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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0-470

460화 너 요새 운동하니? (1)

지셀이 뿜어내는 기운은 이제 붉은색을 잃고 점점 더 진한 어둠으로 물들고 있었다.

"정신이 나가 스스로 이룬 깨달음마저 잊어버린 놈이 무슨 초인이란 말이냐."

구원교가 간과한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초인인 멜키르가 힘을 폭발시키면 엄청나게 강해질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초인은 심상에 자신만의 세계를 정립하고 그것을 구현하는 자다. 이성을 잃고 자신의 세계를 잃어버린 멜키르는 더 이상 초인이라 할 수 없었다.

"기술도, 깨달음도, 의지도 모두 잃어버리고 그저 비대하고 혼탁하게 이루어진 엉터리 마나나 휘두르면 오히려 더 약해질 뿐이다."

일반 기사라면 그게 도움이 됐을 것이다. 어쨌든 몇 배나 육체적 능력이 향상되니까.

하지만 초인은 아니다. 초인은 자신만의 원칙으로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는 자다. 그 능력을 잃는다면 다른 초인을 상대할 수 없다.

멜키르는 심상뿐만이 아니라 오러 블레이드도 못 썼다. 성전사는 단순히 힘만 무지막지하게 강해질 뿐이다.

"네놈들 실험은 실패다. 너희는 모르겠지만 전생에도 실패했었어."

쓰면 반드시 이성을 잃고 죽어 버리니 그들로서도 초인을 데리고 실험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구원교의 사제들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크아아악!"

멜키르는 지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그저 괴성을 지르며 눈앞의 목표를 없애는 것에만 집중했다.

지셀의 주먹이 다시 멜키르의 얼굴에 꽂혔다.

콰아아앙!

멜키르는 버텨 보려 했지만 지셀은 멈추지 않았다. 몇 번이고 쉬지 않고 멜키르의 얼굴과 몸을 가격했다.

콰앙!

콰아앙!

콰아아앙!

으지직!

결국 멜키르의 한쪽 얼굴이 함몰됐다. 검은 기운으로 강화된 그의 육체도 더 강한 힘에는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콰아앙! 콰앙! 콰앙!

멜키르는 연속된 공격에 팔이 부러지고 다리도 반대로 꺾였다. 이제는 반격조차도 할 수 없다.

쓰러지는 것도 지셀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주먹은 엄청난 속도로 멜키르의 몸을 두들겼다.

콰앙! 콰앙! 콰앙!

멜키르의 몸을 지탱하던 검은 기운은 지셀에게 맞을 때마다 흩어지며 사라졌다. 지셀이 주는 충격을 이겨 내지 못한 것이다.

드드드득.

지셀이 다시 주먹을 뒤로 당기자 강렬한 기운이 맺혔다. 그 잠깐의 틈 사이에 멜키르는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하지만 그가 완전히 쓰러지기도 전에 지셀의 주먹이 그의 얼굴에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콰아아앙!

멜키르의 머리가 땅바닥에 깊게 꽂혔다.

"크르르륵...."

멜키르의 눈에 이성의 빛이 돌아왔다. 그러나 안면이 완전히 함몰된 상태라 그의 생명력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그저 지독할 정도로 끈질긴 검은 기운이 꺼져가는 그의 생명을 겨우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완전히 정신을 차린 멜키르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자, 자깐..."

이빨도 완전히 다 박살 나 발음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멜키르는 두려워하는 눈빛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자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기운에 감싸여, 눈을 붉게 빛내고 있는 자.

'어째서 구원교가 원하는 성전사의 최종 모습이 저놈에게... 아니, 왜 내 정신이 돌아온 거지? 이성을 잃는 게 아니었나?'

멜키르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무지막지한 폭력으로 이성도 되찾게 하는 지셀이 다시 주먹을 들어 올렸기 때문이다.

"얼떨결에 엄마의 원수를 갚네. 나쁘지 않아. 아니, 사실 아주 좋은 상황이야. 원수도 갚고 공작가의 초인도 하나 없앨 수 있었으니까."

지셀이 붉은 눈을 빛내며 씨익 웃었다. 이놈한테 딱히 원한은 없었지만 어쨌든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원흉이라지 않나.

다만, 그 덕분에 어머니가 아버지와 만나 자신이 태어났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셀은 멜키르를 더 괴롭히지 않고 깔끔하게 보내주기로 했다.

"조금 아플 거다."

콰아아아앙!

그의 주먹이 쓰러져 있는 멜키르의 얼굴을 향해 다시 날아갔다.

콰지직!

멜키르는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다. 얼굴이 완전히 박살 나며 땅 깊숙이 박혀 버렸기 때문이다.

"후...."

지셀이 마나를 가라앉히고 허리를 펴며 일어섰다.

쉽게 이긴 거 같지만 사실 그도 온몸이 욱신거렸다. 마나도 절반 이상을 썼다. 확실히 성전사라 불리는 괴물들의 힘은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 테넌트랑은 좋은 싸움이 됐을 텐데."

지셀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깨달음은 잃었어도 그 정도 수준은 될 거 같았다.

물론 제대로 된 초인인 테넌트가 결국 이기겠지만 말이다. 상당히 고전한 뒤에 말이다.

"콩아, 이제 와라."

흑왕은 싸움의 충격파를 피해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이제 그 정도는 익숙해진 상태다.

아주 여유롭게 주변에서 풀을 질겅질겅 씹어 먹고 있었다. 딱히 주인이 당할 거라고 생각도 안 하는 거 같았다.

"가자."

길리언을 미리 보내 큰 걱정은 들지 않지만 그래도 자신이 확실히 확인해야 했다.

지셀은 흑왕을 타고 바로 영주성으로 달려갔다.

* * *

포위를 벗어났던 암살자들은 어둠을 틈타 영주성에 진입했다. 일반적인 경비병들은 그들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에 진입하고 난 뒤부터가 문제였다. 기사들과 병사들이 잔뜩 깔려 있기에 그들은 숨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

파악!

주변과 동화된 그들은 어떻게든 시선을 피하려 했다. 기둥과 천장, 여러 사물의 그림자를 이용해 어둠을 타고 다녔다.

하지만 그게 완벽할 수는 없었다. 정상적인 이동 경로를 벗어난 그들은 숨겨진 마법 경보에 감지되고 말았다.

지이이잉!

강력한 마력의 파동이 일어나며 경보가 울렸다.

성에 남아 있던 기사들과 병사들이 암살자들을 쫓았다.

"잡아라!"

"저기에 있다!"

"어서 알려!"

암살자들은 어떻게든 추격을 피해 움직였지만 몇몇은 결국 잡히고 말았다.

촤악!

"크윽!"

포위된 암살자들은 기사와 병사들의 협공에 어찌하지 못하고 밀려났다. 그들은 뛰어난 암살자였지만, 몰려드는 인원을 다 해치우고 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마지막까지 숨겨 두었던 힘을 꺼내 들었다. 암살에는 어울리지 않는 그 힘을 말이다.

콰아아앙!

"크아아아악!"

성에 진입한 암살자들은 생명력을 폭발시키며 괴물로 변했다.

포위에서 탈출한 이들은 모두 성전사로 변할 수 있었다. 영주성 내에서 최후의 전투를 벌여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자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나머지가 희생했던 것이다.

"물러나라! 성전사란 놈들이다!"

병사들이 뒤로 물러나고 기사들이 암살자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배나 강해진 그들은 기사들을 압도했다. 페르디움의 몇 안 되는 마법사들까지 합류했지만 괴물이 된 암살자들을 쉽게 저지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곳에는 그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휘리리리릭!

콰아아앙!

어디선가 날아온 도끼에 괴물이 되어 날뛰던 암살자 하나의 머리가 단숨에 박살 났다.

"길리언 님이다!"

누군가가 반갑게 외쳤다.

노한 표정으로 나타난 그는 누구보다 앞장서 달려가 암살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그의 딸, 레이첼이 머물고 있다. 당연히 미친 사자처럼 날뛸 수밖에 없었다.

콰아앙! 콰앙! 콰앙!

길리언에 이어 펜리스 기사들까지 참전하자 성전사가 된 암살자들은 금세 쓰러졌다. 애초에 수 차이가 너무 컸다.

얼마 후 복귀한 페르디움의 기사들과 병사들도 영주성을 가득 채울 정도로 몰려들었다.

발각된 암살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전부 쓰러졌다. 그들이 아무리 뛰어나고 강하다 하더라도 수많은 기사와 병사들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란돌프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뭐야? 다 죽인 거야? 더 없어?"

쓰러진 암살자들의 수는 여덟. 란돌프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까 대충 열 명? 열한 명? 그 정도 되지 않았어? 설마 아직 안 잡힌 놈들이 있는 거야?"

기사들도 표정을 굳혔다. 마법 경보도 울리지 않았고, 성 곳곳을 가득 메운 기사들과 병사들도 남은 놈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아직 성 밖에 숨어 있을 수도 있으니 일일이 수색해야 한다. 그렇게 찾으면 그래도 다행인데, 만약 암살자들이 완전히 물러났다면 확인이 안 되니 계속 경계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상처투성이인 벨린다가 나타나서 외쳤다. 그녀는 무척 지쳤는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아가씨 방은 어떻게 됐어! 레이첼은! 후작님하고 가신들도!"

란돌프가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벨린다? 몸이 왜 그래? 괜찮아? 어디서 다친 거야?"

"아가씨하고 레이첼 지키고 있냐고!"

"아니, 왜 갑자기 반말이야.... 지, 지키고 있지! 지금도 기사들하고 병사들이 아예 방 안에 들어가 있어!"

벨린다가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전에, 다시 마법 경보가 울렸다.

챙그랑!

그러고는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벨린다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아가씨 방이잖아!"

파앗!

벨린다의 몸이 어둠으로 감싸이며 사라졌다. 순간적으로 보인 그 기술에 길리언이 살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벽을 넘어선 거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감탄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레이첼은 엘레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길리언과 기사들이 엘레나의 방을 향해 급하게 움직였다.

예상대로 남은 암살자들은 벽을 타고 엘레나의 방으로 침입했다. 그곳에 설치되어 있던 마법 경보가 울렸지만, 암살자들의 움직임은 빨랐다.

암살자들은 겁에 떨고 있는 두 명의 여자를 발견했다. 그중 목표는 금발 머리의 여자였다.

"크아아아!"

창문을 깬 암살자는 바로 성전사로 변해 돌진했다.

물론 그의 앞을 막은 자들이 없던 건 아니다.

"막아라!"

네 명의 기사와 수십 명의 병사들이 두 여자를 에워싸고 있었다. 바깥에서 방 앞을 지키던 병사들도 문을 박살 내며 들어왔다.

가장 먼저 달려 나간 기사들이 검을 휘둘렀다.

카아앙! 카앙! 카아앙!

공격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 성전사와 처음 싸워 보는 기사들은 깜짝 놀랐다.

더 힘을 끌어올려 상대를 잡으려 했지만 이미 괴물은 무지막지한 힘으로 돌파한 뒤였다.

콰아아앙!

"으아아악!"

병사들까지 순식간에 밀려 버렸다. 괴물은 포효하며 손을 뻗었다. 이대로 조금만 달려가면 목표의 목을 부러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엘레나를 지키는 건 기사들뿐만이 아니었다.

쉬익!

갑자기 천장에서 여덟 명이나 되는 하녀들이 떨어지며 괴물의 앞을 막았다. 바로 지셀과 벨린다가 양성한 암살자들이었다.

카카카카캉!

괴물로 변한 암살자의 돌진은 거기서 막혔다. 하녀들은 단검에 연결된 단단한 줄로 괴물의 몸을 포박한 뒤에 공격했다.

뒤늦게 달려온 기사들도 마나를 죄다 끌어올려 괴물의 등을 마구 베었다.

퍼억! 퍼억! 퍼억!

사방에서 들어오는 공격에 괴물은 순식간에 걸레짝이 되었다.

하지만 들어온 놈은 하나가 아니었다.

"크아아아악!"

바로 뒤를 이어 한 놈이 더 달려들었다. 이미 한 번 겪어 본 기사들은 모든 힘을 끌어올려 괴물을 공격했다. 엘레나의 앞을 막은 하녀들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 괴물을 저지하고 모두가 무심코 긴장을 풀었다.

파악!

그 짧은 틈을 타, 세 번째 암살자가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막아!"

기사들이 다급하게 검을 휘두르고 하녀들 또한 단검을 던졌지만 치명상을 주지는 못했다.

암살자는 몸 곳곳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결국 원하던 목표에 다다랐다.

아군의 희생을 발판 삼아 기회를 살린 덕분이었다.

암살자가 목표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바로 그때, 레이첼이 엘레나의 몸을 밀쳐 내며 암살자의 앞을 막았다.

"레이첼!"

엘레나의 외침을 들으며 레이첼은 눈을 감았다.

"칫!"

암살자는 목표 대상을 향해 잠깐 시선을 돌렸지만, 어느새 하녀들이 사이를 파고든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암살자는 레이첼의 목을 손으로 콱 붙잡았다.

"움직이지 마라!"

그로서는 도박이었다. 후작 영애가 아니니 인질이 통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독이 묻은 단검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모두가 움직임을 멈췄다. 엘레나만큼은 아니어도 레이첼 역시 페르디움 영지에서 무척이나 중요한 인물이었다.

암살자의 도박은 성공했다. 그는 팔로 레이첼의 목을 강하게 감싸고 헐떡였다.

"물러나라. 이년이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다들 한 걸음씩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고 암살자는 고민에 빠졌다.

'젠장, 목표는 페르디움 후작 영애였는데 이년은 도대체 누구지? 일단 단주님이 올 때까지 버티자.'

어차피 자신이 여기서 죽는 건 기정사실이다. 그렇다면 임무라도 성공해야 했다. 안 그러면 개죽음일 뿐이다.

멜키르가 온다면 자신이 소란을 피우는 틈을 타 페르디움 후작이나 후작 영애를 암살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레이첼!"

그때 막 도착한 길리언은 인질극을 벌이는 암살자를 보고 이를 갈았다. 레이첼의 얼굴에는 시뻘겋게 피가 몰려 있었다.

딸이 붙잡혀 있는 걸 보니 당장 달려가서 암살자의 머리를 부수고 싶었다.

꿈틀거리는 그를 벨린다가 제지했다.

"기다려요. 한 번 실수하면 끝이에요."

암살자는 수준 높은 자다. 저기서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바로 레이첼의 목이 부러질 것이다.

다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대치만 하고 있을 때 지셀이 도착했다.

"대공자님!"

"영주님!"

모두의 반응에 암살자는 방금 나타난 자가 펜리스 백작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셀은 서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곱게 죽고 싶으면 놔줘라. 네 단주처럼 머리가 박살 나서 죽고 싶지 않으면."

"뭐? 단주님이... 죽었다고?"

"그래."

암살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의 단주가 죽다니. 펜리스 백작이 그렇게 강하다는 말인가?

"거짓말, 거짓말하지 마라. 단주님도 초인이다. 그런데 네가 그렇게 멀쩡하다고?"

펜리스 백작은 조금 지저분해지고 피곤해 보이는 걸 빼고는 멀쩡해 보였다. 아무리 강해도 같은 초인이 싸웠는데 저럴 수는 없었다.

지셀이 벨린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분이 처리했거든."

확실히 그녀는 상처투성이였다. 암살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 도무지 믿을 수 없었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할래? 곱게 죽을래? 아니면 아프게 죽을래?"

"...."

지셀은 대화를 유도하며 마나의 실을 뿌렸다.

상대의 수준을 보아하니 최소 상급이다. 몸을 구속해도 레이첼의 목을 부러뜨릴 확률이 높다. 그래서 암살자의 뒤에 떨어진 파편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고 있었다.

'단숨에 머리를 뚫는다.'

다른 때와 다르다. 자칫 실수하면 레이첼이 죽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지셀은 엄청나게 집중을 한 상태였다. 다른 이들도 긴장한 채 모두 암살자만 노려보고 있었다.

암살자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으려고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후작 영애만큼은 아니어도 중요한 인물 같은데 이년이라도 죽일까? 그러고 나서 힘을 폭발시키면....'

그렇게 모두가 긴장, 집중하고 있을 때.

다들 예상도 못 한 일이 일어났다.

"레이첼을 놔줘!"

레이첼 덕분에 목숨을 구한 엘레나가 갑자기 암살자의 팔을 덥석 붙잡으며 달라붙었다.

묘하게 움직임이 빨라 옆에 있던 하녀들마저 순간 그녀를 놓치고 말았다.

암살자는 희열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는 더 고민하지 않고 비어 있는 손으로 엘레나를 공격하려 했다.

우지지직!

레이첼을 붙잡고 있던 팔이 부러지지 않았으면 말이다.

"크아악!"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지셀이 띄워 올린 파편이 암살자의 머리를 단숨에 꿰뚫었다. 동시에 주변에 있던 모두가 암살자를 공격했다.

파파파파팍!

암살자는 순식간에 온몸이 터지고 뚫리고 베이며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쿠웅!

암살자가 쓰러졌지만 누구도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다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엘레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레나 또한 눈만 껌뻑이며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지셀이 떠듬거리며 물었다.

"에, 엘레나, 너...."

"어? 어?"

"너 요새 운동하니?"

461화 너 요새 운동하니? (2)

지셀의 물음에 엘레나는 당황스러워하며 답했다.

"우, 운동 같은 거 안 해."

엘레나는 귀족가의 영애다. 완전히 몰락한 귀족이 아닌 이상, 살면서 평범한 귀족 영애가 힘을 쓸 일은 없다.

페르디움이 아무리 가난한 영지라 해도 왕국의 지원을 받던 변경백이었다. 사용인 정도는 쓸 수 있다.

그러니 엘레나도 딱히 힘을 쓰는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수련도 하지 않는다.

오직 영애로서 품격을 기르기 위한 수업만을 받아 왔다. 힘을 써 봤자 고작 그에 관련된 정도였다.

이번이 정말 태어나서 처음으로 온 힘을 다해 본 것이다.

"으, 으...."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한지 엘레나가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았다. 그냥 한계치를 모르고 살았다. 힘을 써 볼 일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지셀이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분명 그때....'

― 오, 오빠! 도망가자!

― 괜찮아, 놔 봐. 너 은근히 힘세다?

― 빨리 도망가자고!

엘레나를 죽이려고 암살자 세 명이 페르디움을 찾아왔을 때, 그녀는 지셀의 팔을 붙잡고 도망가자고 했다.

그때 지셀은 팔을 쉽게 빼지 못했다.

― 힘은 또 왜 이렇게 세? 너 운동하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냥 보통 여자아이보다 힘이 조금 더 세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당시엔 암살자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어 깊이 생각하지 못했고, 나중에도 회귀 직후라 자신의 힘이 불안정해서 그랬겠거니 여기고 넘어갔다.

'그런 경우가 또 있었지....'

케인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돈을 받기로 했을 때, 엘레나는 지셀에게 슬쩍 팔짱을 끼고 친한 척하며 뭔가 얻어내려 했다.

그때도 지셀은 가볍게 팔을 빼려 했지만 실패했다.

― 아니, 너 진짜 운동하니? 뭔 힘이 이렇게 세.

지셀의 머릿속에 이상했던 점이 마구 떠올랐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넘어갔던 부분들이 말이다.

벨린다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엘레나를 그냥 수상할 정도로 건강하지만 평범한 여자아이라 생각하며 키웠다.

'그래, 확실히 아가씨는 아픈 적이 없었어. 그 흔한 감기조차도 걸린 적이 없었지. 도련님이 매일 콧물하고 기침을 달고 살았던 거에 비하면....'

당시에는 허약한(?) 지셀을 돌보느라 상대적으로 건강한 엘레나에게 신경을 덜 쓸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래도 어렸을 때는 이 정도로 힘이 센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또래보다 나은 정도이지, 성인보다 강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서 아네트를 생각하며 혹시나 했던 마음도 금세 접었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그때도....'

알포이와 마법사들이 처음 영지에 왔을 때, 바네사를 부려먹다가 지셀에게 혼난 적이 있었다.

직접 짐을 옮기라고 했지만 알포이와 마법사들은 그걸 제대로 들지조차 못했다. 오죽하면 데리고 온 마부가 도와준다고 했을까.

그때 사용인들과 함께 나타난 엘레나는 그들의 짐을 양손 가득 가볍게 들어 주었다.

벨린다도 그때 손뼉까지 치며 호들갑을 떨지 않았는가.

― 어머, 안 무거우세요? 요새 운동하시나 봐요!

― 아이참, 그런 거 안 해. 이거 그렇게 무겁지도 않은걸.

그냥 알포이와 마법사들이 너무 허약해서 그런 거라 생각했다. 지금이야 건강하지만 그때 그들은 정말 허약했으니까.

지셀과 벨린다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두 사람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신력이다. 분명 신력을 타고난 게 분명해.'

'아네트 님의 신력이 아가씨에게 이어졌을 줄이야.'

왜 그때 자세히 알아볼 생각을 안 했을까. 왜 그냥 힘 좀 센 여자아이라 생각했을까.

솔직히 신력은 아무나 타고나는 게 아니니 생각도 못 했던 이유가 컸다.

'신력을 가졌는지 확인하려면 시간이 걸리지.'

'어릴 때 이후로 제대로 힘쓰는 모습을 본 적도 없고 신경도 안 썼으니 알 수가 없었어.'

신력을 가진 자는 일반인들과 근육의 밀도, 구조가 달라 강한 힘을 낼 수 있지만... 태어났을 때부터 큰 힘을 낼 수 있는 건 아니다.

보통은 나이를 먹어 가면서 근육도 같이 성장하며 힘이 강해진다. 그렇기에 꾸준히 신경을 써야 신력을 타고났는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페르디움에서는 엘레나에게 신경을 써 줄 여유가 없었다. 점진적으로 강해지는 엘레나의 힘에 다들 익숙해져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부분도 분명히 있었다.

엘레나 본인도 힘을 쓸 일이 없으니 알아차리지 못했을 터. 온 힘을 다해야 하는 위기 상황을 이번에 처음 맞닥뜨리고 각성했을 확률이 높았다.

지셀이 눈을 빛냈다.

'우리 집안에 이런 보석이 있을 줄이야. 이걸 이대로 썩힐 수는 없지.'

솔직히 암살자의 팔이 부러진 건 운이 좋았던 덕분이다. 암살자는 방심한 상태에서 갑자기 공격당해 반응하지 못한 것뿐이다.

아무리 신력을 타고났다 한들 본격적으로 싸운다면 엘레나는 초급 기사 하나조차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마나와 기술을 익히지 않으면 아무리 힘이 강해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전생에는 암살자에게 당해서 몰랐던 거지만....'

아마 전생의 암살자들도 발악하는 엘레나에게 손목 하나 정도는 부러지지 않았을까?

지셀은 괜히 밝은 미소를 지으며 엘레나에게 다가가 친한 척을 했다.

"엘레나, 무서웠지? 고생 많았어."

"어? 음?"

"아휴,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기도 해서 조금 미안하네. 내가 보답으로 옷도 사 주고 장신구도 사 줄게."

엘레나가 수상쩍다는 눈길을 보내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지셀이 엄청난 부자인 건 이제 왕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지셀은 사치를 안 하기로도 유명했다.

벌어들인 돈을 전부 영지 개발과 전투 준비에 쏟아붓기 때문이다. 심지어 뇌물을 받은 것도 그쪽에 쏟아붓는다.

'부자가 됐는데도 제대로 선물 하나 안 사 줬으면서!'

그것 때문에 서운하다고 레이첼에게 욕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영지가 부자가 되면 뭐 하는가. 자신은 여전히 가난한 영애였다.

그런데 갑자기 저렇게 친한 척하면서 뭘 사 준다고 한다? 뭔가 노리고 있는 게 확실했다.

"뭐, 뭔데? 갑자기 왜 그러는데?"

"아휴, 내가 미안해서 그러지. 우리 동생 그동안 너무 안 챙겨 준 거 같아서."

"우, 웃기시네. 오빠 그럴 사람 아니잖아? 어? 어? 가까이 오지 마. 지금 당신 굉장히 수상해."

다가가던 지셀이 엘레나의 경고에 걸음을 멈췄다. 그래도 그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진짜라니까? 이번에는 갖고 싶은 거 다 사 줄게. 뭐든 말만 해."

"지, 진짜?"

"그럼! 진짜지! 아주 그냥 원하는 걸로 다 사 줄게! 내가 큰마음 먹고 쓴다."

"진짜, 진짜지?"

"그렇다니까.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그러면 그렇지. 그냥 줄 사람이 아니다. 엘레나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물었다.

"뭔데? 무슨 부탁인데?"

"후우...."

지셀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여기가 승부처다. 이제 설득을 해야 한다.

그는 정말 진심을 담아, 세상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북부군에 들어와라."

* * *

"휴, 이제 끝났네요."

"그래, 다들 고생 많았어."

벨린다와 마주 앉은 지셀도 조금 피곤한 낯빛으로 몸을 의자에 기댔다.

며칠간 정말 바쁘게 움직였다. 공작가도 이번만큼은 성공하려고 작정했는지 꽤나 비싼 미끼까지 풀었다.

문제를 어찌어찌 해결하고 나니 상당한 피로가 몰려왔다.

벨린다가 조금 착잡해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엘레나 아가씨를 데리고 가시려고요?"

"그래야지. 저 재능을 그냥 내버려두는 건 죄라고, 죄."

"너무 가기 싫어하시는데요?"

"으음...."

지셀의 한쪽 볼에는 빨간 손바닥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싫다는 엘레나를 몇 시간 동안 붙잡고 설득하다가 결국 따귀를 한 대 맞은 것이다.

지셀은 설득을 위해 그냥 맞아 줬지만, 순간 목이 돌아가서 죽을 뻔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귀족이면 귀족의 의무를 다해야지. 저런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안 싸우는 건 죄야. 어떻게든 끌고 갈 거야."

"휴우...."

벨린다는 그저 어깨만 으쓱였다. 그녀는 몇 번이나 위험하다고 반대했지만 지셀은 요지부동이었다.

"신력 때문에만 이러는 건 아니야. 이번 일을 겪어 보니 엘레나도 제 한 몸 지킬 정도는 되어야겠더라고. 레이첼도 마찬가지야. 당장 전투에 참여시키지는 않더라도 데리고 가서 수련은 시킬 거야."

크게 틀린 말은 아니기에 벨린다도 끝까지 반대하지는 못했다. 어쩌면 지셀과 자신의 옆이 가장 안전한 곳일 수도 있다.

무기술도 익히게 하고 마나 연공도 익히게 한다니 옆에서 자신이 잘 지켜 주는 수밖에 없었다.

지셀은 벨린다가 또 반대할까 봐 바로 화제를 돌렸다.

"엘레나 일은 그렇게 하기로 하고. 우리 엄마에 대해서 좀 자세히 들어보자.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20년 전이면 뭔가 내가 태어난 시기랑 안 맞는 거 같은데."

"30년은 안 넘었으니까 대충 20년 정도가 지났다고 얘기한 거죠. 그보다는 더 됐어요."

"...그러면 벨린다 진짜 나이가 몇이라는 거야?"

"제가 항상 뭐라고 가르쳤죠?"

"...여자의 '진짜' 나이는 묻지 않는다."

"그래요."

"...."

능청스러운 대답에 지셀은 할 말이 없어 고개를 저었다.

"어휴.... 그래서 우리 엄마의 정체가 뭐야? 어떻게 페르디움까지 오게 된 거고. 어떤 사연이 있었길래 저 멜키르란 놈이 우리 엄마를 찾아다니기까지 한 거야?"

"후우...."

벨린다는 한숨을 내쉬더니 옆에 두었던 낡은 상자 하나를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지셀이 불렀을 때부터 이런 얘기를 할 줄 알고 가져온 것이었다.

"이건 뭐야?"

"제가 그동안 페르디움에 숨겨 놓았던 거예요. 먼저 아네트 님과 제가 있었던 단체에 관해 아시는 게 나을 거 같아서요."

벨린다는 대부분의 개인 물건을 페르디움에 숨겨 놓고 지셀을 따라갔다.

펜리스부터 카발디, 데스몬드까지 계속 자리를 옮겨 다닌 지셀이었기에 정리가 될 때까지 중요한 건 이곳에 보관한 것이다.

"여기에... 엄마의 비밀이...."

지셀은 침을 꿀꺽 삼키며 상자를 열었다.

딸깍.

상자 안에는 세 권의 책자가 들어 있었다. 비교적 깨끗한 책 두 권과 상당히 낡아 보이는 책 하나.

겉보기에도 완전히 다른 책의 모습에 지셀이 떨리는 눈으로 두 권의 책을 먼저 바라보았다.

책 표지에 적혀 있는 제목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이게... 우리 엄마의 비밀이라고?"

"네."

지셀이 눈을 몇 번이나 껌뻑거리고 책 제목을 다시 확인했다.

[기억을 잃은 전 남편이 알고 보니 제국의 황태자?]

[마차에 치였더니 왕국의 공주로 환생했습니다.]

아무리 봐도 시중에 판매되는 소설들이었다. 고든이 예전에 썼던 '투명 소드마스터' 같은, 그냥 소설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어머니의 비밀이 있다니 확인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지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호, 혹시 재혼이셔?"

"네? 무슨 소리세요?"

"사실 왕국의 숨겨진 공주님이셨고?"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지셀이 짜게 식은 눈빛으로 두 권의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러면 이건 뭔데?"

"어머, 어머. 그게 왜 거기 있대."

그제야 책을 본 벨린다가 화들짝 놀라며 잽싸게 뺏었다.

아주 예전에 지셀과 엘레나의 육아에 지칠 때, 가끔 짬을 내서 보던 소설이었다. 잘 보관해 놓겠다고 한 게 저기에 같이 넣고 깜빡했던 모양이었다.

민망한 듯 배시시 웃은 벨린다가 말했다.

"아, 제가 취미로 보던 책이 거기 있었네요. 이건 신경 쓰지 마시고 다른 거 보시면 돼요."

"...그래."

정신을 차린 지셀이 남은 책을 집어 들었다. 상당히 낡고 오래된 책이었다.

책에 적힌 건 한 단체에 관한 정보와 벨린다가 익힌 기술들이었다.

"그림자 기사단이라...."

전생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책자에도 그저 그들의 임무가 루타니아 왕실을 암중에서 수호하는 집단이라는 내용만 남겨져 있었다.

왕실에 위협이 되는 적들을 처치하는 비밀 단체. 이 단체의 수장이었던 사람이 바로 자신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그림자 기사단은 왕국의 모든 정보를 틀어쥐고 귀족들의 살생부를 작성할 만큼 강력한 단체였다.

하지만 그들의 기원이 무엇인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나오지 않았다. 무언가 기록이 끊긴 듯한 느낌이었다.

다만 특이한 점은....

"한 가문이 단장 자리를 독점해서 이어 내려왔다고? 이 왕국에서?"

"네, 대대로 이어진 자리예요. 아네트 님의 가문에서만 비전을 익히고 그림자 기사단장 자리를 맡을 수 있었죠."

"응? 그건 벨린다에게 전수됐잖아?"

"아네트 님은 자신의 대에서 그걸 끊으려 하셨어요. 그래서 저에게 전수해 주신 거예요. 왜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엄마한테 다른 가족은 없었던 거야?"

"네, 제가 알기로는요. 워낙 비밀이 많으셨던 분이라.... 그리고 그런 게 매력적이라고 하셨었거든요."

지셀은 벨린다가 자신에게 가르친 것들을 누구에게 배웠던 건지 깨달았다. 어머니의 교육이 자신에게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 그런데 이 단체가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만들어졌는지는 나와 있지 않네."

이런 강력한 권한을 쥔 단체가 이유 없이 생겼을 리가 없다. 게다가 이미 오래전부터 암중에서 구원교와 싸운 흔적이 있었다. 허투루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지셀이 대충 다 읽은 듯하자 벨린다가 부연 설명을 했다.

"아마 건국왕 때부터 있었던 단체일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루타니아 왕실을 지켰던 게 아닐까요? 물론 기록이 없어 확신할 수는 없지만요."

"그러면 그림자 기사단이 지금도 왕실에 존재하는 건가?"

"아니요, 제가 알기로는 멜키르 때문에 기사단은 없어졌어요. 살아남은 자들이 없었으니까요. 그 뒤에 다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가 배신자였나?"

"네, 멜키르가 부단장이었거든요."

벨린다는 담담하게 과거의 일을 말해 주었다. 부단장이었던 멜키르가 아네트를 기습해 큰 부상을 입혔다고.

그때 단원들도 대부분 죽고, 그림자 기사단은 와해되었다고 했다.

그 당시 어렸던 벨린다는 그저 멜키르와 배신자들이 협공했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다시 보니 그게 아니었던 거 같네요. 아네트 님을 치기 위해 외부 세력과 손을 잡았던 거 같아요. 공작가와 구원교 말이에요."

"싸울 당시에 상대에 관해 다른 말 들은 건 없어?"

"저는 당시에 견습 단원이었어요. 아네트 님이 그 일에 관해서는 말씀을 안 하셔서 자세히 알 수가 없었어요."

"그렇군.... 그래도 대충은 알 거 같아."

공작가가 야망을 내비치기 시작한 건 겨우 10여 년 전이지만, 구원교와 접촉을 하고 나라를 뒤집을 준비를 한 건 20년이 넘었다는 뜻이다.

그전까지는 전혀 움직임이 드러나지 않았던 구원교다. 분명 그림자 기사단이 무너질 때부터 그들이 움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지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

"워낙 숨기는 게 많은 놈들이니 알 수가 없군. 신흥 종교 같지도 않고 말이야."

그들이 사용하는 검은 기운은 지금까지 쓰이던 마나나 신성력과는 궤를 달리하는 힘이다. 그런 힘이 갑자기 세상에 나타났다.

구원교가 새로운 힘을 발견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에레네스의 반응을 보면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거 같았다.

그럼에도 그들에 관해 기록은커녕 구전되는 말조차 없다니.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뭔가 대대적인 조작이 있었던 거 같은데....'

그게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래도 기회가 나면 에레네스에게 물어봐야 할 거 같군.'

에레네스가 쉽게 말할 거 같지는 않으니 조금씩 캐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만나고 싶은 사람이 한 명 더 생겼다. 논리적인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직감에 더 가까웠다.

'분명 알고 있는 게 있을 거야.'

구원교가 멜키르를 도운 것은 그림자 기사단을 무너트리고 왕실을 치려는 의도였다고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의 목적인 루타니아의 국왕을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의 가문과 구원교, 그리고 왕실. 이 셋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로 엮여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462화 너 요새 운동하니? (3)

루타니아의 국왕은 오래전부터 병석에 누워있었다. 그렇기에 재상과 브랜포드 후작이 국정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20여 년 전이라면 브랜포드 후작이 제대로 된 권력을 잡기 전, 아직 국왕이 쇠약해지기 전이었다.

'왕실에는 이 사태와 연관된 기록이 있을지도 몰라. 국왕이라면 알고 있겠지.'

그런 의심에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었다.

바로 공작가가 취하는 전략 그 자체다.

'공작가는 전생에도 바로 수도부터 노렸다. 그때는 친왕파가 약해진 상태라 별로 의심하지 않았지만....'

전쟁에서 왕을 잡는 건 곧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일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공작가의 의도에 관해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귀족 대부분이 공작가에 넘어갔기 때문에 수도만 점령하면 끝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단 말이지.'

자신 때문에 공작가는 왕국을 자연스럽게 삼키는 데 실패했다. 게다가 왕국과 교단의 공적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니 국왕을 잡는다 해도 그들이 왕국을 차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공작가의 군대는 왕국 전역이 아니라 수도만을 노리는 전략을 취하고 있었다. 군대를 움직이는 방식을 보면 그렇다.

'구원교는 20여 년 전에 왕실을 수호하는 그림자 기사단을 쳤다. 암중에서 이미 한 번 싸웠단 뜻이지. 지금도 왕실을 집요하게 노리고 있어. 단순히 전쟁에 승리하기를 원하는 게 아니야.'

아마 그들은 그때부터 왕실을 노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셀의 어머니 때문에 저쪽도 괴멸되는 피해를 보았다.

그래서 왕국을 전복하는 쪽으로 계획을 바꿨을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감에 의존한 예측이었다.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상대의 전략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내내 전쟁터에서 살아온 지셀의 직감은 다르게 말하고 있었다.

의문점을 해결하려면 국왕을 직접 만나 구원교에 대해 아는 게 있는지 물어봐야 한다.

'그리고 그림자 기사단에 대해서도. 왜 한 가문이 대대로 왕실을 수호했는지도 말이야.'

벨린다에게 넘겨받은 책에도 그런 부분은 제대로 나와 있지 않았다.

몇 가지 의문점을 마음속에 갈무리한 지셀이 벨린다에게 웃어 보였다.

"멋있네. 우리 엄마가 왕국 최강에, 루타니아를 어둠 속에서 수호하던 사람이었다니."

"깜짝 놀라셨죠?"

"뭐, 조금."

"도련님 재능이 다 아네트 님에게서 이어진 거라니까요. 엘레나 아가씨의 신력도 말이죠."

벨린다는 무척 자랑스러워하면서도 후련해하는 표정이었다. 아네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말하고 싶어 지금까지 얼마나 입이 근질거렸던 걸까.

지셀이 머리를 조금 긁적이며 다시 물었다.

"그러면 우리 엄마의 진짜 이름이... '엘리자베스 로렌 르 이본느 데 발리에르'가 아니라는 거네?"

"네."

"그러면... 그렇게 지은 이유가 있나?"

"그냥 이제 예쁘고 우아하고 거창한 이름을 쓰고 싶으시다고 그렇게 바꾸셨어요. 예전부터 생각해 두신 거였거든요. 그러니까 다 가짜죠."

"...그래,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시는 거고?"

"네, 예쁘고 밝고 재미있고... 그런 분으로만 알고 계세요."

"원래 성격은?"

"평소에는 정말로 그렇긴 한데, 화나면 좀... 도련님이랑 비슷한 면이 있으셨던 거 같네요."

지셀은 쉽게 수긍했다. 자신의 성격이 왜 이 모양인지 이제 알게 되었다.

"그래도... 아버지한테까지 그렇게 다 숨길 필요가 있었을까?"

아버지가 알면 큰 충격을 받긴 했을 것이다. 어머니를 그저 몰락 귀족의 후예인 줄로만 알고 있었으니까.

남편으로서는 조금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벨린다의 생각은 달랐다.

"원래 사람이라는 게 쓸데없거나 안 좋은 과거는 숨기고 싶어 하는 법이라고요. 특히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말이죠. 굳이 그런 걸 후작님이 알아서 좋을 건 없잖아요? 괜히 자존심만 상할 수도 있고요. 배려에요, 배려."

"으음... 그런가."

"그리고 다른 이유도 있었죠. 분명 아네트 님의 마나 연공법과 기술은 페르디움에 도움이 됐겠지만, 그걸 익혔다가는 페르디움이 더 빠르게 위험에 처했을 수도 있어요."

"흐음...."

맞는 말이었다. 멜키르란 놈의 말에 따르면 공작가는 어머니의 행방을 몇 번이나 확인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자신의 정체를 페르디움에 알리는 걸 포기했을 것이다.

벨린다가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 밝히니 속이 시원하네요. 도련님이 원하신다면 책에 비전이 적혀 있으니 언제든 익히시면 돼요. 원래 도련님 거니까요."

"뭐, 그건 생각해 보고. 그나저나 아버지하고는 어떻게 만난 거야?"

"원래는 북부에서 잠시 휴양을 취하고 다른 왕국으로 넘어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페르디움에서 잠시 쉬는 동안에 젊었던 후작님을 만난 거죠."

"그렇게 서로 눈이 맞았다?"

"눈이 맞긴요. 후작님이 한 번만 만나 달라고 아네트 님을 어찌나 집요하게 따라다니던지.... 매번 거절해도 계속 쫓아다녔다니까요? 후작님 은근히 근성 있는 남자였어요."

"...그래."

문득 예전에 어머니에 관해 물을 때, 아버지가 술에 취해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내가 그대를 위해서라면 심장도 뽑아 줄 수 있다고 고백했지. 그 뒤에 부부싸움을 할 때마다 심장 언제 뽑을 거냐는 소리를 얼마나 들었는지. 허허허허.

가만 보니 아버지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도 사랑 하나만으로 그런 사람과 결혼에 성공하다니, 어찌 보면 아버지도 대단했다.

"그래서 벨린다가 여기 남아서 나랑 엘레나를 돌본 거였구나."

"네, 아네트 님도 제가 여기서 평안하게 살기를 바라셨거든요. 그래서 후작님도 저에게 도련님과 아가씨를 맡기신 거고요."

그 말을 하는 벨린다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아직도 많이 그리운 모양이었다.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지셀은 문득 다른 의문점을 떠올리고 미간을 좁혔다.

"잠깐, 그런데 왕실은 엄마를 안 찾았어? 공작가와 멜키르도 계속 찾았던 거 같은데?"

그런 대단한 사람이 사라졌다면 왕실도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 사람을 찾아다녔다는 기록도 없고, 말을 들은 적도 없었다.

벨린다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그림자 기사단은 설사 왕이라 해도 정체를 알 수 없어요.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단체였거든요. 단원들도 고아만 뽑아서 양성하니 가족도 없어요."

"그게... 말이 되나? 왕도 안 만나고?"

"오직 단장님만이 가면을 쓰고 왕을 만났죠. 그러니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어요. 어쩌면 없어져서 속 시원해했을 수도 있겠죠."

왕의 재가 없이 알아서 정보를 수집하고 움직이는 단체라니. 대단하긴 하지만 어찌 보면 양날의 검과도 같다.

그들의 수장이 다른 마음을 먹으면 왕의 목도 날려 버릴 수 있다는 뜻이니까.

왕실로서는 한 가문에 귀속된 그림자 기사단을 굉장히 찝찝하게 느꼈을 수도 있다.

"그렇군. 그래서 구원교와 멜키르가 그림자 기사단을 차지하려 한 거구나. 쉽게 왕을 잡으려고."

"그런 거 같아요. 하지만 실패했죠. 그래도 아네트 님은 떠나기 전에 편지는 남겼다고 하셨어요."

"무슨 편지?"

"그림자 기사단이 와해됐으니 새로운 수호 단체나 가문을 만들라고요. 당시에 왕실을 노리던 적은 아네트 님이 전부 처리했다고 하셨으니 할 일은 다 하신 거죠. 어차피 기사단이 사라진 이상 아네트 님이 남아 계시는 게 오히려 위험할 테니까요."

"그래, 그랬군."

웬만한 궁금증은 다 풀렸다. 어떻게 그런 단체가 만들어지고 유지됐는지는 여전히 의아했지만 말이다.

'그건 국왕을 만나 보면 알 수 있겠지.'

새삼 신기하고 놀라웠다. 자신의 어머니가 그런 엄청난 단체의 수장이었단다. 거기에 당시 왕국 최강이라 불릴 정도였다니.

지셀은 상념에 빠지려던 스스로를 다잡고 벨린다에게 말했다.

"오늘은 이쯤 하도록 하지. 또 궁금한 게 생기면 물어볼게. 벨린다도 어서 쉬도록 해. 내일 일찍 출발할 테니까."

"도련님은요?"

지셀이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엘레나를 마저 설득해야지."

* * *

"후...."

지셀은 거울을 노려보며 숨을 내쉬었다.

빨간 손바닥 자국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일부러 지셀이 마나의 흐름을 차단해 회복을 막았기 때문이다.

페르디움의 후계자이자 펜리스의 영주, 북부군 사령관인 자신의 뺨에 엘레나가 손바닥 자국을 남겼다고 강하게 어필하기 위해서였다.

원래 남매간의 싸움은 이렇게 유치할 수밖에 없다.

"하,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자신이 페르디움으로 향한 사이 공작가의 군대도 움직였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예상대로 델파인군의 진군로는 세 방향이었다. 그중 하나는 북부군이 있는 쪽이었다. 무척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고 하니 곧 부딪칠 것이다.

강행군을 한 기사들을 위해 하루 정도만 쉬고 가려 했는데 엘레나의 일이 변수였다.

"어떻게든 오늘 내로 설득해야 해."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다. 오늘 내로 설득해야 내일 아침에 출발할 수 있었다.

지셀은 다시 한번 진심을 담아 설득하기로 하고 바로 엘레나를 찾아갔다. 시간이 없으니 최선을 다해야 한다.

똑똑.

노크를 하자 방 안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울렸다.

"들어오지 마."

덜컥.

지셀은 엘레나의 거부에도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갔다. 동생의 거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아! 들어오지 말라고!"

"엘레나, 잠깐만 진정하고 내 말 들어 봐."

"싫어, 싫어, 싫어, 싫어!"

"네 재능을 이런 북부에서 썩힐 순 없어. 넌 정말 최고가 될 재능이라고."

"난 우아한 귀부인이 될 거야! 멋진 공자님하고 결혼할 거라고! 무슨 전쟁터야!"

예전 같았으면 헛소리하지 말라고 놀렸을 것이다. 가난한 영지의 영애가 어찌 멋진 공자님을 만나 결혼을 한다는 말이냐고.

하지만 요새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수많은 명문가에서 청혼을 보내오고 있다. 지셀 덕분에 페르디움 가문은 명실공히 왕국 최고의 가문 중 하나가 됐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쪽에서 혼처를 고르는 중이었다. 딸바보 즈발터가 청혼서를 오는 족족 전부 찢어 버리고 있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말이다.

지셀이 조금 슬픈 눈빛으로 말했다.

"너는 결혼보다 전장에서 날뛰는 게 어울려. 한 마리의 성난 황소처럼 말이지. 공포의 존재가 될 수 있을 거야. 정말 멋있지 않아?"

"으아아악! 짜증 나! 꺼져!"

흔한 남매간의 대화였지만 진척이 영 되지 않았다. 지셀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너는 최고의 전투 병기가 될 수 있다고! 아니, 그냥 전투 병기로도 널 표현하기는 부족해. 넌 공성 병기급이야! 와, 공성 병기 엘레나!"

"그러니까 그런 거 하기 싫다고!"

"왜? 멋있잖아? 인간이 공성 병기라니!"

"하나도 안 멋있다고!"

"다 너를 위해서야!"

"싫다고!"

"아! 하라고 좀!"

천하의 지셀도 가족이 말을 안 들으면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약점이라도 잡아서 괴롭혀야 하는데 당장 생각나는 게 없었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자 지셀은 바로 몸을 돌렸다. 치사하지만 다른 방법을 쓸 생각이었다.

"아버지한테 얘기해서 널 북부군으로 쫓아낼 거다."

"뭐? 뭐? 미쳤어? 야! 멈춰! 이 미친놈아!"

엘레나가 다급한 얼굴로 지셀의 뒤를 쫓았다.

지셀은 페르디움의 목줄을 쥐고 있다. 자신을 보내라고 지셀이 강요하면 아버지와 가신들은 거부하기가 힘들 것이다.

암살자가 날뛴 뒤라 가신들은 대전에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피해를 확인하고 성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타이밍이 좋다고 생각한 지셀은 들어가자마자 즈발터에게 말했다.

"엘레나를 북부군으로 데리고 가서 수련시켜야겠습니다."

"으음.... 꼭 그리해야겠느냐."

즈발터도 이미 보고를 받았다. 자식이 신력을 타고났다는 건 기꺼운 소식이긴 했지만, 딸에게 수련이니 전투니 그런 험한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북부군은 전쟁터만 찾아다니는 군대다. 딸을 그렇게 위험한 곳에 보낼 수는 없었다.

"아빠, 아빠! 나 안 갈래! 절대 허락하지 말아요!"

엘레나가 헐레벌떡 들어와 즈발터의 옆에 매달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의 부탁에 즈발터가 근엄하게 말했다.

"굳이 싸우기 싫다는 사람을 데리고 갈 필요가 있느냐. 게다가 엘레나는 아직 약하지 않느냐. 북부군으로 가면 위험할 것이다."

"후방 주둔지에 배치할 거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직접 가르쳐서 얼른 강하게 키우겠습니다."

"어허, 그래도 위험하다니까. 안 된다."

즈발터의 강경한 반대에 지셀이 다른 얘기를 꺼냈다.

"아버지는 초인이 암습을 해 와도 바로 죽을 실력은 아닙니다. 버티기만 해도 주변에서 협공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 내가 이제 그 정도 실력은 된다."

"하지만 엘레나와 레이첼은 아닙니다. 단 한 번의 실수에도 죽을 수 있습니다. 이번 일을 겪고 전 두 사람이 스스로의 몸을 지킬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으음.... 그래도 이곳에서 수련을 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제가 가르치는 게 가장 빠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으으음...."

즈발터는 고민에 빠졌다. 사실 이제 암살이 벌어질 일은 극히 드물었지만, 어쨌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즈발터가 고민하는 사이, 지셀이 총관인 호메른과 재무관인 알버트를 노려보았다. 계속 도움을 받고 싶으면 알아서 처신하라는 뜻이었다.

그 뜻을 눈치챈 두 사람이 바로 앞에 나섰다.

"대공자의 말이 맞습니다. 엘레나 아가씨도 최소한의 무력은 쌓으셔야지요."

"그럼요, 저희가 그동안 그 부분에 소홀했습니다. 대공자라면 속성 교육이 가능할 겁니다."

두 사람에게는 어차피 선택권이 없다. 대공자는 수틀리면 정말 다 뺏어 갈 놈이다. 이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가신들도 모두 나서서 찬성의 뜻을 던졌다. 딸바보 즈발터도 당황할 정도였다.

지셀의 수작을 본 엘레나가 분노하며 외쳤다.

"뭐에요! 다들 나를 내쫓고 싶어서 안달이 난 거 같잖아! 정말 너무하잖아! 오빠가 그렇게 무서워?"

와지지직!

즈발터가 앉아 있는 의자의 팔걸이가 분노한 엘레나의 손에 박살이 나 버렸다. 이제 그녀는 힘을 내뿜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반대하던 즈발터마저 살짝 두려워하는 눈빛으로 그걸 보고 중얼거렸다.

"가, 가도 될 거 같은데...."

"이이익! 진짜 아빠까지 그럴 거야? 나 안 가! 안 갈 테니까 아무도 찾아오지 마! 오면 다 죽을 줄 알아!"

엘레나가 주먹을 내보이며 씩씩거리자 다들 두려워하는 눈빛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녀는 그렇게 후다닥 자신의 방으로 도망가 버렸다.

즈발터는 이마를 짚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모르겠다. 둘이 알아서 하거라. 어차피 네놈이 다른 사람 말 들을 놈도 아니지 않느냐."

"감사합니다. 그러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지셀은 방에 숨은 엘레나를 일단 내버려두고 휴식을 취했다.

하루를 푹 쉰 지셀과 기사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떠날 준비를 마쳤다.

짐을 싸 들고나온 레이첼이 살짝 두려워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에, 엘레나는요? 저, 저 혼자 가나요?"

신분의 차이는 있지만 엘레나와 레이첼은 둘 도 없는 친구였다. 길리언도 언젠가는 귀족 작위를 받을 게 확실하기에 페르디움에서는 둘이 허물없이 지내는 걸 막지 않았다.

레이첼은 엘레나도 함께 간다는 지셀의 설득에 용기를 내어 따르기로 했다.

길리언도 조금 걱정스러워하긴 했지만, 오랫동안 못 본 딸을 가까이 둘 수 있다는 점에서 크게 반대하진 않았다.

어차피 북부군이 망하면 페르디움이고 뭐고 다 망할 게 뻔하다. 그럴 바에는 같이 있으면서 수련을 시키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지셀이 씨익 웃으며 레이첼의 물음에 답했다.

"걱정하지 마. 엘레나도 함께 갈 거니까."

지셀이 품에서 검은색 천을 한 장 꺼내 눈 아래를 가리도록 묶었다. 몇몇 기사들이 똑같이 따라 했다.

그러자 성 앞에 흉악한 도적 떼가 생겨났다.

목뒤를 몇 번 주무른 지셀이 중얼거렸다.

"왜 꼭 다들 힘을 쓰게 하는지 모르겠어. 그냥 곱게 가자고 할 때 가면 얼마나 좋아. 안 그래?"

살다 보면 때로는 약탈을 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설사 그게 동생이라도 말이다.

463화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1)

복면을 쓴 지셀과 기사들은 다시 성안으로 당당하게 들어갔다.

도적놈들이 들어온 모양새였지만 성의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복장도 그대로이고 얼굴 아래만 가려서 누구인지 다 티가 났기 때문이다.

병사들과 사용인들은 오히려 지셀 일행을 보자마자 옆으로 피했다.

'또 미친 짓 하려나 보네.'

'참 한결같긴 한데... 그게 좋은지 안 좋은지 모르겠다.'

'그냥 이번에도 모르는 척하자.'

다들 투명 인간 취급을 하는 덕분에 지셀과 기사들은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엘레나의 방까지 갈 수 있었다.

엘레나를 지키던 호위 기사들도 지셀을 앞에 두고는 서로 눈짓하더니 그냥 자리를 비켜 버렸다.

콰앙!

지셀이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엘레나가 화들짝 놀라 외쳤다.

"뭐야!"

"나는 약탈왕이다."

"야이, 미친놈아! 작작 좀 하라고!"

엘레나가 성을 냈지만 지셀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말을 안 들으면 그냥 힘을 쓸 수밖에 없다.

"잡아."

그의 말에 복면을 쓴 기사들이 엘레나를 포위했다. 천장에서 엘레나를 지키던 암살자들은 지셀을 보고 그냥 눈을 감았다.

"오, 오지 마. 때릴 거다?"

엘레나가 뒤로 물러나며 주먹을 들었지만 기사들은 히죽 웃었다.

"잘 모시겠습니다."

파앗!

기사들이 달라붙어 엘레나의 몸을 순식간에 밧줄로 묶었다. 그녀가 힘을 써도 풀지 못하게 아예 고치처럼 밧줄로 온몸을 칭칭 휘감았다.

신력을 타고났다 한들 마나 연공법을 익히지 않은 엘레나로서는 결박을 풀기 어려웠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만 질렀다.

"놔! 놓으라고! 으아아아!"

엘레나가 단숨에 제압되자 지셀이 뒤쪽을 향해 손짓했다.

"가져와."

거대한 나무 상자가 하나 들어왔다. 엘레나는 입에 재갈까지 물려진 채 상자 안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니까 좋게 가자고 했잖아."

북부군에 도착하기만 하면 엘레나도 포기할 것이다. 지셀이 히죽 웃으며 상자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씩씩거리는 숨소리만 들렸다. 엘레나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승리를 예감한 지셀이 근엄하게 말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야. 너의 그 힘을 사람들을 위해 쓰자고. 얌전히 있어. 북부군에 도착하면 풀어 줄 테니까."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끄으으응...!"

투둑, 투두둑.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 지셀이 다시 상자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잠시 후.

콰아앙!

"헉!"

상자가 뚫리며 주먹이 하나 튀어나왔다. 지셀은 잽싸게 고개를 돌리며 피했다.

힐끗 상자 안을 바라보자 저 어둠 속에서 분노에 찬 눈동자가 보인다.

"어우, 분노하면 더 강해지는 체질인가?"

본인의 힘을 자각한 뒤로 마구 힘을 쓰고 있다. 이 규격 외의 힘을 제대로 다룰 수 있게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지셀은 다급하게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야야, 빨리 가자. 가면서 계속 묶어. 이거 완전히 괴물 되겠어."

콰앙! 콰앙! 콰앙!

상자에서 주먹이 계속 튀어나왔다. 기사들은 기겁하며 상자를 들고 움직였다.

엘레나를 지키던 암살자들은 한숨을 쉬며 따라나섰다. 아무래도 북부군까지 쫓아가야 할 모양이었다.

그렇게 엘레나를 계속 제압하며 지셀이 출발하려고 할 때, 즈발터가 헐레벌떡 나왔다.

"꼬, 꼭 그렇게 데려가야 하겠느냐?"

"저더러 알아서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거 아니면 방법 없습니다."

"하여튼 성질은 제 엄마 닮아서...."

즈발터의 말에 지셀과 벨린다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의 비밀을 아직 말해 줄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몇 번 저은 즈발터가 말을 이었다.

"그래, 네 뜻이 그러하다니 알겠다. 동생을 잘 보살펴야 한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스코반도 데리고 가거라."

"네? 스코반을요? 왜요?"

즈발터가 살짝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아니, 걔가 요새 영지에서 적응을 잘 못하는 거 같더라고.... 그래서 분위기 좀 바꿔 주고 그러고 싶어서.... 엘레나의 호위 기사도 필요하지 않으냐...."

북부군으로 가면 엘레나와 레이첼은 엄중한 경호를 받게 될 것이다. 굳이 스코반이 따라올 필요가 없었다.

이미 호위를 서는 암살자들도 짐을 챙겨 합류한 상태였다.

지셀은 즈발터의 속뜻을 파악하고 내심 혀를 찼다. 지금 그는 스코반을 북부군으로 떠밀고 있었다.

'불쌍한 놈.'

헛소문 하나에 평판이 완전히 바닥이 나 버렸다.

지셀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스코반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짐을 들고 서 있었다. 그 옆에는 정신이 나가 버린 듯한 표정을 지은 리카르도도 있었다.

스코반은 죽어도 혼자 죽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 소문의 원흉인 리카르도도 북부군 전출 조건으로 기어이 끌고 온 것이다.

어차피 북부군은 악마의 군대라 소문이 나 있는 상태다. 안 좋은 소문 붙은 놈 하나 더 들어와 봤자 달라질 건 없다.

지셀이 피식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스코반도 데리고 가지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콰앙!

또 상자가 부서지며 주먹이 튀어나왔다. 기사들은 힘겹게 엘레나의 머리를 누르고 다시 밧줄로 묶었다.

"아빠! 뭐 해! 이 미친 새끼가 나 납치해 가잖아! 읍읍!"

즈발터가 울상을 지었다. 당장이라도 악마에게서 딸을 구해 내고 싶었다.

지셀이 그 표정을 보고 기사들에게 마구 손짓을 했다.

"야! 얼른 다시 묶어! 자자, 빨리 가자!"

그렇게 새로운 인물들이 합류한 일행은 바로 북부군 진영으로 향했다.

* * *

지셀이 없는 북부군은 남부 전선 한 곳에 자리를 잡고 대기하는 중이었다.

그들이 할 일은 지셀이 돌아올 때까지 경계 상태를 유지하는 일이다. 공작가의 군대가 도착하면 저지하는 역할도 맡고 있었다.

지셀이 떠난 뒤 공작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에 분위기는 어느 때보다 삼엄했다.

다들 긴장한 채로 경계를 서는 와중에도, 알포이는 바네사에게 붙잡혀 공부를 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이상한 소문이 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로 공작가가 클로드와 알포이도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 총관은 어쨌든 전쟁에서 능력을 보여 줬잖아? 대영지의 총관이기도 하고. 그리고 좀 얄밉기도 하니까 죽이고 싶겠지.

― 그런데 알포이는 왜? 얄미운 건 똑같지만 오히려 바네사부터 노려야 하는 거 아닌가? 알포이는 그 뒤에 죽여도 되잖아.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다들 의아해했다. 헛소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조심성 많은 바네사는 소문이 괜히 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알포이에게 더 강해져야 한다며 전장에서도 공부하기를 종용했다.

천막 안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알포이를 바네사가 슬쩍 훔쳐보았다.

'웬일로 알포이 님이 공부를 저렇게 열심히.... 역시 소문이 신경 쓰이시는 건가?'

의자에 앉아 책만 바라보는 알포이를 보며 바네사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저렇게 집중한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알포이는 책을 보며 생각했다.

'아까 파이를 다 먹었어야 했는데. 피오테 돈을 더 뜯을 방법은 없나. 우리 꼬꼬는 하늘에서 잘살고 있을까?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

'아, 놀러 가고 싶다. 나도 백작 돼서 영지 하나 갖고 싶다. 어쩌면 내 부모님은 엄청난 부자에 귀족이 아닐까? 사실 난 떠돌이 고아가 아니라 스승님이 납치해 온 걸 수도 있어. 그래, 그런 걸 거야.'

'저녁은 뭐 먹지? 아, 왜 책만 보면 졸린 거 같지? 책이 적성에 안 맞나? 그런데 아스콘 그 새끼는 왜 맨날 나한테 욕을 하고 지랄이야.'

공부와는 전혀 상관없는 헛생각들이었다.

알포이는 책에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펜리스에 온 뒤로 몸 쓰는 일만 해서 그런지, 머리가 상당히 멍청해진 거 같았다.

'자극이 필요해. 내 머리를 다시 일깨울 수 있는 강한 자극이 말이야.'

이 상태로는 공부를 해도 소용이 없다. 알포이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바네사가 훅 들어와서 말했다.

"알포이 님! 왜 공부를 하다 말고 일어나세요!"

"...나 감시하고 있었어?"

"그, 그건 아니고요. 우연히?"

"잠깐 고민이 있어서 총관하고 상의 좀 하려고. 고민 때문에 집중이 잘 안돼."

바네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항상 핑계를 대고 공부를 빠지던 사람이니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알겠어요. 빨리 상의하시고 공부에 집중하셔야 해요. 5서클 마법을 빨리 하나라도 익히셔야죠. 5서클 마법은 기존보다 원소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야 해요. 그러니 마력의 배열에 더 신경을 쓰시면서...."

"알았다고...."

바네사의 설명 기질이 또 발동하자 알포이가 고개를 푸욱 숙였다. 솔직히 공부하기 너무 싫어서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다.

바네사의 깜짝 강의가 끝나자 알포이는 우울한 표정으로 클로드를 찾아갔다.

지휘 천막 안에서 에레네스와 함께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던 클로드가 반갑게 손을 들었다.

"여, 알포이. 무슨 일이야? 공부해야 해서 바쁘다며?"

"음. 잠깐 상담 가능한가?"

"그럼, 우리 브로의 고민이라면 내가 언제든 들어 줄 수 있지."

알포이는 자리에 앉아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말이야. 요새 참 공부가 안돼. 아무래도 머리에 녹이 슨 거 같다는 말이지. 옛날에는 마탑의 후계자가 될 정도로 참 똑똑했는데."

"머리를 오래 안 쓰면 그럴 수 있지."

"그래서 말이야. 머리에 자극을 줄 방법이 있을까? 강한 자극이 필요할 거 같아. 때리는 거 말고, 머리를 쓰는 자극."

클로드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분야야말로 자신의 전문 분야다.

"너는 홀짝만 해서 그래. 마법으로 사기를 치니 당연히 머리 쓸 일이 없지. 종목을 카드 게임으로 바꿔 보는 게 어때?"

"으음... 카드 게임?"

"그래. 카드 게임은 홀짝과 달라. 상대의 패를 예측하고 계속 머리를 굴려 심리전을 해야 하지. 아마 꽤 자극이 될걸? 머리를 써야 하니까."

알포이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홀짝은 마법으로 사기를 치니 머리 쓸 일이 없었다. 아니, 이제 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클로드의 말에도 조금 미진한 부분이 있었다.

"일리 있는 말이긴 해. 그런데 그런 자극으로는 조금 약하지 않을까? 난 더 강한 자극을 원하거든."

"판돈을 올리면 되지."

"아하."

과연 그렇다. 판돈을 올릴수록 자극은 더 강하게 올 것이다.

역시 클로드다. 이렇게 단숨에 해결 방안을 알려 주다니. 참 싫은 놈이지만 저 똑똑함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대화를 듣고 있던 에레네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웬 바보 둘이 만담을 하는 거 같다. 그런데 저게 북부군의 핵심 인물들이란다.

손잡을 사람을 잘못 찾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클로드가 에레네스를 휙 돌아보며 물었다.

"에레네스 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뭐가 말이냐."

"알포이가 두뇌 자극을 위해 종목을 바꾸는 것 말이지요. 제 의견이 괜찮지요?"

"난... 그런 건 모른다."

"아, 숲에서만 계셔서 그런가? 재미를 모르고 사셨네. 참 안타깝네요."

"...."

품격 높은 엘프 대족장으로서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단언컨대 자신의 앞에서 이런 덜떨어진 짓을 하는 놈들은 처음이었다.

인간 귀족들조차 자신의 앞에서는 감히 쓸데없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렇게 '자연 그대로'인 놈들에게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지던 그때, 정찰병이 급하게 들어와 외쳤다.

"공작가의 군대가 인근에 나타났습니다! 곧 이곳에 당도할 것입니다. 그쪽의 정찰병도 우리 쪽을 확인했을 겁니다."

그 말에 클로드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몇 명인데?"

"약 10만 정도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와, 많네. 수도로 향하는 군단을 세 개로 나눈 걸로 알고 있는데 이쪽에만 10만? 우리를 죽이려고 아주 작정했구먼."

클로드가 혀를 차며 일어났다.

공작가 단독으로만 10만 이상의 군대를 일으킬 수 있으리라고 예측하고 있다. 거기에 남부에 있는 공작가의 모든 봉신이 함께 움직였다.

예로부터 남부 지역에는 돈과 식량이 넘쳐났다. 그 역량을 전부 쏟아붓는다면 얼마나 많은 병사를 키울 수 있을지, 그 수를 정확히 추정하기도 어려웠다.

서부의 절대자였던 로드리크 후작과도 비교가 안 되는, 명실공히 왕국 최강의 세력이라 할 수 있었다.

클로드가 턱을 몇 번 쓰다듬다가 중얼거렸다.

"어디 보자. 영주님한테 소식을 알릴 수도 없으니, 결국 우리가 막아 내야 하는 건가."

다크는 마력을 전부 소모하고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마 영주가 새로운 분신을 보내겠지만 전투는 곧 시작될 것이다.

북부군은 남부에서 수도로 가는 길 중 가장 거리가 짧은 경로에 진을 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곳이니만큼 가장 강한 전력이 막아야 하니까.

클로드가 조금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그놈들은 영주님이 빠지면 우리를 단숨에 밀어 버릴 수 있다고 착각한 모양인데.... 뭘 준비했을까? 뻔하긴 하다만...."

북부군은 강하기로 유명하다. 병장기의 질도, 병사 개개인의 전력도 뛰어나기에 단순히 병력이 많다고 해서 북부군을 이길 수는 없다.

그러니 공작가도 그에 대응할 수 있는 전력을 준비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작가가 알지 못하는 점이 있다. 이쪽의 초인은 지셀 하나만이 아니라는 것.

클로드가 에레네스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대족장님이 큰 힘을 써 주셔야 할 거 같습니다."

"그래, 알겠다. 너희들을 보니 그냥 나가서 싸우는 게 속이 편할 거 같구나."

에레네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산과 같은 거대한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464화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2)

널따란 평원에 두 대군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한쪽은 북부군의 깃발을, 다른 한쪽은 델파인 공작가의 깃발을 휘날리고 있었다.

델파인군의 제2군단을 이끄는 마테스 백작이 옆에 있는 자에게 물었다.

"흠, 펜리스 백작이 없는 게 확실합니까?"

"예, 부친과 여동생을 잃고 싶지 않다면 움직였겠지요."

대답을 한 자는 구원교의 심판관, 덴타리아였다.

덴타리아는 야만인들을 충동질하여 북방에 균열을 만들어 냈던 사제다. 그 임무를 마치고 지금은 델파인군에 합류한 것이다.

마테스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펜리스 백작이 빠졌다 해도 북부군은 정예입니다. 강한 자들이 많고, 병장기의 질도 높기로 유명하지요. 사제분들께서 힘을 써 주셔야 합니다."

기사와 병사들의 실력은 북부군과 델파인군이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장비와 병기들이 문제였다.

북부군은 공성 병기를 끌고 다니면서도 기동력을 유지하기로 유명하다. 모두 펜리스 백작이 고안한 신기술 덕분이라고 한다.

빠른 속도로 움직여야 하는 델파인군은 공성 병기를 가져오지 않았다. 길을 뚫으면 후속 보급 부대가 가지고 올 예정이었다.

하지만 북부군은 투석기들을 잔뜩 배치해 놨을 게 뻔했다.

"우리는 최대한 빨리 길을 뚫고 가야 합니다. 저들과 똑같이 투석기를 배치하고 싸울 수는 없습니다."

반면 북부군은 그냥 시간만 끌면 되는 상황이다. 굳이 그들이 먼저 덤빌 필요가 없었다.

사실 북부군의 수가 조금만 더 적었다면 문제 될 일은 아니었다. 저쪽에서 투석기를 써도 그냥 대군으로 밀어 버리면 된다.

하지만 북부군 또한 8만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그러니 함부로 맞붙을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마테스 백작의 우려 섞인 말을 들은 덴타리아가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펜리스 백작이 없는 북부군은 전투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쪽 7서클 마법사만 봉쇄하면 저희 사제들이 앞장서서 길을 뚫고 투석기들을 부수겠습니다. 다소 피해는 있겠지만, 큰 걱정은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음, 알겠습니다."

마테스 백작으로서는 초인인 사제들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이 투석기를 잔뜩 배치한 이상 어떤 전술 회전도 큰 의미가 없었다. 벽이 없을 뿐 요새를 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초인인 사제들이 앞장서서 적 진영을 흐트러뜨려야만 했다.

'펜리스 백작이 없으니 충분히 가능하겠지.'

마테스 백작은 정말 그리 믿었다. 무려 세 명의 고위 사제들이 참전한 상태였으니까.

북부군만 괴멸시키면 펜리스 백작은 기반을 잃게 된다. 그러면 전쟁은 쉬워진다.

타국에서 보낸 연합군이 하나둘 도착하고 있지만 어차피 그들은 주력이 아니다. 수도부터 점령하고 하나하나 정리하면 된다.

마테스 백작의 머릿속에는 질 거라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오직 어떻게 하면 피해를 줄일지, 추가로 내려온 명령을 어떻게 수행할지에 관한 고민만 가득했다.

"이번 전투에서 가능하면 알포이란 놈을 없애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그 숨겨진 7서클 마법사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적진에 파고들었을 때 그놈으로 예상되는 놈이 보이면 가장 먼저 죽여 주시지요. 후퇴한 뒤에 펜리스 백작과 합류하지 못하게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초상화도 확인했으니 병기를 부수는 대로 가장 먼저 찾아 죽이겠습니다."

덴타리아가 잔인한 웃음을 지었다.

그간 공작가가 펜리스 백작에게 당해 온 것은 변수가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실력을 숨기고 있던 알포이였다.

그런 변수를 하나씩 없애고 다시 모든 상황을 통제하겠다는 게 공작가의 계획이었다.

웃음 짓는 덴타리아를 보며 마테스 백작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남부에 근거지를 둔 봉신들은 델파인 공작을 거스르지 못했다. 그들은 얼마나 공작가가 무서운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봉신들이 공작파 귀족들처럼 빠져나간다면 바로 보복이 들어올 것이다.

그러면 영지도 위험해지지만, 공작가에 볼모로 붙잡혀 있는 그들의 가족이 어찌 될지 모른다.

봉신들의 후계자나 가족을 인질로 잡는 건 유구한 전통이긴 하지만 라울은 심할 정도로 많은 가족을 잡아갔다.

가족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영주들도 있지만, 그들도 공작가에 협박받고는 빠져나가기를 포기했다. 제 목숨 소중한 건 누구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다. 왕국을 차지하는 수밖에. 그래야 우리도 산다.'

이제 내전에서 승리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구원교와 함께 끝까지 가는 수밖에.

명분도 없는 전쟁에 공작가와 구원교에 대한 공포까지 뒤섞이니 병사들의 사기도 말이 아니었다.

그나마 훈련을 잘 받은 정예병들이니 그걸 믿고 가야 했다.

"전군, 진군하라."

마테스 백작의 명령이 떨어지자 델파인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북부군도 전투 준비는 이미 끝낸 상태였다.

클로드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주변인들에게 말했다.

"어차피 맞붙으면 우리가 이깁니다. 저놈들은 지금 병기가 없거든요. 다들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놈들은 우리가 쏘는 대로 그냥 다 맞아 죽을 게 뻔해요."

북부군 후방에는 이미 수백 대의 투석기가 배치되었다. 이 정도면 적들은 사정거리에 들어오는 족족 그냥 뒈진다고 봐도 된다.

로드리크 후작과 싸울 때도 지셀은 투석기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야전에 제대로 배치할 수만 있다면 투석기는 매우 강력한 무기였다.

펜리스군과 한번 싸워 본 테넌트가 한 가지 우려를 전했다.

"저들도 우리 쪽에 투석기가 많은 걸 모르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진군한다는 건, 자신이 있다는 뜻이죠. 어쩌면 초인이 섞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초인이 없을 확률이 더 높다. 초인은 그 정도로 드문 존재니까. 공식적으로 알려진 초인은 네 명도 안 된다.

하지만 라비에르를 잡으면서 구원교에 숨겨진 초인들이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확신할 수 없는 문제였다.

"초인이 있다면 가장 먼저 투석기부터 노릴 겁니다. 이쪽의 전력이라면 막아 낼 수는 있지만.... 피해가 꽤 클 겁니다."

이쪽에도 아직 알려지지 않은 두 명의 초인이 있지만, 상대 초인이 진영에 파고들어 날뛰면 피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클로드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우리도 대응을 해야겠죠. 에레네스 님이 힘을 좀 써 주셔야 할 거 같습니다!"

"그래,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네! 지금 가장 먼저 나가 주시면 되겠습니다! 가서 적을 막아 주세요!"

"...나 혼자?"

"네! 혼자서요!"

"...아무리 나라도 10만 대군을 홀로 막을 수는 없다."

아무리 초인이라도 10만 명을 상대하기는 어렵다. 전부 병사들로만 구성되었어도 때리다가 지쳐 쓰러질 것이다.

하물며 왕국 최고의 세력이라는 공작가다. 수준 높은 기사와 마법사들이 즐비할 것이다. 거기에 초인까지 있을 게 확실하다.

혼자 나가서 싸우면 반드시 죽는다.

에레네스가 약한 모습을 보이자 클로드가 근엄한 목소리로 외쳤다.

"에레네스 님!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걸 모르십니까! 지금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에레네스 님이 먼저 나서셔야 합니다!"

피해를 줄이기 위해 혼자 나가서 최대한 많이 죽이고 난리를 피우다가 죽으라는 말로 들린다.

언제나 평온한 에레네스도 그 말을 듣고는 짜증을 참지 못했다.

"그럼 너는? 나에게 책임을 지우고 너는 뭘 하겠다는 말이냐?"

클로드가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답했다.

"전 큰 힘이 없으니 책임 따위도 없습니다."

"...."

지휘소에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꼴통으로 유명한 카오르와 알포이도 경멸 섞인 표정을 지었다.

웬디가 바로 클로드의 입을 막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원래 이런 사람이...긴 하지만 오늘따라 왜 더 이러는지...."

제압당한 클로드는 바둥거리며 웬디의 손을 뿌리친 뒤 외쳤다.

"아니!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 적들이 속도를 더 내고 돌격하기 전에 에레네스 님이 나서야 한다고!"

사람들이 의아해하자 클로드가 자신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니까 잘 들어 봐. 에레네스 님이 나가셔서 초인인 티는 내지 말고 최상급 기사 정도로만...."

클로드의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알쏭달쏭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딱 와닿는 건 아니지만 뭔가 그럴듯했다.

에레네스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지셀이 전쟁에서 무조건 저놈의 말을 따르라 했으니 일단 한 번은 말을 들어줄 생각이었다.

"알겠다. 내가 나가 보도록 하지. 네 말처럼 되지 않는다면 앞으로는 따르지 않겠다."

"아무렴요. 제 말처럼 안 되면 자리에서 물러나겠습니다."

자신만만한 클로드의 말에 에레네스는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사실 클로드가 언제나 자리에서 물러나고 싶어 한다는 건 알지 못했다.

델파인군은 점점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투석기의 사정거리에 들어가는 순간 돌격하기 위해서다.

물론 이 전법은 선두에서 선 세 명의 초인을 믿고 시도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힘이라면 반드시 적진을 와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마테스 백작이 손을 들며 말했다.

"이제 곧 선두가 투석기의 사정거리에 들어간다. 최대한 빨리 달려 적의 진영까지 파고들어야 한다."

무려 10만에 이르는 군대다. 분명 중간 열과 후열은 투석기 때문에 큰 피해를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선두가 부딪히는 사이 초인이 파고들어 투석기를 부수고 나머지 병사들이 돌진하면 북부군을 괴멸시킬 수 있다.

"마법사들은 준비해라! 적 7서클 마법사의 마법을 봉쇄한다!"

델파인군의 마법사들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이곳에는 6서클 마법사가 무려 5명이나 참전했다. 그 외에도 5서클 마법사와 4서클 마법사들이 다수다.

설령 적군에 7서클 마법사가 있다고 해도 적의 마법을 봉쇄할 수 있을 터였다.

델파인군이 조금씩 북부군에 다가가며 속도를 높이던 그때.

"응? 뭐지?"

북부군 진영에서 빠르게 달려 나온 엘프 하나가 델파인군의 앞을 가로막았다.

엘프는 상당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마테스 백작은 눈을 찡그렸다.

"무슨 속셈인지 뻔히 보이는군."

그는 잠시 진군 속도를 늦췄다. 옆에 있는 덴타리아와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기사 대전을 요청하는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흠, 기운을 보니 최상급 수준의 실력자 같군요. 전투 전에 미리 없앨 좋은 기회입니다."

"저도 그런 생각입니다. 펜리스 백작이 없으니 별짓을 다 하는군요."

"이쪽에 초인이 세 명이나 있다고 생각하지는 못할 테니까요."

그 누구도 한 군대에 초인이 셋이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북부군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 공작가와 구원교도 꽤나 무리했다.

물론 북부군에도 뛰어난 인물이 많기로 유명하다. 아마 제법 강한 인물을 보내 기사 대전을 펼쳐 사기부터 끌어올릴 생각인 듯 보였다.

만약 여기서 적을 역으로 깨부순다면 이쪽의 사기는 더 올라갈 것이다. 전술적으로 불리한 입장에서 그런 좋은 기회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척살 명령이 내려진 자들은 많지요. 길리언, 카오르, 벨린다.... 그렇지만 저 엘프는 정보에 없는 인물 같은데. 설마 그 욕쟁이 엘프가 나왔을 리는 없고."

덴타리아가 몇 번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말을 이었다.

"뭐, 기운을 보니 그들 못지않은 인물로 보입니다. 미리 죽여 둬서 나쁠 건 없다는 뜻이지요."

"맞습니다. 저런 자를 하나라도 죽여 두면 우리 군이 맞부딪쳤을 때의 피해도 그만큼 줄어들 것입니다."

"제가 나가서 금방 처리하고 오지요. 군단장님은 제가 놈을 죽이는 즉시 돌격하십시오. 저도 바로 달리겠습니다."

"그리하지요."

마테스 백작은 일부러 진군 속도를 천천히 늦추었다.

멈출 듯 말 듯 전진하던 델파인군은 선두가 투석기의 사정거리에 들어가자마자 멈췄다. 하지만 적의 공격은 없었다.

"역시 기사 대전을 원했구나. 아주 좋아. 대결이 끝나는 대로 적을 몰아치겠다."

엘프가 제법 강해 보이긴 하지만 이쪽은 초인이 상대할 것이다. 설사 초인에 근접한 자라도 덴타리아를 이길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렇게 강한 자였으면 이미 소문이 날 대로 나지 않았겠는가.

피해가 꽤 클 거라 각오하고 있었는데 적의 실력자 하나를 없애고 시작할 수 있다니, 정말 좋은 일이었다.

덴타리아는 여유롭게 걸어 나와 에레네스와 마주했다.

"이름이 뭐지? 정보에는 없는 인물 같은데."

"에레네스."

"그런 엘프가 있었던가? 루미나와 아스콘이란 인물은 아니군."

에레네스는 그에 대답하지 않고 다른 걸 물었다.

"왜 군대를 멈춘 거지?"

"기사 대전을 하자고 나온 게 아닌가?"

"그건 맞다. 하지만 나올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돌격해서 싸워도 되지 않았느냐. 만약 지면 상황이 더 불리해졌을 텐데?"

"흐, 흐하하하! 져? 내가 져? 이 멍청한 엘프야. 감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그딴 소리를 하느냐."

"그러면 당연히 이길 줄 알고 나왔다는 뜻인가?"

"그래, 펜리스 백작이 자리를 뜬 이상 북부군에는 더 이상 초인이 없지 않으냐. 누가 나와도 내 상대가 될 수는 없다."

고오오오오오....

덴타리아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 기운은 에레네스의 몸을 강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는 잔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말처럼 투석기 때문에 우리가 불리한 상황이긴 하지. 그러니 당연히 대전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느냐. 너 정도 되는 실력자를 없애고 시작하면 그만큼 우리 피해가 줄어들 테니."

"그런가. 신기하군."

"뭐가 말이냐?"

"너희들이 그 가벼운 놈의 말처럼 움직이는 게 말이다."

드드드드드.

에레네스의 발밑에서 덩굴이 올라오며 그녀의 몸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어느새 나무로 만든 갑옷이 그녀의 몸을 감싸고 머리에는 사슴의 뿔 같은 것들이 솟아올랐다.

몸에서 퍼져 나오는 은은한 녹색의 기운이 마치 그녀를 보호하듯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 모습에 덴타리아가 눈매를 꿈틀거렸다.

"너...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거냐?"

지금 느껴지는 기운은 최상급 수준이 아니다. 적어도 초인에 이른 기운이었다.

에레네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차라리 전군을 이용해 날 짓밟고 가지 그랬느냐. 그러면 나도 뒤로 물러났을 것을."

"뭐?"

"사실 우리도 초인 하나를 없애고 시작할 생각이었다."

파악!

그녀의 눈에서 강렬한 녹색 빛이 뿜어 나왔다.

465화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3)

덴타리아는 조금 당황했다. 최상급 수준인 줄 알았던 상대가 초인인 거 같았기 때문이다.

"어. 어째서? 북부군에 초인이 또 있다고?"

이러면 작전이 상당히 흐트러진다. 북부군에 더 이상 초인이 없을 거라 전제하고 계획을 잡았기 때문이다.

흔들리던 그의 두 눈에 곧 잔인한 빛이 어렸다.

'어쩌면 이게 기회다.'

숨은 초인이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여기서 저 엘프를 죽이면 확실하게 위험 요소가 사라진다.

상대의 실력이 자신보다 높은지, 낮은지는 알 수 없지만, 이쪽엔 초인급 강자가 셋이나 있다.

'협공을....'

덴타리아가 다른 초인들을 부르려 할 때, 에레네스가 먼저 움직였다.

파앙!

텁!

"크윽!"

덴타리아는 무엇을 해 보기도 전에 에레네스에게 목이 붙잡혔다.

콰아앙!

그대로 땅에 짓눌린 덴타리아가 기겁하는 표정을 지었다.

'수, 숨을....'

상대의 힘이 어마어마했다. 목을 잡혔을 뿐인데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였다.

드드드드드....

"끄으윽...."

마치 산이 목을 누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대로 가면 목이 부러질 것이다.

덴타리아는 기운을 더 끌어올렸다. 그의 양손에서 검은 기운이 솟구쳐 나갔다.

콰아아아아아앙!

기운을 쏟아 냈지만 에레네스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커헉, 콜록! 콜록!"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난 덴타리아가 흠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다급하게 기운을 끌어올리며 양팔을 교차했다.

번쩍!

콰아아아앙!

우드드득!

녹색의 기운에 강타당한 덴타리아는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섬광을 막은 두 팔은 부러져 버렸다.

"크아아악! 네년! 도대체 뭐냐!"

파아아아아!

덴타리아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세차게 뿜어져 나오며 부러진 그의 팔을 감쌌다. 부러진 팔을 기운으로 고정한 것이다.

그의 등에서 검은 빛으로 이루어진 날개가 솟구쳐 올랐다. 손에서는 검은 기운의 손톱이 길게 튀어나왔다.

어지간해서는 쓰지 않는 고위 사제들의 힘이었다. 덴타리아는 자신의 한계까지 힘을 끌어내었다.

"내 성력을 우습게 보지 마라!"

정체도 알 수 없는 엘프에게 얻어맞은 덴타리아가 분노하며 외쳤다.

콰아아앙!

덴타리아가 검은 빛이 되어 쏘아져 나갔다.

자신을 뛰어넘는 힘을 가진 엘프가 이렇게 갑자기 튀어나오는 건 말이 안 된다. 처음에는 당황해서 당했을 뿐이다. 분명하다.

"죽어라!!!"

그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악마의 것 같은 손톱을 휘둘렀다.

공간이 일그러지며 갈라질 정도로 강대한 힘이다. 절대 상대가 막거나 피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덴타리아는 에레네스의 잔상을 베었을 뿐이었다.

이미 공격을 피하며 그의 옆으로 이동한 에레네스가 말했다.

"너희들은 진정한 초인이 아니다. 그저 찌꺼기나 얻어먹은 기생충일 뿐이지."

번쩍!

콰아아앙!

다시 섬광이 번뜩이자 덴타리아는 옆구리가 움푹 파이며 나동그라졌다.

"끄아아악!"

그는 땅에 쓰러진 채 고통에 겨운 비명을 내질렀다.

성력이 고통을 경감해 주어야 했다. 성력이 모두 소모될 때까지 온전한 고통을 느낄 수 없어야 했다.

그런데 옆구리에서 끔찍한 아픔이 느껴졌다. 도무지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친 부위에 집중된 성력이 부족해서 그런 줄 알고 성력을 움직여 보았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서, 설마... 저년의 공격에 그 이상의 힘이 담겨 있다는 말인가.'

성력의 효과를 무시할 정도로 강한 힘이라는 뜻이었다. 몇 대 맞지도 않았는데 어마어마한 성력이 소모되어 있었다.

저벅.

에레네스가 경멸을 담은 눈빛으로 덴타리아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형편없구나. '그때'와 비교하면 너희들은 정말 형편이 없다."

"무, 무슨 소리를...."

"반쪽짜리 힘으로 초인 행세를 하고 다니다니."

구원교의 고위 사제들은 초인과 비슷하게 시간과 공간을 점유한다. 신앙의 힘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완전하게 정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기술과 경험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끊임없이 갈고 닦은 게 아니라 성력이란 특이한 힘을 받은 것이기에, 그 힘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네놈들은 에퀴데마보다도 약하다."

균열의 괴수인 에퀴데마는 맹수의 본능으로 싸운다. 그 강인한 육체와 야성에서 나오는 힘은 초인이라 해도 감당하기 힘들다.

하지만 사제들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힘만 있을 뿐, 그 힘을 다룰 기술도 경험도 본능도 없었다. 그러니 반쪽짜리 초인이라 칭하는 것이다.

"크윽...."

덴타리아는 옆구리를 붙잡고 뒤로 기듯이 물러났다.

이길 수 없다. 이대로 계속 싸운다면 자신은 목숨을 잃고 작전에 실패하고 말 것이다.

에레네스는 덴타리아의 너절한 행동을 그저 바라만 보다가 물었다.

"더 없나?"

"뭐, 뭐가 말이냐?"

"초인이 너 혼자냐는 말이다. 그러면 넌 여기서 죽을 것이다."

"이 건방진...."

덴타리아가 눈을 빛냈다. 피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부르지 못한 것뿐, 어차피 처음부터 협공을 하려 했다. 상대방이 이렇게 방심하면 나쁠 게 없었다.

"당장 이년을 쳐!"

덴타리아가 외치자 에레네스가 있던 자리에 검은 빛의 기둥들이 솟구쳐 올랐다.

콰앙! 콰아앙!

에레네스가 뒤로 물러나며 상대 진영을 바라보았다.

두 명의 사제가 날아오는 것을 확인하고 그녀가 눈을 빛냈다.

"셋인가."

초인이 셋이나 있다니. 만약 자신이 없었으면 북부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두 명의 사제가 끼어들자 덴타리아가 하늘로 솟구치며 웃었다.

"이 건방진 엘프야. 네가 아무리 강해도 세 명을 감당할 수 있을 거 같으냐?"

사제들은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기술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초인급이 셋이나 되면 그 힘은 무시할 수 없이 강해진다.

서로를 보완해 주며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콰앙! 콰아앙! 콰앙!

검은 기운들이 사방을 때렸다. 이번에는 에레네스도 우습게 볼 수 없었는지 연신 피하기에 바빴다.

그 모습을 본 북부군 진영에서도 약간의 소란이 일었다.

"진짜 더 있었잖아?"

알포이가 부들부들 떨며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클로드는 에레네스에게 초인이 얼마나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 죽일 수 있으면 바로 죽이세요. 하지만 압도할 수 있으면 다른 초인을 더 끌어들여야 합니다. 상대의 전력을 정확히 알아야 적절히 대응할 수 있으니까요.

만약 처음 나온 초인을 에레네스가 압도한다면, 상대방 초인들은 협공을 해서라도 에레네스를 죽이려 할 것이다.

그 정도의 강자를 죽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이런 상황을 만든 클로드가 거만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나 같은 전문가한테는 뻔히 보인다고. 전쟁은 카드 게임하고 같은 거라고 항상 말하잖아. 심리전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결국은 더 좋은 패를 가진 놈이 이기는 거지."

카오르가 어깨에 검을 걸치며 비아냥거렸다.

"전문가는 무슨. 너 맨날 영주랑 내기하면 지잖아?"

"...그건 규격 외 인간이라."

어쨌든 클로드의 생각은 통했다. 만약 저쪽에서 에레네스를 무시하고 한꺼번에 달려들었으면 이쪽도 조금 골치가 아팠겠지만, 상대가 받아 주었다.

카오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저놈들은 이걸 왜 받아 준 거야? 어차피 이쪽에 영주가 없는 줄 알고 있으면 그냥 밀어 버리는 게 낫잖아. 이쪽 피해를 조금이라도 더 키워야 하는 거 아닌가."

"쯧쯧쯧, 지휘관의 마음이란 게 그렇지 않아. 투석기 때문에 불리하니 병력 소모를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을 거라고. 최상급 기사만 되어도 상대할 때 피해가 상당하잖아. 그러니 기회가 될 때 미리 죽이고 가고 싶었을 테지."

"흥...."

카오르가 입술을 삐죽였다. 자기만 똑똑한 척하는데 재수 없다. 그냥 아무튼 다 마음에 안 든다.

알포이는 조금 감탄스러워하는 눈빛으로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역시 카드 게임을 해야 해.'

정말 두뇌 자극이 잘될 거 같았다.

클로드가 뻔뻔하고 거만하게 말하는 통에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지만, 사실 그의 속마음은 말과는 조금 달랐다.

그의 등에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와, 진짜 졸라 세네. 저 정도라고? 말이 돼? 진짜 영주보다 더 센 거 아냐?'

별 기대 없이 말했던 건데, 에레네스는 정말 초인을 셋이나 끌어들여서 싸우고 있었다.

아무리 전투 경험이 부족한 사제라 해도 그 힘만은 초인급이다. 한 대만 제대로 맞아도 초인에게 맞는 것과 다를 게 없다는 뜻이다.

그런 자들을 동시에 셋이나 상대하다니.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냥 이대로 공작가로 쳐들어가 버릴까?'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잠깐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에레네스의 활약은 인상적이었다.

구경을 하던 알포이가 조금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거 세 명이나 덤비는데 괜찮겠어? 우리도 이제 도와줘야 하지 않아? 바네사를 빨리 내보내자고! 저놈들한테 매운맛 좀 보여 줘야지!"

직접 나갈 생각은 없었다. 저기에 끼면 자신 정도는 순식간에 몸이 갈려 버릴 것이다. 이럴 때는 또 상황 판단력이 좋은 알포이였다.

테넌트가 검을 뽑으며 클로드에게 말했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카오르도 어깨에 검을 걸친 채 건들거렸다.

"나랑 이 친구랑 나가면 돼. 저 사제들 싸움 졸라 못하잖아."

카오르는 이미 지셀과 함께 라비에르를 잡아 본 적이 있었다. 사제들이 힘과 속도는 강하지만 기술이 현저히 부족하다는 걸 잘 알았다.

그러니 자신과 테넌트가 나가면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클로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조금 더 지켜보자고."

위험하면 뒤로 빠지거나 신호를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에레네스는 아직 신중하게 싸움을 진행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하나는 죽이겠다는 뜻이다.

상대 쪽에 초인이 더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 에레네스가 한 명을 죽였음에도 더 나오지 않는다면.

'저 셋이 전부라는 거지.'

전쟁 시에 초인의 유무를 확인하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그에 따라 쓸 수 있는 전략이 바뀌기 때문이다.

지금 에레네스는 클로드의 명령을 확실하게 이행해 주고 있었다.

덕분에 초인이 최소 세 명이나 와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영주가 없을 때 북부군을 밟아 버리겠다는 상대방의 의지가 느껴졌다.

클로드가 주변에 손짓을 하며 말했다.

"그래도 슬슬 싸울 준비는 해 둬. 셋이나 내보냈는데 밀리면 저쪽도 발광할 테니까."

북부군이 긴장한 채 싸움을 구경하는 동안, 델파인군의 마테스 백작도 주먹을 꾹 쥐고 네 사람의 공방을 지켜보고 있었다.

"도, 도대체 저 엘프는 누구란 말이냐."

세 명의 초인을 전부 내보냈다. 그런데도 상대를 단번에 죽이지 못했다. 상대 지휘관이 바보가 아닌 이상 대응할 수 있는 기사들을 따로 꾸렸을 것이다.

기습적으로 초인이 난입하는 것과, 그들을 묶어 둘 전력이 준비됐을 때 치는 건 무척이나 큰 차이가 난다.

하지만 그것도 세 명의 초인이 저 엘프를 이겼을 때나 고민할 수 있는 문제였다.

"서, 설마 지지는 않겠지?"

일대일로 밀리는 건 확실히 봤다. 그래도 세 명이 질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협공은 언제나 몇 배나 더 큰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가만히 있지?"

이 정도면 북부군 진영에서도 도와주러 사람이 나와야 한다. 그런데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 문제가 없다는 듯 구경만 하는 게 마테스 백작을 더 긴장하게 했다.

고민하던 그는 부관에게 말했다.

"바로 칠 준비를 해라."

"네?"

"상황을 보다가 사제들이 위험하면 돌격한다."

"하지만 기사 대전이 아직...."

"이 멍청한 놈아. 한 명을 상대로 세 명이 나간 이상 대전은 우리의 패배다. 저쪽은 아무도 안 나오지 않느냐!"

"아, 알겠습니다."

구경하던 병사들의 사기는 더 떨어졌다. 기사 대전은 이미 끝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제 틈을 봐서 바로 밀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반드시 기회가 날 것이다.

콰앙! 콰앙! 콰아아앙!

싸움은 점점 과격해져 갔다. 세 명이나 되는 초인들이 강력한 힘으로 서로를 보완해 주니 에레네스도 쉽게 그들을 압도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무언가를 노리는 듯 신중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늘에 떠오른 덴타리아가 크게 웃으며 외쳤다.

"잘난 척하더니 꼴좋구나! 어디 이것도 한번 막아 봐라!"

고오오오오....

덴타리아의 눈이 진한 보랏빛으로 물들며 그의 전신에서 어마어마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차피 기술로는 이길 수 없다. 그렇기에 강력한 힘으로 주변을 초토화할 생각이었다.

에레네스가 아니라 북부군을 노리고 말이다.

'이 공격을 성공시키면 마테스 백작이 움직일 거다.'

준비가 끝나면 에레네스를 버려두고 바로 북부군 쪽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저 엘프는 다른 사제들이 붙잡아 두면 된다.

그사이 북부군은 자신의 공격에 큰 피해를 입을 것이다. 마테스 백작은 분명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고오오오오....

어느새 덴타리아의 몸에서 검은 기운들이 일렁이며 가닥가닥 뽑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라비에르가 지셀과 싸울 때 썼던 기술이었다. 강력한 힘으로 수천 가닥의 기운을 뽑아 주변을 초토화하는 고위 사제들의 최강 기술.

기술이 부족한 그들이 강력한 초인을 만났을 때, 모든 성력을 몰아넣어 단번에 역전을 노리는 필살기라 할 수 있었다.

설령 초인이라도 이 공격은 피하지 못한다. 하물며 일반 병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멍청한 엘프년. 건방지게 나대다니. 아군이 뒈지는 꼴을 보고 후회해라.'

그 순간, 다른 사제들의 공격을 피하고 있던 에레네스가 눈을 빛냈다.

드드드드.

나무 갑옷을 단단히 감싼 그녀의 왼팔에서 다시 새로운 덩굴들이 자랐다.

서로 엮이며 곧 거대한 활의 형상을 이룬 덩굴이 그녀의 왼손에 쥐어졌다.

대륙 7강, 세계수의 수호자라 불리는 에레네스의 결전 병기.

엘븐 세레네이드.

파아아아아....

그녀가 오른손으로 시위를 당기자 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녹색의 화살이 만들어졌다.

화살을 당긴 상태로 계속 사제들의 공격을 피하던 그녀가 마침내 움직임을 멈췄다.

그 순간, 북부군 진영을 노리던 덴타리아는 거대한 기운을 느끼고 고개를 내렸다.

멀리서 녹색의 빛이 번뜩였다.

"서, 설마... 저 엘프는...."

덴타리아가 무언가를 떠올리기도 전에.

퍼어억!

빛의 화살이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466화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4)

"커헉...."

심장이 뚫려 버린 덴타리아는 피를 토하며 추락했다.

그가 내뿜던 검은 기운이 심장으로 몰리며 어떻게든 회복시키려 했다.

하지만 완전히 부서진 심장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검은 기운이 대신하려 해도, 심장을 뚫고 지나간 기운이 그것을 방해했다.

"이, 이 힘은...."

에레네스의 기운은 세계를 구성하는 자연의 힘이었다. 신성력은 아니어도, 법칙을 벗어난 검은 기운을 방해하는 효과가 있었다.

'저 엘프....'

몽롱해지는 정신 속에서 덴타리아는 저 엘프가 누구인지 드디어 기억해 냈다.

'세계수의 수호자....'

이런 힘을 낼 수 있는 엘프는 몇 없다. 심지어 저렇게 거대한 활을 쓰는 엘프는 단 하나뿐이었다.

세계수의 수호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구원교와 싸워 왔다. 만약 덴타리아가 조금만 더 빨리 엘프의 정체를 알아챘다면 이렇게 맞서 싸우지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오랜 세월 구원교와 대적해 온 숙적임에도 덴타리아가 바로 생각해 내지 못한 이유가 있다.

그들의 왕이 에레네스에게 내린 '저주' 때문에, 그녀가 세계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에레네스는 지금까지 수하 엘프들만을 보내 싸워 왔다. 구원교도 그걸 알기에 지금까지 그녀의 거취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북부군에서 모습을 나타낼 줄이야.

'이걸 알려야 해....'

에레네스가 세상에 나타난 걸 알았다면 새롭게 작전을 수립했을 것이다. 적어도 현재 구원교를 이끄는 가트로스가 왔어야 했다.

또 변수가 있었다니. 도대체 펜리스 백작의 곁에는 얼마나 많은 변수가 있다는 말인가.

쿠우웅!

덴타리아의 몸이 바닥에 부딪히며 박살이 났다. 검은 기운은 숨이 끊어진 그를 더 이상 보호해 주지 못하고 세상 곳곳으로 흩어졌다.

"덴타리아!"

"이년이 감히!"

남은 두 명의 사제는 당황하면서도 분노했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오랜 시간 함께한 동료가 죽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나 저 엘프가 보여 준 힘에 두려움을 품게 된 것도 사실이었다.

수도 없이 내지른 공격을 피해 가며 저런 공격을 시도하다니. 게다가 저 활....

"서, 설마...."

"세계수의 수호자?"

두 명의 사제도 구원교의 고위 사제다. 그들도 마침내 엘프의 정체를 눈치챘다.

"후우...."

에레네스는 크게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몸에서 타오르던 검은 기운이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조금 전 화살을 쏘는 순간, 에레네스는 사제의 공격을 피하거나 막지 못하고 그대로 맞고 말았다.

반쪽짜리라도 초인은 초인이라, 강한 힘에 버티지 못하고 뒤로 튕겨 나갔다.

대륙 7강인 그녀나 지셀의 기준에서나 반쪽짜리 초인이지, 다른 사람에게는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강대한 힘을 가진 자들이었다.

하지만 곤란해질 정도로 큰 타격은 아니었다.

"그래도 초인이랍시고 제법 하는구나."

파아아아아!

에레네스가 다시 활을 잡아당겼다. 기운이 몰리며 빛의 화살이 만들어졌다.

경험이 없는 구원교의 두 사제는 순간 멈칫하며 고민했다.

'어, 어떡하지?'

'문헌대로라면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상대다.'

'그런데 공격이 통하긴 했잖아?'

'싸워야 하나? 둘이 덤비면 이길 수 있을까?'

두 사람은 공격해야 할지 도망쳐야 할지 빠르게 판단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그들의 치명적인 실수가 되고 말았다.

퍼어어억!

"커억!"

다시 한 사제의 심장이 꿰뚫렸다. 막지도 피하지도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회, 회복이 제대로 되지...."

사제는 가슴을 부여잡고 괴로워하다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들은 검은 기운 때문에 쉽게 죽지 않는다. 장기가 파괴되어도 숨만 바로 끊어지지 않는다면 검은 기운이 장기의 기능을 일정 시간 대신해 주며 신체를 회복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들의 힘을 맹신했고, 그것은 습관이 되었다. 아군이 죽는 걸 보고서도 빠른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쿠웅!

숨이 끊어진 사제가 쓰러졌다. 남은 사제는 에레네스가 다시 활을 잡아당기는 걸 보고 나서야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멀리서 델파인군의 마테스 백작이 고함을 질렀다.

"쳐라! 어서 사제님을 구하고...."

그런데 조금 더 빨리 움직인 자가 있었다.

"모두 공격해라!"

파아아아앙!

클로드의 외침과 함께 북부군 진영에서 수백 개의 돌이 델파인군을 향해 날아갔다.

이미 클로드는 모든 준비를 끝내고 타이밍만 노리고 있었다.

콰앙! 콰앙! 콰아앙!

"으아아아악!"

수백 개의 돌이 델파인군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제대로 움직이기도 전에 떨어진 돌에 의해 델파인군의 진형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콰앙! 콰앙! 콰앙!

펜리스에서 만든 갈바니움 투석기의 무서운 점은 기동성뿐만이 아니었다. 보통 투석기보다 몇 배나 장전이 빠른 것도 전투의 향방을 가르는 중요한 요소였다.

델파인군을 기다리는 사이 주변에서 돌을 어마어마하게 긁어 온 북부군은 사정없이 돌을 쏘아 보냈다.

클로드 옆을 지키던 웬디가 조금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대족장님도 위험하시지 않을까요?"

"알아서 잘 피하시겠지."

"...."

"그리고 저분이 앞에 나가 있을수록 적들의 대열이 망가질 거라고! 죽을 사람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으하하하!"

"확실히 투석기 공격에 당하실 분은 아니지만...."

수준 높은 기사들도 투석기 공격을 정면으로 맞으면 빈사 상태에 이를 정도의 부상을 입는다. 재수가 없으면 죽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아무리 에레네스라도 제대로 맞으면 마나가 뭉텅이로 사라질 것이다. 괜히 성벽을 부술 수 있는 무기가 아닌 것이다.

사전에 합의된 바는 아니지만 클로드는 에레네스가 훌륭하게 피하거나 막아 낼 거라 믿었다.

아니면 말고.

비처럼 쏟아지는 돌에 마테스 백작도 당황하며 외쳤다.

"다, 달려라! 어서 달려!"

예상했던 공격이지만 막상 당해 보니 생각 이상으로 위력이 강했다.

이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초인들을 셋이나 데리고 왔는데도, 두 명이 죽고 한 명은 뒤로 돌진하고 있었다.

"돌아와! 돌아와서 적을 공격하란 말이다!"

마테스 백작이 외쳤음에도 사제는 뒤돌아 도망가기 바빴다.

그리고 에레네스가 그 사제의 뒤를 쫓았다.

콰아앙!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거대한 돌을 한 손으로 쳐낸 그녀는 아군의 진영을 한번 노려보았다.

'돌을 날리겠다는 얘기는 안 했는데.'

날아오는 돌들을 쳐낼 때마다 손이 얼얼해질 정도로 기운이 소모되고 있었다. 돌이 하도 많이 쏟아지니 그녀조차도 죄다 피하기는 어려웠다.

'저놈 진짜....'

북부군에 합류한 뒤로 자신의 평정심이 묘하게 깨져 갔다.

에레네스는 돌아가면 꼭 한 소리 하리라 결심하고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구원교의 사제를 잡는 게 우선이었다.

타앗!

에레네스는 사제를 따라 적진 쪽으로 뛰어가며 다시 빛의 화살을 잡아당겼다.

마테스 백작이 달려오는 에레네스를 발견하고 외쳤다.

"죽여라! 저 엘프부터 죽여라! 어서!"

상대방 초인이라도 없애야 이 전투에 승리할 가능성이 생긴다.

아무래도 도망가는 사제를 쫓으려는 거 같은데, 아군을 상당수 희생해서라도 죽여야 했다.

수많은 기사와 병사들이 에레네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카가가가각!

기사들이 휘두르는 검에 그녀의 갑옷이 조금씩 갈라졌다. 역시 수준 높은 남부의 기사들이라 할 수 있었다.

중간중간 최소 상급은 되는 기사들까지 끼어 있는 거 같았다.

에레네스는 사제들과 싸우느라 이미 상당히 기운을 소모한 상태였다. 특히 '엘븐 세레네이드'는 엄청난 기운을 소모한다.

아무리 초인이라 해도 지친 채로 적진에서 많은 자들을 상대하기는 쉽지 않았다. 게다가 망할 놈의 클로드가 어마어마한 돌들을 계속 집어 던지고 있었다.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해서 좋을 건 없었다.

콰앙! 콰아앙! 콰앙!

시체가 터지고 비명이 울린다. 사방에서 기사들의 공격이 들어온다.

결국 에레네스는 사제를 더 쫓지 못하고 화살을 쏘아 보냈다.

파아아아아앙!

그새 상당히 멀리 도망친 구원교의 사제는 멀리서 쏘아져 오는 강대한 기운의 파동을 느꼈다.

이미 두 명이나 죽는 걸 눈앞에서 봤다. 그는 모든 힘을 쏟아내어 가까스로 몸을 틀었다.

파아아악!

"끄아아악!"

어깻죽지가 완전히 박살이 나 팔이 떨어진 사제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래도 다행히 급소는 피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전장을 벗어났다. 초인의 힘을 가진 자답게 도망치는 속도 또한 무지막지하게 빨랐다.

"쯧."

에레네스는 아쉬움에 혀를 한 번 차고 몸을 돌렸다. 뒤로 물러나야 할 때였다.

처음에는 투석기 공격을 맞으면서도 앞으로 달려가던 델파인군은, 자신을 잡겠다고 일부 병력이 길을 튼 덕분에 진형이 무너지고 말았다.

아무래도 클로드란 녀석이 이런 것까지 예상하고 공격을 시작한 거 같았다.

북부군에겐 좋은 일이지만, 포위당한 에레네스로서는 귀찮은 일이었다. 주위에 빽빽하게 몰린 기사들과 병사들이 무기를 내질렀다.

그녀가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끝없이 휘날리는 바람이여, 나의 부름에 답하라."

콰아아아아아!

바람이 모여들며 거대한 회색빛 여인의 형상을 이루었다. 소용돌이가 감싸고 있는 바람의 상급 정령, 실라이론이었다.

실라이론이 에레네스의 주변을 한 바퀴 돌자 강렬한 폭풍이 주변으로 뻗어 나갔다.

파아아아앙!

"으아아아악!"

갑자기 불어온 폭풍에 주변에서 덤벼들던 기사들과 병사들이 전부 뒤로 밀려나거나 나동그라졌다.

그들은 칼날 같은 바람에 당해 몸 곳곳이 베이며 피를 뿜어내었다.

에레네스는 그 정도로 끝내지 않았다. 이왕 힘을 쓴 거 조금 더 쓰기로 했다.

"영원히 타오르는 불이여, 너의 불꽃을 이곳으로 가져와라."

퍼어어엉!

허공에서 갑자기 불꽃이 모여들며 곧 거대한 도마뱀의 형상을 한 상급 정령, 샐라임이 나타났다.

불타는 도마뱀이 입을 벌리자 불길이 쏘아져 나갔다. 샐라임은 성난 맹수처럼 주변의 모든 걸 태우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뜬금없이 아군 진영에서 화염 공격을 당한 병사들이 불타며 쓰러졌다. 불길은 옆으로 옮겨붙으며 점점 커졌다.

마나를 다룰 줄 아는 기사들은 몸에 붙은 불을 끄거나 막아 냈지만, 몰려오던 병사들은 그러지 못했다.

"피해라!"

"거리를 벌려!"

제대로 돌격을 하기도 전에 난입한 에레네스 때문에 난리가 났다.

마테스 백작은 다급하게 외쳤다.

"마법사! 마법사들은 뭘 하느냐! 어서 막아라! 어서 막으란 말이다!"

하지만 마법사들도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이미 북부군에서 쏟아져 오는 거대한 마력을 봉쇄하기도 바빴다.

"무리입니다! 저희는 이곳을 공격하는 '알포이'의 마력을 막고 있습니다!"

북부군에는 바네사만 있는 게 아니다. 다른 마법사들도 즐비하다.

영지 방어 때문에 두고 온 마법사들을 제외해도 무려 100여 명의 마법사들이 이곳에 와 있었다.

그들이 전부 마법을 쏘아 대니 델파인군은 마법 공격을 막기에 급급했다.

그나마 델파인군에도 수준 높은 마법사들이 많기에 7서클 마법사가 끼어 있는 북부군 마법사들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이이익...."

마테스 백작은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믿었던 초인들은 두 명이 죽고 한 명은 도망가 버렸다.

끊임없이 돌들이 날아와 아군을 죽이고 웬 미친 엘프는 아군 진영을 초토화하고 있었다.

일부 기마병은 북부군의 지근거리까지 도착했지만, 중간에 방해가 너무 많아 수가 충분하지 않았다. 대형도 죄다 망가진 채였다.

반면 북부군은 전열이 방패를 세우고 제대로 된 방비 태세를 갖춘 상태였다. 기사들까지 전부 앞세워 방어를 단단히 했다.

이대로는 돌격해 봐야 뚫을 수 없다.

'어떻게 해야....'

마테스 백작이 갈팡질팡하는 사이, 북부군에서는 차분히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기하고 있던 테넌트가 클로드에게 말했다.

"이제 제가 나가겠습니다."

"좋아. 절대 초인인 티는 내지 마. 적당히 상급 기사 정도로. 알겠지?"

"알겠습니다."

처음 작전과 다르긴 하지만 클로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테넌트도 알았다. 이미 승패가 기울었는데 굳이 패를 하나 더 보여 줄 필요는 없었다.

카오르도 어깨를 빙빙 돌리며 말했다.

"이야, 생각보다 결과가 더 좋네. 원래는 초인이 몇 명인지 확인하고, 죽일 수 있을 만큼만 죽이고 빠지는 거였잖아. 정 안 되면 우리가 나가고. 이것도 예상한 거야?"

여유롭게 말하고 있지만 카오르의 등은 식은땀으로 온통 젖어 있었다.

'뭐야, 싯팔! 저 엘프 뭐야? 미친 거 아냐? 왜 저렇게 센데! 저거 엘프 맞아? 드래곤 아니야?'

저번에 덤벼들었다가 늘씬하게 맞기는 했지만, 저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클로드는 거만하게 웃으며 답했다.

"뭐, 엘프 대족장이라고 하니 이 정도는 할 거라 대충 예상했지. 그래서 죽일 수 있을 만큼은 죽이라고 얘기한 거고."

'몰라, 시발, 저거 뭐야.... 무서워....'

하지만 클로드의 등도 식은땀으로 젖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저 정도로 강할 줄은 정말 그도 몰랐다.

누가 봐도 에레네스는 괴물이었다. 홀로 초인 두 명을 죽이고 도망가던 한 놈은 팔을 날려 버렸다.

그것만으로도 경이로운데 이제는 적 진영에서 정령들까지 불러내어 학살을 하고 있었다.

그뿐인가? 싸우면서 중간중간 아군의 투석 공격도 쳐내고 있었다. 정말 영주 못지않은 괴물이었다.

그렇기에 지셀의 전생에 대륙 7강이라 불렸던 것이지만, 이들이 그걸 알 수는 없었다.

콰앙! 콰앙! 콰앙!

"으아아악!"

"어떻게든 뚫어라! 길을 만들어라!"

"엘프부터 쳐! 엘프부터 치란 말이다!"

전황은 점점 델파인군에게 불리해졌다. 사방에서 다른 명령이 내려오니 병사들 사이에 혼선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중간에서 에레네스가 난리를 피우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기껏 투석기를 피해 북부군 앞까지 도착한 자들은 전열조차 제대로 뚫지 못했다. 오히려 오는 족족 방패에 막히고 카오르와 테넌트에게 죽기 바빴다.

마테스 백작은 눈 밑이 떨려왔다.

'이렇게 될 줄이야....'

패배는 확실하다. 이제 다른 진군로의 군단이 수도를 점령하기를 바라야 한다.

북부군을 없애기 위해 가장 많은 군사를 끌고 왔는데도, 예상외의 변수들 때문에 패배하고 말았다.

그가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지금 후퇴하면 병사들은 꽤 살릴 수는 있을 것이다. 워낙 많은 수를 데리고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인 셋을 데리고 와서 패한 자가 이대로 돌아가서 무얼 하겠는가? 처벌은 둘째 문제였다. 스스로의 자존심과 명예가 더럽혀졌다.

이 일을 망친 원흉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

"돌격을 멈춰라! 모두 저 엘프를 죽여라! 돌격을 중지해라! 엘프를 죽여라!"

마테스 백작이 몇 번이나 소리를 지르며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펜리스 백작도 버거운데 저런 엘프까지 그의 곁에 둘 수는 없었다. 저 수상할 정도로 강한 엘프를 어떻게든 죽여야 한다.

여기 온 델파인군 모두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467화 뭔가 찝찝해. (1)

콰앙! 콰앙! 콰앙! 콰아앙!

투석기 공격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도대체 돌을 얼마나 준비했는지 짐작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쏟아지는 돌에 무방비로 으깨지고 깔리면서도 델파인군은 에레네스에게 달려들었다.

"와아아아! 죽여라!"

"어떻게든 엘프만 죽이면 된다!"

"물러서지 마라!"

델파인군은 그저 에레네스를 죽이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하고 있었다. 이미 북부군을 향해 돌진한 아군은 포기한 상태였다.

"흠."

에레네스는 달려드는 적들을 날려 버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녀도 상급 정령까지 소환한 데다, 아군 투석기 공격을 쳐내느라 너무 많은 기운을 소모한 상태였다. 낙하하는 무거운 돌은 어지간한 기사의 공격보다 더 강했으니까.

힘들긴 하지만, 이런 일은 익숙했다. 오래전 전쟁에서도 동료들과 함께 가장 앞장서서 싸웠었으니까.

주변에 가득 쌓인 시체를 둘러본 그녀가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됐겠지."

클로드의 요청보다 훨씬 더 많은 걸 해 주었다. 돌아가도 아쉬운 소리는 못 할 것이다.

델파인군이 돌진까지 그만두고 모두 에레네스에게 달려들었지만, 그녀는 바람을 타고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자, 잡아라! 어서 잡아!"

마테스 백작이 애원하듯이 외쳤다. 이런 손해를 봤는데 저 엘프마저 놓칠 수는 없었다.

델파인군의 궁병들이 마구 화살을 날렸지만 겨우 그 정도로 그녀를 잡을 수는 없었다.

콰앙! 콰앙! 콰앙!

여전히 투석기 공격은 이어지고 있었다. 날아온 돌이 델파인군을 짓이겼다. 이미 선두로 돌진했던 자들은 모두 죽고 말았다.

대열은 엉망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에레네스라는 목표를 잃은 병사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마테스 백작 또한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넋이 나가 버린 듯했다.

피투성이가 된 부관이 다급하게 외쳤다.

"군단장님! 엘프가 도망갔습니다!"

"...."

"명령을 내려 주셔야 합니다!"

"...."

"군단장님!"

"...후퇴하라."

다시 돌진하기에는 늦었다. 사기도 사기지만 상대 초인을 이길 방법이 없었다.

지금 돌격했다가는 그저 개죽음일 뿐이었다.

얼핏 봐도 절반 이상이 죽었다. 그것도 뭐 하나 제대로 못 해 보고 두들겨 맞기만 했다.

'10만의 대군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줄이야.'

그렇게 준비하고 알아봤는데도 여전히 북부군의 전력을 그 누구도 파악하지 못했다.

콰앙! 콰앙! 콰아앙!

징그러울 정도로 계속 날아오는 투석기 공격 탓에 후퇴도 쉽지 않았다. 델파인군은 날아오는 돌들을 피해 엉망이 된 대열로 도망가기 바빴다.

그런 그들을 보며 클로드가 옆에 선 자에게 손짓했다.

"아스콘, 오늘도 좀 보여 줘. 진정한 엘프의 힘을! 자연의 저주를 받은 네 주둥이를 보여 줘!"

비장한 표정으로 나선 아스콘이 마법사의 도움을 받아 크게 소리쳤다.

"야! 시발! 공작가 싸움 X나 못하네! 그래 놓고 싸움 잘하는 척 거들먹거리고 살았죠? 왕국 최강이 아니라 왕국 X밥이었죠? 그냥 오자마자 두들겨 맞기만 했죠? 니들이 뭘 할 수 있는데? 개X밥 새끼들아! 꼬우면 또 덤비든가!"

원래 이기고 나서 놀리는 게 제일 재미있다. 그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아스콘의 조롱을 듣고 북부군은 너무나 신나 했고 물러나는 델파인군은 굴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진영으로 돌아오다 아스콘의 말을 들은 에레네스는 눈을 감고 그냥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와 같은 종족이라는 게 너무 수치스러웠다.

* * *

전투는 북부군의 완벽한 승리로 끝이 났다.

다들 승리할 것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저 얼마나 적은 피해로 이기느냐가 문제였을 뿐이다.

그런데 에레네스가 깜짝 놀랄 정도로 큰 활약을 해 줘서 생각보다 더 쉽게 이길 수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에레네스가 갑옷을 해제하자 갑옷은 다시 덩굴로 변해 땅으로 들어갔다.

이제 저 갑옷은 대지의 기운을 받아 저절로 회복될 것이다.

에레네스는 클로드를 보며 말했다.

"네 생각대로 됐구나. 조금은 인정해 주마."

"...."

클로드는 할 말이 없었다. 사실 그가 에레네스에게 바란 건 초인이 몇 명인지 확인하고, 운이 좋으면 하나 정도 죽이고 돌아오는 것이 전부였다.

적들이 돌격하면 투석기로 수를 줄인 뒤 남은 적은 안쪽에서 테넌트가 죽이게 할 심산이었다.

그런데 거기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이게 아니었는데.... 영주가 혼자 날뛸 때랑 비슷하잖아?'

생각해 보니 정말 비슷한 느낌이었다. 지셀과 함께할 때도 자신이 할 일이 별로 없긴 했다.

다들 에레네스를 괴물 보듯이 보고 있었다. 그 어색한 분위기를 가장 먼저 깬 자는 알포이였다.

"대족장님! 저 알포이입니다! 저 기억하시죠? 5서클 마법사, 신을 이긴 남자요."

알포이가 새삼스레 자기소개를 하며 시원하고 깨끗한 물을 가지고 왔다. 5서클 마법사가 직접 정화하고 온도를 낮춘 물이다.

"...."

에레네스가 굉장히 찝찝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물잔을 받아 들었다. 어지간한 독에 당할 몸은 아니지만 도무지 신용이 안 가는 놈이 저러니 영 꺼림칙했다.

그래도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으니 일단 마셨다. 그러자 알포이가 손을 싹싹 비비며 말했다.

"어깨 주물러 드릴까요?"

"...괜찮다."

"헤헤, 언제든 필요하면 불러 주세요."

알포이는 파리처럼 계속 손을 비비며 물러났다. 그는 새로운 줄을 잡을 생각에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했다.

'대족장님 꼬셔서 노예 탈출할 거야!'

딱 봐도 영주보다 강해 보인다. 잘만 꼬시면 노예 계약을 해지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알포이가 주책없이 굴어도 어색한 분위기는 쉬이 흐려지지 않았다.

테넌트는 긴장한 채 손을 몇 번이나 쥐었다 폈다.

'세상은 정말 넓구나. 펜리스 백작 말고도 이런 인물이 있을 줄이야.'

자신도 초인에 오르긴 했지만 저렇게 싸울 수는 없었다.

아마 한 명이랑 겨우겨우 치고받고 싸우다가 너덜너덜해지지 않았을까? 기술이야 자신이 위라 해도 힘 자체는 구원교의 고위 사제가 더 강할 테니 말이다.

거만하게 상석에 앉아 있던 클로드가 후다닥 내려와 말했다.

"대신 앉으실래요?"

"...됐다."

"아이참, 앉으셔도 되는데."

아부를 떠는 클로드, 알포이와 달리 카오르는 고개를 돌리고 중얼거렸다.

"흐, 흐흥... 두, 두고 봐. 나중에 다시 붙어 줄 테니까."

더 수련하고 빨리 복수전을 걸려고 했는데 지금 보니까 초인이 되어도 못 이길 거 같았다.

속은 부글부글 끓는데 또 덤비기는 무섭다. 자존심 때문에 감탄하기는 싫다.

에레네스에게 대놓고 개겼던 아스콘은 그녀와 눈도 못 마주치고 아예 몸을 돌렸다. 그도 괜히 다른 쪽을 보며 구시렁거렸다.

"시바, 싸움 졸라 잘하네. 숲에서 사냥만 하고 살았나. 아주 그냥 세계도 정복하겠어."

에레네스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상 가벼운 놈들은 다 이곳에 모아 놓은 것만 같구나.'

도대체 펜리스 백작은 어떤 사람일까? 이런 놈들만 모아 놓기도 참 힘들 텐데 말이다.

심지어 펜리스 백작은 이런 놈들을 데리고 어마어마한 전적을 쌓고 있다. 참으로 신기한 놈들이다.

긴장한 수뇌부와 다르게 북부군 병사들은 이 완벽한 승리에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와아아아! 이겼다!"

"델파인군도 별거 아니잖아!"

"대족장님 대단하십니다!"

특히 에레네스를 따라온 엘프들은 자부심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에게 에레네스는 신이나 마찬가지였다. 북부군에게 자신감을 주는 원천이 지셀이라면 엘프들에게는 그녀가 바로 그런 존재였다.

에레네스는 북부군 병사들을 보며 살짝 미소 짓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무리 숲에서만 살았어도 그 정도의 사회성은 있었다.

"나는 이제 좀 쉬어야겠다."

"아, 그러면 제가 회복해 드릴게요! 도움이 되실 거예요."

피오테가 다가왔지만 에레네스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그냥 휴식을 좀 취하면 된다."

크게 상처 입은 곳은 없다. 단지 기운을 너무 많이 소모했을 뿐이다.

신성력을 받으면 회복 속도가 빨라지기야 할 테지만 그녀는 거절했다.

평소에도 에레네스는 신성력을 불편해했다. 상극의 기운임이 아님에도 그러했다.

'그 기운을 더 느끼고 싶지 않다.'

신성력을 접할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

오래전 떠난 동료가 쓰던 힘. 그리고 이 사태를 만든....

'그만, 과거의 일에 더 사로잡히지 말자.'

떠오르는 상념을 지우려고 에레네스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거절당해 머쓱해하는 피오테를 뒤로하고 에레네스는 자신의 천막으로 향했다. 오늘은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었다.

그녀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피곤해 보이고 어두웠다. 분명 전투가 힘들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클로드는 멀어지는 에레네스의 등을 보며 혼자 작게 쿡쿡거리며 웃었다.

웬디가 흘깃 바라보자 클로드가 그녀에게 손가락 세 개를 펴고 입술만 움직여서 말했다.

'30년.'

"...."

클로드는 저런 강력한 전력을 30년이나 쓸 수 있다는 것에 무척이나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에레네스가 엘프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 300년으로 했어야 했는데.'

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30년이면 자신도 살아있을 확률이 높다. 에레네스도 당연히 살아 있을 것이다.

30년 뒤에 자신은 분노한 에레네스에 의해 한 줌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에잉, 몰라. 그때 가서 생각하지 뭐."

30년 뒤를 걱정하고 살기에 그는 너무나도 낙천적이었다.

솔직히 전쟁 중에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러니까 전쟁이 끝나고 나서 고민해 봐도 된다.

'어떻게 하면 계약을 연장할지 말이야. 도박 중독자로 만들어야 하나?'

클로드가 야심 찬 고민에 빠져 있는 동안, 북부군은 다시 물자를 점검하고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한 번 이겼다고 방심하면 안 된다. 지금도 각지에서 공작가의 군대가 움직이는 중이고, 상황은 왕국에 좋지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흐음,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클로드가 지도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번 전투는 단지 공작가의 진군로 하나를 막았을 뿐이다. 이곳 외에 다른 두 곳은 어떻게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쪽은 아직 결과가 안 나왔으니까.

동부의 군대는 계속 깨지고 물러나다가 부랴부랴 움직인 연합군들 덕분에 겨우 방어선을 만들었다고 한다.

다른 쪽을 지원하려고 해도 상황을 보고 움직여야 하는데 소식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고서야 다크가 클로드를 찾아왔다.

"이열, 클로드! 이번에도 잘 막아 냈군!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

"...왔냐. 영주님은?"

"곧 도착할 거야. 상황을 확인하려고 날 먼저 보낸 거다."

"페르디움 일은?"

"아주 훌륭하게 잘 막아 내었다. 다 이 몸 덕분이지."

자신 덕분에 에레네스의 말을 페르디움에 전달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자화자찬하는 다크였다.

"그래.... 뭐, 나머지는 영주님이 와서 처리하겠지."

얼마 후 지셀 일행들이 도착했다. 지셀은 전투 경과를 보고받고 매우 흡족해했다.

예상대로 자신이 없어도 다들 훌륭하게 적의 공격을 막아 주었다. 특히 에레네스가 크게 활약했다.

'역시 대단하다니까.'

전생에 대륙 7강이라 불렸던 자들은 규격 외의 존재들이라고 봐야 했다. 에레네스는 그 이름에 걸맞은 힘을 보여 줬다.

아마 공작가에서는 에레네스의 존재를 알고 다시 전략을 짜느라 머리가 아플 것이다. 하지만 북부군에 아직 더 큰 잠재력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예상치 못할 것이다.

자신 또한 조만간 다섯 개의 코어를 만들고 전생의 실력을 되찾을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아직은 무리해서 좋을 게 없지.'

언제 격렬한 전투에 참여할지 모르니 지셀도 섣불리 코어를 확장하기는 힘든 상태였다.

이번 전쟁은 코어 세 개로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다크의 증폭 능력을 이용해서 코어 다섯 개에 근접한 힘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회가 나는 대로 시도는 할 생각이었다.

"연합군은 어떻게 됐지?"

"오는 족족 왕국군과 동부로 보내고 있었습니다만... 아직 제대로 된 결과는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각 왕국에서 주력 부대를 보냈을 리는 없으니 전투력은 크게 기대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숫자는 그 자체로 힘이 된다. 그들이 있기에 여러 곳에 방어선을 세울 수 있었다.

클로드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었다.

"현재 동부로 진군한 델파인군은 왕국군과 연합군의 군세에 막혔습니다. 다른 두 개의 군단 또한 왕국군과 싸우고 있을 겁니다."

"흠, 그래. 다크를 보내서 상황을 파악해야겠어. 아직도 소식이 안 들어온 걸 보면 문제가 생긴 모양이군."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는 없다. 여기서 북부군이 승리했다고 하나 다른 곳이 모조리 패하면 골치가 아파진다.

어느 한쪽을 도우러 가도 다른 한쪽이 뚫려 버리면 수도를 뺏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차라리 바로 남부로 쳐들어가는 게 어떨까요? 원래 그런 계획이 있지 않았습니까."

클로드의 말이 맞다. 지셀은 북부군이 공격을 한 번 막아 내면 바로 남부로 기습 공격을 감행할 생각이었다.

멜키르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지셀이 관자놀이를 툭툭 치며 고민하다가 말했다.

"아니야. 원래 그러려고 했는데 지금 뭔가 찝찝해."

"뭐가요?"

"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찝찝해."

"...."

지셀이 세워 뒀던 큰 전략은 이랬다.

여유가 생기는 대로 북부군이 남부로 짓쳐들어가 공작가를 친다. 그러면 그들을 막기 위해 공작가의 다른 군단이 돌아올 것이다.

그때 왕국군과 연합군, 북부군이 힘을 합해 다시 그들을 위아래로 포위한다.

이를 위해 예전 모브레이 백작을 회유해 길을 빌려주겠다는 약속까지 받아 내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은 그 전략에 의심이 생겼다.

"그놈들은 돌아오지 않을 거 같아. 오히려 잘됐다 하고 바로 수도를 점령할 거 같단 말이지."

"그러면 공작가가 박살 나는데요? 델파인 공작을 잃어서 좋을 게 있겠습니까?"

"최후의 방어선은 뚫리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있겠지. 왕국제일검과 7서클 마스터가 움직이지 않았잖아."

그들은 공작가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였다. 전쟁에는 구원교의 초인들만이 나서고 있었다.

이게 지금 지셀이 골치 아파하는 점이었다.

공작가의 다른 군단에도 구원교의 초인이 최소 하나씩은 끼어 있을 터다. 왕국군과 연합군은 초인이 없이 그들을 상대해야 한다.

"왕국군이나 연합군이나 초인을 처리하고 오긴 어렵지. 결국 우리끼리만 해결해야 한다는 말인데.... 문제는 공작가의 주력이 아직도 남부에 남아서 델파인 공작을 지키고 있다는 거야,"

"만약 남부로 들어가서 상황이 고착되거나 점령에 시간이 오래 걸리면... 다른 지역은 다 끝이 날 수도 있겠군요."

"그래. 솔직히 처음엔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거든. 델파인 공작만 잡아 죽이면 끝난다고 생각했었으니까. 나머지는 그 뒤에 하나씩 잡아 죽일 생각이었어."

지셀이 잠깐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될 거 같다는 거지."

어쩌면 공작가와 구원교는 북부군이 차라리 남부를 치길 바라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래야 다른 군단들이 살아남아 수도를 점령할 수 있을 테니까.

468화 뭔가 찝찝해. (2)

지셀은 섣불리 움직일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머니에 관해 듣고 나니, 구원교는 남부가 먹히든 말든 어떻게든 왕실부터 함락하려 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예전부터 공작가의 움직임을 보고 그런 의심을 해 왔지만, 지금은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우리가 남부를 쓸어버리는 것보다 우리가 빠진 왕국군을 공작가가 쓸어버리는 게 더 빠를 거야. 일단은 어느 정도 정리를 하고 움직여야겠어."

"정리라면...?"

"수도로 향하는 델파인군부터 박살 내고, 국왕을 좀 만나 봐야겠다. 전령을 보내서 수도를 비울 수 있으면 비우라고 전해."

만약 공작가의 목표가 국왕이라면, 국왕이 몸을 숨겼을 때 그들의 전략이 다소 바뀔 것이다. 그 부분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쓸 수 없는 방법이었다. 클로드가 황당해하며 답했다.

"폐하께서는 지금 오늘내일하는 상태 아닙니까. 도망갈 상태가 되겠어요? 아니, 왕실의 자존심 때문에라도 절대 도망 안 갈 겁니다. 도망가면 모든 영주들의 마음이 바뀔 텐데요."

"일단은 전해 보고, 정 안 되면 만나서 얘기해 보자고."

지셀도 딱히 당장 뭘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었다. 이번만큼은 전생의 정보가 없으니 직감에 따라 진행하는 면이 컸다.

구원교와 그림자 기사단,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보며 자신이 모르는 정보가 있는지만 확인할 참이었다.

클로드가 머리를 긁적이다가 물었다.

"그런데 어디를 먼저 도와주시려고요?"

"음...."

델파인군의 남은 두 개 군단과 길목을 지키는 왕국군에 대한 소식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만약 한 곳이라도 패하면 수도까지 금세 밀고 들어올 것이다. 양쪽 다 패하면 더 골치 아파진다.

동부에서 우회 기동하여 수도로 진격하는 군대도 문제였다. 방어선을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이쪽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지금쯤 붙었겠지?"

"그럼요. 아마 곧 소식이 들어올 겁니다."

북부군은 연합군을 맞이해야 해서 조금 더 북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남부 전선 가까이에 있던 왕국군은 북부군보다 먼저 맞붙어서 싸우고 있었을 것이다.

상황을 알아보라고 다크를 보내긴 했지만, 다크가 도착하기 전에 전쟁 결과 보고가 먼저 들어올 수도 있었다.

"그쪽에서도 전령을 보낼 테고, 다크도 보냈으니 일단은 며칠만 기다려 보자고.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결정하자."

사방이 전쟁터니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최대한 빨리 정보를 입수한 뒤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북부군이야 아예 길목을 막고 일부러 회전을 유도했지만 다른 왕국군은 아니다. 그들은 남부 전선의 각 요새를 끼고 싸우고 있다.

거기에 연합군들까지 속속 합류하고 있으니 꽤 오래 버틸 수도 있다.

"언제든 이동할 수 있게 준비는 해 둬. 다른 곳을 도와주든 수도로 가든, 정보가 들어오자마자 움직일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러면 난 그사이에 엘레나랑 레이첼을 좀 수련시켜야겠군."

두 사람이 같이 온 걸 봤던 클로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둘 다 아주 죽어 나갈 게 뻔하다. 그만큼 영주의 수련은 무지막지했으니까.

* * *

북부군까지 끌려온 엘레나는 화가 잔뜩 난 상태였다.

우아한 귀부인이 되고 싶었는데 피 냄새 가득한 전장까지 끌려왔다. 혼자 돌아갈 수도 없었다.

천막 안에 레이첼과 둘만 남게 되자 엘레나가 구시렁거렸다.

"에휴, 내 팔자야. 그러면 그렇지. 어쩐지 요새 일이 너무 잘 풀린다 했어."

이제 좀 영지가 먹고살 만해졌는데 그 혜택을 누리기는커녕 힘이나 잔뜩 쓰게 생겼다.

욕이라도 실컷 해 주고 싶은데, 북부군이 왕국과 영지를 지키는 걸 알기에 꾹꾹 참고 있었다.

레이첼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을 거야. 엘레나는 신력을 가지고 있잖아? 내가 더 걱정이지."

"흥, 귀부인한테 신력이 무슨 소용이야. 그런 건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래도 그냥 호신을 위해 배운다고 생각하자."

"어휴, 알았어, 알았어. 너 정말 근데 괜찮아? 안 무서워?"

퉁명스러운 엘레나의 표정에 레이첼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부터 병마에 시달리며 친구도 없이 지내온 그녀는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운 면이 있었다.

어머니도 일찍 잃고 아버지인 길리언도 무뚝뚝하니 더 그랬다.

'나는 너와 함께 있으면 다 괜찮아.'

그래서 그녀는 북부군으로 끌려온 것도 개의치 않았다.

자신의 병을 치료해 준 건 지셀이니까. 그 덕분에 소중한 친구인 엘레나도 만날 수 있었으니까.

그녀에게는 하루하루가 감사한 나날이었다. 조금 두렵기는 했지만, 엘레나와 함께라면 어떠한 고난도 이겨 낼 수 있을 거 같았다.

"일단은 스스로 몸을 지키는 게 우선이고, 싸워도 균열인 같은 괴물이랑 싸운다고 하셨잖아.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우리가 사람 죽일 일도 없다고 하셨고."

"흥, 오빠 말은 다 믿으면 안 돼. 어? 지금 특별히 사람 좀 죽여야겠네? 그러면 그냥 투입되는 거라고. 그냥 자기 멋대로 사는 사람이거든."

엘레나가 툴툴거렸다. 어렸을 때부터 지랄 맞던 지셀의 성질을 많이 봐 왔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그렇게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지셀이 나타났다.

"엘레나, 레이첼. 오늘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너희에게 전투 기술을 알려 주겠다."

엘레나가 지셀을 노려보다가 픽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알겠어. 대신 무기는 내가 고를 거야."

"응? 무기? 무슨 무기?"

"레이피어로 할래."

이왕 배우는 거 엘레나는 목표를 바꿨다.

바로 한 자루의 레이피어를 쓰는 우아한 기사로 말이다.

자신은 전장의 아름답고 고귀한 꽃이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보고 감탄할 수밖에 없는, 그런 도도한 기사가 될 것이다.

'흐흥, 그것도 나름 멋지잖아. 뭐? 나보고 성난 황소처럼 날뛰라고? 웃기지 마. 난 그렇게 안 싸워.'

그녀의 머릿속에 화려하게 활약을 펼치는 우아한 백조와 같은 기사가 그려졌다.

왕국과 역사에 남을 아름답고 도도하고 우아하고 화려한 기사! 정말 멋지지 않은가!

'나중에는 귀부인이 될 거긴 하지만.... 잠깐은 길을 돌아가도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어쩌면 수련을 좀 해 봐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지셀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뭐? 레이...피어?"

"응, 레이피어. 그게 제일 우아하잖아?"

"푸웁!"

지셀이 주먹으로 입을 막고 웃음을 참았다. 세상 살면서 그런 웃긴 말은 처음 들어 본다는 반응이었다.

"뭐야! 왜 웃어! 레이피어가 어때서!"

"아니, 네가 그런 허약하기 짝이 없는 꼬챙이를 쓴다고? 그건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찌르기만 해도 바로 부러져 버릴걸?"

"으으... 그럼 검이야?"

검이야 기사들의 기본 소양이니 당연히 익힐 거라 생각했다. 레이피어보다는 덜 하지만 나쁘진 않다.

나중에 실력이 늘면 레이피어로 바꾸면 되니까.

하지만 이번에도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검도 너에게 어울리지 않아."

"그럼 뭐! 뭘 가르칠 건데? 주먹? 어?"

성난 엘레나가 주먹을 치켜들자, 지셀이 고개를 돌리며 천막 밖을 향해 외쳤다.

"어이, 그거 가져와!"

곧 기사 두 명이 끙끙대며 거대한 무언가를 들고 왔다.

쿵!

기사들이 내려놓은 건 무척이나 거대하고 흉측하게 생긴 양날 도끼였다.

크기가 어찌나 큰지 어지간한 성인 남성의 몸 크기를 뛰어넘었다. 양쪽 도끼날은 불길할 정도로 불그스름한 색을 머금고 있었다.

그뿐인가. 도끼의 중앙에는 끔찍한 해골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 밑에 적힌 글귀는 더 가관이었다.

[죽음은 내 영광의 길이요, 나의 적은 지옥이니라.]

그 도끼를 보고 엘레나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이, 이게 뭐야? 이게 내 무기라고?"

"아아, 그래. 이 도끼의 이름은 '파멸의 인도자'야. 너에게 딱 어울리는 무기지. 전에 말 안 듣는 영주한테서 뺏어 온 건데, 길리언이 특별히 너에게 양보해 주기로 했어."

"꺼, 꺼져."

어디서 흉측한 도끼를 들고 와서 이걸 쓰란다. 이런 도끼를 들고 다니면 우아한 기사는커녕 인간 도살자로 보일 것이다.

엘레나의 속도 모르고 지셀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건 아무나 들 수 없는 무기야! 정말 너를 위해 만들어진 무기라고!"

'파멸의 인도자'는 무식할 정도로 무겁기에 실용성이 떨어졌다. 마나를 익힌 자라면 들 수 있겠지만 그만큼 마나의 소모가 크다.

하지만 신력을 가진 엘레나라면 무리 없이 들 수 있을 것이다.

엘레나가 주먹을 꽉 쥐고 외쳤다.

"이딴 건 난 못 든다고!"

기사 두 명이 낑낑거리며 들고 온 걸 자신이 어떻게 든다는 말인가?

그래도 지셀은 손짓을 하며 재촉했다.

"일단 들어 봐. 한 번 들어 보고 얘기해. 넌 들 수 있어. 너를 위해 태어난 무기니까."

"으으.... 너 진짜...."

엘레나가 폭발하려고 하자 레이첼이 옆에서 말렸다.

"그러지 말고.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한번 들어 봐 봐."

"으으...."

레이첼의 부탁에 어쩔 수 없이 엘레나는 도낏자루를 잡고 힘을 주었다.

정말 묵직하니 팔에 힘이 꽉 들어갔다. 그런데... 쉽게 들린다?

상당한 무게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어쨌든 들긴 들었다. 휘두를 수도 있을 거 같았다.

만약 마나를 익힌다면 지금보다 적은 힘으로도 검처럼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지셀이 물개 박수를 치며 외쳤다.

"와! 봐 봐! 장난 아니지? 혼자 저걸 들었다니까? 마나도 없이 말이야! 벨린다! 벨린다도 어서 와서 봐 봐! 저거 완전 괴물이야!"

벨린다가 천막 입구에서 고개만 빼꼼 들이밀고 구경하더니 말했다.

"아, 아가씨, 그, 그거 잘 어울려요."

진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옆에 있는 기사들마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그건 아가씨를, 역시 아가씨를 위한 무기 같습니다. 저,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전혀 진심이 보이지 않는 말투였다. 지셀이 억지로 시켰다는 게 뻔히 보였다.

괴물 소리까지 들은 엘레나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잘 어울리긴 뭐가 잘 어울려! 귀부인이 될 나한테 이딴 무기가 잘 어울리겠냐고!"

부우웅!

"우왁!"

갑자기 휘둘러진 '파멸의 인도자'를 피해 지셀이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휘두르기만 해도 강풍이 불었다. 이건 정말 엘레나를 위한 무기였다.

기사들도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엘레나가 눈을 빛내며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제 오빠를 똑 닮아 있었다.

"잘 어울린다 이거지. 그럼 다들 내 도끼 맛을 좀 보든가."

부웅! 부웅! 부웅!

엘레나가 도끼를 마구 휘두르자 지셀과 기사들이 천막 밖으로 도망갔다.

뭘 배우지도 않았는데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주변이 다 파괴되고 있었다. 천막은 순식간에 걸레가 되어 무너져 버렸다.

"야! 전투 기술 알려 준다며! 안 와? 안 오냐고! 덤벼, 이 새끼야!"

엘레나가 도끼를 양손으로 잡고 마구 휘두르며 외쳤다. 다들 멀리 떨어져서 발광하는 엘레나를 구경했다.

지셀이 미친 망나니처럼 뛰어다니는 동생을 보고 중얼거렸다.

"으음, 전장에서 날뛰는 성난 황소가 되기를 바라긴 했지만... 지금 보니... 성난 장수풍뎅이 같군."

제 몸보다 더 큰 도끼를 들고 이리저리 휘두르는 게 꼭 그래 보였다.

한참을 날뛰던 엘레나는 레이첼이 달래고 나서야 겨우 노기를 가라앉혔다. 다들 몰려와서 구경하니 창피해진 것도 한몫했다.

결국 나중에 무기를 바꾸는 조건으로 엘레나는 수련을 수락했다.

바로 지셀의 강의가 시작됐지만, 안타깝게도 기초 자세를 가르치는 것에서 끝났다.

전장으로 보낸 다크가 상황을 알렸기 때문이다.

― 주인... 상황이 좋지 않다. 시체들만 가득해.... 지금 주변을 계속 둘러보고 있어.

곧이어 피투성이가 된 전령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속속 들이닥쳤다.

"동부 방어선은 궤멸하고 동부군 사령관이 사망했습니다! 델파인군은 다시 수도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왕국군 3군단과 8군단이 패배했습니다! 델파인군은 수도로 진격 중입니다!"

"3군단과 8군단을 지원하러 간 왕국군 6군단과 연합군이 패배했습니다!"

"연합군 중 일부가 전멸했습니다. 세이론 왕국, 몰토나 왕국, 롬바르스 왕국입니다."

"영주들이 군대를 모아 다시 저지선을 형성했지만 수가 현저하게 부족합니다!"

동부를 포함하면 현재 남아 있는 델파인군의 진군로는 총 세 개였다. 이 중 두 군데에서 왕국군과 연합군이 완전히 박살 났다.

남은 한 군단에 대한 소식은 아직 확실하게 들어오지 않았다.

― 주인... 아무래도....

다크의 보고를 받고도 지셀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다크는 그 지역에서 본 것만을 전달해 준다. 현재 왕국군의 상황이 어떤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모른다.

전체 상황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 지셀은 다크에게 주변 수색을 맡기고 조금 더 기다렸다.

남은 한 군단에 대한 소식도 곧 들어왔다.

"남부 전선이 완전히 궤멸했습니다! 현재 왕국군 총사령관인 모리스 맥쿼리 후작은 소수의 병력만 이끌고 도주한 상태입니다!"

지셀은 이마를 짚었다. 전력 차이가 이 정도로 클 줄이야.

초인이 전황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하지만, 초인 한두 명 차이로 승패가 갈리는 건 아니었다. 그럴 수 있다면 그냥 초인들끼리 싸우고 끝났을 것이다.

이렇게 대패했다는 건 기사들부터 병사들, 지휘관의 역량까지 모두 델파인군의 상대가 안 된다는 뜻이었다.

듣고 있던 아스콘이 혀를 차며 말했다.

"아휴, 병신들. 뭐 제대로 싸울 줄 아는 놈들이 하나도 없네."

아스콘의 말에는 한 점 틀림이 없었다. 진짜 한 곳도 빠짐없이 다 패배했을 줄이야. 전략적 후퇴를 한 부대조차 없었다.

이대로는 위험했다. 공작파에서 탈퇴했던 귀족들이 이 소식을 들으면 공포에 빠져 버릴 것이다. 그들이 눈치를 보고 다시 공작가의 휘하로 들어가면 더 골치가 아파진다.

소식을 들은 지셀의 측근들도 다들 굳은 표정을 지었다. 도무지 어디서부터 수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북부군이 남아 있으니 전쟁이야 계속할 수 있겠지만, 수도가 함락당하고 국왕이 사로잡히면 아무 의미 없다.

침잠한 분위기 속에서 지셀은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서부에 모인 군대는 왕국군과 영주들의 군대에 합류하지 말고 바로 수도로 가라고 전해라. 일단 카르데니아를 지키라고 해. 페르디움은 병력을 모두 펜리스의 최전방 요새로 보내 방비를 단단히 하라고 일러라."

"저희는 어떻게 할까요?"

클로드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지셀이 곧 결정을 내렸다.

"북부군은 둘로 나눈다."

하나로 움직이기에는, 상황이 너무나 좋지 않았다.

469화 그게 네놈들의 한계다. (1)

지셀의 명령을 들은 클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어떻게 나눌까요?"

북부군이 한꺼번에 움직인다면 어느 곳이든 저지할 수 있다. 지셀과 에레네스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사이에 다른 곳이 모두 밀려 버릴 것이다. 결국 이쪽도 부대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지셀은 지도를 찍으며 말했다.

"내가 기동군 2만을 끌고 총사령관이 막던 방향으로 가겠다. 클로드가 나머지를 이끌고. 필요하다면 부대를 더 나누어도 좋다."

에레네스와 측근들을 클로드에게 맡기기로 했다. 자신이 없어도 델파인군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이었다.

1차 저지선을 뚫은 델파인군이 기동력을 높이기 위해 부대를 다시 나눌 수도 있지만, 그 부분은 클로드가 막아 줄 것이다.

"클로드, 적보다 먼저 수도로 가는 길목을 확보해야 한다. 할 수 있겠지? 연합군이 오기만 기대해서는 안 돼. 그들보다 공작가의 군대가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어. "

"알겠습니다. 일단 선발대와 본대를 나눠서 움직이겠습니다."

"그래, 다들 이번에도 클로드의 명령을 잘 따르도록. 일단 북부군만으로 수도 인근에 방어선을 만드는 게 이번 작전의 목표다. 조금만 기다리면 연합군이 다시 합류할 거야."

클로드가 지도의 한쪽을 보며 물었다.

"동부로 우회해서 들어오는 공작가의 군대는 어찌합니까? 북부군이 그곳까지 막는 건 무리입니다."

하려고 하면 할 수는 있다. 하지만 동부까지 막으려면 각 병력의 규모도, 그들을 이끄는 장수들의 수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북부군이라도 위험해진다.

지셀이 클로드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동네는 지금 어떻지?"

"동부군 사령관도 죽고 왕국군은 박살 났습니다. 다만 영주들과 연합군이 아직은 조금 남아있어 다시 방어선을 구축한 상태입니다."

"그러면 내버려둬. 다른 사람이 도와주러 나설 거야."

"다른 사람이요? 어, 설마?"

"그래. 아멜리아가 이런 기회를 두고 볼 리가 없지. 동부를 다 먹고 싶어서 근질근질할 거야."

"레이폴드 백작이 뛰어나다는 건 저번 전쟁에서 확인했으나... 병력 차이가 너무 큽니다. 델파인군은 야만인들과 다릅니다."

병사들의 질도 뛰어난 데다, 훌륭한 지휘관들도 많다. 거기에 구원교의 초인도 최소한 한 명은 붙어 있을 것이다.

레이폴드군은 모든 면에서 열세였다. 동부에 남은 군대와 손을 잡아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아무리 아멜리아라 해도 막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클로드의 우려에도 지셀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막아? 그 여자는 막는 건 관심도 없을걸? 아마 영주들 군대에 합류하지도 않을 거야."

"네? 그러면 뭘 어떻게 해요?"

"다른 이들이 막고 있는 동안 델파인군을 뒤에서 괴롭히겠지."

"...괴롭혀요?"

"응. 전에 야만인들과 싸울 때 썼던 전략은 아멜리아의 진짜 장기가 아니야. 그건 상황상 어쩔 수 없이 막은 거고. 그 여자가 제일 싫어하는 싸움 방식이 그렇게 대놓고 맞붙어 싸우는 거야. 무척 경멸하지."

"...경멸까지요?"

"그렇다니까. 아주 자기밖에 모르고 이기적이라서 손해 보는 건 죽어라 싫어하거든. 그래서 혼자 뒤통수 때리고 패는 거 좋아해. 자기는 손해 안 보고 남 괴롭히는 거 좋아한다고."

욕하는 거 같기도 하고 자기소개를 하는 거 같기도 하다. 클로드의 표정을 본 지셀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너 무슨 생각해?"

"...아뇨. 아무 생각도."

"...아무튼 아멜리아가 그쪽 뒤를 괴롭히면 남은 군대가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야."

전생과 비슷한 구도였다. 그때는 용병왕의 군대가 공작가를 치는 역할이었다. 그리고 아멜리아는 용병왕의 군대를 따라다니며 근성 있게 괴롭혔었다.

당시 지셀도 아멜리아를 잡지 못해 상당히 약이 오르지 않았던가. 그 대상이 지금은 구원교와 공작가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 틈을 타 여기저기에 깃발을 꽂을 것이다. 달리 그녀가 '깃발의 마녀'라 불렸던 게 아니다.

"자, 그러니까 그쪽은 일단 내버려두고 움직이자고. 수도로 진격하는 두 개 군단부터 확실하게 처리하자."

사실 지셀 입장에서는 수도가 점령당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왕국과 상관없이 공작가와 구원교의 세력은 모두 다 쓸어버릴 계획이었으니까.

다만 국왕을 한번 만나 보고 싶고, 그놈들이 목적을 순순히 이루게 둘 생각이 없었기에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어차피 잡아 죽일 놈들이라면, 지금 친왕파의 힘을 빌려서 하나라도 더 죽여 둬야 조금이라도 이쪽의 피해가 덜할 게 아닌가.

"바로 출발한다. 모두 다시 달리도록."

지셀의 명령에 북부군은 두 무리로 나누어졌다. 지셀과 기동군은 서쪽 방면, 남은 북부군은 동쪽 방면으로 향했다.

* * *

왕국군 총사령관 모리스 맥쿼리 후작은 평소에 귀족들에게 실없는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종종 보이는 철없는 태도와 미신에 의지하는 모습 때문이었다.

그래도 모리스의 폭력적이고 급한 성정과 총사령관이라는 권위 때문에 그의 앞에서 대놓고 무시하지는 못했다.

어쨌든 총사령관으로서 나름대로 능력이 있기는 했으니까.

"자! 이번 점괘도 우리가 승리한다고 나왔다! 특히 귀인이 나타나서 도와준다고 하니 모두 힘을 내서 싸우도록 하자!"

"와아아아아!"

그의 미신 행위는 놀랍게도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는 데 무척 효과적이었다.

총사령관인 그가 남부 전선까지 내려와 직접 지휘하는 점도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 한몫했다.

다른 귀족들과 다르게 그는 자신의 책무를 소홀히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덕분에 그가 이끄는 왕국군은 정말 잘 싸웠다. 연합군 중 일부도 도착해서 병력의 규모 또한 꿀리지 않았다.

"막아라! 오늘도 우리가 버티면 이기는 거다!"

모리스는 총사령관답지 않게 요새 위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직접 병사들을 지휘했다.

그 열정에 고무된 왕국군과 연합군은 무려 세 차례나 델파인군의 공세를 막아 내었다.

상대 쪽에 초인이라 불리는 구원교의 고위 사제가 끼어 있는데도 말이다.

지셀은 단순히 패배했다는 보고밖에 듣지 못했지만, 사실 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잘 싸웠다.

델파인군 3군단을 이끄는 포그렌 백작이 긴 수염을 배배 꼬며 고민했다.

"흐음, 미신이나 믿는 맥쿼리 후작에게 이런 능력이 있었나? 아무리 공성 병기를 쓰지 않는다지만 이리 잘 막아 낼 줄이야."

2군단과 마찬가지로 3군단도 빠르게 진격하기 위해 공성 병기를 가져오지 않았다.

마법사들이 모여서 마법을 쓰고, 초인인 사제가 활약하면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막상 싸워 보니 왕국군은 마법 공격도 생각보다 잘 막았다.

따라온 마법사가 말했다.

"적염의 마탑 주력과 마탑주 휴베르트가 와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아군의 6서클 마법들을 막아 내고 있습니다."

"흐음, 그런가."

이쪽의 마법을 완전히 봉쇄하지 못해 요새 벽이 꽤 망가지긴 했지만, 그래도 꿋꿋이 버티고 있다. 상대측에도 6서클 마법사와 5서클 마법사들이 꽤 많다는 뜻이다.

포그렌 백작은 옆에 있는 구원교의 고위 사제, 비콘티스에게 말했다.

"상대의 저항이 생각보다 거셉니다. 계속 싸우면 점령할 수는 있겠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요."

"으음, 내 면목이 없습니다."

비콘티스는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사과했다.

몇 번이나 요새로 돌격했지만 그때마다 기사들이 진을 짜 비콘티스를 막았다. 그 상태로는 왕국군과 연합군을 쓸어버리기 어려웠다.

포그렌 백작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몇 번 젓고는 말을 이었다.

"급하게 진격해야 하는 상황이라 문제가 된 것뿐입니다. 현재 다른 방안이 없으니 사제님께서 조금 더 힘을 내 주셔야 할 거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결국 초인인 자신이 무조건 앞장서서 싸우라는 뜻이다.

비콘티스는 넝마가 될 정도로 나가 싸웠다. 성문을 부수고 후퇴하기를 벌써 다섯 번이나 반복했다.

어차피 이곳만 뚫으면 뒤쪽에는 허접한 영주들의 군대밖에 없다. 포그렌 백작도 그걸 알기에 아예 전군을 갈아 버릴 기세로 공세를 이어 갔다.

"와아아아! 함락했다!"

델파인군은 병력의 절반을 잃었지만 기어코 성문을 점거했다.

모리스와 휴베르트, 그리고 일부 지휘관들과 병력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맥쿼리 후작과 잔당들을 잡아들여라!"

포그렌 백작의 말에 추격군이 꾸려졌다. 왕국군 총사령관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친왕파는 사기가 크게 떨어질 것이다.

그러니 델파인군도 이런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추격군의 선두에는 분노로 가득 찬 비콘티스가 있었다.

"아주 갈기갈기 찢어 버릴 테다."

고생을 진득하게 한 그는 화풀이할 대상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이 고생의 원흉인 모리스가 될 수밖에 없었다.

두두두두두두!

모리스는 침통한 표정으로 추격군을 피해 도망가기 바빴다. 그의 옆에는 적염의 마탑주인 휴베르트가 있었다.

뒤따라오는 병력은 오백도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연합군의 패잔병들이 섞여 있었다.

"이렇게 대패할 줄이야."

모리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델파인군도 큰 피해를 입긴 했지만, 여전히 상당한 전력이 남아 있었다. 남은 영주들의 군대가 전부 모여도 그들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이곳이 뚫린 것도 문제지만 다른 곳도 문제였다. 델파인군의 진군로는 동부를 제외하고도 두 곳이 더 있다.

북부군은 모르겠지만 다른 한 곳도 델파인군을 막기 힘들 것이다. 싸워 보니 델파인군의 강력함을 더 잘 알 수 있었다.

"어서 달려라! 어떻게든 추격에서 벗어나야 한다!"

침통한 와중에도 모리스는 열심히 말을 달렸다. 영주들의 군대를 다시 규합하고 방어선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히이이이잉!

"각하! 말이 더 달릴 수 없습니다! 쉬어 가야 합니다!"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달렸다. 말이 거품을 물고 있었다. 뒤쪽에는 쓰러진 말들도 속출했다.

"으으... 이럴 시간이 없는데."

델파인군에는 초인이 한 명 있었다. 그가 언제 쫓아올지 모른다.

하지만 다들 지쳤고 말들조차 달리기 힘들어하니 쉬어 갈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쉬어간다."

물조차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그들은 그냥 말에서 내려 주저앉았다.

꾀죄죄한 모습의 휴베르트가 모리스에게 말했다.

"각하, 괜찮을 겁니다. 그 구원교의 사제도 꽤 상처를 입지 않았습니까?"

수많은 기사와 병사들이 죽일 듯이 달려드니, 아무리 초인이라도 힘이 빠져 곳곳에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초인만 없다면 추격하는 쪽도 속도를 내기는 어려울 터였다. 그들의 말도 지치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모리스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꼴도 지저분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러길 바라야지. 그런데 할멈을 놓고 왔네."

"...그 점쟁이 말입니까?"

"그래. 무사할지 모르겠어. 용하니까 잘 피해 있겠지."

"크흠흠."

휴베르트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마법사인 그에게 점쟁이는 참으로 꼴도 보기 싫은 존재였다.

세상에 전쟁터까지 점쟁이를 끌고 와서 점을 보는 게 말이 되는가? 물론 그 덕분에 이상하게 사기가 높아지긴 했지만 말이다.

휴베르트가 불편해하는 기색을 눈치챈 모리스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도 사실 알고 있네. 다들 날 어떻게 보는지. 미신에 빠진 한심한 놈으로 보고 있겠지."

"커흠, 아니, 아닙니다. 뭐 각하께서 취미로 점을 보시는 건 유명하니...."

"취미가 아니야."

"네?"

"취미가 아니라 나는 진짜 믿고 싶었다고."

휴베르트가 빛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 이제 안 믿으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이번 전투에서 귀인을 만난다고 했는데, 그런 건 코빼기도 안 보였고...."

"아니, 아니야. 나는 그런 것 때문에 믿는 게 아니야."

모리스가 슬픈 표정으로 휴베르트의 양어깨를 짚었다. 죽기 전에 다른 이에게 꼭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가 떨리는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모두가 사이비라 욕을 해도, 모두가 믿지 말라고 해도, 모두가 손가락질해도, 나는, 나는 그럴 수가 없었어."

"가, 각하...."

"왜냐하면 할멈만이 나에게 잃어버린 자식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해 줬으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모두가 믿지 않아도 나는 믿어야 해. 나만큼은 그 노파를 믿어야 해."

모리스는 떨리는 입술을 몇 번이나 깨물었다.

"그래야 내 잃어버린 자식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그게 내가 그 점쟁이 할멈을 믿는 이유야. 그리고 그게...."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경계를 서던 기사가 허겁지겁 달려와 외쳤다.

"추격군입니다! 선두에 초인이 있습니다!"

저 멀리서 먼지구름이 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말보다 빠른 초인이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차앙!

모리스가 검을 빼며 몸을 돌렸다.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게 부모 마음이야."

"...."

휴베르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는 그냥 모리스가 멍청해서 미신을 믿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는 멍청한 게 아니었다. 그렇게라도 희망을 잡고 싶었던 것이다.

모리스가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를 따르는 병사들도 모두 내 자식이나 마찬가지지."

숨을 크게 들이쉰 모리스가 크게 소리쳤다.

"모두 도망가라! 저들의 목표는 나다!"

"각하!"

호위 기사들이 기겁하며 외쳤다. 하지만 모리스는 꼿꼿하게 서서 외쳤다.

"가라! 너희들이 죽을 곳은 이런 초라한 곳이 아니다! 너희들은 살아서 꼭 승리를 이뤄 내야 한다!"

"각하! 안 됩니다!"

"명령이다! 도망가서 영주들의 군대에 합류해라! 그리고 이 왕국을 지켜라!"

파악!

모리스의 검에서 푸른 마나가 솟아올랐다. 그도 상당히 지친 탓에 푸른 빛이 흐릿하게 깜빡였다.

하지만 그는 명문가의 가주로 뛰어난 마나 연공법을 익힌 상급 기사이기도 하다.

적어도 잠깐은 상대를 붙잡을 수 있을 것이리라.

기사들과 병사들은 차마 도망가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저 멀리서 보이던 검은 점이 어느샌가 모리스의 앞까지 다가와 버렸다.

콰아아아!

흙먼지가 일며 비콘티스가 나타났다. 그의 검은 로브는 다 해지고, 피딱지가 곳곳에 묻어 있었다.

"맥쿼리 후작!"

비콘티스가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멍청하기로 유명한 놈한테 며칠이나 묶였던 데다 큰 피해까지 봤다.

막상 싸워 보니 괜히 왕국군 총사령관이 아니었다. 이놈이 가진 능력과 지위를 생각하면 여기서 반드시 죽여야 했다.

"유언은 전달했겠지?"

"...."

모리스가 입술을 실룩거리며 자세를 잡았다. 죽을 때 죽더라도 한방은 먹여 주고 싶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맞붙기 직전, 모리스의 오른편에서 누군가 달려왔다.

쿵! 쿠웅! 쿵!

걸을 때마다 땅바닥이 터지는 것처럼 큰 소리가 울렸다. 모두가 자연스럽게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콘티스는 달려오는 자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여자? 사제?"

웬 여자가 달려오고 있었다. 전신에는 하얀 사제복을 입고 한 손에는 뭉툭한 메이스를 든 채였다.

그런데 다가올수록 뭔가 이상했다.

"뭐야... 저건...."

멀리서 봤을 때는 잘 몰랐는데, 다가올수록 여자의 체구와 메이스의 크기가 범상치 않게 느껴졌다.

쿵! 쿠웅! 쿵!

눈 한번 깜빡일 때마다 거리가 훅훅 줄어들었다. 비콘티스는 상대의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

그가 기운을 끌어올리며 외쳤다.

"멈춰라! 정체를 밝혀라!"

콰앙!

갑자기 여자가 엄청난 속도로 쏘아져 왔다. 가까워진 그녀를 보며 비콘티스가 기겁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어지간한 장정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체구가 거대했다. 들고 있는 메이스는 사람 몸보다 더 컸다.

드드득!

여자의 팔뚝이 부풀어 오르며 힘줄이 솟아올랐다. 그녀의 손에 들린 거대한 메이스가 비콘티스에게 휘둘러졌다.

"이년이!"

갑작스러운 공격에 비콘티스가 팔을 들어 올렸다. 일단 공격을 막은 뒤 반격을....

콰아아아아아앙!

으드드득!

"커어억!"

단 한 수에 비콘티스는 팔이 으스러지고 피를 토하며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후우...."

여자가 사나운 표정으로 숨을 길게 내쉰 뒤 말했다.

"내 이름은 파르니엘. 전쟁의 여신을 모시는 신실한 종이다."

훗날 '전쟁의 성녀'로서 대륙 7강 중 하나로 꼽혔던 그녀가 루타니아 왕국에 도착한 것이다.

일단 패고 자기소개를 한 파르니엘의 위엄에 주변인들 모두가 숨을 죽였다.

입만 떡 벌리고 있던 모리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휴베르트를 바라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모리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내가 용하다고 했잖아?"

휴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귀인이 나타날 줄이야.

그거참, 보통 점쟁이가 아니었다.

470화 그게 네놈들의 한계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