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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초월학관 연구동.

수많은 교수, 조교들의 개인 집무실이 있는 건물이며 연구회실이 밀집된 건물이었다.

현재 초월학관에서 운영되는 연구회의 수는 모두 70개.

매년 많은 연구회가 만들어지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새롭게 신설된 연구회가 있었으니, 그 수가 총 12개에 달했다.

그중 단연코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은 신설 연구회가 있었으니.

[해충 박멸 연구회]

이런 목적을 가진 연구회가 있어도 되나 싶을 정도의 특이한 연구회.

독특한 명칭만큼 이목을 끌었던 연구회는 하급반 신입생 6명으로 구성됐다.

그리고 방과 후, 어김없이 연구회실에 모인 6명.

그중 4명은 한 명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힐끔-.

'대체 왜 저런대?'

'나도 몰라....'

'요 며칠 계속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시던데.'

'선생님 무슨 일 있으신가?'

잔뜩 삐져나온 로이스의 주둥이를 보는 순간 쌍둥이와 불꽃 남매는 슬금슬금 엉덩이를 움직여 로이스에게서 떨어졌다.

물론 이러한 걱정은 마음속으로만 이뤄졌다.

괜히 성난 로이스를 건드렸다가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 두려웠던 것이다.

한편 그들의 예상대로 로이스의 짜증 수치는 이미 한계점에 도달해 있었으니.

짜증의 원인은 다름 아닌 윌리엄이었다.

'아, 답답해!'

자신이 빅터의 유산을 챙기고 덫을 깔아두고 온 지 어느덧 4개월이 흘렀다.

그런데 핀의 보고에 의하면 윌리엄은 여전히 감을 잡지 못해 매일 자료만 파고 있다고 한다.

내심 윌리엄이 덫에 걸리기를 기다리고 있던 로이스로서는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명색이 마이스터씩이나 되는 놈이 그걸 못 찾냐!'

속으로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초월학관인 만큼 그곳을 거쳐 간 이들의 수 또한 어마어마했다.

그 긴 시간 동안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꼭꼭 숨겨져 있다는 소리였다.

물론 그건 그거고, 답답한 것은 답답한 거였다.

'단서 몇 개를 더 흘려줘야 하나?'

윌리엄이 너무 헤매다 보니 로이스는 은근슬쩍 단서 몇 개를 흘려주었었다.

그럼에도 윌리엄이 여전히 지지부진하니 더 복장이 터지는 거였다.

'아냐, 지금도 충분히 위험해… 여기서 더 단서를 흘려주면 이상함을 눈치챌 텐데....'

뭐든지 적당한 것이 좋았다.

괜히 들쑤셨다가는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격이 되리라.

'멍청한 윌리엄아… 힘 좀 내 봐라.'

이제는 열심히 윌리엄을 응원하는 로이스였다.

그러다 고개를 돌린 그의 시야에 열심히 책을 보고 있는 시바의 모습이 들어왔다.

불꽃 남매와 쌍둥이가 자신의 눈치를 보는 사이 시바는 오로지 열심히 책만 넘기고 있었다.

"넌, 뭘 그렇게 열심히 보냐?"

로이스의 질문에 시바가 책에서 시선을 떼며 입을 열었다.

"이번 필기시험 범위 보고 있었습니다만."

"필기시험?"

"네."

"갑자기 그건 왜?"

마치 처음 듣는다는 듯한 말투에 시바가 경악했다.

"…이틀 뒤가 학기말 필기시험이지 않습니까?!"

"벌써 그렇게 됐나?"

"벌써 그렇게 됐냐뇨! 이미 2주 전부터 다른 학생들은 다들 눈에 불을 켜고 공부 중인데...."

"아, 수업 끝나면 다들 어디로 사라지더니만, 그게 공부하려고 사라지는 거였어?"

시험 따위는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한 말투에 시바가 혀를 내둘렀다.

"로이스 님은 공부 안 하십니까? 조종반이야 필기 없이 오로지 실기만 보니까 상관없다지만, 저희 기술반은 필기시험 성적도 중요합니다. 아, 제가 선배에게 작년 족보 좀 얻어온 거 있는데… 같이 보실래요?"

"됐어. 너나 많이 봐. 공부는 무슨. 원래 시험이란 건 기본 실력으로 보는 거야."

"아, 네...."

로이스의 이야기에 시바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꿍얼거렸다.

"로이스 님 재수 없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켄드릭의 이마에 불똥이 튀었다.

딱-.

"칵! 왜?!"

이마를 부여잡은 켄드릭이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로이스를 쳐다보았다.

"너랑 놀더니 애가 완전히 버려 버렸어."

"그, 그게 어째서 제 잘못입니까!"

"몰라, 그냥 네 잘못이야."

"크흑!"

로이스는 켄드릭과 투덕거리고.

칸과 카니, 타니아는 탁자에서 카드놀이를 시작했다.

도무지 시험이 코앞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여유.

'그래, 내가 누굴 걱정하냐....'

자신을 제외한 이들 모두가 전원 수석 입학생들이었다.

시바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다시금 책으로 시선을 돌릴 때였다.

"응?"

켄드릭의 뒤통수를 찰싹찰싹 두들기고 있던 로이스의 손이 우뚝 멈췄다.

웅- 웅-.

그가 진동하는 통신석을 다급하게 꺼내 들었고.

"무슨 일이야, 핀?"

[로이스 님, 물었어요!]

통신석 너머에서 들어온 목소리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장 4개월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식.

"물었다!"

환호성을 내지른 로이스.

이에 깜짝 놀란 시바가 책을 떨구며 고개를 돌렸을 때, 이미 그 자리에 로이스의 모습은 사라진 뒤였다.

"로, 로이스 님이 없어졌어요?!"

로이스가 공간 이동을 펼친 것을 처음 본 시바는 경악했다.

하지만 이미 그게 일상이 된 이들에게는 큰 감흥이 없었다.

"네 차례야."

"칸 오빠, 빨리 해요."

"흐음...."

"저도 껴 주세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옹기종기 모여 카드를 돌리는 네 사람을 본 시바.

"음...."

그는 어색하고 민망한 얼굴로 놓친 책을 집어 들었다.

'무언가… 내 상식이 무너지고 있어....'

시바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224화. 시험 (3)

기다란 복도를 빠르게 가로지르는 꽁지머리의 사내.

"안녕하세요, 교수님."

"안녕하세요."

윌리엄은 학생들의 인사를 본체만체하며 제 갈 길을 가기 바빴다.

무섭게 굳어 있는 그의 표정을 본 학생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가 뭐 잘못했나?"

"그, 그러게? 왜 저렇게 화나셨지?"

학생들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런 학생들의 생각과는 달리 윌리엄은 화가 난 게 아니었다.

극도로 흥분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뿐.

하지만 아무리 표정을 감추려 해도 격하게 날뛰는 심장과 그로 인해 떨려 오는 손은 어쩔 수 없었다.

빠르게 복도를 가로지른 윌리엄.

그의 발걸음이 서서히 늦춰졌다.

두리번거리며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부스럭-.

그것은 한 장의 누런 종이였다.

너무 오래되어 삭아 없어질 것만 같이 보이는 종이.

그 위에는 수십 개의 선이 난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를 바라보는 윌리엄의 두 눈에 강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가 이 지도를 손에 넣게 된 경위의 시초는 몇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날 연구 자료를 찾기 위해 교수 전용 도서관에 들어간 윌리엄.

원하는 자료의 책을 꺼내던 도중 그 옆에 있던 책이 같이 떨어지고 말았다.

툭-.

'응?'

허리를 굽혀 책을 주워 든 윌리엄의 눈에 의아함이 나타났다.

두꺼운 양장본으로 만들어진 서적.

제목도, 저자도,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책은 꽤 오래전의 것으로 보였다.

'인공관절에 관한 자료군.'

인공관절은 현재도 끊임없이 연구되는 분야였다.

서적의 연대가 오래되어 책에 담긴 자료 자체는 대단하다 할 게 없었다.

당장 이 주변에서 아무 책이나 꺼내어 비교해도 이보다 더 발전된 연구 자료가 가득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윌리엄은 오래된 서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정확히 말을 하자면, 책 곳곳에 남아 있는 누군가의 흔적에서 말이다.

'이건… 대단하군.'

책 곳곳에는 누군가 주석의 형태로 남겨 둔 메모가 있었다.

그 메모는 하나같이 인공관절에 관한 깊은 이해도가 없으면 남길 수 없는 것들이었다.

책의 연도는 최소 수십 년 전으로 추정되는데 주석의 내용은 현대의 것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만큼 충분한 깊이가 느껴졌다.

'대체 누구지?'

교수 전용 자료실에 남아 있는 서적인 걸로 보아 초월학관을 거쳐 간 교수 중 하나임은 분명했다.

책의 전 주인이 누구인지 궁금했기에 윌리엄은 낡은 책을 챙겨 들었다.

그렇게 자신의 집무실로 와 한동안 낡은 서적을 살펴보았지만, 전 주인에 대한 단서는 찾을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이 책의 주인… 예사의 인물은 아니군.'

책을 살피면 살필수록, 주석을 읽으면 읽을수록.

주석을 남긴 책 주인의 연구 이해도에 감탄하게 됐다.

'최소… 당시 마이스터에 오른 인물이다.'

하지만 그런 놀람도 잠시.

책의 주인에 대해 그 어떤 것도 알아내지 못하자 흥미는 빠르게 식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낡은 서적은 그의 집무실, 다른 연구물들의 틈에 섞여 방치되어야 했다.

그러다가 오늘, 자료를 반납하기 위해 도서관에 가려던 윌리엄은 그 낡은 서적도 같이 챙겨 들었다.

그렇게 서적을 원래 있던 자리에 꽂아 넣고 돌아서던 그 순간.

툭-.

잘 꽂아 넣은 줄 알았던 책이 갑자기 떨어졌고, 그 충격으로 인해 안 그래도 낡았던 책의 겉표지와 속표지가 분리되고 말았다.

'이런....'

살짝 인상을 쓰며 분리된 책을 주워 들던 윌리엄.

책 주변에 떨어진 한 장의 종이를 발견하는 순간 그의 동공이 커졌다.

'응?'

선이 난잡하게 얽혀 있는 그림.

하지만 독특한 그림보다도 윌리엄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그림 밑에 적혀 있는 한 줄기 글귀였다.

[꼭 외워라, 개대가리 - 더글라스]

더글라스라는 이름을 본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벌렁거렸다.

'더글라스?!'

어찌 그 이름을 모르겠는가.

만약 이 글귀를 남긴 이가 더글라스인 게 사실이라면 그가 '개대가리'라고 부를 이는 한 명뿐이었다.

'그랜드 마이스터… 빅터!'

늑대 인간이었다고 전해지는 위대한 마이스터의 1인.

또한, 자신이 찾고 있는 유산의 주인.

'진정하자....'

미칠 듯이 날뛰는 심장과 달리 윌리엄의 머리는 팽팽 돌아갔다.

'대체… 이게 뭐지?'

그는 손안에 든 정체불명의 그림이 무얼 의미하는지부터 고민에 들어갔다.

이후 며칠 동안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그림만을 파고든 윌리엄은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 이건… 지도다! 이 선은 비밀 통로를 나타내는 거였어!'

선의 전체적인 윤곽을 살폈을 때, 초월학관을 나타내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초월학관 어디에도 이런 복잡한 통로는 없었다.

'지하다… 초월학관의 지하에 비밀 통로가 있는 거야!'

그리고 지도 위에 표시된 몇몇 기호와 숫자, 그리고 깨알 같은 글씨까지.

이것이 어딘가의 위치를 알려 주는 지도임을 알아챈 순간 며칠간 쌓였던 피곤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게 바로 10여 분 전.

저벅- 저벅-.

다시금 빠르게 발을 놀린 윌리엄이 향한 곳은 종탑이었다.

정해진 시간마다 자동으로 타종하는 무인 종탑.

학생들에게 수업과 쉬는 시간을 알려주는 종소리의 진원지.

1년에 한두 번, 정비하러 오는 이들 빼고는 아무도 찾지 않는 장소였다.

그리고 때마침 들려오는 타종 소리.

댕-.

윌리엄은 고개를 들어 높은 종탑을 올려다보았다.

'이 지도가 진짜라면 이 종탑 어딘가에 입구가 있을 거다.'

지도에 표시된 지하 통로로 들어가는 입구는 모두 4개.

남자 공용 목욕탕.

여자 공용 목욕탕.

연구동 지하 화장실.

그리고 중앙 종탑.

연구동 지하 화장실은 지켜보는 눈이 많아 위험했고, 남·여 공용 목욕탕은 다른 의미로 접근하기가 힘들었다.

때문에 윌리엄이 선택한 곳은 바로 이 종탑이었다.

'제발....'

윌리엄은 자신의 손에 들린 지도가 진짜이길 빌며 종탑으로 들어섰다.

끼이익-.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낡은 경첩이 비명을 내질렀다.

주변을 두리번거린 윌리엄이 은밀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별 문양을 찾아야 한다.'

아마도 지도에 그려진 이 별 문양이 입구와 관련된 무언가일 터.

먼지가 가득한 종탑을 꽤 오랫동안 헤집고 다닌 끝에 1층 계단의 뒤편 공간에서 별 모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작정하고 찾는 게 아니라면 쉽사리 발견하기 어려운 위치.

윌리엄의 손가락이 별이 그려진 벽돌을 눌렀다.

그러자.

달칵-.

벽돌이 안으로 움푹 들어갔고.

드르륵-.

돌로 만든 바닥이 좌우로 갈라지며 지하로 내려가는 검은 공간이 드러났다.

뿌옇게 흩날리는 케케묵은 먼지의 틈 속에서 윌리엄의 눈빛이 번뜩였다.

극도의 희열감이 담긴 안광이었다.

'진짜… 진짜였어!'

우연히 발견한 낡은 지도.

처음에는 약간의 미심쩍은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이 완전히 날아갔다.

초월학관의 역사와 함께한 종탑에 그 누가 이런 비밀 기관을 만들었겠는가.

이 정도 기관이라면 애초에 종탑을 설계할 때부터 만들어야 하는 수준이었다.

'여기다… 여기에 내가 찾는 것이 있다!'

그리 확신한 윌리엄은 어두운 공간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드르릉-.

윌리엄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무섭게 닫히는 비밀 통로.

조금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종탑이 다시금 적막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순간.

스르륵-.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로이스가 나타났다.

그는 윌리엄이 머물렀던 자리를 바라보며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재킷 안 주머니에서 핀의 작은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괜찮겠죠?"

두서없는 물음이었지만, 로이스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괜찮아야지. 이렇게까지 떠먹여 줬는데 못 먹으면 머리는 그냥 장식품인 거고."

"하긴...."

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을 위해 얼마나 바삐 움직였던가.

로이스는 몸소 발품 팔아 가며 지하 미로로 내려가는 입구를 찾아서 사전 답사까지 했고.

미로에서 길 잃지 말라고 친절히 지도까지 만들어 줬다.

핀은 윌리엄이 지도가 든 낡은 서적을 발견하게 만들기 위해 철저한 사전 조사를 거쳐 그가 찾으려는 책 옆에 꽂아 두었다.

그러고도 숨겨 둔 지도를 못 찾으니 일부러 책을 떨어뜨려 가면서 지도를 보여줬다.

윌리엄이 행운이라고 치부한 모든 것이 사실상 철저하게 계획된 것들이었다.

'우우, 힘들었지....'

핀이 그간의 고생에 콧김을 푹- 뿜어냈다.

너무 과하면 이상함을 알아차릴 거 같고, 적당히 단서를 주자니 멍청한 윌리엄이 못 알아차리고.

중도를 유지하며 일을 꾸미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런 핀의 노고를 알기에 로이스가 녀석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줬다.

"네가 고생 많았다. 조금만 더 고생해 줘."

"네! 맡겨 주세요!"

주인으로 모시는 드래곤의 칭찬만큼 요정에게 큰 힘이 되는 것은 없었다.

핀이 씩씩하게 웃었다.

이에 로이스도 마주해 미소를 지어 줬다.

"힘내라, 멍청한 윌리엄!"

"힘내라!"

짧게 윌리엄을 응원해 준 둘의 신형이 다시금 사라졌다.

그렇게 로이스와 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윌리엄.

그는 순탄하게 지하 미로를 헤쳐 나가고 있었다.

지하 미로는 자칫 잘못하면 빠져나가지 못할 만큼 복잡했다.

하지만 윌리엄에게는 지도가 있었다.

지도에 표시된 백합, 망치, 날개, 늑대의 문장.

거기다 각 문장의 위치로 가는 길이 지도에 친절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자신의 지도가 진짜라고 철석같이 믿은 윌리엄은 지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움직였고, 그 믿음에 보답하듯 그의 앞에 늑대의 문장이 그려진 철문이 나타났다.

철문의 존재를 확인한 윌리엄은 희열했다.

"드디어!"

그토록 찾고 싶었던 빅터의 유산.

그가 살아생전 연구한 모든 기술!

그게 바로 저 철문 뒤에 있으리라.

한껏 기대를 품고 철문 앞에 선 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이건...."

철문에는 빼곡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기존에 적혀 있던 글귀는 온데간데없고 새롭게 적힌 글귀.

그건 하나의 문제였다.

기존의 문구는 그랜드 마이스터 넷만 알고 있기에 윌리엄이 풀 수 있게 새로운 문제로 로이스가 바꿔 놓은 것이다.

글귀를 대충 슥- 훑은 윌리엄은 철문의 하단을 손으로 매만졌다.

"마나 감응 장치."

그는 곧바로 마나 감응 장치의 용도와 철문의 글귀가 무얼 의미하는지 눈치챘다.

"문제를 풀고 여기에 답을 적으라는 거군. 쉽게 문을 열 수는 없다는 건가."

유산을 보관하는 금고와 같은 개념이니 이 정도 보안 장치가 있는 거는 당연했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지. 명색이 그랜드 마이스터의 유산인데!"

굳게 닫힌 철문을 보면서도 윌리엄은 매우 자신만만했다.

자신이 누구던가.

염원의 탑이 자랑하는 마이스터의 1인이었다.

아무리 그랜드 마이스터가 준비한 문제라고 해도 자신의 실력이면 철문의 문제쯤은 충분히 풀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는 철문의 문제를 정독했다.

가장 먼저 그의 시야에 잡힌 것은 난생처음 보는 기괴한 형태의 술식이었다.

그리고 그 밑으로 적힌 글귀.

[위 술식은 1차원 공간에서 1의 기운을 가진 속성력이 정신파 변환 물질에 전달되었을 때 총량을 구하는 술식이다. 만약 차원이 4차원까지 확장된다면, 팽창되는 속성력의 총량과 이를 구하기 위한 술식을 해당 술식으로 유도하여라.]

자신만만하게 문제를 바라보던 윌리엄.

그는 계속해서 문제를 읽었다.

한 번, 두 번.

그 횟수가 열 번을 넘어가고.

10분, 20분, 30분.

하염없이 시간은 흘러갔다.

그로부터 약 두 시간이 흘러, 심각한 표정으로 변한 윌리엄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게 도대체...."

너무 쉬우면 윌리엄이 이상함을 눈치챌 거 같고.

너무 어려워도 안 되니 적당한 난이도의 문제를 선택해 철문에 새겨 놓았던 로이스.

그래도 마이스터인데 이 정도는 풀겠지라는 생각으로 선택한 문제였건만....

"…무슨 소리냐?"

아무래도 윌리엄을 과대평가했던 모양이었다.

225화. 시험 (4)

철문 앞에 윌리엄이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로이스.

"아오! 답답한 새끼! 머리는 장식이야?"

그는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답답함에 가슴이 터질 듯싶었다.

"왜 몰라? 고작 저걸!"

그래도 마이스터씩이나 되는 놈이 고작 저런 문제 하나 못 풀어서 끙끙거리고 있다고?

"…저 새끼, 마이스터 자리 고스톱으로 딴 거 아냐?"

로이스로서는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물론 윌리엄이 모자란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로이스가 가진 마이스터라는 직함의 기준점이 높아서 벌어진 일일 뿐.

로이스가 한심하다는 눈빛을 하고 있던 그때, 윌리엄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자료가 필요하다. 여기서는 답이 안 나와.'

로이스는 통로 너머로 사라지는 윌리엄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뒤통수가 아릴 정도로 눈총을 받으며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온 그는 계속해서 문제를 풀어 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아침이 밝아 오고.

그의 주변으로 밤샘의 흔적이 가득했다.

책상도 모자라 의자와 바닥 곳곳에 깨알 같은 숫자가 적힌 종이가 굴러다녔고.

그의 뒤에 보이는 칠판에는 알 수 없는 수식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하...."

뻑뻑한 눈을 문지르며 크게 한숨을 내쉬는 윌리엄.

그의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젠장!'

기껏 유산의 위치를 알아냈건만, 고작 문제 하나를 못 풀어서 이러고 있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것도 마이스터라 불리는 자신이 말이다.

'도저히 모르겠군....'

문제 자체를 달달 외울 정도로 생각하며 머리를 굴려 보았고, 필요한 자료를 찾아 가며 미친 듯이 풀이를 해 보았다.

하지만 답은커녕 작은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 전공이 아니니까.'

아무리 마이스터라고 해도 주력으로 연구하는 분야와 그렇지 않은 분야의 차이는 당연히 있다.

윌리엄이 주력으로 삼고 있는 전공은 고강도 회로 술식.

철문의 문제가 속한 분야는 정신파 변환 물질 연구 분야였다.

'큭, 내 전문 분야의 문제였다면 이렇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는 애써 그렇게 자위했다.

그리고 고민했다.

이대로 이 문제를 부여잡고 계속해서 연구하느냐.

아니면 자존심을 내려놓고 도움을 청하느냐.

잠시간의 갈등 끝에 내려진 결론은 도움을 구하는 쪽이었다.

'이딴 문제에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게 낫다!'

빅터의 유산을 코앞에 두고 허송세월하며 손가락을 빨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때마침, 같이 학관에 온 마이스터 중 평생 정신파 변환 물질을 연구한 달인이 있었다.

그라면 이 문제를 풀 수 있으리라.

그리 결심한 윌리엄은 빠르게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그가 향한 곳은 자신의 연구실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이른 시간이기는 했지만, 늘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는 그의 특성상 지금도 연구실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윌리엄의 예상대로 노크가 끝나기 무섭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누구냐?"

"접니다, 해럴드."

"…윌리엄? 들어오게."

방 주인의 허락이 떨어지자 윌리엄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러자 자신의 방만큼이나 어질러진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책상에 앉은 해럴드가 안경을 쓱 올리며 윌리엄을 바라보았다.

상당히 초췌해 보이는 윌리엄의 얼굴에 해럴드가 피식거리며 물었다.

"밤새웠는가?"

"예, 그러는 해럴드도 밤을 새운 모양이군요."

"나야 밀린 연구가 있어서 말이지. 그런데 자네가 이 시간에는 웬일인가?"

"도움이 필요해서 왔습니다."

"도움? 자네가? 나한테?"

해럴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같은 마이스터지만, 해럴드와 윌리엄 간의 교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윌리엄도 그렇고 해럴드도 그렇고, 둘 다 개인 성향이 짙은 연구자이다 보니 이렇다 할 교분을 나누지 못한 것이다.

거기다 윌리엄이 얼마나 자존심 높은 인간인지 알고 있기에 그의 도움 요청은 실로 뜻밖이라고 할 만했다.

그런 해럴드의 시선에 윌리엄이 낮게 헛기침을 했다.

"크흠. 최근 난제 하나를 풀이 중인데...."

윌리엄은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기보다는 곧바로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그가 근처에 있는 칠판의 빈 공간에 달달 외우고 있는 문제를 써 내려갔다.

타닥- 타닥-.

분필이 칠판 위를 노닐고, 윌리엄이 무얼 하는지 호기심 있게 바라보고 있던 해럴드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갔다.

윌리엄이 문제를 다 적자 그제야 해럴드가 입을 열었다.

"…자네가 왜 날 찾아왔는지 알 거 같군."

칠판의 문제는 정신파 변환 물질에 관한 것이었다.

한참이나 유심히 문제를 살피던 해럴드가 침음을 삼켰다.

"음… 윌리엄… 자네, 이거 어디서 찾은 문제인가?"

"우연히 본 겁니다. 죄송하지만… 출처는 밝힐 수 없습니다."

도움을 구하러 왔다면서 출처는 밝힐 수 없다는 말이 무례로 들릴 수 있었지만, 해럴드는 개의치 않았다.

오로지 칠판에 적힌 문제가 그의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

정신파 변환 물질과 차원 계수와의 관계.

이는 현재 해럴드가 연구하고 있는 분야였다.

이것만큼은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던 해럴드에게 윌리엄이 가져온 문제는 꽤 충격적이었다.

'도대체 누가?!'

더군다나 해당 문제에는 이미 1차원에서 속성력의 총량을 구하는 술식이 적혀 있었다.

자신이 완성한 술식에 비해 훨씬 단순화된 술식이 말이다.

무언가 충격을 받은 듯한 그의 얼굴을 보며 윌리엄이 조심스레 물었다.

"어찌… 답을 아시겠습니까?"

그 물음에 해럴드가 고개를 내저었다.

"자네가 이걸 어디서 찾아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문제를 생각해 낸 이가 예사의 인물은 아닌 거 같군."

"해럴드조차 풀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시간이 좀 필요하네. 연구하면 풀 수 있을 거고."

윌리엄은 놀라고 말았다.

문제가 쉽지 않다고는 생각했지만, 해럴드조차 고개를 내저을 정도였다니.

한편으로는 자신이 풀지 못한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안도하고 말았다.

윌리엄이 그리 놀라는 사이 한참이나 문제를 노려보던 해럴드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노인 특유의 익살스러움과 장난기가 가득한 미소.

해럴드가 윌리엄을 보며 물었다.

"그것보다 내가 이걸 풀어 주면 자넨 뭘 해 줄 텐가?"

"흠… 뭘 원하십니까?"

"이 문제, 내가 써도 되나?"

"예?"

"안 그래도 마지막 문제를 뭐로 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잘됐군. 이거로 하면 되겠어."

그 이야기에 윌리엄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해럴드가 언급한 마지막 문제.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린 것이다.

윌리엄이 혀를 내둘렀다.

"악취미는 여전하시군요."

"전통은 지키라고 있는 거네."

"그 전통을 만든 게 해럴드이지 않습니까?"

"내가 만든 전통이니 더더욱 더 잘 지켜야지. 그래서… 이 문제 내가 써도 되겠는가? 허락해 주면 내 연구해서 답을 알려 주겠네."

해럴드의 이야기에 윌리엄은 잠시 고민했다.

무언가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다만… 문제 유출에 신경 써 주십쇼."

"유출은 무슨. 그리고 유출이 된다고 해도 뭐가 문제겠는가. 애초에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아볼 녀석이 있을까? 정답을 써 넣는 놈이 있다면 그 녀석을 당장 데려다가 마이스터 자리에 앉혀야 할 걸세."

해럴드의 확신 어린 답에 윌리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이야기에 윌리엄도 충분히 공감했기 때문이다.

"…마음대로 하십쇼."

"그러지. 이 문제는 내가 연구를 좀 해 보고 알려 주겠네."

"기다리겠습니다."

그렇게 모종의 협약을 맺은 윌리엄과 해럴드.

윌리엄이 연구실을 빠져나가고 칠판 위에 적힌 문제를 바라보는 해럴드의 장난스러운 미소는 더욱더 짙어졌다.

그로부터 사흘 뒤.

평소와 달리 강의실에 자리한 학생들은 쉬는 시간임에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모두 자리에 앉아 열심히 책만 보고 있을 뿐.

이틀 전 학기말시험이 시작되면서 이러한 광경이 계속되고 있었다.

밤잠을 줄여 가며 예상 문제를 외우고 또 외우고.

그것도 모자라 시험 직전까지 열심히 공부 중인 학생들.

마지막 필기시험이니만큼 학생들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가득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특히 이번에 그들이 치를 시험을 앞두고 학생들의 긴장은 더욱 고조됐다.

중얼중얼-.

여기저기서 미친 사람처럼 자신이 외운 것을 되뇌는 이들이 속출했다.

그들을 긴장케 한 이유는 이번 시험이 해럴드의 과목이기 때문이었다.

5년에 한 번꼴로 초월학관의 교수로 오는 마이스터 해럴드.

깐깐한 그의 성격만큼이나 시험문제 역시 철두철미했고, 문제의 난이도는 모든 과목을 통틀어 가장 어렵다고 전해졌다.

심할 경우, 제한된 시간 동안 한 문제도 못 풀고 백지를 제출하는 학생들이 있을 정도.

하지만 문제는 그거뿐이 아니었다.

해럴드는 시험이 끝나고 학생들에게 오답 정리를 시키는데, 틀린 시험문제 하나당 양피지 10매였다.

0점을 맞은 학생이 졸업 후 10년이 지나서도 해럴드의 시험문제를 기억하며 치를 떤다는 것은 초월학관 학생들 사이에 너무도 유명한 일화였다.

그렇게 모든 학생이 조금 있으면 치러질 시험 걱정으로 달달 떨고 있는 사이, 로이스의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윌리엄 이 자식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며칠 전, 밥상을 코앞까지 대령해 줬건만, 그것도 떠먹지 못한 멍청한 윌리엄.

핀의 보고에 의하면 그는 해럴드를 찾아갔다 온 이후 아무런 행동도 취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설마… 진짜 마이스터라는 놈이 그 문제 하나를 못 풀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그 설마가 정말로 일어나고 말았다.

이후 윌리엄은 해럴드를 찾아가 도움을 구했고, 무언가 해럴드와 거래가 오갔다고는 한다.

그 뒤로도 딱히 이렇다 할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겨우 밥상까지 끌어다 앉혔는데 수저를 들지 않으니 로이스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

치미는 답답함에 로이스는 결심하고 말았다.

'오냐, 내가 아주 밥까지 떠서 주둥이에 밀어 넣어 주마.'

아무리 못난 놈이어도 씹어 삼키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이걸 어떻게 알려 줘야 티 안 나게 잘 알려 줄 수 있을까?'

너무 대놓고 알려 줄 수도 없지 않은가.

"끄응...."

로이스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당장 코앞에 들이닥친 학관의 시험 따위보다는 윌리엄에게 어찌 밥을 떠먹여 줘야 잘 먹였다고 소문이 날지가 로이스에게는 더 큰 관심사였다.

그렇게 로이스가 윌리엄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사이.

드륵-.

앞문을 통해 해럴드 밑에서 일하는 조교가 들어왔다.

그의 품에 들린 두툼한 서류 봉투를 보는 순간 학생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에 조교가 미소를 머금었다.

'나도 저랬던 때가 있었지.'

한창 초월학관에 다닐 당시, 조교 역시도 5년에 한 번 걸리는 지옥 기수의 학생이었다.

마치 자신의 과거를 보는 듯한 학생들을 보며 학창 시절을 음미하던 조교의 눈빛이 금세 싸늘해졌다.

추억은 추억이고, 지금은 본분을 다할 때니 말이다.

"모두 책 집어넣어라. 그리고 매년 하는 이야기지만, 부정행위를 할 생각이라면… 해도 좋다. 안 걸릴 자신이 있다면."

조교의 매서운 눈빛이 학생들을 훑었다.

"참고로 내가 7년 동안 조교 짓 하며 잡아낸 부정행위자만 52명이다. 그놈들 모두 어떻게 됐는지는… 말 안 해도 알겠지?"

모를 리가 없었다.

시험 2일 차.

3반에서 나온 부정행위자.

그는 부정행위가 발각되기 무섭게 일말의 여지도 없이 바로 퇴학을 당했다.

조금의 선처도 없이 말이다.

"이 반에는 잠시 편해지자고 평생의 기회를 날려 버리는 멍청한 녀석이 없기를 바란다. 뭐, 이렇게 말을 해도 매년 꼭 한두 놈씩은 인생을 걸고 미친 짓을 하는 놈들이 나오긴 하지만...."

꿀꺽-.

조교의 신랄한 비난에 학생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한 학생들을 보며 조교가 가져온 봉투를 열어 시험지를 꺼냈다.

"자, 시작하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교는 시험지를 돌렸다.

바스락- 바스락-.

여기저기서 시험지가 오가는 소리와 함께 먼저 시험지를 받은 학생들 사이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음...."

"하...."

시험의 난이도는 예상대로 최악.

"끄응...."

문제를 확인하기 무섭게 학생들이 고개를 처박고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일분일초가 아까웠다.

한탄은 시험이 끝나고 해도 늦지 않았다.

그리고 맨 뒷줄에 있기에 가장 늦게 시험지를 받은 로이스.

쓱 문제지를 살피던 그는 눈을 깜빡였다.

끔뻑끔뻑-.

그는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

로이스의 시선이 시험지의 마지막 문제에 꽂혀 있었으니.

20번) 위 술식은 1차원 공간에서 1의 기운을 가진 속성력이 정신파 변환 물질에 전달되었을 때 총량을 구하는 술식이다. 만약 차원이 4차원까지 확장된다면, 팽창되는 속성력의 총량과 이를 구하기 위한 술식을 해당 술식으로 유도하여라.

자신이 철문에 적어 둔 문제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고스란히 시험지에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또 무슨 해괴한 경우냐...?'

226화. 시험 (5)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 문제가 여기 떡하니 박혀 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뭔가 거래를 했다는 게 이런 거였나?'

핀에게 듣기로는 해럴드와 윌리엄이 무언가 거래를 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이게 시험문제로 나온 것도 그들이 한 거래에서 파생된 일이리라.

'거래는 그렇다고 쳐도… 이게 왜 여기서 나와?'

학생들의 시험문제에 낼 정도면 이미 답을 구했다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왜 해럴드는 이 해답을 윌리엄에게 알려 주지 않았지?

윌리엄 새끼는 답을 알고도 문을 안 열고 있는 건가?

로이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일단 시험문제로 낼 정도라면 답을 알고 있다고 보는 게 맞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상황 자체는 로이스에게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잘됐네. 안 그래도 어찌 티 안 나게 알려 주나 했더니.'

해럴드가 올바른 정답을 구했다면 상관이 없다.

다만 그가 구한 답이 틀렸을 때가 문제다.

'내가 시험지에 적어 놓으면 최소 해럴드가 한 번은 보겠지.'

윌리엄이 해럴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면, 자신이 적은 문제의 해답 또한 해럴드를 통해 윌리엄에게 전해지리라.

그리 생각한 로이스는 빠르게 시험문제의 답을 적어 내려갔다.

슥슥슥-.

그가 20개의 정답을 모두 적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3분 남짓.

그것도 다른 문제는 1분 안에 답만 쓱쓱- 적어 버렸고 마지막 20번 문제에서 2분이나 소요됐다.

마지막 문제는 정답뿐 아니라 자세한 풀이 과정까지 적어 두느라 걸린 시간이었다.

드륵-.

자리에서 일어난 로이스가 시험지를 들고 앞으로 걸어갔다.

시험을 보고 있던 학생들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로이스에게 꽂혔다.

"뭐?"

"벌써?"

잠시 뒤, 자신의 앞에선 로이스를 향해 조교가 인상을 썼다.

"뭐지?"

"다 했습니다."

"…다 했다고?"

"네, 나가 봐도 되죠?"

로이스가 당당하게 내민 시험지를 본 조교가 피식거렸다.

그 같은 반응은 조교뿐 아니라 시험을 치르고 있는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또야?'

'또?'

나흘 동안 치러진 시험에서 로이스는 시험이 끝나기 무섭게 답안지를 제출했다.

이를 놓고 학생들 사이에 말이 많았다.

'그래도 명색이 입학 수석인데… 풀어서 냈겠지?'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몇 분 만에 답안을 써서 내는 게 가능해? 분명 찍었거나, 백지를 냈을 거다!'

그렇게 로이스의 행보를 놓고 갑론을박이 펼쳐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다른 시험이야 풀어서 냈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들도 이번만큼은 부정적이었다.

주어진 시간을 다 줘도 전부 풀까 말까 한 해럴드의 시험을 몇 분 만에 풀고 나간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주변의 시선이 그러거나 말거나, 로이스는 태연했다.

"가도 돼요?"

시험지를 들이미는 로이스의 재촉에 조교가 이를 받아들고 슥- 훑었다.

풀이한 흔적 따위는 하나도 없이 정답 칸에만 적혀 있는 글자들.

그나마 마지막 문제에는 조금은 길게 쓰여 있기는 했지만....

'마지막 문제를 풀었다고?'

차라리 다른 문제를 전부 쓰고 마지막 문제의 정답 칸만 비어 있었으면, 그나마 조금은 다시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마지막 문제의 답이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조교는 확신할 수 있었다.

'쯧, 대충 써 재꼈군.'

조교가 손을 내저었다.

"가 봐라, 가서 미리 손 풀어 놓고 있는 게 좋을 거다. 이걸 다 쓰려면 아마 손목 관절이 나갈지도 모르니까."

이에 로이스는 더는 할 말 없다는 듯 휙 몸을 돌려 시험장을 빠져나갔다.

그가 빠져나가고 조교가 잘게 혀를 차며 혼잣말을 했다.

"쯧. 꼭 저런 놈들이 있지. 머리가 안 되면 몸으로 때우려는 놈들. 시험 성적과는 상관없이 애초에 작정하고 오답 정리를 하려는 무식한 놈들."

혼잣말이 끝나고 자신을 향한 시선에 조교가 눈을 부라렸다.

"다들 여유가 넘치네? 아까 그놈처럼 손목 버릴 각오로 오답 정리 할 생각이라면 계속 그렇게 고개 쳐들고 있는 게 좋을 거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학생들의 시선이 다시금 시험지로 돌아갔다.

사각- 사각-.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공간에 오로지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만 연이어 들려왔다.

한편, 강의실을 나와 침대에서 뒹굴고 있던 로이스.

뎅-.

시험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고 한참 뒤, 방문이 벌컥 열렸다.

"으으...."

괴상한 신음과 함께 흐느적거리며 등장한 시바.

터덜터덜 좀비처럼 걸어와 침대에 쓰러지는 그의 얼굴은 마치 영혼이 없는 이 같아 보였다.

간헐적으로 꿈틀꿈틀거리는 시바를 보며 로이스가 혀를 찼다.

"쯧쯧, 뭔 대단한 거 했다고 다 죽어 가냐? 고작 시험인데."

"으으...."

살짝 고개를 틀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바의 시선.

그 속에서 읽히는 생각에 로이스가 으르렁거렸다.

"재수 없다는 소리 지껄이면 그대로 이불에 묶어서 창밖으로 던져 버릴 줄 알아."

속마음을 읽힌 시바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슬그머니 시선을 회피한 시바.

한참이나 누워서 기력을 보충한 그가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가 로이스를 보며 필기시험 기간 동안 품어 왔던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요, 로이스 님."

"왜?"

"정말 필기시험 보면서 백지 내셨어요?"

이에 로이스가 피식거렸다.

그도 귀가 있으니 다른 이들이 자신을 두고 하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로이스가 조소를 머금고 답했다.

"백지는 무슨. 다 풀고 나왔구만."

"전부 다요?"

"어."

"에이...."

"…뭐냐. 그 불쾌하고 불손하기 짝이 없는 반응은?"

"말도 안 되죠. 다른 시험이야 그렇다 쳐도… 아까 그 시험을 어떻게 다 풉니까?"

"네가 그래서 안 되는 거야. 풀라고 내놓은 문제를 왜 못 풀어?"

"풀라고 내놓은 문제가 아닌데요?"

"…무슨 소리냐, 그건."

"모르셨어요? 마이스터 해럴드의 마지막 문제?"

"뭔데 그게?"

"만점이란 완벽을 이룬 존재만이 얻을 수 있는 가장 달콤한 열매다! …라는 게 평소 마이스터의 지론이라 마지막 문제는 늘 학생들이 절대 풀 수 없는 문제로 내신다고 하더라고요."

"...."

"역대 시험에서 마지막 문제로 나온 게 세계 7대 난제라고 하던데요? 혹은 그에 준하는 문제이거나."

"...."

"그래서 해럴드 교수님의 시험은 사실상 만점이 95점이래요. 이거 진짜 유명한 이야기인데… 정말 모르셨어요?"

"…몰랐는데."

로이스가 볼을 긁적였다.

'세계 7대 난제거나 그에 준하는 문제라....'

자신은 조금 전 그런 문제의 정답은 물론 풀이식까지 아주 상세하게 적어 놓고 나온 것이다.

'나… 잘한 거 맞나?'

조금 과했나 싶기도 하고....

하지만 로이스는 곧 생각을 털어 냈다.

'아, 몰라. 될 대로 되라지.'

뒷일은 다음에 생각하는 거로.

* * *

그로부터 이틀 뒤.

쿵- 쿵-.

다수의 초월기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평야를 달려 나가고 있었다.

그 수가 무려 백 대.

다른 대륙의 사람들이 봤다면 전쟁이 난 게 아닐까 걱정부터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가을 대륙, 그것도 사이론 인근의 주민들은 지금의 상황을 너무도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응? 허허, 벌써 때가 이렇게 됐나?"

"올해도 어김없구만."

100대의 초월기가 달리는 것을 보는 것은 그들에게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어김없이 벌어지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쿵- 쿵-.

무서운 속도로 뛰어가는 초월기의 흉갑에는 초월학관을 상징하는 문장이 떡하니 박혀 있었으니, 굳이 소속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밭일하던 농부들은 잠시 휴식을 취하며 초월기를 구경했다.

한편 농부들과는 달리 갑작스러운 초월기들의 등장에 여행복 차림의 중년인이 경악성을 토했다.

"뭐, 뭐야? 초월기들이 왜?!"

그 소리를 들었는지,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중년인의 뒤로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다가왔다.

"자네, 외지인인가?"

"그, 그렇습니다만. 대체 저건 뭡니까? 뭔 초월기들이 떼를 지어서...."

"저거? 초월학관 하급반 학생들일세."

"예? 학생들이 왜?"

"시험을 보고 있는 걸세. 이맘때쯤이면 초월학관 하급반 학생들이 치르는 시험이지. 클클."

"대체 무슨 시험이기에 이 난리랍니까?"

"합동 실기 시험이란 건데.... 자네, 저어어기 저 산, 보이나?"

노인의 지팡이가 올라갔다.

중년인의 시선도 지팡이를 따라 움직이니 평야의 끄트머리에 아주 작은 산이 하나 볼록 올라온 게 보였다.

"예, 보입니다만."

"초월학관에서 시작해서 저 산 정상에 있는 깃발을 들고 다시 초월 학관으로 복귀하는 거라네. 기동성과 지구력, 효율적인 속성력 분배를 시험하는 거라던가 뭐라나… 그렇게 실력 좋은 상위 성적자를 추려서 나중에 쌈박질 시험까지 본다더군."

상당히 구체적인 설명에 중년인이 놀라 물었다.

"혹시 초월학관 관계자십니까?"

"클클, 관계자는 무슨. 이 동네서 몇 년만 살아도 다 아는 이야기일세."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어 준 노인이 고개를 들어 멀어져 가는 초월기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올해 신입생들은 실력이 제법이구만 그려."

"…어르신 눈에는 그게 보이십니까? 제 눈에는 다 똑같아 보입니다만?"

여행객의 질문에 노인이 눈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내가 이 자리에서 저 짓거리만 수십 번은 봤네, 이 사람아! 대충 뛰어가는 모양새만 봐도 딱 견적이 나오지! 봅세, 저 앞에 다섯 기 있지? 내가 봤을 때는 저 다섯이 가장 실력이 좋아."

"그야, 맨 앞에 있으니 당연한 거 아닙니까?"

"어허! 모르는 소리! 그냥 앞에서 달리고 있다고 다가 아닐세! 움직임이 가벼워 보이지 않는가! 다른 놈들은 무식하게 힘으로 달리는 데 비해 저 다섯은 요령껏 힘을 배분해서 달리고 있고!"

"…그런가요?"

아무리 봐도 잘 모르겠지만, 중년인은 그저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흘흘흘, 두고 보세. 조금 있다가는 저 다섯 기만 이 앞으로 지나갈 테니."

자신감 넘치는 노인의 이야기에 중년인은 슬그머니 호기심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과연 노인의 말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30여 분이 흘렀을까.

쿵- 쿵-.

저 멀리서 거대한 발소리가 들리며 초월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수가 정확히 다섯 대.

함께 달려갔던 다른 초월기는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도 격차가 많이 벌어진 것이리라.

"허, 진짜네?"

저 다섯 대가 선두에 있던 5대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맞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노인의 정확한 예측이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경험은 무시할 수 없다더니....'

사이론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노인의 안목은 여느 초월기 관계자 못지않게 정확했다.

* * *

학생들이 학기말시험의 꽃이라 불리는 기체 평가를 받는 사이.

해럴드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고민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음...."

작게 신음하는 해럴드.

며칠간 제대로 잠을 못 잔 그의 피부는 매우 푸석해 보였다.

눈밑 또한 거뭇거뭇한 것이 그의 몸 상태를 알려 주었지만, 그럼에도 해럴드는 피곤조차 잊은 듯 칠판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칠판에 윌리엄이 적어 두고 간 '그 문제'를 말이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허...."

해럴드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렵구나.'

처음에는 며칠 동안 연구하면 풀어 낼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자만이란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4차원이라...."

1차원에서 2차원으로 차원 계수가 늘어나는 데 발생하는 변수만 해도 수백 가지.

한데 1차원의 술식을 4차원으로 변형시킨다?

거기서 파생하는 변수가 몇 개가 될지 쉬이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흠...."

너무 머리를 쓴 탓에 지끈거리는 관자놀이.

해럴드는 칠판에서 잠시 눈을 떼고 뻐근한 목덜미를 문질렀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똑똑-.

"마이스터, 톰입니다."

"…들어와라."

톰은 윌리엄의 직계 1급 도제이자 조교를 맡은 이였다.

문이 열리고 공손하게 고개 숙여 보인 톰의 양손에는 두꺼운 종이 뭉치가 들려 있었다.

"필기시험 채점이 끝나서 가져왔습니다."

"저쪽에 놓고 가거라. 나중에 살펴볼 테니."

"네."

해럴드의 명령에 톰은 100장의 시험지를 책상에 올려 두었다.

이후 나가려던 톰은 해럴드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이건… 이번 시험의 마지막 문제이지 않습니까?"

"맞다."

"대체 얼마나 어려운 겁니까?"

"얼마나 어렵다라...."

직계 도제의 질문에 해럴드가 잠시 고민을 하다가 피식거렸다.

"만약 내가 이 문제를 풀어 내지 못한다면… 세계 7대 난제가 8개로 늘어날 거다."

"...?!"

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려울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7대 난제급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다가 푸석한 해럴드의 얼굴을 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연구도 좋지만, 건강을 챙기셨으면 합니다."

"나는 걱정 말아라. 그것보다 학생들 성적은 어떻지?"

"올해 입학생들이 수재기는 수재인가 봅니다. 80점 이상 고득점자가 10명이나 됩니다. 그중 만점은 세 명이나 되고요."

"…만점?"

해럴드의 눈썹이 꿈틀거리자 톰이 다급히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아, 죄송합니다. 95점 말입니다."

"그렇군… 알았다. 고생했으니 가서 쉬어라."

"예, 그럼 마이스터께서도 쉬시길...."

해럴드의 축객령에 톰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연구실을 떠나갔다.

그렇게 연구실에 홀로 남게 된 해럴드는 다시금 칠판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런 해럴드의 옆.

수북하게 쌓인 학생들의 시험지가 어서 자신을 봐 달라는 듯 놓여 있었다.

다시 한참의 시간이 흘러.

"후...."

긴 한숨을 토해 낸 해럴드가 뻑뻑한 눈을 문질렀다.

그러고는 톰이 가져온 시험지로 눈을 돌렸다.

아무리 고민을 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잠시 머리를 식혀 주어야 했다.

해럴드가 학생들의 시험지를 가져와 한 장 한 장 넘기기 시작했다.

사락- 사락-.

해럴드가 보기 좋게 점수별로 정리를 해 온 톰.

가장 위에서부터 밑으로 갈수록 고득점자의 시험지였다.

시험지를 훑던 해럴드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깔끔하군."

자신이 믿고 맡긴 도제이니만큼 톰의 채점은 흠잡을 게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신중하고 꼼꼼하게 학생들의 답안을 살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제 남은 시험지는 단 3장.

톰이 말한 95점짜리 시험지였다.

그 첫 장의 주인은 뷘이었다.

그 안에 빼곡히 적혀 있는 풀이 과정과 답.

노력의 흔적이 보였기에 해럴드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장으로 넘겼다.

그러자 드러난 다음 장에는 놀랍게도 시바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뷘의 시험지보다는 덜하기는 했지만, 시바의 시험지도 뷘의 것 못지않게 복잡한 풀이 과정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두 학생의 시험지에서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해럴드가 마지막 장으로 넘겼을 때.

"...?"

처음으로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앞선 두 장과는 달리 너무도 깨끗한 시험지.

풀이 과정 따위는 없고 오로지 답만 덩그러니 적혀 있었다.

해럴드는 시험지의 상단에 적힌 이름을 확인했다.

"로이스? 그 정신 나간 흰머리 녀석이군."

아무리 학생들이 많아도 그 정도로 독특한 놈을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로이스의 얼굴을 떠올린 해럴드가 피식거렸다.

그러다가 그는 로이스의 시험지가 앞선 두 장과 다른 점을 또 하나 발견했다.

"흠?"

바로 마지막 문제.

지금까지 그 어떤 시험지에서도 마지막 문제의 정답 칸은 계속 비어 있었다.

하지만 로이스의 시험지에만은 답과 풀이 과정이 적혀 있는 게 아닌가.

조교인 톰은 당연히 틀렸을 거라 생각했는지 사선으로 틀린 문제라는 표시를 남겨 두었다.

하지만 모든 학생의 문제를 확인해야 하는 해럴드는 자연스럽게 로이스가 풀어 낸 마지막 문제를 읽어 내려갔다.

한 글자, 한 글자.

술식 하나하나를 확인하면 할수록, 해럴드의 눈이 서서히 벌어졌고.

"…허?"

그의 시선이 마지막 정답 칸에 닿았을 때.

"이, 이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그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227화. 실전 평가 (1)

초월학관 기체(機體) 보관소 인근 대형 연무장.

이번 합동 기체 평가의 첫 번째 시험인 기동 시험 결승 지점.

그곳에 하급 기술반 학생들이 긴장된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평야와 맞닿은 지평선에서 그들이 기다리던 형체가 나타났다.

"와, 왔다!"

"누구야? 누가 1등이야?"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곧 멀리서 오고 있던 초월기들이 시야에 잡혀 들었다.

그곳에는 2대의 초월기가 엎치락뒤치락하며 달려오고 있었고, 그 뒤를 다른 2대의 초월기가 바짝 따라붙은 상태였다.

쿵- 쿵-.

무서운 기세로 달려온 초월기의 선두 2대.

그중 먼저 결승점을 통과한 기체에는 30이란 숫자가 적혀 있었다.

간발의 차로 2등을 차지한 기체는 63번.

이후 56번과 89번이 몇 초 차이로 결승점을 통과했다.

그들의 기록을 성적표에 적어 내는 조교들이 혀를 내둘렀다.

"…신기록이네."

"기록을 15분이나 단축하다니...."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4명이나 말이다.

그렇게 조교들이 혀를 내두를 때.

30번기의 후면 탑승구가 열리며 긴 은발을 지닌 여인이 튀어나왔다.

수 미터의 탑승구에서 가볍게 뛰어내린 카니가 양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1등이다!"

동시에 63번기에서 내린 칸이 심통 난 표정을 지었다.

"쳇!"

"넌 나한테 안 돼. 앞으로 10년간 누나라고 불러라!"

"0.1초 차이였거든!"

"0.1초든 0.01초든! 진 건 진 거잖아?"

"큭!"

이번 평가로 오빠, 누나의 자리를 놓고 자기들끼리 내기를 한 모양이었다.

그들이 투덕거리는 사이 3등으로 들어온 56번기에서 타니아가, 4등으로 들어온 89번기에서 켄드릭이 내려섰다.

주변의 기술반 학생들은 그 4인방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듣기는 했는데… 진짜 엄청나네.'

은발 쌍둥이와 붉은 머리 남매에 관해서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초월학관 역사상 최강의 신입생.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무려 넷.

'저런 놈들을 어떻게 이기라는 거야?!'

초월 학관의 기체는 모두 동일한 제원이었다.

여기서 어떻게 조율했느냐, 얼마나 정비를 잘했느냐에 따라서 기체의 성능이 달라진다.

하지만 그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때문에 기체 평가의 순위는 초월기를 다루는 조종반 학생들의 역량에 따라서 크게 뒤집히고는 했다.

그런 의미에서 쌍둥이와 불꽃 남매의 역량을 뛰어넘을 조종반 학생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말은 다시 말해 저들 넷과 같은 조원이라면 높은 평가 점수를 받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넷과 같은 조원의 얼굴에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그중 1등을 한 카니의 조원인 뷘의 얼굴은 너무 환해 빛이 날 지경이었다.

"카, 카니!"

뷘이 수통과 수건을 들고 카니에게 부리나케 달려갔다.

"고, 고생했어. 카니, 1등이라니! 역시 대단해!"

로이스를 대할 때 보였던 쌀쌀함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카니를 향한 뷘의 눈빛에는 오로지 수줍음만이 가득했다.

"어."

카니가 시큰둥하게 수통과 수건을 받아 들었음에도 뷘은 감격한 눈빛을 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디론가 쪼르르 달려가는 카니.

그녀가 향하는 곳에 누가 있는지를 본 뷘의 인상이 무섭게 굳어졌다.

"로이, 로이! 나 1등 했어!"

어서 칭찬해 달라는 듯한 눈빛.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다른 남학생의 심장이 철렁일 정도의 눈빛 공격이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로이스는 시큰둥하게 손을 휘휘 내저을 뿐이었다.

"어."

그런 무신경한 반응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 카니가 로이스의 손을 낚아챘다.

그리고는 그 손을 제 머리에 얹고 고개를 앞뒤로 왔다 갔다거렸다.

카니의 엉뚱한 행동에 로이스가 뚱하게 물었다.

"…너, 뭐 하냐?"

"내 쓰담쓰담은 내가 알아서 챙길게!"

로이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을 때 쪼르르 달려온 타니아가 로이스의 반대 손을 낚아채 자신의 머리에 얹고 카니가 하는 짓을 그대로 따라 했다.

"제 쓰담쓰담도 제가 알아서 챙길게요!"

졸지에 양손을 빼앗긴 로이스에게 질투 가득한 시선 수십 쌍이 꽂혔다.

'하… 마음대로 해라.'

그렇게 로이스가 해탈한 표정으로 제 손을 내어주고 얼마 후.

쿵- 쿵-.

결승점을 통과한 또 다른 초월기.

33번 초월기를 본 순간 로이스가 중얼거렸다.

"우리 삼땡이도 왔네."

1등인 카니가 들어오고 나서 10분.

그것도 과거의 최고 기록을 5분이나 단축한 놀라운 기록이었지만, 앞선 넷의 기록이 너무 엄청나 빛이 바랬다.

쿵- 쿵- 쿠웅-.

서서히 속도를 늦추고 간이 사다리 옆에 선 33호기.

푸쉬쉭-.

후면 탑승구가 연기를 뿜으며 개방되고 한참이 흘러 시에라가 비척비척 계단을 내려왔다.

땀 때문에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

후들거리는 다리와 팔.

툭 치면 쓰러질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상태를 예상이라도 했는지 조교가 한쪽을 가리켰다.

"토할 거면 저쪽으로 가서 토해라."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에라가 입을 틀어막고 달려 나갔다.

하지만 누구 하나 이를 뭐라 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시에라의 반응이 정상적이었다.

비정상적인 것은 앞서 들어온 네 명이었다.

시에라의 기록을 적은 조교는 로이스의 주변에 모여 있는 넷을 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놈들이냐.'

초월기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 장치가 따로 있지만, 이를 제어하는 것은 조종자의 속성력이었다.

때문에 조종자의 속성력에 따라 초월기의 출력값이 크게 좌지우지됐다.

또한, 초월기의 동작이 격하면 격할수록 조종사의 속성력 소비 또한 커지는 법.

이제 고작 하급반이 된 조종사들이 1시간 동안 달리고, 산을 타는 등의 격한 동작을 했다면 조금 전 시에라와 같은 반응을 보여야 했다.

아니, 어찌 보면 시에라도 양호한 편이었다.

심하면 초월기 안에서 점심으로 먹은 것을 게워 내거나 탈진으로 기절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저 네 명은 달랐다.

전무후무한 엄청난 신기록을 달성했으면서도 힘든 기색은 물론 땀 한 방울도 묻어 있지 않았다.

'마이스터 아구스께서 자신의 뒤를 이를 인재들이라고 극찬을 하시더니만....'

그의 안목이 틀린 게 아니었다.

그렇게 조교가 쌍둥이와 불꽃 남매를 바라보며 혀를 내두르고 있을 때.

"이것 좀 줘 봐."

로이스가 카니에게서 수통과 수건을 뺏어 들고 걸어갔다.

그가 가는 방향에는 비척비척 걸어오고 있는 시에라가 있었다.

"받아."

자신의 앞으로 수통과 수건을 본 시에라.

평소였다면 거절했을지도 몰랐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고… 맙다."

수건으로 땀을 닦고 텁텁한 입을 헹군 그녀.

그 뒤로 몇 모금을 더 마신 뒤에야 그녀의 표정이 조금은 살아났다.

시에라가 수통과 수건을 손에 들고 말했다.

"이건… 내가 나중에 돌려주지."

"괜찮아. 내 거 아니니까."

"...?"

"쟤 거거든."

그녀의 되물음에 로이스가 피식하며 한쪽을 턱짓했다.

그곳에는 살벌한 눈을 한 뷘이 있었다.

이에 시에라가 피식거렸다.

'대충 어떻게 된 건지 알겠네.'

처음 로이스와 짝이 된 이후로 4개월.

아직 그와 큰 친분이 있는 거는 아니었지만, 그의 주변 인간관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터덜터덜 걸어 뷘에게 수건과 수통을 돌려주고 온 시에라.

다시 로이스 앞에 선 그녀가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기체 상태는 최상이었다."

대체 로이스가 언제 작업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합동 수업이 있는 날마다 기체 상태는 항상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내 능력이 부족했다."

이를 악물고 앞서 달려가는 4대의 초월기를 쫓았다.

중반까지는 엇비슷하게 달릴 수 있었지만, 어느새 차이는 점차 벌어졌다.

자신의 역량 부족으로 거머쥔 5등이란 성적.

시에라는 그게 분하고, 같은 조원인 로이스에게 미안했다.

그녀의 사과에 로이스는 피식거렸다.

'확실히 나쁜 애는 아니란 말이지.'

지난 4개월.

최악이라 할 수 있었던 첫 만남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며 조금은 그녀와의 거리감을 좁힐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친해졌다는 건 아니지만, 최소 그녀의 됨됨이가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고 로이스도 마냥 시에라를 차갑게 대하지는 않았다.

이후 둘은 큰 불협화음 없이 잘 지낼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로이스는 시에라에 대해 한 가지 알 수 있었다.

'…꼭 뭔가에 쫓기는 거 같단 말이지.'

로이스가 파악한 그녀에게 여유가 없었다.

평상시 시에라의 말투에 어렴풋이 조급함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니까.'

어차피 자신이야 이곳에 오래 머물 것이 아니기에 시에라의 인생에 간섭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 생각한 로이스는 시에라를 딱히 위로하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고는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가 흘러.

"낙오된 기체를 제외하고는 전부 복귀 완료했습니다."

"학생들도 집합 완료했습니다."

조교의 보고에 아구스를 대신해 감독하고 있던 1급 도제가 강단 위로 올라갔다.

그는 정렬한 학생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모두 1차 평가를 치르느라 고생 많았다."

마나를 담은 1급 도제의 목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하지만 진짜 평가는 내일부터라는 것을 잘 알고 있겠지."

그 이야기에 기동 평가 상위 32개조에 속한 이들이 눈을 빛냈다.

내일 있을 실전 평가.

일명 전투 토너먼트를 통해 32개 조 중 다음 학기 1반이 될 25명이 결정된다.

거기에 토너먼트 장학금이라 불리는 성적 장학금과 상위 다섯 개 조만 누릴 수 있는 염원의 탑 견학까지.

32위권에 들어온 이들의 눈이 반짝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학관을 졸업하면 너희가 나아가야 할 곳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경쟁의 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상위 32위 안에 들어오지 못한 놈들은 낙오자나 다름없지. 지금이야 그저 단순히 성적이 매겨질 뿐이지만 사회에 나가서도 지금처럼 낙오한다면… 너희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도제의 말에 32위 안에 들어오지 못한 이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반면 32위 안에 들어선 이들의 얼굴은 밝았다.

이를 본 1급 도제가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왜, 너희는 아닐 거 같나? 고작 남들보다 조금 우위에 섰다고 그 밑에 놈들이 우습나? 7조!"

"네!"

"예!"

"고작 32위인 네놈들이 33위를 비웃을 자격이 있을까? 조금만 늦었어도 너희 역시 낙오자가 됐을 거다."

"...."

"고작 남들보다 조금 성적이 좋다고 자만하지 마라. 지금은 네 밑에 있는 놈들이 언젠가는 너의 자리를… 너의 목을 노리는 이들이 될 테니까."

도제의 신랄한 비판에 조금 전까지 웃던 32위 내 조원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상, 해산!"

짧은 명령을 끝으로 학생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조종반 학생들은 그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흩어졌다.

하지만 기술반 학생들은 달랐다.

당장 오늘의 기동 평가를 거친 기체를 손봐야 했다.

특히나 상위 32위에 속한 기술반 학생은 오늘 밤을 새워서라도 기체를 정비해야 한다.

그래야지 당장 내일 있은 실전 토너먼트를 치를 수 있으니 말이다.

"빨리빨리!"

"그거 이쪽으로 옮겨!"

분주하게 움직이는 기술반 학생들.

로이스는 가지 않고 자신의 곁에 남은 시에라를 보며 말했다.

"안 가냐?"

"…내가 도와줄 건 없나?"

"그 말 하기 전에 가서 거울이나 좀 보고 와."

"거… 울?"

"너, 지금 딱 뒈지기 일보 직전인 얼굴이야."

"...."

"그 꼴로 도와준다고 나섰다가는 내일 실전 평가 치르기도 전에 쓰러질 걸? 그냥 가서 쉬는 게 도와주는 거다."

"…알겠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시에라가 몸을 돌렸다.

비척비척 걸어가는 그녀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로이스.

그는 이내 고개를 돌려 기지개를 쭉 켰다.

"나도 빨리 끝내고 쉬어야지."

어차피 그에게 이번 일은 소꿉장난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설렁설렁할 생각은 없었다.

'염원의 탑 견학이라....'

다음 학기 반 배치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지만, 장학금과 염원의 탑 견학은 로이스로서도 제법 구미가 당기는 보상이었다.

'한 번쯤, 보고 싶긴 한데.'

지난번처럼 뒷길을 이용해 숨어드는 게 아니라.

정식 절차를 밟아 염원의 탑에 들어가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로이스가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그의 뒤로 접근하는 그림자가 있었다.

익숙한 기운에 로이스가 뚱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뭐냐?"

로이스의 뒤에 서 있는 이는 다름 아닌 뷘이었다.

그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이번에 실전 평가의 우승은 나와 카니가 차지할 거다. 넌 절대 우리를 이길 수 없어."

"...?"

"우리가 우승하게 되면… 난 카니한테 고백할 거다. 그렇게 알아 둬라."

그 말을 끝으로 뷘은 휙 고개를 돌려 성큼성큼 로이스에게서 멀어졌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로이스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미친놈인가? …지랄 염병하고 자빠졌네."

***

실전 토너먼트가 열리는 날 새벽.

욱씬-.

시에라는 아릿한 가슴 통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

힘겹게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킨 그녀.

건너편 침대에 룸메이트가 아직 곤히 잠들어 있는 게 보였다.

'…씻어야겠네.'

아직 시간이 이르기는 했지만,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리려면 일찌감치 준비하는 게 좋을 듯싶었다.

그렇게 침대를 벗어나려던 그녀는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휘청거렸다.

"윽!"

가까스로 몸을 틀어 바닥이 아닌 침대에 쓰러진 시에라.

일순간 몰아친 현기증에 천장이 빙빙 돌고 있었다.

이에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제… 무리했구나.'

앞서가는 4대의 초월기를 따라잡고자 무리를 한 여파가 아직 남아 있었다.

몸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다시금 겨우 상체를 일으킨 시에라가 침대에 걸터 앉아 현기증을 가라앉혔다.

'…이길 수 있을까?'

통칭 조종반 신입생 괴물 4인방이라 칭해지는 이들.

자신의 목표인 우승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최소 그들 중 한 명 이상은 꺾어야 했다.

시에라는 자신과 그들의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자신의 실력으로는 절대 그들을 꺾을 수 없다는 것도.

절망감이 언급한 순간, 눈앞에 아른거리는 누군가의 얼굴.

이에 시에라가 이를 악물었다.

"…해내야 해."

반드시 우승을 차지해야 했다.

그게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그물을 끊어 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니까.

그렇게 투지를 일깨운 그녀가 다시금 힘차게 몸을 일으켰다.

***

방과 후 보고를 위해 해럴드의 연구실을 찾은 톰.

그는 연구실 내부의 풍경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전날 아침, 시험지를 해럴드에게 전달하러 왔을 때와 방 안의 풍경이 너무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사방팔방 난잡하게 널려 있는 수백 개의 종이 뭉치.

빈틈 하나 없이 빼곡하게 새하얀 글자가 적혀 있는 칠판.

그리고 그런 칠판을 바라본 채 미동조차 하지 않는 해럴드까지.

평소와는 너무도 다른 분위기에 톰은 바짝 긴장하고 말았다.

그가 조심스럽게 해럴드를 불렀다.

"마이스터...?"

"...."

"마이스터?"

톰의 부름에 해럴드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톰은 절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헙?!"

뒤돌아선 해럴드의 눈빛은 너무도 강렬했다.

또한, 그의 눈빛 속에는 흥분, 기쁨, 분노, 경악 등이 다채롭게 섞여 있었다.

"톰."

"아… 예?"

"그놈 어딨느냐."

"누,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로이스라는 놈."

"예?"

"하급 1반에 있는 머리 하얀 놈 말이다!"

톰은 지금 해럴드가 누구를 말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각에 다른 학생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지, 지금쯤이면 하급반 실전 평가 결승을 치르고 있어서… 아마 시합장에...."

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해럴드가 연구실을 뛰쳐나갔다.

십여 년간 해럴드를 곁에서 지켜본 톰조차 난생처음 보는 격한 반응.

"대체...."

아연실색한 톰의 뒤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창을 통해 들어왔고.

"…무슨 일이시지?"

주홍의 햇빛이 조금 전 해럴드가 뚫어지게 바라보던 칠판을 비췄다.

동시에 해럴드가 서른 시간 동안 증명해 낸 풀이식이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그렇게 주홍빛으로 빛나는 칠판 끝단에는 로이스가 시험지에 적어 넣었던 답이 떡하니 적혀 있었다.

228화. 실전 평가 (2)

시간을 조금 앞으로 되돌려, 실전 토너먼트가 시작된 오전 무렵.

실전 평가 대진표가 발표된 게시판 앞에 학생들이 우글거렸다.

그들은 대진표를 보고 수군거렸다.

"우와, 2군에 괴물 4인방 중 셋이나 들어갔는데?"

"2군은 진짜 피 터지겠다."

"1군에서는 카니랑 뷘 조가 올라오겠네."

"뷘 녀석은… 운도 좋지."

대진표는 전날 상위 32개 조를 절반씩 나눠 1, 2군으로 편성했고, 각 군에서 최종적으로 올라온 두 조가 결승에서 맞붙게 되는 형식이었다.

가장 강력한 우승자인 칸, 카니, 타니아, 켄드릭 중 카니를 제외한 셋이 2군으로 배치됐다.

이를 확인한 뷘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게시판을 확인하고 돌아선 시에라.

그녀의 눈빛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1군 첫 번째 시합. 차라리 잘됐다.'

현재의 몸 상태라면 조금이라도 빨리 시합을 치르고 휴식을 통해 회복하는 것이 이득이었다.

'30호기의 시합은 1군 여덟 번째.'

그리고 가장 강력한 상대인 카니와 뷘은 1군 마지막 시합이었다.

만약 자신이 쭉 올라간다면, 준결승전에서 30호기와 맞붙게 되리라.

찌릿-.

가슴에 이는 통증을 억지로 참아 낸 시에라는 시합장에 자리한 초월기 대기장으로 들어섰다.

그런 그녀를 로이스가 뚱한 표정으로 맞아 줬다.

"괜찮냐?"

"뭐가 말이지?"

시에라를 바라보는 로이스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로이스의 눈에는 시에라의 상태가 훤히 보였다.

'마나 폐색증이네.'

과도한 속성력 소모로 인해 한계 이상의 부하(負荷)가 중첩되어 기운의 통로가 좁아져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통증도 통증이지만, 무리해서 한 번 더 속성력 고갈이 온다면 영구적인 속성력 손실이 올 수도 있는 상황.

"흠...."

자신을 바라보는 로이스의 시선에 시에라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답했다.

"걱정 마라. 내 몸은 내가 잘 안다."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어깨를 으쓱거리는 로이스를 뒤로하고 시에라는 말없이 초월기 탑승구로 향했다.

쿠그그그-.

시에라가 동기화를 펼치자 거인이 태동했고.

쿵-.

주인과 혼연일체가 된 초월기가 연무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로이스는 그 뒷모습을 잠깐 바라볼 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