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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제1편 공작가 서자가 되었습니다 (1)

별것 아닌 인생이었다.

게임을 좋아하는 평범한 청년.

회사에 치이고 카드빚을 갚는 데 허덕이는 평범한 삶이었다.

그 인생의 마지막도 별것 아니었다.

사인은 동사.

꽤 오래 사귄 애인에게 차인 뒤, 술을 진탕 먹고 집으로 돌아가던 겨울밤. 퍽치기에 걸려 기절한 채 방치된 탓에 얼어 죽고 말았다.

그렇게 첫 번째 삶은 끝이 났다.

다시 눈을 뜨자, 난 강보에 싸여 유아용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때, 처음 듣는 낯선 언어가 들려왔다.

"알렉스, 넌 그레시아 공작의 아들이란다."

신기하게도 바로 이해가 되는 말.

아기가 된 나에게 아름다운 여성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풍스러운 드레스를 입은 금발 여성. 그녀는 내 어머니였고, 난 갓 태어난 아이였다.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난 당연히 '전생'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분명 난 전생한 것이 맞았고, 이곳도 지구가 아닌 것 같았다.

창문 밖으로 달이 세 개가 나란히 떠 있는 것을 보고 이곳을 지구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시간이 지났다.

어쨌거나 새로운 인생은 꽤 괜찮아 보였다.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었다.

중세풍의 화려한 방. 여러 명의 하녀.

그리고 공작의 아들이라는 어머니의 말.

분명 난 대단한 귀족의 아들로 새로 태어난 것이다.

잠을 이기지 못하는 와중에도 무척이나 기뻤지만.

역시 마냥 좋은 일만 일어날 리 없었다.

처음 눈을 뜬 뒤로 얼마 뒤에 멋지게 생긴 남자가 들어왔다가 나갔고, 그는 아기인 나를 힐끔 보더니 어머니를 데리고 나가 버렸다.

꼴을 보니 아버지인 공작이 분명했다.

날 보고도 별로 기뻐하지 않는 모습.

알고 보니, 어머니는 평민이었고 난 가문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서자였다.

그것도 본부인이 둘씩이나 있고, 형들도 둘이나 되는 천덕꾸러기. 어머니가 없을 때 날 보며 낮게 혀를 차는 하녀도 보였다.

공작과 어머니의 관계도 내가 알던 부부 사이와 꽤 달라 보였다. 상황이 그리 좋아 보이질 않았다.

'도대체 귀족가에 태어났다고 좋아할 때가 아니잖아! 이건 대체 언제 적 클리셰야! 공작 아들로 태어났으면 살기 편한 막내라든가 아니면 힘숨찐인 첫째라든가 해야 하잖아! 아니면 시스템창이라도 나오든가!'

반짝이는 정령이 눈에 보이지도 않았고, 시스템창, 설정창, 스탯창을 외쳐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신이 준 선물도 없었고, 신은커녕 천사 나부랭이도 본 적이 없었다.

졸린 눈을 부릅뜨며 뭔가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그 고민은 채 몇 분을 넘길 수 없었다.

이제 막 태어난 갓난아기. 그저 졸음에 겨워 다시 잠이 들 뿐이었다.

대귀족이라서 그런지 어머니의 방과 내 방은 따로 있었고, 난 쓸데없는 걱정과 함께 유모의 젖을 먹으며 하루하루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난 퍼뜩 잠에서 깼다.

달빛이 들어오는 방 안에 하녀 하나가 서 있었다.

'아, 칸나네. 오늘 밤 당직인가.'

어머니를 도와 나를 돌보는 하녀 중 하나였다.

'근데 난 왜 깬 거지? 배도 고프지 않고, 아래도 축축하지 않은데....'

갑자기 깬 나는 멀뚱하니 칸나를 바라보았고, 하녀 칸나는 우울한 표정으로 날 마주 보았다.

"그냥 자고 있지. 왜 잠을 깨서...."

뭔가 미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그녀는 소리 없이 요람 옆으로 다가왔다.

뭔가 불길한 상황.

난 놀라 입을 벌렸지만, 그보다 먼저 머리 위로 커다란 베개가 덮쳐 왔다.

베개를 잡은 양손은 칸나의 손이었고, 베개는 내가 울음을 터트리기 전에 내 얼굴을 덮어 버렸다.

숨이 막혔다.

"미안해요. 공자님은 너무 일찍 태어났어요."

점점 멍해지는 귓가로 들려오는 소리.

'아니, 뭔 막장 드라마냐고! 이건 아니잖아! 태어난 지 몇 달도 되지 않아 암살이라니! 난 아무것도 해 보지 못했다고!'

속으로 마구 고함을 질러 댔지만, 베개에 눌린 입에서는 울음소리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다.

점점 의식이 멀어졌다.

아쉽게도 마지막 순간까지 구원은 찾아오지 않았다.

숨이 멈추었다.

'젠장, 별 황당한 전생이 다 있네.'

그렇게 허탈한 투덜거림을 끝으로, 내 두 번째 인생도 끝이 났다.

깜깜한 어둠. 녹아내리는 정신. 죽음이 찾아왔다.

마지막으로 눈앞에 환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천국일까?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화악!

빛이 어둠을 뒤덮었다.

그리고.

"으애애애앵!"

난 다시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는 아름다운 여성.

"알렉스, 넌 그레시아 공작의 아들이란다."

그동안 매일 보았던 그녀는 몇 달 전 처음 보았던 표정으로 나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그리고.

드디어 눈앞에 글자가 떠올랐다.

[사망하셨습니다. 자동 저장 시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난 눈앞에 떠오른 한글을 보며 울음을 뚝 그치고 말았다.

며칠 멍한 정신으로 지낸 뒤, 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죽은 게 아니었다.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난 때로 돌아온 게 분명했다.

전생에 이어 회귀라니.

태어난 지 몇 개월도 되지 않아 죽은 것도 황당했지만,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버리니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어이가 없었다.

더구나.

[사망하셨습니다. 자동 저장 시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정신을 집중하면 허공에 나타나는 글자는 이 회귀가 한 번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자동 저장 시점이라....'

분명 전생에서 즐기던 싱글 게임에서 자주 본 문구였다.

게임 유저가 직접 게임을 저장하는 것이 아닌, 특정 위치를 지나가면 자동으로 게임이 저장되고, 그 뒤에 유저가 죽으면 게임이 저장된 곳에서 부활하는 세이브 로드 기법.

그때 등장하는 문구가 바로 '자동 저장 시점'이었다.

'지점이 아니라 시점이라면 특정 위치가 아니라 시간인가.'

이 세계로 오게 한, 알지 못하는 존재에게 감사를.

역시 아무 대안도 없이 낯선 세계에 던져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마냥 좋은 일일 수는 없었다.

'앞으로 죽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 해.'

기껏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매번 죽어 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언제까지 살아나리라는 보장도 없었고, 무한히 살아나더라도 영원히 죽음이 반복되는 삶이 계속될지도 몰랐다.

그래서야 다시 살아나는 능력은 축복이 아니라 되레 저주가 될 뿐이었다.

하지만, 죽지 않는 방법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죽은 시기는 겨우 태어난 지 몇 개월 지난 시점. 말은커녕 기어 다니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시작부터 헬 난이도라니....'

그렇다고 다시 죽어 줄 수는 없었다. 끔찍한 죽음의 기억과 함께 막막한 아기 생활을 다시 해야 하는 상황. 기필코 살아남아야 했다.

다행히 누가 범인인지는 알고 있었다.

물론 뒤에서 지시한 사람은 따로 있겠지만, 실행한 범인을 알고 있으니 범인을 치워 버리면 되는 일이었다.

날 죽인 하녀는 칸나.

그리 눈에 띄지 않는 여자였다.

어머니의 하녀들 가운데에서도 그리 모나지도 않고 나름 착실해 보이는 여성.

전생을 살아온 눈으로 봐도 사람을 함부로 죽일 여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뭐, 전생과 시대가 다른 거겠지.'

딱 봐도 피와 살이 마구 튀는 중세 시대였다. 잘나가는 귀족 집안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별다르지 않을 게 분명했다.

쏟아지는 잠을 이겨 내며 난 칸나를 계속 관찰했다.

덕분에 하녀들과 어머니는 잘 울지도 않고 잠도 잘 안 자는 아이라며 이상하게 여겼다.

하지만 난 그런 시선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똑같은 시간이 다시 흘러갔다.

공작인 아버지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가끔 나를 보고 가기도 했고, 조금씩 잠이 줄어 관찰할 시간도 늘어났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하녀 칸나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져 갔다.

'이걸, 왜 못 알아봤지?'

지금 보니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어두운 얼굴이었다.

다른 하녀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기도 했고.

'사람을 죽이려는데, 더군다나 공작의 아들을 죽이려는데 얼굴이 멀쩡할 리가 없지. 뒷일은 생각도 안 하나?'

베개로 덮어 자연사로 위장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책임이 없을 리 없었다. 잘하면 책임을 지고 죽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

하지만, 난 어두워지는 칸나의 표정을 보고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살인자를 안타깝게 여길 이유는 없었다.

"아! 도련님이 웃으셨어요."

"잘 안 웃으셨는데, 다행이네요."

"그런데 웃는 표정이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쯧! 어디서 그런 말을!"

내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던 하녀들이 하녀장에게 혼나고 말았다.

난 아직 코웃음을 칠 나이는 아닌 듯했다.

죽었던 때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처음에는 하녀들이 군대 불침번 때처럼 밤마다 몇 시간 간격으로 돌아가며 지켜봐 주었지만, 몇 개월이 지나자 밤에 남는 하녀는 한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녀들은 내가 울지 않는 이상 방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처음보다 무척이나 허술한 보살핌이었지만, 전생과 비교하면 그래도 과한 보살핌이 분명했다. 역시 대귀족가.

칸나는 밤에 혼자 남게 되는 시간을 기다린 모양이었다.

칸나가 혼자 남게 되는 밤.

"들어가세요."

"그럼 수고해."

"괜찮아요. 공자님이 조용해서 힘들지 않아요."

퇴근하는 다른 하녀들의 인사에 칸나가 손을 마주 흔들어 주었다.

그 뒤에, 내 쪽을 보며 언뜻 미안한 표정을 짓는 그녀.

하지만, 난 그녀의 얼굴에는 관심이 없었다.

몇 시간 뒤, 밤이 깊어지면 다시 똑같은 일이 벌어질 뿐이었다.

그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나는 기다리는 대신 크게 입을 벌렸다.

그리고 목청껏 울음을 터트렸다.

"으아앙!"

좀처럼 울지 않던 아이의 울음소리가 저택 안에 울려 퍼졌다.

당연히 난리가 났다.

"무슨 일이야!"

"공자님의 울음소리예요!"

방을 나섰던 하녀들이 금세 다시 달려오고, 방에서 쉬고 있던 어머니까지 한걸음에 달려왔다.

달려온 하녀들은 물론이고 어머니까지 칸나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지만, 하얗게 질린 칸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냥 갑자기 우시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얌전하던 애인데, 갑자기 그럴 리가 없잖은가!"

어머니가 칸나에게 버럭 화를 냈다. 화를 잘 안 내시는 분인데 많이 놀라신 것 같았다.

그런데 칸나 말이 맞는데요.

하녀장이 우는 나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나쁜 꿈을 꾸셨거나 갑자기 깨서 놀라신 모양입니다. 금방 다시 잠드실 겁니다."

그럴 리가. 잠들면 끝장이다.

"으아아아아아아앙!"

다시 한번 풀 파워로!

얼굴이 빨개지도록 울어 젖혔다.

놀란 하녀장이 나를 놓칠 뻔했고.

"당장 신관과 주치의를 불러요!"

어머니가 하녀들에게 고함을 쳤다.

어라? 주치의는 알겠는데, 웬 신관? 설마?

아무튼 사람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가운데, 난 필사적으로 울음을 이어 갔다.

힘들었다. 지쳤다.

온종일 우는 아기도 있다는데, 그게 가능할 리가. 미친 거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었다. 살기 위해서는 버텨야만 했다.

난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으아앙, 으앙, 헉. 헉. 켁, 으앙!"

그날 밤, 난 하얗게 밤을 불태웠다.

다음 날 아침.

난 침대 위에 널브러져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특별한 병은 없어 보입니다. 너무 울어서 목이 부은 것을 빼고는 모두 건강하십니다. 부은 목도 이제 곧 괜찮아질 테고요."

주치의의 말이 들려왔지만, 난 지금 다른 것에 신경을 쓰느라 귀담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환한 빛이 시야를 어지럽히는 중이었다.

하얀 로브를 입은 노인이 내 조그마한 목에 손가락을 올리고 있었고, 그 손가락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신관을 부르라는 말에 혹시나 했는데, 이렇게 사실이 될 줄이야. 이곳은 전생의 지구와 같은 평범한 중세 시대가 아니었다.

이곳의 성직자들은 신의 힘을 쓸 수 있었다.

그렇다면.

마법사도, 검기를 쓰는 기사가 있을지도 몰랐다.

좋은 건가? 아직 이게 나한테 유리할지 어떨지 파악이 안 되었다.

아니,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무사히 밤을 보냈지만, 아무 변화도 없었다.

위험이 지나갔다든가 하는, 새로 떠오르는 메시지도 없었고 칸나도 멀쩡히 저쪽에 서 있었다.

오히려 어머니가 칸나에게 다가가 사과를 하고 있었다.

"어제는 너무 놀라서 그랬어. 괘념치 마렴."

"괜찮습니다. 마님."

칸나가 멀쩡한 것을 보면 아직 위기가 지나간 게 아니었다.

아쉬웠지만, 이런 상황도 예상하고 있었다.

나도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제2화

제2편 공작가 서자가 되었습니다 (2)

삼 일 뒤.

다른 하녀들의 퇴근 직후.

"으아아아아아앙!"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칸나 앞에서 난 다시 신나게 울어 젖혔다.

한 번에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면 그만이었다.

칸나가 당직을 맡을 때마다 난 자지러지게 울어 댔다.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관심은 약해졌지만, 밤에 홀로 남겨 두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칸나를 향하는 시선이 점차 묘해져 갔다.

"공자님과 칸나가 안 맞는 것 같죠?"

"칸나가 담당일 때만 그러니까."

칸나가 없을 때, 다른 하녀들끼리 쑥덕거리는 일도 늘어났고.

"혹시 칸나 혼자 있을 때 뭔가 잘못하는 거 아냐?"

은근한 험담을 하는 하녀도 생겨났다.

그리고 내가 네 번째 울음을 터트린 이후.

칸나는 결국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힘들었다.'

쓰린 목을 가다듬으며 난 칸나를 마음속으로 배웅했다.

'어디 가서 콱 뒈져 버리길.'

그날, 새로운 메시지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위기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새로운 '저장 시점'이 설정되었습니다.]

예스! 예스!

떴다. 이건 세이브 포인트다.

역시 죽으면 무조건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죽는 상황이 해결되면 그 시점에 새로운 저장 시점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었다.

죽을 때마다 처음 시점으로 돌아간다면, 난 다 때려치웠을 것이다.

매번 아기에서 다시 시작한다니,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었다.

"어, 공자님이 웃고 계셔요."

"저번처럼 이상한 웃음이 아닌데요."

"정말 칸나가 싫었나?"

하녀들이 쑥덕거렸지만, 난 눈곱만큼도 개의치 않았다.

이제 다시 평온한 아기 라이프가 시작될 참이었다.

하지만 그런 섣부른 생각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오늘부로 이곳에 새로 배속 받은 하녀, 루이실입니다."

칸나 대신 새로 들어온 하녀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날 노려보고 있었다.

소름이 쫙 돋고 온몸의 솜털이 바짝 솟았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평범한 하녀처럼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칸나가 나갔다고 일이 끝날 리 없었다. 무기가 망가지면 새로운 무기를 쓰면 그만이었다.

배후에서 살인을 지시하는 자가 그만두지 않는 한, 암살자는 계속 올 게 분명했다.

나는 새로 온 하녀를 열심히 주시했다.

하지만, 의외로 새로운 하녀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표정이 어두워지지도, 뜻밖의 행동을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처음 당직을 설 때도 조용히 의자에 앉아 밤을 지새웠을 뿐이었다.

'착각이었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매번 암살자가 하녀로 들어올 리 없었다.

밤새 긴장했던 난 겨우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조심해야겠지만, 이렇게 매번 긴장하고 있을 순 없어. 자객은 없어. 이러다간 키도 안 클 거야.'

그렇게 편한 시간이 지나고.

사흘 뒤.

난 또다시 베개에 입맞춤 당하게 되었다. 물론 코도 막혔고.

제길.

또 죽어 버렸다.

[사망하셨습니다. 자동 저장 시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벌써 두 번째.

그나마 다행이라면 돌아온 시점이 다르다는 것 정도일까.

"칸나는 오늘부로 배속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난 작별 인사를 하는 칸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죽음의 고통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통증을 느끼기 어렵다는 아기인데도, 그리고 단순히 숨이 막혀 죽은 것뿐인데도.

죽는 순간의 막막함과 허무함을 또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젠장, 내가 포기할까 보냐.'

한 번 죽고 나면 어쨌거나 범인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범인을 알게 되면 적어도 다음 죽음은 막을 수 있을 터.

다음 날, 난 몰래 날 노려보는 루이실을 마주 노려봐 주었다.

"어머, 귀여우셔라. 공자님이 루이실을 빤히 쳐다보고 있어요."

노려보던 루이실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고, 하녀들이 쑥덕거렸다.

"루이실이 마음에 드신 모양이군요. 한번 안아 보겠습니까?"

하녀장의 말에 루이실이 아기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아니라고! 반대야!

날 안아 드는 루이실을 보며 난 결국 최종 병기를 쓸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아앙!"

"어, 어쩌죠?"

"이런, 아직 익숙하지 않은가 보네요. 이리 주세요."

하녀장이 돌려받은 뒤, 난 울음을 멈추었다.

시간이 흘렀다. 변화는 없었다.

사흘 뒤.

다시 루이실이 홀로 야근을 하게 되었다.

어차피 달라질 것은 없었다.

난 또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으아아아앙!"

사흘마다 반복되는 울음.

결국, 새로 온 하녀도 다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또 한 번 하녀가 바뀌고.

저택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배속이 바뀐 하녀들 전부 그만둔 거 아세요?"

"그 하녀들 모두 그만둔 뒤에 소식이 끊어진 모양이에요."

"소식이 끊어져요?"

"가족들 모두 떠난 집도 있고, 혼자 연락이 안 된 아이도 있더라고요."

"혹시 설마...."

수군거리던 하녀가 창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고, 다른 하녀가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설마 죽었겠어요? 다들 무슨 일 때문에 영지를 떠난 거겠죠."

"하지만, 모두 여기서 떠났던 사람들인데...."

수군거리던 하녀들이 침대에 누워 있던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모두 소식이 끊어지다니. 설마 뒤처리를 한 걸까?

그런 권력이 있는 사람은 이 공작가에서 몇 없을 텐데....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들 모두 지금, 아니 앞으로도 겨우 서자인 내게는 감히 발끝에도 닿을 수 없는 사람들뿐이었다.

* * *

"이번에도 시도조차 못 했다고요?"

"네. 전처럼 아기가 우는 바람에 결국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벌써 세 번째라...."

"우연일 수도 있고, 아이가 아마추어인 애들의 살기에 놀랐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다른 이유일 수도 있겠죠. 기존과 다른 능력을 깨우쳤을 수도 있고."

"각성일이 되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뭐, 가정일 뿐이니까요."

"그럼 계속 진행할까요?"

"아뇨. 세 번도 너무 많았어요. 벌써 소문이 도는 모양인데, 하녀를 들여보내는 일은 여기서 멈추죠. 다음에는 다른 방법을 쓰도록 하자고요."

"알겠습니다."

"아이가 몇 개월이나마 좀 더 세상을 느끼게 해 주어야죠."

비밀스러운 대화가 끝이 났다.

그 말을 끝으로, 아름다운 방 안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 *

'해방이다!'

세 번째 하녀가 나간 뒤, 드디어 편안한 밤이 이어졌다.

그 뒤에 들어온 하녀는 나를 죽이려 하지 않았다.

평안한 밤. 개운한 목.

드디어 기쁘게 먹고 자고 싸고 할 수가 있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 계속 버틸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천재가 되어야겠다.

"우아아, 아브브브."

"벌써 옹알이를 하시네요."

"아브아브."

"그런데 너무 옹알이를 오래 하시는 것 아닌가요?"

"우우우. 브아아아."

그동안 열심히 울어 젖히느라 목이 너무 상했다. 목이 아파 죽겠다.

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말문이 터져야 했다.

그래서 난 오늘도 옹알이를 계속 시도했다.

"아브아브아브...."

* * *

시간이 지나, 드디어 모유를 떼게 되었다.

어머니가 직접 수유를 해 준 것이 아니고 유모가 따로 있었지만, 대귀족가라면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쩝, 이유식 맛이 별로인데.'

처음 먹어 보는 이유식 맛은 생각 외로 그리 좋지 않았다.

전생에 보았던 아기들은 허겁지겁 먹던데.

역시 시대가 달라서 음식 문화가 발달이 안 된 것일지도.

커서 향신료 무역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이유식을 먹어 가면서 난 무럭무럭 커 나갈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일장춘몽이었을까.

어느 날부터일까. 난 조금씩 잠이 많아졌다.

졸렸다.

깨어 있는 시간도 줄고, 얼굴과 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했다.

아팠지만, 졸음은 계속 이어졌다.

이상했다.

하녀들이 억지로 음식을 먹였지만, 먹던 음식도 토해 내고, 체력을 잃고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놀란 어머니가 주치의를 부르고 신관도 불렀지만, 주치의의 치료도 신관의 성법도 아픈 내 몸을 고치지 못했다.

"도대체 아기가 아픈 이유가 뭡니까!"

"죄송합니다. 아직 어린아이의 병들이 다 밝혀지지 않아서...."

주치의는 솟아나는 땀을 소매로 계속 닦아 냈다.

치유 마법이 발달했다고 하지만, 주치의는 딱 봐도 청결 개념도 없는 돌팔이 의사였다. 역시 중세 시대. 유아 사망률이 장난이 아닐 게 분명했다.

시간이 계속 흘렀지만, 그는 치료는커녕 병명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

"으아, 아프, 아브."

내가 신음처럼 꺼내는 울음소리에 어머니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어 주셨다.

"네가 어디가 아픈지 말을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녀의 말에 난 다시 울음소리를 냈다.

"아브, 아프, 아프."

'배가 아파요! 장이 꼬인다고요! 젠장, 음식이 이상하다고요!'

주치의와 달리 난 내 몸이 아픈 이유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목 놓아 외친 고함은 다른 사람에게는 그저 아기의 울음으로 들릴 뿐이었다.

기력이 사라진 마지막 날 밤.

며칠 동안 내 옆에서 밤을 새운 어머니가 나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널 지켜주지 못해서."

그녀도 내 병이 자연적인 병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네가 아픈데, 공작님은 찾아오시지도 않는구나."

어머니는 골골거리는 내 얼굴을 보며 눈물을 떨구었다.

난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을 마지막으로, 마치 전원이 꺼지듯 숨이 멈추었기 때문이다.

[사망하셨습니다. 자동 저장 시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또 죽어 버렸다.

잠시 뒤, 정신을 차린 난 입술을 악물었다.

'젠장! 너무 여유를 부렸어!'

'천재는 개뿔. 외계인이라도 되어야 할 판이잖아!'

세 번째 하녀를 쫓아낸 다음의 순간으로 돌아온 나는 필사적으로 말을 연습했다.

늦으면 끝이다.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필요한 것은 단 두 마디.

그리고 난 결국 해내고 말았다.

"아, 이거 드세요. 이유식이에요. 후, 후, 안 뜨거울 거예요. 자, 맘마."

그날, 첫 이유식을 먹게 된 순간.

난 하녀가 숟가락으로 떠 준 이유식을 입으로 베어 물었다.

그리고 힘껏 뱉었다.

퉤!

이유식이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놀란 하녀들이 다가왔다.

"이런, 아직 이유식이 안 맞으시나?"

당연하지! 안 맞는 정도가 아니었다.

자, 그동안의 노력을 선보일 때였다.

배에 힘을 모으고.

입과 혀를 제 위치에 놓고.

크게 심호흡을 한 뒤에.

난 힘껏 외쳤다.

"맘마!"

하녀들이 모두 놀란 얼굴이 되었다.

"설마?"

"지금 말씀하신 거죠!"

"마님을 부른 거 아닌가요?"

"마님을 모시고 올게요!"

놀란 하녀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어머니를 모셔 오기 위해 달려갔다.

잠시 뒤, 어머니가 방 안으로 달려오자 난 다시 한번 외쳤다.

"맘마!"

어머니와 하녀들의 얼굴이 환하게 변했지만, 난 여기서 끝낼 생각이 아니었다.

거기다 '맘마'가 엄마란 뜻도 아니었다.

"아파!"

"맘마가 아파!"

동시에 손을 들어 사방으로 쏟아진 이유식을 가리켰다.

앙증맞은 손가락을 들고 첫말부터 헛소리를 늘어놓는 아이.

어머니도, 하녀들도, 그리고 소식을 들은 저택의 고용인들도 모두 황당해했다.

공작 아들이 처음 꺼낸 말이 '엄마', '아빠'도 아닌 '맘마가 아파'라니.

또다시 이상한 소문이 돌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어머니는 자식의 말을 가볍게 듣지 않았다.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그녀는 남아 있는 이유식 그릇을 낚아챈 뒤, 하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주치의.... 아니 연금술사님을 불러오세요!"

"네? 연금술사님요?"

"영지에 한 분 계시는 것으로 아는데요?"

"아, 네. 계시긴 합니다만."

"아이의 말을 못 들었나요! 당장 불러요!"

하녀들이 놀라 되물었지만, 어머니, 즉 공작의 첩 아만다는 다시 명령을 내릴 뿐이었다.

"어서!"

"네! 네!"

신분이 평민이고 지금도 첩일 뿐이었지만, 공작의 여자라는 위치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하녀들이 급하게 달려 나갔고,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잡았다.

윽. 너무 세게 잡으셨다. 피가 안 통한다.

"아, 아파."

어쩔 수 없이 처음 배운 말을 다시 써먹을 수밖에 없었다.

제3화

제3편 천재가 되었습니다 (1)

다행히 이 동네의 연금술사는 납을 금으로 만들려고 했던 전생의 짝퉁 화학자가 아니었다.

달려온 연금술사는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이유식에 들어 있던 독을 찾아냈다.

연금술사는 쉽게 찾기 어려운 지속성 독이라 자신이 아니었으면 찾기 힘들었을 거라고 열심히 자화자찬을 했고, 난 그 자화자찬을 속으로 인정해 주었다.

앞서 죽었을 때는 주치의도, 신관도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분야가 다른 거겠지.'

어쨌거나 연금술사가 독을 발견하는 바람에 저택은 한바탕 난리가 나 버렸다.

서자이긴 했지만, 공작가 도련님을 죽이려던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방에 드나드는 하녀들은 물론이고, 저택의 모든 고용인이 긴장했다.

그리고 그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공작, 즉 내 아버지가 내 방으로 찾아오셨다.

겁에 질린 하녀들은 땅을 박을 듯이 머리를 깊이 숙였고, 어머니도 그를 향해 진중한 인사를 했다.

공작은 무심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뒤따라온 늙은 집사에게 말했다.

"범인은 잡았나?"

"네. 요리사 한 명의 자백을 받았습니다."

집사의 말에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백한 요리사는 죽이고, 그 가족은 영지 밖으로 목숨만 붙여서 쫓아내도록. 그리고 요리장과 책임자들에게도 조처를 취하고."

"네. 알겠습니다."

무섭고도 차가운 명령.

영지민이 영지 밖으로 쫓겨나게 되면, 다른 영지에 정착하지 못하고 유랑민이 될 뿐이었다.

영지민이 가진 것 없이 유랑민이 되라는 소리는 결국 죽으라는 소리와 별다른 바가 없었다.

하지만, 공작의 지시는 거기까지였다.

자백한 요리사를 심문하라는 말도 없었고, 약을 타게 한 사람을 조사하라는 이야기도 없었다.

결국, 일을 여기서 묻으라는 소리였다.

그의 말에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머니조차 무슨 말은커녕 고개도 들지 못했다.

'아이고, 아버지란 작자가 이 모양이면 정말 답이 없는데.'

말을 마친 공작이 방을 빠져나가려 했다.

이대로 공작을 나가게 할 수는 없었다.

정말 짜증이 나지만, 다시 한번 필살기를 써야 했다.

공작을 빤히 바라보면서, 배에 힘을 줬다.

그리고 힘껏 소리쳤다.

"빠빠! 빠빠!"

모두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공작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이다! 좋은 생각, 좋은 생각!'

눈꼬리를 휘고, 입을 벌리고 웃음 발사!

"까르르, 빠빠!"

말과 함께 계속 연습한 표정이었다.

그동안의 연습으로 하녀들과 엄마도 귀엽다고 인정해 준 웃음.

공작 뒤에 서 있던 늙은 집사도 내 웃음을 보고 미소를 지어 주었다.

하지만, 공작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짜증 나는 인간이다.

하지만, 버텨라. 내 안면 근육들아! 그동안의 노력을 헛되게 만들쏘냐!

방그읏, 방그읏!

그래도 꼴에 아버지이긴 한 모양이었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공작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 이 아이의 경호는 총집사 자네가 직접 담당하도록."

"아, 넵."

놀란 총집사의 대답 뒤에도 공작은 계속 말을 이었다.

"적어도 각성 때까지는 집안에 소란이 없었으면 좋겠군."

"모두에게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총집사의 대답과 함께 어머니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큰 짐을 내려놓는 듯한 소리.

그녀가 다시금 공작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공작은 어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 한번 나를 쳐다보았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내 미소나 실컷 보라고.'

나도 열심히 그를 바라봐 주었다. 방실방실. 아, 턱이 저리다.

그래도 지금은 억지로 웃는 웃음이 아니었다.

목표를 이루었는데 웃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다행히 턱이 떨리기 전에 공작은 방을 나갔고, 하녀들의 축하 속에 어머니는 나를 보며 눈물을 떨구었다.

역시 잘못 태어난 것 같다. 이렇게 무서운 귀족 생활이라니.

신관도 있고 마법도 있는데, 유아 생존율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이유가 다 여기에 있는 것 같았다.

[위기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새로운 '저장 시점'이 설정되었습니다.]

'그래도 시간은 번 건가.'

난 공작이 나간 뒤 떠오른 화면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공작이 보장한 안전이었다. 적어도 전처럼 쉽게 암살자를 보내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내 생각보다 공작의 보호는 더 강력했다.

* * *

고맙게도 지루한 시간이 계속 이어졌다.

공작이 선언한 뒤로 나를 죽이려는 시도는 사라졌다.

역시 저택 안. 내부자의 짓이었다.

누가 범인인지 알아내지 못해 무척이나 찜찜했지만, 아직 어린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하루하루 열심히 성장해 나갈 뿐이었다.

그리고 아기 때부터 천재로 인정을 받아 버렸기에 아예 그 오해를 인정하기로 했다.

최대한 빨리 말을 배우고, 일어나 걷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말을 배우는 것과는 달리 몸을 움직이는 건 쉽지 않았다. 육체적인 부분에서는 전생의 기억도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겨우 다른 아이들보다 늦지 않게 앉게 되자 나는 바로 책을 보게 해 달라고 떼를 썼다.

다행스럽게도 이 세상은 다른 분야와 균형이 맞지 않게 발달한 부분이 있었다.

중세에 가까운 시대상과 다르게 출판업은 꽤 발달해 있었던 것.

그림이 가득한 동화책부터 전문 서적까지.

일반 평민에까지는 퍼지지 않은 귀족들과 부자들만이 누리는 특권이었지만, 내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책을 달라는 말에 처음에는 당연하게도 그림책을 가져다주었다.

공주와 왕자가 그려져 있고, 동물들이 그려져 있는 그림책이었다.

나도 당연하게 다른 책을 달라고 떼를 썼다.

"글. 자. 책!"

모두 황당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지만, 난 뻔뻔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글이 좋아! 그림 별로야! 글 보여 줘!"

"세상에 그런 건 또 어디서 들으신 건가요?"

놀란 하녀들이 책을 구해 오고, 어머니는 급하게 글을 가르치는 선생을 불렀다.

다행히 글은 어렵지 않았다. 표음문자에다 발음과 글이 그리 다르지 않았다.

글이 만들어진 지 오래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성장에 필요한 기본적인 활동은 계속하면서 나는 공부를 이어 갔다.

하루, 한 주, 한 달, 일 년....

시간이 지나갔다.

시간과 함께 나도 쑥쑥 자라났다.

아쉽게도 열심히 움직였지만, 몸은 동년배의 아이들과 비슷했다.

하지만, 자라면서 쌓여 가는 지식은 다른 아이들과 비교할 수가 없었다.

자라면서 점점 소문은 퍼져 갔고, 5살이 꽉 찬 지금은 저택 내 고용인들 모두가 나를 천재라고 부르고 있었다.

* * *

책이 가득한 서재.

책장에 기대어 있는 의자에 한 아이가 앉아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의자에 앉은 채로 바닥에 닿지 않는 발을 흔들고 있었다.

하녀 플로라는 벽에 기댄 채 아이, 공작의 아들 알렉스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작은 아이가 다리도 닿지 않는 의자에 앉아 커다란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자신의 상체만 한 책을 무릎 위에 올리고 열심히 책을 읽는 모습은 그녀가 보기에도 무척이나 귀여워 보였다.

'보고 있는 책이 그림이 가득한 동화책이라면 더 좋을 텐데.'

미소를 짓던 플로라가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이. 이제 막 6살이 될 알렉스 공자가 보는 것은 나이대에 걸맞은 동화책이 아니라 역사서였다. 그것도 고대 제국어로 쓰인 무척이나 어려운 책.

다른 평민들과 달리, 공용어를 읽고 쓸 수 있는 지식인인 플로라도 전혀 읽지 못하는 책이었다.

역시 저택 전체에 소문이 난 천재 도련님다운 모습이었다.

아쉽게도 저택을 벗어나면 알렉스 도련님의 천재성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저택 안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도련님은 똑똑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플로라는 슬쩍 주위를 둘러본 뒤에 벽에 등을 기댔다.

'편하다....'

작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책을 보고 있는 도련님에게 속으로 감사했다.

공작 일가 앞에서 하녀가 벽에 등을 기대는 행위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물론 알렉스는 아직 어렸지만 어린아이가 말을 잘못하기라도 하면 당장 쫓겨나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알렉스 공자는 그런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아이답지 않게 자신의 예절은 잘 지키고 있었고, 고용인에 대한 배려는 저택에 있는 어느 누구보다 훌륭했다.

알렉스 공자는 한참 전에 그녀에게 허락해 주었다.

-나하고 둘만 있을 때는 편하게 있어도 돼.

1년보다 훨씬 전에 들은 말이었고, 그 뒤로 몇 달 동안 따르지 않아 몇 번이나 다시 들은 말이었다.

그때 알렉스 공자의 나이는 4살이었다. 당연히 4살짜리가 하는 말을 믿고 허술하게 지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공자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평범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녀가 공자의 하녀로 들어오게 된 이유이자 소문의 시작인 하녀들의 실종도 그렇고, 그녀가 직접 본 공자가 꺼낸 첫말.

-맘마 아파.

덕분에 저택은 한바탕 난리가 났고, 그때부터 플로라는 공자를 외경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 뒤에도 공자의 행동은 범상치 않았다.

아기 때처럼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는 않았지만, 계속해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 주었다.

빠르게 말을 배우고, 빠른 속도로 글을 배워 갔다.

공용어로 쓰인 책은 물론, 지금 읽고 있는 고대 제국어까지.

지금도 막 여섯 살이 되는 아이가 아카데미를 나온 어른들이 보는 책을 보고 있었다.

도무지 아이로 보기 힘든 천재.

옆에서 계속 지켜본 플로라는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편하게 지내라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말은 지켜졌다. 1년 동안 저택의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휴식을 알지 못했다.

그 덕분에 그녀는 1년 동안 편하게 보낼 수 있었다.

'이제 얼마 안 남았나....'

생각을 이어 가던 플로라는 알렉스 공자를 보며 안타까운 얼굴이 되었다.

저택에 돌고 있는 소문과 그녀가 직접 본 독살 시도.

물론 독살 시도 이후에는 평온한 나날이 이어졌지만, 이제 그 평온한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공작님이 약속하신 각성일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처음과 다르게 알렉스 공자에게 무척이나 정이 들었지만, 하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때, 복도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된 것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벽에서 등을 떼고 입을 열었다.

"공자님, 이제 수업 시간입니다."

* * *

"대륙의 귀족은 500년 전 마왕군을 괴멸시킨 용사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그전에도 귀족과 왕실들이 존재했지만, 그들은 평민과 다를 바 없는 보통 사람들이었고, 지금과 같은 능력을 지닌 귀족들은 아니었습니다."

"...저희 카를로스 왕국의 왕실은 용사인 카를로스 기사의 정식 후손입니다. 왕실에서 분리되어 나온 그레시아 공작가도 당연히 같은 후손입니다. 그리고...."

수업 시간.

앞에는 젊은 서기관이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남작가 출신의 유능한 서기관이라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졸음이 쏟아지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내가 만약 평범한 어린아이였다면 벌써 자리에 엎어져서 자고 있거나 생떼를 부렸을 게 분명했다.

하긴 평범한 아이가 이런 수업을 받을 리도 없겠지만.

물론 내가 졸린 것은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다 알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선행학습을 너무 심하게 했어.'

이미 3년 이상 저택에 있는 도서관급 서재에서 각종 책을 독파했다.

내 앞에 서 있는 교사의 말은 단지 지겨운 복습에 지나지 않았다.

난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별수 없었다. 이 정도도 감지덕지했다.

제대로 된 공작가의 자제라면 대단한 현자라도 모셔 올지 모르겠지만, 서자인 난 영지의 관료에게 수업을 듣는 것만 해도 고마울 정도였다.

이것도 저택 내에서 천재로 소문이 나서 받게 된 수업이었다.

물론 수업이라고 해야, 영지 내 서기관들에게 일주일에 두 번 받는 교양 수업과 회계 수업뿐이었다.

오늘 수업도 역사 이야기가 가득했지만, 결국은 '교양 수업'일 뿐이었다.

그래도 수업 내용은 무척이나 알찼다.

제대로 된 수업은 날 문관으로 만들 속셈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제4화

제4편 천재가 되었습니다 (2)

지겨웠던 설명이 끝나고 서기관, 아니 교양 선생이 나를 보며 물었다.

"질문 있습니까?"

아쉬운 듯한, 깔보는 듯한 표정으로 꺼내는 말.

애매한 내 처지를 여실히 느끼게 하는 표정이었다.

난 당연히 질문이 있었다.

"서기관님의 말씀처럼 현재 대륙의 거의 모든 귀족은 각성으로 상속 능력을 얻잖아요. 그리고 저희 그레시아 공작가도 용사인 카를로스 기사의 능력을 계승하고 있고요."

"그렇습니다."

서기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만족스러운 표정.

"그런데 500년이나 내려온 능력이 어떻게 계속 계승될 수 있었나요?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아도 벌써 30세대인데, 그동안 결혼을 30번은 했을 텐데요. 그럼 카를로스 기사와 같은 능력을 발휘할 확률이 거의 몇만 분의 일로 줄어들잖아요."

둘 다 귀족이라고 해 봤자 한쪽 능력을 계속 얻게 될 확률은 2분의 일.

중간에 중복해서 결혼이 여러 번 이루어진다고 해도 30번 결혼이 이어지면 결국 확률은 수백, 수천 분의 일로 줄어들 뿐이었다.

"거기에다 형제 사이에 능력이 동시에 발휘될 수도 있고 다른 쪽, 즉 어머니 쪽 능력만 나오는 형제도 나올 수도 있잖아요. 어떻게 계속 이어 올 수 있었던 걸까요?"

근친상간이라도 계속한 걸까? 미친 사람은 없어 보이는데 말이야.

서기관의 눈이 커졌다. 깔보는 듯한 표정은 완전히 사라졌고, 대신 난감한 표정이 얼굴에 떠올랐다.

"음. 그건 아직 배울 때가 아닌 것 같군요. 아마 각성 이후에 따로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뭔가 비밀이 있는 듯한 말이었지만, 저 표정은 아무것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멘델의 유전법칙은 아직 무리였나?

하지만, 각성일이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 나에게는 무척이나 중요한 문제였다.

천 년 전까지 이 세상은 전생인 지구의 중세 유럽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세상을 불태우는 마법도 없었고, 돌을 가르고 성벽을 부수는 기사도 없었다.

신관들도 성법을 쓰지 못했고, 연금술사들은 사기나 치는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천 년 전 일어난 대격변 이후로 이 세상은 전생의 지구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었다.

천 년 전, 대륙 곳곳에 검은 문이 만들어지고 마계라 불리는 세상에서 괴물들이 넘어왔다. 평범한 동물들이 괴물로 변했고, 그 괴물들을 이끄는 마왕이라는 존재까지 나타났다.

세계가 멸망으로 치닫는 그때, 인간들 사이에서도 특별한 힘을 가진 자들이 나타났다.

용사라고 불리는 자들.

검으로 하늘을 가르고, 마법의 불로 바다를 불사르는 사람들.

그들은 멸망에 이른 인류를 구하고, 마왕을 쫓아내고, 마계의 문을 막았다.

그들 덕분에 인류는 살아남았지만, 그 뒤 세상은 그전과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몬스터라고 불리게 된 괴물들이 대륙 곳곳에 남게 되었고, 용사들의 능력은 자식들에게로 이어져 새로운 지배 계층이 형성되었다.

지금 귀족이라고 불리는 자들.

그리고 그 귀족들이 용사의 능력을 얻게 되는 날을 '각성일'이라고 불렀다.

태어난 지 6살이 되는 생일.

앞으로 이틀 뒤였다.

수업이 끝난 뒤에 나는 플로라를 따라 복도를 나섰다.

혼자서도 잘 다닐 수 있었지만, 서자이나 공작의 아들인 날 혼자서 다니게 할 리 없었다.

다행히 그동안 하녀들을 열심히 꾀어 놓아서 같이 다니는 데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때론 같이 다니는 덕분에 도움을 받을 때가 있었다.

지금처럼.

"어이, 잡종."

복도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과 마주쳤다.

시종들과 같이 복도를 걸어가던 두 소년.

그중 작은 아이가 나를 보자마자 시비를 걸었다.

거만한 표정으로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나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더 큰 아이.

같이 걸어가던 큰 소년은 힐끔 나를 보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그냥 지나쳤다. 날 무시하고 지나가는 큰 소년과 남아서 시비를 거는 작은 소년

저쪽은 형제로 생각도 안 하는 듯하지만, 그들은 내 형제들이었다.

시몬 데 그레시아.

마누엘 데 그레시아.

공작의 첫째 부인의 두 아들.

서자인 나와 다르게 제대로 된 그레시아 공작가의 정식 계승자들이었다.

8살짜리 꼬맹이가 거만한 얼굴로 날 비웃었다.

"며칠 뒤에 각성이지? 그런데 각성을 할 수나 있어?"

만날 때마다 듣는 비웃음이지만, 이번 말은 꽤 아팠다.

꼬맹이의 말대로였다.

저 두 사람은 모두 각성일이 지났고, 둘 다 제대로 각성을 했다.

마누엘 꼬맹이는 손가락 사이에서 스파크를 튀기며 계속 날 놀려 댔다.

저쪽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첫째 시몬과 달리 둘째 마누엘은 그의 어머니, 첫째 공작부인 일가의 능력을 각성했다.

마법사 계열의 능력.

때문에 공작가를 잇는 데는 한 걸음 물러나게 되었지만, 공작부인 쪽의 지원을 얻기에는 더 좋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 어머니는 능력을 가지지 못한 평민 출신.

나름 건실한 상인 집안이었지만 능력을 지니지 못한 이상, 귀족에게는 의미 없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동안 도서관에서 열심히 조사한 바에 따르면, 상속 능력을 주는 유전자는 열성 유전자에 가까웠다.

발현되기 어려운 유전자.

결국, 평민인 어머니를 둔 나는 각성할 확률이 4분의 1에 불과했다.

'역시, 죽으면 과거로 돌아가는 능력은 각성이 아닌 건가?'

아니면, 전생을 기억하는 것이 각성일지도 몰랐다.

음, 생각과 다르게 의외로 가진 게 많이 있었다.

이름 모를 신께 다시 감사.

'뭐, 부활 능력은 각성일에 각성한 것도 아니니까....'

오히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능력이 상속 능력이면 무척이나 곤란했다.

더 얻을 능력이 없으니 각성일에는 아무 능력도 얻지 못할 테고.

각성일이 지나면, 평민으로 밀려나서 잘해 봤자 영지 구석의 서기관이나 행정직으로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잠깐....'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 가던 난 입을 헤 벌렸다.

"각성을 못 하는 것도 나쁘지 않네?"

"뭐라고?"

실수로 꺼낸 말에 마누엘 꼬맹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음, 살아남기는 그게 훨씬 좋을 것 같은데...."

공작의 비호가 있은 뒤로는 꽤나 나쁘지 않은 생활이었지만, 그전에는 몇 번이나 죽음을 반복했는지 몰랐다.

되살아나는 능력이 없었다면 예전에 아기 시체가 되었을 게 분명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눈앞에서 마누엘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난 전혀 듣지 못하고 있었다. 각성했을 때와 하지 못했을 때를 저울질하기에 바빴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너무 한쪽만 바라봤는지도 모르겠는걸.'

죽을 위험을 계속 겪으니 죽지 않을 힘을 계속 원하게 되었다.

이 세계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힘은 각성뿐. 그 때문에 생각이 한쪽으로만 치우쳐 버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생각을 바꿔 보니 각성을 하지 않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몰랐다.

어차피 공작의 보호는 각성일까지였다. 각성일이 지나면 다시 죽음의 위협에 시달릴 게 분명했다.

하지만, 각성에 실패한다면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생활. 한적한 문관으로 평생을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고마워! 형!"

난 덥석 꼬맹이의 손을 잡았다.

찌릿!

손에서 찌릿하게 전해 오는 정전기.

아직 개발이 안 돼서 약한 능력이었지만, 손 전체가 따끔거렸다.

하지만, 난 손에서 느껴지는 작은 통증도 기쁠 따름이었다.

"갑자기 무슨 짓이야!"

마누엘이 버럭 화를 냈지만, 말로만 성질을 낼 뿐이었다.

시몬과 마누엘은 모두 제대로 교육을 받은 공작가의 자제.

그리고 복도에는 플로라를 비롯한 고용인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공작의 아들이 고용인들이 보는 앞에서 육체적인 폭력을 행하긴 쉽지 않았다.

난 마누엘과,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시몬에게 손을 흔들어 준 뒤에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누엘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고 있었고, 시몬은 눈썹을 찡그린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난 10살, 8살짜리 꼬맹이들과 티격태격할 생각이 없었다.

"둘째 도련님의 말을 그렇게 넘기시다니, 공자님은 정말 대단하세요."

뒤에서 플로라의 뜬금없는 감탄사가 들려왔지만, 난 각성에 대한 걱정이 줄어든 것이 마냥 기쁠 뿐이었다.

각성일은 금방 다가왔다.

당일 아침.

휘황찬란한 옷을 입은 뒤, 어머니는 방을 나서는 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각성하지 못하더라도 괜찮아.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어. 넌 정말 사랑스러운 나의 아들이란다."

난 어머니의 음성에 가슴이 포근해졌다.

육체가 어려지니,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여려진 것 같았다. 더구나 공작과 다르게 어머니는 날 사랑하고 있었다.

전생을 기억한다고 해도, 어머니는 어머니였다.

"네. 사랑해요."

처음으로 꺼낸 말에 날 감싼 팔이 굳어졌다.

두 팔이 좀 더 강하게 나를 감쌌고, 숨이 막혀 얼굴이 퍼렇게 변했다.

위험해. 죽을 뻔했어.

잠시 뒤, 어머니랑 하녀들과 함께 복도를 걸으며 난 며칠 동안의 고민을 이어 갔다.

역시, 각성을 하지 못하게 되면 어머니가 걱정이었다.

상속 능력을 가지지 못한 아이.

당연히 귀족이 될 수 없었고, 공작가에 필요 없는 아이를 가진 어머니는 공작가에서 내쳐질지도 몰랐다.

'뭐, 외가도 못사는 편은 아니니까. 정 뭐 하면 내가 모시고 살면 되겠지.'

아버지와 헤어지게 되겠지만, 이 살얼음 같은 저택에서 나가는 편이 어머니에게도 좋을 것 같았다.

'그래도 경제와 상업에 대해 모르는 것도 아니니까.'

전생에 경험한 내용이 있으니 상가인 외가에서 일하는 것도 나쁜 것이 없어 보였다.

어쨌거나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 뒤 각성식에서 결론이 나면 그때 고민해도 될 일이었다.

난 생각을 가다듬고 어머니를 따라 발을 옮겼다.

잰걸음을 옮겨 도착한 곳은 저택 후원에 있는 가족묘였다.

왕의 동생으로 공작 위에 오른 초대 공작부터 할아버지까지 직계 가족의 석관이 안치되어 있는 지하 석실.

가족묘 안쪽 깊은 곳은 공작만 들어갈 수 있어 저택의 고용인들 사이에서 온갖 소문이 들려오는 공작가의 비밀 장소였다.

하지만, 알렉스가 있는 곳은 각종 예식을 거행하는 맨 바깥 석실이었다.

가족묘에 있는 석관들은 깃발과 장식이 걸려 있는 석벽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이 석실에는 벽에 걸려 있는 깃발과 장식 외에 바닥에 그려진 거대한 문양만 있을 뿐이었다.

석실 안에는 미리 사람들이 와 있었다.

한쪽에는 며칠 전에 시비를 걸었던 두 형제와 공작부인이 서 있었다.

브리비아 그레시아 공작부인.

지금도 성세를 이루고 있는 란사로테 후작의 첫째 딸이자 공작의 첫째 부인. 정실이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답고 무척이나 젊어 보이는 모습. 누가 보더라도 고귀한 귀족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우아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공작과 정말 잘 어울려....'

딱 봐도 무표정한 공작과는 천생연분처럼 보였다.

'저 사람이 정말 나를 죽인 범인일까?'

나를 죽일 만한 위치와 힘을 지닌, 가장 범인에 근접한 사람.

공작이 범인을 추적하는 것을 능히 막을 만한 사람이었고, 나를 죽이려고 했던 하녀들을 소리 없이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증거가 없으니....'

뭐, 공작이 하는 꼴을 보면 증거가 있다고 해도 별 의미가 없을 가능성이 컸고, 그녀가 아니라 그녀를 따르는 귀족들이 벌인 일일 수도 있었다.

그녀야 슬쩍 눈만 감아도 되는 일.

내 죽음은 그저 그런 일일 뿐이었다.

제5화

제5편 각성했습니다 (1)

난 속으로 한숨을 내쉰 뒤, 공작부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역시 고귀한 귀족. 공작부인이 내 인사를 받아 주었다.

보이지 않을 듯이 고개를 까닥이는 공작부인의 모습을 확인한 뒤, 난 그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며칠 전과 다를 바 없는 표정을 한 두 소년을 지나, 어린 소녀와 한 여성이 서 있었다.

나보다 한 살 많은 누나와 두 번째 공작부인이었다.

엘레나 데 그레시아.

귀여운 누나는 나를 보자 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저 괘씸한 두 형제와 달리 나름 나와 친한, 한 살 터울의 누나.

물론 저쪽은 어머니가 자작에 불과했지만, 제대로 된 귀족이었다.

당연히 그녀는 나와 달리 공작의 제대로 된 딸이었지만, 그녀의 어머니 덕분인지 아직은 그럭저럭 나와 잘 지내고 있었다.

나는 소녀 뒤에 서 있는 여성에게 고개를 숙였다.

내 인사에 미소를 지으며 웃어 주는 여성.

마리아 데 그레시아.

시골에 작은 영지를 거느리고 있는, 이비사 자작가의 막내딸인 둘째 공작부인이었다.

그녀는 첫째 공작부인과 달리, 조용하고 주변을 무척이나 잘 배려해 주는 자비로운 귀족이었다.

지금처럼 서자인 나도 차별하지 않았고.

물론 성격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딸밖에 없으니 나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일지도 몰랐다.

음, 이렇게 생각하니 내가 좀 성격이 꼬여 있는 것 같은데.

고개를 흔들어 허튼 생각을 날려 버린 뒤, 난 앞을 바라보았다.

정면에는 내 아버지인 공작이 서 있었다.

그 옆에는 나이 든 총집사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모셔 온 신관도 보였다.

하지만, 난 날 노려보는 공작의 시선에 사로잡혀 버렸다.

꽤나 무서웠다.

"이쪽으로 와라."

공작은 담담한 목소리로 어머니 뒤에 서 있는 날 불렀다.

크게 심호흡을 했다. 다행히 경직된 몸이 풀렸다.

걱정스러운 얼굴의 어머니와 하녀들의 시선을 받으며 난 앞으로 걸어갔다.

자박, 자박.

석실 안에는 어린 내 발소리만 들렸다.

발소리가 그치고, 난 공작 앞에 멈추었다.

날 잠시 쳐다본 공작이 입을 열었다.

"오늘 알렉스의 6번째 생일을 맞아 각성식을 시작하겠다."

공작의 말에 난 찡그려지는 눈썹을 억지로 폈다.

각성식에서도 이름만 불릴 줄이야.

역시 몇 년 전에 들었던 말은, 공작의 아들로 받아 준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단지 각성일까지 보호해 준다는 말일 뿐.

역시 서자는 공작가의 일원이 되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각성식을 거행한다는 것은 혹시나 하는 기대일 뿐.

'기회를 준다고 생각하는 걸까?'

난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이런 상황이면 각성해도 고생길이 펼쳐질 뿐이었다.

난 각성을 못 해도 상관이 없었다. 공작, 귀족이라는 위치는 그 권력만큼 위험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건국 당시 왕실에서 분리된 우리 그레시아 공작가는 먼 옛날 용사 일행이었던 카를로스 기사의 능력을 이어받아...."

덕분에 긴장이 완전히 풀려 버렸다. 난 공작이 이어 가는 예식 연설을 귓가로 흘려들으며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담담한 얼굴로 연설을 다 듣자, 공작은 묘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난 그러든지 말든지 식이 진행되기를 기다렸다.

공작의 얼굴에 떠올랐던 표정은 금세 사라졌고, 곧 식을 진행했다.

"각성을 시작하겠다."

공작은 굳은 얼굴로 손을 올렸다. 드디어 각성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각성.

상속 능력을 깨우는 시간.

하지만, 난 각성일에 한 가지 더 노리는 것이 있었다.

'자동 저장 시점'이 저장된 지도 벌써 몇 년.

앞으로 죽게 된다면 마지막 죽은 시점. 1살 아기 때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게 분명했다.

미친.

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기 시절을 다시 겪으라니.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배우고, 똥오줌을 가리고....

난 절대! 다시 그런 일을 되풀이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중간에 자살할 수도 없었다. 남에게 죽는 것과 달리 자살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냥 생이 끝나 버릴지도 몰랐고, 시점이 저장 안 될지도 몰랐다.

결국, 이 시간까지 끌고 온 것은 각성일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공작. 이번 생애의 내 아버지가 머리에 손을 올렸다.

"지금부터 선조로부터 이어 온 능력을 깨우겠다."

공작의 무뚝뚝한 목소리와 함께 내 머리를 덮고 있는 손이 조금 따뜻해졌다.

아버지의 사랑과 같은 따뜻함은.... 개뿔.

말 그대로 손에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뜨거워!

"움직이지 마라! 뜨겁다고 들었을 텐데! 참아라!"

움찔거리는 나에게 공작이 호통을 쳤다.

하지만, 이렇게 뜨겁다고 말해 준 사람은 없었다.

젠장, 또 중간에 말이 씹힌 거야?

각성 때까지 소금을 뿌리다니. 난 고통 속에서도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난 열기를 참으며 쓰러지려는 몸을 곧추세웠다.

손에서 출발한 열이 머리를 감쌌다. 열기가 머릿속으로 점점 파고들었다.

열기에 눈앞이 뿌옇게 변하고, 의식이 흐려졌다.

통증이 머릿속을 마구 찔러 댔고, 열기가 온몸을 불태웠다.

하지만, 난 참아 냈다.

엄청난 고통이었지만, 죽는 것에 비하면 별거 아닌 고통이었고, 열기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화악!

고통이 사라졌다.

동시에 눈앞에 떠오르는 문장.

[각성에 성공했습니다. 새로운 '저장 시점'이 설정되었습니다.]

나이스! 기대했던 대로였다.

자동 저장이라는 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죽음을 반복해야만 저장이 가능할 리 없었다.

이 능력이 나에게 주어진 벌이 아니라면, 죽지 않아도 중간에 저장할 시점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6살 생일. 난 새로운 저장 시점을 얻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머리 깊은 곳에 전에 없던 것이 느껴졌다.

뇌처럼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새로운 기관이 머릿속에 생겨나 있었다.

"!"

눈을 뜨니 공작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에 생긴 기관이 아니더라도, 공작의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기쁘게도, 아니 아쉽게도.

난 각성에 성공했다.

* * *

"각성했군."

공작이 내 각성을 확정적으로 선언하자, 사람들은 모두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첫째 공작부인의 모습과 이맛살을 찌푸린 첫째 공자 시몬. 입을 딱 벌리고 있는 둘째 마누엘.

둘째 부인도 무척이나 놀란 듯했고, 하나밖에 없는 누나도 놀란 표정이었다. 하지만 누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기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대기하고 있던 신관과 총집사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역시 모두 내가 각성하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어머니는 무척이나 복잡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걱정과 기쁨이 섞여 있고, 한숨과 대견함이 묻어 나왔다.

나도 어머니와 다르지 않았다.

예상과 전혀 다른 결과였다. 다른 생각을 떠올리기 전이었으면 기쁨에 겨워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심경이 복잡할 뿐이었다.

더구나 내가 받아들인 각성 능력은 무척이나 애매한 능력이었다.

머릿속에 새로운 기관이 생겨난 뒤에

난 내 능력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마치 잃어버린 손을 다시 찾은 것처럼.

어떤 능력이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 바로 알게 되었다.

특별한 이름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충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훈련을 받고, 싸움의 경험을 쌓으면 점점 육체가 강화되는 능력.

쩝. 이렇게 설명하니 일반인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군.

하지만, 그래도 일반 평민들과 같지는 않았다. 성장하는 속도도, 성장의 한계도 보통 사람과 달랐다.

더 빨리 성장하고, 인간의 한계를 넘을 정도로 강해지게 만들어 주는 능력이었다.

물론 끝도 없이 강해지지는 않겠지만.

그러니까, 허접스럽게 보여도 마냥 허접하지는 않은 능력이라는 것이다!

역시 애매한 능력이다.

"그래, 무슨 능력을 상속받은 거지?"

앞에 서 있던 공작께서 친히 나에게 질문을 하셨다.

나에게 처음 하는 질문이었다. 그것도 말 속에 일말의 온기를 품고 있었다.

역시, 가문에 도움이 될 듯하니 바로 처우가 달라졌다.

덕분에 기분이 무척이나 나빠졌다.

공작에게 먼저 사과의 말을 꺼냈다. 마음속으로.

'미안하게도 가문에 그리 도움이 안 될 듯한데요.'

그와 동시에 나이답지 않은 대답을 했다.

"육체 강화 계열로 보입니다. 훈련 성취가 일반인보다 무척 높아지는 것 같습니다."

막 6살이 된 아이의 앳된 목소리였지만, 난 공작을 바라보며 똑 부러지게 대답했다.

"풋!"

옆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에다 작게 들리는 안도의 한숨 소리까지.

비웃는 녀석은 뻔했고, 한숨 소리는 첫째 공작부인의 것이 분명했다.

총집사가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육체 강화 계열이라, 특이한 능력이군요. 분명 선조이신 용사 카를로스 님이 가지고 계신 능력 가운데 비슷한 능력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총집사의 말이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 같았다.

그동안 도서관급 서재에서 열심히 공부한 덕분이었다.

몇 년간의 노력 덕분에 나도 선조 카를로스가 가지고 있던 능력을 대충 파악하고 있었다.

먼저 직계인 왕실에 내려오는 [마나 감응력].

이 능력을 깨달으면, 세상과 몸속에 있는 마나를 눈으로 보듯 느끼고 다룰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현왕과 두 왕자가 이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왕실의 분파인 이곳 그레시아 공작가에 내려오는 능력인 [마나 회로 구축법].

속칭 [심법]으로 불리는 마나 순환 기법으로, 몸 밖으로 유형화된 마나를 뿜어내기 위한 기술이었다.

카를로스 기사는 네 개의 심법을 가지고 있었고, 그 심법들을 돌아가면서 그레시아 공작가 일족이 얻어 왔었다.

물론, 오랜 역사 속에서 카를로스 기사의 다른 능력을 상속받은 사람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와 같은 능력을 얻은 사람은 내가 알기론 한 명도 없었다.

'거기다 꽤나 허접한 능력으로 보이니....'

나름 성장형 능력처럼 보였지만, 다른 능력도 어차피 다 훈련과 시간이 지나면 강해지는 능력들이었다.

귀족이 쓰는 능력들은 거의 다 마나를 기반으로 한 능력들이었다.

마법도 마나를 가공해서 사용하는 것이고, 검으로 내뿜는 검기도 몸속의 마나가 유형화되어 나타나는 것이었다.

모든 마나의 기반을 다룰 수 있는 왕실의 능력이고 비록 육체 한정이긴 하지만 공작가도 마나의 기반을 다룰 수 있어 이만큼 귀족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나와 전혀 상관없는 육체 강화라니.

잘하면 기사급이나 되려나.

이래서야 귀족으로 불리기도 쉽지 않을 듯했다.

'아니, 잠깐. 허접한 능력도 나쁘지 않은 것 아냐?'

난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놀랐던 표정들이 안도하는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고, 어머니 표정도 그리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렇군. 나쁘지 않았다.

나 같은 서자에게 딱 어울리는 능력이었다.

평민으로 떨려 나가지 않아도 되는, 귀족 언저리에 딱 걸칠 수 있는 능력.

잘하면 조그만 마을의 영주가 되어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승 귀족 정도만 줘도 땡큐인데.'

상속 능력을 받았다고 해도 자작급 이상은 언감생심이었다.

'좋다. 묻어간다. 5년을 살아남았다. 이대로 늙어 죽을 때까지 버티기다!'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니, 공작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육체 최적화] 능력을 상속받은 건가."

공작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가까이 있는 내 귀에 들려왔다.

아무래도 내 강화 능력의 원래 이름은 [육체 최적화]였나 보다.

뭐, 이름은 별 상관없지만, 문제는 공작의 표정이었다.

항상 무표정하던 공작의 표정이 바뀌어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공작의 눈빛이 뭔가 맛있는 먹이를 눈앞에 둔 늑대의 그것처럼 보였다.

제6화

제6편 각성했습니다 (2)

뭔가 찝찝하게 여겨졌던 공작의 표정과 달리 그 뒤의 시간은 별다른 것 없이 지나갔다.

시몬과 브리비아 공작부인의 건조한 축하의 말과 마누엘 꼬맹이의 무시, 그리고 제대로 칭찬해 준 누이와 둘째 공작부인.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축하 인사를 하는 총집사와 저택의 고용인들까지.

"너무 서운해하지 마렴. 능력을 각성한 것만 해도 정말 대단한 거란다."

방에 돌아와 어머니가 꼭 껴안으며 위로해 주었지만, 난 딱히 위로가 필요 없었다.

오히려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아예 각성을 못 한 것보다 더 좋을 수 있어.'

안전이 중요하다지만 이런 시대에 평민으로 내쫓기는 것은 앞으로 살아가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형제들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수준의 애매한 능력이라면 안전을 도모하면서도 앞날에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뭐, 까놓고 말해 각성을 해 버려서 어쩔 수 없이 '정신승리'를 하는 중이지만.'

애매한 능력도 상속 능력은 상속 능력이었다.

공작의 보호가 끝난 지금, 다시 위험이 덮쳐 올지도 몰랐다.

'풀어져선 안 돼. 긴장해야 해. 긴장.'

어머니께 인사를 드린 뒤, 방에 돌아온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공작가에 남게 되었으니, 이제 다시 긴장의 시간이 시작될 터였다.

'이제, 목표는 분가! 천재 코스프레는 던져 버리고 대충 쓸모 있는 놈으로 변하는 거다!'

그런 다짐을 하는 사이,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플로라인가?'

"들어와."

하지만, 예상과 달리 문을 연 사람은 나이가 지긋한 여성인 하녀장이었다.

"내일 아침 일찍, 저택 뒤쪽 연무장으로 나오시랍니다."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오기 무섭게 입을 열었다.

"연무장 맞나요?"

"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웬 연무장이지?

나는 다시 물었다.

"누가 지시한 거죠?"

"총집사님이십니다."

총집사라....

그가 나에게 지시를 내렸다는 것은 공작이 지시를 내렸다는 이야기였다.

그럼, 연무장에서 나오라는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기사를 만나라는 거겠지?"

"네, 알론소 기사단장님을 뵈라고 하셨습니다."

하녀장의 말에 나는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기사단장은 꽤 껄끄러운데....'

알론소 기사단장.

다른 기사와 달리 그는 평민으로서 능력을 각성한 단승 귀족이었고, 서자인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리 서자라도 공작의 자식인데, 그는 복도에서 스쳐 지나갈 때 나를 못 본 척 무시하곤 했다.

공작의 명령을 거절할 수도 없고, 나도 확인해 봐야 할 필요가 있었다.

각성한 능력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다음 날 아침.

난 플로라의 뒤를 따라 저택 뒤쪽 연무장으로 향했다.

물론 위치를 알고 있었지만, 이제 막 6살이 된 아이를 홀로 돌아다니게 할 리가 없었다.

연무장은 저택 뒤쪽에 난 샛길로 조금 걸어가야 했다.

나무에 둘러싸인 자그마한 연무장에는 두 사람 이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능력을 남에게 보여 주기 싫어하는 귀족들이 사용하는 사적인 연무장.

아버지인 공작과 배다른 형들이 주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오늘은 공작도 보이지 않았고, 배다른 형제들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텅 빈 연무장 중앙에 두 명의 기사가 나와 있었다. 중년의 기사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기사였다.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기사는 날 좋아하지 않는 알론스 기사단장이었고, 젊어 보이는 기사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누구지?'

그런 의문을 마음속에 묻어 둔 채 난 기사단장 앞에 서서 인사를 했다.

몸을 곧게 세우고,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귀족이 신뢰하는 자에게 하는 인사.

"알렉스입니다."

예의가 바르지만, 귀족적인 인사에 기사단장과 젊은 기사가 몸을 움찔거렸다.

막 여섯 살이 된 아이가 할 만한 인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기사단장 알론소... 입니다."

기사단장의 조금 늘어진 대답이 돌아왔다.

"공작님의 지시로 알렉스... 공자님의 능력을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역시, 존대하는 게 무척이나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이 기사단장과는 친해지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도 제대로 된 내 인사 덕분에 얕잡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상대에 대한 존중은 말로 시작하는 법.

조금 거리감을 가지게 되었지만, 나도 그리 친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으니 얕잡아 보이지 않게 된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예상대로 각성 능력을 확인할 모양이었다.

공작의 얼굴이 꽤 무서웠는데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내 앞에 서 있는 꼬장꼬장한 기사를 상대해야 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내 질문에 기사단장은 목검 하나를 건네주었다.

내 몸의 크기에 맞게 줄인 목검. 이곳저곳에 있는 흔적으로 보아하니 새로 만든 검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쓰던 물건 같았다. 시몬이나 마누엘이 썼던 검인가?

'설마 이곳에서도 물려받기인가.'

뭔가 한심한 생각이 언뜻 지나간 뒤 난 검을 잡은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역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전생 때에는 검을 든 적도, 검도 학원에 다닌 적도 없으니 검을 잡자마자 뭔가 느껴질 리가 없었다.

내가 대충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며 기사단장이 입을 열었다.

"기본기가 아예 없으니 우선 기본 훈련부터 시작합니다. 미겔!"

"넵!"

'아니, 그렇게 표 나게 말할 필요가 없는데. 처음 검을 잡는데 기본기가 있을 리 없잖아.'

속으로 투덜거리는 동안, 기사단장의 말에 옆에 서 있던 젊은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정기사 미겔입니다."

두꺼운 팔을 가진, 순해 보이는 기사였다. 다행이었다. 일부러 사람을 골릴 만한 기사는 아닌 듯했다.

기사단장은 옆으로 물러서서 팔짱을 끼고 훈련을 지켜보았다. 직접 훈련하는 대신 옆에서 지켜볼 모양이었다.

"오늘 하루 동안 수습 기사 훈련 과정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체력과 몸 상태에 따라 진도를 조정할 테니 최선을 다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오늘 하루뿐이었다. 나도 상속 능력이 궁금한 만큼 최선을 다해 볼 생각이었다.

"그럼, 우선 달려 볼까요? 이 연무장은 작은 편이니까 50바퀴만 돕시다."

50바퀴? 잘못 들었나?

기사의 말에 입이 딱 벌어졌다.

기사들이 사용하는 연무장과 비교하면 많이 차이 나지만, 그래도 연무장이었다. 연무장 한 바퀴면 100m가 넘었다. 50바퀴라니. 5㎞였다.

운동도 안 한 6살짜리한테 5㎞를 뛰라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설마 네가 암살자냐?

"우선 달리십시오. 지쳐 쓰러질 때까지 달리면 됩니다. 치유 성액도 준비해 놓았으니, 몸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한계를 시험할 모양이었다.

난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준비했으면 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검을 쥐고 뛰십시오. 검을 놓치면 처음부터 다시 뛰겠습니다."

기사의 말에 난 달리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운동 좀 해 놓는 건데.'

난 젊은 기사의 호통을 들으며 이를 악물고 계속 달렸다.

그렇게 달리고 또 달려서 32바퀴째.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끈기는 있군."

정신이 들자, 귓가로 뜻밖의 음성이 들려왔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음성이었다.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 공작의 음성이었다.

"확실히 능력을 얻으신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훈련을 받지 않은 평범한 6살 아이의 지구력은 아닙니다."

이번에는 기사단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단장과 공작이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설마 내가 저택에 실려 온 건가?

하지만, 코 위로 숲의 내음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바닥에 닿은 등과 팔다리도 오돌오돌한 흙바닥이 느껴졌고.

내가 있는 곳은 기절했던 바로 그 연무장이었다.

그런데 평범한 지구력이 아니다라....

역시 그건가?

달리는 중간에 힘들어서 포기하려던 순간이 있었다.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팔다리가 후들거리고 위액이 올라올 때였다.

바로 그때, 몸속 깊은 곳에서 힘이 솟구쳤다.

조금 전 달릴 때는 전생에 들었던 '러너스 하이'라고 생각했는데....

죽을 정도로 운동하면 마약 비슷한 호르몬이 분비되어 힘이 솟구친다는 생리현상 말이다.

그게 아니었나? 하기야 전생에 들어 왔던 '러너스 하이'와는 느낌이 달랐다.

피로를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힘든 것이 조금 덜해진 것 같은 느낌? 혹은 내 한계가 더 늘어난 느낌이었다.

아무튼 그 느낌 덕분에 나는 한계를 넘어 달릴 수 있었다. 물론 나중에는 결국 기절하고 말았지만.

"이제 정신을 차린 모양입니다. 회복력도 나쁘지 않습니다. 능력 자체는 확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리 대단한 능력으로 보이지 않습니다만...."

기사단장의 말에 공작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발소리가 들렸다. 점점 멀어지는 발소리.

나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꽤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기사단장과 저택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공작의 등이 보였다.

그 상속 능력이란 것이 귀도 좋아지게 하는 걸까?

기사단장이 있는 곳은 내가 누워 있는 곳과 꽤 멀었다.

내게 무릎베개를 해 주던 플로라도 옆에 서 있던 젊은 기사 미겔도 둘의 대화를 못 들은 것 같았다.

난 떠나가는 공작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

"괜찮으세요? 더 누워 계셔요. 후유증이 있을지 몰라요. 사람을 부르려고 했는데...."

플로라가 더 이야기하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공작이 찾아왔으니 그녀가 무슨 말을 꺼낼 수 있었을까. 그저 지켜보는 게 고작이었을 것이다.

"괜찮아."

정말 괜찮았다. 어디 아픈 곳도 없었고, 정신도 멀쩡했다.

갑자기 과격하게 쓴 근육들이 당기기는 했지만, 기절했다가 깨어난 것치고는 이상하게 멀쩡했다.

하지만, 멀쩡한 내 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공작이 이곳을 찾아오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지나가는 길이었나? 아니면 잠깐의 변덕일까?

그럴 리가 없었다. 공작이 그런 사람이었으면 그동안 나를 찾아오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뭔가 있었다. 이 테스트가. 별것 아닌 내 각성이.

뭔가 공작이 눈여겨보게 하는 이유가 있었다.

"후유증도 없는 것 같고. 더 훈련받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일어난 나에게 다가온 기사단장이 더 할지 물어보았다.

공작이 찾아왔기 때문인지, 처음보다 기사단장의 표정이 괜찮았다. 플로라는 걱정스러운 얼굴이었지만, 난 고개를 끄덕였다.

"더 받겠습니다."

공작이 찾아온 이유를 알아내야 했다. 공작이 알려 줄 것 같지 않으니 나 스스로 이유를 알아내야 했다.

그리고 다 포기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작은 기대가 내 가슴속에서 꿈틀거렸다.

나는 내 손에 쥐게 된 무기가 뭔지 확실하게 알아 두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젊은 기사 미겔이 다시 내 앞에 섰다.

"원래는 계속 육체 단련을 이어 가는 게 맞지만, 지금은 능력 확인이 우선이니 검술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아쉽게도 뭔가 대단한 검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었다.

아래로 내려치기가 계속 이어졌고, 근육이 덜덜 떨리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좌우로 휘두르게 했다.

한참 동안 훈련을 지켜보다가 기사단장이 자리를 비웠다. 나머지 테스트도 확인이 끝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 훈련은 끝이 아니었다.

난 플로라가 싸 온 도시락을 먹은 뒤, 오후 내내 검술 훈련을 받았다.

나중에 가서는 팔에 힘이 빠져서 검술 훈련인지 춤추는 건지 알기 힘들어졌지만.

해가 저택 뒤 숲 너머로 넘어갈 무렵, 훈련은 끝이 났다.

이번에는 기절하지 않았지만, 난 차라리 기절하게 해 달라고 빌 정도로 힘들었다.

이 정도까지 계속한 나도 무식했지만, 막 6살이 된 아이를 종일 굴리는 기사는 무식해도 너무 무식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능력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오늘은 근육을 무리하게 사용했으니, 하녀들에게 마사지를 받고 하루 이상 푹 쉬십시오."

젊은 기사 미겔은 지쳐 누워 있는 나에게 인사를 한 뒤에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제7화

제7편 훈련을 받았습니다만... (1)

그가 연무장을 나서자마자, 플로라가 누워 있는 나에게 물었다.

"일어나실 수 있어요?"

"무리야. 무리."

팔은 떨어져 나갈 것 같았고, 다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럼 업히세요."

플로라가 조금 기쁜 표정으로 날 등에 업었다.

뭐가 기쁜 걸까?

"마지막으로 업히셨던 때가 벌써 2년 전인가요? 공자님은 나이답지 않으셔서 마님도 걱정이랄까, 아쉬움이 많으세요."

물론, 저희는 그 덕분에 편하기도 하지만요.

뒤에 작게 덧붙이는 말이 있었지만, 지금은 무슨 말을 하든 잘 들리지 않았다.

아니, 벌써 반쯤 눈이 감겨서 이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도 없었다.

그 뒤에도 뭐라고 계속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난 이미 잠들어 버린 뒤였다.

몸은 금방 회복되었다. 통증이 가득했던 몸은 다음 날이 지나가기 전에 멀쩡해졌다.

그리고 회복된 몸은 어제와 달라졌다. 더 단단해지고 더 강해졌다.

하루를 푹 쉬는 동안, 나는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반신욕과 마사지, 그리고 다과까지. 기절할 정도로 혹사한 몸을 회복시키라는 어머니의 배려였지만, 이미 몸은 다 회복되어 있었다.

그렇게 여유로운 하루를 보낸 다음 날 아침. 기사 미겔이 직접 내 방으로 찾아왔다.

"앞으로 공자님의 훈련은 제가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말에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테스트만 하는 것 아니었나요?"

"훈련 겸 테스트라고 보시면 됩니다. 하루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능력이니까요."

공작이 직접 찾아오고, 정식 기사가 막 6살이 된 아이를 훈련시킨다라....

테스트가 계속된다고 해도, 뭔가 기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그리고 말을 놓으셔도 됩니다. 이미 상속 능력을 얻으셨으니 말을 놓으셔도 무방합니다."

미겔의 말에 난 입꼬리를 올렸다. 말을 놓으라고 했으니, 바로 놓아 주기로 했다.

"너무 빠른 것 아냐?"

"네?"

"실질적으로 훈련을 받기 시작하는 종자는 14살. 잡일을 시키는 시종도 아무리 빨라도 7살부터 받지 않나? 난 이제야 6살이 되었는데?"

내 말에 미겔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시동부터 시작하는 것일 리도 없고, 대단하신 시몬 형도 8살부터 기사 훈련을 시작했잖아."

더구나 능력을 외탁하신 우리 둘째 공자 꼬맹이는 아직도 능력 훈련을 받고 있지 않았다.

뭐, 전기 능력 이외에는 일반 꼬맹이 그 자체이니 벌써 이런 훈련을 받기에는 무리였다.

"저도 좀 빠르다고 생각하지만.... 공작님의 명령입니다."

공작의 명령이라는데 할 말이 없었다.

공작은 뭘 원하는 걸까?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는 육체 강화 능력일 뿐인데. 역시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비밀이라도 숨겨져 있는 걸까?

어차피 공작의 명령이니 시키는 것을 하다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지시에 따라야겠지. 오늘도 뒤쪽 연무장이야?"

"넵."

안심한 듯한 얼굴로 기사가 냉큼 대답했다.

꽤 순진한 기사였다. 하기야 닳고 닳은 기사들이 서자인 내 교육을 맡을 리가 없었다.

나는 기사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왕따는 아닌 것 같고, 호구 계열인가?

뭐, 어쨌거나 실력만 좋으면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바로 옷을 갈아입고 그의 뒤를 따랐다.

계속 훈련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어머니는 싸늘한 얼굴로 기사를 노려보았지만, 공작의 명령이라는 말에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플로라는 도시락을 준비하기 위해 식당으로 달려갔고, 어머니는 방을 나서는 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기사 미겔과 나는 둘이서 연무장으로 향했고, 잠시 뒤 도착한 연무장에서 뜻밖의 사람과 만나게 되었다.

아니, 예상치 못했을 뿐 충분히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네가 여기를 왜 온 거지?"

미겔과 함께 온 나를 보고 공작의 맏아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다른 기사와 함께 연무장에서 검술 훈련을 받고 있었다.

나를 보며 아래로 늘어뜨린 검날에는 푸른빛이 은은하게 흐르는 중이었다.

마나로 만들어진 검기였다.

겨우 10살짜리가 유형화된 마나를 만들다니. 직접 보고 있지만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역시 그레시아 공작가가 자랑하는 후계자인가.'

시몬 형의 앞에 서 있던 기사도 무척이나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지? 여기는 공작가의 연무장이다.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기사가 미겔을 꾸짖었다.

하아, 귀찮게 되어 버렸다.

여기서 내가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이유가 없었다.

나도 미겔을 쳐다보았다.

미겔은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

"알렉스 공자를 훈련시키라는 공작님의 명령입니다. 오늘 조회 시간에 단장님이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그럴 리가...."

기사의 앓는 소리에 시몬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직접 확인하겠다."

그는 훈련도 내팽개치고, 저택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나름 교양을 지킨다고 뛰지 않고 있었지만, 저래서야 뛰는 것보다 보기가 더 안 좋았다.

카메라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저 장면을 남기지 못한 것이 무척이나 아쉬웠다.

그날 확인하고 오겠다는 시몬과 기사는 연무장에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미겔 밑에서 첫날부터 박박 기기 시작했다.

미겔은 첫날 받은 훈련과 달리 계속해서 달리기를 시켰다.

그것도 나이에 맞는 달리기가 아니라, 첫날처럼 기절할 정도로 달리게 했다.

하루, 이틀, 사흘.

난 매일같이 달리다가 기절을 했고, 플로라의 등에 실려 저택으로 돌아갔다.

첫날 이후 이 연무장은 내 전용 연무장이 되어 버렸다.

시몬도 다시 오지 않았고, 공작도 들르지 않았다. 가문의 다른 사람들이나 기사, 저택의 고용인들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일주일 뒤.

"헉, 헉. 원래 기사 수업이 이런 식인가? 다들 어떻게 버티는 거지?"

처음으로 기절하지 않게 된 날, 난 미겔에게 물어보았다.

미겔은 다시금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그럴 리가요. 이런 식으로 수업을 했다면 다들 못 버텼을걸요? 저 같아도 도망쳤을 겁니다."

"뭐?"

황당한 소리에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다 앓는 소리만 내게 되었다.

"그런데 왜 난 이런 무식한 방법을."

"덕분에 빠르게 성장하고 있잖습니까?"

그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난 매일같이 기절하는 순간에도, 계속 성장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달리는 어느 순간.

좀 더 빨라지고, 좀 더 숨쉬기 편해지고, 좀 더 튼튼해졌다.

평범하게 몸이 튼튼해지는 것과는 확연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레벨업!'처럼 단계적으로 올라가는 느낌?

이건 매일같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느낌이 오는 시간적 간격이 점점 길어졌지만, 확연하게 다른 느낌을 느낄 수 있었다.

'첫날부터 지금까지 네 번 느꼈으니까 4레벨이라고 해도 되려나?'

너무 힘들어 별의별 생각을 다 하게 되었지만, 어쨌거나 미겔 기사의 말대로 내 능력은 확실히 성장하고 있었다.

* * *

"그 아이가 가문의 연무장에서 따로 훈련을 받는다고 하던데요."

"네. 공작님도 시몬 공자님도 다른 연무장을 쓰고 계십니다."

"거기다 공작님은 그 연무장을 찾아가시기까지 했다면서요."

"첫날 하루뿐이었습니다."

"며칠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왜일까요? 뭐 때문에 그 아이에게 신경 쓰는 걸까요. 머리가 좋은 거야 소용없는 일이고, 상속 능력도 별 볼 일 없는 것이었고...."

"따로 이유를 알아볼까요?"

수하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필요 없어요. 어차피 공작님의 보호도 각성일에 끝났으니."

조금 더 두고 보려고 했는데, 공작이 그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절대 그냥 놔둘 수 없었다.

"그것보다 가문 연무장이 외진 곳이라면서요?"

"네. 숲에 둘러싸여 있어서 숲지기와 공작가 분들 이외에는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럼, 그곳에서 사고가 벌어져도 다른 사람들은 알기 어렵겠군요."

"공작님이 갑자기 찾으시지 않는다면 그럴 것으로 생각합니다."

"공작님은 걱정하지 말아요."

잠시 말이 멈추자, 방 안 온도가 조금 내려간 듯했다.

"사람을 구해요. 암습에 능한 자로. 적어도 젊은 기사 하나는 손쉽게 죽일 수 있는 자로요."

"알겠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숙인 뒤 방을 나섰고, 아름다운 방은 다시 조용해졌다.

* * *

"휴우우우."

긴 숨을 몰아쉬며 쏟아지는 땀을 털어 냈다. 몸에 활력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거의 한 시간을 한계에 이를 때까지 달렸지만, 이제 더 이상 기절하는 일은 없었다.

물론 무척이나 힘들었지만, 이렇게 조금 쉬면 어느 정도는 회복되었다.

겨우 한 달이 지났지만, 스스로도 크게 성장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연무장을 감싼 숲에서 진한 내음을 맡을 수 있었다. 크지 않은 연무장 덕분에 마치 숲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수고하셨어요."

대기하던 플로라가 물컵을 건네주었다. 시원한 물을 마시고 나니 기다리고 있던 기사 미겔이 입을 열었다.

"이어서 검술 훈련을 시작하죠."

그의 말에 플로라가 잔을 받아 들고 연무장 외곽으로 향했고, 난 허리에 찬 목검을 뽑아 들었다.

6살 키에 맞춘 장난감 같은 목검이었지만, 어른들이 쓰는 목검만큼 튼튼했다.

미겔은 기사답지 않게 순하게 생긴 얼굴이었지만, 훈련할 때면 전생의 유격 조교가 떠오를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굴려 댔다.

전생이었으면, 아니 내가 그저 평범한 6살이기만 했어도 아이 학대로 신고를 당했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는 플로라도 내 훈련 모습에 놀라 어머니에게 알려야 한다며 발을 동동 굴렀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무 그늘에 앉아 한가롭게 구경을 하고 있었다.

난 숨을 가다듬고, 들고 있던 검을 휘둘렀다.

아무런 기교도 없이 아래로 내려치기 2시간.

말도 안 되는 횟수였고 어른도 하기 힘들었지만, 한 달 동안 훈련을 받아 온 난 충분히 버텨 낼 수 있었다.

"핫! 핫! 핫!"

짧게 기합을 이어 가며 검을 내려치자, 검 주변에 바람이 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바람이 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목검에 흐르는 날카로운 기세가 바람처럼 느껴진 것이다.

일주일간 오로지 달리기로만 일관하던 훈련은 시간이 지나자 점점 검 훈련으로 대체되었다.

지금은 검을 휘두르는 시간이 훨씬 더 길었다.

아직 검술이라고 불릴 정도의 훈련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제대로 배울 수 있을 게 분명했다.

"흠, 예상보다 성장이 빠르군요. 상당히 무리하고 있는데도 탈도 안 나고. 역시 귀족의 능력이려나...."

목검을 휘두르는 나를 보며 미겔이 중얼거렸다. 그의 말에는 놀랐다는 뉘앙스로 가득했다.

"훅, 훅, 다행이네요."

비교할 대상이 없어 내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기사인 그가 놀라는 것을 보니 나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제8화

제8편 훈련을 받았습니다만... (2)

"제가 본 것은 일반 종자들의 훈련뿐이었지만, 성장하는 속도를 보면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네요. 성장이 어디서 멈출지 모르겠지만, 이대로만 성장하시면 훌륭한 기사가 되실 겁니다...."

말을 마칠 무렵, 미겔의 표정은 꽤 애매하게 변해 있었다.

평민에 비해 뛰어난 능력이고 강력한 기사가 되기에는 충분했지만, 능력을 지닌 귀족에게 기사는 그리 값어치 있는 지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에게는 나쁘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흠, 영지 기사나 되어 볼까?'

잠깐 그런 생각도 해 보았지만, 역시 공작가에 매여 있을 것을 생각하니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뭐, 6살짜리가 벌써 그런 고민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거기에다 공작이 나를 눈여겨보는 이유를 빨리 알아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쑥쑥 자라나는 실력을 최대한 키울 때였다.

그렇게 한참을 훈련하고, 쉴 때가 되었다.

때마침 저택에서 하인이 와서 미겔을 불러냈다.

"단장님이 부르신다고?"

"네."

"알았어.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쉬고 계십시오."

역시, 에프엠 유격 조교. 그냥 끝낼 리가 없었다.

그가 저택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난 플로라와 함께 나무 그늘에 앉았다.

플로라가 차와 간식을 꺼내 놓았다.

"좋다."

따스한 음료가 몸속에 스며드니 근육이 노곤하게 풀려 나갔다.

'역시 부자, 귀족이 최고야.'

아쉬웠다. 나이가 들어 저택을 나가게 되면 이런 서비스를 못 받게 될 텐데.

난 옆에 앉은 플로라에게 물었다.

"심심하지 않아?"

"아뇨. 심심하기는요. 하나도 안 심심해요."

플로라가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절대 이 자리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하기야 내가 봐도 심심할 정도로 꿀 보직이었다.

"편해 보이지만, 그래도 여러모로 신경 쓸 게 많아요. 공자님의 식성에 맞춰서 음식도 준비해야 하고, 지치면 쉬실 수 있게 물수건도 준비해야 하고...."

플로라는 열심히 자기가 필요한 이유를 설명했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숲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는 소리.

풀들이 서로의 몸을 쓰다듬는 소리.

지저귀는 벌레와 새....

어라.

전혀 들리지 않았다.

새 소리도, 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연무장에서 격하게 움직일 때도 들려왔었는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표정이 차가워지고, 늘어져 있던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 아니 그렇다고 힘들다는 건 아니고요!"

변한 내 표정 때문인지 플로라가 급하게 말을 바꿨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언제부터 소리가 안 들렸지?

조금 전?

아니면 한참 전부터?

젠장, 너무 긴장을 풀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옆에 놓아두었던 목검을 쥐었다. 솔직히 그리 안심이 되는 무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검을 잡으니 조금 마음이 놓였다.

휴우.

난 최대한 소리가 안 나게 숨을 몰아쉰 뒤, 평범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슬슬 훈련을 시작해 볼까?"

"네? 아직 기사님이 안 돌아오셨잖아요. 좀 더 쉬세요."

플로라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그럼, 플로라는 기사님을 불러올래?"

이어지는 내 말에 플로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린아이의 지시였지만, 그동안의 내 이미지 덕분인지 곧바로 내 말을 따랐다.

"그럼 쉬고 계셔요. 얼른 모셔 올게요."

그녀는 바로 연무장을 가로질렀고, 난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일어났다.

플로라는 종종걸음으로 연무장을 지나 저택으로 향하는 길에 접어들었다.

그녀가 막 시야에서 벗어나려는 순간.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누구?"

그녀는 자신을 가로막은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옷 일색의 사람이었다. 몸도, 얼굴을 가린 수건도 모두 검은색.

"플로라, 피해!"

젠장. 나는 고함을 쳤고, 놀란 그녀가 입을 벌리는 순간.

푹.

그녀의 등으로 검게 칠해진 검날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 바닥에 흩뿌려지는 피.

"아...."

바람이 새는 듯한 신음만을 남기고, 그녀의 몸은 허물어졌다.

검이 뽑혀 나오고, 그녀가 누운 흙바닥에 피가 고였다.

나는 플로라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검은 복면인이 나타나고 플로라가 검에 찔리는 그 순간까지 나는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나타난 순간도 알아차리지 못했고, 플로라가 검에 찔리는 순간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그 뒤에도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훈련으로 강해지기는 개뿔. 6살짜리가 한 달 훈련으로 달라지긴 뭐가 달라졌을까.

처음 본 살인 현장에 이렇게 얼어 버릴 것을.

거기다 너무 안일했다.

별 볼 일 없는 능력을 얻었다고 너무 쉽게 생각했다.

전담 기사를 붙이고, 가족 연무장에서 홀로 수련까지.

거기다 공작까지 등장했으니.

나를 죽이려고 했던 자가 의심을 품기에 충분했다.

별 볼 일 없는 서자가 공작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고.

'정말 기대를 받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쓸 만한 도구인지 확인하는 중일까.'

각성 때 보았던 공작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먹이를 노리는 섬뜩한 눈.

그 눈은 기대를 품고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이 아니었다.

저벅. 저벅.

젠장,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천천히 내게 다가오는 중이었다.

죽은 플로라를 넘어, 지금은 연무장을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진 남자는 복면을 쓴 채로 마치 산책을 하듯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제길, 공포에 질려서 꼼짝도 못 하고 있다니.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을 떠올려 봤자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잠깐, 공포에 질렸는데 이렇게 냉정하게 적을 바라보며 생각을 이어 갈 수 있나?

분명 아무리 노력을 해도 팔도, 다리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머릿속은 그리고 눈동자는 내 의지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면.

설마.

공포 때문에 움직일 수 없던 게 아니었어?

나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

꽈직.

다행히 턱은 움직였다.

입술이 터져 피가 목을 타고 아래로 흘렀다.

"아, 아."

이제 혀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기는 그레시아 공작가의 연무장이다. 여기서 살인을 하다니 뒷일은 생각도 안 하는 건가?"

내 말에 천천히 다가오던 남자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멈춰 세우긴 했지만, 그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떨리는 검을 부여잡고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구에게 사주를 받았는지, 어디 단체인지 모르겠지만, 공작의 아들인 날 죽인다면 당신과 당신의 가족, 사주한 자들도 모두 죽음을 각오해야 할 거야!"

이어진 고함에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검은 복면 위에 드러난 눈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신기한 물건을 보는 듯한 눈이었다.

역시, 허세와 유도심문은 실패했다.

검은색으로 통일한 가죽옷과 얼굴의 반을 가린 복면, 검게 칠한 검.

플로라를 먼저 죽이긴 했지만, 딱 봐도 나를 죽이려고 온 자였다.

'젠장, 플로라에게 미안한데. 다음에 더 잘해 줘야겠다.'

나는 복면인 뒤로 보이는 플로라의 주검을 보며 속으로 사죄했다.

복면인이 다시 움직였다.

칙칙한 분위기를 풍기고 실력도 대단해 보이는 복면인. 어떻게 봐도 암살범이나 청부 살인업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방금 전 눈빛에서 내가 똑똑하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온 것을 알 수 있었다.

암살범이 타깃에 대해 제대로 모른다?

'정보가 부족한 걸까? 아니면 자신의 실력에 그만큼 자신이 있는 걸까.'

대답을 듣지 않아도, 걸어오는 그의 몸에서 작은 정보들이 흘러나왔다.

훈련을 받은 단단한 몸. 오른손잡이. 은연중 배어 나오는 자신감.

내 눈으로 확인하기도 어려운 검 솜씨.

하지만, 타깃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렇지만, 또 내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는 암살자.

그리고 방해받지 않을 시간까지 알고 있는 암살자.

어라? 그걸 어떻게 알았지? 미겔이 자리에 없는 시간을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걸까?

미겔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은신이 뛰어난 걸까? 아니면 시간에 맞춰 미겔을 불러낼 수 있었던 걸까?

만약 불러낸 것이라면 미겔을 불러낸 하인을 매수한 걸까?

정보가 늘어날수록 의문도 늘어났지만, 아쉽게도 당장 의문을 풀 수는 없었다.

복면인이 점점 다가왔다.

그가 다가올수록 몸이 덜덜 떨렸다.

왜 떨리지?

공포에 휩쓸린 건가?

하지만, 아직도 내 정신은 멀쩡했다.

덜. 덜. 덜.

몸이 떨리자, 손에 든 검도 마구 흔들렸다.

그 덕분일까. 움직이지 않던 몸이 조금은 움직여졌다.

'제발 좀 멈춰!'

나는 억지로 반대편 손을 움직여 마구 떨리는 검을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젠장, 마음이 꺾인 것도, 겁에 질린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몸은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고, 지금은 혼자서 벌벌 떨고 있었다.

왜 안 움직이지?

이건 심리적인 게 아니야.

그럼 뭘까. 심리적인 게 아니면 무협지처럼 살기라도 뿌리고 있는 걸까?

어라?

잠깐, 이 세상은 전생과 달랐다.

몸을 치유하는 신관이 있고, 제대로 된 연금술사가 있는 곳. 거기다 손가락에서 스파크를 튀기는 철부지 둘째 형님도 있었다.

그럼, 내가 모르는 기운이 내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어라? 기운? 기운에 묶여?'

그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 떠올랐다. 마치 머릿속 한 부위에서 스위치가 올라간 것 같은 느낌.

그리고 몸 주변에서 뭔가가 느껴졌다. 방금까지 느낄 수 없었던 기운.

그 기운은 내 몸을 감싸고 몸 안까지 밀고 들어와 몸을 떨리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운은 바로 앞까지 다가온 복면인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복면인에게서 흘러나온 기운은 내 안에도 있었고, 풀에도, 나무에도, 공기 중에도 흐르고 있었다.

'이게 뭐지?'

처음 느끼는 감각에 휩쓸리는 순간.

저벅.

복면인의 발소리가 멈추었다.

그는 내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꼬맹이답지 않게 재미있게 해 주더니 왜 지금은 아무 말도 못 하지? 뭔가 한마디 해 봐."

복면 속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눈은 덜덜 떨리는 내 검을 보며 웃고 있었다.

역시 내 몸을 굳게 만들고, 지금 또 떨게 만든 건 눈앞의 복면인이었다.

"실력도 나쁘지 않은데,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짓을 하고 다닌다는 것을 가족도 알고 있나요?"

내 말에 복면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결혼은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들이나 딸이 아빠를 어떻게 생각할지. 죽은 엄마는 저세상에서 이런 아들의 꼴을 보며 또 뭐라고 생각할지...."

"이 자식이, 남의 멀쩡한 엄마를...."

역시, 욕은 가족 욕이 최고였다. 냉정하던 복면인이 내 말에 바로 성질을 냈다.

그와 동시에 검은 피가 맺힌 검을 위로 치켜들었다.

냉정하지 못한 검.

예상대로 내 몸을 감싸던 기운도 조금이나마 흐트러져 있었다!

'제발! 제발! 움직여!'

나는 조금이나마 흐트러진 기운 사이로 내가 가지고 있던 기운을 밀어 넣었다.

어떻게 그렇게 하게 된 건지는 알지 못했다. 기운을 느끼는 순간, 가능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

그리고 검이 다시 아래로 내려오는 순간.

콰직.

난 내 몸을 감싼 기운을 뚫고 옆으로 몸을 날릴 수 있었다.

서걱.

몸을 날리는 순간, 눈앞에 피가 솟구쳤다.

젠장, 역시 한 달 훈련받은 6살짜리 몸으로는 제대로 피하는 것은 무리였다.

쿵.

나는 2m 정도 옆으로 날아간 뒤에 바닥에 나뒹굴었다.

가슴에서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다행히 심장이나 중요 혈관이 베인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피가 너무 많이 쏟아지잖아!'

당장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면 이대로 죽기 딱 좋은 상처였다.

더구나 통증도 슬슬 밀려오기 시작했다.

검을 휘둘렀던 복면인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피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커진 눈동자를 보니 속이 시원해지긴 했지만, 그 감정은 이내 고통으로 뒤덮였다.

"아악!"

내 비명을 들으며 복면인이 중얼거렸다.

"내 검을 피하다니. 거기다 조금 전 꺼낸 말은 날 흔들려고 한 말이었나? 고통을 참는 것도 잘하는 것 같고. 흠, 이대로 죽이기엔 좀 아까운데. 조직에서 써먹기 딱 좋아 보이는데...."

그는 아쉽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다시 검을 치켜들었다. 아쉽다는 말은 빈말인 모양이었다. 아니면 한번 고용되었으면 반드시 약속을 지키는 프로이든가.

'결국 죽는 건가?'

난 치켜든 검을 보며 혀를 찼다.

그때였다.

멀리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기사 미겔의 목소리였다. 고함을 열심히 지른 보람이 있었다.

미겔이 달려오고 있었다.

제9화

제9편 다른 길을 걸어 보았습니다 (1)

"멈춰!"

미겔은 순식간에 연무장을 가로질러 복면인에게 달려들었다.

다행히 복면인은 나보다 미겔을 우선으로 생각한 듯했다.

미겔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몸을 돌린 복면인의 팔도 휘둘러졌다.

캉!

검이 튕겨 나가는 소리와 함께.

"큭."

미겔의 신음이 들려왔다.

복면인은 그 자리에 서 있었지만, 달려들었던 미겔은 어느새 뒤로 밀려나 있었다.

미겔이 들고 있는 것은 공작가 기사단의 장검. 복면인의 손에는 짧은 단검이 들려 있었다.

긴 장검과 단검. 달려들었던 미겔과 그 자리에서 방어했던 복면인.

하지만 신음을 흘린 것도, 뒤로 밀려난 것도 미겔 쪽이었다.

'젠장, 기사도 도움이 안 되는 거야?'

암살자 따위가 너무 강했다.

"바로 사람들이 달려올 거다."

"약하군. 시간은 충분해."

그 말과 함께, 이번에는 복면인이 미겔에게 달려들었다.

갑옷을 입은 미겔이 피하기에는 불가능한 빠른 속도였다.

미겔은 검을 휘둘러 막았지만, 검을 휘두른 자리에는 복면인이 보이지 않았다.

복면인은 미겔의 뒤에 나타났다.

내 눈에는 마치 공간 이동을 한 것처럼 보였다. 미겔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순간적으로 복면인을 놓쳤고, 다음 순간.

서걱.

미겔의 목이 하늘로 치솟았다.

'맙소사!'

미겔이 이렇게 쉽게 당하다니.

난 황당한 광경에 그만 얼이 빠지고 말았다.

아쉽게도 놀랄 시간은 많지 않았다.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커억, 커억."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는 내 앞에 복면인이 다가왔다.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마지막 순간, 멀리서 고함이 들려왔지만 이미 너무 늦은 발걸음이었다.

어둠이 찾아왔다.

[사망하셨습니다. 자동 저장 시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 * *

다시 밝아진 시야.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연무장이 아니라 가족묘 내부였다.

눈앞에 공작이 놀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돌아온 건가.'

내가 각성한 바로 그날로.

방금까지의 고통 때문일까.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공작이 입을 열었다.

"각성했군."

그때처럼 공작은 바로 내 각성을 선포했다.

"헉."

"말도 안 돼."

전에는 듣지 못한 사람들의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다시 한번 주변을 돌아보았다.

사람들의 모습은 전과 다르지 않았다.

놀라고, 분노하고, 감탄하고, 시샘하는 사람들.

하지만, 내 마음은 달랐다.

'너무 설쳤어.'

날 죽이려는 자가 있는데 능력에 취해 너무 튀어 버렸다. 각성한 뒤에는 조심하기로 그렇게 다짐했었는데.

당장이라도 범인을 찾고 싶었지만, 아직 어린 내 나이와 실력이 발목을 잡고 있었다.

아직은 더 숙이고, 더 숨어 있어야 했다.

"그래, 무슨 능력을 상속받은 거지?"

공작의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전과 똑같은 대답을 해서는 안 되었다.

공작의 눈을 피해야 했다.

"몸이 튼튼해지는 능력 같은데, 잘 모르겠는데요."

공작의 눈살이 조금 찌푸려졌다.

어리바리한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든 것이 분명했다.

"육체 계열일까요? 용사 카를로스 님의 능력 가운데 비슷한 능력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글쎄, 확인해 보면 알겠지."

전과 다른 대답 덕분일까? 공작의 반응이 전과 달랐다.

다른 이들의 비웃음을 사며 각성식은 끝이 났고, 다음 날 난 미겔 기사와 함께 연무장에 서게 되었다.

알렉스 기사단장이 함께한 자리도 아니었고, 저택 뒤쪽 숲에 있는 공작 일가의 연무장도 아니었다.

기사단이 쓰는 거대한 연무장 한쪽에서 미겔 기사에게 테스트를 받게 된 것이다.

연무장에 나와서 훈련을 받던 기사들과 그의 종자들이 나를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기사단장님의 지시로 공자님을 테스트할 생각입니다. 최선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알렉스 기사단장은 나오지 않았지만, 테스트는 전과 다르지 않았다.

쓰러질 때까지 계속된 달리기와 이어진 검 휘두르기.

처음에 내 훈련을 훔쳐보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자 점차 관심을 잃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일까. 똑똑하다고 알려진 어린 공자의 실력이 소문만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나이대의 아이들치고는 열심히 하는 것 같았지만, 자신들이 어렸을 때도 그만큼은 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온몸에 먼지와 땀범벅이 되어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휴, 레벨업 전에 멈추면 대충 이 정도군.'

레벨업이 되지 않게 아슬아슬하게 훈련 속도를 조절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린 몸이라 쉽게 지쳤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더 튼튼하거나 컸으면 지치기 전에 레벨업을 했을 게 분명했다.

"지구력도, 성장 속도도 확연히 구별되는 능력은 아닌 것 같군요. 그 나이대에서는 나름 뛰어나 보이지만...."

미겔도 조금은 실망한 눈치였다. 걱정했는데 다들 눈치를 못 채는 것 같았다.

"그런데 혹시 다른 곳에서 검술을 배우셨습니까? 검이 지나가는 길이 깔끔하군요."

하지만, 손에 익은 검 솜씨는 들키고 말았다.

한 달 동안 받은 훈련은 되살아나서도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각성일에 받은 상속 능력을 알아보는 시간이었다. 미겔 기사는 검술에 대한 것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저는 기사단장님께 보고할 테니 돌아가서 쉬십시오."

말을 마치고 미겔은 몸을 돌렸다.

기사단장뿐만 아니라 공작도 보이지 않았고, 미겔도 실망한 표정이었으니 이번에는 공작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암살의 위협에서도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플로라가 다가오려는 것을 멈춰 세우고 나는 검을 좀 더 휘둘렀다.

내려치기와 휘두르기.

최선을 다해 십여 차례 검을 휘두르자, 힘이 사지로 뻗어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육체가 강화되고 성장하는 느낌. 바로 레벨업이었다.

지금 내 몸속을 돌아다니는 힘. 얼마 전 복면인에게 죽기 직전에 느꼈던 바로 그 힘이었다.

나는 그 힘을 뽑아 검에 밀어 넣었다.

우우웅.

검에 무언가 보이지 않는 막이 씌워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팟.

바닥에 선을 긋자, 모래 먼지와 함께 깊게 금이 그어졌다.

검을 휘두른 범위보다 더 길게 이어진 금. 바로 검에 둘린 막이 해낸 것이다.

"이게 마나인가...."

나는 목검을 살펴보았다.

마나가 맞나? 분명 내 상속 능력은 마나를 사용하지 않는 능력이었는데....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마나뿐이었다.

도대체 내 상속 능력은 무슨 비밀을 가지고 있는 거지?

뇌리에서 전 회차에 보았던 공작의 눈이 떠올랐다.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눈길이었다.

* * *

미겔 기사의 실망한 표정대로, 나는 공작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기사단장은 물론이고, 미겔 기사도 찾아오지 않았고 과도한 훈련도 없었다.

평범한 6살짜리 아이의 생활로 돌아간 것이다.

뭐, 그동안 천재로 소문난 덕분에 평범한 어린이로 보기에는 애매했었지만.

일주일에 두 번 서기관들에게 수업을 받고, 나머지 시간은 거대한 서재에서 책을 보며 지내는 생활. 오랜만에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나는 최대한 조용히 있었다. 테스트 이후 검술 훈련도 받지 않았고, 죽을 때 느꼈던 마나를 연습하지도 않았다.

훈련을 받았던 기억 덕분인지 신기하게도 무척이나 좀이 쑤셨지만, 꾹 참고 서재와 내 방만 오가며 서기관에게 받는 수업에만 참가했다.

그렇게 숨을 죽이고 시간을 보내자, 내 각성으로 놀랐던 사람들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첫째 형은 전처럼 나를 무시했고, 둘째 도련님은 슬슬 날 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복도에서 마주친 누나는.

"괜찮아? 어디 아픈 건 아니지?"

귀여운 표정을 하고는 날 걱정해 주었다.

7살짜리 꼬마 숙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걱정해 주는 모습은 전생에 텔레비전 광고에서나 볼 법한 모습이었다.

"왜요? 제가 아프대요?"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막 이야기했어."

"엘레나 님!"

그녀의 말에 같이 따라왔던 하녀가 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 실수했다. 이런 거 말하면 안 되는 거지? 혼나겠네."

귀족 가문의 딸 역시 지켜야 할 규칙이 많았다. 물론 나 같은 서자가 아니라서 무시당하는 일은 없었지만.

"몸이 아픈 게 아니야? 그럼 마음이 아픈 건가?"

그녀는 한 걸음 다가와 내 머리에 손을 올렸다.

"마음이 아픈 건 내가 치료해 줄게."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기도 전에 엘레나의 손이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상속 능력이 발휘된 것이다.

"빨리 나아라. 아프지 마라. 무서운 귀신도 떠나가고, 예쁜 마음만 가득해져라!"

뭔가 전생의 굿에서나 들을 법한 말과 함께 머릿속으로 따사로운 기운이 스며들어 왔다.

신관들의 성법과 다른 그녀의 상속 능력은 '큐어'였다.

감정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멘탈이 무너진 사람, 적에게 세뇌를 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는 능력. 그녀의 어머니 쪽 가문에서 물려받은 능력이었다.

아직 세뇌당한 것을 해결해 줄 능력까지는 안 되지만, 마음이 풀어지고 가슴을 따스하게 해 주기에는 충분했다.

다른 형제들과 달리 엘레나와의 사이가 나쁘지 않은 것은 그녀의 착한 마음 덕이기도 했지만, 그녀가 받은 상속 능력의 비중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제 괜찮지?"

"...네."

기껏 능력을 써 주었는데 그 전에도 멀쩡했었다고 말하기에는 어려웠다.

"응. 잘됐다. 맞아. 나도 능력을 써 주었으니까 알렉스도 능력을 보여 줘. 어머니도 보고 싶다고 하시니까 빨리 놀러 와."

당장이라도 같이 가자는 듯이 말했지만, 지금 당장은 무리였다.

"늦었습니다. 선생님이 기다리십니다."

"힝. 오늘은 빠지면 안 돼? 춤 연습 힘들단 말이야."

"안 됩니다."

이제 7살인데, 벌써 춤 연습이라니. '큐어'라는 좋은 능력을 지닌 공작가 딸의 몸값을 올리기 위한 준비일까.

잠깐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오늘은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오늘은 각성일로부터 한 달째 되는 날이었다. 저번 삶에서 복면인의 손에 죽었던 날.

이제 곧 내가 죽었던 시간이 도래할 터였다.

나는 방 안에 앉아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르는 것을 기다렸다.

위기가 지나가 [자동 저장]이 되었다는 문구.

하지만, 오후가 지나고 해가 질 때까지 눈앞에는 아무런 문구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계속 기다렸다. 밤늦게까지, 그리고 다음 날에도.

하지만, 메시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위기가 안 지나간 거겠지?'

역시 암살자가 나를 죽일 수 없게 되지 않는 한, 메시지는 안 뜨는 모양이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기껏 몸을 바닥까지 숙이고 있었는데, 효과가 별로였다.

그렇게 한숨을 내쉬고 있으니, 바로 앞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렉스, 왜 그러니?"

정신을 차리니 아름다운 귀부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리아 데 그레시아. 공작의 둘째 부인. 공식적으로 내 작은어머니였다. 물론, 어머니라고 부를 일은 없겠지만.

"알렉스, 정말 이상해요. 지금도 어른처럼 한숨을 내쉬잖아요."

마리아 옆에 앉아 있던 엘레나가 이때다 하고 내 흉을 봤다.

좀 더 큰 여성이 그랬다면 화가 났을지도 모르지만, 아직 발이 땅에 닿지도 않는 어린 소녀가 의자에 앉아서 하는 말에는 그저 미소만 지어질 뿐이었다.

"저거 봐요. 웃는 것도 이상해요."

음. 웃는 연기가 실패했군.

공작부인은 뾰로통하게 말하는 딸과 난감해하는 나를 보며 작게 웃을 뿐이었다.

나는 어제 엘레나가 일방적으로 정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공작의 둘째 부인과 만나는 중이었다.

장소는 공작부인의 개인 응접실. 그녀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수수하면서도 아름다운 곳이었다.

마리아는 지금처럼 가끔 엘레나를 통해 나를 초대했다.

앞에 간식을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평범한 다과회였지만, 그녀와 어린 누나의 다정한 행동 덕분에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뭐, 공작부인의 입장에서는 그저 어린아이들의 재롱을 보고 싶은 마음일 테지만, 나를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는 첫째 공작부인에 비하면 천사나 다름없었다.

흠. 그러고 보니 이것도 상속 능력 덕분이려나. 그런데 엘레나의 능력은 직접 발동해야 하는 액티브형 능력일 텐데.

뭐, 상속 능력이든 성격 덕분이든 나쁜 것은 없었다.

위기가 사라지지 않아 머릿속이 복잡한 지금, 이렇게 아늑한 분위기에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공작부인들의 능력은 뭘까?'

누나도, 작은 꼬맹이 형도 각각 자기 어머니 일가의 능력을 상속했는데. 공작부인들의 능력은 딱히 알려진 바가 없었다.

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결국, 위기를 피해 가는 것에 실패했으니 이제는 날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해야 했다.

그날 저녁.

나는 다시 검을 들었다.

제10화

제10편 다른 길을 걸어 보았습니다 (2)

"훈련을 받고 싶습니다!"

6살짜리 꼬맹이가 갑자기 나타나 이런 소리를 하면 기사는 어떻게 반응할까.

그것도 자신이 소속된 공작 가문의 서자가.

그 결과가 눈앞에 서 있었다. 미겔 기사는 난감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도와 달라는 표정이었지만, 주변에 있던 기사들은 모두 나와 기사 미겔을 외면했다.

어리벙벙한 미겔의 모습을 보며 난 속으로 웃었다. 역시 미겔은 다른 기사와 다르게 순진했다.

"나이도 아직 어리시고, 단장님이나 다른 사람의 허락도 받아야 하고...."

그는 우물쭈물 대답했지만, 이쪽은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

"미리 기사단장님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내 말에 미겔은 한층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순진하고 착한 기사였지만, 주위 상황을 모르지는 않았다.

나는 저번 삶에서처럼 공작의 기대를 받고 있는 아들이 아니라 관심이 끊어진 서자일 뿐이었다.

그가 내 훈련을 담당하게 되면 기사로서의 그의 장래는 어느 정도 불투명해질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못 본 척하는 다른 기사들에게는 부탁의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휴, 단장님께 허락을 받았다면 어쩔 수 없죠."

사실 기사단장이 허락한 내용은 담당할 기사의 허락을 받아야만 훈련을 하게 해 주겠다는 조건부 허락이었지만.

이런 이야기는 당사자에게 해 줄 필요가 없겠지.

"나이가 너무 어리신데.... 그래도 상속 능력이 있으시니 종자들이 받는 기초 훈련부터 시작하죠."

나는 묵묵히 훈련을 받았다.

힘든 달리기와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검 휘두르기.

전에 했던 것이었지만, 힘든 것은 여전했다.

하지만, 충분히 이겨 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만큼 능히 견뎌 낼 수 있는 고통이었다.

실력이 쑥쑥 성장했다.

처음에는 내 훈련을 외면하던 사람들이 점차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평범한 인간 이상의 성장을 보였던 저번의 삶과 달리, 지금은 성실하고 뛰어난 자질을 지닌 기사 후보생 정도로 보일 뿐이었다.

"혹시 기사가 되실 생각은 없습니까? 이대로 계속하시면 정말 뛰어난 기사가 되실 것 같은데."

미겔도 빠르게 성장하는 내 모습에 기뻐했다.

하지만, 나는 내 모든 모습을 그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밖에서의 훈련은 하루에 하는 훈련의 반도 되지 않았다.

방에 돌아온 뒤에도 계속 훈련했다.

방도 크고 전생에 배웠던 실내 운동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기에 근육을 혹사할 정도로 충분히 훈련을 이어 갈 수 있었다.

헉. 헉.

그렇게 방 안에서 땀범벅이 되도록 훈련을 마친 뒤.

"자, 그럼 다음 단계로 가 볼까."

문 옆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졸고 있던 플로라를 불렀다.

"플로라!"

"네?"

갑작스러운 부름에 플로라는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내가 불렀다는 것을 알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운동을 끝내신 건가요? 너무 심하게 하지 마세요. 아직 어리시니까요."

존 게 민망했던지,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걱정스러운 한마디를 던졌다.

하지만, 나는 의자를 빤히 쳐다봤고, 그녀는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입을 뻐끔거렸다.

장난은 여기까지. 나는 용건을 꺼냈다.

"아무래도 이 방에서 자기는 어렵겠어. 오늘은 손님방에서 자야 할 것 같아."

내 말에 플로라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바닥 곳곳에 물기가 흥건했고, 훈련 덕분에 물건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하아, 오늘은 꽤 어지럽히셨네요. 알겠습니다."

다른 때보다 훨씬 어질러진 모습에 그녀는 잘 곳을 준비하러 방을 나섰다.

다행히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오늘은 전보다 훨씬 방이 어질러졌다는 것과, 그렇게 방이 어질러졌는데 졸 수 있었다는 것을.

그날부터 나는 훈련을 핑계로 자는 방을 계속 옮겼다.

저택에 있는 손님방들과 빈방으로 계속 옮겨 다녔고, 플로라와 하녀들은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불만이 쌓여 갔다.

"훈련한다고 몸이 안 좋은 거니? 그렇게 이 방 저 방 옮겨 다닐 거면 엄마 방에서 같이 자렴."

다과 시간에 어머니도 걱정해 주셨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와 같이 자다니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계속 자는 곳을 바꾸자 저택에 소문이 퍼졌다. 각성한 서자가 밤마다 이상한 행동을 한다는 소문이었다.

각성의 여파로 정신이 이상해졌다. 몽유병이 생겼다. 밤마다 오줌을 싸는 버릇 때문이라는 이야기까지.

더구나 자는 곳을 알려 주는 하녀도 매일 달라진다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다시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밤.

비어 있던 저택의 손님방 한 곳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밖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달도, 별도 보이지 않았고, 방 안도 등불이 꺼져 무척이나 깜깜했다.

끼이익.

창이 작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복면을 쓴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두운 방 안이었지만, 그는 방 안의 모습이 잘 보이는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본 복면인은 발소리도 내지 않고 침대를 향해 나아갔다.

이불이 덮여 있는 침대는 가운데가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그는 튀어나온 이불을 노려보다가 갑자기 이불을 젖혔다.

척.

이불이 젖혀진 침대 위에는 베개와 둘둘 말린 다른 이불이 놓여 있었다.

그는 지그시 이불을 노려보다가 피식 웃었다.

"머리가 좋군. 거기 숨어 있었나?"

그는 허리에서 검을 뽑아 둘둘 말린 이불 옆에 꽂았다.

푹!

그 순간.

"윽!"

낮은 비명과 함께 침대 밑에서 작은 인영이 튀어나왔다.

어린아이. 바로 침대 밑에 숨어 있던 나였다.

다리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힐끗 보니 입고 있던 잠옷 바지는 찢어져 있었고, 다리에 구멍이 뚫려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걸 피했어? 대단한데?"

피가 묻은 검을 침대에서 뽑아 들고, 복면인이 나를 바라보았다.

"숨도 멈췄는데.... 어떻게 알았지?"

"숨을 멈췄다고 기척이 숨겨질까."

피식 웃는 모습이 복면 위로도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웃음은 곧바로 사라졌다.

"조금 전 행동이나 고통을 참는 것을 보니 겉보기처럼 애 취급을 하면 안 되겠어."

'아니, 애 취급을 받아도 되는데요.'

나는 등 뒤로 숨긴 검을 꼭 쥐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보다 궁금한 게 있는데."

그는 다리에 피를 흘리는 내 모습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밤마다 방을 바꾸는 것도 그렇고, 침대 밑에 숨어 잠을 자는 것까지.... 어떻게 내가 온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거지?"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무척이나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나이에 맞게 행동할 상황이 아니었다. 고통 때문에 그런 걸 신경 쓰기도 힘들었다.

암살자가 오리라는 것은 '자동 저장 시점' 문구가 뜨지 않는 것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훈련은 기사단과 같이 연무장에서 받았으니, 저번 삶처럼 연무장에서 습격을 받을 리도 없었다.

낮 동안은 공작 저택 안에서 습격을 받을 리도 없을 테니, 내가 밖으로 나가지 않는 한 암살자가 밤에 내게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밤에 찾아오는 암살자를 피하려고 전생에 TV에서 보았던 것처럼 열심히 방을 옮겨 다녔는데, 암살자는 결국 찾아왔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암살자에게 해 줄 필요는 없었다.

"그럼, 누구 지시로 날 죽이려는지 묻는다면 대답할 거야?"

내 반문에 암살자의 눈이 휘어졌다.

"재미있는 아이로군. 시간이 좀 있었으면 같이 놀아도 좋았을 텐데."

그 순간, 온몸이 딱딱하게 묶이는 느낌이 들었다. 손가락 하나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전에 죽었을 때 느꼈던 바로 그 느낌이었다.

그때는 죽기 직전 운이 좋게도 풀려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나는 고통을 참으며 몸속에 숨겨진 힘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죽기 전에 느꼈던 힘. 분명 각성 능력에는 없었던 마나라는 힘.

두 달의 시간 동안, 난 육체의 힘을 늘리는 것만큼 이 마나라는 힘을 일깨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아직 어린 만큼 짧은 시간에 대단한 성취를 이룰 순 없었지만, 원하는 수준의 능력은 일깨울 수 있었다.

쩌쩍.

첫 번째로는 몸을 감싼 암살자의 힘을 깨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그걸 깨?"

암살자의 눈이 커지는 순간, 난 뒤로 숨긴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휘이익.

암살자가 번개같이 달려왔고, 나는 손에 들린 검을 내던졌다.

정면이 아닌, 창문 쪽으로.

쨍그랑!

창문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검이 창문 밖으로 쏘아져 나갔다.

쐐애액!

마나가 실린 검은 아이가 던진 것 같지 않게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밤하늘을 갈랐다.

그와 동시에 어느새 다가온 암살자의 검이 내 가슴을 찔렀다.

까아앙!

가슴에서 불꽃이 튀고, 난 뒤로 튕겨 나갔다.

"막았어?"

암살자는 당황한 얼굴로 자신의 검을 쳐다보았다. 검이 깨져 반만 남아 있었다.

쿨럭.

벽에 부딪힌 난 입에서 피를 쏟았다.

제길. 영화처럼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영화에서는 가슴에 몰래 숨긴 쟁반이 적의 총알도 막아 내던데.

잠옷 속에 보호구를 입고 철판까지 안에다 넣었는데, 이런 치명상에 가까운 상처라니.

어린아이의 몸이라지만, 그동안의 훈련이 무색했다. 더구나, 암살자는 마나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반만 남은 암살자의 검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나였다. 보통 검으로 이렇게 되었는데, 저걸 막기는 무리일 듯싶었다.

"그냥 놔두면 안 될까. 어차피 죽을 것 같은데."

난 입에서 피를 쏟으며 그에게 중얼거렸다.

"너, 6살 맞냐?"

그는 황당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다가오는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확인 사살이다."

젠장, 성실하기도 하셔라.

농담이 아니었다. 신관도 치료하기 힘든 상처였다. 검에 뚫리는 것은 막았지만, 어린아이의 몸속은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빨리 도망쳐야 할 텐데...."

부서진 창과 쏘아진 검 덕분에 밖은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적이다!"

"당장 수색해!"

저택의 방들은 하나둘 불이 켜지기 시작했고, 경비를 서던 병사와 기사들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도망칠 시간은 충분해."

암살자는 여유로웠다. 하지만, 나도 그를 비웃어 줄 수 있었다.

"과연 그럴까."

내가 왜 손님방을 고집했을까.

바로 공작의 서재와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근래 업무가 늘어나 서재에서 밤을 새우는 공작이니만큼, 이런 소란을 눈치 못 챘을 리가 없었다.

콰아아아앙!

멀리서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파파팍!

그리고 누군가 복도를 질주했다. 소리는 순식간에 문 앞까지 다가왔다.

콰앙!

그리고 문이 터져 나갔다.

"젠장!"

암살자는 반만 남은 검을 내던진 뒤, 창문을 향해 재빨리 몸을 던졌다.

그와 동시에 공작이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빠르게 방 안을 살펴보았다. 그는 내가 벽에 기댄 모습을 보며 몸을 움찔했다.

그는 내 쪽으로 한 발 다가왔지만, 내 모습을 보고 발을 멈추었다.

피바다 속에 벽에 기대어 앉은 어린 아들. 아들의 왼쪽 가슴은 움푹 들어가 있었고, 오른쪽 가슴에는 검이 박혀 있었다.

아들은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작의 얼굴은 항상 보았던, 표정 없는 얼굴이 아니었다.

회한, 안쓰러움. 안타까움. 어두움. 갈등.

여러 감정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이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더니, 그는 결국 고개를 돌렸다.

"암살자다! 알렉스가 당했다!"

엄청나게 큰 고함을 지른 그는 다시 한번 나를 쳐다보고, 창밖으로 뛰쳐나갔다.

그가 창밖을 나서자, 나는 다시 한번 피를 토했다.

"쿨럭, 아무리 그래도 아들인데 살릴 수 없을 것 같으니까 그냥 가는 건가?"

마지막에 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더라도 앞으로 그를 용서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까악! 공자님!"

뒤이어 잠옷만 걸친 플로라가 뛰어들어 왔다.

그녀는 나를 보며 비명을 질렀고.

"신관! 마님! 아니, 어떻게."

나는 허둥지둥하는 그녀를 불렀다. 의사를 불러도 신관을 불러도 나을 상처가 아니었다. 숨이 넘어가기 전에 그녀에게 물어볼 것이 있었다.

"내가 여기서 잔다는 것을 누, 누구한테 말했지?"

방을 계속 옮긴 덕분에 어린 시절처럼 다시 숙직 하녀가 옆방에서 자게 되었다.

나는 자는 곳을 숙직 하녀에게만 말해 두었고, 내가 그날 자는 곳은 숙직 하녀만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하면 암살자가 찾아오게 될 때 누가 발설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 담당은 플로라였다.

설마 그녀가?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저번에 죽었을 때 나는 그녀가 검에 찔리는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만약, 저번 삶에 플로라가 검에 찔려 죽지 않았다면 지금 그녀를 의심했을지도 몰랐다.

내 질문에 그녀는 마구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말하지 말아요. 나을 수 있어요."

엉뚱한 소리를 하는 그녀에게 나는 고함을 질렀다.

"당장 말해!"

핼쑥한 표정으로 그녀는 떠듬떠듬 대답했다.

"아, 저, 엘레나 님이 여쭤봐서...."

말을 하다 말고 그녀는 하얗게 질려 버렸다.

"설... 설마, 말도 안 돼."

젠장, 누나라고?

나도 믿을 수 없었다.

시야가 점점 어두워졌다.

플로라의 고함이 점점 작아졌고, 마지막 순간.

툭.

복면인의 잘린 머리가 내 앞에 던져졌다.

복면인의 잘린 머리 뒤로 공작이 보였다.

아쉽게도 무슨 표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시야가 깜깜해졌다.

[사망하셨습니다. 자동 저장 시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 * *

눈을 뜨니 무표정한 공작의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 번째 맞이하는 각성일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여러 얼굴들이 내 눈앞을 지나갔고, 나의 누나.

엘레나가 보였다.

누이한테 말했다고?

난 그녀 옆에 서 있는 여성을 바라보았다.

둘째 공작부인.

마리아 데 그레시아가 미소를 띤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11화

제11편 범인을 찾았습니다 (1)

각성식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공작이 각성을 선언하자, 사람들이 놀라워했고 어머니는 기뻐했다.

방에 돌아와서는 전처럼 테스트를 받으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를 들은 뒤, 나는 방을 나섰다.

테스트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죽기 전에 알아낸 사실을 확인해야 했다.

먼저 만나 볼 사람은 누이 엘레나 공녀였다.

아니, 그 전에 다시 한번 확인해야 했다.

나는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플로라에게 물었다.

"요즘도 엘레나 누나하고 자주 만나?"

"그럼요. 다른 공자님하고 다르게 아가씨는 계속 도련님을 신경 쓰신답니다. 정말 착한 분이에요."

그녀의 말에 입이 쓰게 느껴졌다.

"그래? 주로 어떤 걸 묻는데?"

"뭐, 잘 지내시는지, 요즘 뭐 하시는지, 힘들지 않은지 그런 걸 물으시죠. 각성식 뒤에도 어떤 능력을 얻으셨는지 물어보셨어요."

그냥 듣기에는 사랑하는 동생에 대한 누나의 관심 정도로 보였다. 전 같았으면 그런 그녀의 관심에 고마워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의심의 눈으로 보게 된 지금은 모두 다르게 들려왔다.

"그런데 나에 대해서 너무 쉽게 떠벌리는 거 아냐?"

내 말에 조금 감정이 실린 모양이었다. 미소를 짓던 플로라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게.... 아.... 잘못했습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내가 아기였을 때의 일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각성일 전까지 몇 년간 평온하게 지냈지만, 그전에는 몇 번이나 목숨의 위협을 받았었다.

물론 몇 번 죽기도 했지만, 그것은 나만 아는 일이었다.

그동안 너무 풀어 준 것 같았다. 생각을 바꿔야 할 것 같았다.

내 편으로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저 주위의 사랑을 받는 꼬맹이가 될 뿐이었다.

나는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며 걸음을 옮겼고, 플로라는 풀이 죽은 얼굴로 앞장섰다.

"어서 와!"

귀여운 응접실. 어린 소녀가 환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공작의 딸에 걸맞은 고급스러우면서도 귀여운 응접실이었다.

"알렉스가 내 응접실로 온 건 처음이지?"

미리 이야기해 놓은 덕분에 응접실 중앙의 탁자에는 맛있어 보이는 다과가 놓여 있었다.

나는 누나의 손에 이끌려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전속 하녀가 차를 따르고, 차를 따르는 와중에도 엘레나는 이리저리 손짓을 하면서 말을 이어 갔다.

"...내가 그때 두근두근하며 알렉스하고 아빠를 보고 있었잖아. 그런데 아빠가 각성한 게 맞다고 말씀하시는 순간, 정말 기뻤다니까!"

그녀의 얼굴에는 지금도 기쁨이 가득했다.

이런 착한 아이가 날 죽이기 위해 정보를 빼냈다고?

거기다 아직 어린아이였다. 그렇게 머리가 뛰어나지도 않은.

하지만, 다른 용의자는 없었다.

그 뒤로 평범한 잡담이 이어졌다. 나는 대충 대답하며 질문을 던질 기회를 엿보았다.

기회는 금방 찾아왔다.

"...아! 맞다. 그래서 어떤 능력을 각성한 거야? 벌써 확인한 거야? 아니면 따로 테스트 같은 거 받는 거야?"

드디어 질문이 들어왔다. 그것도 평범하지 않은 질문이.

"와, 각성에 대해 잘 아시네요?"

순진한 얼굴로 물으니, 엘레나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아니, 그게...."

우물쭈물하던 그녀가 혀를 날름 내밀었다.

그녀는 창피한지 몸을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잘 몰라. 엄마가 알려 줬어."

나도 그녀를 향해 몸을 숙였다. 하녀들이 듣지 않는 편이 좋으니 나도 말소리를 줄였다.

"공작부인께서요?"

"응. 알렉스가 각성한 걸 보고 많이 알려 주셨어.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각성한 능력도 물어보라고 하셨어."

목 뒤가 뻣뻣해졌다. 나는 굳어진 내 목소리를 들키지 않게 노력하며 질문을 이어 갔다.

"그럼 그동안 플로라에게 여러 가지 물어본 게 누나의 생각이 아닌 거예요?"

내 말에 엘레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냐. 엄마가 알아보라고 하긴 했지만, 나도 도와줄 생각에 그런 거야!"

나는 붉어진 얼굴로 열변을 토하는 누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 어디에도 거짓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희대의 사기꾼이거나 나처럼 환생한 것이 아니라면 내 앞에 있는 어린 소녀는 단지 이용당했을 뿐이었다.

그녀의 어머니에게.

"그동안 보살펴 줘서 고마워요."

나는 굳어진 표정을 숨긴 채, 최대한 마음을 담아 소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아니, 고맙다는 말은 필요 없어. 그냥 이렇게 친하게만 지내면.... 헤헤헤."

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말을 이었다.

"몰랐으면 모를까. 알았는데 그냥 넘어가긴 그러네요. 공작부인께도 감사드려야겠어요."

"정말, 알렉스는 오라버니들보다 말투가 더 딱딱하다니까."

그렇게 중얼거린 엘레나가 입을 열었다.

"내가 물어볼까? 알렉스라면 엄마는 언제나 환영할 거야."

"제가 따로 약속을 잡을게요. 아! 맞다. 그때 놀라게 해 드리고 싶어요. 제가 알아차렸다는 걸 비밀로 해 주세요."

"응! 그거 재밌겠다. 나도 같이 보면 좋을 텐데."

"그건 안 돼요. 저도 테스트가 있고, 누나도 바쁘잖아요. 세 명이 만나는 건 따로 시간을 낼게요."

엘레나는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잡담이 좀 더 이어진 뒤, 나는 그녀의 방을 나섰다.

무언가 알아차린 것일까? 플로라는 조금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나는 테스트를 받게 되었다.

테스트를 받는 곳은 처음 테스트를 받았을 때와 같은, 저택 뒤에 있는 공작 일가의 연무장이었다.

"헉. 헉. 헉. 테스트는 이제 끝난 건가요?"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였다.

내 앞에는 미겔과 기사단장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 말에 미겔이 급하게 대답했다.

"아.... 네. 네! 달리기로 지구력과 체력을 확인했고, 검을 다루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상속 능력이 정말 대단하네요."

전과 달리 이번 테스트에서는 최선을 다했다.

이를 악물고 달려서 달리는 동안 몇 번이나 '레벨업'을 했고, 검을 휘두를 때는 과거의 기억을 살려 최대한 깔끔한 휘두르기를 보여 주었다.

우연히 익힌 마나는 지금 밝힐 수 없어 숨겨 두었지만, 다른 것만으로도 두 사람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때문일까?

전과 달리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기사단장이 조금은 정중한 어조로 나에게 질문했다.

"검을 배운 적이 있습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헉, 헉. 그건 플로라한테 물어봐도 될 거예요. 이번에 검을 처음 잡은 겁니다."

검을 잡은 게 두 달이 훨씬 넘었지만, 그걸 기억하는 것은 나, 아니 내 기억뿐이었다.

내 말에 플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께 바로 보고 올리겠습니다. 흠, 제 생각에는 앞으로도 계속 훈련을 받으시게 될 것 같습니다."

전과 달리, 기사단장도 벌써 확신이 든 모양이었다.

"공자님의 교육을 맡길 좋은 기사를 찾아보겠습니다."

너무 열심히 한 덕분일까. 검을 너무 잘 휘두른 덕분일까. 기사단장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아니, 그건 좀.

지금 다른 기사에게 교육을 받는 건 곤란했다.

"아니, 앞에 계신 미겔 기사님에게 훈련을 받고 싶습니다!"

급하게 외친 말에 기사단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미겔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되나요?"

멋쩍어하는 미겔의 말에, 기사단장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공작님께 그렇게 보고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놓칠 수 없었다.

이 공작가에 저런 호구 같은 기사가 또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기에.

훈련이 끝난 다음 날.

기사단장의 말처럼 훈련이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훈련은 내일부터 시작이었고, 오늘은 둘째 공작부인.

마리아 데 그레시아 공작부인과 만나야 했다.

어머니께 문안 인사를 드린 후, 나는 플로라와 함께 마리아 공작부인의 방으로 향했다.

나는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마음을 다잡았다. 벌써 세 번째 반복이었다.

죽음의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똑같은 삶이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것 또한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었다.

이번에는 결판을 지어야 했다.

하지만, 굳은 마음과 달리 저택을 가로질러 도착한 공작부인의 응접실은 무척이나 차분하고 아름다웠다.

"알렉스가 왔네. 어서 와요."

응접실의 가운데 소파에 공작부인이 앉아 있었다.

평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띤 공작부인을 보자, 그동안의 확신이 조금 허물어져 버렸다.

짧은 삶이었지만, 언제나 내게 미소를 보내 주던 그녀였다.

어머니를 제외하고, 공작 일가 중 내가 고마워하는 단 한 명의 어른.

정신 차려!

혼란스러워지는 마음을 다시 한번 다잡고 고개를 숙였다.

"공작부인께 인사드립니다."

"마리아라고 부르라니까. 엄마라고 해도 돼."

장난스럽게 말하는 그녀의 음성이 나를 포근하게 감싸 주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그녀가 앉은 소파 반대편 의자에 앉았다.

언제나처럼 눈앞 식탁에는 다과가 놓여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플로라와 다른 하녀들은 응접실을 빠져나갔고, 공작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친한 손님에게는 직접 차 대접 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다웠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밀담을 나누기 쉬워질 것 같은데?'

하녀가 모두 나갔으니 남은 사람은 공작부인과 나뿐이었다.

'아니, 설마 그렇게까지 하려고.'

너무 앞서간 생각에 속으로 고개를 저었고, 나는 입을 열었다.

"그동안 해 주신 게 너무 많은데 고맙다는 말씀을 제대로 못 드려서요. 비록 말뿐이지만 감사하다고 말씀드리려 왔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뭘 했다고."

그녀의 말에 나는 엘레나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엘레나 누나를 통해서 계속 살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동안 그렇게 살펴 주신 걸 몰랐는데, 알게 되었으니 감사 인사를 드려야죠."

"아!"

내 말에 공작부인은 놀란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놀란 얼굴은 금세 사라졌다. 대신 원래의 미소가 더욱더 환하게 돌아왔다.

"그걸 알았어? 괜히 서먹해질까 봐 엘레나한테 잘 숨기라고 했는데. 혹시 마음 상하거나 한 건 아니지?"

그녀가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나는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잘못 짚은 걸까? 뭔가 중간에 내가 모르는 게 있는 걸까?

그녀와 대화를 나눌수록 자꾸 헛갈리기만 했다.

아마도 공작부인의 저 분위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무리 봐도 모두를 사랑하고, 또 모두에게 사랑받는 공작부인의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그녀의 모습에서 날 죽이려는 음습한 책략가의 모습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망했군.

아무래도 착각한 것 같았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녀일 리가 없었다.

어머니도 그녀를 좋아했고, 하녀들도 그녀를 좋아했으며, 저택의 고용인들도, 첫째 공작부인의 아들들도, 나도 그녀를 좋아했다.

모두가 공작부인을 좋아했다.

우리의 공작님도....

어라?

공작도 좋아했었나?

분명 처음에는 너무 좋아해서 그녀의 가문이 자작에 불과한데도 공작이 결혼을 강행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떻지?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는데.

공작은 냉혈한 공작답게 부인들을 언제나 동등하게 대하는 걸까?

아니면 사랑이 식은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던 나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방 안에 흐르는 부드러운 분위기가 껄끄럽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눈앞에 보이는 공작부인의 미소가.

어딘가 어긋나 보였다.

허황된 생각에 죄스러운 마음이 더욱 커졌지만,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쿵.

몸 깊은 곳에서 기운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마나로 불리는 바로 그 기운이 갑자기 위로 치솟았다.

가슴을 지나 목을 거쳐, 눈을 감싸고, 머리로 밀려들었다.

다음 순간.

쩌어어엉!

머릿속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가 사라졌다.

"괜찮아? 어디 아픈 거니?"

걱정스러운 음성이 들려왔지만, 그 음성은 전과 다르게 들렸다. 전처럼 포근하지도 않고, 마치 연기하는 것처럼 들릴 뿐이었다.

고개를 들었다.

응접실은 전과 같았지만,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지금은 방 안을 감싸던 부드러운 공기가 사라졌다.

아름답지만 차가운 응접실.

그 응접실 중앙에서 딱딱한 미소를 띤 공작부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12화

제12편 범인을 찾았습니다 (2)

마리아 공작부인이 맞는 걸까?

아름다운 얼굴도 그대로였고, 미소도 전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전처럼 따스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모습이 마치... 억지로 만든 인형 같은 모습이었다.

"왜 그러니?"

나를 보던 그녀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졌다.

"왜 그런 표정으로 나를 보는 거니?"

이제 그녀의 얼굴에 더 이상 미소가 보이지 않았다.

내 얼굴도 마찬가지일 게 분명했다.

지금도 머리와 몸속에서 꿈틀거리는 힘과, 전과 달라 보이는 그녀의 모습.

그리고 다들 알지 못하던 그녀의 상속 능력.

나는 이제 어떻게 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물어볼 정도로 날 죽이려 한 범인이 누구인지 확신이 들었다.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날 죽이려는 거죠?"

그녀의 표정이 살짝 금이 갔다.

"무슨 소리니?"

"제가 태어난 뒤로 계속 저를 죽이려고 하셨잖아요. 지금도 마찬가지고."

공작부인의 표정이 계속 변했다.

불안과 의심, 고민과 깨달음.

마리아는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설마, 내 능력을 막아 낸 거니?"

역시 예상대로였다. 내가 그녀를 좋아했던 것도, 모든 이들이 그녀를 좋아한 것도 그녀의 상속 능력 때문이었다.

"역시 상속 능력이었나요? 엘레나 누나가 상태 이상 치료 쪽이었으니 이비사 자작가가 정신 계열 능력일 테고, 그렇다면 공작부인은 호감을 높이는 능력을 가진 건가요?"

마리아는 질린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더 이상 나를 어린아이로 보지 않았다.

"똑똑하다고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거라고는...."

작게 중얼거리던 그녀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똑똑하다고 내 능력을 막아 낼 리가 없어. 어떻게 막은 거지?"

나에게 물었지만, 대답을 원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설마 각성한 상속 능력이 그쪽이었나? 아닌데. 분명 신체 강화라고 했는데."

혼자 고민을 이어 가던 그녀는 결국 자기만의 결론을 낸 듯했다.

"너도 안드레 아들이란 거냐?"

공작의 아들이라. 역시 공작은 그녀의 능력에서 벗어나 있었던 건가.

"아냐. 브리비아의 아들들도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반쪽인 네가 어떻게...."

그녀의 말에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좋아하던 사람의 진실된 속마음을 듣는 것은 정신 건강에 좋지 않았다.

그녀의 혼잣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말을 멈춘 사이 내가 입을 열었다.

"공작님은 그 능력에서 벗어난 거군요. 처음에 사이가 좋았던 것도 그 능력 때문이었고...."

내 말을 끊고, 그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냐! 능력 때문이 아냐! 그이는 정말 날 사랑했었어! 아만다! X녀 같은 네놈의 어미 때문이야! 그년이 우리 둘 사이를 갈라놓은 거야!"

소리를 지르는 그녀의 눈에는 내 어머니에 대한 분노로 가득했다.

하지만, 듣는 나로서는 황당한 소리일 뿐이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 갈 곳 잃은 자신의 분노를 다른 사람에게 토해 내다니.

그 탓에 타깃이 된 나에게는 그녀의 말이 그저 멍멍이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게 거짓이었군요. 나와 어머니에게 친절하게 대한 것도,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것도."

"뭐, 날 좋아해 주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는 것은 습관이 되어 있었으니까. 날 좋아해 주는 것도 즐겁고, 너희 모자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내 앞에서 재롱을 부리는 걸 보는 것도 재미있었고."

비웃는 얼굴로 줄줄이 늘어놓던 그녀가 문득 표정을 바꾸었다.

"하아.... 너무 흥분했어. 어린애 앞에서 이성을 잃다니...."

그녀는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공기가 다시 일렁거리며 그녀의 미소가 따스하게 나를 감싸려 했지만, 뭔가 효과를 보기도 전에 딱딱한 미소로 돌아갔다.

"방금 있었던 일은 잊어버리렴. 잠깐 화가 나서 마음에 없던 말을 한 거란다."

자신의 능력이 먹히지 않게 된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일까. 그녀는 따뜻한 말 뒤에 바로 협박을 이어 갔다.

"어차피 서자인 네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괜히 분란을 일으키면 네 엄마한테 피해만 갈 거야."

그녀는 그것으로 일을 무마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난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러려고 이렇게 일을 벌인 게 아니었다.

지금도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메시지가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공작부인은 날 죽일 마음이 가득했다.

언제 암살자가 올지 알 수 없게 된다면 전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럴 수야 없지. 이번에는 내가 시기를 정할 생각이었다.

자, 슬슬 화를 북돋아 볼까.

"부인의 말씀처럼 아무도 신경 안 쓸 수도 있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전 몇 번이나 죽을 뻔했잖아요. 태어날 때부터요.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꽤 많을걸요?"

내 말에 그녀는 비웃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흥, 그걸 누가 기억한다고."

나는 손가락으로 내 머리를 가리켰다.

"제가 기억하고 있어요."

"말도 안 돼. 그걸 기억하고 있다고?"

그녀의 비웃는 표정은 내 이어진 말에 확 바뀌었다.

"기억하다 뿐이겠어요? 살기 위해 열심히 울고, 음식을 뱉어 냈죠."

마리아는 눈을 크게 뜬 채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괴물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걸 네가 알고 한 거라고? 젖도 안 뗀 아기가?"

그때의 고생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기 노릇은 정말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난 그녀를 향해 몸을 숙였다. 손을 입에 올리고, 비밀 이야기를 하듯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모르셨어요? 사람들이 저를 '천재'라고 부르잖아요."

내 비웃음이 잘 전해진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을 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테스트도 잘 치렀어요. 내일부터 저택 뒤에 있는 연무장에서 '혼자' 훈련을 받게 될 거예요."

내 말에 공작부인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 연무장이 어떤 연무장인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공작 일가만 사용할 수 있는 연무장.

그 연무장을 내 형제들을 제치고 나 혼자 사용한다는 것은 내가 공작에게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이만저만한 특혜가 아닌데?'

말을 멈추고 공작부인을 살피는 동안, 잠깐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쨌거나 꽉 쥔 그녀의 주먹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고,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내 말이 제대로 먹힌 것처럼 보였다.

슬슬 마지막 한 방을 날릴 때였다.

"내일부터 공작님이 '직접' 참관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공작님이 제 말을 들어 주실지는 내일 되면 알겠죠."

물론, 공작이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지난번 삶에서 공작이 찾아온 적이 있었으니 테스트에서 더 실력을 보여 준 지금은 더 빨리 올 가능성이 컸다.

아무튼 공작을 만난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빠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앞에 앉은 여성이 처음 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노와 혐오가 범벅이 된 얼굴.

그 얼굴에 조금씩 공포가 떠올랐다.

자, 이제 떠날 때였다.

"그럼, 오늘 다과는 즐거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와 하녀들이 귀엽다고 좋아하던 인사였지만, 내 앞의 여성은 내 인사에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나는 그녀를 남겨 두고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나는 복도를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자, 상처를 후벼 팠으니 이제 수습을 해야겠지.

이제 어떻게 할까.

미겔에게 갈까? 기사단장, 아니면 총집사에게?

아니, 돌아갈 이유가 없었다.

* * *

아이가 떠난 응접실.

마리아 공작부인은 혼자 방 안에 남아 있었다.

항상 온화한 분위기의 응접실과 그녀의 모습이 지금은 시간 속에 딱딱하게 굳어진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와 함께 굳어 있는 그녀의 표정이 살아났다.

꽃이 피듯 미소가 피어났고, 삭막하던 응접실에 봄 향기가 나는 듯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긋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들어와요."

끼익.

문이 열리고, 남자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의 말에 마리아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아이에게 지었던, 고용인들에게 지었던 미소와는 조금 다른 미소. 남자의 얼굴을 붉어지게 만드는 미소였다.

"네. 저번에 미루었던 일을 이제 해 주셔야겠어요."

"아, 그 서자 건이군요. 알겠습니다. 조금 이른 것 같지만, 날을 잡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아뇨. 날을 잡으면 너무 늦어요. 꼭 오늘 밤에 처리해 주세요."

남자는 그녀의 말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일을 이렇게 성급하게 처리하는 사람이 아니었었다.

"네? 너무 급하신 게 아닌지."

그의 말에 마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간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뇨. 돈이 얼마나 들어도, 무슨 요구를 해도 상관없어요. 제발! 오늘 밤 꼭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너무 성급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언제나처럼 그녀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바로 응접실을 빠져나갔고, 방은 다시 얼어붙은 그림이 되어갔다.

* * *

오후가 지나고, 창밖에는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자신의 숙소로 물러갈 시간이 한참 지난 시각. 플로라는 아직 내 방에서 나와 함께 있었다.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 무슨 일로 남으라고 하셨는지...."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에 아이 혼자 저택을 돌아다닐 수는 없잖아. 그래서 남으라고 한 거야."

내 말에 그녀는 더욱 불안한 얼굴이 되었다.

"해도 졌는데 대체 어디를 가시려고요?"

복도로 나서며 플로라의 물음에 대답했다.

"공작 집무실."

"...네?"

잠깐 멍해 있던 플로라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가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었지만, 플로라는 나를 집무실로 안내했다.

고용인들이 물러난 저택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중간에 경계를 서는 경비병이 우리 두 사람을 쳐다보기는 했지만, 말을 걸지는 않았다.

최대한 다른 사람들 모르게 공작을 만나려는 나에게는 지금의 상황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렇게 층계를 내려가 긴 복도를 거친 뒤, 공작의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집무실 앞. 총집사가 문을 지키고 있었다. 충성스러운 그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공작이 아직 집무실에 있다는 소리였다.

그는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공작님을 뵈러 왔습니다."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언제나처럼 그는 정중하게 물었다.

"약속을 잡으셨습니까?"

"아닙니다."

"아직 업무가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약속을 잡아 다음에 오시지요."

정중한 거절. 하지만, 나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기다리겠습니다."

총집사의 하얀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때, 문 안쪽에서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여보내게."

역시, 공작 정도의 실력이면 복도에서 나는 소리 정도는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나에게 화를 낼 수 없었던 총집사는 불쌍한 플로라를 엄하게 노려본 뒤에 문을 열어 주었다.

책과 서류들로 가득한 고풍스러운 집무실.

태어나서 처음 와 보는 집무실 중앙에 내 아버지, 안드레스 데 그레시아 공작이 앉아 있었다.

그는 갑자기 찾아온 서자가 달갑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나도 그의 부정을 원하지 않았다.

지금은 비즈니스의 시간이었다.

나는 삭막한 집무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쿵.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공작과 나만 남게 되었다.

제13화

제13편 결자해지(結者解之) (1)

사각사각.

공작은 책상에 앉아 계속해서 서류를 확인했다.

어린 아들이 처음으로 아버지의 집무실을 찾아왔는데도 그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버지의 정이 그리워 찾아온 아들이라면 이런 냉담한 아버지의 반응에 울거나 화를 내며 뛰쳐나갔겠지만, 나는 그런 이유로 온 것이 아니었다.

나는 조용히 기다렸다. 이런 밀고 당기기는 전생에 많이 겪어 봤기에 기다리는 것은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몇 분이 지났을까.

"무슨 일이냐."

드디어 공작이 입을 열었다. 눈을 들지도 않았고 펜도 내려놓지 않았지만, 이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듯했다.

"저를 죽이려는 자가 있습니다. 보호를 요청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딱.

서류 위를 움직이던 펜이 멈추었다.

공작이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공작의 눈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나이답지 않은 아이라고 들었는데, 그 말대로군."

그의 표정과 눈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죽기 전에 보았던 복잡한 감정이 드러난 표정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얼음 같은 차가움만이 그의 얼굴에 드러나 있을 뿐이었다.

"죽이려는 자라.... 그게 누구인지 네가 안다는 말이냐?"

"네."

내 대답에 공작의 차가운 표정이 살짝 금이 갔다.

"네 나이가 아무리 어려도 확실하지 않은 말로 남을 음해하면 그 책임이 결코 작지 않을 거다!"

공작의 묵직한 목소리가 집무실 안을 울렸다.

웅웅거리는 소리에 소름이 쫙 돋았다.

말의 내용과 말투만으로도 평범한 사람은 겁에 질리기 충분해 보였다.

하지만, 겁을 먹기에는 나는 그동안 너무 많이 죽었다.

"책임지라면 책임지겠습니다. 저를 죽이려는 당사자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그제야 공작은 펜을 내려놓았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무표정했던 얼굴이 지쳐 보이기 시작했다.

"직접 들었다라.... 믿기 어려운 소리를 하는군."

그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마치 과거의 한 자락을 더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는 세수하듯이 얼굴을 쓰다듬었다.

손을 떼자, 살짝 허물어졌던 얼굴이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몸을 앞으로 내밀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믿기는 어렵지만 그건 그렇다 치고, 왜 너를 보호해야 하지?"

어이가 없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모습을 보니 일종의 테스트 같긴 했지만, 그의 말을 들으니 별로 없던 정이 아예 먼지가 되어 사라질 지경이었다.

절로 대답이 딱딱하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까요."

"흠. 너도 각성했다 이거냐."

그는 대수로울 것 없다는 듯이 말했다.

"육체 최적화 능력이라면 꽤 관심이 가는 상속 능력이지만, 아직 그 능력인지도 확실하지 않아. 그 능력이 맞더라도 내 생각만큼 성장할지 어떨지 알 수도 없고."

처음 말과 달리 그래도 꽤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공작이 관심을 가지는 능력이고 잘하면 생각보다 훨씬 더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이라....

단서를 조금 더 얻은 건가.

공작이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그걸로는 인력을 낭비해야 할 이유로는 부족해."

공작이 다시 펜을 들었다.

완전히 관심을 잃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역시 관록이란 걸까. 갑이 저러니 진심이든 아니든 패를 다 깔 수밖에.

탁탁탁.

나는 집무실 한쪽에 서 있던 갑옷으로 다가갔다.

전시용으로 세워져 있는, 반짝이는 판금 갑옷이었다. 사람처럼 전시된 갑옷은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다.

스르릉.

나는 검을 뽑아 들었다.

다행히 검은 잘 뽑혀 나왔다.

하지만, 예상보다 무거웠다. 휘청이는 검을 억지로 들어 올리고 공작을 바라보았다.

공작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운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은 없었지만, 황당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나이가 어리지 않았다면 검을 든 순간, 공작이 달려와 내 목을 베었을지도 몰랐다.

전에도 말했지만, 이 세상은 꽤 무서운 곳이었다.

예의를 지킨다는 귀족이나 왕실에서도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일들이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뭐, 나를 죽이려는 사람이 명목상으로는 어머니이기도 하니까.... 그렇게 따지면 별반 다를 게 없긴 했다.

"몰래 검술이라도 배운 걸 보여 주려는 거냐? 테스트 내용은 전부 들었다."

허접하게 검을 휘두르면 바로 두들겨 맞고 내쫓길 분위기였다.

하지만, 난 다른 것을 보여 줄 생각이었다.

그가 모르는 것.

나는 몸속 깊숙한 곳에 숨겨진 힘을 일깨웠다.

움직여!

꿈틀.

작은 힘이 깊숙한 곳에서 솟아올랐다. 나는 솟아난 힘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머리와 눈으로 마나가 움직이는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방식대로 이번에는 손으로, 그리고 검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역시 어려웠다. 하지만, 느렸지만 마나는 내 말을 들어주었다.

팔을 통해 손으로, 그리고 손가락 끝으로.

마지막에는 검으로 흘러들어 갔다.

우우우우웅.

검이 떨리기 시작했다.

"으악!"

검이 마구 튀어 나가려고 했다. 필사적으로 검을 잡고 있었지만, 이래서야 검을 휘두르기는커녕 잡고 있는 것도 힘들었다.

철검이 목검보다 마나를 더 잘 받아들인다는 말만 믿었는데, 이런 문제가 있을 줄이야!

"됐다! 거기까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떨리는 검을 잡고 있는데 공작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억지로 밀어 넣던 마나를 멈추고, 검에 기댄 채 공작을 바라보았다.

공작이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나를 얻은 건가? 언제부터지?"

"테스트 뒤에 느꼈습니다."

"따로 훈련법을 배운 게 아니고?"

"네."

그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중얼거렸다.

"테스트 후라.... 그럼 상속 능력으로 얻었다는 건가?"

"모르겠습니다."

"아니, 너한테 한 말이 아니다."

생각을 더듬던 그는 어느 순간 얼굴을 찌푸렸다.

"설마, 마나를 얻고 만난 건가?"

만난 대상을 말하지 않았지만, 누구를 이야기하는지 바로 알아들었다.

"네. 마나를 움직이게 되자, 공작부인에 대한 호감이 사라졌습니다. 그 뒤에 대화를 나누다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앞뒤도 다르고 알게 된 방법도 조금 달랐지만, 그리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

내 말을 들은 공작은 조용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게 그렇게 쉽게 벗겨지는 거였나...."

공작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피곤하고 지친 중년 남자가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에 씌워져 있던 가면이 지금 완전히 벗겨져 있었다.

나는 계속 기다렸다.

시간이 지났다. 한참 동안 멍하니 있던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지만, 그 표정은 조금 전과는 달라 보였다.

"보호는 언제부터? 언제 죽이러 올 것 같았지?"

아버지가 아들에게 할 만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부하나 거래 상대에게 할 만한 말이었다.

전보다는 나아진 것일까?

그래도 다행이었다. 공작이 내 말을 받아들였다.

"당장 필요합니다. 오늘 밤에 올 가능성이 제일 큽니다."

나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직 마지막 요청이 남아 있었다. 제일 중요할지도 모르는 요청이었다.

"실력자가 필요합니다. 정기사 두 명 이상, 아니면 수석 기사급이 필요합니다."

기사단장이 와 주면 좋겠지만, 그가 나 같은 서자를 경호할 리가 없었다.

나는 긴장한 얼굴로 공작을 바라보았다.

내가 봐도 어이없는 요청이었다. 6살짜리 아이가 뭘 안다고 자신을 경호할 기사를 고르다니. 치기 어린 아이의 요청이라고 무시하기 딱 좋았다.

하지만, 그 정도가 아니면 미겔처럼 암살자에게 썰려 나갈 뿐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망했다.

"기사들을 이런 집안일에 쓸 수는 없지.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방으로 돌아가라."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집무실에서 쫓겨났다.

* * *

해가 떠오르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깊은 밤.

서자 알렉스의 방도 반쯤 어둠에 잠겨 있었다.

끽. 끼익.

달빛에 걸려 있던 창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창은 지루할 정도로 조금씩 열렸고, 잠시 뒤 열린 창으로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소리 없이 들어왔다.

창가에 내려선 그는 방 안을 훑어보았다.

탁자와 의자, 옷걸이와 선반, 그리고 침대.

침대를 본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급하게 벌인 일은 거절하는 게 맞는 거였어. 귀찮게 되어 버렸잖아."

그가 바라보는 침대에는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하지만, 침대에 앉아 있는 사람의 그림자는 어린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복면인은 빠르게 방을 다시 훑어보았다.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방 안의 가구들 안에도 어른이 숨어 있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복면인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쩝, 제대로 된 기사를 등에 달고 도망가기는 쉽지 않을 테고,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가. 기사 하나라니."

복면인은 검을 뽑았다. 검게 칠해진 검을 그는 옆으로 늘어뜨렸다.

그와 함께 방 안의 기세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흡.

침대 밑에 숨어 있던 나는 넘쳐나는 마나에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어, 거기 있었던 거야? 일을 마무리할 수 있겠네. 나도 악운이 꽤 좋잖아?"

복면인은 전과 달리 말이 많았다. 다른 사람인가? 목소리는 같은데....

마나를 움직이자,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침대 옆으로 살짝 고개를 내밀어 복면인을 바라보았다.

왜 말이 많아진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가득 맺혀 있었다.

침대에 앉아 있던 인영이 몸을 일으켰다.

파팍.

몸을 짓누르던 마나가 사라졌다. 아니, 다른 마나에 밀려나 버렸다.

"기사급 이상의 암살자라.... 확인해 봐야겠군."

인영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자, 은은한 달빛에 얼굴이 드러났다.

저택의 주인이자 영지의 주인인 공작의 얼굴이 달빛에 드러났다.

"제길! 악운이 좋은 게 아니었잖아! 일을 어떻게 한 거야?"

복면인은 고함을 지르며 창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공작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복면인이 창에 도착하기도 전에 공작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복면인이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복면인이 휘두르는 검은 스스로 발광하듯이 빛을 뿌렸지만.

콰직!

공작의 검과 닿자마자 마치 꾸겨지듯 접혀 버렸다.

복면인의 검과 달리 공작의 검은 아무런 빛을 내지 않았다. 하지만, 어두운 방 안에서도 검 주위 공기가 떨리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내 검을 막아 내다니 실력이 좋군. 이 정도 실력의 암살자라면 고문으로도 입을 열지 않겠지."

공작은 다시 검을 휘둘렀고, 복면인도 빠르게 다른 손을 휘둘렀다.

푹!

복면인의 손에서 단검이 쏘아졌다.

동시에, 복면인의 목이 잘려 나갔다.

복면인이 던진 단검은 침대를 거의 뚫을 뻔했다.

만약을 대비해서 미리 다른 곳으로 피해 있었지만, 복면인의 발악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공작은 내가 있는 곳을 힐긋 바라본 뒤에 입을 열었다.

"뒷정리하도록."

"알겠습니다."

공작의 말에 총집사가 문가에서 대답했다.

그가 언제 문을 열고 들어왔는지 알 수 없었다. 역시 총집사쯤 되면 숨기는 게 많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이를 엄마에게 보내도록."

암살자가 죽었으니 미끼 역할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

그래도 어머니에게 보내라고 하는 걸 보니, 쇳물이 흐르는 인간은 아닌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총집사가 나를 바라보았고, 나도 공작을 쳐다보았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일이 마무리되려면 공작의 확답을 받아야 했다.

공작이 검을 쥔 채로 잠시 서 있었다.

그는 다시 누워 있는 목 없는 시체를 보았다.

잠시 뒤 공작이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말고 아만다에게 가거라. 오늘 정리될 거다. 내일부터는 널 죽이려는 사람은 이 저택에 없을 거다."

피 묻은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공작은 방을 나섰다.

어디로 가는지 나도 총집사도 묻지 않았다.

갈 곳은 한 곳밖에 없었다.

제14화

제14편 결자해지(結者解之) (2)

밤사이 내 방에서 벌어진 활극은 조용히 묻혔다.

아는 사람은 나와 공작, 총집사와 어머니뿐이었다.

어머니도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했다. 공작이 암살자에게서 나를 구해 준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날 밤, 공작이 내 방을 나선 뒤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는데, 다음 날 저택에서 벌어진 일로 그 결과를 알게 되었다.

두 번째 공작부인, 마리아 공작부인이 급하게 자작가인 처가로 떠나게 된 것이다.

건강 문제 때문에 휴양차 가게 된 것이라고 했지만, 갑작스럽게 내려진 결정에 사람들 사이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하지만, 이 저택, 아니 영지에서 공작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크게 앓은 것같이 보이는 공작부인의 어두운 모습에 사람들은 가슴속 깊이 의문을 묻어 두었다.

공작은 집무실 창 앞에 서서 앞마당에 서 있는 마차를 쳐다보았다.

마차 주변에는 갑자기 길을 나서게 된 공작부인을 배웅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동안 공작부인이 저택의 모든 사람들에게 두루 사랑을 받아 온 만큼, 마차가 서 있는 곳에는 저택의 모든 사람들이 배웅 나와 있는 것 같았다.

고용인들은 물론이고, 첫째 부인과 그 아들들도 함께 나와 있었고, 첩인 아만다도 아들과 함께 멀찌감치 서서 그녀를 배웅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딸 엘레나는 그녀의 앞에 서서 계속 울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아는 정말 몸이 안 좋은지 그녀의 딸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달라진 그녀의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그녀를 배웅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집무실 창 쪽을 한 번 바라본 뒤, 사람들을 훑어보다가 뭔가에 놀란 것처럼 급하게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마차가 출발했다.

급하게 여행길에 오른 행렬이었지만, 공작부인의 이동인 만큼 제대로 준비되어 있었다.

화려한 마차 앞뒤로 경비병들이 마차를 호위했고, 기사가 앞에 서서 일행을 이끌었다.

마차가 화원 사이의 길을 지나 저택의 정문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마차는 점점 멀어져 갔다.

공작은 멀어지는 마차를 보며 입을 열었다.

"편지에 적어 놓았지만, 자작에게 다시 한번 경고를 하도록. 마리아는 앞으로 자작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엘레나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을 제대로 주지시켜."

"알겠습니다."

공작 뒤에서 총집사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런데 공녀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공작이 대답하기도 전에 밖에서 어린 소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공작님! 저 왔어요! 제발 들여보내 줘요!"

공작이 고개를 돌렸다.

"들여보내도록."

"알겠습니다."

총집사가 문을 열어 주었고, 눈물로 범벅이 된 엘레나가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왜 엄마가 나가는 거죠? 엄마는 어제도 안 아팠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나한테는 왜 아무도 말 안 해 줘요."

공작은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딸의 얼굴은 조금 전 저택을 떠난 마리아와 무척이나 비슷했다.

정신을 차리기 전 보았던 마리아의 모습과.

어제 보았던 마리아의 얼굴이 딸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그녀는 침실을 찾아온 공작을 보고 무척이나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오셨군요! 안 오실 줄 알았어요!"

정말 진심으로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그녀의 환한 얼굴을 보자, 공작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

그녀는 아직도 공작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위기는 달랐지만, 그녀의 미소는 처음 만났을 때와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이쪽으로 오세요. 이런 제가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았네요."

그녀는 그때와 다르지 않았지만, 공작이 그때와 달라져 있었다.

공작은 그녀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 마나로 그녀의 능력을 깨뜨렸을 때 느꼈던 감정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날, 그녀에 대한 사랑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상대방의 사랑은 소유욕이 범벅이 된 욕망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공작은 숨이 막혀 더 이상 그녀 옆에 있을 수 없었다.

그날 이후 공작은 그녀의 방을 찾지 않았다. 낮에 만날 때도 공적인 관계만 유지했고, 최대한 그녀를 멀리했다.

그는 마음을 닫고 가면을 뒤집어쓴 채로 공작의 삶을 이어 온 것이다.

다만, 공작은 그녀를 벌하지 않았다.

자신을 기만한 죄가 컸지만, 공작은 자신이 그녀를 더 이상 찾지 않은 것으로 그녀의 죄를 용서했다.

자신의 딸을 낳았기 때문에, 이미 아내로 들였기 때문에.

아니,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나약한 결정이 오늘과 같은 일을 만들어 버렸다.

"조금 전까지 알렉스 방에 있었다."

"네?"

공작의 말에 마리아의 미소가 깨져 나갔다.

그녀는 그제야 공작의 손에 든 칼을 보게 되었다.

검을 들고 있는 그의 손에도, 검을 집어넣은 칼집에도 점점이 핏물이 묻어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갔다.

"몇 년 전 알렉스가 독살 미수를 당했을 때, 일을 그냥 무마한 것이 내 마지막 용서였다."

공작의 말을 들은 마리아는 넋을 놓고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저택 내에 암살자를 들여 내 아이를 죽이려고 들다니, 내가, 이 그레시아 공작가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나?"

공작의 말이 끝나자, 벌컥 마리아가 소리를 질렀다.

"나를 안 돌아봐 주니까! 이렇게 사랑하는데 왜 날 멀리하는 거예요! 당신에게 사랑받기 위해 참고 또 참았어요. 화날 일도 참아 냈고,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웃어 줬어요. 모두가 나를 사랑해 주는데 왜 당신만이 나를 멀리하는 거죠?"

소리를 지르는 그녀의 모습은 능력이 발휘되지 않아도 처절하고 안쓰러워 보였다.

하지만, 공작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전부 아만다 때문이에요. 그 꼬맹이만 죽으면 아만다, 그년을 저택에서 쫓아낼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한 건가?"

공작의 말에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하지만, 흐르는 눈물 위로 차가운 공작의 말이 들려왔다.

"실수했군. 생각보다 훨씬 정신이 망가져 있었어."

그는 마리아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마리아가 놀라 고개를 들었지만, 공작의 눈은 차갑기만 했다.

"아니, 둘 다 망가져 버린 거겠지."

공작은 손에 마나를 주입했다.

우우웅.

머릿속으로 스며드는 힘에 마리아가 놀라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공작은 그녀의 머리를 쥐고 놓지 않았다.

"죽이지는 않으마. 하지만, 너는 이 집에 더는 있지 못할 것이다."

"이... 이건.... 어떻게...."

머릿속으로 밀려드는 마나가 그녀의 머리를 마구 헤집기 시작했다.

그녀의 상속 능력.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는 정신계 능력은 그녀의 머리 깊은 곳에 있었다.

공작의 마나는 그 깊은 곳에 있는 능력을 잘라내고 해체해 나갔다.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능력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었다. 이런 게 가능하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공작은, 아니 공작가의 능력은 마나 심법 중 하나일 터였다. 그가 다른 사람의 능력을 부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아.... 안 돼!"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공작의 손을 움켜잡았지만, 그녀가 기사 이상의 힘을 지닌 공작의 손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잠시 뒤, 공작은 그녀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마리아는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이제 그 능력으로 더 이상 남을 농락할 수 없겠지. 내일 친정으로 돌아가라.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조용히 지내는 거다."

그의 말에 마리아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만일 내일부터 죽을 때까지 무슨 다른 소리가 들리면 너는 물론이고 자작가 전체가 큰 화를 당할 거다. 엘레나는 따라가지 않는다. 네가 조용히 있는다면 엘레나는 마지막까지 공녀로 남게 될 것이고, 아니면...."

마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고통과 체념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옛날에 내가 사랑했던 당신이 아니군요. 지금 당신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네요."

그는 몸을 돌렸다.

마리아는 울음을 터트렸고, 공작은 문을 나서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날 변한 거지. 누구 때문에."

"흑, 흑, 흑. 엄마가 잘못한 게 있으면 용서해 주세요. 저도 잘못을 빌게요."

마리아의 울음이 딸의 울음으로 바뀌었다.

공작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가 회상하는 동안, 딸은 그에게 용서를 빌고 있었다.

공작은 딸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엄마의 비슷한 얼굴이었지만, 엘레나는 마리아와 달랐다.

그녀의 얼굴은 가식이 가득 찬 만들어진 얼굴이 아니었다. 엘레나는 아직 세상의 때에 물들지 않은 어린 소녀였다.

"엄마가 꼭 갈 수밖에 없다면 저도 따라갈게요. 제 능력으로 옆에서 치료해 드릴게요."

그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마리아는 버렸지만, 엘레나는 아직 공작가의 딸이었다.

"그렇군. 이 저택에서는 혼자 지내기 어렵겠군. 조금 이르지만, 너도 아카데미에 갈 준비를 해라."

"네?"

놀란 엘레나를 무시한 채로, 공작이 총집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마침 상속 능력도 정신 회복 쪽이니 수녀회 소속 아카데미에 다니는 게 좋겠군. 연락을 보내도록."

"알겠습니다."

총집사는 우는 딸을 데리고 집무실 밖으로 나갔고, 공작은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멀리 자신의 첩과 함께 걷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아기 때부터 풍파를 일으키는 아이였다.

신기한 일을 벌이는 아이. 천재로 이름이 높았지만, 천재와는 조금 다른 듯한 아이. 아이답지 않게 자신과 거래를 하는 아이.

그리고 특별한 상속 능력을 지닌 아이였다.

"자, 이렇게 나를 고생시켰으니 이제 네 쓸모를 스스로 증명해 봐라."

공작은 차가운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았고, 아이는 귀가 가려운지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긁어 댔다.

* * *

두 번째 공작부인이 저택을 나간 뒤,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먼저, 공녀 엘레나가 교육을 받기 위해 저택을 떠나게 되었다.

아직 아카데미를 가기에는 이른 나이였지만, 공작의 지시를 거역할 수는 없었다.

엘레나는 우울한 얼굴로 저택을 나섰고, 나와 엄마는 떠나는 엘레나를 위로해 주었다.

솔직히 엘레나에게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잠자코 죽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미안한 마음은 가슴 깊이 묻어 둘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로는 서자인 내가 어린 나이에 제대로 된 기사 훈련을 받게 되었다.

저택 뒤에 있는 공작 일가의 연무장에서 남들 모르게 받는 훈련이었지만, 사람들 사이에 금세 소문이 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수군거렸고, 나를 지켜보는 눈들이 늘어났지만, 나는 훈련을 따라가느라 다른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그 뒤로 나를 죽이려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계속 흘렀고.

네 번의 겨울이 지나갔다.

그리고 내가 10살이 되던 봄.

저택에 손님이 찾아왔다.

아름다운 소녀였다.

후작의 딸이자 큰형 시몬의 약혼자.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검을 치켜들었다.

"네가 공작가의 숨겨진 칼이라며? 나랑 한판 붙자. 내가 한 수 가르쳐 줄게."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아름다운 소녀가 꺼낸 말에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제15화

제15편 형의 약혼자가 왔습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