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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스텐은 폐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래된 돌조각을 밟을 때마다 음산한 소음이 폐광 안에 울려 퍼졌다. 옆에 선 에이단이 횃불을 들고 있었지만 폐광의 어둠은 그마저도 삼키는 듯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화로 장인."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어둠 속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혀 그의 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있던 울스텐과 에이단은 흠칫하며 멈춰 섰다.

울스텐은 잠시 목을 가다듬고 겨우 대답했다.

"...자네가 그 이름 높은 성배기사로군."

울스텐의 대답에도 아이작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울스텐은 에이단에게 눈치를 줘서 좀 더 횃불을 앞으로 비추라고 지시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은 아이작의 다리 언저리뿐이었다.

"대화하기에는 조금 먼 거리 같은데 가까이서 이야기해도 되지 않겠나?"

"우선 저는 질문 몇 가지를 할 겁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에 따라 우리 거리를 어떤 식으로 좁힐지 결정하도록 하지요."

그 말에 에이단이 조급한 모습을 보였다.

"아이작 님, 화로 장인께서는 저와 성배기사님을 신뢰하여...."

"나를 초대한 건 자네일 텐데."

울스텐이 에이단의 말을 끊고 대답했다.

사실 원래 그였다면 이런 대우를 받자마자 바로 자리를 박차고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등을 보이는 순간 어둠 속에서 무언가 튀어나와 그의 발목을 쥐고 심연 속으로 끌고 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솔데가 했던 말이 조금 이해가 되었다.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랬던가. 성배기사에게서 느낄 법한 기분이 아니었다.

"초대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요. 우선 질문하겠습니다."

아이작은 화로 장인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세상의 화로 장인께서 무엇 때문에 바다를 넘었을까요? 빛의 법전 교단과 갈등이 생겨서 교류가 거의 끊어졌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울스텐에게는 다행히도 이미 이솔데에게 받았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솔데에게 말했던 대답이 그대로 아이작에게 통할지는 알 수 없었다.

"장인이 의뢰받은 물건을 만들러 왔지, 뭐 때문에 왔겠나?"

아이작은 말없이 울스텐을 응시했다. 울스텐은 그 보랏빛 시선에서 불편함을 느꼈다.

마치 긴 더듬이를 그의 뇌 안에 밀어 넣어 내면을 샅샅이 훑는 듯한 느낌이었다. 만약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강제로 움켜쥐고 끌어낼 것만 같은.

"만들려던 물건이 뭡니까?"

울스텐은 결국 입을 열었다.

"...신을 만들려고 한다네."

"신?"

아이작은 눈썹을 찌푸렸다.

터무니없는 말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제가 할 만한 생각은 아니었지만 칼센 밀터를 신으로 만드는 계획에는 무수히 많은 사제들이 개입해 있었다.

거기에는 많은 이유들이 깔려 있었다. 자신이 믿는 신을 위해서, 어떤 사악한 신앙을 막기 위해서, 봉사를 대가로 보상을 받기 위해서... 하지만 울스텐의 말에는 다른 이유가 깔려 있었다.

"신을 만드는 것 자체가 목적이란 말이군요?"

"음, 바로 알아듣는군."

이것은 아이작이 이미 세상의 화로 엔딩을 봤기 때문이기도 했다.

세상의 화로 교단은 엘릴 교단과 마찬가지로 백제국으로 분류된다. 다만 그들은 하늘의 태양을 신의 상징으로 삼는 대신 지하의 들끓는 용암을 상징으로 삼고 있다.

그들의 교리에 따르면 신은 스스로의 몸을 진정한 형태로 재탄생시키기 위해 땅거죽 아래에 있는 '세상의 화로'에 들어갔으며, 마침내 그 제련이 끝났을 때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다.

재밌는 것은 그들은 바로 그 신이 빛의 법전이라고 믿는다는 점이다.

다른 신도들은 빛의 법전은 이미 신께서 하늘에서 굽어보고 계시다고 말하지만, 세상의 화로 교단은 저것은 진정한 신의 모습이 아니며, 재탄생이 완성되는 시기에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사실상 같은 신을 섬기면서도 다른 교리를 지닌 것이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섞이지 못하고 별개의 교단으로 존재했다.

그리고 이런 교리를 가진 세상의 화로 교단이 가진 최종 목적은 하나.

"세상의 화로가 깨지는 날 당신께서는 땅거죽을 벗고 찬란한 형태를 드러내신다. 지금 빛의 법전이 신이랍시고 섬기는 것은 빛바랜 태양이야. 진정한 신이 스스로를 재탄생시키는 동안 그들을 기만하고 있을 뿐."

빛의 법전 사제들이 듣는다면 기함할 만한 소리였다.

그런 얘기를 고대신과 천사, 주교를 썰어 버린 성배기사 앞에서 하고 있으니 옆에서 듣고 있던 에이단은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울스텐 역시 평소라면 다른 신앙의 신자들 앞에서 이런 말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답을 원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에게 장인으로서의 철학을 들려줘야 했다.

"그러면 세상의 화로를 섬기는 장인으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나? 그저 대지 거죽 아래 신이 스스로 깨어나길 기다리는 것? 아니지. 우리는 장인이야. 신께서 우리에게 창조와 변화의 기적을 선물하신 까닭은, 우리가 직접 당신의 육신을 만들라는 뜻이다."

"...그건 세상의 화로 교단의 공식 입장은 아닌 거죠?"

"허어? 묘하게 눈치가 좋군. 그래. 나처럼 생각하는 장인이 많지는 않지. 불경하다고도 하고."

많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세상의 화로 교단 안에서도 과격파 내지는 급진파로 분류되는 집단이다.

해석에 따라서는 이단으로 분류되기까지 하는.

아이작은 울스텐의 실체를 알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째 주변에 자꾸 이런 놈만 꼬이는군... 이름 없는 혼돈 때문인가?'

게벨은 파문당한 성기사고, 헤사벨은 아이작이 강요하긴 했지만 배교자에, 이솔데는 교단이 썩었다고 부르짖는 속 꼬인 이단심문관이며, 울스텐은 신을 만들겠다고 자처하는 사제다. 어쩐지 철저한 마이너리티만 아이작 주변에 꼬이는 느낌이었다.

아이작부터가 몸 안에 이름 없는 혼돈을 품은 거짓 성배기사이니 끼리끼리 모이는 걸지도 모른다.

'아니,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군. 목적만 맞다면 밑바닥끼리 힘을 합쳐야 할 테니.'

울스텐도 신을 만들겠다고 설치는 만큼 실력은 확실할 것이다. 무명 성서를 만든 것도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일 테니까.

'하지만 결국 칼센이 실패한 것을 보면 신을 만드는 데는 실패한 모양이군.'

아이작의 침묵이 길어지자 이번에는 울스텐이 입을 열었다.

"자, 그러면 이제 자네가 대답할 차례인 것 같군. 나는 여기 무슨 일로 초대했지? 보호가 필요해서 오기는 했네만, 자네 목적도 들어야 할 것 같아서."

아이작은 대답 대신 몸을 돌렸다.

"우선 움직이면서 이야기하지요."

***

아이작과 울스텐, 에이단은 점점 더 깊은 폐광 안으로 향했다.

그들이 멈춰 선 곳은 벽에 박혀 있는 타천사 앞이었다. 수십여 미터에 이르는 여덟 장의 날개로 이루어진 천사는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한 형상으로 벽에 굳어져 있었다. 몸 대부분은 바위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전부 꺼내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울스텐은 타천사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게... 그 타천사로군. 돌이 된 천사라니."

"본 적 없습니까? 타천사로 이미 무명 성서를 만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리스헨 헨드락이 가져다준 조각으로 만들었을 뿐이네. 그때에는 어디 있는지도 몰랐지."

울스텐은 장인의 심장이 뛰는 건지 눈을 떼지 못하며 투박한 손을 뻗어 타천사의 굴곡을 더듬었다.

그 손길은 섬세하기 그지없었다.

타천사는 귀하디 귀한 재료다. 신마다 천사를 벌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빛의 법전의 타천사처럼 선명하게 흔적이 남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울스텐은 당장이라도 타천사를 바위에서 꺼내 무언가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듯했지만, 아이작의 시선 속에서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자네가 나한테 시키고 싶은 일이 뭔가? 어차피 나는 뭔가를 만드는 재주밖에 없는 장인일세. 굳이 여기까지 데려와서 이걸 보여 주는 걸 보니 뭔가를 부탁하고 싶은 모양이지?"

"정확합니다."

아이작은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뭔가?"

"말로 설명드리기는 어렵고... 나중에 제가 조악하게 만든 도면이라도 보여드리겠습니다. 갑옷 비슷한 것인데 아마 전에 만들어보신 적 없는 형태일 겁니다."

전에 만들어본 적 없을 것이라는 말에 울스텐은 코웃음 쳤다. 그는 경험이 풍부한 화로 장인이었다. 세상의 화로 교단에도 성기사와 비슷한 존재들이 있었다.

"라이칸스로프(Lycanthrope) 전사들에 대해서 모르는 모양이군. 그들이 입는 갑옷을 만드는 것에 비하면 일반인이 입는 갑옷 따위는 별것도 아니지."

"생각만큼 쉽지는 않을 겁니다."

아이작은 그가 도면을 보고 황당해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말했다.

"살면서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형태의 갑옷을 만들어야 할 테니까요."

101화. 화로 장인 (2)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부탁드리고 싶군요."

"뭔가?"

아이작은 에이단을 가리켰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에이단은 갑자기 두 사람의 시선을 받자 당황하며 허리를 바로 세웠다.

"저 친구에게 약속한 물건이 있습니다. 소금 의회에...."

"그건 안되네."

갑자기 울스텐이 딱 잘라 말했다.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아이작은 의아한 듯 물었다.

"뭘 만들어달라는지 듣지도 않고 말입니까?"

"보나마나 소금 의회에 성물 하나 만들어달라는 거겠지. 무명 성서 같은 거 말이야."

정확했기 때문에 아이작은 미소를 지었다.

화로 장인이 다른 신앙의 성물을 만드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신앙의 천사나 사제들조차도 화로 장인이 만든 성물을 더 좋아했다. 어차피 화로 장인이 만드는 성물은 포장지에 불과하고, 그 안에 무엇을 채우느냐는 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같은 그릇을 만들어도 그 안에 물을 채우느냐 피를 채우느냐는 그릇을 가진 자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울스텐은 그 그릇을 만드는 것조차도 단호하게 거부했다.

"에이단, 이 친구가 나한테는 한 번도 부탁 안 했을 것 같나? 어려운 게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야."

"왜죠?"

"애초에 무명 성서는 나 혼자 만든 게 아니야. 자네도 여기까지 왔으면 알겠지만, 많은 사람들의 손이 닿았지. 배교자라고 욕먹어도 할 말 없을 정도로. 필요한 재료도 다양해. 고작 타천사 하나 있다고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네."

그건 아이작도 예상하고 있었다.

불사 교단, 빛의 법전, 세상의 화로, 붉은 성배,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 난 교단들이 힘을 합친다는 게 애당초 기적이었다. 무명 성서는 원한다고 만들 수 있는 물건도 아니고, 다시 만들 수 있는 물건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작이 원하는 것은 무명 성서가 아니었다.

"혹시 다른 성물을 원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야. 소금 의회의 신은 지금 소금 사막 아래 매장당했어. 신의 전언도, 축복도, 허락도 받지 않고 만들어진 성물이 과연 제대로 된 성물일 것 같나?"

울프텐은 콧방귀를 뀌며 중얼거렸다.

"보나 마나 안에 잡귀나 꼬여서 엉망이 될 거야. 소금 의회 놈들은 그걸 또 좋다고 섬기겠지. 그런 와중에 무명 성서? 단체로 고대신이나 섬기다가 자기들끼리 죽고 죽이지 않으면 다행이겠군."

쇠르에서 고대신이 벌였던 일과 비슷한 일이 또 벌어질 수 있다는 투였다. 그리고 실제로 소금 의회가 곧잘 하는 행동이기도 했기 때문에 아이작은 웃고 말았다.

지금 소금 의회는 온갖 미신적인 행동과 금기로 중구난방이었다. 제대로 된 교리를 잃어버린 탓이었다.

에이단은 단호한 울스텐의 말에 실망하는 모습을 보였다.

솔직히 아이작은 굳이 어려운 신을 섬기지 말고 제대로 된 신... 그러니까 이름 없는 혼돈 같은 걸 섬기면 어떻겠냐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소금 의회도 소금 의회 나름대로 필요했다.

"그런 걱정은 하지 말고 일단 만들어주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이 친구를 위해서라도 그런 건 함부로 만들면 안 된다니...."

"일단 만들어놓으면 제가 제대로 된 성물로 만들겠습니다. 약속한 바가 있으니까요."

아이작의 말에 에이단이 눈을 번쩍 떴다.

'제대로 된' 성물로 만들겠다고? 그것은 연락이 두절된 그들의 신과 다시 연결할 방법을 알고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소금 의회의 얼마 안 되는 사제들조차 모르는 방법을.

실제로 소금 의회로 엔딩까지 본 아이작은 간단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경악 어린 시선을 받으며, 아이작은 부드럽게 부탁했다.

"이제는 부탁드려도 될까요?"

"무슨 성물을 만들지부터 이야기해야 하지 않나?"

"촉매로 활용할 거라서 그렇게 대단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기왕이면 작고 의식용으로 사용 가능 한 것이면 좋겠군요. 제가 대략적인 형태를 알려드리죠."

울스텐은 아이작의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협력하기로 했으니 돕기로 하지. 그럼 두 개나 만들어줘야 하는데, 대가는 뭘로 지불할 생각인가?"

"화로 장인을 싼값에 부릴 생각은 없습니다."

아이작은 타천사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당신이 바다를 건넌 이유가 돈을 받기 위해서는 아니겠지요. 여기에 머무는 동안 당신이 무엇을 만들든 필요한 물자를 지원해드리겠습니다. 장비와 시설도요. 사실 타천사 정도라면 타협할 수 있는 최상의 재료 아닌가 싶군요."

울스텐은 아이작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자신이 바다를 건넌 이유를 밝혔다. 화로 안에 들어간 자신의 신을 장인의 손으로 재탄생시키기 위해서라고. 즉, 아이작은 그것을 돕겠다는 뜻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배교로 해석할 수도 있었다.

"신께 맹세할 수 있나?"

아이작은 미소 지었다.

"빛의 법전께 맹세하죠."

***

귀한 타천사 조각을 제공한다고는 해도 화로 장인을 고용하는 것 치고는 싼값이다. 화로 장인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제국의 귀족과 상인들은 눈이 뒤집힐 테니까.

타천사의 크기는 충분했다. 화로 장인과 소금 의회, 양쪽 모두에게 만족스럽게 나눠줄 수 있다. 어차피 시장에서 눈에 띄지 않게 유통시키려면 조금씩 유출시켜야 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렇다고 이름 없는 혼돈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는 없으니 빛의 법전을 걸었을 뿐이다. 결코 '어쩌다 보니 마음이 바뀌어서' 맹세를 어겼을 때 대가를 치르지 않으려고 한 것은 아니다. 정말 아니다.

하지만 함께 곁에서 걷고 있는 에이단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저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이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울스텐은 타천사 앞에 내버려 두고, 아이작은 에이단을 데리고 광산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이작이 든 루앗딘 열쇠의 불빛이 환했기 때문에 어둡지는 않았지만, 폐쇄된 지 오래된 폐광 특유의 답답한 공기가 에이단의 가슴을 옥죄어 왔다.

에이단은 슬슬 아이작이 '용건은 끝났으니 여기서 죽어 줘야겠다'라면서 칼을 휘두르지 않을까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다시 아이작이 밖을 향해 나가기 시작했을 때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아이작이 대체 뭘 하려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여길 자신의 무덤으로 삼을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그때 아이작이 멈춰 섰다.

"뭐가 안심이지?"

"예? 어, 이제 밖으로 나가시는 것 같아서...."

"우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같은 통로를 걷지 않았어. 여전히 어둡고 깊은 폐광을 걷고 있지. 어떻게 나가는 길이라는 걸 알았지?"

에이단은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아이작은 자신을 시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함부로 대답할 수 없어서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나 아이작은 에이단이 하지 못한 대답을 대신 했다.

"그야 여기 와본 적 있으니까 잘 모르는 길도 잘 알겠지. 안 그래?"

에이단은 대답하지 못했다.

소금 의회가 헨드락 영지에서 맡았던 역할은 무엇일까.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금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면 대신 말해주지. 소금 의회가 하는 일이다. 당연히 운송과 밀수를 했겠지."

화로 장인조차 소금 의회의 도움을 받아 바다를 건너온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바다의 선원들 중 태반은 소금 의회 신도들이다. 바다에서만큼은 누구도 소금 의회의 눈을 피해서 움직일 수 없다.

반대로, 빛의 법전의 눈을 피해 불사 교단이나 붉은 성배 클럽의 물자나 사람을 들여보내려면 소금 의회의 도움이 필수적이라는 뜻이다. 소금 의회는 황금우상과 마찬가지로 백제국에도 흑제국에도 속해있지 않기 때문에 거리낄 이유도 없었다.

"그렇다면 에이단 베어베크, 자네는 무엇을 몰래 들여오러 이 폐광을 들락날락거렸을까?"

이번에도 아이작은 답을 알면서 에이단에게 물었다.

에이단은 입 다물고 있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 숨을 가쁘게 쉬다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이제 리스헨 헨드락이 죽고, 칼센 밀터도 사라지면서 그의 손을 떠난 일이었다.

"...무기와 장비들... 입니다."

아이작은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에이단은 추가로 더 말하지 않았다.

아이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또?"

"예? 그, 그것뿐입니다."

"시체나 뼈다귀 같은 거 안 가져왔어?"

에이단은 무슨 흉흉한 말을, 하는 표정으로 아이작을 바라보다가 그가 무엇을 암시하는지 알고 사색이 되어 다급하게 손을 저어댔다.

"언데드요?! 소금 의회가 이번 일에 끼어들긴 했지만 그만큼 정신 나간 짓을 하진 않습니다! 지방 영주가 무기를 사들이는 것과 언데드를 숨겨오는 것은 죄의 수준이 다르다구요!"

정색하고 말하는 것을 보니 진심이었다. 소금 의회 신도의 말이었기에 아이작은 혼돈의 눈을 쓸 필요도 없이 믿었다.

리스헨은 이곳에서 반란 비슷한 것을 준비 중이었다. 아마 칼센 밀터라는 새로운 신을 만들고 국가를 세우려고 했으니 필요한 게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일단 썩지 않는 무기부터 비축해 두려고 했을 테고.

폐광은 그런 물자를 숨겨 두기 좋은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불사 교단의 도움도 받았으니 병력도 숨어 있지 않을까 했는데, 아무래도 그 정도까지 엇나가진 않았던 모양이다.

'하기야 새로운 신을 세우는 거지, 불사 교단에 투신하려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아마 자신만의 논리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이런 음모가 으레 그러하듯, 칼센 밀터가 사라지고 붉은 살점의 선지자와 트러블이 생기면서 제거당했고.

"그 장비들은 어디 있지?"

아이작은 에이단의 어깨를 감싸 쥐며 물었다. 에이단은 얌전히 리스헨이 숨겨 둔 도토리 창고를 향해 안내했다. 아이작은 에이단이 어둠 속에서도 능숙하게 길을 안내하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소금 의회는 밀수꾼이나 선원 정도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의 큰 효용이 있다.

오직 신도들만이 공유하는 은밀한 비밀.

울스텐이 성물을 만들고 나면 아주 쓸모 있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

울스텐의 안내를 받아 다시 폐광 안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아 에이단과 아이작은 널빤지로 막아놓은 갱도 앞에 도착했다. 널빤지에는 초라하게 '위험! 폐갱'이라고 적혀 있는 경고문이 전부였다.

"출입구와 그렇게 멀지 않은 것 같은데."

"너무 깊은 곳에 방치 해두면 관리하기도 힘들고, 혹여 광산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요."

아이작은 칼로 단숨에 널빤지를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드나든 지 오래된 폐광인데도 용케 무너지지 않고 잘 보존되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작은 갱도 안의 공기가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갱도 안쪽은 제법 넓었다. 커다란 공동 안쪽에 나무 상자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아, 저기 있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봤던 때와 똑같...."

아이작은 덜컥 에이단을 멈춰 세웠다. 에이단은 그대로 우뚝 선 채 앞을 바라보았다.

절그럭.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에이단은 문득 공기가 쌀쌀하다는 것을 느꼈다. 동굴 안이 원래 좀 춥긴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어, 언데드? 설마 그럴 리가...."

"사령술이군. 리빙 아머(Living Armor)다."

어둠 속에서 절그럭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허공을 날아다니는 갑옷과 칼들이었다.

에이단은 사색이 되어 다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저는 거짓말 하지 않았...."

"알아. 그냥 속은 거겠지. 그리고 리빙 아머는 군대로 쓸 만한 것이 못 된다."

망령들은 전술적 행동을 이해 못 하고 단순한 행동밖에 하지 못한다. 망령에 주박을 걸어 놓고 단순한 파수견, 내지는 병장기들을 관리하는 하인 정도로 쓰기 위해 세워 놓은 것 같았다. 놀랄 것도 없었다. 이미 불사 교단은 자기네 사제도 고대신 하나 부려 먹기 위해 수도원 지하에 몇십 년이고 짱박아 놓는 놈들이었으니까.

리빙 아머들은 침입자를 감지한 듯 여기저기서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작에게 위협이 될 만한 놈은 보이지 않았다. 리빙 아머를 파괴하는 것은 언데드 퇴치 기적을 쓰거나 갑옷에 숨어 있는 주술 촉매를 제거하면 간단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아까운 병장기를 훼손하고 싶지 않았다.

"어, 밖에서 사람을 불러올까요?"

"아니."

아이작은 에이단을 힐긋 보고 고개를 돌렸다.

"내가 하는 걸 잘 봐라."

에이단은 루앗딘 열쇠를 검집에 집어넣고 왼손을 툭툭 털었다. 그때 리빙 아머 하나가 소리도 없이 아이작을 향해 달려들었다. 둘이 교차하는 순간, 아이작은 왼손으로 리빙 아머의 가슴에 손바닥을 꽂아 넣었다.

콰드드드득.

촉수가 갑옷을 꿰뚫고 그 안의 촉매를 순식간에 제압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촉수에 신성력을 불어넣으며 갑옷에 깃든 영혼까지 거칠게 탐식했다.

촉수가 삽시간에 부풀어 올랐다. 순식간에 수십 가닥으로 번져나간 촉수는 단숨에 갑옷 안을 가득 메우고 심지어 구멍이란 구멍 곳곳으로 튀어나와 흩어지기 시작한 영혼을 게걸스럽게 훑어 먹었다.

그 모습을 본 리빙 아머들이 발작적으로 영적인 비명을 질렀다.

[어두운 성찬례가 발동합니다.]

102화. 어둠 속에 묻힌 것들 (1)

단순히 이곳을 지키고 관리하라는 명령을 들은 리빙 아머들에게 공포라는 이질적인 감정이 스며들었다. 아이작은 눈을 번뜩이며 거칠게 갑옷을 찢어발겼다. 영혼의 한 줌조차 남기지 않고 포식해 버리는 촉수의 모습에 리빙 아머들은 영적인 충격을 받았다.

일어섰던 열 몇 구의 리빙 아머들은 순식간에 혼이 튕겨 나가 동굴 밖으로 사라졌다.

'결속이 약해서 다행이군.'

아이작이 일부러 신성력을 불어넣어 효과를 크게 한 것도 있지만, 애당초 이 리빙 아머들이 그다지 정성 들여 만든 게 아닌 탓도 있었다. 하지만 어두운 성찬례 특성이 발동한 것만으로도 이 정도라면, 하급 군졸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물론 촉수를 꺼내서 화려하게 죽여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아이작은 고개를 돌려 '어두운 성찬례' 효과를 받았을 에이단을 돌아보았다. 그가 일부러 이런 '쇼'를 보인 것은 에이단 때문이기도 했다.

망령들처럼 도망도 가지 못하고 겁에 질려 꼼짝 못 하는 그를 마음대로 조종하기 위해서.

역시나 에이단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벌벌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 보인 것은 공포가 아닌 다른 감정이었다.

그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꿈꾸는 자시여...."

"뭐? 뭔 소리를 하는 거냐?"

아이작은 눈살을 찌푸리며 에이단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에이단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후다닥 일어섰다. 하지만 에이단의 눈에는 공포 대신 동경과 경외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이는 아이작이 기대했던 바가 아니었다.

그때 아이작은 어두운 성찬례의 다른 효과를 떠올렸다.

'성찬을 목격한 적은 공포 혹은 혼돈 상태에 빠지지만, 당신의 추종자들은 종교적 황홀경에 빠집니다... 였던가?'

기가 막히지만 에이단은 아이작을 '추종'하고 있는 듯했다. 아이작은 대체 언제부터 이놈이 자신을 추종했던 건가 잠깐 고민했다.

"그, 그 방금 그것은 무엇입니까?"

에이단은 차마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못했지만 아이작은 뭔지 알아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완전히 잘못 짚었다는 것도.

에이단은 자신을 원래 추종했던 게 아니다. 어두운 성찬례를 보고서야 추종하게 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촉수를.

소금 의회는 메이저 신앙치고는 특이하게도 촉수를 추종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소금 의회의 천사 중 일부가 바다 생물... 정확히는 두족류의 형태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이작의 촉수는 언뜻 보기에 문어발과 크게 다르지 않다. 훨씬 끔찍하게 생기긴 했지만.

아이작은 에이단의 생각을 눈치채자마자 바로 중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내가 섬기는 신의 기적이지."

"빛의 법전 성기사가 아니셨군요!"

"자세한 이야기는 들려줄 수가 없겠군."

아이작은 권위로 에이단을 찍어눌렀다.

네필림의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에이단을 입 다물게 하는 동시에 모든 설득력을 부여했다. 이미 어두운 성찬례의 영향을 받은 에이단은 아이작의 정체에 대해 열심히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서 빈 성물을 만들면 어떻게든 소금 의회 성물로 만드실 수 있다고 하신 거였군요. 빛의 법전 안에서 몸을 숨기고 계신 것도 그들로부터 몸을 숨기기 위해...."

뭔가 열심히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아이작은 일일이 설명해 줄 생각이 없었다.

누군가는 자신을 복수자라고 생각한다. 또한 누군가는 천사로, 누군가는 경건한 성배기사로, 누군가는 부패한 교단을 끝장낼 혁명가로까지 생각하는 듯하다.

이제는 자신을 신으로 착각하는 사람까지 나타났지만, 아이작은 그 누구에게도 일부러 맞춰서 자신을 포장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알아서 착각해서 이용해 먹기 편해진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들의 착각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싶은 마음 따위는 없었다.

'지들이 먼저 착각한 건데 내가 왜 책임을 지나? 속은 놈이 나쁜 거지.'

***

아이작은 폐광에 숨겨진 병장기들을 확인했다. 병장기 상태는 놀랄 만큼 깨끗했다.

리빙 아머들이 열심히 관리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동굴 구조상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어떻게 설계한 건지 폐광치고는 습도가 낮은데다 산소가 다소 희박했다. 거기에 언데드가 뿜어내는 한기가 더해지자 최적의 무기 창고가 된 것이다.

'역시 화로 장인이 만든 무기는 아니군.'

내심 기대했지만 병장기들은 당연히 화로 장인이 만든 것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병기 하나하나에 섬세하게 손을 대 만들기를 원하지, 군용품을 대량 생산하는 것은 싫어했다.

'그렇다고 불사 교단이나 붉은 성배 쪽 무기는 아닌데.'

이 정도 질의 병장기를 대량 생산하려면 반드시 국가나 교단이 개입해야 한다. 그런데 병장기 양식 특성상 빛의 법전 쪽도, 불사 교단이나 붉은 성배 쪽도 아니었다. 소금 의회에는 솜씨 좋은 대장장이들이 없다.

'그럼 올칸 규율인가?'

동방의 오크 유목민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신앙이 개입한 셈이지만 아이작은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병장기들을 죄다 녹일 수도 없으니 써먹긴 써먹어야 할 텐데, 게르토니아 제국과 분쟁이 많은 불사 교단이나 붉은 성배 쪽의 무기라면 바로 들킬 것이다.

올칸 규율은 백제국에서 너무 멀어서 그냥 특이한 무기 정도로 취급될 확률이 높았다.

병장기를 살펴보는 동안 에이단은 끊임없이 아이작을 힐끔거리며 바라보았다. 자신이 본 게 진짜인지를 포함하여, 아이작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잔뜩 있는 듯했다.

'...솔직히 이해 못 할 건 아니군.'

소금 의회 신도들은 소금 사막 아래 묻힌 자신의 신의 흔적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 또한 소금 사막을 깨부수고 신의 부활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그 단서라도 쥔 사람이 나타났다면 아이작이라도 말을 걸고 싶어서 안달 났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에이단이 무엇을 궁금해하는지보다 무엇을 답해 줄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아이작은 리빙 아머가 빠져나간 갑옷의 안쪽을 살펴보다가 주술 촉매를 발견했다. 아이작은 그 촉매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나 궁금해져 손가락으로 문질러 보았다.

순간, 망령의 미세한 파편이라도 남은 건지 촉매의 힘 때문인지 저릿한 감각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이작에게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할 만큼 미약한 힘이었지만, 번뜩이는 잔상이 그의 눈앞에 스치고 지나갔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런 개...."

아이작은 휘청거리지 않기 위해서 간신히 다리에 힘을 줬다.

그의 각막에 남은 잔상은 다름 아닌 노란 옷을 입은 남자였다.

아이작의 악몽 속에 끊임없이 나타났던 데 더해, 사후세계가 범람해 왔을 때 그를 향해 손짓하던 의문의 남자.

잔상은 빠르게 사라졌지만 아이작은 쉽사리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 빌어먹을 것이 대체 뭐길래 자신을 이렇게 괴롭히는 건가 싶어졌다.

문득 아이작은 칼센 밀터가 꿈인지 망상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환상 속에서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네 현 상황에 대해 궁금한 게 있다면 소금 상인에게 물어봐.'

소금 상인이 에이단을 가리킨다는 것은 명확했다. 소금 의회 신도의 속성을 정확히 짚은 별명이었으니까.

'안 그래도 적절하게 길들이고 나면 물어보려고 했었다고.'

"괜찮으십니까, 아이작 님?"

에이단은 아이작이 멍하니 있자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자신이 기대하는 그런 신성한 것이 아니라 촉수 괴물이라는 것을 알면 실망할 테지만, 굳이 일찌감치 실망시킬 필요는 없으리라. 아이작은 지끈거리는 미간을 누르며 말했다.

"그 불사 교단 주교와 싸웠을 때 후유증이 좀 도진 것 같군."

"불사 교단 주교... 아아, 그 흔적을 봤습니다. 우르반수스의 문을 열어젖혔더군요. 일시적이라지만 그런 일에 휘말리셨다니, 후유증을 앓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르반수스.

사후세계를 가리키는 정확한 명칭이다.

고어(古語), 내지는 신들의 말이지만, 천사나 신수들 입장에서는 엄연히 자신들이 기거하는 세계라 사후세계라는 명칭이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아이작은 에이단이 어떻게 이런 것들을 아는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소금 의회 신도는 대부분 신학에 해박하다. 뭐가 성물인지 구분할 지식 정도는 있어야 하니까. 그중에서도 특정 직업군, 소금 의회의 성물과 유산을 찾아 헤매는 자들, 일명 '고고학자'들은 탁월할 정도로 신학에 해박했다.

에이단 베어베크는 바로 그런 고고학자 중 하나였다.

***

"그러고 보니 강한 신성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은 사후세계와 연결되는 일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엉뚱한 힘에 오염되거나 타락하는 자들도 있지요. 아이작 님도 부디 주의하십시오."

아이작은 에이단의 말에 호기심을 느꼈다.

이 세계를 게임으로만 접했을 때, 아이작은 사후세계에 관심이 없었다.

모든 신앙에 사후세계가 중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솔직히 죽어도 새로 플레이하면 그만인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좋은 문제니까.

하지만 '현실'에서는 달랐다.

천국에 가기 위해 기꺼이 수도원에서 구도하고 전쟁터에 목숨을 던지는가 하면, 지옥에 갈 것이 두려워서 아예 사회적 최하층인 바르바리가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반대로 가족과 주군을 배신하고 이단 신앙에 투신하여 천사가 되는 자들도 있었다.

인생은 짧고 사후세계는 길다는 생각으로 하는 일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 사후세계가 어떻게 현실로 건너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타락시킨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어쩌면 아이작에게도 일어나고 있는 일 같았기 때문이었다.

"강한 신성력을 발휘하면 사후세계와 연결된다고?"

"예. 신성력은 우르반수스에서 내려오는 힘. 그 힘을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경계가 옅어질 수밖에 없죠. 천사들이 사후세계에서 주로 기거하는 이유가 그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아이작은 호기심을 느꼈다.

어쩐지 최근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과 무관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역시 소금 의회의 고고학자는 이것저것 아는 것이 많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줄 수 있나?"

에이단은 잠시 생각하다가 뭔가 비유를 떠올린 듯 입을 열었다.

"아이작 님은 독생자(獨生子)십니까?"

"뭐라고?"

"어, 음. 홀로 태어난 사람을 뜻합니다. 그 어떤 조상이나 가문, 인연을 빌리지 않고도 태어난 존재요. 신화 속에나 나올 법한 존재죠. 실제로 그런 존재는 없으니까."

에이단은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아이작 님은 스스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전부 자신의 의지대로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까? 아닙니다. 그건 우르반수스가 시키는 겁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요."

"나는 딱히 밥 먹을 때 장엄한 빛이 숟가락을 들라고 명령하거나 걸을 때마다 오른발을 내밀고 그다음 왼발을 내밀라고 속삭이는 현상 같은 건 겪은 적 없는데."

"하지만 숟가락을 쓰는 법이나 걷는 법을 모르는 건 아니지요. 세상의 모든 산 것들은 과거에 영향을 받습니다. 정확히는 이미 죽은 자들에게서 영향을 받죠. 당신이 먹고 자고 걷는 방식들은 모두 죽은 자들이 만든 방식입니다."

아이작이 처음 떠올린 것은 집단무의식이나 신체에 새겨진 기억인 DNA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거창한 개념을 가져올 필요도 없었다.

평범한 문화, 도덕, 예절, 규범 따위가 모두 세밀하게 인간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그런 것들의 총합이 우르반수스라고?"

"예. 그래서 정확한 표현으로는 사후세계가 아니라 우르반수스라고 불러야 맞습니다. 사후세계라고 하면 단지 죽은 자들이 가는 세계를 말하는 것 같으니까요."

"그렇다면 내가 가진 기적이 강해질수록 내 자유 의지라는 것은 점점 희박해지고 사후세계의 의지가 나를 대신한다는 건가?"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요. 누군가는 그것을 참 신앙인이 되었다거나, 깨달음을 얻었다거나, 성자라거나 혹은... 천사라고 부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라는 압력을 받는다는 것이다.

신앙에 갓 입문한 사람은 스스로의 본질을 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신앙은 그에게 큰 압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더 강한 힘과 더 높은 지위를 얻으면 가해지는 압력이 더욱 거세질 수밖에 없다.

그 과정을 당사자는 '신앙심이 깊어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상은 사후세계의 의식과 개인이 일체화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에이단은 설명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에이단이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답변을 내놓았다.

"그런데 그건 신앙인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집단에서도 일어나는 일 아닌가?"

개인이 집단에 소속되면 그 집단에 물드는 일은 흔한 일이다. 굳이 사후세계니 신이니 천사니 하는 거창한 개념까지 끌고 오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에이단은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음.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군요. 사실 이 모든 것이 은유적인 표현일 수도 있겠습니다."

결국 그 역시도 기록과 책으로 공부한 학자에 불과하다. 우르반수스나 신이 어떤 존재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최근 아이작이 자주 겪고 있는 악몽 같은 것은 에이단의 설명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악몽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사후세계, 아니 우르반수스의 어딘가인 것이다.

우르반수스의 악의와 집착이 아이작을 정확하게 겨냥하고 있었다.

그때 에이단이 말을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그때 알 두아자드가 남긴 흔적이 기묘하긴 했지요."

"기묘하다? 어떻게?"

"보통 우르반수스의 문을 열면 그 개방자와 관련된 사후세계가 나타나기 마련이죠. 알 두아자드는 불사 교단이었으니 당연히 흑제국과 같은 환경이 나타났을 겁니다. 동토와 망령들로 오염된 생물들, 뭐 그런 거요. 하지만...."

초반에는 분명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 출몰하는 망령들과 얼어 죽은 식물들. 하지만 직후 드러나기 시작한 세계는 그와 전혀 다른 것들이었다.

온갖 것들이 녹아내리고 뒤틀린 세계.

"아이작 님의 능력이 닿은 덕분에 '정상화'된 세계는 멀쩡해졌지만, 땅속은 아니더군요. 그건 분명히 불사 교단의 사후세계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달랐지?"

"죽은 풀 아래 흰 모래가 가득했습니다."

아이작은 그 말을 듣자마자 떠올린 단어가 있었다.

이름 없는 혼돈이 전 인류의 1/3을 지워 버렸던 악명 높은 사건.

백사병(白死病).

103화. 어둠 속에 묻힌 것들 (2)

아이작은 전 인류의 1/3을 지워 버렸다는 '그 병'의 설정을 떠올렸다.

이름 없는 혼돈이 아직 그 이름을 잃기 전,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자들을 전부 죽여 버렸다는 대사건.

당연히 거기에는 이름 없는 혼돈을 신봉하는 사제들뿐만 아니라 다른 신앙의 신학자, 사제, 성기사, 일반인까지도 포함되었다.

사실 병이라는 명칭은 정확하지 않다. 엄밀히 따지자면 어떤 의지에 의한 대학살이라고 봐야 정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증상을 '백사병'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이름을 듣게 되면 '감염'되기 때문이다.

이윽고 발병한 존재들은 온몸이 백화되면서 흰 먼지 알갱이로 부서져 내린다.

이름 없는 혼돈 교단의 신도들이 가장 많이 있었다던 바다 건너 남부 지방은 백사병으로 인해 지금도 흰 모래로 덮인 사막지대가 되었다.

이후 다른 신앙들은 집요한 기록 제거작업을 통해 이름 없는 혼돈의 거의 모든 흔적을 지워 버렸다. 무슨 일이 있었고,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조차도 알 수 없게끔. 에이단조차도 바로 백사병을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그것은 신적인 존재의 동반자살이었다.

결국 해당 사건으로 인해 이름 없는 혼돈의 교단은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신은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아이작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또 그 거지 같은 일을 벌이려고 나를 대리인으로 부리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아이작이 제일 먼저 모래 알갱이가 될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에게 이름 없는 혼돈은 여전히 '이름이 없는 신일' 뿐이었다. 같은 일이 반복될 것 같지도, 반복할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름 없는 벌레의 책을 만들 때에도, 이계에서 나이트 스토커가 나타났을 때에도, 사후세계가 범람했을 때에도, 이름 없는 혼돈은 매번 메시지창을 통해 아이작에게 경고를 보냈다. 만약 그가 과거의 일을 반복하길 바랐다면 위험한 일이 발생했을 때마다 경고 대신 권장의 메시지를 보냈을 것이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그래, 이 메시지.

누군가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메시지.

만약 이 메시지창이 없었다면, 상태창과 퀘스트가 없었다면 자신은 이 세상에 어떻게 적응했을까. 아이작은 현실에서 사람은커녕 쥐새끼 한번 죽여 본 적 없다. 하지만 여기서는 잘도 사람을 썩둑썩둑 썰고 죽음의 위기 앞에 기꺼이 몸을 던져 가며 싸웠다.

그것은 아이작이 유달리 적응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세계와 거리감을 둘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사는 이 세계가 현실이 아니라고. 지금 네가 벌이는 일들은 현실이 아니라 게임 속 캐릭터가 벌이는 일이라고.

이름 없는 혼돈이 속삭이는 메시지는 그런 식으로 아이작의 정신을 보호하고 있었다.

이름 없는 혼돈은 아이작을 이용해 무언가를 고치고 싶어 했다.

그렇다면 이름 없는 혼돈은 기껏 자신의 신도들을 다 죽여 놓고 이제 와서 무엇을 기대하며 아이작을 불러들였을까.

이 세계에 도착했을 때부터 줄곧 던져 왔던 오래된 의문이 다시 한번 피어올랐다.

'이름 없는 혼돈, 우르반수스, 백사병... 그리고 노란 옷을 입은 남자.'

노란 옷을 입은 남자.

그가 이미 사후세계에 있는 존재라면, 결국 모든 것이 그 남자와 연결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 없는 혼돈이 자신의 신도들을 전부 죽인 것.

지금 그들이 사후세계에 가득할 것이라는 것.

이름 없는 혼돈이 굳이 자신을 선택한 것.

노란 옷을 입은 남자가 자신을 끊임없이 찾아오려고 하는 것.

결국 그 모든 것은 얽히고설킨 문제였다. 아직 단서는 찾지는 못했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작 본인에게 해답의 실마리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설적이군.'

아이작이 이름 없는 혼돈을 이용해서 더 크고 강한 힘을 얻을수록, 그는 점점 사후세계와 가까워질 것이다. 그는 이름 없는 혼돈의 대리인이자 교단의 최고 지도자인 셈이니까.

'그리고 언젠가는 놈과 다시 마주치게 되겠지.'

아이작은 그때를 무방비한 상태로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이름 없는 혼돈이든, 노란 옷을 입은 남자든, 누가 아이작에게 무엇을 원하든 간에 아이작은 여전히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누굴 돕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의 시선이 에이단에게로 향했다.

다행히 소금 의회 신도의 고고학적 능력은 과거의 빈틈을 메우는 데 아주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에이단을 당장 써먹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를 일단 손아귀에 두고 있으면 언제고 소금 의회의 의원들과 연결이 될 테니, 그때 가서 해결할 수 있으리라.

'조만간 소금 의회와 만나서 해결해야 할 문제도 있고 말이지.'

그전까지 아이작은 영지를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정비를 마무리 짓기 시작했다.

"저건 다 뭡니까?"

자클렛의 바르바리 용병들을 시켜 폐광의 무기 창고에서 무기 일부를 꺼내오게 했다. 오랫동안 방치할 것을 염두에 둔 듯, 습도와 기름칠 등 녹스는 것에 대해 철저하게 대비해 대부분의 장비들이 멀쩡했다. 양도 꽤 적지 않아서 바르바리들을 전부 다 무장시키고도 예비용이 남을 정도였다.

"분실물들."

"...군용이던데요? 게다가 새것이고. 제국군 제식 장비는 아니지만...."

아이작은 신기한 눈으로 자클렛을 바라보았다. 바르바리 대부분이 글자도 못 읽는 야만인 취급을 받는 것을 생각해보면 꽤 지성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어디서 가져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지. 그런데 자클렛, 군용인 건 어떻게 알았지?"

"제가 경비대장으로 굴러먹은 게 몇 년인데요."

단순히 똑같은 게 많아서, 정도의 대답이 나왔다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던 아이작은 자클렛의 대답을 듣고 호기심이 생겼다.

자클렛은 더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낀 건지 말을 이었다.

"군용 장비는 통일성이 중요해요. 무기라는 건 소비재니 쓰다가 망가지면 바로 옆 동료 거라도 주워서 쓸 수 있어야 하니까요. 칼 휘두르던 놈이 갑자기 철퇴를 들면 어지럽겠죠. 보급에도 난항이 있을 테고. 난전에서 같은 편을 알아보는 데도 필요하겠죠."

용병이나 지방 영주의 징집병들은 자기 개성에 맞게, 혹은 그냥 주는 대로 들고 다니곤 한다. 바르바리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때문에 무기에 대한 이해도가 높으면 징집병도 정규군을 1:1로는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자클렛이 말한 이유로 집단과 집단의 싸움이 되면 정규군의 진가가 드러난다. 집단 전투력과 지속력이 차원이 다른 것이다.

자클렛은 그 구조를 이해하는 모양이었다.

"어디 출신이라고 했더라?"

"스반바르 군도요."

세상의 화로 교단이 지배하는 영역이다. 울스텐이 넘어온 섬이기도 했다.

그럼 세상의 화로 신도였을 확률이 높은데, 왜 굳이 게르토니아까지 넘어와서 바르바리가 됐는지는 묻지 않았다. 거기서 사람이라도 하나 죽이고 왔을지도.

아이작은 갑자기 그녀의 근황에 대해 물었다.

"자클렛, 이 마을 사람들이 바르바리들을 보는 시선이 어떻지?"

"어, 물론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죠. 바르바리들이라는 게 솔직히 제가 보기에도 예의 없고 더럽고 경우 없는 놈들이 많으니."

자클렛은 그렇게 말하다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래도 요즘은 좀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생활 형편이 나아지면서 애들도 좀 누그러졌고, 아이작 님이 가르쳐준 교리 내용을 꽤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실천하는 놈들도 있구요. 게다가 이번에 불사 교단과 전투하면서... 주민들도 제법 친절해졌거든요."

자클렛은 이 일련의 변화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쇠르 뒷골목에서 청부 살인이나 수행하던 강도무리는 더 이상 없는 듯했다. 애당초에 바르바리들이 지나치게 살기를 띠던 것도 로어커스 사태 때문에 식량이 부족해져서 그리된 것이니 부드러워지는 것도 당연했다.

"좋아. 자클렛, 이제 네가 다시 여기 경비대장이다."

"겨, 경비대장이요? 제가요? 저는 바르바리인데요?"

복잡한 문제이기는 했다. 바르바리는 신앙인이 아니고, 심지어 제국민으로 인정받기 힘든 경우도 있었다. 조금 과한 광신도들은 바르바리를 짐승 취급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바르바리를 공직으로?

그렇다고 '지금이라도 신앙을 가져라'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배교자가 다시 신앙의 품으로 돌아가는 게 쉽다면 세상에 바르바리들이 그렇게 많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아이작은 그 복잡한 문제에 대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말고 내가 말하면 그런 줄 알아. 내가 이사크레아 령의 영주 아이작 이사크레아다. 이사크레아 수도원의 원장이기도 하고. 지금은 경비대장이지만 혹시 모르지, 이사크레아 성기사단의 성기사라도 될지도."

"서, 성기...."

이상한 부분에서 말이 끊어졌지만, 자클렛이 받아들이기 힘든 사이즈의 일인 듯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진심이었다.

오직 그에게만 충성하는 병력이 필요하다.

자클렛은 성기사라기에는 한참 수준이 부족하지만, 그건 지금도 늘어나고 있는 신앙과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물론 자클렛 본인도 피땀눈물이 섞인 노력을 해야겠지만.

"다른 놈들도 바르바리라는 것에 신경 쓰지 말고 노력하라고 해. 시비 거는 놈이 있으면 말하고."

아이작은 거기까지 말했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캐틀린은 어디 있지? 그쪽도 정리를 해놔야겠군."

***

"저와 한 약속을 잊으신 줄 알았습니다."

캐틀린은 아이작이 찾아오자 빙긋 웃으며 말을 꺼냈다.

캐틀린은 새롭게 차려진 황금우상 상단의 이사크레아 지부에 머물고 있었다.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캐틀린은 그 사이 원래 있던 건물을 사들이고, 마차가 머물 공간과 창고, 로비, 휴게실까지 완비하여 제법 그럴싸하게 지점을 만든 상태였다.

지점의 완성도만 보아도 캐틀린이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솔직히 요즘 너무 바빠서 잊고 있긴 했다. 사실 금방 해결될 문제도 아니니 당신이 계속 상기시켜 줄 거라고 생각했지."

"예.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투자라는 게 하루 이틀 만에 성과가 나오는 일은 아니니까요."

캐틀린이 쇠르라는 경제 대도시의 지부장 자리까지 비워 두고 이사크레아까지 온 이유. 그것은 이사크레아 영지를 새로운 무역거점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사실 쇠르 지부를 완전히 비워둔 것은 아니고 대리인에게 일임한 상태였지만, 직접 와서 챙길 정도로 그녀는 이사크레아 영지 투자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사실 투자라고는 해도 아이작 님이 저희 상단에 맡겨두신 그 자금을 운용하는 수준이긴 하지요. 그것으로 충분하지만요. 그리고 전에 말씀 주신 대로만 진행된다면 회수는 훨씬 빠르겠지요."

"음. 그거야말로 시간이 해결할 문제니까."

이사크레아 영지를 무역거점으로 만든다는 계획은 아이작이 캐틀린에게 제안한 것이다. 당연히 그 계획에는 합당하고 실현 가능한 계획들이 담겨 있었다. 이솔데에게는 말할 수 없지만 황금우상 상단의 지부장에게는 말할 수 있는 것들로.

캐틀린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이미 소금 의회 상인과 화로 장인을 확인했습니다. 정말 말씀하신 대로 북해 항로만 열어주실 수 있다면...."

캐틀린은 희열을 느낀 듯 몸을 떨었다. 전율을 느끼는 포인트가 솔직히 미묘해서 조금 떨떠름했지만, 이해할 수는 있었다.

북해 항로는 황금우상 상단이 가장 간절하게 원하는 무역로였다.

엘릴 왕국과 스반바르 군도, 게르토니아 제국은 모두 백제국 영향권이지만 밀무역을 제외하면 무역은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당연히 그 배후에는 신앙 간의 갈등과 온갖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소금 의회가 항로를 독점하다시피 한다는 것도 있고.

"그 폐쇄적인 방구석 노인네들이 만든 물건들을 조금이라도 가져올 수 있다면... 차익을 얼마나 남겨 먹을 수 있을지 상상도 안 되는군요. 소금 의회가 운송한다면 해적 걱정도 없을 테고, 어쩌면 소금 사막이나 만 사하르의 물건들까지도... 심지어 그 거래가 세금도 없는 오직 이곳의 독점적 지위 아래서만 가능하다면...."

캐틀린은 꿈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면서 위험한 혼잣말까지 중얼거렸다.

자칫 잘못하면 잡혀갈 소리였지만, 아이작은 그녀의 꿈을 부정하지 않았다. 황금우상은 불사 교단과도 거래를 하니까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리고 솔직히 아이작도 내심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성지 수복을 목표로 두고 있긴 해도 종교적 금기니 배타성이니 하는 것 따위는 그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하지만 당장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고, 일단은 엘릴과 세상의 화로 쪽만이라도 제대로 거래를 트는 게 우선이었다. 둘 다 빛의 법전의 지위를 인정하는 백제국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자존심 강한 엘릴은 쉬지 않고 틱틱거린 탓에 공식적인 거래가 중단된 상태였고, 세상의 화로는 스반바르 군도에 은둔한 지 한참이었다.

이 둘 사이에서 제대로 된 시장을 열 수 있다면 캐틀린은 황금우상 상단에서 압도적인 지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로어커스 사태로 상실한 신뢰를 극복하고도 남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이사크레아 영지의 물자도 풍부해질 테고.

"그러고 보니 교통이 문제인데, 그건 해결되셨나요?"

"아, 그건 걱정 마라."

이사크레아 영지의 교통이 안 좋다는 것은 아이작도 잘 알고 있었다. 산골 계곡 사이에 위치한 영지의 교통이 편해 봤자니까. 하지만 달리 말하자면, 그 두꺼운 산맥을 넘으려면 이사크레아 영지를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중앙과 이어지는 가도가 산사태로 막혀 있다는 점이었는데,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이전 영주가 일부러 산사태를 일으켜서 막아둔 것 같더군. 원래 산사태가 자주 일어나는 지역도 아니었고, 일부러 치우기 힘든 척하면서 방치한 거야."

이전 영주, 리스헨 헨드락은 신앙적 반역을 꿈꾸면서 영지를 일부러 폐쇄적인 곳으로 만들었다. 드나드는 사람이 없을수록 비밀을 숨기기 좋을 테니까.

아이작도 숨겨야 할 비밀이 많기는 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리스헨과 정반대로 할 생각이었다.

무역거점인 도시가 폐쇄적으로 군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그는 영지를 최대한 개방적이고 온갖 종교가 드나들 수 있는 문화적 잡탕 지역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이름 없는 혼돈의 교리가 퍼질 것이다.

신앙이라는 숲속에 숨은 나무처럼.

104화. 어둠 속에 묻힌 것들 (3)

아이작은 캐틀린의 준비와 의지가 만반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다음 용건으로 넘어갔다.

"거점 구축 때문에 부탁했던 일을 까먹지는 않았겠지?"

"이를 말입니까? 이미 준비됐습니다."

캐틀린이 그렇게 말하면서 내놓은 것은 꽤 두꺼운 서류 뭉치였다. 첫 장을 살펴보자 제목부터 눈에 띄었다.

헨드락 영지 관련 거래 재무표.

"안 그래도 최근 들어 악성 채무자로 바뀔 조짐이 보였던지라 따로 정리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대로 파산했다면 우리 상단에도 큰 문제가 됐겠지요. 다행히 아이작 님이 인수하시면서 일부나마 보전했습니다만...."

서류에는 리스헨 헨드락과 카일 헨드락이 영지에 어떤 물건을 들이고 내보냈는지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무기처럼 예민한 물건들은 소금 의회를 통해 밀무역했겠지만, 밀무역으로는 도저히 수요가 충족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은 황금우상 상단을 통해 구했을 것이다.

"팔 때에는 이상한 점을 그다지 느끼지 못했는데, 확실히 정리하다 보니 미묘한 점들이 눈에 띄긴 하더군요. 광산이 있었으면서도 철을 제법 사들이던 것도 그렇고, 장기간 보존 가능한 식량들을 필요 이상으로 구입한 것도 그렇고."

이런 물자 또한 영지 어딘가에 은밀하게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아이작은 전 영주들이 소중하게 모은 도토리들을 홀라당 털어먹을 생각이었다.

***

그러나 아이작의 매력에 현혹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솔데는 이사크레아 영지를 떠나기 위해 말에 짐을 싣고 있었다. 아이작을 옆에 계속 두고 지켜보기로 하긴 했으나 일단 상부에 대면보고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고한다....'

무고하다고 보고한다면 명령을 계속 수행할 이유가 없어지고, 촉수와 사악한 이단 신앙을 섬기는 정황이 발견되었다고 솔직하게 보고하면 즉시 성기사단이 출동할 것이다.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미묘한 '깨끗하지만 의심의 여지는 있는' 단어를 찾아 보고해야만 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만약에라도 그녀가 실수해서 빛의 법전과 아이작이 충돌한다면 상황은 돌이킬 수 없어질 테니까.

지금 아이작은 빛의 법전 교리에 충실하면서 선을 베풀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신앙에는 빛의 법전조차 품을 정도의 아량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빛의 법전에는 그럴 만한 아량이 없었다.

만약 빛의 법전이 아이작을 배척하기로 결정한다면, 그들은 곧 끔찍한 재앙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솔데 이단심문관님."

그때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이솔데는 고개를 돌렸다.

깡마른 젊은 사제 한 명이 신경질적인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솔데는 그 사제의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저 표정이 자신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원래 저 꼴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사제님."

"떠나신다니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긴히 하실 말씀이시라면...."

이솔데는 괜히 긴장해서 말꼬리를 흐렸다. 젊은 남자밖에 없는 수도원이나 신전을 드나들다 보면 그녀의 외모는 불필요한 관심을 살 때가 많았다. 이단을 심문하는 것보다 그런 기습 고백자들의 기습이 그녀에게 더 불편할 정도였다.

"성배기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성배기사를 관찰하기 위해 체류 중이셨던 것으로 아는데, 혹시 뭔가 눈치채셨을까요?"

"아, 아아. 그렇군요. 다행이군요."

"예? 다행이요?"

"아뇨. 다른 생각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배기사님이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사제는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다가 은밀하게 말했다.

"이단심문관님은 성배기사라는 자가 의심스럽지 않으십니까?"

"...."

이솔데는 뭐라 설명하기 복잡한 기분에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하지만 사제는 그것을 다르게 해석한 듯 기꺼이 말을 이어갔다.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어린 성기사, 사실 저는 성기사라는 것도 의심스럽습니다. 로튼해머 단장이 인증해줬다지만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한 자의 무엇을 보고 인정한단 말입니까? 갑자기 나타난 부모도 모를 고아가 갓 성인이 되자마자 성기사라뇨?"

"실제로 그에 합당한 성취를 이루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게 문제입니다. 성배기사가 왈라이카 인간사냥꾼의 추적을 따돌리고, 쇠르에서 타락한 상인들의 정신을 고쳤으며, 이곳에서는 천사마저 물리쳤다지요. 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목격한 사람이 있습니까?"

이 점은 이단심문관들도 신경 쓰던 점이었다.

아이작이 성기사로서 여러 업적을 세운 것은 사실이고, 검술 실력도 대단하다지만 그 활약을 직접 본 사람은 없다시피 했다. 그래서 기적을 쓰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라고 이솔데에게 명령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역시나 아이작이 기적을 숨길 만한 사정이 있다는 것이었고.

"하지만 천사를 물리친 것은 목격자가 많지요."

"거기에 대해서도 합리적으로 설명할만한 제 가설이 있습니다!"

"가설이요?"

"예! 처음부터 붉은 성배와 성배기사가 짜고 쳤다는 추측입니다."

사제는 자신의 생각에 꽤나 확신을 가진 듯 열변을 토했다.

"아시다시피 붉은 성배는 음모의 대가입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말할 것도 없지요. 성배기사를 우리 교단 안에 깊숙이 침투시키기 위해 일부러 패배한 척한 겁니다! 변방 영주보다는 교단의 성자가 이용하기 쉬울 테니까요!"

이솔데는 착잡함을 느끼면서도 사제의 말이 교단 내부의 어떤 목소리를 반영한다고 느꼈다.

외부에서 변화가 찾아오는 것을 꺼리는 자들의 목소리.

"심지어 그가 영지를 차지한 후 행적들을 보십시오! 이단들을 수도원 안에 들이고, 자산을 풀어 영지민들을 게으르게 만들며, 심지어 바르바리들에까지 칼을 쥐여준다더군요! 이게 말이나 됩니까?"

열변을 토해내는 사제의 목소리에는 일방적인 반감이 담겨 있었다.

이솔데는 아이작에게 현혹되어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반대로 이렇게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당연히 늘어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것은 이성적인 판단이라기보다 대세의 흐름에서 거부감을 느끼는 본능적인 반발이었다. 아이작이 성인이 되어서 완전히 교단의 편이 된다 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 사제가 하는 말이 논리나 증거 대신 정황과 추측뿐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이 고발이 정말 신앙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질투 때문이라는 것도.

이솔데는 순전히 불만 때문에 쓸데없이 예리해진 사제를 적당히 달래고 넘어가기로 했다.

"아직 추측뿐이잖습니까. 좀 더 알아보고 있으니 사제님은 교리와 어려운 신도들을 보살피는데 신경 써주십시오. 이 영지는 최근까지 붉은 성배의 신앙에 오염되었으니...."

"하지만, 그 외모를 보십시오! 붉은 성배가 좋아할 만한 곱상한 얼굴 아닙니까! 분명 붉은 성배의 남창이...."

짜악!

사제의 얼굴이 팩 돌아갔다.

사제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솔데를 바라보았다. 이솔데는 그의 얼굴에 왜 손자국이 났나 생각하다가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고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때린 거라 때린 기분이 안 드는군.'

"이게 무슨...."

사제가 항의하려던 순간 이솔데는 주먹을 쥐고 사제의 콧등을 한 번 더 후려갈겼다. 사제는 꽥 하는 괴상한 신음을 내며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이솔데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사제의 머리채를 잡고 들어 올렸다.

"사제."

"힉, 히익."

이솔데가 조용히 속삭이자 사제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제야 그는 눈앞의 상대가 누구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조용하고 나긋나긋해 보이는 여자였지만 어쨌든 그녀는 이단심문관이다. 거친 바르바리들과 사악한 이단 신앙들이 배회하는 경계에서 칼과 고문으로 진실을 쥐어 짜내는 자들.

그 고문용 송곳과 망치가 자신을 향할 것이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사제는 눈빛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숨쉬기가 어려웠다.

"지금 당신은 후안 주교가 성자 후보로 추대를 준비 중이고, 리옹 후작이 직접 자작으로 작위를 수여한 이사크레아 영주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로튼해머 단장이 성기사로 임명했으며, 저, 이솔렛 브란트가 이단심문관으로서 직접 조사했음에도 명확한 증거를 찾지 못한 자를 말입니다."

"힉, 아, 으...."

"이전까지는 신앙인으로서 고발할 수 있는 내용이라 생각되어 참아주었습니다만 인신공격은 봐주기가 어렵군요. 지금 말씀드린 내용을 이사크레아 경의 신원 보증인들에게 말씀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제야 사제는 정신이 번쩍 든 모양새였다. 일시적인 질투로 시비를 걸기에는 너무나 큰 거물들이었다. 심지어 이솔데조차도 브란트 공작가의 딸 아닌가.

아무리 사제의 권력이 큰 게르토니아 제국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집안이었다.

"아, 으, 제, 제가 잘못 안 것 같습니다! 뭘 착각해서!"

"그렇군요. 왜 그런 착각을 하셨죠?"

"서, 성배기사가 어린 나이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뭔가 울컥해서...."

"아뇨. 사제님은 그런 삿된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그런 말씀은 사제로서의 됨됨이를 해치지 않습니까."

"그, 그럼...?"

"넘어진 걸로 합시다. 넘어져서 머리가 오락가락했던 거죠."

이솔데는 그렇게 말하면서 사제를 무릎 꿇렸다. 그리고는 얼굴을 지면 가까이 밀어붙였다.

"넘어진 걸로. 알겠죠?"

사제는 무슨 말인지 깨닫고 몸을 떨다가 힘껏 지면에 얼굴을 박았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고서야 이솔데는 그의 어깨를 붙잡고 다시 들어 올렸다. 얼굴이 흙과 피로 엉망이었지만 어차피 치료 기적이면 금방 나을 상처였다.

이솔데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빛의 법전은 이런 자격 없는 자들조차 신앙심만 바치면 기적을 베풀어 주신다. 이솔데는 기적이란 그렇게 하찮게 베풀어질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릇 기적을 쓴다면 아이작처럼....

"그럼 다시는 넘어지지 마세요. 사제님."

"예, 예. 아, 알겠습니다."

사제는 이솔데가 풀어주자마자 허겁지겁 달려 나갔다. 이솔데는 사제가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쓸데없이 과민반응했군.'

이걸로 사제는 입을 다물겠지만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작 본인도 이렇게까지는 안 했을 것이다.

'분명 그럴듯한 말로 설득하거나 뇌물을 풀든가 해서 자기 편으로 만들었겠지. 마냥 순진무구한 성기사는 아니니.'

사실 아이작이 목격자가 없는 상황에서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사제가 살아 나갈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아이작에 비하면 훨씬 온건한 처사였지만, 그것을 모르는 이솔데는 사제를 때리고 심지어 자해까지 하게 했다는 죄책감만 남았다.

하지만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자신은 그때에도 똑같이 행동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여름이 깊어지고 가을이 찾아올 무렵, 영지의 상황은 완전히 안정되었다.

파종도 늦고 땅도 피폐해졌었지만 이사크레아 영지는 역대급 풍작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로어커스 때문에 땅을 헛되게 놀렸던 다른 영지들과 비교하면 눈부신 성과였다. 아이작의 기적 의식으로 생태계 최하층부터 최상층까지 최대한 가치를 끌어올린 결과였다.

뿐만 아니라 산사태로 막혀 있던 서쪽 가도도 공사를 통해 뚫리면서 새로운 길이 열렸다. 산맥을 넘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는 소식에 황금우상 상단 외에도 다른 상단들 역시 이사크레아 영지를 찾기 시작했다.

아이작도 영지 안에서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영지 주변의 기이한 현상이나 몬스터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 토벌을 빙자한 성물 수집을 이어 나갔다.

늘 성과가 있는 것은 아니고 크게 가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빛의 법전과 관련된 성물을 몇 개 찾아 반납하기도 했다.

[빛의 법전이 당신의 숭고한 여정을 축복합니다.]

[신앙이 상승합니다.]

[이성 보호 능력이 상승합니다.]

아이작은 여기서 성물을 얌전히 교단에 반납하는 것이 아닌, 이사크레아 영지 안에 있는 수도원에 반납했다. 어쨌든 여기에도 빛의 법전 사제들이 머물고 빛의 법전 수도원으로 취급되고 있으니 반납 효과를 받을 수 있었다. 강력한 성물은 아니었지만 원한다면 언제든 꺼내 쓸 수 있으니 유용한 방식이었다.

'다른 신앙 성물도 이렇게 보관하면 좋겠는데.'

물론 이단 신앙자들이 들락거리는 건 눈감아줘도 다른 종교의 사당이나 신전을 세우는 것은 사제들이 용납하기 힘들 것이다.

아이작은 아쉬운 대로 일단은 빛의 법전 성물 반납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이제 영지도 안정된 것 같군.'

이번 원정 동안 일부러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고 영지를 비웠지만,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몇 가지 사소한 일들이 벌어지긴 했지만 모두 카일과 지힐렛이 알아서 처리했다.

이미 매뉴얼을 만들어 둔 상태였기 때문에 돌발적인 상황으로 영지가 주저앉을 일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정 급박한 상황이라면 카일에게서 직접적으로 의지가 전해질 것이고.

이제 슬슬 영지에서 눈을 떼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아이작에게 편지가 날아왔다.

많은 미사여구를 제외하고 요점만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았다.

'즉시 노르덴 항으로 와주길 바람'

후안 리아르 주교로부터의 소환이었다.

105화. 소금 의회 (1)

'노르덴? 왜 갑자기?'

다른 사람도 아닌 주교의 소환이었기에 아이작은 즉시 노르덴 항으로 향했다. 교단 상층부에 아이작을 비호할 만한 뒷배는 후안 주교뿐이었다. 인간이야 어찌 됐든 아이작을 이 자리에 꽂아 넣은 사람이니까.

하지만 갑작스러운 소환에 내심 찔리는 구석도 없잖아 있었다.

사실 아이작은 최근 소금 의회에 관련된 일로 에이단을 노르덴 항에 보내둔 상태였다.

'소금 의회를 포섭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 중이었는데, 설마 들킨 건가?'

노르덴 항은 소금 의회의 거점 도시 중 하나였다. 소금 의회는 황금우상처럼 그들을 국교로 삼은 국가가 없기 때문에 세계 곳곳에 거점 도시를 두고 있었다.

물론 소금 의회 신도 대부분이 선원인 이상, 항구라면 소금 의회 신도가 반드시 있다. 다만 그중에서도 이른바 '의원'들이 모이곤 하는 장소가 있었다. 노르덴 항이 그런 거점 중 하나였다.

이사크레아 령과 가까우면서 소금 의회를 조종하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었다. 앞으로 북해 무역로를 장악하려면 중요한 거점이 될 테니까. 때문에 아이작이 이사크레아 영지를 떠나면 바로 향할 곳도 바로 노르덴이었다.

'뭐가 어찌 됐든 일단 만나봐야겠군. 어르고 달래는 걸로 해결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대화를 하든, 맞서든, 어쨌든 만나 봐야 했다.

아이작은 서둘러 말을 박찼다.

***

"성배기사가 도착했습니다. 주교님."

후안 주교는 노르덴 외곽의 한 지방 유지의 저택을 빌려 머물고 있었다. 이곳에도 빛의 법전 성당이 있긴 했으나, 낡고 빈곤해진 성당은 성에 차지 않는 듯했다.

창가에 앉아있던 늙은 주교가 고개를 돌렸다.

"오, 우리 이사크레아 경이 오셨군. 영주 생활은 마음에 드시오?"

빈정거리는 듯한 어조였다.

아이작은 이전에 순순히 교단의 뜻에 따르지 않았으니 어느 정도 불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주교가 직접 불만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그는 잠시 처신을 고민하다가 일단 예의부터 차리기로 했다.

"주교님을 뵙습니다."

아이작은 다가가 교범대로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성호를 그은 뒤, 후안 주교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하지만 후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작은 꺼낼 말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미진한 재주와 부족한 믿음 탓에 주교님의 신뢰에 보답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성심성의껏 신도들을 열정으로 대하고 있으니 제게 실망스러운 점이 있었다면 얼마든지 조언 부탁드립니다."

사실 아이작은 영주로서 대단히 잘 해내고 있었다. 헨드락 가문이 이전에 하던 짓에 비하면 영지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고, 새로운 길이 닦이며, 치안도 보장되고 있었다. 아이작은 영지 관리 측면에서는 떳떳했으나, 상대방은 주교였다. 단순히 영주로서 해야 할 일만이 아니라 그 이상을 요구할 수 있었다.

"흐음."

아이작의 겸손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후안 주교는 한층 누그러진 표정을 했다.

"이사크레아 경이 영주가 된 지 얼마나 됐지?"

"반년 정도 됐습니다."

"아직 한참 영지 안정에 힘을 쓸 때군. 사실 사제들을 통해 이사크레아 경이 얼마나 영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들었네. 하지만 실망스러운 부분들이 너무나 많이 눈에 띄더군."

실망? 아이작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미 상당히 피폐해진 영지였기 때문에 이미 잘 굴러가고 있는 영지에 비하면 부족한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부분을 지적하고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바르바리들을 경비대로 만든 것 때문인가? 아니면 이단 신앙자들을 수도원에 들인 것? 신앙 교리를 은근슬쩍 입맛대로 바꿔서 고친 것? 타천사 조각을 빼돌린 것? 수도원 지하에 이름 없는 혼돈의 성역을 만든 것?'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 많았다. 그중 뭘 지적받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몇몇은 지적이 아니라 당장 성기사단이 쳐들어왔어야 할 상황이었지만.

아이작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바르바리를 경비대장으로 만든 것이라면...."

"바르바리? 아아, 그건 아무래도 됐네. 변경이라면 그 정도 일은 있을 수 있지. 치안 유지야 영주의 마음이니까. 내가 엄중하게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신앙심에 대한 것이오."

아이작은 역시나 했던 부분에 지적이 들어오자 긴장했다. 그가 뭐라 변명할 말을 준비하는 사이 후안 주교의 말이 이어졌다.

"무려 반년 동안 기부금이 한 푼도 들어오지 않았더군."

"제가 기도회에서 한 말들은... 예?"

"반년, 무려 반년일세. 그 긴 시간 동안 신앙심을 증명할만한 기부금을 교단에 한 푼도 바치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나?"

아이작은 잠시 혼미해지려던 정신을 부여잡고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시중을 드는 부제와 경호를 서는 성기사도 있었지만 아무도 후안의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이게 교단의 타락을 상징하는 건가 했지만, 생각해보니 교단은 오직 기부금과 황실의 지원금으로 굴러간다. 기부금이 반쯤 강제로 뜯어내는 것이라는 걸 생각하면 같은 교단 사람들끼리는 이런 태도가 당연한 것일 수도 있었다.

"죄송합니다. 주교님. 제가 이런 일은 잘 몰라서... 그리고 영지 상황이 좋지 않다 보니 돈이 들어갈 곳이 많았습니다."

"쯧!"

후안 주교는 언짢다는 듯 혀를 찼다. 아이작은 없는 돈이라도 만들어 내서 뜯어내라는 수작인가 했다. 물론 아이작 개인이 가지고 있는 돈은 많았다. 황금우상 상단에 투자해 둔 자금만 해도 어마어마했으니까. 아이작은 그 사재라도 털어서 입을 막아야 하나 생각했지만 주교의 생각은 아이작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물론 이사크레아 경은 순진무구한 성배기사이니 이런 일에 대해 잘 모를 수 있다고 생각했네. 그래서 내가 이번 기회를 빌어서 우리 성배기사에게 가르침을 전해주기로 했지."

"예?"

"보고 있으면 머리는 좋은데 이쪽으로는 돌아가지 않는 것 같더군. 그러니 내가 직접 알려줘야지."

아이작은 그제야 자신이 무언가 대단히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나를 질책하거나 심문하기 위해 이 자리에 부른 게 아니라... 돈 뜯어내는 법을 가르쳐주기 위해 여기까지 불렀다 이건가?'

이미 많은 돈을 벌어들인 아이작이지만, 후안이 가르쳐 줄 지식은 완전히 다른 세계의 상식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노르덴 항은 거점 항구에 어울리지 않는 쇠락한 모습이었다.

과거에는 상당히 번성했던 곳이었지만 세상의 화로 교단과의 무역이 단절되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건물만 무성하게 늘어서 있을 뿐, 빈 거리와 한적한 항구의 모습이 소금 의회의 현 상태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후안 주교는 비탈진 길을 따라 말을 타고 내려가면서 아이작을 향한 설교를 이어 나갔다.

"우선 영지에 돈이 들어갈 곳이 많아서 기부금을 낼 여력이 없다고 했었나? 그건 자네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는 뜻이네."

"모쪼록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돈을 쓰는 사람과 돈을 버는 사람, 둘 중에 누가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나?"

아이작이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후안은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은 듯 일방적으로 말을 이어갔다.

"당연히 돈을 쓰는 쪽에 권력이 있네. 심지어 돈을 쓴다는 사실 자체가 돈을 불러오기도 하지. 많은 돈을 써서 영지를 개선하고 있다면, 당연히 그 돈이 누군가에게 흘러 들어갈 것이 아닌가?"

후안은 순진무구한 성배기사를 향해 근엄한 어조로 말했다.

"예를 들어 다리를 고친다면 석공과 돌을 파는 상인에게 돈이 들어가겠지. 대충 금화 일천 닢 정도 들어간다고 쳐보세. 그 막대한 돈을 쓰겠다고 나선다면, 석공과 석재상들이 줄을 서서 모여들겠지."

"...그렇겠지요?"

"그럼 자네는 교단을 위한 일이니 신앙심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는 자에게 일을 맡기겠다고만 해도 교단에 적지 않은 기부금이 들어올걸세. 심지어 듣자 하니 자네는 영지에 길도 닦고, 가도를 뚫고, 다리뿐만이 아니라 성벽을 고치고 수로까지 재정비했다더군!"

후안은 기가 차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데 자네 영지에서 기부금이 한 번도 들어온 적이 없네. 그 말인즉슨 다리를 고치는 데 든 비용이 전부 인건비와 자잿값으로만 나갔다는 것 아닌가?"

'...당연한 거 아닌가?'

보통 그걸 뇌물 수수라고 부른다. 그리고 아이작은 돈이 남는다 해도 자신이 챙긴다면 모를까 딱히 교단에 그걸 기부할 생각 따위는 한 적이 없었다.

"하다못해 신도로서도 그만한 액수를 받았다면 응당 교단에 절반은 기부하는 것이 옳거늘! 자네 영지의 부족한 신앙심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이만큼만 이야기하겠네."

아이작은 문득 자신의 수도원에 들어온 '기부금'들이 꽤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아이작은 그것을 당연히 영지를 위한 세금쯤으로 여기고 전부 영지를 고치는 비용으로 썼다. 아직 영지가 엉망이니 영지를 위해 쓰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굳이 후안에게 알려 주진 않았다.

"그리고 자네가 이사크레아 영지의 수도원장이자 영주가 되었을 때 근방 귀족이나 상인, 지주들이 선물을 보내왔지?"

"아, 예. 몇 개 받았습니다만, 경황이 없어서 일단 보관해두고 있었습니다.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주교님께 드리겠...."

아이작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지만 후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몇 푼 안 되는 선물 따위는 자네가 가지게! 중요한 건 선물을 누가 어떻게 보냈는가일세. '이사크레아 수도원장'에게 보낸 건가, 아니면 '이사크레아 영주'에게 보낸 건가?"

아이작은 이런 질책을 받는 것이 어색해서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게 중요한 건가? 둘 다 같은 사람 아닌가?

아이작의 혼란을 읽은 듯 후안이 꾸짖는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수도원장에게 보내는 것이라면 빛의 법전의 가호를 빌며 선물을 바쳐야 하고, 영주에게 보내는 것이라면 당연히 새로운 땅주인에게 잘 보여야 하니 선물을 바쳐야 하네! 그런데 자네는 수도원장이자 영주이지 않은가? 그럼 어떻게 받아야겠나?"

아이작은 그래도 주교 앞이니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수도원장으로서 받아야지요."

"이런 멍청한 놈. 수도원장으로서 한번, 영주로서 한번, 이렇게 두 번 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미친놈인가?'

아이작은 이 욕심보 터진 기괴한 논리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후안은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수도원장과 영주의 업무가 엄연히 다름에도 자네는 두 가지 일을 다 하고 있네! 아니면 자네가 둘 중 하나라도 소홀히 하고 있나? 아니겠지. 자네처럼 순진하게 일 잘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니 또 그럴듯했다. 일을 두 배로 하면 당연히 돈도 두 배로 받아야지.

돌이켜보니 정말로 그렇게 두 번 보낸 자들도 있긴 했다. 아이작은 그것이 오류라고 생각해 하나씩은 돌려보냈지만 그런 자들은 정말로 후안 주교 같은 자들의 생각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돈 밝힌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가치관의 혼란이 급격하게 찾아왔지만, 후안의 교육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한 번만 보낸 자에게는 서신을 보내게. 수도원장에게 보냈다면 영주의 명의로, 영주에게 보냈다면 수도원장의 명의로. 그리고 선물을 보내지 않은 자가 있다면 기록해두고 절대로 잊지 말게. 그놈들이야말로 악질 중의 악질이야. 빛의 법전께서도 그런 놈은 잊지 않고 지옥으로 보낼걸세."

'역시 미친놈인가?'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고 지옥으로 보내는 신이라면 좀 정신 나간 신 아닌가? 골루와루 같은 놈이라면 모를까.

후안은 준엄하게 말했다.

"자네도 기억해두게. 돈을 쓰는 것도 권력, 돈을 버는 것도 권력, 돈을 가지고 있는 것도 권력이네. 하지만 그중 가장 안 좋은 것은 번 돈을 가지고만 있는 것이야. 번 돈을 쥐고만 있으면 괜한 적을 만들 뿐만 아니라, 돈을 더 벌 기회까지 놓치는 꼴이거든. 돈이라는 건 끊임없이 돌아야만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걸세."

"...명심하겠습니다."

황금우상 상단도 아니고 빛의 법전 주교로부터 이런 가르침을 들을 줄은 몰랐지만, 꽤 그럴싸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끊임없는 자본의 순환이 경제를 총체적으로 성장시킨다는 논리야말로 사실상 자본주의의 기초 아닌가.

'결국 뇌물로 받은 돈을 먹지만 말고 위로도 상납하라는 뜻인 게 문제지만.'

106화. 소금 의회 (2)

아이작은 그 이후로도 상인들로부터 세금 외에도 교단으로서 기부금을 더 뜯어내는 법과 면벌부 판매 방법, 오직 교단의 수도원에서만 독점 생산 판매가 가능한 품목들, 제국에 바쳐야 할 세금을 교단을 위한 비용으로 위장해 면세받는 방법 등등에 대해서 배웠다.

미친 소리와 그럴듯한 소리를 번갈아 가면서 하니 아이작은 교단의 부정부패가 얼마나 탄탄하게 자리 잡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 시스템이 얼마나 정교한지 후안 주교가 빛의 법전 주교가 아니라 황금우상 상단의 지부장쯤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물론 후안이 이런 것을 가르쳐 주는 것도 전부 위에 상납하라는 뜻에서였다.

"이렇게까지 돈을 뜯어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어허, 이렇게까지라니? 지금 아이작 경에게 성배기사의 지위를 보증하고 이사크레아 영지의 수도원장 자리, 그리고 작위 수여에 대한 교단 안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갔는지 알고 있나?"

아이작은 후안의 말에 깜짝 놀랐다.

"교단에 저에 대한 불만이 많습니까? 성인으로 추대한다기에 그런 것은 없을 줄 알았습니다만...."

"교단에는 입이 많지. 능력도 없는 주제에 성인이 되고 싶어서 줄 선 경우도 많고. 그리고 주교들도 다들 자기 사람을 성인으로 만들어서 키우고 싶어서 안달 났거든. 그래서 아이작, 자네의 됨됨이야 어찌 됐든 일단 견제하는 자들도 있다네."

아이작은 교단의 정치 상황을 대충 알 수 있었다.

황제의 대항마로 성인을 추대해야 한다는 의견은 공통적이지만, 누굴 추대할지에 대해서는 주교마다 의견이 다른 것이다. 각자 자기네 라인을 성인으로 추대하고 싶어서 자꾸 미뤄지던 차에... 아이작이 등장한 것이다.

딱히 연고도, 인연도, 소속도 없으면서 능력과 업적만큼은 보장된 존재가.

그래서 아이작의 성인 추대가 서둘러 이뤄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후안 주교가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는 것도.

"저를 보호하기 위해 돈을 많이 쓰신 모양이군요."

"적지 않게 들었지."

후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이작은 그가 빚 면제를 제외하면 지원을 거의 해 주지 않아 구두쇠라고 생각했는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이작을 보호하기 위한 돈을 잔뜩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제 성인 추대가 미뤄졌으니 곤란하시겠군요."

"그것도 그렇지. 하지만 교단 직할령의 영지를 확보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니 큰 손해는 아니야."

후안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작을 돌아보았다.

"그러니 바로 그 흔치 않은 영지에 '내 사람'인 자네를 확실하게 그 자리에 꽂아둬야지. 자네는 더더욱 돈을 뜯어내는 법을 공부해서 내게 갚아야 하는 거고."

아이작은 약간이나마 감사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 빠르게 식는 것을 느꼈다. 결국 아이작에게 들어간 돈을 빠르게 돌려받기 위해 이런 부정부패와 비리, 뇌물 수수들을 가르쳐준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었다.

어찌 됐든 교단 최상층부 중 하나인 후안과 고리를 만들어 둘 수 있다면 돈이 얼마나 드는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연줄은 만들고 싶다고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라면 오히려 편했다.

후안은 나름대로 납득한 아이작을 힐끔 보다가 달래듯이 자상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 자네처럼 순진무구하고 선한 신앙심으로 가득 찬 성배기사라면 내 이 수전노 같은 모습이 질릴지도 모르지. 등하맹인이라던가? 나 같은 사람을 그렇게 부르는 것도 같더군."

"아... 그럴 리가요. 어떤 놈들이 감히 주교님을."

바로 게벨에게서 들었던 말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처음 듣는 척 말을 아꼈다.

"하지만 교단 안에 나 같은 사람이 있어서 빛의 법전 교단에 소속된 수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는 걸세."

후안 주교는 주변의 사제들과 성기사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생각해보게. 여기 있는 놈들은 기도하거나 칼 쓰는 재주밖에 없는 놈들뿐이야. 빌어먹을 재주는 몰라도 벌 재주는 없는 놈들이지. 빛의 법전께서 기도에 보답해주시지 않는다면 절반은 한 달 안에 굶어 죽거나 산적이 될걸세. 하물며 수도원이 돌보는 고아나 빈객, 고용인들은 어떻겠나?"

의외로 인건비도 꼬박꼬박 지불하는 편인 건가?

아이작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 후안 주교가 말을 이었다.

"물론 상당수는 자원봉사자지만, 먹이고 재우기만 해도 돈이 아득하게 들어간다네! 그게 다 공짜가 아니란 말이지!"

"...."

아이작은 수도원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막강한 기적을 발휘하는 예브하르 수도원장조차도 그 수도원을 배부르게 먹여 살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만약 수도원장이 후안 주교였다면 적어도 아이작이 쥐를 잡아먹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성직자로서는 수도원장이 더 훌륭한 사람이다.

하지만 단체를 이끄는 고위층으로는 후안 주교 같은 역량도 필요하리라.

"설마 교단이 정말로 순수한 기부금만으로 굴러간다고 생각하나? 절대로 아니네. 자네도 영주니 이제 슬슬 알고 있을걸세. 어느 정도 규모 있는 집단을 이끌게 되면, 그 집단의 목적이 무엇이건 원래 가지고 있는 능력보다 돈 끌어오는 능력이 중요하게 되는 법이라네."

'불사 교단처럼 사악한 놈들과 싸우면 이 정도 부패는 필요악인 셈이다!'라고 후안은 말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후안의 말을 약간 더 보충했다.

"...그리고 저희는 그 수고의 일부를 대가로 받을 뿐이구요."

"정확하네."

후안은 아이작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웃으며 대답했다.

"자네가 성배기사로서 능력이 출중하다는 것은 이미 알아보았지만, 말 몇 마디로 영지를 접수하는 모습을 보고 자네도 나와 동류라는 것도 깨달았지. 자네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건 알아. 하지만 지금부터는 정직하게 벌어들이는 돈 이상의 돈이 필요할 걸세."

"예. 주교님."

"훌륭하군. 자네가 충분한 성의를 보인다면 그저 그런 성배기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교까지 올라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거야."

"주교라뇨. 제가 어찌 감히 후안 주교님과 나란히...."

"하하하! 자네가 아니라면 누구에게 내 자리를 넘겨주겠나?"

그렇게 하하호호 덕담을 나누는 사이 후안과 아이작의 말이 부둣가에 멈춰 섰다. 빈곤한 노르덴 항의 모습과 다르게 부둣가에는 꽤 많은 배들이 정박해있었다.

초췌한 인상의 선원들이 아이작을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아이작은 소금 의회 일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후안 주교는 왜 여기까지 나를 불러서 돈 버는 강의를 진행한 거지?'

아이작이 후안을 바라보자 그는 누런 이를 드러내고 씩 웃으며 말했다.

"제일 중요한 강의지. 이단을 상대로 돈을 뜯어내는 법에 대해 알려주겠네."

***

후안과 아이작 일행이 정박해 있는 배 중 하나에 가까이 다가가자 선원들이 고개를 돌렸다. 주교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데면데면한 눈치였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이 소금 의회 신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선원들은 격렬한 내적 갈등을 겪고 있었다.

뭔가 높아 보이는 사제가 온 것은 분명한데, 대응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들은 비록 다른 신앙일지라도 '사제'를 무시했다가 바다에서 부정이라도 탈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함부로 이단 신앙 사제에게 말을 걸었다는 이유로 또 부정 타는 것은 아닌가 고민에 빠진 것이다.

소금 의회 선원들이 오도 가도 못 하는 내적 갈등에 빠진 이유는 그들이 정확한 교리를 분실했기 때문이었다. 명확한 근거 없이 자기만의 미신을 주워섬기는데 논리가 있을 리가 없다.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바다를 헤매는 선원들은 어쨌든 정교한 질서보다는 불확실한 운에 기대야 할 때가 많았으니까.

때문에 그들은 차라리 주교가 먼저 말을 걸어 주길 애타게 기다렸다.

"이곳의 책임자가 누구냐?"

대열 앞에서 후안 주교의 말을 이끌던 어린 사제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 선원 사이에서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선원 한 명이 허겁지겁 앞으로 달려 나왔다.

"어... 무슨 일이십니까, 사제님?"

그 말에 대답한 것은 이번에도 후안 주교가 아니라 옆에 있는 어린 사제였다.

"이놈! 이분은 빛의 법전 주교이신 후안 리아르 주교님이시다! 감히 선원 따위가 말을 붙일 수 있는 신분이 아니니 이 배의 선장을 불러와라!"

후안은 아이작이 처음 봤을 때처럼 말 위에 앉아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아이작은 후안에게 몰래 조용히 물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헨드락 영지에 왔을 때에도 저 사제를 대신 시켜서 말씀을 전하시던데, 뭔가 이유라도 있습니까?"

"당연하지. 나는 빛의 법전 주교일세. 내 말 한마디 한마디가 천금과 같은 가치를 갖지. 값싸게 나의 '말씀'을 소비하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혀를 빌리는 것은 당연한 걸세. 내 말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자는 스스로 가치를 증명한 자뿐이네. 자네처럼."

'진짜 미친놈이군.'

자기 혓바닥에도 가격을 붙이는 광기를 보며 아이작은 혀를 내둘렀다.

한편 선원들이 당황해 곁눈질하며 망설이기만 하자 후안은 어린 사제에게 뭔가를 속삭였다. 어린 사제는 곧바로 그의 말을 전달했다.

"너희가 소금 의회 신도들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왔다. 빛이 관장하는 질서는 관대하게 모두를 수용하는바, 품에 들어온 너희들을 쫓아낼 요량으로 온 것은 아니니 걱정 말거라."

"저, 그, 잘 알겠습니다. 주교님, 아니, 사제님...?"

선원은 사제에게 말해야 하는지 주교에게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결국 어린 사제에게 말했다.

"바로 접대할 사람을 불러오겠습니다. 거기 너, 당장 선장실로 뛰어가라. 거기 그놈 취해 자빠져 있을 테니 바닷물이라도 끼얹어. 옷도 똑바로 입히고."

"예? 아, 예, 알겠습니다!"

지적받은 선원은 허둥대며 달려갔다. 선장을 데리러 간 사이 주교를 상대하던 선원은 싹싹한 태도로 사제를 향해 말했다.

"혹시 무슨 용건인지 알려주시면 이야기 진행이 좀 더 빠를 것 같습니다만. 선장님은 어젯밤부터 진탕 취하셔서 제대로 머리가 안 돌아가실 겁니다. 하찮은 아랫것들과 공연히 말씀 나누실 필요 없이 제가 정리해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이작은 선원의 대응이 제법 날랜 것을 보고 그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확실히 다른 선원들보다 계급도 높고 후안 주교 같은 부류를 상대해 본 느낌이 났다.

어린 사제가 대답하기 전에 아이작이 나서서 물었다.

"그쪽은 이름이?"

선원은 아이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히야니스 니코스입니다. 그쪽은... 혹시 아이작 성배기사님이십니까?"

아이작은 소금 의회 신도까지 자신을 알아본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아이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눈초리가 예리해졌다. 아이작은 혼돈의 눈을 발동해 보고 싶은 호기심이 들었지만, 주교를 옆에 두고 그런 모험을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나저나 주교님과 성배기사님까지, 이런 촌 항구까지 무슨 일로 오셨는지...? 토벌해야 할 악마라도 나타났습니까?"

그의 말에 후안 주교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어린 사제가 그의 말을 대신해서 외쳤다.

"정확하다!"

아이작은 놀란 눈으로 후안을 돌아보았다.

"노르덴 항 앞바다에 사악한 이단의 괴물이 나타났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신도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괴물은 즉시 토벌해야 하는바, 소금 의회의 협조를 구한다."

***

노르덴 항의 괴물이라니. 아이작은 듣도 보도 못한 말이었다. 하지만 짚이는 것은 있었다.

'설마 그걸 괴물이라고 지칭하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후안 주교는 어마어마한 무례를 저지르고 있었다.

지금 그가 '괴물'이라고 칭하고 있는 것은 북해에 살고 있는 소금 의회의 천사일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소금 의회의 신이 소금 사막 아래 봉인 당하면서 사후세계와의 연결이 끊어진 것은 신도들만이 아니었다. 지상에서 임무를 수행 중이던 천사들도 졸지에 지상에 고립된 것이다.

하지만 본래 지상은 천사가 살기에 적합한 환경이 아니다. 그들의 기하학적이고 일반 상식에 맞지 않는 기괴한 형상은 본연의 형태가 사후세계에 맞춰 설계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소금 의회의 천사 역시도 언젠가 다시 돌아올 자신의 신을 기다리며 대부분의 시간을 수면으로 보냈다.

'나도 그 천사에게 용건이 있긴 했지만, 이 시점에 벌써 천사가 깨어 있던가?'

아이작은 천사에게 소금 의회 교리의 비밀 몇 가지를 알려 주고 그 대가로 소금 의회의 협조를 얻어 낼 생각이었다. 어떻게 깨울지도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그런데 벌써 천사가 깨어나 있는 것은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부, 불러왔습니다!"

그때 허겁지겁 배에서 누군가 달려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히야니스 말대로 바닷물이라도 끼얹은 건지 물에 흠뻑 젖은 남자가 몸에 맞지 않는 커다란 선장 외투를 입고 내려왔다. 선장은 사태 파악이 안 되는 듯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주교 일행들을 둘러보다가 아이작과 눈을 마주쳤다.

아이작과 선장의 몸이 동시에 굳었다.

'에이단?'

선장복을 입고 내려온 것은 아이작이 소금 의회 일을 진행하기 위해 먼저 파견해 둔 신도, 에이단 베어베크였다.

107화. 소금 의회 (3)

"당신이 선장인가?"

"아, 아니. 저는."

에이단은 허겁지겁 뭐라고 말하려다가 뒤에서 누군가 툭 차는 발길질에 허리를 똑바로 폈다. 그는 이내 다른 선원들과 눈을 마주치고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저는 '용맹한 연어' 호의 에이단 베어베크입니다. 순풍이 함께 하길. 빛의 법전 주교님께서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에이단은 가까스로 차분함을 되찾고 품위를 갖춰 말했다. 비록 바닷물에 젖은 몸이 품위를 대폭 떨어뜨리고 있었지만, 귀족들과 나란히 하던 말투가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작은 대충 상황을 알 것 같았다. 에이단이 진짜 선장일 리는 없고, 갑자기 위에서 높으신 분이 오니 적당히 말실수 안 하고 접대할 만한 사람을 불러온 것이다. 아마도 히야니스라는 남자가 진짜 선장일 확률이 높아 보였다.

실제로 대화 내용을 돌이켜보니 에이단이 선장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한 적 없었다.

'에이단이 이 배에 있을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제대로 찾아왔군.'

아이작의 목적과 후안의 목적이 비슷하다면 이 배에 에이단이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역시나 히야니스가 에이단에게 뭐라고 속삭이자 그의 얼굴이 금방 사색이 되었다.

"괴, 괴물 말씀이십니까? 뭔가 오해가 있는 듯합니다. 선원들은 바다에서 조금 큰 파도나 고래를 보고 착각하기도 해서...."

에이단의 말에 후안이 속삭이자 어린 사제는 우습다는 듯한 비웃음과 함께 전달했다.

"그렇다면 이 항구에 왜 이렇게 배가 많이 정박해 있단 말이냐? 필시 항구에 들어왔다가 떠나지 못할 사정이 생긴 것이겠지. 태풍이 올 시기도 아니고, 풍랑이 거칠지도 않다. 괴물 때문 아니냐?"

에이단은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아이작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해도 스치듯 자꾸 마주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이작은 에이단을 약간 도와주기로 했다.

"주교님. 잠시 여쭐 것이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후안은 눈을 가늘게 뜨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이작과 함께 잠시 뒤로 물러났다.

"만약 정말 괴물이 나타났다면 저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요청했지, 굳이 숨길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저들이 저렇게 부정하는데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이단심문청의 첩보력을 얕보지 말게. 이사크레아 경."

후안은 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자네 말이 맞네. 저 앞바다에 있는 것은 괴물이 아니라 소금 의회의 명천사인 '익사자 왕'이네. 기록에는 있지만 근 300년 동안 모습을 드러낸 적 없었지. 하지만 최근 모습을 드러냈다더군."

"예? 그러면 천사를 토벌하려는 겁니까?"

아이작은 자신이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토벌했다는 이유로 후안 주교가 뭔가 허황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전사가 아닌 음모가 타입인 데다 유리한 전장에서 싸웠기에 쫓아낼 수 있었던 것이지, 다른 천사라면 어림도 없었다.

그런데 심지어 바다에서, 본체를 그대로 가지고 있을 소금 의회의 천사를 상대하라고?

아이작에겐 그런 무지성적인 자살 계획 따윈 조금도 없었다.

"자네 천사를 토벌해봤다고 자만하고 있는 거 아닌가? 익사자 왕은 붉은 살점의 선지자와 다르네. 뭍으로 기어 올라왔다면 모를까 바다에선 절대로 건드려선 안 되네."

다행히 후안은 미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아이작을 매도하기까지 했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우선 들었다.

후안을 바다로 밀어 버릴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그러면 왜 여길 찾아오신 겁니까?"

"듣자 하니 익사자 왕이 신도들에게 뭔가 터무니없는 것을 요구한다더군. 그래서 배들이 떠나지 못하고 오도 가도 못 하는 중이라고 들었네. 소금 의회의 의원들까지 모여서 익사자 왕의 요구를 들어줄지 말지 회의 중이라고 하더군."

후안 주교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어떤 요구 말입니까?"

"정확하지는 않네. 워낙에 쉬쉬하는 중이라... 뭘 어떻게 결론 내리든 우리와는 상관없지. 하지만 중요한 건 이번 기회에 적당히 선물을 받고 자기들끼리 알아서 잘 처리하라는 조언을 해주러 온 걸세. 교단까지 정보가 들어왔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소금 의회의 천사 때문에 항구가 봉쇄당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후안 주교는 그걸 눈감아 주는 것을 빌미로 돈을 뜯어내러 왔다는 것이다.

항구 봉쇄로 손해 보는 것도 소금 의회고 익사자 왕과 빛의 법전이 맞붙으면 손해 보는 것도 소금 의회지만 어쨌든 돈을 내야 하는 것도 소금 의회다.

"당연히 소금 의회가 '예 그럼 우리 쪽 천사 좀 퇴치해 주십쇼' 하면서 배를 빌려줄 리가 없으니 꽤 짭짤한 돈을 지불할 걸세. 이게 바로 이단을 교화하면서 수익을 창출하는 비법이지. 알겠나?"

후안은 진지하게 아이작에게 가르침을 전달했다.

"명심해두게. 이단 놈들이 모이기 시작하면 어떤 이유에서건 양심의 가책 없이 돈을 뜯어낼 수 있는 빌미가 된다는 것을!"

'가책을 느낄 양심이 있기는 한 건가?'

아이작은 되묻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어쨌든 납득은 할 수 있었다.

그 사이 히야니스와 에이단도 뭔가 상의를 마친 건지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후안은 그들이 얼마나 불러야 적당히 눈감아 줄 것인지 비용을 가늠하며 다가갔다.

후안이 다가오자 에이단은 뭔가를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방황하는 이교의 신도들에게까지 도움의 손길을 뻗어주시니 이 감당 못 할 은혜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후안 주교님."

에이단은 겸손한 태도로 자세를 낮추며 말했다.

"괜찮다면 배에서 대화를 정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희가 주교님의 은혜에 대한 '성의'를 표시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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