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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화

제4편 공주의 각성식 (1)

이른 아침.

기숙사에서 나온 학생들이 첫 교시 수업을 듣기 위해 빠르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나도 그들 사이에 껴서 기숙사를 나섰다.

시간이 흘러서인지 몇몇 학생들이 나에게 눈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평민 출신이거나 어디 지방의 이름 없는 작은 영지의 삼남, 사남들이었다.

학기 초와 달리 학생 전부가 나를 외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놓고 나와 아는 척을 하는 학생도 없었다.

귀족가의 서자 취급이 이러니 어쩔 수 없었다.

수업을 받으러 가는 학생들과 달리, 나는 아카데미 정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의아하게 쳐다보는 학생들이 있었지만, 대놓고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인가요?"

아니, 한 명 물어보는 사람이 있었다.

길 반대편에서 수업하러 가는 여학생 그룹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신입생뿐만 아니라 선배들까지 함께 모여 있는, 작지 않은 그룹이었다.

서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움직이던 이들이었는데, 나에게 말을 건 학생 때문에 모두 대화를 멈추었다.

나에게 말을 건넨 사람은 그룹에서 홀로 미모를 발하고 있는 학생, 즉 발레아였다.

발레아의 처세술은 아무리 봐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나와 계약을 한 뒤에 그녀는 전보다 더 나와 친한 척을 했다.

수업 중에 옆에 앉을 때도 많았고, 지금처럼 지나가다가 항상 아는 척을 했다.

그런데도 저렇게 다른 친구들과 사귈 수 있다니.

아버지가 죽은 남작가의 딸이면서도 귀족들과 저렇게 잘 지낼 수 있다는 점에서 나보다 처세술이 100배는 훌륭했다.

"네. 지금 가는 길입니다."

내 말에 여학생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오늘 공주님 각성일이잖아."

"설마 각성식에 초대받았다는 거야?"

"설마 각성식 하는 곳에 들어가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잖아. 가족, 아니 왕족분들만 참석할 텐데."

"그럼 따로 축하하러 가는 건가?"

"그렇겠지."

"그것만도 대단하잖아. 공주님의 각성 축하라니."

"그건 그렇지. 아카데미에서는 초청받은 사람이 없잖아."

"아니, 그레시아 공작가 자제라지만 서자잖아. 그게 가능한 거야?"

"쉿! 함부로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해!"

"아무튼 신기하긴 신기하네. 어떻게 공주님하고 알게 된 걸까."

이제는 따로 귀에 마나를 불어넣지 않더라도 이 정도 거리에서 수군거리는 말들은 쉽게 들을 수 있었다.

덕분에 그리 듣기 좋지 않은 뒷말을 실컷 듣게 되었다.

발레아도 내가 듣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런 내색은 전혀 하지 않고 내게 말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공주님께도 안부 전해 주시고요!"

그녀는 내게 손을 흔들고는 다른 여학생들과 걸어갔다.

나에 관해서 물어보는 수군거리는 말들도 점점 멀었다.

그녀들의 말대로, 나는 오늘 공주의 각성식에 가는 길이다.

당연히 각성식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고, 각성 축하와 왕비님의 호출 때문이었다.

공주와 공주의 호위 기사, 시녀들은 어제 미리 왕궁으로 가 있었다.

정문 앞에는 왕실에서 보내온 마차가 서 있었다.

나를 위해 보내온 마차는 아니었다.

"어서 와."

왕비의 여동생이자 공주의 이모인 카트린을 위한 것이었다.

마차에는 카트리네 교수가 와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마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왕실에서 보내 준 마차였으니 무척이나 화려했다.

공작가 본가에 있는 마차 정도랄까.

"이렇게 둘이 움직이는 것도 오랜만이네."

카트린은 반가운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나도 그녀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녀와 같이 던전을 탐험할 때가 떠올랐다.

그렇게 몇 마디 대화하다가 카트린은 멀어져 가는 아카데미 정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해서 혼났어. 아이샤만 아니었으면 정말 붙어 있기 싫은 곳이야."

수업 시간에 보았던 그녀의 딱딱한 얼굴이 한껏 풀어져 있었다.

다른 사람이 없어서 긴장이 풀어진 것 같았다.

나도 다른 사람인데, 주의하라고 말해야 하나.

잠깐 떠오른 생각은 뒤로하고, 위로의 말을 꺼냈다.

"잘하시던데요."

위로이긴 했지만, 실제로도 그녀는 정말 잘 가르쳤다.

기사 학부 1학년 담임 교수 역할도 잘했고, 기사 학부 학생들도 잘 가르쳤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를 존경하는 학생도 많아졌고, 그녀의 수업으로 학생들의 실력이 빠르게 향상되었다.

처음 수업 때 기사들에게 완패를 당해 수모를 겪었던 학생들이었지만, 왕립 아카데미 학생들은 모두 각성을 거친 상속 능력자들이었다.

그러니 적절한 교육과 훈련을 거치니, 금방 제 실력을 보일 수 있었다.

이제 기사들과 대등하게 대련을 벌이는 학생들도 나오고 있었고, 다른 학생들도 대련에서 쉽사리 지지 않았다.

"잘하기는. 그냥 가지고 있는 상속 능력들을 제대로 쓰게 하는 것뿐인데 뭐. 재미없어."

용병 때의 반짝이던 그녀의 눈빛이 생각났다.

가문의 보탬이 되고자 용병 생활을 했었지만, 그녀도 모험과 용병 일을 싫어하지 않았다.

"용병 일은 힘이 들지만 이렇게 답답하지는 않았는데, 던전 탐사 때는 재미도 있었고."

그런 자유로움에 맛을 들였으니 교수직이 답답할 것 같기는 했다.

솔직히 나도 답답하긴 했으니, 마음속으로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왕궁으로 가는 동안, 카트린과 오랜만에 편한 대화를 나누었다.

여러 신변잡사와 학교생활 이야기 등.

숨겨야 하는 것들은 빼야 했지만, 나름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어느새 왕궁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아, 단검은 오늘 돌려줄게."

"네."

며칠 전 카트린이 내 단검을 빌려 갔다. 연구를 할 게 있어서라는 이유에서였다.

원래 카트린의 가문 것이었으니, 며칠 정도는 충분히 빌려줄 수 있었다.

마차에서 내리기 전에 카트린은 방금 떠올랐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까먹을 뻔했네. 각성식이 끝난 뒤에 시간이 좀 있지? 아카데미로 돌아가기 전에 한 군데 들르자."

"네? 어디를요?"

"우리 집."

카트린의 집이라면 설마.

"라텐하마르 백작가요?"

"응. 우리 집에는 제대로 된 대련실이 있거든."

그동안 제대로 된 대련을 못 해서 그런 건가.

아카데미의 대련 장소들은 모두 공개된 곳들뿐이어서 그녀와 제대로 된 대련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도 자신의 능력을 다 보여 줄 수 없었고, 나도 내 실력을 모두 드러낼 수 없었다.

가끔 뒷말이 너무 심해 제 실력을 드러내 볼까 생각도 했지만, 역시 뒷일이 걱정되어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대련을 꼭 거기서 해야 하나요?"

나도 그녀와 제대로 붙어 보고 싶기는 했지만, 그 장소가 꼭 백작가 대련실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게...."

내 대답에 그녀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대련 때문이 아니라 뭔가 더 있나?

"아버지께서 보자고 하시기도 했고."

결국, 이게 집에서 보자고 하는 이유였나 보다.

하긴, 내가 가지고 있는 단검은 라텐하마르 백작가의 유물이었다.

탐사에서 같이 얻었고, 카트린이 나에게 준 것이니 지금은 내 소유였지만.

그래도 한번 와 보라는데 안 갈 수는 없었다.

저렇게 미안해하는 표정을 보니 거절하기도 어려웠고.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왕궁의 외성을 지나, 내성 앞에 마차가 멈추었다.

내성 앞에는 적지 않은 숫자의 마차가 서 있었다.

각성식은 가문 내부의 행사였다.

공작가에도 순서를 진행하는 신관과 가문 내의 사람들, 그리고 집사 정도만 참석했었다.

왕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들었다.

하긴, 나도 축하 명목으로 왕궁에 왔으니 다른 사람들도 그런 명목으로 왔을 게 분명했다.

"가자."

어차피 나는 카트린의 뒤만 따라다니면 그만이었다.

카트린의 말에 나도 마차에서 내렸다.

당연히 마중 나온 사람이 있었다.

"카트리네 드 라텐하마르 영애와 알렉스 데 그레시아 공자, 어서 오십시오."

마중 나온 집사는 정중한 말과 함께 우리 두 사람을 안내했다.

우리는 내성 안으로 들어갔다. 왕궁의 내성. 튼튼하고 거대한 성이 바로 기사의 성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우리는 거대한 복도를 지나 왕궁 내부를 가로질러서 왕궁의 뒤뜰로 나왔다.

왕궁의 뒤뜰에는 커다란 화원과 아름답고 커다란 묘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화원에 들어가지 않고 뒤뜰 가장자리에 멈춰 섰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왕비와 만났을 때 보았던 하녀들도 보였고, 귀족들과 신관, 기사들도 보였다.

모두 나와 같이 공주의 각성식을 축하해 주러 온 사람들이었다.

나는 모여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다.

공주의 각성식을 보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다.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오지 않은 사람들보다는 공주의 편일 확률이 높았다.

다만, 모여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각성식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어 보였다.

왕비의 하녀들 중에는 기도를 하는 하녀도 있었지만, 대부분 별다른 표정 없이 주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역시 [마나 감응력]을 얻으시겠죠?"

"글쎄요. 두 왕자님이 모두 얻으신 능력이긴 한데."

"심법 중 하나를 얻으실지도 몰라요. 카를로스 초대왕께서 가지신 심법이 꽤 많았잖아요."

"심법은 대부분 그레시아 공작가로 넘어간 것 아닌가요."

"어차피 피로 이어진 곳이니 왕실에서 나올 수도 있는 거죠."

"초대왕의 능력은 강철 육체도 있고, 육체 최적화에 방패술도 있으니까 다른 능력이 나올 수도 있어요."

"아니면, 왕비님 쪽 능력이 넘어올 수도 있을 테고요."

귀를 슬쩍 기울이니,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대부분 공주님이 무슨 능력을 얻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표정과 달리 조금 더 과열되면 내기라도 할 기세였다.

다만, 처음 생각과 달리 공주의 세력으로 보기는 어려운 사람들 같았다.

단지 가까운 인맥 정도일지도.

다행히 왕비의 하녀들은 좀 달랐다. 하녀로 불리지만, 전부 귀족 출신들이었다. 작위를 받지 못한 자녀들.

기도를 마친 하녀들은 작은 목소리로 그들과 다른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나 감응력이 아닌 다른 능력이면 좋겠어요."

"왜? 공주님도 마나 감응력을 얻으시면 좋잖아."

"두 분 왕자님이 그 능력을 얻어서 계속 사이가 안 좋잖아요. 공주님도 얻게 되면 두 분 왕자님께 시달리지 않으실지...."

"아, 그 말대로네."

[마나 감응력]

카를로스 왕국의 직계 왕족들만 얻게 된다는 상속 능력이었다.

마나를 느끼고 활용하는 데 최고인 상속 능력.

마법이라 불리는 원소 능력을 사용하든 심법을 따로 배워서 기사로 능력을 사용하든 무엇이든지 가능하다는 상속 능력이다.

초대왕인 카를로스 기사가 자신에게 제일 중요하다고 말하고 다녔던 능력이었고, 어느 순간부터 카를로스 왕국의 국왕이라면 꼭 가지고 있어야 하는 능력이 되었다.

'나도 얻지 말라고 기도해야 하려나.'

아카데미 생활을 무사히 보내려면 공주가 별것 아닌 능력을 가져야 했다.

나는 따로 신앙은 없었지만, 살짝 눈을 감고 믿지 않는 신에게 열심히 기도를 했다.

'왕비님 쪽의 능력. 라텐하마르 백작가의 능력을 얻게 해 주시기를.'

잠깐, 그러면 나와 동문이 되는 건가.

그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떠 보니, 사람들이 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왕궁에서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다.

공주도 보였고, 잘생긴 젊은 남자들과 리아 왕비도 보였으며, 화려한 왕관을 쓴 중년 남자도 보였다.

사람들도, 나도 모두 무릎을 꿇었다.

왕관을 쓴 중년 남자.

이 나라 왕의 행차였다.

제80화

제5편 공주의 각성식 (2)

생각보다 왕은 젊어 보였다.

아들 둘이 차기 왕을 노리고 한판 붙으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다 늙은 노인인 줄 알았는데, 멀리서 보기에는 중년에서 막 노년으로 넘어가는 정도로 보였다.

하지만, 눈에 마나를 넣어 살피니 얼굴에 병색이 역력한 게 느껴졌다.

'아픈 건 맞나 보네. 일종의 약발인가.'

이곳까지 왕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나가 느껴졌다. 정돈되지 않고 강제로 쑤셔 넣어서 마냥 흘러넘치는 마나였다.

'정말, 얼마 안 남았나 보네.'

마나빨로 억지로 버티는 게 눈에 보였다. 저 정도면 몸은 한계에 가까울 게 분명했다.

강력한 능력자인 왕이니만큼 그 몸으로도 더 버티겠지만, 사실 시간을 조금 연장하는 데 불과할 뿐이었다.

'뭐, 그런 것까지 내가 걱정할 건 아니고.'

왕의 반보 뒤에 리아 왕비가 따르고 있었다. 지금은 전에 보았을 때와 달리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왕과 왕비 뒤로 젊은 청년 둘이 걸어가고 있었다.

한눈에도 그들이 왕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첫째 왕자와 20대 초반의 둘째 왕자.

저 두 사람이 차기 왕에 제일 가까운 자들이었다.

공주의 파벌로 분류가 되어 버린 나에게는 적에 가까운 자들이다. 물론 상대방은 나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지만.

두 왕자의 뒤로 어린 아이샤 공주가 따라 걷고 있었다. 둘째 왕자와 10살 넘게 차이가 나는 10살짜리 어린이가 굳은 얼굴로 왕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녀를 보니, 과거 내 각성식 생각이 났다.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데다 반복된 삶으로 신체 나이보다 정신연령이 훨씬 높은 나였지만, 각성식 때에는 무척 긴장했었다.

아이샤 공주도 창백한 얼굴을 보니 많이 긴장한 듯했지만, 그래도 나이에 비해 잘 이겨 내는 것 같았다.

'나이에 맞지 않는 똑똑한 아이라는 건 나보다 공주에게 더 어울리는 표현일지도.'

공주 뒤로는 기사들과 신관들이 따라 걷고 있었다.

확실히 왕실의 내부 행사가 맞았다. 각성식은 왕의 직계만 참석했다.

다만, 나와 같이 멀찍이 서서 각성식을 지켜보는 사람들 중에 대귀족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영지를 가지고 있는 귀족들은 수도로 발걸음을 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적어도 대리인은 보낼 수 있었을 테고, 수도에 머무는 귀족들도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지금 내 주변에 있는 귀족들 중에는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공주의 지금 위치를 말해 준다고 해야겠지.'

현재 살아 있는 왕비의 딸이긴 하지만, 그녀의 두 오빠와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왕은 저렇게 몸이 안 좋은 것을 표를 내고 있었고 왕자들은 이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으니, 공주의 각성식에 참석해서 괜한 오해를 사려는 귀족들이 많을 리 없었다.

아카데미 학생들은 이 행사를 지켜보는 나를 대단하게 생각했지만, 제대로 아는 자들은 비웃을지도 모른다.

뭐, 내 처지와 별로 다르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공작가의 저택 뒤에 있는 묘실과 달리, 왕성의 묘실은 훨씬 웅장하고 화려했다.

왕 일행은 선대왕들의 조각상 사이로 걸어가 묘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우리는 왕 일행이 다시 나오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흘러갔다.

왕 일행은 보이지 않았지만, 기다리는 사람들은 모두 조용했다.

잠시 뒤.

화아악.

묘실 안에서 마나가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드디어 공주가 각성한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상속 능력을 얻었을지 궁금해하며 작게 속삭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과 그 일행이 다시 묘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걸어 나오는 일행의 표정은 다양했다.

왕은 창백한 얼굴로 혀를 차고 있었다.

두 왕자는 모두 만족한 얼굴이었고, 기사들과 신관들은 조금 안타까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왕비는 들어갈 때와 표정이 크게 변하지 않았고, 공주도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냥 담담한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은데.... 묘하게 기쁜 듯한 느낌도 들고.'

뭔가 나온 사람들의 표정으로는 결과를 알기 어렵다고 느꼈는데, 옆에서 카트린의 말이 들려왔다.

"잘된 것 같네요."

나는 고개를 돌려 카트린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 * *

각성식이 끝난 뒤, 사람들은 바로 해산했다.

예상과 달리 모였던 사람들은 바로 흩어졌고, 나와 카트린은 왕비의 부름에 그녀의 궁으로 향했다.

전에 만났던 커다란 응접실에서 나와 카트린은 공주와 왕비를 만났다.

우우우웅.

마나의 벽이 방 주위를 둘러쌌다.

내가 마나로 만들었던 방음벽과는 다른 마나의 벽이었다.

"외부의 시선은 모두 막았습니다."

나이가 든 하녀가 왕비에게 고개를 숙였다.

하녀복을 입고 있지만, 왕비의 시중을 드는 하녀가 평범한 여성일 리 없었다.

적어도 이름 있는 귀족이 확실했다.

그녀가 펼친 마나의 벽은 그녀의 상속 능력일 게 분명했다.

"아이샤, 이제 표정을 풀어도 돼요."

"휴우, 힘들었어요."

왕비의 말에 공주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굳은 얼굴을 풀더니,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카트린도 공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고생했어. 다행히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아."

"응, 카트린 덕분이에요."

공주의 밝은 대답에 카트린이 고개를 저었다.

"저보다 알렉스의 도움이 컸죠."

"알렉스 님에게도 감사드려요."

"아니, 인사 받을 일을 한 것 같진 않은데요."

공주의 인사는 나를 난감하게 만들 뿐이었다.

나를 방에 두고 마나 벽을 친 것부터가 문제였다.

방에 마나 벽을 친 걸 보니, 분명 왕비와 공주, 카트린만 알아야 하는 비밀 이야기를 할 듯했다.

거기에 왜 내가 끼어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공주가 왜 기뻐하는지도 모르겠고, 나한테 왜 감사하는지도 모르겠다.

누가 나에게 이유를 좀 알려 주면 좋겠어!

"호호, 아무래도 알렉스 공자에게 먼저 설명을 해 줘야 할 것 같네요."

어쩔 줄 몰라 하는 내 모습에 왕비가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각성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몰라 말을 못 했어. 다행히 결과가 좋으니 말해 줄게."

카트린이 왕비의 말을 이었다.

드디어 궁금했던 말을 들을 모양이었다.

솔직히 안 들었으면 더 좋을 것 같은데....

그렇지만 왕비와 공주, 카트린의 표정을 보니 이미 늦은 모양이었다.

그녀들이 생각하기에는 나는 이미 그녀들과 한 팀이었다.

듣지 않겠다고 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아, 먼저 각성식에서 말한 대로 어떤 상속 능력을 얻었는지 다시 말해 줘요."

왕비의 말에 공주가 말했다.

"보이지 않는 검기. 외가인 라텐하마르 백작가의 상속 능력을 얻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녀는 앞에 놓은 작은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차를 저으라고 놓은 숟가락이었는데, 그녀가 손에 쥐자 숟가락 끝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과연, 저 일렁거리는 기운은 전에 본 적이 있었다.

바로 던전에서 카트린이 사용하던 능력이었다.

그리고 나도 던전에서 얻은 단검을 들면 그 능력을 쓸 수 있었다. 솔직히 사람에게 기습할 때는 최고의 능력이었다.

아, 이제야 왕과 다른 왕자들의 표정이 이해되었다.

공주가 얻은 능력은 무척이나 훌륭한 능력이었고 쓸모도 많은 능력이었지만, 왕가의 능력은 아니었다.

거기다 국왕의 능력이라는 '마나 감응력'을 두 왕자가 가지고 있었으니, 어머니 쪽의 능력을 얻은 공주는 이제 두 왕자와 경쟁을 하기 어려워졌다.

왕의 표정이 안 좋았고, 두 왕자의 표정이 밝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왕비와 공주의 표정도 나쁘지 않았는데? 거기다 지금은 아예 웃는 얼굴이고.

머릿속으로 고민을 하며 공주를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맞다. 조금 전, 공주의 말은 뭔가 이상했다.

그녀는 '상속 능력을 얻었다'가 아니라 '상속 능력을 얻었다고 말씀드렸다.'라고 했다.

설마 다른 능력을 얻고 백작가의 상속 능력을 얻었다고 말한 건가?

하지만, 내 눈앞에는 아직도 끝이 일렁거리는 숟가락이 보이고 있었다.

"혹시 실제는 다른 능력을 얻으신 겁니까?"

혹시나 해서 꺼낸 내 말에 공주는 고개를 저었고, 왕비와 카트린은 미소를 지었다.

"왕실의 각성식에서 거짓말을 하면 안 돼요. 확실히 공주는 '보이지 않는 검기' 능력을 얻었어요."

왕비가 공주의 대답에 추가로 말해 주었다.

그리고 카트린이 왜 왕비와 공주가 좋아하는지 이유를 알려 주었다.

"다행이야. 걱정이 많았어. 왕가의 능력이 아니니 두 왕자님의 시선도 공주님에게서 멀어질 거야."

아, 그렇군. 공주는 나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공주가 왕가의 능력, 특히 '마나 감응력'을 얻었으면 두 왕자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지금 두 왕자가 서로 칼날을 노린 채로 출발 신호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거기다 공주까지 등장해 버리면 두 왕자의 칼날이 어디로 먼저 향하게 될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왕비와 공주는 왕자들의 칼날을 피해 목숨을 겨우 건진 사람들 같지 않았다.

왕비가 입을 열었다.

"이번 대의 왕자와 공주는 선조의 피가 너무 짙어요. 신관들의 말로는 역사상 가장 피가 짙은 세대라고 해요."

신관이 그런 것까지 알 수 있는 건가? '치료술'에 '계약'에 왕족의 피의 농도까지 파악할 수 있다니, 신관의 능력은 의외로 다재다능한 모양이다.

어쨌거나 왕비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당연히 그 말은 왕족들만 아는 비밀로 했고, 왕자들은 모두 예상대로 '마나 감응력'을 얻었어요."

자식들이 다 능력이 좋다고 마냥 좋은 건 아닌 모양이다.

"신관의 말에 따르면, 아이샤도 '마나 감응력'을 얻을 가능성이 컸어요."

"그래서 공주가 마나 감응력을 얻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 했어. 내가 용병으로 돌아다닌 것 중에 그런 이유도 포함되어 있었지."

"그리고 방법을 찾아냈어."

카트린이 나를 가리켰다.

"아, 설마."

공주가 옷소매에서 단검을 꺼냈다.

며칠 전 카트린에게 빌려준 단검이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숟가락 대신에 단검을 잡았다. 단검 끝이 일렁거렸다.

"던전에서 찾은 유물로 우리 가문의 상속 능력을 얻게 된 너를 보고 각성을 유도할 방법을 찾게 된 거야."

이어진 말에 따르면, 던전에서 돌아온 그녀는 바로 나를 수도로 불러들였고, 가문의 유물들을 모아 공주에게 만지게 했다.

아쉽게도 그 유물들은 공주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조금이나마 느낌이 온 것은 던전에서 얻은 방패였다.

카트린과 왕비는 마지막으로 내 단검을 빌려서 공주에게 만져 보게 했다.

그랬더니, 단검이 반응했다.

"머릿속에서 말이 들렸어요. [힘을 원하는가]라고."

제길, 저 유치한 말을 또 듣게 된다니.

"공주에게 단검을 몸에 숨긴 채로 각성식에 참여하게 했어요. 작은 단검이라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고, 결국 우리의 예상대로 외가의 상속 능력을 얻게 되었어요."

저 단검 덕분에 왕가의 능력 대신 백작가의 상속 능력을 얻게 된 건가?

하지만, 그게 그렇게 좋은 건가? 당장의 위기는 피했지만, 그래도 괜찮은 건가?

찌푸린 내 얼굴을 보았는지 왕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생각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얻었어요. 아이샤."

왕비의 말에 공주가 몸에 힘을 줬다.

우우우우웅.

공주의 몸 전체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맙소사. 저건 '보이지 않는 검기'가 아니었다. 전혀 다른 능력이었다.

부우웅. 치지직.

작은 불꽃들이 공중에 나타났고, 머리카락 사이로 스파크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공주는 각성식에서 왕가의 능력 대신 다른 능력을 얻은 게 아니라, 왕가의 능력과 외가의 능력을 모두 얻게 되었어요."

왕비의 말대로였다.

공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갈한 마나는 왕가의 상속 능력.

'마나 감응력'으로 만들어지는 마나였다.

공주는 '마나 감응력'을 몸에 두른 채로 일렁거리는 단검을 들고 환하게 웃었다.

제81화

제6편 오늘부터 기사 학부생입니다 (1)

다과회가 끝나기 전에 왕비는 또 한 번 나를 놀라게 했다.

"공주는 내일부터 기사 학부에 다닐 거예요."

"네?"

뜬금없는 소리에 놀라 반문을 해 버렸지만, 왕비는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대신 친절하게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외가의 능력을 얻었으니, 카트린에게 훈련을 받을 필요가 있어요."

그건 맞는 이야기였다.

"거기다 다른 능력도 있는데, 옆에서 대련하며 실력을 키워 줄 사람이 있어야 해요."

이건 나를 말하는 건가?

"왕가의 능력을 얻지 못했다고 알려졌으니 관심은 전보다 줄어들겠지만, 후계에서 물러났다고 생각 없이 공격해 오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왕비의 말대로였다. 나도 여러 번 경험했다.

"현장학습도 있을 텐데, 옆에서 보호를 받았으면 해요. 부탁드릴게요."

아이고, 역시 추천장을 그냥 써 준 게 아니었다.

경호원 업무가 이제부터 시작인 것 같았다.

충격을 여러 번 받은 덕에 나는 멍한 상태로 왕궁을 빠져나왔다.

카트린과 함께 마차로 외성을 빠져나오자 겨우 정신이 들었고, 나는 카트린에게 물었다.

"저를 쓰실 정도로 공주님의 신변이 위험하신 겁니까?"

"응. 왕께서 건강하셨을 때도 여러 번 습격을 당하셨어. 왕궁 안이어서 어렵지 않게 물리치긴 했지."

역시, 왕궁 안은 무서운 곳이었다.

"왕께서 건강하셨을 때도 그 정도인데, 아예 쓰러지시거나 돌아가시기라도 한다면 왕궁 안에서도 목숨을 부지하시긴 힘들어."

"그래서 왕께서 아직 거동하실 때, 형제들의 시선에서 조금이라도 멀리 떨어뜨리기 위해 공주님을 아카데미에 보내신 거야."

왕은 내일이라도 당장 쓰러질 것처럼 보였고, 이제 각성도 했으니 내가 봐도 공주는 보호가 필요했다.

"우리가 공주님을 지켜 드려야지."

음, 이제는 완전히 저 '우리' 안에 내가 들어가게 된 모양이다.

외성에서 빠져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멈추었다.

카트린의 집이자 왕비의 친정인 라텐하마르 백작가에 도착한 것이다.

저택은 무척 아름다웠다.

우리 영지에 있는 공작가의 저택보다는 규모가 작았지만, 수도에 있는 공작의 '별장'보다는 훨씬 컸다.

백작은 그레시아 공작과 다르게 수도에 기반을 둔 중앙 귀족이지만, 수도 중앙에서 이 정도 규모의 저택을 가지고 있는 사실만 봐도 백작가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집사의 안내로 백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반갑네. 라텐하마르 백작이네."

아직 정정해 보이는 노인이 소파에 앉아 안으로 들어오는 나를 훑어보았다.

숱이 거의 없는 머리에 날카로운 눈. 거기다 단단해 보이는 몸까지.

딱 봐도 제대로 된 귀족이었다.

나는 그의 인사에 대답했다.

"알렉스입니다."

제대로 된 귀족이란 뜻은 다른 의미로 계급 차별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라는 이야기였다.

괜히 풀네임을 말해서 눈살을 찌푸리게 할 이유가 없었다.

나를 훑어본 그는 바로 카트린에게 물었다.

"각성식은 잘 마친 거지?"

"네. 계획대로 되었습니다."

카트린은 딱딱한 어조로 대답했다.

"계획대로라.... 잘되었군."

두 사람의 대화는 아버지와 딸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마치 직장 상사와 부하 사이의 대화 같았다.

제대로 된 귀족이라면 흔한 모습이었으니, 별로 특별해 보이진 않았다.

대답을 들은 백작은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앉으라는 말 대신에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카트린에게 선조의 유물을 얻는 데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계약대로 했을 뿐입니다. 저도 충분한 보상을 받았습니다."

"보상이라. 선조의 단검도 포함되는 거겠지?"

단검? 보상을 꺼내면서 단검에 대해 이야기한다라....

노인네가 귀족일 뿐 아니라 욕심쟁이였나.

그의 말에 슬쩍 카트린을 훔쳐보았다.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는 내 눈짓에 살짝 손가락을 움직였다.

긍정적인 대답을 하라는 용병들의 신호였다.

단검은 그녀의 선물에 가까웠지만, 아무래도 보상으로 이야기한 듯했다.

"계약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다만 지금 단검은 제 소유물입니다."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계약 핑계를 대고 오해하게 만들면 그만이었다.

"...보상이었군."

역시, 바로 오해해 버렸다.

"알겠네. 앞으로도 카트린이나 아이샤 공주님을 잘 도와주게나."

"명심하겠습니다."

명백한 퇴거 요청에 바로 대답했다.

"카트린은 잠깐 남고."

나는 혼자 방 밖으로 내쫓겼고, 기다리던 하녀가 나를 안내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카트린 님이 손님을 연무장으로 안내하라고 하셨습니다."

아이고, 열심히 머리를 쓴 뒤에 이제는 몸을 쓸 차례인가.

나는 하녀를 따라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은 특이하게도 건물 지하에 있었다.

하기야 저택이 크다고 해도, 복잡한 수도에서 저택 밖으로 연무장을 만들기는 어려워 보였다.

연무장은 단단한 돌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돌도 평범한 돌이 아니었다.

"돈으로 발라 버린 느낌이야."

거기다 한쪽에는 소파와 탁자까지 놓여 있어서 소파에 앉아 하녀가 타 주는 차를 마실 수 있었다.

땀내 나는 연무장에서 차를 마시고 있다니, 수도에 와서 처음으로 문화 충격을 받았다.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오늘 본 각성식의 왕족들, 조금 전에 만난 백작.

모두 내가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레시아 공작의 아들에다 각성까지 하긴 했지만, 나는 그저 반쪽짜리 서자일 뿐이었다.

영지에 있을 때는 어느 정도 이겨 냈다고 생각했는데, 수도에 와서 보니 전혀 아니었다.

서자는 생각보다 더 천대받는 위치였고, 계급 간의 사다리는 부서진 것이 아니라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왕비와 공주가 나를 가까이 두는 것도 서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 위치는 두 왕자에게 무시당하기 충분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막막하기 그지없었지만, 지금 나는 그저 담담할 뿐이었다.

단도에 욕심을 내는 백작도 무섭지 않았고, 두 왕자도, 왕도 두렵지 않았다.

죽음에서 되돌아오는 경험 덕분에 공포가 사라진 것도 있지만, 죽음을 이겨 내는 내 능력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카트린이 지하 연무장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나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백작이 너를 찾는 게 단검 때문인 줄은 몰랐어. 내가 대신해서 사과할게. 아니, 내가 이 집에 데려온 것도 잘못했어."

그녀다운 사과였다.

"어제까지는 단검 이야기는 꺼내시지도 않았어. 그냥 알렉스에 대해 궁금해서 부르신 줄 알았어."

어제라면 아직 단도의 효과가 확실한 것이 아니었을 테니 말을 안 했을 테지.

아니면, 옳은 것에 매달리는 딸 성격 때문일지도.

"괜찮아요. 어차피 이 단검은 지금 제 손에 있으니까요. 단지 나중에라도 문제가 생기면 도와주시면 돼요."

"응. 기필코 도와주겠어."

수도에 와서 조금 유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저 성격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꽤 답답해 보였는데, 지금 보니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내 편이라고 느끼기 때문일까.

"가문의 유물이라고 생각해서 그러시겠죠. 이해합니다."

내 말에 카트린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그런 분이 아니셨는데, 왕께서 몸이 안 좋아지신 뒤로는 뭔가 조급해지신 것 같아."

잘못 줄을 서면 가문이 통째로 날아갈 판국이니, 조급해지지 않을 수 없으리라.

"백작님은 공주님 일을 다 아시는 겁니까?"

내 물음에 카트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두 가지 능력을 얻었다는 것은 말씀드리지 않았어. 앞으로도 얼마 동안은 말씀드리지 않을 생각이고."

엥? 나에게 말한 것을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는다고?

그녀는 우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왕비님과 약속했어. 왕가의 능력까지 얻게 되면 욕심을 낼 것 같은 사람에게는 비밀로 하기로."

이런, 단검을 욕심내는 바람에 딸들이 벽을 쳐 버린 건가.

"공주는 아직 어려. 그녀에게는 시간이 필요해."

확실히, 오빠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물론, 그전에 왕이 죽어 버려서 내전이라도 일어나면 별의미 없는 일이겠지만.

공주나 왕비 입장으로는 이것이 최선일지도 몰랐다.

"그럼, 전부 알고 있는 사람은 또 누가 있나요?"

생각보다 아는 사람이 많았다. 하기야 나도 들었는데, 아는 사람이 더 있는 게 당연했다.

"단검의 각성 능력을 아는 것은 아버지까지이고, 전부 아는 것은 왕비님과 공주와 나. 그러고 너밖에 없어."

"네? 왜 저죠? 제가 어디가 믿을 데가 있다고...."

실수를 수습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건 나만 아는 일이다.

아버지도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나를 믿는다는 건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내 말에 그녀가 대답했다.

"나하고 계약했잖아. 그리고 내가 계속 확인했고."

아, 계약. 비밀을 지킨다는 계약을 했었지.

하지만, 전생에 수많은 계약을 경험한 바로 그 계약은 여러 가지 빈틈이 많은 계약이었다.

"여러 가지 알아보고 결정했어. 알렉스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왕비님과 나는 확신했어."

카트린은 나를 빤히 보며 말했다.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저게 사람을 신뢰하는 눈이라고 하는 건가.

뭔가 가슴이 쿡쿡 찔리는 것 같았다.

뭐, 지금 당장 배반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슬쩍 눈을 피했다.

"알겠습니다. 그보다 제대로 대련할 생각 아니었습니까?"

"아, 맞아. 대련해 줄 거지?"

"네. 저도 한번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나는 단검을 꺼내 들었다.

확실히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과연 왕비와 공주, 카트린이 나를 이용하고 말 사람들은 아닌지.

죽지만 않으면 확인할 시간은 충분했다.

결국, 이대로 지내 볼 생각이다.

카트린은 방패와 검을 들어 올렸다.

검과 방패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고, 내 검에서도 내 눈에만 보이는 붉은 기운이 솟구쳤다.

"시작하죠."

"그래!"

그녀와 나 둘 다 정장이었지만.

뭐 어때. 이럴 때도 있는 거지.

바앙!

부웅!

우리 두 사람은 일렁이는 검을 상대방을 향해 휘둘렀다

* * *

대련은 즐겁게 끝이 났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몇 벌 없는 정장이 잘려 나갔다는 점일까.

확실히 방패까지 쓰는 그녀의 능력은 무시무시했다.

그녀의 능력 덕분에 방패가 자유자재로 크기가 변하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성장한다면, 그녀 혼자만이 아니라 여러 명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검에서 솟구치는 기운도 더 강해진 것 같고.

던전 때의 실력이었다면 금방 제압당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 대련은 무승부라고 볼 수 있었다.

능력을 사용했다고 실전과 같지는 않겠지만, 이대로라면 충분히 내 실력에 자신을 가져도 될 것 같았다.

"그래도 더 열심히 해야지."

뭔가 쓸데없는 일에 잘 말려드는 느낌이니,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대련이 끝난 뒤 그녀는 저택에 남았고, 나는 아카데미로 향했다.

제82화

제7편 오늘부터 기사 학부생입니다 (2)

홀로 마차를 타고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길.

나는 단검을 꺼내 살펴보았다.

왕궁에서 헤어질 때, 공주는 아쉬운 듯 마지못해 단검을 돌려주었다.

그냥 가지라고 하면 가질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나도 절대 줄 생각이 없었다.

'거기다 백작까지 욕심내고.'

내게도 능력을 주었기에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공주에게도 효과가 있을 줄은 몰랐다.

"근데, 나는 백작가와 아무 상관이 없을 텐데 그럼 유전이 아닌 건가?"

나는 단검을 살펴보았다.

새 문양이 새겨진 단검은 전과 다름없이 날카로운 빛을 뿌릴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 머릿속에 말도 했었지."

그때 들은 말이 떠오르는 것 같아, 급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힘을....]

다행히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쓸모도 많았지만, 뭔가 비밀이 많은 물건이었다.

"정말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네."

특정한 능력으로 각성을 고정시키는 단검, 평민을 강제로 각성시키는 집단도 있고, 마나를 증폭시켜서 터트리는 목걸이도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모르는 것들이 계속 늘어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 나에게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많은 시간이 있었다.

충분히 버티기만 해도 그 비밀들을 다 풀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나는 단검을 다시 품에 집어넣은 뒤, 의자에 몸을 기댔다.

마차는 빠르게 아카데미로 향했다.

* * *

다음 날, 아카데미에서는 또 한 번 소란이 일었다.

기사 전공 수업 시간에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 왔기 때문이다.

"다들 누군지 알겠지만, 자기소개 부탁해."

카트린의 말에 그녀가 앞으로 나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이샤 데 카를로스입니다. 오늘부터 기사 수업에 참가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이샤 공주가 다부진 목소리로 모인 사람들에게 외쳤다.

"무슨 일이야."

"그러게. 공주님이 왜 기사 학부로 오신 거지? 청강 같은 건가?"

"오늘부터라잖아. 아예 전과하신 거잖아."

"말도 안 돼. 왜 공주님이...."

"혹시, 어제 각성식에서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거 아냐?"

"아, 어제가 각성식이었지."

"맞다. 내가 소식을 들었는데, 각성식에서 공주님이 왕가의 능력을 얻지 못하셨나 봐."

"정말이야?"

학생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귀에 와 박혔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저 수군거리는 소리는 내일이면 아카데미 전체에, 그다음 날이면 수도 전체로 퍼져 나갈 게 분명했다.

학생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보았을 텐데, 공주는 실망한 표정이 아니었다.

자기소개를 끝낸 공주는 자신의 자리, 즉 내 뒷자리로 왔다.

학생들이 슬금슬금 그녀를 곁눈질했고, 나는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괜찮겠어요?"

"네. 괜찮아요."

아직 어린 소녀가 야무진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래 봤자, 이제 10살인데.

이미 어른이 된 듯했다.

어제 왕비님이 하신 말씀대로 왕족은 정말 힘든 삶을 영위하는 모양이다.

"자, 모두 알다시피 이제 현장학습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리고 기사 학부와 상속 능력 학부는 그 뒤에 실전 수업을 해야 해. 성적이 중요하다는 것은 다들 잘 알고 있겠지? 위험한 수업들이니까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준비해야 해."

카트리네 교수가 학생들에게 말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마나를 실어서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보다, 이제 진짜 아카데미 수업들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다른 학년은 우리보다 빠르게 시작했다는데, 우리는 공주의 각성식 때문에 뒤로 밀린 것 같았다.

"그런 의미로 오늘은 일대일 대련이야. 학생들끼리 둘씩 짝을 지어."

오늘은 기사들이 조교 역할을 하지 않았다. 하기야 기사들도 고급 인력이었다. 왕립 아카데미라고 해도 그런 인력을 매번 수업 조교로 쓰기는 힘들 것이다.

대련이라는 말에 학생들의 표정이 각양각색으로 변했다.

"아, 대련은 싫은데."

"다른 건 좋고? 차라리 대련이 나아."

"그건 그런가? 하긴 수업 끝날 때까지 무한 달리기를 하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무한 달리기, 마나 움직이기, 근력 훈련 등.

대련 말고도 기사 수업에서는 기사를 만들기 위한 훈련을 진행했다.

전부 영지에서 해 왔던 훈련이라 나는 딱히 힘들다는 건 못 느꼈는데, 다른 학생들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카트리네 교수님은 너무 눈이 좋아. 대충 대련하기 힘들어."

"쉽게 이길 사람을 고르면 되잖아."

"그런가? 그럼 너하고 하면 되겠네."

"하, 나를? 좋아. 내가 정신을 차리게 해 주지."

학생들이 대련 상대를 정하기 시작했다.

나에게도 대련을 신청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름이... 브리아였던가.'

평범하게 생긴 여학생이었다.

저쪽에서 잘난 척을 하며 대련 준비를 하는 피루나 백작의 둘째 아들과 쌍벽을 이루는 기사 학부의 천재였다.

순위에서 공공연히 제외되는 나를 제외하고는 두 번째로 강하다고 인정되는 학생이라고 할까.

분명 귀족이라고 들었는데, 다른 학생들과 달리 대련 때만 되면 나와 대련하고자 다가왔다.

나도 마땅히 할 사람이 없었기에 그녀와 대련을 했다.

덕분에 그녀는 단검을 쓰지 않은 내 실력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그래서 더 대련하려고 하는지도.

하지만, 오늘은 선객이 있었다.

"알렉스 공자에게는 제가 먼저 신청했습니다."

"아.... 공주님."

그녀는 바로 물러섰다.

나이가 어리든, 왕가의 능력을 얻지 못했든, 기사 학부를 다니든 어쨌든 그녀는 이 나라의 공주였다.

당연히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기껏 서자인 나에게 다가온 사람이었다. 한 사람도 아쉬운 상황인데, 공주 때문에 사이가 서먹해질 수는 없었다.

평범한 얼굴에, 다들 들어 본 적 없는 귀족의 딸이었다. 분명 후계자도 아닌 것 같았고, 거기다 기사로서는 훌륭한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 잘만 꼬시면 나중에 동료나 애인이 될지도 모른다.

음, 결혼도 가능하려나.

잠시, 그녀와 같이 보내는 일생이 머릿속으로 흘러갔다.

음, 이게 전생에 읽었던 '손잡았는데, 이혼까지의 망상'이라는 건가.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결혼이라니, 이제 15살이었다.

이곳 귀족 자녀의 결혼 적령기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긴 하지만,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다.

솔직히 결혼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고.

쓸데없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고 나는 공주와 대련을 시작했다.

검 위로 희미하게 일렁이는 마나. 다른 사람들은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나도 날이 없는 철검을 들어 올려 그녀를 가리켰다.

"시작하시죠."

"네!"

아직 약한 능력이지만, 저 일렁이는 기운에 닿으면 내 검 정도는 싹둑 잘려 나갈 게 분명했다.

하지만, 공주는 아직 10살짜리 소녀일 뿐이다. 제대로 검을 배운 적도 없고 육체 훈련도 하지 않아 몸에 근육도 없었다.

물론, 각성하고 왕가의 능력도 얻어서 일반인과 전혀 다른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녀 정도는 검을 쓰지 않고도 쓰러뜨릴 수 있었다.

공주가 검을 휘두르며 내게 달려들었고, 나는 슬쩍 몸을 움직이며 그녀의 발을 걸었다.

"꺅!"

비명 소리와 함께 공주는 바닥에 나뒹굴었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으로 모였다.

'이럴 것 같더니.'

하지만, 나는 조심스럽게 훈련시키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사람은 배운 대로 가르칠 뿐이다.

대련이 교육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어나십시오.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

"으윽."

차가운 내 목소리에 공주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고.

카트린과 다른 학생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공주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 시간이 지나면 별의별 소문이 다 나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소문은 별로 걱정되지 않았다.

지금은 겨우 10살짜리 꼬마가 공주라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저런 악바리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지가 더 궁금했다.

공주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다시 해요."

"알겠습니다."

나를 가르치던 미겔 기사의 기분이 이랬을까?

공주와의 대련이 조금은 재미있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좀 더 친해지면, 공주의 속마음을 들어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공주는 나이에 맞지 않게 열심히 훈련했고, 실력이 쑥쑥 자라났다.

물론, 그 실력은 나와 카트린에게만 제대로 보여 주었다.

솔직히 나도 왕족의 능력인 '마나 감응력'은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다른 능력과 왕실에서 듣고 온 그녀의 마나 심법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 * *

몇 주가 지난 뒤, 우리 신입생 모두는 수업에 들어가는 대신에 아카데미 중앙에 있는 건물로 향했다.

무식하게 튼튼해 보이는 석조 건물이었다.

평상시에는 문이 굳게 닫혀 있었고, 많은 기사와 병사들이 건물 앞을 지키고 있었다.

문 앞에는 입학식 때 보았던 중노인이 서 있었다.

바로 왕립 아카데미 학장이었다.

입학식 때는 낙하산으로 내려온 관료로 보였는데, 지금은 전혀 달랐다.

"어서들 오세요. 이번 신입생들은 조금 늦었군요."

학장이 반가운 표정으로 우릴 반겼고.

학장의 신호로 굳게 닫혀 있던 건물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오늘이 현장학습이죠?"

"네!"

학생들의 우렁찬 대답에 학장은 빙그레 웃었다.

"첫 이동일 테니 모두 알겠지만, 다시 한번 설명할게요."

그는 열린 문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건물 내부는 겉에서 볼 때처럼 무척이나 삭막했다.

돌로 만들어진 벽과 바닥. 특별한 장식도 없었고, 큰 기둥들만이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다.

전생에 보았던, 벽이 있는 그리스 신전과 비슷하다고 할까.

다만 다른 것은 중앙에 새겨진 거대한 문양이었다.

"저게 이동진인가."

"맞아요."

작게 속삭였지만, 학장은 바로 알아들었다.

"저 마법진이 바로 고대 제국이 만든 이동 마법진이에요. 그리고 학장인 제가 당대 이동 능력자입니다."

알고 보니 왕립 아카데미의 학장은 항상 순간 이동 능력을 가진 귀족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이동 능력자는 한 대에 한 명 나왔고, 아카데미 학장은 오랜 시간 동안 무사히 이어져 내려왔다는 이야기였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동 능력자는 한두 사람을 멀지 않은 곳으로 이동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겨우 수도를 벗어나는 정도랄까요."

학장은 우리들을 이끌고 마법진 앞에 섰다.

"당연히 제 능력으로는 여러분 전부를 저 멀리 마왕 봉인지로 이동시킬 수 없죠."

그는 손으로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을 가리켰다.

"이 마법진은 제 능력을 강화해서 여러분 전부를 한 번에 이동시켜 줄 수 있어요. 이것도 고대 왕국의 신비 중 하나죠."

눈앞에 있는 마법진도, 우리가 들어온 건물도 모두 고대 제국의 유물이자 유적이었다.

왕립 아카데미는 바로 이 유적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 마법진은 마왕을 봉인시켰다는 봉인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항상 문이 굳게 닫혀 있었고, 기사들이 그 앞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동 능력자가 학장을 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고.

당연히 현장학습 목적지는 마왕을 봉인했다는 봉인지였다.

"자, 그럼 만약을 대비해서 조별로 모여 주세요."

신입생들은 미리 짜 놓은 조끼리 뭉쳤다.

내 주위에도 사람들이 모였다.

나는 주위에 모인 사람들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짜증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내 배다른 형이 한쪽에 서 있었고, 발레아가 내 옆에 바짝 붙어 있었다.

공주는 긴장한 얼굴로 내 앞에 섰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피아르가 얼떨떨한 얼굴로 서 있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이 일행이 우리의 첫 현장학습 구성원이었다.

제83화

제8편 현장학습 (1)

대전쟁 때 용사들이 힘을 모아 마왕을 봉인했다는 봉인지.

대륙의 동쪽.

웬만한 나라 크기만 한 거대한 영역을 차지하는 곳으로, 마계로 돌아가지 못한 마물이 가득한 대륙의 마계라고 불리는 곳이다.

봉인지의 경계는 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걸쳐져 있었는데, 다행히도 우리 왕국은 봉인지와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다.

대전쟁 때 다른 용사들과 마왕을 봉인한 카를로스 기사. 우리 왕국의 초대왕은 마왕을 봉인한 뒤에 공간 이동 마법진을 발견한 이곳에서 왕국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이동 마법진을 관리하고 활용하기 위한 아카데미를 세웠다.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전기에 적힌 대로 다시 마왕이 발호했을 때 이동 마법진을 통해 제일 먼저 달려가기 위해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이동 마법진은 왕국의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그리고 아카데미 학생들은 이 이동 마법진을 이용해서 봉인지로 가서 마물과 맞서 싸워야 했다.

이것은 용사의 능력을 이어받은 귀족의 의무였다.

이쪽 세상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해야 할까.

물론, 시간이 지나갈수록 의무는 줄어들었지만, 지금도 현장학습이라는 수업을 통해 모든 신입생들은 봉인지를 방문해야 했다.

기사 학부와 상속 능력 학부, 그리고 행정 학부까지도.

그래서 이런 인원들로 조를 짜게 된 것이다.

행정 학부 한 명에 기사 학부 두 명, 그리고 상속 능력 학부 두 명.

조 인원은 학생들의 선택 위주였고,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다면 교수들이 수정해서 정하기로 했다.

먼저, 공주가 나와 같은 조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발레아가 바로 나와 같은 조를 하고 싶다고 신청을 했다.

내 배다른 형님은 공주를 보더니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나와 같은 조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행정학부 한 사람이 필요했는데, 결국 기숙사 방이 내 옆방이라서 피아르가 같은 조가 되었다.

더 이상 우리 조가 되겠다고 자원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감히 공주와 같은 조를 하겠다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같이 하고 싶어 하던 잘난 귀족 몇몇은 내가 같은 조에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을 바꿔 다른 조로 가 버렸다.

결국, 나 때문에 이런 구성원이 되어 버린 것이다.

모두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고 있을 때, 공주가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이샤입니다."

공주의 인사는 무척이나 귀여웠지만, 모두 내색하지 않았다.

허겁지겁 공주의 인사에 답례할 뿐이었다.

"마누엘 데 그레시아입니다."

내 배다른 형님은 언제나처럼 그동안 배운 귀족 예절을 뽐냈고.

"발레아예요. 반가워요."

발레아는 내 옆에 붙어서 가식적인 목소리로 수줍은 여학생을 연출했다.

"알렉스입니다."

나는 평범하게 인사했고.

"피, 피아르입니다."

피아르는 고개를 숙인 채로 겨우 말했다.

인사가 끝나자, 다시 조용해졌다.

다들 멀뚱거리며 서 있을 뿐이었다.

다른 조들은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이 조 하나만 적막감이 감돌았다.

'망한 것 같네.'

친해서 같은 조가 된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끼워 맞춘 조인 데다 공주까지 끼어 있으니 함부로 말을 꺼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거기다, 대화를 이끌어 가야 할 공주는 아직 어렸다.

다행히 그런 어색한 분위기에서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이 있었다.

"저...."

다들 조금 놀랐다.

말을 꺼낸 사람이 피아르였기 때문이었다.

"제, 제가 이 조에 같이 있어도 되는 건가요?"

하지만, 놀란 것과 달리 그의 말은 사람들을 기운 빠지게 했다.

전에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목걸이를 분실한 뒤에는 소극적으로 변해 버렸다.

"이미 조가 정해졌잖아요. 너무 늦었어요."

발레아가 그의 말에 대답했다.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말속에 묵직한 뼈가 느껴졌다.

발레아의 말에 피아르의 머리는 더욱 아래로 내려갔다.

다시 조용해지려는 순간, 마누엘이 입을 열었다.

"그럼 조장은 누가 하는 거지?"

말을 하면서 마누엘은 다른 사람들을 쭉 둘러보았다. 공주만 빼고.

성격하고는. 반말하고 싶어서 공주를 빼고 둘러본 거였다.

거기다 둘러보는 꼴이 자기를 지목하라고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럼 마누엘 님이...."

"알렉스 님이 좋겠어요!"

그 시선에 피아르는 반사적으로 마누엘을 지목하려고 했지만, 그 전에 발레아가 손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나는 화들짝 놀랐다.

이년이 나를 물 먹이려는 건가!

아니, 조장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조장을 하면 얼마나 고생할지 뻔하게 보이잖아!

고귀한 10대 소녀, 말 지지리 안 듣는 배다른 형제, 반쯤 제정신이 아닌 데다 나를 죽였던 여자에다 잔뜩 주눅 든 행정 학부 학생까지.

다행히 다들 제대로 무장은 하고 왔지만, 이 구성원들을 통솔하는 것은 절대 무리였다.

"공주님이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나는 냉큼 높은 사람에게 짐을 떠넘겼다.

"네?"

공주는 내 말에 깜짝 놀랐고, 다른 사람들도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하긴 공주의 나이가 걱정되겠지.

"제가 옆에서 도와드리겠습니다. 공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네. 알겠어요."

하지만, 다시 한번 옆에서 바람을 넣으니 공주는 순순히 수락했다.

공주가 수락하자, 조장이 결정되었다.

반대는 당연히 없었다. 어린 나이가 걱정되지만, 공주가 하겠다는데 어느 누가 나서서 반대를 하겠는가.

나도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공주가 조장이 되어야 그나마 말을 들을 터였다.

공주는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웠고.

옆에서 조언 비슷하게 참견해서 컨트롤하면 될 듯하니까.

거기다, 조장이 딱히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번 수업은 보호자를 낀 사파리 관광에 가까우니까.

"공주님이 계신 조인가요?"

여교사 한 명이 우리 옆으로 다가왔다.

"제가 여러분 조를 맡게 되었네요."

중년의 여교수. 교양학 수업인 '상속 능력 기초' 수업에서 본 교수였다.

상속 능력 학부 쪽 교수라고 들었는데.

"아이샤 공주님, 니엘입니다."

"학생으로 대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녀는 우리를 대충 훑어보고는 공주에게 인사를 올렸다.

공주는 난감한 얼굴로 손을 저었고, 학생들은 교수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교수가 대놓고 학칙을 어기고 있었다.

아카데미 안에서는 계급과 관계없이 평등하게 대하라.

아카데미를 만든 초대왕의 왕명이었지만, 교수부터 지키지 않는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저 교수는 계승권이 없는 귀족이었던가. 아이들도 상속 능력이 안 나타났고.

세대를 이어 가며 피가 섞이면 어느 순간 태어난 아이들이 각성을 못 하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어머니가 평민인 나도 그럴 위험이 있었고, 귀족끼리 섞이더라도 결국 그런 자식은 능력이 없는 귀족이 되었다.

그래서 귀족들은 강한 능력을 가진 자식을 후계자로 세우려 하는 것이다.

뭐, 그 덕분에 장자는 후계자 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신나게 형제끼리 싸우기도 하는 거고.

아마 니엘 교수도 본인이 마지막인 단승 귀족으로 끝날 것이다.

그래서 공주에게 잘 보이기 위해 무리수를 둔 거고.

이 조를 담당하려고 뭔가 수를 썼으려나.

원래대로라면 카트린이 우리와 같이 움직였을 텐데, 그녀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잘나신 대귀족 자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쨌거나 각 조는 교사나 실력 있는 기사들이 맡았다.

구경에 가까운 현장학습이라 깊게 들어가지 않더라도, 마왕 봉인지가 안전할 리가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학생 전체가 우르르 몰려다니면 마물들의 시선을 다 끌어 버릴 테고.

결국, 보호자인 기사나 교사들이 소규모 인원을 통솔해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조장은 교사의 지시를 전달하는 연락책 정도밖에 의미가 없었다.

"조장은 누구로 정했죠?"

"제가 조장입니다."

"역시, 공주님이십니까."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공주를 바라보는 교수였다.

그런데 왜 공주에게 이렇게 줄을 대려고 애쓰는지 모르겠다. 제1 왕자, 제2 왕자 쪽에 비하면 무척이나 헐거운 끈일 텐데.

그렇게 담당자들까지 다 조별로 모이자, 학장은 마법진 위로 올라갔다.

"모두 자리에 서세요. 이동진을 가동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동이 끝날 때까지 능력 사용은 금지입니다."

그의 말에 우리는 담당자의 지시에 따라 각자 위치에 섰다. 뭔가 규칙이 있는 것 같은데 아직 알 수 없었다.

모두 제자리에 서자, 마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우우우웅.

공기가 떨리고, 마법진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와, 진짜 마법진이야."

다들 빛나는 마법진에 놀라고 있었지만, 나는 휘몰아치고 있는 마나에 더 놀라는 중이었다.

'일종의 마나 흡수진인가.'

본인이 가지고 있는 마나를 증폭하는 목걸이와 다르게 마법진은 주변의 마나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능력 사용을 금지시킨 것이 이해가 되었다.

이렇게 마나를 빨아들이는데, 괜한 능력을 썼다가는 엉망이 될 게 분명했다.

"장비를 확인하고, 조별로 손을 잡으세요. 잘못하다가는 혼자 낙오될 수 있습니다."

일렁이는 마나가 안정되자, 학장이 모두에게 말했다.

장비를 모두 확인한 뒤에, 우리 조도 손을 잡았다.

니엘 교수가 마누엘과 손을 잡았고.

마누엘은 피아르와 손을 잡았다.

피아르는 발레아와, 발레아는 나와 손을 잡았고, 내 반대쪽 손은 공주가 잡았다.

학장이 주위를 훑어본 뒤에 능력을 일으켰다.

"출발합니다."

화아아악!

말과 함께 마법진이 눈이 부시도록 밝은 빛을 내뿜었다.

사람들이 빛에 휘감겼고, 나는 마나가 멀리 뻗어 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목표인 봉인지로 연결되는 것 같았다.

'저 마나를 건드리거나 끊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잠시 무서운 생각을 떠올리던 나는 시야가 확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건물 안에 있었는데, 우리는 어느새 나무들, 아니 밀림 속에 들어와 있었다.

다른 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빽빽한 밀림 안에 우리 조원 다섯과 니엘 교수만 서 있었다.

동시에 현기증이 확 일어났다. 놀이 기구를 연달아 10번은 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엑!"

피아르가 바로 헛구역질을 했고.

"욱!"

"웁!"

마누엘과 다른 학생들도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다.

공간 이동의 후유증 같았다. 나도 속이 뒤집혔지만, 급히 마나를 끌어올렸다. 마나가 움직이자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마나를 움직이면 좀 괜찮아진답니다."

언제 자리를 옮겼는지, 니엘 교수가 공주의 등을 두드리며 말하고 있었다.

니엘 교수의 조언 덕분인지 공주의 표정도 금방 괜찮아졌고, 마누엘과 발레아, 피아르 순서대로 창백했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는 학생들.

"여기가 봉인지?"

피아르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고.

"그냥 울창한 숲 같은데...."

마누엘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좀 더운 것 같아요."

발레아는 손부채를 만들어 흔들었고.

공주는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역시, 나이답지 않은 공주였다.

그리고 나는 허공을 보며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눈앞에 메시지창이 떠올라 있었다.

[봉인지에 도착했습니다. 새로운 '저장 시점'이 설정되었습니다.]

젠장, 또다시 세이브 포인트가 설정되어 버렸다.

제84화

제9편 현장학습 (2)

'자동 시점이 지금 설정되다니 조금 방심했나.'

죽지 않고 자동 시점이 설정된 게 지금까지 세 번이 있었다.

[봉인지에 도착했습니다. 새로운 '저장 시점'이 설정되었습니다.]

[봉인지]라....

첫 번째 자동 시점은 [각성식]이었고, 두 번째는 [아카데미 입학]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봉인지].

특정 행사나 사건 말고도 일정 지역에 도착하는 것도 새로운 이벤트가 되는 모양이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겠고.

하기야, 마왕 봉인지니 중요한 건 당연했다.

돌이켜보면 하나하나 이해가 되었지만, 그건 일이 벌어진 뒤에야 깨달았을 뿐이었다.

매번 뒷북인 느낌이라 이럴 때면 나 자신이 조금 한심했다.

나는 두 손으로 뺨을 두드렸다.

'정신 차리자.'

"알렉스 님도 놀라셨나 봐요."

내가 뺨을 두드리는 것을 보았는지 옆에서 발레아가 말을 걸었다.

"네, 조금 놀랐습니다."

암, 놀랐고말고.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리 멀리 흩어진 것은 아니에요. 조금만 걸으면 학장이 있는 집합 장소에 도착할 거예요."

내 말에 니엘 교수가 공주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저 교수도 참 일관성 있었다.

교수의 모습에 나는 마누엘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왜, 그런 표정으로 보지?"

그야, 니엘 교수에게 캐릭터와 자리를 빼앗겼으니까.

아직 마누엘은 어렸다.

이쪽 세상에서는 성인 취급이었지만, 전생이었다면 고등학교에 다닐 나이이니 실제로도 어렸다.

그러니 니엘 교수를 상대하기에는 아직 멀었다.

딱 봐도 마누엘은 공주 때문에 이 조에 참여했다.

내 실력을 알기에 다른 사람들처럼 나에 대해 혐오하는 것도 아니었고.

나와 같은 조라도, 가족이라 어쩔 수 없다는 이유가 있어 명예에도 별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니엘 교수 때문에 공주에게 한 발짝도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공작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위치나 배워 온 귀족의 예절 같은 것 때문에 우물쭈물하다가 교수에게 새치기를 당한 것이다.

"다들 정신이 들었으면 준비하세요."

교수의 말에 일행은 정신을 차렸다.

이미 검을 뽑아 든 공주를 제외하고, 다른 일행들도 서둘러 무기를 뽑아 들었다.

마누엘은 집에서 가져온 명검을 손에 쥐었고, 발레아와 피아르도 형식적이나마 검을 들었다.

나도 등에 메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피아르와 아이샤 공주는 내가 한 손으로 들고 있는 검을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분명 양손 검일 텐데...."

키가 전보다 커져서 처음 들고 다닐 때처럼 이상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지금도 한 손으로 드는 것은 무리일 것 같은 거대한 검이었다.

그런 검을 한 손으로 쉽게 잡고 있으니 놀라는 게 당연했다.

"전에 쓰던 단검은 이제 안 쓰시네요."

발레아는 얼마 전 자신과 싸웠을 때 쓰던 단검이 생각난 것 같았다.

"원래 이쪽이 주무기였습니다."

몸에 숨길 수 있고 능력을 활용하기 쉬워서 단검을 자주 사용했지만, 오랜 시간 배우고 훈련했던 것은 이 대검이었다.

우우웅.

나는 대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대검 끝에서 내 눈에만 보이는 붉은 아지랑이가 작게 피어올랐다.

이제는 단검을 들지 않아도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교수도 내 검을 신기한 듯이 보다가 금방 고개를 젓고, 공주에게 말했다.

"모두 출발하죠. 너무 늦으면 점수가 깎일지도 몰라요."

"어디로 가야 하죠?"

발레아의 물음에 모두 니엘 교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거대한 나무와 넝쿨로 가득한 주변을 살펴보더니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안쪽으로 이동된 건가? 이러면 찾기가 어려운데."

작게 중얼거리던 그녀는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더니, 결국 나를 바라보았다.

"그... 기사 학부 맞아?"

"네."

말 걸기가 어려웠나? 모를 리가 없는데, 쓸데없는 것을 물어보고 있었다.

"그럼, 아무 나무 위로 올라가서 확인 좀 해 볼래?"

그녀의 말에 옆에 서 있는 나무를 확인했다.

양팔로 감싸 안기 어려운, 두껍고 높은 나무였다. 내가 아니더라도 육체 능력이 있는 상속 능력자라면 누구나 올라갈 수 있었다.

"저도 기사 학부인데요."

옆에서 공주가 이의를 제기했지만.

"설마 공주님을 올라가라고 하지는 않겠지?"

오히려 나를 혼내는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역시, 노련한 정치꾼이었다.

마누엘도 놀란 눈으로 교수를 바라보았다.

아니, 우리 착. 한. 형님에게 벌써 나쁜 물을 들이면 곤란한데....

괜히 말린 기분에 뭔가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우선 그녀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나무 위에서 뭘 찾아야 하나요?"

"올라가 보면 알아."

네에, 네에. 속으로 욕을 한 사발 하고, 나는 나무를 타기 시작했다.

마나를 손과 발에 두르고, 가지를 피해 쑥쑥 위로 올라갔다.

스파이더X가 부럽지 않은 속도였다.

그렇게 아파트 5층 높이까지 올라가니 나무 끝에 도달했다.

그 뒤에 주변을 살피자, 교수의 말대로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멀리 푸른 광선 한 줄기가 하늘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신기하네. 무슨 능력이지? 레이저 능력 같은 건가."

아니면 플래시 능력일지도.

아무튼 저 광선이 출발한 곳이 교수가 말한 목적지가 분명해 보였다.

나는 나무 위로 올라온 김에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래에서 보았을 때는 나무와 덩굴이 가득한 정글이었지만, 이곳에서 보는 봉인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수해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지만, 멀리 눈 덮인 산맥도 보였고, 호수처럼 보이는 곳도 있었다.

멀찌감치 점처럼 보이는 날짐승, 아니 마물도 보이고. 이 정도 거리에서 저 정도 보이면 생각보다 큰 마물이었다.

우지끈.

숲 한가운데 나무들이 쓰러지며 길을 내는 광경도 보였다.

"확실히 위험한 곳이네."

여기서 보니, 이곳이 봉인지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빛줄기를 확인한 뒤에 아래로 뛰어내렸다.

착.

작은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내려서니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모였다.

"빛줄기가 위로 솟아오르고 있는 곳을 보았습니다."

나는 빛줄기가 솟아오른 방향을 가리켰다.

"맞아. 학장님이 하신 거예요."

나에게 차갑게 대답하더니, 이어서 공주에게는 부드럽게 설명하는 니엘 교수였다.

"자, 그럼 출발하죠."

그녀가 다시 일행을 이끌었다. 이번에는 목적지도 알았으니, 모두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무와 넝쿨이 가득하고, 수풀이 우거진 정글 같은 숲을 나아가니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이 세계를 많이 돌아다니지 않았지만, 이 숲은 어딘가 낯설고 이상했다.

바람도 거의 불지 않았고, 공기도 마나도 왠지 찐득찐득했다.

다른 곳보다 몇 배나 많은 마나가 느껴졌지만, 어딘가 불길해 보이는 마나였다.

그래서인지 덩굴이 뒤덮인 숲은 무척이나 음침해 보였다.

일행도 무척이나 긴장한 것 같았다.

그때, 교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모두 알고 있듯이 이 마왕 봉인지는 대전쟁 때 용사들이 수많은 병사와 기사들과 함께 마왕과 마물들과 싸워 마왕을 봉인한 곳이에요."

그녀는 걸어가면서 설명을 이어 갔다.

마왕의 등장 이후 끝없이 밀리던 전선은 용사라고 불리는 신기한 능력자들의 도움으로 이곳까지 전선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그 와중에 고대 제국과 수많은 나라가 멸망했고, 병사들과 기사들, 사람들이 수없이 죽어 갔지만, 결국 이 대륙 동쪽 끝인 봉인지까지 마왕과 마물들을 밀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용사들은 마왕을 죽이지 못하고 이곳에 마왕을 봉인했고, 봉인된 마왕의 마나가 주변을 휩쓸어 마물들을 가두었다.

용사와 인간들도 마왕을 봉인하는 데 지쳐서 더는 싸울 수가 없었다.

그들은 마물이 모여 있는 이곳을 봉인지라고 지정하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실제 봉인지에서 들으니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럼, 이 찝찝한 기분이 마왕의 마나 때문인 건가요?"

"마왕의 마나. 마기라고 부르기도 하죠."

공주의 질문에 니엘 교수는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정체된 마나 사이로 묘한 마나가 섞여 있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마나였다.

머릿속이 간질거리다가 결국 생각이 났다.

입학식에서 자살한 여강사에게서, 그리고 피아르의 스승이라는 자에게서 보았던 마나와 닮아 있었다.

여러 가지 상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봉인된 마왕이 스승이라는 자를 세뇌하는 장면에서, 제국의 연구진들이 봉인지에 연구실을 세워서 마기를 분석하는 장면까지.

쩝, 아무래도 전생에 만화나 웹소설을 너무 많이 본 것 같았다.

쓸데없는 상상을 지워 버리고, 사실만 기억에 담아 두었다.

그 뒤로도 교수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공주에게 잘 보이려는 교수의 노력 덕분에 이곳에서도 수업은 충실하게 진행되었다.

꼴 보기 싫었지만, 우리에게 도움이 되니 입 닥치고 잘 듣기로 했다.

그렇게 숲을 걸어가다가 나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묘하게 거슬리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만요."

일행을 멈춰 세우고, 주변을 살폈다.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귀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조용했다.

조용할 리가 없는데. 역시 뭔가 있었다.

이번에는 코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기분 나쁜 냄새가 코에 스며들었다.

찾았다!

"왜 멈춰 세운 거지?"

그때, 교수가 인상을 쓰며 내게 물었다.

"마물입니다."

나는 2시 방향을 가리켰다.

내 말에 교수는 눈썹을 찡그렸다.

"정말이야?"

"네."

"나보다 빨리 알아차렸다고?"

"제가 코가 좋습니다."

나는 손가락으로 코를 가리켰다.

코 덕분에 겨우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나의 움직임도 조금 달라져 있었다. 마나 움직임이 바깥과 달라서 나도 놓칠 뻔했다.

"아, 맞아요. 뭔가 다가오고 있어요."

교수는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어진 공주의 말에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곧 그녀도 알아차렸다.

"공주님 말씀대로네요. 모두 준비해요."

이 정도로 노골적이니 오히려 참신하게 느껴졌다.

"마물이 나타났으니 진형을 연습해 봅시다. 행정 학부와 상속 능력 학부에서는 따로 배우지 않지만, 마물과 상대할 때는 진형이 중요합니다."

그래도 아카데미 교수는 역시 아카데미 교수였다. 필요한 설명은 제대로 해 주었다. 물론, 공주를 바라보면서 해 주고 있었지만.

"조원들의 상속 능력에 따라 여러 진형을 만들 수 있어요. 다행히 여기에는 기사 학부생들이 있으니 우선 행정 학부와 상속 능력 학부 학생은 뒤로 물러서세요."

교사의 말에 마누엘과 발레아가 냉큼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기사 학부생들이 앞으로 나와 주세요. 기사가 마물을 일차로 막아 주고, 그 후 귀족들이 능력으로 마물들을 죽이는 거랍니다."

결국, 기사는 몸빵 하라는 이야기일 뿐이잖아.

"아, 공주님은 조금 물러서서 다른 학생들을 보호해 주세요. 싸우는 중에 다른 마물이 나타날 수도 있어요. 기사 중 한 명은 다른 능력자들을 보호하는 게 좋아요."

맞는 이야기이긴 한데, 결과적으로 보면 나만 앞에 나서라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

공주도 같은 생각인지 나를 쳐다보았지만, 나는 뒤로 손을 저어 그녀를 물러서게 했다.

교사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크르르릉.

크르르릉.

울창한 숲 사이로 표범처럼 보이는 검은색 마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마리가 아니었다. 크고 작은 두 마리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제85화

제10편 파티 전투

흑표범처럼 보이는 마물 두 마리.

크고 작은 두 마리의 마물은 서로 거리를 벌리고 등장했다.

'동시에 상대하기엔 거리가 먼데.'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아, 마침 두 마리네요. 알렉스 학생! 적어도 한 마리를 꼭 막아!"

니엘 교수가 화난 표정으로 나에게 소리쳤다.

말도 안 하려고 하더니 이름까지 불러 주셨군.

두 마리가 등장한 게 예상과 다른 모양이었다.

"한 마리는 제가 막아서겠습니다."

그때, 마누엘이 슬쩍 앞으로 나섰다.

그는 나를 보더니, 손을 앞으로 뻗었다.

파지지직.

그의 손에서 스파크가 뻗어 나갔다.

캬아아악!

전기에 직격을 당한 마물이 몸을 웅크리고 비명을 질렀다.

그의 말대로 마물이 다가오는 것을 막은 것이다.

그는 멋지게 폼을 잡으며 계속 전기를 내뿜었다.

꼴을 보니 금방 탈진할 것 같았다.

그래도 그 덕분에 다른 마물도 수풀 속으로 몸을 낮추었으니, 처음 마물을 상대한 것치고는 나쁘지 않은 대응이었다.

겁에 질려서 교수 뒤에 숨은 피아르보다야 100배는 훌륭했다.

공주도 얼굴이 창백해졌지만 검을 놓지 않았고, 발레아는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아이샤 공주는 아직 못 미더웠지만, 발레아가 있으니 괜찮을 듯했다.

그럼 교수의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마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교수의 말대로 한 마리만 상대하면 될 듯했다.

크아아앙!

다른 마물이 전기에 구워지는 모습에 멈추었던 마물이 다시 움직였다.

수풀 속에서 튀어나오더니, 나무와 나무를 박차며 내 쪽으로 달려왔다.

'마물 따위가 파쿠르를 하고 있냐.'

좌우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닌, 3차원적인 움직임이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놓칠 이유는 없었다.

나는 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오랜만에 잡는 대검이었다. 특별한 능력도 없고, 명검도 아니었다.

하지만, 무척이나 단단한 검이었다.

절대 부러지지 않는다고 말하던 이에로 후작의 아들 마르틴. 죽어 버린 서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배워 왔던 심법으로 마나를 돌리고,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몸이 가벼워지고 검이 더 날카로워졌다.

다른 능력은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머리 위로 뛰어내리는 검은 마물을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부우우웅.

길어진 열 개의 날카로운 발톱이 내 머리로 떨어졌지만, 내 머리가 갈라지기 전에 검과 먼저 부딪혔다.

내 검처럼 마물의 발톱에도 마나가 흐르고 있었다.

전에는 이런 마나가 흐르는 단단한 발톱 때문에 마물을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지금은 전과 달라졌다.

서걱.

대검이 마물의 발톱을 잘라 버렸다. 이어서 다리도 분리하고, 머리까지 반으로 잘라 버렸다.

쿵.

마물은 내가 서 있던 자리로 추락했다.

나는 검을 휘두른 김에 몸을 굴려 마물에 깔리는 것을 피했다.

검에 묻은 검은 피를 털어 내며 죽은 마물을 확인했다.

확실히 시체가 되어 있었다.

죽은 마물은 생각대로 동물이 마나에 오염되어 변형된 마물이었다.

마물이 되기 전의 습성대로 움직였지만,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지 못하는 놈이 공중으로 뛰어내린 게 잘못이었다.

"윽!"

크아아앙!

내가 마물을 잘라 내는 순간, 마누엘의 마나도 다 떨어졌다.

나쁘지 않은 실력에 괜찮은 위력이었지만, 저렇게 무식하게 퍼부으면 마나가 남아날 리 없었다.

모락모락 연기를 뿜어내던 나머지 한 놈의 마물이 괴성을 지르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나는 달려가는 마물을 향해 검을 던지려 했지만, 바로 멈추었다.

달려가는 마물 아래로 바닥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이미 발레아의 영역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발레아는 준비만 해 놓고 마물을 공격하지 않았다.

'실력을 숨기려는 걸까?'

아니면 나처럼 다른 학생들의 실력을 보고 싶어서일지도.

검은 마물은 일행 바로 앞까지 달려들었다.

그 순간.

딱!

니엘 교수가 손가락을 튕겼다.

펑!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폭음과 함께 달려들던 마물도 뒤로 튕겨 나갔다.

'공기를 터트린 건가?'

마물이 튕겨 나간 그 자리는 수풀이 원형으로 누워 버렸고, 내가 있는 곳까지 바람이 밀려왔다.

크앙!

공격력은 그리 강하지 않은 듯했다.

한참을 밀려난 마물이 다시 달려들었다.

하지만, 교수가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이번에는 튕길 때마다 마물의 몸이 갈라지며 피를 뿌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창이 마물의 피부 위로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공기, 혹은 바람을 움직이는 능력인가 보네.'

좋아 보이는 능력이었다. 방어에도 좋고, 원거리 공격도 가능하고, 거기다 무기가 안 보이니 상대방은 방어하기도 어렵고.

크앙! 컹!

달려들던 마물은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공격을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그 모습에 공주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싸울 생각인 듯했다.

공주가 막 튀어 나가려는 순간, 교수가 피아르를 향해 소리쳤다.

"뭐 하는 거지? 다른 학생들이 싸우고 있는 거 안 보이나?"

교수의 말에 달달 떨고 있던 피아르가 정신을 차렸다.

"아, 네, 네!"

그는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더니, 공주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럼, 예비 폭탄은 실제로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볼까.

"증, 증폭!"

피아르는 팔을 내뻗으며 주문 비슷한 것을 외쳤다.

능력을 발휘하기 위한 키워드인 것 같은데, 듣고 있는 나도 조금 창피했다.

피아르의 팔에 모여들던 마나가 공주에게 뻗어 나가는 것이 보였다.

희미하게 빛나던 공주의 몸과 검이 좀 더 빛나기 시작했고, 막 달려 나가려던 공주도 놀라서 피아르를 보았다.

"와, 힘이 넘치는 것 같아요."

"자, 이제 가서 싸워 보세요."

계속 마물을 견제하던 니엘 교수는 공주의 등을 살짝 밀어 주었다.

"넵!"

공주는 힘차게 달려 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공주 한정으로 본다면, 니엘 교수는 참으로 멋진 교육자였다.

'달리 공주와 관계있는 사람 아냐?'

오죽하면 이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공주는 피투성이가 된 마물 앞에 도착했다.

원래 검은색이라 딱히 달라 보이지 않았지만, 마물은 몸에서 연기가 풀풀 나고 있었고 피부 곳곳이 갈라져서 피를 쏟고 있었다.

'정말 예쁘게 밥상을 차려 놓았네.'

피아르 덕분인지 공주는 힘이 넘쳐 보였다.

공주는 작은 몸집이라 마치 대검처럼 보이는 검을 마물을 향해 휘둘렀다.

머리로 떨어지는 검.

엉망이 되었지만, 아직 마물은 움직일 수 있었다.

마물은 급하게 앞다리를 움직여 검을 막았다.

서걱!

하지만, 이미 죽기 직전인 마물이 몸에 마나를 실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잘린 마물의 앞다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됐다!"

공주는 잘라 버린 다리를 보고 기뻐했다.

하지만, 다리 하나 잘렸다고 마물은 죽지 않았다.

"위험해!"

교수의 말과 함께 마물이 피를 쏟으며 공주를 덮쳤다.

놀란 공주가 눈을 크게 뜨고, 교수가 급하게 손을 움직이는 순간.

덜컥.

입을 벌리고 공주의 얼굴 바로 앞까지 다가왔던 마물이 그 자리에 딱 멈춰 섰다.

마물의 몸에는 땅에서 자라나 있는 넝쿨이 어느새 잔뜩 감겨 있었다.

서걱.

그와 동시에 내가 마물의 목을 잘라 버렸다.

"괜찮나요?"

놀란 니엘 교수가 달려오고, 겁먹은 공주가 딸꾹질했지만.

나는 피 묻은 검을 털며 발레아를 노려보았다.

'힘을 숨긴 찐다'도 아니고, 발레아를 믿었다가 큰일 날 뻔했다.

아니, 내 잘못인가. 발레아를 믿다니.

발레아는 나를 보며 손을 모으고 미안해했지만, 아무리 봐도 고의처럼 보였다.

"다행이에요. 발레아 덕분이에요."

하지만, 그녀의 본성을 모르는 니엘 교수와 다른 학생들은 발레아를 칭찬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위기의 순간에 발레아가 나서서 공주를 구해 준 것처럼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공주는 금방 안정을 되찾았다. 이 역시 나이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공주가 안정을 되찾자, 교수는 학생들을 돌아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마물들이 강했어요. 피아르를 빼고는 다들 잘했어요."

교수가 학생들을 살필 때 나는 아예 건너뛰었다. 생각보다 잘해서였나? 덕분에 피아르가 배로 혼나는 분위기였다.

마물을 보고 벌벌 떨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지원을 해 주었는데, 행정 학부 학생이 그 정도면 되지 않나?

마누엘도 페이스 생각은 안 하고 질러 버려서 초반에 나가떨어졌고, 공주는 아직은 싸울 실력이 아니었다.

거기다 발레아는 실력 발휘를 하지도 않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따지면 나도 제대로 싸우지 않은 건가.

따지고 보면 다른 학생들도 모두 문제가 있었다.

니엘 교수도 괜히 공주를 경험시켜 준답시고 공주를 위험에 빠지게 했고.

하지만, 교수가 피아르를 혼내는 것을 말릴 생각은 없었다.

피아르의 잘못은 아니지만, 피아르 때문에 한 고생을 생각하면 그는 더 혼나야 했다.

"...다음부터는 정신을 차려야 해!"

피아르를 열심히 혼낸 뒤에 니엘 교수는 계속 우리를 움직이게 했다.

"원래 마물은 가죽부터 피까지 쓸모없는 게 거의 없을 정도예요. 특히 마나를 쓰는 귀족들이나 기사의 장비로 쓰는 재료에는 마물의 부산물이 제격이랍니다."

다시 교수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아까 전처럼 공주를 보며 하는 강의였다.

"지금은 시간도 없고, 운반할 방법이 없어서 놔두고 가지만, 웬만하면 사람들과 같이 와서 시체를 수거하는 게 좋아요. 아니면, 유물 가방 같은 것을 구하든가요."

왕국의 보물 창고에 있다는 '유물 가방' 이야기인가 보다.

엄청난 양이 들어가고, 무게도 늘어나지 않는다는 가방.

게임에서 보았던 인벤토리나 아공간 같은 물건이지만, 본 적이 없으니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일행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길을 가다가 또다시 마물을 만나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안전하게 처리했다.

내가 앞에 나가서 막고, 발레아가 영역을 펼쳐 모두를 보호했다.

피아르도 정신을 차리고 모두에게 증폭을 걸어 주었고, 공주도 내 뒤에서 나를 보조했다.

'마누엘은 마나가 다 떨어져서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 버렸지만....'

마누엘은 무척이나 못마땅한 것 같았지만, 자기가 잘못했는데 다른 사람에게 뭐라 하기에는 그가 배운 귀족의 명예가 문제였다.

'나중에 뒷구멍으로 시비를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거야 그때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이제 조장이 통솔하도록 해요."

마물과의 전투가 안정적으로 바뀌자, 교수는 우리에게 전투를 맡겼다.

"아, 네, 넵. 모두 진형을 갖춰 주세요!"

우리는 공주의 지휘에 따라 덤벼오는 마물을 잡았다.

공주는 문제없이 일행을 통솔했다.

니엘 교수는 대단하다고 마구 칭찬했지만, 솔직히 이 구성원이면 누가 조장을 해도 상관없었다.

그렇게 몇 차례 전투를 하며 몇 시간 동안 걸어서 우리는 집합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넓은 공터에 학장과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학장이 서 있는 앞에는 빛이 솟구치는, 뚜껑이 열린 나무 박스가 있었다.

우리가 따라온 빛이 저 나무 상자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섯 번째 조가 왔군요."

일등은 아니었지만, 그리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다.

제86화

제11편 낙오

공터에 도착한 우리는 자리에 앉아 쉬었다.

교수와 기사들도 쉬고 있는 것을 보니, 이 공터 혹은 저 나무 상자에 마물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무슨 장치를 한 모양이었다.

우리 뒤에도, 학생들이 교수나 기사들과 함께 차례로 공터에 모여들었다.

살짝 위험한 일이 있기는 했지만, 이대로 현장학습은 끝날 모양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해가 나무 끝에 걸쳐지며 사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언제 가는 거지?

생각보다 오래 쉬게 되어서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을 살피니, 교사와 기사들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해 있었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어떻게 된 거예요?"

"아직 한 조가 안 왔어요."

"너무 늦는 것 아닌가요?"

누가 안 온 거지?

나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살펴보았다.

몇몇 학생들이 안 보이고, 교수 중에도 안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카트린. 카트리네 교수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우리 조원들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뭔가 일이 생긴 것 같은데요."

발레아의 말에 모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직 도착을 못 한 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이유를 알려 주었다.

"네?"

모두 놀라 주변 사람들을 살폈다.

"브리아가 없어."

발레아가 사람들을 살피다가 친구 한 명이 안 보인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맙소사, 미리사!"

피아르는 사촌 누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 카트린이 없어요."

그리고 공주도 놀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공주의 말대로 카트린 교수의 조가 안 보였다.

"잠깐 기다려 봐요.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볼 테니."

우리와 같이 쉬고 있던 니엘 교수가 학장이 있는 곳으로 갔다.

학장이 있는 곳에는 기사와 교수들이 모여 있었다.

귀에 마나를 불어넣어 이야기를 들어 보려고 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마나로 막을 두른 모양이었다.

조원들은 안절부절못했다. 특히 공주의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공주는 뭔가 아는 모양이었다.

카트린 교수의 조가 더 늦어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대로 기다리는 건가? 이제 곧 밤이 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학장 주변에 모여 있던 교수와 기사들이 각자의 조로 돌아갔다.

니엘 교수도 우리 조로 돌아왔다.

모두 니엘 교수의 입을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학장 핑계를 댔다.

"학장님이 말씀하실 거예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학장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아직 조 하나가 낙오된 채 도착을 안 했습니다. 계속 기다렸지만 밤이 되어 가니 더는 기다리기 어렵습니다."

학장의 말대로 해가 나무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다.

깊은 숲이니 금방 어두워질 게 분명했다.

"안전을 위해 기사로 구성된 수색대 일부를 남기고 나머지는 아카데미로 복귀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상대로였다. 도착하지 않은 조 하나 때문에 이곳에서 모두 밤을 지새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먼저 복귀하고, 수색대가 사라진 조를 찾아서 이곳으로 데려와 아카데미로 돌아오는 게 정답이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일까. 카트린 조가 도착을 못 하다니. 조원들이 아무리 실력이 없더라도 카트린 혼자서 충분히 가능할 터였다.

학생들은 갑작스러운 사고에 소란스러워했다.

"좀 더 기다리면 안 됩니까?"

한 학생이 물어보았지만, 학장은 고개를 저었다.

"마물의 접근을 막는 유물의 유지 시간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 얼마 뒤에는 이곳으로 마물이 몰려올 겁니다."

학장은 바로 학생들을 재촉했다.

"밤의 봉인지는 낮보다 훨씬 더 위험합니다. 모두 이동할 준비를 하세요."

모두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학장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만, 공주는 그들과 달랐다.

"저도 남을게요."

"안 됩니다."

니엘 교수는 공주의 요청을 바로 거절했다.

"학장님께 말씀드려도 소용없습니다. 각성한 지 얼마 안 되는 어린 학생을 봉인지에 남겨 둘 수는 없습니다. 거기다 공주님은 왕족이십니다. 아무도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니엘 교수는 전과 다르게 단호하게 말했다.

어린 학생이라기보다는 왕족이라 허락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그보다 공주가 왜 이리 고집을 부리는지 모르겠다.

이모인 카트린이 걱정되는 것은 알겠지만, 자신이 수색대에 들어가도 전혀 보탬이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수색대가 찾더라도 금방 복귀할 수 없잖아요."

공주의 말에 니엘 교수가 얼굴을 굳혔다.

그게 무슨 말이지? 찾기만 하면 학장과 같이 돌아오면 되잖아.

아니, 잠깐.

"설마 이동하는데 쿨타임, 아니 대기 시간이 필요하나요?"

내 물음에 공주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의 대답에 모두 놀랐다.

"언제 가능하게 되는 거죠?"

"오전에 와서 지금 돌아가는 거니까 내일 아침에는 다시 올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오지 못한 친구와 사촌이 있는 발레아와 피아르가 급하게 물었다.

"이곳까지 오게 해 준 마나를 원래 자리로 되돌리는 거니까 되돌아가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하시네."

니엘 교수는 전과 다르게 다른 학생들에게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우리가 돌아가면 마법진에 모아 두었던 마나가 모두 사라지니까 일주일(?) 정도 필요하다고 하시던데."

손가락을 꼽아 보던 그녀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남게 되는 기사들도 이곳에서 일주일을 보내기는 쉽지 않을 거야."

니엘 교수의 말에 피아르도 급하게 부탁했다.

"저도 남겠습니다."

"안 돼. 넌 도움이 전혀 안 되니 허락할 수 없어."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조원 모두에게 말했다.

"이런 말을 하면 안 되겠지만, 모두 확실히 기억해 둬. 왕립 아카데미는 학술원 같은 교육기관이 아니야. 이곳은 귀족의 의무를 배우는 곳이자 죽음을 보게 되는 곳이야. 동료의 죽음에도 익숙해져야 해."

교수는 도착하지 못한 학생들과 교수의 죽음을 각오하라고 이야기했다.

학생들은 그녀의 말에 충격을 받았고,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이 세상의 아카데미는 내가 아는 전생의 학교와 전혀 다르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평범한 학교가 아니라 사관학교에 가까운 곳이라는 것도, 예상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지금 처음으로 실감했다.

학장부터 시작해 교수들도 교육 도중에 학생과 교직원이 죽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두 나라를 이끌어 갈 각성자이자 귀족이지만, 교육 중에 죽을 수도 있는 인력이었다.

'그래도 공주는 예외겠지.'

자신은 절대 남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공주는 간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뜻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말로는 부탁하지 못하고 있지만, 저런 표정을 하고 있는데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공주의 부탁 때문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카트린을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목숨이 하나라면 거절했겠지만, 한 번 정도는 들어줘도 될 듯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나는 몸을 돌려 학장에게로 걸어갔다.

"너도냐! 안 된다니까!"

뒤에서 니엘 교수가 소리쳤다. 아무래도 본래의 성격이 튀어나온 것 같았다.

사람들은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교수들의 지도 아래 이곳에 올 때처럼 위치에 맞춰 선 것이다.

그리고 기사 몇 명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다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수색대로 선택된 사람들인 것 같았다.

나는 닫힌 상자 위에 걸터앉아 마나를 다스리고 있는 학장 앞에 섰다.

그가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지?"

"수색대에 참여하려고 합니다."

그는 내 말에 눈썹을 찡그렸다.

"자네 이름이 어떻게 되나."

"알렉스 데 그레시아입니다."

내 이름을 들은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날 귀찮게 한 게 누군가 했더니 바로 자네였군."

그는 내 뒤쪽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공주님이 저렇게 원하시니 어쩔 수 없군. 참여하게나."

각성도 하지 못한 공주를 아카데미로 대피시킨 이유는 바로 눈앞의 학장이 공주, 왕비의 편이었기 때문이다.

카트린을 교수로 받아들인 것도, 왕비의 후원으로 나를 아카데미에 받아 준 것도 그였고, 입학식 때 자살한 강사 건을 묻어 버린 것도 그였다.

그리고 내가 공주의 숨겨진 호위 같은 존재라는 것을 교직원 중에 아는 사람은 카트린과 학장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나를 수색대에 참여시킬 수 있었다.

"너, 어디 가!"

"수색대에 참여합니다."

"뭐?"

학장과 대화를 마친 뒤 다른 곳으로 움직이자, 마누엘이 나에게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나는 대충 손을 흔들어 줄 뿐이었다.

공주는 차마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만 꽉 깨물고, 양손으로 바지만 잡아 늘리는 중이었다.

공주 때문이 아닌데, 생각보다 꽤나 자책하는 것 같았다.

그냥 놔두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해서 나중에 포상이라도 듬뿍 받아 내면 좋을 테니까.

발레아는 부러운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부러운 건지.

그리고 피아르는 간절한 표정으로 나와 수색대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사촌 누이가 많이 걱정되는 듯했다.

다른 학생들도 놀라서 나를 쳐다보았다.

수색대 쪽으로 가는 게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기사들 앞에 도착했다.

"수색대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알렉스입니다."

내 인사에 기사들은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학생이 수색대에 참여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될 게 분명했다.

"학장님이 허락하셨습니다. 공주님께서 부탁하셨고요."

기사들이 뭐라 하기 전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다들 황당해하면서도 뭐라 하지 못했다.

학장과 공주. 역시 좋은 백이었다.

잠시 뒤.

부우우웅.

환한 빛과 함께 사람들이 사라졌다.

직접 이동했을 때는 몰랐는데, 밖에서 보니 이동하는 방법이 무척 신기했다.

'순간 이동 같은 게 아니라 마나에 실려 가는 것처럼 보였는데.'

너무 빨리 움직여서 마치 사라진 것같이 보였지만, 남겨진 마나를 살펴보니 마나로 이어진 길을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멀미를 한 건가.'

아직 제대로 파악한 것은 아니었지만, 좀더 조사하면 재미있는 결과가 나올 것 같았다.

모두 사라진 뒤에 기사들이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숲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문을 열었다.

"살아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는데."

"쉽지 않겠죠?"

"솔직히 같이 못 돌아가면 죽는다고 봐야겠지."

그들의 대화에는 우울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식량은 있지?"

"일주일분은 있습니다. 아니, 한 명 늘었으니 6일분이네요."

동료가 메고 있는 배낭을 보던 중년 기사가 뒤따라가고 있는 나를 돌아보았다.

"자네는 왜 죽을 자리에 찾아온 건가."

그의 말에 나는 씩 웃었다.

"기사님들과 비슷합니다. 저도 매여 있죠."

대충 둘러친 말이었지만, 기사들은 내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들의 처지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실력은 어느 정도지? 설마 우리의 발목을 잡지 않겠지?"

다른 기사가 물었다.

나는 그의 말에 대답했다.

"영지의 기사에게 인증 받았습니다. 중급 기사 이상이라고."

내 말에 기사들이 전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제87화

제12편 수색 (1)

내 말에 기사들은 걸음을 멈추었다.

믿기 힘들어서였다.

"정말인가?"

"믿기 힘든데."

자신들끼리 쑥덕이던 기사들이 한 명을 내 쪽으로 밀어냈다.

"아니, 왜 접니까."

"막내잖아."

"젠장."

"대충 확인만 해. 해가 넘어갔다."

젊은 기사가 투덜거리며 내 앞에 섰다.

판금 갑옷이 노을에 붉게 물들어 있었다.

"같이 가야 하니까 실력 확인이 필요하다...라고 하니까."

그는 검을 들어 올렸고, 나는 등에 멘 검을 잡았다.

"와, 그걸 한 손으로 든 거야?"

젊은 기사가 뒤를 돌아보았다.

"저 정도 힘이면 그냥 데려가도 될 것 같은데요."

"잔꾀 부리지 말고 빨리 확인해 봐."

"쳇."

혀를 차던 기사가 내 앞에 섰다.

"자, 덤벼."

다른 사람들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아카데미 기사들이라서인지, 귀족인 나에게 편하게 말을 놓고 있었다.

다른 귀족들이라면 뭐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별 상관없었다. 오히려 이게 더 편했다.

그것보다 내 말을 전혀 믿지 않는 것 같았다. 검도 제대로 잡지 않고, 자세도 풀어져 있었다.

"그럼, 가겠습니다."

나는 기수식을 행한 뒤에.

쿵!

마나가 가득한 발로 땅을 박찼다.

쉬이익.

기사의 놀란 얼굴이 빠르게 다가왔다.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부우우웅.

공기를 가르는 대검 소리가 숲을 울렸다.

"뭐?"

코앞에서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대검은 기사의 목을 향해 밀려들고 있었다.

젠장, 막지도 않냐!

검면으로 휘두른 거였지만, 이 속도로 맞으면 목이 멀쩡할 리 없었다.

큭.

나는 급하게 검을 멈추었다.

덜컥.

기사의 목 바로 옆. 검이 겨우 멈추었다.

쿵.

기사는 놀라 땅에 주저앉았다.

세상에, 이렇게 허접하다니.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멈추는 게 더 힘들었다.

나는 주저앉은 기사를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생각보다 너무 허접했다.

다른 기사들을 봐도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생각을 잘못했다. 이들은 아카데미 소속의 기사들이었다.

공작 영지나 왕실 기사들을 기준으로 생각했으니, 이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왕실 기사단을 빼놓고도, 그레시아 공작의 기사단은 왕국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기사단이다.

그런 기사들의 수준으로 생각했으니.

잘못했다가 기사 한 명을 저승으로 보낼 뻔했다.

"테스트는 이 정도면 될 것 같은데요."

놀란 눈으로 나를 보던 기사들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귀족인가."

"무슨 상속 능력이길래 저 나이에 저렇게 센 거지?"

"실력이 있으니 학장도 허락한 거겠지. 괜한 테스트였어."

기사들은 자격지심이 가득해 보였다.

'아무리 잘해도 상속 능력 탓이 되어 버리네.'

이들은 내가 보아 왔던 영지의 기사들과는 다른 기사들이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부자들을 미워하던 전생의 내 모습은 이들과 다를 게 없었다.

"상속 능력이든 노력이든 간에 실력은 충분하니까 문제될 것 없지. 어쨌든 환영한다."

일행의 리더로 보이는 중년 기사가 입을 열었다.

구시렁거리던 기사들은 그의 말에 입을 닫았다.

"그럼, 인원수도 맞으니 둘로 나눠도 되겠군."

그의 말에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기사들은 5명. 나까지 6명이니 둘로 나누면 세 명씩 움직인다는 이야기였다.

"괜찮습니까? 둘로 나눠도."

"어쩔 수 없지. 어쨌거나 우리는 사람들을 찾으려고 남은 거니까 위험하더라도 많은 곳을 서둘러 찾아봐야 해."

표정이 좋지 않고 구시렁거리는 기사들이었지만, 이들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 이들이었다.

기사들은 협의를 해서 둘로 나누었다.

나는 리더로 보이는 중년 기사와 나와 대련을 한 막내 기사와 함께 움직이게 되었다.

나머지 세 명의 기사들은 중년 기사에게 인사를 하고는 빠르게 숲속으로 사라졌다.

"우리도 출발하지."

중년 기사가 앞장섰다. 우리도 그의 뒤를 따랐다.

내 옆을 걸어가던 젊은 기사가 머리를 긁적이며 이름을 말해 주었다.

"영 엉망이긴 한데, 내 이름은 악셀이야. 앞에 계신 분은 미로 선임 기사이시고."

"알렉스입니다."

나도 다시 이름을 말해 주었다.

"그렇게 빠르게 들어올 줄은 생각도 못 했어. 준비했으면 그렇게 꼴사납게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야."

그는 조금 전 대련이 영 아쉬운 모양이었다.

그의 말에 앞서가던 미로 선임 기사가 주의를 주었다.

"방심한 것도 네 실력이야."

"그건 알지만요."

악셀 기사는 어깨를 으쓱였다.

신기하게도 미로 기사는 숲 안에서도 길을 찾지 않고 빠르게 걸어가고 있었다.

"혹시, 낙오조를 찾는 방법이 있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따로 사람을 찾는 모습이 안 보여서요."

내 질문에 앞에서 걸어가던 선임 기사가 대답했다.

"아까 전에 다른 조들이 어느 쪽에서 왔는지 확인했다. 우선 그들이 오지 않은 방향으로 움직일 생각이다. 공간 이동 때 흩어지는 최대 거리는 학장님이 알려 주셨다. 그 거리까지 움직인 뒤에 빙 둘러가며 찾을 생각이다."

뭔가 다른 방법이 있는 줄 알았는데, 평범하지만 착실한 방법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기사님들은 반대쪽으로 가신 거군요."

"출발한 곳을 중심으로 서로 빙 둘러 움직이면 대충 찾을 수 있을 거야."

"살아 있다면."

악셀 기사의 말에 미로 기사가 초를 쳤다. 아니면, 현실적이라고 해야 할까.

"그보다 우리가 사는 게 먼저일 것 같은데요."

악셀 기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 멀리 움직이지 않았는데, 벌써 밤이 되었다.

하늘에는 별과 달이 떠 있었지만, 울창한 나무와 넝쿨로 인해 숲 안쪽은 한 치 앞도 안 보일 정도로 깜깜했다.

"눈에 마나를 싣는 방법은 알고 있겠지?"

"네."

나는 대답을 하면서 눈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깜깜하던 주변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캬릉. 캬릉.

꺅. 꺅.

크르르르를.

밤이 되니 마물들의 괴성이 숲을 울렸다.

확실히 다른 사람들의 말처럼 봉인지의 밤은 낮과 완전히 달랐다.

"외곽인데도 난리네요."

"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낮에도 마물들이 전보다 강해진 것 같고."

"낙오자들도 있고요."

기사들이 작게 속삭였다.

밤이라 소리를 죽여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손에 든 대검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지금은 대검을 쓰기 어려울 것 같았다.

나는 대검을 등에 다시 멨다. 그리고 숨겨 놓았던 단검을 꺼내 들었다.

"너무 어두운데. 마나를 밀어 넣어도 코앞밖에 안 보여."

귀족과 달리, 기사들은 마나 활용이 쉽지 않았다.

나는 낮과 그리 차이 나지 않게 보고 있었지만, 두 기사는 겨우 바로 앞만 보며 움직였다.

나는 기사들이 나아가는 앞쪽을 보고는 혀를 찼다.

'이래서 죽느니 사느니 한 거였어.'

멀리 앞쪽에서 이쪽을 노려보는 마물이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내가 눈이 되어 줘야겠어.'

"마물입니다. 거리는 정면 30걸음. 원숭이 형태의 마물입니다."

소년 크기의 못생긴 인간형 마물이었다. 마치 전생에 보았던 판타지 소설의 고블린 같았다.

내 말에 젊은 기사는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지만, 선임 기사는 몸을 낮추고 검을 들어 올렸다.

"한 마리인가?"

"지금 두 마리째입니다. 아니 세 마리. 계속 늘어납니다."

아무래도 포위하려는 것 같았다.

"포위인가."

내 생각과 같았다. 선임 기사는 경험이 풍부한 것 같았다.

"선공이 낫겠지."

"네."

"좋아, 셋, 둘, 하나."

지금이라는 소리와 함께 우리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마나가 단검으로 밀려들었다. 붉은 기운이 단검에서 길게 솟구쳤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마나로 이루어진 검기.

푹!

나는 포위망을 만들고 있는 마물의 머리에 단검을 밀어 넣었다.

이어서, 단검을 빼내고 옆에 있는 마물의 가슴에 단검을 밀어 넣었다.

끼이익!

마물의 비명이 들려왔다.

선임 기사의 검에 베인 마물이 비명을 지른 것이다.

밤눈이 밝은 나와 달리, 기사들은 희끄무레한 형체에 검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잘 보이지 않으니, 일검에 죽이기 어려웠다.

그래도 이런 허접한 마물을 처리하지 못할 리는 없었다.

문제는 숫자였다.

우리가 죽인 것보다 더 많은 마물이 나타났다.

"죽이면서 계속 달려. 멈추면 포위당한다!"

선임 기사의 말대로였다.

우리 세 사람은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렇게 한참 동안 달려 나가다 보니, 더 이상 공격하는 마물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헉, 헉, 다 처리한 건가요?"

팔다리에 상처를 입은 악셀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영역을 벗어난 거야."

선임 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그는 별로 안 다쳤다.

"고맙네. 덕분에 살았어."

그는 내 쪽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두 사람이 죽인 마물의 두 배 이상을 죽였다는 것을 안 모양이었다.

"눈이 잘 보인 덕분이죠."

내 말에 선임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헉, 헉, 조금 쉬면 안 되겠습니까?"

악셀 기사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선임 기사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학장님이 말한 거리까지 온 것 같아. 조금 쉰 뒤에 수색을 하면 될 거야."

악셀 기사는 나무에 등을 대고 주저앉았다.

선임 기사도 다른 나무에 등을 기댔다.

"알렉스 학생도 좀 쉬지."

"그보다, 앞으로는 어떻게 찾을 건가요?"

"별도리 없지. 빙 둘러 가며 일일이 찾아봐야지. 다행히 자네가 밤눈이 밝으니 찾는 데 도움이 될 거야."

"그럼, 쉬는 동안 제가 따로 찾아봐도 되겠습니까?"

미로 기사는 나를 빤히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옆에 있는 나무를 올라갔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나무를 타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나무 끝에 도착하자, 나는 감탄사를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하늘에 별이 가득했고, 마나가 물결치며 하늘을 가로질렀다.

마치 오로라처럼, 물감을 탄 것처럼 마나가 흘러가고 있었다.

밤이라 멀리 마나가 흘러나오는 곳까지 보였다.

아마 저곳이 봉인지의 중심인 마왕이 봉인된 곳일 터였다.

마물이 득실거려서 접근하기도 어렵다는 곳이었다.

나는 멍하니 그곳을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그런 곳에 시선을 빼앗길 때가 아니었다.

나는 나무 끝에 올라서서, 주변을 살폈다.

가까운 곳에서 먼 숲까지.

아쉽게도 빛은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빛은 기대하지 않았다. 마물이 먼저 봐서 공격당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빛은 포기하고 대신 마나를 살펴보았다.

이곳 마나와 다른 마나가 보이는 곳. 아니면 마나가 격렬하게 움직인 흔적이 있는 곳.

그런 곳이 있나 계속 살펴보았다.

한참을 살피다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런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격렬하게 마나가 움직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싸움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흔적 사이에 조금은 이질적인 마나가 느껴졌다. 마기가 섞이지 않은 마나. 귀족의 마나였다.

잘못 본 것일지도 모르고 이미 아카데미로 돌아간 다른 사람의 흔적일 수도 있지만, 지금은 저 엉킨 마나를 쫓을 수밖에 없었다.

맨땅에 헤딩을 하느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게 나았다.

아래로 내려와 미로 선임 기사에게 말해 주었다. 그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내 말대로 하기로 했다.

잠시 후 악셀 기사가 끙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 우리는 내가 말한 목적지를 향해 달려갔다.

밤에 숲을 가로지르는 것은 무척이나 힘들고 지치는 일이었다.

거기다, 달려가는 동안에 몇 번이나 마물과 만났다.

악셀 기사뿐만 아니라 선임 기사도 상처를 입으며 마물을 해치운 우리는 결국 새벽이 다 되어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나는 살아 있는 두 학생.

그리고 카트린의 시체를 보게 되었다.

제88화

제13편 수색 (2)

하루 전.

봉인지로 옮겨진 카트린이 담당한 조는 봉인지의 낯선 환경에 금방 적응했다.

"브리아와 레오넬이 선두, 라이드와 헤수스가 뒤를 받치도록. 미리사는 마물이 등장하면 레오넬에게 능력을 사용해."

"네!"

다른 조처럼 기사 학부의 두 학생을 전방에 세우고, 상속 능력 학부의 두 학생과 행정 학부인 미리사를 뒤에 배치했다.

그녀는 미리사의 능력을 기사 학부에서 능력이 떨어지는 레오넬에게 사용하도록 했다.

브리아는 기사 학부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였고, 상속 능력 학부의 라이드는 신입생 선서까지 한 대단한 가문에다 실력이 뛰어난 학생이었다.

거기다, 카트린이 뒤에서 학생들을 지키니 카트린의 조는 딱히 힘들지 않게 마물들과 싸울 수 있었다.

크아아앙!

곰처럼 생긴 푸른 털의 마물이 뒷다리로 일어나서 괴성을 질렀다.

일그러진 얼굴. 입 안에서 타오르는 푸른 불꽃.

브리아와 레오넬이 앞에서 마물을 막아섰고, 마물은 푸른 화염을 쏘아 냈다.

콰아아아아!

입에서 뿜어져 나간 화염은 막아선 두 학생 쪽이 아니라 엉뚱한 곳으로 쏘아졌다.

"잘했어!"

"저항이 강해서 오래 못 버팁니다!"

마물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던 라이드가 숨을 헐떡였다.

기사 학부 두 학생이 그 틈에 마물을 공격했다.

마물은 머리를 흔들며 혼란스러워했다.

덕분에 다른 학생들의 공격을 버티지 못했고, 카트린이 나설 것도 없이 금세 쓰러지고 말았다.

"라이드 학생, 수고했어요. 마물을 상대하기 좋은 능력이네요."

카트린의 말에 숨을 헐떡이면서도 라이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봤자, 가문에게 그리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요."

그의 말에 카트린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라이드의 능력은 그의 가문의 능력이 아니라 어머니 쪽인 외가의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안정적으로 마물들을 쓰러뜨리며 전진하던 카트린의 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갑옷과 뼈만 남은 오래된 시체 하나가 그들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기사인가. 상당히 오래된 시체인데...."

"설마 아카데미 기사인 건가요?"

"제국 기사 아냐?"

카트린의 말에 시체에 다가온 학생들이 수군거렸다.

"음. 갑옷에 문양이 아직 남아 있네. 문양을 보면... 차이프리 백작가... 기사인 듯한데."

학생들은 모두 라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시체에 다가와 낡은 갑옷을 쓰다듬었다.

"저희 기사단 갑옷이 맞습니다. 아마 봉인지로 출정을 왔던 기사들 중에 복귀하지 못한 기사인 것 같습니다."

마왕과 용사들의 마지막 전투와, 인류와 마물의 혈투가 있었던 봉인지는 남은 마물 때문에 접근을 금하는 금지 구역이 되었다.

하지만, 금지로 지정된 뒤에도 많은 가문과 국가, 개인이 봉인지로 기사단과 용병, 능력자들을 보냈다.

위험천만한 곳이었지만, 그만큼 기회의 땅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봉인지에서는 마왕과의 싸움으로 이 땅에 묻힌 용사, 기사, 군인, 신관들의 유품과 유물이 계속 발견되었고, 아직도 남아 있는 던전과 대단한 부산물을 얻을 수 있는 마물까지 가득한 곳이었다.

라이드는 담담한 얼굴로 시체 옆에 놓인 낡은 검을 챙겼다.

기사의 유품으로 가져갈 생각인 것 같았다.

'생각보다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은데, 50년 정도 되었나?'

좀 더 살펴보니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얼마 안 된 시체였지만, 50년 이상 된 시체이니 라이드가 알지 못하는 일일 가능성이 컸다. 그의 담담한 태도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모두 시체에 묵념한 뒤에 길을 떠났다. 마지막까지 시체 옆에 남아 있던 라이드가 가방에서 반지 하나를 꺼냈다.

그는 반지를 손가락에 낀 뒤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반지가 붉게 변했다.

반지를 확인한 라이드가 굳은 얼굴로 일행을 따라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번 더 마물을 처치한 일행은 라이드의 요청으로 합류 지점의 빛을 확인했다.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갔던 브리아가 아래로 내려와 의외의 말을 꺼냈다.

"방향이 잘못되었습니다. 길을 잘못 든 것 같습니다."

"정말이야?"

브리아의 말에 카트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길을 잘못 들다니, 그동안 이런 실수를 한 적은 없었는데....

하지만, 실제로 브리아가 직접 확인한 결과였다.

일행은 브리아가 말한 방향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그 뒤로 일행은 계속 걸었다.

마물들도 계속 나왔고, 점점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걸어가는 동안, 카트린은 수시로 방향을 확인했다.

브리아 뿐만 아니라 카트린 본인도 나무 위로 올라가서 방향을 확인했다.

'목적지가 너무 멀어. 왠지 봉인지 중심 쪽으로 향하는 느낌도 들고.'

해가 지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빛이 가리키는 목적지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너무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학생들에게 불안감을 안겨 줄 수는 없었다.

"조금만 더 가면 돼. 모두 힘내!"

서두르기 위해 그녀도 적극적으로 싸움에 임했다.

그렇게 일행은 노을이 지기 시작할 무렵 빛이 가리키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공터도 아니었고 빛을 내뿜는 상자도 없었다.

거기다 학장과 다른 학생들도 없었다. 대신, 마물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붉은 꽁지깃이 달린 다리 여섯의 도마뱀 마물들이었다.

"이게 뭐야!"

"다들 물러서! 진형을 갖춰!"

카트린이 모두에게 외쳤고 학생들도 정신을 차리고 진형을 갖추었지만, 마물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설마 마물들의 둥지?'

너른 분지에 나뭇가지와 넝쿨로 이루어진 두꺼운 바닥. 그리고 다른 마물들보다 몇 배는 큰 마물이 중앙에 떡하니 앉아 있었다.

쿠에에엑!

큰 마물이 괴성을 지르자, 둥지에 있는 마물들이 모두 일행에게 달려들었다.

일행이 상대할 만한 숫자가 아니었다.

카트린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모두에게 말했다.

"내가 뒤를 지킬 테니, 모두 달려!"

카트린의 고함에 일행은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움직였다.

서걱!

몰려드는 도마뱀 마물의 몸을 베어 가며 카트린은 뒤에서 일행을 지켰다.

열심히 마물을 베었지만, 카트린 혼자서 마물들을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처음부터 낙오됐는지 라이드는 초반부터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그가 빠진 탓에 다른 학생들은 쉽게 마물들의 공격을 당했다.

빛 능력자인 헤수스가 제일 먼저 마물들에게 휩쓸렸다.

광원을 터트려 눈을 공격하는 능력을 지닌 헤수스였지만, 안타깝게도 마물에게 공격받았을 때는 아직 노을이 사라지지 않을 때였다.

번쩍거리는 빛과 함께 헤수스는 먼저 달려드는 도마뱀 마물에게 머리가 뜯겨 나갔다. 다른 부분들도 밀려오는 마물들에 파묻혀 일행의 뒤에 남겨졌다.

헤수스가 죽자, 충격을 받은 미리사가 그다음으로 죽었다.

다른 사람의 능력을 증폭시켜 주는 능력을 가진 미리사였지만, 그 자신은 싸울 줄 모르는 조금 튼튼한 능력자일 뿐이었다.

미리사가 죽자, 증폭된 능력이 원래로 돌아온 레오넬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그렇게 학생들이 한 명씩 죽어 가는 동안, 카트린은 필사적으로 마물들을 쓰러뜨렸다.

방패로 마물들을 쳐 내고, 일렁이는 검으로 검이 닿지 않는 마물들을 죽였다.

대단한 실력이고 훌륭한 활약이었지만, 그녀 혼자의 힘만으로는 학생들을 지킬 수 없었다.

결국, 대다수의 학생을 잃고 그녀도 큰 상처를 입은 뒤에야 마물들의 추적을 겨우 뿌리칠 수 있었다.

마물들이 둥지로 돌아가자, 카트린과 홀로 남은 브리아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잘했어."

카트린의 말에 브리아가 우울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카트린은 더는 걷기 힘들어 보였다.

그녀의 몸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찢어지고 갈라지고, 특히 옆구리가 뜯겨 나가서 창자가 보일 지경이었다.

강력한 각성 능력자라 저 큰 상처에도 정신을 차리고 있는 거지, 보통 사람이었으면 이미 쇼크사 했을지도 모른다.

"다들 죽었겠죠?"

브리아의 말에 카트린은 뭐라 말할 수 없었다.

"거기다 밤이 되었어요.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해야 하는 거죠?"

이번에는 카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늦은 거네요."

"수색대가 출발했을 거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돌아갔을 테고요. 그리고 수색대가 올 때까지 밤을 보내야 하잖아요."

아쉽게도 카트린의 말은 브리아를 안심시키지 못했다.

거기다 브리아는 어느 정도 봉인지와 현장학습에 대해 공부해 온 듯했다.

아쉽게도 카트린은 고통 때문에 브리아를 위로해 주지 못했다.

브리아는 이곳까지 참 잘 싸워 왔는데. 카트린이 점수를 준다면 100점에 가까웠다.

"큭, 여기서 수색대를 기다리자. 밤에는 움직이지 않는 편이 좋아."

그녀 말대로 봉인지의 밤은 낮보다 훨씬 위험했다. 괜히 설치다가는 죽기 딱 좋았다.

카트린은 억지로 팔을 움직여 가슴에 포션을 뿌리고 붕대를 감았다.

통증이 몇 배 더 심해졌다. 포션을 뿌렸기 때문이었다. 포션은 상처를 몇 배나 빠르게 낫게 해 주었지만, 그만큼의 고통을 주기도 했다.

한쪽 나무에 기대어 무릎을 감싸 쥐었던 브리아도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카트린의 말을 이해했다기보다는 지치고 충격을 받아 무심코 고개를 끄덕인 것 같았다.

그때였다.

저벅, 저벅.

가까이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윽!"

카트린이 신음을 흘리면서도 검을 치켜들었다.

우울증에 가까운 상태였던 브리아도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헉, 헉, 저, 접니다. 라이드."

숲속에서 등장한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제일 처음 낙오됐던 라이드 공자였다.

"살아 있었군요!"

브리아가 환한 얼굴로 라이드를 환영했다.

대신 카트린은 살아 돌아온 라이드를 보고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많이 놀라는 바람에 낙오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갔습니까?"

라이드는 어두워지는 브리아와 카트린의 표정으로 여기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교수님이 여기서 기다리자고 하시네요. 수색대가 올 거라고."

브리아의 말에 라이드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살아남았어요?"

브리아는 라이드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낙오된 뒤에 조심스럽게 숲이 파괴된 흔적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다행히 안 걸려서 이곳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일행이 도망치면서 낸 흔적이었다. 그래도 라이드라도 살아서 돌아와 주니 브리아는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브리아가 빨개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생리현상은 어쩔 수 없었다.

브리아가 수풀 속으로 사라진 뒤에 라이드가 카트린에게 다가왔다.

그는 옆구리 상처를 확인한 뒤에 다시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그가 몸을 돌렸을 때, 그의 등 뒤에서 카트린의 말이 들려왔다.

"헉, 헉, 왜 능력으로 경로를 바꾸었죠?"

그는 몸을 돌려 카트린을 바라보았다.

"학, 하악, 왜 일부러 낙오한 거죠?"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로 반쯤 죽어 가는 카트린을 노려보았다.

"무슨 소리입니까? 경로를 바꾸다니요. 낙오된 이유도 지금 설명했잖습니까?"

"하악, 하악, 라이드 당신의 능력은 감각 교란이잖아요. 마물의 시각, 청각, 후각까지 다 교란하는데 사람도 충분히 가능하잖아요. 하아, 우리가 나무 위에 올라갈 때마다 시각을 교란해서 빛의 위치를 바꾼 거 아닌가요?"

카트린의 말에 라이드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도대체 무엇을 찾으려고 낙오를 한 건가요? 설마, 옆구리에 차고 있는 주머니 때문인가요?"

라이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다시 카트린에게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죄송합니다. 주머니를 알아차리지 못하셨으면 편히 가실 수 있었을 텐데요."

그는 팔을 뻗어 카트린의 목을 졸랐다.

카트린이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라이드를 안쓰럽게, 혹은 안타깝게 바라보다 결국 눈을 감았다.

잠시 뒤, 볼일을 보고 돌아온 브리아는 편하게 잠자는 듯이 누운 카트린을 보고 입을 막았다.

"더 버티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라이드는 안타까운 얼굴로 죽은 카트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수색대가 도착했다.

제89화

제14편 되돌아가는 길 (1)

여러 번 경험했지만 알고 있던, 그것도 친했던 사람의 시신을 보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었다.

시간을 거슬러서 그들이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시체를 보는 순간의 충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살릴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 탓에 나는 지인이 죽은 충격 이상으로 심장이 조여질 정도의 긴장을 느꼈다.

"괜찮습니까?"

"둘만 살아남은 겁니까?"

기사들은 살아남은 두 학생에게 급하게 물었다. 둘 다 살아났다는 기쁨에 억지로 대답해 주었다.

"우, 우리 둘뿐이에요. 카트린 교수님이 마지막까지 버텨 주셨는데...."

여학생, 브리아가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을 하자.

"상처가 크셨습니다. 포션과 붕대로 치료해 보려고 했지만, 잘 안 되었습니다."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남학생이 추가로 설명했다.

다시 보니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신입생 선서를 했던 학생이었다. 라이드라는 이름이었는데.

기사들이 살아남은 학생들을 보살피는 사이에 나는 카트린의 시체를 살펴보았다.

붕대를 감아 놓은 옆구리 상처는 그들의 말대로 무척이나 심해 보였다.

다른 상처도 많은 것을 보니, 격렬한 싸움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동안의 성장으로 생겨났던 자신감이 쭉 빠져나갔다.

내 실력과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 카트린이 이렇게 죽어 버리다니. 이 봉인지에서는 나도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었다.

"신호를 보내고,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겠어."

미로 선임 기사의 말에 악셀 기사가 품에서 봉 하나를 꺼냈다.

그는 봉을 위로 들어 올리더니, 아래를 손바닥으로 쳤다.

츄아아아악.

봉에서 광원이 위로 쏘아지더니, 하늘에서 터졌다.

쾅!

신호탄이었다

"구했다는 소식을 알렸으니 집결지로 올 거야. 우리는 오면서 보았던 동굴로 가지. 해가 뜰 때까지 거기서 버티고 바로 집결지로 가도록 하지."

미로 선임 기사는 나에게 양해를 구하듯이 이야기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까지 오는 동안 두 기사는 내 실력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시신을 모셔 가기는 어렵겠죠?"

내 말에 선임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동굴 위치는 알고 있으니 시신을 수습하고 바로 따라가겠습니다."

내 말에 미로 선임 기사와 악셀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브리아와 라이드는 이해하지 못했다.

"어, 그러고 보니 알렉스가 왜 여기 있는 거죠?"

"좀 있다가 설명해 줄게요."

나는 브리아의 질문을 뒤로 미루었고.

"네? 그래도 같이 가야...."

선임 기사는 라이드의 말을 끊고 일행을 재촉했다.

"괜찮으니까 빨리 움직여요. 여기도 위험합니다."

걱정되는지 자꾸 발길을 멈추는 라이드를 이끌고, 기사들은 우리가 왔던 방향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나는 카트린의 시체를 제대로 확인했다.

상처 하나하나 전부 확인하고, 붕대를 풀어서 옆구리 상처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제대로 부검할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뭔가 의심스러운 상황도 아니었다.

단지 그녀가 이렇게 쉽게 죽었다는 사실을 내가 수긍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죽은 이에게 미안할 정도로 겉옷을 벗겨 가며 모두 확인한 뒤에, 내 대검으로 땅을 파서 그녀를 깊지 않게 묻었다.

그리고 커다란 돌을 세우고 주변 나무에 흠집을 내서 그녀가 묻힌 자리를 표시했다.

다행히 내 감각이 더 좋아졌는지, 충분히 다시 찾아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무덤에서 잠시 있다가 나는 그녀의 유품인 방패와 검을 들고, 먼저 간 일행을 따라갔다.

동굴에 도착했을 때는 먼저 출발한 기사들이 동굴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리 높지 않은 바위 언덕 아래에 푹 파인 깊지 않은 동굴이었다. 안쪽으로 10여 미터밖에 안 되는 짧은 동굴.

그리 높지 않아도 바위 언덕 아래에 있는 동굴이었다. 한쪽만 막아 내면 되기 때문에 깊지 않은 동굴이라도 숲 가운데에서 자는 것보다 훨씬 안전했다.

오래 지내기 어려운 곳이었지만, 하룻밤 정도는 지내기 충분했다.

내가 도착하기 전까지 기사들은 학생들과 함께 수풀과 나뭇가지로 동굴 앞쪽을 위장하고 있었다.

나뭇가지를 나르던 라이드와 브리아는 내가 일찍 도착한 것에 안도했다.

"괜찮아요?"

브리아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지나서인지 브리아와 라이드는 괜찮아진 것 같았다.

나도 그들을 도와 동굴의 위장을 끝마쳤고, 이어서 불침번을 정한 뒤 잠시나마 취침하기로 했다.

"곧 날이 밝겠지만, 잠깐이라도 잠을 자도록 해요. 날이 밝으면 계속 걸어야 하니까."

우선 고생한 두 학생은 불침번에서 제외시켰다.

나도 불침번을 빼 주려 했지만, 내가 나서서 불침번을 서겠다고 했다.

약간의 옥신각신 끝에 그나마 편한 첫 불침번을 내가 서게 되었다.

내 뒤에는 미로 기사, 그리고 마지막은 악셀 기사가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해가 뜰 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세 명이나 불침번을 설 정도는 아니었지만, 모두 너무 피곤했기에 출발 시간을 조금 늦추기로 했다.

조금 추웠지만, 이 정도면 기사나 능력자들은 불이 없어도 충분히 잘 수 있었다.

불침번을 서기 위해 위장용으로 쌓아 둔 나뭇가지 앞으로 가는 동안.

라이드가 먼저 자리에 누웠고, 두 기사도 검을 머리맡에 놓고 금방 곯아떨어졌다.

브리아도 자리에 누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다시 일어나 내 옆으로 왔다.

그녀는 바위벽에 기대앉은 내 옆에 앉아 어두운 숲을 바라보았다.

"위험할 줄은 알았지만, 내가 속한 조가 이렇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더구나 카트린 교수님이 돌아가시다니. 교수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가실 것 같지 않았는데...."

그녀는 앞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대답을 듣기 위한 말은 아니었다. 그냥 넋두리였다.

그녀는 이리저리 횡설수설 떠들다가, 내 이야기까지 했다.

"기사님들에게 들었어요. 학장님이 공자님을 수색대에 포함하셨다면서요. 알렉스 공자의 실력이라면 수색대에 들기 충분하지만, 학장님이 인정하셨다니 정말 대단해요."

기사 학부 시간에 혼자서 나와 여러 차례 대련을 해 봤기 때문인지, 그녀는 내 수색대 참가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렇게 이야기를 들어 주다가 잠깐 말이 멈춘 사이에 나도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아, 기사님들에게는 말했는데, 못 들으셨겠네요."

그녀는 어제 하루 벌어진 일을 설명해 주었다.

빛 신호를 따라왔는데 이상한 곳에 도착해 버린 것과 그곳이 마물들의 둥지라 엄청난 숫자의 마물들과 싸우게 된 것.

조원들을 차례로 잃고 마지막으로 다친 카트린 교수까지 결국 죽게 된 일까지 순서대로 말해 주었다.

말을 하다가 몸이 조금씩 떨리는 것 같았지만, 나는 이야기하는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대신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바로 들어가실 것 아니면, 몇 가지 물어봐도 되나요?"

"네. 어차피 잠이 안 와서 나온 거니까요. 물어보세요."

표정과 달리 그녀는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하기야, 도망치는 도중에 아는 사람들이 죽어 나갔으니 벌써 멀쩡해질 리가 없었다.

전생에 평범한 사람들이었으면 평생 트라우마로 남을 일이었다.

어쨌거나 허락이 떨어졌으니, 의문이 드는 점을 물어보았다.

"빛기둥을 따라갔는데, 합류 지점에 도착 못 했다고요?"

"정말 이상하죠. 저도 이해를 못 하겠어요. 카트린 교수님이 중간에 방향이 이상한 것 같다고 하셔서 레오넬하고 저하고 카트린 교수님까지 나무 위로 올라가 확인했어요."

"이상하다고 하셨다고요?"

"네. 처음에는 그런 말이 없으시더니 가면 갈수록 이상하게 느껴지셨나 봐요."

"음.... 그러면 처음부터 계속 그 방향이었나요?"

"아, 아뇨. 중간에 방향을 잘못 들어서 나무 위로 올라가 확인하고 방향을 튼 적이 있었어요."

"그게 언제죠?"

"맞다. 해골을 발견하고 좀 지나서였어요."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나와 카트린 교수가 친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인지, 브리아는 나에게 최대한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시체가 라이드 가문의 소속 기사였다는 이야기에다 죽은 학생들까지 포함해서 마물과 싸운 이야기까지.

"라이드가 처음에 낙오하지만 않았어도 한두 명은 더 살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아니, 그렇다고 라이드에게 뭐라 하는 것은 아니고요. 혼자서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니까요."

거기다 아쉬웠던 점까지 모두 털어놓은 뒤 그녀는 결국 피곤에 겨워 잠자리로 돌아갔다.

얼마 뒤에는 다음 불침번 시간이 되어 미로 선임 기사를 깨운 뒤, 나도 잠들었다.

"모두 일어나세요!"

잠깐 눈을 감았는데, 바로 일어나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간에 마물이 쳐들어왔나 해서 급히 눈을 뜨니, 햇살이 눈을 따갑게 찔렀다.

모두 일어나 건조식으로 아침을 때웠다.

훈련을 받은 기사들은 짧게 잔 수면만으로도 멀쩡해 보였고, 기사 학부인 나와 브리아도 능력자의 육체 덕분에 몸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다행히 라이드도 괜찮아 보여 일행은 바로 출발하기로 했다.

출발하기 전, 두 기사가 작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집결지에서 돌아갈 때까지 버틸 생각입니까?"

"아니, 그건 아니고 다른 곳으로 찾으러 간 기사들과 집결지에서 합류를 해야지. 합류한 뒤에 버틸 만한 곳으로 이동하자고."

미로 기사의 말에 악셀 기사의 표정이 어두웠다.

"살아 있을까요?"

"글쎄."

말을 나누던 두 기사가 나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대화를 전부 들었지만, 나는 모르는 척했다.

솔직히 어젯밤에 봉인지를 무사히 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내 덕분이었다.

학생들이 있는 곳을 찾아낸 것도 나였고, 다가오는 마물들을 감지해서 미리 알려 준 것도 나였다.

검을 쓰는 실력도 나쁘지 않았지만, 마물을 감지하는 능력만으로도 내 몫 이상을 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우리는 다시 출발지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다시 봐도, 밤의 봉인지와 낮의 봉인지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해가 뜨자, 수십 마리의 마물들이 쏟아져 들어오지도 않았고 몰래 습격하는 마물들도 없었다.

내가 미리 마물을 감지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다가오는 마물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물론, 쉬는 사람은 없었다.

기사들은 물론이고, 브리아도 기사들과 함께 마물을 쓰러뜨렸고, 라이드도 마물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나도 마물들과 싸울 때는 같이 도왔지만, 다른 때는 앞에 나서서 일행들을 이끌었다.

오늘은 어제와 같은 빛기둥이 없으니 맨눈으로 목적지를 찾아가야 했다.

우리는 다행히 길을 모두 기억하는 내가 있었으니, 어렵지 않게 출발한 곳을 향해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걷다 보니, 밤이 되기 전에 목적지인 공터에 거의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나도 알겠어."

미로 기사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뒤로 물러서서 일행과 합류했다.

"수고했어."

내가 옆에 서자, 라이드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입학식 때는 어색하게나마 존중을 하더니, 서자란 걸 알게 된 뒤에는 이렇게 반말을 했다.

뭐,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저쪽도 후계자는 아니지만, 고위 귀족의 맏아들이었으니 내게 충분히 반말을 할 수 있었다.

"라이드 공자도 고생했습니다."

"아직 도착한 것도 아닌데."

"얼마 안 남았으니까요."

"거기다, 일주일은 더 버텨야 하잖아."

"그렇긴 하네요."

"아, 그러고 보니 어제 라이드 공자 가문의 기사 유체를 찾았다면서요."

"...아, 그랬었지. 다행스런 일이었어."

잠시 말이 끊어졌다.

"그래도 다행이었어요. 낙오했다가 다시 복귀해서."

"죄송할 따름이지."

대답이 늦어지고 점점 짧아졌다.

"그러고 보니, 허리에 찬 주머니는 못 보던 거네요."

"...원래 차고 있던 거야."

내 질문에 라이드는 움찔 놀라 버렸다.

어라? 할 말이 없어서 꺼낸 말이었는데? 무슨 일이지?

다시 질문을 하려 했지만, 라이드 공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거기다, 주변을 둘러보니 예상치 못한 상황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제90화

제15편 되돌아가는 길 (2)

숲 안에는 우리 두 사람밖에 없었다.

분명 일행 뒤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거기다,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길을 잃다니, 내 감각으로 길을 잃다니 믿을 수 없었다.

"설마 길을 잃은 건가?"

라이드 공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이드 공자를 보니, 그는 내가 처음 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낯선 표정은 금방 사라졌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잠깐만요. 위에서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나는 나무 꼭대기로 올라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황당하게도 위에 올라와서도 도무지 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고, 황당한 경우였지만 나는 오히려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이렇게 된 거였군."

큰 의문 하나가 풀렸다.

나는 아래로 내려와 라이드에게 말했다.

"조금 이상하지만,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빨리 가죠."

"어? 길을 알겠다고?"

내 말에 라이드는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네, 가시죠."

나는 한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쪽에서 주춤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라이드를 바라보았고, 라이드는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따라왔다.

이동하는 도중에 언제나처럼 마물이 나타났다.

내가 먼저 검으로 막아섰지만, 전과 다르게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제대로 검을 휘둘렀다고 생각했지만, 마물을 스쳐 지나갔고 어떨 때는 너무 깊게 휘둘러 빼내기가 힘들었다.

"젠장, 왜 이리 안 맞지? 좀 도와줘요!"

"나도 노력하고 있어. 저 마물은 내 능력이 잘 안 먹혀!"

뒤에서 뭔가 하는 모양이었지만, 마물은 신나게 나를 공격했고, 상처투성이가 되어서야 겨우 물리칠 수 있었다.

나는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길은 더욱 알기 어려웠지만, 라이드를 이끌고 계속 걸었다.

그 뒤로 몇 차례 싸움이 끝난 뒤, 나는 결국 큰 상처를 입고 걸음을 멈추었다.

윽. 크윽.

나는 악어를 닮은 마물 사체에 걸터앉아 옆구리를 살펴보았다.

살이 갈라져서 내장이 보이고 있었다. 피도 계속 흘러나와 현기증이 나고 있었다.

포션을 들이부었지만, 상처가 심해서 현상 유지도 힘들어 보였다.

"저는 여기까지인 것 같은데요. 더는 못 갈 것 같습니다."

내 말에 라이드는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살폈다.

저렇게 열심히 봐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내 상처는 치명상이었고, 더는 움직이기 힘들었다.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라이드가 나무에 기대어 놓은 내 검을 손에 쥐었다.

"생각보다 무거운 검이네. 이런 걸 들고 싸워 왔다는 건가."

그는 인상을 쓰며 검을 움직였다.

능력과 달리, 그는 제대로 검을 배운 것 같았다.

말없이 내 검을 잡고 휘두르고 있는 라이드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당신이었습니까? 일부러 사람들에게서 떼어 놓은 게."

내 말에 그는 피식 웃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 너무 많아. 아니면 내가 연기력이 부족한가."

"설마, 나 말고도 알아차린 사람이 있었습니까?"

내 말에 그는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찔렀다.

"같은 상처를 입은 교수도 마지막엔 눈치챘지. 몰랐으면 편안하게 죽었을 텐데 왜 아는 척을 해서는."

그는 나지막이 혀를 찼다.

"설마, 교수님이 돌아가신 게 마물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당신이 죽인 건가?"

"뭐, 그냥 놔두었어도 죽었을 거니까 마물 탓이라고 해도 될 거야. 브리아에게 말할 것 같아서 조금 빨리 돌아가시게 한 것뿐이야."

그는 무척이나 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앞에 두고도 아무 걱정이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봐도 이 상처로는 그를 상대하기 어려워 보였다.

그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몰랐지만, 내 능력은 마물에만 효과가 있는 게 아니야. 사람의 감각도 뒤틀어 감각을 교란할 수도 있고, 빛기둥의 위치를 착각하게 만들 수도 있지."

역시, 예상대로였다.

내가 길을 잃은 것도, 카트린 조가 이상한 길로 빠진 것도 모두 라이드의 능력 때문이었다.

"그런데 공작은, 그리고 가문의 어른들은 이런 내 능력을 무시하고 동생 녀석에게 후계자 자리를 주었단 말이야!"

말을 하다가 말고, 그는 검으로 하늘을 찔러 댔다.

"가문의 후계자가 아카데미로 쫓겨나 다른 떨거지들하고 하하 호호 지내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줄 알아? 아니, 네놈은 애초에 서자니 그런 걸 알 리가 없지."

그는 신나게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내가 따로 이유를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알아서 그가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었다.

입학식에서 봤을 때부터 어제까지 라이드의 그런 사정을 알지 못했다.

평범하게 잘 살고 있는 똑똑한 고위 귀족의 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나름대로 고통과 갈등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솔직히 내가 보기에는 병X 같아 보였지만, 지가 힘들다는데 어쩌겠나.

뭐라 할 이유도, 할 수도 없었다.

라이드는 계속 말을 이었다.

"억지로 버티면서 지내는 도중에 어제 드디어 하늘이 날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역시 그 기사 시체가 문제였다

"그 시체는 50년 전에 우리 가문에서 봉인지로 보냈던 기사였어. 둘째 할아버지와 기사단 반을 보낸 큰 계획이었지. 무슨 물건을 찾으려고 했는지는 알 필요 없고, 아무튼 그들은 실패했던 다른 사람들처럼 이 봉인지에 와서 실종되어 버렸어."

나는 멍하니 그가 떠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현기증이 점점 심해졌지만, 아직은 버틸 만했다.

"그 뒤로 아카데미를 다니게 되는 사람들은 모두 봉인지에 가서 사라져 버린 작은할아버지의 물건들을 찾아오는 게 의무이자 목표가 되었지."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하게 찾아질 리가 없었지. 결국 지금은 형식적인 일이 되어 버렸어."

이야기를 듣다가 깜빡 정신을 잃었나 보다.

"어이, 벌써 죽지 마. 내 이야기를 다 들어야지."

라이드는 걱정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정신을 차리자, 그는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형식적인 의무였을 뿐이지만, 실제로 벌어지면 전혀 다른 문제가 되어 버려. 후계자 자리에서 쫓겨났던 아들이 다시 올라설 기회가 되는 정도랄까."

그는 말을 하면서 허리에 손을 올렸다.

"죽은 작은할아버지는 만약을 대비해서 일정 거리까지 가까워지면 빛이 나는 반지를 가지고 있었어. 그리고 아카데미에 오는 일족은 그 반지를 가지고 다니지."

그는 자기 손을 보여 주었다. 아카데미에서는 못 보던 반지가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

기사 시체를 발견한 뒤에 그는 가방에 넣어 두었던 반지를 꺼내 확인했다. 반지는 붉게 빛나고 있었고, 그는 능력을 발휘해서 일행을 반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유인한 것이다.

운이 나쁘게도 목적지는 마물들의 둥지가 자리 잡고 있었고, 그는 다른 사람들을 이용해서 작은할아버지가 남겨 놓은 물건을 찾는 데 성공한 것이다.

"허, 허리에 차고 있는 주머니가 바로 그 물건입니까?"

"맞아. 우리 가문이 찾던 것. 내가 다시 후계자로 올라서게 만들어 줄 물건이야."

그는 허리에 차고 있는 작은 주머니를 두드렸다.

주머니는 너무 작아서 웬만한 것은 넣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뭐가 들어 있으려나.

멍한 정신에도 호기심이 스쳐 지나갔다.

"나중에 돌아왔는데, 다친 교수님은 나를 의심하고 있었고 어쩔 수 없이 손을 쓰게 되었지."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그는 나를 노려보았다.

"별거 아닌 일이었는데, 교수님이 죽게 되어 버렸잖아. 거기다 너도 아는 척을 해서 나를 힘들게 만들고 있어!"

결국 자신이 벌인 일인데, 그는 나와 카트린 교수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사람들을 속였고, 거기다 속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 또 거짓말을 하고 나를 죽이려 하고.

아마 그는 어제 처음 큰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거짓말과 살인이 이어질수록 그는 양심이 무뎌지고, 살인에 익숙해졌다.

결국, 그는 아무 거리낌 없이 지금 나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말해 주고 싶었어. 연극에서 악당이 주저리주저리 비밀을 털어놓는 모습을 보고 비웃었는데, 내가 그 상황이 되니 참기가 무척 어렵더라고."

그는 주절주절 떠든 변명을 마지막으로, 드디어 내게 다가왔다.

"자연사를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해. 해가 지기 전에 합류 지점에 도착해야 하니까 먼저 죽이는 것을 양해해 줘."

그는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검을 치켜들었다.

저 검으로 죽게 되면 어제 아침으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계획한 대로였다.

어차피 카트린을 살리기 위해 한 번은 죽어야 했다.

그 죽음을 효과적으로 쓰기 위해 여태껏 나는 범인을 찾아다녔다.

그녀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이리저리 물어봐서 범인을 파악하고, 그 뒤에 범인의 입을 열려고 일부러 상처를 입었다.

다행히 범인의 입이 가벼워서 쉽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죽는 것뿐.

크아아아앙!

하지만, 나 혼자 죽는 것은 조금 억울했다.

어차피 지금의 일은 없어지겠지만, 카트린을 죽인 저놈을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

"뭐야! 무슨 소리야!"

라이드가 검을 휘두르지도 못하고,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타이밍이 맞았네.'

신기하게도 내가 마나를 보고 느끼는 것은 라이드의 능력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길을 찾는 감각은 엉망이 되었지만, 마나를 느끼는 감각은 그대로였다.

덕분에 마물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는 것도, 마물이 많은 곳을 찾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래서 나는 길을 잃은 김에 마물이 많은 곳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이곳은 악어 마물의 둥지였다.

내가 깔고 앉은 마물은 둥지에 남은 암컷이었고, 지금 밀려오는 마물들이 수컷 마물들이었다.

수십 마리의 악어 마물이 사방에 나타났다.

"저리 가! 저리 가라고!"

라이드는 공포에 질려 검을 휘두르고, 능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검은 마물의 몸에 튕겨 나가고, 능력은 마물 한두 마리에게만 영향을 줄 뿐이었다.

"안, 안 돼! 다 왔는데! 내 자리로 돌아가는 건데!"

마물들 사이로 라이드의 비명이 들려왔다.

비명은 점점 작아졌고, 결국 조용해졌다.

마물들이 살을 씹는 소리가 들려왔고, 다른 마물들이 나에게도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렇다고 먹힐 수는 없지.'

나는 남은 마나를 가득 끌어올렸다.

피와 함께 마나가 밖으로 빠져나갔다.

현기증이 심해지더니, 이제 기력이 모두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사망하셨습니다. 자동 저장 시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잠시 뒤 - 혹은 오랜 시간이 지나 - 눈앞이 다시 환해졌다.

울창한 숲과 넝쿨.

어제 보았던 조원들이 엎드려서 헛구역질하고 있었다.

똑같은 광경.

제대로 돌아왔다.

자, 이제 카트린을 구하러 갈 시간이다.

제91화

제16편 지금 구하러 갑니다 (1)

죽었다 되살아난 뒤에 찾아오는 통증을 다스리는 동안, 일행도 헛구역질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무와 수풀과 넝쿨. 봉인지는 밀림에 가까운 울창한 숲이었다.

"여기가 봉인지?"

"그냥 울창한 숲 같은데...."

"그런데 좀 더운 것 같아요."

나는 바로 앞의 생에서 들었던 말을 똑같이 다시 한번 듣게 되었다.

이제는 신기하게 느껴지지 않는 대화의 반복.

나는 사람들이 정신 차리기를 기다리며 세운 계획을 다시 점검했다.

내 계획의 최종 목표는 카트린을 살리는 것과 라이드 녀석을 박살 내는 것.

둘 다 하기에는 일정이 빡빡했다.

무리로 여겨지는 부분도 있었고 시간이 빠듯한 부분도 있었지만, 계획을 수정할 생각은 없었다.

조원들이 주변을 둘러본 뒤에, 니엘 교수는 조원들에게 진형을 갖추도록 했다.

그러는 사이, 니엘 교수는 저번처럼 공주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이런저런 설명을 했다.

대충 준비가 끝나고, 니엘 교수는 나에게 나무 위로 올라가라고 지시했다.

저번에는 뭘 찾아야 할지 물어봤지만, 이번에는 반문 없이 그냥 나무 위로 올라갔다.

나무 꼭대기에서 본 광경은 전과 다르지 않았다.

멀리 빛으로 이루어진 기둥이 하늘 끝까지 솟구쳐 있었다.

아래로 내려와 나는 저번과 같이 말했다.

"빛기둥이 솟아오른 곳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손을 들어 방향을 가리켰다.

빛기둥이 솟아오른 방향과는 조금 떨어진 방향이었다.

"집결지에서 학장님이 유물로 빛을 쏘신 겁니다. 확인했으니 바로 출발하죠."

저번과 같이 다시 확인하지 않고 바로 출발했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내가 맨 앞에서 섰다. 일행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맨 앞에서 마물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맨 앞에서 마물을 막는 것이나 앞에서 일행을 이끄는 것이나 그리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전보다 조금 더 빨리 걸었다.

뒤에서는 공주에게 설명하는 니엘 교수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봉인지에 대한 설명, 공기와 마나, 마기에 대한 이야기.

설명을 듣다가 나는 뒤쪽을 향해 소리쳤다.

"전방에 마물입니다!"

저번처럼 니엘 교수는 못 믿겠다고 말했지만, 이번에는 해명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저번과 달리 걸음을 멈추지 않았으니, 금방 만나게 될 터였다.

크아아앙!

방향을 틀었는데도 처음 만나는 마물은 전과 똑같았다.

아마도 이 일대 전체가 저 마물들의 영역인 듯했다.

흑표범을 닮은 마물 두 마리.

나는 전과 달리 기다리지 않았다.

쿵.

발에 마나를 밀어 넣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마물을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서걱!

마물의 목을 잘라 버리고, 쓰러지는 마물을 옆으로 피했다.

그 와중에 저번처럼 다른 마물은 마누엘이 뿌린 전기에 지져지고 있었다.

저번에는 다른 조원들의 실력을 보기 위해 기다려 줬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나는 대검에 마나를 가득 밀어 넣은 뒤, 그대로 던졌다.

퍽!

검은 마물의 등에 박혔다.

아쉽게도 급소에 박히지 않았지만, 마누엘의 능력에 도움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콰지지지직!

마물의 피부 위를 흐르던 전기는 검을 타고, 마물 몸 안을 태우기 시작했다.

카앙! 캉!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마물은 쓰러졌다.

저번과 달리, 마누엘 혼자 마물을 쓰러뜨린 격이었다.

"괜한 도움이었어!"

마물이 숨을 거두자, 마누엘이 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놈 성격, 참 이상하네.

입가를 씰룩이는 게 뻔히 보이는데 괜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저번에는 마나가 바닥이 나서 짐만 된 것을 도와주었는데, 자기가 다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시간도 없고, 재롱이 귀여워서 그냥 봐주기로 했다.

처음 전투에서 조원들의 실력을 보지 못했지만, 봉인지에 마물은 많이 있었다.

더구나, 이동 속도가 전보다 빠르니 마물을 만나는 빈도는 전보다 훨씬 많아졌다.

"니엘 교수님!"

"내가 막고 있으니 서둘러요!"

"발레아, 잘했어요!"

"공주님, 뒤로 물러서요!"

"저도 할 수 있어요!"

싸움이 늘어나자, 신기하게도 조원들 간의 호흡은 전보다 더 좋아졌다.

쉬는 사람도 없었고, 발레아도 공주도 적극적으로 싸움에 임했다.

내 빠른 걸음에 뭐라 말하려던 니엘 교수도 조원들의 빠른 실력 향상에 입을 닫았다.

빠르게 봉인지를 주파하며 우리는 나무에 기대어 있는 시체 한 구를 발견했다.

내가 시체를 가리키자, 모두 놀라 시체에 다가갔다.

"기사 맞죠?"

공주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갑옷을 입고 있는 해골이었고 문장도 있으니 기사가 아닐 수 없었다.

"아는 문장인데...."

마누엘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내가 나섰다.

"차이프리 백작 가문의 문장입니다. 라이드 공자의 가문이죠."

아는 이름이 나오자 모두 눈을 크게 떴다.

"차이프리 백작 가문의 기사라고?"

마누엘이 내 말에 얼굴을 찌푸렸고.

"대전쟁 때 싸우던 분인가?"

"그때는 차이프리 가문이 없었습니다."

발레아의 말에 피아르가 오랜만에 고개를 저었다.

"먼지와 넝쿨에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닐 겁니다. 적어도 50년 정도?"

거기다, 나는 일행의 대화 사이사이에 슬쩍슬쩍 사실을 알려 주었다.

"먼지가 닦여 나간 것을 보니, 다른 조가 먼저 왔다 간 것 같네요. 검도 없어진 것 같고."

어쨌거나 이 자리에 있는 학생들은 모두 왕립 아카데미의 재원들이었다.

이 정도만 이야기해도 누가 이곳에 왔는지 추측해 낼 수 있었다.

"검을 가져갔다면 같은 가문이라는 이야기인데, 라이드 공자가 먼저 온 것일까요?"

발레아의 말에 공주가 눈을 반짝였다.

"라이드 공자 조면 이모, 아니 카트리네 교수님 조예요."

공주는 기뻐했지만, 니엘 교수는 눈썹을 찡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설마, 다른 조의 경로와 만나게 되었다는 건가?"

그녀는 공주를 곁눈질로 확인하고는 다시 나에게 지시를 내렸다.

"다시 한번 위로 올라가서 목적지를 확인해 봐. 다른 조와 경로가 겹쳐질 리 없어."

여기서 기사 학부는 공주와 나, 두 사람밖에 없었다.

공주를 시킬 수는 없고, 여학생이나 다른 학부 학생을 나무 꼭대기까지 보낼 수도 없으니 결국 내가 다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서자인 나를 보내는 게 편해서였다.

마누엘 정도만 해도 나무 꼭대기까지 충분히 올라갈 수 있었고, 영역을 사용하면 발레아도 가능했다.

어쨌든지 그녀의 말에 나는 다시 나무 위로 올라갔다.

빛기둥을 확인하니, 우리가 가는 경로에서 살짝 어긋나 있었다.

만약을 대비해서 크게 반원을 그리며 달려왔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살짝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기사의 시체를 찾을 수 있었다.

흔적을 보니, 먼저 다녀간 카트린 조와도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계획한 대로였다.

아래로 내려와서 이번에는 바르게 말해 주었다.

니엘 교수는 방향을 가리키는 나를 노려보았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알려 주었으니 양심에 거리낄 게 없었다.

우리는 다시 이동을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걸음을 멈추었다.

마물들 때문이었다.

우리 앞에 마물들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정말 경로가 겹쳤네요. 다른 조가 처리한 거죠?"

발레아의 말대로였다. 내가 일부러 이쪽으로 데려왔으니, 경로가 겹칠 수밖에 없었다.

"카트리네 교수님의 조가 맞는 것 같습니다. 이건 카트리네 교수님이 남긴 검흔(劍痕)입니다."

나는 사체에 남겨진 상처를 가리켰다.

내가 카트린과 친하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내 주장에 뭐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니엘 교수의 표정도 밝아졌다.

경로가 겹쳤다는 것은 제대로 길을 찾아가고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하지만, 곧 니엘 교수에게 미안해질 예정이었다.

나는 일행을 남겨 두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풀들이 쓰러진 방향을 확인하고, 나무의 흔적을 쓰다듬었다.

뜬금없는 내 행동에 일행은 모두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문제라고?"

니엘 교수는 나를 노려보았다.

니엘 교수도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거기다, 문제를 또 가져온 것 같으니 그런 상황에서 충분히 나를 노려볼 만했다.

아무래도 니엘 교수에게 찍힌 것 같은데....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저희 쪽이 아니라, 먼저 출발한 카트리네 교수님의 조가 이상합니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 말에 공주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남겨진 흔적을 살펴보니, 카트리네 교수님의 조가 여기서 방향을 틀었습니다. 빛기둥 쪽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도 안 돼."

일행은 내 말에 황당해했지만, 내가 흔적을 보여 주자 결국 수긍하고 말았다.

"제가 위로 올라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래 주겠어요?"

거기다 마누엘까지 나서서 나무 꼭대기에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니엘 교수는 마누엘의 말에 반색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이해가 안 되네요."

"마물들에게 쫓긴 건가?"

일행 모두는 뜻밖의 사태에 놀랐지만, 공주는 놀란 것 이상으로 불안해했다.

카트린은 공주에게 왕비만큼이나 가까운 가족이었다.

카트린이 위험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따라가면 안 될까요?"

공주가 니엘 교수에게 부탁했지만, 교수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안 됩니다. 밤이 되기 전에 도착해야 합니다. 다른 조를 찾을 시간이 없어요."

확실히 봉인지의 밤은 무서웠다. 나도 니엘 교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수색대가 만들어질 거예요. 그들에게 맡겨요. 나는 다른 학생, 아니 공주님을 위험에 빠지게 할 수는 없어요."

니엘 교수의 단호한 거절에 공주는 다른 학생들을 쳐다보았다.

학생들은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다른 조가 위험하다고 해도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모두 시선을 피했지만,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간절한 공주의 눈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따라가 보겠습니다."

내 말에 공주의 눈이 커졌다.

"카트리네 교수님의 조를 쫓아가는 것은 제가 제일 잘할 겁니다. 많이 왔으니, 이제 제가 없어도 다들 충분히 집결 지점까지 갈 수 있을 테고요."

내 말에 니엘 교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니엘 교수도 공주나 카트린과 무슨 관계가 있는 모양이다.

"그.... 네가 가야 할 이유가...."

마누엘은 뭐라 하려고 하다가, 공주를 보고는 말을 멈추었다.

서자 동생과 공주 사이의 저울질에서 공주가 이긴 듯했다.

발레아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고, 미리사가 같은 조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피아르는 오히려 나에게 부탁했다.

마지막으로 니엘 교수가 마지못해 허락했다.

계획대로 되었다.

낙오하지 않고 행동하기 위해 혼자 열심히 움직였다.

경로를 바꾸어 카트린 조가 발견한 기사 시체를 찾아내고, 기사 시체와 그 뒤에 발견한 마물 사체의 상처에서 카트린 조라는 것을 알게 했다.

그 뒤에 카트린 조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밝혀 주니, 예상대로 공주가 나서 주었다.

"출발하겠습니다. 나중에 뵙죠."

"부탁해요."

공주의 말을 뒤로한 채 나는 카트린 조의 흔적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제92화

제17편 지금 구하러 갑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