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상도(上都)의 귀인 (4)
겨우 사건이 마무리되려던 찰나, 누군가 꼬투리를 잡았다.
“소녀, 동의할 수 없습니다.”
‘누구야? 지금 이 상황에서 동의하고 말고가 어디 있는데!’
이런 생각을 하며 묵자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자, 봄빛으로 가득한 맑은 두 눈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명은 묵자에게 넋을 잃었다.
‘차를 따르던 시녀가 알고 보니, 손도 곱고 눈도 어여쁜 여인이었다니.’
하지만 그는 침착한 표정으로 동의할 수 없다던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조금 전까지 노래를 부르던 자색이 출중한 가희였다.
“수주(秀珠) 낭자가 위 대인의 학문을 사모한다면, 내 너를 속량(*贖良: 몸값을 받고 노비의 신분을 풀어 주어서 양민이 되게 함)해 대인께 보내드리면 어떻겠는가?”
구명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는 위씨 가문의 두 형님과 담소를 나누던 중, 위씨 가문의 셋째 아들이 설레는 표정으로 수주를 바라보는 것을 발견하였다.
구명의 말에, 사람들 모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수주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구명의 애인이었던 그녀는 구명에게 애정을 듬뿍 받으며 건방지게 굴기 일쑤였었다.
‘그런데 나를 사랑했던 나리가 나를 보내버리려 하다니.’
평소 아무리 애원하여도 구명은 수주를 속량해주지 않았었다. 한데 상대에게 아첨을 떨기 위해 이리도 쉽게 ‘속량’ 두 자를 입 밖에 내다니. 수주는 믿을 수가 없었다.
역시 손님을 연모하면 안 된다는 수양어머니의 말이 옳았다. 손님들은 모두 냉정하고 야박했다.
위씨 가문의 셋째 아들이 연신 고개를 저으며 손을 휘저었다.
“이보게, 그건 절대 안 되지. 아직 상중인데 어찌 첩을 들이겠는가?”
묵자는 의아했다. 그럼 상중이 아니었다면 저 가희를 첩으로 들였다는 건가?
“셋째야, 사실은 네 처가 무서워서 그러는 거지?”
위씨 가문의 둘째 아들이 긴 수염을 매만지며 놀렸다.
“제수씨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 지금까지 소실 하나 들이지 못하는 거잖아.”
“지어미가 얼마나 어질고 착한데요. 좋은 내자(*內子: 남 앞에서 자기 아내를 이르던 호칭)입니다.”
위씨 가문의 셋째 아들은 부인과 사이가 돈독한지, 다른 사람이 함부로 부인을 험담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럼 첩을 하나 들여 보지그래? 내가 장담하는데, 사흘도 안 돼서 제수씨한테 쫓겨날 거다.”
위씨 가문의 둘째 아들은 크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는 심지어 제 큰형까지 끌어들였다.
“형님, 제 말이 맞지 않나요?”
바깥에서 이러한 집안 얘기를 언급하는 건 옳지 않았다. 하지만 사내들이 모이면 여인 이야기를 하고, 여인들이 모이면 사내 이야기를 하는 건 천 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 광경이었다.
위씨 가문의 첫째 아들이 다소 창피한 듯이 말했다.
“집안 망신이지, 집안 망신이야.”
첩실을 들이지 않는 게 집안 망신이라고? 묵자의 마음에 또다시 울화가 차올랐다.
“아무래도 소녀의 용모가 연꽃잎처럼 고운 선녀의 손보다 어여쁘지 못하여, 대인께서 소녀를 원치 않으신가 보군요.”
구명의 야박함에 상심한 수주는, 생각지도 못한 셋째의 거절에 체면을 구기고 말았다. 수주는 홍류방에서 제일가는 가희로 재능과 미모를 겸비한 여인이었기에, 자신을 거절하는 사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수주의 말에 위씨 가문의 셋째 아들은 말문이 턱 막혔다.
‘말이 참 미묘하지 않은가?’
묵자는 식은땀이 삐질 흘렀지만, 구명이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수주를 보내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위씨 가문의 셋째 아들이 아무 말도 못 하니, 수주는 아예 작정하고 묵자와 자신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소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소녀는 열 살부터 기예를 배웠고, 고금(*古琴: 중국의 전통 현악기), 장기, 서예, 그림까지 못 하는 게 없습니다. 군자(君子)의 좋은 벗이라 할 수 있는 제가 고작 찻물이나 나르는, 손이 어여쁜 계집종보다 못하다는 것입니까? 하면, 저 계집에게 재주라도 하나 부려보라 하시지요. 만약 저 계집이 이긴다면, 소녀는 더 이상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원망의 말을 늘어놓던 그녀는 묵자에게 대결을 요청했다.
‘그럼 나는 무어라 원망을 해야 할까?’
묵자는 여태껏 윤락가의 여인들을 낮잡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수주라는 이 여인은 정말이지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수주와 구명의 관계를 묵자가 알 리 없었다. 묵자는 그저 수주가 위씨 가문의 셋째 아들에게 거절을 당해 망신스러운 나머지, 지위가 가장 비천한 자신에게 화풀이해서 수주 본인의 존재감을 부각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오호라? 그거 재미있겠군!”
위씨 가문의 둘째 아들이 흥미를 보였다.
“대부호의 계집종과 유명한 가희와의 대결이라, 전대미문의 구경거리가 되겠어. 하면, 내가 작은 내기판을 좀 열면 어떨까? 자자, 다들 어서 판돈을 걸라고.”
위씨 가문의 둘째 아들은 상인이었던지라, 가장인 그의 큰형이나 과거 급제자인 동생과 달리, 말주변이 좋고 돈 버는 데에 관심이 많았다.
묵자는 사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들 중에서 유일하게 구수운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위씨 가문 둘째 아들이, 성격도 호탕한 것이 사람이 썩 괜찮다고 생각했다.
‘한데 이 사람은 쓸데없이 판 벌이는 것을 좋아했다니…….’
묵자는 참으로 할 말이 없었다.
만약 그녀가 신분과 관계없이 발언할 수 있었다면, 그녀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댁네 어르신께서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제발 상중인 걸 잊지 마세요. 노래를 듣고 내기까지 하다니요. 그리고 셋째 나리께서는 나랏일 하는 관리시니, 백성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는 거 아닙니까?’
“최소 은자 1냥에서 최대 5냥까지 걸기로 하지. 수주가 이길 것 같으면 왼쪽에, 저 계집종이 이길 것 같으면 오른쪽에 내려놓게나. 아직 상중이라, 큰 액수를 걸기는 어렵네.”
위씨 가문의 둘째 아들은 탁상을 치고 일어서며 말하더니, 한쪽 발을 의자에 올린 채 판돈을 받을 자세를 취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평소 과히 무료했던 탓인지, 혹은 이 시대의 생활이 대체로 따분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세 나리가 가만히 있는데도 다른 사람들은 크고 작은 은자를 꺼내 왼쪽에 내려놓았다.
수주의 얼굴에 의기양양한 빛이 돌았다.
“둘째 나리, 저희가 돈을 걸어도 되겠습니까?”
수주 뒤에 서 있던 가희 몇이 생긋 웃으며 물었다.
“암, 물론이지. 이런 건 사람이 많을수록 재미있다고.”
위씨 가문의 둘째 아들이 가희들의 돈을 받으며 말했다.
쇄은자(*碎銀子: 커다란 은자 덩어리를 쪼갠 것) 한두 냥이 그의 왼손 옆에 놓였다.
“다 수주한테 거는 건가? 이러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
한쪽으로 판이 쏠리면 선을 잡은 사람이 대패하거나 쾌승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위씨 가문의 둘째 아들이 묵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거기, 네 이름이 뭐냐? 내기를 시작하게 어서 이름을 말하거라. 우리 큰형님과 셋째, 그리고 네 집 주인 나리가 네게 걸도록 하지.”
묵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답하고 싶지도, 할 수도 없었다.
대답한다면 자신이 반년간 지켜온 고요한 일상이 완전히 깨져버릴 것이었다.
묵자는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
“조금 전까지는 멀쩡히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말을 마친 위씨 가문의 둘째 아들은 크게 손해를 보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묵자는 차라리 자신이 말을 하지 못하면 좋을 것 같았다.
“손님의 질문에 어찌 대답하지 않는 건가?”
놀랍게도 구명은 ‘버르장머리 없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는 평소 집안 시녀들을 얕보며 엄하게 대하곤 했지만, 지금은 어째서인지 인상을 구기지 않았다.
“……묵자입니다.”
그녀가 하는 수 없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먹자? 멀쩡한 여인네 이름이 왜 그 모양이래.”
이름을 잘못 알아들은 위씨 가문의 둘째 아들이 구시렁댔다.
“먹 묵(墨)에 자줏빛 자(紫)를 쓴 이름입니다.”
묵자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옥릉에 핀 만 그루의 모란꽃, 왕은 오직 묵자를 위해 행차하시니.”
위씨 가문의 셋째 아들이 또 한 번 자신의 학문을 뽐내듯이 말했다.
“묵자는 옥릉국 모란꽃의 명품종으로, 초기에는 왕궁에 공물로만 바치어지던 물건입니다. 후에 귀족과 부유한 집안에서 이를 기르기 시작하면서, 꽃장수들이 우리 대주국에 들여온 매우 귀한 꽃이죠. 옥릉인들이 묵자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여식의 이름을 묵자라고 짓는 경우가 종종 있다던데, 그대도 옥릉의 사람인가?”
“대인께선 역시 박식하십니다. 전 옥릉의 사람이 맞습니다.”
다만 그녀는 이름이 정말 모란꽃의 묵자를 상징하는 것인지, 그리고 옥릉에서 여식에게 ‘묵자’라는 이름을 흔히 지어주는 게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요즘 옥릉이 다사다난하지. 그대도 전쟁으로 인해 대주국으로 피난을 온 것인가?”
위씨 가문의 셋째 아들은 드디어 당당하게 등 뒤의 시녀를 바라볼 수 있었다.
‘한데 왜 저리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걸까?’
셋째가 속으로 의아해하는 그때, 묵자가 대답했다.
“부모님을 잃고 갈 곳 없는 저를 셋째 아씨께서 받아주셨습니다.”
이름까지 알렸으니, 그녀의 주인이 구수운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네가 구씨 가문 셋째 아가씨의 시녀라고?”
그녀의 대답에 위씨 가문의 둘째 아들이 냅다 질문을 던졌다.
“네.”
묵자는 시종일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물론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때 눈을 쳐다보는 게 기본예절이라는 것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유별한 낭자 밑에 유별난 시녀라니. 그런 거였구먼, 그런 거였어!”
위씨 가문의 둘째 아들이 왠지 이상했다며 말을 이어갔다.
“셋째야, 네가 판돈을 걸기 싫으면 내가 은자 5냥을 네게 빌려주마. 저 계집이 이긴다는 것에 걸지.”
“둘째 나리, 나리께선 선을 잡으셨는데 어찌 돈을 거십니까?”
속 좁은 수주가 대뜸 질문을 건넸다.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쨌든 저 계집에게 은자를 거는 사람이 있어야 내기를 하든 말든 할 것 아닌가.”
위씨 가문의 둘째 아들은 억지를 부리는 데 선수였다.
그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오른쪽 찻잔 옆에 엽전 5냥이 놓였다.
“형님, 제 몫인데 어찌 빌리겠어요?”
은자를 내려놓은 사람은 다름 아닌 위씨 가문의 셋째 아들이었다.
“옥릉국이 망한 후, 집을 잃은 백성들이 묵자처럼 정처 없이 떠돌고 있지요. 얼마나 가엽습니까.”
알고 보니 셋째가 건 이유는 동정심에서였다. 정말로 묵자에게 음흉한 심보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가여워하는 편이 좋을 터였다. 묵자는 결코 자신에게 쏟아지는 연심을 감사히 여기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묵자는 다른 사람과 대결을 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저 저자들이 저희 마음대로 자신을 이리저리 휘두르려는 것이었다.
“조짐이 좋구먼.”
위씨 가문의 둘째 아들은 옥릉국 따위가 망하든 말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저 그의 고향인 대주국이 무사하면 그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