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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하켄

* * *

결국 파브리스는 데일을 설득하지 못했다.

그는 혀를 찬 뒤 눈을 감아버렸다.

유언이 있냐는 데일의 물음에 마지막으로 짧게 답했을 뿐이다.

"그런 거 없어."

파브리스는 데일에게 생기가 모두 빨려 죽었다.

무르하탈은 영주관을 뒤져 쓸만한 물자를 찾아다녔다.

"주인님. 무기고를 발견했습니다. 각종 방어구와 무기는 물론, 화약까지 있습니다."

"화약은 다룰 줄 아나?"

"제 언데드들은 다룰 줄 모릅니다. 도마뱀들도 마찬가지겠지만요."

"그러면 일단 내버려 둬. 괜히 건드렸다가 폭발에 휘말리면 웃기지도 않는 일이니까."

"알겠습니다."

데일은 굳이 영주관을 나설 생각이 없었다. 성벽에 남아있는 병사들을 향해 공격을 나설 생각도 없었다.

이곳을 굳건히 지키면 이길 수 있으리라 믿었다.

'더 인내심 있는 놈이 이기는 거지.'

그런 데일의 전략은 정확히 먹혀들었다.

알브헤임의 잔존 병력은 여전히 성벽 위를 삼엄히 지키고 있었다.

비록 바깥에는 도적떼가. 안쪽에는 언데드들이 도사려 안팎으로 포위당하는 처지지만, 성벽만 끼고 있으면 능히 막아낼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데일이 공격해오지 않자 병사들은 혼란에 빠졌다.

"이게 무슨 일이오! 당장 오늘밤에 공격해 올 거라 했지 않소!"

"비축된 물자는? 식량은 얼마나 남았습니까?"

"언제까지 이 위에서 버텨야지?"

언제 언데드가 공격해올지 몰라 밤에는 잠도 못 자고.

식량이 조금씩 떨어져가니 불안은 커지고.

모두의 피로가 점점 쌓여가기 시작했다.

결국. 닷새 뒤.

지휘를 맡은 수비대장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우리는 이대로 알브헤임을 탈출한다."

"예? 하, 하지만 성주님이."

"파브리스 경은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다. 아직 북쪽이 비어있으니, 그쪽으로 후퇴하면 돼. 우리가 여기서 전부 죽어버린다면, 이곳에서 벌어진 일을 누가 황혼께 알리겠는가!"

그럴듯한 말에 지휘관과 병사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명분은 상관없다.

은근히 누군가 등을 떠밀어주기를 바랐던 그들이다.

병사들은 최소한의 짐만 챙겨 북문을 열고 도주를 시작했다.

그 소식은 곧장 데일에게 들어왔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 허공에 검을 붕붕 휘두르며 수련하던 데일에게 무르하탈이 보고했다.

"주인님의 예상대로, 놈들이 북문으로 도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라고 일부러 북쪽을 비워둔 거다. 너무 궁지에 몰아버리면 발악을 해버리니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추격대를 꾸려라. 하급 언데드가 아니라, 최소 구울급 이상으로."

데일은 마력을 뿜어냈다.

그러자 한쪽에 쌓여 있던 뼛조각이 두둥실 떠오르더니, 이내 자기들끼리 달라붙으며 말의 형상을 이루었다.

―샤아아아!

해골마가 음산하게 울며 땅을 굴렀다.

데일은 해골마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걸 태워서 추격시켜. 하지만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 전부 죽일 수는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무르하탈은 데일이 소환한 해골마를 끌고 나갔다.

이제 도시가 비었으니 밖으로 나갈 시간이다.

데일은 노움 남매를 데리고 우선 남문으로 향했다.

남문을 나서자 저 멀리서 서성이던 도적단이 보였다.

데일이 차분히 말했다.

"이쪽으로 오도록."

리마는 얼른 바람을 조종해 데일의 목소리를 실어 날랐다.

나직이 중얼거린 목소리가 바람을 타니 평원을 쩌렁쩌렁 울렸다.

도적 수백 명이 황급히 다가왔다.

그런 도적의 감시역이었던 언데드도 함께 왔다.

"그래. 다행히 이탈자는 없는 모양이군. 얌전하게 잘 기다려주었어."

그야 도적들에게는 무기도 들려주지 않았고.

도망갈 낌새를 보이면 언데드 병사가 곧장 칼을 휘두를 것처럼 으르렁댔으니.

게다가 도적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실로 간단한 것이었다.

남문 쪽에서 멀찍이 서성이는 것.

만약 도시를 공격해라 같은 터무니 없는 명령이 내려졌다면 이들은 살기 위해 도망쳤을 것이다.

"자. 도시로 따라 들어와라."

"야, 약탈인가요?"

한 눈치 없는 도적이 기대하는 얼굴로 물어보았다.

데일은 그런 도적을 뒤돌아보았다.

싸늘한 눈빛에 도적이 얼어버렸다.

"내 명령 없이 재물이나 사람들에게 함부로 손을 대는 녀석은 죽어서도 안식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이해했나?"

"예, 옙!"

도적 떼를 이끈 데일은 우선 도시 곳곳에 세워져 있는 황혼의 석상을 부수는 일에 착수했다.

"망치랑 정 가져와!"

"다리부터 부수면 돼!"

쿠구구궁.

황혼의 석상이 무너져내렸고, 그럴 때마다 석상이 있던 자리에 주황색 빛무리가 팟! 하고 튀어오르더니 저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데일은 빛무리가 향하는 방향을 가늠해보았다.

'동쪽.'

황혼이 탑을 짓고 있다는 곳.

주황색 빛무리는 황혼의 힘일 테니, 이 석상은 황혼의 힘을 전달하고 전달받는 매개체인 것일까?

'마치 교단이나 밤의 신전의 재단처럼 말이지.'

계속해 도시를 뒤진 데일은 유독 커다랗고 넓은 건물을 발견했다.

크기로 치면 영주관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다.

그 안에 들어가자 처음으로 주민들을 마주칠 수 있었다.

넓은 홀의 중앙에는 웅장한 황혼의 석상이 서 있었고, 그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엎드려 절하고 있었다.

"황혼께 혼을 바치시오! 위대한 대업에 동참하시오! 비록 이곳에서 육신은 허물어지겠지만, 그대의 영혼은 영원불멸하게 빛날 것이오!"

중앙에서는 광기 어린 눈을 한 노인 하나가 칼을 붕붕 휘둘러대고 있었다.

피에 젖어 새빨간 칼이다.

노인의 눈동자가 번뜩일 때마다 엎드린 사람들은 더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혹여나 시선이 마주치지 않길 바라며.

노인은 혀를 찼다.

"쯧. 이렇게 소극적이어서야 어찌 대업을 이루겠나. 어쩔 수 없지. 병사! 노예들을 데려와라. 노예들의 영혼을 바치겠다! 뭣들 하나 병사?"

하지만 노인이 외쳐도 병사가 노예를 데려오는 일은 없었다.

당연하다.

이미 도시의 병력들은 전부 후퇴했으니.

노인은 자기가 버려졌다는 사실도 몰랐다.

대신 데일은 도적들에게 명했다.

"가서 석상을 부숴라."

"예!"

"가, 갑자기 뭐야?"

"너희 뭔데!"

우르르 뛰어든 도적들이 석상을 무너트렸다.

노인을 비롯해 일부 시민들이 달려들어 도적을 저지하려 했다.

하지만 무장도 안 한 이들이 도적들을 막아설 수는 없었다.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멍하니 있는 사람들에게 데일이 말했다.

"이제 황혼을 섬길 필요는 없소. 원래 살던 대로 살면 될 것이오."

데일의 이 같은 선언에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로 반응했다.

눈물을 흘리거나. 기뻐하거나. 감격하거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자유에 기뻐하는 이들이 7할.

나머지 3할은....

"이 무도한 것!"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잃지 않을 것이다!"

진심으로 섬기는 것일까?

아니면 세뇌라도 당한 것일까.

적지 않은 인원은 황혼을 진심으로 따르고 있었다.

데일은 파브리스를 떠올렸다.

'그 녀석도 믿음만큼은 진심이었지.'

황혼이 이루려 하는 대의에 공감하는 사람이 꽤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전투원이 아니다. 하지만 그냥 놔둘 수는 없다.

"영주관에 지하감옥이 있을 것이다. 그곳에 집어넣어."

"예!"

도적들은 여전히 저항하려는 황혼의 추종자들을 제압해 질질 끌고 갔다.

감옥에 갇힌 저들을 어찌 처리 할지는 주민들이 직접 정할 것이다.

데일은 해야 할 일을 빠르게 처리해나갔다.

우선 뒷 수습을 해야 했다.

도시의 모든 걸 다스리던 파브리스와 황혼의 추종자들이 사라졌으니 그 일을 대신할 만한 이들이 필요했다.

"그, 그냥 경께서 이곳 알브헤임을 다스려주시면 안 될까요?"

"부디 이곳에 남아주세요! 제발요!"

"저희의 주군이 되어주십시오!"

주민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데일의 잔류를 애원했지만,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대로 서쪽으로 가야 하오. 여기 남아있을 수는 없소."

어서 나머지 동료들과 합류해야 한다.

사실 이렇게 시간을 사용하는 것도 아깝지만, 그렇다고 도시민들을 그냥 버리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당분간은 주민 중에서 학식이 있는 자들이 모여 도시를 운영해 나가기로 했다.

다음으로 데일은 무르하탈을 시켜 도적들을 무장하게 했다.

알브헤임의 무기고에는 갑옷과 무기가 넉넉히 있었고, 도적 수백 명을 무장시키기에는 충분했다.

꾀죄죄한 도적 떼가 번뜩이는 사슬 갑옷으로 무장하니, 제법 그럴싸해졌다.

데일은 래파킨에게 명령했다.

"네가 저놈들을 지휘하는 게 제일이겠지. 그래도 한때 두목이었으니."

"알겠습니다."

언데드 래파킨은 다시 도적들을 지휘하게 되었다.

저들은 무르하탈의 언데드 군세와 더불어 가장 위험하고 험한 위치에 내던져질 것이다.

속죄를 위해.

도시민 중에서 지원병도 받았다.

무르하탈이 보고했다.

"주인님. 지원하려는 이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얼마나 되지?"

"500명을 거뜬히 넘는 숫자가 지원했습니다."

"...정말로 많군."

원래 도시민이 아니었던 외지인들.

피 끓는 혈기를 지닌 청년들.

강한 주군을 모시고 싶어 하는 용병이나 병사 출신들이 대거 지원의사를 밝혔다.

곰곰이 고민한 데일이 말했다.

"너무 많이 데려가면 이 도시를 지킬 인력이 부족하다. 당장 싸울 수 있는 병사나 유용한 기술이 있는 이들을 우선해서 300명만 받아주도록."

"명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군단을 넷으로 나눠야겠어. 첫 번째 부대는 무르하탈네가 이끄는 언데드. 두 번째는 카리악과 리자드맨. 세 번째는 래파킨과 도적단. 네 번째는 나머지 인원들로."

"미리 지휘체계를 만들어놓는 건 중요한 일이죠. 탁월하신 생각입니다. 하지만 네 번째는 누구에게 맡기실 겁니까?"

"일단 소마에게 맡기지."

그렇게 편제까지 마치자, 군단의 규모는 훨씬 불어났다.

무르하탈이 이끄는 언데드가 무려 800여 기.

리자드맨이 60.

래파킨과 도적단이 약 500.

그리고 이번에 합류한 지원병과 이전에 있던 병사들을 합치니 320.

거의 2000에 달하는 규모가 되었다.

아직 군단이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모자란 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무시할만한 숫자는 아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군단은 추종자들이 사용하던 갑옷과 쇠뇌로 훌륭히 무장했다.

짐마차 5대에 식량과 화약. 생필품, 그리고 창고에 잠들어 있던 대포 3문을 실었다.

화약과 대포는 지원병 중에 다룰 줄 아는 기술자가 있어, 들고 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발리스타도 실어라."

"발리스타. 말씀이십니까?"

"어. 손에 들고 써보니까 생각보다 괜찮더군."

"손에 들고 썼다? 발리스타를?"

무르하탈은 데일이 말하는 바를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약 나흘간의 준비가 끝나자마자 데일은 출발을 명했다.

보름달이 하늘에 뜬 한밤중이었다.

"출발한다."

언데드와 리자드맨은 묵묵히 따랐고, 도적들도 눈치를 보며 말없이 따라나섰다.

4부대의 인간 병사들만이 의문을 제기했다.

"저기 부대장님. 하루 잤다가 아침에 출발하면 되지 않나요?"

"맞아요. 밤이라 바닥도 잘 안 보이는데."

'부대장'이라는 감투를 써서 잔뜩 신이 나 있던 소마가 설명했다.

"크흠! 그건 이몸, 소마 부대장께서 친절히 설명해주지. 다들 알다시피 우리 군단의 이름은 밤의 군단이다. 데일 경께서 밤의 여신을 섬기는 기사여서도 있지만, 밝은 빛과는 어울리지 않는 존재들이 섞여 있기 때문이지. 언데드. 몬스터나 다름없는 리자드맨. 간악한 도적 무리까지! 그런 밤의 군단이 한낮에 배회하는 건 이상하잖아?"

"무르하탈 님은 데일 군단이라고 부르던데요?"

소마가 즉시 대답했다.

"센스 없는 뼈다귀의 말은 무시하도록. 우리는 밤의 군단이야. 알겠지?"

"...결국, 이름 때문에 밤에 다닌다는 건가요?"

시큰둥한 반응에 소마는 사실대로 말했다.

"언데드들이 강한 햇빛에 약해."

"아...."

"뭐야.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시지, 왜 이렇게 거창하게 말하세요."

"맞아요. 말이 너무 많으세요."

"...."

소마가 상처받은 얼굴로 데일에게 다가가 물었다.

"경. 혹시 저 부대장 그만두면 안 돼요?"

"팔짝팔짝 뛰면서 좋아할 때는 언제고 또 왜."

"아니. 들어보세요. 부대원들이 제 말도 잘 안 듣는 것 같고. 제가 막 쓸데없는 내용을 빙빙 돌려서 말한다 하구. 너무 하지 않아요?"

"무슨 애도 아니고."

찡찡거리는 소마의 말을 흘려들은 데일이 물었다.

"그것보다. 서쪽 상황을 좀 알고 싶은데? 뭐 소식 들려온 거 없나?"

칭얼거리던 표정을 싹 지워낸 소마가 말했다.

"아. 일단 지금 알드군트는 그 늑대왕 하켄 사령관이 놀라운 지휘 능력으로 적의 침공을 수차례나 막아냈다 하네요."

늑대왕.

몇 번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은 단어에 잠깐 멈칫한 데일이 물었다.

"공격하는 게 누군데."

"라만티스라는 악마입니다. 황혼의 아래에 있는 놈으로...."

"전승의 라만티스."

"어? 아십니까?"

"알다마다."

1대1 결투를 선호하며, 패한 상대의 신체 일부분을 몸에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끔찍한 놈이었다.

"라만티스 그놈이 도시를 노린다 이거지?"

"예. 벌써 도시 3곳을 무너트렸고, 알드군트까지 무너지면 서부는 끝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별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왜지?"

"늑대왕 하켄과 라만티스의 결투가 정해졌다고 하더라고요."

"...."

멍하니 걸음을 옮기던 데일이 우뚝 멈춰선 뒤,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왜지?"

하켄

* * *

"하켄! 하켄! 하켄!"

"인류의 영웅께 영광있으라!"

라만티스와의 결전이 머지않은 지금.

도시를 울리는 환호성은 도저히 끊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미 승리를 거두기라도 한 듯한 분위기에 하켄은 집무실에 앉아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끄으... 거절했어야지 이 병신아!"

저 라만티스라는 악마 놈은 무려 1대1 결투를 선호한단다.

그 악마에게서 결투 신청이 날아왔을 때, 당연히 하켄은 거절하려 했다.

괜히 혼자 나섰다가 개죽음당할 일이 있겠는가?

문제는 주위 반응이었다.

사람들은 당연히 하켄이 결투에 나갈 거라 단정을 짓고, 대뜸 하켄을 칭송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결투를 받아들인다는 서신도 제멋대로 작성해버렸다.

하켄은 그런 분위기에 '있잖아 나. 무서워서 결투하기 좀 그런데?' 라고 말할 만큼 배짱 있는 사람이 못 되었다.

"병신! 병신! 병신! 이 병신!"

하켄은 자기 머리를 주먹으로 힘껏 두드렸다.

남들이 늑대왕이다 뭐다 띄워줄 때 진작 그만뒀어야 했다.

자기 실력을 벗어난 허세의 결과는 죽음이었다.

하티는 그런 하켄을 한심하게 쳐다보다, 아가리를 쩍 벌리며 늘어지게 하품했다.

"얌마. 너는 내가 죽든 말든 상관없어?"

하티는 고개를 휙 돌렸다.

귀찮으니 말 걸지 말라는 뜻이었다.

시무룩해진 하켄은 다시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아. 죽기 싫다."

멍하니 중얼거리던 하켄은 자리에서 번뜩 일어났다.

"그래.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살아왔는데 죽을 수야 없지. 일단... 튀자."

하켄이 도주를 결심한 그때.

똑똑.

바깥에서 들리는 노크 소리에 하켄의 등골이 쭈뼛 섰다.

그는 급하게 목을 가다듬은 뒤, 억지로 근엄한 목소리를 냈다.

"누구지?"

"하켄. 나예요. 카일라."

"아... 들어와."

안도한 하켄이 허락하자, 문이 스르르 열렸다.

카일라가 바구니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 느끼한 목소리는 어떻게 안 돼요? 들을 때마다 구역질 날 거 같아요."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그리고 다른 사람들한테는 제대로 먹힌다고."

카일라는 하켄의 비밀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당연한 일이다.

하켄의 온갖 추한 일면을 다 아는 그녀이니만큼 늑대왕이니 뭐니 하는 칭호가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도 잘 알았다.

"배고플 것 같아서 샌드위치 좀 싸 왔어요. 맥주도요."

"고마워. 설마 네가 만든 맥주는 아니지?"

"무슨 뜻이죠?"

카일라가 도끼눈을 뜨자 깨갱한 하켄이 '아무것도 아니야. 주는 대로 먹을게.'라며 중얼거렸다.

하켄은 넋이 나간 얼굴로 샌드위치를 와작와작 깨물었다.

카일라는 그 모습을 안쓰럽게 쳐다보다, 물었다.

"어떻게 할 거예요? 다들 이미 하켄이 악마랑 결투할 거라며 들떠 있어요. 거의 축제나 다름없던데요?"

"윽. 그 정도야?"

"다들 힘든 시기잖아요. 거짓된 명성이라도, 하켄은 저들의 희망이니까요."

어쩌면 하켄이 지금까지 들키지 않고 영웅으로서 칭송을 받은 건. 단순히 그가 거짓말을 잘했기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힘든 시기에 사람들은 기댈 곳이 필요하다.

그때 마침 나타난 게 하켄이고, 사람들은 의심하기보다는 믿는 걸 택했다.

사람은 믿는 대로 보는 법이니.

"...사실 도망칠 생각이었어."

"하켄답네요."

"그야 당연하잖아. 악마랑 결투하라니. 나는 데일 경이 아니라고.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어."

"안 걸리고 도망칠 수는 있어요?"

하켄은 말이 궁했다.

확실히. 도시에는 기사와 병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고, 도시 바깥에는 악마의 군세가 있다.

도망치기도 어려울뿐더러 어디로 도망친단 말인가?

"힘들겠지."

"거봐요. 차라리 지금이라도 결투를 포기하고 계속 수성에 임하겠다고 하는 게 어때요?"

"그럼 사람들이 전부 실망할 거야."

"애초에 멋대로 기대한 사람들인데, 실망시키는 게 어때서 그래요."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면 나를 잡아다 산 채로 불태워 버릴 거야."

"...그건 가능성 있네요."

둘은 잠시 말이 없었다.

해가 져가고. 점점 그림자에 뒤덮여가는 세상 속에서 하켄과 카일라의 얼굴도 그림자에 파묻혔다.

한참 고민하던 하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결투에는 나가야겠어. 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왜요?"

하켄이 고개를 저었어.

"모르겠어. 살면서 이렇게 누군가한테 기대를 받아본 것도 처음이라 그런가?"

"싸우러 간다는 거예요?"

"적어도 도망은 쳐서는 안 돼."

"늪지 마을 주민분들이 슬퍼할 거예요. 특히 퀼이라 했던가요? 그 친우분의 가족들은 더더욱이요."

"그래도 싸워야 해. 차라리 싸우다 죽는다면, 영웅의 장렬한 죽음이라며 사람들이 단결할 수 있을 거야."

카일라가 고개를 저었다.

"하켄답지 않아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지금... 다리 엄청 떨고 계시잖아요."

그녀의 말마따나, 하켄의 다리는 위태로울 정도로 후들거리고 있었다.

그만 좀 정신없이 굴라고 하티가 눈치까지 줄 정도다.

카일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한테까지 허세를 부릴 필요는 없어요."

"허세 아니야. 정말로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데요 대체. 자기 목숨보다 중요한 게 어딨다고."

"데일 경처럼 되고 싶어."

카일라는 말을 멈췄다. 무관심하던 하티도 고개를 들어 하켄을 쳐다보았다.

"난 데일 경을 옆에서 계속 지켜봤잖아. 데일 경이라면 절대 여기서 도망치지 않았을 거야."

"데일 경은 강하잖아요."

"아니야. 경이 항상 이기는 싸움만 했던 건 아니야. 아무리 위험하고 패배가 뻔한 싸움이라도, 싸워야 한다면 물러서지 않았어. 그리고 이겨냈지."

하켄은 눈을 감고 과거를 회상했다.

데일과 수많은 모험을 이뤄내며, 승리를 이루어내던 영광의 나날들을.

하켄의 생에서 무언가 의미 있는 일들을 해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데일과의 모험은 이 보잘것없던 용병의 마음도 바꿔놓았다.

하켄은 굳은 의지를 담아 말했다.

"내가 한심한 사람인 건 알아.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데일 경처럼 되고 싶어."

"하켄...."

"그냥 죽으러 가는 건 당연히 아니야. 나한테도 믿는 구석이 있다고."

하켄은 품을 뒤져 장갑을 하나 꺼냈다.

새빨간 보석이 손등에 박힌, 고급스러워 보이는 장갑이다.

"그건?"

"바이만의 보물고에서 얻은 물건이야. 마음을 굳게 먹으면 어떤 충격도 흘릴 수 있다는 전설의 장갑이지."

슬쩍 눈치를 본 카일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기 아니에요 그거? 마음을 굳게 먹으라니. 너무 두루뭉술하잖아요."

"어허! 사기 아니야! 딱 봐도 범상치 않은 생김새잖아!"

"그건 그렇지만요."

결국. 하켄은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

도망칠 수 없다면 싸울 수밖에.

시간은 빠르게 흘러.

결투 당일이 되었다.

하켄은 사람들의 앞으로 나섰다.

빨간 망토와 황금 투구. 비싼 갑옷을 걸친 하켄의 모습은 뭐랄까. 천박한 졸부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이미 콩깍지가 제대로 쓰인 사람들에게는 그마저도 위대한 영웅의 면모로 보였다.

"하켄! 하켄!"

"꼭 이겨줘요!"

"늑대왕이시여! 우리를 구해주세요!"

사람들이 칭송했다.

그들은 하켄의 모습에서 희망을. 그리고 승리를 보았다.

정작 하켄의 뒷덜미에는 식은땀이 잔뜩 맺혀 있었지만.

"괜찮아요? 아니. 딱 봐도 안 괜찮아 보이네."

"응."

카일라의 말에 하켄이 짧게 답했다.

길게 얘기해봤자 두려움에 말만 더듬을 것 같았다.

"후회되죠?"

"...응."

"지금이라도 사실대로 말하세요. 늪지 마을 주민들한테 얘기 들었어요. 소꿉친구가 죽은 걸 숨기고 몇 년이나 혼자 끙끙댔다면서요. 하켄은 그게 문제에요. 평소에는 눈치 없이 할 말 못 할 말 다 하면서, 꼭 중요한 말은 숨겨서 혼자 고생하잖아요."

"...반박하기 힘드네."

핀잔을 준 카일라는 하켄에게 권유했다.

"자. 하켄은 할 만큼 했어요. 괜히 가서 개죽음당하지 말고, 다 사실대로 말하세요. 설마 진짜로 불태워 죽이기야 하겠어요? 그리고 데일 경이 돌아왔을 때 하켄이 없으면 어떡해요. 데일 경이 슬퍼할 거예요."

"그, 그치? 내가 죽으면 슬퍼하시겠지?"

"...아마도요?"

카일라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 그래도 싸우기도 전에 도망칠 수는 없어. 그리고 나한테는 이 장갑도 있으니까."

"후우. 아니다 싶으면 바로 물러나세요. 알겠죠? 약속이에요?"

"응...."

고개를 끄덕인 하켄이 하티를 내려다보았다.

"같이 가줄 거지?"

하티가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혼자 가라는 뜻이었다.

"이, 이 의리 없는 늑대 새끼!"

"사령관님. 놈이 왔습니다. 약속 시간입니다."

"그래. 나도 안다."

부관이 오자 하켄은 다시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라만티스가 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라만티스는 양 진영의 정확히 가운데에 있는 빈 공터에 기다리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악마의 모습도 선명히 보였다.

2미터가 넘는 체구에 두 개의 머리. 네 쌍의 눈.

네 개의 팔.

돌처럼 보일 정도로 다부진 근육.

그 자체로도 이미 위압적인 생김새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놈이 지니고 있는 '장신구'다.

라만티스는 온몸에 금색 줄을 칭칭 감고 있었는데, 그 금색 줄에는 눈, 귀, 코, 손가락 따위의 신체 부위가 빼곡히 꿰뚫려 있었다.

라만티스가 지금껏 이겨온 상대의 신체 일부분이었다.

"엄마야."

그 끔찍한 광경에 하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기껏 샘솟았던 용기가 깡그리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하켄은 꿋꿋이 걸어가 라만티스의 앞에 섰다.

라만티스의 두 머리가 동시에 물었다.

"네가 하켄인가? 늑대왕 하켄?"

"...그래."

라만티스의 두 머리가 의심스럽다는 듯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흐음? 소문으로 듣던 거랑은 조금 다른데? 이 녀석이 우리 공세를 수차례나 저지해온 그 괴물이라고? 느껴지는 힘이 너무 적은데."

"방심하지 마라. 방심하는 건 네 안 좋은 단점이다. 완벽히 힘을 숨긴 강자일 확률이 높다."

"흐음. 하긴. 아니었다면 그런 명성을 얻지도 못했을 테니."

라만티스가 전투 자세를 잡았다.

네 개의 팔에는 어느새 무기가 들려 있었다.

겉면에 날이 바짝 서 있는 둥그런 무기. 차크람이다.

"하켄. 강자에 대한 예우로, 네놈은 특별히 눈알을 뽑아내 심장 부분을 장식해주마."

"...그거 눈물 나게 고맙네."

"그럼 가겠다. 우리는 라만티스. 강자를 사랑하고 영원한 투쟁을 이어가는 자. 네놈의 목숨을 취하겠다!"

퉁!

라만티스가 땅을 박차자, 그 몸이 순간적으로 흐릿해지더니 하켄의 바로 앞에 나타났다.

평범한 이라면 반응조차 못 할 움직임.

하지만 하켄은 데일과 함께하며 숱한 강자들의 싸움을 봐왔고, 그 자신의 실력도 크게 늘었다.

하켄은 타워 실드를 들어 올렸다.

쾅쾅쾅쾅!

네 개의 팔이 지닌 차크람이 연속해서 방패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엄청난 충격이 손목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하켄의 몸이 계속해 뒤로 밀려났다.

'생각보다 더 엄청나잖아! 이런 괴물을 데일 경은 어떻게 상대하고 있던 거야!'

공세에 나섰던 라만티스는 의아했다.

"왜 그러지 하켄?"

"실력을 숨기고 있군. 어서 네 본 실력을 드러내라."

"감히 우리를 상대로 여유를 부리다니!!"

"진정해라. 쉽게 흥분하는 건 네 안 좋은 단점이다."

라만티스는 하켄이 힘을 숨긴다고 제멋대로 오해했다.

그렇기에 견제의 의미로 가벼운 일격만 날릴 뿐, 본격적인 싸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하켄이 언제든 꺼낼 본 실력을 경계한 것이다.

물론. 하켄은 그런 견제를 막아내는 것만도 죽을 맛이었지만.

그러다 보니 싸움이 길어졌다.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것뿐이지만, 지켜보는 이들의 생각은 달랐다.

"호, 호각으로 싸우고 있다...!"

"역시 늑대왕. 악마랑도 호각으로 싸우다니."

"저런 대단한 용병이 왜 과거에는 알려지지 않았단 말인가!"

그들의 눈에는 인류의 희망이 악마와 단신으로 맞서는, 전설의 일부와 같은 광경으로 비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켄은 오직 한순간의 틈을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큰 거. 반드시 큰 게 올 거다.'

라만티스가 동작이 큰 공격을 퍼부을 때.

하켄은 유물 장갑을 사용할 생각이다.

강한 믿음만이 힘을 끌어낼 수 있다지만, 당장 목숨이 경각에 달했는데, 그것만큼 간절할 수는 없지 않는가?

'한 번만 막아낸 뒤, 그 빈틈에 때려 박는다.'

하켄이 야심차게 준비한 건 바로 독이다.

데일이 두르핀을 상대할 때, 검에 독을 바르는 것에서 영감을 얻었다.

하켄은 연금술사들에게 거금을 쥐여줘 강력한 독을 만들도록 시켰다.

상대가 빈틈을 보이는 순간. 하켄은 맹독이 듬뿍 발린 단검을 때려박을 생각이었다.

'설령 악마라도 멀쩡하지는 못하겠지!'

조금이라도 피해를 준다면?

최소한의 체면을 챙긴 셈이니, 그대로 달아나버린다는 게 하켄의 계획이다.

그런 다음에 자기가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노라 허세를 부린다면, 사람들은 믿어주겠지.

데일을 동경하지만 결코 데일은 될 수 없는 하켄의 하찮고도 비열한 계책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 계책이 어느 정도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계속해서 가벼운 공격만 날리던 라만티스가 슬슬 조바심을 느낀 것이다.

"끝끝내 본 힘을 숨긴다는 건가? 대단한 인내심이군."

"존중받을 만한 전사야."

"그럼 이쪽에서도 전력을 다해야겠지!"

순간. 라만티스가 손에 든 차크람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라만티스는 바닥을 박찬 뒤, 공중에서 크게 돌며 빛나는 차크람을 휘둘러왔다.

'온다!'

그토록 기다리던 동작이 큰 기술.

하켄은 방패를 힘껏 앞으로 내밀며 장갑을 향해 속으로 외쳤다.

'강한 마음! 강한 마음! 강한 마음! 강한 마음!'

무려 바이만의 보물고에 잠들어 있던 유물이다.

분명. 악마의 일격이라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믿으며 하켄은 두 주먹에 불끈 힘을 줬고....

쩡!!

"아?"

손에 든 방패는 차크람에 부딪혀 너무나 허무하게 날아가 버렸다.

하켄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내가 그럼 그렇지 뭐."

이후 대처는 빨랐다.

하켄은 뒤로 휙 돌아 그대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뭐지? 유인인가?"

"...도망치는 거 아니야?"

"그럴 리가. 소문으로 듣기에 늑대왕은 절대 도망치지 않는 명예로운 전사라고 했다. 멋대로 추측하는 건 네 안 좋은 단점...."

"도망치는 거 맞지?"

"벌레 같은 놈이!!"

그제야 속았다는 걸 깨달은 라만티스가 급하게 쫓기 시작했다.

"당장 멈춰!"

"너 같으면 멈추겠냐?!"

영웅과 악마의 신화적인 결투는 순식간에 쫓고 쫓기는 추한 추격전이 되어버렸다.

아군도. 적군도.

그저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하켄은 필사적으로 도망쳤지만 악마의 걸음걸이를 뿌리칠 수는 없었다.

머지않아 따라잡힌 하켄에게 라만티스가 차크람을 휘둘렀고, 하켄은 황급히 바닥을 굴렀다.

부웅!

날카로운 차크람이 지나가자,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뭉텅 잘려나갔다.

조금만 늦었다면 잘려 나가는 건 머리였을 것이다.

얼굴이 새하얘진 하켄에게 라만티스가 으르렁거렸다.

"오늘. 이 대결을 우리가 얼마나 기대했는데."

"그 기대를 이런 식으로 배신해?"

"우선 약속대로 네 눈부터 뽑아주마!"

"어어! 우리 말로 하자!"

하켄이 뭐라 말하든 라만티스의 손은 우악스럽게 가까워져 왔다. 저 뾰족한 손톱이 금방이라도 눈알을 파낼 것 같았기에, 하켄은 재빨리 외쳤다.

"데일 경! 데일 경을 만나고 싶지 않아?"

데일의 이름에 라만티스의 손이 우뚝 멈췄다.

그가 흥미를 보였다.

"데일. 흑기사 데일?"

"그래. 대륙에서 가장 강한 전사지. 강한 사람을 좋아한다며. 그분이랑 싸우고 싶지 않아?"

"그놈은 두르핀과 함께 죽은 거로 알고 있는데?"

"하하. 당연히 헛소문이지. 경께서 폭발에 휘말려 상처를 입었는데, 그 때문에 잠시 그런 소문을 퍼트린 것뿐이야."

하켄은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아무 말이나 쥐어짜냈다.

그리고 그게 어느 정도 먹혀들기도 했다.

라만티스가 중얼거렸다.

"확실히. 그 녀석과는 싸워보고 싶었다."

"얼굴이 잘생겼다지. 그 코를 잘라 장식할 수 있다면 참 좋았을 텐데."

"그래서? 그 데일이 어딨다는 거지?"

하켄은 입을 다물고. 눈알만 또르르 굴리다 말했다.

"어. 사실. 그게. 음. 사실 도시 안쪽에 있거든? 마침 부상이 다 나으셨으니까, 나를 그냥 살려보내주면 내가 데일 경을 데려 올...."

"죽이자."

"그래."

다시 라만티스의 손이 하켄의 눈알을 뽑기 위해 가까워져왔다.

하켄은 소리를 질렀다.

"그, 그만! 애꾸눈은 싫어!"

"그럼 둘 다 뽑아주마."

"어어? 저기 데일 경이다! 너희들이 좋아하는 데일 경이라고!"

"멍청한 인간놈. 우리가 그런 한심한 수에 걸릴 것 같으냐?"

"얌전히 눈을... 컥!"

퍽!

다음 순간. 라만티스의 몸이 튕겨 나갔다.

그의 등 한가운데에 큼직한 쇠화살이 박혀 있었다.

라만티스는 화살이 날아온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뒤에서 화살이 날아오다니? 배신인가?

이윽고 라만티스는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자기 부하들을 뚫고 오는 한무리의 군세와 그 선두에 서서 발리스타를 직접 들고 이쪽을 겨냥하는 흑기사를.

"...흑기사?"

데일이었다.

하켄

* * *

라만티스는 당황했다.

뒤쪽에서 적군이라고?

'저 방향은 알브헤임인데. 대체 어디로 온 거지?'

데일은 이미 한 발 쏜 발리스타를 내려놓은 뒤, 다음 발리스타를 손에 들어 그대로 라만티스를 겨냥했다.

퉁!

시위의 장력이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쇠화살이 다시금 날아들었다.

라만티스는 뒤로 풀쩍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그사이.

데일은 마검을 휘두르며 악마들의 진영을 헤집은 뒤. 라만티스의 앞에 섰다.

하켄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했다.

"데, 데일 경. 역시 살아 있었군요."

"늪지 마을에 남겨둔 쪽지를 봤다. 그나저나 결투라니. 제정신인가?"

"그게. 사정이 있습니다."

"에스델이나 다른 동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고?"

"그것도 사정이 있습니다."

"나중에 듣겠다."

라만티스는 이 갑작스러운 개입에 당황하는 대신, 도리어 흥미를 빛냈다.

"오호. 그대가 데일인가?"

"듣던 대로 강맹한 기운이군. 거기 얼간이랑은 확연히 달라."

"즐거운 싸움이 되겠어."

데일은 그런 반가운 인사에 짧게 답했다.

"역겹게도 생겼군."

"뭐...?"

"하켄. 사령관을 맡고 있다지? 내가 이놈을 맡을 테니, 공격 명령을 내려라."

"아, 알겠습니다."

정신 차린 하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뒤.

아군 진영을 향해 황급히 달려갔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멍하니 있던 병사들에게 하켄이 외쳤다.

"전군 공격! 데일 경께서 오셨다!"

"데일?"

"그 흑기사 데일?"

아는 이름의 등장에 병사들이 웅성거렸고, 참모들은 크게 감탄했다.

"설마 사령관은 처음부터 이걸 다 계획하고?"

"아하. 결투를 받아들인 것도 전부 계략이었구나."

"정말 소름 돋을 정도의 치밀함이다...!"

"됐으니 어서 진격하라고!"

하켄의 명령에 진격을 알리는 깃발이 올라갔다.

뿔피리가 전장을 울렸고.

예상치 못한 지원군에 사기가 오른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땅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이길 수 있다!!"

병사들과 악마의 하수인들이 어우러지고. 격전이 펼쳐졌다.

데일이 이끌고 온 밤의 군단은 악마의 뒤통수를 치며 제대로 휘젓고 있었다.

무르하탈의 강력한 언데드 군세가 상대를 덮치고.

리자드맨과 도적 떼가 기회를 노리며 칼을 휘둘렀다.

펑! 퍼펑!

짐마차에 싣고 온 대포가 이따금 불을 뿜기도 했다.

대포의 화력 자체는 마법사에 비해 그리 뛰어나다고 할 수 없지만, 저 굉음만으로도 상대를 위축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그런 혼전을 슥 훑어보던 라만티스는 피가 끓어 못 참겠다는 듯. 기다란 혀를 내빼 차크람을 핥았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생각이지?"

"우리는 인내심이 많지 않아."

"안 그래도 얼른 죽여줄 생각이었다. 너희를 죽여야 네 똘마니들이 힘을 잃을 테니."

데일은 라만티스에 대한 정보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라만티스. 싸움을 삶의 업으로 삼는 악마. 엘프 같은 놈.'

마침 적절한 상대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일은 지금 자신의 힘과 실력이 어느 정도 수준에 달해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런 면에서 라만티스는 참 적절한 상대다.

다른 악마처럼 해괴한 마법을 부리거나 비열하고 추잡한 꼼수를 부리는 대신, 라만티스는 자신의 힘과 기술로 승부 보는 타입이다.

원 없이 싸워보기에 딱 알맞았다.

"그럼 가겠다. 우리는 라만티스. 강자를 사랑하고 영원한 투쟁...."

"나는 데일이다."

데일은 라만티스의 소개를 끊고, 곧장 마검을 뻗어 들어갔다.

급하게 말을 멈춘 라만티스가 네 개의 차크람을 포개 마검을 막아냈다.

카각!

엄청난 힘이 실린 일격에 라만티스가 뒤로 밀려났다.

"과연 다르구나!"

"저 하켄이라는 놈과 달리, 네 명성은 헛된 게 아니었군!"

"처음부터 제대로 가겠다!"

라만티스가 차크람을 공중을 향해 붕 던졌다.

그러자 4개의 차크람이 환하게 빛나더니, 8개로 늘어나는 게 아닌가?

라만티스는 4개의 차크람을 투척한 뒤, 나머지 4개는 손에 쥔 상태로 데일의 안쪽으로 파고 들어갔다.

빛나는 여덟 칼날이 죽음의 궤적을 그렸다. 하나하나가 심상치 않은 공격이다.

갑옷을 방어력을 믿었다가는 그대로 잘려 나갈 터.

데일은 집중했다.

차크람의 궤적을 읽었다.

언뜻 불규칙하고 기하학적으로 보이는 궤적이라도, 모두 완벽히 계산해 던진 공격일 터다.

그렇지 않다면 서로가 부딪혀 튕겨 나갔을 테니까.

잘 계산된 공격이라면, 그 계산을 파훼할 지점도 분명히 있다.

그리고 데일은 그 지점을 정확히 파악해냈다.

콰콱!

수직으로 내려벤 마검이 차크람 셋을 동시에 떨어트렸다.

튕겨나간 차크람이 다른 차크람과 부딪혔고. 불티를 허공에 흩날리며 튕겨나갔다.

"...허."

"한 방에 튕겨낼 줄은 몰랐는데."

라만티스는 감탄했다.

하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곧바로 빛나는 차크람을 되돌려, 다시 공중에 던졌다.

그러자 8개였던 차크람이 이번에는 16개로 늘어났다.

라만티스는 직접 접근해오는 대신. 이번에는 네 개의 팔을 이용해 차크람을 투척하기 시작했다.

데일은 검을 휘둘러 차크람을 튕겨냈다. 라만티스는 멈추지 않았다.

차크람을 다시 되돌려 공중에 띄우고 던지기를 반복했다.

16개였던 차크람은 다시 32개가. 32개였던 게 다시 64개로.

빛나는 원반이 끝없이 쏟아진다.

도저히 눈으로 다 읽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차크람을 보며 데일은 생각했다.

'일일이 쳐내서는 안 되겠군.'

데일은 마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뒷발을 앞발 앞으로 옮기고. 다시 앞발을 뒷발의 앞으로 옮겼다.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한 데일의 몸이 순식간에 가속해 마치 팽이와도 같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팅! 팅! 팅! 팅!

원반이 빠르게 회전하는 칼날에 튕겨나갔다.

그 우악스러운 기술에 라만티스는 잠깐 멈칫했지만, 다시 팔을 움직였다.

이건 자존심 대결이었다.

라만티스는 무수히 늘어나는 원반을 끝없이 던져댔다.

데일이 반드시 실수하는 부분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판이었다.

데일은 무시무시한 집중력을 발휘해, 결코 실수하지 않았다.

끝없이 쏟아지는 빛의 원반과 검의 폭풍이 부딪히며 주위에 불티를 아름답게 흩날렸다.

그리고 돌연.

자신을 날아오는 수백 개의 빛나는 빛의 원반을 향해 데일이 망토를 펼쳤다.

망토에 새겨진 푸른 사자가 현실로 튀어나오고는 크게 울부짖었다.

그러자 데일에게 쏟아지던 수백 개의 차크람이 정확히 방향을 바꿔, 원주인에게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마법 반사.

"뭐...!"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지만, 과연 라만티스는 경험 많은 전사였다.

그는 몸을 웅크려 뒤로 힘껏 물러났다.

파바박!

몸에 빛나는 차크람이 틀어박혔지만 어떻게든 급소만은 회피했다.

하지만 그냥 보고 있을 데일이 아니다. 성큼성큼 걸어간 데일이 마검을 수직으로 내려베었다.

라만티스의 얼굴에 마검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드리웠다. 라만티스의 눈동자가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마검이 왜인지 너무나 거대하게 느껴졌다.

마치 별이 머리로 떨어지는 듯한 위압감.

라만티스는 네 개의 팔을 급히 교차했다. 단단한 피부와 뼈로 막아내리라 생각했다.

우그극.

그러기에 데일의 힘이 너무 강했고, 마검이 너무 날카로웠다.

4개의 팔 중 두 개가 잘려 나가자 라만티스는 그제야 방어가 의미 없음을 깨닫고 데일에게 달려들었지만....

"이놈!!"

서걱.

마검을 되돌린 데일은 깔끔하게 검을 휘둘렀다.

요즘 한창 수련하고 있는 가로베기.

반으로 토막 난 라만티스가 바닥을 굴렀다.

"대체 무슨...."

"이런 터무니 없는 실력을 가진 전사가 또 있다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해 라만티스가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승부가 난 셈이다.

데일은 마검을 내려놓고 몸 상태를 살폈다.

갑옷 곳곳에 상처가 가득했다.

수백개의 빛의 원반을 모조리 쳐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상대를 생각하면 별 거 아닌 피해다.

그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다.

'생각보다 쉬운데.'

그가 강해진 걸까?

확실히. 데일의 강함은 두르핀에게 죽을 뻔한 이전보다 훨씬 강하고, 수련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악마를 홀로 사냥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이다.

하지만 너무 수월하지 않은가.

'내가 강해지기도 했지만... 악마가 약해지기도 했다?'

데일은 라만티스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혹시 컨디션이 안 좋은가?"

"전사를 모욕할 생각인가?"

"깔끔하게 죽여라!"

격렬한 태도에 데일이 설명을 덧붙였다.

"모욕하려는 게 아니다. 뭔가. 내가 아는 라만티스라는 악마는 이것보다 훨씬 강대했던 거로 기억해서 말이다."

강대했다는 말에 조금 기분이 풀린 라만티스가 말했다.

"...그래. 그랬었지."

"본디 우리는 우주를 떠돌며 숱한 강자들과 싸워오던 전사다. 이것보다 더 강했었지."

"그럼 왜 지금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거지?"

"힘을 빼앗겼다."

"누구한테서?"

"황혼."

라만티스가 이를 으득 갈았다.

"놈은 딱 우리가 저항하지 못할 만큼의 힘을 빼앗아."

"우리를 놈의 발아래에 뒀지."

데일이 물었다.

"황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눈치군? 너희들은 동료라고 생각했는데?"

"무슨 소릴!"

"힘을 되찾는 그 날, 우리는 황혼에게 복수할 것이다!"

데일은 라만티스와의 대화에서 얻은 정보를 곰곰이 종합했다.

'확실히 사이가 안 좋군. 황혼이 악마는 아닌 건가? 게다가 힘을 빼앗았다라... 어떤 식으로 힘을 빼앗는 거지?'

긴 고민 끝에 문득 떠오른 가능성 하나.

혹시 황혼은 데일과 비슷한 방식으로 강해지는 게 아닐까?

상대의 생기와 잔혼을 흡수하는 데일처럼 말이다.

아직은 정보가 부족하다.

하지만 데일은 이 가설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고민이 길어지자, 눈치를 보던 라만티스가 반 토막 난 몸을 슬그머니 이어붙이려 했다.

콰직!

데일은 마검을 머리통에 박아 넣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라만티스가 쓰러지자 전장에 즉각적인 변화가 일었다.

라만티스의 추종자들이 그 힘을 크게 잃은 데다가 혼란에 빠졌다.

그 혼란을 틈타 기세를 올린 아군이 파도처럼 들이닥치자, 적군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남은 건 잔당을 추격 토벌하고, 뒤처리를 하는 일뿐이다.

데일은 우선, 라만티스의 시체에 입을 가져다 댔다.

'라만티스의 피를 마시면 정신력 능력치가 오르던가?'

악마의 피에는 특별한 힘이 있다.

데일은 라만티스의 피를 마셨다.

푸른색의 끈적이는 피가 식도를 넘어가자, 데일은 기분이 한결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앞서 마셨던 다른 악마의 피처럼 즉각적인 반응은 없었지만....

'뭔가 변하긴 했군.'

다음으로는 생기와 잔혼을 거둘 시간이다.

라만티스의 몸에 건틀릿을 박아 넣었다.

막대한 생기와 함께 끔찍한 기억들이 난잡하게 흘러들어왔다.

데일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에 이마를 부여잡았다.

악마는 이게 문제다.

큰 성장을 담보하는 만큼, 정신에 대한 타격도 적지 않다.

하지만 라만티스의 피가 준 효과를 여기서 느낄 수 있었다.

정신력 능력치가 도움이 됐다.

다른 악마 때와 달리.

데일은 악마의 생기를 얼마 남기지 않고 대부분 거둘 수 있었다.

물론. 한동안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은 필요했다.

영혼이 찢겨나간 라만티스가 내지르는 비명이 머리를 웅웅 울리니.

어쨌거나 만족스러운 수확이었다.

아마도. 아니, 거의 확실히 등급이 오를 것이다.

이제 새로운 기술도 배울 수 있을 터.

'이곳에 밤의 신전이 있으면 좋겠는데.'

마침 하켄이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데일이 핀잔을 줬다.

"그래도 명색이 사령관이란 놈이. 아직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설렁설렁 지나다녀도 되는 건가?"

하켄이 씨익 웃었다.

"저 하는 거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부하들이 하는 말에 고개만 끄덕여주면 돼요."

"...듣기로는 라만티스의 공세를 일곱 번이나 막았다는데. 그런 식으로 했다고?"

"되던데요?"

데일은 하켄이 사령관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당연히 말아먹고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하켄의 부하들이 너무 유능했다.

"물론. 그것도 이제 끝이죠. 이제 데일 경이 왔잖아요? 팔자에도 없는 사령관은 그만둬야겠어요."

"아니. 계속해라."

"?"

유능한 인력들이 하켄을 중심으로 뭉쳐 있다.

늑대왕 하켄.

설령 그게 꾸며낸 모습이라 해도, 굳이 진실을 밝혀 사람들에게 혼란을 줄 필요가 있을까?

'사람들이 하켄을 믿고 있다면, 그것도 이용해야 해.'

데일의 설명에 하켄의 얼굴이 창백해졌지만, 결국 수긍하고 말았다.

"그래요 뭐. 이제 악마도 뒤졌으니...."

"그래. 그럼 대충 정리할 건 다 한 것 같고. 도시 안에 밤의 신전이 있나? 기도를 좀 드리고 싶은데."

"아. 제가 사령관이 되고 가장 먼저 한 게 신전을 세운 겁니다."

"그러면 그곳에 일단 들르겠다."

"그래요? 저는 경이 휩쓸린 이후의 일에 대해 얘기나 나누려 했는데... 급하시면 이따가 하죠."

데일은 걸음을 멈췄다.

당장 신전으로 가 힘을 얻느냐, 아니면 동료들의 이야기를 먼저 듣느냐.

별거 아닌 고민을 의외로 꽤 깊이 갈등한 끝에, 데일은 결론을 내렸다.

"일단 이야기부터 하지. 당장 급할 게 없으니."

하켄

* * *

알드군트는 승전 기념으로 후끈 달아올랐다.

사람들은 악마가 물러갔다는 것에 기뻐하며, 웃고 떠들었다.

해가 지지 않았지만 도시는 이미 취해 있었다.

데일도 그리웠던 얼굴들과 해후를 나누었다.

"경!"

카일라가 사뿐히 달려와 데일을 껴안았다.

데일도 그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정말로 죽은 줄 알았잖아요."

"미안하다."

"미안하긴요. 저희를 구하려다 그러신 거잖아요."

하티도 헐레벌떡 달려와 데일의 다리에 얼굴을 부벼댔다. 어지간히도 반가웠던 모양.

그러다 흠칫한 하티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갑자기 평소의 무심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휙 돌렸다.

"너도 잘 지냈냐?"

하티가 그렇다는 의미로 낮게 울었다.

무심한 울음소리.

하지만 좌우로 팽팽 흔들리는 꼬리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데일은 그런 하티의 갈기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하티는 눈을 감고 그 손길을 즐겼다.

그 모습에 하켄이 쓴웃음을 지었다.

"저저. 내가 만질 때는 물어뜯으려 하더니만."

"그래도 소문을 들어보니 이 녀석이 많이 도움이 된 것 같던데?"

"그렇죠 뭐."

어깨를 으쓱인 하켄이 말했다.

"그럼. 여기에서 대화를 나누기는 좀 그러니까, 가보실까요?"

"그래."

하켄은 자신의 집무실로 데일을 안내했다.

그의 집무실은 도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 높은 층에 있었다.

알드군트의 시장 집무실보다도 높은 층이었으니, 하켄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데일은 하켄의 으리으리한 집무실을 보고 농을 건넸다.

"출세했구나. 하켄."

"쓸데없이 높기만 하지 별로예요. 계단 오르내릴 때마다 무릎이 다 쑤십니다."

따라 들어온 카일라가 말했다.

"제가 차를 타올게요. 아. 아예 식사를 준비해 올까요?"

"하켄이 사령관이라며. 그럼 전속 요리사도 있는 거 아닌가?"

"제가 그 전속 요리산데요?"

"사령관 권한으로 꽂아 넣었죠. 기왕이면 아는 사람을 가까이 두는 게 낫잖아요? 특히 요리에는 언제든 독이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급여도 쏠쏠해요! 여관 운영할 때보다 훨씬 잘 벌어요!"

자기 사람 꽂아 넣기라니.

참 훌륭한 사령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지 않아 카일라가 식사를 내왔다.

어찌나 그 종류가 다양하고 화려한지, 큼직한 식탁이 모자를 지경이었다.

하켄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평소에 이거 절반이라도 준비해주지. 맨날 샌드위치만 싸오면서."

카일라는 하켄을 깔끔히 무시하고 데일에게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서 드세요!"

"고맙다."

데일은 투구를 벗었다.

잿빛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머리카락을 적당히 넘긴 데일은 숟가락을 들어 우선 버섯 수프부터 입에 떠먹었다.

여전히 맛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맛있군."

하지만 데일은 맛있다고 말했다.

맛은 몰라도, 카일라가 어떤 기분으로 요리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잠시간 조용히 식사가 이어졌다.

하켄은 어느 정도 배가 부르고 나서야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럼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할까요?"

손수건을 들어 입가를 닦은 데일이 답했다.

"처음부터."

"그럼 두르핀 폭발 이후부터 말씀드릴게요."

하켄은 하나부터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데일이 사라지자 뿔뿔이 흩어진 동료들.

늪지 마을로 간 일.

그곳에서 서부까지 오는 여정과 하켄이 오해를 산 계기.

전부 듣고 난 후 데일이 말했다.

"어처구니가 없긴 한데, 사람들이 왜 너를 따르는지는 알겠군."

"예... 저는 그냥 하티가 적들을 알아채는 걸 이용해서 싸움을 피했을 뿐인데. 악마들을 피해 수천을 이끌고 후퇴하는 데 성공한 영웅이 되어버렸더라고요."

"다른 동료들에 대해 더 얘기해봐라. 지금 연락을 주고받고 있기는 한가?"

"예... 사제 양반이랑은 가끔 편지를 주고받고 있긴 한데요. 그것도 3개월 전이 마지막이긴 했죠."

하켄은 말을 이었다.

"사제 양반은 북쪽의 엘드리엄으로 향했어요."

"왜 굳이 이곳에 안 남고 북부를?"

"글쎄요... 저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엘프들에게 수련받고 있대요. 자기 약함을 통감했다나 뭐라나."

데일은 미간을 좁혔다.

엘프들에게 수련을 받는다고?

"아무래도 에스델이 제대로 돌아버린 것 같군."

"뭐. 그건 이유 중 하나일 뿐이고. 진짜 목적은 영웅들의 흔적을 찾는 거라는데요?"

"영웅들?"

하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사라진 영웅들을 조사해서 황혼을 물리칠 실마리를 얻을 생각인가봐요."

영웅들의 행적.

데일 역시 관심 있는 분야였다.

황혼과 그 영웅들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은?"

"에리얼 사제장님은 카엘름으로 가셨어요. 거기가 밤의 신도도 많고, 4군단이랑 연계하기도 괜찮은 위치라고... 근데 제가 딱히 사제장이랑 친하지는 않잖아요? 편지를 주고받지는 않았어요. 어. 그리고 베른바르트 군단장은 잘 있는 것 같고. 황제는 여전히 하늘 위에 날아다니며 뭔가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고."

하켄은 대륙의 정세에 대해 자기가 아는 것들 전부를 털어놓았다.

사령관이라는 위치답게 하켄은 아는 게 상당히 많았다.

한참 이야기를 듣던 데일이 말했다.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겠다. 근데 아직 못 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예? 뭔가요? 대충 다 말한 것 같은데."

"엘레나에 대한 얘기를 아직 안 했지 않나. 이상한 소문이 들리던데."

"아."

하켄의 표정이 흐려졌다.

선뜻 말하기 어려운 듯, 침을 꿀꺽 삼킨 하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게. 음. 엘레나는 말이죠? 조금 어리지 않습니까?"

"조금이 아니라 그냥 애지."

"그래서 그런지 데일 경이 그 폭발에 휘말렸을 때. 유독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아요."

그럴 만도 하다.

부모도. 왕국도. 프라우를 제외하면 알고 지내던 모두를 잃고 이레네까지 흘러들어온 게 바로 엘레나다.

그런 와중에 겨우 이레네에 정착하나 싶더니, 도시는 무너지고.

믿고 의지하던 데일마저 사라졌다.

어린 영혼에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을까.

"그래서?"

"그. 엄청 원망하더라고요. 데일 경을 죽게 내버려뒀다고 저희에게 소리 치긴 했지만... 알지 않습니까. 그런 건 보통 자기한테 하는 말이라는 걸. 복수하겠다고 떠났습니다. 아무리 말려도 듣지를 않더라고요. 마지막으로 떠날 때 표정이 기억나요. 울음이 새어나오는데 억지로 참으면서 걷는 게...."

그 뒤로 엘레나는 황혼의 세력에 대해 무차별적인 테러를 저지르고 있었다.

본디 마법을 순수하게 사랑하던 엘레나는 그 마법을 가장 파괴적인 형태로 바꿔, 많은 도시와 마을을 불태웠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옆에 프라우가 있어주는 점이군."

"예. 못 미더운 엘프지만. 그래도 경험 자체는 많으니까요. 덕분에 아직 황혼에게 안 잡히고 무사히 살아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언제까지 괜찮을 거라고는 안심할 수 없다.

황혼은 기사단장조차 단신으로 꺾은 괴물이다.

지금은 내버려두고 있지만 만약 황혼이 마음만 먹는다면, 엘레나가 위험해지는 것도 시간 문제다.

"일단 다른 것보다 소문을 퍼트려야겠군."

"무슨 소문이요?"

"내가 살아있다는 소문."

"아아. 그게 좋겠네요. 소문을 들으면 집 나간 공주도 되돌아오지 않겠어요?"

다만, 지금의 대륙은 파편화되어 있다.

중간중간 황혼의 영역이 매우 크고, 아군의 영역은 작은 만큼.

소문이 얼마나 빨리 퍼질지는 미지수였다.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하켄의 얘기를 모두 들은 데일은 계획을 말했다.

황혼이 탑을 짓고 있다는 것과 그 탑을 무너트려야 한다는 것.

"아. 탑. 저도 그거참 수상쩍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탑으로 뭐한 답니까? 역시 저 하늘에 뽈뽈 날아다니는 황제를 떨어트리는 거겠죠?"

"듣기로는 신을 떨어트린다는데."

"...예?"

아무래도 악마들에게 공세를 받느라 거기까지는 몰랐던 눈치다.

얼빠진 표정의 하켄에게 데일이 마저 말했다.

"어쨌든. 놈을 막으러 갈 생각이다. 하지만 나 혼자서 가봤자 황혼은커녕 그 부하들조차 못 뚫겠지."

"그건 그렇죠."

"네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설득해 줬으면 좋겠다."

이곳 알드군트에 있는 병력은 1만을 넘는다. 잠재적인 병사들까지 합치면 그보다 더욱 많은 터.

서부 도시 대부분이 무너지니 그 난민까지 받아들인 알드군트는 상당히 규모가 컸다.

그 힘을 이용해야 했다.

고민하던 하켄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어차피 이곳에 틀어박혀 있으면 이 전쟁에서 진다는 거잖아요. 제가 설득해 볼게요."

"부탁한다."

"그러면 빨리 움직여야겠네요? 언제 탑이 완성될지 모르니까."

"그래. 지금도 황혼의 힘은 강해지고 있을 거다. 자의든 타의든. 놈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더군."

"끄응. 그러면 이제 어디로 가실 건가요?"

데일은 주저 없이 답했다.

"엘드리엄."

* * *

하켄과의 대략적인 상의를 마친 뒤. 데일은 하티를 앞세워 밤의 신전으로 향했다.

오랜만의 산책에 하티는 신이 났는지 우아하게 걸음을 옮겼다.

도시는 소란스러웠다.

사람들을 불안케 했던 라만티스가 사라지니 다들 기뻐서 주체하기 힘들 정도였다.

"데일 경 만세!"

"늑대왕 하켄 만세!"

"역시 하켄 님이야."

사람들의 입에서는 하켄과 데일의 이름은 끝없이 오르내렸다.

이번 전투는 하켄이 계략을 꾸며 라만티스를 붙잡아 두었고. 그 틈을 이용해 데일이 라만티스를 베어냈다는 식으로 소문이 났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고.

하켄이 명성을 얻어서 나쁠 게 없었기에, 데일은 그냥 내버려 두었다.

데일은 그런 소란스러움을 뒤로하고 도시의 외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밤의 신전이 있는 곳은 외곽의 주택가였다. 도시에서도 유독 고요하고 서늘한 장소였다.

그렇다고 더럽거나 불결한 장소는 아니었다.

회색 벽돌로 지어진 집들이 가지런하게 서 있었다.

하켄이 신경 써서 지은 곳이니만큼 제법 깔끔한 분위기였다.

'밤의 신도들이 따로 모여 사는 곳인가?'

머지않아 신전 입구를 찾아낸 데일은 지하로 내려갔다.

온 도시가 승전의 기쁨으로 물든 지금. 신전도 사람 없이 고요했다.

데일이 계단을 내려서자 한적한 신전을 홀로 지키던 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 데, 데일 경?"

아는 얼굴이었다.

이레네에서 암흑가의 촌장을 맡았던 노인이다.

"다행히 무사한 모양이오."

"모두 경과 하켄 사령관님 덕분이지요. 두 분의 은혜에 저희 암흑가 주민들 모두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두 분을 저희에게 내려주신 여신님의 은총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제가 된 거요?"

촌장은 고개를 저었다.

"이곳의 사제를 맡아주실 분이 없어, 제가 임시로 신전을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에리얼은 카엘름으로 갔다는데. 왜 따라가지 않으셨소."

"너무 먼 거리였던지라 주민들이 여정을 따라가기 힘들 것 같았습니다."

당장 촌장도 나이가 있다.

이레네에서 도망쳐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몸에 큰 무리를 주었을 것이다.

데일은 잠시 촌장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다.

데일이 죽었다고 알려진 이유나, 최근 밤의 신도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등등.

데일은 혹시나 해 엘레나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혹시 엘레나. 그러니까, 바이만의 공주가 어디 있는지 소식 들은 거 없소?"

"글쎄요. 2개월 전에 대륙 동부에 모습을 보였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 이후로 악마들에게 도시가 포위당했던 터라... 도움이 못 돼서 죄송합니다."

"신경 쓰지 마시오."

아무래도 엘레나에 대한 정보는 이곳 알드군트에서는 얻기 힘들 것 같았다.

그 뒤로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눈 데일은 이곳에 온 본 목적을 꺼냈다.

"기도실을 좀 쓸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저 뒤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고개를 끄덕인 데일은 마검을 끌러 바닥에 놓은 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익숙한 구조의 기도실로 들어가 한쪽 무릎을 꿇었고 조용히 읊조렸다.

"왔습니다."

하켄

* * *

"왔습니다."

데일이 고개를 조아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양초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연기는 형상을 이루기 위해 몇 번이고 뭉치고 흩어지고를 반복했지만, 끝끝내 여신의 형상을 이루는 데에는 실패했다.

'여신의 힘이 더 약해졌다.'

데일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저번보다 상태가 심각하다.

그리고 그 원인은 명확했다.

황혼.

황혼 탓에 여신의 힘이 점점 제약받고 있었다.

[아들. 환영. 대견.]

결국. 형상을 이루는 데에 실패한 여신은 글자를 통해 의사를 전달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데일이 물었다.

"상황이 많이 안 좋은 모양이군요."

[여신. 노력. 성과. 미비.]

"역시 황혼 탓입니까?"

[긍정.]

곧바로 돌아오는 대답.

데일은 확인하듯이 물었다.

"놈이 짓는다는 탑이 완성되기 전에 멈춰야 하는 것입니까?"

[긍정.]

"그러면... 이제 저희에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남아 있습니까."

황혼이 탑을 완성하는 건 어느 시기일까. 그것만 알아도 계획을 짜는 데 좀 더 도움이 되리라.

데일의 물음에 여신은 한참을 고민하다, 대답을 내놓았다.

[티끌.]

"...티끌만큼의 시간이 남아있단 것입니까?"

[긍정.]

아무래도 예상보다 더 여유가 없는 것 같다.

고개를 끄덕이 데일이 말했다.

"공물을 바치겠습니다."

잔혼과 생기를 바쳤다.

늪지대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모아 온지라 그 양이 적지 않았다.

데일은 확신을 담아 말했다.

"이제 등급이 오를 수 있겠죠?"

[긍정!]

허공에 뿌옇게 끼어 있던 연기가 데일의 몸을 감쌌다.

강한 힘이 신체로 빨려 들어왔다.

변화가 생겼다.

멈춰버린 심장에 피 대신 더욱 강대한 힘이 맥동한다.

드드득.

투구 양옆에 나 있던 뿔 장식물이 좀 더 자라나고 휘어 하늘로 향했다.

장식물에는 이전보다 더 강력한 마력이 서려 불길한 보랏빛을 내뿜었다.

투구의 눈구멍 속에서 빛나는 안광은 더욱 섬뜩하게.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더욱 싸늘해져, 무더운 공기와 만나 수증기를 만들어냈다.

한층 더 인간에서 멀어졌다.

데일은 그렇게 생각했다.

"등급이 올랐군요."

[긍정.]

"그럼 새 기술을 배울 시간이네요. 그림자 검이죠?"

[긍정....]

신나게 설명하려던 여신은 어딘가 시무룩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림자 검.

그림자로 이루어진 칼날이 허공을 떠돌아다니며 전투를 보조해주는 기술이다.

시전자의 근력 능력치에 비례해서 그 파괴력이 증가하는데, 지금 데일의 근력을 생각하면 막강한 아군이 추가로 생긴 것과 같은 효과다.

'확실히. 등급이 오르니 점점 좋은 성능의 기술을 배우는구나.'

더불어 다른 기술들도 한차례 강화했다.

'영혼 지배'는 '어둠의 명령'으로 바뀌었다. 효과 자체는 동일하지만, 그 강력함이 한층 진화했다.

상대의 영혼을 더 거세게 뒤흔들 수 있게 되었고, 되살려낸 언데드의 강함도 한층 강해졌다.

'해골마 소환' 역시 '강화 해골마 소환'으로 한 단계 성장했다.

이제 데일이 소환하는 해골마는 단순히 언데드 탈 것 이상의 위용을 발휘할 것이다.

나머지 공물을 힘과 내구. 마력에 골고루 투자한 데일은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등급: 6

직업: 암흑기사

근력: 128

내구: 80

마력: 74

체력: ―

정신력: 74

[보유 기술 목록]

생기 강탈

새벽의 안개

어둠의 명령

강화 해골마 소환

그림자 검

[특성]

반인 반언데드

어둠의 감각

밤의 여신의 축복

[칭호]

지옥에서 돌아온 영웅

눈에 띄는 건 이제 6에 달한 등급과 그에 걸맞은 높은 능력치들이다.

대륙에서 평범한 인간 중에 이 정도의 능력치를 보유한 이가 있을까?

데일이 평범한 인간은 아니지만....

게다가 정신력 능력치가 마력을 따라잡은 것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이번에 라만티스의 피를 마신 게 큰 도움이 됐군.'

정신력 능력치는 전투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저것 잡다한 부분에 영향을 끼친다.

특히 악마나 황혼의 추종자 등. 영혼이 탁하고 악한 자들의 잔혼을 취해야 하는 일이 많은 데일에게는 더 의미가 컸다.

'확실히. 악마의 힘을 흡수하는 게 가장 성장이 빨라.'

악마는 두려운 적이니만큼 이겼을 때 큰 성장을 보장하기도 했다.

게임식으로 말하면 훌륭한 경험치원이라 해야 할까.

문제는.

'황혼 역시 악마의 힘을 흡수했다는 것.'

하위 서열뿐만 아니라 고위 서열 악마의 힘까지 빨아들였다면.

황혼은 대체 얼마나 강한 걸까.

어쩌면 게임에서 보아왔던 그 어떤 적보다도 강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길 수 있을까?

게임조차 클리어하지 못해, 몇 번이고 캐릭터를 바꿨던 자신이?

"...."

데일은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냈다.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이겨야 한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승산을 올리기 위해서. 데일은 강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가보겠습니다."

[조심! 아들. 사랑!]

기도실을 나선 데일은 하켄이 마련해준 숙소로 향했다.

여전히 도시는 들뜬 열기에 휩싸여 있다. 그곳에 데일이 얼굴을 비춰주면 사람들이 더욱 기뻐하겠지만, 지금은 별로 그럴 기분이 아니다.

데일은 침대에 누우 조용히 과거를 회상했다.

이미 몇 번이고 곱씹어본 행복했던 과거. 지구에서 살 적의 일. 그리고 조부.

혼자만의 상념에 빠져있자, 어느새 주위 풍경이 변해간다.

데일은 이걸 꿈이라고 불렀다.

수많은 기억들이 바람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데일은 어느 황무지 위에 서 있었다.

황무지에는 데일이 그간 죽여온 적들이 서 있었다.

도적. 범죄자. 그리고 악마들. 죽어 마땅했던 모두.

그곳에 이제 라만티스도 추가되었다.

저들은 그저 데일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이것도 늘상 겪는 일이다.

이제 데일은 '귀신은 썩 꺼지라며' 저들의 머리통을 부순 뒤. 다시 꿈에서 깨어나면 된다.

"몇 번 하니까 지겹군. 빨리 끝내자."

데일은 팔을 붕붕 돌리며 놈들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때.

몰려 있던 녀석들이 양옆으로 우르르 물러났다.

데일은 미간을 좁혔다.

이 꿈속의 불청객들은 이리 움직임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불청객들이 물러선 장소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바닥에 끌리는 새빨간 옷을 입고 있는 사내, 혹은 여인. 가슴에 박혀 있는 룬검.

베일에 가려진 터라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그 강렬한 존재감은 데일이 마주한 그 어떤 이들보다도 거대했다.

마치 밤의 여신을 마주하는 기분이라 해야 할까.

또한, 상대는 무언가 익숙하기도 했다. 아련한 느낌이랄까. 언젠가 만난 적이 있는 그런 기분.

데일이 저도 모르게 물었다.

"황혼?"

상대가 빙그레 웃었다.

장막에 가려진 얼굴이지만, 그 입가가 웃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미소에서는 다채로운 감정이 전해져왔다.

호의. 반가움. 그리고 증오.

상대가 입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어요."

그와 동시에 온 지면이 흔들렸다.

강한 힘에 데일의 꿈이 강제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에 종지부를 찍을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요."

데일은 입을 열지 못했다.

이곳은 분명 데일의 영역이지만, 데일은 자유롭지 못했다.

짓궂게 웃은 황혼이 말했다.

"아. 그리고 안부 전해주세요."

황혼은 가슴에 박힌 룬검을 쓰다듬었다.

"저를 이 꼴로 만들어 놓은 배신자한테."

데일의 의식이 수면 위로 올라갔다.

* * *

"...."

데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은땀이 온몸에서 흘러내리는 듯,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실상은 땀 한 방울 흘리지 못하는 몸이지만.

'방금 그건 대체?'

단순한 악몽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황혼이 너무 강력해서, 멀찍이 떨어진 데일의 정신에 침투할 정도가 된 건가?

'아니.'

그건 아니었다. 그건 정말로 신들의 영역이었으니까.

아마 파브리스나 다른 황혼의 추종자가 원인이었을 것이다.

놈들의 생기와 잔혼을 흡수할 때, 황혼의 힘도 일부 빨려 들어왔을 터.

그게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아무거나 주워먹다가는 배탈이 나는 법이니.'

그렇다면 황혼은 왜 데일의 앞에 굳이 모습을 드러낸 건가.

시간이 남아돌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황혼이 데일을 향해 보여준 복잡한 감정도.

'그리고 배신자한테 안부를 전해달라고?'

그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배신자는 누구고 왜 데일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는 건가.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

갈수록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하다.

이 답답함을 베어내기 위해. 데일은 마검을 들었다.

부웅!

한참을 아무 생각 없이 검만을 휘둘렀다.

검을 휘둘러 쓸데없는 잡상을 베어냈다.

'그러고 보니 이미 백만 번. 채웠는데.'

루드비히를 만나서 다음 지도를 받아야 하는데. 정작 루드비히가 없다.

'에리얼하고 같이 있으려나?'

에리얼한테도 연락을 넣어야 한다.

데일이 온 대륙을 돌며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다.

여신의 말마따나, 지금 아군에게 주어진 시간이 티끌과 같다면 최대한 빨리 황혼을 향해 진격해야 했다.

'상황을 설명하고 의사를 주고 받아야 해. 에리얼은 4군단과도 가까우니, 바른바르트 군단장의 지원을 얻기도 좋고.'

문제는 연락 수단이다.

전서구가 제대로 원하는 곳까지 다다를 수 있을까? 중간에 요격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들면 믿을만한 사람에게 편지를 맡기는 게 제일이지만, 아무리 빠른 말을 타도 직접 편지를 들고 이동하는 건 역시 시간이 든다.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도 전해야 하는데.'

계속해 마음에 걸리는 건 엘레나다. 데일은 엘레나를 거둔 순간부터 일종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보호자로서의 마음이랄까.

위험한 길을 걷는 걸 그냥 두고 볼 수 없다.

'후우. 정신이 하나도 없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데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 가지로 혼란스럽고 복잡하지만.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다 보면 어떻게든 길이 보일 것이다.

늘 그랬듯이.

* * *

어느 척박한 땅의 한적한 마을.

마을의 유일한 선술집에 한 소녀가 홀로 앉아 우유를 홀짝였다.

로브를 눌러 썼지만, 그 아름다운 얼굴을 전부 가릴 수 없었다.

선술집의 취객들은 술을 마시는 듯 마는 듯하면서 소녀를 흘끔거렸다.

"누구야?"

"몰라. 여행자인 것 같은데."

"이 시기에 여자 혼자 여행을 다닌다고?"

수군거리던 취객 중. 불콰하게 취한 사내 하나가 소녀에게 다가갔다.

사내는 능글맞게 웃으며 치근덕댔다.

"이봐 아가씨. 어디 출신이야?"

"꺼져."

"그러지 말고. 같이 한잔하자고. 술은 내가 살게."

"마지막 경고야. 꺼져."

"하하. 까탈스럽기는. 그러지 말고... 끄아아악!"

화악.

순간. 허공에서 생겨난 불덩이가 사내를 덮쳤다.

온 몸이 불타는 사내가 고통스럽게 바닥을 굴렀다.

지켜보던 이들이 당황했다.

"마, 마법사라고?"

소녀는 손을 휘저었다.

차가운 물방울이 생겨난 불타는 사내를 덮쳤다.

싸아아아!

수증기가 퍼지며, 그제야 사내의 몸에 붙은 불이 꺼졌다.

소녀는 다시 말했다.

"꺼져."

"히, 히이익!"

사내는 도망쳐버렸다.

지켜보던 취객들도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마법을 그렇다치고. 저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과 목소리를 듣고도 다가갈 간 큰 이는 없었다.

선술집에 새 손님이 들어온 건 바로 그때였다.

귀가 뾰족한 엘프 전사가 성큼 들어섰다.

엘프 전사의 등장에 취객들은 또 한 번 당황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프 전사는 소녀의 앞에 앉았다.

"오우. 얌전히 있으셨습니까 공주님."

"프라우 경. 공주님이라 부르지 말라고 100번은 말한 것 같은데. 우리 정체를 광고하고 싶어서 환장한 거야?"

"음. 근데 조용히 있고 싶으셨다면서 또 사람을 불태우신 거 아닌가요?"

"...."

엘레나는 샐쭉 입술을 삐죽이며 우유를 홀짝였다.

프라우는 맥주를 삼켜 시원하게 들이켰다.

"캬! 이 맛이지. 깡촌 치고는 술맛이 제법입니다. 카일라의 맥주만 먹다보니 진미가 따로 없네요."

"카일라한테 이를 거야."

"하하! 하... 봐주십쇼."

엘레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우유를 홀짝였다.

그 모습을 슬쩍 본 프라우가 물었다.

"공주님도 한잔하시겠어요? 꽤 맛있어요."

"아니."

"왜요? 옛날에는 마시고 싶어하셨잖아요."

잠시 멈칫한 엘레나는 시선을 떨어트렸다.

"...데일 경이 나이가 찰 때까지 마시지 말라 했어."

"으음."

프라우도 말을 잃었다.

엘레나 앞에서 데일에 대한 화제는 금기였다.

잠시 눈치를 살피던 프라우가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실 건가요?"

"이 근처에 악마가 점령한 도시가 있다고 들었어.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악마라는데, 전부 불태우려고."

"음. 저희 둘이서요?"

"겁먹었으면 오지 마. 나 혼자 갈 테니."

"엘프한테 겁먹었냐니. 공주님만 아니었으면 결투를 신청했을 겁니다."

식사를 마친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숨막힐 듯 조용한 선술집을 떠나, 저 평야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프라우가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게 어떻습니까. 에스델이나 하켄이 있는 곳으로. 거기서도 공주님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겁니다. 꼭 이렇게 죽을 자리 찾아다니는 사람처럼 위험한 곳만 골라 다닐 필요도 없고요. 데일 경도 그걸 원하지 않을 겁니다."

엘레나는 프라우를 힐끔 올려다본 뒤, 로브를 여몄다.

"데일 경을 죽인 적들을 전부 불태울 때까지는 멈출 생각 없어."

"...알겠습니다."

둘은 그 뒤로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기묘한 이인조가 사라진 마을에는 다시 활기가 돌아왔다.

취객들은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조금 전 벌어진 놀라운 일을 안주 삼아 술자리를 계속했다.

그리고 조금 뒤.

마을에 소문을 전해주는 방랑 상인이 선술집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오! 자네 왔나!"

"좋은 소식 좀 가지고 왔나?"

방랑 상인은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번에는 특별한 소식이 있네!"

"오오. 특별한 소식?"

"흑기사 데일 아는가?"

"알다마다. 악마와의 싸움에서 전사한 사람 아닌가?"

방랑 상인은 씨익 웃으며 외쳤다.

"글쎄! 들어보게! 그 흑기사가 살아있다는군!"

항해

* * *

도시는 여전히 들뜬 분위기에 감싸여 있었지만, 데일은 차분하게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했다.

우선 에리얼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나 살아있다.' 로 시작해, 지금의 상황과 황혼을 향해 진군해야 하는 이유 따위가 담긴 내용을 종이에 가득 눌러 담았다.

생각보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는데,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가 워낙 오랜만이기도 했거니와, 이제는 너무 강력해진 근력에 자꾸만 깃펜이 부러져 버린 탓이다.

어쨌건. 우여곡절 끝에 편지를 적은 데일은 그 편지를 여러 장으로 베껴 쓰게 시킨 후, 전령에게 건네주었다.

"위험하지만 중요한 일이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편지를 전달하겠습니다!"

열 명이 넘는 전령이 흩어졌다.

저들의 목적지는 같았지만, 모두 다른 길을 사용했다.

한 명이라도 카엘름에 다다르는 데에 성공해도 목적은 이룬 셈이다.

'할 수 있을까?'

저들이 황혼의 영역을 지나 카엘름까지 다다를 수 있을까?

썩 희망적이지는 않았다.

그저 행운이 따라주기를 바랄 뿐이다.

시간 내에 카엘름과 4군단의 도움을 받으려면, 이들이 성공하는 수밖에 없다.

'다음은... 황제인가?'

또 하나의 세력.

하늘을 날아다니는 황제.

그 권위는 이전만 못하다 하나, 그는 여전히 황실 기사단과 마탑의 마법사들을 거느리고 있다.

고급 병력의 숫자는 다른 세력보다 훨씬 크다.

게다가 3군단은 여전히 황제를 따르고 있다 한다.

그 협조를 받을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을 것이나....

'연락할 수단이 없군.'

데일에게는 황제와 접촉할 방법이 없다.

데일이 직접 하늘을 날아, 성으로 기어 올라가지 않는 한 말이다.

게다가 황제라는 인물은 데일에게 여전히 미지로 남아 있다.

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지금 황혼이 무슨 짓을 벌이려는지 알고 있을까?

싸울 의지는?

데일은 황제에 대해 아는 게 적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황제가 그다지 신뢰할 만한 인물은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그 아래 사람들까지 똑같지는 않을 거야.'

데일은 황실 기사단과 함께한 적이 있다.

기사단장이 이끄는 기사단원들은 분명 오만한 구석이 있었지만, 그래도 명예롭고 강대한 기사들이었다.

백성들을 모두 버려두고 도망이나 다니는 황제에게 불만을 품은 이들도 많을 것이다.

'이건 좀 더 생각해봐야겠군.'

당장 하늘에 날아다니는 이레네와 접촉할 방법이 없다면, 고민해봤자 시간 낭비일 뿐이다.

지금 당면한 문제는 엘드리엄에 대한 건이다.

데일이 직접 엘드리엄으로 가겠다 선언했고, 하켄은 그의 참모진과 데일의 회의를 주선해주었다.

참모진은 데일에게 무한한 호의와 존경을 보냈다.

"정말이지 대단하십니다."

"알브헤임을 단신으로 점령해 이곳까지 오시다니."

"과연 사령관님의 친우답습니다."

어느새 데일과 하켄은 둘도 없는 친우가 되어 있었지만, 데일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하켄도 그냥 근엄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고.

하지만 엘드리엄에 가서 도움을 청하겠다는 데일의 계획에 참모진의 얼굴이 흐려졌다.

"으음. 확실히. 황혼을 직접 쳐야 한다는 건 이해했습니다."

"황혼이 신들을 떨어트린다니. 이건 거룩한 성전이 될 것입니다. 병사들도 기꺼이 참전할 테죠."

"하지만... 엘드리엄에 가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켄의 부관이 지도를 펼쳐 보였다. 대륙의 지도를 전부 보여주는 큼직한 지도였다.

"보시다시피 이곳 알드군트와 엘드리엄의 거리 자체는 그리 멀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북부에 갈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이레네를 거칩니다. 왜 그러는지 아십니까?"

"산맥 때문이군."

"예."

대륙의 가장 커다란 산맥인 용뼈 산맥의 줄기가 뻗어 나와, 서부와 북부를 가르고 있었다.

문제는 그 험난함이다.

좁고 험한 산길과 굴러떨어지면 시체도 못 찾는 '절망의 절벽'.

싸늘한 칼바람에 까딱 잘못하면 그대로 날아가 버리는 '회오리 계곡'.

낙석이 유성처럼 쏟아져 여행자를 노리는 '별의 길'.

이런 악의 가득 찬 지형이 곳곳에 깔려 있다.

"옛날. 라발 장군은 한 무리의 병사를 이끌고 저 모든 곳을 뚫고 가, 적의 뒤를 치고 전설이 되었죠."

"하지만 그때랑 지금이랑 다른 게 하나 있습니다. 바로 황혼 놈들의 주둔지가 산맥 곳곳에 있다는 점이죠. 그 숫자는 많지 않지만... 쉽지는 않을 겁니다."

단순히 피해도 피해지만, 시간이 문제다.

그 모든 어려움을 뚫고 엘드리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겨울이 되어 있으리라.

"차라리 이레네를 향해 진격해 황혼 세력을 일소하고, 그곳에서 다시 북상하는 게 어떻습니까?"

"...지금 이레네 주위에는 뭐가 있소?"

"일단 무너진 이레네 터에서 새 도시가 들어서고 있습니다. 그 근처 황혼의 세력권인 마을과 도시가 쑥쑥 들어서는 실정이고요."

"그자들을 모두 꺾은 뒤 엘드리엄으로 향하는 게, 그냥 산맥을 통과하는 것보다는 빠르다는 소리요?"

참모진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데일은 신음을 삼켰다.

하켄을 데리고 도시를 훌륭히 방어해낸 저 참모진의 능력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이들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문제는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점이다.

여신은 티끌과 같은 시간이 남았다 했으니, 조금이라도 빨리 서두르는 게 좋다.

이레네까지 밀고 나간 뒤 다시 북상해 엘드리엄과 합류하는 것보다는, 함께 중앙을 향해 진군하는 게 낫지 않겠나?

고심하던 데일은 지도의 다른 한 부분을 발견했다.

알드군트의 서쪽. 드넓게 펼쳐진 바다.

"바다를 이용하면 어떻소."

"바다 말씀이십니까?"

"이곳은 무역 도시로 유명하지 않소. 항구도 있지 않소?"

"맞습니다. 실제로 이레네가 무너지기 직전까지는 많은 물류가 오갔지요. 지금도 남쪽으로 항해하는 건 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북쪽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참모는 지도를 척척 가리켰다.

"여기서 조금만 더 북쪽으로 가도 용뼈 산맥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기단의 영향권이죠. 해류도 남쪽을 향하는지라, 여러모로 불리한 조건이 많습니다... 만.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참모는 지도에 그려진 웬 그림을 가리켰다.

거대한 문어가 꿈틀거리거나, 반인반어 괴물이 노래를 부르거나, 해골바가지가 칼을 들고 있거나.

섬뜩한 그림들이 지도 한구석을 메우고 있었다.

"보이십니까?"

"문어랑. 스켈레톤?"

"북쪽 바다에는 얼음 조각들뿐만 아니라, 크라켄이나 세이렌 같은 몬스터들이 우글거립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두려운 건 바로 유령선입니다."

"유령선 말이오?"

"예. 하늘을 날아다니는 선박인데, 그 안에 망자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놈들은 상선을 보면 대뜸 다가와, 살아있는 모든 선원을 죽이고 자기 동료로 삼기로 유명하죠. 뱃사람들은 그들을 바다의 공포라 부릅니다."

"흐음."

데일은 다시 한번 지도에 시선을 주었다.

실제로 중세 시대 지구에서도 지도에 바다 괴물을 그려 넣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암초를 잘못 봐서 괴물이 산다고 믿든, 적군에게 두려움을 줘 선뜻 다가오지 못하게 공갈을 치는 것이든, 일단 지도에 표시하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괴물과 미지가 정말로 살아 숨 쉬는 세계다.

괴물이 있다면 정말로 있는 거다.

돈 되는 일이라면 절대 마다하지 않는다는 상인들이 북쪽 바다는 꺼들떠보지도 않는단다.

'그렇다면 정말로 위험하다는 건데.'

데일은 책상을 툭툭 두드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몬스터. 해류. 유령선....'

곰곰이 고심을 이어가던 데일의 머릿속에 한순간. 섬광이 번뜩였다.

"잠깐. 유령선에 망자들이 타 있다고 했소?"

"예. 그렇습니다만."

"망자라는 게 무얼 의미하는 거요. 스켈레톤? 좀비? 구울?"

"으음. 보통 스켈레톤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유령 선박에 실체가 있다는 거겠군. 무게를 가진 이들을 태우고 있는 거니."

"그렇...죠?"

참모들은 데일이 대체 왜 이런 질문을 하나 의아해 서로 시선만을 교환했다.

"그곳에 사람이 타면 어떨 것 같소."

"?"

"예?"

"그곳에 타면 엘드리엄까지도 금방 아니겠소?"

참모진들은 어리둥절해하다, 이내 이게 저 흑기사의 농담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하하하하!"

"유령선에 타다니. 참 재밌으십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유머 감각이 출중하시군요 하하!"

"농담 아니오."

데일의 한마디에 좌중이 싸늘해졌다.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는 참모에게 데일이 덤덤히 말했다.

"유령선이라는 게 망자들을 싣고 날아다니는 배라면, 그 유령선을 우리가 사용하면 되지 않겠소."

"어, 음. 저. 이쪽을 공격하면 공격했지, 순순히 유령선에 타게 해줄까요?"

"문제 될 거 없소. 바다의 공포라고 해봤자 언데드 아니오? 언데드는 내가 잘 설득할 수 있소."

"설득이라니 대체 무슨... 아."

그제야 참모들은 데일이 이끄는 군단을 떠올렸다.

군단 병력의 절반 가까이 차지한 언데드 군세와 그 군세를 이끄는 미치광이 리치를.

'음. 제법 그럴듯한 계획... 인가?'

'아주 터무니없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잘못하면 저 깊은 북쪽 바다 아래에 처박힐 텐데.'

상상도 해본 적 없는 계획에 참모들은 선뜻 이렇다저렇다 말을 올리지 못했다.

그때.

홀로 근엄히 앉아 눈을 감고 있던(반쯤 졸고 있던) 하켄이 다시 눈을 떴다.

"경의 말에 따르도록."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대충 데일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걸로 회의는 사실상 끝이었다.

참모진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 누구도 감히 하켄의 의견에는 반론하지 않았다.

* * *

참모는 머지않아 데일과 군단을 태워줄 북쪽 바다로 태워다 줄 간 큰 선장을 수배해주었다.

"그쪽이 흑기사 데일이오? 만나서 반갑소! 이 '바다새'호의 선장, 루브릭이외다!"

"반갑소. 데일이오."

"유령선을 잡으러 간다고 들었소! 으하하하! 내 살면서 이런 골 때리는 의뢰는 처음이오!"

"놈들이 있다는 북쪽 바다까지 데려다줄 수 있소?"

"물론! 돈만 넉넉히 준다면야 무슨 일이든 하는 게 내 미덕이지만... 이번에는 최소한만 받겠소."

"?"

"그 개같은 뼈다귀 새끼들이 죽인 내 동료가 적지 않거든."

변덕스러운 바람과 해류에 경로를 이탈했다가, 유렁선을 맞닥뜨려 목숨을 잃은 항해사 길드원이 얼마나 많던가!

알드군트의 뱃사람은 하나 같이 '바다의 공포'를 두려워하고, 증오했다.

"아 물론. 이쪽 뼈다귀는 환영이오! 으하하하!"

"죽여도 됩니까. 주인님?"

"되겠나?"

안광을 흉흉히 빛낸 무르하탈은 병사들을 부려 루브릭의 범선에 필요한 짐들을 실었다.

그사이 데일은 마중 나온 하켄과 마지막으로 상의했다.

"저희는 그럼 계획대로 이레네를 향해 진군하겠습니다. 이레네에서 합류하는 걸로 하죠."

"조심해라."

"이미 알드군트도 무너트린 마당에 조심할 게 뭐 있겠습니까. 오히려 조심해야 할 건 경이죠.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바다에 가라앉으면 다 개죽음인데요."

"여차하면 수영해서 엘드리엄까지 가면 된다."

회심의 농담을 던진 데일은 곧장 하켄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하켄은 심드렁했다.

"아.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데일이라면 진짜 그렇게 할 것 같았다.

자기 농담을 받아주지 않는 모습에 데일은 조금 실망했다.

"이만 가보겠다."

"예. 금방 봅시다."

"하티. 너도 얌전히 잘 있어라."

하티가 불만스레 크릉 울었다.

하티는 데일과 함께 가고 싶었지만, '늑대왕'의 권위를 생각하면 하티가 하켄 옆에 있어 주는 게 좋았다.

"이번에는 또 사라지는 거 아니죠?"

"당연하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마지막으로 카일라의 등을 두드리며 안심시켜준 데일은 배에 올랐다.

상당히 큰 규모의 범선이다.

돛이 무려 일곱 개나 달려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범선이라도 2,000에 달하는 밤의 군단을 모두 태울 수는 없었다.

데일은 북쪽 지방이 고향인 인간 병사들과 도적들 일부만을 대동했다.

도적떼나 리자드맨을 비롯한 나머지 병력들은 하켄과 함께 이레네로 진격할 것이다.

그리고 그 지휘는 무르하탈이 맡았다.

"무르하탈."

"예. 주인님."

"내가 없는 동안 잘할 거라 믿는다."

"맡겨만 주십시오."

"배신하지 말고. 배신하면 죽는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이미 신께 맹세까지 않았습니까. 이 무르하탈이 그렇게 못 미덥습니까?"

"어."

"...."

사실. 무르하탈은 데일을 배신할 생각이 없었다.

무르하탈은 데일이 보여준 여러 무위를 보고 생각했다.

데일이야말로 여신의 은총을 받는 진짜 기사라고.

적어도 데일 옆에 있으면 콩고물 떨어질 게 많다고.

이득이 되는데 왜 굳이 배신하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데일을 배신한 뒤의 뒷감당이 두려웠다.

저 흑기사라면 정말로 지옥 끝까지 쫓아와, 기어코 자신의 두개골을 부숴버릴 것 같았으니까.

해야 할 말을 모두 마친 뒤.

데일은 범선에 올랐다.

기다리고 있던 선장 루브릭이 기세 좋게 소리쳤다.

"자! 닻을 올려라!"

"예이!!"

"바람 좋고! 적당히 따습고! 구름 한 점 없고! 이번 항해는 느낌이 좋구만! 흑기사 형씨. 기대해도 좋소. 내가 감이 많이 좋은 편이거든? 이번 항해는 느낌이 좋아. 아무 문제 없을 것 같아!"

루브릭은 쾌활하게 외치며 싸구려 술을 벌컥 들이마셨다.

그리고 반나절이 채 지나기 전.

선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흑기사 형씨. 아무래도 우리 좆된 것 같소."

"유령선이 나타났소?"

선장이 발작하듯이 외쳤다.

"아니. 크, 크라켄이오!"

"...."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항해

* * *

얼굴이 하얗게 질린 루브릭 선장이 바다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잠잠하던 바다에 짙은 그림자가 넘실거렸다.

"뭔가 있긴 하군. 근데 저게 크라켄인지 다른 몬스터인지 어떻게 아는 것이오."

"뱃밥 먹은 세월이 있는데 척보면 척 아니겠소! 그리고 크라켄이 아니라도, 크라켄만큼 커다란 놈이라는 건 확실하니, 우린 좆된 것이오! 배가 박살날 거라고!"

선원들은 모두 혼란에 빠져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루브릭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조타수! 배를 우현으로 돌려!"

"작살 준비해!"

"자, 작살로 크라켄을 뭘 어쩌려고요."

"그럼 가만히 서 있으려고 병신아!!"

그러는 사이에도 그림자는 점점 배를 향해 가까워지고 있었다.

크라켄이 범선을 슬쩍 보고 지나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은 부서졌다.

녀석은 명백히 이쪽을 향해 적의를 가지고 다가오고 있었다.

마침내 바닷속 그림자가 수면 위로 떠오르더니, 그 거체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놈이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수면이 넘실거리며 파도를 만들어냈다.

무식하게 커다란 문어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빨판이 다닥다닥 붙은 거대한 촉수.

회색에 가까운 몸체.

그리고 그 피부 위에 달라붙은 울퉁불퉁한 따개비들.

범선보다도 족히 두 배는 더 큰 괴수의 모습은 과연 위압감이 넘쳤다.

'저런 걸 만나면 확실히, 꼼짝없이 뒤진 목숨이었겠군. 괜히 북쪽 바다로 안 가는 게 아니었어.'

심지어 이곳은 아직 북쪽 바다도 아니었다.

"젠장! 아직 따뜻한 바다란 말이다! 왜 재수 없게 여기까지 내려온 거야!"

원래 바다는 변덕쟁이다.

바다에 익숙한 선원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러려니 하는 배포를 가졌다.

하지만 이건 선을 넘지 않았는가.

다가오는 크라켄을 보며 이를 바득바득 갈던 루브릭은 문득, 옆에 서 있는 흑기사가 너무나 평온한 걸 눈치챘다.

마치 남의 일인 양 구경하는 느낌이라 해야 할까.

루브릭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왜 그리 차분하시오!"

"아니. 그냥 저 녀석을 사냥하면 얼마나 많은 생기를 흡수할 수 있을까 고민 중이었소."

"뭐요?"

데일은 크라켄을 살피며 판단을 마쳤다.

아무리 거대해봤자 몬스터는 몬스터. 그보다 더 크고 강력한 것도 사냥했던 데일에게 겁을 주기에는 한참 모자랐다.

하지만 지금은 바다 위라는 건 잊자 말아야 한다.

'배에서 싸우면 좋을 게 없겠군.'

저 무식하게 커다랗고 무거운 촉수를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이 범선은 종잇장처럼 찢겨나갈 거다.

엘드리엄으로 수영해서 돌아가는 건 사양이다.

데일은 망토와 가방을 풀러 루브릭에게 건네주었다.

"잠시 맡아주시오. 귀한 물건이니 혹시라도 잃어버리면 안 되오."

"뭐, 뭐요?"

"갔다 오겠소."

"잠...!"

데일은 마검만을 들고 쿵쿵 달려가더니, 그대로 갑판에서 땅을 박차 바다로 뛰어들었다.

풍덩!

갑옷과 수면이 부딪혀 잠시 물보라와 물거품이 일고. 머지않아 바다 속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뭐가 많긴 하군.'

바닷속 풍경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다소 있었다.

크라켄뿐만 아니라 거대한 상어나 사이렌 등. 다종다양한 몬스터들이 오랜만의 인간 고기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기 때문.

그들은 데일이 바다에 뛰어들자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먹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내, 데일의 몸에서 풍겨나오는 음산하고 싸늘한 기운에 움직임을 멈췄다.

"!!"

"!"

뭔가 잘못됐다.

저건 먹이가 아니다.

감이 좋은 몬스터들은 곧장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늦었다.

마력이 휘몰아치며 데일의 눈동자에서 안광이 번뜩였다.

영혼지배.

경쟁자들보다 빠르기에, 데일과 가장 가까웠던 거대 상어의 두 눈이 흐리멍덩해졌다.

지성이 약한 몬스터의 의식을 지배하는 건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데일은 거대 상어의 단단한 몸을 붙잡은 뒤, 명령을 내렸다.

'저 문어 놈에게 접근해라.'

명령을 받은 거대 상어는 빠르게 수면 위로 올라온 뒤. 꼬리지느러미를 파닥이며 크라켄에게 향했다.

둘 간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선장과 선원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 무슨... 상어를 조종한다고?"

"물에 뛰어들길래 자살하는 줄 알았는데...."

크라켄도 상어를 타고 오는 기사의 접근을 알아차렸다.

우우우웅!!

온 바다를 울리는 기분 나쁜 외침과 함께, 촉수가 맹렬한 기세로 휘둘러졌다.

데일은 상어의 등을 밟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강한 압력에 거대 상어의 등이 움푹 내려앉고.

뒤이어 크라켄의 촉수에 얻어맞은 상어는 그대로 목숨을 잃고 저 깊은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상어의 희생(?) 덕에 데일은 촉수를 피할 수 있었다.

상어를 후려치느라 힘을 잃은 촉수 위에 올라탄 데일은, 그대로 촉수를 밟고 본체를 향해 달렸다.

의도를 눈치챈 크라켄이 곧장 다른 촉수를 데일에게 내뻗으려던 그때.

싸아아아아!

데일의 몸에서 흘러나온 어둠이 온 일대를 덮었다.

평범한 어둠이 아니다.

크라켄은 갑작스레 느껴지는 싸늘함과 두려움에 몸서리쳤다.

저 북쪽 바다의 차디찬 물도 이리 싸늘하지 못했으며, 이 끔찍한 공포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크라켄은 움츠러들었다.

몸을 움직여 어떻게든 어둠을 흩어내려 했다.

머지않아 어둠이 흩어지고.

다시 태양이 보였다.

그리고 그 태양을 등지고, 마검을 번쩍 든 흑기사가 뛰어오르고 있었다.

푸욱!

마검이 깊숙이 박혀 들어가자, 푸른 피가 튀었다.

우우우우웅!!

또다시 기괴한 울음소리를 낸 크라켄이 촉수를 뻗어 데일을 후려치려 했다.

하지만 데일은 이미 녀석의 머리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신체 구조상 크라켄이 데일을 떼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데일은 요령 좋게 촉수를 피해내면서 계속해 검을 휘둘렀다.

'워낙 맷집이 좋은 녀석이라, 죽을 생각을 안 하는군.'

부족한 건 화력.

문득. 데일은 이럴 때 시험해보기 적당한 기술이 하나 있음을 떠올렸다.

정신을 집중해 마음속에 검을 그렸다.

그러자, 데일의 그림자가 모여들더니, 대검의 형상을 이루어 데일의 주위를 날아다녔다.

새로 얻은 기술 '그림자 검'.

그림자 검은 데일이 별도의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마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스스로 날아가 크라켄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슈칵!

형체화된 그림자의 날카로움은 마검에 비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크라켄의 울퉁불퉁한 피부에 상처가 빠르게 늘어났다.

이따금 촉수가 그림자 검을 후려치기도 했지만, 그림자는 흩어졌다가 다시 되돌아와 다시 검의 형상을 이루었다.

날카로움.

빠르기.

그리고 스스로 움직이는 편리함까지.

그림자 검은 공격 기술이 갖춰야 할 모든 요소를 갖춘 기술이었다.

문제가 딱 하나 있다면....

'마력 소모가 장난 아니군.'

맹렬하게 싸워나가던 그림자 검이 어느 순간부터 비리비리하더니, 팟! 하고 흩어져버렸다.

흑기사의 고질병인 마력 부족이 어김없이 터져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 충분했다.

실전에서 새 기술을 시험해본 셈 치면 이 정도로도 만족스러웠다.

애초에 이미 크라켄은 빈사 상태니까.

게다가 상처 입은 짐승이 다음으로 취할 행동은 뻔하다.

도주.

크라켄은 촉수를 허우적거리며 깊은 바다 저 아래로 도망치려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몇몇 촉수는 데일을 꼭 붙들려 했다.

'그대로 익사시킬 요량인가 보지?'

안타깝지만 데일은 숨을 쉬지 않는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크라켄은 복수심에 불타며 데일을 놓지 않으려 했다.

데일은 굳이 저항하지 않았다.

녀석의 상처에 손을 박아넣고, 산채로 생기를 흡수했다.

'덩치가 크니 생기도 어마어마하군.'

데일은 별 어려움 없이 크라켄에게서 생기를 거두었다.

나름 한 바다를 주름잡는 괴물답게 그 양이 적지 않다.

실로 만족스러운 성과였다.

그리고 크라켄이 충분히 깊게 내려왔을 쯔음.

생각했다.

'슬슬 올라가야겠군.'

데일은 자신을 부러져라 쥐고 있는 촉수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힘을 주었다.

"!!"

드드득.

크라켄의 촉수가 그대로 뜯겨나갔다. 그 압도적인 용력에 크라켄은 당황을 넘어 경악했다.

이런 자그마한 몸으로 이 정도의 힘을 발휘하는 걸 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대로 촉수를 두어 개 더 뜯어낸 데일은 녀석의 머리에 박힌 마검을 뽑아 챙긴 뒤.

유유히 수영해 수면 위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데일이 본 건 반쯤 죽음에 이르러 저 어두운 바다 아래로 가라앉는 크라켄과, 그런 크라켄을 뜯어먹기 위해 몰려드는 바다 몬스터들이다.

'당분간 몬스터 걱정은 없겠군.'

모처럼 크라켄 고기로 실컷 포식했으니 구태여 위협해오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크라켄을 사냥한 데일에게 다시 덤벼들 정도로 몬스터들은 멍청하지 않았다.

유유히 수영해 범선으로 다가선 데일이 말했다.

"밧줄 좀 내려주시오."

"...."

"아, 으. 예! 내려드리겠습니다!"

벙찐 얼굴로 멍하니 서 있던 선원들이 앞다투어 밧줄을 던져주었다.

밧줄 서너 개가 데일의 근처에 떨어졌다.

"하나면 되는데."

데일은 그중 하나를 붙잡고 범선 위로 올라섰다.

갑판으로 올라선 데일은 몸에 묻은 바닷물과 해초 따위를 후두둑 털어냈다.

루브릭이 헐레벌떡 달려와 공손히 수건을 받쳤다.

"이걸로 몸을 닦으십시오."

"고맙소."

"아닙니다. 홀로 크라켄을 때려잡는 기사인데, 이 정도는 당연합니다."

이전보다 훨씬 공손한 태도와 말투였다.

데일이 대충 몸을 닦아내자, 다른 선원들이 앞다투어 달려와 손을 내밀었다.

"다, 다 쓰셨으면 제가 받아드리겠습니다."

"아니, 내가!"

"...?"

"이 새끼들! 위아래도 있는 법이거늘! 헤헤. 저한테 주시면 됩니다."

루브릭이 샛노란 이를 드러내며 헤헤 웃었다.

이 촌극에 데일은 꺼림칙한 기분으로 수건을 건네주었다.

"왜 수건 따위에 다들 목매는 것이오."

"수, 수건 따위라니요! 맨몸으로 바다에 뛰어들어, 오래도록 바다의 공포로 군림한 크라켄을 때려잡았는데! 그분의 몸을 닦은 수건에도 당연히 특별한 힘이 깃들어 있지 않겠습니까!!"

으레 뱃사람들은 미신에 약한 법이다. 그럴 수밖에.

변덕스럽고 위험한 바다와 항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들은, 미신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데일의 성수가 묻은(정확히는 바닷물이지만) 수건은 몬스터들을 내쫓고 행운을 불러오는 영험한 힘이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으음. 알겠소."

조금 소름끼쳤지만 데일은 이해해주기로 했다.

딱히 해가 될 것도 없고.

"이제 어떻게 하면 됩니까 기사님."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마치 왕을 섬기는 신하들처럼, 선원들이 데일의 앞에 바짝 엎드렸다.

분명 이 배의 선장은 루브릭이건만.

하지만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 루브릭이 가장 앞에서 엎드리고 있었으니까.

"...원래대로 북쪽으로 계속 가주시오. 당분간 습격은 없을 것 같으니까."

"옙!"

"모두 위치로!"

"이대로 북쪽 바다로 간다!!"

* * *

'바다새'호는 순조로운 항해를 계속했다.

해가 지고, 다시 해가 떴다.

태양 빛을 받아 반짝이던 짙푸른 바다는 점점 먹물색으로 변해갔다.

곳곳에 암초가 보였으며, 해류는 거칠었고, 용뼈 산맥에서부터 불어온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이 선원들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과연 듣던 대로 만만치 않은 바다다.

하지만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루브릭 선장은 능숙하게 배를 항해해갔다.

"하하! 어쩌면 이대로 엘드리엄까지 도착할 수도 있겠는데요!"

루브릭이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순조로웠다.

크라켄 이후로는 몬스터에게 습격당한 적도 없고, 이런 위험한 바다에 해적 따위가 있을 리도 없으니까.

하지만 데일은 이 평화가 마냥 달갑지만은 않았다.

"유령선에 대한 게 혹시 헛소문이었소?"

"그럴 리가요! 놈들은 진짜입니다! 저도 멀리서 본 적이 있다고요!"

"근데 왜 안 나타나는 것이오."

"으음."

유령선이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로 순탄하게 항해해, 목적지까지 도착해버릴 것 아닌가.

"안 나타나면 좋은 것 아닙니까? 어차피 목적지는 엘드리엄이지 않습니까."

"나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선박의 원리가 궁금하오. 어쩌면 유용하게 써먹을 수도 있을 거고."

"하지만 저쪽에서 안 나타나면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없지 않습니까."

"흐음."

데일이 고민에 빠져 있자, 옆에서 엿듣던 선원 하나가 의견을 냈다.

"미끼로 유인하면 어떨까요?"

"미끼?"

"낚시를 생각해보십시오. 떡밥이든 미끼든 뿌려놔야, 물고기가 다가오지 않겠습니까?"

"오오."

"막내야 너 완전 똑똑한데?"

"역시 막내!"

"헤헤. 제가 선배님들이랑 달리 조금 똑똑하지 않습니까. 이 정도는 당연하죠."

고개를 끄덕인 데일이 물었다.

"그러면 그 미끼는 누가 하지?"

"그거야...."

선원들의 시선이 막내 선원에게 집중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돛대의 꼭대기에 막내 선원이 칭칭 묶여 소리쳤다.

"살려주세요오오오!!"

항해

* * *

"살려주세요오오오!!!"

막내 선원은 으스대며 입을 놀린 대가를 치렀다.

돛대에 묶여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제법 처량해보였다.

하지만 다른 선원들은 낄낄 웃을 뿐이었다.

"저저 막내 녀석. 아직 육지 물이 덜 빠져서 건방졌었는데, 마침 잘됐네."

"저 정도로 되겠습니까? 저 때는 신고식이라고 다리에 밧줄을 묶어서 바다에 담가 놨었는데...."

다만.

그렇게 미끼를 내걸렸지만, 성과는 영 시원치 않았다.

"흠. 입질이 안 오네요."

"이제 내려주세요오오오!!"

"벌써 내리기에는 좀 그렇고... 혹시 미끼가 부족한 거 아닐까요?"

"그럼 누굴 또 매달 건데."

"아?"

그 다음 막내와 데일이 데려온 도적 떼가 돛대에 매달렸다.

돛대는 마치 과실 나무에 열매가 열리듯, 사람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비명을 질러댔다.

선원들은 왜인지 뿌듯한 얼굴로 돛대를 올려다보았다.

그 옆에서 미묘한 표정을 짓던 데일이 선장에게 물었다.

"엘드리엄까지는 얼마나 걸릴 것 같소."

"으음. 엘드리엄으로 바로 연결되는 항구는 없고. 좀 더 북쪽으로 가면 작은 선착장이 있는 거로 압니다. 일주일 정도 더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일주일이라."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다.

데일은 느긋이 기다리기로 했다.

저렇게 눈에 띄는 미끼를 내걸었으니, 산자를 질투하는 언데드라면 반드시 찾아오지 않겠는가?

* * *

엿새가 지났다.

그리고 유령선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데일은 슬슬 유령선에 대한 게 헛소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괴물이랑 마법이 진짜 있는 세상이니까, 그만큼 헛소문도 더 많이 돌아다니겠지.'

달리 생각하면, 소문 자체는 사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언데드라고 영원한 시간을 사는 건 아니다.

극단적인 가정으로. 앞서 만났던 크라켄과 싸우다 유령선이 격침되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죽여줘...."

돛대에 묶인 이들도 초주검이 되어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데일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보름달이 떠 있다.

찬 바람이 거칠게 부는 바다.

이따금 떠내려오는 얼음 조각.

맑은 하늘과 은은한 달빛.

데일은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 먹물 같은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밤바다에는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기묘한 마력이 있다.

모든 게 다 허무하게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유령선이고, 황혼이고, 모든 여정을 끝마칠 싸움이고.

모두 그저 그런 일처럼 느껴졌다.

이래서 뱃사람들이 밤바다를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지 말라고 경고하곤 하나 보다.

바다에서 시선을 뗀 데일은 부질없음을 느끼며 선장에게 말했다.

"저들을 내려주시오. 육지에 닿기 전까지는 쉬게 해주고."

"예? 아직 유령선은 나타나지도 않지 않았습니까?"

"아무래도 놈들은 나타날 생각이 없는 것 같소. 당장 내일이면 항해 끝 아니오."

"그건 그렇지만...."

루브릭은 못내 아쉬운 기색을 내비쳤다.

그가 위험한 북쪽 항해에 기꺼이 나선 건, 데일이 가증스러운 유령선을 소탕해주겠노라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아쉽다 해도 어쩔 수 없는 문제다.

루브릭은 선원들을 시켜, 불쌍한 막내와 도적들을 내려주려 했다.

하지만 그때.

눈이 게게 풀린 막내 선원이 중얼거렸다.

"온다... 온다고...."

처음에는 정신이 나간 막내가 헛소리를 지껄인다 생각했다.

선원들은 막내를 내려주려 했다.

하지만 막내 선원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온다고 이 새끼들아!!"

그제야 사람들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그리고 발견하고 말았다.

형광색에 가까운 녹색 빛에 둘러싸여, 이쪽을 향해 맹렬히 돌진하는 유령선을.

"아아!"

"지, 진짜 나타났어!"

유령선은 지금 일행이 타고 있는 바다새 호의 절반 정도 크기를 한 범선이었다.

갑판을 이루는 나무는 썩어 군데군데 구멍이 뚫렸고, 돛은 죄다 찢어져 넝마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하늘을 날아다니는 유령선은 그런 것 따위는 아무 문제가 안 된다는 듯.

무시무시한 속도로 이쪽을 향해 가까워졌다.

게다가. 유령선은 한 척이 아니었다.

"3척?"

"유령선이 아니었어! 유령선단이었어!!"

"무슨. 그사이에 배를 두 척 더 건조했다고?"

"건조한 게 아니라 약탈한 거겠지!"

패닉에 빠진 선원들이 자리에 주저 낮고, 얼굴을 자루 안에 파묻고, 실의에 빠져 술만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사이에도 유령선은 너무나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유령선에서 골을 울리는 음산한 목소리가 퍼져나왔다.

"이히히히!"

"몸을 빼앗고 싶어!"

3척의 유렁선에서 순간,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데일은 눈을 찌푸리며 하늘을 살폈고 유령선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아챘다.

'밴쉬?'

밴쉬.

대륙에서는 흔히 보기 힘든, 영체 언데드 아가씨들.

하늘로 솟구친 밴쉬 무리는 그대로 아래로 급강하.

패닉에 빠져 있던 선원들과 진한 입맞춤을 나누었고... 그 몸을 빼앗았다.

"히히!"

"이 몸은 이제 내 거야!"

"레이그! 갑자기 왜 이래... 컥!"

몸에 밴쉬가 들어와 눈빛이 변한 선원이 검을 붕붕 휘둘러댔다.

갑작스러운 동료의 배신에 선원들이 혼비백산했다.

하늘에서는 아직 빼앗을 몸을 찾지 못한 밴쉬가 붕붕 날아다니며 귀곡성을 터트렸고, 그 찢어지는 듯한 비명에 데일이 데려온 병사들이 바닥을 뒹굴었다.

어느 눈치 없는 밴쉬 하나도 선원의 몸을 빼앗아 데일에게 달려왔다.

"이 잘생긴 기사님은 누구실까!"

데일은 검을 내지르려다가 말았다.

그랬다가는 애꿎은 선원까지 죽을 것이다.

대신. 데일은 가볍게 손을 휘둘러 선원의 따귀를 때렸다.

쾅!

물론. 데일의 기준으로 가볍다는 뜻이었다.

"꺄아아악!"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날아간 선원이 바닥을 뒹굴었고, 선원의 몸에서 밴쉬가 튕겨 나왔다가, 다시 선원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고 데일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군. 빼앗은 몸이 큰 충격을 받으면 잠깐이지만 튕겨나오는 구조인가? 그리고 몸에 빙의되어 있을 때는 고통을 느끼는 것 같고."

"너! 너! 너어...!"

"뭐."

"...."

슬쩍 눈치를 살핀 밴쉬가 하늘로 솟구쳤다.

"큰언니를 데려올 테니, 두고 보자!!"

데일에게 당한 밴쉬가 선박으로 돌아가자, 이어서 저 유령선의 선장으로 보이는 밴쉬로 보이는 자가 나타났다.

밴쉬 선장은 괜스레 인사하거나 말을 거는 대신.

다짜고짜 지상을 향해 푸른 불꽃을 날려대기 시작했다.

"죽어라! 죽어!"

느릿하게 날아온 불꽃은 범선과 직격하자, 그대로 사방팔방에 불티를 휘날렸고.

마법적인 불꽃은 순식간에 갑판 이곳저곳에 불을 옮겨 붙었다.

안 그래도 아수라장이던 전장이 더욱 혼란에 휩싸였다.

"엄폐물 뒤로 숨어!"

"화살! 화살로 응사해!"

"대포는!"

"하늘에 날아다니는 걸 대포로 어떻게 맞춰!"

그 말대로.

바다새 호에는 대포가 몇 문 있었지만, 각도 탓에 공중에 떠다니는 유령선을 노릴 수가 없었다.

애초에 저렇게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는 목표물을 맞추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고.

주위가 순식간에 혼란에 빠지자, 루브릭이 데일에게 매달렸다.

"겨, 경! 어떻게 좀 해주십시오! 이대로는 다 죽게 생겼습니다!"

"대포 탄환이 어딨지?"

"예? 저기 있습니다만."

루브릭은 갑판 한켠에 덩그러니 놓인 바구니를 가리켰다.

바구니에는 사람 머리통만 한 쇠공이 담겨 있었다.

데일은 쇠공 중 하나를 들었다.

그 무게를 가늠했다.

'별로 무겁지도 않군.'

데일은 양손으로 포탄을 들고 한 바퀴를 빙글 돈 뒤, 그대로 유령선을 향해 손을 놓았다.

쐐애애액!

포탄이 공기를 가르며 하늘로 솟구쳤다.

궤적이 정확하다.

원래대로라면 유령선을 그대로 부숴버렸을 공격.

하지만.

"빗나갔다?"

포탄이 그대로 유령선을 통과해버렸다.

마치 그곳에 있는 건 신기루인 것처럼.

'밴쉬는 그렇다쳐도. 배도 통과해버리다니. 정말로 유령선인 건가?'

"깔깔깔! 무식한 놈! 그런 공격이 통할 것 같아?"

얄밉게 웃어보인 밴쉬 선장은 무어라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유령선을 감싸고 있던 녹빛이 한순간 사라지고.

갑판 위에 대기하고 있던 스켈레톤 궁수들이 머리를 내밀었다.

후두둑!

그들은 기계적이 움직임으로 지상에 화살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데일은 화살비를 갑옷으로 튕겨내며 다시 한번 포탄을 던졌다.

하지만 밴쉬가 다시 한번 주문을 외우자, 유령선이 녹빛에 둘러싸였다.

포탄은 다시 유령선을 뚫고 지나갔다.

"아 그래. 재미없는 짓을 하는군."

데일은 고민했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해야 저 유령 여자를 잘 요리했다고 소문이 날까.

마검을 투척할까?

확실히 효과적일 것이다.

영체라는 건 물리적인 공격에 무적이라는 뜻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일단 때릴 수만 있다면 쉽게 굴복시킬 수 있다.

하지만.

'안 돼.'

마검에 닿았다가는 저 밴쉬가 소멸해버릴 수 있다.

그래서는 안 된다.

데일은 애초에 저들의 힘을 사용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닌가.

'영혼 지배? 새벽 안개? 둘 다 거리가 너무 멀어.'

방법이 필요하다.

저 하늘에 떠다니는 밴쉬를 지상으로 떨어트릴 방법이.

지금도 선원들은 비명을 질러댔지만, 데일은 침착하게 생각을 거듭했다.

생각하다보면, 분명 좋은 수가 있을 것이다.

밴쉬를 죽이지 않으면서 아래로 끌어내릴 방법이.

그리고 그때.

데일은 조금 전에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데일이 선원의 뺨을 때리자, 밴쉬가 튕겨나왔다가, 다시 빨려들어가던 광경을.

'혹시 다른 몸에 무의식적으로 들어가려는 성질이 있는 거 아닐까? 애초에 몸 없이 영혼만이 이 세상에 남아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니까. 마침 기절한 상대면 저항도 없을 테고.'

마치 마른걸레가 물을 흡수하듯.

소라게가 빈 껍질을 찾아 들어가듯.

몸이 없는 밴쉬도 다른 몸을 찾아들어가려는 게 본능 아닐까?

시험해볼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아이고 데일 경! 저희 좀 살려주십시오!"

"...."

"데일 경?"

"잠시 주무시오."

데일은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징징거리던 루브릭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억! 하는 소리와 함께 루브릭이 의식을 잃었다.

데일은 루브릭을 붙잡고는 곧장 밴쉬를 향해 집어 던졌다.

"꺄하하! 아무리 던져봐야 아무 소용... 어?"

마구 비웃던 밴쉬가 당황했다.

기껏해야 포탄이나 날아올 줄 알았더니, 웬 시커먼 남정네가 날아오는 게 아닌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밴쉬는 굳어버렸고, 루브릭이 그대로 밴쉬의 몸을 지나쳤다.

그리고 밴쉬는... 어느새 루브릭의 몸 안에 빨려 들어가 있었다.

데일의 예상이 정확히 들어맞은 셈.

"어어!"

밴쉬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어느새 동화 속 공주님처럼 다소곳하게 데일에게 안겨 있었다.

"이제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라."

"어머."

데일의 뜨거운 시선에 밴쉬는 볼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고....

데일은 곧장 손을 놓았다.

솔직히. 루브릭의 모습으로 얼굴을 붉히며 몸을 배배 꼬는 모습을 보기 역겨웠다.

* * *

다행히 밴쉬 선장은 아주 멍청하지 않았다.

유령 선단을 이끄는 선장이 바짝 바닥에 엎드렸다.

"부, 부디. 목숨만은 살려줘."

그러자 휘하 밴쉬들도 일제히 바닥에 엎드렸다.

"살려주세요!"

데일은 상대의 모습을 살폈다.

흰 원피스를 입은 긴 장발의 여인.

외모는 제법 아름다워 죄 없는 선원을 홀리기에 충분했지만, 그 동공 없는 눈동자에서는 무시 못 할 힘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밴쉬 무리를 이끌고 있다고?"

"롬의 딸 야가브야. 자매들을 이끌고 있고. 유령선의 선장이지."

이건 여러모로 예상외였다.

유령선의 선장이래서 기껏해야 리치 정도를 생각했는데.

밴쉬라.

밴쉬는 게임에서도 쉬이 볼 수 없는 종류의 언데드였다.

데일은 흥미를 보였다.

"그래. 어디서 이 많은 밴쉬들을 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놈들을 이끌고 배를 습격하고 다닌 이유가 뭐지?"

"무시받지 않기 위해서."

"뭐?"

야가브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우리 밴쉬 자매들은 늘 차별받아 왔어! 인간들에게는 유령이라고 공격받고, 같은 언데드에게는 신체도 없는 년들이라면서 무시 받았지!"

데일은 속으로 '맞는 말 아닌가?'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야가브는 열변을 토했다.

"우리가 왜 무시당할까! 그건 우리가 약하기 때문이지. 그러니 결심한 거야! 힘을 얻기로!"

"그래서 애꿎은 사람들을 습격하고 다녔나?"

"그래! 배를 습격해! 유령선을 늘려서 어... 대충 50대가 넘어가는 대함대를 이끌고 다니면, 그 누가 우리를 무시하겠어? 우릴 날파리 취급하던 언데드들도 우릴 다시 볼 거야."

인정받고 싶다.

무시받기 싫다.

뭐랄까. 어찌 보면 평범한 욕구로 일을 벌이는 것 같은데, 목표 자체는 꽤나 거창하다.

데일이 물었다.

"유령선을 3척이나 부리는데, 원래는 1척이었겠지?"

"그럼! 이 1척을 구하는 것도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러면 3척으로 늘리는 데에 얼마나 걸렸지?"

"70하고도 7년이 더 걸렸지 아마?"

"...그럼 50척까지 늘리려면 수백 년이 걸리겠군."

야가브는 야망이 깃든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괜찮아. 언제나 시간은 밴쉬의 편이니! 스켈레톤이든, 구울이든. 신체가 있는 언데드는 언젠가 시간의 흐름에 닳아 없어지지만, 우리는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사라질 일이 없어!"

"흐음."

이 밴쉬. 꽤나 호탕한 구석이 있다.

리치인 무르하탈이 좀 더 음험하고, 책사에 가깝다면, 이쪽은 정렬적인 야망가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물론, 실체는 죄 없는 선원들을 습격하던 해적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데일이 주목한 건 다른 부분이다.

"흐음...."

야가브의 말을 곰곰이 되짚은 데일이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네 말은, 시간이랑 재원만 충분하다면, 날아다니는 함선 50척을 만들 수 있다는 건가?"

항해

* * *

밴쉬 야가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당장은 힘들겠지. 하지만 시간만 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50척의 유령선이라...."

하늘을 날아다니는 전력은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다.

공중에서 흩뿌려지는 공격은 군대의 사기를 꺾어놓기 마련이니.

그것뿐만 아니라, 데일은 이 유령선이라는 이동 수단에도 관심이 있었다.

빠르게 하늘을 날아다닌다면, 대자연의 장벽들과 적 세력을 무시하고 대륙 각지를 다닐 수 있다.

시간이 부족한 데일에게 큰 힘이 되어주는 것이다.

게다가.

'어쩌면 황제와 접촉할 수 있을지도.'

공중에 날아다니는 이레네에 당최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 고민이었으니, 그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황제랑 접촉할 수 있을지 말지. 접촉하는 게 이득일지 아닐지는 아직 미지의 영역이다.

하지만 선택지가 하나 더 늘어난 것만으로도 의미는 있었다.

내친김에 데일은 계속 질문을 던졌다.

"이 유령선이 하늘을 나는 원리도 좀 궁금한데."

"음! 그걸 말해주는 건 어려울 것 없지."

이곳은 일종의 협상 자리다.

야가브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데일의 아래로 들어가 협력하거나, 데일에게 소멸당하거나.

당연히 야가브는 전자를 택했다.

그리고 기왕 이렇게 된 거, 자기 쓸모를 최대한 부풀리기로 했다.

쓸모가 많을수록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 테니.

"우리는 부유 마법을 사용했다. 부유 마법이 뭔지 알지?"

"알다마다. 황제가 도시를 띄워올릴 때 사용한 마법 아닌가."

"뭣. 황제가 뭘 띄워?"

처음 들어보는 소식에 야가브의 눈이 땡그래졌다.

그야 쉽게 믿기 힘든 얘기긴 했다.

"그보다 너희는 밴쉬가 아닌가. 마력을 담아둘 신체도 없는데, 어떻게 마법을 쓰는 거지? 아니. 애초에 흑마법을 사용하면서 일반 마법도 사용할 수 있는 건가?"

"마력은 영혼과 정신과 관련된 힘이지. 육신이 없어도 그릇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알아낸다면, 어려울 것도 없어."

"마법과 흑마법은?"

"애초에 마법과 흑마법은 상극이 아니야. 오히려 흡사한 부분이 많지. 단지 두 가지를 다 다룰 만한 재능과 시간이 있는 이가 드물 뿐이야."

그리고 언데드에게 시간은 넉넉하다.

재능과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고. 야가브는 말했다.

"결국은 의지의 문제야. 상극이라 할 수 있는 밤의 신성과 빛의 신성도, 잘만 하면 동시에 다룰 수 있을걸? 어마어마한 반발에 몸이 펑! 터져나가겠지만."

"두 가지 기적을 동시에 다룬다는 소린가?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군."

데일은 야가브에 대한 신뢰도를 한 단계 낮췄다.

그런 데일의 낌새를 눈치챘는지, 야가브는 멋쩍게 웃었다.

"히히. 어디까지나 이론상 가능하다는 소리야. 애초에 두 신이 다른 신의 신도에게 신성을 왜 내려주겠어. 의미 없는 가정이지."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이 밴쉬가 마법과 흑마법에 모두 조예가 있다는 건 대충 알았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어?"

"썩어도 범선인데, 이 무거운 배를 하늘로 들어서 날아다니려면 어마어마한 마력이 필요해. 심지어 배 위에는 스켈레톤들도 타고 있지. 그걸 해낼 정도로 무식하게 마력이 많았다면, 나랑 싸울 때 좀 더 고전했겠지."

"흐음."

야가브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냥 무식한 기사인 줄 알았더니, 제법 마법적인 조예가 있었다.

옳은 지적이다.

단순히 비행 마법으로 무거운 걸 들어 올리려면 그에 걸맞는 대가가 필요하다.

황제가 이레네를 공중에 들어올리는 희대의 업적을 달성할 수 있었던 건 그에게 마탑이 있었기 때문이다.

"꼼수를 좀 부렸어. 영체화라고 들어봤어?"

"흑마법이군."

영체화.

대상의 육체를 물질계와 정신계의 중간 틈새로 날려 버리는... 뭐 대충 그런 거창한 설명의 기술이었던 거로 데일은 기억하고 있다.

중요한 건 몸이 현실에서 벗어나고. 자연스레 무게도 사라져버린다는 것.

야가브는 기껏해야 적 공격을 회피할 때 쓰는 기술을 훌륭히 응용해낸 것이다.

"과연. 이 세상에 실체가 없는 배가 둥둥 떠다니는 거니까, 정말로 유령선이군."

"하하! 마음대로 날아다니다가 전투에 들어가면 영체화를 풀면 되니, 마력을 아낄 수 있지!"

물론. 영체화에도 단점은 몇 가지가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못 쓰잖아."

"못 쓴다기보다는 마력이 압도적으로 많이 들지. 그래서 죄다 우리 같은 밴쉬나 스켈레톤으로 데리고 다니잖아?"

결국.

유령선 함대를 만들어놔도 사람들을 수송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언데드 수송용으로는 분명 의미가 있다.

그리고 데일 휘하 병력의 절반은 언데드였다.

데일은 야가브의 쓸모를 인정했다.

"좋아 그럼. 한동안 내 밑에서 일해줘야겠다."

"뭐. 싸움에서 패배했으니 복종하는 것도 당연한 거지. 그게 언데드의 방식이고."

언데드는 위계질서가 강하다.

"다만. 우리한테도 무언가 보상이 있어야 좀 더 열과 성을 다할 수 있지 않을까?"

매끄럽게 혀를 굴려, 어떻게든 무언가 하나라도 받아내려는 태도에 데일은 피식 웃었다.

나쁘지 않다.

의욕 있는 부하도 필요한 법이다.

무르하탈과는 다른 방식으로 데일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나랑 같이 다니다 보면, 너와 밴쉬들이 무시당할 일은 없을 것이다. 약속하지."

누가 감히 데일의 부하들을 무시하겠는가.

그건 곧 데일을 무시한다는 것과도 같은데.

"이 정도면 충분한가?"

야가브는 매력적인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 * *

밴쉬 자매들의 합류가 결정되고.

데일이 가장 먼저 한 건 자매의 병력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함선이 3대. 각 함선에는 스켈레톤과 밴쉬가 각각 30여 기씩.

밴쉬는 몰라도, 스켈레톤은 당장 그렇게 큰 전력은 아니다.

유령 선단에 강력한 화력을 기대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다만. 그 기동성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데일은 유령선에 올라 야가브의 방식에 익숙해지려 했다.

우선은 영체화부터.

"영체화를 걸 거야. 어. 솔직히 자신 없는데, 그래도 열심히는 해볼게."

"실패하면 어떻게 되지?"

"음. 영원히 차원의 틈새에 부유하던가, 몸과 영혼이 분리되어버리는 사소한 일들이 벌어지는 정도?"

"별로 사소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럼 간다! 되도록 마음 편하게 먹어. 그쪽 영혼은 특이해서, 우리 마법이 먹히지 않을 것 같단 말이야."

고개를 끄덕인 데일은 눈을 감고 자리에 앉았다.

밴쉬들이 데일을 둘러싸 구문 구결을 외우기 시작했다.

마력이 데일의 몸속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몸 안에 흐르는 밤의 신성과 마력이 저절로 방어하려 했지만, 데일은 최대한 몸을 가라앉혔다.

다음 순간. 머리가 짜르르 울렸다.

데일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몸은 반투명했고, 초록색 빛에 둘러싸여 있었다.

"대충 성공한 것 같군."

"■■■■!"

"■■?"

"■■■■■."

밴쉬들이 무어라 입을 뻐끔거렸지만, 목소리가 전달되는 일은 없었다.

이 차원의 틈새인지 뭔지에서는 바깥의 소리가 차단되었고, 시야도 뿌연 노이즈가 낀 것처럼 흐릿했다.

'그래. 완벽한 기술이 어딨겠어.'

다소 아쉬운 점이었다.

하지만 이게 어디인가.

'잠깐. 저놈들이 마음만 먹으면 날 계속 이 상태로 가둬둘 수 있는 건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자력으로 탈출할 방법도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보통 이런 경우.

무식한 방법이 대개 정답인 경우가 많았다.

데일은 마력을 잔뜩 끌어다가 새벽안개를 전개했다.

주위에 안개가 뻗어나가자, 데일을 감싼 초록빛이 크게 일렁였다.

그러다 일순.

공간이 찢어지며 데일이 다시 밖으로 나왔다.

"꺄아악!"

"아악!"

밴쉬들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리고 원망스럽게 외쳤다.

"뭐 하는 거야! 강제로 마법이 취소되었잖아."

"어떻게 하면 나올 수 있을지 시험해봤다."

"...다음에는 그냥 손을 흔들어. 얼마든지 꺼내줄 테니."

사소한 해프닝은 있었지만, 데일 역시 영체화된 상태로 이 유령선과 함께 날아오를 수 있다는 걸 확인했다.

"우리도 흑기사를 영체화한 건 처음이야. 네 신체랑 영혼이 너무 강해서, 마력이 엄청 들었어. 그나마 반언데드라 이 정도였지."

"좋아. 그럼 나는 일단 바다새호로 내려오겠다. 알아서 따라와."

"어디로 간다 했지?"

"엘드리엄."

"호호! 자매들아! 우리는 이제 엘드리엄을 함락하러 간다!"

""예 언니!!!""

"그런 거 아니야."

어쨌든. 밴쉬 자매는 오랜만에 육지로 간다는 사실에 들뜬 모양이다.

그녀들이 바다 위를 방랑한 건, 절대 바다를 좋아해서가 아니었으니까.

"음. 유령선을 위에 두고 항해해보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군."

"그러게요 선장."

"근데 밴쉬들 엄청 이쁘던데. 한번 꼬셔볼까요?"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루브릭은 떨떠름한 기색으로 배를 몰았고, 다음날. 육지가 보이는 곳까지 다다랐다.

"저기 선착장이 보이십니까? 배를 내려드릴 테니 저곳까지 노를 저어 가시면 됩니다."

작은 선착장이다.

이런 커다란 범선이 접근하기는 힘들었다.

루브릭은 배를 두어 척 내려주었다.

데일을 따라온 도적과 병사들은 몇 차례 노를 저으며 왔다 갔다 해야 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데일이 선장에게 악수를 건넸다.

"도와줘서 고맙소. 위험한 부탁이었는데 말이오."

"으하하! 세상이 어지럽지 않습니까! 유령선을 처리하는 것도 보고 재밌었습니다."

"그리 말해줘서 고맙소."

"저. 그. 정말 고맙습니까?"

"?"

"그럼 땀 닦은 수건 하나만 더...."

"...."

데일은 배를 타고 육지에 도착했고, 선원은 다시 노를 저어 범선으로 돌아갔다.

바다새호는 천천히 저 수평선 너머로 멀어져갔다.

데일은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도착한 선착장은 작고 초라한 곳이었다.

부서진 어선 몇 척이 바닥을 굴러다녔다.

'사용 안 한 지 오래됐군.'

버려진 곳일까?

아무래도 엘드리엄에서도 북쪽으로 치우진 오지인지라, 사람들이 다 떠난 듯하다.

아직 여름인지라 북쪽 지방은 적절히 시원했다.

"가자. 엘드리엄까지 가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해."

"옙!"

"저기 마을이 보이는데. 약탈할까?"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야가브는 시야가 넓었다.

육지에 상륙한 야가브와 자매들은 묘하게 들뜬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어댔다.

아니면 그냥 약탈이 좋던가.

"약탈은 무슨. 근데 마을이 있다고?"

"집이 몇 채 보이는데? 작은 마을인 것 같아!"

"사람은?"

"사람은 안 보여!"

데일은 야가브가 가리킨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언덕을 두어 개 넘자, 그녀의 말대로 마을이 하나 나왔다.

데일에게도 익숙한 마을이었다.

"...그래. 이 근처였지."

선배 흑기사였던 케인.

그가 이성을 잃고서도 돌아오고 싶어 했던 고향.

언데드를 이끌고 북부를 쑥대밭으로 만들던 케인은 좀처럼 잊히지 않는 사내였다.

지금도 가끔 꿈을 꾸면 생각나곤 한다.

왤까.

그가 흑기사를 가리키는 별명인 '살육 기계'에 걸맞는 무위와 힘을 보여준 것 때문일까?

데일이 케인에게서 흑기사로서 싸우는 법이나 기술들을 배웠기 때문일까.

'그것도 있지만....'

남 일 같지 않았다.

자아와 이성을 잃고 날뛰는 것도 그렇고, 죽을 때까지 싸우다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나,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방황하던 모습 모두 데일에게는 타인의 일이 아니었다.

선배 흑기사는 데일의 미래였고, 데일은 그런 미래를 원치 않았다.

데일은 익숙한 집의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케인이 그토록 돌아오고 싶었던. 그리고 최후를 맞이했던 장소다.

케인의 시체는 없었다.

유달리 따뜻했던 저번 여름. 이 차디찬 북부에서도 시체는 썩어 없어졌다.

데일은 텅 비어버린 집안을 둘러보며 케인의 최후를 떠올렸다.

부릅뜬 눈으로 데일에게 제국의 위험을 경고하던 그 모습을.

그의 경고는 실현되었다.

제국은 무너졌고 세상은 혼란에 빠졌다.

케인은 마지막에 어떤 심정이었을까?

자기가 치른 죄에 대한 죄악감?

제국의 미래에 대한 불안?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케인이 결국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점이다.

그것 하나만큼은 만족했을 것이다.

"뭐 있어?"

밴쉬 야가브가 벽을 통과하며 물었다.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데일은 집 문을 닫은 뒤, 다시 한번 다짐했다.

그는 케인처럼은 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그러니... 마음을 단단히 간수해야 할 것이다.

내면의 늑대가 다른 늑대를 잡아먹지 않게.

"...."

마지막으로 마을을 뒤돌아본 데일은 무심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도적과 병사, 유령선이 뒤따랐다.

'얄궂군.'

데일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한때 케인이 언데드 군대를 몰고 다니던 장소에서 똑같이 언데드를 데리고 다니는 자신의 상황이 꽤나 우스꽝스러웠다.

물론.

이 근방 주민들은 '검은 사신'이 부활했다면서 공포에 떨 테지만 말이다.

괜스레 겁을 주지 않으려면 어서 빨리 이동하는 게 낫다.

엘드리엄이 머지않았다.

그곳에서 데일은 에스델을 만날 것이다.

대주교 에스델

* * *

지금 대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을 꼽으려면 단연 황혼일 것이다.

세상에 갑작스럽게 뚝 떨어진 이 괴물은 악마를 굴복시키고, 이레네를 무너트렸으며, 하늘의 신들을 떨어트리기 위해 쉼 없이 달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황혼 외의 인물 중 가장 영향력이 강한 이는 누구일까?

황제?

군단장?

아니었다.

"에스델 성하. 동쪽에서 올라온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성하(聖下).

에스델은 그 호칭이 낯설었다.

온 교단의 지도자라 할 수 있는 대주교에게나 붙는 호칭 아닌가.

인간 중 가장 거룩하고 경건한 인물.

그게 지금의 에스델이었다.

"후우."

에스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모든 원흉은 오르단이었다.

이레네가 무너질 당시.

오르단은 성기사와 실력 있는 사제들에게 성 밖의 교도들을 지켜달라 부탁했고, 그들은 용맹히 성 밖을 나섰다가 황혼의 군세에 휩쓸렸다.

그사이.

오르단은 미리 준비한 대로 거사를 치렀다.

미리 준비한 동지들과 칼을 빼들었고, 교단의 모든 사제를 살해했다.

고위급 사제가 떼 몰살을 당했고, 그 안에는 주교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행히 데일이 개입해 오르단을 막아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고급 인력을 대부분 잃어버린 교단은 혼란에 휩싸였다.

황혼을 향해 일사불란하게 반격해야 할 교도들은 우왕좌왕했고, 타지에 나가 있던 하급 사제들은 어쩔 줄 몰라 눈치나 살폈다.

누군가가 그들을 규합해야 했다.

그리고 그럴만한 사람은... 에스델이 유일했다.

에스델은 팔에 걸린 성물을 쓰다듬었다.

신성이 무한하게 솟아나는 강력한 성물.

이 성물은 그 자체로 에스델이 신에게 선택받았다는 증거가 되었으며, 강한 권위가 되었다.

대주교.

성녀.

마지막 희망.

무엇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에스델은 그 칭호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녀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이곳 엘드리엄으로 점점 더 많은 교도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임무에 나섰던 성기사 엘리 경이 돌아왔습니다. 즉시 전선에 투입할 수 있을 겁니다."

"약탈당했던 성물을 되찾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영웅들의 자취를 찾는 일은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에스델은 끝없이 밀려드는 보고를 들었다.

엘드리엄을 선택한 건 탁월한 결정이었다.

그녀는 이곳을 새로운 신앙의 중심지로 삼을 생각이다.

황혼이 교단을 무너트리려는 지금. 신앙인들이 모여들 구심점은 중요하다.

서쪽은 너무 고립되어 있다.

남쪽은 낙후되었고, 동쪽은 너무 혼란스럽다.

수비에도 적합한 이곳 북부가 사람들을 끌어모으기에는 제격이었다.

흩어졌던 교도들이 엘드리엄으로 몰려들었다.

개중에 전투 능력이 있는 성기사나 사제는 곧장 병력으로 활용했다.

에스델은 그 병력을 활용해 엘드리엄의 성주와 협력해 이곳 북부 일대의 치안을 필사적으로 유지했다.

덕분에 북부는 다른 어느 곳보다 황혼의 세력이 약했다.

하지만 순조롭기만 한 건 아니었다.

"황혼이 점점 더 탑을 쌓아나가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너무 늦어 버릴 겁니다. 머지않아 힘을 모아 치고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전쟁이 벌어지겠군요. 많은 사람이 죽을 거예요."

"성하. 대륙의 모든 인간들이 죽는 한이 있어도 저지해야 합니다. 부디 사사로운 일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목숨이 사사롭다니.

에스델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럴 때마다 에스델은 끔찍한 책임감과 중압감에 짓눌렸다.

공격 명령을 하는 건 좋다.

하지만 병사들이 죽으면 그 누가 책임져 주나.

그 병사들의 가족이나 친지들은?

신이 돌봐주실까?

정말로?

참으로 불경스러운 생각이 머리를 가득 메웠다.

아무래도 오르단이 에스델의 마음속에 심어놓은 못된 씨앗이, 제멋대로 발아해버리고 만 모양이다.

에스델이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결국은 이레네로 밀고 내려가야 해요. 하켄 사령관이 어서 악마의 군세를 깨트려주길 바라야겠군요."

"예...."

"형제님들. 이만 모두 나가주세요."

누가 감히 대주교의 말에 반대할까.

엄숙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인 사제들이 자리를 떴다.

누구 하나 살갑게 웃으면서 인사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가볍게 농담이라도 건네주면 좋으련만.

살갑게 식사 권유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이 자리에 오른 뒤로 사람들은 두 가지 표정만을 지었다. 딱딱하거나, 절박하거나.

에스델은 그게 싫었다.

"푸흡. 사령관 하켄이라니."

그래도 하켄의 이름을 들으니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얼빠진 용병이 모두의 칭송을 받고 있다니.

편지를 통해 내막을 전해들은 에스델은 어이가 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하켄에 대해 생각하노라면 이레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게 된다.

자기를 친언니처럼 따르던 엘레나나, 요리 솜씨가 좋았던 카일라.

그리고.

"데일 경."

에스델의 눈가가 젖어 들었다.

그에게 많은 걸 가르쳐준 흑기사는 이제 없다.

하켄은 반드시 살아있노라 여겼지만, 데일은 틀림없이 죽었다.

그리고 에스델은 많은 걸 깨달았다.

그토록 강건해 보이던 데일 역시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한 사람의 인간이었음을.

에스델이 데일에게 참으로 많이 기대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데일이 사라진 마음속 빈자리가 생각보다 더 시리다는 것을.

에스델은 눈을 질끈 감고 마음을 다스렸다.

이미 1년이 더 넘었건만.

이렇게 가끔 찌르르 가슴을 울리곤 헸다.

에스델은 눈가를 감췄다.

주저앉고는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약한 모습도 보여선 안 된다.

그녀밖에 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다.

데일이 지키려던 모든 것들을 에스델이 지켜야 한다. 그의 의지를 그녀가 계승해야 한다.

하지만 에스델은 약하다.

더더욱 강해져야 한다.

에스델은 품에서 검을 꺼냈다.

바이만의 보물고에서 받아온 투박한 모양의 검.

본디 검집에서 빠져나오지 않던 검은 데일이 죽고 얼마 후. 너무나 손쉽게 검집에서 흘러나왔다.

마치 '네 마음이 문제였다.'라고 말하듯.

에스델은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예리한 기세를 눈에 담은 뒤,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이제 곧 모든 걸 건 대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그곳에서 대륙의 최후가 결정나겠지.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을까.

에스델이 조금이라도 더 강해진다면, 한 명이라도 더 많이 살릴 수 있을까?

그렇게 에스델이 막막한 답답함에 감싸여 있을 때 돌연.

사제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크, 크, 큰일났습니다 성하!"

"진정하세요. 무슨 일이죠?"

"검은 사신. 검은 사신이 부활해 유령선단을 부리며 이곳을 향해 진격하고 있습니다!"

"...검은 사신?"

언데드 군세를 이끌며 온 북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흑기사의 별명.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데일과 호각으로 싸우던 그 흑기사의 모습이 여전히 선명하다.

에스델은 엘드리엄 성주와 다른 군사 참모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급히 향했다.

"성하. 오셨습니까."

"검은 사신이라니. 무슨 소립니까 그게. 검은 사신은 죽었지 않습니까."

검은 사신과의 전투에 에스델뿐만 아니라 엘드리엄 성주도 참전하지 않았던가.

그곳에서 성주는 오른팔을 잃기도 했고.

"정찰병들의 보고일 뿐입니다. 엘드리엄에서 하루 거리에서 흑기사가 언데드를 이끌고 오는 게 목격되었다는군요."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야 알아차리다니. 대체 무슨...."

"면목이 없습니다. 놈이 워낙 예상치 못한 경로로 왔던지라."

검은 사신 토벌 이후.

성주는 용뼈 산맥 인근에 여러 초소를 두어 비슷한 일이 재발하지 않게 방지했다.

문제는 저 흑기사가 나타난 장소다.

"북쪽 바다 쪽으로 왔더군요."

"...그게 말이 됩니까?"

"글쎄. 저도 이해는 잘 안 가지만, 어쨌건 사실은 사실입니다."

해양 몬스터가 육지로 올라오는 경우는 몹시 드물다.

그렇기에 바다 쪽에는 그다지 감시의 눈길을 두지 않았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얻어맞을 줄이야.

"그들의 병력은 어느 정도인가요? 그때처럼 수천의 언데드를 부리고 있나요?"

"음. 아직 정확한 보고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늘을 날아다니는 배 3척을 거동하고 다닌다는군요."

"쯧!"

"배가 3척이라니."

"이곳도 위험한 거 아닌가?"

참모들은 하늘을 나는 배에 대해 웅성거렸다.

아무리 높고 단단한 성벽이라도 거뜬히 넘어버리는 거 아닌가?

언데드 놈들이 작정한다면 이 북부 일대에 다시 한번 끔찍한 혼란에 휩싸일 것이다.

"일단 배를 요격할 수 있는 마법사들을 집결시켰습니다. 걱정 마시지요."

"지금 그들이 어딨죠? 계속 움직이고 있나요?"

"병사들이 막아서자, 왜인지 모르겠지만 멈춰 섰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대치하고 있습니다."

에스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갈게요. 직접 처리하겠습니다."

"처리한다니...."

"이미 검은 사신도 토벌한 적이 있어요. 뛰어난 전사들을 몇 명이 잠시만 시간을 끌어준다면, 제가 소멸시켜 보이겠어요."

성주는 난색을 표했다.

"그러다 성하가 다치기라도 하면, 제가 신실한 교도들한테 맞아죽습니다."

"안 다쳐요. 목만 안 잘리면 치료하면 되고요."

"그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성주는 말리려 했지만, 에스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이제 곧 전쟁이 벌어지면 에스델이 사람들을 이끌어야 했다.

뒤에서 명령이나 내리는 자보다는 직접 싸움에 임하는 전사가 병사들에게 더 존경을 사지 않을까?

에스델은 데일이 하던 그대로 사람들을 이끌 생각이다.

"후우. 알겠습니다. 그럼 엘프 전사 몇을 붙여드리죠."

"바로 가죠. 말을 준비해주세요."

"하다못해 마차를... 아니. 됐습니다."

깊은 한숨을 내쉰 성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데일은 꽤 당황스러운 상황에 직면했다.

그는 엘드리엄을 향해 똑바로 진군했다.

그 과정에서 병사나 주민들을 만나면, 엘드리엄에 소식을 전해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괜한 오해를 살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를 마주한 사람들의 반응은 생각보다도 더 격렬했다.

"검은 사신이다!"

"도망쳐!!!!"

"흑. 흐흑. 죽고 싶지 않아."

PTSD라고 해야 할까?

이미 검은 사신에게 끔찍한 경험을 해본 주민들은 줄행랑을 쳤다.

그들의 공포를 부채질하는 데에는 밴쉬들도 한몫했다.

"키히히히! 도망쳐라 머저리들아!"

"확 몸을 뺏어버릴라!"

언데드답게 머리 한구석에 나사가 빠진 밴쉬들은 인간이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즐겼다.

인간이 내뿜는 공포의 감정이 달콤하게 느껴진다 하던가?

결국.

데일은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네 자매들한테 괜스레 겁을 주지 말라고 해라."

"왜?"

"하지 말라면 좀 하지 마."

어쨌거나 거침없이 진군하던 데일 군단은 한 무리의 병사들과 맞닥뜨렸다.

병사들은 비장한 기세로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또 한 번 검은 사신이 우리의 터전을 짓밟으려 한다. 우리는 여기서 시간을 번다. 성하께서 지원군을 보낼 때까지, 이 자리를 사수해야 한다. 설령 우리는 이곳에서 죽어 없어지더라도, 우리의 가족과 이웃들만은 지켜내야 한다!!!"

"우와아아아!!"

필사의 각오.

지휘관으로 보이는 엘프 전사의 연설에 병사들은 함성을 내질렀다.

싸울 생각이 없던 데일은 오해를 풀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지만....

"나는 검은 사신이 아니다!"

"현혹되지 마라! 검은 사신은 사람을 홀리는 힘이 있다!"

"나는 데일이라고 하며, 싸울 의사가 없다!"

"봐라! 저 잔악한 무리는 이미 죽은 영웅의 이름을 사칭하고 있다!"

"우우우! 쓰레기 같은 놈!"

"네가 정말 데일이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데일 맞다고!"

"모두 귀 막아! 사악한 언데드가 계속해서 현혹하려 든다!"

저들은 간악한 흑기사의 말을 귀담아들을 생각이 없었다.

데일이 뭐라 외쳐대도, 이제는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무시할 뿐.

야가브가 킬킬 웃으며 말했다.

"그냥 죽이자. 그게 편하잖아?"

"그랬다가는 정말로 걷잡을 수 없다."

한 명이라도 죽였다가는 데일의 처지가 곤란해진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대치가 길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저쪽에서 함성이 들렸다.

"와아아아!"

"성하가 왔다!"

"이제 살았어!"

병사들이 양옆으로 갈라지고, 그 사이로 누군가 새하얀 말을 타고 나왔다.

전신을 판금 갑옷으로 무장했지만, 체형을 보니 남자보다는 여자에 가까워 보였다.

'성기사인가?'

갑옷을 입은 여인은 검을 하늘에 뽑아들고 무어라 연설했고, 병사들은 다시 환호했다.

이윽고.

여인은 말에서 내려 이쪽을 향해 성큼 걸어왔다. 그녀의 곁에는 엘프 전사들이 호위로 붙었다.

데일은 부하들에게 멈춰 있으라 명한 뒤.

홀로 앞서 나갔다.

이제 여인과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졌다.

여인은 이쪽을 향해 소리쳤다.

"언데드를 이끌고 선량한 사람들을 핍박하는 악한. 살인자. 도적. 악의 무리여, 여신이 제게 부여하신 거룩한 명에 따라 제가 당신의 사지를 산산조각내... 이 땅의 거름으로...."

여인이 우뚝 멈췄다.

데일도 투구를 울리는 그 목소리가 낯이 익어, 입을 열었다.

"에스델? 오랜만에 만났는데 말이 좀 심하군. 말투도 거칠어졌고. 엘프들이랑 어울려서 그런가?"

"...데일 경?"

에스델이 검을 툭 떨어트렸다.

대주교 에스델

* * *

에스델은 지금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꿈인가?

아니다. 이건 분명 사악한 언데드가 에스델에게 마법을 걸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리라.

속으면 안 된다.

이런 달콤한 꿈이 현실일 리 없다.

"왜 그러지?"

하지만 저 목소리.

차갑고 무뚝뚝하며, 엘프처럼 딱딱 끊어 말하는 듯한 억양은 기억 속 목소리와 너무나 흡사했다.

그렇기에 간절함을 담아. 그리고 불안함을 담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진짜. 진짜 데일 경인가요?"

"가짜 데일도 있나? 그나저나 갑옷 멋지군. 그토록 갑옷 좀 입고 다니라고 잔소리했는데, 이제야 판금 갑옷을 마련한 건가?"

그제야 에스델은 상대가 데일이라는 걸 확신했다.

"어쨌든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다. 하켄에게 대충 얘기 들었다. 이곳에서 이것저것 일을 벌인다고."

"...."

데일이 악수를 건네자, 에스델은 그 손을 양손으로 꼭 붙잡았다.

그 몸이 조금 들썩였다.

당황한 데일이 물었다.

"...우나?"

"크응. 안 울어요."

"코도 훌쩍이는 것 같은데."

"아니라고요."

데일은 어깨를 으쓱였다.

투구 아래 얼굴이 가려져 확인할 수가 없다.

본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야.

에스델은 데일의 손을 붙잡은 채, 그저 입을 꾹 닫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슬슬 데일이 곤란해하고, 병사들이 의아해하던 순간.

에스델이 입을 열었다.

"약속하세요."

"뭘?"

"다시는. 다시는 그런 무모한 짓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세요."

"...노력해보지."

에스델은 데일의 손을 한층 강하게 쥐었다.

"노력이 아니라 약속하세요. 지금 당장."

그 박력에 데일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약속하겠다."

둘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약속을 어기면 손가락을 잘라버리겠다는 의미였다.

* * *

데일의 등장은 순식간에 엘드리엄을 달궜다.

"데일 경이 오셨대!"

"데일 경? 흑기사 데일 경? 뭔 소리야. 그분은 악마와의 싸움에서 돌아가셨잖아."

"밤의 여신의 힘으로 부활했대!"

"허어!! 당장 보러 가세!"

삽시간에 소문이 퍼졌다.

데일이 엘드리엄의 성문 앞에 다다랐을 즘.

이미 온 엘드리엄의 시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데일을 보며 열렬한 환호성을 터트렸다.

"와아아아!!! 진짜 데일 경이다!"

"데일 경! 데일 경!"

"북부의 영웅이 돌아오셨다!"

"불사신이다! 저분은 불사신이다!"

"손 한 번만 잡아주세요!"

"제 아들 이름도 데일로 지었습니다 데일 경!"

"제 막내딸도요!"

"딸 이름으로 좋은 이름은 아닌 것 같은데...."

차갑고 무뚝뚝한 북부인들의 뜨거운 반응에 데일은 당황했다.

"이 사람들 왜 이러는 거지?"

에스델은 무슨 이상한 질문을 하냐는 듯. 되물었다.

"당연한 거 아니에요?"

"당연하다고?"

"원래 경은 검은 사신을 막아낸 영웅으로 북부인들한테 인기 많았잖아요. 게다가 악마랑 싸우다 전사한 영웅이 되돌아오다니. 당연히 열광하죠."

숭고한 죽음을 맞이한 영웅은 전설이 되는 법.

그 전설이 이리 살아 돌아왔으니, 북부인들이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됐고. 어서 손이나 흔들어주세요. 기왕이면 미소도 좀 짓고요."

"어. 그래."

투구를 벗은 에스델은 꾸며낸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데일은 그런 에스델의 모습이 낯설었다.

하지만 에스델이 한 번 더 흘겨봤기에, 어색하게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환호성은 더더욱 커져 온 천지를 울렸다.

"성하! 데일 경이 살아돌아왔으니 황혼을 무찌를 수 있는 겁니까?"

"이제 승리는 우리 것이죠! 그쵸?"

"한 말씀만 해주세요! 억!"

사람들이 어찌나 열렬히 달려드는지, 에스델의 호위를 맡은 엘프 전사들이 연신 몽둥이를 휘둘러야 했다.

하지만 열광적인 북부인들은 몽둥이에 얻어맞더라도 에스델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때.

에스델이 자리에서 멈춰 손을 들었다. 그녀는 말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소란스럽던 시민들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카리스마.

"오늘은 참으로 기쁜 날입니다. 지금껏 전사한 줄 알았던, 영웅 중의 영웅 데일 경께서 우리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셨지요. 우선 이 경사로운 일에 모두 눈을 감고, 두 여신께 감사 기도를 올립시다."

그러자 시민들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데일은 미묘한 눈빛으로 그런 에스델을 쳐다보았다.

에스델은 애써 시선을 돌렸다.

"이로써 또 하나의 진실이 밝혀졌습니다. 영웅은 죽지 않으며, 악은 절대 선을 이길 수 없습니다. 다가올 황혼과의 결전에서, 저희들은 반드시 승리할 겁니다. 황혼의 목을 베는 그날까지, 함께 싸웁시다!"

"와아아아!"

"대주교님 만세! 데일 경 만세!"

"황혼의 목을 잘라라!"

시민들의 환호를 뒤로하고.

에스델과 데일은 계속 걸음을 옮겼다.

데일이 조용히 물었다.

"음. 여러모로 달라졌군."

뭐랄까. 정치인 비슷하게 되었다 해야 하나.

에스델은 여전히 입가에 꾸며낸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데일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힘들어요. 근데 이 자리에 있으면 이럴 수밖에 없어요."

황혼이 온 대륙을 지배하려는 지금.

신들의 권위는 그 어느 때보다 위협받고 있다.

사람들이 신앙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기에 교단의 얼굴마담인 에스델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확신을 심어줄 수밖에 없다.

신들은 우리를 가호하며,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시민들에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너도 고생이 많군."

"알아주니 고맙네요."

"근데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못 물었는데. 왜 이렇게 입이 걸걸해진 거지?"

에스델이 흠칫했다.

그리고는 딴청을 피웠다.

"글쎄요. 무슨 말을 하는지 저는 잘...."

"아까 분명 나를 보면서 사지를 찢어버리니 뭐니 하지 않았나."

"사지는 찢다니요. 저는 분명 사지를 산산조각...."

"기억하고 있네."

"...죄송해요."

"아니. 책망하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궁금해서."

에스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그 편을 더 좋아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에스델도 고상하고 점잖은 언어를 사용했더랬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 전사 기질 가득한 북부인들은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고, 결국.

에스델은 좀 더 적나라하고 직관적인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뭐. 눈높이를 맞추는 건 중요한 일이지."

"예...."

둘은 시민들을 뚫고 나가 성주의 저택 앞까지 다다랐다.

엘드리엄 성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성주는 데일을 보며 씨익 웃었다.

"자네가 죽었다고 했을 때, 나는 믿지 않았었네. 대체 누가 자네 같은 괴물을 죽이겠나."

"오랜만이오."

데일은 악수를 위해 오른손을 내밀려다, 성주의 허전한 망토를 발견하고 재빨리 왼손을 내밀었다.

지난번. 검은 사신과의 전투에서 성주는 팔을 잃었다는 게 떠올랐다.

성주는 웃으며 악수를 받아주었다.

"하하! 아무튼 반갑네."

엘프답게 힘 있고 억센 손이었다.

* * *

셋은 성주의 집무실에서 회포를 풀었다.

해야 할 말이 너무 많았다.

"그렇군. 늪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온 건가? 대단하군."

데일이 살아남은 경위.

"하켄은 여전히 잘하고 있나 보네요. 솔직히 언제 진실이 탄로 나 목이 매달려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라만티스를 쓰러트리고 알브헤임까지 활로가 뚫린 건 반가운 일이군. 그 성벽을 정공법으로 뚫으려면 원래 1만의 병력은 필요했을 진데. 큰일을 해주었어."

하켄과 서부의 상황.

"...북쪽 바다를 항해해 왔다고요?"

"성밖에 세워둔 저 유령선. 혹시 내가 아는 그 유령선이 맞나? 수십 년간 바다를 누비던."

"맞소."

데일이 밴쉬를 굴복시키고, 북쪽 바다를 항해해 온 일까지.

에스델과 엘드리엄 성주는 연신 감탄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만큼 데일이 걸어온 행보는 쉬이 믿기에는 다소 놀라웠다.

다만. 이 흑기사가 허세 같은 걸 부리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에, 순순히 믿었다.

성주는 데일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잘해주었네. 경이 살아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시민들이 큰 용기를 얻었어. 다른 곳에도 연락을 넣었나? 자네 얘기가 퍼진다면, 대륙의 많은 사람들에게 힘이 날 텐데."

"일부러 소문을 퍼트렸소. 카엘름에도 전령을 보냈고. 다만. 얼마나 효과를 보일지는 모르겠소."

지금의 파편화된 대륙에서 소문의 전파는 그리 빠르지 못하다.

당장 엘드리엄에서는 악마 라만티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아직 못 전해듣지 않았던가?

"전령이라. 카엘름 위치를 생각하면, 솔직히 거기까지 닿을 확률이 너무 낮은데."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소."

"그래. 안 하는 것보다는 낫긴 하지. 그럼 이제 내가 말할 차례인가?"

시원스레 운을 뗀 엘드리엄 성주는 북부의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했다.

에스델을 중심으로 새로운 교단의 중심지가 됐다는 말과, 각지에서 몰려드는 병력들이 점점 수를 불려나가고 있다는 것.

설명을 모두 들은 데일은 생각했다.

'상황이 괜찮은데?'

정말로 괜찮다.

강력한 병력을 통해 황혼의 세력을 저지하고 있으며, 치안도 대륙의 그 어디보다 안정되었다.

"용뼈 산맥에 있는 하이엘프 부족들과도 계속해 접선을 시도하고 있네. 워낙 배타적인 자들이라 도움을 청하는 게 쉽지가 않지만, 몇몇 부족에서는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더군."

"상황이 괜찮은 것 같소. 여기까지 준비하다니, 대단하오."

"운이 좋았네. 황혼은 북부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거든."

데일이 말했다.

"하켄은 이레네를 향해 진격하고 있소. 지금쯤 병사들을 이끌고 알브헤임에 도착했겠지. 엘드리엄도 함께 남하해 이레네를 친 뒤, 즉시 황혼을 향해 진격하는 게 좋지 않겠소?"

이레네를 되찾은 뒤, 그곳에서 곧장 동쪽으로 진격한다.

그 과정에서 황혼 아래에 고통받는 다른 도시들도 해방시키고, 카엘름이나 4군단과 합류해 규모를 불린다.

그렇게 모든 전력을 집중해 황혼의 병력과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황혼이 무슨 짓을 벌이려는지 알고 있을 거라 믿소. 여신께서 내게 말하시길, 우리에게는 정말로 티끌만한 여유밖에 없다는군."

"!"

"정말. 정말 밤의 여신께서 직접 알려주셨단 말인가?"

"그렇소."

"허."

얼굴을 굳힌 성주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사실 우리는 언제라도 남하할 준비가 되어 있었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어."

성주는 지도를 펼쳐 보였다.

북부. 용뼈 산맥. 그리고 1군단.

1군단은 황혼에게 넘어간 배신자들이다.

천혜의 요새인 용뼈 산맥을 사이에 두고 있어 아직까지 마찰을 빚을 일은 없었지만, 이레네로 진격한다면 얘기가 다르다.

"이레네를 공격할 때 뒤통수 맞기 좋아 보이는군."

"1군단은 4개의 군단 중에서도 머릿수가 가장 적지만, 가장 독한 이들이기도 하지. 용뼈 산맥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맞으며 전선을 수십 년간 유지했는데, 악기가 들어차지 않으면 그것도 이상하지 않나?"

"뒤를 기습할 수 있는 정예 병력이라...."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명확하다.

혼자 앞뒤로 싸 먹히는 걸 경계하는 거겠지.

하지만 이제 하켄이 서부군을 이끌고 오면 그것도 어느 정도 해결.

대부분의 일들은 빠르게 논의가 되었다.

한참의 회의를 거친 뒤.

데일은 문득 생각나는 걸 물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에스델. 아니. 대주교 성하."

"데일 경까지 사석에서 그렇게 부르시면 저 울 거예요."

"...아무튼 에스델. 하켄이 말하기를 영웅들의 흔적을 쫓고 있다고 들었는데?"

에스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영웅들은 이미 실종되었지만, 그들이 남긴 무구나 자취는 어딘가에 남아 있을 거 아니에요. 그게 황혼을 이기는 데에 단서가 되어주지 않을까 하는 계산에서 조사대를 꾸렸죠."

그 황혼과 영웅들과의 관계가 있다고 여긴 데일은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과는 좀 있었나?"

"예. 꽤 흥미로운 자료들이 많이 나왔는데... 그중 가장 큰 성과는 이거겠네요."

에스델은 서랍을 열어, 두툼한 책을 꺼냈다.

"이건?"

"일기. 성녀의 일기에요."

대주교 에스델

* * *

당연한 얘기지만, 4명의 영웅들 중 에스델이 가장 공을 들여 조사한 사람은 바로 성녀였다.

에스델은 성녀의 대체재로서 두각을 드러냈고, 이제는 그 성녀의 이름을 달게 되었다.

만약 성녀가 남겨놓은 지식이나 노하우, 성유물이라도 발견된다면 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신앙에 가득 찬 열렬한 신자들은 이 대업에 기꺼이 뛰어들었고, 성과를 보였다.

"저 북부에 자그마한 수도원이 있어요. 그곳에 무려 성녀의 일기가 있더군요."

"일기?"

"본디 성녀께서는 무언가 기록하는 걸 좋아해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쓰셨습니다. 그 일부가 발견된 것이죠."

"본인 일기가 맞기는 한 건가?"

데일은 의아했다.

일기란 게 뭔가.

가장 개인적인 물건 아니던가.

그런 걸 줄줄 흘리고 다닌다고?

그것도 변두리 수도원 같은 곳에?

"물론 저도 의아한 부분이 좀 있긴 하지만, 필적을 조사해본 결과 성녀께서 집필하신 일기가 맞습니다."

"본인이 일부러 흘렸을 수도 있겠군. 왜 지금껏 발견되지 않은 거지? 교단에서는 성녀의 흔적을 찾기 위해 이미 온 대륙을 뒤져보지 않았나?"

에스델은 어깨를 으쓱였다.

"낡은 수도원 책장 사이에 아무렇게나 꽂힌 일기가, 성녀님의 흔적일 줄 누가 알았겠어요. 심지어 내용이 다소... 음. 이상한 곳이 많았어요."

"이상하다고?"

"읽어보시죠."

에스델은 소가죽 표지를 한 낡고 헤진 일기를 전해 받았다.

잘못 건드리면 금방 찢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일기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데일은 조심스레 표지를 넘겼다.

그러자 정갈한 글씨체의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거룩하신 신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것에 감사드린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너무나 아름답고 찬란한 기적이며, 이를 소중히 하기 위해 이 기록을 남긴다.]

일기라기보다는 역사서에 더 어울리는 문구다. 비장함까지 느껴진다.

데일은 천천히 종이를 넘겼다.

[4군단이 아르구르의 침공을 받았다. 베른바르트 군단장은 전선을 훌륭히 방어해냈지만, 피해가 적지 않다. 4군단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바이만이 무너졌다. 나는 어떤 도움도 주지 못했다. 왕가의 마지막 혈통인 공주가 탈출을 시도했다는 보고를 들었지만, 그 이후로 어떤 소식도 들려오지 않는다. 부디 신께서 그녀를 가호하시길.]

[2군단 쪽 정세가 심상치 않다. 1군단은 간신히 버티고 있지만 식량 부족을 호소하고 있다. 황제는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인다.]

[서부 도시에서 성난 군중이 밤의 교도 121명을 학살했다. 악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게 그들 탓이라는 주장이었다. 도시의 위정자들은 그 흐름을 은근히 부채질했다. 교단 역시 모른 척했다. 나도... 모른 척해야 했다. 신이시여.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지 마소서.]

[서부에서의 일로 전선의 밤의 교도들이 이탈했다. 그들은 강력한 전력이다. 그들이 없는 전선은 더욱 약해질 것이다. 교단 내의 급진파들은 이를 기회로 밤의 교도들이 믿을 수 없는 자들이라 시끄럽게 짖어댄다. 맙소사. 저들은 빛과 밤의 협약을 누가 이끌었는지 잊었단 말인가?]

[2군단과 성기사들을 이끌고 가니아고스와 맞섰다. 그 머리 다섯 개 달린 뱀과 싸우는 건 정말로 끔찍한 일이었다. 하지만 가니아고스보다 더 강한 악마가 많이 남아 있다.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53명의 성기사가 죽었다. 병사 478명이 죽었다. 부상자는 셀 수 없다.]

[상황이 급박하지만 여전히 황제는 군단장들을 견제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는 과연 전쟁을 끝낼 생각이 있는 걸까?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황실 기사단장 미하일이 전사했다. 그는 내가 아는 가장 강력한 기사였다. 그가 패배하다니. 상위 서열 악마들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까. 두렵다. 잠 못 드는 밤이 많아졌다.]

[점점 악마가 이레네로 다가온다. 대륙의 멸망이 눈에 보인다. 두르핀과의 교전에서 성기사 72명이 죽었다. 그중 41명은 놈의 자폭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 이제 살아있는 성기사는 30명이 채 되지 않는다.]

[남쪽의 거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밤의 신도들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강해졌다. 광기에 사로잡힌 군중이 신도들을 찾아다녔고, 조금이라도 의심 가는 인물은 산 채로 묶어 불태웠다. 저들은 저걸 '이단 사냥'이라 부르며, 마치 성전이라도 되는 양 떠들어댄다. 제발. 제발 저들이 악마에게 홀린 것이기를. 이 끔찍한 만행이 저들의 진심이 아니기를.]

[끝이 다가온다. 신께서는 나에게 강력한 힘을 내려주셨다. 악마조차도 능히 꺾을 힘이었다. 하지만 나는 깨달았다. 나 혼자로는 부족하다. 나와 같은 재능을 가진 이들이 최소 3명은 더 있어야 고위 서열 악마를 도모해볼 가능성이 있다. 기사단장의 죽음이 오늘따라 뼈에 사무친다.]

[끝이 왔다. 나는 버림받았다. 이 세계는 이것으로 끝이다.]

데일은 일기에서 시선을 뗐다.

에스델이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건...."

"예. 터무니없는 말들이 적혀 있죠."

"나도 읽어봤네만, 나는 성녀께서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네. 아니면 빛의 여신께서 성녀께 종말의 미래를 보여주었거나."

에스델은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일기인 줄 알았는데, 사실상 소설이나 다름없더라고요. 날짜나 사건이나 어째 현실과 일치하는 게 하나도 없어요. 서부 도시에서 벌어진 학살은 사실무근이고, 가니아고스나 두르핀은 데일 경이 쓰러트린 거잖아요? 심지어 미래 날짜의 일기가 쓰인 적도 있어요. 저도 성주랑 비슷한 생각이에요. 어쩌면... 성녀께서 정신이 온존치 못한 게 아니었을까요?"

"아니. 내가 봤을 때는 약을 한 것 같습니다. 약으로 정신이 파괴되고, 이리저리 비틀거리다, 어느 이름 모를 대지에서 쓰러진 거 아니겠습니까?"

"으음. 아무리 그래도 한때 교단의 상징이었던 분이신데... 데일 경?"

"무슨 일 있나?"

둘은 데일이 아무 말도 없자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데일은 선뜻 입을 열기 힘들었다.

일기.

그래. 이건 일기가 맞다.

다만, 에스델과 성주가 정신 이상자의 망상 취급해도 이상할 건 없다.

그야. 이건....

'내가 게임했을 때의 벌어진 일들인데.'

그가 성직자로서 게임을 플레이할 때.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게 바로 빛과 밤의 반목이다.

안 그래도 세가 강력했던 교단은 주인공의 활약으로 더더욱 성세를 떨쳤고, 밤의 교도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서로 간에 신뢰를 잃은 두 종교는 다시금 반목했고, 협력하지 못하는 인류는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그대로 플레이어도 게임 오버.

이 일기에 담긴 건 그 당시의 일들이다.

'그들이 내가 키웠던 캐릭터인 건 알았어.'

이레네의 상위구역에서 영웅들의 조각상을 처음 보았을 때. 데일은 이미 영웅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들은 데일이 키우고 포기해버렸던 이 게임의 주인공.

다소 놀랐지만, 생각해보면 마냥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게임 속이었는데, 그 게임에 자기가 키우던 캐릭터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지 않은가?

데일이 의문을 가졌던 건 다른 부분이다.

'왜 넷이 함께 있지?'

만약 데일이 게임 속에 떨어졌다면. 게임 캐릭터가 있어도 이상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건 기본적으로 싱글 게임이다.

각각의 주인공이 같은 시대. 같은 배경에서 모험을 해나가는 이야기다.

넷이 함께 있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데일은 가설을 세웠다.

데일은 게임 속으로 떨어진 게 아닌, 게임과 똑같이 생긴 다른 어느 세상으로 떨어진 거라고.

솔직히 이게 맞나? 싶기는 하지만, 이러면 넷이 함께 있는 것도 이해는 되었다.

이제 그 가설이 깨졌다.

'성녀는 기억하고 있어.'

단순히 이게 게임과 모양만 같은 세상이라면. 성녀는 이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진실은 어떻게 되는가.

이 넷은 왜 같이 있을 수 있는가.

성녀는 왜 기억을 가지고 있는가.

시간이라도 되돌린 건가?

이건 대수롭지 않게 여길 일이 아니다.

데일이 이 세상에 떨어진 이유와 그가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이랑도 분명 연관이 있을 것이다.

"어. 저. 데일 경?"

"무얼 그리 골똘히 생각하는가."

데일은 일기를 툭툭 두드렸다.

"이거. 내가 잠시 빌려가도 되겠나?"

"어차피 저희한테는 이제 가치가 없는 물건이에요. 마음대로 쓰세요. 원한다면 처분하셔도 좋고요."

성녀가 실종되기 전에 이런 미치광이 같은 글을 남겼다는 걸 밝혀봤자 교단에 좋을 게 없다.

방으로 돌아간 데일은 일기를 읽고 또 읽었다.

일기에 나와 있는 건 사소한 부분까지도 모두 데일의 기억과 정확히 일치했다.

'더 의심해봤자 의미가 없군. 너무 명백해.'

이건 틀림없이 성녀의 일기가 맞았다.

데일은 일기를 팔랑팔랑 넘겼다.

어느 순간부터 일기가 뚝 끊겼다.

마지막 글귀가 계속 눈에 걸렸다.

[끝이 왔다. 나는 버림받았다. 이 세계는 이것으로 끝이다.]

대체 누구한테 버림받았다는 걸까.

'역시 신이려나?'

그렇게 생각하면 황혼이나 오르단과의 사상과도 맥이 통하는 부분이 있다.

아니. 틀림없이 이게 옳은 해석이겠지.

하지만 뭔가 마음 한구석이 석연치 않았다.

데일은 빈 백지를 계속해 노려봤지만, 보이는 건 없었다.

결국. 데일은 더 조사하는 걸 포기했다.

일기를 들여다본다고 무언가 단서를 얻을 것 같지도 않다.

'태워버리는 게 낫겠지.'

타인의 손에 들어가서 좋을 물건이 아니다.

책 가까이 촛불을 가져다댔다.

불은 금방 옮겨붙었다.

낡은 종이가 활활 타올랐다.

데일은 재가 되어 가는 종이를 쳐다보다, 눈을 부릅떴다.

"음?"

빈 종이였던 일기의 마지막 장에 갑작스레 글자가 생겨났다.

[끝이 아니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나와 같은 처지의 동료들이 왔다! 다시 되돌아가, 모든 것을 올바르게 되돌릴 기회가 온 것이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현상에 데일은 급하게 종이에 붙은 불을 끄려 했다.

하지만 빠르게 타버린 일기는 까만 재가 되어 허공에 흩날렸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안 그래도 복잡하던 머릿속이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이대로라면 온종일 고민에 잠겨 있을 판이었다.

하지만.

땡! 땡! 땡! 땡!

위급 상황을 알리는 요란한 종소리가 데일의 상념을 깨웠다.

데일은 급히 걸음을 옮겼다.

에스델에게 갈 생각이었다.

에스델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둘은 복도에서 마주쳤다.

"무슨 일이지?"

데일은 얼굴이 사색이 된 에스델을 붙잡고 물었다.

"하늘! 하늘을 보세요!"

데일은 창가로 다가가 바깥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탄식을 내뱉었다.

"이런."

* * *

황혼은 점점 완성되어가는 탑을 올려다보았다.

황혼의 인생을 모두 바친 목표.

맹세.

꿈.

그리고 의무.

그 모든 게 녹아 있는 탑이 이제 정말 완성을 두세 걸음 앞두고 있고, 대업을 이루기까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황혼은 눈을 감고 가슴을 어루만졌다.

심장 부근에 박힌 룬검이 걸리적거렸지만, 황혼은 이제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비로소 우리들의 꿈이 이루어진 거야."

욱신!

황혼의 말에 대꾸라도 하듯.

짜르르한 통증이 황혼을 내면으로부터 피어올랐다.

황혼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니 부디 일이 끝날 때까지는 얌전히 있어줘."

탑을 향해 걸음을 옮긴 황혼은 천천히 팔을 뻗었다.

손끝을 탑 표면에 갖다 대었다.

우우우우우웅!

표면에 미리 새겨놓은 도형과 문양을 따라 빛이 발광했다.

이윽고.

탑의 상층부에서 주황빛이 화산처럼 뿜어져 나와, 온 하늘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아직 화창한 오후 시각임에도, 사위는 노을이 진 것처럼 오렌지빛에 감싸였다.

마치 당장이라는 세상이 멸망할 것 같은 압도적인 광경을 황혼의 추종자들도, 억울하게 끌려온 시민들도, 악마 하수인들도 멍하니 쳐다보았다.

웃는 건 오직 황혼뿐이었다.

황혼은 한껏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제 마무리할 시간이 왔어."

밤의 여신이 말하길, 인류에게 남은 시간은 그야말로 티끌.

이제 그 티끌마저 부스러지기 시작했다.

대주교 에스델

* * *

갑작스럽게 뻗어나온 주황빛은 하늘을 뒤덮었다.

태양은 그 종적을 감췄고, 온 사위가 오렌지빛으로 물들었다.

사람들은 저 주황빛이 금방 흩어져버리길 간절히 기도했다.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다시 해가 뜨고.

너무나 당연한 법칙.

하지만 수천. 수만 년 동안 이어져 온 그 진리는 지금 깨어져 버렸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주황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공포에 떨었다.

"아아! 신이시여!"

"드, 드디어 멸망이 온 거야! 우린 다 죽을 거야!"

"도망쳐야 해... 조금이라도 멀리...."

엘드리엄의 시민들은 곧장 성주의 저택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에스델을 찾았다.

"대주교님! 무어라 말씀해주십시오!"

"일시적인 현상이죠? 그쵸?"

"금방 신께서 저희에게 태양을 되돌려주시겠죠?"

에스델은 말문이 턱 막혔다.

당황하기는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데일은 그런 에스델의 등을 두드렸다.

"정신 차려라. 다들 너를 의지하고 있지 않나. 네가 당황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지."

"아."

에스델은 표정을 굳힌 뒤, 오른손을 들었다.

그러자 아우성치던 시민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도시에는 거짓말처럼 정적이 찾아들었다.

에스델은 한동안 주위를 둘러보며, 침묵을 지켰다.

그녀는 데일에게서 침묵의 힘을 배웠다.

침묵이 길어지자 사람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더욱 간절히 쳐다보았다.

이윽고 적당한 분위기가 형성되고. 에스델 스스로도 해야 할 말을 머릿속에 정리했을 때.

그녀는 입을 열었다.

"형제님들. 자매님들. 당황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이미 오래전부터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거짓말이다.

설마 하늘이 뒤덮일 줄 꿈에서도 몰랐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저들은 더 당황할 것이다.

"이는 모두 짐작하다시피, 황혼의 짓입니다. 그 가증스러운 존재는 우리에게서 태양과 달, 그리고 하늘을 빼앗고, 두 여신께 그 마수를 뻗으려 하고 있습니다."

에스델은 자신만을 바라보는 시민들에게 차분한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저희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산과 동굴로 숨어들어, 조금이라도 비참한 삶을 이어가는 것. 그리하면, 비록 적은 시간이나마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보존할 수 있겠지요."

에스델은 시종일관 차분했다.

하지만 데일은 굳게 쥔 그녀의 주먹이 미세하게 떨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에스델은 이어 말했다.

"다른 하나는 위험하고 어려운 길입니다. 바로 황혼에 맞서 싸우는 것이죠. 황혼은 강력한 적이고, 그 군세는 비열하고 잔혹합니다. 그들과 싸우면 많은 피가 흐를 겁니다. 어쩌면 우리가 패배해 전멸할 수도 있습니다."

패배라는 말에 시민들이 웅성거렸다.

에스델이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패배할지언정 우리는 명예롭게 인간으로서 최후를 맞이할 겁니다! 그리고 죽어서 이미 영면에 든 가족, 친구, 전우와 만나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겠지요. 끝까지 부끄럼 없이 살았다고!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싸워냈다고!"

에스델이 외쳤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비겁자가 되어 편한 길로 도망치다 모든 걸 잃어버리시겠습니까? 아니면 힘겨운 싸움일지언정, 저 간악한 학살자에게 창끝을 들겠습니까!"

"우와아아!"

"우리는 싸움을 원합니다!"

"성전을 선포하겠습니다! 신께서 이 싸움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용맹히 싸우는 한! 신께서는 절대 저희를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에스델은 왼팔을 들어 올렸다.

팔에 감긴 성물이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빛무리는 허공에서 아름답게 부스러지더니, 사람들의 몸에 은은하게 떨어져 내렸다.

에스델이 신성을 성물에 쏟아부어 연출한 장면이다.

사람들은 황홀한 눈으로 그 빛무리를 쳐다보았다.

정말로 신이 가호하는 듯한 광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이윽고.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졌다.

"와아아아!!"

"신께서 우리를 가호하신다!"

"싸우자! 창을 들자!"

"에스델! 에스델!"

세상이 망할 것 같던 절망감은 이제 없다.

엄청난 열기가 도시 안을 휘몰아쳤다.

분위기에 휩쓸린 사람들은 에스델의 이름을 연호했다.

에스델은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억지로 꾸며낸 듯한 미소였다.

연설을 마치고.

저택 안으로 들어온 에스델은 비틀거렸다. 데일이 얼른 그 몸을 지탱해주었다.

"...죄를 지은 기분이에요."

"훌륭한 연설이었다."

"교묘한 말로 사람들을 홀렸어요. 마치 선택권을 준 척했지만, 누가 저 분위기에서 당당히 도망치고 싶다고 말하겠어요. 신께서 가호하신다는 말도. 성전도. 제가 기적을 일으켜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킨 것도... 제가 거짓말로 저 사람들을 전쟁으로 몰아넣은 거예요."

하긴.

저런 상황에서 자기는 황혼이랑 싸우는 대신 도망친다고 말한다면, 곧바로 비겁자 소리를 들으며 몰매를 당할 것이다.

"이번 황혼과의 싸움에서 얼마나 많은 피가 흐를까요. 저 사람들 중 몇이나 몸 성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그래서. 네가 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몬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건가?"

"...."

'에스델답군.'

오랜만에 만나 많은 게 변한 에스델이지만, 변하지 않은 부분은 있었다.

이 오지랖에 가까운 선한 마음이라거나.

"어차피 싸우지 않으면 황혼에게 죽을 목숨이다. 지금도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리거나 그 영혼을 착취하는 놈이다. 자기 대업을 완수한다고 사람들을 살려둘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정 마음이 안 좋으면 네가 할 건 하나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서 돌려보내는 것."

"!"

"지금 후회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나."

멍하니 데일을 바라보던 에스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죠."

둘은 성주가 기다리고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

성주와 참모는 이미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보급 상황을 확인해! 특히 무기와 식량은 제대로 관리해야 해!"

"탈라 마을에서 겁에 질린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답니다!"

"그곳에 사제들을 보내 상황을 설명하게 만들어라. 최대한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해."

"하늘이 주황빛으로 변하고 곳곳에서 기절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저 주황빛에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요?"

"글쎄. 그냥 놀라서 기절한 것 같은데."

분주히 지휘하던 성주는 이쪽을 발견하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훌륭한 연설이었습니다. 성하. 덕분에 혼란이 크게 줄었습니다."

"상황은요?"

"보시다시피 난장판입니다. 벌써 해가 져야 할 시간인데도 여전히 온 세상이 주황빛이지 않습니까? 북부 곳곳에서 큰 혼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병사들이 급하게 북부 일대를 돌아다니며 성전을 외쳐대고 있어 혼란이 얼추 줄어들고 있지만. 글쎄. 이게 얼마나 갈지 모르겠군요."

"곧바로 진군해야 하오."

데일이 끼어들었다.

"이건 황혼이 탑을 완성해 간다는 증거일 것이오. 아직 전부 완성하지는 못했을 것이오. 아직 내 힘에는 변화가 없으니."

황혼이 자기 목표를 이뤄냈다면, 밤의 여신의 힘을 사용하는 데일에게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우리에게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확실한 것 같소."

"그건 나도 동의한다네. 다른 것보다, 이대로 가다가는 혼란이 더욱 커지겠지."

태양과 달이 사라졌다.

성전이라는 이름에 사람들이 의지를 다지는 것도 잠시간이다.

용기가 가라앉으면 머지않아 저들은 더욱 큰 두려움에 떨게 될 것이다.

아직 모두의 마음이 꺾이지 않았을 때.

곧장 사람들을 이끌고 진군에 나서야 한다.

"저 빛이 아직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거나 하지는 않네만, 앞으로도 그럴 보장은 없네. 조금의 시간이라도 남아 있을 때, 진군하는 게 맞겠지."

준비가 충분하냐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다.

보급부터 시작해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너무 많다.

하지만 여기서 준비를 철저히 한다고 승산이 더 오르냐?

엘드리엄 성주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은 부족해도 걸음을 옮겨야 할 때다.

"다만. 여전히 우리의 세력은 너무 부족하다네. 아무리 서부의 하켄 사령관과 병력을 합치더라도, 저쪽에는 황혼의 병력에 악마의 군세, 배신한 1군단과 2군단까지 있네. 우리만으로 상대하기에는 숫자가 역부족일세."

지금 이대로라면 황혼에게 닿기도 전에 적 병력의 파도에 휩쓸려 패배할 것이다.

"우리는 더 많은 아군이 필요하네."

"카엘름과 4군단 쪽에 다시 한번 전령을 보내보는 게 어떻겠소."

"당연히 그리할 것이네. 하지만 전령들이 그곳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는 어찌 되겠나. 계획을 짤 때는 언제나 최악을 가정해야 하네. 다른 아군도 필요해."

"다른 아군이라 해봤자...."

모두의 시선이 지도의 한곳에 집중되었다.

여전히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는 3군단. 그리고 하늘을 떠다니는 이레네.

"황제를 설득하자는 말이군?"

"황제가 안 된다면, 3군단이라도 설득해야 해. 지금껏 3군단이랑 어렵사리 대화를 주고받은 적이 몇 번 있었지만... 자기들은 오직 황제의 명에 따르겠다는군."

"결국. 황제를 설득해야 한다는 소리 아니오?"

"3군단이 황제를 버리게 하도록 설득할 수도 있지."

데일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물었다.

"황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오?"

"자기보신적인 겁쟁이. 젊었을 때는 그나마 총기가 있었지만, 나이가 들어 그마저도 없어졌지."

"이 전쟁이 우리 승리로 끝이 난다면, 황제는 어찌 될 것 같소?"

"끝이겠지."

황제는 지켜야 할 사람들을 지키지 못하고, 저 혼자만 도망쳐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아직 시민들이 있는 지상을 향해 돌로 된 폭격을 날려댔다.

황제에 대해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존경과 흠모가 모조리 박살나는 사건이다.

이 전쟁이 끝난 후에는 귀족들도. 백성들도. 황제를 지배자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끝까지 결사항전해 장렬히 죽었다면 얘기가 달라졌을 걸세. 온 대륙이 황제의 복수를 하자고 들고 일어났을 테니까. 하지만 황제는 추하게 자기 목숨을 연명했네.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버렸어. 그 핏줄에는 이제 고귀함 따위는 없네."

황가는 끝.

데일도 동의하는 바였다.

하지만 그게 문제였다.

"그 사실을 황제도 잘 알지 않겠소? 전쟁이 끝나면 자신도 끝장이라는 걸."

"그건... 그렇지."

"황제가 유일하게 노릴 수 있는 건 우리가 황혼과 싸우다 동귀어진하는 경우요. 자기 세력만이 건재하다면 다시 한번 제국을 지배할 수도 있겠지. 그러니 우리를 돕지 않을 것 같소만."

성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경 말이 옳네. 하지만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던가?"

"...없소."

"되든 안 되든 시도는 해봐야 하네. 그리고 그걸 해줄 수 있는 건, 자네밖에 없어. 시간이 없네. 저 하늘을 날아다니는 유령 아가씨의 배를 타고 가서, 그들을 설득해주게."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직 데일 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면, 기꺼이 할 생각이다.

마치 에스델처럼.

"경. 조심하세요. 황제는 어떤 면에서는 황혼보다도 더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니까요."

"명심하겠다."

말이 나온 김에 데일은 곧장 움직이려 했다.

그런 데일을 성주가 붙잡았다.

"아 물어볼 게 있는데."

"무엇이오. 뭐든 답해드리겠소."

분명 이 타이밍에 하는 거라면 무언가 엄청 중요한 질문일 것이다.

데일이 진지하게 말하자 조금 당황한 성주가 손을 내저었다.

"아. 너무 부담 갖지 말게. 그냥 지극히 개인적인 궁금증이네만... 자네. 이전에는 엘프를 엄청 싫어하지 않았나? 나를 보던 표정에 꺼림칙함이 가득했었는데."

"지금도 싫소만."

"한데. 지금은 많이 나아진 것 같아서 말일세. 뭐. 심경이 변화라도 있었나?"

데일은 늪에서 만났던 하이엘프를 떠올렸다. 그녀와 나눴던 이야기도.

데일은 어깨를 으쓱였다.

"오랜 시간 막연히 두려워하던 게, 알고 보면 생각보다 별거 아닌 경우가 많지 않소. 감정이라는 것도 시간이 흐르면 무뎌지기 마련이고. 그거랑 비슷한 느낌이오."

"흐음. 그렇다면 역시 내 딸 아이와 혼담을...."

"이만 가보겠소."

성주의 말을 끊은 데일은 성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밴쉬 야가브는 그녀의 자매들과 함께 나무 그늘 아래에 서성이며 따분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야가브는 데일을 발견하고는 불만을 내뱉었다.

"정말. 따분하다고. 우리가 이런 걸 하려고 너를 따른 건 아닌데."

"걱정 마라. 이제부터 재밌어질 테니까."

"뭐?"

"지금부터 만나러 갈 사람이 있다."

"그게 누군데?"

데일은 야가브와 시선을 마주치며 말했다.

"황제."

"!!"

밴쉬 자매들은 즉시 일어나 배를 띄울 준비를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데일을 태운 유령선이 주황빛 하늘을 헤치며 나아갔다.

동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