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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조(2) >

'참 탐나는 놈들이 많아.'

서문엽은 분석안으로 남아공 선수들을 훑어보며 품평했다.

다들 대부분의 능력이 80대에 머물러 있고, 70 밑으로 떨어진 능력치가 별로 없었다.

민첩성이나 기술 부분은 90이 넘는 경우가 많으니, 스타일이 뚜렷한 팀이었다.

유럽에서 아프리카 출신 선수들이 많이 활약하는 이유가 있었다.

"삼촌!"

"응?"

뒤에서 백하연이 핀잔했다.

"뭘 그렇게 흐뭇한 표정으로 쟤네들을 보고 있어?"

"티 나니?"

"응. 잘 큰 젖소들 보는 목장 주인 같아."

"너도 쟤들 좀 봐봐라. 하나같이 탐나지 않니? 나도 저런 애들 데리고 경기 해보고 싶다."

"YSM도 좋은 선수 많잖아."

"다 외국인이라서 대표 팀엔 없잖아."

"흥, 대표 팀엔 내가 있는데. 나로는 부족해?"

"어휴, 우리 하연이가 있으면 든든하지. 머리는 돌이지만."

"혼날래!"

화를 내는 백하연과 투덕거리다가 양 팀 선수 간의 인사가 끝났다.

각자의 더그아웃으로 돌아갔고, 설치된 접속 모듈로 들어갔다.

그렇게 경기가 시작되었다.

1세트 던전은 만인릉이었다.

"여기도 이제 정겹네."

만인릉은 피에트로와 둘이서 실컷 누볐었다.

만인릉 황제와 싸우느라 이곳에서 신나게 죽었었다.

이 경기용 던전에 있는 가짜 황제가 아니라, 사령을 불러온 진짜 황제 말이다.

결국은 무기 영체화를 터득하고서 승리했기 때문에 좋은 추억이라 할 수 있었다.

'하는 짓거린 시발 놈이긴 한데, 덕분에 예언의 괴물과 싸울 최소한의 수단은 마련했지.'

무기 영체화도 없었으면 거대 뱀과의 싸움은 아예 성립 자체가 안 되었으리라.

아무튼 이 경기용 던전에 있는 가짜 만인릉 황제도 선수들에게는 꽤나 악명 높은 최종 보스 몹이었다.

만인릉 황제가 펼치는 검술은 그대로 구현되었고, 무기 영체화 같은 건 못하지만 대신 어마어마한 오러량을 가져서 11명이서 덤벼도 몰살당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어지간한 강팀이 아니면 만인릉 황제를 사냥하는 일은 피했다.

그런데 바로 그 점에 있어서 한국 대표 팀이 계획한 작전이 있었다.

한국 대표 팀은 두 가지 콘셉트를 지키고 있는데, 하나는 '잘 큰 서문엽', 둘은 한 타 싸움이다.

이번 작전은 서문엽이 단시간에 대량의 사냥 포인트를 듬뿍 먹을 수 있는 비책이었다.

"시작한다."

던전에 접속하자마자 서문엽이 말했다.

"옛!"

선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승호는 나를 따라오고, 나머지는 반대 방향에서 사냥을 시작해."

조승호는 서문엽을 따라 만인릉의 중심부를 향해 은밀히 움직였다.

조승호의 역할은 정찰.

앞서서 몰래 이동하고는, '투명화' 상태에서 주변 상황을 살펴 '시야 전달'로 서문엽에게 알린다.

나머지 9명의 선수들은 반대편 방향에서 사냥을 했다.

최대한 요란스럽게 사냥을 해서 만인릉에 있는 언데드 괴물들의 시선을 끄는 행동을 했다.

모든 목적은 서문엽이 조용히 궁전에 진입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

-한국의 서포터 조승호 선수가 망을 보고 서문엽 선수가 뒤따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대체 어디를 저리 비밀리 이동하고 있는 걸까요?

-방향만 보면 궁전입니다. 어딘가 좋은 사냥 장소가 있는 모양이지요. 다소 먼 곳에 있는 사냥 장소에 시작부터 미리 가서 자리 잡는 플레이도 종종 있는 일입니다.

중계를 들으면서 한국 측 더그아웃에 앉아 있던 백제호는 웃음을 지었다.

"좋은 사냥 장소이긴 하지."

"이제 곧 세상이 깜짝 놀랄 겁니다."

라이너 하임 코치가 거들었다.

남아공전에 대비하여 모의 훈련을 할 때, 서문엽이 보여준 플레이에 얼마나 놀랐던가.

그런 게 가능할 줄은 전혀 몰랐다.

배틀필드 강국 독일, 그것도 최강 팀 베를린 블리츠 BC 출신인 라이너 하임 코치조차도 난생처음 본 퍼포먼스였다.

'서문엽은 이미 그 정도로 강한데도 아직도 치열하게 훈련을 하고 있지. 정말 대단한 향상심이다.'

그가 코치로서 직접 본 서문엽은 이미 세계 최고의 선수였다.

나단 베르나흐, 로이 마이어, 다니엘 만츠 등의 톱3도 서문엽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서문엽은 분명 민첩하고 절정의 창술을 구사하는 테크니컬한 선수였지만 힘과 기동력에서 약점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약점이 사라져 버렸다.

아니, 기동력은 이제 세계 최속을 자랑하는 이나연과도 비슷한 수준이었다.

본래부터 장점이었던 부분은 더 강력해졌다.

이제 괴물 그 자체였다.

올해의 선수상이든 뭐든 가시적인 성취는 시간문제이리라.

'이미 인류를 구한 영웅이라는 빛나는 영광을 가진 사람이 저렇게까지 치열하게 스스로를 채찍질할 수 있다니, 대단한 일이다.'

라이너 하임 코치는 서문엽에게 경외심을 품고 있었다.

이번 월드컵은 물론이고, 향후 자신이 한국 대표 팀의 사령탑이 되었을 때도 선봉장이 되어줄 귀중한 에이스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든든한 것이었다.

시간이 경과되자, 비로소 경기장이 술렁거렸다.

서문엽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목적이 무엇인지 서서히 밝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문엽 선수가 궁전으로 향합니다!

-좋은 사냥 장소로 미리 이동하려는 의도로 보여지기는 했지만, 설마 그 사냥 장소가 궁전이었던 걸까요?!

-대체 궁전 어디에서 사냥을 할 생각인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여태껏 만인릉에서 펼쳐졌던 경기들 중 가장 색다른 양상이 나타날 것 같습니다.

서문엽은 담을 넘고 궁전 안에 잠입했다.

궁전 외벽을 기어오르며 점점 위로 향하는 서문엽.

궁전의 최상층은 만인릉 황제가 기거하는 장소였다.

-황제입니다! 서문엽 선수가 만인릉 황제를 사냥하러 가고 있는 겁니다!

-맙소사! 목적이 만인릉 황제 암살이었나요? 혼자서요?!

중계진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관중들로 흥분하여서 서문엽의 이름을 연호했다.

저 무모한 작전이 과연 서문엽의 손에서 어떻게 연출될지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서문엽은 마침내 만인릉 황제의 처소에 창문을 통해 들어갔다.

만인릉 황제는 대검 두 자루를 손에 들고는 서문엽을 맞이하였다.

가짜였기 때문에 말은 없었다. 그저 경기용 던전의 최종 보스 몹일 뿐이었다.

창으로 황제의 목을 향해 겨눈 서문엽이 방패도 가슴 높이로 들고 자세를 잡았다.

만인릉 황제가 거침없이 덤비면서, 두 사람의 일대일 대결이 시작되었다.

-시작되었습니다! 서문엽 대 황제! 웬만한 강팀이 아니면 사냥하겠다고 덤비는 게 오히려 손해일 정도로 막강한 최종 보스! 서문엽이 혼자서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와아아아아!!"

기대했던 일대일 대결이 성사되자 관중들이 뜨겁게 함성을 질렀다.

말도 안 되는 대결이다.

하지만 서문엽은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싸움을 벌였을 터였다.

설마 사전 훈련을 통해 검증해 보지도 않고 월드컵 경기에서 저런 시도를 할 리는 없으니까.

콰콰쾅!

오러를 듬뿍 머금은 대검이 바닥을 후려갈겼다.

몸을 날려 피한 서문엽은 이어서 날아드는 두 번째 대검도 바닥을 굴러 피했다.

콰앙!

구르면서도 창으로 황제의 왼발을 찌르는 테크닉은 덤.

캉!

황제는 처음 휘둘렀던 대검으로 창을 가로막았다.

다시 일어난 서문엽이 황제의 주위를 돌며 맹수처럼 기회를 살핀다.

황제가 다시 움직였다.

그런데 황제가 움직인 순간, 서문엽도 같이 움직였다. 황제가 달려드는 걸 보자마자 반대 방향으로 우회했기 때문에 서로의 위치가 뒤바뀌었다.

-서문엽 선수 집중력이 대단합니다. 황제가 달려드는 걸 보고 뒤따라 움직였는데, 거의 동시에 움직인 것처럼 보일 정도로 반응 속도가 빨랐어요!

-눈으로 보고 움직였다기보다는 눈치로 알아차리고 같이 움직인 거죠. 서문엽 선수가 황제에 대해 속속히 다 파악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 사이에 재미있는 인연이 있습니다. 실제 만인릉 황제를 처치한 사람이 바로 서문엽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이번 '황제 암살 작전'은 서문엽이 황제를 혼자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국 팀이 시도한 겁니다. 경기 전에 훈련을 통해 검증이 된 것이 맞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가볍게 공방을 주고받으며 시작된 싸움은 점점 격렬해졌다.

황제가 공격하면 서문엽이 피하면서 반격하는 구도였다.

강력한 오러를 가진 황제의 공격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을 철저히 피하면서도, 서문엽은 황제의 검술에서 드러나는 자그마한 빈틈을 철저하게 노렸다.

황제의 검술은 기본적으로 허점이 없지만, 공격을 시도할 때는 누구나 빈틈이 나타나는 법이었다.

또한 서문엽은 황제가 어떤 동작으로 어딜 공격할지 다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순간의 작은 빈틈을 잘 노릴 수 있었다.

퍽!

시간차를 두고 연이어 휘두르는 대검을 모조리 피하면서, 서문엽은 창을 어깨에 걸치고 뒤로 찔러 황제의 왼쪽 어깨를 맞췄다.

찔린 어깨의 상처는 이내 오러가 피어오르면서 순식간에 재생됐다.

하지만 서문엽은 꾸준히 황제에게 계속 상처를 입혀 나갔다.

진짜 황제였다면 그런 서문엽의 노림수에 대하여 임기응변으로 카운터를 펼쳤겠지만, 저것은 그런 인공지능이 없는 몹에 불과했다.

그런 것치고는 훌륭하게 황제의 검술 스타일을 원형대로 잘 살렸지만, 분명 한계가 있었다.

진짜 황제와도 신나게 싸워봤던 서문엽으로서는 사냥 포인트 왕창 주는 먹잇감이었다.

두 사람이 계속 맞붙는다.

서문엽은 경이로운 민첩성으로 계속 황제를 교란시키며 반격으로 공격을 성공시켜나갔다.

스쳐도 골로 가는 공격에 한 번도 맞아주지 않는 경이로운 결투였다.

"와아아아아!!"

"서문엽! 서문엽!"

관중들이 서문엽을 응원했다.

만인릉 황제를 혼자서 사냥하는 선수는 서문엽이 처음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빅 매치를 보는 기분이었다.

오러를 상처 재생에 계속 소진하면서 황제의 공격력이 서서히 감소되었다.

그때부터 서문엽이 본격적으로 공격에 들어갔다.

휘릭!

대검을 피해 빙글 회전한 서문엽은 겨드랑이 사이로 창을 찔러 다리를 노렸다.

황제가 다리를 뒤로 빼는 순간.

뻐억!

방패로 머리를 후려쳤다. 머리도 뒤로 젖히는 바람에 빗나갔지만 대신 어깨를 타격할 수 있었다.

진짜 공격은 방패였던 것이다.

눈을 번뜩인 서문엽은 증폭으로 민첩성을 118로 만든 뒤, 창으로 미친 듯이 연속 찌르기를 퍼부었다.

파파파파파파파팟!

황제가 정신없이 방어했지만, 두 대검 사이로 창이 파고들며 상처를 연달아 입혔다.

황급히 황제가 뒤로 물러난 순간이었다.

쉭!

서문엽이 창을 집어 던졌다.

손끝으로 창을 긁어 회전력을 실은 투창.

급히 두 대검을 교차해 방어를 취한 황제는 흠칫했다.

창이 굉장히 느린 속도로 날아왔기 때문이다.

속도는 느리게 설정한 '던지기'였다.

이를테면 체인지업으로 타이밍을 뺏은 셈이었다.

타이밍을 뺏은 지금이 기회였다.

서문엽은 새 창을 꺼내 돌격했다.

휘어지며 뚝 떨어지는 투창과 함께 서문엽의 찌르기도 함께 펼쳐졌다.

푸욱!

황제의 심장이 꿰뚫렸다.

-크아아아!

황제가 비통한 괴성을 질렀다.

상처에서 오러가 줄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또 다른 창을 꺼내서 계속 찔렀다.

몇 번을 찔렀을까.

-만인릉의 최종 보스, 만인릉 황제가 처치되었습니다.

던전의 최종 보스 몹이 사냥되었다는 안내 메시지가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아아!"

경기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사냥 포인트 0 상태에서 황제와 일대일 대결에서 승리한 서문엽.

푸른빛-보랏빛-붉은빛-검은빛-흰빛의 다섯 단계 중 벌써 4단계인 검은색 휘광에 둘러싸였다.

-서문엽 선수가 말도 안 되는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벌써 4단계에 도달했습니다! 어느 누가 경기 시작하자마자 황제를 사냥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게 가능하다면 그 선수야말로 만인릉의 황제라고 불러야겠죠!

-서문엽 선수가 벌써 저렇게 성장했습니다. 황제가 처치됐다는 메시지가 남아공 선수들에게도 알려졌을 텐데요, 그들에겐 최악의 소식입니다!

< C조(2) > 끝

< C조(3) >

-만인릉의 최종 보스 만인릉 황제가 처치되었습니다.

경기 초반.

갑작스러운 안내 메시지에 남아공 선수들은 당황해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거 무슨 소리야?"

"오류 났나?"

"황제가 벌써 죽을 리가 없잖아?"

그들은 메시지가 사실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아직 경기 초반이었다.

심지어 상대는 11명이 다 덤벼도 까다로운 만인릉 황제였다.

집단으로 사냥해도 1, 2명의 희생은 각오해야 해서 최근에는 잡으려고 하지도 않는 악명 높은 최종 보스였다.

벌써 잡힐 리가 없었던 것이다.

-안내 오류라면 곧 정정 메시지가 뜰 거야. 당황하지 말고 각자 사냥에 전념하고 있어.

곧 메인 오더의 지시가 내려졌다.

선수들은 그제야 동요에서 벗어나 하던 대로 사냥에 열중했다.

언데드 괴물들과 싸운 지 몇 분이 지났다.

오류 정정 메시지는 없었다.

메인 오더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오류가 아닌 것 같다.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한국이 황제를 잡았어.

선수들은 침음했다.

혹시나 정말 황제를 잡은 거면 어쩌지, 하는 불안이 현실이 된 것이다.

-몇 명이서 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대규모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았으니 소수 인원으로 사냥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중에 서문엽은 분명 포함되어 있겠지.

메인 오더의 말이 계속되었다.

-황제가 죽고 궁전을 지키던 언데드들이 비상이 걸렸으니, 서문엽은 아직 궁전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거다. 그러니 우리는 곧바로 서문엽을 노리자.

선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당초 전략적 방침은 암습.

서문엽이나 피에트로 둘 중 한 사람을 암습하여서 처치하는 것이 목표였다.

서문엽이 활개를 치면 경기가 점점 어려워지니 처치해야 하고, 피에트로가 있으면 결정적인 전투에서 질 위험이 컸다.

적어도 둘 중 하나는 처치해야 승산이 있다는 계산이었다.

남아공 선수들은 모두 개개인이 빠르고 기술적이기 때문에 게릴라 전술이 효과적이었다.

남아공 선수들이 움직였다.

4인은 따로 한국 측 본대에 견제 플레이를 펼쳐서 성동격서를 하고, 나머지 7인이 궁전에서 서문엽을 처치하기로 했다.

***

궁전 내부는 서문엽을 위한 사냥터로 변모되었다.

황제가 처치당하자 이 사실을 안 언데드 괴물들이 서문엽이 있는 황제의 처소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서문엽은 처소에 이르는 나선형 계단에서 언데드 무리를 맞이했다.

척, 척, 척, 척.

궁전을 지키는 스켈레톤 근위대가 일렬로 계단을 올랐다.

은빛 갑옷에 5m나 되는 길이의 장창, 그리고 붉은 망토까지 두른 만인릉의 정예 군단이었다.

일제히 장창을 서문엽을 향해 세우고 다가오는 근위병들의 모습은 장엄하기까지 했다.

집단전에 능하고, 함께 있으면 저 5m 길이의 장창으로 고슴도치처럼 빈틈없이 창날을 세우기 때문에 접근하기도 까다롭다.

서문엽의 창은 1.8m.

창 길이에서부터 불리한 구도였다. 서문엽뿐만 아니라 스켈레톤 근위대보다 린치가 긴 무기를 쓰는 선수들이 많지 않다.

장창들이 빈틈없이 세워져 있어 파고들 틈도 보이지 않는다.

투창으로 사냥해도 되지만, 스켈레톤 근위병의 숫자가 많아서 일일이 던지기를 펼치면 오러가 소진되고 만다.

그러나 서문엽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지금처럼 강해지기 이전에도 스켈레톤 근위대 따위를 상대로 어렵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서문엽은 창을 휘둘렀다.

챙!

선두에 선 스켈레톤 근위병의 장창을 옆으로 쳐내 빈틈을 만들었다.

금세 다른 창들이 빈틈을 메우지만, 서문엽은 압도적인 민첩성으로 빈틈이 사라지기 전에 재빨리 파고들었다. 장창은 가까운 거리에서는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다른 스켈레톤 근위병이 장창으로 찔러왔지만, 계속 창을 휘둘러 쳐냈다.

그러고는 가까이 있는 놈을 방패로 후려 팼다.

뻐어억!

스켈레톤 근위병은 팔을 들어 막았지만 그 팔이 부서졌다.

뻐억!

한 번 더 쳐서 두개골을 박살 냈다.

장창들이 계속 찔러왔지만, 서문엽의 창이 쉬지 않고 움직여 모조리 쳐낸다.

서문엽이 믿는 것은 압도적인 민첩성과 정교한 창술.

아무리 스켈레톤 근위대가 장창으로 합공을 해도 모든 공격을 방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뻐어억! 쿠앙!

창술로 방어하며 계속 가까이 붙어 방패로 팬다.

하나, 둘······.

스켈레톤 근위병이 잇달아 죽어나갔다.

두려움을 모르는 스켈레톤 근위대는 꾸역꾸역 밀고 들어왔는데, 서문엽에게는 그게 다 사냥 포인트로만 보였다.

'좋았어, 여기서 흰색까지 찍는다.'

최종 5단계인 흰색 광채에 둘러싸이면 그때부터는 천하무적이었다.

이미 4단계 검은색이니 얼마 남지 않았다.

'근데 상대 팀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데?'

초반에 대뜸 최종 보스 몹을 잡는 이득을 거뒀는데, 상대 팀이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초반 상황에서 한 번 격차가 생기면, 그 격차가 또 다른 격차를 만들면서 스노우 볼이 굴러가기 때문이다.

"조승호? 너 계속 거기 있냐?"

조승호는 대답 대신 '시야 전달'을 펼쳐왔다.

궁전 인근이었다. 무장한 스켈레톤 군대들이 득시글거렸다. 그 거리에서 조승호는 홀로 외로이 웅크리고 있었다. '투명화'를 유지하려면 말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시야 전달로 대신 대답한 것이다.

"좋아, 거기서 계속 궁전 근처를 살펴봐. 남아공 애들이 이곳을 칠 수도 있거든. 만약 발견하면 또 시야 전달로 나한테 알려."

대답은 없었지만 충분히 알아들었으리라.

서문엽은 이어서 백하연 측에도 경고를 했다.

"하연아, 그쪽을 습격할 수도 있으니 잘 대비해."

-알았어!

서문엽의 생각에 남아공은 장기전을 즐기는 팀이 아니었다.

선수 개개인은 뛰어나지만, 선수들의 피지컬이나 초능력을 보면 서로 시너지를 일으키는 조합이 안 보인다. 한마디로 조합을 생각 안 하고 그냥 실력 좋은 순서대로 막 뽑은 것이다.

'저런 선수 구성으로 한 타 싸움을 노릴 리는 없고, 결국 기습이나 지속적인 견제 플레이로 승부를 보는 팀인데, 지금쯤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서문엽은 지금쯤 남아공 선수들 다수가 이곳 궁전에 몰려오고 있다고 확신했다.

궁전에 잠입해 황제를 처치했어도, 비상이 걸린 궁전에서 빠져나가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 궁전에 있다는 걸 알 테니 이곳에 올 확률이 높지.'

서문엽은 스켈레톤 근위대를 사냥하며 남아공 선수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벌써 4단계까지 사냥 포인트를 모았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스켈레톤 근위대를 때려 부술수록 사냥 포인트가 차곡차곡 쌓여서 서서히 검은 광채에 흰빛이 나오려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적습!

백하연이 소리쳤다.

"몇 명인데?"

서문엽은 의아해져서 물었다. 이쪽으로 올 줄 알았는데, 9명이나 있는 본대를 치다니 의외였다.

-4명!

"아하, 그럼 성동격서니까 적당히 쫓아내."

나머지 7명은 이곳에 오리라.

서문엽은 남아공 측의 움직임을 훤히 꿰뚫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조승호가 '시야 전달'로 이미지를 보내왔다.

남아공 선수 3명이 궁전에 은밀히 잠입을 시도하는 모습이었다.

조용히 잠입해야 하는데 한 곳에 7명이 우르르 몰려갈 리는 없으니, 다른 방면에도 4명이 있으리라 추측할 수 있었다.

'일단 근위대부터 정리하자.'

스켈레톤 근위대와 싸우는 중에 습격을 받으면 위험해질 수가 있으니 일단 이곳부터 빨리 처리하기로 했다.

서문엽은 창을 연달아 던지기 시작했다.

스켈레톤 근위대를 노리고 던진 게 아니었다.

콰악! 콱! 콰아악!

창 3자루가 나선형 계단의 벽에 꽂혔다.

서문엽은 훌쩍 도약해 꽂아놓은 창 위에 올라섰다.

두 발로 창에 거꾸로 매달린 채, 아래에 있는 스켈레톤 근위병들에게 창을 찔렀다.

파파파팟!

순식간에 근위병 4마리의 두개골에 구멍을 뚫었다. 구멍이 뚫릴 때마다 파사삭 무너져 버렸다.

십여 자루의 장창이 한꺼번에 밀려오자, 서문엽은 다시 창에 올라선 뒤 도약하여 다른 창 위에 매달렸다.

벽에 꽂은 창 세 자루를 디딤대 삼아 옮겨 다니며 격렬하게 창술을 펼치는 서문엽.

지금까지는 오러를 아끼기 위해 차근차근 잡고 있었는데, 남아공 선수들이 오기 전에 정리하기 위하여 본격적으로 속도를 냈다.

장창의 파도 사이에서 빈틈을 발견한 서문엽은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근위병들의 틈바구니에 착지한 서문엽은 방패로 원을 그리며 휘둘렀다.

파가가가가각!

주위에 있던 3마리가 한꺼번에 쓰러졌다.

계속해서 장창을 사용할 거리를 주지 않고 가까이 붙어서 방패로 때려잡았다.

빠각! 뻑! 뻐어억!

주변이 부서진 뼛조각들로 엉망이 되었다.

공중제비를 돌며 오른발을 벽에 꽂힌 창에 걸고 매달렸다. 위에 올라서서 다시 점프!

다른 창 위에 나타나 다시 주변의 스켈레톤 근위병들을 죽였다.

여기저기 날아다니듯이 하며 창과 방패를 휘두른 서문엽은 결국 근위대를 다 처리하는 데 성공했다.

서문엽은 이제 흰빛에 휩싸였다.

5단계를 달성한 것이다.

남아공 선수들이 나타난 것도 바로 그때였다.

***

"제길! 흰색이야!"

"벌써?!"

"그래도 혼자뿐이야! 다 같이 공격해!"

궁전에 잠입한 7인은 위풍당당하게 흰색 광채에 휩싸인 서문엽을 보고 기겁했지만, 7 대 1 상황이었으므로 다 같이 협공했다.

황제의 처소 쪽에서 3명, 계단 아래에서 4명이 덤벼들었다. 스켈레톤 근위병과는 비할 바 없이 빨랐다.

다만 서문엽은 더 빨랐다.

쉭-

콰직!

-서문엽, 1킬.

들고 있던 창을 보지도 않고 뒤로 던져 한 명을 처치했다.

둘러싸인 상황에서 무기를 던질 줄은 몰랐던 탓에 방심하다가 1명이 데스되었다.

서문엽은 이어서 벽에 꽂혀 있던 창을 뽑아들고 다음 상대에게 덤볐다.

상대는 채찍을 쓰고 있었는데, 강철로 된 채찍에 전류가 흘렀다. 채찍에 전류를 실어 상대를 감전시키는 초능력이었다.

휘리릭!

채찍이 회오리 같은 모양으로 서문엽을 덮쳤다.

스치기만 해도 전류로 감전시킬 수 있으니 닿기만 하면 통하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회오리 같은 모양을 띤 채찍의 흐름 속에서, 서문엽은 파고들 공간을 봤다.

바로 정중앙!

팔다리를 모으고 그대로 회전하는 채찍의 한가운데로 몸을 날렸다.

서문엽은 불타는 링 사이를 통과하는 사자의 곡예처럼 그 사이를 통과했다. 그리고 앞으로 세운 창으로 채찍을 든 남아공 선수를 찔렀다.

푹!

-서문엽, 2킬.

채찍이 닿기 전에 처치할 수 있다고 확신한 판단력의 승리였다.

그때, 갑자기 중력이 2배가 된 것처럼 몸이 무거워졌다.

누군가가 몸이 느려지게 하는 초능력을 쓴 것이리라.

"이때다!"

다른 남아공 선수들이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서문엽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증폭, 민첩성.'

파파파팟!

-서문엽, 3킬.

-서문엽, 4킬.

-서문엽, 5킬.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연속 찌르기!

도리어 남아공 선수들이 서문엽이 느려졌다고 방심한 나머지 무더기로 죽었다.

남은 것은 2명.

딜러들은 모두 죽고 탱커 2명만 남았는데, 다들 망연자실했다.

"어떻게 저렇게 강할 수가······."

"아무리 5단계라도 이건 너무하잖아."

전의를 상실한 그들은 냉큼 덤벼드는 서문엽에게 속수무책으로 데스당했다. 둘 다 탱커라서 달아나 봐야 서문엽보다 느렸다.

-서문엽, 6킬.

-서문엽, 7킬.

이어서 백하연 쪽에서도 킬 소식이 들렸다.

-백하연, 1킬.

-피에트로 아넬라, 1킬.

-피에트로 아넬라, 2킬.

-피에트로 아넬라, 3킬.

아마 견제 플레이를 하던 남아공 선수 4인이 이미 졌기 때문에 달아나지 않고 계속 싸운 모양이었다.

1세트는 한국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 C조(3) > 끝

< C조(4) >

2세트, 던전은 천 개의 다리.

천여 개의 다리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고, 다리에서 벗어나면 10배의 중력으로 추락하는 던전이다.

워낙 지형이 복잡하고 길이 한두 개로 정해져 있지 않아서 수많은 변수가 창출된다.

이런 지형일수록 남아공이 빠른 기동력을 잘 살릴 수 있다.

하지만 남아공 선수들은 정상 컨디션이 아니었다.

그들은 1세트의 대패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궁전에서 서문엽과 싸운 7명은 정신적으로 후유증을 앓았다.

하나같이 높은 연봉을 받으며 유럽권에서 잘나가는 선수들이었다.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궁전에서는 서문엽에게 아무것도 못해보고 학살당한 7개의 낙엽에 불과했다.

머릿속에 있던 오만함이 깨지고 겸손함이 자리 잡기 시작한 과도기.

한마디로 패닉이었다.

2세트에서도 서문엽은 기세 좋게 날뛰었다.

남아공 선수들이 1세트의 영향으로 많이 위축됐을 것을 예상하고 활발하게 견제 플레이를 펼쳐 더 심리적 압박을 주었다.

남아공 측의 진영에서 아예 살다시피 한 서문엽은 계속 창을 던져서 위협했다.

그러면서 조승호를 인근 길목에 두어 CCTV 겸 충전기 역할을 시켰다.

"이대로는 안 돼!"

"다 같이 가서 잡아!"

분노한 남아공 선수들이 전원 총동원되어서 서문엽을 잡고자 했다.

하지만 그럴 때는 조승호가 CCTV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적이 어디서 오는지 조승호가 봐주니 이를 참고하여서 손쉽게 따돌렸다.

제대로 포위망을 펼쳐야 잡을 수 있지만, 그러면 각기 흩어져야 하기 때문에 서문엽에게 오히려 각개 격파 당할 수 있었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남아공 대표 팀은 자멸했다.

서문엽의 견제 플레이에 대응을 못 하고 우왕좌왕하니, 시간이 흐를수록 한국 팀의 누적 사냥 포인트가 그들을 훨씬 상회했다.

뒤늦게야 정신 차린 남아공 선수들의 선택은 한 타 싸움에서 승리를 노려보자는 것.

그것은 결국 한국이 원하는 바였다.

한 타 싸움을 집중적으로 연마한 데다가 선수들이 사냥 포인트를 잘 먹어서 성장한 한국 팀은 마지막 결전에서 대승을 거뒀다.

파파파파팟!

피에트로가 남아공 선수들의 머리 위에 있는 다리로 공간 이동한 뒤, 마법진을 만들었다.

이제 20개까지 만들 수 있지만 여전히 배틀필드 경기에서는 13개로 한정했다. 온힘을 다하면 경기 자체가 성립이 안 되기 때문이다.

힘 조절을 했음에도 파괴력은 극강했다.

피에트로는 단번에 4킬 3어시를 기록했다.

파괴되다시피 한 남아공 진형을 한국 선수들이 불도저처럼 밀어버렸다.

서문엽은 도망치는 적을 하나하나 붙잡아 사냥하는 역할을 맡았다.

완벽한 승리였다.

-한국이 완벽하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한 명의 데스도 없는 압승! 정말 강합니다!

-1세트에서 충격패를 당하고 나서 남아공 선수들이 자기 스타일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서문엽 선수야 당연히 무섭죠. 건드려 봐야 손해만 입기 십상이라는 게 여려 차례 증명됐으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1세트 때 궁전에서 싸웠을 때처럼 습격하는 것이 남아공의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크게 패한 나머지 2세트에서는 고유의 스타

일을 잃고 이도저도 아닌 경기를 했습니다.

-그것은 남아공 선수들의 정신적 동요도 문제였지만, 초반부터 견제를 펼치며 정신적으로 압박한 서문엽 선수의 플레이가 주효했던 것이죠.

-예, 정말 무서운 선수입니다. 단지 강하기만 한 게 아니라, 상대의 허실을 잘 알고 싫어할 만한 플레이만 해줬어요.

-단독으로 황제를 사냥했던 것도 그렇고, 오늘 서문엽 선수가 자신의 숨겨왔던 본 실력을 똑똑히 세상에 공개했습니다. C조의 미국과 네덜란드도 오늘 경기를 보고 걱정이 태산일 겁니다.

***

제럴드 워커는 손에 땀을 쥐고 경기를 보았다.

보고도 믿기지 않아서 1세트를 다시 보았다.

모은 사냥 포인트도 전혀 없는 초반.

시작하자마자 궁전에 가서 황제와 일대일로 붙었다.

만인릉 황제는 악명 높은 최종 보스 몹이었다.

사냥 포인트를 충분히 쌓은 후반에 다 같이 잡으라고 만들어진 몹이다.

저렇게 혼자 잡으라고 놔둔 몹이 아닌 것이다.

'저게 사람인가?'

황제의 대검에 실린 힘은 제럴드 워커도 버겁게 막아야 하는 위력이었다.

충분한 사냥 포인트를 모으지 못하면 못 막는다.

괜히 수많은 팀이 만인릉에서 황제를 거르는 게 아니었다.

서문엽이 아무리 최근 근력이 좋아졌다고 해도 황제의 공격을 막아내기란 무리였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서문엽이 보여준 답안은 간단명료했다.

한 대도 안 맞으면 된다.

'움직임을 미리 알고 피하고 있다. 저게 가능한 거였나?'

서문엽은 황제를 주시하고 움직이려는 찰나, 한 발 먼저 움직여서 회피와 반격을 동시에 성공시킨다.

황제의 검술 패턴을 다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황제는 몇 가지 패턴밖에 못하는 싸구려 AI가 아니다. 탄탄한 검술과 상황에 따라 응용하는 테크닉을 갖추고 있어 미리 알고 피하기란 보통은 무리였다.

선수들 중에는 두 자루의 대검으로 황제의 검술을 따라 배워서 효과를 거둔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육감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무서운 반사 신경이라고 해야 할까.

실제로 황제를 처치했던 경험이 도움 됐던 건지, 서문엽은 능수능란하게 황제를 요리했다.

다소 시간이 걸렸지만, 꾸준히 공격을 피하고 반격으로 상처를 입히며 피해를 누적시켰다. 결국 힘이 빠진 황제를 잡는 데 성공했다.

'이런 선수를 어떻게 상대하지?'

제럴드 워커는 갑갑해졌다.

이번 월드컵에서 자신이 최고임을 증명하고 싶었다.

자신도 있었다.

서문엽에게 짧은 가르침을 받은 이후, 자신은 성장했다.

예전에는 스스로의 어설픔을 모른 채 최강을 소리친 애송이였다면, 이제는 비로소 진정 최고의 탱커가 되었다고 확신했다.

자신에게 패배와 가르침을 내려주었던 서문엽도 이제는 자신 있었다.

그런데 그 확신이 저 멀리로 날아갔다.

못 본 사이에 서문엽은 괴물이 되어 나타났다.

약했던 힘이 메이저리그의 클래식 탱커들 못잖게 세졌고, 속도는 그냥 미쳐 버렸다.

순발력은 또 어떤가.

적에게 대응하는 반사 신경과 창을 찌르는 속도는 눈에 보이지도 않게 되었다.

그동안 숨겨왔던 본 실력이라도 드러낸 것일까?

저 나이에 이런 성장이 있을 수 있나 싶었다.

'미치겠군. 이미 누가 최고인지는 정해졌어.'

다른 사람들은 누가 최고냐고 아직도 기대하고 있겠지만, 자신이나 톱3라 불리는 세 사람은 이미 느꼈을 것이다. 서문엽을 혼자 감당하기란 무리라고 말이다.

아마 그들이 속한 프랑스, 독일, 영국 대표 팀도 고민하고 있을 터였다.

황제를 사냥한 이후, 남아공 선수 7명을 혼자서 학살하는 장면에서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유명한 선수들인데, 우수수 쓰러지는 떨거지들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내가 막는 수밖에 없다.'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육체 강화로 30초간 제럴드 워커는 어마어마한 피지컬을 얻는다.

양 팀 모두 한 타 싸움에 집중하고 있으니, 싸움이 벌어졌을 때 30초간 서문엽을 상대하면 된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내가 이길 수도 있지! 보여주겠다. 그때 이후로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수년 전 언젠가, 승부를 겨루러 갔다가 가르침을 받고 돌아왔던 날은 아직도 기억했다.

순순히 진심으로 패배를 인정했던 때는 그날이 처음이었다.

***

1경기, 미국 대 네덜란드, 미국 승.

2경기, 대한민국 대 남아공, 대한민국 승.

죽음의 조라고 불렸던 C조에서 격동이 일었다.

이중 최강 팀으로 꼽혔던 미국의 대승은 당연했는데, 한국의 대승은 뜻밖이었다.

서문엽과 피에트로 콤비가 있으니 한국이 이길 거라는 전망은 다들 하고 있었다.

문제는 너무 강했다.

정확히는 서문엽이 말이다.

1세트에서 보여준 퍼포먼스는 세상에 충격을 주었다.

-서문은 미쳤어. 황제를 구역 보스 몹쯤 되듯이 해치워 버렸어.

-서문에게는 뭔가 특별한 게 있어. 실제로 자기가 잡아봤던 던전 몹을 상대할 땐 비상식적일 정도로 간단하게 사냥하지.

-저 악명 높은 황제를 실제로 처치했던 사람이라니. 그는 정말 영웅이라 불릴 만해.

-얘들아, 너희들 황제보다 서문에게 학살당한 7명의 선수들도 언급해 줘. 그들은 듣도 보도 못한 떨거지들이 아니야. lol

-미국과 한국이 붙으면 누가 이길까? 당연히 미국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모르겠어.

-저런 서문엽이 있는데 진다고? 상상이 안 가. 심지어 서문엽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피에트로 아넬라는 무서운 원거리 딜러라고.

-제발 미국이 한국과 남아공에게 졌으면 좋겠어. 그래야 우리 네덜란드도 희망이 생긴다고!

└안 됐네, 친구. 미국이 남아공에게 질 거라는 희망을 품다니.

C조에서 미국이 1위로 올라가고 남은 한 자리를 놓고 세 국가가 치열하게 다툴 거라는 기존 평가는 사라졌다.

이제는 미국도 한국을 상대로는 장담 못 한다는 의견이 대세였다.

서문엽이 보여준 퍼포먼스는 그 정도로 큰 파장을 낳았다.

월드컵은 점점 팬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으며 진행되었다.

A조의 프랑스가 2승을 거둬 16강 진출을 거의 확정 지었고, B조에서도 영국이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2승을 거뒀다. '아이리시 위저드' 로이 마이어를 비롯한 선수들이 통합된 영국 대표 팀의 저력을 똑똑히 보여주며 우승 후보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리고 다시 C조의 3경기가 열릴 차례가 되었다.

전 세계 팬들이 가장 기대한 경기.

미국 대 대한민국의 경기였다.

"컨디션은 어때?"

그렇게 묻는 백제호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나왔다.

서문엽이 어제도 혹독하기 그지없는 트레이닝을 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회복력이 빠른 초인이라지만, 경기 바로 전날에 하드 트레이닝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서문엽은 월드컵 중에도 내내 빠짐없이 하드 트레이닝을 했다. 그것도 코치들이 다들 뜯어말리고 싶어 하는 엄청난 강도의 트레이닝을 말이다.

마치 서문엽에게 월드컵은 최종 목표가 아닌 그냥 지나가는 이벤트 정도인 것처럼 보였다.

"내 컨디션? 완전 최상이지."

서문엽은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감이 넘쳤다.

"알다가도 모르겠다. 옛날에는 더 강해질 수가 없다면서 훈련 안 하고 그냥 놀았잖아?"

"그땐 그게 한계였으니까."

백제호는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경기장에 나서기 위해 배틀 슈트와 갑옷을 챙겨 업은 서문엽은 라커룸에 달린 거울을 보며 씨익 웃었다.

-대상: 서문엽(인간)

-근력 91/95

-민첩성 109/110

-속도 100/101

-지구력 101/102

-정신력 111/112

-기술 108/109

-오러 110/111

-리더십 100/101

-전술 100/101

-초능력: 분석안, 던지기, 불사, 증폭, 영혼 연성.

남아공과의 경기가 끝난 날도 밤늦게까지 훈련했다. 그렇듯 월드컵 중에도 쉬지 않고 훈련을 한 보람은 있었다.

바로 어제 민첩성이 1 더 오른 것이다.

'제럴드 워커야. 나랑 재미있게 놀아보자.'

모든 재능을 만개해 괴물이 된 제럴드 워커와 겨뤄볼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맨날 말도 안 되는 거대 뱀과 사투를 벌이던 그에게 제럴드 워커 같은 인간적인 상대는 유희거리나 다름없었다.

< C조(4) > 끝

< C조(5) >

양 팀 선수가 입장했고, 서로 악수를 나눴다.

서문엽은 제럴드 워커와 악수를 나눴다. 두 사람의 시선이 충돌했다.

"예전의 내가 아닐 거다."

제럴드 워커는 호승심을 숨기지 않았다.

서문엽은 미소를 지었다.

"알아, 인마."

"당신도 그간 더 강해졌지만, 나도 만만치 않을 거다."

그 말을 남기고 제럴드 워커는 지나갔다.

'생각보다 신중한데.'

네덜란드전에서 1, 2세트 연속 MVP를 차지한 미국의 영웅답지 않은 방어적인 태도였다.

'내가 남아공을 박살 내는 걸 봤을 테니 위기감을 느꼈을 테고, 아마도 제럴드 워커는 날 마크하는 특명을 받았겠지.'

계속 미국 선수들과 악수를 나눴다.

하나같이 덩치가 크고 힘이 셌다. 탱커들은 그야말로 거인이었고, 민첩성과 속도가 높은 딜러들도 체격이 한국 선수들보다 컸다.

덩치가 클수록 강한 것은 초인들의 세계에서도 대체로 적용되는 이야기였다.

'어째 다들 기본적으로 근력이 높네.'

서문엽은 혀를 내둘렀다.

현재 서문엽의 근력은 91/95.

스피드를 살리기 위해 근력을 다소 포기했지만, 그럼에도 상당히 높은 편이다.

그런데 미국 대표 팀 선수들의 평균적인 근력이 딱 그 정도였다.

탱커들은 물론이고 딜러들도 근력이 85 아래로 떨어지는 선수가 없었다.

'아니, 어떻게 쟤네 딜러들이 우리 탱커들보다 듬직해 보이냐?'

한국 측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은 서문엽이고, 그다음이 근력 90의 최혁이다.

그런데 미국 팀에는 근접 딜러 중에도 근력 90이 넘는 선수가 몇 있었다.

근접 딜러가 탱커와 근력이 비슷하면 어떻게 될까?

그땐 근접전에서 탱커가 안전하지 못하게 된다. 저쪽 딜러가 몸싸움에서도 안 밀리고, 들고 있는 방패를 뺏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미국이 괜히 '파워 게임'으로 세계를 제패한 게 아니었다.

새삼 확연히 느껴지는 양국의 격차였다.

이 탓에 오늘 경기는 백제호를 비롯하여서 코치진이 고심을 했고, 선발 선수 명단을 다음과 같이 짰다.

-탱커: 서문엽, 최혁, 채우현, 최만식, 신태경.

-근접 딜러: 백하연, 박영민.

-원거리 딜러: 피에트로 아넬라, 심영수, 이나연.

-서포터: 조승호.

이번에는 제대로 된 5탱커였다.

본래 서문엽이 딜러 역할을 하면서 사실상 4탱커였지만, 이번만큼은 서문엽도 탱커 라인을 보강하는 데 힘을 보테야 할 필요가 있었다.

탱커들끼리 힘겨루기에서 한국 측이 뚫려 버릴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근접 딜러에서는 유벽호가 빠지고 박영민이 들어갔다.

유벽호는 순간 기속으로 30초간 빠른 스피드를 구사할 수 있지만, 근력이 너무 약한 탓에 공격 수단이 많지 않았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디펜스가 최상급이었기 때문에 유벽호가 활약할 길이 별로 없었다.

대신 근력·민첩성·속도 등이 모두 80대로 우수한 편에다가 화염검이라는 확실한 공격 수단이 있는 박영민이 투입됐다.

하지만 한국이 승부를 걸고 있는 진짜 공격력은 원거리 딜러들이 맡았다.

적을 교란시키는 역할을 맡은 이나연은 제외하더라도, 피에트로와 심영수가 초능력을 적극적으로 써서 막강한 화력으로 적을 파괴할 계획이었다.

이를 위하여 조승호가 원거리 딜러들의 오러를 회복시켜 주는 충전기 역할을 수행한다.

요약하자면 결국 한 타 싸움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뜻!

미국도 한 타 싸움이 특기이니 어마어마한 집단전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어느 때보다도 강한 적을 맞이한 만큼, 한국 선수들의 표정은 전쟁에 나가는 것처럼 굳어 있었다. 피에트로만이 아무 생각 없는 표정으로 휘적휘적 따라 걷고 있을 뿐이었다.

***

1세트 던전은 대공동묘지.

죽은 지저인을 매장하는 거대한 동굴이었다.

성역(최후의 던전)에 거주하던 대부분의 지저인이 매장되는 곳인 만큼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일반 지저인은 동굴의 각 벽이나 천장에 매장시키지만, 신분이 높은 이는 가족과 함께 굴을 따로 파서 공간을 마련해 안치시킨다.

폭도 굉장히 큰 데다가 구조도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신분 높은 지저인이 죽을 때마다 새로 동굴 옆에 길을 따로 뚫어서 안치실을 만들고, 동굴이 꽉 차면 확장 공사를 거듭한 결과였다.

이곳은 안치된 고인의 시신을 보호하는 신성한 장소였기 때문에 지저인들은 누구나 이곳에 매장되길 바랐다. 워낙 시체를 언데드로 만드는 작자들이 많은 탓이었다.

그런데 결국은 지저 문명 최후의 대사제가 여길 통째로 던전으로 만들어 성역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전쟁에서 밀리고 있어서 눈깔 뒤집힌 대사제에게 이 대공동묘지는 언데드 군단을 생산할 절호의 군사 시설로밖에 안 보였을 것이다.

'그 대사제가 지금 나와 함께 있지.'

서문엽은 흘깃 피에트로를 곁눈질했다.

피에트로는 자신의 과오가 얽힌 대공동묘지를 둘러보고 있었다.

딱히 표정에 드러나는 감정은 없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어떤 회한(悔恨)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대형 갖추고, 시작하자."

서문엽이 선수들에게 지시했다.

"예!"

선수들이 서문엽을 중심으로 모였다.

이곳은 따로따로 나뉘어서 사냥하는 곳이 아니었다.

11명이 함께 이동해야 한다.

벽과 천장에서 언데드들이 워낙 많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게다가 괴물들을 다 처치하면 해당 지역의 동굴이 무너진다.

주요 길목을 제외하고는 다 저절로 붕괴되는 형식의 던전.

길이 어떻게 달라져서 서로 고립될지 모르니 함께 다니는 것이 최선이었다.

선두에 서문엽이 서고, 그 위로 탱커 넷이 좌우에 도열했다.

쐐기 형태로 선 탱커라인 뒤편에 딜러들과 조승호가 보호받듯이 섰다.

그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크엑!"

"크히엑!"

"흐으으으···!"

천장과 벽에서 좀비들이 튀어나왔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신들로 만든 언데드 괴물들이었다.

좀비들은 영화처럼 느릿느릿하지 않았다.

초점 없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맹렬하게 달려왔다.

"내가 먼저 앞서가서 뚫는다. 뒤따르면서 다 쓸어버려."

"옛!"

서문엽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서문엽의 빈 공간은 4탱커가 간격을 좁혀서 메웠다.

파파파파팟!

서문엽의 창이 연속 찌르기를 섬전처럼 펼쳤다.

창은 어김없이 좀비들의 머리에 구멍을 뚫었다.

좀비들을 우수수 쓰러뜨리며 계속 앞으로 질주! 금세 좀비 떼를 뚫고서 저 멀리로 파고들었다.

서문엽이 돌파하자 나머지 선수들이 뒤따르며 좀비들을 쓸어버렸다.

콰앙! 뻑! 뻐억!

서문엽은 거침없이 돌진했다.

좌우에서 좀비들이 몸을 날리다시피 하며 덮쳤지만, 그때마다 방패로 후려치며 계속 앞으로 나갔다.

창도 앞으로 찌르고, 뒤로도 이중날로 찌르며 좀비들을 마구 죽였다.

살육 기계.

좀비가 무더기로 서문엽에 의해 쓰러졌다.

서문엽이 앞에서 빠르게 돌파한 덕에 한국 팀의 전진은 빨랐다.

우르르르!

그들이 지나간 동굴이 무너졌다.

한국 팀이 지나간 자리마다 도미노처럼 붕괴가 계속되었다.

돌아갈 곳 없이 계속 전진해야 하는 곳.

이것이 대공동묘지의 묘미였다.

동굴은 두 갈래, 세 갈래로 계속 나뉘었는데, 어떤 길로 가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행보가 결정된다. 한 번 지나가면 붕괴되어서 다신 못 돌아가기 때문이다.

[야, 어느 쪽에 언데드가 많아?]

서문엽이 오러에 소리를 싣는 기법으로 피에트로에게 은밀히 물었다.

[왼쪽.]

피에트로는 바로 답했다.

대공동묘지의 설계와 확장 공사는 대대로 대사제의 역할.

피에트로보다 더 이곳 구조를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서문엽은 피에트로가 알려주는 대로 길을 정했다.

피에트로가 알려준 길에는 숨겨진 밀실이 많았다.

신분 높은 지저인 일가족이 매장된 밀실이 있을 때마다 피에트로가 알려주었다.

알려준 벽을 후려갈기니, 우르르 벽이 무너지면서 밀실이 나타났다.

대공동묘지는 아직 어느 프로 팀도 그 구조와 숨겨진 밀실 등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워낙 방대하기 때문.

하지만 한국 팀은 피에트로 덕에 밀실을 빠짐없이 발견하고서 그 안에 있는 거물급 언데드들을 사냥했다. 그들은 신분이 높았던 만큼 더 강하고 사냥 포인트도 더 많이 줬다.

"삼촌,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백하연이 궁금해져서 물었다.

"여기도 7영웅이 깼던 곳이잖아."

"우리 아빠도 그리 잘 알지는 못하던데."

"네 아빠랑 나랑 같니? 걔는 내가 시키는 대로만 따랐고, 나는 지도까지 만들면서 다녔지."

그때는 지금처럼 강했던 시절이 아니라, 던전에서 더더욱 머리를 쥐어짜고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물론 그렇다 해도 숨겨진 밀실을 잘 찾는 것은 피에트로 덕분이었지만 말이다.

밀실은 중요한 사냥 포인트였다.

밀실에서 나타나는 괴물은 그만큼 더 강하지만, 어차피 11명이 다 같이 다니기 때문에 일반 좀비나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협공으로 처치할 수 있다.

그러면서 사냥 포인트는 풍부하게 주니, 밀실을 많이 찾을수록 이득이었다.

서문엽이 피에트로가 일러주는 대로 밀실을 족족이 찾아내니, 한국 팀은 빠른 속도로 사냥 포인트를 축적할 수 있었다.

서문엽은 벌써 3단계인 붉은색 광채.

다른 선수들도 조승호와 피에트로를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2단계 보라색이 되었다.

그때였다.

우르르르!

어딘가에서 동굴이 붕괴되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운 곳에 미국 팀이 있다는 뜻이었다.

손짓으로 모두를 침묵시킨 서문엽은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창으로 2시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이다."

머릿속에서 이곳 인근의 지리가 펼쳐졌다.

약 200m 거리.

약간 길이 좁아지는 구간이라 11 대 11로 싸우기에 공간이 충분치 않았다.

공간을 넓게 활용 못 하면 빠른 발보다는 힘이 더 중요해진다.

한국에 불리한 지형이란 뜻이었다.

"좀 더 넓은 공간으로 끌어내서 한판 붙어야겠다. 이쪽으로 따라와!"

서문엽이 선수들을 이끌고 이동했다.

좀비들을 마저 다 해치우고 움직이니, 그들이 지나왔던 동굴도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 소리를 미국 측도 들었을 터였다.

미국은 아마 쫓아올 터였다. 그들로서는 좁은 지형이 유리하니 피할 이유가 없으니까.

얼마나 지났을까.

넓은 지형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는데, 문득 피에트로가 말했다.

[천장에 밀실.]

[천장?]

서문엽은 위를 바라보았다.

창으로 찌르자 천장이 우르르 무너지고, 숨겨진 공간이 나타났다.

여러 개의 관이 놓여 있었고, 그곳에서 안식을 방해받은 스켈레톤들이 관을 열고 일어났다.

"딱 좋네. 여기서 싸운다! 모두 올라가!"

한국 선수들이 일제히 천장의 밀실로 올라갔다.

스켈레톤들은 금방 처치했다.

서문엽은 이곳에서 미국 팀을 맞아 싸우기로 했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으니 유리한 구도였다.

게다가 밀실 덕에 공간이 넓어져서 이나연이 점프하기도 좋고, 심영수가 밀실 구석에 숨어서 '폭발 구체'를 쏘기도 좋았다.

11명이 모두 밀실에 자리 잡고 기다리니, 금방 미국 팀이 도착했다.

그들은 천장의 밀실에 자리 잡고 기다리는 한국 팀을 보고는 곤란해했다.

"제길, 이런 밀실이 있었나?"

"구도가 너무 불리한데."

한국 팀이야 제 발로 밑으로 내려가 덤빌 이유가 없었고, 미국 팀은 한국 팀이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 뛰어올라서 싸우기에는 너무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서로 대치했으나 쉽게 싸움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그때였다.

서문엽이 방패로 입을 가리고 작게 지시했다.

"피에트로, 마법진으로 좌우 길목을 전부 틀어막을 수 있겠지?"

"가능하다."

"좋아. 길을 전부 틀어막아서 가둬놓고 패자."

좌우로 뚫려 있는 길을 마법진으로 막아놓으면 미국은 독 안에 든 쥐처럼 된다.

그때 위에서 공격을 퍼부어서 다 때려잡겠다는 의도였다.

"셋 하면 시작한다. 하나, 둘, 셋!"

< C조(5) > 끝

< C조(6) >

파파파파파팟!

마법진 13개가 일거에 펼쳐졌다.

7개는 좌측 길목에, 6개는 우측 길목에 자리 잡아서 미국 선수들을 가둬 버렸다.

게다가 그곳에서 영령들이 소환되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막아!"

미국 선수들은 버럭 소리 질렀다.

제럴드 워커를 위시한 탱커들이 나서서 막아보았지만, 영령들은 불규칙하게 사방팔방에서 날뛰어서 커버가 불가능했다.

서문엽이 소리쳤다.

"심영수, 폭발!"

"옛!"

심영수가 혼란한 미국 선수들 한가운데에 폭발 구체를 쏘았다.

콰르릉! 콰릉!

"크억!"

-심영수, 1킬.

잇달아 날린 폭발 구체에 당한 미국 선수들이 나타났다. 양 길목을 차단하여 가둬놨기 때문에 피할 공간이 없었다.

이나연도 열심히 화살을 쏴서 그들을 더욱 정신 없게 만들었다.

-피에트로 아넬라, 1킬.

-피에트로 아넬라, 2킬.

탱커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령들에게 당한 선수들도 속출.

움직일 공간이 여의치 않으니 마법형 원거리 딜러들의 공격이 정통으로 적중하고 있었다.

그 광경에 제럴드 워커의 두 눈에 불꽃이 튀었다.

"이 새끼들을!"

제럴드 워커는 한국 선수들이 도사리는 천장의 밀실 위로 뛰어올랐다.

혼자 호랑이 굴 안에 뛰어든 제럴드 워커.

그러나 맹수는 제럴드 워커였다.

"어딜 올라와!"

"어림없다!"

최혁과 신경태가 달려들었다.

제럴드 워커가 '육체 강화'를 펼친 것도 그때였다.

-육체 강화: 근력, 민첩성, 속도, 지구력을 30초간 20% 강화한다.

그렇지 않아도 강했던 그의 피지컬이 20%씩 상승하자, 제럴드 워커는 괴물이 되었다.

힘껏 핼버드를 휘둘렀다.

콰가가각!

"커헉!"

'오러 집중'으로 방패에 오러를 모았던 최혁도, 보조해 주던 신태경도 일격에 나동그라졌다.

나동그라진 두 탱커는 제럴드 워커의 핼버드가 수확하듯이 목숨을 노렸다.

쩌억!

-제럴드 워커, 1킬.

신태경의 데스.

콰직!

최혁은 가까스로 옆으로 뒹굴어서 핼버드의 도끼날을 피했다.

"같이 커버해!"

채우현이 방패를 들고 달려들며 소리쳤다.

이에 보조 탱커인 최만식도 같이 도왔다.

제럴드 워커는 방패를 들어 올린 채 돌격했다.

몸통 박치기!

쿠우우우웅!

"흐억!"

"뭐 이런!"

채우현과 최만식도 같이 나동그라졌다.

한국의 탱커 4명이 한 사람에게 모두 수수깡처럼 밀려 버린 참사였다.

탱커들이 위기에 빠지자 그 뒤에 있던 근접 딜러 백하연, 박영민이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제럴드 워커는 핼버드를 풍차처럼 휘두르며 그들을 물러나게 만들었다.

"찻!"

심영수가 '속박'으로 제럴드 워커의 발목을 묶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발목만 휘감았을 뿐, 제럴드 워커를 어쩌지는 못했다.

제럴드 워커는 계속 핼버드를 크게 휘둘러 한국 선수들을 접근 못 하게 한 뒤, 환란에 빠진 동료들에게 소리쳤다.

"올라와!!"

제럴드 워커가 혼자서 동료들이 올라올 공간을 개척해 버린 것이었다.

영령들에 의해 환란을 당하고 있던 미국 선수들은 재빨리 점프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파팟!

마법진 3개가 삽시간에 이동해서 천장을 막아버렸다.

점프했던 미국 선수들이 마법진에 머리를 들이받고는 무더기로 추락했다.

순간적으로 피에트로가 뛰어난 센스를 보여준 것이었다.

그 여파는 컸다.

"으악!"

"아아악!"

영령들이 추락한 미국 선수들을 사정없이 물어뜯었고, 방어태세가 무너진 탓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피에트로 아넬라, 3킬.

-피에트로 아넬라, 4킬.

"이, 이럴 수가!"

제럴드 워커는 당황했다.

자신 때문에 도리어 동료들이 더 큰 위기에 빠진 셈이었으니까.

물론 제럴드 워커는 놀라운 괴력으로 최선을 다했고, 다만 피에트로가 마법진을 조종해서 사기성을 보여줬을 뿐이었다.

"이 개자식들!"

아직 '육체 강화' 30초는 진행 중이었다.

격노한 제럴드 워커는 자신이 왜 최고의 탱커로 꼽히는지 증명했다.

최혁, 채우현, 최만식 3탱커와 좌충우돌하며 몸싸움에서 승리.

균형을 잃고 허우적대는 최만식의 머리를 핼버드로 후려쳐 데스 시켰다.

-제럴드 워커, 2킬.

연이어 최혁까지도 방패로 찍어버렸다.

최혁도 방패를 들어서 막았지만, 압도적인 힘에 찍어 눌렸다.

뻐걱!

-제럴드 워커, 3킬.

밀실의 좁은 공간이라서 제럴드 워커 한 사람의 괴력에 한국 선수들이 쩔쩔매고 있었다.

아래쪽에서 살아남은 미국 선수들도 다시 기운내서 악을 쓰며 마법진을 후려갈기기 시작했다.

마법진은 단단하지만 선수들이 일제히 달려들어서 후려치는데도 끄떡없는 수준은 아니었다.

6명밖에 남지 않은 미국 대표 팀이 어떻게든 이기겠다며 일심동체로 힘을 모으는 상황. 제럴드 워커의 분전 덕에 용기를 얻은 것이었다.

그쯤 되니 서문엽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팟!

서문엽이 혼자서 한국 탱커들을 작살내고 있는 제럴드 워커에게 몸을 날렸다.

제럴드 워커도 그를 의식하고 있었다.

쾅!

강맹한 위력이 실린 창을 제럴드 워커의 방패가 막아낸다.

오히려 제럴드 워커가 힘을 가해 창을 밀어냈다.

서문엽은 밀리는 힘에 저항하지 않고 창을 빙글 회전시켰다.

이어서 창 뒤쪽의 이중날로 발목을 노렸다.

유려하게 이어진 2격.

카앙!

다시 제럴드 워커가 방패를 아래로 내려 막아냈다.

예전과 비교하면 놀랍도록 발전한 방패 컨트롤이었다.

이번에는 제럴드 워커의 핼버드가 서문엽의 몸통을 노렸다.

방패로 막을 수도 있지만, 계속 서로 충돌하는 식으로는 제럴드 워커에게 유리한 힘 싸움이 될 뿐이었다.

파앗!

훌쩍 뛰어올라 피한 서문엽은 벽을 디딘 채로 3연속 찌르기를 펼쳤다.

촤촤촥!

"큭!"

갑자기 측면 각도에서 날아드는 찌르기에 제럴드 워커가 동요했다.

이번엔 벽을 힘껏 박차고 반대편으로 이동.

반대편에서 다시 3연속 찌르기를 펼쳤다.

촤촤촥!

"윽!"

제럴드 워커는 계속 양 측면에서 공격을 퍼붓는 서문엽의 공세에 밀렸다.

정면 힘 싸움을 피해 양 측면을 공략해 오는 서문엽의 공세가 얄밉기까지 했다.

게다가 지금은 일대일 대결을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실력이 어중간한 대부분의 한국 선수들은 두 사람의 싸움에 끼어들 엄두도 못 내고 있었지만, 단 한 사람은 달랐다.

파팟!

백하연이 달려와 거침없이 채찍을 휘두른 것이다.

채찍이 뱀처럼 움직이며 제럴드 워커의 오른쪽 팔을 낚아챘다.

"꺼져!"

제럴드 워커가 몸부림치자 오히려 채찍을 당기던 백하연이 흔들렸다.

하지만 백하연은 그대로 검을 꼬나 쥐고 달려들었다.

상대가 누구건 칼 꽂을 생각을 하지 못하면 명문 파리 뤼미에르 BC에서 근접 딜러로 살아남지 못한다.

위협적으로 덤비니 제럴드 워커도 백하연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앞에서는 무려 서문엽이 공세를 펼치는데 환장할 지경이었다.

푹!

"큭!"

아니나 다를까, 조금의 틈이 보인 순간 서문엽의 창이 오른쪽 허벅다리를 찔러 버렸다.

다행히 버틸 만한 부상이었다.

제럴드 워커는 허둥지둥 벽에 붙어서 거북이처럼 방패 속에 웅크린 채 방어만을 했다.

서문엽은 제럴드 워커를 계속 궁지로 몰아넣었다.

"피에트로 안 끝내고 뭐 해? 조승호, 피에트로한테 오러 줘!"

제럴드 워커 한 놈에게 3킬을 당하는 바람에 한국 팀도 상황이 웃기게 됐다.

서문엽을 제외하고 남은 선수는 채우현, 백하연, 박영민, 이나연, 피에트로, 심영수, 조승호.

이나연, 피에트로, 심영수, 조승호는 근접 전투에 약하다.

그 때문에 이 싸움을 끝내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전개됐다.

죽은 세 선수가 모두 탱커여서 이런 사태가 일어난 것.

그래서 서문엽은 피에트로에게 어서 끝내라고 독촉했다.

조승호가 '오러 전달'로 자신의 오러를 전부 피에트로에게 넘겨주었다.

사실 피에트로는 다섯째 상급 사제를 흡수하고서 오러가 아직 넘쳤지만, 일부러 이전처럼 약간의 힘만 내고 있었던 상황.

조승호가 오러를 건네주니 더 힘을 발휘할 명분이 생겼다.

파파파팟!

부서졌던 마법진을 새로 만들어 다시 13개를 채운 피에트로.

거기서 영령들이 또다시 물밀듯이 쏟아져 나왔다.

미국 선수들을 절망케 하는 순간이었다.

-피에트로 아넬라, 5킬.

-피에트로 아넬라, 6킬.

"됐어! 다 내려가서 끝내!"

서문엽의 호령에 한국 선수들은 일제히 아래로 내려갔다.

서문엽은 홀로 남아 제럴드 워커와 사투를 벌였다.

이미 다리에 부상 입은 제럴드 워커는 요리하기 어렵지 않았다.

거기다가 '육체 강화' 30초도 끝나 버렸다.

촤촤촤촤촥!

서문엽이 갑자기 템포를 올려서 더 빠른 연속 찌르기를 퍼붓자, 제럴드 워커는 육체 강화가 풀린 타이밍과 맞물려서 복부를 찔리고 말았다.

"크억!"

-서문엽, 1킬.

물론 서문엽은 그 30초를 속으로 계산하고 피니시를 한 것이었다.

제럴드 워커가 쓰러지자 승부는 이미 난 셈이었다.

1세트, 5-0, 대한민국 승리.

***

"이야, 압승인 줄 알았는데 스코어가 5-0이네. 그 와중에 3명이 또 죽은 거야?"

서문엽이 혀를 내두르자 한국 선수들은 고개를 숙였다.

특히나 쉬운 싸움을 어렵게 만든 최혁, 최만식, 신태경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무리 상대가 제럴드 워커라지만 탱커 4명이 하나를 못 당해내고 무너진 것은 문제가 있었다.

피에트로가 6킬.

심영수와 서문엽이 각각 1킬씩.

아래쪽에 남아 있던 미국 선수는 3명이었는데, 그 3명이 그 와중에도 발악하며 3킬을 해버린 것이다.

미국 대표 팀의 선수 개개인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상대가 미국이잖아."

백제호가 한마디 하며 다른 선수들을 옹호해 주었다.

서문엽은 어깨를 으쓱했다.

"누가 뭐래? 그냥 감탄한 거야. 쟤들 되게 끈질기다. 정면에서 11 대 11 제대로 붙었으면 못 이길 수도 있었겠는데."

탱커들이 힘 싸움에서 안 되니, 양측이 충돌하자마자 한국은 대형이 무너질 것이다.

그렇다고 서문엽이 전면에 나서서 메인 탱커 노릇을 하자니, 제럴드 워커와 드잡이하느라 발이 묶인다. 서문엽이 없으면 한국의 공격력은 격감된다.

"그렇다고 꼭 우리가 불리한 것만은 아닙니다. 방금도 피에트로 선수가 마법진으로 길목을 천장까지 전부 틀어막은 플레이는 아주 좋았습니다."

라이너 하임 전술 코치가 말했다.

그는 2세트 던전인 던전 웜 레어 지도를 펼쳐놓고 피에트로에게 설명했다.

"이곳도 1세트도 비슷한 지형이라 같은 구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 던전은 특히 로이 마이어가 매번 MVP를 따는 곳이죠. 제가 무슨 말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피에트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 마이어의 특기는 '얼음벽'으로 공간을 갈라서 아군에게 유리한 판을 만드는 것이었다.

얼음벽의 그 역할을 피에트로의 마법진으로 똑같이 흉내 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로이 마이어 못잖은 전술적인 판단력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전술 97/97

피에트로의 전술 능력은 로이 마이어의 92/98보다 결코 낮지 않았다.

부족한 것은 의욕뿐이었다.

[내게 점점 많은 것을 바라는군. 말했지만 난 이게 별로 재미있지 않다.]

피에트로가 서문엽에게 은밀히 말했다.

그를 선수로 만들어서 부린 장본인, 서문엽은 뜨끔해서 황급히 말했다.

[알았어, 인마. 내가 마법진 어떻게 쓸지 시각 이미지로 전달해 줄게. 넌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알았다.]

그제야 피에트로는 더 이상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시각 이미지를 오러에 실어서 전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 C조(6) > 끝

< C조(7) >

거대한 잡식성 지렁이인 던전 웜은 개미처럼 지하에 굴을 파고 지낸다.

끊임없이 굴을 파고 다니므로 경기 중에도 실시간으로 지형이 달라진다.

때문에 던전 웜 레어는 길을 잃기 십상인 악명 높은 미로였다.

이곳에서 많이 뛰어본 베테랑들도 오히려 경험에 의존하여 길을 찾다가는 던전 웜들이 새로 뚫어놓은 굴로 접어들어서 헤매고 만다.

2세트가 시작되자 서문엽은 선수들과 함께 이동했다. 길 잃기 딱 좋은 곳이라 되도록 함께 다녀야 안전했다.

다만 발이 빠른 이나연에게는 따로 임무를 부여했다.

"주변 정찰하고 웜들 유인해 와."

"네!"

이나연은 씩씩하게 달려갔다.

쌩하니 쏜살같이 달려가는 모습을 보니 흐뭇해졌다.

'처음 봤을 땐 재능이 벼룩 같다고 낄낄거렸었는데 말이지. 참 잘 컸어.'

아직 자신의 재능을 몰랐던 이나연에게 속도를 키우고 활을 쥐여준 것은 서문엽의 신의 한 수였다.

이제는 한계는 있을지언정 뚜렷한 장점이 있어서 정찰과 견제라는 매우 확고한 역할을 맡는다.

장단점과 활용성이 확고하기 때문에 수많은 클럽 감독들이 탐낸다.

감독이라면 누구나 정찰에 특화된 선수 하나씩은 갖고 싶어 하는 법이었다.

이나연은 점프를 활용하여 마하를 방불케 하는 속도로 쏘다녔다.

던전 웜이 보일 때마다 화살을 한 대씩 쏘며 유인했다.

금세 이나연이 던전 웜 3마리를 끌고 돌아오자 사냥이 개시되었다.

"최혁, 채우현 앞에서 잘 버티고, 신태경과 최만식은 커버!"

"옛!"

서문엽의 오더에 네 탱커는 굳은 결의가 어린 표정으로 답했다. 1세트의 치욕을 만회하고 말겠다는 결의가 보이는 탱커들이었다.

쿠우우웅! 쿠웅!

"큭!"

"으윽!"

던전 웜들이 온몸으로 부딪쳐 오자 최혁과 채우현은 버티려고 안간힘을 썼다.

"태경아, 뒤 좀!"

던전 웜 2마리와 충돌한 채우현이 다급히 소리쳤다.

신태경이 쏜살같이 달려와 뒤에서 받쳐주었다. 채우현은 간신히 쓰러지지 않고 버텨낼 수 있었다.

탱커들이 안정적으로 던전 웜들을 멈춰 세우자, 딜러들의 공격이 펼쳐졌다.

콰지직!

"키리릭!"

백하연의 검이 가장 먼저 던전 웜의 머리에 꽂혔다.

격노한 던전 웜이 머리를 마구 뒤흔들자 백하연은 검을 뽑으며 튕겨져 나갔다.

하지만,

파앗!

순간이동으로 다시 던전 웜 앞에 나타나 다시 한 번 검을 꽂았다.

푸우욱!

"끼리리리릭!"

급소에 잇달아 공격당한 던전 웜은 움직임이 굼떠졌다.

다른 던전 웜은 박영민이 나섰다.

박영민은 검을 던전 웜 입속에 밀어 넣고 '화염검'을 펼쳤다.

퍼어엉!

"끼리리릭!"

이어서 이나연도 날렵하게 뛰어올라 던전 웜의 몸에 화살을 꽂아 넣었다.

그러고는 신영수의 '폭발 구체'로 마무리.

콰르릉!

던전 웜의 시체 2구가 축 늘어졌다.

나머지 한 마리는 서문엽의 몫이었다.

팟! 파앗!

벽을 박차고 천장까지 디딘 서문엽은 급속도로 하강하게 던전 웜의 정수리를 창으로 꿰어버렸다.

콰지직!

"끼릭!"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던전 웜이 축 늘어졌다.

창을 뽑은 서문엽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옛날에 제호가 자주 써먹은 움직임인데, 이게 되네."

중력을 무시하고 벽이며 천장이며 모두 밟고 다니던 백제호의 날렵함.

민첩성과 더불어 속도도 극도로 높아야 가능한 동작인데, 이걸 이제 서문엽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민첩성 109에 속도 100이니 못할 것도 없었다.

다들 서문엽을 보며 감탄 어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넷티, 빨리 튀어가지 않고 뭐 하냐? 11명이 다 뭉쳐 다니니까 몹을 빨리빨리 공급해야 해."

"앗, 네!"

이나연이 또 후다닥 뛰어갔다.

다 같이 던전 웜 레어를 다니다가, 문득 백하연이 말했다.

"삼촌, 5-5-1로 찢어지는 건 어때?"

"5-5-1? 그 1은 나 혼자 다니라는 뜻은 아닐 테고······."

"1은 나연이야. 5인 1조로 다니고, 나연이는 두 조에 몹을 몰아주는 거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않으면 괜찮지 않아?"

그 제안에 서문엽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현재 한국 팀이 한데 뭉쳐 다니는 이유는 지리적으로 변수가 많아서였다.

서로 따로 다니다가 길을 잘못 타서 점점 더 거리가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상대가 미국.

적극적으로 한 타 싸움을 걸어오는 팀이라는 사실이었다.

미국 측이 한 타 싸움을 걸어오면 재빨리 합류해야 하는데, 그게 늦어지면 낭패 보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중간에서 두 조를 왔다 갔다 하며 조율해 주는 이나연이 있다.

'넷티가 두 조의 위치를 조율해 준다면 문제없어. 정찰로 주변 지리를 파악하니까 길잡이가 되어줄 테고. 문제는 넷티가 그렇게 복잡한 역할을 다 해낼 수 있느냐다.'

-대상: 이나연(인간)

-근력 48/48

-민첩성 71/71

-속도 100/100

-지구력 53/53

-정신력 73/73

-기술 60/60

-오러 69/69

-리더십 24/24

-전술 76/83

-초능력: 점프

65였던 전술이 어느새 76으로 성장했다.

늘 전술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정찰을 담당하다 보니 전술 스탯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

76이면 선수로서 상당히 높은 수치였다.

속도 외에는 모든 게 부족한 이나연.

그런 그녀가 태극 마크를 달고 활약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전술적 재능이 뛰어난 덕이었다.

'좋아. 76까지 올랐으니 할 수 있겠어.'

서문엽은 백하연이 제시한 방안을 채택하기로 했다.

그렇게 1조는 서문엽이 최혁, 조승호, 피에트로, 심영수를 이끌기로 했다.

조승호는 전투력 자체가 없고 피에트로와 심영수는 오러를 아껴야 하는 입장이라, 사실상 서문엽과 최혁만 싸우는 조였다.

서문엽이 월등하게 강하기 때문에 그나마 탱커 중 공격력이 높은 최혁 외에는 멤버를 이렇게 구성했다.

나머지는 모두 백하연이 이끄는 2조에 속해 따로 떨어져 이동하기로 했다.

이나연은 더 바빠졌다.

빠르게 던전을 누비고 다니며 던전 웜을 활로 쏴서 유인해 1조와 2조에 분배해 주었다.

또한 1조와 2조가 서로 너무 많이 떨어지지 않게 내비게이션 역할도 해줘야 했다.

하는 일이 훨씬 복잡해졌지만, 이나연은 어려워하지 않고 수월하게 해냈다.

덕분에 한국 팀의 사냥은 훨씬 빨라졌다.

이나연만 몹 몰이를 하는 게 아니라 두 조도 사냥감을 찾아다녔기 때문에 사냥 속도가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침입자를 격퇴하기 위해 나타난 병정 던전 웜까지 처치하고 다니 서문엽은 3단계 붉은색 광채에 휩싸였다.

사냥 포인트의 보조에 의하여 공격에 실리는 파괴력이 더 강해졌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는데. 슬슬 결판을 지으러 가야겠다.'

한국 팀은 미국 진영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미국 측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지역에서 그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

-북쪽으로 향한 흔적이 있어요.

정찰 간 이나연이 알려왔다.

북쪽?

서문엽은 곧 알아차렸다.

"공동으로 갔군."

던전 웜 레어의 지하 최심부에 있는 거대한 공동(空洞).

던전 웜들이 광물을 파먹은 곳인데, 여왕 던전 웜이 수천 개의 알을 산란하는 장소였다.

알들을 지키려는 병정 던전 웜도 많이 출현하고, 알에서 깨어난 새끼 던전 웜들이 득시글거려서 사냥하기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하지만 사냥 중에 적습을 받으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에 함부로 자리 잡아서는 안 되는 곳이기도 했다.

미국이 먼저 그곳에 자리 잡았다는 것은······.

'한판 붙자 이거지.'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사방이 탁 트인 넓은 공간에서 제대로 붙겠다는 의지였다.

1세트처럼 불리한 지형에서 피에트로의 마법진까지 더해지면 대패할 수 있다는 것을 교훈으로 얻은 탓에 내린 결단이리라.

"공동으로 가자. 놈들이 기다린다."

서문엽은 공동에서 미국이 원하는 대로 한판 붙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최적의 사냥 포인트 습득 장소인 공동에서 자리 잡고 있는 적을 가만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한국 팀이 공동에 도착했다.

미국 팀은 공동의 정중앙에서 밀집 대형을 짜고 사냥을 하고 있었다.

'나름 머리 썼군.'

그들을 관찰하던 서문엽은 정중앙에 자리 잡은 이유를 알아챘다.

그들 대부분은 메이저리그 출신이었다.

그리고 메이저리그는 로이 마이어가 활약하는 리그다.

로이 마이어가 '얼음벽'을 어떻게 써서 적을 고립시키는지 늘 봐왔던 선수들인 것이다.

피에트로가 마법진을 벽처럼 활용해 1세트처럼 자신들을 단절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구석이 아니라 정중앙에 자리 잡았다.

사방이 트인 중앙에서는 마법진으로 벽을 만들어도 돌아갈 수 있으니 말이다.

거기다가 피에트로의 공격은 회피가 가능한 넓은 곳에서 맞아야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교훈을 1세트에서 얻었고 말이다.

그들을 풍비박산 낸 피에트로의 6킬이 꽤나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삼촌, 어떡할 거야?"

팀의 서브 오더인 백하연이 조용히 물었다.

이러면 계획대로 피에트로의 마법진을 활용해서 싸울 수 없지 않느냐는 질문이었다.

서문엽이 말했다.

"다른 꼼수는 없겠군. 그냥 붙는다. 일단 조승호에게 소모된 오러를 충전받고 시작하자."

조승호가 모두에게 오러 전달을 시전했다.

한국 선수들은 사냥으로 소진했던 오러를 모두 회복했다.

덕분에 조승호는 이제 오러가 다 고갈됐지만 말이다.

"피에트로."

"뭐냐."

"적 탱커 2명을 마법진으로 전후좌우 둘러싸서 제거해 버려. 할 수 있지?"

"한 명당 5개씩 쓰면 10초 안에 처치할 수 있다."

피에트로의 말에 서문엽을 제외한 선수들은 질린 표정이 되었다.

튼튼하기로 소문난 저 미국 탱커 2명을 10초 안에 제거한다니, 미친 파괴력이었다.

"탱커 2명만 없어져도 싸워볼 만할 거야. 그럼 남은 건 2명인데, 그중 제럴드 워커는 내가 처치할 거고."

2세트에서 미국은 제럴드 워커를 포함해 4탱커 체제였다.

그중 3명이 빠지면 아무리 상대적으로 약한 한국 탱커진이라도 밀어붙일 수 있었다.

"자, 가자!"

서문엽이 소리치며 앞장서서 뛰어나갔다.

한국 선수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여서 뒤따랐다.

미국 측도 이미 정찰로 한국이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파악한 상태. 당황하지 않고 포메이션을 갖췄다.

선두에 선 제럴드 워커가 눈에 불을 켜고 서문엽을 노려보고 있었다.

서문엽도 제럴드 워커를 똑바로 바라보며 달려갔다.

두 사람이 가장 먼저 충돌할 것 같았다.

그때, 서문엽은 시각적 이미지를 오러에 실어 피에트로에게 전달했다.

누구를 먼저 처치해야 하는지 직접 이미지로 보여줘 지시한 것이다.

파파파파파파팟!

"헉!"

"이, 이런!"

미국의 탱커 2명이 각각 5개의 마법진에 전후좌우와 머리 위까지 둘러싸여 버렸다.

5개의 마법진에서 영령들이 쏟아져 나왔다.

"으아아악!"

"아악!"

-피에트로 아넬라, 1킬.

-피에트로 아넬라, 2킬.

피할 공간이 조금도 없는 일격!

삽시간에 탱커 2명이 데스당하자 미국 팀은 술렁였다.

저런 식으로 당하면 누구도 킬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법진들이 또다른 먹잇감을 찾아 날아들었다.

"마법진을 피해! 둘러싸이면 끝장이야!"

제럴드 워커가 소리쳤다.

"넌 여길 신경 써야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서문엽이 말을 건넸다.

촤악!

"큭!"

날아드는 창을 고개 젖혀 피한 제럴드 워커.

이윽고 그도 '육체 강화'를 쓰고서 맞상대했다.

카앙! 깡! 챙!

불꽃 튀는 공방이 펼쳐졌다.

30초간 민첩성이 114가 된 제럴드 워커와 민첩성 109의 서문엽은 엄청난 속도로 공격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힘에서 유리한 제럴드 워커가 심지어 더 민첩하기까지 하니 서문엽이 수세에 몰렸다.

물론,

'증폭, 민첩성.'

서문엽은 금방 민첩성을 119로 뻥튀기 시켰다.

갑자기 더 빨라진 서문엽의 템포에 제럴드 워커는 당황했다.

'25초, 이제 24초 남았지? 그 안에 처치해 주지.'

서문엽은 제럴드 워커가 '육체 강화' 상태일 때 이겨주기로 했다.

< C조(7) > 끝

< C조(8) >

-피에트로 아넬라! 놀라운 초능력 응용으로 미국의 탱커 2명을 처치하고 싸움을 시작합니다!

-맙소사, 초능력을 저렇게 쓰면 대체 누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아넬라, 너무 강력합니다! 한 타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적어도 2명 이상은 죽고 시작할 수밖에 없어요!

-미국의 위기! 한국이 거세게 밀어붙입니다! 탱커가 둘밖에 안 남았어요! 최전방 제럴드 워커의 어깨가 무겁습니다! 서문엽, 그대로 제럴드 워커에게 돌진! 맞붙습니다!

"와아아아아아!!"

"워커! 워커! 워커!"

"서문에게 지지 마!"

경기장 대부분을 채운 미국 팬들이 소리를 지르며 응원했다.

제럴드 워커와 서문엽.

양 팀 에이스의 자존심 싸움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무서운 속도로 공방을 벌이자 경기장이 더욱 후끈해졌다.

육체 강화로 피지컬 각 능력치가 20% 상승한 제럴드 워커.

서문엽은 그에 한 발짝도 안 물러서며 모든 공격을 맞받아쳤다.

두 사람 다 탱커인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템포가 빨랐다.

둘 모두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민첩성을 발휘하고 있으니, 보는 관중들 입장에서는 휘황찬란한 광경일 수밖에 없었다.

-놀랍습니다! 정말 경이로운 대결을 펼치고 있어요!

-제럴드 워커 선수는 몸집에 비해 말도 안 될 정도로 순발력이 뛰어나죠. 거기다가 육체 강화를 썼으면 보통은 누구도 감당 안 될 위력을 발휘합니다! 그런데 서문엽은 역시나 서문엽입니다. 한 치도 밀리지 않고, 버거워하는 모습도 안 보입니다!

눈보다 빠른 그들의 공방에 관중들은 어안이 벙벙했지만, 배틀필드 선수 출신인 중계진은 싸움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눈으로 따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입을 떡 벌리고 경악한 것은 마찬가지.

짧은 순간순간에 펼쳐지는 그들의 공방에 서린 테크닉이 하나같이 고난이도였기 때문이다.

-제럴드, 제한 시간 30초 안에 승부를 봐야 하는데 승기를 가져올 기미가 안 보입니다. 서문엽이 더 스피드를 끌어 올려서 오히려 밀어붙이고 있어요!

-한국 팀을 상대로는 서문엽만 제대로 마킹해도 성공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미국이 수적으로 불리해요. 거기다가 피에트로 아넬라는 지금도 저 무서운 초능력을 계속 펼치면서 휘젓고 있어요!

-피에트로! 피에트로의 초능력만 견뎌내면 됩니다. 한국은 서포터 조승호가 싸움에서 빠지고 이나연도 공격에 큰 위력은 없습니다. 미국의 탱커 라인이 붕괴된 것이 큰 리스크이지만 이겨낼 수 있어요!

제럴드 워커와 서문엽이 치열하게 붙는 동안, 미국은 일류답게 한국의 공세에 대처하고 있었다.

제럴드 워커도 서문엽과의 일대일 대결로 바쁜 바람에 탱커가 하나밖에 남지 않았지만, 근접 딜러들이 붙어서 탱커 라인을 커버해 주었다.

근접 딜러들도 어찌나 근력이 강한지, 한국의 4탱커들이 오히려 밀릴 정도였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열심히 뛰어다니며 피에트로의 마법진을 하나하나 부숴 나가고 있었다.

웬만한 힘으로 때려서는 꿈쩍도 안 하는 마법진이지만, 여럿이서 힘을 모아 일격을 가하는 식으로 부수니 마법진이 어느새 7개로 줄었다. 미국도 나름대로 피에트로에 대한 대응책을 연마해 두었던 것이다.

그렇게 의외의 전개가 펼쳐지고 있을 때였다.

서문엽이 문득 뒤로 훌쩍 뛰어서 거리를 벌리며 물러났다.

그리고 즉각 창을 던지는 그립으로 고쳐 쥐었다.

곧잘 하는 그립 체인지 페인트였다.

그러나 제럴드 워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서문엽이 저 페인트로 상대의 타이밍을 뺏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파앗!

이번에는 페인트가 아니었다.

살짝 시간차를 두고 뜸들인 다음, 정말로 창을 던졌다.

흠칫.

제럴드 워커는 시간차로 타이밍을 뺏고 던진 서문엽의 테크닉에 살짝 동요했다.

하지만 회복도 순식간이었다.

'그래, 던져봐. 이것만 막고 새 창을 꺼내기 전에 달려들어서 밀어붙이면 내 승리다.'

제럴드 워커는 홧김에 정말로 창을 던진 서문엽의 실수라고 판단했다.

찰나의 순간에 자신이 승리할 시나리오가 머릿속을 스쳤다. 그가 초일류라는 증거였다.

하지만.

'무슨!'

방패를 들어서 날아오는 창을 막으려 했던 제럴드 워커는 당황했다.

창이 너무 느리게 날아왔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문엽이 2중으로 함정을 팠다.

최대한 천천히 날아가게끔 '던지기'를 조절한 것.

제럴드 워커는 느리게 날아오는 창이 완전히 도달할 때까지 방패를 들고 방어를 해야 했고, 그사이에 서문엽은 새 창을 꺼내 들었다.

캉!

창이 방패에 막혔다.

하지만 제럴드 워커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결국 타이밍을 뺏겼다.

시작된 서문엽의 맹렬한 공세에 제럴드 워커는 계속 방어를 해야 했다.

한 템포 더 기어를 올려서 연속 찌르기를 펼치는 서문엽.

그가 깨달은 완급 조절의 묘리가 완벽하게 적용되었다.

제럴드 워커는 수세에 몰렸다.

밀어붙이면서, 서문엽도 피니시를 먹일 시나리오를 설계했다.

쉭!

창이 재빠르게 하단을 노렸다가 튕겨 오르듯이 얼굴로 향했다.

방향을 바꿔 뱀처럼 날아드는 창.

제럴드 워커는 황급히 방패를 들어 얼굴을 막았다.

그 순간, 제럴드 워커의 시야는 방패에 가려졌다.

물론 제럴드 워커는 방어한 직후, 재빨리 방패를 다시 옆으로 치워서 시야를 회복했다. 일전에 서문엽에게 방패로 스스로의 시야가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으니까.

하지만 방패를 치웠을 때, 서문엽은 사라져 있었다.

다음 순간.

푹!

"크억!"

제럴드 워커는 왼쪽 어깨를 창에 찔렸다.

'당했다!'

방패를 옆으로 치웠지만, 서문엽은 그 방패의 움직임을 쫓아서 웅크린 채 옆으로 이동한 것이다.

상대의 방패를 역이용해 시야 밖으로 숨는 테크닉!

결과적으로 아주 잠깐이나마 상대의 시야 밖으로 사라지는 마술을 펼친 셈이었다.

어깨를 당한 제럴드 워커는 허둥지둥 물러났다.

"방패가 안 올라가지?"

서문엽은 차갑게 웃으며 말을 건넨다.

제럴드 워커는 이를 악물었다.

왼쪽 어깨를 찔린 탓에 왼손에 든 방패를 위로 올리기 힘들었다. 그걸 서문엽은 귀신같이 꿰뚫고 있었다.

이윽고 펼쳐진 연속 찌르기는 오직 상단만 노렸다.

제럴드 워커는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느린 발이 발목을 잡았다.

푹.

-서문엽, 1킬.

서문엽은 제럴드 워커를 처치하는 데 성공했다.

아직 제럴드 워커의 육체 강화가 7초 남아 있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오 마이 갓! 제럴드 워커가 당했습니다!

-서문엽의 경이로운 테크닉의 연속이었습니다! 느린 투창으로 타이밍을 뺏고, 밀어붙이다가 제럴드 워커 선수의 방패를 역이용해 시야 밖으로 움직이는 기술을 펼쳤어요!

-그 짧은 순간에 말이죠!

-예! 탱커를 공략할 때, 탱커가 들고 있는 방패 때문에 안 보이는 지점으로 몸을 숨기는 테크닉은 근접 딜러들이 곧잘 하는 거지만, 저런 스피드로 구사하는 것은 처음 봅니다!

-이러면 미국이 위험합니다! 제럴드 워커 선수가 데스당하면서 균형이 완전히 무너졌어요!

자유가 된 서문엽이 다른 미국 선수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피에트로가 조종하는 영령들 때문에 정신없는 미국 선수들이 그의 사냥감이 되었다.

-서문엽, 2킬.

-서문엽, 3킬.

-피에트로 아넬라, 3킬.

-서문엽, 4킬.

한바탕의 킬 축제였다.

탱커도 1명밖에 없으니 미국 선수들은 모두 서문엽의 맹공에 노출되어 줄줄이 데스당했다.

두 사람의 일방적인 공격에 미국은 결국 쓰러졌다.

6-0.

그 와중에 한국 팀도 5명이나 데스당했지만, 결국 2세트도 한국의 승리였다.

-1세트, 5-0, 한국 승. MVP: 피에트로 아넬라.

-2세트, 6-0, 한국 승. MVP: 서문엽.

한국은 미국을 꺾고 2승을 챙겨 C조 1위에 올랐다.

***

네덜란드는 남아공을 2-1로 꺾었다.

1세트는 완승했지만, 2세트는 악에 받친 남아공의 대대적인 초반 기습 작전에 휘말려 내주고 말았다.

심기일전하여 3세트는 다시 완승을 거뒀지만, 네덜란드는 갈 길이 먼 와중에 당한 2세트 패배에 한숨을 쉬었다.

한편, 네덜란드와 남아공의 2-1 소식에 한국은 축배를 들었다.

이로서 한국은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패배한다 해도 16강 진출은 확정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남아공을 상대로도, 미국을 상대로도 한 세트도 패하지 않았다.

때문에 한국, 미국, 네덜란드가 함께 2승 1패가 된다 해도, 남아공에게 한 세트를 패배한 네덜란드보다 순위가 높게 된다.

즉, 다음 경기에서 완패한다 해도 1위나 2위로 16강 확정이었다.

네덜란드로서는 한국을 2-0으로 꺾고, 미국이 남아공에게 지거나 이기더라도 한 세트는 패하길 바라야 했다.

하지만 미국조차 이겨 버린 한국의 저력을 보았기 때문에 네덜란드는 암울한 분위기였다.

"그래도 1위로 올라가야 편하게 8강에 진출할 수 있습니다."

라이너 하임 코치의 말에 모두들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16강 대진표는 추첨을 통해 정해지는데, 조 2위 팀은 다른 조 1위 팀과 붙도록 되어 있었다.

현재 조 1위가 거의 유력한 국가는 프랑스, 영국, 독일 등이었다.

프랑스와 독일은 말할 것도 없는 세계 최강 팀이었고, 영국 통합 대표 팀도 아이리시 위저드가 버티고 있는 강팀이었다.

특히 원거리 딜러로 전향한 개리 윌리엄스가 강력한 합금 활로 적을 괴롭히면서 동료의 킬을 돕는 어시스트 머신이 되었다.

-강화된 육체: 던전에서 근력, 민첩성, 속도가 5씩 증가한다. 원거리 딜러로 출전 시 10씩 증가.

개리 윌리엄스가 가진 초능력의 숨겨진 특성이 서문엽으로 인해 발굴된 탓이었다.

근접 딜러였을 때보다 근력, 민첩성, 속도가 5씩 더 높으니 이는 상당히 큰 차이였다.

더군다나 YSM에서 서문엽에게 집중 훈련을 받으면서 활로 어시스트를 하는 요령을 터득했다.

개리 윌리엄스의 뜻밖의 성장에 날개를 단 영국 통합 대표 팀은 무서운 상승세를 보이고 있었다.

한국도 미국을 꺾고서 강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지만, 서문엽과 피에트로에게 많이 의존하는 만큼 약점도 컸다. 저런 강팀들과 만나면 미국처럼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방심해서는 안 되지만 네덜란드는 미국보다 어려울 것 없는 팀이고, 지더라도 한 세트만 빼앗으면 1위 확정이니 문제없지."

백제호는 낙관했다.

괴물처럼 강해진 서문엽이 있는데 질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저 괴물도 있고.'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피에트로를 노려보며, 백제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인간의 탈을 썼지만 알맹이는 전직 대사제라니.

대체 서문엽이 안 보이는 곳에서 무슨 짓을 벌이고 있기에 저런 작자를 동료로 데려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보나마나 피에트로는 아직 한 번도 진심으로 실력 발휘를 한 적이 없을 것이다. 그 지저 문명을 다스렸던 대사제 아닌가?

"지금껏 축적된 데이터로 미루어보면, 네덜란드가 우리를 상대로 어떤 작전을 펼칠 지는 명확합니다. 남아공은 서문엽 선수를 암습하려다가 당했고, 미국은 한 타 싸움으로 승부를 보려 했지만 패했습니다."

여럿이 덤벼서 서문엽을 제거하기도 어렵고, 한 타 싸움으로 정면 대결해도 어렵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라이너 하임 코치가 계속 설명했다.

"네덜란드는 서문엽 선수 외에 다른 선수들을 집중적으로 노릴 겁니다. 앞선 미국전을 미루어보면, 유리한 구도에서 한 타 싸움이 벌어졌는데도 우리 팀은 6명, 5명씩 데스를 당했지요."

서문엽과 피에트로를 제외한 나머지는 만만하다는 데이터가 나와 있는 것이었다.

< C조(8) > 끝

< 진출(1) >

네덜란드 대표 팀은 자국 여론이 상당히 안 좋다고 했다. 미국에서 너무 처참하게 진 탓이었다.

그동안 유럽은 트렌드에서 뒤처진 미국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미국식 파워 게임은 그들에게 너무 무식하고 야만적인 발상이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유럽식 빠른 운영으로 우세한 상황을 만들어놨는데도, 결정적인 한 타 싸움에서 몰살을 당해버린 것이다.

이제 네덜란드가 16강에 진출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한국을 상대로 한 세트도 내주지 않고 깔끔한 승리.

그와 더불어 미국이 남아공에게 지거나 이기더라도 한 세트는 패배해야 한다.

둘 중 하나라도 성립 안 되면 탈락이었다.

"진출 여부를 떠나서 최소한 한국은 이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망한 팬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가 없어!"

감독의 열변에 네덜란드 선수들의 얼굴에 비장한 각오가 서렸다.

지저 전쟁 이후 초인의 힘은 국가의 힘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배틀필드는 나라의 자존심이 걸린 스포츠였다.

이대로 조별 예선 탈락의 수모를 안고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한국은 강하다. 저 미국도 꺾었지. 우리가 당해내지 못했던 한 타 싸움에서 말이다."

"······."

선수들은 숙연해졌다.

미국의 집단전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탱커의 파워가 가장 잘 드러나는 상황이었고, 특히 그중에서도 제럴드 워커의 경악스러운 기량이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런데 강팀이라고 할 수 없었던 한국이 미국을 정면 승부로 꺾은 것이다.

"하지만 면면을 뜯어보면 한국은 오히려 미국보다 더 상대하기 쉬운 팀이기도 하다."

스크린에 두 한국 선수의 사진이 나타났다.

서문엽과 피에트로였다.

이어서 미국과 한국이 맞부딪치는 전투 영상이 재생됐는데, 서문엽이 제럴드 워커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헉."

"다시 봐도 정말······."

"괴물들이야."

네덜란드 선수들은 침음을 삼키며 탄식했다. 저 제럴드 워커의 위력은 몸소 체험해 보았다. 그런 그를 압도해 버린 서문엽은 대체 어떤 수준이란 말인가.

그리고 다음 영상.

1, 2세트 모두 승부를 결정지은 피에트로의 초능력이었다.

1세트에서는 마법진으로 길목을 차단해 가둬 버리고, 2세트에서는 탱커 2명을 마법진으로 아예 둘러싸서 단번에 처치해 버렸다.

볼수록 사기만 떨어지는 미친 초능력이었다.

"이 두 사람만 보면 한국은 미국을 능가하는 강팀으로 느껴지겠지. 하지만 이러면 어떨까?"

감독의 말이 떨어지자, 이번에는 전투 전체가 눈에 들어오는 영상이 재생됐다.

서문엽과 피에트로만 제외하면 모두 소수의 미국 선수에게 밀리고 있는 한국 선수들이었다.

간간히 전투에 참여 자체를 안 하는 서포터 조승호와 열심히 뛰어다니며 활을 쏘지만 유효타를 주지 못하는 이나연도 보였다.

네덜란드 선수들은 되려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서문과 피에트로만 빼놓고 보니 저런 팀이 어떻게 조 1위인지 의문이군."

"남아공보다도 약하잖아."

"백하연은 역시 괜찮네. 근데 주변 동료들의 협력 플레이가 없으니까 활약상이 떨어져."

서문엽과 피에트로를 제외하면 역시나 백하연이 가장 눈에 띄었다. 파리 뤼미에르 BC 주전 멤버로서 이름값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백하연은 팀플레이에 특화된 선수였다.

동료들이 기회를 만들어주면 백하연이 빈틈을 치고 들어가 킬을 낸다.

혹은 동료들에게 킬 기회를 만들어주는 어시스트를 한다.

백하연은 한국 팀에서 두 패턴 중 후자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후자도 백하연이 만들어주는 기회를 동료들이 잘 받아먹지 못했다.

그나마 피에트로가 소환한 영령들 덕에 빈틈을 포착해서 킬을 여러 번 할 수는 있었다.

감독이 말했다.

"봤나? 단점이 이렇게 확연한 팀도 없을 거다. 무식한 미국 놈들은 자신들의 힘을 믿고 한국 팀의 강점과 맞붙었기 때문에 졌다. 하지만 우린 다르다. 강점은 철저히 피하고 약점만 공략한다."

"예!"

"물론 한국도 약점을 모를 리는 없다. 그 점을 보완하기 위해 각별히 주의는 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안전장치부터 하나씩 따고 들어가면 돼."

***

C조, 대한민국 대 네덜란드.

절치부심한 네덜란드가 준비한 전략은 1세트부터 나타났다.

"엇?"

정찰을 다니던 이나연은 전방에서 네덜란드 선수 2명이 나타나자 깜짝 놀랐다.

"1시 방향 적 2명 출현!"

이나연은 그렇게 소리치고는 냉큼 방향을 돌려 달아났다.

그런데 달아나던 길목에도 네덜란드 선수가 1명 더 나타났다.

"1명 더 출현!"

이나연은 당황하지 않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앞 점프로 세차게 질주하며 뒤쫓는 네덜란드 선수들과 거리를 벌리며 달아나는 이나연.

그런데 그 방향에서도 네덜란드 선수 1명이 출현했다.

하필이면 원거리 딜러 샌더 반 바트였다.

'보호막'과 '화염창'이라는 두 가지 초능력을 가진 이 마법형 원거리 딜러는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에이스였다.

세로 3m, 가로 4m의 직사각형 보호막은 어디서든 생성시킬 수 있어서 방어 외에도 적의 길을 막는 용도로도 쓸 수 있다.

또한 1m 길이의 화염창을 생성시켜서 던질 수 있는데, 한 번 던지면 화살과 같은 속도로 날아가 직경 3m 범위의 폭발력을 가진다.

이렇듯 샌더 반 바트는 공격과 수비 모두 갖춰진 원거리 딜러로, 이나연의 천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샌더 반 바트도 출현! 저 잡히겠어요!"

-뭐? 당장 가서 구해줄 테니까 최대한 버텨봐!

백하연이 소리쳤다.

그러나 그때, 서문엽이 끼어들었다.

-안 돼, 가지 마.

-응? 왜?

-작정하고 노렸잖아. 이나연 하나만 잡으려 하겠냐? 적어도 2중으로 함정을 팠겠지. 도우러 가다가 너희까지 기습당해.

"그럼 전 어떡해요?"

이나연이 물었다.

-어쩔 수 없어. 데스당하더라도 최대한 시간 끌어.

"네!"

이나연은 최선을 다했다.

4명의 네덜란드 선수들에게 둘러싸였지만 빠르게 달리고 점프하며 활을 쐈다.

하지만 네덜란드 선수들도 상당히 빠른 편이었고, 작정하고 이나연을 사냥하기 위해 설계한 함정이기 때문에 결국 데스를 면치 못했다.

콰르릉!

"꺅!"

-샌더 반 바트, 1킬.

보호막으로 앞을 가로막고 화염창을 던져 마무리한 샌더 반 바트였다.

"됐군. 정찰이 없으니 한국은 견제에 대한 대응이 더 느릴 거야."

이나연은 한국의 안전 장치였다.

홀로 다른 지역에서 사냥하는 서문엽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위험인물.

오히려 나머지 10명이 약점이라면 약점이었다. 그 때문에 이나연을 정찰로 돌려서 적습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인데, 네덜란드가 허를 찔러서 이나연부터 사냥한 것이다.

워낙 탁월한 이나연의 기동력 때문에 설마 잡힐 거라고 생각 못 했던 한국의 실책이었다.

그 뒤로 네덜란드의 습격은 계속되었다.

이나연이 없어지니 한국은 수시로 견제를 받았다.

이나연의 데스 후 잔뜩 경계를 높인 한국 선수들이지만, 꾸준히 두세 명씩 나타난 네덜란드 선수들은 위협을 가하고 사냥하던 괴물을 스틸하고 도망치기 일쑤였다.

결국.

-샌더 반 바트, 2킬.

네덜란드의 견제 플레이가 성공을 거뒀다.

당한 사람은 보조 탱커 신태경.

전방에서 방어를 하던 탱커 4인 중 가장 외곽에 있던 신태경을 샌더 반 바트가 능숙하게 잡아낸 것이다.

'보호막'을 파티션처럼 써서 신태경을 다른 한국 선수들과 고립시킨 후에 화염창 3발로 마무리. 깔끔한 솜씨였다.

또다시 네덜란드의 견제에 당해 버린 한국 선수들에게 서문엽의 호통이 떨어졌다.

-뭐 해, 병신들아! 상대가 몇 명이라고 반격을 못하는 거야! 견제 올 것을 뻔히 아는데도 그냥 당하고만 있냐? 아오, 씨발! 그냥 스스로 목을 매서 데스해라!

서문엽과 피에트로 이외의 선수들이 노려질 거라는 걸 사전에 뻔히 예측하고 있었다.

예측하고 적의 견제를 수비하는 훈련을 했는데도 당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미안해, 삼촌.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할까?"

다들 기가 죽으니 백하연이 나서서 화제를 전환했다.

서문엽은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조승호는 나한테 보내. 그리고 나머지 7명은 다 같이 뭉쳐 다녀.

"그게 끝이야?"

-피에트로가 있으니까 쟤들도 대규모로 싸움을 걸어오지는 않을 거야. 지금처럼 소수로 계속 시비만 걸 뿐이지. 내가 돌아올 때까지 너희들은 딱 5명만 살아남아 있어라. 알아들었어?

"응."

서문엽은 조승호에게 '오러 전달'을 수시로 받아가며 홀로 사냥에 열중했다.

그러는 동안 나머지 7명은 계속 네덜란드의 견제 플레이에 시달렸다.

네덜란드는 한국을 시종일관 괴롭히면서, 본인들은 꾸준히 사냥해 성장을 했다.

그럼에도 아직 만족을 못 느끼는 네덜란드였다.

"한두 명은 더 처치해야 돼. 아직 불안하다."

"저쪽도 서문엽이 계속 사냥 포인트를 모으며 크고 있잖아. 수적으로 더 유리하게 만들어야 돼."

혼자 남아공 선수 7명을 때려잡은 서문엽의 플레이는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피에트로의 초능력 역시 웬만한 수적 불리함은 만회하고도 남을 정도의 위력을 발휘한다.

이미 11 대 9지만 아직 안심할 수 없었다. 한국 선수들의 숫자를 더 줄여야 안전했다.

맹렬하게 공세를 펼친 네덜란드.

대규모로 공격했다가는 피에트로의 초능력에 당할 수 있기 때문에 기습과 매복 등으로 조심스럽게 견제를 펼쳤다.

지속적으로 피해를 입은 한국은 그럼에도 서문엽의 지시대로 최대한 죽지 않고 살아남으려 애썼다.

-샌더 반 바트, 3킬.

보조 탱커 최만식이 또다시 샌더 반 바트의 화염창에 사냥당했다.

그리하여 6명으로 줄어 있을 때였다.

-이제 됐다.

서문엽의 목소리가 들렸다.

반격의 시작이었다.

***

-3킬! 네덜란드의 에이스 샌더 반 바트 선수가 킬러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피에트로 선수의 초능력에 반격 당하지 않기 위해서 가까이 접근하지 않고 멀리서 공격하는 네덜란드입니다. 샌더 반 바트 선수의 '화염창'이 제격이죠.

-한국은 아무것도 못하고 계속 당하고만 있는데요. 서문엽 선수도 묵묵히 다른 지역에서 홀로 사냥 중입니다.

-한국은 나머지 선수들이 당하든 말든 일단 서문엽 선수를 키우겠다는 작전입니다. 사냥 포인트를 잘 먹은 서문엽 선수가 얼마나 무서워지는지는 여러 번 증명됐으니까요.

-하긴, 한국은 서문엽 선수와 피에트로 선수가 전력의 90% 아니겠습니까? 나머지 선수들 중 누가 죽어도 큰 문제없다고 판단했을 수 있겠습니다.

-말씀하신 순간, 서문엽 선수가 마침내 움직입니다. 4단계로 성장하자마자 슬슬 반격에 나섭니다.

서문엽은 검은 광채에 휩싸여 있었다.

혼자 아무 방해도 안 받고 사냥한 덕이었다.

조승호에게 오러를 충전받으며 사냥했으니 현재 어떤 선수보다도 크게 성장한 상태였다.

"다 뒈졌다고 복창해라."

서문엽은 혼자서 네덜란드 선수들이 있는 지역으로 달려갔다.

그동안 당했던 것을 모두 되돌려 줄 심산이었다.

잠시 후.

-서문엽, 1킬.

서문엽은 사냥을 개시했다.

사냥 중이던 네덜란드 선수들에게 냅다 뛰어들어서 한 명을 찔러 죽인 것이다.

"서문엽이다!"

"혼자서?!"

네덜란드 선수들이 7명 모여 있었음에도 혼자 뛰어든 서문엽.

"죽여!"

성난 네덜란드 선수들이 달려들자, 서문엽은 잽싸게 달아났다.

'증폭, 속도!'

증폭시키자 속도가 무려 110.

거기에 초경량 갑옷을 입고 있으니 거의 날아다니듯이 달아나는 서문엽이었다.

삽시간에 거리가 벌어지자 네덜란드 선수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 진출(1) > 끝

< 진출(2) >

서문엽의 공세가 시작됐다.

네덜란드는 한국 팀을 괴롭히는 4명과 사냥을 하는 7명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서문엽은 그 7명을 6명으로 줄여놨다.

멀리서 창을 던진 것도 아니고, 직접 뛰어들어 처리한 1킬이었다.

도망치는 속도는 더욱 경악스러워서 추격하던 네덜란드 선수들은 망연자실해야 했다.

-줄곧 참아왔던 한국! 마침내 서문엽 선수가 네덜란드에게 복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주하는 스피드 좀 보십시오. 저렇게 빨리 달리는 선수는 난생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아, 이거 네덜란드 큰일입니다. 사냥 포인트가 4단계에 접어들었고, 방금 킬을 먹어서 더 쌓인 서문엽 선수거든요. 공격 하나하나가 위력적인데 도망치는 속도도 따라잡기 어렵습니다.

-계속 괴롭힘을 당하겠군요.

-바로 그거죠! 서문엽 선수가 움직인 이상 이제 네덜란드도 운영을 달리 해야 합니다.

그 말대로 네덜란드는 동요하고 있었다.

서문엽을 어찌 해야 할지를 논의하는 것이었다.

한곳에 6명이나 모여 있는데도 언제 있을지 모르는 적습을 두려워하는 모습은 한국의 처지와 동일했다.

다만 공격을 담당하는 네덜란드 선수 4명의 역할을 서문엽 혼자 하고 있을 뿐.

-다 같이 서문엽을 잡아야 하지 않을까?

한 선수가 의견을 냈다.

그러자 오늘 3킬을 거둔 에이스 샌더 반 바트가 반대했다.

-서문엽은 너무 빨라. 광범위한 포위망을 펼친다 해도 앞을 막고 있는 한두 명을 간단히 죽이고 빠져나갈 거야. 이나연과는 전혀 달라.

이나연은 정작 일대일도 감당할 전투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쉽게 설계해서 처치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같은 방식을 서문엽에게 적용했다가는 끔찍한 각개격파를 당할 터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

-아냐, 이대로 당하고 있으면 돼.

샌더 반 바트가 의아한 말을 했다.

그가 설명했다.

-한국과 똑같아. 서문엽이 우리를 괴롭힌다면 우리도 한국을 똑같이 괴롭히는 거야. 한국처럼 우리도 최대한 견디면서 상대를 철저히 괴롭혀 주는 거지.

네덜란드는 그 말에 수긍했다.

가급적 서문엽과 싸우려 들지 말라는 감독의 신신당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동성을 중시하는 최신 트렌드를 장착한 네덜란드는 이런 상황에서 적과 충돌하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것이 강점이었다.

네덜란드가 맞불을 놓았다.

6명의 본대는 서문엽을 피해 수시로 위치를 옮겼다.

거의 피난 다니다시피 빠르게 이동하는 본대.

그러면서도 계속 사냥을 하고, 지속적으로 사방을 경계했다.

모두들 발이 빨랐기 때문에 가능한 플레이였다.

그러는 한편으로 한국을 계속해서 기습하며 시비를 걸었다.

-샌더 반 바트, 4킬.

죽은 사람은 다름 아닌 조승호였다.

서문엽에게 오러를 거의 다 빨린 뒤로는 인근 지역에 '투명화'를 펼친 채 CCTV 역할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샌더 반 바트가 조승호가 숨어 있을 법한 위치 몇 군데에 '화염창'을 연거푸 던진 끝에 처치에 성공한 것이다.

이나연과 조승호.

한국의 눈부터 멀게 하겠다는 전략적 콘셉트가 느껴지는 네덜란드였다.

조승호까지 없어지자 한국은 더욱 위축되었다.

적이 오는지 알려주는 선수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빠르고 순간 이동까지 있는 백하연이 정찰 역할을 대신할 수는 있지만, 또 네덜란드의 설계에 걸려들까 봐 몸을 사리는 중이었다. 백하연은 귀중한 전력이었으니까.

-샌더 반 바트인가 하는 새끼, 아까부터 겁나 거슬리네.

서문엽의 목소리가 들렸다.

-삼촌, 계속 이대로 가는 거야?

백하연이 물었다.

-어.

서문엽은 단호했다.

그런데 뜻밖의 말이 이어졌다.

-조금 있으면 우리가 이기니까 마음 편히 먹어.

-뭐? 어떻게?

-지금 놈들을 3구역으로 몰아넣고 있어. 3-2구역은 길이 하나밖에 없어. 한쪽은 내가, 다른 쪽은 피에트로가 공간 이동으로 와서 틀어막으면 싹 처치할 수 있어.

그랬다.

서문엽은 치고 빠지기로 네덜란드를 똑같이 괴롭혀 주겠다는 단순한 생각을 하는 게 아니었다.

6명을 통째로 해치워 버릴 구상을 하는 중이었다.

-내가 신호하면 피에트로는 3-2구역의 서쪽 방면 길목으로 온다. 나머지는 샌더 반 바트 무리가 이쪽으로 도우러 오지 못하게 싸움을 걸어.

-알았어.

서문엽은 잇달아 투창을 날려서 네덜란드의 본대를 위협했다.

네덜란드의 본대 6인은 그의 의도대로 3구역으로 이동했다.

그들로서는 서문엽이 몸을 숨긴 채 접근했다가 기습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길이 하나뿐인 3-2구역이라면 서문엽의 접근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잠시 후.

파앗!

서쪽 방면의 길목에 피에트로가 나타났다.

파파파파파파팟!

여태껏 오러를 아끼고 있던 피에트로는 마법진 13개를 유감없이 펼쳐 보였다.

"이런!"

"일단 피해야······!"

네덜란드 선수들은 피에트로의 초능력 공격 범위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반대편에서는 서문엽이 무서운 기세로 돌진하고 있었다.

한쪽은 피에트로.

다른 쪽은 서문엽.

도망칠 곳은 없었다.

"제기랄, 그냥 싸워!"

"마법진은 뚫기 어려워! 서문엽을 처치해!"

6명은 서문엽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마법진에서 소환된 영령들이 쏟아져 나와 그들을 추격했다.

그들은 저 으스스한 잡귀 같은 것들에게 잡히기 전에 서문엽을 처치하고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뻐어어억!!

-서문엽, 2킬.

일격에 한 명이 죽었다.

창으로 찌르기를 펼치는 듯하다가, 충돌 직전 360도 회전하며 방패로 후려친 일격이었다.

단순한 테크닉이지만 엄청난 스피드로 펼쳐지면 더없이 고난이도의 공격이 된다.

일격부터 기선 제압을 한 서문엽은 창으로 허공을 수놓았다.

촤촤촤촤촤촥!

민첩성 109를 모조리 끄집어낸 연속 찌르기!

"크헉!"

-서문엽, 3킬.

파앗!

서문엽은 힘껏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리고 공중에서 계속 연속 찌르기를 이어나갔다.

-서문엽, 4킬.

네덜란드 선수들은 기가 질렸다.

인간 같지 않은 스피드로 쏟아지는 공격을 도무지 대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뒤에서는 피에트로가 소환한 영령들이 그들은 덮치고 있었다.

-피에트로 아넬라, 1킬.

-피에트로 아넬라, 2킬.

-서문엽, 5킬.

6명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한편, 같은 타이밍에 백하연 일행도 샌더 반 바트 일당을 공격했다.

그쪽은 5 대 4의 싸움이었는데, 샌더 반 바트가 '보호막'과 '화염창'을 병행하며 2킬을 추가하는 미친 활약을 벌였다.

하지만 6킬에 빛나는 샌더 반 바트의 활약은 백하연에 의해 멈춰졌다.

백하연이 달려들자 샌더 반 바트는 '보호막'으로 가로막다.

팟!

순간 이동으로 보호막을 건너뛰고 코앞에 나타난 백하연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샌더 반 바트는 거기까지 예상했다.

즉각 몸을 굴려 피하며, 다른 손으로 화염창을 빠르게 만들어 던졌다.

촤라락!

간발의 차.

백하연도 여기까지 예상하고서 화염창을 피했다.

동시에 채찍을 휘둘러 샌더 반 바트의 목을 휘감았다.

"커헉!"

그녀의 또 다른 초능력 로프로 인해 자유자재로 조종되는 채찍이 목을 꽉 졸랐다.

-백하연, 1킬.

네덜란드는 강했다.

샌더 반 바트가 백하연에게 데스됐지만, 싸움은 도리어 한국이 밀렸다.

그들이 현란한 스피드와 긴밀한 연계 공격으로 유벽호와 최혁을 연거푸 처치한 것이다.

채우현과 심영수만 남아서 열심히 저항하는 모습이었다.

'숫자는 우리가 하나 더 많았는데.'

백하연은 한숨을 푹 쉬었다. 삼촌의 고충을 알 것 같았다.

백하연도 합류해서 저항한 결과, 싸움은 한국의 승리로 돌아갔다.

피에트로가 공간 이동으로 나타나서 네덜란드의 잔당을 깡그리 정리해 버린 것이었다.

***

1세트, 5-0, 대한민국 승.

2세트, 3-0, 대한민국 승.

네덜란드는 치열하게 저항했다.

그들은 이나연, 조승호를 우선적으로 노려서 한국의 시야 확보를 차단했고, 그 뒤에 거의 총력전으로 한국에 견제 플레이를 퍼부었다.

이나연과 조승호 등 주변 감시를 해줄 수 있는 선수가 없으면 견제에 대한 방어가 더없이 약해진다는 것을 파악당한 것이었다.

본래 한국 대표 팀은 네덜란드의 견제를 견뎌내고서 후반에 한 타 싸움으로 승부를 본다는 전략적 취지를 갖고 있었다.

후반에 이르면 결국 양 팀이 한자리에 모여서 한 타 싸움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세운 전략이었다.

그런데 이를 전혀 수행하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취약점이 발견된 탓이었다.

다행히 2세트는 1세트와 비슷한 패턴으로 한국이 승리했다.

사냥 포인트 잘 먹고 성장한 서문엽이 피에트로와 함께 어떻게든 해결하는 쪽으로 콘셉트가 바뀌어 버린 것이 문제이긴 했지만 말이다.

3승으로 C조 1위를 차지하면서 16강 진출이 확정됐지만, 대표 팀은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개개인의 역량에서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나, 사실 이 정도까지 밀릴 정도로 격차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라이너 하임 코치가 근본적인 원인을 진단했다.

"문제는 연계 플레이가 아직 미숙하다는 점입니다. 사전에 훈련했던 상황에서는 연계 플레이가 잘 이루어지는데,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는 연계가 이루어지지 않고 개인플레이로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긴 했지."

백제호도 동의했다.

실력 문제보다는 한국 선수들이 당황하는 모습이 너무 자주 보였다.

대표 팀에 경험이 부족한 어린 선수들이 많은 탓도 있었다.

사실 그것도 실력이라고 봐야 하긴 하지만 말이다.

'저 녀석이 너무 의욕이 없는 것도 문제였지.'

백제호는 남몰래 피에트로를 노려보았다.

경기 내내 따로 오더가 없으면 아무것도 안 하는 허수아비 같은 피에트로가 거슬렸다.

피에트로가 의욕이 있었다면 적의 습격을 적극적으로 막아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서문엽이 따로 지시하는 게 없으면 도무지 안 움직인다. 스스로 일을 안 하는 짜증 나는 부하 직원을 둔 느낌이었다.

하지만 피에트로의 그런 태도는 서문엽을 포함하여 모두들 묵인했다. 싫은 사람을 억지로 데려온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워낙에 베일에 싸여 있는 인물이라 아무도 안 건드리는 분위기였다.

"16강전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더 많을 겁니다. 인도는 너무 변칙적인 팀이니까요."

월드컵 본선 대진표가 추첨으로 완성되었다.

한국의 16강 상대는 H조에서 2위로 올라온 인도.

초인 숫자가 가장 많아 초인 대국 소리를 듣던 인도는 지금껏 월드컵에서 16강에 올라가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체면을 구겼던 인도가 마침내 월드컵 본선에 등장한 것이다.

그 일등공신은 7영웅의 멤버이자 타락한 영웅으로 불렸던 칸 아르얀이었다.

"칸 아르얀의 '맹독'이 이렇게 다양하게 쓰일 줄은 몰랐습니다. 인도는 월드컵 역사상 가장 특이한 팀일 겁니다."

서문엽은 YSM에서 칸 아르얀의 '맹독'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개리 윌리엄스와 이나연 등 활잡이들에게 독화살을 주어서 공격력을 강화시킨 것.

인도 대표 팀은 서문엽의 이 발상을 적극적으로 채용했다.

활을 무기로 쓰는 원거리 딜러만 무려 4명.

거기다가 수리검을 무기로 쓰는 원거리 딜러도 있었다.

수리검 수십 개를 한꺼번에 던져서 사방을 뒤덮는 공격은 위협적이기 짝이 없었다. 그 수리검들에 전부 맹독이 발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탱커들도 날카로운 가시가 돋친 방패를 사용했다. 그 가시들에 모두 맹독이 발라져 있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야말로 맹독을 철저히 활용하는 전략으로 인도는 월드컵 H조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변칙으로 가득한 인도 대표 팀은 어쩌면 한국 대표 팀에게 가장 까다로운 팀인지도 몰랐다.

< 진출(2) > 끝

< 살의(1) >

상담실.

닫힌 커튼 틈새로 햇살이 은은하게 들어왔다.

상담실답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이었다.

"와, 여기 편하네요."

서문엽은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머리숱이 별로 없고 나이 든 정신과 상담의가 그를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

"허허, 그렇다고 주무시면 안 됩니다."

"잠이 좀 오려고 하는데 참겠습니다."

오늘은 서문엽이 정신과 상담을 받는 날이었다.

배틀필드 선수는 누구나 정기적으로 상담을 통해 멘탈 케어를 받아야 했는데, 서문엽도 예외는 아니었다.

"월드컵에서의 활약은 잘 봤습니다. 네덜란드전에서도 대단하시더군요."

"제가 잘하긴 했죠."

서문엽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화자찬했다.

경기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문득 상담의가 물었다.

"배틀필드를 하면서 느끼시는 어려움이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씀해 보세요."

"우리 팀 애새끼들이 너무 못합니다."

너무 솔직했다.

"아니요, 팀 문제 말고 개인적으로 느끼는 정신적 문제를 묻는 겁니다."

"그러니까요. 그게 제 정신에 얼마나 큰 피해를 입히는데요."

"혼자 많은 역할을 해야 해서 부담감을 느끼십니까?"

"그런 건 아니고요."

서문엽은 단호히 말했다.

부담 같은 건 느껴본 적이 없었다.

전쟁 시절에도, 지금도 세상의 존망을 짊어지고 있지만, 그 때문에 부담을 느끼는 성격이 아니었다.

애당초 의무감이 별로 없었다.

도전 정신이 불타오를 뿐, 기본적으로 내가 못하면 세계가 위험하다는 영웅 심리가 없었다. 해보고 안 되면 세계가 멸망하건 말건 별수 없다는 꽤 가벼운 생각을 갖고 있었다.

세계의 존망을 짊어진 부담도 없는데, 하물며 월드컵이야 그냥 놀이일 뿐이었다.

"누가 제일 세냐를 겨룰 거면 그냥 천하제일 무술대회 같은 걸 하지 왜 11명이서 하는 팀 스포츠를 만들겠습니까?"

"그야 물론입니다. 어디까지나 배틀필드의 취지가 있는 것이니까요."

초인의 힘을 함양(涵養)하여 언젠가 다시 있을지 모르는 재앙에 대비한다.

알고 보면 서문엽은 배틀필드의 취지대로 재앙에 착실히 대비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호흡이 척척 맞아서 연계 플레이를 펼치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어째 저 혼자 싸우는 기분이 강합니다. 이러면 팀 스포츠로서의 의미가 없잖아요?"

"팀원들의 아쉬운 실력 탓에 본인이 데스당하는 상황에 몰리는 것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으실 수도 있겠군요?"

상담사가 서서히 '데스'로 이야기를 접근했다.

서문엽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 요즘 데스 안 당한 지 오래 됐잖아요. 너무 저 혼자 설치는 것 같아서 찜찜할 뿐이죠."

"그렇군요. 그럼 화제를 돌려서 데스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그러죠."

"사실 배틀필드를 상당히 위험한 스포츠입니다. 상대가 무기를 들고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적의를 받는다는 것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 일입니다. 그래서 일반인에게는 배틀필드가 절대로 허용 안 되지요."

"음······."

"비록 고통을 느끼기 전에 접속이 끊긴다고 해도, 죽음을 유사 체험한 것이나 같은 효과를 가집니다. 서문엽 선수도 배틀필드를 하면서 수없이 공격을 받으셨지요?"

"예."

"그럴 때마다 위협을 느끼십니까?"

"간혹?"

"자세히 말씀해 보세요."

"공격을 받을 때 대개는 '저건 막을 수 있겠다' '저건 피할 수 있겠다' 이렇게 견적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런 견적이 안 나오는 공격에 대해서는 위협을 느끼죠."

그 위협의 대상이 요즘 매일 연습 삼아 싸우는 거대한 뱀이라고는 차마 고백할 수 없었다.

"그럴 땐 어떻게 하십니까?"

"뭘 어떡해요. 죽기 전까지 최선을 다하죠. 뭐라도 공격 한 방을 더 먹이고 데스되려고 노력합니다."

"막을 수 없는 공격을 받는 순간, 자신이 죽을 거라고 정신은 인지하죠. 데스를 당한다는 것은 서문엽 선수에게도 스트레스일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예, 스트레스를 받죠."

서문엽은 부득부득 이를 갈며 말을 이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배틀필드는 선수를 너무 과보호하는 게 아닙니까?"

"···예?"

"죽을 정도의 공격이 아닌데도 데스 판정을 받고 그냥 접속이 끊깁니다. 분명 그 정도는 참고 싸울 만한데도 말이죠. 제가 한 번 죽어봐서 아는데, 죽을 각인지 아닌지는 기가 막히게 잘 안다고요. 배틀필드는 그런 것 때문에 너무 맥 빠집니다. 처절하게 싸우겠다 싶으

면 그냥 데스 처리돼서 끝납니다. 이게 얼마나 스트레스인데요?!"

상담사는 내심 당황했다.

배틀필드 선수들은 누구나 데스에 익숙했다. 그걸 두려워해서는 프로 선수로 생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신적으로 일반인보다 더 강하기 때문에 스트레스에 잘 견디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선수들도 누구나 데스를 당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들도 인간이기에 그런 정신적 충격이 쌓이고 쌓이면 더는 견딜 수 없는 정도에 이른다.

그 때문에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릴 정도까지 심화된 초인은 거의 없지만, 정신적 피로감은 쌓이고 쌓여서 결국 선수 생활 은퇴를 하게 된다.

그 스트레스의 정체는 바로 두려움.

유사 죽음 체험이라는 특수한 경험이 누적되면 두려움이 쌓이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무슨 사람이 두려움이 조금도 안 보이지?'

상담받는 선수가 아무리 강한 체해도 상담사에게는 그들이 숨기려 하는 두려움이 보인다. 그런데 서문엽은 그런 게 전혀 안 보였다.

"서문엽 선수는 최후의 던전에서 죽음에 가까운 위기를 겪어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틀필드에서 데스의 위기에 처하면 더욱 충격을 받을 수 있을 텐데요?"

"아, 그게 말이죠."

서문엽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때 죽기 직전까지 갔잖습니까. 옆구리 크게 찔리고, 시신경도 고장 났는지 앞도 안 보이고, 감각이 없어서 고통은 안 느껴졌는데 피가 점점 빠져나가니까 서서히 힘이 없어지고."

"허어, 무서운 경험이었겠군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상담사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 정도의 일을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점은 자아를 보호하는 방어기제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죽음에 달하는 경험조차 서문엽에게는 자아를 위협받을 정도의 충격이 아니었던 것.

"무섭긴요. 죽음이 이 정도구나 하고 알게 되니까 그 뒤로는 죽는 게 안 무섭던데요. '불사' 초능력을 얻은 탓인가 싶기도 하고."

상담사는 말도 안 되는 저 말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감각 추구 성향이 있는 것 같은데, 머릿속에 공포가 조금도 없는 것 같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감각 추구 성향은 위험을 감수하고 새롭고 복잡한 경험을 추구하는 성향을 뜻했다.

그가 본 서문엽은 영락없이 신체적 위험을 감수하며 감각을 추구하는 경향이 짙었다.

수상스키, 등산 같은 건강한 활동으로 충족하지 않으면 반사회적 행동이나 알코올, 약물 중독 등의 부정적인 결과로 나타날 수 있었다.

'지금은 배틀필드를 하고 있어서 그런 충동을 충족하는 것 같군.'

배틀필드보다 훨씬 더 짜릿한, 인류의 존망을 건 스릴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상담사는 알지 못했다.

***

"상담을 받고 왔어?"

"오냐."

"제대로 성실하게 받았지?"

"아 그렇다니까."

백제호는 신신당부했다.

"여태 한 번도 상담을 안 받았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나처럼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굳이 심리 상담 같은 걸 받아?"

서문엽의 말에 백제호는 단호하게 답했다.

"아냐, 넌 누구보다도 심리 상담을 받아야 해."

"거참, 누구를 사이코패스 취급하는 거야? 난 그저 어릴 때 학대 좀 받았고, 14살 때 살인을 했고, 흉기 들고 던전에서 싸우고 다녔을 뿐이라고."

"···난 네가 뉴스에 나올까 봐 늘 두렵다."

누구보다도 서문엽과 오래 지냈던 백제호라서 더욱 걱정이 많은지도 몰랐다.

정기적으로 상담받으라고 백제호에게 신신당부를 받은 서문엽은 대충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트레이닝 룸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또한 과격하기 짝이 없는 강도의 훈련을 시작했다.

몸을 격렬하게 움직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시각적 이미지를 오러에 담는 상형 언어를 수련했다. 몸과 정신을 동시에 혹사시키는 무시무시한 훈련이었다.

오직 정신력이 111에 달한 서문엽만이 소화할 수 있는 자기학대. 그러나 그 덕에 능력치는 꼬박꼬박 오르고 있었다.

-대상: 서문엽(인간)

-근력 91/95

-민첩성 110/111

-속도 100/101

-지구력 102/103

-정신력 111/112

-기술 108/109

-오러 111/112

-리더십 100/101

-전술 100/101

-초능력: 분석안, 던지기, 불사, 증폭, 영혼 연성.

민첩성, 지구력, 오러가 각각 1씩 늘었다.

'역시 육체랑 오러를 동시에 훈련하는 게 효과가 컸다!'

서문엽은 단시일에 오른 자신의 능력을 보며 기뻐했다.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동시에 하면 난이도가 확 올라간다.

하지만 실전에서는 몸을 움직이면서 오러 컨트롤도 함께해야 했기 때문에, 육체와 오러를 함께 훈련하는 것이 옳았다.

이처럼 서문엽은 훈련을 하면서 계속 강도를 더 높일 아이디어를 첨가했다.

그럴수록 강해지는 속도도 점점 빨라졌고 말이다.

'그런데 이제 상형 언어는 완전히 익숙해졌구나.'

지저인의 의사소통 방식인 표음, 상형, 표의 언어 중 2가지를 마스터했다.

표음 언어야 성대에서 나오는 소리만 오러에 실으면 되니 쉬웠는데, 상형 언어는 머릿속에 떠올린 시각적 이미지를 오러에 싣는 일이라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지저인이라도 된 것처럼 능숙해졌다.

아무래도 상형 언어를 실전에서 상대를 속이는 용도로 많이 써먹은 덕에 금방 실력이 늘었다.

너무 익숙해져서 더 이상 상형 언어 가지고는 오러 컨트롤 수련이 되지 않는다고 느꼈다.

'좀 더 어려운 훈련이 필요한데.'

-서문엽 님이 표의 언어까지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큰 성과로군요.

지저인 언어를 가르쳐 주었던 '하인'의 말이 떠올랐다.

그때 우연이지만 서문엽은 시각적 이미지에 감정까지 실었다고 했다.

감정을 전달하는 것은 오직 표의 언어만이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그래, 한 번 연습해 보자. 하다 보면 되겠지.'

서문엽은 표의 언어도 연마해 보기로 했다.

인간이 하다못해 고위 등급의 지저인만 할 수 있는 표의 언어까지 도전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이미 무기 영체화까지 터득한 바 있는 서문엽은 이번에도 불가능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어떻게 훈련할까 고민하다가, 서문엽은 자신의 창을 한 자루 가져왔다.

'살의(殺意)를 오러에 담아서 창에 실어보자.'

창에 오러를 실어 찌르는 것은 어느 초인이나 할 수 있는 일.

하지만 거기에 상대를 죽이겠다는 감정까지 담으면 어떻게 될까?

어찌 될지 알 수는 없지만 무조건 시도해보는 서문엽이었다.

이윽고 새로운 훈련이 시작되었다.

파앗! 팟!

몸은 계속 좌우로 왔다 갔다 빠르게 왕복하며 민첩성과 지구력을 훈련했다.

동시에.

쉬쉬쉬쉭!

좌우로 왕복하면서 창을 마구 찌르며 기술을 훈련했다.

그와 함께 살의를 오러에 실어서 창에 전달하는 표의 언어 훈련까지 더한다.

동시에 네 가지 능력치를 수련!

아니, 그런 엄청난 강도의 훈련을 견디며 계속하니 정신력까지 포함해 총 5가지가 수련된다고 봐야 했다.

천하의 서문엽이라도 금방 지치는 훈련법이었다.

이를 악물고 계속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 살의(1) > 끝

< 살의(2) >

몇 시간째 쉬지 않고 혹독한 훈련에 매진하고 있을 때였다.

-너냐?

훈련 도중 뜬금없이 피에트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문엽은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피에트로가 대체 어디서 말을 전달한 건지 보이지 않았다.

파앗!

피에트로가 공간 이동으로 나타났다.

"너 방금 어디서 말한 거야?"

서문엽이 궁금해서 묻자 피에트로가 답했다.

"내 숙소. 인근에만 있으면 어디든 말을 전달할 수 있다."

"그게 가능하다고?"

음성을 오러에 담아서 멀리 떨어진 서문엽에게 전달했다.

지저인의 언어 전달법을 익힌 서문엽은 그게 얼마나 난이도 높은 기술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에 경악했다.

'천재, 천재하더니 정말 대단한 놈이긴 했구나.'

"근데 왜 왔어?"

"누군가가 계속 표의 언어를 퍼뜨리고 있기에 주변에 지저인이 있나 인기척을 살폈는데 없더군."

"응? 정말로?"

서문엽은 화색이 되었다.

"내가 계속 표의 언어를 시도하고 있었는데 그게 들렸단 말이지?"

"두 번 감지되더군. 살의를 품고 있는 감정이었다."

"그래, 그거야."

창을 찌르면서 수없이 시도했는데 그중 성공 횟수가 겨우 두 번인 모양이었다. 물론 실망할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성공을 하긴 했다는 점에서 이 훈련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확신하게 되었으니까.

피에트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희한하군. 말은 들었지만 정말로 인간이면서 표의 언어까지 가능할 줄이야."

피에트로는 정말로 희한한 놈을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서문엽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놈한테 희한하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은데. 아무튼 잘 왔다. 온 김에 내 훈련이나 좀 봐줘."

"그러지."

피에트로는 가만히 서서 서문엽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서문엽은 훈련을 재개했다.

신속하게 좌우로 왕복하면서 창을 찔렀다.

연속 찌르기를 펼치면서 살의의 감정을 오러에 실어 창끝에 불어넣는다.

잠시 후, 서문엽은 아무 말도 없는 피에트로에게 물었다.

"어땠어?"

"뭔가를 하려고 했다는 것은 알겠군. 하지만 표의 언어는 결과적으로 발동되지 않았다."

"뭐가 문제인지 알겠어?"

"간단하다. 싣는 것은 성공했지만 표현하는 데는 실패한 거지."

"···감정이 실리긴 했는데 그게 표현이 안 돼서 실패했다는 소리지?"

"그렇다."

"감정을 싣는 것과 표현하는 것까지 메커니즘이 2가지로 나뉘는 줄은 몰랐는데."

감정을 싣는 데만 몰두했던 서문엽으로서는 당황스러운 이야기였다.

"두 가지는 동시에 이루어진다. 정확히는 오러로 표현될 수 있도록 정제된 감정을 싣는다고 해야 하지. 내가 볼 때 너는 그냥 살의를 품고 창을 휘두르고 있을 뿐이다."

"정제된 감정을 싣는다고? 아오, 씨발! 점점 어려워지네."

명쾌하게 이해할 수가 없어서 서문엽은 짜증을 터뜨렸다.

"감정을 글로 표현한다고 생각하면 쉽다. 문자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나타낼 수가 없지."

"말뜻은 알겠는데 그러니까 더 어려워지는데. 오러로 표현되려면 감정을 어떻게 다듬어야 한다는 거야?"

"생각보다 쉽다. 넌 벌써 두 번이나 성공했으니까."

그러면서 피에트로는 서문엽의 창을 가리켰다.

"무기로 표현했기 때문에 성공한 거다. 살의를 무기로 표현했으니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셈이지."

"아!"

서문엽은 그제야 실마리를 발견한 눈치였다.

창술이 대가의 경지에 이른 서문엽이 창에 살기를 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을 무기를 통해 표현하는 것은 무기술의 극에 달하여야만 가능한 일인데, 서문엽은 바로 그런 경지에 오래전에 도달한 사람이었다.

감을 잡고 있는 서문엽에게 피에트로가 설명했다.

"감정을 오러에 실은 뒤, 그것은 창에 불어넣는 방식을 했기 때문에 계속 실패한 거다. 감정을 오러에 싣는 것도 창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해라."

"머리가 아니라 창에서 감정이 나온다고 생각하란 말이지?"

"금방 알아듣는군."

"오케이! 감 잡았어!"

서문엽은 훈련을 속행했다.

왼쪽으로 전력 질주한 뒤에, 급정지하며 창을 힘껏 내질렀다.

스악!

창끝은 정확히 트레이닝 룸의 벽에 닿을 듯 말 듯한 위치에서 정지했다.

화악, 하고 창에 실려 있던 오러가 퍼져 나갔다.

서문엽은 그 한 번의 찌르기에서 무언가 다른 감각을 느꼈다.

'이 느낌은 뭐지?'

평생 창을 썼지만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기이한 손맛을 느꼈다.

창이 공기를 꿰뚫고, 공간을 찌른 느낌.

"성공했군."

피에트로가 입을 열었다.

"그것도 아주 훌륭하게."

서문엽도 알고 있었다.

이건 분명히 성공이라고, 느낌이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그 뒤로 서문엽의 훈련은 계속되었다.

창에서 나는 소리부터가 전과 달랐다.

삭! 스악!

처절한 파공성과 함께 창이 질주했다.

창끝에서 살의가 터져 나왔다.

서문엽은 흥이 났다.

표의 언어는 성공이었다.

창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해야 간신히 살의를 전달할 수 있는 정도지만, 애당초 인간이 표의 언어에 성공했다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었다.

서문엽이 계속 표의 언어에 성공하는 것을 본 피에트로는 조용히 사라졌다.

한참 동안 훈련에 취해 있던 서문엽은 체력이 전부 고갈되고 나서야 중단했다.

힘들지만 즐거운 훈련이었다.

한 차원 더 높은 경지의 창술을 익혔다는 성취감!

서문엽은 오늘 자신이 완전히 새로 거듭났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거울을 통해 분석안을 봤더니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대상: 서문엽(인간)

-근력 91/95

-민첩성 110/111

-속도 100/101

-지구력 102/103

-정신력 120/121

-기술 119/120

-오러 123/124

-리더십 100/101

-전술 100/101

-초능력: 분석안, 던지기, 불사, 증폭, 영혼 연성

기술이 108에서 119으로 무려 11이나 상승해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오러는 111에서 123으로 12나 올랐다.

단 하루 만에 말이다!

놀라운 것은 정신력까지 111에서 120으로 9 올랐다는 사실이었다.

'표의 언어가 정신력에 영향을 끼친 모양이다.'

단시간에 이 정도로 성장한 것은 처음이었다.

기술도 오러도 전투의 근간이 되는 능력치였으므로 오늘의 성장은 서문엽을 아주 강하게 만든 셈이었다.

정신력도 마찬가지였다.

정신력의 성장은 초능력 '증폭'에 영향을 끼쳤다.

-증폭: 가진 능력 가운데 하나를 골라 위력을 증폭시킨다. 신체 능력 중 하나를 고를 시 +20, 초능력을 고를 시 위력 강화

'증폭'이란 초월적인 집중력으로 특정 능력을 극대화시켰던 현상이 초능력으로 정착한 것이었다.

그 근간인 정신력이 오르자 '증폭'은 말도 안 되는 위력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20.

기존의 +10에서 2배로 껑충 뛴 것이다.

근력을 증폭시키면 111이 되고, 민첩성을 증폭시키면 무려 130이 된다는 뜻이었다.

오러를 증폭시키면 무려 143이 된다.

'완전히 괴물이 되었잖아?'

자신이 이렇게까지 강해질 수 있다니 경이를 느꼈다. 옛날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증폭'이 더 강해졌다면 다른 초능력을 증폭시켰을 때 나오는 효과도 더 업그레이드되는 게 아닐까?'

'분석안'을 증폭시키면 리더십, 전술 항목도 볼 수 있으며, 실시간 영상 매체로도 작동된다.

'던지기'를 증폭시키면 던진 창을 되돌아오게 할 수 있다.

'불사'를 증폭시키면 영체로 변신하게 된다.

'영혼 연성'의 경우는 증폭이 되지 않아서 아쉬웠다.

이제 업그레이드된 증폭으로 '분석안', '던지기', '불사'를 증폭시켜보기로 했다.

'일단 분석안 증폭!'

분석안을 증폭시켜 보았다.

증폭된 분석안으로 거울을 보니, 변화가 생겼다.

-분석안(증폭): 살아 있는 대상의 능력치를 보고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다. 영상 매체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증폭된 분석안의 효과가 추가되었다.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다고?'

서문엽은 입을 쩌억 벌리며 경악했다.

분석안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미리 예상한다면, 그야말로 무적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미쳤다. 이제 난 정말 무적이다.'

잘만 활용하면 거대 뱀과 싸울 때도 도움이 되겠다 싶었다.

다음은 '던지기'를 증폭시켜 보았다.

증폭된 '던지기'는 특별히 달라진 게 없었다.

'왜 변한 게 없지? 혹시 위력이 더 강화됐나?'

당장 창을 던져보고 싶었지만 이곳에서는 초능력을 실험해 보기 부적절했다. 나중에 던전에 접속하면 증폭된 '분석안'과 같이 한 번 테스트해 보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불사'를 증폭시켜 보았다.

파아아앗!

서문엽은 영체로 변신했다.

'에너지가 더 넘치는 것 같다!'

순수 오러로 이루어진 영체의 에너지가 전보다 훨씬 강해졌다는 것이 체감되었다.

그리고 분석안으로 봐도 달라진 점이 또 있었다.

-불사(증폭): 200초간 오러로 이루어진 영체가 되어 모든 공격을 무효화하고 모든 사물을 통과한다.

영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200초로 대폭 늘어났다.

오러 수치의 상승도 영향을 끼쳤지만, '증폭'의 위력 강화도 큰 몫을 한 듯했다.

'이렇게 강해지다니.'

기술과 오러의 상승.

그리고 증폭의 위력 강화.

서문엽은 불과 하루 만에 엄청난 성장을 했다.

'이런 식으로 계속 강해진다면 거대 뱀과도 싸워볼 만하겠는데?'

혹독한 훈련에 지쳤음에도 몸이 근질거렸다. 거대 뱀과 싸워보고 싶었다. 얼마나 강해졌는지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서문엽은 생각난 김에 피에트로를 찾아갔다.

"야, 한국에 잠시 다녀오자. 그 뱀 대가리랑 한 판 붙고 싶다."

"그러지."

공간 이동으로 함께 강화도에 있는 YSM 클럽하우스에 갔다.

꽁꽁 숨겨놓았던 괴물 창을 꺼내 무장하고서 접속 모듈에 들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