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당황은 잠깐이었다.
암전되었던 시야가 밝아졌다.
아른거리는 횃불의 불빛. 제단 위에 놓인 멀쩡한 모습의 황금 욕조가 보였다. 좌우에 놓인 계단으로 사람들이 줄지어 올라가고 있었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욕조 가장자리에 서고는, 손에 든 단검으로 자신의 목을 그으며 욕조에 뛰어들었다. 철퍽대는 소리.
끝내 용기를 내지 못한 자들은, 뒤에 선 이들이 달려들어 목을 긋고는 욕조에 던져 넣었다.
황금 욕조는 그들의 피와 육체를 끝없이 받아들였다.
서둘러야 한다는 속삭임, 그리고 저 멀리서 번지는 소란이 귀를 스쳤다. 처음 듣는 언어였지만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아, 그래. 이건 진혈의 기억이군.
이안은 비로소 헛웃음을 지었다. 물론 내적인 웃음일 뿐이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누군지 모를 존재의 의식에 들러붙은 채,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지식들이 흘러들어오는 걸 가만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안은 이들이 먼 과거, 대륙 동부에 존재했던 왕국의 왕족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곧 제국군에게 목숨을 잃게 될 처지라는 것도.
악마를 숭배하는 이교도들이라는 이유였다. 이안이 보기엔 억울할 것 없는 일이었다. 피를 제물로 바치며 섬겨야 하는 신은 악마 취급을 받는 게 당연했으니까.
물론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네 안에 왕가의 피가 흐르는 한 왕조는 멸망한 것이 아니며, 네가 신혈의 정수를 품은 한 주께서도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인즉. 살아남거라, 공주. 내 딸아. 그리하여 다시 너만의 혈족을 일궈내고, 왕국을 재건하거라. 그것이 너의 사명이니."
비장한 얼굴로 내뱉은 중년인이, 마지막으로 욕조에 피를 쏟으며 죽었다. 이안이 관조 중인 여자아이가 마지막으로 일어섰다. 그녀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굳게 닫힌 문 너머 소란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윽고 계단을 오른 그녀가 욕조 옆에 섰다. 그리고는 다른 이들과 달리, 피와 시체로 가득한 욕조 속으로 뛰어들었다.
끈적한 온기가 전신을 덮었다.
다음 순간, 공포에 질린 제국 병사들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차가운 죽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살육. 오로지 그들이 흘린 피의 온기만이 끈적하게 남아, 시야를 붉게 물들였다.
다음 순간부터 그의 눈앞으로, 몇 배속으로 빨리 감기 한 것 같은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하나같이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 순간의 감정과 생각들이 선명하게 뇌리를 파고들었다.
생존을 향한 갈망. 그리고 고독. 마침내 첫 가족을 만들어 낸 순간의 기쁨. 그리고 전쟁 속에서 느낀 흥분. 다른 마족들을 향한 혐오와 그것들을 배신하던 순간의 갈등.
헛된 꿈과 욕망은 공허한 기쁨과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낳을 뿐이었다. 과거를 향한 그리움은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들을 이용하기만 하는 자들에 대한 증오는 단 한 순간도 작아지지 않고 몸집을 불렸다.
그리고 끝내는, 모든 것들이 무너지기를 바라게 됐다.
망국의 공주는 어느덧 악마가 되어 버렸다.
그 모든 순간은 현재로 이어졌다.
간신히 일궈낸 나라를 무너뜨리는 건, 이제 전혀 아쉽지 않았다. 단지 그런 척할 뿐.
일족을 제 손으로 죽이는 것도, 더는 전혀 슬프지 않았다.
확실한 죽음이 다가오는 것은 물론 두려웠지만, 동시에 헛된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저자와 함께라면, 어쩌면, 이번에는.
다음 순간, 만신창이가 된 채로 대검을 치켜드는, 무표정한 얼굴의 남자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어떤가요. 타인의 눈으로 본 자신의 모습은."
옆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안은 본능적으로 옆을 돌아보고는, 자신이 고개를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소녀가 앉아 있었다. 금발에 붉은 눈. 그리고 낯선 복식의 의복을 걸친. 이안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이건 내 본모습이 아니야."
소녀, 여제가 미소 지었다.
"내가 모르는 다른 여러 모습이 있다는 건가요? 현학적인 말을 즐기시는 줄은 몰랐는데. 의외군요."
"즐기지 않아. 이건 정말 내 본모습이 아니라는 의미다."
"...?"
여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이안이 덧붙였다.
"나는 다른 세상에서 왔거든."
"다른… 세상이요?"
여제의 눈이 커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하지만 이안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이 세계는 거기서, 누군가가 놀이를 위해 만들어 낸 세상일 뿐이었지. 나는 놀이를 즐기다가 여기로 끌려온 것뿐이야. 내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 없이."
"이 세상이, 유희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뜻인가요?"
"그래.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면 이 세계를 만든 이는… 아주 쓰레기 같은 인간이겠군요. 모든 것들이 고통받게 만들어 두고, 그걸 보면서 웃음 짓는."
여제는 더 깊이 캐묻는 대신, 그저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읊조렸다.
이안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 역시 자주 그런 생각을 했으니까.
그가 방금 본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환영 역시, 누군가의 영혼이 완전히 망가져 타락하는 과정을 담고 있지 않았던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주억거리던 꼬마 여제가, 이윽고 납득했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진혈이 당신의 영혼을 물들일 수 없었던 거군요. 신성과 혼돈을 한 몸에 품은 것도. 여러 마법을 익힌 것조차, 당신의 영혼이 이 세계의 법칙으로 만들어지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거예요."
"거기까진 생각해 본 적 없지만… 어쩌면 네 말이 맞을지도."
"정말이지… 놀랍군요. 그럼 이 세계는요? 이 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도, 알고 있나요?"
"조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면서도, 이안은 묘하게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들이었으니까.
그런 이야기를 내 손으로 죽인 마족에게, 그것도 그 마족의 주마등 속에서 하게 되리라곤 상상해 본 적도 없었지만.
"당신과 싸우지 말 걸 그랬어요. 그냥 그 불쌍한 아이를 당신에게 주고, 당신과 친구가 되었다면. 그럼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지금처럼 시간에 쫓기는 일 없이."
"테사를 줬어도 나는 너희를 죽이러 갔을 거다. 넌 똑같이 내 손에 죽었을 거고, 이런 이야기를 듣지도 못했을 거야. 애초에 너는…."
여제의 붉은 눈을 잠시 응시한 이안이 이내 덧붙였다.
"내가 아니라도 테사에게 죽을 운명이었거든."
"운명이라…. 그래요. 어떻게 해도 피할 수 없는 사건은, 운명이라 표현할 수밖에 없겠죠. 내가 끝내 왕국을 재건할 수 없는 운명이듯이. 그렇다니… 차라리 다행이네요."
여제가 빙긋 미소 지었다.
"내가 하게 될 이 선택도, 이미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는 뜻일 테니까."
"무슨 선택?"
이안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여제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이안은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저택의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다만 모든 게 흑백이었다. 소용돌이치는 먹구름도. 밤하늘도. 거대한 초승달까지.
"나는 이 세상에 지워지지 않는 균열을 남길 거거든요. 검은 벽이 그랬듯이."
이어진 여제의 목소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의 그것이 아니었다. 생김새도 그랬다. 황금 욕조에서 걸어 나오던 분신과 똑같았다.
이안의 시선을 가만히 마주 본 그녀가 이윽고 빙긋 미소 지었다.
"말릴 줄 알았는데. 아니군요."
"내가 말리면, 하지 않을 거냐?"
"물론 아니죠. 이젠 나도 돌이킬 수 없거든요. 사실, 반쯤은 충동적이었어요. 우릴 실컷 이용해 먹은 주제에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는 외면한 작자들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도, 복수하고 싶었거든요."
"그게 널 이용하던 자들이 바라는 일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나?"
"있죠. 물론. 그게 조금은 분하기도 했는데."
여제의 미소가 짙어졌다.
"당신 덕분에 괜찮아졌어요. 이젠 오히려 즐겁네요. 자신들이 전부 옳다고 주장하는 그 역겨운 신들과 사제들도, 나처럼 꼭두각시에 불과하단 걸 알게 됐잖아요."
이안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멀지 않아 일어나게 될 일이었다. 그저 그 필연적인 순간이 조금 더 앞당겨질 뿐이리라.
"그래서, 유언을 남기려고 날 끌어들인 거냐?"
"사실은 한 번 더 당신을 설득하고 싶었어요."
고개를 저은 여제가 말을 이었다.
"내 유지를 이어받아 달라고. 당신이라면 어쩌면,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이뤄 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거절하면 협박이라도 할 생각이었죠. 이 세계는 이미 충분히 많이 부서져서, 균열이 조금만 더 늘어나도 치명적일 테니까. 그런데 보아하니…."
여제의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후련해 보이기도, 모든 걸 포기한 것 같기도 한 묘한 미소였다.
"당신은 이미 다 알면서도 거부한 거였네요. 그러니, 이제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졌어요. 그냥 대화나 나눌 생각이에요. 나는 늘, 당신과 좀 더 오래 대화해 보고 싶었거든요."
"그런 소원이라면, 이미 이룬 것 같은데."
"조금만 더요. 어차피,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그래, 뭐. 더 할 말이 있나?"
"당신은 우리를 멸족시킨 존재로 영원히 기억될 거예요, 이안. 다른 마족들이 당신을 알아볼 것이고, 우리를 이용하던 자들도 당신을 주목하겠죠."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라. 다 사이좋게 네 곁으로 보내줄 테니까."
"그래 주면 좋겠네요. 우리를 이용해 먹던 자들은, 특히."
마족도 죽기 직전엔 솔직해지는 거군.
피식한 이안이 물었다.
"그것들에 대해서나 말해 봐. 원탁 의회, 어디서 만날 수 있지?"
"아쉽게도… 나도 몰라요. 사실, 당신보다 더 아는 것 같지도 않고. 난 그자들의 정확한 이름조차, 당신을 통해 알게 됐거든요. 저길 봐요, 이안. 곧 시작될 거예요."
여제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안은 그녀의 손길을 따라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옆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그자를 사제님이라고 불렀어요. 루 솔라의 광신도죠. 아주 강한 신성을 부리는. 그러니 보통 사제는 아닐 거예요. 그리고."
목소리가 늘어졌다. 이안은 다시 옆을 돌아보았다.
여제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쩌적,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안은 다시 흑백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초승달 한복판을 가르며, 공간에 거대한 균열이 번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기다란 손가락 같은 무언가가 슬며시 삐져나왔다. 다음 순간 초승달이 녹아내리면서 그 손가락을 가렸다.
"...!"
이안은 눈을 깜빡였다. 어느새 하늘의 색이 되돌아와 있었다.
붉은 초승달이 물감이 번지듯 흩어지면서 밤하늘을 녹이고 있었다.
쿠릉, 쿠르릉- 흐르기 시작한 먹구름 사이에서 천둥이 번쩍였다.
눈앞으로 퀘스트 완료창이 이어졌다.
비로소 이안은 자신이 현실로 되돌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가득하던 진혈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흔적도 남지 않았다. 혼돈의 파편도 거의 텅 빈 채로 침묵했다.
그저 그가 누운 잿더미만이, 방금 그가 겪은 일들이 백일몽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줄 뿐이었다.
와르르르르-
사방에서 굉음이 번지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알현실뿐만 아니라 모든 지하 공간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붕괴가 이상하게 가까웠다. 이제 보니, 잔해로 뒤덮인 알현실의 넓이는 아까의 반도 되지 않았다. 깊이도 마찬가지였다.
"결계가 무너졌다 이거지…."
늘어나고 휘어졌던 공간이 본모습으로 되돌아간 게 분명했다.
중얼거린 이안이 상반신을 일으키려다 휘청댔다. 지독한 현기증과 두통. 그리고 눈앞이 아찔해질 정도의 통증이 전신을 후려쳤기 때문이다.
이안은 그제야 자신의 몸 상태가 생각보다 더 나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의식이 멋대로 다시 꺼지려 했다.
하지만 아직은 기절할 때가 아니었다.
이안은 잿더미 한복판, 묘비처럼 박혀 있는 군단장의 대검에 기대서 간신히 상반신을 일으켰다.
이어 아공간에서 목함을 꺼낸 그가, 간신히 궐련을 입에 물었다.
떨리는 손아귀에서 작은 불똥이 튀었다. 이안은 몸에 남은 마력이 한 줌도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이대로 눈을 감았다가 뜨면, 지독한 마력 탈진에 시달리게 되리라.
화륵-
작은 불꽃 하나가 피어났다. 궐련 끝에 불을 붙인 이안이, 대검의 검면에 고개를 기대며 연기를 들이마셨다.
몸속을 가득 채웠던 약초 냄새가 입 밖으로 번졌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던 시야가 조금은 밝아졌다. 연기를 내뿜으면서, 이안은 아까 문득 떠올렸던 생각의 결론을 비로소 내렸다.
여기서 겪은 모든 상황이, 전부 게임에도 있었던 건 아니리라고.
적어도 이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았을 터였다. 게임에선 없었던 여러 상황이 더해져 만들어진 나비효과이리라.
"하아…."
한 모금의 연기를 더 토해낸 이안이, 결심한 듯 몸을 일으켰다.
잿더미에 파묻힌 발목이 삐걱대고, 어지러움이 밀려들었다.
왼쪽 허벅지의 출혈은 이미 멎었지만, 여전히 힘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기어코 일어섰다.
"후…."
오른팔을 뻗은 이안이 대검의 자루를 움켜쥐었다.
지금은 땅에서 뽑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간신히 검날을 기울여 아공간에 넣은 그는, 몸을 돌려 잿더미 사이에서 부러진 단죄의 검을 찾아냈다. 검집은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절뚝대며 걸음을 옮겨 검집까지 간신히 주워 아공간에 넣은 그가, 비로소 궐련의 연기를 들이마시며 시선을 돌렸다.
미로 저택은 전부 무너져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 잔해들이 모여서, 그나마 지상으로 올라갈 수 있을 법한 비탈길이 몇 개 만들어져 있었다.
지금 이 몸으로 올라갈 길은 아닌 것 같은데….
궐련의 연기를 토해낸 이안이, 이윽고 걸음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이안…!"
비탈길 저 너머에서, 익숙한 실루엣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료들이었다.
"나, 나리! 무사하시군요! 다행입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필립이 소리치는 가운데, 메브가 다급하게 안면 가리개를 올렸다. 그녀는 조바심 가득한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면서도, 필립이 비탈길을 내려올 수 있게 부축하려 주춤댔다.
필립은 부목과 붕대로 왼팔을 고정한 채였다.
메브의 보조를 받으며 비탈길로 접어드는 발걸음이 엉거주춤했다.
저러다 한 번은 자빠질 것 같은데.
생각하던 이안은, 그들을 앞질러 달려오는 둘을 눈에 담았다.
잔해 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달리는 샬롯.
그리고 그녀를 앞질러 질주하는 건, 설표 가죽 망토를 걸친 테사이아였다.
활짝 웃으며 달려오는 그녀의 눈동자는, 더 이상 붉지 않았다.
예전보다 훨씬 더 짙은 녹색. 머리칼은 은발이 아니라 백발에 훨씬 더 가까워졌다.
외형적 변화는 그 정도가 전부인 것 같았다. 피부 아래 꿈틀대던 뿌리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
양팔을 흔들며 다가오는 테사이아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안은, 미간을 좁히며 옆으로 손을 뻗었다.
아공간에서 간신히 딸려 나온 봉인함이 땅에 떨어지고, 그의 미간이 더 좁아졌다.
충분히 가까워졌음에도 테사이아가 달려오는 속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더 양팔을 활짝 펼치고 있었다.
이안이 연기를 토하며 내뱉었다.
"보다시피, 부상자다."
"알아! 딱 봐도 엄청 심각해 보여!"
소리친 테사이아가 그대로 몸을 날렸다. 지금의 이안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돌진이었다. 물론, 버틸 수도 없었다.
이안이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그 와중에도 그의 뒤통수에 손을 받쳐 머리는 부딪히지 않게 한 테사이아가, 그를 품에 안은 채로 고맙다고 소리를 질러 댔다.
부상자라니까….
온몸을 뒤덮는 고통에 눈을 감으면서도, 이안이 내뱉었다.
"옷부터 꺼내 입어라. 망토만 걸치고 있지 말고."
"역시, 내 옷 챙기는 건 이안 뿐이야. 알았어."
테사이아가 군말 없이 일어섰다.
그녀의 뒤통수로, 이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테사."
"응?"
"네 의뢰는 완수됐다."
"...!"
눈을 치켜뜬 테사이아가 다시 이안을 돌아보았다.
눈을 깜빡인 것도 잠시. 그녀는 다시 한번 고맙다고 소리치며 이안을 끌어안았다.
이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미 정신을 잃은 뒤였으니까.
#171화
심연이 속삭였다.
귀를 기울인 순간, 속삭임은 삽시에 뇌리를 가득 채우는 괴성으로 변했다. 이미 잊힌 언어. 세상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수많은 것들의 사념.
"...!"
이안은 번쩍 눈을 떴다.
머릿속의 괴성이 씻은 듯 사라졌다. 먹구름 넘실대는 밤하늘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은은한 불빛과 온기, 장작 타들어 가는 소리가 나지막이 이어졌다.
등에 울퉁불퉁한 것들이 배겼다. 아직 무너진 미로 저택의 잔해 위였다.
'그래… 죽진 않았군.'
손가락과 발가락이 움직이는 것까지 확인한 그는, 이윽고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목 아래까지 덮여 있던 모포와 설표 가죽 망토가 흘러내렸다.
지끈거리는 두통과 현기증. 모든 관절이 비명을 지르고, 특정할 수 없는 전방위적인 통증이 이어졌다.
여러 명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다음 날 같은 느낌이었다. 실제로도 그랬지만.
"벌써 깨셨습니까…? 조심하십시오, 도와 드리겠습니다."
허둥지둥 달려온 건 필립이었다. 멀쩡한 팔로 엉거주춤 이안을 부축하며, 그가 덧붙였다.
"좀 더 주무시지 그러십니까. 정말 상태가 말이 아니셨습니다. 사실, 지금도 그래 보이고요."
"이 반지는, 그래서 끼워 둔 거냐?"
이안이 왼손을 들며 덧붙였다. 너덜너덜해졌던 그의 왼손은, 어느새 다시 본래의 형태로 되돌아와 있었다. 손 곳곳에 흉터가 남아 있고 살짝 구부리기만 해도 아팠지만.
어쨌든, 중지에는 필립의 성물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성 다미엘의 반지. 필립이 머리를 긁적였다.
"성물이니까요. 나리께서 회복하시는 데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될 겁니다."
이건 좀 감동인데.
낮게 웃음 지은 이안이 반지를 빼며 내뱉었다.
"이만하면 충분해. 이제 네가 껴라. 난 이게 없어도 회복이 빠르지만, 넌 아닐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어라, 그러고 보니 정말 왼팔이 상당히 멀쩡해지셨군요.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눈 뜨고 보기 힘들 만큼-"
"내가 얼마나 잤지?"
말을 자른 이안이 필립의 손에 반지를 쥐여 주었다. 필립이 한 손으로 어설프게 반지를 끼우며 대답했다.
"반나절쯤 주무셨을 겁니다. 저도 일어난 지 몇 시간 안 됐습니다. 우리 나리께서 첫 번째 불침번을 서셨거든요."
오래도 잤군. 그냥 눈을 감았다가 뜬 것 같은데.
이안은 야영지를 눈에 담았다.
저택의 목조 잔재를 모아 피운 모닥불.
메브는 모포조차 덮지 않은 채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봉인함에는 모포가 딱 하나 들어 있었다. 그걸 이안에게 덮어 준 것이리라.
그 옆에 웅크린 샬롯도 쌕쌕대는 숨소리만 흘렸다. 테사이아의 녹색 눈에 모닥불의 불빛이 맺혀 아른거렸다.
"…언제부터 깨 있었냐?"
"방금 전부터."
"으헉?!"
테사의 대답에 필립이 숨을 들이켜며 펄쩍 뛰었다. 재빨리 입을 다문 그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습니까…."
"너무 신선한 반응이라 오히려 놀랍네. 뱀파이어들과 맞서 싸운 기사가 이런 걸로 놀라다니."
"말씀은 정말 감사합니다만, 전 아직 서임을 받지 못했습니다."
필립이 미소를 숨기지 못한 채 대답했다. 킥킥댄 테사이아가 몸을 일으켰다. 위아래 모두 이안의 옷을 걸친 채였다.
옷 입으라고 말한 게 꿈이 아니었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필립과 테사이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눈빛의 의미를 깨달은 필립이 재빨리 말했다.
"아, 미로에서 통성명 겸 인사는 다 나눴습니다. 저와는 구면이기도 하잖아요?"
"내가 눈을 떴을 땐 이미 와 있더라구. 멀리서 큰 소리가 울리고. 이안이 싸우는 소리라고 하더라. 그래서 대충 인사하고 바로 뛰었지, 뭐. 얘 팔이 이래서, 어쩔 수 없이 빙빙 돌다가 늦었지만."
테사이아가 말을 받았다.
필립이 건넨 가죽 수통을 받으며 이안이 대답했다.
"그래도 거기서 용케 잘 빠져나왔네."
필립이 어깨를 으쓱였다.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갑자기 미로가 출렁이는 느낌이 들더니, 다음 순간에 반쯤 무너진 저택이 바로 앞에 솟아 있었거든요. 곧 그마저도 무너졌고요. 덕분에 저희가 그렇게 헤매던 미로가 본래는 그리 크지도 않았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마경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걸 눈앞에서 본 겁니다."
결국 자력으로 나오진 못했었단 거군. 물을 마시며 대충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덧붙였다.
"여기 계속 있었던 건, 나 때문이고?"
"예. 상태가 워낙 좋지 않으셨으니까요. 아시다시피, 이런 소굴은 주인이 사라지면 오히려 가장 안전한 곳이 되기도 하니까…."
여긴 경우가 조금 다를 것 같은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수통을 내려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결과적으론 잘 한 선택이군. 덕분에, 소득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소득이라니요…? 어, 나리. 그 몸으로 벌써 움직이시면…."
이안이 힘겹게 일어서자, 필립이 당황한 듯 허우적댔다.
"넌 쉬고 있어, 주근깨."
내뱉으며 이안을 부축한 건 테사이아였다.
"이안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난 알 것 같으니까."
"...?"
눈을 끔뻑이는 필립을 남겨둔 채, 이안과 테사이아가 걸음을 옮겼다.
이안과 보폭을 맞추면서, 그녀가 속삭였다.
"나랑 같은 걸 느낀 거지?"
"아마도."
덤덤하게 대답하며, 이안은 눈을 뜨기 직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공허의 속삭임. 이곳 어딘가에 불경한 물건이 파묻혀 있는 게 분명했다.
감각이 온전하지 못한 와중에도, 어딘가에서 번져 나오는 서늘한 마력이 느껴졌다. 일행 중에서는 테사이아만 느낀 모양이었다.
"감각이 전보다 더 좋아진 모양이군."
절뚝절뚝 걸음을 옮기면서 이안이 말했다. 테사이아가 녹색 눈을 빛내며 미소 지었다.
"그 이상이야. 아예 새로운 감각이 생긴 것 같아. 야옹이 말로는, 내가 원로 귀쟁이가 된 거라던데. 맞아?"
"그래. 그렇게 됐지."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원로 퀘스트의 보상이 뇌리를 스쳤다. 약간의 경험치와 스킬 포인트 하나. 사실상 씨앗을 그냥 먹었을 때와 다른 건 경험치뿐이었다. 아니, 가장 중요한 하나가 더 달랐다. 테사이아.
"너는 아마 가장 젊은 원로일 거다. 어쩌면, 마지막 원로일지도 모르고."
"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말하니까 엄청 대단해 보이네. 어쨌든, 좋아. 모든 게 새로운 느낌이야. 마력도 느껴지고. 이젠 피를 마시고 싶다는 충동도 없어. 갈증이 없다는 게 어떤 느낌인 건지도 몰랐는데. 내 생각보다 더 좋은 거였어."
이안을 돌아보며 미소 지은 테사이아가 이내 덧붙였다.
"고마워, 이안. 이 은혜는, 앞으로 계속 갚을게."
그녀의 미소는 여전히 장난스러웠지만, 전보다 훨씬 온화했다.
어쩌면 이건 원로 요정으로 재탄생해서 생겨난 분위기가 아니라, 본래 타고난 기품인지도 몰랐다. 마족이 되어 가려져 있었을 뿐.
"아직도 과거가 전혀 기억나지 않냐?"
"응. 생명수의 씨앗도 기억까지 돌려주진 못하나 봐. 상관없지, 뭐. 이젠 요정들에게 배척당할 일도 없잖아? 심지어 난 원로고."
"다른 요정을 만나도, 기억이 없다는 건 드러내지 마라. 귀쟁이들은 동족의 뒤통수도 치는 것들이야."
"알아 둘게. 사실 상관은 없어. 귀쟁이들이 개수작을 부려도, 네가 바로 눈치채고 알려 줄 거잖아?"
하여간, 대책 없긴.
피식댄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잔해 더미의 가장자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긴… 집무실 쪽이군."
비탈길 사이로 설핏 드러난 원형 계단의 흔적을 눈에 담으며, 이안이 중얼댔다. 테사이아가 눈을 끔뻑였다.
"집무실?"
"여제의 방이란 얘기야."
"아하… 흐음… 잠깐만…."
폐허를 돌아보는 테사이아의 눈빛이 은은한 빛을 머금고 일렁였다.
마력이었다. 그녀의 눈가로 핏줄이 슬며시 돋아났다. 생명수의 뿌리일 터였다. 그녀의 신경계와 핏줄 속에 자리를 잡았으니까.
"저 안에서 마력이 느껴져. 이안, 너도 느껴져?"
"조금은. 선명하진 않아. 몸 상태가 이래서, 감각이 둔하군."
"그럼, 내가 찾아다 줄까?"
테사이아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이안의 눈매가 설핏 가늘어졌다.
"흠…."
"왜 그렇게 봐? 설마, 못 믿겠다는 건 아니지?"
"맞는데."
"믿어 봐. 내가 보여줄 테니까."
단호하게 말한 테사이아가 이안을 한구석에 앉혔다.
평평한 잔해 위였다.
"이안은 쉬면서 구경만 해."
테사이아가 날듯이 몸을 돌렸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찰랑댔다. 더는 전처럼 머리칼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는 없게 된 모양이었다.
하긴. 그건 뱀파이어의 특기였다.
"으읍…."
쿠드득-
곧 테사이아가 이를 악물며 돌덩이 하나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쉽지는 않아 보였다. 안간힘을 쓰고서야 겨우 옆으로 치워냈다.
'괜찮나, 저거.'
원로 요정이 되었다고 해서 힘까지 더 강해진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힘이 어지간히 세더라도 저 잔해들을 맨손으로 치우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터였다.
어쨌든 여전히 자신만만해 보여서, 이안은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어차피 이 몸 상태로는 별 도움도 되지 못할 터였다. 아직은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개고생을 한 보람은… 있지만.'
이안은 상태창을 열었다. 경험치만 해도 엄청나게 오른 전투였다.
레벨 업을 한 건 아니었지만, 머지 않아 다시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 정도면 타후므리트를 죽였을 때와 필적하는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어쩌면 최단기간 레벨 업 기록을 또 한 번 경신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거기다 능력치 포인트 여러 개에, 스킬 포인트도 세 개나 더 생겼다.
태초의 내성에 사용한 포인트를 제외해도 두 개가 더 늘어난 셈.
뿐만 아니라 상태창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다양한 속성 저항력도 추가적으로 늘어났다.
게임에서처럼 테사이아만 상대했다면 끝내 얻지 못했을 귀중한 보상들.
이어 눈을 감고 내면의 혼돈의 파편까지 확인한 이안의 눈매가, 이내 꿈틀댔다.
'이건…?'
파편의 크기는 이번에도 조금 커진 상태였다. 그보다 이안을 놀라게 한 건, 파편에서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전해진다는 사실이었다.
진혈에서 느껴지던 것과 비슷한 느낌.
'설마, 진혈의 능력을 일부 흡수한 건가…?'
그런 게 가능해? 하긴. 생각해 보면 타락자나 악마의 마력을 흡수한 적은 있어도, 마족의 근원을 흡수한 건 처음 생긴 일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이안은 가만히 정신을 집중했다. 심상 속 파편의 주위로 붉은빛이 아른거리더니 옅은 맥동이 번졌다.
역시나, 파편이 그의 피를 흡수하고 있었다. 그의 의지가 이끄는 대로 천천히, 조금씩. 뒤이어 내부에 담긴 혼돈력이 아주 조금 늘어나는 게 느껴졌다.
'역시. 내 피를 혼돈력으로 치환하는 거네.'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이안의 입가에 옅은 헛웃음이 번졌다. 전환 효율이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어쨌건 다급한 순간에는 쓸모가 있을 터였다.
체력이 회복되는 속도가 마력보다 빠르니까. 혼돈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파편을 다시 가득 채우려면 보름은 족히 걸리리라. 하지만 이제 틈틈이 조금씩 피를 먹인다면, 훨씬 줄일 수 있을 터였다.
'내 피를 먹는 거면… 진혈의 부작용이 나한테 영향을 끼치진 않겠네.'
이윽고 결론 내린 이안이 피를 먹이는 것을 멈췄다. 다행히 파편은 그의 피를 더 탐하지 않고 고요하게 잦아들었다.
문득 진혈의 주인 퀘스트를 수락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뱀파이어가 되었을 것은 확실했다. 추가적인 능력치와 스킬도 손에 넣을 수 있었을 터였다. 그라면 뱀파이어들보다 더 살뜰하게 그 능력들을 활용했으리라.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여러 제약이 생기는 건 물론이고, 더는 신성력과 관련된 스킬들은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을 테니까.
'또 모르지. 카르하라면 오히려 재미있어 하면서 신성을 내려 줬을지도.'
그럼 투쟁의 축복이 활성화될 때마다 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느껴야 했으리라. 그러다 끝내는 죽었겠고.
그런 의미에선, 파편이 진혈의 능력을 일부 흡수한 지금이 훨씬 나은 결과인 셈이었다.
결코 의도한 것도, 원한 결과도 아니긴 했지만.
"찾았다…!"
이안이 입맛을 다시는 사이, 잔해 사이에서 테사이아의 탄성이 번져 나왔다.
그녀는 어느새 잔해 틈으로 기어 들어가서, 모습이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도 너무 빠른데.
내심 놀란 이안은, 이내 그럴만한 이유를 깨달았다.
여제의 집무실은 3층이었다. 그러니 무너진 잔해 속에서도 비교적 위에 있었으리라.
"봐! 할 수 있댔지?"
꾸물대며 기어 나온 테사이아가 정사각형의 목함을 머리 위로 들어 보이고는 달려왔다.
이안이 느낀 바로 그 마력이 선명해졌다.
오염된 마력이 아니라는 게 뜻밖인 부분이었다.
앞으로 다가온 테사이아가, 상자를 이안의 허벅지에 내려놓았다.
"열어도 줄까?"
"아니. 충분해. 고생했다."
"응. 조금 하긴 했지. 생각보다 힘들었다구."
"그럼 이제 물러나 있어. 여기 쳐다보지 말고."
"...?"
테사이아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냉큼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을 확인한 이안이, 비로소 반쯤 부서진 자물쇠가 걸린 상자를 눈에 담았다.
표면에 정교한 주문 회로가 몇 겹으로 새겨져 있었다. 무슨 주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마석이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안에 담긴 물건이 동력원인 모양이었다.
안에 뭐가 들었을지는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공허의 마력이 느껴지지 않긴 했지만, 악마의 반열에 오른 마족의 수장이 고이 보관할 만한 물건은 그리 많지 않을 터였다.
"역시…."
자물쇠를 걷어내고 뚜껑을 살짝 연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틈으로 공허의 마력이 번져 나왔기 때문이다. 혼돈력에 가까울 정도로 순수한 마력.
이제 보니 이 상자도 보물이었다.
이만한 공허의 마력을 평범한 마력으로 바꿔 내보내는 장치라니. 보통 물건일 리 없었다.
잡념은 내용물을 확인한 순간 깨끗이 사라졌다.
붉은색의 푹신한 받침대 위에, 뼈로 만들어진 괴상한 물건이 놓여 있었다. 어린아이의 두개골 같았지만, 눈구멍이 옆으로 두 개 더 뚫려 있었다. 그 아래로 이어 붙은 건 정체를 알 수 없는 다른 짐승의 뼈였다.
"그건… 뭐야?"
테사이아가 바짝 곤두선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심상치 않은 파장을 느낀 것이리라.
탁, 상자를 닫으며 이안이 대답했다.
"암흑 성물. 심연의 유산. 공허의 우상….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타락한 자들의 보물."
그의 목소리에는 피로가 묻어 나왔다. 잠깐 본 것만으로도 시야가 일그러지고 목에서 피 맛이 났다.
각인 작업은 몸을 조금 더 회복한 뒤에 해야 할 것 같았다. 지금은 이 암흑 성물에 담긴 여제의 각인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보관함을 아공간에 밀어 넣은 이안이 힘겹게 일어섰다. 재빨리 달려와 부축한 테사이아가 속삭였다.
"더 뒤져 볼까, 이안? 뭔가 더 나올 것 같은데."
"내일. 더 하면, 다들 깰 거다."
지금은 나도 너무 피곤하고.
뒷말을 삼키며, 이안이 걸음을 옮겼다. 모닥불로 다가가면서 테사이아가 중얼댔다.
"내일 야옹이랑 같이 뒤져 볼게. 쟨 단순해서, 힘쓰는 일이라면 사족을 못 쓰니까."
이안이 대충 고개만 끄덕이는 사이.
"뭘… 찾아오신 겁니까?"
모닥불 옆의 필립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대신 대답한 건 테사이아였다.
"암흑 성물."
"네에? 또 그런 위험한 걸 손에 넣으셨다고요? 이번엔 뭡니까?"
나도 아직 정확히 몰라, 인마.
이안은 대충 손사래만 치고는 다시 모포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아침 일찍 여길 떠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잠이 쏟아져서 버틸 수가 없었다.
이안은 눈을 감자마자 정신을 잃었다. 더는 그 어떤 방해도 없이,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꿈조차 끼어들지 않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심연이었다.
***
이안은 코를 간질이는 고소한 냄새와 함께 눈을 떴다.
여전히 하늘에 가득한, 그러나 그나마 밝은 회색으로 일렁이는 먹구름이 선명해졌다.
적어도 이른 아침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저만치에서 번지는 돌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이안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두통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기운이 없긴 했지만, 몸도 제법 움직일 만했다.
"깨어났구나, 이안. 새벽에 잠시 일어났었다는 얘기는 들었다. 몸은, 좀 괜찮으냐?"
곁으로 다가온 메브가 수통을 내밀며 말했다. 이안은 수통을 받아 입에 가져갔다. 제법 시원한 새 물이었다. 그가 자는 사이에 주변을 뒤져 수원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물 몇 모금을 마신 그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별 일 없었소?"
"다행히도. 저 둘 빼곤."
메브가 곁에 앉으며 이안의 뒤쪽을 턱짓했다. 진귀한 구경을 한다는 듯한 눈빛. 실제로도 그랬다.
수인과 원로 요정이, 경쟁하듯 잔해를 파헤치며 노략질을 하고 있었으니까.
#172화
돌덩이를 집어 던지는 샬롯과 잔해 사이에 상반신을 파묻은 테사이아의 뒷모습을 눈에 담으며, 이안은 짧은 헛웃음을 흘렸다.
저걸 정말 하고 있다니.
심지어 수확도 있어 보였다.
"와! 또 금화! 말했지? 이것들, 부자라니까?"
그것도 제법 많이.
주머니를 들고 기어 나온 테사이아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샬롯을 돌아보았다.
"별거 아니라고 큰소리치더니. 잘 좀 해 봐, 야옹아. 계속 돌만 집어 던진다고 뭐가 나오는 게 아니라니까? 앗, 이안! 일어났어?"
걸음을 옮겨 전리품이 쌓여 있는 평평한 돌 근처로 다가가던 테사이아가, 이윽고 이안을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고, 테사이아가 보란 듯 돈주머니를 전리품 사이에 떨어뜨리는 사이.
"깨어났구나, 이안."
낮게 그르렁대며 입맛을 다시던 샬롯도 홱 이안 쪽을 돌아보았다.
"그래."
대답한 이안이, 자신 쪽으로 다가오려는 샬롯을 향해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살만 하니까,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 계속해."
"…그래도 될까?"
멈칫한 샬롯이 되물었다. 눈에 은은한 승부욕이 맺혀 있는 걸 보니, 저 전리품을 누가 더 많이 발굴했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그래. 잘 됐지. 장비도 죄다 박살 나고 주머니도 홀쭉해졌는데. 엄선은 나중에 해도 되니까, 열심히들 해 봐."
"그렇게 말한 다면야…."
고개를 끄덕인 샬롯이 몸을 돌렸다. 테사이아는 이미 네발로 기어 다니며 잔해 사이를 관찰하는 중이었다.
아주 잘들 노는군.
피식댄 이안이 시선을 거뒀다.
말과 마차가 없으니 찾은 걸 전부 들고 갈 순 없겠지만, 어쨌든 가계에 꽤 보탬이 될 터였다.
운이 정말 좋다면 값진 보물이라도 하나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르고.
고소한 냄새가 가까워진 건 그때였다.
"샬롯이 저렇게 즐거워하는 건 처음 봅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테사이아가 하자는 건 다 하더군요. 둘이 확실히, 보통 사이가 아닌 모양이에요."
필립이 스튜가 담긴 그릇을 내밀며 말했다. 가장자리가 깨진 걸 보니, 여기서 파낸 물건을 대충 씻어 온 모양이었다.
"둘의 목숨이 하나였으니까. 보통 사이는 아니지."
접시를 받아들며 대답한 이안이 메브를 돌아보았다.
"아쉽게 됐소. 기대한 바가 있으셨을 텐데. 저 녀석은 더는 마족이 아니거든."
그가 접시를 들어 스튜를 입에 가져갔다. 뜨끈한 온기가 식도를 타고 흘러들면서, 잊고 있던 허기가 밀려들었다. 육포와 알 수 없는 보존 식량들을 넣고 끓인 꿀꿀이 죽이었지만, 천상의 맛이 따로 없었다.
하긴 생각해 보니 꼬박 하루 이상을 먹은 게 없었다. 심지어 부상 중이 아니던가.
"잘된 일이니 전혀 아쉽지 않아. 오히려 새로운 기적을 본 느낌이다. 누군가 타락하는 것은 보았어도, 그 반대의 경우는 처음이니."
선선히 대답하며, 메브가 이안의 접시에 수저를 얹어 줬다.
이것도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다들 현지 조달 전문가가 다 됐군.
이안은 내심 웃고는 수저를 쥐었다. 정신없이 먹는 그를 바라보던 메브가 이윽고 말을 이었다.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만. 실제로 보니 정말 놀라운 회복력이구나. 고작 하루 만에 이렇게까지 멀쩡해지다니. 적어도 며칠은 요양해야 하고, 회복까지 한 달 이상은 필요할 줄 알았다."
"겨우 움직이기만 하는 수준이오. 아직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한 이안이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회복이 극도로 빠른 건 딱 지금 수준까지일 터였다.
컨디션이 온전해지려면 적어도 일주일에서 열흘은 더 필요하리라.
물론 전투가 끝난 직후의 몸 상태를 생각하면, 그것도 충분히 초인적인 회복력이라 할 수 있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연 건 접시가 다 비워져 갈 때쯤이었다.
"경은 괜찮으시오?"
"보다시피. 부끄럽구나. 다들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건만, 나만 멀쩡하다니."
"잘 됐지, 부상자들의 안전을 책임질 사람이 하나는 있어야 하잖소."
"그래, 그건 내 당연한 의무다."
이안을 마주 본 메브가 다짐받듯 말을 이었다.
"당분간은 내가 선두에 설 거야. 너는 절대 무리하지 말고 회복에만 전념하도록 해."
안 그래도 그럴 거다.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접시에 남은 걸 한입에 털어 넣었다.
필립이 스튜를 한 국자 더 퍼서 다가온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어쨌건, 결과적으로 루 사드는 구원 받은 셈입니다. 마족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났으니까요. 글루미르 시나 다른 영지의 상황이 좋을 것 같진 않습니다만…. 어쨌든, 생존자들은 전보다 훨씬 안전하게 삶을 이어갈 수 있겠죠."
"글쎄…."
잠시 침음한 이안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수저를 들었다.
슬쩍 미간을 좁혔던 필립이, 이내 그의 의중을 알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영주들이 다 죽었으니 혼란이 시작될 거란 말씀이시군요. 전쟁 중이기도 하고요. 염려 마십시오. 정말 모든 귀족이 죽은 건 아닐 테니, 적법한 대체자가 있을 겁니다. 마침 국경도 봉쇄 중이라, 다른 왕국까지 소식이 바로 들어가지도 않을 테고요. 혹 내부의 갈등이 심화되더라도…."
오른손의 반지를 내려다본 그가 덧붙였다.
"교단의 조사단이 그리 늦지는 않을 겁니다. 아무리 변방에 무심해도, 이만한 괴현상까지 방치하지는 않겠지요. 어쩌면 정화대를 파견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곳의 사정을 알게 되면, 당연히 적극적으로 개입할 테고요. 물론 기부금을 왕창 뜯어내긴 하겠습니다만…."
"…그래, 뭐. 그럴지도 모르지. 다른 더 큰 문제들이 일어나지만 않는다면야."
심드렁하게 대꾸한 이안이 식사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메브와 필립의 표정은 대번에 심각해졌다. 이안을 가만히 바라보던 메브가, 이윽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른 더 큰 문제가… 생길 거란 말이냐?"
"당장 할 얘긴 아닌 것 같소."
이안이 수저를 놓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묘하게 조용해진 샬롯과 테사이아 쪽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이미 진작부터 뭔가를 느낀 듯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이안 쪽도 힐끔대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둘에게 고개를 슬쩍 끄덕인 이안이 덧붙였다.
"지금은 손님들을 맞을 준비부터 해야 할 것 같으니까. 우리가 주인은 아니지만."
"...!"
그제야 메브와 필립도 폐허의 비탈길 위로 시선을 돌렸다.
메브가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고, 샬롯과 테사이아도 서로 간격을 좁히며 일행의 앞을 가로막듯 서는 가운데.
저벅- 저벅-
비로소 발걸음 소리가 조금씩 선명해졌다. 아주 조심스럽고 주춤대는 기척들이었다.
곧 같은 종류의 창과 방패, 방어구로 무장한 일련의 병사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제기랄, 정말 있다니…."
"고기 끓이는 냄새가 착각이 아니었군…. 루 솔라시여…."
다만, 그들은 하나같이 겁에 질린 얼굴들이었다.
폐허 한복판의 일행에게 제대로 무기를 겨눌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서로를 돌아보며 수근댔다.
"보아하니 글루미르 시의 주민들은 무사한 모양이군."
마법 같은 걸로 재워 두기라도 했었나 보지.
이안이 심드렁하게 읊조리는 가운데, 필립의 속삭임이 이어졌다.
"그런데 왜들 저렇게 겁을 집어먹었답니까? 역시, 이 폐허 때문일까요?"
"진심으로 묻는 거냐? 저택 밖의 시체들을 봤겠지. 정원에도 여럿 널브러져 있을 테고."
"…아. 그랬겠군요. 너무 당연한 것들이라 의식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필립이 머쓱하게 볼을 긁적였다.
지금 저 밖은 지금 말 그대로 지옥도나 다름없을 터였다.
그 광경을 보고서도 여기까지 들어온 저 병사들의 배포가 오히려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하긴. 저택이 사라졌으니 안 와 볼 수는 없었겠지만.'
어쨌건, 이안이 염려한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적어도 저들은 대화는 통할 것 같아 보였으니까.
물론, 귀찮아 지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러기 전에 뜨고 싶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상황을 잘 이용해 볼 수밖에.
이안이 내심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전부 모여든 병사들이 움푹 함몰된 폐허의 가장자리에 늘어섰다.
그들 사이로 말 탄 기수의 모습이 드러났다.
마흔쯤 되어 보이는, 루 사드의 문장이 새겨진 서코트를 걸친 기사였다.
병사들의 지휘관일 터였다.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긴장이 가득한 얼굴임에도, 그는 자신의 의무를 잊지 않았다.
"나는 니그리안테 백작을 섬기는 글루미르의 기사, 오스릭이오! 그대들의 정체를 밝히고,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를 낱낱이 고하시오! 그러지 않는다면… 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소…!"
그가 용기를 쥐어 짠듯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눈에 힘을 주고 있긴 했지만, 초조함과 떨림이 묻어나오는 것까진 감추지 못한 채였다. 아마 내심, 부디 그들이 협조해 주길 바라고 있을 터였다. 그들이 본 광경을 만들어 낸 장본인들이 이안 일행이라는 걸 모를 리 없었으니까.
물론 이안은 그들과 굳이 싸울 생각이 없었다. 경험치조차 없는, 무의미한 살육이 될 테니까.
게다가 해결책도 간단했다.
'썩 내키는 방식은 아니지만….'
오스릭을 바라보던 이안의 시선이, 이내 아래로 내려갔다.
역시나, 샬롯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나서도 되겠냐는 듯한 눈빛.
거기다 메브와 필립도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이안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긴장감이 없구만.
어깨를 까딱인 이안이 말했다.
"짧고 간결하게."
샬롯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턱을 살짝 치켜든 그녀가, 이윽고 그르렁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춰라. 여기 계신 이분은 엄정한 여신의 성전사이자 타오르는 여신의 불씨의 운반자, 거인 왕국 최후의 징벌자이며 북부의 진정한 대전사-"
"...?!"
오스릭을 비롯한 병사들의 눈이 점점 커졌다. 샬롯은 그들 하나하나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심장을 찌른 용살자이자, 백금룡의 공식적이며 유일한 대행자. 이제는 왕국을 암중에서 지배하던 흡혈 일족을 처단하고 루 사드를 구원하기까지 하신, 북부의 초인, 이안 호프 경이시다!"
짧게 하라니까….
적막이 내려앉는 가운데, 이안이 소리 없이 입맛을 다셨다.
오스릭과 병사들은 말 그대로 멍한 얼굴들이었다.
놀랍지도 않았다. 저 장황한 칭호들을 한 번에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그게 더 놀랄 일이었다.
이윽고 오스릭이 입을 달싹였다.
"흡혈… 일족이라니… 그게 무슨… 루 사드가, 마족의 지배를 받고 있기라도 했다는… 말이오?"
아, 역시 그게 제일 충격인 건가.
생각할 찰나, 필립이 슬쩍 그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저도 거들어도 되겠습니까?"
"...."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내친걸음이니, 다른 주접이 더해진다 해서 달라질 것도 없으리라.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나선 필립이 소리쳤다.
"방금 이안 경의 종자가 한 말은 전부 사실입니다! 이는 루 솔라의 신도이자 티르 엔의 사도. 약자들의 구원자이며 정당한 복수의 대행자인 붉은 기사, 메브 리우렐 경의 이름으로 보증합니다!"
"복수의…? 귀공이… 그, 붉은 기사란 말씀이시오?"
"저는 경의 종자인 필립입니다."
깍듯하게 대답한 필립이, 옆의 메브를 향해 손을 받쳐 들었다.
가뜩이나 벌어져 있던 오스릭의 입이, 메브의 녹색 눈을 마주한 순간 더 크게 벌어졌다.
그 명성이 자자한 붉은 기사가 여인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모양. 메브가 입을 연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붉은 기사, 메브 리우렐이오. 그리고 지금은, 북부의 초인인 이안 호프 경을 섬기고 있지."
"...?"
이안이 돌아보았음에도, 메브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이안 경께서는 뱀파이어들이 루 사드를 지배하고 있음을 알고, 그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셨소. 그리고 끝내 그 저주받은 족속들을 전부 격퇴하고 루 사드를 구원하셨지. 이는 찬란한 여신과 엄정한 여신께서 지켜보셨으며, 투쟁의 신께서도 가호한 성전이었음이니."
병사들을 한차례 돌아본 메브가 덧붙였다.
"모두 무기를 거두고 합당한 예를 갖추시오. 무지로 저지른 무례에는 죄를 묻지 않을 것이나, 알고도 행하지 않음은 신성 모독이요, 또한 마족을 섬겼음을 자백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
이안의 한쪽 눈썹이 말려 올라갔다.
입을 연 것도 드문 일인데, 거기다 한술 더 뜨기까지 한다고…?
#173화
메브의 날 선 눈빛을 응시하던 이안은, 곧 다른 일행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들 웃음기 없이 진지했다.
심지어 테사이아조차 무표정했는데, 백발이 일렁이듯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여차하면 그대로 달려들 기세군.
이안이 생각하는 사이, 손에 쥔 창과 방패를 덜덜 떨던 병사들이 속삭이기 시작했다.
"아, 아무래도 전부 사실인 것 같습니다, 대장. 밖의 그 광경을 보셨잖습니까…!"
"맞습니다. 근래에는 하늘도 불길하기 짝이 없었고, 흉흉한 소문도 한둘이 아니었잖습니까. 우리만 해도, 죄다 기절했다 깨어났고요."
"이러다 우리 모두 한통속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습니다…! 교단의 정화자라도 찾아온다면, 다 죽은 목숨이라고요…!"
병사들의 목소리가 이어질수록, 오스릭의 멍한 눈에 조금씩 빛이 돌아왔다.
이윽고 마른 침을 삼킨 그가, 이안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이안 경…? 제가 이렇게 불러도 되겠습니까?"
"괜찮소."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상 일행들에게도 의사를 표현한 것이었다. 다들 진정하라고.
오스릭의 말이 이어졌다.
"백작 각하께서 정말… 마족이셨던 겁니까?"
"그렇소. 그리고 여기가 그들의 본거지였지. 그런 의미에서, 나도 묻고 싶군."
오스릭의 눈을 마주 보며 이안이 덧붙였다.
"아무리 장벽에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영주가 도시 밖에 따로 저택을 지어 사는 걸 정말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소?"
"...! 무, 물론입니다! 제국의 명문가는 그러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들었으니까요. 왕국은 제국과 인접한 데다 각별하게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제국의 방식을 따르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
화들짝 이어가던 말을 문뜩 멈춘 그가, 눈을 질끈 감으며 탄식했다.
"맙소사… 루 솔라여…."
자신의 말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구차한 변명 같다 여긴 모양이었다. 이윽고 그가 손에 든 검을 툭 땅에 떨어뜨리며 말에서 내렸다.
병사들도 기다렸다는 듯 손에 든 걸 전부 떨어뜨리며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뒤이어 그들 사이에 한쪽 무릎을 꿇은 오스릭이 소리쳤다.
"찬란한 여신께 맹세코, 저희를 비롯한 글루미르의 주민들은 전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저희의 목숨으로 진실을 증명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
명예를 지키고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선 죽을 수도 있단 건가.
이안은 짧게 헛웃음을 지었다.
누가 기사 아니랄까 봐, 병사들의 입장 따윈 전혀 고려하지 않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몇몇 병사는 당장이라도 도망칠 것처럼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이안은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기 전에 입을 열었다.
"흡혈 일족과 그들의 하수인은, 우리의 손에 남김없이 죽었소."
"...!"
"하지만 물론, 아직 왕국에는 놈들의 끄나풀들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교단에서도 그리 여길지도 모르고."
화색이 돌던 오스릭과 병사들의 얼굴이 다시금 얼어붙었다.
이안의 태연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적어도 당신들이 무고하다는 건 알고 있소. 그러니 일어들 나시오."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경…!"
진심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한 오스릭이 벌떡 일어서며 덧붙였다.
"왕국에 놈들의 끄나풀이 남아 있다면 남김없이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색출할-"
"그건 알아서들 하시오, 그보다…."
이안이 오스릭을 마주 보았다.
"마차와 말을 좀 팔아주지 않겠소? 보다시피 다들 다치기도 했고, 아직 갈 길이 멀어서."
"물론입니다… 만. 저, 그와 관련해서 작은 제안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제안?"
"저 혼자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엄중한 사안인지라…."
이안의 시선에 마른 침을 삼킨 오스릭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귀빈들께서 도시를 방문해 직접 증언해 주신다면, 진실을 밝히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차후 교단에 저희의 무고함을 증명할 때도 그렇겠지요. 또한 경을 비롯한 귀빈들께 왕국을 대신해 감사와-"
"알겠소."
말을 자른 이안이 덧붙였다.
"머무는 동안 안락한 숙소와 훌륭한 식사를 제공해 준다면야."
"당연히 그리할 것입니다! 그럼,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바로 돌아가 소식을 전하고, 마차를 이끌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러시오. 보다시피 일행이 많으니 큰 마차로 부탁하겠소. 짐을 싣고 갈 짐 마차도 있으면 좋겠고."
"그리하겠습니다. 다들 이곳에서 귀빈들을 호위하며 대기하라."
오스릭이 주춤대며 일어서는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성심을 다해야 할 것이다. 루 사드의 구원자들이시니."
"예, 옛…!"
"예!"
병사들이 꼿꼿이 서며 소리치는 가운데, 이안에게 고개를 숙인 오스릭이 곧바로 말에 올라탔다. 말머리를 돌린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다. 떨어뜨린 검조차 다시 주워들지 않은 채였다.
무기를 집어 든 병사들이 일행을 등지고 서는 가운데.
"역시 나리십니다."
필립의 느긋한 속삭임이 이어졌다. 이안의 시선을 받은 그가 용병의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덕분에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회복과 재정비 시간을 가질 수 있겠군요. 말과 마차도 얻어낼 수 있겠고요."
"난 팔아 달라고 한 것 같다만."
"에이. 저들이 설마, 나리께 돈을 받겠습니까?"
"...."
이놈, 정말 귀족들을 상대론 날강도가 다 됐네.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이안의 귓가로 메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들이 원하는 조사와 증언은 내가 대행하겠다, 이안. 네가 허락한다면."
"그렇게 하시오."
선선히 대답한 이안이 옅은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덧붙였다.
"협박 솜씨가 좋으신 줄은 몰랐소. 덕분에 일이 쉬워졌군."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협박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
이안의 시선에, 메브가 담담한 얼굴로 덧붙였다.
"나는 빈말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어."
"그럼…. 아니오, 그러시군."
뭔가 되물으려던 이안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 뻔했기 때문이다. 백금룡은 교단의 성자이니 그의 뜻을 대리하는 이안 역시 성자이며, 이안에게 반하는 것은 신성 모독이 맞다 하겠지.
'성기사가 성자를 섬기는 건 당연한 일이라 하겠고.'
여차하면 정말 피를 볼뻔 했군.
입맛을 다시며 시선을 돌린 이안은, 이내 샬롯과 눈을 마주쳤다.
한쪽에 쌓여 있는 전리품들을 기다렸다는 듯 턱짓한 그녀가, 뒤이어 등을 돌리고 늘어선 병사들 쪽으로도 고개를 까딱였다.
'부려먹잔 거지?'
청출어람이라더니. 다들 정말 대단하군.
피식댄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송곳니가 보이게 미소지은 샬롯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나다 싶은 놈들은 내려와라. 그리고 여기 쌓인 물건들을 위로 옮겨. 이것들은 이안 경께서 정당한 소유권을 지닌 전리품이자, 증거물들이다."
저건 또 내 말투 같은데.
허둥지둥 몸을 돌리는 병사들을 바라보며 이안이 턱을 긁적이는 사이.
"나머지도 다 내려 와."
테사이아가 낭랑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위에 선 병사들의 시선을 받은 그녀가, 요정 특유의 고고한 얼굴을 유지한 채 덧붙였다.
"아직 아래에 묻혀있는 것들이 있으니까. 다들 파는 걸 돕도록 해."
"...."
"왜, 싫어?"
"아, 아닙니다…!"
폐허를 꺼림칙하게 바라보던 병사들도 비로소 잔해의 비탈길을 내려왔다.
이안의 시선을 받은 테사이아가 이게 되네, 하고 입술만 달싹여 말했다.
적응이 너무 빠른 거 아닌가.
입맛을 다신 이안이 이윽고 내뱉었다.
"맨입으로 부려먹지 말고, 작업이 끝나면 적당히들 챙겨 줘라. 성과가 좋은 사람한테는 더 많이 주고."
병사들의 눈에 의욕을 불어넣기에는 충분한 말이었다.
필립의 탄성이 뒤를 이었다.
"채찍뿐 아니라 당근도 적절하게 활용해야 하는 거군요. 역시 나리십니다. 또 하나 배웠네요."
넌 그만 좀 배워도 될 것 같다만.
코웃음 친 이안이, 내려놓았던 접시를 집어 들었다.
"스튜나 한 국자 더 퍼 와라."
***
오스릭 경은 크고 단단해 보이는 이두 마차와 짐 마차, 약간의 호위병과 또 다른 기사까지 동행한 채 돌아왔다.
마차는 제국에서 수입한, 본래 백작 내외가 사용하던 물건이랬다.
빈말이 아닌지, 내부는 마부석에 앉은 샬롯을 제외한 나머지 넷이 충분히 타고도 남을 만큼 넓었다.
"출발하겠습니다."
마차는 병사들의 호위 아래 저택을 나섰다.
병사들의 호위 아래, 마차가 저택을 떠났다.
미로 정원의 장미 넝쿨들은 전부 까맣게 말라 죽은 후였다. 필립의 말대로 규모도 훨씬 작아진 데다, 정문으로 일직선으로 통하는 길까지 열려 있었다.
"...."
하지만 저택 너머에 펼쳐진 광경까지 달라진 건 아니었다.
비쩍 말라붙어 본래 형태를 가늠하기 어려운 수많은 시체들. 이미 썩기 시작해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날벌레들이 날아다녔다.
모든 시체가 미라처럼 피를 빼앗긴 건 아니었다.
저택으로 향하는 일행을 가로막았던 것들은, 썰리고 토막난 형태 그대로 썩어가고 있었다.
이안은 마차의 창문을 통해, 저 멀리까지 이어진 시체들의 길을 새삼스럽게 눈에 담았다.
오스릭을 비롯한 병사들이, 그들을 발견한 순간부터 벌벌 떨어 댄 이유를 확실히 이해하고도 남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저 괴물들의 우두머리나 저것들을 모조리 죽인 장본인이나, 그들에겐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으리라.
다른 일행들도 마차 밖을 바라보며 저마다의 감상에 빠져 있었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쾌적하네, 이안."
테사이아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안이 그녀 쪽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그래. 그러니까 의자에 앉아도 될 것 같다만."
"여기가 편한걸. 익숙해서 그런가. 그러니까 다들 조심해 줘. 날 밟지 않게."
한복판의 바닥에 살짝 다리까지 굽힌 채로 누운 테사이아가 메브와 필립을 돌아보았다.
필립이 어이없다는 듯 뇌까렸다.
"대체 왜 이러시는 건가 했더니. 항상 이렇게 다니셨던 거군요."
마주 앉은 메브의 시선을 받은 이안이 입맛을 다셨다. 오해받기 딱 좋은 구도였기 때문이다.
"강제로 이런 건 아니오. 저가 좋아서 저러는 거지."
메브가 흐릿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피곤했겠구나 싶었을 뿐이야. 네가 눈에 띄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거늘. 보아하니, 어디서든 눈에 띌 수밖에 없었겠어."
"알아주니 고맙소."
이 녀석들이 주위의 이목을 다 잡아끌어 준 덕에 오히려 편했던 부분도, 아예 없진 않았지만.
"받아들이도록 해, 빨강 머리."
테사이아가 느긋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나랑 야옹이는, 어딜 가든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금방 익숙해질 거야."
"넌 이제 마족이 아니다, 테사."
가라앉은 눈으로 테사이아를 내려다본 이안이 덧붙였다.
"귀쟁이 중에서도 귀족이라 할 수 있는 원로 요정이지. 그러니 예의범절이라는 걸 배워 두는 게 좋을 거다."
"…그래야 할까?"
움찔댄 테사이아가 되물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메브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적어도 문명인으로서의 기본적인 소양은 익혀 두도록 해. 여기 메브 리우렐 경이, 아주 좋은 선생님이 되어줄 거다."
"그래, 알았어. 이안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의자에 앉는 게, 그 시작점이 되겠군."
벌떡 일어선 테사이아가 이안 옆의 빈자리에 앉았다.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메브의 시선이 다시 이안에게로 돌아왔다.
"괜찮겠느냐? 내가 아는 예법은 변방의 것이며, 그마저도 기사의 것인데."
"뭐든 지금보단 나을 테니 걱정 마시오. 애초에, 우리 중에 그런 걸 가르칠 사람은 경밖에 없잖소."
"흐음… 그렇다면…."
"루시라고 생각하시오. 아니, 루시보다 어리다고 생각해도 무방하겠군. 들어서 알겠지만, 겉모습과 달리 아는 게 별로 없거든."
"잘 부탁해, 스승님."
테사이아가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메브의 눈빛이 묘하게 엄격해지는 사이, 필립이 넌지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떤 의미에선 제 사제가 생긴 셈이군요."
"꿈 깨, 주근깨. 내가 널 귀여워해 주는 거라면 모를까. 처음엔 내 눈도 못 마주친 주제에."
"그건 테사가…."
"내가, 뭐?"
"…아닙니다. 없던 일로 하죠."
"왜 말을 하다 말아? 귀는 또 왜 빨개지고. 뭔데?"
이 녀석 하나만 늘어났는데, 몇 배는 더 시끄러워진 기분이군.
둘의 대화를 한 귀로 흘리던 이안의 시선이, 이윽고 다시 마차의 창 밖으로 향했다.
어느새 글루미르시였다.
글루미르는 겉보기만큼이나 크고, 그나마 잘 정돈된 도시였다.
거리를 오가던 시민들이 걸음을 멈추고 마차를 바라보았다.
다소 생기 없이 퀭한 얼굴들을 바라보며, 이안은 문득 주마등 속의 여제를 떠올렸다.
'아무런 애정도 없다더니….'
본인은 스스로가 영토와 백성에 대한 애착을 잃었다 여겼지만, 정말 그런 건 아니었던 게 분명했다.
정말 그랬다면 이들도 모두 죽여 저택의 양분으로 삼았을 테니까.
마법으로 도시 전체를 잠들게 하는 건, 이 암흑 시대의 마족 치고는 너무 미지근한 방식이었다.
물론 가만히 두었다면 다들 잠든채로 죽음을 맞이했겠지만….
'정작 부하들은 아예 인간성을 잃은 것들이 태반이었는데. 아이러니하군.'
문득 혼돈의 파편이 흐릿한 울림을 토해냈다. 가슴에 손을 얹은 이안의 눈썹이 슬쩍 말려 올라갔다.
어쩌면 진혈을 빨아들인 파편에, 여제의 사념이 흐릿하게나마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여제가 처음은 아닌데. 설마 죄다 조금씩 남아 있는 건 아니겠지.'
어차피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도시를 가로지른 마차가, 이윽고 내성 앞에서 멈췄다.
첨탑뿐 아니라 몇몇 벽면을 곡선으로 지은 데다, 지붕까지 얹어 대저택처럼 보이기도 하는 제국 양식의 성이었다.
활짝 열린 대문 앞에는 기사와 사제를 비롯한 성의 관리와 하인들이 전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가 멈춘 순간부터 살짝 고개를 숙인 그들의 얼굴에 저마다의 긴장이 묻어났다.
대부분은 자칫하며 이 자리에서 마족의 끄나풀로 몰려 목이 날아가리라 여기는 모양이었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저 사이에는 정말 뱀파이어의 끄나풀이 섞여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이안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투구를 눌러 쓴 메브가 안면 가리개를 내리며 말했다.
"먼저 내리겠다, 이안. 아무도 네 곁에는 접근하지 못하게 할 거야."
"여기서부터 나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더 위엄있어 보일 테니까요. 방으로 모실 테니, 편하게 따라오십시오."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인 필립이, 먼저 마차에서 내리고는 절도있는 움직임으로 마차 문을 잡았다.
테사이아가 이안의 팔을 잡으며 속삭였다.
"내 옆에 딱 붙어 있어, 이안. 걸음이 너무 빠르면 말하고."
"…그 정도로 중환자는 아니야."
이런 과잉보호를 받게 되는 날이 다 오다니.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선선히 마차에서 내렸다.
대기 중이던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새로운 영주를 맞이하기라도 하듯이.
#174화
"다들 회의실에 모이도록 조치해 두었습니다. 준비가 끝나면 나오십시오. 복도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일행을 안내한 오스릭이 깍듯하게 말하고는 방을 나섰다.
뒤이어, 메브와 필립이 문 앞에 섰다.
"식사하시면서 편히 쉬고 계십시오. 일이 끝나면 바로 돌아오겠습니다."
"호위병을 문 앞에 세워 둘 테니, 염려 말고 쉬어라. 이안."
여전히 안면 가리개를 내린 채 말한 메브가, 필립과 함께 방을 나섰다.
이안은 방 한 가운데에 놓인 대형 식탁 앞에 대충 걸터 앉았다.
앉은 건 그뿐이었다. 샬롯과 테사이아는 여전히 앞에 선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킬 일이 있다면 맡겨만 달라는 듯이.
…다들 정말 내가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게 할 셈인 거군.
낮게 웃음 지은 이안이 입을 열었다.
"이곳 관리들에게 전리품을 정리해. 물물 교환도 괜찮고. 그 후엔 나가서 여정에 필요한 물자를 구비해라. 뭘 준비해야 할 지는, 알고 있겠지?"
샬롯이 곧바로 대답했다.
"말과 마차. 식량. 장비. 옷도 몇 벌 더 사야겠군. 따로 더 원하는 것이 있나?"
"마석을 구할 수 있다면, 소형으로 세공된 것도 몇 개 구해 와. 판별은 테사에게 맡기고."
"그러지. 빨리 끝내고 돌아오겠다. 그리고 염려 마라. 관리들에겐 가격을 후려치더라도, 주민들에겐 그러지 않을 테니."
"누가 뭐래? 다 등쳐먹고 와도 상관 없어."
씩 웃은 샬롯이 몸을 돌렸다.
왜 농담인 줄 아는 거지. 이안이 생각하는 사이, 샬롯의 뒤로 냉큼 따라붙은 테사이아가 손을 흔들었다.
"다녀올게, 이안."
샬롯이 나지막이 으르렁댔다.
"놀러 가는 거 아니니까, 표정 관리 잘 해라. 귀쟁아."
"너나 잘해, 짐승아. 난 그냥 무표정하게 서 있기만 할 거니까."
투닥댄 둘이 언제 그랬냐는 듯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방을 나섰다. 그리고 불과 몇 분도 지나지 않아, 하인들이 음식을 대령하기 시작했다.
식탁 가득 다양한 음식이 놓였다. 대부분 육류였고, 포도주가 담긴 술병도 대령됐다.
이안의 눈조차 제대로 마주 보지 못한 채, 하인 하나가 물었다.
"더 필요하신 게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술만 더 가져다주면 좋겠는데."
"바로 대령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하인이 곧바로 몸을 돌렸다.
악당이라도 된 기분이군.
소리 없이 코웃음을 치면서도, 이안은 곧바로 식사를 시작했다.
음식은 상당히 훌륭했다.
겉모습만 제국의 영향을 받은 건 아닌지, 온갖 향신료와 양념을 아끼지 않았다. 포도주도 물을 거의 타지 않은 듯 맛과 향이 진했다. 아마도 가장 좋은 것들을 아낌없이 내온 것이리라.
'뱀파이어들이 이걸 먹진 않았을 테고… 의심을 피하기 위해 오히려 더 신경을 쓰며 산 건가.'
하긴. 내성의 크기만 봐도 딸린 식구가 한둘이 아닐 터였다. 귀족과 관리들도 여럿 있었으리라. 그중에 몇이나 지금까지 남아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안은 고기를 우물대며 널찍한 방을 눈에 담았다.
사용한 흔적도 없는 커다란 침대.
바닥에 깔린 곰과 사슴 가죽. 벽면마다 아른거리는 등잔불. 하나뿐인 커다란 창 옆에는 기다란 커튼까지 드리운 채였다.
식탁이 놓인 이곳은 일종의 응접실이었으리라.
잘 뒤져 보면 이 방의 주인이 마족이었다는 증거가 여럿 나오겠지만, 어쨌건 상당히 크고 화려한 공간이었다.
'크고 화려…?'
문득 곱씹은 이안이, 쥐고 있던 닭 날개를 접시에 툭 떨어뜨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봐야 음산하고 칙칙한. 현대인의 눈에는 감옥 같아 보이는 방에 불과하건만.
일행들에게 둘러싸인 덕에 잠시 잊고 지냈던 회의감이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느새 자신이, 이 암흑 시대의 현지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적응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조차 무의미했다.
이 세계의 존재들에게 정을 주지 않으리라던 다짐도, 무색해진 지 오래였다.
머리로는 몇 번이나 테사이아가 죽는 게 당연하다 생각했지만, 막상 그게 현실이 되자 오로지 살릴 생각만 했던 것처럼.
필립이 부상당하자 꼭지가 돌아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처럼.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아무렇지 않게 떠넘긴 것조차, 사실은 그들을 그만큼 믿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이제는 본래의 세상이 꿈처럼 느껴졌다. 그저 그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시발….'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현대인으로서의 그가 남아 있었다.
어떻게든 이 개 같은 세계를 벗어날 것이며 그때가 되면 이 세계의 인연들과도 작별할 것이란 생각 역시,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부서져 가는 세계에서 아득바득 목숨 건 사투를 이어나가는 게 아니라, 카드 명세서와 월세에 한숨 쉬며 월급날만 기다리던 삶이 여전히 더 그립고 소중했다.
적어도 아직은.
'하지만 만약 언젠가… 아니.'
다쳐서 그런가, 별 의미도 없는 생각을 다 하는군.
코웃음을 친 이안이 잔에 담긴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렇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이 세상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도, 지켜보기만 하면 죽게 되리란 사실에도 변함이 없었으니까.
심지어 그는 점점 더 심한 망캐가 되어가는 중이기까지 했다.
무엇이 더 소중한지 따위의 배부른 고민은, 어떻게든 끝까지 살아남아 이 세계의 결말까지 보고 난 뒤에 다시 해도 늦지 않을 터였다.
'애초에 그 빌어먹을 놈의 결말이란 걸 보고 나서도, 돌아갈 수 있다는 보장조차 없지만….'
지금은 그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 나갈 길을 생각하고 곱씹는 게 우선이었다.
그가 전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이, 이제는 마냥 먼 얘기라고만 할 수는 없었으니까.
문득, 앞에 놓인 음식들이 투박하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포도주 역시 향보다 시큼털털한 맛이 먼저 느껴졌다.
하지만 이안은 묵묵히 음식을 씹어 삼키고 술병을 기울였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나가는 게 최선일지를 생각하면서.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 오오."
그를 현실로 되돌린 건, 문을 열고 들어온 필립이었다.
처음엔 식탁에 놓인 음식에 눈이 휘둥그레졌던 그는, 뒤이어 이안이 먹고 남긴 뼈 무더기에 더 놀란 표정이 되었다.
"이렇게 많이 드시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제 스튜가 입에 맞지 않으셨던 모양이군요."
"먹어야 빨리 회복하지."
심드렁하게 대답한 이안이 고기를 마저 입에 넣었다.
투구와 장갑을 벗은 메브와 필립이 식탁에 앉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은 잘 해결되었다."
운을 뗀 메브가 식은 빵을 집어 들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의 신분은 물론이고, 뱀파이어들에 대해서도 다들 순순히 납득하더군. 저 밖의 물증들뿐만 아니라, 다들 저마다 한 구석씩은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그랬겠지. 믿고 싶지 않았을 뿐."
"이제 더 우리를 귀찮게 할 일은 없을 겁니다, 나리. 다들 앞으로 할 일이 많아 보였거든요."
필립이 묘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덧붙였다.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번 일로 생긴 공백을 차지할 생각들이겠군."
"바로 그렇습니다.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제 귀에도 들리더군요."
왼팔을 고정한 붕대를 풀면서, 필립이 짧게 혀를 찼다. 미간을 슬쩍 찌푸린 건 어깨의 통증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국왕도 뱀파이어의 하수인이리라 추정하더군요. 왕이 무사한지부터 확인할 생각인 것 같았습니다. 혹, 뱀파이어들 사이에 왕으로 보이는 자가 있었습니까?"
"글쎄. 있었어도 죽었겠지."
이안은 어깨만 으쓱였다. 딱히 짐작이 가지는 않았다. 있었다 해도 별 볼 일 없는 뱀파이어였으리라. 허수아비 왕에게 많은 진혈을 하사할 리 없었다.
"그야 그렇겠군요. 어쨌든, 다들 내심 그러길 바라는 것 같았습니다. 거기다 전선의 병력부터 먼저 손에 넣을 궁리를 하더군요. 그 후에 어쩌려는 건지는 뻔합니다. 병력과 사제를 앞세워 왕궁으로 향하고, 왕가를 조사한 뒤에 다음 왕을 옹립하겠죠. 저들은 왕국의 새로운 권력자가 되겠고요."
경멸스럽다는 듯 말한 필립이 포도주로 입을 축이고는 내뱉었다.
"우리가 며칠 내로 떠날 거라 말하고 나니, 다들 얼굴에 혈색이 돌더군요. 그리고는 더는 캐묻지도 않고, 편하게 머물다 가라고만 했습니다. 중요한 건 우리 나리의 서명뿐이었던 거죠."
"뭐, 그럴 만하지. 우리가 나서서 권력 놀음이라도 하려 들면, 밥그릇을 빼앗길 테니까."
이안의 태연한 말에, 필립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한심하고 허탈할 따름입니다. 정말 목숨 걸고 싸운 건-"
"그런 말 말거라, 필립. 우리는 외지인일 뿐이니. 게다가 저들이 야심에 불타는 만큼, 나라의 혼란은 빠르게 가라앉을 거다. 나쁘게만 생각할 거 없어."
메브가 나지막이 말을 잘랐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도, 썩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비로소 술만 홀짝이기 시작한 이안이 덧붙인 건 그 직후였다.
"어차피 저들이 뭘 하건 큰 의미가 있지는 않을 거다. 사실, 루 사드는 전혀 구원받지 못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씹던 걸 멈춘 필립이 이안을 바라보았다.
"아까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었지요. 루 사드에, 또 다른 문제가 생기리라 보시는 겁니까?"
"루 사드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야. 변방 왕국들, 어쩌면 제국 변경까지도 영향을 받게 되겠지."
"제국까지도?"
메브가 가라앉은 눈으로 되물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말했다.
"여제는 죽기 전에 저주를 풀었소. 세상에 또 하나의 균열을 새길 거라더군."
"...."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됐지."
메브와 필립의 입이 일순간 벌어졌다. 이윽고 필립이, 입에서 침이 튀는 것조차 신경 쓰지 못한 채 되물었다.
"이 일대에, 침식이 시작되기라도 할 거란 말씀이십니까?"
"정확히는 나도 몰라. 어쨌건, 좋은 일이 일어나진 않을 거다."
"마경이 더 많이, 더 빠르게 형성되거나…. 어쩌면 이 일대가 전부 흉지가 되어 버릴지도 모르겠군. 최악의 경우엔…."
읊조리듯 내뱉은 메브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균열을 뚫고 저 너머의 것들이 넘어오게 될지도 모르고."
"저 너머라면… 공허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지. 이 세상 너머에는 공허만 존재하는 게 아니니까."
"…그럼요?"
"세상의 틈새에서만 살아가는 괴물들도 있지. 나도 정확한 실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만. 공허에서 넘어오는 것들이 존재하듯, 틈을 뚫고 숨어드는 것들이 있을지도 몰라."
알아서들 잘 말하는군.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와 메브를 번갈아 바라보던 필립이 탄식했다.
"그럼 당장 전쟁부터 멈춰야 합니다. 그리고 단 한 명의 백성이라도 더…."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너도 이미 알 텐데."
술잔을 내려놓은 이안이, 메브와 눈빛을 교환하고는 말을 이었다.
"전쟁을 멈추거나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식의 생각은 할 필요도 없어. 그건 영주들을 모조리 죽여도 불가능할 테니까."
"그야… 그렇겠습니다만…."
"전쟁이 계속되는 한 언젠가는 여제가 아니라도 일어나게 될 일이었다. 우리는, 그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하면 돼."
"이런 혼돈과 비극을 바라는 자들. 바라는 걸 넘어 조장한 자들을 찾아내 단죄하는 걸 말하는 것이겠군."
메브가 빵을 접시 위에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필립이 무거운 얼굴로 술잔을 들었다.
"그렇다면 결국, 본래대로-"
문이 벌컬 열린 건 그때였다.
"다녀왔어, 얘들- 어머. 다들 표정이 왜 그래?"
팔을 흔들며 성큼성큼 들어온 테사이아가 이내 눈을 깜빡였다.
필립이 입맛을 다시는 가운데, 테사이아를 지나친 샬롯이 빈자리에 앉으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다녀왔다, 이안."
"일은?"
"어느 정도는 정리됐다. 마차는 오늘 우리가 탔던 걸 받기로 했다. 그리고 말을 한 마리 더 샀다. 식량과 술도 준비해 준다더군. 내일 이후로는 언제든 떠날 수 있을 거야."
"훌륭하군."
"마석을 판매하는 상인은 없었지만, 대신 성의 창고에 소형 마석이 몇 개 있다더군. 두 개 정도 뜯어냈다. 돈을 아낀 만큼 장비를 더 구할 수 있을 것 같다. 내일 추가로 구매하러 갈 생각이야. 다들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말해라."
"재미있을 줄 알았는데 그저 그랬어. 난 정말 한마디도 못 했다고. 야옹이가 으르렁대면서 협박하는 소리만 줄창- 어머."
투덜대며 고기를 한 점 입에 넣은 테사이아가, 이윽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거 맛있다. 이래서 다들 고기를 먹는 거였구나? 이안의 피 만큼은 아니지만. 굉장하네."
이어 그녀가 손으로 고기 한 덩어리를 더 집어 입에 가득 욱여넣었다. 입가에 양념이 잔뜩 묻은 건 덤이었다.
덕분에 분위기가 조금은 가벼워졌다. 메브가 식기 쓰는 법을 가르쳐야겠다고 중얼거리는 가운데, 풀썩 웃음 지은 필립이 덧붙였다.
"의외로군요. 요정은 고기를 즐기지 않는 줄 알았는데요. 술이라면 모를까."
"그래? 난 원래 피를 마셔서 그런가. 너무 맛있는데? 물론 이 술도 맛있고. 이게 포도주구나. 전에 마셨을 땐 구정물 같았는데."
"천천히 먹어라, 귀쟁아. 입맛 떨어지게 하지 말고."
샬롯이 핀잔을 주면서도 테사이아의 잔에 포도주를 채워 주었다. 입가에 기름과 양념을 묻힌 테사이아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던 필립이 물었다.
"마족이었을 때의 피 맛과 지금 느끼는 고기 맛을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비슷하게 느껴지나요? …아, 무례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악의는 없었습니다."
샬롯의 시선을 받은 필립이 재빨리 덧붙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씹던 고기를 꿀떡 삼킨 테사이아가 말했다.
"맛있다는 건 비슷한데, 그 외엔 전혀 달라. 이쪽이 조금 더 다채롭네. 음, 어쨌든 난 좀 덜 익은 게 입에 맞는 것 같아. 촉촉해."
이것도 뱀파이어였던 영향인가?
이안은 게임의 요정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의 요정들도 고기를 아예 먹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다지 즐기지는 않았고, 대부분 빵이나 열매 따위를 더 좋아했다.
필립의 말대로 술을 가장 좋아하긴 했지만.
손바닥으로 입가에 묻은 것들을 훔친 테사이아가, 이윽고 눈을 빛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 야옹이 말로는 제국으로 간다던데. 맞아?"
다시 식사를 이어가던 메브와 필립이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루 사드 남쪽 국경을 넘어서, 제국의 서부로 향할 거다."
"서부? 서부 어디?"
"말하면 아냐? 제국에 가 본 적도 없는 주제에."
샬롯이 핀잔을 주는 가운데, 잠시 말을 멈춘 이안이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술을 마시며 샬롯과 테사이아를 번갈아 바라본 그가, 이윽고 잔을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너희들은, 거기 도착하기 전에 떠나도록 해."
"...?!"
#175화
샬롯과 테사이아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메브와 필립도 하던 걸 멈추고 이안을 바라보았다.
"떠나라니. 그게 무슨 뜻이야, 이안?"
뒤이어 테사이아가 되물었다. 이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말 그대로다. 제국에 들어서고 나면, 떠나도록 해."
"왜…? 이제야 겨우 다시-읍."
테사이아의 입을 수인의 커다란 손이 막았다. 테사이아가 눈동자만 굴리는 가운데, 샬롯이 말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런 말을 하진 않겠지. 뭐냐? 다른 시킬 일이라도 있는 거야?"
"뭐… 이유야 여럿 있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테사이아를 바라보았다.
"네 의뢰는 끝났다, 테사. 더는 아무것도 네 목숨을 노리지 않아. 그러니 당장은, 굳이 계속 같이 다닐 필요도 없지."
"보수! 의뢰 보수를 받아야지!"
샬롯의 손을 억지로 밀어낸 테사이아가 소리쳤다.
"그게 순서잖아. 의뢰에는 합당한 보수가 뒤따라야 하는 법이라며."
"보수를 받지 않겠단 말은 아니다만."
"엥…? 그럼?"
테사이아가 멍하니 되물었다. 이안이 술잔을 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넌 이제 원로 요정이다, 테사. 하지만 그래서 네가 뭘 할 수 있게 된 건지는 아무도 모르지. 심지어 너 자신도. 게다가 무기를 다룰 줄도 모르고, 뱀파이어의 권능도 잃었지. 그러니 지금의 넌, 그저 더 빠르고 감이 좋은 요정일 뿐이야."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이야?"
"어떤 의미에선. 당장은."
내뱉은 이안이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테사이아가 충격받은 얼굴로 굳어진 가운데, 잔을 내려놓은 이안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너는 너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테사. 하지만 그건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지. 같은 귀쟁이들이라면 모를까."
"...!"
"그래서 떠나라는 거다. 제국 남부로 가. 그래서 요정들을 만나라. 듣자 하니 거기엔 어린 생명수도 몇 그루 있다더군. 거기서 네가 어떤 존재인지 깨닫고, 네 능력을 일깨워. 그래서 진정한 의미의 원로 요정이 돼라."
"…기억도 되찾고?"
테사이아가 조금은 달라진 눈빛으로 물었다.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그러고도 달라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그것도 노력해 보던가."
"달라지다니?"
"모든 기억이 돌아온 네가, 지금의 너와 같은 존재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전형적인 귀쟁이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거군. 하긴, 그럴 수도 있겠어."
중얼댄 샬롯이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이 녀석이 이 모양인 건, 기억이 없어서일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기억이 없는 지금의 내가 더 좋단 거지?"
해 본 적 없는 생각이라는 듯 멍하니 눈을 끔뻑이던 테사이아가, 이윽고 되물었다.
이안과 샬롯은 그저 어깨만 까딱였다.
테사이아의 표정이 묘해졌다.
"너희들은… 정말이지…."
그녀의 눈에는 어느새 충격이나 서운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다른 여러 종류의 감정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전부 헤아릴 순 없었지만, 이안이 보기엔 하나같이 낯간지러운 종류의 것들이었다.
"알았어. 기억은 굳이 찾으려고 애쓰지 않을게. 애초에 노력한다고 될 일도 아닐 거야. 그게 아니면,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을 리가 있겠어? 그래도… 어쨌든… 고마워, 얘들아. 그렇게 말해줘서."
…못 들어 주겠군.
슬쩍 미간을 찌푸린 이안이 내뱉었다.
"날 위해서 하는 말이다. 그게 나한테 도움이 되니까. 그러니 가능하다면 요정 사회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아. 쉽진 않겠지만, 아예 불가능하지도 않을 거다. 기억이 없다 해도, 넌 엄연한 원로니까."
"알았어. 해 볼게."
"다시 말하지만, 쉽지는 않을 거다. 귀쟁이는 못 믿을 족속들이니까."
"어려워도 상관없어."
단호하게 내뱉은 테사이아가 자신만만하게 미소 지었다.
"해낼게. 이안. 그래서 쓸모 있는 귀쟁이가 되어서 돌아올게."
이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지 않아도 돼. 오히려 거기 쭉 눌러앉아 있는 게 더 도움이 될 거다. 나뿐만 아니라 샬롯에게도."
"…야옹이는, 왜?"
테사이아의 고개가 기울어지는 가운데, 샬롯이 눈이 번쩍 뜨인 듯한 얼굴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주황색 눈을 마주 보면서, 이안이 말을 이었다.
"전에 들은 말이 있어. 이대로면 머지않아, 요정들이 교단을 앞세워 수인들을 멸망시킬 거다. 전부 죽이지는 않더라도, 노예로 만들어 부리게 될지도 모르지."
"...!"
테사이아가 눈을 치켜뜨며 샬롯을 돌아보았다. 메브와 필립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이런 얘길 왜 안 했어?"
샬롯이 테사이아의 시선을 슬며시 피하며 내뱉었다.
"확실하지 않으니까. 그저, 귀쟁이 한 놈이 한 말일 뿐이야."
"그때 그놈을 말하는 거군. 핀드렐 아이나스."
눈을 가늘게 뜬 메브가 말했다.
샬롯이 낮게 가르릉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의 기분이 되살아 난 모양이었다.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이안이 말했다.
"샬롯은 너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 이번엔 네가 저 녀석을 도와."
"...."
테사이아의 눈동자가 짙은 녹색으로 가라앉았다. 샬롯이 무표정하게 입을 연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이 녀석의 도움까진 받지 않아도 된다, 이안. 내가 이 녀석을 구하려고 한 건, 내 목숨을 여러 번 구한 빚을 갚기 위해서였을 뿐이야."
"네 종족이 걸린 일이야. 자존심이나 철칙 따윈 넣어 둬라."
딱 잘라 말한 이안이 그녀를 마주 보았다.
"이번 일이 끝난 뒤에 다시 말하기로 한 얘기가 있었지. 그걸 지금 하겠다."
샬롯의 눈이 순간 커졌다.
이안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는 지금까지 네 역할을 충분히 해 줬다. 강제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그걸 떠나서도 언제나 기대 이상의 능력을 보여 줬지. 내 목숨을 노렸던 빚은, 이미 한참 전에 다 갚았다."
"...."
"그러니 이 녀석과 함께 가라. 가는 동안 남부에 대해서도 알려 줘. 거긴 네가 가장 잘 아니까. 그리고 그 후엔, 네 일족을 구해."
잠시 말을 멈춘 이안이 샬롯과 테사이아를 번갈아 돌아보았다.
"너희 둘은 종족 간의 원한을 극복하고 친구가 됐지. 서로를 여러 번 구했어. 이번에도 다를 건 없다. 서로가 서로의 목표를 이루는 데에 도움을 주면 돼. 물론, 그게 나한테도 도움이 될 거고."
말문이 막힌 듯 입만 달싹이던 샬롯이, 이윽고 간신히 내뱉었다.
"…내가 일족을 구하는 게, 네게도 도움이 될 일 같지는 않다만."
"그건 모를 일이지. 내가 남부에 가게 될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남부로 올 거야, 이안?"
테사이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말했듯이, 어쩌면."
"그래. 그래서 쭉 눌러앉아 있으라고 한 거구나…. 알았어. 그러면 거기서 기다릴게.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댄 테사이아가, 이윽고 묘한 미소를 지으며 샬롯을 돌아보았다.
"결국, 우린 또 한 몸인 거네. 샬롯."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징그러우니까."
이안과 테사이아의 시선을 피하며 내뱉은 샬롯이, 앞에 놓인 술잔을 들었다. 그녀가 입에 가져간 술잔을 아주 천천히 기울였다. 머릿속에 오가는 여러 생각과 감상들을 정리할 시간을 벌려는 듯이.
그들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필립이, 이윽고 이안을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역시, 나리는 대단하십니다."
"그래. 그야말로… 고결하군."
메브가 덤덤하게 덧붙였다. 질색하듯 한쪽 얼굴을 찌푸린 이안이 술잔을 들었다.
"날 위해서 하는 말들이오. 이 녀석들이 그러는 게 나한테 도움이 되니까. 그러니 쓸데없는 오해들 하지 마시오."
빈말이 아니었다.
제국 남부는, 게임에선 DLC에 포함된 추가 지역 중 하나였으니까.
그리고 이안에겐 미지의 영역이기도 했다.
그때의 그는 메인 시나리오를 클리어할 생각뿐이어서, 진행에 필수적이지 않은 지역은 뒷전으로 미뤄 뒀었다.
사실, 거의 모든 DLC가 그랬다.
심지어 더 이상 스토리를 진행하지 못하게 됐을 때는, DLC 지역들로 넘어갈 방법도 사라진 상태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터였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남부에 발을 들이는 때가 오게 되리라.
그리고 그때 샬롯과 테사이아가 그곳에 있다면, 분명 그가 그 미지의 영역을 헤쳐나가는 데에 큰 도움이 되어 줄 터였다.
'그게 게임에서도 있었던 상황일지는 모르겠지만….'
이안은 대수롭지 않게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흡혈 여제와 싸우면서 확실해진 부분이 하나 있었다.
그가 게임에선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을 만들어 내더라도, 일어날 일은 어떻게든 일어난다는 것.
물론 전혀 예상치 못한 나비 효과가 더해질 위험성이 있긴 했지만. 게임의 흐름을 의식해 선택을 주저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했다.
"수인족에 대해서 말했다는 귀쟁이는 누구야? 이왕 이렇게 된 거, 알아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메브와 필립이 묘한 미소를 짓는 가운데, 테사이아가 불쑥 물었다.
이안은 선선히 아공간에 손을 넣어, 꽃 모양의 은 브로치를 꺼내 들었다.
"아이나스라더군. 꽤 이름 있는 가문 같았다. 이게 그놈들의 문장이고."
"흐음…. 아이나스. 그래. 기억해 둘게."
"이놈들이 우리 뒤를 추적해 올지도 몰라. 아마 나와 샬롯을 죽이려 들겠지. 그런 상황이 온다면-"
"죽여 버려. 누구든."
테사이아가 단호하게 뒷말을 가로챘다.
이안의 시선에, 그녀가 싱긋 입술을 말아 올렸다.
뱀파이어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미소였다.
"난 귀쟁이보다 너희가 더 중요해. 그것들은 동족에 불과하지만, 너희는 가족이니까. 인간들도 그렇잖아? 가족을 건드리는 것들은, 죽어도 싸."
짧게 웃음 지은 이안이 술잔을 들며 덧붙였다.
"낯간지러운 소리를 잘도 하는군."
"뭐 어때. 없는 얘기도 아닌데."
"다음부턴 그냥 속으로만 해."
"그냥 할래. 네 반응이 재밌거든."
"...."
"네 뜻은 잘 알았다. 이안."
샬롯이 내뱉은 건 그때였다. 잔을 내려놓고 이안을 똑바로 마주 본 그녀가 덧붙였다.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군. 하지만, 제국에 들어서자마자 떠날 수는 없을 것 같다."
"…없다고?"
"그래. 네가 그리 말해주었다 해도, 나는 아직 네게 빚이 남아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건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지."
샬롯이 시선을 돌려 메브와 필립을 바라보았다.
"너와 달리 이들에겐,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빚을 갚을 기회가 없을 수도 있어. 어쩌면, 남부를 오래도록 떠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메브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술을 홀짝댔고, 필립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고기를 입에 가져갔다.
샬롯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니까, 이들이 쫓는 타락자를 잡아 죽일 때까진 함께하게 해 다오, 이안. 그 후에는 네 명령대로 남부로 떠나겠다."
"…부탁."
이윽고 내뱉은 이안이, 잔을 쥐고는 덧붙였다.
"이번 건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다."
"…그래, 부탁."
묘한 미소를 입가에 건 샬롯이, 잔을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그 앞으로 기다렸다는 듯 잔을 내민 건 필립이었다. 그가 샬롯과 눈을 마주치며 미소 지었다.
"고맙습니다, 샬롯. 계속 함께해 주신다니 든든하군요."
"동감이다. 대가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너처럼 뛰어난 전사의 도움을 사양할 수는 없지."
메브도 잔을 들면서 덧붙였다.
일행의 행동을 지켜보던 테사이아도 냉큼 잔을 들었다.
"그럼 나도 너희한테 빚을 갚는 거로 할게. 어쨌거나, 내 의뢰에 목숨 걸고 나서 준 거니까."
"확실히, 당신은 다른 요정들과는 좀 다른 구석이 있군요. 테사."
필립이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곧 일행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안에게로 모였다.
"…다들 왜 이렇게 장단이 잘 맞는 건지 모르겠군."
이윽고 헛웃음을 지은 이안도 잔을 내밀었다. 서로의 잔을 부딪친 일행이 동시에 잔을 비웠다.
"말이 나온 김에, 아까 못 다 한 본론으로 넘어가는 게 좋겠군요."
입가의 술을 소매로 닦으며, 필립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언제 떠나는 게 좋을까요? 나리."
잔에 새 술을 따른 이안이 샬롯을 돌아보았다.
"장비를 전부 보급하려면 며칠이나 필요하지?"
#176화
샬롯이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얼마나 필요해질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지간한 건 하루면 구할 수 있을 거다. 병기고에 물건이 제법 있어 보이더군. 도시의 대장간에도. 관리를 적당히 구슬리면 구매할 수 있을 거야."
"최면이 딱인데, 이젠 쓸 수가 없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한 번 시도나 해 볼까?"
테사이아가 끼어들었다. 헛웃음을 지은 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괜한 짓 하지 마라. 그냥 돈으로 사. 경, 내일 샬롯과 함께 장비를 구매해 주시오."
"그러지."
메브가 고개를 끄덕이며 술병을 받아 드는 사이, 필립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설마, 모레 바로 떠나려는 건 아니시겠죠? 나리께서 요양하시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입니다."
요양은 무슨.
피식한 이안이 붕대를 칭칭 감아 팔을 고정해 둔 그의 어깨를 턱짓했다.
"나보단 네 걱정이나 해라. 그 상태론 칼도 못 휘둘러."
"전 거뜬합니다. 성물의 가호를 받고 있으니까요. 상처가 깊긴 했습니다만 덧나는 일 없이 아물고 있고, 후유증도 없을 겁니다."
"센 척만 늘어선…. 경은 어떻소?"
"나는 네 뜻에 따르겠다. 언제라도 상관 없다."
"준비는 우리 셋이 해도 충분하니까, 너희 둘은 휴식에만 전념하면 좋겠군."
메브에 이어 샬롯이 덧붙였다.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이, 필립이 단호하게 내뱉었다.
"종자인 제가 굳은 일에 빠질 수는 없죠. 쉬시는 건 이안 나리만으로 충분합니다."
"글쎄…. 지금 네 꼴로 봐선 별 도움 안 될 것 같은데. 주근깨."
테사이아의 직설적인 말에, 이미 발그레하던 필립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곧 그가 힘을 쓰지 않고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읊어대기 시작했다. 그래 봐야 흥정이나 협박 따위였다.
일행은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저마다 다음 여정을 위해 준비해야 할 물품들에 대해 떠들어 댔다.
이안은 그들의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며 주먹만 쥐락펴락했다.
아직 몸 상태가 온전하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통증은 적었지만, 부러지고 금 간 뼈가 간신히 이어 붙은 정도일 터였다.
어쩌면 타락용에게 죽다 살아난 때보다 회복할 시간이 며칠은 더 필요할지도 몰랐다.
하긴. 이번에는 회복을 도와줄 용의 마력이 없었다.
'이것도 충분히 괴물 같은 회복력인데. 사람의 욕심은 정말 끝이 없군.'
피식한 이안이 입을 열었다.
"그럼, 모레 아침에 떠나는 거로 하지."
필립이 홱 그를 돌아보았다.
"정말 그렇게 빨리요? 겨우 하루만 더 쉬시겠단 말씀이잖습니까!"
"혹시 나 때문이라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 이안. 부족에 남은 시간은 그리 촉박하지 않아."
샬롯이 뒤이어 덧붙였다. 고개를 저은 이안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이동하면서 쉬면 돼. 대신 여기 머무는 동안엔 꼼짝도 하지 않을 거니까, 내가 나설 일 없게 확실히 준비해."
"…그래. 그러지."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메브도 자기만 믿으라는 듯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러시다면야 어쩔 수 없죠, 하고 중얼댄 필립이 이내 일행을 한차례 돌아보고는 미소 지었다.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군요. 저와 우리 나리 둘이서만 타락자를 추적하던 게 불과 얼마 전인데. 용을 죽인 북부의 초인에, 눈을 가리고도 뱀파이어를 죽일 만큼 뛰어난 수인 전사. 거기다 한때는 마족이었던 원로 요정까지 함께 해주시게 됐으니 말입니다. 이 여정의 끝에 얼마나 대단한 타락자가 기다리건, 아주 손쉽게 처리할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듭니다."
술잔을 든 그가 취기 어린 얼굴로 미소 지었다.
"그래 봐야 개인에 불과할 자가, 흡혈 일족 전체만큼 강할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메브와 샬롯, 테사이아가 동의하듯 술잔을 들었다. 이안이 중얼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이 자리에 미구엘이 없어서 다행이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놈이 있었다면, 네가 하면 안 될 말만 줄줄이 골라서 읊는다고 난리를 쳤을 테니까.
속으로만 읊조린 이안이, 입맛을 다시며 술잔을 들었다.
"술이나 마셔라."
굳이 분위기를 망칠 말을 다 내뱉을 필요는 없었으니까.
잔에 담긴 포도주를 단숨에 전부 마신 테사이아가, 텅 소리가 나게 잔을 내려놓은 건 바로 그때였다.
"그래서, 대체 제국 서부 어디로 가는 건데? 타락자는 또 뭐고."
"그러고 보니, 테사는 아직도 모르시겠군요. 흠… 어디서부터 말씀 드려야 할지."
"처음부터 전부."
"그럴까요? 좋습니다, 어차피 밤은 이제 시작이니까요."
"너도 한 번씩 마음에 드는 소릴 하네, 주근깨."
웃음 지은 필립이 술을 들이켜고, 테사이아가 능숙하게 자신의 술잔을 채웠다. 메브와 샬롯도 연신 술을 홀짝이며, 시작된 필립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술꾼들만 모였군.
이안은 소리 없이 웃음 지으며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댔다.
왁자지껄한 대화는 한참이나 더 이어졌다.
늦은 밤, 접시와 술병이 남김 없이 비워질 때까지.
***
예고대로, 이안은 방을 떠나는 일 없이 휴식에 전념했다.
아침부터 육류 위주의 식사를 배불리 하고, 그 외의 시간은 전부 침대에서 보냈다.
물론 일행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필립은 물론이고 테사이아까지 그랬다. 심지어 흥정에 꽤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무표정하게 빤히 응시하고 있으면, 다들 귀족에게 추궁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초조해한다는 것이다.
아마 원로 요정으로 거듭나면서, 특유의 이질적이고 고고한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진 덕분이리라.
"제가 얘기할 때는 콧방귀만 뀌던 상인들이 알아서 물건 값을 깎아줍니다. 이젠 슬슬 화가 날 지경이군요."
잠결에 이런 필립의 투덜대는 목소리가 귓가를 스칠 정도였다.
"샬롯도 이런 기분이셨습니까?"
"아니. 나는 그럴 때 손톱이나 이빨을 보여준다. 그러면 거기서 숫자가 조금 더 줄어들지."
"...."
"아무래도 넌 흥정에는 재주가 없는 것 같군, 필립."
"아니… 그런 걸 흥정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넌 말과 마차의 점검에만 신경 써. 힘쓰는 일도 하지 마라. 어깨의 상처가 터질지도 모르니까."
"…예."
때때로 방에 돌아오는 일행의 대화를 귀에 담으면서도, 이안은 잠에 취한 하루를 보냈다.
일행은 정말 단 한 번도 그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밤에도 바닥에 깔린 가죽 위에 저마다 흩어져 누워 잠을 청했고, 침대를 양보하려는 이안의 말은 아무도 듣지 않았다.
이안이 침대를 벗어나기 시작한 건 다음 날 오전 부터였다.
도시가 이른 아침부터 소란스러웠기 때문이다.
포도주가 담긴 술잔을 든 이안이 창가에 나른하게 기대 섰다.
일행이 머무는 방은 성의 가장 높은 층, 가장 깊은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그래서 내성의 정문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대신 도시의 전경은 비스듬하게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이안의 시선은 크고 작은 건물들 너머, 막 성문을 통과하는 일련의 무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지금 도시를 빠져 나가는 건 오스릭 경이 지휘하는 병사들입니다. 국경의 펠미르로 가서, 성의 지휘권을 장악할 계획이라더군요. 어렵지 않은 일이겠지요. 현 지휘관들은 흡혈 일족의 끄나풀이라는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테니까요."
어떻게 알았는지, 뒤에서 필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메브와 함께 방으로 들어온 그가, 이안에게 다가오며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절주절 떠들어 댔다.
"새 영주인 벨란 자작은 병력 대부분을 이끌고 진작 떠났습니다. 도노반 주교님을 대동하고 수도로 간다더군요. 거기서 왕가와 도시의 혼란을 잠재운다는 명목으로 실권을 잡을 생각이겠죠. 더불어 새 작위도 받고 말입니다."
걸음을 멈춘 그가 짧게 혀를 찼다.
"다들, 영지를 손에 넣을 생각에 눈이 벌개진 모양입니다."
"명분도 충분하고 시간 싸움이나 다름 없는 문제이니 서두르는 건 이해가 간다만…."
읊조리며 이안의 곁에 선 메브가, 하늘을 덮은 먹구름만큼이나 칙칙한 도시의 전경을 훑으며 덧붙였다.
"병력을 너무 많이 차출했다. 덕분에 글루미르는 지금 무방비나 다름 없어. 본래도 병력이 그리 많지는 않아 보였거늘…."
"그게 다 우리 덕분 아니겠습니까. 애초부터 전선에서 동떨어진 지역인데, 이젠 근방에 마물도 없으니까요. 이미 어제부터 성문을 활짝 열어두고 사람들을 받더군요. 이곳은 안전하다는 걸 보여주려는 거겠죠."
"…어쨌든, 우리는 이제 안중에도 없단 거군."
심드렁하게 내뱉은 이안이 술을 홀짝였다. 필립이 어깨를 으쓱였다.
"떠날 준비까지 바쁘게 하고 있으니 더 그럴 겁니다. 사실, 우리가 여기 눌러 앉는다고 해도 막을 명분도 없고요. 엄연히 루 사드의 구원자들 아니겠습니까? 새 영주가 서둘러 떠난 건 그래서일지도 모릅니다."
필립이 묘한 눈빛으로 이안을 돌아보았다.
"나리가 마음을 바꾸시기라도 하면, 글루미르를 내어줄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그러길 바라는 말투로군."
"그럴리가요. 나리가 고작 이런 영지 하나를 다스릴 인물은 아니시죠. 나라 하나라면 모를까."
나라도 줘도 안 가지거든? 차라리 스킬 포인트 하나가 더 좋지.
짧게 실소한 이안이 무관심한 눈길로 도시를 훑으며 내뱉었다.
"떠날 준비는?"
"거의 다 끝났습니다. 우리가 도시에 들어올 때 탔던 제국제 마차를 타고 떠날 겁니다. 말도 세 마리 준비해서, 먹이를 든든하게 먹여주고 있고요. 옷과 식량도 충분히 구비해 뒀습니다. 보다시피, 급한 대로 새 장비도 구했고요."
필립이 멀쩡한 오른팔을 옆으로 펼쳐 보였다. 한쪽 견갑이나 팔목 보호대 따위가 전부 새로 산 물건이었다.
그 와중에도 방주 상단에서 구매한 물건 중 멀쩡한 것들은 짝이 안 맞아도 그대로 쓰고 있어서, 성기사의 종자 보다는 베테랑 용병 같아 보였다.
"그래. 알아서 잘 했겠지."
이안이 술을 홀짝이며 대답하는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묵직한 발소리가 이어졌다.
각종 장비들을 품에 안은 샬롯과 테사이아였다.
식탁 위에 장비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많이도 샀군."
"다 네 거다, 이안."
이어진 샬롯의 말에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나 혼자 쓰기엔 많아 보이는데."
"쓸만해 보이는 건 다 들고 왔다. 물건 보는 안목은 네가 가장 좋으니까, 골라서 선택할 수 있게."
"걱정 마. 남은 건 가지고 가면 돈을 다시 돌려 받기로 했으니까. 물론 그건 야옹이가 할 거고."
테사이아가 물건들을 짝을 맞춰 늘어 놓으며 덧붙였다.
무슨 맞춤 서비스인가.
비로소 헛웃음을 지은 이안이 식탁 앞으로 다가갔다.
흡혈 일족과의 전투 이후로, 그는 사실상 장비를 전부 새로 맞춰야 했다.
"이거. 이거. 이거. 그리고-"
이안은 물건들을 하나하나 툭툭 건드려 보고는 어렵지 않게 필요한 것들을 분류했다.
아쉽게도 대부분은 전에 쓰던 것보다 성능이 떨어졌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무리 좋은 장비라도 결국은 소모품이었다. 성물에 가까운 단죄의 검조차 반 토막이 나버리지 않았던가.
"좋아. 끝이네."
이안이 선택할 때마다 휙휙 장비들을 침대 옆에 옮겨 놓은 테사이아가, 손을 탁탁 털며 미소 지었다.
"남은 건 야옹이가 돌려주러 가고, 난 이제 뒷마당으로 나갈 거야. 빨강 머리가 검술을 알려 주기로 했거든."
"검술을…?"
이안은 새삼 테사이아를 눈에 담았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각종 가죽 방어구들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 심지어 옆구리에는 그럴싸한 장검도 한 자루 끼워둔 채였다.
활동성을 중시한 복장이었지만, 이렇게 보니 어엿한 요정 전사가 따로 없었다.
원로는 마법사인 것 같던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마법사라고 검을 쓰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가 그렇듯이.
"염려 마라, 이안. 다치거나 사고가 생길 일은 없게 할 테니."
메브가 덧붙였다. 짧게 웃은 이안이 잔을 내려놓았다.
"날 두들겨 패던 때처럼만 하지 마시오. 저 녀석 성격에, 그러면 정말 죽자고 달려들지도 모르니까."
"그럼 그만큼 배움이 빨라지겠군."
그러시겠지.
이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다시 침대로 향했다. 잠이 오지는 않았지만, 할 수 있을 때 억지로라도 더 자둘 필요가 있었다.
내일 아침이면 다시 덜컹대는 마차나 말 안장 위에서 종일 시간을 보내야 할 테고, 모닥불에 의지해 잠들고 이슬을 맞으며 깨어나는 생활이 반복될 테니까.
일행들이 조용히 방을 빠져 나가기 시작한 가운데. 맨 뒤에 선 필립이, 침대에 누운 이안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모든 일이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으니, 나리는 맘 편히 쉬기만 하십시오. 우리는 내일, 무탈하게 글루미르를 떠나게 될 겁니다."
***
'…무탈은 개뿔.'
이안이 생각과 함께 눈을 뜬 건 늦은 새벽이었다.
어두운 천장을 응시하는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오염된 마력의 파장이 선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순간에 갑자기 나타났고, 심지어 그리 멀지도 않았다.
신경이 곤두서는 가운데, 귓가로 아주 희미한 소리가 파고들었다.
두꺼운 판자를 부수는 듯한 소리. 이어진 짧은 비명.
…대문을 부수고 들어온 건가.
이안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일어난 건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
"...."
이미 눈을 뜨고 있던 테사이아와 상반신을 일으킨 메브. 그리고 샬롯까지 연달아 일어나 서로를 한차례 돌아보았다.
철컥, 촤르륵-
그리고 곧,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저마다의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대화는 한 마디도 필요하지 않았다.
#177화
이안은 희미하게 번지기 시작하는 소음을 귀에 담으며, 바닥에 놓인 사슬 갑옷을 집어 들었다.
'흡혈 일족과 관련된 마족인가? 아니면 원탁?'
어느 쪽이건 자신의 실력은 물론이고 흔적을 남기지 않을 자신도 있는 놈, 혹은 놈들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성을, 심지어 정문을 부수며 침입할 생각 따윈 하지 못할 테니까.
사슬 갑옷 위에 판금 흉갑을 걸치는 이안의 뇌리로, 자연스러운 가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정말 그를 노리는 거라면, 본래는 도시 밖에서 그를 기다릴 계획이었으리라.
하지만 성문이 활짝 열려 있고, 병력이 앞다퉈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는 생각을 고쳐먹었겠지. 도시로 들어와 남은 병력이 거의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엔, 정문으로 쳐들어가도 되리란 자신감까지 얻었을 테고.
미로 저택 앞에 펼쳐진 광경도 다 봤을 테니, 시간을 오래 끌고 싶지도 않았을 터였다. 이안이 요양 중이라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을 테니까. 완전히 회복하기 전에 끝장을 내려는 심산이겠지.
'날 죽이고 도시를 빠져나갈 자신이 있는 건가. 아니면, 목격자를 전부 죽일 자신이?'
물론 그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또 다른 세력일 수도 있었다. 선수를 쳐서 글루미르로 쳐들어온 옆 영지의 특공대라든가.
물론 그렇다 해도 딱히 달라질 건 없을 터였다.
물론 그는 내전 따위에 개입할 생각 같은 건 없었지만. 이런 짓을 벌인 놈들이 그런 뜻을 순순히 받아들일 리 없었다.
"이게 무슨 소리… 엥…?"
뒤늦게 밖의 소란을 듣고 일어난 필립이, 바쁘게 준비 중인 일행을 멍하니 눈에 담았다.
곧 잠이 달아난 얼굴이 된 그가 튕겨 오르듯 일어섰다.
"야습?! 야습입니까?"
"넌 계속 잠이나 자라. 어차피 그 상태로는 싸울 수도 없으니까."
이안이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대답했다. 판금 갑옷을 능숙하게 걸쳐 입던 메브가 그를 돌아보았다.
"나는 너도 빠졌으면 좋겠다만. 무엇이 침입했건, 우리 셋이서 싸워도 충분할 거야."
"그럴 순 없소."
퀘스트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안이 팔목 보호대를 마저 고정하는 사이, 필립이 왼팔을 고정한 붕대를 풀며 내뱉었다.
"저도 그럴 순 없습니다. 다들 싸우러 가시는데 저만 어떻게-"
"그럼 너는 테사와 함께 성의 사람들을 통솔해. 괜히 얼쩡거리다가 피 보는 일 없게."
이안이 덧붙인 말에, 벌써 방어구를 거의 다 착용한 테사이아가 홱 고개를 돌렸다.
"나? 나까지? 나는 왜?"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한쪽 눈이 파랗게 멍들고 입술 끝이 터진 테사이아의 얼굴 대신, 닫힌 문으로 향했다.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리! 나리…! 도와주십시오…!"
문 두드리는 소리와 숨넘어가는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곧 문이 열리고, 무기도 들지 않은 병사 하나가 거의 구르듯 들어서며 소리쳤다.
"정문을 부수고 웬-!"
그의 목소리가 이내 잦아들었다. 이미 준비에 한창인 일행을 눈에 담은 덕분이었다.
"이미 알고 계셨군요. 다행입니다, 루 솔라여…."
식은땀을 흘리며 중얼댄 병사가 주저앉았다. 장갑을 낀 이안이 각반을 확인하며 내뱉었다.
"상황이나 설명해 봐. 침입자에 대해서도."
"단 한 명입니다. 새카만 흑마를 이끌고 온, 정체를 알 수 없는 흑기사!"
"흑기사…?"
메브가 되물었다. 병사가 목이 떨어질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저는 비명을 듣고서야 깨어났습니다. 저를 비롯한 병사들이 달려나갔을 때는, 이미 정문이 박살 난 상태였습니다. 그 두꺼운 문을 어떻게 부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부서진 대문 한복판에 그 흑기사가 서 있었습니다. 문을 지키던 초병들은, 이미 다 죽은 상태였고요."
"그래서?"
"그자는 몰려나오는 병사들을 마주 보면서도 태연하더군요. 그리고는 쇳가루를 삼킨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테사이아를 바라보며 말한 병사의 시선이 이안에게로 돌아갔다.
"용살자는 어디에 있냐고요. 다들 굳어 버린 와중에, 저만 겨우 정신을 차리고-"
역시, 날 찾아온 놈이군.
단검 집이 달린 가죽 띠를 어깨에 묶으며, 이안이 일어섰다.
"그거면 충분해. 알려 줘서 고맙군."
메브와 샬롯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인 그가 걸음을 옮겼다. 엉거주춤 장비를 착용하던 필립이 다급하게 그를 돌아보았다.
"나리! 정말 두고 가실 거면, 이거라도 끼고 가십시오!"
그가 손에 든 것을 이안에게 던졌다. 반사적으로 받은 이안이, 손아귀에서 빛나는 황금 반지를 내려다보며 한쪽 입술을 말아 올렸다.
성 다미엘의 반지. 내부에 가득한 신성력이 전해졌다.
"아마도 나리라면, 그 성물의 힘을 끌어내실 수 있으실 겁니다."
물론 이안은 그럴 수 있었다. 성물답게, 반지에는 신성 스킬이 두 가지나 붙어 있었다. 빛의 축복과 빛의 방벽.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는 설명을 읽어 볼 필요도 없었다.
곧바로 왼손의 장갑을 벗으면서, 이안은 주저앉은 앳된 얼굴의 병사를 내려다보았다.
"너는 여기 남는 둘을 도와라. 성에 남은 이들을 안전한 장소로 피신시켜."
"네, 넷…!"
"이안, 그냥 나도 따라가면 안 돼?"
"필립은 아직 싸울 상태가 아니야. 그러니까 여차하면, 네가 사람들을 지켜야 돼."
"아, 내가 호위였어? 난 또-"
테사이아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이안은 곧바로 방을 나섰다.
전투 도끼를 움켜쥔 샬롯과 투구를 손에 든 메브가 뒤따라 복도로 나왔다.
복도와 계단. 다시 이어진 복도를 지나 또 다른 계단으로 들어선 이안의 눈에, 비로소 정문으로 통하는 연회장의 전경이 펼쳐졌다.
"루 솔라여… 시발…!"
"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연회장은 이미 피바다였다. 토막 난 병사들의 시체가 즐비하고, 살아남은 열 명 남짓한 병사들은 멀찍이 물러난 채 간신히 창만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안의 시선은 연회장 한복판에 고정되어 있었다.
방금 죽은 게 분명한, 사선으로 토막 난 시신 사이.
"...."
기다란 검을 늘어뜨린 흑기사가 우두커니 서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제로 보이는 육중하고 정교한 판금 갑옷이, 병사들의 피를 머금고 불그스름한 광택을 흘렸다.
양쪽에 비스듬한 뿔이 돋은 투구. 그 아래의 안면 가리개는 위아래가 앞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와 얼굴을 완전히 가렸다. 파충류의 머리 같아 보이기도 했다.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흑검이 불길한 예기를 머금고 번뜩였다.
푸르르…
흑기사의 뒤에서 숨소리가 이어졌다. 연회장 입구를 가로막듯 선 흑마가 내뿜은 콧김이었다. 머리와 목, 몸통을 대부분 가린 두꺼운 마갑 아래로, 근육질의 몸과 불그스름한 안광이 일렁였다.
그래, 정말 혼자서 다 죽일 수 있겠군.
흑기사의 시선이,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한 일행 쪽으로 돌아온 건 바로 그때였다.
"누가 용살자지?"
앞선 병사의 말대로, 쇳가루를 잔뜩 마신 것 같은 까끌까끌한 목소리가 번졌다. 목소리에 은은한 마력이 묻어 나왔다.
식은땀을 흘리던 병사들의 고개가 일제히 계단 쪽으로 돌아왔다.
"요, 용살자…! 용살자께서 오셨다…!"
"살았다…. 이제 우린 살았어…!"
병사들의 탄성이 번지는 가운데, 흑기사의 시선이 비로소 이안에게서 멈췄다.
"네놈이로군. 백금룡의 대행자…."
그 양반 이름은 왜 튀어나오지.
생각하며, 이안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럼 너는 뭐하는 새끼냐?"
흑기사는 대답 대신 검을 양손으로 고쳐 쥐며 검날을 투구 앞까지 치켜들었다.
솨아아-
놈의 전신에서 검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신성력처럼 느껴지는 힘. 하지만 그게 사실은 그렇게 보일만큼 밀도 높은 마력이라는 것을 깨달은 이안의 미간이, 비로소 굳어졌다.
'용의 마력…?'
"오늘이 너의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용살자. 내가 너의 목을 베고, 주의 유일한 대전사로 거듭날 것이니…!"
검붉은 아지랑이가 검을 타고 번지기 시작했다. 이안의 눈앞에 비로소 퀘스트 창이 이어졌다.
역천의 세 번째 사도.
이안의 뇌리로, 대륙에 남은 두 마리 용 중 하나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참칭하는 자, 라크마흐. 놈이 자신의 대행자를 보낸 게 분명했다. 이유는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지금, 백금룡의 대행자였으니까.
정작 이안이 주목한 건 전혀 다른 부분이었다.
'세 번째라니. 하나가 전부가 아니었어…?'
이안은 의문을 제대로 끝마치기도 전에 몸을 날렸다.
콰과과-
그가 선 계단을 향해 검붉은 충격파가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흑기사가 그대로 검을 크게 내리친 순간 터져 나온 충격파였다.
샬롯과 메브가 거의 동시에 계단 아래로 몸을 날리고, 부서진 돌계단의 잔해가 튀어 올랐다.
그 사이로 몸을 휘돌리는 이안의 눈동자가 잿빛으로 물드는 가운데.
"다들 물러나! 여긴 우리에게 맡기고 대피해라!"
바닥을 구르며 착지한 메브가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거의 동시에 착지한 샬롯이 방향을 틀어 용수철처럼 튀어 나갔다.
고대 장인의 전투 도끼를 머리 위로 힘껏 치켜든 채였다.
"잔챙이들은… 빠져라!"
소리친 흑기사가 검을 휘둘렀다. 대답 대신 한차례 포효한 샬롯이 도끼를 내리쳤다.
쩌엉-!
두꺼운 도끼날과 기다란 검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샬롯은 물론 흑기사도 밀려나지 않았다. 충돌한 둘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추고, 충격파가 동심원을 그리며 터져 나왔다.
휩쓸려 튕겨 나가면서, 샬롯이 소리쳤다.
"평범한 검이 아니다, 이안!"
"나도 봐서 알아."
충격파를 거슬러 달려가며 이안이 내뱉었다. 황금빛이 아른거리는 그의 검이, 검붉은 검을 늘어뜨리는 흑기사를 향해 뻗어나갔다.
빛의 축복과 바람 칼날이 더해진 황금빛 궤적을, 흑기사는 피하지 않았다.
카가가각-
이안이 휘두른 검이 놈이 치켜든 왼팔에 막혔다. 요란한 불티와 번쩍임이 남았을 뿐, 이안의 검은 그의 갑주를 가르지 못했다. 오히려 이안의 검에 작은 균열이 번졌다.
뿔 투구 아래의 안광이 일렁였다.
"기대 이하로군. 부상이 심한 모양이지?"
"딱 널 죽일 만큼만 별로지."
아닌 척하면서 나불대는 새꺄.
속으로만 덧붙이며, 이안은 준비하고 있던 진공 폭발을 사용했다.
쩌엉-
"...!"
소리 없는 폭발에 흑기사의 팔뚝과 몸이 일순간 꺾이더니, 그대로 튕겨 나갔다.
카가가가-
허공에서 자세를 다잡은 흑기사가 바닥의 판석을 깨뜨리며 멈춰섰다. 놈이 왼팔을 탁탁 털며 다시 일어섰다.
'뭐 이렇게까지 단단하지…?'
이안의 미간이 좁아질 찰나, 놈이 쥐고 있던 검을 고쳐 쥐었다.
용의 날개처럼 생긴 십자 막이에서 검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검신으로 번졌다. 놈이 이안을 향해 다시금 검을 휘두르려는 찰나.
쒸에에엑-
자루 대신 검날 끝부분을 움켜 쥔 메브가, 섬전처럼 달려들며 팔을 내리쳤다. 거꾸로 뻗어 나온 십자 막이와 뾰족한 무게추가 철퇴처럼 떨어지며 흑기사의 투구를 노렸다.
콰지직-!
흑기사는 검을 치켜들어 막았다. 그는 메브의 투구를 향해 왼 주먹을 뻗으려 했다.
그보다 검은 궤적이 그 옆으로 다가오는 게 더 빨랐다. 도끼자루를 몸 앞에 바싹 붙인 샬롯이었다.
콰지직-!
흑기사가 고개를 돌릴 찰나, 그녀가 그대로 놈에게 충돌했다. 쇠끼리 맞부딪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흑기사의 몸이 옆으로 밀려났다.
샬롯이 놈의 투구 앞으로 오른손을 뻗은 건 거의 동시였다.
안면 가리개를 덮은 새카만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쩌엉!
흑기사가 그대로 판석 위에 처박혔다.
뒤이어 놈의 몸 위에 올라타듯 달려든 샬롯의 오른손이, 다시 도끼자루를 움켜쥐었다.
콰직! 빠각! 콰지직!
샬롯이 난도질하듯 흑기사의 투구와 흉갑을 내리쳤다. 인간을 한참 초월한 속도와 힘. 흑기사의 안면 가리개와 흉갑, 목 가리개가 조금씩 우그러들었다.
투구 사이에 번지는 검붉은 안광이 타오른 건 바로 그다음 순간이었다.
"꺼져라-!"
쩌어엉!
터져 나온 검붉은 충격파가 샬롯을 휩쓸고 날려 버렸다. 주춤주춤 계단과 통로 쪽으로 흩어지던 병사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볼과 손등이 찢겨 나간 샬롯이 아무렇지도 않게 공중제비를 도는 사이.
충격파에서도 튕겨 나가지 않은 메브가 다시 일어서는 흑기사를 향해 다시금 돌진했다.
쒸아악-!
거꾸로 쥔 양손 검이 망치를 휘두르듯 흑기사의 투구를 향해 떨어졌다.
우지직-!
마지막 순간 흑기사가 고개를 옆으로 피했다. 덕분에 투구 한복판을 맞는 건 피했지만, 십자막이가 놈의 목덜미와 견갑 사이에 박혀들 듯 떨어졌다.
일어서던 흑기사의 한쪽 무릎이 다시 꺾였다.
물론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솨아아아-
"...!"
놈의 전신에 맺힌 아지랑이가 타올랐다. 흑기사가 늘어뜨린 검이 사선으로 솟구쳤다.
카가가가각-
메브가 왼팔에 고정한 버클러를 치켜들며 물러섰다. 검붉은 궤적은 버클러 표면을 찢어발기고, 그 너머의 갑옷에도 깊은 흠집을 냈다.
"신성한 결투를 방해하지 마라! 하찮은 것들아!"
흑기사가 포효하고, 간신히 균형을 다잡은 메브가 검을 고쳐 쥐는 사이.
"물러나시오."
이안이 그녀의 곁을 지나치며 내뱉었다. 어느새 그의 오른손에 들린 검에서 눈부신 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메브와 샬롯이 싸우는 사이에 주문을 완성한 것이다.
검을 사선으로 치켜든 채로 일어선 흑기사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누구 맘대로 결투냐?"
그의 검은 이미 뻗어 나가고 있었다. 흑기사도 치켜든 검을 내리쳤다.
이안은 피하지 않았다. 저 검이 아무리 빠르다 한들, 이 거리에서의 번개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콰릉-!
검과 검이 맞닿기도 전에 천둥 치는 소리가 났다. 실제로도 그랬다. 일순간 터져 나온 전격이 흑기사를 관통했다.
솨아아아-
흑기사의 뒤를 빛의 장벽이 감싸 안았다. 흑기사의 갑옷을 타고 거미줄 같은 뇌전 자락이 터져 나온 건 거의 동시였다.
파치치치치칫-!
황금빛까지 더한 눈부신 점멸이 이어졌다. 단 한 가닥도 밖으로 새지 않았다. 신성력의 장막에 부딪히자 굴절되어 흑기사에게로 도로 되돌아갔다.
"...!"
놈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고개를 한계까지 뒤로 꺾은 채로 그저 온몸을 바들댔다.
파칫, 파치칫….
곧 점멸이 가라앉았다.
흩어지는 뇌전 줄기 사이로, 흑기사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놈의 안면 가리개 틈에서 새카만 연기가 몇 가닥 피어났다. 전신에 아른거리던 아지랑이도 꺼질 듯 잦아들었다.
하지만 아직 퀘스트 완료 창은 뜨지 않았다. 이안은 연쇄 번개를 견디지 못하고 부러진 검을 던져 버리고는, 아공간에서 새 검을 꺼내 들었다.
투구 틈을 찔러야겠군. 그가 생각할 찰나였다.
키히이잉-!
울부짖은 흑마가 그대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마갑 사이로 흘러내리기 시작한 검은 안개가 거대한 궤적을 만들어냈다.
"...!"
마침 그 경로에 걸쳐 있던 샬롯은, 눈을 치켜뜨는 와중에도 전투 도끼를 횡으로 휘둘렀다.
두꺼운 전투 도끼가 돌진하는 말의 측면을 할퀴었다.
카가가가각-
마갑 표면에서 불똥이 튀고, 그 사이의 가죽도 길게 찢어졌다.
하지만 흑마의 돌진을 멈추지는 못했다. 도끼 날에 베인 상처에서는 피 대신 검은 안개가 뭉실뭉실 솟아나고 있었다.
그대로 샬롯을 지나친 놈이, 고개를 숙인 채 이안에게로 밀려들었다. 전신에 두른 안개가 맹렬하게 타올랐다.
저건 또 뭔.
인상을 찌푸린 이안이 결국 뒤로 몸을 날렸다. 간발의 차로 스쳐지나간 흑마가 그대로 궤적을 틀어 흑기사의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놈의 발자국마다 검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푸스스-
아지랑이는 삽시에 검은 안개로 화해 흑기사의 전신을 집어삼켰다. 어느새 흑마 역시 안개가 뭉친 듯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전신에 두른 마갑은 그 와중에도 말의 형태를 유지했다.
푸후우-
흑기사의 앞을 가로막은 유령마가 검은 연기가 섞인 콧김을 뿜어냈다.
바닥을 구른 이안이 고개를 들어, 놈의 적의 가득한 붉은 안광을 마주보았다.
그의 한쪽 입꼬리가 씁쓸하게 말려 올라갔다.
"부러운 새끼로군…."
저런 게 있다면, 말이 죽을 걱정은 없을 테니까.
#178화
콰아아-
흑기사를 집어삼킨 안개에서 검붉은 충격파가 터져 나온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팔로 얼굴을 가린 이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주르륵 밀려났다. 샬롯과 메브도 마찬가지였다.
"힉, 히이익-!"
"으허억…!"
아직 연회장을 빠져나가지 못한 병사들이 나뒹구는 가운데.
안개 사이로, 무릎을 꿇고 웅크린 흑기사의 모습이 설핏 드러났다.
꾸득, 꾸드드득-
본래도 2미터에 육박하던 놈의 덩치가 더 커지고 있었다. 갑옷 사이사이의 이음매가 점점 벌어졌다. 하지만 그의 갑옷은 그럼에도 분해되거나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듯, 몇 겹으로 두텁게 덧댄 부분들이 펼쳐지면서 새로운 이음매와 관절 부위를 만들어 냈다.
놈의 갑옷이 유독 두꺼운 건, 저런 장치들이 숨겨져 있어서였던 모양이었다.
'하다 하다 이젠 변신 갑옷이 다 나오네….'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충격파의 압력 속에서, 이안은 여전히 미간을 좁힌 채 놈을 노려보았다.
아마도 이게 전부가 아닐 터였다. 그가 혼돈력을 끌어올리는 사이, 쿵, 흑기사의 한쪽 판금 장화가 바닥을 디뎠다.
상체를 여전히 앞으로 숙인 채, 놈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크르르르…."
저주파가 섞여 두 겹으로 들리는 숨소리가 나지막이 번졌다.
이안은 전에 이것과 비슷한 숨소리를 이미 들어 본 적이 있었다. 타후므리트와 아르케아스에게서.
쿠우우-
검은 안개에 담긴 마력이 일순간 흑기사의 전신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흑기사가 구부리고 있던 상반신을 활짝 치켜든 건 바로 그 직후였다.
"----!"
흑기사가 응축된 마력을 발산하며 울부짖었다. 성 전체가 뒤흔들리는 듯한 함성.
"...!"
"컥… 커허…."
간신히 일어서던 병사들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다들 눈동자에 맥이 탁 풀리고, 몇몇은 거품을 물며 혼절했다. 자세를 다잡던 샬롯도 눈을 치켜뜨며 주저앉았고, 메브도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거친 숨결을 토해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지금 흑기사가 내지르는 함성은 용의 포효였으니까.
물론, 이안이 보기엔 여러모로 손색이 있었다. 저게 진짜 용의 포효였다면 지금쯤 성이 무너져내리고 그를 제외한 모두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을 테니까.
심지어 이안은 무릎조차 꿇지 않았다.
'…완벽하게 저항하진 못했지만.'
물론 곧바로 싸울 수 있는 상태까지는 아니었다. 팔다리가 저릿저릿하고 숨이 가빴다. 대기를 울리는 떨림에 밀려나지 않고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마력을 일깨우면서, 이안은 포효하는 흑기사를 눈에 담았다.
게임 속 3 챕터의 네임드, 역천의 첫 번째 사도가 뇌리를 스쳤다. 그때의 놈도 체력이 3분의 1 정도로 떨어지자, 저렇게 용과 인간의 혼혈 같은 모습으로 변신했었다.
더 강해진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패턴을 익히기 전까지 게임 오버 화면을 몇 번쯤 봤었다.
그때는 놈이 라크마흐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도인 줄 알았건만.
보아하니 몇이 더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투쟁의 축복을 내려줄 법도… 아니지.'
용이랑 싸울 때 준 축복을 용인 따위에 내릴 리가.
이안은 고개를 드는 미련을 단숨에 털어냈다. 축복은 어디까지나 빌려온 힘일 뿐, 본래 그의 능력이 아니었다. 의존하려 들다간 명줄만 재촉할 뿐이리라.
이안의 눈빛이 고요해질 찰나, 흑기사의 포효가 마침내 잦아들었다. 그르렁대는 듯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보아라. 이것이 은총 받은 자의 참된 모습이니…."
흑기사의 하반신에 뭉쳐 있던 검은 안개가 동심원을 그리며 낮게 깔렸다. 샬롯의 연타로 한쪽이 움푹 구겨진 안면 가리개가 쩍 벌어지면서, 그 사이로 붉은 안광을 머금은 눈동자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파충류의 그것처럼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이 이안을 응시했다.
놈의 눈빛에, 강대한 힘을 손에 넣은 자들 특유의 여유와 오만이 묻어나왔다.
"본모습을 드러내라, 백금룡의 대행자여. 거짓된 신들이 두려워 나약한 거죽 속에-"
"난 이게 본모습인데."
"-자신을 가둬 두. …뭣이?"
흑기사가 멈칫했다. 잿빛 마력이 아른거리는 눈으로, 이안이 덧붙였다.
"거기서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는 있냐? 아침까지 그 모습으로 있으면, 거짓된 신들이 거짓된 천벌을 내릴 것 같은데."
뇌전이 줄기줄기 모여드는 이안의 검을 슬쩍 응시한 흑기사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를 따라 전해지는 마력의 울림에 이안의 눈매가 슬쩍 꿈틀댔다. 미친놈인가, 뭐가 웃기지.
"과연, 그 용의 대행자로군. 스스로 거짓된 자들의 발을 핥은 백금룡만큼이나 어리석고 편협해. 아직도 느껴지지 않느냐? 그 기만과 거짓으로 얼룩진 것들의 영향력이 약해진 것이?"
카드득, 자신의 힘을 음미하듯 왼 주먹을 그러쥔 흑기사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인간의 신이란 것들은 전능한 척 신도들의 눈을 가리지만, 실제로는 순리에 따라 본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세상을 가까스로 틀어막고 있을 뿐인 머저리들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마저도 더는 제대로 할 수 없게 됐지."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내뱉은 흑기사가 이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이미 세상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잊히거나 멸망한 존재들과 용이 군림하던, 태초의 시대로. 용살자, 네놈도 거기에 한 몫 하지 않았느냐…?"
놈의 안광이 슬며시 휘어졌다.
"며칠 전부터, 나는 낮에도 주의 존재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듣자 하니 그날이 네가 마족으로부터 루 사드를 구원한 날이라더군. 정말 네놈은 이 작은 왕국을 구원한 것이 맞느냐? 거짓된 신들이 만들어 낸 균형을 무너뜨릴 마지막 화살을 쏘아 올린 것이 아니라?"
예리한 척 하긴.
싱긋, 입꼬리만 말아 올린 이안이 내뱉었다.
"그건 어떻게 해도 일어날 일이었어. 이 세상에는 너 같은 것들이 지겹게도 많으니까. 그런 의미로, 말도 지겹게 많아줘서 고맙군."
이안의 자세가 느슨해졌다.
"덕분에 그 짝퉁 포효의 여파가 전부 사라졌거든."
"…짝퉁? 그게 무슨 뜻이지?"
"가짜인 건 너도 마찬가지란 얘기지. 도롱뇽아."
다음 순간 이안이 몸을 날렸다. 어느새 그의 검은 뇌전이 가득 뭉쳐 빛나고 있었다.
코웃음 친 흑기사가 이제는 다소 짧게 느껴지는 흑검을 비스듬하게 늘어뜨리는 사이.
크히잉-!
놈의 곁에 우뚝 서있던 유령마가 이안을 향해 마주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의 검에 맺힌 마법을 뽑아내려는 모양. 하지만 이안은 검을 내뻗지 않았다.
타타탓-
유령마의 측면으로 쏜살같이 달려드는 검은 궤적이 보였기 때문이다.
샬롯. 무력화 상태를 완전히 떨쳐낸 듯, 그녀는 도끼날을 앞세운 채 포탄처럼 몸을 날리고 있었다.
콰장창-!
짐승처럼 울부짖은 그녀가 유령마의 마갑과 충돌했다. 샬롯과 뒤엉킨 유령마가 새카만 궤적을 남기며 옆으로 나뒹굴었다.
그 너머로 드러난 흑기사를 향해, 이안이 검을 내뻗었다. 놈이 왼팔을 앞으로 치켜든 건 거의 동시였다.
콰릉-!
이어진 굵직한 뇌전은, 이번에는 흑기사를 관통하지 못했다. 대신 파도처럼 솟구친 검은 안개가 뇌전을 집어삼켰다.
역시 두 번은 안 통하네.
생각할 찰나, 흑기사가 치켜들었던 왼팔을 앞으로 떨쳤다.
콰아아-!
뇌전을 머금은 파도가 밀려들었다. 눈을 치켜뜬 이안이 휩쓸리는 가운데.
"이안…!"
소리친 메브가 자세를 낮춘 채 흑기사를 향해 돌진했다. 어느새 똑바로 든 검을 투구 옆으로 바싹 치켜든 채였다.
"붉은 기사라 불린다지? 그 만용만큼은 칭찬해 주마."
콰아아-
밀려드는 파도를 돌파한 그녀를 맞이한 건, 치켜든 흑검을 힘껏 내리치는 흑기사의 모습이었다. 검붉은 궤적이 그녀의 새 부리 투구를 쪼갤 듯 떨어졌다. 메브가 다급하게 검을 치켜들었다.
쩌어엉-!
흑검에 실린 힘이 메브를 그대로 내리눌렀다. 그녀의 양손 검에 균열이 일고, 메브의 한쪽 무릎이 끝내 땅에 닿았다. 바닥의 판석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일었다.
"상으로, 아까 네가 하려던 걸 그대로 돌려주도록 하지…."
읊조리는 흑기사의 팔에 힘이 실렸다. 흑검이 메브의 검을 쪼개 버리고, 그 너머의 투구로 떨어져 내릴 찰나.
솨아아-
피어오른 황금빛 장막이 메브를 가로막았다. 흑검이 불티를 튀기는 가운데.
"가서 샬롯을 도우시오. 병사들도 대피시키고."
뒤에서 이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의 전신에 맺힌 푸른 역장이 사그라들고, 검을 고쳐 쥔 이안이 덧붙였다.
"그동안, 대행자들끼리 놀고 있을 테니."
"…네가 원한다면."
읊조린 메브가 부러진 검을 던져 버리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녀가 샬롯과 사투를 벌이는 유령마를 향해 달려가는 사이.
"이제 제대로 할 마음이 들었나?"
그녀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흑기사가 내뱉었다.
이안이 내뱉었다.
"난 계속 제대로 하고 있었어."
"그럴 리가. 고작 그 정도로 용이라는 절대자를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래, 그럴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흑기사가 펄쩍 뛰어오르며 소리쳤다.
"본 실력을 드러내도록 만들어 주마!"
이게 본 실력이라니까.
내심 혀를 찬 이안이 옆으로 몸을 날렸다.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린 흑기사가 흑검을 내리찍은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콰앙-!
이미 잔뜩 금이 가 있던 바닥의 판석들이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솟구쳤다.
투쟁의 축복을 받은 내 모습이 저런가.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재빨리 자세를 다잡아 놈에게로 달려들었다.
어쨌건 도망 다니며 싸울 수는 없었다. 그럼 전장이 넓어질 테고, 저 미친놈은 성을 무너뜨려서라도 그를 죽이려들 터였다. 다른 이들이 죽는 건 상관 없었지만, 그 사이에 일행도 포함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게다가 덩치가 커진 만큼, 놈의 움직임은 다소 둔해 보였다. 근접전으로 끌고 가면서 약점을 노리는 편이 나으리라.
'그러려면 일단은….'
쒸아악-
이안은 코앞까지 가까워진 흑기사의 갑옷을 눈에 담았다. 치켜든 그의 오른손에는, 어느새 부러진 단죄의 검이 들려 있었다. 기다란 십자 막이를 타고 푸른 신성력이 타올랐다.
콰과과과과-
톱날처럼 솟구친 신성력의 칼날이 흑기사의 목덜미와 흉갑을 사선으로 가르며 떨어져 내렸다.
아까 메브와 샬롯의 연합 공격으로 균열이 일고 우그러졌던 부분들이 찢겨 나가고, 목덜미와 옆구리를 감싼 이음매가 터져 나갔다.
'역시.'
이안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갑옷의 겹쳐져 있던 부분들이 펼쳐지면서, 그만큼 방어력이 낮아지고 이음매도 취약해졌으리란 추측이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아마 게임에서도 갑옷을 벗겨 약점을 드러내는 게 공략 순서였으리라. 정확한 공략법을 알지 못하는 만큼, 드러난 단서들을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콰아아아-
푸른 궤적이 사그라들기도 전에 뿜어져 나온 왼 팔뚝에, 이안이 다급하게 몸을 젖혔다. 그의 몸을 으깨 버릴 듯 휘둘러진 쇠장갑의 끝부분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가슴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뒤따른 마력의 파장만으로도 그의 흉갑을 찢어버리기엔 충분했다.
새로 산 건데, 시발. 숨이 턱 막히는 압력을 느끼면서도, 이안을 아직 신성력이 남은 단죄의 검을 올려졌다.
카드드득-
훤히 드러난 흑기사의 팔뚝을 푸른 신성력이 할퀴었다. 팔을 자르지는 못했지만, 팔꿈치 안쪽의 이음새 부분을 찢기에는 충분했다.
흑기사가 어느새 머리 위로 치켜든 흑검을 사선으로 내리친 건 거의 동시였다.
빛의 장막이 이안을 감쌌다.
콰치치칫-!
흑검과 맞부딪친 빛의 장막이 눈부시게 번쩍였다. 장막을 후려친 검날에서도 검붉은 마력의 불티가 튀어 올랐다.
이안이 보기에도 확실히 저 검붉은 검은 보통 검이 아니었다. 흑기사의 힘을 견뎌내는 건 물론이고, 신성력의 장막까지 천천히 갈라내고 있지 않은가. 하긴. 애초에 평범한 검이 용의 마력을 견딜 수 있을 리도 없었다.
'어쨌건, 한 대라도 제대로 맞으면 죽겠네.'
가뜩이나 치솟았던 집중력이, 극한의 위기감과 맞물려 한계까지 돋아났다. 신경이 몸 바깥까지 곤두서는 듯한 느낌.
아공간에서 제국제 장검을 꺼내든 이안이, 장막 너머로 보이는 흑기사의 어깻죽지를 향해 검을 내뻗었다.
검붉은 비늘이 우둘투둘하게 돋아난 피부 위로 빛의 축복과 바람 칼날을 머금은 칼날이 틀어박혔다.
쿠드드득-
손아귀로 전해지는 반발력이 상당했다. 갑옷이 없더라도 저항력이 상당히 높은 게 분명했다. 이안은 새로 돋아난 어금니를 다시 으스러뜨릴 기세로 악물었다.
동시에 잿빛으로 물들던 그의 눈동자가 번쩍였다.
콰직-
칼날과 어깻죽지에서 소리 없는 폭발이 일었다. 진공 폭발.
하지만 지금까지처럼 어깨가 통째로 날아가는 식의 결과는 일어나지 않았다. 검날을 중심으로 주먹만 한 구멍이 뚫리면서 가죽과 살점이 터져 나갔을 뿐이었다. 붉은 속살과 금이 간 쇄골 뼈가 얼핏 드러났다.
하지만 흑기사는 비명은커녕 움찔대지조차 않았다.
"...!"
그저 안면 가리개 사이의 붉은 안광이 일순간 가늘어진 게 전부였다.
동시에 이안의 시선에, 옆으로 활짝 열리듯 펼쳐졌던 놈의 왼팔이 살짝 구부러지는 게 보였다. 다음 순간 저 주먹이 만들어 낼 궤적이 이미 현실이 된 것처럼 그려졌다.
쒸에에엑- 콰아앙!
비스듬하게 떨어진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뒤이은 마력의 충격파가 판석과 병사들의 시체 조각까지 모조리 터뜨리며 폭발했다.
하지만 그때 이미 이안은 흑기사의 반대쪽 측면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주먹을 내리치면서 뒤로 젖혀진 흑기사의 오른팔, 살짝 구부러진 팔꿈치 안쪽으로 향했다.
'될까?'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검날이 놈의 팔꿈치 안쪽을 정확하게 갈랐다. 놈의 팔뚝 보호대의 이음매가 끊어졌다.
진공 폭발을 사용할 때부터 휘청대던 검날도 거의 동시에 부러졌다. 이게 마지막 제국제 장검이었다. 이번에 새로 구매한 칼들은 이것보다 내구도가 훨씬 떨어졌다.
부러진 검을 미련 없이 떨어뜨린 이안은, 대신 고대의 운철 단검을 뽑아 들었다.
날 길이가 다소 짧지만, 이 거리에선 치명적인 단점이 되지는 않을 터였다. 게다가 운철 단검은 내구도가 기형적으로 높았고, 장비 파괴 옵션까지 붙어 있었다.
흑기사의 급소를 드러나게 하는 데에는 이게 더 효과적일 수도 있었다. 게다가 슬슬, 흑기사의 전투 방식이 눈에 익고 있었다.
"제법이다만."
물론, 이안만 그런 건 아니었다.
"정말 고작 그런 잔재주만으로 나를 이길 수 있다 믿는 것이냐?"
흑기사의 안광이 일순간 번뜩이며, 이안에게는 상대적으로 느리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와중에도 놈의 전신에서는 이미 검붉은 마력이 타오르고 있었다.
살짝 구부러져 있던 놈의 오른팔이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흑검에서 분출되는 마력이 이안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이건 못 피하겠는데…?'
#179화
솨아아-
마력 역장과 빛의 장막이 동시에 피어올라 이안을 감쌌다. 하지만 흑기사가 내리친 검은 그 위가 아니라 옆의 바닥으로 떨어졌다.
꽈아앙!
폭탄이 터진 것 같은 충격파와 함께, 휩쓸린 이안이 함께 튕겨 올랐다. 아무리 이중으로 보호받고 있다 해도, 발아래에서 이어진 폭발력까지 상쇄할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천장이 가까워졌다. 이안이 황급히 몸을 돌렸다. 마력 역장에 뒤덮인 그의 등이 천장에 틀어박히듯 부딪혔다.
거미줄 같은 균열. 엄청난 압력. 그 와중에도 연회장의 전경이 한눈에 펼쳐졌다.
연회장 한쪽을 새카만 마력의 궤적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대기를 찢으며 뻗어 나간 궤적 끝, 유령마가 단상의 상석을 박살내고 벽면에 충돌하는 중이었다. 놈에게서 번진 검붉은 마력이 벽면에 안개처럼 넘실댔다.
샬롯은 그 궤적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듯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한쪽 어깨와 팔의 갑옷이 찢겨나가고 그 사이로 피가 터졌다.
하지만 다른 병사들에 비하면 아주 얕은 부상이었다. 운 나쁘게 경로에 휩쓸린 그들은, 트럭에 치인 것처럼 만신창이가 된 채로 사방으로 튕겨 나가는 중이었으니까.
메브의 품에 안긴 병사도 그중 하나로 보였다.
그녀는 검을 들지 않은 상태였다. 샬롯에게 유령마를 맡긴 채, 먼저 전투 불능 상태가 된 병사들을 옮기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연회장 구석의 통로에 대충 널브러진 병사들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그녀가 뭔가 말한 듯, 병사의 입술이 간신히 달싹이고 있었다.
이안의 인지력은 그 입술이 만들어 내는 불완전한 단어들을 단숨에 읽어냈다.
부디, 부탁드리겠.
메브가 무슨 말을 한 건지, 무엇을 부탁한다는 건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숨이 끊어지는 병사를 품에 안은 메브의 뒷모습이, 직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감을 머금기 시작했으니까.
"...!"
추락을 시작한 이안의 시선이 바로 아래로 돌아간 건 그때였다.
불길한 직감. 역시나, 어느새 흑기사가 뛰어오르려 하고 있었다.
떨어지는 그를 공중에서 썰어 버리려는 모양이었다. 아주 현명한 판단이었다. 공중에서는 땅에서 그랬듯이 도망 다닐 수 없을 테니까.
물론, 보편적인 경우라면 그랬으리라.
푸확-!
하위 회색 마법인 돌풍을 생각과 거의 동시에 완성한 이안이, 왼팔을 옆으로 후려치듯 내뻗었다.
한 줌의 혼돈력을 머금고 증폭된 바람이 그의 몸을 옆으로 날려 버렸다.
콰직-! 퍼억!
이안은 기둥 하나를 등으로 부수고는 그 건너편의 벽면에 처박혔다. 미간을 찡그린 그가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아까 연회장 계단으로 들어서기 전에 지나쳤던, 바로 그 복도였다.
콰아아-
기둥이 부서지면서 튀어 오른 흙먼지 사이로, 솟구치는 흑기사의 모습이 뒤를 이었다.
검을 위로 내뻗은 자세를 취하면서도, 놈의 투구가 이안이 널브러진 복도 쪽으로 득달같이 돌아왔다.
놈이 왼팔을 위로 뻗어 자세를 다잡은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공중에서 체공하는 찰나의 순간.
내뻗은 검을 양손으로 움켜쥔 놈의 전신에서 검붉은 마력이 타올랐다.
콰과과과과-
놈이 복도로 밀려들었다. 검붉은 궤적이 복도 천장을 두부처럼 가르면서 쏟아져 내렸다.
"...!"
솨아아-
단검을 머리 위로 들어올린 이안의 주위로, 신성력의 장막과 푸른 마력 역장이 발작하듯 피어올랐다.
콰지지지직-
검붉은 궤적이 천장에 이어 복도 벽면, 그리고 그 아래 피어난 신성력의 장막과 일렁이는 푸른 역장까지 차례로 찢어발겼다.
흑검은 빛의 축복이 아른거리는 단검 날 한복판에 맞닿고서야 간신히 멈췄다.
안면 가리개 사이, 흑기사의 안광이 웃음 짓듯 일렁였다.
"그래… 이제 확실히 알겠군…."
놈은 단숨에 검을 더 내리찍어서 상황을 끝내지 않았다. 그저 쏟아지는 돌 부스러기와 안개처럼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흙먼지 너머를 응시하며, 손아귀의 감촉을 음미하듯 천천히 내리눌렀다.
"그 잔재주가 정말 네놈의 전력이었구나…. 거짓된 신들에게 굴복한 위정자가 아끼는 이유가 있었군. 쥐새끼 같은 부분이 닮아서였어."
쿠구구국-
흑검의 검날 중앙을 가로막은 단검 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흑기사가 그르렁대듯 속삭였다.
"아주 느린 죽음을 선사해 주마. 네 죽음이 고통스러울수록, 내가 영광된 대전사로 거듭나게 될 의식도 훌륭하게…?"
그의 목소리 끝이 순간 올라갔다. 점점 내려가던 단검이 어느 순간 우뚝 멈췄기 때문이다. 흑기사의 팔에 힘이 더 들어갔지만, 단검을 내리누를 수 없었다.
푸스스, 그 아래에서 언제부터인가 번지기 시작한 붉은 빛이 사람의 실루엣을 그려냈다.
"…막 상태창을 열었었는데.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군."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미간을 찌푸린 듯 흑기사의 안광이 가늘어졌다.
"그게 무슨…."
"거짓된 어쩌고 타령 좀 더 해 줬으면 좋겠군."
흑검을 오히려 조금씩 밀어내면서, 이안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신성력과 마력이 뒤엉켜 아른거리는 기묘한 눈으로 흑기사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덕분에, 그 거짓된 양반들이 좀 빡친 모양이거든."
"...!"
흑기사의 안광이 다시 커질 찰나, 붉은 신성력이 타올랐다.
쩌엉-
검을 쥔 흑기사의 팔이 뒤로 확 밀려났다. 운철 단검을 앞으로 떠밀듯 휘둘러 떨쳐낸 이안이, 그대로 놈의 품으로 뛰어올랐다.
오른팔을 휘둘렀던 원심력을 고스란히 왼 주먹에 실어 내뻗는 채였다.
흙먼지를 가르며 뻗어 나가는 그의 주먹에 황금빛 신성력이 서렸다.
빠아악-!
이안의 황금빛 주먹이 흑기사의 투구 옆면을 후려쳤다. 놈의 고개가 옆으로 홱 돌아가고, 거대한 몸이 통로 쪽으로 붕 떠올라 튕겨 나갔다. 주먹 끝에서 터져 나온 황금빛 잔재가 검붉은 마력을 불태우며 번쩍였다.
"...!?"
투구 옆면에 주먹 자국이 선명하게 찍힌 가운데, 흑기사의 안광이 순간 휘청였다. 고통보다는 당혹으로 물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곧 안광이 다시 타오르면서, 놈이 날아가는 와중에도 몸을 비틀었다.
바닥을 한바퀴 구르며 착지하고는 뒤따라 내달리는 이안의 모습이 놈의 시야에 선명해졌다.
쿠와악-!
흑기사가 그대로 마저 몸을 비틀어 이안을 향해 흑검을 내리쳤다.
예상한 듯 자세를 낮춘 이안의 위로, 빛의 장막이 비스듬하게 피어 올랐다.
카가가각, 흑검이 장막 표면을 깎듯이 할퀴며 미끄러졌다. 불똥이 눈부시게 튀는 가운데, 그 사이를 뚫고 도약한 이안이 또 한 번 힘껏 왼 주먹을 휘둘렀다.
쩌엉-!
그의 황금빛 주먹은 뿔 투구 옆면에 새겨진 자국보다 조금 더 위에 틀어박혔다. 하지만 결과가 다르지는 않았다. 신성력이 마력을 불태우고, 흑기사의 안광이 이번에는 선명한 고통을 머금고 흔들렸다. 안면 가리개와 투구를 이어 주는 이음새가 덜컹댈 찰나.
쩌엉-!
아직 투구에 박혀 있던 주먹에서 소리 없는 폭발이 터져 나왔다. 진공 폭발. 동시에 흑기사가 머리부터 복도 벽면에 처박혔다.
콰장창창- 와르르-
흑기사가 벽돌들을 부수며 튕겨 나가고, 복도 벽면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이안은 내뻗었던 주먹을 짧게 털며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진공 폭발은 본래 맨손으로 사용하면 손이 함께 망가질 각오를 해야 하는 마법이었지만. 카르하의 신성력에 빛의 축복까지 덧씌워진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저 돌벽을 후려친 것처럼 얼얼할 따름.
'의존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확실히 더럽게 편하긴 하네.'
역시, 기사나 야만 전사를 했어야 됐다니까.
생각하며, 이안은 다시 땅을 박찼다.
와르르르-
무너진 돌무더기 사이로 흑기사가 벌떡 일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놈의 붉은 안광이 분노와 모멸감을 머금고 이리저리 일렁였다.
곧 놈의 시선이 달려드는 이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용살자-!"
왜, 새꺄. 속으로만 대답하며 이안은 운철 단검을 고쳐 쥐었다. 흑기사가 검붉은 마력이 불길처럼 타오르는 흑검을 휘두른 건 거의 동시였다.
콰지지지직-
궤적에 걸린 기둥들이 모조리 갈려 나갔다. 이러다 성이 무너져도 상관없다는 듯 거리낌 없는 움직임이었다. 이안은 물러나는 대신 더 빨리 질주했고, 바람 칼날이 만들어 낸 돌풍도 그를 힘껏 떠밀었다.
콰과과과-
흑검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비로소 힘껏 뛰어오르면서, 이안이 오른손을 내뻗었다. 운철 단검이 쩍 벌어진 흑기사의 투구 틈을 노리고 뻗어나갔다. 흑기사가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려 버린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카가각-
신성력이 맺힌 단검 날이 투구 옆면을 톱으로 썰어 낸 것 같은 흔적을 만들며 찢어발겼다. 마침내 단검 날이 안면 가리개와 투구를 고정해 주는 이음매까지 닿은 순간, 이안은 준비하고 있던 진공 폭발을 다시 한번 사용했다.
쩌엉-!
흑기사의 고개가 뒤로 튕겨 나가듯 젖혀졌다. 동시에 위로 젖히게 만들어져 있던 안면 가리개가 너덜너덜하게 날아갔다.
놈이 튕겨나가던 고개를 힘으로 다시 내리 눌렀다. 분노가 일렁이는 눈동자가 이안을 마주보았다.
"...!"
놈이 오히려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깨달은 이안이, 황급히 팔을 회수하며 빛의 장막을 펼쳤다. 이미 흑기사의 왼 주먹이 그의 측면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쩌엉-!
간신히 생성된 빛의 장막이 커다란 주먹을 가로막고, 깨질 것처럼 출렁였다.
"오오오오오-!"
흑기사가 기합성을 토해내며 끝까지 주먹을 휘둘렀다. 결국 떠밀린 이안이 콰장창, 반쯤 무너진 기둥을 온몸으로 부수며 튕겨 나갔다.
시야가 한순간 확 트이고 허공을 천천히 선회하며 체공하는 가운데.
'또 며칠 앓아 눕겠군.'
이안은 문득 생각했다.
고통이 큰 건 아니었다. 그저 온몸이 조금 욱신거렸다. 하지만 투쟁의 축복이 끝나고 나면, 분명 알지도 못했던 부분들이 아프기 시작하리라. 하긴. 크게 상관은 없는 부분이었다. 이미 축복을 받기 전부터 비슷한 상태였으니까.
앞으로를 생각하면 체념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흑기사가 말했듯, 균형이 무너지고 균열이 본격화되기 시작했으니까.
'…아무래도, 스킬을 더 찍을 때가 된 것 같은데.'
생각하며, 이안은 무너진 기둥 사이를 뚫고 튀어나오는 흑기사를 눈에 담았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 이안과 흑기사의 시선이 교차하는 그때.
푸-확!
옆에서 붉은 섬광이 번쩍였다.
이안은 물론 흑기사의 고개도 본능적으로 옆으로 돌아갔다.
난장판이 된 연회장의 전경. 그 한구석, 어느새 전신에 피처럼 끈적이는 신성력을 두른 메브가 요정의 세검을 힘껏 내뻗고 있었다.
그 끝에서 뿜어져 나간 붉은 신성력은, 유령마의 머리를 꿰뚫고 그 뒤쪽의 마갑을 안에서부터 찢어발기며 뚫고 나갔다.
'…저쪽이 더 빨리 끝나겠는데.'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게임에서는 분명, 저 유령마와 흑기사가 한 조를 이루어 덤벼들었을 터였다. 지금보다 훨씬 더 까다로운 전투였으리라는 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 뛰어난 보상이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다른 여러 보스전이 그렇듯, 선택에 따라 추가적인 보상이 생길 수도 있었고.
어쩌면 저 유령마가 바로 그 추가적인 보상인지도 몰랐다.
'흑기사를 저놈보다 먼저 죽이는 게 획득 조건이라면…?'
죽지 않는 탈것. 아주 달콤한 유혹이긴 했다. 하지만 반드시 손에 넣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추측이 사실인지를 확인해 보기 위해, 일행에게 기다리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게다가 저 유령마는 지나치게 눈에 띄었고, 동시에 저주받은 존재가 분명하기까지 했다.
낮에 탈 수도 없을뿐더러, 신성력을 두른 채로 타면 내내 괴로워할 게 분명했다.
투쟁의 축복을 받을 때마다 그의 피를 빨고, 미동도 하지 않고 잠들어 버리는 늪지의 원한처럼.
하지만 미련을 버린 건 이안 뿐인 모양이었다.
"로- 사아아아아-!"
흑기사가 쩌렁쩌렁한 고함을 토해냈다. 절규에 가까운 외침에, 이안은 화들짝 놈을 돌아보았다.
안면 가리개가 날아가면서, 놈의 얼굴은 턱 위부터 고스란이 드러나 있었다.
검붉은 비늘이 한가득 돋은 피부. 머리카락이 한 올도 남지 않은 머리에는, 대신 만들어지다 만 것 같은 뿔 대여섯개가 가장자리를 따라 삐죽삐죽 돋아 있었다. 샛노란 동공이 세로로 찢어진 붉은 눈은, 앞발을 치켜들며 울부짖는 유령마에 못박힌 듯 고정된 채였다.
이안의 입술 끝이 슬쩍 말려 올라갔다.
그대로 공격이 이어지면 영락없이 밑에 깔린 채로 추락할 판이었는데. 덕분에 주문을 완성할 틈이 생겼으니까.
"둘이 사귀냐?"
"...?!"
내뱉은 말에, 흑기사의 고개가 비로소 득달같이 돌아왔다. 하지만 이안은 이미 손을 내뻗고 있었다. 어느새 등 뒤까지 가까워진 바닥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자세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푸화악-!
혼돈력을 머금고 증폭된 휘몰아치는 방벽이, 그는 물론이고 흑기사까지 휩쓸어 날려 버렸으니까.
메브에게 발길질을 하려던 유령마와 다른 두 일행까지 터져 나온 돌풍에 휩쓸려 나뒹구는 가운데.
카드드득-
공중에서 자세를 다잡은 이안이, 연회장의 한쪽 벽면에 평지처럼 발을 디디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다소 둔중하게 치솟는 흑기사에게 고정된 채였다. 덩치 덕분인지, 놈은 돌진력이 상쇄되며 떠올랐을 뿐 이안처럼 튕겨 나가지는 않았다.
콰지지직-
발이 벽면을 부수며 파고들었다. 이안은 오른팔을 아공간 너머로 뻗었다. 운철 단검을 놔버린 그의 손아귀에, 이제는 꽤 익숙해진 굵직한 자루가 잡혔다.
끝이 살짝 휘어진, 넓적하고 기다란 검신을 가진 외날 대검이 벽면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막 휘두르기엔 좀 좁은데.
생각과 달리, 이안은 힘껏 벽면을 박찼다.
콰르르르-
균열이 일던 벽면이 그의 도약력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내렸다. 뒤따라 번진 균열이 연회장 천장까지 이어지고, 천장을 구성한 돌들도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를 가르며, 대검을 머리 위로 치켜든 이안이 쇄도했다.
"...?!"
허공을 돌던 흑기사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오오오오오-!"
대기를 울리는 기합성과 함께, 노랗고 붉은 신성력이 뒤섞인 거대한 궤적이 밀려들고 있었으니까.
#18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