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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4화 짧은 평화 (2) >

"그럼 다음 주 월요일부터 정상 수업으로 돌아가는 거네?"

―네. 그럴 것 같아요.

이튿날 밤.

나는 지아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주된 통화의 내용은 한국 초인 사관학교 부지 내 피해 복구의 현황에 대한 것이었다.

"생각보다 복구가 빠르네. 피해가 만만치 않았을 텐데."

원체 부지가 넓은 사관학교라서, 이번 게이트 대폭주의 피해도 클 수밖에 없었다.

그 피해를 모두 복구하려면 적어도 2~3주는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열흘도 안 걸릴 줄이야.

―메이든 님께서 많이 도와주셨다고 해요. 이것도 특별한 보수 없이 자재값만 받고 해 주셨어요.

"아하. 기왕 치솟은 이미지. 이 기회에 더욱 호감으로 만들겠다, 이거네?"

―그런 이유도 없진 않으시겠죠. 그래도 좋은 마음으로 하시는 거니까요.

"알아."

메이든 씨는 뼛속부터 선인이다.

자신의 이득을 얻는 것에 있어서, 부도덕적 행위를 하지 않는다.

······대미궁으로 도전자를 괴롭히는 건 제외하고.

그것만 아니었어도 지금보다 두 배는 좋은 이미지였을 텐데.

―아, 그리고 추가로 훈련 시설도 하나 더 건설한다고 해요. 메이든 님이 특허 낸 기술력을 정부에서 사들였다고 하더라고요.

"오. 정부가 웬일로?"

―원체 좋은 기술이기도 하고, 이번 일로 메이든 님이랑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는 의도도 있는 것 같아요.

"하긴. 지금 거의 영웅 취급이니까."

사건을 마무리한 유화 씨보다 인기가 많다. 이건 나도 좀 의외였다. 그만큼 메이든 씨의 마도 병기의 대규모 지원이 임팩트가 강했기 때문이겠지.

"근데 지아 너도 거의 영웅이잖아."

그렇다고 메인 게이트를 처리한 유화 씨와 지아의 인기가 없다는 건 아니다.

―으······. 한 것도 없는데 이런 취급을 받으니까, 뭔가 가시 방석에 앉은 듯한 기분이에요.

"가시 방석은 무슨. 그냥 즐겨."

―하지만··· 이번 일은 선조님이 다 한 거나 마찬가지인데······. 악마도 처리하셨구.

그게 마음에 걸렸구나.

"말했잖아. 신화 그룹이 커지는 게 날 돕는 거라고."

비혼 길드도 마찬가지다.

두 기업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내가 활동하기 편해진다.

내 정체를 감추기도 용이하고, 인맥을 이용해서 일을 처리하기도 더 쉬워진다.

······음. 뭔가 두 그룹의 숨은 실세가 된 것 같은 느낌이네.

―네. 열심히 할게요.

"그래. 쑥쑥 커서 나중에 고대 유물이나 잔뜩 구해 주라."

―네. 천사족이랑 엘프족 유물 위주로 어떻게든 해 볼게요!

······굳이 천사족이랑 엘프족이 아니어도 되긴 하는데.

아무튼 이게 내 궁극적인 목표다.

정부나 다른 나라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영향력을 키우고, 막대한 자금을 끌어 모으게 되면, 기업 단위로 고대 유물을 수집할 수 있게 된다.

신화 박물관을 만든다는 명목을 세우면 아마 아무런 잡음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기업이 자신들의 사비를 털어 나라의 격을 올려 줄 박물관을 만들어 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렇게 수집한 고대 유물들을 내가 사용하는 것이다.

효과가 좋은 유물들은 잠시 대여하면 되고. 효과가 그닥 좋지 않은 유물들은 1분 동안 만지고 있기만 하면 되니, 잠시 CCTV만 꺼달라고 하면 아무 문제도 없다.

그렇게 되면 앉아서 특성을 수집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흑색 문신이 문제가 좀 되려나.

'장인의 간이 대장간'에 넣어 둘 보험용 유물이랑 문신을 잘 조율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 *

다음날 이른 아침.

나는 인근 초인 훈련 센터로 향했다.

평소 가던 곳이 아닌, 엄청 비싼 고급 훈련 센터다.

한국에서 제일 설비가 다양하고 가장 최신식이다.

목적은 새로 얻은 힘의 확인이다. 여기서만 할 수 있는 특수 훈련 커리큘럼들이 많거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훈련도 그 특수 커리큘럼 중 하나다.

찍찍!

"어허. 가만히 있어."

천변에 구속되어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50미터 크기의 설치류 몬스터, 몬스터 렛.

놈이 애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눈이 '죽여줘······!'라고 외치는 듯했다.

"딱 3번만 더 실험할 테니까."

이 훈련의 이름은 [살생 경험 커리큘럼]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초인 지망생들에게 살생을 경험하게 하기 위한 훈련이다.

그래서 진짜 '몬스터 렛'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뭐, 내 목적은 살생을 경험하는 게 아니라, 치유력(신성력)을 실험해보는 것이다만.

찌이이익!

내 단검이 가까이 다가가자, 몬스터 렛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근데 어림도 없지.

천변의 구속은 완벽했다.

나는 그대로 몬스터 렛의 신체를 갈랐다.

푸욱!

찌이이이익!

몬스터 렛이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걱정 마. 바로 치료해줄 테니까."

나는 반대쪽 손을 놈의 상처에 가져다 댔다.

내 손에서 흘러 나온 마력은 '신성력'이라는 대체 에너지로 치환되어, 몬스터 렛의 상처로 흘러갔다.

사아아······.

하얀 빛으로 변한 마력이 몬스터 렛의 상처를 치유했다.

상처는 금세 치유되어갔다.

"음. 역시 내 마력으론 사람 한 명 살리는 게 다인 것 같네."

면적에 따라, 상처의 깊이와 출혈양에 따라 마력의 소모량에 차이가 발생한다.

수 차례 시행의 결과, 내 마력으론 중상을 1회 정도 치유하는 게 끝이라는 걸 알았다.

"좋아."

이걸로 천사족 특성, '신성력'의 실험은 종료해도 될 것 같다.

"AI. 이 몬스터 렛 다시 데려가."

죽이기는 미안해서, 일단 살려서 돌려보내기로 했다.

[몬스터 렛을 회수합니다.]

그 말과 함께 소형 로봇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몬스터 렛을 포박하여 밖으로 데려간다.

내게서 멀어져가는 몬스터 렛의 얼굴이 편안해보인 건 착각일까?

······착각이겠지 뭐.

그럼 빠르게 다음 실험으로 넘어가 볼까.

"AI. 난전 모드. 가상 몬스터 40체 정도 랜덤하게 소환해 줘. 랭크는 D랭크 정도로."

두 번째 실험.

엘프족의 새로운 특성을 실전에서 사용해 볼 시간이다.

[난전 모드로 전환합니다.]

[D랭크 몬스터 40체. 종류 랜덤. 소환을 시작합니다.]

"지형은 장애물이 많은 숲속."

[숲속 필드로 변경합니다.]

그 말과 함께, 주위에 마력의 빛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27%··· 55%···]

제각기 뭉쳐서 하나의 형태를 이룬다. 동물형에 식물형, 곤충형까지 아주 다양하다.

동시에 주위의 풍경이 변한다.

숲과 수풀이 솟아나며, 몬스터들을 엄폐시킨다.

"이야. 보호색까지 구현했네."

역시 비싼데는 비싼값을 하는구나.

[96%··· 100%]

[몬스터의 구성을 종료합니다.]

이내 모든 준비가 끝났다.

지형지물에 가려서 모든 몬스터들을 확인할 순 없지만, 아마 나를 노리고 있을 테지.

[훈련을 시작하시려면 '시작'이라 외쳐 주십시오.]

나는 천변을 단검의 형태로 바꾸었다.

이걸로 준비 완료.

"시작."

그 말과 동시에 신체 중심을 낮췄다.

[훈련을 시작합니다.]

그 순간, 몬스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형 같았던 표정에 생기가 돌아왔고, 진짜 몬스터처럼 나를 노려본다.

크르르르······.

가장 호전적인 놈들이 내게 달려들었다.

나무 위에 선 원숭이가 활을 당기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저놈을 포함해서 내 눈에 보이는 몬스터들은 11체뿐이다.

남은 29체의 몬스터들은 숲속에 숨어서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겠지.

눈에 보이는 적들에게만 신경을 쏟고 있다간, 숨어 있는 놈들에게 치명상을 입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숨어 있는 적들만 생각하면 집중력이 흩어져서, 아차한 순간 치명상을 입게 될 테지.

이게 숲속 전장의 무서움이다.

안개가 자욱한 늪지나, 시가지처럼 시야가 제한된 장소는 모두 마찬가지다.

보이지 않는 적이 가장 위험한 법.

"이 눈을 실험해보기엔 안성맞춤이네."

나는 눈에 의식을 집중했다.

양쪽 동공이 팽창하며, 청명한 푸른 빛을 내뿜었다.

그 순간, 시야가 넓어졌다.

내 모습을 3인칭으로 보는 듯한, 저 하늘의 인공위성으로 내 모습을 보는 듯한 기묘한 광경이 펼쳐졌다.

엘프족 특성, [엘프의 눈]이 발동된 것이다.

주위의 모든 것이 보인다.

이 순간, 내 눈에 사각은 사라졌다.

나는 가장 먼저 내게 달려드는 동물형 몬스터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악!

세 놈이 피분수를 뿜으며 옆으로 나가떨어졌다.

이것으로 가장 위험한 세 놈의 처리는 완료했다.

"다음은······."

어둠 속에서 내 빈틈을 노리는 암살자들을 처리할 차례다.

나는 뒤로 도약함과 동시에 천변을 활로 바꾸었다.

쒜에에에엑!

내 시위를 떠난 세 발의 화살이 뱀처럼 휘었다. 숲속에 모습을 감춘 세 마리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활에 시선이 팔린 틈을 노려 전위의 남은 8체의 몬스터들이 달려들었다.

······어림도 없지.

활을 쏨과 동시에 즉시 장검의 형태로 변형.

벤다.

촤악!

핏물이 튀었다.

5미터 크기로 늘어난 장검이 네 마리의 신체를 토막냈다.

낙법을 취하며 사복검의 형태로 변경.

몸을 360도 회전시킨다.

촤라라라라락-!

사복검이 내 신체를 휘감으며, 접근하는 몬스터들을 갈아 버렸다.

동시에 '장인의 간이 대장간'에 넣어 둔 '암룡의 뿔'을 수풀을 향해 날렸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핏줄기가 튀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암룡의 뿔은 내 강기를 품고 궤도를 바꾸었다.

직각으로 꺾여, 그 옆에 서 있던 다른 두 놈의 머리까지 꿰뚫는다.

주위엔 사망한 몬스터들의 잔해가 폴리곤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이제 남은 몬스터들은 23체.

잘 숨어 있지만, 내 눈을 피할 수는 없다.

화르르르르륵-!

내 주위에 화염의 화살이 떠올랐다. 총 8개의 화살이 동시에 격발되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나를 향해 날아드는 세 발의 독침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것까지 다 보이네.

감탄스러운 성능이었다.

나는 독침이 날아오는 방향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화르륵!

내 앞에 거대한 불벽이 피어올랐다.

그 불벽에 닿은 공격들이 폴리곤으로 변해 무(無)로 돌아갔다.

끼야아아아악!

화르르르륵!

반면 놈들은 내 파이어 애로우를 피하지도, 막지도 못했다.

이걸로 남은 몬스터는 15체.

여기까지 왔으면 사실상 전투는 끝났다고 봐도 된다.

나는 천변을 단검으로 바꿈과 동시에 가장 가까운 몬스터에게 달려들었다.

바람이 불었다.

바람의 길이 펼쳐진 것이다.

'엘프의 눈'과 '바람의 길'이 만나, 지금껏 본적 없는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뭐야 이건."

두 가지 특성의 시너지는 내가 상정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났다.

모든 게 보인다.

이건 사각이 없는 수준이 아니다. 눈에 적외선 센서라도 달린 기분이다.

나는 몸을 움직였다.

눈에 보이는 대로.

몸이 움직이는 대로.

무아지경이었다.

그저 바람의 길을 따라 움직였다.

베고, 쏘고, 찔렀다.

그렇게 몸을 움직이다보니,

[모든 몬스터의 소멸을 확인했습니다!]

[훈련을 종료합니다!]

어느새 훈련은 끝나 있었다.

아직까지 솟구치는 아드레날린을 억지로 억누르며 심호흡을 했다.

진정하자.

"······대박인데?"

이번에 새로 얻은 두 개의 특성. '신성력'과 '엘프의 눈'은 모두 잭팟이었다.

역시 머릿속으로만 알고 있는 것과, 직접 실전에서 사용해보는 것은 전혀 다르구나.

"그럼 이제 남은 건······."

천사족의 완전 체화 효과를 파악하는 것뿐이다.

"에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벌써부터 머리 아프네."

게이트 대폭주 전부터 찾으려 부단한 노력을 했는데, 아직까지도 실마리를 잡지 못했다.

한숨이 나오는 건 당연했다.

"······오늘은 꼭 찾는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오늘 어떻게든 승부를 보기 위해서 이 최첨단 훈련 센터를 찾아 온 거다.

"AI. 예약된 특수 훈련 모드. 순차적으로 진행."

[첫 번째, '독극물 내성 훈련'을 시작합니다.]

어디 독극물 면역부터 시작해 보자고.

[남은 특수 훈련 모드는 총 187개입니다. 예상 소요 시간은 16시간 28분 35초입니다.]

······어디 한번 누가 이기나 해 보자.

< 124화 짧은 평화 (2) > 끝

< 125화 짧은 평화 (3) >

낡은 폐허.

러스트는 붕괴된 건물의 구조물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간부끼리 서로 감시하는 건 금지되어 있는 걸로 아는데."

허미트를 바라보는 러스트의 표정에 짜증이 가득하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허미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지랄. 내 뒤를 캔 게 아니면, 거기서 서율 씨에 대해 할 말이 있다고 할 리가 없잖아."

러스트가 코웃음을 쳤다.

허미트의 말은 자신과 강서율의 관계를 모르는 이상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분명 미행은 없었는데, 은둔자라는 이름에 걸맞게 정기를 감추는 방법까지 터득하기라도 한 거야?"

"글쎄."

허미트의 태연한 반응에 러스트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다.

"그래. 말해 줄 생각은 없다 이거지."

"굳이 밑천을 드러낼 필요가 있나?"

"신중하기도 하셔."

러스트가 혀를 찼다.

"마에스트로도 알아?"

"무슨 의미지?"

"나와 서율 씨의 관계. 마에스트로도 알고 있냐고."

"모른다. 나만 알고 있지."

"······그래? 그건 불행 중 다행이네."

러스트가 안도했다.

"궁금한 게 다 풀렸으면,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지."

"해 봐. 고독한 늑대님께서 내게 무슨 말을 할지 나도 기대되네."

러스트의 눈빛이 살벌하게 빛났다.

"미리 말해 두지만, 괜히 협박이라도 할 생각이라면······."

"강서율의 목적은 진리의 구명자라는 빌런 조직을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리는 거다."

"······뭐?"

러스트의 동공이 확장됐다.

예상치도 못한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왜?"

"복수를 위해서."

"복수···?"

"그래."

허미트가 무던하게 이어 말했다.

"강서율의 인생은 진리의 구명자라는 조직에 의해서 붕괴됐다. 복수하고 싶은 게 당연하다 생각하지 않나?"

"붕···괴?"

러스트의 동공이 불안으로 떨렸다. 허미트의 말이 사실이라면 강서율과 자신은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게 된다.

'말도 안 돼.'

이건 계약을 무사히 마치고 자유의 몸이 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정체가 진리의 구명자 소속 간부라는 걸 들키는 순간 파멸. 강서율과 가까워질 일을 영영 사라진다.

"······증거는?"

그러나 허미트의 말이 진실이라는 보장은 없다.

"따로 자료로 보관해 둔 게 있다. 조직의 데이터베이스에서 빼돌린 극비 정보라서 이 자리에 가지고 오진 못했다. 필요하면 나중에 보내 주도록 하지."

러스트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허미트에게 얼굴을 가까이 댔다.

"나중은 못 믿어. 지금 당장 자료를······."

"진정해라. 자료에 대한 건 일단 내 얘기를 듣고 나서 봐도 늦지 않는다."

조급한 러스트에 반해 허미트는 아주 차분했다.

러스트가 입술을 짓씹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좋아. 얘기해 봐. 서율 씨와 조직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전에 하나 당부해 둘 말이 있다."

"또 뭐?"

러스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중요한 얘기를 앞두고 말을 돌리는 건 딱 질색이다.

"이 얘기를 들으면 너는 두 가지 선택지 중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 할 거다."

"선택?"

"그래. 계속해서 조직의 편에서 있을 건지 아니면······."

허미트가 눈을 날카롭게 떴다.

"강서율의 복수를 돕기 위해, 나와 손을 잡고 조직을 배신하는 길을 택할지."

러스트의 동공이 요란하게 떨렸다.

* * *

"찾았다······!"

새벽 2시 30분.

나는 퀭한 눈으로 환호하고 있었다.

무려 14시간의 노가다 끝에 천사족 특성 완전체화의 효과가 뭔지 찾아냈다.

별 거 아닐 거라는 예상을 뒤엎고, 나름 준수한 효과라는 것까지 알았으니,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설마 정신 공격 저항력 증가였을 줄이야."

정신 공격 내성 훈련 커리큘럼을 통해서 알게 됐다.

일반인은 폐인이 될 수도 있다는 훈련을 받았으나, 아무렇지도 않았다.

두 단계를 더 올려 봤으나, 약간의 두통이 끝이었다.

"대박인데?"

얼핏 보기엔 수수해 보이는 효과였지만, 정신 공격 저항력은 꼭 필요한 능력이다.

힘이 강하고, 능력이 출중해 봐야 뭐하겠는가.

마인드 컨트롤 한 방이면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 모두가 공평하게 한 방인데.

이 정신 공격 저항력 증가는 그러한 끔찍한 빌런들에게 빅엿을 날릴 수 있는 완벽한 카운터격 능력이다.

'이러면 '세인트'를 상대하기가 굉장히 쉬워진다.'

진리의 구명자 일곱 간부 중 한 명으로, '에덴'이라는 이교집단의 주인이며.

사람의 인격을 붕괴시켜 자신의 신도로 인격을 재형성시키는 '심리장악'이라는 특성을 지닌 아주 무서운 여자다.

그 여자를 상대함에 있어 숫자는 의미가 없다.

동료를 아무리 많이 데려간다 하더라도, 한 순간에 적으로 돌변하는 수가 있다.

그만큼 세인트의 '심리장악'은 강력하다.

"노가다한 보람이 있었어."

그 스킬에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을 얻었다는 건 아주 크다.

* * *

월요일.

오랜만에 등교하니까, 뭔가 기분이 묘하다.

한동안 집에서 쉬니까 좋았는데.

"아. 벌써 피곤하다."

"그러게. 쉴 땐 좋았는데."

교실 곳곳에서 이런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다들 나와 똑같은 생각인 모양이다.

"서율아. 안녕."

이제 막 등교한 시연이가 내게 웃으며 다가왔다.

"좋은 아침."

"응. 오늘 날씨 좋더라~"

뭔가 평소보다 활기차다.

"되게 기분 좋아 보이네? 뭐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응. 조금? 헤헤."

진짜 기분 좋아 보이네.

"무슨 일인데?"

"사실······."

하시연이 두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이번에 흑철 에디션 바벨을 구했거든!"

"······예?"

무슨 에디션이요?

"흑철의 성질이 마력 단절이잖아? 그 성질을 이용해서 마력은 완전히 배제하고, 오로지 육체만을 단련시킬 수 있는 센세이션한 운동 기구야!"

"······."

그렇구나.

정말 센세이션하네.

"무게 조절도 초인에 맞춰져서 자유롭게 조절 가능하고, 안전장치까지 달려 있다니까? 진짜 대박이지?"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것만 해도 대단한데, 여기에 사은품으로 흑철 에디션 덤벨까지 줬다니까?"

아니, 할 말이 없었다.

"어젯밤에 도착했는데, 덕분에 어제 설레서 잠도 못 잤다니까, 아··· 빨리 밤이 됐으면 좋겠다~ 어떤 느낌일까?"

"······."

무섭다.

진심으로.

······쟤, 진짜 집에 운동 기구를 메이커별로 모으는 건 아니겠지?

"앗. 광마석 에디션 시리즈 이번에 새로 나오는 거 예약해야 되는데. 까먹고 있었다."

"······."

제발 그건 아니길.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 * *

첫 수업은 피진호 교관의 실내 교육이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곧 기말 고사가 있을 거다."

그 말에 여기저기에서 탄식이 터졌다.

"아~"

"에반데."

"중간고사 본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기말고사야."

이는 중간고사가 두 번이나 연기된 것으로 인해, 기말고사와의 텀이 굉장히 짧아졌기 때문이다.

"필기는 교관님들이 각자 시험 범위를 공지해 주실 거다. 뭐, 올해는 휴교가 잦았으니, 범위는 그리 크지 않을 거다."

사건사고가 끊이길 않아서, 솔직히 학교에서 뭘 배운 게 많이 없다.

"실기 시험도 조금 단촐하게 치를 예정이다."

웅성거림이 커졌다.

상황이 변해서 시험도 바뀐 모양이다.

"단촐한 시험이 뭘까?"

"······이래 놓고 또 서바이벌시키는 거 아니겠지?"

"나 그럼 무조건 서율이랑 팀 한다."

"방법은 있고?"

"무슨 수를 쓰던! 반드시!"

원작에서는 기말 고사로 단체전을 했는데, 단촐하다고 하는 걸 보니 그건 아닌 것 같다.

······상황이 이렇게 꼬였는데 원작대로 시나리오가 진행될 리가 없다.

분명 단체전은 아닐 거다.

그렇게 확신했다.

"실기 시험 날짜는 6월 28일. 시험 방식은······."

피진호 교관이 웃었다.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악마 같은 웃음이었다.

"최대 5명씩 팀을 이뤄 토너먼트를 치르는 단체전이다. 팀 구성에 대한 건 추후 공지하겠다."

"······."

······여기서 시험이 원작대로 진행된다고?

에이.

분명 이러다가 또 시험 내용이 바뀌겠지.

내가 이런 나비 효과 하루이틀 겪은 것도 아니고.

설마 진짜 단체전이겠어?

* * *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지아야. 팀 같이 하기로 한 사람 있어?"

"시연이 너 우리랑 할래?"

사방에서 팀원을 구하는 소리만 들려왔다.

설마 진짜 단체전일 줄이야.

"서율아. 팀 다 짰어?"

한 남학생이 내게 다가왔다.

"나? 아직 고민 중."

"진짜? 그럼 나 어때? 이래봬도 전위는 좀 하는데."

강중후 사관생.

방패와 숏소드를 사용하는 퓨어 탱커. 확실히 이런 애가 팀에 있으면 큰 도움이 될 거다.

······내가 다루기도 쉬울 테고.

근데 문제가 있다.

"음······. 네가 138위였나?"

"어? 어, 맞아."

놀란 표정이다.

'어떻게 내 랭킹까지 기억하고 있지?'라는 표정 직후, '혹시 날 팀원으로 생각하고 있었나?'싶은 표정으로 변한다.

"미안. 그럼 좀 힘들 것 같다."

미안하지만 그런 생각은 조금도 안 했다.

일단 100위~200위권 애들은 검토조차 안 했거든.

"아······. 혹시 나와 비슷한 랭킹권에 노리는 애가 있어서 그런 거야?"

"비슷한 이유지."

이번 단체전의 팀 구성은 사관생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물론 완전한 자유는 아니고, 상위 랭커들이 모여서 팀을 맺는 걸 억제하는 식의 룰이 존재하긴 한다.

1~100위 한 명.

101~200위 한 명.

201~300위 한 명.

301~400위 한 명.

401~487위 한 명.

대충 이런 식으로 팀을 구성할 것을 권장한다.

물론 권장일 뿐이고 꼭 이렇게 하라는 건 아니다.

1~5위 다섯 명이 팀을 맺어도 상관없다.

상위 랭킹 집중으로 인한 페널티 를 감수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근데 나라면 그렇게 안 한다.

페널티가 워낙 무지막지해야지.

1~5위가 팀을 맺으면 팀 전체 능력치 감소 페널티가 60% 이상 걸릴 텐데, 그걸 어떻게 감당해.

"따로 생각하는 게 있나 보네."

"조금?"

물론 생각 중인 게 있긴 한데, 어떻게 하면 더 큰 이득을 볼 수 있나 싶어서 단체전 룰북을 샅샅이 살피는 중이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사관생은 쓰게 웃으며 나를 떠나갔다.

그 후에도 몇 명이 더 찾아와 내게 팀 제의를 했지만, 나는 모두 거절했다.

그렇게 룰북을 처음부터 끝까지 토씨 하나 없이 훑은 직후.

결론이 나왔다.

"······되겠다."

근데 이러면 시연이나 지아 둘 중 한 명을 선택해야하는데.

어쩌면 좋을까.

"서율아! 팀 다 짰어?"

시연이가 내게 다가왔다.

"아직. 시연이 넌?"

"나야 서율이 네가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했으니까 당연히 미정이지. 근데······."

시연이가 옅게 웃으며 뒤의 네 명을 가리켰다.

"철진이가 날 위해 만든 팀이라고 해서······. 어쩌지?"

아하. 입장이 곤란해졌구나.

나는 지아의 뒷편을 살펴봤다.

"음. 잘 짰네?"

"응. 철진이가 이런 건 또 머리 회전이 빠르잖아."

진짜 잘 짰다.

1위 하시연.

9위 김철진.

197위 최지훈.

여기에 나머지 둘은 450위권 밖.

"너랑 철진이로 생긴 페널티는 하위권 두 명으로 커버한다, 이거네?"

"응. 이러면 페널티도 거의 없다고 했어."

괜찮은 방법이다.

하위 랭킹 두 명을 탱커와 서포터로 선정한 것도 신의 한 수다.

"어떡해?"

시연이가 안절부절 못한다.

나는 픽 웃었다.

"뭘 어떡해. 가면 되지."

마침 잘 됐다.

안 그래도 둘 중 한 명만 필요했는데.

"······그래도 돼?"

"그럼. 팀 선택은 네 자유인데."

그리고 저렇게까지 준비해 왔으면 받아들여야지.

"······진짜?"

"진짜지 그럼 가짜냐."

"······."

시연이는 아직도 고민이 많아 보였다. 뭘 그리 고민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김철진을 불렀다.

"어이, 김철진이~ 시연이 데려가~"

"오. 쿨한데?"

김철진이 껄껄 웃으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런 말하기 뭐한데, 괜찮겠어? 서율이 너도 시연이 껴서 우리 팀 같은 조합 만들려고 했던 거 아냐?"

"그렇긴 한데. 괜찮아. 다른 방법이 있거든."

"다른 방법?"

"지아랑 팀 맺는 방법."

멀리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지아가 움찔했다.

"오호라. 시연이는 버리시고 신지아랑 팀을 짜시겠다?"

철진이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시연이가 먼저 날 버린 거잖아."

이번엔 시연이의 어깨가 움찔했다. 슬쩍 보자, 울상이다.

"······그런 거 아닌데에."

시연이의 생생한 반응을 보며, 나와 철진이는 동시에 웃었다.

그 옆에서 우쭐하고 있는 지아의 표정이 킬링 포인트다.

"근데 너랑 지아면 페널티 포인트가 제법 쎌 텐데, 다른 애들은 어떻게 하게? 하위 랭킹 애들 중에 남은 애들 있나?"

철진이가 턱을 매만졌다.

나름 내 생각을 해 주고 있는 모양이다.

"필요 없어."

근데 그거 괜한 걱정이다.

"응? 뭐가?"

"다른 팀원. 필요 없다고."

내 얘기를 듣고 있던 모든 애들이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지아랑 둘이 2인 팀을 꾸릴 생각이거든."

"······2인팀? 진심이야?"

"왜? 4인팀도 있고, 3인팀도 있는데. 2인팀이면 안 돼?"

이 시험에는 페널티 포인트만 있는 게 아니다.

"······어드벤티지 포인트를 노리는 거구만."

하위 랭커들이 많을수록, 팀원수가 적을수록 능력치가 증가하는 어드벤티지 포인트도 존재한다.

"정답."

나는 그 룰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이다.

< 125화 짧은 평화 (3) > 끝

< 126화 단체전 (1) >

밤 8시.

평소처럼 지아, 시연이와 훈련을 마치고 근처 카페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좋겠다아···. 나도 그쪽 팀 하고 싶었는데."

시연이가 커피에 꽂힌 빨대를 입에 물고 중얼거렸다.

"언제는 철진이랑 하고 싶다더니."

"······하고 싶다고 한 적은 없다 뭐. 그냥 한번 물어본 거지."

빨대를 입에 문 채로 입술을 삐죽인다.

"힝. 너무해 이번엔 나만 왕따야······."

빨대에 입을 떼고 테이블에 볼을 대고 엎드려서 나를 올려다본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 삐졌어요.'라고 주장하는 듯했다.

위로해 주길 바라는 것 같지만, 어림도 없지.

나는 속으로 사악하게 웃었다.

시연이는 놀려야 제 맛이다.

"그럼 지금이라도 우리 팀으로 올래?"

"······우씨. 페널티 포인트 때문에 못 가는 거 다 알거등?"

"아니 뭐, 시연이 너를 위해선 그 정도는 감안해도 될 것 같아서 한 말이지. 그치 지아야?"

시연이에게 안 보이는 각도로 윙크를 했다.

지아의 입가가 장난스런 호선을 그렸다.

"네. 시연이를 위해서라면 페널티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죠."

내 의도를 완벽히 파악한 듯하다.

"들었지? 그럼 우리 팀으로 오는 거 콜?"

"······어?"

시연이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이, 이게 아닌데.'싶은 표정이다.

"그럼 지금 서류 수정해서 2인 팀이 아니라 3인 팀으로 바꾼다고 학교에 연락한다?"

"선조님. 그 전에 김철진한테 연락해야죠."

"아, 맞네. 그게 먼저지."

"아니, 그, 저···. 얘들아?"

우리가 말을 이어 갈 때마다, 점점 시연이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인다.

"왜?"

"······그, 진짜 3명이서 할 거야?"

"응. 시연이 널 위해서라면 페널티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니까?"

일단 서운해서 삐진 척은 했는데, 막상 팀을 바꾸라고 하니까, 김철진네 팀이 생각난 것이다.

애초에 하시연을 염두에 두고 만든 팀인데 이제 와서 빠진다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팀을 바꾸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

시연이가 안절부절 못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시선을 이리저리 피한다.

좋아. 지금이다.

"아~ 막상 닥치니까 우리랑 같이 하긴 싫어지셨다?"

"······어? 아니, 어?"

이번에야말로 뇌정지가 온 듯, 넋이 나갔다.

"지아야. 시연이가 우리랑 팀 하고 싶다고 말했던 건 그냥 예의상 한 말이었나 봐."

"그러게요. 역시 저희보단 김철진, 최지훈이 더 좋은가 봐요."

지아가 바로 호응했다.

실망한 척하는 눈빛이 제법 리얼하다.

"아,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아, 그치? 내가 오해한 거지?"

"그··· 그러엄! 당연하지!"

시연이가 안도한 듯 방긋 웃었다. 근데 믿을 사람을 믿어야지.

"그럼 우리랑 팀 하는 거다?"

내가 해맑게 웃었다.

"아으, 그···그건······."

하시연의 동공이 이 이상 떨릴 수 없을 정도로 흔들렸다.

눈에 무슨 전동 안마기라도 달렸나.

나와 지아는 일부러 한참 동안 시연이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으."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미안······."

하시연이 세상 시무룩한 표정으로 우물쭈물 대며 말했다.

"진짜 너희랑 하고 싶은 건 맞는데에······."

대역죄인 같은 표정으로 조심조심 말을 이어 갔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 와서 팀을 바꾸는 건······ 힘들 것 같아······."

고개를 푹 숙이고 앞머리 사이로 힐끔힐끔 우리의 눈치를 보는 것이 자못 귀여웠다.

"푸흡."

결국 지아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입을 가리고 끅끅대며 웃었다.

"······?"

시연이는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아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눈꼬리에 눈물까지 맺혀 있다.

"큭큭!"

시연이 얘 진짜 너무 순수한 거 아냐? 놀리는 맛이 아주 쏠쏠하다.

"······우씨."

이제야 상황을 파악한 듯.

시연이가 눈에 힘을 빡 주고 우리를 노려본다.

뺨이 미묘하게 빵빵하다.

이번엔 제대로 삐졌다.

찐 삐짐이다.

"서율이는 몰라도 지아 너까지······."

"미, 미안. 선조님이 신호를 주셔서······."

지아가 눈물을 훔치며 변명했다. 물론 웃음은 아직까지도 멎을 기색이 없었다.

"됐어······. 두고 봐."

그런 우리를 바라보며 하시연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이번 단체전에서 복수해 줄 거야!"

* * *

금요일 아침.

평소처럼 피진호 교관님과의 체력 단련 중, 좋은 소식을 듣게 됐다.

"근육 성장 속도가 또 올라갔군. 계획표를 다시 짜야 할 필요가 있겠어. 지금의 1.5배는 강도를 올려도 되겠군."

"······."

솔직히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 잘 모르겠긴 한데.

아무튼 근육 성장 속도가 올랐다는 건 좋은 소식이니까.

"흠. 입학 당시를 생각하면 정말 다른 사람이라 해도 좋을 만큼 성장했어."

교관이 내 신체를 이리저리 만지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 속도라면 1학년 중에 B랭크까지 오르는 것도 가능할 것 같군."

"네."

지난 2주 동안의 단련으로 나는 C(4/99)에서 C(7/99)로 신체 능력치가 상승했다.

지금까지의 성장 속도를 돌이켜 보면 아주 더딘 속도라 볼 수 있겠다. 근데 따지고 보면 이게 정상적인 속도다.

"B에서 A까지 올리는 데 또 추가로 2년. 그럼 4학년이군. 여기서 보너스 포인트를 사용해서 체력과 민첩을 S랭크까지 올리면 졸업 직후부터 S랭크 초인. 훌륭한 성장 속도군."

능력치의 랭크는 낮을수록 잘 오르고, 높을수록 안 오르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F랭크에서 E랭크가 되는 것보다, B랭크에서 A랭크가 되는 게 수십 배는 힘들다.

그렇기에 보너스 포인트를 최대한 아껴, 프로가 되기 직전에 사용하는 것이다.

포인트의 소모가 크다고 해도 그게 이득이니까.

"졸업과 함께 S랭크 초인인가요······."

4년 만에 F랭크에서 S랭크.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는 아주 빠른 성장이다.

"왜 그러지?"

"아닙니다. 그냥 믿기지 않아서요. 4년 만에 F랭크에서 S랭크라니."

시스템의 보정을 받지 못하는 상황임에도 이정도 성장 속도를 보인다는 것에 만족해야 할지도 모른다.

"길어야 4년이라는 거다. 네 급격한 성장력을 생각하면 훨씬 빠를 수도 있다. 여차하면 1년도 안 걸릴 수도 있다."

"······네."

문제는 교관의 말이 보너스 포인트의 사용을 기반으로 둔 말이라는 것이다.

10포인트씩 투자해, 체력과 민첩을 S랭크로 올리라고?

보너스 포인트가 없는데 어떻게?

"교관님. 만약 보너스 포인트 없이 순수하게 단련만으로 S랭크까지 오르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제법 흥미로운 질문이군."

피진호 교관이 턱을 매만지며 상념에 잠겼다.

"10년."

"······10년이요?"

"그래. 최소 그 정도는 필요할 거다. 그것도 내가 퍼스널 트레이너로 붙어 있다는 전제 하에 말이지."

예상보다 더하다.

"물론 이것도 특성이나 스킬의 각성에 따른 차이가 있긴 하겠다만······. 힘들 거다. 이제껏 본연의 능력만으로 S랭크에 도달한 초인들은 한 손에 꼽는다."

"······그렇죠."

조사해 봤는데 7명밖에 없더라고.

물론 내게 보너스 포인트를 대체할 수 있는 수단은 많다.

수인족 완전 체화의 신체 능력치 상승 효과도 있고.

아직까지 활성화시키지 못한 거인족의 특성인 '압도적인 힘'도 있다.

그 외에도 신체 능력이나 마력을 상승시키는 특성은 많다.

사실상 S랭크 달성은 문제가 안 된다.

"······교관님은 S랭크 위에 한 단계 높은 경지가 있다는 가설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래.

S랭크는 말이다.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전례는 없지만, 미래에도 없다곤 할 수 없으니 말이지."

S랭크 위의 경지.

시스템의 기능 확장, 초월 시스템의 개방과 함께 펼쳐지는 신천지, SS랭크.

이 경지는 순전히 '시스템에 의해서'만 들어설 수 있다.

즉, 10년이고 100년이고,

시스템의 보정을 받을 수 없는 나는 절대 들어설 수 없는 경지라는 것이다.

······이 차이를 어떻게 메꿔야 할까.

나는 아직 그에 대한 답을 내지 못했다.

* * *

"아. 시험 망쳤어."

"너두? 야 나두."

"야 너네두? 응 난 아냐."

"이 배신자 쉑."

"죽여! 배교도다!"

필기 시험 기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신이 형의 선물인 '기억력'과 '지식' 덕분인지 따로 공부할 것도 없었고, 그냥 문제만 쓱쓱 풀다 보니 어느새 끝.

순식간에 일주일이 지나갔다.

"이렇게 된 이상 실기 시험을 존나게 잘 치는 수밖에 없다."

"응 다음 네 실력 D랭크."

"비겁하게 팩트로 싸우다니! 정정당당하게 선동과 날조로 승부하자!"

"지랄. 킥킥."

나는 시험을 망친 불쌍한 중생들의 헛소리를 들으며 교실을 나섰다. 다들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것 같은데.

복도를 걷는 중에도 시험에 대한 얘기만 들려왔다.

"에휴. 후회해 봐야 뭐하겠냐. 너네 실기 시험 준비는 어케 되고 있냐?"

"말도 마라. 합 맞추기가 너무 힘들어. 어휴."

필기 시험을 어느 정도 잘 본 애들은 실기 시험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있었다.

실기 시험은 다음 주 월요일.

오늘이 금요일이니, 3일밖에 안 남았다.

"나 진짜 팀 바꾸고 싶음. 말이 안 통해."

"넌 훈련이라도 하지. 난 애들이 훈련을 안 나온다. 미치겠어."

다들 고역을 치르고 있는 것 같다. 하기야, 이것도 조별 과제의 연장선 같은 거니까.

조별 과제의 거지같음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깊이 공감한다.

"차라리 나도 강서율, 신지아처럼 2인 팀 맺는 게 나았을까 싶다니까."

얼마나 힘들면 저런 말까지 나온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2인팀은 아니지. 3인, 4인 정도면 모를까."

"알아. 그냥 해 본 말이지. 그렇게 지나 이렇게 지나 똑같으니까. 아, 빡쳐."

"······너 진짜 많이 힘들구나."

불쌍한 중생들을 뒤로하고.

나는 여유만만한 미소와 함께 교사를 나섰다.

교문 앞에는 지아가 서 있었다.

나를 발견한 듯 손을 흔든다.

"서율아~ 여기!"

주위에 사람들이 많아서 호칭은 서율아.

"미안. 기다렸지?"

"아냐. 리무진도 방금 왔어."

"그래?"

기사님께서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작게 목례한 뒤에 차 안에 탔다. 뒤따라서 지아도 탑승을 마치고, 기사님도 승차.

차는 바로 출발했다.

"선조님. 시험은 잘 보셨어요?"

바로 지아의 호칭이 '선조님'으로 돌아왔다.

VIP의 업무용 리무진이기에, 앞과 뒤가 완전히 막혀 있다.

기사님은 우리 말을 들을 수가 없다.

"잘 봤지. 아마 만점일걸."

실수만 안 했으면 100% 만점일 거다.

"역시 선조님이세요."

그런 날 지아가 존경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본다.

요즘 지아의 시선이 점점 강렬해지고 있다.

슬슬 진심으로 무서워진다.

뭐가 무섭냐면 내가 엘프가 아니라는 걸 알아 챈 뒤에 어떻게 변할지가 굉장히 무섭다.

"어우."

순간 상상하자, 나도 모르게 등골에 한기가 느껴져 몸이 부르르 떨렸다.

"선조님, 추우세요? 에어컨 끌까요?"

지아가 세상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괜찮아. 추워서 그런 거 아냐."

나는 손사래를 쳤다.

"그보다 지아 너야말로 진짜 괜찮겠어? 2박3일 동안 나랑 붙어 있어야 하는 건데."

오늘부터 일요일 밤까지 지아의 별장에서 단체전 대비를 위한 실전 훈련을 할 예정이다.

일은 괜찮은 건가?

"그럼요! 선조님이 친히 1:1로 활 쏘는 법을 수강해 주신다는데, 2박3일이 문젠가요! 364박365일도 문제없습니다!"

간만에 지아의 뒤편에 골든 리트리버의 환영이 보인다.

아마 꼬리가 있다면 마구 흔들리고 있을 테지.

"공주님이랑 금호, 백호도 같이 가는 거죠?"

"어. 걔네도 우리 훈련을 도와줄 거야."

"와······."

존경심으로 가득 찬 두 눈에서 열망의 불빛이 뿜어져 나온다.

지아는 요즘 레,금,백 트리오에게 푹 빠져 있다.

그 셋과 같이 여행을 간다는 생각에 설레고 있는 것이리라.

"아 참. 그건 챙겼어?"

"아, 만 년의 정수요? 가져왔어요. 여기요."

지아가 내게 작은 돌을 넘겼다.

해변가에 널려 있을 것 같은 아주 작고 이쁜 돌멩이.

이 돌멩이의 이름이 바로 '만 년의 정수'다.

신 씨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 중의 하나로, 유일하게 사용처를 모르는 의문의 아이템이기도 하다.

"선조님. 혹시 그게 어디에 쓰이는 건지 아세요?"

물론 나는 안다.

"아니까 가져오라고 했지."

지아의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정말요? 어떤 용도인가요?"

나는 이쁜 돌멩이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단 비밀. 나중에 알려 줄게."

만 년의 정수.

이 아이템은 지아의 각성, '격세유전:엘프'를 활성화시켜 주는 핵심 아이템이다.

< 126화 단체전 (1) > 끝

< 127화 단체전 (2) >

[S급 상태창]이라는 원작 소설에서 신지아라는 캐릭터는 2부 시점에서 '격세유전:엘프'라는 특성을 개화하는 것으로 새로운 힘을 각성하게 된다.

엘프의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되며, 엄청난 성장을 이룬다.

2부의 쟁쟁한 이종족들 사이에서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강해진다.

지금 이 시점에서 지아를 각성시킬 수만 있다면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

문제는 당장 지아를 각성시킬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만 년의 정수.

S랭크의 마력.

이 두 가지 조건은 달성할 수 있지만, 남은 한 가지 조건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마지막 조건이 '엘프의 마력 활용을 보고 모방하는 데 성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엘프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마력 활용을 모방하란 말인가.

그렇다고 내가 가르칠 수도 없었다. 모르는데 어떻게 가르쳐.

그렇기에 나는 지아의 각성을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각성한 뒤에 도움이 되는 싸움법을 교수하고. 각성한 후의 전투 방식에 맞게 마력에 치중한 단련을 시키는 것.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러나 레나라는 천재 공주님을 만난 뒤로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레나의 마력 운용이 우리와 어떻게 다른지 잘 봐."

"네."

먼저 내가 착각하고 있던 게 있다. '엘프의 마력 활용 모방'은 정확한 각성 조건이 아니었다.

정확한 각성 조건은 '고대의 마력 활용법 학습'.

즉, 레나가 내게 가르쳐 준 마법 체계를 익히는 것이 각성의 조건이었다.

"그러케하는 거 아닌데."

레나가 혀 짧은 소리로 지아를 나무랐다. 그사이 제법 한국말이 늘었다.

"······그럼 이렇게?"

"그러케하는 거 아니라니까여?"

지아와 투닥거리는 레나를 바라보며 3일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공주님. 엘프족의 마력 운용법에 대해 알아?

이 질문에 대해 레나는 이렇게 답했다.

―그대는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엘프족에게 특수한 마력 운용법 같은 건 없다.

―······없다고?

―음. 엘프족들도 우리와 같은 마력 체계, 드래곤이 창안한 드래곤식 마력 운용 체계를 사용한다.

이 말로 딱 깨달았다.

지아의 조건은 엘프의 마력 활용법을 모방하는 게 아니라, 드래곤이 창안한 고대의 마력 운용법을 습득하는 것이라고.

그렇기에 레나를 지아에게 붙이기로 했다. 격세유전의 개화를 촉구시키기 위해서.

이번 2박 3일의 합숙은 그것이 주 목표였다.

―그대여! 이 지아라는 그대의 가신은 글러먹었다! 그대에 비하면 티끌만큼의 재능도 없다!

······물론 생각처럼 일이 술술 풀리고 있진 않다.

―마력이란 게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전형적인 시스템에만 의지하는 우자(愚者)다!

레나가 길길이 뛰며 이를 갈았다.

―만약 이자가 수인국의 훈련병이었다면 그 즉시 쫒겨났을 게다!

시스템에 모든 걸 맡기는 식의 마력 운용은 편리하다.

그러나 편리한 만큼 빈틈이 많다. 시스템에 제동을 거는 식의 특성을 지닌 상대에겐 손도 발도 못 쓰게 된다.

고로, 시스템에 모든 것을 거는 짓을 어리석은 자나 하는 짓이다.

······라고 공주님은 말했다.

나도 어느 정도 공감하는 말이다.

―저번에 그 시연이라는 가신은 좀 쓸 만한 듯하더니······.

레나가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조금만 더 고생해 줘. 처음 사용해 보는 마력식이라서 그래. 금방 감 찾을 거야.

레나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일국의 공주 머리를 그렇게······ 됐다. 말해 봐야 입만 아프지. 마음대로 하거라.

공주님이 드디어 포기한 듯했다.

좋은

―아무튼 알겠다. 노력해 보마.

그리곤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일단 마력 유도를 해 보고······ 그것도 안 되면······.

뭔가 생각이 많아진 모양이다.

"······공주님이 뭐라고 하셔?"

조용히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지아가 넌지시 물었다. 불안한 표정이다.

"재능 있다고 하던데? 생각보다 배우는 게 빠르다고."

생각에 잠겨 있는 레나를 힐끔힐끔 바라보던 지아의 표정이 시무룩하게 변한다.

"······그런 표정이 아니었는걸요."

말은 못 알아들어도, 분위기로 대충 좋은 얘기는 오가지 않았겠구나, 라고 느낀 모양이다.

"실제로 진전이 없기도 하고요······. 공주님··· 실망했다고 하셨죠?"

3시간 사이에 자신감이 곤두박질 친 모양이다.

뭐라고 해 줘야 기운을 차리려나.

거짓말은 씨알도 안 먹힐 것 같고. 음. 이 방법이 좋겠다.

"사실 조금 실망한 것 같긴 하더라."

"······역시 그렇군요."

금방 시무룩해졌다.

"근데 레나는 과거의 '이종족'들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있거든."

"수인이나, 엘프, 드래곤 같은 존재들이요?"

"어. 고대 마법 체계를 미리 알고 있던 그들이랑, 난생 처음 배우는 지아 너를 비교하고 있으니, 실망스러울 수밖에."

"아······."

나는 지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지아 너는 잘 하고 있어. 처음 배우는 것치고는 습득력도 빠르고."

"······정말요?"

"그럼."

나는 10분 만에 성공해서 잘 모르겠지만, 지아의 재능을 생각해 보면 빠른 축에 속할 거다.

"그니까 괜히 사서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하는 것만 생각해."

"······네."

지아가 옅게 미소 지었다.

아직 완벽히 자신감은 되찾지 못한 듯하지만, 좀 나아진 듯하다.

······뭐, 알아서 잘 하겠지.

―그대여. 그럼 슬슬 다시 수련을 시작하겠다. 내 말을 그대로 전해다오.

마침 레나가 생각의 정리를 마친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아야. 다시 단련 시작하재. 괜찮지?"

"아, 넵!"

지아가 결의에 찬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금요일 자정.

첫 날의 훈련을 마치고.

"지아야 오늘 고생했어. 그럼 들어가서 푹 쉬어."

강서율이 신지아의 방 앞에서 인사를 건넸다.

"네. 선조님도 푹 쉬세요!"

신지아가 해맑게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그럼 내일 보자."

"네! 내일 봬요!"

그 말을 끝으로 방으로 들어갔다.

"······."

쿵.

문을 닫고, 혼자가 되자마자 순식간에 표정이 바뀌었다. 해맑은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대신 짙은 후회만이 남았다.

"하아······."

침대에 그대로 뻗어 누우면서 깊은 한숨을 내쉰다.

"······선조님. 실망하셨겠지?"

자정까지 이어진 단련에서 신지아는 결국 고대 마력 운용식을 습득하는 데 실패했다.

레나의 깊은 한숨이 가슴에 가시처럼 박혀 있다.

"······으."

강서율은 말했다.

아직 이틀이나 남았고, 처음 사용해 보는 이상 오래 걸리는 게 당연하다고.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신지아가 아니었다.

'아마 날 위로해 주시려고 그런 말을 하신 걸 거야.'

강서율은 자상하다.

그 말은 상냥함에서 나온 위로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더욱 속이 쓰렸다.

"바보······."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너무 한심하다.

'선조님이 매일 자신의 시간을 쪼개서 훈련을 봐주시고, 이렇게 고대의 마력 운용식까지 알려 주시는데······.'

자신은 아직도 강서율의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선조님은 충분히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하셨지만······.'

아마 그것조차도 상냥한 거짓말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게, 자신은 정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있다.

'사무적인 처리나, 금전적 지원 같은 일들은 메이든 씨와 유화 씨도 할 수 있어.'

신화 그룹이 크다고 해도, 메이든과 유화의 힘을 합친 것보단 크지 않다.

애초에 신화 그룹은 아직 신지아의 것이 아니다.

메이든, 유화에 비해서 지원에 제약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무력도 마찬가지야······. 나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

이번 게이트 대폭주 사건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그 멤버 중 제일 쓸모없는 건 나였어.'

S랭크 초인인 유화는 말할 것도 없고. 금호, 백호는 더욱 강해졌다.

하시연도 그사이에 엄청난 성장을 이뤘다.

아마 3개월 뒤면 자신은 하시연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레나는······.'

그녀의 힘은 격이 달랐다.

현존하는 모든 속성의 마법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마법사.

고속 영창도 가능하며, 대규모 섬멸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는 올라운더.

그런 존재가 강서율의 옆에 붙어 있는 이상 무력적으로 뭘 도울 방법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선조님의 힘도 무시무시하고······.'

120만의 마력을 품은 방출형 게이트를 혼자서 처리하고.

악마를 혼자 재봉인했다.

추가로 게이트 대폭주 사건 때 쓰러트린 소형 악마까지.

대체 얼마나 강한 건지 감도 안 잡힌다.

물론 함부로 봉인을 풀 수 없다는 제약이 있긴 한데.

그렇다고 힘을 봉인한 상태가 약한 것도 아니다.

'내가 힘을 봉인한 상태의 선조님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마치 미래를 읽는 듯한 신묘한 움직임과 무기의 숙련도. 거기에 딱 맞는 천변이라는 무기까지.

'아직은 능력치의 차이가 커서 이길 수야 있겠지만······.'

그게 다다.

힘을 봉인한 상태의 강서율에게도 완벽한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

"한심해······."

신지아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시너지를 이뤄 새로운 부정적인 생각을 낳는다.

'내가 제일 약하니까. 그래서 나만 따로 보충 훈련을 시켜 주시는 게 아닐까. 나는 그 보충 훈련에 따라가지도 못하고 있는 거고.'

하다하다 이런 열등감까지 느낄 정도가 됐다.

불안했다. 분명 언젠가는 강서율의 인내심도 바닥날 터.

그때까지 강서율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버림 받는 게 아닐까. 그런 막연한 불안감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신지아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싫어."

어머니의 원수를 대신 갚아 준 강서율에게 은혜를 갚지 못하는 게 싫다.

가문의 선조이자 엘프족의 영웅인 강서율을 실망시키는 게 싫다.

그리고.

"버림받고 싶지 않아······."

강서율에게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되고 싶지 않다.

신지아가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기 위해선······.'

어떻게든 고대의 마력 운용식을 익혀야 한다.

베개에 가려져 있는 신지아의 두 눈에서 이채가 흘렀다.

* * *

"······죄송해요."

"음······."

나는 세상 시무룩한 표정의 지아를 바라보며 침음을 흘렸다.

오늘은 일요일.

2박 3일의 합숙이 끝나는 날이다.

"정말 죄송해요······."

"괜찮다니까. 원래 오래 걸리는 게 당연한 거야."

결국 지아는 마력 운용법을 익히지 못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역시 첫 술에 배부르기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설마 인간이라는 종족이 이렇게까지 마력을 다루는 데 재능이 없을 줄은 몰랐다······.

옆에서 레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레나도 레나 나름대로 답답하긴 오지게 답답했던 모양이다.

―수재라는 자가 이 정도라니······.

큰 충격을 받은 표정이다.

레나의 표정에 지아의 표정이 더욱 가라앉았다.

―처음이라 그렇다니까. 공주님은 뭐 처음부터 잘 했어?

왜 우리 지아 기를 죽이고 그래.

―잘했다. 짐은 천재니까.

―······.

반박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공주님은 천재니까.

―그럼 얼마나 더 배워야 할 것 같아?

―음. 나름 감은 잡은 듯한데, 봐야 알 것 같구나. 짧으면 일주일 정도가 아닐까 싶다만.

―일주일?

생각보다 되게 빠른데?

난 또 뭐 몇 달씩 걸린다고.

"······공주님이 뭐라고 하세요?"

그런 우리를 바라보며 지아가 자신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 감을 잡아가고 있는 것 같아서 빠르면 일주일 내에 익힐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하는데?"

"······그런가요."

지아가 복잡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역시 선조님은 자상하세요."

내 말을 안 믿는 눈치다.

이번 일로 자신감을 많이 상실한 모양이다.

나는 레나를 째려봤다.

―왜 그런 눈으로 짐을 바라보느냐?

―대체 뭐라고 했길래 얘가 이렇게 힘이 없어?

―짐은 아무것도 안 했다. 애초에 뭐라 할 만큼 한국어가 유창하지 않다.

······그건 그렇네.

그럼 왜 이러지?

"앗. 죄송해요. 잠시 일 걱정에 생각이 많아졌네요."

"······그래?"

그런 표정은 아닌 것 같았는데.

아무튼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나저나 그대여. 그······ 바베큐 파티? 그건 언제 하는 겐가.

레나가 내 소매를 붙잡고 이리저리 당겼다. 두 눈에 고.기라고 쓰여 있는 듯했다.

고기가 그렇게 좋을까······.

물론 나도 좋아한다만.

―조금만 기다려. 아마 슬슬 도착할 테니까.

마지막 날 정도는 게이트 대폭주 사건을 처리한 사람들을 모아서 파티라도 할까 싶어서, 다른 세 명을 이곳으로 불렀다.

이제 곧 도착할 시간이다.

"서율아~"

때마침 저 멀리서 하시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옆에 유화 씨도 보인다.

"오오!"

레나의 눈이 이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아마 하시연의 양손에 쥐어져 있는 봉투를 봤기 때문이리라.

"고기!"

이 공주님,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 이름만 또박또박 발음한다.

일부러 이러는 건 아니겠지?

"경치가 좋네요. 공기도 맑고."

유화 씨가 썬글라스를 벗으며 싱긋 웃었다.

"공주님~ 안녕!"

"안녕!"

하시연과 레나가 하이파이브를 했다.

"지아도 안녕~"

"응. 안녕."

이어서 지아와도 하이파이브.

하시연다운 친화력이었다.

나는 다시 유화를 바라봤다.

"메이든 씨는요?"

"바빠서 못 온대요. 젊은 것들끼리 잘 놀고 오라던데요."

"그럼 유화 씨도 빠져야 하는······."

찌릿.

시선에 살기가 느껴진다.

"뭐라고요?"

"아닙니다······."

괜히 장난 한번 하려고 했다가, 죽을 뻔했네.

계란 한 판이 가까운 사람한테 나이로 장난치는 건 자제해야겠다.

"농담은 재껴 두고, 일은 괜찮아요?"

"······안 괜찮아요."

유화 씨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눈 밑에 다크써클도 보인다.

엄청 바쁘다고 하더니, 잠도 제대로 못 자는 모양이다.

"근데 여기 와도 돼요?"

"몰라요."

"밀린 일은······."

"제가 알 바예요?"

유화가 웃었다.

세상 밝은 웃음이었다.

"그건 내일의 제가 어떻게든 해 주겠죠."

아니, 조금 실성한 미소였다.

······많이 힘드시구나.

"농담이고요. 이렇게라도 스트레스를 안 풀면 진짜 죽을 것 같아서 그래요. 일의 능률을 생각해선 휴식을 잘 취해야 하거든요."

"······아하."

휴식과 일의 능률이라.

역시 한 길드의 대표다운 훌륭한 마인드다.

우웅-

손에 쥐고 있던 유화의 폰이 진동한 것은 그때였다.

우웅- 우웅-

계속 울린다.

그럼에도 유화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만 있다.

"전화 안 받으세요?"

"네. 스팸 전화예요."

"······그래요? 발신자 이름에 '김비서'라고 적혀 있던 것 같던데."

"잘못 보신 거예요."

유화가 슬쩍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

그 순간 직감했다.

아, 아까 했던 '내일의 내가 어떻게든 해 주겠죠.'가 진심이었구나.

"······힘내세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럴까.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안 간다.

"오오오오!"

레나의 탄성이 들려 온 것은 그때였다.

나와 유화는 동시에 레나를 바라봤다.

"시여니 한 번에 성공해써! 대단해!"

레나가 진심으로 감탄한 듯 손뼉을 쳤고.

"와······."

시연이는 손 위에 푸른 마력을 일렁이고 있었다. 뭔가 평소와는 다른 기운이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지아는.

"······."

떨리는 눈으로 시연이가 뿜고 있는 푸른 마력을 응시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지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 127화 단체전 (2) > 끝

< 128화 단체전 (3) >

일요일 밤.

집에 복귀한 나는 최종적으로 내일 치를 단체전에 대한 계획을 다시 검토한 뒤에 침대에 드러누웠다.

지금 몇 시인가 싶어서 폰을 확인했다.

"음?"

유화 씨한테 메시지가 와 있었다.

[가능하다면 과거의 저를 죽이고 싶네요.]

많은 의미가 함축된 한 마디 메시지였다.

"······정신 차리셨구나."

바베큐 파티 땐 조금 실성한 것 같았는데, 스트레스가 조금 해소되니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다.

아마 후회에 몸부림치고 있을 타이밍이 아닐까 싶네.

[일이 많이 밀렸어요?]

답장은 바로 왔다.

[네.]

[엄청.]

[굉장히.]

[미친듯이요.]

속사포 같은 답장이었다.

[혹시 지금 길드장실에 앉아 계세요?]

[네.]

[죽을 것 같아요.]

자유시간 10시간의 대가는 매우 컸던 모양이다.

[...고생하세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하얗게 불태운 곰 이모티콘)]

[한동안 절 찾지 마세요.]

[살아서 만나요.]

뭔가 유언 같은 한 마디였다.

실제로 그 말을 끝으로 유화는 더 이상 답장을 보내오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명복을 빌어 줬다.

현재 시간은 12시 27분.

평소에 잠드는 시간이다.

슬슬 잘까.

나는 폰을 침대 옆 선반에 올려두고 침대에 누웠다.

"냐아앙."

침대 밑에서 금호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금호야?"

내 옆으로 금호가 폴짝 뛰어 올라왔다. 언제 들어온 거지? 분명히 레나, 백호와 같이 자고 있었는데.

"왜? 오랜만에 형이랑 자려고?"

금호가 간드러지는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리곤 내 품에 몸을 기대고 작게 하품을 한다.

"그래. 같이 자자."

나는 그런 금호를 껴안았다.

안 그래도 요즘 금호한테 신경을 많이 못 써 준 것 같아서 마음에 걸렸는데.

내 손길을 느끼며 금호가 고롱고롱 소리를 냈다. 기분 좋은 모양이다.

"어유, 귀여워."

금호는 금세 잠에 들었다.

나도 품 안의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나저나 오늘 지아의 상태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본인은 괜찮다고 주장했지만, 아무리 봐도 괜찮은 표정이 아니었단 말이지.

역시 고대의 마력 운용식을 익히는 데 실패해서 그런가?

원래 오래 걸리는 게 당연하다고 했는데, 도통 안 믿는 분위기다.

시연이가 한 번에 성공해서 그런가? 그건 그냥 시연이가 이상한 건데 말이지.

나도 놀랐다.

드래곤족 완전 체화로 마법의 재능을 획득한 나조차도 한 눈에 보고 성공하진 못했는데, 그걸 한 눈에 보고 똑같이 재현해 내다니.

하시연이라는 캐릭터의 마력적 재능에 감탄밖에 안 나온다.

"음."

혹시 지아가 시연이에게 열등감을 느낀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최근에 랭킹 1위를 빼앗기기도 했고, 지아에 비해 시연이의 성장 속도가 확연히 빠르기도 하고. 조급해하긴 딱 좋은 타이밍이긴 한데.

지금까진 또래 중에서 지아보다 뛰어난 자가 단 한 명도 없었으니, 그런 감정을 느낄 수도 있겠거니 싶었다.

"지금 지아가 성장 속도에서 밀리는 건 어쩔 수 없는 건데."

시연이는 '빙결의 성역'을 미리 개화하면서 리미트가 해제된 상태인 반면,

지아는 아직 '격세유전'을 개화하지 못했기에 리미트가 걸린 상태다.

성장 속도에 차이가 발생하는 건 당연하다.

그 사실에 조급함을 느끼고 있는 거라면······.

"괜히 걱정되네."

음.

괜한 걱정이겠지?

그리고 만약 내 불안이 사실이라고 해도 문제없다.

"······빠르면 일주일 내에 익힐 수 있을 거라고 했으니까."

지아가 격세유전을 개화하기만 하면 자연스레 해결될 문제다.

"그리고 뭐, 이번 단체전에서 자신감을 되찾을 수도 있고."

* * *

월요일.

1학기 기말 고사 실기 시험이 시작됐다. 우리 팀의 첫 경기는 오후라서 지금은 다른 팀의 대전을 관전하고 있는 중이다.

"와. 대박. 하시연네 팀 예술인데?"

"그러게. 뭐 저러냐."

하시연을 필두로 한 5인 팀과 평범한 조합의 5인 팀의 대결.

돋보이는 것은 단연 하시연의 팀이었다.

"하시연 혼자서 공격을 맡고, 다른 네 명이서 수비."

"전술은 되게 간단한데. 하시연이 너무 강하니까 막을 수가 없네."

단체전의 룰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깃발뺏기'다.

각 팀이 임의로 진지를 설정해 지켜야 할 깃발을 셋팅.

그 진지를 찾아서 깃발을 먼저 빼앗는 팀이 승자가 된다.

룰은 간단해 보여도 생각보다 복잡한 경기다.

깃발을 수색하면서 방어도 겸하는 공수의 밸런스 분배가 중요하다.

상대의 전략을 읽고 유연하게 전술을 바꾸는 것이 묘미인 뇌지컬과 피지컬을 모두 필요로 하는 나름 심오한 경기다.

"그냥 하시연 혼자 다 해 먹는 거 같은데."

근데 이번 경기엔 뇌지컬 같은 거 없다.

"저게 그 인간전술병기인가 뭔가 하는 그거냐?"

시연이의 피지컬이 돌아 버렸다.

혼자서 유유자적 수색을 마치고, 적진에 쳐들어가서 방어하는 팀들을 모조리 박살내고 깃발을 쟁취한다.

심플 이즈 베스트.

이 단순한 전략에 상대방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우리 다음에 쟤네랑 싸워야 하는데. 어쩌냐?"

"하시연은 방치하고, 공격에 올인하는 게 낫지 않겠어?"

"방어하는 4명을 뚫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잖아."

"하긴. 철진이는 말할 것도 없고, 최지훈도 요즘 엄청 강해졌으니까."

"다른 두 명도 수비적으론 1인분은 하는 것 같고."

"어렵네."

기묘한 술책은 상대에게 걸린 순간 쉽사리 파훼되는 법.

허나 순수한 힘과 힘의 격돌은 쉽게 파훼할 수 없다.

김철진은 자신들의 이점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저 잔머리 킹이 확실히 머리가 좋긴 좋아.

이렇게 나올 걸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닌데, 조금 작전을 바꿀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어제 레나한테 마력 운용식을 수박 겉핥기로나마 배워서 그런가, 시연이의 전투력이 더 강해졌다. 더해서 방어에 전념하는 4인도 내 생각보다 강하다.

음. 어떻게 할까.

―승자! 하시연 팀!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시합이 끝났다. 깃발을 뽑아들고 웃고 있는 시연이의 얼굴이 모니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압도적인 승리였다.

"어제 공주님한테 팁을 받아서 그런가, 시연이가 그새 더 강해졌네요."

옆에서 지아가 내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표정이 엄청 진지하다.

"남은 네 명도 예상했던 것보다 호흡이 잘 맞고. 계획을 좀 수정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지아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안 그래도 생각 중이야. 뭐 혹시 떠오르는 방법 있어?"

"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아의 표정을 관찰했다.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겨 있다. 평소와 다름없는 냉정 침착한 표정이다.

"첫 대전에서 바로 미끼를 던지는 건 어떨까요? 지금 상황에선 그게 훨씬 좋은 견제가 될 것 같은데."

오호라.

"계획의 템포를 올리자?"

"네. 어차피 할 거라면, 그게 심리적으로 더 압박감이 크지 않을까 싶어요."

"흠."

확실히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괜찮겠네. 철진이의 생각이 많아지게 하는 것만으로도 이득이니까."

"그쵸?"

지아가 싱긋 웃었다.

부정적인 감정은 티끌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환한 미소였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하자."

"네!"

나는 그런 지아의 미소를 바라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괜한 걱정이었던 것 같다.

나는 지아에 대한 일말의 걱정을 일단 놓아 버렸다.

지금은 단체전에서 이길 생각만 하자.

"그럼 계획의 템포를 조금 올려서, 지아 네가 처음부터 공격을 맡아 줘."

"네. 그럼 수비는 선조님에게 맡길게요."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 * *

시간이 흘러 오후 2시 40분.

강서율, 신지아 팀의 경기 시간이 되었다.

"후."

경기가 시작된 지 약 1분.

강서율은 깃발 앞에 혼자 남아서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지아는 잘 하고 있으려나."

강서율 팀의 작전은 하시연 팀 이상으로 심플했다.

강서율이 수비를 맡고,

신지아가 공격을 맡는다.

이게 끝이었다.

애초에 두 명인 이상 한 명이 공격을 맡고, 다른 한 명이 수비를 맡는다는 작전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둘 다 공격에 나선다는 올인 전략도 있겠지만, 그건 빈집털이를 당할 걸 생각하면 너무 도박수가 짙은 작전이었다.

'적의 진지를 탐지할 수 있는 색적 스킬이 있으면 모르겠는데······.'

아쉽게도 강서율에게 그런 스킬은 없다. 그렇기에 올인 전략은 패스.

물론 상황이 따라준다면, 올인 전략을 꺼내는 것도 망설이지 않겠지만,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다.

'첫 경기는 이게 베스트 플랜이야.'

신지아, 강서율의 팀과 대전하는 상대팀은 6위, 98위, 201위, 308위, 450위로 이루어진 밸런스 좋은 팀이다.

파티 구성도 탱커 하나에 서포터 하나, 근거리 딜러 둘에 마법사로 균형이 잡혀 있다.

교관들의 사전 평가에서도 꽤나 준수한 성적을 거둘 거라 평가되는 팀이다.

'서은하 사관생이 속해 있는 팀.'

1학년 최고의 탐지 능력을 지녔다고 평가되는 사관생 서은하.

그녀라면 시작과 동시에 강서율 팀의 진지를 파악하는 데 성공했을 것이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시간상 슬슬 공격조가 나타날 때가 됐다.

'왔다.'

때마침 강서율의 '엘프의 눈'이 빠르게 다가오는 인영을 포착했다.

"다들 양반은 못 되시겠어."

강서율의 눈앞에 다섯 명의 사관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혼자인가?"

"보면 알잖아."

그래.

'다섯 명'이 말이다.

"역시 올인 전략을 들고 오셨구만."

강서율은 그들이 나타날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단검을 휘리릭 돌리며 픽 웃었다.

"예상하고 있었나 봐?"

"어느 정도는?"

강서율은 후방에 위치한 201위, 서은하를 바라봤다.

"진지를 순식간에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팀원이 있으면 올인 전략도 도박은 아니니까."

탐지 능력이 있으면 수색 시간이 대폭 축소되고, 그만큼 상대 팀보다 공격에 집중할 시간에 여유가 생긴다.

요컨대 신지아가 진지를 찾기 전에, 강서율을 쓰러트리고 깃발을 쟁취하겠다는 작전이다.

"잘 아네."

6위, 고태진이 웃었다.

"그걸 예상하고 있었으면서도 신지아를 보내고 혼자 남은 건 우리를 무시하기 때문이라고 봐도 되는 건가?"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맹수 같은 웃음이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강서율이 어깨를 으쓱했다.

"······건방지긴."

머리에 열이 오른 고태진이 이를 악 까드득 깨물었다.

강서율이 강한 건 인정하지만, 혼자서 5명을 상대하려 하는 건 오만이다.

'멍청한 놈.'

제법 좋게 봤는데, 자신과 자만의 차이도 모르는 어리석은 놈이었나.

"시간 끌 필요 없이 바로 끝내겠다. 다들 준비해."

"오케이. 작전대로 간다?"

B팀이 진영을 짜는 것과 동시에 강서율에게 달려들었다.

두 명은 강서율에게,

남은 두 명은 깃발로,

그리고 남은 한 명은 원거리에서 화력 지원을 준비했다.

"2인팀으로 시험을 치른다는 만용을 부린 자신의 어리석음을 원망해라!"

고태진이 미소 지었다.

승리를 확신한 자의 미소였다.

강서율도 웃었다.

가소롭다는 듯이.

"글쎄. 후회는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 할 거 같은데."

강서율이 단검을 살포시 움켜쥐고.

"애초에 너네, 내가 지금 어드벤티지 포인트를 받고 있다는 거 까먹은 거 아니냐?"

검을 휘둘렀다.

치이잉-!

고태진의 검을 단검으로 완벽하게 받아냄과 동시에,

"!"

키이이잉-!

탱커의 방패 돌격을 장검으로 완벽하게 흘려냈다.

"으억!"

그 흘리기에 완전히 무게 중심을 잃은 탱커가 고태진 쪽으로 쓰러졌다.

"큭!"

탱커에게 밀려나며 고태진의 자세가 흔들렸다.

'빙고!'

그 빈틈을 강서율은 놓치지 않았다.

단검을 회수함과 동시에 고태진의 신체에 찔러 넣는다.

"큭!"

조금 얕았다.

그러나 신경쓰지 않았다.

'이 정도로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안 했어.'

강서율이 한 걸음 다가감과 동시에 고태진을 압박했다.

킹! 캉!

강서율의 벼락같은 연공을 막으며 고태진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말이 35% 능력치 증가지, 체감은 두 배 이상이잖아!'

어드벤티지 포인트로 능력치가 상승한 강서율의 전투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C랭크의 평균적인 능력치로도 상위 랭커들과 비교되던 강서율이다.

그런 강서율이 어드벤티지 포인트 버프를 받아 B랭크 급의 전투력을 획득했다.

강할 수밖에.

'오래 버티진 못한다!'

고태진이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발은 묶었어! 깃발만 뺏어!"

"알아!"

강서율이 깃발에서 멀어지는 걸 기다리던 다른 두 명이 행동을 개시했다. 이 위치라면 빼앗을 수 있다!

"어허."

그러나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강서율이 아니었다.

"어딜 날로 먹으려고."

강서율이 마력을 끌어 올렸다.

화르르르르륵-!

"꺅!"

불길이 깃발을 감싸듯이 솟구쳤다. 깃발을 빼앗기 위해 달려들었던 두 명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그 순간.

파직!

강서율의 신체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뇌기!'

고태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강서율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눈치 챘다.

"늦었어."

강서율이 악마처럼 웃었다.

콰아아아아앙-!

그 순간, 하늘에서 한 줄기 벼락이 내리쳤다.

"꺄아아아악!"

그 벼락은 멀리서 마법을 캐스팅하고 있던 사관생을 꿰뚫었다.

"이걸로 4명."

털썩-

천벌에 직격당한 사관생이 연기를 내뿜으며 쓰러졌다.

"······."

"······."

정적이 흘렀다.

네 쌍의 눈동자가 요동친다.

'방금 뭘 본 거지?'

두 눈을 의심하게 하는 광경이었다.

"우리 둘을 검으로 상대하면서 화, 뇌 속성 마법을 동시에 시전했어···?"

"말도 안 돼······."

경악하는 네 사람을 바라보며, 강서율이 미소 지었다.

"왜? 이중 캐스팅 처음 봐? 아, 내가 마법을 제대로 사용하는 것도 처음 보나?"

모두 대답이 없었다.

그 정적이 꽤나 마음에 든 것일까. 강서율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럼 이것도 처음 보겠네?"

강서율의 신체에 마력이 집중됐다.

화르르르륵-!

주위에 마력의 화살이 두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허업!"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사방에서 요란하게 울렸다.

경악.

충격.

그러한 감정의 폭류가 쏟아져 나온다.

아마 모니터 너머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저게 무슨······."

화염의 기운을 머금은 화살이 계속해서 늘어 갔다.

"말도 안 돼······."

어느덧 그들의 시야엔 강서율의 마력 화살들이 수없이 늘어섰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후우우웅-!

뜨거운 열기 사이로 돌개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듯이, 화염의 화살 사이를 비집고 바람이 응집되어 갔고.

그것은 이내 무형의 화살이 되었다.

모두의 입이 떡 벌어졌다.

"바, 바람?"

"푸, 풍 속성!"

강서율의 풍 속성 마법이 처음으로 세간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즉.

"삼, 삼중··· 속성!"

경악한 그들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강서율은 미소 지었다.

아직 놀라긴 이르다는 듯이, 거만하게 웃었다.

"아직 안 끝났어."

그 순간.

화염과 바람이 한데 어울려 노닐기 시작했다.

화륵, 휘이잉!

바람이 화염을 키우고,

화염이 바람을 키운다.

강렬한 열기와 맹렬한 풍압이 하나가 되어 간다.

"세상에······."

풍화의 화살.

싱글 랭커, '불의 마녀'와 '풍제(風帝)'가 보여 줬던 융합 마법이 강서율의 손에서 재현된 순간이었다.

"융합 마법을··· 혼자서?"

넋이 나간 사관생들을 보며 강서율은 웃었다.

"지금부터 항복 선언할 시간 딱 30초 준다."

악마를 연상시키는 사악한 미소였다.

"아니다, 마음 바뀌었어. 5초."

< 128화 단체전 (3) > 끝

< 129화 단체전 (4) >

실기 시험 첫 번째 날은 쏜살 같이 지나갔다.

5일 동안 하루에 한 경기씩만 치르면 되는 여유 있는 일정의 시험이라서 신체적으론 전혀 피곤하지 않은데.

주위에서 꽂히는 시선들 때문에 정신적으로 피곤하다.

"······."

교사에서 교문까지 향하는 짧은 길목에서,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을 맛보게 될 줄이야.

"저기 봐. 쟤가 강서율이야."

"오. 그 삼중 속성? 나 직접 보는 건 처음이야."

선배들의 시선이 유독 강렬하다.

"마법 쓰는 거 봤지? 우리 마법 동아리도 강서율 쟁탈전에 합류한다. 절대 놓치지 마."

"네. 물론이죠."

기말고사가 끝나는 것과 함께 동아리 활동 금지도 풀린다.

선배들의 눈에서 탐욕의 빛이 일렁이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리라.

"와. 진짜 오늘 MVP는 강서율이었다."

"말이 안 나오더라."

"양파야? 뭐 까도 까도 계속 나오네."

"이번에야말로 더 원에서 스카우트 오는 거 아니냐?"

저런 칭찬을 직접 들으려니 좀 머쓱하다. 등이 간질간질하다고 해야 하나.

"잘생기긴 잘생겼다."

"직접 보니까 더 잘생겼어."

"사진이 매력을 다 못 담네."

거기에 여선배들의 외모 품평도 사이사이 들려왔고.

"짜증나."

"재수 오질라게 없네."

"재능빨 개극혐."

설익은 질투심을 드러내는 사관생들도 많았다.

"으."

더는 못 버티겠다.

이게 가시 방석이지.

나는 전력으로 달려갔다.

교문을 한참 지나, 한적한 공원까지 전력으로 달렸다.

"어휴."

이제 좀 살겠네.

이렇게 주목받을 걸 예상하고 한 짓이긴 한데, 내가 새가슴이라 그런가? 도통 관심을 받는 게 익숙해지질 않는다.

"내일은 더 심하겠지?"

간만에 또 스카우터들과 기자들에게 시달릴 생각을 하니 조금 후회되기도 한다.

······뭐,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필요한 일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한데.

우웅-

"음?"

내 폰이 진동한 것은 그때였다.

[메이든 크리티네스]

메이든 씨한테 걸려 온 전화였다.

"마침 잘 됐네."

안 그래도 집에 도착하면 전화하려고 했는데 잘 됐다.

나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꼬맹이. 또 한 건 했던데?

메이든이 능글맞게 웃었다.

"한 건 했다니, 제가 무슨 범죄라도 저지른 것 같잖아요."

나도 능글맞게 웃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전화하신 거예요?"

―왜? 이유가 없으면 전화하면 안 되냐?

"그건 아닌데, 이 타이밍에 전화거신 걸 보면 이유가 있으신 게 아닐까 해서요."

한창 바쁠 시간인데, 굳이 시간까지 내서 전화한 걸 보면 뭔가 있는 게 분명하다.

―뭐, 별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메이든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꼬맹이 네가 슬슬 전화를 걸 타이밍이 아닐까, 싶어서 먼저 했다.

"······네?"

순간 벙쪘다.

―뭘 '네?'야. 나한테 전화할 생각 아니었어? 부탁할 게 있을 텐데?

"어······."

확실히 집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를 걸 생각이기도 했고.

부탁할 게 있는 것도 맞다.

"어떻게 아셨어요?"

―어떻게 알긴. 이 누님이 네 머리 꼭대기에 서 있으니까 알지.

메이든이 코웃음을 쳤다.

"그럼 제가 무슨 부탁을 할지도 아세요?"

설마 이것까지 다 예상하고 계시나?

―알지.

······안다고? 진짜?

―기사 하나 내달라고 할 생각이잖아.

"허."

내 동공이 서서히 커져 갔다.

―기사 제목은 대충 '강서율 사관생, 모든 속성을 다룰 수 있는 특성을 지녔다고 발표!'정도가 되겠네.

"······."

내 입이 점점 벌어져 갔다.

―일차적인 목적은 추후에 네 번째, 다섯 번째를 넘어서 그 어떤 속성 마법을 사용해도 이상하지 않게 모든 속성 보유자라는 사실을 세간에 미리 알리는 걸 테고.

"······."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는 계획인데, 이걸 이렇게 확실하게 추리해 낼 수 있다고?

풍 속성 마법을 공개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최종적인 목적은 너 자신의 네임 밸류를 높이고, 미래지향적으로 초인으로서의 영향력과 발언권을 키우기 위한 포석을 두는 걸 테고. 맞지?

"와······."

이 이상 정확할 수 없는 완벽한 추리였다.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가 나오기라도 하신 건가?

―왜 대답이 없어? 아냐? 기사 내지 마?

"아뇨. 맞습니다. 맞아요."

나는 허허 웃었다.

진짜 대박이네.

"······진짜 제 머리 꼭대기에 서 있으셨네요."

메이든의 통찰력에 혀를 내둘렀다. 이런 사람이 내 아군이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아무튼 다 알고 계시다니까, 굳이 설명할 필욘 없겠네요. 기사 뿌리는 일 부탁드려도 될까요?"

―오냐. 미리 준비 다 해 놨다. 당장 뿌릴 수 있는데, 뿌릴까?

"······벌써 거기까지 준비가 끝났어요?"

행동력도 대박이다.

―당빠지.

이런 통찰력과 행동력을 지닌 사람이 만약 적이었다면······.

몸이 부르르 떨렸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네.

―꼬맹이? 왜 대답이 없어?

"아, 죄송해요. 조금 다른 생각을 하느라. 바로 부탁드려요."

―오냐. 인터넷을 활활 태워 주마.

* * *

다음날.

[강서율 사관생, 자신은 삼중 속성이 아니라 모든 속성 보유자라 밝혀!]

[충격! 세계 최초의 모든 속성 보유자!]

[속성 마법의 유용성과 그 효용성을 생각해 봤을 때, 강서율 사관생의 몸값은 S랭크 초인 이상!]

['더 원' 길드의 '마스터' 강서율에게 관심 있다 밝혀.]

[불의 마녀와 풍제의 융합 마법을 소형으로나마 재현한 강서율! 천부적인 마법 재능 소유자!]

아주 난리가 났다.

통합 포털 사이트는 내 이름으로 도배됐고, 뉴스란도 전부 나에 대한 기사들밖에 없었다.

"진짜 활활 타네."

메이든 씨가 던진 작은 불씨가 기자들의 끊임없는 장작 공세를 받아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걸로 내가 추후 어떤 속성을 꺼내던, 사람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강서율이니까 뭐.'

같은 풍조가 생겨날 테지.

성공적이다.

······대신 지금 그만큼 관심을 몰아서 받고 있는 상황이긴 한데.

예방주사 미리 맞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선조님. 시간 됐어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지아의 말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시간을 보니 11시 21분.

경기 시작까지 10분도 채 남지 않았다. 시간 참 빠르네.

"그럼 슬슬 나가자."

"네."

우리는 대기실을 나서, 경기장으로 향하는 통로를 걸어갔다.

"그럼 오늘도 공격 잘 부탁해."

"네. 걱정 마세요."

우리는 조용히 경기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후딱 이기고 가서 쉬자."

* * *

목요일.

실기 시험 네 번째 날이 되었다.

지난 두 번째, 세 번째 경기는 손쉽게 승리했다.

두 경기 다 내가 씹어먹었다.

두 번째 상대는 첫 번째 경기를 보면서 배운 게 없었는지, 올인 전략을 그대로 들고 와서 나한테 무참히 깨져나갔다.

세 번째 상대는 나름 머리를 쓴다고 공수를 나눴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2/3으로 나눈다고 어드벤티지 룰에 버프를 받고 있는 나와 지아를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고, 각개격파를 당하는 것으로 완패했다.

언터쳐블.

누구도 우리를 막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은 목요일.

시연이네 팀과 붙는 날이다.

"서율아. 양심은 안녕하시냐?"

마침 철진이가 싱긋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예의도 바르지.

내 양심의 안부까지 신경써 주네.

"오냐. 안녕하다. 네 잔머리는 만수무강하시고?"

나도 그대로 돌려줬다.

"아니. 최근에 양심 출타한 깡패 한 놈이 후드려 패서 앓아누웠다."

"안타깝게 됐네. 병문안 갈까?"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서로의 눈동자 사이로 전류가 튀는 듯했다.

"작전은 잘 세웠고?"

"그럼~ 당연하지. 누가 첫 날에 무언의 압박을 보내 주신 덕분에 고생 좀 하긴 했는데."

무언의 압박.

내가 풍 속성 마법과 융합 마법을 사용한 것을 의미하는 거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일단 시치미를 뗐다.

"모르긴 개뿔. 1공 4방 체제를 유지해 봐야 못 이길 거라고 아주 협박을 하더만."

첫 번째 경기 날.

내가 풍 속성 마법에 이어서 융합 마법까지 사용한 건, 철진이에게 보내는 무언의 경고였다.

'너희 하시연 몰빵 전략 계속 쓸 거야? 그럼 난 이렇게 할 건데? 이래도 쓴다고?'

이런 느낌이었다.

"오늘까지 잘 아껴뒀으면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텐데. 아주 자비가 넘치십니다? 굳이 사전에 경고까지 해 주시고."

철진이가 딱딱하게 웃었다.

"우리 사이에 그 정도 정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하하하."

나도 웃었다.

"그리고 사실상 결승전인데, 그렇게 끝나면 재미없잖아. 너희도 스카우터한테 어필할 시간은 있어야지."

자신만만한 웃음이었다.

"이야~ 배려심이 철철 흘러넘치네."

철진이의 이마에 혈관이 도드라졌다. 인내심에 한계가 찾아온 모양이다.

"좋아. 그럼 재미있게 해 줘야지. 기대해. 아주 재미있을 테니까."

철진이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기대할게. 2시간 뒤에 보자."

멀어지는 철진이를 향해서 손을 흔들어 줬다.

철진이가 완전히 사라지자, 조용히 대화를 듣고만 있었던 지아가 입을 열었다.

"선조님의 계획엔 지장 없겠네요."

감탄한 표정이다.

"그러게. 철진이가 생각보다 자존심이 쎄구나."

나도 이렇게 잘 될 줄은 몰랐는데.

"네. 쟤도 나름 천재 소리를 듣던 애니까요. 무시당했다고 생각이 들면 열이 오를 수밖에 없죠."

"무시한 게 아니라 오히려 경계한 건데 말이지."

김철진의 유연한 발상과 하시연의 피지컬, 여기에 성장한 최지훈의 든든한 백업까지.

무시하긴커녕 제일 경계하고 있는 팀이다.

그렇기에 초장부터 수를 써 둔 거고.

"그럼 우리도 슬슬 경기 준비 하자."

"네. 작전은 계획대로 진행하시는 거죠?"

"어."

나는 웃었다.

"철진이한테 인생 공부 좀 시켜 줘야지."

김철진의 치명적인 약점은 당황했을 때, 생각이 일차원적이고 안전지향적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 약점만 고치면 더 성장할 수 있다.

"겸사겸사 내 랭킹이랑, 지아 네 랭킹도 좀 올리고."

시연이가 요즘 기고만장한 것 같아서, 다시 2위로 끌어내려 줄 필요가 있다.

"······예."

지아가 오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목요일 오후 2시 55분.

3승 0패 강서율 팀과 마찬가지로 3승 0패 하시연 팀의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

"시작한다!"

"일거수일투족 놓치지 말고 기록해!"

"실수하면 길드장님한테 조인트 까인다!"

관중석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볐다. 업계 관리자들이나 기자들은 물론이고, 일반 시민들까지 가득했다.

"아. 괜히 나까지 떨리네. 누가 이길까?"

"강서율이 이기지 않을까? 세계 최초 모든 속성 보유자인데."

"강서율 팀이 이기겠지. 다른 팀원도 랭킹 2위에 신화 그룹의 자재라면서."

대다수의 목적은 강서율을 직접 보는 것이었다.

"아직 모르는 거야. 상대팀도 꽤나 유명한 유망주들이 몰려 있거든."

"어드벤티지 버프를 받고 있다고 해도, 결국 머릿수의 차이는 극복하기 힘들걸?"

비단 강서율만이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호화롭다.

"아무튼 꿀잼 경기인 건 확실할 듯?"

"그건 인정."

초인들의 경쟁도 하나의 스포츠가 되어 버린 세상에서, 사관생들의 경쟁도 하나의 스포츠 경기와 같았다.

"융합 마법 쓰겠지? 그거 보려고 왔는데."

"쓰겠지. 상대가 상대니까."

가성비 좋은 유망주 경기.

지금 경기가 딱 그런 경기였다.

"오. 시작한다!"

그 순간, 경기가 시작됐다.

양 측이 동시에 행동을 개시했다.

"······어?"

동시에 관객들 모두가 당황한 듯 눈을 부릅떴다.

"둘 다 올인 전략이야?"

하시연 팀은 경기가 시작됐음에도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 공격을 포기한 방어 올인 전략을 들고 온 것이다.

반면 강서율 팀은 깃발은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듯이 동시에 대지를 박차고 뛰어 나갔다.

방어를 포기한 공격 올인 전략이었다.

"······대박."

"이렇게 되면······."

관객들의 눈에서 이채가 흘렀다.

"정면 승부!"

개꿀잼 경기가 확정된 순간이었다.

* * *

"하아암. 진짜 오는 거 맞긴 해?"

한편, 관중석의 외곽에 네 명의 남녀가 저마다의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래. 온다."

마에스트로.

"킥킥. 근데 이런 별것도 아닌 일에 간부가 네 명이나 움직일 필요가 있나?"

알케미스트.

"그것보다 지금 당장 이 관중석에 있는 배교도들을 모두 개화시키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세인트.

"······자제해라. 광역 은신이 풀리면 귀찮아진다."

그리고 허미트.

진리의 구명자 네 간부가 관중석 곳곳을 살피고 있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목숨은 붙여 놔라."

마에스트로의 눈에서 섬짓한 냉기가 흘렀다.

"낄낄. 알고 있어.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 죽이지만 않으면······."

알케미스트가 혐오스럽게 웃었다.

"알아내야 할 정보가 있다. 약품을 이용해서 정신적으로 붕괴시키는 것도 자제하도록."

"뭐야. 그런 거였어? 흥이 팍 식네."

알케미스트가 혀를 찼다.

"마에스트로. 온 것 같다."

허미트가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두 명의 여성이 서 있었다.

정장에 썬글라스를 끼고 있는 유화와, 제법 큰 캐리어를 끌고 있는 메이든이었다.

그 둘을 확인한 마에스트로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럼 지금부터 10분 후에 작전을 시작하겠다."

네 명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적은 비혼 길드장, 유화의 생포. 다시 말하지만 절대 죽여선 안 된다. 보스의 명령이다. 반드시 생포하도록."

마에스트로의 눈에서 살벌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보스의 명령이라는 말에 알케미스트와 세인트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

허미트는 그런 세 간부를 오묘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129화 단체전 (4) > 끝

< 130화 혼란 (1) >

"······이야. 설마 깃발을 포기하고 두 명이 다 공격에 나설 줄은 몰랐는데."

철진이가 깃발 앞에 서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너무 과감한 거 아냐? 우리가 한 명만 공격으로 돌렸어도 바로 패배였어."

얼핏 보면 도박성이 높은 수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건 철저한 계산하에 산출된 전략이다.

"철진이 네가 올인 방어 전략을 들고 나올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거든."

나는 단검을 적당히 휘휘 돌리며 답했다.

"······."

철진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무슨 의미인지 설명하라는 눈빛이다.

"그냥 간단한 소거법이야. 너희 팀은 4대1이건 2대3이건, 어떻게 나눠도 나와 지아를 동시에 상대할 방법이 없어. 반드시 한 쪽은 패배하지."

철진이는 첫 날에 이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내 융합 마법을 보고 느꼈고, 이어진 2번째 3번째 경기를 보고 확신했겠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팀을 나눠 봐야 어느 한 쪽은 반드시 진다. 그렇게 되면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인원을 집중해서 한 명을 집중적으로 공략한다. 이것밖에 없지."

김철진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다음은 더 간단했다.

"남은 건 공격을 택하느냐, 방어를 택하느냐밖에 없는데······."

나를 바라보는 다섯 쌍의 시선과 일일이 눈을 맞추며 픽 웃었다.

"변수를 싫어하는 네 성격 상 공격을 택할 리는 없고. 그럼 남은 건······."

뺨을 긁적이는 철진이를 보며 말했다.

"방어 올인 전략. 나와 지아 둘 중 한 명이 습격해 오는 걸 기다린다. 이거밖에 없지."

정적이 흘렀다.

철진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야~ 이건 뭐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손오공이라도 된 기분이네."

허탈한 미소를 짓는다.

"철진이 넌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생각이 단순해지는 경향이 있어. 주의하는 게 좋아."

"······그래. 머리에 새겨 두마."

철진이가 쓰게 웃었다.

"그럼 잡설은 여기까지 하고."

나는 마력을 끌어 올렸다.

"슬슬 시작해 보자고."

내 주위에 마력의 화살이 일렁거렸다.

"서율아."

그런 날 김철진이 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보답이라긴 뭐한데, 나도 네 약점을 하나 알려 줄게."

"······내 약점?"

김철진이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넌 계획을 너무 세세하게 짜려는 경향이 있어.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행위에 이유가 필요하고, 항상 사전에 포석을 깔아 두려 하지."

갑자기 최지훈이 김철진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런 계획은 사소한 변수 하나만으로도 쉽사리 무너지는 법이야. 주의하는 게 좋아."

······팩트로 명치를 후려맞았다.

김철진이 자세를 낮추며 소리쳤다.

"지훈아! 단절의 투기장!"

"······뭐?"

그 말에 내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굳이 스킬명을 입에 담을 필요가 있나?"

"에이. 기분이지."

단절의 투기장.

최지훈의 특성, 마갑의 상위 개화 스킬.

효과는 외부와 격리된 투기장에 상대를 가두는 것.

마갑을 방어용이 아닌 상대를 구속하기 위해 사용하는 공격용 스킬이다.

······그걸 벌써 개화했다고?

이 시기에?

"강서율. 행운의 여신은 31번이나 미소 짓지 않는 법이라는 걸 깨닫게 해 주지. 오늘 너는 내게 패배할 것이다."

최지훈의 신체에서 마력이 솟구쳤다. 기세가 범상치 않다.

마력의 움직임으로 보아, 진짜 '단절의 투기장'이 맞는 것 같다.

회피할 방법은?

없다. 저게 내가 아는 '단절의 투기장'이라면 발동을 막을 방법은 없다.

이렇게 되면 나는 최지훈에게 발이 묶이게 되고, 혼자 남은 지아는 혼자서 남은 4명을 상대해야 한다.

"지아야. 딱 3분만 버텨 줘."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단절의 투기장에 대한 걸 모르는 지아가 어리둥절했다.

"설명할 시간이 없어. 아무튼 어떻게든······."

그때였다.

마력이 폭발했다.

"선··· 서율아!"

"···부탁해!"

동시에 그 마력이 나를 감싸듯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푸른 마력의 벽으로 사방이 가로막힌 정체불명의 장소에 서 있었다.

단절의 투기장이 나와 최지훈을 완전히 격리시킨 것이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예상 못했는데."

"그렇겠지. 이 스킬에 대한 건 시연이한테도 말하지 않았으니까."

최지훈이 으스댔다.

처음 봤을 때와는 다르게 묘하게 남자다워진 얼굴이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최지훈 이놈. 엄청 성장했다.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신체에 두르고 있는 정교한 형태의 마갑이 성장을 증명하고 있었다.

"너. 요즘 되게 열심히 수련하는구나?"

"흥."

하긴 최지훈이라는 캐릭터는 원래 성장 포텐셜이 높긴 했다.

원작에선 묘하게 비틀린 심성 때문에 이상한 방향으로 헛돌아서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김철진의 주도하에 착실하게 성장하고 있다.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

"오늘은 반드시 이기겠다."

나를 씹어 삼키겠다는 열정적인 눈빛. 승부욕으로 번들거리는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나는 그 눈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넌지시 물었다.

"너 혹시 나한테 30연패 한 거 마음에 담아 두고 있냐?"

"······."

아까 행운의 여신이 어쩌고 저쩌고 하기도 했고. 패배를 마음에 담고 있는 게 아닐까.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말은 그렇게 해도 눈썹이 움찔거린다. 정곡을 찔린 표정이다.

"요즘 자꾸 시연이가 나랑만 붙어 다니니까 질투하는 것도 있을 것 같고."

"······."

이번엔 대꾸도 안 한다.

다만 두 눈에서 빛나는 시퍼런 안광이 '나 지금 기분 언짢다.'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것도 정곡이었던 모양이다.

"너 나 싫어하지?"

"그래. 싫어한다."

그렇게 단언했으나, 최지훈의 두 눈에선 증오나 적개심과 같은 감정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느껴지는 것은 순수한 열망. 승부욕. 그러한 긍정적인 감정들뿐이었다.

"오케이. 잘 알겠다."

최지훈이 왜 이렇게 빠르게 성장했는지 대충 알겠다.

아주 복합적인 변화다.

원작에서 최지훈은 S급 상태창을 지닌 먼치킨 주인공 강서율에게 열등감을 품었다.

압도적인 재능 앞에 절망하고, 하시연을 빼앗겼단 사실에 질투했다.

그 감정이 폭발해서 전형적인 망나니 같은 캐릭터가 된 것이다.

사사건건 주인공과 대립하며 주인공의 걸림돌이 되었다.

그 관계는 최지훈이 강서율의 과거(생체 실험)에 대해 알기까지 계속되었다.

그 후 주인공의 불우한 과거에 대한 걸 알게 된 후에 조금씩 회개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과거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면서 크게 성장하게 된다.

최후에는 주인공의 편에 서서 마신과 대적하게 되는 것으로 원작 최지훈의 일대기는 막을 내린다.

그렇다면 지금은?

지금의 나는 최지훈이 열등감을 느낄 만큼 압도적으로 강하지 않다.

초반 단계에서 내(강서율) 과거에 대한 걸 알게 된 것으로 묘한 관계가 형성되기도 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자신을 다시금 되돌아보는 계기도 됐을 것이다.

시연이에 대한 질투심도 조금은 달라졌다.

원작의 하시연은 주인공에게 '사랑'에 가까운 감정을 품었지만, 지금의 시연이가 내게 품고 있는 감정은 '동경'이나 '존경'에 가깝다. 그 사실을 최지훈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겠지.

그렇기에 질투심도 그리 크진 않다. 서운함에 가깝겠지.

그 결과가 지금의 성장한 최지훈이다.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사라지고, 나와 부딪치는 것으로 한층 빠르게 성장했다. 자신의 길을 찾았다.

이 빠른 시기에 '단절의 투기장'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 이는 필히 좋은 변화다.

그렇게 생각하자 묘한 기쁨이 몰려왔다. 나비의 날갯짓이 불러온 이로운 변화에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왜 웃지?"

내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최지훈이 눈을 날카롭게 떴다.

"별거 아냐. 그럼. 슬슬 시작하자."

밖에서 혼자 4명을 상대하고 있을 지아가 걱정되기도 하고. 최대한 빨리 승부를 내야 한다.

"2분 내에 끝내 줄게."

"헛소리. 내 방어는 완벽하다. 제아무리 너라고 해도······."

"그건 네 생각이고."

나는 마력을 끌어 올렸다.

시연이가 근처에 있기 때문에 '교감'이 활성화 됐다.

어드벤티지 버프에 더해 교감의 마력 1랭크 상승 버프까지 추가됐다.

"어서 와. A랭크 마력은 처음이지?"

지금의 내 마력은 A랭크에 가깝다.

최지훈의 동공이 서서히 확장되어갔다.

주위에 수많은 마력 화살들이 떠올랐다.

각기 다른 속성을 품고 있는 마력 화살.

화르르륵-!

그중, 하얀 빛으로 일렁이는 마력 화살들도 있었다.

정령의 불길을 이용해 생성한 마력을 연소시키는 화살.

가성비가 최악이기에 지금까진 많이 사용하진 못했던 화살이지만, 지금의 내겐 상관없는 얘기다.

"간다."

마력 A랭크.

화 속성 친화력.

정령의 불길.

드래곤족 완전 체화로 획득한 마법의 재능.

레나에게 배운 고대 마법.

현재 내 마법은 일개 사관생이 대처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다.

"마갑으로 한번 잘 막아 봐."

수십이 넘는 마력의 화살들이 천지를 수놓았다.

* * *

한편, 단절의 투기장 밖에서는 신지아와 하시연이 격돌하고 있었다.

캉!

연달아 날아오는 화살을 막으며 어떻게든 접근하려는 하시연과.

쒜에엑!

하시연의 접근을 억누르며 어떻게든 하시연에게 피해를 입히려는 신지아.

"시연아! 무리하지 마!"

"알아!"

평소라면 막상막하겠지만, 지금 신지아는 어드벤티지 버프를 받고 있는 상태. 밀리는 것은 당연히 하시연이었다.

제대로 접근도 못하고 있다. 이 전투 구도가 지속된다면 3분 내에 하시연은 패배할 테지.

만약 이게 1:1 전투였다면 말이다.

"너무 시연이만 신경쓰는 거 아니냐?"

"읏!"

하시연에게 집중하는 틈을 노려 김철진이 신지아의 품 안으로 파고 들었다.

김철진의 검에 마력이 일렁였다.

'회피!'

신지아는 양 발에 마력을 집중했다.

탓!

마력이 폭발하며 몸이 총알처럼 뒤로 튀어나갔다.

순식간에 포위망에서 벗어난 신지아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마력을 폭발시켜서 위치에서 벗어나는 회피 기술은 효과가 좋긴 한데, 마력 소모가 너무 크다.

'역시 네 명은······.'

아직 2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숨이 찬다.

"시연아! 쉴 틈을 주지 마!"

"응! 알고 있어!"

"읏···!"

신지아가 입술을 짓씹었다.

김철진을 포함한 세 명도 문제지만, 진짜 문제는 하시연이다.

'그사이에 더 강해졌어······.'

저번 주에 싸웠을 때보다 한 단계 진화했다.

아마 일요일에 레나에게 고대 마법 운용식을 배워 습득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겠지.

'나는 아직도 익히지 못했는데······.'

겨우 억눌러 둔 열등감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시연이는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도 아니야······.'

게다가 하시연은 아직 빙결여제를 꺼내지도 않았다.

아마 강서율을 상대하기 위해 아껴 두는 거겠지.

이해는 가지만 자존심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우웅-!

신지아의 화살에 마력이 서렸다.

강서율에게 배운 강기.

쒜에에엑!

세 발의 화살이 거의 동시에 하늘을 날았다.

그중 두 발의 화살은 멀리서 백업에 전념하고 있는 두 명의 사관생에게, 남은 하나의 화살은 김철진에게 날아갔다.

"칫!"

김철진이 혀를 찼다.

아직 마력을 다루는 데 익숙하지 않은 두 사관생은 이 공격을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두 명이 탈락하면 신지아의 도주 경로가 확 넓어진다.

그렇게 둘 순 없다.

'어쩔 수 없지······.'

게다가 이대로 있으면 강서율이 나오기 전에 신지아를 처리할 수 없을 가능성이 크다.

그 전에 승부를 보는 수밖에.

'서율이가 나왔을 때를 대비해 아껴두려 했는데.'

"시연아!"

"알아!"

하시연의 신체에 서리가 서렸다.

쩌저적-

그 서리는 이내 얼음이 되고, 얼음은 이내 빙결의 갑주가 되었다.

빙결여제.

빙결의 성역의 상위 개화 스킬.

하시연의 필살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캉! 팅!

두 사관생을 향해 날아가던 화살이 하시연의 '빙익'에 의해 가로막혔다.

"······읏."

신지아가 이를 악물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빙결여제를 꺼낸 하시연을 막을 수 있을까?

김철진이 틈을 노리고, 다른 두 명이 퇴로를 차단하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무리야.'

대답은 NO였다.

"시연아! 바로 붙어! 퇴로는 내가 막을게!"

"알겠어!"

하시연이 특유의 스케이트 같은 부츠로 얼어붙은 지면을 미끄러지며 이동했다.

몇 번을 봐도 놀라운 기동성으로 신지아를 향해 빠르게 쇄도했다.

팅, 티잉!

벼락처럼 날아드는 화살은 순식간에 생성한 얼음의 벽으로 궤도를 꺾으며 접근한다.

두 명의 거리는 점점 좁혀져 갔다.

'이대로면······.'

앞에는 하시연이 다가오고, 퇴로는 남은 세 명이 막고 있다.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은······.

'없어.'

지금 신지아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시간을 버는 것 정도였다.

쒜엑! 쒜에엑!

신지아는 필사적으로 화살을 쏘았다.

남은 마력을 모조리 짜내서 난사에 가까운 속사를 쏘았다.

필사의 속사는 하시연의 접근을 완전히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꺅!"

차단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시연의 방어를 뚫는 데 성공하기까지 했다.

푸욱!

빙결의 갑주를 뚫고 하시연의 왼팔에 화살이 박혔다.

"크읏."

뒤따라 날아든 화살에 하시연은 접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지아 너···. 너무 나만 보는 거 아냐?"

하시연에게 완전히 집중된 공격.

그 틈을 김철진은 놓치지 않았다.

"철진아! 지금이야!"

하시연이 왼팔의 상처를 막은 채 소리쳤다.

"!"

어느새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김철진이 신지아의 등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그럼 나중에 보자!"

김철진이 승리를 확신했다.

이 공격은 무조건 명중한다.

'······피할 수 없어.'

신지아도 패배를 확신했다.

이 공격을 피할 방법은 없다.

'선조님. 죄송해요.'

3분만 버텨달라던 강서율의 말이 떠올랐다. 한심했다. 설마 3분도 못 버틸 줄이야.

'만약 시연이와 내가 서로 팀이 바뀌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만약 자신이 하시연의 포지션이었다면, 어드벤티지 버프를 받은 상태의 하시연을 이길 수 있었을까?

'무리야.'

하시연에겐 빙결여제가 있다.

3분 정도는 확실하게 버텼을 것이다.

'한심해.'

신지아는 자신의 한심함에 치를 떨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아앙-!

"!"

"!"

경기장 밖에서 폭음이 들렸다.

폭음과 함께 맹렬한 바람이 불었다. 폭발의 후폭풍이었다.

"큭!"

"뭐, 뭐야!"

태풍과도 같은 후폭풍.

"으억!"

그 폭풍 때문에 힘을 잃은 김철진의 검은 신지아의 등을 스치는 데 그쳤다.

콰아아아아앙-!

두 번째 폭음.

이번엔 더욱 강렬한 바람이 불었다.

"우와아!"

그 폭풍에 모두 뿔뿔이 흩어져 하늘을 날았다.

"크읏."

탁-

약 10미터를 날아, 바닥에 착지한 신지아가 자세를 낮춰 바람에 저항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양손으로 바람을 막으며 생각했다.

'경기장의 마력 장벽이 깨졌어.'

분위기가 싸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게 분명하다.

그 순간 코끝에 비릿한 냄새가 스쳤다.

'이건··· 피 냄새?'

바람을 타고 날아든 짙은 혈향.

이건 한두 명의 피로 날 수 있는 냄새가 아니다. 최소 열댓 명은 죽었을 것이다.

그 말은 즉.

"······테러?"

누군가가 이 사관학교에 테러를 일으켰다?

신지아의 동공이 충격으로 떨렸다.

"조용히 듣기만 하십시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

처음 듣는 남성의 목소리.

그 음성에 신지아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누, 누구······."

주위를 둘러봤으나, 아무도 없었다.

"조용히. 소란 피우지 마시길."

"읍!"

돌연 그림자가 튀어나와 신지아의 입을 막았다.

"시간이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그림자가 서서히 사람의 형상을 이루었다.

"강서율은 어디 있죠?"

그림자, 허미트의 눈에서 이채가 흘렀다.

< 130화 혼란 (1) > 끝

< 131화 혼란 (2) >

관중석은 이미 난리가 난 상태였다.

"꺄아악!"

"비, 비켜! 어서 비켜!"

"도, 도망가! 테러다아아!"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울리고.

콰아아앙!

여기저기서 폭음이 울렸으며.

"누, 누가 살려 주세요! 제 아들이!"

"어, 엄마!"

누군가는 도움을 갈구했다.

"상황파악은?"

"안 됩니다! 외부와 연락이 완전히 두절됐습니다!"

경기 관람을 위해 경기장에 방문한 초인들이 사태 수습을 위해 움직이곤 있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제기랄······ 대체 무슨 일이······."

주위에서 음악 소리가 들린다.

이 끔찍한 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클래식 음악 소리.

/베토벤(베르토벤)/의 운명교향곡이 웅장하게 울린다.

"이 빌어먹을 노래는 또 뭐고······!"

그 소리에 맞춰 폭음이 울린다.

그 폭음에 맞춰 비명소리가 울린다.

마치 누군가가 이 상황을 조율하는 듯한 완벽한 하모니.

지옥의 끝자락에서 악마들이 듣는 음악이 이러하지 않을까.

"틀렸습니다! 외부와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이 음악 때문인가······?"

이 음악은 결계의 종류가 아닐까. 남자는 확신했다.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음악은 그렇다고밖에 볼 수 없다.

"어쩔 수 없지······ 일단 이 현장은 내가 지휘······."

"끄아아아아악!"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울렸다.

바로 옆에서 들리는 비명소리.

지근거리에서 남자에게 보고를 하던 초인의 비명소리였다.

"너, 너! 갑자기 왜··· 끄어어어억!"

촤아아아악!

연이어 두 번째 비명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칼에 살점이 베이는 소리도 선명하게 들렸다.

남성은 긴장을 끌어 올리며 비명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확인했다.

피를 뿜어내며 쓰러져 있는 두 초인 앞에 한 명의 남성이 서 있었다.

"······너!"

남성은 빌런이 아니라 초인이었다.

"어째서!"

그가 쥐고 있는 검에서 피를 뚝뚝 떨어트리며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 배신을!"

10년이나 같은 길드에서 생활해온 초인의 배신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

그러나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남자를 응시할 뿐.

두 눈에서 빛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뭐라 말이라도 해 보란 말이다!"

남자가 소리쳤다.

"그래 봐야 아무 소용없답니다."

그 순간, 여성의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울렸다.

"저분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주님께 몸과 마음을 바치셨거든요."

부드러운 손길이 남성의 뺨을 쓰다듬었다. 쇠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여성의 손이 남자의 몸을 완전히 껴안았다.

"너, 너는······."

새하얀 풀 플레이트 갑옷을 입고 있는 금발의 여성.

그녀가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남자를 뒤에서 껴안고 있었다.

"너무 떨지 마세요. 당신도 곧 자신의 죄를 뉘우치게 될 테니까."

여성은 웃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상냥한 미소였다.

"회개하세요."

"아, 아, 아아아······!"

남자가 소리쳤다.

동시에 두 눈에서 빛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주님의 이름으로 당신의 죄를 사합니다."

남자는 이지를 완전히 상실했다.

"가세요. 가서 죄를 뉘우치지 않는 배교도들에게 신의 철퇴를 내리세요."

"······네."

멀어지는 초인을 바라보며 여성, 세인트가 다시금 미소 지었다.

"끄어어어억!"

"서, 선배님이 어째서!"

초인이 초인을 베고,

"여, 여보! 대체 왜!"

아내가 남편을 찌르고,

"끄으읍!"

아이가 어미의 목을 조르는 광경.

"아아······."

그 모습을 바라보며 세인트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아름답고, 황홀하다.

"다들 주님의 품에서 푹 쉬세요. 제가 당신들의 죄를 사하겠습니다."

폭음, 비명, 혼란.

그것을 아우르듯이 울려 퍼지는 베토벤의 운명교향곡.

"그러고 보니, 마에스트로의 지휘를 받는 건 오랜만이네요."

그 소리에 귀 기울이며, 세인트는 다시 행동을 개시했다.

"알케미스트는 잘 하고 있으려나요."

세인트는 유화를 납치하기 위해 행동하고 있을 알케미스트를 떠올렸다.

* * *

"푸흐흐흐흐. 싱겁군! 아주 싱거워!"

경기장 인근의 공터.

유화와 메이든은 정체불명의 남자와 대치하고 있었다.

"이게 다인가? 겨우 마력을 응집해서 쏘아 보내는 게 다냔 말이야!"

남자는 신체 곳곳에 마력의 검을 꽂은 채로 광소했다.

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이 터벅터벅 걸어온다.

안구를 정확히 관통하고 있는 검 한 자루를 뽑아서 식도에 그대로 넣는다.

푸우우욱!

당연하게도 마력검은 남자의 식도를 정확하게 관통했다.

"끄하하하하하하! 싱겁군! 싱거워! 마력의 형질이 덜 여물었어!"

식도에서 피를 뿜으며, 쇳소리 가득한 목소리로 또다시 광소한다. 그 소름 돋는 모습에 유화와 메이든이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저 미친놈은 대체 뭐야."

"모르겠어요······."

조금 전 테러가 발생했을 때, 이 남자를 발견했다.

누가 봐도 '나 빌런이오.'라고 주장하는 얼굴과 표정.

이 남자가 테러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은 아주 높았다.

그렇기에 둘은 이 남자를 이곳 공터까지 쫒아왔다.

거기까진 좋았다.

"저 새끼 불사신이라도 되는 거야?"

문제는 저 남자가 죽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목을 베도, 심장을 찔러도, 사지를 절단해도, 남자는 광소와 함께 부활한다.

"언데드는 질색인데······."

그 모습은 얼마 전 강남 게이트에서 튀어 나온 불사의 군단을 연상케 했다.

"후흐흐흐."

남자의 웃음소리가 작아졌다.

"이게 끝인 것 같군."

남자가 허공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플라스크.

화학 실험에서나 사용할 법한 유리병에 붉은 액체가 가득 담겨 있다.

주르르륵.

남자는 그 액체를 자신의 신체에 뿌렸다.

츠으으으으······.

연기와 함께 남자의 상처가 급속도로 치유되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마냥, 시간을 되감는 것처럼, 처음 만났을 때의 깔끔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포션?"

말도 안 되는 치유력의 포션이었다. 아니, 치유력은 이해한다 쳐도 옷까지 원상태로 되돌리는 건 대체 무슨 마술이지?

"언니. 아직도 연락이 안 돼요?"

"······그대로야."

메이든이 혀를 찼다.

마력의 파장을 분석해서 새로운 주파수를 잡아 보곤 있지만, 연락이 닿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마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운명교향곡' 때문이겠지.

"알아. 안다고. 논 게 아니라 샘플을 수집한 거야. 죽이지 말라며?"

남자가 돌연 짜증을 냈다.

"거 참. 내가 제멋대로긴 해도 보스의 명령은 듣는다고. 너는 지휘에나 집중해. 슬슬 정신없어질 타이밍이라 바쁠 거 아냐?"

그 모습에 메이든이 눈을 날카롭게 떴다. 누구와 얘기하는 거지?

"유화 저년은 내가 알아서 생포해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푸흐흐흐!"

남자의 두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유화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방금 그 말.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인 모양이다.

"······역시 저들의 목적은 저인 모양이에요."

"그럼 저 거지 같은 새끼들······. 진리의 구명자라는 거네."

이런 대규모 테러를 미끼로 써서 유화를 납치해 가려는 사람은 진리의 구명자 외엔 없다.

"뒤졌어."

메이든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쥐고 있던 캐리어를 바닥에 내려두고, 마력을 더욱 끌어 올렸다.

"쯧."

그러나 험한 말과는 다르게 얼굴엔 자신 없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필 장비가 없을 때······.'

메이든의 능력은 전투에 특화되어 있지 않다. 그런 그녀가 S랭크 32위라는 위치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특출난 제작 능력과 그 제작 능력을 총 동원한 대규모 전투 능력 덕분이다.

그런데 오늘은 그 제작 장비들을 챙겨오지 않았다.

지금의 메이든은 S랭크 초인의 전투력을 보일 수 없다.

상대의 능력도 미지수인데다가, 말하는 것으로 보아 비슷한 실력의 빌런이 최소 한 명 이상 근처에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버티는 것밖에 없어.'

메이든이 유화에게 눈짓했다.

최대한 버텨 보자는 신호였다.

유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든과 똑같은 결론을 낸 것이다.

"가자."

"예."

그렇게 두 명이 마력을 끌어 올리려 할 때였다.

"푸흐."

남자가 웃었다.

웃으며 양손에 플라스크를 꺼내 들었다.

"샘플 D2H4-74, D2H4-75."

동시에 외쳤다.

"샘플의 마력적 행위를 완전 동결한다."

피이이이이잉-!

플라스크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골을 흔드는 이명이 울렸다.

"큭!"

"꺅!"

두 명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극심한 어지럼증이 느껴졌으나, 필사적으로 참으며 남자를 노려봤다. 기습을 경계한 것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가만히 서서 웃고만 있을 뿐. 습격을 해 올 생각은 없어 보였다.

'무슨 생각이지?'

누가 봐도 완벽한 기습 타이밍이었는데, 보고만 있다니.

상대의 의도를 모르겠다.

그렇게 약 5초가 흘러.

이명이 완전히 멎는 것과 함께 다시금 마력을 끌어 올렸다.

"······!"

"이건······."

그제야 두 명은 남자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마력이······ 안 움직여?"

"크하하하하하하!"

남자가 웃었다. 웃으며 두 여성을 응시했다.

"못 들었어? 샘플 수집은 완료했다고 했잖아."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는 표정.

"너희의 마력은 내 제어하에 있다."

이제 곧 숨이 멎을 실험용 쥐를 바라보는 것처럼,

무감각한 눈빛으로 두 명을 노려봤다.

* * *

"······뭐야 이건."

최지훈을 쓰러트리고 단절의 투기장을 빠져나온 내가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당혹'이었다.

최지훈이 생각보다 잘 버텨서 10분이나 걸린 것도 당황스러운 일이었으나, 지금 느끼는 당황과는 격이 달랐다.

일단 주위에 아무도 없다.

시합이 끝났던 끝나지 않았던 주위에 누군가는 있어야 하는데, 쓰러져 기절해 있는 최지훈을 제외하곤 그 어떠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경기장의 장벽이 깨졌어?"

그뿐만이 아니다.

장벽 너머에서 혈향과 화약이 섞여서 내는 비릿한 냄새가 넘실거린다.

"테러라도 난 거야?"

그게 아니고서야 지금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때였다.

―들리십니까?

"······허미트?"

바닥에서 허미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재빨리 바닥을 살폈다.

"반지?"

눈에 익은 반지 하나가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저번에 받았던 일회용 통신용 반지다. 러스트에 대한 정보를 알리느라 소모했는데.

―듣고 있다면 응답하세요.

나는 재빨리 반지를 주워 손에 끼웠다.

"듣고 있어."

―드디어 나왔군요.

허미트가 혀를 찼다.

"지금 무슨 일······."

―시간이 없습니다. 상황만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허미트가 내 말을 끊었다.

―현재 이곳엔 저를 포함해 네 명의 간부가 있습니다.

"······!"

네 명? 지금 네 명이라고 했어?

―마에스트로, 알케미스트, 세인트, 그리고 저. 이렇게 넷입니다.

잘못 들은 게 아닌 모양이다.

―목적은 비혼 길드장 유화의 납치. 베가본드를 처리한 것으로 판단되는 주모자를 생포해 정보를 얻는 것.

놈들이 유화 씨를 노린다는 건 들었지만, 설마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그것도 간부를 네 명이나 동원해서 습격을 해 올 줄은 몰랐다.

―마에스트로와 세인트는 시선 분산을 위한 양동. 저는 배후에서 변수 처리.

마에스트로의 '지휘'와 세인트의 '심리장악'은 양동작전에 제격이고. 허미트의 능력은 변수 차단에 최적화되어 있다.

―그리고 알케미스트가 유화의 납치를 맡았습니다.

알케미스트의 능력도 누군가를 생포하는 데 최적화 되어 있다.

마에스트로다운 완벽한 임무 배치였다.

"습격으로부터 시간은 얼마나 흘렀어?"

―8분입니다.

8분이나 흘렀다고?

그럼 내가 단절의 투기장에 들어선 직후부터 테러가 벌어졌다는 거잖아······.

―현재 알케미스트는 유화와 메이든의 마력 샘플의 채집을 완료한 상황입니다.

"!"

내 눈이 부릅떠졌다.

마력 샘플의 채집이 끝났다는 말은 유화와 메이든의 마력이 완전히 동결되었다는 말과 같다.

마력을 사용할 수 없는 유화와 메이든은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없다.

두 명이 위험하다!

"그 둘 지금 어디 있어?"

―경기장에서 북동쪽 방향으로 3.87km 떨어진 공터입니다.

금호를 불러 이동하면 1분 내에 도착할 수 있다.

"금호야!"

내 마력이 빠르게 소모되며 눈앞에 금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릉!"

순식간에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인지한 금호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으르렁댔다.

나는 금호의 등에 올라탔다.

"북동쪽으로 달려 줘! 전속력으로! 시간이 없어!"

금호가 꾹 다문 입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동 중에 허미트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알케미스트를 쓰러트릴 방법은 생각해 두신 게 있습니까?

"있어."

오늘 메이든 씨와 유화 씨가 경기장에 찾아 온 이유는 비단 우리의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허미트. 혹시 메이든 씨의 근처에 캐리어 하나 굴러다니지 않아?"

어젯밤.

메이든 씨는 말했다.

나한테 줄 선물이 있다고.

오늘 가져갈 테니 기대하고 있으라고 말이다.

―지금은 확인할 수 없지만, 경기장에서 봤을 땐 캐리어 하나를 들고 있긴 했습니다.

"그럼 됐어."

그 캐리어 안에는 필히 고대 유물이 들어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돼."

그래.

드래곤족의 고대 유물이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다.

"할 말은 끝이야?"

―예. 끝······

순간 허미트가 말을 멈췄다.

―······이건.

"왜? 무슨 일이야?"

허미트가 당황한 목소리로 답했다.

―······방금 전, 세인트가 하시연, 신지아와 조우했습니다.

"······뭐?"

< 131화 혼란 (2) > 끝

< 132화 혼란 (3) >

마에스트로는 교사 옥상에서 눈을 감고 클래식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생생한 음악.

세상 그 어떤 것들보다 아름답고, 고귀하며, 진귀한 하모니.

마에스트로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변해 간다.

폭음은 칼란도(평온하게)

비명은 크레센도(점점 세게)

절망은 칸타빌레(노래하듯이)

"아름답다."

통제할 수 없는 간부들의 행동(애드립)에 맞춰서 완전히 새로운 곡조로 재편성하며, 지휘를 이어 간다.

'이 악단은 오로지 나만의 것이다.'

무대 밖의 관중들은 절대 무대 안으로 들어설 수 없다.

이것이 마에스트로의 특성.

[무대 위의 지휘자]

무대 내부와 외부를 완전히 격리시키는 공간 장악형 특성이다.

'천치들이 무대 밖에서 무슨 짓을 해도 내 무대를 망칠 수는 없다.'

마에스트로의 음악이 끝날 때까지, 그 어떠한 자들도 이 무대 위에 발을 들일 수 없다.

'무대 위에선 모두 내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마에스트로가 손을 흔들었다.

세계라는 오선지에 생명이라는 악보를 새겨 넣듯이.

그때였다.

―마에스트로.

세인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무슨 일이지?"

―신지아도 살려서 데려가면 보스가 좋아할까요?

"······신지아라."

베가본드를 사살한 일건에 한 쪽 다리를 걸치고 있는 신화 그룹의 금지옥엽 신지아.

"잡아 둬서 나쁠 건 없지."

그녀도 무언가 정보를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아니지만, 잡아 둬서 나쁠 건 없다.

―네. 그럼 생포하는 방향으로 노력해 볼게요.

"신지아를 찾았나?"

―예. 마침 딱 마주쳤지 뭐에요.

세인트 특유의 나긋한 웃음소리가 은은하게 울렸다.

―아참, 정보를 빼내는 거니까, 사지 정도는 없어도 괜찮죠?

"그래. 과다출혈로 죽지만 않는다면 상관없다."

―에이~ 마에스트로도 참. 제가 그런 실수를 할 사람으로 보여요?

세인트가 상쾌하게 웃었다.

―피알레 주교가 죽은 일에 대해 궁금한 것도 있고······ 어떻게든 어떻게든 생포해 갈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 * *

유화와 메이든의 몰골은 끔찍했다.

"하아··· 하아···."

"크읏."

메이든의 오른팔은 완전히 꺾여나가 덜렁거리고 있었고, 유화는 양 다리에 상흔을 입어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상태다.

"짜릿하군. 마력을 잃은 초인들이 입술을 짓씹고 나를 올려다보는 표정은 언제 봐도 짜릿해."

신체 곳곳에 새겨진 자상에서 끊임없이 핏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옷가지는 넝마가 된 지 오래다.

"시발··· 새끼···."

메이든이 핏물로 걸걸해진 음성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입은 아직 살아 있군."

알케미스트의 신영이 흐릿해지더니,

뿌드득!

뼈가 짓눌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크아아아아악!"

"언니!"

메이든의 왼팔이 꽈배기처럼 뒤틀려, 힘을 잃고 덜렁거렸다.

"연약하군. 골격도, 피부도, 근육도. 모든 것이 평균 이하야."

메이든의 뒤에 모습을 드러낸 알케미스트가 자신의 양손에 흥건한 메이든의 피를 탈탈 털며 몸을 돌렸다.

"마력과 장비를 사용할 수 없는 '던전 크리에이터'와 '창조자'는 이 정도인가. 푸흐흐."

마력 동결.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하고, 마력으로 전장을 관조하며, 마력으로 전투를 하는 두 명에게 있어서, 마력의 결여는 초인으로서의 능력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메이든이 표독스런 눈으로 알케미스트를 올려다보았다.

알케미스트가 추잡하게 웃었다.

"눈이 건방지군."

알케미스트의 신영이 다시금 흐릿해졌다.

푸욱!

무언가 살점을 꿰뚫는 소리가 들렸다.

"꺄아아아악!"

"언니이···!"

찢어지는 비명소리.

다시 모습을 드러낸 알케미스트가 무언가를 손에 쥐고 있었다.

"이러면 더는 그런 눈을 할 수 없겠지."

안구.

강압적으로 적출한 메이든의 두 눈이었다.

메이든의 신체가 갸우뚱 기울며 바닥에 쓰러졌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신체에 힘이 풀려 버린 것이다.

"크흐흐흐흐흐."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알케미스트가 비웃음을 흘렸다.

"바닥을 기는 모습이 꽤나 잘 어울리는군."

알케미스트가 입을 벌렸다.

그리곤 낼름.

손에 쥐고 있는 메이든의 안구를 입안에 넣었다.

안구가 이빨에 짓뭉개지는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미···친놈."

보이진 않지만, 무슨 짓을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아 챈 메이든이 아주 작은 소리로 읊조렸다.

우물우물.

꿀꺽.

"푸하. 역시 인간의 안구가 제일 맛있어."

알케미스트가 황홀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동시에 유화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본다. 동시에 입가가 반달처럼 휘었다.

"눈 정도는 없어도 되겠지······."

유화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알케미스트가 유화의 눈으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큿!"

유화가 아직 멀쩡한 양 팔을 이용해서 알케미스트를 공격했다.

탁, 탁!

그러나 유화의 두 팔은 아주 손쉽게 알케미스트에게 구속되었다.

"놔··· 놔아!"

"억울한가? 그러니까 육체 능력을 좀 끌어올려 두지 그랬나."

두 팔을 왼손으로 구속한 알케미스트가 오른손을 유화의 눈으로 가져갔다.

서서히 커져 가는 남성의 손을 바라보며 유화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아도 소용없다."

눈꺼풀에 거친 손가락의 감촉이 느껴지던 바로 그때.

"크아아아아앙!"

호랑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포효.

그것이 누구의 포효인지는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금호야!"

콰득!

벼락처럼 튀어나온 금호가 알케미스트의 오른팔을 짓씹었다.

동시에 우지끈! 그대로 꺾는다.

"오호······."

오른팔이 절단된 알케미스트가 재밌다는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제법 힘 좋은 호랑이군."

알케미스트의 오른팔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피부가 부글부글 끓으며 빠르게 재생되어 간다.

3초가 채 지나지 않아, 알케미스트의 오른팔은 원래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크르르······."

금호는 입에 물고 있던 오른팔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알케미스트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누가 봐도 분노한 모양새다.

금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유화는 멍하니 생각했다.

'금호가 왔다는 건······.'

"늦어서 죄송합니다."

마침 유화의 뒤에서 강서율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울렸다.

"서율 씨!"

"······꼬맹, 이."

강서율은 메이든의 신체에 손을 올린 채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

"말하지 마세요. 상처가 심해요."

강서율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신성력을 이용해 메이든의 상처를 치유하고 있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유화 씨는 조금만 참아 주세요."

메이든의 치유를 어느 정도 마친 강서율이 꾹 다문 입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놈을 처리한 뒤에, 흉터 하나 없이 치료해드릴 테니까."

그의 왼손에는 익숙한 캐리어 하나가 들려 있었다.

조금 전 남자와 대치하기 전에 메이든이 바닥에 내려 뒀던 캐리어.

고대 유물이 들어 있는 캐리어다. 강서율은 그 캐리어를 쥔 채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

"조, 조심하세요! 놈은 불사예요!"

유화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알고 있습니다."

강서율이 캐리어를 열었다.

"놈에 대한 건 모두 알고 있어요."

촤라라라락-

기계틱한 소리와 함께 캐리어가 열렸다. 캐리어 내부에는 작은 지팡이 하나가 들어 있었다.

드래고닉 스태프.

메이든이 강서율에게 선물하기 위해서 자신의 인맥을 총 동원해 입수한 드래곤족의 고대 유물.

"야. 약쟁이."

강서율은 [드래고닉 스태프]를 손에 쥐었다.

"넌 곱게 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

그 순간,

강서율의 전신에서 마력이 솟구쳤다. 그의 분노를 보여 주듯 아주 거칠게 일렁였다.

"드래고닉 인챈트."

그 시동어와 함께.

"이 구역을 '격리'한다."

강서율의 입에서 묵직한 음성이 울렸다.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악-!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이건?"

알케미스트의 두 눈에 처음으로 당황이라는 감정이 깃들었다.

"네 인생 자체를 모조리 부정해 줄게."

* * *

드래고닉 스태프.

한 고룡이 폴리모프로 유희에 나서는 아들을 위해 만든 스태프다.

기본적인 성능은 말할 필요도 없이 최상급이고.

고유 능력으로는 [드래고닉 인챈트]가 있다.

효과는 폴리모프한 상태에서도 드래곤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그래.

드래곤의 힘.

[용언]을 말이다.

"대기 중의 마력이여, 칼날이 되어 쏟아져라."

하늘에서 마력의 칼날이 쏟아져 내렸다.

"대지여, 솟구쳐라."

대지가 송곳처럼 솟구쳤다.

"불타라."

아무 전조도 없이 알케미스트의 신체가 불타올랐다.

"비틀려라."

알케미스트의 신체가 꽈배기처럼 꼬였다.

"크아아아아아악!"

알케미스트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울렸다.

"어, 어째서! 마력을 수집할 수 없는 거냐!"

알케미스트의 능력은 '수집'이다.

상대의 마력을 수집하여 자신의 지배하에 두는 힘.

그것을 이용해서 유화 씨와 메이든 씨의 마력을 수집해, 동결시킨 것이다.

"왜냐고?"

그러나 그 수집은 지금의 내겐 통하지 않는다.

"내가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마력의 형질을 바꾸고 있으니까."

"······뭐?"

당황하는 알케미스트를 바라보며 나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마······."

"폭발하라."

콰아아아앙-!

알케미스트의 신체가 부지불식간에 폭발했다.

덕분에 말이 끊겼으나,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는 파악했다.

타고난 마력의 형질을 계속해서 바꾸고 있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하고 싶은 것이리라.

확실히 상식적으론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 '인간의 상식' 선에선 말이다.

"태풍이 되어 분쇄해라."

그러나 지금의 나는 '드래곤'이다. 마력의 시초인 드래곤에게 있어선 마력의 형질을 바꾸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다.

"근데 너, 지금 내 마력의 형질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닐 텐데."

나는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툭툭 쳤다.

"슬슬 약빨 떨어질 때잖아."

"!"

한쪽 눈만 남은 알케미스트가 당황한 듯 눈을 부릅떴다.

"왜? 내가 네 '시간역행의 포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신기해?"

알케미스트가 불사신인 이유는 그가 개발한 '포션'의 효과 때문이다.

인간 천 명의 피를 응집시켜 만드는 그의 연구의 집대성.

효과는 3분간 불사에 가까운 재생력을 얻는 것.

그 효과는 앞으로 30초가 지나면 완전히 끊긴다.

"그니까, 네가 그런 걸 궁금해할 상황이냐고. 너 30초 후면 죽는다니까?"

"짓눌려라."

나는 용언을 계속해서 사용하면서 비웃음을 흘렸다.

"넌 내 상대가 안 돼."

알케미스트의 힘은 '비밀'이었을 때 힘을 발휘하는 종류의 힘이다.

비밀을 모조리 알고 있는 나에겐 아무런 위험도 되지 못한다.

"유언은? 앞으로 30··· 아니, 25초 후면 죽을 텐데. 유언 정도는 들어 줄게."

나는 용언을 이용해 마법을 조절, 알케미스트의 입은 최대한 피해가 없도록 컨트롤했다.

"······크흐흐."

알케미스트가 웃었다.

"역시 마에스트로의 말처럼 내부의 정보를 빼돌리는 배신자가 있는 게 확실한 것 같군."

입만 동동 떠다니면서도 근엄한 척 웃는 꼬라지는 제법 볼썽사나웠다.

"왜? 무대 위의 지휘자를 사용하고 있는 마에스트로에게 그 사실을 알리기라도 하게? 할 수 있으면 해 봐."

이 공간은 이미 격리된 지 오래다.

마에스트로의 [무대]가 제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용언]에 비할 바는 못 된다.

"네 연구는 미완성으로 끝. 너는 진리의 실마리도 잡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어 가는 거야."

진리를 추구하는 화학자.

알케미스트.

그에게 죽음은 무엇보다도 큰 형벌이다.

퍼어어어엉-!

재생해 가던 그의 신체가 다시금 폭발했다.

이제 남은 시간은 약 10초.

"헛소리! 연구 결과는 조직 내에 그대로 남아 있다! 시간역행의 포션은! 미래영겁 기억될 완전무결한 포션이다!"

알케미스트가 웃었다.

자신만만한 웃음이었다.

"그 기록이 있는 이상, 나는 불멸이다! 죽지 않는다!"

광인.

연구에 미친 화학자의 광소였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

"······."

그것이 거슬렸다.

힐끔 뒷쪽의 메이든 씨와 유화 씨를 바라봤다.

"언니··· 괜찮아요?"

"···그래. 어찌어찌··· 살아는 있다···."

심한 몰골이다.

두 사람을 저렇게 만든 알케미스트가, 상쾌한 얼굴로 죽어 가는 게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푸흐흐흐! 나는 불멸이다아!"

"······지랄."

그렇기에 나는 놈에게 다른 죽음을 선사하기로 했다.

이대로 쉽게 죽이지 않겠다.

너는 인생 모든 것을 부정당해 죽어야 한다.

내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빛났다.

"폭발하라!"

콰아아아아앙-!

공기가 폭발하며, 알케미스트의 신체가 산산이 부서졌다.

그 순간, 나는 재생 중인 알케미스트의 신체를 향해 몸을 옮겼다.

"······무슨 생각이지?"

머리부터 시작해서 점점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 중인 알케미스트가 눈을 찌푸렸다.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재생되어 가는 알케미스트의 신체에 오른손을 가져다 댔다.

"네놈···?"

파아아아앗-!

새하얀 빛이 흘렀다.

신성력의 발현.

"대기 중의 마력이여. 내 신체를 구성하는 마력이 되어라."

대기중의 무수한 마력이 내 신체를 타고 마력이 되었고.

곧 신성력으로 치환되어 알케미스트에게로 흡수되어 갔다.

"이건······ 치유력?"

"그래."

적을 치유하다니.

누가 보면 정신나간 짓이라고 할 테지. 하지만 난 지극히 정상이다.

"네 시간역행의 포션이 완전무결한 연구의 산물인 이상, 너는 죽지 않는다고?"

내 신성력이 계속해서 흘러든다.

"헛소리."

끊임없이 흘러들었다.

"이게, 무···슨."

완전한 모습으로 되돌아온 알케미스트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네 포션은 결함품이야."

동시에 신체 곳곳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세포가 증식이라도 하는 것처럼.

부풀고, 또 부푼다.

"포션 제조의 기본인 과다 치유에 대한 대응책도 안 되어 있다니, 연구자로서 실격이라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해?"

살덩이에 매몰되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알케미스트를 바라보며 나는 계속해서 신성력을 퍼부었다.

"네··· 놈···."

살점 사이에서 알케미스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축하해. 네 말대로 시간역행의 포션은 미래영겁 기억될 거야."

"네··· 노오오옴···!"

꾸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놈의 신체가 파열하기 시작했다.

"가장 기본적인 것도 지키지 못한, 자만과 만용의 산물로. 반면교사로서 역사에 기록되겠지."

"으아아, 아아아!"

과다 치유.

완전히 사멸한 세포가 하나씩 파열하듯이, 곳곳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럴 순 없다! 이럴 순··· 이럴 순···!"

놈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울렸다. 염산에 성대가 녹아가는 듯한 걸걸한 음성이었다.

나는 웃었다.

드디어 쓰레기에 걸맞은 목소리가 됐네.

파지지직-

동시에 드래고닉 스태프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1분의 시간 제한이 끝난 것이다.

[Error!]

이럴 때만 튀어 나오는 상태메시지를 보며, 나는 드래고닉 스태프를 '장인의 간이 대장간'안에 넣어 버렸다.

"······푸흐, 흐. 기뻐하긴, 이르다."

돌연 알케미스트가 이상한 소리를 했다.

"이곳엔··· 나만 있는 게··· 아니지···."

무너져 가는 고깃덩이 안에서 무어라 말한다.

"유화는 지켰을지언정······"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알겠다.

"지아는 못 지킬 거라고?"

"······."

나는 코웃음을 쳤다.

"나한테 한 방 먹이고 싶었던 모양인데, 미안해서 어쩌나."

점점 역겨워지는 고깃덩어리를 바라보며 픽 웃었다.

"세인트는 '지금의' 지아를 이길 수 없어."

< 132화 혼란 (3) > 끝

< 133화 혼란 (4) >

서서히 격리가 풀려 가며, 원래의 푸른색을 되찾고 있는 하늘 아래에서 나는 바닥에 대자로 누워 있었다.

"서율 씨, 괜찮아요?"

유화 씨가 내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 줬다. 날 바라보는 얼굴에 걱정이 가득하다.

"예에. 괜찮습니다. 그냥 마력을 너무 많이 썼을 뿐이라서······."

조금 전, 알케미스트의 숨이 멎을 걸 확인한 직후.

나는 바로 메이든 씨와 유화 씨의 치료를 시작했고. 탈진했다.

"죄송해요. 저희 때문에."

"죄송하긴요. 오히려 제가 더 죄송하죠.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나는 상체를 일으켰다.

"신체에 위화감이 느껴진다거나, 그런 건 없는 거죠?"

"네. 그런 건 전혀 없어요."

나는 유화 씨의 신체를 다시금 살폈다. 핏물로 넝마가 된 옷가지는 그대로였지만, 사이사이 보이는 피부는 깨끗하다.

문제없는 것 같다.

"메이든 씨도 위화감은 없고요?"

나는 옆에서 멍하니 서 있는 메이든 씨를 불렀다.

대답이 없다.

"메이든 씨?"

"어? 어. 뭐라고?"

못들은 거 같다.

"양팔이랑 눈에 위화감 같은 거 없냐고 여쭤봤어요."

"멀쩡해. 오히려 시력이 좋아진 것 같은데."

메이든 씨가 상쾌하게 미소 지었다.

"그나저나 꼬맹이. 실손 신체 재생 같은 회복 마법은 또 어디서 배운 거야?"

쭈그려 앉아서 내 볼을 쿡쿡 찌르며 능글맞게 웃는다.

저 모습을 보니, 확실히 치료는 잘 된 것 같다.

"아무튼 고맙다. 덕분에 심봉사 신세는 면했어."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

"별 말씀을.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데요."

두 명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두 눈에는 숨길 수 없는 호의가 가득하다.

"그럼 화야. 우린 슬슬 다시 움직이자. 이 빌어먹을 운명교향곡도 여전하고, 아직 상황은 끝나지 않았어."

"······네."

"꼬맹이. 너는 마력이 회복될 때까진 여기서 좀 쉬고 있어. 금호 네가 잘 지켜 줘야 한다."

금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거예요."

나는 떠나려는 두 명을 만류했다. 굳이 지금 뭘 더 할 필요는 없다.

"그럴 필요 없다고?"

"무슨 말이에요?"

"굳이 두 분이 뭘 하지 않아도, 곧 상황은 끝날 거라는 말이에요."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용언의 공간 격리에 의해 적색으로 물들었던 하늘이 다시 본래의 청색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꽤나 아름다웠다.

"저쪽에 녹색 마력광 보여요?"

적색이 청색에게 물드는 사이에 녹색빛이 은은하게 점멸하고 있었다.

"······저건 또 뭐야. 언제부터 있었어?"

"느껴지는 마력량이 굉장하네요."

저 마력이 적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두 명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런 거 아닌데 말이지.

"저 마력은 지아의 마력이에요."

"······뭐?"

저 녹색빛은 지아의 각성을 알리는 축복의 빛이다.

"그니까, 그냥 앉아서 쉬세요. 저희가 굳이 뭘 더 하려고하지 않아도······."

[격세유전:엘프]의 개화와 함께 피어오르는 마력.

"지아가 알아서 다 해결해 줄 거예요."

저 마력이 내리쬐고 있는 한, 지아가 패배할 일은 없다.

* * *

신지아는 천재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천재 중의 천재.

신지아의 재능은 하시연과 비교해도 뛰어나면 뛰어났지, 결코 밀리지 않는다.

그런 그녀가 하시연은 한 눈에 보고 익힌 '드래곤식 마력 운용법'을 지금까지 익히지 못한 이유가 뭘까.

그건 바로 '조급함'과 '열등감'이라는 감정 때문이었다.

메이든, 유화, 하시연과 자신을 비교하며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마음의 여유를 잃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기 중의 마력과, 자신의 내면과 공명해야 하는 드래곤식 마력 운용법을 익힐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여기서 악순환이 시작됐다.

조급해져서 익힐 수 없었는데, 익힐 수 없으니 더 조급해졌다.

더 조급해진 만큼 마력의 공명과는 더욱 거리가 멀어져갔고, 그 사실에 또다시 불안감이 증폭되었다.

무한의 굴레.

악순환의 연쇄였다.

물론 강서율이나 타인의 앞에선 이러한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속에선 점점 곯아 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신지아는 드디어 악순환의 연쇄를 끊어 내는 데 성공했다.

"지금··· 뭐라고 했어?"

뭐, 극적인 성장이 있었다거나. 깨달음을 얻었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그저 말 그대로 '조바심'이나 '열등감'이라는 감정이 사라졌을 뿐이다.

"못 들으셨나요? 피알레 주교의 죽음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냐고 물었답니다."

'분노'라는 감정에 사로잡혀, 다른 감정을 모두 잊었을 뿐.

그저 그것뿐인 얘기였다.

"피알레 주교······."

신지아의 양손이 분노로 바들바들 떨렸다.

"그 말은 즉, 피알레 알로가 당신의 수하라는 말이지?"

"말에 조금 어폐가 있네요."

세인트가 미소 지었다.

"수하라기보다는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동지랍니다. 저희 교단, 에덴의 주교니까요."

자애롭고, 상냥한 미소였다.

"······그래."

그 순간, 신지아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극심한 분노는 때로 사람을 냉정하게 만든다.

지금의 신지아는 그런 상태였다.

"그니까, 그 에덴이라는 교단이 우리 어머니를 죽인 거나 다름없다는 말이네."

"그럴 리가요. 오해예요. 저희 교단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답니다."

차가운 분노.

"조금 길을 잘못 든 분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드리고, 주님의 곁으로 인도해드릴 뿐."

"······그래. 당신도 똑같구나."

신지아의 머릿속에서 잡다한 감정이 모조리 소멸한 순간이었다.

"피알레 알로와 똑같아."

"그럼요. 제 주교니까요."

이 여자를 죽여 버리겠다.

그걸 위해선 침착해야 한다.

그런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래서, 제 질문에 대한 답은 언제 해 주실 생각인가요?"

세인트가 웃었다.

하시연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음~ 대답할 마음이 없는 것 같네요."

세인트가 쓰게 웃었다.

"곤란하네요. 제 힘도 통하지 않는 것 같고. 어쩌면 좋을까요."

신지아에게는 [정신 무장]이라는 정신 공격 방어 특성이 존재한다.

과거 피알레 알로의 [시스템 다운]을 버텨냈을 정도로 뛰어난 특성.

신지아에겐 세인트의 [심리장악]이 통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죠. 일단 힘으로 끌고 가는 수밖에."

그 순간, 신지아의 주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심리장악]에 당해 세인트에게 조종당하는 초인들이었다.

"반항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으실 거예요."

그 조종당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하시연'을 비롯한 사관생들도 다수 존재했다.

세인트가 하시연의 뺨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당신이 반항할 때마다, 여기 친구들이 대신 죗값을 치르게 될 테니까요."

"······."

신지아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상황 판단이 빠르네요. 아주 좋아요."

신지아가 저항하길 포기한 것이라고 생각한 세인트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나 신지아는 포기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은?'

신지아는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할 수 없었다.

신지아의 머리가 빛의 속도로 회전했다.

'이 상황에서 저 여자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어머니의 원수를 이대로 놓칠 수는 없다.

그러자 문득 강서율의 말이 떠올랐다.

―지아 네가 고대의 마력 운용식을 익히고, 마력을 S랭크로 올리기만 하면. 그때부턴 그 누구도 너를 막을 수 없을 거야.

당시엔 그저 위로의 말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냉정해진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조금 이상했다.

―아.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만 년의 정수는 항상 몸에 지니고 있고.

위로하기 위해서였다면 막연하고 두루뭉술한 말을 했으면 됐을 텐데, 강서율의 말은 너무 디테일했다.

'선조님의 그 말은 입에 발린 위로가 아니라 진심이셨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신지아는 속주머니에 넣어 둔 '만 년의 정수'를 떠올렸다.

다행히 만 년의 정수는 지니고 있다.

이걸로 첫 번째 조건은 클리어.

다음은 두 번째 조건이다.

'마력 S랭크.'

빠르게 보너스 포인트를 이용해 마력을 S랭크까지 상승시켰다.

이제 남은 것은 고대 마력 운용식을 익히는 것뿐.

'······진정하자.'

신지아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조금은 침착해진 머리로 레나의 말을 떠올렸다.

레나는 말했다.

마력의 본질을 느끼고, 내면의 신비와 동조시키라고.

지금까진 그 간단한 말을 마음속 깊이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 봐도 레나가 말하는 마력의 본질을 느낄 수가 없었다. 조바심이라는 안개가 마력의 본질을 가려 버렸던 것이다.

'······알겠어.'

쓸데없는 감정이 완전히 사라진 지금은 다르다.

마력의 본질이 무엇인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살아 있어.'

마력은 생명이다.

그 간단한 본질을 이제야 알아채다니. 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슬슬 마음의 준비는 끝났나요?"

세인트가 싱글벙글 웃었다.

신지아는 눈을 감은 채 웃었다.

웃으며, 마력을 회전시켰다.

파아아아앗!

그 순간.

속주머니에 넣어 둔 씨앗이 개화했다. 녹색빛의 마력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그 빛은 서서히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세계수?"

세계수의 형상.

마력으로 빚어진 세계수가 하늘에 새겨졌다.

"당신, 무슨 짓을······."

시선을 내려 신지아를 바라본 세인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귀가?"

신지아의 귀가 길게 늘어나있었다.

마치 전설 속에 존재하는 '엘프'처럼 말이다.

눈을 뜬 신지아의 두 눈동자에서 찬연한 빛이 흘러 나왔다.

평소의 청색빛이 아닌 아주 찬연한 '녹색빛'이 말이다.

그녀의 주위로 바람이 휘몰아쳤다.

"······엘프?"

세인트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격세유전:엘프]

신지아의 진정한 힘이 눈을 떴다.

"에덴 교단의 교주."

신지아가 활을 쥐었다.

그 활을 중심으로 바람이 더욱 거세게 몰아쳤다.

그것은 명백한 풍(風) 속성 마력이었다.

"여기서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

그녀의 분노가 태풍처럼 휘몰아쳤다.

* * *

마에스트로는 갑작스레 끼어든 불협화음을 생각하며 상념에 잠겨 있었다.

―마에스트로. 알케미스트와 세인트에게 연락이 닿지 않는데.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허미트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알케미스트는 죽었다."

―······뭐? 누구에게? 어떻게?

마에스트로가 작게 혀를 찼다.

"모른다. 내 무대 안에 누군가가 새로운 무대를 세웠다. 내 제어가 닿지 않는 새로운 무대를······. 알케미스트는 거기서 죽었다."

―······.

허미트가 놀란 듯 헛숨을 삼켰다. 물론 연기였다.

―세인트는?

"······신지아에게 패퇴했다."

―······뭐?

이번엔 진짜 놀랐다.

신지아가 세인트를 이겼다고?

어떻게?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럼 세인트도 죽었다는 건가?

"다행히 그건 아니다. 허미트 너도 알고 있지 않나. 그녀는 그리 쉽게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랬지.

마에스트로가 깊게 숨을 내쉬며 마력을 거뒀다.

―철수하는 건가?

"그래. 작전은 실패했다. 철수하는 수밖에."

―그렇군. 알겠다. 도주로를 준비해 두지.

"부탁하마."

그 말을 끝으로 연락이 끊겼다.

혼자 남은 마에스트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재미있군."

불협화음.

자신의 완벽한 무대를 방해하는 소음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로 깔끔하니 이건 또 나름대로의 풍류가 있지 않은가.

"아주 재미있어······."

자신의 계획을 철저하게 분쇄한 불협화음을 떠올리며,

마에스트로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 * *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은밀한 테러! 한국 초인사관학교의 보안 시스템 이대로 괜찮은가!]

[역대 최다 사상자 발생.]

[메이든 크리티네스 단독 인터뷰! 이번 테러는 '진리의 구명자'에 의한 보복 테러라고 밝혀.]

[비혼 길드장 유화, 알케미스트라는 진리의 구명자 소속 빌런과 싸울 당시의 영상을 일부 공개.]

사건에 대한 건 빠르게 퍼져 갔다. 초인사관학교에 테러가 있었다는 사실에 세계가 경악했다.

한국의 보안 시스템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뛰어나다.

심지어 최근에 메이든의 기술을 사서 보안의 강도를 높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테러에 대한 걸 사전에 파악하지 못했다.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대응 불가. 테러의 두려움에 전 세계가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 말은 즉, 세계 그 어떠한 곳이라도 그들의 테러가 닿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외부의 지원을 완전히 단절하는 특수 결계!]

[이 결계를 뚫을 방법은 없는 걸까?]

현존하는 초인 지원 시스템의 근간을 흔드는 결계의 존재까지 알려져 그 혼란은 배가되어 갔다.

[이번에도 테러를 수습하는 데 성공한 유화와 메이든 크리티네스에 대하여.]

[한국의 새로운 별이 되려 하는가. 비혼 길드에 대해 알아보자.]

그 혼란의 사이에도 사건 해결의 공로자인 유화와 메이든의 평판은 상승하고 있었다.

나는 넘쳐흐르는 뉴스들을 적당히 훑어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 머리 아파."

이번 사건이 불러올 미래의 필연적인 변화를 생각하자 머리가 안 아플 수가 없었다.

"점점 아스트랄해지는구나."

설마 간부 네 명이 그 타이밍에 습격을 해 올 줄은 몰랐다.

대업을 위한 준비만으로도 벅찼을 텐데. 그만큼 유화 씨를 신경쓴다는 의미겠지.

"후."

그래도 다행이다.

사망자는 결코 적다고 할 순 없었지만, 중요 인물들은 모두 멀쩡히 살아남았고,

알케미스트를 죽이는 데도 성공했다. 명백한 이득이다.

"잘하자나여. 지금까지 왜 못하는 척했서여?"

"······그러게요. 왜 그랬을까요."

여기에 더해서 지아가 [격세유전:엘프]를 개화하는 데 성공해, 세인트와 대적할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

이건 가히 엄청난 성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거울을 바라보며, 눈에 정신을 집중했다.

동공이 파충류처럼 좌우로 쫙 갈라짐과 동시에 황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이 동공의 변화는 내가 이번에 새로 얻은 드래곤족의 특성 때문이다.

마나의 본질을 직접 꿰뚫어보는 드래곤족의 눈.

"용안(龍眼)이라."

내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 133화 혼란 (4) > 끝

< 134화 진척 (1) >

그날밤.

나는 지금까지의 일들을 되뇌며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재정립하고 있었다.

"일곱 간부 중 두 명이 죽었고, 두 명은 아군."

남은 간부는 마에스트로, 트릭스터, 세인트. 이 셋뿐이다.

"놈들의 전력은 대폭 다운됐어."

단순 계산으로도 일곱 명에서 세 명으로 줄어든 것으로 전력은 50% 이상 다운됐다.

반면 우리 진영의 전력은 배 이상 상승했다.

허미트, 러스트가 우리 진영으로 합류했고, 지아가 각성하며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강자로 성장했다.

"여기에 메이든 씨의 자금력, 기술력이 더해지면······."

실질적인 전력 상승은 3배~4배까지 치솟을 테지.

나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반대쪽 손으로 노트에 글을 끄적였다.

[만약 이 상태로 놈들과 격돌했을 때, 우리 측의 승률은?]

탁, 탁, 탁.

펜촉이 노트에 부딪치는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울렸다.

[트릭스터]

그의 무작위성이 짙은 특성은 매우 까다롭겠지만, 상대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세인트]

모든 전투에서 힘을 발휘하는 심리장악이라는 특성과 불사에 가까운 부활 능력. 까다로운 상대긴 하지만, 상대할 수 없는 건 아니다.

[마에스트로]

지휘자라는 이름에 걸맞게 만능에 가까운 특성을 지닌 최강의 간부. 약점다운 약점도 없고, 머리도 좋아서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울 테지. 그러나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일반 빌런들이야 이쪽도 대응할 방법은 많다.

당장 여기까지의 계산값만 놓고 생각해 보면 우리 진영의 승률은 8할을 넘어설 테지.

그러나 이 계산식에는 가장 중요한 계산값이 빠져있다.

"······언노운."

언노운이 문제다.

지금의 전력으론 그를 절대 이길 수 없다.

우리가 체스판 위의 말이라면, 언노운은 체스판 밖의 플레이어다.

차원이 다른 강함.

일곱 간부 전원이 동시에 달려들어도 이길 수 없다.

'마스터'를 포함한 싱글 랭커 9인이 전부 덤벼도 상처 하나 낼 수 없다.

언노운은 그런 존재다.

만약 언노운이 살아서 2부 에피소드에 진입해, 초월자에 등극했다면 2부 보스인 마신만큼 강하지 않았을까.

"원작의 슈퍼 킹갓 마제스티 충무공 먼치킨 강서율도 1:1 대결에서 밀릴 정도였으니 말 다한 거지······."

원작 언노운의 마지막 전투는 말 그대로 압권이었다.

보면서 몇 번을 전율했는지 모른다. 저번에 우연찮게 마주쳤을 때를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그놈을 이기려면 최소한 원작의 강서율만큼은 강해져야 한다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불가능하다.

"역시 한 템포 빠른 전면전은 무리인가."

언노운을 빠르게 처리하고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싶었는데.

욕심이었던 모양이다.

"어쩔 수 없지."

당초 계획대로 조용히 국가전 테러를 대비하면서 함정을 파두는 전략으로 가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잠이나 자자."

나는 책상 앞에서 일어나 침대로 뛰어들었다. 고급 침대 특유의 적당히 푹신한 감각에 바로 노곤함이 밀려왔다.

점점 정신이 아득해졌다.

* * *

진리의 구명자 은신처.

"죄송합니다. 제 실수입니다."

마에스트로는 언노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

언노운은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꼬고 턱을 괸 채로 삐딱하게 마에스트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명."

두 눈에선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라.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그 싸늘한 목소리에, 마에스트로를 포함한 회의실 내부에서 숨죽이고 있던 다른 간부들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다비드. 못 들었나?"

쿠구구구궁-!

언노운의 분노로 방출된 마력이 건물을 흔들며, 흡사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세 번은 없다. 내가 유물의 융화에 힘쓰는 도중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말하라고 했다."

"네, 네!"

마에스트로가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채 고개만을 들어 올렸다.

"먼저 한국 초인사관학교의 행사를 이용해서, 침입 경로를 짰습니다."

마에스트로는 이번 계획의 요지를 하나부터 열까지 모조리 설명했다. 얘기가 이어질수록 언노운의 표정이 점점 풀어져 갔다.

"누군가가 제 특성을 무시하고 공간을 격리해, 알케미스트를 살해했습니다."

"그래서 유화를 납치하는 덴 실패했다?"

"예."

이제는 대놓고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재미있군. 계속하도록."

"예. 알케미스트가 다른 공간에 격리된 당시, 반대쪽에서······."

그때였다.

쾅!

문이 열렸다.

"다음은 제 입으로 직접 말할게요."

평소와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세인트였다.

"로라. 드디어 부활했나."

"네. 제대로 준비를 못 해 뒀다 보니 좀 걸렸네요."

세인트의 특성,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리라.]는 사전에 제물의 준비가 필요하다.

그녀의 영토 내에서 죽었다면 1초 만에 다시 부활했겠지만, 아쉽게도 한국에는 준비된 제물이 별로 없었다.

덕분에 부활하는 데만 3일이나 걸렸다.

"그 여자한테 꽤나 시달려서, 부활에 좀 애먹은 것도 있구요."

세인트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신지아와 전투를 벌일 때를 떠올린 것이다. 상처 입은 초식동물처럼 벌벌 떨던 여자가 그렇게 급변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좋아. 로라. 말해 보도록.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실 별로 말할 건 없어요. 제 특성이 통하지 않아서, 강압적인으로 생포하기 위해 움직였고 패배. 그게 끝이에요."

"네가 사관생에게 졌다고?"

"네. 평범한 사관생이 아니었거든요."

세인트가 싱긋 웃었다.

"싸우는 도중에 갑자기 엘프처럼 변했어요."

"엘프?"

언노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힐끔 시선을 돌려 러스트를 바라본다. 러스트도 뭔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렇게 각성한 신지아에게 제가 패배했고, 지금에 이르렀답니다."

세인트가 싱글벙글 웃었다.

"······."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 사이에 러스트와 허미트가 서로 아이컨택을 했다.

러스트가 눈으로 허미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0.3초의 간격을 두고 눈을 세 번 깜빡.

'이따가 그곳으로 와.'

그런 신호였다.

허미트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스, 엘프를 찾으시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신지아를······."

"아니."

언노운이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신지아는 엘프가 아니다."

"하지만 저와 세인트가 본 건······."

"두 번 말하지 않겠다."

"예. 죄송합니다."

언노운의 확언에 마에스트로가 의문을 지워 버렸다. 언노운의 말은 진리다. 그가 이렇게 확신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리라.

"아이. 좋겠군."

언노운이 러스트를 불렀다.

"좋아요? 뭐가요?"

"네 친구가 생긴 것 같아서."

"······."

러스트가 미묘한 표정이 되었다.

언노운이 눈을 빛냈다.

'아마 그 신지아라는 사관생도 아이와 마찬가지로 [격세유전]을 각성한 거겠지.'

그렇다면 굳이 볼 일은 없다.

격세유전을 지닌 자의 시스템에 대한 건 이미 러스트를 통해 전부 알아봤다.

인간과 크게 다를 건 없었다.

'그리고 공백의 10년에 대한 걸 알고 있는 건 진짜 엘프뿐이다.'

언노운이 이종족들의 탐색에 열을 올렸던 이유는 이종족들이 알고 있을 '공백의 10년'에 대한 걸 알고 싶기 때문이다.

격세유전으로 엘프의 힘을 일부 획득했을 뿐인 사관생에겐 흥미없다.

"다비드. 자리로 돌아가도록."

"······예."

마에스트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작게 목례한 뒤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얘기는 잘 들었다. 변수가 많은 상황이었다는 건 이해했다. 다비드의 능력으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도 이해한다."

마에스트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다비드론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말에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마치 다른 사람이라면 잘 할 수 있었을 거라는 뉘앙스지 않은가.

"블랑뉴가 죽은 것도 이해하마. 그저 블랑뉴가 약했기 때문에 죽은 것뿐이니까."

베가본드 때와 똑같았다.

죽음은 오로지 자신의 실수.

시간회귀의 포션을 지니고도 패배한 알케미스트가 멍청했을 뿐.

그의 죽음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언노운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다비드. 이번 작전으로 얻은 건 있나?"

언노운의 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내게 전권을 위임받아 각자의 일이 바쁜 간부들을 무려 네 명이나 투입한 대작전이다."

지금이라도 마에스트로를 찢어발기겠다는 의지를 가득 담아 노려본다.

"성공을 했건, 못했건, 아무것도 얻은 게 없다는 건 아니겠지."

마에스트로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호랑이 앞에 선 쥐가 된 기분이다.

"대답해라. 다비드."

언노운이 손가락 두 개를 들어 올리며 마에스트로를 노려봤다.

그 손가락은 마에스트로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세 번째는 없다.'

마에스트로는 바로 정신을 차렸다. 언노운의 기세에 움츠러들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번 작전으로 베가본드를 함정에 빠트린 장본인이 유화나 메이든 크리티네스가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만약 그 둘이 주모자였다면 알케미스트에게 그리 쉽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누구지? 신지아를 얘기하려는 생각이라면······."

신지아의 각성은 그저 세인트의 자극으로 솟구친 분노의 표출에 의한 특성 개화의 산물일 뿐이다. 격세유전에 대한 걸 알고 있는 언노운이기에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아닙니다."

마에스트로는 격세유전을 모르긴 하지만, 느낌상 그건 아니라고 느끼고 있었다.

"그럼 누구지?"

"······."

마에스트로가 말을 잃었다.

아니, 할 말이 없었다.

아직 마에스트로도 주모자가 누군지 특정해 내지 못했다.

"다비드."

"죄송합니다. 아직 거기까진······."

언노운의 표정이 엄동설한처럼 차가워졌다.

"대신! 하나 확실해진 게 있습니다!"

여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언노운을 바라보며 마에스트로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 다섯 명 중에 배신자가 있습니다."

"······근거는?"

언노운의 표정에 다시 흥미가 솟아올랐다.

"알케미스트가 소멸하기까지 소요된 시간입니다. 알케미스트의 능력은 대인전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5분 동안 무적이 되는 시간역행의 포션으로 쉽사리 죽일 수도 없습니다."

"······."

"그런 알케미스트가 3분 만에 사망했습니다. 이건 누군가가 알케미스트에 대한 정보를 미지의 주모자 X에게 제공하지않은 이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만약 언노운 자신이 알케미스트에 대해 모른 채 그와 싸운다고 해도, 3분 내에 알케미스트를 처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알케미스트의 '시간역행의 포션'은 그만큼 뛰어나다.

언노운의 표정에서 흥미를 읽은 마에스트로가 마지막 쐐기를 박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배신자가 누구인지까지 파악했습니다."

"오호."

언노운의 눈에서 이채가 흘렀다.

"과연. 내부의 암세포를 도려낼 수 있다면 블랑뉴의 죽음이나 계획의 지체는 대수로운 일이 아니지."

언노운이 남은 다섯 간부를 쭉 훑으며 말했다.

"그래. 누가 배신자지?"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며 마에스트로의 말을 기다렸다.

"배신자는······."

마에스트로가 서서히 손을 들어 올렸다.

"허미트입니다."

그 손은 허미트를 똑바로 가리키고 있었다.

* * *

목요일.

사건으로부터 일주일이 흘렀다.

"진짜 올해는 뭐 마라도 낀 건가?"

"벌써 몇 번째 휴교냐."

어제까진 휴교였다.

부지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는데, 사건이 워낙 커서 수습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이다.

"그래도 우리 반에 사망자가 안 나와서 다행이지."

"애초에 사관생들 자체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다더라."

사건 당시에 초인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초기의 폭발을 제외하면 민간인, 사관생의 피해가 거의 없었다. 물론 그만큼 초인들이 많이 죽었다만.

"애들아! 오늘도 자습이래!"

한 남학생이 교실에 들어오며 소리쳤다.

"······아놔."

"기껏 등교했더니 자습이야?"

다들 떨떠름한 표정이다.

"모르겠다. 그냥 훈련장이나 가자."

"그러게. 집에만 있었더니 몸이 찌뿌듯해서 몸 좀 풀고 싶네. 1:1 콜?"

"콜."

사관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각자 훈련을 하러 떠났다.

"서율아!"

내게도 시연이와 지아가 다가왔다.

"같이 훈련하자!"

"그럴까? 나야 좋지."

마침 '용안'을 실험해 보려고 하기도 했고. 시연이는 실험 상대로서 딱이다.

"강서율."

갑자기 최지훈이 내게 다가왔다.

"덤벼라 오늘이야 말로 네게 패배의 쓴맛을 알려 주지."

아니, 집착남이 다가왔다.

"승리의 여신은 32번이나 같은 사람에게 웃어 주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해 주지."

나는 몇 번이고 들은 최지훈의 말을 그대로 재현해 냈다.

최지훈이 벙쪘다.

얘도 참 어지간하다.

그렇게 날 이기고 싶을까.

뭐, 그러니까 그렇게 열심히 훈련한 거겠지만.

"좋아. 하자, 대련. 대신 단판으로 하는 걸로 하고······."

잘 생각해 보니, 용안을 실험하기엔 최지훈이 더 안성맞춤이다.

"지는 사람은 이긴 사람한테 형이라고 부르기. 콜?"

덤으로 저 건방진 놈한테 매운 맛을 보여주기도 할 겸.

"······좋다."

최지훈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질 수 없다는 의지가 보인다. 그렇게 형이라고 부르기 싫은가?

"오케이. 그럼 바로 훈련장으로 가자. 예약할 곳이······."

"미리 해뒀다."

"······준비성 좋네? 그럼 가자."

철두철미하네.

"먼저 가라. 위치는 여기다. 나는 잠시 김철진과 얘기 좀 하다 가겠다."

"······오호라. 작전을 짜시겠다?"

"······."

"뭐, 알아서 해. 그럼 우린 먼저 갈게. 가자 지아야, 시연아."

"아, 응."

"응."

나는 손을 적당히 흔들며 교실을 빠져나왔다.

"저, 서율아."

인적이 드문 길목에서 시연이가 나를 불렀다.

"왜?"

"그, 지금 여전히 C랭크 정도인 상태지?"

"마력만 B. 너랑 붙어 있어서 한 랭크 올랐잖아."

몽마족의 특성 '교감'이 적용중이다.

"아. 그랬지."

하시연이 혀를 내밀고 웃었다.

"아무튼, 평균 C랭크라는 거잖아."

"굳이 따지자면? 왜?"

"······그럼 지훈이 이기기 힘들 수도 있어."

시연이의 표정이 꽤나 심각했다.

"지훈이, 마갑이 진화했어."

"······뭐?"

"이름은 안 알려 줘서 모르는데, 아무튼 형태도 바뀌었고, 강도도 한층 진화했어. 나도 못 뚫을 정도로."

"······시연이 네가?"

"아마 빙결여제를 사용하지 않았으면 못 이겼을 거야."

······헐. 그정도라고?

최지훈 갑자기 뭐야.

뭐 불법 도핑이라도 했어?

단절의 투기장도 놀랐는데 뭐 일주일 사이에 마갑을 진화시켜.

"마법 저항력도 한층 강해졌고······ 지금 능력치로는 이기기 힘들 거야. 천변이라도 사용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훈련용 장비로는······."

"음."

틀린 말은 아니다.

만약 최지훈이 마갑을 진화시킨 게 맞다면, C랭크 나부랭이가 뚫을 수 있는 강도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시연이 말대로 천변을 사용할 수 있으면 모르겠지만, 훈련용 무기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B랭크 마력으로 마법을 모조리 퍼부어도 그을음을 내는 게 끝일 테지.

그렇기에 시연이가 저런 말을 하는 것이겠지.

"괜찮아."

"······어?"

하지만 그거, 쓸데없는 걱정이다.

"괜찮다고."

나는 시연이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마갑도 결국 '마력 작용에 의한 하나의 현상'일 뿐이잖아?"

"······그치?"

"그럼 내가 이겨."

나는 속으로 사악하게 웃었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시연아, 오늘 내가 신기한 거 보여 줄게."

자.

최지훈.

조용히 내 '용안'의 제물이 되어라.

< 134화 진척 (1) > 끝

< 135화 진척 (2) >

대련실에서 나와 최지훈은 적당히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작전은 잘 짰어?"

나는 능글맞게 웃으며 물었다.

"글쎄. 굳이 작전이 필요할까 싶더군."

최지훈도 한쪽 입꼬리만 들어 올리며 맞받아쳤다.

오. 자신감.

"그러다 지면 쪽팔려서 어쩌려고 그러냐?"

"그럴 일은 없다."

나는 슬쩍 관람석을 바라봤다.

김철진이 세상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다. 저 표정으로 보건데, 최지훈의 '마갑'이 진화한 건 확실한 것 같다.

······재밌겠네.

"그럼 긴 말할 필요 없이, 바로 시작할까?"

"그래."

우리는 서로 세 걸음씩 물러났다.

"지아야. 카운트 부탁해."

심판을 맡은 지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5!"

카운트가 시작됐다.

나는 훈련용 단검을 살포시 움켜쥐었다. 마력을 상시 발동 상태로 대기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4!"

최지훈의 신체에서 마력이 솟구쳤다. 간간히 봐 왔던 마갑의 마력 유동이었으나, 오늘은 확실히 무언가가 달랐다.

"3!"

최지훈의 신체에 마갑이 씌워지기 시작했다.

투구부터 갑주, 건틀렛에 부츠까지.

1초도 채 되지 않는 시간 사이에 모든 무장을 마쳤다. 확실히 이것만 봐도 굉장한 성장이다.

"2!"

그러나 놀라운 건 장착 속도가 아니었다.

최지훈의 마갑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 것이다.

"······히야."

마갑의 진화형 상위 특성.

[수라마갑]

저 모습을 지금 보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1!"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나는 바로 자세를 잡았다.

긴장을 끌어 올리고, '엘프의 눈'을 활성화하며 '바람의 길'에 신경을 집중했다.

용안은 좀 아껴 두기로 했다.

용안의 실험 전에 저 '수라마갑'의 힘을 직접 내 몸으로 체감해 보고 싶다.

지금의 내가 '템빨'없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알아 볼 겸.

"시작!"

최지훈의 신영이 쏜살처럼 날아왔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다.

바람의 길이 가리키는 궤적을 따라서 단검을 휘둘렀다.

치잉!

쇠와 쇠가 부딪치는 마찰음을 들으며, 나는 몸을 비틀었다.

내 단검에 흘려진 최지훈의 장검이 바닥으로 박혔다.

두 달 전의 최지훈이었다면 여기서 끝이었을 것이다.

"흥!"

내 흘리기를 예상이라도 한듯, 최지훈이 장검을 지지대로 삼아 발차기를 날려 왔다.

후웅-!

상체를 꺾는 것으로 회피.

이어진 주먹과 장검의 연타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회피한다.

동시에 옆구리에 단검을 찔러 넣는다.

강기를 머금은 단검이 최지훈의 옆구리에 정확히 명중했다.

키이이잉-!

"우왓!"

그러나 내 단검은 최지훈의 마갑을 뚫지 못했다.

충격이 팔에 전해져 저릿하다.

나름 신경을 쓴 강기였음에도 작은 흠집을 낸 게 끝이었다.

"소용없다."

최고의 공격 찬스는 최고의 반격 찬스라 하였다.

이 타이밍을 노린 것처럼 최지훈의 마갑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위험하다.

저건 수라마갑의 '수라' 모드 활성화를 알리는 이펙트다.

저 상태에선 모든 '신체 능력치'가 1랭크씩 상승한다.

"큭!"

나는 빠르게 몸을 비틀었다.

파앙-!

검이 공기를 찌르는 파공음이 선연하게 울렸다.

어떻게든 이탈해 보려고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지훈은 자세가 흐트러진 나를 놓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후웅! 후웅!

상승한 신체 능력치와 강인한 방어력을 앞세운 무자비한 연공.

카앙! 치잉!

그 연공에 내 상황은 점점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거, 생각한 것 이상으로 훨씬 빡세잖아!

저번 단체전 때는 어드벤티지 버프를 받고 있는 내가 능력치로 최지훈을 찍어 눌렀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정반대다.

점점 내 균형이 무너지고 있다.

이대로 가면 패배한다!

그럴 순 없지!

나는 빈틈을 노려 마력을 회전시켰다.

화르르르륵!

최지훈의 정수리 위쪽에 생성된 파이어 애로우가 최지훈의 사각을 노리고 떨어져 내렸다.

공격에 온 신경을 쏟고 있는 최지훈은 파이어 애로우를 눈치 채지 못했다.

퍼어어엉-!

좋아!

최지훈의 신체를 중심으로 맹렬한 불길이 피어올랐다.

수라마갑의 방어력을 생각하면 이걸로 끝날 일은 없고.

일단 이 타이밍에 일단 거리를 벌리고 자세를 정비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뒤로 도약하려 할 때였다.

화르르르륵!

불꽃을 뚫고 붉은 건틀릿이 튀어 나와,

턱!

내 오른팔을 정확히 붙잡았다.

"소용없다고 했을 텐데."

불꽃의 중심에서 최지훈의 눈이 더욱 붉게 빛났다.

"이제 도망갈 수 없다."

붙잡은 손을 당겨, 내 몸을 끌어당기는 동시에, 검을 찔러 넣는다.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최지훈에게 팔을 잡히고 있는 이상, 사실상 끝이다.

화염을 뚫고 가까워지는 장검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좀 더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템빨이 없는 지금의 나로서는 이게 한계였나 보다.

어쩔 수 없지.

씨익.

내 입꼬리가 반달처럼 휘었다.

번쩍!

내 눈동자에서 황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용안의 개안이었다.

쩌저저저저적-!

"뭐?"

최지훈의 장검은 내 신체의 3cm앞에 멈춰 섰다.

"······빙결마법?"

지면에서부터 시작된 얼음이 최지훈의 오른손과 장검까지 얼려, 고정시켜 버린 것이다.

"왜 놀라? 기사 못 봤어? 내 특성이 뭔지?"

"모든 속성 사용 가능 특성······."

"잘 아네."

드래곤족의 특성.

용안.

마나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을 지닌 내게 속성 마법의 자유로운 사용 정도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흥. 그게 어쨌다는 거지? 흡!"

쨍그랑!

최지훈이 기합을 넣음과 동시에, 마력이 비산하며 얼음이 깨져 나갔다.

"워!"

빙결이 풀려 휘둘러지는 장검을 피하며, 뒤로 도약했다.

"이야. 시연이랑 많이 싸워 봐서 그런가? 빙결 상태를 푸는 게 굉장히 능숙하네."

"흥. 시연이의 빙결 마법에 비하면 별거 아니었다."

최지훈이 다시금 자세를 잡으며 으르렁댔다.

"음. 인정. 솔직히 시연이에 비해선 별 거 아니지."

나는 솔직히 인정했다.

저 멀리서 시연이가 히죽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탓!

내가 한 눈을 판 틈을 타, 최지훈이 다시 쏜살 같이 날아들었다.

"어딜."

내 마력이 대지에 스며들었다.

쿠우우웅!

동시에 최지훈의 돌격 경로에 대지의 벽이 솟아났다.

콰아아앙-!

"지 속성까지!"

충돌음과 함께 흙먼지가 비산했다. 나는 슬쩍 세 걸음 뒤로 물러섰다.

후웅!

동시에 최지훈의 검이 조금 전 내가 있던 곳을 베어 냈다.

흙먼지에 시야를 잃었어도, 내가 원래 있던 위치를 기억해 두고 공격을 가한 것이다.

"키야~ 진짜 많이 늘었어."

기본기부터가 다르네.

이건 뭐 다른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흥!"

횡 베기가 불러 온 후폭풍이 흙먼지를 날리며, 순간적으로 나와 최지훈 사이에 시야가 열렸다.

최지훈이 곧장 몸을 날렸으나, 소용없었다.

"······이건?"

대지가 뱀처럼 최지훈의 전신을 휘감아, 행동을 방해하고 있었다.

대지의 벽과 같이 시전해 둔 지 속성 마법. '대지의 속박'이 지연 발동되며 최지훈의 신체를 속박한 것이다.

"그건 좀 풀기 힘들 걸? 지 속성의 특성은 '마력의 유동 저하'거든."

"······이 까짓것!"

최지훈의 근육이 팽창했다.

힘으로 풀어 버리려는 생각인 것 같은데. 어림도 없지.

내 눈에서 다시금 황금빛 광채가 빛났다.

쩌저저적-!

속박된 최지훈의 신체 위에 빙결 마법이 덧씌워졌다.

"······크윽."

최지훈의 신체가 완전히 굳었다.

마갑에 의해서 신체 자체는 완벽하게 보호되고 있는 듯하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일 거다.

지 속성 속박 마법으로 마법의 유동을 억누르고, 빙결 마법으로 신체 움직임을 억누른다.

이걸 풀 수 있는 사관생은 몇 없을 거다.

"내가 이겼지?"

"······."

최지훈은 답이 없었다.

어떻게든 속박을 풀어 보려 하는 모양인데, 소용없다.

"그거 못 풀어."

"······."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다.

"쯧."

그러나 이내 납득한 듯, 혀를 찼다.

"내가 이긴 거 맞지?"

나는 싱긋 웃으며 최지훈의 얼굴에 내 얼굴을 가져다 댔다.

그런 내 미소를 바라보며 최지훈도 웃었다.

"······흥. 아직 지진 않았다."

"응?"

"네가 내 '수라마갑'을 뚫지 못하는 이상, 내 패배는 아니다."

"아~ 그러세요?"

나는 다시금 단검에 강기를 씌웠다. 이번엔 '정령의 불길'을 코팅한 마력 연소의 성질을 지닌 강기다.

화르르륵!

반투명한 불꽃을 두른 단검을 최지훈을 향해 내리꽂았다.

카아아앙-!

그러나 내 단검은 최지훈의 수라마갑을 완전히 관통하지 못했다.

그저 절반 정도를 꿰뚫었을 뿐이다.

"워······."

내 강기의 마력량보다 최지훈의 수라마갑의 마력량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었다.

"소용없다. 내 수라마갑은 무적이다."

"그러게. 진짜 단단하긴 더럽게 단단하네."

혀를 내두를 정도다.

"흥.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

그런 날 보며 최지훈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서로 결정타를 입힐 수 없는 이상, 무승부로 끝낼 수밖에 없겠군."

와. 치졸한 거 봐.

"너, 그렇게 나한테 형이라고 부르는 게 싫냐?"

"······."

최지훈은 침묵했다.

그리고 무언은 곧 긍정이라 하였다.

"내가 너한테 꼭 형 소리를 듣고 만다."

이거 오기가 생겨서라도 이겨야겠네.

나는 다시금 정령의 불길을 이용한 강기를 피워 올렸다.

"소용없다고 했을 텐데. 네 마력량으론 내 수라마갑을······."

"닥치고 보고나 있어."

나는 다시 단검을 내리꽂았다.

카아아앙-!

물론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내 단검은 최지훈의 수라마갑을 반 정도만 관통했을 뿐.

"학습능력이 없는 건가? 못 뚫는 다고······."

"아직 안 끝났어."

그러나 여기부터가 진짜다.

나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역산이라고 들어봤어?"

"마법의 발동을 막는 '마녀'의 특성을 말하는 건가?"

S랭크 초인 싱글 넘버 4위. 마녀의 아이덴티티라 볼 수 있는 특성이다.

"맞아. 마법의 발동식을 파악해서 계산, 역으로 시전하는 걸로 마법의 발동 자체를 막는 사기적인 특성이지."

"······그게 어쨌다는 거지?"

최지훈이 의뭉스런 눈으로 날 바라봤다. 나는 픽 웃었다.

"잘 봐. 지금부터 재밌는 구경 시켜 줄 테니까."

마력의 연소 작용에 의해, 허공에 흩날린 수라마갑의 마력 패턴.

단검이 꽂힌 틈새로 보이는 수라마갑의 마력 구조.

그리고 30번이 넘는 대련으로 익숙해진 최지훈의 마력 형질.

용안으로 읽어낸 마력 정보를 기반으로, 수라마갑의 구조를 완전히 분석 해 냈다.

"······8,849개의 마력 패턴이라. 많긴 하네."

성공이다.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나는 조용히 최지훈의 투구에 손을 올렸다.

동시에 마력을 움직였다.

8,849개의 마력 패턴을 끝에서부터 역으로 파훼한다.

생각보다 오래 걸릴 것 같지만, 다행히 최지훈은 움직일 수 없다. 시간은 충분하다.

"너, 설마······."

내가 뭘 하려는 건지 눈치 챈 것일까.

최지훈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좋은 경험 한다고 생각해."

나는 계속해서 마력을 움직였다.

"네가 어디서 역산을 경험해 보겠어?"

다음 순간.

파아아앙!

최지훈의 수라마갑은 산산이 부서져 연기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나는 맨몸이 된 최지훈의 목에다가 단검을 가져다 댔다.

"이러면 내가 이긴 거지?"

"······."

"이제 형이라고 불러야겠네?"

"······."

"형이라고 불러 보렴. 동생아."

최지훈이 똥 씹은 표정으로 와락, 인상을 구겼다.

"혀······."

"형 해 봐, 형."

우쭈쭈.

"혀···를 차라리 잘라 버리겠다!"

아 근데 진짜 치졸하게.

* * *

그날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용안의 전능한 효과에 감탄하며 히히덕대고 있었다.

"크으~ 설마설마했는데 마갑까지 캔슬해 버릴 수 있을 줄은."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리긴 했지만, 그게 어디야.

거기에 모든 속성 마법의 자유로운 사용까지. 과연 드래곤의 눈. 사기도 이런 사기가 없다.

"드래곤족은 이런 눈을 다들 패시브로 달고 다닌다는 거 아니야?"

이런 눈에 더해서 '용언'에 무한에 가까운 마력에 강인한 신체 능력에.

강할 수밖에 없다.

"어후. 벌써 이런 시간이네."

시간을 보니 어느새 자정이 넘었다. 나는 이빨을 닦기 위해 세면실로 향했다.

"음?"

세면실로 향하는 길, 레나의 방이 눈에 들어왔다.

슬쩍 문을 열고 안을 확인했다.

레나를 중심으로 금호, 백호가 잘 뭉쳐서 자고 있다.

나는 조용히 카메라 어플을 켰다. 어머 이건 찍어야 해.

"크~"

이렇게 오늘도 내 힐링 컬렉션이 한 장 늘었다.

그렇게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섰을 때였다.

"왁! 시발! 깜짝이야!"

방 앞에 무언가 검은 게 있어서 비명을 질렀다.

잘 보니 사람이다.

뭐, 뭐야! 적이야? 습격인가!

나는 다급하게 천변을 꺼내 들었다.

"좋은 밤입니다."

"······응?

익숙한 목소리였다.

"허미트?""예."

검은 덩어리, 허미트가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이 반짝이고 있다.

뭔가 존경심이나 경외심 같은 게 느껴지는 것 같은데.

아니, 그보다.

"······너 여기 있어도 괜찮아?"

언노운한테 걸리는 거 아냐?

"시치미 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두 알고 있습니다."

뭘?

"설마 처음부터 여기까지 계산하고 대정령의 맹약을 사용하신 걸 줄은······."

허미트가 깊게 감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감복했습니다."

그런 허미트를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

< 135화 진척 (2) > 끝

< 136화 진척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