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240-250

#240화

카가가각-!

동시에 검날이 역장을 더 깊이 가르며 파고들었다. 그사이에도 두 수인 전사의 포효가 터져 나오고, 두 기사가 맞부딪치며 만들어 낸 충돌음이 요란하게 번졌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구나, 용살자…!"

이안의 눈에 회색 마력이 일렁인 건, 공작이 씹어 뱉은 순간이었다.

공작이 흑요석 반지가 끼워진 오른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그보다, 이안이 주문을 완성하는 게 조금 더 빨랐다.

쩌엉-!

역장 중간에 박혀 있던 검날에서 무형의 폭발이 터져 나왔다. 역장이 산산 조각나고, 폭발의 끝부분에 휘말린 공작이 옆으로 포탄처럼 튕겨 나갔다.

"각하-!"

필립, 샬롯과 각각 뒤엉켜 있던 호위 기사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발로이가 벽면에 처박히는 공작을 향해 달려갔다.

콰직-!

하지만 채 세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방패를 앞세운 필립에 치이듯 떠밀렸다.

필립이 멈추지 않고 놈을 밀어붙였다. 이안과 공작 사이를 가로막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

팔메르가 울부짖으며 이안의 뒤로 달려든 건 바로 그때였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한 자루의 송곳니 검만이 남은 채였다.

공작에게 달려가려던 이안이 멈칫했다. 하지만 팔메르는 그를 끝까지 덮치지 못했다. 뒤에서 뻗어 나온 샬롯의 양손이 놈의 한쪽 다리를 와락 움켜쥐었기 때문이었다.

"캬오오오오-!"

포효하며, 샬롯이 팔메르를 반대쪽으로 내리치듯 휘두르며 집어 던졌다. 빨려 나가듯 멀어진 팔메르가 그대로 바닥에 처박히고는 튕겨 나갔다.

콰르르르-

벽면을 몸으로 무너뜨린 팔메르가 그 너머까지 멀어졌다. 다시 한번 울부짖으며, 샬롯이 놈을 따라 달려나갔다.

이안은 이미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타타탓-!

샬롯이 팔메르를 패대기친 순간, 그대로 피를 흘리며 주저앉은 공작에게 달려간 것이다.

공작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주춤대고 있었다.

"...!"

이안의 기척을 느낀 듯 그가 고개를 돌렸다. 공작의 얼굴은 처참했다. 얼굴 한쪽이 찢겨 나간 것처럼 훤히 속살을 드러냈고, 왼쪽 눈알도 터져 버렸다. 목덜미와 어깨에도 피가 콸콸 흘렀다.

그 와중에도 놀란 표정을 지은 그가, 또다시 오른손을 내뻗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안이 더 빨랐다. 달려가던 그대로 몸을 비틀며 검을 휘두른 것이다.

스걱-!

새하얀 궤적이 공작의 오른 손목을 비스듬하게 잘랐다. 종이를 자르듯 깔끔한 궤적이었다.

"...!"

한 박자 늦게 눈을 치켜뜨는 공작의 얼굴로, 이안이 왼손을 내뻗었다.

터억-

이안의 손아귀가 공작의 안면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공작의 하나 남은 푸른 눈이 커지는 가운데.

"널 죽이는 건 내가 아니야."

내뱉은 이안이, 그대로 왼팔을 떨치듯 옆으로 휘둘렀다. 공작은 그의 손길에 목각 인형처럼 맥없이 딸려 나가 내던져졌다.

콰장창-!

공작의 몸이 식탁을 으스러뜨리고는 튕겨 올랐다.

"경!"

동시에 이안이 소리쳤다. 그게 누구를 뜻하는 것인지, 튕겨 오르는 공작은 곧바로 깨달았다.

솨아아….

황금빛을 머금고 부유하는 로브 아래. 피처럼 붉고 끈적한 신성력을 가득 머금은 전신 판금 갑옷이 그에게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틀림없는 신성력이었지만, 성스럽기보다는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콰-과-과-

공작의 귀로 느릿느릿한 파공음이 파고들었다. 그게 저 붉은 성기사가 내리치는 양손 검이 만들어내는 소리라는 걸, 공작은 검날이 보이고서야 깨달았다.

은으로 도금한 것 같던 기다란 검날은 지금,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끈적한 붉은 궤적이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공작을 향해 가까워졌다.

하지만 공작이 할 수 있는 저항은 없었다. 그는 여전히 튕겨 오르는 중이었고, 가까워지는 저 칼날보다 자신의 몸이 더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공작은 자신의 육체가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앞뒀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모든 것이 이토록 느리고 선명하게 인식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콰드드득-

붉은 검날이 공작을 갈랐다.

콰직-!

공작을 통과한 검날이 부서진 식탁을 다시 한번 쪼개며 박혔다. 반으로 갈라진 공작의 몸이 피와 내장을 흩뿌리며 허물어졌다.

"...."

안면 가리개 너머, 메브의 붉은 안광이 가라앉았다. 그녀가 검을 뽑아 들며 자세를 다잡는 사이, 이안도 반토막 난 공작의 앞으로 다가섰다.

"전사로 죽을 수 있음에 감사해라! 노예야!"

"닥쳐라, 하수인아! 왜지? 공허의 야성을 섬기는 것만으로도 모자랐나?"

팔메르와 샬롯의 고함과 굉음이 번졌다. 대체 어디까지 가버린 건지, 소리가 멀었다. 이어지는 하인들의 외침과 비명을 한 귀로 흘리며, 이안은 공작의 시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뭐야, 정말 죽은 거야…?"

세검을 움켜쥔 테사이아가 읊조렸다. 다소 허탈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안의 미간이 슬며시 좁아졌다.

"죽은 건 맞긴 한데… 끝난 건 아닌 것 같군."

퀘스트 완료 창이 안 떴거든.

그가 속으로 덧붙이는 사이, 뒤에서 억눌린 웃음이 번졌다.

필립에 떠밀려 벽에 붙은 발로이가, 필립의 왼팔을 밀쳐내며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안은 놈을 벽에 밀어붙인 채로 낑낑대는 필립을 고개를 갸웃하며 바라보았다.

'아니, 저 새낀 저걸 다 걸치고 왜 저러고 있담.'

마법 무구들을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긴. 생각해 보면, 성물 반지의 힘도 겨우 익숙하게 다루던 녀석이었다. 대여섯 개나 되는 마법 무구의 힘을 능숙하게 휘둘렀다면 오히려 그게 더 놀라운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저 갑옷을 걸친 지 이제 고작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뿐이었고, 심지어 마법 무구를 활용하는 연습은 아예 한 적도 없지 않았던가.

스킬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사용할 수 있는 건, 한때 게임 캐릭터였던 이안 뿐일 터였다.

돼지 목의 진주 목걸이구만.

생각할 찰나, 발로이의 안면 가리개 너머에서 씹어 뱉는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차라리 감사해야겠군…! 덕분에 돌이킬 수 없게 되었으니! 나는 언제나 주인님이, 하찮은 인간의 껍질 따윈-"

빠각-!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은 강철 방패의 모서리가 발로이의 투구에 틀어박혔다. 발로이의 팔을 뿌리친 필립이 힘껏 후려친 것이다. 발로이의 목소리가 끊어지는 가운데, 필립의 안광이 샛노랗게 번쩍였다.

빠각! 콰직! 콰드득-!

방패가 연달아 벨로이의 투구를 후려쳤다. 발로이의 뒤통수가 벽에 박히듯 연신 처박히고, 안면 가리개가 형편없이 구겨졌다.

저 안에 든 머리도 무사하지는 못할 게 분명했다.

'확실히, 방패도 무기네.'

두터운 돌벽에 균열이 번질 만큼 연달아 후려친 필립이, 비로소 숨을 토해내며 멈췄다.

벽에 반쯤 박혀 있던 발로이의 투구가 축 처졌다. 구겨진 안면가리개 사이로 붉은 피가 주르륵 쏟아졌다. 놈의 견갑과 각반에 번쩍이던 마석이 빛을 잃는 가운데, 필립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철그렁-

발로이가 맥없이 허물어졌다. 놈을 내려다보는 필립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고요했다. 저 멀리서 샬롯과 팔메르가 만들어내는 소란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고개를 돌리며 내뱉는 필립을 바라보던 이안이, 불현듯 눈을 치켜떴다.

슈화아악-!

사방에 일렁이던 푸른 주문 회로가 삽시에 자줏빛으로 물든 것이다. 동시에 천장의 주문 회로들이 눈부시게 명멸했다.

"다들 물러나!"

콰과과과-

이안이 소리친 것과 자주색 충격파가 쏟아져 내린 건 거의 동시였다. 펄럭이던 로브가 발작적으로 육각 역장을 펼치는 가운데, 충격파가 이안을 중심으로 장내를 휩쓸었다.

"꺄악?!"

짧은 비명을 토한 테사이아가 뒤로 튕겨 나가 벽에 처박혔다. 얇은 내벽이 무너지면서 그녀의 위를 뒤덮었다. 메브도 튕겨 나가 바닥을 구르고, 필립은 발로이의 피가 묻은 벽면에 정면으로 처박혔다.

콰과과과-

충격파에 직격당한 이안은 바닥에 납작하게 짓눌린 상태였다. 마력의 응집을 느끼자마자 자세를 낮추며 역장을 펼치지 않았다면, 눈과 고막이 전부 터져 버렸을 터였다.

역장은 버티지 못하고 깨졌지만, 어쨌든 최소한의 보호막 역할은 충실히 소화했다.

"...."

곧 폭발이 잦아들었다. 바닥에 대자로 엎어져 있던 이안이 간신히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가 휘청대며 고개를 들었다.

기침에 피가 섞여 나오고 코피가 주르륵 쏟아졌다. 현기증과 귀울림으로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이안은 장내를 눈에 담았다.

쉬아아악-

사방에 흩어져 있던 공작의 살점과 내장 조각들이 무너진 벽면 너머로 빨려들듯 날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택 곳곳에서 방금 일어난 것과 같은 폭음과 뭔가 무너지는 소리, 사람들의 비명이 메아리쳤다. 아마 시종과 하인들이 내지르는 비명이리라.

충격의 여파로 감각이 둔한 와중에도, 저 멀리서 심상치 않게 응축되는 공허의 마력이 느껴졌다.

사방에 자욱한 오염된 마력을 뚫을 정도로 선명한 존재감.

이안이 입에 고인 피를 탁 뱉으며 몸을 일으키는 사이.

-마법사이기까지 했다니…. 이것도 전부 그, 자신을 길잡이라 칭하는 오만한 자의 작품인가? 아니면, 네 야망의 결과물일 뿐인가. 용살자여….

쇳가루를 삼킨 듯한 목소리가 대기를 웅웅 울리며 번졌다. 저택 전체가 울림통이 된 것 같은 소리였다.

-하긴… 어느 쪽이든 달라질 건 없겠지. 너 역시, 이 그릇된 세상이 만들어낸 또 다른 괴물에 불과할 테니.

거 새끼, 시끄러워졌네.

이안이 혀를 차며 일어섰다.

마찬가지로 비틀대며 일어서는 메브와 엉덩방아를 찧은 채 고개를 터는 필립을 눈에 담은 그가 곧바로 몸을 돌렸다.

벽면의 잔해 사이로 테사이아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녀는 반쯤 엎어진 채 돌과 돌가루에 뒤덮인 상태였다.

이안이 걸음을 옮기는 사이, 뒤에서 필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대체 이게 뭡니까? 왜 공작이 아직 살아있죠…?"

"영혼을 빼 둔 거겠지."

잔해를 파헤치고 테사이아의 어깨를 쥔 이안이 내뱉었다.

아마도 공작은, 공허의 표식에 담긴 힘을 이용해 영혼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을 터였다.

불사를 추구하던 주문쟁이라면 충분히 택할 법한 선택이었다.

"너무 아파… 찝찝하고…."

먼지투성이가 된 테사이아가 인상을 잔뜩 구긴 채 일어섰다. 입술이 다 터지고 코피가 흐르긴 했지만, 어쨌거나 크게 다치진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왜 빛을 등졌는지 아느냐? 바로 너희들의 그 오만함 때문이다. 너희는 그저 위만을 바라보지. 정작 절망의 구렁텅이에 굴러떨어진 이들을 살필 생각 따윈 하지도 않아.

"…쟤 자꾸, 뭐라는 거야?"

그사이에도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목소리에, 테사이아가 피 섞인 침을 뱉으며 물었다.

눈가의 핏줄이 꿈틀대는 걸 보니 정말 기분이 나쁜 게 분명했다.

"뭐긴. 죽여 달란 거지."

내뱉은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경. 공작을 또다시 벨 준비는 되셨소? 이번엔, 여러 번 베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수십 수백 번이라도 할 수 있다. 기꺼이."

다가오는 메브의 전신에는 어느새 검붉은 신성이 번지고 있었다. 색이 더 진해진 것을 보니, 그녀 역시 어떤 식으로든 피를 흘린 게 분명했다.

저택 내부가 신의 손길이 닿지 않을 만큼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필립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이안이 고개를 돌리는 가운데, 파라락 날아든 로브가 망토처럼 그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필립이 사용하던 정화자의 두건 망토였다.

"두 분 먼저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멈춰선 필립은, 어느새 다시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꾸드득….

쓰러져 있던 발로이가, 상반신을 뒤로 기울인 기괴한 자세로 일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옆으로 기울어진 투구 사이로, 자주색 안광이 스멀스멀 번졌다.

"제 몫이 아직 다 끝나지 않은 것 같아서요."

덧붙인 필립이 허리춤에서 장검을 뽑아 들었다. 뿌득, 어긋나 있던 손가락 하나를 끼워 맞춘 테사이아도 덧붙였다.

"나도 남아야 될 것 같아."

마티아스도 방구석에서 비척대며 일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얼굴에 단검이 박힌 채였고, 폭발에 휩쓸린 여파로 전신이 너덜너덜한 상태였지만. 눈구멍에서 촛불처럼 피어나는 자주색 안광만큼은 더없이 또렷해 보였다.

잔해 사이에서 요정의 세검을 집어 들며, 테사이아가 미소지었다.

"잘됐네. 짜증 났는데."

메브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망설임 없이 잔해 너머로 발을 들였다.

"계속 되살아나도 당황하지 마라. 최대한 빨리 끝낼 테니까."

덧붙인 그가 내달렸다. 메브가 붉은 잔상을 그리며 그의 뒤를 따라 멀어지는 가운데.

타타탓-!

필립과 테사이아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날렸다.

각자의 상대를 향해서.

#241화

이안은 무너진 벽면들의 잔해로 난장판인 복도를 내달렸다. 천장과 바닥에 이어진 주문 회로가 자줏빛으로 일렁이며, 저 너머로 멈추지 않고 마력을 공급하고 있었다.

'끝이 계속 멀어지는 것 같은데.'

착각이 아니었다.

복도는 엿가락처럼 늘어나며 뒤틀리고 있었다. 좌우로 이어진, 곳곳이 무너진 벽면도 마찬가지였다.

-…교단은 백성들을 수탈하는 데 앞장서고, 황실은 그저 더 큰 힘과 황제의 업적에만 목을 매고 있지. 거스르는 자들은, 전부 검은 벽 너머로 보내 버리면서.

아마 저 멀리 응축되고 있는 혼돈력과도 무관하지 않을 터였다. 주문 회로에서 흘러가는 마력도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 끝에는 아마, 새로운 존재로 재탄생 중인 공작이 있으리라.

그러니까 지금 이건, 마족의 권역이 형성되는 과정인 것이다.

공작이 눈을 뜨면 권역도 완성되겠지. 그때부턴 더 이상 신의 손길도 이 안에까지 미치지는 못할 터였다.

공작이 손에 넣은 공허의 표식이 힘을 다할 때까지.

그 전에 표식을 다시 공허와 연결하기만 하면, 영구적인 권역이 완성되리라.

본래는 마족으로 거듭나기 전에 미리 끝냈어야 할 과정이었을 것이다. 이안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선후가 바뀌었을 뿐.

-황실과 교단이, 벽 너머에 아직도 제국의 군단과 선대 황태자가 살아있다 주장하는 건, 정말 그렇게 믿어서가 아니다. 그걸 명분으로 제후와 속국들의 목줄을 쥐기 위해서지. 제국은… 이미 뿌리부터 썩었다.

이 와중에도 공작의 목소리는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아마 지금 놈은 엄청난 해방감과 고양감에 휩싸여 있을 테니까. 혹시 몰라 귀담아듣고 있긴 했지만, 대부분 별로 알고 싶지 않은 헛소리였다.

"...!"

불현듯 눈을 치켜뜬 이안이 미끄러지듯 멈춰선 건 그때였다. 뒤따르던 메브도 어리둥절하게 급정거할 찰나.

콰아앙-!

몇 미터 앞의 한쪽 벽면을 등으로 박살 내면서, 샬롯이 튕겨 나왔다. 그녀의 얼굴은 피범벅이었다.

눈 위부터 턱까지 이어진, 맹수가 할퀸 듯한 상처가 이안의 눈에 박혔다.

한 손으로 샬롯의 목덜미를 움켜쥔 팔메르가 만든 흔적일 터였다.

콰르르르-

이안의 미간이 좁아진 건, 샬롯이 밀리고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샬롯을 밀어붙이며 그의 앞을 가로지르는 팔메르의 전신에 회색 아지랑이가 잔상처럼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이라도 후려칠 것처럼 치켜든 왼 주먹과, 심지어 꼬리 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주 거칠고 흉포한 느낌이 드는 처음 보는 종류의 혼돈력.

회색으로 물든 팔메르의 눈에도 이성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야성만이 가득할 뿐.

"----!"

짐승 같은 포효를 토해내며, 팔메르가 샬롯을 반대쪽 벽면까지 밀어붙였다. 콰르르, 벽이 무너지면서 둘이 그 너머로 사라졌다. 쿵, 땅이 울리는 굉음이 이어졌다.

샬롯이 바닥에 메다 꽂혔으리라 유추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냥 두면 죽겠는데.

곧바로 따라가려던 이안이 멈칫했다.

"...?!"

그의 시선이 절로 자신의 왼팔로 내려갔다. 팔 전체가 인두로 지니는 것처럼 뜨거워졌기 때문이었다.

이안의 왼팔 위로 붉은 신성력이 번지고, 열기가 삽시에 어깨를 타고 솟구쳤다.

'왜, 또. 시발아…!'

"크르륵…."

"끄으… 으으…."

복도 너머에서 끔찍한 형상의 마물들이 기어 나온 건, 이안이 이를 악문 그때였다. 변이된 구울이 둘 셋씩 멋대로 이어 붙은 듯한 몰골인 놈들이었다.

저택의 시종과 하인들뿐만 아니라, 변이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것처럼 바짝 말라붙은 놈들도 있었다.

표식을 손에 넣으며 통제권을 가지게 된 의식의 부산물이거나, 남몰래 준비하던 권속들이리라.

뭐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부분이었다.

'타이밍 오지네.'

중요한 건 저것들이 아주 빠르다는 사실이었으니까. 권속들은 바닥뿐 아니라 천장에도 거꾸로 매달린 채 엄청난 속도로 기어 왔다.

타탓-

메브가 이안의 옆을 비집고 지나친 건 그때였다. 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채고 곧바로 대응에 나선 것이다.

"내가 맡겠다. 너는, 샬롯을."

묵소리만 남긴 채, 그녀가 붉은 궤적을 흩뿌리며 달려갔다.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대답할 상태도 아니었다.

어느새 열기가 목구멍까지 치솟고 있었으니까.

"오- 오오오-!"

시발. 이안은 내심 카르하를 향한 욕설을 덧붙이며 포효했다. 함성에 깃든 신성이 대기를 울렸다.

고통과 열기가 빠른 속도로 잦아들었다. 더는 신성이 밀려들지 않았다.

콰직-! 빠각!

저 앞, 인간 전차처럼 권속들을 베고 후려치는 메브를 눈에 담으며, 이안은 숨을 헐떡였다.

곧 기가 찬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그가 걸음을 옮겼다.

무너진 벽 너머, 잿빛에 휩싸인 팔메르의 등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아래에 깔린 샬롯까지 확인한 순간, 이안의 입매가 조금 더 비틀렸다.

팔메르가 내리친 주먹을 움켜쥐어 막아낸 샬롯의 손에, 붉은 신성력이 묻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르르 떨리는 그녀의 손아귀가 팔메르의 팔을 조금씩 밀어냈다.

'뭐, 저기가 더 재미있어 보인다 이건가.'

그럼, 나는? 씹새야.

생각하면서도, 이안이 검을 고쳐 쥔 순간이었다.

"난 괜찮다…! 이안…!"

샬롯의 억눌린 외침이 터져 나왔다. 팔메르의 주먹을 밀어내며, 그녀가 재빨리 덧붙였다.

"이놈은 내가… 맡겠다! 그러니… 가라…!"

끼어들지 말라 이거지?

실소를 삼킨 이안은 어깨를 까딱이고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어쨌건 투쟁의 축복을 받았으니 일방적으로 밀리지는 않을 터였다.

버프 셔틀이 된 것 같은 묘한 기분은 여전했지만.

-넌 정말이지 놀랍구나, 용살자. 마법사이면서도, 정말 그 야만 신의 대전사라니…. 하지만 소용없을 것이다. 이미 빛의 시대는 막을 내렸으니까. 이것이 의회가 결성된 이유 중 하나임을 아느냐? 의원들은 모두,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를 바라는 자들이지. 각자가 그리는 이상향이 다를 뿐….

시선은 안 느껴지는데 어떻게 보는 거지. 뭐, 박쥐라도 되나.

내심 생각하며, 이안은 멈추지 않고 내달렸다.

어느새 토막나고 으스러진 시체 조각들이 길처럼 이어졌다.

살육을 벌이는 와중에도, 메브의 전진은 그다지 느려지지 않았다. 그녀가 쉴 새 없이 휘두르는 검은, 복수를 이루기 위한 의지를 대변하듯 그 어느 때보다도 붉었다.

메브의 뒷모습이 새빨갛게 보이는 건, 그저 권속들의 피를 뒤집어 써서만은 아니리라.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원탁의 균형은 끝내 무너지리라는 것을. 아마 다들 알았겠지. 그래서 그 길잡이도 너를 이용해 나를 손에 넣으려 한 것일 테고. 사실, 네가 아니라도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혼돈과 어둠의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고… 나는 이 시대가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쉬지 않고 붉은 궤적을 토해내던 메브의 검이 문득 멈췄다.

이안이 지척까지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앞을 가로막는 적들이 모두 사라졌을 뿐이었다.

스물이 넘는 권속을 홀로 모조리 썰어 버린 것이다.

다시 복도의 끝이 보이는 가운데.

"경!"

천장의 주문 회로가 기다렸다는 듯 명멸했다.

솨아아-

이안의 외침과 동시에 재빨리 멈춰선 메브가 자세를 낮췄다.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은 건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활짝 펼쳐지며 솟구친 망토들이, 각각 세 겹의 황금빛 역장을 만들어 냈다.

콰과과과과-

자주색 충격파가 복도를 휩쓸었다. 널브러진 권속의 잔재들이 퍽퍽 터져 나갔다.

하지만 육각형을 그리는 황금빛 역장은 이제 한 겹이 깨져 나갔을 뿐이었다.

그 아래의 이안은, 귀가 조금 먹먹해진 게 전부였다. 아마 메브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저 뒤에서 포효와 굉음이 메아리치는 걸 보니, 샬롯과 팔메르는 충격파에 휩쓸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거, 진짜 물건이네.'

이안은 머리 위로 펄럭이는 로브를 보며 내심 감탄했다.

이 망토에 새겨진 백금의 가호는, 최대 세 개의 역장을 동시에 만들어 낼 수 있는 진언 주문이었다.

지금처럼 중첩시키는 것도, 이어 붙여 범위를 넓히는 것도 가능했다.

물론, 일반적인 마력 역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성능이 뛰어났다.

역장을 펼치는 동안엔 로브를 움직일 수 없고, 최대 사용 횟수에도 제한이 있긴 했지만.

횟수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하나씩 회복됐다.

진언 회로가 스스로 마력을 흡수해 정제하는 게 분명했다. 아공간에 넣어 두면 충전이 되지 않는 게 그 증거였다.

'내구도 회복 옵션이 없는 게 아쉽긴 하지만.'

더럽게 눈에 띄는 외형도 그렇고.

파삭, 한 겹의 역장이 더 부서졌다. 하지만 충격파는 이미 눈에 띄게 잦아들고 있었다.

-신들의 영향력은 점점 더 줄어들 것이다. 너희가 바라는 아침 역시 밝아 오지 않으리라.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내가 만들 세상에는 굶주림도, 고통도, 심지어 죽음조차도 존재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자아도 없겠지, 새꺄.

내심 코웃음 치며, 이안은 메브를 바라 보았다.

그녀의 숨결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동시에 그녀의 전신이 점점 더 붉게 물들고, 피처럼 붉은 신성력이 뭉실뭉실 번졌다.

전에도 본 적 있는 현상이었다. 마경에 발을 들이기 직전에.

"천천히 따라오시오."

내뱉은 이안이 역장을 거둬들이며 몸을 날렸다. 잿빛으로 물든 그의 시선이 저 앞, 복도 너머로 향했다.

복도는 무너진 채로 끝나 있었다.

부자연스럽게 멀게 느껴지는 건, 공간이 왜곡되고 있기 때문일 터였다. 아마 이 사이의 공간이 권역의 중심부이리라.

'높이도 달라졌겠지?'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망설임 없이 발을 박찼다. 그의 몸이 포물선을 그리며 복도 너머로 솟구쳤다.

휘아아아-

달려오는 동안 시전한 바람 칼날이 그의 도약을 보조했다.

머리 위로 검을 치켜들며, 이안은 펼쳐진 풍경을 눈에 담았다. 집중력과 육감이 최고조인 덕분에, 모든 게 느리고 선명하게 인식됐다.

저택 한복판은 누가 푹 파낸 것처럼 무너져 있었다. 공간이 성의 내부라 해도 될 만큼 넓었다.

무너진 네 개 층의 통로들이 저마다의 단면을 훤히 드러내고, 그 아래로는 무너진 건물의 잔해들이 가득했다.

'…이러니 감각 교란이 심했지.'

하지만 마력 탐지를 활성화한 이안의 눈은, 그 아래에 고인 공허의 마력을 먼저 인식하고 있었다.

모든 복도에서 이어진 주문 회로는, 잔해더미 아래에 기하학적인 거대한 문양을 그렸다.

그 안에 담긴 마력은 어느새 고인 것처럼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문양 중심부의 마력이 혈관처럼 위로 솟구쳐 일렁였다.

실제로도 중심부는 잔해가 트로피 같은 형태로 불쑥 솟아 있었다. 아주 불경한 의식을 치르는 제단처럼 보이기도 했다.

정말 그럴 터였다. 그 위에 자주색으로 빛나는 커다란 덩어리가 알처럼 놓여 있었으니까.

자주색 알 표면은 섬유질 같은 질감으로 꿈틀댔다. 과거, 혼돈과 융합했던 이안의 피부 같았다.

두근-

공허의 파편이 군침을 흘리듯 울음을 토하는 가운데, 이안은 그 안에서 재탄생 중인 실루엣을 눈에 담았다. 자줏빛 마력이 선명하게 신경계와 혈관의 형태를 그려냈다.

인간의 그것과 비슷해 보이지만, 명확한 차이가 있었다. 머리 양쪽에 뿔처럼 솟은 형태와 양어깨에서 길게 이어진 부분이 특히.

'그래도, 게임에서 보단 봐줄 만한 몰골이겠네.'

하지만 어쨌건, 아직 생장을 완벽하게 끝낸 건 아니었다. 거머리처럼 꿈틀대며 뻗어 나가는 신경과 혈관 말단이 선명했다. 마력을 분출하려는 듯 명멸하기 시작한, 그 아래의 주문 회로도.

쒸아악-!

또 그 충격파를 뿜어내려는 게 분명했지만, 이안은 물러나지 않았다. 바람이 오히려 이안의 몸을 발사하듯 떠밀었다.

어느새 붉게 물든 이안의 눈에, 쏜살같이 가까워지는 자주색 알이 가득 맺혔다.

진은 강철 장검이 허공에 새하얀 궤적을 그리며 떨어졌다.

콰지직-!

검날이 알의 표면에 틀어박혔다. 아주 질긴 가죽을 가르는 듯한 감촉. 이안이 주문을 완성한 건 거의 동시였다. 새하얀 검날이 삽시에 붉게 달아올랐다.

콰-아아-!

검날에서 생성된 불길이 폭발하듯 솟구쳤다. 불길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선홍색이었다. 알의 표면뿐만 아니라, 검날이 박힌 내부도 삽시에 부글부글 끌어 올랐다.

날 표면에 발을 얹은 이안이 훌쩍 뒤로 도약했다.

쩌저적- 쩌엉-

잔해더미로 떨어지기 직전, 이안의 등 뒤로 비스듬하게 이어 붙은 두 장의 역장이 피어올랐다. 그 위에 등과 뒤통수로 착지한 이안이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어쨌건 다시 튕겨 나가지는 않았다. 충돌한 순간 역장 표면이 살짝 구부러지며 충격을 흩어준 덕분이었다.

엄청난 마력 소모에 얕은 현기증을 느끼면서도, 이안은 알 표면을 눈에 담았다. 위를 뒤덮은 선홍색 불길이 왕관 같은 형태로 타들어 가고 있었다.

'혼돈력까지 섞었는데, 의외로 수수하네.'

마력은 엄청나게 먹은 주제에.

물론, 화력까지 수수하지는 않을 터였다. 저건 가장 뜨겁고, 힘이 다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꺼지지 않는 지옥 불이었으니까.

'하긴. 차라리 잘 된 건지도.'

적색은 오히려 효과 범위가 넓을수록 사용하기 까다로웠으니까.

스킬 트리 더 높은 곳에 위치한 지옥 불 난사나 불 소나기 같은 것들은, 익힌다 해도 막상 사용할 상황이 그리 많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고 안 배울 순 없지만.'

생각하며, 이안은 불길을 향해 왼손을 내뻗었다.

화르르르-

위로 솟구치던 지옥불이 용암처럼 흘러내리며 알 전체를 뒤덮었다. 화염 역류. 꺼지지 않는 선홍색 불길에 휩싸인 제단이 녹아내리듯 허물어졌다.

알 내부도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안에 담긴 공작을 익혀 버리기에도 충분할 터였다.

-적색이라고…?

공작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건, 알 내부의 마력이 명멸한 것과 거의 동시였다.

콰- 아아-

뒤이어 알이 자줏빛 광채를 흩뿌리며 산산조각으로 폭발했다.

안에 담겨 있던 응축된 마력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번져나가고, 불이 붙은 알의 잔해들이 폭죽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쩌적-

이안의 앞으로 한 장의 역장이 더 피어나면서 충격파와 불티를 막아냈다.

지옥 불은 흩어지지 않고, 오히려 자욱하게 번지는 마력에 옮겨붙었다. 파장을 거스르는 건 화염 역류의 영향이리라. 사이 사이로 불티가 비처럼 쏟아졌다.

콰르르-

허공에 불의 구름이 아른거리는 가운데, 자욱한 안개 한복판에서 실루엣이 선명해졌다.

마족으로 거듭난 크랄렌이, 반쯤 녹아내린 잔해 위에 서 있었다.

신장만 놓고 보면 인간일 때와 그다지 다르지 않아 보였다.

다만 관자놀이 양쪽에 산양의 그것 같은 뿔이 돋아 있고, 몸 곳곳에도 자주색 갑피가 외골격처럼 덮여 있었다. 등 좌우에는 기다란 날개뼈가 손가락 같은 관절의 형태를 훤히 드러낸 채 드리웠다.

날개를 감싸야 할 피막은 아직 형성조차 되지 않았다. 놈의 피부 역시 자줏빛 핏줄이 선명하게 비칠 정도로 얇았다.

완벽하지 않은 상태로 눈을 뜬 것이리라.

하지만 놈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 이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염소처럼 가로로 길게 누운 동공이 일렁였다.

-너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존재로구나….

불의 비 한복판에서, 놈이 입술을 달싹였다. 놈의 목소리는 여전히 저택 전체에서 번지듯 울렸다.

-마법사인 것으로도 모자라, 여러 색의 마법을 익혔다니. 심지어 혼돈의 힘까지 느껴지는군. 신들도 이 사실을 아느냐? 아니…. 대답할 필요는 없다.

크랄렌이 미소 지었다. 톱날 같은 이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너를 사로잡아, 내가 직접 알아낼 테니까.

"하여간 주문쟁이 들이란…."

이안이 읊조렸다. 그의 등을 받치던 역장이 흩어졌다. 그 아래의 잔해로 착지하며, 그가 말을 이었다.

"신기한 걸 보면 정신을 못 차린다니까."

다시 크랄렌을 올려다보는 그의 입술 끝이 슬쩍 말려 올라갔다.

"시야도 좁아지고."

-그야 당연히…. …?!

내뱉던 크랄렌의 시선이 불현듯 위로 올라갔다. 지옥 불의 열기와 마력에 가려져 있던 기척을 비로소 느낀 것이다.

불의 구름보다도 더 붉은 궤적이,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242화

-...!

메브였다. 그녀의 전신에 맺힌 신성력이, 허공에 날개처럼 흘러내리는 붉은 궤적을 아로새기며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크랄렌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그녀가 치켜든 검이었다. 붉게 물든 검날에 불그스름한 뇌전이 줄기줄기 맺혀 있던 것이다.

쒸아악-!

날카로운 파공음이 비로소 크랄렌의 귀를 파고들었다. 크랄렌이 발작적으로 손을 내뻗었다.

주위에 자욱하던 마력이 삽시에 뭉쳐, 그의 앞에 커다란 막을 드리웠다. 날갯죽지로 몸을 가린 건, 말 그대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콰-치치치칫!

칼날이 보호막 위에 틀어막혔다. 뇌전이 거미줄처럼 터져 나와 보호막을 뒤덮었다. 산산이 깨져 나가는 보호막을 꿰뚫고, 붉은 기사가 떨어져 내렸다.

콰지직-!

뇌전 없이도, 붉은 칼날은 크랄렌의 몸을 가로막은 날개 뼈를 진흙처럼 갈랐다. 신성력이 맺힌 칼날이 그 너머, 크랄렌의 목덜미까지 깊이 가르며 박혀 들었다.

크랄렌의 한쪽 무릎이 휘청 꺾였다.

-또… 네놈이…?

크랄렌의 탄식이 대기를 울렸다. 물론, 메브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쒸에엑-

자루를 쥔 왼손을 놓고는 그대로 주먹을 쥐어 크랄렌의 안면으로 휘둘렀을 뿐이었다. 전신 곳곳에 지옥 불이 불티처럼 맺혀 일렁였지만,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쩌엉-!

크랄렌의 안면 한복판에 주먹이 틀어박혔다. 주먹에서 터져 나온 신성력이 놈의 머리를 휩쓸었다. 구부러져 있던 크랄렌의 무릎에 완전히 힘이 풀렸다.

콰직! 콰직! 콰직!

메브는 크랄렌이 완전히 쓰러질 때까지 연달아 주먹을 내리치고는, 놈의 쇄골 아래까지 박혀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을 치켜드는 사이 팔뚝의 마석이 일렁이고, 검날에 붉은 바람이 번졌다.

비스듬하게 몸을 돌린 그녀가 검을 내리쳤다.

쒸에엑! 콰직!

안면이 움푹 들어간 크랄렌의 머리가 잘려나갔다. 동시에 메브의 흉갑 좌우에 박힌 마석이 번쩍였다. 메브가 굴러떨어지는 머리를 향해 왼손을 내뻗었다.

화르르- 퍼엉!

손아귀에서 피어오른 화염구가 그대로 뻗어 나가 폭발했다. 춤추는 불꽃 주문이 새겨져 있던 고티어의 흉갑과 달리, 나세르의 판금 흉갑에는 화염구 주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안이 확인해 본 바로는 무려 3레벨이었다. 물론 마법사가 시전하는 동일 수준의 마법보다는 위력이 떨어지겠지만, 신성력에 녹아내리는 머리를 불태우기에는 충분했다.

"...."

머리를 잃고 움찔대는 크랄렌의 몸을 내려다 본 메브가, 곧바로 다시 검을 치켜들었다.

치이이이….

크랄렌의 육체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메브는 신경 쓰지 않는 듯 검을 내리쳤다. 신성력이 맺힌 칼날이 곤죽처럼 변한 크랄렌의 몸을 난도질했다.

-그래… 확실히, 너는 여명의 일원이 아니구나. 복수자야. 복수에 눈먼 정화자라. 준비를 단단히 했군. 용살자.

크랄렌의 목소리가 웅웅 울려 퍼졌다.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마, 실제로도 그럴 터였다.

솨아아-

동시에 잔해 아래의 주문 회로가 눈부시게 빛났다.

허공에 자주색 소용돌이가 휘몰아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콰과과과-

소용돌이가 응집되면서 충격파를 토해냈다. 메브와 이안이 거의 동시에 황금빛 역장을 펼치는 가운데, 크랄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무의미한 짓이다. 나는 이미 불사의 존재로 거듭났으니…. 나의 죽음보다, 너희의 힘이 다하는 것이 빠르리라.

충격파를 토해내는 혼돈력 덩어리 속에서, 크랄렌의 육체가 재구성되고 있었다. 처음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그걸 올려다보는 건 메브 뿐이었다. 역장 뒤에 몸을 숨긴 이안은 전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사방으로 이어진 복도의 단면 저 너머를.

막이 씌워진 것처럼 일렁이던 이안의 눈동자가, 이윽고 한 곳에서 멈춰 섰다.

'…찾았다.'

그의 한쪽 입꼬리가 설핏 말려 올라갈 찰나.

-최선을 다해 발버둥 치거라. 하지만 너희는 결국, 나를 이 시대의 새로운 왕으로 섬기게 될 것이다.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느새 크랄렌의 육체는 거의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쿠구구구….

이안이 백금의 가호를 거두며 일어선 건, 아직 충격파의 잔재가 대기를 울리고 있을 때였다.

대신 그의 전신으로 푸른 마력 역장이 번지고 있었다. 여파를 감당하는 건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역장 너머로 메브를 돌아본 그가 내뱉었다.

"계속 죽여 주시오. 그러다 보면, 정말로 죽일 수 있게 될 테니."

이안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따라 붙었다.

"말했듯이, 기꺼이."

쩌엉, 소용돌이가 흩어지며 한 차례 단말마 같은 충격파를 토해낸 건 그때였다.

허공에 자욱하던 지옥 불의 잔재가 사방으로 흩어지는 가운데, 그 한복판에서 재구축을 끝낸 크랄렌이 눈을 떴다.

-…어딜 가려는 것이냐?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그의 육체는, 처음 눈을 떴을 때의 불완전한 상태 그대로였다.

날개는 여전히 뼈만 앙상했고 피부는 속이 비칠 정도로 얇았다.

아마도 급속 재생의 한계이리라.

타타탓-

이안은 등을 후려치는 충격파를 오히려 추진력 삼아 내달렸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크랄렌의 눈매가, 이내 꿈틀댔다.

-설마…?

그래, 바로 그 설마다. 새꺄.

이안은 속으로만 내뱉었다. 메브가 크랄렌과 충돌한 순간부터, 그는 마력 탐지를 활성화한 채로 주문 회로를 살피고 있었다.

마력을 역추적하기 위해서.

놈의 영혼은, 이 마력의 근원지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모든 주문 회로가 모여드는 이곳은, 그 근원지를 유추하기에 최적의 장소겼다.

-네 이놈…! 빠져나가게 둘 것 같으냐?

크랄렌의 반응이 그의 추론을 확신으로 바꿔 주고 있었다. 놈은 소리도 없이 이안을 향해 날아들며 주문을 준비했다. 허공에 심상치 않은 마력의 응집이 번졌다. 아마도 공허 주문이리라.

하지만 이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슈확-!

"너야말로, 어딜 가는 거냐?"

복수의 화신이 그를 지켜 주고 있었으니까.

콰과과-!

등 뒤에서 붉은 섬광이 번쩍이고, 응집되던 마력이 산산이 흩어졌다.

-네 이놈…!

크랄렌의 목소리에 여유가 사라졌다. 자신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 이곳에 주문 회로를 새긴 것이겠지만. 이제부턴 반대로 그게 놈의 발목을 잡게 될 터였다.

몇 번을 다시 살아나도, 놈의 앞에는 복수의 화신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게다가 이안에게도 길을 알려주게 되리라. 그가 마력 탐지를 활성화한 동안에는 계속해서. 심지어 점점 더 정확하게.

'…아예 쓸모없는 스킬이란 건 없다니까.'

게임에선 전혀 아니었지만.

내심 읊조리며 복도로 접어든 이안이 멈추지 않고 내달렸다. 끝없이 밀려드는 마력을 거슬러서.

***

"흐음…."

나세르는 구릿빛 미간을 좁히며 침음했다. 그의 연갈색 눈동자는 저택에 못 박힌 듯 고정된 채였다.

심상치 않은 지진과 창문에서 번뜩이던 자줏빛은 어느새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둠에 휩싸인 저택은 고요하기만 했다. 하지만 나세르에겐 이 고요가 더 불길했다. 저택의 내부가 외부와 단절되었다는 의미나 다름없었으니까.

땅 아래, 여전히 은은하게 전해지는 불길한 마력이 그의 추측을 뒷받침했다.

"정말 이렇게 구경만 해도 되는 걸까, 닐라, 셀림?"

내뱉으며,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마차 옆에 선 두 백마가 대답 대신 푸르르 투레질을 했다. 닐라와 셀림은 녀석들의 이름이었다.

녀석들의 주위로는 끔찍한 몰골로 뒤틀린 시체 토막들이 여럿 널브러져 있었다.

마구간을 관리하던 하인과 정원을 청소하던 정원사들이었다.

그들은 저택이 진동하고 땅에 불길한 자줏빛이 아른거린 순간, 비명과 함께 변이하기 시작했었다.

달려드는 그들을 처리한 건, 물론 나세르였다. 그 과정에서 닐라와 셀림도 자신들의 몫을 다했다.

전마로 훈련받은 데다 주문 마갑까지 착용한 녀석들은, 웬만한 사람보다도 훌륭한 전력이었다.

"그래. 알아. 너희를 지키는 게 내 역할이지…. 나는 마부고."

검과 방패를 든 양손을 으쓱인 나세르가 터덜터덜 말들의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순간에도 그의 피부는 곳곳이 따끔거리고 있었다. 땅속에 일렁이는 불길한 마력의 영향이었다.

오랜 기간 신의 은총을 받으며 단련된 육체와 정신이 아니었다면, 나세르 역시 진작 이 마력에 홀리고 말았을 터였다.

말들이 무사한 건 마갑 덕분이었다. 마갑에 박힌 마석이 이 순간에도 은은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만약의 경우에 마석을 교체하기 위해서라도, 나세르는 이 녀석들을 떠날 수 없었다.

마갑에 새겨진 보호 마법이 깨진다면, 이 녀석들도 이 불길한 마력에 잡아먹히고 말 테니까.

"...!"

나세르의 고개가 번쩍 돌아간 건 그때였다. 저 멀리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발소리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빨리빨리 움직여! 명심해라, 각하의 신변을 안전하게 확보하는 게 최우선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는 건 그다음이야!"

"이런…."

울려 퍼진 외침에, 짧게 혀를 찬 나세르가 달려나갔다.

저택의 소란을 들은 누군가가 병사들을 이끌고 달려온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어둠 너머, 정원으로 들어서는 일련의 병사들과 기사를 눈에 담으며, 나세르가 소리쳤다.

"들어오지 마십시오! 지금 여긴 위험합니다!"

"...?"

병사들과 기사의 고개가 그에게로 돌아왔다. 나세르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

"전부 밖으로 나가십시오! 그리고 대문을 봉쇄하세요! 당장!"

그의 말에 따르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병사들에게 턱짓한 기사는 오히려 그를 향해 다가왔다. 기사의 외침이 이어졌다.

"네놈이야말로 당장 무기를 내려놔라. 여기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도, 낱낱이 고하고!"

"하…."

나세르는 짧은 한숨을 토해냈다.

자신이 더 이상 정화자나 성기사는 물론, 심지어 대교회의 일원도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자각한 것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원하시는 대로 협조하겠습니다! 그러니 일단은 당장 병력을-"

나세르의 목소리가 바람 빠지듯 잦아들었다. 저택으로 달려가던 병사들의 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향해 다가오던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다들 뭔가에 홀린 것처럼 멍한 얼굴이 되었다. 눈동자에 자줏빛이 아른거리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아, 이런…."

나세르가 멈춰 섰다.

그가 주춤주춤 뒷걸음을 치기 시작한 가운데.

"...."

"...."

모든 병사들의 고개가 일제히 그에게로 돌아왔다.

어둑어둑한 정원 너머로, 수많은 자줏빛 안광들이 번뜩였다.

저벅, 저벅-

그들은 곧, 나세르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저마다의 무기를 뽑아 들면서.

"하… 루 솔라여."

나세르가 체념하듯 탄식했다.

마차를 향해 멈추지 않고 뒷걸음질을 이어 가면서, 그가 검과 방패를 치켜들었다.

곧 검을 돌리듯 던져 날 끝부분을 움켜쥔 그가, 다가오는 기사와 병사들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원망은 하지 마십시오. 난, 분명히 경고했으니까."

그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병사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

콰과과과-

충격파가 장내를 휩쓸었다. 황금빛 역장 아래 몸을 숨긴 이안이, 차분히 앞을 바라보았다.

2층 깊숙한 곳에 위치한 서고였다. 그리고 사방에 빼곡하게 새겨진 주문 회로는, 구석의 책장 너머로 모여들고 있었다.

'비밀 통로라니. 식상하긴.'

이안이 심드렁하게 콧방귀를 뀌는 그때, 폭발 사이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후회하게 될 것이다…. 내가 없다면 서부뿐만 아니라 중앙까지 혼란에 휩싸이게 될 테니. 네 선택은 더 큰 혼돈과 어둠을 불러올 것이야.

크랄렌이었다. 회유책으로 마음을 바꾼 모양이었다. 이안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어차피 듣지도 못할 터였다.

놈은 벌써 메브에게 두 번이나 더 죽은 뒤였다.

지금은 또다시 되살아나는 중이었다. 주문 회로의 마력이 엄청난 속도로 뿜어져 나가고 있었다.

이렇게 충격파가 터져 나오는 것도, 놈이 죽은 후에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아마 육체가 존재하는 동안에도 주문 회로를 통제하는 게 가능하겠지만, 메브가 그럴 틈을 주지 않는 게 분명했다.

-군도를 통제할 수도 없게 되겠지. 새로운 영주가 임명된다 한들, 저 바다의 약탈자들을 다룰 수 있을 것 같으냐? 함대는 놈들의 소유로 전락하고, 내해는 고립될 것이다.

네가 여기서 망자의 나라를 만들게 두는 건 괜찮고?

속으로만 읊조리며, 이안이 검을 내뻗었다.

화르륵- 콰앙-!

잦아드는 충격파를 뚫고 날아간 화염구가, 책장을 산산조각내며 폭발했다. 그 너머로 지하로 이어진 좁은 계단이 드러났다. 바닥과 벽면, 천장에 주문 회로가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스으읏-

그때 정화자의 두건 망토가 그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진언 회로의 빛이 꺼질 듯 옅어진 채였다. 마력을 거의 다 소진한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타타탓-

이제 목적지가 코앞이었으니까.

바람 칼날을 시전하며 달려 나간 이안이, 망토를 펄럭이며 날듯이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은 길고 구불구불하게 뒤틀려 있었지만, 이런 현상에 익숙한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게임이었으면, 이렇게 쉽게 도달할 수 없었겠지?'

쉬지 않고 내달리는 이안의 뇌리로, 게임이었다면 펼쳐졌을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마 그때는 크랄렌의 추적을 뿌리치며 마력의 근원지를 찾아야 했을 터였다. 쫓아온 놈을 죽이고, 재생성 되는 동안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터져 나오는 충격파를 피하거나 견뎌내면서.

상당히 귀찮고 피곤한 과정이 되었으리라는 사실은,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분명 게임 오버 화면도 여러 번 보게 되었으리라.

물론, 무식하면서도 간단한 방법도 있었을 터였다. 크랄렌을 죽이고 또 죽이는 것이다. 공허의 표식에 담긴 힘이 다할 때까지.

아마 소위 고인물들이나 가능한 플레이였을 테고, 어쩌면 추가적인 보상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지만.'

곧 지하 석실이 드러났다. 미끄러지듯 멈춰 서면서, 이안은 장내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꽤 넓고 고급스럽다는 걸 제외하면, 전형적인 흑마법사의 연구실이었다.

널찍한 책상. 잉크와 깃털 펜. 연구 일지로 보이는 두꺼운 책과 온갖 음험한 주문들이 기록되어 있을 마법서들.

그리고 석실 한복판까지 빼곡하게 이어지며 새겨진 주문 회로와, 그 한복판에 놓인 단상.

그 위에 놓인 수정구와 공허의 표식이 새겨진 머리통만 한 돌조각까지 눈에 담은 순간, 이안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을 날렸다.

이곳에 어떤 방비가 되어 있을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뭐건, 제대로 작동할 틈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되살아난 크랄렌이 언제 다시 죽을지 알 수 없지 않은가.

이 방에 있는 물건들을 자세히 관찰하는 건, 모든 일이 끝난 후로 미뤄도 늦지 않았다.

-이럴 수는 없다… 그토록 기다리던 시대가 이제야 막을 올렸거늘… 이렇게 허무하게….

탄식 섞인 목소리가 대기를 울렸다. 제단 위를 뛰어넘으면서, 이안이 읊조렸다.

"원래 인생이란 게 그런 거야."

불공평하고, 부조리하지.

일렁이는 수정구 한복판으로, 새하얀 궤적이 떨어졌다.

퍼석-!

#243화

수정구가 산산이 터져 나갔다. 내부에 일렁이던 영혼이 화살처럼 튀어 나가 천장을 뚫고 사라졌다.

자신의 그릇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리라. 순리대로.

동시에 대기를 웅웅 울리던 목소리가 칼로 자른 것처럼 끊어졌다.

촤아악-

제단을 지나친 이안이 미끄러지듯 착지했다. 고장 난 형광등처럼 점멸하던 장내의 주문 회로들이, 곧 차분하고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회로를 통제하던 존재가 사라지면서, 일종의 대기 상태로 전환된 모양이었다.

'이제 지랄 염병 날 일은 없겠네.'

일어선 이안은 차분하게 숨을 고르며 단상을 바라보았다. 돌덩어리 한복판, 상형 문자 같은 공허의 표식이 불길한 자줏빛으로 일렁였다.

꽤 많은 힘을 소모했으련만, 아직도 강대한 힘이 전해졌다. 보고 있으면 표식으로 빨려들어 가는 듯한 묘한 착시가 일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실제로도 홀려 버렸으리라. 공허의 마력이 가진 기본적인 특성중 하나였다.

"...."

내면 깊은 곳에서 울림이 번졌다. 혼돈의 파편이 공명하고 있었다. 어서 저 힘을 삼키자는 듯이.

아직 안 돼.

속으로 뇌까리며, 이안은 표식 대신 아공간으로 손을 뻗었다.

곧 그가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네모반듯한 목함을 꺼내 들었다.

흡혈 여제가 가지고 있던 암흑 성물, 틈새를 걷는 자의 두개골을 담았었던 보관함이었다.

암흑 성물조차 안전하게 보관하던 물건이었으니, 공허의 표식 정도는 거뜬하게 품을 수 있으리라.

'안 들어갈 것 같은데….'

문제는 돌덩이의 크기였다.

짧게 입맛을 다신 이안이 검을 들었다.

콰직! 새하얀 검날이 돌덩어리의 끝부분을 내리쳤다. 외형과 달리 꽤 물러서 쩍, 균열이 가며 부서졌다.

표식의 마력은 여전히 고요했다.

…괜찮아 보이네.

고개를 살짝 끄덕인 이안이 계속해서 검을 내리쳤다. 돌덩이가 툭툭 깨지며 작아졌다. 적당한 크기에서 칼질을 멈춘 그가, 비로소 표식이 새겨진 돌 조각을 검면으로 툭 쳐냈다.

돌 조각은 별 저항 없이 보관함 안으로 굴러떨어졌다.

탁, 보관함의 뚜껑이 닫혔다.

동시에 장내에 가득한 주문 회로의 자줏빛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반대로 보관함의 표면에는 흐릿한 빛이 번지고 있었다. 아주 정교하게 새겨진 주문 회로의 형태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안이 보관함을 다시 아공간에 던져 넣을 찰나.

쿠구구구-

장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또 깔리고 싶진 않은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의 시선은 석실 너머의 책상으로 향하고 있었다.

***

콰드득-!

추락한 크랄렌이 잔해 더미 구석에 처박혔다. 불그스름한 충격파가 주위를 훑고 지나가는 사이.

쿠구구구….

장내의 지진이 잦아들었다.

"큭… 큭큭…."

눈을 뜬 크랄렌의 입술 사이로 허탈함 섞인 웃음이 번졌다.

지금 그의 몰골은,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사지가 모두 멋대로 잘려나간데다 날갯죽지도 한쪽만 남았다. 그마저도 절반이 채 되지 않았다. 얼굴은 엉망진창이었고, 목덜미부터 가슴 한복판까지 도끼로 찍은 것처럼 벌어진 단면에서는 검은 체액이 줄줄 흘러내렸다.

터억-

모두, 저 앞에 착지하는 복수의 화신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그에게 세 번의 죽음을 선사하고, 아마도 마지막이 될 네 번째 죽음마저 선사할 자.

"...."

붉은 검을 움켜쥔 메브의 모습은, 크랄렌과 달리 처음과 그리 다를 바 없었다.

달라진 건 조금 거칠어진 숨결과, 전신을 뒤덮은 신성력뿐이었다.

그녀의 신성력은 크랄렌에게 공격당할 때마다 점점 더 짙어져서, 이제 그녀 주위로 검붉은 어둠이 내려앉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자신에게 다가오기 시작한 죽음을 응시하던 크랄렌이, 문득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묻지."

"...."

"왜 내게 복수하려는 거지? 엄정한 여신의 사도에게 원한을 산 기억은 없어서 말이야."

순간 멈칫한 메브가, 이윽고 내뱉었다.

"너는 나를 모를 것이다. 나는 그저, 네 하수인들이 만들어 낸 피해자 중 하나일 뿐이니까."

"…변방 출신인가. 어디지?"

"아겔 란."

"아겔 란…?"

"레지스라는 이름을, 알고는 있나?"

순간 미간을 좁혔던 크랄렌의 입가에, 이윽고 묘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기억나는군…. 레지스. 레지스 브란트…. 맞나? 그 작은 왕국의 공작을 자처하던."

"그렇다."

"나는 이름만 들어 본 자지. 그가 정확히 무슨 짓을 벌인 것인지도 몰라. 어둠을 가져올 씨앗 중 하나이며, 불멸을 추구한다는 것 정도만 알았지. 그래서 후원을 허락했고. 끝내 실패했다 들었는데…."

크랄렌이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다가오는 메브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를 죽인 것도 자네겠군."

"그렇다. 나 혼자 하진 않았지만."

"큭큭… 그래. 이제 보니, 그 씨앗에서는 복수가 싹텄군. 하긴. 내가 뿌린 씨앗이 많았으니.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어도 이상하지 않아."

씁쓸한 미소를 지은 건 잠시였다.

다시 메르를 올려다 본 크랄렌이 내뱉었다.

"그러나, 사과하지는 않겠다."

"...."

메브가 크랄렌의 앞에 멈췄다. 그녀의 전신에 맺힌 신성력이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크랄렌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이 세상을 뒤집어, 새로운 세상을 열고 싶었으니까. 그로 인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러니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나는 같은-"

콰직-

메브의 검이 붉은 직선을 그렸다.

잘려 나간 크랄렌의 머리가 허공을 빙글빙글 돌고는 잔해 더미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잘린 목의 단면에서 타르처럼 검은 핏물이 왈칵왈칵 솟았다. 움찔대던 크랄렌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검을 옆으로 내뻗은 채로 굳어졌던 메브가, 비로소 다시 검을 늘어뜨렸다.

크랄렌의 시체를 내려다 본 것도 잠시.

"----!"

메브가 몸을 구부리며 울부짖었다. 오랜 숙원이 이루어졌음에도, 오히려 비통하게 느껴지는 소리였다.

절규에 반응하듯 끓어오른 신성력이, 아지랑이처럼 사방으로 번지며 흩어졌다.

"...."

2층의 복도 끝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이안은, 눈앞에 떠오른 퀘스트 완료창을 닫으며 아래로 뛰어내렸다.

저택은 어느새 본모습으로 되돌아온 후였다.

이어지던 절규가 잦아들었다.

하지만 메브는 크랄렌의 시체 앞에 주저앉은 채였다.

이안은 천천히 그녀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신성이 모두 증발한 탓인지, 메브의 뒷모습이 유독 창백해 보였다.

그가 뭔가 말할 필요는 없었다.

"나리-! 괜찮으신 겁니까? 나리!"

다급한 외침과 함께, 3층 복도 단면으로 필립이 뛰쳐나왔으니까.

꽤 거친 싸움이었던 듯 지저분한 몰골로, 녀석이 소리쳤다.

"다치시기라도 한 겁니까? 나리! 대답해 주십시오!"

"…나는 괜찮다. 필립."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은 메브가 천천히 일어섰다. 철컥, 투구가 스스로 벗겨져 갑옷 뒤편으로 접혔다.

메브가 뒤를 돌아보았다. 잔해 중턱에 선 이안을 잠시 여러 감정이 뒤섞인 녹색 눈으로 마주 본 그녀가, 이윽고 위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복수도 끝났다. 필립."

"...!"

비로소 필립의 미간도 일그러졌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기묘한 표정이었다. 지난 기억들이 뇌리를 스치는 것이리라. 그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 찰나.

"길 막지 말고 비켜 봐. 주근깨."

필립을 툭 밀치며 앞으로 나온 테사이아가, 그대로 난간을 박차고 뛰어내렸다. 3층 높이라는 건 상관도 없다는 듯한 거침없는 움직임이었다.

"으, 으아악…!?"

복도 끝에 간신히 걸쳐 선 필립이, 언제 감상에 빠졌었냐는 듯 꼴사나운 소리를 내며 양팔을 휘젓는 가운데.

"진짜 난리도 아니었어, 이안! 물론 너희에 비할 건 아니겠지만, 이쪽도 나름대로 엄청났다니까?"

무릎을 살짝 굽히며 가볍게 착지한 테사이아가 위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내뱉었다.

그녀의 얼굴에도 전투의 여파가 역력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몰골에, 얼굴에 자잘한 긁힌 상처도 여럿이었다. 기다란 은발 곳곳이 불에 탄 것처럼 구불구불했다.

"주근깨랑 그 기사 놈이 서로 번쩍대고, 내가 상대하던 주문쟁이는 머리만 남아서도 마법을 쓰더라. 죽는 줄 알았다니까. 한 번 정도는 정말 그럴 뻔했고."

어쨌건,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꾸기엔 충분했다.

풀썩 웃음 지은 이안이 말했다.

"그래도, 결국은 이겼나 보군."

"당연하지. 그런데…."

난장판인 장내를 태연하게 돌아보며,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야옹이는? 야옹이는 어디 있어?"

눈을 끔뻑인 이안이 메브와 슬쩍 시선을 교환하고는 내뱉었다.

"오늘 길에, 못 봤냐?"

"응. 못 봤는데? 같은 층에 있었어? 아니, 잠깐만. 뭔가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고-"

콰르르르-!

저 위편에서 벽이 부서지며 굉음이 터져 나온 건 그때였다. 일행이 있던 곳의 반대편 복도. 심지어 4층이었다.

"...!"

눈을 치켜뜬 셋이 저마다 쏟아지는 잔해를 피해 훌쩍 물러났다.

이안은 뒤엉킨 채 추락하는 두 수인을 올려다보며, 슬쩍 눈썹을 치켜들었다.

'언제 또 저기까지 갔지.'

크게 한 바퀴 돌았나.

그 사이, 샬롯이 팔메르를 아래에 내리깐 채 잔해 더미 한복판으로 떨어졌다.

콰아앙-!

돌 부스러기와 먼지가 사방으로 튀었다. 추락의 충격은 고스란히 팔메르의 몫인 게 분명했다. 튕겨 오르는 놈의 입에서 피 화살이 치솟았다.

콰장창창-

팔메르가 바닥을 나뒹굴며 튕겨 나가고, 놈을 박차며 착지한 샬롯이 고양이처럼 추락 지점에 착지했다.

그녀의 몰골은 처참했다. 갑옷 곳곳이 뜯겨 나가고, 드러난 거의 모든 부분이 상처투성이였다. 붉은 신성력이 꺼질 것처럼 일렁였다. 특히 한쪽 얼굴을 가르며 깊이 새겨진 할퀸 자국은, 아물더라도 흉터가 남을 게 분명할 정도로 깊었다. 눈이 무사한 게 기적 같았다.

눈을 치켜뜬 테사이아가 다급하게 세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야옹아! 내가 도와주-"

"끼어들지 마!"

저주파 섞인 외침을 토해낸 샬롯이, 바닥을 나뒹구는 팔메르를 노려보며 덧붙였다.

"…저놈은 내 거다."

"어, 그래…? 알았어…."

테사이아가 머쓱하게 다시 검을 검집에 밀어 넣는 가운데, 샬롯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갔다. 간신히 네 발로 몸을 일으키던 팔메르가, 흐릿한 잿빛 눈동자를 간신히 뜨며 샬롯을 노려보았다.

'…하긴, 저놈은 크랄렌에게 힘을 받는 게 아니었지.'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은 샬롯과 충돌하는 팔메르를 눈에 담았다.

놈은 수인들의 신. 공허로 추방된 태초의 야성을 섬기는 광전사가 틀림없었다. 그러니 샬롯이 저토록 진지한 것이리라. 놈과의 전투는 그녀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을 테니까.

이미 많은 수인이 크룩시카를 섬기고 있다지 않던가. 그 사도 하나조차 이기지 못한다면, 일족을 장악하는 것도 불가능할 터였다.

"----!"

다행히, 승기는 이미 샬롯 쪽으로 기울었다.

빠직-!

팔메르의 턱을 무릎으로 걷어찬 그녀가, 그대로 놈의 위로 올라타며 주먹을 치켜들었다. 장갑마저 벗겨진 새카만 주먹이 피의 궤적을 만들며 떨어져 내렸다.

빡! 빠각!

샬롯이 연신 주먹을 내리쳤다. 그녀를 밀어내려 애쓰던 팔메르의 움직임에 점점 힘이 빠졌다.

샬롯은 멈추지 않았다. 허우적대던 팔메르의 팔이 마침내 축 늘어졌다. 이어진 주먹질에 몸을 움찔대기만 할 뿐이었다.

"하아… 하아…."

이윽고 주먹질을 멈춘 샬롯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팔메르는 물론이고, 그녀에게서도 어느새 신성력은 찾아볼 수 없었다.

비로소 승리를 확신한 듯, 양팔을 치켜든 샬롯이 포효했다. 그녀의 털과 갈기에 가득 맺혀 있던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곧 팔메르의 목덜미를 움켜쥐며 일어선 샬롯이, 일행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주황색 눈동자는 어느새 한결 차분해진 상태였다. 전투의 여파는 방금의 포효로 전부 날려 버렸다는 듯이.

"…다 끝난 건가?"

샬롯이 이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안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군…."

비로소 샬롯이 비틀댔다. 팔메르를 다시 툭 떨어뜨린 채였다.

"야옹아!"

소리친 테사이아가 후다닥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

"아직…. 아직 아니다, 귀쟁아."

피맺힌 손으로 테사이아의 어깨를 두드린 샬롯이, 옆구리에서 진은 강철 단검을 뽑아 들었다.

발로 팔메르의 몸을 뒤집은 그녀가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는 왼손을 뻗어, 팔메르의 꼬리를 쥐고 위로 들었다. 여러 개의 마디로 이루어진 꼬리 갑주. 단검을 움켜쥔 샬롯의 오른손에 힘이 들어갔다.

콰직-!

단검이 팔메르의 꼬리를 단숨에 잘라냈다. 이미 의식을 잃었음에도, 팔메르의 몸이 한차례 크게 들썩였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꼬리를 움켜쥔 채, 샬롯이 휘청대며 일어섰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이안이 슬며시 미소 지으며 턱짓했다.

"그렇게 잘라도, 괜찮은 거냐?"

"…그래."

샬롯이 비로소 왼팔을 테사이아의 어깨에 두르며 내뱉었다. 테사이아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가 움켜쥔 꼬리를 내려다보았다. 잘린 단면에서 떨어진 피가 그녀의 각반과 장화를 적시고 있었다.

"이놈은 섬기지 말아야 할 분을 섬겼다. 일족의 어린 전사도 여럿 같은 길로 끌어들인 것 같더군. 극형으로 다스려도 과하지 않아."

"크룩시카를 섬기는 것들의 꼬리를 전부 잘라 버리기라도 하려는 거냐."

"그런 생각까진 해보지 않았다만…."

손아귀에 축 늘어진 꼬리를 내려다본 샬롯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훌륭한 조언이군. 그렇게 해야겠어. 필요하다면."

"...."

괜한 소릴 한 건가.

이안이 헛웃음을 흘리는 가운데, 잔해더미 한쪽으로 필립이 착지했다. 한 층 한 층 조심스럽게 내려온 끝에 1층까지 도달한 것이다.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일어선 필립이, 쓰러진 팔메르를 내려다 보았다.

"그래서, 이자는 왜 살려 둔 겁니까? 설마, 꼬리를 잘랐으니 죽은 거나 다름없단 말씀은 아니시겠죠?"

"…그럴 리가. 잠시 유예한 것뿐이야. 이놈을 심문하면, 일족이 어떤 상태인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을 테니까."

내뱉은 샬롯이, 잠시 멈칫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무표정하게 팔메르를 내려다보는 이안을 향해, 그녀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래도 되겠느냐? 허락해 준다면, 이놈이 다른 사고를 칠 수 없게 하겠다. 정 내키지 않는다면-"

"그것 때문에 본 게 아니야. 그놈의 처분은 알아서 해. 네가 이긴 상대고, 네 동족이니까."

이안이 말을 잘랐다. 어깨를 까딱인 그가 덧붙였다.

"어차피 싸워 이겨서 꼬리를 잘랐으니, 그 녀석은 이제 네 말을 거스를 수 없잖아. 안 그래?"

"의도한 건 아니지만, 아마도. 그럼… 왜 그렇게 본 거지?"

"마침 잘 됐다 싶어서. 한 놈 정도는 살려 두는 것도 괜찮았거든."

"...?"

샬롯이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빡였다. 낮게 실소한 이안이 덧붙였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네. 우리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잊었냐? 뒷수습은 해야지."

#244화

"아하…."

샬롯이 낮은 탄성을 흘리는 사이, 필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수인이 직접 공작이 벌인 일들을 자백하게 하시려는 거군요. 우리가 말하는 것보다 설득력이 있을 테니까요."

"바로 그거야. 그러니까 그놈이 아는 걸 술술 불게 만들고 싶은데. 할 수 있겠어?"

"물론이다. 이안. 얼마든지."

샬롯이 엎어진 팔메르를 내려다보며 송곳니를 슬쩍 드러냈다.

보아하니 동족이라는 이유로 마음이 약해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공작을 따르는 자들이 자백을 믿어 줄지 모르겠군요. 반대로 이자에게 다 덮어씌우면 모를까."

필립이 턱을 만지며 덧붙였다.

갈수록 신중해진다니까. 아니, 인간 불신이 깊어지는 건가.

"일리 있는 말이군. 그러니까…."

내심 실소하면서도 입을 연 이안이, 메브를 돌아보았다.

"경, 가서 공작의 머리를 챙겨주시겠소? 나도 증거를 챙기긴 했지만, 물증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잖소. 경이 벤 머리니까, 경이 챙기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알았다. 그러지."

다소 멍한 눈빛이던 메브가 선선히 몸을 돌렸다.

맥이 탁 풀린 걸음걸이였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격렬한 전투를 치른 데다, 방금 자신의 길고 긴 복수행마저 끝낸 참이 아니던가. 아마 한숨 푹 자고 일어나야 진짜 현실감이 밀려오리라.

시선을 거두며, 이안이 말을 이었다.

"샬롯, 혼자 움직일 수 있겠냐?"

"그래. 충분히."

이안은 아공간에서 봉인함을 꺼내면서 팔메르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네 포로부터 결박해. 운반하기 편하게. 물부터 좀 마시고. 당장 쓰러질 것 같아 보이니까."

샬롯이 선선히 몸을 숙였다. 이어 이안의 시선을 받은 테사이아가 눈을 깜빡였다.

"왜?"

"경이 로브를 잃어 버렸더군."

"…또?"

"찾아서 바로 경에게 줘라. 걸치게. 언제 경비대가 들이닥칠지 모르니까 맞이할 준비는 해 둬야지."

"알았어. 아니, 그건 싸울 때마다 자꾸 어디로 사라지네…."

투덜대면서도 테사이아가 훌쩍 몸을 돌렸다. 주위를 돌아보는 그녀의 눈가에는 어느새 핏줄이 꿈틀대며 돋아나고 있었다.

이안은 이어 자신의 견갑에 망토처럼 고정되어 있던 로브를 벗어 필립에게 내밀었다.

로브를 엉거주춤 뒤집어쓰면서, 필립이 말을 이었다.

"병사들이 몰려오면, 협조하실 겁니까? 제압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희생자가 나올 텐데요."

"봐서. 웬만하면."

"예. …이상하게 안심이 좀 되는군요. 일이 잘 안 풀리더라도, 뭔가 생각이 있으신 것 같아서요."

"뭐, 보험이 있으니까."

"보험…? 그게 뭡니까?"

"백금룡."

"…아."

"우리 힘으로 해결해보다 안 되면, 그 양반한테 넘기면 그만이야. 그러니까…."

어깨를 까딱인 이안이 덧붙였다.

"쓸데없는 걱정말고 이놈이나 들어라. 네가 운반해."

눈을 치켜뜬 필립이 팔메르를 내려다보았다.

"…제가요?"

"정화자가 포획한 것처럼 보이는 게 더 그럴듯 하니까. 직접 심문할 명분도 설 테고."

"그렇긴 하겠습니다만…."

그때, 팔메르를 통나무처럼 결박한 샬롯이 뒤로 물러났다.

필립은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면서도, 주저앉아 팔메르의 몸 아래에 양팔을 밀어 넣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큰 덩치를 제가 어떻게… 혼자…?"

벌떡 일어난 그가, 오히려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빡였다.

"…충분히 되는군요. 이게 되네."

"될 것 같으니까 시켰지."

넌 이제 반 정도는 초인이니까.

피식한 이안이, 돌아오는 메브와 테사이아를 눈에 담았다.

크랄렌의 머리는 테사이아가 들고 있었다. 메브가 로브를 걸치고 있기 때문이리라.

"나갑시다."

봉인함을 아공간에 되돌린 이안이 몸을 돌렸다. 아직도 경비병들이 들이닥치지 않은 걸 보면, 저택에서 일어난 일이 외부에 알려지진 않은 모양이었다.

상관없는 일이었다. 직접 내성을 찾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그림이었으니까.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건, 저택의 대문을 연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

저택 앞에 난장판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게 뭔…."

두건을 눌러쓴 채 따라 나온 필립이 멍하니 중얼댔다. 온 사방에 병사들이 쓰러져 있었다.

곳곳에 떨어진 횃불들이 흐릿하게 일렁이며 난장판을 밝혔다.

"안 들어온 게 아니라, 못 들어온 거였군."

그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이안이 중얼댔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눈에 그려지는 듯 했다. 소란을 듣고 달려왔다가, 죄다 공허의 마력에 홀려버린 것이다.

상태로 봐선 광란 상태에 빠져 자기들끼리 싸운 게 분명했다.

"다 죽은 건 아니야. 반 정도는 그냥 기절한 것 같은데?"

이리저리 오가며 병사들의 상태를 확인한 테사이아가 말했다. 어둠 저 너머에 일렁이는 불빛들을 빤히 응시하던 샬롯이 말을 이었다.

"대문 밖에 병사들이 모여 있다. 기사도 보이는군."

"들어오면 안 된다는 걸 알게 된 모양이군요. 이젠 괜찮겠지만, 그건 모를 테고요."

필립이 덧붙였다. 이안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기다린 김에 좀 더 기다리게 두지 뭐. 잘됐네. 증인이 더 많아지겠어."

네, 하고 대답하던 필립이 곧 이안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가 대문이 아니라 옆으로 이어진 길목으로 들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쪽으로 가십니까? 여긴… 아!"

필립의 눈이 뒤늦게 커졌다.

"마차! 나세르!"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던 모양이었다.

잊을 게 따로 있지.

대답 대신 실소를 흘리며, 이안은 저 앞의 어둠을 응시했다.

횃불 하나 없었지만, 그는 문 닫힌 마구간과 그 주위의 풍경을 어렵지 않게 식별할 수 있었다.

마구간 주위에도 병사들이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 나세르와 말들을 노리고 몰려든 것이리라. 심지어 사이사이로 변이된 시체 토막들도 흩어져 있었다.

"…설마, 짝귀까지 죽은 건 아니겠지."

고요한 마구간을 바라보며 테사이아가 중얼댔다. 일행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들 비슷한 생각일 터였다.

아무리 나세르가 전직 정화자라도, 공허의 마력에 홀린 수십을 달랑 검과 방패만 들고 상대하기는 쉽지 않을 테니까.

"...!"

이안이 눈매를 꿈틀댄 건, 마구간의 닫힌 문 앞에 선 순간이었다.

문을 연 그의 얼굴에, 비로소 묘한 미소가 번졌다.

"기적이 일어났군."

열댓 명쯤 되어 보이는 병사들이 널브러진 저 너머, 마구 구석에 두 마리 백마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녀석들이 걸친 마갑이 어둠 속에서도 은은하게 빛나고 있어서, 비현실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맙소사, 루 솔라여…."

"아니, 쟤들이 어떻게 살았지?"

뒤따라 들어온 필립과 테사이아도 탄성을 터뜨렸다. 메브와 샬롯은 별말을 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놀라긴 마찬가지인 눈치였다.

심지어 옆에는 마차까지 멀쩡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장내를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옮긴 이안이, 이내 반대편 벽면의 건초더미 사이로 다가갔다.

나세르가 거기 주저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녀석의 상태는 한 눈에 봐도 엉망이었다. 말똥과 흙, 짚단 속에서 나뒹군 듯한 몰골이었다.

이안이 내뱉었다.

"그래도, 살아는 있군."

"…예. 간신히요."

나세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번졌다. 필립이 번쩍 고개를 돌리며 그의 이름을 부르는 사이, 이안이 녀석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기절한 줄 알았더니."

"잠깐 쉰 겁니다. 너무 지쳐서요."

나세르가 오물 범벅인 얼굴을 들며 말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의 상태를 훑어 보았다. 곳곳에 긁힌 상처와 눌어붙은 핏자국이 남아 있긴 했지만, 어쨌건 치명적인 상처는 없어 보였다.

나세르는 정말 그저 탈진해 있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이안은 그 사실에 내심 놀라면서도,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어지간히 굴러다닌 모양이군."

"예, 뭐… 혼자서 여럿을 상대하려면 별수 없지 않겠습니까. 나리 명령대로, 죽이지 않으려고도 노력했고요. 닐라나 셀림에게 차인 자들은 죽었겠지만… 그거까진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닐라와 셀림?"

나세르가 턱으로 말들을 가리켰다.

"저 녀석들이요."

"아. 이름이 있었군."

"처음부터 저 녀석들을 이 안에 넣어 둔 건 아니었어서요. 덕분에 고생을 좀 더 했습니다. 막판엔 정말 위험하기도 했고요."

"보니까, 자기들끼리도 싸운 것 같던데."

"덕분에 숨 쉴 틈이 생겼죠. 슬슬 죽이지 않을 자신이 없어지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발광하기 시작하더니, 자기들끼리 싸우더군요. 잠깐이었습니다. 몇 분 지나지도 않아서 죄다 픽픽 쓰러졌죠. 덕분에, 안에서 일이 잘 끝났다는 걸 알았습니다."

"고생했다."

요약도 적당했고.

낮게 웃음 지은 이안이 덧붙였다.

"인상적이군. 살아남은 것도 놀라운데, 말까지 지켜내다니."

"그러게. 대단하네, 짝귀. 다시 봤어."

테사이아도 덧붙였다. 그녀는 메브, 샬롯과 함께 쓰러진 이들의 상태를 하나씩 확인하고 있었다.

장내를 돌아보던 나세르가 풀썩 웃음 지었다.

"그러게요. 저도 저 자신에게 놀랐습니다. 온갖 마법 무구를 두르고 산 시간이 꽤 길어서, 솔직히 확신은 없었거든요."

"자신감을 가져도 될 것 같군. 정말 여럿 살아 있으니까."

메브가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내뱉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일어섰다.

"움직일 수 있게 되면 마차로 가서 쉬고 있어라. 사람들이 돌아올 때까지 말도 잘 지키고."

"…예."

끙, 하고 짧게 침음한 나세르가 일어섰다. 양손의 검과 방패를 축 늘어뜨린 상태이긴 했지만, 어쨌든 쓰러지지는 않았다.

휘청대며 몇 걸음을 옮긴 그가, 마구간 밖으로 나가는 이안과 일행들을 돌아보고는 물었다.

"그런데 이제 어쩌시려는 겁니까?"

"어쩌긴."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문을 나서며 덧붙였다.

"자수해야지."

***

도시의 분위기는 아침부터 이상했다. 범선들이 줄지어 항구를 떠나고, 모든 관리와 귀족들이 내성에 모여 나오지 않았다.

시민들 사이에 공작에게 변고가 생겼다는 소문이 돌았다.

몇 시간 뒤 밝혀진 사실은 소문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었다.

서기관이 크랄렌 공작이 마족이었다는 사실을 광장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이다.

발표 내용은 그게 전부였지만, 도시 전체를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말도 안 돼! 누군가 누명을 씌운 게 분명해. 각하께서 그럴 리가."

복구 작업조차 중단한 채, 시민들은 도시 곳곳에 모여 같은 주제로 떠들어 댔다. 오늘은 그들을 통제할 관리들조차 없었다.

"목격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저택에서 죽을 뻔한 병사가 백 명도 넘고, 시체도 서른이 넘게 치웠어요."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인 건 술집이었다. 내성에서 나온 이들이 소식을 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도시의 모든 술집이 하던 일도 내팽개치고 달려온 이들로 만원이었다.

"교단의 정화자들이 그자의 목을 베어서 들고 나왔소. 내가 직접 봤소.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지."

소식을 전하는 이들은 가지각색이었다. 하인. 마구간지기. 묘지기. 심지어 근무를 끝낸 병사가 직접 이야기하고 있기까지 했다. 저마다가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떠들어 댔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각하가 마족이라니."

"부정하지 말게. 하수인인 팔메르도 조금 전에 전부 자백했다더군. 전부 사실일세."

"그 수인 기사? 수인의 말을 어떻게 믿소? 그 자가 각하께 전부 뒤집어씌운 건지도 모르는 일 아니오."

"정화자들이 제출한 증거 중에, 공작이 자필로 쓴 일지도 있었네. 진술과 내용이 일치한다더군. 도시를 이 꼴로 만든 원흉도 공작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마당에, 아직도 그자의 편을 드는 겐가?"

"뭐, 뭐라고…? 그거 정말 제대로 들은 것 맞소?"

"나도 그렇게 들었소. 행정관님께 직접."

"맙소사…."

크랄렌 공작에 대한 진실만이 퍼져 나가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사실을 밝혀낸 이들에 대한 이야기도 곳곳에서 이어졌다.

"정화자들과 함께 온 자가, 북부의 용살자라더군."

"그 유명한 북부의 초인? 그분이 지금 여기에 있다고?"

"그래. 그분이 정화자들을 도왔다더군. 그 덕분에 마족을 이렇게 별다른 피해 없이 토벌할 수 있었던 거야."

"이럴 수가. 그분들이 도시로 들어올 때 옆을 지나쳤었는데. 그 마차에 그 유명한 용살자가 타고 있었다니."

"못 믿겠으면 저쪽에 가서 또 물어보게. 나만 들은 얘기가 아니니까."

"아냐. 거짓말을 할 거면 더 그럴듯한 말을 지어냈겠지. 감사 기도라도 올려야겠군."

물론, 모두가 그저 놀라고만 있는 건 아니었다.

"크랄렌의 시체라도 보고 싶군. 나는 이번 비극으로 아내를 잃었어. 그게 전부 그 개자식 때문이었다니. 그것도 모르고 난…!"

"나도 마찬가지일세. 제기랄. 평생 지옥에서 불타라, 더러운 놈."

공작에 대한 분노와 성토도 뒤를 이었다. 진상을 낱낱이 밝히기를 원하는 이들도 목소리를 높였다. 도시의 귀족과 관리들이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있으니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일지도 모르겠군."

몇몇은 현실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주로 내해를 오가는 상인들이 그랬다.

"이제부터라니. 그자는 이미 죽었다지 않나."

"그러니까. 에드워드 크랄렌이 어디 보통 인물이었나? 중앙에까지 영향력을 끼치던 귀족일세. 그가 마족으로 밝혀졌으니,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나겠냔 말이야."

"루 솔라 맙소사… 피바람이 불겠군. 폐하께서 진노하실 게 분명해."

"그래. 중앙이 발칵 뒤집어지겠지. 그동안, 여긴 이 상태로 버려져 있겠고."

"설마 그러겠나. 여긴 서부의 중심일세. 가장 중요한 자리가 비었으니, 혼란을 잠재울만한 영향력과 정통성을 지닌 인물을 내려 보내시겠지."

"그것도 문제이긴 마찬가지일 걸세. 새 영주가 가장 먼저 할 일이 무엇이겠나?"

"이번 일의 관련자들을 전부 조사하고 처단하겠지. 그래… 괜히 군도의 범선들이 아침부터 꽁무니를 뺀 게 아니군. 맙소사. 설마 그자들도 연관이 있는 건 아니겠지."

"모르지. 느낌이 좋지 않아. 군도가 순순히 협조한다면 다행이지만, 아니라면…."

"…당장 떠날 준비를 해야겠군. 이러다 뱃길이 막히기라도 하면, 우리 모두 망하는 걸세."

"나도 같은 생각이야. 하루 아침에 진정될 혼란이 아닐세. 지금만 해도 보게, 아무도 속 시원하게 설명해주지 않고 자기들끼리 바쁘지 않은가. 아마, 본인들이 살 궁리나 하고 있겠지."

실제로도 그랬다.

도시 귀족들과 관리들, 하루아침에 주군을 잃은 기사들 모두, 살아남을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

정화자들이 일을 저지른 이상, 황실과 교단 양측에 소식이 전해질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게 어떤 파장으로 되돌아올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물론, 확실한 부분도 있었다.

이 혼란이 가라앉을 때쯤엔, 많은 관련자들이 죽게 되리라는 것. 혹은 노예가 되거나. 검은 벽 너머로 보내질 수도 있었다.

뭐건, 행복한 결말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도시 귀족과 관리들의 관심은 용살자에게로 집중됐다.

정화자와 달리, 그는 말이 통할 것 같은 상대였으니까.

심지어 저 위대한 백금룡의 대행자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가 무고를 증명해 준다면, 살아남을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질 터였다. 물론, 그를 만난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낮까지 이어진 조사를 끝내고 돌아간 용살자, 이안 호프는 숙소에 틀어박혀 한 발짝도 나오지 않고 있었으니까.

#245화

"반갑소, 스펠로 경. 경이 아직 대문을 지키고 있는 걸 보니, 용살자께서 안에 계신 모양이군."

"그렇소."

창밖 너머에서 목소리가 번졌다.

"이미 여럿이 이 문을 넘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건 알고 있소. 하지만 우리는, 안면이 좀 있잖소?"

"그건 사실이지."

"그러니 작은 선물을 준비했소. 자, 넣어 두시오. 서운하지 않으실 거요. 그리고 잠깐만 시간을 주시오. 얼굴만 뵙고 바로 나오겠소."

"…여럿이 왔다가 돌아갔다는 얘긴 들으셨어도, 왜 돌아갔는지는 듣지 못하셨나 보군."

"음…?"

"경께선 방문객들의 접견 신청을 거부하지 않으셨소. 대신, 한 가지를 전하라 이르셨지."

"그게 무엇이오?"

"털어서 먼지 한 톨 나오지 않을 사람만 들어오라고 말이오."

"...?!"

"방문객을 즉시 최우선으로 조사하실 것이며, 작은 부정이라도 남김없이 밝혀내서 책임을 묻겠다 하셨소. 정말 청렴결백하다면, 아무런 문제 없이 신원을 보증해 주실 것이고."

"허…."

"하지만 벌써 먼지를 묻히고 계시군. 안면이 있으니 드리는 말씀인데, 돌아가서 집안 정리부터 하는 게 좋으실 것이오. 그리고 다시 오시오."

"그, 그래야겠군. 고맙소, 경. 내 그리하리다."

거, 일 열심히 하네.

소파에 기대앉은 이안은, 멀어지는 마차 소리를 들으며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밤새 이어진 조사가 끝난 뒤, 스펠로는 일행의 안내와 경호를 자처했다. 이안은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에게 일종의 임무를 내렸다.

방금 창밖으로 이어진 대화가 바로 그 결과였다.

이안이 잠에서 깬 이후로 벌써 세 번째 손님이었다. 물론, 돌아가는 것도 세 번째였다.

조사를 받으며 눈치 빠른 귀족 몇과 대화를 나눠 본 결과, 이안은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 도시에서는 받을 퀘스트가 없다는.

아무래도 게임에서의 라클리프는, 플레이어가 발을 들였을 때 이미 어떤 식으로든 멸망한 상태였던 모양이었다.

부패와 역병의 도시가 아니라도, 공작의 손에 망자의 도읍으로 거듭났겠지.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본래는 죽었을 수많은 이들까지 살린 셈이 된 것이다.

퀘스트라도 있다면 모를까. 먼지 풀풀 풍기는 귀족과 관리들의 앞가림까지 신경 써줄 이유도,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게임에서 그랬다면… 결국 여긴 어떤 식으로든 다시 망하게 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가 아무리 용을 써도 바꿀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란 게, 엄연히 존재하는 세상이니까.

…알 게 뭐야. 일단은 구했으면 그만이지.

잡념을 떨치며, 이안은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아무런 제목도 적혀 있지 않은, 불길하게 거뭇한 표지가 드러났다. 쇼파 아래에도 비슷한 책이 두 권 더 놓여 있었다. 크랄렌의 책상에서 일지와 함께 챙겨 나온 마법서들이었다.

물론, 이번에도 이해할 수 없는 헛소리들만 잔뜩 쓰여 있었다. 변방에서 본 것보다 더 고차원적인 헛소리였다.

'야영할 때 불쏘시개로나 써야겠네.'

크랄렌의 일지는, 놈의 머리와 공허의 표식과 함께 증거로 제출했다. 공허의 표식은 직접 폐기하겠다는 명목으로 되찾아 왔지만, 나머지는 여전히 내성에 남겨 뒀다.

중앙에서 파견 나올 조사단을 위한 선물이었다. 아침까지 이어진 길고 지루한 조사에 전부 응해 준 것도 그래서였다.

모든 게 명확하고, 부정할 수 있는 자료와 증거가 있어야 그에게까지 불똥이 튀지 않을 테니까.

물론 공식적인 문서에는 전부 고티어와 나세르의 이름을 쓰긴 했지만.

어쨌건 그의 이름을 알고 있는 자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도 불똥이 튈지 모르니까… 그 양반에게도 말해 둬야지.'

책을 아래로 내려놓은 이안이, 소파 등받이에 뒤통수를 기댔다.

그의 시선이 어둑어둑해지는 넓은 방안을 훑었다. 두 개의 침대에는 메브와 샬롯이 죽은 것처럼 누워 있었다.

집 한 채를 통째로 숙소로 받았음에도, 일행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가장 큰 방 하나에 모여서 잠들었다. 아마 서로의 곁이 아니면 맘 편히 잠들 수도 없게 된 것이리라. 몹시도 지치고 피곤한 시간을 보낸 뒤에는 더더욱.

어쨌든, 가장 먼저 눈을 뜬 건 이안이었다.

침대를 양보해서 잠자리가 불편했다거나 하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말 그대로 충분히 쉬어서였다.

이번 전투에서 그는, 그저 가장 까다로운 부분만 전담하지 않았던가.

실질적인 전투와 몸을 써야 하는 일 대부분은 동료들의 몫이었다.

물론 마력을 꽤 소모하긴 했지만, 이전까지의 전투들과 비교하면 대단한 수준도 아니었다.

심지어 상대가 의회의 의원이자 마족이기까지 했는데도.

'…하긴. 쉽게 갈 때도 있어야지.'

그러기 위해 준비도 많이 했고, 힘든 과정도 거쳤으니까.

문득 소파 옆에 놓인 간이 탁상으로 손을 뻗은 이안이, 그 위에 놓인 술잔을 들며 내뱉었다.

"그 손, 떼는 게 좋을 거야."

"...!"

소파 아래에서 조용히 뻗어 나와 마법서를 움켜쥐던 흰 손이 굳어졌다. 손이 쑥 들어가더니, 곧 머쓱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테사이아가 기어 나왔다.

"어떻게 알았어…?"

"잘."

피식하며 대답한 그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을 이었다.

"안 보여서 어디 구석에라도 있나 했더니. 밑으로 기어들어 왔었군."

"재미있어 보여서. 나도 주문쟁이잖아. 쓸 줄 아는 주문은 없지만."

"안 읽는 게 좋을 거다. 첫 주문을 사령술로 익히려는 게 아니면."

"당연히 아니지. 그냥 무슨 내용일지 궁금했어. 살짝만 보려고 한 거야. 살짝만."

테사이아가 엄지와 검지를 까딱이며 미소 지었다.

퍽이나 그러시겠지.

이안은 다시 한번 코웃음을 흘리고는 술을 홀짝였다.

슬며시 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테사이아가, 푸석한 은발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주근깨랑 짝귀는 어디 갔어? 눈 뜨니까 안 보이던데."

"아까 일어나서, 내보냈다. 시킬 일들이 있어서."

"시킬 일?"

"…그 수인 광전사의 신변을 확보하고, 교회도 대관하라고 했어. 나간 김에 먹을 것도 준비하고, 배편도 알아보고."

슬쩍 테사이아를 돌아본 그가 덧붙였다.

"심심하면 너도 내려가 있든가. 아마 곧 돌아올 거야. 그땐 다들 깨울 거고."

"됐어. 이안이랑 있을래."

장난스럽게 미소 지은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이제 곧, 오래 못 보게 되잖아."

"…뭐, 그렇지."

잠시 멈칫한 이안이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다시 술잔을 입에 가져가는 그를 잠시 빤히 바라보던 테사이아가, 이윽고 덧붙였다.

"그냥, 우리랑 같이 남부로 가면 안 돼? 어차피 그 대단한 사명도 끝났잖아."

"안 돼."

"왜…?"

왜긴 왜야. 남부는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그렇지.

생각하면서도, 이안이 말을 이었다.

"내 뒤에 붙은 꼬리가 너무 많아. 너도 알겠지만, 덕분에 가는 곳마다 개판이 되고 있지. 너희가 해야 할 일들에 별 도움이 안 될 거야."

술잔을 내려놓은 이안이, 주석 술병을 들어 술을 따르며 덧붙였다.

"그러니까 남부로 가는 건, 그 꼬리를 다 잘라낸 후가 될 거다. 너는 가서 자리나 잘 잡고 있어."

"…알았어. 쉽진 않을 것 같지만, 뭐든 도움이 될 수 있게 해 볼게."

장난스럽게 콧잔등을 씰룩인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은혜는 갚아야지. 안 그래?"

은혜 갚는 귀쟁이라. 귀하네.

속으로 읊조리며 술병을 내려놓은 이안이 턱짓했다.

"저 녀석이나 잘 도와라. 고난이 많을 거다. 너라도 힘이 되어 줘."

"그것도 쉽지 않아 보이는 건 마찬가지지만. 해야지, 뭐. 내가 아니면 누가 쟬 돕겠어. 그런데, 그 징그러운 줄무늬 야옹이는 어쩔 거야? 걘 타락자잖아."

"그건 샬롯이 알아서 하겠지."

죽이든, 살리든.

술을 들이켜며, 이안은 팔메르를 떠올렸다. 심문실에서 눈을 뜬 그는, 꼬리가 잘렸다는 것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잠시 후 샬롯이 앞에 서자, 굴욕적인 표정으로 그녀의 명령에 따랐다. 과거, 그녀가 이안에게 그랬던 것처럼.

"죽일 생각이다."

샬롯의 잠긴 목소리가 번진 건 그때였다. 그녀가 푸스스 침대 위로 몸을 일으켰다.

"필요한 얘기를 전부 들은 뒤에."

"잘 잤어, 야옹아? 몸은 좀 어때?"

"괜찮다. 개운하군."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 그녀가 이안이 앉은 소파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테사이아가 킥킥댔다.

"가뜩이나 못생긴 얼굴인데. 더 못생겨졌네."

샬롯의 한쪽 얼굴에는, 이마에서 턱까지 이어진 네 가닥의 흉터가 깊이 자리했기 때문이다. 이안이 보기에도 저건 완전히 아물 상처가 아니었다. 이미 온몸이 흉터투성이인데, 하나가 더 추가된 것이다.

"나를 더 아름답게 만들어 줄 상처지. 투쟁과 승리의 흔적이니까."

술병을 들며 내뱉은 그녀가 입을 벌린 채 술을 콸콸 흘려 넣었다.

손톱에 찍힌 자국이 가득한 기다란 목이 꿈틀댔다.

빈속에 저렇게 들이부으면 속 쓰릴 텐데.

덜컹.

1층에서 문소리가 뒤를 이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일을 다 끝낸 모양이군."

곧 고소한 냄새가 은은하게 번지기 시작했다. 빵. 소시지. 아마도 해산물 스튜. 어쩌면 면 요리일지도 몰랐다.

"와우…."

샬롯과 테사이아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른 아침 이후로, 다들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것이다. 해가 질 때가 다 되었으니 한나절 이상을 굶은 셈이었다.

"...!"

메브가 벌떡 일어난 건 그때였다. 모여 있는 일행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인 그녀가, 부스스한 머리칼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내뱉었다.

"벌써 식사 시간인가?"

"…식욕이 있으셔서 다행이군."

또 예전처럼 삶의 의욕을 잃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낮게 웃음 지은 이안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일어섰다.

"갑시다. 먹고 갈 곳이 있으니."

***

걸신들린 것처럼 식사를 마친 일행은, 곧바로 마차에 올랐다. 말과 마차는 저택 뒤편의 정원으로 옮겨 둔 상태였다.

"아, 팔메르는 내일 아침에 인도받기로 했습니다. 저, 아니 나세르가 처분 책임자로요."

마차에 오르고서야 기억이 난 듯, 필립이 말했다.

마차가 출발하는 것을 느끼며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군. 배는?"

샬롯과 테사이아의 시선이 동시에 필립에게로 돌아갔다. 슬쩍 둘의 눈치를 살핀 필립이 덧붙였다.

"이틀 뒤 오전에 출항하는 상선이 있다고 합니다. 도시의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상인들은 죄다 이번 주 내로 떠날 예정이라더군요."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때, 마차가 멈췄다.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창을 열자, 군기가 바짝 든 스펠로의 얼굴이 드러났다.

"경, 출타하십니까?"

"그렇소. 교회에 갈 생각이라서."

"역시 신실하시군요…. 제가 경호하겠습니다. 언제 경을 만나려는 이들이 달라붙을지 알 수 없어서요."

죽으라면 죽는시늉도 하겠군.

이안은 낮게 웃음 지었다.

사실 그가 스펠로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그저 귀찮은 일을 피하고 일행을 편히 쉬게 해 주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스펠로 본인을 비롯한 도시의 귀족들은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지금 그는, 용살자와 정화자에게 결백을 증명받은 몇 없는 기사인 것이다. 사실상 면죄부나 다름없었고, 앞으로 불어닥치게 될지도 모르는 피바람에서도 무사할 확률이 높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본인도 그 사실을 알기에 더더욱 이안에게 깍듯한 것이리라.

"그럼, 부탁하겠소."

"예. 교회 내부로도 아무도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창문을 닫았다. 스펠로가 탄 말의 발굽 소리와 함께,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슬쩍 이안을 돌아본 필립이 말을 이었다.

"아까는 시키신 게 많아서 여쭤보지 못했습니다만. 교회로 가시는 건 역시…."

"그래. 백금룡을 뵐 거다."

"...!"

이안의 대답에, 필립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그랬다. 놀란 표정으로 그를 돌아본 건 메브뿐이었다.

가벼운 옷차림에 정화자의 로브만 걸친 그녀는, 지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로 따라 나온 것이다.

"위대한 백금룡을 뵌다고? 지금?"

"미룰 필요 없잖소. 의뢰를 끝냈으면, 보고를 해야지."

보상도 받고.

입을 뻐끔거린 메브가 탄식했다.

"그런… 그런 줄 알았다면, 갑옷과 검을 정갈하게 걸치고 나왔을 것을. 필립, 왜 알려 주지 않았느냐?"

"아, 알고 계실 줄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리. 제 거라도 벗어 드릴까요?"

필립이 냉큼 고개를 숙였다. 오히려 미안한 표정이 된 메브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네 잘못이 아니지. 내가 음식에 너무 정신이 팔려 있었어."

두건을 벗은 그녀가 떡지고 뻗친 머리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테사이아도 긴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이안이 풀썩 웃음 지었다.

"쓸데없는 짓들 하지 마시오. 그 양반은, 우리 겉모습 같은 건 신경도 안 쓸 테니까."

"그래도 어찌… 고결한 분을…."

곧 마차가 멈췄다. 나세르가 문을 열었다. 문 좌우로는 말에 탄 스펠로와 세 명의 경비병이 길을 만들듯 늘어섰다.

더럽게 눈에 띄네, 진짜.

이안은 실소를 삼키며 마차에서 내렸다.

한쪽 대문이 덩그러니 열린, 거대한 교회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본래는 커다란 유리창들로 웅장하게 장식되어 있었겠지만, 지금은 반 이상 깨진 채로 방치된 음산한 모습이었다.

마지막으로 어두워지는 하늘을 올려다본 이안이 걸음을 옮겼다.

일행이 차례로 뒤를 따르는 가운데, 마차 문을 닫은 나세르가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십시오."

계단을 오르다 멈칫한 이안이, 미간을 좁힌 채 그를 돌아보았다.

"무슨 소리야. 너도 따라와, 필립."

"...? 저도요?"

나세르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어 되물었다.

"그래."

드물게도 정말 기쁜 듯한 미소를 지은 나세르가 후다닥 따라붙었다.

교회 내부는 휑하니 비어 있었다. 적당한 높이의 단상과, 그 주위로 잔뜩 피어오른 촛불만이 황량한 예배당을 밝혔다.

"이 큰 도시에 사제님이 한 분도 남지 않다니…. 그래도, 청소는 해 둬서 다행입니다."

필립의 말을 끝으로, 장내에 묘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다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이안은 신경도 쓰지 않고, 아공간에서 작은 부적을 꺼냈다.

아르케아스가 자신을 부를 때 쓰라고 준 물건. 이안은 부적을 잠시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에게 물어야 할 질문도, 들어야 할 말도 아주 많았다.

다시 만날 기회가 언제 또 올지 모르는 만큼, 하나도 빠뜨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물론, 보상도.

화륵-

이안의 손아귀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가 손에 든 부적을 그 안에 던졌다. 부적이 삽시에 불타면서, 한순간 황금빛으로 번쩍이고는 수많은 불티를 흩뿌렸다.

솨아아-

예배당 허공에 휘몰아친 불티들이, 곧 눈부신 황금빛 글자로 화했다.

이안의 스킬로도 읽을 수 없는. 진언이라 부르는 용의 주문이었다.

진언 아래로 눈 부신 빛의 구가 피어올랐다. 그 사이로 흐릿한 실루엣이 번졌다.

…순간이동 마법이라도 되나. 이걸 가르쳐 달라고 하고 싶은데.

이안이 생각하는 사이, 빛의 구 너머로 황금빛 안광이 아른거렸다.

"...!"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일행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심지어 테사이아도 마찬가지였다. 불멸의 존재를 마주했을 때의, 일종의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경외심에 사로잡힌 것이다.

무릎을 꿇지 않은 건 이안뿐이었다.

"...?"

그는 점점 선명해지는 실루엣을 바라보며 슬며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솨아아아아-

그 순간 빛의 구가 사방으로 금가루 같은 빛을 뿜으며 흩어졌다.

"이렇게 빨리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거늘…."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그 한복판의 샛노란 안광이 휘어졌다.

"반갑구나, 이안. 전보다 얼굴이 좋아졌네. 다행이야."

"귀하는…."

눈을 한차례 깜빡인 이안이, 이윽고 말을 맺었다.

"…못 본 사이에 좀 작아지셨군."

커다란 유리병을 품에 안은 아르케아스는, 난쟁이의 모습이었다.

#246화

심지어 이번에는 성별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안이 본 난쟁이 남자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수염이 덥수룩하게 나 있었으니까.

반면 지금 아르케아스의 얼굴은 매끈하고 동글동글하게 곱상했다. 적당히 구불구불한 검은 머리도 목덜미 아래까지 기른 채였다.

그냥 어린 소녀라 여기지 않은 건, 이목구비가 키에 비해 또렷해서였다. 몸의 비율도 그렇고.

잠시 이안을 빤히 올려다본 아르케아스가, 뒤이어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좀 작아져? 만나자마자 나를 웃게 하는구나! 좀 작아지다니…!"

품에 안은 유리병 속에서 액체가 찰랑댔다.

뭐가 저렇게 웃기담.

볼을 긁적이며, 이안이 덧붙였다.

"주문과 몸이 형태를 기억해서, 다른 모습으로 의태하면 불편하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그래. 그랬지. 역시, 내 대행자는 기억력도 훌륭하군."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아르케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슬쩍 옆을 돌아본 그가 덧붙였다.

"이야기에 앞서, 네 벗들을 먼저 소개해 주지 않겠니? 다들 불편해 보이는구나."

아, 그렇지.

이안은 뒤를 돌아보았다. 다들 여전히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였다.

"내 동료들이오. 순서대로 메브, 필립, 샬롯, 테사이아. 그리고… 나세르."

이 녀석은 조금 애매하긴 하지만.

이안이 속으로 덧붙이는 사이, 아르케아스가 종종걸음으로 그의 옆으로 다가섰다.

일행들을 돌아본 그가 입을 열었다.

"다들 일어나 주겠니?"

테사이아를 시작으로, 일행 모두가 차례로 일어섰다. 아르케아스를 빤히 내려다본 건 테사이아뿐이었다. 다들 고개를 살짝 숙이거나, 경외심 가득한 얼굴로 아르케아스 쪽을 조심스럽게 힐끔댔다.

그가 지금 난쟁이 소녀의 모습이라는 건 상관도 없다는 듯한 얼굴들이었다.

"반갑구나. 나는 아르케아스란다. 루 솔라 교단의 성자이며, 비밀과 보물의 수호자이자, 빛바랜 황금이라 불리기도 하지."

일행들을 훑어보며 말한 아르케아스가 미소 지었다. 입이 큰 데다 동글동글한 볼살이 살짝 말려 올라가서, 시원한 느낌이 드는 미소였다.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이 아닌 듯, 그가 곧이어 덧붙였다.

"분명 내 대행자를 여러모로 도와주었겠지. 고맙구나. 다들 수고 많았다."

"벼, 별말씀을…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위대한 분이시여…."

메브가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읊조렸다. 다들 비슷한 표정이었다. 테사이아만 빼고. 그녀는 인사를 받을 만 하다는 듯 고개를 까딱이고 있었다.

아르케아스의 눈매가 더 부드러워졌다.

"나 역시 이안의 전우이니, 이안의 벗은 곧 나의 벗이기도 하지. 그러니 너무 어려워하지 말렴."

…그렇게 말한다고 한순간에 편해지진 않을 것 같은데.

생각하며, 이안이 턱짓했다.

"뭘 들고 오신 거요? 설마, 그게 준비하신 보상은 아닐 테고."

"아니지. 전에 네가 말했었잖니."

이안 쪽으로 몸을 돌린 아르케아스가, 품에 안고 있던 유리병을 들었다.

"다음엔 술을 한잔하자고. 그래서, 약속대로 좋은 술을 준비해왔지."

아, 그 약속.

피식 웃은 이안이 말했다.

"그래서 난쟁이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거요? 술을 마시려고?"

"그럴 리가. 지금 이 육체는, 내가 아니란다."

아르케아스가 작은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지금 내 둥지에 잠들어 있어. 전에 말했듯이,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거든. 그래서 대신, 내 아이의 몸을 잠시 빌렸지."

"아이…?"

"마음으로 낳은 아이란다. 내 막내딸이지. 염려 말렴. 지금 이 아이는 그저 잠들어 있을 뿐이니까. 강제로 몸을 빼앗은 게 아니란다."

"용의 아이…!"

옆에서 새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필립이었다. 이안과 아르케아스의 시선을 받은 필립이 화들짝 고개를 숙였다.

"머, 멋대로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그만…. 저는 그 이야기가, 그저 전설인 줄만 알았어서요."

"사과할 필요 없단다. 그래. 답을 주자면, 전설이 아니란다. 예전엔 인연이 닿은 아이들을 여럿 거뒀지. 혹, 너도 용의 아이가 되고 싶었니?"

"…예."

순간 묘한 표정이 되었던 필립이 더 깊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르케아스의 눈썹 끝이 살짝 내려앉았다.

"미안하구나. 나도 마음 같아서는 전부 거두고 싶었다만, 그럴 수 없게 됐어."

"배, 백금룡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덕분에 그릇된 길로 빠져들지 않을 수도 있었고요. 오히려… 기쁩니다. 그 이야기가 그저 전설이 아니었다는 게."

허둥지둥 덧붙인 필립이 쑥쓰러운 듯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아르케아스의 미소가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

"그래. 너는 내 도움 따위 없이도, 몹시 훌륭하게 잘 자란 것 같구나."

"...!"

필립의 입이 순간 벌어졌다. 곧 귀가 붉어진 녀석이 감격한 듯 고개를 조아렸다. 아르케아스의 시선이 이안에게로 돌아왔다.

"아주 선한 아이로구나. 과연, 네 벗다워."

"괜찮은 놈이오. 겁 많고 눈치가 좀 없어서 그렇지."

필립이 다시 한번 놀란 듯 이안을 바라보았다.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이안이 덧붙였다.

"어쨌든 그럼 지금은, 일종의 원격 조종 중 이시라는 거군."

"원격 조종…? 재미있는 표현이구나. 맞지만, 조금 다르단다. 나는 지금 이곳에 있어. 지금 불가능한 건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지. 그러니 염려 말렴. 그보다, 날 불러낸 이곳은…."

조곤조곤 말을 이으며, 아르케아스가 널찍한 예배당을 돌아보았다.

"…그래. 라클리프인가. 먼 곳까지 왔구나, 이안."

"귀하의 의뢰를 수행하다 보니."

"그랬겠지. 자, 우선은 가자꾸나. 나눌 이야기가 많은데, 서서 할 순 없잖니."

그가 이안에게 술병을 건네며 덧붙였다.

"술도 한 잔 해야 하고."

"미리 말씀드리는데, 보고만 드리려는 게 아니오. 부탁드릴 것도 있고, 여쭐 것도 많소."

"염려 말렴. 나도 그러니까. 마침 밤도 이제야 시작이니, 찬찬히 하나씩 풀어가 보자꾸나."

미소 지은 아르케아스가 몸을 돌렸다. 이미 교회의 구조를 알고 있었던 듯, 멀어지는 걸음걸이가 여상했다.

부탁이 또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일행들에게 턱짓한 이안이 그의 뒤를 따랐다.

돌계단을 오르며, 아르케아스가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위에 올라가면, 잠시 기다려 줄 수 있겠니? 내 대행자와 단 둘이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야."

"물론입니다. 위대한 분이시여."

메브가 곧바로 대답했다.

심지어 나세르도 목이 떨어질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넌 확실히 순수 교도는 아니었네.

내심 피식대며, 이안은 2층으로 발을 들였다.

텅 빈 복도. 벽에 걸린 촛불들이 고요하고 음산하게 이어졌다.

좌우의 열린 방들을 확인하며 나아가던 아르케아스가 곧 멈춰 섰다.

식탁과 의자가 마구잡이로 뒤엉켜 있는, 곰팡내로 퀴퀴한 식당이었다.

"여기서 기다려 주렴. 엉망인 곳에 머물게 해서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저희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고개를 저은 메브와 필립이 냉큼 안으로 들어갔다. 아르케아스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괜찮다면, 술잔을 찾아봐 줄 수 있겠니? 모두 함께 마실 수 있게. 내가 잔을 깜빡했더구나."

"물론이죠. 맡겨만 주십시오."

필립의 대답이 곧바로 돌아왔다.

이 양반, 자연스럽게 잘도 부려먹네.

이안이 소리 없이 실소할 찰나, 그를 올려다 본 아르케아스가 앞을 가리켰다.

"우린, 조금 더 들어가자꾸나."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뒤에 선 테사이아에게 술병을 건넸다.

"기다리고 있어. 엿듣지 말고. 궁금하면 나중에 다 알려줄 테니까."

"그런 생각 안 했어. 걱정 마. 조용히 기다릴게."

재빨리 미소 지으며 술병을 받은 테사이아가 몸을 돌렸다.

안 했긴 개뿔.

이안은 콧방귀를 뀌고는 아르케아스의 뒤를 따랐다. 그는 한차례 코너를 돌고서야 나타난 나무 문을 열었다.

책상 앞뒤로 의자가 놓인 텅 빈 집무실이었다. 아르케아스가 손을 튕기자, 책상 위의 등잔에 불이 붙었다.

책상 안쪽의 의자를 밖으로 끌고 나오며, 그가 턱짓했다.

"앉으렴. 이왕이면 마주 앉자꾸나."

"그럽시다."

드륵, 의자를 옆으로 돌린 이안이 그 위에 앉았다. 그는 앞에 마주 놓은 의자에 풀썩 올라앉는 아르케아스를 눈에 담았다.

여러모로 저번에 만났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고작 두 번째 만남이건만, 일행들과 함께 있을 때처럼 마음이 편한 것이다.

…겉모습이 저래서 더 그런 건가.

"사랑스럽지 않니? 내 도움이 없었더라도 아주 잘 자랐을 아이지. 겉모습으로 오해하지 말렴. 보기보다는 나이가 많단다."

아르케아스가 자신의 짤막한 팔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팔불출 기질도 있으시군.

피식한 이안이 입을 열었다.

"막내 딸이라면, 자식을 꽤 여럿 두셨던 모양이오."

"그렇지. 이 아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잠시 후에 다시 하자꾸나. 지금은, 네가 우선이니까."

이안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르케아스가 미소 지었다.

"사실, 몹시 놀라고 있단다. 네가 과업을 완수하리란 건 확신했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거든. 아직 채 1년도 지나지 않았잖니."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시겠지만, 뜸 들이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말이오. 의뢰에 대한 이야기부터 먼저 들으시겠소?"

"좋지. 제법 긴 이야기일 것 같은데. 괜찮다면, 그냥 보여주지 않겠니?"

"보여 달라고…?"

이안이 슬쩍 한쪽 눈매를 꿈틀댔다. 과거, 그의 머리 뚜껑을 열려던 누군가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태연하게 손을 내밀면서, 아르케아스가 덧붙였다.

"그래. 네가 허락만 한다면."

"…손만 잡으면 되는 거요?"

"물론이지."

하긴. 이 양반이 머리를 열어 볼 리는 없겠자.

속으로 읊조리면서도, 이안은 황금빛이 아른거리는 작은 손을 잠시 바라보았다.

"염려 말렴. 네 생각까지 읽지는 않을 테니까. 그저 네가 보고 들은 것들만 함께 돌아볼 거란다. 네가 허락하는 만큼만. 항해의 키도 네가 쥐게 될 거야."

아르케아스가 조곤조곤 덧붙였다.

이안이 생각을 읽히는 걸 걱정한다 여기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기억을 엿보는 거라면, 아르케아스에게 상태 창도 보이지 않을까 하는. 만약 그렇다면 이 용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시작 지점도 고를 수 있소?"

"물론이지. 저번에 우리가 헤어진 이후부터 시작할 거란다."

그렇다면야.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아르케아스의 손을 감싸 쥐었다. 아르케아스의 눈에 맺힌 안광이 황금빛으로 일렁였다.

"내 마력을 받아들이렴. 내 의식도."

동시에 손아귀를 타고 아르케아스의 마력이 밀려들었다. 용의 마력. 이미 전에도 느껴 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혼돈의 파편이 짧은 울림을 토해내는 가운데, 용의 마력이 이안의 전신을 가득 채웠다.

시야 가장자리에 황금빛이 아른거렸다. 어느새 눈을 감고 있던 아르케아스가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이건 대체…? 조금만 더 도와주지 않겠니? 쉽지 않구나."

뭐가 잘 안 되는 거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눈앞에 선택 퀘스트 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기억의 항해.

이안은 퀘스트를 수락했다. 그 순간 시야가 황금빛으로 물들고, 모든 감각이 뿌옇게 흐려졌다.

일순간 풍경이 변했다.

북부, 트라벨가. 아르케아스와 헤어진 직후였다.

모든 게 영상을 빨리 감기 한 것처럼 빠른 속도로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안이 정신을 집중하자 모든 게 흘러가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이건 좀 신기한데.'

생각하면서도, 그는 곧 어렵지 않게 기다리던 순간을 포착했다.

글루미르, 흡혈 여왕의 저택이었다. 주위 풍경이 흘러가는 속도가 순간 조금 느려졌다. 울부짖는 여제. 그리고 최후의 순간 그녀가 보여 준 환영들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그가 다음으로 주목한 건, 역천룡의 사도였던 흑기사를 마주친 순간이었다. 놈을 죽이고 나타난, 신기루처럼 아른거리던 강대한 기척도.

아르케아스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이안은 멈추지 않고, 그저 그에게 보여 줄 필요가 있는 순간들로 나아갔다. 어느새 기억을 훑는 데에 익숙해져서, 자유자재로 속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

제국에 발을 들이기 전, 먹구름 너머로 일렁이던 그림자. 드네로브의 의식. 불결한 거목. 그리고 그를 따라 온 정화자.

마지막은 당연히도, 크랄렌 공작이었다. 그가 떠들어 대던 말들. 그리고 메브에게 목이 달아나던 순간.

그리고, 지금.

솨아아아-

그순간 시야가 다시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용의 마력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의 의식이 엿가락처럼 늘어나며 함께 빨려 나간 건 그 순간이었다.

동시에 아주 단편적인 광경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수많은 용과 인간의 시체로 뒤덮인 평야. 슬픔으로 가득 찬 포효.

족쇄처럼 조여들어 오는 빛의 고리. 어둠 속의 검붉은 안광. 또다른 전쟁과 수많은 죽음. 그리고 시야를 가득 채우며 끝없이 솟구친 어둠.

"...!"

튕겨 나가듯 의식이 되돌아왔다.

모든 감각이 선명해지는 가운데, 눈앞으로 퀘스트 완료창이 떠올랐다.

창을 닫아 버리면서, 이안은 앞에 앉은 아르케아스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방금 본 건, 이 용의 기억이었던 것 같았으니까.

미묘한 미소를 짓고 있던 아르케아스가 말했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하구나. 의도한 건 아니었다."

정말 당황한 거였군.

내심 읊조리며, 이안이 입을 열었다.

"용도 주문을 실수할 때가 있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생길 경우에는. 가끔."

황금빛이 아른거리는 눈으로 이안을 뚫어질 듯 응시하면서, 아르케아스가 몸을 기울였다.

"무언가가 네 영혼을 감싸고 있더구나. 내 마력조차 파고들지 못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247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

이안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르케아스가 자신의 동글동글한 턱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구나. 마력도 아니고, 네가 품은 혼돈과도 전혀 달랐어. 처음 느껴보는… 전혀 새로운 무언가였지. 혹, 짐작 가는 부분은 없느냐?"

그거, 설마 상태창인가?

이안의 눈매가 절로 가늘어졌다.

직전에 퀘스트 창이 떠올랐던 걸 보면, 아예 터무니없는 추론은 아니었다.

'그럼 뭐, 상태창이 내 영혼에 달라붙어 있기라도 한 건가.'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부분은 언제나 말을 아끼는 게 좋았다. 상대가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써먹기 좋은 적당한 핑계도 있었다.

"글쎄. 내 혈통의 힘일지도."

"흐음… 아무리 고대인의 혈통 인자가 발현한 것이라 해도 너 같은 능력은…. 그래. 나도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지. 아예 불가능한 일도 아니야."

생각에 잠긴 채 아르케아스가 중얼댔다. 이안은 그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방금 본 환영을 곱씹었다.

"혈통의 힘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저 황실의 아이들도, 저마다 다른 능력을 타고나니까. 너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르지. 무엇이건, 정말이지 귀중한 힘을 타고난 것이다. 이안."

그가 새삼스러운 눈길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전에 네 말을 들었을 때는 의문점이 나았었다만. 직접 겪어 보니 네가 얼마나 특별한지 확실히 알겠구나. 그 무엇도 네 영혼을 멋대로 물들일 수는 없겠어. 그래… 어쩌면 네가 그토록 담대하고 침착한 것도 그 덕분일지도."

…그건 그냥 내 정신력이 높아서 그런 걸 텐데. 상념에서 깨어나며 생각한 이안이, 그를 마주 보았다.

"그래서, 어떠시오? 내 기억을 들여다본 소감은."

"…그래. 내가 잠시 샛길로 빠졌었구나. 지금 중요한 건, 네가 타고난 능력이 아니지."

아르케아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직도 이안의 손을 맞잡은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반대쪽 손으로도 이안의 손등을 덮으며, 그가 덧붙였다.

"아주 힘들었겠더구나. 고생했다. 그리고 미안하구나. 그토록 위험한 짐을 짊어지게 한 주제에, 도와주지도 못해서."

"...."

이안의 한쪽 눈썹이 슬쩍 말려 올라갔다. 이런 말을 들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해서였다.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새삼스러웠다.

…뭘 또, 위안이 되고 난리야.

이윽고 낮게 웃음 지은 이안이 입을 열었다.

"그건 사실이지. 그래서 이번 일의 마무리가 잘 안 풀리면, 귀하께 다 떠넘길 생각이었소. 그럴 기회가 오지는 않았지만."

"아쉽구나. 기꺼이 도왔을 것이거늘."

"아쉬워하실 필요 없소. 훌륭한 보상으로 보답해 주시면 되니까."

"물론이지. 내가 너를 모를까."

아르케아스가 싱긋 미소 지었다.

"본래는 내가 가진 보물을 하나 내어줄 생각이었지만. 너는 내가 예상한 것보다 더 큰 위험을 감수하고, 더 대단한 업적을 이루어 냈더구나. 그러니 나도 그에 걸맞은 보상을 해야겠지. 분명 신들께선 노여워하시겠지만…."

톡톡, 작은 손이 이안의 손등을 토닥였다.

"염려하지 말렴. 그건 내가 감당할 테니."

뭐, 초과 달성 보상 같은 거라도 되는 건가. 생각하며,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뭔지는 몰라도, 기꺼이 받겠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아르케아스의 손아귀에, 문득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이안. 조심하렴."

이안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의미심장하게 일렁였다.

"혼돈에 잡아먹히지 않게. 넌 아주 위험한 경험을 했던 거란다."

…역시, 이 이야기도 하시는군.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소. 너무 염려하지는 마시오. 내 영혼이 어떤 상태인지 직접 겪어 보셨잖소."

"물론 그렇지. 하지만 그 힘을 달리 혼돈이라 부르는 게 아니란다. 늘 경각심을 가지렴. 만약 그게 끝내 널 삼키고 만다면…."

"믿으시오. 나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인간으로 남을 거니까."

무엇을 걱정하는지 이미 안다는 듯한 말투에, 백금룡의 입매가 다시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래… 믿으마. 그리 확언해 주니, 그래도 조금은 마음이 놓이는구나."

만족스럽게 이안의 손등을 토닥인 그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자세를 고쳐 앉으며 한결 느긋해진 말투로 말을 이었다.

"어쨌든… 뜻밖이긴 하구나. 그 에드워드 크랄렌이 타락자이자 의원이었다니. 그의 죽음과 정체가 중앙에 알려지고 나면, 여파가 만만치 않겠어."

"도시의 귀족들은 죄다 목이 달아날 걱정부터 하더군. 시민들은 불안에 떨고 있고 말이오."

"그래…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할 과정이지.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말렴. 인간들의 역사는 늘 이런 식으로 이어져 왔으니까."

"의외로 무책임하시군."

이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아르케아스가 씁쓸하게 말을 이었다.

"흘러야 할 피는 흐르겠지. 하지만 생각 보다 많이 흐르지는 않을 것이란 얘기란다. 혼란은 곧 기회이기도 한 법이니까. 황실과 교단은, 그걸 놓치지 않을 거란다. 아마…."

슬쩍 고개를 옆으로 까딱인 그가 덧붙였다.

"권좌를 노리는 새싹들과, 교단의 주류가 되고자 하는 자들은 특히."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그저 고개만 까딱일 뿐이었다. 아르케아스의 미소가 묘해졌다.

"중앙의 사정 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는 거구나. 궁금한 게 따로 있는 거야, 그렇지?"

"뭐, 아예 없진 않소만. 우선순위는 아니오."

그놈의 황실과는, 되도록이면 엮이지 않을 생각이기도 하고.

이안은 속으로만 덧붙였다.

게임에선 그들과 엮이면서 걷잡을 수 없이 4챕터로 접어들게 되지 않았던가. 중앙으로 가는 걸 조심스러워한 이유이기도 했다.

아르케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긴. 당장 그보다 더 궁금한 것들이 많겠지. 전부 물어보렴. 답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아는 대로 이야기해 줄 테니."

이안은 잠시 그의 부드러운 눈빛을 마주 보았다.

상태창에 대한 질문은 할 필요가 없어졌다.

아르케아스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 오래 산 용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호기심이 많은 편이었으니까. 알아보지 못할 언어로 쓰여진 무언가를 보았다면, 물어보지 않을 리 없었다.

상태창은, 어떤 식으로든 오로지 그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다.

대신, 이안은 의뢰와 관련된 것부터 묻기로 했다.

"내게 의회의 일원을 제거해 달라 부탁하신 이유가 무엇이오?"

"…내가,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었니?"

"돌려서 말씀하시긴 했었지. 그것 말고, 진짜 이유 말이오."

이안이 슬쩍 고개를 까딱였다.

"나는 귀하의 뜻이 대륙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라 여겼소만. 막상 여기까지 오고 보니,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말이오."

방금 본, 당신의 기억도 그렇고.

뒷말을 삼킨 이안이, 아르케아스의 눈을 빤히 마주보았다.

"혼란이 갈수록 커지고 있잖소. 놈들의 균형이 무너지면, 아마도 더 큰 혼란이 시작될 테고."

"그래… 역시, 내 대행자는 영특하군."

기특하다는 듯, 아르케아스가 다시 한번 이안의 손등을 토닥였다.

이건 대체 언제까지 잡고 있을 거람. 생각하는 사이, 아르케아스가 말을 이었다.

"그래. 평화는 내 목표가 아니란다. 원하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이지. 너희 인간들이 원대한 야망을 품는 존재들인 이상. 하지만 이 세상이 안정을 되찾길 바라는 건 사실이란다. 적어도, 최종적으로는."

"…그러기 위해서 혼란이 일어날 걸 알면서도 부탁하셨단 거요?"

"내 우둔한 머리로는, 전혀 피를 흘리지 않을 방법은 찾을 수가 없더구나. 대신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고, 적은 피를 흘릴 방법을 떠올렸을 뿐이란다."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가능하다면, 흘려 마땅한 이들의 피가 더 많이 흐르게 하면서. 물론 이마저도 너라는 귀중한, 아니, 유일한 존재를 만나지 못했다면 시작조차 하기 힘들었겠지만."

"...."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안정을 위한 차악을 골랐다, 이건가?

전에도 느꼈지만, 아르케아스는 친절한 척하면서 불친절했다. 이야기를 멋대로 건너뛴다는 부분이 특히.

다행인 건, 어쨌든 친절하기는 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대륙의 안정을 되찾는단 말씀이시오? 아시다시피 대륙은 이미 개판이고, 앞으로 더 개판이 될 텐데."

질문에는 늘 어떤 식으로든 대답을 돌려줬으니까.

아르케아스가 낮게 웃음 지었다.

"너는 늘, 한 걸음을 더 들어오는구나. 이상하지. 그 또한 기꺼우니. 그래. 너는 알 자격이 있지. 본래는 술을 마시면서 하려던 이야기이긴 하지만. 미리 알려주마. 사실, 그리 놀라운 얘기도 아니란다."

이안의 눈을 마주 본 그가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나는, 검은 벽을 없애고 싶은 거니까."

물론, 이안을 순간 굳어지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더 이상 게임을 진행할 수 없게 되었던 곳이, 바로 검은 벽 너머였으니까.

물론, 아르케아스의 입에서 그 이름이 튀어나오리란 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검은 벽. 이제는 그 존재가 너무 당연해져 버린 괴물이지. 하지만 동시에 그건, 이 순간에도 조금씩 계속해서 대륙을 좀 먹고 있어. 그러니, 내가 그걸 없애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하지 않겠니?"

아르케아스가 은근한 미소를 머금으며 덧붙였다.

멈추고 있던 숨을 내쉬며, 이안이 물었다.

"그 방법을 찾는 건, 황실과 교단의 역할 아니오?"

"그렇지. 하지만 그들이 방법을 생각해 낼 때쯤엔, 모든 게 돌이킬 수 없어진 뒤일 거란다. 그들은 그게 당장 사라지길 원하지 않거든."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평소라면 설정 놀음이라 생각하고 흘려들었겠지만. 검은 벽과 관련된 부분은 그러기 어려웠다.

그것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도 드물 뿐 아니라, 그가 놓친 퀘스트에 대한 단서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케아스의 말이 이어졌다.

"그보다 그걸 연구하고,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지. 마탑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마법사들이 검은 벽에 매료되어 있다는 건, 이미 비밀도 아니잖니. 그리고 원탁은, 그걸 가장 좋지 않은 방식으로 이용하려던 자들이지. 그래서 네게 부탁한 거란다. 그들의 계획이 성공하게 둘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방법은 찾으셨소?"

"가닥은 잡았지. 그래… 보아하니 너도 검은 벽에 관심이 많았구나. 하긴. 놀랄 일은 아니지. 마법사는 늘,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매료되곤 하니까."

아르케아스가 낮게 웃음 지었다. 이안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며, 그가 흥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대륙의 절반을 집어삼킨 미증유의 마경에 어찌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있을까. 들어간 자는 있어도 나온 자는 없으며, 그 너머가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도 알려진 바가 없지. 어째서 광기와 혼돈을 흩뿌리는지도 알 수 없으니. 그야말로 유혹적이야."

"그 의문들에 대한 답을, 알고 계시다는 듯한 말투시군."

"그럴 리가."

내뱉으면서도, 아르케아스의 미소가 은근해졌다.

"그저 추측만 할 뿐이란다. 나 역시 모든 걸 알지는 못해. 그 너머를 직접 본 것도 아니잖니? 단 한 명이라도 되돌아온 이가 있으면 좋겠구나. 그럼 더 많은 것들이 명확해질 텐데."

"...."

그게 바로 난데.

이안은 속으로만 읊조렸다.

아마 그는 검은 벽 너머를 일부나마 직접 본, 벽 바깥의 유일한 존재일 터였다.

물론, 그 사실을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상대가 아르케아스라 할지라도.

아주 귀찮아질 건 물론이고, 어떻게 알고 있느냐는 질문을 피할 수 없을 테니까.

게임에서 가 봤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걸 알아듣는 건 둘째 치고, 믿어 줄 리도 없었다.

게다가 현실이 된 지금은, 분명 그때보다 더 끔찍해졌을 터였다.

"설마, 직접 검은 벽을 넘으실 생각이시오?"

대신 이안은 아르케아스의 속내를 파악하는 데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게 훨씬 더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럴 리가. 교단도 황실도, 심지어 신도 허락하지 않을 거란다. 밖에서 무너뜨려야 해."

"그 너머에 뭐가 있을 줄 알고."

"뭔가 있겠지. 분명, 끔찍한 무언가가. 하지만 네 덕분에, 대비할 시간이 충분히 생겼을 거란다. 내가 준비할 시간도 마찬가지고."

잠시 말을 멈춘 아르케아스가, 이윽고 산뜻하게 미소 지었다.

"더는 묻지 말렴. 이 이상은 알려줄 수 없단다. 아무리 너라도. 물론 염려도 하지 말렴. 네게 그걸 대신해 달라 부탁하지도 않을 것이니."

"부탁하셨다고 해도, 거절했을 거요."

아르케아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그래. 그렇겠구나. 그렇다 해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으렴. 근시일 내는 아니겠지만, 나는 언젠가 검은 벽을 무너뜨릴 거란다. 그 이후에는 네 도움이 필요해질 수도 있어. 네가 원치 않더라도."

"...."

이안은 대답 대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것도 거대한 흐름이라는 거지.

그는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검은 벽을 넘어야 할 운명이었다.

다만 그 시점을 최대한 늦출 생각이었는데. 아르케아스가 검은 벽을 무너뜨릴 계획이라면, 그 한계 시간이 정해진 것이 다름없었다.

말했듯, 외부에서 벽을 무너뜨린다 해서 그 안에 있는 것들이 사라지지는 않을 테니까.

지금까지의 경험상,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 없었다.

분명 아비규환이 펼쳐지리라.

'그러니까 무너뜨리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어떻게 설명하느냐는 둘째 치더라도, 설사 아르케아스를 막는다고 해도 다른 누군가가 생겨날 게 분명했다.

미지의 영역이지만, 검은 벽은 어떤 식으로든 끝내 무너지게 될 운명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게임의 그가 벽 너머에 발을 들였었던 것도 그 확신을 뒷받침했다. 넘어갔으니, 다시 돌아오게도 되지 않았겠는가.

'…어떻게 그러는지는, 공략 글에서도 안 읽어 봤지만.'

이안의 얼굴을 관찰하듯 바라보던 아르케아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너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한 모양이구나."

"…아니오. 매도 알고 맞아야 대비를 하는 법이지."

한숨 쉰 이안이 아르케아스를 마주 보았다.

"남은 시간이 충분하기만을 바랄 뿐이오. 내가 살아야 남도 도울 것 아니겠소."

"참으로 너 다운 이유로구나. 말했듯, 염려 말렴. 적어도 의회가 자멸한 후가 될 거란다. 그들이 만들어낸 혼돈이, 제국을 하나로 똘똘 뭉치게 하겠지. 내가 뭔가 시도하는 건 그 이후가 될 거야."

"다행이군…."

이안은 안도를 숨기지 않았다. 어쨌든 그에게는 시간이 더 필요했으니까.

게임일 때와 비교하면 확실히 더 강해지긴 했지만. 현실이 된 4챕터에서도 통할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망캐라는 본질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남은 능력치 포인트와 스킬 포인트를 당장 전부 투자한다 해도, 여전히 대마법사라 불릴 수는 없을 테니까.

잘 쳐줘도, 마법을 아주 잘 쓰는 전사 정도일 터였다.

그때, 그의 표정 변화를 재미있다는 듯 지켜보던 아르케아스가 말을 이었다.

"사실 나는, 네가 나의 대행자임을 숨기고 다닐 줄 알았단다. 그런데 의외로, 너는 그 사실을 숨기지 않더구나. 오히려 살뜰하게 이용했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소만. 딱히 숨길 이유도 없어서 말이오."

"그래. 탓하는 게 아니란다. 오히려 영민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고작 이름만으로도 네게 도움을 줄 수 있어서 다행이기도 하고. 그래서 이 이야기들을 해 줘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싱긋 미소 지은 아르케아스가 덧붙였다.

"어쩌면, 원치 않더라도 네가 어떤 과업을 수행하고 있었는지 밝혀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르잖니. 그때 적당한 핑계를 만들어 주고 싶었어. 내가 내린 과업을 사실대로 밝힐 수는 없잖니?"

"대신, 귀하의 목적을 대라는 말씀이시군. 이해했소."

"그래. 너는 내 부탁으로 검은 벽과 관련된 정보를 조사하고, 그걸 무너뜨릴 방법을 찾고 있는 거란다. 사실은 그러면서, 공식적으로는 계속 내 대행자로 남아 주었으면 한다고도 부탁하려 했었지. 더는 아무런 과업도 수행하지 않을지라도."

"…명목상으로라도 말이오?"

이안이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아르케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주기만 하더라도 교단은 계속 너를 주목할 테고, 나는 그만큼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네 기억을 보니, 그런 부탁은 할 수가 없겠더구나. 그저 주목하는 걸 넘어, 네 목숨을 노리는 자들까지 생겨 버렸으니."

"뭐, 그럼 공식적으로는 계속 그런 걸로 하겠소."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읊조리던 아르케아스가, 이어진 이안의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계속 그렇게 해 주겠다고?"

"이제와서 더는 백금룡의 대행자가 아니라고 한들, 내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수긍하고 물러날 리가 없잖소."

한쪽 어깨를 까딱인 이안이 말을 이었다.

"어차피 똑같을 텐데. 못 할 것도 없지. 게다가 말씀하셨다시피, 귀하의 이름을 파는 게 도움이 되는 순간도 많아서 말이오. 그렇다고 떠벌리고 다닐 생각은 없지만.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앞으로도 계속 써먹겠소."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뻐끔댄 아르케아스가, 이윽고 내뱉었다.

"정말이지, 실용적인 이유로구나."

이안은 풀썩 웃음을 흘렸다. 저런 표정을 다 짓다니. 덕분에 답답하던 기분이 조금은 유쾌해졌다.

#248화

아르케아스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기쁘구나. 얼마든지 그러렴. 내 공식적인 대행자는, 앞으로도 너뿐일 거란다."

"대신, 귀하께서 알려주실 수 있는 부분들도 다 알려 주셔야 할 거요. 말했듯이, 매도 알고 맞아야 대비를 할 것 아니겠소."

"그래… 물론 그렇겠지. 네가 대행자로 남아주지 않았더라도 알려줄 생각이었다."

언제 즐거워했었냐는 듯, 아르케아스의 미소가 다시 씁쓸해졌다.

머뭇대는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본 이안이, 옆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그 얘기는, 나가서 계속하지 않으시겠소?"

"나가서?"

"은밀하게 나눠야 할 얘기는 일단락된 것 같아서 말이오."

"…흠. 그래.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긴 하였지. 네 벗들이라면 믿지 못할 이들도 아니겠고. 그러자꾸나."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선 아르케아스가, 묘하게 장난스러운 눈빛이 되어 이안을 돌아보았다.

"네 의뢰의 보수도, 벗들이 보는 앞에서 주도록 하마. 그편이 더 즐겁잖니?"

"이미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셔놓고, 뭐하러 물으시오?"

풀썩 웃은 이안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르케아스가 어서 가자는 듯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못 이긴 척 걸음을 옮기면서, 이안이 내뱉었다.

"그런데, 이 손은 언제까지 잡고 계실 거요?"

"네 벗들이 보기 전까지."

"...?"

"오늘이 지나면 또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르잖니. 기회가 있을 때 예뻐해야지. 내 하나뿐인 대행자인데."

"그건 대외적인 거고, 사적으로는 전우로 돌아간 것 아니었소?"

태연하게 걸음을 옮기며 그를 올려다본 아르케아스가 미소지었다.

"그것도, 유일하긴 마찬가지란다."

"...."

***

"오, 오셨습니까…!"

이안과 아르케아스가 식당으로 들어서자, 의자를 튕겨내듯 일어선 필립이 고개를 숙였다.

나머지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필립처럼 요란을 떨지 않았을 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백금룡과 그의 대행자에게 예의를 갖췄다.

필립은 로브를 벗어 버리고 전신 판금 갑옷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였다. 벗은 로브는 잘 개어서 식탁 옆에 올려 두었다.

메브는 여전히 로브를 걸친 채였다. 그게 벗은 차림보다 더 단정하다 여기는 것이리라.

가볍게 손사래를 친 아르케아스가 미소 지었다.

"늦어서 미안하구나. 반가움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어."

"아닙니다, 위대한 분이시여. 전혀 길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 말하려던 테사이아의 입을 샬롯이 막는 가운데, 메브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채 장내를 돌아보던 이안이 내뱉었다.

"짧게 느껴질 만하군. 다들 아주 바빴겠는데."

식당의 전경이 말 그대로 드라마틱하게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망령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건만.

지금은 모든 식탁과 의자가 반듯하게 각잡혀 놓여 있었다. 벽과 식탁에도 촛불들이 반짝였고, 쓸고 닦기까지 한 듯 돌바닥 역시 깨끗했다.

"아무리 그래도, 위대하신 분을 지저분한 곳에서 모실 수는-"

"아르케아스."

메브의 말을 자르며, 아르케아스가 미소 지었다.

"이름으로 불러주겠니, 메브?"

"...! 예, 아르케아스 님."

살짝 숨을 들이켰던 메브가, 영광이라는 듯 고개를 숙였다.

"사실, 나는 알려진 것과 달리 전혀 위대하지 않단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덧붙인 아르케아스가 손짓했다. 일행들이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이 와중에도 샬롯은 여전히 손을 뻗어 테사이아의 입을 막은 채였다. 테사이아는 눈동자만 굴려 그녀를 노려보면서도, 평소처럼 손을 쳐내지는 않았다.

"잠시 기다리렴."

이안에게 속삭인 아르케아스가, 일행이 앉은 길쭉한 식탁의 측면으로 향했다.

가장 앞의 두 자리만을 비워 둔 식탁 위에는 주석 잔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르케아스가 가져온 술은 식탁 정중앙에, 개봉도 하지 않은 채로 자리했다.

아르케아스가 멈춰 섰다. 그는 여전히 의자에 앉은 일행보다도 작았다.

"내 대행자의 과업을 도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내가 직접 보니 정말 다들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해 주었더구나. 물론 모두가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일행을 차근히 훑던 아르케아스의 시선이, 맨 끝자리에 앉은 나세르에게서 잠시 멈췄다. 나세르의 미소가 석상처럼 굳어지는 가운데, 그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 해도,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지.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마. 너희들의 이름을 다음 천년이 지나도 기억할 것이다."

일행들이 저마다 감격한 듯한 얼굴이 되는 가운데, 아르케아스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물론 인사만으로 끝내기엔 아쉽지. 너희들에게도 작은 선물을 주마. 작은 보답이라 너무 서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구나. 마음 같아서는 내 둥지에 잠자고 있는 보물들을 하나씩 선물해 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단다."

내뱉으며, 그가 양팔을 식탁 위로 얹었다. 양 손아귀에서 황금빛 광채가 번지더니, 곧 하나의 작은 진언을 이뤘다. 아르케아스가 짧은 왼팔을 그 한복판으로 밀어 넣었다.

팔은 진언을 뚫고 나오는 게 아니라, 그 한복판으로 파고들듯 사라졌다.

"...!"

일행들이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는 가운데, 아르케아스가 그 안에서 꺼낸 물건들을 순서대로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성인 손가락 두 개 정도의 길이와 두께를 지닌 유리병들이었다.

밀봉된 내부에는 금색을 넘어 옅은 갈색에 가까운 액체가 담겨 있었다.

파스슷….

진언이 증발하듯 흩어졌다.

삽시에 장내가 확 어두워진 듯한 느낌이 드는 가운데, 식탁 위에 놓인 여섯 개의 유리병 속에 은은한 황금빛이 일렁였다.

"하나씩 나눠 가지렴. 만약 목숨이 위험한 순간이 온다면, 안에 든 걸 전부 마시도록 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너희를 구해 줄 거란다."

아르케아스 가까이에 앉은 메브와 샬롯의 시선이, 그를 지나 자연스럽게 이안에게로 돌아왔다.

이안이 사양하지 말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메브와 샬롯이 아르케아스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르케아스 님."

"감사합니다… 위대한 분이시여."

유리병을 조심스럽게 집어 든 둘이 옆 사람에게 하나씩 전달했다. 일행들의 감사 인사가 이어졌다. 다들 유리병 속의 은은한 빛에 시선을 빼앗긴 채였다.

아르케아스가 덧붙였다.

"그 병도 버리지 말렴. 아주 단단해서 좀처럼 깨질 일이 없는 물건이니까. 물론 그걸 쓸 일이 없으면 더 좋겠다만…. 너희들은 위험과 불의를 외면하지 못하는 성격들 같더구나."

그의 시선이 뒤에 선 이안에게로 돌아왔다.

"내 대행자처럼. 놀라운 일은 아니지. 벗은 서로 닮는다고들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한 병은 네 거란다. 이안."

그의 손짓에 걸음을 옮기면서, 이안이 내뱉었다.

"이것도, 귀하의 피로 만든 거요?"

"여러 신의 축복이 깃든 성수에 내 피를 한 방울 섞어, 약간의 주문을 곁들인 물건이지."

"생명의 영약이… 위대하신 분의 작품이었던 거군요."

나세르가 내뱉은 건 그때였다. 일행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였다. 나세르가 유리병에 차마 손도 대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정화자들이 아주 위험한 임무에 투입될 때 교단에서 종종 지급하곤 하는 영약입니다. 이걸 받으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의미였죠. 그런 만큼 효과는 확실합니다. 마시면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고 힘이 솟으니까요. 하지만…."

나세르가 유리병 안의 액체를 빤히 바라보며 덧붙였다.

"이렇게까지 색이 진한 건 처음 봅니다."

"그건 몇 가지 공정을 더 거쳐 희석한 물건이라 그렇단다. 수량을 늘리려면 어쩔 수 없었거든. 지금 너희에게 주는 건, 그보다 조금 더 좋은 거란다. 사실, 이게 진짜 생명의 영약이라 할 수 있지."

친절하게 설명한 아르케아스가 미소 지었다.

"그렇다고 희석해서 쓸 생각은 하지 말렴. 개봉한 순간 바로 마시지 않는다면, 금방 쓸 수 없게 된단다."

"명심하겠습니다."

"예. 잊지 않겠습니다."

일행들이 저마다 대답하는 사이, 이안은 자신의 병을 집어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정보창도 물론 확인할 수 있었다. 유일 등급의 소모품. 생명의 영약.

생명력을 7할까지 단번에 회복시켜 주는 데다 육체에 작용하는 모든 상태 이상을 정화하고, 일정 시간 동안 추가적인 회복력과 저항력까지 부여하는 물건이었다.

나세르가 말한 영약은 그도 게임에서 본 적이 있었다. 회복의 영약이라는 이름으로. 그것과는 여러모로 비교도 할 수 없는 성능이었다.

이건 먹으면서도 아깝겠는데….

생각하며, 이안이 입을 열었다.

"이런 귀중한 영약을 이렇게 여러 개 넘겨주셔도 괜찮으신 거요?"

"조금 무리하고 있긴 하단다. 하지만, 이미 내친걸음이잖니. 자. 그거 내려놓고 이리 가까이 서렴."

아르케아스가 옆으로 몸을 돌리며 미소 지었다.

아, 그래. 이제 내 차례란 거군.

선선히 영약을 내려놓은 이안이 그를 마주 보고 섰다.

일행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가운데, 더 짙어진 황금빛 안광을 머금은 아르케아스가 입을 열었다.

"왼손을 이리 주겠니?"

"...."

이안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왼손을 내밀었다. 아르케아스의 양손이 그의 왼손을 아래위로 덮었다. 작은 손아귀에서 황금빛 용의 마력이 번졌다.

"이안 호프. 이 세상에 남은 내 유일한 전우이자 대행자야. 너는 내가 내린 무거운 과업을 훌륭하게 완수해 주었다."

아르케아스의 목소리 역시, 어느새 메아리치듯 울리고 있었다.

"감사의 증표를 이 왼손에 새기노니. 너를 위험으로부터 지켜줄 단단한 방벽이 되리라."

방벽…?

이안이 뭔가 내뱉기도 전에, 샛노란 광휘가 눈부시게 번졌다.

솨아아….

빛이 이내 잦아들었다. 광원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아르케아스가 손을 뗐음에도, 이안의 왼손 손등에 여전히 남아 일렁였다.

육각형을 그리는 황금빛 선. 그리고 그 한복판에, 자그마한 진언이 원을 그리며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진언 회로였다.

"...."

손등을 내려다보는 이안의 입이 설핏 벌어졌다. 저마다 눈을 감거나 얼굴을 가렸던 일행들도 경탄을 숨기지 못하는 가운데.

"이제야 마음이 조금은 놓이는구나. 자. 한번 확인해 보렴."

미소 지으며 말한 아르케아스가, 아직 황금빛이 아른거리는 양손을 활짝 펼쳤다.

지잉-

그 순간, 이안의 손등에 새겨진 진언 회로에서 황금빛 육각형이 솟구쳤다.

이안의 팔뚝을 절반이나 가릴 정도의 크기였다. 육각형의 중심부는 손등에서 살짝 떨어진 허공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안이 손을 움직이자 자력에 고정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정화자의 두건 망토에 새겨진 백금의 가호와 달리, 완전히 불투명한 황금색 역장이었다.

이안이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정보창을 멍하니 눈에 담는 사이, 아르케아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낯설지는 않을 거야. 나와 함께 싸울 때에, 비슷한 것을 이미 사용해 보았잖니. 물론, 이건 그보다 더 좋은 거란다."

"방패… 인 겁니까?"

필립이 더듬대며 물었다.

아르케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대행자는 지나치게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으며, 위험할수록 더 몸을 던지는 무모한 성정을 지녔지. 용과 싸울 때조차 그랬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한데, 그러면서도 결코 방패는 들지 않더구나. 지켜 보는 입장에선 불안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지."

숨 쉴 틈 없이 내뱉은 아르케아스가, 황금색 방패의 끄트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러니 직접 선물할 수밖에. 결코 몸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으로."

"아니…."

드물게도 얼빠진 표정으로 굳어있던 이안이 비로소 탄식을 흘렸다. 황망하게 아르케아스를 마주 본 그가 말을 이었다.

"보상은… 내가 고를 수 있는 거 아니었소…?"

"저번에는 그랬지. 하지만 이번에도 그러리라 약속한 기억은 없구나. 혹, 또 나의 진혈을 달라고 할 생각이었니?"

싱긋 입술을 말아 올린 아르케아스가 덧붙였다.

"용의 진원은 마실 때마다 효과가 더해지는 영약이 아니란다. 너는 이미 진원을 품었으니,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거야."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왜. 마음에 들지 않는 거니?"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는 듯, 이안이 눈을 깜빡였다.

"너무 눈에 띄잖소. 내가 마법사라는 건, 알고 계실 텐데…?"

"잘 알지. 그런데 내 대행자는 날붙이를 휘두르며 싸우는 걸 더 좋아하더구나. 참으로 신기한 일이지."

아르케아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네가 왜 방패를 사용하지 않는지 알고 있단다, 이안. 마법을 사용하기 불편해서겠지. 하지만 이제는 아닐 거야. 방패를 들고도 왼손으로 얼마든지 주문을 펼칠 수 있을 테니."

"...."

"조금 눈에 띄는 건, 나도 어쩔 수 없구나. 하지만 상관없잖니. 너는 앞으로도 나의 대행자이니."

"…다른 걸로 바꿔달라고 하면, 들어주실 거요?"

현기증이 이는 듯 잠시 눈을 감았던 이안이 읊조렸다. 아르케아스가 고개를 저었다.

"애석하게도, 그럴 수 없단다. 이미 주문은 새겨졌으니. 게다가… 그러고 싶지도 않구나."

다시 눈을 뜨는 이안을 즐겁다는 듯 바라보며, 아르케아스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렴, 이안. 너는 네가 마법사라는 걸 감추고 싶어 하잖니. 지금 네 모습을 보면, 네가 눈앞에서 마법을 쓴다 해도 마법사라 여기지 않을 거야."

"아니… 하…."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달싹이던 이안이, 결국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자신의 손등을 중심으로 펼쳐진 육각형의 마력 방패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아르케아스가 그의 기억을 직접 엿본 게 생각지도 못한 나비 효과를 불러온 게 분명했다. 아마도 격전을 치를 때마다 너덜너덜해지는 자신의 대행자가 어지간히도 걱정된 것이겠지.

하지만 어쨌든, 이안의 예상이나 바람과는 전혀 다른 보상이었다.

본래는 마력량을 올려달라고 하거나, 진언 마법이 새겨진 마법 봉 같은 걸 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방패라니.

'이게 맞아, 진짜…?'

그것도 이렇게나 눈에 띄는.

#249화

"네 기대와 다르다면 미안하구나. 하지만 너를 지켜만 봐야 하는 내 마음도 조금은 헤아려 주렴. 그게, 널 지켜줄 거란다."

아르케아스가 타이르듯 덧붙였다.

말 안 듣는 아이가 된 기분에 휩싸인 이안이, 이윽고 체념의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쓰겠소. 고맙소."

한층 더 망캐가 되어 버린 듯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어쨌든 보상 자체만 놓고 보면, 불평하는 게 이상할 정도로 대단한 보물이긴 했다.

아르케아스가 선물한 이 백금 방벽은, 무려 전설 등급의 마법 방패였으니까. 정보창은 이 주문 회로를 귀속 장비로 분류한 것이다.

작동 원리는 정화자의 두건 망토와 사실상 동일했다.

방패를 형성하기 위해 따로 그의 마력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주문 회로에 남은 마력량만큼 방패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리라. 뭔가를 막아낸다면 내구도 대신 마력을 소모하는 방식이겠지.

정보창 상에 표기된 수치가 얼마나 높은 건진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실전에 사용하기에 부족한 수준은 아닐 터였다.

물론 진언 회로는 스스로 마력을 회복했고, 내구도도 따로 없었다.

장착을 해제할 수 없긴 했지만, 이건 단점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사실, 단점은 이 방패가 너무 눈에 띈다는 게 전부였다. 이안이 기사가 아니라는 사실과.

"…왼손이 잘리는 일이 없게 조심해야겠군."

"당연한 말을 진지하게 하는구나."

아르케아스가 미소 짓는 가운데, 필립의 나지막한 탄성이 이어졌다.

"정화자의 방패를 얻은 이후로, 이보다 더 좋은 방패를 보게 될 일은 없으리라 확신했습니다만. 아니었군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방패는 따로 있었어요."

진심으로 감탄한 얼굴이었다.

그래. 너한텐 그렇겠지.

짧게 코웃음 치며, 이안은 방벽을 회수했다. 황금빛 방패가 증발하듯 소리 없이 흩어졌다.

손등의 진언 회로에 일렁이던 빛도 삽시에 가라앉았다. 빛이 사라지고 나자, 회로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카르하의 문신도 이렇게 깔끔하면 딱 좋았을 텐데.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나세르의 더듬대는 목소리가 번진 건 그때였다.

"마법사… 라니요? 이안 나리께서 마법사라고요? 북부의 대전사이자 백금룡의 대행자가, 마법사란 말씀이십니까?"

"...."

쟨 또 무슨 뒷북이야.

일행들은 그를 물끄러미 돌아볼 뿐, 아무도 뭐라 대꾸하지 않았다. 그게 사실이니 더 덧붙일 말도 없는 것이리라.

이안은 나세르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식탁의 빈 자리를 가리켰다.

"그럼 이제, 귀하의 마지막 선물을 맛봐도 되겠소? 당장 한 잔 마시고 싶은 기분인데."

"그래. 그러자꾸나, 이안."

나세르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던 아르케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그의 건너편 자리로 향한 이안이, 식탁에 놓인 영약을 들어 아공간에 넣었다.

건너편 의자에 올라앉던 아르케아스가 눈을 빛냈다.

"호오…. 재미있는 주문을 쓰는 구나. 그 너머는 어디로 이어져 있는 거니?"

"글쎄. 나도 잘 모르겠소."

"모른다고…?"

이안은 어깨만 으쓱이고는, 흑검과 단죄의 검을 차례로 꺼내 식탁 위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필립에게 로브를 가지고 오라 턱짓하며, 그가 덧붙였다.

"그보단, 한 잔 마시고 본론으로 넘어갑시다. 남은 얘기가 아주 많으니."

"…그래.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만 봐도, 날 다시 만날 날을 정말 손꼽아 기다렸다는 걸 확실히 알겠구나."

아르케아스가 풀썩 웃음 지으며 말했다. 그의 시선이, 두 자루 검 옆에 정화자의 망토를 내려놓는 필립에게로 돌아갔다.

"술을 한 잔씩 돌려줄 수 있겠니? 내가 직접 따라 주고 싶지만, 팔이 닿지 않는구나."

"물론입니다. 위대하신 분."

대답하며, 필립이 식탁 중앙의 술병을 들어 밀봉된 마개를 열었다. 나무 냄새와 꽃향기가 뒤섞인 상쾌하고 달큼한 향이 삽시에 번졌다.

필립이 군침을 삼키며 잔에 차례로 술을 따르는 동안, 아르케아스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용이 담근 술이다. 과거, 신의 물방울이라 불리기도 했지. …이런, 이 이름을 들으면 놀라는 이가 하나는 있을 줄은 알았거늘. 예상이 빗나갔구나."

코를 킁킁대던 일행들이 저마다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이 중에서 그나마 가장 박식할 나세르도 처음 듣는다는 얼굴이었다.

아르케아스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름이 잊힐 만한 시간이 지나긴 했지. 오직 하나의 용만이 주조법을 알았고, 그는 이미 죽었으니. 해서, 이제 더는 만들 수 없는 술이지. 지금 이것도, 만들어진 지 몇백 년은 지난 술이란다."

잔에 담긴 반투명한 갈색 액체를 내려다본 이안이 미간을 좁혔다.

몇백 년이라고?

"이거, 먹어도 되는 거 맞소?"

"내 둥지 깊은 곳, 아주 강력한 보존 마법이 새겨진 상자에 보관했단다. 염려 말렴."

아르케아스가 술잔을 들었다.

그렇다면야….

이안도 그의 뒤를 따라 잔을 들었다. 놀랍게도 정보창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의 물방울. 무려 유물 등급이었고, 일정 시간 동안 정신력 수치와 체력, 마력 회복력을 높여 주는 효과가 있었다.

…술이 아니라 영약이었군.

"자, 어서들 맛을 보렴."

내뱉은 아르케아스가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침을 꼴깍대던 일행들이 거의 동시에 술잔을 드는 가운데, 이안도 잔을 입에 물었다.

술을 몇 모금 마신 그의 입가에, 이윽고 옅은 헛웃음이 번졌다.

"…거창한 이름이 붙을 만하군."

본래의 세상까지 포함해서, 그가 평생 마신 그 어떤 술보다도 맛있었기 때문이다. 향과 맛 모두 달콤하게 시작해 상쾌하게 끝났고, 목 넘김도 좋았다.

"루 솔라여… 이건 정말, 신의 은총이나 다름없습니다."

"허어…."

필립과 메브, 나세르도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샬롯과 테사이아는 단숨에 다 마시려는 건지, 술잔을 입에서 떼지 않았다.

아르케아스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내가 알기로는 대륙에 단 두 병밖에 남지 않은 술이란다. 둘 다 내가 가지고 있고, 이걸 다 마시면 이제 나머지 한 병만 남겠지. 누군가 어딘가에 더 숨겨 두었길 바랄 뿐이야."

"…이 위대한 걸 이제 아무도 만들지 못하다니."

비로소 잔에서 입을 뗀 테사이아가 중얼댔다. 그녀의 잔은 텅 비어있었다. 그녀를 돌아본 아르케아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마음껏 마시렴. 그 한 병은, 여기서 남김없이 비우고 갈 거란다."

"역시… 위대한 분은 다르시네. 주근깨. 한 잔 더- 읍?"

테사이아가 눈을 치켜떴다. 샬롯이 손을 뻗어 그녀의 양 볼을 와락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샬롯이 씹어 뱉듯 속삭였다.

"예의를 갖춰라, 귀쟁아. 제발…. 위대한 백금룡이시다."

"괜찮다. 오히려 편하게 대해 주니 좋구나."

죄다 어린애 취급이시군. 뭐, 같이 젊어지는 그런 기분이신가.

실소를 흘린 이안이 입을 열었다.

"저 녀석은 원로 요정이오."

"그래. 네 기억에서 얼핏 보았지. 흡혈귀에서 원로 요정이 되다니. 그야말로 진귀한 일이야. 다행인 일이기도 하단다. 원로는 명맥이 끊긴 상태였으니. 해서, 본래는 어느 가문 출신이니?"

"그걸 여쭤보려 했소. 기억을 잃었거든."

샬롯이 테사이아의 볼을 쥔 손을 놓았다. 테사이아가 새삼 긴장한 얼굴로 아르케아스를 바라보았다.

샛노란 안광을 은은하게 일렁이며, 아르케아스가 물었다.

"기억을 되찾고 싶은 거니?"

"그건… 바라지 않아요."

테사이아가 고개를 저었다. 의외라는 듯 눈을 깜빡이는 아르케아스를 바라보며, 그녀가 덧붙였다.

"기억을 되찾은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닐 수도 있으니까."

"실험체가 된 부작용 같소. 기억하는 건 이름뿐이지. 귀하는 요정을 여럿 보셨을 테니, 겉모습만 봐도 어느 정도는 출신지를 짐작할 수 있으시지 않을까 해서 여쭤본 거요."

이안의 첨언에, 아르케아스가 묘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네 벗들은 너를 닮았구나. 하나 같이 재미있어. 그래… 어디 한번 자세히 보자꾸나."

그가 테사이아를 관찰하듯 눈에 담았다.

"외모가 준수하고 치열이 고른 것만 봐도, 이름 없는 가문의 요정은 아니었을 거야. 은발에 짙은 녹안…. 턱은 갸름하고 코는 높고… 피부는 희고 체구는 다소 작구나. 흐음… 그래. 내가 보기엔, 에레노스의 후손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은데."

"에레노스… 요?"

"그래. 먼 과거, 이름을 떨치던 가문이지. 안타깝게도 지금은 몰락했단다. 가문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남부에 아주 작은 규모로만 존재하지. 납치된 것일 테니 중앙에 진출한 귀족은 아닐 테고. 고결한 혈통이나 이미 몰락한 가문이라면, 꽤 적합한 대상이었겠지."

상당히 합리적인 추론인데.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이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테사이아 에레노스. 가뜩이나 긴 이름이 더 길어지겠군."

"감사 인사를 드려라, 귀쟁아."

"...! 가, 감사합니다. 위대하신 분…."

샬롯의 속삭임에 퍼뜩 정신을 차린 테사이아가 허리를 숙였다.

아르케아스가 미소 지었다.

"전체적인 특성은 비슷하나, 확실한 건 아니란다. 가문으로 돌아가면 명부를 확인하렴. 만약 내 추측이 맞다면, 에레노스 가문은 새로운 시대를 맡겠구나. 최연소 원로가 가문을 이끌게 될 테니."

"이름을 찾았군요. 축하합니다, 테사. 아니, 에레노스 공."

필립이 테사이아의 앞에 잔을 놓으며 덧붙였다.

테사이아가 다소 멍한 얼굴이 된 채로 술잔을 드는 가운데, 이안이 필립을 눈에 담았다.

"저 녀석은, 또 얼마 전에 루 솔라의 계시를 받았소."

"그래. 그 또한 보았지. 축하한다, 필립. 네가 눈멀지 않기를 기도하마."

아르케아스가 덕담하듯 말했다. 필립이 쑥스럽게 미소 짓는 가운데, 이안이 덧붙였다.

"아직 서임은 받지 못했소. 혹, 귀하께서 내려주실 수는 없겠소? 저 녀석은, 대교회에 가는 걸 내키지 않아 해서 말이오."

"호오… 용의 기사가 되고 싶은 거니? 필립."

장난스럽게 말한 아르케아스가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필립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감히 그런 건방진 생각을 할 리가요. 위대하신 분께 서임을 받는다면 일생의 영광이겠으나, 그런 주제넘은 꿈까지 꾼 건 아닙니다."

"내가 너를 기사로 임명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란다."

"…저, 정말요?"

"하지만 그게 네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구나. 교단에는, 나를 미워하는 이들이 꽤 많거든."

"...!"

나세르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가 술잔을 황급히 내려놓는 사이, 아르케아스가 말을 이었다.

"그뿐 아니라, 원치 않는 질투도 사게 되겠지. 게다가 내게 서임을 받았다 해도, 대교회에 직접 그 사실을 알려야 한단다. 그것까지 내가 도와줄 수도 있지만, 그러면 더 파장이 크겠지. 그러니 다시 물으마."

술잔을 다시 든 아르케아스가, 필립을 빤히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래도 내게 서임을 받고 싶니?"

"...."

잠시 갈등하던 필립이 입을 열었다.

"저는… 그냥 대교회로 가서 임명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질투가 두렵거나 위대하신 분을 모욕하려는 건 아닙니다. 절대로요."

황급히 덧붙인 그가, 옆자리의 메브를 일별하고는 덧붙였다.

"다만, 말씀하신 대로 된다면 우리 나리께 되돌아가기가 더 어려워질 것 같아서요. 돌아가게 되더라도, 주목을 많이 받게 될 테고요."

"그래. 현명한 선택이로구나. 잘 생각했다."

아르케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을 돌아본 그가, 이안의 시선이 메브에게로 향하고 있음을 깨닫고는 덧붙였다.

"네 벗들에게 조언을 해 주기를 바라는 거겠지? 덕분에 아주 즐겁다만. 그 전에, 우리와 관련된 이야기부터 끝맺는 게 어떻겠니?"

이안이 속내를 들킨 듯 바라보자, 아르케아스가 식탁 위에 죽 늘어놓은 물건들을 내려다보았다.

"이것들이 자꾸 내 시선을 잡아끌어서 말이야. 조언과 잔소리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것 중 하나이니, 빠뜨릴 염려는 말고."

"…그러시다면야."

고개를 끄덕이며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이안이, 가장 오른쪽에 놓은 검집을 집어 들었다.

이제 정말 산산조각 나기 일보 직전인, 부러진 단죄의 검이었다.

"이 검, 기억하시오?"

"물론이지. 타후므리트의 심장을 찌른 검을 어떻게 잊을까. 게다가, 내가 회수해 주었잖니?"

"아시다시피 부러져서 말이오. 되살릴 방법이 없겠소?"

"…왜 그걸 계속 부러진 채로 들고 다니나 했더니. 몰랐던 거구나."

짧게 탄식한 아르케아스가 덧붙였다.

"신성한 불로 날을 녹이면, 안에 담긴 신성이 상하지 않는단다."

"…타오르는 여신의 성화를 말씀하시는 거요? 화로의 사원?"

"그래. 미리 알려 줄 걸 그랬구나. 나는 네가 당연히 알고 있을 줄 알았다. 너는, 불씨의 운반자였잖니."

그렇게 간단했다니.

이안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심지어 화로의 사원 인근이 다시 번영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 않았던가.

게임일 때의 기억에 너무 많은 부분을 의지한 나머지,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뿐 아니지. 성화로 달궈 접고 두드린 쇠로 검날을 새로이 벼린다면, 전보다 더 날카롭고 단단해질 거란다. 그때라면 비로소, 성검이라 불리기에 전혀 손색이 없어지겠지. 어쩌면, 엄정한 여신이나 타오르는 여신이 축복을 더할지도 모르고."

아르케아스가 조곤조곤 덧붙였다.

당장 북부에 다시 갈 생각은 없는데….

생각한 것도 잠시. 이안의 시선이 이내, 붉은 머리의 여기사에게로 향했다.

"경."

"...?"

"이 검은, 그럼 경이 화로의 사원까지 운반해 주시겠소?"

"내가…?"

메브의 눈이 커졌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복수가 끝나면 루시를 만나러 갈 거라고 하셨었잖소. 겸사겸사 사원에 이것도 맡겨 주시오. 온전하게 복구가 끝나면, 내가 언젠가 찾으러 가겠다고."

"괜찮은 방법이군요. 곧바로 변방으로 돌아가시는 것보단 그게 훨씬 좋을 것 같습니다. 가신 김에, 그냥 그곳에 머무르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고요."

필립이 냉큼 덧붙였다. 얼떨떨한 표정인 메브를 돌아보며, 아르케아스가 미소 지었다.

"지친 몸과 상처 입은 영혼은, 가족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치유되는 법이지. 지금 네가 품고 있는 그 감정들을 이겨내는 데에도 도움이 될 거란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메브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이 단죄의 검을 그녀에게로 내밀었다.

"이제 경이 보관하시오."

"그래…."

메브가 단죄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선명한 녹색 눈동자에 여러 감정이 오갔다.

아마 본래는, 화로의 사원을 거치는 일 없이 변방으로 향할 생각이었으리라.

시선을 거둔 이안은 옆에 놓여있던 흑검을 집어 들었다. 검집조차 없이 드러난 새카만 검날에 옅은 울림이 번졌다.

아르케아스의 미소가 슬며시 굳어졌다. 그의 올 게 왔다는 듯한 눈빛을 마주 보며, 이안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 검에 깃든 마력이 누구의 것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소만."

#25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