챙겨 온 아공간 주머니에 쓸어 담았다.

빅터의 유산이 윌리엄의 주머니로 전부 사라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후 윌리엄은 미련 없이 떠나갔다.

중요한 내용물이 유출되고 빈껍데기가 된 상자만이 쓸쓸히 남아 그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달조차 뜨지 않은 야심한 시각.

로브를 뒤집어쓴 윌리엄이 한적해진 시가지를 빠져나갔다.

그가 향한 곳은 사이론의 외곽에 자리한 허름한 농가였다.

잠시 뒤, 윌리엄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농가로 들어섰다.

그 안에는 한 명의 사내가 자리잡고 있었으니.

"왔나?"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있던 허름한 차림의 농부가 윌리엄을 맞아 줬다.

짙고 화려한 금발의 사내.

허름한 옷차림과 달리 드러난 피부는 너무도 깨끗했다.

그리고 농부의 목소리.

그것은 일전에 윌리엄과 통신석으로 대화를 나누던 이의 것이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