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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누가 규칙을 논해 (4)

22화. 누가 규칙을 논해 (4)

안순은 보잘것없는 묵자가 괴롭히기 좋다고 생각한 것인지, 묵자를 마구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여기에 공용이니 아씨 물건이니 할 게 어디 있어. 곳간을 인계받은 이후로 그런 말은 또 처음 들어보네. 곳간 안에 있는 물건은 모두 구씨 가문 것이야. 구씨 가문 것은 즉 어르신과 마님의 것이고. 어르신과 마님께서 선물하신 물건이 아닌 이상, 가져간 물건은 무조건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해. 오늘 주인마님과 춘귀원 마님께서 곳간을 봉쇄하고 전체 점검을 하라 하셨으니, 우리도 분부에 따라 움직이는 것뿐이야. 귀 얇은 내가 네게 물건을 내어주면 뭐 하나, 네 집 아씨께서 내 월급을 주시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만일 내가 마님께 벌이라도 받으면, 네 집 아씨께서 나 대신 용서라도 빌어주신다니?”

“아씨께서는 전체 점검 시에 사적으로 보관해둔 물건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셨어요.”

백하 또한 그 규칙을 알고 있었다.

“그건 아씨가 계실 때의 규칙이지. 지금 셋째 아씨한테는 열쇠도 없고, 아씨가 만든 규칙도 마님께서 폐지하신 지 오래잖아. 지금은 오래전 어르신께서 만드신 규칙을 따르고 있는걸. 우리 같은 아랫것들은 열쇠를 쥔 사람의 말을 들을 뿐이야.”

안순이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어갔다.

‘아주 주인을 믿고 제멋대로 날뛰는구나!’

묵자는 대놓고 권력에 따를 뿐이라는 안순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씨께서 만드신 규칙을 폐지하였다고, 구씨 가문의 조상들께서 정하신 규칙까지 폐지한 건 아니겠지요?”

그녀가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묵자는 구수운을 따라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 곳간의 역대 장부를 정리한 적이 있었다. 커다란 상자 가득히 담긴 장부에는 평소 출납과 점검 후의 총록이 기록되어 있었다.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파악해야 했던 그녀는 그 기록들을 자세히 읽어 내렸다. 구수운의 할아버지 때에는 곳간에 좋은 물건들이 차고 넘쳤다. 하지만 지금은 고작 몇십 냥짜리 금비녀마저 귀한 보물처럼 궤에 넣어 보관할 정도였다.

“규칙을 바꾼 건 너희 아씨지. 마님께서 열쇠를 인수하신 이후로는 예전 규칙을 다시 따르는 중이라니까.”

안순은 아직도 자신이 함정에 빠진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럼 됐네요.”

묵자는 긴말 없이 소매에서 목록 하나를 꺼내었다.

“아씨께서 찾아오라고 하신 물건이에요. 번거로우시겠지만, 부탁드릴게요.”

그녀의 말에 안순이 펄쩍 뛰었다.

“이거 완전 닭대가리 아니야? 네 집 아씨가 만든 규칙은 인제 통하지 않는대도!”

“저희 아씨의 규칙을 따르라고 한 적 없어요. 당연히 마님의 규칙을 따라야죠. 마님께선 어르신께서 예전에 정해두신 규칙을 사용하고 계신다면서요. 그럼, 잘 들으세요. 대주국 현명(玄明) 16년 정월 15일, 그러니까 셋째 아씨께서 열 살이되던 해, 집 전체의 곳간 열쇠를 어르신께서 관리하셨어요. 그날 어르신께서 모든 곳간을 봉쇄하고 전체 점검을 하셨는데, 마님께선 안 할멈에게 곳간에 보관해둔 옥 여의(*如意: 길상을 상징하는 장식물의 일종) 한 쌍과 명화 세 폭, 자기 네 짝을 가져오라 하셨어요.”

안순이 입을 반쯤 벌린 채 묵자를 바라보았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장부를 찾아보셔도 좋아요. 상자 맨 위에 놓인 기록에 적혀 있을 거예요.”

입을 벙긋하며 아무런 말을 못 하던 안순이 결국 시녀에게 현명 16년의 장부를 가져오라고 말하였다. 그녀는 제대로 확인해야 했다. 아무리 그래도 멍청한 계집 따위가 저런 일을 기억하고 있을 리 없었다. 만약 저 계집의 말이 틀렸다면, 마님을 부르기 전에 그녀가 먼저 계집의 뺨을 내리칠 것이다.

시녀가 가져온 장부를 펼쳐보던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묵자의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은 것은 물론, 각 처소에서 보관해둔 사적인 물품은 전체 점검에 포함하지 않으며, 곳간이 봉쇄되어도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내용이 똑똑히 명시되어 있었다.

이를 본 안순은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제 어찌해야 한담?’

물건을 가져가지 못하게 하는 건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물건을 가져가게 해준다면, 마님께서 자신을 내쫓을지도 몰랐다.

“안 아주머니께서 너무 바쁘시면, 시녀 몇만 붙여주세요. 저희가 직접 찾아갈게요.”

살며시 고개 숙인 묵자의 자태는 마치 눈앞의 사람을 극진하게 모시는 듯했다.

그녀의 옆에 서 있던 백하는 완전히 다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순은 마치 상갓집 개처럼 풀이 죽어있었다.

“이리 가져와 봐.”

그때, 묵자와 백하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기소침했던 안순의 얼굴에 먹구름이 가시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그녀는 냅다 달려가 공손한 어투로 ‘마님’을 외쳤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강소심에게 장부를 건네며 긴장한 티를 내었다.

백하도 강소심에게 황급히 인사를 올렸다.

그러나 묵자는 외려 태연해 보였다.

“정말 이런 방법이 있었네.”

곧이어 강소심이 장부를 안순에게 돌려주며 백하와 묵자를 일으켜 세웠다.

“일이 이리되었으니, 안순, 셋째 아씨께서 말씀하신 물건을 모두 준비해 와.”

“마님, 하지만 주인마님께서…….”

안순은 하고픈 말을 삼켰다.

‘셋째 아씨께 눈치를 주려고 하신다면서요.’

“어머님께 이 장부를 보여드리면 자네를 나무라진 않으실 거야.”

강소심은 이 상황에서 자신을 쏙 빼고 말하였다.

안순의 표정은 실로 가관이었다. 이 장부를 마님께 보여드리라니, 제 무덤을 파라는 소리이지 않은가? 그녀는 구수운에게 미움을 사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노비 문서를 가지고 있는 장 씨에게는 절대 밉보일 수 없었다.

“자네가 평소 게으름을 피우니, 이런 일 하나 모르고 있던 것 아닌가?”

강소심은 우물쭈물하는 안순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됐어, 우는 얼굴 하지 마. 보는 내가 다 답답하니까. 어머님께는 내가 알아서 잘 말씀드리지. 다만 내 도움으로 매질을 피하게 되었으니, 벌로 자네의 두 달 치 급여를 삭감할 거야. 알았으면 조금 전의 일은 부끄러운 줄 알고, 내가 어머님께 설명해 드릴 테니 자네는 그냥 무조건 맞다고만 하면 돼. 만약 불만이라면, 직접 어머님께 말씀드리던지.”

“마님,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어차피 자신의 급여로 가족들을 먹여 살리는 것도 아니었다. 이토록 짭짤한 일자리를 지켜낼 수만 있다면, 그깟 은자쯤이야 얼마든지 손해 볼 수 있었다.

안순은 바닥에 엎드린 채 강소심을 향해 머리를 조아린 뒤, 빠르게 시녀를 데리고 가 물건을 내어왔다.

묵자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줄곧 구씨 가문 여인들은 겉보기에 현모양처 같지만 속은 그렇지 않고, 듣기에는 좋은 말만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왔다. 집안의 모든 여인이 이리된 것도 장 씨 때문이었다. 윗물이 탁한데, 아랫물이 맑을 리 있나. 모두 각자의 이익만 바라며, 어떻게 사람을 대해야 하는지 모르는 듯했다.

강소심은 현모양처에다 효녀라며 칭찬을 받는 구씨 집안 맏며느리였지만, 장 씨의 중용을 받는 것으로 보아 그 마음이 절대 자비롭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마님.”

하지만 묵자는 겉으로는 충분히 감사를 표하였다.

“그럴 필요 없어. 난 그저 규칙에 따라 일하는 것뿐이니까.”

강소심이 묵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막 정원에 들어서서 묵자를 발견했을 때, 강소심은 그날 밤 자신이 묵자를 미인으로 봤던 게 단순한 착각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묵자를 자세히 살펴보니, 활 소리에 놀란 새처럼 잔뜩 움츠린 자세로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고개를 제대로 들지 않아서 그렇지, 원래는 절대 못난 얼굴이 아니었다.

“그 또한 마님의 착한 마음씨 덕분입니다. 저희가 곳간을 찾아와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사실 이 가운데 진정 겸손한 사람은 백하였다.

“다 까닭이 있겠지. 네 아씨께서 갑자기 내일 당장 출발하겠다고 결정하셨는데, 너희가 어쩌겠어?”

장 씨였다면 절대 강소심처럼 진심 어린 척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백하가 재빨리 감사 인사를 올렸다.

“정원에 있으니 해가 뜨겁네. 목록에 적힌 물건이 꽤 많던데, 아마 안순이 가져오는데도 시간이 걸릴 거야. 너희 둘은 나랑 같이 방에 들어가서 기다리는 게 낫겠어.”

강소심이 걸음을 옮기자 보라색 치마가 살며시 흔들리고, 복사꽃 가지가 수 놓인 명주 겉옷이 바람에 따라 펄럭였다. 허리춤에 달린 진주 한 뭉치는 태양 아래 더할 나위 없이 밝게 빛났다. 강소심은 확실히 부잣집 여식다웠다.

백하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선 묵자는 백하와 반 발자국 떨어져 멈춰 섰다.

“너희는 나이가 어떻게 되지?”

강소심은 무심한 척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며 물었다.

“소인 올해 스물입니다.”

백하가 대답했다.

“전 열여덟입니다.”

호칭으로 잔꾀를 부리다간 언젠가 약점이 잡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묵자는 기꺼이 이런 모험을 하고 싶었다.

“다들 어린 나이는 아니네. 백하는 심지어 나보다도 한 살이 많아.”

강소심은 열여섯의 나이에 당시 열일곱 살이었던 구씨 가문의 넷째와 혼인하였다. 넷째는 구수운보다 생일이 고작 석 달 느렸다.

“내 시녀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애가 열여덟이야. 새해가 되기 전에 바깥채 집사네 아들과 혼인시켰지, 인제 곧 어머니가 될 거야.”

강소심은 시집온 지 삼 년이 되었지만, 아직 자식이 없었다. 다행히도 유일한 시첩인 애련도 아이를 낳지 못해, 그녀의 정실 자리를 위협하진 못했다. 정실은 첩실을 마음대로 괴롭힐 수도 있고, 심지어 남편의 동의 없이 첩실을 내다 팔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첩실이 아들을 낳아 남편을 제대로 휘어잡는다면, 정실을 내쫓고 본처 자리를 꿰차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어쨌든 자식이 없다는 건 사내가 처를 내쫓기 가장 정당한 변명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다들 마님의 마음씨가 자비롭다고 하는 거군요.”

백하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묵자는 이런 부류의 대화를 백하에게 떠맡긴 뒤, 본인은 보잘것없는 이등 시녀 시늉을 하였다.

“셋째 아가씨도 그렇지. 대부호의 규수시니, 혼수도 두둑이 해가실 거 아니야. 나이대가 조금 넘었다고 혼인하지 못하는 건 아니잖아? 오히려 너희 같은 시녀들이 시중을 드느라 혼인을 못 하겠지. 여인은 혼인할 때를 놓치면, 배필을 찾기 힘들어.”

강소심이 걱정 어린 말투로 말하였다.

“아씨께서 아직 배필을 찾지 못하셨는데, 저희 같은 노비들이 어찌 혼인할 생각을 하겠습니까?”

백하는 ‘저희 같은 노비들’이라는 말로 묵자까지 끌어들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만약 너희 아씨께서 한평생 혼인하지 않으시면, 너희도 따라서 홀로 살겠다고?”

강소심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호호 웃음을 지었다.

“이리도 고운 여인인데, 그러기엔 너무 아깝지 않나? 어떤 사내를 좋아하는지 나한테 말해봐, 내가 조금이나마 도와줄게. 비록 너희 노비 문서가 아가씨께 있긴 하지만, 너희가 정말 좋은 사내를 만나 혼약을 하겠다면, 너희 아가씨도 막지 않으실 거야.”

“마님께선 농담도 잘하시네요. 저희 같은 시녀들이 어찌 원하는 사내를 골라 혼인하겠습니까? 주인께서 더는 우둔한 제가 싫다고 짝을 찾아 내보내실 때, 운이 좋으면 성실하고 선량한 사내와 혼인하게 되는 것이지요.”

백하 또한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런 걸 겸손한 처세술이라고 하는 걸까?’

묵자는 속으로 감탄했다. 그리고 백하가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의도를 알지만, 열심히 배우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