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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45 강철에는 눈이 달려있지 않다

막시밀리앵은 연금술의 달인이다.

그는 3레벨 이하의 연금물질을 자유자재로 연성할 수 있다. 가연금성 물질이 손가락 끝이 닿기라도 하면, 침투한 마력이 순식간에 구조를 무너뜨리고는 그가 원하는 대로 다시 짜 맞춘다.

하지만 이 자체는 별로 대단한 것이 못 된다. 연금술의 규모나 속도는 순전히 마력을 다루는 문제. 최소한의 기반 지식만 갖추어졌다면, 연금술은 마력을 불어넣는 만큼만 반응하는 정직하고 재미없는 기술이다. 하물며 타인의 기력이나 마력이 담긴 물건은 연금하지 못하니, 얼마나 무력한가.

하지만 막시밀리앵의 연금술은 특별하다. 그건 그의 마력량이나 완력과는 다른 재능에 기인한다.

세상을 톱니바퀴의 집합으로 보는 관점. 그것을 밑바닥부터 쌓아 올릴 수 있는 지성. 만물을, 심지어 이성마저도 톱니바퀴로 흉내 내려는 의지.

그것이 한 데 합쳐져서 만들어진 그는, 맨바닥에서도 홀로 성을 짜 올릴 수 있는 위인이다.

"쳇. 작명 센스하고는…!"

회귀자는 지잔을 감아쥐고는 앞으로 뛰쳐나갔다. 날뛰는 톱니바퀴를 쳐내기 위함이었으나, 단련된 직감이 위험을 감지했다.

무언가가 떨어지고 있다.

회귀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강철의 팔?"

조그만 톱니바퀴들이 부지런한 개미처럼 막시밀리앵의 몸 위를 기어갔다. 개미만큼이나 작은 톱니바퀴부터 사람 머리만 한 것까지. 막시밀리앵의 전신에서 기어나온 톱니바퀴가 철컥철컥 맞물리며 거대하고 기괴한 팔의 형태를 이뤘다.

근육의 역할을 하는 톱니, 관절의 역할을 하는 톱니, 뼈대의 역할을 하는 톱니.

각양각색의 톱니가 절묘하게 조립되어 하나의 형태를 이룬다. 그 모습은 톱니바퀴로 인체를 흉내 낸 것 같은, 기이한 조형미를 가진 모양새였다.

어깨톱니가 돌아갔다. 틱, 틱, 틱. 녹슨 어깨가 비명을 지르고, 길이만 3m가 될 법한 거대한 기계 기둥이 사람의 것처럼 움직였다.

투박한 조형미가 돋보이는 기계 팔. 그곳에서는 쇠못으로 채워진 바다에 파도가 칠 때 생길 법한 쇳소리가 들린다. 금속의 포말에는 소란스러움조차 없다. 소리마저도 묵직하고 중후하다.

강철 팔을 쳐든 막시밀리앵은 즐거운 듯이 외쳤다.

"도룡참, 이었나? 신선하군! 좋은 영감을 얻었어! 어디, 시험해보마!"

톱니바퀴가 돌아가고, 강철의 팔이 회귀자를 내리찍었다. 회귀자의 머리 위로 거대한 톱날이 떨어졌다.

"도룡참은 그거랑 완전 다르거든!"

톱날이 달린 거대한 강철 팔을 상대로, 회귀자가 지잔을 마주 쳐올렸다. 막대기로 파도를 막아내려는 무모한 시도처럼 보였으나, 지잔은 그게 가능한 막대기였다.

충격이 서로를 덮친다. 부스러진 톱니바퀴가 회귀자의 몸 위로 쏟아지고, 지잔에 튕겨 나간 강철 팔이 막시밀리앵의 전신을 뒤흔들었다. 굉음을 사이에 두고 양측이 서로 한 발짝씩 물러났다.

막시밀리앵은 강철 팔의 형태를 변화시키며 외쳤다.

"마신의 힘! 좋구나. 아주 좋아!"

"나는 싫거든!"

"서로의 목숨을 걸고, 맞물려보자꾸나!"

"죽을 거면 그냥 혼자 죽어!"

회귀자가 마주 외치며 지잔을 움켜잡았다. 그녀의 시야 뒤쪽으로 막시밀리앵이 만든 강철의 신생아가 스쳐 지나갔다. 땅을 긁는 소리가 자못 위협적이었다. 이대로 갔다간, 저 톱날이 달린 강철 바퀴는 자동마차를 공격할 것이다.

짧은 순간 회귀자는 고민했다.

'과병이 만든 장난감에 대응하기에는 여유가 없어! 그래, 동료를 믿자! 이따위 장난감으로는 내 동료에게 상처 하나 입힐 수 없으니까!'

어? 믿는다고?

그건 고맙긴 한데.

회귀자의 믿음은 나와 자동마차를 향해 거칠게 굴러오는, 거대한 강철 톱니바퀴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우와아. 저게 뭐야."

도로와의 마찰로 붉게 달아오른 강철 바퀴가 세상을 짓이기려는 듯 굴러왔다. 원초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압도적인 위용이 내 도주의욕을 고취시켰다.

회귀자의 믿음은 무겁다 못해 무섭구나. 이럴 거면 그냥 믿지 말아줘.

나는 자동마차의 상태를 돌아보았다. 아까 전진을 강요하며 회귀자가 작살을 낸 덕분에 자동마차 앞부분은 처참하게 부서져 있다.

다행스럽게도 전투를 상정하고 개발된 자동마차는 앞쪽이 박살 나도 동력만 멀쩡하면 굴러갈 수 있게 설계되었고, 그 동력은 지금 티르가 제공하고 있다. 즉 마르지 않는다는 소리.

"여기에 하나 더 끼워도 망가지지는 않겠지."

나는 중얼거리며 조종간을 비틀었다.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강철 톱니를 향해 정면으로.

"휴이?! 위험해!"

자동마차에 올라탄 히스토리아가 새된 목소리로 다그쳤지만, 나는 무시하고 밀고 나갔다. 강철 톱니바퀴가 자동마차 앞쪽을 연달아 긁는다. 따다다다당, 하고 연금강끼리 잇달아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자동마차는 조금 손상되었을 뿐, 강철 톱니의 공격을 손쉽게 버텨냈다.

"괜찮아. 티르의 힘으로 강화된 연금강은 어림잡아 4레벨 수준. 급조한 3레벨 연금강 정도로는 흠집도 안 나. 아지미사일 정도는 되어야 무너뜨리지. 저기처럼."

"멍!"

다른 강철 톱니바퀴는 아지가 아지미사일로 막아내는 도중이었다. 재빨리 달려간 아지가 옆쪽을 쾅 후려치자 세상을 삼킬 것만 같던 강철 톱니바퀴도 허무하게 좌우로 휘청거렸다. 아지는 자기가 우리를 완벽히 보호한 것마냥 자랑스럽게 으쓱거렸다.

"회전은 그 자체로 힘이야. 저렇게 강력하게 회전하는 바퀴는 그 무게 이상의 관성을 지녀. 옆으로 쳐내기보다는 정면에서 막는 게 훨씬 쉬워."

"멍?!"

회전의 힘을 몰랐던 아지는 비틀거리면서도 여전히 균형을 유지하는 톱니바퀴를 보고는 당황했다.

당황한 나머지, 앞발을 땅에 박고 몸을 돌려 뒷발로 걷어차는 회전 돌려차기를 써야 할 정도였다. 회전하는 톱니바퀴도 아지의 진심, '네 발'을 다 쓴 힘에는 어쩔 수 없어서 형편없이 찌그러져 허공으로 날아갔다.

역시, 몸이 좋으면 머리가 편해도 된다니까.

"뭐, 그건 여기도 마찬가지지. 티르, 버틸 만해요?"

[문제없다. 다만, 제 혼자 굴러가는 바퀴라니. 상당히 독특한 물건이로구나. 쓰임새가 영 짐작이 가지 않는데 어디에 쓰는 물건이냐?]

"우리를 짓이기는 데에요."

[호오. 그렇구나.]

끼기기긱.

자동마차와 톱니바퀴의 싸움. 원래라면 도로 위에서의 충돌은 양쪽 모두에 심대한 타격을 입혀야 하나, 차체를 권능으로 보강하고 동력으로 흡혈귀를 쓰는 1 티르력 자동마차는 충격에 아랑곳하지 않고 꾸준히 나아갔다.

톱날이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까지 쳐들어왔지만, 더 부수는 데 실패하고는 침묵했다.

여력이 다한 톱니바퀴는 자동마차 앞에 박힌 장식물이 되었다. 다만, 너무 깊숙이 들어와서 그런지 손잡이가 작동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경각에 달했던 앞바퀴쪽은 이제 완전히 으스러진 듯 싶었다.

흠. 어차피 앞바퀴는 이미 박살이 났겠다, 조금 고쳐볼까.

"좋아. 히스토리아! 잠깐 이리와서 핸들 좀 잡아 뽑아 봐."

"…잠깐! 기다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운전대를 잡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운전대를 놓는 것이다. 세상에는 운전해야 하는 사람이 하나 필요하니, 내가 그 의무를 저버리면 누군가가 떠맡게 되어있다.

내가 손을 놓고는 나가자, 다급해진 히스토리아가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미끄러지듯 운전석에 앉았다.

"야! 핸들을 놓으면 어떻게 해!"

"괜찮아. 나 말고 누군가가 잡아줄 거니까. 너처럼 말이야."

"멋대로 굴긴…!"

"아. 그리고 지금 핸들이 고장나서 급하게 고치려고 하는데, 잠깐 그것 좀 뽑아줄래?"

"달려가는 와중에 핸들을 고치겠다고? 이만큼 부서진 것을?"

히스토리아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순순히 내가 시키는 대로 행동했다. 양 다리를 교차해서 핸들 목을 감싼 뒤, 무릎을 펴서 단숨에 뽑아냈다. 제어를 잃은 앞바퀴가 미친 듯이 달그락거렸다.

그동안 나는 꼬챙이를 뽑아 들고 회전 톱날이 박힌 곳으로 향했다.

엄청나게 복잡한 구조는 아니다. 막시밀리앵은 톱니바퀴 공예의 달인이고, 간단한 구조일수록 내구성과 효용성이 뛰어나다는 진리를 깨닫고 있다. 그걸 좋아하냐 아니냐는 둘째치고.

"이 정도면 해볼만 한데."

톱니 사이 난 이음매에 꼬챙이를 끼웠다. 폭풍의 중심은 고요하다고 하지만, 그건 힘을 잔뜩 머금은 부동의 존재감이다. 꼬챙이가 폭풍에 표류하는 돛단배처럼 흔들렸다.

"그건 막시밀리앵 국장이 만들어낸 톱니바퀴야. 너라도 단시간에 구조를 파악하지는…."

못했겠지. 만일 아무도 없는 맨땅에서 이 장치와 마주쳤다면 말이야.

하지만 이 톱니바퀴는 막시밀리앵이 만들어낸 거다. 그는 톱니바퀴를 연금하며 이 구조를 단숨에 짜 올렸다.

덕분에 생각을 읽던 나도 조금은 구조에 대해 알게 되었다. 당장 다시 만들어내라면 마력량이 딸리니 그럴 수야 없겠지만, 이미 있는 걸 가공하는 정도는 할 수 있다.

"리알케."

마력을 불어넣으면 구조가 허물어진다. 그 사이로 정형하듯 꼬챙이를 비집어 넣는다. 톱니 몇 개를 떼어내고, 동력부를 박살 난 차축 한가운데 끼웠다. 규격이 맞지 않아 어긋난다.

하지만 맞물리지 않는 사소한 차이를 우악스럽게 조정하는 것이 전투 연금술. 온존해둔 마력을 끌어모아서 단조했다. 맨땅에서 만드는 것도 아니고, 이미 있는 것을 가공할 뿐이지만 마력이 통째로 빠져나갔다.

마력량 많은 것들은 좋겠다. 나는 투덜거리며 부러진 축을 강하게 끼워넣었다. 덜컥, 하고 맞물리는 소리가 들린다.

임시변통에 불과하지만, 이것으로 자동마차는 앞쪽에 바퀴 대신 커다란 날톱을 매단 로망이 가득 담긴 모습을 하게 되었다.

히스토리아가 인상을 찡그리며 손잡이를 다시 끼우고는 비틀었다. 그에 따라 톱날이 좌우로 방향을 바꾸었다. 히스토리아는 어이없다는 중얼거렸다.

"…전투 연금술. 하지만, 구조를 모른다면 쓸 수 없을 텐데."

"구조는 의외로 간단해. 복잡해 보이는 건, 쓸데없는 톱니바퀴가 많이 들어가서 그런 거야. 사실 동력만 충분하면 어떻게든 굴러가기 마련이고. 효율이 10%밖에 안 돼도, 가하는 힘이 크면 되니까."

그리고 지금 이 자동마차는 티르 엔진으로 돌아가고 있다.

날톱이 다시 회전한다. 이번에는 우리 쪽이 아니라 저쪽을 향해서. 톱니바퀴에는 눈이 없으니, 자기를 만들어준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저 작동하기만 할 뿐.

"그래서. 이 톱날을 달아서 뭘 할 건데? 이걸로 누구를 들이박기라도 하게?"

"와, 정말 좋은 계획이야, 히스토리아!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뭐?"

비꼬려고 했던 말이었겠지만, 히스토리아는 완벽하게 정답을 짚었다.

나는 이걸로 막시밀리앵을 칠 생각이었다.

"발에 바퀴를 단 국장은 자동마차보다 빨라. 따라잡을 수 없어."

"그렇다면 출력을 올리면 되지."

다른 동력과는 달리, 우리 동력은 보채면 보챌수록 강한 힘을 내니까.

"티르! 이제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입니다! 더 빠르게 돌려줘요!"

[…더, 빠르게 말이냐? 하지만 휴, 아무리 강하게 힘을 준들 이것은 내 손으로 붙잡고 돌리는 것이다. 나의 몸이 인간의 육신을 하고 있는 이상 이보다 빠를 수는 없다.]

하긴. 힘이 강하다고 꼭 빠른 건 아니지. 티르의 힘은 어디까지나 몸 안에서만 유효하고, 그 탓인지 속도가 그닥 빠르지 않다.

빠르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기운을 폭발시켜서 몸을 밀어내거나, 땅을 붙잡아 당기는 식으로 힘을 가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딛고 뛸 수 없듯, 티르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가늘고 짧은 팔다리로는 엄청난 속도를 낼 수는 없다. 구조적으로 비효율적인 것이다.

애초에 우리가 자동마차를 타고 온 것도, 티르의 느릿한 이동속도와 한낮의 태양이라는 종족적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였지.

그래도. 아직 할 게 남았다. 이게 자동마차의 한계가 아니다. 막시밀리앵을 보라. 전신에 뻗어있는 톱니바퀴를 자기 뜻대로 돌리며 회귀자의 재빠른 움직임을 따라잡고 있다.

톱니바퀴가 돌며 힘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모든 톱니바퀴가 제 힘을 갖고 스스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원래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 티르! 이 자동마차가 몸이라고 하면, 그 톱니바퀴들은 하나하나가 근육이랑 다를 바 없어요! 피를 근육에 스며들게 하여 움직일 때처럼 그것들을 잡고 움직여보세요!"

[오호라. 감을 잡았다. 한 번 시도해보마.]

티르의 대답이 들린 직후, 어둠이 차체로 스며들었다.

지금까지 이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티르는 차체를 강화하기만 할 뿐, 권능으로 움직인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못했다. 뭐, 나도 할 말은 없다. 그때까지만 해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막시밀리앵의 생각을 읽는 지금은 다르다.

"그리고 다 돌려요! 중앙 축부터 바퀴 끝까지! 전부 한꺼번에!"

[어둠의 권속, 내가 이를 지배하노라.]

차체 안에서 어둑한 기운이 물씬 풍겨왔다. 자동마차가 급격하게 가속했다. 앞좌석의 내 이마로 맞바람이 한층 강하게 분다.

나는 실눈을 뜨며 앞쪽의 막시밀리앵을 겨냥했다. 그는 막 회귀자와 다섯 번째 충돌을 앞둔 도중이었다.

"히스토리아! 운전대를 잡은 건 너야! 누구를 박을지, 이제 슬슬 결정해!"

"…휴이,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공격하면, 이젠 돌이킬 수 없어."

"어차피 이미 늦었어! 선택해야 해. 싫으면, 이쪽은 멋대로 싸우다가 죽어버릴 테니까!"

회귀자와 막시밀리앵, 서로 바쁘게 겨루는 둘의 모습이 점차 가까워진다. 흡혈귀의 지배 아래 놓인 자동마차는 아까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기세로 돌진했다. 심지어 앞쪽에는 흉악한 강철 회전톱날을 매단 채로.

히스토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너도, 시아티도. 다들, 끝까지 치닫기만 하고…. 어떻게서든지 끝장을 보려고 해! 왜 적당한 순간 멈추는 법을 모르는 거야…!"

"몰랐어? 원래 말리는 사람이 있을 때 사람은 더 몸을 들이미는 법이야!"

이제는 지척이었다. 더는 고민할 시간이 없다.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면 둘 다 치게 된다.

고민하던 히스토리아는 이윽고 핸들을 확 꺾었다.

그 방향은… 막시밀리앵 쪽이었다.

'국장은 휴이와 시아티를 무조건 죽여. 하지만 귀염둥이는 최소한 그러진 않을 거야…. 두 발로 서있어야 한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어.'

앞바퀴 대신 매달아둔 회전톱날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나아갔다. 회귀자와 겨루는 도중,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회전톱날을 발견한 막시밀리앵의 눈이 커졌다.

"내, 내 강철의 신생아가… 나에게?!"

"헹! 자랑하던 톱니바퀴를 빼앗긴 기분이 어때?"

막시밀리앵이 궤적에서 몸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슬아슬하게 대치하고 있던 회귀자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어딜 도망가, 이 쇳덩어리가!"

회귀자가 지잔을 땅에 찍었다.

지곤류, 자철검.

땅은 세상에서 가장 큰 자석이며, 빛에 가까운 것들마저도 쥐고 흔든다. 땅의 검 지잔 역시 그러한 성질을 가진다.

땅에 떨어진 톱니바퀴, 충돌로 생긴 쇳가루, 연금강 부스러기들이 지잔 근처로 떠올랐다. 지잔의 손잡이와 검끝을 느슨한 실로 연결한 듯한 금속의 잔해가 지잔 근처에서 부유했다.

회귀자는 자력을 뻗어 막시밀리앵을 얽매었다. 그의 전신에 가득 달려있던 톱니바퀴가 자력에 반응하여 끌려간다.

"거기 멈춰!"

한순간 전신을 묶어버리는 힘. 톱니바퀴 때문에 붙잡힌 막시밀리앵은 제때 벗어나지 못했다. 우뚝 굳은 그의 몸을 강철의 톱니를 매단 자동마차가 덮쳤다.

회전 톱날의 그의 어깨와 가슴을 들이받았다. 쿵, 하고 차 앞쪽에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고, 찢어진 옷자락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내가 주먹을 꽉 움켜쥐고는 외쳤다.

"해치웠나?"

어림도 없었다. 아직까지도 톱날이 돌아가는데, 막시밀리앵은 톱날에 갈리는 와중에도 멀쩡하게 움직였다.

아무래도 막시밀리앵의 몸에 덧붙여진 톱니바퀴 역시… 4레벨, 아니, 5레벨에 가까운 연금강이었던 모양이다.

"으으으으윽…! 리알케…!"

놀랍게도, 막시밀리앵은 자동마차에 들이받히고도 쓰러지지 않았다. 강도야 어쨌든 질량은 한참 가벼울 텐데, 육장성에게는 자동마차의 돌격조차도 버텨낼 능력이 있던 것이다.

그는 자동마차에 치여 질질 끌려가면서도 충돌 순간 전신으로 마력을 내뿜었다. 톱날이 잇달아 그의 몸에 부딪히는 순간, 침투한 마력이 톱니바퀴를 잘게 분해하여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히스토리아는 예상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막시밀리앵 국장은 톱니바퀴의 신이라 불리는 존재야… 이런 톱니바퀴 공격이 통할 리 없지."

막시밀리앵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호흡할 때마다,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황금색 톱니바퀴가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틱, 틱, 틱.

톱니바퀴가 잠깐 잦아들고, 성황을 대강 파악한 그는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고개를 들었다. 막시밀리앵은 잔뜩 흥분해서는 자기를 공격한 물건과 그것을 조종한 면면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감히…! 내 톱니바퀴를 제멋대로 개조하여 나를 공격하다니…!"

어떻게 알았는지, 그의 렌즈는 정확히 나를 향했다. 불길함을 느낀 히스토리아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휴이, 내 뒤로 물러나."

'국장은 아무런 힘도, 권위도 없는 하급자가 명령을 전하는 게 아닌 '자기 의지로' 방해하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해. 아니, 하급자가 '자기 의지'를 갖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 아마 휴이에게 공격을 가한다면…. 내가 막아야겠지.'

안 그래도 회귀자와의 싸움은 막시밀리앵에게 있어선 벅찬 대결이었다. 지잔은 그의 모든 톱니바퀴를 합친 것보다 훨씬 무거웠고, 그가 자랑하는 힘도 지잔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때그때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기지가 없었다면 막시밀리앵은 진작 쓰러졌을 것이다.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팽팽한 싸움 도중 방해받았으니. 분명 분노했으리라… 라고 생각하는 히스토리아였다.

하지만 너는 뭘 잘못 알고 있다.

이 미친놈은 이성마저 톱니바퀴로 흉내내려는 존재다. 나조차도 완벽히 읽을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 공식에만 끼워맞추면.

"내 톱니바퀴를…! 하나하나 분해해서, 이런 싸구려 자동마차에 이어붙여...!!"

으르렁거리며 어떤 일이 있었는지 되새긴 막시밀리앵은, 나를 향해 힘차게 웃어보였다.

"대단하군! 아주 대단해!"

인정받는다고.

EP.246 마지 텐시

끼기기기긱.

달려가던 자동마차가 사람에 부딪혀서 멈췄다. 회전하는 톱날에 갈리면서 50m 가까이 끌려갔던 막시밀리앵은 지금 기뻐하며 박수를 치고 있다. 찢긴 옷 사이로 보이는 건 부드러운 살갗 대신 전신을 뒤덮은 톱니바퀴다.

여러모로 상식을 뛰어넘는 상황만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가! 자네인가. 그래, 생각해보니, 자네에게는 가능성이 있었어. 자격은 없지만, 오직 가능성이!"

막시밀리앵은 조금 전까지 격렬한 전투를 벌이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태연했다.

"왕국이 멸망하던 해 태어난 아이들. 그중에서도 솎아내고 남은 둘. 하지만, 둘 다 아니었나? 설마. 죽었다고 알려진 자네가?"

'저런! 판단에 오류가 있었군. 우리는 그가 죽은 줄 알았다. 살아있었다고 해도 별달리 특색을 보이지 않아서 무시하고 있었지. 하지만, 단지 보이지 않았을 뿐. 이들을 모두 모은 게 그라면? 시조 티르칸쟈카, 마신의 힘을 다루는 소년, 짐승의 왕부터 왕가의 말예까지. 그가 이끌었던 거라면!'

막시밀리앵의 눈이 기대감으로 번뜩였다.

그가 보기에, 인간 대부분은 불완전하다.

인간은 모두 동일한 구성요소를 가지고 있다. 피, 살, 뼈, 근육. 그 안을 채우는 기력과 마력. 연금술사인 막시밀리앵은 그것을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조합되고, 어떻게 작동하냐에 따라서 형태와 능력이 달라진다. 밥을 빌어먹는 비천한 불구도, 홀로 세상에 우뚝 선 절대자도. 피륙으로 빚고 마력과 기력을 채워 넣어 만들어진 같은 인간이다. 전혀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따라서 막시밀리앵이 보기에, 인간 대부분은 자기 자질을 스스로 망가뜨리는 결함품에 불과했다.

고급 자재로 만들어진 물건이 더 뛰어난 성능을 내는 거야 그러려니 한다. 애초에 태생부터 다르니 다른 성능을 가진 게 당연하니까.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배치되고 조합되었냐에 따라, 그 구조적 정밀함에 따라 성능이 천차만별이라면.

막시밀리앵처럼 대단한 사람이 '교정'해주는 것으로, 결함을 없애고 본래의 성능을 발휘할 수 있지 않겠는가.

따라서 그는 인간의 왕을 찾고자 했다. 인간의 본, 그것을 넘어선 인간의 특질을 이해하기 위해서.

"자네가 인간의 왕인가? 정녕, 이 세상에 새로이 나타난 군국을 판단하기 위해서 이 땅에 강림한, 준엄한 평가자가 자네인가!"

막시밀리앵의 생각만 읽으면, 그는 인간의 한계에 대해 고뇌하고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과감한 혁명가의 면모를 보인다. 하지만 글쎄, 그의 진정한 목표는….

인간의 왕을 찾고….

'완벽한 생각 톱니를. 만인에게 통용되는 일반성을 갖추기 위해선 인간의 왕이 필요하다. 인간의 왕은 모든 인간을 대표하기에!'

머리에 톱니바퀴를 박겠다네.

정말 미친놈이잖아.

인간의 왕도 인간이야, 인간. 톱니바퀴랑은 호환이 안 된다고.

"완벽하군. 완벽해! 이토록 완벽한 조합이 있을 수 있나. 자격도 있고, 가능성도 있지! 만일 인간의 왕이 이들 가운데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 하하하. 숙원을 이룰 기회가 알아서 찾아오다니. 나는 행운아로군!"

제멋대로 장광설을 토해내는 막시밀리앵이었지만, 나에게는 그를 닥치게 할 힘이 없다. 나는 고개를 돌려 저 사람을 닥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자를 보았다.

"셰이 씨."

가만히 서서는 막시밀리앵의 장광설을 묵묵히 듣고 있던 회귀자가 내 말에 반응했다.

"어? 왜?"

"뭐해요? 갈 길이 먼데. 사이비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있을 거예요?"

회귀자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와 막시밀리앵을 번갈아 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당당한 말이 튀어나왔다.

"무슨 말 하나 궁금하잖아."

"궁금하다고 방금 전까지 싸우던 위험인물을, 거기다 이상한 종교관까지 설파하는 녀석을 가만히 둬요? 정보가 그렇게 중요해? 우리 안전보다?"

"아, 아니. 그럴 리 없잖아. 그냥."

'쳇. 조금 더 말하게 두지. 과병이 신나 가지고서는 제 입으로 정보를 토해내는 경우가 그리 많지는 않은데.'

왠지 방금 전까지 죽일 듯이 싸워놓고서는 가만히 있더라니. 또 그 정보를 얻으려고 한 거야?

나는 생각 다 읽었으니까 더 볼일 없다고! 빨리 치우고 가자고!

내 서슬퍼런 기색에 찔끔한 회귀자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덧붙였다.

"죽이기 전에 유언은 들어줘야지."

"우리 말이나 들어주시죠! 왜 적 말을 아군 말보다 더 잘 들어주는 거야!"

"알았어, 알았어."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이야기를 들었어. 왕국이 멸망한 해 태어난 아이? 참나, 만물의 영장 수뇌라는 녀석이 아무런 근거 없는 헛소문이나 믿고 있으니. 매 회차마다 그토록 뻘짓이나 반복했던 것도 당연하지. 어쨌든, 이번에 군국 녀석들은 깔끔하게 처리했네.'

내 재촉에, 회귀자는 다시 우리와 막시밀리앵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유언은 그게 다지? 더 할 말 있으면 죽이기 전에 빨리 말해. 우리는 인내심이 그리 많지 않으니까."

막시밀리앵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아아. 나는 자네들을 죽이지 않겠네. 확인해볼 것이 있거든."

"미안한데, 죽이지 않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거든? 너 혼자선 결코 나를 이길 수 없어."

"확실히, 두 마신의 힘을 동시에 다루는 자네는 상대하기 벅차군. 마신전 녀석들은 도대체 뭘 하는 건지 모르겠어. 소년 하나가 두 마신을 손에 넣을 동안, 꼴에 비밀결사라는 놈들이 그 지경이니. 쯧쯧."

그러나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막시밀리앵은 태연했다. 무언가 한 수 숨겨둔 이의 여유도, 지원군이 올 거라 확신하는 태도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예 없었다.

또각, 또각. 머리에 심은 톱니바퀴가 굴러간다. 이성과 감성을 분리하고, 둘의 결합이 필요할 때만 맞물려서 엮는다. 기계가 자기 고장나는 것을 걱정하지 않듯, 막시밀리앵도 자기에게 닥칠 끝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뭐, 막시밀리앵이 믿는 구석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걸 막기엔 이미 늦었다.

가장 먼저 이상을 느낀 건 티르의 어둠이었다. 자동마차의 그림자에 숨어 힘을 온존하고 있던 어둠이 크게 움찔거렸다. 새카만 몸체에 두드러기라도 난 것마냥. 움츠러들며 더욱 색을 진하게 했다.

[이건….]

무언가를 느낀 티르가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회귀자도 직감적으로 무언가를 깨닫고는 검을 고쳐 쥐었다.

파츳. 허공에서 스파크가 일었다.

아무것도 없는 장소에서 네모난 빛깔이 모자이크처럼 번쩍이다가 사라졌다.

빛이 사라진 곳에는 어떤 물건도 없다. 망막에 맺힌 잔상만이 점차 하나의 형태만 이루어갈 뿐,

하지만 무언가가 분명히 그곳에 있었다. 존재를 인지할 수 있으나 인식할 수 없는 어떤 것이.

회귀자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 기운은…!"

전신을 짓누르는 중압감. 차마 마주보기도 힘든 위압감이, 인간보다 격상의 존재가 나타나 우리를 굽어살피는 것만 같은 아득한 감각이 느껴진다. 한없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시선 아래, 인간은 한없이 하찮다.

와중, 머리에 톱니바퀴를 박아넣은 막시밀리앵은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의 이성은 기계적으로 동작하고 있기에.

"하지만 자네들의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누군가가 죽어버릴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 오히려 내 목숨을 걱정해야 할 판이네. 그러니, 나도 반칙을 써야겠어."

빛무리가 형상을 이뤘다. 사람이었다. 두 팔과, 두 다리를 갖고. 목 위에 얼굴을 단 새하얀 공백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사람과 비슷한 건 형태뿐이었다. 나는 독심술로 느닷없이 나타난 존재의 생각을 읽으려고 시도했다.

생각이 읽히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이게 사람이긴 한가?

『관제 관측 완료. 구현율 14%. 주의, 요망. 현 위치는 관제 관측이 용이하지 않은 지역.』

전신이 빛난다. 제대로 마주할 수조차 없는 백광이 몸을 감싸고 있다. 눌러 쓴 새하얀 투구 때문에 눈가가 가려져 있고, 얼굴에는 표정조차 보이지 않는다.

검은 선 하나로 이루어진 잔잔한 입가는 인간과 비슷해 보이기 위해 뒤늦게 그려 넣은 것 같다.

생각을 읽을 수 없기에, 나는 그 존재가 무엇인지 모른다. 단지 회귀자와 막시밀리앵의 생각으로부터 무슨 존재인지 뒤늦게 인식했을 뿐.

"…에이메데르!"

히스토리아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 천통? 저…게?"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물었다.

"같은 육장성인데 네가 몰라?"

"몰라. 천통은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적 없어. 하지만, 설사 드러냈다고 하더라도…."

'저 모습은, 아무리 봐도 인간이 아니잖아. 기척조차 흐릿해!'

모두의 혼란 속에서, 기이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존재가 팔을 흩뿌렸다. 새하얀 팔에 언제 쥐어졌는지 모를 흰 칼날이 나타났다. 어딘가에서 뽑은 게 아니라, 원래부터 거기 있었던 것만 같았다.

『긴급 시퀀스. 이행.』

빛무리가 깨진 유리창처럼 흩날렸다. 번뜩이는 검이 잔상처럼 남았을 때, 새하얀 그림자는 순간적으로 우리를 향해 짓쳐들어오고 있었다.

인간은 반응이 느리다. 상대가 평범한 인간의 격에서 벗어나있기에, 공격의 전조를 파악하기도 어렵고 살기를 읽기도 전의를 느낄 수도 없다. 독심술이 통하지 않으니, 나조차도 그게 잔상으로 남고서야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피해!"

회귀자는 천반경으로 반응했지만, 애초에 빛의 칼날은 그녀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새하얀 그림자가 정확히 자동마차 쪽을 향해 칼날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존재가 숨어있다.

[건방진! 감히. 내 앞에서 천사를 꺼내는 것이냐!]

티르가 그렇게 외친 직후. 안쪽에서 어둠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원래 티르는 짐칸 속에 몸을 숨기고 있기로 했다. 태양 빛에 자주 노출될수록 어둠이 소모되니, 힘을 온존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격노로 눈이 붉어진 티르는 그런 계획쯤은 신경도 쓰지 않고는 어둠을 부풀렸다. 국소적인 밤이 자동마차를 중심으로 찾아왔다.

빛의 칼날이 어둠을 갈랐다. 스며드는 틈 사이로 빛이 색소처럼 스며들어온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천사의 머리가 들이밀어진다.

하지만 새카만 어둠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그 빈자리를 채웠다. 그 속에서 새카만 양산이 튀어나와 천사를 후려쳤다.

새하얀 몸에도 형체는 있었던 모양이다. 양산에 직격당한 흰 몸체가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저동마차의 앞뒤를 뒤집어서 뛰쳐나온 티르는 격양된 얼굴로, 천사라고 불린 존재를 노려보았다.

[이 날파리가, 감히…!]

천사는 티르의 양산을 맞고도 날아가다가, 물길 바닥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몸을 흩뿌리며 부드럽게 일어섰다. 아무리 봐도 비인간적인 움직임이었다.

허공에서 헤엄치듯이 일어난 천사가 새하얀 빛을 흩뿌리며 말했다.

『막시밀리앵 국장. 조속히 복귀하라. 국장 개인의 힘으로는 이들에 대항할 수 없다.』

"하핫. 드디어 등장하셨군, 천통! 보았나? 내가 찾은 것 같네!"

『국장의 의견은 묻지 않았다. 국장의 개인적인 목표와 관계없이, 지금은 힘을 합칠 때다. 조속히 복귀하라. 그렇지 않으면, 이들을 저지할 수 없다.』

"알았어. 알았어! 알아들었네. 자네 뜻에 따르겠네!"

[어딜 도망가려고 하느냐.]

그 순간, 어둠이 폭발하듯이 솟구쳐서 둘을 감싸려고 들었다. 천사가 검을 휘둘러 어둠을 떨쳐냈으나, 어둠은 포기하지 않고 연달아 다가왔다.

누군가의 합류를 기다리며 시간을 끌듯이.

[성황청의 장난감이라. 설마 이곳에서 볼 줄은 몰랐는데… 재미있는 짓거리를 해주는구나. 아니면, 이 나를 도발하는 것이냐?]

티르가 뚜벅뚜벅 걸어나왔다.

흡혈귀는 생명이 없다. 자기 피조차도 자기 스스로 조종하는 작자들이며, 이미 죽었기에 생에 대한 본능 역시도 희미하다. 다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자의 분노를 사기는 꽤나 힘든 법이다. 인간에게는 위협적인 주먹질이나 공격조차 상대에게는 약간 무례한 언행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단 하나.

성황청과 관련된 것은 다르다. 시조 티르칸쟈카가 그들의 손에 의해 아버지를, 자신을, 혈족을 잃은 뒤. 성황청은 흡혈귀의 선험적인 증오를 샀다.

모든 흡혈귀는 성황청을 향해 분노한다. 티르는 그 극단에 서있다.

천사가 다가오는 티르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시조의 시선은 내가 끌겠다. 막시밀리앵 국장, 반복하여 명령한다. 조속히 복귀하라.』

"하하! 역시 소모 가능한 자원은 참 좋다니까!"

막시밀리앵이 껄껄 웃으며 물러났다. 발에 달린 톱니바퀴가 맹렬히 구르고, 그의 몸이 도로를 따라 빠르게 멀어진다. 그는 냉큼 도망쳤다.

다 잡은 적이 도망가는데도 회귀자는 섣불리 그를 잡으러 갈 엄두도 못했다.

천통이라 불렸던, 그리고 티르가 천사라고 부른 존재가 눈앞에 남아있었기에.

[내가 너희를 순순히 보낼 것 같더냐?!]

어둠이 몸을 부풀렸다. 티르는 본인 자체가 그다지 빠른 편은 아니나, 그녀의 본질은 강대한 공간 장악력에 있다. 어둠 속은 그녀의 몸 안이나 다름이 없기에 그 안에서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내가 외쳤다.

"티르! 힘을 너무 낭비하진 마요!"

하지만 지금은 낮이다. 빛을 막기 위해 어둠이 지속적으로 소모되며, 약간의 틈이 생겨도 금방 허물어지고 만다.

낮에 어둠을 흩뿌리는 건, 비유하자면 물속에서 공기방울을 지키는 꼴이다.

천사는 그 점을 노렸다.

검이 수십 갈래로 나뉘었다. 일격일격이 강하지는 않으나, 충분히 빠르고 날카로운 참격이 연달아 어둠을 베어낸다. 면으로 뒤덮이는 어둠을 면으로 흩날리는 검격이 밀어냈다. 어둠에 약간의 틈만 생기면, 아직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이 알아서 상처를 헤집는다.

어둠과 빛의 싸움. 그 속에서 회귀자가 움직였다.

막시밀리앵이 충분히 멀어진 것을 확인한 회귀자가 냉큼 끼어들었다.

"거기까지 하시지! 에이메데르!"

회귀자의 눈이 순간적으로 일곱 빛깔로 물든다. 운명안은 개안하지 않는 대신, 칠색의 눈을 차례로 개안하여 빛을 관측한다. 그와 동시에 회귀자는 천앵을 비스듬히 들어 그 너머로 천사를 바라보았다.

천검기, 칠색안 연계기. 무지개.

벼락처럼 뻗어나간 천앵이 천사를 비스듬히 베어냈다.

기척을 알아챈 천사가 백광의 검으로 맞섰으나, 천앵과 백광의 검이 부딪힌 순간 새하얀 빛이 일곱 빛깔로 분해되었다. 백광을 해체하여 만들어낸 무지개가 천앵의 궤적을 물들였다. 회귀자의 검을 따라 긴 무지개가 떴다.

감정이 드러나진 않았지만, 천사는 약간 놀란 듯했다.

『그렇군. 이게 마신의. 하늘의….』

천사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회귀자는 그 힘을 그대로 밀어넣어 천사의 목을 베었다. 섬광이 번쩍이고, 빛이 잔상이 길게 남는다. 천사의 몸을 꿰뚫은 회귀자가 격하게 외쳤다.

"티르칸쟈카! 마무리를!"

유리가 빛을 깨뜨릴 수 있을지언정 없앨 수는 없다. 순간적으로 흐릿해진 천사는 깜빡거리며 다시 형체를 이루려고 했다.

그 순간 어둠이 뒤덮인다. 파도처럼 몰려들던 티르의 어둠이 천사를 기어코 붙잡았다. 격양된 티르는 말도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순간, 어둠 속에서 거대한 질감이 쿵 떨어졌다. 형상화된 어둠이 백광을 짓이긴 것이다.

『관측, 한계…. 위험.』

[끝이다.]

티르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어둠이 몰려들어 빛을 갉아먹었다.

티르의 힘은 물리력이 아니다. 요새 힘이 너무 강해지는 바람에 강조되고는 있지만 그 힘은 저주나 지배에 가까운 것. 잡힌 이상 천사는 끝장이다.

신비로 뒤덮인 빛의 몸은 침식하고 있는 어둠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자폭 시퀀스. 가동.』

그 직후.

빛의 기둥이 솟아올랐다.

EP.247 말보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천사의 폭발은 희생. 그것은 온갖 삿된 것을 몰아내는 정화의 빛이다. 폭발하는 빛이 티르의 어둠을 갉아먹으며 흡혈귀의 어둠을 향해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그 순간 회귀자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급하게 천앵을 떨치며 빛이 폭발하기 직전 그 주변을 둥그렇게 베어냈다.

천검기, 천경.

모든 방향으로 뻗어 나가야 할 빛무리가 무언가에 가로막혀 튕겨 나갔다. 회귀자가 베어낸 공간에 이리저리 튕기던 빛은 하나 남은 틈을 비집고 솟았다. 빛의 기둥은 다른 곳은 침범하지 못한 채로 허무하게 자기가 왔던 하늘로 되돌아갔다.

빛무리가 잔상처럼 깜빡거린다. 티르는 어둠으로 그것을 집어삼키고는, 맛없는 무언가를 먹은 듯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하는 짓거리까지. 천사와 꼭 판박이로구나. 군국이라는 나라는 천사가 지키고 있는 것이더냐.]

"천사는 아니야. 정확히는, 군국이 천사를 흉내내어 만든 무언가지."

회귀자가 천앵을 집어넣으며 대답했다.

[천사를 흉내 내어 만들었다고? 그것이 가능한 것이냐?]

"알다시피, 천사는 성황청의 신관들이 무언가를 제물로 바쳐서 불러온 격상의 존재. 하지만 군국의 천사는 조금 달라."

이전 회차, 회귀자는 군국의 육장성 모두를 상대해보았다. 그중에서 가장 까다로웠던 존재는 신비 그 자체인 천통이었다. 대응책을 찾지 못한 채 레지스탕스와 함께 전멸당했던 그녀는 비밀을 풀기 위해 성황청에 찾아갔었다.

이천 년 동안 온갖 신비를 보관하고 관찰해온 성황청은 그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내놓았다.

"다른 신앙을 극도로 억제하고, 군인이라는 존재를 군국의 신도로 삼았어. 그 뒤 호국과 수호라는 의지 하나만으로 달리 빚어냈지. 인공정령, 혹은 인공 수호천사라고 할까."

[인공 수호천사라.]

"그래. 천사라는 존재마저도, 그 원리를 하나하나 분해하고 해체한 뒤 군국에서 인공적으로 재현한 거야. 물론 수호천사이기 때문에 활동 범위에 한계가 있어. 개념적으로 쳐들어오는 존재밖에 막지 못해. 그래서 지금 처음 나타난 거고."

지금까지 군국에서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는 메타컨베이어 벨트, 혹은 그 바깥에 있는 땅. 군국은 공격받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에이메데르의 출격조건이 성립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너서클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지금. 에이메데르는 군국을 지키는 수호천사로서 강림했다. 육장성인 과병을 보호하기 위해.

"천통, 에이메데르는 그 천사를 총칭하는 말이야. 혹은 그 천사의 원본이 된 어떤 존재이든가. 사실 그 본체를 본 적은 없어서 모르지만, 사령부를 공격하면 어떻게든 결판이 나겠지."

[성황청과는 무관한 존재이냐?]

"100% 확신은 못하지만, 성황청은 무관하지 않을까. 아니라면 군국이 천신교에 세금을 매길 리 없으니."

[오호라.]

납득한 티르는 천사가 소멸한 흔적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복잡한 기분이 드는구나. 성황청이 자랑하는 천사가 실은 얼마든지 베낄 수 있는 잡것이라는 건 대단히 기꺼운 일이나. 그것이 막상 나의 눈앞에서 설치고 있으니 거슬린다.]

"뭐. 그래도 천앵을 가진 나와 너의 어둠이 있다면 쉽게 무찌를 수 있으니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래도 앞으로도 계속 나타나겠지. 천사란 그런 존재니.]

티르는 성황청과 몇백 년에 걸쳐서 전쟁을 벌였던 전설적인 존재다. 그러나 성황청과 흡혈귀의 전투는, 서로의 강점과 약점이 너무 확연하기에 일진일퇴의 공방전으로 귀결되고는 말았다.

밤에 최대한 진격해야 하는 흡혈귀에게는, 최후미에서 그들의 발목을 잡다가 희생의 빛을 터뜨리며 소멸하는 천사는 혐오를 넘어 공포스러울 정도로 귀찮은 존재였다.

[하물며 이것은 예전에 보았던 천사보다 조금 더 강력하고 귀찮구나. 성녀가 불러내는 치천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그 정도야? 나는 천사와 싸워본 적은 없어서 잘 몰라."

[천사를 모른다니. 하긴, 셰이 너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것처럼 보여도 아직 어리지. 천사를 모를 수 있…. 잠깐.]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중, 무언가를 감지한 티르가 몸을 홱 돌렸다. 붉은 눈빛이 어둠을 꿰뚫어보며, 어둠 저편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을 눈에 담았다.

[휴?]

히스토리아가 낙마한 직후, 백마 위에 타고 있던 공주는 홀로 노출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 있다고 딱히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다.

적의를 피해 가는 능력. 상황에 따라서는 무적에 가까운 힘. 그녀는 위험에 처하지 않는다.

산사태 같은 자연재해가 닥치거나 폭주한 마차가 달려들면 모를까.

공주는 인간의 가장 큰 적인, 다른 인간의 적의로부터 안전했다.

그래서일까.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에도 공주는 너무 안일한 위치에서 멈추어 있었다.

히히히히힝!

셀피가 무언가에 쏘인 듯이 앞다리를 들었다. 위에 탄 공주가 휘청일 정도로 위험한 움직임이었다. 공주는 셀피가 시조 티르칸자캬의 어둠 때문에 놀란 줄 알고 다독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셀피의 뒷다리가 풀썩 주저앉고, 그녀의 눈높이가 아래로 훅 내려간 순간. 공주는 직감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공주는 세상으로 끌려 나왔다. 충격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물리적인 충격에 더해, 정신적인 충격까지 그녀를 뒤흔들었다.

셀피의 따뜻하고 포근한 몸은 푹신하다. 백마에 깔린 그녀의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뜨거운 피가 흘러나온다. 흰 갈기가 붉게 가라앉는다.

갑작스럽게 변한 상황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나, 그녀의 이성은 담담하게 이 상황을 설명할 대답을 내놓았다.

'아, 셀피가 죽었구나.'

공주는 반 박자 늦게 상황을 인식했다. 누군가가 공격했고, 셀피는 채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죽음에 이르렀다. 아직 살아는 있지만 그건 머지않아 끊어질 목숨이었다.

짐승은 보통 인간보다 강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가 '보통' 인간일 때나 가능한 일.

"그란디오모르 공주인가? 자네에게 개인적인 감정은 없네. 하지만 죽어줘야겠어."

상대는 보통 인간이 아니었다.

육장성, 과병 막시밀리앵. 그는 도망치는 척 움직여놓고는, 어둠이 주위를 집어삼킨 틈을 타 다시 되돌아온 것이다.

육장성과 독대하게 된 공주는 멍청하게 되물었다.

"네, 에?"

"개의 왕이 헷갈려하는 모양이야. 고작 망국의 공주 따위에게 잠깐 한눈을 팔 정도면. 하긴, 왕가의 핏줄이니 그럴 수 있지. 인간의 왕을 참살하고 그 권능을 빼앗은 다섯 배신자의 핏줄 아닌가?"

"네, 네."

"인간의 왕이 필요하지 않다는 상징. 왕이 없더라도 인간을 대표할 수 있다는 오만. 자기 핏줄들은 영원히 위대하리라는 아집. 그것을 짊어진 자네들이 전부 사라져야… 인간의 왕이 진정으로 돌아오실 것 아닌가."

막시밀리앵은 공주를 향해 빠르게 설명하고는 저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지? 역시, 영민하군. 최소한 군주의 피를 이은 후예다워."

공주는 지금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셀피의 몸 아래 깔린 채, 육장성의 질문에 반사적으로 대답만 할 뿐.

막시밀리앵은 보고를 끝마친 사무원처럼 단정지어 말했다.

"그러면 죽이겠네."

막시밀리앵이 회전하는 톱날을 지닌 칼을 들이밀었다. 강철조차 저미는 힘이 공주의 부드러운 살갗을 파헤치고 피부 안쪽의 것을 탐하려고 다가왔다. 죽음의 위기를 목전에 두고서야 공주는 드디어 그녀의 처지를 자각했다.

'어라, 저, 죽는 건가요?'

적의를 피해 가는 능력을 지닌 공주는 언제나 호의 속에서 자라왔다. 머리에 꽃밭이 피었다고 할 수 있지만, 세상에서 머릿속에 가장 아름다운 화단을 꾸미고도 안전한 힘을 지닌 이가 예리엔 그란디오모르다.

타고난 여유, 상처받지 않기에 가질 수 있는 인자함. 그란디오모르 왕가는 볼품없는 그런 능력으로도 가장 오래 살아남았다.

하지만 생각의 일부를 톱니바퀴에 맡긴 과병은… 아무런 적의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인간이다.

히히잉….

죽어가는 말이 마지막 발악으로 앞발을 휘둘렀다. 안쓰러운 충성심이다. 퍽, 하고 고기가 잘려나가며, 톱날검 아래 뜯겨나간 앞다리가 어지러이 흩날린다. 셀피의 피가 묻은 톱날검이 공주의 머리까지 다가왔다.

시체가 온전히 남는 아름다운 죽음은 없다. 칼날이 가슴을 헤집거나, 목을 깔끔하게 베어 실혈을 일으키는 죽음이란 사치와 같은 것.

공주는 죽을 것이다. 날뛰는 톱날이 머리를 부수어, 그 안쪽의 모든 체액을 쏟아내며. 모독적으로 죽을 것이다.

그때였다.

뚜둑.

막시밀리앵의 팔이 바깥쪽으로 꺾였다.

절체절명의 순간, 시아티의 흑마술이 발동되고, 그의 팔은 또 기이한 각도로 뒤틀렸다. 톱날이 바깥쪽으로 꺾였다.

"이, 빌어먹을. 노이즈."

막시밀리앵이 딱딱 끊어지는 목소리로 이를 갈았다. 그가 시선을 홱 돌렸다. 그곳에는 이제 중지까지 새카맣게 물든 시아티의 왼손이 있었다.

시아티는 부상의 여파에 신음하면서도 천천히 오른손의 의수를 들어올려 남은 손가락을 잡았다. 그래 봐야 엄지와 검지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여전히 오기가 가득했다.

"…꼼짝 마, 육장성. 아직 두 번 남았어."

"노이즈 따위가. 나를 두 번이나 방해하고도 살아남기를 바라다니."

"죽음은 두렵지 않아. 오히려 나를 죽여줬으면 좋겠는데? 해보지 그래?"

코웃음을 친 막시밀리앵은 꺾인 팔을 다시 맞추었다. 아까와 마찬가지였지만, 그의 팔은 꺾였다고 무언가 문제가 생기는 구조가 아니었다. 그는 멀쩡해진 팔로 톱날검을 들어올렸다.

시아티는 헐떡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팔이 꺾여도 아무렇지 않아. 이쯤되면 비겁하다거나, 불합리하다는 생각조차 안 들어. 괴물…같으니.'

하지만 시아티에게는 아직 마지막 수단이 남았다. 모든 제물을 다 소모했을 때, 새로이 갱신되는 마지막 계약.

그녀의 목숨을 대가로 목을 꺾으면, 상대방에게 같은 필멸을 강요하는 최후의 주술. 시아티는 여차하면 그것을 쓸 각오를 하고서는 막시밀리앵과 대치했다.

"흑마술을 아는 사람이 너뿐이라 생각하는가? 오만하군. 그럴 힘도 자격도 갖추지 못했으면서, 자기 하찮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그 작태. 지긋지긋해."

"알아서 다행이야. 모르면 설명해주려고 했는데."

"그래. 흑마술로 네 목을 꺾는다고 내가 죽을 것 같나?"

마지막 주술을 간파당한 시아티가 흠칫거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막시밀리앵은 경멸에 찬 냉소를 내뱉었다.

"어이가 없군."

막시밀리앵은 가만히 선 채로 어딘가의 톱니바퀴를 돌렸다. 뚝, 뚝, 뚝. 색다른 맞물림이 들렸다.

막시밀리앵의 목이 꺾여서는 안 될 각도까지 꺾였다.

분명, 평범한 인간이라면 목이 그 위치에 도달하는 것만으로도 죽으리라. 목이란 머리와 전신을 연결하는 통로이며 급소니까.

그러나 막시밀리앵에게는 급소가 아니다.

"하찮아. 죽음이 두렵다고, 그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그 믿음이. 하찮은 것의 죽음은 역시 하찮기 마련인데, 어디서 주워들은 지식 하나로 맞먹을 것처럼 구는 게… 정말, 가당찮아."

흑마술로 그의 목을 꺾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을 것이다. 몸의 일부를 개조한 막시밀리앵은 일반적인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다.

시아티가 두려움과 무력감에 휩싸일 무렵, 막시밀리앵은 천천히 그의 목을 원래 위치까지 돌려놓았다.

"어디, 그 비루한 힘으로… 원하는 바를 이루어보게나."

막시밀리앵은 공주를 향해 한 걸음 내디디며 짧게 덧붙였다.

"불가능하겠지만."

무력하다. 시아티가 평생을 걸쳐 벼린 한 자루 칼은, 육장성이라는 규격 외의 괴물 앞에서 한없이 무력했다.

하지만 절망을 느꼈다고 멈출 수는 없다. 죽든, 살든. 악에 받친 채로 움직여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공주가 죽으니까….

그리고, 시아티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의미가 없을 테니까.

시아티는 왼손의 검지를 쥔 채, 잔뜩 긴장한 채로 막시밀리앵의 움직임을 살폈다.

막시밀리앵이 움직이기 전에 시아티가 미리 손가락을 꺾을 순 없다.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상, 그녀의 흑마술은 상대의 행동을 방해하는 것에 불과하다. 미리 흑마술을 쓴다면 상대는 우습게 팔을 되돌리고는 공주를 죽일 것이다.

그렇기에, 시아티는 공주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막시밀리앵이 움직인 직후를 노려야 한다.

'…고 생각하고 있군. 하찮은 것들의 생각은 너무 읽기 쉬워. 그래서 지루하고, 단조롭지.'

막시밀리앵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그의 무기가 홀로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철컥. 한구석에 있던 톱니바퀴가 움직였다. 왼팔과 톱날을 잇는 구조체, 그 사이를 미끄러뜨리며 몸을 늘린다.

오직 막시밀리앵만이 이해할 수 있는 복잡한 조화가 일어나고, 기계장치가 그들만의 공식을 따라 움직였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전조도 없이 톱날이 주욱 늘어났다.

"예리엔!"

시아티가 검지를 급히 잡았으나, 흑마술이 작동하지 않았다.

흑마술은 같은 것에 같은 일을 강제하는 행위다. 손가락을 꺾으면 가늘고 길며 마디가 존재하는 것을 부러뜨릴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오직 그것만 부러뜨릴 수 있다.

막시밀리앵의 톱날은 손가락과 닮지 않았다. 그 복잡한 구조체는 가늘고 길지도 않았으며 무엇이 마디인지도 확실치 않다. 따라서, 시아티의 흑마술은 무위로 돌아갔다.

하지만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시아티가 시간을 끈 덕분에 내가 도착했으니까.

"뭐, 내가 와서 뭘 하겠냐만."

시아티랑 마찬가지지, 뭐. 일격 정도 막아내는 거.

나는 새삼스레 내 무력함을 한탄하며 그의 톱날검 이음매에 꼬챙이를 찔러넣었다.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에 잡음이 끼어들었다.

끄그극. 갑작스레 침범한 이물질에 톱니바퀴의 움직임이 멈췄다.

"흠? 기척도 없이 다가오다니. 시조… 아니군. 자네인가?"

"네. 접니다."

티르의 어둠은 사방을 가득 메우고는 점차 뻗어나가고 있다. 그 속에 숨어서 다가왔던 나는, 불의의 일격으로 막시밀리앵의 톱날에 약간의 기능장애를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공주는 목숨을 한 번 더 부지했다. 후우, 슈퍼세이브.

"잠시 실례했습니다. 그럼 이만."

일격을 성공시킨 나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꼬챙이를 빼내며 몸을 뒤로 던졌다.

상대는 육장성, 톱니바퀴가 없어도 순수 힘으로 나를 찢을 수 있는 괴물이다. 잠시라도 주저해서는 몸이 갈갈이 찢긴다.

냅다 도망치는 내 뒤로 막시밀리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둠을 두르고 기척을 숨겼군! 시조의 존재감 속에 쏙 숨어들었어! 자네, 실력이 대단하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자네라면 그냥 건드리기만 한 건 아니겠지! 어디, 무엇을 했나 확인해볼까!"

막시밀리앵이 톱날검을 크게 휘둘렀다. 톱날검은 순식간에 두 배 정도 길어지며 내 등을 찢어발기려고 들었다.

속도가 예사롭지 않다. 전력으로 뛰고 있는데 톱날이 벌써 지척이었다. 더욱 놀라운 건, 막시밀리앵은 제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후, 다행이다.

상대가 톱니바퀴를 써서.

"이런, 들켰네."

그러나 그보다 더 길어지려는 순간, 톱날검이 크게 덜컥이며 톱니바퀴가 세차게 헛돌았다. 막시밀리앵이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멀찍이 도망치는 데 성공한 나는 꼭 쥐고 있던 손을 폈다. 후두둑, 하고 내가 방금 빼낸 톱니바퀴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물건을 잘 흘리시네요. 앞으로는 주의하세요. 이런 쓰레기 하나하나가 환경에 나쁜 영향을 준단 말이에요."

톱니바퀴의 약점. 빠지면 언제든지 갈아끼울 수는 있지만, 갈아끼우기 전에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

맞물리지 않으면 힘을 전달할 수 없다. 아무리 강해도 공회전을 한다면 그저 성능 나쁜 부채에 불과하다. 나는 그 점을 노리고 톱니바퀴 소매치기를 시도했고, 성공하고야 말았다.

물론, 가치 있는 톱니바퀴를 소매치기 하기 위해서는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지만.

"그 짧은 순간에 내 톱니바퀴의 구조를 파악하다니! 어떻게 알았나?"

독심술로 알았지. 막시밀리앵의 머리 안에는 톱니바퀴 설계도가 있으니, 나는 거기에서 진짜 중요한 톱니만 골라서 뺐을 뿐이다.

나는 언제나처럼 대충 둘러댔다.

"자동마차, 아래쪽에서 위로 쳐올리니까 구조가 무너지던데요. 거기서 배운 것을 당신 무기에다 써먹은 거예요.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밀어내는 거."

자동마차는 톱니바퀴의 맞물림으로 형체를 이루고 있으며, 그 구조 때문에 아래서 쳐올리는 충격에 약하다.

그건 막시밀리앵의 무기도 마찬가지.

외부의 충격에 강하지만, 애초에 막시밀리앵의 톱니바퀴는 쉽게 조립하고 쉽게 해체하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무기.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힘을 가하면 손쉽게 빠져나온다.

나는 그 구조를 파악했고, 꼬챙이 끝을 휘게 만든 뒤 톱니바퀴를 당겨서 빼냈다. 덕분에 육장성을 공격하고도 이렇게 살아서 말도 하고 있다.

글쎄, 아마 두 번의 기회는 없겠지만. 이게 어디냐.

"그것을 단번에 이해했다는 말인가! 대단해! 정말, 또 다른 종류의 인재로군!"

막시밀리앵은 침을 튀기며 극찬했다. 시아티에게 방해받았을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화 안 내세요?"

"내가 왜 화를 내겠나? 그걸 파악한 직관에, 이해한 것을 곧바로 실현해내는 추진력. 그리고 해내리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는 과단성까지! 자네는, 분명 자격이 있네! 아니, 인간의 왕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해도! 자네는 내 뒤를 이을 자격이 있어!"

방해받은 주제에 막시밀리앵은 더욱 만족스럽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참 웃음도 헤퍼.

나는 떨어뜨린 톱니바퀴를 다시 그의 발치로 굴려주었다. 그의 발치에 도착한 톱니바퀴는 저절로 그의 몸을 기어올라 망토 안으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빛의 기둥이 솟구쳤다. 티르와 회귀자가 천사를 마무리 지은 것이다.

이제 살았다. 나는 여유를 되찾고는 평온하게 말했다.

"질척이는 사람은 추하다고 했어요. 우리, 이제 슬슬 아름다운 이별을 하지 않을래요? 어둠은 티르의 몸 안이나 마찬가지에요. 여기 계속 머물면 당신도 위험할걸요?"

"확실히, 그렇군."

막시밀리앵은 간단하게 수긍하고는 성큼 물러났다. 사방을 가득 메운 어둠 탓에, 몇 걸음 멀어졌음에도 그의 몸이 다 흐릿하게 보였다.

"내 생각에는 아직 여유가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자네에게 바치는 경의의 표시로 물러나겠네. 인간의 왕일지도 모르는 자네를 위해."

"참나. 세금도 안 내면서 왕이랍시고 겁나 띄워 주네. 도대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 인간의 왕이 있다면 댁은 좀 공손하게 굴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하하하! 아직 후보 아닌가! 누군가 한 명으로 확실해지면 남은 경의를 전부 표해주겠네!"

껄껄거리는 그의 웃음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 너머로 사라졌다. 그의 생각이 들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린 뒤, 나는 전신에서 힘을 빼며 중얼거렸다.

"여기 빡세네."

EP.248 무지개다리

전투는 끝났지만, 적을 성공적으로 격퇴한 것과 별개로 얻은 전과는 미미했다.

과병에게 상처는 입혔지만 제압하진 못했고, 천통은 소멸시켰으나 애초에 본체가 아니고. 정작 천통을 보고 격분한 티르가 어둠을 너무 많이 소모해버렸다.

애써 아낀 어둠이 아까웠지만, 티르는 그 점에 있어서 무덤덤했다.

[불가항력이었다. 천사를 사냥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화병이 나서 쓰러졌을 테니.]

"화병은 뭔 화병이에요. 그냥 머리에 피를 안 보내면 절로 가라앉잖아요."

내 푸념과는 별개로 성황청은 티르의 발작버튼이다. 고양이가 쥐를 쫓듯, 티르는 성황청을 보면 이성을 잃을 정도로 격노한다.

그거야 이해하니까 나도 더 뭐라 하지 않는 거지만. 나는 이제 의미가 퇴색되어버린 페달을 밟으며 운전대를 돌렸다.

"어쨌든 손해가 커요. 저쪽도 육장성, 개개인이 국가적인 전력인 만큼, 기습이라도 가하면 피해가 없을 수 없어요."

강자 한 명이 천 명과 겨룰 힘을 지닌 세상에서, 한 나라의 적으로 가장 까다로운 존재는 무엇일까.

당연히, 그것은 게릴라다.

강한 힘을 지닌 한 명이 기동력을 흩뿌리며, 국토를 돌아다니면서 파괴행위를 저지른다. 그와 비등한 강자가 아니라면 대적할 수조차 없다. 몸 안에 든 기생충처럼, 그는 전국을 착실하게 좀먹으며 막대한 피해를 끼친다.

물론 그만한 강자를 타국에 보내 죽게 하는 건 손해지만, 역사적으로 망국의 위기에 적국에 침투해서 시간을 끈 위인들의 이야기는 대대로 전해져온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거지만, 그건 적도 마찬가지.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다간 약한 쪽부터 사냥당하기 마련이다.

나는 힐끔 이번 공격 최대 피해자를 살폈다.

"셀피…."

공주는 짐칸 한편에서 무릎을 감싸고 앉아, 애마의 죽음에 슬퍼하고 있었다.

협소한 짐칸에 말의 시체까지 싣고 다닐 수는 없어서 회귀자는 지잔의 권능을 써 셀피를 위한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공주는 무덤 앞에서 짧은 추모를 마치고, 붉어진 눈시울로 뒤를 힐끔거리면서 자동마차에 올랐다.

셀피가 죽기 전 셀피는 다 셀피 안에 있었으나, 셀피가 죽은 뒤엔 셀피의 대부분이 공주의 안쪽으로 옮겨간 것 같았다.

공주는 자동마차의 진동을 느끼면서 셀피의 위를 되새겼고,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셀피를 떠올렸으며, 무언가를 먹을 때 본능적으로 셀피의 먹이를 챙기다가 우울해했다.

"멍. 멍멍."

아지는 말없이 공주의 곁을 지켰다. 공주의 감정을 느끼고는 위로해주기 위함이었다.

회귀자도 그쪽을 힐끔거렸다.

이전 회차의 동료를 안쓰럽게 여기는 마음은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과거의 이야기. 단락된 경험을 가진 회귀자는 마음과는 별개로 공주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말주변이 없어서? 그것도 있다. 성격이 그래서? 그것도 맞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질감이었다.

'…말투나 생김새는 그때와 비슷하지만, 내가 알던 공주랑은 확실히 다르네. 그때는 동료가 죽어도 눈물을 밖으로 내보일 만큼 약하진 않았는데.'

회귀자는 누군가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는다. 안타까움이나 아쉬움은 느끼지만 그에 슬퍼할 여유도, 그럴 필요도 없다.

마음이 닳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보다 어떤 비극이 닥치든 회귀하면 그만인 게 크다.

'하긴, 이 시점은 아직 이르니까. 공주도 아직 여릴 수 있지.'

이러한 상처가 쌓이고 쌓여서 그때의 공주가 된 거라고, 나름대로 결론을 회귀자가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고는 회귀자에게 제안했다.

"셰이 씨, 지금이 기회에요. 가서 위로라도 한마디 해줘요."

"위로를 어떻게 해? 위로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회귀해야 달라지지. 하지만, 나는 고작 말 한 마리를 위해 회귀할 수는 없어. 애초에, 여기까지 왔다면 공주가 죽더라도 회귀하지는 않을 거야.'

"마음이 편해지잖아요, 마음이."

"마음이 편해지면 뭐해. 그래도 셀피는 돌아오지 않는 걸."

'나에겐 공주의 슬픔을 없앨 능력이, 셀피를 돌아오게 할 능력이 있지만… 하지 않고 있어. 이 모든 걸 돌이킬 능력이 있으면서 입 다물고 위로만 하는 건 위선에 불과하잖아. 그러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에겐 위로할 자격이 없지.'

거 참, 부정적이네.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야 있다. 아니, 애초에 나는 독심술을 갖고 있으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지.

통신병처럼 골렘 너머로 대화하던가, 막시밀리앵처럼 자기 머리에 톱니바퀴를 박아놓고는 필요할 때만 연결해서 쓰면 이해를 못 하지만… 회귀자는 기억이나 경험을 내가 볼 수 없는 곳에 두었을 뿐 생각 자체는 읽히니까.

그러니까 더 답답하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인기가 없지."

"뭐? 죽을래?"

이런 귀는 또 밝아. 나는 은근슬쩍 목소리를 높이며 화제를 돌렸다.

"셰이 씨, 아무리 봐도 공주는 전투에 적합하지 않잖아요. 굳이 공주를 이 싸움에 데려갈 필요가 있었을까요?"

"여기까지 왔는데 돌려보낼 수는 없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애초에 공주가 따라오겠다고 했을 때 거절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군국 내부에 침투한 첩자는 시아티만 있어도 충분히 접촉할 수 있잖아요."

"…확실히 그 말대로긴 한데."

'왜 하필 말이 죽은 이 타이밍에 묻는 거야? 잠깐, 혹시? 말이 죽어서?'

회귀자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너, 혹시 말이 죽은 거로 공주의 쓸모가 다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어? 셰이 씨, 독심술 익혔어요?"

"너한테는 피도 눈물도 없어?!"

"설마요. 저도 피가 나고 눈물을 흘리는 평범한 사람이라고요. 단지, 짐승을 위해 흘려줄 건 없을 뿐."

"진짜 너무하네! 이런 자식이 마음이 편해진다 운운했던 거야?!"

'아지한테도 그렇고, 나비한테도 그렇고. 이 녀석은 짐승한텐 진짜 가혹하네! 만물의 영장도 이정도까지 막 대하진 않아!'

막 대하기는. 짐승에게 짐승 대접만 하면 됐지 뭘 더 바라.

회귀자는 나를 나무라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아직 너에게 제대로 설명하지는 않았지? 공주의 핏줄, 그란디오모르 왕가에 내려지는 힘이 뭔지."

"뭐, 대강은 알고 있지만요."

"알면 설명하기 편하겠어. 그란디오모르 왕가, 그 핏줄에 내려오는 힘… 적의를 사지 않는 능력이라고 간단하게 설명된 그 힘의 본질은, 평화야."

회귀자는 그녀가 알고 있는 지식을 찬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상대가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믿음. 서로가 서로를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약속. 사회를 이루는 힘. 우리에게는 그 힘이 필요해."

"왜요? 혹시 평화롭게 모든 걸 끝내기 위해서?"

"정답이야. 내 목적은… 전쟁을 막는 거지, 새로운 전쟁을 일으키는 게 아니니까."

회귀자의 힘은 강대하다. 천앵과 지잔을 양손에 쥔 지금, 실제로 회귀자는 홀로 어마어마한 재앙을 일으킬 수 있다.

애초에 지잔은 단신으로 무저갱을 만들어낸 대종사가 남긴 유물. 거기에 천앵과 더불어 일신의 전투력을 갖춘 회귀자는, 무저갱보다 덜 신비할지언정 더욱 커다란 인명피해를 만들 능력을 지녔다.

그렇지만 하지 않는다.

그녀의 목적은 살인으론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라서.

"통신본부를 무너뜨리고 전쟁 수행능력만 분쇄하면, 통신에 장애를 겪은 군국은 커다란 혼란에 빠질 거야. 어차피 우리는 적당한 때 싸움을 멈추고 이탈해야 해. 그 상황에서 공주가 가진 평화의 힘이 빛날 거야."

'조금 억지스럽지만, 짐승의 왕도 확보하고 티르칸쟈카도 함께 있는 지금. 그리고… 총사까지 합류한 지금은 힘이 충분해. 할 수 있어.'

호오. 회귀자도 다 계획이 있었구나. 새삼 인생 다시 쓸 수 있어서 무계획으로 산 게 아닐까 생각했던 내가 다 미안해진다.

내친김에 궁금했던 걸 다 물었다.

"하지만 결국 왕가를 상대로 쿠데타가 일어났잖아요?"

"오죽 못했어야지. 심지어 왕가는 자기 핏줄의 힘을 대강 알면서도 시민들 앞에 얼굴을 내보이지도 않았어. 능력을 쓸 기회가 없는데 어떻게 평화로워지겠어?"

"육장성 막시밀리앵은 공주님을 대놓고 죽이려 들었는데요?"

막시밀리앵 이야기가 나오자 회귀자는 대단히 싫은 표정을 했다.

"그놈은 별개야. 그놈은… 신비에 대항하기 위한 계책으로 자기의 인지를 건드렸어. 어떤 방식인지는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그래도 안심해."

회귀자는 천앵과 지잔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대단히 믿음직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다음에 만날 때는, 결코 도망칠 수 없을 테니까. 공주 쪽에 눈 돌릴 틈도 없을걸."

어디까지나 전략적인 발언이었지만, 회귀자는 이야기에 몰입하느라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간과했다.

앞좌석과 뒤쪽 짐칸이 구분되어 있다고 해서, 그 목소리가 공주에게 안 들릴 리 없다는 것을.

상실의 슬픔을 극복하는 방법은 추모하는 게 아닌, 그것을 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계속 앞으로 흘러가는 시간이 백약이라고 여겨지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입술을 꾹 물고, 주먹을 꽉 쥔 공주가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까지 공주 이야기를 하고 있던 회귀자는 흠칫하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어? 들렸나? 뭐, 내가 못할 말을 한 건 아니니까.'

하지만 회귀자, 너는 아직 잘 모르고 있다. 네가 어떤 꼴로 어떻게 비치는지를.

공주는 좁은 짐칸에서 움직여 앞좌석 가까이 다가왔다. 앞좌석 가까이 붙은 공주는 양손을 가슴께로 모은 다음 입을 열었다.

"…공."

"어? 나?"

회귀자가 자기 자신을 가리키자, 공주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드려요. 비록 제 힘은 미력하고, 저조차도 어떻게 쓰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저도 제 능력을 총동원해서 공을 도와드릴게요. 저를 위해, 그리고… 공을 위해."

"어, 어? 고마워."

'…? 도대체 무슨 일이지? 그때 공주를 구한 건 내가 아니라 얘인데…?'

그러게. 최근에는 내가 공주를 도왔는데, 왜 네가 감사의 인사를 받냐.

하지만 여전히 전방주시 중이라 식은 시선을 보낼 수가 없다. 그동안 회귀자는 내가 부린 재주의 대가를 수금했다.

"그리고, 만일… 이 모든 일이 끝나면."

뭔가를 생각하던 공주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말을 주워 담았다.

"아직 그에 대해 논하는 건 이르겠죠. 일단, 저는 내통자와 연락할 준비를 하고 있을게요."

"어? 어."

공주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물러났다. 여전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하지 못한 회귀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의욕적이네? 말이 죽어서 의기소침할 줄 알았는데."

"그랬나 보죠. 조금 전까지는."

"기운을 차렸으면 좀 낫네."

너도 참 순수하긴 하다. 아니, 사실 회귀자의 입장에서 이런 상황은 처음일 테니까 순수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너 오히려 남자일 때 더 인기를 끄는 편이었구나?

아니, 여자였을 때도 나름 괜찮았을지도. 되도 않는 남장만 안했다면.

내 뒷좌석 그늘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티르는 참다 못해 한마디 했다.

[…휴. 수완이 너무 뛰어나지 않느냐?]

"수완이라뇨?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요."

[발뺌은. 내가 셰이처럼 둔감하리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이 짧은 순간 공주를 다독이고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넌지시 제시하다니. 여간내기가 아니구나. 왕년에 계집 여럿 울린 솜씨렷다.'

억울하네. 나는 마술사다. 사람들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게 한 적은 있어도 울린 적은 없거든.

몇몇은 빼고.

"으윽…."

그때, 흑마술과 부상의 여파로 잠들어 있던 시아티가 깨어났다. 멍든 가슴팍을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킨 그녀가 흠칫 놀라 주위를 살필 때였다.

지금껏 조용히 있던 히스토리아가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천잠사라는 귀중한 밧줄이 그녀를 얽매고 있었지만 히스토리아는 지금까지 그랬든 한 점의 불편함도 없어 보였다.

그에 비해 어떤가. 시아티는 묶여있지 않았지만 히스토리아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읏, 뭐야. 볼일이라도… 있어?"

부상당한 인간이 흔히 보여주듯, 시아티는 본능적으로 히스토리아를 경계했다. 히스토리아여서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 기색을 충분할 정도로 인지한 히스토리아는, 결심을 되새기고는… 반론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당당하게 선언했다.

"시아티. 너는 여기서 빠져."

EP.249 아픈손가락

시아티는 고통과 불쾌함에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부러진 손가락, 자기를 부수는 흑마력, 막시밀리앵에게 공격당해 입은 상처는 그녀를 착실하게 갉아먹고 있었다.

그에 반해, 히스토리아는 곧고 바른 자세로 서서는 시아티를 내려다보았다. 천잠사가 그녀를 얽매고, 양팔을 조금도 움직일 수는 없지만…. 그래도 히스토리아는 강했다.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무슨… 소리야."

히스토리아는 시아티의 손가락을 흘긋 보았다.

오른팔은 의수다. 과거에 잘려나간 오른손 대신 단단한 쇳덩이가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하나 남은 왼팔에는 부러지고 뒤틀린 손가락이 붙어있다.

손가락 몰골을 보건대, 머지않아 그마저도 사라질지 모른다. 어쩌면… 손가락으로 끝나지 않을지도. 히스토리아는 눈을 한층 가늘게 떴다.

"네 손가락. 사령부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두 개밖에 남지 않았어. 약지와 중지는 이제 가망도 없고."

"흐, 그래서?"

"잔탄은 두 발. 그걸 다 쓰면, 뭐? 다음은 목숨이라도 쓸 거니?"

"못 쓸 건 없지."

시아티는 오기로 말했다. 진심이었다.

그녀에겐 최후의 저주까지 쓸 각오가 있었다. 만일 사령부와 맞닥뜨린다면, 그리고 그녀의 인생을 망가뜨린 이들과 마주친다면, 시아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기 목숨을 쓸 것이다.

그 각오는 정말이었으나… 히스토리아는 그 의지를 단숨에 부정했다.

"치워."

"뭐?"

"흑마술 따위 통하지 않아."

울컥한 시아티가 상반신을 들었다. 그러나 감정에 솔직한 몸과는 별개로, 그녀의 입에서는 반박이 곧장 나오지 않는다. 누구보다도 시아티 자신이 절절히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과병을 상대로 손가락 두 개를 꺾었다.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살짝, 아주 티끌만큼의 시간만 끌었을 뿐. 막시밀리앵은 멀쩡하게 되돌아갔다.

아니, 고작 그녀의 손가락으로 과병의 시간을 끌었다면… 분에 넘치는 성과였다.

시아티는 적을 죽일 수만 있다면 자기 목숨 따윈 떨이로 취급한다. 지금껏 그래왔고.

하지만, 목숨까지 바쳤는데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면. 금기에 손을 댔는데도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다면.

"설사 통한다고 해도, 손가락 두 개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해. 탄환이 떨어진 총은 그냥 쇳덩어리에 불과하고. 제물이 부족한 흑마술사는 평범한 사람보다도 무력하니까."

발끈한 시아티가 항변했다.

"…그래서, 나보고 손가락을 꺾는 대신, 손가락만 빨면서 있으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그러면 누가 대신 그들의 팔을 꺾어주기라도 해?!"

"내가 해줄게."

"하?"

"내가 꺾어주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너와는 달리, 잔탄에 관계없이."

히스토리아는 미련없이 몸을 돌렸다. 히스토리아의 얼굴이, 몸이 시아티를 내버려 둔 채 공주에게로 향했다.

갑작스레 이야기로 끌려나온 공주가 눈을 끔벅였다. 그녀의 앞으로 군국이 자랑하는 육장성이 서슬퍼런 기색으로 다가왔다.

"공주. 내가 너에게 정식으로 요구하겠어. 시아티 대신, 내가 너의 총이 되어주지."

"네?"

시아티는 히스토리아가 이어 할 말을 예상하고는 눈을 부릅떴다. 히스토리아는, 지금 그녀가 싸울 이유를 빼앗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너와 이들에게 전폭적으로 협력할게. 전력을 다해 네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주겠어. 그게 설사 군국에 반하는 짓이라도."

파격적인 제안이다. 육장성이나 되는 군국 최강 전력 중 한 명이, 공주에게 완벽하게 협력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공주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물었다.

"당연히, 요구사항이 있으시겠죠? 무엇을 원하시나요?"

히스토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잔혹하리만치 단정적으로 말했다.

"대신 시아티를 전투에서 빼."

"히스토리아!"

시아티의 외침을 무시한 히스토리아는 제멋대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시아티는 네 친구라고 말했지, 공주. 그렇다면 네 친구를 보호하고, 전력을 확충할 기회야. 네가 조금이라도 계산이 된다면 거절하진 않겠지."

"주제넘은 소리 하지 마! 네가 뭔데, 나보고 빠지라 말라야!"

"군국 육장성, 히스토리아 소장이다. 최연소 장성이며, 이치에 닿은 자. 총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총사다. 잔탄 두 발 뿐인 흑마술사에 비할 바 아니야."

히스토리아는 담담하게 자격을 읊어나갔다.

"또 사령부에 대한 지식도 있지. 너희가 접촉할 정보원이 누군지는 몰라도… 나보다 사령부의 구조를 더 잘 알지는 않을걸."

따라서, 너 하나보다는 내 힘이 더 도움이 될 거라고. 히스토리아는 분명한 사실이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불편한 진실을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지금 시아티가 잠시 머뭇거린 것도, 차마 부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히스토리아가 아군이 된다면, 확실히….'

아주 잠깐, 안온한 도피처에 몸을 담그고 싶은 마음이 피어오른다. 무력한 그녀에 비해 훨씬 강력한 존재가 돕는다면…. 그녀도 힘들이지 않으며, 더 효율적인 게 아닐까.

마음이 약해지려는 순간 반발심이 고개를 들었다.

만일 티르가 똑같은 제안을 했다면, 시아티는 기뻐하며 그 뜻에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히스토리아였다. 한때 시아티와 같은 시간을 보냈던 그녀가 동정심을 갖고 시아티를 구하려고 하고 있다.

"너도, 너도 묶여있는 주제에 힘이 되어주긴!"

히스토리아는 말로 반박하지 않았다. 그녀는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군국의 장성이 되기 위한 조건은, 감(坎)기공을 익혔을 것."

으득, 으득.

히스토리아의 전신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뼈부터, 관절. 근육이 움츠러들고 힘줄이 당겨진다. 보이지 않는 누가 어깨를 거칠게 잡아당기는 것처럼 허리가 휘고, 몸의 변형을 따라오지 못한 셔츠가 찢어질 듯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그녀의 뒤에는 아무도 없다. 이 모든 움직임은 그녀가 스스로 행하는 일.

히스토리아는 자기 몸을 뒤틀면서도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이 정도는 아무런 장애도 아니라는 듯이.

"감기공을 익혀야만 장성이 될 자격을 얻어. 뼈와 근육에 기공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생존 확률이 대폭 올라가기에. 장성은 군단을 이끄는 자, 칼이 몸을 헤집고 바위가 몸을 짓이겨도 살아남아, 마지막까지 그들을 책임져야 하니까."

히스토리아의 팔이 더욱 꺾이고, 뼈가 잠시 제 위치에서 어긋난다. 투둑. 견디다 못한 단추가 뜯겨나갔다. 튼튼한 의복 패킷이 망가질 정도로 격심한 변화다.

유연하게 움직이는 히스토리아의 몸과는 달리, 매듭에는 그만한 유연성이 없었다.

"흐으."

히스토리아가 길게 숨을 내쉬며 어깨를 원위치로 돌려놓았다. 묶을 대상이 사라진 천잠사가 그녀의 팔 아래로 늘어진다. 매듭을 푼 게 아니라 아예 벗어던진 히스토리아는, 걸칠 곳을 찾아 가슴 쪽으로 말려 들어간 천잠사를 떼어냈다.

"그렇기에. 흑마술도… 장성에게는 그다지 유효하지 않아. 약간의 부상을 입히고 행동을 제어하는 게 전부."

히스토리아는 천잠사를 원해 주인에게 툭 던졌다. 날아오는 천잠사를 낚아챈 회귀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찼다.

"…뭐,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수월하게 푸네. 나름 꽉 묶은 건데."

공주가 홀로 구속을 풀어낸 히스토리아를 보며 중얼거렸다.

"저게 풀리는 거였네요…."

"당연하지. 구속복이나 밧줄 같은 건 육장성급 강자에게 의미 없어. 천잠사쯤 돼야 푸는 데 시간이 걸리고, 그동안 내가 대응할 수 있으니 묶어둔 거지."

"저런 게 취향이신 줄…."

"어? 취향?"

"다행이네요…. 저는 저만한 포텐셜이 나오지 않으니…. 아니, 아직 긴장을 풀 때가 아닐까요…."

"뭐가? 무슨 말이야?"

공주가 보내는 시선이 어디인지 알아챈 히스토리아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셔츠 단추를 여몄다. 어쨌건, 천잠사를 스스로 풀어내고 자유의 몸이 된 히스토리아는 다시금 제안했다.

"공주. 내 요구에 대한 대답은?"

공주는 다시 태도를 가다듬고는 대답했다.

"어, 음. 총사님.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다만?"

옅게 깔린 거절의 기색에 히스토리아가 위압적인 시선으로 공주를 노려보았다. 공주는 무시무시한 기세에 침을 꿀꺽 삼켰지만, 그래도 히스토리아의 기운은 공주를 위압했을지언정 위협하진 않았다.

"말씀하신 대로, 저는 시아티의 친구예요. 제가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리는 위치가 아니에요."

"그러면? 시아티가 죽어도 상관없다고?"

"아뇨아뇨.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어요!"

공주가 다급히 고개를 젓고는 재빨리 대꾸했다.

"대, 대신, 시아티를 돕고 싶으시다면! 저에게 협력하는 게 아니라, 시아티의 옆에서 시아티를 지켜주시는 게 어떨까요? 저는, 저, 공격을 받지 않는 능력이 있어서…!"

"결국 싫다는 뜻이네. 시아티가 죽든, 아니면 손이 아예 사라지든 상관없다고."

"그, 그런 뜻은 아니에요! 단지, 저는…. 시아티에겐 목숨보다 중요한 게 있으니까, 그게 낫지 않나 하고!"

"잘 알았어. 결국, 시아티도 네 뜻대로 부릴 수 있는 말이라는 거지. 누가 공주 아니랄까 봐, 하는 짓은 왕국이랑 똑같네."

공주가 입을 다물었다. 정말 그렇게 여겼다면 전선에 참여하지도 않았겠지만, 방금 셀피를 잃은 그녀에게는 부정할 의지가 부족했다.

"필요없어! 죽어도, 너 같은 것의 도움은 받지 않아!"

대신 시아티가 외쳤다.

"너는, 끝까지 우리를 같은 인간으로 안 보지! 약하니까, 하찮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해! 하멜른의 아이들을 내버린 건 다른 사람이 아니야. 너처럼, 우리를 필요 없는 존재로 여긴 너 같은 녀석이! 다 죽인 거나 마찬가지라고!"

"실컷 지껄여. 네가 뭐라고 하든, 나는 내 멋대로 너를 살릴 거니까."

"하멜른 강에 빠졌을 때처럼? 하! 너는 그렇게 잘나서, 물속에서 시체만 건져 올렸니? 네가 거기서 살린 게 뭐가 있지?"

한껏 비웃은 시아티는 해묵은 상처를 헤집었다. 정신적인 흑마법이었다. 서로 고통스럽지만, 더 닳아빠진 시아티보다는 히스토리아에게 더 치명적인.

"…그래."

히스토리아는 잠깐 고통스러워했으나 얼굴 밖까지 드러나진 않았다. 대신 그녀는 담담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때처럼."

운전대를 잡은 탓에 저 대화에로부터 떨어져 있던 나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둘 다 사교성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저 둘의 이야기는 지독할 정도로 헛돌고 있다. 앙금이 있으니 그러려니 싶지만, 너희 둘이 서로 날을 세우면 가만히 있는 내가 피곤해진다고.

"자자. 다들 진정해. 어쨌든, 대국적으로는 좋은 이야기가 되었으니…."

내가 실없이 그리 분위기를 흐리려고 할 때였다. 히스토리아가 고개를 홱 돌렸다.

"너도 마찬가지야, 휴이."

"어? 나?"

"싸울 때 빠져있어. 시아티를 데리고. 그러면 내가 너 대신 싸워줄게."

히스토리아는 거침이 없었다. 시아티에 이어 나까지 보호할 의도로 그리 말해왔다. 뜻밖의 제안에 나는 턱을 긁적였다.

"어, 저기. 리아. 마음은 정말 고마운데."

뭔가 크게 오해를 하는 모양이다. 지금 내가 운전하는 모습 보면 몰라? 나는 애초에 전투원이 아니라고.

"나도 네 말은 못 들어주겠는데?"

"…너도 시아티처럼 멋대로 죽으려고?"

"아니? 그럴 생각은 전혀 없어. 애초에 나는 애초에 전투원이 아니니까. 처음부터 위험한 곳에는 얼씬도 않는걸."

'…아닌 것 같은데. 요령이 좋은 척하면서도, 정작 위험한 일에는 다 발을 들이민단 말이야.'

히스토리아는 미심쩍은 시선으로 나를 보았지만 내가 해줄 말은 없다. 실제로 나는 하나같이 휘말렸을 뿐이니까.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봐봐."

나는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하루 일과를 마친 태양이 슬슬 잠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비스듬한 빛이 점차 약해지고, 빈자리를 어둠이 채웠다.

"날이 저물고 있어."

자동마차를 억지로 끌고 시간을 맞춰서 온 보람이 있다. 지금 시간은 밤. 위험이 찾아오곤 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우리 쪽에는 밤의 귀족이 있다. 오늘 밤은 오직 군국에게만 위험한 시간이 될 것이다.

EP.250 아군이 된 적

군국 시민의 수도가 아미텐그라드라면, 군국 군인의 수도는 이너서클 사령부이다.

구 왕국의 수도에 만들어진 아미텐그라드는 거주도시의 역할을 수행했다. 거주지, 일자리, 농경지까지. 평범한 도시가 가져야 할 모든 것을 춘 채로 인구를 품었다.

그에 반해, 사령부는 도시라 부르기엔 결격사유가 많았다. 인구분포는 편중되어 있고, 자원을 끊임없이 집어삼키기만 할 뿐 다른 곳에 나누지 않는다. 오직 전쟁만을 위해 준비된 도시.

그 덕분에 군국은 규모에 비해 커다란 군대를 유지했다.

사령부에는 제철소, 군수공장, 사관학교 등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온갖 군사시설이 밀집해 있다. 군인의 관리 감독 아래 노역자들은 노동을 계속하고, 노동이 빚어낸 무기와 자재가 점차 쌓여간다.

이 모아둔 힘을 언젠가 필요한 때가 오면, 타국을 향해 쏟아내기 위해.

군국의 한가운데 있기에, 따라서 언제나 침략으로부터 안전했던 이너서클 사령부 초소.

그곳에서 한 장교는 내심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군국이 명확한 답변을 해주지는 않았지만, 장교쯤 되면 이것저것 이야기가 많이 들려온다.

무저갱이 무너졌으며, 그곳에서 사상 최악의 존재들이 풀려나고, 그들을 가두어놨던 이들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 사령부로 다가오는 중이다.

그의 임무는 사령부로 쳐들어오는 그들을 저지하는 것.

그에게 전해진 내용은 딱 그 정도였다.

즉, 아무것도 몰랐다는 소리다.

"두려운가, 소위?"

그의 뒤쪽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직접 들은 적은 손에 꼽지만 잊을 수 없는, 아니, 잊어서는 안 되는 목소리였다.

군기가 바짝 든 소위는 빠릿하게 몸을 돌리며 그를 향해 경례했다.

"충성!"

그곳에는 장교복을 입은 장성이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힘이 곧 지위인 군국에서는 장성의 나이대가 고른 편이다. 하지만 기공이라는 것이 익히기 꽤 까다로운 것인 만큼, 장성 중 비교적 젊은 편에 속하는 그도 벌써 서른 중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갓 임관한 한참 어린 장교를 향해 다독이듯 말했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힘을 풀어라. 쏘지 않은 총이 가장 위협적이고, 휘둘러지지 않은 칼이 가장 날카로운 법. 벌써 잔뜩 힘을 주고 있다간 정작 써야 할 때 힘이 빠지게 된다."

"시정하겠습니다!"

"다시 묻지, 소위. 두려운가?"

그제야 소위는 아직도 첫 번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경을 칠 일이다. 소위는 급한 마음에 대답했다.

"조금밖에 두렵지 않습니다!"

"호오. 군국의 군인이 두려움을 느끼는가?"

"시, 시정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나도 역시 두렵기 때문이다."

소위의 어깨를 두드린 장성은 뒷짐을 지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뜻밖의 대답에 소위가 당황하는 사이, 장성은 어둠 저 너머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싸우기 전부터 승패를 점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죽을지, 살지는 대강 감이 오지. 상대는 강력하고, 그에 비해 외곽 수비 부대는 부족하다. 아무리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고 해도 일반적인 3레벨 수준의 부대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누가 보더라도 우리는… 버림말이다."

냉담한 진실에 소위는 크게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그게 진실이어도 동료들끼리 자조적으로 농담하는 것과 그만한 권위자가 단언하는 것은 무게가 다르다. 소위가 떨리는 목소리로 복창했다.

"버, 버림말…입니까."

"그래. 자네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이곳을 지키고 있지만, 만일 교전이 발생해도 지원이 오리라 기대하지는 않는 편이 좋다. 옥쇄를 각오하고 싸우도록."

버림받은 말의 심정을 알고 싶다면 딱 소위의 마음을 읽으면 될 것이다. 참담하게 고개를 숙인 그의 위로 장성의 한마디가 들려왔다.

"대신, 이것 하나만 약속하지. 나는 귀관의 지휘관이며, 이곳의 책임자이니. 이 초소에서 귀관과 같은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살든, 죽든."

참담하게 떨어졌던 마음만큼 감동시키기 쉬운 게 또 있을까. 소위는 감격스러운 얼굴로 장성을 바라보았다. 그는 오랜만에 진심에서 우러난 경례를 표했다.

그러기를 기대했던 장성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여주지 않기 위해 바깥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장성은 지휘관이다.

톱니바퀴에 빗대면, 그는 톱니바퀴의 축에 해당되는 중대한 역할을 떠안고 있다. 그의 지휘 아래 수많은 톱니가 몸을 던지고 살을 문댄다. 축은 그 힘과 무게를 견디고 끝까지 살아남아야 하기에, 군국에서도 특별하게 대한다.

그렇더라도, 결국 적과 처음 맞부딪히는 부분은 최전방에서 병력을 지휘하는 소위다. 톱니바퀴의 축이 중요하다고 해도 톱니가 망가진다면 헛돌 뿐.

따라서 장성은 그들의 사기를 올려주기 위해 친히 최전방에 나타났다.

'소위든, 장성이든. 어차피 부품인 것은 똑같지 않은가. 수가 적냐 많냐의 차이일 뿐.'

장성은 자조적으로 읊조렸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자기 처지에 대한 담담한 평가일뿐, 그에 딱히 불만을 품진 않았다.

장성쯤 되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자기가 장기말에 불과하다는 것조차도 그 일부였다. 어쩌면 그것을 아는 것조차 축복일 수 있다. 대다수 군인들은 자기가 어떤 부품인지도 모른 채 주어진 일만 하니까.

높이 올라가본 사람만이 자기가 얼마나 하찮은지 깨닫는다. 장성 정도는 되어야, 톱니의 축이 되어 중앙과 연결되어 있어야 자기 위치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왕국보다는 낫지 않은가. 매 순간 호시탐탐 상대를 노리며, 약해지면 결투를 벌이려고 혈안이 된 그 끔찍한 나라보다는.'

하지만, 이라는 문구와 함께 장성은 문득 생각했다.

막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한 소위는 젊다. 그가 왕국에 살았던 시간은 태어나고 몇 년 남짓. 그야말로 왕국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하던 '좋을 세대'다.

하지만 왕국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군국은 어떤 모습으로 비칠지.

'나야 알 수 없지. 마음을 읽지 못하는 한.'

중얼거린 장성이 시선을 바깥으로 던질 때였다.

좌우로 흔들리던 탐조등이 무언가를 포착했다. 이쪽에서 뻗어나간 다섯 줄기 광선이 어둠 저편을 비춘다. 탐조등이 무언가 움직이는 형상을 포착한 것이 틀림없었다.

장성이 손을 들었다.

"온다."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은 잔뜩 긴장한 채 앞으로 각자의 무기를 겨누었다. 대포와 기총도 어둠 저편을 향해 총구를 돌렸다. 명색이 군국의 군인, 두려움 앞에서 도망치는 자는 없다.

바싹 마른 입에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다름 아닌 그의 몸에서 나온 소리였다. 장성은 헛웃음을 지었다.

'장성의 위치까지 올랐지만, 그래도 격상의 상대를 앞두고 긴장하는 것인가. 훗. 위관이나, 장성이나 다를 게 없군.'

장성은 코웃음을 치며 무기 패킷을 생체 단말에 끼웠다. 그 순간 전신을 얇은 연금강이 둘둘 감쌌다. 단검을 주로 쓰는 그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방어용 장성기, 철린갑이었다.

무기의 리치가 짧을수록 한 번의 목숨을 구할 방어구를 필요로 하는 법. 그는 약간 답답한 갑옷이 주는 안정감을 느끼며 송곳니와 같은 날카로운 단검을 치켜들었다.

털털거리는 소리는 점차 가까워졌다. 어둠을 두르고 있기 때문인지 아직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탐조등이 훑는 범위를 보건대, 그들이 꽤나 가까이 온 것이 틀림없었다.

'잠깐. 어둠? 분명 전달받기로는, 탐조등으로 간파할 수 없으니 주의하라고….'

통신병으로부터 전해들은 사항을 떠올린 그가 고개를 팍 들었을 때.

털털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앞으로 당도한 건…. 어딘가에서 다섯 바퀴쯤 구르고 온 듯한 몰골의 자동마차였다.

박살 난 차체도 차체지만, 내부에 비하면 겉모습은 그나마 멀쩡한 편이었다. 안쪽은 누가 한손으로 움켜쥐고 비틀었는지 부서지고 어긋난 모양새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

자동마차의 안쪽이 텅 비어 있었다.

조사를 끝마친 장성은 손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위장이다! 적은 이미 야음을 틈타 숨어들었다! 이 사실을 통신병에게 전달하도록!"

"넵!"

통신용 골렘을 향해 재빨리 뛰쳐나가는 소위의 모습을 보며, 장성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안도의 한숨이라는 것을 그는 한참 뒤에 깨달았다.

살다 보면 한 번쯤 나라를 부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길 때가 있다. 없는 데에서는 나랏님도 욕한다지만, 군국에는 왕이 없기에 내 투덜거림은 군국이라는 나라 그 자체를 향할 수밖에 없다.

욕을 하지 않으면 된다고? 살다 보면 누군가에게는 원망을 쏟아붓지 않고는 견디기 힘든 일도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거고.

모범시민이었던 나는 나도 뭔가 일이 잘 안 풀린다 싶으면 군국따위 망해버리라고 저주하면서 우울한 마음을 달래고는 했다.

당연히 농담이다. 평범한 개인은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없으며, 절대 이룰 수 없는 일은 농담이 될 요소를 가진다. 나에게 있어 군국이 망해버리라는 악담은 어디까지나 농담의 영역에서 머무르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군국을 정말 멸망시킬 수 있는 존재와 함께 있었다.

사령부 인근에 위치한 자동마차 조립 공장.

"군국의 전투 방식은 기동전. 통신병, 자동마차, 명령체계. 세 가지로 명령 수행 속도가 명령 하달 속도를 따라잡지. 자동마차의 존재는 그에 필수."

불타 쓰러지는 설비 공정을 배경으로 한 채, 그곳에서 걸어나온 히스토리아는 손을 내뻗었다. 이글거리는 불길이 그녀의 손에 달린 마력초 한 개비에 불을 붙였다.

얼굴에 음영을 드리운 채 마력초를 문 그녀는 담담히 설명했다.

"이 조립 설비는 쉽게 복구할 수 없어. 부품이 아무리 많아도 결국 조립공정을 거치지 않으면 쇳덩어리일 뿐. 조립 공정 자체를 부수면 공장이 마비되지. 막시밀리앵 국장 정도 되는 자가 있다면 모를까, 복구하려면 공병 다섯 대대가 붙어야 할걸."

마침 그녀의 눈에 완성되기 직전의 자동마차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자동마차를 옆으로 뻥 걷어찼다. 군홧발이 새겨진 문짝이 되튕겨나오고, 삐거덕거리며 옆으로 주르륵 밀려난 자동마차는 벽에 부딪히고는 와장창 부서졌다.

"여기가 없다면 사령부의 병력운용에 차질이 생기겠지."

마지막 하나까지 치운 히스토리아가 군홧발을 또각거리며 걸어갔다.

군국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으면서, 누구보다도 군국에 대해 해박한 히스토리아가 그 힘과 지식으로 직접 파괴 행위를 자행하니 연약한 강철 기계장치는 버티지 못했다. 히스토리아의 체계적인 폭력 앞에서 무른 연금강은 부러지고 짓이겨졌다. 연금술(물리) 앞에서 아무것도 원형을 유지하지 못했다.

거대한 횃불이 되어 밤을 밝히는 공장을 뒤로한 채, 히스토리아가 문으로 걸어나왔다.

그녀의 곁에서 파괴 행위를 도왔던 회귀자는 뚱한 얼굴로 대꾸했다.

"이거 아무런 의미가 없다니까? 진짜 발목잡기 수준이야. 자동마차 따위, 통신병들이 다른 곳에서 아득바득 긁어올 거라는 말이지. 통신병을 어떻게 하지 않으면."

"통신병을 어떻게 할 수는 없어. 육장성인 나도 통신병이 어디서 일하는지 모르니. 아마 당사자를 제외하면 군국의 그 누구도 모르지 않을까."

히스토리아는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에도 별로 유감스럽지 않다는 태도였다. 회귀자가 떠보듯 물었다.

"모르는 것치고 통신병을 묘하게 신경 쓰는 눈치던데? 너야말로 무언가를 아는 거 아냐?"

"…몰라. 그러니까, 신경 쓰는 거지."

히스토리아는 담배연기를 후, 내뿜으며 중얼거렸다.

"분명 존재하는데, 내 눈에는 보인 적 없다. 이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그걸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더라. 대위라고 해봤자 더 나을 것도 없는 처지인데 말이야."

존재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어디 숨어있거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로 지내고 있다는 뜻.

창문 없는 방에서 오직 골렘을 통해 대화한다는 사실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히스토리아는 그와 비슷하게 추측했다.

"물론, 네 말대로 통신본부를 공격하면 차질이 생기긴 하겠지. 통신본부가 무너지면 송신할 수 있는 정보량이 급감하니까."

"그래! 거기부터 쳐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라도 이 과정은 필요해. 주요 시설을 전부 잃고 전쟁을 벌일 수는 없어. 필시, 군국은 사령부에서 정예병력을 파견할 거야…. 그러면 그때, 텅 빈 사령부를 습격하면 돼."

얼핏 보면 합당한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회귀자도 나름 산전수전을 다 겪은 위인이다. 그녀는 히스토리아의 제안 속에 숨은 의도를 파악했다.

"전투를 벌이지 않으려고 유인책을 펼치는 거지?"

방향을 돌려 자동마차 조립 공장을 습격한 것부터, 일부러 설비만 집요하게 노리는 것까지. 히스토리아는 노골적으로 전투를 피하고 있었다.

"흥. 대단한 평화주의자시네."

"전쟁을 막겠다는 꼬마가 같이 있으니, 거기 옮았나 보지."

대꾸할 말이 없던 회귀자가 매섭게 시선을 돌렸다. 히스토리아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둘은 잠깐 서로를 노려보았고, 각자 못마땅한 듯 고개를 홱 돌렸다. 회귀자가 물었다.

"그 녀석은?"

"휴이를 말하는 거라면, 그는 노역자들을 모으러 갔어."

"왜?"

다 타들어간 마력초 꽁초를 툭 뱉으며 히스토리아는 고개를 중얼거렸다.

"또 무슨 속임수를 쓰려는 거겠지."

군국에는 이런 농담이 있다. 군국의 공장에는 오직 톱니바퀴뿐이라고.

당연히 공장에는 노동자가 필요하다. 아무리 정교한 톱니바퀴라도 유연성은 갖고 있지 않다. 온갖 상황에 적합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라도 어떤 곳에는 인간을 쓰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런데 왜 톱니바퀴뿐이냐고?

그야, 인간이 톱니바퀴의 일부가 되어 일하기 때문이지.

톱니바퀴가 삐걱거리고 조립되다 만 자동마차가 벨트를 따라 흘러오는 좁은 공간, 기지개를 피다간 팔다리가 잘려나갈지도 모르는 톱니바퀴 틈으로 들어간다. 인간의 심박은 제각각이나 공장의 심박은 만인에게 일정하다. 똑딱똑딱, 사방이 똑같은 박자로 맞물리는 어둠 속. 노역자는 주어진 자리에 눕거나 쭈그려 앉아서, 톱니바퀴를 따라 전달되는 부품을 제 시간에 끼워넣어야 했다.

놓치면 벌점이다. 모두가 똑같은 박자에 맞추어 일하기에, 한 명의 사소한 실수도 전체의 지연으로 이어진다. 감독관이 노성을 지르며 다그치고, 다음 차례의 노역자가 차게 식은 눈으로 보는 가운데 실수를 정정해야 한다.

이토록 가혹한 일이기에, 군국은 죄를 지은 죄인만 이너서클 노역장으로 보내며.

이토록 가혹하게 일을 시키기에, 이너서클 노역장은 최고의 생산량을 자랑했다.

살아남은 사람을 모으던 나는 저쪽 구석에서 느껴지는 생각을 읽고는 다가갔다. 설비 한구석에 사람들이 숨어있었다. 나는 발소리를 크게 내며 다가가 그들의 위로 머리를 내밀었다.

"히익!"

"자자! 어서 나오세요! 다 나오랬더니 왜 입을 꾹 다물고 계셔!"

내가 재촉하자 노역자들은 울먹거리면서도 밖으로 나왔다. 군국의 지시에 그대로 따르기를 수년. 그들에겐 반항심의 싹조차 없는 상태였다.

기어나오는 사람들을 한구석으로 몰았다. 이 밤에도 공장을 굴리고 있던 야간조 이백여 명. 나는 잔뜩 겁먹은 채 웅크린 사람들을 향해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자, 다들 아직 이해를 못 하신 모양인데."

홱. 양손을 뻗어 격납고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아직 반출되지 않은 자동마차 200대가 주인을 기다리며 서 있었다.

"여러분 모두에게 자동마차 한 대씩을 그냥 드린다니까요? 아무런 조건 없이! 와, 여러분들이 죽을 때까지 일한 다음 흡혈귀로 되살아나 30년 정도 더 일해야만 온전히 손에 넣을 수 있는 자동마차를 손에 쥘 이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노역자 몇몇은 솔깃해했고 몇몇은 내 저의를 의심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잔뜩 겁을 집어먹고 귀를 닫은 채 내가 떠나기만을 기다렸다.

"우리를 내버려 둬…."

이너서클의 노역자는 대부분 범죄자다.

범죄자라고 다 나쁜 눈으로 보지 않았으면 한다. 엄격한 규칙이 지배하는 군국에서, 범죄자란 모범시민까진 아닌 사람을 총칭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물건을 훔친 사람, 이웃을 때렸던 사람, 사기로 돈을 긁어모은 사람, 과실로 사람을 죽인 사람, 밀수업에 종사한 사람, 군국에 반감을 갖고 레지스탕스에 가입하려다 함정에 빠지고 만 사람.

한때는 법조차 무시할 정도로 용감했으나, 지금은 순순한 노역자가 된 범죄자들이 잔뜩 움츠린 채 수동적으로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 그 모든 것을 벗어던질 기회를 드리고 있어요! 당신들 눈앞에는 자동마차가 있고, 당신들을 억압하고 가두던 병력은 전부 도망쳤어요! 자, 잃은 것은 쇠사슬이고, 얻은 것은 이 세상을 누빌 자유! 자동마차와 함께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아요!"

"…도망치다가 잡히면?"

누군가가 최악의 가정을 중얼거린다. 누가 한번 시작하자, 봇물이 터지듯 노역자들의 중얼거림이 쏟아진다.

"더 안쪽으로 끌려갈 거야. 다, 다 죽을 거라고."

"재료가 되어 사라질지도 몰라…. 아, 안돼. 안쪽은."

"이건 불합리해. 공격한 건 너흰데….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건 너희 때문인데."

이제는 원망을 우리쪽을 향해 쏟아낸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 과거를 미화한다.

우리끼리 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찾아와서는. 너희만 없었어도 내일은 어제와 똑같았을 텐데.

이들은 죄를 지어서 이곳으로 끌려왔다. 반항하다가 더욱 끔찍한 처지에 처해진 이들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다. 자존심을 내려놓고 군국에 복종했다.

범죄자를 계도하는 군국 교육대가 만들어낸 가장 모범적인 성공작. 교육대 갱생 프로젝트의 진정한 성공 사례.

존엄을 짓밟아가며 만들어낸 살아있는 톱니바퀴.

하지만 이들을 여기 남겨두면 안 된다. 히스토리아나 회귀자는 설비만 부수었지만, 사실 이들이야말로 이 공장의 핵심 부품. 이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공장 복구 속도도 빨라지겠지.

자, 진짜 완벽하게 부수기 위해선.

나는 작게 헛기침을 시작하고는, 그들을 설득할 말을 꺼냈다.

"여러분, 그거 아시나요?"

EP.251 마음의 백도어

지금은 아무도 이 노역자들을 묶고 있지 않다. 이들을 묶어놓은 건 군국이 만들어낸 규칙, 혹은 공포다. 달리 말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말이에요. 군국 사령부로 쳐들어가고 있어요. 군국의 자산을 부수는 동시에 군국의 발을 묶어둬야 한단 말이에요?"

나는 천천히 걸으며 격납고에 있는 자동마차 중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을 톡 두들겼다.

"여러분들이 자동마차를 갖고 달아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여러분들이 피땀 흘려 만든 이 귀중한 자동마차를 하나하나 부숴야 하거든요?"

당황스러운 감정이 퍼져나갔다. 너희가 자동마차를 부수는 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는 태도다. 긍정적인 반응이다.

마음의 빗장은 하나가 아니다. 오히려 성문이 수십 개 달린 철옹성에 가깝다. 한쪽 문을 꼭꼭 닫아둔다고 해도 뒷문을 슬쩍 열면 전부 빠져나갈 수 있다.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건, 이곳은 빗장이 달려있지 않은 문이라는 뜻.

"다르게 말하죠. 자동마차를 보전하고 싶다면 냉큼 이것을 타고 안전한 곳까지 옮기세요.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딱, 내가 손가락을 튀긴 순간, 자동마차의 차체가 형편없이 찌그러졌다.

"꺄아아악!"

누군가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그만큼 끔찍한 꼴이었다. 자동마차를 두른 어둠이 뱀처럼 차체를 감싸더니, 점차 조여들어가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박았다.

부러진 톱니바퀴가 내장처럼 흩뿌려진다. 연금강철이 주괴였던 시절로 회귀하는 듯했다.

"제가 일일이 부수어야 한단 말이에요. 저도 여러분과 같은 노동자라, 가능하면 일을 줄이고 싶은데."

당연히 내가 한 게 아니다. 티르의 힘을 잠깐 빌렸을 뿐이다. 그러나 저들의 눈에는 내가 이 어둠을 다루는 것처럼 보였겠지.

"너, 너무해요! 공들여 만든 자동마차가!"

"여기 혹시, 이 모든 걸 일일이 부수어야 하는 제 노고를 덜어주실 착한 분들이 계실까요?"

내가 손을 쥐고 흔들자, 그것을 본 티르가 어둠으로 똑같은 행위를 따라했다. 자동마차가 앞뒤로 흔들리며 한층 격렬하게 부품을 토해냈다.

"아니면, 제가 부수고 여러분이 나은 부품을 그러모아 새로 만드는, 한쪽에서는 부수고 한쪽에서는 고치는 비합리적인 노동을 할까요?"

이들은 탈출할 수 없다. 군국이 마음을 묶었기 때문이다. 멋대로 근무지를 이탈하면 더 끔찍한 형벌을 가하겠다며, 그들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심어넣었다.

그러니까 내가 만드는 백도어는 근무지 이탈이 아니다.

업무를 줄여주는 거지.

"자! 우리, 노동조합을 만들죠! 서로서로 일하기 싫은 노역자잖아요! 저는 안 부수고, 여러분은 안 만들기로 해서 타협을 보죠! 자동마차를 안전한 곳까지 옮기세요! 저희는 북쪽으로 오면서 어지간한 기지는 전부 초토화했으니, 그 자리는 비어 있겠네요! 거기 잠깐 주차해두면 되겠어요!"

머리에 보자기를 쓴 누군가가 가장 먼저 벌떡 일어서서 자동마차를 향해 달려나갔다. 덜컹, 그녀가 가장 먼저 자동마차에 올라타고 우레바퀴를 돌리자, 철컥거리며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자동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수게 둘 순 없지."

"그래. 만일 다시 만들어야 한다면. 차라리…."

처음 한 번이 어렵지, 한 번 봇물이 터지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흐른다. 서로를 바라보던 노역자들은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내가 마련한 백도어를 통해 마음을 내보냈다.

마음을 따라 몸도 밖으로 나갔다. 그들을 옭아맨 사슬은 어디까지나 마음만 묶어두었을 뿐이기에.

"어? 뭐야?"

덜컹덜컹.

노역자들은 수많은 자동마차가 어둠 속으로 달아나는 광경은 꽤 장관이었다.

나라가 휘청일 정도로 크지는 않지만, 군국의 입장에서도 무시하기는 힘든 손해일 것이다. 그 군국의 세금을 도둑질했다는 사실에 뿌듯함이 차올랐다.

마침 공장을 다 부수고 돌아온 회귀자가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격납고를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기에 있던 자동마차는?"

나는 마지막 남은 한 대를 탕탕 치며 말했다.

"괜찮아요. 여기 마지막 하나는 남겨놨으니까요. 가장 좋은 거로요."

"노역자들은? 공장이 불에 타면 같이 불에 탈 것처럼 굴더니만. 탈출시킨 거야?"

"탈출이라니요! 경을 칠 소리를. 저들은 군국의 자산인 자동마차를 지키기 위한 적극적 대피 행위에 가담했을 뿐이에요."

"뭐야. 같은 말이잖아."

"다르죠."

내가 뒷문을 열어두긴 했지만, 그래도 사슬은 남아있다. 어떤 노역자는 간만에 되찾은 자유를 즐기다가 냉큼 도망치겠지만, 몇몇은 사령부를 벗어나지 않고는 근처에서 알짱거릴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쪽이 더 위험하다. 그들 자신에게도, 군국에게도.

"군국 입장에서는, 아예 도망치는 노역자보다는 괜히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녀석이 더 싫겠죠. 저들에게 도망칠 마음이 희박했던 탓에 군국에 더 큰 혼란을 일으킬 거예요!"

지금까지 자동마차를 타고 온 우리 모습이 뇌리에 남아있겠지. 자동마차 하나하나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내용물을 확인하려고 다 잡아볼 것이다.

이른바 군국을 상대로 한 알러지 작전.

'이 많은 사람을 미끼로 썼다는 말이잖아? 멋대로 도망친 노역자들이 나중에 어떻게 될지 알고….'

그것까지 내가 신경 써줘야 해? 그건 저쪽 사정이지.

결정한 건 저들이고 괴롭히는 건 군국이다. 양자 관계에 내가 왜 끼어들어서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회귀자가 떠나는 자동마차의 뒤를 보며 중얼거렸다.

"너… 꽤 가차없구나."

"아니. 군국의 전력을 깎아먹고 싶다면서요. 일을 성공적으로 해냈는데 왜 나무라는 거예요?"

"딱히 나무라는 건 아니야."

"나무라는 게 아니라 칭찬을 해야죠! 일을 제대로 했다면 '잘했다.'나, '고맙다.' 라고 말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사교성이 안 좋은 사람은 입에 발린 말을 하면 알러지라도 생기는 줄 안다. 회귀자가 딱 그쪽이었다. 칭찬을 비롯한 사교 활동을 기어코 피하려는 타입.

"뭘 새삼스럽게…."

"와, 사람 써먹는 게 군국이랑 다를 게 없네."

내가 투덜거리듯 한마디 흘리자 회귀자가 발끈했다.

"그건 아니지! 내가 아무리 그래도 군국만큼은 아니잖아! 칭찬, 해주면 될 거 아니야!"

"자, 어디 해봐요. 엎드려 받는 절인 만큼 더욱 조심스럽게 해야 할 거예요."

"치잇…."

씩씩거리던 회귀자는 나를 흘겨보며 툭 내뱉었다.

"제법이야. 잘했어."

"부족해요."

"…솔직하게 잘했다고 했잖아. 뭐가 더 필요해?"

"오, 방금 건 좀 진정성이 있어서 좋았어요."

"아니, 이건 너를 칭찬하려고 한 말이…. 에잇, 됐어. 그래, 너 잘났다."

회귀자가 핀잔을 줄 무렵이었다.

첫 번째 자동마차에서 누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보자기로 머리카락을 감싸고 있던 공주였다.

"저, 휴이 님? 연극은 다 끝나셨나요?"

아차. 아직 끝났다는 이야기를 안 했구나. 눈치껏 알아챌 줄 알았는데, 계속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건가.

나는 공주에게 ok 사인을 보냈다.

"네! 공주님, 좋은 연기였습니다! 수고하셨어요!"

"후.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에요. 갑자기 연기를 하라시길래 잔뜩 긴장했는데."

공주는 땀 난 손바닥을 몇 번 쥐었다 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톱니바퀴에 머리카락이 끼어들어가는 일을 막기 위해 노역자는 머리를 짧게 깎거나 보자기로 감싸곤 한다.

덕분에 공주는 그 독특한 연분홍빛 머리카락을 드러내지 않고 사람들 틈에 끼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집단의 평화를 이루는 그녀의 능력을 이용해, 가장 먼저 총대를 메고 자동마차로 달려가게끔 했다.

아무렴. 역시 바람잡이 없으면 장사가 안 되지. 원래 호구가 잡힌 판도 까는 것부터가 일인데.

"티르도 고생하셨어요! 역시 명불허전, 압도적인 연출이었네요! 올해 최고의 그랜드 매지션 걸이 될지도!"

[이쯤이야. 연극을 보는 이는 언제나 즐거운 법이니.]

어둠으로 몸을 가리고 있던 티르가 담담하게 웃어 보였다. 회귀자가 진상을 알아채고 중얼거렸다.

"뭐야. 선동이었잖아. 너야말로 군국이랑 뭐가 달라?"

"다르죠! 저는 최소한 말을 안듣는다고 즉결처분하거나 안쪽 '연구소'로 보내지는 않는다고요! 제가 선물한 건 자유에요!"

어떻게 그런 폭언을. 나를 군국 따위와 같게 보다니!

방방 뛰는 나를 두고, 회귀자는 자동마차의 문을 열었다. 안쪽에서 공주가 그녀를 반겼다.

"아, 공! 고생 많으셨어요!"

"공주도. 많이 시달렸을 텐데, 열심히 해주었어."

너 왜 공주한테만 자연스레 칭찬이 나가는 건데? 차별하는 거냐?

"아, 아닛, 아니에요…! 이런 것밖에 도움이 안 돼서…!"

"아니. 앞으로도 더 도움이 될 거야."

'군국이 멸망한 뒤 다시 세워진 신왕국이 그 난장판 속에서도 명맥을 지킨 건 다 공주 능력 덕분이었으니까. 흥, 나조차도… 환멸을 느낄지언정 적의를 갖진 못했지. 그 힘이라면, 분명 더 잘 쓸 수 있어.'

확고한 의지를 담은 발언에, 심장이 쿵 떨어진 듯한 공주가 양손으로 보자기를 꼭 쥐면서 시선을 피했다.

속내가 저러면 칭찬이 아주 시기적절하게 들어가는구나. 공주, 속지 마라. 그건 정말 가시밭길이다.

이쪽은 미리 봐 둔 자동마차에 짐을 다 실어둔 상태였다. 히스토리아와 회귀자가 탄 것으로 준비는 끝났다.

지금껏 우리 움직임은 군국에게 전부 포착되고 있었다. 하지만 밤이 도래하고 어둠을 사방에 깔린 지금, 이 한나절 동안은 우리가 군국보다 빠르다.

히스토리아가 노린 게 바로 그것이다. 기동전.

군국 출신 장성 아니랄까 봐, 작전도 군국 같네.

"리아. 다음 목적지는 어디야?"

마지막으로 올라탄 히스토리아가 지시를 내렸다.

"연금강 제련소. 당연한 수순이지. 연금강 공급을 망가뜨리면 중장기 보급계획에 차질이 생길 테니."

"오, 괜찮은 작전인데. 장성은 장성이라는 건가. 거리와 방향은 어떻게 돼?"

"멀지 않아. 북서쪽으로 20분 거리. 애초에, 자동마차에 쓸 자재를 빠르게 공급하기 위해 서로 가까이 지었으니."

연금강 제련소, 좋지. 연금재료가 잔뜩 있는 거기라면 내가 쓴 카드를 조금 보충할 수도 있겠다.

와중에 나쁜 기억을 상기한 회귀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연금강…."

연금강 제련소. 광물과 가연금물질을 연금하여 강철로 정련하는, 군국의 살을 빚어내는 곳. 연금강으로 다른 물건을 생산하는 공장은 많지만 연금강을 생산해내는 건 이곳이 유일하다.

연금강은 군국의 살. 따라서, 이곳을 망가뜨리면 군국은 연금강의 재고가 언제 동날지 몰라 공포에 떨어야 한다. 무기부터 건축자재, 패킷까지. 군국에 존재하는 모든 자원에 시한부 선고가 내려지는 것이다.

하지만.

회귀자는 섣불리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그곳이 어떤 장소인지는 알고 있었기에.

"그곳은…. 사람을 때워 철을 녹이는…."

히스토리아가 회귀자의 대답을 긍정했다.

"당장 죽여도 되는 흉악범죄자만 가득 모여있는 곳이지."

연금강을 만들기 위해서는 연금술이 필요하다. 연금술을 쓰기 위해서는 구조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마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가장 만들기 쉬운 마력원은 살아있는 인간이다.

즉.

연금강 제련소는, 사람을 잔뜩 쥐어짜서 연금강을 만들어내는 공장.

자동마차 조립공장의 노역자들이 죽어도 가기 싫어했던 '안쪽'의 일부이다.

"연금강 제련소요?"

공주가 반응했다. 그녀는 연금강 제련소가 무엇인지 알지는 못했지만, 그곳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거기에요! 거기에 저희 협력자가 숨어있어요! 거기서 저희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기회에요! 드디어, 저희도 도움이 될까 봐요…!'

공주가 천진난만하게 말했지만, 나를 비롯해 그곳의 실체를 아는 몇몇은 선뜻 잘됐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공주의 태도가 너무 밝은 탓에 차마 지적하지 못한 것이다.

"숨어있다고? 5레벨, 갱생 불가능한 범죄를 저질러 체포된 이들만 가는 가장 안쪽 노역장에?"

그러나 공주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히스토리아는 한층 냉소적인 태도로 쏘아붙였다. 뜻밖의 말에 공주가 토끼 같은 눈을 하고는 되물었다.

"네?"

"고양이집에 잠입한 생쥐 꼴이네. 숨은 게 아니라, 잡힌 거겠지."

EP.252 강철의 나라와 얼굴 없는 인간들 - 1

다행스럽게도, 협력자 이야기의 결말은 숨어든 협력자가 사실 잡혀서 착취당하고 있다는 해학적인 종류가 아니었다. 공주는 손발을 내저으며 그 협력자는 진짜로 레지스탕스의 임무를 받고 잠입한 것이며, 군국에 대한 복수심이 투철하고, 심지어 자기도 직접 얼굴을 본 적도 있다고 장담했다.

못 미덥긴 마찬가지지만 어쨌건 목적지는 정해졌다.

연금강 제련소. 강철과 인간의 비명이 동시에 들리는 곳.

우리는 그곳에 도착했다.

깡-. 깡-.

마르고 달궈진 소리가 울려 퍼진다. 녹은 연금강을 주괴로 정련하는 소리다.

군국에는 통신병이 있으니, 우리의 공격은 군국 전역에 알려졌을 것이다. 다른 곳은 나름 비상이랍시고 병력을 빼내거나 문을 잠갔지만, 이곳만은 외딴 섬 같았다. 고요하다는 게 아니라, 바깥이 어떻게 되든 무관계하며 무관심하다는 점에서.

공장 입구에 미등록 자동마차가 도착했음에도 경비병은커녕 노역자조차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약간 서운할 정도다. 사방팔방에서 들려오는 강철의 비명소리만이 이곳이 어디인지 주장할 뿐이었다.

"…칫. 이곳은 언제 와도 을씨년스럽네. 그냥 지나가는 편이 좋을 텐데."

회귀자가 질린 기색으로 중얼거리다가 문앞에서 우왕좌왕하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명백히 수상한 그 그림자는 문 앞에서 서성이다가 우리의 모습을 보고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검을 치켜든 회귀자는, 적의나 경계심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상대의 모습에 다시 검을 내렸다.

"저 앞에 누가 오는데? 적은 아닌 것 같아. 레지스탕스 쪽 협력자인가?"

그 대답은 시아티가 대신했다.

시아티가 드물게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군국을 망가뜨리는 것만 신경 쓰던 그녀에게 남은 몇 안 되는 존재인 모양이다. 그녀는 성치 않은 몸으로도 반가움을 표현하며 그 사내를 향해 다가갔다.

둘이 마주치기 세 걸음 전. 혹시나 하는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그리고 예전의 그날을 잊지 않기 위해. 시아티는 미리 나누어두었던 암호를 확인했다.

"우리는 어디에 있지?"

사내도 똑같이 걸음을 멈추고는 그에 화답했다.

"여전히, 그 강바닥 아래."

"무사했네, 캐러팔드."

"너도, 시아티."

서로를 확신한 둘은 짧게 어깨를 맞대 인사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 접촉에는 죽음을 함께 한 자만이 가진 친애가 느껴졌다.

최소한, 시아티에 한해 그 감정은 매우 확고했다.

짧은 인사 뒤, 캐러팔드라 불린 사내는 곧이어 시아티의 뒤를 따라온 이들의 면면을 보았다.

"레지스탕스…가 아닌 쪽 사람도 많이 보이는군. 우리 협력자인가?"

"달라. 우리가 협력자 쪽."

"뭐?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잠깐. 저들은?"

나와 히스토리아의 얼굴을 본 사내가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모범적일 정도로 말끔한 인상의 사내였다. 좋게 말하면 준수하고, 나쁘게 말하면 특색이 없다고 할까. 오늘 자고 내일 일어나면 얼굴이 떠오르지 않을 법한, 인상이 흐릿한 남자가 백지 같은 얼굴에 표정을 그렸다.

남자는, 시아티와 처음부터 아는 사이였던 것처럼 인사를 끝마치고는, 눈을 굴리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히스토리아? 휴이? 진짜, 너희야? 둘이 어떻게 여기까지…!"

놀라운 일은 연이어 일어났다.

뜻밖의 만남에 꽤나 반가워하는 그의 태도와는 달리, 히스토리아는 마뜩잖은 얼굴을 보였다.

'강 밑바닥에서 간신히 살려놨더니, 이런 사지에 숨어들어왔을 줄은. 다들 죽고 싶어 안달이 난 거야? 왜 자꾸….'

히스토리아에게 살리지 못한 이들은 회한이며, 살린 이들은 그녀가 간신히 이룩한 성과다. 그러니 성과가 회한이 되기 위해 날뛰는 모습이 마뜩잖을 수밖에 없다.

입가를 일그러뜨린 히스토리아는 시선을 피하며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 사내는 어설프게 내민 손을 회수하며 히스토리아를 노려보았다.

"진짜 변한 게 없군. 히스토리아는 아직도 우리를 존재하지 않는 척, 보지 못한 척한단 말이지. 잘났군, 정말."

…마치 히스토리아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듯, 그는 투덜거렸다. 나는 말도 안하고 떠난 히스토리아 대신 그녀를 변호했다.

"보지 못한 척이 아니라, 봐주고 있는 거지. 리아 입장에서 레지스탕스는 잡아야 할 대상이니까."

"그렇더라도! 저 애매한 태도는 뭐야! 군국 편인지, 우리 편인지 확실하게 해야 할 거 아니야!"

사내가 씩씩거렸다.

'캐러팔드'다운, 참으로 적절한 태도다. 유치한 이분법을 갖고 상대를 구분하는 편협함. 상대의 호의에 기대면서도 그 이상을 바라는 찌질함까지 돋보인다.

누가 봐도 악에 가득 찬 소시민으로 보이는 그런 태도를 취한 그는, 이내 나를 향해 호의적인 미소를 보여왔다.

"그나저나 휴이, 정말 오랜만이야. 네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든든한데."

그리고 나를 아는 사람처럼, 우호적인 미소를 지으며 인사한다. 혹여나 내가 그를 몰라볼까 봐 친절하게 자기소개까지 덧붙여가며.

"아, 나 기억하지? 나야, 나. 캐러팔드!"

'나는 캐러팔드. 하멜른의 마지막 생존자. 그리고 레지스탕스이며, 이들을 안내할 안내자.'

물론 나는 캐러팔드를 기억한다.

그는 하멜른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아이들 중 하나였다. 마도장교 지망생으로, 야망도 있고 재능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란카르트라는 괴물을 동기로 두고 있었다.

너무 강한 빛은 눈을 멀게 한다. 다른 방법을 추구했다면 장교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좁은 시야를 가진 그는 란카르트의 거대한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낙제했다.

그래. 나는 그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너는 말도 없이 사라졌지. 첸토는 실망했고 시아티는 그에 분개했지만. 나만은 알았어. 네가 군국과 같이 지낼 수 없다는 것을. 언젠가 너도 우리와 함께할 날이 올 거라고 확신했지. 마치 우리가 같이 니콜라스를 무찔렀던 그때처럼!"

'역할에 몰입하라. 배역에 충실하라. 그리고 {나}를 속여넘겨라. 나는 캐러팔드다.'

…자기를 캐러팔드라고 믿는 정신병자는 모른다고.

누구냐, 너는?

자기가 자기라고 강하게 인식하는 사람은 삶이 지루해진 철학자 말고는 없다. 심지어 이 남자는 얼굴조차도 캐러팔드와 전혀 닮지 않았다.

그는 캐러팔드가 아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를 캐러팔드라고 인식한다.

그와 가장 가까웠을 시아티도, 그를 강바닥 밑에서 구했던 히스토리아도.

"캐러팔드. 이럴 때가 아니에요."

"엇? 공주님께서 친히 이곳에…?! 시아티. 어떻게 된."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 일단 진정하고 듣기나 해. 캐러팔드."

"진정하게 생겼어? 그리고 저들은 누군데?"

인지부조화가 찾아온다. 그를 아는 시아티와 히스토리아, 공주는 분명 그를 캐러팔드라고 인식하고 있다. 지금도 저 특색없는 얼굴에 자꾸만 그들의 시선이 덧씌워진다.

그러나 나는 안다. 헷갈릴 수조차도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자기를 캐러팔드라고 주장하는 정신병자는… 역설적으로, 자기가 캐러팔드가 아님을 강하게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호오. 이거 봐라. 표지를 바꿔치기를 해버렸네.

솜씨가 수준급이다. 기회가 생기자 냉큼 자기를 소개하는 것부터, 자연스럽게 같이 겪었던 일을 늘어놓고는 자기를 캐러팔드로 인식시키는 것. 한두 해 솜씨가 아니다.

친밀감을 만들어내기. 내가 사기를 칠 때 자주 쓰곤 했지.

다른 게 있다면, 나는 기껏해야 흉내 낼 뿐이지만 그는 '변신'까지 할 수 있다는 점.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그를 캐러팔드라고 보고, 느끼고, 행동한다.

이건… 신비에 가까운 무언가.

정말로 사기적인 능력이다. 저 능력을 나에게 줬다면 사기를 칠 때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 텐데. 이런 부분에서 불공평함을 느낀다.

그래도 다행이야. 나에게 독심술이 있어서.

만일 내가 간파하지 못했다면, 캐러팔드를 흉내 내는 무언가에 이끌려서 함정까지 갔겠지.

노래로 뱃사람을 유혹하는 전설 속 세이렌처럼, 보물로 여행자를 낚는다고 하는 동화 속 미믹처럼. 친구의 얼굴을 하고 찾아온 이 존재를 따라갔을 게 분명하다.

자, 어떻게 할까.

"좋아. 정했다."

"응?"

결정했다. 마음을 다스린 나는, 독심술로 마음을 읽으며 거울처럼 그를 따라했다.

그는 캐러팔드다.

그는 캐러팔드다.

그는 캐러팔드를 덮어 쓴 지크흐룬드.

아니. 거기까지 읽진 말자. 내가 알아챘다는 게 드러나니까.

그는 지크흐룬드가 아니라… 군국의 그림자이자, 공공안전부의 수장.

별이 빛나기 위해 필요한 어둠. 존재하나 드러나지 않는 흑질(黑質). 야경꾼… 영궤 지크흐룬드가 아니라.

하멜른에서 살아남아 레지스탕스가 되어, 오랜 잠입 생활을 견딘 끝에 결실을 거둔 게 기쁜.

내 친구였던 캐러팔드다.

"…시아티가 있을 때부터 대충 예상을 했지만, 정말 너였네, 캐러팔드.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을 많이 봐."

반갑지 않다.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친구와 오랜만에 재회한 사람처럼 밝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캐러팔드'를 향해 한껏 잘난 듯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군국을 부수는 명예는 내가 가장 먼저 차지하겠어."

네가 생각하는 내 모습. 대답하리라 기대하는 그대로 흉내 내주지.

사람이 가장 방심할 때는 언제인가.

푹 자고 있을 때?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감탄하고 있을 때?

아니.

사냥감의 숨통을 물어 뜯기 직전. 모든 긴장이 풀리며 필연적인 성취감에 젖을 때다.

속고 속이는 사냥의 밤이 시작됐다.

EP.253 강철의 나라와 얼굴 없는 인간들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