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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460

450화 총관이 알아서 잘 적었겠지. (3)

에레네스는 입술을 앙다물고 다크를 관찰했다. 가만히 다크를 바라보던 그녀는 무언가를 떠올리고 눈을 크게 떴다. 심장 박동이 점차 빨라졌다.

'설마.... 아니, 그건 말이 안 돼.'

짚이는 존재가 하나 있었다. 하지만 그 존재는 자신이 알기로 '그'와 함께 봉인되었을 터. 다시 나타났어도 '그'와 함께여야 한다.

'아니, 아니야. 그저 비슷한 기운일 뿐이다.'

그 존재는 저렇게 천박하지도 유치하지도 않았다. 저런 정신 나간 정령 같은 게 아니었다.

찢어질 듯한 감정의 폭풍 속에서 생겨난 그 존재는, 슬픔과 음울함만을 품고 있었다.

"그 정령... 비슷한 걸 어디에서 얻은 거지?"

"주웠는...."

지셀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다크가 끼어들었다.

"알려고 하지 마라! 엘프! 내 저주를 받고 싶지 않다면!"

"...."

다크는 그저 초라한 자신의 과거를 말해 주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에레네스는 다시 다크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아는 존재와 헷갈릴 만큼 기운이 비슷했지만, 역시 조금 달랐다.

그저 불길함만이 느껴질 뿐, 별다른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짚고 눈을 감았다.

'내가 없는 사이에 세상이 많이 변했구나.'

너무 오랜만에 세상에 나와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자신이 갇혀 있던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생겼을 수도 있지 않은가.

마나 연공법도 그렇다. 인간은 누구보다 빠르게 발전하는 존재다. 그러니 자신이 모든 걸 다 알 수는 없었다.

신성력과 구원교의 기운은 상극이다. 특히 균열의 괴수들은 더욱더 그렇다.

만약 지셀이 구원교와 관련이 있다면 신의 가호를 받는 사제와 함께할 리가 없었다. 실제로 펜리스 백작은 수많은 균열의 확장을 저지하지 않았는가.

'내가 실수했군.'

펜리스 백작의 힘이 자신이 알던 것과 비슷한 것은 우연에 우연이 겹쳤을 뿐인 듯했다. 수상스럽긴 하지만 지켜보면 될 일이다.

결국 에레네스는 갑옷을 해제하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제가 오해를 해서 큰 실례를 했군요. 용서해 주시길."

"...."

사람들은 조금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두 번 오해했다가는 왕국 하나쯤 말아먹겠네.'

'아스콘처럼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 거 아니야?'

하지만 지셀은 대수롭지 않게 사과를 받아들였다. 전생에 에레네스를 겪어 본 그는 그녀의 성격이 무척이나 뻣뻣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그럴 수 있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예의는 집어치우도록 하지. 불편하니까."

"그렇게... 알았다."

에레네스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지셀은 지휘 천막이 있던 쪽을 돌아보았다. 천막은 이미 충격파에 휘말려 먼지가 되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에레네스가 지셀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가 그걸 보고 조용히 말했다.

"미안하게 됐군."

"...그래. 배상은 받아 낼 거야."

두 사람은 다른 천막으로 들어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주변에는 측근 몇 명만 대동한 상태였다.

지셀이 먼저 입을 열었다.

"구원교와 원한이 조금 있는 모양이지?"

"조금이 아니라 박멸할 생각이다."

"이유는 말할 생각 있나?"

"세상을 어지럽히는 놈들이니까."

원론적인 대답이었다. 지셀은 그 너머에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그걸 지금 굳이 따져 물을 필요는 없었다.

"그래. 실력이 대단하던데, 우리와 함께하려고 찾아온 건가?"

"그대가 어떤 사람인지 보고 결정하려고 했다."

"균열과 싸울 거면 우리와 함께하는 게 나을 거야."

"어째서지?"

"이제 막 루타니아 왕국을 주축으로 연합군이 결성되었거든. 구원교와 싸우려면 여기서 싸우는 게 제일이긴 하지."

지셀은 그녀에 대해 상당히 많이 알고 있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일단은 처음 만난 것처럼 행동하며 그녀의 힘을 얻으려 했다.

에레네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루타니아 왕국에서는 균열 대부분의 확장을 저지했다고 들었다. 앞으로의 목표가 어떻게 되지?"

"일단 델파인 공작가를 칠 거다. 그들이 곧 움직일 거야. 놈들이 구원교와 손을 잡았으니 구원교도 같이 오겠지. 연합군에도 이곳으로 먼저 오라고 했어."

"이곳으로?"

"그래, 연합군의 제일 목표는 루타니아 왕국의 일을 해결하는 것이거든."

"그럴 이유가 있나?"

"이곳이 빨리 정리되어야 내가 다른 곳을 도와주러 갈 수 있으니까. 그게 가장 효과적이지 않겠어?"

"그렇군."

에레네스는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었다.

자신이 듣기로도 현재 균열을 가장 확실히 상대하는 곳은 북부군이다. 이들이 내부의 일을 빨리 처리할수록 다른 곳도 빨리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저기 힘을 분산시켰다가 끌려다니는 것보다는 하나씩 빠르게 처리하는 게 낫겠지.'

생각을 마친 에레네스가 말했다.

"델파인 공작가와 이곳의 구원교를 처리하는 데 도움을 주도록 하지."

"잘 생각했어."

지셀이 만족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초인급에 이르는 구원교의 사제들이 몇이나 델파인 공작가에 붙어 있는지는 그도 모른다. 에레네스가 합류했으니 구원교의 사제들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계속 여기에 붙어 있을 수는 없다. 루타니아의 내부 정리가 끝나면 나는 떠나도록 하겠다."

"어차피 균열 처리가 목적이면 계속 함께 움직여도 되지 않나?"

"그럴 수는 없다. 따로 찾고 있는 게 있다."

"그게 뭔데?"

"...아직은 대답할 수 없다."

"그래, 그렇군."

지셀은 이번에도 더 따지지 않았다. 전생에도 에레네스는 그러했으니까. 누구에게도 자신의 속내를 얘기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한참을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이던 클로드가 말했다.

"그러면 엘프들도 저희 펜리스와 함께한다는 거군요. 이제 동맹이 된 건가요? 아, 저는 펜리스의 총관인 클로드입니다. 행정 업무를 맡고 있지요."

에레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은 그렇다."

"그렇다면 이쪽에 원하는 게 있으신가요?"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진행하려고 한 일이니 미리 얘기해도 되겠군. 이곳 루타니아 왕국에서 엘프에 대한 노예제를 폐지해 줬으면 한다. 시간이 걸려도 괜찮으니 그 일을 진행해 줄 수 있나?"

에레네스는 전생에도 인류 연합에 같은 것을 요구했다. 세계수를 지키는 그녀야말로 엘프들의 대표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흐음, 그렇군요. 어차피 우리 영지는 그렇게 하고 있으니 별문제가 없지요. 동맹군도 그렇게 해야 하는 거고요. 바로 진행하도록 하죠."

지셀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에레네스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그렇게 쉽게 된다고? 왕국의 법을 바꿔야 하는 일 아닌가?"

"이 왕국에서 우리 영주님이 원해서 되지 않는 일은 없는데요. 그리고 안 해 주면 대족장님이 난리 피울 거잖아요. 그 멋진 갑옷 입고 말이죠. 아, 진짜 멋지던데 혹시 그 갑옷 더 남는 거 없나요?"

"...."

에레네스는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엘프를 해방하라고 실력을 행사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어렵더라도 협상을 통해 얻어내려 했다. 그녀는 구원교와 싸우려는 것이지 대륙의 인간들까지 전부 적으로 돌리려 한 건 아니었으니까.

새삼 지셀이 가진 권력을 알게 된 에레네스가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렇군. 가능하면 그 일을 우선 부탁한다."

그녀의 얼굴에는 약간의 미안함이 서려 있었다. 마치 엘프들이 노예가 된 게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대족장이라는 위치에서 그간 엘프들을 버려둔 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솔직하고 담백한 부탁에 지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뻣뻣한 엘프가 고개를 숙이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긴 전생에도 자신의 힘을 먼저 보여 주고 엘프들의 처우 개선을 부탁했지.'

그렇기에 엘프들은 노예 위치에서 풀려나, 인류 연합에 속해 함께 싸울 수 있었다.

어차피 지셀이 왕국법을 뜯어고쳐서라도 바꾸려고 했던 일이다. 엘프뿐만이 아니라 드워프들과도 약속한 일이기 때문이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지셀이 물었다.

"드워프들은?"

"그건 드워프들의 왕이 알아서 할 일이다."

"그러면 그냥 노예로 내버려둬?"

"그건 드워프들의 왕이 알아서 할 일이다."

"...그래."

에레네스는 끝까지 모르는 척 같은 말만 반복했다. 엘프와 드워프의 사이가 안 좋은 건 유명하지만, 이렇게까지 선을 그을 필요가 있을까.

확실히 에레네스의 정의감은 어딘가 살짝 비틀린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그저 세상을 구하겠다는 신념은 확실하니 그거면 충분했다.

대화가 마무리되자 클로드가 이것저것 쓰던 종이들을 한데 모은 뒤 한 장을 꺼내 에레네스에게 건넸다.

"자, 그러면 우리의 동맹을 확실하게 한다는 하는 의미에서 여기에 서명해 주시죠."

"서명?"

"네, 계약서입니다. 증거를 남겨야 하니까요."

에레네스가 조금 불쾌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엘프들의 대족장이다.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 걸 작성하라는 것이냐."

"원래 일이라는 게 다 그런 겁니다. 세상에 계약서도 안 쓰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대족장의 말은 가볍지 않다. 내가 너희들과 한 언약은 하늘과 땅, 나무들과 꽃, 그리고 바람이 듣고 세상에 퍼뜨려 줄 것이다. 너희들만 약속을 올바르게 지키면 된다."

클로드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그것들은 보증을 못 하니까 계약서를 쓰는 거라니까요. 나무랑 꽃이 뭘 할 수 있는데요?"

"내 말은, 대자연이 보증...."

"대자연이고 나발이고... 아니, 죄송합니다. 왜 이렇게 말이 기세요? 그냥 이거 서명하면 그렇게 구구절절 말씀 안 하셔도 된다니까요. 사기꾼일수록 말이 길어진다는 얘기 들어 보신 적 없으세요?"

"...."

"엘프 대족장님, 그냥 서명하시죠?"

휙.

에레네스가 신경질적으로 클로드의 손에서 종이를 빼앗았다. 오랜 세월을 살면서 엘프 대족장인 자신에게 계약서를 작성하라는 인간은 단연코 처음이었다.

이 펜리스에 사는 놈들, 확실히 뭔가 이상하다.

'특히 이 클로드란 놈이 그래.'

오랜 세월을 살아와 어지간한 일에는 평정심을 잃지 않는 자신이다. 그런데 계약서 쓰라고 재촉하는 이놈은 묘하게 자신의 평정심을 깨뜨리고 있었다.

풍겨 오는 기분도 무척 불쾌했다. 끈적한 흙탕물을 보는 것 같았다. 아니, 늪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찝찝한 놈이었다.

펜까지 받아 서명을 하려던 에레네스가 서명란 옆에 있는 이상한 글귀를 보고 멈칫했다.

"세계수는... 그냥 큰 나무다?"

"앗차차, 제가 기다리다가 지루해서 낙서한 게 있었네요. 죄송합니다. 다른 부분만 먼저 확인하시죠. 금방 다시 작성해서 드리겠습니다."

클로드가 바로 다른 종이에 새로운 계약서를 작성했다.

"자, 다시 똑같이 적었습니다. 확인해 보시죠. 이건 대족장님이 저희를 도와주겠다는 내용이고, 여기에는 저희가 엘프들을 노예에서 해방해 주겠다는 내용이 있고... 그리고 여기는...."

클로드가 계약서의 곳곳을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설명해 주었다.

에레네스는 머리가 아파져 왔다. 이놈은 말이 너무 많다. 그냥 약속을 하나 하는 것뿐인데 뭐 이렇게 복잡하다는 말인가.

"알겠다, 알겠어. 서명하면 되지 않느냐. 인간들의 일 처리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복잡하구나. 우리 엘프들은 신의로 일을 진행하거늘."

정신이 사나워진 그녀는 제대로 읽지도 않고 두 장의 새로운 계약서에 바로 서명해 '버리고' 말았다. 그냥 서명란 옆에 또 이상한 글이 있는지만 확인했다.

클로드는 뭔가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냉큼 계약서를 지셀에게 가져가 눈짓했다.

"영주님도 어서 서명하시죠."

지셀은 클로드를 잘 안다. 슬쩍 옆을 보니 웬디가 천장만 보고 있다. 저건 클로드가 또 뭔가를 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계약서에 쓰여 있는 '수작질'도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이 미친놈, 이 짧은 시간에 대화를 듣고 이딴 짓을 벌이다니.

"크흠흠, 뭐 총관이 알아서 잘 적었겠지. 난 그냥 서명만 하면 되는 거지, 뭐. 총관 데리고 오길 잘했네."

지셀은 헛기침을 하며 '안 읽은 척'을 하고 잽싸게 서명을 했다.

클로드는 두 장의 계약서를 돌돌 말아 후다닥 끈으로 묶었다.

"자, 이제 완료되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대족장님."

"그래,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게 엘프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라."

"그럼요,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거죠. 그러면 두 개 다 저희가 보관할까요? 보관할 곳은 있으신지요?"

"이리 주어라. 보관할 곳이 있다."

에레네스가 손짓하자 땅에서 나무 덩굴이 튀어나왔다.

돌돌 말린 계약서는 덩굴에 감싸여 다시 땅으로 들어갔다. 참으로 신기한 기술이었지만 계약서를 우연히 다시 볼 일은 없을 거 같았다.

그걸 본 클로드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아휴, 우리 대족장님은 보관도 확실하시네. 무척 안전해 보입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노인네 같기도 하고. 하긴 이런 엘프를 건드릴 간 큰 놈은 없었겠지. 대자연이 보증하는 계약서라... 그거참 좋네.'

클로드가 방긋 웃음을 지었다.

그는 일부러 이상한 짓들을 하며 에레네스의 정신을 쏙 빼놨다. 애초에 계약서라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그녀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녀는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악랄해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만나자마자 사기를 치는 놈이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물며 루타니아의 영웅이라 불리는 자와 그 총관이지 않은가.

그래서 그녀는 보지 못했다.

계약 기간에 아주 작게 '30년'이라고 쓰여 있던 걸 말이다.

451화 비밀 무기가 하나 더 생겼군. (1)

지셀은 클로드를 보며 방긋 미소를 지었다.

엘프 대족장의 약속은 무겁다. 훗날 클로드에게 사기당한 걸 알아도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충격은 좀 받겠지만 말이다.

원래는 연합군을 창설하면서 연합 체계를 짜고 이에 대한 협약서를 준비하라고 클로드를 불렀다. 중간에 뇌물을 건네며 진행한 게 좀 어이없긴 했지만 그래도 빠르게 잘 처리해서 넘어갔다.

그런데 이젠 에레네스를 계약으로 옭아매기까지 했다. 지셀로서는 잘된 일이고, 잘 불렀다 싶긴 하지만....

'역시 이놈은 정상이 아니야.'

클로드는 계약을 마친 뒤 연신 웃으며 에레네스에게 친한 척을 하고 있었다.

"아휴, 대족장님. 이제 우리 '가족' 같은 관계가 된 겁니다. 그렇죠? 오래오래 함께해요."

지셀은 그 모습을 보고 재차 혀를 내둘렀다.

'미친놈.'

에레네스는 뭔가 찝찝해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우리 엘프들은 동맹인 너희를 정말 '가족'처럼 대할 것이다."

에레네스가 생각하는 가족과 클로드가 생각하는 가족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지만, 그녀는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어쨌든 에레네스가 합류하는 것이 확실해졌으니 지셀은 마음이 든든해졌다. 무려 대륙 7강 중 두 번째라 불리던 강자의 힘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나한테 비밀 무기가 하나 더 생겼군. 앞으로의 싸움에 큰 도움이 되겠어.'

이미 그에게는 비밀 무기가 하나 있었다. 바로 테넌트였다.

심지어 그와 같이 싸우는 북부군 병사들도 테넌트가 마스터인 줄 몰랐다. 지셀이 일부러 소문을 막은 영향도 있지만, 웬만한 실력자가 아니고서야 마스터의 경지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초인, 그것도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자들이 둘로 늘어난 덕분에 지셀도 행동의 폭이 더 넓어질 것이다.

지셀은 에레네스를 이끌고 천막 밖으로 나가 병사들에게 고했다.

"모두 들어라. 엘프 대족장께서 '앞으로' 우리와 함께 할 거다. 그러니 더 이상 엘프들을 적대하지 말고, 동료로서 대하도록."

"와아아아!"

병사들은 그의 말에 환호했다. 지셀과의 싸움을 통해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 조금이나마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가 실제로 얼마나 강한지 제대로 알아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조금 전의 싸움도 그저 잠깐 서로 몸을 풀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병사 중에서 지셀이 누군가에게 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니 수뇌부 몇몇만 조금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이었고, 대부분은 강자가 합류한 것만 기뻐할 뿐이었다.

오히려 그녀와 같은 종족인 엘프, 같은 노예 처지인 드워프들이 어색하고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에레네스는 드워프들은 모른 척하고 엘프들에게 말했다.

"이 전쟁이 끝나면 너희들을 모두 숲으로 데려다주겠다. 펜리스 백작에게 자유를 약속받았으니까."

"...."

그런데 엘프들은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에레네스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어머니인 세계수가 있는 숲이다. 너희들은 기쁘지 않으냐?"

그 말에 갑자기 펜리스의 엘프들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에레네스와 그녀를 따라온 엘프들은 그들이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의아해하는 에레네스에게 아스콘이 나서서 물었다.

"거기 술 있어요?"

"우리는 딱히 술을 즐겨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원한다면 과일주를 만들어 마시면 된다."

"그런 거 맛없는데. 맹맹하고. 요새 누가 그런 걸 먹어요?"

"...."

"고기는 있어요? 소고기, 닭고기, 돼지고기."

"엘프가... 무슨 고기를 먹는다는 말이냐."

"참 내, 우리는 이제 닭고기 없으면 못사는 몸이라고요. 근손실 온다니까? 우리 몸 안 보여요?"

펜리스의 엘프들은 고든과의 지옥 훈련을 통해 근육 하나는 끝내주게 발달했다. 에레네스는 그제야 그들의 몸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

"술도 구려. 고기도 안 먹어. 숲이니까 놀 것도 없겠지. 그런 데를 우리가 왜 감?"

"엘프는 자연과 함께 살아야...."

아스콘이 갑자기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가 그 오랜 세월을 노예로 사는 동안 숲에서 고상하게 지내시던 분이 이제 와서 구해 준다고? 이게 뭔 개소리냐고요."

아스콘의 말에 에레네스를 따라온 엘프들이 발끈했다.

"감히 대족장님께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아, 됐고. 나는 원래 말 이따위로 하니까 이제 와서 생색내지 말라고요. 우리는 전쟁 끝나고 자치구 하나 얻어서 살기로 했으니까, 강제로 끌고 갈 생각하지 말고요. 나 안 간다고 분명 말했다?"

"이놈! 세계수의 숲은 아무나 올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 대족장님의 호의를...."

"됐다. 그만하거라."

"대족장님!"

발끈하는 엘프들을 에레네스가 말렸다. 그녀는 조금 슬픈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다 나 때문이다. 너희들의 의견도 존중하겠다. 그리하도록 하여라."

곧 그녀는 옆에서 멀뚱멀뚱 구경하고 있는 드워프들을 바라보면서도 말했다.

"그래, '우리' 때문에 너희들도 노예가 된 거겠지."

의미심장한 발언이었지만 드워프들은 여전히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기 때문이다.

지셀은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군.'

다른 엘프들은 몰라도 에레네스는 무척 오래 살았다. 살아 있는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정말 소문처럼 천 년을 살았다면....'

고대 제국이 멸망한 이후의 역사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사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탓에, 잃어버린 역사에 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했다.

'나중에 물어봐야겠어.'

어차피 자신은 학자가 아니니 딱히 종족들의 역사에 큰 관심이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균열을 막고 공작가를 처치하는 일이다.

적당히 엘프들을 달랜 에레네스가 지셀을 바라보며 물었다.

"바로 공작가로 쳐들어갈 건가?"

"...."

전생에도 느낀 거지만 역시 사회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고 그냥 제 생각대로 밀어붙이는 엘프다.

뭐, 자신을 비롯해서 대륙 7강에 이른 자들은 다 비슷한 성격이었지만 말이다.

사실 그래서 서로 단합이 된 적이 거의 없었다. 다들 제가 잘났다고 설치느라 더 골치였다.

"일단 우리는 남은 균열을 처리하고 중부 지역으로 다시 이동할 거야. 그곳에서 전력을 정비하고 지원군을 기다린다. 최전방에서 병력을 규합할 수는 없으니까."

전쟁은 하고 싶다고 바로 시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물론 이쪽에서 먼저 쳐들어갈 수는 있지만, 그건 그리 좋은 전략이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듯 지셀은 최대한 아군의 피해를 줄이는 전략을 취할 생각이었다. 이제는 공작가를 깨부순다고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차피 공작가는 곧 움직일 수밖에 없어. 우리 입장에서는 지원군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게 더 유리하고."

"흐음, 그런가?"

"공작가는 이제 왕국 전체를 상대해야 해. 먼저 움직이려면 그들도 군대를 분산할 수밖에 없을 거야."

"대륙 곳곳에 퍼진 구원교의 정보력은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다. 그쪽도 너희에게 지원군이 온다는 걸 알 테니 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다."

그 말에 지셀이 웃었다. 공작가도 바보가 아니니 분명 뒤에서 음모를 꾸미거나, 연합군을 상대할 만한 전력을 준비해 둘 것이다.

예를 들면 구원교의 고위 사제들을 더 불러온다든가.

"물론 그쪽도 나름대로 대비하겠지만, 당신 덕분에 우리 쪽 무기가 하나 더 생겼거든."

"무슨 말인지 알겠다. 내가 적들이 모르는 비밀 병기가 되는 셈이군."

"그래. 당신이 합류했다는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최대한 통제할 거야. 그러면 대비 없이 먼저 움직인 군대는 박살이 나게 될 테고. 그쪽에 한 방 먹일 수 있는 거지."

에레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되도록 빨리 시작했으면 좋겠군."

"걱정하지 마. 저쪽도 속이 달아서 들썩들썩하고 있을 테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공작가는 불리해진다. 지금도 균열이 열리기 전에 비해 훨씬 상황이 안 좋아졌다.

그러니 그들도 남부의 균열을 처리하는 데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조심스러운 그놈들이 불리한 상황에서 무작정 덤벼들지는 않을 것이다. 야만인들을 부추겨 균열을 열고 전쟁을 일으켰던 것처럼 자신을 향해 수작을 걸어 올 게 분명하다.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어. 에레네스를 보면 그놈들도 깜짝 놀라겠지.'

후에 대륙 7강이라 불릴 두 명이 이곳에 있다. 어지간한 수작은 다 깨부술 수 있을 것이다.

"자, 그러면 이제 이동하면서 남은 균열을 처리하자고. 두 개밖에 안 남았으니까."

동부의 균열도 대부분 처리했다. 연합군 회의 때문에 잠깐 자리를 비우느라 처리가 늦어진 만큼, 나머지도 빨리 처리해야 했다.

에레네스가 합류한 북부군은 남은 균열을 처리하기 위해 움직였다.

* * *

"되는 일이 없구나."

라울의 얼굴은 요 몇 달 새에 눈에 띄게 핼쑥해졌다.

야만인들을 이용한 양동 작전도 실패하고 말았다. 완벽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뜬금없이 아멜리아가 움직인 것이다.

거대해진 균열을 펜리스와 페르디움이 큰 피해 없이 막은 것도 놀라운데, 레이폴드군이 야만인 대군의 발목을 잡은 것도 놀라웠다.

둘 다 예상을 벗어나는 결과였다. 특히 아멜리아의 선전은 속에 불이 끓어오를 정도로 쓰라렸다.

"그년이 감히 우리를 배신하다니...."

누가 뭐라 해도 아멜리아의 세력을 키워 준 건 공작가다. 한낱 영애에 불과했던 그녀가 백작이 된 것은 공작가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먹을 건 다 빼먹고 구원교와 공작가가 엮이자 바로 관계를 끊어 버렸다.

그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구원교가 드러난 이후로 다른 공작파 영주들도 대부분 돌아섰으니까.

"참아 줬더니... 내 계획까지 방해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굴욕적이었다. 자신이 키운 개한테 제대로 물린 꼴이 아닌가.

라울은 몇 번이나 숨을 가다듬었다. 웬 꼴통 같은 것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와 자신의 일을 방해하고 있었다.

"반드시... 이 굴욕은 몇 배로 갚아 주겠다."

굴욕은 굴욕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실패한 일에 언제까지 매달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를 갈던 라울이 참모들에게 물었다.

"남부의 균열은?"

"거의 다 처리했습니다. 봉신들도 전쟁 준비는 다 끝낸 상태입니다."

오래전부터 전쟁을 준비해 온 만큼 진군 준비는 빠르게 끝났다. 균열만 다 처리되면 언제든 움직일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자신들이 균열을 처리하는 동안 상대도 놀고만 있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연합군이 만들어졌다고 했나?"

"네, 그렇습니다. 제일 목표는 루타니아 왕국을 정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라울이 머리를 짚었다. 타국에서 지원군까지 온다면 아무리 공작가가 강해도 목표를 이루기 힘들어진다.

이미 가까운 왕국의 군대가 하나둘 친왕파 쪽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

왕국의 최강 세력으로 정국을 좌지우지하던 자신들이 이렇게 궁지에 몰릴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쉽지 않군."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북부군과 왕국군이었다. 북부군 덕분에 왕국군은 전부 남부 전선으로 내려와 있었다.

공작가의 최우선 목표는 가장 빠르게 수도를 점령하고 국왕을 사로잡는 것. 하지만 그 길은 왕국군이 떡하니 막고 있었다.

"동부로 진군해서 왕국군 일부를 뺀다 하더라도 북부군이 문제야."

이제 객관적인 전력은 공작가가 앞선다고 할 수가 없다. 왕국의 모든 이들과 4대 교단이 전부 공작가의 적이 되었으니까.

그중에서도 특히 북부군은 공작가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강했다.

최대한 적은 피해로 수도를 점령하는 것이 목표인 공작가로서는 싸우기 싫은 상대였다.

라울은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할지 머리가 복잡해 한숨만 연이어 내뱉었다.

그때 루타니아의 구원교를 이끄는 가트로스가 말했다.

"조금 더 기다리는 게 어떤가? 어차피 우리의 목적은 영토 싸움이 아니라 국왕과 왕가의 비보이니."

"그랬다가는 지원군들이 몰려들어 수도를 점령하기 더 힘들어질 겁니다."

"지금도 쉽지 않은 건 마찬가지가 아닌가. 모든 계획이 실패하고 펜리스 백작과 북부군이 강해졌으니 말이다."

그 말에 라울이 기분이 나쁘다는 듯 눈매를 꿈틀거렸다. 마치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는 듯한 말투 때문이었다.

그 기색을 읽은 가트로스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네 탓을 하려는 게 아니네. 그저 우리도 더 힘을 써야 한다는 말이지."

"그 말씀은?"

"고위 사제들을 이쪽으로 더 불러들였네. 그들이 오면 전쟁을 시작하도록 하세. 큰 도움이 될 것이야."

"그래도 되겠습니까?"

"결국 힘과 힘으로 부딪쳐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다른 왕국들은 이곳 루타니아 왕국만큼 중요하지는 않아."

"으음...."

라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위 사제들은 초인급의 힘을 가지고 있다. 몇 명만 더 합류해도 전장에서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가트로스가 확신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떻게든 수도만 점령하고 왕가의 비보를 찾으면 나머지는 별 상관없는 일이지."

그것이 공작가에서 이 전쟁을 통해 얻으려는 진정한 목표였다. 왕국 전역을 차지하는 전쟁은 그 뒤에 할 생각이었다.

라울이 조금은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균열의 통제도 실패했고 그 길잡이라는 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왕가의 비보가 정말 효과가 있겠습니까? 아니, 왕이란 분께서 움직이고 계신 게 맞기는 합니까?"

그 말에 가트로스가 조금은 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의심하지 말라. 우리 사도들의 힘은 지금도 더 강해지고 있지 않은가. 왕이 움직이기 시작했기에 이 세상에 그 영향이 미치는 것이다. 분명 찾을 수 있다. 왕께서 그 힘을 안 내보이실 리가 없다."

"...."

"그러니 우리도 확실하게 미리 준비해야 한다. 길잡이를 찾는 것에 실패한 이상 왕가의 비보라도 어떻게든 얻어야 한단 말이다."

가트로스가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그래야 우리가 그 지역으로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

라울은 입을 닫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구원교의 사제들에게 포섭되어 구원교의 신도로서 키워졌다.

문제는 라울이 사제들만큼 구원교를 열성적으로 믿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에게는 종교도 그저 야망을 펼치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그로서는 구원교의 핵심 위치에 있는 사제들이 가끔 보이는 이런 비합리적이고 광적인 모습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쯧, 그놈의 경전이 뭔지. 이 미친 광신도들 같으니라고.'

이들은 그것을 무슨 엄청난 사명처럼 떠받들고 있다. 실제로 힘을 보여 주니 아예 안 믿을 수도 없었다.

어쨌든 라울은 이들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러니 자신의 능력으로 최대한 결과를 내야만 했다.

자신은 그러기 위해 키워진 도구였으니까.

몇 번 고개를 끄덕인 라울이 입을 열었다.

"고위 사제분들이 와도 쉽지 않을 겁니다. 북부군은 이제 에퀴데마도 쉽게 처리할 정도로 실력자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라비에르 심판관도 펜리스 백작과 그의 측근들에게 죽지 않았습니까."

"확실히 그놈과 북부군이 골칫거리이긴 하지. 고위 사제들이 몇 명 더 온다 해도 피해를 안 볼 수는 없을 거야."

"피해를 감수하고 수도까지 밀어붙이는 방안도 있습니다. 그랬다가는 후에 힘들어지겠지만요."

가트로스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니, 아니야. 겨우 펜리스 백작 하나 때문에 몇 안 되는 고위 사제들을 잃을 필요는 없지. 요는 북부군을 뚫고 최대한 빨리 수도를 점령하는 게 아닌가?"

"그렇습니다."

순간 가트로스가 잔인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 펜리스 백작만 따로 유인하는 건 어떻겠나?"

452화 비밀 무기가 하나 더 생겼군. (2)

가트로스의 말을 들은 라울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유인이요? 지금 암살을 하자는 겁니까?"

"그와 비슷한 거지."

세상 물정 모르는 가트로스의 말에 라울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통하겠습니까? 그런 방법이 통할 상대면 진작에 썼을 겁니다. 그놈이 바보가 아닌 이상 따로 유인할 수는 없습니다."

펜리스 백작은 마스터다. 그런 자를 암살하려면 공작가의 초인급 인물 여럿이 힘을 합쳐야 한다.

설령 암살조를 짜서 잠입에 성공한들, 지셀의 수하들도 실력이 만만치 않다. 기사들과 병력도 많다.

만약에 이쪽에서 파견한 초인들이 그들을 상대하다 전멸한다면? 전쟁은 그걸로 끝이 난다.

부정적인 라울의 반응에 가트로스가 고개를 저었다.

"굳이 펜리스 백작을 죽이자는 게 아니다. 페르디움 후작이나 그 동생을 노리면 되지 않겠는가?"

그건 더 웃기는 소리였다. 라울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을 죽여도 대세에 영향은 없습니다. 오히려 펜리스 백작이 더 분노해서 목숨을 걸고 우리와 싸우려 할 겁니다. 페르디움을 차지하고 완전히 부수지 않는 이상 그런 인물들을 암살해 봤자...."

말하던 라울은 갑자기 한 가지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시선을 돌리자는 거군요."

"그래, 그거야. 야만인 침공 때도 결국 펜리스 백작이 움직이지 않았나. 비슷한 방법을 한 번 더 쓰지 못할 이유는 없지. 사실 아멜리아만 아니었으면 성공할 뻔한 작전이 아니었나."

"흐음...."

"북부군을 전부 돌리지 않아도 좋네. 펜리스 백작이 가족을 구하러 북부군과 떨어지기만 해도 성공한 셈 칠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은 그럴듯했다. 하지만 객관적인 상황과 전력을 고민해 본 라울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어지간한 암살자들을 보내서는 불가능할 겁니다. 아니, 애초에 지금은 전시 상황입니다. 암살자들이 그곳까지 도착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예로부터 군주들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바로 암살이었다. 그렇기에 귀족들이 머무는 곳은 엄청난 방비를 자랑한다. 심지어 그걸 대대로 이어가며 보강하는 게 바로 귀족들이다.

암살로 정권을 차지하면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이 귀족들 사이의 암묵적 합의 사항이지만, 애초에 성공 확률 자체도 그리 높지 않다.

라울도 가능하다면 바로 지셀을 암살해 버리고 싶지만, 그게 쉬웠다면 진작에 했을 것이다.

라울은 바로 그 점을 짚었다.

"페르디움은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해졌습니다. 뛰어난 암살단을 보내도 영지에 들어가기도 전에 요격당할 겁니다."

펜리스 백작이 개량했다는 마나 연공법 덕분에 기사도 늘어났고 병사들도 늘어났다.

각지의 경계 검문이 강화된 것은 당연하고 영주들과 귀족들도 암살 방비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

"펜리스 백작이 막 나가는 놈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지금까지 한 짓을 보면 의외로 치밀한 구석이 있습니다. 가족들에 대한 암살 방비를 안 했을 리가 없지요."

소수의 암살자들이 잠입해 목표를 죽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어지간한 자들은 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수상하다고 잡힐 것이다.

초인급에 이르는 라비에르도 결국 추격을 떨치지 못하고 숨어다니다가 죽지 않았던가.

가트로스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굳이 암살에 성공하려는 게 아니었다.

"우리도 그만한 패를 하나 버려야겠지. 그곳까지 잠입할 수 있고 펜리스 백작이 움직일 만한 강한 패를 말이야."

"그 말씀은?"

"검은 달."

"...가트로스 님. 그건."

"공작가를 암중에서 수호하는 집단이 있지 않은가? 오래전 루타니아를 어둠 속에서 지키던 그림자들을 없앨 정도로 뛰어난 자들이라더군. 우리가 죽어 가는 그곳 단주를 살려 주기도 했으니 손을 빌릴 수 있겠지."

라울은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불가합니다. 그들은 공작가를 지키는 자들입니다. 발자크 백작이 허락할 리가 없습니다."

"전하라면 허락하실걸세. 어차피 단주는 소모품으로 쓰려고 목숨만 붙여 놓은 게 아니었던가. 그걸 이제 쓰자는 거야."

"...."

"대업을 위해 그들을 버리게. 그리고 암살 작전에 관한 소문을 흘리게. 가족을 살리고 싶으면 펜리스 백작은 움직일 수밖에 없을 거야."

"...."

"운이 좋으면 펜리스 백작이 그들과 공멸할 수도 있겠지. 그들이야말로 왕국 최고의 암살단이 아닌가."

"가트로스 님, 지금 너무 무리한...."

"그리고 그 틈을 타서 우리가 진격하면?"

가트로스의 두 눈은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다른 이들의 희생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어떻게든 빨리 수도를 점령하고 왕가의 비보를 차지할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트로스는 재촉하듯 말을 이었다.

"단 한 번밖에 쓸 수 없겠지만, 그 또한 초인의 경지에 이른 자야. 아무리 암살에 대비했어도, 초인이 가족을 노린다는 말을 듣고 펜리스 백작이 가만히 있을까?"

"...."

"펜리스 백작은 결국 가족을 구하러 움직일 수밖에 없겠지. 그가 빠진 북부군은 절대 우리 고위 사제들과 공작가의 군대를 막을 수 없을 것이야."

그럴듯한 말에 라울은 고심에 빠졌다.

북부군은 동부의 균열을 처리하는 대로 안전한 장소로 이동할 것이다. 최전방에서 연합군을 규합할 수는 없을 테니까. 즉, 남부 전선에 남는 것은 왕국군뿐이다.

동부로 먼저 진군하여 왕국군 일부를 유인하는 동시에, 페르디움에는 대놓고 초인을 이용한 암살 작전을 펼친다.

'펜리스 백작은 동부를 돕든 가족을 돕든 하나를 선택해야겠지.'

어느 쪽으로든 그가 움직이면 바로 남은 북부군과 왕국군을 치고 수도로 진격해 왕실을 함락시킨다.

펜리스 백작이 빠진다면 초인급인 고위 사제들을 앞세운 공작가의 군대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

장기전은 그 이후에 하면 된다. 지금은 왕실 함락이 우선이었다.

라울은 가트로스의 의견이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고 동의했다.

"확실히 그들이 움직이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대신 이곳을 지키는 최후의 칼을 써야겠지만 말입니다."

"어차피 작전만 성공하면 이곳으로 들어올 놈은 없다. 다들 수도를 다시 탈환하는 데 집중할 테니까."

"으음...."

"암살자들을 왕국 곳곳에 보내 혼란을 일으키는 것도 좋겠지. 경계심이 더 커지게 말이야. 고위 귀족들은 힘들어도 하급 관리들과 귀족들은 처리할 수 있을 게 아닌가."

"그렇게 해서 펜리스 백작이 암살에 더 경계하게 하자는 것이군요."

"그래. 소문을 내든 정보를 흘리든, 어떻게든 그놈이 움직일 수밖에 없게 하자는 거야."

라울은 고민에 빠졌다. 공작은 분명 이 작전을 허락할 것이다. 오히려 가트로스의 의견에 크게 찬성할 게 뻔하다. 그는 자신의 안전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인물이니까.

결국 라울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요. 세부 사항은 조금 더 고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검은 달의 단주는 마스터에 이르는 실력자이지만, 그가 펜리스 백작을 죽일 수 있을 거라 장담할 수가 없었다.

초인급의 인물을 보내도 혼자서는 암살에 성공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사람을 많이 붙여 봐야 어중이떠중이라면 의미가 없다. 실력자들을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페르디움에서 죽을 것이다.

그래도 펜리스 백작을 움직일 수 있다면 남는 장사였다. 심지어 암살자들이 그와 공멸해 준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잘 생각했네. 이번에는 분명 성공할 수 있을 것이야."

가트로스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라울은 바로 참모들에게 말했다.

"검은 달의 단주를 만나겠다. 준비해라."

검은 달의 암살자들은 공작의 성 '이클립스' 곳곳에 숨어서 성안의 이변을 감시한다. 그들의 수장은 공작가의 깊은 지하에 숨어 살고 있었다.

미로 같은 길을 지나 하나의 석실에 도착한 라울이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어두운 석실 한가운데에는 마법진이 하나 있었다. 그 마법진은 균열의 마법진과 비슷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옆에 시체들이 가득한 것조차 비슷했다.

크기가 훨씬 작고, 마법진 위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그 기운을 몰아주고 있다는 것이 균열의 마법진과 다른 점이었다.

남자는 얼굴을 포함해 온몸이 붕대로 감겨있었다. 오직 눈과 입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주변을 맴돌았다.

"멜키르."

라울의 목소리에 멜키르라 불린 남자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쇳소리 같은 거친 숨을 쌕쌕 내쉬며 그가 물었다.

"전하께서 위험하신가."

"아니다."

"누군가 성에 쳐들어온 것인가."

"그것도 아니다."

순간 멜키르의 몸이 주변과 동화되며 흐릿해졌다.

파아악!

곧 짙은 어둠을 풍기며 멜키르가 라울의 앞에 나타났다. 그는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설마 그 계집을 찾은 것이냐? 나를 이 꼴로 만든 그 계집 말이다!"

라울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아니다. 이미 20년이나 지난 일이다. 어떠한 흔적도 찾지 못했고 어떠한 활동도 감지하지 못했다. 그 정도면 죽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확신할 수 있나?"

"크게 다치고 마나 코어까지 깨졌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상태에서 오래 살 수는 없다."

"그 계집은 신력을 타고난 계집이다. 코어가 깨졌어도 쉽게 죽을 목숨이 아니야."

"그렇다 해도 그 정도 부상을 입은 채로 살아남기는 힘들다. 그녀가 움직였다면 우리 정보망에 안 걸릴 리도 없고."

"나와 비슷한 기술을 쓰던 암살자다. 정말 찾지 못했는가?"

그 말에 라울이 잠시 고민했다.

'분명 펜리스에....'

정보부에서 조사한 인물들 중에 비슷한 기술을 쓰는 자가 있긴 했다.

하지만 나이와 활동 시기가 맞지 않는다. 머리카락 색도 마찬가지였다. 멜키르가 찾는 여인은 금발이었지만 정보부에 잡힌 인물은 금발이 아니었다.

'아니지, 다른 왕국에도 그 정도 암살자들은 꽤 있었다. 레이폴드의 살쾡이 밀매단 단주도 그렇고 말이야.'

암살자 출신들이 쓰는 기술은 다 비슷비슷하다. 괜한 억측으로 헷갈리게 할 필요는 없었다.

결국 라울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없다. 죽은 게 확실하니 더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가."

멜키르는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사실 그도 자신이 찾던 인물이 죽었을 거라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저 자신에게 이런 상처를 준 자에게 복수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때는 자신이 확실하게 패배했었으니까.

하지만 상대도 그때의 부상으로 세상을 뜬 모양이었다.

기세를 가라앉힌 멜키르가 착잡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무슨 일 때문에 온 것인가."

"처리해 줘야 할 적이 생겼다."

"내 목숨을 쓸 때가 온 모양이군."

"...억지로 붙여 놓은 목숨이긴 하지만, 한 번은 더 활약할 수 있지 않은가."

죽어 가는 그를 살려 준 것이 바로 델파인 공작가와 구원교의 사제들이었다. 그들로서도 멜키르가 죽도록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멜키르는 무려 20여 년 전에 마스터에 오른 초인이었으니까.

그 실력을 다시 한번 써먹기 위해 이렇게 목숨을 붙여 놓고 멋대로 죽지도 못하게 해 놓은 것이다.

그 말에 멜키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죽기 전에 한 번은 더 싸울 수 있지."

어차피 자신은 공작가의 숨겨진 검이다. 공작가의 적을 처리한다. 그것이 자신의 숙명이자 사명이었다.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뒤부터 공작가를 지키는 것으로 임무가 변경됐지만, 그의 일은 원래 누군가를 죽이는 것이었다.

"상대가 누구지? 내 마지막을 불태울 만한 인물이었으면 좋겠는데."

"펜리스 백작."

멜키르가 살짝 실망한 눈빛을 지었다.

"못 들어 본 이름이군."

"그럴 것이다. 당신이 이곳에서 쉬고 있는 동안 나타난 인물이니까."

"실력은?"

"마스터."

그 말에 멜키르가 즐겁다는 듯 눈매를 휘었다. 자신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먹잇감이었다.

이런 상대를 그냥 죽이면 안 된다. 그냥 죽이면 정말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가 갑자기 혀로 입술을 축이며 물었다.

"그놈한테 가족들은 있나?"

"아버지와 동생이 있다."

"그렇다면 예전처럼 가족들부터 죽여도 되나? 이런 실력자가 고통스러워하는 게 정말 예술이거든. 죽기 전에 내 이름도 널리 알리고 싶고 말이야."

그는 잔인한 암살자이자 스스로를 수준 높은 예술가라 생각하는 자였다. 그렇기에 언제나 적을 죽이기 전에 주변의 소중한 인물들부터 차근차근 하나씩 죽여 나가는 걸 선호했다.

강한 사냥감이 정신적으로 몰리고 망가지는 것이야말로 극도의 아름다움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악독한 취향도 20여 년 전에 누군가에게 크게 당한 뒤로 더 즐기지 못하게 됐지만 말이다.

라울도 마주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히려 이쪽에서 부탁하려고 했지. 시간을 끌면 끌수록 우리가 좋거든. 가족들이고 뭐고 죽일 수 있는 자들은 다 죽여라."

"당장 움직이면 되는가?"

"아니, 사제들이 모이고 전쟁을 시작한 뒤에 출발하면 된다. 갑자기 구상한 작전이라 우리도 정리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거든."

라울이 미소 지었다. 단 한 번만 쓸 수 있는, 아껴 두었던 강한 패를 꺼냈다.

이번만큼은 펜리스 백작도 당할 수밖에 없으리라.

453화 솔직하게 얘기해 봐. (1)

콰지직!

차가운 인상의 여자가 메이스로 누군가의 머리를 박살 냈다.

머리가 박살 난 자는 검은 로브를 입었고 몸에는 검은 태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바로 구원교의 고위 사제라 불리는 심판관 중 하나였다.

"후우...."

여자는 숨을 길게 내쉬며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주변에 가득한 시체들이, 조금 전까지 이곳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여실히 알려 주고 있었다.

살아남은 여자 또한 몸 곳곳에 상처가 있었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놈들의 힘이 전보다 더 강해진 거 같구나. 어째서 이런 일이...."

여자가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깊은 고민에 빠지기 직전, 멀리서 여러 사람이 달려왔다.

"성녀님!"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어서 치료를!"

달려온 자들은 전쟁의 여신 모리아나를 모시는 사제들이었다. 그들은 성녀라 불린 여자를 둘러싸고 신성력을 내뿜었다.

다들 여자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은 키였다. 멀리서 보면 성녀라 불린 여자가 어린아이들 틈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게 아니었다. 사제들은 어린이들이 아니라 중년의 남자들이었다. 실상은 그녀의 거대한 체구 때문에 그렇게 보인 것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어깨는 떡 벌어지고, 근육이 온몸을 감싸고 꿈틀거리고 있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장정은 꿀밤 한 대만으로도 쓰러트릴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전쟁의 여신이 선택한 성녀다웠다.

성녀, 파르니엘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구원교의 고위 사제들이 갑자기 루타니아 왕국으로 가고 있다. 이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가?"

한 사제가 머리를 조아리며 답했다.

"루타니아 왕국을 중심으로 연합군이 결성되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 구원교의 사제들도 모이는 거 같습니다."

"그렇군. 그곳이 지금 싸움의 중심지로구나. 바퀴벌레처럼 숨어 있던 놈들이 그곳으로 몰리는 걸 보니 말이다."

"그쪽 일은 그쪽에 맡겨 두시지요. 이제 돌아갈 채비를...."

"아니, 루타니아 왕국으로 가겠다."

"성녀님! 총대주교께서는 이제 그만 돌아오시라고 하셨습니다."

사제들이 깜짝 놀라며 만류했으나 파르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구원교의 사제들이 모이는 걸 보면 그곳에 사제들보다 더 급이 높은 자가 있는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곳을 차지할 중요한 이유가 있는 거겠지. 난 그곳으로 가겠다."

파르니엘은 피로 범벅이 된 메이스를 꽉 쥐고 말을 이었다.

"구원교의 고위 사제들은 초인에 버금가는 힘을 발휘한다. 보통 사람들은 그들을 상대할 수 없어. 여신의 사명을 받은 내가 가서 도와줘야 하지 않겠는가."

모리아나는 전쟁과 명예, 전투, 승리, 권위, 위엄, 긍지 등을 상징하는 여신이다.

기사들과 전사, 용병 등 전투를 업으로 삼은 자들의 지지를 받는 여신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여신에게 선택받은 성녀가 바로 파르니엘이다. 그녀에게 내려진 사명은 구원교의 박멸.

그렇기에 그녀는 오직 자신만이 구원교를 상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성녀님, 루타니아 왕국은 군사 강국입니다. 그곳에도 강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굳이 우리가 그곳까지 갈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 다른 곳들도 급하지 않습니까?"

사제들이 말렸지만 파르니엘은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구원교의 사제들, 균열의 괴수들은 신성력과 상극이지. 누가 나만큼 그것들을 효과적으로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이냐. 이 세상에 성녀는 오직 나뿐이다."

성녀는 한 시대에 한 명만이 태어난다. 이미 존재하는 성녀가 죽기 전까지는 다른 교단에서도 성녀가 태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은 전쟁의 여신이 성녀를 임명한 상태였다.

하지만 모든 교단은 그 사실을 오래전부터 숨겨 왔다. 전쟁의 여신이 임명한 성녀가 태어났다는 건 불길한 징조이기 때문이다.

극소수의 인물을 제외하고는, 모리아나 교단에 성녀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파르니엘은 자신이 진 책무를 무겁게 느꼈다.

"이 시대에 내가 태어난 것은 여신께서 안배하신 일임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전쟁의 여신께서 나를 보내셨겠느냐."

파르니엘의 말에 사제들은 할 말이 없었다. 확실히 우연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절묘한 시기였다.

파르니엘은 태어날 때부터 신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덕분에 남들보다 몇 배나 강한 힘을 낼 수 있었다.

물론 그것만이라면 그저 조금 특이한 정도로 끝났을 것이다. 아무리 힘이 세도 마나를 다루지 못하면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녀로 선택받고 신성력을 얻게 되자 그녀는 완전히 전투 병기가 되어 버렸다.

이 모든 게 구원교와 싸우라는 신의 계시임을 다들 부정할 수가 없었다.

"끄응... 알겠습니다."

"루타니아로 길을 잡겠습니다."

"일단 그곳의 책임자를 만나 보시지요."

사제들은 더 이상 파르니엘을 말리지 못했다. 성녀의 고집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힘으로 막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그녀가 바로 지셀의 전생에 대륙 7강 중 하나로 꼽혔던 '전쟁의 성녀'였으니까.

* * *

가트로스의 명을 받은 구원교의 사제들이 루타니아 왕국을 차지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런데 가트로스와 라울이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다. 구원교의 사제들이 움직이면서, 구원교와 대립하던 자들도 하나둘씩 루타니아 왕국으로 모이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이미 엘프 대족장인 에레네스는 지셀과 손을 잡았고, 전쟁의 성녀인 파르니엘도 루타니아로 오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각 연합국의 일부 군대까지 델파인 공작가를 상대하기 위해 출정했다.

지셀이 활약한 결과 루타니아 왕국은 그야말로 모든 세력의 각축장이 되어 가고 있었다.

대륙 곳곳에서 합류하는 용병들 또한 어마어마한 세력이 되어 가는 중이었다.

"세이론 왕국의 용병 대부분이 펜리스 용병단 지부로 흡수됐습니다."

"그림웰 왕국의 용병들 절반 이상이 펜리스 용병단에 가입했습니다!"

"새로 가입한 용병들이 우리가 주는 혜택에 무척이나 만족해하고 있습니다."

온갖 지역에서 보고가 올라왔다. 지셀은 보고 내용을 들으며 미소 지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네. 아주 좋아. 새로 가입한 용병들에게 아끼지 말고 식량과 돈을 풀라고 전해라."

도미닉과 펜리스 용병단의 일부는 균열 처리가 끝나기도 전에 각 왕국으로 파견되어 지부를 설립했다.

해당 왕국의 실권자들이 밀어주는 일이다. 행정 처리가 빠르니 진행이 무지막지하게 빠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로서도 당장은 용병들의 유출을 막고 자국 내의 일에 써야 하니 지셀과의 협약에 충실히 따랐다.

진행이 빠른 만큼 처리해야 하는 행정 업무도 많았다. 그걸 처리하는 건 지셀이 아니라, 그런 일을 하라고 지셀이 끌고 온 사람들이었다.

"으아아아아! 그만! 그만! 나를 영지로 돌려보내 달라고!"

클로드는 북부군 진영에서 매일 비명을 지르며 온갖 서류를 처리했다.

처음에 지셀이 클로드와 행정관들을 불렀을 때, 그들은 단지 연합군 관련 일만 하면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 보니 북부군 진영까지 끌려와 온갖 행정 업무를 도맡고 있었다.

"젠장! 왜 이렇게 일이 많아! 왜 이렇게 일을 많이 벌여 놨어! 왜 일이 안 끝나! 보고서 그만 가져오라고!"

클로드는 당분간 펜리스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지셀이 있는 곳이 사실상 펜리스의 중심이었다. 이곳에서 모든 업무를 처리하고 각지에 전달해야 한다.

가장 큰 건 용병들의 일이었다. 무려 2만의 용병들이 각 왕국으로 흩어져 지금도 용병들을 빠르게 흡수하고 있었다.

용병들이 물밀 듯이 가입하는 만큼, 해야 할 일도 보내야 할 물품도 미칠 정도로 많았다.

"으으, 서부 놈들은 좀 알아서 하지. 그냥 독립하면 안 되냐?"

그다음은 서부의 일이었다. 안정화 사업도 마무리하고, 연합군의 진입로를 확보하는 데도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러니 그곳에도 보내야 할 서류가 산더미 같았다.

지셀은 그 모든 일을 클로드에게 떠넘긴 것이다!

"그냥 죽여 줘...."

클로드와 행정관들은 비몽사몽인 상태로 업무를 처리했다.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면 곧바로 피오테가 나타나 회복시켜 주고 갔다.

에레네스는 유심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경망스러운 놈인 줄 알았는데 일을 제법 하는 모양이구나. 우리가 이제 '가족' 같은 관계라고 했으니 내 너를 조금 도와주겠다."

"뭘 도와줘요? 나 이제 너무 피곤해서 잘 건데요? 나 지금 사흘이나 못 잤는데? 대자연이 서류 처리도 해 줘요?"

"그런 건 아니지만 좋은 방법이 생각났구나."

엄살을 부리며 쓰러져서 시간을 끌려고 하는 클로드에게 에레네스가 다가왔다.

그녀가 펴 든 손에서 아름다운 녹색 빛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신성력만큼은 아니더라도 자연의 기운이 활력을 돋워 줄 것이다. 또한 정령들이 너의 일을 도와줄 것이야."

"하, 하지 마!"

파아아악!

녹색 빛이 클로드의 몸을 감쌌다. 클로드는 청량감이 온몸을 휘돌고 몸에 다시 힘이 돌아오는 걸 느꼈다.

물의 정령이 주변을 맴돌며 클로드의 얼굴을 씻겼다. 바람의 정령이 그것을 말려 주고 불의 정령이 몸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땅의 정령은 클로드의 발과 허벅지를 붙잡고 자세를 바르게 해 주었다.

"자세는 왜?"

"그래야 건강하게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 법이다."

"으아아아아! 왜 난 행복할 수가 없어!"

이제 에레네스까지 피오테와 쌍으로 와서 잠도 못 자게 한다. 정령들마저 클로드에게 노동을 강요하고 있었다.

진짜 죽어야 끝나는 모양이었다.

에레네스는 그 속도 모르고 엄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하지 않아도 된다. 가족 같은 관계가 되자고 하지 않았느냐."

"와 씨.... 꼰대라 그런가 말이 안 통하네."

클로드는 진짜 환장할 거 같았다. 총관 대리로 펜리스 성에서 꿀을 빨고 있을 로웰이 부러워졌다.

그래도 클로드가 고생하는 만큼, 북부군과 관련된 행정 업무는 빠르고 확실하게 정리되었다.

그리고 에레네스가 합류한 덕분에 남은 균열을 처리하는 건 더 쉬워졌다.

커어어엉!

"삿된 것들아. 내 다시는 너희가 이 땅에서 설치는 꼴을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북부군에는 엄마처럼 포근하게 굴던 에레네스는 전투에만 들어가면 악귀로 변했다. 어느 쪽이 진짜 얼굴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묶어라."

드드드드드!

에레네스가 소환한 나무 덩굴들이 에퀴데마의 몸을 칭칭 감쌌다.

짐승은 그것을 끊으며 움직이려 했지만, 그 전에 피오테가 벨린다의 도움을 받아 짐승의 목 위에 올라탔다.

크어어어엉!

그 뒤로는 기존과 같은 방식으로 에퀴데마를 처리했다. 에레네스 덕분에 피오테가 훨씬 더 쉽고 빠르게 올라탈 수가 있었다.

몇 번 덩굴이 끊어지더라도 문제는 없었다. 옆에 있는 실력자들이 끊임없이 견제를 해 주었으니까.

너무나도 쉽게 에퀴데마를 잡는 모습을 보고 에레네스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저 짐승을 이렇게 쉽게 잡다니.... 너희들은 정말 대단하구나."

지셀이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그쪽은 어떻게 잡았는데?"

"나는... 우리는...."

그녀는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듯 시선으로 허공을 더듬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흠, 역시 뭔가 이상해.'

얼버무리듯 말을 돌리는 그녀의 모습에 지셀이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 에레네스는 금제가 풀리자마자 자신을 찾아왔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이번이 균열과의 첫 싸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균열인들과 에퀴데마를 보고도 놀라지 않는다. 소문을 들었다기에는 너무나도 익숙해 보였다. 말과 행동도 분명 균열과 몇 번이나 싸워 본 것만 같았다.

저 엘프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조만간 알게 되겠지.'

숨기려고 하는 걸 캐내는 취미는 없다. 하지만 그녀가 이 사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가지고 있다면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지셀의 속내야 어찌 되었든, 균열 처리 속도가 빨라진 덕분에 북부군 사기는 더 올라갔다.

북부군은 천천히 이동하며 균열과 행정 업무를 처리했다. 영지가 이동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다크 또한 사방으로 분신을 만들어 날아다녀야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동부의 균열을 모두 처리하고 연합군의 규합 장소로 이동하던 중, 지셀은 갑자기 떠오른 의문에 미간을 좁혔다.

'이상하군. 왜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 거지?'

에레네스가 합류한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공작가의 전력이면 남부에 열린 균열 정도는 벌써 정리가 끝났을 터다.

대륙 곳곳에 퍼져 있는 구원교의 정보력이라면 분명 연합군이 오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가까운 일부 왕국의 지원군은 벌써 도착한 상태였다.

'공작가가 그걸 보고만 있을 리가 없는데.... 무슨 수작을 꾸미는 거지?'

지금 상황은 분명 공작가에 불리했다. 그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무언가 수작을 부릴 게 분명했다. 하지만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지셀이 그렇게 고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령이 와서 새로운 사실을 알렸다.

"암살자들이 설치고 있습니다. 남부와 가까운 영지의 관리들 몇이 사망했습니다."

"뭐? 암살자? 누가 당했는데?"

"대부분은 하급 관리들입니다. 큰 피해는 없지만 분위기가 어수선해졌습니다."

지셀이 다시 고민에 빠졌다.

'이제 와서? 그런 암살은 대세에 영향을 주지 못할 텐데.'

쓸데없는 짓이었다. 초인이 움직이지 않는 한 고위 귀족은 절대 죽일 수 없다.

설령 초인이 직접 나서서 암살에 성공해도 문제다. 그 뒤에 따라오는 추격까지는 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초인급에 이르는 라비에르도 기사들의 추격을 뿌리치지 못하고 죽었다. 초인이라도 쉬지 않고 계속 싸울 수는 없어.'

초인쯤 되는 자를 버리는 패로 취급하는 멍청한 짓을 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일을 저지른다는 건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건데....'

지셀이 며칠간 공작가의 움직임을 살피는 중에 전령이 더 큰 소식을 가져왔다.

"공작가의 군대가 진군을 시작했습니다! 현재 왕국군 4군단을 격파하고 동부로 이동 중입니다!"

드디어 공작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454화 솔직하게 얘기해 봐. (2)

동부 지역은 이제 막 균열 확장을 저지하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들은 물밀 듯이 진격하는 공작가의 군대를 막지 못했다.

소식을 들은 친왕파는 당연히 난리가 났다. 공작가가 이렇게 갑자기 움직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콰앙!

왕국군 총사령관 모리스는 테이블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어떻게 동부로 바로 진군한 거야! 남부 경계를 다 틀어막고 있었잖아!"

그의 참모들이 곤란해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길목을 막고 있던 4군단이 순식간에 괴멸되었습니다. 생각보다 공작가의 군대가 강한 모양입니다."

"젠장! 수는 얼마인데!"

"약 5만 정도라고 합니다."

"으으.... 주력은 분명 남부에 있을 텐데. 그 정도 여력은 된다는 건가?"

그 말에 참모들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아직도 공작가의 전력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부가 완전히 공작가의 통제하에 들어간 뒤로는 첩자를 보내기도 여의찮았다.

모리스가 고민하다가 물었다.

"동부군이 막을 수는 있나?"

"동부군이라고 부를 만한 병력이 제대로 모이지도 못했습니다. 영주들이 다 따로 놀고 있어 각개 격파 당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한심한 놈들! 빨리 뭉치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동부군 사령관은 진작에 임명했다. 하지만 영주들은 각자 자기 영지의 피해부터 수습하고자 소극적으로 움직였다.

공작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가장 적절한 때에 움직인 것이다.

"젠장, 워낙 안 움직이고 있어서 계속 견제만 할 줄 알았는데."

서로 싸워 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건 공작가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팽팽한 힘의 균형 속에서 시간만 끌 줄 알았다. 연합군이 도착하면 압도적인 병력으로 한 번에 치려고 했었다.

"하긴 그놈들도 멍청하진 않으니까, 연합군이 다 모일 때까지 기다릴 리가 없지."

모리스는 지도를 보며 고민에 빠졌다.

왕국군의 총사령관은 자신이다. 정국은 브랜포드 후작이 주도하지만, 전쟁은 자신이 결단을 내려야 하는 문제였다.

"남부의 왕국군을 빼면 분명 그놈들의 주력이 같이 움직일 거야. 그렇다고 지금 상태를 유지하면 동부가 짓밟힐 테고...."

동부가 중부 지역보다 중요하진 않다고 해도 버릴 수도 없었다. 그쪽을 통해서 수도로 진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으으으.... 어떻게 하지?"

고민하던 그에게 북부군 전령이 찾아왔다.

"펜리스 백작의 말을 전하러 왔습니다."

"조카가?"

모리스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똑똑한 조카라면 분명 방안을 알려 줬을 것이다.

"그래, 조카가 뭐라고 하더냐? 북부군을 다시 움직이겠다고 하더냐?"

"아닙니다. 왕국군 절반을 보내 동부로 진격한 델파인군의 진격을 저지해 달라고 했습니다."

"뭐? 왕국군을 절반이나 보내라고?"

"먼저 도착한 연합군이 동부로 출발했습니다. 동부가 완전히 점령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이 시간을 버는 사이 왕국군으로 델파인군을 치면 될 거라 합니다."

"그런데 절반이나 보내면 남부 전선이 약해질 텐데, 괜찮겠어? 곳곳에 구멍이 뚫릴 거라고."

"북부군도 남부 전선으로 가겠다고 합니다. 서부에서 수습한 2만의 병력이 부족한 곳을 채울 거라고 했습니다."

"으음...."

모리스는 고민에 빠졌다. 북부군이 당연히 올 거라 생각했지만 왕국군이 빠지는 건 생각하지 못했다.

공작가가 한 곳만 공격해 올 리 없다. 분명 여러 경로로 동시에 움직일 것이다. 북부군이 남부를 성공적으로 막아 내도 다른 곳이 뚫릴 수도 있다는 얘기다.

"가뜩이나 암살자 놈들 때문에 분위기도 안 좋은데."

최근에 몇몇 영지에서 암살자들이 날뛰어 하급 장교들과 관리들이 꽤 많이 죽었다.

물론 그 암살자들도 탈출하지 못하고 다 잡혀 죽었다. 고위 귀족들은 터럭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

대세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일이었지만 소문이 문제였다.

"그놈들이 이걸 노린 건가?"

암살 사건에 관한 소문이 퍼지며 분위기가 조금 뒤숭숭해진 건 사실이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침공하니 조금이나마 시너지 효과가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딱 그 정도였다. 병사들이 조금 긴장한 것 외에는 별다른 효용이 없었다.

모리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들인 공에 비해 너무 효과가 약하고.... 도대체 왜 그런 걸까?"

암살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오히려 경계심만 더 올려 주는 꼴이 됐으니까.

차라리 갑작스럽게 기습해서 영지군 하나를 몰살시킨 게 더 파급력이 컸다.

"참 이해할 수가 없네. 그냥 하나만 걸려라 하고 막 던져 본 건가?"

모리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들은 그저 지셀을 얽매기 위해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한참 동안 고민하던 모리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할멈을 불러와라. 오랜만에 하늘의 뜻을 물어봐야겠다."

그 말에 참모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씨, 또 시작이네.'

'하, 진짜 그걸 해야 하나.'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으니....'

곧 허리가 굽어진 노파 하나가 들어왔다. 모리스는 무척이나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오! 할멈! 내 오늘 중요한 일이 있는데 점괘를 좀 봐야겠어."

"흘흘흘, 조만간 절 부를 줄 알았습니다."

"이야, 역시 할멈이라니까. 아주 용해. 그러고 보니 전에 내가 싫어하는 놈이 큰 이득을 줄 거라고 했잖아? 그게 정말이었다니까? 그놈이 이제 내 조카가 됐어."

"흘흘흘, 좋게 풀렸다니 다행입니다."

"자자, 그러니까 오늘도 용하게 하나 부탁해."

"그럼요, 그럼요. 그래, 오늘은 무슨 일입니까? 무엇이든 알려 드리지요."

노파는 주술사였다. 그녀는 아주 예전부터 후작가에 머물며 모리스에게 여러 조언을 해 주며 살아왔다.

모리스는 미신을 좋아한다. 예전부터 지셀을 마녀니 오리니 하면서 흉봤던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러니 미래를 잘 맞힌다 싶은 노파도 무척이나 신뢰하는 편이었다.

당연히 4대 교단의 사제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왕국군 총사령관이 취미(?) 삼아 하는 일이라 치부하고 모르는 척하는 중이었다.

모리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전쟁이 났는데 골치 아픈 상황이야. 한쪽이 그냥 막 밀리고 있거든. 그런데 조카가 다른 쪽 군대를 이동하라고 했어. 해도 될까?"

"흘흘흘, 제가 한 번 봐 드리겠습니다."

노파는 보자기에서 주섬주섬 동물 뼈들을 꺼냈다. 그러고는 바닥에 붉은 염료로 괴상한 그림을 그린 뒤에 뼈들을 던졌다.

"홋홋홋!"

이상한 추임새까지 넣으며 뼈들을 몇 번 던지고 유심히 살피던 노파가 중얼거렸다.

"으음.... 이건...."

"왜? 왜? 안 좋아? 옮기지 말까?"

"아닙니다. 옮기는 건 맞습니다. 다만...."

"다만 뭐?"

"조카분 가족이 조금 위험할 거 같습니다."

"군대를 옮기는데 뭔 조카 가족이 위험해?"

"그냥 점괘가 그리 나왔습니다. 그 조카분이 군대를 옮기라 해서 조카분 점도 같이 본 거거든요."

"음? 그래? 어쨌든 알았어. 할멈이 말했으니 군대를 옮겨야지. 조카한테도 소식을 전해 주고."

"흘흘흘, 후작님도 출정하실 겁니까?"

"그럼, 총사령관인 내가 가야지. 앗차, 할멈도 같이 갈 거니까 미리 채비해 놔. 편하게 이동할 수 있게 최고급 마차도 준비해 줄 테니까. 할멈이 같이 가야 전투 전에 점을 봐 줄 거 아냐. 몸 괜찮지?"

"흘흘흘, 괜찮고말고요. 알겠습니다."

노파가 물러나자 모리스가 근엄한 표정으로 북부군 전령에게 말했다.

"북부군 사령관에게 전해라. 내 왕국군을 움직이기로 결단을 내렸다고. 아, 그리고 가족이 위험하다는 점괘가 나왔으니 꼭 신경 쓰라고 해. 요새 암살자들이 설치는데 조심해서 나쁠 거 없지."

"...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전령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왕국군 총사령관이 한낱 점쟁이의 말을 믿고 군대를 움직이다니.

왕국에 심각한 위기가 왔다는 게 새삼 느껴졌다.

"자! 빨리빨리 움직이자! 공작가 놈들의 머리를 박살 낼 시간이다!"

모리스가 크게 외치고 자리를 떠나자 몇몇 참모들이 전령에게 다가와 애원하는 조로 말했다.

"이해하시게. 원래 후작님이 저러시던 분은 아니었네."

"아주 오래전에 막냇자식을 잃어버렸는데 도무지 못 찾아서 저런 미신에 의지한 거야."

"하필이면 저 노파가 언젠가는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바람에 옆에 계속 두고 있는 걸세."

"그래, 나중에 자식 찾으면 주겠다고 영지도 하나 비워 놓을 정도네. 백작의 작위도 주겠다나? 부모 마음이란 게 그렇지 않겠나."

"그러니 이 일은 소문내지 말게. 알았지? 이런 게 소문나서 좋을 게 없잖아? 응? 북부군 소속 어디야? 내가 자네 얼굴 다 봤어. 응?"

참모들은 구구절절 사정을 설명하기도 하고 반쯤은 협박하기도 하면서 전령을 이해시키려 했다.

고위 귀족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런 게 널리 퍼져서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전령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은 내지 않겠습니다."

"그래, 그래. 오늘 일은 못 본 걸로 하자고. 북부군 사령관께도 잘 말씀드리고."

"...알겠습니다."

전령은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마음속에 담고 진영으로 돌아갔다.

그는 돌아가자마자 지셀에게 보고를 올렸다.

"왕국군의 절반을 바로 동부로 이동시키겠다고 합니다."

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자신의 뜻대로 될 거라 생각했다. 모리스가 반대해도 브랜포드 후작이 움직여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 연합군도 움직였으니 비슷한 시기에 도착하겠네. 다른 말은 없었나."

"저기 그게...."

전령은 조금 우물쭈물했다. 이런 얘기를 건네도 될지 판단이 안 섰기 때문이다. 그래도 전령인 이상 자신의 판단으로 보고를 거르면 안 된다.

"왜? 편하게 얘기해."

지셀의 말에 전령은 자신감을 얻고 말했다.

"총사령관 각하께서 가족들이 위험할 테니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음? 가족? 그게 무슨 말이야?"

"그게 요새 암살단도 날뛰고 있고.... 그게 그러니까...."

전령이 횡설수설하자 지셀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얘기해 봐."

"...넵."

전령은 정말 있는 그대로, 본 그대로 말했다. 얼버무려서는 그 말이 나온 이유를 도무지 설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걸 들은 지셀도 큰 충격에 빠졌다.

'그 정도일 줄이야.'

미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렇게 심각하게 좋아하는 줄은 몰랐다.

점쟁이가 다른 말이라도 했으면 모리스는 엄청나게 고집을 부렸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어질어질했다.

"...그래, 수고했다."

전령이 물러나고 지셀은 조금 고민에 빠졌다. 모리스에 대한 고민은 아니었다.

가족들이 위험하다는 얘기에 요새 날뛰는 암살단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놈들이 아무런 효용도 없는 짓을 할 리가 없는데....'

펜리스와 페르디움은 암살 대비를 확실히 해놨다. 정말 초인이라도 오지 않는 이상 누군가를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벨린다가 키운 암살단은 가족과 주요 인물 주변에 꼼꼼하게 배치했다. 그렇기에 북부군에도 합류하지 않았다.

'설마... 다른 수가 있는 건가?'

너무나 노골적으로 암살 소식을 퍼트리고 있었다. 최근에는 북부 영지 몇 곳에서도 암살자들이 활개 쳤다고 한다. 마치 곧 페르디움으로 가겠다는 신호 같았다.

하지만 그들도 지셀의 가족을 암살해 봤자 오히려 분노만 더 살 뿐, 딱히 대세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자신에게 알리는 것이다. 자신을 유인하는 것이다. 가족들을 암살하러 갈 테니 어서 돌아오라는 뜻이다.

'내가 자리를 비우면....'

그사이에 공작가의 주력이 수도를 향해 진군할 것이다.

'뭘 노리는지는 알았어.'

자신을 북부군과 떨어뜨리려는 공작가의 계책임은 확실했다.

하지만 여전히 무슨 생각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설사 진짜로 암살을 시도할 생각이라 해도, 지셀이 언제 자리를 비울지 어찌 알고 진군 날짜를 잡겠는가.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 답은 며칠 뒤에 도착했다. 지셀은 하나의 서신을 받았다.

[너를 죽이겠다. 페르디움에서 기다리도록 하지. 가족들을 지키고 싶다면 바로 움직여야 할 것이다.]

담백한 글귀 아래에는 검은 초승달이 그려져 있었고 '멜키르'라는 서명이 쓰여 있었다.

이제는 대놓고 가족을 죽이겠다고 한다. 이 정도면 제발 와 달라고 애원하는 수준이다.

확실하게 자신을 북부군과 떨어뜨려야 하는 공작가의 입장을 생각하면 가짜 계책이 아닐 확률이 훨씬 더 높았다.

"그런데 이건 뭐지?"

협박이야 그렇다 쳐도, 자랑하듯이 밑에 그려 놓은 그림과 멜키르라는 이름은 조금 궁금했다. 전생에도 접하지 못했던 것이었으니까.

지셀은 측근들을 전부 불러 모았다. 혹시 편지를 보낸 놈을 아는 사람이 있나 싶어서였다.

갑작스러운 호출에 다들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모여들었다.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은 단 둘뿐이었다.

'젠장, 또 강한 놈이 들어왔어. 두고 보자. 내가 언젠가는 꼭 뛰어넘어 주겠다.'

부상에서 회복한 카오르는 앞서가는 에레네스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자꾸 펜리스에서 실력 순위가 뒤로 밀리는 게 짜증이 났다.

그와는 반대로 알포이는 힘의 차이를 느끼자마자 납작 엎드렸다. 복수는 꿈도 꾸지 않았다. 그는 그저 평소처럼 헛생각만 했다.

'아, 나도 백작하고 영주하고 싶다. 노예 그만하고 싶다.'

언제나 일관성 있는 마음가짐이었다.

지셀은 속내가 빤히 보이는 두 사람을 보며 혀를 차고는 측근들에게 서신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경험 많은 용병이었던 길리언과 카오르도, 많은 지식을 쌓은 바네사와 마탑에 있었던 알포이도, 서부에서 높은 자였던 테넌트도, 무척 오래 산 에레네스도 그 정체를 알지 못했다.

단 한 명.

"도, 도련님! 이건...."

벨린다만이 그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응? 뭐야? 벨린다는 이게 뭔지 알고 있어?"

"도련님! 빨리, 빨리 영지로 돌아가야 해요."

"그렇지 않아도 가 볼 생각이긴 한데.... 왜 그렇게 긴장한 거야?"

"도련님을 죽이겠다는 이놈은.... 이놈은 상대를 죽이기 전에 그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부터 무조건 죽이는 놈이에요! 어서 페르디움으로 돌아가야 해요! 이건 거짓말이 아니에요!"

벨린다는 무척이나 흥분해서 말을 쏟아 냈다. 그녀의 눈빛에는 약간의 두려움마저 서려 있었다.

"잠깐 진정해. 멜키르라는 놈이 누군지, 벨린다는 이놈을 어떻게 아는지 설명을 해 줘야 알아들을 수 있잖아."

그 말에 벨린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에는 듣는 사람이 너무 많지만, 이들을 내보내려고 실랑이할 시간도 아까웠다. 그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었다.

크게 한숨을 내쉰 그녀가 무언가를 결심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모두 잘 들어요. 제가 지금까지 숨겨 왔던 비밀을 말해 줄 테니까요."

그 말에 다들 숨을 죽였다. 그렇지 않아도 다들 꽤 오랫동안 그녀의 정체를 궁금해했기 때문이다.

페르디움의 하녀장이자 지셀의 가정교사에 불과했던 그녀가 왜 그렇게 강한지 말이다.

거기에 암살자들이 쓸 법한 기술을 쓰는 이유도 궁금했다. 다들 그녀가 정체를 숨긴 암살자 출신이라는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벨린다가 조금 슬픈 눈빛으로 말했다.

"다들 듣고 놀라지 마세요. 전 사실... 암살단 출신이에요."

너무나도 당연한 소리에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455화 적들을 찾았다. (1)

모두가 시큰둥한 표정을 짓자 벨린다가 발끈했다.

"뭐예요! 지금 여자의 비밀스러운 과거를 말해 줬는데 그 반응은 뭐냐고요! 왜 다들 안 놀라는 건데!"

"...."

다른 사람들이 뭐라 대답해야 할지 잠깐 고민하는 사이 카오르가 나서서 외쳤다.

"집사장이 암살자라는 걸 누가 몰라! 영지 암살대도 집사장이 이끄는데! 무슨 암살단에 있었고 저 이상한 편지 보낸 놈을 어떻게 아는지 자세하게 얘기를 해 줘야지!"

"하려고 했는데 지금 반응이 마음에 안 들었다고!"

"...."

"어쨌든 저는 암살단에 있었고 저 쪽지를 보낸 놈은 우리와 싸웠던 놈이에요. 문제는...."

벨린다가 숨을 푹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저놈은 분명 우리 단장님한테 죽었거든요. 어떻게 살아 있는지 모르겠네요."

지셀이 그 부분에 의문을 표했다.

"단장? 죽은 놈이라고? 그러면 이거 그냥 사칭 아니야?"

벨린다는 조금 흥분이 가라앉았는지 처음과 달리 차분하게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러네요. 그런데 굳이 사칭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지금 여기 계신 분들 중에 누구도 저놈이 누군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뭐 하러 사칭을 하겠어요?"

"그건 그렇지."

지셀도 고개를 끄덕였다. 유명하지도 않은 놈은 사칭해 봤자 의미가 없다. 지금도 벨린다 말고는 저 표식이나 멜키르라는 이름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으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정말 죽은 게 맞아?"

"분명 단장님이 저놈의 숨을 끊고 마나 코어까지 파괴했어요. 저도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어요."

"흐음, 그러면 이놈을 죽였다는 단장이라는 사람은 어디에 있는데?"

지셀은 그게 궁금했다. 멜키르라는 놈도, 벨린다가 말하는 단장이라는 사람도 전혀 정보가 없다. 작정하고 숨어 사는 자들이란 뜻이다.

벨린다는 잠시 멈칫하다가 지셀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오래전에 돌아가셨어요."

다들 여전히 의심스러워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뭔가 속 시원하게 제대로 말을 안 하는 꼴이 상당히 수상했다.

지셀은 머릿속이 간질거렸다. 갑자기 가설이 하나 떠올랐기 때문이다.

'단장이라는 사람이 혹시? 에이, 설마....'

그가 물어보려고 하는 찰나에 벨린다가 먼저 성을 내며 말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이놈이 다시 나타났다는 게 중요한 거죠! 설사 그놈이 죽고 그놈의 후인이 사칭하는 거라 해도 이 방식은 그놈이 쓰던 것하고 똑같다고요! 이런 짓을 괜히 할 리가 없잖아요?"

"으음...."

잠시 고민하던 지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가짜 계책은 아닌 거 같았다.

공작가에서도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는 작전이니 실제로 암살자를 보냈을 가능성이 크다.

"운 좋게 살아남았거나 그 방식을 따라 하는 놈일 거다?"

"그래요! 저는 반드시 이걸 보낸 놈의 얼굴을 확인해야겠어요. 도련님이 안 가겠다면 저 혼자서라도 가겠어요!"

벨린다의 두 눈은 이제 알 수 없는 증오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살기를 내뿜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아무래도 멜키르란 놈에게 상당한 원한이 있는 것만 같았다.

'뭐, 직접 만나 보면 알 수 있겠지.'

"만약 이놈이 살아 있는 거면.... 이놈 실력은 어떤데?"

지셀의 물음에 벨린다가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20년 전에 이미 마스터에 이른 암살자였어요."

그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20년 전에 마스터에 올랐다면 지금은 얼마나 강해졌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지셀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마스터에 올랐다 해도 무조건 실력이 늘어나는 건 아니야. 마스터에 오른 뒤에도 벽이 계속 앞을 막고 있거든. 붙어 보기도 전에 쫄 필요 없어."

그래도 사람들은 긴장을 풀지 못했다. 오직 에레네스만이 지셀의 말에 동의를 표한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이놈이 진짜면 크게 다치고 죽기 직전까지 갔다는 거 아냐? 계속 요양하고 있었을 확률이 높지. 가짜면 최근에 초인에 오른 놈일 테고."

벨린다가 옳다구나 하며 끼어들었다.

"그래요. 그럴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일단 진짜 그놈인지 아니면 사칭범인지부터 확인하자고요."

"알겠어. 그나저나 이 그림은 뭐야?"

"검은 달이요. 그놈들의 표식이에요."

"의미가 있나?"

"암살 대상이 살아 있을 때는 초승달, 그리고 암살에 성공하면 보름달로 변해요."

"낭만 있는 놈들이네."

지셀이 피식 웃으며 일어섰다.

공작가는 자신을 북부군과 떨어뜨리려고 별짓을 다 하고 있었다. 자신만 없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 같았다.

이럴 때는 재미있게 놀아 주며 한 방 먹이는 것도 방법이다.

지셀은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당분간 북부군은 클로드가 지휘한다."

그 말에 에레네스만 살짝 놀랐을 뿐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짜증 나지만 클로드가 이미 능력을 보여 줬기 때문이다.

클로드는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발로 툭툭 찼다. 입이 삐죽 나온 게 정말 하기 싫어하는 듯 보였다.

"벨린다와 길리언이 기사들 중에 몇 명만 골라. 소수 인원만 움직인다."

그 말에는 반대하는 자들이 조금 있었다. 바네사가 가장 먼저 외쳤다.

"영주님! 저도 함께 갈게요!"

"아니야, 분명 공작가의 군대가 북부군을 칠 거야. 그놈들이 지금 대놓고 나를 떨어뜨려 놓으려고 하는 이유가 뭐겠어. 그러니 마법사가 있어야 해."

"에레네스 님이 있잖아요!"

"바네사도 함께 있어야 해. 그래야 피해 없이 공작가를 막을 수 있다."

그 말에 바네사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북부군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가서 도와주도록 하지! 바로 나! 신을 이긴 남자가 말이야! 요!"

알포이가 외쳤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는 그냥 전쟁터에 있기 싫어서 따라가고 싶었을 뿐이니까.

바로 채비를 마친 지셀이 에레네스에게 말했다.

"내가 없는 동안 북부군을 부탁하지. 적들은 당신하고 테넌트의 존재를 모르니 크게 당황할 거야. 이딴 수작도 앞으로는 못 쓸 테고."

전쟁이 본격적으로 일어나면 초인 하나하나가 아쉬워질 터다. 암살 따위로는 대세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게 뻔한데 큰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초인을 뒤로 돌릴 리가 없다.

그리고 지셀은 적들이 그런 생각조차 못 하게 폭풍처럼 몰아칠 생각이었다.

에레네스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얼굴에는 약간 걱정하는 기색이 남아 있었다.

"괜찮겠나?"

"뭐가?"

"그... 클로드란 자에게 지휘를 맡기는 거 말이다. 일은 잘하는 거 같지만 사람이 너무 가벼워서 그런지 영 미덥지 않다. 중요한 전투인 것 아닌가."

지셀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가볍고 무겁고는 사람의 성향일 뿐, 능력과는 다른 얘기지. 걱정하지 말고 싸울 때 저놈이 하자는 대로만 해 줘. 그러면 될 거야."

"...알겠다. 그런데... 암살자들은 어떻게 찾을 셈이지?"

"글쎄. 일단 페르디움 성에서 놈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생각해 봐야지."

에레네스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는 혀를 찼다.

"암살자들을 찾는 걸 조금 도와주지. '가족' 같은 사이니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다."

"음? 어떻게?"

"나는 정령들을 이용해 세상 곳곳을 살펴볼 수 있다. 몇 가지 제약이 있지만 잠깐이라면 페르디움을 훑어볼 수 있을 것이다. 암살자들의 위치를 먼저 포착하면 페르디움군이 쉽게 대비할 수 있을 게 아닌가."

"대단하군. 그럼 부탁하지."

지셀은 에레네스의 능력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뻔뻔하게 모르는 척했다. 전생에도 그녀의 능력으로 중요 지역을 확인해 가며 전쟁을 치렀었다.

물론 그녀의 말대로 제약이 있다. 마법적 방해가 있거나 정령의 기운이 약한 곳은 볼 수 없다.

그리고 상당한 집중력과 힘을 소모하기 때문에 그리 오래 지켜볼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직접 돌아다니며 구원교의 흔적을 찾고, 그걸 토대로 예측하며 주변을 확인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잠깐이라도 어딘가를 살펴볼 수 있는 건 싸우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된다.

"다크의 분신을 놓고 가도록 하지. 나와 의식이 연결되어 있으니 그쪽에 말하면 바로 전달될 거야. 페르디움에도 분신을 보내 둘 테니까."

"...그래."

에레네스는 여전히 다크의 존재에 관해 조금 의심하는 거 같았다. 그녀가 알고 있던 능력과 흡사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본인이 말하지 않고 숨기는 이상 계속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가자. 이런 수작은 이제 두 번 다시 못 하게 해 주자고."

지셀은 몇 명의 측근과 기사들을 데리고 바로 페르디움으로 향했다.

출발 전에 다크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에레네스의 탐색 정보를 전해 듣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자신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경계 수준을 최고조로 올리라고 전달하기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셀이 출발하자마자 에레네스는 최대한 자연의 기운이 풍부한 공터에 자리를 잡았다.

"나를 보호해라."

그녀의 주변으로 따라온 엘프들이 날카로운 기세를 풍기며 경계를 섰다.

갑자기 또 지휘관이 된 클로드도 그녀 주변에 기사들과 병사들을 붙여 주었다.

'영주님이 없으니까 대족장님이 북부군 최고 실력자일 거 아냐? 살아남으려면 잘 모셔야겠어.'

클로드는 실실거리며 에레네스를 따라다녔다. 그 속내를 알지 못하는 에레네스는 무척이나 찝찝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말이다.

드드드득!

땅에서 덩굴들이 올라와 에레네스의 몸을 감쌌다. 그녀가 눈을 감은 채 북쪽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고오오오오오....

그녀의 주변으로 이상 현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대지 위에 아무렇게나 흩뿌려져 있던 잡초들이 흔들렸다.

어디선가 날아온 새들이 하늘 위에서 시끄럽게 울며 주변을 돌았다. 그녀의 머리 위로 구름이 몰리며 빛을 가리기 시작했다.

에레네스의 주변 공간이 왜곡되며 일렁였다. 마치 알 수 없는 기운들이 그녀의 주변으로 몰려오는 듯했다.

"이, 이게 뭐야?"

"이게 진짜 대족장님의 힘이라고?"

"성녀님이 기적 일으킬 때랑 비슷한 거 같잖아?"

경악할 만큼 강한 힘에, 주변에 있던 기사와 병사들은 모두 놀라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거대한 자연의 기운을 느낀 펜리스의 엘프들이 하나둘 홀린 듯이 그녀 주변으로 다가왔다.

특히 루미나의 충격이 가장 컸다. 그녀는 지셀 덕분에 가장 먼저 자연과의 소통에 성공했던 엘프다.

하지만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느꼈던 자연은 정말 아주 작은 편린에 불과했다는 걸.

"아아...."

세상 모든 것이 속삭이고 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잡초들이, 흙먼지만 일으키던 바람이, 그저 딛고만 있던 대지가, 심지어 주변을 돌아다니던 작은 벌레들까지.

모두가 에레네스에게 말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보고 느낀 것을 그녀와 함께 공유하고 있었다.

아주 먼 곳에서부터 서로서로 이어져 이곳까지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연과의 소통.

세계수의 은총을 받은 에레네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아무리 에레네스라 해도 기적에 가까운 이 힘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쿨럭!"

파아아아악!

에레네스가 피를 토함과 동시에 그녀 주위로 모여들었던 모든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족장님!"

"괜찮으십니까!"

"어서 대족장님을 모셔라!"

경계를 서던 엘프들이 기겁하며 달려오자 에레네스가 손을 저었다.

"괜찮다. 역시 세계수가 없는 곳에서 쓰기에는 쉽지 않구나."

세계수 근처에서는 반동을 세계수가 나눠 지지만 이곳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에레네스는 숨을 한 번 내쉰 뒤 말했다.

"조금 쉬었다가 다시 하도록 하겠다. 페르디움의 영주성은 아직 안전하다."

그 말에 다른 이들은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서 순간이나마 페르디움 성을 훔쳐보다니. 그건 8서클 마법사도 못 하는 일이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말이지만, 전설의 엘프 대족장이라 하니 또 안 믿을 수도 없었다.

클로드만 다른 생각을 했다.

'으음, 정말 대단한데? 전쟁 때도 쓸 만하겠지만... 영주가 뭐 하는지 감시하면 안 걸리고 몰래 장사할 수도 있겠어. 친하게 지내고 나중에 꼬셔야겠다.'

클로드의 야망을 모르는 에레네스는 조금 휴식을 취하고 다시 페르디움을 훑어보았다.

한 번에 되는 일은 아니었다. 암살자들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수 있으니 몇 번에 걸쳐 훑어봐야 했다.

"쿨럭!"

그때마다 에레네스는 피를 토했다. 그녀를 따라온 엘프들은 그걸 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이제 그만하시지요, 대족장님."

"세계수가 없는 이곳에서 계속하는 건 무리입니다."

"어찌 그곳을 다 둘러보려 하십니까."

그들의 만류에도 에레네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영주성 인근만 지켜봐도 된다. 어차피 그곳으로 올 게 아니냐. 그 정도는 아직 할 수 있다. 도와주기로 약속했으니 하는 것이다."

그 말에 엘프들은 더 말릴 수가 없었다. 엘프 대족장의 약속은 그만큼 무거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클로드는 다시 생각했다.

'참 신의 있는 엘프야. 세상 사람들이 다 저러면 좋을 텐데 그렇지 않아서 참 안타까워. 역시 약속은 대자연이 보증해 줘야 한다니까.'

참으로 뻔뻔한 생각이었다. 그 자신은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더 그랬다.

웬디는 클로드를 흘겨보았다. 이제는 표정만 봐도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며칠 동안 영주성 인근 주변을 계속 훑어보던 에레네스는 드디어 무언가를 발견했다.

"찾았다."

456화 적들을 찾았다. (2)

에레네스가 본 것은 영주성 인근에 있는 작은 숲이었다. 나무를 베고 새로 숲을 조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어린나무가 꽤 많았다.

그 숲에 검은 로브를 쓴 자들이 주변의 기운과 동화되어 숨어 있었다. 육안으로는 확인하기 어려울 터였다.

하지만 그 또한 자연의 일부인 이상, 에레네스의 눈을 피하지는 못했다.

암살자 중에는 얼굴에 붕대를 감은 자가 유독 눈에 띄었다. 그자의 모습을 확인한 에레네스가 숨을 들이켰다.

그자가 숨을 쉴 때마다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과의 동화로 에레네스는 그 기운마저 감지할 수 있었다.

'이건 구원교의 기운! 이놈이 멜키르란 놈인가?'

멜키르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암살자답게 무척이나 기감이 예민한 편이었다.

― 뭔가 기분 나쁜 기운이 느껴지는군.

― 단주님, 이제 어떻게 할까요?

― 몇 명이 죽었지?

― 세 명이 죽었습니다.

― 그래, 생각보다 너무 오래 걸렸어. 검문이 이 정도로 강도 높게 이뤄질 줄이야.

남부에서 북부까지 몰래 잠입하기는 힘들다. 험지로만 이동해 사람의 눈을 완전히 피하려 해도 쉽지 않았다.

전쟁 때문에 각지의 순찰이 더욱더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검은 달의 암살자들은 결국 몇 번이나 발각되어 싸움을 해야 했다.

단원 개개인의 수준이 높고 단주인 멜키르가 초인이기에 위기를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약간의 피해는 생길 수밖에 없었다.

멜키르가 갑자기 몸을 들썩이며 웃고는 말했다.

― 이 정도면 이미 펜리스 백작과 페르디움 후작에게 소식이 들어갔다고 봐야지. 그놈이 오기 전에 먼저 움직여야겠다.

― 기다리지 않고 말입니까? 우리의 목적은 펜리스 백작을 유인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 멍청하게 기다릴 필요 없다. 펜리스 백작이 움직였으면 이미 목적은 달성한 거니까. 안 움직였으면 가족들을 죽이고 본보기를 보여 줘야지. 안 그래?

― 그러면....

― 그래, 마지막 휴식 시간이다. 밤이 더 깊어지면 움직일 것이다.

― 알겠습니다.

멜키르로서는 이미 작전을 성공시킨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몇 번이나 검문에 걸려 실력이 드러났다. 이 소식을 들으면 펜리스 백작은 움직일 수밖에 없다.

이제 남은 건 그를 얼마나 깊은 절망에 빠트릴까 하는 것뿐이다.

― 그놈이 올 때까지는 즐길 시간이라는 거지. 정말 기대되는구나.

멜키르의 웃음과 함께 달이 어두운 구름에 가려지기 시작했다.

번쩍!

에레네스가 눈을 떴다. 그녀의 두 눈에 녹색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쿨럭!"

다시 피를 토한 에레네스가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주 작은 까마귀를 바라보았다.

다크는 며칠이나 기다리는 사이 마력이 거의 다 흩어져 작아질 대로 작아진 상태였다.

"적들을 찾았다."

"뭐, 뭐라고 전달할까요?"

다크는 아주 공손하게 물었다.

자칭 정령왕 다크는 무척이나 긴장하고 있었다.

에레네스가 자연과 소통하는 동안 '진짜' 정령들의 어마어마한 기운을 느꼈다. 정령왕은 자신이 아니라 눈앞의 엘프 쪽에 더 잘 어울리는 말 같았다.

그리고 그 기운은 자신의 본체에 충분히 타격을 줄 수 있을 거란 확신까지 들었다. 그래서 저절로 공손해진 것이다.

에레네스가 창백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펜리스 백작은 어디에 있지?"

"에.... 영지에 막 진입했습니다."

"암살자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은 영주성의 동남쪽에 있는 숲이다. 어린나무가 많이 있는 곳. 놈들은 밤이 더 깊어지면 움직일 생각이다. 어서 가라고 전해라."

"네, 네! 바로 전달했습니다!"

다크는 바로 페르디움에 먼저 가 있는 분신을 통해 그 소식을 알렸다. 즈발터는 소식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병력을 모아라! 내 이놈들을 직접 잡아 죽일 것이다."

옆에서 호메른과 알버트, 란돌프가 말렸다.

"아이고! 왜 영주님이 먼저 나서세요! 요새 좀 강해지셨다고 몸이 근질거립니까! 어떻게 갈수록 아들을 닮아 가세요! 아들이 아버지를 닮아야지!"

"아무리 전보다 강해졌다 해도 암살자 중에 초인이 섞여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형님, 그냥 제가 갔다 올게요! 좀 가만히 계세요!"

영주가 죽으면 끝이다. 초인까지 있을지도 모른다는데 가라고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모두의 극렬한 반대 때문에 즈발터는 입맛만 다시며 자리에 앉았다.

'아, 나도 이제 최상급 초입에 올랐는데.'

초인에 오르진 못했지만 단숨에 죽을 수준도 아니다. 지셀 덕분에 란돌프도 비슷한 수준에 올랐으니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 같았는데 참 아쉬웠다.

"자자, 우리가 가자!"

란돌프가 기세 좋게 외치며 기사들과 병력을 잔뜩 이끌고 나섰다.

기사들은 나서면서 스코반을 노려봤다. 또 페르디움에 안 좋은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스코반은 정말 억울했다.

"왜 자꾸 영지에 이런 일이.... 아니, 이게 왜 내 잘못이냐고!"

가만히 있었는데 요새 기사단 내 괴롭힘에 시달리고 있다. 빨리 은퇴하고 싶었다. 최근에는 그냥 북부군으로 전출시킨다는 얘기도 있었다.

스코반은 결심했다. 마음 힘든 것보다 몸 힘든 게 낫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럴 바에는 차라리 대공자 옆에서 죽어라 구르는 게 나을 거 같았다.

'그래, 이번 일이 끝나면 북부군으로 가야겠다. 리카르도 그 새끼도 반드시 데리고 간다.'

소문의 원흉인 리카르도는 스코반의 속마음도 모른 채 옆에서 하품만 하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페르디움의 기사단과 병력이 출발했다. 란돌프가 옆에 있는 부관에게 물었다.

"정확한 위치가 어디라고?"

"몇 년 전에 대공자님이 목재가 필요하다고 털어 갔던 숲입니다."

"아, 거기 겨우 나무 옮기고 새로 심고 복구하고 있었는데."

초인이 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에 병사 2천, 기사가 100명이나 움직였다. 싸우다 보면 숲은 초토화될 것이다.

페르디움군은 순식간에 숲에 도착했다. 잠깐 고민한 란돌프가 부관에게 말했다.

"야, 졸라 센 놈 있다고 하니까 맞붙는 건 나중에 하자. 일단 그냥 태워라."

"태, 태워요?"

"그래, 그냥 다 태워 버려. 안에서 싸우면 우리가 불리해. 어차피 싸우다 보면 나무도 다 박살 날 텐데 뭐."

예전처럼 무지성 돌격을 자제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한 단계 성장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영지가 풍족해지니 숲 하나 정도 태우는 건 이제 일도 아니었다. 란돌프는 자신의 결정에 무척이나 흡족해했다.

"이게 그러니까 어? 부자 영지나 할 수 있는 일이지."

병사들이 모두 불화살을 당겼다. 예전 같으면 꿈도 못 꿀 일을 하는 셈이라 다들 낯빛이 상기되어 있었다.

"와, 내 손으로 우리 숲을 태우는 날이 올 줄이야."

"이런 건 대공자님이나 하던 짓이었는데."

"돈 많은 영지는 참 좋구나."

"쏴라!"

파아아악!

란돌프의 외침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불화살이 숲을 향해 날아갔다.

불길이 주변을 다 잡아먹으며 빠르게 번지기 시작했다. 에레네스와 엘프들이 보면 기겁할 만한 광경이었다.

"뭐 해! 계속 쏴! 그 새끼들 튀어나올 때까지 쏘라고!"

불화살은 끊임없이 날아갔다. 화살도 넘치는 게 페르디움이다.

숲의 입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암살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고도로 훈련을 받은 자들답게 당황하지도 않고 호들갑을 떨지도 않았다.

그저 멜키르만 바라보며 명령을 기다릴 뿐이었다.

"이놈들이 어떻게 안 거지?"

멜키르는 어찌 된 상황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들이 있는 곳을 정확하게 짚고 나타났다.

이 넓은 영지에서 어떻게 자신들을 바로 찾아낼 수 있다는 말인가!

"뛰어난 마법사가 있는 게 아닐까요?"

수하의 물음에 멜키르가 고개를 저었다.

"마법사의 눈은 우리의 은신을 잡아낼 수 없다. 그저 멀리 볼 수 있는 것뿐이니까."

이들은 이런 환경에서도 주변과 동화되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감시 마법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육안으로만 초인의 은신을 찾아낼 정도면 그건 보통 마법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이가 페르디움에 있을 리가 없다.

"아무래도 다른 방안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쩐지 숲이 조금 찝찝하더니만.... 할 수 없지."

"어떻게 할까요?"

"전부 흩어져서 어떻게든 영주성에 잠입해라. 페르디움 후작과 후작 영애를 죽일 수 있으면 죽여."

"알겠습니다."

공작가 최고의 암살 부대인 이들이다. 비록 수는 30여 명에 불과했지만 이들은 자신이 있었다.

"가라. 나는 조금 있다가 뒤따라가겠다."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암살자들의 몸이 흐릿해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들은 미끼였다. 성공하면 좋고, 실패해도 그만인 미끼들.

멜키르는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경계가 흐트러진 틈을 타서 진입할 생각이었다.

파아앗!

불타는 숲에서 흐릿한 인형이 여럿 튀어나왔다. 란돌프가 그걸 발견하고 외쳤다.

"나왔다! 막아라!"

페르디움군은 이미 숲 입구를 단단히 막고 있었다. 가장 먼저 기사들이 뛰쳐나갔다.

카앙!

공작가 최고의 암살단답게 그들은 개개인이 최소 중상급 기사 수준이었다. 거기에 암살 기술이 더해졌다.

휘리릭.

기사들과 암살자들의 무기가 부딪치기 직전, 암살자들의 몸이 다시 흐릿해지며 이동했다. 애초부터 이곳에서 싸울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잡아!"

기사들은 정면 승부에 강하다. 이렇게 대놓고 몸을 빼는 암살자들을 따라잡기는 힘들 수밖에 없었다.

암살자들은 모든 기술을 발휘하며 병사들의 틈으로 파고들었다.

스각! 스각!

"으아아악!"

"여기 있다!"

"빨리 공격해!"

유령처럼 사이사이를 파고들며 공격하는 암살자들을 일반 병사들이 막기는 힘들었다. 병사들이 할 수 있는 건 오직 몸으로 앞을 막는 게 전부였다.

병사들이 그렇게 암살자들을 붙잡고 있을 때 란돌프와 기사들이 참전했다.

"비켜라!"

콰아아아앙!

사방에서 푸른빛 마나가 일렁였다. 암살자들은 어떻게든 도망가려 했고 기사들은 어떻게든 그들을 잡으려고 했다.

푸욱!

"크윽!"

누명을 벗기 위해 누구보다 앞장서서 싸우던 스코반은 결국 옆구리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암살자들의 무기에 독이 발려 있었는지 순식간에 머리가 어지러워지며 상처 부위가 부어올랐다.

"아이 씨! 진짜 짜증 나!"

콰앙!

스코반이 온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세 명의 기사에게 잡혀 있던 암살자는 그대로 목이 날아가 버렸다.

그의 실력도 예전에 비해 몰라보게 늘어 있는 상태였다.

"쿨럭!"

스코반은 피를 토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주변에서 다른 병사들이 그를 부축하며 뒤로 끌어 줬다.

"뭐야.... 왜 구해 줘? 매일 나 죽으라고 기도하던 거 아니었어?"

스코반이 입술까지 씰룩이며 눈물을 지었다. 삐져도 단단히 삐진 게 눈에 보였다.

병사들이 어색한 미소로 답했다.

"아이참, 왜 그러세요. 당연히 구해 드려야죠."

"그럼요, 우리 다 같은 편인데요,"

"어떻게 경비대장님이 죽는 걸 보고만 있어요."

감격스러운 말에 스코반은 훌쩍거렸다. 그래도 아직 완전히 버림받지 않은 모양이었다. 북부군으로 가는 건 조금 보류하기로 했다.

감동한 스코반을 보며 병사들은 자기들끼리 눈짓했다.

'여기서 죽으면 이 땅이 영원히 저주받을 거라던데.'

'죽어도 다른 곳에서 죽어서 묻혀야 해.'

'다시는 페르디움이 어려워지면 안 되니까.'

스코반이 병사들 사이에 도는 소문까지는 모르는 것이 그에게는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콰앙! 콰앙! 콰앙!

전투는 갈수록 과열되어 갔다. 상대가 암살자들이다 보니 페르디움군으로서는 그들을 제대로 포착하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

반면 암살자들도 상대의 수가 워낙 많으니 쉽게 나아가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마지막 수를 쓰기로 했다.

츠츠츳....

암살자들의 모습이 드러난다. 마나를 이용해 주변과 동화되어 시각을 교란하는 기술을 해제한 것이다.

이제 그들은 마치 기사들처럼 대놓고 싸우기 시작했다.

콰앙! 콰아앙!

그들은 이런 경우를 대비한 훈련도 받았다. 일부가 희생하며 틈을 내어 일부를 보내 주는 방식이었다.

암살자치고는 수준이 높은 그들은 수많은 기사와 병사들에게 둘러싸여서도 훌륭하게 버텨냈다.

그 틈을 타 소수의 암살자들이 모습을 숨기며 자리를 벗어났다.

가장 앞장서서 싸우던 란돌프가 그걸 발견했다.

"젠장! 빨리 쫓아라! 성으로 간다!"

대략 열 명 정도가 혼란을 틈타 포위를 벗어났다. 성내엔 암살자들이 숨을 만한 곳이 많아 잡으려면 골치가 아파질 게 분명했다.

포위를 벗어난 암살자들은 다시 어둠 속에 몸을 감췄다. 부랴부랴 기사들이 말을 타고 쫓아갔지만 어두운 밤이라 육안으로 확인하기가 힘들었다.

남은 암살자들은 모두 죽었다. 기사들과 병사들은 다시 말에 올라타 탈출한 자들을 쫓기 바빴다.

"크크큭... 슬슬 움직여 볼까."

숲의 초입에 숨어 그걸 지켜보던 멜키르가 잔인한 웃음을 지었다.

미끼들이 훌륭하게 일을 해냈다. 숲 근처에 있던 병력은 모두 미끼들을 쫓아갔다.

그의 몸이 흐릿해지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 빠르게 영주성으로 이동해 주요 인물들을 암살하면 된다.

그가 숲을 벗어나려던 그 순간.

콰아아앙!

그가 있던 자리에 창 하나가 날아와 꽂혔다.

457화 이제 빛날 수 있어. (1)

순식간에 거리를 벌리며 피한 멜키르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두두두두두!

잠시 후 불타는 숲에서 일단의 무리가 튀어나왔다. 멜키르는 다가오는 자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펜리스 백작."

온몸이 찌릿찌릿해질 정도로 강한 기세를 풍기는 지셀을 보며 멜키르는 입술을 혀로 축였다.

"드디어 왔구나."

히이이잉!

흑왕의 고삐를 당겨 멈추게 한 지셀이 말했다.

"길리언, 기사들을 데리고 성으로 향해라. 잔당을 모두 찾아 죽이도록."

"알겠습니다."

길리언이 기사들과 함께 다시 말을 달렸다.

멜키르는 자신을 지나쳐 가는 그들을 보면서도 막지 않았다. 오히려 잘 가라고 살짝 길을 비켜 주며, 가야 할 방향을 안내하듯 손까지 뻗었다.

길리언은 불쾌해하며 미간을 좁혔지만 힐끗 눈길을 쏘아 보내고는 그대로 말을 달렸다.

길리언과 기사들이 사라지자 멜키르는 목을 좌우로 꺾으며 웃었다.

"수하들을 전부 보내다니 자신이 있는 건가? 아니, 하나 남긴 했군. 둘이서 날 상대하려고?"

지셀 옆에 남아 있던 벨린다는 계속 멜키르를 노려보고 있었다.

얼굴은 붕대로 감겨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다. 하지만 사람을 구별하는 특징은 얼굴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눈매, 입술, 분위기, 목소리. 기억을 더듬으며 눈앞에 선 자와 기억 속 인물의 특징을 비교하던 벨린다가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정말 네가 살아 있었구나. 배신자 멜키르."

멜키르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벨린다를 바라보았다.

"뭐? 배신자? 날 아나?"

벨린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아네트 님을 배신하고 습격한 네놈을 잊을 리가 없지."

그 이름을 들은 멜키르의 몸에서 거대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붕대 사이로 드러난 두 눈에 맺힌 살의가 훤히 보였다.

"그년을 알고 있군. 넌 뭐냐? 그 계집은 지금 어디에 있지?"

"돌아가셨다. 네놈과 싸운 날 입으신 부상 때문에."

잠시 멈칫한 멜키르가 갑자기 크게 웃었다.

"하, 하하하! 죽었어? 결국 죽었어? 크하하하! 그럼 내가 이긴 것 아닌가! 크하하하!"

멜키르는 너무나 기뻤다. 자신을 이렇게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꼴로 만든 자가, 결국 자신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이 말이다.

20여 년 동안 얹혀 있던 체증과 분노가 싹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광소를 터뜨리는 멜키르를 향해 벨린다가 비웃음을 지었다.

"이겨? 암살자 수백 명을 끌고 와서 기습했는데도 전멸한 주제에 그걸 정말 이겼다고 생각하는 거야? 너 아주 추하게 발버둥 쳤었잖아. 지금도 사실 두려운 존재가 사라져서 기쁜 거 아냐?"

그 말을 들은 멜키르의 두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년이... 넌 뭐냐? 도대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그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아는 사람은 공작가와 구원교의 인물 몇몇뿐이었다. 절대 외부인이 알 수 없는 정보였다.

벨린다를 노려보던 멜키르가 곧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너... 벨린다?"

"그래, 기억났다니 다행이네."

"흐하하하! 네년이! 네년이 살아 있었구나!"

차앙!

멜키르의 양손에 갑자기 두 개의 단검이 생겨났다.

"그래, 그래. 어린 년이 운 좋게도 살아남았구나. 아네트가 널 데리고 도망쳤나 보지?"

벨린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차가운 눈빛으로 마나를 끌어올릴 뿐이었다.

그녀의 로브가 펄럭이자 몸에 연결된 단검 수십 개가 뱀처럼 꿈틀거리며 떠올랐다.

그것을 본 멜키르가 다시 웃었다.

"역시 그년이 쓰던 기술하고 비슷하구나. 숨어 사는 동안 좀 배운 모양이야. 오늘 널 죽여서 내 수치스러운 과거를 전부 지워야겠다. 둘 다 덤벼라."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며 기세를 피워올렸다.

뻘쭘하게 대화를 듣고 있던 지셀이 물었다.

"벨린다, 정말 아는 사람이었어? 그리고 아네트란 사람은 누구고?"

벨린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결심했다는 듯 안타까운 눈빛으로 말했다.

"아네트 님은 제 스승님이자 제가 소속되었던 단체의 단장님이셨어요. 그리고...."

머뭇거리는 그녀에게 지셀이 재촉하듯 물었다.

"그리고?"

"도련님의 어머니셨죠."

"...."

멜키르의 고개가 휙 꺾이듯이 지셀 쪽으로 돌아갔다. 지셀 또한 자기도 모르던 비밀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나 잘못 들은 건가 싶어진 지셀이 떠듬거리며 다시 물었다.

"우리 엄마가... 암살자?"

"일반적인 암살자랑은 조금 달라요. 정의로운 암살자 비슷한 거예요."

정의로운 암살자라는 말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봤다. 지셀은 복잡한 머리를 애써 가라앉혔다.

솔직히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다. 지셀이 어렸을 때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가 아는 건, 어머니의 몸이 조금 병약했다는 것. 그래서 오래 살지 못하고 떠났다는 것뿐이었다.

그 때문에 아버지가 몇 년이나 슬퍼했던 기억은 남아 있었으니까.

"어, 그러니까... 우리 엄마 몸이 약했던 게... 혹시 저놈 때문이라는 건가?"

"네. 이 비열한 놈하고 싸우느라 마나 코어가 깨지는 큰 부상을 입으셨었어요."

"그런 부상을 입었는데도... 아버지와 결혼하고 나와 엘레나까지 낳고 몇 년을 더 사셨다고? 그게 말이 돼?"

마나 코어가 깨지면 정상적으로 살기가 힘들다. 몸의 균형이 망가지고 끊임없이 생명력이 새어나가기 때문에 일반인보다도 더 약해지게 된다. 그렇게 시름시름 앓다가 금방 세상을 떠나는 게 일반적인 결말이다.

타고나길 강건하게 태어났거나, 깨진 코어 대신 다른 방법을 써서 마나와 생명력을 저장하면 수명을 연장할 수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벨린다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단장님께서는 신력을 타고나신 분이셨거든요. 정말 강한 분이셨죠."

"와우...."

신력을 타고난 자는 체력과 힘이 일반인에 비해 몇 배나 강인하다. 실제로 전생의 대륙 7강 중에서 신력을 가진 자가 있었기에 지셀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신력을 타고났다면 마나 코어가 깨지고서도 몇 년이나 살았다는 것도 이해가 된다.

"그렇군. 나랑 엘레나는 워낙 건강한데 우리 엄마는 왜 병약했을까 궁금해했던 적이 있거든. 큰 부상 때문이었네."

어머니의 출신도, 어머니와 함께 페르디움에 왔다던 벨린다의 과거도 뭔가 수상쩍긴 했었다. 이제야 밝혀진 출생의 비밀(?)에 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실 그렇게 약하신 분이 아니었어요. 신력을 타고나신 분이 그런 큰 후유증을 겪을 정도로 크게 다치셨는데, 저놈이 살아 있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 가요. 어떻게 살아났는지 모르겠어요."

"듣고 보니 그렇군."

벨린다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놈이 저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무슨 수작을 부렸다는 뜻이다.

숨을 쉴 때마다 검은 기운이 새어 나오는 걸 보니 딱 봐도 구원교에서 수작을 부린 게 분명했다.

"저놈이 아네트의 자식이라고?"

멜키르가 정말 당황했는지 지셀과 벨린다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래, 북부를 제패하고 마스터에 오른 대단하신 분이지."

"하, 하하... 과연 왕국 최강이라 불렸던 그년의 자식답구나. 그래, 그래. 이제 보니 머리카락 색도, 생긴 것도 페르디움 후작이 아니라 그년과 비슷하군."

"아네트 님을 많이 닮았거든."

"설마 저놈이 그렇게 빨리 강해진 게 그년하고 똑같이 신력을 타고나서 그런 건가?"

멜키르는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신력을 가진 자가 마나를 익히면 본신의 힘이 몇 배나 더 증폭되기 때문이다.

벨린다가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도련님은 신력을 타고나지도 않았고 아네트 님의 마나 연공법과 기술도 배우지 않았어."

"뭐? 그러면 어떻게 저 나이에 마스터에 올랐다는 거냐."

"우리는 어떤 것도 가르치지 않았어. 아네트 님이 그러기를 원하셨으니까. 도련님은 페르디움의 마나 연공법과 검술만 익혔어."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년의 비기와 힘이 저놈한테 갔으니 저렇게 빨리 강해진 것이 아니냐!"

"아니, 도련님은 스스로 노력해서 그 자리에 오른 거야. 그리고... 그만 좀 그년, 그년 거려. 네 상관이었던 사람한테 예의는 지켜라. 이 싸가지 없는 새끼야."

콰아앙!

벨린다의 눈이 빛나며 순식간에 모습이 사라졌다.

멜키르의 뒤에서 나타난 그녀가 단검을 날카롭게 쏘아 냈지만, 이미 목표는 사라진 뒤였다.

몸을 돌리는 그녀의 앞에 멜키르의 붕대 감은 얼굴이 나타났다.

"견습 단원 주제에 감히 날 공격하다니... 많이 컸구나."

카앙!

멜키르의 단검이 벨린다의 복부를 노리고 들어왔다. 가까스로 쳐 낸 그녀가 뒤로 물러났다.

파아아아악!

수십 개의 단검이 꿈틀거리며 멜키르를 향해 날아갔다. 단번에 공간을 장악하는 공격이었지만 멜키르는 모두 피해 냈다.

스륵.

벨린다의 몸이 흐릿해지다 곧 사라졌다. 그녀를 따라가는 멜키르의 몸도 흐릿해졌다.

카앙! 카앙!

두 사람은 사방에서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며 전투를 이어 갔다. 누구도 좇기 힘들 만큼 빠른 움직임이었다.

지셀은 그걸 전부 눈으로 좇으며 고민하고 있었다.

'아직 벨린다가 이기긴 무리겠어.'

확실히 멜키르는 강했다. 대놓고 싸워서 약해 보일 뿐, 제대로 암습을 가한다면 어지간한 초인은 크게 한 방 먹을 것이다.

그리고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힘을 전부 개방하지 않고 있군.'

전력을 내지 않고도 벨린다를 상대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는 건지, 상대가 두 명이니 힘을 아끼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아직은 여력이 있어 보였다.

'흐음, 어찌해야 할까....'

평소 같았으면 당연히 벨린다와 합공해서 빠르게 잡아 죽였을 것이다. 갑자기 들어서 아직 얼떨떨하긴 하지만, 어머니에게 큰 부상을 입힌 범인이었다 하기도 했고.

하지만 이 싸움에 끼어들기는 조금 애매했다.

'벨린다가 저렇게 원한과 감정을 내보이는 일도 흔치 않으니....'

그녀는 지금 자신의 힘으로 멜키르를 쓰러뜨리고 싶어 한다. 스스로 과거의 악연을 끊으려 하는 것이다.

콰앙! 카아앙!

벨린다의 몸 곳곳에 상처가 나기 시작했다. 독이 묻어 있었는지 상처 곳곳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파앗!

맞붙어 싸우던 벨린다가 힘에 겨운지 거리를 벌리며 물러났다.

잠깐 숨을 고른 멜키르가 그녀를 보고 웃었다.

"이거, 이거.... '그림자 기사단' 역사상 최고의 기재라 불렸던 벨린다가 20년이나 지났는데 고작 이 정도야? 아네트 그년이 사람 보는 눈은 부족했네."

"닥쳐."

벨린다는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저놈의 숨통을 자신의 손으로 끊어 버리고 싶었는데 역시 초인의 벽을 넘기는 아직 힘들었다.

이죽거리던 멜키르가 지셀을 흘낏 바라보았다.

"요새 잘 나가니 내가 우습게 보이나? 네놈이 태어나기도 전에 난 마스터였다."

"그래서?"

"언제까지 구경만 할 거냐는 뜻이다. 이년이 죽고 나서야 움직일 건가? 아주 여유가 넘치시는데?"

"벨린다가 혼자 힘으로 널 죽이고 싶어 하는 거 같아서 말이지. 맞아?"

지셀의 물음에 벨린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도련님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놈은 반드시 제가 죽여야겠어요."

두 사람의 대화에 멜키르가 우습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흐흐흐, 그래서 구경만 하겠다? 이년이 죽어야 후회할 모양이네. 뭐, 그러면 계속 구경하도록 해."

휘리릭.

멜키르가 단검을 손가락 사이에서 돌리며 이죽거렸다.

그는 지셀이 끼어들지 않을 거라는 말은 믿지 않았다. 분명 벨린다의 목숨이 경각에 이르면 움직일 것이다. 그때 비기를 써서 역으로 공격할 생각이었다.

"마저 해볼까?"

씨익 웃은 그의 몸이 사라졌다. 그러고는 갑자기 벨린다의 뒤에서 튀어나왔다.

"칫!"

카앙!

벨린다가 몸을 틀며 가까스로 공격을 막았다. 두 사람의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카카카캉!

파악! 파악! 파악!

사방에서 두 사람이 만들어 낸 어둠이 피어올랐다.

암살자들의 싸움은 확실히 기사들의 싸움과는 달랐다.

두 사람은 과하게 힘을 끌어올리지 않았다. 날카로운 기운을 한 점에 집중해 상대의 급소만 노렸다. 그러니 강렬한 충격파가 퍼지지도 않았다.

카가가각!

멜키르의 오러 블레이드를 견디지 못한 벨린다의 단검이 하나둘씩 이가 나가고 줄이 끊겨 바닥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녀가 드래곤 하트를 흡수해 강대한 마나를 쌓았어도 멜키르와는 힘을 집중하는 수준이 확연히 달랐다.

그러니 마나를 과하게 몰아넣어도 단검의 이가 나가 버리거나 줄이 끊긴 것이었다.

멜키르는 쉬지 않고 이죽거렸다.

"아직도 벽을 못 넘어섰잖아? 그년의 비기도 제대로 못 쓰고 말이야. 도대체 그 긴 시간 동안 뭘 한 거야? 놀았어?"

"...."

벨린다는 그저 입술만 깨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겨를이 없다는 게 맞을 것이다.

이기기가 힘들다. 이 배신자를 자신의 손으로 단죄하고 싶지만 그럴 가능성이 너무나도 낮은 게 분했다.

드래곤 하트를 흡수하고 이미 마나의 양은 초인의 수준에 다다랐지만, 단 하나의 벽을 넘지 못해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벨린다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게 내 인생의 전부였으니까.'

그런 그녀를, 지셀은 조금 안타까워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458화 이제 빛날 수 있어. (2)

'벨린다....'

지셀은 모두에게 새로운 마나 연공법과 기술 등을 가르쳐 줬지만 벨린다에게는 오직 수련을 위한 공간만을 만들어 주었다.

그녀가 쓰는 마나 연공법과 기술은 흠잡을 데가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그녀에게 부족한 건 단 하나뿐이었다.

'평생 나와 엘레나의 뒷바라지만 하고 살았지. 수련조차 제대로 못 하고 말이야.'

예전에는 육아 때문에 수련할 시간이 제대로 없었다. 지금은 펜리스에서 집사장으로서 남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아무리 좋은 마나 집속진을 만들어 줘도 가끔 짬을 내서 수련하는 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평생을 전장에서 지냈던 길리언과 실력이 비등하지.'

그것만으로도 벨린다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지, 그녀가 쓰는 기술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젊은 시절부터 그녀는 그 빛나는 재능을 갈고닦기를 포기했다. 지셀과 엘레나를 돌봐주기 위해서 말이다.

'하아....'

그래서 지셀은 언제나 벨린다를 보면 미안함에 가슴이 미어졌다. 어린 두 남매를 양육하기 위해 인생을 바친 그녀의 희생 때문에.

분명 자신과 엘레나는 그녀에게 자식과도 같은 존재였으리라. 그것이 비록 돌아가신 어머니와 한 약속으로 시작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러니까 이제 좀 마음 편하게 살라고.'

그녀의 그런 희생에 보답하고 싶은 게 지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어쩌면... 내가 도와줄 수 있을지도....'

전투를 보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지셀이 마나의 실을 곳곳에 퍼뜨리기 시작했다.

전투에 직접적으로 끼어들려는 건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조금 도와 보려고 하는 것이었다.

카앙! 카앙! 카앙!

날카로운 기운이 사방으로 튀겼다.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빛들이 마치 별 무리 같았다.

하지만 그 빛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벨린다의 몸은 온통 상처투성이였고, 단검은 전부 바닥에 떨어져 손에 쥔 하나만이 남았다.

"허억, 허억...."

피투성이가 된 벨린다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에 비해 멜키르는 조금 숨이 차 보였을 뿐, 큰 부상은 없었다.

멜키르가 다시 힐끗 지셀을 바라보았다.

'정말 끼어들지 않을 생각인가?'

조금 더 두고 보면 알 일이다. 멜키르는 슬슬 벨린다의 숨통을 끊기로 결심했다.

'그래, 계속 그렇게 시건방지게 굴어 봐라.'

스각.

마나를 더 끌어올린 멜키르의 단검이 섬광처럼 뻗어 나갔다. 벨린다는 땅을 박차며 뒤로 피하려 했다.

동시에 그녀의 귓가에 지셀의 목소리가 울렸다.

― 조금 더 가볍게.

파악!

순간 벨린다의 몸이 그녀가 의도했던 것보다 더 많이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지셀의 힘이 개입했다는 걸 느꼈다.

'도련....'

― 너무 움직임이 무거워. 벨린다.

'무슨....'

벨린다는 생각을 이어 가지 못했다. 공격에 실패한 멜키르가 다시 단검을 날렸기 때문이다.

"읏!"

벨린다의 허리가 숙여지며 다시 한번 공격을 피했다. 이번에도 무형의 힘이 개입했다.

그녀는 지셀의 말을 듣고 어떻게든 조금 더 속도를 올려 보려고 했다.

하지만 지셀의 목소리가 그것을 제지했다.

― 무작정 빠른 게 아니라. 더 가볍게 움직여야 해. 아마 그게 맞을 거야.

누구도 벨린다가 쓰는 기술을 전부 본 적이 없다. 그녀가 이렇게 대놓고 모든 기술을 사용하며 싸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지셀이라도, 벨린다가 쓰는 수준 높은 기술을 지금 한 번 봐서 완벽하게 파악해 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계속 보니 그 기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은 알 거 같았다.

― 벨린다는 분명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을 거야. 기억해 봐. 마나는 전혀 부족하지 않아. 드래곤 하트의 일부를 흡수했잖아?

츠앗!

벨린다의 볼이 다시 한번 베이며 피가 튀었다. 하지만 그녀는 멜키르의 단검을 피하면서도 지셀의 말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지셀의 개입 덕분에 몸을 움직이기가 조금은 수월해졌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더 빠른 게 아니고 더 가볍게...? 기억?'

― 벨린다가 정말 그 단체의 유일한 후계자라면... 그 기술의 궁극적인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을 거야. 안 그래?

그녀는 지셀의 말뜻을 알아채고 기억을 더듬었다.

지금은 그저 글과 그림으로 적혀 있던 마나 연공법과 기술을, 그리고 말로만 전해졌던 가르침을 곱씹을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가장 선명하게 남은 장면을 떠올렸다.

'아네트 님....'

아름다운 금발의 여인이 춤을 춘다. 그녀의 주변에는 밝게 빛나는 별들이 맴돌고 있었다.

어둠을 수놓은 별들은 금발 여인의 손길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며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아직 어린 소녀였던 벨린다는 별들의 궤적을 황홀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자신도 저 경지에 이르고 싶었다. 그것이 그녀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닿을 수 없었다.

스각!

벨린다의 팔이 다시 베이며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래도 그녀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는 볼 수 없는 그 춤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말이다.

아아, 생각났다. 바쁜 삶에 치이고 살며 까맣게 잊고 있던 무언가가.

기억 속의 아네트가 웃으며 말했다.

― 봤지? 언젠가는 너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이 느낌을 잊으면 안 돼.

드래곤 하트를 흡수한 뒤 벨린다는 아네트의 비기를 익히기 위해 시간이 날 때마다 수련했다.

하지만 업무 사이사이 비는 시간을 전부 투자해도 도무지 구현할 수가 없었다. 마나가 부족한 것도 아니었고 마나 로드의 흐름도 문제가 없었음에도 말이다.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반쯤은 포기했다. 조금은 더 시간과 경험이 필요할 거라 생각했다.

다시 지셀의 목소리가 울렸다.

― 아까하고는 움직이는 느낌이 좀 달라졌네. 내가 도와줄게.

파악!

벨린다의 발이 다시 땅을 박차고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연신 멜키르의 단검에 상처를 입으면서 피하기에만 바빴다.

하지만 지셀의 개입 덕분에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멀리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진 거 같았다.

'내가... 이렇게 움직일 수 있었던가?'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어떤 느낌인지 알 거 같았다. 단순히 속도에 치중한 움직임이 아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이걸 하지 못했을까? 무엇이 자신을 가로막고 있었을까?

다시 지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 벨린다의 마음은 너무 무거워.

'무겁다고요?'

― 우리 아버지처럼, 항상 나와 엘레나 걱정을 달고 살잖아.

'...하지만 도련님, 제 임무는....'

― 저 하늘의 별처럼 홀로 고고한 존재가 되어야 해.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저는....'

― 어떠한 걱정도, 어떠한 부담도, 어떠한 책임감도 지지 마.

'도련님....'

― 벨린다한테는 항상 미안하고, 고마워. 나와 엘레나를 평생 돌봐줬잖아. 벨린다의 인생까지 포기하면서 말이야.

'아니에요. 그건 제가 원하던 거였어요. 절대 후회하지 않아요.'

― 어떤 마음인지 알아. 하지만 잠깐은 그 마음을 내려놓도록 해. 그게 벨린다의 성장을 막고 있으니까.

탁.

벨린다가 땅을 박차며 공격을 피했다. 조금 전과는 달리 발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발자국도 남지 않았다.

마치 두둥실 떠다니듯, 그녀의 움직임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 느낌은....'

지셀의 마나 덕분에 그녀는 아주 적은 힘으로도 이동할 수 있었다. 잔뜩 긴장했던 몸에서 점점 힘이 빠진다.

누군가가 대신 몸을 띄워 주는 느낌. 잠깐이나마 중력을 거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떠한 저항도 그녀를 붙잡아 둘 수 없었다.

'이건....'

바로 이 느낌이었다. 그녀가 본 아네트의 춤은 어떠한 구속도 없이 자유롭게 별들 사이를 떠다니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있던 단체는 아주 오래전부터 루타니아 왕국을 어둠 속에서 수호하던 단체였다.

그러나 그 단체의 비기는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는 구속에서 벗어나야, 모순을 이겨내야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아아... 이것이었구나....'

그 느낌을 알게 되자 그렇게 바라고 바랐던 경지가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이제는 자신의 움직임을 도와주던 지셀의 마나마저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순간 지셀의 마나가 사라졌다. 벨린다의 몸이 더 가볍고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았다. 조금 더 나아가서 완전히 그 경지에 진입해야 한다.

아직도, 아직도 자신의 마음속에는 무언가가 남아 그 길을 막고 있었다.

그때, 지셀의 담담한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울렸다.

― 벨린다.

그녀는 누구보다 빛날 수 있음에도 자신을 숨기고 살았다. 자신이 가진 모든 걸 억누르고 오직 지셀과 엘레나를 위해서만 살았다.

그렇게 언제나 두 사람의 뒤에서 무한한 애정과 헌신을 쏟아 주었다.

그 마음에 지셀은 고마움과 미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 이제 마음 편히 가져. 너무 걱정하지 마.

쉽지 않다. 모든 걸 잃은 그녀에게 지셀과 엘레나는 인생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어찌 그들을 마음 편히 지켜보기만 하겠는가.

그녀의 그런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지셀이 웃으며 말했다.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 넘치고 힘찬 목소리로.

― 나 이제 다 컸잖아? 그러니까 정말 괜찮아.

벨린다가 미소 지었다.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대견스러움이 섞인 기쁨의 눈물이었다.

스각!

멜키르의 단검이 다시 어둠을 갈랐다.

벨린다는 고개와 허리를 젖히며 그것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냈다. 동시에 그녀의 손이 살짝 움직였다.

드드드....

날이 나가고 줄이 끊겨 땅에 떨어졌던 단검들이 떨리기 시작했다.

멜키르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주변 마나의 흐름이 심상치가 않았다.

"이년! 갑자기 무슨 짓을 한 거냐!"

스각!

다시 단검을 피한 벨린다가 다른 손을 움직였다. 그녀의 움직임은 점점 춤을 추는 것처럼 변해 갔다.

드드드....

조금씩 떨리던 단검들이 서서히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벨린다의 움직임을 본 멜키르의 눈이 커졌다.

"너, 너 설마...."

멜키르가 마나를 더 끌어올리며 단검을 엄청난 속도로 휘둘렀다. 무리하기 시작했는지 입에서는 검은 연기가 세차게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는 벨린다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다.

마치 유령을 상대하는 듯했다. 공격할 때마다 벨린다는 그 힘에 밀려나는 깃털처럼 사뿐하게 피했다.

'이, 이 움직임은!'

멜키르는 벨린다가 벽을 넘어섰다는 걸 깨달았다. 저 움직임은 그 옛날 자신을 한 번 죽였던 아네트의 움직임과 똑 닮아 있었다.

순간 벨린다의 입술이 달싹이며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별빛을 흔드는 울림."

쐐애애애액!

벨린다를 압박하던 멜키르가 뒤를 돌며 단검을 휘둘렀다.

채애앵!

이가 다 나간 단검 하나가 강렬한 푸른 빛에 휩싸여 날아왔다. 멜키르가 쳐 냈는데도 단검은 땅에 떨어지지 않고 계속 그를 밀어붙였다.

"이, 이 미친...."

멜키르는 어이가 없었다. 허공에 떠 있는 단검 하나와 힘 싸움을 하게 된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놀라운 점은.

"오러... 블레이드...."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공격한 단검은 짧은 오러 블레이드로 감싸여 있었다.

지금 벨린다는 무기를 손에 쥐지도 않고 오러 블레이드를 뿜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게 끝이 아니었다.

쉬이이익!

사방에서 오러 블레이드에 휩싸인 단검들이 쏘아져 왔다. 그 수가 하나둘씩 늘더니 종국에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수십 개의 단검들이 모두 멜키르를 향해 쇄도했다.

카카카카캉!

멜키르가 다급하게 움직이며 단검을 쳐 내고 피했다. 하지만 그 수가 너무나도 많았다.

하나하나의 위력은 마스터급이라 하기엔 미약했으나, 전부 오러 블레이드를 뿜어내고 있다. 최상급 기사 수십 명이 덤벼드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멜키르가 순간 겁에 질린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이, 이년이... 정말 이 기술을...."

빛의 궤적이 무수히 사방을 가른다. 멜키르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공간에 갇히고 말았다.

이것이야말로 순간을 빚어 내는 선율이자 무한한 공간의 환희.

한때 왕국 최강이라 불렸던, 그림자 기사단장 아네트의 비기가 이곳에서 완벽하게 구현되고 있었다.

카가가가가각!

단검들이 엄청난 속도로 공간을 장악하며 움직였다. 멜키르의 주변에는 단검들이 만든 빛의 궤적만이 가득했다.

"끄아아아악!"

쇄도하는 단검들을 모조리 막지는 못한 멜키르는 몸 곳곳이 베이며 갈라졌다.

벨린다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녀는 불같은 눈길로 멜키르를 노려보았다.

차앙!

허리춤에 숨겨져 있던 두 개의 단검이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벨린다의 눈앞에, 춤을 끝내고 웃음을 짓던 아네트의 얼굴이 그려졌다.

― 저 하늘의 별처럼, 이제 빛날 수 있어.

459화 이제 빛날 수 있어. (3)

벨린다는 드디어 자신만의 세계를 완전하게 정립했다.

그 세계의 기반은 지셀과 엘레나를 향한,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과 헌신이다.

그녀가 정립한 세계가 이곳에 구현되고 있었다.

새로운 초인의 탄생이었다.

파파파파파파팍!

빛의 궤적은 수도 없이 멜키르를 가르며 지나갔다.

"크아아아악!"

공간 안에 갇힌 멜키르는 비명을 지르며 난도질당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지셀도 순간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저 안에 갇히면 그 누구도 공격을 쉽게 피하거나 막을 수 없을 것이리라.

파악!

빛에 휩싸인 단검들이 다시 사방으로 흩어졌다. 멜키르의 붕대는 이미 다 피에 젖고 찢어져 그 안을 내보이고 있었다.

"크르륵...."

붕대가 모두 벗겨진 멜키르의 모습은 무척이나 흉악했다. 얼굴부터 몸까지 상흔으로 가득해 성한 곳이 없었다.

이미 상처와 고름으로 빽빽하게 덮여 있던 몸은 단검에 베이며 생긴 상처로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 멜키르가 허망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아네트.... 아네트.... 네가 다시...."

그의 몸에 난 상처들은 대부분 아주 오래전 아네트에게 당한 것들이었다. 그 상처들은 지금도 흉하게 짓무르고 터져 고름을 쏟아 내고 있었다.

이미 마나 코어가 깨지고 생명력을 잃은 탓에 상처를 제대로 회복시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런 몸으로 어떻게 움직이고 싸울 수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사아아악!

비틀거리는 멜키르의 앞에 진한 어둠이 몰려들었다. 바로 앞에서 일그러지는 어둠을 보면서도 멜키르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파악!

어둠이 찢어지며 그 안에서 벨린다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두 개의 단검을 멜키르의 몸에 박아 넣었다.

하나는 심장에, 그리고 하나는 목에.

푸욱! 푸욱!

"끄르륵...."

이미 크게 상처를 입고 비틀거리던 멜키르는 그것을 막지 못했다. 몸의 힘줄은 죄다 끊긴 지 오래였다. 강대한 기운으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벨린다가 한 줄기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녀의 눈은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난 네가 정말 죽은 줄 알았어."

멜키르는 얼마 남지 않은 기운을 끌어모아 힘겹게 입을 열었다.

"크륵... 큭.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지. 지금 내 꼴을 봐라."

"난 그것도 모르고 도련님과 아가씨만 잘 키우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살아 있는 줄 알았으면 그러지 않았을 거야."

멜키르는 벨린다가 속한 단체를 무너트리고 스승마저 죽인 원흉이었다. 만약 그가 살아 있는 걸 알았다면 그녀는 복수로 점철된 괴로운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어쩌면 몰랐던 게 벨린다에게는 다행일 수도 있었다.

멜키르는 몸을 들썩거리며 웃었다.

"크흐흐흑... 저놈이 그년의 아들이었을 줄이야. 그걸 20년이나 넘도록 모르고 있었다니... 크크큭.... 이미 그날부터 모든 일이 꼬여서... 공작가가 궁지에 몰린 것이겠지....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 있다니...."

"우연이 아니야. 필연이지."

그래, 이것은 필연이다. 아주 오래전의 악연이 이렇게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멜키르는 공작가와 구원교 덕분에 숨을 붙인 게 분명했다. 그에게 당했던 아네트의 자식은 어느새 장성하여 공작가와 구원교를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 되었다.

그들과 지셀의 악연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오래전부터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벨린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되살아나지 못할 거야. 확실하게 목을 베어 줄 테니까. 이번에는 널 도와줄 자들도 없어."

"크크큭.... 그년에 이어 너한테도 당하다니.... 그 비기를 내가 익혔어야 했는데...."

"너같이 비열한 놈이 익힐 수 있는 게 아니야."

파악!

벨린다는 그 말을 끝으로 두 개의 단검을 휘둘렀다.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두 개의 검날이 교차하며 멜키르의 목을 베었다. 아니, 베려고 했다.

카아아앙!

단검은 멜키르의 상처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기운에 막히고 말았다.

"응?"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벨린다가 순식간에 뒤로 물러났다.

파아아아아아아!

멜키르의 상처 곳곳에서 검은 기운이 미친 듯이 새어 나왔다. 그 기운은 금세 그의 몸을 단단하게 감쌌다.

드드득.

멜키르의 근육이 부풀며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이를 드러내고 웃던 그가 말했다.

"내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하는구나. 그래도 이곳에 펜리스 백작이 있어서 다행이야."

벨린다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저 현상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구원교의 '성전사'라 불리는 존재다.

멜키르의 두 눈이 환희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환상을 보는 듯 허공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 힘 덕분에 겨우 목숨을 붙일 수 있었지. 하지만 정말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이제 안식을 취할 수 있겠구나."

그의 시선이 다시 벨린다를 향했다.

"아네트의 후인이었던 네년과 펜리스 백작. 너희 둘을 죽이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결국 내 승리일 테니까."

콰아아아아앙!

멜키르의 몸에서 거대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눈은 이제 완전히 뒤로 넘어가 흰자위만 남았다.

몇 번 몸을 꿈틀거린 멜키르의 입에서 침이 새어 나왔다.

"그어어.... 아네트... 반드시 널 죽여...."

"목표는.... 펜리스 백작.... 페르디움 후작.... 엘레나...."

"아네트.... 벨린다...."

초인에 이른 그도 정신이 망가져 버리는 걸 피하지 못했다. 성전사의 힘은 그만큼 강하고, 대가도 컸다.

"칫."

벨린다가 뒤로 물러나며 단검들을 다시 허공에 띄웠다. 상처도 심하고 마나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지만 더 강해진 멜키르와 싸우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지켜만 보던 지셀이 드디어 앞으로 나섰다.

"그만, 벨린다."

"도련님."

"이제 내가 처리하지."

"하지만 저놈은!"

"저건 더 이상 벨린다가 알던 놈이 아니야. 그놈은 끝났어. 이제는 그냥 다른 존재지."

"...."

"차라리 성으로 가서 길리언을 도와주는 게 어때? 다크로 확인한 바로는 별문제는 없을 거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괜찮겠어요?"

지셀이 피식 웃었다.

"걱정 좀 그만하라니까."

그 말에 벨린다도 미소 지었다.

지셀이 아무리 강해지고 아무리 큰 권력을 얻는다 해도 그녀에게는 언제나 어린아이였다.

아마 지셀이 늙어 죽을 때까지 그럴 것이다. 원래 그런 것이니까.

벨린다는 뒤로 물러났다. 지금은 지셀을 믿어야 한다. 엘레나도 그녀에게는 정말 소중한 존재다. 지켜 줘야 했다.

"먼저 갈게요. 빨리 처리하고 오셔야 해요."

"그래, 마음 놓고 가도록 해. 나머지는 끝나고 나서 얘기하자고. 궁금한 게 꽤 많거든."

"크아아아아!"

변이가 완전히 끝난 멜키르가 벨린다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 지셀이 끼어들었다.

콰아아앙!

지셀이 사나운 웃음을 지었다.

"이제 나랑 어울려 보자."

파악!

지셀의 눈이 붉어지며 검은 기운이 그의 몸을 감쌌다. 멜키르가 뿜어내는 기운보다 더 강하고 짙은 기운이었다.

드드드드득!

멜키르의 거대한 손이 지셀의 검을 잡고 부러뜨리려고 했다. 하지만 지셀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지셀은 바로 검을 놓고 주먹으로 멜키르의 얼굴을 후려쳤다.

콰아아아앙!

멜키르의 고개가 단숨에 돌아갔다. 지셀이 손을 한번 털고 웃었다.

"내가 무기 종류를 가리지 않고 뭐든 잘 쓰는 편이긴 한데. 사실 내가 가장 먼저 익힌 건 무기술이 아니야."

크아아아악!

멜키르가 괴성을 지르며 고개를 제자리로 돌렸다. 그 사이 지셀이 다시 주먹을 뒤로 당겼다.

"내가 가장 먼저 익힌 게 체술이야. 어렸을 때부터 주먹질하는 게 제일 좋았거든."

그의 주먹이 빛처럼 쏘아져 나갔다.

콰아아앙!

"크륵?"

멜키르의 고개가 다시 뒤로 넘어갔다. 괴물이 된 그는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째서 자신이 맞고 있는지를 말이다.

벨린다는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이번에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 같았다.

'하여튼 성질은 어릴 적 그대로라니까. 그래도....'

지셀은 어릴 때부터 제 맘대로 안 되면 주먹질부터 하던 망나니였다. 주변에서 다들 곤란해하고 미워했다.

그럼에도 벨린다는 포기하지 않고 언제나 사랑으로 그를 감싸 주었다. 언젠가는 변할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지금.

지셀은 정말로 변했다. 그의 주먹은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는 횡포가 아니라 많은 사람을 지키는 희망이 되었다.

'아네트 님, 보고 계시죠?'

벨린다는 영주성으로 향하며 미소 지었다. 애써 지우고 있었던 추억을 떠올려서일까. 아니면 지셀에게 숨겨 왔던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하게 되어서일까.

오늘따라 자꾸 눈물이 날 거 같았다.

'정말, 나도 나이가 들었나. 주책이라니까.'

그래도 이번 일이 끝난다면, 옛 추억에 취해 마음껏 울 수 있을 거 같았다.

멜키르는 정신이 나간 와중에도 떠나는 벨린다를 쫓아가려 했다. 무의식만 남은 상태로도 더 죽이고 싶은 목표를 찾는 것이다.

하지만 그걸 그냥 두고 볼 지셀이 아니었다.

"어디 가?"

콰아아앙!

원래보다 두 배 가까이 커진 멜키르의 복부에 지셀의 주먹이 꽂혔다.

콰콰콰쾅!

멜키르의 몸이 바닥을 구르며 저 멀리까지 튕겨 나갔다.

"크아아아악!"

벌떡 일어난 멜키르가 지셀을 보며 괴성을 질렀다. 방해하는 놈부터 치워야 움직일 수 있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지셀이 손을 털며 고개를 저었다.

"후, 되게 터프한데?"

그가 봤을 때 멜키르는 초인의 힘을 완전히 발휘할 수 없는 상태였다. 마나 코어가 깨지고 구원교가 집어넣은 기운이 생명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벨린다와 싸울 때도 온전하게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멜키르는 자신과 벨린다를 보고 여유를 부렸다. 믿는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걸 믿고 자신만만해한 건가?"

성전사가 되면 본신의 힘이 몇 배나 강해진다. 제대로 힘을 쓸 수 없는 멜키르도 중요한 순간에는 기운을 폭발시킬 수 있는 것이다.

지셀은 그제야 왜 공작가가 이 작전을 과감하게 실행했는지 알 수 있었다.

"어차피 한 번밖에 못 쓰는 초인이니, 버리는 패로 써도 아깝지 않았겠지."

멜키르 또한 마지막 목숨을 불태우기에는 이곳이 가장 좋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저놈들 뜻대로 되진 않겠지만.

"크아아아아!"

멜키르는 목표를 다시 정했다. 눈앞에 있는 마음에 안 드는 놈부터 치워 버리기로.

콰앙!

멜키르가 땅을 박차자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지셀의 앞에 나타났다. 마치 공간이동을 한 것처럼 빠른 속도였다.

콰아아앙!

멜키르의 주먹이 지셀의 몸에 내리꽂혔다. 지셀은 급히 팔을 교차해 막았지만 몸이 뒤로 밀려나 버렸다.

카아아아아!

멜키르가 가슴을 펴고 괴성을 질렀다. 승리의 포효를 내뿜는 짐승과도 같았다.

지셀도 웃음을 지었다. 팔이 떨어질 것 같이 저릿했지만, 지금 상황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오랜만에 아주 시원하게 힘을 쓸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동안 이렇게 힘쓸 일이 없었지."

무기 없이 주먹질만 하는 상대는 찾기 힘들다. 그것도 초인의 경지에 오른 자라면 말이다.

멜키르는 아주 훌륭한 상대였다. 정신이 나가 기술은 떨어지겠지만 힘과 맷집은 일반적인 초인보다 훨씬 더 강할 터.

그 정도 상대라면 온 힘을 다해 치고받을 수 있다. 꽤나 만족스러운 싸움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크아아아아!"

멜키르는 자신의 주먹에도 멀쩡한 지셀을 보고 심기가 매우 불편해졌다.

다시 공격하려는 찰나, 지셀이 한발 빠르게 움직였다.

엄청난 속도로 다가간 지셀이 멜키르의 얼굴에 똑같이 주먹을 내리꽂았다.

콰아아아앙!

"크아아악!"

무언가가 폭발하는 듯한 굉음과 함께 멜키르는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지셀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엄청난 힘을 집중해서 쳤지만 상대는 박살 나지 않았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오랜만에 피가 끓었다.

"크아아아!"

멜키르가 벌떡 일어나 지셀에게 달려들었다. 지셀도 피하지 않고 같이 마주 나아갔다.

콰아아앙!

두 사람의 주먹이 서로를 강타했다. 검은 기운이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넘실거리며 엮여 들어갔다.

서로에게 타격을 입힌 둘은 조금씩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크아아아!"

끊임없이 분노의 괴성을 지르는 멜키르를 보며 지셀이 웃었다.

"다시 와라."

콰아아앙!

콰아앙!

콰앙!

주먹이 수도 없이 오갔다. 두 괴물의 힘이 맞부딪칠 때마다 주변이 충격파로 터져 나갔다.

콰아아앙!

다시 멜키르의 주먹이 휘둘러진다. 지셀은 피하지 않고 막았다. 막는 순간 뼈가 박살 나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과연 엄청난 힘이었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고 똑같이 주먹을 휘둘렀다.

콰아앙!

멜키르도 맞으면 다시 반격했다. 그러나 주먹이 오갈수록 그의 몸은 조금씩 뒤로 밀렸다.

"조금만 더 힘을 내 봐라!"

콰아앙!

지셀이 악마 같은 웃음을 지으며 주먹을 휘둘렀다. 얼굴을 얻어맞은 멜키르가 뒤로 나동그라졌다.

시간이 갈수록 밀리는 건 멜키르였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제대로 반격하지 못하고 얻어맞기만 했다.

"크아아악!"

짐승이 된 멜키르는 그래도 벌떡 일어나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확실히 힘과 속도는 어마어마했다.

콰아앙!

드드득!

지셀의 발이 땅에 강한 고랑을 만들며 버텨 낸다. 그의 몸은 이제 공격을 맞아도 쉽게 밀리지 않았다.

"고작 이 정도냐?"

콰아아앙!

반대로 멜키르는 지셀의 주먹에 맞을 때마다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나거나 나동그라졌다. 맞은 부위가 터지고 부어오르기까지 했다.

"무작정 기운만 폭발시킨다고 강해지는 게 아니야."

지셀은 비웃음을 지으며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멜키르의 몸이 다시 뒤로 나동그라졌다. 너무나도 강렬한 공격에, 이성을 잃은 그의 눈이 당혹감으로 물들 정도였다.

지셀은 오만하게 멜키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슬슬 끝을 내자."

쿠웅!

검은 기운에 감싸여 붉은 눈을 빛내는 지셀이 멜키르에게 다가갔다.

460화 너 요새 운동하니?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