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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중요한 것은 이미지다. 정문을 통해 들어가는 것 역시 이를 위한 퍼포먼스 중 하나.

세작이 문을 열어 주든, 부수고 들어가든 일단 정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의 상징이 된다.

대중은 보이는 것에 쉽게 휘둘린다.

그러니 그림자에선 어떻게 행동하든, 태양 아래에선 당당히 행동하자. 우린 잘못한 것이 없다. 설령 잘못한 것이 있다 한들, 그것은 대의를 위한 것이었을 뿐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한 행동이 무엇을 위한 것이라 생각한 겁니까? 황제의 전력을 깎아내리기 위해서? 물론 그것도 맞지만 그건 부가적인 목적일 뿐, 핵심은 제국민들의 지지를 얻고 황제의 지지를 낮추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어느 정도 목적을 달성했다.

악덕 영주들을 응징하고, 제국민들을 하찮게 보는 오만한 귀족을 벌하며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그 과정에서 살인귀 기사단과 충돌하는 일이 발생하며 폭탄이 잘못 터져 민가에 피해를 입히기도 했지만, 그 원망은 모조리 살인귀 기사단에게로 향했다.

혁명군의 이념이 제국민들의 호의를 산 것과 살인귀 기사단의 이미지가 나쁜 탓에 발생한 예상외의 이득이었다.

"우리의 존재 의의와 행동의 정당성은 제국민에게서 나옵니다. 그들의 지지가 없다면 우리는 혁명군이 아닌 한낱 반역자 모임이 될 뿐이지요."

그러니 제국민들을 설득해야 한다. 설득하고, 눈앞에서 당당히 황족들을 죽여 정당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잠시 말을 멈추고 호흡을 정리한 다니엘이 한쪽 팔을 펼쳤다.

"황궁의 정문을 통해 황제에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많은 전력이 필요하고, 용사의 파편을 지닌 자를 죽이기 위해서도 상당한 전력이 필요합니다."

제멋대로 행동해 혁명군의 전력을 깎아 먹은 자가 누구였지?

바로 눈앞의 이들과 같이 거사를 재촉하던 자였다.

그러니 너희에겐 이 이상의 발언권이 없다. 이렇게까지 설명했는데, 아무리 낯짝이 두껍다 해도 감히 제 의견을 내세우는 인간은 없겠지.

─이겼다.

"전력 부족에, 시기도 좋지 않죠. 그러니 묻겠습니다. 아직도 거사를 강행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 계십니까?"

"...."

반박은 없었다.

한 차례 수뇌부의 기를 꺾어 둔 다니엘이 줄곧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폴을 데리고 회의장을 벗어났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어두운 비밀통로를 걷던 폴이 조용히 고개를 들어 다니엘을 확인했다. 역시나 회의에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은 듯 그의 얼굴에 짙은 피곤이 드리워 있었다.

이럴 때면 그는 어머니를 뵈러 가곤 했지.

거기까지 생각한 폴이 갈림길 앞에서 뚝 멈춰 섰다. 생각 없이 숙소로 돌아가는 통로를 향하던 다니엘이 뒤늦게 그를 돌아봤다.

"다녀오세요."

"응?"

"저도 아는 길을 굳이 바래다주실 필요는 없어요. 전 이대로 숙소에 돌아갈 테니 형은 그냥 바로 어머니께 다녀오세요."

예상치 못한 말에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하니 있던 다니엘이 씩 웃으며 폴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다 컸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미 다 커 있었어요."

"그래 그래."

장난기가 가득 담긴 웃음은 곧 다정한 미소로 바뀌었다.

"...고맙다."

제법 타인의 온기에 익숙해졌다 했더니, 아직 이런 상황엔 면역이 없는 모양이다.

쩡하니 굳어 있던 폴이 더듬더듬 별말을 다 한다며 중얼거리더니 결국 쑥쓰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치듯 숙소로 돌아갔다. 다니엘은 키득키득 웃으며 걸음을 돌렸다.

그 웃음은 얼마 가지 못했다.

'....'

다니엘은 멍하니 거리를 배회했다. 본래 예정대로라면 아직도 어머니와 함께여야 했지만 쫓겨난 탓에 어쩔 수 없었다.

머리가 어지럽다. 조금 전 한바탕 어머니를 모시는 동료들에게 화를 내었음에도, 그의 감정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그만큼 그가 마주한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어머니께서… 피를....'

각혈을 하셨다. 그것만으로도 충격인데, 이것이 오래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단다. 동료들은 그걸 알면서도 어머니의 부탁이란 명목하에 숨겼고.

머리로는 이해한다. 그의 인생은 어머니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으니. 심지어 혁명군을 만든 이유도 어머니 때문이었는데 말해 무얼 하겠는가. 그러니 어머니의 건강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역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할 것이 분명했다.

아들이 상처받지 않길 바란다. 혁명군 수장의 정신 건강은 중요하다. 그러니 숨길 만도 했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감정은 별개였다. 그만큼 그의 인생을 어머니를 위해 바쳤는데, 이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생각 없이 축제가 벌어지는 거리를 떠돌았다. 타 왕국과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도 제국의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해 열린 것이랬던가. 이전이었다면 제국의 낭비와 허세에 혀를 찼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미 한바탕 화를 내었기 때문일까, 그렇게 흥분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기분이 차분하다. 아니, 차분하다기보다는 넋이 나갔다고 봐야 옳겠지.

"...어."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거리를 배회하길 한참, 인파에 떠밀린 누군가와 강하게 부딪혔다.

술 냄새가 훅 풍겨 온다. 취객인가. 조금 불쾌하긴 해도 사람이 많으니까 어쩔 수 없지, 하고 넘기려던 찰나.

"쿨럭."

"...?!"

상대가 울컥 피를 뱉었다. 상대가 후드를 쓰고 있는 탓에 그 사실을 반 박자 늦게 깨달은 다니엘이 눈을 크게 떴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 마주한 진실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하얗게 질린 얼굴이 더욱 희게 탈색되었다.

"이, 이보세요. 괜찮으세요?"

"...."

"저, 정신 차리… 아, 의사. 의사에게 데려가야...."

손이 덜덜 떨린다. 다니엘은 상대를 부축하는 손에 힘을 주었다.

진정해, 이 사람은 어머니가 아니야. 그러니 그렇게 당황할 필요 없어.

그냥 침착하게 근처 의사에게 데려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여기 근처에 의사가 있나? 있다면 어디에 있지? 의사를 찾는 과정에서 시간을 많이 낭비하진 않을까? 그러다 이 사람이 죽기라도 하면?'

...젠장!

정체 모를 환자를 안아 들었다.

그도 자신이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대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쩌겠나. 오늘 어머니와 같은 증상을 보인 사람이 죽었다간 편히 잠들지 못할 것 같은데.

'내가 아는 의사는 하나밖에 없어.'

위치를 분명하게 알고 있는 가까운 거리의 의사는 그뿐이다.

혁명군의 수장으로서 해선 안 되는 짓이라는 걸 알지만, 이성이 생각하고 제어하기 전에 이미 감정에 먹힌 다니엘은 움직이고 있었다.

***

이게 뭐야.

길에서 행인들이 축제 이야기를 하며 특정 거리를 언급하길래 갔을 뿐인데, 누군가 내 등에 강한 충격을 주며 밀쳤고, 그 탓에 다른 사람 옷에 피를 토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나를 들고 뛴다?!

심지어 가면 갈수록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는데... 어어? 골목 벽이 갈라지고 땅이 열리고, 심지어 웬 비밀 통로까지 드러나네?

'이게 뭐야아아아!'

얼굴을 반쯤 가린 후드 아래서 눈만 데굴데굴 굴리다 상대의 시선이 내게 닿는 것을 느끼고 얼른 눈을 감았다.

...일단 기절하도록 하자.

***

결국 저질렀다.

다른 이들이 알게 된다면 수장 자격에 대해 논하겠지. 욕심이 많은 자들이니 어떻게든 물어뜯으려 들 것은 안 봐도 뻔하다.

그렇지만 아직 알려진 것도 아니고, 결국 눈앞의 사람 하나 살린 셈이니 후회는 없다. 수습은 뒤로 미뤄 둔 다니엘이 초조한 마음으로 의사의 말을 기다렸다.

"목숨에 지장은 없습니다. 따로 조치를 취할 필요도 없이 푹 쉬게 하면 되겠네요."

"하, 하지만 피를...."

"애초에 몸 자체가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은 상황이었던 듯하군요. 신체적으로 다른 충격을 받은 흔적이 있기는 하지만... 이미 조치가 끝났거나 조치할 필요 없는 것들 뿐입니다."

"아아...."

다행이다.

다리에 힘이 풀려 스르륵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짙은 한숨을 내쉬는데, 노의사가 흘리듯 물었다.

"그보다, 알고 데려오신 겁니까?"

115. 사실 그들은 알고 있었다(9)

"...네? 무엇을… 말입니까?"

"모르셨군요. 저는 못 본 것으로 칠 테니, 아무래도 직접 보시는 게 낫겠습니다."

안도하기가 무섭게 불길한 감각이 등을 훑어내렸다.

내가 저지른 일이 생각 이상의 큰일일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닫힌 병실을 열어젖혔다. 로브를 벗어 얼굴이 드러난 한 남자가 침대에 누워있었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 흰 머리카락. 이쯤에서 다니엘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 하하."

도대체 오늘 무슨 날이기라도 한 건지. 왜 끔찍한 일들은 한 번에 밀려오는지 모르겠다.

저 남자가 누구인지 알 것 같다. 아니, 스스로를 속이지 말자. 다니엘은 저 남자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어 확신할 수 없지만 예상이 맞다면 저 눈꺼풀 아래에는 붉은 눈동자가 숨어 있겠지.

탄식 같은 목소리가 병실을 채웠다.

"...데온 하르트."

혁명군으로서는 우선적으로 제거해야 하는 인물.

그제야 의사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제게 어마어마한 배려를 해 주었다는 것 역시.

"왜, 하필이면."

오늘치 정신력은 이미 다 소모했다. 이 이상은 한계였다.

날뛰는 혁명군 수뇌부들을 제압하고, 어머니께서 각혈하시는 모습을 보았으며, 그녀와 같은 증상을 보인 사람을 구했다. 그런데 이젠 그 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안 돼. 할 수 없어.'

적어도 오늘, 다니엘은 데온 하르트를 죽일 수 없다. 그는 확신했다.

'....'

홀린 듯 그에게 다가갔다. 눈치 빠른 노의사가 조용히 병실 문을 닫고, 시간이 멈춘 듯 조용해진 공간 속에서 다니엘은 소리 없이 침대 앞 의자에 앉았다.

너는 네가 얼마나 운이 좋은지 모를 거다. 본래였다면 내게 정체를 들킨 즉시 죽었을 텐데.

천천히 일어나며 오른손으로 침상을 짚었다. 그대로 왼손을 뻗어 녀석의 목에 손을 댄다. 피가 모자란 탓인지 조금 빠른 맥박이 느껴졌다.

'...서류상의 데온 하르트였다면 침상을 짚은 순간… 아니, 근처에 다가간 순간 눈을 뜨고 반응했을 텐데. 역시 몸이 좋지 않은 건가.'

손을 거뒀다. 그대로 물러나려는데 뒤늦게 녀석의 흐트러진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하게는 흐트러진 옷깃 사이로 드러난 기묘한 모양의 낙인이.

─그래, 마왕의 저주에 걸렸댔지.

몸을 쇠약하게 만든다 했던가. 그럼에도 전쟁터에서 오랜 시간 쌓아 온 경험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닌 탓에 전투 능력은 별개로 취급되고.

그렇기에 데온 하르트는 마왕의 저주를 받았음에도 여전히 혁명군의 제거 대상 윗 순위를 차지하는 것이지만....

"굳이 내가 죽이지 않아도 얼마 못 가 죽겠어."

당장 일어나 경계해도 모자랄 판에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이 무방비한 모습을 보라. 그가 아니더라도 머지 않아 누군가의 손에 죽을 것 같은데 굳이 손을 더럽혀야 할까.

그렇게 합리화하며 일어났다. 자꾸만 어머니가 떠올라 더 이곳에 있을 수 없었다.

병실을 나가자 앞에 대기하고 있던 의사와 마주쳤다. 데온 하르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려는 듯 곁눈질로 어깨 너머 병실을 살핀 그가 이내 눈을 마주친다.

다니엘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깨어나면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게 돌려보내세요. 당연히 그가 길을 외우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이 일은...."

"함구하겠습니다. 어차피 요즘 건망증이 심해져서 금방 잊을 테지만요."

"...그래도 보안은 잊지 말아 주세요. 안대 씌우는 거 잊으시면 안 됩니다."

"네."

그대로 등을 돌려 이곳을 벗어났다. 복도를 걸으며 어떻게든 한계를 넘은 정신을 복구하기 위해 애썼다.

보통은 어머니를 찾아가 휴식을 취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는 상황이다. 어머니 생각은 더 하지 말고, 차라리 데온 하르트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를테면 마왕의 저주라든가.

'저주… 저주라.... 각혈은 저주 탓에 일어난 것인가.'

각혈... 어머니.

억지로 돌려놓았던 의식의 흐름은 다니엘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다시 돌고 돌아 어머니에게로 집중되었다.

저주하니 문득, 데온 하르트가 마왕의 저주를 받았다면 어머니는 세상의 저주를 받은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힘든 삶 끝에 돌아온 것이 각혈이라니.'

쇠약해진 몸을 볼 때마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예고 없이 성큼 현실감 있게 다가올 줄은 몰랐지만.

어머니에게서 나온 피가 경고하고 있었다. 네 어머니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서둘러야 해.'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그녀의 이상향을 보여 드려야 한다.

그제야 다니엘은 제 발걸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 나는 이미 알고 있었구나.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는 '그'를 만나야 하지.

다니엘은 표정을 가다듬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빨라진 걸음이 그의 조급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

와, 죽는 줄 알았네.

저 녀석이 내 목에 손을 댔을 때는 정말 목 졸라 죽이려는 줄 알고 긴장했다. 그 탓에 심장이 아직도 쿵쿵 뛰는데, 다행히도 눈치 못 챈 건가?

슬그머니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병실이라 그런가, 겉보기에는 평범하네. 하지만 난 이곳이 결코 평범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잘은 몰라도 여기까지 올 때 절차가 복잡했던 것을 생각하면 아마 비밀 조직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럼 나 잡힌 건가? 인질 된 거야?'

처음엔 치료의 목적으로 데려왔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닐 것이다.

내 외모가 어지간히 독특해야지. 방금 내 목을 조르려 든 것도 그렇고, 이 얼굴을 본 이상 정체는 이미 다 까발려졌다고 봐도 무방할 터다.

'그러니 튀자.'

길은 모르지만 어디든 가다 보면 출구가 나오겠지.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게 좋겠어.

슬금슬금 상체를 일으키…다가 풀썩 누워 눈을 감았다.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거든.

아니나 다를까,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조금 전 그 사람인가?'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신경이 곤두섰다. 기묘한 긴장감 속에서 점점 가까워지던 발소리는 바로 옆까지 도달하고 나서야 뚝 멈췄다.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까지 기절한 척하고 계실 겁니까."

"!"

너무 놀란 나머지 나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다.

선명하게 드러난 내 두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머리가 희끗한 한 노인이 부드럽게 미소 짓는다. 적의라고는 한 톨도 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속일 사람을 속여야지요. 전 의사입니다."

"...."

"따라오시지요. 밖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정말? 아무 대가 없이 밖까지 데려다준다고? 아니, 그보다....

노인의 손에 들린 안대를 가리켰다.

"그건...?"

"길을 외우시면 좀 곤란한 탓에 그렇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

내 표정이 보이지도 않는 듯 노인은 빙긋 웃었다.

***

집무실에 돌아온 크루엘은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마주하고 잠시 멈칫했다.

"...공작 각하."

공작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무언가 시킬 일이 있었다면 굳이 오지 않고 불렀을 텐데.

심지어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책상 위의 체스판이다. 뒤늦게 급하게 나가느라 체스판을 정리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크루엘이 뒷짐을 지며 움찔거리려는 손을 감췄다.

그런 그를 힐긋 본 공작이 천천히 허리를 폈다.

"왔군요."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사냥대회에 참가한 건에 관해 대화가 필요할 것 같아 와 봤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신경 쓸 것이 많은데 쓸데없는 오해로 시간 낭비, 심력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요."

"...."

물론, 그게 오해인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속내를 삼킨 공작이 싱긋 웃었다.

"아, 그 전에."

"...?"

"꿇으세요."

일순간 녹색 눈이 잘게 흔들렸다.

제가 들은 것이 정녕 그 말인지 의심하듯 공작을 향한 녹안은, 변함 없이 웃고 있는 보라색 눈과 마주하고는 체념하듯 아래로 내리깔렸다.

한쪽 무릎이 땅에 닿고, 크루엘의 고개가 낮아졌다.

주군을 향한 기사의 예.

아직 확실시된 것도 없으니 굳이 선을 넘어 그를 적대할 필요는 없다. 크루엘은 부정할 수 없는 좋은 전력이기에 공작은 그쯤에서 만족하고 적당히 넘어갔다.

"사냥대회에 참가했지요."

"예."

"...."

"...."

미묘한 정적이 찾아왔다.

할 말을 잃은 듯 잠시 크루엘을 내려다보던 공작이 이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돌려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

"─내가, 모를 줄 알았습니까?"

크루엘의 눈이 떨렸다. 이 순간만큼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공작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면 필시 흔들림을 들켰을 테니.

어디까지 알아차린 걸까. 어디까지 말해야 하지? 설마 '계획'까지 알아차린 것은 아니겠지.

'대답을....'

대답을 해야 하는데.

머리가 팽팽 돌아간다. 침묵이 길어지고 있었다.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겠다 싶을 때, 공작이 말을 이었다.

"왜 데온 하르트를 살린 겁니까."

넓은 아량으로 당시엔 넘어가 주었던 과거를 친절히 짚으며 몰아붙인다.

"혁명군을 이용하면 되는 것을 굳이 살인 의뢰를 넣는 쪽으로 유도하고, 그래서 허락했더니 부상만 입혀도 약속한 금액의 절반을 지급하겠다는 조건을 멋대로 내걸고...."

"...."

"보자 보자 하니 주제도 모르고 움직이더군요. 그게 데온 하르트가 죽을 확률을 낮추기 위한 것이라는 걸, 제가 모를 줄 알았습니까?"

대의에 홀린 혁명군보다는 돈을 목적으로 움직이는 자들이 더 성의 없이 움직인다.

크루엘은 의뢰를 택했다.

돈을 목적으로 움직이는 자들도 제 목숨은 소중히 여긴다. 그러니 부상만 입혀도 적지 않은 돈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면 굳이 무리해 죽이겠다 달려들 이유가 없다.

크루엘은 사비를 들여 그러한 상황을 만들어 주었다.

"게다가 이번 사냥대회에선 아예 직접 데온 하르트를 구하기까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그런 짓을 저지르는 것일까. 그는 정녕 데온 하르트를 죽이고 싶은 것인가?

"해명해 보세요."

보라빛 안광이 번뜩 빛났다. 실로 날카로운 기세였으나 크루엘은 되레 안심했다.

전부 알아차리진 못했구나.

계산이 섰으니 시간을 더 끌 필요는 없다. 지체 없이 입을 열었다.

"제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진작에 말을 할 것이지. 애꿎은 인력만 낭비했잖습니까."

"죄송합니다."

"됐습니다."

고작 이 정도로 공작의 의심이 풀릴 리 없다. 그의 대답에는 허점이 많았다.

공작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일일이 꼬집고 파고드는 대신 다른 방법을 택했다.

"경도 고작 이 정도로 의심이 풀릴 것이라 생각하진 않겠지요."

"...."

"고로 내기를 제안하겠습니다."

크루엘을 향해 일어나라는 말을 던지며 공작은 느긋이 걸음을 옮겨 크루엘의 책상 앞에 섰다. 체스판 밖으로 밀려난 흑색 킹을 집어 들고, 천천히 살피며 말한다.

"데온 하르트는 죽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경에게 맡기고, 경을 통해 명령을 내렸지만 의심의 여지가 생긴 이상 저로서도 마냥 손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

"경은 경대로 데온 하르트를 죽이기 위해 움직이세요. 저 역시 따로 움직일 테니. 먼저 그를 죽이는 자가 내기의 승자가 되는 겁니다. 승자에게 주어지는 이득은... 승자에게 맡기도록 할까요."

패자는 승자의 소원을 들어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공작은 돈도 많고 쓸 수 있는 사람도 많다. 명백히 불공평한 내기였으나 크루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뻔한 대답 대신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왜, 그렇게 데온 하르트를 죽이고자 하십니까."

116. 사실 그들은 알고 있었다(10)

태생적으로 무뚝뚝하여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이 적고, 표현에 서툰 하르트가에서 데온이 알게 모르게 마음고생을 했다는 것을 이젠 안다.

서류상의 오류로 전쟁터에 가게 되었을 때, 무언가 문제가 있을 거라는 종류의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곧장 가족들을 원망했던 것을 생각하면 가족들이 얼마나 믿음을 주지 못했는지 알 수밖에 없었고.

하지만 크루엘은 하르트가 멸문 사건의 책임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모든 원인을 온전히 저와 제 가족들에게 돌리지 않았다. 온전한 책임을 뒤집어쓰기엔 더 직접적인 원흉이 있었기에.

공작.

그가 데온 하르트를 전쟁터에 보냈다.

도대체 왜, 무슨 이유로, 어떤 수를 쓴 건지 알 수는 없지만 크루엘 하르트의 이름이 올라가야 할 명단을 바꿔치기했고,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내 데온 하르트를 저택에서 끌어냈다.

가주인 아버지의 점잖은 설득조차 통하지 않았다. 크루엘을 대신 보내겠다는 납득 가능한 대안에도 그들은 세뇌라도 당한 것처럼 데온 하르트만 찾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아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뒤늦게 이 사건이 공작과 연관이 있음을 안 크루엘은 그때부터 조용히 공작을 주시했다.

데온 하르트를 향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악의. 그것은 전쟁이 끝나고도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강해졌다.

그렇기에 일부러 그의 밑에 들어간 것이지만....

'그건 나중에.'

지금은 그걸 떠올릴 때가 아니다.

드문 질문에 공작의 고개가 올라갔다. 그의 눈엔 희미한 의심이 담겨 있었다.

평소 먼저 말하는 법 없이 질문에만 답하더니. 정말 데온 하르트를 살리고 싶기라도 한 것일까.

공작의 눈매가 가늘어지자, 질문을 잘못한 것을 깨달은 듯 크루엘이 한발 늦게 말을 보탰다.

"제게는 그를 죽여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습니다. 하지만 각하께서는 그 이유가 충분하지 않은 듯하여."

"귀족파의 대표로서 황제의 개를 죽여야 한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한가요?"

"...."

"부족한가 보군요."

감은 좋네.

확실히 그 이유만으로 그를 제거하려는 것은 아니다. 데온 하르트는 제국에 위협이 된다.

공작은 차후 제국의 주인이 될 자의 입장에서 그러한 위협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을 뿐이다.

데온 하르트가 왜 제국의 위협이냐고?

"이유라면 데온 하르트가 황제의 임무를 받아 이동할 때, 제가 경에게 내렸던 명령을 떠올리면 될 겁니다."

[혁명군의 흔적을 쫓다 보면 황제의 명을 받고 데온 하르트의 뒤를 봐주는 이가 있을겁니다. 그자를 죽이세요. 그리고 만일 데온 하르트를 쫓을 여건이 된다면 그가 어디로 가는지 확인하고 오도록 하세요.]

"...."

"아, 경은 모르려나."

그가 일을 처리했을 땐, 이미 데온 하르트는 자리를 벗어난 뒤였다 했으니.

정말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만약 데온 하르트의 뒤를 밟아 그가 어디로 가는지 확인했다면 마계와 연관이 있음은 어느 정도 유추했을 것이다.

공작은 심장 부근을 어루만지며 싱긋 웃었다.

"모른다면 어쩔 수 없지요. 제 대답은 이게 전부입니다."

데온 하르트가 마왕군의 군단장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누군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궁금해하겠지.

머리가 돌아가는 자라면 '어떻게, 왜' 를 따지기 이전에 '언제부터?'의 여부를 우선적으로 따질 것이다.

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처음부터.'

모셔다드리겠다는 크루엘을 거절하고 본인의 집무실에 돌아온 공작은 자리에 앉아 등받이에 상체를 기댔다.

입가에 흐린 비웃음이 떠올랐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애초에 데온 하르트가 마왕의 눈에 띄게 된 것도, 마왕성에 가게 된 것도 나 때문이니.'

8년 전쟁 당시 공작은 어찌하여 데온 하르트를 전장에 보냈을까.

어찌하여 그를 돌아오게 하려는 백작가의 황실을 향한 요청을 차단하였으며, 어찌하여 데온 하르트를 용사의 동료로 마왕성에 보내야 한다는 의견을 내었을까.

귀족 자제인 데온 하르트가 일반 병사에서 시작한 원인은 무엇이었고, 선봉대가 된 것은 누구 때문이었지?

이 모든 것의 근원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마왕과의 계약."

데온 하르트는 권태에 찌든 마왕의 흥미를 끌어내기 위한 공작의 미끼였다.

저택에서만 지내며 이렇다 할 접점도 없었던 상대에게 무슨 악감정이 있었겠는가. 데온 하르트가 전쟁터에 끌려 나온 것은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다.

악의도 아닌 그저 필요에 의한 미끼. 크루엘이 알면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쥐었을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하며 공작은 심장이 있는 곳 위에 손을 댔다. 이질적인, 마음만 먹으면 세계의 규칙을 거스를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느껴진다.

공작의 심장에는 마왕의 계약인과 함께 그로 인해 얻은 마력이 담겨 있다.

단순히 그를 소환하기만 하면 계약이 가능할 줄 알았던 예상과 달리 마왕이 흥미 없다며 거절했을 때는 어찌나 당황했던지.

[내기를 제안하겠습니다.]

[내기?]

[예, 제법 흥미로우실 겁니다.]

그 상황에서 공작은 용케도 오래전 공적인 일로 방문한 하르트 백작저에서 우연히 마주했던 한 남자아이를 떠올렸다.

***

"붉은 눈, 흰 머리, 창백한 피부."

"인간 중에 붉은 눈은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일단 제가 알기로는 인간입니다. 심지어 어리지요."

"조금 흥미롭긴 한데 그게 내기와 무슨 상관이 있지? 그냥 내 흥미를 끌 만한 것을 막 던진 것이라면...."

"그럴 리가요. 일단 끝까지 들어보시죠. 그 아이는 몸이 약해 태어난 이래로 단 한 번도 집 밖에 나가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흰자와 검은자의 색이 뒤바뀐 역안을 마주하며 공작은 보란 듯이 눈을 휘었다.

"그런 귀공자가 전쟁터에 나가게 된다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호오?"

"이게 내기 조건입니다."

독특한 외양, 그럼에도 인간이라 알려진 아이.

몸이 약해 집 밖에 한 번도 나가본 적 없다는 특수성과, 양심 따윈 내팽개친 잔혹한 내기 제의.

이건 먹힌다. 보통 권태에 찌들어 무뎌진 자들은 자극적인 것을 찾는다. 아이 자체가 가진 특수한 설정을 제외하더라도 그리 많지 않을 마왕의 계약자들 중 이런 내기를 내건 자는 없었을 것이다.

"인간계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고는 들었는데... 정말 전쟁이 터지는 건가."

"네, 이번에 왕위에 오른 우리의 왕께서 왕국의 이름을 '제국'이라 명명하며 모든 왕국을 상대로 도발을 펼치셨으니까요. 이미 맞닿아 있는 왕국들과는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이 벌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내기에 대한 대답은?

의외의 정보에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마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난 '생존'에 걸지."

"네?"

'얼마나 버티느냐'가 아닌 '생존'.

"넌 애초에 조건을 '얼마나 버티느냐'로 내세웠으니 '죽음'을 택하겠지? 기한은 그 아이가 참전한 전쟁이 끝나는 날까지로 하자."

"네? 네."

이상하다. 이야기가 이쪽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분명 그 아이가 몸이 약하다는 것과 세상 밖에 나와 본 적 없다는 것을 똑똑히 말했을 텐데.

혼란스러운 공작의 속을 눈치챈 듯 마왕이 웃었다.

"내기는 불리한 쪽에 걸어야 재밌지."

***

그 뒤는... 뭐, 뻔했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 데온 하르트를 죽여야 한다. 마왕이 지켜보고 있으니 직접적으로 손을 쓰진 못하고, 공작은 간접적으로나마 그가 쉽게 죽을 만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애썼다.

이를테면 귀족 자제인 그가 징집된 평민들과 같은 일반 병사로 참전하게 만든다든가.

그럼에도 죽지 않자 아예 선봉대의 대장으로 만들어 버린다든가.

왕이 무력으로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인수인계 등의 문제가 정리되지 않은 데다 즉위와 거의 동시에 전쟁이 터졌기에 서류 조작은 쉬웠다.

'분명 평민과 빈민들로 이루어진 급조된 선봉대이니 얼마 못 가 죽으리라 생각했는데....'

데온 하르트는 용케 살아남았다. 아니, 오히려 잔혹함과 '불사'로 유명해졌지.

죽지 않는 선봉대. 될 수 있는 한 사람을 잔인하게 죽여 가까이 가는 것조차 꺼리게 만드는 살인귀들. 그들을 지휘하고 이끄는 주인, 데온 하르트.

그는 영웅이 되었고, 8년 간의 긴 전쟁은 끝났다.

공작의 패배였다.

'계약은... 포기해야 하나.'

힘과 권력은 많을수록 좋다는 그의 지론과,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본능.

그것이 마왕과의 계약을 탐하게 만들었으나, 괜찮다. 조금 아쉽긴 하지만 계약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힘이었을 뿐이니.

애초에 계약을 했다 해도 정말 급박한 상황이 아닌 이상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다시 조건을 걸지.]

그럼에도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그에게, 마왕이 손을 내밀었다.

[데온 하르트를 내게 보내. 그럼 내 마력의 일부를 내어 주지.]

[....]

[온전한 계약은 아니고... 그래, 반-계약이라 보면 되겠네.]

아아. 표정 없던 공작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퍼져 나갔다.

내기는 패배였으나 공작은 실패하지 않았다. 그가 깔아 둔 밑밥은 그 힘을 여실히 발휘하고 있었다.

내기의 제물, 마왕의 흥미를 끌기 위해 내건 미끼. 마왕은 8년간 다양한 방법으로 데온 하르트의 소식을 전해 받았으며, 때로는 마법을 이용해 직접 지켜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그에게 흥미를 갖게 되는 것도 이상하진 않다.

[마왕성까지 보내 드리는 건 제 힘으로 어떻게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 그를 붙잡는 것은....]

[내 역할이지. 알아. 그거면 충분해.]

그리고.

공작은 데온 하르트를 용사의 동료로 발탁하여 마왕성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무슨 생각인지 황제는 이를 받아들여 그를 마왕성에 보냈다.

가는 과정에서 죽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보아 온 그의 운을 보면 죽진 않겠지. 뭐, 죽으면 어쩔 수 없고.

어느쪽이든 그가 데온 하르트를 다시 보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마왕이 손에 들어온 것을 쉽게 놓아줄 리 없지 않은가.

...라고 생각했는데.

[용사의 시신을 수습해 오다니!]

데온 하르트가 살아 돌아왔다. 그것도 용사의 시신을 들고!

이날, 공작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쌍욕을 내뱉었다.

'처음엔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의문은 점차 해소되었다.

언제부턴가 서서히 언급되기 시작한 마왕군의 0군단장. 황제의 밀명이라는 명분하에 주기적으로 어딘가를 오가는 데온 하르트. 그리고 마계에서나 제국에서나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는 0군단장의 정체.

──데온 하르트가 0군단장이구나. 황제는 이를 알고도 눈감아 주는 것이고.

마계에서도 한자리 차지한 자가 제국에서도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 위험하다. 심지어 황제는 데온 하르트를 상당히 아끼고 있었다. 그런 자가 마왕의 편으로 돌아선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죽여야 해.'

황제는 제치고 제국을 위해서라도 죽여야 한다.

당연한 결론 도출이었다.

'죽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계속 두드리다 보면 언젠간 죽겠지.

검 한번 쥐어 본 적 없는 어린 나이에 전쟁터에 나가 영웅까지 된 인간이다. 조금 걱정되지만 계속 시도하다 보면 언젠간 운이라는 방패를 뚫는 날이 올 것이라며 일말의 불안감을 억누르는데.

똑똑.

"공작님, 다니엘 씨가 찾아왔습니다."

예정에 없는 손님의 방문 소식이 들렸다.

....

"이레온에서 글재주 좋은 사람을 얻었습니다. 이를 이용해 민심을 흔들 생각입니다."

다짜고짜 만남을 청한 다니엘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한 말이었다.

"...길거리에 글이라도 뿌릴 생각입니까?"

"네."

"...."

공작은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겠다. 지금 눈앞의 남자는 제정신이 아니다.

창백하게 질린 안색. 초조한 듯 떨리는 눈동자.

...그러고 보니 언제인가 그의 어머니가 각혈을 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수장에게는 숨기고 있다고 들었는데, 시간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 용케 잘 숨긴다 했더니 결국 들킨 모양이지.

117. 각자의 움직임(1)

"...급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일단 진정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런 일을 벌이기엔 시기가 좋지 않다는 걸 모르지 않잖습니까."

"그래서 이 정도 선만 떠올린 겁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민심을 흔드는 것이 아닌 선동을 했겠죠."

"지금은 그 정도의 흔들림도 제국엔 큰 위협이 됩니다. 마계와의 전쟁을 앞둔 지금, 민심이 흔들려서 좋을 건 없다는 걸 알잖습니까."

"...수뇌부는 매일같이 거사를 외치고 있습니다. 이 정도도 하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도대체 각하께선 어느 정도를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아예 움직이지 않길 바라시는 겁니까?"

"네."

"...뭐?"

"당장은 움직이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활동하던 것들도 모조리 멈추고 쉬는 편이 좋겠군요. 마계와의 전쟁은 제국의 전력이 가장 중요합니다. 내부 분열은 독입니다."

울컥 튀어나온 반말은 넓은 아량으로 넘기며 공작이 말했다.

"이참에 당신도 머리를 식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 너무 조급해하고 있다는 것, 본인은 알고 있습니까?"

"...."

"대답은?"

이런, 크루엘을 상대하다 온 탓에 말이 고압적으로 나와 버렸다.

혹시 감 좋은 눈앞의 사내가 무언가 눈치챘을까 슬쩍 살폈으나 다행히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다니엘은 별다른 내색 없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다행이다. 일단은 눌린 듯하니.

하지만 그의 어머니 건강은 날이 갈수록 나빠질 테고, 덩달아 혁명군 수장의 정신 또한 흔들리겠지. 임시로 눌러 놓은 게 얼마나 갈지 모르겠다.

실례했다며 물러가는 다니엘의 뒷모습을 보던 공작은 눈을 감고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

눌린 게 아니었다. 눌려 준 것이었다.

문을 닫고 나와 혁명군 기지로 돌아가며 다니엘은 천천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의 눈은 차갑게 식은 지 오래였다.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들, '그런 말'을 듣고서도 싸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방심했군, 공작.

'덕분에 정신이 들었으니 감사해야 하나.'

마음이 급해 눈이 가려졌던 것은 사실이다. 머리가 굳고 목적을 위해 무작정 돌진할 뻔했지. 공작이 아니었다면 그간의 인내가 죄다 물거품이 되었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 대사.

[당장은 움직이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활동하던 것들도 모조리 멈추고 쉬는 편이 좋겠군요.]

그리고.

[대답은?]

덕분에 머리가 식으며 어느 정도 상황 파악이 되었다.

공작은 제국이 무너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지금 당장뿐만이 아니라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겠지.

이전부터 느껴 오던 위화감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나는 듯했다.

'그럼 그렇지. '공작'이라는 높은 지위를 자진해서 버리려 들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

혁명군에 접촉해 온 이유도 자신들을 억제하기 위해서였으리라.

'이래서 권력과 손잡는 건 주의해야 하는 건데.'

단기적으로는 이득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아니다. 슬슬 손을 떼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이제 와서 공작의 손을 뿌리치기엔 잃을 것이 너무 많다. 공작 본인은 손해 보는 것 하나 없이 혁명군만 큰 타격을 입겠지. 그래서는 곤란해.

"...다니엘 형?"

"아, 폴."

"거기서 뭐 하세요...?"

"권력과 손을 잡는 것은 되도록 지양해야 한다. 나중엔 발목이 묶여요."

"...취하셨어요?"

다니엘은 말없이 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폴이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데온 하르트를 봤어요."

"...어떻게 그를 알아봤니? 로브 안 입고 있던?"

"안 입고 있던데요. 옷차림이 아주 화려하던데."

"...."

"아, 그래도 안대는 쓰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옷도 그렇고, 그 머리카락이랑 피부가 여간 독특한 것이 아니잖아요? 어렵지 않게 알아봤죠."

아니, 이 의사 할아버지가.

안대 씌우는 거 잊지 말랬더니 정말 딱 그것만 챙기셨네. 로브 입히는 걸 깜빡하면 어쩌자는 거야?

건망증이 심해졌다더니, 이렇게 증명해 주실 줄이야.

"의사 선생님이 몰래 밖에 데려다주던데, 형이 데려오신 거죠? 왜 안 죽인 거예요? 아니, 왜 그냥 보내셨어요?"

그러고 보니 폴은 데온 하르트에게 원한이 있었지.

분노에 찬 눈동자가 다니엘을 올려다본다. 다니엘은 조용히 그의 눈을 들여다보다 느릿하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굳이 내가 죽이지 않아도 죽을 것 같아서."

"납득이 안 돼요."

정보를 얻을 수도 있고, 하다못해 인질로 쓸 수도 있지 않아요?

멈칫. 다니엘의 손이 멈췄다. 폴의 머리 위에 얹어져 있던 손이 스르륵 미끄러지듯 내려온다.

연기와 같이 흐릿한 헛웃음이 부스러지듯 공간에 흩어졌다.

"...정말 다 컸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미 다 커 있었다니까요."

"그래 그래."

...그래. 나도 준비해야 할 때가 되었지.

공작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준비해야 함이 옳다.

"납득이 안 되는 것이 당연해. 내가 무르게 대처한 것이니까."

"왜 그러셨어요?"

"말했잖아? 내가 물렀다고.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어."

그러니까 폴.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눈을 마주했다. 달밤의 숲속처럼 고요한 침묵이 찾아왔다.

일견 편안하기까지 한 그 침묵을, 다니엘은 기꺼이 깨부수며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너는 앞으로 내게서 많은 장점과 단점을 보게 되겠지. 지금처럼 장점은 흡수하고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은 거르거나 반면교사로 삼도록 해. 지금의 너는 아주 잘하고 있어."

"...이해가 안 돼요."

"뭐가?"

"왜 저를 데리고 다니시는 거죠? 형이 저를 데리고 간 자리 중에는 제가 갈 만한 곳이 아닌 데도 있었어요. 저를 가르치기 위해서였죠? 왜 저를 가르치려 하는 거예요?"

"내가 데려온 아이니까 내가 책임져야지. 교육은 그 책임에 속하는 당연한 것이야."

먹고살기 바쁜 하층민들은 교육의 중요성을 곧잘 무시하곤 한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혁명은 누가 일으키는가. 정세를 알고, 부조리함을 아는 자들이 일으킨다. 한마디로 아는 것이 많은 자들이 일으킨다는 뜻이다.

나라가 이상하게 돌아가면 그것을 알고 꼬집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위의 사람들이 듣지 않으면, 뒤집어 엎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기에 교육은 중요하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뭐, 지금까지는 그 이유에서였지."

"그럼 이제는 아니라는 건가요?"

"응, 나도 슬슬 후계자가 있어야지. 나는 단기간에 아주 많은 것들을 가르칠 생각이야. 부디 잘 흡수해 주었으면...."

"자, 잠깐만요! 후계자라뇨. 제가요?"

"무슨 문제라도?"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본 폴이 할 말을 잃고 입만 뻐끔거렸다.

몇 초간의 틈을 두고, 따질 건 따져야 한다는 의무감에 가까운 목소리가 간신히 기어 나왔다.

"왜 하필 전데요?! 전 어리고...."

"다 컸다고 우길 땐 언제고."

"아니...! 하… 진짜...."

드물게도 폴이 분통을 터트리며 가슴을 팡팡 두드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니엘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보통은 더욱 화를 냈을 테지만, 이번만큼은 폴이 화색을 띠었다.

"역시 농담이었죠?"

"아니. 진담이야."

"왜요?!"

"그야...."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끝으로 훔쳤다.

여전히 웃음이 실실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말을 잇는 것이 먼저였다.

"넌 젊으니까."

"...네?"

"아, 너무 막 던졌나? 다시 처음부터 설명할게."

드디어 웃음이 멈췄다.

다니엘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을 정리했다.

"너는 제국 출신이지만 제국에 애정이 없지."

그렇다고 다른 나라를 사랑하지도 않으며 사랑할 이유도 없다.

"제국의 손에 무너진 각 왕국의 사람들이 모인 이곳에서 애정하는 나라가 없다는 것은 네 공정성에 대한 신빙성을 높여 줄 거야."

"...그리고요?"

"그리고 말했다시피 넌 젊어. 그 덕에 유연한 사고가 가능하지. 나이 들수록 느는 건 고집뿐이라는 말, 들어봤어? 실제로 나이 먹은 사람들은 타인의 조언을 잘 듣지 않아. '젊은 것이 내게 훈수를 두려 해?' 이런 생각이 기저에 깔려 있거든. 그리고 늙은 자들은 변화를 선호하지 않지."

"하지만 혁명군에 가담한 어르신들은요? '혁명' 자체가 변화 아닌가요?"

"복수심에 들어온 거야. '나의 나라가 무너졌으니 제국 또한 무너져야 한다', 뭐 이런 거. 제국을 무너뜨린 이후의 정책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거나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겠지."

혁명은 무엇보다 강력한 변화다. 안정과는 완전한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다.

무릇 혁명군의 수장이라면 혁명을 성공한 이후의 정책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데, 익숙한 것을 선호하는 자에게 그 자리를 내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혁명 이후의 정책에 변화가 없다면, 그것을 어찌 혁명이라 부를 수 있을까.

"나이 든 자들은 자신이 모르는 것이 늘지 않길 바라고, 안정을 사랑하거든. 모험을 하기엔 너무 지쳐 있지."

그렇기 때문일까, 변화는 언제나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거의 늘 젊은이들의 손에 이루어져 왔다.

그러니 혁명군의 수장은 젊은 자가 되는 것이 옳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노인을 우습게 보라는 건 아니야. 그들은 한때 변화를 추구했던 젊은이였고, 긴 시간을 살며 많은 경험을 쌓았지. 그러한 경험은 하나의 지식이 되기도 하니, 존중해야 함이 옳아."

"뭐예요.... 그럼 어떡하라는 거예요? 노인의 말을 들어요? 듣지 말아요?"

"굳이 그렇게 극단적으로 나눠야 할 필요가 있을까? 지금까지 잘해 왔잖아. 스스로 판단해서 거를 것은 거르고 필요한 것만 흡수해. '교육'은 그러한 판단에 도움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거야."

아무런 정보도 없이 무작정 선택하라 할 수는 없으니까.

"...좋아요. 그게 저를 후계자로 선택한 이유라는 거죠?"

"맞아. 아, 하나 더 있어."

"더 있다니...."

아연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무시하며 빙긋 웃었다.

"넌 사람을 사랑할 줄 알지."

"저 애인 없는데요...."

"사랑이 꼭 연인간의 사랑만 있는 건 아니잖아. 친구간의 사랑, 가족간의 사랑… 아주 많지. 짚이는 게 있지 않아?"

"...시이아."

정답.

납득할 수 없다는 듯 폴이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그건 곧 약점이 되지 않아요? 당장 형만 해도...."

말끝을 흐렸다지만 뒷말을 예측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뭐, 그럴만도 하지. 당장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머니께서 각혈하셨다는 이유만으로 정신을 놓았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는 부정할 수 없는 약점이다. 하지만.

"혁명군의 이념이 뭐지?"

"신분제 없이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요."

대답을 내놓으며 폴의 얼굴이 알 것 같다는 듯 변했다.

이 이념 자체가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한 이념을 등에 지고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아가야 하는 자가 바로 혁명군의 수장일지니.

"누군가를 사랑할 줄 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이해할 수도 있다는 뜻이지."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르는 자에겐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박탈될 수밖에.

"...정말 그럴까요? 주변은 다 내팽개치고 딱 사랑하는 사람만 위할 수도 있잖아요."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 가능성은 열려 있다는 뜻이야. 그리고 그런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교육'이 존재하는 것이라고요? 알겠어요."

졌다는 듯 폴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젊은 아저씨가 벌써부터 후계자 타령하는 게 웃기긴 하지만...."

"폴...?"

"일단 가르쳐 주시는 건 열심히 들을게요."

보기 드문 환한 미소가 다니엘을 향했다.

다니엘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폴의 머리에 툭 손을 얹었다.

"...그래."

어쩐지 짓궂은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다.

"그럼 지금 바로 시작해 볼까?"

"엑."

"가르칠 게 너무 많아. '말'에 관련된 것만 해도 상대를 설득하거나 제압하는 법, 민중을 선동하는 법 등으로 나뉘고, 그 밖에도 혁명 이후에 펼쳐야 할 정책이나 법, 정권이 바뀌며 덩달아 흔들릴 경제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저 그냥 안 하면 안 될까요?"

"응, 안 돼."

무엇부터 가르쳐야 할까.

저것들도 중요하지만 역시 시작은 이거다.

숙소로 향하던 방향을 틀어 아이의 걸음을 집무실로 유도하며 느긋하게 입을 뗐다.

"우선 간단하게 천부인권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118. 각자의 움직임(2)

날이 밝고 세상은 소리 없이 바뀌었다.

아는 사람만 아는 변화와 움직임.

황제는 마계에 대한 악소문이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는 보고서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재상을 불렀다.

"공작의 약점이 무엇인지 아는가."

"공작에게도 약점이 있었습니까? 약점 같은 건 꽁꽁 감추는 사람이라 찾기 힘들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그걸 또 어떻게 알아내신 건지...."

"본인도 그런 약점이 있다는 걸 모르겠지. 짐이 이러한 약점을 알고 있다는 사실 또한 평생이 가도 모를 것이다."

이는 그런 종류의 약점이니까.

황제의 얼굴에 차가운 비웃음이 번졌다.

"물론 알아도 못 고치겠지. '오만'을 어찌 고칠 수 있을까."

"...오만, 말씀이십니까?"

"본인이 가장 똑똑한 줄 알고 모두의 머리 위에서 아래를 굽어보는 줄 알지. 누군가 본인의 정수리를 보고 있으리란 생각은 전혀 안 하고."

황제가 정말 누군가 마계의 편에 설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순진해서는 살아남지 못하는 자리가 바로 황위인데?

웃기는 소리. 그저 알고 있었을 뿐이다.

모른 척하고 있으면 공작이 선심쓰듯 나서리란 것을.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인력을 아낄 수 있었지."

"...참으로 대담하십니다. 내부의 적에게 제국의 명운이 걸린 중요한 문제를 맡기시고."

"제국이 명운이 걸렸으니 맡긴 것이다. 공작은 이 자리를, 제국을 탐내지. 그런 그가 제국이 망하게 둘 리 없지 않나."

유독 공작이 저를 어린애 보듯 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오만이든 저를 얕잡아 본 것이든 이용했으니 됐다.

찝찝한 감상은 뒤로하며 황제는 보고서를 뒤집어 엎었다.

"언젠간 그 오만에 발목이 잡혀 넘어질 날이 오겠지. 그때 공작의 표정이 어떨지 궁금하군."

***

명예 후작이 되었다!

분명 귀족파의 반발이 거셀 것이라 예상했는데, 생각 외로 잠잠해서 살펴보니 크루엘이 명예 백작이 되었더라.

그래, 귀족파 수장의 개에게도 작위를 수여했으니 조금 불평하고 끝낼만 하지. 사실 귀족파 입장에서 물어뜯을 건수는 많았지만 수장인 공작이 입 다물고 받아들인 탓에 입을 다문 것에 가까웠다. 솔직히 나도 신기하다. 황제랑 공작이랑 비밀리에 거래라도 했나?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그보다....

"나… 정말 살아 돌아왔구나...."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다 하십니까."

레멤베르가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으며 지그시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정말 신기한걸? 무슨 조직의 비밀 기지에 들어갔다가 살아나오다니, 이건 기적이다. 심지어 정체를 들킨 상태였단 말이지. 안대를 씌울 때는 어디 으슥한 곳에 데려가 깔끔하게 처리하려는 줄 알았는데, 정말 무사히 거리에 돌려보내 줘서 내심 놀랐었다.

파란만장했던 어젯밤을 차마 설명하진 못하고 눈만 데굴데굴 굴리다 잔을 들었다.

"푸흡-!"

"저런. 괜찮으십니까?"

"쿨럭, 이건, 뭐...."

"황실의 궁의가 또 보약을 보내 주었더군요."

보약인데 왜 내 미각이 죽어 가는 것 같죠.

젠장, 커피인 줄 알았는데. 보약을 커피잔에 담아 올 줄이야. 이런 쪽으로까지 발전할 필요는 없잖아요, 이 할아버지야....

혀에 감각이 없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이건… 독살 미수야...."

"독 검사는 이미 마쳤습니다. 자꾸 늙은이 심장 철렁하게 하지 마시고 어서 쭉 드시지요."

"...."

빌어먹을.

눈물을 머금고 잔을 쭉 들이켰다. 그 와중에 향은 또 커피 향이라 더 엿 같다.

끔찍한 맛에 향기로운 커피 냄새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잖아.

"이거 왜 커피 향이 나는거죠."

"제가 특별히 부탁했습니다. 후작님께서 보약을 잘 드시려 하지 않아 꼼수가 필요할 것 같다고 했지요."

"내가 애입니까?! 아니, 그걸 또 들어 준 궁의는 뭐하는 인간…! 후우...!"

"침착하시고 심호흡하시지요. 후작님은 혈압이 오르면 위험합니다."

"레멤베르,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죠."

뒷목을 잡고 씨근덕거리다 레멤베르를 흘겨봤다.

구렁이 같은 집사는 그저 빙긋 웃더니 대화의 화제를 휙 틀었다.

"식물형 몬스터를 조종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콜록!"

"오래전부터 식물형 몬스터를 양성하고 있었고, 그걸 이용해 거슬리는 자들을 밤에 몰래 처리했다고...."

"콜록콜록,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아아, 또다. 말을 돌린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이번에도 레멤베르의 말에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뒤늦게라도 정신을 다잡으려 해 보지만....

"아, 아닙니까? 그렇다면 후작님이 뱀파이어며 식물형 몬스터는 후작님의 피에서 탄생한…."

"개소리 한번 신박하네요."

"그럼 세계 정복을 꾀하신다는 소문은…."

"반역으로 죽을 일 있습니까?!"

황제가 어떤 인간인데!

...이런 식으로 말을 하니 안 넘어갈 수가 있나.

이런 걸 연륜이라고 하는 건가. 연륜이란 단어에 대한 잘못된 상식을 머릿속에 집어넣으며 고개를 젓는데, 레멤베르가 은근한 장난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반대로 세계 멸망을 꾀하신다는 소문도 있더군요."

"미쳤네요. 도대체 어떻게 하면 소문이 그렇게까지 부풀 수 있는 겁니까?"

사람들의 상상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세계 멸망이라는 말에 한쪽 구석에서 서류 작업을 하던 단이 고개를 번쩍 들었으나 무시하고 혀를 쯧쯧 찼다.

아니 그보다, 쟤 왜 여기에 있냐.

황당한 눈으로 그를 보다가 레멤베르를 보았다. 무슨 문제 있냐는 듯, 빙긋 웃는 얼굴이 나를 마주했다.

"...너무 편애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래도 외부인, 아니…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녀석인데."

"후작님께서 들이신 이상 경계할 필요가 없으니 유능함의 정도에 따라 마음을 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직접 데려와 놓으시고 외부인이라니요. 초반이라면 몰라도 서류 정리 체계를 정리한 이후에는 완전히 받아들이셨지 않습니까. 단이 들으면 섭섭해하겠습니다."

"섭섭합니다."

"...어, 그래… 미안하다...."

역시 연륜은 무서워.

노인을 때릴 수도 없고, 말로는 밀리니 레멤베르와는 맞부딪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고개를 살짝 틀고 다른 말을 꺼냈다.

"폐하께서 내리신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또 한동안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보약이 다 상하겠군요."

"그거 참 잘됐… 안됐네요."

"짐을 싸 드릴 때 챙겨 드리겠습니다."

"...."

버려야지.

내 미각을 위한 야심 찬 계획을 세우고 있던 참에, 단이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폐하의 임무라 하셨습니까?"

"그래. 저번처럼 또 한동안 자리를 비울 거야."

황제를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 오는 기분이다. 두통뿐이랴, 스트레스가 확 솟구치고 있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한 손으로 꾹 짚고 원인 모를 스트레스를 몰아내기 위해 느릿하게 숨을 고르는데, 눈치를 보던 단이 슬그머니 입을 뗐다.

"저도 같이 가면 안 되겠습니까? 보좌하겠습니다."

"응, 안 돼."

"...네."

"몰래 따라오는 것도 안 돼. 너나 나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할 수도 있어."

목격자는 죽여야 하니까.

그런데 얘가 검술을 좀 배웠다고 했으니 반대로 내가 죽을 수도 있겠다. 사냥대회때 한 번이지만 습격에서 나를 구한 걸 보면 그럴 가능성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겠지.

만약 내가 눈치채지 못하고 저놈을 꼬리에 단 채 마왕성까지 가게 된다면 더 최악이다. 인간을 들인 죄로 저 녀석과 함께 죽을 테니.

'혼자 죽는 건 아니라 심심하지는 않겠네.'

아, 스트레스 받아. 관자놀이를 짚은 자세를 유지하며 조곤조곤 말을 읊었다.

그런데 어째 조용하다? 돌아오는 대답도 없고.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

레멤베르와 단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특히 단은 눈동자가 떨리는 것 같았는데, 잘못 본 거겠지?

흔들리는 눈과 다르게 마주친 눈에서 묘한 희열이 느껴져 황급히 시선을 피한 탓에 자세히 볼 시간이 없었다.

소름이 돋은 팔을 쓸어내리는 사이, 정신을 차린 듯 단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설마 평소의 상태로도 이런 협박을 할 수 있을 줄은...."

"응...?"

"따라가지 않겠습니다."

"어, 그래...."

떨떠름하게 답하며 눈을 굴렸다.

분위기가 이상하다. 그냥 가벼운 경고였을 뿐인데.

미묘해진 분위기를 되돌리려는 듯 레멤베르가 화제를 틀었다.

"언제 출발할 생각이십니까?"

"...지금?"

여기에 더 있어 봤자 서류 작업이나 해야 하고 쓰디쓴 약을 먹어야 한다.

차라리 하루 빨리 마계에 가는 편이 낫지.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부탁합니다. 아, 그리고 살인귀 놈들은...."

저번 같은 짓도 한두 번이지, 이쯤 되니 다른 방법을 찾게 된다. 여태껏 운이 좋아 다친 녀석들이 없었다지만 그래도 위험하잖아. 매번 추격전을 찍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뭔가... 좀 더 편하고 수월한 방법 같은 거 없나?

눈치 빠른 집사는 즉각 다른 대안을 내놓았다.

"후작님께서 출발 시간을 조금만 늦춰 주신다면 식사에 수면제를 타 수월한 출발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약에 내성이 있어서 어지간한 수면제는 통하지 않을 텐데요."

"이번에 단을 통해 좀 강한 약을 구했습니다. 조절하기에 따라 코끼리도 3초 안에 재울 수 있다더군요."

"아니… 그건 좀...."

사람 죽일 일 있나.

...그런데 이렇게 편한 방법을 알고 있었으면서 왜 진작에 말을 안 했대? 답이 바로 나온 것을 보면 예전부터 이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약을 구하는 게 문제였다면 내게 말을 하면 됐을 테고.

의문을 가득 담아 그를 보자 곧장 의미를 읽은 레멤베르가 빙긋 웃었다.

"재밌잖습니까."

"...전 재미 없었습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기분이었다고요.

속으로 툴툴거리며 어서 가서 준비하라는 뜻을 담아 손을 내저었다.

한 차례 허리를 숙인 레멤베르가 등을 돌려 문을 연다. 노크를 하려던 듯 손을 든 사용인과 마주쳤다.

'...뭐지?'

고개를 쭉 빼 레멤베르의 어깨 너머로 사용인을 보았다. 눈이 마주친 녀석이 흠칫하며 몸을 움츠린다.

덩달아 작아진 목소리가 간신히 기어 나왔다.

"화, 황태자 전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

황녀가 강하게 주장했다.

"그는 남자를 좋아하는 게 틀림없어요!"

황태자는 난색을 표했다.

"설마."

그리고 멈칫, 떠올린다.

여자 관계가 지나치게 담백한 한 남자를. 주위에 두는 이들의 성비가 지나치게 불균등하고, 여자에게 정도 이상으로 관심이 없는 남자를...!

"그럴 리…가...."

"있죠?"

"...."

여자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황녀가 노리는 남자인 만큼 주위에 여자가 있는지 철저히 조사하고 감시했기에 그는 알고 있었다.

리엔 라이너라는 기사가 있다. 어디까지나 주군과 기사라는 관계로 묶인 철저히 공적인 관계. 황태자는 관심을 거뒀다.

구원교 임무를 수행할 때, 데온 하르트는 어디선가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를 데려왔다. 이름이 각각 단과 란이었던가.

그리고 임무가 끝나자 남자는 남고 여자는 떠났다. 그 남자는 현재 하르트 저택에서 데온 하르트와 함께 지내고 있다. 혹여 여자에게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던 황태자는 마음을 놓았다.

'안심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나....'

설마 남자를 좋아할 줄이야.

"그러니 오라버니께서 꾀어내 보시는 건 어때요?"

"...뭐?"

119. 각자의 움직임(3)

"저는 안 되는 것 같으니까요. 오라버니는 객관적으로 봐도 잘생겼고, 신분도 좋으니 그가 정말 남자를 좋아한다면 어렵지 않게 넘어올 거예요."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곧 마계와의 전쟁이 있을 거예요. 그리고 데온 하르트는 여전히 제국의 가장 위험하고 불안한 영웅이죠. 제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이렇다 할 근거는 없다.

심지어 황녀는 데온 하르트가 마계를 오간다는 것도 모른다.

데온 하르트에 대한 한정적인 정보만 가지고 있으면서도 감 하나에 의존해 그를 콕 짚은 황녀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던 황태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지금이 그를 황실에 묶어 둘 적기이긴 하지."

이 타이밍을 놓치면 또 언제 기회가 올지 모른다.

팔짱을 낀 채 잠시 입을 다물고 고민하던 황태자는 슬쩍 눈을 굴려 황녀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게는 후계를 두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것을 부디 잊지 말아 주렴."

"어머, 당연하죠. 그를 확실히 묶어 둔 뒤라면야."

오라버니가 만나고 싶은 여자는 실컷 만나셔도 돼요.

황녀가 웃으며 손을 흔든다.

다른 이가 들었다면 웃어넘길 황녀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정도로.

황태자 또한 황녀만큼이나 편견 없는 사람이었다.

***

"그대가 명예 후작이 된 건에 관하여 방문했네."

"...임명장이라면 이미 받았습니다."

그리고 손에 들린 그 꽃다발은 뭐죠...?

이제 보니 머리도 그렇고, 외관에 신경을 쓴 티가 난다. 날 만나고 나서 여자라도 만나러 갈 예정인가?

평소보다 더 화려하게 갖춰 입고, 아무렇게나 내리고 다니던 머리의 한쪽을 깐 황태자가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임명장만 덜렁 보내지 않았나. 폐하께서 바쁘신 탓에 급한 대로 임명장부터 보내셨다지만, 황제에 대한 맹세 절차도 없이 그냥 작위만 받고 입 닦으려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왜 말을 그렇게 하세요. 누굴 죽이려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 다급히 고개를 젓자 그가 농담이었다는 듯 웃으며 들고 있던 꽃다발을 내밀었다.

"농이니 마음 놓아도 되네. 맹세를 대신 받기 위한 폐하의 대리인으로 오긴 했지만, 사실 폐하께서는 굳이 그런 허례허식은 하지 않아도 된다 하셨네. 진심이 아닌 맹세는 필요 없다 하셨지. 오늘 내가 온 것은 그냥 후작이 보고 싶어서야."

뭐지. 다른 의미로 기분이 쎄하다.

내밀어진 꽃다발을 가리키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 꽃은...?"

"이건 명예 후작이 된 것과 사냥대회 1위를 축하하는 선물."

"어... 감사합니다."

"그리고 약간의 보석과 돈이 있긴 한데... 그건 우승 상금이자 폐하께서 사냥대회에서 봉변을 당한 자네에게 주는 보상이라네."

사냥대회 1위 자리를 빼앗겨서 기분이 상한 것은 아닌 모양이네. 다행이다.

준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 꽃다발을 몇 번 만지작거리다 품에 안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황궁의 사람들로 보이는 자들이 열심히 무언가를 나르고 있었다.

대충 봐도 몇 궤짝씩 나르고 있는데, 저게 '약간'이라고...?

"그, 음... 자네."

"아, 네. 말씀하십시오."

다시 시선을 돌려 황태자를 마주했다.

화려하다 못해 주위가 반짝이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하는 외모의 사내가 드물게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도대체 뭘 말하려고 저 구렁이 같은 남자가 뜸을 들이는지.

미간까지 좁혀 가며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하던 황태자는 끝내 고상한 어조로 한껏 돌린 말을 꺼냈다.

"자네는… 법이 바뀌어 동성 간의 혼인이 가능해지면 어떨 것 같나?"

"...예?"

그걸 왜 제게 물으시는지. 아니, 그보다 너무 뜬금없는데요. 전쟁 관련된 것도 아니고, 이 시국에 웬 혼인 이야기야?

그래도 황태자가 물어본 것이니 답은 해야 한다. 튀어나오려는 황당함을 억누르고 머리를 굴려 가능한 무난한 답을 도출했다.

"저는 잘 모르겠으나, 기뻐할 사람도 있을 것 같긴 합니다."

세력 좀 있는 귀족 중에 동성을 좋아하는 귀족이라도 있나? 법을 바꾸는 것을 미끼로 그 귀족을 끌어들이려고?

확실히 평화적인 방법이긴 하네. 현 시국에 할 말은 아니지만.

"잘 모른다니... 자네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 건가?"

"네."

정확하겐 누굴 좋아할 여력이 없다고 봐야겠지.

나 하나 챙기기에도 바쁜데 남을 어떻게 신경 쓰겠는가. 내게 있어서 타인은 평면적인 인물일 뿐이다.

굳이 피곤하게 신경 쓰거나 상대의 사연을 파고들 필요도 없고, 그냥 겉으로 보이는 대로 대하면 충분한, 그런 존재.

극으로 따지면 배경 같은… 아, 대화가 가능하니 배경은 아닌가. 그럼 엑스트라. 혹은 정해진 주제에 맞게 움직이는 책 속의 인물 같은 존재.

"그런가...."

어쩐지 허탈한 음성이 고막을 건드렸다.

거기서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설마.

'그 대상이 나였냐?!'

동성 간의 혼인 어쩌구 하는 미끼도, 말끔하게 차려입고 왔던 것도, 전부 날 노린 거였어?

황녀가 안 먹히는 것 같으니 황태자가 몸소 나섰다, 이거지? 대충 상황은 이해했다. 그런데....

'다 이해하는데 왜 내 성적 취향을 바꾸고 그러세요....'

황녀가 먹히지 않으면 그냥 '황녀가 타입이 아닌 모양이구나' 하고 다른 여자를 찾아 주면 될 것이지. 왜 황태자 전하께서 '몸소' 나서시냐 이 말이다.

...설마 황태자의 취향이...?

나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린 모양이다. 황태자가 당황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오해다."

"아, 네. 알겠습니다."

황태자가 남자를 좋아할 줄이야.

물론 그가 여자를 좋아하든 남자를 좋아하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남자를 좋아한다 해도 '후계는 어쩌려고' 정도의 생각만 잠깐 할 뿐, 그 이상의 관심은 없는데... 그 대상이 내가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더듬더듬 손을 옆으로 뻗어 줄을 당겼다. 반응이 없다. 다시 당겼다. 여전히 아무도 오지 않는다.

미친 듯이 줄을 당겼다.

"...지금 자네가 당기고 있는 줄은 호출용이 아니라 전등 줄이네."

"아."

어쩐지 시야 한쪽이 반짝반짝하더라.

"오해라니까."

"네, 믿습니다. 잠시...."

조심스럽게 일어나 뒷걸음질 쳐 문에 다가갔다.

황당한 눈초리의 황태자를 살피다 재빨리 등을 돌려 문을 열고, 복도를 향해 소리를 내질렀다.

"...레멤베르! 레멤베르으!"

"아니, 후작. 일단 진정하고…."

"준비는 언제 끝나는 겁니까아!"

"후작?"

황태자가 내 어깨를 잡았다!

언제 등 뒤에 다가온 건지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오소소 돋는 소름을 느끼며 마지막으로 문밖에 대고 외쳤다.

"코끼리 3초 그거 써도 되니까 빨리 끝내요!!"

"코끼리 3초...?"

몰라, 난 마계로 튈거야.

이쯤 소리쳤으면 레멤베르도 들었겠지. 못 들었어도 다른 사용인이 듣고 전해 줄 거다.

그러니 시간만 조금 벌자. 아무렇지 않은 척 뒤돌아 황태자를 마주하고 태연히 말을 뱉었다.

"전하를 믿습니다. 당연히 오해겠지요."

"...그런데 왜 문에 바짝 붙어 있는 건지?"

"아."

"...."

그 뒤로 난 레멤베르가 올 때까지 황태자에게 붙잡혀 오해가 풀릴 때까지 설명을 들어야 했다.

뭐, 결과적으로 오해는 풀렸다.

그 잠깐 사이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말끔하게 꾸민 것이 무색할 정도로 반쯤 넋이 나가 버린 황태자였으나 미안한 마음은 티끌만큼도 들지 않았다.

그러게 누가 그런 짓을 하래? 흥.

***

"밥 먹자!"

"미친놈아! 새치기하지 마!"

"...근데 요즘 혁명군이 잠잠하지 않냐?"

"그런 것 같긴 한데…는 지랄. 오늘 또 한 건 처리했잖아. 폐하께서는 언제까지 우릴 부려먹으시려는 건지."

"건물 값은 해야지... 우리가 무너뜨린 건물이 몇 채냐?"

"솔직히 그거 다 혁명군이 가진 폭탄 때문이었잖아. 상대하기도 바쁜데 폭탄까지 어떻게 일일이 처리하냐? 그냥 하늘에 던지는 수밖에."

"아무튼 요즘 진짜 빈도가 줄었어. 간혹 나오는 애들도 잔챙이였고. 왜지? 전쟁 때문인가?"

"근데 너 왜 손 떨고 있냐?"

"신경 꺼. 후유증이야. 그렇지 않아도 오늘 혁명군 처리 담당이 나여서 약을 좀...."

"푸핫! 야, 얘들아! 여기 아직도 후유증 하나 못 이기는 새끼가 있다!"

"진짜? 우리가 약을 쓴 지가 몇 년인데!"

"어휴 나약한 새끼. 노오력을 해야지. 앙? 으이지가 부족하구만 으이-지가."

"아씨, 다 닥쳐!"

쿵!

"...난 닥치라고 했지 식판에 머리 처박으라 한 적은 없는데."

"신종 식사법인가? 손 안 쓰고 개처럼 먹기?"

"안 일어나는데 저러다 숨 막혀 뒤지는 거 아니… 쿨."

"야, 얘 잔다. 얘 기면증 있었드르렁."

"다들 뭐…."

쿵! 쿠웅!

"...."

"...커허어."

"...맹수도 뻗게 만든다는 약을 먹고도 10분을 더 떠들다 잘 줄이야."

후작님은 어떻게 저런 미친놈들만 모아 이끌게 되신 건지. 이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인가.

아무튼 다음번엔 약을 더 강하게 타도 되겠어.

"후작님께 출발 준비가 끝났다고 전해 드리게."

***

탈출이다!

***

데온 하르트는 늘 그렇듯 익숙하게 말을 몰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어느 산맥의 입구에 도달했다.

황제도, 마왕도 이곳에 경계선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군대를 보내 주둔시키진 않는다. 사람 하나 간신히 드나들 정도의 작은 경계선은 오로지 데온을 위해 존재하므로.

데온 하르트가 소속을 확실히 정하기 전까지, 서로 다르면서도 닮은 두 군주는 산맥 안에 위치한 경계선에 누군가를 보내 그 위치를 섣불리 노출시키는 행동은 자제하기로 암묵적인 약속을 나누었다.

그렇기에 뒤를 밟히는 일 없게 배웅해 주는 자들도 산맥 안까지는 따라가지 않는 것이고.

'소속을 확실히 정하기 전까지....'

분명 그의 목숨은 음식이 아닐진대, 유통기한이 생겼다. 각오를 했다지만 썩어 들어가는 마음은 별개였다.

황제가 승부수를 뒀다는 것을 알면 과연 마왕이 가만히 있을까? 그럴 리가.

손끝으로 낙인을 문지르며 피식 웃었다.

'이런 걸 새겨 넣는 녀석이 정상일 리 없지.'

아직 주도권은 이쪽에 있으니 지나치게 강압적으로 나오진 않겠지만, 그래도 각오해 두는 것이 좋겠다. 마왕이 괜히 마왕(魔王)인 것이 아니니.

타고 온 말을 돌려보내고 산맥에 발을 들였다.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험한 산길을 오르는데, 중간 쯤 왔을 때 들릴 리 없는 소리가 들렸다.

"끄륵-."

피 끓는 소리. 다른 말로 누군가 죽어 가는 소리.

고개를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 누군가의 입을 막고 목에 박아 넣었던 단검을 뽑아내는 한 남자가 있었다.

녹색 눈, 검은 머리. 참으로 지긋지긋하지. 너는 왜 내가 가는 곳마다 있어서.

"크루엘 하르트."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단검을 뽑아 들었다.

쓰러진 시체를 내려다보던 크루엘이 시선을 올려 데온을 본다. 눈이 마주치고, 침묵이 흘렀다.

목격자는 죽여야 한다. 위치상 경계선은 보지 못했겠지만 뒤를 밟은 이유가 너무도 선명하니 죽이는 것이 옳다. 특히 그 상대가 귀족파 수장인 공작의 수하라면 더더욱.

하지만 잘 알고 있음에도 데온은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적의를 드러내기엔 데온은 현재 너무 지쳐 있었다.

"...."

"...."

기묘한 침묵 속에서, 정신적으로 지친 데온의 눈을 가만히 보던 크루엘이 이내 고개를 돌렸다.

의외의 행동에 데온이 눈을 키우든 말든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어떠한 내색도 없이 시체를 내버려둔 채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려는 듯 걸음을 옮긴다.

크루엘의 생각을 알 수 없는 데온으로서는 그저 미간을 찌푸린 채 멀어지는 뒷모습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120. 불편한 일상(1)

이 시기에 데온 하르트가 자리를 비웠다. 공작은 쪽지를 구겨 쥐며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하필 지금....'

내기를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적어도 마계와 전쟁이 제대로 터지기 전에는 제거해야 하는데.

슬쩍 크루엘을 보니 언제나처럼 무표정으로 시립해 있다. 태연해 보이기까지 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심사가 뒤틀려 공작은 부러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이쯤 되니 정말 감탄이 나오는군요. 데온 하르트가 폐하의 명으로 자리를 비웠답니다."

"...."

"어쩜 이리도 운이 좋은지."

세계가 가호라도 내리는 것일까.

매번 실패를 하고 타이밍을 놓치니 슬슬 오기가 생긴다.

"어서 돌아왔으면 하는군요."

보라색 눈이 섬뜩하게 빛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크루엘이 말없이 시선을 내렸다.

둘뿐인 공간에서 신경질적으로 서류에 펜을 휘갈기던 공작이 문득 떠오른 생각에 손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데온 하르트가 자리를 비워 짜증날 사람들이 이번엔 더 있는 것으로 아는데...."

황제가 마계와의 전쟁을 알린 날 저녁, 저를 찾아와 얼빠진 소리를 늘어놓던 멍청이들.

데온 하르트 뱀파이어설에 진심으로 흔들려 확실히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었지. 그런 놈들이 귀족파라니,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크루엘이 알 수 없는 눈으로 저를 보든 말든, 공작은 얼굴에 한껏 비웃음을 띠고 중얼거렸다.

"정말... 운이 좋단 말이지."

***

제국이 전쟁 중지 선언을 했다. 마계와의 전쟁이 시작될 것 같다는 알림은 덤.

이 소식은 삽시간에 대륙 전역에 퍼졌다. 이에 대한 각 왕국의 반응은 다양했다.

"다, 다행이다...."

"우린 살았어! 살았다고!"

"으허허헝헝!"

그 무시무시한 황제가 전쟁을 중지했다는 것에 안심하고 환호하는 왕국도 있었고.

"뻔뻔하군. 멋대로 전쟁을 시작해놓고 멋대로 멈추다니. 우리를 도대체 뭘로 보는 거지?"

"멋대로 멈춘다고 하면, 우리는 반드시 들어야 하나? 오만한 새끼."

"우리 왕국이 제국에 지원을 하는 일은 없을 거다."

마계 문제는 뒤로 미뤄 둔 채 그저 뻔뻔하고 오만한 행태에 분노하는 왕국도 있었으며.

"제국이 싫지만 현 상황에서는 제국이 망하지 않게 하는게 최우선이다. 완전하지 않은 상태로 맞붙고, 무너지는 꼴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지."

"제국은 인간계의 1차적인 방어벽이자 가장 강력한 방어벽이지. 제국이 망하면 인간계 전체가 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전쟁으로 물자와 병력을 상당히 소모했을 텐데, 마냥 손놓고 있을 수만은 없어."

"제국이 싫더라도 지금은 제국을 위해야 한다. 무언가 해야 해."

조금 더 머리를 굴리는 왕국도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모든 왕국 사이에서 공통점이 발견되었는데, 보고서를 통해 이를 가장 먼저 발견한 황제는 나직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공작의 수가 제법 먹힌 모양이군."

적지 않은 왕국의 수많은 수뇌부들 중 하나 정도는 '그 발언'을 할만도 한데.

정말 놀랍게도, 제국에 강렬한 적의를 보인 왕국조차 빈말로도 '차라리 마계의 편에 서고 말지' 따위의 말을 내뱉은 일은 없었다.

***

보약은 버렸다.

레멤베르가 정말 챙겨 줬더라. 인간계에 버렸다간 무서운 집사님이 증거를 찾아 나를 추궁할 것 같다는 어처구니 없는 불안감 때문에 인간계 말고 마계에 넘어와서 버렸지.

액체여서 그런지 정말 말도 안 되게 무거웠다.

어쨌든 큰 문제 없이 마왕성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신분 확인을 하고 당당히 입성하는데.... 이게 웬걸? 내가 성에 들어서자마자 지나가던 거의 모든 마족들의 고개가 나를 향해 돌아갔다.

전에도 이러긴 했는데, 이렇게 타오르듯 열렬한 시선을 보내진 않았던 탓에 뭐지? 싶은 순간.

"데몬 님!"

"데몬 님이시다!"

"데몬 님께서 오셨다!"

"어서 오세요!"

"데-세."

"데-세."

뭐, 뭐야. 이거 뭐야. 데세는 또 뭐고.

주위에 마족들이 점점 모여든다. 심상치 않은 기세에 나도 모르게 주춤 물러섰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슴에 붉은 심장 모양 브로치를 단 마족들이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데-세'를 외친다. 시발 무서워!

차마 그들을 뚫고 내성까지 도망칠 자신이 없어 그저 얼어붙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데, 인파가 갈라지더니 한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데몬 님! 어서 오세요!"

"...리리넬?"

"네!"

세상에 리리넬! 날 구해 주러 왔구나!

11군단장이 납시었으니 이 미친 무리들도 떨어져 나가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리리넬을 보는데,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가슴팍의 붉은 무언가가....

순간 뇌가 정지했다.

'...뭐지? 왜 리리넬 가슴팍에도 브로치가 달려 있는 거지?'

그뿐이랴. 옷차림도 뭔가 이상하다.

리리넬이 쓰고 있는 검은 모자 한가운데에 붉은 심장 모양이 수 놓아져 있다. 손에 들고 있는 검은 천에도 붉은 수가 얼핏 보이는 것이 영 불안한데....

"교주님! 교주님이시다!"

"오오, 교주님!"

...교주니임?

아니겠지. 설마 아닐 거야. 저 귀여운 아이가 그럴 리가 없잖아. 마족이지만.

무언가 착오가 있길 바라는 내 마음을 가볍게 지르밟으며 리리넬이 손에 든 검은 천을 펼친다. 한가운데에 붉은 심장이 새겨진 천이 나부끼며 동시에 어마어마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

"데-세."

"데-세!"

역시 얘네 데몬교 신도들이었냐?!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름 정상적이었던 것 같은데, 도대체 언제 이렇게 사이비스럽게 변한 거야? 마왕은 이 지경이 되도록 뭐 하고 있었고?

이 모든 것의 원흉인 듯한 리리넬을 돌아봤다. 그녀는 흐뭇한 미소를 띤 채 '데-세'를 외치는 마족들을 보고 있었다.

"리리넬?"

"네, 데몬 님!"

"이게 다 뭡니까? '데세'는 또 뭐고."

"데몬 님을 존경하는 자들이에요! '데-세'는 데몬 님 만세를 줄여서 표현한 것이고요! 어떠세요?"

"어떻…어떻냐고.... 아, 혈압...."

아, 안 돼. 침착하자. 여기서 혈압이 심하게 오르거나 피를 토하면 주치의 벤이 달려올 것이다. 마왕성에 오자마자 또 한바탕 일을 치를 수는 없지.

힘겹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리리넬을 불렀다.

"무슨... 누가 이런 걸 알려 줬습니까?"

"2군단장한테 조사를 맡겼죠! 인간계의 종교라는 건 이렇다던데, 아닌가요?"

"아예 틀린 건 아닌데...."

드벨라니아아아!

장난도 정도껏 쳐야지, 순수한 애를 이렇게 망쳐 놓으면 어떡해!

일단 이 심란한 무리부터 치워야겠다. 리리넬이 교주이니 리리넬한테 말하면 되겠지?

"마음은 고맙지만 내가 좀 피곤해서... 해산시킬 수 있습니까?"

지금 당장.

영영 해산시키면 더 좋고.

"앗, 그런...! 당연하죠! 죄송해요, 데몬 님. 제가 너무 마음만 앞섰나 봐요...."

리리넬이 허둥지둥 손을 내젓는다. 언제 그랬냐는 듯 그 많던 인파가 우르르 사라졌다.

조금 전보다 한결 조용해진 배경을 두고 리리넬이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마왕님께 가실 거죠? 문 앞까지 모셔다드릴게요."

"...부탁합니다."

교주가 옆에 있으면 그 미친놈들도 달라붙진 않겠지.

정말 끔찍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환영식이었다.

***

"왔구나. 생각보다 빨리 왔네."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처리하던 마왕이 고개를 들고 웃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붉은 눈과 마주한 마왕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진다. 무언가 알아차린 듯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 데온의 앞에 섰다.

"너...."

허리를 살짝 숙여 얼굴을 바짝 대고, 눈을 마주한다. 섬뜩한 역안이 붉은 눈을 들여다봤다.

"무언가 중요한 말을 들었구나."

뭐지? 뭘까?

무슨 말을 들었길래 이 인간 아이가 이렇게 표정 관리를 못하는 것일까.

나름대로 관리를 한다고 한 것 같지만, 고작 그 정도로 오랜 시간을 산 마왕의 눈을 속일 수는 없다.

손을 뻗어 턱을 쥐고 들어 올렸다. 금방이라도 꿰뚫어 볼 듯 눈을 마주하고 읊조리듯 조용조용 묻는다.

"이야기해 줄 생각은?"

"...."

"그래, 없겠지.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은 안 해? 네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대답은 없었다.

마왕은 오히려 그 모습에서 결정적인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마왕이나 황제, 마계나 제국에 관한 정보였다면 이렇게 동요했을 리 없다. 그렇다고 황제의 편에 붙었다고 하기엔 침묵이 너무 노골적이다. 정말 황제의 편이었다면 그럴싸하게 둘러댔겠지.

그러니 남은 건....

"황제가 승부수를 던졌구나."

"...그, 렇습니다."

"괘씸하게도."

하긴, 시기가 시기이니 그럴 만도 하지.

이를 내게 침묵했다는 것은 흔들린다는 것일까, 그저 내게 들키고 싶지 않았을 뿐일까.

아마 후자이리라. 이를 알게 되면 황제가 괘씸한 것과 별개로 나 역시 거기에 동참할 테니.

"넌 내가 눈치채지 못했으면 끝까지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겠지?"

"...."

"괜찮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니."

하지만, 그래....

이건 확실히 못 박아 두어야겠다.

턱을 쥔 손을 미끄러지듯 내려 목을 감싸 쥐었다. 자연히 낙인의 위치에 엄지가 닿아 그것을 꾹 누르자 이 상황에 두려움을 느끼는지 데온의 몸이 티 나지 않게 떨렸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겠지."

도망친다 하여 내가 놓아줄 것 같은가.

아무리 네가 자유롭게 제국과 마왕성을 오간다지만 이걸 망각해서는 곤란하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야.]

"대답이 없네."

"...."

"왜, 또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아 줘?"

가늘게 눈을 휘어 웃었다.

대답 없는 데온의 목을 놓고 돌아서서 창문을 열었다. 세 개의 둥근 달이 훤히 드러난 탁 트인 풍경이 펼쳐졌다.

"달이 예쁘지?"

"...."

"넌 햇빛에 약하지. 그러니 태양을 신경 쓸 필요 없는 이곳을 택해. 언제나 밤이라지만 저렇게 밝은 달이 뜨는데 뭐 어때."

이러한 배경을 등지고 데온을 향해 양팔을 펼치며 활짝 웃었다. 환한 달빛 탓에 역광이 드리웠다.

"이곳에 있는다면 나를 제외한 모든 마족들이 네게 무릎을 꿇을 거야. 아니, 원한다면 나도 꿇어 주지."

객관적으로 따졌을 때 데온 하르트가 이렇게까지 해 가며 잡아야 할 정도의 인물이냐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을 것이다.

하지만 마왕에게는 그 무엇보다 이 권태로움을 쫓아낼 인물이 중요했고, 또한 현재 황제와 벌이고 있는 암묵적인 게임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기에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었다.

"갖고 싶은 것이 있다면 뭐든 쥐어 주지. 이곳을 택하기만 한다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인간계에 나가는 것에 대해 크게 터치하지 않을 거야. 인간계의 땅이 갖고 싶다면 점령해서 줄 수도 있어."

제국의 황제는 그 지위상 데온 하르트에게 무언가를 주는 데 이것저것 제약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마왕의 권력이 절대적인 곳. 마왕은 그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황제가 주는 것 이상의 것을 줄 수 있노라 자신했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몰아붙여 확답을 얻어 내고 싶지만....

'몰아붙이는 것은 여기까지.'

더 몰아붙였다간 오히려 마음이 떠날 수도 있으니.

마왕은 순순히 물러섰다.

"그러니 잘 생각해 봐."

이만 가 보라는 손짓에 데온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얼마 되지 않는 걸음이 문 앞에 도달했을 때, 마왕이 한 가지 잊었다는 듯 그의 등에 대고 덧붙였다.

"돌아온 것은 환영하지만 낙인은 지우지 않을 거야."

"...."

오히려 그 낙인에 위치 추적 기능 외의 다른 것을 추가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데온은 침묵으로 답을 대신하고 문을 열었다.

121. 불편한 일상(2)

"데몬 님, 어서 오십시오. 일찍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에드?"

"네, 겉옷은 저 주시고 저쪽에 앉으십시오."

자연스럽게 내게서 겉옷을 가져간 에드가 나를 덩그러니 놓여 있는 의자로 이끈다. 얼떨결에 거기에 앉자, 언제 온 건지 내 앞에 선 벤이 나를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멍하니 그가 하는 모양을 지켜보다 뒤늦게 의문을 담아 그를 불렀다.

"벤...?"

"네, 데몬 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붕대가 감긴 손목 만지작거리던 벤이 목에 걸린 마력석을 들여다보더니 무언가 떠오른 듯 인상을 찌푸렸다.

"누워 보시겠습니까?"

"...?"

"에드, 뭐 하나? 빨리 데몬 님 침대에 눕혀 드리지 않고."

아니… 오자마자 이게 무슨....

갑작스러운 상황에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에드가 안아 들 기세로 다가오길래 기겁하며 일어섰다.

뭔진 몰라도 일단 순순히 따르는게 좋겠다. 안 따라 봤자 쟤네가 힘으로 다 할 거 아냐.

'그런 수치를 겪느니 그냥 따르고 말지....'

느릿느릿 걸어 침대에 누웠다. 벤이 배 곳곳을 꾹꾹 누르더니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분명 내상 신호가 있었는데… 지금은 많이 나아지셨네요."

"그렇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심각했구나.

검사도 끝난 것 같겠다, 많이 나아졌다니 다행이네.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려다 어깨를 누르는 벤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풀썩 누웠다.

왜 그래, 나 괜찮다며.... 일어나면 안 될까?

"아, 말씀드리는 게 늦었군요. 데몬 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방금 살피지 않았습니까?"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각혈 등의 강한 신호는 오지만, 단순한 혈압 상승이나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은 신호가 잘 안 오더군요. 마치 신호가 지나치게 약해서 알아먹을 수 없을 정도로 끊어지듯이 온다고 해야 할까요...."

"내 몸은 괜찮습니다. 그보다 그거 오류입니까? 그렇다면 바꾸는게...."

"아뇨, 바꿔 봤자 초반에만 제대로 된 신호가 오고, 그 뒤는 지금과 같아져서...."

이미 바꿨었냐.

그거 재료 내 피 아니었어? 말을 들어 보니 한두 번 바꾼 게 아닌 것 같던데, 도대체 언제 가져간 거야?

속으로 구시렁거리다 문득 떠오른 가설에 슬쩍 말을 꺼냈다.

"혹시 거리상의 문제는…."

"절대 아닙니다. 그랬다면 지금 제대로 된 신호가 왔겠죠."

어, 그래....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보다 데몬 님, 제발 몸 좀 아끼십시오. 신호가 올 때마다 가지도 못하고 가슴만 졸이는데, 제가 얼마나 미치는지 아십니까?"

그러고 보니 얘 내 담당 주치의였지. 그것도 직업 정신이 투철한 주치의이니 확실히 가슴 졸일 만도 하다.

이거 고맙다고 해야 하나,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데, 에드가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탈출 시도했으면서...."

"한 번은 리리넬 군단장님께, 한 번은 마왕님께 잡혔지. 다음번엔 반드시 탈출하고 만다!"

탈출해서, 데몬 님의 몸을 치료하러 갈 거야!

그렇게 외치는데 차마 티는 내지 못하고 속으로 기겁했다. 미친, 인간계에 오겠다고? 절대 안 돼! 오지 마!

'숨은 영웅이 여기에 있었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큰 위기가 지났다는 것이 충격이다. 리리넬과 마왕. 둘을 향해 속으로 미친 듯이 감사 인사를 보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왕님과 면담까지 해 놓고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난 데몬 님의 주치의니까. 담당 환자의 몸에 이상이 생겼을 때 달려가 살피는 것은 내 의무고."

"그것도 정도가 있지. 넌...."

"아, 시끄럽고, 데몬 님. 몸 상태에 대해 여쭐 것이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대놓고 에드를 무시한 벤이 나를 향해 몸을 틀며 미소 지었다.

저기, 난 괜찮은데... 너야말로 괜찮겠냐? 지금 에드가 뒤에서 노려보고 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럽게 질문을 꺼냈다.

"혹시... 몸 상태의 변화를 느끼신 적 없으십니까?"

몸 상태? 잘 모르겠는데.

...아, 그러고 보니 어느 시점부터 각혈 빈도가 적어졌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거 기분 탓 아니었어? 각 상황에서 얻는 부상도 예상했던 것보다 가벼운 선에서 그쳤던 것 같지만... 내가 느끼는 몸 상태는 크게 변화한게 없어서 기분 탓인 줄 알았다.

기분 탓인지 진짜인지 확인도 할 겸, 이러한 사실을 알리자, 에드가 뛸 듯이 기뻐하며 외쳤다.

"후유증도 나을 수 있는 거였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데몬 님께서 마계의 말을 탈 날이 머지 않은 듯합니다!"

"...그걸 기억하고 있었습니까?"

"데몬 님과의 약속인데 절대 잊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아냐, 잊어도 돼.

나 그냥 아픈 상태로 있으면 안 될까...?

이마를 짚으려던 손을 간신히 멈추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흠, 다시 봐도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은데.... 정말 건강해진 걸까?

시험 삼아 벽을 향해 가볍게 주먹을 내질렀다.

"앗, 데몬 님! 잠시...!"

뽀각.

"...."

"...."

...전력으로 내지른 것도 아닌데.

욱신욱신 부어오르는 주먹과 벤을 번갈아보았다. 기겁하며 달려와 손을 살핀 벤이 굳은 얼굴로 선고했다.

"골절입니다."

"...."

이건 내가 아는 몸 상태가 맞는데.

이상하네. 몸 상태가 오락가락하기라도 하는 걸까.

별다른 감흥 없이 보랏빛 멍이 올라오는 손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벤이 손을 낚아채 신속히 치료하며 짙은 한숨과 함께 질책하듯 낮게 중얼거렸다.

"그런 의미의 달라짐이 아니었습니다. 전 그저, 마력석의 신호가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지는 것이 마치...."

─데몬 님의 육신을 이루는 무언가가 꾸준히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침묵이 찾아왔다.

"...그게, 무슨...."

섬뜩한 말이었다.

소름이 돋은 팔을 쓸어내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이 변하고 있다는 겁니까?"

"그저 추측일 뿐입니다."

"미쳤군. 해도 될 말이 있고 안 될 말이 있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아, 마지막 말은 내가 한 게 아니다.

처음으로 내 앞에서 험악하게 얼굴을 구긴 에드가 벤의 멱살을 잡고 한 말이었다.

보는 내가 다 흠칫할 정도로 흉흉한 기세였으나, 안타깝게도 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에드에게만큼은 절대 지지 않는 상남자 주치의는 마찬가지로 그의 멱살을 잡고 외쳤다.

"그럼! 마력석에 걸린 마법이 변질되었겠나! 마법에 있어서 '시간의 흐름에 따른 소멸'은 있을지 몰라도 '변질'은 있을 수 없어! 그러니 뭐가 남겠나! 현재 데몬 님의 몸에 흐르는 피가 마법을 이루는 데 사용된 피와 달라졌다는 것밖에 없지!"

"마법의 문제가 아닌 마력석 자체의 오류일 수도 있지 않나!"

"그래서 이미 몇 번이고 바꿨다고 말했잖나! 데몬 님의 피를 채혈하는게 쉬운 일인 줄 아나! 데몬 님께서 눈감아 주셔서 매번 얻어 가긴 했지만, 그렇지 않아도 피가 부족하신 분이라 양심이 얼마나 찔리는데!"

...나 눈감아 준 적 없는데?

언제 내 피 뽑아 갔냐, 이 빌어먹을 주치의야.

"전부 초반엔 잘 작동했어!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신호가 약해졌을 뿐이지!"

"...."

"데몬 님의 피가 맞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 반응이라고, 이건!"

이번에도 벤이 이겼다.

에드의 말문을 막아 버린 그가 잠시 씩씩대더니 침착하려는 듯 호흡을 고르고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마주친 눈에는 낭패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

"...죄송합니다. 감히 데몬 님 앞에서 언성을 높였습니다."

"아뇨, 뭐.... 그것보다는 그 내 몸이 변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내가 고작 그런 거에 화낼 리가 없잖아. 그러니 사과는 그만하고 어서 이어서 말해 봐.

나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건데 내가 모르고 있을 수는 없지.

조심스럽게 내 표정을 살피며 진위 여부를 확인한 벤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처음엔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착각인 줄 알았고요. 그런데 이게 반복되다 보니...."

"...."

"이참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데몬 님의 몸은 처음 만난 그 날부터 꾸준히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정확히 집어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아주 미세하게 달라지고 있어요."

"몸이 회복되고 있는 건 아닌가?"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면 내가 바로 알았겠지."

얜 유독 에드한테 신경질적인 것 같아....

눈을 굴리며 둘을 살피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평소라면 입을 다물고 있었을 상황이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좋은 겁니까, 나쁜 겁니까?"

내 몸이잖아.

한숨이 나올 정도로 약해 빠졌다 해도 어쨌건 내 몸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진 몰라도 좋은 현상이라면 다행인 거고, 나쁘다면 마음의 준비를 해 둬야지.

"일단은 좋은 쪽 같긴 합니다. 이전에 비해 특별히 나빠진 것은 없으니까요. 오히려 각혈의 빈도가 줄었으니 좋게 봐야 옳겠지요."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똑똑.

방 안 모든 이들의 고개가 문을 향했다. 나 역시 입을 다물고 문을 보았다.

대화가 거의 끝났을 때의 방문이라니, 타이밍 하나는 좋네. 속으로 감탄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내 눈치를 살피던 에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살짝 연다.

약간의 틈이 벌어지기 무섭게 그 틈새로 손이 쑥 들어왔다.

"...?!"

시발 깜짝야! 절로 욕이 나오네. 누구야?

이번엔 에드도 적지 않게 놀란 듯 급히 문을 닫기 위해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가 풀었다.

그새 감정을 다스렸는지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가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드벨라니아 님, 장난이 지나치십니다."

"오, 에드으. 용케 알아차렸네?"

"무슨 일이십니까?"

"데몬 님께서 돌아오셨으니 만나보는게 예의 아니겠어?"

이번엔 인사를 할 정도로 오래 나갔다 온 것도 아닌데, 굳이?

순식간에 문 틈으로 몸을 들이민 2군단장 드벨라니아가 에드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더니 내게 사사삭 다가와 덥석 손을 잡는다. 바퀴벌레처럼 소리 없는 움직임에 조금 전과는 다른 소름이 돋았다.

"데몬 니임, 왜 벤이 옆에 있는 거죠? 어디 다치신 곳이라도 있나요?"

"아뇨, 딱히."

"흐음...."

망설임 없는 대답에도 썩 믿음이 안 가는지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날 살핀다.

이럴 거면 왜 물어봤냐. 아니, 그보다 이 손 좀 놔주….

"세상에!"

"!"

왜, 왜애 또....

심적 충격을 고스란히 담은 음성에 지레 놀라 그녀를 보았다. 드벨라니아의 시선은 내 손끝에 닿아 있었다.

"손톱이 부러졌잖아요!"

"...."

"공들여 관리한 손톱이...."

와... 나 얘 소리 지르는 거 처음 봐. 근데 그 원인이 내 손톱이야.

반대 손목에 감긴 붕대는 안 보이나? 부러진 손톱보다는 골절된 손이 더 잘 보일 텐데.

잡은 손끝에서 거칠한 감촉을 느낀 듯, 그녀는 연신 내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날카로운 표정으로 에드를 돌아봤다.

"넌 데몬 님 손톱 관리도 못 하고 뭐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사과하지 마. 애초에 네가 손톱 관리를 해 주는게 이상한 거였어.

내 손톱 관리는 보통 에드와 드벨라니아가 맡는다. 평소 에드가 다듬어 주고, 드벨라니아가 살피며 가끔 직접 다듬기도 하는 방식.

얘네가 하도 당연스럽게 해서 나도 넘어갔는데, 생각해 보니 이건 아니잖아. 부관이 왜 내 손톱을 다듬어? 2군단장씩이나 되는 존재가 왜 내 손톱 관리를 맡냐고.

"거기, 주치의. 뭐 해? 어서 데몬 님 손톱을 회복시키지 않고."

"...주치의의 역할을 헷갈리신 것 같습니다, 드벨라니아 님."

"데몬 님 손톱에 위기가 왔는데, 그게 주치의의 역할이 아니라고?"

당연히 아니지. 누가 들으면 생명이 위태로운 줄 알겠다.

조금 식은 눈으로 드벨라니아를 보는데, 그녀 본인도 그게 억지인 줄은 아는지 고개를 홱 틀며 선심 쓰듯 말을 바꿨다.

"정 안 되면 영양이라도 좀 주든가."

"...알겠습니다."

계속 버텼다간 이 공방이 평생이 가도 끝나지 않을 것을 눈치챈 벤이 짙은 한숨을 내쉬며 가방을 뒤적인다.

"데몬 님, 손을...."

"아… 네."

혹여 그가 기분이 상해 이상한 짓이라도 할까, 나는 손톱을 맡긴 내내 불안한 눈초리로 그를 살펴야 했다.

마왕성에 도착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122. 불편한 일상(3)

폭풍처럼 등장해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선사한 드벨라니아는 도망치는 것도 바람 같았다.

별건 아니고, 리리넬과 데몬교 건에 관해 조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어 조심스럽게 운을 뗐더니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눈치챈 듯 눈만 이리저리 굴리다 중얼거리듯 변명하더라.

[순진한게 놀려 먹는 재미가 있어서 그만....]

[....]

[죄송해요오!]

그리고 창밖으로 몸을 날리는데, 어찌나 날렵하던지.

급히 창틀을 짚고 아래를 확인했을 때, 그녀는 이미 저 멀리 달려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찾으니 임무로 자리를 비웠다고....

'뭐... 그래, 당분간 옷을 싸 들고 오는 일은 없겠네.'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 후로 의미 없는 시간이 흘렀다.

언제나 그래 왔듯 마왕성에서 내가 할 일은 딱히 없다. 가끔 뜬금없이 임무를 받아 무기를 차고 불려 나가긴 하지만 그것도 아주 드문 일이고.

그러니 이건 내 일상이라 할 수 있다. 이제와서 불안해할 것도 없어.

"...젠장."

불안해!

어느새 다 맞춘 큐브를 한쪽에 던지고 일어났다. 푹신한 침대가 더 누워 있으라는 듯 유혹했으나, 마음이 불편한 내겐 먹히진 않았다.

어쩐지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다. 당장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방 한쪽에 서서 불안한 듯 눈을 굴리던 에드를 불렀다.

"에드."

"네, 데몬 님."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이 뭡니까."

"저녁에 군단장 회의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없습니다."

뭘 해야 할지 모르니 별수 있나.

"시발."

불안감이 짜증으로 변모해 내 감정을 들쑤신다.

지나친 감정은 이성을 흐리고 머리를 둔하게 만든다. 거지 같은 인생, 짜증 나네, 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등등 온갖 험한 말을 중얼거리던 내가 그의 존재를 자각한 것은 '다 꺼져 줬으면'을 중얼거린 뒤였다.

창백하게 질린 에드가 눈동자를 덜덜 떨며 나를 보고 있었다.

"아...."

"...."

맞다, 입조심. 나도 마계가 익숙해지긴 한 모양이다. 이렇게 긴장 놓고 욕까지 읊는 걸 보면.

'...사과해야겠지?'

다른 누구도 아닌 마족한테 괜한 미움을 사는 건 사양이다. 수명의 연장을 위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에드."

"네… 데몬 님. 죄송합니다."

"왜 네가 사과를… 아니...."

실수했다! 묻지 말아야 하는데!

뜬금 없는 사과에 이유를 물어봤자 상황만 악화된다는 것을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배웠는데... 역시 반사적으로 나오는 말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아니나 다를까, 에드가 더 희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파르르 떨더니 간신히 답을 내놓았다.

"꺼져 드리지 못해서… 데몬 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듣고 보니 그렇네. 너 왜 여기에 있냐?

"사과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아니, 따지는 게 아니라… 정말 이유가 궁금해서 묻는 겁니다."

열심히 손까지 저어 가며 에드를 안심시키기 위해 애썼다.

평소엔 네 방에 있었잖아. 왜 여기에 있는 건데? 네 방 없어졌어? 마왕이 방 빼래?

"마왕님께서… 데몬 님 곁에 붙어 있으라 하셨습니다."

아. 감시.

본인도 말하면서 찔리는지 내 눈치를 살핀다. 물론 조금 짜증이 나긴 하지만 애꿎은 부관에게 화낼 생각은 없다. 그 전에 마족에게 화낼 만큼 간이 크지도 않고.

그에게 뭐라 말하는 대신 입을 다물고 던져 두었던 큐브를 다시 가져왔다. 여전히 요동치는 불안한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마구잡이로 섞으며 생각을 비우려 애쓰는데, 에드가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외성을 돌아보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외성...?"

그래, 내가 너무 내성에만 머물긴 했지.

마왕성에 온 지도 꽤 됐고, 적응도 어느 정도 되었으니 한 번쯤 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아, 물론 혼자서 가는 건 말고, 에드가 호위로 따라붙는다는 조건 하에. 난 아직 혼자 외성을 돌아다닐 정도로 성장하진 않았다. 아마 평생 그러겠지만.

그러나 나는 답을 내놓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했어야 했다.

"좋습…."

외성에는 그 미친 광신도들이 있다는 것을 떠올린 건 긍정의 답을 내놓은 것과 거의 동시였다.

"니다...."

말을 주워 담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경솔한 언행이 위험하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게 되는구나.

후회해 봤자 바뀌는 것은 없다. 이미 에드의 얼굴이 화악 밝아져 있었으니까. 저 얼굴에 대고 어떻게 말을 바꿔. 말을 번복했다가 얼굴이 어두워지기만 하면 다행이지, 저 감정이 모조리 짜증이나 분노로 치환되기라도 하면....

부르르 떨리는 몸을 억눌렀다. 몰라, 난 감당할 자신 없어. 그냥 가야지. 제기랄.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에드와 붙어 있는 수밖에.

"옷을 갈아입으시겠습니까."

"음...."

이번엔 섣불리 답하지 않았다.

우선 내 옷차림을 돌아봤다. 딱히 나쁘진 않은데... 좀 더 존재감이 없었으면 좋겠네. 가능한 광신도들의 눈에 띄지 않게.

'그리고 마계는 밤이지.'

그래, 그냥 아예 완전히 검은 옷을 입어 버리자. 달빛이 닿지 않는 그늘 위주로 돌아다니는거야.

마음을 정하고 옷장을 열어 검은 옷을 꺼내며 한발 늦은 답을 했다.

"갈아입을 겁니다. 나가 있으세요."

"...."

뭐야, 왜 대답이 없어?

슬쩍 돌아보자 에드가 떨리는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아니, 잘 보니 흔들리는 그의 시선은 내 손에 들린 옷에 고정되어 있었다.

...왜?

"...확실한 경고가 되겠군요. 알겠습니다."

"?"

무, 무슨 경고?

야야, 그러고 나가면 어떡해. 괜히 불안해지잖아!

문까지 소리 없이 닫히고, 졸지에 덜렁 남은 나는 조용히 옷을 들어 지그시 노려보았다.

'아무리 봐도 이상은 없는데....'

괜히 찝찝해졌다. 다른 거 입어야지.

물론 검은 옷을 입는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어 옷장에서 또 다른 검은 옷을 꺼냈다. 마왕이 검은색 옷과 남색 옷을 적지 않게 준 덕분에 대체할 다른 옷이 없다든가 하는 문제는 없었다.

검은 옷의 효과는 놀라웠다!

조금 전의 그 어마어마했던 광신도들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정말 아무도 내게 오지 않더라. 오히려 다들 알아서 피해 가는데, 심지어 그중에 붉은 심장 브로치를 단 마족도 있었다면 과연 믿겠는가!

'검은 옷 만세!'

마족 퇴치 효과가 있을 줄이야.

로브는 통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옷만 통하는 건가? 너무 자주 입으면 효과가 떨어질 수도 있으니 가끔 써먹어야겠어.

나는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거리를 활보했다.

***

데몬 님께서 기분이 나쁘시다.

오래전 식당에서 그가 검은 옷을 입고 접시를 엎는 일이 있었던 이후 마왕성에서 그가 입는 '검은 옷'은 기분이 나쁘다는 상태를 보여주는 하나의 경고로 인식되었다.

어떠한 수나 장식도 없는 순수한 검은색. 그 옷을 입은 0군단장을 마주한 마족들의 심정이 어땠겠는가.

'걸리면 죽는다.'

'눈에 거슬리지 않게 굴자.'

'필요하다면 내 모든 마력을 동원해서라도 도망을… 아, 마법은 사용 금지였지.'

'마왕님께 죽나, 데몬 님께 죽나…. 거기서 거기 아닌가.'

'몰라, 난 죽더라도 마왕님이나 다른 군단장님 손에 죽을래. 아무리 생각해도 데몬 님은 아닌 것 같아.'

평소 내성, 그것도 본인의 방에서만 머무시는 분이다. 외성까지 나왔다는 것은 필시 희생양 하나 잡아서 족치겠다는 뜻이겠지.

데몬 님을 존경하지만 목숨은 소중하다. 마족들은 슬금슬금 그를 피해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는 붉은 심장 브로치를 단 데몬교 신도들도 마찬가지였다. 데몬 님의 심기를 더 나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이 이유인 점에서 조금 달랐지만.

'도움이 되지는 못할 망정 데몬 님의 심기를 더 거스를 수는 없지!'

'알아서 잘 숨어다니자. 우리 중에 데몬 님을 거슬리게 하는 놈이 나오면 그 새낀 바로 퇴출이야.'

'데-세.'

그렇게 알게 모르게 수많은 마족들의 모든 신경이 한쪽에 집중된 지 한참, 목적지 없이 떠돌던 그의 걸음이 길 한복판에서 멈췄다.

덩달아 지켜보던 마족들의 호흡도 멈추고.

긴장감 가득한 침묵 속에서, 그의 입꼬리가 소리 없이 올라갔다.

'헉.'

좀처럼 희생양이 걸려들지 않아서일까. 어쩌면 트집을 잡을 만한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썩 좋은 의미는 아닐 웃음이, 그의 얼굴에 걸려 있었다.

***

마왕성의 규모는 제국의 소도시급이라 말한 적이 있었던가.

단순한 규모만이 다가 아니다. 마왕성은 하나의 소도시라 봐도 무방했다.

마왕성은 크게 내성과 외성으로 나뉜다. 이를 제국의 수도에 빗대면 내성은 황궁, 외성은 황궁 밖, 성벽 안의 도시가 되겠지.

내성에는 마왕과 군단장, 각 군단원들 같은 주요인물들과 이 모든 이들의 생활을 책임질 사용인들이 존재하며, 외성에는 일반 마족 병사들과....

'아 몰라.'

그 많은 직책을 어떻게 다 읊어.

아무튼 외성에는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직책을 맡은 다양한 마족들이 존재한다. 그 분위기는 인간계 도시의 길거리와 같고.

다만 차이점이라 하면 길거리의 간단한 음식을 파는… 아, '판다'라고 할 수는 없나. 마왕성 내부에서 돈이 돌지는 않으니.

아무튼 그러한 노점상조차 철저히 계산된 위치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식당, 노점상, 술집, 공개된 연무장 등등… 외성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마왕이 수뇌부들과 머리를 맞대고 최대한 효율적인 위치에 하나하나 배치해 둔 것이다.

'적이 성문을 뚫고 들어온다면 이 모든 건 길목을 막는 방패이자 기습을 위한 은폐물이 되겠지.'

혹은 공격용 무기로 변할 수도 있고.

그 의도가 어떻건 지금 내가 보기엔 평범한 도시의 길거리다. 심지어 돈도 주고 받지 않으니 오히려 인간계보다 더 좋은 곳이라 봐도 될 정도.

주위에 마족도 없으니 쾌적하겠다, 모처럼 내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옆에서 조용히 나를 살피던 에드가 주의를 돌리려는 듯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데몬 님, 모처럼 나온 것이니 무언가 드셔 보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배는 안 고픈데...."

"그렇군요. 실례했습…."

"하지만 먹겠습니다."

"...."

뭐. 왜. 뭐.

저거 맛있어 보였단 말이야.

'냠.'

무슨 고기로 만들었는지 모를 꼬치는 맛있었다. 고기의 출처는 굳이 생각하지 않도록 하자. 맛있으면 됐지.

시야 한쪽에 쌓인 검은 껍데기를 모른 척하며 에드를 보았다. 그는 꼬치를 건넨 마족에게 무언가 속삭이고 있었다.

언뜻 떨지 말라느니, 죽고 싶냐느니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아하니 꼬치를 건넬 때 너무 떨어서 짜증이 났었나 보네.

'하긴, 내가 보기에도 너무 심하게 떨고 있었지.'

하도 떨어서 소스가 다 떨어질 지경이었다.

에드가 무서워서 그런 것 같아 서둘러 직접 받으려 했는데, 이 무정한 부관이 먼저 나서서 받아 버리더라.

아무튼 이렇게 두었다간 저 불쌍한 마족의 심장이 멈추는 불상사가 생길 것 같아 입에 든 고기를 꿀꺽 삼키고 서둘러 에드를 불렀다.

"에드."

"네, 데몬 님."

"다른 곳을 둘러보고 싶은데, 안내 좀 해 주겠습니까?"

"아, 네. 알겠습니다. 너, 조심해라."

마지막까지 마족에게 경고를 날린 그가 걸음을 서둘러 내게 다가왔다.

"무엇을 위주로 둘러보고 싶으십니까?"

"글쎄요... 기왕이면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는 쪽이면 좋겠군요."

"기분 전환이라면...."

잠시 고민하던 그가 멈춰 있던 발을 뗀다.

순순히 뒤를 따라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에드가 도착한 곳은 공개된 연무장 입구였다.

'설마, 싸우자고?'

어쩐지 정상적으로 안내한다 싶었더니만, 결국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속으로 한껏 탄식하며 무기를 들게 될 상황을 피하기 위한 방안을 머릿속에서 뒤적이는데, 곧장 안으로 안내할 줄 알았던 에드가 입구의 무기를 제공하는 마족에게 다가가 무언가 말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건지, 마족의 얼굴이 곤란함으로 물들었다.

"가져와."

"하지만...."

"허락은 내가 받도록 하지. 그러니 죽기 싫으면...."

아니, 저기요. 기분 전환이라면서. 왜 남의 목숨 가지고 협박까지 하고 그래.

저러다 정말 일 치르겠다. 다 먹은 꼬치를 버릴 곳을 찾다가 시간을 더 지체하면 안될 것 같아 그냥 손에 든 채 저들을 향해 걸음을 뗐다.

"에드, 지금 뭐...!"

턱.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123. 불편한 일상(4)

신발 앞코가 어딘가에 잘못 걸리는 소리. 내가 넘어진다는 신호.

균형을 잡기 위해 반사적으로 팔을 휘적였다. 뒤늦게 이 모습이 꼴 사납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 의식적으로 제지한 채 바닥이든 벽이든 무언가라도 짚으려 팔을 뻗는데.

"...에드?"

"네… 데몬 님. 죄송합니다."

에드가 내 한쪽 팔을 잡아 올렸다. 가공할 힘에 내 몸이 힘없이 딸려 올라간 탓에 넘어지지는 않았는데....

에드가 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게 내가 죽기 싫으면 내놓으라고...."

나직이 뭐라 중얼거리는 것 같은데, 잘 안 들린다. 넘어질 뻔한 내가 못마땅하기라도 한 건가? 아니지, 내게 사과한 것을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불안한 마음에 조용히 눈만 굴리다가 조금 전까지 에드의 협박을 듣고 있던 마족과 눈이 마주쳤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 패닉에 가까울 정도로 공포에 질린 녀석의 시선을 따라 슬쩍 시선을 들었다. 에드가 잡아 올린 팔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하게는 그 손에 쥐어진 뾰족하게 깎인 나무 꼬치가.

'...아.'

넘어지면서 찌를 뻔했구나. 큰일 날 뻔했네. 저 마족이 하얗게 질리는 것도 당연하다.

그보다, 나 지금 인생 종친 건가?

누군가의 실수에 의해 제 목숨이 위험했을 때의 감정 변화는 대개 놀람, 공포, 분노 순이다. 아무래도 눈앞의 마족은 지금 공포 단계까지 밟은 것 같은데.

사과를 해도 과연 순순히 받아 줄까?

목숨이 걸린 고민에 빠질 때, 내 기색을 살피던 에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데몬 님의 앞을 감히 막아선 것, 사죄드립니다. 하지만 지금 마왕성의 마족을 죽이기엔 시기가 좋지 않습니다."

"...."

"마…왕님께서도 탐탁치 않아 하실 겁니다."

마지막 말에는 과연 이것을 말해도 되는지 고민하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애초에 나 마족 죽이려 한 적 없는데. 그리고 제아무리 뾰족하다지만 내 손에 들린 것은 결국 가느다란 나무 꼬치에 불과하다. 마족이 고작 그딴 걸로 죽을 리가 없잖아.

'...여기서는 뭐라 답해야 하지?'

내가 적절한 답을 내놓는 것보다 에드가 움직이는 것이 더 빨랐다.

나를 물끄러미 보던 그가 실례했다며 잡고 있던 팔을 놓고 물러선다. 쓰레기를 대신 치워 드리겠다는 명목으로 내 손에 들린 나무 꼬치를 가져가고, 다시 한번 불안한 눈으로 나를 훑고 나서야 그는 고개를 돌려 마족을 보았… 아니, 멱살을 잡았다.

'...?!'

***

역시나, 애꿎은 마족 하나가 죽을 뻔했다.

손에 무기가 들려 있지 않아 조금 마음을 놓았더니만, 설마 나무 꼬치를 사용할 줄이야.

손에 쥐고 조금만 힘을 줘도 툭 부러지는 가느다란 나무 막대기에 불과하지만, 그 끝의 뾰족한 정도는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위험의 여지가 크다.

데몬 님은 그것을 이 마족의 눈에 꽂아 버리려 하셨다.

'이유는 아마… 너무 기다리게 만들어서.'

그렇지 않아도 심기가 불편하셨는데, 이런 쓸데없는 실랑이로 귀한 시간까지 깎아 먹으니 짜증이 나실만도 하다.

에드 본인도 데몬 님을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답지 않게도 죽기 싫으면 어서 내놓는 게 좋을 거라는 설명까지 친절히 덧붙였다. 눈앞의 마족이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데몬 님이 이 녀석을 죽이고 전투 때의 데몬 아루트로 돌입하시는 것을 막기 위해서.

'술을 드셨을 때만큼은 아니어도 충분히 위험한 상태가 되실 테니….'

그러나 친절한 설명이 채 먹혀들기도 전에, 데몬 님이 움직였다.

인내심이 다 닳아 버렸다는 듯, 다 먹고 남아 버린 나무 꼬치를 쥐고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마족의 눈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체중을 실은 휘두름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막아야 하나?'

그 잠깐 사이에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아도 심기 불편한 데몬 님의 기분을 거스르는 짓을 할 것인가, 그냥 두고 볼 것인가.

데몬 님을 막아서는 것은 이 한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수준이지만, 저 녀석을 죽여 각성한 데몬 님은 수많은 목숨을 위태롭게 만든다.

후자의 경우는 전자에 비해 본인이 살 가능성이 높다는 이점이 있음에도 마왕성 소속의 충직한 에드는 전자를 택했다.

뒤늦게 큰일 날 뻔했다는 것을 자각한 녀석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그 한심한 꼴을 보고 있자니 절로 혀 차는 소리가 나왔다.

"그러게 내가 죽기 싫으면 내놓으라고...."

...경고했는데.

슬쩍 시선을 옮겨 데몬 님의 기색을 살폈다. 기분이 많이 상하셨을까. 분노하신 건 아니겠지.

어쨌든 이젠 그를 설득해야 할 차례다. 에드는 마른침을 넘기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말이 먹히긴 한 것일까. 나름의 성의를 다한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나마 이 이상 무엇을 할 생각은 없어보여 에드는 눈치를 살피다가 서둘러 그의 손에 들린 나무 꼬치부터 빼 왔다. 다행히도 순순히 넘겨주신 덕분에 걱정을 덜었다.

...저러다 갑자기 움직이시진 않겠지.

심기 불편한 상태의 데몬 님 손에 피를 묻게 할 바엔 차라리 이쪽에서 먼저 움직이는 편이 낫다. 불안한 눈으로 그를 살피다가 몸을 틀어 실랑이를 벌이던 마족의 멱살을 잡았다.

***

"봤지? 데몬 님께서 심기가 불편하시다. 그러니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걸 똑똑히 새겼으면 좋겠는데."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응, 그래… 날 이유로 내세우는 것엔 이미 익숙해졌어....

나는 조용히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봤다.

마족의 행동은 빨랐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에드는 녀석에게서 웬 막대기 두 개를 받을 수 있었다.

...막대기?

'단순하게 생겼는데? 지금 저걸 받겠다고 그 난리를 친 거야?'

진짜 막대기다. 그 단어 외에는 다른 것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단순한 외형.

황당함에 할 말을 잃은 사이, 내게 다가온 그가 막대기 하나를 건네며 무언가 설명하려는 듯 입을 열더니 이내 급히 입을 다물었다.

"데몬 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마왕님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종류여서...."

"...?"

잠깐. 마왕에게 허락을 받아야 할 정도라고? 그 정도로 신경 써 줄 필요는 없…는데....

의미 없이 손을 뻗어 보았으나 이미 늦었다. 신속한 부관은 내가 미처 말리기도 전에 통신석을 꺼내 들고 곧장 마왕과 연결했다.

- 에드? 무슨 일이지?

하하… 행동 한번 재빠르네....

...빌어먹을.

"데몬 님의 심기가 좋지 않은 탓에 눈꽃 스틱을 사용해 보려 하는데, 사용 가능 여부를 여쭙고 싶습니다."

눈꽃 스틱? 뭐야, 그 애들 장난감 같은 이름은.

- 기분이 안 좋다고? 어느 정도인데?

"그...."

무언가 말하려던 에드가 눈치를 살피듯 힐긋 나를 곁눈질한다.

그 망설임에서 무엇을 읽은 건지, 마왕의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 아니, 아니다. 네가 어련히 알아서 적당선의 해결책을 찾아본 거겠지. 어지간히 심각한 것 같은데, 얼마든지 사용하도록 해. 뒤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러지 마. 허락하지 않아도 돼.

내 기분이 나쁘다는 게 어째서 이유가 되는 건데. 내가 애냐. 그리고 왜 고작 이런 일에 마왕이 뒤까지 봐주는 거야?

걸고넘어지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보니 도리어 입을 다물게 된다. 해탈하여 영혼이 빠져나간 눈으로 에드를 보자 그가 움찔하더니 제 손에 든 막대기 하나를 들어 보이며 급히 설명을 시작했다.

"가위로 이 끝을 자르고 하늘을 향하게 하시면 됩니다."

"...그럼 무슨 일이 벌어지는…."

내 말은 채 끝을 맺지 못했다.

- 마왕성 전체에 알린다. 0군단장 데몬 아루트가 이전에 개발한 눈꽃 스틱을 시험해 볼 예정이다. 마왕성의 사용인들은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에 당황하지 말고 각자 할 일을 계속하도록.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

의문은 잠시였다. 마족들은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것은 물론이고, 일상에서 마법 물품을 만들어 사용한다. 현재는 마법 사용이 금지되었다지만… 이전에 개발한 물건이랬으니 아무래도 마법 물품 같은데.

이름이 눈꽃 스틱이랬으니 뭐, 눈이라도 내리게 하는 건가?

당연하게도 마왕이 직접 알린 방송은 마족들의 주의를 강하게 끌었다.

"시험? 그런 건 이미 다 끝내지 않았어?"

"쉿, 딱 봐도 핑계인 거 모르냐. 데몬 님 심기가 불편해서 어떻게든 평화적인 방법으로 풀어 보려는 거잖아."

"데몬 님께 이게 통할까…."

"인간계 출신이시니까 아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 통하길 빌자."

"뒷정리하려면 또 한바탕 고생하겠네."

또렷하게 들리진 않지만, 내 이름이 언급된다는 것은 알겠다.

마왕이 기껏 포장한 말을 쫙쫙 뜯어 파헤치고 있는 모양인데, 쪽팔려서 얼굴을 못 들겠다.

'안 그래도 된다니까… 집 가고 싶다....'

백작저로 가면 다시 이곳에 오고 싶어지겠지. 정녕 내가 맘 편히 있을 곳은 없단 말인가.

화끈해지는 얼굴을 한 차례 쓸어내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심호흡에 집중했다.

그사이, 다른 마족에게서 가위를 받아 온 에드가 막대기의 끝을 자르더니 하늘을 향해 가리킨다. 잘린 부분에서 무언가가 솟구치더니 공중에서 펑 하고 터졌다.

'폭탄이었어? 뭐… 딱히 놀랍진 않네.'

폭탄 정도는 예상 범위 내였다. 에드가 내 신체에 해가 갈 일을 저지르지도 않을 테니 두려워할 것도 없고. 문제는 다른 마족들의 반응인데....

뻔하지. 그렇게 대놓고 방송까지 했는데, 피해를 입는다면 당연히 날 원망하지 않겠어? 내 수명이 또 줄어들었네. 하하.

이런 방면으로는 해탈해 버린 지 오래였기에 반쯤 죽은 눈으로 폭탄이 터진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꽃잎처럼 떨어지는 하얗고, 차가운, 솜털 같은 결정.

"...눈?"

"네. 마음에 드십니까? 기후 변화가 없는 마계와 달리 인간계는 눈도 내릴 때도 있으니 데몬 님의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여…."

"확실히 나쁘진 않은데...."

이렇게 평화로운 방법이라니. 마족들도 이런 방법을 쓸 줄 알았구나. 그런데 그동안 왜 그랬냐.

손을 내밀어 눈송이를 받았다. 차갑다. 진짜 눈이네. 신기하긴 한데, 어째서 고작 이런 걸로 방송까지 한 거지?

의문에 대한 답은 금방 나왔다.

"하늘에서… 폐기물이 내린다...."

"이걸 우리가 치워야 한단 말이지...."

"어쩌겠어… 데몬 님께서 행하시는 건데.... 그분의 손에 죽는 것 보단 낫잖아.... 닥치고 치우자...."

"하하, 하하하. 다 좋으니 제발 많이 사용하지만 않으셨으면 좋겠다...."

"빨간 것도 사용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그건 안 되겠지?"

아하....

이해해 버렸다.

쟤네 반쯤 넋이 나간 것 같은데 어떡하냐. 미안해서 눈치를 살피는데, 에드가 눈치 없게도 내 손에 가위를 쥐여 주며 데몬 님도 자르라며 종용한다. 아니, 이건 눈치 없는게 아니라 그냥 눈치를 보지 않는건가.

매정한 놈 같으니라고.

하지만 오랜만에 보는 눈이 반갑기도 하고, 나도 직접 해 보고 싶었던 탓에 모른 척 가위를 받아 들었다.

붕대를 감은 손목을 본 에드가 흠칫 놀라 말했다.

"아, 데몬 님 손이… 제가 잘라 드리겠습니다."

"됐습니다."

조금 전부터 계속 애 취급 당하는 기분이라 별로다.

물론 그럴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이 이상 그딴 취급을 당할 생각은 없었기에 한 손에 막대기를 쥐고 골절된 손으로 가위를 쥐고 표시선에 조준했다.

'...손이 떨리네.'

다친 손이 자꾸 덜덜 떨려서 가늠이 제대로 안 된다.

안되겠다. 막대기 끄트머리를 잡고 있던 손을 옮겨 표시선 가까이를 잡고 다시 가위를 대었다.

서걱.

"...아."

"데몬 님, 손이...!"

일단 자르긴 잘랐다. 나는 곧바로 자른 곳이 하늘을 향하게 손을 옮겨 들었다.

퍼엉! 조금 전과 같은 굉음이 들리며 흰 눈 사이로 붉은 눈송이가 섞여 내리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안타까운 마족의 통곡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손바닥 위에서 사르르 녹아 버린 붉은 액체를 가만히 보다가 설명을 요하듯 에드를 보았다.

"에드?"

"네, 데몬 님."

"왜...."

붉은 액체에서 익숙한 냄새가 난다.

어디서 맡던 냄새인지 깨달은 순간, 제법 예뻐 보이던 하늘의 눈송이가 섬뜩하게 비쳤다.

머리 위에 소복히 내려앉는 그것에 진저리를 치지 않기 위해 애쓰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왜 눈에서 피 냄새가 나는 겁니까. 이거 설마."

진짜 피입니까?

124. 세계의 가호(1)

뒷말은 삼켰다. 그러나 늘 그렇듯 눈치 빠른 부관은 삼킨 뒷말까지 눈치채고 즉각 답했다.

"아닙니다. 진짜 피처럼 느껴지도록 혈향을 첨가한 것뿐입니다."

"아니, 그냥 눈이면 충분한데 왜 굳이 이런 걸 만들어서...."

"전쟁은 기후와 분위기에 큰 영향을 받으니까요. 인간계와 전쟁을 치를 때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개발한 것입니다. 그보다 데몬 님, 손이...."

애들 장난감용이 아니었구나. 하긴, 그러니 마왕의 허락이 필요한 거겠지.

'그보다....'

에드의 시선을 좇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끝을 보았다.

막대기만 자르려 했는데, 손가락까지 잘라 버렸네. 조금 베인 정도인데, 설마 고작 이 정도에 벤이 오진 않….

"데몬 님!"

...오네?

직업 정신에도 정도가 있지, 별것도 아닌 일에 오다니. 넌 피곤하지도 않냐?

황당한 눈으로 그를 보며 무심코 다친 손가락을 입에 넣으려 하는데, 누군가 손목을 잡아챘다.

"...에드?"

"벤, 어서 치료하도록. 생각보다 제법 깊게 베였다."

다친 손가락을 손수건으로 감싼 그가 상처 부위를 지혈하듯 꾹 누른다. 찌릿한 고통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서둘러 벤이 다가오고, 에드가 손수건을 떼며 일어난다. 멎었던 피가 다시 퐁퐁 솟아나기 시작했다. 벤이 나직이 혀를 찼다.

"마법은 못 쓰니 일단 소독부터 하고… 지혈하고 꿰매야 할 것 같습니다."

"데몬 님께서 피를 입에 넣는 일이 없도록 제대로 치료해 두길 바라지."

연락이 왔는지 주머니에서 통신석을 꺼낸 에드가 벤을 향해 말을 툭 던지고 곧장 통신석을 연결하며 자리를 피했다.

저거 일부러 저런 거다. 벤이 반박할 틈을 주지 않았잖아.

벤도 억울한지 부들부들 떨었으나, 이내 투철한 직업 정신을 버리지 못하고 씩씩대며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아 따가…! 자, 잠깐. 마취를 안 했는데…!

'...음, 표정이 험악하네.'

그냥 입 닥치고 있자.

마취 없이 생으로 상처를 꿰매는 흔치 않은 경험에 넋을 놓고 있길 잠시, 꼼꼼히 매듭까지 지은 벤이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듯 흠칫 몸을 떨었다.

덜덜 떨리는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데…몬 님, 그… 괜찮…으십니까?"

"네… 뭐...."

누가 보면 내가 죽이려 드는 줄 알겠다. 공포에 질린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초연하게 웃어 보였다. 아프긴 했지만 내 몸에 해를 끼친 것도 아니고, 이미 다 끝났는데 내가 뭘 어쩌겠어.

...그런데 왜 더 떨고 있는 건데.

"어떻게… 어떻게 그런 실수를 할 수가 있지?"

"벤…?"

"정말 죄송합니다 데몬 님! 죽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전 주치의 실격입니다…!

얼핏 울먹이는 듯한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그가 떠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직업 정신이 투철한 만큼 이런 유의 실수를 용납 못 하는구나.

"...정말 괜찮으니 더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안 괜찮았으면 내가 진작 말했을 겁니다."

무서워서 말 못 한 거지만. 정말 죽을 것같이 아팠으면 말했을 것이다. 나도 내 목숨은 소중하거든.

이러다 눈앞에서 머리 박고 죽을 기세라 부담스러운 마음에 서둘러 그를 말렸다.

그런데 평소라면 이쯤에서 그만뒀을 벤이 도리어 고개를 번쩍 들고 눈을 부라렸다.

"그래! 그거 말입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아프셨을 텐데요!"

처음 보는 사나운 태도에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내 침묵을 어떻게 이해한 건지, 벤이 높게 치솟았던 눈꼬리를 뚝 떨구고 침울하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데몬 님… 주치의 앞에서 고통을 참으시면 안 됩니다. 마력석 신호에도 한계가 있는 데다, 요즘은 그 신호조차 불안정하단 말입니다. 데몬 님께서 어디가 불편하다, 아프다 표현하셔야 최소한의 고통으로 수월한 치료를 할 수 있는데...."

"...."

"마취 없이 생으로 꿰매다니… 그걸 버틴 데몬 님은 대체...."

"...."

"게다가 괜찮다고… 질책도 없이... 이건 너무 너그러우신 거 아닙니까...."

음, 이 분위기를 어쩌지.

잠시 눈을 굴리다가 꿰맨 티가 나는 손가락을 내밀었다.

"붕대는 감지 않는 겁니까?"

"아…! 아뇨, 감염 예방을 위해서라도 감아야 합니다. 잠시…."

벤이 주섬주섬 거즈와 붕대를 꺼내 상처에 대고 감고 있을 때, 그사이 통신을 마친 에드가 내게 다가왔다.

심히 죄송스러운 표정을 보아하니 무슨 일이 터진 모양이다. 내 잘못은 아닌 것 같고.

"데몬 님, 마왕님께서 부르십니다. 급히 같이 가 봐야 할 곳이 생겼다고 하셨습니다."

역시나.

잘못한 것이 없으니 꿀릴 것도 없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힐긋 벤에게 시선을 던진 그가 비꼬듯 재촉했다.

"아직도 치료를 못 끝냈나?"

"...이제 막 끝났다. 모셔 가. ...아, 데몬 님. 되도록 상처에 물이 닿지 않도록 하십시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에드를 쫓아 지체 없이 걸음을 옮겼다.

마왕의 집무실에 도착해 문을 열었을 때, 마왕은 골치 아픈 듯 이마를 짚고 있었다.

각도상 언뜻 보이는 짜증 가득한 얼굴과 달리 목소리는 언제나와 같이 상냥하게 날 맞이했지만.

얼굴조차 마주하지 않고 상대를 알아챈 듯, 미동도 없이 눈을 내리깐 그의 입에서 여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왔어?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기분 풀라고 해 놓고 이렇게 불렀네. 미안해. 급한 일이 생겼어. 아니, 급하다기보다는 귀찮고 짜증 나는 일이지."

마침내 그가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의 짜증은 온데간데없이 평온한 얼굴이 나를 마주한다.

표정 변화 봐라. 소름 끼치네. 역시 아무리 물렁해 보여도 마왕은 마왕이구나.

"요정족의 불평과 짜증을 들어 주러 갈 거야.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입장에서의 이야기지만."

"...."

"요정족들의 땅은 이곳 심연에 위치한 것치고는 상당히 아름답지. 때아닌 눈도 괜찮지만 기분 전환 하기엔 이쪽이 더 나쁘지 않을 거야."

같이 가자.

마왕이 싱긋 웃으며 손을 내민다. 나는 가만히 그를 쳐다봤다.

'평소 내가 아는 마왕이었다면 '같이 가지 않을래?' 하고 권유형 말투를 썼을 텐데.'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말.

의미 없는 눈싸움을 멈추고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시야가 바뀌었다.

***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로써 이 게임의 주도권이 아직 내게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황제 또한 다르진 않겠지. 조금 안심했다.

'여유로운 척하더니.'

권유형 말투도 버릴 정도로 마음이 급한 모양이네.

필시 내 기분이 나쁘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 것이리라.

'내가 황제의 편이 될까 봐 걱정이라도 되나 보지?'

응? 마왕.

이 게임에서 패배할까, 겁이라도 나나 봐?

***

마왕은 곧장 요정족의 땅으로 이동하지 않았다.

[어, 마왕님, 데몬 님. 여긴 무슨 일로…?!]

[가자.]

[!?]

그는 마왕성의 정원 어딘가로 이동해 괴식물을 가꾸던 히엔을 납치하다시피 데리고 이동했고, 마침내 나는 금발에 녹색 눈을 한 뾰족한 귀의 미남자를 볼 수 있었다.

"네 그 마기 때문에 세계가 맡긴 씨앗이 오염이 되어 버렸다. 어떻게 책임질 거지?"

물론 그는 마왕을 보기가 무섭게 서슬 퍼런 기세로 따졌지만.

나는 숨죽이고 눈을 굴려 그가 마왕의 눈앞에 들이민 주먹만 한 씨앗을 살폈다. 마치 곰팡이가 핀 것처럼 검은 얼룩이 잔뜩 생겨 있는 모습.

저게 그 마기에 오염된 건가? 내가 보기엔 그냥 곰팡이 같은데....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씨앗에서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나왔다. 오, 제기랄. 마기 맞네.

"...히엔."

팔짱을 낀 채 요정왕으로 보이는 남자의 항의를 무표정으로 듣던 마왕이 턱으로 씨앗을 가리켰다.

"소생 가능한지 살펴봐."

"네, 네...!"

손을 덜덜 떨며 씨앗을 받아 든 히엔이 극도의 흥분으로 눈을 빛내며 씨앗을 살핀다. 순수한 흥미로 빛나던 눈은 이내 마왕이 물어본 '소생 가능 여부'를 떠올린 듯 삽시간에 생기를 잃고 가라앉았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불가능하구나.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진 않을 것 같지만… 마기에 오염된 것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이런."

"책임져라."

요정왕이 고운 미간을 험악하게 일그러트리며 으르렁거린다.

마왕이 곤란한 듯 뺨을 긁적이더니 화제를 돌리려는 듯 다른 질문을 던졌다.

"세계가 직접 맡긴 거라고 했나?"

"그래. 우리는 세계의 의지를 가장 존중하는 종족이지. 그렇기에 세계가 이 씨앗을 믿고 맡긴 것이고."

"그럼 그렇게 필사적일 이유가 없잖아."

"뭐?"

마왕이 어깨를 으쓱했다.

"네 입으로 말했지, '존중'이라고. 그런데 왜 그깟 씨앗 하나에 쩔쩔매는 거지? 이건 세계를 존중하는 것을 넘어 마치 너희 종족이 세계의 개라도 되는 것 같은데."

"무슨 헛소리를!"

"헛소리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보인다는 거지."

응 그래, 헛소리가 아니라 그냥 도발로 보이네.

생존을 위해 마왕으로부터 슬금슬금 멀어졌다. 요정왕의 표정으로 보건대,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사람 하나 죽일 것 같은 기세다.

그러나 생각 외로 그는 분노를 터트리지 않았다. 오히려 땅이 꺼질듯한 한숨으로 분노를 삭히고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해탈한 듯 중얼거렸다.

"그래… 그 말대로 우리 종족이 세계의 개도 아니고, 씨앗 건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으니 넘어가고...."

가만히 듣고 있던 히엔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저... 그럼 이 씨앗은...."

"...네가 갖든지."

"감사합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얘도 진짜 정상이 아니야....

황당하단 수장들의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는지, 히엔이 희희낙락하며 조심스럽게 씨앗을 만지작거린다.

주변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한 태도에 요정왕이 마왕을 돌아본다. 내게도 읽힐 정도로 선명한 눈빛이 '쟤 뭐냐?'라고 묻고 있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마왕은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잠시 침묵하던 요정왕이 다시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마물부터 어떻게 좀 처리했으면 하는데."

"우리도 열심히 사냥 중이야. 다만 처리하는 수보다 불어나는 수가 더 많을 뿐이지. 용사라도 있다면 조금 억제되었겠지만...."

예전에 마왕성에서 회의를 하며 이와 비슷한 대화가 오갈 때 마왕이 저런 식으로 말하며 나를 본 적이 있기에 잠시 긴장했으나, 다행히도 내게 시선이 닿는 일은 없었다.

'...아니, 근데 왜 내가 긴장을 하고 안심을 해야 하는 거지?'

억울하네. 나랑은 상관없는 일인데.

아예 그들로부터 시선을 떼고 다시 몇 걸음 옮겨 마왕으로부터 더 떨어졌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호숫가에 도달했는데, 그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뭐지? 웬 사람이....'

마족? 요정족?

마왕을 대하는 요정왕의 태도를 봐선 마족이 연못에 있는 것이 가능할 리 없고. 그럼 요정족인가?

...지느러미가 달려 있는데?

"마치 용사의 탄생을 기다리는 듯한 발언이군. 넌 용사가 나타나지 않길 바라고 있어야 할 텐데. 그러고 보니 내가 세계가 벼르고 있다고 말해 준 적이 있었나?"

아, 웃었다. 나한테 웃어 준 거, 맞지?

누군진 모르지만 웃는 게 상당히 우아하시네.

"글쎄, 하지만 내가 이 말을 했던 것은 확실히 기억하지. '어차피 용사는 등장할 테고, 나는 그를 맞이하게 되겠지. 이건 지금까지 그래 왔던 일이다. 이제 와서 새삼 두려워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너...."

한쪽에서 벌어지는 두 종족 우두머리들의 살벌한 대화는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눈앞의 지느러미 인간이 수면 밖으로 쑤욱 나오지만 않았어도 평생 외면 가능했을 텐데.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깜짝 놀란 와중에도 지느러미가 인간의 다리로 변하는 것은 제법 신비로웠다. 타박. 그렇게 드러난 하얀 발이 지면을 밟는다.

"마왕은 이번에 탄생하는 용사의 손에 죽을 거예요."

고상하고 맑은 목소리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목소리에 감탄해서? 아니, 두 수장의 주목을 끌어모으는 내용 때문에.

갑자기 등장하셔서 그렇게 이목을 끄는 말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역시나, 마왕과 요정왕의 시선이 이쪽을 향해 있다. 다행히도 내가 아닌 저 여자에게 집중되어 있다지만 그 시선의 범위에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 다시 슬금슬금 자리를 이동…하려 했으나 여자에게 잡혔다!

히엔, 히엔! 살려 줘! 여기선 네가 가장 나은 것 같아. 차라리 네 옆에 있을래!

'...씨앗에 홀렸냐?!'

125. 세계의 가호(2)

얼룩덜룩 곰팡이 핀 주먹만 한 씨앗이 뭐가 그리 예쁘다고, 그것만 보느라 이쪽은 돌아볼 생각도 않는다.

아무리 처음 보는 씨앗이라 해도 그렇지, 빌어먹을 정원사 자식.

기어이 요정왕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푸르른 녹색 눈동자가 흥미롭다는 듯 빛났다.

"그래, 인어 여왕은 미래를 볼 수 있었지.... 전에도 잠깐 봤지만 상당히 흥미로운 인간이란 말이야. 거기 인간, 이름이 뭐지?"

"데온 하르트…입니다."

속삭이듯 말을 하면서도 혹시 몰라 힐긋 히엔을 살폈다.

못 들은 것이 분명한 모습. 요정왕도 상황을 눈치챈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그래, 기억해 두지."

기억 안 하셔도 됩니다. 부디 잊어 주세요.

내 심정이 어떻든 요정왕은 나를 품평하듯 꼼꼼히 뜯어보더니 고개를 돌려 마왕을 보았다. 조금 전보다 훨씬 누그러진 목소리가 상대를 불렀다.

"마왕, 이 인간은 왜 이곳에 데려온 거지? 반드시 듣게 해야 할 이야기라도 있었나?"

"심연에서는 이곳 풍경이 가장 좋아서."

"...뭐?"

"정신적 안정을 취하게 해 주기 위해 데려왔지."

"이곳은 관광지가 아니다!"

다시 언성이 올라갔다.

...지금 그런 걸로 싸울 때가 아니지 않나? 분명 인어 여왕이라는 여자가 마왕의 죽음을 말한 것을 들었는데. 왜 반응이 없어?

'내가 환청을 들었나?'

슬쩍 고개를 들어 아직도 내 어깨를 잡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시선을 느낀 듯 곧장 고개를 내려 눈을 마주한 그녀가 살며시 웃는다.

바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두 눈에 알 수 없는 호의가 담겨 있어서, 어쩐지 거북했다.

등 뒤에서 예의 그 부드럽고 우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세계에게 많이 밉보이신 모양이에요, 마왕님. 이번 용사는 장난 아니던데요."

"애초에 우리 종족 자체가 세계에겐 눈엣가시니까 더 밉보일 것도 없지. 그보다 미래를 보는 것은 예언과는 다르지 않아? 네가 본 미래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잖아."

"글쎄요… 이번에 본 미래는 조금 특별해서.... 바꿀 수 있다면 그게 기적이지 않을까요."

"말했잖나. 세계가 벼르고 있다고."

두 종족 수장이 한 발언이다. 잘은 몰라도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나조차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마왕은 위협적인 발언을 들은 자답지 않게 평온했다. 한 점의 동요 없이 매끈한 얼굴이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내가 재밌는 사실 하나 알려 줄까?"

언제나처럼 가볍고 여유로운 목소리를 등에 업고, 마왕 특유의 분위기가 공간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선 그가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짓고 긴장한 두 수장을 놀리듯 손가락을 까닥인다.

"우리 마족들이 사용하는 힘을 인간들이 뭐라 칭하는지, 알아?"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드넓은 공간을 울렸다.

작지만 선명하게 귀에 틀어박히는 웃음에 나는 물론, 두 종족 수장들까지 입을 다물고.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대신 답해 주듯, 마왕은 짧은 틈을 두고 친히 답을 내놓았다.

"'기적'."

"...."

"...오만하긴."

침묵 끝에 가볍게 혀를 찬 요정왕이 나를 돌아봤… 아니, 날 왜 봐?

"거기 인간. 손을 다쳤더군."

"네… 뭐...."

"마왕이 마법을 금지한 탓에 제대로 치료도 못 하고 원시적인 방법으로 처치를 해 놓은 모양이던데, 내가 직접 치료해 주지."

"아뇨, 괜찮습…."

"따라와라."

네....

아까부터 묘하게 내게 흥미를 갖는 것 같더라니만,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구나. 어쩐지 상처 치료는 핑계고 나를 더 관찰하고 싶어하는 느낌이 드는데... 기분 탓이겠지?

앞장서서 걸어 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머뭇거리며 보다가 고개를 돌려 마왕을 보았다. 도와 달라는 내 눈빛이 보이지도 않는지 그는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다녀와. 난 여기 이 인어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테니."

망할....

혹시 모를 희망을 담아 히엔을 돌아봤지만....

'쟤 아직도 저러고 있네.'

그냥 포기하련다.

씨앗과 결혼할 기세인 히엔을 뒤로하고 순순히 요정왕의 뒤를 따랐다.

마왕성에 있을 때와 다름 없는 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풍경은 상당히 아름다웠다.

달이 은은한 빛의 장막을 내리고, 그 아래 푸른 나무들이 길쭉하게 솟아 있다. 곳곳에 은은하게 빛나는 꽃들이 모인 공터가 있어 나무가 제법 컸음에도 달빛이 땅에 닿지 않는 경우는 없었다.

'괜히 마왕이 데려온 게 아니구나.'

해가 없는 곳에도 저렇게 예쁜 꽃이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히엔 이 자식은 이렇게 예쁜 꽃들을 두고 어째서 그딴....

'...말을 말자.'

요정족의 땅에서만 자랄 수 있는 식물이어서 그럴지도 모르지.

내심 히엔을 변호하며 걸음을 옮겼다. 히엔을 떠올리니 절로 마왕성의 괴식물들이 떠올라 잠시 질겁했지만 얼마 못 가 다시 주변의 풍경에 홀려 잊어버렸고.

기분 전환을 넘어 넋을 놓고 둘러보았던 것 같다.

그런 내 정신이 돌아온 것은 한참을 말없이 걷던 요정왕이 손가락을 튕겨 누군가를 불렀을 때였다.

"외상용 약초를 가져와라."

"어디 다치셨습니까?"

헉, 순간 숨을 멈췄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조금 전까지 탁 트여 있던 시야가 검은 그림자에 가려졌다. 눈앞에 달빛을 등져 얼굴도 보이지 않는 검은 형체가 불쑥 나타나 요정왕 앞에 예를 갖추고 있었다.

비밀…호위나 심부름꾼… 같은 건가?

간신히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눈앞에 나타난 상대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얘도 귀가 뾰족하네. 같은 종족인 것 같은데, 귀 형태는 종족 특성인 모양이지?'

마왕측의 1군단장 제이카르도 귀가 뾰족했는데.

제이카르와 요정족의 상관관계를 따져 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답 없는 억측은 그만두고, 이쪽에나 좀 더 집중하자.'

보아하니 나무에서 뛰어내린 것 같고.

여기 나무가 상당히 높던데 부상은커녕 소리 하나 없이 착지하다니, 외모뿐만 아니라 이쪽 방면으로도 인간과 다른 종족이라는 게 티가 나는구나.

"내가 아니라 여기 손님이."

"손님…입니까. 알겠습니다."

나를 힐긋 본 녀석이 나무와 나무 사이를 몇 번 박차고 높은 나뭇가지 위로 훌쩍 뛰어오르더니, 징검다리를 건너듯 나뭇가지를 밟아 가며 순식간에 사라진다.

절로 감탄이 나오는 움직임이었다.

"제이카르도 저게 가능할까...."

"제이카르...?"

아무리 그래도 이런 식의 감탄은 입밖으로 내선 안 되는 거였는데.

요정왕의 뾰족한 귀가 파륵, 떨렸다. 귀를 의심하듯 미간을 살짝 좁히며 나를 돌아본 그가 이내 자신이 제대로 들었다는 것을 확신한 듯 얼굴 전체를 와락 찌푸린다.

마왕의 대행역도 맡는 2인자의 이름을 그가 모를 리가 없겠지. 모른다 해도 정황상 내가 말하는 상대가 마족이라는 것은 예측 가능할 것이다.

감히 요정족에 사이가 좋지도 않은 마족을 빗댔으니 그의 기분이 어떻겠는가.

'망할….'

명백한 이쪽의 실수인 상황. 실례했다며 사과하려는데,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날 선 목소리가 날아왔다.

"그래, 마왕의 마기에 오염된 우리 일족의 전사 말이지. 그 이름 참 오랜만에 듣는군. 그는 잘 지내던가?"

허억, 진짜 연관이 있는 거였어!

이전에도 말했지만 마왕의 힘은 순수하게 자기들끼리만 뭉쳐 마족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아무래도 제이카르는 요정족에 마왕의 힘이 깃들어 탄생한 요정족 출신의 마족인 모양이다.

요정왕이 마왕을 싫어할 만하네....

'그리고 이제 나도 싫어하겠지.'

성격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던데, 내가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는 말실수까지 했으니....

무지는 썩 좋은 변명이 되지 않는다.

차마 잘 지낸다고 답할 수도, 그렇다고 아니라고 답할 수도 없어 우물쭈물하길 한참, 물끄러미 나를 보던 요정왕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밀었다.

"...?"

"손. 치료해야지."

누그러진 목소리가 아이를 어르듯 부른다.

반사적으로 그의 손 위에 다친 손을 얹었다가 아차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약초 가지러 간 그 녀석 아직 안 오지 않았나? 설마 올 때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싶은 순간, 요정왕이 근처 나무 아래에서 자그마한 상자를 집어 드는 것이 보였다.

'...이미 왔다 갔구나.'

기척 하나 없이 빠르기도 하지.

순순히 손을 맡겼다. 손끝에 감겨있던 붕대가 풀리고 작은 상처가 드러났다.

"...손가락을 거의 반쯤 잘랐군. 폭은 좁지만 상처가 깊어."

그렇게 말하니 작은 상처가 아닌 것 같네...?

뻘쭘해져서 어색하게 웃고 있는데, 요정왕이 상자를 열고 약초를 꺼내 뭉개며 말을 붙였다.

"정신적 안정을 취하기 위해 왔댔나."

아닌데요. 그거 마왕이 멋대로 붙인 핑계인데.

"우리 종족의 영역이 관광지는 아니다만, 인간이 우리 영역에 발을 들인 것은 처음이기도 하고, 기왕 왔으니 특별히 치료가 끝나면 기념으로 직접 안내해 주지."

네? 아니 잠깐만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흠칫하여 거절하려던 순간, 그가 뭉갠 약초를 손끝에 붙이더니 꾹 눌렀다. 예고 없는 행동에 깜짝 놀란 몸이 굳었다.

아! 아프…아…프지 않네?

'...꿈인가.'

다 나았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잠시 눈을 깜빡였다.

약초를 떼고 드러난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렸다. 누가 보면 맨살에 바느질을 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언제 상처가 났냐는 듯 말끔한 모습.

...약초 탐난다.

욕망 어린 눈을 눈치채기라도 한 건지, 요정왕이 멍하니 약초 상자를 보고 있는 내 앞에 대고 손가락을 튕겼다.

"데온 하르트."

"죄송합니다."

"...뭐?"

아, 마족들이 뜬금없는 사과를 할 때 내 표정이 저랬겠구나.

궁금하지도 않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머쓱한 표정으로 요정왕의 시선을 피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그냥 데온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그래, 데온. 내 호의가 불편해 보이던데."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살피던 그가 내 손을 다시 가져와 실밥을 풀며 대수롭지 않게 말문을 열었다.

알고 있었으면서 그런 거냐? 이 나쁜....

'...잠깐, 내가 불편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아무도 없는 곳까지 데려왔다는 것은....'

날 죽이려고...?!

아니, 근데 날 치료해 줬잖아. 기껏 치료해 놓고 죽일 리는 없을 테고. 도대체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