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25

EP.253 강철의 나라와 얼굴 없는 인간들 - 2

군국에서는 그 누구도 죄를 범할 수 없다. 일반 시민은 물론이고, 설사 상위계급인 장교라고 해도. 지주회사의 주인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만일 누군가 가진 힘과 지위를 이용해서 사리사욕을 채웠다면, 군국이 아니면서 시민의 고혈을 쥐어짜 자신의 목을 축였다면. 돈방석을 깔고 앉아 축배를 드는 밤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찾아온다.

공공안전부, 직권으로 헌병대를 부리는 군국의 처형자.

영궤, 지크흐룬드가 방문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증거는 전부 확보되어 있고, 그의 지위와 재산은 이미 말소된 이후다. 평소에 간이고 쓸개고 빼줄 것처럼 굴던 승냥이들도 공안의 경고를 받고는 겁을 잔뜩 집어먹은 채 몸을 사린다.

달인의 검술은 너무 현묘해서, 상대는 자기가 베인 사실도 눈치채지 못한다고 한다.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공공안전부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팔다리가 다 잘린 이후.

자포자기로 저항하려고 해봤자, 상대는 힘도 권력도 절정에 달한 육장성이다. 장교라고 해도 그의 칼날에 대적할 수 없다. 죄인이 허락된 유일한 감정은 군국에서 죄를 저지른 자신에 대한 후회뿐.

그러나 누구도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공공안전부가 찾아오기 전, 죄인은 이전에 지크흐룬드의 방문을 받았다는 것을.

그때는 지크흐룬드의 모습이 아니었겠지만.

갈 길이 바쁘다는 재촉에 '캐러팔드'는 우리를 제련소 안쪽까지 인도했다.

어머아마한 규모의 공장이었다. 건물 외벽은 두꺼운 콘크리트로 되어 있었으며, 커다란 굴뚝에서는 새하얀 연기가 화산처럼 뿜어져 나왔다. 이토록 커다란 건물인데, 바깥에서는 창문 하나 보이지 않았다. 대신 수십 개의 환기구와 큼직한 강철 문 하나만이 외벽에 을씨년스럽게 자리해 있었다. 두꺼운 문을 열자 안쪽에서 후끈한 열기가 밀려 나왔다.

그리고 연금강 제련소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연금강 제련소는 가연금물질을 연금강으로 변환하는 커다란 시설입니다. 분해, 분류, 정련 공정. 이렇게 세 가지로 나뉘지요. 분해 공정은 가연금물질을 디알케, 그러니까 구조 변환으로 분해합니다. 그 과정에서…."

'캐러팔드'는 자기 쓸모를 주장하기 위해 아는 척 설명했으나, 그의 의도는 통하지 않았다. 다들 눈 앞에 펼쳐진 상식 밖의 광경에 경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컥, 철컥.

사슬에 꿰인 인간이 레일을 따라 걷는다. 왼팔을 어깨 위로 힘없이 든 채, 갈고리가 그들을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

그들의 얼굴에는 표정도, 생기도 없다. 낯선 침입자에게 시선을 돌릴 여유조차 갖지 못한 채 정해진 자리로 향한다. 숨을 쉬는 것도 힘겹게 시뻘건 쇳물이 흘러가는 레일 앞에 선다.

그 뒤, 사슬이 철컹 당겨진다. 그 사슬 끝은 생체 단말과 연결되어 있다. 물고기 입을 꿰뚫은 낚싯바늘처럼, 생체 단말 안쪽에 매달린 갈고리가 만성이 되어버린 고통으로 인간의 몸을 조종한다.

"으윽."

마른 비명과 함께, 갈고리의 힘을 이기지 못한 노역자가 손을 뻗는다. 그 앞에는 반쯤 녹아내린 연금강 선철(銑鐵)이 있다. 아직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그것을 향해, 갈고리가 떼쓰는 어린아이처럼 노역자의 손을 잡아끈다.

이 순간만큼은 노역자도 주춤한다. 생명으로서의 본능이 시뻘겋게 타오르는 철조각을 향해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끄아아아아아아악!!"

쇠사슬이 위협하듯 거칠게 당겨진다. 힘을 받은 갈고리 끝이 살갗 위로 도드라진다. 꿰인 피부에 새빨간 주름이 잡히며 밀려난다. 인간의 피부 역시 본질적으로 옷자락과 다를 바 없다고 외치는 것 같다.

힘을 이기지 못한 노역자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뻗는다. 불꽃과는 밀도부터가 다른 녹아내린 강철을 향해.

살갗이 익는다. 가만히 두면 자신을 고깃덩이로 만들 그 달아오른 열기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연금술을 써야 한다.

"세트! 리, 디, 디알케! 디알케에에…!"

-그런 끔찍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절규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군국 전역에 공급하기 위한 연금강을 생산할 만큼 많은 절규가.

어딘가에서는 연금술에 실패한 모양이다. 끔찍한 비명과 함께 고기 굽는 냄새가 퍼진다. 체액이 타오르며 솟구친 새하얀 김이 공장 위쪽으로 떠올라 자기가 왔던 곳을 한 번 굽어보고는, 바람을 따라 저 멀리 보이지 않은 곳으로 사라졌다.

생존과 고통을 담보로 이들을 혹사… 아니, 쥐어짜는 군국 최악의 노역장.

연금강 제련소는 지금까지 쌓아온 상식을 전부 쳐부수고는, 그 잔해 위에서 도덕과 정의를 비웃는 모독이었다.

"…이, 이, 이건. 말, 말도 안 돼."

공주의 반응이 늦은 것은, 이 모든 시스템을 이해하기까지 그만큼의 시간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공주는 경악과 전율로 벌벌 떨었다.

"어, 어떻게 이럴 수 있죠? 이들, 이들이 도대체 얼마나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거죠? 아니, 설사 그렇더라도! 이런 꼴은!"

비교적 이런 광경에 익숙한 회귀자는 얼굴을 찡그리는 정도에서 끝냈다.

"이래서 오고 싶지 않았던 거야. 칫, 비위만 상하잖아."

[…내 권속이 거느렸던 인간 농장도 이정도는 아니었건만. 인간은 간혹 흡혈귀보다 더한 모습을 보여주는구나.]

흡혈귀인 티르조차도 그리 평가할 정도니, 이 참상이 얼마나 혹독한지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색다른 광경을 맞이했을 때, 인간은 새로운 반응을 보인다.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네모난 상자와 같다. 두 눈과 두 귀로 무엇을 흘려넣었냐에 따라 다른 반응을 내보이는, 안이 보이지 않는 상자. 신이 아닌 이상, 그 어두컴컴한 상자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를 터. 하지만 충분한 관찰을 통해 그것을 흉내낼 수 있다.'

그 와중 우리 모두를 시험하듯, '캐러팔드'는 모인 인간의 반응을 관찰하고 있다.

'반응 확인. 위험인물 X, 기시감을 보인다. 과거에 제련소에 온 적이 있나. 그렇다면 군국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도 설명된다. 시조 티르칸쟈카, 감탄…? 경멸? 하나 분명한 건, 이보다 더한 수라장을 겪어왔는지 반응의 크기가 작다. 그리고.'

회귀자와 티르를 한 번식 살핀 뒤. '캐러팔드'가 나에게 분명한 관심을 보였다.

"어때, 휴이?"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너의 반응은?'

'캐러팔드'는 이런 위험천만한 곳에 잠입한 자신에 대한 우월감을 보였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배역의 입장에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연기. 그는 속으로는 냉철하게 나를 주시하는 중이다.

왜? 지금 이곳엔 위험한 사람이 이토록 많은데, 왜 하필 나를 콕 집어서 경계하는 거야?

'정보 부족. 쓰는 힘, 특정되지 않음. 캐러팔드가 설명하기로는 어디 특출난 재능이 없는 단순한 수재였다고 하나, 육장성을 제치고 수석을 차지한 경력과 탄탈로스에서 살아남은 이를… 단순하다고 설명하고 끝낼 거라면, 파고드는 맛이 없지.'

나도 이상한 존재에게 인기가 많구만.

군국의 모든 정보는 영궤를 한 번 거친다. 그는 통신병의 정보를 가장 먼저 열람할 권한이 있으며, 심지어 그를 보조하기 위한 단독 통신본부도 존재한다.

그렇게 정보를 모은 그이기에, 정보의 암흑지대나 다름없는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총사조차도 군국을 배신하게 만들었고, 시조로 하여금 관에서 나오게 했지. 과연 그게 우연인지, 아니면 네 능력인지. 자아, 보여라, 피리 부는 사나이. 어떤 수로 내로라하는 강자를 꼬드겼는지. 얼마나 중요한 배역을 맡고 있는지를….'

그래. 그게 네 뜻이라면.

보여주지.

평소와는 완전히 달라진 나를 말이야.

"이 미친 나라 같으니…. 도대체, 인간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어떻게 인간을 하찮은 도구 취급을 할 수 있는데?!"

군국의 이름 아래 짓밟히는 인권에 분개한 것처럼, 나는 감정을 끌어올리며 소리쳤다.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던 공주는 내 뜻에 동의를 표했으나, 회귀자는 도리어 의아한 시선을 보내왔다.

"엥? 뭐야, 답지 않게. 인류애에 눈이라도 떴어?"

"농담할 분위기가 있고 그렇지 않을 분위기가 있지, 지금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와요?! 셰이 씨는 이 모든 광경을 보고도 아무런 생각도 안 들어요?!"

"어? 아니. 나는 그냥. 네가 평소에 비해서 감정적이길래…."

그야 영궤를 속이기 위함이지! 괜히 초 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정의감? 군국에 반기를 든 이유가 어쭙잖은 정의감 때문인가. 흠. 위험인물의 반응을 보면 아직 확실하지 않은데. 조금 더 시험해볼까.'

'캐러팔드'는 본의가 아닌 척 눈치 없이 한마디 보탰다.

"어, 여기는 그나마 나은 편인데…."

아주 정교하게 계산된 한 마디. 부주의한 '캐러팔드'라면 할 법한 말이면서도, 은근히 파낸 함정.

나는 속으로 쾌재를 내질렀다. 함정을 판다는 건, 나를 완전히 사냥감으로 인식한다는 뜻.

그렇다면 사냥감을 연기해야지. 나는 그가 판 함정에 냉큼 발을 들이밀었다.

"캐러팔드, 그게 무슨 뜻이야? 여기는 그나마 낫다면. 이 다음은? 뭐가 있는데?"

"이쪽, 분해 작업을 맡은 사람들은 비교적 지식인들이야. 제식마법을 배웠고 연금술을 할 줄 아니까 비교적 편한 임무를 맡았어."

"그러면 다음 공정은?"

내가 묻자, '캐러팔드'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연금술을 전혀 모르는 이들이 다음 공정에서 일하고 있어."

모순이다. 연금강은 연금술의 결과물. 연금술을 모르는 이가 어떻게 연금강을 제련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캐러팔드'는 거기서 설명을 멈추었다. 이 이상은 네가 맞춰보라는 듯이.

'그는 지금까지 무력적인 부분에선 도드라지지 않았다. 참모 역할일까. 어디, 능력을 시험해보자.'

미안하지만, 그 시험. 나는 다 컨닝으로 통과했거든. 네가 답을 아는 이상 나에게 모르는 문제는 없어.

"연금술을 쓸 줄 모르면서 연금술을 쓴다고? 그게 될 리가…."

있다. 딱 한 가지, 연금술을 쓸 줄 모르면서도 연금술을 쓰는 방법이.

성년이 된 군국민이라면 누구나 하나씩 갖고 있는 그것. 의복 패킷을 끼워 넣으면 자기 몸에 맞추어 연금술을 발휘하는, 군국 7대 발명품 중 하나.

생각을 읽은 탓에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마치 사색 끝에 간신히 답을 찾아낸 것처럼, 내가 떠오른 대답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정답을 말했다.

"생체 단말…?"

'정답.'

"인간의 몸을 거푸집 삼아서, 거기에 녹은 철을 부어 넣는다고…?"

'단편적인 정보를 모아 거기까지 추리해내다니. 단순한 수재라고 보기 어렵군. 그를 이 집단의 참모로 보는 편이 맞겠어.'

'캐러팔드'는 나에 대한 평가를 상향 조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쳇, 알고 있었네. 하긴, 전학년 수석인 너에게는 쉬운 문제였나…."

연금술은 다른 물질을 가공하여 유용한 물질로 변화시키는 행위를 총칭한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은 매순간 연금술을 부리고 있다.

먹은 음식을 태워 열을 얻고, 찌꺼기를 정제하여 피와 살로 만든다. 그것을 몸 곳곳에 누빈다.

생명이란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연금활동을 하는 개체인 것이다.

"네 대답이 맞아, 휴이. 생명은 연금술의 제 1 원소… 그렇다면, 생명 그 자체를 써서 연금술을 하는 것도 가능하지."

이 문을 넘어가면, 거기부터는 닭장처럼 좁은 공간에 갇힌 인간들이 빼곡이 있을 것이다. 생체 단말이 있는 왼팔만 철창 밖으로 내민 채 묶여있고, 거기로 새빨간 쇳물이 계속 스며들 것이다.

이곳과는 다르게 티끌만큼의 자유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자유가 없어도 일하는 데 지장이 없으니까.

나는 한마디 툭 내뱉었다.

"완전히 미쳤군."

이건 진심이었다.

이 제련소는 악의를 가지고 만들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노역자들을 고통스럽게 할지언정, 그건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요인에 지나지 않는다.

군국이 이 제련소를 만든 이유는, 그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군국을 채울 만큼의 연금자원이 있어야 이 나라를 살찌울 수 있기에, 그리고 연금자원을 만들어내는 방법은 수많은 인간을 혹사시키는 것뿐이기에. 군국은 죄수들을 착취하여 연금강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고통스러워 비명을 내지르는 노역자의 모습을 살폈다. 입은 옷은 깨끗하고, 스트레스로 피부와 머리카락이 다 떨어져 나가면서도 살은 제법 올랐다. 그들을 묶은 쇠사슬도, 녹슨 곳 하나 없이 깨끗했다. 마력을 짜내야 할 노역자가 빨리 죽으면 군국 입장에서도 손해이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어떠한 악의도, 부정도, 증오도 없다. 차가운 이성만이 인간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다.

캐러팔드가 이토록 중요한 시설에 잠입할 수 있던 이유도 알았다. 고급 인력인 장교도 제정신이 박히고선 이곳의 감독관으로 일하지 않을 테니, 외부의 인력마저 끌어와야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영궤한테 걸려서 '캐러팔드'가 된 거고.

내가 외쳤다.

"당장 때려부수죠!"

EP.254 강철의 나라와 얼굴 없는 인간들 - 3

'만일 네게 충분한 정의감이 있다면, 이 제련소는 당장 부수고 싶을 정도로 증오스럽겠지.'

딱히 이 제련소가 증오스럽지는 않다. 인간의 증오는 오직 인간을 향한다.

물건을 보고 화내는 사람은 머저리다. 의미 없는 일에 공을 쏟으니까. 나라를 향해 증오심을 불태우는 사람은 바보다. 나라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감정을 소모하니까.

사실 그들은 전부… 그 너머에 있는 인간을 찾고 있는 것이다.

나처럼.

'시설을 파괴하고 노역자를 해방하는 게 가장 일반적인 선택.'

내 감정이야 어쨌든, 지금은 지크흐룬드의 대본을 따라간다. 그가 생각한 대로 나를 이곳까지 이끈 회귀자와 히스토리아를 향해 요구했다.

"당장 이곳을 다 때려 부수죠! 군국의 죄악,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이 노역장을 때려 부수고 노역자를 해방하면 군국도 커다란 타격을 입을 거예요!"

'하지만, 이 제련소의 진상을 아는 자라면 그 주장에 동의하지 못할 터.'

지크흐룬드의 대본은 물 흐르듯이 이어졌다. 그가 고른 무대는 모두에게 공감되는 분노를 일으켰고, 그가 초빙한 배우들은 전부 그의 생각대로 움직였다.

"어서요! 시간 끌 이유 없잖아요!"

회귀자는 이 공간을 불편해하면서도 내 제안에는 난색을 표했다.

"부숴? 여길? 지금?"

"지금, 이라니요?"

"지금 시점에서, 연금강 제련소는 흉악범을 가둬두는 곳이잖아. 여기 있는 녀석들은 다 범죄자들이라고."

회귀자가 보고 왔던 미래에는 흉악범 말고도 다른 인간을 가둘지도 모른다. 그때 군국은 벼랑 끝까지 몰려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가장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자만 연금강 제련소에 있다. 고통받는 이들의 기억을 살펴보면 지옥에 가도 감히 죗값을 치를 수나 있는지 의심되는 이들이 많다.

무고한 시민에게 신무기를 시험해 본 장교나, 흡혈귀가 되고 싶다는 이유로 어린아이를 납치하여 피를 취한 여인. 지주회사를 장악한 뒤 폭력배를 고용하고 사조직을 만들어 왕처럼 군림한 어리석은 이까지.

용서할 수 없으며 갱생의 기회를 주는 것조차 불의인 죄인들에게 끔찍한 고통을 선사하는 합법 지옥인 셈이다.

"그래도! 아무리 흉악범이라고 해도, 이런 방식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어쩌자고? 이들을 아무런 조치 없이 풀어줄 수는 없어."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나와는 대립하는 의견이 생긴다. 이 역시, 지크흐룬드가 적은 대본대로.

'특히, 총사는 절대로 이들을 그냥 해방할 수 없다. 몇몇은 그녀가 직접 잡아넣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총사가 취할 행동은 정해졌지.'

"한 가지, 방법이 있어."

나와 회귀자가 결정을 못 내리고 잠시 고민하는 동안, 무언가 결심한 히스토리아가 운을 띄웠다.

'모든 고민을 해결할 간단한 방법. 이들을 전부 죽이면 된다. 이들은 이미 사형을 언도받은 대죄인이고, 총사에게는 죄인을 즉결처분할 권한이 있으니.'

"노역자의 행동은 생체 단말을 꿰뚫은 쇠사슬에 의해 제어되고 있어. 그리고 혹시나, 노역자들이 반란을 일으킬 때를 대비해 장치를 준비해뒀지."

"노역자가 반란을 일으킬 때를 대비해서, 군국이 만든 장치? 그다지 좋은 장치처럼 들리지는 않는데."

"…미뤄둔 사형을 집행하는 장치야."

간단히 말해, 그 장치를 작동시켜서 이곳 모두를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이야기에 다들 놀란 사이, 히스토리아는 그 말만 남기고는 앞장서서 걸었다.

'총사는 한정된 보신주의를 갖고 있다. 자기가 정한 테두리 안쪽의 사람은 필사적으로 지키지만 그 바깥의 존재는 쉽게 내버린다. 제련소의 노역자는 명백히 테두리 바깥의 존재. 총사에게 있어, 연금강 제련소의 노역자는 구할 가치가 없는 것들.'

그래서, 히스토리아는 이들을 전부 죽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내가 지크흐룬드의 대본에 따라 발끈하려는 찰나, 나보다 먼저 회귀자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다 죽이자는 거야? 이 많은 인간들을?"

"이곳의 노역자들은, 이미 사형을 선고받은 5레벨의 중범죄자. 갱생의 여지가 아예 없고,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용납하지 않아. 이들은 군국이 곧 시체가 될 이들을 이용하는 것뿐이야. 휴이 너도, 이들이 저지른 죄를 알면 당장 네 손으로 찢어 죽이고 싶어질걸."

나야 별생각은 없지만, 확실히 이 정도 죄목이라면 살아남기는 글렀다. 이곳이 군국이라서 써먹으려고 살려둔 거지, 왕국 시절이었다면 집행 기사라고 불리는 떠돌이 기사들이 정의를 집행한답시고 대낮에 결투를 벌여 아주 잔혹하게 죽였을 것이다. 그리고 시민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목을 앞에 효수했겠지.

무엇이 더 나은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회귀자가 투덜거렸다.

"그래도 그렇지. 이들을 다 죽이는 건 좀."

"전쟁을 막으려는 네게 있어서도 나쁜 일은 아닐 텐데. 당장은 비축된 연금강으로 버틸 수 있겠지만, 추가적인 공급이 없으면 장기적인 전쟁은 불가능해. 시설이야 어떻게든 복구할 수 있지만… 죽은 인간은 복구하지 못하니까."

"끙. 그렇긴 한데."

'어떤 결론이 나던, 너희 모두는 결국 최심부 제어실로 향할 것이다.'

뾰족한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티르는 점점 지지부진해지는 이야기에 지루해하며 그들을 중재했다.

[이야기가 더 나아가지를 않는구나. 시간이 그리 많다면야 나야 천년만년 기다려 줄 수 있다만, 너희는 한시가 급하지 않았더냐?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기 전에 일단 움직이자꾸나.]

티르가 뒤를 돌아보며 '캐러팔드'를 불렀다.

[길잡이!]

티르가 부르자,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던 '캐러팔드'가 길잡이는 자신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대답했다.

"어, 저, 저요?"

[우리를 안내하거라. 그것이 너의 임무이니.]

"네, 넵! 그러면 제어실로 안내하겠습니다!"

'좋은 배우들이로군. 어젯밤 내내 고친 대본이 무색하지 않게 해주었어.'

칭찬해줘서 고마워. 너도 대본 좀 잘 짜더라. 인간에 대한 관찰력이 제법인데 말이야.

'흠, 하지만. 배역이 비어 있지 않으면 내가 연극에 참가할 수 없잖아? 그래서야 재미없지. 무리를 조금 나눠볼까.'

우리를 저 안쪽으로 안내하려던 '캐러팔드'는, 잠시 멈칫거리고는 걱정스레 공주와 시아티를 돌아보았다.

"저, 공주님. 공주님께는 퇴로를 지켜주십시오. 안쪽은 제가 맡겠습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절규에 잔뜩 움츠리고 있었던 공주가 되물었다.

"퇴, 퇴로를 지키라니요? 저, 저보고 이곳에 혼자 남아있으라고요?"

"아니요. 바깥에서 보셔도 됩니다. 아무래도 안쪽은… 그. 공주님 보시기엔 좀."

'캐러팔드'는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고는 우물쭈물거렸다. 말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말한 것과 다름없다. 안쪽에는 더 끔찍한 광경이 있으니, 공주는 밖에서 쉬고 있으라는 뜻이었다.

공주는 충분히 그 뜻을 알아챘다.

"캐러팔드. 혹시 제가 충격을 받을까 봐 떼어놓으려는 건가요…?"

"꼭 그런 건 아닙니다! 누군가는 퇴로를 지켜야 하니까요. 만일 지켜야 한다면 공주님께서 적임이시니까…."

'적의를 피하는 공주는 떨어뜨리는 편이 좋다. 인간의 감정, 그 자체에 간섭하는 반칙적인 존재는 배우 역할에 걸맞지 않아. 잘 연출된 무대에서 열연하는 배우의 외침이 일으키는 감동이야말로 진짜지. 공주는… 기계장치에게 맡겨야 겠군.'

공주는 발끈해서 자기도 따라가겠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타이밍 좋게도 누군가의 끔찍한 비명이 들리고, 공주는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 움츠러들었다.

회귀자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곳을 파괴하든 뭘 하든. 공주가 활약할 일은 없을 거야. 여기에는 적이 없으니까 네 능력을 쓸 일도 없겠지."

미안하지만 틀렸다. 저 최심부에는 아마 적이 숨어있을 거다. 그러니까 지크흐룬드도 공주를 내보내려는 거고.

그러나 지크흐룬드의 이 일련의 연기는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를 제외한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만일 내가 그의 정체를 밝히며 나서도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애초에 내가 그를 의심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최근까지 같이 있었을 시아티도, 공주도 알아채지 못했는데 6년이란 간극이 있는 내가 알아채는 게 더 비합리적이니까.

그렇다고 독심술의 존재를 밝힐 수도 없고.

"으, 저, 저는…. 그러면, 부탁드릴게요…."

공주가 남아있기로 결정하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때. 나도 참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티르, 셰이 씨. 미안해요. 저도 잠깐 빠져있어도 될까요?"

티르는 내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휴. 안색이 창백하구나. 괜찮으냐?]

"네. 그저 마음의 문제일 뿐이에요. 어떤 결말이 나오든… 지켜보고 있기 힘들 것 같아서요."

살짝 내리깐 시선, 꽉 쥔 주먹. 나는 누가 보더라도 제련소의 모독적인 광경에 분노한 모습이었다.

내 달라진 태도에 티르는 잠깐 의아해했다. 그러나 그러려니, 하고 넘기고는 자애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할 만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오지 않았느냐. 지치지 않는 흡혈귀와는 달리, 너에게는 약간의 휴식이 필요할지도 모르겠구나.]

"고마워요, 티르. 저는 그러면 아지랑… 잠깐, 아지는 또 어디 갔지?"

공주가 뒤쪽을 가리켰다.

"아지 양은 저기… 문에 들어올 때부터 우뚝 멈춰서는 들어오질 않던데요."

"왠지, 개 짖는 소리가 안 들리더니."

고개를 돌려보니 아지는 문틈으로 안쪽을 흘금거리면서도 차마 발을 내딛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결계에 가로막힌 것 같았다. 어떤 노역자가 고통에 신음할 때마다 아지는 무언가 불편한 듯이 이빨을 드러내며 그르렁거렸다.

인간의 감정에 민감한 아지에게, 수많은 인간이 고문 수준의 형벌을 실시간으로 받고 있는 이곳은 지옥 비슷하게 보일 것이다.

"어차피 아지를 혼자 둘 수도 없었으니. 잘 되었네요. 저는 바깥에서 왕들이랑 망이나 보고 있을게요."

회귀자도 흔쾌히 허락했다.

"뭐, 그래. 아까 바깥쪽에는 별다른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고. 어차피 단순 파괴 행위에 네 힘까진 필요없기도 하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후딱 처리하고 나올게."

회귀자의 허락도 떨어졌겠다, 나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한시라도 빨리 떨어지고 싶다는 듯이 성큼성큼 밖으로 향했다.

'일단, 둘은 떨어뜨려 놓았다. 공주랑 참모. 괜찮은 배역이군. 내가 그 배역을 연기한다면, 충분히 즐거운 장면이 나오겠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네가 내 자리를 차지한다면, 꽤 즐거운 장면이 나올 거야.

그러니까 나도 무대를 준비해두고 있을게. 너 혼자만 무대를 독차지 하는 건 불공평하잖아. 그렇지?

철컥. 연금강 제련소의 강철 문이 닫혔다. 틈 하나 보이지 않도록 단단히 닫은 나는 팔을 뻗어 아지를 쓰다듬었다. 아지는 여전히 기분이 나쁜지 그르렁거리고만 있었다.

"저… 휴이, 님?"

"네? 왜요?"

나는 아지를 달래며 싱긋 웃어 보였다. 공주는 우물쭈물하다가 내 표정을 힐끔이며 물었다.

"방금, 표정이 갑자기 바뀌신 것 같아서…. 무슨 즐거운 일이라도 떠올리신가요?"

"즐거운 일? 조금 전까지 저딴 꼴을 보고 왔는데 어떻게 즐겁겠어요?!"

"죄, 죄송해요오…! 어, 그런데 눈은 웃고 계신데요…."

"당신이 내 표정에 대해 뭘 알아!"

"히익!"

웃고 있긴. 나는 분노해야 한다.

저들은 죽어 마땅한 범죄자다. 인간은 대의를 위해 다른 인간을 심판할 권리를 갖기에, 죄악을 저지른 저들은 대의의 이름 아래 처단하는 게 마땅하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존엄이라는 게 있다. 설사 그것이 범죄자라도,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마땅히 존중해야 한다. 그것이 도리니까.

우습게도.

"우습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공주님? 어차피 죽어야 할, 그리고 죽을 이들인데. 묶여서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다니."

"그, 그렇지만… 죽일 거라면 정당한 절차를 거쳐, 모두의 앞에서 죄를 드러내고 최후를 맞이하게 해야죠. 저건, 저건 너무해요! 쇠사슬에 묶여서 착취당하는 건 마치… 가축 같잖아요!"

공주는 주먹을 꾹 움켜쥐며 치를 떨었다. 적의란 종류의 감정을 접해본 적 없었던 그녀의 일생에서, 군국의 악의와 접한 건 처음이었을 테니까.

"가축처럼 착취하면 안 되나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당연히 안 되죠!"

"어째서죠? 군국에게는 이런 시설이 필요하고, 이런 시설을 운영할 능력도 있어요."

"할 수 있다고 뭐든지 해서는 안 되잖아요! 언제나 정도를 지켜야 해요. 그것을 지키지 못해서 저희 부모님도…!"

차마 말을 못다 한 공주를 위해 내가 뒷말을 이어주었다.

"그러게요. 선친께서는 왕국 경영 더럽게 못 해서 나라를 말아 드셨죠? 본인이 말아먹은 건 아니지만 확실히 경험자다 보니 와닿는 바가 다르네요."

"네, 네에?!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하지만 사실이잖아요?"

"그렇기는 하지만요! 얼굴도 못 보았다고는 하지만, 제 부모님이세요! 최소한 제 앞에서는 말을 가려주세요!"

나는 피식 웃으며 아지와 함께 자동마차에 올라탔다. 공주는 씩씩거리며 내 뒤를 따라 자연스럽게 자동마차에 앉았다.

'정말, 말이 너무 심하잖아요! 제가 그런 걸 따지는 건 아니지만, 예절이나 품위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아요! 배려도 부족하고…!'

"해서는 안 될 말이지만. 할 수 있죠."

자동마차의 시동을 걸었다. 우레바퀴가 털털 돌아가며 자동마차 전체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멈추었던 자동마차가 다시 박동을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주가 놀라서 말을 걸었다.

"잠깐만요, 휴이 님? 망을 보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말이란 것도 결국 제 입과 혀를 이용해서 소리를 빚어내는 건데. 무엇을 발음하고 순서를 어떻게 배치하냐에 따라 해선 안 될 말이 되지요."

구르르릉. 점차 가속하던 자동마차는 곧 최고속도에 이르렀다. 나는 조종간을 돌려서 거대한 연금강 제련소의 외벽을 따라 달렸다. 좌측에 보이는 건 끝도 없는 회색 콘크리트 벽. 아무리 가도 똑같은 광경만 반복되어, 곧 내가 전진하는 건지 멈춘 건지 헷갈릴 지경이 되었다.

"할 수 없다면, 처음부터 할 수 없어야죠.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걸요."

"…예컨대, 가능한 일이라면 그건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거군요."

잘 알아듣네. 예리하고 제법 머리도 돌아가서 말이 잘 통한다니까.

"하지만 달라요. 할 수 있다고 뭐든지 하는 것이야말로 야만이며, 죄예요. 왕국이 멸망한 건 할 수 있는 일과 해선 안 되는 일을 구분하지 못해서였어요."

"나보고는 뭐라고 하더니, 정작 자기가 부모님을 탓하네."

"제 부모님이니까 뭐라고 해도 제가 해요!"

발끈한 공주가 빽 소리치곤, 눈을 똑바로 뜨고 또박또박 대답했다.

"네! 왕국은 멸망할 만했어요! 그러니까, 해서는 될 일과 안될 일이 있어요! 예전에 왕국의 치안을 책임졌던 집행 기사분들. 그분들은 죄인을 처치하고 규칙을 바로 세우기 위해 세상을 떠돌며 집행 결투를 했죠. 하지만 언젠가부터 집행 결투는… 보다 더 참혹하고 잔인하게 죽이는 처형식이 되었어요! 심지어 무고한 이마저 누명을 씌워서 처형하는 일도 생겼죠!"

"그건 타락한 집행기사들의 잘못이잖아요?"

"기사들의 왕국이었잖아요! 왕국이 그들을 긍정했으니까, 왕이, 저희 부모님이 결국 모두의 손에 끌어 내려진 거예요!"

모순…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지. 공주의 말에는 조금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 나는 그곳을 조심스레 짚었다.

"그 말대로라면, 공주님 입장에선 저 제련소의 존재가 반갑겠네요. 부수지 않는 편이 좋겠죠? 언젠가, 저 제련소는 흉악한 범죄자뿐만이 아니라, 군국의 뜻에 반하는 모두를 잡아넣다가 결국 파국에 이르고 말 테니까. 이야, 레지스탕스 만만세네요!"

EP.255 강철의 나라와 얼굴 없는 인간들 - 4

공주는 이제 왕이 될 수 없고, 이 나라는 왕국이 아니다. 군인이 다스리며 총과 칼로 평화를 강요하는 군국이다. 사령부의 명령 아래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이곳에서 그 어떤 인간도 책임감을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 나라를 만든 원흉, 그란디오모르 왕과 왕비의 유일한 자손인 공주는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레지스탕스가 된 왕국의 잔당은 물론, 이 나라의 국민 전체를 향해서.

내 말을 농담으로 들을 법도 했지만, 공주는 진담으로 듣고는 냉큼 부정했다.

"저를 자꾸 시험하려고 들지 마세요. 저런 곳은 없어져야 해요! 상대가 비록 죄인이라고 해도, 영원히 고통을 주는 지옥은 현실에 있어선 안 돼요!"

"왕도 아니면서 백성의 삶에 관심이 많으시네요."

"그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저 도리를 따를 뿐이에요! 애초에 휴이 님도 저 안의 모습을 보고 분개하시지 않으셨나요!"

"아, 저는 그 부분이 화가 난 게 아니에요."

야만이란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문명은 할 수 없는 것을 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살인은 기본이고, 도둑질이나 협박, 사기나 선동, 배교와 반란 등등. 가끔 몇 가지가 빠질 때도 있고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금기가 들어갈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문명이란 인간에게서 무언가를 거세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야만적이냐 문명적이냐 묻는다면, 어감은 별로 안 좋지만 분명히 야만적이겠지. 저지를 수 있는 범죄는 다 저지르고 다녔으니까.

하지만 나는 개인이고, 일개 인간이 끼칠 수 있는 영향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악영향을 끼쳤더라고 해도 붙잡아 처벌하면 그만.

나는 실제로 처벌당하기까지 했으니 완벽한 예시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군국은?

"대의를 위해, 나라를 위해 별 해괴한 구실을 다 갖다 붙이면서 막되게 행동하는 녀석들은 있었어요. 하지만 어쨌든 그들의 행동을 옹호하기 위해 같다 붙인 거란 말이죠. 그에 비해, 이건 진짜거든요. 나라의 이름으로 행했고, 나라를 위해서 한 행동이에요. 심지어 나라가 직접 시킨 듯한 기분도 들죠."

국민을 착취하는 노역장을 만든다. 다 국가를 위해서다.

엄정한 법으로 모두를 다스린다. 전부 국가를 위해서다.

온갖 발명품을 만들고 그것을 널리 퍼뜨리나, 그게 국민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안다.

생체 단말을 꿰뚫은 갈고리.

의복 패킷으로 만든 구속복.

신체를 대가로 시전하는 제식 마법.

오직 영양만 보존하는 압축 통조림.

맛이나 행복은 애당초 고려하지 않은 키메라 콩.

스스로 돌아가는 탓에 인간을 거기에 맞추어야 하는 우레바퀴.

피, 땀, 시체로 일궈내고 인간을 윤활유로 써서 움직이는 메타컨베이어 벨트.

군국이 특히 악랄하게 사용하는 것도 있지만, 그 7대 발명품 모두 인간을 향한 애정이 결핍되어 있다. 모든 것을 걸러내고 남은 것은 유용성 하나.

공주도 내 말을 긍정했다.

"맞아요. 다른 나라도 그렇지만, 군국은 그 정도가 특히 심해요. 그나마 다행인 건, 처벌이 가혹해서 그 와중에 중간에서 착복하는 이들이 없다는 것 정도…."

"네. 특히 그렇죠. 군국은 군국을 제외한 다른 누군가가 죄를 짓는 것을 두고 보지 않아요. 군국에서 죄를 저지를 수 있는 건 오직 군국뿐이니까."

"…네? 죄요?"

"군국에는 여유가 있어요. 부나 행복, 시간이나 자부심을 나누어 줄 잉여자원이 분명히 있단 말이에요. 그러나 군국은 그것을 절대 나누지 않고 끊임없이 비축해요."

공주는 아까 나에게 발끈했던 사실조차 잊은 채로 내 말에 집중했다.

"…그렇다면, 휴이 님은. 그 모든 것을 손에 거머쥐며 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막후의 권력자를 향해 화가 나신 거군요?"

"글쎄요? 그가 누군지도, 어디 있는지도 알려지지 않고, 존재여부조차 불명확한데 어떻게 화를 낼 수 있겠어요?"

"아, 죄송해요. 표현을 바꿀게요. 휴이 님은 이 모든 것을 만들어낸 그 존재를 찾고 싶으신 거죠?"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이, 공주는 손을 말아쥐고 손바닥을 쳤다. 방금 전까지 나에게 따박따박 대꾸했던 기세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대충은요. 하지만 몇 개월 군국을 떠돌아다니고, 수도에서 몇 년 살았는데도 지금까지는 발견하지 못했단 말이죠."

독심술사인 내 '발견'은 차원을 달리한다. 만일 그가 정체와 신분을 속이고 하층민인 척 평화롭게 살고 있었어도, 마음을 읽는 나와 마주친다면 즉각 정체가 드러난다.

만일 어딘가 비밀스러운 기지에서 은둔하고 있어도, 단 한 번이라도 바깥에 나왔다면. 그러다 우연히 나와 마주쳤다면. 먼발치에서 내가 흘겨보기만 해도 전부 알아냈을 것이다.

꼭 그런 막후의 지배자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권력자는 필연적으로 수많은 이들과 관계될 수밖에 없다.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거나 접촉한 존재가 있다면. 나는 실 끄트머리를 붙잡고는 찬찬히 그것을 풀어나갔을 거다.

…뭐, 결국 찾지 못했고. 목숨을 걸 정도까지 대단한 목표는 아니라서 느긋하게 하고 있었지만.

"그래서… 아까와 같은 질문으로 저를 시험하신 거군요."

"네?"

시험? 웬 시험. 나는 문제 풀기의 달인이지 문제 내기에는 젬병이다. 상대방이 아는 내용은 전부 알지만, 상대방이 모르는 내용을 떠올리지도 못하는 나는 문제를 낼 때 있어서 밑천이 잘 드러난단 말이야.

내가 솔직하게 반문했을 때, 공주는 무슨 말이냐는 듯 내게 물었다.

"레지스탕스인 제가 그 '누군가'를 마주치면 어떻게 행동할지 몰랐으니까. 제련소의 존재가 레지스탕스 입장에서는 더 좋지 않냐는 식으로 저를 테스트하셨던 거잖아요."

'하긴. 셰이 공의 동료가 그토록 무정한 말을 할 리가 없죠. 저는 또 괜히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여서는! 예리엔 그란디오모르, 더 정진하세요!'

이걸 이렇게 받아들이네. 이 공주는 사람을 마냥 긍정적으로 바라보는데.

하긴, 귀머거리는 귀가 안 들릴 뿐인데 말을 하지 못하고, 장님은 색이 무엇인지 표현할 수 없다. 인지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 그대로 무(無)감각해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적의에 노출된 적 없는 공주는 적의를 조심하는 법도 배우지 못했다. 태생적으로 위기감이 결여된 정신적 장애인인 것이다.

아니, 천치라고 하는 편이 더 적합하려나. 천치 같으니.

"눈치가 빠르시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오해다. 원래 나는 공주에게 호기심을 불어넣으려고 하려 했으니까.

이렇게 호기심을 불어넣어야, 나중에 사령부에 잠입할 때 보다 적극적으로 되지 않겠는가.

공주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세요. 저는 눈앞의 광경에 놀라서 다른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휴이 님은 닥친 일에 매몰되지 않고 이후의 일까지 바라보고 있으셨군요…. 제 부족함을 용서해주시길 바라요. 도움이 되지 못할망정 큰소리나 치다니."

아니다. 아마 공주는 엄청나게 큰 도움이 될 거다.

아무도 적의를 품지 못하는 권능. 자기 머리에 톱니바퀴를 박아넣은 미친놈 하나가 그녀를 죽일 뻔한 바람에 빛이 좀 바랬지만, 그 더럽게 사기적인 능력을 가만히 썩히고 둘 수는 없지.

그리고.

"뭐, 됐어요. 그것도 결국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가야 할 수 있는 이야기니까."

"네? 무사히 빠져나가다니요?"

'여기서 할 일은 전부 끝나지 않았나요? 제련소를 무너뜨리고 사령부로 향하면… 어, 잠깐만? 무너뜨려…?'

알아차렸군.

여기는 함정이다. 그 함정 중에서도 특히 질이 나쁜 종류다.

힘이나 물리력이 아닌, 딜레마 속에 우리를 가두기 때문에.

공주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어떻게? 어떻게 무너뜨리죠? 흉악범을 다 죽여야 할까요, 아니면 노역자를 해방시켜야 할까요? 누가, 어떻게 결정하죠?'

제련소 안에서는 알아차리기 힘들다. 왜냐면 그들은 고민하는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대본 안에서 움직이는 이들은 무대 밖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그렇기에 나와 공주는 빠져나올 필요가 있었다.

나는 공주에게 설명했다.

"연금강 제련소는 진짜 중요한 시설이에요. 사실, 어떤 의미로는 사령부 이상으로 지켜내야 할 목표물이죠."

비록 연금강이 재고 많은 자원이라지만 무한하지는 않다. 그리고 연금강처럼 온갖 곳에 소모되는 자원은 무한해도 부족한 법이다.

여기서 생산에 차질이 생기면, 군국에 존재하는 그 어떤 계획이든 그대로 늦춰진다. 기계처럼 딱딱 돌아가는 군국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게 굴러가야 하는 톱니바퀴가 느려지는 건 절대 원하지 않겠지.

"그래서 군국은 여기에다가 함정을 팠어요. 우리는 멋들어지게 걸리고 말았죠."

그러니까, 여기서 막는 거다. 영궤라는 강력한 전력을 투입해서라도.

…사실 내가 알아챈 게 아니라, 영궤의 생각을 읽고 뒤늦게 깨달은 거지만! 이 나도 그 대본을 읽고 어라, 이게 큰일인가? 싶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아무런 병력도 없었어요! 오기 전에 셰이 공이 확인했잖아요!"

"그러니까 함정인 거죠. 아무도 없으면 안 되는 곳에 코빼기 하나 비치지 않았으니까. 군단조차 소모품으로 보는 군국이라면, 일초지적밖에 되지 않더라도 발목을 잡을 지연 부대가 있었어야 해요. 아무리 지금이 티르의 시간인 밤이라고 해도요."

실제로 낮에는 지연부대가 도로를 끊고 멀리서 포격을 가했다. 몇 초 지연시키진 못했지만 어쨌건 그게 군국의 방식이다.

공주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 그렇다면. 어떻게 된 거죠? 총사님이 우리를 함정에 빠뜨린 건가요…?"

"아니요. 리아의 제안은 옳았죠. 덕분에 저들은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으로 우리를 찍어누르는 대신, 조잡한 함정 속에 우리를 가두려고 애쓰게 되었으니까요."

히스토리아의 전략은 지극히 군국스럽다. 행적을 숨기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시설을 골라 선제타격하자는 효율적인 전략이다.

단지, 효율적인만큼 읽히기 쉬웠다. 자동마차 조립 공장을 부수러 방향을 튼 순간 군국도 다음 목표를 어렵잖게 예상했으리라.

그리고 뭣보다 공주, 우리를 함정에 빠뜨린 건 네 동료인 캐러팔드…로부터 정보를 캐낸 영궤 지크흐룬드거든? 어딜 책임전가를 해.

내가 독심술을 쓴다는 사실을 밝힐 수 없어서 입 다물고 있지, 문책했다면 가장 먼저 네가 심판대에 올랐을 거다.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이곳은 무대에요. 제련소의 입구부터 최심부까지 가며 노역자가 처한 끔찍한 참상을 눈앞에 관람시켜주는 루트. 그 과정 자체가 일행에게 더욱 큰 고민을 안겨줄 거예요. 다 죽여야 할지, 풀어줘야 할지, 아니면 놔둬야 할지. 리아랑 셰이 씨가 의견충돌을 내고, 티르랑 시아티가 거들어서 혼란스러워질걸요."

히스토리아는 나름 군국의 장성이다. 자신을 따르는 부하에게 죽음을 명령할 권한이 있는 그녀는 흉악범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

회귀자는 후일 넘칠 죄악을 막기 위해서 움직이는 중이다. 그런 그녀에게, 무력한 수많은 노역자를 단숨에 죽이자고 해도 곧바로 수긍할 수 없다.

시아티는 군국에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노역자를 전부 풀어주는 쪽을 선호할 이다. 그게 더 큰 혼란을 부추길 테니까.

그에 비해, 생사에 초연한 티르는 다 시귀로 만든다는 선택지까지 제공할 위인이다.

지크흐룬드가 참모인 나와 갈등 자체를 없앨 수 있는 공주를 떼어놓고자 한 것도 혼란을 부추기기 위해서겠지.

그렇게 시간을 끈 뒤에, 우리가 행동을 취하기 직전. 포위하여 일소할 셈이다.

"정말, 그럴지도 몰라요! 어떻게 하죠?"

충분히 가능성을 짚은 공주는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말했다.

"아니! 휴이 님은 그 모든 사실을 알고 계시면서 왜 바깥으로 나오신 거죠…?!"

"왜냐면, 준비된 무대를 망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대 바깥으로부터의 침입이거든요."

"네에?!"

마술과 연극. 이 둘은 모두 관객을 위한 무대를 준비한다. 서로 연기가 필요하다는 점 역시 공통점이다.

그러나 딱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그건 장르의 의무.

연극은 결국 모두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지만, 마술은 모두의 예상을 벗어나야 한다. 그 다른 방향성의 온갖 차이를 낳는다.

슬슬 끝이 보인다. 군국 국경까지 이어질 것만 같았던 콘크리트 외벽도 다 끝나가고, 우리는 제련소 입구의 반대편에 와 있었다.

거기에 도착하고 나서야 나는 자동마차를 멈추었다.

"제련소는 문이 없는 건물. 따라서, 입구로부터 가장 먼 이쪽이 바로 최심부죠."

제련소에는 문이 없다. 벽은 매끈한 피부처럼 계속 늘어져 있을 뿐이다. 여기까지 오면서 쪽문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공주가 의아해했다.

"어째서 쪽문조차 만들지 않았을까요? 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대신 건물이 구역별로 분리되어 있었죠? 격벽으로 분리하려고 했나 봐요."

"그랬다간 불 난 구역 사람들은 도망칠 곳 없을 텐데요?"

"이 건물을 설계한 사람은 그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나 보죠."

공주는 내 대답에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공주를 놔두고 훌쩍 자동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벽 한구석으로 걸어가며 나는 카드를 한 장 꺼내고 훌쩍 뒤집었다. 내가 제일 애용하는 도구, 다이아몬드 1 꼬챙이는 여전한 감각으로 나를 반겼다.

"오랜만이다. 내 친구. 많이 그리웠지?"

"멍! 그립진 않아! 오래 봐와서! 그래도 반가워!"

친구를 불렀다고 모든 인간의 친구가 오네. 나는 뒤따라오는 아지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너는 가서 나비나 가져와. 할 일이 있다."

"멍!"

아지는 냉큼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비 상자를 챙기러 떠났다. 나는 그동안 꼬챙이를 양손으로 잡고는 회색 콘크리트 벽을 향해 겨누었다.

"흡!"

온 힘을 다한 찌르기. 양손을 모아서 힘껏 내지른 꼬챙이가 콘크리트 벽을 세차게 파고들었다.

…한 1cm 정도.

"역시 콘크리트. 내 힘으로는 꿈쩍도 안 하는군."

그렇지만 이럴 때를 위해서 대지술이 있지. 무저갱 아래 갇혀있던 바람에 신성력으로 오해받았던 기술이.

꼬챙이를 세게 그었다. 매끈한 회색 벽에 자그맣지만 배덕적인 흠집이 난다. 역사적인 유산에 남긴 낙서 같은, 비가역적이기에 더 해보고 싶어지는 흔적을 새겼다.

"끄응, 이것도 꽤 힘드네…."

나는 꼬챙이를 동그랗게 움직여 폐곡선을 이룬 뒤, 땀방울을 훔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파헤쳐진 콘크리트에서 먼지가 피어오른다.

자, 일할 시간이다. 손을 벽에다 대고, 깊게 심호흡하며, 정신을 집중한다. 아득하고 광대한 땅과 그 위에 기어다니는 하찮은 내 존재를 상기하며 대지술을 썼다.

끼기긱.

꼬챙이로 구분해둔 땅이, 손으로 밀자 단순히 얹혀 있던 것처럼 그대로 밀려났다.

대지는 언제나 그대로이며 영원할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떠오르고, 가라앉고, 부딪히다가 피부가 일어나기도 하는. 그녀의 신체(神體)는 인간의 신체(身體)처럼 변동하는 물질이다.

대지모신도 인간처럼, 피부 아래에서 뜨겁게 맥동하는 새빨간 액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지라 생각하는 그건 사실 그 핏물 위에 얹어진 판(板)에 불과하며, 판은 용암의 혈류를 따라 흐르거나 움직이다가 서로 부딪히며 솟아나기도 한다.

…우리가 산이라고 부르며 우러러보는 게, 대지모신의 입장에선 고작 피부가 튼 것에 불과하다니.

이러니까 마신(魔神)이 될 만하지.

"고작 꼬챙이 따위로 벽을 매끄럽게 잘라내시다니…!"

'휴이 님도 힘을 보일 기회만 없었을 뿐, 사실 검술의 달인이셨군요! 기공이 경지에 이르렀는지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어요!'

와중에 공주는 입을 틀어막고 놀라고 있다. 내가 기공으로 콘크리트 내부를 파고들어 베어낸 줄 아는 것이다.

어떻게 보는 눈도 없냐. 대지술이잖아. 내 기공이 침투경을 가볍게 쓰는 경지라면 내가 이러고 있겠니?

양손으로 벽을 한껏 더 밀자 잘려나간 조각이 건물 안쪽으로 밀려나 쑥 떨어졌다. 묵직한 소리가 건너편에서 들리고, 동그랗게 난 구멍으로 새카만 어둠이 보였다.

좋아. 여기는 준비 됐고.

"냐하앙…. 놔, 놔라냐. 냐는, 냐는 움직이지 않을 거다냐…."

"멍! 안 돼! 일할 시간! 일 없어, 밥 없어!"

아지는 노동의 중요성을 설파하며 나비의 뒷목을 물고는 질질 끌고 오고 있었다. 나비가 발톱을 세워 땅에 박고 버티려고 했지만, 아지의 힘 앞에서 나비의 발톱은 땅을 파헤치는 쟁기 수준의 저항밖에 못 했다.

발톱은 여전히 날카롭다. 부수는 데는 차고 넘치겠지.

"준비가 끝났군요. 제가 먼저 들어갈 테니까, 아지와 나비를 데리고 따라 들어오세요."

"네…!"

'절묘한 계획이 있으신 모양이에요! 제가 힘이 된다면, 기꺼이 돕도록 할게요!'

공주가 주먹을 불끈 쥐고는, 구멍을 넘어가는 내 모습을 주의깊게 바라보았다. 후후, 좋다. 네가 나를 대단하게 생각하면 할수록 내 계획을 더 따라올 테니까….

어라. 그런데 벽이 생각보다 두껍네. 거의 터널 수준인데. 이러면 구멍이 좀 작은 거 아닌가…. 앗.

"이런, 꼈네요! 공주님, 좀 밀어주실래요?"

'…계획이, 있으시겠죠?'

벌써 의심하는 거야? 이왕 믿을 거라면 더 팍팍 믿어주라! 유통기한이 너무 짧은 거 아니냐고!

"멍! 밀어! 영, 차! 영, 차!"

"너 말고! 너 말고! 악! 발톱 세우지 마!"

EP.256 강철의 나라와 얼굴 없는 인간들 - 5

최심부 제어실에 들어서기 직전까지도 회귀자와 히스토리아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녀들이 아니라 그 누가 와도 비슷한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회귀자는 지금껏 몇 번이고 반복했는지 모를 대사를 외쳤다.

"무턱이고 다 죽이는 게 능사는 아니라니까!"

히스토리아 역시도 비슷한 논조로 반박했다.

"다른 방법이 없잖아. 왜, 무력한 상대는 못 죽이겠니? 그들이 일어서서 결투해야만 죽일 수 있어? 기사 나부랭이 나셨네."

"아니, 결국 미뤄뒀던 사형이 어쨌든. 그딴 짓거리가 좋게 돌아갈 리 없잖아. 연금강 제련소를 싹 털어버리면 결국 나중에는 무고한 사람까지 잡아 오게 된다니까?"

"기사가 아니라 예언자였어? 미래라도 보고 왔니?"

"응… 아니! 그런 단순한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고!"

전투로 이어지지 않기에 끝나지 않을 다툼이었다. 정의도 정답도 없는 문제 앞에서 둘은 갖은 논쟁을 펼쳤으나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았다.

'캐러팔드'는 당황해하며 긴 복도 끝에 있는 철문을 가리켰다.

"저기, 저곳이 최심부 제어실입니다, 만…."

으르렁거리는 둘 사이에 끼어들려는 캐러팔드를, 시아티가 그의 팔을 당겨 제지했다.

"캐러팔드. 일단 물러나."

"내가 끼어들 공간이 아닌 것 같아. 이거 어쩌지? 공주님이 계셨어야 했나?"

"…계셨어도 별 차이 없었을걸. 이들은 공주님의 명령을 듣는 사람이 아니니까."

"이거 곤란한데."

'캐러팔드'는 난처한 얼굴을 하면서 내심 웃었다.

연금강 제련소는 군국의 군인조차도 잔혹함에 혀를 내두르는 시설이다. 쇠사슬에 꿰인 채 이동하는 사람들이 그나마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그 끔찍함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 건물에서 그들이 본 건, 작은 우리에 갇힌 채로 비명을 지르는 죄수들이었다. 왼팔을 밖으로 내뻗은 그들의 생체 단말에는 깔때기가 달려있었다.

녹아내린 연금강이 깔때기 위로 떨어진다. 방울져 떨어지지만 소리는 돌멩이 못지않게 둔탁하다. 그러면 녹은 철은 몸으로 퍼져나가서 마력을 잔뜩 흡수하고는, 한 바퀴 돌아 생체 단말로 돌아온다. 강철의 열매가 그의 팔목에 맺힌다.

죄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빠르게 떼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점차 무거워지는 무게에 팔이 꺾이니까.

그렇게 레일에 떨어진 연금강은 어디론가로 실려간다.

위 과정은 그날 치 노역시간이 다할 때까지 기계적으로 반복된다.

'거기! 살려줘! 제발, 뭐든지 할게!'

'푸, 풀어주세요! 앞으로는 절대로 죄를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착하게 살게요!'

구해달라는 아우성이 몰아치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한 일행은 그들을 무시하고 지나갔다. 그러면 도와달라는 호소는 저주로 바뀌어서 쏟아진다. 회귀자와 히스토리아는 그 모든 지옥을 뒤로 한 채 최심부 제어실에 도달했다.

고작 그런 거로 마음의 상처를 입을 만큼 그들이 나약하진 않다. 다만, 고민할 이유는 충분히 되었다.

"뭣보다. 이런 방식으로 한 번 죗값을 치른 이들이잖아. 여기서 우리 멋대로 죽여버리면 좀 그래."

"군국을 향해 테러를 저지르는 주제에 별 이유가 다 필요하네. 네 억지를 들어주느라 휴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안 봐도 훤해."

"그 자식 이야기는 갑자기 왜 나와? 아무런 관계 없잖아!"

이들은 알까.

그들에게 보여준 모든 광경은, 사실 '캐러팔드'를 연기하는 지크흐룬드가 절묘하게 설계한 것임을.

남몰래 반응을 살핀다. 시선을 향하지 않고 감정을 읽는 건 그의 특기다.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을 구분한 뒤, 한쪽의 반응이 약해진다 싶으면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 새로이 루트를 짠다.

결국, 둘의 의견은 완전히 갈라져 서로 대립하게 된다.

'갈등, 대립, 그리고 고뇌. 완벽한 이야기야. 역시, 그 어떤 호화로운 무대도, 대단한 관객을 모신 극장도. 이 드넓은 세상을 배경으로 짠 무대에 비할 바는 아니지.'

'캐러팔드'는 잠시 그의 아주 예전 모습을 떠올렸다.

제국의 제후국은 말만 제후국이지 사실상 식민지나 다름이 없었다. 식량, 재산, 문화, 사람까지. 제후국은 제국에게 공물을 바치며 명맥을 유지해야 했다.

제국에 바칠 공물 중 가장 주목받은 것이 바로 문화적 자산이었다. 별다른 비용이 들지 않으면서, 제국 고위층의 허영심을 잔뜩 채워주며, 고유한 특색을 가진 문화야말로 제후국의 으뜸 가는 공물이었다.

특히 근래 가장 화제가 되는 건 바로 극(劇). 제후국은 공물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나라에서 직접 극단을 운영하곤 했다.

극단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당연하게도 배우다.

온갖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능력이 필요하다. 뛰어난 암기력, 대상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관찰력, 무대 위에서 영웅담을 재현할 정도의 신체능력, 익힌 지식을 써먹는 응용력 등등.

영궤라 불리기 전 그는 어디 내놔도 꿀릴 것 없는 배우였다.

'하나, 제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제후국에서는 정작 현실을 비출 수 없었지. 나는 무대 위에서만 살아있던 반송장이었다.'

제국에서 온 관리는 대놓고 뇌물을 받는다. 그러나 누구도 그에 대해 비판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뇌물도 뇌물이 아니라 포장해야 하는 처지다.

지크흐룬드는 그 사실이 '우스웠다'.

부당하다거나 억울하다거나. 권력 앞에서 울분을 삼킨다거나 하는 저항심은 하나도 없다.

그저 우스웠을 뿐.

부끄럽다면 뇌물을 받지 않으면 된다. 재물이 고프다면 기뻐하며 그것을 취하면 된다.

하나, 겉으로는 고고한 척 잘난 척하며 뒤로는 온갖 접대를 받는 그의 모습이 너무 우스워서, 지크흐룬드는 그를 한껏 비꼬았다. 좀스러운 수염을 매달고 우스꽝스러운 연기로 그를 만인의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예술가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해학적인 본성을 표출한 것이었으나, 그 결과는 참담했다.

'아하하핫! 그때의 나는 몰랐겠지! 덕분에 세상을 떠돌아다녀야 할 운명이 되리라곤.'

오랜 배우 생활은 큰 도움이 되었다. 제국에서 쫓아온 무시무시한 추적자를 앞에 두고도 태연하게 연기한 덕분에 위기를 몇 차례 넘기기도 했다.

얼굴을 꾸미고. 거주지를 옮기고. 옷을 고치고. 태도를 바꾸고. 인연도 전부 갈아엎으며.

진짜 자신이 누구였는지 다 잊어갈 무렵.

어떻게 알았는지, '그녀'가 찾아왔다.

'새로 태어난 나라에서 부정(不正)을 없애고 싶으니까 힘을 빌려달라고! 아하하핫! 말이 되는 소리를. 나는, 딱히 청렴결백을 좋아하진 않는데!'

하지만 지크흐룬드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오랜 추격 세월 끝에 지쳐있던 그로선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신상의 위협도 위협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자아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지크흐룬드는 타고난 배우였기에, 수십 개의 페르소나를 갖고 자기 자신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덮어썼다. 너무나도 대단한 연기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났으나, 정체성을 자주 바꾼 나머지 이제는 원래 자신이 무엇인지 잘 떠오르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수십 개의 인격 중 하나가 아닌, 그 모두의 총칭인 '자신'을 찾아온 '그녀'는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하나의 닻이었다.

'아차차! 또 까먹을라. 집중하자. 집중한다. 잊지 않는다. 나는 캐러팔드, 로 분장한 영궤 지크흐룬드.'

마음을 다스린 '캐러팔드'는 다시 마음속으로 상을 그렸다. 평범한 체격, 평범한 골격. 아무런 특징도 특별한 인상도 없는, 도화지 같은 남자의 얼굴. '캐러팔드'의 연기가 끝나면 돌아가야 할 지크흐룬드의 몸.

수많은 인격과 신분 사이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만든 자아의 닻.

다시 연기를 시작한 지크흐룬드는 즐거이 눈앞의 배우들을 바라보았다. 그가 만든 다툼이 점차 고조되어가고 있다.

본래 이럴 때는 제삼자의 중재가 필요하기 마련이나, 안타깝게도 여기에는 이들을 중재할 사람이 없다.

그나마 비교적 냉정한 티르가 둘을 재촉했다.

[슬슬 방향을 정해두거라. 아니면 내 직접 휴를 데리고 오겠다. 휴가 없으니 도저히 이야기가 정리되지 않는구나.]

"칫. 알았어. 어쨌든, 이 시설 자체를 파괴할 생각은 있는 거지? 노역자들의 거취를 결정하기 전에, 일단 다 부수고 생각하자…."

회귀자가 단순하고 폭력적인 결론을 내릴 무렵, 그녀는 건너편에서 인기척을 느끼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순식간에 표정을 바꾼 회귀자는 날카로운 철문 너머를 노려보며 '캐러팔드'에게 물었다.

"잠깐. 안에서 기척이 느껴지는데? 이봐, 안에 경비 병력이라도 있어?"

"…그, 글쎄요. 위급 상황이니 그럴지도 모릅니다. 저도 잘은."

'경비 병력? 있을 리가 없다. 이 안에 군국의 병력이 숨어 봐야 별 도움도 안 되고, 오히려 배역간의 갈등에 끼어드는 잡음이 될 뿐이다. 매복한 병력이 등장하는 장면은 한참 나중인데.'

모두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영문 모를 방해자가 나타난 이상, 이제 서로 다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지크흐룬드에게는 달갑지 않게도 말이다.

"들어가자! 내가 먼저 진입할게!"

회귀자가 쌍검을 앞으로 내밀고는 냅다 뛰었다. 건너편 복도까지 단 두 걸음 만에 뛰어간 회귀자는 달려가던 속도 그대로 냅다 강철문을 걷어찼다. 기공을 잔뜩 두른 채 내지른 발길질은 3레벨 연금강 강철문도 사정없이 찌그러뜨렸다.

"누구냐…! 어?"

회귀자는 당장 검을 휘두르려다 말고 우뚝 멈췄다.

복잡한 기계장치와 낯선 소음으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철과 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온다. 인간과 달리 기계가 움직이는 데에는 빛이 필요 없는지, 희미한 조명이 내부를 어슴푸레 비추는 최심부 제어실 한복판에 서 있는 존재는.

다름 아닌 나.

아까 이 참상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다면서 밖으로 뛰쳐나갔던 내가 최심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휴이? 어떻게 여길… 우리를 앞질러 온 거야?"

[휴? 마침 잘 왔구나.]

곧이어 티르, 히스토리아, 그리고 시아티와 '캐러팔드'가 연이어 모습을 드러냈다. 내 등장에 다들 놀랐지만 딱 그 정도. 애초에 아군이니 경계할 필요가 전혀 없다.

다만, '캐러팔드'만은 불길한 흐름을 느끼고는 몸을 떨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한 번 퇴장한 배역이 어째서 저기에? 이건 대본에 없는 내용인데…!'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침침한 조명이 나를 감싸고 선 공간에서.

나는 잔뜩 힘을 주고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군요. 여러분이 도착하기 전에 끝내고 싶었는데."

EP.257 강철의 나라와 얼굴 없는 인간들 - 6

"생각보다 일찍 오셨군요. 여러분이 도착하기 전에 끝내고 싶었는데."

진심이다. 원래 이들이 오기 전 모든 준비를 끝내놓고 맞이하려고 했다.

외벽을 뚫고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독심술로 미리 안쪽을 살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내 행보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렇게 텅 빈 제어실에 침투한 나는, 이내 커다란 문제에 봉착했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마음을 읽을 사람이 없으니, 눈앞에 놓인 수많은 기계장치를 보고도 구조를 알 수가 없었다.

망할 독심술. 독심술이라고 진짜 사람 마음밖에 못 읽네. 사람 마음도 읽는데 이깟 기계장치를 못 읽어?

도와줄 사람이 있나 살펴봤지만, 여기에서는 공주도 쓸모없긴 마찬가지. 아지와 나비를 써서 무차별 파괴할까 생각하기도 했으나, 그건 최후의 수단.

어쩔 수 없이 나는 '캐러팔드'를 기다렸다. 그가 여기 도착한다면, 그의 생각을 읽어서 말살 장치가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으리라.

그리고 '캐러팔드'가 도착했다.

"못 버티겠다더니, 왜 다시 돌아왔어?"

"혹시나 여러분이 제련소를 어떻게 할지 결론을 내리지 못할까 봐 걱정되어서요. 셰이 씨,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죠?"

정곡을 찔린 회귀자가 움찔했다. 나는 대놓고 혀를 찼다.

부끄럽다, 부끄러워. 아무리 '캐러팔드'가 뒤에서 조종했다지만 진짜로 휘둘리면 어떻게 해. 이래서야 회귀자라고 하겠나.

"…으, 응. 그래도 거의 났어. 좀만 기다리면 다 해결할 수 있."

"뭐, 괜찮아요. 그러기 위해 제가 온 거니까요."

뒷짐을 진 채 제어실을 가로질러 천천히 걸었다. 낯선 분위기에 다들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는 동안, 나는 빠르게 '캐러팔드'의 생각을 읽었다.

'최악이군. 무대가 내 손을 떠났어. 흐름이 저쪽으로 넘어갔다.'

낯선 흐름에 '캐러팔드'가 대처하는 방법은, 진부한 반응으로 존재감을 지우고 흐름에 편승하는 것이었다.

억지로 존재감을 내보였다간 우리가 의심할 테니까…도 이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는 천생이 연기자이며, 연출가다. 잘 짜인 무대는 가끔 만든 이의 손에서 벗어나기 마련. 천생 연기자인 그는, 연극이 대본을 초월하려는 그 순간을 방해하는 것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과병도 그렇고, 영궤도 그렇고. 육장성이란 것들은 다 정상이 아니구만. 군국은 이딴 녀석들을 어떻게 모았는지.

어쨌든. 덕분에 시간을 벌었다. 이 흐름이 끝나지 않는 한, 그러니까 내 대사가 유의미하게 계속되는 한 지켜볼 거라는 뜻이지?

좋아. 받아주마.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우뚝 솟은 강철막대 위에 손을 살짝 걸치며 말했다.

"셰이 씨에겐 경천동지할 힘이 있어요. 굳이 말살 장치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이곳 모두를 쉽게 죽일 수 있죠. 천앵과 지잔을 휘두르기만 한다면 이 건물째로 땅 아래 파묻을 수 있으니까요."

"그딴 짓 안 해!"

"네. 알아요. 셰이 씨는 그것이 가능하기에 도리어 이들을 죽이는 데 회의적이죠. 장치를 쓰든, 아니면 힘을 쓰든 어차피 마음먹기에 달린 일. 한 번 선을 넘어버리면, 앞으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계속 넘나들까 봐."

히스토리아는 그 이야기를 듣고 흠칫거렸다. 약간이지만 회귀자의 심정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회귀자가 회귀한다는 사실은 모르겠지만, 어쨌건 그녀의 양손에는 말 그대로 경천동지할 힘이 잠들어 있다. 만일 선을 넘어버린 회귀자가 힘을 마구잡이로 쓴다면? 그 여파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면?

역사서에 한 획을 긋는 끔찍한 살육이 벌어질 것이다.

"갖고 있으면 약간 불편하지만, 한 번 버리면 다시는 얻지 못할 소중한 정의죠.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셰이 씨가 가진 그것이 참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그나저나 이 강철 막대는 말살 장치가 아닌가? 손으로 잡았는데도 '캐러팔드'가 아무런 반응을 안 보이잖아.

저 페르소나. 읽기 살짝 귀찮네. 악질적인 서술 트릭으로 가득 찬 책을 읽는 기분이야.

어쨌건, 이건 말살 장치가 아닌 듯하니. 나는 입 발린 말을 계속하며 빨간 손잡이가 달린 레버가 있는 곳까지 움직였다.

"하지만 셰이 씨, 리아는 지금 입장이 달라요. 리아는 이미 선을 넘어버린 걸요. 군국에서 자라 군국에서 힘과 권력을 차지한 리아는 지금, 군국에서 손에 넣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우리 편이 되기로 했어요."

나는 빨간 손잡이 위로 자연스럽게 손을 얹으며 말을 이었다.

"리아는 군국의 육장성이에요. 거기까지 도달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재능을 갈고닦았죠. 하지만, 리아가 육장성이 된 이유는 군국에 충성하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휴이. 그만…."

어어, 끼어들지 마. 내 대사가 끊기면 '캐러팔드'가 지크흐룬드로 돌아올지도 몰라.

한층 목소리를 높여 히스토리아의 말을 가렸다.

"엇나간 친구들. 한때 동거동락하던 동기들. 군국에게 버림받고 레지스탕스에 투신한 하멜른의 아이들. 생사조차 묘연해진 저까지. 군국에는 우리가 있을 자리가 없죠. 그래서 리아는 장성이 되었어요. 장성급이 되어야 부관을 임명할 수 있게 되니까."

"너…."

"하지만 친구들이 하나같이 제멋대로인 바람에, 리아는 결국 애써서 이룩한 육장성 자리를 내버리고 이쪽에 붙게 되었죠. 이미 모든 선을 넘은 거예요. 따라서 리아는 모든 작전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둬야 해요. 이게 그녀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니까."

회귀자는 이제야 조금 이해했는지,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다시 히스토리아를 보았다.

"아아. 네가 그래서 그랬구나. 왠지."

'전쟁에 패하고 신왕국이 들어서든, 레지스탕스가 봉기에 성공해 공화국이 들어서든 한 자리 차지하더니. 결국 자리를 차지하는 그 자체가 목적이었구나…. 좋아. 이건 다음 회차에 써먹을 수 있겠는데.'

"시끄러워! 너야말로, 어중간한 각오로 일을 망치지 마. 일이 잘못되었다간 봐. 나는 휴이와 시아티만 데리고 전속력으로 도망칠 거니까!"

속내를 들춰서 미안, 히스토리아. 하지만 유의미한 대사를 하지 않으면 '캐러팔드'가 나를 기다리지 않을 거라서. 어쩔 수 없었어.

그나저나 이 빨간 손잡이도 아닌가. 도대체 뭐가 말살 장치야? 혹시 이건가? 어디, 옆으로 한 걸음 더….

'…이 흐름, 위험하군. 지금 이 무대, 이 대사. 그리고 지금 그가 밟고 선 그것까지. 그가 노리는 건!'

빙고. 이거였구나.

나는 미소를 지으며 발을 세게 굴렀다. 그러자 네모난 판이 열리고, 그 안쪽에서 부자연스럽게 커다란 톱니바퀴가 천천히 솟아올랐다. 크기가 상당히 커서, 마치 거대한 배를 조종하는 키처럼 보였다.

하긴, 말살 장치 같은 흉악한 게 실수로라도 건드릴 위치에 있으면 안 되지.

"결국, 셰이 씨나 리아. 둘 중 그 누구도 나쁘지 않아요. 이 일에 고민하고 책임감을 느껴야 할만큼 잘못되지는 않았단 말이죠. 하지만, 어떻게 책임감을 안 느낄 수 있나요. 아무리 죄인이라고 한들 이토록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려있는데."

"네 말대로야. 우리가 굳이 다툴 필요는 없지."

'쳇. 또 도움을 받아버렸네.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 녀석이 있으면 편리해. 총사의 건도 그렇고, 티르칸쟈카의 건도 그렇고. 다음 회차에서도 데리고 다녀야겠는걸.'

회귀자는 내가 둘의 싸움을 중재하기 위해 왔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미안하지만 반만 맞았다.

나는 너희 싸움을 막기 위해 온 게 아니라.

"그런데 생각해보면 좀 억울하지 않아요? 제련소의 모든 인간을 죽일 장치를 만든 건 군국인데. 왜 우리가 고민해야 할까요?"

거기까지 말한 나는 양손으로 톱니바퀴의 요철을 붙잡았다. 이 거대한 공장의 일부인 것만 같은 묵직한 감각이 느껴졌다.

톱니바퀴, 장치, 그리고 내가 한 말.

회귀자는 내가 뭘 하려는 건지 직감적으로 깨닫고는 외쳤다.

"잠깐만! 너, 설마!"

"딜레마랍시고 극단적인 상황을 만들어놓고 판단을 강요하는 거. 좀 건방지죠? 군국이 만든 건 환경이고 우리가 하면 딜레마에요? 웃기네! 군국은 인간의 나라가 아니야? 나라라고 해도 마찬가지지!"

마지막 한 마디는 악에 받친 외침이 되었다. 나는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 온힘을 다해 톱니바퀴를 돌렸다. 만들어진 이후 단 한번도 쓰인 적 없던 장치가 천천히 움직였다.

말살 장치라는 이름을 가진, 이 제련소의 모든 노역자를 죽음으로 이끌 장치를.

"전쟁을 치르기 위해 흉악범을 구할지, 아니면 정의롭게 사형을 집행할지! 군국, 네가 고민할 때다!"

제련소 어딘가.

갈고리에 꿰인 채 걷고 있던 한 노역자는 커다랗게 덜컹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 주어진 업무를 끝마치고 녹초가 된 상태다. 레일을 따라 움직이는 쇠사슬은 이제 그를 휴게실로 인도해야 했다. 거기서 그는 마력이 회복되기 전까지 꿀같은 휴식을 취할 것이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지금 쇠사슬은 그를 휴게실이 아닌 어떤 낯선 곳으로 이끌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레일이 평소와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수십 번 확인한 끝에 확신했다.

평소와 뭔가 다르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불길하게 다가올 이질감은, 그에게 있어 희망이었다.

산 정상에서는 어디를 향해 걷든 내리막이다.

마찬가지로, 연금강 제련소의 일상은 세상에서 제일 끔찍하다. 그러니, 이 일상에서 벗어난다면 그만큼 좋아진다는 뜻이 아닌가.

혹여나 무언가 오류가 생긴 게 아닐까? 아까 낯선 이들이 이곳에 들어왔던데, 뭘 잘못 건드린 게 아닐까? 당장 감독관들이 뛰어와서 그를 다시 잡아가는 게 아닐까?

그는 간신이 얻은 이 평화가 사라질까 봐, 좋아하는 기색을 애써 숨기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쇠사슬의 인도를 따랐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쇠사슬이 그를 잡아 끄는 장소는… 연금강을 녹여내는 고로. 마법의 화염이 강철을 녹여내는 연옥 한가운데라는 것을.

마력을 쓰기 위해선 살아있는 인간이 필요하다.

달리 말해, 살아있는 인간을 쓰면 마력을 얻을 수 있다.

인간을 녹여 만든 강철은, 평범한 것보다 아름다운 소리를 내리라.

EP.258 강철의 나라와 얼굴 없는 인간들 - 7

'텄군, 텄어. 아아, 제법 괜찮은 연극이었는데.'

'캐러팔드'는 지크흐룬드로 돌아왔다. 마음 같아서는 이 무대에서 조금 더 어울리고 싶었으나, '캐러팔드'와는 달리 지크흐룬드에겐 사명이 있었다.

'제련소가 증발하면… 큰일이지. 작전 실패야. 이거, 다들 가만히 있지 않겠지.'

원래 그의 계획은 이게 아니었다.

제어실 한가운데에는 함정이 마련되어 있었다. 급조하긴 했지만 성능은 확실한 종류의 함정이다. 빨간 손잡이가 달린, 누가 봐도 인상적인 레버가 그 함정의 트리거였다.

원래 회귀자와 히스토리아는 언쟁하다가 결국 함정을 작동시키고는, 군국이 준비한 함정에 빠졌어야 했다.

그런데 지크흐룬드의 생각을 읽은 내가 함정을 건너뛰고는 진짜 말살 장치를 작동시킨 것이다.

'말살 장치를 미리 없애야 했나… 아니, 시간이 촉박해서 그럴 여유까진 없었지. 함정이야 급조할 수 있어도, 말살 장치는 이 제련소를 만들 때부터 설계된 것이니.'

거기까지 생각한 지크흐룬드는 미심쩍은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그나저나, 피리 부는 사나이는 저것이 말살 장치인지 어떻게 알았지? 인상적인 빨간 손잡이까지 달아두었는데, 약 올리듯 건드리기만 하다니.'

지크흐룬드가 몰입에서 벗어나며 한탄하는 동안, 내 만행을 깨달은 회귀자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미친놈아! 도대체 뭐하는 거야?!"

"보면 몰라요? 운명의 수레바퀴를 돌렸어요!"

"당장 돌려놔!"

"안 돼요. 이건 따지자면 절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물건을 떨어뜨린 거랑 마찬가지라서, 한 번 작동시키면 다시 돌려놓는다고 돌아오지 않아요!"

"그러면 어떻게 할 거야?!"

"그걸 왜 제가 고민해야 하죠?"

회귀자는 내 대답이 기가 찬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진지했다.

"법을 만든 것도 군국, 법을 어기면 강제 노역형에 처한 것도 군국. 제련소를 만든 것도, 거기에 말살 장치라는 걸 만든 것도 군국! 제가 한 건 눈앞에 딱 놓여있는 버튼을 누른 죄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게 온전히 저의 탓인가요?"

"궤변이야! 어쨌건 이대로 가면 이들은 죽어. 그리고 이들이 죽어서 잠깐 군국의 계획을 늦춘다고 해도, 그게 더 나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이들을 살리고 싶어요? 그러면 가서 살리시면 돼요. 이 제련소가 그들을 죽음으로 인도하기 전, 셰이 씨가 직접 구하세요!"

"뭐어?"

[그만.]

티르가 회귀자의 말을 끊고 나섰다. 잠시 한숨을 내쉬며 회귀자를 바라본 티르는, 이내 나를 향해 따뜻한 시선을 보내며 걸어왔다.

[휴는 너희를 위해 악역을 자처한 게 아니더냐.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책망하다니. 부끄럼을 알거라.]

"이걸 어떻게 고마워해?!"

[어차피 쉬이 결론 나지 않을 일. 무의미하게 심력을 소모하기 전에 휴가 모든 죄를 떠안고 내린 것이다. 셰이, 현시점에 네가 필히 해야 할 것은 휴를 탓하는 게 아니다. 다음에 해야 할 것을 떠올리고, 행하는 것이지.]

준엄하게 회귀자를 꾸짖은 티르는 나에게 다가와서는, 차가운 손으로 내 손을 잡으며 나를 위로했다.

[괜찮다. 우리 중 누구도 네게 실망하지 않았다. 자책하지 말거라. 셰이가 네게 무어라고 해도, 그건 아쉬움의 토로일 뿐이지 네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니.]

"네? 저는 딱히 자책하지 않고 있는데요."

[그래. 그런 거로 하자꾸나.]

티르가 미소를 지으며 위로하는 포지션을 유지했다. 그런 거로 하자는 게 아니라. 애초에 나는 아무런 죄책감도 없다니까? 군국이 만든 장치인데 왜 내가 책임을 느껴야 해?

뭐, 그래도 나에게만 다정한 연상에게 위로받는 건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네. 조금 아득히 연상이긴 하지만.

"굳이 네가 떠맡을 필요는 없었어."

스스로 제안한 전략적인 목표는 이뤘지만, 히스토리아는 여전히 개운치 않았는지 나를 향해 투덜거렸다.

"내가 했어야 했어. 다른 누군가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었는데…."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단지 톱니바퀴를 돌렸을 뿐이니까."

"나는 육장성이야. 본인의 판단에 따라 군국의 시설을 작동시킬 권한이 있어."

"누가 맡겼다고 자격이 생기나? 권한이 있든 없든, 마지막에 내 몸을 움직이는 건 내 의지인데."

"그렇더라도."

아, 군국이 만든 장치니까 군국이 준 권한으로 작동시켰으면 훨씬 좋은 그림이었겠네. 하지만 히스토리아도 무엇이 말살 장치인지는 몰랐으니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휴이. 너 어떻게 말살 장치를 찾아냈…."

히스토리아는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 자신을 제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누군가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캐러팔드?"

캐러팔드가 아니었다. 이미 지크흐룬드는 배역에서 벗어났으니까.

성큼성큼 걸어간 지크흐룬드는 어느 순간 빨간 손잡이를 가진 레버 앞에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은 오묘했다. 아쉬운 듯하면서도 초연한 듯, 다차원적인 미소를 지으며 손잡이를 콱 쥐었다.

모두가 무대 중심에 나타난 그를 향해 의아해하는 시선을 보낼 때, 그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한탄했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말이지."

"기다려, 캐러팔드! 너, 무슨…!"

말이 끝난 직후, 지크흐룬드는 빨간 손잡이를 세차게 당겼다.

함정은 급조한 것이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극적이었다. 미처 반응할 틈도 없었다.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촤라라라락.

제어실 벽에는 묘한 물건이 벽에 매달려 있었다. 조명이 없기에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그 장식품은, 지크흐룬드가 레버를 당기자 일제히 움직였다.

그야말로 빛의 속도. 저항할 틈조차 없다. 인식한 순간, 제련소를 가득 메운 함정이 우리에게 쏟아졌다.

단, 미리 생각을 읽고 있던 나는 한발 빠르게 반응했다.

"티르! 이리로!"

[휴? 갑자기 왜.]

나는 티르를 잡아당기는 동시에 카드 한 장을 꺼냈다.

다이아몬드 퀸. 천의 여왕. 연금사를 압축해서 만들어둔, 원초적인 의복 패킷을 펼쳤다. 다른 카드와 조합하면 마도장교들이 쓰는 영의(靈衣)가 되지만, 지금은 그럴 짬이 없다.

갑옷 같기도, 혹은 비단 같기도 한 널따란 천이 펼쳐진다. 크기는 불만족스럽지만 티르의 몸을 가리기엔 충분하다. 손을 털어 천을 넓게 펼친 뒤 티르의 몸을 크게 감쌌다.

놀랄 법도 하건만, 티르는 가만히 내가 하는 일을 보고만 있었다. 티르의 성격이 느긋해서 다행이다. 똑같은 일을 회귀자에게 했다면 냉큼 베어버렸겠지.

천이 티르의 전신을 감싼 직후.

빛이 번쩍였다.

수천 개의 태양이 번쩍였다. 벽면을 장식하고 있던 건, 하나하나가 밝은 빛을 가진 탐조등. 고출력의 빛을 뿜어내는 탐조등 수천 개, 수만 개가 일제히 광선을 뿜어냈다.

그 빛은 직접 닿기도, 땅에 부딪히고 튀겨 나오기도, 서로서로 겹치고 겹쳐 하얗게 타오르기도 했다.

압도적인 광량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본능적으로 눈을 감지만, 폭발하는 듯한 빛은 얄팍한 눈꺼풀을 비웃으며 내 망막 안쪽까지 침범했다.

"윽! 빛?!"

군국이 파 놓은 함정. 그건 제어실에 미리 잔뜩 배치해놓은 어마어마한 숫자의 탐조등이었다. 다름 아닌, 티르를 가두기 위해서다.

태양은 온누리를 비출 정도로 밝지만 땅 위에 선 우리 입장에선 하늘에 뜬 작은 구멍일 뿐이다. 직접 노려보지만 않으면 해롭지 않다.

그에 비해, 군국이 만든 탐조등은 사방팔방에서 빛을 뿜어내며 우리를 포위하고 있었다. 시선을 어디로 향하든 눈이 부셔서 뜰 수조차 없다.

[지금은 태양이 잠들었는데, 어찌 이 정도의 빛이…!]

"탐조등이에요! 달아오른 금속은 빛을 내거든요! 금속을 가공하는 제련소는 탐조등을 만드는 공장이기도 하거든요!"

해가 뜨지 않는 밤 중에 티르를 상대하기 위해 짜낸 고육책. 만일 내가 없었다면 꽤 유효타였겠지. 인공의 빛에 대항하기 위해 어둠이 미친 듯이 소모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태양과는 달리 탐조등의 인공적인 빛은 인간의 눈에 보이는 빛만 내는 실용적인 물건이다. 태양의 것보다는 덜 신비하고 덜 뜨거운 빛은 내 두꺼운 천자락을 꿰뚫지 못했다.

"티르, 괜찮아요?"

[괘, 괜찮다. 지켜지는 쪽도 꽤 나쁘지 않은 기분이구나….]

내 옷자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며 티르가 머리를 기댔다. 뭐가 나쁘지 않아. 충분히 나쁘거든! 지켜지지 말고 나를 지켜줘야지!

지금 지크흐룬드가 움직인다고!

'일단, 변수를 제거하자.'

모두가 잠깐 시각을 잃은 그 틈을 지크흐룬드는 놓치지 않았다. 숨겨둔 단검을 꺼내 순식간에 나를 향해 뻗었다. 티르가 가까이 있지만, 바깥이 빛으로 가득 찼기에 티르는 그 공격을 깨닫지 못했다.

이걸 어쩌지? 티르를 방패로 삼을까? 아니, 그건 최후의 수다. 티르를 감싼 천이 찢어지기라도 하면 어둠 소모가 장난이 아닐 테니까.

어차피 저쪽도 시력을 회복한 건 아니고, 단지 내가 있던 위치를 기억해서 공격했을 뿐. 그렇다면.

"티르! 실례할게요!"

[…마음껏 하거라.]

"마음껏 할 것도 없어!"

나는 티르를 감싸 안은 채로 곧장 몸을 던졌다. 나와 티르의 몸이 땅에 거세게 부딪혔다. 등에 아찔한 아픔이 찾아든 것도 잠시, 지크흐룬드가 내 위치를 특정할 수 없도록 필사적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딱딱한 바닥에 등이 다 배길 정도였지만, 그래도 칼에 찔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지크흐룬드도 빛의 폭포 속에서 내 움직임을 쫓지 못하고 놓쳤다.

휴, 살았다. 눈을 감아도 생각을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어디, 티르는 괜찮나….

[이, 이게 보쌈이라는 풍습인가…. 전해 들을 때는 어처구니가 없어 말도 나오지 않았으나, 직접 당하니 색다른 기분이구나….]

헛소리하는 걸 보니 어디 찢어지지는 않은 모양이다. 티르는 훨씬 괜찮고. 애초에 땅바닥을 구른다고 다칠 흡혈귀가 아니니까 말이야.

'…함정이 어떤 것인지 간파했나? 거기다 나의 공격까지 피하다니. 직관이나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수준이다.'

쳇. 그보다 내 걱정이나 해야겠다. 상황이 급해서 먼저 움직였는데 지크흐룬드의 의심을 사고 말았네.

'미심쩍군. 이건, 확인할 필요가 있어. 나의 변검을 드러내는 한이 있더라도.'

감기공을 익힌 회귀자와 히스토리아는 순식간에 빛에 적응했다. 경지에 이른 기공사는 눈에도 기공을 불어넣을 수 있다. 망막을 태울 듯한 빛에 적응한 둘은 냉큼 상황을 파악했다.

"이 빛이면, 어둠을 소모하기 위한 함정이야. 티르칸쟈카를 붙들기 위한 함정! 어? 그러면?"

무언가를 깨달은 회귀자가 곧장 '캐러팔드'의 모습을 한 지크흐룬드를 가리켰다. 그는 한 손에 단검을 든 채, 누군가를 찌르려는 듯한 이질적인 모습으로 빛 한가운데 서 있었다.

히스토리아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캐러팔드는 레버를 잡아당겼고, 그 결과 수많은 탐조등이 일제히 켜졌다.

여기서 이어지는 결론.

"캐러팔드가 함정을 작동시켰어."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멜른에서 살아남은 동기들에게 묘한 애착을 가진 히스토리아지만, 정도는 존재한다. 마도장교 지망생이었던 캐러팔드는 히스토리아와 심정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의심도 쉬웠다.

"배신? 아니면, 변장…?"

"어찌 되었든, 적이라는 소리지? 그렇다면!"

회귀자는 약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즉각 천앵을 들고는 돌격했다. 히스토리아가 잠깐 주저한 것에 비하면, 혹 조금 전까지 칼을 대고 맞서 싸운 관계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자연스러운 공격이었다.

투명한 검이 빛무리를 반으로 가르며 지크흐룬드를 크게 베었다.

"끄아아아악!"

지크흐룬드는 피를 쏟으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힘이 풀린 손이 단검을 떨어뜨렸다. 단숨에 그를 몰아붙인 회귀자는 천앵을 겨누며 소리쳤다.

"당장 함정을 멈…! 어? 죽었어?"

회귀자는 당황했다. 딱히 살초를 펼친 것도 아닌데, 아무리 약하다고 한들 몸을 파들파들 떨면서 죽어버린 것이다.

"뭐야, 인형? 아니, 아까까지의 느낌을 "

아니, 저건 연기다. 지크흐룬드가 지금까지 몇 번이고 해왔던 죽은 척한 연기.

호흡을 멈추고 기공을 흐트러뜨리는 것까지 완벽하게 흉내 낸 실감 나는 연기 앞에서 회귀자가 잠깐 당황했다.

마음 같아서는 죽은 척 연기하는 거라고 알려주고 싶지만, 그랬다간 지크흐룬드의 주의가 더 내 쪽으로 향할 것이다. 지금은 그냥 입을 다물고 있자.

지금 여기서 상황을 따라오지 못한 건 시아티뿐이었다.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있지만, 아직 그녀의 시야는 회복되지 않은 채였다.

"윽…. 캐러팔드? 어디 있어?"

작게 혀를 찬 히스토리아는 시아티를 붙들며 외쳤다.

"시아티, 똑똑히 들어! 캐러팔드는 우릴 배신했고. 그 탓에 지금 우린 함정에 빠졌어!"

"히스토리아? 너는 갑자기 왜 우리를 이간질하는."

"내 말 들어! 지금 너를 이해시키기 위해 하나하나 신경 쓸 시간 없으니까!"

날카롭게 소리친 히스토리아는 곧장 시아티를 데리고 비교적 그늘진 곳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히스토리아는 냅다 소리쳤다.

"귀염둥이!"

회귀자가 즉각 반응했다.

"왜, 가 아니라! 귀염둥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함정이 이것 하나로 끝날 리 없어. 빨리 벗어나야 해! 벽을 잘라! 내가 부수면 건물째로 붕괴할 위험이 있어!"

"치잇…! 이대로 벗어나면, 여기는 진짜 지옥으로 변할 텐데…!"

"너를 믿고 따라온 이들을 다 죽일 셈이야? 여기 갇힌 악인보다 네 동료를 더 생각해!"

회귀자도 그 말에는 수긍했다. 어디까지나 여유가 있을 때만 고민하지, 그녀 역시 동료의 위험 앞에서 사소한 대의를 앞세우는 성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다. 회귀자도 신이 아니다. 능력에 한계가 있는 이상 당장 쌓인 일부터 해결해야 한다.

다른 모든 평범한 사람처럼, 회귀자는 융통성을 발휘했다.

"천검기…!"

회귀자가 벽을 잘라내기 위해서 천앵을 휘두르기 직전.

무언가를 발견한 그녀는 멈칫하더니 천앵의 방향을 바꾸어 날아오는 무언가를 쳐냈다.

챙!

분명 허공을 향해 칼을 내뻗었는데 강철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회귀자는 곧장 스텝을 밟아가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에다가 수십 번 검격을 내질렀다. 그녀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요란한 금속음이 들려왔다.

사방이 눈부시다. 푸른 바다 속에서 떠다니는 청포꽃을 발견하기 힘들듯, 눈부신 빛 속에서 빛 그 자체로 이루어진 존재를 포착하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회귀자조차 마안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그것을 찾아내지도 못했으리라. 일곱 빛깔 색깔이 차례로 번뜩이며, 회귀자는 눈앞에서 그녀를 공격한 존재를 간신히 포착했다.

그리고 회귀자는 난색을 표했다.

"에이…메데르…! 하필, 여기서!"

『관제 관측 완료. 구현율 57%. 인공광 환경. 유리.』

전신이 빛으로 뒤덮인 군국의 수호천사가, 쏟아지는 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바깥에서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군국이 제련소 안에 숨겨둔 병력이, 덫 안에 든 쥐를 소탕하기 위해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EP.259 강철의 나라와 얼굴 없는 인간들 - 8

함정은 빠지기 직전까진 위험성을 숨겨야 한다. 함정이 그 잔혹한 흉수를 드러내는 건 먹잇감이 걸려든 후다.

그 탓에 지크흐룬드의 함정에는 몇 가지 필요한 게 있었다.

제어실을 가득 메운 조명은 흡혈귀의 시조를 옭아매기 위한 가장 좋은 함정이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런 물리력도 없다. 따지자면 세상에서 가장 연약하고 성긴 그물이다. 우리 일행에는 티르만 있는 게 아니니, 만일 그중 누구라도 대응한다면 순식간에 찢고 나가리라.

그렇기에, 지크흐룬드는 우리를 완벽하게 제압하기 위해 두 가지를 준비했다.

하나는 천통 에이메데르. 군국을 수호하는 인공 천사.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가장 강력해지는 빛의 화신.

또 다른 하나는, 노역장 곳곳에 숨겨둔 병력이었다.

함정이라는 사실을 들켜선 안 된다. 따라서 병력을 밖에 둘 수는 없다. 제련소를 병력이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적진 한복판으로 여긴다면 함정에 빠뜨리기 힘들 테니.

그래서 지크흐룬드는 정예 병력을 제련소 내부, 노역자가 갇혀있는 장소에 숨겨두었다. 숨기기는 쉬웠다. 힘을 빼고 노역자인 척 있으면 되니까.

작전은 성공했다. 함정은 발동되었고, 그들은 곧장 달려왔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곤란한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함정에 빠진 우리만큼 지금 그들도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말살 시퀀스가 작동했다니?! 이건 계획에 없었는데…!"

이대로 두었다간 제련소가 통째로 증발한다.

하지만 적을 무찌를 기회는 오직 지금뿐이다.

제련소가 증발하도록 놔두면 전략적인 목표 달성에 실패하고, 그렇다고 말살 장치를 막으러 가자니 이쪽을 상대할 전력이 빈다.

군국의 딜레마.

전술적인 승리를 노릴 것이냐, 전략적인 목표를 달성할 것이냐.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저들이 혼란에 빠졌을 때.

그들에게 혼란을 더하듯, 히스토리아가 굳은 결의와 함께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병력들의 발이 멈췄다.

"히스토리아 소장…!"

육장성이 좁은 통로를 막아서자 병력들 한가운데에서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저 병력은 사령부에서 파견한 직속 부대. 군국의 딸, 장성들의 아이돌 히스토리아의 인상착의는 상식인 것이다.

그러나 동요도 잠시, 저들 역시 정예. 그들은 순식간에 대열을 정비하고는 히스토리아와 마주했다.

병력을 이끌던 지휘관, 토루크 대장이 주먹을 까득 쥐며 앞으로 나섰다.

"그런가. 히스토리아 소장. 귀관이 군국을 배신할 줄은 몰랐군."

"…물러나십시오. 다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련소를 노리다니. 반역에 테러까지. 란카르트도 그렇고 귀관도 그렇고, 탄탈로스로 가고 싶어서 발악하는군. 제정신인가?"

"전투를 줄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제련소를 공격하지 않았다면, 전면전이 펼쳐졌을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패배할 거라고 믿었나? 군국의 군대가!"

히스토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발끈한 토루크 대장은 몇 번 심호흡하여 마음을 가라앉혔다.

"항명에, 탈영에, 반역이다. 즉결처분이 마땅하나, 현재 상황이 긴급한 바. 귀관에게 제안을 하나 하겠다."

토루크 대장은 자기네들이 압도적인 우위에 서기라도 한 듯이 턱을 꼿꼿이 들고는 제안했다.

"당장 투항하고, 군국의 적을 제압해라. 그렇다면 목숨만은 살려두겠다. 귀관의 목숨은 물론, 귀관이 살리고 싶은 이들의 목숨까지."

가장 치명적인 타이밍에 가장 효율적인 방식을 택하다니. 역시 군국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 회귀자는 에이메데르에게 발이 묶여있다. 쏟아지는 빛 속에서라면 티르의 힘도 약해지고 활동범위도 크게 위축된다. 지금 이 순간, 만일 히스토리아가 저쪽에 붙는다면 판세가 훅 기울어진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히스토리아가 우리를 배신할 리가….

"그것은 대장님의 독단입니까, 아니면 사령부의 판단입니까?"

야. 히스토리아. 왜 고민하냐? 왜 캐묻는 건데?

"사령부의 판단이다. 나는 반대하지만, 사령부의 명령이라면 따른다. 군국의 군인이기에."

"…."

히스토리아는 천천히 시선을 나와 시아티 쪽으로 돌렸다. 냉정한 계산이 그 시선에 담겨있었다.

아니, 아니지? 설마 그 짧은 시간에 배신을 고민하는 건 아니지?

"허튼소리 마! 항복할 바에야 죽겠어!"

시아티의 외침은 처절했지만 별다른 힘이 없었다. 그리고 내 의견과는 완전히 상반되어 있었다. 나는 죽을 바에는 항복할 건데. 개똥밭에 굴러도 목숨은 소중하니까.

아, 물론 지금은 아니다. 죽을 정도로 위험하진 않거든. 히스토리아가 저쪽에 붙으면 좀 위험해지지만….

"리아."

"휴이. 고민을…."

"이번에는 우리 시체를 갖고 갈 생각이야?"

저쪽으로 기운 마음을 돌려놓는 데는 한 마디면 족했다.

벼락에라도 감전된 듯이 히스토리아가 크게 몸을 떨었다. 나른하거나 날카롭거나, 종류는 달라도 언제나 가라앉아 있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꽉 쥔 손이 애처로울 정도로 떨린다.

"너, 어…."

군국의 터부. 히스토리아의 악몽. 하멜른의 그 사건은 의미가 있었다. 최소한 그 광경을 목격한 이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흔적을 남겼으니까.

"강물에서 건져내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어. 히스토리아, 강바닥 아래 가라앉은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으니까."

그리고 그중 한 사람은 지금 육장성이 되어, 군국의 명운을 쥐고 흔드는 사람이 되었으니. 그 아이들의 죽음은 나와 히스토리아를 조금 바꿔놓았을 뿐이지만, 결과적으로 군국을 바꿔놓은 셈이다.

죽어간 아이들이 그 사실에 만족스러워할까… 그건 모르겠네.

"…뒤로 빠져있어. 죽으면 가만 안 둬."

"그럼, 수고해."

무시무시한 눈으로, 혹은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본 히스토리아는 내 시선을 홱 피했다. 결국, 내몰린 히스토리아는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 적을 향해 돌격한다기보다는 나와 시아티에게서 도망친다는 느낌이었다.

'칫. 일이 어렵게 되었군.'

내심 혀를 찬 토루크 대장은 마지막으로 히스토리아를 향해 말했다.

"귀관 같은 자가 사소한 정에 휩쓸려 어리석은 선택을 하다니. 귀관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선택이 아니다. 세상은 내몰린 끝에 어쩔 수 없이 택한 길을 선택이라 하지 않는다.

강하다고 해서 감수성까지 단단해지는 않는다. 히스토리아는 너무 강해서 외로웠다. 세상이 한 줌의 찰흙처럼 보였다. 세게 쥐면 당장이라도 으스러질 것 같은 일상에서, 매순간 힘을 조절하며 살아야 했다. 그녀는 친구들이 자기 근처까지 도달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가까이 가기 위해선 먼저 다가가야 한다는 사실을 그때의 소녀는 몰랐다.

"…후회하는 중에는, 새로 할 후회가 없습니다."

이제 남은 건 전면전뿐이다. 토루크 대장은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군국의 육장성을 앞에 두고도 그는 두려움에 떨지 않았다. 그가 군인이어서 그러기도 했지만, 두려워할 이유가 없던 것도 컸다.

'계획이 어긋났지만, 이건 상정 내다. 시조는 무력화되었다. 천통이 소년을 베고, 영궤가 총사를 묶으면. 나머지는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 저들을 제압하면 시조도 총사도 항복하겠지.'

"균형추가 더 기울어진 상황에서는 협상조차 필요치 않다. 방금이 마지막 기회였어. 애석하군, 히스토리아 소장. 다들, 공격…!."

"저기, 장성 여러분들.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모양인데."

우지끈, 하고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소음으로 가득한 제어실에서 조금 돋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시각적인 효과는 굉장했다.

빛이 한 방향으로 기울고 있다.

해가 저물 때 보여주는 그 빛깔이 실내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점차 비스듬히 기울어지는 빛깔은 꼭 밤이 찾아온 것처럼 어두컴컴해졌다.

"뭣…!"

"균형추가 기울어진 상황은 맞는데, 그쪽으로 기울어지지는 않았거든요?"

내가 말살 장치가 뭔지 헷갈렸어도, 지크흐룬드의 생각에서 함정의 종류가 빛이라는 사실은 읽었다. 천통이 오리라는 것도.

그렇다면 대비하지 않을 리 없잖아. 조명만 치워버리면 되는데.

조명의 원리는 간단하다. 연금강을 얇게 뽑아서 뜨겁게 만들면 거기서 빛이 나온다. 장교들은 대부분 전투 연금술을 쓸 줄 아니, 연금강 제련소에서는 조명을 생산하기는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충분하냐고 하면 그렇진 않다.

"조명을 급조한 건 기막힌 수였어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급하다고 철조망에다가 달아놓으시면 어떻게 해요?"

내 말이 끝난 직후, 아지가 내 시야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오도도도 내달렸다.

저 뒤편에서는 회귀자와 에이메데르가 격렬하게 싸우고 있고, 이쪽에서는 수많은 인간을 앞에 두고 히스토리아가 대치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자기와는 하등 상관없다는 듯 태연한 움직임으로 아지는 산책하듯이 걸었다. 인간들은 그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잠시 말문이 막히고야 말았다.

"멍, 차! 멍, 차!"

그렇게 걸어가는 아지의 입에는 수십 가닥의 철조망이 물려있었다.

"길 가던 강아지가 물어뜯으면 어쩌려고."

으드드득.

고작 개 한 마리가 철조망을 뜯어내고 있다. 아지가 끌고 가는 철조망의 크기는 아지의 크기에 비하면 부조리할 정도였다. 따지자면 물고기 한 마리가 그물을 통째로 이끌고 헤엄치는 듯한 비상식적인 광경이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건물이 우지끈거리고, 철조망에 매달린 조명이 펑펑 터져나간다. 아지는 팽팽히 당겨진 철조망이 발걸음을 잡아챌 때마다 신경질적으로 도리질을 쳤다. 쥐어뜯긴 철조망이 거칠게 흔들리며 조명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사방팔방에서 떨어진 조명이 폭발했다.

그런 아지의 뒤편으로, 공구를 손에 든 공주가 새까만 검댕을 묻힌 채 종종걸음으로 뒤따라나왔다.

걸어가다가 병력을 보고 놀란 공주가 우뚝 멈췄다. 그제야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흘러갔다. 토루크 대장은 아지와 공주를 번갈아 보다가, 철조망을 문 아지를 향해 갖고 있던 장검을 내밀었다.

"당장 저걸 막아!"

토루크 대장이 외쳤다. 그를 비롯한 장성과 장교들이 앞장서서 히스토리아를 향해 돌격했다.

애초에 그들도 주제를 아는 터라, 히스토리아를 그들만의 힘으로 쓰러뜨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들은 히스토리아와 입구 사이에 난 좁은 틈으로 돌파할 계획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그러나 그들은 제 분수를 몰랐다. 그들이 모였다고, 멀쩡히 히스토리아를 돌파할 수 있으리라 여겼으니까.

"컥!"

"흡!"

"크악!"

단 한 호흡이었다. 히스토리아는 벽과 천장과 바닥을 순서대로 밟았다. 가볍게 디뎠다기보다는 고무공이 거칠게 튀어 사방팔방에 부딪히는 모습과 비슷했다.

폭발적인 기공을 뿜으며 벽과 천장에 족적을 새긴 히스토리아가 다시 바닥에 내려앉았을 때, 그녀의 앞에 두 발로 서있는 장성은 한 명도 없었다. 뛰어들었던 장교들은 어딘가 한 대씩 얻어맞은 채 땅을 주르륵 밀려났다.

가슴에 발차기를 맞고 나동그라진 장성이 이를 갈았다.

"제길…! 시간이 없는데…!"

"쓸데없는 소리 마라! 두 명은 발을 묶어!"

아지가 땅에 발톱을 박아넣고 걸어갈 때마다 조명이 터져나간다. 그럴수록 제어실 안쪽은 점차 어두워진다. 아니, 우리도 모르는 사이 벌써 밤이 젖어 드는 것처럼 흐릿해져 있었다.

저걸 위해 내 지분 10%를 추가로 내놨다. 너희 때문에 슬슬 채무 불이행을 고민할 때가 왔다고.

"천통이 저기 있으니, 합세해서 싸우기만 하면 돼!"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지.

빛이 점차 사라지니 제어실 안에 에이메데르가 더욱 돋보였다. 한 치의 여유도 없이 회귀자를 몰아붙이고 있던 에이메데르는, 점차 어두워질수록 그 형체가 명확해졌다.

자. 반짝이는 빛이 현란하게 움직인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런 장난감을 보면 환장하는 동물도 있다.

"냐앙!"

참다 못한 나비가 에이메데르의 위로 뛰어내렸다.

은밀하고 강력한 기습이었다. 적의가 아니라 순수한 호기심과 사냥본능으로 비롯된 점에서 더더욱 치명적이었다.

나비의 앞발이 에이메데르를 내리눌렀다. 차라리 발톱으로 할퀴었다면, 빛으로 만들어진 에이메데르는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비의 목표는 빛무리를 붙잡는 것이었고, 그 낭만적인 동작 때문에 빛무리가 한순간 흩어졌다.

나비 덕분에 회귀자는 잠깐 숨 돌릴 틈을 얻었다.

"좋아, 이거라면…!"

회귀자는 지잔을 빼냈다. 빙글 고쳐잡은 뒤, 회귀자는 지잔을 어깨 위로 들어서 냅다 던졌다. 아직 떨어지지 않은, 아지의 반대편 조명을 향해.

단단한 콘크리트 벽 위에 걸쳐진 철조망도 지잔의 무게 앞에선 하늘하늘한 거미집이나 다를 게 없다. 지잔은 철조망을 강타하고, 돌과 강철의 벽이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돌과 강철조각이 비처럼 쏟아지고, 그 충격에 조명 상당수가 부서지거나 깨졌다.

회귀자가 지잔을 회수하기 전, 나비를 뿌리친 에이메데르가 그 틈을 노리고 빛의 칼날을 내찔렀다.

[잘도 날뛰어주었다. 그래, 빛을 이용한 함정이라. 오랜만에 겪는 불쾌함이었다.]

한 줄기 빛이 어둠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빛살과도 같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조명이 사라지고 남은 자리, 어둠은 어느새 형체를 이뤄 천사의 칼날을 붙잡고 있었다.

바깥이 어두워지면 흡혈귀가 눈을 뜬다. 다시 감각을 회복한 티르가 에이메데르의 앞을 막아섰다. 티르는 이전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해진 에이메데르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허나, 기이한 일이로다. 성황청의 치천사도 이리 쉽게 되살릴 수는 없을 터인데. 도대체, 너희는 무엇을 제물로 삼았느냐?]

에이메데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팔을 뻗었다.

조명에서 흘러나온 빛이 에이메데르의 몸으로 빨려들어갔다. 나비의 공격으로 흐릿해진 형체가 순식간에 재구성되었다. 티르는 순식간에 멀쩡해진 에이메데르의 모습을 보며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대답하지 않는 것조차도 똑같구나. 그래. 이제, 더 묻지 않겠다.]

『격멸.』

"티르도 풀려났고, 아지와 나비도 제 역할을 하고 있고. 자, 군국 여러분. 이제 슬슬 정신이 드세요? 이제 이곳은 함정이 아니에요. 당신들이 묻힐 무덤이라고요."

이미 이쪽이 훨씬 유리하다. 기회를 엿보고 있는 영궤가 참전한다고 해도 마찬가지. 기울어진 저울추는 이제 스스로 굴러가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지휘관이라면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겠지. 적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굴할 줄 아느냐!"

"아니요! 굴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 우리는 모두 승자가 될 수 있어요! 제가 여러분을 위해 제안을 하나 하도록 하죠!"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뒤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만일 지금 당장 뒤를 돌아서, 지금도 죽어가고 있을 노역자들을 구하신다면! 인도적인 차원에서 저희가 당신들을 돕겠습니다!"

EP.260 강철의 나라와 얼굴 없는 인간들 - 9

수많은 실패를 반추해온 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 군국은 현장 지휘관의 판단을 존중한다. 통신병이 있다곤 하지만 그들은 정보를 제공하고 전략목표를 제시할 뿐 지휘에 끼어들지는 않는다.

현장에는 현장에서만 얻을 수 있는 단서가 있다. 통신병이 아무리 빠르게 판단한다고 하더라도 그 직감을 뛰어넘진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토루크 대장은 훌륭한 지휘관이었다. 나비, 회귀자, 티르의 협공에 에이메데르가 소멸한 순간 판단을 끝냈으니까.

"네 제안을 수용하겠다. 다만, 우리에게도 너희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

저쪽에서 절대 인정하지는 않겠지만 유사 항복 선언이었다. 나는 원활한 협상을 위해 그 점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인질을 원하시는군요? 하지만 저희도 바보는 아닌지라 인질을 보내드릴 수는 없고, 대신 전력을 다한 협력을 약속드리죠."

"무엇이지?"

"여기 있는 이들을 다 구할 때까지, 잠시 진격을 멈추고 구조 활동에 전념하기로 할게요."

'진격을 멈춰? 그렇다면야 결과적으로 이들의 발을 묶는 셈이니 더할 나위 없지만. 저들이 과연 이 내용을 받아들일까?'

아마 그럴걸. 회귀자는 노역자를 다 죽이는 데 부정적인 입장이고, 히스토리아의 목적은 제련소를 망가뜨리는 게 아니라 전투를 회피하는 거니까.

티르야 뭐, 그냥 어울려주는 거고.

마침 성공적으로 에이메데르를 소멸시킨 회귀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서슴없이 내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제멋대로 무슨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는 거야?"

"협상이죠. 어쨌든 이곳은 군국의 시설이고, 노역자를 살리려면 손이 하나라도 귀하니까요."

"뭐어? 말살 장치는 네가 작동시킨 거잖아!"

"저는 딱히 그들을 죽이려고 한 게 아닌데요? 그건 저희가 안전해지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어요. 보세요. 만일 제가 장치를 작동시키지 않았다면, 저들이 우리 말을 듣는 척이라도 했을까요?"

회귀자는 토루크 대장과 그들이 이끌고 온 병력을 보았다. 대단한 숫자는 아니었다. 훌륭한 지휘관답게, 그는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직감한 순간 이미 병력을 나눠서 제련소 곳곳으로 흩어놓은 상태였다. 혹여나 전투가 끝나면 곧장 피해 복구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책사? 아니, 책사라고 하기보단 조금 더 극적인… 사기꾼 같긴 한데.'

나는 은근히 말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재난을 앞에 두고, 적과 힘을 합쳐 사람을 구한다. 아름답고도 인간적인 결말이네요. 우리, 해피앤딩을 위해 힘을 내볼까요?"

"칫, 결과적으로는 군국을 돕는 셈이잖아."

"아니요. 조금 다르죠. 셰이 씨, 노역자를 구하기 위해선, 노역자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장치를 부숴야 한다고요? 셰이 씨가 바라던 대로."

회귀자는 내 말뜻을 깨닫고는 멍청한 소리를 냈다.

"어?"

"네! 제련소의 시설을 마음껏 부술 기회에요. 심지어 군국의 세심한 안내까지 받으면서요!"

한마디로 회귀자가 바라던 인명피해 없는 파괴 행위가 용인된다는 뜻이다. 제련소의 시설을 하나하나 처참하게 부숴버린다면 노역자들은 남아있을지언정 당장 제련소를 운용하지 못하리라.

상황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톱니바퀴와는 달리, 인간은 서로 너무 다르기에 절대로 맞아떨어질 수 없다. 사상도, 목적도, 능력도 각자 다르니 어딘가에서는 어긋나는 게 필연적이다.

그러나 내가 조율한 이 상황은 모든 인간이 착착 맞아떨어진다. 회귀자는 반쯤 전율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휴즈. 도대체 어디까지 예측하고 있는 거지…?'

어라. 예측이 아닌데.

'함정이라는 걸 깨닫고 우리를 앞질렀어. 준비된 함정을 망가뜨리고, 제련소를 완전히 파괴할 계획도 세웠어. 와중에… 내가 바라던 대로 불필요한 희생을 피했고, 총사가 바라던 대로 군국과의 전투도 없앴지. 이건…. 예언자도 할 수 없는 일인데….'

군국의 의중을 정확히 짚고, 그들이 할 행동을 예측하고, 그것을 확신하면서 계획 하나하나를 받아칠 작전을 짠다…면 얼마나 좋을까. 역사 속 유명한 책사와 비견될 재능이다.

하지만 실상은, 이 모든 작전을 짠 영궤의 생각을 읽고, 문제를 풀 듯 하나하나 없앴을 뿐.

나는 천재가 아니라, 답지를 미리 보고 온 사기꾼이다. 애석하게도 말이지.

'…어쩌면, 정말.'

회귀자의 생각은 거기서 끊겼다. 한시가 급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주저하는 시간이 곧 누군가의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땅에 떨어뜨린 지잔을 다시 챙겨 들며, 회귀자는 나를 향해 작게 한마디를 남겼다.

"어쨌든, 도움이 됐어. 고마워."

회귀자는 성큼성큼 토루크 대장과 그의 병력에게로 향했다. 회귀자가 다가가자, 병력들이 잔뜩 긴장하면서 그녀를 포위하듯이 움직였다. 회귀자는 짜증스레 칼을 휘두르며 대답했다.

"쓸데없는 짓 말고 앞장서! 시간이 없잖아!"

회귀자의 자신만만한 태도를 본 장교 하나가 불만스럽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제길. 이딴 게 곁에 있으면 우리가 인질인 셈이잖아."

"진짜 인질로 취급하기 전에 빨리 움직이시지!"

회귀자가 그들을 이끌고 걸어가는 동안, 나는 뒤로 몰래 티르를 불렀다. 티르는 내 손짓을 보고 느긋하게 다가왔다.

[덕분에 피부가 그을리는 일은 피했구나. 네 기지가 아니었다면 새카맣게 탄 몰골을 보일 뻔했다. 제법 감각적인 선물이지 않느냐.]

허세를 부리긴. 양으로 밀어붙인 군국의 인공조명에 꽤 놀랐으면서.

햇빛에 비하면 여러모로 부족하긴 하지만, 빛의 밀도만큼은 태양을 넘어섰다. 만일 그 빛을 정면으로 받았다면 티르라도 잠시간 전투불능이 되었을 것이다.

빛 속의 흡혈귀는 비유하자면 물에 빠진 인간. 움직일 때마다 어마어마한 압력을 받고 힘도 안 들어간다.

뭐, 그래도 어떻게든 탈출할 수는 있었을 거다. 어둠으로 빛에 저항할 수도 있고, 고작 30m만 한쪽으로 이동하면 벽을 부수고 나갈 수 있으니까. 단, 그때쯤이면 우리가 다 죽었겠지.

어라. 사실 나, 티르보다는 나 자신을 지킨 셈이네.

나는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뭘요. 아, 다 쓰셨으면 그 천은 돌려주실래요?"

내 정당한 반환 요구에, 아직까지 내 다이아몬드 퀸을 어깨에 두르고 있던 티르는 흠칫거리며 옷깃을 여몄다.

[…선물이 아니었던 것이냐?]

"드린다는 말은 안 했잖아요? 비싼 거예요. 돌려주세요."

[낭만이라고는 쥐뿔도 찾아볼 수가 없구나. 어찌 사내 된 자가 한 번 건넨 손수건을 도리어 뺏느냔 말이냐?]

"언제 적 이야기에요? 요즘에는 헤어질 때 자기가 준 선물 내놓으라는 사람도 많아요."

[말세구나!]

"말세가 제 물건 돌려달라는 요구 때문에 일어날 일은 아닐 거 같은데요."

티르는 너무 점잖은 편이라 내가 끈덕지게 달라고 요구하니 마지못해 두르고 있던 천의 여왕을 건넸다. 이게 얼마짜리인데 그냥 줄 수는 없지. 나는 다시 천의 여왕을 카드로 바꾼 뒤 품속에 넣었다.

그러나 티르는 뒤끝도 있었다. 못내 불만이었는지 그 와중에도 계속 투덜거렸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체면이란 게 없지 않고서야 어찌!]

"아하하. 쓸 데가 있어서 그래요. 그리고 티르. 부탁이 있는데."

[낯짝이 두껍다 못해 바늘로 찔러도 티도 안 나겠구나. 요즈음은 한 번 주었던 것을 배알도 없이 빼앗는 게 부탁하는 자의 태도더냐?]

줬다 빼앗는 건 쪼잔해 보여서 나도 싫어. 하지만 애초에 천의 여왕은 나에게도 귀중한 도구라고. 팔면 집 한 채가 뚝 떨어지는 고가품을 줄 수는 없잖아.

그리고 자꾸 내가 뭔가 주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말이야.

"티르는 저보다 연상에 돈도 많잖아요. 심지어 나라도 하나 만들어봤고! 그런데 소시민으로 어렵사리 살아가는 제 몇 안 남은 재산마저도 빼앗으려고 하는 건 너무하지 않아요? 벼룩의 간을 빼 드셔야죠!"

[내 너에게 베푸는 것을 아까워하겠느냐? 성의를 먼저 보여야 내 보답으로 보물이든 금이든 내어주지 않겠느냐.]

"아, 맞다. 예전에 강의 수업료나 마사지 대금으로 금이나 보물 준다면서 정작 쓸모있는 건 하나도 못 주셨지 않나요? 저는 시조 티르칸쟈카의 이름값을 믿고 기다렸는데, 그걸 언제 받을 수 있을까요?"

[…이 건은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사안이 급하니 네 부탁이나 들어보자꾸나.]

쳇. 제법이잖아. 한창 급하다는 점을 이용해서 불리한 대답을 회피하다니. 나라를 세워본 경력이 있어서 그런지 어딘가의 회귀자보단 말을 잘하네.

나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뒤, 목소리를 낮추고 티르에게 속삭였다.

"이들이 노역자를 살려주면, 분명 그때 노역자들이 잠깐 구속에서 풀려날 거예요. 티르는 그들을 돕는 척하면서, 노역자들이 풀려났을 그때."

[그때?]

"어둠으로 눈을 가린 뒤, 몰래 제련소 밖까지 빼내 주세요. 사방팔방으로 흩어져서, 앞으로 도착할 군국의 병력이 새로이 고민하도록."

내가 한 부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은 티르도 역시나 목소리를 낮추고는 대답했다.

[그리하여도 괜찮으냐? 여기 있는 인간들은 전부 극악무도한 죄인이라고 들었다. 그들을 세상에 내보낸다면 여러 문제가 생길 터인데.]

"알 반가요? 저한테 저지르지만 않았으면 상관없어요."

[법이고 정의고. 그에 티끌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태도가 심히 불량스럽구나.]

"실망하셨나요?"

티르는 고개를 젓고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같은 진흙탕에 몸을 담근 공범자를 보듯, 동질감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전혀. 아니, 도리어 더욱 마음에 들었다.]

티르에게 있어, 이 제련소는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끔찍한 공간이 아니다. 역사적으로도 흔히 있었던, 그저 인간을 효율적으로 소모하는 방법 중 가장 선진적인 것일 뿐이다.

천 년을 살아온 흡혈귀의 여왕에게 현대의 도덕에 대해 논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도 없겠지.

[잠깐 기다려보거라. 그러면 그동안 너는 무엇을 할 셈이냐?]

"저요? 제가 일해봤자 아무런 도움도 안 될 테고, 괜히 나댔다가 인질이라도 되면 리아나 티르의 방해가 될 테니. 여기서 가만히 지켜지고 있을게요."

[그래. 그 편이 좋아 보이는구나.]

"좋아요. 티르, 그러면 저 노역자를 해방하러 가주세요. 정의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티르는 피식 웃으며 내 말을 받았다.

[네 부탁을 들어주마.]

그리고 티르 역시도 어둠을 몰고는 제어실을 떠났다. 멀어지는 그녀의 그림자 속에서 수십 개의 흑기사가 불쑥불쑥 솟아올랐다.

흡혈귀가 사람을 구한다, 라… 흔한 일이지. 세상에서 가장 많은 인간을 죽인 종족은 같은 인간이지만, 가장 많은 인간을 살린 종족은 놀랍게도 흡혈귀가 된 인간이니까.

뭐. 이제 준비는 끝났다. 나는 쭉 기지개를 피며 몸을 돌렸다. 한쪽에서는 아지가 철조망에 걸려 바둥거리고, 나비는 신이 나서는 떨어진 조명을 하나하나 확인사살하고 있었다. 잔광이 유리조각처럼 반짝이는 조명은 가까운 미래에 나비의 발자국이 될 예정이었다.

한쪽 저편에서는 히스토리아가 시아티와 공주에게 그동안 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시아티는 이를 악물고 있고, 공주는 갑작스레 변한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는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네? 네? 잠깐만요. 캐러팔드가… 배신을 했다고요? 함정을 작동시키는 바람에, 셰이 공이 그를 베었어요…?"

"내막은 몰라. 그가 진짜 캐러팔드일지, 아니면 변장한 누군가인지. 어쨌든 그의 신변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 분명하지."

"믿을 수 없어요. 그는 분명, 우리를 배신할 사람은 아닌데…."

"사람이니까,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거야."

공주는 잔뜩 움츠러든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명이 깨지긴 했지만 여전히 밝은 편이었고, 그래서 제어실은 여전히 안쪽이 훤히 보였다.

"…그런데."

제어실 곳곳을 둘러보던 공주는, 곧 의아한 듯이 물었다.

"캐러팔드는 어디에 있죠?"

히스토리아는 흠칫거리며 고개를 팩 돌렸다. 그녀가 시선을 향한 곳은 방금 전 캐러팔드가 피를 쏟으며 쓰러졌던 장소였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마른 핏자국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히스토리아는 잔뜩 긴장을 끌어올린 채로 팔을 뻗었다.

"…아무래도, 캐러팔드는 진짜가 아니었던 모양이네."

"어, 그러면 다행이네요! 캐러팔드는 역시 우리를 배신한 게 아니었군요!"

철없이 대답하는 공주를 향해, 히스토리아는 경멸을 섞은 눈빛으로 일갈했다.

"불행이지. 그로 변장했다는 건 그의 정체가 이미 발각되었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캐러팔드는 끔찍한 고문을 받다가 모든 정보를 토해내고 처형당했을 테니까."

"네, 네에?"

"하지만, 나와 그쪽 꼬마의 감각을 속이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아, 그거. 기막힌 연기였지.

지크흐룬드의 연기는 신비로운 무언가가 아니다. 그는 진짜 연기자이며,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보여주기 위해 기예를 갈고 닦았다. 순수한 기술의 영역이기에, 회귀자도 히스토리아도 전부 속아넘어가고 말았다.

그중 가장 큰 능력은 바로 육체에 기공을 불어넣는 감 기공. 이치 끝자락에 간신히 닿은 그의 기공은, 몸의 반응을 원하는 대로 꾸며낼 수 있으며, 또한 다른 존재로 변신하는 것도 가능하다.

"냐?"

파직.

조명을 깨뜨리며 즐거움을 찾던 나비가 묘한 반응을 느끼고 앞발을 들었다. 뭔가 잘못된 조명인지, 나비가 앞발을 뗀 순간 거기서 커다란 폭발음이 들렸다.

"냐하하학!"

폭죽같은 빛이 펑펑 터지며 반짝이는 먼지가 흩날렸다. 순간적으로 반응한 히스토리아가 기공으로 바람을 폭발시켜 그것을 상쇄하고, 아지와 나비가 깜짝 놀라서 사방팔방으로 짖어댔다.

순식간에 벌어진 혼란 속에서 히스토리아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다들 뭉쳐! 흩어지지 말고!"

히스토리아는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마침 그녀의 눈앞으로 누군가가 걸어나왔기 때문이다. 나른한 눈동자에 땋은 머리카락을 지닌, 장신의 여장군이 눈을 부릅 뜬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히스토리아와 똑같이 생긴 사람, 아니, 히스토리아 그 자체인 것만 같았다. 나름 알고 지냈던 시아티도, 공주도 거울처럼 똑 닮은 둘을 보고는 경악했다.

"총사님이… 둘?!"

자기와 똑같은 사람을 발견한 히스토리아는 경악하느라 시간을 소모하지 않았다. 아주 짧은 간격을 둔 채 그들은 동시에 움직였다. 한쪽 히스토리아가 긴 다리를 쭉 뻗었다. '히스토리아'는 부드럽게 흘려보내며 무릎과 팔꿈치로 감싸 다리를 꺾으려고 들었다. 발차기가 허공에서 급격하게 방향을 틀고, 그에 맞서 팔과 다리가 어지럽게 움직인다.

콰광. 히스토리아의 기공, 폭사경이 폭발하며 둘의 신형이 주르륵 밀려났다. '히스토리아'가 급히 내게 손을 뻗으며 외쳤다.

"휴이! 위험해! 내 뒤에 숨…!"

"숨을 수는 없지. 네가 가짜잖아."

공주를 그대로 놔둔 나는 냅다 히스토리아와 가까운 쪽으로 도망갔다. 내가 멀어지고, 헛되이 내밀어진 손이 몇 번 쥐였다 펴졌다.

이번에도 자신을 거부하고 도망간 나를 향해, '히스토리아'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어, 어떻게…."

표정 연기를 해봤자 어림도 없다. 연기에서 가장 쉽게 벗어나는 방법은 역설적으로 이 모든 게 연기라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이다.

'히스토리아'는 내가 단순히 떠본 게 아니라, 진짜로 간파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히스토리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순수한 호기심과 의아함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히스토리아'의 얼굴을 한 지크흐룬드는 의문을 표했다.

"내가 가짜라는 걸 알았지?"

EP.261 강철의 나라와 얼굴 없는 인간들 - 10

지크흐룬드의 정체를 간파할 수 있던 비결? 말할 필요도 없이 독심술이다. 육장성이면서도 솔선수범하여 작전에 참여한 지크흐룬드는, 나에게 있어 곁에 딱 달라붙어 친절하게 작전을 설명해주는 작전 참모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내가 내 독심술을 설명하지 않고서 그의 정체를 밝힐 수 없다는 것.

지크흐룬드의 변신은 신비가 아니다. 기공으로 신체의 구조를 바꾸는 변용술과 군국의 정보력, 그리고 혼신의 연기가 합쳐진 콤비네이션. 신비로부터 몇 가지 수단을 빌려왔을지언정, 순수하게 인간의 기술로 빚어낸 기예다.

따라서 회귀자도 티르도 그에게서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애초에 캐러팔드가 누군지 모르니까, 가 가장 큰 이유이긴 하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 캐러팔드와 몇년 전까지 만난 적도 없다. 쟤가 사실 변장한 육장성이라고 억지로 우기면 들어주기야 하겠다만, 결국 그 의심은 돌고 돌아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그런데 굳이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지? 그냥 유인하면 되는데.

계획대로 그는 미끼를 물었다. 티르를 내보내자마자 지크흐룬드는 나를 노리고 일생일대의 도박을 감행했다. 자신의 변장술이 드러나는 것을 각오하고 히스토리아로 변신하여 우리를 습격했다.

좋아. 여기까지는 성공했으니. 이제 그의 민낯을 까발릴 시간이다.

"어떻게 알았냐니. 주객전도잖아요. 지금 당황스러운 쪽은 저희라고요. 당신이야말로 누군데 히스토리아의 얼굴과 몸을 한 거죠?"

말마따나, 그의 외견은 히스토리아와 꼭 닮아있었다. 히스토리아 본인마저도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나를 지키듯이 선 히스토리아는 본능적으로 적을 탐색하면서도 묘한 불쾌감을 느꼈다.

"얼굴이랑 몸뿐만이 아니야. 전투기술도, 기공도. 내 것과 매우 닮았어. 차이가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구분할 수 없지, 그렇지 않아?"

누가 자기 자신을 똑같이 흉내낼 수 있다는 건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대체재가 존재한다는 의미와 같으니까.

'히스토리아'는 자기 자신을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말해주지 못할 건 없어.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대답을 듣겠어."

지크흐룬드는 히스토리아의 얼굴과 몸을 한 채로 한 바퀴 빙글 돌았다. 나른한 표정, 부드러운 몸선, 그러나 그에 어울리지 않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가볍게 회전한 지크흐룬드는 나를 향해 물었다.

"분명 내 변신은 완벽했을 터. 그런데 어떻게 나를 구분해냈지?"

"꽤 닮았더라고요. 하지만 저와 히스토리아처럼 돈독한 친구끼리는 느껴지는 분위기라는 게 있거든요? 저는 그걸로 찾아냈…."

"아니. 너는 한순간도 동요하지 않았어. 안 자와 알지 못한 자 사이에 있는 반응의 간극. 너의 대응은 분명 그 찰나의 간극을 뛰어넘었어."

'히스토리아'는 느긋하게 걸어왔다. 사뿐사뿐 내딛는 한 걸음이 가벼우면서도 흔들림이 없다. 마치 히스토리아의 걸음 같다…고 여겨지나, 나에게는 조금 기괴하게 보였다.

"내 변신은 완벽했어. 얼굴, 머리카락, 키, 골격, 그리고 표정과 말투까지. 하나하나 전부를 따라 했지. 안쪽이야 다르겠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알 수 없어. 그런데 너는 알아차렸지."

"자신감은 대단하시네요. 그렇다면 그 안쪽이 다른가 보죠. 저희끼리 암호를 정해두거나 표식을 해뒀을 수도 있잖아요?"

"만일 너희끼리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남겼더라도, 최소한 그것을 확인할 시간이 필요해. 그렇지만 네 눈동자는 어딘가에 머물지 않았어. 너에게 숨겨진 무언가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야."

있지, 독심술. 거기다 하필이면 연기하는 사람의 마음을 읽은 탓에 곧장 구분해버렸다.

평범한 사람들은 숨 쉬는 것까지 의식하며 살지 않는다. 몸이 가는 대로 걷지, 다음 보폭을 얼마나 벌리고 어떻게 무게를 실어야 할지 계산치 않는다. 그건 추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몸이 자연스럽게 행동한 끝에 나온 결과다.

그러나 지크흐룬드는 그 모든 것을 계산하여 재현한다. 몸짓, 발걸음, 발성, 동선, 주변 환경까지. 존재하는 모든 근육을 미세하게 써서 재현한다. 기예가 이치에 닿을 지경이라, 평범한 사람들은 연기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진짜로 받아들이고야 만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히스토리아라는 제목이 대놓고 붙은, 지시사항이 상세하게 적힌 대본이 걸어 다니는 느낌이라고.

얼굴은 히스토리아다. 하지만 누구보다 연기하는 그 자신이 이 모든 게 연기임을, 자신의 원래 이름이 지크흐룬드임을 의식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가 히스토리아로 보이지 않는다.

"숨겨진 무언가? 있죠, 당연히."

하지만 내가 독심술을 쓴다는 걸 밝힐 수는 없다. 차라리 다른 걸 밝힐지언정.

그렇다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래, 이럴 때는.

"사랑이에요."

"…?!"

어디에든 갖다 붙이기 좋은 말로 얼버무리자. 앞에서 히스토리아가 미친 놈 보듯 보고 있지만, 모른척하고는 뻔뻔스레 말했다.

"사랑이 부족해요, 사랑이. 충분한 사랑이 있다면, 확연한 차이가 보일 거예요. 저와 리아의 사이쯤 되면, 사소한 몸짓만 보고도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기 마련이죠."

"거짓말이네."

들켰다!

잠깐. 네가 어떻게 확신하는 건데? 너는 독심술도 없잖아. 비독심술사 주제에 내 말의 진위 여부를 확신하지 마! 나는 뻔뻔하게 밀어붙였다.

"증명해보시죠."

"사랑은 감정이지 방법이 아니야. '어떻게'에 해당하는 대답이 될 수 없어. 그리고 무엇보다, 너는…."

말끝을 흐리며 지크흐룬드는 다시 감정을 잡았다. 머릿속으로 가상의 히스토리아를 설정하고, 거기에 몰입한다.

'하멜른의 마지막 생존자. 승승장구하여 육장성까지 되었지만, 그건 성공이 아니라 실패의 이어짐. 부관을 두지 않고 홀로 움직이며 가족도 만들지 않았다. 마음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뜻. 육장성의 지위를 버리고 과거의 망령에게로 향할 만큼….'

현재의 히스토리아와 유사한 인격을 만들고 그것을 자기 내부로 받아들인다. 목소리를 바꾸고, 거기에 자기가 지금까지 관찰해온 히스토리아의 미묘한 몸짓이나 억양을 덧씌운다.

'하지만 그는 히스토리아를 찾아온 적 없다. 분명 그녀가 육장성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도 말이지. 감정의 무게가 다르다. 저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그렇다면, 여기서 히스토리아가 취할 행동은.'

완벽하게 똑같진 않으나, 그렇게 보이기에는 충분하다. 그것이 지크흐룬드의 방식.

지크흐룬드는 다시 '히스토리아'가 되었다.

"거짓말! 너는 나를 조금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아! 휴이, 너는 지난 6년간 단 한 번도 나를 찾지 않았잖아!"

분명 '히스토리아'가 한 말인데, 내 앞에 선 히스토리아가 절절히 공감해서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를 지키듯 말없이 서 있으면서도, '히스토리아'가 자기 마음속으로 대변해줘서 후련해하고 있었다.

본인이 인정하면 어떻게 해. 다 드러나잖아.

"그래놓고 사랑? 헛소리 집어치워! 너는, 지금껏 나를 떠올린 적도 없어!"

"헛소리는 아니에요. 사랑을 담아 보면 다른 점이 분명히 보인다니까요."

"그 다른 점이 뭔데!"

칫. 이런 증거를 내보이는 싸움으로 가면, 단서 대다수를 독심술에 의존하는 내가 불리한데. 뭐 변명거리 없나.

진실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반박할 생각을 못 하게 한다면 나의 승리. 음, 어디 보이는 특징 중 뭐가 없을까….

어? 잠깐만. 그거라면, 이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흔들림이 다르더라요."

"…흔들림? 무엇의?"

"여기요, 이거."

나는 가슴을 톡톡 두들겼다.

상리를 벗어난 내 대답에, 히스토리아도 '히스토리아'도 단박에 이해하지 못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몰라. 프라이버시라고 치고, 지적하면 무례하다고 몰아넣자.

"진짜 히스토리아는 며칠간 묶여있었죠. 육장성을 구속할 정도로 강하게 묶인 탓에 상체고 가슴이고 꽉꽉 짓눌렸어요. 그래서 흔들림이 어딘가 짓눌린 느낌이 들어요. 그에 비해 가짜 쪽, 그러니까 그쪽 건 너무 평범하게 흔들렸죠. 차이가 확연하니 모를 수가 없더라고요."

내 대답이 너무 뜬금없었던 탓일까. 어지간하면 나와 대사를 맞추었을 '히스토리아'도 멈칫거리며 말을 흐렸다. 잠깐 고민하던 그는 이내 자기 생각의 맹점을 깨달았다.

"…확실히, 그 점은 고려하지 못했는데."

"당연하죠. 제가 누누이 말했듯이, 사랑이 있어야만 보인다니까."

"사랑이 그런 뜻이었나…. 히스토리아의 최근 상태까지는 반영하진 못했어."

"반영했다고 하더라도, 과연 당신이 그 미세한 차이를 귀신처럼 짚어낼 수 있었을까요? 저 정도의 시야를 가진 자만 가능한 일이죠."

"둘 다 닥쳐!"

히스토리아가 곧장 몸을 돌려 내 다리를 걷어찼다. 군홧발이 내 다리를 파고들고, 묵직한 밧줄이 나를 잡아채는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나는 양팔을 위로 휘두르며 꼴사납게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히스토리아는 한 팔로 자기 가슴을 가리고 선 채, 수치와 경멸이 섞인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변태 자식, 포로 주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뭣해서, 일부러 신경 안 쓰고 있었는데…!"

그렇지만 내 거짓말은 적보단 아군을 먼저 속여버렸다. 에고야. 흐름이 끊겨버렸네. 이대로 가면 쭉 속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럴듯했네. 하지만 잘 꾸며진 거짓말이야."

뜨거운 물에 손을 넣었다가 미지근한 물에 집어넣으면 차가움을 느끼듯 감정 역시도 상대적이다. 우리 편 히스토리아가 필요 이상으로 당황한 덕분에 도리어 '히스토리아'가 냉정함을 되찾았다.

"히스토리아는 기공의 여파를 견뎌내기 위해 감기공으로 신체를 극한까지 바로잡았어. 고작 며칠 묶여있었다고 몸이 상하지 않겠지."

"알아차렸군요. 사실 그걸로는 구분하기 힘들었어요."

"그래도 맹점이었어. 최근에 포로가 되어서 계속 꽁꽁 묶여 있었다… 그런 정보는 아직 접하지는 못했으니까. 그보다 용케 묶인 채로도 가만히 있었네."

"당신 역시 제가 말한 가능성을 부정하지 못했죠? 저와 리아는 지난 며칠 동안 저와 같이 있었어요. 그동안 서로 알아차릴 수 있는 흔적을 만들었을지도 모르죠. 암호나 표식이 아닌, 둘만 알아차릴 수 있는 무언가를."

"물론, 그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어.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아."

"어째서죠? 당신은 리아가 저희에게 잡혔던 며칠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잖아요?"

내 날카로운 지적에도 '히스토리아'는 말려들지 않고 또박또박 대답했다.

"만일 너희끼리 비밀스러운 무언가를 나누었다면 히스토리아가 저리 방어적인 반응을 할 리가 없잖아."

이거, 쉽지 않겠는데. 나는 주장을 이어갔다.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잖아요. 근거가 되지 못해요."

"네가 주장한 것처럼."

쳇. 썩어도 군국의 공안부장을 맡은 육장성인가. 다른 사람처럼 쉽게 속아 넘어가지 않는군. 뭐 다른 설명이 없을까….

"휴이! 언제까지 둘이 대화만 나눌 셈이야? 사이좋게 대화할 시간이 없어!"

와중에 본의 아니게 뒷담화를 듣게 된 히스토리아가 억지로 대화를 가로막았다.

"내가 나를, 아니, 저것을 상대할 테니까, 너는 일단 이 자리를 피해."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겠어?"

"1:1은 자신 있어. 여간해서는 지지 않아. 그리고 휴이, 너는 무력하잖아. 네가 있더라도 전투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

"틀렸어, 히스토리아. 그리 순진해서야 첩보전은 도저히 맡길 수 없겠는걸."

'히스토리아'가 히스토리아의 말을 가로챘다.

"내가 물었잖아. 어떻게 나를 알아차렸냐고. 그는 제대로 된 이유를 대답하지 못했어. 당연하지. 아마 없을 테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이유 없이 주어진 확신. 도박에서 언제나 승리하는 운명. 신비."

묘한 미소를 지은 '히스토리아'는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님처럼, 손가락을 펼치고는 자상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미래를 보거나. 혹은 과거를 읽거나. 인간의 운명 혹은 인과의 고리를 따라가거나. 천 리 너머를 보고 듣거나. 믿음과 신앙에서 기적을 끌어내거나. 인간으로부터 말미암지 않고, 기적처럼 뚝 떨어지는 상궤에서 벗어난 힘을 우리는 신비라고 불러."

"…알고 있어."

"안다면, 어째서 의심하지 않아?"

군홧발을 또각거리며 '히스토리아'는 조금 뒤로 물러났다. 그는 제어실의 어둠 속에 몸을 반쯤 파묻은 채로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하멜른에서 피리를 불었어. 수많은 아이들이 죽고, 그 광경을 지켜본 이들은 군국을 불신하게 되었어. 수도에서 암약하다가 탄탈로스로 떨어졌어. 거기에 잠들어 있던 괴물들과 의기투합하여, 군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궐기했네. 그리고 지금, 거의 성공할 지경에 이르렀지."

"그건 휴이가 한 일이 아니야. 그는 휘말렸을 뿐…."

"과연 그렇게 생각해?"

'히스토리아'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이마에서부터 턱까지 아래로 스윽 쓸어내리자, 분명 히스토리아의 얼굴이었던 게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근육이 모양을 바꾸었다. 피부가 움츠러들며 햇빛을 오래 못 본 쇠약한 안색을 띄웠다. 히스토리아의 표정은 사라졌다. 대신 높은 자존감에 비해 부족한 능력을 메꾸려는 듯한 허세가 빈 곳을 메웠다.

"캐러팔드… 역시, 네가 변장한 거였네."

캐러팔드의 얼굴이었다.

'캐러팔드'가 음울하게 중얼거리며 생체 단말에 의복 패킷을 끼워 넣었다.

"자아. 만일 그에게 신비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모든 게 설명이 돼. 피리 부는 사나이는 내가 캐러팔드가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아니, 이 제련소에 함정이 있다는 사실 역시 간파했지."

동시에, 탄탄하고 건강했던 여성의 몸도 점차 나약한 남성의 것으로 바뀌었다. 부풀어 올랐던 셔츠가 점차 가라앉고, 힘차게 솟았던 어깨가 움츠러든다. 의복 패킷이 움직이며, 히스토리아의 셔츠였던 게 노역장 감독관의 제복으로 바뀌었다.

골격이나 육체가 완전히 바뀐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겉으로 그렇게 보이도록 꾸몄을 뿐.

신체에 기공을 불어넣는 감 기공이 경지에 이르면, 근육과 뼈, 살과 내장까지 자유자재로 압축시키거나 팽창시킬 수 있다.

"아무런 힘도 없는 평범한 수재가 이런 일을 벌이는 건 불가능하지. 그에게는 신비가 있어. 전지, 혹은 예지에 가까운 어떤 신비가."

그렇게 변신에 가까운 과정을 거친 지크흐룬드의 외견은… 영락없는 캐러팔드의 것이었다.

물론 나에게는 아직 지크흐룬드의 본모습이 아른거렸지만.

"그게 내 결론이야. 어때, 피리 부는 사나이?"

EP.262 절반의 성공

절반의 성공이다.

나는 지크흐룬드가 스스로 정체와 능력을 밝히게끔 했다. 나에게 어떠한 신비가 있을 거라고 확신한 그는, 정체를 숨기는 게 의미 없다고 판단하고는 우리 앞에서 정체를 드러냈다.

문제는, 그 역시 똑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신비는 파헤치기만 해도 상대하기 쉬워진다. 연원, 능력, 약점, 한계. 그것만 파악하면 얼마든지 대책을 세울 수 있어. 시조 티르칸쟈카처럼 말이지.'

신비란 인간의 외부에서 온 것. 그만큼 신비는 강점만큼이나 약점도 뚜렷한 편이다. 그토록 강력한 시조 티르칸쟈카조차도 조명으로 만든 덫에 잠시간 속박되었을 정도니.

혈조술은 그녀 자신의 능력이지만, 그녀가 다루는 어둠은 역사와 업이 만들어낸 신비이기 때문이다.

'시조의 어둠 속에 숨어있던 신비에 대해 몰랐으니, 군국이 연전연패하는 것도 당연하지. 피리 부는 사나이. 너의 신비를 해체하겠다.'

으음. 하지만… 내 신비는 인간 바깥쪽에서 오는 게 아닌데.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티르와 회귀자는 이 자리에 없다. 죽어가는 노역자들을 구출하는 동시에, 몰래몰래 밖으로 빼내고 있겠지.

여기 있는 면면은… 그 사실을 알려도 별로 크게 해가 되지 않을 거고.

음. 좋아. 어렵겠지만, 이번에는 회귀자와 티르의 도움 없이 해내야겠는걸.

'신비? 휴이에게?'

잠깐 머뭇거리긴 했지만, 히스토리아의 동요는 짧았다. 그녀는 숙련된 군인이었고 목표를 혼동하지 않았다.

'예전부터 잡지식이 많았어. 무언가를 물어보면 보통 대답이 나오곤 했지. 그의 말대로일지도 몰라. 그래도 그게 무슨 상관이지? 지금은 휴이의 정체보다, 내 눈앞에 있는 존재의 정체가 더 급해. 아마, 저것의 정체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히스토리아의 얼굴과 몸을 한 상대다.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 몰라도, 변신했다면 만전일 리 없다.

만전이 아닌 상태에서 잠시간 히스토리아와 호각을 겨뤄? 군국에서 그만한 능력을 지닌 존재는 오직 여섯 명뿐. 그중에서도 능력이 온전히 드러난 다른 사람과 달리, 많은 것이 베일에 싸인 사람은 오직 한 명.

"지크흐룬드 공안부장. 당신입니까."

지크흐룬드가 미소를 지었다.

"알아차리는 게 늦었어, 히스토리아. 너와 합을 나누는 그 순간부터 눈치챘어야지. 역시 너는 첩보전에는 영 젬병이구나."

"공작과 잠입이 특기이며, 은신술과 박투술에 능하다고 소개했었죠. 은신술 쪽은 거짓말이었군요."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는 말이 있잖아? 변신술을 쓴다는 사실은 극비야. 감시 대상이 그걸 알아서야 안 되니까. 내가 원하는 건 "

"그렇다면 지금은?"

"숨기는 의미가 없지."

지크흐룬드는 히스토리아 너머의 나를 가리켰다.

"저기, 미래를 보는 신비가 눈앞에 있는데. 내가 숨겨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니."

"이간질을 시도하는 겁니까? 무의미합니다. 지금 상황에서 확인할 수 없는 의심으로 일을 망칠 만큼 무능하진 않아요."

"너는 그렇겠지."

이번에 지크흐룬드는 자기 어깨너머를 가리켰다. 히스토리아는 그쪽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모두가 다 그럴까?"

그곳에는 시아티가 있었다.

시아티는 지금 그 누구보다도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분명 제련소를 부수느니 마느니 고민하던 사이, 갑자기 캐러팔드가 배신하여 함정을 작동시켰다. 직후 세상이 빛으로 휩싸였다.

시야가 돌아오고 보니, 캐러팔드는 어디로인가 사라졌고 저편에서는 군국의 병력이 들이닥치는 중이었다. 다들 무언가를 하는 동안, 시아티가 할 수 있는 건 안전한 곳에서 공주를 지키는 일뿐.

그러나 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시아티라도, 지크흐룬드가 캐러팔드로 변신하자 한 가지 사실만은 깨달았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지크흐룬드라는 것을.

"네가…!"

시아티가 손가락을 들었다. 어두운 마력이 그녀의 손가락을 감쌌다.

작전도 뭣도 없었다. 증오스러운 적에게 똑같은 고통을 느끼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시아티는 왼손의 검지를 쥐었다.

그때였다. 짧은 시간, 지크흐룬드가 '캐러팔드'의 어조와 눈빛으로 말했다.

"시아티. 흑마법은 만능이 아니야. 나는 네가 흑마법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에 구애되기 마련이다. 상대가 적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아직 충분히 익히지 못한 시아티가 멈칫거렸다.

찰나였으나, 지크흐룬드에게는 충분히 길었다. 지크흐룬드가 뛰쳐나가는 방향을 본 히스토리아가 다급히 외쳤다.

"시아티! 뒤로 빠져!"

그러나 말을 끝맺는 순간 이미 지크흐룬드는 시아티의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기묘한 체술이었다. 상대와 미리 합을 맞춘 듯한, 물 흐르듯 아주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시아티가 눈치채기도 전에 지크흐룬드는 그녀의 등 뒤로 흘러갔다.

시아티가 반응하기도 전, 지크흐룬드는 순식간에 그녀의 팔을 꺾어서 제압했다. 육장성의 기공 앞에서는 강철로 된 의수도 지푸라기나 다를 바 없다. 뼈와 철골이 한 손에 잡혀 같이 삐걱거렸다.

"끄으으으…!"

바둥거리는 시아티를 향해 지크흐룬드가 속삭였다.

"진정해, 시아티."

"놔아아! 그 얼굴로… 내 이름을 부르지 마…!"

"진정해야 캐러팔드의 목숨을 구하지. 네 몇 없는 친구들이 소중하지 않아?"

시아티는 울컥거리며 무어라 말하려고 했다. 그녀는 친구들의 죽음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하멜른에서 가라앉았던 아이들은 서로의 발목을 잡을 바에야 차라리 자기 손목을 끊어버리겠다 맹세했다고.

하지만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적과는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눠서도 안 되건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몸이 절로 멈췄다.

그녀는 정말로 평범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외모를 어떻게 따라 했게? 너의 이름과 그의 말버릇, 암구호까지. 그 모든 걸 어떻게 알아냈게?"

"으…."

"당연히, 그를 붙잡아 심문한 끝에 얻은 결과지. 다시 말해, 그의 목숨은 내가 붙잡고 있는 셈이야."

킥, 하고 짧게 웃은 지크흐룬드는 시아티를 토닥이며, 나와 히스토리아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자, 히스토리아. 휴이. 너희들의 소중한 친구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나의 지시에 따라주실까."

소중한 친구에 시아티는 물론 캐러팔드까지 끼어 있다는 건 분명했다. 히스토리아가 이를 악물었다.

"인질극을 할 셈입니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지. 하지만 우리도 궁지에 몰린 만큼, 수단과 방법을 가릴 새가 아니라서."

"쓸모없습니다. 저희는 들러리에 지나지 않아요."

"하지만 들러리라도 떼어내서 나쁠 것 없지. 거기다, 너희라면 설득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나."

히스토리아를 겨냥한 듯한 발언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지금 그의 관심은 온전히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 이제는 대놓고 견제야? 진짜 나를 벗겨 먹을 생각이네. 더 무능력한 척은 할 수 없겠는걸.

왜냐면….

"시아티, 히스토리아. 속지 마. 저 말을 믿어선 안 돼."

"휴이. 냉철하게 생각해봐.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몰라. 우리가 군국의 턱밑까지 따라온 지금이야말로, 안전을 보장받을 기회…!"

"캐러팔드는 이미 죽었어. 그는 시체를 가지고 인질극을 벌이는 거야."

지크흐룬드는 함박웃음를 지었다. 꼬인 실타래를 풀어냈을 때, 오랜 시간 뒤쫓던 사냥감을 사로잡았을 때 보이는 통쾌한 미소였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시아티의 얼굴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마침 뒤에 있는 지크흐룬드의 얼굴과 대비되어 더욱 돋보였다.

마치 행복의 총량은 정해져 있으며, 두 사람분의 몫을 지크흐룬드가 퍼간 것처럼 보였다.

미안. 그렇지만 여기서 시간을 더 끌릴 수는 없어서.

"군국이 레지스탕스를 살려둘 이유가 없잖아. 레지스탕스는 노역장에 가두지 않아. 노역자들을 선동해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거든. 그러니까 군국은 심문이 끝난 직후 바로 그를 죽였을 거야."

캐러팔드는 죽었다. 온갖 고문과 심문 끝에, 원하는 정보를 다 얻어낸 끝에 쓸모없어진 그를 처분했다.

시점은 비교적 최근이다. 날짜로 따지면 지선이 탄탈로스에 찾아왔을 때. 사령부는 전쟁을 준비한다며 공안에게 군 시설 감찰을 명령했고, 그 과정에서 공안부는 캐러팔드를 검거했다. 그는 지크흐룬드의 '심문'을 받았고….

그게 지크흐룬드의 기억 속에 있는 캐러팔드의 마지막 모습이었으니. 캐러팔드는 분명히 죽었다.

시아티는 꼭 내가 그를 죽인 것처럼 노려보며 외쳤다.

"살아있을 수도 있잖아…!"

"아니야. 죽었어. 인간을 순수하게 '가두기' 위한 시설은 비효율적이거든. 노역시키지 못할 바에야 그냥 죽이는 게 군국의 방식이야."

단정짓는 내 말에 시아티가 발끈해서 외쳤다.

"휴이 너는, 어째서 그걸 확신하는 거야?! 캐러팔드가 죽었으면 좋겠어?"

"현실을 이야기하는 거야. 만일 그가 살아있다고 하더라도, 공안의 심문을 받고 멀쩡할 리 없으니까."

시아티는 입을 콱 다물었다.

레지스탕스는 저마다 사연을 갖고 찾아간 이들이다. 어지간해서 동료를 팔아넘기지 않는다.

달리 말해, 지크흐룬드가 직접 캐러팔드를 심문해서 자백을 받아냈다면, 캐러팔드의 상태는 어지간하지 않다는 뜻이다.

"…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도대체 어떻게 확신하냐고!"

"왜냐니! 말했잖아. 그에게는 신비가 있다고!"

인질극이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지크흐룬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 정도 정보로 나를 낚아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역시 알고 있어! 그래, 모를 리 없지! 예지냐? 언젠가 밝혀질 미래가 너에게 진실을 속삭였나?"

이제는 숫제 확신이네. 쳇. 아니거든. 내가 진짜 예언자였다면 너 따위한테 걸렸겠어?

"저는 예언자도 아니고,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신에게 알려줄 의무는 없죠."

"알리지 않더라도 상관없어. 그럴수록 불리해지는 건 너니까!"

아, 그래. 그런 이야기도 있었지.

역사가 짧은 군국에서 신비를 다루는 부서는 딱 하나뿐이다. 역사적 사료를 조사하고 그것을 분석하고 해체하는 신비 해체자들. 내가 군국에서 계속 있었다면, 임관되었을지도 모르는 부서.

그곳의 수장이 지크흐룬드였지. 신비에 취약한 군국에서, 신비를 이용하고 맞서 싸울 힘을 지닌 유일한 육장성.

그는 예언에 대처하는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지크흐룬드는 나 대신, 히스토리아와 시아티를 향해 말했다.

"시아티. 히스토리아. 너희는 원망을 엉뚱한 곳에 쏟아붓고 있다. 어째서 이 나라가 너희의 분노를 감내해야 하지? 바로 너희들의 앞에, 너희를 이 처지로 몰아간 원흉이 있는데?"

EP.263 절반의 고백

예언자의 숙명은 불신.

신화, 전설, 동화. 전해지는 그 어디에서도 예언은 지켜지지 않는다. 위험을 피하라고 경고하면 자석처럼 그 위험을 향해 들러붙으며, 계시를 따르라 충고하면 코웃음을 치면서 그것을 짓밟는다.

나를 예언자라 확신한 지크흐룬드는, 내 친구들을 향해 불신을 심었다.

"봐봐. 육장성의 작전도, 변장도 단숨에 간파하는 휴이가 어째서 하멜른의 비극은 막지 않았지? 그의 능력과 지식이라면, 니콜라스의 계획 정도는 사전에 알아차렸을 터인데."

"궤변은…!"

"애초에. 니콜라스가 금기를 저지르려던 이유? 휴이가 그 자질에 비해 재능이 부족해서지. 니콜라스가 금기를 저지르려는 때 가장 활약한 사람? 너희를 이끌고 니콜라스를 무찌른 휴이지. 심지어 그 결과, 휴이는 히스토리아라는 폭탄을 군국의 최심부에 심어 넣는데 성공했어. 가장 결정적인 순간 개인적인 정 때문에 군국을 배신할 배신자를 육장성으로 만든 셈이지!"

시아티는 이미 해방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시아티는 그를 공격할 생각도 없이 빤히 나를 쳐다보았다. 뭔가 표현하고 싶어도 언어로 빚어낼 수 없어서, 감정이 목에 걸린 듯 괴로워하는 얼굴로.

'먹혀들었군. 아니, 그럴 수밖에. 예언자는 언제나 증오와 박해의 대상이었다. 성황청이 득세하면서 달라진 거지….'

자기 의도가 충분히 먹혀 들어갔다는 것을 확인한 지크흐룬드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 간단한 논리다! 만일 피리 부는 사나이에게 전지나 예지에 가까운 힘이 있다면, 혹은 그에 가까운 직관이 있다면. 그는 하멜른에서 왜 아이들이 죽도록 방치했지? 총교관이 금기를 저지르려는 계획을 미리 깨닫지 못했지? 당연히, 그가 모든 일을 의도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어!"

"아니야!"

히스토리아는 비교적 상황이 나았다.

그녀의 후회는 그때 움직이지 못했던 자기 자신을 향한 것. 내가 원흉이든 뭐든, 그녀의 힘으로 막을 수 있던 비극을 흘려보낸 것에 대한 죄악감이었으니.

그러나 나를 향한 감정이 아까와 똑같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듣지 마! 이건 그의 계략이야! 내부 분열을 일으키려는 거라고!"

"나의 계략보다 먼저 시작되었던 그의 계획. 아니, 운명이라고 하나! 나를 걸고 넘어기지 전에 그부터 추궁해야 하지 않겠어, 히스토리아?!"

히스토리아가 지크흐룬드의 목소리를 가리려는 듯이 크게 외쳤다. 그러나 연기로 다져진 지크흐룬드의 발성은 어디 가지 않았다. 여전히 귀를 파고드는 그의 목소리에 히스토리아는 넌더리를 내며 나를 붙잡았다.

"휴이! 빨리, 말해줘! 너는 휘말렸을 뿐이잖아!"

나를 믿고 싶어 하는 히스토리아조차도, 스멀거리는 의심을 지우지 못한다. 점차 쏟아지는 원망과 불신의 시선. 이대로 입을 다물고 있어도,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해도 빠져나갈 수 없는 의심의 늪.

솔직히, 휘말린 거 맞다. 하지만 피할 기회는 얼마든 있었고, 도망칠 방법은 수두룩했다.

그래도 나는 계속 하멜른에 있었다. 니콜라스가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것을 알고도 그의 계획에 따랐다.

왜냐면.

"휘말렸지.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어. 나는 니콜라스의 계획을 알고 있었거든."

"…휴이?"

"그래도 따랐지. 왜냐면 그게 니콜라스의 바람이었으니까."

히스토리아는 확연히 달라진 내 태도에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나는 히스토리아를 제치고 한 걸음 내디뎠다.

혼란스럽다 못해 공포에 휩싸인 시아티와, 잔뜩 신이 난 지크흐룬드에게.

'드디어 말할 생각이 들었구나? 그래, 이제는 밝히지 않고 빠져나가기 어려울 거야. 남의 힘만을 이용해서 원하는 바를 이룩해온 네가, 신뢰를 잃는 건 치명적일 테니!'

맞는 말이야. 하지만 다른 게 하나 있어.

지크흐룬드의 추측이야 어쨌든, 실제로 나는 독심술을 조금 할 줄 아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 예언처럼 거창한 신비 따위는 몰라.

그러나 꼭 정직할 필요는 없다고. 내가 탄탈로스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알아?

"지크흐룬드 씨. 그가 금기를 저지르기 전까지 제가 왜 니콜라스를 가만히 놔뒀을까요? 한번 맞춰보시겠어요?"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겠지."

"아니요. 그도 그의 바람을 이룰 기회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에요."

"…바람?"

그래, 바람.

니콜라스는 분명 계산적이며 자기 기준 이하의 인간을 하찮게 취급하는 인간이었지만,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나에게 자상한 교관이었다. 금기를 저지른 것도, 차라리 자기 손을 더럽히고자 억지로 무대를 만들어준 것.

아, 물론 전혀 고맙지 않다. 그는 자기 욕망에 충실했을 뿐이니까.

"군국에 공헌하고 싶었죠. 힘의 크기만 키운다면 육장성, 어쪄면 그 너머를 바라볼 수도 있는 제게 강제로 힘을 안겨주고자 했어요."

"그러나 너는 받지 않았지. 성황청은 금기의 존재를 배격하니까."

"아니요. 달라요. 그게 금기라서가 아니라, 그건 나를 변화시킬 일이니까. 자신을 지켜야 할 항상성을 가진 저는 그에 저항해야 했죠. 그래서 같은 목적을 가진 친구들과 힘을 합쳐서 그를 저지했어요."

니콜라스는 자기 뜻을 관철하기엔 힘이 부족했다. 그래서 패배하고 말았다. 아이들이 교관을 상대로 고무적인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승리했음에도 아이들은 원하는 것을 잃었죠. 이 나라에 인정받고 싶어서 졸업실습에 참가했지만 그들이 깨닫게 된 건 나라가 그들을 버렸다는 사실뿐. 모두 군국을 원망하고 증오했어요."

지크흐룬드의 웃음이 서서히 멈췄다.

"…그래서, 그들의 바람대로 군국을 무너뜨리러 왔다?"

"아니요. 나라를 무너뜨리려는 바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극히 한정되어 있어요. 나라는 너무 크고 한눈에 보이지 않아서, 당사자도 나라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죠. 상대를 모르는데 어떻게 증오할 수 있겠어요? 왕국이라면 왕을 치면 그만이지만, 심지어 군국은 왕이 없는 나라인데."

"그렇다면? 그들의 바람은 뭐였지?"

"세상에서 가장 무책임하고, 가장 부담스러운 바람이죠."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많은 바람이기도 하다. 나는 눈을 내리깐 뒤 중얼거렸다.

"그들은 죽어가면서도 그저 자신이 기억되었으면 했어요."

더 살아갈 의욕도 힘도 없어서 스스로 죽더라도, 이 죽음이 무의미하지 않기를 소망했다. 누군가 자신의 고난과 절망을 이해해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천국도, 지옥도 없죠. 사후세계란 존재하지 않아요. 당연히, 그들 자신을 제외하면 그들을 기억해 줄 이는 없어요."

죽음은 그 자체로 끝.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죽음은 정지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굴러가던 돌이 무언가에 부딪혀 멈추는 것처럼, 떠다니던 구름이 물방울로 변해 떨어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결과. 아니, 자연 그 자체.

그곳에 억지로 부여한 형이상학적이며 초현실적인 의미는 허상조차도 못 되는 망상.

그런데 나는 그 바람마저 저버릴 수 없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납골당. 잊힌 이들을 추모하는 도서관."

거쳐 간 이를 전부 기억한다. 그게 바람이었기에.

죽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죽음을 각오했다는 외침은 허울 좋은 핑곗거리. 누구도 갚을 생각을 않는 공수표다.

하지만 한쪽에서는 누군가 천천히 그 무책임한 빚을 갚고 있다. 그것이 바람이기 때문에.

"피리를 부는 사나이."

헤매는 아이들을 이끌고, 강적과 맞서 싸울 방법을 일러주었다. 그리고 죽은 아이들을 기억하며 되뇌인다.

"동방에서 온 박사. 지나가던 선비. 떠돌이 용병. 은둔 현자. 탁발승. 길손. 그런 이름으로 불려왔던."

금기를 저지르고, 금단을 넘고, 금제를 어겨서라도 이루고자 하는 욕망.

평범한 발상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루어낼 방법을 속삭이는. 동화나 연극, 전설 혹은 서사시든 이야기든 하나는 있을 법한 등장인물.

"평범한 사람입니다."

모든 진실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말한 내용은 전부 진실이다. 아무리 의심하고 파헤쳐도 모순을 찾을 수는 없을 거다.

결국 모순점을 찾아내지 못한 지크흐룬드는 일단 내 말을 진실이라고 잠정 결론을 내렸다.

'비슷한 전승은 몇몇 있다. 악몽을 불러일으키는 궤짝이나,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 등. 하지만, 한 인간이 그런 종류의 신비를 지닐 수 있던가…?'

내 정체성은 독심술사. 나는 인간의 노골적인 바람을 마주하기에, 가능하다면 그 소원을 들어주게 된다. 어디까지나 가능하다면 말이지만.

그러니까 독심술을 숨기고서, 그 점을 부각하면 거짓말은 아니게 되지.

지크흐룬드는 아까까지 그가 주장했던 내용에 약간의 미련을 갖고 나를 떠보았다.

"…성황청이 보낸 예언자가 아니라고?"

"예언자일 리 없잖아요. 처음의 성녀가 십자가에 못 박힌 이후 오직 성녀만이 예언할 수 있게 되었는데. 남자인 제가 무슨 수로 예언하겠어요?"

"그딴 건 꾸며내면 그만이야. 성녀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든가, 아니면 계시를 받고 움직이고 있다든가. 혹은 모종의 수로 성별을 속였다든가. 속일 수단은 많아."

자기의 역용술 능력 때문인지, 아니면 직업병인지. 꽤 열린 사고를 갖고 있네. 회귀자가 앞에 있었다면 남장 사실이 들통났겠는걸.

"와, 제가 사실 여자, 그것도 성녀라고요? 제 입장에서는 마지막 수단이 가장 매력적이네요! 살면서 한 번쯤 여자의 몸을 경험하고 싶었거든요! 아!"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지크흐룬드를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눈앞에 몸을 바꾼 경험자가 있네요. 조금 전까지는 히스토리아였다가 캐러팔드의 걸로 바꾸었죠? 어때요, 남자가 되었을 때 기분이? 아니, 여자가 되었을 때의 기분을 물어봐야 하나? 지크흐룬드 씨, 당신의 원래 모습은 뭐죠?"

"…본래라면 밝혀서도 안 되지만, 네 앞에서 숨기는 의미는 없겠지. 죽은 친구의 얼굴을 하고 있는 건 예의가 아니기도 하고."

이게 과연 사람이 할 소리인가 의심스러운 말을 중얼거린 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으며 골격을 바꾸었다. 우득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기공이 붙잡고 있던 뼈와 근육이 재배치되었다. 머리카락이 뿌리부터 새까맣게 색을 바꾼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는 건 변신하는 것보다 몇 배는 빠르고 자연스러웠다. 평소에도 자기 '원래 모습'을 계속 되뇌고 있기 때문이리라.

모범적일 정도로 말끔한 인상의 사내가 나타났다. 평범하게 생겼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나쁜 의미로 새하얀 도화지 같은 남자. 키도 평균 크기. 체형은 약간 마른 편. 내가 지크흐룬드의 생각을 읽을 때마다 자꾸 아른거리던 '원래 모습'….

"여기까지 와서 속이지 말고. 그게 어떻게 원래 모습이에요?"

이 아니다.

"특색없는 얼굴. 평균적인 키. 적당히 마른 몸. 기공의 달인이 저렇다고? 에이, 그럴 리가. 아무리 봐도 저거, 아키 아바타의 기본 설정값이잖아요?"

지크흐룬드는 즉답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이게 나, 군국 육장성 지크흐룬드의 원래 모습이다."

"아. 그런 설정?"

인간은 자기의 얼굴을 마음 속으로 그리지 않는다. 왜냐면 자기 얼굴은, 자신의 몸은 언제나 거기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지크흐룬드가 계속 자기 정체를 되뇌이며, 머릿속으로 그 자신의 원래 육체를 잊지 않도록 떠올린 건.

"그러면 육장성이 되기 전에는요? 그 전엔 당신이 어떤 이름이랑 어떤 얼굴로 살았는데요? 아니, 당신이 역용술을 배우기 전에는 어떤 얼굴이었는데요?"

지크흐룬드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백지같은 얼굴이 울컥거리며 언짢다는 감정을 그렸다. 참, 보여주기 위한 용도로는 딱 맞는 얼굴이다.

그렇기에 진짜일 리 없다.

나는 얼굴에서 미소를 싹 지우며 그를 추궁했다.

"당신, 도대체 누구야?"

EP.264 상상 속의 총알

타국에서 온 지크흐룬드가 왜 군국에 충성할까?

이 나라가 마음에 들어서? 이런 속 보이는 말을 하는 사람 있으면 사기꾼이거나, 옆에 공안이 감시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다. 왕국에 살던 사람은 되어야 상대적으로 선녀처럼 보이지, 신비도 없고 놀거리도 없는 이 나라 어디가 마음에 든다고.

돈을 많이 줘서? 이 미친 나라는 최강자인 육장성도 떵떵거리면서 살지 못하는 극단적인 구조를 가진다. 상위 1%가 부의 1%를 점유하는, 피라미드보다는 오벨리스크 구조에 가까운 대단히 정직한 나라인 것이다. 자금 대부분은 군국이 직접 운용하며, 돈을 쏟아부어 무기를 만들어줄지언정 개인 재산은 좁쌀만큼 준다. 모아봤자 쓸 곳도 없다는 점도 한몫한다.

그런 망할 나라에서 지크흐룬드가 충성하는 이유는 하나다.

'그녀'가 그를 찾았기 때문이다.

그의 기억 속의 '그녀'는, 내가 직접 읽은 게 아니라 잘은 모르지만, 정체를 숨긴 지크흐룬드를 찾아냈다.

오랜 도피 생활 끝에 원래의 자기 자신이 누군지, 어떤 모습인지 잃고 헤매던 지크흐룬드는 그녀를 자아의 닻으로 삼아서 자신을 이루었다.

그녀는 특별하다. 하지만 유일하지는 않다.

왜냐면, 나도 그를 알아볼 수 있으니까.

"아까도, 지금도. 똑같이 꾸며낸 얼굴이잖아요? 심지어 이번 건 정도가 더해. 아까는 최소한 사람의 얼굴이었지, 지금은 만들다 귀찮아서 내던진 조각상 같잖아. 그걸 당신으로 삼아도 괜찮은 거예요?"

"…괜찮다니? 나는 나다. 네가 뭘 알고."

"저는 모르니까 알려달라는 거예요. 당신의 진짜 얼굴을… 아니, 진짜 당신이 누군지 말이죠."

진짜. 그 단어가 나오자 지크흐룬드는 무기질적인 표정을 보였다. 평정을 가장하기 위해 일부러 꾸며냈다기보다는 무언가를 꾸며내기 전 힘을 잔뜩 준 준비 자세처럼 보였다.

"내가 누군지가 그렇게 중요한가? 나는 육장성 지크흐룬드이며, 모습을 바꾸는 건 내가 가진 강력한 특기다. 그 자체가 나를 의미하니. 나를 구분하기 위한 다른 특징이 필요하지 않아."

"뭔 말이에요. 여기서 당신이 당신이라는 거 누가 몰라요? 저는 특징이 아니라, 자격 때문에 묻는 건데요."

자기 자신을 잃을지도 모르는 불안감에, 지크흐룬드는 자기를 알아보던 '그녀'를 닻으로 삼아 그녀를 위해 일했다.

그렇다면 그를 흔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닻을 제거해야지.

"저는 사람들의 소원을, 바람을 듣고 행동해요. 예언자와는 결이 다르죠. 그들은 답이 정해진 미래를 보고 상황을 바꿔버리지만, 저는 주어진 상황에서 그들이 바라는 것을 얻게 하죠."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어. 내가 보기에는 똑같아 보이는데."

"다르죠. 그들의 소망은 진짜니까요. 진짜 인생. 태어나면서부터 유일하게 주어져,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의심할 필요도, 여유도 없이 치열하게 살아간 이들의 욕망이었어요. 저는 그 바람을 들어준 거고."

진짜. 가짜. 진짜. 타고난 연기자인 지크흐룬드는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독심술사인 나는 진짜와 가짜를 언급할 때마다 움찔거리는 감정을 읽었다.

닻이 좀 가볍네. 건드릴 때마다 들썩거리고. 이래서야 고정되겠나.

"그런데 당신은 만든 얼굴에 만든 신분으로, 군국의 명령에만 따르고 있네요. 이게 당신이 찾은 진짜 당신이에요?"

"너…."

나는 그의 마음속 닻을 움켜쥔 뒤, 웃는 얼굴로 그것을 빼냈다.

"그냥 도구잖아요? 요즘은 도구에게도 생애라는 단어를 써주나 봐요?"

"…하찮은 도발. 다짜고짜 할 말이 궁해진 모양이지?"

'도발이다. 여기서 말려들어서는 안 돼. 바람을 읽는다고? 그 역시 예언의 일종이겠지. 시아티와 히스토리아의 증오와 의심을 이용해서, 그를 몰아넣어야.'

그는 내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군국의 최심부까지 도착한 나라는 존재에 대해, 이 모든 게 우연 혹은 행운이라고 쉽게 받아넘기지 않는다. 뭐든지 의심하고 경계하며 사소한 것까지 파고든다. 아마 오랜 시간 쫓긴 덕분에 생겨난 성격이겠지.

그러나 의심이 너무 지나친 덕분에, 그는 내 능력을 완벽히 믿었다.

"아까 말했죠? 저는 바람을 읽는다고."

"…뭐?"

"잃어버린 당신 모습을 되찾고 싶잖아요. 그런데 왜 그러고 있어요?"

존재의 닻은 항구가 아니다. 그는 망망대해에서 조난을 겪은 표류선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지크흐룬드라는 자아마저도 사실 꾸며낸 거에 불과하다는 거지.

"지크흐룬드 역할을 하면 할수록 당신의 원래 모습에서 멀어질 텐데? 가짜 임무. 가짜 삶. 가짜 얼굴. 육장성으로서의 목표까지 지크흐룬드라는 역할에 충실한 것일 뿐 당신의 자신의 바람은 아니야. 도대체… 리아! 나를 지켜!"

가타부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 순간, 존재를 위협받은 지크흐룬드는 땅을 박차고는 나를 향해 달려왔다.

이유는 없다. 누군가 칼로 자신을 찌르려고 할 때 저항하는 건 정당하며 자연스러운 이치다. 지크흐룬드는 자아를 공격하는 나를 배격함으로써 자신을 지키려고 들었다.

그러나 내 앞에는 히스토리아가 있다.

"떠맡기기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던 히스토리아가 제때 반응했다. 내가 싸움의 여파에 휘말려 다칠 것을 걱정한 그녀는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가서는 지크흐룬드와 맞섰다. 한쪽 다리를 단단히 고정하고, 달려드는 지크흐룬드를 낚아채는 듯한 발차기를 날렸다.

콰아아아앙.

재난에 가까운 충돌이었다. 폭발음이 들리고 부서진 바닥이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히스토리아의 기공, 폭사경은 밀어내는 성질을 가진다.

다루기는 까다롭지만 대충 쓰기는 쉬운 종류의 기공. 히스토리아는 그것을 아낌없이 뿌려댔다. 어마어마한 기공을 가진 두 육장성의 충돌은 마주 구르는 고무공끼리의 충돌과 비슷한 결과를 낳았다. 둘은 거울처럼 서로 멀어지며 땅을 주르륵 미끄러졌다.

"휴이! 조심해!"

한 번의 격돌에서 그의 목표를 깨달은 히스토리아가 외쳤다.

"그는 너를 노리고 있어!"

직후 지크흐룬드가 다시 돌격했다. 히스토리아가 아닌, 바로 나를 향해.

의도를 숨길 생각도 없이 곧장 나를 노린다. 다급히 달려온 히스토리아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는 양팔을 당겼다.

폭사경, 폭쇄.

푸르스름한 기공이 모든 것을 밀쳐냈다. 기공량만큼은 육장성 상위급인 히스토리아가 쓰는 폭발. 지크흐룬드조차도 정면으로는 막아내지 못한다. 그는 대신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유술의 기본은 흘려보내는 것. 그는 흐름에 거스르는 대신 빈틈을 파고들었다. 역풍을 앞에 두고도 꺾이지 않는 배처럼, 그는 한걸음 한걸음 차분하게 나아갔다.

'그도 전투의 달인이야. 싸워서 이길지 질지는 모르지만, 휴이를 지킬 수는 없어.'

상대의 격을 파악한 히스토리아는 다급히 나를 보고 외쳤다.

"안전한 곳으로 도망쳐!"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대로 히스토리아의 등 뒤에 찰싹 붙었다. 갑작스런 접촉에 히스토리아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뭘 하는 거야?!"

"여기서 안전한 곳은 네 등 뒤밖에 없어. 잘 부탁해."

"위험해! 기공의 여파도 무시할 수 없어!"

"여파에 휩쓸리는 게 죽는 것보단 낫지. 우왓! 리아, 앞!"

히스토리아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이 쭉 내밀어졌다. 긴 손가락이 내 옷자락을 낚아채려는 순간, 히스토리아가 그것을 눈치채고는 오른팔로 지크흐룬드의 팔을 휘감았다.

그 순간 지크흐룬드가 미끄러지듯 히스토리아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무릎을 깊숙이 집어넣고 팔을 꺾는 것으로 지크흐룬드는 단번에 히스토리아의 무게중심을 뒤흔들었다.

'유술?! 위험해. 아래쪽을 빼앗겼어…!'

나약한 자들 사이에서는 위쪽을 점하는 게 더 유리하다고들 한다. 힘에 내리찍는 무게를 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공을 익힌 자들에게는 반대다. 고작 무게 따위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기공으로 밀어내는 힘이 당기는 힘보다 강하기에, 아래쪽을 빼앗기면 발이 땅과 떨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무주공산이다.

'위험…해…!'

하물며 히스토리아의 기공은 폭사경. 반발에는 강하지만 흡착에는 손색이 있다. 아래쪽에서 밀어내는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히스토리아의 몸이 들썩거렸다.

물론, 아래쪽을 점한다고 바로 승부가 결정되지는 않는다. 다만 히스토리아는 지금 혼자가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휴이가!'

지크흐룬드는 히스토리아를 치우고 나를 노릴 셈이었으니까. 히스토리아가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한계는 더 빨리 찾아왔다.

"안…!"

후우웅. 히스토리아의 몸이 퉁 튕겨 오르고, 방해물을 치운 지크흐룬드는 곧장 그 뒤에 있던 나를 노리고 맹렬한 일권을 뻗었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제어실 안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그의 주먹은 빗나갔다. 왜냐면 나는 히스토리아의 등에 꼭 매달려, 나란히 날아가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후우. 꽉 잡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 날아갈 때 냅다 업힌 보람이 있어.

히스토리아의 등에 착 달라붙은 나는 해방감을 느끼며 외쳤다.

"아하하하! 꼴사나우시네요! 정곡을 찔렸나요? 그럴 수밖에! 제가 읽은 당신의 바람은 하나같이 가짜였으니까요!"

"휴이! 그를 자극하지 않는 편이…!"

"이미 늦었어! 여기까지 왔으면 끝까지 가야지!"

공중에서도 용케 균형을 잡은 히스토리아는 벽을 뒤덮은 철조망에 발을 걸고는 똑바로 섰다. 물론 나를 뒤로 매단 채로.

이렇게 있으니까 내가 엎드린 꼴이 돼서 은근히 편하네. 나는 아래쪽에서 우리를 올려다보는 지크흐룬드를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미안하지만, 당신은 나에게 뭐라 할 자격이 없어! 내가 관조하는 입장에서 인간의 바람을 들어주더라도 그건 진짜야. 진짜 내가, 진짜 나로서. 진짜 삶을 가지고 치열하게 사는 인간의 바람을 들었어! 필요할 때마다 얼굴을, 이름을, 신분을 버리고 갈아엎은 당신이랑은 다르다고!"

독심술사의 도발을 맛봐라. 약한 곳만 후벼 파주마. 내 도발에 지크흐룬드는 곧장 이쪽 벽을 향해 뛰어왔다.

정작 싸우는 히스토리아는 졸지에 둘 사이에 끼인 꼴이 되어 곤란해했다.

"휴이! 도발이 과해!"

"이제 어쩔 수 없다니까! 호랑이 등에 탄 격이야!"

"1:1로도 승산을 장담 못 하는데, 너를 등에 멘 채 싸울 수는 없어…! 무기가 없다면 더더욱…."

"무기가 필요해?"

무기라면 당장 쓸 수 있는 게 있지.

소매에서 다이아몬드 카드 한 장을 꺼냈다. 생체 단말을 경유하여 연금변환을 한 뒤, 지크흐룬드에게 보이지 않게 히스토리아의 어깨에 살짝 걸쳤다. 히스토리아는 보지도 않고 그 묵직한 촉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총?"

"내가 썼던 연금 무기야. 탄환은 넣어놨어."

히스토리아가 총을 받아쥐고는, 자연스럽게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한 번 빙글 돌렸다. 총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녀는 그것만으로 리볼버의 구조와 잔탄 개수를 파악했다.

그리고 화를 냈다.

"세 발밖에 없잖아!"

"채워 넣을 짬이 없었단 말이야."

"아무렴 그래도 그렇지, 총알 세 발로 어떻게…! 하필 또 세 발이야?!"

'영점잡이는 총탄 세 발로 영점을 잡는 기술이야. 쓰려면 최소한 네 발은 있어야 하는데!'

"쉿! 지크흐룬드는 세 발인지 몰라! 모르면 여섯 발이나 세 발이나 마찬가지야! 상상 속의 총알이 그를 견제할 거라고!"

"퍽이나…!"

그래도 뾰족한 수가 없었기에 히스토리아는 총을 받아들고는 소매 아래에 숨겼다. 이런 잡기술은 가르쳐준 적 없는데. 옛날에 카드놀이 할 때 했던 장난질이 꽤 기억에 남았나 보다.

그러다 문득 히스토리아는 리볼버의 손잡이를 긴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 총. 휴이가 나에게 총을 써보라고 권했을 때 줬던 거와 같은 종류네…. 기억이나 하려는지는 몰라도.'

"일단 해볼게. 어디 안전한 곳으로 피해있…. 아니. 내려가기 전까진 꽉 잡아!"

말을 끝마치고 히스토리아는 격자로 된 철조망이 계단이라도 되는 양 단숨에 뛰어 내려갔다. 땅에 떨어지기 직전 그녀는 살짝 감속했고, 나는 그 틈에 벽에 떨어질락 말락 붙은 철조망을 잡고는 바닥으로 뛰었다.

땅을 구르는 건 익숙하지만 등 근육이 뻐근해지는 건 익숙해지기 싫다. 내가 주춤거리며 일어날 무렵, 지크흐룬드의 앞을 다시 히스토리아가 막아서는 광경이 보였다.

EP.265 얼굴 없는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