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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소설만 읽었을 적에는 몰랐다.

글이 독자에게 주는 정보는 생각보다도 제한적이다. 나열된 활자의 조합은 그 세계의 일부분만을 보여 준다. 분명 독자가 모르는 이야기. 배경. 각종 현상이 일어나며 톱니바퀴처럼 굴러가고 있음에도.

작가가 제공하는 시야로, 언어로만 봐야 하니까.

악역영애 에리카.

그녀에 대한 정보도 마찬가지.

바르간의 약혼녀이며, 작은 체구, 표독스러운 말투, 특기. 심지어는 그녀의 집안에 관한 내용도 나타나 있었다. 에리카의 정보가 모두 담긴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것은 그녀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에리카의 특징 중 하나, 악역영애.

그녀가 어째서 악역영애의 포지션을 잡게 됐는지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다.

어째서라니. 그런 설정이니까. 애초에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그녀는 주인공도 아니고 히로인도 아닌데. 소설을 읽으면서 등장하는 인물이 어째서 그런 성격, 역할을 맡게 됐는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지 않겠는가.

그러다.

이 소설에 들어왔고, 깨닫게 된다.

바르간에 빙의된 순간의 감각을 기억한다.

그가 기억하는 첫 순간부터, 당시 넘기고 있던 책에 적힌 글귀까지. 모든 '경험과 감정'이 나에게 전해졌고 그것은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당시 느꼈던 느낌은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한순간에 업데이트된 것만 같은 감각을 전했다.

이때 바르간의 약혼녀이자, 일종의 소꿉친구인 에리카에 대한 새로운 정보는 특히나 많은 양이 유입됐는데.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알게 되고, 소설에 적힌 그녀의 정보가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 체감했다.

현시점의 그녀는 어린 시절과 성격이 다르다. 당연한 말이다. 사람 성격은 태생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절반, 외부적인 요인이 절반이니까.

그러나 바르간의 기억이 남아 있는 나와 소설을 통해 그녀를 알게 된 내가, 그녀를 떠올리며 이상하다고 느낀 까닭은 과거와 달라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미래와 다르다.

불과 몇 개월 후에 보일 모습과 지금은 성격이 아니라 성질 그 자체가 다르게 여겨진다.

잠깐 언급하자면. 이 세계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떠받드는 종교가 있다.

「위그드라실(Yuggdarsill)」

신을 뜻하기도, 종교 전체를 뜻하기도 하는 단어.

전 세계 어디에 있어도 보일 것 같이 거대한 나무를 숭배하는 종교다. 그 외의 종교는 전부 이단이며. 믿어서는 안 된다.

용사의 중축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는 전부 유일신인 위그드라실을 숭배하기 위한 기관이다.

나무의 크기가 주는 압도적인 존재감과, 제공해 주는 대량의 고품질 마석, 주변의 토지를 풍요롭게 해 주기까지 하니 신봉하는 것이겠지.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다수의 '사람들'에 한정된 말이며 소수가 존재하고. 생명체 전체를 뜻하는 건 아니다.

위그드라실과 척을 지고 있는 거대한 하나의 집단. 알티프의 종교.

그게 바로 여신교(女神敎)다.

쉽게 말해.

사람 측에 종교 하나.

괴물 측에 종교 하나.

이런 대립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갑자기 종교 이야기를 한 데는 에리카가 종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가문인 포트레트가는 신실하기로 유명한 집안이다. 에리카 또한 어렸을 적부터 용사 훈련을 받음과 동시에 종교학을 공부했다.

어린 시절의 그녀를 직접 봤던 경험을 토대로 판단하자면.

그녀의 믿음에 거짓은 없었고.

그녀도 그것을 자부심으로 여겼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지.

소설에 적혀 있는 에리카는 유일신, 위그드라실을 믿는 '연기'를 하는 소녀였는데.

그녀는 괴물들의 신을 숭배하며, 아카데미아 내부에서 그들의 활동을 도왔다.

이해하기 어렵다고 표현한 것은 단순히 그녀가 인간의 신이 아니라 괴물의 신을 섬겼기 때문이 아니다.

예전에는 위그드라실, 혹은 아카데미아 내부에 스파이가 한 명 있을 뿐이고, 악역이라는 설정이니까 그럴 수 있겠다 넘겼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녀의 과거를 알고 있다. 그녀의 발자취는 단순한 설정이 아니다.

그녀가 바르간에게 보인 과거의 모습이 전부 거짓이라고?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에리카와 마지막으로 만난 게 1년 전.

새롭게 새겨진 기억으로는 그녀가 이단을 숭배하는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약혼자라는 사실을 이용해 그녀에 대한 정보를 얻기도 했지만 마찬가지.

가능한 경우는 두 가지.

지금까지 그녀가 철두철미하게 숨겨 온 것이거나, 이후의 전개 동안 변하게 된 것.

소설에서 나온 그녀의 말, 행동 등을 분석하며 바르간을 통해 알게 된 과거와 비교해 봤다. 그렇게 이끌어진 결론으로.

나는 확률이 높은 후자에 걸어 보도록 했다.

에리카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마법이나, 그녀의 집안, 나와의 관계를 생각했을 때. 그녀에 대한 확실성을 높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내가 움직이는 데 방해가 되지 않으니까.

그래서 고뇌했다.

이후의 전개가 진행되면서 그녀가 변하게 됐다면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항상 두뇌 한구석에 넣어 두다가 정말 우연히도, 난 '녀석'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몰랐다.

별다른 재능도, 외모도 눈에 띄지 않는 조연 중 하나인 줄 알았다. 소설에 빙의하면서 새로이 알게 된 인물. 그게 전부였다.

그러다, 문뜩 에리카를 추종하던. 그녀와 함께 이단을 숭배하던 어떤 이와 해당 인물이 하사받은 축복이 있었다는 게 떠올랐다.

이름은 모른다. 생김새도 모른다.

적혀진 정보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녀석이 어떤 성격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말투. 어떤 능력을 숨기고 있는지는 알았다.

초반에 에리카의 주위에 붙어 여신교의 사상을 전파하는 녀석이 있었던 것이다. 지독하고 끈질긴 놈이다.

에리카의 마음에 나 있는 틈새를 이용한 것일까.

내 가설이 옳다면 녀석은 이 시기엔 한창 에리카의 주위를 돌아다닐 터이다.

아직은 학기의 초반. 그녀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이를 이용해 자신의 믿는 종교를 전도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추잡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그녀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더러운 눈빛으로 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녀석을 끌어내기로 정했다.

그래서 미끼를 던졌다.

밑 작업을 착실히 이어 가며 녀석의 능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파악했다.

그리고 모든 게 확실해진 건, 에리카가 연구실에 온 날.

⎯예에?!

알리시아의 모습을 하고 있던 나이아스가 미리 말해 둔 대로 나에게 언질을 줬고. 나는 에리카와의 약속을 바꿔 계획을 본격적으로 이행하기 시작했다. 유독 호들갑스럽게 반응했던 것은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녀석의 주의를 끌기 위함이었다.

나이아스는 녀석을 볼 수 있다. 나이아스가 가진 고유 능력,「본질을 보는 눈」 앞에 녀석이 빌린 힘은 무력했다.

결과적으로, 녀석은 나이아스가 의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하기야 엘리트 출신인 에리카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했는데 내가 알고 있는 그 녀석이 알아차릴 일은 없었다.

그래도 혹시 내가 모르는 다른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니 확인을 한 것이었는데 예상대로였다.

그날 이후, 나이아스를 통해 녀석을 계속 관찰할 수 있었고 녀석은 짜여진 것처럼 그대로 움직였다. 특정한 제약을 받고 있는 것처럼.

녀석의 실체를 알았으니 낚싯대를 들어 올리는 것을 조심할 필요는 없다.

빠르게 움직인다.

과감하게 잡아끈다.

녀석은 반드시 장소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도련님. 어디 가시는 겁니까?"

시간이 돼서 나가려는데 연구실에 있던 알리시아가 말을 걸었다. 나이아스가 의태한 게 아닌 당사자이다.

주변에는 완전히 녹초가 된 에밀리와 핀. 가만히 책을 읽고 있는 세레나가 보인다.

"약속이 있어서 말이다. 나머지는 너와 세레나 주도로 진행하면 된다. 클래스전이 며칠 뒤이니 내가 없다고 해서 쉬이 해서는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그… 에리카 님을 만나러 가시는 겁니까?"

"비슷한 녀석은 온다."

"비슷한… 으음,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저녁은 찾아뵙지 않고, 내일 아침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아리송하다는 얼굴을 보인 알리시아가 인사를 한다.

나는 그들을 두고 걸음을 옮긴다.

에리카.

나의 약혼녀.

나는 지금부터 그녀가 없는, 그녀를 위한 무대를 선보일 것이다.

참여 관객은 단 한 명.

지금쯤 다리를 덜덜 떨면서 수업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릴 그 녀석.

녀석이 스토커인 사실은 확정적이지만 이번 무대는 필요한 연극이다. 함부로 밀고 나갈 수 없다. 녀석은 끄트머리일지라도 대규모 집단에 속해 있다.

'군중 속에서 숨기를 즐기는 놈들이 말이지….'

아카데미아에 잠복해 모든 것을 은밀하게 움직이는 그 종교가. 자신들의 정체를 알리고 싶지 않을 터.

그럼에도 녀석은 이런 당당한 짓을 하고 있다. 이는 현재까지 녀석이 하는 행동을 주변 인물들에게 숨기고 있다는 방증.

녀석의 스토킹을 아는 인물이 오로지 나 하나. 어떻게 보면 나에게 있어도 좋은 기회다.

그러기 위해선 보는 눈이 적을수록 좋고.

"날이 저무는군."

주변을 둘러본다.

거리가 어두워져 간다.

조금 있으면 어둠을 밝힐 조명이 켜질 것이다.

***

수업이 끝나길 간절히 바란 한 남자가 있다.

하필 수요일은 그녀와 다른 수업 시간으로 겹치는 날이다. 같은 수업이었다면 이렇게 불안하지도 않았을 텐데.

다행히 약속 시각은 오후 6시 10분.

에리카의 수업도 동시에 6시에 끝나니까 서둘러 가면 늦지 않는다.

사실 수업을 제끼고 그녀 근처에 붙어 있을까 고민해 봤지만. 그건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학생들이라면 몰라도 교수라면 혹여나 존재를 눈치챌 위험이 있다.

더군다나, 아직 지금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포트레트 가문의 여식에게 전도하기 위한 명목이라기에는 위험이 더욱 커서 설득에 무리가 있다.

윗사람들이 지금의 상황을 알게 된다면 반드시 저지하려 할 터.

그래서 수업을 빠지는 것 같이 계획에 없는 행동은 제한된다. …이미 감정에 휘말리는 실수를 한 번 했기에 더욱이.

지금까지 들키지 않고 잘 진행하고 있었는데 인제 와서 들킬쏘냐.

"…젠장."

에리카가 거절했으면 좋았을 것을.

계속 단호하게 거절할 것만 같더니, 그녀는 왜 갑자기 그런 재수 없는 멀대 자식의 제안을 받아들인 걸까. 사이가 좋지 않은 거 아니었나.

아직 마음을 전하기에는 일러서 준비하는 과정이었는데. 이대로 가다간 그녀를 빼앗길 것 같은 불안감이 든다.

수업이 끝나자 남자는 불안함에 달달거리는 다리를 멈추고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바로 약속 장소로 가는 건 아니다.

그 전에 들러서 준비해야 하는 과정이 있다.

여기서는 안 된다. 보는 눈이 많다. 갑자기 생긴 이변에 놀라 존재가 밝혀지게 되면 곤란하다.

가장 가까이 있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여기라면 아무런 의심 없이 기도를 드릴 수 있다.

그렇게 짧게 기도를 마치고 준비가 끝났다.

축복이 내려왔다. 비로소 완벽해졌다.

아무에게도 줄 수 없다.

그녀의 친구에게도. 약혼자에게도. 형제에게도. 부모에게도.

어떤 누구에게도.

절대로 넘기지 않을 것이다.

처음 본 순간 느꼈다.

예전부터 꿈꿔 온. 바라 왔던. 이상적인 모습의 여성.

그녀는 나를 만나기 위해 태어났다.

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이건 운명이다. 거스를 수 없고 거슬러서는 안 된다.

그녀는. 그녀는.

그녀는 '나'만의 것이 되어야 한다.

33화

날이 꽤 어둑해졌다.

차가워지는 밤공기는 느슨해진 피부를 경각시킨다.

멀리서 에리카가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수요일 오후는 전공 수업이 있는 날이다. 평소였으면 수업이 끝나고 기숙사로 향하거나 학생회실로 갔을 그녀였지만, 지금은 방향이 다르다.

그것을 본 『 』는 생각했다.

바르간과 한 약속 때문에 만나기로 한 장소에 가는 중일 것이다. 다소 긴장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발걸음이 결코 빠르지 않다.

언제나 당당하던 걸음걸이는 어디로 간 거지.

이윽고 약속 장소에 도착한 에리카는 바르간과 만났다. 만나자마자 티격태격하던 둘은 짧은 대화를 나누면서 이동을 한다.

바르간이 안내하면 그녀가 따라간다.

그리고 그 뒤를 무언가가 잇는다.

신입생 환영회의 무대에서 경험했듯, 불쾌한 감각이 『 』의 체내에 꾸덕꾸덕 쌓여 간다.

이 감정은, 그녀를 알게 되고. 그녀가 바르간과 함께 있는 걸 본 순간마다 천천히 채워진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에리카 그녀의 것인데.

피부.

머릿결.

목소리.

미세하게 나는 체취까지.

모두 그녀의 것임이 틀림없는데.

어딘가 이질감이 든다.

뭔가가 다른 느낌.

그러나, 『 』가 그런 생각을 이어 갈 틈 없이 두 사람이 빠르게 이동을 시작해 따라갈 수밖에 없다.

아카데미아의 번화가로 향한다. 옷이나 서적, 각종 물품을 사거나, 식사할 수 있는 곳.

바르간은 지름길로 그녀를 안내할 생각인 거 같다. 사방이 뻥 뚫린 넓은 인도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 세 명 정도가 서 있을 수 있는 폭의 건물 틈새로 이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몰려든다.

아카데미아를 밝히는 조명들이 하나씩 켜진다. 이와는 달리 그들이 걷는 길은 사람이 없는, 어두운 틈새.

에리카와 바르간의 거리가 가깝다.

흔들거리는 손과 손이 잡힐 것만 같이 가까운 두 사람.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지는 않지만, 『 』는 아까와 같은 꾸덕이는 반고체 같은 것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리는 기분을 느꼈다.

『 』가 괴로워한다.

해소하고 싶다.

지금 식도를 통과하는 이 불순물을 뱉어 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조각품이 필요하다.

『 』가 급히 품을 뒤지기 시작한다.

품 안을 뒤져도 괜찮다. 들킬 위험은 없다. 어떠한 소리도, 냄새도, 모습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 』가 받은 축복은 마법과는 상이한, 그분의 권능이니까.

품에 있던 작은 조각품을 꺼내 손에 쥐고 있으니 『 』는 마음이 누그러짐을 느꼈다. 그분께서 함께하신다는 충족감이 불순물을 녹인다. 기도를 드리지 않아도 성스러움에 둘러싸이는 감각.

위대하고 전능하신 분.

유일하고 아름다운 분.

그분을 똑 닮은 작은 조각품.

그리고….

돌연, 바르간이 걸음을 멈췄다.

에리카도 그와 함께 걸음을 멈춘다.

바르간이 뒤를 돌아봤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을 바라본다. 허공에 떠다니는 먼지를 보는 것처럼 가만히.

정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그 서늘한 눈동자에 깃드는 것은.

웃음.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짓는다. 쿡쿡거리며 웃기 시작한다. 재밌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별다른 대화를 나누고 있던 것도 아니었는데.

…어라?

안 움직여.

『 』는 변화를 눈치챘다. 발이 떼어지지 않는다.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숨은 가까스로 쉬어지나 이 또한 부드럽지 못하다. 일부러 숨을 밀어 넣지 않으면 끊길 것만 같다.

바르간의 시선에 흔들림이 없다.

오로지 한 곳을 직시한다.

그의 시야에 있는 것이라곤 떠다니는 마력과 공기밖에 없을 텐데. 그마저도 보이지 않는데. 마치 누군가 있는 것처럼.

마치.

『보르그』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는 것처럼.

"하하하핫! 도련님아, 아무래도 저 녀석 이제야 눈치챈 모양인데? 표정이 일그러졌어!"

보르그가 절규한다.

아니다.

그녀는 저렇게 경박한 웃음소리를 내지 않는다. 저런 품위 없는 표정이나 괴팍한 말투를 쓰지 않는다.

에리카는. 에리카는.

그분을 닮은 에리카는!

"입학식 이후 직접 얼굴을 맞대는 건 처음이구나. 랑피트가의 돼지여. 그러나 꿈틀거릴 필요 없다. 어차피 네놈 수준으로는 헛수고일 테니까."

바르간이 일축한다.

그는 보르그가 마력을 모으는 것을 알아차렸다. 보르그는 당황스러웠다. 하사받은 그분의 축복으로도 주변 마력의 흐름은 감추지 못한다. 바르간이 감지한 것이다.

"발밑을 봐라."

바르간이 언어를 입에 담음으로써 행동에 허가가 떨어졌다.

보르그가 발밑을 내려다본다. 발끝을 살짝 움직일 수도 있다. 신발 밑창과 바닥에 들러붙어 있는 점성. 질척거림.

석탄처럼 새까만 괴상한 것이 끈적인다.

녀석은 조금씩 움직인다. 정확히는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가만히 있지만. 흘러가듯 녀석의 외관은 지속해서 변화하고 있다.

입, 눈, 귀.

물살에 떠밀려 가는 그런 것들의 형태도 보였다.

"그 귀여운 외모의 생명체는 내 사역마 중 하나다. 부끄러움이 많은 녀석이라 밖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다만. 오늘은 특별히 외출시켰지."

장난을 치듯 가볍게 말하는 바르간. 그는 지금의 상황을 즐기고 있다.

"슬라임 형태를 한 게 귀엽지 않으냐. 크게 입을 벌려 베어 물면서 놀다가, 실수로 먹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질척거림.

녀석의 사역마가 보르그의 몸을 타고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슬금슬금. 슬금슬금.

천천히 올라오는 녀석은 어느새 목 부근까지 신체 일부를 가져다 댄다.

그리고 에리카를 닮은 누군가가 다가갔다. 그녀는 확실하게 보르그가 보이는 듯했다.

"미안해~ 하지만 이것도 명령이라서 말이야. 아, 인간에게 사역마를 먹여 본 적은 없어서 너무 궁금하기도 하지만! 아프거나 하진 않을 거야. 자, 아~ 해야지. 아~."

정확히 보르그 입을 잡고는 벌리는 그녀. 보르그는 손가락을 자르더라도 거절하고 싶지만 몸이 따르지 않았다.

"그대로 벌리고 있어! 금방일 테니까!"

처음 보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의 표정에 담긴 광기(狂氣). 그 섬뜩한 것에 보르그의 숨이 더욱 가팔라진다.

사역마가 그의 입까지 다다랐다. 목 전체와 가슴이 녀석의 질척이는 신체로 덮여 있다. 몸의 지배권을 뺏겼으나 감각만은 그대로 그에게 전해진다.

끈적.

녀석이 벌려진 입안에 들어간다.

입 내부의 세포가 녀석에 대한 끔찍한 정보를 전달한다. 알고 싶지 않은 감촉, 맛, 냄새.

목젖을 건드렸다. 구역감이 밀려 올라오지만 뱉을 수 없다.

슈우욱!

목젖을 지나 식도에까지 자신의 신체를 밀어 넣은 녀석은. 갑자기 움직임을 빨리하며 거세게 들어온다.

"우와 진짜 전부 들어가네?!"

에리카를 흉내 내는 이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고.

⎯커흑! 커흑!

녀석이 내부에 완전히 들어왔음을 느낌과 동시에, 축복이 풀려 보르그의 모습이 드러났으나 몸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바닥에 쓰러졌다. 참아 왔던 구역감을 쏟아 내며 몸 안에 들어간 사역마를 꺼내려 하지만 반응이 없다.

눈물과 콧물. 온갖 액체로 얼굴이 범벅되어 있음을 느꼈다.

보르그의 시선에서 바르간의 발이 보였다.

바르간이 몸을 숙이며 무언가를 줍는다. 쓰러질 때 떨어뜨린 조각품. 세밀히 살피며 말한다.

"솜씨가 제법이구나. 에리카와 상당히 닮았어. 용사가 아니라 조각가가 되는 편이 나을 텐데 말이지."

"우, 우윽!"

삼킨 것의 이미지가 다시 떠오르자 구토감이 또 올라왔지만. 바르간이 어깨를 건들자 내려갔다.

그는 치유 마법을 쓰고 있었다.

"궁금한 것이 많겠지. 하나, 내가 그것을 일일이 알려 줄 정도로 친절하진 못해서 말이다. 딱 두 가지만 말해 주도록 하지."

얼굴을 가까이 한 바르간이 주먹 쥔 손가락에서 하나를 편다.

"하나. 방금 네가 삼킨 것은 언제, 어디에 있든 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 특기로는 형태 변화와 마력 흡수가 있지."

'녀석이 네 내부에서 날뛴다면 금방 죽어 버리겠지.' 바르간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며 말을 덧붙였다.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인 채.

"둘. 너는 오늘부터 내 지시를 따라야 한다. 내가 시키는 것을 행동하고, 내 명령에 따라서 사고해야 한다. …이런,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은 모양이로구나. 너의 분노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바르간은 손을 완전히 폈다. 그의 손안에는 방금 삼킨 사역마의 파편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말하지 않았다만. 감정의 전달도 돼서 말이다. 오늘부터 네가 느낄 슬픔, 기쁨, 쾌락, 절망. 너의 모든 감정은 내가 원할 때마다 공유된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된다고 하지 않더냐."

바르간은 웃었다.

조각품을 가까이 들이밀며 끝나지 않은 말을 이어 간다.

"한데, 남의 약혼녀를 탐내다니. 넌 참으로 부정한 녀석이로다."

그는 이어서 말한다.

"욕망이 이끄는 대로만 움직이는 '돼지'같이."

"또, 또…! 이… 개새…! 끄으아아아아악!!"

보르그는 소리를 질렀다.

입을 벌리다 심장이 터져 나간 줄 알았다.

누군가 심장을 쥐고 꽉 쥐어 그대로 사방팔방 쪼개진 것 같은 고통.

하지만 심장은 살아 있다. 지금 이토록 거세게 뛰고 있는 게 그 증거. 그의 몸을 빠져나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펄떡인다.

"끄, 으으윽…!"

보르그가 고개를 들어 바르간을 바라보자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보였다.

"…끄으!!"

보르그의 얼굴에 굵은 핏줄들이 올라오며 눈가의 모세혈관은 터져 붉어지기까지 했다.

바르간은 이를 비웃으며 하찮게 여긴다.

"격한 분노로구나. 아주 짙고 날카로워. 하나, 너에게는 아까운 감정이다. 애초에 이 사달을 만든 건 본인의 언동이거늘. 그 책임을 나에게 묻는 것은 맞지 않지."

보르그의 입에서 샌 소리가 나왔다.

뭐라고 한소리 하고 싶지만, 조금 전의 고통의 잔재가 가시질 않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너는 너의 존재를 너무 알렸다. 그게 이렇게 된 원인. 혹시 아나, 눈에 띄지 않게 행동했다면 내가 너를 알아차리지 못했을지. 이제부터 너는, 증오의 대상인 나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이다. 불쌍하게도."

"끄, 흐아아…!!"

보르그는 바르간을 죽이고 싶다는 일념에 몸을 지배당했다.

본래였으면 바르간을 잡아 어떤 정보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지 심문해야 했지만 그런 것은 생각하지도 못할 정도로 분노에 잡아먹혀 있었다.

죽이지 않으면 보르그의 이 거센 불길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감정이 격해지자 아드레날린의 분비가 많아지고 통증이 무뎌지게 된 보르그의 입에서 조금씩이지만 겨우 목소리가 나왔다.

쉰 것이었으나 한마디를 간신히 끄집어냈다.

"네… 네 말을 드, 들을… 바에 자살을… 하겠다. 개자식…아."

신자의 의문스러운 죽음이 전해지게 되면 여신교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자신의 죽음이 곧 바르간의 피해로 연결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흐음. 역시 그게 좋겠군."

격동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바르간이 움직였다.

"개과천선(改過遷善)이라고 알고 있나."

"…뭐?"

"죄를 완전히 뉘우치고 새사람이 되는 것을 뜻하지."

돌연, 거칠게 보르그의 얼굴을 붙잡아 드는 바르간.

증오감을 드러내는 보르그와 달리 바르간은 어딘가 즐거워 보였다.

"보통은 본인이 스스로 깨달아 바뀌게 된다만, 외부인으로 인해서도 가능하지 않겠느냐. 결국은 사고(思考)가 바뀌게 되는 것일 뿐이니 말이다."

바르간은 보르그의 증오를 마주했다. 바르간의 검은 눈동자가 일렁이는 것처럼 보인다.

"특별히 너에게도 말해 주마. 나는 마법 중에서도 저주와 사역마를 주로 다룬다. 그리고 저주의 하위 분야에는 '세뇌'가 존재하지."

실험을 해 보고 싶다.

어느 정도의 반복에 사람이 얼마만큼 바뀌게 될까.

너는 그 첫 대상자가 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다.

그런 말을 덧붙였다.

점차 초점이 흐려지는 보르그의 머릿속에 파문처럼 퍼지는 문장. 그 문장이 보르그가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오셀 랑피트 보르그. 가엾은 돼지여. 네가 나와 여신교 사이의 다리가 되어 줘야겠다.

***

"얘 죽은 거 아니지?"

에리카의 모습을 한 나이아스가 묻는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녀석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놀고 있다.

입학식에서 랑피트가를 내세우며 나에게 대들었던 녀석이 지금은 이런 꼬락서니로 쓰러져 있다.

내가 내 입으로 랑피트가라는 고급 천으로 포장된 돼지라고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스토커 짓을 하는 미치광이 변태였다니. 보는 것만으로도 경멸감에 소름이 돋는다.

뭐, 그렇다고 해도.

"죽일 리가 있나. 나의 게임 말이 되어 활약하게 될 귀중한 몸인데."

"아카데미아의 학생이기도 하고 귀족인데 문제가 되지 않겠어?"

문제가 돼도 자신은 상관없지만 일단 물어본다는 식의 가벼운 말투. 나이아스는 그저 궁금할 뿐이다.

"완전히 백지로 만드는 것은 간단하지만, 입맛대로만 수정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기본적인 성향은 이 녀석이 가지고 있는 그대로 가야 하지. 다만, 기존에 존재했던 지식과 새로 유입된 지식의 구별을 지우거나, 특정한 사고를 할 때 분비되는 물질을 추가하는 정도는 할 수 있지."

"그 정도면 사실상 입맛대로 바꾼 거 아니야?"

"모든 사람이 이 녀석처럼 단순하다면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군."

"무섭다 무서워. 나도 조심해야지. 근데 진짜 대단하다. 여러 가지 의미로, 도련님이 신입생이라고 하면 믿을 정령은 몇 없을 거야."

나이아스가 히죽인다.

쓰러져 있는 녀석을 괴롭히는 건 질렸는지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켠다.

"지금까지 살면서 수많은 사람, 그중에서도 인간족을 봐 왔지만 도련님 같은 경우는 처음이야."

나이아스가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신이 난 어린아이처럼.

"나 있지. 지금 되게 설레. 너무 재밌어! 나와 계약한 우리 도련님은, 인간이면서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결여되어 있는 느낌이야. 정령인 나처럼 말이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나이아스가 멈춰 선다. 에리카의 모습을 풀지 않은 녀석의 눈이 올곧게 나를 향한다.

그 눈에 깃든 것은 어린아이처럼 깨끗하고 순수하지만 사람의 것은 아니었다.

"도련님아, 진짜로 인간이야?"

34화

"캬하핫! 장난이야 장난. 당연히 인간이겠지. 도련님이 다른 종족이었으면 내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잖아. 내 눈이 얼마나 좋은데."

낄낄거리는 나이아스가 환하게 빛나는 자신을 눈을 가리킨다.

추상적인 말이긴 하지만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다. 인간으로 치면 시력도 9.0은 되는 것 같고. '본질을 보는 눈'의 효과에 따라 마나의 분포, 적외선, 자외선 같은 환경적인 요인과 자신보다 급이 떨어지는 축복, 마법을 꿰뚫어 볼 수 있다.

"갖고 싶군."

탐이 날 정도로 괜찮다.

지금처럼 나이아스를 이용해 먹어서 간접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당연히 직접 사용하는 게 더 편하다.

어떻게 좀 안 되나.

"도, 도련님아! 내 눈은 이식한다고 해서 효과까지 따라가는 게 아니니까 말이야! 애초에 정령이라 이식조차 안 될 테지만!"

나이아스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리고 황급히 뒤로 물러난다.

상당히 무례한 녀석이다. 누가 보면 제 사역마의 눈알을 파 가려고 하는 미친놈인 줄 알 것 아닌가.

"안 뽑아 갈 테니 진정해라. 확실히 순간 소유욕이 떠올랐던 건 사실이나, 네 녀석보다 뛰어난 눈은 많이 있으니 말이다."

"도련님아, 나 진짜 무서워지려고 그래. 뭐, 뭐야, 어디서 눈깔이라도 뽑아 올 생각인 거야? 어디서 구할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말했듯, 성능이 따르는 건 아니라 무의미한 일이라니까…!"

"알고 있다. 나도 이식할 생각은 없다."

"진짜일지… 어? 같이 가!"

나는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나이아스를 뒤로하고 이만 발걸음을 옮겼다.

쓰러져 있는 저 녀석은 앞으로 5분 정도 있다가 자연히 일어난다. 내버려 두면 된다.

에리카의 모습을 한 나이아스가 다급히 옆에 들러붙어 따라온다. 팔짱을 끼려고 하기에 옆으로 밀쳤다.

그나저나 얘는 생각이 있는 걸까. 설마 이 모습 그대로 기숙사까지 따라오려는 건 아니겠지?

"나이아스. 의인화를 풀어라."

"에엑? 그냥 이대로 가면 안 돼? 나 지금 외관이 마음에 들었는데."

전에 내 방에 왔을 때는 알리시아의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 한동안 유지할 거라 말했으면서 지금은 이렇다.

하여간 외관이나 내면이나, 카멜레온보다 쉽게 변하는 녀석이다.

"이대로 돌아가면 여러 가지로 복잡해지니까 빨리 풀거라."

"치, 네에네에 알겠습니다~ 도련님의 명을 받들죠."

툴툴거리며 말에는 따르는 나이아스.

저기서 조금만 더 까불었으면 달팽이의 모습으로 기숙사까지 기어 오도록 했을 텐데 아쉽다.

⎯자, 됐지?

나이아스의 모습이 사라졌다. 공기로 분해가 된 것처럼 완전히. 지금 내 주위에는 누구도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면 움직일 수 없어서 답답한데… 고개를 돌리는 것 정도밖에 하지 못한단 말이야.

"그만 떠들고 조용히 해라. 내 속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건 유쾌하지 않다."

나이아스와 같은 정령은 평소에 계약을 맺은 매개체 안에서 살아간다.

그들에게 신체란 일시적인 것이다.

동물이나 인간으로 변할 때 주변의 마나를 소모해서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지 영구적이지 않다. 그들에게 본래 물리적인 요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내가 나이아스와 계약을 맺은 것처럼 계약을 통해 매개체를 얻지 못하면 세상에 존재하지 못한다.

매개체는 생물이 아니더라도 된다.

주변에 굴러다니는 돌, 금광에 있는 황금, 전설적인 명검.

그러니까 유물을 매개체로 연명할 수 있었다.

⎯도련님아, 나 언제 또 의인화해도 돼? 육체가 없는 건 이제 싫단 말이야.

"의인화는 쓸모가 많다. 떼쓰지 않아도 곧 기회가 올 것이다."

멀지 않았다.

한 번 활약했다고 해서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일회용품도 아니고.

⎯진짜지? 약속했다?! 아싸! 있지. 나, 변하고 싶은 외관이 많이 있어. 뭐가 있냐면….

"알겠으니까. 조용히 좀 해라."

기숙사로 돌아가면 우선 이 시끄러운 녀석을 유물로 돌려보내자.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다.

***

팔락.

연구실에서 마법서를 읽고 있었는데 계속 눈을 힐끔거리며 차를 따르던 알리시아가 말을 걸었다.

나에게 방해될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 책의 페이지가 넘어가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도련님, 클래스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렇게 연구회 활동만 하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클래스전이라는 중요한 날을 앞에 두고 리더라는 녀석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탓하려는 모양.

이미 비슷한 말은 담당 교수인 루이사에게 질리도록 듣고 있는데 말이지.

"그,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다름 아닌 도련님의 일입니다. 다 깊은 뜻이 있음을 압니다. 그저 어떤 것인지 궁금해서 여쭈어봤습니다!"

아, 참고로 말로도 했다.

정확히는 말하기 위해 생각했다. 말을 함과 동시에 생각한 것이지만.

⎯후릅.

그나저나 차 맛이 제법 훌륭하다. 가면 갈수록 실력이 느는구나 알리시아. 장점이 많아지는 건 좋은 일이다.

"가, 감사합니다. 그렇게 좋아해 주실 줄은… 부끄럽습니다."

화악 올라오는 열기를 감추기 위해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기뻐하는 알리시아.

음? 이상하다.

"…이번엔 입에 담지 않았다만."

"앗, 실례했습니다. 왠지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 거 같아 그만…."

"...."

독심술을 가르치진 않았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내가 알리시아처럼 표정으로 티가 나는 타입도 아니고 과거엔 포커페이스 따위는 일체의 흔들림 없이 유지할 정도의 천재 연기자였는데.

"…그렇게 바라보시면 창피함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집니다."

특별히 달라진 건 없는 거 같은데.

어느새 수준 높은 연기를 간파할 정도의 관찰안이 생긴 것일까.

아니면 내 눈치를 너무 많이 살피다 나의 미묘한 습관 같은 것을 파악한 것일까.

앞으로 주의해야 할 것이 늘었군.

아무튼, 돌아와서.

"알리시아, 네가 볼 때 우리 연구회의 현 상황은 어떻지?"

"예? 아… 가족같이 단란하고 화목해서 좋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화합하며 각자의 무(武)를 갈고닦는 수련의 장이기도 하고…."

"그런 말을 할 줄 알았다."

감성적인 녀석.

"현재 신학생회의 멤버는 나를 포함해서 다섯. 내가 상정하는 연구회원 수는 이보다 높이 있는 수치이거늘. 하나 그런데도 따로 홍보는 하고 있지 않다."

"예 맞습니다. 도련님께서 신학생회의 홍보를 금지하셨습니다."

"그래, 어째서 그랬다고 생각하지?"

진지한 표정으로 고심하던 알리시아는 조심스럽게 답을 내놓으려다 말았다.

무언가를 떠올린 모양인데 입 밖으로 내면 내가 면박을 주리라 본 것 같다.

"꾸짖지 않을 테니 말하거라."

"그… 귀족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요컨대 내 목은 고목처럼 빳빳하여, 남에게 숙이고 들어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고집불통이라는 말이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답도 아니다.

"상품을 팔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당연히 상품의 질이다. 이건 당연히 알고 있겠지."

"네, 그렇습니다."

"그럼 그다음으로 중요한 건 무엇일까."

"…상인의 태도입니까?"

오, 제법 정답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욱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상인이 상품을 팔기 위해선 손님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노력하고 상품을 널리 알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의문을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대부분의 상인이 그렇게 상품을 팔고 있으니까.

일종의 정석이지.

"우리 연구회는 별도로 홍보할 이유가 전혀 없다. 연구회명이 신학생회로 정해진 순간부터 주목이란 주목은 다 받았으니 말이다. 인지도는 이미 충분하다고 볼 수 있지."

"감히 이런 말씀을 드리긴 죄송하지만… 좋은 의미로 유명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녀의 말이 맞다.

이름이란 커다란 요인으로 그 자체로 남들에게 인상을 심어 준다.

즉, 신학생회라는 명칭은 남들이 봤을 때 학생회를 표방한 연구회, 혹은 현 체제를 부정하는 그룹.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거다.

"하나, 그것은 이름에 의한 선입견일 뿐이다. 우리가 신학생회의 이름을 걸고 한 활동이라곤 최초에 내세웠던 개인 역량 발전만이 아니더냐."

어떠한 분란의 행위도, 학생회를 흉내 내는 활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쏟아지는 신학생회에 대한 악평.

"우리는 꾸준히 성과를 올리고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다. 그건 모두의 상태를 관찰하고 있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지."

현재 신학생회를 둘러싸고 있는 이 부정적인 시선은 사실 부정적인 시선을 가장한 '관심'이다.

실제로 부정적인 감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 뿌리가 깊지 않다.

학생회의 소속이나 관계자가 아닌 이상 그저 이름이 특이할 뿐인 연구회. 남들이 좋지 않게 보니까 그 흐름에 편승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 그 인상을 한 번에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

순간적으로 숨을 크게 삼킨 알리시아.

그러나 토끼같이 커다래진 눈은 곧바로 돌아오며 현실을 마주한다.

"도련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진행된다면, 이미 한계치만큼 쌓여 있는 관심이 긍정으로 바뀌게 됩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한지는…."

"가능하다. 알리시아, 마침 적당한 무대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냐."

"…클래스전 말씀이십니까?"

그래.

모두의 이목이 쏠리는 최고의 사건이자 장소.

이보다 적합한 곳이 있을까.

"홍보하지 않은 까닭? 인원수가 많으면 그만큼 관심이 분산되지 않느냐. 가령 해당 멤버가 누구인지, 그 멤버들이 얼마나 성장했는지에 대한 전달력이 절감된다."

순수하게 강력한 무력.

판을 읽고 지배하는 지략.

예상치 못한 변수.

이에 해당하는 이들이 많아지면 곤란하지. 희귀성이란 중요한 것이니.

"...."

잠시 상념에 잠긴 알리시아는 말한다.

"나중에 대자보 같은 수단을 통해 교수님의 인장이 찍혀 있는 보증된 보고서를 간소화해서 걸어 둔다면 더욱 효력이 있을 것입니다."

"이해가 된 것 같구나."

나는 빙그레 웃었다.

클래스전의 무대를 이용한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저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압도적인 결과를 보이고 전율시킨다. 혹은 눈물이 앞을 가리는 감동적인 스토리로 감동을 준다.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좋다. 하지만 수수해도 괜찮다. 천천히 떠오르는 무거운 감정도 커다란 위력이 있으니까.

필요한 건.

단 한 번의 전율.

등줄기를 타고 올라온 그 짜릿한 감각이 전신으로 퍼질 때.

신학생회의 깃발이 펄럭인다면.

'부정'은 '긍정'으로 바뀐다.

⎯후릅.

역시 차 맛이 좋다.

전과 같은 종일 텐데 신기하게 어떤 방식으로 따르는지에 따라 맛이 변한단 말이지.

다 마신 찻잔을 내밀자 알리시아가 반사적으로 움직인다.

벌써 몇백 번을 반복한 동작이거늘. 차를 따르는 그녀의 손이 다소 떨린다.

이야기를 마치자 자신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느꼈는지 긴장된 모양이다.

"…도련님의 방해가 되지 않도록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너를 걱정하진 않는다. 우려되는 인물은 저기서 세레나가 단련시키고 있는 둘 정도지."

알리시아가 창밖을 바라본다.

풀이 살랑거리는 넓은 공간에 탈진해 쓰러져 있는 붉은 머리의 여성. 그리고 짧게 머리를 친 남성이 부들거리는 팔과 다리를 간신히 움직이는 게 보인다.

붉은 머리의 여성은 동일한 동작을 멈추지 않고 지속하는 남성에게 몇 마디의 말을 하더니 다시 일어서선 검을 휘두른다.

남성에게 질 수 없다는 듯, 이를 꽉 아물고 있다.

반면 남성은 여성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지 잠깐의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저 반복할 뿐이다.

같은 동작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여성이 다른 동작을 이을지라도.

남자는 버그에 걸린 것처럼.

단 하나의 동작.

동일한 호흡.

일정한 검격을.

⎯쇄악!

휘두른다.

35화

똑딱거리는 시곗바늘이 현 시각을 알려 준다.

오전 1시 49분.

나는 일찍 잠들지 않는다.

빙의하고 나선 2시간 정도를 잘까 말까 한지라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은 상당히 적은 편이다.

그런데도 지금은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다. 생각할 때 어딘가에 몸을 기대는 것은 내 버릇으로 평소였으면 의자에 앉았겠지만, 오늘은 좀 피곤한 날이다.

아마 이대로 생각에 잠겨 잠이 들겠지.

이야기를 정리해 보자.

아카데미아 입학 전까지 해야 할 일은 다 마쳤다.

입학하고 나선 리암에게 경각심을 심어 줬고.

이틀 전에는 뜻밖의 수확으로, 에리카에게 달라붙어 있던 여신교의 스토커 놈도 획득해서 여신교와 연결될 다리도 얻었다.

이후에 전개될 원작의 스토리는 어땠지.

원작에서는 아카데미아에 입학하고 처음 에피소드다운 에피소드로 시작하는 게 클래스전이다.

아카데미아에 적응하기 시작한 신입생들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발악한다.

그것은 주연 조연을 나눌 것 없이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매한가지. 모두가 최선을 다한다.

그들이 이토록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반의 성적에 따라 지급되는 카티아 때문에?

젊은 피가 들끓어 모두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아니. 정확한 정답은 정해져 있다.

⎯교회에서 파견된 용사들의 눈에 띄기 위함이다.

용사들은 멀찍이 떨어진 현장에서, 혹은 대형 스크린 같은 영상으로 신입생들의 상태를 확인한다.

그리고 그중 마음에 드는 애가 있으면 일종의 찜을 해두곤 따로 접촉한다.

그들이 신입생들과 접촉하는 이유는 멘토 멘티의 관계를 맺기 위함이다.

아카데미아는 용사가 될 새싹들이 즐비한 배움의 장. 모두는 아니더라도 이중 상당수가 용사가 될 것이며 그럴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현역으로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용사들이 이런 새싹들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라는 취지로 시작한 것이 오랜 전통이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하나, 용사들이 새싹들의 성장을 직접 도울 정도로 한가한 이들은 아니다. 현장의 인력이 부족하다면 부족했지 넉넉지는 못한 상황.

그렇기에 매년, 클래스전을 보러 아카데미아에 방문하는 용사는 10명으로 정해져 있다.

이들이 뽑는 인원은 두 명씩.

두 명의 신입생의 성장을 도우며 지켜보다가 2학기가 시작되면 그중 한 명만을 정식 멘티로 선정하는 방식이다.

즉, 이번 클래스전에서 「20명」의 신입생들이 컨택을 받을 것이고. 이 중 10명만이 정식 멘티로 선정돼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그 혜택을 받으면 아카데미아에서도 엘리트 코스를 탔다고 보면 된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방학 기간에 멘토의 현장에 서포터로서 참여할 수 있는 권한.

멘토의 일대일 교육.

현직 용사들과의 관계망 구축.

교회에서 주는 특별한 선물까지.

무려 이 정도다.

이 정도이기 때문에.

다들 눈에 쌍심지를 켜고 활약하려 든다.

전에 루이사가 함부로 나서다가 탈락하면 각오하라고 했던 이유도 이런 까닭. 클래스전에서 어떻게든 눈에 띄려고 할 것을 알기에.

'그런데. 루이사의 분위기에 휩쓸려 리더의 직책을 쉽게 받을 수 있었지.'

각 반에서 리더의 역을 맡는다는 건 다른 이들보다 쉽게 용사들의 눈에 띌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리더가 되고 나서 불만 세력이 당연히 있었지만 내 앞에서는 밝히지 못하고 그마저도 쉽사리 꺼졌다.

어째서인지는 밝히지 않겠다. 너무 뻔한 이유다.

뭐, 내가 리더를 받겠다고 한 건 용사의 컨택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지만.

실제로 원작에서는 바르간에게 컨택을 거는 용사가 다섯이었다. 바르간은 이 중 하나를 택했고, 나머지 네 명이 다른 학생에게 다시 컨택을 하러 떠나갔었다.

바르간같이 유능한 인재를 탐내는 이유는 이왕 키우는 거 싹수가 있는 놈을 고르겠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소설에서 바르간의 멘토가 되었던 용사는… 그 어두침침한 녀석이었지. 나처럼 사역마가 특기인 녀석이다.

이왕이면 현 용사랭킹 10위 안에 안착해 있는 인물이면 좋겠지만, 일정상 그런 용사가 올 리 없다.

그렇다면 꿩 대신 닭.

그다지 당기지는 않지만, 그 어두침침한 용사의 사역마 조련술은 제법 대단하다. 나쁘지 않게 도움이 될 터. 이대로 진행돼도 괜찮다.

'알리시아의 성장과도 연이 있으니.'

이번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리암과 알리시아다. 그들에게 양보하는 것이 정해진 흐름상 좋다.

남들보다 늦은 스타트라인에서 시작한 두 사람이 처음으로 자신의 잠재력과 경이로운 발전 속도를 제대로 피력할 수 있는 무대가 이번 클래스전.

이들 또한 용사의 눈에 띄어 더욱 성장할 기회를 얻는다.

리암이야 둘째 치고, 알리시아가 성장할 기회를 짓뭉갤 수 없다.

이번엔 멋대로 바꾸지 않고, 흐름이 가는 대로 놔두어도 괜찮다.

갑자기 발생한 특수한 일로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 이상 기존의 용사들이 기존의 학생들과 맺어질 것이다. 실로 안정적인 선택.

그래, '달라지지 않는 이상' 말이다.

***

"뭐야? 왜 그렇게 굳어 있어?"

에밀리가 왜 어울리지도 않게 그런 표정으로 있는 거냐고 묻는다.

이런 어리석은 것.

이걸 보고 굳지 않을 수 있겠나.

자리에 앉아 있는 나는 눈앞의 종이에 쓰여 있는 글자를 믿을 수 없어 몇 번 눈을 깜빡여도 보고, 뒤집어도 보고, 마력을 부여해 보기도 했다.

혹시 오탈자일지 모른다.

무려 교회에서 아카데미아에 보내고 아카데미아에서 학생들에게 알리기 위해 작성한 공문일지라도 차라리 그편이 현실성 있었다.

"도련님, 갑자기 왜 그러시는 겁니까?"

알리시아가 언제나와 같은 동그란 눈을 하고 있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환호와 의문의 종합으로 혼돈 그 자체였다.

분명 경사는 경사이나 무턱대고 좋아하기에는 그 무게가 상당하다.

"알리시아. 만약 천사와 같은 성스러운 존재가 네 눈앞에 나타난다면 어떨 것 같나."

"그, 그야… 당장 무릎을 꿇고 예의를 갖추겠지만, 그 전에 무척 놀라지 않겠습니까?"

"그 정도로 놀라운 일이다."

나는 팔랑거리는 종이를 똑바로 펴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손가락으론 한 인물의 이름을 정확히 가리키면서.

「헤일리온」

"음… 아, 대단히… 멋진 이름인 것 같습니다."

"이름의 감상평 따위를 물은 것이 아니다."

이렇게 직접 보여 줘도 모르는 눈치다.

아무래도 직접 말로 설명해 줘야 할 것 같아 입을 벌리려던 때, 옆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던 핀이 선수를 쳤다.

"현 용사랭킹 7위의 인물이잖아!! 엄청나게 유명한 사람인데 진짜 모르는 거야?"

"네, 부끄럽게도. 어… 그러니까. 그렇게 유명하신 분이 시간을 쪼개서 아카데미아에 오신다는 말씀이신 거죠?"

"어어어?! 잠깐 헤일리온이라고?! 진짜로 그 헤일리온 님이 방문하신단 말이야?"

뒤늦게 리스트에 적힌 이름을 확인한 에밀리는 나에게서 이를 뺏어 가더니 얼굴을 바짝 붙이며 요리조리 돌려보고 있다.

"오탈자…는 아니겠지? 아니, 오탈자인가? 헤일리온 님 같이 바쁘신 분이 아카데미아에 멘토로 파견을 오신다니 그게 말이 되는 일인가?!"

이런 반응이 일반적이지.

알리시아에게는 상식을 더 가르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아무튼, 몇 번이나 강조하지만 이건 놀라운 일이다.

기존의 역사와는 다르다. 물론, 달라질 것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내가 지금까지 해 온 일들이 연쇄 작용을 일으켜 흐름을 바꾸게 될 것은 당연지사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현재 기존 용사들의 기록을 갈아치운 채 승승장구하고, 세간의 관심을 독차지하다시피 하고 있는 용사의 파견이 결정될 줄은 몰랐다.

헤일리온.

정녕 용사 중에서도 남다른 격을 보여 주던 그 사람이란 말인가.

사람이라는 종 안에서 헤일리온의 무력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다.

사람과 알티프. 종과 종의 전면전쟁을 벌이는 최후 결전에서도 그의 활약은 돋보였었다.

알티프에서 최약체이자 대량생산이 가능한 무지성체는 물론이고, 용사들에게도 공포의 대상인 '지성체'. 그중에서도 상위 계층의 지성체들이 그의 손에 의해 흙으로 돌아갔다.

물론, 그렇게 되는 건 몇 년 후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현재 그의 수준으로도 이미 열 손가락 안에는 든다.

그런 남자가 고작 귀여운 예비 용사의 멘토가 되려고 오는 것이다.

어째서?

남의 행동에 의문을 품게 되는 건 알리시아 이후로 처음이다. 솔직히 말해, 이건 상정하지 못한 상황이다.

다른 용사가 올 가능성은 생각해 봤다. 어차피 와 봤자 10위 안의 용사들은 오지 못하니 누가 와도 크게 상관없는 일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그게 현 용사랭킹 7위, 헤일리온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내가 알고 있는 성격의 헤일리온이라면 대충 다른 이에게 넘길 요량으로 오는 것이 아닐 터이다.

그는 모든 일에 진심으로 임한다.

설령 그가 이번에 자원한 게 아니라, 교황에게 명받은 일이라 할지라도.

그는 진지하게 멘티를 도울 것이다.

그런 헤일리온의 현장을 따라갈 권한과 직접 교육을 받는 것은 물론이요,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환경까지 조성된다.

이건 위기인가 기회인가.

아니, 이건 내가 너무 생각이 많은 탓이다. 아직 켕기는 것 따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내가 일으킨 작은 바람에 의해서 그가 오게 됐다고 하더라도 피해를 줄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그런데도 혹시 모르니.

일을 진행하면서 상황을 판단하고 계획을 수정해 나가야 하겠지만, 그런 묘미가 또 있는 게 아니겠는가. 이번 변수는 어떻게 써먹어야 할까.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아카데미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이미 정리해 놨었지만 역시 인생이란 언제나 예상을 웃돈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생각 외의 소득도 생겨 길이 넓어진 직후인데.

금세 이런 대사건이 벌어지다니.

기존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있다. 판이 뒤바뀐다. 그러나 걱정할 것 없다. 오히려 즐거운 일이다. 정해진 줄거리는 바뀌어야만 한다. 그걸 위해서 본격적인 에피소드 돌입 전부터 바쁘게 움직였던 것 아닌가.

설령 정말 위기라고 하더라도 괜찮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것 또한 능력.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능력을 총동원해서라도 이번 사건을 기회로 만들겠다.

그 정도도 못 하면 이 소설 속에서 해피엔딩은 바랄 수 없으니까.

"헤일리온. 영웅의 등장인가."

헤일리온이 온다면 원작에서 바르간의 멘토였던 그 어두침침한 용사 따위는 지나가던 까마귀가 싼 똥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뭐? 이번 에피소드의 주인공이 리암과 알리시아? 아니, 아니지. 절대 안 된다.

어느 정도는 활약하게 두겠지만 스포트라이트는 줄 수 없다.

정정한다.

이번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나.

'슈겐하르츠 트로아 바르간'이다.

***

"제가 중앙교회로 가는 마차를 잘못 탄 건가요?"

말총머리의 여자가 물었다. 기본적으로 웃음이 얼굴에 배어 있는 사람이다.

그녀는 스스럼없이 한 남성의 옆자리에 앉았고 빤히 바라봤다. 남성의 몸을 이모저모 살피는데 손가락으로 찔러 보기도 한다.

그러다 놀란 눈치로 손을 도로 돌려놨다.

"아, 용서해 줘요. 신기해서 나도 모르게 손이 갔네요. 소문으로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 아프진 않아요?"

처음 보는 사이였음에도 여성은 전혀 낯을 가리지 않고 다가선다.

남자는 그녀를 무시할 수 있었으나, 그는 함부로 남의 호의나 선의를 거절할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겉으론 썩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썩은 건 아니거든요."

"하루빨리 팔이 원상태로 돌아왔으면 좋겠네요. 그러면 지금보다 더욱 활약해서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을 텐데."

남성은 옅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의 웃음에는 많은 사연이 담긴 것처럼 보였다.

아카데미아로 향하는 마차 안.

두 용사는 간간이 대화를 이어 가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녀도 용사의 신분으로 나름 다사가 유망한 인재였지만, 옆에 있는 남자는 차원이 달랐다.

이웃사촌의 이름은 몰라도 그의 이름은 모두가 다 알 정도로 유명 인사.

그런 사람이 어쩌다가 아카데미아에 멘토링을 하러 가는 것일까.

여자는 혼자서 끙끙대며 고심하다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도 시선을 느끼고 창문 밖의 풍경을 바라보던 걸 그만둔다.

"헤일리온. 당신 같은 사람이 어째서 이런 일을 하러 가는 거죠? 멘토링의 뜻이 훌륭하긴 하지만, 당신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구하고 있어야 하지 않나요?"

악의가 없는 말이다. 헤일리온도 그것을 알았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다가 답변을 내놓았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이 편이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네…?"

그는 바로 부가적인 설명을 해 주지 않았다. 마치 훗날, 모든 게 자연스럽게 이해되고 연결되리라는 것처럼. 대답을 뒤로 넘겼다.

헤일리온은 창밖을 바라봤다.

마차가 빠르게 달려 주변의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지나친다.

나무도, 돌도, 사람도, 집도, 풍차도.

생김새는 각기 달랐지만 빠르게 지나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모든 게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부자연스러운 건 눈에 띄기 마련이죠."

헤일리온은 그렇게 말하고선 살짝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꺼림칙하거나 어색하지 않고, 순리에 맞듯 평온했다.

36화

최근 아카데미아가 소란스럽다.

재학생들은 물론이고 교수들도 술렁거리며 입을 열기 바쁘다. 아카데미아 장내가 이토록 활기를 띠는 건 축제 에피소드는 돼야 볼 수 있을 줄 알았으나.

단 한 사람의 등장으로 그 계절이 당겨졌다.

성마법사(聖魔法師) 헤일리온.

마법의 경지로는 대마법사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으나 그는 뛰어난 마법사임과 동시에 천재적인 신성술사였다.

과장을 좀 보태서 자신의 왼팔 말고는 그 어떠한 저주나 상처라도 해제하거나 치유하는 게 가능하다고 알려진다. 마치 성녀처럼.

그리고 또 놀라운 사실은 30대라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현 용사랭킹 7위.

마흔이 되는 5년 후에는 무려 2위까지 치고 올라갈 인물이라는 것.

이 랭킹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냐면.

용사랭킹은 한 자릿수부터 그 가치와 힘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며 헤일리온을 제외하곤 십몇 년 동안 변함이 없었다는 점이다.

가령, 현 용사랭킹 11위의 인물이 4명 정도가 있어야 9위와 맞먹을 수 있고, 그만큼 기존의 강자들이 자리를 독식하고 있어 변화가 없는 게 용사랭킹 한자리 대였다.

그 정도로 굳건했던 용사 피라미드 붕괴의 도화선이 된 인물이 헤일리온.

그의 발자취를 따라 말 그대로 폭풍 성장을 하며 추격하는 게 소설의 주연들.

이후의 전개에 주연들이 이 랭킹에 등단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보면 그가 길을 열어 뒀고 밀어줬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즉, 헤일리온은 스토리 배경에 있어서도 중요한 인물이라 부를 수 있겠다.

⎯네, 바르간 님. 헤일리온은커녕 외부인이 저희 마을에 들른 사례가 없습니다. 예… 예, 그렇고말고요.

약간의 잡음이 섞인 나이 든 남성의 목소리.

수정구에 비치는 노인의 형상이 다소 긴장한 모습으로 말하고 있다.

각도도 살짝 어긋나 한쪽으로 치우쳐져 보이는 그. 몇 번이나 통신했음에도 아직 익숙해지지 못한 모양이다.

"그래, 알겠다. 특이 상황이 발생하거나 외부인이 방문한 흔적을 발견한다면 즉시 보고하도록."

⎯다른 누구도 아닌 바르간 님의 명인데 당연히 그래야지요. 이 바트. 비록 늙은 몸이지만 신속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리시아의 트라우마를 극복시켰던 배경, 루비드 마을의 촌장 바트.

사실 그의 이름을 알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그전까지는 이름도 모른 채 그냥 촌장이라고 불렀으나 그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나서는 이름으로 불러 주고 있다.

충신 브람의 보고를 통해서 들었지만 바트는 내가 미리 지시한 대로 잘 행동하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아카데미아에 있어야 하니 자주 방문해 확인하지는 못하겠지만.

진척 상황에 대해서는 브람과 바트를 통해 착실히 전달받고 있다.

⎯바르간 님의 은혜로 루비드 마을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저, 바트도 하루가 다르게 건강을 되찾고 있고요. 이것도 전부 위대하신 슈겐하⎯

나는 통신을 끊고 자리를 옮겼다.

바트는 다 좋은데 한번 대화를 시작하면 잡설이 너무 길다. 부디 수명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수다처럼 길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새로운 적합자를 찾기 귀찮으니까.

"루비드 마을과 연관돼 있을 거라 추측했는데 아닌 건가…."

헤일리온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른다.

어떤 경유로 왔는지도 모른다.

알면 좀 더 확실하게 움직일 수 있을 텐데 안개에 싸여있으니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

때문에 루비드 마을의 촌장에게 연락해서 헤일리온이나 다른 외부인이 방문한 이력이 있는지 확인하고 알려 달라 했으나, 아직 목격담은 전해지지 않는 상황이다.

가장 높은 확률이 그곳이었는데.

그게 아니라면… 다른 곳에서인가.

헤일리온이 아카데미아에 오게 된 원인으로 추정되는 대표적인 사건이 두 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루비드 마을.

다른 하나는 알리시아의 구매.

좀 더 기다려 봐야겠지만 현재로서는 루비들 마을이 가장 유력한 사건.

그 외는 알리시아를 일찍 그 시골에서 꺼내 온 것이 원인일 수 있다.

본래 그녀의 집에 들른 교회의 순례자에 의해서 알리시아의 재능이 드러나는 스토리. 그녀의 공백으로 인해 미래가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당연히 정확한 과정의 설명이나 확정은 할 수 없다.

슈겐하르츠의 재산과 인맥이라고 하더라도 세상만사를 훤히 들여다볼 순 없는 노릇이다. 모든 사람에게 감시를 붙일 수도 없지 않겠는가.

'헤일리온은 모종의 연쇄 작용으로 인해 이곳에 왔고. 현재 그 과정을 알 방법은 없다.'

또한 원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결과는 그의 눈에 들어 멘토 멘티의 관계가 되는 것.

멀리 두는 것보단 가까이 두는 것이 더 많은 정보를 얻는다는 사실은 당연지사. 그렇다면, 기존의 계획은 변경 없이 진행한다.

우선 지금처럼 새롭게 추가되는 정보를 분석해 그의 의중 파악을 이어 가고, 클래스전에서 놀라운 성과를 보인다.

이 안이 가장 적합하다.

'과연 어떻게 될까.'

아군은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그가 나에게 있어 아군이 될지 적이 될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리스크는 언제나 있었고,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패에서 꺼림칙한 건 존재하지 않는다.

리스크는 크지 않다.

반면 성공했을 때 떨어지는 보상은 막대하다.

하지 않는 게 바보 천치인 셈.

그렇다면 제대로 판을 짜 보자.

자, 이번 에피소드에서 나를 방해할 인물은 누가 있나.

입학 성적 5위, 열정과 패기가 넘치는 남자, 오셀 반테올로 레온인가?

혹은 입학 성적 4위, 나를 극도로 싫어하는 약혼녀, 포트레트 트로아 에리카?

그것마저 아니면 입학 성적 3위, 다렉 연합국 소속의 성녀(聖女) 디피엘리아?

누구 하나 만만한 상대가 없으나 가장 크게 위협이 되는 건 이거군.

⎯탁!

나는 말 하나 들어선 게임판 위에서 전진시켰다. 하얗게 칠해져 검을 들고 있는 남자를 형상화한 그것은 왕관을 쓰고 있다.

마치 이 게임의 주인공인 것처럼 주변의 말들을 초라하게 만든다.

그래, 이거다.

목표는 정해졌다.

방안도 정해졌다.

현재 국면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건 이 녀석. 그리고 그걸 막는 수단으론.

⎯탁.

하얀 말을 상대하도록 검은 말을 마주 시킨다. 검은 말은 하얀 말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길을 방해했다.

하얀 말이 원하는 목표물에 다다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그 검은 말과 싸워야 하는 형국이다.

뒤에서 보호를 받는 다른 검은 말은 움직이지 않은 채 상황을 보고 있다.

미리 장면을 떠올리니 웃음이 새어 나온다.

자, 이렇게 되면 제법 볼만하지 않겠나?

어떻게 반응할지 어서 보고 싶군.

당황하는 그대의 얼굴이 벌써 눈에 아른거린다.

안 그런가?

성스러운 왕가의 피를 이어받다가 만 왕자여.

부디 나를 실망하게 하지 말아다오.

"최초의 주인공, '오셀 뷔 아르텔리온'이여."

***

'원래도 지독하신 분이셨지만, 최근에는 더욱 독해지셨어. 저러다 진짜 몸 상하는 건 아닐는지….'

남자 기숙사 A동의 한 방문 앞.

한 남자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어물쩍거리고 있다.

그의 이름은 오셀 포른 팔론.

오셀 왕국, 포른 백작가의 자제다.

'이를 어쩌면 좋담. 이만 노크를 하고 들어가야 하나? 하지만… 방해를 했다고 꾸중을 들으면 어떡하지? 안 그래도 귀찮게 구는 걸 싫어하시는 분인데.'

팔론은 손톱을 질겅질겅 씹으며 고민에 빠져 있다. 이러고 있는 것도 벌써 20분째.

이제 슬슬 어느 쪽으로든 결정을 지어야 하건만, 매사에 지나치게 신중한 팔론에게 결정을 한다는 행위는 쥐약이었다.

그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긴 다른 학생들의 눈초리가 이따금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다가 신고당하는 건 아닌가 걱정됐다.

"그래, 노크하고 들어가자! 오늘 식사도 하지 않으셨으니 분명 시장하실 게 분명해."

한 손으로 들고 있던 식판 위에는 각종 빵과 채소, 고기로 어우러진 균형 잡힌 식단이 준비되어 있었다.

영양소는 확실하게 챙길 수 있을 것 같다.

팔론은 목을 가다듬었다.

몇 번 온 적은 있었지만, 신분의 차이 때문인지 매번 긴장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드디어 노크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고.

⎯똑, 또똑.

"왕자님, 아르텔리온 왕자님! 저 팔론입니다. 안에 계십니까?"

"...."

고요.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았다.

팔론은 당황했다.

설마 안에 없는 것인가?

평소에는 대꾸라도 해 주는데 오늘은 아예 묵묵부답이라니.

팔론은 다시 노크하며 아르텔리온을 불렀고 돌아오는 대답은 여전히 정적뿐이었다.

잠시 모든 행동을 정지한 팔론은 무의식적으로 손잡이를 돌렸다. 사고가 뒷받침된 행동은 아니었다. 사람의 본능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인 것이다

"열려 있잖아…?"

팔론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틈새를 바라봤다. 안은 불이 켜져 있지 않아 어두컴컴하다.

"왕자님…? 계신지요…."

다소 줄어든 목소리로 불러 보지만 역시나 아르텔리온의 대답을 들리지 않았다.

"음…?"

하지만,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마나.

아주 농밀하고 정교한 마나의 기운.

기본적으로 본체를 이루고 있는 이 까칠한 느낌은 해당 인물의 성격을 제대로 드러낸다. 이건 아르텔리온의 마나다. 오랫동안 그와 함께한 팔론이라면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달라. 품고 있는 힘이라고 해야 하나. 존재감이라고 해야 하나. 뭔가가… 이, 이건… 이건 설마…!!"

⎯챙그랑!

순간 안구가 커다랗게 확장된 팔론은 자신이 들고 있던 식기가 떨어져 깨지는 것도 모르고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였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한 왕국 왕자의 방에 허락도 없이 발을 들이다니.

그러나 지금의 팔론에게 그런 것보다 중요한 사항이 있었다. 혼나는 건 나중에라도 실컷 혼나면 된다.

이 정도의 마나.

이 정도의 압력.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느껴지지 않았던 완성된 힘.

"와, 와, 왕자님 드디어…!!"

팔론이 도착한 방에서는 붉은 마법진 위에서 가부좌를 한 채. 간신히 숨을 헐떡이고 있던 아르텔리온이 있었다.

그의 머리, 옷, 주변의 바닥까지.

온통 땀으로 범벅이다.

아르텔리온이 혼자서 뿜어내는 열기와 강렬한 마나의 기운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아, 아아… 아아아! 왕자님!"

팔론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경외의 눈물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차석으로 입학한 아르텔리온은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상당히 분했음이 틀림없었다.

안 그래도 부족했던 수면 시간을 무리해서 더욱 줄여 잠들기 직전까지 검을 휘두르거나, 어릴 때부터 새겨져 있던 예법을 잊고 식사 시간에도 마법서를 읽으며 밥을 먹는 등.

최근의 그는 보고 있는 팔론의 마음이 쓰라릴 정도로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이었다.

"팔론…인가."

방 안이 어둡다곤 하나 바로 눈앞에 있건만 아르텔리온은 팔론을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그 정도로 몰입했고, 모든 힘을 쏟아 냈다.

"예, 예예! 맞습니다. 왕자님, 팔론입니다. 끄흐으윽! 와, 왕자님… 겨, 경하, 경하드리옵니다. 드디어… 드디어 완성을…!!"

팔론은 아르텔리온의 손을 꽉 잡아 줬다. 그의 손에 불이 난 것처럼 뜨겁다.

아르텔리온의 입가가 움직인다. 그가 미소 짓는다. 느껴지는 감정은 만족.

그걸 본 팔론은 더욱 폭포수처럼 눈물을 흘려 댔다.

'왕자님이 본인의 성취로 만족을 표하신 게 얼마 만이란 말인가! 3년? 5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래전의 일일 것이다!'

"…드디어 도달했다. 드디어… 「붉은 오러」를 사용하는 경지에 이르렀어."

푸른빛을 띠는 일반적인 오러의 위 단계인 붉은 오러. 말 그대로 둘렀을 때 붉은빛이 발하는 오러다.

사람들은 말한다. 붉은 오러는 천재라고 칭송받는 검사들조차 소수만이 가능한 절대적인 재능의 영역.

그 단계에 이른 사람을 단순히 천재라고 부르는 것은 비하하는 것과 같다.

그런 경지를 1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올랐다. 팔론이 이토록 눈물을 흘리며 반응을 보인 까닭은 그래서였다.

아르텔리온은 천성적인 검사.

검사에 있어서 오러란 검이나 목숨 정도로 중요한 것.

오늘은 역사에 이름을 새길 기념비적인 날이다.

"그야말로 검제의 재림! 역시 왕자님은 검제의 운명을 타고난 몸입니다!"

클래스전의 전날 밤.

최초의 주인공, 아르텔리온은 지금 이 순간.

'검제'의 이름에 한 발자국 가까워졌다.

37화

클래스전은 부유섬인 아카데미아 내부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카데미아가 아무리 넓다고 해도 클래스전, 기말고사 등 모든 시험이 치러질 수 있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크기는 아니다.

거주 공간이나 생활공간, 교육 공간이 차지하는 면적만 해도 엄청난 부지가 필요로 하니까.

따라서, 현재 우리는 이동 중이었다.

클래스전이 치러질 섬으로 향하는 대형 비공정.

이 아카데미아 전용 비공정은 고급 크루즈 여행에 사용하는 대형 선박의 크기 정도 되었다.

1학년 전체와 교수 몇몇, 참관하러 온 용사들을 태우는 것쯤은 가뿐했다.

우리가 현재 있는 곳은 그 대형 비공정의 수백 개가 넘는 방 중 하나. 원형 테이블을 앞에 두고 다섯 명의 사람이 자리에 앉아 있다.

"쯧."

나를 보자 면전에서 혀를 차는 약혼녀님.

주변에 티 나지 않게, 그저 기분이 좋지 않아서 그런 것처럼 넘기지만 나는 정확히 목격했다.

자못 불쾌해 보이는 표정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역시 1반의 리더는 너냐는 뜻이다.

자꾸 튕기기만 하면 매력이 없는데 말이지.

"결국, 상정했던 사람들이네. 입학 성적순으로 리더를 맡았어."

그녀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에리카는 여기에 있는 인물 중 하나를 제외하곤 말했다.

그녀의 말은 8할이 정답이었다.

지금 이곳에 각 반의 대표로 이 자리에 둥그렇게 앉아 있는 리더들은 입학 성적 1위부터 5위까지의 멤버였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3반의 리더는 레온이 아니군. 뭐,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만."

내 말을 들은 단발머리의 남자가 누군가를 떠올리더니 골치 아프다는 듯 미간을 짚었다.

그는 입학 성적 5위, 오셀 반테올로 레온 대신 리더를 맡은 남자다.

이름은 벨.

오셀 왕국의 평민 출신이다.

"…생각하시는 대로예요. 여러 가지 의미로 그 사람은 리더에 적합한 인물은 아니라 제가 맡게 됐어요."

크게 한숨을 내쉬는 벨.

방금 말했듯 벨이 이렇게 고통받는 것도 이해가 충분히 되는 바이다.

일반적인 생각으론 3반의 대표로 이 자리에 앉아 있어야 했을 사람은 그가 아닌 레온이었을 테니까.

그러나, 오셀 반테올로 레온은 머리를 쓰거나 사람을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데 적합하지 않은 인물.

그가 가진 무력은 뛰어나지만 그만큼 머리가 부족하다고 해야 하나.

열정과 패기, 정의감만으로 살아가는 남자. 그게 레온이다.

그 때문에 3반의 담당 교수인 파울라가 레온을 리더로 추천하지 않은 것이다.

"모쪼록 저는 그저 평안하게 이번 클래스전이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우승까지는 욕심내지 않으니 꼴찌만 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우울하다는 듯 힘없이 말을 뱉는 벨.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패배했다는 마인드를 우리에게 어필한다.

과연, 소설에 적혀 있던 대로 자신의 약점을 이용할 줄 아는 녀석이다.

간접 경험과 직접 경험의 공통분모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쾌감을 느끼고 있자. 입을 열지 않고 있던 성녀(聖女) 디피엘리아가 물었다.

그녀는 입학 성적 3위로, 현재 5반의 리더이다.

"바르간. 신학생회를 만들었다고 들었어요."

"그걸 모르는 재학생이 있었나?"

이름을 일부러 자극적이고 눈에 잘 띄는 거로 해서, 관심이란 관심은 죄다 받게 하였는데 모르면 섭섭하지.

"듣자 하니 학생들과 함께 성장하는 게 주제라고 하더군요. 성과도 착실히 진척하고 있고."

"돌리지 말고 본론을 말해라. 곧 이번 대항전의 종목이 발표된다."

성녀라는 타이틀 때문인가.

착한 아이 증후군에 걸린 연놈들은 이게 문제다.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도 되는 일을 주위의 시선을 신경 써 매번 빙빙 둘러 간다.

"현 학생회장이 슈겐하르츠 트로아 라인카르벤. 당신의 형제죠. 그런데도 신학생회라는 명칭을 사용했다는 건… 형에 대한 견제인가요?"

그녀의 얼굴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의문 속 잔잔한 경계 비스름한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눈은 뜨지 않은 채였다. 그녀는 눈을 뜨지 않으려 한다. 초점이 맞지 않기에.

그녀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 다리도 움직이지 않는다.

성녀의 힘을 너무 많이 사용해 버린 탓이다.

"...."

그녀의 발언에 왕자 주인공님인 아르텔리온도 관심을 보였다.

그와 한자리에 있는 건 저번 입학시험 이후로 처음인데 여전히 말수도 적고 독고다이인 놈이다.

"오호, 내가 첫째 녀석을 위해 그런 귀찮은 일을 할 사람이다?"

"아무리 사이가 좋아 보이는 형제더라도 수면 아래에서는 서로 독을 먹이려고 하는 게 귀족 사회라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참 좋은 거 알려 주는 친구를 뒀군그래."

에리카를 바라보자 그녀는 '그래서 내가 알려 줬으면 어쩔 건데?' 같은 생각을 담은 눈으로 맞대응한다.

상대가 누구든 굽히지 않고 고양이처럼 날카로운 시선을 쏟는 건 에리카의 특징이다.

"슈겐하르츠 내에선 선조부터 내려오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자기 뜻대로 하고 싶은 걸 해라. 다만, 가문의 구성원에게 피해를 줄 경우는 제외한다.' 아주 바람직한 관습이지."

"슈겐하르츠가… 상상했던 대로 독특한 가문이었군요. 하여간 그럼, 당신이 하는 행동은 학생회장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이걸 말하고 싶은 건가요?"

성녀 디피엘리아의 눈꺼풀의 틈새가 살짝 열린다.

눈이 보이진 않지만 보였을 적 몸에 새겨져 있던 습관이 나온 것이다.

그녀가 내 눈을 보고 있지는 않겠지만, 상대에 대하는 예의에 맞게 눈을 마주했다. 그녀가 원하는 대답은 못 해 주지만.

"글쎄."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에 있는 이들은 3반의 벨을 제외하면 모두 학생회 소속이다.

내가 어떤 말을 하듯 장남의 귀에 들어갈 것이 뻔한데, 손해밖에 없는 장사를 뭐 하려 하겠는가.

"나에 대한 것보다. 클래스전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편이 건설적이지 않겠나. 아, 그게 아니면… 이번 무대의 요주의 인물인 나를 탐색하는 중이었나?"

"오만하기는. 아직 어떤 주제인지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우리가 너를 경계할 거라 생각하는 거야?"

에리카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찌른다.

말은 저렇게 해도 나의 성격이나 실력을 여기에 있는 어떤 이들보다 잘 알고 있는 게 에리카다.

"가끔은 솔직해져도 괜찮다 에리카."

"...."

원작에서도 바르간을 막기 위해 작당 모의를 해서 1반을 거세게 몰아붙이는 게 그녀였다.

덕분에 바르간과 같은 반인 리암 일행이 여러모로 고생하며 대중들에게 능력을 보여 주는 게 가능했지. 에리카는 예상외의 리암과 알리시아라는 복병의 출현에 놀라기도 했고.

해당 장면의 에리카를 실제로 보고 싶다는 마음이 간질간질하지만 아마 힘들 것이다.

기존의 틀을 벗어나서 장면 자체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대로 진행된다고 해도 문제는 내가 그 자리에 없을 거라는 거다. 다른 곳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겠지.

녹화 기능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갑자기 벨은 주위를 둘러봤다. 아카데미아 임직원들의 동태를 살피는 듯하다.

"그나저나 준비 시간이 꽤 걸리네요. 종목 선정에는 헤일리온 일행도 참여하는 건가요?"

"그건 아니다. 교회에서 파견된 용사들은 어디까지나 방관자이니까."

아무리 용사랭킹 10위 안의 인물이 왔다고 해도 기존의 체계를 허물지는 않는다.

헤일리온의 등장에 눌려서 그렇지 아카데미아는 권위 높은 배움의 장이다. 교수들과 학생들이 느끼는 프라이드는 어마어마하다.

요컨대 굽신거리면서 눈치나 살피는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설령 용사랭킹 1위가 멘토로 참여한다고 해도 종목 선정에 기여하게 두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곧 파울라 교수가 촐싹거리며 종목을 알려 주러 올 것이다."

우리가 지금 이 원형 테이블에서 대화를 가장한 일종의 기 싸움과, 상대에 대한 정보를 끄집어내고 있을 때.

아카데미아의 임직원들은 대항전의 종목을 선정하고 무대의 준비를 하고 있다. 미리 섬에 도착해 있는 인원들이 뼈 빠지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종목이 당일 날까지 정해지지 않은 것은 비밀성을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혹여나 특정 반의 담당 교수가 자기네 반에 미리 정보를 뿌리면 공평성에 어긋나지 않겠는가.

"하하… 진짜로 그러네요."

벨은 실없는 웃음소리를 냈다.

멀리서부터 교수 일행이 다가오고 있는데 그 최선두에 파울라가 유독 돋보인다.

발걸음이 촐랑거리는 게 자신을 향한 시선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호호호, 다들 오래 기다렸지~? 준비가 끝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지 뭐야~."

금세 테이블로 도착한 파울라는 언제나처럼 괴랄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곤 오래 기다린 우리를 위한 배려인지 바로 중요 사항을 밝히려 든다.

"이번 클래스전은 종목이 뭐냐면 말이지…."

어떤 종목이 나올까.

내가 알고 있는 스토리대로 진행되는 게 가장 유리하겠지만. 헤일리온의 건이 입증하듯 불변의 미래란 없다.

원작에서는 '숨은 왕 잡기'라는 이름의 종목이었는데. 과연 이번에는 어떨지.

파울라는 입으로 두구두구 같은 소리를 내며 시간을 끌다가 드디어 효과음을 멈췄다.

이윽고 말한다.

"이번 종목은 '숨은 왕 잡기'라는 게임이야!"

"숨은 왕 잡기…?"

"우선 설명을 들어 보도록 하죠."

주변의 이들은 자세한 설명을 요구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대강 짐작은 되어도 정확히 듣는 것과는 또 별개이니까.

하나, 나는 저 무리에 속할 수 없었다.

'숨은 왕 잡기라.'

속된 말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지금 이 상황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가 하나 있다. 이 세계에 오고 나선 한 번도 말한 적도, 생각한 적도 없는 단어다.

그래도 상황이 상황인 만큼 언급해 보고자 한다.

비록 천박하지만 천박하기에 사람의 원천적인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기에 용이한 것일 터.

아무튼,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이렇다.

개꿀.

***

'역시 아카데미아의 비공정. 내부가 무슨 왕궁처럼 으리으리하네.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미세하게 주황빛이 감도는 연갈색 머리의 여학생은 이리 저리를 살피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대충 봐도 고가의 물건들이 반짝이며 그녀의 마음을 현혹했다. 그녀에게 귓속말하는 것만 같다.

자신을 훔쳐 가라고.

아카데미아에 입학한 이상 입학금, 기숙사비, 최저생계비는 지급된다. 슬럼가 출신인 그녀가 살아가는 데 불편함은 없다. 오히려 지금까지 누려 왔던 그 어떤 환경보다도 뛰어날 정도니까.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당장 주변을 둘러보아도 귀족들은 자신들의 교복 외에 각종 귀중품이나 사치품을 지닌 채 복도를 걸어 다니고 있다.

아무리 아카데미아에서 자유와 평등을 추구한다고 해도 본래 타고난 이 계급의 격차는 확실하게 존재했다.

과거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호사를 누리고 있었지만, 이미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식견이 생겨 버렸다.

하나만 훔쳐서 팔아도 돈이 얼만데 탐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진짜로 팔면 퇴학당할 테니 할 자신은 없지만.'

걸리지 않는다면 고민할 필요 없이 실행에 옮기겠지만 여긴 그녀가 살아온 슬럼가가 아니다. 무조건 걸린다. 항상 술에 취해 있던 옆집 아저씨의 종잣돈을 훔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저건…."

여학생은 걸음을 멈추곤 옆으로 비켜섰다. 그녀만 움직인 것이 아니다. 주위의 많은 이들이 특정 인물이 길을 나서는 것을 막지 않기 위해 피하는 듯하다.

평민은 기본이었고, 그녀의 시선으론 돈이 많아 보이는 귀족의 자제 또한 껄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러선다.

그렇게 생긴 길을, 한 귀족과 그의 시종으로 유명한 여자가 지나간다.

그녀는 지금과 비슷한 상황을 본 적 있었다. 과거, 슬럼가에서 살 적에 그 인근의 우두머리가 지나갈 적에는 모두가 옆으로 비켜서며 고개를 조아렸다.

'고개를 조아리는 것을 빼면 그때랑 다른 게 없네. 귀족 사회도 결국 사람 사는 건 똑같다는 건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자 그녀의 바로 앞을 그가 지나친다. 그녀는 슬쩍 눈을 올려 남자를 바라봤다.

절대 눌릴 일 없을 것 같은 오뚝한 콧날. 투명한 피부. 은은히 나는 고급 향수의 향까지.

수석 입학생.

슈겐하르츠 트로아 바르간이었다.

그녀와 똑같이 입학했어도 모든 것이 달랐다. 지위, 능력, 명망. 태초부터 모든 걸 타고난 자.

바르간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길을 떠났다. 그저 복도를 거닐고 있을 뿐이었는데 그 위압감이란 대단한 것이었다.

'뒤에 따라다니던 시종도 장난 아니지. 이 세상 외모가 아니야.'

학기 극초반에 바르간의 재력을 듣고 나선 그에게 다가가 볼까 했으나 바로 포기했다. 그와 항상 붙어 다니는 시종이 격이 다른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도 자신이 살던 근방에선 외모 때문에 변태적인 남자들이 꼬일 정도였으나 그 시종 앞에서는 그림자 끝이라도 내밀 수 없었다.

그녀는 그런 미인을 부리며, 마음대로 살아갈 것만 같은 바르간이 부러웠지만 질투를 하진 않았다.

감이 있어야 비교를 할 텐데.

워낙 멀리 있어 자신과는 감히 비교하는 게 부끄러울 정도의 차이.

그녀와는 연이 전혀 없는, 다른 세상의 인물로만 여겨졌다.

'어…?'

그 순간까지는 말이다.

자신의 객실로 돌아온 그녀는 겉옷에 무언가가 있음을 발견했다. 분명 아무것도 없었는데. 마치 당연히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녀는 옷 안에 들어 있는 편지 봉투를 꺼냈다.

박힌 인장과 종이의 재질만 봐도 알 수 있다. 이건 고가의 물건이다.

그녀는 봉투를 코에 가져다 대며 냄새를 맡았다. 봉투에서는 아주 미세하게 고급 향수의 냄새가 났다.

'일단, 열어 볼까.'

발신자가 누구인지, 수신자가 누구인지는 겉에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오랜 손버릇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움직인 것이 아니라면 이 편지는 '의도적'으로 그녀의 품으로 들어온 것일 터였다.

그렇게 조심스레.

봉투를 열자 놀랍게도.

"뭐, 뭐야?!"

보랏빛 연기와 함께 봉투가 사라지며 그녀에게 귓속말이 들렸다. 주변에 그녀 말고는 아무도 없었지만 바로 옆에서 속삭이듯 작게.

당황해하던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이어지는 말을 들었다.

제대로 듣는 건 처음이었지만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주인은 그녀에게 제안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달콤해서 놓치고 싶지 않은 그러한 제안을.

"하, 하하. 이게 무슨 일이래."

담겨 있던 음성 마법이 끝나자, 그녀는 앞머리를 짚으며 조소했다.

침대에 힘이 풀리듯 앉으며 몸을 잠식해 가는 환희를 받아들였다.

스스.

빛을 머금어 뿌옇게 잔재하던 보랏빛 연기는 모습을 바꿨다.

그리고.

⎯팅그르르.

금화 한 닢은 바닥으로 떨어져 굴렀고.

그녀의 구두 언저리에서 쓰러졌다.

38화

면적 110㎢.

대한민국 기준, 영종도 정도의 섬이다.

이 섬은 아카데미아의 소유이며 외부인의 출입을 절대적으로 금지한다.

재산을 침범하는 행위이기 때문이 아니라, 일반인이 출입하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해서다.

매년 이루어지는 클래스전의 장이자, 각종 실험이 이루어지는 이곳은 안전구역이라 불리는 영역을 제외하곤 일반인은 발을 딛는 순간 끝이라고 보면 된다.

드글거리는 마물, 위험천만한 함정들.

일반인이 들어온다면 곧바로 다리 한쪽이 잘리거나 차가운 주검이 되어 까마귀의 먹이가 되어 버릴 것이다.

오로지 용사만을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섬. 세상을 구할 용사를 육성하기 위해 준비된 고통의 장.

그게 에센트릭 아일랜드(Eccentric Island)였다.

클래스전의 종목은 매년 변경되는데 마물 무리의 공격을 막는 공성전, 서바이벌 등 그 종류가 다양했다.

이번 연도의 종목은 숨은 왕 잡기.

말 그대로 숨어 있는 왕을 찾아 등을 터치하면 이기는 간단한 규칙이다.

왕은 반에 한 명씩 지정할 수 있으며, 게임이 시작되고부터 10분 이내에 정하지 않으면 자동 탈락이다.

학생들이 시작점은 반마다 정해져 있는데, 섬 끝자락 부근에 존재하는 각 반의 작은 성으로. 그곳을 '거점'이라 부른다.

거점은 제법 중요하다.

거점에 있는 동안 해당 반의 학생들은 저급 치유 마법, 마법 총량 확대, 위력 증가. 일종의 버프를 받게 된다.

반경 500m까지 그 효과가 미치며 섬 두 곳에 있는 중간 거점을 한 곳이라도 추가로 확보하게 된다면 그 효과가 중첩된다.

또한, 그 중첩된 효과는 중간 거점에서도 효력이 발생하니 거점은 이번 종목의 변수라고 볼 수 있다.

어렵지 않은 기본 골격.

금지 사항 또한 단순하다.

제한되는 행위로는 신체의 절단이나 살인 같은 사람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되는 폭력을 행하는 것이 있다.

이 말은, 그 외의 모든 행위는 허용된다는 말이기도 했다.

***

"플럼은 영상 마법을 준비해라. 마력은 걱정할 것 없다. 내가 보충해 줄 터이니 네가 할 수 있는 최대 출력으로 하면 된다. 세레나, 너는 방어대(防禦隊)이니 서둘러 나갈 채비를 갖춰라."

섬에 도착하고 막이 오른 직후.

주변이 번잡하다.

나는 미리 나눠 둔 역할대로 인원들을 통솔했고, 그들은 별 불만 없이 분주하게 명령을 따랐다.

각자 자신이 맡은 일을 수행하기에 바빴다.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던 불안감이나 불만 같은 부정적인 기운이 감돌 새도 없이 몸을 바쁘게 움직인다.

이런 와중, 한 남자가 나에게 말을 걸기 위해 다가온다. 무시할까 하다가 필요한 일이라 들어 주었다.

"왜 그러느냐. 리암. 변이 마려운 강아지처럼. 할 말이 없으면 거기서 비켜라."

갑작스레 쏘아붙이며 말했으나 리암은 개의치 않은 건지 익숙해진 건지 꿋꿋이 자신의 소견을 드러낸다.

대충 무슨 말을 할지는 알고 있다. 밝히고자 한다면 신속히 진행해 줬으면 한다.

"나를 방어대에 넣어 줘."

역시.

"알겠다. 그리고 들어간 김에 네가 방어대의 머리를 맡아라."

"뭐…?"

"뭐고 자시고 할 시간이 없다. 애초에 너를 방어대에 배정할 생각이었으니까. 더 할 말이 없다면 세레나에게 나머지 인원의 리스트를 적어 줬으니 모아서 곧바로 출발하도록 해라."

"어, 어어… 알겠어. 중간 거점으로 예상되는 지점 말이지? 바로 준비할게."

예상되는 지점이라고 굳이 말하는 게 우습다. 자신이 해당 위치에 대한 정보를 알지 못한다고 강조하는 꼴인데.

리암의 이번 스토리 전개를 알고 있는 나한테 있어선 같잖은 양상이었다.

"아, 가기 전에 이거 하나만 물을게."

"바쁘니까 짧게 해라."

"알리시아 씨는 방어대 인원인 건가?"

"하여간, 여색에 미쳐 가지곤."

"그런 게 아니라…!"

"가서 리스트를 보고 직접 확인해라. 변동 사항은 없으니까."

여색에 미쳤다고 말했지만, 리암이 알리시아와 함께하는지에 대해 물은 것은 나름의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리암과 알리시아가 처음으로 재능을 독자들에게, 그리고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수많은 이들에게 피력한 무대가 1반 근처에 있는 중간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리암이 인지하고 있는 내용은 자신을 제외한 알리시아의 독무대였겠지만 나에게는 다르다.

두 사람은 거점의 효과와 더불어 남들보다 빠르게 성장한 모습을 자랑스럽게 보여 줄 수 있었다. 나도 그 장면을 직접 읽었었고.

"알겠어. 이번엔 네가 리더니까 순순히 따를게. 하지만, 만약 알리시아 씨가 속해 있지 않다면 재고해 줘. 분명 네게 있어서도 도움이 될 거야."

리암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떠나갔다.

끝까지 열 받게 하는 녀석이다. 기존 전개에서 알리시아의 성장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 당사자가 누구인데 나한테 저런 망발을 하는지.

리암이 알리시아의 직업을 중간에 바꾼 실수를 벌인 건 아직도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 녀석이라 더 골치 아프단 말이지.

"…여, 영상 마법 준비가 끝났어요. 이제 어떻게 하면 될까요?"

더벅머리의 남성이 시선을 내리깐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전투 면에서는 핀과 좋은 승부를 보일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이지만, 특기인 영상 마법은 뛰어나다.

"고생했다. 저기 달려가는 쓰레기와는 다르게 너는 도움이 되는구나."

"예? 누구… 아, 리암 말하시는…."

"바로 시작하겠다. 영상 마법을 시전해라."

"아, 네넵! 바로 할게요."

플럼은 소환한 둥근 구체가 두둥실 떠오른다. 내 얼굴 바로 앞까지 올라와 작은 빛을 발한다.

이제 곧 영상 마법이 시작된다.

"아, 아."

나는 가볍게 입을 풀었다.

이딴 걸로 긴장을 하지는 않지만 어떤 행위든 준비 과정은 필요한 법이니까.

내가 생각한 대로 주연들이 잘 움직여 주면 좋을 텐데.

당황스러워할 우리 약혼녀님의 모습이 벌써 눈앞에 선하다.

***

⎯에리카, 제 목소리 들려요? 시야도 공유되고 있는 거 맞죠?

어깨에 앉아 있는 작은 새를 통해 에리카 안에서 디피엘리아의 목소리가 울린다. 현재 에리카가 보는 시야도 감각을 확대하면 두 개의 모니터를 보듯 두 가지의 시야를 볼 수 있다.

하나는 에리카 본인의 시야.

다른 하나는 디피엘리아가 공유해 준 다른 사역마의 시야였다.

"잘 들려. 잘 보이기도 하고. 지금 앞에서 손 흔들고 있지?"

⎯좋아요. 잘 보이는 모양이네요. 마침 4반과 5반의 거점이 가까워서 다행이지 뭐예요.

5반의 리더이자 성녀인 디피엘리아는 사역마를 다루며 식물, 동물과 교감할 수 있다.

동식물과의 교감 능력이 뛰어난 것은 그녀가 다렉 연합국 소속으로 인외(人外)에 속하는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그녀의 천성적인 성격의 덕도 컸다.

에리카의 어깨에 앉아 있는 새도 디피엘리아의 사역마.

같은 사역마 종의 다른 새들의 시각과 음성을 공유할 수 있으며, 타인의 신체에 접촉하고 있으면 접촉하고 있는 사람 또한 그 감각을 공유받을 수 있다.

⎯그런데… 서로의 합의하에 맺어진 동맹이라지만 찜찜하긴 하네요. 뭔가 치사한 것 같고.

"디피엘리아. 동맹은 규칙에 어긋나는 행위가 아니야. 할 수 있는 모든 전략과 전술을 내세워서 끝까지 살아남는다. 그게 클래스전인걸."

⎯맞아요. 약한 소리 해서 미안해요 에리카.

학생회 소속인 에리카와 디피엘리아는 친분이 있었다. 있다고는 해도 에리카가 남과 쉽게 어울리는 성격이 아닌지라 깊은 사이는 아니었으나 서로 대강의 인품이나 성질은 파악하고 있는 상황.

클래스전의 일정이 잡히고 에리카는 디피엘리아를 찾아가 동맹을 제안했다.

에리카가 5반과 연합을 이루고자 했던 이유는 한 명. 슈겐하르츠 트로아 바르간 때문이었다.

⎯성녀의 힘이 담긴 마력이 바르간에게 효과적이라는 거죠?

"효과적이야. 아무리 성녀의 힘이라도, 어중간한 마법이라면 생채기조차 내지 못하겠지만 디피엘리아는 고위 마법도 쓸 수 있잖아?"

디피엘리아가 에리카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에리카가 배반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도 이바지를 했으나, 가장 위협적인 인물, 바르간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다 에리카의 희귀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으니 그녀 입장에서 동맹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성녀의 힘에 취약하다니. 에리카의 약혼자는 굉장히 뭐랄까 특이하네요….

"귀신이나 악마가 아니냐고 묻고 있는 거지? 괜찮아. 말해도 돼."

물론, 바르간 자체가 성스러운 힘에 약한 것은 아니었다.

성수에 몸이 닿으면 녹는다든지 햇빛을 받으면 몸이 타오른다든지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녀석의 사역마는 대부분 암(暗)속성이니까. 녀석의 몸을 보호하는 그 그림자 녀석은 특히."

사역마 자체는 드물지 않지만 암속성은 개체 수도 적고, 가지고 있는 능력 하나하나가 위협적이다. 또한 적합 판정을 받기가 굉장히 어려워 남을 잘 따르지 않는 사역마가 암속성의 사역마.

바르간은 그런 까다롭고 위험한 놈들로 몸을 치장하고 있다.

가령 바르간에게 검을 휘둘렀다고 가정했을 때.

그가 별도의 조처를 하지 않더라도 바르간의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오는 그 괴상한 것이 대부분의 공격을 막아 준다. 그 방어력은 원소 계열 마법도 닿지 못하게 하니 상당히 성가시다.

그러나, 디피엘리아의 힘을 빌린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철통같은 방어막에 구멍이 뚫리며 분명 공격이 닿는다.

에리카에게 있어서 디피엘리아는 바르간을 상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르텔리온은 분명 거절했을 테니까."

⎯그 사람은 그렇죠…. 대화 자체를 별로 못 해 보기도 했지만, 동맹을 받아 줄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같은 학생회 소속이지만 아르텔리온과 손을 잡자고 제안할 순 없었다.

에리카도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걸 즐기지 않지만, 그는 그녀 이상으로 사람과의 연을 잇고 싶어 하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꺼리는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그래도… 아르텔리온은 슈겐하르츠를 신경 쓰고 있는 듯했어. 어쩌면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독단으로…."

⎯어? 에리카! 잠시만요. 저건 뭐죠?!

디피엘리아의 말에 에리카는 생각에 잠겨 있던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고 나서 그녀와 함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 고개는 다시 내려가지 않았다.

"뭐, 뭐야 저게…."

오히려 내려가는 것을 거스르듯 더욱 올라간다.

에리카의 귀에 특정 남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니, 에리카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이 소음은 클래스전이 진행되고 있는 무대. 전체에 퍼지고 있다.

『다들 순조로운 출발을 하고 있나?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니 감회가 새롭군.』

해당 영상 마법은 그 크기가 엄청나 주변의 모든 환경을 미니어처로 만들어 버렸다.

끔찍했던 입학식을 회상시키는 그의 음성과 모습. 영상 마법의 근원지는 강렬한 빛을 내뿜으며 확실하게 자신의 위치를 모두에게 피력하고 있었다.

"저 녀석이… 또…!"

이번 클래스전의 종목은 '숨은 왕 잡기'.

각 반의 왕을 한 명씩 선정하고, 자신의 반의 왕은 보호하며 다른 반의 왕들을 모두 잡으면 이기는 방식이다.

당연히 왕의 정체나, 위치는 숨겨야 하는 최우선 비밀 사항이며 들킨다면 바로 도망쳐야 한다.

반의 위치 또한 리더들이 모여서 대기할 때 공지된 것으로, 당시 각 반의 위치는 그 반의 리더들밖에 알지 못하는 정보였다.

『모두가 알고 있을 테니 내 소개는 생략하겠다. 지금 내 위치는 보이는 그대로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1반의 거점이지.』

바르간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저건 왕을 숨기기 위한 계략일 터이다.

왕, 즉 아카데미아에서 제공한 마법이 담긴 구슬을 깨트린 학생을 다른 곳에 안치하고 자신이 시선을 모아 왕을 안전하게 하기 위한 그런….

⎯에리카. 저 사람이 들고 있는 저거… 그 구슬이 맞는 거죠…?

"…!!"

『가품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도록. 여기에 제대로 인장도 박혀 있다.』

그는 모두가 잘 볼 수 있도록 구슬을 가까이하더니 곧 마력을 부여해 그것을 깨트렸다.

구슬이 깨지고 그가 지정한 부위, 손에 문양이 생겼다.

가품을 통한 연출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특기인 환각 계열은 영상을 통해 전달할 수 없을 텐데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이어지는 그는 말은 혼란에 빠진 에리카에게 결정적인 비수를 꽂았다.

『1반의 '왕'은 나, 바르간이다.』

39화

리암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현재 에밀리, 세레나 외 네 명의 학생들과 함께 1반과 3반의 가운데에 자리 잡은 중간 거점을 점령 중이었다.

점령에는 10분의 시간이 소요되어 아직 7분 정도가 남은 상황.

리암 일행은 다른 반에 비하면 상당히 짧은 시간에 중간 거점을 찾을 수 있었다.

중간 거점이 자연에 꼭꼭 숨어 있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무대의 배경이 크기가 있다 보니 찾는 것이 용이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가 소설을 읽었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장소였기에 대강의 위치나 특정 지형을 알고 있었다.

사진이나 그림은 없었기에 그의 생각보다는 시간이 소모되긴 했으나 충분히 빨랐다.

"중간 거점을 쉽게 찾은 건 좋지만…."

리암은 자신의 말을 전혀 받아들여 주지 않은 바르간을 떠올렸다.

알리시아를 붙여 주지 않을 거면 인원이라도 더 추가했으면 좋으련만 바르간은 방어대의 총원을 7인으로 잡았다.

리암의 기억으로는 4반과 5반의 연합군 중 선발대 인원은 총 11명이었다. 단순 수적으로도 부족하지만, 무엇보다 악역영애 에리카가 그 선두를 지휘하고 있는 게 문제였다.

전개대로라면 3반과 2반의 정찰대도 기회를 노릴 것이다. 거점의 버프를 받는다 해도 농성이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그의 생각대로라면 빙의자인 바르간이 이 정보를 모르고 있을 리 없으나 바르간은 더 많은 병력을 맡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바르간에게 해당 사실을 말해 인원 충원을 주장하는 건 맥락상 이상했다.

그가 빙의자가 아닐 경우, 이를 증명할 방법도 없고, 설령 진실이라고 해도 어떻게 정보를 얻었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하물며 바르간은 막무가내로 나간다고 해서 들어줄 위인도 아니었다.

"리암… 상당히 기운 없어 보이네?"

"아, 에밀리… 그냥 여러 가지로 좀."

리암은 멋쩍게 웃었고 에밀리는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에밀리는 최근 그녀가 느꼈던 솔직한 감정을 꺼내 보였다.

"요즘, 리암은 너무 고민이 많은 거 같아."

"내가?"

"응. 아카데미아 생활이 힘들어서 그런 거야?"

"...."

리암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다가 눈을 슬쩍 올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약간의 장난스러운 얼굴은 잊지 않았다.

"지금 나 달래 주려는 거야?"

에밀리는 리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하늘로 고개를 옮겼고, 발로 벽을 가볍게 툭툭 건드렸다. 양손은 뒷짐을 지듯 뒤에 숨겼다.

"그야, 아카데미아 처음 왔을 때 받은 게 있다 보니?"

수줍음을 감추던 에밀리가 배시시 웃었다.

리암의 시점에서, 그녀는 지금처럼 아무런 걱정 없이 웃을 때가 가장 예뻐 보였다.

"고마워."

"별말씀을."

에밀리만의 응원에 특별한 마법이 걸려 있지는 않으나 신기하게도 걱정이 덜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달라진 환경에 아직 적응하지 못했나 봐."

"처음 왔을 때는 그렇게나 좋아했으면서."

"그러게 말이야."

리암은 최근에 혼자서 고민에 빠지는 일이 잦았음을 인정했다. 달라진 전개에 대한 스트레스가 이유이기도 했지만, 그 외의 자질구레한 사안들도 혼자서 골머리를 앓는 나쁜 버릇이 생겼다.

그런 리암을 보며 에밀리는 어떤 이야기를 해 줘야 기운을 차릴까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이건 그냥 투정인데. 사실 나도 되게 힘들었었어."

"어?"

"무거운 이야기는 아니니까 가볍게 들어. 이젠 대부분 해결됐으니까."

리암은 짐작 가는 바가 있어 잠자코 에밀리의 뒷말을 듣기로 했다. 손을 젓던 에밀리는 말을 이었다.

"그… 왜 난 재능이 아카데미아 다른 애들과 비교했을 때 좀 떨어지는 경향이 있잖아? 아, 빈말은 해 주지 않아도 돼. 나에게 재능이 없다는 사실은 뼈저리게 깨달았으니까."

"...."

"우리가 있던 마을에선 나름 촉망받는 천재였는데 말이지. 역시 세상은 넓어. 그렇지?"

에밀리는 자조적인 말을 뱉었지만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자신의 선천적인 능력을 탓하지도, 괴로워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입학식은 최악이었지. 그런 최악의 연설을 한 수석이랑 같은 조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진짜 너무 싫어서 눈물이 나오려 하더라."

"실제로 글썽이기도 했고."

"부끄러운 과거는 잊어 줄래, 리암…?"

에밀리는 리암의 짓궂은 장난을 가볍게 넘겼다.

"아무튼, 결국 그 고귀하신 도련님과 같은 조가 되고, 심지어는 그 사람이 세운 연구회에도 들어가서 별 대우, 별 욕을 다 들으며 여전히 고통받고 있지만. 그 짓도 계속하다 보니까 버틸 만하더라."

"...."

"나름 얻는 것도 있는 것 같고. 그 왜 뭔가 발전하는 듯한?"

"사람 아닌 걸 대하다 보니까?"

"대충 그런?"

리암과 함께 소리 내며 웃던 에밀리는 곧 웃음을 멈추고 말을 덧붙였다.

"그런… 것도 있지만. 그 녀석. 짜증 나게도 눈이 좋단 말이지."

"눈?"

"사람을 잘 본다고 해야 하나. 그 사람의 적성을 잘 파악한다고 해야 하나. 그런 거."

"아…."

그가 읽었던 소설에서 에밀리에 대한 정보는 극히 적었다. 그녀는 조연으로 가끔 등장할 뿐이지 어떤 게 특기인지, 어떤 걸 좋아하는지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리암의 본래 기억이 없었다면 에밀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리암의 가설대로 바르간이 빙의자라면 아는 정보는 같을 텐데도 그는 다른 것 같다. 가설이 틀린 것일까.

리암은 에밀리의 스테이터스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굳이 확인하지 않고 물었다. 그녀의 입으로 직접 대답을 듣고 싶었다.

"…많이 강해진 거 같아?"

"아니, 그다지."

에밀리의 대답은 호쾌하고 예상외였다.

"하지만, 감은 잡은 거 같아."

리암은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에밀리의 표정이 다양하다. 이번에 짓는 웃음은 조금 전과는 또 다른 웃음이었다.

좀 더 명랑하면서 밝은.

그래, 마치 예전 같은.

'어…?'

문뜩, 기억 속에 묻혀 있던. 그리운 그녀의 모습이 겹쳐진다.

본래 가지고 있던 기억 속, 세상 걱정 없이 명랑하기만 하던 에밀리. 경쟁이 아니라, 그저 검술이 좋아 검을 휘두르던 과거의 나날.

붉어진 노을에 반짝이는 그녀의 미소.

소중한 추억.

…이건 누구의 기억이지?

"리암…?"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리암을 보던 에밀리는 어느 순간 다가와 자신의 옷깃을 잡아당기는 세레나로 시선을 옮겼다.

리암도 천천히 정신을 가다듬으며 세레나를 마주했다.

리암이 기억을 회상할 시간은 이어지지 않았다.

작지만 미세한 변화를 느낀 것인지 세레나가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세레나, 뭔가 감지한 거지?"

"...."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암과 잠시 눈빛을 주고받은 세레나는 멀리서 다가오는 이들을 관찰하기 위해 높은 곳으로 잽싸게 몸을 날렸다.

세레나는 궁사다. 적을 관찰할 수 있는 뛰어난 감각을 타고났으며 그에 머물지 않고 발전시켰다.

게다가, 리암이 본 스테이터스상으로 세레나는 아카데미아의 신입생 평균을 크게 웃돌았다. 지금 이 멤버들 중에서 적의 수나 정체를 가장 빠르게 파악할 수 있는 건 그녀였다.

"수는?"

몸을 잔뜩 숙인 채 시야를 확대한 세레나는 손가락으로 어떤 모양을 나타냈다. 그 손동작이 의미하는 수는 정해져 있었다.

「20」

""…!!""

세레나는 추가로 해당 인원들이 4반과 5반의 연합군이라는 사실을 손가락으로 알렸다.

리암이 예상한 인원은 11.

하나, 현실은 20.

한 반의 정원이 25명. 한 조의 인원이 5. 즉, 한 반에서 하나의 조가 빠진 모든 인원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수가 지나치게 많아. 게다가 이렇게나 빨리!"

저 많은 수가 안전구역을 벗어나 일직선으로 왔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온갖 마물과 함정이 가득한 숲이나 늪을 지나기에는 위험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리암의 지식으로는,

그가 속한 1반은 서쪽 끝.

4반과 5반은 동쪽 끝자락으로 거리가 많이 벌어져 있었다.

안전구역을 벗어나지 않고 왔다고 해도 일반적인 사람의 신체를 뛰어넘는 예비 용사들이니 불가능한 속도는 아니지만. 수도 그렇고 시간도 그렇고, 그가 알던 정보와는 달랐다.

바르간의 요행으로 인해 미래가 바뀐 것이다.

그들은 망설임 없이 돌진하고 있다.

이젠 리암의 오감에도 전해졌다.

사역마를 타고 있는 이들도 있다. 세력을 감출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덤빌 테면 덤벼 보라는 듯 날개를 활짝 편 독수리처럼 맹렬한 기세다.

세레나는 급히 활을 꺼내 시위를 당겨 대기했고, 다른 이들도 각자 포지션에 맞게 빠르게 움직였다.

리암도 재빨리 검을 꺼내며 그들을 맞을 준비를 했다. 기습은 할 수 없다.

분명, 탐지 능력이 뛰어난 이가 하나는 붙어 있을 터.

상대를 인식하고 있는 것은 리암 일행만이 아니었다.

"세레나, 선봉대장은 누구인 거 같아?"

"입학 성적 7위. 벨리아르 트로아 밴틀로."

세레나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여리고 작은 미성이었다.

"역시 바뀐 건가."

리암이 아는 시나리오라면 에리카가 연합군을 이끌고 왔어야 했다. 그러나, 현재 연합군의 선봉대장은 1학년 최강의 궁사 밴틀로.

에리카의 친구이자 그녀가 속한 4반의 부지도자 격인 인물이었다.

"전력을 다해야 할 것 같네."

리암은 마른침을 삼켰다.

"저만큼이 올 줄이야. 이건 긴장되지 않을 수가 없잖아… 리암도?"

"떨려… 하지만."

파지직⎯!

검을 쥐고 있는 리암의 손에서 푸른 전류가 튀어나왔다. 리암은 경직된 웃음을 지으며 에밀리에게 답했다.

"나라고 그동안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니까."

⎯반짝.

중간 거점의 깃발에 점령을 알리는 불빛이 들어왔다.

***

콰앙⎯⎯!!

커다란 진동이 거점 전체를 울린다. 곳곳에서 비명과 기함이 요동친다.

⎯끄아아아아!

⎯적습이다! 적습이야!!

⎯어디서? 대체 어디서 온 거야?!

⎯바르간 님, 명령을! 적이, 적이 쳐들어왔습니다!

⎯멍청한 놈아, 바르간 님은 바쁘시다고! 우리가 막는다!

적은 다섯.

기습 지점은 북문.

2반. 아르텔리온이 소수정예를 이끌고 1반의 거점에 들이닥쳤다.

"아, 아르텔리온… 그 왕자님이 어떻게 벌써…! 바르간 님,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핀. 침착하고 후문으로 향해라. 그곳에 있을 한 명의 남자는 아르텔리온의 충실한 수하다."

"그 말씀은…."

"그 녀석을 너에게 맡긴다. 훌륭한 성과를 기대하고 있겠다. 나를 실망시키지 말도록."

"예, 예!! 알겠습니다. 바르간 님!"

두려움도 잊었는지 기대한다는 말에 환호하던 핀은 힘주어 뛰쳐나갔다.

참으로 단순한 녀석이다.

다루기 쉬워서 마음에 들지만, 어떻게 보면 안타깝기도 하다.

"비안전구역을 뚫으며 추가로 넷이나 달고 오다니. 역시 무력 하나는 인정해야겠구나, 아르텔리온."

오셀 왕국의 왕자 아르텔리온은 개인 전투 능력으로 보자면 원작 바르간 이상의 힘을 보여 주던 인물이자 과거의 주인공이다.

올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그보다 더 빨랐다. 과연, 그만큼 입학식의 설욕전을 하고 싶다는 건가.

쿠웅!

지진이 난 것인지 불도저가 들이받은 것인지 거점 전체가 흔들린다. 머리도 제법 돌아가는 놈이 전투 모드에 돌입하면 미친 것처럼 달려든다.

훗날 검제라 불릴 몸의 피가 들끓는 것일까.

본래의 스토리에서 아르텔리온과 바르간이 싸우는 장면은 2반의 거점 밖에서였는데 말이지. 영상 마법이 제대로 먹힌 모양이다.

왕의 알현실을 연상시키는 넓은 장소에 가만히 서서 그를 기다렸다. 왕자님 앞에서 감히 왕좌에 앉아 있는 것은 예가 아닐 테니 특별히.

곧이어.

콰앙⎯!

두꺼운 철로 만든 거대한 문이 말 그대로 박살이 나며 한 남자가 들어섰다.

연기가 가득 올라왔으나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서 모습을 완전히 보인다.

폭력적이고 성대하게 문을 차고 온 것과는 달리. 이지적이고 수려한 외모. 찬란하게 빛나는 금빛 머리칼. 놀라울 정도로 예스러운 걸음걸이.

틀림없는, 최초의 주인공이자 완성형 주인공.

오셀 뷔 아르텔리온이다.

"먼 길을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왕자님."

한쪽 발을 뒤로 빼며 고개를 숙여 예를 보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들지 않은 모양이다.

들고 있던 검에 시퍼런 오러가 가득 깃든다.

곧이라도 튀어나와 목을 벨 것만 같다.

"이러실 게 아니라 차라도 한잔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저희 시종이 최근 차에 도가 튼 것인지 제법 훌륭한⎯."

"촌극은 그쯤 해라."

"...."

아쉽게 됐다. 정말로 실력이 진보해서 마시게 해 주고 싶었는데 말이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느긋하게 차를 마시는 건 그른 것 같다.

스앙⎯.

아르텔리온이 검을 들어 올리자 날카롭고 견고한 오러에 의해 공기가 갈리는 소리가 들린다.

기다려 줄 생각은 없다.

그는 곧바로.

스와아악!

공간이 접혀 들어가듯 아르텔리온의 검이 매서운 속도로 돌진했다.

시각이라는 정보로 직접 목격하니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것 같은 실로 파격적인 위압과 힘이었다.

그러나.

"훌륭한 반응속도다. 알리시아."

"…!"

카카가각⎯⎯!

시퍼런 오러와 그에 못지않을 정도로 짙은 오러가 맞붙는다. 단순한 철과 철이 아니라 오러를 둘러 소리가 괴랄하다.

왕자님께서 상당히 놀라신 모양이다. 무채색이던 용안이 변했다.

그와 검을 맞대고 있는 알리시아의 눈빛에도 예기가 감돈다. 서로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긴장감이 흐른다.

"존경하기에 마땅한 왕자님, 한낮 공작가에 불과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긴 죄송하지만."

뒤에서 싸움을 지켜보며 말했다.

단어 하나하나에 위대한 왕자님에 대한 진심을 담아.

"제 시종이 돋보이기 위한 발판이 되어 주시죠."

40화

확신이 있었다.

아르텔리온은 단신으로든 떨거지를 끼고서든 비안전구역을 뚫고, 내가 있을 1반의 거점으로 급습할 것이라는 확신이.

매사에 무관심한 것 같은 그는 사실 대단한 승부사였으며, 입학시험 전까지는 패배라는 단어를 모르고 살았다.

그런 그가 아카데미아에 입학하자마자 차석이라는 치욕을 당했으니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이번 자리는 그에게 있어 저번 설욕을 갚을 좋은 기회.

하나, 그렇다곤 해도 녀석이 독단적으로 움직이는 경우는 좀처럼 보기 힘들다. 특별한 사람을 위해, 예를 들어 옛 연인인 알리시아 같은 관계의 인물과 연관되지 않은 이야기라면 더욱.

따라서 나는 영상 마법을 통해 내 위치며 녀석이 나를 처단할 좋은 '명분'을 제공했다.

바로 내가 '왕'이라는 것.

물론, 내가 보인 영상 마법이 조작된 것이고 내가 왕이 아닐 가능성 또한 분명 고려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녀석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왔다. 녀석이 미련했기에?

아니, 아르텔리온은 육체적인 재능과 함께 제법 괜찮은 판단 능력을 갖추고 있다. 리암 같은 단순한 버러지와는 다르게 시야를 넓히고, 내가 왕이 아닐 가능성을 고려했을 것이다.

⎯크르륵, 크하악!!

"급한 마음은 잘 알겠으나, 잠시만 기다려라. 곧 너희를 이곳에 잡아 둔 종(種)에게 복수할 시간을 주도록 할 테니."

나는 근처에 있는 들개형 마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정시켰다.

세우면 2m는 될 법한 마물은 귀엽게도 안광을 번쩍이며 침을 질질 흘리고 있다. 아드레날린 주사를 맞은 것처럼 잔뜩 흥분해 있으나 내 명령에 간신히 헥헥대며 참아 낸다.

그 모습이 지나칠 정도로 깜찍하여 하마터면 양 볼을 잡고 늘려 줄 뻔했다.

⎯가르릉.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자면, 나는 현재 2반의 거점 근처 숲에서 대기하는 중이다.

한쪽으로는 내 어여쁜 쌍둥이 부엉이 사역마를 통해 1반의 상황을 지켜보며.

다른 한쪽으로는 거친 숨을 내쉬는 쉰넷의 마물들을 달랬다.

숲의 그림자 안에서 살기가 가득하다.

사람 종에 대한 분노.

폭력성과 잔혹성이 끝까지 올라 있는 상태다.

잠시 그들에 대한 시선을 거두고.

다시, 1반 거점의 상황에 주목한다.

아르텔리온과 알리시아가 격돌하고 있고, 그것을 지켜보는 나를 형상화한 나이아스가 히죽거리고 있다.

현재 나이아스는 그저 외관 변형이 가능한 사역마라는 설정으로 클래스전에 참가하고 있다. 몇몇 교수들은 나이아스가 높은 격의 정령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나 알리시아를 제외한 다른 학생들은 모른다.

아르텔리온은 아직 나이아스가 나인 줄로만 알고 있다. 이로써 스토리의 초반에 그가 환각이나 허상에 대한 내성이 떨어진다는 설정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자, 이제 남은 건. 무선 역할을 맡은 팔론의 사역마만 무력화시키면… 오, 마침 나이아스의 지시에 따른 핀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곧바로 핀의 그림자에 숨어 있던 내 사역마가 반응했고 녀석의 사역마를 그대로 삼켜 버렸다.

이것으로 아르텔리온의 통신은 차단되었다.

⎯그르륵!!

어두운 숲에서 온갖 마물들이 득실거리며 붉은 안광을 번뜩이고 있다.

그들의 눈에 담긴 것은 증오심과 뛰쳐나가고 싶다는 충동.

그 진한 감정을 억지로 참아 내며 버티고 있었다.

나의 허가가 떨어지는 그 순간을 너무나도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그래, 잘 참아 주었다.

그토록 깊은 감정에 잡아먹히지 않았으니.

너희는 마물이지만 미물은 아니다.

내가 그것을 보증하겠다.

이젠 그동안의 인내에 대한 합당한 보상의 시간이다.

나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돌입을 허한다."

⎯쿠오오오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땅이 거세게 울리며 요동쳤고.

세상은 괴음으로 가득 찼다.

***

성벽이 레고처럼 부서진다.

오우거의 형태를 한 거대한 마물이 돌진하자 두꺼운 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다.

마물들에게 거점 디버프 마법은 발동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크아아아아아!

마물들은 소리치며 그 안으로 들이닥친다.

예비 용사들은 기합을 외치거나 괴랄한 소리를 지르며 그들을 막아섰다.

그러나.

인류, 더 나아가 사람의 종을 보호할 용사의 새싹인 그들이지만 아직 어린 나이였다.

알티프는커녕 마물과의 전투 경험이 없는 자들이 대부분이었고, 있는 이들도 이 정도로 흥분한, 많은 수의 마물을 상대하는 건 처음이었다.

⎯꺄아아아악!!

⎯이,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왜 아카데미아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건데… 이건 더 이상 클래스전이 아니잖아…!!

놀람은 비명을 유발하고.

비명은 공포를 형성한다.

마물이란 미천하며 유용한 종족이다.

주로 던전에 서식하며 사람들의 사역마가 되기 위해, 주인 대신 죽음을 불사르기 위해 태어난 존재.

난폭하고 잔인한 알티프와는 달리 온순한 개체가 많으며 길들이기 적합한 괴물.

그게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마물에 대한 인식이었다.

⎯이건… 이건, 말도 안 돼… 이 마물들이 모두… 한 사람의 저주에 의한 거라고…? 마력 총량이 말도 안 되게 넓어야 할 텐데. 이, 이게 가능한 거야…?

⎯정신 차려! 그럴 리 없잖아!! 눈 똑바로 뜨고 제대로 파악하란 말이야!

⎯하, 하지만, 모든 마법의 형식이 동일한 술자의 형태를… 꺄아악!

⎯씨발! 벌써 이곳까지. 뭣들 해! 덤벼들어!!

오호라, 저 난전 속에서 지팡이를 들고 있는 여학생은 제법 괜찮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참고해서 나쁠 게 없겠군.

반면 옆에 있는 남학생은 버러지인가. 검을 휘두르는 폼이 영 아니다. 그 뒤떨어지는 핀이 몇 개월만 더 연습하면 도달할 정도라고 해야 하나. 딱 그 정도.

저런 녀석들은 지천에 널리고 널렸다. 괜히 공간을 낭비하지 못하게 바로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도록 하자.

아, 그러고 보니. 지금 이 녀석도 마찬가지군.

"사, 살려… 살려 주십시오…."

보라.

저기, 떨리는 다리가 공포에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아, 두려움에 질린 눈물과 콧물을 쏟아 내는 남성이 있다.

클래스전이라는 전장에서조차 화려한 장신구를 포기하지 못한 저 몰상식한 귀족.

저건 마법사가 사용하는 액세서리가 아닌, 그저 치장을 위한 도구다.

저런 자들이 봐 왔을 마물이란 인간에 의해 조련되고, 억압받은. 소위 말하는 말 잘 듣는 애완동물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품고 있을 강렬한 증오심은 모른 채. 겉으로 보이는 유순함과 순종성이 어떠한 경위로 오는지 모르는 채로.

참으로 어리석은 자다.

"바르간, 바르간 님!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이, 이런 건…!!"

우스꽝스러운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나를 헐뜯는 어조였으나, 그 표정은 살려 달라 애원하는 것 같다.

날카로운 발톱이 박혀 있는 마물의 발이 그에게 한 발자국 다가선다. 당장이라도 물어뜯어 버리고 싶다는 듯 흥분한 열기를 코로 내뿜으며.

"자, 자, 자까,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봐!!"

아마, 그는 지금 이번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정한 적개심을 마주한 순간일 것이다.

저 살기 가득한 눈동자가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니. 그는 자신의 팔이 물어뜯기는 장면을 상상했을 것이다.

그러니, 저렇게 한심한 목소리로 울어 대지.

그는 나를 보고 도로 마물을 바라보고를 반복했다. 아무리 클래스전이라 해도, 살인이 허락되지는 않는다. 내가 저 짐승을 멈춰 줄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관망하는 데 흥미가 식어 버린 내가 그를 뒤로하고 다른 곳으로 발길을 옮기자, 다급하게 짖어 댄다.

그 목소리가 하도 필사적이라 하마터면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하, 하… 항복!! 내가 졌어! 항복하겠다고…!!"

꺼진 의지와 함께 또 한 명의 탈락자가 발생했다.

그의 앞에서 으르렁거리던 마물은 적개심을 죽이고 다른 곳으로 사라진다.

마물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귀족 남성은 지금 자신이 어떤 꼬락서니를 하고 있는지 인식하게 된 모양이다.

공포심과 수치심으로 점철된 얼굴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여전히 바닥을 기는 채 말이다.

저 녀석은 왕이 아니다.

고지식한 것인지, 아르텔리온은 기존에 선택한 인물에게 이를 다시 한번 맡겼다.

그의 방패인.

아니, 아직은 아니지.

강인한 의지의 여성에게 전개대로 왕을 맡긴 것이다.

⎯끼익.

성의 수많은 방 중 하나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에는 내 사역마에게 붙잡혀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는 한 명의 여성이 있었다.

사슬로 변할 수 있는 내 소유, 늑대형 사역마에게 물린 것인데. 이 여인의 실력은 얕볼 수 없어 섬을 부랑하던 마물들에게는 맡기지 않고 직접 나섰다.

그녀가 뚫릴 듯하게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본다.

끝낼 것이면 빨리 끝낼 것이지 왜 시간을 끄는 거냐고 욕을 하고 싶은 듯하다.

입 또한 봉인돼 말을 할 순 없으니 눈빛으로 말하고 있다.

"모든 일에는 순서라는 게 있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아르텔리온의 방패. 리암이 읽은 소설의 히로인 중 한 명. 그러나 그녀는 리암과 별다른 연이 있지는 않았으니 이젠 조연으로 밀린 여인이라 할 수 있겠군.

오셀 솔루스 라우가.

아르텔리온의 충신 중 하나이자, 입학 성적 9위로 2반에서는 아르텔리온 다음가는 실력자이다.

그래 봤자 지금은 그 자랑스러워하는 검방술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꽁꽁 묶여 있지만.

그녀에게 움직일 수 있는 건 왕의 문양이 새겨진 손에서 꼼지락거리는 손가락뿐이었다.

구석에는 그녀가 끼고 있던 하얀 장갑이 내팽개쳐 있다.

"왕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는 걸 보면, 꽤나 아르텔리온의 신뢰를 받고 있나 보구나."

앞뒤 생각 없이 1반 거점으로 달려들었을 아르텔리온이 아니다.

그는 아무런 장해 없이, 자기 자신을 무력의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 이 여인을 왕으로 정하곤 안전한 거점에 배치시켰다.

창과 방패 모두를 얻으려고 한 수.

확실히 나쁜 생각은 아니다.

라우가는 실제로 괜찮은 실력의 소유자이며, 리더십이나 충의도 알아주는 바다.

다만, 내가 너의 행동을 미리 읽을 수 있었다는 게 결정적인 흠이로구나. 아르텔리온.

"...."

저 분노에 찬 눈빛을 보고 있자니 에리카가 떠오르기도 한다. 분위기는 완전히 다르지만 나를 보는 적의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남이 나에게 적대감을 갖는다는 건 슬픈 일이다.

"클래스전을 보고 있을 관중들에게 지금의 광경을 똑똑히 새겨 줘야 해서 말이다. 그 때문에 다소 피를 보는 이들도 있겠으나. 용사라면 무릇 흉터 하나둘 정도는 있어 줘야지."

"…!!"

이렇게 친절하게 하나하나 설명해 주는데 어째서 나를 싫어하는 것일까.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걱정할 게 뭐가 있느냐. 살인이나 과한 처사가 이루어질 것 같으면 아카데미아에서 나설 텐데."

습격을 당한 학생은 자동으로 아웃 처리되겠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아무튼, 잠시 동안이면… 호오?"

또 다른 시야로. 잠시 1반의 거점을 확인하던 나는 특이점을 볼 수 있었다.

아르텔리온이 붉은 오러를 보였다. 과연, 이러면 알리시아가 금방 탈락하겠군. 이미 그녀의 실력은 아카데미아의 모두에게 충분히 증명됐다.

조금만 더 기다릴까 했는데 이만 막을 종료해야겠다.

나는 눈을 부라리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라우가의 눈빛에 경계심이 인다.

빨리 끝내 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막상 다가가니 발톱을 세우다니. 교양 없는 녀석하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마."

나는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41화

카앙⎯카앙⎯!!

단 몇 초의 짧은 순간 동안, 수많은 합이 벌어졌다.

아르텔리온과 알리시아.

두 사람 다 상반신을 훌쩍 넘는 거대한 검을 휘두르지만, 질량과 무게를 잊어버린 것처럼 자연스럽다.

전투의 한가운데, 각자의 눈은 서로를 분석하며 약점을 파악한다.

그그그극⎯!

검과 검이 맞부딪힌다.

힘겨루기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검을 쳐 내면 다시금 틈을 노리고, 또다시 청명(晴明)을 울린다.

제대로 눈을 뜨고 지켜보지 않으면 서로의 검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전투.

"⎯!"

아르텔리온의 검이 급속도로 쏘아 들면, 알리시아는 몸을 크게 움직여 피하거나 검으로 흘렸다.

알리시아라고 방어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배운 검술과 경험을 토대로 동작을 이었다.

부드럽지만, 날카롭게.

기병처럼 달려든다.

슈확⎯!

푸르게 빛나는 알리시아의 검, 그 빛을 담아 그녀의 눈동자는 맹금류처럼 번들거린다.

아르텔리온은 그녀의 일격 하나하나를 피하지 않고 직접 맞부딪쳐 보였다. 피할 수 있으나 일부러 피하지 않은 것이다.

"제법."

"크흐…!"

알리사아도 그 사실을 알았다.

아르텔리온이 그녀의 공격을 직접 부딪칠 때마다 철로 만들어진 바위에 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격한 진통이 느껴졌다.

그와는 같은 사람이고, 같은 마나로 만든 오러였음에도 질량이 다르다.

밀도가 달랐다.

검에 쏟은 시간이 달랐다.

⎯카가가가가각!

이번 겨루기는 검을 쳐 내는 걸 허락할 마음이 없는지 아르텔리온이 힘으로 밀어붙인다.

오러가 갈리는 소리가 들린다.

밝기는 비슷하게 보여도 격의 차이는 명확. 알리시아의 오러가 조금씩 파인다. 조금씩 밀리는 알리시아는 이를 악물며 마나를 쏟아부었다.

이대로 가면 검째로 잘려 나갈 것이다.

알리시아는 본능적으로 이를 감지했다.

투확⎯⎯!

알리시아의 도약.

곡예를 하듯 크게 반원을 그리며 아르텔리온의 뒤로 넘어간다. 바람의 마법을 사용해 순간적으로 로켓을 단 것 같은 추진력을 보였다.

넘어가는 찰나의 순간에도 눈으론 아르텔리온의 약점을 찾는다. 그의 모든 동작을 눈에 새겼다.

그의 동작을 보고 유추한다.

근육의 움직임. 순간의 시선. 발끝의 방향. 사소한 변화는 이후의 행동을 짐작하게 하는 단서.

저대로라면.

공간을 꿰뚫을 듯 쏘아들 아르텔리온의 검이 노리는 곳은 그녀가 착지할 바닥.

그렇다면.

⎯타앙!!

총을 쐈을 때의 고음. 총이 아니다. 알리시아의 원소 마법.

극도로 압축돼 있던 공기가 터져 나가며 도약할 때보다 많은 운동에너지를 제공한다.

공중에서의 돌진.

잔상이 남을 정도의 속력.

"⎯!"

그러나.

알리시아의 검은 그녀가 원한 목적지와는 다른 곳으로 향하게 됐다.

그녀의 변화를 알아차린 아르텔리온은 검을 찌르는 동작을 멈추고 그녀의 공격을 피한 것이다.

믿기 힘들 정도의 반사 능력.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신체.

그는 평범한 인간을 아득히 초월했다.

⎯훌륭한 실력이었다.

바닥에 내려꽂히기 직전.

아르텔리온은 작게 읊조렸다.

그는 땅으로 꺼져 가는 알리시아의 등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번 승부는 목숨을 노리는 게 아니었다. 무력화시켜 항복을 선언하거나 상대의 등을 터치하면 아웃되는 구조.

아르텔리온은 알리시아의 실력과 진심을 충분히 확인했다고 판단했고, 정석적인 규칙에 의거한 탈락을 시키려 했다.

이 알리시아라는 여인은 제법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제대로⎯.

"⎯뭐?"

손을 대자, 검은 연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던 것처럼 쉽게 터져버린 그녀의 몸. 무취의 자욱한 연기는 아르텔리온의 시야를 가렸다.

감각이 제한된다.

이건 환각 마법.

적성에 민감한 만큼 쓸 수 있는 사람이 제한적인데, 그녀는 가능한 모양이었다.

하필이면 아르텔리온의 아킬레스건 같은 마법이라니.

아르텔리온의 정면.

중앙으로 연기가 빨려든다.

슈와악⎯!

짙은 연기를 뚫으며 달려드는 알리시아. 빨려든 연기가 흩어지고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르텔리온은 그녀와의 전투 이후 처음으로 인상을 구겼다.

아무리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갖춘 아르텔리온이라고 해도 이건 대항하기 힘들다. 피할 순 없다. 막아야 한다.

그러나, 막기 위해 검을 휘두를 경우 높은 확률로 튕길 것이다.

손잡이에 다시금 힘을 줄 순간도, 검에 가속을 붙일 거리도 없다. 달려드는 그녀의 자세 또한 찌르는 것보다는 검을 쳐 내려는 동작에 가깝다.

그렇게 수만 가지의 생각이 교차하고.

결국, 검은 휘둘러진다.

⎯⎯!

청아한 소리와 함께 잘린 검신이 허공에서 돌며 바닥에 떨어졌다. 오러를 두르고 있음에도 칼날은 무처럼 가볍게 잘려 나갔다.

"오호라. 이건…."

전투를 관망하고 있던 바르간의 모습을 한 나이아스는 놀라운 기색을 보였고, 아르텔리온은 가라앉은 눈으로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

알리시아는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하며 다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철컥. 그녀의 검이 아르텔리온을 겨눈다.

그러나, 이미 상황이 종결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알리시아의 검신은 반이 날아가 단검 정도로 짧아졌고.

아르텔리온의 온전한 검은 푸른색일 적보다 환하게, 붉게 발광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색의 오러.

알리시아는 저 불길한 기운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단번에 체감했다.

그 붉은 검이 올라 알리시아를 향한다.

모든 것을 베어 버릴 것 같은 위압감이 풍겼으나 그 기운이 알리시아에게 적의심을 갖고 쏟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르텔리온이 입을 열었다. 공기의 진동을 통해 들리는 그의 미성은 호수의 물결처럼 잔잔했다.

"…그대는 속에 독수리를 품고 있다. 아직은 새끼인지라 하늘을 날지 못하지만, 머지않아 천지를 내려다보게 되겠지."

"...."

"아깝군. 하늘을 호령할 재능을 갖고서도 새장 속에 갇혀있어야 하니."

알리시아는 그가 의미하는 새장이라는 게 어떤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새장은 슈겐하르츠 가문이었으며.

이는 곧 바르간을 의미했다.

"...."

얼마 전 있었던 리암과의 등급전과 지금의 상황이 겹쳐지게 느껴졌다.

두 사람이 표현하는 단어는 달랐으나 의미하는 바는 일치했다.

자유.

현재의 알리시아에게는 자유가 없으며 바르간에게 잡혀 억압을 받는 상태라 판단한다.

이를 보고 리암은 적극적으로 알리시아를 도우려 했으며.

아르텔리온은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단순히 모르기 때문이다.

저들은 그녀가 바르간에게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받았는지 모른다.

마법과 검술에 대한 재능의 일깨움과 가르침.

처음 입어 보는 고급스러운 옷과 모든 생활비.

용사가 될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

....

모른다.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기에 그녀를 안쓰러워하고 도움이 필요한 대상으로만 여긴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이런 자리가 생길 때마다.

알리시아는 살면서 느껴 본 적 없는 낯선 감정을 맛봐야 했다. 뜨겁고 따끔거리는 소위 분노라고 생각되는 이 맹렬한 감정은 그것과 비슷하지만 무언가 이질감이 있었다.

"…아닙니다. 틀렸습니다."

작게 중얼거리던 알리시아는 숨을 삼킨다.

소량의 호흡이 목구멍을 넘어가면서 그 알 수 없는 감정을 끄집어 내린다.

그러나, 그것은 내려가지 않고 오히려 역류해 몸집을 불렸다.

그 감정의 편린은 언어가 되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비로소 단단해졌다.

"당신이 틀렸습니다. 아르텔리온."

경질화가 이루어진 건 그녀의 말투뿐만이 아니었다.

눈빛.

자세.

그녀의 마음가짐까지.

알리시아는 청렴하면서 또렷한 눈빛으로 아르텔리온을 바라봤고 말을 이었다.

이번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잡스러운 군더더기를 붙이지 않겠다는 듯.

모든 것이 확고했다.

"제 하늘은 이곳입니다."

⎯타앗!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는 맹돌진했다.

날이 부러져 반 쪼가리가 되어 버린 검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찬란한 푸른빛의 오러를 담은 채.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설명.

그녀가 모시는 도련님에 대한 오해와 편견에 대한 해명.

또한, 지금의 이 상황조차 그의 계획 아래에 있다는 것을 알려 그의 대단함을 설파하고 싶었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백날 이야기해 봐야 모를 것이기에.

때문에 알리시아는 간결하게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는 것으로 말을 끝내고. 다시 전투에 돌입했다.

검을 부딪히기 위해.

그저 그러고 싶었기에.

그와의 실력 차이는 명확하다.

알고 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의 주인도 승리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녀석을 붙잡아 둬라. 알리시아.

알고 있다.

지금 이 행동이 비합리적이라는 걸.

단순히 시간을 끌려면 대화를 하는 쪽이 나을 것이다. 그도 아예 꺼리는 기색은 아니니까.

하지만.

꽈악.

알리시아의 강렬한 오러에 날이 사라질 것처럼 발광한다.

아르텔리온이 붉은 오러를 불러일으킨 순간의 힘의 파동을 기억한다. 그녀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폭발적인 힘과 유연성.

또각⎯.

아르텔리온과 가까워지는 그 찰나가.

숨조차 채 순화하지 않는 그 짧은 시간이.

몇 초에서 몇 분으로, 몇 분에서 몇 시간으로 느껴지듯 느리게 흘러갔다.

알리시아는 쥐고 있는 손잡이에 더욱 마력을 쏟아부었다.

양만 많다고 좋은 게 아니다. 우수한 마나. 높은 순도. 그리고, 보다 완벽한 형태를 만들어 줄 유연성을…!

⎯흔들거림.

들판에 핀 작은 풀잎이 간신히 고개를 까닥할 정도의 약한 바람.

그 여리고 순박한 기운이 거세게 다리를 뻗던 알리시아에게 전해졌다.

그저 빛만 발산하던 그녀의 검에 변화가 생긴다.

괄목할 만한 흔적은 아니었다. 그저 약한 바람. 산들바람이 부는 것처럼 연약한 움직임. 그 미세한 바람의 실이 한 가닥씩 모인다.

한 가닥.

또 한 가닥.

그렇게 점차 굵어져 실타래가 되고, 이후로는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실타래는 바람의 뭉치였다.

그리고 그 바람은 아주 얇은 오러로 만들어져 있다.

이윽고 모든 검신이 새로운 형태의 힘으로 뒤덮여 졌을 때.

두 사람은 가까워졌고.

'내 하늘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다!'

검이 휘둘러졌다.

그녀의 굳은 의지를 담아서.

알리시아는 그 일념 하나로 아르텔리온과 부딪혔다.

콰드드드드드득⎯⎯⎯⎯!!

오러를 두른 알리시아 본인도 깜짝 놀랄 정도의 새로운 힘이었다. 의도했지만 의식하진 않은 힘.

붉은 오러는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한 오러 또한 아니다.

마치, 태풍이 검신을 감싸는 느낌.

"...!"

검을 맞대고 있는 아르텔리온도 알리시아의 오러가 변화한 것을 알아차렸다.

알 수밖에 없었다.

좀 전의 힘과는 차원이 다르다.

푸른 오러가 특별한 속성을 갖추고 검에 깃든 형태.

이것은 기본 오러의 발전형이자 붉은 오러로 올라가는 계단 중 하나인.

「속성확립」이었다.

알리시아는 이 짧은 전투를 통해서 그녀의 속성을 오러에 담아내는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를 알아차리게 되자 아르텔리온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만의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그녀를 보며.

아무래도.

단순히 재능만이 뛰어난 여인은 아닌 모양이다.

그런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

⎯빠아아앙!

『2반의 왕 '오셀 솔루스 라우가'가 사망했습니다. 2반의 왕이 사망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2반의 모든 인원은 자동으로 아웃 처리됩니다. 다시 한번 말씀….』

아르텔리온은 가만히 서서 그 기계적인 음성의 방송을 들었다.

패배했다.

같은 사람에게 맞은 두 번째 패배이자, 그의 인생에 있어 마주한 두 번째 고배였다.

"…내가 올 것을 예상하고 움직였다는 건가."

아르텔리온은 차분히 상황을 정리했다.

팔론과 연결되어 있던 통신은 먹통이 됐는지 대답이 없다. 거점에서 기다리고 있던 바르간은 그의 모습을 흉내 낸 사역마였다.

바르간은 자신의 기습을 예측하고 미리 준비해 다른 곳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사역마를 왕으로 추대할 순 없으니 아마 대규모 영상 마법을 끝내자마자 이동한 것이겠지. 그를 따라 하는 정령을 제대로 눈에 담기 전까진 감히 이를 연상하는 것조차도 못했다.

"...."

두말할 것 없는 완전한 패배.

하지만 입학시험과는 다르게 굴욕적이라거나 치욕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의 상쾌한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너무나도 확실하게 져서 그런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마 이렇게 느끼는 데는 그녀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흥미로운 여인이다."

아르텔리온은 쓰러져 있던 알리시아를 내려다봤다. 잠시 기절해 있을 뿐, 큰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아마 곧 일어나게 되겠지.

다시 전장으로 향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녀는 현재 탈락한 상황이지만, 바르간이 2반의 왕을 잡았으니 게임의 룰에 의거해서 부활하게 된다.

타 클래스의 왕을 잡으면 그 전에 아웃되었던 인원들의 부활이 가능하다.

전체가 아니라 반 전체의 1/3이었으나, 그녀 정도의 능력과 상처라면 다시 몸을 이끌고 전장으로 나갈 것이다.

짧은 상념을 마친 아르텔리온을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멀찍이 상황을 지켜보던 나이아스가 눈에 들어온다.

아르텔리온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멀어져 갔고, 잔상처럼 나이아스에게 한마디의 말을 남겼다.

"주인에게 전해라, 세 번째는 없을 것이라고."

42화

2반의 탈락이 방송된 직후.

1반 인근의 중간 거점.

리더인 바르간의 명령을 따라 리암을 포함한 일곱 명의 학생들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

강렬한 빛이 일순간 대지를 집어삼키듯 번쩍였다.

이어서 천둥이 크게 울리며 리암의 검이 내찔러질 때마다 잔류가 지지직거린다.

번개를 활용한 검술은 리암의 주특기다.

원소 계열의 마법 중 전기를 다루는 리암은 번개의 속성을 가진 오러를 담거나, 체내의 미세한 전류를 증폭시켜 신경과 근육을 조절한다.

물론 출력이나 세밀한 조정은 아직 힘든 단계라 자신의 몸에 직접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번개란 그 일련의 형태와 소리만으로도 공포심을 조장하기 마련이다.

치지직⎯ 지직.

리암은 중간 거점의 버프 범위를 벗어나지 않으며 고속으로 이동했고 셋에서 넷 정도를 동시에 상대했다.

움직일 때마다 튀기는 전류의 소리가 보는 이를 긴장케 했다.

그의 현란한 발재간과 검술에 상당수가 발목을 잡혀 쉽사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나 이는 물론, 리암 '혼자서' 넷을 상대할 정도로 강하다는 말은 아니다.

쉐아악⎯⎯!!

마력을 잔뜩 머금은 세레나의 화살이 연합군을 위협한다. 그렇게 움직임이 정지하고 틈이 발생하면 리암이 섬광을 터트리며 쾌속으로 질주해 등을 터치한다.

번뜩이는 섬광으로 인해 시력이 발달한 궁사 같은 경우는 특히 리암을 노리기 어려웠다.

아군인 세레나에게도 다소 피해는 있는 듯 짙은 인상을 한 번도 펴지 않은 채 묵묵히 활을 쏘아 대고 있지만, 적중률이 뛰어나다.

연합군 한 명을 추가로 탈락시키는 데 성공한 리암은 숨을 헐떡이며 주위를 살폈다.

바삐 움직이는 그의 동공에 열은 되는 인원이 보인다.

멀리서 전장을 지켜보고 있는 밴틀로 일행을 포함하면 열다섯은 될 것이다.

"크, 허억."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중복되는 거점의 버프를 받고 있다고는 하나, 머릿수의 차이가 명백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군의 체력은 급격히 떨어지는 반면, 적들은 기세를 높여갔다.

연합군은 번개의 위협에도 내성이 생기는지 처음보다 두려워하지 않는다.

더욱 맹렬하고 저돌적으로 움직인다.

파지직⎯!

리암이 마나를 부여할 때마다, 최근에 획득한 번개의 오러가 튀긴다.

본래는 일정 경지에 이르러야 쓸 수 있는 「속성확립」이었지만, 리암은 레벨 업을 통해 이를 '스킬'로 얻을 수 있었다.

그의 실력에 비해 이른 발현이 가능했다.

"크윽…!"

또다시 검이 부딪힌다.

리암이 지친 새를 타서 연합군의 검사 한 명이 뛰어들었다.

리암의 발이 뒤로 밀린다.

오버클럭으로 가동되는 심장은 급하게 산소를 공급해 주지만 역부족이었다.

지끈거리는 감각이 리암의 손끝에서 전해졌다.

그리고.

"…젠장."

시야로부터 확인되던 다른 남성이 옆으로 빠진다.

움직일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을 이용해 리암의 뒤를 노릴 심산일 것이다.

이대로 등을 당하면 아웃이다!

"크으아아⎯⎯!!"

위기를 느낀 리암은 한 번에 방대한 마력을 방출했다.

손잡이를 잡은 손과 팔의 근육이 터질 듯이.

다리에 구렁이 같은 핏줄들이 줄줄이 올라올 때까지.

그의 전류를 머금은 마력은 주변인들의 근육을 잠시 경직시킬 정도의 전압을 가지고 있었다.

리암은 신속히 검을 올려 친다.

⎯차앙! 채앵!

멈춰 있는 동안.

리암은 두 사람의 검을 허공으로 날려 버렸다.

체력이 더 남았더라면 아웃까지 시킬 수 있었겠지만, 그 정도의 여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이제 저들도 무기를 쓰지 못하게 되었으니 도망가는 틈을 노리면 된다.

버틸 수 있다.

버텨야 한다.

⎯리암, 위험해!!

자신을 다독이는 것을 끝내지도 못한 때.

고막을 강타하는 에밀리의 음성.

문을 지키고 있던 리암을 향해 직선으로 쏘아지는 빛의 활.

1학년 최강의 궁사, 연합군의 선봉대장 밴틀로가 움직인 것이다.

활촉에 주변 모든 마나가 몰려드는 것처럼 발광한다. 이는 리암의 번개보다도 눈이 부실 정도라 눈을 뜨고 있는 게 괴로웠다.

잔뜩 찌푸린 눈의 틈새로 바라보자.

어느새 리암의 주변에 있던 두 명은 멀찍이 비켜서 있었다.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조차 없다.

명백히 타이밍을 노린 공격이었다.

마나, 마나를…!

이미 회피하기는 늦었기에, 리암은 검을 들고 체내에 남아 있던 마나를 쥐어짜 내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다.

바닥까지 긁어모아야 한다.

그러나, 밴틀로의 활은 그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속도로 빠르게 쏘여졌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3m 남짓한 거리였다.

"아."

과한 빛의 세기가 리암의 동공을 급히 축소시키는 그때.

쿠드드드드득⎯⎯!

리암을 꿰뚫을 듯이 매섭게 날아오던 활촉은 어떠한 것에 부딪혀 대거리를 벌리듯 움직임이 정지한 것처럼 보였다.

활에 주목한다.

불똥을 튀기며 고온으로 빠르게 치닫는 공간.

확실하게 무언가와 마찰을 일으키고 있었다.

상황을 위험하다고 판단한 아카데미아 관계자가 개입한 것인가.

그런 생각이 스치자.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하듯.

당사자는 너무나도 당당하고 호쾌하게 웃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하하하하!!"

쿠웅⎯⎯!

대체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 폭탄이 떨어진 것처럼 진한 흙먼지를 일으키며 지면에 떨어진 사람.

먼지바람은 돌풍에 날아가듯 멀리 떠나가 버리고 남성의 모습만이 보이게 된다.

옷 태에서도 드러나는 잘 단련된 육체. 호방한 웃음 속에서 느껴지는 강인한 정신. 짐승과 같은 노련한 감각.

입학 성적 5위.

오셀 반테올로 레온.

"연합을 맺고 상대를 짓누르는 부정(不正)을 보고 그냥 넘어갈 수 없구나! 1반⎯⎯!!"

레온은 호랑이와 같은 목청으로 울부짖었다.

동시에 무언가에 막혀 전진하지 못하고 있던 활은, 모든 에너지를 잃고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걱정하지 마라! 이제부턴 나, 오셀 반테올로 레온이 저 악인들을 막아 주겠다⎯⎯!!"

리암은 어딘가 얻어맞은 사람처럼 두 눈을 끔뻑이며, 혜성과 같이 등장한 그 남성을 바라봤다.

바르간이 미리 언질을 주기도 했고, 리암 또한 그가 올 것이라는 사실 자체는 알았지만, 정말 이렇게 착착 움직여 주리라곤….

"하."

딸꾹질하듯, 리암의 몸이 크게 한 번 들썩여졌다.

***

나는 부엉이로부터 보이던 시야를 접었다.

오셀 반테올로 레온.

어렸을 적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거 같은 저 청년이 등장했으니 더는 볼 필요가 없다.

3반의 레온을 포함한 정찰대가 중간 거점에 들를 것을 알았기에 적은 인원으로 방어대를 구성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진정한 용사를 추구하며 정의를 입에 달고 사는 저 덜떨어진 녀석은 연합이라는 형태를 결코 용납할 수 없다.

클래스전은 모든 행위가 허락되는 지략의 장이기도 했으나 레온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었다.

그의 시선으로는 그냥 두 명이 손을 잡고 한 명을 괴롭히는 것으로 보이나 보다.

나로선 이해할 수 없다만 이용하지 못할 건 또 아니지.

⎯도련님, 저희는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알리시아의 고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왕자님에게 당해 쓰러져 있더니, 금세 정신을 차리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뒤 내 사역마를 통해 통신을 건 것이다.

아르텔리온에 의해 거덜이 난 거점에서 탈락한 인원은 전부 해서 아홉. 내가 2반의 왕을 잡아 부활한 인원이 여덟이었다.

대부분 지나치게 무리를 하거나 크게 다친 흔적은 없어 사용하기 좋은 상태였다.

그래, 대부분이 말이다.

"본 거점은 버린다. 핀을 제외한 전 병력을 이끌고 중간 거점으로 향해서 내가 미리 지시한 임무를 수행해라. 4반과 5반 사이가 아니라 리암 일행이 있는 1반 본 거점 근처이다."

아르텔리온의 통신탑 역, 팔론과 맞붙은 핀은 말 그대로 피떡이 되어 있었다.

팔론과 핀의 차이는 두말하면 입 아픈 정도였다. 다섯 살배기 어린아이와 청소년 정도의 차.

그럼에도 핀이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면서까지 움직임을 봉한 것이다.

핀의 용태가 망가지는 것은 어찌 보면 정해져 있는 절차였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여리여리한 목소리로 기사와 같은 격식으로 말하는 알리시아. 그녀가 통신을 끊으려는지 소리가 멀어져 가자.

"알리시아."

나는 말을 덧붙였다.

"고생했다."

그 무지막지한 강자. 아르텔리온을 막아서는 데 성공한 것.

단 하나의 기술이지만, 전투 중 환각을 활용했던 것.

새로운 오러의 경지에 이른 것 등.

여러 의미를 내포하는 짤막한 문장이었다.

⎯....

통신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착각이 될 정도로 알리시아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네, 감사합니다.

옅게 쑥스러워하며 그녀의 음성이 서서히 멀어져 갔다.

그렇게 알리시아의 목소리는 완전히 끊겼다.

"자, 그럼. 나도 슬슬 움직여야겠군."

나는 몸을 일으키고 어깨를 돌렸다. 마음 같아선 기지개를 쫙 켜며 스트레칭을 하고 싶지만 보는 눈이 있어 마땅치 않았다.

지금 내 주변은 폐허가 되어 버린 성채로 곳곳에서 불타고 있다.

2반의 깃발은 물론이요, 카펫이며 목제가구. 소화(燒火) 가능한 물건은 모조리 타오른다.

성의 단단한 방패가 되어 주던 성벽도 성하지 못한 종이상자처럼 구멍이 뚫려 있거나 잘게 부서져 있다.

탁!

손가락을 튀겼다.

지금 이 주변의 어떤 물리적인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좀 더 멀리 있는 곳. 구체적으론, 디피엘리아가 지키고 있는 5반의 본 거점.

그곳에 있을 좀도둑에게 건 저주를 해제했다.

어느덧 클래스전도 중반을 지나고 있다. 이 시기라면 비공정에서 매수한 그녀가 움직이기에 적합한 때이다.

지금 그녀의 몸 어딘가에 새겨져 있던 문양이 사라졌으며, 이를 확인하곤 내가 미리 일러둔 사항을 이행할 것이다.

저주를 활용하는 색다른 방법이라는 거지.

그 잔향을 풍기려는 까닭도 있고. 그래야 5반의 리더이신 성녀님께서 떡밥을 무실 테니까.

아무튼, 녀석에게 명은 내렸으니.

"우선…."

간단한 운동을 마친 나는 고개를 돌렸고, 멀찍이 떨어진 한 그루의 나무를 지그시 바라봤다.

극도로 낮춰 둔 마나의 기운이라 올 것을 미리 알지 못했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2반에서 처리한 떨거지들과는 격이 다르다. 어중간한 녀석들은 저렇게 기척을 숨기는 것조차 불가능하니까.

"그렇게 멀찍이서 경계하고 있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너를 함부로 대할 생각도 없고, 이곳을 폐허로 만든 마물들은 이미 물러나고 없으니."

이건 거짓이 아니었다.

내 마나 총량이 아무리 바다와 같이 넓다고 한 듯 실제로 바다는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아직은 바다가 아니다.

내 목표치에 비하면 강물이라고 일컫는 게 옳다.

따라서 마물들에게 저주를 거는 것도 아직은 54마리에 40분 정도가 한계다.

그 이상 붙잡고 있으면 서서히 말을 듣지 않는 놈들이 발생하게 된다.

"그새를 못 참고, 바깥사람이 보고 싶어서 온 것이냐?"

나는 놀림을 가득 담아 그녀에게 전달했다. 작은 몸을 숨긴 채 상황을 지켜보던 에리카는 내가 명확하게 숨은 지점을 바라보면서 묻자, 곧 그 뽀얀 얼굴을 보였다.

"그럴 리가."

에리카의 표독스러운 눈매와 말투가 꽂힌다. 그 모습이 흡사 기회를 노린 사냥꾼과도 같았다.

하지만, 에리카. 너는 아직 감정을 숨기는 게 미숙하다. 눈동자 깊은 곳에서 흔들리는 버들잎을 죽여 놓지 못했다.

"그리 긴장할 필요 없거늘."

나는 씨익 웃으며 환각 마법을 시전했고.

에리카는 동상이 걸릴 것 같은 극한의 냉기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기다리고 있었다. 에리카.

네가 오지 않으면 이야기가 재미있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거든.

43화

⎯까악!

자신의 사역마를 통해 아르텔리온이 리더인 2반의 거점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살피고 있던 에리카.

그러던 도중. 마물의 울음소리,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 등 커다란 소음을 들을 수 있었고, 사역마는 2반의 거점 인근 상공을 배회하게 되었다.

"이 정도라니…."

일의 발생지와는 상당히 떨어져 있는 4반 거점에서.

사역마의 눈을 빌린 에리카는 초토화되어 버린 성을 살피며 눈살을 구기고 있었다.

바르간은 방대한 마력을 소모해서 마물을 통솔했고 2반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아르텔리온이 없었다고는 하나, 사실상 단신의 힘으로 클래스 하나를 통째로 날려 버린 것이다.

에리카는 직접 그 장면을 목도하지는 못했지만 굽이치고 있는 마나의 잔재를 통해 이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바르간은 보고도 이해되지 않을 정도의 마나를 소모했다.

최근 행적을 살피면 불쾌하게도 그가 변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지만, 그 짧은 시기에 이 정도로 성장할 줄은 몰랐다.

아무리 천재라고는 하나, 한 번 달리는 것을 멈췄던 선수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고 해서 메워질 간극인 건가 이게.

"쯧."

묘한 패배감을 맛보던 에리카는 혀를 차며 궁리했다.

지금 바르간의 상황을 직접 살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능하다면 사역마를 바르간 근처로 보내 그의 상태를 직접 확인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사역마가 역소환을 당하게 되겠지.

그러나, 정황으로 추정컨대 바르간은 상당한 무리를 했다.

아무리 천재라 찬양받던 그라고 해도 이 정도의 저주다, 전신의 마나가 뜨겁게 달궈져 과부하가 걸렸을 터.

1년 전만 해도 바르간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었던 에리카에게 있어서 지금의 상황은 지극히 당황스러움을 안겨 줬으나, 동시에 그녀를 부추기기도 했다.

이건 기회다.

가장 방해되는 인물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 바르간만 탈락한다면 나머지는 일이 술술 풀리게 된다.

연합군도 바르간을 견제하기 위한 수가 아니었던가.

그 장본인이 약해진 상태로 혼자 있다.

언뜻 함정 같아 보이기도 하나, 주변에 다른 마력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누가 대기하고 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그렇다면, 지금은 손익을 따져 빠르게 결단해야 할 때다.

"디피엘리아. 잠시 연락이 힘들 것 같아. 가 봐야 하는 곳이 생겼거든."

에리카는 그녀의 어깨에 앉아 있는 작은 새를 통해서 5반의 리더인, 디피엘리아에게 그녀의 뜻을 전달했다.

당황스러워하는 디피엘리아의 음성이 들렸으나, 에리카는 이미 판단을 끝냈다.

"우리의 목표물을 발견했어. 정예로 다섯 정도만 지원을 부탁할게."

⎯에리카, 정말 괜찮겠어요?

우려가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그 음성에 에리카는 오히려 옅게 웃어 보이며 대답한다.

"이건 다신 없을 호기야."

에리카는 그녀 특유의 마력을 끌어낸다. 그 마력은 실체화했고, 곧바로 그녀의 전신을 감쌌다.

이윽고, 식이 완료된 마법은 발동되었고.

뭉쳐져 있던 마나의 기운이 흩어지기 시작한다.

⎯후우… 정말 괜찮을까.

홀로 남겨진 작은 새의 시선에서는 더 이상 에리카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카데미아의 재학생 중 유일하게 에리카, 그녀만이 사용할 수 있는 차원(次元) 마법. 공간을 주무르는 능력.

워프 마법이었다.

***

⎯까악! 까악!

에리카 근처를 배회하던 까마귀 사역마가 힘껏 날갯짓을 하며 나를 환영한다.

오랜만에 주인을 만나 기뻐하는 애완동물같이.

"내가 예전에 선물해 줬던 녀석은 여전히 애정하고 있는 듯하구나. 털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있음을 보니 흐뭇할 따름이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네가 아니라, 슈겐하르츠 가문이 입양시켜 준 사역마였잖아."

"그게 그거이거늘."

에리카는 저 사역마의 시야를 통해 워프 마법을 발동시켰다.

그녀가 시각으로 인지한 장소만 이동할 수 있으니 당연한 말이었다.

잔털이 서기 시작한다.

그녀와는 거리가 꽤 떨어져 있음에도 주위의 온도가 미세하게 내려감이 느껴진다.

에리카의 마나에 반응해서 기온이라는 환경적 요소가 변하고 있다.

과연 에리카라고 해야 할까.

바르간이 기억하고 있는 과거의 수준은 떠오르기 힘들 정도로 그녀는 마법을 갈고닦았다.

"상당한 수준의 고위 빙결 마법이라. 늦었지만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마."

사실은 원작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천연덕스럽게 한번 말해 봤다. 그녀의 반응을 살피고 싶어서다.

"시끄러워. 수다나 떨자고 나에게 말을 건 건 아닐 텐데?"

"이야기나 할 요량으로 말을 걸었다만?"

"미안하지만 난 그럴 생각이 없거든."

에리카의 주변의 마나의 흐름이 역행하며 파도치듯 울렁거린다.

그 세기며 농도가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튕기는 반응이 재밌어 놀리듯이 그녀를 대해, 평가가 절하되는 감이 있는데.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녀는 강하다.

입학 성적 4위의 실력자.

입학 성적이 모든 걸 대변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지금과 같은 스토리의 초반에는 꽤 중요한 수치다.

"글쎄. 내가 미리 언질을 줘 두자면, 너는 곧 도망칠 준비를 할 것이다."

"슈겐하르츠. 더럽게 꼬인 악연으로 너를 오랫동안 봐 왔는데 내가 모를 거 같아?"

"그 말은?"

"너는 이미 상당히 많은 양의 마나를 소모했어. 지금의 모습은 허세. 그리고 이건 나에게 있어 기회라는 뜻이고."

에리카가 손을 들자.

그녀의 주변에 1m 정도 크기의 얼음 창 여섯이 생성되며 부유한다.

일회용으로 사용하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화려한 얼음이었는데, 이는 형태를 변화한 원소 마법의 특징 때문이다.

원소를 다루는 수준이 높을수록 변화한 형태가 정교하고 화려해진다. 즉, 저것만으로도 에리카의 경지를 짐작할 수 있다. 아마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도 가능할 터이다.

무협지를 보면 이기어검이라 하여 검을 공중에서도 마음대로 다루는 게 있는데, 저 뾰족한 것이 얼음이 아니라 검이었다면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한다.

"그걸로 나의 몸을 꿰뚫고자 하는 거냐. 하긴, 지금이라면 가능하겠구나."

에리카는 약간 눈살을 찌푸리며 내 말을 무시하려는 듯했다.

"어차피 네 그림자 속에 있는 그 시꺼먼 녀석이 튀어나올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는데 물리적인 수단을 꺼냈다는 건 네 능력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확인하고 싶은 뜻이냐?"

에리카는 다소 긴장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 거라고 해 두지."

"그래, 한번 해 보거라."

나는 손을 양쪽으로 벌리며 그녀의 마법을 제대로 맞아 보겠다는 쇼맨십을 보였다.

냉기를 가득 머금은 얼음의 창들이 고속으로 회전하고 있다.

회전력을 더해 정확도와 위력을 더한 건가. 확실히 저건 나름의 개량을 거쳤군.

뚜벅.

이제 곧바로 저 얼음 창들이 벌처럼 날아들겠지. 그녀의 시야에서 반기는 내 모습이 허상인 줄을 모르고.

환각류의 저주 마법은 시전자와 상대의 실력 차이가 클수록. 혹은 상대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수록 성공 확률이 올라간다.

에리카의 경우는 전자보다는 후자의 영향이 크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녀를 보자마자 환각을 걸었던 나는 대화를 이끌어 가며 시간을 벌고 있었다.

그렇게 살금살금 다가와 벌써 에리카의 근처다. 그녀의 앳된 얼굴이 눈앞에서 보인다.

시선은 여전히 정면을 향하고 있다.

천천히 그녀에게 닿기 위해 손을 뻗는다.

위력이나 꼼수는 제법 는 것 같지만 아직 멀었구나 에리카.

전투를 할 때 정황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건 과거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거기구나?

순간, 에리카가 몸을 크게 돌며 정확히 '나'를 바라봤다.

의외의 반응에 내가 놀랄 틈도 없이.

얼음 창들이 직선으로 꽂힌다.

이건, 제법 위험하다.

허공을 관통하는 소리를 내며 얼음 창이 곧바로 쏟아져 내렸다.

쩌저적.

목표물에 도달한 얼음 창은 대상을 꿰뚫음과 동시에 얼려 버린다.

입에서 냉기가 흘러나온다.

이번 공격으로 인해 주변의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체온도 떨어져 추위에 털이 곤두서기 시작한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슈겐하르츠."

에리카는 어딘가 불만인 듯하다.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본래였으면 기뻐함이 마땅하거늘.

에리카의 두 팔이 달달 떨린다. 추위 때문은 아니다. 날카로워진 눈에서는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엿보인다.

"이젠 사역마조차 꺼낼 필요 없다는 거야? 그렇게나… 그렇게나 내가 우스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그게 아니면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건데…?"

에리카는 나의 현 상태를 집었다.

에리카의 얼음 창을 코앞에서 조준당한 나는 나조차도 깜짝 놀란 반사 신경으로 창들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뛰어난 육체라고 하더라도 스친 상처 하나 없이 회피하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왼 어깻죽지와 오른 허벅지에 얼음꽃이 피었다. 피는 나지 않는다. 에리카의 마법으로 상처 부위가 얼어 버렸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그녀의 공격은 나름 먹혔다고 말할 수 있다.

"주변의 기온을 급격하게 떨어뜨린 것은 낭비가 아니라 나에 대한 대책이었구나. 솔직히 놀라웠다. 설마 공기 중에 떠다니는 미세한 얼음 입자를 사용해 내 위치를 파악할 줄이야."

내가 그녀에게 건 것은 확실한 환각이지만, 그것은 멀리서 있을 나에 대한 영상(映像)에 해당하는 것이지 그녀의 모든 감각을 통제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내가 자신에게 환각을 걸 것을 알았다. 따라서 그에 대한 파훼책으로 대기의 변화를 이용했다.

내 체온 탓에 비정상적으로 녹은 이상점을 파악해 위치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소설에서도 나온 적 없는 방법이었는데 에리카가 이번엔 머리를 제법 굴렸다.

"지금 그딴 칭찬을 받고 싶다는 게 아니잖아. 제대로 대답해!"

"대체 무엇을 말이냐."

"그림자 녀석은 왜 안 꺼냈지? 네가 고작 이런 정도에 피를 볼 녀석은 아니잖아!"

고작 이런 정도라니.

사람이 기껏 칭찬해 줬더니만 자기가 깎아 먹는 건 무슨 심보란 말인가.

"약혼자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기쁘긴 하나, 지금이라면 꿰뚫는 게 가능할지 모른다고 언급하지 않았느냐."

"중간 내용을 빼먹지 말고 제대로 설명해. 지금 상당히 기분이 안 좋으니까."

그러게.

대충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유독 화가 많이 난 것 같다. 저번에 점심 신청을 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미 1반 거점 상황이 종결됐으니 말해 준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잠시 다른 녀석에게 맡겨 뒀다. 클래스전에선 나보다도 필요한 녀석인지라 눈물을 머금고 보내 줘야 했지."

핀의 능력으론 결코 팔론을 상대할 수 없으며, 팔론의 사역마를 저지시키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

해서, 핀에게 내 소중한 사역마를 맡겨 팔론의 사역마를 삼켜 버렸으며. 핀이 바로 탈락할 것을 보호하는 역할을 내렸다.

보호…라고 해 봤자.

핀의 등판이 공격받을 때만 실체화하여 막는 정도로 명령을 내려 놨지만, 핀이 의외로 끝까지 기회를 제공하지 않아 최초 이외에는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네가 남에게 사역마를 빌려줬다고…?"

에리카는 어딘가 허탈하다는 듯,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기야 이상한 반응은 아니다. 암속성의 사역마들은 특히나 주인을 애정하여 자신을 남에게 대여한다는 행위를 극도로 질색한다.

게다가 자신밖에 모르고, 사역마에 미쳐 있는 그 바르간이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라지만 남에게 사역마를 맡긴다는 건, 어쩌면 에리카에게 있어서 환각 마법보다 거짓 같은 일일지 모른다.

"아니었으면 네가 말한 대로 이렇게 창이 내 신체를 스쳐 지나가는 일도 없었겠지."

명확한 증거를 들이미니 에리카도 입을 다물었다.

사역마에게 따로 명령해서 나오지 말라고 하는 안도 있겠으나, 비합리적이며 무의미한 행동이기에 제외됐다.

"...."

"아무래도 이제 좀 진정이 된 모양이구나."

에리카는 지금 상황이 어이가 없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나도 마찬가지다.

남들은 피 터지게 치고받고 싸우고 있을 텐데 우리는 이게 뭔가. 말싸움인가 부부싸움인가.

에리카가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은 기쁜 일이었으나 그녀의 현 상황을 더욱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흐름이 완전히 깨져 버렸다. 여기서 다시 전투를 이어가는 것도 맥락상 이상하고 말이지.

그렇게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자 에리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하나의 창을 더 생성했다.

이번에는 창이 회전하지 않았다.

대신, 차가운 걸 모르는 건지 새하얀 섬섬옥수로 창간을 잡는다.

그 낌새가 심상치 않다.

"…그렇구나. …그래."

고개를 숙인 에리카가 작게 읊조렸다. 그녀의 얇은 몸이 서서히 다가온다. 저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기운치고는 지나치게 거대하며 어두운.

어딘가 바르간과 닮은, 악역영애의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정말로 호기였어."

망설임 없이 창을 찔러 넣는다.

44화

5반의 거점.

2반과 사이에 비안전구역을 끼고 있는 이곳에서 리더이자 성녀인 디피엘리아는 고민에 잠겨 있었고.

그 상념은 불안함에서 기인된 것이었다.

'불길해.'

조금씩 엇나가고 있다.

너무 일렀던 아르텔리온의 추방.

제1 중간 거점을 막아서고 있는 레온.

지원을 요청하곤 바르간을 잡기 위해 연락이 두절되어 버린 에리카.

서서히 균열이 가고 있는 4반과 5반의 연합군.

이 사건들을 잘 살펴보면 연결 고리가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1반.

모든 사건에는 1반이 있었다.

아르텔리온, 레온, 에리카.

전부 1반과 관련되어 있으며 상호작용을 하듯 굴러간다. 1반이 기계의 몸체라면 자신들은 부품인 작은 톱니바퀴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연합군의 사기도 크게 저하됐어.'

디피엘리아도 에리카와 일시적으로 맺은 이 동맹이 굳건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에리카 그녀의 인품과 능력, 1반의 퇴출이라는 공동의 목적 아래에 손을 잡은 것이었으나, 모두가 이 연합을 환영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디피엘리아는 모두를 설득하며 그들의 유용성과 연합의 필요성에 대해서 설파했고, 결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난히 지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마치 누군가가 개입한 듯.

이 동맹이 유지를 바라지 않는 자가 곳곳에 씨앗을 뿌리는 것처럼.

4반과 5반 내부에서 악성 루머가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

⎯에리카는 바르간과 손을 잡고 있다더라. 결국은 성녀가 뒤통수를 맞을 것이다.

⎯아니다. 성녀가 에리카를 배신할 것이다. 제2 중간 거점을 먹은 게 5반이 아니냐. 4반의 인원이 더 많은 연합군이 제1 중간 거점으로 간 틈을 노리는 게 목적이라고 하더라.

⎯사실 연합은 위장이고 뒤에서는 서로의 칼에다 독을 바르고 있다더라.

수군수군.

아무리 막아 보려고 해도 발이 달리지 않은 말은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4반과 5반의 연합에 붕괴 조짐이 보이는 건 1반과는 연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없어야 일반적일 것이다.

'그래야 할 텐데….'

왜인지 모르게 이조차 1반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된다. 리더의 자질이 부족한 자신을 부정하고자 하는 추악한 본성 때문일까.

1반, 더 나아가 슈겐하르츠 트로아 바르간이 벌인 일인 것 같다는 사고를 떨쳐 낼 수 없다.

디피엘리아는 클래스전이 시작되기 전 리더들만이 모이는 자리에서 그와 직접 대면할 수 있었다.

같은 수업도 있어 그전에도 몇 번인가 마주친 적은 있었지만, 제대로 얼굴을 맞대고 대화한 것은 처음이었다.

수상쩍은 인물.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느낌.

그에게는 미안한 생각이지만, 몇 마디 나눠 보지 않은 그를 보고 떠오른 이미지는 정확히 그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에리카의 약혼자이기도 하고,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기에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하지만.

사건이 하나씩 터질 때마다.

주도권이 1반으로 서서히 넘어가는 형세가 만들어질 때마다.

그의 비릿한 미소가 떠오르며 오한이 들었다. 심지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그 악인을 표방하는 웃음으로.

그녀에게 귓속말하며.

⎯나도 미래를 볼 수 있다.

"...."

디피엘리아는 고개를 저으며 합리적이지 못한 자신의 사고 오판을 떨쳐 내려 들었다.

그는 성자(聖子)가 아니다.

성자와 성녀는 한 시기에 한두 명이 있을까 말까 한 정도로 극히 드물다.

또한 교회의 성인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받아 성자가 되었다면 디피엘리아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확실하다.

그는 성자가 아니다.

'기적'을 행할 수 없으며.

'신탁'을 받을 수 없다.

"그래, 내가 어지러워선 안 돼."

이 이상은 망상이다.

부정적인 사고를 멈추고 정신을 차리자.

5반을 이끄는 그녀가 허둥지둥하고 있으면 누가 그녀를 믿고 따르겠는가.

그렇게 디피엘리아가 혼란을 잠재우려고 들며 정신을 가다듬고 있자, 이를 막으려는 것처럼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뛰어오는 모습이 워낙 급하고 불안해 보여 겨우 진정되려 했던 디피엘리아의 가슴이 다시금 뛰기 시작한다.

저 여학생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멀리 있는 작은 왕국의 슬럼가 출신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프리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급하게 달려오는 거죠?"

디피엘리아는 프리다를 바라봤다.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얼굴이 돌아가 그런 모습처럼 보였다.

"저, 저기… 그게…."

숨을 고르는 프리다는 급히 뛰어온 것치곤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전하고 싶은 바가 있으나, 무언가 그녀를 꽉 잡고 있어 꺼려지는 기색으로.

"괜찮아요. 천천히 진정하고 말해 봐요. 아무도 탓하지 않을 거예요."

이것은 디피엘리아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디피엘리아가 차분히 그녀를 기다려 주자 용기를 얻은 것처럼 주먹을 꽉 쥐던 프리다는 말한다.

"에리카 님에게 보낸 지원을 회군시켜야 해요! 저건 함정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함정이라뇨?"

프리다는 장갑을 벗어 던지며 증명하듯 내밀었다. 상처 하나 없는 깨끗한 손이다.

"저는 바르간에게 매수당했었어요⎯⎯!"

***

디피엘리아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았다.

갑자기 달려와 폭탄선언을 한 프리다의 발언을 이해하는데 머리가 아파졌다.

"그러니까… 바르간은 에리카와 뒤에서 손을 잡은 상태고, 에리카가 워프 마법으로 사라진 건 제 사역마 권역 밖에서 그와 만나 작당 모의를 이어 가기 위해서라고요?"

"맞아요…."

"프리다…."

디피엘리아는 한숨을 쉬었다.

"당신을 믿고 싶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허무맹랑하게 들리는데요."

프리다는 이곳에 오는 비공정에서 바르간에게 제안을 받았다고 했다. 내용은 5반 내부에서 스파이 역할을 하면서 정보를 제공할 것.

이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선금 금화 한 닢과 저주를 걸어 그녀가 배신하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

"믿기 힘들겠지만 진짜예요! 분명 여기에, 이 손에 저주의 문양이 있었다고요!"

프리다는 하얀 손등을 앞으로 밀며 강조했다. 눈으로 볼 때는 아무런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평범한 손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걸요…."

"네, 그렇긴 한데… 그건 저도 영문을 몰라서… 문양이 사라져서 이렇게 말하러 올 수 있었던 거긴 한데… 아, 아아. 증명할 방법은…."

프리다의 눈동자가 불안에 떨며 이리저리 배회한다. 미간을 좁히며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려 애쓰려는 것처럼 보인다.

디피엘리아는 그녀의 어깨에 놓여 있는 작은 새를 통해 그녀의 떨궈진 손을 유심히 관찰했다.

'…흔적이 있다.'

정밀하고 복잡한 식의 마나가 해제된 양식.

아무것도 없다고 했지만, 실은 지워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마나의 잔재가 조금 남아 있었다.

그 잔재는 시전자의 정보를 어쩔 수 없이 담게 된다. 저 식과 색으로 유추하건대 저주를 걸었던 장본인은 아마도.

바르간.

입학시험에서 그가 보여 준 마법을 기억하는 디피엘리아는 저 마나의 주인이 바르간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프리다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프리다의 마법식 해석학 성적을 생각했을 때, 그녀가 이 술식의 존재를 깨닫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디피엘리아는 마법 해석과 파훼에서 특히나 두각을 드러냈기에, 냄새를 맡고 정교한 식을 꿰뚫어 바르간의 저주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프리다는 달랐다.

시전자는커녕, 작은 낌새조차 눈치채지 못한다.

현재 이 거점에 남아 있는 멤버를 고려해도 이 흔적을 알 수 있는 이들 또한 없다.

그녀가 눈치를 챘다고 한다면 오히려 어폐가 된다.

"아, 그러니까…."

프리다는 자신감 없는 표정으로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저주에 걸렸었다는 걸 증명할 방법은 없어요."

그런 건가….

차라리 그녀가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느냐고 말했더라면 쉽게 해결되었을 텐데.

이로써 일이 복잡하게 되었다.

디피엘리아는 착잡한 눈을 하는 그녀에게 물었다. 만약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마땅히 필요한 수단일 것이다.

"정보를 어떻게 전달하려고 했던 거죠?"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고 가정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이를 조목조목 따지다 보면 모순이 생길 수 있다. 그러한 왜곡이 발생한다면 그녀는 거짓을 하는 게 되니까.

"저주를 통해서 전달하는 거였어요… 지금은 없어져서 못 보여 드리지만."

"그건 이상하네요. 저주에 통신 기능은 달려 있지 않을 텐데."

하다못해 통신이 가능한 사역마가 특정 장소에 자리 잡고 있다거나, 크기가 거대해 숨기는 게 쉽지 않은 수정구를 가지고 있었다는 편이 더 현실성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뇨, 알릴 수 있었어요! 전달해야 하는 정보가 특정한 시기만을 전달하는 신호라서 가능했죠."

"그게 무슨 말이죠?"

디피엘리아는 눈썹을 찌푸렸다.

"저주에 저항하려 하면 시전자가 알아차릴 수 있다는 건 아시죠? 그는 그 점을 이용해서 자신에게 시기를 알려 달라고 했어요."

"어떤 시기를요?"

디피엘리아는 저주의 색다른 활용 방식에 놀랐으나 티 내지 않고 연이어 물었다.

프리다가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고 꼬리를 물어야 한다.

"빨리 대답하세요. 프리다."

디피엘리아는 그녀를 보챘고.

프리다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애절함을 담아 말했다.

"5반 본 거점의 인원이 열 이하로 줄어드는 시기를요."

"...!"

디피엘리아는 숨을 삼켰다.

기도가 막힌 듯 답답한 느낌이다.

"제가 바르간과 에리카 님이 뒷동맹을 맺었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에요! 그는 저에게 시기를 알려 달라는 것 말고는 아무런 정보도 제공해 주지 않았어요. 이번처럼 제가 배신할 가능성을 고려한 것이겠죠."

더는 시간이 없다는 걸 전달하고 싶은 것인지 프리다가 급하게 말을 쏟아 낸다.

디피엘리아는 놀란 가슴을 붙잡으며 그녀의 말을 들었다.

"다행히 저주가 해제된 게 지원을 보내기 전이었기에 결과적으로 배반하는 행위를 하지는 않았죠. 하, 하지만. 에리카 님에게 지원군을 보낸다는 말을 들었을 때… 문뜩 생각이 들었어요."

"...."

"만약 내게 건 저주를 없앤 이유가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이라면? 에리카 님이 지원군을 요청해서 거점의 인원이 줄어든 것과 관련이 있다면?"

그런 의심과 의문이 사슬처럼 끝도 없이 이어져 결국은 프리다 그녀에게 돌아왔다고 전했다.

그녀의 울대는 물에 젖어 떨리고 있었다.

"그리곤… 고약하게도 뒤늦게… 고작 돈 때문에 반을 배신할 뻔했다는 죄책감이… 저를 옥죄서…."

프리다는 굵은 눈물방울을 떨어트리며 고해성사하듯 자신의 죄를 입에 담고 있었다.

평소의 디피엘리아였으면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리는 그녀를 안아 주며 다독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성녀님은 그러지 못했다.

그녀의 말에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기에 흔들렸다.

결국 프리다의 말은 의심이 만들어 낸 망상이었고, 이를 뒷받침하는 명확한 증거는 없었다.

…그래도. 만약에.

정말 만약에 말이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었고 그녀가 바르간에게 매수를 당했다고 가정을 해 보자.

바르간이 프리다에게 저주를 건 것은 확실하다. 이건 그녀가 직접 관찰했으니 믿을 수 있는 정보다. 그녀의 임무는 5반 거점의 인원이 열 아래로 줄었을 시기를 전달하는 것.

그렇다면 그 시기를 어떻게 만들 생각이었을까.

⎯디피엘리아. 잠시 연락이 힘들 것 같아. 가 봐야 하는 곳이 생겼거든.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에리카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우리의 목표물을 발견했어. 정예로 다섯 정도만 지원을 부탁할게.

에리카는 정확히 수를 짚어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해당 인원을 보내면 남는 거점의 수는 일곱이 된다.

이건 단순히 우연일까.

이어서 들리는 프리다의 발언.

⎯만약 내게 건 저주를 없앤 이유가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이라면? 에리카 님이 지원군을 요청해서 거점의 인원이 줄어든 것과 관련이 있다면?

프리다에게 걸린 저주는 해제되었다. 어째서? 설마 이 모든 상황을 예상하고 자신을 속이기 위해서? 에리카가 정확한 수를 불러 거점의 인원을 열 이하로 줄였기 때문에 필요가 없어져서?

아니, 첫 번째 안은 신탁을 통해 미래라도 보지 못한 이상 불가능하다.

두 번째 또한 에리카가 5반의 거점을 줄여 프리다의 가치가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그녀에게 걸린 저주를 풀 이유는 없다. 오히려 해선 안 된다. 지금처럼 배신할 경우가 있을 테니.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은 대체 뭐지?

"…아."

그때 떠오른 한 사건이 디피엘리아의 후두부를 강하게 타격한다.

둘은 약혼 관계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 의심을 덜어 주듯이 최근 바르간은 에리카에게 등급전을 신청했고 보기 좋게 졌다. 에리카에게 카티아를 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라 모두가 추측했었다.

근데 잘 생각해 보자.

그 사건이 별개가 아니라 이어지고 있으면 어떨까.

만약 그때의 등급전이 이번 일과 관련이 있다면?

카티아는 아카데미아에 있어서 절대적이며 필수적인 점수.

그처럼 가볍게 몇 푼을 쥐여 주듯 넘길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군가는 부부간의 사이가 너무 좋다 보니 저런 비리를 저질렀다⎯라며 비아냥거렸지만. 대부분의 생각은 달랐다.

분명, 합당한 다른 어떤 것이 오갔을 것이다.

이게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그렇다면 카티아를 벌 수 있는 이번 클래스전에서 그 교환 행위가 이루어지는 중일 수 있지 않겠는가.

가령, 다른 클래스의 공략을 돕는다든가 그런….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에리카 그녀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있었다. 오래 알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사람을 배신할 것 같은 인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을 인정(人情)만으로 움직여서도 안 된다.

어쩌면 그녀는 에리카를 너무 신뢰했을지도 모르겠다. 프리다의 말이 거짓이라고 해도 지금의 거점을 보라.

이 넓은 성을 지키는 인원이 고작 일곱이다.

명확한 위기가 아닌가.

디피엘리아의 나무로 만들어진 지팡이가 급격하게 성장하더니, 그녀가 앉아 있는 의자째로 뻗어졌다.

몸을 낮춘 채 울먹이고 있는 프리다를 쓰다듬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깝게. 서로의 체온이 느껴질 정도로 거리가 좁혀지고 디피엘리아는 그녀를 감싸 주었다.

"고마워요. 프리다."

디피엘리아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프리다의 발언을 확실하게 알아볼 순 없으나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회군을 명하겠어요. 집에 사람들이 너무 없으니 불안하네요."

"서, 성녀님…."

"당신은 정말 용감한 사람이에요."

프리다는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펑펑 울었다. 디피엘리아는 덩달아 자신까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따뜻한 한 장면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녀는 몰랐다.

사람을 좋아하고, 신뢰하는 성녀님은 모르신다.

지금 프리다가.

씻을 수 없는 자신의 죄를 용서받은 듯 애절하게 울어 대는 이 소녀의 입꼬리가.

히죽⎯.

초승달처럼 길게 올라가 있다는 것을.

45화

다시 한번 느꼈다.

바르간의 약혼녀이자, 악역영애.

아카데미아에 침투해 있던 여신의 추종자들을 이끈 에리카.

"슈겐하르츠! 이제 지치나 보지?!"

그녀는 뛰어나다.

특히 빙결과 워프 마법의 조합은 상당히 막강하다.

전신 이동은 거리에 따라, 현재 시야가 확보되었는지에 따라 그 속도가 확연히 차이 난다.

따라서 일반적인 전투에서 몸 전체를 이동하는 워프를 사용하기란 난해하다.

거리는 가깝지만, 해당 시야가 보이는 상황도 아닐뿐더러 순간적인 좌표 계산을 하기 어렵고 이동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콰드드드득!

또 하나의 얼음이 대지에서 솟아오른다.

곱게 펴진 그 얼음의 판들과 허공에 떠다니는 수십 개의 얼음 창들.

곳곳에는 그 얼음 덩어리들이 박혀 있어, 마치 놀이동산에 있는 유리의 집에 들어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근처에 솟아오를 때마다 원소 마법을 사용해 부수고 있지만, 올라오는 개수가 더 많다.

또한, 에리카 그녀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니니,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에게 유리한 무대가 만들어지는 꼴이었다.

⎯지잉.

마력의 흔들림.

에리카가 이번에도 내 등을 노린다.

나는 황급히 몸을 틀어 그녀의 뻗은 손목을 잡곤 그대로 땅바닥으로 당겼다.

그녀의 운동에너지를 이용한 것이었다.

그렇게 에리카는 땅으로 꺼지다.

⎯지잉.

다시 워프했다.

⎯차자작!

그녀가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 공중을 배회하던 얼음의 창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침입자를 공격하는 벌 떼와 같이.

죽일 기세로 쏘인다.

쩌저저적⎯!

목표물을 맞히지 못해 땅으로 처박힌 창들은 그대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 또 다른 얼음 기둥을 만들어 에리카에게 시야를 제공한다.

동작 하나하나에 의미가 담겼다.

얼음과 워프의 조합.

이를 가능하게 하는 에리카의 비상한 머리와 능력.

"훌륭하다. 훌륭하다 에리카!"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그녀는 커다란 전력이다. 반드시 필요한 인재다.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그녀의 뛰어난 기술을 볼 때마다. 놀라운 계산 능력을 볼 때마다.

급격히 내려가는 기온 탓인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과는 대비되게.

순수한 환호감이 솟구쳤다.

전투를 이어 가면서 에리카를 쭉 관찰하며 분석했다.

알리시아의 재능을 처음 두 눈으로 봤을 때의 감각.

에리카가 알리시아 정도의 미쳐 버린 재능을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다른 활용도와 엄연한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 저 능력을 이용해서 앞으로 해야 하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으며,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분명 이후 스토리에 있어 커다란 공을 세우게 되겠지!

머릿속에 떠오른 수많은 생각을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한다.

줄이겠다.

에리카 그녀는

"쓸모가 있다."

와장창⎯!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얼음의 벽이 부서진다.

정확히는 내가 부쉈다.

원소 마법을 사용해서 부신 것이 아니다.

순수한 힘.

오러와 근력.

"…마법사인데도 액세서리나 지팡이가 없다 했더니 그런 무기를 골랐던 거야? 기가 차네."

에리카가 헛웃음을 뱉으며 내가 들고 있는 무기를 지적했다.

액세서리와 지팡이.

그래, 일반적으로 마법사라 하면 보다 신속히 마나를 이동시키고 위력을 높여 주는 반지나 팔찌 등을 하는 게 맞겠지.

그러나, 빙의한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다. 유물이라면 몰라도, 아카데미아의 연습용. 심지어 성장해야 하는 이 시기에는 방해만 될 뿐이다.

휘리릭⎯ 착.

나는 들고 있던 작은 무기를 허공에 빙그르르 돌려 잡아 보였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이 가볍게.

언제나와 같은 미소를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뭐, 품에 넣고 다니기 좋지 않으냐."

"철퇴를 쓰는 마법사는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네."

"원래 상식이란 편견과 일맥상통한 법이지."

철퇴(鐵槌).

쉽게 말하면 쇠몽둥이.

조선시대 궁궐의 호위무사들이 사용했던 은압사철퇴와 같은 형태의 둔기다. 길이가 짧아 숨기기가 좋고, 단순하지만 위력이 상당하다.

귀여운(?) 외관에 비해 암살용으로 사용되는 무기.

그냥 때려도 사람이 죽는데, 여기에 오러를 더하면 당연히 웬만한 건 전부 아스러지지 않을까.

"내가 이걸 꺼내지 않고 있던 이유는 만에 하나라도 너를 상처 입힐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대로면 질 것 같으니 꺼낸다. 이런 말인가? 쓸모없는 배려야."

"그래, 네 말이 맞다. 이대로라면 계획한 것보다 네가 빨리 도망치게 될 테니 눈물을 머금고 꺼내고야 만 것이다. 에리카, 너에게 위해를 가할지도 모르는 이 약혼자를 용서해 다오."

"아직도 입을 놀리는 걸 보니, 사태 파악이 안 될 정도로 마나를 쓴 것 같네. 머리가 어지러운가 보지?"

공기가 얼어붙는다.

에리카가 다시 맹공을 퍼부을 준비를 한다.

나 또한 맞대응하기 위해 철퇴에 속성을 불어 넣은 오러를 집어넣었다. 얼음을 녹이는 데는 불이 효과적이지만, 이번 목적은 부수는 데 있으니 바람이 낫다.

"상당한 마나를 소모했음을 부정하진 않겠다. 하나, 약혼녀. 사태 파악이 되지 않는 건 내가 아니라 너다."

"헛소리."

"아니, 헛소리가 아니다. 잘 생각해 봐라. 우리가 전투를 시작한 지 벌써 시간이 꽤 지나지 않았느냐. 그런데… 지금 이곳엔 여전히 우리 둘뿐이다."

"...."

"그 반응을 보아하니,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은 아니었구나. 불안감이 몰려올수록 오히려 전투에 몰입해 잊으려 했던 것이었어."

나는 조소했다.

맹금류라기보다는 사자나 호랑이 같은 그녀를 보며. 아니, 크기로 보나, 외모로 보나 그녀는 고양이에 가깝다.

"에리카, 정신 차려라. 아무리 기다려도 원군은 오지 않는다."

그리고 뒤늦게 모든 상황을 깨달은 너는 곧 도망치기 위한 워프를 준비하게 되겠지.

"자, 2차전을 시작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