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둘러!"
"기름은? 끓인 물과 붕대도 준비해!"
중앙홀은 예상치 못한 소란으로 가득했다. 이솔데는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며 당황했다. 이미 성기사들과 병사, 그리고 관료들이 모여 술렁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요?"
이솔데는 동요하는 관료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
관료는 이솔데를 보고 기겁했다. 그녀는 관료의 반응에 의아해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관료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성기사 베르너가 밀렵꾼들을 찾아갔다가 돌아왔습니다. 영주님 사유지까지 침범하지 않도록 화전민 마을로 경고하러 갔는데, 주민들은 발견하지 못하고 혈흔만 발견했다는군요."
"혈흔이요?"
"예.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닌 듯한 대량의 혈흔인데, 시체는 하나도 없다고...."
관료가 무엇을 암시하는지 깨닫고 이솔데의 얼굴이 싹 굳어졌다.
습격. 대량의 혈흔. 시체가 없는 마을. 변방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흑제국의 '징집'.
관료가 왜 자신을 보고 기겁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백제국의 변방이긴 하지만 흑제국과 제법 떨어진, 게르토니아 제국 영토다. 이런 곳에서 불사 교단의 징집이 일어났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때 아이작이 굳은 표정으로 걸어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보고를 받고 곧장 무장을 차려입은 듯, 머리를 제외하고 갑옷으로 중무장한 상태였다.
"자클렛 용병대장에게 즉시 영지 주변을 정찰하라고 전해라. 순찰대 숫자는 최소 10명 이상으로 하고, 성기사들을 반드시 대동하도록. 사제님들은 성벽에 축성(祝聖)을 부탁드립니다."
그 외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들과 수성을 위한 전략 등, 아이작은 필요한 지시들을 구체적으로 하달했다. 하지만 지시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아이작은 눈을 치켜뜨며 북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뒤늦게 이솔데와 사제, 성기사들도 그가 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반인인 관료들은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싸늘한 기운에 당황했을 뿐이었지만, 성직에 종사하는 이들은 달랐다. 이 찌르는 듯한 한기의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솔데는 강력한 기운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 정도라면 적어도 주교급...?'
일부러 한기를 숨기지 않고 드러낸 것은 선전포고 내지는 알아서 물러나라는 경고의 의미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물러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
특히 아이작은 오히려 이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 차분하게 투지를 불태울 뿐이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다급하게 중앙 홀로 뛰어 들어왔다.
"영주님! 다리 쪽에서 정체불명의 집단이 마을로 오던 상단을 습격했습니다! 상인들이 즉시 도움을 요청해 왔습니다."
"알겠다. 바로...."
아이작은 곧바로 움직이려다가 멈춰 섰다. 뒤늦게 성기사들도 방금 들은 보고 내용을 되새겨 보고 당황했다.
"다리라면 남동쪽 아닙니까? 거기는...."
강력한 한기가 느껴지는 방향과는 정반대였다. 아이작과 이솔데는 이 한기를 보낸 자의 숨겨진 메시지를 깨달았다. 깨지고 싶지 않으면 끼어들지 말라는 뜻이었다. 한기를 보낸 자의 힘이 작지 않은바, 만약 아이작이 수도원을 비우고 상인들을 구하러 가면 영지가 습격당할 수도 있었다.
난처한 순간, 이솔데가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다리 쪽으로 가지요. 성배기사님께서는 주민들을 지키십시오."
91화. 시체들의 밤 (4)
"이단심문관님이요?"
이단심문관의 무력은 조사나 잠입, 암살 쪽에 치중되어 있어 전투 면에서는 성기사보다 못하다. 물론 이솔데는 어지간한 성기사와 맞설 정도는 되지만, 그래도 개인의 무력에 지나지 않는다.
이솔데 역시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성배기사님은 더 많은 주민들을 지키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상인들을 지켜야겠지요."
만약 아이작이 남동쪽으로 움직이면 영지 북서쪽에서 한기를 뿜어내고 있는 정체불명의 적이 영지를 급습할 것이다.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건대, 성기사 한둘로는 대응하기 힘들어 보였다.
아이작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성기사 둘을 붙여드리지요."
귀중한 전력이지만 성채를 끼고 있는 아이작보다는 이솔데에게 무력이 더 필요할 것이다. 이솔데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목된 성기사들과 함께 서둘러 나갔다.
"나머지는 즉시 방어 준비를 시작합시다. 그리고 사제 한 분은 남아서 피난 온 신도들과 함께 구원기도회를 부탁드립니다."
아이작의 지시가 내려지자 모두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격당하는 상황에서 기도회라고 하면 어이가 없게 들리겠지만, 이 세계에서는 기도에 응답이 뒤따른다.
신도들이 구원 요청을 하면 신이든 천사든 아니면 교단의 누군가든 듣고 도와주는 것이다. 실제로 고립된 상황에서 이런 기도를 통해 구원받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상대방은 움직이지 않고 단지 위협 시위를 하고 있을 뿐이지만 최대한 준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한편, 아이작은 안도하고 있었다.
'이솔데가 먼저 나서줘서 다행이군.'
아이작은 이미 불사교단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에이단의 암시뿐만이 아니라 많은 전조와 정황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불사 교단이 많은 노력이 들어간 이 영지를 쉽게 포기할 리도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바로 화로 장인 때문일 것이다.
에이단이 화로 장인에 대한 보호를 부탁한 직후 아이작은 즉시 지힐렛과 헤사벨을 시켜 인근 일대에 수색을 지시했다. 그리고 성역에서 끊임없는 탐색을 통해 조금의 이변도 놓치지 않고 탐지했다.
그 결과, 아이작은 이미 불사 교단의 접근을 예측하고 있었다.
에이단은 조심한다고 조심했겠지만, 그들은 이미 에이단을 추적하고 있었다. 그리고 숨어 있는 화로 장인을 찾을 수 없다고 판단되자 일부러 에이단을 놓아주었다. 그 뒤 화로 장인이 영지에 접근하자 그 틈을 노려 습격을 시작한 것이었다.
'바로 에이단이 소속된 북부 상단의 행렬.'
불사 교단은 화로 장인을 손에 넣기 위해 아이작을 견제할 주력을 이쪽에 두고, 몇 안 되는 상인들과 용병들을 상대할 전력을 상단 쪽으로 보낼 것이다. 아이작은 진작에 이솔데에게 부탁할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소금 의회와 세상의 화로라는 이단 신앙까지 한꺼번에 영지에 들이는 것이 걸렸기 때문이다.
이미 바르바리와 황금 우상까지 영지에 들인 상황에서 한꺼번에 많은 신앙들이 유입되는 것은 쓸데없는 의심의 눈초리를 살수도 있었다.
즉, 아이작은 이솔데까지도 자신과 함께 엮을 생각이었다.
'이용당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당신은 앞으로도 쭉 빛의 법전의 눈가리개가 되어줘야겠어.'
***
기묘한 전조는 어두워진 산 능선 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주민 대피가 이어지는 와중에 수성 준비를 마친 병사들은 산 능선 위에서 기이한 그림자들이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병사들은 그 기이한 움직임을 보며 술렁였다.
"좀비다...."
좀비는 지성이 없는 살아 있는 시체라는 점에서 붉은 성배 클럽에서 만들어 내는 구울과 자주 혼동되곤 하지만, 엄연히 다르다.
일단 구울은 썩지 않는다. 썩어 가는 모습은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붉은 성배는 아름답지 않은 것을 싫어한다.
하지만 불사 교단이 만들어 내는 좀비는 다르다. 좀비는 '완전히' 불사 교단에 입교하기 전에 거치는 중간 과정에 불과하다. 갓 죽은 시체에서 일일이 살점을 벗기고 피를 빼기는 번거로우니 자연스럽게 백골이 될 때까지 좀비로 부려 먹는 것이다.
그렇게 완전히 백골이 된 다음에서야 불사 교단의 개종 자격과 흑제국의 주민이 될 기본 조건이 갖춰진다. 이때에는 이미 돌이킬 방법이 없으니 어지간히 신앙심이 강한 경우가 아니라면 불사 교단에 소속되게 된다.
아이작은 움직이는 좀비 무리를 보면서 사제에게 물었다.
"지하 묘지는 축성이 끝났지요?"
"예. 움직일 수 있는 시체는 없습니다."
백제국에서 시체는 주로 화장하곤 했다. 정신 나간 흑제국의 사제가 '징집'해가는 경우를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간혹 피치 못할 사정으로 시체를 태우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럴 때에는 입안에 돌을 물려 두고 단단한 석관에 봉한 뒤 지하 묘지에 안치했다.
좀비 무리는 느리게 성 주변으로 다가왔다. 기이하게만 보이던 실루엣은 가까이 다가오자 달빛 아래 제대로 된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어떻게 죽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모습이었다. 가끔은 그 원인이 된 무기를 이제 자기가 들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역겨운 불사 교단 놈들...."
병사들은 그 처참한 모습에 분개하며 중얼거렸다. 물론 저들 중 대부분은 바르바리거나 이교도인 화전민 출신이겠지만, 저들의 모습에서 자신이나 가족의 모습을 투영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내심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 불사 교단으로 개종한 사람들의 삶의 만족도는 나쁘지 않은 것 같던데....'
흑제국의 주민이 되기만 하면 이성도 돌아오고, 기아나 병마에 대한 고통도 없이 살 수 있다.
그것이 과연 삶인가에 대해 고찰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긴 하겠지만, 먹고 사는 문제만 해결되면 세상 고민의 대부분은 해결되는 법이다. 남은 긴 시간은 정서적 충족감을 채우며 살면 되는 것이다.
물론 지금 당장은 불사 교단에 대한 분노가 필요한 시점이었기에 그 사실에 대해 굳이 말할 생각은 없었다.
좀비들은 제법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와 성채를 포위했다. 예상대로 마을을 약탈하거나 불태우는 놈들은 없었다.
놈들의 포위망이 어느 정도 갖춰졌을 때, 좀비 무리 중 한 놈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원래 밀렵꾼이었던 건지 사냥꾼 복장에 덩치가 큰 사내였다.
"칵!"
놈은 거하게 피 기침을 한번 토하더니 목을 기괴하게 꺾었다. 그리곤 이상한 자세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결국 구원병을 보냈더군요. 생각보다 여유가 있으십니까?"
그로테스크한 외모와는 달리 기품있는 말투였다.
아이작은 이 좀비 무리를 조종하는 불사 교단의 사제가 이 사냥꾼을 통해서 목소리를 전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역시 신중한 놈이야.'
성역을 통해서도 놈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기운을 숨기는 방식은 신앙마다 다양하니, 모종의 방법을 통해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이작이 대답하지 않자 사냥꾼은 다시 헛기침을 했다.
"저희는 여러분께 용무가 있어서 온 것이 아닙니다. 굳이 빛의 법전 사제나 성기사들을 해치고 싶지 않으니, 아까 성 밖으로 나간 분들이 돌아가도록 지시해주신다면 여러분은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개소리 집어치워, 이 썩다 만 놈아!"
성기사 한 명이 꽤 거친 어조로 욕설과 함께 쏘아붙였다. 품위 있는 태도와 정숙한 말투를 지켜야 한다는 규칙은 불사 교단을 상대로 할 때에는 해당 사항이 없는 모양이다. 사냥꾼은 성기사를 가만히 응시했다.
"성기사 안셀. 거친 태도로 두려움을 숨기고 있군요. 네 자루의 창을 주의하십시오."
대뜸 이름을 불린 성기사 안셀은 숨을 헉 들이켰다.
아이작은 혀를 찼다.
'역시 보통 놈이 아니군.'
방금 그 말로 상대방이 역시나 보통 직급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이름을 확인했다는 건 죽을 자의 명부를 읽을 수 있다는 건데. 설마 진짜 주교급인가?'
죽을 자의 명부는 불사 교단 특유의 예지 능력이다. 상대방이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있는 능력인데, 그 시기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정확해졌다. 네 자루의 창 어쩌고 하는 걸 보니 만약 전투가 벌어지면 성기사 안셀은 죽을 확률이 높았다.
단지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사기를─게임에선 수치적이었으나 이젠 '진짜'인─ 쫙쫙 떨어뜨렸기 때문에 악명 높은 능력으로 소문나 있었다.
안셀이 몸을 조금씩 떨기 시작하자, 아이작이 그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헛소리에 일일이 귀 기울이지 마십시오. 그냥 헛소리를 떠드는 경우도 많습니다."
아이작이 그렇게 말하자 안셀은 눈에 띄게 안도하듯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이작 말대로 불사 교단 사제들은 되는대로 떠드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어차피 확인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사기를 떨어뜨리기에는 좋은 방법이었으니까.
사냥꾼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당신이군요. 이름난 성배기사 아이작.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사냥꾼은 과장된 동작으로 허리 숙여 인사했다. 기괴하게 꺾인 목이 달랑거렸다. 아이작은 화살이 닿을만한 거리라는 것을 확인하고 사격을 지시할까 했지만, 벌벌 떨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고 그만두기로 했다.
성배기사의 병사니 어쩌니 해도 이들의 근본은 변방 촌뜨기다. 불사 교단에 대한 혐오만큼이나 두려움도 컸다. 괜한 명령을 했다가 항명이라도 나왔다간 그대로 붕괴될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사기를 높여야겠군.'
아이작은 곁에 있던 베르너에게 지시를 속삭였다. 베르너는 그 지시를 듣고 흠칫했지만 아이작의 지시에 의문을 표하지는 않았다. 그는 즉시 성벽 아래쪽 어딘가로 향했다.
지시를 내린 아이작은 대범하게 성벽 위로 올라갔다.
"성배기사님!"
곁에 있던 병사들이 기겁하며 아이작을 말리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아이작은 성벽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사냥꾼과 좀비 무리들을 내려다보았다. 활을 가진 놈도 있었지만 상대가 배짱을 보여 준다면 이쪽도 비슷한 배짱을 보여 줘야 했다.
"불쌍한 사람들을 희생시켜 조잡한 무리를 만들었구나, 잔반통 같은 사제야!"
"잔반통?"
사냥꾼이 생소한 비유에 의아한 듯 묻자 아이작이 대답했다.
"구더기가 만찬을 즐긴 잔반만 남은 놈이니 잔반통 아닌가."
푸흡. 성벽 어디선가 웃음이 흘러나왔다.
사실 아이작은 그다지 재미없는 농담이라고 생각했지만, 병사들에게는 그 사소한 여유가 필요했다. 팽팽하게 긴장된 상황에서 아이작이 던진 말 한마디는 병사들에게 여유를 되찾아주었다.
"화전민과 밀렵꾼, 그리고 방랑객 몇 명 쥐어짜 만든 잡탕으로 이사크레아 수도원을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그 불쌍한 사람들의 시신으로 어떻게 공성전을 하려고? 성벽에 몸통 박치기라도 할 건가?"
아이작의 지적에 병사들도 냉정을 찾고 좀비들을 볼 수 있었다. 좀비들의 기괴한 몰골은 생리적인 거부감을 안겨 주었지만, 그들은 질긴 내구력을 가지고 있을 뿐 일반인보다도 느린데다 제대로 된 장비조차 없었다.
"댁들의 조잡한 마을을 불태우고 우물에 시체를 빠뜨릴 수는 있지요."
사냥꾼은 아이작의 말에 협박으로 대응했다. 확실히 아이작이 성에만 틀어박힌다면 아이작이 기껏 자리 잡은 영지가 못 쓸 꼴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할 수 있으면 해보든가."
아이작은 스산한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사냥꾼이 그 미소에 의아함을 느낀 순간, 아이작의 손이 위로 올라갔다가 단숨에 내려갔다.
"발사!"
신호를 받은 누군가의 외침과 동시에, 화살들이 좀비 무리들을 향해 가득 발사되었다. 화살은 성벽에서 발사되지 않았다. 마을 쪽에서 발사되고 있었다.
"저 썩다 만 것들을 마저 묻어줘라!"
자클렛이 용병으로 고용된 바르바리들과 함께 마을 건물들에 매복하고 있다가 동시에 공격을 시작한 것이었다. 마을 주민들이 성벽 안쪽으로 대피를 시작했을 때, 그들은 함께 돌아가지 않았다. 바르바리들은 되레 마을에 남아 매복을 준비 중이었다.
화르르르륵. 송진을 바른 불화살이 타오르며 좀비들에게 옮겨붙었다. 순식간에 좀비 수십여 구가 불타오르기 시작했지만, 사냥꾼은 비웃을 뿐이었다.
"고작 이따위 매복을 믿고 교만하게 군 건가?"
그가 보기에는 매복 따위는 성벽의 이점을 포기하고 나와서 자발적으로 좀비들의 이빨 앞에 살점을 내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허름한 나무집 따위는 좀비 군세가 밀어붙이면 무너질 꼴이었다.
그러나 그가 좀비들에게 공격을 지시하려 했을 때, 이사크레아 수도원의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성벽 문을 연 순간 아이작을 선두로 성기사들과 기마병들이 일제히 돌격해 뛰쳐나왔다. 심지어 그 뒤로 병사들까지 몰려나오고 있었다.
"뭐?"
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에 사냥꾼이 당황한 순간, 이미 아이작은 이 죽음의 군세에 대한 공략에 마무리를 짓고 있었다.
진짜 매복은 외부가 아닌, 바로 놈들의 내부에 있었다.
이미 수십 일 전부터 창궐하기 시작한 파리와 지네, 구더기의 무리가 좀비들의 몸 안에서 만찬을 벌이기 시작했다.
92화. 시체들의 밤 (5)
콰드드드드득!
최전열에 선 기마병들이 일제히 좀비 군세에 부딪친 순간, 뼈가 부러지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벽을 둘러싸고 있던 좀비 군세는 십여 마리의 기마병들과 성기사들의 돌격에 단숨에 무너졌다. 최전열에 아이작과 성기사들이 선 덕분이었다. 단숨에 찢어지는 좀비 무리의 모습에 병사들의 사기가 치솟았다.
"모조리 죽여!"
언데드를 상대로 하는 말로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더 마땅한 구호도 찾을 수 없었다. 병사들은 축성을 받은 창을 꼬나쥐고 쓰러지거나 다가오는 좀비들을 찔러 쓰러뜨렸다. 뒤늦게 좀비들이 포위망을 좁혀 성 밖으로 뛰쳐나온 병사들을 공격하려 해도 마을 쪽에서 공격하는 자클렛의 용병들 때문에 쉽지 않았다.
"불사 교단 놈들, 약하잖아!"
'그야 그렇겠지.'
한 병사의 외침에 아이작은 속으로 생각했다.
좀비들은 불사 교단의 전력으로 쳐주기도 힘든 최하층 계급이다. 살점을 완전히 버리기 전까지는 화살받이나 해자를 메우는 임시용으로 쓰일 정도다. 하지만 최약체로 이루어진 군세라곤 해도 변방 영지의 급조한 전력에게 당할 정도는 아니다.
좀비도 이 정도 숫자가 모이면 질량만으로도 무서운 병종이 된다. 스켈레톤과 달리 좀비는 무거우니까.
하지만 지금 그 살거죽 아래 담긴 것은 썩은 살이 아니라 구더기와 개미, 파리들이다.
'불사 교단의 사제 놈, 지금쯤 당황했겠군.'
놈들이 이렇게 쉽게 당하는 이유는 살점이 허무할 정도로 무르고 푸석하게 부서져 내리기 때문이었다. 좀비 안에 잠복해 있던 구더기들이 일제히 활동을 시작하자, 놈들은 걷는 충격만으로도 부서지고 있었다.
하필 아이작이 의식을 진행 중이던 영지에 쳐들어온 것이 놈들의 패착이 되었다.
"함부로 전열을 무너뜨리지 말고 동료의 위치를 항상 파악해라! 빈틈 생기면 바로 옆구리 터지는 거야!"
그 와중에도 병사장들은 쉼 없이 지시를 내렸다. 아이작이 몇 번이고 당부한 것이 절대로 전열을 무너뜨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좀비 군세가 허무하게 무너져 내릴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난다고 흩어진 좀비들을 쫓아갔다간 수적으로 열세인 병사들은 단숨에 물어뜯긴다. 그리곤 좀비로 다시 새롭게 탄생할 것이다.
이번에는 구더기도 없고 튼튼한 새삥으로.
몇 번 신병인 듯한 병사가 느려터진 좀비를 찌르려고 앞으로 나섰다가 뒤통수를 두들겨 맞고 끌려 오는 일이 반복되고서야 비슷한 일이 사라졌다.
기병대와 성기사들이 종횡무진 좀비들을 찢어 놓고, 병사들이 머리만 곤죽을 내 마무리하는 것이 반복되었다.
***
성기사 안셀은 지금 벌어지는 일을 믿을 수 없었다. 경험이 풍부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불사 교단과 싸워본 적이 있었다. 좀비가 이 정도로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사제의 축성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뛰는 가슴으로 아이작의 등을 바라보았다.
'저분 덕분인가? 성배기사님의 권능 앞에 적들이 이렇게 쉽게 자멸하는 건가?'
그의 눈에는 마치 아이작의 권위 앞에서 좀비들이 스스로 무너져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불사 교단의 사제로부터 죽음을 예언 받고, 그 뒤 성벽 밖으로 돌격하겠다는 아이작의 지시를 들었을 때 그는 아이작의 정신을 의심했다. 좀비들만으로는 성을 공략할 수 없다. 그런데 성벽의 이점을 버리고 자발적으로 뛰쳐나가겠다고?
하지만 지금 벌어지는 일방적인 학살은 전투라기보다 추수에 가까웠다. 안셀은 죽음을 예언 받은 것마저 잊어버리고 열정적으로 환호하며 좀비들을 썰어 버렸다.
"성배기사 만세!"
그때 한기가 훅 밀어닥쳤다.
안셀은 자신의 옆구리 쪽으로 창날이 날카롭게 날아드는 것을 뒤늦게 포착했다. 좀비가 이렇게 빠를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대응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순간, 무언가 뱀처럼 그 창날을 잡아챘다.
아이작이었다.
창날에 맞부딪친 루앗딘 열쇠가 환하게 불타오르며 창을 튕겨 냈다. 안셀은 뒤늦게 창날에 닿았던 갑옷이 구멍 나기 직전이었으며, 주변이 시커멓게 변색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괜찮습니까?"
"또, 또 제 목숨을...."
'사실 미끼로 쓴 거긴 한데.'
아이작은 불사 교단이 안셀을 노릴 것을 예상하고 미리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불사 교단 사제 놈은 어떻게든 다시 이쪽의 사기를 꺾으려 시도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이작은 쓰러뜨리기 어려울 테니, 바로 다음인 성기사, 그중에서도 죽음을 예언받은 안셀을 노린 것이다.
죽음을 예언받은 자가 예언대로 죽는다면 병사들도 공포에 질릴 테니까.
하지만 아이작은 그것을 막았다.
예언이 진짜이든 아니든, 병사들의 눈엔 아이작이 운명을 꺾어 버린 것으로 보였다.
'즉, 이제 놈의 수작은 정반대 효과가 됐다는 거지.'
아이작이 안셀을 구하는 것을 본 성기사들과 기마병의 사기가 다시 치솟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다시 기마병들을 끌고 바로 말을 돌려 달려가기 시작했다.
창이 날아든 곳이었다. 좀비 떼 사이에 유독 크고 시커먼 옷을 입어 눈에 띄지 않는 놈들이 있었다. 놈들은 또 창 한 자루를 집어 들더니 아이작을 향해 집어 던졌다.
창 주변에 시커먼 기운이 서렸다.
'불사 투창병.'
아이작은 차분하게 놈들의 정체를 파악하며 날아드는 창날을 응시했다. 아이작은 날아드는 창을 피하는 대신 루앗딘 열쇠로 쳐냈다.
불사 투창병은 불사 교단의 성기사인 데스나이트와 비견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죽음의 기적을 담은 창을 던질 수 있었다. 그 기적에는 강력한 관통력과 저주는 물론, 표적을 추적하는 유도 기능까지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쳐내기가 쉬웠다.
이 창은 피해도 다시 방향을 틀어 날아온다. 그러니 피할 바에야 대응할 수 있는 기적으로 불태워야 했다. 루앗딘 열쇠는 죽음의 기적을 깨뜨릴 수 있는 간단한 수단이었다.
만약 불사 교단의 주도로 공성전이 시작되었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저 창에 죽었을 것이다. 놈들이 이 좀비 군세의 진짜 전력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몸은 평범한 스켈레톤... 이른바 유리 대포지.'
아이작은 순식간에 돌격해 칼조차 휘두르지 않고 불사 투창병들을 짓밟았다. 아이작이 파악한 불사 투창병들의 숫자는 대략 10여 기. 예상대로 백제국의 영역인 이곳에 많은 정예 병력을 데려오지는 못했다.
아이작은 불사 투창병들을 모조리 짓밟고 부수며 쓰러뜨렸다.
물론 불사의 언데드 군단인 놈들은 달그락거리며 몸을 수복시키려 했지만 성기사들이 뒤따라와 축복받은 무기로 불태우면서 끝장났다.
'이분은 정말 신께서 보내신 분인가?'
손쉽게 적들을 거꾸러뜨리는 아이작을 보면서 성기사들은 선망의 눈으로 아이작의 등을 바라보았다.
이제 아이작의 목표는 불사 교단의 사제가 몸을 빌린 사냥꾼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사냥꾼은 쉽게 당해 줄 생각이 없다는 듯 몸을 기괴하게 비틀었다. 살과 관절을 찢고 그 안에서 거대하고 긴 뼈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치 각다귀처럼 기형적으로 팔다리가 긴 해골의 기괴한 모습에 보는 모두가 전율했다.
그들의 마음속에 다시 두려움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때, 홀로 보란 듯이 환한 빛과 함께 달려가는 사람이 있었다.
불타오르는 루앗된 열쇠를 들고 달려가는 아이작은 마치 어두운 무대 위에서 홀로 조명을 받는 것 같았다. 아이작은 성기사들이 뒤를 따르든 말든 홀로 말을 몰아붙이며 달려갔다. 아니, 성기사들과 기마병들이 따라잡으려 해도 따라잡기 힘들 정도였다.
마치 빛줄기가 쏘아져 나가는 것 같았다.
아직 일어나지 못한 해골 거인은 아이작을 걷어 내려는 듯 팔을 휘둘렀다. 아이작은 말 위에서 칼을 휘둘렀다.
여덟 갈래의 섬광이 순식간에 해골 거인을 도륙했다. 말의 무게와 속도가 더해진 상급 검술은 더 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사람들의 눈은 루앗딘 열쇠가 현란하게 불타오르며 번뜩거리는 것밖에 볼 수 없었다. 이어 뼈가 타들어 가면서 피어오른 매캐한 연기가 아이작의 모습을 가렸다.
"저기!"
한 눈 좋은 병사가 연기 밖을 가리켰다. 아이작이 말을 타고 연기 밖으로 뛰쳐나오고 있었다. 아이작은 상처 하나 없는 모습으로 다시 말을 틀어 진로를 바꾸고 있었다. 반면, 해골 거인은 부서진 팔과 다리로 일어서지 못한 채 허우적거렸다.
놈은 고개를 돌려 아이작을 보려 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해골 거인을 다시 돌아보지도 않았다. 대신 다른 곳으로 달려갔다.
해골 거인은 다시 일어나려 했지만,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성기사들이 놈의 코앞으로 들이닥쳤다.
***
콰드드득, 쿵!
마디마디가 끊어진 해골 거인이 무너진 뒤, 남은 잔존 좀비들을 제압하는 것은 청소에 가까운 간단한 작업이었다. 불사 교단의 사제는 지휘할 의지마저 잃어버린 듯 좀비들은 통일감 없이 여기저기 헤매고 다닐 뿐이었다.
"쓸데없이 상처를 주지 말고 머리만 노려서 쓰러뜨려라! 불사 교단 놈들에게 무고하게 희생된 자들일 뿐이니 시신을 수습해야 한다!"
여유가 생긴 베르너는 병사들에게 시체를 최대한 손상시키지 않도록 지시하며 움직였다. 원래대로라면 어차피 태울 것이고, 바르바리에 불과한 화전민들의 머리가 날아간 시체이니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바르바리에게도 친절을 베풀고 영지에 들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이번 전투에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성 밖에서 매복 공격까지 했다.
베르너는 문득 좀비들을 정리하던 자클렛과 눈이 마주쳤다. 이때까지 자클렛을 볼 때마다 경멸감을 숨기지 않았던 베르너는 기묘한 감정 속에 가볍게 묵례했다.
자클렛은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고개를 숙여 묵례를 받아 주었다.
'성배기사님이 날 이상하게 만드신 것 같군.'
사소한 변화지만 아이작은 이 영지에 있는 모두에게 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베르너는 그게 결코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아이작! 아이작! 아이작!"
승리가 확실해지자 여기저기서 환호와 함께 아이작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언뜻 봐도 압승이었다.
수백 구에 이르렀던 좀비 군세는 전멸한 반면, 이사크레아 영지 쪽에는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었다. 부상당한 자들이 몇 명 있긴 했지만 본인 실수나 아군 오사로 인한 경상 정도였다. 사제의 치료를 받는다면 문제가 될 부상이 아니었다.
"베르너 형제님!"
열렬한 환호 속에서 성기사 안셀이 말을 타고 베르너에게 다가왔다. 죽음의 예언에서 살아남은 그는 이번 승리의 상징 중 하나이기도 했다.
"성배기사님은 어디 계십니까? 이건 대승입니다! 이런 영광을 누릴 분이 가운데 계셔야지요!"
"형제님과 함께 계시던 것 아니었습니까?"
베르너는 당황하며 되물었다.
그러고 보니 해골 거인을 거꾸러뜨린 뒤 아이작을 본 사람이 없었다. 이미 해골 거인이 무너진 시점에서 위협이 될 만한 적들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기 때문에 문제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베르너와 안셀 사이에 당혹스러운 눈빛이 오가던 순간, 그들은 미처 잊고 있던 또 다른 사람들을 떠올렸다.
"다리! 성배기사님은 이단심문관님을 도우러 다리로 가신 겁니다!"
그제야 그들은 황급히 말을 다시 달리게 시작했다. 환호하던 병사들은 다급하게 움직이는 성기사들을 보고 당황했지만, 성기사들은 설명할 생각도 없이 말을 달렸다.
그들의 가슴에는 오로지 아이작에 대한 존경심이 가득할 뿐이었다.
'이런 험한 전투 직후에 승리의 영광조차 누리지 않고, 바로 다른 사람들을 도우러 가다니. 대체 이분은....'
***
사실 아이작의 관심은 애초부터 좀비 군세 쪽에 있지도 않았다.
처음 사냥꾼과 대화한 직후 아이작이 깨달은 것은 불사 교단 사제가 다리 쪽, 바로 화로 장인 쪽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후 아이작의 모든 관심은 이솔데가 먼저 출발한 지원군 쪽으로 쏠려 있었다.
'이 고생을 하고 알맹이를 놓칠 수는 없지!'
93화. 해방주교 (1)
아이작이 무리해서 돌격해 튀어나갔던 것도 서둘러 성 주변을 정리하고 화로 장인을 지원하러 가기 위해서였다.
'헤사벨, 아직 못 찾았나?'
'아직이요. 잘 숨어있군요.'
아이작은 지원군으로 이솔데만이 아니라 헤사벨을 먼저 보내 둔 상태였다. 밤은 헤사벨의 주 무대였고, 암살은 그녀의 주특기였다. 그녀는 이솔데보다도 먼저 북부 상단의 행렬 주변을 탐색하며 불사 교단 측 핵심으로 추정되는 사제를 찾고 있었다.
틈틈이 상단을 공격하는 언데드들의 목을 분리시키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목표인 사제는 찾지 못한 상태였다.
'지힐렛, 상황은?'
지힐렛은 대답을 하는 대신 감각을 열어 아이작과 공유했다. 아이작의 소환수나 다름없는 지힐렛은 '벽 속의 쥐' 능력으로 감각을 공유할 수 있었다. 벡스터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이솔데와 함께 지원군으로 파견된 지힐렛은 치열하게 전투 중이었다.
이솔데가 불러낸 아궁이 짐승이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덕분에 상황이 어떤지 잘 알 수 있었다.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니군.'
성을 포위한 좀비들보다는 수가 적었지만 나름 정예라고 할 수 있는 스켈레톤 병사들이 다수 보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데스나이트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과 북부 상단이 타고 온 마차가 평범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뭐야, 저게?'
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가까이 다가간 스켈레톤 병사 하나가 감전이라도 된 듯 경직되었다가 북부 상단 상인이 휘두른 시미터에 박살 났다.
아마 화로 장인이 발휘하고 있는 솜씨로 보였다.
저 능력 때문에 버티고 있는 것 같긴 했지만, 능력을 무한정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불사 교단의 사제도 영주성의 전투 결과를 확인했을 테니 서둘러 돌파할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그때 헤사벨로부터 기다리던 정보가 전해져 왔다.
'찾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겼지?'
'검은 로브, 황금색 영대, 해골 등불, 화톳불 앞.'
아이작의 눈에 번뜩였다. 놈이 누군지 바로 알아차린 것이다.
'해방주교 알 두아자드.'
원작 게임에서도 워낙에 유명한 NPC라서 모를 수가 없었다. 아이작의 지식에 호응하듯 이름 없는 혼돈으로부터 메시지가 전해져 왔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이 해방주교 '알 두아자드'를 처치하길 원합니다.]
[혼돈의 포상이 당신을 기다립니다.]
***
"조금만 더 버티십시오! 버티면 이길 수 있습니다!"
"버티는 걸로는 안 됩니다! 돌파해야 합니다!"
지원군으로 도착한 이솔데는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처음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놀라고 두려워하고 있을 상인들을 어떻게 달래서 구출할지 걱정이 가득했다. 쉽지 않은 전투가 될 것이 분명했기에 극단적인 상황도 각오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자 상황은 그녀가 상상한 것과 달랐다.
상인들이 너무 잘 막아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다리 한복판에서 마차를 중심으로 좁혀 오는 언데드 군세를 막아 내고 있었다. 이상한 형태의 마차가 이따금 기묘한 파동을 일으킬 때마다 불사 교단의 언데드들은 비틀거리며 움직이지 못했다. 게다가 단순한 상인들로 알고 왔던 사람들은 전원 우락부락한 구릿빛 피부에 날폭이 넓은 시미터를 자기 손발처럼 다뤘다.
유약한 인상에 진짜 상인처럼 보이는 에이단이라는 남자마저 양손에 시미터를 들고 능수능란하게 싸우고 있었다.
'소금 의회 사공들이 왜 이런 내륙까지 와 있는 거지?'
이솔데는 이단심문관답게 그들이 평범한 상인이 아닌 소금 의회 신도들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이솔데는 그걸 따질 틈도 없었다. 그보다는 살아남을 방법을 찾는 게 더 시급했다. 그들이 의외로 잘 막아내고 있다 해도 적들의 수는 압도적이었다. 거기다 언제 고위급 언데드가 나타날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다리를 벗어나면 저 언데드 군세를 어떻게 상대하란 말입니까?! 해가 뜰 때까지 버텨야 합니다!"
"지금 수도원 쪽은 버티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상황이라고! 제가 활로를 뚫어볼 테니 영주성 쪽의 전력과 합류하는 것이 맞습니다!"
아직 이사크레아 수도원의 압승을 알지 못하는 이솔데는 돌파 후 아이작과 합류하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보았다. 반면 에이단은 다리 위에서 해가 뜰 때까지 버티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작 님은 왜 안 오십니까?!"
에이단이 절박하게 외쳤다.
아이작은 수도원장이자 영주다. 자기 주민들을 먼저 지키는 게 당연하다. 상인들을 구하러 튀어나오라고? 물론 에이단은 보호를 약속받았으니 말한 것이지만, 사정을 모르는 이솔데는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어느 쪽이든 의견이 통일되는 것이 좋겠지만, 사실 어느 쪽이든 버거운 상황이었다. 이솔데는 사실 이대로 돌파하는 것이 어렵다고 보았고, 에이단 역시 해가 뜰 때까지 살아남기는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이지 못했다.
"최소한 성에서 지원군이 올 때까지라도 버텨야 합니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못 해요!"
에이단의 말에 이솔데도 이번만큼은 수긍했다. 다리 위라는 지리적 이점을 포기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이솔데는 기껏 구원을 나오고도 크게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자신에게 자괴감을 느꼈다.
'아이작이 차라리 이 자리에 있었다면....'
물론 아이작은 더 많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수도원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아이작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분명 자신보다는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았으리란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에이단 역시 자신이 구원군으로 도착했을 때 노골적으로 실망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퉁. 그때 마차에서 다시 한번 파동이 전해져 왔다. 이솔데는 아주 약간의 이질감을 느낀 것 외에는 별다른 것을 느끼지 못했지만, 다리 건너편에서 어슬렁대는 스켈레톤 병사들은 북부 상단의 상인들과 싸우다가 움찔거리며 멈춰 섰다. 상인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머리통을 깨부쉈다.
이 마차가 발휘하는 파동은 기적이 분명했다. 보통 사람들에겐 들리지 않는 초저주파의 진동이 정확히 특정한 대상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면 설명되지 않는다. 이솔데는 이단의 기적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데 있었다.
'파동의 간격이 아까보다 길어지고 있어.'
기적을 계속 쓸 수는 없을 테니 역시 돌파해 활로를 찾는 것이 옳았다. 이대로는 포위당한 채 몰살당할 뿐이다. 어떻게든 성 근처까지 간다면 지원군이 도울 것이다.
이솔데는 이를 악물었다.
"제가 앞장설 테니 모두들 제 뒤를...."
쿠구구구구궁.
그때, 산 쪽에서 어둠조차 떨게 만드는 거대한 진동이 느껴졌다. 이솔데는 산 쪽에서 먼지가 피어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늘어선 나무들 사이로, 불타오르는 검신을 발견했다. 그녀는 검의 주인이 누군지 바로 알아차렸다.
"아이작...!"
***
불사 교단은 사람의 영혼이 육신에 갇혀 있다고 믿으며, 이를 '해방'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육신이 있기 때문에 생로병사의 고통이 생기고, 그로 인해 빈부격차와 차별, 갈등이 생긴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실제로 언데드가 된 자들은 딱히 외형이 크게 구분되지도, 생로병사에 고통받지도 않으니 얼핏 듣기에 그럴싸하게 들리는 논리다.
그러나 주장과는 모순되게도, 불사 교단 내부에도 빈부격차나 차별이 없진 않았다. 그쪽도 살점만 없을 뿐 결국 사람 사는 곳이니까.
하지만 그보다는 '해방'에 대한 논리로 불사 교단 안에서 온건파와 과격파가 나뉘곤 했다.
온건파는 어차피 기다리고 있으면 점점 해방되는 사람도 늘어나는 거 아닌가? 라고 생각하지만, 과격파는 좀 더 적극적으로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해방주교'는 과격파 쪽에 속하는 이들로 불사 교단의 영역 밖에 직접 나가 '해방' 작업을 진행하는 자들이었다.
약간 과격한 방식의 전도사라고 볼 수도 있었다.
당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단순한 테러리스트지만, 흑제국 입장에서는 인구수를 꾸준히 불릴 필요가 있기 때문에 해방주교의 난동을 일부러 방치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련한 해방주교 알 두아자드는 이번 작전에서 미미한 짜증을 느끼고 있었다.
'하필 성배기사와 엮여서.'
해방주교인 그가 노리는 주된 타겟은 바르바리나 보호받지 못하는 변방의 주민들이다. 불사 교단은 빛의 법전과 적대 관계지만 그렇다고 마주치자마자 머리채 쥐어뜯고 싸우진 않는다.
외교 문제로 비화하기에 십상이니까.
알 두아자드에게는 '시민 해방'이 가장 중요했다. 괜히 백제국 영역 안에서 빛의 법전과 시비가 붙었다가 성기사들에게 쫓기기라도 하면 기껏 만든 해방구를 잃게 된다.
그래서 알 두아자드는 처음부터 이 작전이 내키지 않았다.
수도원, 그것도 요즘 한참 잘나간다는 성배기사가 비호하는 영지를 건드린다니?
하지만 알 두아자드는 그 명령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불사황제 베셰크, 그가 모시는 신으로부터 직접 내려온 명령이었기 때문이었다.
'화로 장인만 확보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원래대로라면 손쉽게 확보할 수 있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이단심문관과 성기사들이 난입하면서 난처해졌다. 물론 해방주교인 그에게는 당장이라도 저들을 몰살시킬 힘이 있었다. 하지만 화로 장인의 안전까진 담보할 수 없는 데다, 성기사와 이단심문관이 떼죽음을 당하기라도 하면 빛의 법전 쪽에서 난리가 날 것이 분명했다.
그 상황에서 영주성에 보낸 좀비 군세마저 박살 나자 그는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안 되겠군. 직접 나서야겠어.'
성배기사가 승리의 여운과 피해 파악에 조금이라도 시간을 빼앗기길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그때, 화톳불 앞에서 일어선 알 두아자드의 감각에 무언가 포착되었다. 빠르고 강한, 그리고 공포와 파괴의 힘으로 가득한 무언가.
그의 두개골이 돌아간 순간 눈앞의 세계가 찢어졌다.
콰드드드드득!
하늘에서 어둠을 찢어발기며 나타난 거대한 촉수가 화톳불과 함께 알 두아자드를 함께 휩쓸어 버렸다. 마치 빗자루질하듯 산기슭을 긁어 버린 굵은 아름드리나무만 한 크기의 촉수는 잔해를 씹어 삼키며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 폐허 위로 아이작이 탄 말이 달려왔다.
아이작은 처참한 상흔을 보면서도 긴장을 놓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음 순간, 그는 섬뜩한 기운을 느끼고 몸을 강하게 틀었다. 아무런 소리도 효과도 보이지 않았지만, 차가운 손이 아이작의 심장을 움켜쥐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이작의 말은 신음이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허물어져 쓰러졌다.
아이작은 재빨리 말에서 뛰어내렸지만 말이 그 자리에서 죽은 것을 보고 눈을 치켜떴다.
"초면에 즉사 저주? 경우가 없는 놈이군."
아이작은 루앗딘 열쇠를 들어 올리며 주변을 밝혔다.
주변이 은은하게 밝아지면서 파랗게 불타오르는 실루엣이 드러났다. 헤사벨이 말한 대로 검은 로브에 황금색 영대를 목에 두른 리치(Lich)였다. 놈은 한쪽 손에 자기 머리를 마치 등불처럼 들고 아이작을 쏘아보고 있었다.
아이작은 알 두아자드의 황금색 영대에 검은 무늬 하나가 타들어 가는 것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한편 알 두아자드는 어이가 없는 것을 넘어 경악하고 있었다.
'즉사 저주를 피해? 그것도 어디서 쏜 건지도 모르는걸?'
알 두아자드는 방금 자신을 휩쓸어 버린 공격의 정체를 짐작조차 못 하고 있었다. 빛의 법전 기적이 아니라는 것만 확실할 뿐, 무엇을 소환한 건지 아니면 일회성 기적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다만 그 공격을 가까스로 회피한 순간 죽음을 위장하고 아이작에게 기습을 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가 가진 가장 강한 저주를 회피하고 비웃기까지 하고 있었다.
"초면에 보자마자 제일 센 능력으로 후려갈겨서 승부를 본다는 계획은 서로 실패한 것 같군. 알 두아자드."
아이작은 '퀘스트 성공' 메시지가 뜨지 않은 걸로 알 두아자드가 첫 일격에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결코 원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해방주교 알 두아자드는 주교급답게 막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물론 주교는 천사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이작이 상대한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애초에 전투를 상정하고 뽑힌 천사가 아니었던데다, 전력을 다한 상황도 아니었다.
진지하게 싸우는 상황이라면 아이작에게 더 까다로운 상대는 눈앞의 알 두아자드였다.
"...아이작 이사크레아 성배기사군요."
아이작의 기습은 확실히 강한 인상을 남긴 듯했다. 알 두아자드는 어떤 행동도 함부로 하지 못하며 아이작을 경계했다.
"방금 그 기적은 뭡니까? 도저히 빛의 법전 기적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네가 빛의 법전에 대해 뭘 알아?"
"180년 전에는 빛의 법전 사제였습니다."
아이작은 불사 교단이 갓 300년 된 어린 종교라는 것을 떠올렸다. 가장 어린 종교가 빛의 법전과 함께 세계를 양분하는 거대 신앙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놀랍지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눈앞의 알 두아자드처럼 수명 다한 인재들을 그대로 흡수하기만 하면 되니까.
"네가 썩어가는 사이 만들어 낸 새 기적이다. 이름은 문어 다리 볶음... 아니 복음...."
"그런 말도 안 되는...."
"네가 뭘 알아! 네가 빛의 법전 성배기사야?"
94화. 해방주교 (2)
똥 싼 놈이 성낸다고 눈앞에서 촉수를 보여 놓고선 아이작은 되레 화를 냈다.
"아닌데... 분명 다른 신앙의 기적인데...."
하지만 논쟁은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아무려면 어떤가? 어차피 죽을 놈인데.
아이작과 알 두아자드, 양쪽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먼저 움직인 것은 아이작이었다.
땅을 박찬 아이작은 빠르게 알 두아자드와의 거리를 좁혔다. 당연히 기적에 대한 대비를 하려고 했던 알 두아자드는 되레 당황했다.
'기적도 안 쓰고 맨몸으로?'
제법 빠르긴 했지만 맨몸으로 달려오는 검사 따위를 상대하기에는 차고 넘치는 거리였다. 알 두아자드는 자신의 두개골을 아이작을 향해 겨냥하고 기도문을 외웠다.
즉사 저주는 사용하지 않았다. 직감으로 즉사 저주를 피하는 미친놈에게 힘이 많이 소모되는 기적을 함부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대신 땅 밑에서 솟구쳐 올라온 한기가 아이작의 발목을 휘감았다.
평범한 추위가 아니었다. 불사 교단이 쓰는 한기는 사후세계에서 기어 올라오는 부정의 기운이었다. 그러자 아이작은 기다렸다는 듯 루앗딘 열쇠로 바닥을 긁어 버렸다. 루앗딘 열쇠의 열기에 긁혀 나간 한기가 쫓겨났다.
'기적은 안 쓰나? 하지만 루앗딘 열쇠가 좀 골치 아프군.'
그래도 아이작이 계속 기적을 쓰지 않는다면 문제가 될 수준은 아니었다. 아이작의 솜씨는 나쁘지 않아 보였지만 성배기사고 뭐고, 기적을 쓰지 못하는 자는 사제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다만 알 두아자드는 아까 산 허리를 긁어 버린 그 강력한 기적을 잊지 않고 주의를 기울였다.
아이작이 알 두아자드 앞으로 빠르게 들이닥쳤다. 알 두아자드는 침착하게 몸을 마치 안개처럼 영체화하며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아이작의 칼날이 허무하게 스쳐 지나갔다. 아까도 알 두아자드는 정체불명의 공격을 영체화로 피해 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공격을 그대로 이어 나가며 이삭 검술: 여덟 갈래를 사용했다.
콰드드드득! 알 두아자드는 주변의 땅 거죽을 찢어발기며 날아드는 여덟 개의 궤적을 보며 흠칫했다.
'기적은 아니야. 그런데 기세가...?'
검술에서 느껴지는 흉포한 기세와 잔혹한 기운이 아까 그 기적과 비슷했다.
그리고 그 궤적의 끝은 정확히 알 두아자드의 영체화가 끝나는 지점을 노리고 있었다.
'영체화의 간격을 이미 알고 있어? 새파란 놈이 무슨!'
알 두아자드는 영체화가 끝나기 직전 황급히 기도문을 외웠다. 영대에 새겨진 검은색 문양 하나가 타들어 가며 또 하나의 구멍이 생겼다. 영체화가 끝나는 순간, 루앗딘 열쇠가 정확히 알 두아자드의 두개골과 팔다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와 아이작 사이로 불쑥 무언가 나타났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것은 아이작을 강하게 들이받으며 밀어냈다.
아이작의 눈썹이 휘어졌다.
"데스나이트? 아니... 듀라한이군."
데스나이트와 유사한 갑옷에 거대한 체구, 검을 가지고 있었지만 머리는 없었다. 대신 타들어 가는 듯한 검은 연기가 목 주변에서 쉴 새 없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데스나이트처럼 기적을 쓰지는 못하지만 대등한 수준의 힘과 검술 실력을 갖춘 존재였다.
이렇게나 강한 존재를 소환하려면 매개와 의식, 준비가 필요했다. 이때까지는 아까 피워 둔 화톳불을 통해 의식을 치렀지만, 아이작이 휩쓸어 버리는 바람에 알 두아자드는 준비물을 모조리 잃어버린 상태였다.
'저 영대에 미리 기도문과 제물을 준비해 둔 건가?'
꽤나 귀한 성물임이 분명했다. 탐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귀찮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 두아자드는 적진 깊은 곳에서 움직이는 해방주교답게 홀로 돌아다니다가 필요할 때 다른 존재들을 소환하고 통솔하는 데 전문화되어 있었다. 뭔가를 소환할 틈을 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렇게 즉시 소환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평정심을 잃은 쪽은 알 두아자드였다.
'아까운 패를 이렇게 빨리 쓰게 될 줄이야....'
그가 불러낸 듀라한은 해방구를 만들면서 우연히 획득한 엘릴 교단의 전사였다.
엘릴 교단은 무력으로 초월자가 된 신을 섬기는 집단답게 사제와 성기사의 구분 없이 모조리 전사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그만큼 그 안에서 이름난 전사는 엄청난 실력을 자랑했는데, 알 두아자드는 우연히 노화로 죽어 갓 매장된 전사를 듀라한으로 만든 것이다.
개종이 불가능했던 탓에 듀라한으로 그치긴 했지만 그래도 실력은 여전히 출중했다. 그만큼 아끼고 있었지만, 아이작을 상대하면서는 꺼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 두아자드는 자신의 두개골이 그을린 흔적을 매만졌다.
'새파란 애송이의 솜씨가 아니야.'
혼란스러운 와중에, 소환이 마무리된 듀라한이 자신의 몸만큼이나 거대한 검을 휘둘렀다.
아이작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듀라한에도 별로 당황하지 않고 바로 맞대응을 시작했다.
쩍, 쩍, 쩍! 검과 검이 부딪치는 거라곤 믿을 수 없는 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전투를 지켜보던 알 두아자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듀라한의 실력은 역시나 순식간에 아이작을 몰아붙이기에 충분했지만 루앗딘 열쇠가 여전히 문제였다.
듀라한이 아이작을 몰아붙이던 것도 보람없이, 듀라한의 검은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하지만 언데드가 되었다 해도 듀라한은 실력자였다. 그는 장비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검을 맞대는 것을 피하며 빈틈을 노렸다. 하지만 아이작은 호락호락하게 상대방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상대가 맞대결을 피하려는 것을 알자마자 아이작은 바로 공세로 전환하며 힘 대결을 강요했다. 검술에 대해 잘 모르는 알 두아자드조차도 아이작의 솜씨가 보통 이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콰드드득, 쩍!
마침내 듀라한의 검이 부서진 순간, 아이작은 지옥 같은 한기를 느꼈다. 은유가 아니라 알 두아자드가 지옥에서 불러들인 한기였다. 봄이었던 주변의 풀밭과 숲은 싸늘하게 죽고 하얗게 얼어붙었다.
마치 온몸에 누군가가 들러붙어 잡아당기고 있는 듯한 저주 속에서 아이작은 제대로 움직이는 것조차 어려웠다. 루앗딘 열쇠의 열기가 없었다면 이 정도 버티는 것도 어려웠을 것이다.
'이래도 기적을 안 쓰나?'
알 두아자드는 끝까지 기적을 쓰지 않는 아이작을 보며 의구심을 느꼈다. 지옥의 한기를 불러들이는 것은 고급 기적이지만, 열과 빛을 다루는 빛의 법전 성기사나 사제라면 물리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아이작은 여전히 근성으로 버티고 있었다.
쩌저저저적. 아이작은 몸에 얼어붙은 서리를 부수며 알 두아자드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을 마주한 알 두아자드는 섬찟함을 느꼈다.
'무슨 백전노장의 성기사단장과 싸우기라도 하는 기분이군.'
알 두아자드는 시간을 더 끌어서는 안 된다는 초조함에 듀라한에게 아이작을 마무리 지을 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듀라한은 두 번째 무기인 도끼창을 꺼내든 시점에도 아이작을 공격하지 않고 있었다.
'뭐야?'
'리치.'
알 두아자드는 불현 듯 듀라한에게서 기묘한 의지를 느꼈다.
'방해하지 마라.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으니.'
언데드가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듀라한의 자아와 의지였다. 그렇게나 불러내서 데스나이트로 각성시키려고 했던 엘릴 전사의 영혼이 지금 듀라한에게 깃들어 있었다. 듀라한은 아이작에게 강한 호승심을 불태우며 도끼창을 치켜들었다.
아이작은 그에 호응하듯이 루앗딘 열쇠를 힘겹게 뽑아 들었다.
아이작이 한기에 사로잡혀 제 상태가 아니듯, 듀라한도 전성기의 육체가 아닌 만큼 제 실력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 상관없이 바로 둘은 무기를 맞부딪쳤다.
***
듀라한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알 두아자드가 그를 무덤 속에서 '징집'했을 때, 그는 강대한 엘릴의 전사로서 그 징집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듀라한은 얌전히 그 징집을 받아들였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가 무려 '노화'로 늙어 죽었기 때문이었다.
명예와 투쟁, 용기를 기치로 받드는 엘릴 교단에서 노화로 인한 사망은 그가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척도인 동시에 수치이기도 했다.
천사라도 됐다면 자신의 실력이 증명됐을 텐데 그 정도는 또 아니었다. 그는 이 애매모호한 최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시체가 도굴당하는 것도 용납하고 기꺼이 불사 교단에 제 육신을 맡겼다.
오로지 영원한 투쟁을 위해서.
살아서 불사 교단과 붉은 성배 놈들을 잔뜩 베어 봤으니, 이젠 죽어서 빛의 법전 놈들을 베면서 실력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시원찮은 화전민이나 바르바리들을 베는 나날뿐이었다. 듀라한은 이 무료한 일상에 지루함을 느끼며 서서히 의식을 침전시키고 있었다. 알 두아자드의 꼭두각시가 되어서.
그러나 오늘, 듀라한은 딱딱하게 굳은 심장이 다시 뛰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쾅, 까드드드득!
두 무구가 부딪치며 맹렬하게 불꽃이 튀어 올랐다. 하지만 깎여 나가는 것은 듀라한의 도끼창뿐이었다. 그는 아쉬움을 느꼈다. 무기만 자신이 쓰던 것이었다면, 하다못해 비슷한 수준만이라도 됐다면 좋았을 텐데.
한편 아이작은 아득한 기분에 취해 있었다.
한동안 그는 수준 높은 검술가와 싸울 기회가 없었다.
수도원에서 떠나기 직전 로튼해머 단장의 실력을 본 게 전부였다. 블러드 나이트가 있긴 했지만, 그때는 심연의 손아귀로 너무 순식간에 끝났다.
하지만 눈앞의 듀라한, 이 머리 없는 기사의 솜씨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실력 자체는 빛의 법전 성기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몰라도, 완전히 다른 형식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아이작은 의도적으로 상대의 공격을 막아 내는 데 집중하며 마른 스펀지처럼 그의 검술을 흡수하고 있었다. 보통의 데스나이트의 검술은 아닌 것 같았다. 그보다는 엘릴 교단의 검술에 가까워 보였다. 아이작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의아함을 느꼈다.
'내가 이걸 어떻게 구분할 수 있지? 이것도 칼센 밀터의 기억인가?'
무엇이 어찌 되었든 간에, 아이작은 실시간으로 한동안 정체되어 있던 자신의 검술 실력이 빠르게 상승하는 것을 느꼈다.
처음 알 두아자드를 기습할 때와 듀라한과 한창 싸우고 있는 지금. 불과 몇 분 차이지만, 그 사이 아이작은 빠른 속도로 상대의 검술을 배워나가고 있었다.
그 사이 아이작이 든 루앗딘 열쇠의 빛깔이 묘한 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하지만 검의 움직임에 취해 있던 아이작은 그 사실을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한순간, 아이작은 듀라한의 검보다 자신의 검이 아주 약간 더 빠르다는 것을 알아챘다.
아이작은 자신이 비로소 검술의 어떤 한 경지를 넘어섰음을 깨달았다.
"조금 알 것 같군."
"음?"
아이작이 중얼거림과 동시에 알 두아자드는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순간적이지만 주홍빛으로 불타오르고 있어야 할 루앗딘 열쇠가 다른 색깔로 빛났던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설마... 그럴 리가. 빛의 법전 성기사가 그런?'
순간 아이작의 검이 뱀처럼 휘어지며 순식간에 듀라한의 도끼창을 휘감았다.
콰드득.
비현실적인 움직임에 듀라한은 놀라면서도 흥미로워하며 아이작의 검을 떨쳐 내려 했다. 하지만 도끼창을 타고 올라간 아이작의 검이 그의 손목을 물어뜯는 순간 그것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세계를 구멍 내고 파먹는 뱀 같았다.
손목을 물어뜯고, 팔을 부러뜨린 아이작의 검은 단숨에 듀라한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쩌억. 정확히 중심부.
갑옷 안쪽에 숨겨진 듀라한의 차가운 심장이 남아 있는 자리였다. 심장이 순식간에 불타오르며 갑옷 안이 열기로 가득 찼다.
머리가 없는 듀라한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아이작은 여전히 아득한 기분 속에 취해 검을 횡으로 베었다. 듀라한의 가슴을 그대로 종잇장처럼 찢으며 아이작의 검이 회전했다.
이 순간 아이작의 검술은 명백히 물리적인 한계를 뛰어넘고 있었다.
그의 검은 베는 것이 아니라 씹어 삼키는 듯한 기세로 뼈와 금속을 찢어발겼다.
듀라한은 검이 자신을 베는 것이 아니라 삼키는 것 같다고 느꼈다.
'멋진 실력이군.'
듀라한은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하며 솔직하게 감탄했다.
마침내 허망하게 마무리했던 그의 생애에 제대로 된 종지부가 찍혔다.
***
"어떻게...?"
알 두아자드는 듀라한이 어떻게 쓰러졌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 듀라한이 아이작을 밀어붙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이작이 뭔가를 중얼거리더니 순식간에 쓰러뜨린 것이다. 기적이라도 쓴 건가 싶었지만, 도저히 빛의 법전 기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한순간이지만 아이작의 검이 발하는 색이 변했기 때문이었다.
'검기? 검기는 엘릴의 기적 아닌가? 놈은 빛의 법전 성기사가 아니었나?'
95화. 해방주교 (3)
검기는 엘릴 교단의 가장 대표적인 기적이었다.
스스로 초월자의 자리에 올라선 엘릴을 숭배하는 자들답게 엘릴 교단은 명예와 승부에 돌아 버린 무인들만 모여 있었다. 그중에서도 검기는 그들 중 선택받은 최상위 전사들에게만 허락된 기적이었다.
하지만 더 깊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아이작의 번뜩이는 눈빛이 알 두아자드에게로 향한 것이다. 그 눈빛에서 야수가 사냥감을 핥는 듯한 섬뜩함을 느낀 알 두아자드는 반사적으로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아이작의 몸을 사로잡던 냉기가 한층 더 강해졌다. 이제 냉기는 시각적인 형체를 갖추고 아이작에게 매달렸다. 몸 곳곳에 파란 손자국과 서리가 맺히고 피부마저 퍼렇게 물들기 시작했다. 듀라한의 움직임까지 사로잡을까 싶어서 자제하던 강도의 기적이었다.
알 두아자드는 극도의 집중력을 통해 세 개의 기적을 동시에 발휘하고 있었다. 명계의 한기를 불러내고, 망령들을 이용해 속박하며, 단숨에 아이작의 심장을 쥐어 터뜨릴 또 다른 즉사 기도문을 준비했다.
'제발 이 정도로 끝내야...!'
그러나 그 순간, 아이작이 왼손을 거칠게 휘둘러 망령들을 뿌리쳤다. 그런다고 망령들이 떨어져 나갈 리가 없지만, 그 일어날 리가 없는 일이 알 두아자드의 눈앞에서 펼쳐졌다.
"아니, 무슨?!"
아이작의 팔에 붙어있던 망령들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쥐어 뜯어낸 것처럼 산산조각 나 흩어졌다. 마치 신성한 기적에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망령들은 비명을 지르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알 두아자드는 뒤늦게 아이작의 왼손에서 불길하게 진동하는 신성을 느꼈다.
'왼손에 기적이? 아니, 저게 기적이 맞나?'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은 길고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으로 흐느적거리는 무언가였다. 거기에는 깊고 어두운 힘이 느껴졌지만, 신성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이전에 골루와루처럼 영적인 존재를 상대할 때에는 촉수가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촉수는 이제 마침내 '기적답게' 신성을 품고 망령을 물리치고 있었다.
이제 촉수에도 신성력이 담기기 시작한 것이다.
반면 알 두아자드는 이미 썩어 문드러진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빛의 법전 성기사로 알려진 자가 엘릴의 기적을 쓰는가 하면, 뭐가 뭔지 모를 불길한 기적까지. 하지만 다행히 아이작은 여전히 냉기에 사로잡혀 제대로 발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아이작은 죽어 쓰러져 있던 말 고삐를 움켜쥐었다.
동시에 튕겨 나가듯 아이작의 몸이 쏘아져 나갔다. 그 모습을 본 알 두아자드는 다시 한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팬텀 스티드? 그건 또 어디서...!"
쩌어어억.
아이작이 블러드 나이트를 처치하고 얻어 낸 팬텀 스티드는 불길한 말발굽 소리를 내며 달려갔다. 블러드 나이트에게 조종당하고 있을 때 붉은 살덩이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형태였듯이, 아이작에게 조종당하는 팬텀 스티드는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불완전한 부정형 신경조직이 어설프게 말을 흉내 내는 것 같았다.
일반인은 그 형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에 질려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알 두아자드는 침착하게 마지막 기적을 완성시켰다.
"...하여 마침내 당신께서 성배를 그 피를 바닥에 쏟아부었으니!"
사방에서 좁혀 오는 심장을 쥐어 터뜨리는 즉사 저주.
이것은 아까처럼 피할 도리가 없었다.
죽음의 기세는 물리적인 형상을 드러내며 나타났다. 돌진하는 아이작의 주변으로 둥글게 풀과 나무들이 시커멓게 죽고, 단숨에 아이작을 압박해 왔다.
하지만 그 순간, 아이작의 몸이 붉은 안개로 변했다.
붉은 안개로 변한 아이작과 팬텀 스티드는 허무하리만치 즉사 저주를 통과해 지나갔다. 알 두아자드는 그것이 붉은 성배 클럽의 기적인 붉은 탄원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으나,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빠각. 붉은 안개가 다시 아이작의 형체를 갖추는 순간, 루앗딘 열쇠가 그의 목뼈를 경쾌하게 쳤다.
***
알 두아자드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몸은 어떻게 됐는지 보이지 않고 두개골만 누군가의 손에 들려 있었지만,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는 이보다 더 끔찍한 상태에서도 되살아난 바 있었다. 몸을 잃어버린 것도 별로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그의 몸 대부분이 그 자신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때 머리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골밖에 없는 주제에 기절도 하네요."
"영혼이 순간적으로 몸에서 빠져나가서 그래."
어딘가에서 아이작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알 두아자드는 그의 설명을 보충해 주었다.
"예. 그래서 저희들은 의외로 그런 이유로 걸핏하면 기절합니다. 몸과 영의 속박이 헐거운 부작용이라고 할까요. 물론 이번처럼 여러분들은 죽을 부상도 기절로 끝나기도 합니다만."
그 말에 뒤에 있던 여자가 몸을 숙여 알 두아자드를 내려다보았다. 알 두아자드의 두개골을 들고 있는 사람은 그 역시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굴마르 가의 아가씨군요.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나는 널 모르겠는데. 해골들은 다 똑같이 생겨서."
"어느 정도 동감합니다. 하지만 익숙해지면 골격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의외로 그런 분들이 제법 있더군요."
저벅. 알 두아자드가 수다를 길게 떨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누군가 그의 앞으로 걸어와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작이었다.
그에게도 여유를 보이려던 알 두아자드는 어째선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어차피 언데드는 성대를 진동시키는 것도 아니고 정신파를 통해 목소리를 내는 것인데도.
아이작 역시 말없이 물끄러미 알 두아자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알 두아자드와 완전히 다른 이유임이 분명했다.
알 두아자드는 자신이 왜 아직 살아있는지 알 수 없었다. 두개골만 남은 상태에서도 기도문도 외우고, 하다못해 물어 뜯기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나 알 두아자드는 그중 어떤 것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이작에게 그 모든 시도가 통할지, 아니, 눈앞에 있는 아이작이 인간이 맞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분명 눈앞에 있는 자는 팔다리 달려 있고 멀쩡하게 눈코입 있는 인간인데, 알 두아자드에게는 그 모든 것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섬뜩하게만 느껴졌다.
'빛의 법전에서 괴물이라도 키우는 건가? 아니면 인간의 육신을 빌린 천사인가?'
그 무감정한 눈동자와 눈을 마주친 알 두아자드는 오한이 일었다.
그는 아이작 몰래 불사 교단의 기적, '명부'를 펼쳤다. 산 자의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 기적은 그 영혼의 질적 상태를 통해 상대의 수명은 물론, 순수함, 감정 상태, 힘과 영혼을 비호하는 신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러나 명부를 통해 아이작을 들여다본 알 두아자드는 한층 더 섬찟함을 느꼈다.
도저히 아이작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물론 누구든 어떤 강력한 신이나 천사가 보호하고 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것을 넘어서 주변의 모든 것을 '포식'하고 있었다.
힘이든, 기술이든, 심지어 정보마저도.
그러나 알 두아자드를 떨게 만든 것은 아이작의 감정 상태였다.
'그렇게 격한 전투를 치르고도 어떤 고양감이나 흥분, 분노조차 느껴지질 않는다.'
수준 높은 전사들은 그럴 수도 있다고 들었지만, 신앙이 다른 자와 마주할 때, 혹은 곧 싸울 자와 마주하면서 느끼는 경멸이나 혐오, 사소한 언짢음 정도는 존재할 법했다. 하지만 아이작에게는 그마저도 없었다.
알 두아자드가 아이작의 시선에 섬찟함을 느낀 것은 당연했다.
아이작은 그를 불사 교단의 주교나 목숨을 걸고 전투를 치른 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차가운 경험치 계산식으로 보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이거 영 쓸모가 없는데.'
[이 대상은 포식 대상으로 가치가 없습니다.]
아이작은 이미 알 두아자드의 육신을 포식한 상태였다. 촉수는 뼈다귀뿐인 몸을 재미없다는 듯이 으적거리면서 씹어 삼켰지만 별 영양이 없다는 메시지뿐이었다.
'리치는 포식 가치가 없다고? 뼈다귀는 영양가가 없기 때문인가, 아니면 언데드에게는 특수한 룰이 적용되는 건가?'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알 두아자드를 해치우면 이름 없는 혼돈으로부터 보상이 들어올 것이고, 그 외에 알 두아자드의 영대를 획득한 것도 큰 성과였다. 영대가 꽤 값어치 있는 성물이었던 것이다.
아이작이 침묵하고 있자 지루해진 헤사벨이 입을 열었다.
"고문해서 입을 열까요?"
"이놈들은 통각이 없어. 고문해도 소용없지."
아이작은 그렇게 말하면서 어이없다는 듯 헤사벨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는 불사 교단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왈라이카 왕국은 흑제국 영역이잖아."
"그냥 정치적으로 뜻이 맞는 거지 별로 친하게 지내는 사이는 아니거든요?"
사실 아이작도 알고 있었다.
붉은 성배 클럽과 불사 교단, 둘 다 죽음을 거부하는 집단이긴 하다. 하지만 붉은 성배 클럽은 육체적 쾌락을 포기 못 한 탐미주의자들인 반면, 불사 교단은 육체의 고통과 구속에서 벗어나 완전한 평등 사회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다.
뜻이 맞을 리가 없다.
그저 이들을 못 봐주는 백제국이라는 더 큰 적 앞에 손을 잡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작은 알 두아자드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대로 잡아먹어도 상관없겠지만 포식해도 영양가가 없다는 것을 안 이상 그냥 먹기에는 아쉬웠다.
알 두아자드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굴마르 가의 후계자도 굴복시키고, 죽음의 저주조차 빗겨내며, 빛의 법전을 기만하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누구의 목소리를 대변하시는 사교도기에 이 땅에 오셨습니까?"
"사교도 아니라고."
알 두아자드는 포기한 듯 물었다.
"화로 장인을 왜 데려가려고 했는지 물으시려는 겁니까?"
"신을 하나 만드는 데 써먹으려다가 일이 꼬여서 데려가려고 한 거겠지. 관심 없어."
알 두아자드의 입이 쩍 벌어졌다.
표정은 지을 수 없지만, 그가 경악했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사실 아이작은 질문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네임리스 카오스의 스토리 라인을 모두 알고 있는 아이작에게는 알 두아자드가 왜 하필 여기서 어슬렁거렸는지 뻔히 보였다.
"고대신을 여기저기서 부활시키도록 사제를 파견하던 것도 너였겠지. 칼센 밀터를 신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갑자기 실종되는 바람에 뒷수습이 난처한 모양이군."
알 두아자드는 얼마나 놀란 건지 무슨 변명을 해야 할지조차 잊어버렸다. 고대신 부활이야 어느 정도 눈치챈 사람은 있어도 신을 탄생시키려던 계획은 불사 교단 안에서도 극비리에 진행하던 일이었다.
"그런데 왜 신을 탄생시키려는 거야? 그걸 이해 못 하겠네."
아이작은 네임리스 카오스를 여러 번 클리어했지만, 이 모든 사건의 시작인 '칼센 신 만들기 계획'이 왜 시작됐고 왜 실패했는지는 모르는 상태였다.
원래라면 아이작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하필 자신이 거기에 발을 얹은 데다 불가피하게 그 행적을 따라가고 있는 상태라면 알아 둬야 할 것 같았다.
"그냥 백제국에 테러하고 싶은 거치곤 너무 거창하고 위험하잖아. 동맹을 만들고 싶은 거면 너네 땅 안에서 할 수도 있는 일이고. 그런데 왜 하필 백제국 영토 안에서 신을 만들려던 거야?"
헤사벨도 처음 듣는 이야기에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알 두아자드는 아이작이 대체 어디까지 아는 건가 싶어서 당혹스러워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빛의 법전 성기사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가 만약 빛의 법전 천사가 보낸, 혹은 천사 본인이라면 모를 리가 없었고, 하다못해 교단 고위층만 되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작이 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기적들을 다 끌어다 쓰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랐다. 그 사실은 알 두아자드에게 놀라운 가능성을 깨닫게 해주었다.
"세상에는 늘 아홉 개의 신앙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가능성을 떠올린 순간 알 두아자드는 입을 열고 있었다.
"아홉 신앙? 그거야...."
"야만적인 고대 신앙들을 물리치고 세상에는 빛의 법전 주도 아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불사 교단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고정시킬 아홉 개의 질서가 만들어진 거죠."
빛의 법전, 엘릴, 세상의 화로, 황금 우상, 소금 의회, 올칸 규율, 붉은 성배, 불사 교단.
그리고 이름 없는 혼돈.
이 아홉 개의 종교를 아홉 신앙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름 없는 혼돈에는 신처럼 교단 이름이 붙어있지 않다. 신도가 전멸하면서 교단 이름도 잊혔기 때문이었다. 아이작은 알 두아자드의 말에 모순이 있다고 느꼈다.
"여덟 신앙이 아니라?"
"남아 있는 것은 여덟이지만, 아홉 번째 자리는 채워야만 합니다."
"자리를 채워야 한다고?"
"예. 아니면 죽은 신이 다시 돌아와 그 자리를 메우려 할지도 모르니까요."
알 두아자드는 아이작을 빤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숭고하신 성배기사님. 당신의 신성한 직무가 지금 위대하신 신들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죽은 혼돈은 언제 다시 범람해 이 세계를 침탈하려 할지 모릅니다."
아이작은 그 말을 듣고서야 불사 교단의 음모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들은 백제국을 엿먹이겠다는 생각으로 백제국 영토 안에서 칼센을 신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비어 있는 아홉 번째 권좌를 서둘러 메워, 그 자리의 원래 주인이 돌아오는 것을 막으려 했을 뿐이다.
바로 이름 없는 혼돈을.
"우리가 왜 백제국 안에 신을 탄생시키려 했느냐구요? 왜 하필 칼센이었는지부터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이작은 알 두아자드의 그 질문에 대해서도 이제 스스로 대답할 수 있었다.
빛의 법전 내부에 불사 교단과 협력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당대에 가장 신에 가까운 업적을 세운 인간과 신성이 가득 고인 영토를 빌려줌으로써.
96화. 해방주교 (4)
아이작은 게벨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나는 아발란체 성기사단 전멸의 배후에 등하맹인 중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칼센은 이번에 천사가 될 것이 예정되어 있었고, 명천사가 될 것까지도 기대받던 자였다. 그런데 아발란체 성기사단이 변방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전멸당하고 배교자로 찍힌 지 몇 년 안 되어 칼센도 배교자가 되었다. 이게 우연일까?
게벨의 경고이자 당부였던 그 말들.
'아발란체 성기사단도 이 계획의 희생양이었나?'
만약 비어 있는 아홉 번째 신앙 자리를 채우기 위해 앙숙이나 다름없는 두 교단이 협력하고 있다면, 그 시도는 꽤 오래전부터 있어 왔을 확률이 높다. 게벨이 소속되어있던 아발란체 성기사단도 거기에 휘말렸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리고 어쩌면 더 많은 희생자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이작이 이 세계에 빙의했을 때 습격당했던 마을처럼.
'물론 이 녀석이 하는 말을 마냥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아이작은 알 두아자드를 내려다보았다.
왜 빛의 법전 성기사가 불사 교단의 도움을 받아 신이 되어야 하는지, 한쪽에서만 진행하면 안 되는지 등 아직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다.
"그걸 왜 내게 그렇게 솔직하게 털어놓지?"
"아아, 성배기사님. 당신이 빛의 법전의 껍데기를 쓰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알아차렸습니다. 당신의 숨겨진 힘을, 그리고 야망을. 당신은 절대로 평범한 성배기사의 영광에 만족할 사람이 아니지요."
알 두아자드의 두개골 안쪽에서 파랗게 타오르는 불꽃이 번뜩이며 아이작을 응시했다.
"계획은... 아직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그 자리를 메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도움을 받는다면 말입니다."
"불사 교단이 나를 어떻게 도울 수 있는데?"
아이작의 말에 알 두아자드는 그가 흔들린다고 느낀 듯 반갑게 말했다.
"불사 황제께서는 현재 유일하게 이 땅을 거니는 신이시자 스스로 신이 되는 의식을 치르고 승천하신 분입니다. 적어도 이 의식에 있어서만큼은 우리 교단만이 유일하게 도울 수 있습니다."
불사 교단의 신이자 지배자인 불사황제 베셰크는 가장 최근에 신이 된 자다. 죽지 않는 언데드들의 신답게 이 세상에 살아 움직이며 다른 신들과 달리 그 존재를 끊임없이 드러내고 입증했다.
'적어도 불사 교단은 불사황제까지 직접 개입했다는 것이 입증되는군.'
그렇다면 빛의 법전은 어디까지 개입했을까? 교황? 황제? 이쪽도 신이 개입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빛의 법전은 비인격신이지만 이름 없는 혼돈을 막아야 한다는 대의명분이 세워진다면 누가 개입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빛의 법전은 빛과 지혜, 질서를 상징한다. 이름 없는 혼돈과는 상극이다. 생각해보면 애당초 이름 없는 혼돈은 모든 신앙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
'머리 깨지겠는데.'
눈앞의 알 두아자드는 아이작이 자신들의 계획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아이작이 어떤 신념이나 신앙을 가지고 있든 상관없이 신만 탄생시키면 그만이라고 말이다. 아니, 사실 그렇게라도 꼬시지 않으면 본인이 산산조각 날 위기이니 뭐라도 말해야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가 이름 없는 혼돈의 대리인일 거라곤 생각조차 못 하는군....'
만약 알게 된다면 절대로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작은 신이 되어 달라는 제안에 대해 생각했다. 솔직히 성기사가 되어서 떵떵거리며 살자는 생각까지는 해 봤지만 신은 너무 갔다는 생각만 들었다.
애당초 받아들일 수도 없는 제안이었다.
아이작의 정체를 안다면 당장 모두가 씹어먹으려 들 테니까.
"어떤 식으로 도와줄 수 있는지 말해봐."
***
아이작은 알 두아자드에게 운을 띄우는 동시에 혼돈의 눈을 발동했다. 그가 진실을 말하는지, 그리고 어떤 음모가 숨겨져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화제를 던졌을 때 표면에 떠오르는 생각을 가장 읽기가 쉽기 때문에 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알 두아자드는 바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그 전에 당신이 숭배하는 신이 뭔지부터... 잠깐."
알 두아자드에게서 일말의 의심이 피어오른 순간, 어둠 속에서 아이작의 녹색 눈동자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알 두아자드의 의식이 급히 닫히기 시작하는 것을 감지한 아이작은 더욱 강하게 능력을 발동시켰다.
"잠깐, 이건 무슨, 아니, 설마?"
충격, 공포, 경악, 혼란.
아이작은 알 두아자드에게서 짧게 피어오르는 감정의 단말마만 읽어낼 수 있었다.
"아는 걸 다 말해!"
공포는 상대방을 굴복시키고 스스로를 드러내게 만든다. 아이작은 헤인켈 굴마르를 통해서 그 사실을 배웠다. 알 두아자드에게도 비슷한 방법을 쓰기 위해 아이작은 혼돈의 눈을 극도로 끌어 썼다.
"너, 으, 어억, 어."
아이작의 눈에 핏줄이 강하게 서면서 피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알 두아자드의 두개골 속에 도사린 영혼이 경련하듯 요동쳤다. 급기야 아이작의 눈에서 핏줄을 넘어 실가닥 같은 촉수가 넘실거리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촉수들은 단순히 흘러나오는 것을 넘어 알 두아자드의 두개골 안쪽으로 침식하듯 파고 들어갔다. 이때까지 들킬까 봐 한 번도 쓰지 않았던 강도였다.
알 두아자드는 주교급 사제답게 의식을 폐쇄하는 데에도 능숙했다. 하지만 아예 이렇게 신체적, 물리적으로 침식해 들어오는 것에는 그 어떤 방법도 소용이 없었다. 아이작은 알 두아자드의 혼란과 공포 속에서 기억이 파편화되어 스며 나오는 것을 느꼈다.
촉수는 마치 뿌리가 탐욕스럽게 지하의 물을 착즙하는 형태로 정보를 쥐어 짜냈다.
그러나 알 두아자드 역시 괜히 주교의 자리에 오른 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익히 알고 있었다.
설령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일지라도 반사적으로 행동할 만큼.
"────."
찌이이이잉. 아이작은 순간 귀가 아파 올 정도의 이명을 느꼈다. 알 두아자드에게서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른 기도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방언기도(方言祈禱)였다.
본인의 의지가 아닌 무의식, 혹은 천사가 임했을 때 터져 나오는 기도.
"아이작 님!"
헤사벨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작은 알 두아자드 주변으로 새하얗게 서리가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아까 공격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빠르고 강한 한기였다. 아이작은 서둘러 혼돈의 눈을 취소하고 물러나려 했지만 이미 그의 의식은 너무 깊게 알 두아자드와 연결되어 있었다.
알 두아자드가 생각하고 말하는 바는 곧 아이작이 생각하고 말하는 바와 같은 수준이었다.
때문에 아이작은 알 두아자드가 무의식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알 두아자드는 사후세계를 이 땅에 강림시키려 하고 있었다.
'이런 미친.'
빠득, 빠드득.
아이작은 알 두아자드의 두개골을 부숴서라도 기도를 중단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손을 대기도 전에 이미 감당할 수 없는 기적을 발동시킨 알 두아자드의 두개골은 스스로 부서져 나갔다. 덜덜거리는 이빨 조각 몇 개만이 방언기도의 메아리를 완성시키고 있었다.
"전부 당장 여기서 벗어나...."
아이작은 팬텀 스티드의 고삐를 쥐고 즉시 도망치려고 했지만, 휘청 무릎이 풀려 쓰러졌다.
아이작은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에 당황했다.
왜?
불사 교단의 사후세계가 찾아오는 것만으로 자신이 이렇게 취약해질 이유가 없다.
불사 교단의 사후세계라고 해 봤자 강추위와 함께 망령과 언데드 대군 소환, 그 정도 수준일 것이다. 왜냐면 불사 교단의 사후세계는 이미 지상에 있으니까.
사후세계를 강제로 지상에 끌어내린 이들이 바로 불사 교단의 정체다.
지금도 지면에서 망령들이 넘실거리며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망령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무언가를 보고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가 불사 교단의 사후세계와 상관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불사 교단 때문에 약해진 것이 아니다.
노란 옷을 입은 남자가 아이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작의 악몽이 현실이 되어 다가오고 있었다.
***
하늘은 무너질 듯 기울어진 채 울렁였고, 그 사이로 검붉은 손가락들이 구름을 어린아이처럼 휘저었다. 바람을 따라 흔들리지만 도무지 바람 소리라고 느껴지지 않는 저 소리는 어린아이의 웃음소리인가, 아니면 한밤중 불안해하는 양 떼의 울음소리인가? 지상을 기어 다니는 모든 벌레와 가축들은 썩어 가는 냄새를 풍겼으며 그 다리는 전부 홀수였다. 모든 것이 불균형하고 위태로워 무너질 것 같은 비대칭 속에서.
노란 옷을 입은 남자가 아이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작은 토할 것 같은 현기증을 느꼈다.
아이작은 저자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수없이 엔딩을 보고 데드씬을 보고 배드 엔딩을 보았지만, 저런 존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악몽이... 왜 지금?'
주변은 알 두아자드가 열어젖힌 사후세계 덕분에 초토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불사 교단의 사후세계는 그 너머에서 넘실거리는 저 불경하고 기괴한 세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저 역겹고 기이한 것들이 금방이라도 밤 중의 밀물처럼 아이작의 발목으로 스며들 것 같았다.
이미 아이작의 현실감각은 아득하게 멀어져 있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은 환희인지 경고인지 의미를 알 수 없는 알림음을 연신 보내왔다. 역설적이게도 아이작은 그 알림음 때문에 실낱만큼이나마 정신을 붙잡을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빠져들 것 같은 이 세계에서 저 알림음은 아이작에게 작게나마 객관성을 부여해 주었다.
이 세계는 게임에 지나지 않고, 너는 그 게임을 몇 번이나 클리어했다!
게임 따위에 과몰입하지 마라! 너는 내가 선택한 플레이어다!
'고작 게임 따위.'
아이작은 그렇게 생각하며 의식을 바로잡으려 했다. 그때 노란 옷을 입은 남자가 아이작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동시에 음산한 나팔과 피리 소리 같은 것이 울려 퍼졌고, 아이작은 귓가에 들려오던 알림음마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악몽이 범람해 오고 있었다.
'아.'
아이작은 자신의 손이 기이하게 변형된 것을 보았다. 촉수가 통제되지 않는 형태로 뻗어 나오고 있었다. 아이작은 전신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풍선이 터질 듯이 몸 안에서 촉수가 꿈틀대고 있었다.
아주 오래 잠들었었다고. 이제 일어날 시간이라고.
'이게 끝인가?'
아이작은 더 이상 막을 방법이 없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때,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불균형해지고, 무너질 듯 어지러워지는 와중에.
홀로 또렷한 형체를 가지고 악몽을 헤치며 다가오는 형체가 있었다.
"아이작! 아이작 성배기사님!"
저승과 이승 사이, 악몽과 혼돈 사이, 그 속에서 그녀는 혼자 꼿꼿한 질서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작은 아득한 의식 속에서나마 그녀의 몸을 휘감은 휘광의 정체를 보았다.
아궁이 짐승. 빛의 법전. 질서의 추종자.
재 속에서 태어난 신수가 그녀를 보호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꼿꼿한 무언가가 그녀를 이 혼돈 속에서 닻처럼 단단하게 자리 잡게 하고 있었다.
"아이작 이사크레아!"
아이작은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이 혼돈에서 빠져나와 저 망설임 없는 질서와 선의를 향해 다가가고 싶었다. 이솔데는 성큼 다가왔다. 아이작은 반사적으로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촉수 다발이 되어버린 왼손을.
이솔데는 그 손을 보고 흠칫했지만 이내 붙잡아 확 끌어당겼다.
아이작은 이솔데의 품에 저항 없이 안겼다. 동시에 아이작은 빛의 영역 안으로 들어왔다.
동시에 모든 것이 명료해지고, 안정된 질서의 영역으로 돌아왔다. 무너지고 얼어붙고 녹아내리던 세계의 풍경이 다시 제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눈앞에 이솔데의 당혹감에 찬 얼굴이 보였다.
"이게 무슨 난리...."
"설명은... 나중에 합시다."
아이작은 혼란 속에서 빠져나오자마자 곧바로 파수자의 등대를 발동시켰다.
빛의 법전 기적 중에서도 최상위의 기적. 빛이 닿는 일대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정할 수 있는 질서의 정점.
아이작의 머리 위에서 떠오른 후광의 빛이 불사 교단의 사후세계를, 그리고 아이작에게서 비롯된 혼돈의 영역을 단숨에 몰아냈다.
아이작은 찬란한 섬광 속에서 아지랑이처럼 사라지는 혼돈을 응시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노란 옷을 입은 남자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마치 다음에 다시 또 보자는 듯이.
97화. 고해 (1)
파수자의 등대에서 뿜어져 나온 안온한 빛이 밤을 추방하고 질서를 되찾아왔다.
이미 얼어붙어 죽은 풀과 나무가 되살아나진 않았지만, 더 이상 망령도 흘러 녹아내리고 섞이는 세계도 없었다. 그제야 아이작은 폭풍 속에서 빠져나와 단단한 땅에 발을 디딘 기분이 들었다.
그가 있어야 할, 있고 싶은 세계였다.
그리고 이솔데가 있었다.
빛의 법전의 이단심문관.
아이작은 사후세계가 범람했을 때 흘러나온 촉수들을 아직 몸 안에 다 집어넣지도 못한 상태였다. 다시 집어넣고는 있지만 속도가 충분히 빠르지는 않았다. 이솔데의 눈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당장 아이작을 베어야겠다는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작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작 님!"
순간 뛰쳐나온 헤사벨이 재빨리 아이작과 이솔데 사이를 가로막았다. 뽑아 든 단검과 단창이 이솔데를 단숨에 찌를 듯 겨냥하고 있었다. 이솔데는 이솔데대로 갑자기 나타난 낯선 왈라이카 인간사냥꾼에게 당황하고 있었다.
헤사벨이 그 짧은 시간 무엇을 생각하고 판단했는지는 명료했다. 서늘한 살기가 드리워졌다.
헤사벨이 이솔데를 향해 달려들려던 순간, 아이작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만."
"아, 아이작 님...."
아이작은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극심한 공복감이 아이작을 덮쳐 왔다. 격렬한 전투 탓인지, 아니면 사후세계의 범람이 원인인지 그의 몸은 원래 상태를 수복하기 위해 거의 모든 '고기'를 소비한 상태였다.
"화로 장인은 확보했나?"
"예, 예! 지, 아니, 벡스터가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러면 일단 돌아가자...."
아이작은 그렇게 말하고는 고꾸라지듯 쓰러졌다.
눈앞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
"오랜만이군."
아이작은 눈을 떴다. 주변은 온통 시커먼 어둠뿐이었다.
하지만 오직 단 한 명, 빛의 법전 성기사 갑옷을 입은 한 남자만이 유일하게 색채를 가지고 아이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머리를 감싸고 있는 둥근 후광이 몸을 비추기 때문인 것 같았다.
아이작은 남자를 보자마자 이게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면 그 남자는 지금 있을 수도, 있을 리도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꿈이 아니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에 가깝지."
성기사, 아니, 칼센 밀터가 아이작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대답했다.
아이작이 포식해 집어삼킨 칼센 밀터가 눈앞에 있었다.
기억보다 훨씬 피곤하고 초췌해 보였지만, 그래도 칼센임은 분명했다.
'이건 또 이상한 꿈이군.'
아이작은 왜 하필이면 자신의 꿈에 칼센이 나왔나 싶었다. 이솔데에게 정체를 들킨 데다 화로 장인까지 도착한, 한시가 급한 상황에 잠이나 잘 때가 아닌데.
"걱정 마라. 너는 지금 수도원에 돌아와서 요양 중이야. 헤사벨이 천장에 달라붙어서 너를 지키고 있고, 지힐렛이 문을 지키고 있지. 화로 장인과 소금 의회의 사공도 무사히 돌아왔고, 이솔데는 네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군."
아이작은 칼센의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자신은 의식을 잃은 상태다. 그런데 바깥 사정을 어떻게 그렇게 속속들이 알 수 있는 거지? 그냥 예상하고 있는 건가?
"'벽 속의 쥐' 능력이 있잖아. 멍청한 놈. 내가 보고 듣기 싫어도 그 감각은 깨어서 네 몸에 정보를 들이밀고 있다."
순간 아이작은 소름이 돋았다.
아이작은 반사적으로 더듬더듬 검을 찾았지만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았다. 아니, 애시당초 아이작의 몸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어둠, 이 공간 자체가 아이작이었다. 아이작은 온 사방에서 칼센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게 아이작의 몸속에 들어온 것처럼.
"비슷해. 여기는 네 뱃속 같은 곳이다."
그럼 이때까지 내가 먹어 치운 것들이 전부 이 안에 있는 건가?
"일부는. 나약한 것들, 자의식이 약한 것들은 금방 녹아내리더군. 헤인켈 굴마르가 잠깐 있었다가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안 보이고, 골루와루라는 고대신이 조각나서 한참을 뭐라고 중얼거리다가 사라졌다. 아, 놀랍게도 붉은 살점의 선지자도 잠시 머무르더군... 물론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졌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나도 잘 모르니까."
반면 칼센은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단정하게 앉아있었다. 마치 구도 중인 수도승 같은 모습이었다. 과연 감히 신의 자리를 넘보던 성기사답다고 할까. 은은한 후광 하며, 도무지 타락했다고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칼센이 나타난 거지? 소화불량 같은 건가?
"아마 최근에 일어난 일들 때문이겠지."
최근에 일어난 일? 불사 교단과 충돌한 것 말인가?
"아니. 네가 경전을 만든 것 말이다."
아이작은 '이름 없는 벌레의 책'을 떠올렸다.
깊은 고민 없이 이름 없는 혼돈이 그저 하나의 신앙으로 자리 잡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경전.
칼센은 그것을 지적하고 있었다.
"그걸 계기로 네 신앙이 사후세계... 우르반수스와 연결되었다. 그게 최근 네게 일어난 모든 변화와 악몽의 시작이지."
사후세계.
아이작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신앙에서 사후세계는 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아니, 사후세계를 설명하고 납득하기 위해 신앙이 존재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모든 신앙에는 저마다 자신들만의 사후세계가 있었다.
가장 보편적인 사후세계가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공포를 대변하는 천국과 지옥이다.
빛의 법전은 찬란한 빛이 함께 하는 고상하고 우아한 천국을 가지지만, 동시에 들끓는 용암으로 가득 찬 지옥을 동반한다. 붉은 성배 클럽은 온갖 산해진미와 미남미녀가 즐비한 만찬장을 천국으로 가지지만, 동시에 그 만찬장의 메뉴로 '요리'되는 지옥을 가진다.
하지만 이름 없는 혼돈에게 어떤 사후세계가 있는지는 들어 본 적 없었다.
감히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칼센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아이작에게 말했다.
"신도, 그 대리인도, 신자들조차 모르는 사후세계라. 그것참 볼만하겠군. 참으로 이름에 걸맞은 사후세계겠어."
너는 뭘 알고 있지? 왜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거야?
"원래는 너를 무시하려고 했다. 아니, 네가 간절히 죽기를 바랐다. 이 안에서 널 어떻게 해코지할 수 없을까 고민도 많이 했지."
하지만 칼센의 씁쓸한 표정에서 그 어떤 시도도 소용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빌어먹을 곳에서는 검술도, 기적도, 의식도 통하지 않더군. 신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저주받은 곳이야."
그런데?
"방금 네 모습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마음을 바꿔?
칼센은 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기도하는 듯한 자세를 바꿔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그는 천장을 보았다. 어디에나 아이작이 있고, 아이작의 시선이 존재했으므로 그는 아이작을 바라보는 것과 같았다.
"일어날 시간이다. 답을 원하거든 소금 상인에게 물어봐. 네 상황에 대해서는 나보다 그가 더 잘 알 테니."
***
아이작은 진짜로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익숙한 천장에 매달려 있는 헤사벨과 눈이 마주쳤다.
"아이작 님! 정신이 드셨군요!"
그녀는 바로 천장에서 내려와 아이작의 상태를 살폈다.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였는데도 그녀가 아무런 해코지도 하지 않은 걸 보면 이제 그녀를 믿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이작은 잠에서 깼음에도 여전히 몸이 무겁고 힘이 빠진 것을 느꼈다.
마치 당 떨어진 노인처럼.
"헤사벨."
"네! 필요한 거 있으신가요?"
"돼지 한 마리 가져와. 익힐 필요 없으니까 최대한 빨리."
그렇게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잡아먹고서야 아이작은 겨우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그제야 아이작은 자신이 이때까지 쌩쌩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던 체력이 '포식'의 효과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방금 그 기운 없는 노인네 같은 체력이야말로 네피림 본연의 체력이었던 것이다. 실시간으로 쌩쌩한 성기사 마냥 활약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먹고 마셔야만 했다.
'단련한다고 단련했는데도 어지간히 저주받은 체력이군.'
다행히 아이작은 별다른 부상이 없었기 때문에 추가로 더 요양할 필요는 없었다. 아이작은 바로 관료들을 만나 영지의 피해 상황을 보고받고 화로 장인을 만나 보려 했지만 헤사벨은 약간 미루는 게 어떠냐고 말했다.
"왜?"
"지금 아이작 님을 찬양하고 열광하는 분위기가 장난 아니거든요. 성기사들도 사제도 관료들도 영지민들도...."
대충 헤사벨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이제 영지민들은 아이작을 거의 지상에 강림한 천사처럼 떠받드는 분위기였다.
목숨을 위협하던 불사 교단의 위협에서 사상자 하나 없이 그들을 구원하고, 위기에 빠진 외부인까지 구출했으며, 무려 리치와 맞상대를 하다가 장렬한 전투 끝에 승리하였으니 가히 전설 속의 주인공이라 할만했다.
아이작은 그 이야기에 상당한 각색이 들어갔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전투가 두 곳에서 일어났는데 서로가 못 본 전투에 대해 오해와 과장이 섞인 게 틀림없었다. 이야기가 부풀려지며 아이작은 거의 단신으로 수천의 언데드를 베고 불사 교단의 천사를 무찌른 반신처럼 묘사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지금은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상태였으니, 모두 밤새워 쾌유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린다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군."
아이작은 그 오해를 당장 때려치우고 기도할 시간에 영지 복구 작업이나 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헤사벨 말대로 그만두기로 했다. 그가 의식을 잃은 사이 들어온 신앙의 양이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기도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지고 신앙심도 깊어져서 그런지 지금까지 모았던 양의 두 배 가까이가 더 들어온 상태였다. 이 정도면 사도들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사도를 더 들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며칠만 복귀를 미루면 신앙이 더 들어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아이작은 조금만 더 다친 척을 하기로 했다.
"그래도 영지 복구 작업이 늦어지는 건 안 돼.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 봄이란 말이다. 일단 고비는 넘겼다고 전하고, 맡은 직무를 충실히 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신자의 모습이라고 전해라."
"넵."
"그리고... 이단심문관은 어떻게 됐지?"
헤사벨은 이솔데를 떠올리자 입술을 샐쭉거리며 대답했다.
"일단은 살려뒀습니다. 아이작 님 말씀대로요. 입을 함부로 놀리면 혀를 뽑으려고 했는데, 다행히 헛소리를 떠들고 다니지는 않더군요. 지금은 불사 교단에 오염된 영지를 정화하는 작업을 돕고 있습니다."
그럴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아이작에 대한 열광적인 분위기로 영지가 들끓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시점부터.
만약 이단심문관인 이솔데가 아이작 몸에서 촉수가 나왔니 괴물 같은 모습을 보였니 하는 소리를 떠들고 다녔으면 꽤나 찬물 뿌리는 소리가 됐을 테니까.
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다행이긴 한데 왜 떠들고 다니지 않은 거지? 찬양받는 성배기사니까 조용히 심문한 뒤 암매장하겠다는 건가?'
꽤 가능성 있는 추측이었다.
교단 입장에서도 성자로 추대하려고까지 했던 성배기사가 사실 촉수 괴물이었습니다, 하면 체면을 망치는 셈이 될 테니까.
하지만 아이작은 내심 그 추측이 실제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솔데가 아이작의 정체를 떠들지 않는 것은 아이작이 이솔데를 살려두는 것과 같은 이유였다.
"이단심문관을 불러줘. 잠시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98화. 고해 (2)
'저는 빛을 섬기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솔데는 문 앞에 서서 짧은 기도를 외웠다.
그녀가 가만히 서 있자 헤사벨이 이상한 눈으로 보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전에도 그러했듯 앞으로도 지혜와 인내를 주시고 삶이 빛으로 충만하도록 도와주소서. 제가 당신을 섬기는 일에 지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그녀는 단단히 결심하고 문을 열었다.
안에는 창백한 안색의 아이작이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이작은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웠다.
지난밤에 본 모습이 거짓말인 것처럼.
이솔데는 무슨 말로 대화를 시작할까 하다가 도무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부터 묻기로 했다.
"얼굴에 밀가루는 왜 바르셨습니까?"
그 말에 아이작은 헤사벨을 노려보았다. 그는 거칠게 뺨을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소용없을 거라고 말했잖아. 이단심문관이 이런 속임수에 속겠냐고."
"이때까지 다 속았는데...."
뺨을 닦아내자 창백해 보였던 혈색이 다시 돌아왔다. 이솔데는 아이작이 아픈 척을 하려고 했었다는 것을 알고 웃음을 터뜨렸다.
"굳이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아이작 님은 이미 병약해 보이는 인상입니다. 별로 차이도 안 나는군요."
헤사벨이 이솔데를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든 동정표를 사겠다는 계획은 실패했지만 분위기를 푸는 데는 성공한 듯했다. 웃는 것을 보니 당장 '이 촉수 괴물 놈!' 하면서 달려들 것 같진 않았다.
아이작은 헤사벨을 향해 턱짓했다.
"잠깐 나가 있어."
"아이작 님...."
"네가 있으면 오해가 더 깊어질 수도 있으니까 일단 물러나 있어. 설마 뭔 일이 생겨도 내가 어쩌지 못하는 걸 네가 막을 수 있을까."
헤사벨은 투덜거렸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에 조용히 물러났다. 그녀는 물러나기 전 자기 눈을 두 손가락으로 가리켰다가, 다시 이솔데를 가리키면서 경고했다.
물론 이솔데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눈치였다.
헤사벨이 나간 뒤 이솔데가 입을 열었다.
"혹시나 했는데 고분고분한 걸 보니 역시 아이작 님의 통제를 받고 있군요."
"예. 제가 기절한 사이 혹시 실례를 범한 건 아닌지 걱정했습니다."
의식을 잃기 직전 헤사벨은 이솔데와 싸우기 직전이었다. 헤사벨이 허당 같은 모습을 자주 보이긴 해도 왈라이카 공작의 후계자다.
죽인 사람의 숫자도, 가지고 있는 힘도 이솔데와 비교가 안 된다. 만약 그대로 싸움이 벌어졌다면 이솔데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을 것이다.
"좀 신경 사납게 굴긴 했어도 고분고분하더군요. 아이작 님을 수습하면서...."
이솔데는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려다가 그때 그 순간이 떠오른 듯 잠시 말을 멈췄다.
아이작은 이제 진지하게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그때 많이 놀라셨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일단 교단에 고발하지 않아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먼저, 그때 그건 어떻게 된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이작은 어떻게 변명을 할지 수도 없이 고민했다. 하지만 이솔데의 태도를 보고 솔직하게 털어놔도 좋겠다는 확신을 얻었다. 목숨값인지 뭔지 몰라도 이솔데는 아이작을 판단하는 것을 미룬 상태다.
그렇다면 설득의 여지도 있을 터.
"보신바 그대로입니다."
"그렇다면 역시...."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는...."
"...역시 불사 교단의 사특한 저주에 당해 신체가 변질당하는 중이었던 거군요!"
아이작은 이름 없는 혼돈의 힘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라는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황급히 이솔데의 눈을 보아하니 농담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이작은 자신이 이솔데 앞에 촉수를 드러냈을 때 모습을 떠올렸다. 알 두아자드가 열어젖힌 저승문 문턱에서 손이며 눈에서 촉수가 튀어나와 기이한 풍경과 함께 흐느적대던 모습.
'오해할 수도 있으려나?'
아이작은 섣불리 그 말에 맞장구치며 거짓말하는 대신 침묵과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이솔데의 상상력을 키웠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거짓말보다 스스로의 상상에 더 잘 속는다.
속이려면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
하지만 아이작은 이솔데의 내면을 읽어 버렸다.
그녀는 속을 준비가 되어있다. 아니, 속기를 원한다.
그때 본 그의 모습이 사악한 사제의 저주에 의해 보인 환각에 불과하며, 눈앞의 당신은 온전하고 경건한 성배기사라고.
그녀는 그렇게 믿고 싶어 했다.
그리고 아이작은 그녀가 그렇게 믿게 둘 생각이 없었다.
아이작은 씁쓸하게 웃었다.
"아뇨. 그게 제 비밀입니다."
이솔데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아이작은 이솔데를 속일 수 있다. 하지만 그다음은? 영원히 숨길 수 있는가?
아이작은 이번 사태로 자신이 대비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사태가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특히나 사후 세계에서 찾아온 그 노란 옷의 정체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이솔데를 죽이는 것도 방법이지만, 몇 번이나 생각했음에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아이작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솔데가 아이작을 고발하고 싶지 않은 것과 같은 이유로.
"저는 저주받은 게 아닙니다. 이단심문관님."
***
아이작은 솔직하게 말했다.
수도원에서부터 이미 촉수가 발현되었으며, 작은 짐승들을 먹이며 성장시켰고, 촉수가 먹은 것 또한 자신의 성장과 생존에 도움을 줬다는 이야기였다. 심지어 계곡에서도 왈라이카 인간사냥꾼을 막을 때에도 촉수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까지도.
다만, 전부 다 말하지는 않았다. 선택적인 고백이었다.
'다른 세계에서 왔다거나, 칼센이나 헤인켈을 먹어버린 일... 까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솔직히 아이작이 포식한 상대 중에는 거리낄만한 상대는 없었다. 모두 짐승 아니면 죽여도 시원찮은 것들이었으니까. 심지어 인간이면 잡범조차도 먹지 않았다.
"...그렇게 저는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물리치고, 불사 교단의 주교를 퇴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정체 모를 신격(神格)의 힘을 빌린 것은 부정할 수 없지요."
촉수를 들킨 것은 어쩔 수 없으니 사실대로 이야기해야겠지만, 이름 없는 혼돈이나 불쾌감을 줄 만한 포식 행위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름 없는 혼돈이 쌓은 부정적인 인식은 아이작과 상관없기도 했으니까.
아이작은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에 대해서만 책임지고 싶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그는 이기적인 동기로 행동했으나 악행을 저지른 바는 없었다.
이솔데는 아이작의 고백을 듣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고해성사를 듣는 사제가 아니다. 오히려 강도 높은 압박을 통해 진실을 쥐어 짜내는 쪽에 가까웠다.
역설적이게도, 그녀는 이 순순한 고백에 낯섦을 느꼈다.
한참 뒤 이솔데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빛의 법전을 믿지 않는 것인가요?"
"딱히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입장에 가깝겠군요."
신과 기적이 실존하는 세계에 신앙을 부정하는 것도 우습다. 그보다는 적극적으로 그 신을 찬양하고 숭배할 생각까지는 없다는 것에 가깝다.
"하지만 수도원장님께서는 제게 믿음의 증명을 수행하셨습니다. 제 생각에 믿음이라는 것이 신을 찬양하고 숭배하는 행위로만 증명되지는 않을 것 같군요."
믿음.
빛의 법전은 보편적 물리 규칙을 '빛의 법전'이라는 형태로 가르치고 고정하는 종교다. 말 그대로 보편적 질서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아이작은 빛의 법전 외 다른 모든 신앙들이 어떤 형태로든 빛의 법전이 주도하는 질서를 따르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라고 보았다.
신앙하는 형태는 다르더라도, 모두 이 세계 자체가 지금 이 형태로 존재하는 것에는 긍정하니까.
"그러면 기적도...."
"예. 기적이라 한다면 이게 제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이작은 이솔데 앞에서 대놓고 촉수를 보여 주었다. 왼손바닥을 가르고 나타난 검붉은 촉수는 손바닥 한마디 넘는 크기로 넘실거리며 드러났다. 이솔데는 생리적인 거부감에 숨을 들이켰지만 즉시 아이작을 불태우겠노라고 선포하진 않았다.
그녀는 거부감을 억누르며 오히려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촉수에 닿았다.
촉수는 가볍게 손가락에 휘감겼다. 결코 흉포하지는 않게.
'이놈도 영악하군.'
아이작은 촉수가 이빨이나 눈동자를 드러내지 않는 것을 보고 잠시 어이가 없었다.
촉수는 이솔데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내켜 하지는 않았지만, 아이작의 의도를 따라 결코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게끔 모습을 어느 정도 감추고 있었다.
이솔데는 잠시 뒤 손을 떼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는 생각이 복잡한지 한참 입을 열지 못했다. 아이작도 그녀 입장이라면 적어도 반나절은 아무 말도 못 할 거라 생각하며 기다려 주었다.
다행히 이솔데는 반나절씩이나 걸리지 않았다.
"때때로 신의 기적은 놀라운 형태로 내려오지요."
아이작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하며 바라보았다.
"전쟁터에서 아이들을 구해 고아원으로 보내는 용병, 가뭄으로 굶주리는 곳에 식량을 헐값으로 내놓는 상인, 자식을 구하기 위해 불구덩이에 뛰어들었다가 살아 돌아오는 어머니... 저는 이 모든 것들 또한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촉수도 기적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기적은 고난에 처한 저희를 구원하기 위해서만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고난 그 자체가 기적이기도 하지요. 루앗딘이 가장 낮은 곳을 전전하다 화형대에 올라서던 그 순간처럼 말입니다."
이솔데는 아이작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촉수가 있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투였다.
"당신은 이미 기적을 보여 주었습니다. 오해받기 쉬운 '그것'과 기적조차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당신은 선을 베풀고 약자들을 옹호했습니다. 매일 같이 기적을 쥐어 짜내면서도 발밑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사제들과 달리요!"
이번에는 아이작이 생각보다 과격한 이솔데의 말에 화들짝 놀라 바라보았다.
이솔데의 눈은 아이작의 손을 보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녀만이 아는 어떤 과거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이단심문관으로서 활동하면서 봐 왔던 것들.
아이작의 생각과 달리 이솔데의 머릿속은 꽃밭이 아니었다.
"당신이 입으로 빛의 법전을 신앙한다고 떠들어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놈들은 이미 많으니까요. 이미 당신은 지켜야 할 가치와 규율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걸로 족합니다!"
그녀의 말에 아이작은 아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진짜 기적이 아니라 감성으로 때운다는 계획은 이미 그가 해 봤던 생각이지만 이렇게까지 감성 과잉이 될 줄은 몰랐다.
그녀의 논리는 이단심문관의 그것이 아니었다.
'아니, 이렇게까지 말하면 내가 이 정신 나간 이단심문관한테서 발 빼야 하는 거 아냐?'
아이작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빛의 법전 안에서 성기사가 되어 잘 먹고 잘살기다. 지금 잘 되어가는 와중에 이솔데를 같은 편으로 만들기만 하면 충분했다.
그런데 이솔데가 이렇게까지 과격분자였다니....
"이단심문관님, 잠시 진정하시고...."
그러나 이솔데는 아이작의 손을 더욱 강하게 덥석 쥐면서 말했다.
"아이작 님, 당신은 무너진 질서를 다시 세우기 위해 빛의 법전께서 보낸 사자임이 분명합니다!"
***
'돌겠군.'
이솔데가 돌아간 뒤, 아이작은 그녀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이솔데가 평범한 이단심문관으로서의 행보를 보이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게벨이 노골적으로 싫어할 정도로, 이단심문관의 악명은 높았다.
하지만 이솔데는 상당히 진솔하고 올곧은 사람이었다.
그다지 이단심문관에게 어울리는 덕목은 아니다.
아이작은 그것을 그녀의 가문 때문에 '때 안 타는 일'만 시킨 이단심문관들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이솔데를 본 아이작은 생각이 달라졌다.
'개혁파군. 그것도 상당한 급진개혁파.'
귀족들은 교단파와 황제파로 나뉘어 있다.
그중 브란츠 공작가는 신심이 깊은 귀족 가문이다. 그렇다면 그녀만의 의지일까?
아이작은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보았다. 교단이 급진 개혁된다면 누가 이득을 볼까.
'황제파 귀족들의 의중이 섞여 있는 건가?'
아니면 정말로 교단에 실망해서?
이솔데가 얼마나 순수한 마음으로 교단의 개혁을 바라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솔데가 아이작을 고발하지 않고 믿기로 한 것처럼, 아이작도 그녀를 믿고 싶었다.
실용적인 이유로든, 개인적인 이유로든.
아이작은 알 두아자드의 주문으로 사후세계가 범람해 오던 때를 떠올렸다.
세계가 무너지고 경계가 흐트러질 때.
그의 몸마저도 혼돈으로 가득 차 촉수가 흘러넘쳐 나올 때.
오로지 이솔데만이 무너지지 않고 그를 다시 질서의 영역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아이작은 그것이 자신의 미래에 있어서 중요한 힌트가 되리라고 직감했다.
99화. 고해 (3)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이솔데는 한참 제자리를 맴돌았다.
'촉수라니!'
그녀는 소리를 지를 수조차 없었다. 누군가 들으면 안 되니까.
아이작 앞에서는 허둥지둥 그에게 내려진 시련이자 고난의 상징이라느니 떠들긴 했지만, 정말 그렇게 믿는 것은 아니었다.
촉수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어떤 끔찍한 일이 있었는지 이솔데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혼돈의 신을 숭배하던 자들에 대한 역사는 거의 다 지워진 상태지만, 그 끔찍한 악명만큼은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이?'
그가 보여 준 됨됨이와 업적은 그녀가 배운 모든 것과 상반되고 있었다.
물론 기만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아이작은 경건한 성배기사로 숭배받으며 많은 이득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단심문관 사이에서는 늘 같은 경구가 잠언처럼 내려오고 있었다.
가장 신실한 자가 가장 뼈아픈 배교를 할지니.
루앗딘에게 반역한 엘릴, 엘릴의 심장을 뽑아버린 붉은 성배, 빛의 법전의 주교였지만 배교하고 사후세계를 지상으로 끌어내린 베셰크.
신화 속 세계는 인간 세계만큼이나 배신과 음모의 연속이었다.
이단심문관들은 그런 일이 또다시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니 아이작을 의심하는 것은 당연했다. 즉, 아이작이 촉수를 보인 순간 이솔데는 그를 즉시 제압했어야 했다. 불가능하다면 탈출하여 알리거나.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솔데는 이미 빛의 법전 교단이 교리를 잘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아이작은 성배기사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이솔데는 차마 아이작을 악이라고 몰아붙일 수 없었다.
'내 신앙심이 흔들리고 있는 건가?'
아니, 신앙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흔들리는 것은 교단에 대한 신뢰였다.
아이작이 교단을 바꿀만한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솔데는 자신이 맡은 역할이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아이작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앞으로도 그녀는 아이작을 감시할 것이다. 다만 목적은 달라질 것이다.
아이작이 악인의 면모를 숨기고 있는지, 혹은 악인이 되어가지는 않는지.
그러나 동시에 이솔데는 다른 걱정도 품고 있었다.
'가장 신실한 자가 가장 뼈아픈 배교를 할지니.'
이단심문관으로서의 직무를 포기하고 교단에 대한 충성심을 잃은 자.
어쩌면, 배교를 저지른 이는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
아이작은 방 안에 은거하는 동안 이번 전투를 통해 얻은 것들을 정리해보았다.
'우선 알 두아자드를 처치하고 얻은 보상....'
알 두아자드를 처치한 순간, 아이작은 사후세계에서 범람해온 혼돈에 휘말려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이름 없는 혼돈은 착실하게 보상을 제공했다. 비록 알 두아자드를 포식할 수는 없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나쁘지 않은 보상이었다.
[이름 없는 혼돈이 해방주교 '알 두아자드' 처치에 만족합니다.]
[혼돈의 포상이 주어졌습니다.]
['어두운 성찬례' 특성을 획득하였습니다.]
[어두운 성찬례 / 촉수로 대상을 포식하거나 '성찬'으로 취급할 수 있습니다. 성찬의 질에 비례하여 신앙이 상승합니다. 성찬을 목격한 적은 공포 혹은 혼돈 상태에 빠지지만, 당신의 추종자들은 종교적 황홀경에 빠집니다.]
'이거 나한테 좋은 특성 맞아?'
아이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스킬 설명을 읽었다. 이름 없는 혼돈보다 붉은 성배 클럽에 어울릴 법한 능력이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적을 산 채로 씹어 먹는 촉수나 피 빨아먹는 뱀파이어나 크게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최근에는 신앙을 늘릴 필요도 느끼고 있었고, 잘 써먹기에 따라 광역 디버프, 혹은 아군에게는 광역 버프도 부여한다고 하니 나빠 보이진 않았다.
'종교적 황홀경'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효과를 낳을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은 알 두아자드에게서 빼앗은 성물.'
아이작은 헤사벨에게 영대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헤사벨은 이미 준비한 듯 바로 내놓았다. 상당히 강한 기적을 즉발성으로 사용할 수 있는 영대였다. 빼앗고 보니 역시나 상당한 가치가 있는 성물이었다. 이미 몇 군데 타들어 간 흔적이 있지만 아직 8개의 문양이 남아 있었다.
아이작의 눈앞에 이 물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는 창이 나타났다.
[예비된 자의 영대(S)]
[베셰크 주교가 아직 배교를 저지르기 전 사용하던 영대. 강력한 제례용 도구로, 미리 필요한 제물과 기도문만 적어 놓는다면 복잡한 의식을 생략하고 기적을 발휘할 수 있다. 사용되어 그을린 흔적은 오직 베셰크 주교만이 지울 수 있다.]
분열 예식과 같은 제례용 아이템이었다.
그것도 불사 교단의 신, 베셰크와 직접 연관된 아이템.
하지만 분열 예식보다는 등급이 낮았다. 분열 예식은 신의 탄생과 직접 연관된 아이템이지만, 예비된 자의 영대는 단순히 베셰크가 아직 인간이었던 시절에 소지했던 물품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신의 물건이어서 그런지 제례용으로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분열 예식은 강력한 제례용 촉매로, 많은 절차와 재료를 생략하게 해 준다. 하지만 이 영대는 촉매로써의 역할 외에도 미리 복잡한 과정을 치러 둔다면 나중에 필요할 때 기적을 즉시 발동할 수 있는 형태인 듯했다. 마치 총알을 장전하는 것처럼.
'문제라면 무슨 기적이 있는지 모른다는 건데.'
아이작이 아무리 들여다봐도 베셰크 주교의 영대라는 정보만 보일 뿐, 무슨 기적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발동했다가 언데드 소환 기적 따위가 나타나면 곤란해질 수 있었다.
'이건 그냥 버프용 아이템으로 가지고 다니는 게 낫겠어.'
['예비된 자의 영대' 성물을 습득하였습니다.]
[숭고한 여정 효과가 더욱 강해집니다.]
불사황제 베셰크와 얽힌 사연이 있는 성물이었기 때문에 아이작이 가지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버프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불사 교단을 적대시하는 상황에서 반납할 수도 있는 것도 아니니, 이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이작은 듀라한과 싸우던 때를 떠올렸다.
그 듀라한은 분명 보통 검사가 아니었다. 엘릴 교단에서도 이름있는 검사였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그가 누구였는지 알아낼 단서는 전혀 없었고, 다만 그가 무기로 쓰던 부러진 검 손잡이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검 손잡이는 딱히 기적도 힘도 없어서 가치가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단 보관해 두기로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와중, 아이작은 자신의 내면에서 검 쪽을 향해 솟구치듯 발현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기적이나 상급 검술과는 다른 무언가였다.
듀라한의 검술 실력은 명백히 자신보다 우위였다. 하지만 그의 검술 실력을 흡수하면서, 아이작은 자신의 한계를 깨뜨린 것이다.
'이것도 칼센의 재능 덕분이겠지. 칼센은 대체 얼마나 강했던 거지?'
만들어진 신의 후보, 명천사로 예비된 성기사였으며, 불사 교단의 이인자까지 올라가는 존재였으니 강한 것은 당연했다. 그런 존재가 자신에게 잡아먹혔다는 것이 생각할수록 기이하게 느껴질 따름이다.
이 능력만큼은 상태창으로 확인이 되지 않으니 방에 은거하는 동안 명상을 하면서 되새겨 보기로 했다. 그때의 감각을 다시 깨우칠 수만 있다면 그의 수준은 확실하게 한 단계 진보할 것이다.
'적어도 게벨이나 그 이상....'
성기사들 중에서는 최상위권에 속하는 수준이다. 아이작은 눈을 감고 듀라한과의 대결을 되새겼다.
***
땅, 땅.
금속을 두들기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성 구석에 마련된 대장간은 한동안 쓰는 사람이 없다가 갑자기 피어오른 열기와 망치질 소리에 오랜만에 기지개를 켰다. 망치를 든 남자는 맹렬하게 모루에 망치질을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힐끔거리며 망치질하는 남자를 훔쳐보았다. 땅딸막하지만 단단한 체구에 덥수룩한 수염 곳곳이 그을린 모습. 이제는 대륙에서 거의 사라졌다고 알려진 바로 그 드워프였기 때문에 호기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백 년 넘게 사람들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화로 장인이라니.
하지만 함부로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작의 보호를 받는 손님이라는 경고를 들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화로 장인은 걱정 없이 망치질을 할 수 있었다.
누군가 등 뒤에서 말을 걸기 전까지는.
"어르신."
요란한 쇳소리를 뚫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망치질을 하던 화로 장인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위아래로 말을 건 여자를 훑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이단심문관 아가씨로군."
"이솔데 브란트입니다."
이솔데가 정중하게 대답하자 화로 장인은 뻣뻣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울스텐이오. 좀 대꾸가 투박해도 이해해주시구려. 원래 내 말투가 이 모양이니... 비록 신앙은 달라도 은혜를 모르는 놈은 아니오."
울스텐은 다리 위에서 불사 교단의 언데드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자신을 구하러 온 이솔데를 잊지 않고 있었다. 이단심문관인 이솔데는 그가 세상의 화로 교단의 사제인 화로 장인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보았고, 울스텐은 이단심문관이 자신을 보호하러 왔다는 사실에 아이러니함을 느꼈다.
"은혜라니요. 같은 백제국에 속한 자들끼리 돕는 것은 당연하지요."
"뭐...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소만."
엘릴, 빛의 법전, 세상의 화로.
아홉 신앙 중 이 세 가지 신앙을 믿는 국가들을 뭉뚱그려 백제국이라 부른다.
물론 그 안에서 갈등이나 내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비슷한 가치를 지향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 최근에는 빛의 법전에서 점점 교조적인 분위기가 강해지면서 관계가 껄끄러워지긴 했지만, 함께 흑제국에 맞서왔다는 공통의 역사가 그들을 여전히 묶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이솔데와 울스텐이 함께 불사 교단의 적들을 막아 낸 것은 꽤나 의미 있는 일이었다. 세상의 화로 교단이 고립주의에 빠져들면서 그럴 일이 최근에는 거의 없었으니까.
그리고 세상의 화로 교단이 고립주의에 빠져들게 된 이유─이단심문관이 이렇게 겸손하게 나오자 울스텐은 어색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아는 이단심문관답지 않은 반응이군. 다들 콧대만 높아서 말 몇 마디 나누다 혈압 올라서 죽을 수도 있다고 하던데... 급하지 않다면 만들면서 이야기해도 되겠소? 중간에 그만두면 품질이 떨어지거든."
울스텐은 두들기던 쇠를 다시 두들기기 시작했다. 이솔데는 명성이 자자한 화로 장인이 손수 두들겨 뭘 만드나 하고 자세히 지켜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전설적인 명검을 만드는 것 같진 않았다.
"정(釘)입니까?"
석공이나 광물을 캐낼 때 쓰는 커다란 대못 같은 도구였다.
"그렇소. 조만간 필요할 것 같아서."
화로 장인들이 신비로운 화로의 기적을 이용해서 마법 같은 무기를 만들어 낸다고 알고 있던 이솔데는 울스텐이 평범하게 땀을 뻘뻘 흘려 가며 정 하나를 만드는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화로 장인들이 바다를 건너온 것도 알려진 것만 백여 년 전 일이니 자신이 잘못 알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울스텐은 자신의 작업을 말없이 지켜보는 이솔데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 듯 힐끔거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썩 꺼지라고 하겠지만 이단심문관에게 그럴 수도 없었다.
결국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으시거든 하시구려."
"음? 아아, 큰일은 아닙니다. 지나가다가 화로 장인께서 제련을 하는 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요. 혹시 제가 실례를 저지르고 있는 걸까요?"
"흠, 아니오. 이건 자기 수양과 기도 같은 거니까."
화로 장인들은 세상의 화로 교단의 대장장이이자 사제다. 변화와 불꽃, 단련의 기적을 다루는 그들에게 이런 제련은 아침 기도와 마찬가지다. 빛의 법전 사제들이 기도하기 전에 제단의 촛대에 불을 붙이듯, 이들은 화로에 불을 피워 올리고 쇠를 두드리는 것이다.
울스텐이 이솔데를 힐긋 보면서 말했다.
"할 말이 없다면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
"예?"
"성배기사는 어떤 사람이오? 수도원에 돌아오고 나면 금방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얼굴도 보기 힘들군. 부상이 그렇게 심한가? 듣기로는 천사도 꺾었다 하던데."
"아, 아이작 님이라면...."
이솔데는 아이작에 대해 이야기하려다가 말문이 막혔다. 아이작과 함께 보낸 시간이 길다 할 수는 없지만 이 영지에 있는 사람 중 가장 인연이 오래된 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솔데는 아리엣 수도원에서 아이작의 진실된 모습을 봤다고 생각했지만, 최근에는 잘 알 수 없게 되었다.
버벅거리던 이솔데는 그를 만나본 사람이나 알 수 있는 말을 가까스로 내뱉었다.
"잘생겼지요?"
"...그것뿐이오? 에이단도 그렇고 어째 만나는 사람마다 다들 그 얘기를 빼놓지 않는군."
100화. 화로 장인 (1)
물론 외모가 잘나면 불가사의한 믿음과 신뢰를 주게 된다는 것은 울스텐도 알고 있었다. 사실 그는 아이작에 대한 질문을 수도원의 다른 하인이나 관료, 심지어 성기사와 사제들에게까지 물어보았다.
그리고 울스텐은 그들이 전부 아이작에 대한 미친 광신도라는 것만 알게 되었다.
'엄청나게 잘생긴 것은 물론이고, 경건한 목소리 한방으로 고대신에게 홀린 사람들을 깨우쳤으며, 단신으로 천사를 무찌르고, 칼을 대충 휘두르자 언데드가 수수깡처럼 부러져나갔다고? 다들 제정신이 아니군.'
물론 소문에는 과장이 덧붙기 나름이지만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열정적으로 아이작이 얼마나 잘났는지 설파하니, 울스텐에게는 떨떠름할 뿐이었다. 일반적인 성배기사에 대한 존경을 넘어서 어딘가의 수상한 교주 같은 느낌마저 들었던 것이다.
'이단심문관은 좀 다를까 했는데 역시 제정신은 아닌 것 같군.'
울스텐의 싸늘한 반응에 이솔데는 당혹스러워하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사실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는 어려운 사람이라서요. 이런 사람이다 싶으면 그 이상을 보여주고, 저런 사람인가 싶으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모습을 보여 주는지라,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외견 정도로군요."
"흐음."
이솔데의 대답에 울스텐은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였다.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라.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다들 입을 모아 찬양하기 바쁜 성배기사를 이단심문관이 예측하기 힘들다고 말하다니. 울스텐은 호기심이 들었지만 계속 캐물을 수는 없었다.
이솔데가 질문의 방향을 바꿨기 때문이었다.
"질문을 돌려보죠. 화로 장인께선 여기 무슨 일로 오셨을까요?"
울스텐은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장인이 물건을 만들러 왔지, 뭐 때문에 왔겠나? 의뢰받은 물건이 있었지."
"화로 장인이 의뢰 때문에 바다를 건너요?"
화로 장인들이 게르토니아 제국에서 사라진 이유는 빛의 법전과의 트러블 때문이기도 했지만, 화로 장인들의 물 공포증이 유난 맞았기 때문이었다. 단단하고 다부진 체구를 가진 드워프들은 물에 빠지면 조약돌처럼 가라앉았다.
"꽤 짭짤한 벌이였거든."
울스텐은 당당하게 말했다.
천박한 대답이었지만 이솔데는 울스텐이 더 이상 말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제국에는 화로 장인이 만든 단검 하나라도 구할 수 있다면 돈을 아끼지 않겠다는 귀족들이 줄을 섰다. 돈으로 부릴 수 있었다면 진작에 화로 장인들은 제국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 이솔데의 호기심은 아이작에게로 향했다.
아이작은 이 화로 장인이 오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리고 게르토니아 제국에서 유일하게 화로 장인을 보유한 이 성배기사는 대체 뭘 만들려고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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