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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마녀

* * *

데일은 밴쉬 야가브에게 목적지만을 말하고, 항해에 대한 나머지는 관여하지 않았다.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낫지.'

야가브와 밴쉬 자매들은 주황빛 하늘을 머리에 이고, 신나게 배를 몰았다.

아래로는 용뼈 산맥의 웅장한 정경이 펼쳐졌다.

"히히! 살다 보니 용뼈 산맥을 넘는 일이 다 있구나!"

"언니! 저희는 죽었잖아요!"

"그런가? 히히히!"

자매들이 깔깔 웃어대며 '언데드 개그'를 나불댔다.

다행인 점은 데일이 영체화 상태인지라 자매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것.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데일은 밴쉬들을 닥치게 만들었을 것이다.

데일은 시끄러운 밴쉬들에게 신경을 쓰는 대신. 아래 펼쳐진 풍경을 눈에 담았다.

하늘을 찌르듯 뾰족하게 서 있는 수많은 봉우리.

개중에는 지금 유령선이 비행하는 영역보다도 더 높은 것들도 있었다.

데일은 봉우리에 하얗게 내려앉은 만년설과 울창하게 솟은 침엽수림을 내려보았다.

'여기를 다시 지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용뼈 산맥의 고원 지대는 혹한과 투쟁과 하이 엘프들의 땅이며... 데일이 이 세상에 처음 발을 디뎌 많은 곳을 배운 곳이었다.

저 봉우리 중 하나에 그가 처음 떨어졌던 장소도 있을까?

그에게 많은 걸 가르쳐주고, 잔인하리만치 냉정하게 내치던 하이엘프 부족원들도 있을까?

그때 데일이 죽이거나 다치게 한 전사들이 많았는데.

그 탓에 다른 부족과의 싸움에서 큰 봉변을 당하지는 않았을까?

데일은 고개를 털어 상념을 지워냈다.

그가 고민할 부분은 아니다.

데일은 살아남기 위해 전사로서 싸웠고, 하이엘프들 역시 전사다.

저들이 데일에게 무엇을 원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데일이 강한 전사가 되길 원했던 걸까? 그래서 마지막에 데일을 추방하고 죽일 듯이 달려들었던 걸까?

만약 그런 거라면 저들의 의도는 성공했다.

이제 데일은 대륙에서 적수가 몇 안 되는 전사가 되었으니.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번 찾아가 보지.'

데일은 지나가듯이 가볍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건 데일이 정신적으로 성장했음을 알리는 증거다.

강한 전사는 두려움이 없는 법이며, 데일은 마음속 두려움이 하나 더 사라졌으니 더 강한 전사가 되었다....

라고 하이엘프들이라면 말했을 것이다.

그때.

화살 하나가 유령선을 스쳐지나갔다.

데일은 화살이 날아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

자그맣게 보이는 하이엘프들이 이쪽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밴쉬 자매들은 더욱 요란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저 야만인들을 보라지!"

"엘프들은 자기들이 뛰어난 전사임을 자부한다지만, 정작 유령이나 미신에는 엄청 겁을 먹는다지?"

밴쉬들의 웃음소리가 산을 울리자, 엘프들은 더욱 분개해 화살을 쏘아댔다.

하지만 3척의 유령선은 유유히 하늘을 비행하며 지나갔다.

그런 간단한 해프닝이 지난 뒤.

야가브는 밤낮 가리지 않고 배를 몰았다.

황혼이 만들어낸 주황빛이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태양을 가려버리니, 낮에도 언데드들이 마음껏 돌아다니는 것이다.

물론. 밤에 힘이 강해지는 데일의 장점 역시 사라져버렸지만, 단점이 없어진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지금은 그렇다는 거지만.'

저 주황빛이 훗날 어떤 효과를 발휘할지는 모를 일이다.

지금도 하늘을 지배하는 주황빛은 점점 더 짙어지고 있다.

아마 데일이 황혼이 세운다는 탑에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저 주황빛이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끼치기 시작하는 순간.

아군의 승산은 뚝 떨어질 것이다.

"잘 가라 산맥아! 반갑다 평야야!"

하루하고 반나절의 비행 끝에.

일행은 용뼈 산맥을 통과할 수 있었다.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확실히. 하늘을 나는 게 속도는 빠르군.'

다만. 지금부터는 조심해야 한다.

데일은 밴쉬들에게 다시 한번 주의를 주었다.

"여기서부터는 황혼의 영역이다. 어떤 괴물이 있을지도 몰라."

여기서 그대로 동남쪽으로 가면 황혼이 있는 황무지가.

좀 더 북쪽으로 가면 1군단이 나온다.

목적지인 3군단까지 가려면 필연적으로 위험한 영역을 지나쳐야 하는 것이다.

'별 탈 없이 지나치는 건... 말이 안 되지.'

유령선은 꽤나 눈에 띈다.

아무리 빨리 움직이고 있다 해도, 추격이 붙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아예 고도를 높여서 적의 시선을 피하는 방법도 생각했었다.

"안 돼."

"왜 그러지?"

"시험해봤는데, 저 빛을 우리가 뚫고 올라갈 수가 없던데? 빛의 신성만큼은 아니어도, 뭔가 껄끄러운 기운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야가브의 거부에, 어쩔 수 없이 고도를 낮춰 날 수밖에 없었다.

유령선은 황혼 아래에 있는 도시 두어 개를 지나쳤다.

도시에서는 이 갑작스러운 불청객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곧장 불덩이와 바람 마법이 유령선을 찢어발기기 위해 날아들었다.

엘프의 화살보다는 훨씬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꽝!

선박의 후미에 마법이 적중했다.

썩은 나무판자가 지상을 향해 우르르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야가브는 한차례 웃음을 흘린 뒤, 능숙하게 배를 몰아 공격에서 빠져나왔다.

황혼의 신자들은 닭 쫓던 개처럼 멀어져가는 배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걸로 추격이 붙기 시작하겠군. 서둘러야겠어.'

하지만 그런 데일의 바람과 달리.

유령선은 몇 차례 비틀거리더니, 이내 지상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나무가 듬성듬성 나 있는 숲에 불시착한 유령선은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데일에게 걸려 있던 영체화 마법도 풀려버렸다.

"무슨 일이지?"

"우리도 좀 쉬어야지."

"언데드가. 휴식?"

데일이 시퍼렇게 노려보자 움찔한 야가브가 말했다.

"실은 방금 마법을 얻어맞은 것 때문에 마력이 완전히 고갈되었어. 다시 마력이 회복할 때까지는 시간이 좀 필요해."

"어쩔 수 없군."

추적자가 언제 따라붙을지 모르는 시점에서 멈춰 서게 된 건 아쉽지만, 닦달한다고 없는 마력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그나마 숲에 떨어진 게 다행이군. 나무에 어느 정도 가려지니.'

데일이 물었다.

"마력을 채우려면 얼마나 걸리지?"

"못해도 하루는 꼬박 쉬어야 반절 정도 회복될 것 같은데?"

"하루라... 너무 오래 걸리는데?"

"다른 방법도 있어! 사람들을 습격하는 거야!"

"또 헛소리를 하는군."

"들어봐! 우리는 마력 강탈이라는 기술을 사용할 수 있거든."

데일도 아는 기술이다

상위 언데드들만이 배울 수 있는 기술로, 상대에게서 마력을 억지로 빼앗을 수 있다.

데일이 다루는 '생기 강탈'과도 어느 정도 결이 비슷한 기술로, 데일역시 여기서 더 성장하면 상대의 마력을 빼앗는 기술을 얻게 될 터다.

"우리가 왜 굳이 선원들을 습격하고 다녔겠어? 배를 빼앗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주기적으로 마력을 흡수해줘야 한단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다.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지?"

"마침 근처에 마을이 보였어. 자매들이랑 그곳을 털어보자고!"

데일은 머릿속에 욱여넣은 지도를 떠올렸다.

'이 주변은 작은 마을이 여러 개 있는 걸로 아는데.'

이 근방은 야트막한 산도 있고, 크고 작은 숲도 많으며, 그다지 비옥하지도 않은 땅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아 도시를 이루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함이 많았고, 규모 작은 마을들이 이곳저곳 흩어져 있을 뿐이다.

그 때문일까?

황혼의 세력도 그다지 크게 중요시하지 않는 지역으로 알고 있다.

들이는 노력에 비해 기댓값이 너무 적은 것이다.

'물론. 이것도 옛날 정보니까, 지금쯤 황혼의 지배 아래에 있을 수도 있어.'

데일이 말했다.

"내가 가서 마을을 살펴보겠다. 만약 황혼의 추종자들이 있으면 잡아오겠다."

"아니라면?"

"마력이 자연적으로 치유될 때까지 기다려야겠지."

야가브가 불만을 터트렸다.

"대체 왜 그래야 하는 거야? 그냥 잡아서 잡아먹으면 편하잖아. 이거 엄청 중요한 일 아니었어? 대륙의 운명이 걸린 거 아니었냐고."

지금 데일의 행보에 대륙의 운명이 걸려 있다는 말이 사실 호들갑은 아니긴 하다.

그녀의 말마따나 데일이 3군단과 접촉해 설득하냐 마냐가 큰 관건일 테니.

"이성적으로 생각하라고. 대륙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사람 하나둘 정도는 희생해도 괜찮잖아?"

"본인이 원해서 하는 게 희생이고. 억지로 목숨을 잃으면 그냥 살인이다."

"정말. 바보같이 굴지 말라고. 왜 그러는 거야? 나는 이해할 수가 없네."

야가브는 공중에서 휙 몸을 틀은 뒤, 데일의 어깨 위에 얼굴을 붙였다.

그리고는 마치 사악한 마녀처럼 속삭였다.

"들었어. 인간 흉내를 내고 싶다며? 그렇다면 더더욱 영리하게 살아야지! 인간은 영악하니까."

"설득하려 들지 마라."

"그리 바보 같이 살면 누가 알아봐줄 거 같아? 그게 보답받을 것 같아? 아니야 아니야. 너도 알잖아 데일! 너는 멍청하지도 않고, 얼마든지 영리하게 굴 수 있어. 고작 마을 하나야! 목격자도 없이 싹 다 죽이자! 그러면 사람에게 친숙한 흑기사라는 네 명성은 유지될 거야! 우리 자매들은 무덤에 들어갈때까지 이 일을 비밀로 간직해줄게!"

"무덤까지래!"

"히히!"

자매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데일은 웃지 않았다.

"설득하려 들지 말라고 두 번째 말했다. 다음에는 검을 뽑겠어."

"아, 알았으니 진정해."

데일이 마검에 손을 가져다 대자 야가브가 뒤로 물러났다.

물론 그녀는 데일이 자신을 벨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지금 데일에게는 야가브의 힘이 필요하지만.

하지만 지금 데일에게서 느껴지는 기백은 그녀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했었다.

신체가 없는 영체인 탓에, 데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감정이 더욱 매섭게 느껴지는 것이다.

데일은 다시 시선을 떼며 말했다.

"그리고 그 재미없는 언데드 농담도 그만하고."

"...재밌지 않아?"

"씁."

데일이 혀를 차자 야가브는 고개를 붕붕 끄덕였다.

"마을로 가보겠다. 얌전히 있어라. 내가 신호하면 곧장 오고."

"알았어...."

데일은 그를 위해 만들어진 크고 두꺼운 로브를 걸쳤다.

그의 정체를 얼마나 가려줄지는 모르겠지만, 안 입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데일은 숲을 벗어났다.

널따란 개활지에 20가구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마을에는 조잡한 목책만이 둘러쳐 있을 뿐. 그 흔한 보초 하나 세워두지 않았다.

데일은 마을에서 그나마 가장 큰 건물로 성큼 들어갔다.

보통 이런 건물은 주점이었고, 데일의 예상은 정확했다.

"하하!"

"그때 이놈이 불이 붙어서는 살려달라고 비는데 어찌나 꼴사나운지...!"

"닥쳐! 그년은 마녀였다고! 마녀를 어떻게 할 수 없잖아!"

주민들은 대낮부터 술을 퍼마시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왁자지껄한 분위기도, 데일이 들어서자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주민들은 이 수상쩍은 이방인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요즘 같은 시대니만큼. 경계심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딱히 황혼의 추종자는 아닌 것 같군.'

안심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아쉬워해야 하는 걸까.

데일은 주점 주인에게 다가갔다.

주인은 노골적으로 경계하는 빛을 띄었지만, 이럴 때 가장 친해지기 좋은 방법이 있다.

바로 돈이다.

촤르륵.

"!!"

탁자 위에 쏟아진 은화에 눈이 휘둥그레진 주인에게, 데일이 말했다.

"적당히 술 아무거나 주시오."

"저, 저희 맥주가 참 맛있습니다."

"그럼 그걸로. 그리고 물어볼 게 좀 있소만."

"아 예 예. 뭐든 물어보십쇼."

돈은 참으로 놀라운 물건이다.

순식간에 데일을 낯선 이방인에서 친절한 여행객으로 변모시켜주니 말이다.

데일은 이 근처 지역의 상황을 물었고, 주인은 이 근방의 소식을 미주알고주알 묻지 않은 것까지 다 말해주었다.

"어후. 그 황혼인지 뭔지. 예전에는 돈이랑 재물만 좀 요구하더니, 요즘에는 아예 뭔 석상을 지으라 마라 난리예요. 아니, 농사지을 사람도 부족한 마을에 그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입니까? 너무하지 않나요?"

"너무하군."

"역시 뭘 좀 아십니다."

정보를 얻기 위해 시작한 대화가, 이제 주인의 하소연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듣고 있던 주민들도 연신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살기 힘든 세상입니다. 갑자기 하늘색이 이상해지질 않나. 악마가 돌아다니질 않나. 얼마 전에는 있죠. 웬 마녀가 마을 사람 하나를 태워버려서 깜짝 놀랐습니다."

"마녀?"

"예. 생긴 건 어려 보이는데, 엄청난 마법을 다루더라고요."

"분명 처녀들의 피를 마시고 젊음을 얻은 노파일 거야!"

"아니야! 악마가 위장한 걸 거야!"

주민들이 끼어들어 자기 의견을 내뱉었다.

이때까지도 데일은 심드렁했다.

사악한 마녀가 행패를 부리는 일이야 그리 드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다음 오는 말은 무시할 수 없었다.

"엘프를 옆에 데리고 다니는 거 봤어? 엘프는 호전적이기로 유명하잖아. 마녀도 필시 엄청 사악하고 잔혹한 여자일 거야."

"...지금 뭐라고 했소."

"예?"

"옆에 엘프를 데리고 다녔다고 했소? 그 얘기를 좀 더 자세히 해주시오. 어서!"

"아, 알겠습니다."

데일이 어깨를 붙잡고 짤짤 흔들자, 당황한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쪼그마한 마녀가 가게에서 주민을 구워버린 이야기를 하려던 그때.

주점으로 일단의 무리가 들어왔다. 주민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흉험한 기세와 황금빛 실을 곁들인 붉은 로브.

황혼의 추종자들이다.

'타이밍 참 절묘하군.'

추종자에서 직급이 가장 높아 보이는 여자가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본론을 꺼냈다.

"알 수 없는 무리가 도시를 넘어 이쪽으로 향했다. 혹 수상쩍은 이가 마을을 들르지는 않았나?"

데일을 흘끗 본 주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부인하려 했다.

"수상쩍은 이라니요. 최근 마을에 지난 사람도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돈데...."

"흠. 그런가?"

"예, 예. 물론입니다."

여자는 차가운 눈동자로 주인을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됐어."

여자는 검을 뽑았다.

검에서는 새빨간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묻은 지 얼마 안 된 피였다.

피에 민감한 데일은 이 여자가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적지 않은 살육을 저질렀다는 걸 눈치챘다.

작은 마을이 여럿 흩어져 있는 지역.

이쪽 방향으로 향한 데일과 유령선.

데일을 찾기 위해 달려온 황혼의 추종자와 병사들.

그리고 여자의 칼에 묻은 피.

데일은 어렵지 않게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짐작을 확신시켜주듯.

여자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어차피 황혼을 섬기지도 않는 머저리들이다. 전부 죽이면 문제없겠지."

마녀

* * *

여인은 칼을 붕 휘둘러 검날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그러고는 기계처럼 아무런 감정도 없는 표정으로 느긋하게 걸어왔다.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한 걸음걸이.

하지만 술집 주인은 숨이 턱 막혔다. 그는 다가오는 죽음을 느꼈다.

주인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주위를 훑었다.

눈동자가 데일과 마주쳤다.

잠깐의 갈등.

미안한 표정을 짓던 주인이 큰소리로 외쳤다.

"이, 있소! 수상쩍은 사람이 여기 있소!"

주인은 데일을 삿대질했다.

여인의 고개가 데일을 향해 돌아갔다.

"흐음? 과연. 위험한 기세가 풍겨오는군."

데일은 말없이 맥주를 홀짝였다.

그리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따라 혀에 감도는 알싸한 쓴맛이나, 알딸딸하게 올라오는 취기가 너무 그리웠다.

그러는 사이에도 주인은 필사적이었다.

"저 사람이 엄청 많은 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밖에는 몰라요! 그러니 마을 사람들 목숨 많은 살려주세요!"

"아 그래. 너는 참 솔직하구나."

"가,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처음 질문했을 때는 모른 척 잡아뗀 거지?"

"엇. 그건."

주인이 당황하는 그 순간.

여인의 검이 섬전처럼 주인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웬만큼 실력 있는 전사들도 쉬이 대응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찌르기였다.

캉!

하지만 막혔다.

어느새 다가온 데일이 여인의 칼을 건틀릿을 잡고 있었다.

여인은 한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내 칼을, 잡았다?'

여인의 찌르기는 벼락이라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빠르고 날카로웠다.

그 칼을 막는 것도 아니고 허공에서 잡아내다니?

힘과 동체 시력. 그리고 기술까지 좋아야 가능한 묘기였다.

카창!

데일은 건틀릿에 힘을 주어 칼날을 부러트려 버렸다.

쯧. 하고 혀를 찬 여인은 손잡이만 남은 칼을 바닥에 버리고. 새 칼을 뽑아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데일이 핀잔을 주었다.

"바른대로 전부 말한 사람에게 보상은 못 할망정, 칼침을 선물하는 게 황혼의 방식인가?"

"간이나 보는 박쥐는 살아 있을 가치가 없다. 그보다 그 박쥐가 너를 팔아넘기려 했는데, 정작 너는 놈을 감싸는 건가?"

"나였어도 그랬을 거다. 외지인 하나 팔아서 이웃을 구할 수 있으면, 백번이라도 팔아야지."

여인은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무표정하게 웃으니 기괴한 분위기가 풍겼다.

"하하하! 호탕하군. 난 너 같은 사내가 좋다. 불신자인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우리 쪽으로 넘어오는 게 어떻겠나? 부와 명예를 모두 주겠다."

"거절하마."

"나름 생각해서 건넨 제안인데. 그렇게 바로 차버리니까 좀 충격인데."

데일은 로브를 벗어던졌다.

시체같이 창백한 얼굴과 로브 아래 가려져 있던 칠흑의 갑주가 드러났다.

팔짱이나 끼며 느긋하게 구경하던 병사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창을 꼬나쥐었다.

"저, 저건!"

"...흑기사?"

데일을 알아보는 걸까?

여인은 눈썹을 꿈틀이며 중얼거렸다.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흑기사를 여기서 만날 줄이야. 이건 예상 못 했는데. 그 뿔 달린 투구는 어디 갔지?"

"너무 눈에 띄어서 놓고 왔다."

여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잘못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딱히 두려워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포프의 딸 앨리스. 지금은 황혼을 섬기는 검 중 하나다."

"데일."

"그게 끝? 으레 인사란 낳아준 부모. 하다못해 소속이라도 말하는 게 예의 아닌가?"

"세상을 뒤엎으려는 놈들이 예의 운운하다니. 다른 의미로 신선하군."

앨리스는 어깨를 으쓱인 뒤, 주점 주인을 노려보았다.

"꺼져. 당장!"

"아, 알겠습니다!"

주점 주인과 주민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병사들은 원을 크게 그리며 데일을 포위했고, 앨리스는 힘을 끌어올렸다.

그녀의 눈이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앨리스가 입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자, 병사들의 몸에 오렌지색 빛 부스러기가 흘러내렸다.

마치 사제의 축복과도 같은 모습.

데일은 생각했다.

'저 황혼의 힘. 용도가 다양하군. 거의 만능이잖아.'

데일은 마검을 들고 앨리스와 마주 섰다.

눈동자는 쉼 없이 움직이며 정보를 머릿속에 박아넣었다.

지형 지물.

적의 숫자.

상대의 노림수.

예민한 귀로는 병사들의 숨소리에 집중했다.

아무리 황혼을 섬기는 괴물 같은 놈들이라도, 호흡은 한다.

호흡에는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상대의 심리. 여력.

그리고... 공격 타이밍!

'지금!'

생각과 동시에 앨리스의 몸이 흐릿해지면 앞으로 솟구쳤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스텝을 밟은 것이다.

슉! 슈슉!

주황빛 검기가 깃든 검이 세 차례 찔러왔다.

모두 급소가 아닌, 배나 허벅지처럼 맞추기 쉬운 부위였다.

상대는 흑기사를 상대로 급소를 노리는 게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인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데일은 뒤로 물러나 피하는 대신. 도리어 발을 한걸음 내질렀다.

찌르기의 달인을 상대로 뒷걸음질해봤자 의미가 없다.

게다가 저 주황빛 검기는 위험하다.

파브리스와 상대해보면서 겪지 않았나.

저 검기는 데일의 단단한 갑옷을 쉽게도 상처입혔다.

데일이 성큼 다가오자 앨리스는 고양이처럼 사뿐하게 스텝을 밟아 뒤로 물러섰다.

그러면서도 검은 쉬지 않고 앞을 향해 찔러댔다.

뒷걸음질하며 검을 내지르다니?

당연히 제대로 힘이 실릴 턱이 없다.

하지만 저 끔찍할 정도로 예리한 검기는, 힘이 충분히 실리지 않은 일격도 충분히 위협적으로 만들었다.

'귀찮게 구는군.'

고양이가 폴짝폴짝 도망다닌다면, 다소 할퀴어지는 걸 감소하더라도 그 꼬리를 붙잡는 수밖에.

데일은 검기에 역으로 몸을 들이밀며 그대로 앨리스의 팔을 붙잡으려 했다.

그때에 맞춰 포위하고 있던 병사들이 창을 찔러 들어왔다.

일개 병사였지만, 그 창끝에는 흐릿할지언정 주황빛 기운이 맺혀 있었다.

데일은 마검을 휘둘러 병사들의 창을 쳐냈고. 그 틈을 타 앨리스가 빈틈을 찔러들어왔다.

저 앨리스라는 여인은 확실히 뛰어난 전사였다.

하지만 이 황혼 추종자들의 진짜 무서운 점은,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는 팀워크였다.

마치 마음이 통하기라도 하는 듯.

이들은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병사들이 막으면 앨리스가 공격한다. 창과 방패. 망치와 모루.

'함께 싸울 줄 아는 놈들이군. 어쩔 수 없지.'

지금은 마력을 아낄 때가 아니다.

데일은 검은 안개를 전개했다.

순식간에 어둠이 주점 안을 덮었다.

이렇게 되면 숫자는 더는 의미가 없다.

어둠 속에서는 데일과 1대1로 싸울 뿐이니.

하지만 그때.

엘리스가 손을 들었다.

"지금!"

"?"

다음 순간.

눈이 타버릴 정도로 환한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불기둥이 솟구쳐올랐고.

콰아앙!

한 박자 늦게 굉음이 터져 천지를 울렸다.

강대한 폭발 앞에서 데일이 전개한 안개는 무력하게 휩쓸렸다.

돌과 나무로 지어진 주점 건물은 그 흔적도 남기지 않고 날아가 버렸다.

데일 역시 성하지 못했다.

갑옷의 쇳물이 뚝뚝 녹아내렸고, 피부도 검게 타버렸다.

바이만 왕국의 망토가 아니었다면 더 치명적인 일격이 되었을 것이다.

'대체.'

곧 연기가 걷히고.

주위 모습이 다시 드러났다.

데일은 무슨 상황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주점을 포위하고 서 있는 수십 명의 병사. 그리고 족히 10명은 넘어 보이는 마법사.

데일과 함께 폭발에 휘말린 병사들은 핏물이 되어 녹아내렸고.

앨리스 역시 온몸이 발갛게 달아올라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데일은 깨달았다.

'이 여자 역시 모루였던 거다. 진짜 망치는 따로 있던 거지.'

앨리스와 병사들이 시간을 끄는 틈을 타서 마법 폭격을 퍼붓다니.

꽤나 고약한 방식이었다.

앨리스는 중얼거렸다.

"그것보다는 더 피해를 줄 거로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더 단단하잖아. 두르핀의 폭발에서 살아남은 건 운이 아니었다는 건가?"

그녀 지극히 사무적으로 말했다.

부하들과 합이 잘 맞는 걸 보면, 필시 오랜 시간 함께 수련하고 싸워왔을 것이다.

그런 병사들을 미끼로 썼다.

병사들이 비명도 못 지르고 죽어버렸다.

하지만 앨리스는 섬뜩할 정도로 차분하다.

아니. 애초에 자기를 미끼로 쓸 정도의 여자니 이상할 것도 없는 것일까?

더욱 기분 나쁜 건. 주점을 포위하고 선 병사들의 표정에도 어떤 동요가 없다는 것이다.

마치 동료의 희생이 당연하다는 듯이.

'이 황혼 추종자라는 놈들은 어째 하나같이 머리가 훼까닥 돌았군.'

교단의 광신자들이랑은 또 다른 느낌이다.

이 자들은 너무 비인간적이었다.

앨리스는 주황빛으로 자기 몸을 감쌌다.

그러자 새빨갛게 익은 살갗이 빠르게 원상태로 되돌아왔다.

치유 능력이 웬만한 사제의 기적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다.

여전히 무표정인 앨리스가 물었다.

"아무래도 너를 살려서 붙잡는 건 힘들 것 같군. 네가 죽거나, 우리 모두 죽기 전에는 이 싸움이 끝나지 않을 거야. 그렇지?"

"지금까지 나를 살려서 붙잡을 수 있다고 믿었다는 게 좀 충격인데. 어지간히도 우습게 보였나보군."

"그래서 묻겠다. 하늘을 날던 배. 아마 너랑 관련이 있겠지? 대체 어디로, 무얼 하러 갈 생각이었던 거냐."

데일은 대답 대신 어깨를 붕 돌린 뒤. 말했다.

"혓바닥이 길어지는 걸 보니, 안 그런 척해도 겁을 집어 먹었나보군."

"...."

앨리스의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떨렸다.

얼음장 같던 무표정이 처음으로 깨진 것이다.

앨리스가 손을 펼쳤다.

그 신호에 맞서 병사 수십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주점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벗어난 순간 저들에게는 오히려 공간적 이점이 생겼다.

할버드와 창 따위의 장병기를 굳게 쥔 병사들이 데일을 빈틈없이 둘러쌌다.

하지만 데일은 차분히 말했다.

"마법사가 열 명이 넘는 걸 보면, 이것보다 더 강력한 화력의 마법도 가능했을 거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

"아마 너 스스로를 미끼로 사용했지만, 죽는 것만큼은 너도 껄끄러웠던 거겠지. 그래서 마법사들에게 화력을 조절하게 만든 거야. 딱 네가 살아 남을 만큼만."

자기 부하는 거리낌 없이 버렸지만, 자기 스스로는 지키려 했다는 걸까?

데일은 유쾌한 기분이었다.

비인간적이고 기계적이라 생각했던 상대가, 실은 그냥 어디서나 흔한 비겁자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말이다.

앨리스가 눈을 빛내며 스산하게 말했다.

"내가 너를 존중하는 지금, 적당히 입을 놀리는 걸 그만두는 게 좋을 거다."

"이미 겁을 집어먹은 순간 승패는 정해진 거다."

으레 싸움이란 먼저 겁먹는 쪽이 지는 법.

데일은 마력을 사용해 그림자 검을 소환해냈다.

"죽지 마라. 살려서 쓸 곳이 있으니까."

"...죽여."

"우와아아!"

스산한 명령에 병사들이 대열을 이루고 다가왔다.

데일은 마검을 들고, 힘껏 뛰어올라 적들의 한복판에 내려섰다.

곧장 주황빛이 서린 창과 할버드가 날아왔다.

퍽! 퍼걱!

갑옷에 흉터가 생겨났다.

신경 쓰지 않았다.

데일은 가장 가까운 병사의 몸에 건틀릿을 박아넣었다.

생기를 흡수했다.

그것만으로도 갑옷은 금세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 것도 모자라, 그림자가 뭉쳐 새로운 투구를 만들어냈다.

데일은 투구를 머리에 뒤집어썼다. 투구의 눈구멍에서 시퍼런 안광이 빛났다.

그리고. 학살이 시작되었다.

그날 앨리스는 깨달았다.

왜 흑기사가 전장의 공포라 불리우는지.

흑기사를 상대로 숫자로 밀어붙이는 게 얼마나 의미 없는 행위인지를.

'이게 대체....'

데일은 병사들 사이를 누비며 거침없이 마검을 휘둘렀다.

단단한 갑옷을 걸친 병사들은 갑옷째로 저 멀리 날아갔다.

마법사들은 마법을 외려 했지만, 아군 사이에 섞인 데일을 노리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설령 독한 마음을 먹고 마법을 시전하려 해도, 귀신같이 데일이 도끼나 단검을 던져 머리통에 박아주니.

전의가 꺾인 마법사들은 더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렇게 데일은 병사를 빠르게 줄여갔다.

보다 못한 앨리스는 그런 데일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데일이 오히려 피해 다니며, 병사들만을 죽이고 있었다.

'거슬리는 병사들부터 죽이려는 거야!'

앨리스가 사용하던 전략을 그대로 써먹는 느낌이랄까.

더 분통이 터지는 건, 저걸 대처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앨리스는 상대가 당연히 무식하고 살육에 미쳐 날뛸 거라 생각했지만, 데일은 오히려 지극히 이성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싸워나갔다.

그 모습에 앨리스는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흑기사가 어떻게 이렇게 냉정할 수 있는 거지. 어둠에 영혼을 팔은 작자가!'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전장에 서 있는 건 데일과 앨리스뿐이었다.

병사와 마법사들은 팔다리 하나쯤은 잘려,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더욱 앨리스를 경악케 한 건, 병사들의 숨이 모두 붙어있다는 거였다.

"왜 전부 살려둔 거지?"

"키우는 애완 밴쉬가 있다. 먹이로 줄 생각이다."

"애완 밴쉬?"

데일 나름의 농담에도 앨리스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진실을 깨닫고 탄식을 내뱉었다.

'아. 봐준 거였구나.'

죽이지 않고, 살아서 사로잡으려던 건 데일도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죽일 작정하고 싸웠으면 앨리스는 진즉에 목이 떨어졌을 것이다.

압도적인 실력 격차에 그녀는 허탈함을 느꼈다.

이윽고 데일은 앨리스에게 달려들었다. 마검과 그림자 검의 공세에서 앨리스는 서른 합을 버텼다.

서른 합. 그녀가 약하지 않다는 증거였다.

"적어도 파브리스보다는 낫군."

앨리스가 무너져 내렸다.

* * *

소식을 듣고 온 밴쉬들은, 병사들에게 달라붙어 그들의 영혼을 유린하고, 마력을 강탈했다.

"히히! 축제다!"

"달콤해!"

"역시 데일을 따라나서길 잘했어!"

데일의 강고한 행동에 불만을 보이던 밴쉬 자매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호들갑을 떨며 데일을 칭송했다.

반면. 마을 주민들은 두려움에 벌벌 떨며 바짝 엎드렸다.

밴쉬 무리가 산 자들을 희롱하는 끔찍한 모습 탓도 있지만, 이들은 데일을 황혼의 무리에게 팔아넘기려 하지 않았던가?

특히 주점 주인은 이를 딱딱 부딪칠 정도로 심하게 떨고 있다.

"사, 사, 사, 살려 주십시오. 아니. 저는 죽여도 좋으니 마을 사람들만이라도...!"

"일어나시오."

데일은 직접 주인을 일으켜주었다.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오. 자기 사람을 지키는 용기. 나는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소."

"겨, 경. 하다못해 받은 돈이라도 돌려드리겠습니다."

"넣어두시오. 나는 별로 쓸 일도 없소."

어차피 세상이 망하면 화폐 같은 건 무가치하다.

그리고 데일은 이제 돈이 급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달랐다. 주점 주인이 눈을 뚝뚝 흘렸다.

"흐, 흐흑. 감사합니다. 이 못난 놈은 경을 팔아넘기려 했는데, 이리 자비를 베풀어주시다니...."

"그만 우시오. 그것보다 아까 하던 얘기를 마저 하고 싶소. 마녀와 엘프 전사가 왔었다고?"

"예? 예. 그렇습니다."

주점 주인과 마을 주민은 앞다투어 자기가 본 걸 설명했다.

마녀에 대한 묘사를 들은 데일은 확신했다.

'엘레나랑 프라우가 맞군. 근데, 마음에 안 든다고 사람을 불태우다니. 엘레나 성격이 많이 나빠졌군. 사춘기인가?'

다소 오해가 있었지만, 엘레나의 성정이 불같아진 건 사실이었다.

어쨌건.

엘레나의 행방을 알게 된 건 참으로 운 좋은 일이었다.

언제 봉변을 당할까 걱정하던 참 아닌가.

"그래서. 그 둘이 어디로 향했소?"

"그건 저도 잘...."

"애초에 저희랑은 말을 거의 안 섞었던지라."

모두가 곤란해하고 있을 때.

한 순박해 보이는 사내가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아! 제가 우연히 옆을 지나가다가 두 사람이 대화하는 걸 들었습니다!"

"어디로 간다고 말을 했나?"

"아, 예. 멀찍이서 들려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 근방의 악마를 잡으러 간다고 했었습니다!"

악마라는 이름에 데일은 미간을 좁혔다.

마녀

* * *

데일이 다시 한번 물었다.

"악마라니. 그게 확실한가?"

"그렇습니다! 제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이 근방에 악마가 있나?"

"그게...."

주점 주인이 조금 눈치를 살피다 말했다.

"여기서 북쪽으로 가면 그리 높지 않은 산에 고성이 하나 버려져 있습니다. 두 달쯤 전에 악마가 그곳에 터를 잡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있긴 합니다만."

"악마 이름이 뭐지?"

"파, 파리한? 파레힌?"

"파르훈을 말하는 거군."

"아, 예. 맞습니다! 분명 그런 이름이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고약한 놈이라고 들었습니다! 처음 그놈이 고성에 자리 잡았을 때는 저희도 밤잠을 설쳤지만, 다행히 자기 둥지에 틀어박혀서 나오지는 않더라고요."

'귀찮게 되었군.'

데일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파르훈.

전투 능력 자체는 악마들 중에서는 떨어지는 편이다.

하지만 녀석의 특기는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것.

정신력 능력치가 낮은 상태로 파르훈을 마주하면, 자칫 놈의 하수인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근데 엘레나는 최근 심적으로 불안정하지 않던가?

데일은 불안해졌다.

"엘레나가 이곳에 들른 게 언제지?"

"엘레나?"

"네가 말한 마녀 말이다."

"아. 그러니까 그게...."

"닷새 전이지?"

"어어. 닷새 전이 맞아."

주민들이 너도나도 말을 보탰다.

엘레나는 닷새 전 이 마을에 들렀고, 해가 지기 전에 북쪽을 향해 떠났다.

'악마의 둥지까지 가는데 하루가 걸렸을 거고, 싸움을 앞두고 체력을 비축했겠지. 그러면 다음 날 싸웠다고 치면....'

적어도 엘레나가 악마와 맞붙은지 이삼일은 지났다는 것.

어쩌면 지금 엘레나는 궁지에 몰려 있을 수도 있다.

'서둘러야겠군.'

궁지에 몰려있다면 도와야 하고, 사로잡혀 있다면 구출해야 한다.

데일은 희희낙락하는 밴쉬 자매들에게 명령했다.

"야가브. 잠시 뱃머리를 돌린다."

"음? 어디로?"

이야기를 전혀 듣고 있지 않던 야가브가 되물었다.

"북쪽. 고성에 악마가 산다. 그놈을 처리하고 간다."

"아하. 그런 거라면야. 출항이다!"

"예!"

우렁차게 대답한 밴쉬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유령선이 돛이 쫙 펼쳐졌고, 영체화 마법을 통해 녹색 빛에 뒤덮였다.

데일은 떠나기 전에 마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대로 외진 곳으로 도망치시오. 산이든. 숲이든."

"예?"

"여기서 황혼의 병사들이 수십이나 죽었소. 분명 추가 병력을 보낼 것이오."

황혼의 병사들은 그들의 동지가 처참하게 죽은 흔적을 발견할 것이다.

그럼 그 분노는 어디로 향할까?

눈치 빠른 주점 주인은 상황을 눈치채고 얼굴이 하얘졌다.

"아. 그, 그렇군요."

"시간이 얼마 없소. 많아야 이틀? 그 안에 주민들을 데리고 최대한 멀리 도망쳐야 하오."

"하지만... 저희가 도망칠 수 있을까요?"

"내가 가짜 흔적을 만들어주겠소."

데일은 일부러 남겨둔 시체들을 향해 오른손바닥을 펼쳤다.

안광이 번뜩이고. 마력이 휘몰아쳤다.

이내, 시체들은 비척비척 일어났다.

"그어어."

"그으."

데일은 명령을 내렸다.

"각자 흩어져서, 힘이 다할 때까지 최대한 멀리 움직여라."

"그어어."

강제로 되살아난 병사들이 비척비척 걸어갔다.

이제 태양도 뜨지 않는 시대니. 저들은 상당히 오랫동안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병사들이 움직이며 만들어낸 흔적은 주민들이 도망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경께서는 저희 마을의 은인이십니다!"

"저도 이제부터 밤의 신도가 되겠습니다!"

주민들이 바닥에 엎드리며 깊은 감사를 표했다.

주점 주인이 대표로 말했다.

"무언가 보답을 해드리고 싶은데, 저희가 가진 게 없어서 이 돈이라도...."

"그거, 내가 준 돈 아니오?"

"흠흠. 그건 그렇습니다만."

"먹을 거는 어떻습니까?"

"삶은 감자라도 좀."

주민들은 앞다투어 작은 것 하나라도 데일에게 선물해주려고 했다.

개중에는 덜자란 꼬맹이들도 들풀 따위를 따와 데일에게 내밀었다.

"기사님. 감사합니다!"

"...."

아무리 데일이라도 이것까지 거절할 수는 없었다.

결국. 데일은 주민들의 선물을 한 아름 받아들고, 아이에게서 받은 들꽃은 조심히 주머니에 넣었다.

이윽고 출항 준비가 끝났다.

데일은 배 위에 올라탔다.

야가브가 핀잔을 주었다.

"뭔 쓸모없는 걸 그렇게 이것저것 받았어."

"신경 꺼라."

데일은 삶은 감자를 와삭와삭 씹어먹었다.

"우리는 딱히 음식을 먹을 필요도 없는데, 굳이 꾸역꾸역 입속에 집어넣는 이유가 뭐야?"

"성의라는 게 중요한 거다."

"정말이지. 너는 참 이상한 놈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야가브는 데일에게 영체화 마법을 걸어주었다.

이윽고 배가 하늘로 두둥실 떠오른 뒤,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아래에서는 주민들이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게 흐릿하게 보였다.

아마 환한 미소를 짓고 있겠지.

그 모습을 보며, 데일은 바로 얼마전에 야가브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바보같이 살지 말라고 했던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저기 있지 않은가.

내심 마음이 복잡하던 데일은 역시 자기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등을 기댔다.

이제 해결해야 할 건 하나.

'부탁이다 엘레나. 제발 살아만 있어라.'

위기에 빠져도 좋고, 놈의 지배를 받아 하수인이 되어도 좋다.

살아만 있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살아만 있으면.

* * *

엘레나와 프라우는 악마가 산다는 고성의 출입구에서 멈춰 섰다.

"여긴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공주님."

"흐으음."

확실히, 악마의 둥지라는 얘기를 들으니 이 허름한 고성이 무언가 으스스해보인다.

막상 와보니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소름 끼칠 정도로 고요한 분위기 역시 꺼림칙함에 부채질한다.

'믿을 만한 동료들이 있었다면 두렵지 않았을 텐데.'

마법사는 필연적으로 주문을 외우는 동안 무방비해진다.

그 특성상 상대의 표적이 되는 경우가 많고, 위험에 빠질 일도 많다.

괜히 마법사들이 믿음직한 호위들을 옆에 두고 다니는 게 아니다.

엘레나에게도 그런 호위가 없다. 아니, 있기는 한데... 확실히 실력은 뛰어난데... 썩 믿음직스럽지가 않다.

"흐흐. 오늘 제 아이들이 피를 가득 먹겠네요."

엘레나가 질린 얼굴로 말했다.

"제발 자기 무기를 '아이들'이라고 표현하는 건 그만둬줘요. 변태 같이 웃지도 말고요."

"변태라니. 말씀이 심하시군요. 그나저나 왜 여기서 멈춰 서신 건가요? 혹시 겁먹으신 건가요?"

프라우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엘레나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녀는 대답 없이 고성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자, 잠깐 기다리세요!"

프라우가 급히 엘레나의 뒤를 따랐다.

고성은 조용했다.

반쯤 무너져 내린 옛 왕국의 장식물과 독특한 건축구조가 시선을 잡아끌었지만, 살아있는 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아무도 없는 장소 같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엘레나는 이 성 어딘가에 숨어 있는 악마의 사악하고도 꺼림칙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놈 역시 엘레나와 프라우가 들어온 걸 알아챘을 것이다.

그렇다면 악마의 의도는....

'더 안쪽으로 들어오라는 건가?'

"계속 가죠. 경."

"...."

대놓고 함정이다.

하지만 알면서도 발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엘레나와 프라우는 한참을 걸었다.

복도와 빈방을 여럿 지나쳤고.

마침내 커다란 문 앞에 도착했다.

고성의 옛 주인이 살았던 공간일 것이다.

엘레나는 이 문 너머에 악마가 있다고 확신했다.

"이 앞이에요. 대비하세요."

"...."

엘레나가 앞으로 다가가자, 커다란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넓은 홀이 보였다.

엘레나는 홀 안으로 발을 들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어?'

분명 이 안에 악마가 있는 게 확실하건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엘레나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조심하세요 경. 놈이 무언가 꾸미고 있습니다. 경?"

"...."

프라우가 대답이 없다.

엘레나는 그제야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이 엘프, 너무 조용하다.

분명 평소였다면 제발 닥쳐달라고 해도 떠벌거렸을 텐데 말이다.

식은땀이 한줄기가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엘레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프라우를 보았다.

프라우다. 분명 프라우가 맞았다.

한데... 뭔가 꺼림칙하다.

"프라우."

"왜 그러십니까 공주님."

프라우답지 않은 부드러운 음성.

엘레나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경 아이들 이름이 뭐였더라?"

"하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독신이라 아이가 없습니다."

엘레나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어느샌가 튀어나온 불덩이가 그대로 프라우를 덮쳤다.

콰아아아!

프라우의 몸이 연기가 되어 흩어져버렸다.

'대체 언제부터 바뀐 거지?'

그 다음 순간.

홀 반대편에 나 있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수십 명의 전사가 뛰어들어왔다.

그리고 전사들은 모두 프라우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겁 없는 친구들! 이 파르훈의 성에 어서 오게!"

악마 파르훈의 중후한 목소리가 온 공간을 쩌렁쩌렁 울렸다.

하지만 파르훈의 본체는 보이지 않았다.

파르훈은 감탄을 터트렸다.

"이거. 엄청난 마력이 느껴지길래 웬 괴물이 오나 했더니, 이렇게 작은 소녀라니! 놀랍군!"

"그런 소녀한테 겁먹어서 본체도 안 드러내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

"하하! 그렇게 도발해봤자 소용없네!"

"...프라우 경은 어떻게 한 거야."

"이 프라우라는 이름의 엘프 전사는 정말이지 놀랄 정도로 유혹에 약하더군! 거의 어린이 수준이었네! 아가씨는 제법 신분이 높아 보이는데, 전사의 수준을 보니 그리 훌륭한 집안은 아닌 모양이군."

악마의 신랄한 말에 엘레나는 할 말이 궁했다. 프라우가 좀... 유혹에 약한 사람은 맞으니까.

하지만 프라우가 욕먹는 건 참아도, 가문을 모욕하는 건 참을 수 없다.

엘레나의 손짓하자 물방울이 맺히더니 거대한 용의 형상이 되었다.

엘레나는 이번에는 반대로 다시 손짓했다. 수룡의 몸에 번개가 타닥이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죽여버릴 수 있는 강력한 마법.

하지만 그 놀라운 기예에도 파르훈은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놀리듯이 말했다.

"훌륭하군! 우리들에 비교해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마법 실력이군! 하지만 괜찮겠나? 이 중에는 네 동료가 섞여 있네! 자네 스스로 소중한 동료를 죽이고 싶은 겐가?"

"윽."

엘레나가 주춤하자, 껄껄 웃음을 터트린 악마가 외쳤다.

"과연 이 중 누가 진짜 동료일까! 어디 한번 열심히 찾아보게!"

프라우의 얼굴을 한 악마의 하수인이 엘레나에게 달려들었다.

엘레나는 수룡을 불러들여 하수인들을 튕겨내려 했다. 하지만 하수인들은 맹목적으로 달려들었고, 엘레나는 마법의 출력을 조절할 수밖에 없었다.

자칫 잘못했다가 프라우를 죽여버리면. 그때는 정말로 마음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상대는 악마다.

손속에 사정을 두며 상대할만한 적이 아니다.

사위에서 밀려드는 적에 상처가 하나둘 늘어나고.

악마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엘레나를 괴롭혔다.

"그래! 네 마음속 감정이 보이는구나! 작은 소녀여! 너는 슬퍼하며 분노하고 있구나! 소중한 사람을 모두 잃고, 그 소중한 사람을 앗아간 존재에게 복수하지 못하는 현실이 화가 나는 모양이지!"

"...."

"하지만 네가 진정으로 증오하는 건 너 자신이겠지! 소중한 사람들이 죽어갈 때 아무것도 하지 못한 무능한 자신을! 가만히 지켜만 보던 스스로가 미워서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닥쳐."

"대륙을 떠돌며 복수하고 다니는 건 죽은 이에 대한 속죄인가? 하지만 엘레나. 작은 소녀여. 너도 알고 있지 않는가? 네가 진정으로 복수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악마의 목소리가 엘레나의 귓가로 파고들어 영혼을 뒤흔들었다.

귀라도 막고 싶은 기분이지만, 달려오는 하수인들을 상대하는 것만도 벅찼다.

"모든 건 네 탓이었다. 그 사람이 죽은 건 모두 네 탓이었단 말이다. 네가 약했기 때문이다."

엘레나는 이를 악물고 달려오는 하수인을 불로 지져버렸다.

마법이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엘레나의 마음의 평정이 깨졌다는 의미다.

이대로 가다가는 진짜 프라우를 죽여버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엘레나의 마음은 버틸 수 없다.

아니. 어쩌면 악마는 그걸 노릴지도.

"여전히 네가 복수해야 할 자들이 살아있다. 모두를 버린 무능한 황제. 당연하다는 듯이 그의 보호를 받으며, 정작 그의 죽음에도 별로 슬퍼하지 않는 무능한 인간들. 그리고 황혼. 소녀여. 복수를 원하나?"

"...."

엘레나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 눈이 탁 풀렸다.

달려들던 하수인도 걸음을 멈추고, 그 하수인들의 몸에서 연기가 빠져나와 뭉치고 얽히더니 사람 얼굴 같은 형상을 이루었다.

이 연기야말로 악마 파르훈의 본 모습이다.

파루훈이 속삭였다.

"나의 것이 되어라. 스스로를 죽이고 나를 섬겨라. 그리하면 네 복수를 이룰 힘을 주겠다."

파르훈이 연기로 이루어진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잡아라."

멍한 표정의 엘레나도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 * *

"저기네! 고성!"

밴쉬 야가브가 쾌활하게 소리쳤다.

저 아래에는 반쯤 무너져내린 고성이 있었다.

"저기가 악마가 산다는 고성...."

데일은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고요한 거지?"

3군단

* * *

고성은 고요했다.

아무리 유심히 살펴봐도, 어떠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악마는 강대한 존재고, 필연적으로 사악하고 강력한 기세를 뿜어낼 수밖에 없다.

숨으려 해도 쉽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고성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텅 비어버린 것 같다.

혹시 잘못 찾아온걸까?

하지만 이 근처에 고성이라고는 이곳밖에 없다.

데일은 밴쉬들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흩어져서 누가 있는지 찾아봐라. 파르훈은 정신 계열 공격을 하니까 조심하고."

"알았어!"

밴쉬들이 흩어졌다.

데일은 복도를 따라 성큼 걸었다.

빈방을 여럿 지나쳤고, 마침내 고성의 옛 주인이 살았을 법한 큰 홀을 발견했다.

한데. 홀 문이 열려 있다.

데일은 마검을 뽑아 들고 홀 안으로 들어갔다.

홀 안은 난장판이었다.

'화려하게도 싸웠군.'

강력한 불꽃이 오래된 벽돌을 그슬린 흔적이 가득했고, 기둥이나 지붕 따위도 무너져 내렸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흔적이다.

그리고 성 하나를 무너트릴 압도적인 화력을 낼 수 있는 이는 몇 없었다.

'엘레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악마는 또 어디 갔고?

데일이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그때.

야가브와 자매들이 모여들었다.

"데일! 악마 녀석을 찾았어!"

"뭐?"

밴쉬들이 하늘을 유려하게 비행하며 데일의 앞에 내려앉았다.

그녀들은 원을 이루었는데, 그 원 한가운데에 웬 자그마한 연기가 흐릿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밴쉬들은 그 연기를 중심으로 빙빙 돌며 조롱을 내뱉었다.

"깔깔깔! 이게 그 악마라고?"

"완전 조그맣잖아!"

"이런 추한 모습으로 살고 싶었을까? 나였으면 그냥 죽었을 거야!"

"부끄러운 줄 알아!"

"...."

가운데에 있는 악마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그저 몸만 부르르 떨었다.

데일이 자매들을 뒤로 물리고 악마에게 다가갔다.

"파르훈?"

자기 이름을 부르자, 파르훈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데일을 발견하고는 더더욱 몸을 움츠렸다.

"데, 데일? 악마 살해자 데일?"

"그런 호칭으로 불리던 때도 있었지. 파르훈, 맞나?"

"...그래."

"대부분의 힘을 잃었군."

파르훈이 입을 꾹 다물었다.

"엘레나랑 싸운 거군? 거기서 패배한 거고."

"...그 마녀를 아나? 아니. 그렇군. 마녀가 분노한 이유가 그러고보니... 과연 그렇게 된 거였나."

혼자 무언갈 깨달았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파르훈에게 데일이 물었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군. 설마 네가 엘레나한테 질 줄은 몰랐는데?"

"날 아나?"

"잘 알지. 정신 공격이 특기지 않나? 그리고 주문을 외울 때 집중해야 하는 마법사들은 필연적으로 정신 공격에 약하지. 말해봐라. 패배했는데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파르훈이 수치심을 느끼며 대답했다.

"이런 일이 있을까 봐 미리 영혼을 쪼개놓았다. 늘 최악을 대비해야 오래 사는 법이니."

"자기 영혼을 쪼갤 수가 있나?"

데일은 그 말에 흥미를 보였다.

언젠가 선배 흑기사 케인에게서 산 채로 영혼을 뜯어내는 요령을 배웠던 것처럼.

이 악마아게서도 쓸만한 기술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자세히 말해봐라. 엘레나랑 어찌 싸웠고, 영혼은 어떻게 쪼갰고, 후에 엘레나는 어디로 갔는지. 아. 옆에 엘프 전사도 같이 있지 않았나?"

데일의 거듭된 질문에 당황하던 파르훈의 얼굴에 이내 미소가 어렸다.

기회를 잡은 자 특유의 미소였다.

"아. 그래. 얼마든지 말해줄 수 있지. 대신. 나랑 거래하자고."

"흠?"

"내 목숨을 보장한다면 모든 걸 사실대로 털어놓겠다. 궁금하지 않아? 나는 많은 걸 알고 있거든. 그 괴물 같은 마녀를 지금 막지 않으면 큰일이 벌어질 거라고."

"...."

"어때. 거래를 받아들이겠나?"

데일은 무감정한 눈빛으로 파르훈을 응시했다.

"거래. 말이지?"

"그래. 당연히 받아들일... 커억!"

데일은 파르훈에게 양손을 뻗었다.

파르훈이 급하게 몸을 빼려했지만, 이미 데일은 악마의 영혼을 지배해 천천히 몸속으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힘을 잃은 악마를 삼키는 건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파르훈이 미친 듯이 발버둥을 치며 외쳤다.

"컥. 그, 그마안! 사, 살려줘!"

"나는 악마랑 거래 안 해."

이윽고. 파르훈의 혼이 전부 데일의 몸속으로 빨려들어왔다.

악마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데일의 영혼을 쩌렁쩌렁 울렸다.

데일은 머리를 부여잡고 잠시 마음을 안정시켰다.

머지않아 파르훈의 기억이 눈앞에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 * *

"내 손을 잡아라."

악마 파르훈은 손을 내밀었다.

눈이 탁 풀린 엘레나가 손을 붙잡으려 했다.

둘의 손이 마주치는 순간. 모든 건 끝난다.

엘레나의 정신은 파르훈에게 지배당해, 평생을 그의 꼭두각시로 살아야 할 것이다.

파르훈은 약속한 대로 복수는 이뤄줄 생각이었다.

그 역시 황혼을 너무너무 싫어하니까.

'내 힘을 빼앗아간 황혼 놈! 이 마녀라면 너한테 능히 복수할 수 있겠지!'

둘의 손이 서서히 맞닿으려던 그때.

텁.

억센 손이 엘레나의 팔목을 붙잡았다.

"?"

파르훈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곳에 있는 건 프라우였다. 진짜 프라우.

여전히 흐리멍덩한 눈을 한 프라우가 엘레나를 붙잡고 있었다.

"공. 주님...."

파르훈은 경악했다.

'정신을 잃었는데도, 본능적으로 주군을 지킨다는 건가?'

그는 이 엘프 전사를 너무 얕보고 있었다.

짐승 같은 감각의 전사는 본능적으로 위협을 알아차리는 법이니.

프라우가 팔을 붙잡자 엘레나도 퍼뜩 정신을 차렸다.

"프라우 경."

정신이 멍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상황을 곧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제 엘레나는 마음껏 날뛸 수 있다는 걸.

화아아!

이윽고 거대한 불꽃이 사방에 피어올랐다.

불꽃은 한데로 뭉쳐 거대한 날개를 지닌 용의 형상을 이루었다.

"무, 무슨 이 정도의 마법을!"

"너 때문에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어. 악마."

불꽃으로 이루어진 용이 거대한 날개를 파닥이며 위로 솟구쳐 올랐고.

이내 그 뜨거운 숨결을 내뱉었다.

화아아아!

불꽃의 숨결이 온 실내를 메꾸었다.

커다란 것도. 작은 것도.

단단한것도. 약한것도.

형체가 있는 것과 없는 것도.

열기는 모든걸 평등하게 소멸시켜 버렸다.

머지 않아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엉망이 된 실내가 보였다.

불꽃에 그슬려 버린 벽돌과 무너진 기둥.

처참했지만, 놀랄 정도로 적은 피해이기도 했다.

화력을 생각하면 성이 통째로 날아갔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만큼 엘레나의 마법 제어가 무시무시한 수준에 닿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경. 고마워요. 덕분에 악마의 꼬드김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아닙니다 공주님.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럼 이제 좀 떨어져 주시겠어요?"

엘레나의 허리를 붙잡고 찰싹 달라붙어 있던 프라우가 큼큼 헛기침하며 떨어졌다.

"마법 실력이 더 늘으신 겁니까?"

"그럴지도요."

엘레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핏줄에 흐르는 마법적 재능은 실로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바이만 왕가의 모두가 엘레나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을 것이다.

불과 몇 년전까지 엘레나 역시 조금 뛰어난 마법사에 불과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어째서 이렇게 빠른 성장을 보인걸까?

엘레나는 그 답을 찾았다.

'강해질 이유가 있으니까.'

강해져야만 하는 이유.

힘에 대한 끝없는 탐욕.

오로지 마법에만 몰두해 수련하는 노력.

엘레나는 더 큰 힘을 원했고, 그녀의 핏줄과 재능에는 그걸 이룰 힘이 있었다.

"성취는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힘에 너무 취하진 마십시오. 마법은 결국 영혼과 정신으로 제어하는 힘. 단단하지 못한 마음으로 너무 강력한 마법을 부리면 스스로를 삼켜버릴 수 있습니다."

"아버님이 하던 것과 비슷한 말을 하는군요."

"바이만 왕가는 올바른 마음을 지니지 못한 마법사가 힘에 취해 어떤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많이 봐왔으니까요."

프라우는 공주의 호위기사로서 충언을 올렸다.

하지만 그 말은 엘레나의 마음에는 닿지 못했다.

"가죠. 언제까지 여기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이 간악한 악마는 감히 내 마음을 홀리려 했지만, 몇 가지 깨달음을 주었죠. 내가 복수해야 할 대상이 악마뿐만은 아니라는 걸."

"그럼?"

"황제에게 가야겠어요. 우리 왕국이 무너지는 걸 구경만 한데다 이레네를 버리고 도망친 비겁자를 제 손으로 죽이겠어요."

과연 혼자서 마탑과 기사들을 꺾고 황제를 죽일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거다.

목숨이 위험할 거고.

하지만 엘레나는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 * *

데일은 얼추 상황을 파악했다.

파르훈은 기억은 극히 일부만이 남아 있을 뿐이지만, 엘레나의 행선지는 알 수 있었다.

'황제.'

지금쯤 동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아직 도착은 안 했겠지. 어디쯤일까?'

황제의 아래에는 3군단이 있고, 개인이 군단에 맞붙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다.

'사고치기 전에 어서 가야겠군.'

데일은 밴쉬 자매들을 데리고 고성을 나왔다.

배에 올라타 빠르게 3군단을 향했다.

엘레나보다 먼저 도착해야 귀찮은 일을 막을 수 있다.

그렇게 3일을 꼬박 비행한 끝에 저 멀리 요새가 보이기 시작했다.

악마에게 맞서 수십 년간 버텨온 인류의 방패.

3군단이다.

그리고 그 3군단 위에는 이레네가 둥둥 떠있었다.

"여기서 내려간다."

"그냥 요새까지 가면 안 돼?"

"마법사들에게 요격당하고 싶나?"

야가브는 순순히 배를 내렸다.

땅에 발을 디딘 데일이 말했다.

"너희들은 여기서 잠시 기다려라."

"왜에. 우리도 황제 보고 싶어."

"어쩌면 우리를 반기지 않을 수도 있어."

이들은 황제를 섬기는 자들.

저들은 데일을 불청객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일단 대화를 해봐야 한다.

데일은 일단 투구를 벗었다.

이제는 맨 얼굴을 보이는 게 첫 만남의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준다는 걸 알았다.

데일은 요새를 향해 걸어갔다.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고, 종말이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 때문일까?

피난민들이 요새의 정문 앞에 줄을 서 있었다.

세상이 위험에 빠지면 가장 안전한 곳이 바로 이런 요새일 테니까.

검문을 맡은 경비병들은 피난민들을 깐깐하게 조사했다.

"요새 내에 네 신원을 보증해줄 사람이 있나?"

"어, 없습니다요."

"네가 황혼이나 악마의 하수인이 아니라고 증명할 수 있나."

"저, 저는 결단코 악마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건 모를 일이지. 결국, 증거는 없다는 거잖아?"

"아이고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요."

"흠. 글쎄. 성의를 좀 보이면 못봐줄 것도 없지."

"...저희는 가난한 농부입니다요. 고향을 떠난 저희가 모은 재물이 어딨겠습니까."

"그래? 당장 끌어내!"

"아악! 죄송합니다!"

경비병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피난민을 붙잡고 저 멀리 던져버렸다.

당연히 폭력은 덤이었다.

우악스러운 광경이었지만 주위 사람들은 심드렁했다.

이제 이런 일이 일상의 일부처럼 흔하다는 증거다.

'군인들이 부패했군. 여기도 상태가 좋지 못한가 보네.'

검문을 맡은 경비병이 다소의 금품을 챙기는 거야 관습적으로 허용되는 부분이지만, 저건 선을 넘었다.

그만큼 3군단의 상황이 개판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설득이 될까 모르겠군.'

조금 불안했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일단 부딪혀보는 게 맞았다.

데일은 성문을 향해 걸어갔다.

"아이씨, 어떤 새끼가 새치기를...!"

"미안하다. 급한 일이라 양해 좀 부탁한다."

"아, 예. 바쁘시면 어서 가셔야죠."

기다리던 이들은 기꺼이(?) 줄을 비켜주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비켜서자 경비병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데일을 보고는 굳어버렸다.

"흐, 흑기사?"

"데일이다. 대주교 에스델 성하의 전령으로서 찾아왔다. 3군단장이랑 대화를 좀 했으면 싶은데."

"...흑기사 데일? 맞으십니까?"

"맞으니까 안에 소식을 전해줬으면 좋겠는데."

"아, 알겠습니다!"

데일의 이름값은 작지 않았다.

병사가 다급히 성안으로 들어갔다.

피난민이나 병사들이나 모두 데일의 이름에 웅성거렸다.

"그 데일?"

"생각보다 잘생겼네. 괴물처럼 생겼을 줄 알았는데"

"죽다 살아났다는 영웅이잖아."

"그런 분이 이곳에 왔다고? 우리 군단에 힘을 보태주시러 온 건가?"

"차라리 지금 군단장 대신 우리를 지휘해주면...."

데일은 사람들이 뭐라하던 그저 조용히 서 있었다.

부정적인 관심도 긍정적인 관심도 그에게는 달갑지 않았다.

머지 않아 병사가 다시 나왔다.

그의 뒤에는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척척 걸어나온 뒤 데일을 둘러쌌다.

스릉.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데일은 팔짱을 끼며 물었다.

"이게 무슨 짓거리지?"

유독 화려한 갑옷을 입은 기사가 외쳤다.

"데일! 너를 악마와 내통하고 반란을 꾸민 체포하겠다!"

데일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건 또 뭐야.'

3군단

* * *

기사들의 날카로운 칼날이 번들거렸다.

그들의 노골적인 적의와 살의가 데일을 자극했다.

몸 안의 본능이 이 자들을 죽이라 외쳤다. 하지만 데일은 참았다.

일단 이야기를 들어봐야 했다.

"다짜고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네 혐의를 부정하는 거냐?"

"정말 몰라서 하는 소리다."

"하! 뻔뻔도 하군!"

화려한 갑옷을 입은 기사가 큰 소리로 외쳤다.

"첫째! 언데드를 비롯한 사악한 자들을 모아 그 의도가 의심스러운 단체를 조직한 죄!"

밤의 군단을 말하는 걸까?

사실, 이 점을 찔러 들어오면 할 말이 궁하긴 했다.

리치, 도적, 언데드 병사들, 그리고 이제는 밴쉬까지.

누가 봐도 건전한 단체는 아니지 않은가?

"둘째! 4군단장 베른바르트를 비롯해 불순한 무리들과 어울리며 폐하에 대한 반란을 꾸민 죄!"

반란? 내통? 베른바르트?

이레네가 무너지고 4군단이 완전히 황제에게서 돌아서긴 했다.

그걸 반란으로 여긴 걸까?

"마지막으로 황혼과 내통해 이레네를 불구덩이에 빠트리고, 명예롭던 황실 기사단장 미하일 경을 죽음에 이르게 한 죄! 이래도 네 죄가 없다고 주장할 셈이냐!"

"잠깐. 다른 건 몰라도 마지막 껀 터무니없는 모함인데."

"시끄럽다! 변명은 재판장에 가서 해라! 모두 저놈을 제압해!"

"예!"

"...."

"...."

"뭐 하는 거야. 제압하라고!"

"...예."

기사들이 데일을 앞에 두고 우물쭈물거렸다.

막상 칼을 뽑긴 했는데, 그 소문의 흑기사를 직접 상대하려니 겁이 났다.

물론. 둘러싸인 데일은 어처구니없는 심정이었다.

'겁을 집어먹었다고? 이런 것들이 기사?'

데일은 방금 기사들이 대화를 나누던 걸 곰곰이 되짚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놈들. 귀족이 아닌데.'

귀족과 평민을 구분하는 가장 큰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억양이다.

아무리 평민이 비싼 옷을 입고 화려하게 꾸려도, 평생에 걸쳐 익숙해진 억양은 어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평민이 기사가 되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지만, 절대 흔하지는 않았다.

근데 이 기사들은 전부 평민으로 보였다.

'그러고 보니 황제는 예전에도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평민들을 써먹곤 했지.'

그때 황제가 겉으로 표방한 건 실력주의였다.

문제는 이 기사들이 실력 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껏해야 비싼 갑옷을 입은 용병 정도일까.

솔직히 말해.

데일 혼자서 전부 쓰러트릴 수 있다.

'어떻게 할까.'

마침내 상관의 닦달에 못 이겨 기사들이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이기는 건 쉽다.

하지만 그 이후의 일도 생각해야 했다.

'어쩌면 내가 이 기사들을 죽이길 노리는 걸지도 모르겠군.'

앞의 혐의는 터무니없는 모함이라 주장할 수 있지만, 여기서 기사를 한 명이라도 죽이면 그건 현행범이다.

완벽한 명분이 되는 것이다.

"나는 대주교 성하가 보낸 전령이다. 전령을 이렇게 대하는 법이 있나?"

"하! 밤의 여신을 섬기는 흑기사가 대주교의 전령이라고? 농담이라면 제법 웃기구나!"

"여기 대주교의 인장이 찍힌 편지도 들고 왔다."

"당연히 조작된 거겠지!"

기사는 보지도 않고 외쳤다.

아니, 일부러 보지 않으려 하는 기색이었다.

"이러는 이유가 뭐지?"

"죄를 지은 자를 잡아들이는 데에 이유가 필요한가?"

"군단장을 만나고 싶다."

"군단장께서는 너 같은 놈과 대화를 나눌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

"...."

"억울한 게 있으면 재판을 받도록. 아니면, 역시 찔리는 게 있나 보지?"

완고한 태도.

잠시 고심한 데일은 이내 마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좋다. 순순히 끌려가주마."

"!"

눈치만 보던 기사들이 후다닥 달려들었다.

"더, 덮쳐!"

"밧줄 가져와!"

"밧줄로 안 돼! 쇠사슬이 필요해!"

기사들이 달려들어 쇠사슬과 밧줄로 과할 정도로 꽁꽁 묶어놓았다.

그리고는 얼굴에 자루까지 뒤집어씌워 시야를 가렸다.

"감옥 가장 깊숙한 곳에 집어넣어라. 시민들에게 보이지 않게 철저히 가리고."

"예!"

"그리고 입단속도 철저히 해!"

기사들이 데일을 마차에 실은 뒤 끌고 갔다.

데일이 완전히 제압되었다 여긴 기사들이 겨우 한시름 놓았다.

"사, 살았다."

"시발 새끼. 지도 직접 잡기 쫄리니까 우리 시키는 것 봐."

기사들이 그들의 상관을 욕하든 말든.

데일은 정신을 집중해 바깥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마차는 지금 요새의 한복판을 나아가고 있었고, 거리에는 시민들이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소문 들었어? 흑기사 데일 경이 이 요새에 왔대."

"저, 정말? 내가 아는 그 데일 경이 맞아?"

"그렇다는데. 봤다는 사람이 엄청 많아."

"그럼 당장 가서 환영식을 해야지! 영웅이신데!"

"그게... 기사들이 잡아갔다나 봐."

"뭐?"

"데일 경이 황혼이랑 내통했다느니 뭐니 하는 걸 아직도 주장하더라고."

"빌어먹을 황제 새끼."

"쳐죽일 놈."

"거기!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헛소문을 퍼트리면 엄벌 대상이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기사의 일갈에 시민들이 흩어졌다.

데일은 계속해서 시민들의 소리에 집중했고, 방금 전과 비슷한 얘기가 도시 이곳저곳에서 들렸다.

'황제에 대한 민심이 최악이군.'

이제 상황이 조금씩 윤곽이 잡히기 시작한다.

그나마 황제에게 충성하는 3군단이지만, 시민들의 입까지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황제가 이레네를 버리고 도망친 것도 전부 소문이 났을 터.

황제의 권위와 민심은 최악이었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데일이 동료와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 악마 두르핀과 동귀어진했다는 소문이 돌며 온 대륙에 그 명성을 퍼트렸다.

그리고 죽음에서 돌아왔다는 소문이 퍼지며, 그는 영웅에서 전설이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황제보다도 데일을 칭송했다. 그게 황제에게는 몹시 거슬렸을 것이다.

'그래서 뒤집어씌운 거군.'

난공불락의 이레네가 그냥 무너질 리 없다.

그 강력한 기사단장 미하일이 죽을 리 없다.

필시 배신자가 있을 것이다.

그 배신자는 바로 흑기사다.

흑기사는 본디 언데드의 본능을 가진 자로, 사악하고 잔인하다.

그동안 데일의 연기에 모두가 속았고,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데일이 뒤통수쳤다.

대충 그런 소문을 퍼트려 데일의 권위를 깎아내려 했을 터.

하지만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순진하게 저 얘기를 믿는 이들도 소수나마 있었지만, 대부분은 황제의 주장을 불신했다.

그러는 와중에 데일이 3군단을 방문했으니, 저들로서도 당황했으리라.

'내가 온 걸 숨기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겠군.'

대륙의 영웅이 사로잡혀 있다는 말이 퍼지면,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다.

'뭐. 당장 처형당할 일은 없겠네.'

그랬다가는 감당할 수 없으리라.

물론, 순순히 처형당해줄 생각도 없었지만.

천천히 움직이던 마차가 멈췄다.

"내려!"

기사들이 데일의 몸을 우악스럽게 붙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철창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기사들은 데일을 그 안에 집어넣은 뒤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하아. 시간도 없는데 골치가 아프군."

어떻게 해야 할까.

데일은 생각에 잠겼다.

* * *

3군단장의 이름은 멜피스.

멜피스는 싸움도 못 하고, 지휘도 형편없으며, 머리도 그리 좋지 못한 사내다.

하지만 그는 정치에 대해서만큼은 천재적인 감각을 지녔다.

명문가의 차남으로 태어난 멜피스는 3군단으로 부임해 가장 안전한 보직을 꿰찼고.

곧장 다른 귀족 지휘관들과 친목을 도모하고 관계를 쌓아나갔다.

멜피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부하가 세운 업적은 교묘하게 자신의 것으로 돌렸으며, 자기 실책은 부하에게 전부 떠밀었고, 경쟁자를 모함해 뒤로 제끼고, 부하들에게 돈을 걷어 상관에게 뇌물로 바쳤다.

그렇게 하다 보니 자연스레 계급이 올랐다.

그럴듯한 전공 하나 없는 머저리가 가슴에 훈장을 대롱대롱 달고 다녔고, 지휘관 중에서도 높은 서열에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3군단장은 그런 멜피스를 쳐내야겠다 마음먹었고, 관련 증거를 모으기 시작했다.

멜피스 일생일대의 위기였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났다.

이레네가 무너지고, 다른 모든 군단이 황제를 배신할 때, 오직 3군단만이 황제에게 붙었다.

멜피스는 여기서 기회를 봤다.

그는 거짓 증거를 모아 군단장을 배신자라 고발했고, 황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군단장은 정식 재판도 없이 빠르게 처형당했다.

멜피스는 황제의 지혜로움을 찬양하며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고, 이에 크게 기꺼워한 맹세는 멜피스를 3군단장으로 앉혔다.

그다음에 멜피스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전임 군단장의 사람들을 쳐냈고, 자기한테 아부하고 딸랑거리는 이들을 주요 보직에 앉혔다.

그런 사람들 대부분은 멜피스만큼이나 무능했다.

군단은 빠르게 약해졌다.

군기는 개판에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하지만 멜피스에게는 상관없었다.

그는 자기 자리만 보존할 수 있다면 다른 무엇도 관심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데일이 왔다.

데일은 큰 위협이었다.

누가 봐도 시민들. 심지어 병사들도 데일을 더 좋아할 것 아닌가?

마침 황제도 데일을 싫어했으니 일은 쉽다.

멜피스는 신속하게 데일을 잡아넣었다.

"그래. 순순히 감옥 안에 잡혀들어갔다고?"

"아, 예.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저희 기사들에게 겁을 먹은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래. 제까짓놈이 내 기사들에게 어쩔 수 있겠나."

여기서 기사들이란, 그가 용병들에게 돈을 받고 기사 작위를 내려준 이들이었다.

한시름 놨다는 생각에 멜피스는 기지개를 켰다.

"생각보다 별거 없군. 기사 한둘 정도는 벨 줄 알았는데. 뭐. 그랬으면 기사 살해죄가 추가되었겠지만."

"소문이 과장된 것이겠죠. 애초에 소문이란 게 믿을 게 못 되지 않습니까? 그까짓 송장 놈이 영웅이라니! 진짜 영웅은 바로 군단장님이십니다!"

"하하. 이 친구. 아부도 참."

"아부가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악마와 황혼에 맞서 이 요새를 굳건히 지키는 멜피스 님이 영웅이 아니라면, 누가 영웅이겠습니까?"

요새를 굳건히 지킨다기보다는, 무서워서 요새에 틀어박힌 것에 더 가깝지만, 어쨌든 멜피스는 흐뭇하게 웃었다.

"흐하하! 그래. 내가 그까짓 언데드 놈보다는 낫긴 하지."

"맞는 말씀입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큰일입니다!"

"이봐. 감히 노크도 없이...."

"황혼의 병력 일부가 이곳을 향해 진군하고 있습니다!"

"뭐, 뭐, 뭐? 그 새끼들이 왜 여기로 와? 아니. 그보다 숫자는?"

"이천입니다!"

벌떡 일어났던 멜피스가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뭐야. 겨우 이천? 여기 요새에 있는 병사가 몇인 줄 알아?"

"수, 수는 적지만 심상치 않습니다. 강력해 보이는 이들도 많고...."

"3군단 소속 지휘관이 그렇게 겁이 많아서 어쩌겠나. 쯧쯧쯧. 그냥 가까이 오면 화살이나 듬뿍 먹여주도록."

당황한 지휘관이 간곡히 말했다.

"병사들의 사기가 좋지 못합니다. 하다못해 마탑과 황실 기사단에 지원을 요청하는 게."

"무슨 소리! 겨우 이깟 일로 그분들을 부르면, 폐하가 자칫 나를 무능하다고 생각할 거 아니야!"

"그래! 대륙의 영웅 멜피스 님이 있는데, 대체 무엇이 두렵단 말이냐!"

"멜피스 님 같은 위대한 분을 섬긴다면, 자랑스러워하고 용맹을 보여야지!"

부하의 아부에 멜피스의 입가가 씰룩였다.

보고하러 온 지휘관은 절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뒤, 집무실을 나섰다.

멜피스가 혀를 찼다.

"쯧쯧. 어찌 저리 무능한 놈들이 많은지. 기분도 잡쳤는데 술이나 따라봐."

"예. 여깄습니다!"

부하는 요즘은 구하기도 힘든, 비싼 포도주를 은잔에 가득 따라주었다.

* * *

데일은 감옥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머리에 뒤집어씌운 자루라도 좀 빼주지.'

감옥 안은 고요했다.

다른 죄수도 없었고, 간수도 없었다.

아마 데일이 무서워 입구에서만 경계하는 듯했다.

데일은 생각을 정리했다.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군.'

지금 상황은 다소 예상외였다.

설마 군단장이랑 대화조차 못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대주교의 전령으로 온 데일을 이리 가둬버리다니?

후환이 두렵지 않은 건가?

'마냥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어.'

시간이 없다.

지금쯤 하켄과 에스델은 최후의 싸움을 위해 이레네를 향해 진격하고 있을 것이다.

한가하게 감옥에 틀어박혀 있을 시간은 없는 것이다.

'그냥 탈옥해?'

그럴 거였으면 성문에서 그냥 기사들을 베는 게 낫지 않았을까?

머리가 복잡했다.

군단장을 만나지 못한다면, 하다못해 황제가 있는 저 이레네로 올라갈 방법이라도 찾고 싶다.

그러려면 도움이 필요하다.

혼자서는 어렵다.

한데, 누구한테 도움을 받는다는 말인가?

'그냥 힘을 쓸 걸 그랬나.'

새삼 후회가 들었고, 내면의 본능이 거보라며. 지금이라도 저들을 죽이라고 충동질했다.

그렇게 데일이 깊은 고심에 빠져있던 그때.

발소리가 가까워져 왔다.

쇠 장화가 바닥을 딛는 소리다.

기사인가?

저 은밀하면서도 경쾌한 걸음걸이만 들어도 저자가 전문적으로 싸움을 배운 인간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아까 그놈들은 아니군. 누구지?'

데일이 의아해하던 그때.

발소리가 철창 바로 앞에서 멈췄다.

"데일 경. 오랜만이야."

익숙한 목소리였는데,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음. 오랜만이군. 반갑다."

"...나 못 알아보는 거지?"

"내 머리에 씌워진 자루를 좀 치워줬으면 좋겠는데."

"아."

그제야 상대가 가까이 다가와 자루를 걷어주었다.

해맑은 얼굴이 데일 바로 앞에서 씨익 웃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그치?"

에른스트

함께 북부를 돌아다녔던 한때의 의뢰자이자, 친위대의 단장이자, 기사단장의 두 번째 제자.

그리고 너무나 순진하고 어수룩하던 귀족 청년.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군."

정말로 반가운 얼굴이었다.

3군단

* * *

에른스트가 씩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네? 경이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만은 믿지 않았지. 경 같은 사람이 어떻게 죽을 수 있겠어?"

데일이 물었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나."

"멜피스 그 새끼가 경을 감옥에 처박았다는 얘기를 들었거든. 듣자마자 바로 달려왔지."

"앞에서 사람들이 지키고 있을 텐데?"

"흐흐! 잊었어? 나 친위대 단장이야. 생각보다 권력이 있다고."

에른스트가 한껏 가슴을 펴며 우쭐댔다.

"마침 잘됐군. 지금 상황이 급하다는 건 알지?"

"어. 하늘이 심상치 않던데. 황혼이 무언갈 하려는 거 아니야?"

"황제는 지금 뭘 하고 있지? 뭔가 계획이라도 있나? 말하기 어려우면, 계획이 있는지 없는지만 말해줘도 된다."

"폐하는 지금...."

깊은 한숨을 내쉰 에른스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솔직히 말할게. 폐하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제정신이 아니라고?"

"시민들을 모두 버리고, 성을 띄워 도망쳐버린 건 아무리 폐하라도 비난을 피할 수 없었어. 상위 구역의 사람들도 경악했고. 그래도 평소였다면 괜찮았을 거야. 스승님이 있으면... 아무리 귀족들이라도 폐하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기사단장은 황혼에게 패배해 죽었다.

황제를 수호하는 가장 강력한 검이 사라진 것이다.

"그 당시 분위기는 정말로 흉흉했어. 당장 반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지. 폐하께서도 그걸 알아차리고 자기한테 위협이 될만한 고위 귀족들을 대거 숙청하기 시작했어."

"그래도 되나? 저항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그간 폐하께서는 귀족들의 힘을 꾸준히 깎아왔으니까. 북부에서 귀족들이 충돌했던 것도 그렇고, 친위대를 신설한 것도 그렇고. 다른 무엇보다, 여전히 황실 기사단은 폐하를 따르고 있어. 마탑은 중립을 지켰고."

피바람이 불었고, 대규모 숙청이 일어났다.

황제의 공포 정치에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가장 충성스럽던 신하마저도 황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다만 그걸 겉으로 대놓고 표현할 수는 없다.

다음 처형 상대로 선정될 테니.

"그때부터였을 거야. 요직에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한테 딸랑거리는 사람을 앉혀놓은 게."

"전형적인 암군이군."

"원래는 총명하던 분이셨는데... 스승님의 죽음에 특히 큰 충격을 받으신 것 같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에른스트가 말을 이었다.

"지금은 국정 운영은 아랫사람한테 모두 떠넘기고. 술이랑 여자에 빠져 살고 계셔. 나이도 있으신 분이. 쯧."

"결국. 황혼이 세상을 뒤집어엎든 말든 별달리 움직일 계획이 없다는군."

"모르지. 워낙 노회하신 분이라, 저 모습은 가면이고 마음속에 깊은 심계를 꾸미고 있을 수도 있지."

에른스트는 여전히 황제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이 남아 있는 듯했다.

하긴. 애초에 그럴만한 사람이니까 황제 역시 에른스트를 친위대 단장에 임명했을 터.

데일이 물었다.

"에른스트.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뭐가."

"뭘 물어보는지 알지 않나. 지금 세상이 박살나게 생겼는데, 이대로 동쪽 한구석에 틀어박혀 있는 게 맞다고 생각하나?"

에른스트는 잠시 고민했다.

생각을 정리한다기보다는 신중히 말을 고르는 눈치였다.

그런 모습에서 데일은 시간의 흐름을 느꼈다.

이레네에 불던 피바람은 순진하고 다소 어벙하던 청년에게 신중함을 길러주었다.

"우리 사이니까 솔직히 말할게. 이대로는 안 돼. 당장 황혼을 막아야 해. 내가 그리 독실한 신자는 아니지만, 녀석이 하려는 일만은 막아야 해."

"그러면...."

"하지만 폐하를 설득하는 게 힘들어. 아니. 말을 붙이는 것조차도 어려워. 항상 술에 찌들어계시니."

"황제가 안 된다면, 3군단만이라도 어떻게 안 되겠나?"

에른스트가 고개를 저었다.

"군단장 멜피스가 문제야. 그놈은 우리가 뭘하든 반대부터 하고 볼 놈이야. 싸울 의지도, 싸워야 할 이유도 이해하지 못하는 놈이지. 오히려 우리가 폐하를 설득하려 하면, 신이 나가지고는 우리가 음험한 의도를 품고 있다고 모함할 놈이지."

에른스트는 이를 빠득 갈았다.

아무래도 당한 게 많은 모양이었다.

데일은 상황을 정리했다.

무기력한 황제.

황제의 칼날에 팔다리가 잘려버린 귀족 세력.

무능한 군단장.

에른스트의 친위대는 아직 힘이 부족하다.

마탑은 중립을 지키고 있으며, 황실 기사단은 아직은 황제를 따르고 있다.

한참을 고민하던 데일이 다시 물었다.

"지금 황실 기사단장은 누구지?"

"아일라 경이라고... 알지? 스승님의 제자."

"그 젊은 여자 기사를 말하는 건가?"

"어어. 기사단장을 맡기에는 조금 어리긴 하지. 그래도 스승님의 제자라는 점이랑, 실력이 빼어나다는 점 덕분에 임시로 단장을 맡고 있어."

"임시?"

"어. 폐하께서는 그... 스승님 정도가 아니면 단장으로 성에 안 차시는 것 같아."

참으로 욕심 많은 작자였다.

"그렇다면 지금 기사단은 아일라라는 기사의 뜻에 따르고 있는 건가?"

"음. 그렇지. 이게 옳지 못하다는 건 알아도, 스승님께서는 끝까지 폐하를 모셨으니. 아일라 경도 그 의지를 따르고 싶은 것 같아."

"그렇군. 그러면, 만약에 기사단이 황제에게서 등을 돌리면 어떻게 될 것 같나?"

"그때는 진짜 끝이지. 마탑도 더는 눈치만 보지 않을 거야. 하지만 아일라를 설득하는 건 쉽지 않을걸?"

고개를 끄덕인 데일이 물었다.

"마지막으로 묻지. 기사단장을 정하는 조건이 뭐지?"

"단원 중에서 폐하께 정식으로 임명을 받거나, 기사단원들 모두가 인정할 정도의 사람이거나... 근데 그건 왜 물어? 잠깐. 설마?"

"내가 기사단을 설득하겠다. 이레네로 나를 안내해줘라. 그 정도 권한은 있겠지?"

에른스트는 데일이 무슨 일을 할지 짐작이 간다는 듯. 당황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 그 정도는 가능하지. 근데. 잘못되면 너도 나도 끝이야. 엄청 위험하다고!"

"세상이 망하려는데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너는 몰라도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에른스트가 말을 흐렸다.

데일은 에른스트와 두 눈을 마주쳤다.

"에른스트. 네가 목숨을 걸고 다른 귀족들과 경쟁하며, 친위대 단장이 된 이유가 뭐지?"

"...."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아니었나?"

에르스트는 눈을 감았다.

그는 고심에 빠졌고, 데일은 기다려주었다.

에른스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데일 경. 아론. 기억나?"

"네 충실한 시종 아니었나. 네 꿈을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도 바쳤던."

"...기억해주는구나."

"당연한 것을."

데일이 아론을 기억해주자, 에른스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데일 경이 예전에 그랬잖아. 아론이 스스로를 희생한 걸 후회하지 않게 똑바로 행동해라, 고. 아무래도 그 순간이 온 것 같네."

에른스트가 다시 눈을 떴다.

그 눈동자에는 조금 전까지의 두려움과 주저는 온데간데없고, 대신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가자. 아. 열쇠 구해올게."

"괜찮다."

"뭐?"

데일은 힘을 주었다.

타닥. 탕!

온몸에 칭칭 감은 밧줄은 힘으로 끊어버리고. 쇠사슬은 벽에 부딪혀 그대로 박살냈다.

창살?

데일은 창살을 양손으로 잡고 가볍게 양옆으로 벌렸다.

데일을 위한 문이 만들어졌다.

"어. 음. 어."

"애초에 내가 여기로 잡혀들어온 게 아니라, 잡혀준 거다."

"...그런 것 같네."

에른스트가 경악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둘은 빠르게 감옥 밖으로 나왔다.

감옥의 입구에는 경비병들이 기절해 있었고, 그런 경비병들을 전사들이 감시하고 있었다.

데일도 낯이 익은 얼굴들이었다.

"친위대야. 경도 알지? 예전에 같이 북부에서 싸웠던 용병들."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경."

"소문은 들었습니다. 정말 대단하시더군요."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여기 경의 검은 챙겨두었습니다."

"아. 다들 오랜만이다. 고맙다."

친위대가 앞다투어 반가움을 표시했다.

데일은 습관적으로 그들의 몸을 살폈다.

근육이 단단히 잡혀 있고, 무기와 갑옷이 잘 조화를 이룬다.

조금 싸울 줄 아는 용병이 아닌, 진짜배기 전사의 느낌이 났다.

시간은 사람을 성장시킨다.

에른스트도 그렇고, 이들도 마찬가지다.

"가자. 마침 요새 내부가 혼란스러운 것 같아."

"왜 그러지?"

"황혼의 군세 일부가 이쪽으로 온다나 봐. 숫자는 2000밖에 안 된다는데... 뭔가 불안해. 서두르자."

친위대는 데일을 둘러싼 뒤, 빠르게 움직였다.

목표는 이레네.

이레네는 하늘에 둥둥 떠 올라 지상에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에른스트는 그 그림자 안으로 걸어 들어가 조심히 외쳤다.

"한스 경! 한스 경! 어딨어요?!"

"...."

묵묵부답.

한숨을 내쉰 에른스트가 다시 외쳤다.

"지혜롭고 뛰어난 마법사 한스 경!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허허. 누가 나를 부르나 했더니, 친위 대장이셨군요."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나타난 마법사의 이름은 한스.

그리고 이 역시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오늘 반가운 얼굴을 많이 보는군."

"...어라. 데일 경?"

한스는 마치 뱀 앞에 선 쥐처럼 데일을 보고는 굳어버렸다.

데일은 한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나저나 한스 경이라니. 출세했구나. 마탑에서도 따돌림이나 당하던 평민 마법사가."

"하. 하하. 다 데일 경 덕분이죠. 에른스트 단장이라도 연결해주시고, 그 뭐냐. 바이만 보물고에서 비행 마법도 배울 수 있게 해주시고."

"그래 한스. 앞으로는 부르면 재깍재깍 튀어나와라. 여러 사람 기다리게 하지 말고."

"...예."

한스가 쭈그러들자, 친위대가 고소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도 어지간히 거드름을 피운 모양이다.

그런 낌새를 눈치챈 한스는 불현듯,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해? 나 한슨데? 요즘 마탑에서도 나 함부로 못 대하는데?'

한스는 어깨에 올려진 데일의 손을 툭 쳐냈다.

"흠. 흠흠. 아무래도 저를 아직도 예전의 한스로 생각하시는 모양이군요."

"한스가 아니면 뭔데."

"자꾸 이렇게 제 권위를 존중하지 않으시면 그때는 저도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가만 안 있으면. 뭐 어쩔 건데."

"어쩌긴... 음."

한스가 데일을 흘끔 쳐다봤다.

이렇게 말을 했으면 표정 변화라도 있으련만.

데일은 지극히 무감정한 표정이었다.

오래도록 떵떵거리며 살아오며 쌓아온 한스의 자존심이 싸그리 무너져 내리고.

현실이 차갑게 찾아왔다.

"어, 어쩌긴요. 어쩌긴... 뭐 어떻게 못 하긴 하죠."

한스가 무기력하게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데일이 말했다.

"한스. 난 아직도 네가 빈민가에 쳐들어와 사람들을 불태우려던 그 모습을 잊지 않았다."

"...그때 안 죽였잖아요. 아무도."

"내가 막아서였겠지. 어쨌건. 원래 죽었어야 하는 목숨을 살려준 거니, 늘 겸손해라. 이제 네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알겠습니다...."

기가 꺾인 한스가 마법 구결을 외웠다.

쓴웃음을 짓던 에른스트는 데일에게 가리켰다.

"여기 양탄자 위에 서세요."

날개 달린 말이 그려진 화려한 태피스트리 양탄자였다.

에른스트와 데일, 그리고 한스까지. 셋이 양탄자 위에 올라섰다.

"안드레이 님의 작품이에요. 하늘을 날기 더 쉽게 만든 마도구죠."

"아. 안드레이. 그분은 잘 지내시나?"

"너무 정정해서 문제죠."

이윽고 마법 완성되었다.

양탄자가 세 사람을 싣고, 두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상이 빠르게 멀어졌다.

시야가 탁 트이자 멀리까지 보였다.

저 멀리서 한 무리의 군세가 진격해오는 게 보였다.

'방금 말한 황혼의 군세인가? 확실히 숫자 자체는 적은데, 심상치 않긴 하군.'

놈들을 유심히 살피던 데일은 또 다른 방향에서 걸어오는 자그마한 점 두 개를 발견했다.

데일은 그쪽을 집중해 바라보았다.

사람 둘이 걸어오고 있었다.

한데 왜일까.

둘의 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누구지?'

오늘은 유독 아는 얼굴을 많이 만나는 날이다.

저들도 혹시 아는 얼굴이지 않을까?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다.

아무리 데일이라도 이 거리에서는 알아볼 수 없다.

그렇게 데일이 지상을 살피는 사이.

양탄자는 높이높이 날아, 이레네에 빠르게 가까워졌다.

한스는 비행 마법을 유지했고, 에른스트는 빛을 내는 마도구를 꺼내 켰다 하늘을 향해 껐다를 반복했다.

데일이 묻기 전에 에른스트가 설명했다.

"암호입니다. 미리 정해진 암호를 보이지 않고 접근하는 비행물체는 전부 요격당해 버립니다. 악마조차도 섣불리 접근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군."

데일은 새삼, 야가브의 유령선으로 접근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랬으면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새까만 재가 되었을 테니.

이레네 쪽에서도 빛이 깜박거렸다.

들어와도 좋다는 신호였다.

한스가 양탄자를 몰아 이레네에 착륙했다.

상위구역의 모습은 이전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구역을 감싼 두꺼운 성벽이 전부 사라지니, 꽤나 탁 트인 느낌이었다.

하늘 위인지라 전망도 아주 좋았고 말이다.

하지만 늘어선 건물들이나 아름답게 가꿔진 거리는 그대로였다.

혼자만 전쟁의 불씨와 세월의 흐름이 비껴간 듯한 모습이었다.

에른스트가 양탄자에서 내리자, 마법사와 기사 몇이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친위대장. 지상에서의 일은 잘 해결되었습니까?"

"예. 덕분에 일을 잘 보고 왔습니다."

"그거참 다행이군요. 한데. 뒤에 있는 분은 누구죠? 한 명이 더 올라온다는 보고는 못 들었는데요."

황실 기사단의 기사가 눈매를 좁혔다.

아래에서 봤던 어중이떠중이 기사랑은 비교도 안 되는 기세였다.

에른스트가 곤란한 얼굴로 데일을 쳐다보았다.

이제 어찌할 거냐는 표정이다.

데일은 고개를 저어주었다.

마치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이.

데일은 땅을 박찼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기사가 검을 뽑으려 했지만, 이미 데일은 저 높이 날아 근처 지붕에 착지했다.

데일은 상위구역을 내려다보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었고, 이내 폭탄을 터트리듯이 목소리를 내뱉었다.

"황실 기사단장 미하일 경의 전우로서 말한다!!"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에 사람들이 일제히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럼에도 목소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기사단장 자리를 걸고, 황실 기사단에 명예로운 결투를 신청한다!!!"

우레와 같은 목소리가 온 하늘에, 온 도시에, 그리고 이곳에 살아가는 모두의 귓가에 울렸다.

기사단

* * *

데일의 목소리가 온 하늘을 쩌렁쩌렁 울렸다.

아마 술과 여자에 빠져있다는 늙은 황제의 귓구멍에도 들어가지 않았을까?

데일은 눈을 감고 반응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렇게 결투를 신청해본 게 얼마 만일까?

과거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엘레나의 힘을 탐하던 마탑의 빈민가 수색. 재판. 그리고 결투.

결투를 벌였던 크리스틴은 황실 기사단에 입단할 예정이었던 사내로, 상당한 강적이었다.

당시 데일은 기량과 기교에 밀려 패배하기 직전까지 갔다.

죽음을 앞두었고, 인간을 포기할 뻔했다.

몇 가지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면 데일은 싸늘한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아니면 여타 흑기사처럼, 완전히 괴물이 되어버렸거나.

'뭐. 싸늘한 건 지금도 매한가지지만.'

시간이 흘러 데일은 또다시 결투를 벌이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데일이 다르고, 상대가 다르고, 결투 방식이 다를 것이다.

이제 데일은 약자가 아니었다.

'오는군.'

곧장 반응이 왔다.

병사들과 귀족들, 마탑의 마법사들, 황실 기사단까지 우르르 몰려나왔다.

이곳 상위구역에 사는 모두가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데일은 건물에서 내려서, 다시 바닥에 착지했다.

에른스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경. 이게 맞는 방법인지 모르겠어. 너무 시선을 끄는 거 아니야?"

"오히려 시선을 끄는 게 좋다. 기사가 아닌가? 어둠 속에 숨어서 몰래몰래 일을 벌인다면, 그건 기사가 아니라 도적이겠지."

여전히 불안해했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다.

에른스트는 일단 데일을 믿기로 했다. 그 역시 상황의 심각함을 알았다.

'이대로는 안 돼. 우리도 황혼과 싸워야만 해. 아니면 모두 끝이야.'

아마 소수의 머저리나 간신을 제외하면 비슷하게 느끼고 있을 터다.

싸워야 한다.

적어도 이렇게 가만히 있는 건 아니었다.

대부분의 상위구역 주민들은 비슷하게 생각했지만, 황제의 칼날이 두려워 누구 하나 앞장서지 못했다.

그 역할을 데일이 대신해주려 한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데일 경에게 따라줄 수도 있을지 몰라. 아니. 반드시 그럴 거야. 데일 경에게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힘이 있으니까.'

에른스트는 말은 안 했지만, 데일을 존경한다.

언제나 말보다 행동으로.

싸울 때는 가장 앞장서서 싸워나가는 이 흑기사를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마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이리라.

에른스트는 그리 믿었고, 이제 곧 벌어진 사건들을 불안함과 기대감을 안고 기다렸다.

마침내 병사와 기사들이 도착했다.

병사들은 일제히 쇠방패를 들어 전열을 대비했고, 지붕 곳곳에 마법사가 올라가 데일을 주시했다.

잘 훈련되고 기민한 움직임이다.

적어도 3군단과 달리, 이레네는 최소한의 역량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데일이다! 황실 기사단과 얘기하고 싶다!"

데일의 외침이 쩌렁쩌렁 울렸다.

병사들과 마법사들이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기사단도 술렁였다.

본래라면 불청객을 즉시 제거하는 게 옳다.

하지만 이 중에는 데일과 안면이 있는 자들도 있다.

설령 대화 한번 나누지 않았어도. 한때 같은 전장을 달리던 전우인 것이다.

그렇게 이어진 기묘한 대치는 머지않아 깨졌다.

병사들 사이를 헤집고 기사가 한 명 나선 것이다.

기사는 투구를 벗었다.

데일도 아는 얼굴이다.

항상 기사단장과 붙어 다니던 제자이자 지금은 황실 기사단의 임시 단장.

그녀는 상황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쯧 하고 혀를 차고 말했다.

"아일라. 미하일의 제자, 아일라."

"데일이다. 초면은 아니지?"

"글쎄.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었으니, 안면이 있다고 말하기도 뭐한 것 같은데."

어깨를 으쓱이는 아일라에게 데일이 말했다.

"결투다. 황실 기사단의 단장 직위를 걸고 결투를 벌이자."

아일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본인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지 아나 모르겠군. 네가 스승님과 인연이 없었다면 진즉에 베어버렸을 거다."

"터무니없는 소리가 아니다. 나는 한 명의 황실 기사단원으로서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는 거다."

"...지금 뭐라고 했어?"

데일의 충격적인 선언에 삽시간에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졌다.

아일라가 날카롭게 노려보자, 데일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아시다시피 나는 전대 기사단장인 미하일 경과 친분이 있다. 나는 한 사람의 전사로서 그를 존경했고, 그 역시 나를 좋게 봐주었지."

아일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데일의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스승인 미하일은 항상 아일라 앞에서 데일을 칭찬하고 호의를 보였으니.

데일이 이어 말했다.

"미하일 기사단장은 나에게 여러 번 기사단에 입단할 것을 권유했다. 여기 있는 기사들 중에 그 모습을 본 사람이 적지 않을 거다."

기사단장은 일부러 기사들 앞에서 데일에게 입단을 권유하기도 했다.

다짜고짜 데일을 기사단에 들였다가는 불만이 생길 수 있으니, 미리 분위기를 살핀 것이다.

당시 기사들도 수긍하는 기색이었다.

그럴 수밖에.

데일은 전장에서 같은 편으로 서면 누구보다 든든한 아군이었다.

"그때는 비록 우리가 가는 길이 달라 거절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우리는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나는 기사단장의 제안을 받아, 기사단의 일원이 되겠다."

"그게 무슨 궤변이야!"

"임시 단장은 미하일 경의 의지를 존중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건 또 따르지 않는 건가?"

기사단이 전대 기사단장의 충심을 핑계로 여전히 황제 옆에 붙어 있는 걸 비꼬는 말이었다.

아일라의 얼굴이 굴욕으로 일그러졌다.

그녀는 억지로 화를 참으며 끊어 뱉듯이 말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모든 단원들의 인정을 받으면 단장이 될 수 있다고 들었다. 너희들에게 결투를 신청하겠다. 나랑 실력을 겨뤄보자. 방식은 상관없다. 너희들이 한꺼번에 덤벼도 좋고, 한 명씩 차례차례 겨뤄도 좋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약속하겠다. 나는 절대 너희를 죽이지 않겠다. 너희는 날 죽여도 되지만, 나는 이곳에 피를 흘리러 오지 않았다. 그러니 부담 없이 덤벼도 좋다."

"우리를 모욕하는가!"

"이 오만한 놈!"

기사들이 고함을 터트렸다.

그 황실 기사단이다. 실력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심만큼은 하늘을 찌를 정도로 드높다.

한데.

자기들보고 한꺼번에 덤비는 것도 모자라, 죽이지 않겠다니?

이는 모욕이나 다름없다.

아일라도 칼날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알아? 너는 지금 우리의 명예를 짓밟고 있어."

"너희들에게 짓밟힐 명예가 남아 있었나? 몰랐군."

"뭐?"

"시민들이 적에게 몰살당할 때. 모두의 터전인 도시가 무너지고, 사람들이 너희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 너희는 도망치지 않았나. 그런데도 명예를 운운해?"

기사들의 입을 다물었다.

아일라가 변명하려 했다.

"그건 우리도...."

"그만!"

데일이 거칠게 말을 끊었다.

"충성심을 핑계 대지 마라. 너희는 너희의 의무를 저버렸다. 조금이라도 명예가 남아 있다면, 검을 뽑아라!"

데일의 일갈에 기사들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한 젊은 기사가 아일라에게 고개를 숙였다.

"단장님. 제가 가겠습니다. 더 이상의 모욕은 참을 수 없습니다."

"토브루 경."

"저자 한 명을 상대로 기사단 전부가 달려들었다가는, 저희 기사단은 두고두고 놀림거리가 될 겁니다. 저는 그건 싫습니다."

"...상대는 강합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에요. 스승님마저 인정한 강자입니다."

"상대가 강하다고 물러서면 그게 기사입니까?"

"...."

"그리고 설령 제가 패배한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최대한 놈에게서 실력을 이끌어볼 테니 그사이, 선배님들이 분석해주십시오."

아군을 위해서라면 거리낌 없이 희생하며, 그 희생을 최대한 값지게 사용하는 것.

그게 황실 기사단이다.

아일라는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합니다."

그것으로 결투가 성사되었다.

사람들은 우르르 뒤로 물러나 넓은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표정은 다양했다.

불안해하는 사람도 있었고, 단순히 흥미 어린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었다.

나머지 대부분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데일은 그 표정을 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내심 내가 이기는 걸 바라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을 수도 있겠군.'

두 사람은 결투장의 중앙에 마주섰다.

데일의 상대는 젊은 기사 특유의 씩씩함을 담아 외쳤다.

"에이네이 가문의 토브루!"

"데일. 신입인가? 처음 보는 얼굴인데."

"하! 선배님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지?"

"?"

"방금 입단했다며. 그럼 네가 내 후배지, 막내야."

데일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 젊은 기사는 제법 유쾌한 구석이 있었다.

둘의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공증인을 맡아줄 이가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작은 체구에 커다란 고깔모자가 어딘가 우스꽝스러운 노인이었다.

데일이 인사했다.

"오랜만이오. 안드레이."

"그래. 또 사고를 치고 있구나."

"또라니. 내가 언제 또 사고를 쳤다고 그리 말하시오."

"...다 끝나고 얘기하지."

안드레이는 수염을 벅벅 쓰다듬고는,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에 뭐냐. 알 거 다 아는 사람들이니, 서로 명예를 지키고 싸우시오. 신께서 보고 계시니."

안드레이는 건성으로 손을 내렸고 뒤로 물러났다.

으레 결투에서 들리는 환호성이나 함성은 없었다.

데일과 토브루는 서로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

"...."

조금 전까지의 농담은 온데간데없고.

싸늘한 침묵 속에서 둘은 원을 돌며 상대에게 칼끝을 향했다.

대치가 길어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하루종일 걸리겠군.'

시간을 듬뿍 드려가며 서로의 인내를 시험하는 건 자신 있었다.

하지만 데일이 상대해야 할 기사가 못해도 쉰 명이 넘는다.

결투 하나하나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다.

결국. 데일은 먼저 공격에 나서기로 했다.

쿵!

데일이 땅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바닥에 깔린 상아색 판석이 쩌적하고 갈라졌다.

그와 동시에 데일의 몸이 흐릿해졌다.

'무슨.'

토브루는 순간.

상대가 공간이동 마법이라도 사용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만큼 데일의 움직임은 그의 인지를 넘어서 있었다.

저런 거체로 저 정도의 빠르기라니?

이해할 수 없었다.

꽝!

"으윽!"

어느새 코앞에 다가온 데일이 마검을 내리찍었다.

토브루는 검을 비스듬히 들어 충격을 흘려내려 했다.

그는 뛰어난 기사다. 정확한 대응과 절묘한 자세로 충격의 많은 부분을 감쇄하는 데에 성공했다.

문제는. 데일의 힘 자체가 너무 강했다는 점이다.

한 번의 일격에 자세가 휘청였다.

데일은 다시 한번 마검을 내리찍었다.

자세를 잃었는데, 이전만큼 완벽히 방어해낼 수 있을 리 없다.

토브루는 검을 양손으로 쥐어 앞으로 내밀었다.

항복은 없다. 어떻게든 방어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기사의 의지는 단단할지언정, 무기는 그렇지 못하다.

콰창!

연이은 부딪힘에 토브루의 롱소드가 산산이 조각났다.

토브루는 경악했다.

보검까지는 아니어도, 상당히 괜찮은 품질의 검이다.

그게 이렇게 부서져 버리다니?

토브루는 패배를 직감했다.

검을 잃은 검사가 무얼 할 수 있겠나.

게다가 저 시커멓고 불길한 마검은 그의 소중한 검을 부숴먹은 것도 모자라, 토브루의 정수리를 쪼개기 위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토브루는 죽음을 느꼈다.

언젠가 기사로서 맞이하게 될 거라 생각한 최후.

조금은 허무했지만....

'그래도 엄청난 실력자와 싸울 수 있어, 만족스럽구나.'

그는 황실 기사단의 기사다.

그리고 황실 기사단원은 죽는 그 순간까지 눈을 감지 않는다.

토브루는 떨어지는 검날에서 결코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저 검이 두개골을 반으로 가를 때까지, 결코 겁먹은 모습을 보이지 않으리라.

그리한다면 기사로서의 명예를 지킬 수 있을 터.

하지만 다음 순간.

떨어져내리던 마검이 뚝 멈췄다.

정확히 토브루의 머리 앞. 새끼손가락 한 마디의 거리를 앞두고 멈췄다.

"패배를 인정하나?"

데일이 무덤덤하게 물었다.

토브루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이내 허탈하게 웃었다.

"내리치는 검을 얼굴 바로 앞에서 정확히 멈추는 기예를 보여주는데, 인정해야지. 졌다. 한 수 잘 배웠다."

"너도 훌륭했다. 빈말이 아니다. 무게중심 잡는 수련을 한다면, 더 실력이 늘 것 같군."

"...조언 고맙다."

이것으로 첫 번째 결투는 끝.

지켜보던 사람들. 특히 기사들은 충격에 빠져 웅성거렸다.

'토브루는 막내지만 그렇다고 약한 놈은 아니다.'

'그런데 단 두 합만에 꺾었다고? 그것도 죽이지도 않고?'

'대체 어느 정도의 실력을....'

데일은 동요하는 기사들을 보며 덤덤히 말했다.

"다음."

기사단

* * *

압도적인 무력에 기사들은 당황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도 더 성장했다.

게다가 데일은 약속을 지켰다.

용감하게 결투에 나선 젊은 기사를 살려주었다.

다치게 하지도 않았다.

상대에게 예를 표했고, 기분 나빠지지 않을 선에서 조언도 건네었다.

데일은 명예를 지켰다.

그리고 상대의 명예도 지켜주었다.

그 모습에 기사들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에릭이라는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다음은 제가 가겠습니다."

"에릭 경."

"토브루 경 다음은 제가 제일 실력이 떨어지지 않습니까. 최선을 다해서 기사단의 명예에 흠이 되지 않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아일라가 주저했다.

데일은 강하고 에릭은 데일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결투에서 진 기사가 얼마나 수치스러울지 아일라는 잘 알았다.

하지만 에릭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압니다. 제가 이기지 못할 거라는 걸."

"...."

"하지만 제가 진다고 해도, 결투에서 지는 건 아닙니다. 이건 저 흑기사와 우리 기사단 전체의 결투 아닙니까? 마지막 순간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다면, 제가 패배한 게 아닙니다. 그러니 저도 최선을 다해 놈이 자기 역량을 드러내게 하겠습니다."

그 진지한 태도에 아일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합니다. 그리고 이길 각오로 싸우세요. 어쭙잖게 버티겠다는 마음으로 상대할 이가 아닙니다."

"예!"

고개를 숙인 에릭이 데일의 앞에 섰다.

데일은 눈앞의 기사를 살폈다.

유독 키가 크고. 팔이 길쭉한 사내였다.

별명은 아마 '꺽다리 에릭' 정도가 아닐까?

인상 깊은 건 에릭이 다루는 무기다.

그는 길쭉길쭉한 체구에 걸맞은 기다란 창을 들고 있었다.

무쇠로 이루어진 창대에, 날이 세 갈래로 뻗어 나온 삼지창이었다.

'황실 기사단이라고 꼭 검을 쓰는 건 아니었지.'

드물게도 검 외의 무기를 주력으로 사용하는 기사도 있다.

그게 에릭이었다.

"에페수스 경의 제자. 에릭."

"데일이다."

"잘 부탁한다."

사납게 웃어 보인 에릭이 뒷걸음질해 거리를 벌렸다.

기사의 눈이 사납게 번들거렸다.

그는 뾰족한 창끝을 앞으로 세운 채, 쉴새 없이 데일과의 거리를 가늠했다.

'창잡이들은 거리 재기에 능숙한 편이긴 하지.'

데일은 고민 없이 땅을 박찼다.

곧장 마검을 뻗어 에릭의 머리를 노렸다.

맹렬한 기세지만 에릭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는 마력을 끌어올려 신체를 강화.

데일에게 정확히 창을 내질렀다.

카악!

삼지창의 창끝 사이에 마검을 끼운 에릭은 그대로 마검을 타고 창을 찔러 들어갔다.

그 속도가 빠르다.

'무시할까?'

아니다. 막아야 한다.

순식간에 판단을 마친 데일은 무릎을 들어 창대를 쳐 올렸다.

강한 힘에 창이 순간적으로 부웅 떠올랐다.

하지만 에릭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양팔을 비틀어 곧바로 창을 제 위치로 되돌린 뒤, 다시금 데일을 노렸다.

'그렇군. 절대 거리를 주지 않겠다 이건가.'

대부분의 싸움에서 데일은 마검을 이용해 거리 싸움에서 이점을 가져가곤 했다.

마검은 거의 창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길쭉했으니.

먼저 공격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장점을 살릴 수 없다.

데일의 검이 상대에게 닿는 속도보다, 상대의 창끝이 데일에게 닿는 속도가 더 빠르다.

그냥 맞아줄까?

아니. 그거야말로 상대가 원하는 대로다.

아직 상대해야 할 기사가 많다.

피해는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

데일은 고민했고 결정을 내렸다.

순간적으로 한걸음 뒤로 물러났고. 마검을 끌어당겼다.

후웅!

창끝이 데일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곧장 뒤로 후퇴했다.

조금이라도 느리게 움직이거나, 좁은 거리를 물러났으면 창끝이 갑옷을 긁었을 것이다.

다만 이걸 운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에릭은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거리 계산을 이리 정확히....'

직접 맞상대하니 상대에게서 뿜어져나오는 위압감이 장난 아니다.

에릭은 데일의 실력에 감탄하며 다음 일격을 내지르려 했다.

하지만 그때.

데일이 마검을 던졌다.

"!"

에릭은 당황했지만, 대응은 실로 훌륭했다.

창을 비스듬히 올려 날아오는 마검의 궤적을 틀어버렸다.

하지만 한순간이나마 창이 봉쇄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아주 잠깐의 틈.

하지만 데일에게는 그 잠깐이면 충분했다.

순간적으로 에릭의 거리 안으로 파고든 데일이 그대로 주먹을 내질렀다.

한때 하이엘프들에게서 직접 배운 격투술.

에릭은 급히 창대를 들어 주먹을 막아냈다.

텅!

강력한 충격에 에릭이 물러나고. 데일은 그대로 파고들어 계속 주먹을 내질렀다.

파바방!

끝없는 난타에 결국. 에릭 역시 창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데일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마치 창처럼 날카롭게 찔러드는 주먹이었다.

하지만.

"어?"

텁.

에릭은 어느새 데일에게 붙잡혀 있는 자신의 주먹을 보았다.

"...주먹을. 잡는다고?"

데일은 에릭의 팔을 꺾은 뒤, 그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단단히 고정했다.

그리고 물었다.

"패배를 인정하겠나?"

"젠장.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지도 다 이해하지 못하겠군. 패배를 인정한다."

"훌륭한 창술이었다. 다만, 너무 찌르기만 선호하는 탓에 주먹질도 단순해지는 느낌이 있다."

"...조언 고맙다."

에릭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패배해서 분하긴 했지만, 치욕스럽다는 감정은 없었다.

그리 느끼기에는 데일이 너무 강했다.

에릭은 아일라에게 가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더 버텼어야 했는데."

"아뇨. 경은 잘해주었어요."

"그럼 저는 잠시 들어가봐도 되겠습니까?"

"예?"

"방금 싸움을 복기하고 싶어서... 생각보다 느껴지는 게 많습니다."

에릭은 여간해서는 그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기사다.

그가 저리 말할 정도라면, 정말로 데일과의 결투가 그에게 어떤 종류의 깨달음을 주었을 것이다.

아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다음은, 패트릭 경. 경이 나가주세요."

"예!"

씩씩하게 대답한 패트릭은 거구의 기사였다.

덩치가 산만하고, 배도 산만하게 나와있다.

여느 기사와는 다른 모습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저 패트릭이라는 기사를 둔하다거나 돼지라고 놀리지 않았다.

저 살 아래에 어느 정도의 근육이 파묻혀있는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쿵쿵 걸어간 패트릭은 데엘의 앞에 섰다.

"와하하! 앞의 결투는 잘 봤다. 하지만 나는 토브루 경이나 에릭 경처럼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거다."

"무기는?"

"원래 메이스와 대검을 그때그때 맞춰 사용하는데... 제안 하나 하지. 방금 보니 맨손 격투에 자신 있는 거 같은데. 어떤가? 무기를 버리고 맨손으로 싸우는 건?"

데일은 패트릭을 빤히 쳐다봤다.

제안을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이라는 태도였다.

데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지."

"오! 배포가 크시구만!"

데일이 제안을 받아들인 건, 딱히 배포의 문제는 아니었다.

'여기서는 받는 게 맞겠지.'

데일의 목적은 이들 모두를 꺾고,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주어 마음을 사로잡는 것.

그걸 위해서라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좋았다.

원하는 대로 싸우고 패한다면, 더 인정하기 쉽지 않겠는가?

마치 씨름 선수처럼 자세를 낮추고, 손뼉을 짝짝! 부딪힌 패트릭이 말했다.

"델로스의 아들. 패트릭."

"데일."

"먼저 간다!"

패트릭은 앞선 기사와는 달랐다.

거리를 두고 물러나거나 서로 상대를 가늠하는 일 없이, 그 거체를 이용해 저돌적으로 돌진했다.

그 모습을 보고 데일은 생각했다.

'이 돼지. 생긴 건 무식해보이는데 영리하군.'

패트릭의 노림수가 읽혔다.

그는 이미 데일이 기사들을 죽이지 않는 걸 보았다.

최대한 깔끔하게 승리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보았다.

그렇기에 앞뒤 안 보고 돌진을 선택한 것이다.

서로 뒤엉키고 구르고 하다보면 피해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계산!

그리고 패트릭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것도 바로 몸과 몸을 맞대고 뒹구는, 그런 우악스러운 싸움이다.

쿵!

달려든 패트릭이 양손을 뻗었다.

데일도 양손을 뻗어, 서로가 손을 마주 잡았다.

패트릭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멍청한 놈!'

체구는 곧 힘.

패트릭은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힘으로 밀려본 적이 없었다.

안 그래도 타고난 용력에 거구에서 우러나오는 힘. 거기다 마력으로 인한 강화까지.

그 기사단장도 순수 힘 싸움으로는 패트릭을 이기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는 손과 손이 맞닿은 순간 쾌재를 불렀다.

그대로 데일의 균형으로 깨트려 깔아뭉갤 생각이었다.

'어?'

쾌재가 경악이 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왜. 왜 안 넘어가는....'

안간힘을 썼지만 도무지 균형을 깨트릴 수가 없다.

도리어 패트릭의 몸이 서서히 앞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패트릭은 당황했다.

식은땀이 목덜미를 타고 흐른다.

힘으로 밀렸단 말인가? 천하의 패트릭이?

패트릭이 어쩔 줄 몰라하는 사이.

데일은 기습적으로 패트릭의 옆구리를 잡은 뒤. 다리에 힘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패트릭의 몸이 바닥에서 떠올랐다.

뒤늦게 패트릭이 아기처럼 다리를 버둥거렸지만, 땅을 벗어난 하체는 힘을 받을 수 없다.

데일은 그대로 패트릭을 바닥에 메다꽂았다.

꽝!

"컥!"

패트릭은 온몸이 찌르르 울리는 느낌에 신음을 토해냈다.

하지만 뚱뚱하다는 건 곧 맷집이 좋다는 의미기도 했다.

다른 이였다면 그대로 뻗었을 일격.

패트릭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반격하려 했지만... 그 순간 데일의 주먹이 날아왔다.

퉁!

창처럼 날카롭고. 재빠른 주먹이 패트릭의 턱을 비스듬히 후려쳤고.

일어서려던 패트릭은 이리 비틀. 저리 비틀거리다 이윽고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손을 툭툭 턴 데일이 말했다.

"너무 힘만 믿는군. 세상에는 나보다도 괴물 같은 놈들이 많으니, 좋은 교훈이 되었을 거다."

친절한 조언.

물론, 기절한 패트릭은 그 조언을 들을 수 없었다.

데일은 아일라에게 말했다.

"그냥 기절했을 뿐이다. 어디 다친 곳도 없으니, 침대에라도 뉘여두면 금방 일어날 거다."

아일라가 찌푸린 표정으로 지시했다.

"패트릭 경을 옮겨주세요. 혹시 모르니 진찰도 해주시고요."

기사 둘이 다가가 패트릭을 질질 끌고 사라졌다.

아일라는 말을 잃었다.

믿었던 패트릭이 힘 싸움에서 맥없이 당했기 때문에?

아니.

충격이었던 건 다른 부분이다.

'방금 그 찌르는듯한 움직임. 앞선 에릭 경의 그것과 비슷하다. 설마 그 짧은 사이에 배워서 써먹은 건가?'

그 짧은 사이에. 상대의 움직임을 읽고. 그걸 곧바로 응용해낸다니.

아일라는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스승님께서 그토록 좋아하시던 이유를 알겠어.'

그녀는 다시금 입술을 깨물었다.

결투는 계속되었다.

기사들이 차례차례 앞으로 나가, 자기 특기로 데일에게 승부를 제안했고 데일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어김없이 승리했다.

황실 기사단의 숫자는 총 77명.

데일은 빠르게 결투를 진행했지만, 모두와 겨루다 보니 자연히 시간이 많이 흘러갔다.

하지만 지켜보는 이 중에서 지루해하거나, 피곤해하는 이들은 단 하나도 없었다.

평범한 귀족들은 물론, 마법사들도 웅성거렸다.

"정말로 혼자서 모두를 상대하고 있잖아."

"인간답지 않은 강함이다."

"상대하는 기사들이 약한 게 아니야. 저 흑기사가 터무니없는 거라고."

그리고 데일.

데일 본인은 꽤나 즐거웠다.

이런 싸움다운 싸움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역시 하나같이 싸움의 달인들이다. 나 역시 배우는 게 많군.'

대륙 최강의 기사단이라는 칭호답게, 그 구성원 중 어중이떠중이는 없었다.

기사들은 적어도 자기만의 특기를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데일은 그들과 무기를 섞으며, 기사들의 기술을 모방했다.

그의 실력이 빠르게 늘어나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꼭 생기를 흡수하지 않아도, 강해질 수 있다는 게 실로 만족스러웠다.

싸움의 즐거움!

그렇게 75번의 결투가 이어졌다.

그리고 방금 막 76번째의 결투가 끝이 났다.

"내가 패배했소."

피부가 흰 중년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그는 황실 기사단의 부단장으로, 데일과도 몇 번 함께 전장에서 싸운 적이 있었다.

부단장답게 그 실력이 몹시 뛰어났다.

데일은 흑색 갑옷 여기저기에 난 상처를 슥 훑어본 뒤, 악수를 건넸다.

"감히 내가 조언해줄 만한 게 없군."

"아니오. 그대와 검을 섞으면서 나 역시 많이 배웠소. 괜찮다면 다음에도 한 수 부탁드려도 괜찮겠소?"

"얼마든지."

두 기사가 악수를 나누었다.

화려하고 수준 높은 싸움에 환호라도 내지를 법하건만.

사위는 싸늘할 정도로 고요하다.

사람들은 조용히 기다렸다.

결투는 끝나지 않았다.

아직 본승부가 남아 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그때.

아일라는 조용히 투구를 머리에 썼다.

"내 차례군요."

황실 기사단장의 첫 번째 제자.

미하일이 이 세상에 남긴 가장 뛰어난 걸작품.

천재.

그 모든 칭호들을 내려 두고, 아일라는 한 명의 결투자로서 데일의 앞에 섰다.

차분한 걸음걸이.

고른 호흡.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눈동자.

데일은 그 모습에서 기사단장 미하일의 향기를 느꼈다.

기사단

* * *

아일라는 고아다.

전쟁으로 부모를 모두 잃었다.

이 시대에서는 별로 드물지도 않았다.

부모 없는 고아가. 그것도 여자아이가 혼자 살아남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독해져야 했다.

무기를 다루는 법을 배워야 했고 스스로의 몸을 지킬 줄 알아야 했다.

다행히 아일라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그녀는 어린아이였지만, 어른을 상대로도 칼 싸움으로는 지지 않았다.

뒷골목의 도적들은 그런 그녀의 능력을 높이 샀다.

도적단은 아일라를 노예이자, 하녀이자, 암살자로 부렸다.

조직에 적대적인 사람에게 아일라를 보냈고, 암살했다.

아일라를 어린아이라 여겨 방심한 사람을 죽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사람을 죽이면, 흑빵과 반쯤 썩은 치즈를 받을 수 있었다.

아일라는 딱딱한 빵을 녹여 먹으며 세상에 대한 증오를 불태웠다.

'악마 숭배자들이 사람들을 홀려 동료로 만든다지?'

그녀는 오히려 그들이 자신에게 접촉해주길 바랐다.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신이든 악마든 상관없이 누구의 손이라도 잡을 수 있었다.

광신도든, 괴물이든 되어주리라!

하지만 그녀에게 손을 내민 건 악마도 신도 아니었다.

어느 명예로운 기사였다.

"꼬마야. 검을 제법 잘 다루는구나. 부모는 있니?"

"...없어. 그리고 나는 꼬마가 아니라 아일라야."

"나는 미하일이다. 네 눈빛이 마음에 드는구나. 이제부터 너는 내 제자니, 나를 스승이라 부르도록."

"...?"

미하일은 그리 말하고는 홀로 천천히 말을 몰아 걸어갔다.

마치 아일라가 당연히 따라오리라 여기는 태도였다.

아일라는 잠시 고민했다.

방금 저 미하일이란 기사가 그녀를 억압하던 도적단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그것도 단신으로.

원한다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다.

뒷골목의 어둠 속에 스며들면, 미하일은 결코 그녀를 찾을 수 없으리라.

하지만.

"뭣 하나. 어서 안 따라오고."

미하일이 고개를 돌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 눈동자는 노예를 보는 눈도, 더러운 뒷골목 고아를 보는 눈도, 비정한 암살자를 보는 눈도 아니었다.

자기 제자에게 보내는 따뜻한 눈이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같은 사람으로서 존중해준다는 게.

그녀는 미하일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아일라는 기사가 되었다.

그 이후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스승께 검을 배웠다.

기사가 되었고, 동료가 생겼다.

따뜻한 집과 맛있는 음식과 좋은 사람들이 곁에 생겼다.

미하일은 아일라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전해주려 했다.

글을 읽는 법부터 시작해 예절, 검술까지 모든 걸 가르쳐주려 했다.

미하일은 아일라의 스승이자 부모였다.

그리고 미하일은 죽었다.

그 시체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고, 유언 한마디조차 내뱉지 못했다.

아일라의 세계가 무너진 그 날.

그녀는 결의했다.

스승이 지키고자 했던 가치들을 그녀가 반드시 지킬 거라고.

그렇기에 아일라는 질 수 없다.

절대로.

* * *

"아일라. 미하일 경의 제자 아일라."

"데일이다."

아일라는 온몸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강력한 마력의 운용에, 일부 마력이 눈동자에 흘러나와 마력광을 뿜어냈다.

칼날 같은 기세가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앞선 기사와는 많이 다를 거라고.

그녀는 온몸으로 말했다.

"한 가지 경고할게."

"말해라."

"난 널 죽일 거야. 그러니 너도 날 죽일 각오로 싸워. 진심이 아닌 상대를 죽여봤자 기분만 나빠지니까."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약속은 약속이다. 나는 절대 너를 죽이지 않을 거다."

"설령 네가 죽는다 해도?"

"그래."

아일라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는 데일이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니란 걸 안다.

그녀는 봤다.

크리스틴과의 결투에서, 죽음에 다다라서도 끝까지 이성을 부여잡던 데일의 모습을.

신념이라고 해야 할까.

그 당시 그녀가 본 데일은 그 어느 기사보다도 명예로웠다.

뒷골목 출신인 그녀 따위보다도 더.

그렇기에 마음에 안 들었다.

"...후회하게 해줄게."

본인이 생각해도 깜짝 놀랄 정도로 유치하게 내뱉은 아일라가 땅을 박찼다.

그 속도는 데일조차도 가까스로 읽어낼 정도로 재빠르다.

'적당히 상대할만한 적수는 아니라 이건가.'

마검으로 방어하기에는 늦었다.

데일은 허리춤에 늘 달고 다니는 부무장인 메이스를 들어 냅다 던졌다.

부웅! 퉁!

아일라가 검을 쥔 손을 꺾었다.

롱소드는 잔상을 일으킬 정도로 빠르게 회전해, 그대로 메이스를 튕겨냈다.

그러고서는 더더욱 자세를 낮춰 데일의 아래쪽으로 파고들었다.

잠깐의 틈을 번 데일은 마검을 견제하듯이 앞으로 곧추세웠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내려 베고 싶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가볍게 피해낸 아일라가 반격하는 미래밖에 보이지 않았다.

캉! 카가가가!

찰나의 시간 동안 검격이 수십 차례 부딪혔다.

일반인들은 눈에 담을 수조차 없으며, 기사들조차 쉬이 이해할 수 없는 빠르고 수준 높은 교환이 일어났다.

검과 검이 맞부딪히고. 불티가 계속해서 튀었다.

유리함과 불리함도 몇 차례나 뒤집혔다.

격렬한 전투 속에서 승부는 평행선을 달렸다.

사람들은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앞의 결투와는 완전히 다르다."

"역시 아일라 경. 선대 기사단장의 모든 걸 물려받았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던가."

"어쩌면 시간만 좀 지나면 미하일 경도 능히 넘어설 수 있겠군."

"하지만 그 상대로 밀리지 않는 데일 경도...."

"정말 대단하다. 둘 다."

"이대로라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다만. 당사자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아일라는 이를 악물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이렇게 격렬하게 싸운 게 얼마 만일까?

'좋지 않아.'

아무리 괴물 같은 실력의 기사라도, 결국에는 사람이다.

심장이 뛰고, 땀을 흘리고, 피로를 느끼는 사람.

반면 상대는 다르다.

흑기사의 체력은 무한하다.

의지와 신체가 허락하는 한, 계속해 싸워나갈 수 있다.

살육 기계.

기계를 상대로 싸움이 길어질수록 불리해지는 건 당연한 얘기다.

'이대로 가다가는 점점 불리해진다.'

아직 여력이 충분할 때. 승부를 걸어야 한다.

의지를 다졌지만 그녀는 오히려 몸에서 힘을 뺐다.

눈빛도 차분하게.

호흡도 일부러 느리게 내쉬었다.

아일라는 뒷골목 태생이다.

그녀는 암살에 능했다.

아일라는 그 점을 부끄럽게 여겼지만, 미하일은 오히려 그게 네 장점이라고.

마음껏 갈고 닦아 보라고 조언해주었다.

'내가 가장 잘하는 것.'

그녀는 암살의 원칙을 알았다.

가장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비수를 찔러넣는 것.

그게 암살이다.

큰 기술을 사용하기 전에 기합을 외치거나, 숨을 크게 들이쉬거나, 눈빛을 번뜩이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평범함을 가장하고 상대의 방심을 유도해내 찌른다!

아일라는 몸을 비스듬히 낮췄다.

데일의 시야와 사각. 그 사이의 애매한 회색지대에 걸친 그녀는. 그 어떠한 전조 동작도 없이 검을 그었다.

둘 간의 거리 탓에 검은 허공을 맥없이 가르는 듯 보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서걱.

데일의 왼팔이 잘려나갔다.

"!"

"쯧!"

상대의 팔을 잘라냈지만 아일라는 도리어 혀를 찼다.

분명 목을 노렸다.

하지만 데일이 마지막 순간. 허리를 틀었다.

자신의 노림수를 뒤늦게나마 눈치챘다는 것이다.

'단순히 감각만으로? 아니면 스승님께서 기술을 사용하는 걸 본 적이 있으니까?'

어느 쪽이든 경악스러운 건 매한가지였다.

아일라는 연거푸 허공을 그었다.

그럴 때마다 날카로운 검풍에 얻어맞은 건물이나 도로에 깊은 흉터가 생겼다.

하지만 첫 일격과는 달리.

데일은 차가운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한 손만으로도 마검을 휘둘러 공격을 막아냈다.

'확실히 쉽지 않군.'

한때 기사단장이 보여줬었던, 마력을 이용해 주위 모든 것을 베어버리는 기술.

검의 길 끝에 이르러야만 터득할 수 있는 기술에 데일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방금 그건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했어.'

어떤 전조도 없이 파고들어 온 날카로운 일격.

도저히 기사보다는 암살자에 가까운 일격에 데일은 크게 놀랐다.

만약 데일이 기사단장의 기술을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아니면 위험을 알리는 본능이 조금만 늦게 반응했다면.

데일의 목은 바닥을 구르고, 데일의 여정은 그것으로 끝이었을 터.

이 섬뜩함.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다.

언젠가부터 쉽게 쉽게 싸워오던 터라, 느슨해졌던 감각들이 예리하게 날을 세웠다.

'확실히 죽이지 않고 이기는 건 힘들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약속을 깰 수는 없다.

그리하면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테니.

아일라가 모든 역량을 쏟아내고 있다면 데일이 할 일도 하나다.

최선을 다하는 것뿐.

아일라에게 맞서 데일은 마검을 휘둘렀다.

루드비히에게 배운 단순하고 기본적인 동작들처럼, 지극히 정석적으로 대응했다.

만약. 여기서 마력을 이용해 새벽 안개를 전개하거나, 영혼 지배. 혹은 그림자 검을 사용하면 싸움은 더 쉬울 것이다.

하지만 데일은 그러지 않았다.

순수하게 검으로 상대를 꺾어내고 싶었다.

잡다한 기술로 지금의 시간을 망치고 싶지도 않았다.

검과 검의 부딪힘에서 데일은 계속해 성장해나갔다.

'대단해. 둘 다 점점 실력이 늘고 있어.'

지켜보던 에른스트가 감탄을 흘렸다.

그래도 짧게나마 기사단장에게 가르침을 받던 에른스트다.

그는 데일과 아일라의 움직임이 점점 치명적이고 날카로워지는 걸 느끼고 있었다.

'아일라....'

에른스트는 문득 생각했다.

깊게 눌러쓴 투구 아래에 아일라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지 않을까?

그렇게 얼마나 검격이 이어졌을까.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시간도 끝이 났다.

이번에도 무기의 문제다.

챙강.

아일라의 검이 부러졌다.

사실. 여기까지 버틴 것만 해도 대단히 좋은 검이라 할 수 있다.

강대한 충격의 맞부딪힘을 몇백 번이나 견뎌냈으니.

단지 마검이 너무 규격 외로 뛰어날 뿐이다.

아일라는 부러져버린 자신의 검을 황망히 내려보았다.

그리고. 주저하는 태도로 패배를 선언하려 했지만....

"내가 졌...."

"검을 다시 뽑아라."

데일은 덤덤히 말했다.

아일라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데일을 쳐다보았고, 이내 뒤쪽에 손을 뻗었다.

"누구. 검 하나만 빌려주세요."

"여, 여깄습니다."

기사 하나가 자신의 검을 내밀었다.

검을 건네받은 아일라는 다시 한번 데일과 맞붙었고.

긴 격전 끝에 다시 검이 부러져 버렸다.

데일은 또 기회를 주었다.

아일라는 다시 검을 받아 싸움에 나섰고, 이번에는 검이 부러지는 게 아닌. 검을 놓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녀는 흉하게 찢어져 피가 철철 넘쳐흐르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데일은 다시 한번 기회를 주려했다.

하지만 아일라가 먼저 말했다.

"내가 졌어."

그녀는 투구를 벗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땀으로 흠뻑 젖은 아일라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 이상으로 후련한 감정이 엿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주황빛 하늘을 노려보았다.

우수에 젖은 눈빛.

저 하늘에서 그리운 얼굴이라도 엿보는 듯했다.

아일라가 중얼거리듯이 내뱉었다.

"나는 네가 싫어."

"말 안 해도 안다."

"스승님이 네 칭찬만 하더라고. 나는 안 봐주고."

"...."

"부모를 동생한테 뺏겼다고 생각하는 아이처럼, 질투한 거지. 유치하게도."

아일라는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뒤로 젖혔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해버리면... 질투하는 것도 힘들잖아."

쓴웃음을 지은 아일라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주위를 슥 둘러보았다.

그 눈빛을 알아본 기사단 전원이 다가와 데일을 둘러쌌다.

아일라는 어딘가 개운한 얼굴로 말했다.

"인정할 게 데일 경. 데일 경이 우리에게 이겼어. 명예로운 관습에 따라 결투의 승자가 모든 것을 가지는 게 옳겠지."

그녀는 부러진 검의 손잡이를 쥐고, 고개를 숙였다.

"이제 경이 우리의 단장이야."

다른 기사들도 자신의 병장기를 쥐고,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77번의 명예로운 결투.

단 한 명도 죽지 않은 결투자.

단장 위임.

지켜보는 사람들은 직감했다.

만약 세상이 멸망하지 않으면.

오늘의 이야기는 전설이 되어, 영원토록 전해지리라.

황제

* * *

데일은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기사들을 보며 물었다.

"그래도 되겠나?"

"이제 와서 무슨 당연한 말을."

피식 웃은 아일라가 말했다.

"경은 우리보다 강했고, 우리보다 명예로웠고, 우리보다 정의로웠어. 그런 기사가 이끌어준다면, 오히려 우리가 영광이야."

""영광입니다.""

기사들이 일제히 말했다.

데일은 고개를 끄덕인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귀족, 기사, 마법사 할 거 없이 모두가 데일을 쳐다보고 있었다.

데일이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이곳에 와서, 조금 우악스러운 방법으로 기사단장 직위를 승계받았는지. 그 이유는 대충 짐작할 거라 믿소."

"조금 우악스러운 게 아니긴 했지...."

데일은 에른스트의 중얼거림을 무시했다.

"세상이 위기에 처해 있소. 황혼은 이미 자신의 흉계를 완성단계까지 이르렀소. 이 주황빛 하늘이 그 증거요. 우리에게는 그리 많은 시간이 남지 않았소."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데일이 말을 이었다.

"이걸 내 입으로 직접 설명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오. 그대들은 제국에서 가장 똑똑하고, 여유롭고, 잘 교육받은 이들 아니오? 당연히 이런 사실도 모두 알고 있었겠지. 오히려 그게 더 부끄러운 일이오. 알면서도 방관하고 있다니."

"...."

"나는 아직도 그대들이 이레네에서 도망치던 모습을 기억하오. 지상에서 죽어가는 시민들을 뒤로한 채, 저 혼자 안전한 하늘로 도망쳤지. 모든 게 황제의 탓이라고 말하지는 마시오. 그대들에게는 힘이 있고, 더 나은 선택을 내릴 수 있었소. 하다못해 이곳을 벗어나 지상의 사람들을 돕는 방법도 있었지. 그대들은 스스로의 의무를 저버렸소."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

데일이 좋아하는 말이다.

이곳에 있는 모두는 귀족이자 사회의 고위층.

귀족은 그 권위만큼이나 의무도 강하다.

그들에게는 아랫사람들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데일이 규탄하는 듯한 말에 몇몇 이들이 얼굴을 찌푸렸다.

주로 나이 많고. 신분이 높아 보이는 귀족들이었다.

감히 흑기사 따위가 훈계하는 게 기분이 나쁜 것일 터다.

하지만 데일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이 불쾌하게 여기든 말든. 이제 데일에게는 어떤 위협도 되지 못한다.

"죄를 갚을 시간이오. 지금 서쪽과 북쪽에서 내 동료들이 군사를 이끌고 최후의 싸움을 위해 진격하고 있소. 남쪽에도 전령을 보냈소. 전령이 무사히 도착한다면, 그들도 반드시 진군할 것이오. 그러니 그대들도 이 싸움에 참여하시오."

"...."

사람들은 침묵했다.

누구 하나 말을 꺼내지 못하고,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 분위기를 살핀 에른스트가 조심히 말했다.

"데일 경. 여기 있는 이들이 비겁자라서 가만히 있던 건 아니야. 황제 폐하가 두렵거나, 황제 폐하의 명을 저버릴 수 없는 충신들이라 힘을 비축하고 있었던 거지."

에른스트는 일부러 부드럽게 말했다.

그 의도를 눈치챈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한다. 나 또한 여기 있는 모두가 비겁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주군의 말을 지키는 것 또한 아랫사람의 의무이기도 하지."

당근과 채찍.

한결 누그러진 태도에 사람들의 표정도 풀렸다.

"폐하의 명령이 내려진다면 우리는 지금이라도 당장 싸우러 나갈 수 있어. 그러니...."

"내가 기사단장으로서 황제를 설득하겠다. 애초에 그럴 생각으로 단장 자리를 받아낸 거고. 에른스트. 황궁으로 안내해라."

"아, 알았어."

데일이 걸음을 옮기자 종종걸음으로 따라온 에른스트가 속삭였다.

"폐하를 죽일 생각은 아니지. 그렇지?"

"...살려두길 원하나?"

"당연하지!"

에른스트가 다급히 말했다.

"충신 얘기는 빈말이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1000년을 이어온 제국의 황제라고. 지금 남아 있는 마법사나 귀족들 중에는 여전히 황제 폐하를 따르는 충신들이 많아! 폐하를 싫어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폐하를 죽이자고 묻는다면, 그건 좀 아니라고 할 사람이 많을 거라고."

요컨대 황제를 죽인다면, 큰 반발을 살 것이라는 것이다.

데일은 혀를 쯧 찼다.

마음에 안 드는 놈 하나 마음대로 죽이지 못한다니.

아일라도 옆으로 따라붙어 말했다.

"나 역시 폐하에게 해를 끼치는 건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 우리가 불명예스럽게 행동할 건 인정할게. 폐하가... 그리 좋은 군주가 아니라는 것도. 하지만 그분이 칼에 베이는 건 보고 싶지 않아."

"미하일 경이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사람이라?"

"...죽어서 스승님을 볼 면목이 없어."

에른스트도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나도 마찬가지야. 경이 폐하를 상대로 칼을 뽑는다면, 친위대로서 폐하를 지킬 생각이야. 그러니까 내 말은. 경에게 경고하는 게 아니라, 어. 대화로 해결했으면 좋겠다는 거야."

긴 시간 동안 대륙을 호령하던 제국이다.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고 했던가?

많은 걸 잃어버린 제국에는 여전히 충신들이 많았다.

'황제는 황제라 이건가?'

저 충심은 지금 황제 개인에 대한 충성은 아닐 것이다.

천년이 넘게 권위를 쌓아온 황제라는 직책에 대한 충성이 아닐까?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애초에 너희들의 협조를 받아야 하는 일이다. 이미 이빨 빠진 황제를 굳이 죽여서 문제를 만들어야 할 이유는 없어. 나 개인적으로도 딱히 황제에게 원한이 있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그리 말해준다니 다행이네."

'게다가 황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을 수도 있겠지.'

황제는 사람 됨됨이와는 별개로, 굉장히 간교하면서도 영리한 인물이다.

악마를 상대로 몇십 년간 제국을 유지했으니, 절대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의 황제의 모습은 연기고, 사실 마음속에는 다른 음험한 계획을 품고 있는 게 아닐까?

다른 세력과 황혼을 공멸시키고, 다시 자기가 대륙의 패권을 거머쥘 커다란 흉계를 말이다.

'이쪽이 오히려 더 가능성 있군.'

자신의 권력을 위해 진격 중인 군단에 보급도 끊었던 인간이다.

이미 도덕성을 버린 사람은 무슨 짓이라도 벌일 수 있다.

데일은 기사단과 친위대에게 둘러싸여 황궁으로 향했다.

상위구역의 주민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런 데일을 뒤따랐다.

데일이 허튼짓하는 걸 감시하려는 자도 있었고, 순수하게 호기심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었다.

데일은 그저 조용히 걸었다.

마침내 황궁을 둘러싼 성벽 앞에 도착했다.

'외곽의 성벽은 무겁다고 치워버리더니.'

도시를 하늘로 띄우기 위해 무거운 성벽을 아래로 떨어트려 쑥대밭을 만들었던 황제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 황궁을 둘러싼 성벽도 무너트리는 게 옳다.

'자기 목숨은 끔찍이 여긴다 이건가?'

성문을 지키던 문지기는 아일라와 에른스트의 눈치를 살피며 문을 열어주었다.

황궁이 눈에 들어왔다.

곡선과 직선의 아름다움을 최대로 살린 대리석 건축물과 정성스레 가꾸어진 화원.

곳곳에 설치된 분수에서는 투명한 물이 하늘로 솟구쳐 주위 식물에 물을 흩뿌렸고, 황제의 모습을 본뜬 조각상이 위풍당당하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곳이 제국의 심장.'

에른스트가 옆에서 설명했다.

"악마에게 함락당하기 전, 제도는 이렇게 생겼었데. 폐하께서는 그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이레네에 황궁을 지으신 거고."

"그렇군."

"어때?"

"뭔가... 쓸쓸하군."

화원에는 그 흔한 장미 하나 없었다.

오로지 나무와 덩굴식물뿐.

색깔은 대리석의 회색빛과 식물의 초록빛뿐이다.

다른 무엇보다, 사람이 아무도 없다.

정원사조차 없이 화원은 그저 조용히 그곳에 있을 뿐이다.

에른스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폐하께서 요즘 좀 민감해서, 꼭 필요한 인원 아니면 황궁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셔서... 아무튼 가자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

정원을 가로지르자, 데칼코마니처럼 좌우 대칭인 웅장한 건축물이 나타났다.

황궁이다.

황제는 저곳에서 기거하며, 제국의 정무를 살핀다고 한다.

"알현실로 가자."

"그전에 내가 폐하께 미리 언질이라도 해놓을게."

아일라가 말했다.

에른스트가 조심히 물었다.

"괜찮겠어? 폐하께서 화를 내시지 않을까?"

"...그래도 해야지. 죽이기야 하겠어?"

아일라가 앞장서서 사라지고.

데일과 에른스트는 일부러 느린 걸음으로 따라갔다.

황궁 내부는 너무나 넓어, 걸어서 이동하는 것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알현실 앞에 도착했을 때.

아일라가 미리 와 서 있었다.

아일라의 눈두덩이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무슨 일 있었나?"

"폐하께서 화가 나셨더군. 걱정하지 마라. 술병에 얻어맞았을 뿐이야. 들어가면 된다."

"...알았다."

데일은 알현실의 문 앞에 섰다.

문지기 두 명이 커다란 문을 열어주었다.

천천히 열리는 문을 쳐다보며, 데일은 생각에 잠겼다.

'황제. 황제는 어떻게 생겼을까.'

게임에서도 쉬이 만날 수 없는 인물. 만나봤자 멀리서 잠깐이나마 그 얼굴을 볼 수 있는 제국의 수장.

황제는 어떤 모습일까?

한때 대륙을 지배하던 제국의 우두머리답게 당당한 풍채를 지닌 대장군 같은 사내일까?

아니면 모략에 능통한, 비열하면서도 두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는 노인일까?

어쩌면 비웃는듯한 얼굴로 턱을 괴고 앉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치 '네가 올 줄은 이미 알고 있었다'라고 말하는 듯이.

어쨌든. 그가 이 시대의 거인이라는 점만은 확실하다.

이제 그 거인을 마주할 시간이다.

미약한 긴장을 느끼며 데일은 알현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둡군.'

어둡다.

넓은 공간에는 창문이 몹시도 많았지만, 그 창문은 모두 두꺼운 커튼에 틀어막혀 있었다.

유일하게 커튼에 막히지 않은 창문은, 권좌의 바로 뒤에 있는 창문뿐이다.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주황빛이 옥좌와 그 옥좌에 앉아 있는 황제의 앞으로 긴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아일라가 말했다.

"폐하. 말씀드린 대로 데일 경을 데려왔습니다."

황제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일라는 데일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데일은 몇 걸음 앞으로 더 걸어갔다.

그제야 그림자에 파묻힌 황제의 얼굴 윤곽이 보였다.

더 앞으로 걸어가던 데일은 걸음을 멈췄다.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게... 황제?'

몇 가닥 안 남은 머리카락과 진한 다크서클.

구부정한 허리. 흐느적거리는 손.

흐리멍덩한 눈. 입가에 흐르는 침인지 술인지 모를 액체.

위엄있는 군주는 없다.

비열한 모략가도, 비정한 실력자도 없다.

이곳에 있는 건, 그저 삶에 지쳐 마음이 꺾여버린 불쌍하고 추레한 노인일 뿐이다.

"...."

데일은 말없이 황제의 바로 앞까지 걸어갔다.

그 앞에서 무릎을 꿇거나, 예를 취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동네 노인에게 얘기하듯.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황제. 듣고 있소?"

"...."

"내가 누군지 알고 있소?"

황제는 힘없이 웃음을 흘렸다.

"흐흐. 간신배들이 결국에는 이곳에 언데드를 데려왔구나. 충신은 다 죽었는가. 미하일. 미하일은 어디 있지?"

이곳까지 술 냄새가 느껴진다.

데일이 답했다.

"기사단장은 죽었소. 이제 내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소."

"허튼소리! 어서 미하일을 불러와라. 이 건방진 송장 놈을 단칼에 베어버리란 말이다!"

생각보다 상태가 더 심각했다.

데일은 아일라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일라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데일이 말했다.

"아일라. '업'이라는 걸 아나?"

"업?"

"내 조부가 믿던 종교에서 주장하던 개념이다. 선한 일을 하면 보답받고, 반대로 악한 일을 하면 언젠가 반드시 되돌려받는다는 개념이지. 그걸 업보라고 불렀지."

"으음. 그렇군."

업보.

데일은 그 개념을 별로 믿지 않았다.

아니라면 평생을 정직하게 살았던 그의 조부가 그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저 황제를 보고 있자니, 그게 꼭 틀린 개념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죄악감. 중압감. 혹은 상실감.

무엇 때문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황제의 마음은 망가졌다.

"하지만 황제는 아직 업보를 덜 치렀어."

"뭐?"

"좋게 넘어가려 했더니 도무지 참아줄 수가 없군."

데일은 성큼 걸어갔다.

에른스트도. 아일라도. 주위 다른 누구도 반응하지 못할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데일은 팔을 뻗어 황제의 멱살을 쥐었다. 그대로 황제를 들어 올리고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신 차려라. 죽여버리기 전에."

황제

* * *

한 가지 감정이 데일을 움직였다.

분노.

이 모든 일을 초래한 황제가 정신 줄을 놓고 있다니?

차라리 뻔뻔하게라도 자신의 과오에 대해 '그건 모두 필요한 일이었다'라고 주장했으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예 현실에서 눈 돌리고 있다니.

이건 참을 수 없다.

"정신 차려라. 어서."

당황한 황제가 고함을 질렀다.

"뭐, 뭣들 하나! 이 언데드 놈이 나를 죽이려 하지 않느냐!"

"데일 경!"

"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황제가 버둥거리자, 에른스트와 아일라가 달려들었다.

데일은 황제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황제는 다시 옥좌에 파묻혔다.

그는 떨리는 눈으로 데일을 올려다보았다.

데일이 말했다.

"적어도 마지막 책임을 져라. 이런 식으로 도망치지 말고."

"거, 건방진 놈. 어서 이놈을 끌고 나가!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다니! 사형! 사형이다! 기사단! 친위대! 어서 움직이거라!"

"...."

"...왜 아무도 대답이 없느냐."

감히 황제의 멱살을 잡다니.

그 일족을 모조리 사형시켜도 과하지 않을 무례다.

한데.

기사단과 친위대는 데일에게서 황제를 떨어트리기만 할 뿐, 그 이상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눈치만 볼 뿐.

그제야 황제는 현실을 완전히 이해해버렸다.

아니. 사실 기사단이 친위대를 감히 어전으로 끌고 왔을 때부터 상황은 명확했다.

"그래. 너희들은 이제 내가 아닌 저 시체 놈의 말을 따르는 거구나."

아일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폐하. 저희는 여전히 폐하께 충성합니다. 다만. 지금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데일 경의 말마따나, 황혼을 막아야 합니다."

"닥쳐라! 이 배신자! 미하일 경이 천한 고아 년을 데려올 때부터 내 이리될 줄 알았지!"

황제는 아일라에게 분이 풀릴 때까지 욕설을 내뱉었다.

대제국의 군주가 내뱉기에는 너무 천박하고 적나라한 말들이었다.

아일라는 주먹을 불끈 쥐고 모욕을 받아넘겼다.

씩씩거리는 황제에게 데일이 말했다.

"아무래도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모양이군. 그럼 대충 상황이 어떤지 이해가 됐을 거라 믿는다."

황제가 모든 신뢰와 인망을 잃었어도 계속 이곳에서 권력을 누린 건, 기사단과 친위대 덕분이었다.

귀족들이 불만을 품어도 황제에게 순응한 것도.

마탑이 중립을 지킨 것도 전부 황제의 기사단의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제 그 기사단이 마음을 돌렸다.

황제는 모든 걸 잃고 껍데기만 남은 셈이다.

"너를 죽일 생각은 없다. 적어도 지금은. 그러니 좋게 말할 때 네 의무를 다해라. 그 알량한 감투라도 유지하고 싶다면 말이다."

"감히! 감히!"

"참고로 이건 권유가 아니다."

데일의 눈이 번뜩였다.

흑기사에게서 뿜어지는 음산하고 싸늘한 기운에 황제의 몸이 굳었다.

마음이 지치고 무너진 노인이 견뎌 낼 만한 기운이 아니다.

황제는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데일의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다.

이성은 데일이 자신을 쉬이 죽일 수 없다고 판단하지만, 데일의 분노는 꾸며진 감정이 아니다.

저 흑기사를 더 분노케 한다면, 그는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자신을 죽일 것이다!

황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황제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다. 마음대로 하거라."

"당연히 이 성도 전투에 사용할 거다. 공중요새는 그 자체로 큰 힘이 될 테니까. 아. 3군단에도 문제가 많더군. 새로 군단장을 앉혀야 할 것 같은데."

"마음대로 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버럭 화를 내는 건 황제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황제는 화를 내고 본능적으로 데일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모습에 마지막 자존심마저 무너져 내렸다.

한때 제국을 지배하던 자신이, 이제는 한낱 언데드의 눈치를 보는 신세가 되다니....

물론. 목적을 달성한 데일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데일은 아일라에게 말했다.

"들었지? 황제의 허가를 받았으니, 이걸로 마탑과 다른 귀족들도 설득할 수 있겠지."

"...알았다."

아일라는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땅으로 떨어진 황제의 모습에 그녀 역시 복잡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도 아니었다.

비로소 황혼을 상대로 함께 싸울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미 많이 늦은 감도 있다. 하지만 늦었더라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그렇게 황제를 내버려 두고 데일이 알현실을 나가기 전.

데일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 이건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보는데, 이레네가 무너질 때 왜 시민들을 버리고 혼자 도망쳐버린 거지? 그때 성벽을 끼고 마탑의 마법사들과 기사단이 함께 싸웠다면 승산이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기사단장이 그렇게 허무하게 전사하지도 않았을 거고. 왜 그런 멍청한 선택을 한 거냐."

"...제국을 지키는 게 내 의무다. 위대한 제국의 역사가 내 대에서 끊기게 할 수는 없어."

"겨우 그런 이유 때문이었나?"

황제가 울분을 담아 말했다.

"네가 뭘 알겠느냐! 천년을 넘게 이어온 제도가 악마에게 짓밟히는 광경을! 불타는 도시를 뒤로 하고 도망쳐야 했던 내 심정을! 이레네마저 그런 꼴이 되게 할 수는 없었다! 너 따위가 감히 나의 심정을 짐작이라도 할 수 있을까!"

"생각보다 더 시시한 이유였군. 결국. 겁을 집어먹었다는 말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 아닌가."

"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데일이 툭 뱉었다.

"그리고 외곽구역과 빈민가 역시 이레네였다. 결국. 너는 이레네를 지키지 못한 거다. 과거의 실수를 그대로 되풀이했다는 거겠지."

"그게 무슨...."

데일은 걸음을 옮겼다.

더는 대화를 나눌 필요성을 못 느꼈다.

황제는 생각보다 더 시시한 인간이었고, 역겨운 인간이었다.

저런 인간을 살려둬야 한다는 게 분노가 치밀 정도로.

데일이 알현실을 나섰다.

에른스트와 아일라도 그 뒤를 따랐다.

아일라는 마지막으로 황제에게 시선을 주었다.

황제의 얼굴에는 다시금 긴 그림자가 져 있었다. 황제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황제다. 황제란 말이다. 이럴 수는... 나는 제국을 지켜야... 미하일 경. 제발 돌아와주게. 제발."

아일라마저 걸음을 옮겼다.

공허한 알현실 내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 * *

엎드려 절 받기, 아니. 칼 들고 협박하기 수준이었지만 황제의 명령이 떨어졌다.

에른스트와 아일라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마탑과 귀족들을 만나 곧장 회의를 시작했고, 빠르게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는 상위구역의 실세들이 미리 대비를 해놓은 탓이 크다.

그들 역시 늦든 빠르든 이런 날이 올 걸 예상하고 어느 정도 말을 맞춰놓은 것이다.

빠르게 회의를 끝마친 에른스트가 데일에게 말했다.

"일단 3군단장부터 갈아치워야 해. 데일 경도 봤잖아? 얼마나 개판인지."

아일라도 동의를 표했다.

"멜피스는 최악이지. 놈이 망쳐놓은 군단을 어떻게든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야 해."

"그러고 보니, 아까 보니까 황혼의 병력 일부가 이쪽을 향해 오던데."

"아. 2,000명 정도라고 추정되지 아마? 아무리 3군단이 약해졌다고 해도, 겨우 그 정도 병력에 밀릴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바로 도움을 가는 게 좋겠지. 한 명이라도 아쉬운 상황이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에른스트는 꽤나 여유로운 태도였다.

3군단에만 오천이 넘는 병력이 주둔해 있다.

그 정도 병력이 성벽을 끼고 있는데 방어 정도는 거뜬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

친위대원 한 명이 얼굴이 사색이 되어서 달려왔다.

"대, 대장님!"

"응? 존. 지상에서 대기하라고 했잖아."

"큰일났습니다. 성문이. 성문이 뚫렸습니다!"

"...뭐?"

에른스트는 곧장 도시의 가장자리로 가 바닥에 엎드린 뒤, 지상을 살폈다.

에른스트의 얼굴도 이내 경악으로 물들었다.

"뭐, 뭐야 이게."

친위대원의 말은 사실이었다.

성문이 뚫렸고, 황혼의 병력이 성 안으로 짓쳐 들고 있었다.

* * *

능력 없이 정치질로만 자리를 차지한 이들은 항상 제 자리를 똑같은 방식으로 빼앗길까 불안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성이 공격당하든 말든. 부관이랑 술이나 까먹던 3군단장 멜피스는 문득, 불안함을 느꼈다.

'일단 흑기사놈을 붙잡아 놓긴 했지만, 이 기회를 틈타 허튼짓 거리를 하려는 놈들이 있지 않을까?'

허튼짓 거리는 자신이 하고 있지만, 멜피스에게 그런 자각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언제까지고 황제 폐가 나를 좋게 봐주신다는 보장은 없어. 소문에 의하면 요즘 정신이 영 좋지 못한 모양이고. 이런 틈을 파고들어 간신배놈들이 수작을 부릴 수 있어. 내 능력을 질투하고 눈엣가시로 여기는 놈들이 많으니까.'

간신배는 멜피스 자신이고, 사람들이 그를 싫어하는 이유는 질투 때문은 아니었다.

어쨌든 멜피스는 무언가 불안감을 느꼈다.

저 하늘 위에서 기사단장의 직위 교체와 황제의 굴복이 이루어지는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그의 본능이 미약한 불안을 느낀 것이다.

어떻게 보면 동물적인 감각이라 부를 수 있으리라.

'역시. 아직 내 기반은 살짝 불안정한 부분이 있지.'

그리고 그 기반이 불안정한 이유는 하나.

멜피스는 전장에서 별다른 공을 세운 적이 없다.

병사로서도. 지휘관으로서도 딱히 활약한 적이 없는 것이다.

'운 나쁘게도 나한테는 좋은 기회가 없었지. 흑기사 데일이라고 했었던가? 운 좋은 녀석. 만약 내가 그놈과 같은 전장에 있었다면, 대륙에 울려퍼지는 건 나의 이름이었을 텐데!'

취기와 함께 생겨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멜피스의 사고를 계속 확장시켰다.

'나에게는 전공이 필요하다. 전공만 있으면 아무도 쉽게 나를 쳐낼 수 없어. 전공을 세울 기회가... 아.'

마침 황혼이 이 성을 향해 진격해오고 있지 않나?

그것도 2000이라는,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로!

'성안에 틀어박혀 있으면 놈들이 도망쳐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성문을 열고 싸워, 놈들을 포위해 전멸시킬 수 있다면?'

적을 전멸시킨 명장!

그런 멋진 칭호가 자신의 이름 뒤에 오지 않을까?

"흐흐흐!"

"?"

희망에 젖어 웃음을 흘리는 멜피스를 부관이 미친놈 보듯이 쳐다봤다.

멜피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성문을 열고 적을 맞설 준비를 하게!"

"???"

"감히 우리를 향해 이빨을 드러낸 저 이교도 놈들을 살려두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네! 내 기사들을 친히 이끌고, 적들을 모조리 도륙 내야겠어!"

부관은 자신의 상관이 너무 술을 많이 마셨나 의심했지만, 이내 멜피스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만만해 보이는 적군을 잡아먹어 전공을 쌓는 것!

멜피스는 군단의 지휘관들을 급히 소집해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지금부터 성문을 열고 놈들을 소탕한다. 기사들은 말을 타고 놈들의 퇴로를 막아 포위. 그대로 섬멸하는 거야!"

"오오오!"

"참으로 완벽한 계책입니다!"

"멜피스 님은 역사에 다시 없을 명장입니다!"

딸랑이들이 아무 생각 없이 아부를 늘어놓고, 멜피스는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해했다.

하지만 3군단이라고 모두 머저리만 있는 건 아니었다.

"안 됩니다 군단장님. 저희는 성벽을 끼고 방어하는 것만을 준비해왔습니다. 당장 돌격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병사들의 사기가 몹시. 몹시 안 좋습니다. 다짜고짜 성 밖으로 나가 싸우라고 하면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군단장님께서 임명하신 기사들은 조금... 하다못해 이레네에 도움을 요청하시지요. 황실 기사단이 10명이라도 있으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전략을 지적당하자, 그걸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한 멜피스의 얼굴이 분노로 새빨개졌다.

"에에잇! 이 겁쟁이 놈들! 3군단을 지키는 지휘관라는 것들이 이리 두려움이 많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라!"

"...."

"게다가 고작 저런 쥐방울만한 병력도 우리끼리 처리하지 못하고, 이레네에 도움을 요청하자고? 명령이다! 당장 성문을 열 준비해!"

결국, 지휘관들은 멜피스를 말리지 못했다.

멜피스는 실용성은 없고 화려하기만 한 갑옷을 걸치고 말에 올랐다.

그가 뒷돈을 받고 기사로 임명해준 이들도 말에 올랐으며, 의욕 없는 병사들이 대강대강 전열을 이뤘다.

병사들의 사기가 낮든 말든, 멜피스는 잔뜩 신이 나 외쳤다.

"우리는 오늘. 대승을 거두고, 역사에 남을 전설이 된다!"

결과적인 얘기지만, 멜피스는 자신의 말을 절반이나마 지키게 된다.

그들은 역사에 전설로 남는다.

결코 좋은 의미는 아니었지만.

그리고 같은 시각.

얼굴을 가린 이인조가 반대쪽 성문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경. 여기가 3군단, 맞죠?"

"그렇습니다 공주님. 황제에게 붙어먹은 놈들인데, 특히 군단장이 쓰레기로 이름 높더군요."

"잘됐네요. 죄책감 없이 불태울 수 있겠어요."

"...정말 하실 생각입니까? 상대는 군단인데요."

"여전히 내키지 않는 눈치네요.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군단을 상대로 싸운 전사. 경은 그런 호칭이 탐나지 않나요?"

프라우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이내 엘프 특유의 호전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거 구미가 당기는데요? 어서 시작하죠."

"그래요 그럼."

엘레나는 뚜둑 몸을 푼 뒤.

빠르게 주문 구결을 외웠다.

그리고 모든 준비가 끝나자, 스산한 분노를 담아 말했다.

"일단 성문부터 무너트리죠."

엘레나

* * *

3군단장 멜피스가 제대로 계산하지 못한 요소가 몇 가지 있다.

첫째. 그가 뇌물을 받고 임명한 기사들은 도저히 기사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수준이 처참하다는 것.

둘째. 2000에 달하는 황혼의 병력은 하나하나가 병사 셋은 상대할 수 있는 정예병이라는 것.

셋째. 바이만의 공주와 그 기사가 황제를 불태우기 전에, 우선 3군단을 무너트리기로 마음먹었다는 것.

스스로에 대한 과신의 대가는 참혹했다.

"자! 용감한 기사들아! 돌격해라!"

"와아아아!"

기사들이 말을 몰며 돌격했다.

하지만 그들이 채 거리를 좁히기도 전에, 황혼의 추종자 쪽에서 마법이 날아왔다.

쏴아아아!

거대한 파도가 솟아오르더니 그대로 달려오던 기사의 일선을 뒤덮었다.

"어억!"

"크아악!"

파도에 얻어맞은 기사들은 그대로 낙마.

다음 기사들이 계속 돌격하려 했지만 땅은 순식간에 진창이 되어 발이 푹푹 빠지기 시작했다.

말 타는 솜씨가 썩 좋지 않았던 기사들이 곳곳에서 낙마했다.

낙마하지 않더라도 속도와 기동성이 크게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기사들이 진창에서 허우적거리는 그 순간.

화살 세례가 기사들의 머리 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냥 화살이 아니다.

화살촉에 주황빛 기운이 둘러싸여, 갑옷도 능히 뚫어낼 만한 화살이었다.

"아아악! 살려줘!"

"도, 도망가!"

비명과 신음. 그리고 도주.

용맹히 돌격하던 기사들은 자기 무기조차 내팽개치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등을 보인 상대만큼 먹음직스러운 먹이도 없는 법.

황혼의 전사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당황해 멍하니 있던 멜피스가 발작하듯이 외쳤다.

"뭐 하는 거야! 도망치지 말고 맞서 싸워! 하다못해 방패라도 들라고 멍청이들아!"

하지만 그런 멜피스의 외침에도 기사들은 그저 도망칠 뿐이었다.

뒷돈을 받고 어중이떠중이들을 기사로 받아들인 결과였다.

'기사를 모두 잃을 수는 없어.'

멜피스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벼, 병사들! 앞으로 진격!"

"...."

"진격하라고!"

하지만 병사들은 주춤거리며 꼼짝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야 당연하다.

가뜩이나 사기도 낮은데, 앞에서 기사들이 싹 쓸려나가는 봤으니 누가 싸우고 싶겠나.

지휘관들도 다급한 상황에 어쩔줄 몰라했다.

대부분의 지휘관들은 멜피스에게 줄을 대서 권력을 차지한 부류.

심지어 이 중에서는 전쟁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은 지휘관도 있었다.

그 사이에도 적 전사들은 도망치는 기사를 따라잡아, 도륙내고 있었다.

기사들이 전멸하면 그 다음은 아군 병사의 차례다.

그제야 멜피스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이거... 큰일 난 거 아니야?'

전공을 세우려다가, 오히려 중요 병력을 전부 날려 먹게 생겼다.

이대로면 멜피스의 입지가 흔들리고 만다.

평소 불만있던 세력들도 이번만큼은 가만있지 않을 거다.

"이, 일단 후퇴한다. 여력이 있을 때 물러서서, 성벽을 끼고 싸운다!"

"예!"

우물쭈물하던 지휘관들이 후퇴하자는 말을 듣자마자 눈을 빛냈다.

병사들도 아직 명령도 안 내려졌건만, 재빨리 성문을 향해 몰려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멜피스에게 또 다른 재앙이 펼쳐졌다.

쿠우웅!

온 요새에 울려 퍼질 만큼 거대한 굉음.

굉음 다음에 하늘을 향해 검은 연기가 솟구쳐 올랐다.

황혼의 마법사가 마법을 날린 걸까?

아니다.

소리가 들려온 건 요새의 반대쪽이다.

"뭐, 뭐야 대체."

당황하는 멜피스.

부관이 급히 달려와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구, 군단장님. 큰일입니다!"

"대체 무슨 일인데!"

"마녀! 마녀가 나타나 성문에 마법을 날려대고 있답니다!"

"마녀? 무슨 마녀?"

"그 왜. 격노의 마녀라고. 떠돌아다니면서 성과 마을을 불태운다는 마녀가 있지 않습니까?"

"아 그래. 황혼에게 넘어간 배신자를 응징한다는 미치광이년... 근데 그년이 왜 우리를 공격하는 건데?"

"...글쎄요?"

쿠웅!

다시 한번 굉음이 울렸다.

좋지 못한 신호다.

계속 마법을 날려댄다는 의미니.

"성문! 아직 성문은 괜찮은 거지?"

"어, 얼마 못 버팁니다. 마녀의 화력이 생각보다 강합니다."

"무슨 혼자서 성문을 부숴...."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엄연히 현실이다.

급격한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해, 멜피스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지휘관이 그런 멜피스의 눈치를 보다 조심히 물었다.

"저. 군단장님. 지금이라도 위에 연락하죠. 마녀까지 왔으니, 마탑이랑 기사단의 도움이 필요해요."

멜피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안 돼."

"예?"

"그러면 난 끝이라고!"

진즉에 도움을 요청했다면 모를까, 얻어맞고 이제야 부랴부랴 도와달라고 외친다고?

그러면 멜피스가 책임을 져야 하지 않는가!

이런 상황까지 와서도 자기 안위만 생각하는 멜피스의 행동에 부관은 말을 잃었다.

감탄스럽기까지 했다.

"으으. 무언가 좋은 비책이... 아!"

섬광이 멜피스의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그는 자신이 떠올린 천재적인 발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가 막힌 묘책을 생각해내다니!

"좋은 생각이 났다."

"무엇입니까?"

"우리가 감옥에 가둬놓은 흑기사. 그 흑기사를 사용한다."

"?"

"들어봐!"

멜피스가 신이 나 설명했다.

"그 언데드 놈이 착한 척을 한다는 건 알지? 속으로는 분명 음흉한 마음을 품고 있겠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마치 영웅이라도 된 듯이 굴고 있지. 그러니 황혼의 공격에 당하고 있다고 말하면, 일단 우리를 도와주긴 할 거다."

"저. 근데, 저희가 그 흑기사를 잡아넣을 때, 황혼과 내통한 혐의로 넣지 않았나요? 그래 놓고는 이제와서 황혼의 추종자들을 상대로 싸워달라고 하면,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

움찔한 멤피스가 입을 뗐다.

"오, 오해가 있었다고 해. 아니다! 기회를 주겠다고 해. 황혼과 맞서서 결백을 증명하라는 거지!"

"으으음."

"그리고 들어봐! 계획은 그게 끝이 아니야. 오늘의 실수를 그 흑기사에게 덮어 씌우는 거지. 흑기사가 폭주해서 아군을 공격했고, 덕분에 피해가 커졌다! 따라서 책임은 그 송장 놈에게 있다! 라고 보고를 올리면, 누구든 믿지 않겠어?"

"...."

부관은 말을 잃었다.

멋대로 데일을 가둬놓고는, 급할 때 되니 도움을 청했다가, 마지막에는 자기 잘못을 덮어씌우겠단다.

'악마인가?'

아무리 멜피스 아래에서 온갖 더러운 일을 다 했던 부관이지만, 지금만큼은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뭐 어쩌겠나.

멜피스가 힘을 잃으면, 그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것인데.

"알겠습니다. 그럼 우선 감옥에 있는 흑기사를 풀어놓겠습니다."

"그래. 어서 서두르도록!"

그리고 그때.

쿠웅! 쿠구궁!

앞서서 들리던 굉음보다 더 큰 폭발음 다음, 무시할 수 없는 소리가 울렸다.

멜피스와 지휘관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성문이 무너졌다!'

마법사 혼자서 성문을 이리도 빨리 무너트릴 줄이야!

멜피스가 성안으로 후퇴했을 때는 이미 아비규환이 펼쳐지고 있었다.

"꺄아아악!"

"성문이 뚫렸다! 도망쳐!"

"으악! 군단장 이 시발 새끼는 대체 뭘하고 있는 거야!"

"불이다! 도시에 불이 붙었다!"

성문이 뚫렸다는 소식에 병사들과 주민들이 혼란에 빠져 뛰어다녔다.

곳곳에는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혼란 속에서 누군가 횃불을 떨어트려서 목조 건물에 불이 옮겨붙은 것이다.

그 와중에 뒤따라온 황혼의 병력이 성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법과 화살이 날아 들어오자 혼란은 더욱 커졌다.

"아."

답이 없는 상황.

멜피스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탄식을 흘리는 것뿐이다.

* * *

데일은 요새에서 펼쳐지는 혼란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그 짧은 사이에 이런 난장판을 만들 수가 있는 거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군단장 멜피스에게 감탄마저 나왔다.

일부러 상황을 망치려 해도 이렇게 빠르고 정확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부하의 보고를 듣던 에른스트도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니 대체 무슨. 그러니까. 군단장이 성문을 열고 달려 나갔다가, 기사를 전부 잃고 도망쳐 들어왔다고? 그리고 그 타이밍에 마녀의 공격을 받아 성문이 무너졌고?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지?"

"아, 그, 예. 믿기 어렵지만 모두 사실입니다."

"아니! 대체 왜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우리한테 도움을 안 요청한거야! 아니. 하다못해 보고라도 했어야지!"

아일라가 씩씩대며 소리쳤다.

하지만 데일이 주목한 부분은 다른쪽이었다.

"잠깐. 마녀가 공격했다고?"

"아, 예."

"무슨 마녀인지는 아나?"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무시무시한 마법을 혼자서 펑펑 써대는 걸 보니 그 요즘 소문의 '격노의 마녀' 같습니다...."

'엘레나!'

악마 파르훈을 헤치운 엘레나가 기어코 이곳까지 와서 성문을 무너트리다니.

그것도 하필 황혼의 병력이 도시를 공격하는 타이밍과 절묘히 겹쳐버렸다.

'아마 우연이겠지.'

덕분에 요새가 혼란에 빠졌으니, 꽤나 곤란한 우연이라 할 수 있다.

데일이 말했다.

"일단 빨리 내려가자. 도움을 줘야지. 기사단이랑 마탑의 전쟁 마법사도 준비되어 있나?"

"준비는 되어 있지. 준비는."

에른스트는 떨떠름하게 말했다.

"문제는 내려가는 방법이야. 이레네가 워낙 높이 떠 있잖아? 그래서 한 번에 지상으로 내려가는 숫자에는 한계가 있어."

"평소에는 어떻게 내려가나? 전부 양탄자에 올라타지는 않을 거 아닌가."

"작은 배에 마법사들을 태워서 오르락내리락하지. 기사랑 병사, 그리고 물자를 싣고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마법사들 마력 대부분을 써야 할 거야."

'야가브의 유령선이랑 별로 다를 것도 없군.'

요새 바로 위에 있건만, 곧바로 도움을 가기 힘들다니.

심지어 적들이 이미 도시에 파고들고 있어, 마법 폭격도 힘들다.

"일단 물자나 병사는 후순위로 미루고 기사부터 되는대로 태워야겠군."

"어쩔 수 없네."

에른스트와 아일라가 분주히 움직였다.

지상으로 내려가기 위한 배가 빠르게 준비되었다.

황실 기사들이 우선적으로 배에 올랐고, 마법사들이 함께 모여 비행 주문을 외웠다.

그래도 이곳까지 올라오는 것과 달리.

내려가는 건 상대적으로 적은 마력이 들었다.

그 사이에도 아래의 상황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성문을 무너트린 황혼의 병력이 아예 본인들이 성벽을 점령하려 하고 있었다.

도시의 반대편에서는 연거푸 엘레나의 마법이 터졌고.

그 사이에서 병사들은 우왕좌왕하며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아일라와 에른스트는 더욱 서둘러야 했고, 마침내 준비가 끝났다.

"내려갑니다!"

도시의 한구석에 마련된 선착장에 정박되어 있던 배가 두둥실 떠올랐다.

배가 천천히 지상을 향해 낙하했다.

아일라가 초조한 기색으로 물었다.

"내려가면 누구부터 칠 거야. 황혼의 병력부터? 아니면, 마녀부터? 병력을 반으로 쪼개는 건 위험할 거 같은데?"

잠시 고민한 데일이 말했다.

"내가 엘레나를 막겠다."

"혼자서? 아, 그러고 보니 아는 사이던가?"

"보호자 같은 거지."

보호자인만큼 엘레나가 더 날뛰기 전에 데일이 책임지고 막아야 한다.

쿠우웅.

마침내 배가 지상에 착륙했다.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내려서, 병사를 지원하기 위해 달렸다.

데일은 반대로 달렸다.

"바로 해결하고 도와주러 가겠다!"

"알았어 경!"

에른스트와 아일라가 빠르게 사라지고. 데일도 속도를 높였다.

'엘레나.'

데일의 기억 속 엘레나는 선한 소녀다.

당장 빈민가의 수색 때도, 주위에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위험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오지 않았던가.

분노로 성격이 변했다고 해도, 그 근본까지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대화를 나누면 금방 설득할 수 있겠지.'

그래. 대화 몇 마디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다.

대화가 가능하다면.

"크아아악!"

"저, 저 폭풍은 뭐야!"

"도망쳐!"

무너진 성문에 도착하니, 거대한 토네이도가 주위를 휩쓸고 있었다.

데일조차도 선뜻 다가가기 꺼려지는 토네이도였다.

데일은 멈칫했다.

'대화... 어떻게 나누지?'

* * *

같은 시각, 프라우가 엘레나에게 외쳤다.

"상대는 다수고 우리는 하나! 언제 마법이나 화살이 날아올지 모릅니다! 조금이라도 틈이나 여지를 주면 안 됩니다!"

"알았어. 다가오는 모든 걸 날려버리면 된다 이거지?"

엘레나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자신 있어."

엘레나

* * *

토네이도. 혹은 용오름.

원을 그리며 거세게 회오리치는 저 바람기둥을 본 병사들이 겁에 질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무리 오만한 사람이라도 대자연의 웅장함과 잔혹함을 마주하면 고개를 수그리기 마련이다.

지상에 솟아난 재앙에 병사들은 감히 뭘 해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저런 자연재해를 일개 개인이 일으켰다는 게 더 섬뜩할 따름이었다.

"도, 도망쳐야 해."

"신이시여...."

"이건 말도 안 돼."

사람들이 실의에 빠져있건 말건. 토네이도는 천천히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거센 바람은 닿는 모두를 빨아들였다.

도로의 단단한 판석.

버려진 짐마차.

건물 기둥과 벽돌.

무겁고 가볍고를 가리지 않고, 토네이도는 닿는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토네이도에 한 번 빨려 들어간 물건은 머지않아 산산이 조각나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이는 저게 단순한 토네이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얼음 조각이 있다.'

칼날처럼 날카롭게 번들거리는 얼음 조각들이 바람을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엘레나가 따로 만들어낸 칼날 얼음이었다.

'두 가지 마법의 조합.'

엘레나의 특기.

다른 마법사는 감히 흉내 낼 엄두조차 내지 못할 천재적인 재능의 발로.

단단하고 날카로운 얼음 조각들은 회전하고, 또 회전해 토네이도에 빨려든 모든 것을 갈아버렸다.

그야말로 거대한 분쇄기인 셈이다.

저 괴물의 뱃속에 들어가면 누구도 형체조차 남기지 못 하리라.

다만. 그런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현상에서도 데일은 일말의 친절을 느꼈다.

'일부러 멀리서 사용했다.'

토네이도는 성벽에서 어느 정도 거리에서 솟아올랐고, 이쪽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미리 보고 도망치라고 친절하게 말해주는 것 같은 모습이다.

실제로, 굳어있던 병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허겁지겁 물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딜 가든 행동이 굼뜬 사람은 있는 법.

병사 하나가 창백해진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으. 으. 으... 사, 사, 살려...."

"레이나 이 멍청아! 빨리 일어나서 도망쳐!"

"다, 다, 다리가 안 움직여. 흐흑. 엄마...."

지독한 공포에 몸이 굳어버렸다.

동료들은 그런 병사를 구하고 싶지만, 그들 역시 토네이도에 가까워질 용기는 없어 발만 동동 굴렀다.

그대로 병사가 토네이도의 영향권에 들어서려던 찰나.

데일이 달려들어 병사를 품에 안고 뒤로 훌쩍 뛰어올랐다.

순간적으로 바람이 데일을 빨아들이려 했지만, 데일의 도약력이 더 강했다.

만약 조금만 늦었다면 병사는 갈가리 찢겨 육편이 되었으리라.

"어, 어, 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이 녀석을 챙겨라."

데일이 병사의 동료들에게 말했다.

굳어 있던 동료들이 허겁지겁 달려와 동료의 몸을 지탱했다.

데일이 지시했다.

"도시 반대편에 황실 기사단이 싸우고 있을 거다. 거기로 가서, 명령을 받아라."

"고맙습니다!"

"데일 경 맞으시죠? 그 유명하신... 정말 감사합니다."

"모, 목숨을 걸고 저를...."

데일은 감동받은 병사들에게 손을 휘휘 저은 뒤. 이내 신경을 꺼버렸다.

병사들을 구한 건 그냥 그럴 능력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엘레나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무고한 사람을 조금이라도 덜 죽이는 게 낫겠지.'

데일은 엘레나의 분노를 이해한다.

의지하던 자신이 죽었으니, 어린 마음에 복수 같은 걸 꿈꾸는 것일 터.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헤친다면, 모든 일이 끝났을 때 엘레나가 견뎌낼 수 있을까?

데일이 힘이 있지만 무고한 이들을 죽이지 않고 스스로 인간임을 유지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엘레나도 위험할 정도로 대단한 재능을 지녔지만 인간으로 남아 있길 원했다.

'업보는 적게 쌓을수록 좋지.'

그러려면, 되도록 빨리 엘레나를 막아야 한다.

사실 상황이 여러모로 좋지 않다.

엘레나가 요새를 공격한 타이밍의 황혼의 추종자들이 요새를 공격하는 것과 겹쳐버렸다.

그래서 피해가 생각보다도 더 커져 버렸다.

전투가 끝난 이후, 엘레나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그들의 말에 일리가 있기도 하고.

상황을 조금이라도 원활히 수습하려면 빨리 엘레나를 막아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대화를 하고 싶다.

하지만 대화를 하려면 저 토네이도를 뚫고 들어가야 한다.

여기서 아무리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저 살벌한 바람에 목소리 따위는 모조리 흩어져버릴 것이다.

데일은 마검으로 시선을 내렸다.

'마검이라면....'

분명 마법을 갈라낼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잠시뿐.

잠깐 바람을 갈라내도, 뒤이어 오는 바람이 그 빈자리를 채울 뿐이다.

게다가 저 토네이도의 무서운 점은 바람만이 아니다.

바람을 따라 얼음 칼날과 그 안에 빨려 들어온 암석이나 건물 잔해 따위에 얻어맞으면, 아무리 데일이라도 무사할 거라 확신할 수 없다.

'아니면 마법 반사 망토를 쓸까?'

바이만의 보물고에서 찾은 마법 반사 망토.

악마의 마법조차도 일순간 튕겨낼 수 있는 강력한 유물.

분명 엘레나의 마법도 튕겨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법이 반사되면 어떻게 될까?

'엘레나가 다치는 게 아닐까?'

토네이도와 얼음 칼날이 역으로 방향을 바꿔 엘레나를 노린다면?

엘레나가 뛰어나게 대처해 힘을 상쇄한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단순히 다치는 선에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니. 마법의 강력함을 생각하면 엘레나가 죽을 확률이 더 높다.

그럼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다.

결국은 남은 방법은 하나.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나?'

저 폭풍 안으로 뛰어들어, 어떻게든 헤쳐 나가, 엘레나에게 닿는다.

무식한 해결책이지만 지금 당장은 그 방법밖에 없어 보였다.

하지만 괜찮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하는 법이지만....'

몸이 좋으면 조금 무식해도 살만한 법이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빠르게 결단을 내리는 건 데일의 장점이다.

데일은 곧장 주위를 둘러보았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는 병사들을 발견했다.

데일은 그들에게 다가가 부탁했다.

"방패를 빌려줄 수 있겠나?"

"예? 예, 예! 당연히 드려야죠!"

"나중에 찾아와라. 반드시 갚겠다."

데일은 보는 대로 방패를 줍기 시작했다.

그 종류도 신경 쓰지 않았다.

자그마한 버클러부터 원형 방패, 사각 방패, 타워 실드까지.

팔에 걸 수 있는 건 전부 달았고, 끈을 이용해 몸 이곳저곳에 요령 좋게 붙여놨다.

병사들이 그런 데일을 묘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어, 음."

"대체 뭘 하시려고...."

방패를 덕지덕지 붙여놓은 데일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웠다.

어디서 광대가 왔나 생각이 들 정도.

다른 한편으로는 저 무거운 방패들을 달고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이는 게 놀랍기도 했다.

'이 정도면 방어력은 얼추 되었나?'

모든 준비는 끝났다.

데일은 다가오는 토네이도를 향해 당당히 섰다.

휘오오오오!

폭풍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주위 모든 걸 집어삼켰고, 이제 곧 데일도 집어삼킬 것이다.

'저 안에서는 숨도 쉬기 힘들겠지.'

호흡이 필요 없는 몸이라서. 그리고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않는 몸이라 실로 다행스럽다.

그러지 않았다면 저 토네이도 안에 뛰어드는 미친 짓은 엄두도 내지 못했을 테니.

마침내 폭풍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바람이 강하게 느껴진다.

데일은 가만히 서 있지만, 점점 폭풍의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

데일은 자세를 낮췄다.

마지막으로 폭풍을 올려다보았다.

어지럽게 서로 얽히고 뒤엉키는 바람의 흐름.

그 흐름을 읽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가장 적합한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순간.

타앙!

땅을 박찼다.

하늘로 뛰어오른 데일의 몸을 순식간에 폭풍이 삼켰다.

거센 기류에 데일의 몸이 더 높이 상승했다.

휘오오오!!!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데일의 몸이 마구 회전했다.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지는 이제 알 수 없다.

균형 감각은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해버린다.

모래와 흙 따위가 섞여 시야마저 흐릿한 폭풍 속.

평범한 사람이라면 곧장 혼절해버리겠지만, 데일은 평범과는 거리가 멀었다.

데일은 정신을 붙잡고 집중을 유지했다.

그리하지 않으면 금방 목숨을 잃어버릴 테니.

팍! 파각!

얼음 조각이 빠르게 날아와 몸에 부딪힌다.

챙겨온 방패에 큼직한 균열이 생겼다.

데일은 구멍 뚫린 방패의 끈을 풀었다. 방패가 폭풍에 휘말려 저 멀리 사라졌다.

'생각보다 위력이 강하다.'

회전을 거듭한 끝에 위력이 가득 실린 얼음 조각들은 무시할만한 게 못 되었다.

고육지책으로 챙겨온 방패들의 소모도 예상보다 빨랐다.

'쳐낼 수 있는 건 쳐내야 해.'

데일은 감각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얼음 조각을 정확히 감지해야 한다.

폭풍 속에서는 시각도. 청각도 제한되지만, 해내야만 한다.

휘오오오!!

바람이 절규하는 소리가 자꾸만 방해한다.

하지만 데일은 그 안에서 쓸모없는 정보와 필요한 정보를 분리하고, 빠르게 머릿속에 계산해냈다.

집중에 집중을 거듭하던 그때.

어느 순간. 주위 풍경이 미세하게 바뀌었다.

마치 데일이 평소에 꿈을 꿀 때와 비슷한 광경이다.

날아오는 얼음 조각들이 마치 예리한 검날처럼 보인다.

천 명이 넘는 검사들이 파괴적이고 날카로운 검로를 그리며 데일을 노려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두려움도. 주저도 일절 없는 냉혹한 검사들.

데일은 마검을 들어 아래로 내려쳤다.

투퉁! 퉁!

첫 번째 얼음 조각을 베어냈다.

정확히 반으로 쪼개진 얼음 조각이 힘없이 날아가버렸다.

완벽한 방어.

하지만 만족할 시간은 없다.

곧바로 두 번째. 세 번째 얼음 조각이 날아들었다.

데일은 바람의 흐름에 이리저리 뒤집히면서, 사방에서 덮쳐오는 얼음 조각들을 베어냈다.

물론. 모든 얼음 조각을 쳐낼 수는 없었다.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놀라운 기량으로, 상당히 많은 얼음 조각들을 쳐낼 수 있었다.

'생각보다 수월하다. 왜일까?'

데일은 고민했고, 머지않아 답을 얻을 수 있었다.

'황실 기사단 전체와의 결투.'

기사단의 기사들은 하나하나가 자신의 특기가 있었으며, 각자의 개성이 확실했다.

저 불규칙하고, 크기마저 제각각인 얼음 조각들에서 데일은 기사단의 움직임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데일은 결투에서 생각보다 많은 걸 배운 모양이다.

그리고 이 얼음조각들을 쳐내면서, 그때 얻은 배움을 빠르게 몸에 체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처 쳐내지 못한 얼음 조각들은 꾸준히 데일을 베었고, 이미 챙겨온 방패는 모조리 소모되었다.

갑옷에도 깊숙한 상처가 곳곳에 있다.

몇몇 파편은 제대로 틀어박혀, 차가운 피가 흘러내렸다.

이미 온몸이 넝마 짝이다.

'슬슬 한계인데.'

이 혼란스러운 폭풍 속에서 사투를 벌이면서도, 데일은 꾸준히 자신의 위치를 계산하고 있었다.

토네이도의 큰 흐름을 따라 빙글 몇 바퀴 돌다보니, 점점 그가 어느 위치에서 날아다니고 있는지 감이 오기 시작했다.

'기회는 아마도 한 번. 폭풍의 중앙에 가장 가까워지는 순간, 단번에 낙하한다.'

머지않아 그 시간이 왔다.

기류의 불안정한 흐름에 데일의 몸이 폭풍의 중심에 가까워졌다.

절호의 기회.

데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거대한 대리석 원통이 날아다니는 게 눈에 보인다.

건물의 기둥이었을까?

운이 좋다.

데일은 몸을 크게 회전한 뒤, 기둥을 힘껏 걷어찼다.

쿵!

균열이 가득하던 대리석 기둥이 산산이 조각나고. 데일의 몸이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데일은 마검을 앞세워 폭풍의 중심을 향해 빠르게 가까워졌다.

이제 방어는 불가능하다.

얼음 조각이 온 갑옷을 할퀴고 지나갔지만 데일은 묵묵히 버텨냈다.

데일이 폭풍의 중심까지 닿는 게 빠를까? 아니면 온몸이 난도질당하는 게 빠를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엘레나가 못 본 새에 몰라보게 실력이 늘었군.'

일단 만나서 꾸중이나 좀 할까 생각했는데, 생각이 좀 바뀌었다.

아무래도 엘레나가 이제 다 큰 모양이다.

절대 마법의 위력에 놀라 생각을 고쳐먹은 게 아니다.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데일은 계속 떨어져내렸고....

툭.

비로소 땅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폭풍의 눈.

주위 기류와는 상관없이 너무나 포근하고 조용한 공간에 엘레나와 프라우가 서 있었다.

둘은 이 아늑한 공간으로 침투해온 존재를 보며 경악했다.

온몸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데일이 둘을 보며 인사했다.

"오랜만이다. 둘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