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곧 빨라질 거야. (3)
"우아아아악!"
"약탈왕이다! 약탈왕이 나타났다!"
"빨리 도망쳐!"
마을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약탈왕의 악명이 워낙 자자하다 보니 다들 언제든 도망갈 수 있게 간단히 짐을 싸 둔 상태였다.
어차피 이주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사람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자경단도 마찬가지였다. 이들도 약탈왕의 군대가 나타나면 싸우지 말고 도망치라는 영주의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지셀이 몽둥이를 들고 크게 외쳤다.
"다 부수고 다 뺏어라!"
"와아아아! 다 털어 버리자!"
기사들은 지셀이 왜 이러는지 잘 모른다. 그냥 또 뭔가 마음에 안 들거나 심심해서 그러는 거라고 대충 넘겼다.
그들은 영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곱만큼도 관심을 두지 않고 수련만 하는 상태였으니까.
그래서 이번에도 그냥 정신없이 지셀을 따라다니기 바빴다.
그런데 최근 지셀과 함께 마을을 털면서 든 생각이 있었다.
'이거... 은근히 재미있다.'
'혹시 나는 도적놈 체질인가?'
'왠지 모르지만 계속하고 싶어!'
대부분이 용병이나 비천한 출신이다 보니 기사가 됐어도 다른 영지의 기사들처럼 딱딱하게 살지를 못했다.
펜리스는 다른 영지에 비해 훨씬 자유롭기는 하지만 그래도 규율이 있다. 특히 길리언은 용병 출신이면서 누구보다 엄했다.
그는 절대 지셀의 얼굴에 먹칠하는 건 용납하지 않았다.
기사라는 이름을 달게 된 이후로 내내 그렇게 묶여 살다가, 오랜만에 이런 나쁜 짓(?)을 하니까 뭔가 속이 편하고 기분이 좋아졌다.
"와아아아! 다 부숴라!"
"이 마을의 식량은 다 내 거다!"
"우리가 북부의 약탈자다!"
그래서 이들은 온 힘을 다해 연기했다. 아니, 그 배역에 완전히 몰입하고 말았다.
"이히히힛! 잡아라아아아!"
"우아아아앙! 엄마!"
복면을 쓴 기사는 천박한 웃음을 내지르며 도망가는 아이를 쫓았다.
"꺄아아악! 안돼! 우리 아이만은!"
아이의 엄마가 깜짝 놀라며 외쳤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진 걸 느낀 기사는 괜히 돌부리에 발이 걸린 것처럼 넘어졌다.
"어.이.쿠! 여.기.에. 돌.이. 있.었.네?"
"아아, 여신님! 감사합니다!"
아이를 안은 엄마는 여신께 감사를 드리며 급하게 도망갔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다들 공포에 질려 기사의 어색한 연기를 알아채지 못했다.
이렇게 적당히 잡을 듯 말 듯 하며 마을 사람들을 쫓아낸 약탈왕과 40인의 도적은 곧 집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쾅! 쾅! 콰앙!
복면을 쓴 클로드가 기사들을 재촉했다.
"빨리빨리 부숴! 누가 볼까 봐 창피하다고!"
아무리 클로드가 막 나간다지만 그래도 아카데미에서 수석을 차지했던 학자 출신이다. 이런 품격 떨어지는 짓은 정말 하고 싶지 않았다.
"아, 왜! 재미있는데!"
기사들은 낄낄거리며 열심히 마을을 박살 냈다.
집들을 다 부순 그들은 마을을 털고 얻은 식량과 자재들을 가지고 의기양양하게 성으로 돌아왔다.
물론 돌아올 때는 근처에 숨겨 뒀던 옷으로 갈아입어 사람들의 눈을 속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성으로 돌아오는 지셀과 기사들을 보며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 영주님이 도적 떼들을 쫓아갔대."
"500명이 넘었는데 지금은 40명 정도로 줄었다더라."
"아아, 매일 저렇게 나가시느라 얼마나 힘드실까."
지셀은 그런 사람들에게 피곤한 안색으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울컥하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영주님, 힘내십시오!"
"저희가 힘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저도 입대하겠습니다!"
영주가 저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어찌 가만히 있으랴. 지금의 평온한 생활은 모두 영주 덕분이다.
지셀 또한 감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말만 들어도 든든하구나. 너희들이야말로 이 영지의 희망이다. 같이 힘을 합쳐 영지를 노리는 적들을 몰아내자!"
"와아아아아!"
성이 떠나가도록 다들 함성을 내질렀다. 매일 이런 일이 반복되니 날이 갈수록 입대율이 치솟고 있었다.
지셀은 성에 들어오자마자 클로드에게 물었다.
"야, 오늘은 얼마나 챙겼냐?"
"...작은 마을이라 얼마 안 됩니다."
클로드가 전리품(?)의 수량을 말해 주자 지셀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답했다.
"뭐? 그거밖에 안 돼? 야, 그러니까 빨리 좀 가자니까. 다 들고 튄 거 아냐."
"...."
클로드는 지셀을 보며 생각했다.
'이 새끼 지금 도적질에 완전히 심취했구나.'
영주는 원래부터 막 나가는 인간이라 잘 어울리긴 했다. 하지만 자신은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억지로 끌려가서 할 수 없이 같이하긴 하는데, 이러려고 총관했는지 매번 자괴감이 들었다.
어쨌든 약탈왕이 활약한 덕분에 영지가 위험하다는 인식이 크게 퍼졌다.
의심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실제로 각 도시와 요새들은 수도 없이 움직이는 병사들로 북적였으니까.
"빨리빨리 움직여라! 적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이다!"
두두두두두!
바쁘게 움직이는 병사들을 보며 사람들은 걱정에 빠졌다.
"또 적이 온 거야?"
"우리 영지가 식량이 많으니까 다들 뺏고 싶을 거야. 지금까지 그걸 생각 못 했어."
"이번에도 약탈자들인가? 아니면 다른 영주의 정찰대?"
분주하게 움직이는 병사들에게 한 노인이 다가가서 물었다.
"무슨 일이오? 적이 또 나타난 거요?"
"그런 거 같습니다. 지금 빨리 영지 경계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병사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속사정을 모른 채 실제로 내려온 이동 명령에 따르는 것뿐이니까.
원래 군대라는 게 그렇다. 뭔지도 모르고 그냥 까라면 까는 거다.
그래서 병사들은 바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고,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더 걱정에 빠졌다.
막연하게 믿었던 영지의 군대가 큰 어려움에 빠졌다고 한다. 영지를 다른 자들에게 빼앗기면 예전처럼 빈곤한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들로서는 영지가 이미 전시 상태에 빠졌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입대율은 점점 더 올라가기만 했다.
물론 병사들이 이동하면 얼마 있다가 위에서 다시 명령이 떨어지긴 한다.
― 경계에서 영주님이 적을 요격했다. 부대 원상 복귀하라.
그러면 병사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영주를 칭찬하기 바빴다.
"역시 영주님이야."
"우리가 힘이 되어 드려야 하는데."
"이미 다른 부대는 영주님과 함께 싸웠다더라고."
자신들은 안 싸웠지만 다른 부대는 싸웠다. 모든 부대에 그런 소문이 돌았다. 윗선에서 각 부대 사이의 정보 교류를 막으니 서로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갈수록 늘어나는 입대 자원자 수를 확인하고 지셀은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
"좋아, 이제 얼마 안 남았네. 그러면 마지막으로 혼신의 연기를 해 볼까?"
이미 모든 마을의 강제 이주 작업이 끝났다. 이제 펜리스 영지에는 첩자가 숨을 만한 작은 마을조차 남지 않았다.
사람이 사는 곳은 모두 도시와 요새로 한정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전쟁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기가 굉장히 빠르고 편해진다. 물류 이동도 마찬가지다.
지셀답다면 지셀다운, 오직 전쟁 효율을 높이는 데만 집중한 무지막지한 계획이라 할 수 있었다.
입대율을 높이면서 겸사겸사 지지부진하던 이주 계획도 마무리 지은 셈이 되었다.
"자, 가자! 모두 실수하지 말라고!"
마지막 출정을 나갔던 지셀과 기사들은 모두 붉게 물든 붕대를 온몸에 칭칭 감고 돌아왔다.
붕대는 벨린다가 특별히 빨갛고 매운 양념을 써서 피가 배어 나온 것처럼 시뻘겋게 물들였다. 붕대에서 피어오르는 알싸한 매운 향에 기사들은 모두 코가 빨개지고 눈가가 촉촉해졌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 영주님이 다치셨다."
"우리 영주님 소드마스터라고 소문나지 않았어?"
"적들이 너무 많았대. 강한 기사들도 있었나 봐."
사람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기사들을 보며 발만 동동 굴렀다. 지셀과 기사들은 팔다리가 처진 게 무척이나 피곤해 보였고 고개까지 푹 숙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일 대로 모이자 지셀이 발에 마나를 모아 흑왕의 옆구리를 꽉 조였다.
히이이이잉!
내장이 터질 듯한 고통에 흑왕이 깜짝 놀라며 몸을 흔들고 성질을 부렸다. 그 타이밍에 맞춰 지셀은 그대로 말에서 떨어졌다.
털퍼덕.
"크윽!"
"영주님!"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다가오려 하자 지셀이 손을 들고 말했다.
"나, 난 괜찮아...."
그때 화가 난 흑왕이 콧김을 내뿜으며 쓰러져 있는 지셀을 뒷발로 걷어찼다.
퍽!
'이 새끼가?'
데굴데굴 굴러가던 지셀이 잠깐 흑왕을 노려봤지만, 지금은 연기 중이라 혼을 낼 수가 없었다. 지셀은 분노와 짜증을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승화하며 다시 고개를 떨궜다.
"영주니이이이임!"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자신들을 사랑으로(?) 보살펴 주고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어쨌든 다 해 주는 영주님이다. 이렇게 힘들고 아파하는 모습을 보니 안타까움을 참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쓰러져 오열하기까지 했다. 특히 이곳에서 오래 살았던 나이 든 사람들이 그랬다.
그들에게 영주는 일생의 은인이자 구원자였으니까.
그때 지셀이 떠듬떠듬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모든 사람의 귀에 마치 꽂히듯이, 수상할 정도로 잘 들렸다.
"큭... 병사만 조금 더 많았어도.... 영지에 병력이 너무 부족해...."
지셀은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고 기절한 척했다. 기사들은 그 모습을 보고 입술을 꽉 깨물며 분개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웃으면 진짜 죽는다.'
'참자, 참자, 참자.... 아, 제발, 제발.'
'엄마, 아빠. 보고 싶어요.'
클로드도 눈을 꾹 감고 고개를 돌렸다. 누가 보면 눈물을 참는 것만 같았다.
'창피해서 못 해 먹겠네, 진짜.'
옆에 있던 웬디도 윗입술을 깨물며 하늘만 바라보았다.
곧 성에서 벨린다와 사용인들이 급하게 달려 나왔다.
"꺄.악! 도.련.님! 어.떡.해!"
벨린다가 비명을 지르자 옆에 있던 길리언이 지셀을 들쳐메고 성안으로 성큼성큼 움직였다. 그의 얼굴은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길리언은 이런 연극이 도무지 성격에 맞지 않았다. 그래도 지셀이 하는 일인데 초를 칠 수는 없었다.
그는 혹시나 실수라도 할까 봐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영지민들은 딱딱하게 굳은 그의 얼굴을 보고 화를 참는다고 여겼다.
공사 때문에 자재를 옮기던 알포이와 케인은 영주와 가신들이 힘을 합쳐 영지민들에게 사기를 치는 광경을 보고 혀를 찼다.
"쯧쯧. 지랄들을 해라, 지랄들을."
어쨌든 영주가 싸우다 다쳐 쓰러졌다는 소문이 영지에 순식간에 퍼졌다.
사람들 사이에서 자원입대 운동이 대규모로 벌어졌다.
"우리 영주님은 우리가 지켜야 해! 영주님에게 힘이 되어 주자고!"
"우리가 영지를 지키자! 우리가 아니면 누가 지켜! 뺏기면 다시 예전처럼 살아야 한다고!"
"멀쩡한 놈들은 전부 영지군으로 입대하자!"
영지군의 복무 기간은 10년이다. 다른 영지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생각보다 긴 시간이지만 사람들은 개의치 않았다. 다들 분개한 표정으로 자원입대를 신청했다.
그리고 얼마 뒤, 클로드가 지셀에게 보고를 올렸다.
"...기사를 제외한 병사들의 수는 약 1만 2천입니다. 목표치보다 더 큰 성과.... 크읍, 시발 이게 뭐야! 이게 진짜 왜 되는 건데!"
클로드는 말하다가 왠지 분이 치밀어올라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영주가 인기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영지에 사는 모든 사람이 영주만 사랑하고 존경하고 아끼는 거 같았다.
너무 사랑받아서 이딴 사기를 쳐도 잘 통하는 게 더 열 받는다. 자신도 사랑받고 싶다는 질투심이 마구마구 올라왔다.
"크흑, 어쨌든 기사와 엘프들, 노동 돌격대원들까지 다 합하면 무려 1만 3천을 조금 넘는 병력입니다."
현재 북부에서 그 이상 병력을 모을 수 있는 곳은 레이폴드와 데스몬드밖에 없었다.
기사들의 수와 새로운 장비들까지 생각한다면, 전체 전력은 그 두 곳과 북부 최강을 다툴 만할 정도였다.
물론 지금 신병들의 수준은 징집병과 다를 게 없다. 그들을 이제 정예병으로 만들어야 그 계산이 맞을 것이다.
지셀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봐, 되잖아. 우리 영지 사람 많다니까?"
"네.... 인기 많아서 좋으시겠습니다. 어휴, 좋겠다. 증말."
"너, 지금 질투하니?"
"네니요."
지셀은 괜히 씩씩거리는 클로드를 보며 혀를 차다가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간다. 길리언."
"네, 영주님."
"스톤헤이븐 요새를 중심으로 남쪽 지역의 훈련을 맡도록. 기사 100명을 지원해 줄 테니 그들과 함께해라. 나는 북쪽 지역의 훈련을 맡겠다."
"알겠습니다."
병사들은 영지 곳곳에 퍼져 있기에, 길리언 한 사람이 그들 모두를 훈련시키고 관리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지셀과 담당 구역을 적당히 나누어서 관리해야 했다.
지셀이 기준으로 삼은 스톤헤이븐 요새는 영지의 옛 카발디 지역의 남쪽에 있는, 가장 크고 중요한 요충지였다. 적이 쳐들어올 때는 반드시 그곳을 거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담당 구역을 나누긴 했지만, 영주인 지셀이 영주성을 오래 비울 순 없었다. 그렇기에 길리언에게 조금 더 멀리 떨어진 남쪽 지역의 훈련을 맡긴 것이다.
물론 남쪽 지역만 맡는다 해도 길리언 혼자 수천의 병사를 관리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병사들보다는 수준이 높은 기사들도 같이 붙여 준 것이었다.
지셀은 거침없이 자신이 생각하는 훈련 목표를 말했다.
"모든 병사가 기마술에 능숙해지도록 훈련하는 게 목표다. 그 뒤 기마에 익숙한 2천 명을 뽑아 궁술을 집중적으로 훈련시킨 뒤, 전부 궁병 및 궁기병으로 편성할 생각이다."
펜리스 병사들에게 이제 기마술은 기본이었다. 하지만 지셀이 원하는 수준에는 그 정도로도 부족했다.
"나머지는 기존 병사들처럼 창술과 검술, 방패술에 모두 익숙해지도록 한다. 언제 어디서든 병종을 바꿔서 전투에 활용할 수 있게 말이야."
"목표 기간은 어느 정도입니까?"
"목표 기간은 3개월이다. 짧은 건 알지만, 그 안에 어떻게든 전투에는 참여할 수 있게 가르쳐 놔야 해."
"최선을 다해 명을 수행하겠습니다."
빠듯한 기간이지만 어떻게든 해야 했다. 언제 내전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셀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 때문에 미래의 일이 바뀌고 전생보다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하루도 방심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모든 가신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영지 개발과 모든 정책을 뒤로 미루고 병사들의 훈련을 최우선 목표로 두겠다. 병사들이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게 지원하는 데 전념하도록."
지셀의 한마디로 펜리스 영지의 전쟁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병사들의 훈련은 그 첫 번째 단추였다.
병사들이 조금 힘들어하긴 하겠지만, 강도 높은 훈련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다들 영지를 지키겠다고 결심하고 입대한 사람들이라 사기가 무척 높았다.
이제 이들을 전장에서 싸울 수 있게 가르쳐야 한다.
북부 최강이라 불리는 해럴드 데스몬드의 군대와도 겨룰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지셀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북부 최강이 될 날이 머지않았다."
북부를 제패하기 위한 준비가 하나둘 끝나 가고 있었다.
271화 그놈이 벌써 움직였다고? (1)
친왕파 귀족들의 회의 자리에서 지셀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왕국을 잇는 도로 사업이 시작되면서 요즘 지셀은 수도에서 가장 뜨거운 화제가 되어 있었다.
이러니 회의 자리마다 이름이 빠질 수가 없었다.
왕국군 총사령관 모리스 맥쿼리 후작은 눈을 찌푸리며 브랜포드 후작에게 물었다.
"그놈이 대규모 병력을 모집하고 있다고?"
"그렇소. 아예 영지가 떠들썩할 정도로 모으고 있다고 하더군."
"하, 그 오리 새끼가 카발디 백작을 치고선 겁을 먹긴 먹었나 보구먼. 하긴, 공작파 귀족을 건드렸으니 그럴 만도 하지."
"문제는 너무 과할 정도로 모으고 있다는 거요."
정확한 수는 보고되지 않았지만, 무장병이 최소 수천 명은 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금까지 큰 사고를 몇 번이나 쳤던 지셀이기에 브랜포드 후작은 그 소문이 유독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모리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음... 하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놈이니까. 이번에도 어디 치려고 모으는 거 아냐? 지금 겨우 가뭄 사태를 수습하고 있는데 또 사고 치면 곤란해."
"일단은 카발디 백작을 치고 공작파와 척졌으니 나름 대비를 하는 듯하오. 데스몬드 백작도 군대를 모으고 있고."
브랜포드 후작의 말에 모리스는 우습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봤자 한낱 북부의 일개 영주일 뿐이지. 공작가가 내전을 일으키지 않는 이상 데스몬드 따위가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그 말에 다른 친왕파 귀족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왕국군이 멀리 떨어져 있다면 모를까, 이미 데스몬드 영지 인근에서 계속 그들을 감시하고 있다. 브랜포드 후작의 선견지명 덕분에 데스몬드 백작은 손발이 꽁꽁 묶이게 된 셈이었다.
그 사실은 브랜포드 후작도 알고 동의하는 바다. 아무리 북부에서 손꼽히는 데스몬드라도 공작가의 도움과 명령 없이는 섣불리 움직일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당장 전쟁이 벌어지지 않더라도, 데스몬드가 군대를 모으고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쯧, 데스몬드가 군대를 소집하는 건 내전이 가까워졌다는 뜻이지 않은가.'
친왕파 귀족들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그간 공작가의 압박에 계속 밀렸으면서도, 펜리스 백작 덕분에 조금 살 만해지니 또 오만한 성정들이 고개를 쳐든다.
자신들이 왕실을 떠받든다는 명분과 정통성을 쥐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공작가가 내전을 일으키면 그건 반란이었으니까.
한숨을 한번 내쉰 브랜포드 후작이 말을 이었다.
"현재 2군단의 일부 병력이 인근 영주들의 도로 건설을 도와주고 있지 않소?"
모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하는 거 빨리하는 게 나으니까. 내가 지시했는데 뭐 문제라도 있소? 북부 새끼들 다 가난해서 작업도 제대로 못 하고 있더라고."
"전부 다 복귀시키도록 하시오."
"왜?"
"2군단이 그쪽에 주둔하는 건 북부 감시 및 펜리스 백작의 보호를 위해서요."
무심한 브랜포드 후작의 말에 모리스는 험상궂은 얼굴을 더 찡그렸다.
"도대체 왜 그렇게 그 오리 새끼를 신경 쓰는 건데? 그놈이 언제부터 우리한테 그렇게 중요했다고!"
"내전이 일어나면 북부에서는 펜리스 백작이 가장 먼저 공격당할 것이오. 2군단의 전력이 유지되어야 데스몬드와 공작파 귀족들의 합공을 막아 낼 수 있을 것이오."
"무슨 벌써 내전을 걱정해! 공작가도 가뭄 이후에 전력을 수습하느라 조용히 있잖아! 지금 내전을 일으키면 그냥 서로 죽자는 건데 그놈이 그럴 리가 있겠냐고! 그 새끼들 하는 짓은 다 말뿐인 협박이야!"
"다른 영주들과 왕국군도 내전에 대비해 전력을 정비할 생각이오. 언제 공작가가 칼을 빼 들지 모르니까. 도로 건설 때문에 공작파 영주들의 신경도 날카로워져 있고."
"그래, 준비하는 건 좋다 이거야. 그런데 왜 그놈만 보호하는데? 자꾸 그렇게 그놈만 싸고돌고 그놈이 해 달라는 거 다 해 주니까 그 새끼가 더 건방져지는 거 아냐!"
모리스는 그간의 분노를 터뜨리듯이 외쳤다. 그 외침에 다른 귀족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에게나 냉정한 브랜포드 후작이 너무 지셀만 챙기니 조금씩 불만들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브랜포드 후작의 권세가 높아 아직은 다들 뒤에서만 떠들고 있었다. 하지만 지셀이 몇 번 더 사고를 치거나 단 한 번이라도 실패한다면 후작의 입지도 같이 흔들릴 것이다.
그런 분위기에도 브랜포드 후작은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분명히 경고했소. 내가 말한 대로 하시오."
"이익...."
모리스는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몇 번이나 입술을 씰룩였다. 브랜포드 후작이 왜 저렇게 그 애송이만 끼고도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음에 안 들지만, 브랜포드 후작의 요청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어쨌든 그는 친왕파의 수장이자 자신을 뛰어넘는 권세가였으니까.
"공작가만 쓰러뜨리면 그 새끼의 목은 내가 날려 버릴 거라는 말, 절대 잊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때는 말리지 않는 게 좋아."
"그때가 되면 내 모르는 척하겠소이다."
"흥!"
이번에도 영양가 없는 협박을 건넨 모리스는 벌레 씹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
다른 귀족들도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모리스를 따라갔다.
그들은 어디에 줄을 대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었다.
'브랜포드 후작도 나이가 드니 판단력이 흐려지는 모양이야.'
'설사 내전이 일어나도 왕국군은 우리를 보호해야지. 왜 그놈을 보호해 준다는 말인가?'
'혹시 그놈을 정말 정치적 후계자로 점찍은 건가?'
친왕파의 다른 귀족들도 모리스 후작과 비슷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애송이에게 너무 과한 혜택을 주고 편의를 봐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작가가 정말 내전을 일으키면 그놈은 버리는 패로 쓰는 게 맞다. 괜히 도와줄 필요가 없었다.
'진짜 내전이 벌어진다면 왕국군 전력은 그놈을 보호하기보다는 그냥 공작파를 압박하는 데 쓰는 게 낫지. 공작파의 만만한 다른 영주를 치거나.'
'지금까지는 북부에서의 영향력을 올리려고 키워 준 거지만, 실제로 전쟁이 나면 그놈은 버리고 다른 영주들을 밀어주는 게 나아.'
'왕국군은 우리 최후의 보루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런 놈을 도와주는 데 쓰기는 아깝지.'
친왕파 귀족들의 생각은 대부분 비슷했다. 아직은 브랜포드 후작의 힘으로 찍어 누르고는 있지만, 그들의 불만이 커지다 보면 결국 사고가 터질 수밖에 없었다.
그걸 알고 있는 브랜포드 후작은 혼자 남게 되자 이마를 짚으며 눈을 감았다.
'피곤하군.'
공작가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운데 내부는 제대로 단합이 되지 않고 있다.
지셀이 몇 번이나 능력을 보여 줬음에도 젊은 귀족들은 그의 명성을 시기하고 질투한다. 나이 든 귀족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형편없는 북부의 애송이 놈이라며 그를 무시했다.
시대가 바뀌고 있음에도 여전히 사고방식이 고루한 친왕파 귀족들 때문에 지셀과 관련된 일은 뭐 하나 매끄럽게 풀리지 않았다.
그놈이 사고를 여러 번 쳐서 그런 부분도 있긴 하지만.
'내전이 일어난다면 지리멸렬하게 당하기만 하겠어.'
브랜포드 후작은 내전이 일어날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친왕파의 귀족들 대부분은 여전히 공작파를 견제하며 그들과 힘겨루기를 할 수 있다고 여겼다.
왕실에 속한 귀족들의 힘으로 그게 가능하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아함을 추구하는 귀족들의 정치 방식이니까.
'나라가 망하는 건 언제나 멍청한 놈들이 설칠 때였지.'
이 왕국을 승냥이 같은 놈들 손에 넘길 수는 없었다. 지금은 자신의 권위로 계속 찍어 누르며 끌고 갈 수밖에 없었다.
그게 언제까지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문득 브랜포드 후작의 머릿속에 지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언제나 제멋대로에 사고나 치고 다니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놈.
'재미있는 놈이긴 하지.'
어쩌면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그놈이 왕국의 마지막 남은 희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공작가조차 그놈이 하는 짓을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밀어줄 거면 그런 놈을 밀어줘야지.'
공작가와 싸우기 위해 자신이 키운 강력한 무기, 북부에서 가장 빠르게 힘을 키우고 있는 젊은 영주.
그것이 바로 지셀 페르디움이었다.
어느 순간 브랜포드 후작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 *
데스몬드의 영주, 해럴드는 제 앞에 선 부관에게 물었다.
"그놈이 대규모 병력을 모집하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누가 봐도 대놓고 전쟁을 준비하는 모양입니다. 추정하기로는 병력 규모가 5천 이상이 될 거 같습니다."
현재 펜리스 영지의 정보는 다른 영지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었다. 수상한 자들은 죄다 '노동 돌격대'로 끌고 가고, 영지 밖으로 퍼지는 정보는 가능한 한 조작해서 내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덩치가 커진 이상, 정보 유출을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었다.
부관의 보고를 들은 해럴드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확실히 멍청한 놈은 아니었어. 맛이 가서 겁도 없이 날뛰고 있긴 하지만."
해럴드의 표정은 전과 달랐다. 분노하지도 않았고, 지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정도 아니었다. 그저 속에서 흘러넘치는 감정을 꾹꾹 누르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혼자서 몇 번 고개를 주억거린 해럴드는 다시 부관에게 물었다.
"우리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영지의 물자를 전부 끌어모았습니다. 이제 더는 모을 수 없을 거 같습니다."
해럴드는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이제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손해가 참 크군."
지셀을 암살하려고 몰래 키우던 상단과 엄청난 양의 자원을 미끼로 던졌다. 영주를 끌어내기란 그리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암살에 실패한 탓에 상단은 해체되었고, 가져갔던 자원도 모두 증발해 버렸다.
영주 암살에 쓰인 이상, 상단이 해체되는 건 그 하나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그 상단과 연관된 곳도 모두 끝장난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 모든 걸 감수하면서까지 지셀을 죽이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 손해는 쉽게 복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결국 해럴드는 최후의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바로 힘으로 지셀을 잡아 죽이는 것이다.
"우리를 감시하는 2군단의 상황은 어떻지?"
"현재 절반의 병력이 친왕파 영지에 지원을 나가 있습니다. 도로 건설 때문인 거 같습니다."
"그놈들도 우리를 우습게 보고 있구나."
데스몬드 백작은 피식 웃었다. 왕국군이 감시하면 자신이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을 거라 판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절반 정도만 남아 있다면 순식간에 밀어 버릴 수 있다.
"우리 쪽 병력 모집 상황은?"
"모든 봉신에게 병력을 소집하라고 알렸습니다. 현재 각지에서 병력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놈이 대규모로 병력을 모집하기 시작했다면 우리도 더 모아야겠군. 압도적으로 쓸어버리고 그곳을 차지해야 하니까."
"압도적이라 하신다면...."
"징집병은 필요 없다. 3만의 무장 병력을 확보해라."
"...3만 말씀이십니까?"
"그래, 봉신들에게 단 하나의 병사도 남기지 말고 전부 끌고 오라 전해라. 수가 부족하면 모두 목을 베겠다. 우리 또한 모든 거점과 요새의 병력을 하나로 모은다. 총동원령이란 말이다. 알겠나?"
"아, 알겠습니다."
부관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가난한 탓에 북부 영지들의 평균 병력은 1천에서 2천 정도에 불과하다. 병력이 많은 영지라고 해 봤자 3천을 넘기기 힘들다.
그런데 지금 해럴드는 3만의 병력을 모으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 정도면 영지의 치안을 맡은 병사들까지 죄다 끌고 와야 한다.
달리 말하면, 그런 병사들까지 긁어모으면 3만 명도 확보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정도 저력이 있기에 데스몬드가 북부의 최강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해럴드는 의자에 기대며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멜리아가 반란에 성공해서 다행이군."
만약 그 일까지 실패했다면 큰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레이폴드가 신경 쓰여서 지셀과의 전쟁에 전력을 다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솔직히 아멜리아를 우습게 보고 있었는데, 혼자만의 힘으로 북부제일검인 위르겐도 처리하고 순식간에 영지를 점령했다는 소식에 놀라긴 했다.
"생각보다는 제법이야. 그런데 멍청하게 후계자 하나를 놓치다니. 쯧쯧쯧."
하지만 데이븐 레이폴드의 존재에 생각이 닿자 해럴드는 혀를 찼다. 역시 방구석에서 책만 읽던 계집이라 한계가 있었다.
지셀만 아니었어도 레이폴드의 반란 또한 자신이 깔끔하게 마무리했을 텐데.
"지금 발루아 남작과 전쟁 중이라 했나?"
"그렇습니다."
"쓸데없는 짓은 그만하고 내가 전쟁을 일으키면 바로 군대를 끌고 합류하라고 전해라. 발루아 남작은 내가 밀어 버릴 테니까."
"알겠습니다."
대답을 한 부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먼저 전쟁을 일으키시면.... 백작님이 내전을 촉발하시는 셈이 됩니다. 펜리스 백작을 죽이면 분명 친왕파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이건 원래 계획에 없던 일이라 공작가에서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저희에게는 명분도 없으니까요."
부관의 물음에 해럴드는 잠시 눈을 감았다.
지셀 하나 때문에 모든 일이 꼬여 버렸다. 아멜리아가 반란에 성공했지만, 발루아 남작을 상대하게 된 바람에 레이폴드의 힘을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다.
그 사이에 지셀은 제 이득을 다 챙기고, 이제는 친왕파의 모든 영지를 잇는 도로까지 건설하고 있었다.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이미 공작가는 모든 일을 망친 해럴드에게 분노한 상태였다. 아니, 정확히는 공작가의 두뇌인 라울 요제프 자작이 분노했다고 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판도는 모두 그가 짜 둔 계획대로,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지셀이란 존재가 나타나기 전까지 말이다.
'건방진 놈들.'
지셀과 라울, 둘 모두를 향한 해럴드의 속마음이었다.
한 놈은 사사건건 자신의 일을 방해하고, 한 놈은 자신의 머리 위에 서서 지시만 내린다.
특히, 라울은 지금 자신을 처리하고 다른 이를 내세우려고 한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다.
북부의 대영주로서 참을 수 없는 모욕과 굴욕이었다. 계속 일을 실패한 것도, 누군가 자신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것도.
'이제는 다 상관없다.'
실타래는 엉킬 대로 엉켰다. 아깝더라도 단호하게 끊고 가야 한다. 그러려면 지셀을 죽이는 게 우선이었다.
이건 이제 공작가의 명령과 상관없는 일이 되었다. 북부의 대영주로서 땅에 떨어진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을 세우려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해럴드는 공작가가 어떻게 나올지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오직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으로 전쟁을 결심했다.
지셀을 죽이고 북부를 제패한다. 그렇게 자신의 능력을 다시 보여 주면 된다.
명분? 내전? 그딴 게 지금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이 처참한 굴욕감을 씻는 것이다.
미친놈을 상대하려면 자신도 미친놈이 되어야 했다. 그걸 방해한다면 왕국군도 가만히 둘 수는 없었다.
'그 뒤에 공작가와 담판을 짓는다.'
그래도 공작가가 자신을 쳐내려 한다면 그땐 힘으로 설득하는 수밖에 없다.
친왕파에 붙어서라도 말이다.
공작을 배신할 각오까지 할 정도로 그는 궁지에 몰려 있었다.
그래서 여력을 남기지 않고 영지의 모든 힘을 한곳으로 모았다.
오직 지셀 하나를 죽이기 위해서.
해럴드가 다시 눈을 떴다. 그의 입에서 억눌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전쟁은 공작가의 계획과 상관이 없다."
"그렇다면...."
"이건 내 계획이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그 미친 새끼를 죽이고 지금까지의 치욕을 씻을 것이다."
각오를 굳힌 해럴드의 눈빛은 전과 달랐다. 그의 눈은 서늘할 정도의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272화 그놈이 벌써 움직였다고? (2)
"와아아아!"
"또 이겼다!"
"적들이 물러난다!"
발루아 성의 병사들이 물러가는 아멜리아의 병사들을 보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전쟁이 시작된 지 벌써 몇 달이 지났다. 이들은 고작 1천의 군대로 아멜리아의 5천 대군을 막아 내고 있었다.
본래도 정예병으로 소문난 발루아의 병사들이다. 이들은 계속된 승리에 크게 사기가 올라 있었다.
"하하하! 소문만 요란했지 레이폴드군도 별거 아니잖아?"
"이 북부에서 여자 지휘관이라니! 밑에 있는 새끼들은 다들 고추나 떼라고!"
"이미 뗀 거 아니야? 그러니까 싸움도 저렇게 계집애처럼 소극적으로 하지! 다들 소꿉장난하러 왔냐! 으하하하!"
물러가는 레이폴드군을 보며 다들 의기양양하게 조롱을 건넸다. 이들은 절대 자신들이 지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병사들의 수만 많을 뿐이지 상대는 이제 막 영주가 된, 전쟁 경험 하나 없는 여자였으니까.
하지만 이곳의 영주인 발루아 남작만은 그렇게 표정이 좋지 않았다.
'뭐지? 왜 이렇게 소극적으로 공격하는 거지? 나를 굴복시키고 데이븐 공자를 죽이러 온 게 아닌가?'
처음에는 발루아 남작도 아멜리아를 우습게 봤었다. 상대의 공격을 자신들이 너무 쉽게 막아 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싸울수록 의도가 확연하게 눈에 보였다. 지금 아멜리아는 일부러 소극적으로 공격하며 시간을 질질 끌고 있었다.
그 증거로, 저 앞에 있는 레이폴드군의 숫자는 여전히 처음과 별다를 게 없는 상태였다. 피해를 거의 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도대체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군. 뭘 노리고 있는 거지?'
상대 병력의 규모는 이쪽의 다섯 배가 넘는다. 상대가 피해를 각오하고 밀어붙이면 막을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
그런데도 장난치듯이 깔짝거리기만 하니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식량은 충분하다. 더 버틸 수 있어. 펜리스 백작이 왜 우리를 도와주는지 모르겠지만.'
펜리스 영주는 데이븐을 보내며 대량의 식량도 함께 보냈다. 덕분에 식량 걱정은 없었다.
말로는 친구라서 도와줬다고 하지만, 요즘 같은 시기에는 보기 힘들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발루아 남작은 그런 귀한 걸 대가 없이 준다는 말을 믿을 정도로 순진한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를 도와줘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고민하던 발루아 남작은 품에서 꼬깃꼬깃한 서신을 하나 꺼냈다.
지셀에게 식량을 받으며 같이 받은 서신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절대로 성 밖으로 나가 싸우지 말 것. 기회가 온 거 같아도 그건 기회가 아니다.]
여전히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내내 성안에 틀어박혀서 막기만 하고 있는데, 도대체 어떤 기회가 온다는 걸까? 그리고 그게 또 기회가 아니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헛소리 같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었다.
'펜리스 백작은 요새 북부에서 뜨는 신성이다. 카발디 백작도 쉽게 이긴 자야.'
그간 지셀이 보인 말도 안 되는 활약은 이미 소문날 대로 소문이 난 상태였다.
지셀을 직접 본 적이 없는 발루아 남작은 그가 정말 혜안이 있어 앞날을 내다본 건지, 아니면 그저 멋있어 보이려고 헛소리를 지껄인 건지 쉬이 판단할 수가 없었다.
고민에 빠진 건 발루아 남작만이 아니었다. 아멜리아의 진영에서도 답답함을 못 이기고 불만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아가씨! 아니, 백작님! 아, 그냥 밀어 버리자니까요? 제가 가서 대가리 다 깨 버릴게요! 저런 놈들한테 왜 시간을 끄냐고요!"
성질이 더러운 만큼 급하기도 한 울칸이 몽둥이를 꽉 쥐며 외쳤다. 그는 발루아군의 조롱을 참아 넘길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혼자 성을 타고 올라가 죄다 죽이고 싶었다.
아멜리아는 울칸의 성화에도 심드렁한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조용히 해. 시끄러워서 귀 아프니까."
냐앙!
바스테트도 조용히 하라는 듯 앞발을 허공에 휘저었다.
"아오!"
울칸은 답답한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갑자기 태도가 변한 아멜리아의 속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빠르게 발루아 성을 공략하겠다던 그녀는 출정 중에 갑자기 하나의 소식을 듣고 전략을 바꿨다.
― 데스몬드 백작이 소집령을 내렸습니다.
그 후로는 이렇게 소풍을 나온 듯이 시간만 보내는 중이었다.
식량이야 충분하니 버티는 데 문제는 없지만, 다른 이들은 그녀의 속셈을 모르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수하들이 한 번에 밀어 버리자고 몇 번이나 주장했지만, 아멜리아는 매번 거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군대를 조금 더 뒤로 물리고 곳곳에 함정을 파라."
공성전 중인데 군대를 후퇴시키고 함정을 파라니. 대체 무슨 의도로 내리는 명령인지 다들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국 주변 사람들의 눈총을 한 몸에 받은 베르나프가 어쩔 수 없이 나섰다. 갈굼은 한 사람이 받는 게 나으니, 아멜리아의 갈굼에 익숙한 그가 대표로 나선 것이었다.
"저기... 아가씨? 우리 공성전 하는 중 아니었나요? 발루아 남작은 성에서 안 나올 거 같은데요. 그렇다고 저쪽을 도와줄 사람도 없고요.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펜리스 백작인데, 그놈도 데스몬드 백작이 군대를 모으는 걸 알고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그놈이라도 나서지 않을 거예요."
냐앙!
바스테트가 베르나프를 보고 크게 호통을 내질렀다. 어디 감히 건방지게 아가씨의 명령에 따지냐는 모습이었다.
'하, 저 고양이 새끼는 왜 전쟁터까지 따라와서 나한테 지랄일까?'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떠는 베르나프를 보며 아멜리아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우리가 시간을 너무 끌었으니까."
"네?"
"슬슬 우릴 우습게 볼 놈들이 나올 거야. 이왕 나온 거, 최대한 이득을 봐야 하지 않겠어? 때가 되면 발루아 남작도 성에서 튀어나올 테니까 그때 죽이면 돼."
그녀는 언제나처럼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움직였다. 그래서 베르나프는 그녀의 설명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머리가 제법 좋다고 알려진 콘라드만 고개를 끄덕이며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눈치를 보고 있던 울칸과 칼레브도 괜히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나프도 분위기에 휩쓸려 알아들은 척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모습들에 코웃음을 친 아멜리아가 콘라드에게 물었다.
"데스몬드는?"
"소집령을 다시 보내왔습니다. 발루아 남작은 일단 나중에 치라는 명령입니다. 펜리스 백작을 먼저 치겠다고 합니다."
그 말에 아멜리아는 잠시 인상을 찡그렸다.
"도대체 갑자기 왜 그러는 거지? 그게 공작가의 뜻인가? 북부에서 내전을 시작하겠다고? 왕국군이 코앞에서 감시하고 있는데?"
"모르겠습니다. 공작가 쪽에서는 아직 내전을 준비하는 정황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멜리아는 데스몬드 백작의 정보를 친왕파보다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어쨌든 같은 편에 서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작가의 뜻은 정확히 모른다. 아직은 데스몬드가 북부를 총괄해 공작가와 소통하고 있었으니까.
잠시 고민하던 아멜리아가 말을 이었다.
"일단은 조금만 더 시간을 끌어 봐. 핑곗거리는 계속 생길 테니까."
고개를 한번 숙인 콘라드가 조심히 물었다.
"역시 북부에서 내전을 시작하려는 걸까요?"
"가능성은 없지 않지. 어쨌든 지셀 그 새끼 때문에 일이 많이 꼬였으니까. 그런데 이상하다는 말이야. 왜 북부부터지?"
왕국군이 데스몬드 백작을 감시하고 있다. 동시다발적으로 시작한다면 모를까, 굳이 이곳에서 먼저 시작해서 친왕파의 경각심을 키워 줄 필요가 없었다.
해럴드는 신중한 성격이다. 언제나 공작가의 명령을 정확하게 수행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남자였다.
그런 사람이 움직인다는 건 공작가에서 무슨 명령이 내려왔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혼자 움직일 리가 없으니까.
현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계속 고민하는 그녀에게 콘라드가 말했다.
"펜리스 백작은 데스몬드를 감당할 수 없을 겁니다. 현재 대규모로 병력을 모집한다는 소문은 있지만, 전력의 차이가 너무 큽니다."
"뭐, 그래도 그놈 덕분에 우리 쪽엔 상황이 나쁘지 않게 됐어."
정확한 상황은 모르겠지만 데스몬드 백작이 펜리스를 친다는 건 아멜리아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지셀이 발악할수록 데스몬드 백작의 피해도 더 커질 테니까.
그녀는 원래 상황에 맞춰 움직이는 것에 능숙하다. 그리고 지금도 상황을 이용해서 최대한의 이득을 볼 생각이었다.
펜리스와 데스몬드, 어디가 이기든 남은 쪽도 피해를 볼 수밖에 없으니까. 너덜너덜해진 상황에서 갑자기 뒤통수를 맞으면 무척이나 아플 것이다.
아멜리아는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둘이 싸울 동안 잔챙이들이나 쓸어버리고 기다리면 돼."
정말 마음에 드는 상황이었다.
* * *
"이야아아아!"
펜리스 영지는 연일 병사들의 고함으로 가득 찼다.
모두가 영지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모인 자들이라 사기는 드높았다.
공교롭게도 약탈왕과 40인의 도적은 병력 모집이 끝나자 사라져 버렸다. 아무래도 병사들이 너무 많아져서 도망갔다는 게 중론이었다.
지셀은 훈련 중인 병사들을 보며 만족스러워하는 웃음을 지었다.
"좋아! 훌륭해! 기사들보다 훨씬 낫잖아?"
자신과 길리언의 훈련은 일반인들이 견디기에는 만만치가 않았다. 하지만 병사들은 이를 악물고 버텨 내고 있었다.
이 영지는 자신들이 아니면 지킬 수 없다는 의지 때문이었다.
지셀은 이런 의지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병사 하나하나는 보잘것없더라도, 이 의지들이 모여 강력한 힘을 이루기 때문이다.
병사들도 훈련이 힘이 들긴 하지만 지원한 걸 후회하지 않았다.
"이야, 말로만 들었는데 막상 보수를 받으니까 장난이 아닌데?"
"음식도 비교가 안 될 정도야. 제일 좋은 고기와 빵이 나온다니까?"
"이 갑옷 좀 봐 봐. 나 기사 같지 않아?"
다른 영지민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혜택과 대우를 받으니 더 버티기가 수월했다.
특히 차분한 은빛 갑옷은 이제 영지군의 상징과도 같았다.
영지의 높은 생산력 덕분에 모든 병사는 타 영지의 기사와 비슷한 수준의 무장을 갖추게 되었다.
기사가 아니면 구경도 못 해 볼 비싼 무장이다. 당연히 이런 좋은 혜택과 대우는 그들의 자부심을 더 키워 주었다.
병사들이 열의를 보이자, 다소 의지가 빈약하고 반강제적(?)으로 기사가 된 이들에게 불똥이 튀었다.
"너희들은 도대체 수련을 왜 더 열심히 안 하는 거냐!"
훈련 중 갑자기 난입한 지셀 덕분에 기사들은 또 죽을 맛이 되었다. 요새 영주는 툭하면 나타나서 주먹부터 날리고 있었다.
"으아악! 영주님! 갑자기 왜 또 지랄이세요!"
"우리도 열심히 수련하고 있다고요! 거기에 병사들 교육하는 데 참여하고 있잖아요!"
"피 토한 거 안 보이세요? 피곤해 죽겠다고요!"
다들 열심히 한다고 난리를 피웠지만 사실 이들은 전보다 더 나태해졌다.
병사들을 훈련시키며 우월감을 느끼는 탓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새로 받은 갑옷 때문이었다.
자신의 실력을 몇 배나 뛰어넘는 무장을 얻게 되니 절로 여유가 생겨 버린 것이다.
"이야, 이거 입으니까 진짜 상급 기사는 된 거 같은데?"
"이런 거 입으면 죽을 일도 없는 거 아냐?"
"웬만한 기사들은 다 이길 거 같은데? 병사들 정도는 나 혼자서 천 명도 죽일 거 같아."
이런 생각이 들어 버리니 개인 수련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걸 잘 알고 있는 지셀은 하루도 기사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갑옷만 믿고 있다가는 그냥 뒈지는 거야! 마나가 부족해서 제대로 쓰지도 못할 거다!"
저 갑옷은 사용자의 마나를 잡아먹어야 능력이 발동된다. 그런데 반쪽짜리 기사들이 제대로 운용할 리가 없었다.
얼마 쓰지도 못하고 퍼질 게 뻔한데 수련까지 열심히 안 하면 바로 시한부 인생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그들을 더 독하게 굴릴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안 하는 놈은 그림자 산맥으로 보내 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라고!"
"알았다고요! 그만 좀 괴롭혀요!"
자발적으로 힘쓰는 병사들과 대조되긴 하지만, 어쨌든 기사들도 반강제로나마 열심히 수련했다.
클로드를 비롯한 가신들도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혹여나 놓친 게 있는지 매일같이 점검하고 피치 못할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영주는 언제나 승리를 장담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혹시나 패배했을 때의 대처도 생각해야 했다.
다들 내전이 일어나면 당연히 데스몬드가 이곳부터 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동안 쌓아 온 원한이 만만치 않았으니까.
클로드는 진지한 얼굴로 지도를 보다가 웬디에게 말했다.
"나랑 같이 도망갈래?"
"예?"
"고향까지 혼자 도망갈 자신이 없어서. 너 싸움 잘하잖아. 나 좀 지켜 줘. 나 혼자서는 돌아가다가 강도만 만나도 죽는다고."
갑자기 울상을 지으며 사정하는 클로드를 보며 웬디가 경멸 어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클로드는 이제 상관없다는 듯 외쳤다.
"내전이 일어나면 데스몬드 백작과 공작파 귀족들이 전부 여기 몰려올 거라고! 그러면 영주님도 못 이길 거 아냐!"
"...그만 좀 징징거리시죠."
"아, 몰라! 공작파와 싸워서 우리가 어떻게 이기냐고! 그것도 데스몬드 백작을 말이야! 내가 잠깐 미쳤었나 봐!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원한이 많은 영지라는 걸 깜빡했다. 진작에 도망갔어야 했다.
영주가 싸움도 잘하고 지금까지 승승장구했다는 건 가신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데스몬드는 지금까지의 상대와는 차원이 달랐다. 뭐니 뭐니 해도 북부 최강이라 불리는 영지였으니까. 숫자도 문제지만, 기사와 병사들의 수준까지 매우 높은 걸로 유명하다.
그러니 전쟁을 준비하면서도 가신들은 똥줄이 탈 수밖에 없었다.
'이번만큼은 영주님도 힘들 거 같아. 예상도 하고 준비도 하고 있지만, 데스몬드가 너무 강하다. 정말 내전이 시작되면 이길 수 있을까?'
대부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지금껏 발전하는 영지의 모습에 취해 위험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정말로 전쟁이 코앞이라 생각하니 새삼 걱정이 늘었다.
실제로 클로드는 몇 번이나 도망치려고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웬디에게 바로 잡혀 왔다.
그녀는 클로드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빨리 준비나 제대로 하세요. 어떻게 도망칠지는 지고 나서 생각하자고요. 어차피 내전이라는 게 우리 혼자만 싸우는 게 아니잖아요. 왕국군도 도와줄 텐데."
"그래도 지면 바로 목이 날아갈 거라고!"
"그러니까 지지 않게 준비해야죠."
클로드의 사정에도 웬디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는 공식적으로 총관이자 영지의 노예다. 영주 다음으로 높지만 다른 의미로 누구보다도 낮은 클로드는 눈물을 머금고 전쟁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다들 훈련과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을 때, 갑자기 북부 영주들의 사신이 동시에 지셀을 찾아왔다.
그들은 억지를 부리다시피 하며 지셀을 만났다. 적당히 인사를 건넨 사신들은 빠르게 본론을 꺼냈다.
"짐바르 영지에서 왔습니다. 제가 대표로 백작님께 좋은 제안을 전해 드리려고 합니다."
"뭔데?"
심드렁한 지셀의 표정에 사신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애송이 영주가 예의는 쥐뿔도 없다는 건 유명한 사실이었다.
열 받긴 하지만, 얻을 게 있어서 왔으니 사신은 일단 참았다. 사실 안 참아도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긴 했다.
"영토를 늘릴 생각이 있으십니까? 저희가 도와드리려고 합니다."
큰 힘이 없는 군소 영지들이지만 무려 6개의 영지에서 온 사신들이었다. 이들이 힘을 합하면 만만치 않은 병력이 나올 것이다.
영토를 늘리자는 말에 지셀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다 같이 온 걸 보면 이미 얘기가 끝난 거 같은데.... 어디를 치자는 거지?"
크게 심호흡을 한 사신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바로 레이폴드입니다. 북부의 관습을 어기고 감히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와 형제들을 몰아낸 찬탈자, 아멜리아를 치자는 것이지요."
지셀은 비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사신들을 바라보았다.
273화 그놈이 벌써 움직였다고? (3)
"거절한다."
지셀의 단호한 말에 사신들은 당황했다.
"어째서입니까? 아직도 레이폴드가 데스몬드와 북부의 최강을 겨루던 영지라 생각하십니까? 그건 정말 잘못 생각하시는 겁니다."
"어째서?"
"일단 찬탈자 아멜리아는 여자입니다. 영지를 다스려 본 경험도 없고 전쟁 경험은 더더욱 없지요. 그저 우아하게 찻잔이나 들 줄 아는 영애였을 뿐이지 않습니까? 반란도 연회를 기습해서 운 좋게 성공했을 뿐이지요."
"흐음...."
"지금 발루아 남작과 싸우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벌써 몇 달이나 지났는데, 성을 공략하지도 못했잖습니까? 병력이 무려 다섯 배나 많은데도 말입니다."
그 말에 지셀은 피식 웃었다.
발루아 남작은 명장이다. 거기에 아멜리아는 소극적으로 대치하고 있다. 그러니 전쟁이 길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둘 중 하나라도 생각했다면 저런 말은 못 했을 것이다.
사신은 지셀의 웃음에 자기 말이 통한다고 착각했는지 열심히 설득을 이어 갔다.
"우리는 레이폴드 백작과 동맹이었던 영지입니다. 후계자인 4공자 데이븐이 살아 있으니 명분은 충분합니다. 저희가 공격한다면 발루아 남작도 성에서 나와 호응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길 수 있다?"
"그럼요, 발루아 남작 하나도 당해내지 못하는 한낱 계집이 어찌 우리 연합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이 기회에 한 손 거드시지요."
지셀은 귀찮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됐다. 난 관심 없으니까 너희들끼리 해라."
"레이폴드의 정당한 후계자가 아직 살아 있습니다. 찬탈자를 내버려 두는 선례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 북부는 예로부터 여자는 영주로 인정하지 않는 관습이 있습니다. 지금 이 북부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영주들이 연합까지 해서 레이폴드를 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일단은, 반역자를 가만히 내버려 두는 건 나쁜 선례가 남는다는 것이었다.
다른 영주들이 힘을 합해 찬탈자를 가만두지 않는다는 걸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자기 영지에서도 그런 위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아멜리아가 여자라는 것도 북부의 영주들에게는 거슬리는 일이었다.
척박하고 거친 북부에서는 언제나 강인한 남자가 모두를 이끌고 다스려야 한다. 그런 관습과 전통에 의지해 살고 있는데 여자가 영주가 됐다. 그것도 반역으로 말이다.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주는 일은 절대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이런 자잘한 것들이 하나둘 모여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기 때문이다.
언제나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영주들은 그런 위험을 허투루 보지 않았다.
이런 이유들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레이폴드는 넓고 풍요로운 땅입니다. 우리가 4공자 데이븐을 도와준다면 관습에 따라 보상으로 땅을 일부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진짜는 이거였다. 그들은 혼란해진 레이폴드를 쳐 그곳을 갈라 먹으려는 것이었다. 아멜리아가 우습게 보이는 것도 그들의 결정에 한몫했다.
열성을 다한 설득에 지셀은 다시 웃었다.
'아멜리아를 죽인다고? 고작 너희들로?'
지셀의 전생, 용병왕도 아멜리아는 못 죽였다. 죽일 수 있었으면 회귀하자마자 바로 아멜리아를 죽였을 것이다.
데스몬드가 페르디움을 노리고 있고, 당장 건드릴 수 없기에 내버려 뒀을 뿐이다.
그녀는 그 정도로 위험한 사람이었다. 이런 허접한 놈들이 그녀를 이기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애초에 그녀가 품은 야망은 레이폴드의 백작 자리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 터였다.
다만.... 지금 지셀이 취하는 전략에는 이놈들이 필요하긴 했다. 그녀의 야망을 최대한 이용하며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말이다.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는다. 대신 다른 걸 도와주도록 하지."
"그게 무엇입니까?"
"어차피 식량을 얻으러 온 거 아닌가? 내가 식량을 지원해 주겠다."
그 말에 사신들은 활짝 웃음을 지었다.
사실 펜리스의 병력까지는 필요 없었다. 6개 영지의 병력만으로도 아멜리아 정도는 쉽게 이길 거란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을 먹일 식량을 확보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지셀을 꼬실 생각이었다. 제일 좋은 땅을 양보해서라도 말이다.
그런데 지셀 쪽에서 이렇게 먼저 식량을 준다고 하면, 굳이 끼워 줄 필요가 없었다.
'크큭, 애송이가 레이폴드의 명성에 겁을 먹었구나.'
'그것도 레이폴드 백작과 그 후계자들이 멀쩡할 때나 가능한 얘기지. 한낱 계집이 이끄는 군대가 뭐가 무섭단 말인가.'
'직접 전쟁에 참여하는 게 아니니 가장 좋은 땅은 우리끼리 상의해서 먹으면 되겠군. 적당한 보상만 챙겨 주면 될 거야.'
지셀의 약속을 받은 사신들은 희희낙락하며 돌아갔다. 이미 전쟁 준비는 거의 다 끝난 상태니, 식량을 받는 대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사신들을 돌려보내고 지셀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내 준비가 끝날 때까지 저놈들이 최대한 시간을 끌어 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어차피 저들은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아멜리아가 이 정도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전생에도 발루아 남작과 전쟁하는 동안 아멜리아의 뒤를 치려는 자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자신이 끼면 결과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지금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얼마 안 남았다.'
자신 때문에 모든 일이 전생보다 빠르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데스몬드 백작이 군대를 모으고 있다는 게 그 증거였다. 그렇기에 지금은 아멜리아와 싸우며 전력을 낭비할 수 없었다.
최대한 시간을 벌며 원하는 수준까지 준비를 끝마쳐야 했다. 아멜리아는 그다음에 처리해도 된다.
'그동안은 어떤 수작도 부리지 못하게 해야 해.'
뒤통수치는 데 도가 튼 여자다. 그래서 발루아 남작과 다른 영지들을 지원해 주며 발목을 잡으려는 것이었다. 그래야 그녀의 선택지가 하나라도 줄어들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라, 해럴드.'
모든 판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짜여 가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데스몬드 백작과의 일전뿐이다.
'나 때문에 북부의 모든 일이 꼬였으니 공작가와 해럴드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내전이 일어난다면 데스몬드는 반드시 이곳부터 치려고 할 것이다. 이제 북부에서 가장 강한 친왕파의 세력은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그래도 아직은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전생에도 공작가는 북부에서 내전을 시작하지도 않았다.
혹여나 북부에서 내전이 시작되더라도, 왕국군이 데스몬드 영지를 감시하고 있으니 갑자기 공격당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이 잠깐의 공백을 틈타 준비를 모두 끝내야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내전이 시작하자마자 데스몬드부터 밀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내전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죽여 버리겠다.'
그 생각을 하자 지셀의 가슴이 조금씩 뛰기 시작했다.
배후의 공작가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하긴 했지만, 어쨌든 페르디움을 직접 멸망시킨 건 데스몬드 백작이다.
전생에는 그의 시체를 몇 번이나 난도질했는지 모른다. 주변에서 보고 있던 수하들이 말릴 정도로 지셀은 엄청난 분노를 쏟아 냈었다.
페르디움 멸망은 없던 일이 되었으니 차치하더라도, 어차피 자신과 데스몬드 백작은 무조건 싸울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북부 제패를 위해서는 그놈을 반드시 죽여야 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생각한 대로 준비만 끝내면 압도적으로 승리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지셀은 묵묵하게 전쟁 준비와 병사들의 훈련에 힘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지셀이 가신들과 회의하던 중, 대전에 전령이 다급하게 들어와 외쳤다.
"데스몬드 백작이 군대를 일으켰습니다! 이곳을 향해 진군하고 있습니다!"
지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직 이쪽은 준비가 완벽히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놈이... 벌써 움직였다고?'
공작가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최대한 신중하게 움직이며 오직 공작가의 명령만 따르던 그놈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것도 왕국군이 바로 앞에서 감시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회귀 후 처음으로.
지셀이 짠 판이 뒤흔들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 * *
"빨리 움직여라! 어서! 데스몬드 백작이 군대를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이다!"
깜깜한 밤에 자다가 소식을 듣고 일어난 2군단의 군단장, 도렌 자작은 다급하게 군대를 이동시켰다.
목적지는 지셀이 카발디 백작을 공격했을 때 막았던 길목과는 다른 위치였다. 먼저 가서 진을 치고 막아야 했다. 그게 자신이 받은 임무였다.
'미친... 이게 지금 어떻게 된 일이지?'
도렌 자작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떠한 연락도 없었다. 심지어 전쟁을 일으키는 명분도 없었다.
데스몬드 백작은 그냥 막무가내로 군대를 일으켜서 펜리스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귀족의 품격이라고는 전혀 없는 행동.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도렌 자작은 더 무서웠다.
북부에서 최강이라 불리는 대영주가 그런 체면을 벗어던졌다? 이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도렌 자작은 옆에 있는 부관에게 물었다.
"속도는 그렇게 빠르지 않다고 했지? 그냥 펜리스에 무력 시위만 하려고 천천히 가는 건가? 그런 거면 좋겠는데!"
"그냥 무력 시위만 하려고 가는 건 아닌 거 같습니다."
"왜?"
"병력이 3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느린 겁니다."
"...오."
도렌 자작은 순간 멍해졌다. 이게 말이 되는 숫자인가? 아무리 대영주라지만 그 정도 병사를 모을 수 있는 건가?
믿을 수 없는 숫자에 오금이 저려 왔다.
곧 정신을 차린 도렌 자작은 억울하다는 듯 크게 외쳤다.
"젠장! 3만의 병력을 2군단만으로 어떻게 막으라는 거야!"
붙어서 이길 자신은 전혀 없었다. 데스몬드군은 북부에서 최고를 다투는 강병이다.
그나마 도로 건설에 참여했던 병사들이 돌아와 5천 명이 되었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북부 영주들은 쓸어버릴 수 있는 숫자지만 그래도 3만에는 어림도 없었다.
"제발 좋게 넘어가야 할 텐데. 그냥 뭔가 원하는 게 있어서 그런 걸 거야."
내전에 대비해 군대를 점검하고 대비하라는 명령은 내려왔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데스몬드 백작이 혼자 움직였다는 뜻이다. 도렌 자작은 그것에 희망을 걸었다.
"혼자서 친왕파와 싸우려는 생각은 없을 거야. 펜리스를 점령해도 어차피 우리가 다 움직이면 다시 뱉어 내야 하잖아. 그냥 뭔가 오해가 있었을 거야. 그렇지?"
"...."
계속 희망찬 질문을 던지는 도렌 자작의 모습에도 부관은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부관도 무슨 상황인지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에이씨! 그냥 빨리 달려! 대군이라 속도가 느리니 먼저 가서 길을 막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내가 차를 한잔하면서 달래 볼게. 뭐가 불만이냐고. 나한테 말을 좀 해 보라고. 내가 다 들어 주겠다고."
도렌 자작은 움직이면서도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그만큼 불안감이 컸던 것이다.
두두두두두!
멀리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우렁찼다. 그 소리를 듣고 도렌 자작은 이상한 예감을 느꼈다.
"왜 기마병이 전력으로 달리는 소리가 날까?"
2군단은 절반 이상이 보병이다. 속보로 이동하고는 있지만, 기마병이 달리는 속도에 맞출 수는 없다.
그래서 기마병들도 보병의 속도에 맞춰 움직이는 중이었다. 절대 전력으로 질주하는 소리가 날 리가 없었다.
두두두두두!
도렌 자작은 무려 왕국군의 군단장에 오른 몸. 이 상황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바보가 아니었다.
"습격이다! 전원 전투 준비!"
그의 외침과 동시에 병사들이 바로 전투 태세를 갖추며 진형을 만들었다. 과연 정예라 불리는 왕국군다운 빠른 움직임이었다.
두두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그런데 소리가 들리는 방향이 한 곳이 아니었다.
"이, 이게 무슨...."
갑자기 뒤에서도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는 건 시차를 두고 움직였다는 뜻이다.
'첫 번째 소리를 듣고 진형을 짜게 한 뒤 배후를 습격....'
두두두두두!
곧 말발굽 소리가 옆에서도 들려왔다. 도렌 자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야밤에 이동 중이라 주변을 제대로 살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적은 그런 부분을 훌륭하게 이용했다.
도렌 자작도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바로 대응책을 꺼냈다.
"불을 꺼라! 주위를 어둡게 해서 난전으로 유도해!"
주변의 모든 불이 꺼졌다. 첫 돌격은 맞을 수밖에 없겠지만, 기마병의 특성상 그 후에는 상대도 방향을 잃고 난전에 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장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하, 젠장... 오늘 왜 이렇게 밝냐."
하지만 도렌 자작은 운이 없었다. 달빛이 너무 밝았다. 그리고 상대도 도렌 자작이 어떻게 대응할지 예측한 거 같았다.
화악!
한쪽에서 갑자기 수많은 불빛이 피어올랐다. 그 수만 무려 천 개에 가까웠다.
도렌 자작은 그것을 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매복까지 있었구나...."
상대는 진심이었다. 정말로 왕국군까지 쓸어버리고 펜리스를 치려는 것이었다.
파아아아앙!
수많은 불화살이 왕국군에게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하늘을 수놓은 불빛들을 보며 도렌 자작은 중얼거렸다.
"데스몬드 백작이 미친 게 분명하군."
그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불화살들은 무자비하게 쏟아졌다.
파파파파팍!
"으아아아악!"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은 2군단의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이동 중이었으니 제대로 방어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상대가 정말 제대로 된 통보도 없이 이렇게 막 나올 줄은 몰랐다.
홀로 친왕파와 싸우려 하다니. 왕국의 누구도 이러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데스몬드 백작이 미쳤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두두두두두!
곳곳에 불이 옮겨붙으며 주변이 환하게 밝혀졌다. 말발굽 소리가 더 커졌다.
난장판이 된 2군단의 진형으로 기마병들이 사방에서 들이닥쳤다.
콰아아아앙!
"으아아악!"
"빨리 다시 진형을 갖춰라!"
"어떻게든 난전으로 유인해!"
곳곳에서 2군단의 장교들이 외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데스몬드군은 강군이라 불리는 2군단을 어이없을 정도로 손쉽게 쓸어버렸다.
도렌 자작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단하군.... 역시 데스몬드라는 건가."
자신들이 언제, 어떻게, 어디로 움직일지 예측하고 모든 준비를 끝냈다.
심지어 본대는, 여전히 느릿하게 펜리스로 향하고 있었다.
분명 첫 정보에는 기마대도 전부 본대에 속해 있었다. 중간에 기마대만 빠른 속도로 빠져나와, 타이밍에 맞춰 우회 기습에 성공했다는 뜻이다.
데스몬드에는 이런 일이 가능한 지휘관이 한 사람 있다. 바로 북부에서 기동전의 달인으로 유명한 자.
"에머슨."
일전에 자신이 길을 막아 카발디를 지원하는 데 실패한 자였다. 그가 움직였다면 충분히 이해가 갈 만한 상황이었다.
"이런... 항복도 받아주지 않겠군."
당시의 일로 분명히 속에 원한을 쌓아 뒀을 테니까.
과연 에머슨은 악귀 같은 얼굴로 웃으며 자신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도렌 자작!"
에머슨의 외침을 들은 도렌 자작은 한숨을 쉬며 검을 들어 올렸다. 아무래도 오늘은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거 같았다.
목숨은 진작에 포기했다.
다만....
"우리 딸 아카데미 학비는 이제 어떻게 하나...."
그것이 그에게 남은 유일한 걱정거리였다.
274화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1)
'...한 방 먹었군.'
데스몬드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지셀은 생각에 잠겼다.
해럴드가 예상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의 속도였다.
'너무 많은 게 바뀌었어.'
미래의 정보를 이용해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많은 것을 선점해 왔다.
원래는 이미 쪼그라들었어야 할 친왕파도 건재하고, 멸망했어야 할 페르디움도 살아 있다.
신기술로 수많은 이득을 본 것은 덤이다.
그 모든 게 자신이 미래에서 훔쳐 온 지식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미래를 바꾼 대가가 지금 오고 있었다.
"영주님! 데스몬드 백작이 미친 게 분명합니다! 내전도 아닌데 혼자 군사를 일으키다니!"
클로드가 사색이 되어서 외쳤다. 지금까지 펜리스 영지는 먼저 준비를 끝내고 기습적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전쟁을 해 왔다.
준비할 때야 몰랐어도 결과만 보면 항상 그런 상황이 되도록 판이 짜여 있었다.
하지만 지금 처음으로, 준비가 끝나기도 전에 적이 쳐들어온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지셀은 어떠한 감정도 내색하지 않고 담담하게 물었다.
"신형 활은 얼마나 제작됐지?"
지셀의 물음에 갈바릭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절반이 조금 넘게 완성됐소."
새로운 기술이 들어간 활이다. 마음먹는다고 뚝딱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활 하나하나를 완성하는 데는 무척이나 정교한 작업이 필요했으니까.
지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병사들의 무장은 얼마나 부족한 거지?"
클로드도 갈바릭과 비슷한 표정으로 답했다.
"절반도 채우지 못했습니다."
무려 1만에 가까운 병사들이 충원되었다. 이들의 무장을 전부 갈바니움 전신 갑옷으로 채우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아무리 생산 속도가 빨라졌어도 필요한 수량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영주가 왜 항상 '빨리빨리'를 외치는지 가신들은 이제야 뼈저리게 느꼈다. 원하는 만큼 준비가 안 되어 있으니 자신감이 점점 줄어들었다.
불안해진 가신들은 대전이 시끄럽게 떠들었다.
"병사들의 훈련이 부족합니다! 아니, 애초에 숫자부터가 상대가 안 됩니다!"
"잠깐은 2군단이 막아 줄 테니, 그사이에 협상을 하든 해서 시간을 끌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당장 친왕파에 중재를 요청합시다!"
병사들의 대부분은 훈련병이고 갈바니움 무장은 아직 전부 맞추지도 못했다.
병력 차이가 압도적이라 수성을 한다 해도 막아 내리란 보장이 없다. 설사 막아 낸다 해도 피해가 엄청날 것이다.
왁자지껄 떠드는 와중에 전령이 급하게 달려와 외쳤다.
"2군단이 전멸했습니다!"
가신들의 얼굴이 이제 완전히 창백해졌다. 그나마 믿을 건 친왕파의 도움뿐이었는데 그것마저 소용이 없게 되었다.
"진짜 미친 게 맞았구나."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미치지 않고서는 혼자 이렇게 날뛸 리가 없었다.
어떻게든 펜리스 영지를 밟아 버리겠다는 데스몬드 백작의 집요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그대로 공포로 돌아왔다. 영주가 아무리 대단해도 이번 일만은 해결할 수 없을 것이리라.
가신들이 생각한 것과는 그 이유가 조금 다르긴 했지만, 2군단이 전멸했다는 소식을 듣고 지셀도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절대 이렇게 멋대로 움직이는 놈이 아니었는데.'
전생의 해럴드는 이렇지 않았다. 그는 정교하게 공작가의 명령을 수행하는 데만 집중하고, 항상 주변의 상황을 살피며 신중하게 움직였다.
그가 군사를 모은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가능성을 열어 두긴 했다. 하지만 전생에 보고 듣고 겪었던 해럴드의 성정상 내전 때 움직일 확률이 가장 높다고 생각했다.
지금처럼 행동하는 건 절대 해럴드의 방식이 아니었다.
'혼자 움직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지만....'
그래서 언제나 바쁘게 쉬지 않고 움직였다.
단지 해럴드가 그의 예상보다 더 빨리 움직였을 뿐.
'모든 걸 버린 모양이군.'
아무리 대영지로 손꼽히는 데스몬드라도 병사 3만 명은 모으기 힘든 숫자다. 그들을 먹이는 데 필요한 물자 또한 모으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공작가와 친왕파의 관계까지 전부 무시했다는 건 스스로의 목숨도 버리겠다는 뜻이었다. 즉, 해럴드는 지셀을 죽이기 위해서 정말 자신의 모든 걸 걸고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소중한 것을 지키려 하는 자는 강하지만 모든 걸 버린 자는 무서운 법이다.
'전생의 나처럼 말이지.'
아직 준비가 끝나지 않은 펜리스는 데스몬드를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안일했군. 나도 모르게 전생의 정보를 너무 맹신한 거 같아.'
지셀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전생의 정보를 너무 믿은 것도 문제였지만, 자신이 해럴드를 너무 궁지에 몰아넣은 것도 이번 사태에 한몫했다.
상대도 생각할 줄 알고 감정이 있는 사람이다. 궁지에 몰리면 미쳐 날뛰며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게 당연하다.
회귀를 했다고 해도 그게 만능은 아니다. 자신이 미래를 바꾸면 바꿀수록 그 뒤에 이어지는 불확실성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불안에 떠는 가신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벨린다가 나서서 외쳤다.
"도련님! 제가 갈게요! 제가 가서 데스몬드 백작을 암살하고 올게요! 그러면 적들도 혼란에 빠질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준비할 시간을 충분히 벌 수 있어요!"
"안 돼. 성공 못 할 거야."
"할 수 있어요!"
벨린다가 고집을 부렸지만, 지셀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바네사가 나섰다.
"영주님! 이곳을 뺏길 수는 없어요! 제가 어떻게든 막아 볼게요!"
알포이가 그러지 말라고 바네사의 소매를 붙잡았다. 하지만 그녀는 냉정하게 뿌리치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어떻게 이곳을 발전시켰는데요! 다 같이 목숨을 걸고 싸우면 막을 수 있어요! 왜 다들 아무런 말이 없는 거예요! 우리 항상 이겼잖아요! 이길 수 있잖아요! 또 함정을 파든 뭐든 하자고요! 제가 마법으로 쉬지 않고 공격하면 되잖아요!"
바네사의 외침에도 다른 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마음은 알지만, 미련한 고집일 뿐이다.
보고 받은 전력만 병사 3만 명에 공성탑이 8대, 투석기가 12대다.
거기에 데스몬드 백작의 전속 마법사는 무려 6서클이다. 그 뒤를 따르는 마법사도 수십 명에 달한다.
바네사가 엄청난 화력을 내더라도, 상대가 그 공격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뜻이었다.
'서로 마법이 무력화되면 남은 건 병사들의 싸움이야.'
'기사들의 수가 100명이 넘는다고 하던데. 우리 기사들 같은 반쪽짜리가 아닌 진짜 기사가.'
'데스몬드의 병사들은 강병이다. 우리 병사들도 강하지만, 수에서 너무 차이가 나.'
제대로 된 무장병은 기존에 있던 4천 명이 전부였다. 분명 적은 병력은 아니지만, 상대 전력과 비교하면 턱도 없었다.
지셀도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가 생각해도 지금 맞붙는 건 위험했다.
'수성을 하려면 할 수는 있겠지만.... 병사들의 훈련 상태도, 무장도 너무 부족해. 피해가 클 수밖에 없겠어.'
진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하지만 피해가 크다면 이긴다 해도 이기는 게 아니었다.
지셀은 공작가뿐만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배후들과도 계속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한 번만 이겨 봐야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데스몬드를 이긴다 해도 끝이 아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은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렇기에 준비는 항상 빠르게, 그러면서도 충분하게 해 두어야 했다. 최대한 피해를 줄여야 적들과 계속 싸울 수 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아버지와 브랜포드 후작의 도움을 받는다면 부족한 병력을 채우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들이 병력을 보내는 사이에 신형 활도 거의 제작이 끝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정도 시간도 없었다. 그들이 병력을 보내길 기다리면서 수성을 했다가는 지금까지 키운 병력을 거의 다 잃을 것이다.
데스몬드 백작은 정말 좋은 타이밍에 움직인 것이다. 그것도 압도적인 병력을 이끌고서.
'어쩔 수 없지. 이번 한 번은 물러나는 수밖에. 계획을 다시 짜야겠군.'
생각을 마친 지셀은 눈을 뜨고 말했다.
"모든 물자와 병력을 옛 펜리스 지역으로 이동한다."
그 말에 가신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다. 펜리스 지역으로 이동한다는 건 카발디 지역을 포기한다는 뜻과 같았다.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다들 똑같은 마음이었다.
'아깝구나. 어떻게 발전시킨 영지인데.'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아직 3만의 대군을 감당할 수는 없으니까.'
'훗날을 도모하는 수밖에.'
가신들은 한편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막무가내인 영주가 훈련도 안 된 병사들을 데리고 싸우겠다고 하면 그것도 곤란했기 때문이다.
다들 지셀이 회귀한 걸 모르니 그저 고집불통에 막무가내라 오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셀은 언제나 아무 생각 없이 일을 벌인 적이 없었다. 항상 효율과 시간을 생각하며 움직였다.
성공한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위험을 무릅쓸 수 있었고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사람이, 큰 손해를 볼 게 뻔한 전쟁을 굳이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펜리스 성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펼치겠다. 그곳에서 나머지 준비를 마치고 재정비를 한 뒤, 다시 카발디 지역을 탈환하도록 하겠다."
클로드가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부터 전쟁에 대비해 증축해 놨으니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중요 시설들은 모두 파괴하고 최대한 빠르게 이동하도록 하자. 길리언과 카오르에게도 빨리 소식을 전하고 복귀하라고 일러라."
카발디 지역은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발전됐다. 거기에 철광석까지 넘치는 영지다.
어쩌면 데스몬드 백작은 카발디를 점령하고 만족할 수도 있다. 설령 그걸로 만족하지 않더라도, 카발디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려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 기뻐하고 있어라.'
아쉽지만 지금은 물러날 때였다. 준비가 끝나는 대로 재침공 계획을 짜고 기회를 잡아야 한다.
카발디 지역을 차지하고 더 강력해진 데스몬드를 상대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지셀의 명령에 따라 가신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소식을 듣고 겁에 질려 있는 영지민들을 안정시키는 것도 일이었다.
지셀은 영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말아라! 데스몬드 백작은 너희들을 건들지 않을 것이다! 꼭 다시 찾아오겠다!"
발전된 영지를 유지하려면 그만한 인구가 필요하다. 해럴드도 바보가 아니니 학살을 벌이진 않을 것이다.
2군단이 전멸했기에 데스몬드 백작의 발목을 잡을 군대가 없었다. 가신들은 똥줄이 타는 표정으로 더 바쁘게 움직였다.
데스몬드군이 진군 속도가 느린 편이어도, 먼 거리가 아닌 만큼 금세 도착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얼마 뒤, 수많은 훈련병과 물자들이 영주성에 도착했다. 길리언이 소식을 듣고, 남쪽 지역에서 훈련하고 있던 병사들을 보낸 것이다.
보고를 받은 지셀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길리언은?"
요새로 보낸 길리언과 100명의 기사, 그리고 1천의 병사가 돌아오지 않았다.
클로드는 무척 난감해하며 서신을 한 장 건넸다.
서신을 읽어 내려가던 지셀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영주님, 아직 완벽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라서 후퇴 결정을 내리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을 뺏기면 다시 재기하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절대 이곳을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신형 활과 병사들의 무장이 완성되면 분명 이길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목숨을 걸고 그 시간을 벌겠습니다. 저는 영주님께서 제게 하신 말씀을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 내가 반드시 영지의 가난을 끊어 낼 거야. 한 방울의 물이 아니라 비가 되어서 말이지.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일을 영주님은 결국 이루어 내셨습니다. 그리고 더 어려운 적과 싸우기 위해 지금 이곳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곳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저와 기사들이 어떻게든 시간을 벌겠습니다. 준비를 멈추지 마시고 반드시 승리하십시오. 그리하면... 영주님께서는 이제 비가 아니라 폭풍이 되어 이 북부를 덮을 수 있을 것입니다.]
"길리언...."
지셀은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길리언은 지셀의 꿈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려 하고 있었다.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클로드가 하나의 서신을 더 건넸다.
"이건 뭐지?"
"그곳에 있는 기사들이 적은 것입니다."
지셀은 다시 서신을 펼쳤다. 그곳에는 100명의 기사가 영주에게 건네는 글이 한 마디씩 적혀 있었다.
― 우리 꼴통 영주님 쫄았냐?
― 우리가 막아 줄게. 걱정하지 말라고.
― 병신, 매일 잘난 척하더니 쌤통이다.
― 저한테 왜 그랬어요.
― 아, 대장의 곤란한 표정을 못 봐서 그건 좀 아쉽네.
...
누가 용병 출신들 아니랄까 봐 허세와 욕들만 가득했다. 이왕 죽음을 각오하고 쓰는 거, 하고 싶은 말은 다 한 모양이었다.
지셀은 그걸 보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고개를 들고 한참을 웃은 지셀이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중얼거렸다.
"그래, 살다 보면 가끔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지. 계획은 계획일 뿐이니까."
완벽한 계획이란 건 없다. 지내다 보면 상황에 따라 대응도 바뀌는 건 당연한 거다. 결과만 완벽하면 된다.
"...저기, 지금 이상한 생각하시는 거 아니죠?"
불안한 어조로 묻는 클로드를 무시하며 지셀이 말을 이었다.
"사실 후퇴하는 거 마음에 안 들었어. 내가 너무 배려가 깊었지 뭐야. 왕국과 싸울 때는 안 그랬는데 말이지."
오랜만에 또 헛소리가 나온다. 클로드와 가신들은 더욱더 불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셀은 자기 할 말만 해 댔다.
"병사들의 훈련은 계속한다."
"네?"
"신형 활과 갈바니움 무장의 생산도 계속한다. 영지의 모든 인력을 전부 그쪽에 붙이도록."
"영주님! 맞붙으면 승산이 없다니까요! 영주님도 알고 계시니까 후퇴를 결정하신 거 아닙니까!"
"반대는 받지 않는다. 길리언과 기사들을 믿고 우리는 최대한 빨리 준비를 끝낸다. 그리고 그들을 구하러 간다."
손안에 있는 서신을 구긴 지셀이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해럴드 데스몬드는 이번 전쟁에서 죽는다."
275화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2)
요새, 스톤헤이븐.
펜리스 영지의 남쪽을 지키는 가장 크고 단단한 요새.
길리언은 이곳을 중심으로 남쪽 지역의 훈련병들을 관리하고 있었다.
"다 모였나?"
"네, 교관 말대로 다 모였수."
옆에서 건들거리며 답한 자는 자칭 '창술의 천재' 루카스.
빠르게 늘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현재는 길리언의 부관으로 임시 배속된 상태였다.
길리언은 훈련병과 철광석 등의 중요 자원을 전부 지셀에게 보냈다. 그리고 남쪽 지역에 흩어져 있던 병력과 식량들을 전부 이곳에 모았다.
"흠."
길리언은 성벽에 자리한 병사들과 기사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곳에 남은 건 기존에 훈련을 마쳤던 1천의 병사와 100명의 기사뿐이다.
병사들은 모두 차분한 은빛 갑옷을 입고 있었다. 모습만 보면 전원 기사들 같았다.
이들은 카발디 전쟁 때부터 참여해 지금까지 혹독한 훈련을 받아 온 정예 중의 정예들이었으니, 기사 같다는 평가도 아깝지 않았다.
그리고 100명의 기사는 모두 검은색의 신형 갑옷을 입은 상태였다. 이들은 십인장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즉 기사 한 명당 10명의 병사를 이끄는 것이다.
길리언은 알고 있다. 이들만 가지고도 어지간한 중소 영지는 이제 단번에 쓸어버릴 수 있다는 걸.
하지만....
길리언의 시선이 요새 밖을 향했다.
'데스몬드....'
저 앞에 진영을 꾸리고 있는 3만의 대군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데스몬드가 괜히 북부 최강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그 영지에는 수많은 정예와 수준 높은 기사들이 포진해 있었으니까.
저들을 이길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길리언은 절대 물러날 수 없었다.
길리언이 묵직한 목소리로 모두에게 말했다.
"우리의 목적은 저들을 이기는 게 아니다. 영주님이 얼마 남지 않은 준비를 마치실 수 있게 최대한 시간을 버는 것이다."
기사들이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길리언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곳이 뚫리면 적들이 영지의 중심까지 빠르게 갈 수 있다. 어떻게든 목숨을 걸고 저놈들의 발목을 잡아야 한다."
영지의 전 도시와 요새 사이에는 도로가 연결되어 있다. 이 요새가 뚫리게 되면 3만의 대군이 빠른 속도로 영주성까지 진격할 것이다.
옆에서 입맛을 다시고 있던 루카스가 말했다.
"그냥 후퇴하는 게 낫지 않나? 영주 성격상 우리가 죽는 걸 원하지는 않을 텐데. 성질은 더러워도 은근히 자기 사람 잘 챙기는 사람이잖아. 여기야 나중에 다시 찾으면 안 되나?"
길리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가 있는 사이에 여기가 너무 많이 발전했다. 데스몬드 백작이 이곳을 깔고 앉으면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친왕파가 나중에라도 도와주지 않겠어?"
"그럼 도와줬다는 핑계로 이곳을 그들이 차지하겠지. 되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전에 공작가가 데스몬드에게 군사를 지원해 줄 수도 있으니."
루카스는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본래도 철광석이 넘치던 카발디 영지는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발전했다. 사람들의 생활 수준도 높아졌고 이주민들을 받으며 인구도 많이 늘어났다.
이곳을 먹고 그냥 뱉을 영주는 아무도 없다. 오히려 영지 상태만 확실하게 알려지면서, 여길 노리는 자들과 의미 없는 싸움만 계속하게 될 것이다.
길리언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기사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이곳에 영주님의 꿈이 있다."
"...."
"우리도 영주님과 함께 여기까지 왔다.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해 왔는지 생각해라. 이곳을 뺏기면 지금까지의 노력은 의미가 없어진다."
한 기사가 손을 들고 물었다.
"도망가고 싶은 사람은 가도 됩니까?"
그러자 길리언이 사나운 웃음을 지었다.
"아니, 너희들은 나와 함께 영주님을 위해 이곳에서 죽는다. 목숨을 걸고 적들의 발목을 잡아라."
그러자 기사들이 키득거리며 한 마디씩 건넸다.
"어휴, 진짜 꼰대라니까."
"충성심 뭐야. 촌스럽게."
"용병 시절에 계약은 아주 잘 지켰겠어. 사람이 참 신의가 있어. 신의가."
"난 도망가서 다른 곳에서 잘 살고 싶은데."
깐족거리는 기사들을 보며 길리언은 다시 웃었다. 다들 비아냥거리지만 도망가는 놈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저들은 이제 단순한 수하들이 아니다. 지셀에게 은혜를 입고 성장했으며 많은 것을 함께 해온 '동료'들이었다.
둥! 둥! 둥!
북소리가 울린다. 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드드드드....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투석기였다. 그 수가 무려 12대.
기사들과 병사들은 요새를 둘러싼 투석기를 보고 조금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길리언이 손을 들고 말했다.
"전투 준비. 거리를 벌리고 투석기 공격에 대비해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거대한 돌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쾅! 쾅! 콰앙!
돌들은 사정없이 성벽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몇 개의 돌은 요새 안으로 떨어지며 모아 뒀던 물자와 건물들을 박살 냈다.
무자비하게 날아오는 공격에 펜리스군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다들 돌의 방향을 보고 정신없이 피하기에만 바빴다.
쾅! 쾅! 쾅! 쾅!
돌 조각이 튀며 비교적 약한 성벽의 위쪽이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간 단단하게 보강 작업을 했기에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해럴드는 투석기 공격을 멈추고 말했다.
"돈을 좀 많이 벌었다더니 요새를 보강하는 데도 신경을 많이 썼구나. 병사들에게도 저런 갑옷까지 입히고 말이야. 수도 제법 많군."
보이는 적군 전원이 기사들처럼 갑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해럴드는 저들이 진짜 기사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기사가 저 정도로 많다는 건 말이 안 되니까.
다만 갑옷 색이 다른 이들을 보며 문득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저놈들이 그 페르디움 공방전에서 활약했다던 검은 부대인가? 수가 그때보다 늘었군."
분명 50여 명으로 보고를 받았었는데, 얼핏 보니 지금은 100명 정도 되는 거 같다.
마나는 쓰지 못해도 실력이 꽤 뛰어나다고 들었는데 돈을 벌어서 검은 부대의 규모도 늘린 모양이었다.
아마 저들이 이 영지에서 기사 역할을 하는 놈들일 것이다. 마나를 쓰는 진짜 기사라는 뜻이 아니라, 보병보다는 실력이 나은 정예라는 뜻에서 말이다.
"투석기 공격은 조금 쉬었다가 다시 하도록 하지. 마법사들과 궁병들은 준비해라."
해럴드의 뒤쪽에 서 있던 하얀 수염의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윌로우라 불리는 데스몬드의 전속 마법사로, 무려 6서클에 이른 자였다.
"어떻게 할까요?"
"어차피 공성탑을 붙일 테니 그전까지 최대한 넓은 범위에 피해를 주도록. 진군하면서 땅에 함정이 있는지도 확인하라."
"알겠습니다."
윌로우가 손을 휘젓자 약 스무 명의 마법사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거리가 너무 멀기에 마법사들이 효과적으로 마법을 쓰려면 더 가까이 가야 했다.
둥! 둥! 둥!
다시 북이 울리고, 데스몬드군의 중보병들이 마법사와 궁병들을 호위하며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은 마력으로 땅을 훑으며 룬스톤 함정이 있는지 확인했다. 이미 한번 당해 봤기에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행보였다.
"함정은 없는 거 같군. 속도를 높여라."
윌로우의 말에 데스몬드군의 이동 속도가 더 빨라졌다.
길리언은 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적들을 노려보며 거리를 가늠한 뒤 외쳤다.
"쏴라!"
촤아아아아악!
순식간에 수천 개의 화살이 하늘을 뒤덮으면서 쏘아졌다.
펜리스군은 모든 무기를 쓸 수 있게 훈련을 받는다. 당연히 이곳에 남은 병사들 모두가 활을 어느 정도는 쏠 줄 알았다.
타타타타탕!
중보병들이 급하게 거대한 방패를 들어 올려 막았다. 갑자기 많은 화살이 날아와 깜짝 놀란 탓에 이들의 발이 잠시 멈추었다.
놀란 건 해럴드도 마찬가지였다.
"음? 뭐지? 전원이 궁병이었단 말인가?"
그의 상식으로는 아무리 정예군이라 해도 모든 무기를 다룰 수는 없다.
훈련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시간이지만 그만큼 훈련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이다. 다른 영주들이 굳이 병종을 나누면서 전문성을 키우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잘됐군. 다들 근접전에 약할 테니 빠르게 공성탑을 붙이면 되겠어. 바로 움직여라. 그리고 접근하기 전까지 다시 투석 공격을 시작하라. 정신없이 몰아붙이도록."
무려 8대의 공성탑이 천천히 이동을 시작했다. 동시에 중보병들의 보호를 받는 마법사들이 요새를 공격했다.
파아아아악!
중보병들 사이사이에서 거대한 불덩이들이 쏘아져 나갔다.
불덩이들은 병사들이 몰려있는 곳을 정확하게 향했다. 투석기의 공격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정교했다.
"뒤로 물러나!"
펜리스의 기사들이 갈바니움으로 만든 거대한 방패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기사들 아래 배속된 병사들은 자신들의 십인장 뒤로 숨거나 아예 몸을 피했다.
터엉! 터엉! 터엉!
"크읏!"
한 번 불덩이를 막을 때마다 속이 진탕되고 절로 몸이 뒤로 밀렸다. 하지만 기사들은 마나로 방패를 감싸며 이를 악물고 버텼다.
데스몬드군의 공격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중보병들과 함께 이동한 궁병들이 엄청나게 화살을 쏘아 댔다.
그와 동시에 투석기들의 공격도 재개되었다.
콰앙! 콰앙! 콰앙!
"피해! 피해!"
"흩어져! 화살 맞지 않게 머리 위로 방패 올려!"
"씨발! 이거 진짜 버틸 수 있는 거 맞아?"
기사들은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제대로 맞붙지도 않았는데 공격을 피하고 막기에만 바빴다.
자신들도 나름 강한 전력이라 할 수 있는데 데스몬드군 앞에서는 아무것도 못 할 지경이었다.
숫자가 깡패라고는 하지만, 이들이 밀리는 건 단순히 수적 차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데스몬드군은 요새의 병사들이 숨 쉴 틈도 없도록 정교하게 그들을 몰아붙였다.
도무지 뭔가를 할 틈이 없었다. 그나마 갈바니움 방패 덕분에 병사들도 화살 공격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위안이었다.
고오오오오!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공격도 미칠 거 같은데 하늘 위에서 엄청난 마력이 몰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고서클 마법의 전조 증상이었다.
데스몬드군의 공격을 정신없이 막거나 피하던 기사들이 고개를 들고 중얼거렸다.
"씨발... 장난 아니네...."
"우리 영주님은 이런 새끼들하고 싸우자고 한 거였어?"
"지금까지 만난 놈들하고는 차원이 다르구먼."
기사들의 넋두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하늘 곳곳에서 마력이 뭉쳐졌다.
캐스팅을 마친 윌로우가 여유롭게 손을 휘저으며 중얼거렸다.
"파이어 레인."
화아아악!
요새 위의 허공에서 수백 개의 거대한 불덩이들이 피어올랐다. 그것들은 순식간에 아래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무차별적으로 떨어지는 불덩이에 기겁하며 기사들이 외쳤다.
"모두 모여!"
앞에서 날아오는 건 자신들이 어떻게든 막을 수 있다. 하지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건 다 막아 줄 수 없다.
갈바니움 방패를 들었다 해도 병사들로서는 고서클의 마법을 제대로 버티지 못할 것이다.
기사들은 입고 있는 갑옷에 마나를 잔뜩 집어넣었다.
지이이잉!
검은색 갑옷의 틈 사이사이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갑옷에 새겨진 마법진이 활성화되며 반투명한 역장이 생기기 시작했다.
콰앙! 콰앙! 콰아아앙!
불덩이들은 사방으로 내리꽂히며 모든 것을 파괴했다. 단단한 돌바닥도 단숨에 파일 정도로 강력한 공격이었다.
과연 고서클의 마법답게 무시무시할 정도의 파괴력이었다.
하지만 역장을 뿜어낸 기사들과 그 주위의 병사들은 그을린 곳 하나 없이 안전했다.
스르륵.
기사들 주변에 떨어지던 불덩이들은 역장에 부딪히기도 전에 흩어져 버렸다.
성벽과 망루 등이 파괴되어 엉망이 됐지만, 기사와 병사들은 멀쩡히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윌로우가 중얼거렸다.
"디스펠? 설마 6서클 마법사가 있단 말인가?"
곳곳에서 퍼진 마력의 파동이 자신의 마법을 흩어 버리는 것을 느꼈다. 자신은 6서클이니, 마력을 흩어 해제하려면 최소한 동급의 마법사가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뭔가 좀 이상했다. 6서클 마법사가 있었다면 마법이 발동되기 전에 해제했을 테니까.
그리고 곳곳에서 느껴지는 마력도 자신의 마법에 비하면 좀 하찮은 크기였다.
"룬스톤을 이용해서 마법진을 설치한 건가? 돈이 썩을 정도로 많은가 보군. 그런데 어디서 6서클 마법사를 초빙해서 만든 거지?"
혀를 찬 윌로우가 다시 마법을 준비했다. 마법 도구로 막은 거라면, 그 도구가 아예 버티지 못하고 박살 날 때까지 공격하면 될 일이었다.
파아아악!
콰앙! 콰앙! 콰아앙!
한 번 더 마법을 시도했지만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흐음... 뭔지 모르겠지만 무척 잘 만들었는걸?"
불쾌해진 그는 다시 한번 마법을 준비했다. 6서클 마법이다 보니 마력이 엄청나게 빠져나가긴 하지만, 어차피 자신은 안전하니 마력이 떨어질 때까지 시도해 봐도 된다.
둥! 둥! 둥!
하지만 그가 다시 마법을 뿌리기 전에 공성탑이 움직였다. 윌로우는 혀를 차며 뒤로 물러났다.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꽤 자존심이 상했다.
해럴드는 무심하게 그 모습들을 지켜보았다.
사실 원거리 공격만 계속하며 며칠 동안 펜리스군을 지치게 해도 된다. 그렇게 하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왕국군이 움직이고 있겠지.'
이미 2군단을 전멸시켰다. 브랜포드 후작은 분명 군사를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지셀이 여기에 없었다.
'시간을 끄는 동안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놈이니까.'
친왕파의 압박, 꿍꿍이속을 알 수 없는 지셀. 두 가지를 생각하면 여기서 시간을 오래 끌 수는 없었다.
최대한 빨리, 압도적인 병력으로 밀어붙이고 펜리스를 점령해야 했다. 그래야 자신이 원하는 판을 짤 수가 있게 된다.
즉, 해럴드도 지셀과 마찬가지로 시간에 쫓기고 있었던 것이다.
드드드드드드.
그래서 단번에 병력을 쏟아부었다. 오늘 내로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서.
다가오는 공성탑들을 보며 기사들은 가쁜 숨을 내쉬었다.
갑옷의 능력을 발동시키고 마법 공격을 막느라 거의 절반의 마나가 빠져 버렸다.
"흐흐... 뭐 붙어서 싸우지도 않았는데 왜 벌써 지치냐."
기사들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벌써 이렇게 많은 마나를 사용했으니 앞으로 싸움이 더 힘들어질 게 뻔했다.
그래도 드워프와 마법사들이 만들어 준 이 갑옷이 아니었다면 큰 피해를 보았을 것이다.
드드드드드!
공성탑이 다가온다. 데스몬드의 궁병들은 견제를 하기 위해 연신 화살 공격을 날렸다. 공성탑의 위에 있는 궁병들도 성벽을 향해 화살을 쏘아 댔다.
방패를 들어 막기만 하던 루카스가 크게 외쳤다.
"교관! 어떻게 할 거야! 공성탑이 뭐 저렇게 많아! 존나 많이 몰려올 거라고!"
"기다려라. 공성탑이 붙는 게 우리한테도 낫다."
원거리 공격으로는 도무지 답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가만히 있다가 다 지쳐 죽을 것이다.
하지만 길리언은 적들도 다급한 상황이란 걸 알고 있었다. 펜리스군은 숨을 고르며 그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투웅! 투웅! 투웅! 투웅!
8대의 공성탑이 하나둘 성벽에 붙었다. 데스몬드군이 공성탑 아래에서부터 개미 떼처럼 올라오기 시작했다.
길리언은 살기를 띤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준비해라."
철컥! 철컥! 철컥!
기사들과 병사들이 모두 투구를 내려 완전히 몸을 감쌌다. 지금까지는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안면 가리개를 열고 있었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데스몬드군은 펜리스에서 화살 공격조차도 날아오지 않자 조금 더 대담하게 움직였다.
더 많은 병력이 공성탑 안으로 끊임없이 들어갔다.
터엉! 터엉! 터엉!
공성탑의 들다리가 성벽에 걸쳐졌다. 펜리스군은 공성탑을 노려보았다. 탑 안에 살기등등한 데스몬드의 병사들이 잔뜩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지이잉―!
펜리스 기사들의 갑옷 틈 사이에서 다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들의 눈빛에도 데스몬드군처럼 살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길리언이 방패를 버리고 두 개의 거대한 도끼를 꺼내 들었다.
그가 목소리에 묵직한 살기를 실어 입을 열었다.
"잘 왔다. 이제 제대로 싸워 보자."
276화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3)
"어?"
공성탑에서 나가려던 데스몬드의 병사들은 지금껏 겪어 보지 못한 상황에 직면했다.
콰아앙!
가장 먼저 길리언이 공성탑으로 들어가 도끼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어 기사들이 하나둘씩 공성탑으로 뛰어들었다.
콰앙! 콰앙!
갑작스럽게 공격을 당한 데스몬드군의 비명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으아아악!"
"뭐야! 이 새끼들!"
"막아! 막으라고!"
공성탑 안은 생각보다 좁다. 병사들이 빽빽하게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이잉―!
펜리스 기사들이 움직일수록 갑옷에서 밝은 빛이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이들은 순식간에 늘어난 근력과 속도를 이용해, 가까이 붙어 있는 병사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파바바바바박!
검과 창이 움직이는 속도가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병사들의 목이 날아가고 몸이 뚫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펜리스 기사 모두가 상급 기사에 근접하는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데스몬드의 병사들이 아무리 정예병이라 해도 막을 수 없었다.
퍼엉! 퍼엉! 퍼엉!
종국에는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공기가 터지는 소리마저 들려왔다.
펜리스 기사들은 힘을 아끼지 않았다. 마나가 미친 듯이 뿜어져 나오며 주변에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
― 첫 공격은 압도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적의 기세를 꺾을 수 있다. 특히 우리의 수가 더 적다면 말이지.
훈련 때마다 지셀이 하는 말이었다. 이들은 그 말을 언제나 가슴에 새겼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그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야 하는 때였다.
'밀리면 계속 들어온다!'
다들 같은 생각이었다. 시간제한이 있는 힘이니만큼 더더욱 몸을 사리면 안 된다.
어떻게든 지금 적의 기세를 끊고 잠시 물러나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적은 끊임없이 몰려올 것이다.
펜리스의 기사들은 그런 생각으로 목숨을 도외시하면서까지 힘을 아끼지 않았다.
콰아아앙!
"으아아아악!"
데스몬드의 병사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제대로 대응도 못 하고 죽어 나갔다.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한 기사들의 공격이다. 상급 기사에 육박하는 힘을 뿜어내는 그들 덕분에 데스몬드군은 공성탑에서 단 한 사람도 나오지 못했다.
그중에서도 발군은 역시 길리언이었다.
하나의 공성탑에 10명에 가까운 기사들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혼자서 하나의 공성탑에 들어간 상태였다.
길리언은 양 떼들 사이에 들어간 사자와도 같은 무시무시한 모습이었다.
콰직!
도끼가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단번에 몇 명의 몸이 쪼개져 갔다. 어찌나 힘이 강한지 병사의 목을 벤 길리언의 도끼가 공성탑의 내부에 박힐 때도 있었다.
콰앙! 콰아앙!
길리언의 공격이 거세어질수록 공성탑마저 떨리는 듯했다.
출구까지 열심히 올라온 데스몬드의 병사들은 순식간에 전멸당했다.
"뭐, 뭐야! 이 괴물은!"
"밀어붙여! 밀어붙이라고!"
"크아악! 기사들이 올라와야 해!"
길리언은 아예 올라오는 계단을 막아서고, 다가오는 적들을 족족 쳐 죽였다.
적군은 아직 공성탑만 먼저 움직인 상태였다. 적의 견제를 피하려면 공성탑을 먼저 성벽에 붙이고, 그걸 통해 침입한 병사들이 시간을 버는 사이 사다리를 붙이는 게 정석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아직은 공성탑의 출구만 막으면 적이 공격할 길이 없다는 뜻이었다.
좁은 길목은 소수의 강자로 막을 수 있다. 길리언과 펜리스의 기사들은 그렇게 적들이 나올 구멍을 틀어막았다.
그동안 펜리스의 병사들도 놀고만 있던 건 아니었다.
"쏴라! 계속 쏴!"
공성탑의 가장 높은 곳에서는 데스몬드의 병사들이 화살을 쏘며 병사들을 견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펜리스군은 전부 갈바니움으로 만든 전신 갑옷을 입고 있다. 방패로 미처 막지 못해도, 전신 갑옷을 입은 덕분에 화살에는 그리 큰 피해를 받지 않았다.
눈먼 화살을 몇 번 맞고도 멀쩡한 걸 알게 된 펜리스의 병사들은 점점 자신감을 품고 대응하기 시작했다.
쐐애애액!
펜리스군도 똑같이 공성탑의 최상층을 향해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저놈들 전부 판금 갑옷을 입고 있어!"
"공격이 제대로 안 통하잖아!"
"숙여! 몸 숙이라고!"
탑 내부와 마찬가지로 최상층의 궁병들도 혼란에 빠졌다.
전신 판금 갑옷을 단순한 화살로 뚫기는 쉽지 않다. 충격은 줄 수 있겠으나, 관절이나 목 부분 등을 조준하지 않는 이상은 공격이 크게 효과가 없었다.
한쪽은 맞으면 죽는데 한쪽은 맞아도 죽지 않는다. 교전비가 맞지 않으니 상황은 펜리스군에게 점점 유리해졌다.
사다리가 걸쳐지고 데스몬드군이 올라올 때쯤에는 공성탑 최상층의 궁병들이 거의 전멸한 상태였다.
그래도 데스몬드군은 개의치 않는 듯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올라가라! 숫자로 밀어붙여!"
곳곳에 있는 지휘관들의 외침에 데스몬드군의 병사들이 크게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
공성탑 사이사이에서 사다리를 타고 데스몬드의 병사들이 개미 떼처럼 올라오기 시작했다.
"막아라!"
길리언이 외치자 펜리스 기사 중 일부가 공성탑에서 튀어나왔다. 길리언이 있던 공성탑에도 다른 기사가 들어갔다.
절반의 기사들은 공성탑의 출구를 틀어막았고, 나머지 기사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적들을 상대했다.
콰앙! 콰앙!
"으아아악!"
올라온 적들도 별수는 없었다. 길리언은 피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채로 쉬지 않고 적들을 죽여 나갔다.
그는 기사들처럼 신형 갑옷을 입지 않았다. 지셀의 가르침 덕분에 이미 그 수준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쉬지 않고 날뛰는 길리언과 달리, 기사들의 기세는 다소 약해졌다. 갑옷 틈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전보다 조금 줄어들었다.
'젠장, 손이 떨리기 시작하네.'
'마나가 바닥을 치고 있어.'
'이제 얼마 못 버틴다.'
초반의 마법 공격에 버티느라 너무 많은 마나를 사용했다. 스스로의 움직임이 전보다 굼떠진 게 확연히 느껴졌다.
이대로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제풀에 피를 토하고 쓰러질 것이다.
"와아아아아아!"
하지만 힘이 떨어진 기사들의 빈틈은 병사들이 채워 주었다. 공성탑의 견제에서 벗어난 병사들은 진형을 갖추고 성벽 위의 적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창으로 연신 적을 찌르던 루카스가 그 모습을 보고 크게 웃었다.
"하하핫! 이 새끼들도 정말 쓸 만하잖아!"
갈바니움 전신 갑옷은 정말 대단했다. 훈련된 정예인 데스몬드의 병사들이 펜리스 병사들의 갑옷을 제대로 뚫지 못했다.
뛰어난 방어력 덕분에 펜리스군은 수가 더 많은 데스몬드군을 압도할 수 있었다.
공격하는 기세가 한풀 꺾인 것을 느끼고, 데스몬드의 기사 수십 명이 사다리를 타고 훌쩍 성벽 위에 뛰어올랐다.
카가가각!
"크윽!"
데스몬드의 기사가 마나를 담은 검을 휘두르자 펜리스 병사의 갑옷이 길게 갈라졌다.
비틀거리는 병사를 따라가며 기사가 다시 검을 휘두르려고 할 때.
콰앙!
길리언의 도끼가 어디선가 날아와 기사의 머리를 단숨에 날려 버렸다.
"기사들부터 상대해라! 병사들은 내버려 둬!"
쩌렁쩌렁한 길리언의 외침에 펜리스의 기사들이 데스몬드의 기사들에게 달라붙었다.
어차피 병사들끼리의 싸움은 이쪽이 압도적이다.
지이잉―!
다시 펜리스 기사들의 갑옷에서 밝은 빛이 강하게 뿜어져 나왔다.
'생각하기 귀찮다. 그냥 오늘 뒈지자.'
그들은 모두 마나를 아끼지 않았다. 원래 목표는 최대한 시간을 끄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도 버렸다.
그런 마음으로 싸웠다가는 어차피 밀린다. 적들의 수가 너무나도 많았다.
'그럴 바에는 한 새끼라도 더 죽이는 게 낫지. 그냥은 안 죽는다, 이 새끼들아.'
독기가 잔뜩 오른 펜리스의 기사들. 그들이 한계까지 힘을 아끼지 않고 뽑아내니 그 기세가 실로 대단했다.
콰아앙!
"크윽! 이 새끼들 도대체 뭐야!"
데스몬드의 기사들은 연신 뒤로 밀려 났다. 몇몇은 순식간에 목이 날아갔다.
이들이 아무리 정예 병력에, 타 영지의 기사들보다 강하다 해도 모두가 상급 기사의 수준에 이른 건 아니다.
갑옷의 도움을 받아 모두가 상급 기사에 근접한 수준까지 올라간 펜리스 기사들의 힘을 당할 수는 없었다.
차분하게 시간을 끌면 쉽게 이길 수 있겠지만, 데스몬드군에는 그걸 아는 사람이 없었다.
"더! 더 밀어붙여라!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길리언의 얼굴은 악귀와도 같았다. 눈에서 불길이 쏟아지는 듯했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버티고 밀어내야 한다.'
펜리스 기사들의 힘에 시간제한이 있다는 건 그도 잘 알고 있다. 전보다 사용 시간이 더 늘어나긴 했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에 다다른 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멈추면 안 된다. 첫 전투부터 밀리면 그들이 남은 의미가 없었다.
'지금 밀리면 끝이다.'
한번 밀리면 저 대군은 폭풍처럼 덮쳐올 것이다. 그러면 시간을 끌 수가 없다.
조금이라도 더 버티려면 오히려 지금 최선을 다해 강력한 힘을 보여 줘야 한다.
그래야 적들이 다음 전투부터 더 조심스럽게 움직일 테니까.
'그럴수록 영주님이 쓰실 시간이 늘어난다.'
적을 막거나 이길 수는 없다. 아무리 강해도 저 숫자 앞에서는 그건 불가능하다. 오직 할 수 있는 건.
'영주님이 오시기 전까지만 버틴다.'
길리언은 그 마음으로 적들을 죽여 나갔다.
"힘을 내라! 반드시 지킬 수 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기사들을 독려하던 길리언은 옆구리가 따끔해지는 걸 느꼈다.
푸욱!
고개를 돌리니 은밀하게 다가온 데스몬드의 기사 하나가 검을 찔러넣고 있었다.
아무리 혼전이라지만 그 틈을 타서 몰래 들어오다니. 역시 대단한 놈들이었다.
길리언의 입술이 잠시 씰룩거렸다.
데스몬드의 기사는 자신의 공격이 성공했다고 생각했는지 입꼬리를 비틀며 웃고 있었다.
"건방진...."
길리언은 바로 몸을 돌려 기사의 목을 우악스럽게 잡았다.
"커헉!"
콰직!
그것이 기사의 마지막 외침이었다. 길리언은 기사의 목을 잡은 채 머리를 도끼로 내리쳤다.
그는 일부러 더 과격하고 잔인하게 적들을 죽였다. 피투성이가 되어 날뛰는 맹수와도 같은 모습에 데스몬드군은 기가 질렸다.
"죽고 싶은 놈은 누구든지 와라!"
콰아아앙!
도끼를 든 길리언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바닥이 갈라진다. 마나가 담긴 그의 외침은 주변의 공기를 모두 터뜨리는 것만 같았다.
길리언이 다가갈 때마다 데스몬드군은 기사와 병사를 가릴 거 없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경악스러워하는 눈으로 길리언을 바라보았다. 도무지 넘을 수 없는 벽을 보는 듯했다.
길리언뿐만이 아니라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도 강하긴 마찬가지였다. 이곳은 괴물들 천지였다.
"이, 이 괴물 같은 놈들...."
"고작 이 정도 숫자로...."
"어째서 펜리스에 이런 놈들이...."
데스몬드군은 헛웃음을 흘렸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압도적인 병력으로 밀어붙였는데, 오히려 밀리는 건 자신들이었다.
펜리스 백작 말고도 이런 강자들이 즐비할 줄은 정말 몰랐다. 무장 덕분인지 병사도 하나하나가 준기사급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펜리스군이 제법 뛰어나다는 소문은 있었기에 정예병 수준은 될 거라고 짐작했다. 그렇게 교육을 받았고 다들 상대가 쉽지는 않을 거라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왔다.
하지만 이건 일반적인 군대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 군대였다.
놀란 건 멀리서 전황을 지켜보던 해럴드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어떻게... 저런....'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요새를 단숨에 점령하려고 이번 공격에 무려 5천의 병력을 쏟아부었다.
그런데 그 대군도 요새를 점령하기는커녕 제대로 적을 죽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게 말이 되는가? 지셀 그놈이 저런 군대를 만들어 냈다고?'
검은 갑옷을 입은 자들은 확실히 기사 수준으로 보였다. 그것도 최소한 중급 이상의 실력자들이다.
거기에 병사들은 죄다 전신 판금 갑옷을 입고 있었다. 이래서는 일반 병사들로 죽이기가 무척 힘들어진다.
게다가 적군이 전부 궁병이라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근접전 실력도 무척 뛰어났다.
고작 1천으로 1만의 군사를 상대할 만한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내가... 정말 그놈한테 죽을 뻔했구나.'
모골이 송연해졌다. 펜리스 영지에서 최근에 대규모 병력을 모집했다.
만약 자신이 조금만 더 늦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10만을 끌고 왔어도 그놈을 죽일 수 있었을 거라 장담할 수가 없었다.
저만한 기사들을 모집한 것도 놀랍지만, 지휘관으로 보이는 인물은 더욱 뛰어났다.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키웠던, 북부제일검을 노리던 빅토르와 비슷한 수준... 어쩌면 그 이상도 될 것으로 보였다.
그 실력도 실력이지만, 하얗게 센 머리가 피로 붉게 물들 정도로 거침없고 과격하다.
그야말로 목숨을 걸지 않았다면 보일 수 없는 행동이었다.
뛰어난 인재들과 강력한 장비로 무장한 병사들. 그놈은 언제 이렇게 사람들을 모으고 키웠단 말인가.
해럴드는 눈을 감았다.
'천운이다. 하늘이 나를 도왔구나.'
공작가의 명령도, 친왕파와의 관계도 생각하지 않고 움직였다. 후일을 고려하지 않는 건 자신답지 않았지만, 그러지 않았다면 자신은 확실히 그놈한테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애송이가 아니었어.'
빅토르를 잃은 이후, 지셀 페르디움이 운도 좋지만 능력도 있긴 하다고 평가를 바꾸었다. 그런데 그것도 착각이었다. 능력이 있다는 것마저도 너무나 박한 평가였다.
괴물이다. 지셀이란 놈은 왕국을 뒤집어엎을 괴물이었다. 저런 전력을 차근차근 준비하고 키울 만큼 심계도 깊은 놈이었다.
공작가도, 자신도 지셀이 어떤 자인지 제대로 몰랐다. 그렇기에 계속 당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다행이구나.'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었다. 이제야 그놈을 파악할 수 있었다. 놈이 무엇을 준비하고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오히려 그놈이야말로 내전을 기다리고 있었군.'
내전이 언제 일어날지는 누구도 정확하게 모른다. 그건 공작가가 결정할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셀이라면, 자신의 준비가 끝나는 대로 먼저 내전을 일으켰을 게 분명했다.
저 무시무시한 군대로 북부를 집어삼키기 위해서 말이다.
'됐다. 그놈은 이번 전쟁으로 끝이다.'
눈앞에 있는 놈들은 분명 대단하지만, 고작 1천에 불과하다. 압도적인 숫자 앞에서는 쓰러질 수밖에 없다.
생각을 마치고 마음을 다잡은 해럴드는 손을 들었다.
"허튼 남작."
"네, 백작님."
해럴드의 부름에 중년의 남자가 곁으로 다가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는 데스몬드의 봉신으로 허튼 남작령의 주인이자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기사이기도 했다.
"적 지휘관을 죽일 수 있겠나? 저 하얀 갈기의 사자 같은 남자를 말이다."
허튼 남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성벽을 바라보았다. 잠시 길리언의 움직임을 쫓던 그는 다시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맡겨 주시지요."
277화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4)
해럴드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허튼 남작은 데스몬드 진영에서 개인 무력으로는 한 손에 꼽히는 실력자였다.
"좋다, 다른 놈은 신경 쓰지 말고 저놈부터 우선 죽이도록."
"알겠습니다."
허튼 남작이 바로 말을 타고 달려 나갔다. 그는 요새로 다가가는 와중에도 계속 길리언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무자비한 힘으로 이쪽의 기사와 병사들을 쉬지 않고 도륙하고 있는 자.
만약 정상적인 상황에서 붙었다면 허튼 남작 자신도 감히 그를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는 실력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도 계속된 전투로 힘이 많이 떨어진 게 눈에 보였다. 기세는 갈수록 흉포해졌지만, 그 힘과 속도는 처음보다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전쟁의 긴장감과 전투의 피로는 쉬이 볼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지금쯤이면 괜찮겠군.'
성벽 가까이 도착한 그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더니, 단 두 번의 도약만으로 사다리를 타고 가볍게 성벽 위에 올라갔다.
그러고는 길리언을 바라보며 검을 뽑았다.
차앙!
귀에 꽂히듯이 들려오는 소리에 길리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검을 뽑는 소리만으로도 알 수가 있었다. 상대가 만만하지 않은 적이라는 걸.
'드디어 진짜가 나타났군.'
가볍게 걸어오고 있지만 한 걸음 한 걸음마다 강대한 힘의 파동이 느껴진다.
길리언은 자세를 고쳐잡고 정면으로 허튼 남작을 바라보았다.
허튼 남작도 가까이서 길리언을 확인하고는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어쩌면... 오늘이 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구나.'
눈앞에 있는 자는 상처 입고 독이 바짝 오른 맹수였다. 한 번이라도 실수했다간 자칫 이쪽의 목이 물어뜯길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대.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거친 기세에 감히 다가가기가 힘들 정도였다.
둘 다 단번에 서로의 실력을 알아보았다.
두 사람은 어떠한 말도 내뱉지 않고, 바로 서로를 향해 무기를 내질렀다.
카아아아앙!
도끼와 검이 만나는 순간, 날카로운 굉음과 함께 강한 불꽃이 튀었다.
두 사람의 무기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움직였다. 무기가 부딪칠 때마다 강렬한 충격파가 주변에 퍼져 나갔다.
콰앙! 콰아앙!
어느 순간 두 사람의 주위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뿜어져 나오는 충격파를 견디기 힘들어 물러난 것이다.
파앙!
길리언의 도끼가 허튼 남작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허튼 남작은 검을 들어 올려 도끼를 쳐냈다.
카앙!
강렬한 반탄력에 서로의 자세가 흐트러지며 잠깐의 틈이 생겼다.
허튼 남작이 심유한 눈으로 길리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분명 펜리스 백작의 수하들은 대부분이 용병들이라 들었는데.... 이름이 뭐지?"
"길리언."
"비천한 용병 주제에 제법이군. 나는 허튼 남작이다. 오늘 널 죽일 사람이지."
길리언은 피식 웃으며 허튼 남작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은 여전히 맹렬한 적의로 가득 차 있었다.
"어린놈의 새끼가 시건방진 말을 지껄이는구나."
거친 대답에 허튼 남작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눈앞에 있는 상대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긴 했지만, 자신도 이미 중년에 접어든 터. 어리다는 소리를 들을 나이는 아니었다.
길리언의 말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그의 정체성은 용병이다. 누구보다 거친 세월을 살아온 자로서, 허튼 남작의 말은 도발 축에도 들지 않았다.
"나한테 그런 말을 한 새끼들이 많긴 했지. 지금은 다 땅속에 파묻혀 있지만 말이다. 칼은 나이와 신분을 가리지 않는다."
젊은 시절부터 수없이 많은 사선을 넘으며 살아온 길리언이다. 허튼 남작처럼 오만한 실력자를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하지만 용병들의 세계에서는 살아남는 자가 가장 강한 자다.
길리언은 머리가 하얗게 셀 때까지 살아남았다. 그것은 그가 살아온 삶을 증명하는 자부심이었다.
허튼 남작은 살짝 웃으며 답했다.
"예의가 없는 놈이군. 누가 땅속에 묻힐지는 두고 봐야겠지."
콰앙!
두 사람은 다시 맞붙기 시작했다. 마치 두 사람이 싸우는 공간만 다른 세계가 된 것만 같았다.
펜리스의 기사와 병사들, 데스몬드의 기사와 병사들도 어느 순간 전투를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두 사람이 맞붙으며 이동하는 범위가 갈수록 커져 갔기 때문이다. 괜히 근처에 있다가 말려들면 몸이 갈가리 찢어질 수도 있었다.
콰앙! 콰아앙!
바닥이 깨지며 돌들이 튀어 나갔다. 그 파편에 맞은 병사가 그대로 쓰러질 정도로 여파는 강력했다.
허튼 남작의 검술은 누가 봐도 감탄을 내지를 정도로 군더더기가 없고 깔끔했다.
그야말로 기사의 정석이라 할 수 있는 검술.
펜리스와 데스몬드, 양쪽의 기사들은 절제되고 품격 있는 그의 검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특히 펜리스 기사들이 느끼는 놀라움은 컸다.
'엄청나다....'
'그냥 검술 교본 그 자체야.'
'세상에는 뛰어난 사람이 정말 많구나.'
그들이 가장 많이 본 검술은 지셀의 것이다. 하지만 지셀의 검술은 그들 수준에서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어떨 때는 보는 사람을 감동시킬 정도로 우아하고 어떨 때는 모든 걸 찢어발길 정도로 광폭하다. 지셀의 움직임은 어떤 무기를 쓰는지, 어떤 상황인지에 따라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변화무쌍했다.
그러니 봐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저 간혹 그가 보이는 실력에 경악하는 것 외에는 다른 감상이 끼어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허튼 남작은 다르다. 그의 검술은 기사가 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보여 주는, 정석 그 자체였다.
콰아앙!
그에 반해 길리언의 움직임은 마치 굶주린 맹수와도 같았다.
조금이라도 한눈을 팔면 바로 목을 물어뜯기고 온몸이 분쇄될 듯한, 흉포하고도 거친 살기가 느껴진다.
데스몬드의 기사들은 오히려 길리언의 공격을 보며 감탄을 토해 냈다.
'지극히 실전적이다.'
'어디서 무기가 날아올지 전혀 예측할 수가 없어.'
'저런 움직임이 어떻게 가능한 거지?'
공격 하나하나가 하늘에서 내리치는 벼락과도 같았다. 자신들의 실력으로는 피할 수도, 막아 낼 수도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두 사람 다 유형만 다를 뿐 똑같은 괴물이었다.
푸슉!
허튼 남작의 검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길리언의 팔과 다리 곳곳이 베이며 피가 솟구쳐 올랐다.
허튼 남작의 몸은 깨끗하다. 아주 작은 상처조차도 입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치명타를 줄 수가 없다.'
상대는 과격할 정도로 공격 일변도였다. 어지간한 공격은 몸으로 받아내면서 자신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분명 상처를 더 많이 입고 피투성이가 된 건 상대 쪽이다. 하지만 싸우면 싸울수록 밀리고 있는 건 자신이었다.
상대의 도끼는 무자비한 힘을 품고, 날카로운 각도로 날아왔다. 조금이라도 정신이 흐트러진다면, 한 대라도 맞는다면 작은 상처로 끝나진 않을 것이다.
길리언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허튼 남작을 노려보았다.
'미꾸라지 같은 놈.'
보통 이 정도로 밀어붙이면 상대는 점차 조급해하며 자세가 흐트러지게 된다. 하지만 허튼 남작이란 놈은 잔잔한 호수와도 같은 침착함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저런 건 아무나 보일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자신의 감정을 철저하게 통제하며 싸움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자만이 가능하다.
길리언의 입장에서 상대하기가 가장 까다로운 유형이 바로 허튼 남작과 같은 사람이었다.
콰앙! 콰앙!
무기를 맞부딪치는 동안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했다.
'이대로는 끝이 나지 않는다.'
체력 싸움으로 들어가면 어느 한쪽이 지쳐야 끝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쟁 중이다. 두 사람의 움직임 때문에 본의 아니게 잠시 소강상태가 됐고, 기사들의 대결이라 관습상 끼어들지 않는 것뿐이다.
양측 다 전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흉흉한 모습으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오래 끌어서 좋을 게 없었다.
그리고 이 전투의 승자가 있는 쪽은 높아진 사기로 상대측을 밀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길리언은 상대를 죽이기 위해 더 거친 수를 써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기회를 주지.'
콰앙!
다시 무기가 맞부딪치며 튕겨 나간다. 길리언은 그대로 자신의 가슴을 내보이며 도끼를 꽉 잡았다.
'와라.'
상대를 향한 도발이자 미끼다. 허튼 남작이 그걸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알면서도 그걸 받아 주었다.
'승부를 내지.'
허튼 남작이 눈을 빛내며 길리언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었다. 동시에 길리언의 도끼가 허튼 남작을 향해 내리꽂혔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원초적인 공격.
누가 더 강하고 빠르냐에 따라 승부가 갈린다.
쐐애애액!
마나를 한껏 머금은 허튼 남작의 검이 빛살처럼 쏘아져 나간다.
푸욱!
길리언의 도끼가 반도 휘둘러지기 전, 온 힘을 다해 내지른 허튼 남작의 검이 먼저 깊숙하게 꽂혀 들어갔다.
살을 뚫는 감촉에 허튼 남작이 미소를 지었다.
'끝이다.'
하지만 허튼 남작은 몰랐다. 이 길리언이란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
"...?!"
심장이 뚫렸음에도 길리언의 도끼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악마같이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그대로 도끼를 내리찍었다.
허튼 남작은 본능적으로 검에서 손을 놓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콰아아앙!
쩌억!
허튼 남작의 흉갑이 깨어지며 가슴이 쩍 하고 벌어졌다.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허튼 남작은 의문스러운 눈으로 길리언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분명 심장을....'
자신의 검이 꽂힌 위치를 확인하고 허튼 남작이 한쪽 눈을 찡그렸다. 검은 그가 처음 노렸던 위치에서 아주 살짝 벗어나 있었다.
'설마... 도끼를 휘두르면서 자세를 바꿨나?'
무기를 휘두를 때는 자세가 바뀜에 따라 몸의 위치도 미묘하게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걸 모르는 허튼 남작이 아니다. 당연히 상대의 몸이 움직이기 전에 찔렀다.
하지만 그 찰나의 타이밍조차 길리언이 건 도박이었다. 상대가 찌르는 순간에도 공격을 멈추지 않으면, 조금이나마 자세가 바뀌고 치명상을 피할 가능성이 생긴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평생 싸워 온 자만이 쓸 수 있는 대범한 수였다.
파아악!
가슴에서 피를 뿜어내며 비틀거리던 허튼 남작이 무릎을 꿇었다.
"쿨럭!"
"남작님!"
데스몬드의 기사들이 달려와 피를 토하는 허튼 남작을 부축했다. 깊은 상처였지만 아직 숨이 붙어 있다.
"어서 남작님을 모셔라!"
허튼 남작이 부하들에게 부축받으며 뒤로 물러났다.
길리언도 몇 걸음 비틀거리며 물러난 뒤에 가슴에 꽂힌 검을 뽑아내었다. 도끼를 쥔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죽이지 못했다.'
허튼 남작이 순간적으로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도끼가 얕게 들어갔다. 그 상황에서도 그런 판단을 내리다니, 역시 대단한 놈이었다.
"교관!"
펜리스의 기사들도 달려와서 길리언을 부축했다. 꼿꼿하게 서 있긴 하지만 딱 봐도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구멍 뚫린 가슴에서는 계속 피가 새어 나왔고, 꽉 다문 입술에서도 조금씩 피가 흘러나왔다.
정말 멀쩡했다면 멈추지 않고 바로 후속타를 날렸을 것이다.
양측이 다시 무기를 들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어쩌다 보니 어정쩡하게 전투를 멈춘 상태였다.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의 주변에 금세 살기가 피어오르고 전의가 가득 차기 시작했다.
펜리스 기사들은 몇 번이나 핏물을 삼키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젠장... 몸이 뒤틀리는 거 같아.'
'정말 시간이 얼마 안 남았군.'
'후우... 하나라도 더 죽이고 간다.'
이들은 이미 한계에 달한 상태였다. 대부분은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저 검은색 투구를 쓰고 있기에 적들이 못 알아차리는 것일 뿐.
길리언도 그걸 알기에 어떻게든 쓰러지지 않으려 버티고 있던 것이다.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여 줬다가는 적들이 오히려 더 기세등등하게 덤벼들 테니까.
둥! 둥! 둥!
북소리가 다시 울렸다. 하지만 전과는 다르게 데스몬드군이 천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이들은 허튼 남작을 보호하기 위해 그의 주변을 꽁꽁 에워싸고 있었다. 여기서 잃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북소리와 함께 물러가는 데스몬드군을 보며 펜리스군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운이 좋았어.'
'교관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군.'
만약 허튼 남작이 쓰러지지 않았다면 데스몬드군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펜리스군의 실제 상태를 알았다면 더 밀어붙였겠지만, 길리언이 버텨 준 덕분에 해럴드마저도 펜리스군의 허세에 속아 넘어갔다.
적들이 물러난 게 확실해지자 길리언은 피를 내뱉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경계를 세우고 모두 휴식을 취한다. 언제든지 전투에 참여할 수 있게 마음을 놓지 마라."
그는 여전히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기사들이 물었다.
"교관, 정말 괜찮아?"
"당장 누워서 치료부터 받아야 하지 않겠어?"
"어이! 의무병 어디 갔어! 붕대 좀 가져와!"
소란 떠는 기사들을 보며 길리언이 손을 저었다.
"됐다. 너희들도 어서 쉬고 마나부터 회복해라. 내 상처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휘소에 가더라도 혼자 걸어가야 한다. 가서 혼자 상처를 치료해야 한다.
그는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모든 병사가 자신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길리언은 천천히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오늘의 전투를 내내 지켜보던 해럴드는 새로운 작전을 떠올렸다.
"모든 병기와 마법사들을 동원해서 요새를 부숴 버리는 게 낫겠군."
278화 다 같이 살고 다 같이 죽는다. (1)
전쟁에서 첫 교전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첫 교전에서 가늠한 상대의 전력을 토대로 전쟁을 어떻게 이끌어 가야 할지 계획하게 되기 때문이다.
해럴드는 큰 상처를 입고 돌아온 허튼 남작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생각보다 더 강하군.'
단숨에 점령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펜리스군은, 격렬한 기세는 차치하고서라도 병사 개개인이 너무 강했다.
그중에서도 적 지휘관이 강하다는 건 멀리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쪽에서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를 냈던 건데, 그 허튼 남작까지 이렇게 큰 상처를 입고 돌아올 줄이야.
"괜찮은가?"
"...죄송합니다, 백작님."
허튼 남작은 얼굴이 창백해진 채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급히 포션을 들이부었지만 쉽게 낫지 않는다. 마나에 당한 상처란 그런 것이다. 기운이 날뛰며 회복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강할수록 그 기운이 남아 있는 시간도 길기에 포션이나 신성력을 아무리 부어도 금방 낫기가 힘들었다.
해럴드는 잠시 허튼 남작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어떤가? 상대의 실력을 직접 겪어 본 소감이. 병사를 더 몰아넣으면 되겠는가?"
"당연히 점령은 가능하겠으나.... 피해가 상당히 클 것입니다. 피해를 줄이려면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흐음... 우리에게도 남은 시간이 많지는 않다."
"하나, 피해가 커져도 좋을 건 없지 않습니까?"
그 말도 맞았다. 펜리스를 점령하고 지셀을 죽인다고 끝이 아니다. 페르디움도 점령해야 하며, 그 뒤로도 친왕파와 오랜 시간 싸워야 할 것이다.
만약 펜리스와 페르디움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절반 이상의 병력을 잃으면 친왕파와의 다툼에 버티기가 힘들어진다.
최소 2만 이상은 유지를 해야 다른 이들이 쉽게 손을 뻗지 못할 터였다.
"아멜리아 그년이 이제 말을 제대로 안 듣는군. 그러게 바로 합류를 하라 했거늘."
만약 아멜리아가 제때 합류했으면 선택의 폭이 지금보다 더 넓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레이폴드도 북부 영주들 몇 명의 합공을 받고 있어 정말로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해럴드는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시간을 들여야 하는가.'
고작 천 명에 불과한데 1만의 군대와 싸우는 것만 같았다. 저 강력한 정예들을 무리해서 뚫었다가는 피해가 클 것이다.
여기서 큰 피해를 보고 아군의 사기가 꺾이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오랜 시간을 들이기에는 주변 상황이 좋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저 요새를 점령해야 했다.
고심하는 해럴드에게 허튼 남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차라리... 회유를 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회유?"
"네, 펜리스군은 대부분 비천한 출신이라 들었습니다. 특히 저 길리언이란 놈과 기사들은 용병 출신이라 합니다."
"흐음...."
"분명 펜리스 백작이 돈을 많이 줘 가며 저들을 이끌었던 게 분명합니다. 저들의 장비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영지에서 좋게 대우해 주니 다들 편하게 지냈겠죠. 저만한 실력자들을 묶어 두려고 엄청난 유지비를 들였을 겁니다."
해럴드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높은 등급의 용병들일수록 고용비가 엄청났다. 하지만 북부의 식량왕이라고까지 불리는 그놈이라면 충분히 유지할 능력이 됐을 것이다.
해럴드가 관심을 보이자 허튼 남작이 조금 더 자신 있게 말을 이었다.
"결국 돈으로 묶인 자들입니다. 계약상 신의를 지키고는 있지만, 근본은 어디 가지 않는 법. 저들에게 깊은 충성심이 있을 리 없습니다."
"하면, 우리가 저들에게 더 좋은 대우를 약속하고 회유하자 이 말인가?"
"네, 훌륭한 장비도 갖췄고 실력도 있으니 사기는 높지만, 결국 우리를 이길 수 없다는 건 저들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용병의 가장 큰 덕목은 신의를 지키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니까요."
"일리가 있군."
"요새의 지휘관인 길리언은 펜리스 백작이 거느리기에는 아까운 인물입니다. 만약 저 인물을 회유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의 일이 무척이나 쉬워질 겁니다."
"제 주인을 배신한 개를 중용하라는 말인가?"
"어차피 용병은 충성으로 묶이는 관계가 아닙니다. 받은 값만큼만 해 주는 관계죠. 저희가 펜리스를 점령하면 더 좋은 대우를 해 줄 수 있습니다. 용병인데도 저렇게까지 싸우는 걸 보면 제법 신의는 있는 인물 같습니다."
허튼 남작은 필사적으로 해럴드를 설득했다. 비록 자신에게 큰 상처를 입혔지만 길리언의 무력만큼은 정말로 아까웠다.
북부에서 검술 실력으로는 손꼽히는 자신과 호각으로 싸운 자다.
몸 상태가 최고였다면, 아니... 시간에 쫓기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면 자신이 졌을지도 모른다.
저런 인물이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죽는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다.
해럴드도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와 그 정도로 싸울 수 있는 인물은 이 북부에서 흔치 않지."
허튼 남작은 해럴드 밑에서 북부제일검 자리를 노리던 빅토르의 검술 스승이었다. 그는 북부제일검이라 불리던 위르겐도 자신보다 실력이 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한 영지의 주인이다 보니 전면전이 아니라면 그와 싸워 볼 기회가 없었을 뿐. 만약 전쟁이 나서 위르겐과 붙었다면 결과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허튼 남작의 설득에 해럴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내 며칠 시간을 더 써 보도록 하지."
데스몬드의 진영에서 즉시 하얀 깃발을 든 사신이 출발했다.
길리언은 사신을 노려보며 물었다.
"항복하라고?"
그는 상처가 낫지 않아 여전히 얼굴이 창백했다. 몸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고통과 피곤이 얼굴에 내려앉은 걸 보니 계속 싸우기는 힘들어 보였다.
사신은 길리언을 위아래로 살짝 훑어보더니 건방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백작님께서는 여러분께 최고의 대우를 약속했습니다."
말투는 정중하지만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다. 마치 네까짓 놈들이 어쩔 거냐는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사신은 은혜를 베푼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어차피 대부분이 용병 출신이라 들었습니다. 지금보다 더 많은 돈과 더 좋은 대우를 약속드리겠습니다. 용병들이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는 고용주에게 옮겨 타는 건 자연스러운 일 아니겠습니까?"
길리언의 옆에 있던 루카스가 창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이 외부에 어떤 식으로 보이는지는 잘 알고 있다. 평생을 천대받으며 살아왔으니까.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대놓고 신의 없는 놈들 취급하며 모욕하다니.
스으으윽....
사방에서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사신과 그를 따라온 수행원들은 살을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사신은 살짝 뒤로 물러나며 웃었다.
"설마... 본인들이 정말 기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시겠죠?"
"...."
"여러분들은 기사가 아닙니다. 그저 조금 강해진, 기사도는 전혀 없는 용병일 뿐이죠. 현실을 직시하십시오. 얄팍한 계약과 신의, 자존심 때문에 목숨을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사신은 여유롭게 고개를 들고 기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러분들은 끝까지 살아남는 게 미덕입니다. 용병답게 말이지요. 굳이 아까운 목숨을 여기서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상대방의 착각을 깨부수고 현실을 직시하게 해 준다. 그래야 눈앞에 닥쳐온 공포가 제대로 보일 테니까.
그것이 바로 사신이 취한 전략이었다. 결과가 정해진 일에 굳이 아부를 떨 필요도 없었다.
현실만 알게 해 주면 된다.
"펜리스 백작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저희와 새로 계약을 하면 됩니다. 필요하시다면 위약금도 저희가 물어드리겠습니다. 금방 다시 받아 낼 수 있으니까 말이죠."
"이놈이...."
루카스가 참지 못하고 살기를 줄기줄기 뿜어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사신은 칼 한번 휘두르지 않고 말로서 자신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솔직히 예전 같았으면 낄낄대면서 아무렇지도 않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셀과 함께하며 성장한 만큼.... 이런 모욕과 수치를 이제는 견딜 수가 없었다.
다른 기사들도 거칠게 숨을 내쉬며 몸을 들썩거렸다. 지금 당장 사신을 잡아 죽이고 싶었다.
다들 길리언을 바라보았다.
길리언은 이런 걸 참지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영지에서 가장 기사다운 사람이며 가장 깊은 충성심으로 영주를 모시는 사람이니까.
"백작에게 시간을 좀 달라고 전해라. 다른 이들을 설득해야 하니까. 그리고 다음에 올 때는 말뿐이 아닌 제대로 된 조건을 가지고 오도록."
"...!"
기사들은 순간 당황해서 어떠한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신은 그런 기사들을 슬쩍 둘러보며 비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은 선택이십니다. 다른 분들도 잘 생각해 보시지요. 아까운 목숨을 여기서 허무하게 잃으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끝으로 사신은 돌아갔다. 잠깐의 침묵이 지난 뒤, 루카스가 창을 길리언의 목에 들이밀며 말했다.
"교관... 이제 와서 목숨이 아까운 거냐?"
다시 살기가 피어오른다. 대답 여하에 따라 바로 치겠다는 각오가 느껴질 정도였다.
다른 기사들도 하나둘씩 창을 들기 시작했다.
"겁쟁이인 줄은 몰랐는데. 적한테 칼침 한번 세게 맞더니 겁이 생겼나."
"지금 영주를 배신하겠다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사니까 우리가 평생 근본 없는 놈이라고 욕을 먹는 거야."
길리언은 팔짱을 끼고 기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왜? 좋은 기회가 왔는데 같이 항복하고 싶은 놈은 없나?"
"이 새끼가!"
파앗!
루카스가 예고도 없이 바로 창을 찔렀다. 하지만 길리언은 슬쩍 고개를 움직여 피했다.
하지만 루카스는 멈추지 않고 바로 창을 휘둘러 길리언의 얼굴을 치려 했다.
텁!
길리언은 손쉽게 날아오는 창대를 잡았다. 루카스가 인상을 쓰며 창을 빼내려고 했지만 쉽게 빠지지 않았다.
길리언은 창을 잡은 채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살기등등한 걸 보니 항복하고 싶은 놈은 없어 보였다.
한 번 피식 웃은 그가 말을 이었다.
"이 멍청한 놈들아. 놈들이 알아서 시간을 주겠다는데 바로 거절하면 손해지 않느냐."
"어?"
기사들은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모욕적인 말에 화가 나다 보니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길리언은 날카로운 눈빛을 내비쳤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놈이 없는 건 다행이군. 우리의 자존심을 챙기는 건 나중의 일이다. 모욕에 대한 분노는 적과 붙었을 때 풀어라. 지금은 시간을 끄는 게 영주님을 위한 일이다."
"오...."
"우리 교관이 자존심을 내려놓고 이렇게 뻔뻔하게 굴 줄이야."
"은근히 생각이 깊단 말이야?"
오해가 풀린 기사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다시 낄낄거렸다.
길리언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단순한 놈들."
하지만 그래서 지셀이 이들을 좋아하는 것일 테다. 언제나 감정에 솔직하고 뒤에서 음흉한 짓은 저지르지 않는 순수한 놈들이니까.
"어차피 저쪽도 시간을 오래 주진 않을 거다. 그사이에라도 마나와 체력을 회복시키고 있어라."
기사들이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으며 물러났다.
사신의 보고를 받은 해럴드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천한 놈들은 어쩔 수 없군. 명예도 모르고 돈만 좇는 놈들 같으니라고."
만약 상대가 정말 기사들이었다면 해럴드도 쉽게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비천한 출신이라는 선입견이 그의 눈을 가려 버렸다.
그런 놈들이 더 좋은 조건을 찾아 주인을 갈아타는 건 비일비재한 일이었으니까.
"그래도 잘됐군. 피해를 좀 줄일 수 있겠어. 실력들이 제법 뛰어나니 조건은 넉넉히 쳐 줘라."
사신은 자신만만하게 성공을 보고 했다. 그러니 자신은 관대한 마음으로 기다려 주면 되는 것이다.
이틀 정도 후에 사신은 다시 펜리스 진영으로 갔다. 그리고 자신들이 내 줄 수 있는 엄청난 조건들을 강조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하실 겁니다. 그런데 아직 설득을 다 못하셨습니까?"
길리언은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건은 마음에 드나 거부하는 몇 명이 남았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오. 조건을 몰라서 그러는 이들도 있으니까."
사신이 살짝 둘러보자 과연 한쪽에 불만이 가득한 표정의 기사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길리언의 쪽에 붙은 기사들이 더 많긴 했지만 아직 전부 설득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사신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경고하듯이 말을 건넸다.
"쯧... 저희도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버릴 사람은 버리십시오. 이 정도 조건은 어떤 곳에서도 쉽게 주지 못할 겁니다.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그렇게 사신은 매일같이 찾아가 길리언을 닦달했다. 길리언 쪽에 붙는 기사들의 수가 점점 더 많아지는 게 보였지만 그 속도가 너무나 느렸다.
사신은 문득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이놈들이 더 좋은 조건으로 계약을 하려고 질질 시간을 끌면서 수작을 부리는구나!'
사신은 이를 갈았다. 역시 돈밖에 모르는 비천한 놈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이라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이딴 수작질이라니. 어쩔 수 없이 사신은 조금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
그래도 길리언은 전부 설득해서 데리고 가고 싶다며 시간을 요구했다.
그런 실랑이로만 무려 일주일의 기간을 써 버렸다. 해럴드에게 마지막 경고를 받은 사신은 똥줄까지 타서 찾아왔다.
"도대체 얼마나 더 시간을 줘야 합니까! 이제 더 줄 수 없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한 명 남았소."
사신이 고개를 돌리자 한쪽에 혼자 퉁명스럽게 서 있는 기사가 보였다.
"저자는 뭡니까?"
대답은 서 있는 기사에게 나왔다. 그는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루카스다. 창술의 천재지."
"왜 혼자 항복을 안 하고 버티는 거요? 자존심 때문이오?"
"화가 나서 말하고 싶지 않다."
"왜 화가 났소?"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정말 몰라?"
"...."
속이 터질 거 같았지만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사신도 죽기 싫으니 달래듯이 말했다.
"그... 내가 뭔가 결례를 저질렀다면 사과하겠소. 그러니 어서 말해 보시오."
"뭘 잘못했는데?"
"...."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지금 미안하다고 한 거야?"
"...."
"됐어, 말 안 할래. 기분 더 안 좋아졌어."
사신은 끓어오르는 화를 억눌렀다. 오늘까지 이들을 데리고 가지 못하면 자신도 정말 죽은 목숨이 된다.
어쩔 수 없이 사신은 몇 시간에 걸쳐 루카스를 설득했다. 제발 왜 화가 났는지 말해 달라고 사정을 하면서 말이다.
사신의 정성에 루카스는 기분이 조금 풀렸는지 툭 던지듯이 말했다.
"조건이 마음에 안 들어서 항복하고 싶지 않아. 내가 원하는 조건은 따로 있거든."
"그, 그러면 원하는 조건이 뭐요? 지금 조건도 무척 좋은 건데? 데스몬드 백작님만 따르면 평생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지 않소?"
"그 정도로는 성에 안 차. 귀족의 작위와 작은 영지 하나를 줘. 영주가 되고 싶다. 내가 그렇게 성공하는 게 우리 엄마의 꿈이었어."
"이, 이... 미친...."
비천한 출신 주제에 조건으로 말도 안 되는 걸 요구하고 있다. 저런 정신 나간 놈은 당연히 설득이 되지 않는다.
사신은 길리언을 바라보며 외쳤다.
"그냥 이놈을 죽이시오! 어차피 다른 기사들은 다 설득하지 않았소!"
"거절한다."
"뭐, 뭐요?"
"우리는 다 같이 살고 다 같이 죽는다. 그러니까 그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다. 일주일 정도 시간을 더 주면 내가 설득하겠다."
사신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길리언의 말을 듣고 드디어 깨달았다.
'다 같이 살고 다 같이 죽는다고?'
이놈들은 애초부터 항복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게 분명했다.
279화 다 같이 살고 다 같이 죽는다. (2)
사신은 그것도 모르고 공명심에 취해 성공했다고 보고를 올려 버린 것이다.
그는 이제 길리언의 다리를 붙잡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사, 살려 주시오. 오늘 그대들을 데리고 가지 못한다면 난 죽은 목숨이오. 분명 항복한다고 하지 않았소? 시간도 충분히 주지 않았소!"
"전부 다 설득이 되면 한다 했다. 일주일을 더 주면 하겠다."
아무리 사신이 애원해도 길리언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사신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돌아와 보고를 올렸다.
"아, 아직 설득되지 않은 자가 있어서... 일주일만 시간을 더 달라고 합니다."
해럴드는 살기 어린 눈으로 사신을 바라보았다. 그는 바보가 아니다. 사신의 반응과 지금까지 걸린 시간을 보고 사태를 파악했다.
스르릉.
그는 바로 검을 뽑으며 으르렁거렸다.
"네놈의 설레발 때문에 내가 그런 하찮은 놈들에게 또 조롱을 당했구나."
드높은 명예와 위엄이야말로 해럴드의 자부심이다. 그런데 이런 수모를 당하자 이전에 지셀에게 당한 분노까지 되살아났다.
사신은 바닥에 엎드려 애원했다.
"사, 살려 주십시오! 반드시! 반드시 제가 다시 설득을...."
"설득? 이미 중요한 시간을 일주일이나 써 놓고 내 얼굴에 먹칠한 주제에 다시 설득을 한다고?"
"네, 네! 이번에야말로...."
"닥쳐라!"
퍼억!
해럴드는 그 자신 또한 상급에 이른 기사다. 분노를 담아 검을 내려찍자 엎드려 있던 사신의 머리는 단숨에 터져 나갔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 해럴드는 계속 사신의 몸을 난자했다.
"이 한심한 놈!"
퍼억!
"저런 천한 놈들조차 설득을 못 하고!"
퍼억!
"이 내가! 지셀과 그 수하 놈들에게! 언제까지 이런 모욕을 당해야 한다는 말이냐!"
퍼억! 퍼억! 퍼억! 퍼억!
악귀 같은 얼굴로 시체를 난도질하는 해럴드를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그간 쌓아 온 분노와 시간에 쫓기는 초조함이 폭발해서 그러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퍼억! 퍼억! 퍼억!
"후...."
시체가 완전히 곤죽이 됐을 즈음에야 해럴드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손을 멈추었다.
언제나 위엄 있고 깔끔한 모습만 보이던 그답지 않게 상당히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앞에 놓인 시체를 바라보는 해럴드의 눈에 다시 살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사신이 아니라 요새에 틀어박혀 있는 펜리스군을 향한 살기였다.
"이 비천한 놈들이 감히 얄팍한 수를...."
해럴드의 책임은 아니었다. 비록 선입견은 있었으나 직접 만나 보지 못했으니 사신의 보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제법 능력도 있는 놈이 자신만만하게 말하니 믿고 시간을 준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회유에는 실패했다. 천한 놈들이 자신을 우롱하고 중요한 시간을 뺏어갔다고 생각하자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펜리스군은 그사이에 정비를 하며 상처와 체력을 전부 회복했을 것이다.
챙그랑.
검을 던져 버린 해럴드가 옆에 있는 부관을 노려보며 말했다.
"당장 저 요새를 완전히 부숴 버려라."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저놈들은 모두 붙잡아서 사지를 찢어 버리도록."
이제 시간을 들여서라도 확실히 이기는 수밖에 없었다. 압도적인 전력의 우위를 살려 요새 자체를 짓밟을 계획이었다.
지셀을 잡는 데 필요한 과정이기도 하지만, 그 자신을 우롱한 저 비천하고 건방진 놈들에게 공포감을 주는 방법이기도 했으니까.
해럴드는 이를 갈며 말을 이었다.
"3일을 주겠다. 그리고 윌로우에게 전해라. 제깟 놈들이 마법 공격을 완벽하게 막진 못할 테니, 죽일 수 있는 놈은 죄다 죽이라고."
분노한 해럴드의 명령에 따라 다시 투석기와 마법사들이 나섰다. 충차도 가져오긴 했지만 쓰지는 않았다.
굳이 좁은 성문 하나를 뚫어 축차 투입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성벽을 무너뜨리고 사방에서 포위해 들어가면 된다.
침착하게 대군의 이점을 살리며 펜리스군을 압박할 생각이었다.
"쏴라!"
데스몬드군의 지휘관들이 크게 외치자 공격이 시작되었다.
쾅! 콰아앙! 쾅!
마법사들이 날린 마법과 투석기가 쏜 거석들이 쉴 새 없이 요새의 벽을 두드렸다.
펜리스군도 적들이 움직이자 바로 전투 태세를 갖췄다.
"뒤로 물러나라!"
길리언이 외치자 다들 부리나케 성벽에서 내려갔다. 저런 어마어마한 공격이 들어올 때는 성벽에 있는 게 무의미하다.
어차피 반격할 수도 없고, 괜히 근처에서 알짱대다가는 맞아 죽을 게 뻔했다.
길리언은 데스몬드군을 노려보며 긴 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잘됐다."
적들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 요새를 무너뜨릴 계획처럼 보였다. 하지만 길리언의 목적은 이 요새를 지키는 게 아니었다. 적의 발목을 잡고 시간을 끄는 것이 최우선 목표였다.
"당분간은 접전을 피할 수 있겠군."
사신과 실랑이해 가며 이미 일주일이나 시간을 벌었는데, 성벽이 무너지기 전까지 시간을 더 벌게 생겼다. 이런 상황은 무조건 환영이었다.
단 하나의 문제는.
요새 안으로 물러난 아군도 공격할 수 있는 괴물이 적 진영에 있다는 것이다.
부우웅!
공중에 높이 떠오른 윌로우가 요새를 내려다보며 마법을 시전했다.
콰앙! 콰앙! 콰아아앙!
하늘에서 무수한 돌덩이가 떨어지며 요새 안쪽도 파괴하기 시작했다.
"젠장! 저 새끼 또 왔어!"
"시발! 우리도 바네사 왔으면 너 죽었어!"
"잘난 척하지 마! 이 새끼야!"
욕설만 내뱉을 뿐 우왕좌왕하며 피하는 펜리스군을 보며 윌로우는 비웃음을 지었다.
"벌레 같은 놈들. 뭐 하러 저런 놈들을 설득하겠다고 시간을 끌었는지."
하찮은 놈들이 싸움 좀 한다고 건방지게 구는 꼴이라니. 해럴드의 명령이니 회유에 반대하진 않았지만, 윌로우는 내심 그게 참 마음에 안 들었다.
이런 벌레 같은 놈들은 설득이고 뭐고 애초에 처음부터 자신이 나서서 몰살해 버려야 했다.
얼마 전 전투에서 끝을 보았어야 했는데 참 아쉬웠다. 그때는 길리언이란 적 지휘관과 허튼 남작의 실력이 백중세라 끼어들고 싶어도 끼어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역시 마법을 쓰기에는 아군이 없는 게 훨씬 편하다.
콰앙! 콰앙! 콰앙! 콰앙!
윌로우는 마법으로 요새 안쪽을 산산조각 내는 와중에도 주변 상황을 꼼꼼히 살폈다. 투석기와 마법사들의 공격에 성벽이 바깥쪽부터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었다.
"다른 쪽은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두고 벌레들이나 몇 마리 잡아 봐야겠군."
그런데 그때, 자신이 요새 안쪽에 날린 마법 중 몇 개가 사라지는 게 보였다.
바로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 주변에 떨어진 마법이었다.
마법이 사라진 덕분에 기사 주변에 모여 있던 병사들도 멀쩡했다. 돌덩이들은 그저 요새 안쪽의 건물과 물자들을 파괴할 뿐이었다.
"흐음, 신기하군. 나름대로 마법 공격에 대비는 하고 있었구나. 마법사는 확실히 아닌 거 같은데, 어떻게 한 거지? 아티팩트를 몇 개씩 들고 다니는 건가? 가까이서 못 보니 답답하군."
윌로우는 마법사답게 현재 상황에 대해 큰 호기심을 보였다. 하지만 그도 펜리스 기사들의 갑옷 전부가 아티팩트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기사 한 명이 중소 영지의 몇 년 치 예산을 입고 다닌다고 어느 누가 생각하겠는가.
자신의 상식 내에서 답을 찾으려 하니 근접한 답은 찾아도 정확한 답을 찾을 리가 없었다.
여유를 부리며 구경하는 윌로우를 보며 길리언은 이를 갈았다.
'저놈만 아니면 더 오래 버틸 수 있을 텐데.'
항상 저런 마법사들이 문제다. 특히 고서클 마법사일수록 전황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가 있었다.
무지막지한 파괴력으로 넓은 범위를 공격하면 상대하기가 무척 힘들기 때문이다.
특히 저렇게 멀리 떨어져서, 같은 편의 보호를 받고 있다면 말이다.
아군에도 마법사가 있었다면 서로 마법을 파훼하는 방식으로 견제할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에 마법사는 없었다.
"일단 쏴라!"
길리언의 외침에 병사들이 화살을 쏘아 댔다. 천 개에 가까운 화살이 아예 윌로우가 있는 공간을 덮어 버릴 기세로 날아갔다.
하지만 윌로우는 날아오는 화살들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한심하구나."
타타타타탕!
화살들은 윌로우의 앞에 펼쳐진 실드를 뚫지 못했다. 애초에 일반 병사들의 공격이 6서클 마법사의 마력을 뚫을 리가 만무했다.
펜리스군을 한껏 비웃은 윌로우는 다시 손에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구경도 지겹구나. 신기한 건 다 죽이고 찾아보면 될 일. 어디 이것도 한번 막아 봐라."
대규모 광역 마법은 아무래도 공격 하나하나의 위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든 마력을 한 점에 집중시킨 강력한 마법은 어떨까? 그때도 저런 하찮은 도구들로 막을 수 있을까?
며칠 전에 이어 지금도 자신의 마법이 일부나마 막혔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약간 상한 그는 마력을 잔뜩 쏟아부었다.
콰지지지직!
윌로우의 한쪽 손에 강력한 전격의 기운이 몰리기 시작했다.
평소였다면 이런 엄청난 마력을 소모하는 마법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군에게 보호받는 안전한 상황에서는 굳이 몸을 사릴 필요가 없었다.
콰직! 콰지직! 콰직!
엄청난 마력이 한 점으로 몰리는 걸 발견하고 길리언이 외쳤다.
"창을 던져라!"
쐐애애액!
기사들이 온 힘을 다해 마나를 머금은 창을 던졌다.
카앙! 카아앙! 카앙!
"호오?"
제법 강한 공격에 윌로우가 눈을 크게 떴다.
창에 맞을 때마다 실드의 마력이 크게 출렁이며 강도가 약해졌다. 그만큼 공격 하나하나가 큰 파괴력을 담고 있었다.
"전원이 정말 전부 중급 기사 이상의 실력자란 말인가?"
6서클 마법사인 자신의 실드에 이 정도 타격을 주려면 최소 그 수준은 되어야 한다. 윌로우는 새삼 펜리스의 저력에 놀랐다.
곧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백작님 말씀대로, 죽일 수 있는 놈은 최대한 죽여 놔야겠군."
펜리스 놈들은 다 요새 안에 숨었다. 지금 성벽 밖에서 날리는 공격으로는 아무도 죽일 수 없다. 지금 자신이 한 놈이라도 더 죽여야 정면으로 붙었을 때 아군의 피해가 적을 것이다.
콰지지지직!
이제 윌로우의 손에 모인 전격의 기운은 처음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커졌다.
"어디 한번 볼까?"
윌로우가 가볍게 요새 안을 훑어보며 공격할 목표를 고민할 때.
휘리리리릭!
"음?"
무시무시한 속도로 도끼가 날아왔다. 순간 저걸 맞으면 죽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감히!"
인상을 쓴 그는 도끼가 날아온 방향을 향해 전격을 방출했다. 자신을 공격한 건방진 놈을 죽이려는 의도였다.
콰아아아아아앙!
푸른 전격이 방출되는 것과 동시에, 아래쪽에서 날아온 도끼가 윌로우의 실드를 강타했다.
천지가 진동할 듯한 엄청난 굉음이 터진 직후.
"크아아악!"
윌로우가 자신의 왼쪽 어깨를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실드는 이미 깨졌고, 그의 왼쪽 팔도 도끼와 함께 날아가 사라진 상태였다.
윌로우는 피를 철철 흘리며 땅으로 추락했다.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데스몬드의 기사와 마법사들이 받아 주지 않았다면 그의 몸은 산산조각이 났으리라.
"으아아악!"
우아하게만 살아왔던 윌로우는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고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 순간만큼은 마법도, 전쟁도, 명령도, 그 어떤 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서 윌로우 님을 후방으로 모셔라!"
6서클 마법사는 귀한 존재다. 주변에 있던 모든 이들이 달라붙어 윌로우를 안전하게 진영으로 옮겼다.
거기에 최상급 포션을 들이붓고 의무병들이 죄다 달라붙어 그의 어깨를 치료하기 바빴다.
요새 안에 있던 펜리스군은 모두 멍한 표정으로 길리언을 바라보았다.
치이이이익!
길리언의 몸도 정상이 아니었다. 무려 6서클의 전격 마법을 정통으로 맞은 그는 온몸에서 김을 모락모락 뿜어내고 있었다.
"크윽...."
길리언이 더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의 몸 곳곳에는 수포가 끓어올랐고 고기 타는 냄새가 사방에 진동할 정도였다.
"교관!"
기사들이 달려와 길리언을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길리언은 여전히 손을 휘저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났다.
'강하긴 강하군.'
과연 고서클 마법사다웠다. 엄청난 마력이 모이는 걸 보고 시선을 자신에게 끌었다.
기사와 병사들이 큰 피해를 볼까 봐 다급하게 모든 마나를 뽑아내 도끼를 던졌다.
동시에 앞으로 나서며 뿜어져 나오는 마법을 몸으로 막았다. 허튼 남작에게 당한 부상이 아직도 낫지 않은 상태라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주변에 있던 기사들의 갑옷에서 발동한 디스펠이 마법을 약화해 주지 않았더라면 정말 죽었을지도 모른다.
"후우...."
길리언의 몸은 이제 정상이 아니었다. 허튼 남작에게 뚫린 가슴과 윌로우의 마법에 당한 그는 몸을 편히 세우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래도 그의 눈빛은 여전히 맹렬하게 타올랐다. 어떻게든 적의 발목을 잡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렇기에 주변에 있던 기사들은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조금 더 뒤로 물러나라. 성벽이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우리가 할 일은 없다."
쾅! 콰앙! 쾅!
여전히 적들의 공격이 거세다. 요새 안에도 간간이 마법과 돌들이 날아 들어와 건물과 물자들을 부수고 있었다.
반격할 수 있는 병기들은 본래도 수가 얼마 없었고, 그마저도 첫 교전 때 죄다 박살이 난 뒤였다.
펜리스군은 조금 더 후퇴한 뒤 다시 정비하는 시간을 가졌다.
길리언 또한 몸을 치료하며 휴식을 취했다. 그의 몸은 이제 붕대로 감싸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콰앙! 콰앙! 콰앙!
데스몬드군의 공격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었다.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조금만 더 버텨라....'
길리언은 간절한 마음으로 성벽을 바라보았다. 성벽이 조금이라도 늦게 무너져야 시간을 그만큼 더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저 압도적인 병력 앞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계속 버티면서 싸우는 게 전부였다.
콰앙! 콰앙! 콰앙!
3일이 지나자 성벽의 위쪽은 이제 완전히 허물어졌다.
그래도 병사들이 쉽게 들어가기엔 무리였다. 해럴드는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엄청 단단하군. 카발디 백작이 다스릴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도대체 얼마나 보강을 한 거지?"
적들에게 남은 병기가 없어서 3일간이나 대놓고 공격을 퍼부었는데도, 성벽은 아직도 무너지지 않았다.
지셀이 요새를 증축하며 가장 먼저 내린 명령은 바로 내구성을 높이라는 것이었다. 특히나 스톤헤이븐처럼 주요 거점에 있는 요새는 다른 요새들보다 훨씬 더 단단했다.
해럴드는 혀를 찼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너무 시간이 지연되고 있었다.
"쉬지 말고 계속 퍼부어라."
성벽이 낮아졌으니 다시 병력을 밀어 넣어 볼까도 생각했지만, 해럴드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래 봐야 첫날과 같은 교전만 벌어질 게 뻔했다.
단단하긴 하지만 못 부술 정도의 요새는 아니다. 데스몬드군은 정말 쉬지 않고 성벽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콰아앙!
마침내 한쪽이 무너지자 슬슬 다른 부위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며칠간 공격을 쏟아붓자 요새는 곳곳이 무너져 흉한 모습이 되었다. 생각보다는 오래 버텼지만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해럴드는 사나운 얼굴로 지체 없이 명령을 내렸다.
"전군, 당장 요새를 점령하라."
280화 다 같이 살고 다 같이 죽는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