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화. 그대였군
누군가 들었다면 뭔 헛소리를 하는 거냐고 하겠지.
당연하다.
다짜고짜 내가 기이의 창시자라니.
증명할 방법이랄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대마법사님께선 잘 알고 계시겠지. 마법적 지식이 전무하다시피 한 제시가 어째서 그보다 상위 개념인 기이를 알고 있는지를.
"...설마?"
마법사들 사이에 스승과 제자는 없을지도 모른다?
동감한다.
하지만 나는 마법사가 아니라 악마 사냥꾼이거든. 그러니까 제시와는 마법과 기이에 관해서도 꽤 심도 높은 대화를 나눴다는 거다.
대마법사가 후후─ 너털웃음을 뱉는다.
"그래, 확실히 그런 기억이 있네. 빌어먹게도."
제시의 머릿속 혹은 고깔모자에 담긴 기억을 되짚어본 건가.
시종일관 여유가 넘치던 표정이 조금은 심각해졌군.
슬슬 상황 파악이 되는 모양인가 봐.
'늦었지만.'
긍지에 살고 긍지에 죽는 그랑펠이다.
그런 그랑펠 앞에서 타인의 긍지를 가벼이 여겼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
그 대가야 말할 것도 없겠지.
과연, 누구의 긍지가 더 올곧으며 광적인지 겨뤄보자고.
"한데, 기이를 향한 접근을 불허한다니. 제아무리 창시자라고 하더라도 그럴 권리가 있는 거야? 무슨 의미인지 알아듣지 못하겠는데."
그 말이 옳다.
기이를 향한 길이 진짜로 걷는 길도 아니고.
내가 가로막을 순 없는 일이지.
하지만 마법사는 아니면서도 마탑의 수석인 나다.
덕분에 마법사들이 무엇을 가장 꺼리는지는 잘 알고 있는바.
"그대들이 목표로 했던 마법의 극한."
그러니까 나는 선언했다.
"기이의 끝에는 내가 먼저 다다르겠다."
"...!"
이른바 당신들의 진리를 가로채겠다는 거지.
그거야말로 대마법사.
당신들의 긍지를 꺾어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테니까.
짧은 침묵 후 되돌아오는 질문.
"그건 우리를 향한 선전포고로 받아들여도 되는 건가?"
침묵은 긍정이니까, 물론이다.
아, 기절한 제시는 무죄니까 빼고.
나는 머리를 굴렸다.
'마지막까지 종잡을 수 없이 요란한 하루구나.'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던가?
한 명도 아니고, 대마법사'들'이랑 적대적인 관계가 되다니.
대폭 상승한 행운의 효과가 진짜 이게 맞나, 싶다.
그럼에도 의심은 하지 않았다.
'행운의 효과는 제대로 확인했으니까.'
그러니까....
역으로 생각해 볼까?
지금 이 상황이 행운으로 취급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
유달리 고달팠던 오늘 하루를 되돌아본다.
그러던 중 마탑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정확하게는 마르셀로의 글귀가.
──────
탑주님께서 처음으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
그와 동시에 떠오르는 대마법사의 목소리.
-"마탑의 수석으로서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 않나?"
-"맞아. 마탑식으로 말하자면 '진리'라는 거지."
눈앞의 대마법사는 마탑에 관해 지나치게 상세히 알고 있었다.
게다가 초월자의 격을 갖춰 시공간의 사교장에 진입했다는 건 마법사로서 적어도 '서클'을 형성했다는 뜻.
내가 아는 지식 속, 마탑에서 서클을 형성했던 마법사는 오직 한 명밖에 없었다.
나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대였군."
그와 동시에 퀘스트창이 점멸했다.
[퀘스트 : 마탑의 재건]
마법사의 탑에 존재하던 모순의 실체.
진리 추구라는 마탑의 목적조차 불순해진 지금.
마탑을 그 기반부터 바로 세워라.
─탑주와 조우하라. (성공)
추측이 확신이 되는 순간.
입맛은 이보다 씁쓸할 수 없었다.
역시, 아랫물이 맑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나.
'탑주가 생각하는 진리가 이따위였으니까.'
카림제바를 비롯한 원로들도.
그 아래의 선임, 숙련, 견습 마법사들도.
진리란 울타리 안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었던 거야.
그러나 이 순간, 점멸하는 퀘스트 목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진정한 진리를 찾아라. (진행 중)
그래, 마탑은 이름뿐인 진리를 내던지고.
진정한 진리를 찾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변화했으니까.
탑주, 당신이 마력 구체에서 부유하던 사이에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는 거지.
그 시점에서 우리는 더 이상 나눌 이야기가 없겠군.
"그대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연기에는 소질이 없군."
"...연기라고?"
"지금이라도 그만두기를 권하겠다."
"아까부터 수수께끼 같은 말만 늘어놓는 거 알아? 이렇게 쉽지 않은 사내는 처음인걸. 게다가 연기라면 아까부터 때려치웠잖아? 이 수석, 그대가 사사로운 장난에도 정색한 덕분에."
아니.
내가 그만두라는 연기는.
제시의 흉내를 말하는 게 아니다.
"모험가인 제시 하인네스. 그녀에게 견습 마법사 자격을 부여한 건 대마법사의 그릇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기 위함이었나?"
"...!"
"허나, 한 가지 의문이 드는군."
나의 말에 대마법사의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선대 대마법사들과는 달리 그대의 육체는 마력 구체 속에서 부유하고 있지 않은가? 그대가 뱉은 말이 사실이라면, 그 행동은 명백히 일인전승 절차에 어긋나는 행위일 터."
"...글쎄,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말했다시피 그대는 연기에 소질이 없네, 탑주."
"!"
내가 그만두라는 건 그놈의 자작극이다.
어떤 꿍꿍이가 있어서 대마법사의 절차를 어겨가면서까지.
육체와 의식을 분리하는.
위험천만한 짓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말이야.
"이 일은 당분간 기밀로 치부하겠다."
탑주, 당신이 걱정돼서가 아니다.
"마르셀로 수석을 실망하게 하고 싶진 않군."
자신이 시한부의 저주로 죽어가던 순간까지.
탑주, 당신을 걱정하던 마르셀로가 안쓰러워서 그러는 거니까.
착각하지 말라는 소리다.
마르셀로의 이름을 꺼낸 순간.
탑주의 얼굴엔 더 이상 여유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드륵!
신경질적으로 끄는 의자 소리.
그러더니 날카로워진 목소리가 이어진다.
"잠깐, 이대로 자리를 떠나도 되는 거야? 나라면 걱정될 것 같은데. 설마, 내가 이 아이의 몸을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겠지?"
협박인가.
아직도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 한 거 같은데.
그 대사는 나도 똑같이 되돌려줄 수 있거든.
나는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탑주, 그대의 육체 또한 내 수중에 있다는 걸 명심하도록. 그리고 다시 한번 조언하지. 그대는 아무리 봐도 연기에 소질이 없군."
게다가 탑주가 제시의 육체를 차지한 데에는.
대폭 상승한 행운이 영향을 끼쳤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나였다.
[남은 시간 : 3분 21초]
심지어는 본인의 입으로.
천운이 따라 오랜만에 세상 구경을 했다고 말했으면서 말이지.
새삼스럽게 직업병 덕을 봤구나, 싶다.
'하도 악랄한 악마들만 상대해서 그런가.'
악의를 구분하는 거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할 수 있는 나였다.
그러니까 무슨 사연으로 그런 짓을 벌인 건지는 모르겠다만.
제시를 볼모로 협박해 오는 탑주에게서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가 있지.'
천하의 마르셀로가 존경해 오던 탑주였다. 그런 마르셀로의 보는 눈을 부정하면, 마르셀로 덕분에 수석의 자리를 차지한 나 자신을 부정하는 꼴이니까.
그러니까 아까부터 집어치우라고 했던 연기는.
그 어울리지도 않는 나쁜 사람 연기를 말하는 거라고 탑주.
잘근─
탑주는 제시의 얼굴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예의가 없군, 이 수석. 그대는."
뭐?
예의가 없어?
격식에 죽고 못 사는 내가?
"상사의 치부를 꼭 그렇게 들춰야 하는 건가?"
...아, 계급을 들먹이면 할 말이 없어진다.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는데.
탑주의 안색이 다시금 바뀌었다.
상황에 따라 낯빛을 휙휙 바꾸는 게.
정말로 부장님을 보는 것 같아서 무섭다.
'역시 연륜은 무시 못 하지.'
속으로 혀를 내두르던 찰나.
"이 수석. 그대가 모든 걸 훤히 꿰뚫어 본 이상, 어쩔 수 없게 됐군. 아무리 생각해도 그대가 나의 공범이 되어줘야겠어."
...그런데, 뭐요, 공범?!
내가 미쳤다고 구린내가 풀풀 나는 상사와 한배를 타랴.
썩은 동아줄은 붙잡지 않는 게 사회생활의 상책이란 말이다.
그러나 이 순간, 시야가 점멸했다.
[퀘스트 : 마탑의 재건]
마법사의 탑에 존재하던 모순의 실체.
진리 추구라는 마탑의 목적조차 불순해진 지금.
마탑을 그 기반부터 바로 세워라.
─탑주와 조우하라. (성공)
─대마법사들의 음모를 저지하라. (진행 중)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잠깐, 거기부터 연기였어?'
아무래도 연기 못 한다는 말은 취소해야겠는데?
*
드래곤이 활강했다!
그 속보는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당장 두려울 것 없이 제로 산맥에서 몬스터를 사냥해 나가던 플레이어들조차 멈칫하게 할 소식이었으니까.
"...저거, 설마 우리한테 날아오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세상에 입구까지 마중 나오는 보스몹이 어딨냐?"
"그렇지? 괜한 걱정이겠지?"
실제로 AAU에게서 정보를 전달받기 전까지.
제로 산맥의 플레이어들은 아무런 낌새를 느끼지 못했었다.
워낙 높은 제로 산맥이어야지.
호열과 검성, 셰그윈이 맞붙었을 때 났던 굉음처럼 큰 소음이 아니고서야 들리지 않는 게 당연했다.
제로 산맥 남서부.
거대 연합의 베이스캠프.
분석관, 남철민은 들어오는 정보를 읊었다.
"제로 산맥 최정상에서 깨진 차원의 틈 균열 때와 유사한 현상이 포착됐다.... 현재까지 들어온 정보는 거기까지야. 그쪽도 별일 없는 거지?"
-응. 토끼들이 겁나게 빡세다는 거 말곤 없어.
"다행이네. 최정상에서 활강한 이후엔 어떤 곳에서도 드래곤의 모습이 포착되지 않았다고 하니까.... 역시, 생성된 균열을 통해 아르카나 대륙으로 향했을 확률이 가장 높을 것 같네."
-정말? 옆에 있는 전문가도 형이랑 똑같은 소릴 했는데.
"...전문가?"
남태민의 말에 남철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얘가 세상에 드래곤 전문가가 어디에 있다고....
아니지, 설마 호열 씨랑 함께 있는 건가?
-호열 씨가 아니라 용기사, 스칼 말하는 거야.
"난 또.... 가 아니라 스, 스칼?! 스칼이 왜 옆에 있어?"
-아, 그게 조금 전에 우리 쪽으로 합류했거든.
"뭐, 뭐어?!"
남철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스칼이 누구던가?
신비주의 그 자체.
그 어떤 길드에 속해있지 않으면서도 아르카나 공식 랭킹 1위에서 내려온 적이 없던 플레이어. 더군다나 그 잠재력만큼은 히든 클래스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평가받는 용기사!
그런 스칼이 거대 연합에 합류했다고?
순간, 머릿속에서 두들겨지는 계산기.
'잘하면 샤이닝도, 천하통일도....'
우리 거대 연합이 제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물론, 남철민의 상상의 나래는 오래가지 않았다.
토끼와의 사투를 끝낸 남태민이 말을 덧붙였으니까.
"맞아, 긍지더라고."
찌릿─
그 말에 곁에 있던 레오니는 눈을 흘겼다.
'아니, 그걸로 설명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호열과 드래곤부터 클래스 퀘스트까지.
구구절절하고 복잡하게도 얽힌 스칼의 거대 연합 합류였다. 자초지종도 모자라 구구절절 설명해도 부족한 사연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걸 긍지 한 단어로 퉁 치면 알아들을 수 있겠냐고!
"역시, 형은 이해할 줄 알았어."
"?!"
...그런데, 있었다.
레오니는 또 한 번 정신이 아득해졌다.
설마, 내가 비정상인 건가...?
젠장, 머리가 지끈거렸다.
"진짜 다들 미쳤어...."
그러나 레오니의 두통은 오래가지 않았다.
"으, 으아아악!!"
애마, 알렉산더의 꼬리를 빗기던 스칼.
그가 기겁해서 소리쳤으니까.
히히힝!
퍽!
그 바람에 놀란 알렉산더가 날뛰며 뒷발질을 했지만.
정작 얻어맞은 스칼은 익숙한 모양인지, 내색이 없었다.
오히려 히사기와 슈레이그가 걱정할 정도였다.
"괜찮으신 겁니까, 스칼 씨?"
"뭔가 무시무시한 소리가 났는데."
"...어째, 스칼 저거 내가 알던 이미지가 아닌데. 언니?"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건만.
스칼에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말발굽에 사타구니를 얻어맞은 것보다도.
끔찍한 글씨가 눈앞에 떠올랐으니까.
"...아, 안 돼."
드래곤이 활강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땐 설마 했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생각하며 애써 외면했다.
그러나 새로운 퀘스트창이 반짝거리는 지금.
더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클래스 퀘스트 : 전룡소집(全龍召集)]
스칼의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위대한 가문? 아르카나 대륙에 돌아와? 모든 용들이 집합해?!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요! 드래곤이 움직인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어디서 어떤 일을 벌이셨길래. 이런 퀘스트가...!!"
천운의 후폭풍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 213화. 자리를 비우다
무섭다.
무서워.
역시, 사람이 제일 무섭다니까?
스스슥─
책상 위.
수북하게 쌓인 수석의 업무.
나는 깃털펜을 휘갈기면서도 좀처럼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처음부터 모든 게 연기일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탑주의 연기는 고깔모자에 깃든.
전대 대마법사들을 속이기 위한 연기였다...!
그런 의미에서 탑주는 괜히 탑주가 아니었다.
탑주가 제시의 기억을 훑어봤던 것처럼.
대마법사들도 탑주가 나와 대화를 나눈 기억을 살펴볼 수 있을 터.
'탑주가 입으로 내뱉은 말만 보면....'
의심할 구석은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까칠하게 나왔던 거였구나.
그 메소드 연기 덕분에 낌새를 알아차릴 순 없을 거다.
애초에 얼굴을 맞대고 있던 나부터도.
─대마법사들의 음모를 저지하라. (진행 중)
퀘스트창이 반짝거리지 않았더라면.
그 말에 숨겨진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테니까.
그렇다고 내가 눈치가 없다는 건 아니다.
다짜고짜 공범이 되라니!
누구라도 오해할 수밖에 없잖아, 그건?
'괜히 마르셀로가 존경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건가.'
플레이어의 전유물인 시스템창.
때문에 전대 대마법사들로서는 알아차릴 수 없는.
사각지대인 시스템창을 활용해 내게 사건의 경위를 전해올 줄이야.
'그건 시스템을 이해하고 있단 거겠지.'
플레이어들이 『마법』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아르카나인들에게도 [시스템]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개념이었다.
천하의 마르셀로가 기이에 고전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말이야.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과연, 탑주의 자리는 괜히 올라선 게 아니군."
어째 낙하산으로 수석을 차지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다만.... 그래도 기이에 있어서만큼은 조금은 어깨에 힘을 줄 정도는 되지 않을까.
'그나저나.'
결국, 탑주는 끝까지 나를 가늠해 본 모양이었다.
나를 신뢰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퀘스트 내용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능구렁이 몇 명을 상대해야 하는 거야, 이게?'
대마법사의 음모도 아니고.
대마법사'들'의 음모를 저지하는 퀘스트.
이런 초고난도의 퀘스트를 탑주는 혼자서 수행하고 있던 거였으니까. 심지어는 그런 적들과 모든 감각을 공유하면서 말이야.
'슬슬 이해가 되는데.'
어째서 탑주가 제시를 마탑에 입성시켰는지를.
탑주는 제시를 선택한 거겠지.
대마법사의 음모를 함께 막아낼 아군으로.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처럼 말하자면.
그게 대마법사 클래스 퀘스트의 스토리 라인이라는 거겠고.
-"스승과 제자라.... 그렇게 생각했던 게 한두 명 정도는 있었을지도 모르겠는데. 뭐, 나를 포함해서 대다수는 아니었을 거란 말이야."
자기가 스승이면서 그런 소릴 하다니.
하긴 본인조차 속여넘겨야 하는 연기였을 테니까.
여기선 탑주가 거짓말을 했다고 꼬투리 잡을 때가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대마법사들의 음모가 뭐냐는 거다.
도대체 탑주는 어떤 음모를 알아차렸길래.
육체와 의식을 강제로 분리하고, 고깔모자라는 호랑이굴로 들어가서, 제시에게 대마법사 자리를 넘기는 도박 수를 던진 걸까...?
'결국, 그놈의 진리가 문제인가?'
진리라고 하니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카림제바.'
마탑의 지하.
무간에서 무너져 버린 두 명의 원로 마법사와는 달리.
카림제바는 절대영도에 얼어붙어 가면서까지 진정한 진리를 향한 열망을 굽히지 않았었다.
그런 카림제바가 진정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벌였던 일은 다름 아닌 상위 마왕의 부활....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구린내가 난다.
마왕 쟁탈전 끝에 상위 마왕 중 하나인 가미긴과 마주쳤던 나였다.
덕분에 상위 마왕의 범상치 않음을 직접 확인했단 말이지.
일단, 상위 마왕하고는 말부터가 통하지 않았다.
-"□□."
그러나 가정해보자.
카림제바가 말한 '진정한 진리'.
그리고 대마법사들의 목적지인 '마법의 극한'을 동일시한다면....
'기이가 진정한 진리가 되는 건가?'
나는 탑주와 나눈 대화를 통해 마법의 극한이 기이라는 걸 파악했다. 아니, 파악한 걸 넘어서 내가 기이의 창시자라고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왔지.
내 입으로 내뱉었으니까.
탑주뿐만 아니라.
다른 대마법사들도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터.
'역시, 입으로 매를 버는구나.'
만약, 탑주가 아닌 다른 대마법사의 인격이 튀어나온다면 일이 상당히 귀찮아질 것 같았으니까. 부디, 제시가 마력 탈진에 시달리지 않기를 바라야겠지.
탄식을 삼키기도 잠깐.
생각 끝에서.
나는 가능성 하나를 떠올렸다.
'잠깐, 상위 마왕이 기이의 영역에 있는 존재라면.'
그런 전제를 깔고 간다면.
단번에 풀리는 의문 하나가 있었다.
그랬다.
가미긴이 [『기이』]에 저항할 수 있었던 이유를 찾은 셈이잖아!
기이는 말 그대로 기이한 효과를 가졌다.
자그마치 화룡이라 불렸던 카림제바가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허약했던 과거의 나한테 패배했던 건 기이에 관한 내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미긴이 유일했다.
다시금 떠올려보는 가미긴과의 전투. 악크샨 선배님들이 도움이 없었더라면, 설령 기이를 발현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가미긴을 지옥에 처박을 수 없었겠지.
그렇다면 결론은 나왔다.
상위 마왕.
그들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기이의 영역'에 진입한 존재라는 것.
그렇게 생각하자 상위 마왕이 그토록 압도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가 됐다. 기이한 힘이니까 누구도 저항할 수 없었던 거였어.
나는 읊조렸다.
"그런가."
그래, 기이를 향해 달려나가던 게 나랑 마르셀로만 있던 게 아니었구나? 상위 마왕은 물론, 대마법사들도 기이를 향해 나아가고 있던 거였어.
근데, 말이야.
다들 명심하고.
주제 파악을 하라고.
"허나, 나와 같은 눈높이에 설 생각은 하지 말거라."
나의 흑역사가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 이상.
나는 누구보다 먼저 기이에 도달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말뿐만이 아니다.
기이에 상위 마왕이, 악마가 관련됐다는 걸 알게 된 지금.
그랑펠은 더욱더 진심이 될 수밖에 없거든.
스샤샤샥─!
...아니, 그렇다고 이런 데까지 진심이 될 필요는 없는데.
어째 깃털펜을 놀리는 속도가 더욱더 신속해져 간다.
거기서 나는 또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아뿔싸.
어째 기이로 향하는 길보다.
고생길이 더 훤하게 열린 것 같다고.
─대마법사들의 음모를 저지하라. (진행 중)
●탑주의 육체와 마주하라. (진행 중)
그러나 모든 길도 한 걸음부터다.
탑주의 육체라면 마탑 최상층, 마력 구체 속에서 부유하고 있을 테니까. 언제나 모든 것은 절차에 따라서. 최상층을 찾는 건 수석의 업무를 마친 그다음이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불합격이다. 벤쉬 윌리엄."
스슥─!
*
유스라 왕국.
황금 궁전의 새로운 근위대장은 라이언 하트 기사단의 삼인자, 에노크 로렌이었다.
에노크는 문득, 예시카를 떠올렸다.
예시카는 어째서 그렇게 기겁을 했던 걸까?
"흐아암─"
하품이 다 나올 정도로 할 일이 없는데 말이야.
-"단장님, 제로 산맥 원정에 함께하고 싶습니다."
예시카의 선언.
예시카가 나를 대신해 위험천만한 제로 산맥 원정을 대신 나서줄 줄이야. 에노크에게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하르콘의 승인 아래 예시카와 에노크, 서로의 직무가 바뀐 게 바로 오늘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황금 궁전 수호가 절대 만만한 임무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묘하게 마음이 놓인단 말이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느 누가 불순한 마음을 가지고 황금 궁전에 얼씬거릴 수 있단 말인가? 무려 이호열 총대장님께서 매일같이 방문하시는 장소란 말이다.
물론, 총대장님께서야 워낙 바쁘신 분이니까. 언제까지고 자리를 지키고 계시진 않는다. 그럼, 그 부재를 노리는 이들이 있는 건 아니냐고?
아니, 뭘 모르는 소리를.
'산 너머에 또 하나의 산이 기다리고 있지.'
그렇다.
황금 궁전의 별실엔 엘시도어가 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엘프가 눈을 부릅뜨고 있다는 것.
저런 엘프를 어떻게 굴복시키신 건지는 모르겠다만....
암, 모든 게 이호열 총대장님의 능력이시겠지.
"이게 얼마 만에 꿀이냐?"
그리고 이런 꿀을 마다한 예시카의 덕도 추가.
그러나 에노크는 착각하고 있었다.
황금 궁전 근위대의 업무는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을.
해가 중천에 뜨고, 시곗바늘이 정확하게 정오를 지나는 순간이었다.
"...뭐, 뭐야?"
우르르─
마치 합이라도 맞춘 것처럼.
황금 궁전 앞으로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호열을 취재하기 위해 몰려든 취재진들이었다.
난데없는 인파.
에노크는 반사적으로 소리치고 말았다.
"정지. 아직 이호열 총대장님께서는 복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통제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이번에도 짜맞춘 것처럼 정갈하게 오와 열을 맞추고 있는 게 아닌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발적으로 말이다.
"가위바위보!"
"아자! 저희 VBC가 먼저입니다."
"아니, 윤 감독님. 먹고 가위바위보 연습만 하셨어요?"
또한 순서를 정하는 나름의 절차도 존재하는 모양.
에노크는 직감할 수 있었다.
이 또한 이호열 총대장님의 덕분이라는 것을.
왜, 라이언 하트 기사단 내에서도 소문이 자자했었거든.
-"총대장님이 입만 열면 주변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니까?"
-"사실 나도 마탑 마법사한테 들은 게 있는데 말이야."
-"뭐, 마탑에서 뭘 들어?!"
-"소문에 의하면 총대장님께선 이쪽 세상에서 아주 고귀한 혈족이신 것 같더라고. 콧대 높은 마탑 마법사들이 그렇게 말할 정도였니까."
-"심지어는 호멘이라던가. 그런 기도문도 있다고 했지?"
그저 호멘.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에노크가 속으로 중얼거리던 와중이었다.
다그닥─
난데없이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
그와 동시에.
기자들에게서 탄식이 튀어나왔다.
"에휴."
애마, 알렉산더를 타고 나타난 스칼이었다.
그간 신비주의를 고수해 오던 스칼이 아니던가?
그런 스칼의 등장에 환호해야 할 기자들이 시큰둥한 이유는 간단했다.
"아니, 또 왔어. 저거?"
"이젠 반갑기보다는 지겨운데, 진짜."
"류오쥔춘은 걱정도 안 된대요? 1레벨 차인데?"
놀라고, 카메라부터 들이대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대체 호열에게 무슨 볼일이 있어서란 말인가?
그동안의 신비주의가 무색하게도.
호열 앞에서만큼은 스칼은 지나치게 질척거렸다.
호열의 뒤를 쫓아 마탑과 유스라 왕국.
그리고 제로 산맥을 쏘다니고 있었으니까.
"이번엔 진짜 정말 미치도록 급한 일이라."
"뭐, 이번에도 특종감인가요 스칼 씨?"
"물론, 해결만 되면 정식으로 기자 회견 열겠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매번 같은 변명을 해가면서 은근슬쩍 맨 앞으로 나아가는 스칼이었다. 언제나처럼 예시카를 붙잡고 호소하려던 스칼은 흠칫했다.
"...예시카 브라이트 경은?"
"그녀는 제로 산맥으로 원정을 떠났습니다. 오늘부터 황금 궁전의 근위대장은 저, 에노크 로렌입니다."
"아, 그렇군요. 에노크 씨."
"...?"
예시카는 경이고, 자신은 왜 씨란 말인가?
묘하게 거슬렸지만, 따지기엔 또 치졸해 보였다.
게다가 상대는 스칼이었다.
'용기사 스칼인가.'
대격변 이전, 제국에서부터 그 명성이 자자했던 몇 안 되는 모험가 중 하나. 에노크 또한 기사이기에 용기사인 스칼의 존재를 모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대단한 모험가 스칼이.
"아니. 그보다 긴급한 일입니다, 에노크!"
안절부절.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꼭 전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꼭 호열을 만나야 한다며 떼를 쓰고 있었다.
에노크는 그제서야 질색하던 예시카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스칼에게 매일같이 시달린 거구나, 예시카....
단호한 예시카에 달리 에노크는 정이 많았다.
"경께서 복귀하신다면 전언을 전달하겠습니다."
게다가 스칼의 목소리가 워낙 호소력이 짙어야지.
하지만 무엇보다도.
스칼에겐 호열에게 반드시 전해야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으니까.
"오늘은 평소랑 대사가 조금 다른데?"
거기엔 웅성거리는 기자들의 바람잡기도 한몫을 거들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스칼은 이번에도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근데 몇 시에요, 지금?"
"엥? 잠깐만, 훨씬 지났는데?"
"아니 호열 씨가 이러실 분이 아닌데?"
"혹시 무슨 사건이라도 터진 거 아닐까요?"
"...설마?! 아, 안 돼!"
단 하루도 일과를 어기지 않았던 이호열.
그가 이례적으로.
하필이면 오늘 황금 궁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
.
.
마탑의 최상층.
흥건한 바닥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말하고 있다.
멈칫─
그 광경을 목격한 원로 마법사.
"...이호열 수석?"
유그위드가 간신히 말을 잇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처참하게 깨져버린 마력의 구체.
그 안에서 바닥으로 쏟아져 내린 마력의 정수.
탑주가 사라졌다.
◈ 214화. 당사자에게 묻도록
탑주가 사라졌다.
마탑, 선임 계급 이상의 마법사 전원은 크리스탈 홀에 신속히 집결했다.
물론, 거기엔 수석인 나도 포함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최초 목격자로서 크리스탈 홀 강단에 섰다.
이런 상황에도 목과 허리는 지나치게 꼿꼿하구나.
꼿꼿한 자세 덕분에 집결한 이들의 면면이 한눈에 보인다.
대다수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들이군.
벤쉬와 뱅그릿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뱅그릿 선임?"
"소식 못 들으셨어요?"
"아니, 그게 정신이 없어서...."
"손에 들고 계신 그 종이는 또 뭔가요?"
"아, 이거 말입니까? 크흠,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긴 뭐야, 나에게 불합격을 받은 출탑 신청서지.
대충 분위기를 보아하니,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는 건 벤쉬뿐인 것 같군.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들 심각한 표정으로 얼굴을 구기고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대다수는 탑주와 접점이 없을 테니까.'
원로 마법사들과 대면해 본 선임 마법사조차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그보다 더 보기 힘든 탑주와 마주한 이들이 몇 명이나 되겠냐고.
물론, 몇 안 되는 이들이야....
지금도 충분히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마르셀로에겐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겠지.
"탑주님께서 실종되셨습니다."
마르셀로는 자리에 앉은 채 입을 열었다.
"그 현장을 처음 발견하신 건 이호열 수석이십니다."
그 말이 더없이 옳다.
그러니까 이렇게 강단에 꼿꼿하게 서 있는 거지.
이내, 유그위드가 마르셀로에게 눈짓하고는 말꼬리를 이어받았다.
"그리고 그런 이 수석을 제가 발견했지요."
그것도 맞다.
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누군가 말했다.
"그렇다면 불행 중 다행이네요! 다른 분도 아니고 이호열 수석께서 최초 발견자시라니. 분명, 어떤 사소한 단서라도 찾아내셨을 테니까요!"
...저거, 나를 조리돌리는 건가?
의심할 정도의 발언을 내뱉는 건 벤쉬였다.
출탑 신청서의 복수를 이렇게 하는 건가, 싶었거늘.
벤쉬의 눈치야 경악스러울 정도니까 너그러이 이해해 주자.
사실 벤쉬보다 이해할 수 없는 건 나의 똥고집이었으니.
내게 집중되는 시선─
분명, 내가 탑주의 행방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물론, 짐작하고 있다.
단서보다도 명확한 퀘스트 목표가 눈앞에 떠오른 상태였거든.
─대마법사들의 음모를 저지하라. (진행 중)
●탑주의 육체와 마주하라. (실패)
●폭주한 탑주의 육체를 처치하라. (진행 중)
...그래, 이렇게 잘 풀릴 리가 없다 생각했다!
분명 육체와 의식을 분리했다는데.
탑주의 육체는 어떻게 손가락을 꿈틀거렸던 걸까.
그런 의문을 품었을 때부터 불안 불안했다는 거다.
사건의 경위는 보이는 퀘스트 목표, 그대로였다.
마력 구체 속에서 부유하던 탑주의 육체가 폭주.
구체를 깨부수고는, 의식은 그대로 고깔모자에 남겨둔 채 마탑에서 가출했다는 것. 탑주의 육체가 어디로 간 건지는 알 수 없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폭주한 탑주의 육체를 처치하라. (진행 중)
절대 호의적으로 나오진 않을 거겠지.
이렇게도 구체적인 사정과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었거늘.
말했다시피 내 고집.
아니지, 그랑펠의 똥고집이 문제였다.
"마탑 최상층에 단서 따윈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 뭐, 틀린 말은 아니야.
단서는 내 퀘스트창에 있지.
최상층에 있는 게 아니니까.
그치만.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도 있는데, 어째서.'
항상 입으로는 매를 벌고.
말은 씨가 되는 말만 골라서 하는 거냐, 그랑펠?
"아앗...."
나의 단호할 정도의 선언에 벤쉬는 흠칫 당황한 모습이었다.
옆자리의 뱅그릿이 그를 대신해서 입을 연다.
"그렇다면 탑주님의 행방에 대해 짚이시는 바는...?"
그에 관한 내 대답은 더욱 가관이었다.
"답하지 않겠다."
"...!!!"
자기변호를 하자면 이건 단순한 꼬장이 아니었다.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킬 수밖에 없는 긍지 때문이지.
그렇다, 나는 탑주에게 분명 그렇게 말했었으니까.
-"이 일은 당분간 기밀에 부치겠다."
근데, 아무리 기밀이라도 그렇지.
'침묵은 긍정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데.'
조금은 돌려서 말할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나의 뻔뻔한 선언에 크리스탈 홀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유그위드가 입을 연다.
"그렇다면 어째서 마탑의 최상층을 찾았는지, 이유 정도는 물어도 되겠습니까? 마탑의 수석에겐 최상층에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곤 하지만. 이 수석은 평상시, 최상층에 출입하는 일이 없지 않았나요?"
왜긴요, 당연히 퀘스트 때문이지.
그러나 애초에 탑주로부터 시작된 퀘스트였다.
뱉은 말에 따라서.
유그위드의 질문에도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으니.
이번에도 내가 뱉은 말은 한결같았다.
"답하지 않겠다."
진심, 공포의 주둥아리가 따로 없구나.
내가 이렇게 수상한 사람이다.
광고하다시피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었거늘.
그럼에도 나를 향한 눈초리가 의심으로 바뀌진 않았다.
'이런 반응은 좀 감동이네.'
물론, 의심받지 않는다고 끝난 건 아니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마르셀로의 시선.
누가 봐도 공허해진 눈빛이 나를 향했다.
"...경께서 그리 말씀하시는 데에는 분명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경, 부디 이번만큼은 제 심정을 헤아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다시 한번 말한다.
아르카나 대륙에서 마법사는.
그중에서도 마탑의 마법사들은 절대 성인(聖人)이 아니다.
이를 증명하는 마탑의 일화에 관해서는 멀게는 소문으로, 가깝게는 예시카를 통해서도 전해 듣지 않았던가?
'단순하게 방해가 된다고 일대를 날려버렸다니까.'
그런 마법사들이 누가 봐도 수상한 나를 이해하려 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체감하고 싶지는 않았건만.
확실히 마탑이 변했다는 게 느껴지는군.
그러나.
"유감이네. 마르셀로 수석."
"...경?"
"그럼에도 그대의 부탁에 응할 수는 없겠군."
내가 쓸데없는 의심을 사가면서까지 대답하지 않는 건 전부 마르셀로 때문이었으니까. 그래, 나는 마르셀로가 실망하지 않기를 바란다.
'애타게 기다리는 탑주는 이미 죽었으니까.'
육체와 의식이 분리된 시점에서 탑주는 사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시에게 대마법사 클래스를 계승할 순 없었을 테니까.
그게 바로 내가 당황하지 않은 이유였다.
'이 또한 탑주의 계획 일부겠지.'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만.
퀘스트 목표에 떠오른 대로.
탑주, 자신의 육체가 사망해야지만 이뤄지는 계획.
그렇기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마르셀로에게만은 절대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설령.
"...경의 뜻을 알아들었습니다."
나에게 실망한다고 하더라도.
.
.
.
벨리에는 흑마도학 선임, 마티스를 바라봤다.
마티스는 그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추궁이 아닌 절차에 불과했거늘.
그럼에도 최초 목격자란 이유로, 이호열 수석께서 단상에서 질문에 답하는 모습조차 보기 싫으시다는 거겠지. 사실 벨리에의 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모두가 같은 심정일 거야.'
숙련, 견습 마법사는 모를지라도.
이곳에 모인 선임 이상의 마법사 모두는 알고 있었다.
모험가였던 이호열 수석, 그가 마탑을 위해 짊어졌던 짐들을.
마탑의 과오.
카림제바를 비롯한 원로 마법사들이 악마 숭배자로 밝혀졌던 순간, 이호열 수석께서는 쏟아지는 세상의 관심과 화살을 전부 자신에게 돌리셨었다.
뿐만 아니다.
휘청거리던 마탑이 완전히 쓰러지지 않도록.
새로운 진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변화의 바람을 이끈 것도 이호열 수석이었다.
'다들 알고 있으니까, 그런 표정들이겠지.'
그런 이호열 수석이기에.
이 자리의 모두는 신뢰하고 있는 것이었다.
탑주의 행방불명에 관해 아무런 답을 내놓지 않고 있더라도.
수석님에게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것이다.
"질답에 이의는 없습니다."
"저 또한 남은 의문은 없습니다."
"슬슬 마무리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순수마력학, 뱅그릿 톰.
대지마법학, 마이아 데이안.
마법부여학, 키코 아르민.
정령마법학, 페이얀 롯....
"동의합니다."
끝으로 자신과 마티스 선임 마법사까지.
계급과는 무관했다.
원로, 유그위드도 선임들의 선언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으니까.
크리스탈 홀에서 의견을 밝히지 않은 건 마르셀로가 유일했다.
'마르셀로....'
벨리에는 마르셀로에게 탑주가 어떤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가끔은 마르셀로에게 서운한 감정이 들 정도였으니까.
'어쩔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아.'
벨리에는 마르셀로의 입장에서 생각했다.
탑주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인 뒤.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탑주가 사라졌다.
그 현장을 처음으로 발견한 건.
불행 중 다행으로 이호열 수석.
마르셀로는 누구보다 마음을 놓았었겠지.
이호열 수석이라면 틀림없이 탑주가 남긴 흔적에서 무언가를 포착했을 거라 생각했을 테니까. 그러나 정작 이 수석께서는 침묵을 지키고 계셨다.
모른다도 아니고, 답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복잡한 마음이라는 걸 알아.'
마르셀로, 네 성격이라면.
감히 이 수석님을 원망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자책하고 있을 거라는 것도.
그러나 벨리에는 짐작할 수 있었다.
이호열 수석의 심정도 마르셀로와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벨리에는 유일한 인물이었으니까.
'이 수석님....'
호열이 단신으로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했던 진짜 이유를 알고 있는.
수백만의 악마가 달려드는 와중에도 시무아르드가(家) 시한부의 저주를 해주하고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그 때문에 피투성이로 마탑에 복귀했던 광경까지 목격했던 유일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 진실을 말한다면 마르셀로는....'
분명, 이 수석님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겠지.
하지만 덕분에 마르셀로가 더 큰 자책에 빠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 수석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그에게 격한 감정변화는 좋지 않다."
당부가 있었기에 여태껏 그날의 진실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던 벨리에였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았다고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벨리에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분명,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실 거라 믿습니다.'
벨리에는 호열을 바라봤다.
크리스탈 홀을 빠져나가는 그 뒷모습을.
문득, 호열이 남겼던 말이 떠올랐다.
분명, 이 수석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었지.
-"본래 살아가는 건 고독 속에서 헤엄치는 것이다."
"...이번에도 혼자서 짊어지시는 건가요?"
벨리에는 작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 무게를 견디실 수 있는 거죠?"
.
.
.
하여튼, 이놈의 흑역사가 여러 사람 헷갈리게 한다!
그냥 속 시원하게 모든 게 탑주의 계획이라고, 탑주가 제 발로 마력 구체를 깨고 마탑을 벗어난 거라고. 까버린다고 어디 덧이라도 나는 거냐고, 진짜.
'미안하다.'
특히나 마르셀로에겐 면목이 없다.
내가 마르셀로에게 여태까지 받아온 게 얼만데!
아무리 마르셀로를 위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우리 사이에 쉬쉬해야 할 일이 생길 줄이야.
'아니, 그러니까 왜 쓸데없는 말을 해서는...!'
나의 자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뻔뻔하게 내뱉는 입.
"멋대로구나. 탑주여."
그거 대체 누가 할 소리냐, 그랑펠.
'내가 이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크리스탈 홀에서도 쪽팔려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
그래, 플레이어에게 장비는 생명과도 같은 거니까. 게다가 여명 세트는 평상시 입고 다니던 정장과 큰 차이도 없었으니까. 넘어간다고 치더라도.
펄럭─
근데, 이놈의 재킷을 일상에서도 어깨에 걸쳐두는 건 좀 심하지 않냐? 날 쳐다보는 시선이 괜히 차림새 때문에 그런 것 같고, 피해의식이 생긴단 말이다.
"제멋대로인 행동에 정식으로 책임을 묻겠다."
나도 네게 수치심에 관한 책임을 정식으로 묻고 싶구나, 그랑펠.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겠지.
이제부터 나는.
검성, 셰그윈과 마찬가지로.
초월자, 그와 동시에 전대 대마법사인 탑주를 처치해야만 했으니까.
정확하게는 탑주가 아닌, '탑주의 육체'지만 말이야.
그런 심각한 상황 속에서.
나는 태연하게도 읊조렸다.
크리스탈 홀에서의 뒤끝을 더해서 말이야.
"마르셀로의 질문에 답하는 것은 탑주, 그대이지. 내가 아니다."
제발.
이번에도 그 말을 실현할 수 있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며 걸음을 옮겼다.
.
.
.
[아르카나 대륙 전기 공식 홈페이지]
※긴급 업데이트 공지
『여러분 곁으로 최악의 적이 찾아옵니다.
신규 보스 몬스터, 탑주가 추가됩니다.
출현 지역은 '지구 전역'입니다.』
그날 인류는 깨달았다.
아르카나 대륙의 초월자가 어떤 존재인지를.
하늘에서 떨어지는 수백 개의 운석.
"엄마!"
"저기, 하늘에서 별똥별이 엄청나게 떨어져요!"
"흐흐흑, 신이시여. 제발...!!"
절망 속에서 목격했다.
"유감스럽게도."
마치 되감기 버튼을 누른 것처럼.
"나는 신도, 미신도 믿지 않는다."
밤하늘로, 우주로 거슬러 올라가는 운석 무리.
"그럼에도 소원을 비는 중이었다면."
그런 초월자조차 능가하는 기이의 존재를.
"내가 대신하여 이루어 내겠다."
펄럭!
◈ 215화. 얼마든지 날뛰어 보도록
『여러분 곁으로 최악의 적이 찾아옵니다.
신규 보스 몬스터, 탑주가 추가됩니다.
출현 지역은 '지구 전역'입니다.』
충격적인 소식은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누구보다 당혹스러운 건 다름 아닌 AAU였다.
신규 보스 몬스터가 탑주라니.
그 말이 사실이라면....
윤수겸은 마른침을 삼켰다.
"최악의 적이란 말이 과언이 아니게 될 거야."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마법사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
레벨과 무관하게 클래스가 마법사 계열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유명 길드에 입단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마법사는 일당백.
능력에 따라 그 이상을 해낼 수 있는 존재들.
그 당시의 귀족 클래스 중 하나로 투자되는 비용을 포함. 육성 난이도는 극악이지만, 육성해 내기만 한다면 확실하게 보상을 거머쥐는 클래스였다.
"아르카나 설정이 그랬으니까요."
제국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드넓은 아르카나 대륙을 일통했다고 봐도 무방한 제국이었거늘. 무수한 병사 숫자와 비교해 제국 소속 마법사의 머릿수는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까놓고 밸런스 때문에 만든 설정이었지. 마탑은."
마법사는 아르카나 대륙의 균형을 뒤흔들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마탑은 그런 마법사들이 날뛰지 못하게 하는 족쇄 역할을 했다.
허나, 아르카나가 현실이 된 지금.
마탑의 마법사들은 NPC가 아니었으니, 설정도 영원할 수 없었다.
처음엔 그 사실만으로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가?
아직도 마탑이 현실에 등장한 그날을 잊을 수 없었다.
"완전 초비상이었죠, 저희."
"마탑이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히기 전까지 매일 야근이었지?"
"그때 생각하면 지금은 감사해야겠네요."
위험성만으로는 핵폭탄을 능가하는 마탑.
그런 마탑이 인류의 든든한 지원군이 될 줄은 몰랐는데.
모든 게 마탑의 수석, 호열 덕분이겠지.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업데이트는 더더욱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마탑 측에서 들어온 연락은 없나?"
"그렇지 않아도 견습 마법사 자격으로 마탑에 머물던 플레이어들에게서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원로 마법사, 유그위드가 사건과 관련해서 의견을 밝힐 거라고요!"
"후우. 일단, 마탑 전원이 돌아선 건 아니란 건가."
터져 나오는 한숨 속에서.
성현준과 윤수겸은 눈빛을 교환했다.
두 사람, 모두 같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뻐금거리는 성현준의 입.
"왜, 이번엔 호열 님이 아닌 거죠?"
지금껏 대중에게 마탑의 태도를 밝히던 건 호열이었다.
마탑의 실세, 수석이자 플레이어.
호열만큼 현실과 마탑의 연결고리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는 이는 없었으니까.
성현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긴급 업데이트도 예상하고 먼저 움직이고 계신다든가?"
"아니, 설마가 아니야."
"네? 뭐 짚이는 거라도 있으세요, 선배?"
"탑주가 플레이어들의 적으로 돌아선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호열 씨라면 분명 그 이유를 알고 계시겠지. 아니, 모를 수가 없어."
"...같은 마탑 소속이시니까요?"
"그래, 유그위드도 분명 파악하고 있을 거야."
윤수겸은 확신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윤수겸의 장담은 오래가지 못했다.
마탑의 로비.
취재진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원로, 유그위드.
-"설마, 탑주가 적의를 드러내리라곤 예상치 못했습니다."
그녀의 선언에 성현준은 말을 더듬었다
"...끼,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다는 거잖아요?"
탑주가 가사 상태에 빠져 마력 구체 속을 부유하고 있으리라고는 예상할 수 없는 AAU였다.
그러나 정확히 예상할 수 없다고는 해도, 비슷하게 추측할 수는 있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예상은 하고 있었던 반응이죠?"
"그래, 담담한 목소리를 보면.... 행방이 묘연해진 것까지는 알아차리고 있었던 눈치야. 젠장, 마탑에 무슨 떡밥이 있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쵸. 어떤 설정이 어떤 식으로 실현됐을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그동안 수도 없이 목격하지 않았던가?
아르카나 대륙 전기의 밸런스를 해치지 않기 위해 추가했던 몇 줄의 설정들이 '실존'하는 부메랑이 되어 현실로 날아들었던 광경을.
그런 의미에서 더 이상의 추측은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절레절레─
생각을 떨쳐낸 윤수겸이 말했다.
"좋아, 당장은 닥친 위기만 생각해 보자고."
마탑의 사정?
그딴 건 눈앞의 위기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대단하시다는 아르카나 대륙의 마법사들.
그 마법사의 정점, 탑주가.
인류의 적으로 등장한 상황이었으니까.
"젠장, 드래곤이 날아오른 게 얼마 전인데."
윤수겸의 입에서 거친 말이 나올 정도.
그만큼 답이 없는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탑주는 균열에 등장한 게 아니었다.
그저 마탑에서 출탑.
곧바로 현실로 뛰쳐나왔단 것이다.
그 사실을 상기시켜 주듯.
업데이트 내역에도 똑똑히 명시되어 있다.
출현 지역이 '지구 전역'이라고.
"탑주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싸울 생각인 걸까요?"
"그런 기동력을 따라갈 수 있는 건...."
"플레이어 중엔 호열 씨밖에 없겠죠."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보는 AAU.
그러나 시작부터 틀렸다.
탑주에게는 포탈을 타고 동에서.
서에서 나타날 필요조차 없었으니까.
위이잉─
요란한 경고음.
자동으로 전환되는 전면 모니터 화면.
갑작스러운 경고음이었지만 당황하는 이는 없었다.
"...!"
최근 이것과 똑같은 경고음을 들었으니까.
그랬다.
제로 산맥 최정상에서 드래곤이 날아올랐던 그 순간에.
지부장, 박민재가 입을 열었다.
"빌어먹게도, 어나더 스페이스 호에서 도착한 교신이다."
그의 목소리가 낯설게 떨렸다.
"소행성 군집이 지구로 낙하 중."
"...네?"
"정황상 탑주가 발현한 메테오 스트라이크로 추정된다."
"!!!"
초월자는 그런 존재였으니까.
*
아주 성대하게 날뛰어 주시는구나, 우리 보스!
마법 서적을 탐독하는 것 또한.
하루도 빼놓지 않은 일과 중 하나였다.
덕분에 잘 알고 있지.
반짝─
하늘에서 쏟아지는 저 유성우가 어떤 마법인지를.
'미친, 메테오 스트라이크 10연발이라니.'
아무리 계획 일부라고 하더라도.
지구를 날려버리려고 작정한 거야, 뭐야?!
메테오 스트라이크.
웬만한 마법사는 존재 자체도 알지 못하는 마법이었다.
발현 과정만 살펴보더라도 눈치챌 수 있을걸?
무려 하늘도 아니고, 우주에 떠있는 소행성에 탐색. 낙하시킬 정도의 마력을 쏟아부어서 간섭하고, 발현 과정에 도달해야 하는 마법이란 뜻이다.
그 정도 마법 발현력을 갖춘 이가 몇이나 되겠냐고! 그런 의미에서 장담하겠다.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발현하기 위해선 반드시 '서클'이 필요하다고.
나는 입을 열었다.
"탈출을 자축하는 것인가."
그 대단한 마법, 메테오 스트라이크에 대한 감상평을 뱉었다.
"그러나 폭죽의 방향이 잘못됐군, 탑주여."
저런 핵폭탄이 폭죽이라니.
허세 진짜....
그러나 지키지 못할 말은 내뱉지 않는다.
『반전 마법』 발현.
나는 역행하는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바라봤다.
그래, 반대로, 하늘로 쭉쭉 뻗어져 나가는 게.
그랑펠 말대로 이제야 폭죽놀이 같긴 하네.
문득, 목소리가 들려온다.
"뭐야...? 운석들이 거꾸로?!"
"잠깐. 이, 이호열이다!"
"뭐라고?! 어디?!"
"엄마, 별똥별이 아니라 폭죽놀이였나 봐요!"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고 나를 바라보는 시민들.
보다시피 이곳은 인구가 밀집한 도심지였다.
말은 태연하게 내뱉고 있지만, 진심으로 아찔해진다.
'내가 진짜 온 힘을 다해서 발버둥을 치고, 온갖 우물이란 우물은 다 파고 다니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영약까지 직접 키워서 먹고 서클을 형성했기에 망정이지...!'
만약, 발버둥 치다가 다리에 쥐라도 났었다면?
이 순간, 나는 메테오 스트라이크에 탐색조차 할 수 없었을 거다.
당연한 일이다.
내가 발현했다면 또 모를까.
타인이 발현한 낯선 마법이었으니까.
'일반적으론 불가능하다.'
그러나 나 또한 초월자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초월자 : 그대의 초월적인 경지는 초월자라 불리기에 충분하다. - 현재 도달한 성취 : 서클 (모든 마법 발현력 1,000% 상승) / 미완성 쾌검술 / 없음 / 없음....]
발현력이란 마법에 관련된 모든 능력치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거기엔 탐색 능력도, 간섭 능력도 포함.
그렇지 않아도 낯뜨거운 설정 덕분에 경이로운 수준이었던 그랑펠의 시야가 1,000퍼센트 더 밝아졌다는 거겠지.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나와 그랑펠은 기이,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군.
『설정』과 [시스템].
완전히 다른 두 개념을 알뜰하게도 써먹고 있으니까 말이지.
그나저나.
언제까지고 탑주에게 휘둘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마력을 끌어올려 탑주의 마력흔을 추적했다.
메테오 스트라이크에 탐색하며 마력을 특정했으니, 어렵지 않게 위치를 특정할 수 있었다. 지체하지 않고 그 좌표를 향해 곧장 포탈을 발현했다.
"...파이팅!!"
문득, 뒤통수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발길을 붙잡는다.
누군가 용기를 내서 뱉은 말.
그 목소리가 신호탄이 되어 내게 응원이 쏟아졌다.
"흐흑, 감사합니다.... 정말로...!"
"부디 이겨주세요, 호열 님!"
"긍지를 담아서 응원하겠습니다!"
...저런 소릴 직접 듣는 건 처음인데.
하긴, 플레이어들과는 많이 부딪혔던 나였지만.
일반인들하곤 마주할 일이 없었지.
그 사실을 의식해서일까, 어깨가 심히 부담스럽군.
부담감 때문이냐고?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뻔뻔하게 읊조렸다.
"실로 소박한 소원들이구나."
그렇다.
이놈의 긍지가 부담감을 느낄 리 없었으니.
어깨가 부담스러운 이유는 당연히.
이 와중에도 펄럭거리는 재킷 때문이라는 것이다....
.
.
.
그나저나 상도덕이라는 게 없군, 레이먼 션.
아무리 긴급 업데이트라고 하더라도 내역에 레벨 정도는 공지해주는 게 국룰 아니냐고. 물론, 초월자부터야 레벨의 의미가 퇴색되는 경지라고는 하더라도.
'그래도 짐작은 할 수 있을 거 아냐?'
포탈에서 빠져나온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서클의 능력을 찍먹한 거나 다름없었다는 걸.
탑주에게는 전장이 필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전장을 창조할 수 있었으니까.
육안으로는 평범한 하늘, 땅, 산, 숲처럼 보였거늘.
일대에는 짙은 마력이 넘실거린다.
곧 눈치챌 수 있었다.
'실체가 아니야.'
모든 게 '마력 덩어리'라는 것을.
내 시야에 보이는 모든 게 전부 환각마법이었다.
진심으로 경이로울 정도의 마법 구현력이다.
'나스로우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환각마법학 선임 나스로우.
그의 환각마법과는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차원이 다르다.
보통의 환각마법이 대상을 속이는 것이라면, 이건 세상을 속이려 드는 수준. 실제로 나는 두 다리로 마력 덩어리를 땅처럼 딛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번에도 환각마법인가?"
내가, 그랑펠이 누군데?
플레이어로 각성하고 얼마 되지 않았던, 기껏해야 100레벨 언저리였던 그 시절.
초청장도 없이 정기 학회가 열리는 마탑에 또각거리며 들어가서는. 탑주의 환각 마법을 간파했던 나란 말이다.
그러니까 태연하게 지껄일 수 있단 거지.
"탑주, 뜻밖에도 그대는 발전이 없군."
이런 깽판을 벌인 탑주에겐 무슨 속셈이 있는 건지.
나야 알지 못한다.
하지만 탑주.
정확히는 탑주의 육체가 가지고 있는 적의는.
메테오 스트라이크 10연발에서 확실하게 파악했다.
그러니 나도 진심일 수밖에 없다.
정렬하는 육망성 브로치의 방향.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발동 중인 버프를 확인한다.
[천적관계]는 발동되지 않았지만.
업데이트 내역에 적혀있던 대로.
탑주의 육체는 보스 몬스터 판정이다.
[육망성 브로치 2/6]
[세트 아이템 효과가 적용됩니다.]
[현재 적용 중인 세트 효과 : 2/6]
[1. 모든 기본 스탯이 2포인트 상승합니다.]
[2. 보스 몬스터 공격 시, 모든 피해량이 10퍼센트 상승합니다.]
[천적관계]가 없는 상태에선 10퍼센트의 전력상승도 소중하지. 물론, 탑주와 비교하자면 보잘것없는 나의 마력량을 뒷받침해 주는 [첫 세계수의 축복]도 빠트릴 수 없다.
게다가 탑주의 육체.
그쪽은 나처럼 이런 마도구 하나도 없잖아?
마력 구체에선 맨몸으로 빠져나왔을 테니까 말이야.
펄럭거리는 여명의 재킷은 제쳐놓더라도.
나는 마탑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에픽 등급 아이템으로 둘둘 도배했단 말이다.
마지막으로.
본의 아니게 상위 마왕 덕분에 체감하게 된 기이의 위대함까지.
탑주라는 최악의 적을 상대로.
혼자서 나선 데에는 합리적이면서도 복잡한 계산이 있었다는 거지.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문득, 허공에 일렁이는 마력.
서서히 발현되는 포탈 속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지원군이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 216화. 수업 (1)
"!"
눈동자에 확실하게 느낌표가 떠오른 걸 보니까 이번엔 제시 하인네스가 맞군. 그나저나 놀라야 할 건 나인데. 어째 제시 쪽이 훨씬 놀란 눈치다.
"이런 곳에서 오랜만에 뵙네요, 이호열 수석님!"
일단, 시공간의 사교장에서 있던 일은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꾸벅─
직각으로 숙이는 자세가 정중해서 나도 모르게 화답했다.
"마력 탈진의 후유증은 나아진 모양이군."
안부를 묻는 건 좋다, 이거야.
근데, 단도직입도 정도가 있지!
방금 말했잖아?
'사교장에서 있던 일은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라고.'
만난 기억도 없는데.
제가 마력 탈진에 시달렸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고 계신 건가요.
혹시라도 물어오면 어쩌나.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면 어쩌나 싶었는데.
"마력 탈진...? 역시, 이 수석님이세요! 제 마력의 흐름이 불안정한 걸 알아보셨군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은 괜찮아졌습니다!"
...이럴 땐 쌓아둔 업보가 도움되기도 하는구나.
그나저나, 나는 제시를 바라봤다.
아무리 그래도 여긴 좀 위험하지 않나.
'500레벨 초중반이었지.'
감히 장담할 수 있었다.
제시에게 이 전장은 무리다.
벌써부터 증거가 눈에 보이고 있었다.
미약하게 들썩거리는 어깨.
포탈에서 나타난 제시였다.
목적지가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포탈 발현에 소모되는 마력량은 급격하게 상승하는 법.
호흡을 가다듬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제시는 포탈을 발현하는 데에 많은 마력을 소모한 거겠지.
제시가 탑주의 마력흔을 추적할 순 없었을 터.
그렇다면 역시.
클래스 퀘스트를 따라 움직인 건가.
슬쩍 주변을 살핀다.
아직까지 탑주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상태다.
제시와는 의견을 교환할 필요가 있겠군.
적에 관한 정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제시는 든든한 지원군이다.
'어떻게 보면 당사자니까.'
나야 탑주와의 대화를 통해 이 사건에 얽힌 사연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만.
구체적인 목적까진 알지 못했다.
퀘스트가 있긴 해도 지나치게 간결했거든.
─대마법사들의 음모를 저지하라. (진행 중)
●탑주의 육체와 마주하라. (실패)
●폭주한 탑주의 육체를 처치하라. (진행 중)
처치하라.
그렇게만 적혀있었으니까.
하지만 대마법사, 제시는 아니겠지.
나의 추측은 정확했다.
"과연, 짐작하고 계셨네요! 클래스 퀘스트 때문이 맞습니다. 이 수석님에게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저도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거든요!"
나는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시가 기특해서가 아니다.
내가, 이호열이 기특해서다.
나, 진짜 날마다 죽도록 발버둥 치고 있으니까!
왜, 오늘만 두고 봐도 그렇다.
어찌어찌 잘 풀려서 긴급 업데이트를 해결하고 복귀한다고 쳐보자고.
그런 내가 유스라든, 마탑이든 복귀해서 할 일은 뻔했다.
[집념]을 향상시키겠다고, 육체를.
그것도 한계에 다다를 정도로 혹사하겠지.
어디 그것뿐이냐?
기이의 영역에 상위 마왕을 포함한 경쟁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기이에 관한 연구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생각만 해도 피곤하네.'
그러나 드높으신 긍지께서.
타인의 앞에서 엄살을 부릴 리가 없었으니.
나는 제시를 향해 의연하게도 말했다.
"알고 있다."
탑주가 한 말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마력 탈진에 빠졌었으니까.
그나저나.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만 더 덧붙이자.
나는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허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가라앉지 않는 것이다."
"...앗, 마력 탈진 말씀이시군요!"
"그렇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마력 탈진에 빠질 때까지 무리하는 건 자제해 주면 좋겠다.
내 천운은 진작 끝났거든. 고깔모자에서 어떤 대마법사의 인격이 튀어나올지 장담할 수 없다는 거다.
"네, 명심할게요!"
제시가 느낌표로 대답하기도 잠깐.
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무엇이냐, 대마법사 클래스 퀘스트의 목표.
탑주의 계획은 과연...!
"이번 클래스 퀘스트는 [수업]입니다!"
...수업?
그 단어를 듣는 순간.
퍼즐처럼 흩어졌던 의문들이 맞아들어가기 시작했다.
탑주가 제시를 마탑으로 불러들였던 시점부터 지금 이 순간.
제시에게는 턱없이 벅찬 이 공간으로, 제시를 이끈 이유까지도.
탑주는 고깔모자에 깃든 뒤에도.
차기 대마법사 제시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자신의 육체를 남겨둔 것이었다.
제시는 모험가다.
마법적 지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존재.
그럼에도 대마법사들의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다른 세계의 존재.
그런 제시에게 방대한 마법적 지식을 전수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방법이 필요했던 거겠지.
제시가 양손으로 지팡이를 꼭 붙잡곤 말했다.
"퀘스트 목표는 전대 대마법사의 육체와 조우하는 건데요! 약간 긴장도 되고 기대도 되네요! 고깔모자 말고 육체는 처음 뵙는 거거든요!"
나와 제시의 퀘스트 목표를 비교해 본다.
'...나는 처치하라. 제시는 조우하라.'
뭔가 상당히 다른 뉘앙스군.
당연하게도.
내가 말하지 않는 이상, 제시는 내 퀘스트에 관해 알지 못하겠지.
그러니 마냥 설레는 심정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제시 하인네스."
"네, 듣고 있습니다. 이 수석님!"
"이번 수업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왜,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하기도 전.
지구를 향해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10개나 발현했던 탑주의 육체가 아니던가? 하도 빌어먹을 상황을 많이 겪어서 말이야. 조금은 감이 생겼거든.
내 추측에 화답하듯.
변해가는 환각마법의 풍경 너머.
요동치는 마력의 물결 속에서.
탑주의 육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업이 시작된 모양이군."
그 말에 제시의 동공이 처음으로 내게서 떨어진다.
불투명한 마력 구체에서 빠져나온 탑주의 육체.
남자인가, 여자인가.
성별을 알아차리기 힘든 중성적인 외모.
그보다 눈에 띄는 건 초점 없이 공허한 눈동자였다.
이내, 제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 수석님!"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퀘스트 목표가 갱신됐습니다! 그런데...."
"말해도 좋다."
"그게 '이번 수업에서 살아남으라'라고 하시네요...!"
생존이라니, 제시에겐 불가능한 퀘스트 목표잖아?
하지만 어째서 제시에게 벌써부터 이딴 퀘스트 목표를 줬는지 알 것 같다.
분명, 그 고깔모자 속에서. 대마법사들의 의식 사이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겠지, 탑주?
시간이 촉박한 거야.
더는 고깔모자 속에 존재하며.
제시를 돌볼 여유가 남아있지 않은 거야.
그런 상황에서 나를 떠올린 거겠지.
서클을 형성한 나라면.
게다가 기이의 창시자인 내가 제시와 함께라면.
먼 훗날 제시를 위한 안배를.
지금 시점에서 개시해도 된다고 판단한 거겠지.
상황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약간 참관 수업 같은 느낌이잖아, 이거?'
육체와 의식이 분리된 시점에서 탑주가 자신의 육체를 통제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만에 하나, 자신의 육체가 폭주해 제시를 헤치려고 든다면.
지켜보고 있던 나더러 처치하라는 뜻이 분명했다.
'아니, 진짜 부장님 같네.'
퀘스트 목표까지 들이대면서 부하 직원 부려 먹는 거 뭔데?
하지만 마냥 투덜댈 일도 아니겠지.
그도 그럴 게.
현재 탑주가 발현하고 있는 모든 마법은 말 그대로 차기 대마법사, 제시를 위한 것이었다.
메테오 스트라이크처럼 마법 서적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초고위 마법이 쏟아진다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눈을 부릅뜨고.
생각을 고쳐먹자, 호열아.
참관이 아니라 함께 수업을 받는다고 생각하자고.
『타고난 마법적 재능은 웬만한 마법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 흉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내겐, 그랑펠에게는 목격하는 모든 걸 흡수하는 재능이 있었으니까.
좋다.
본격적으로 수업을 시작하자, 탑주여.
나는 뻔뻔하게도 지껄였다.
"부디 배울 것이 있었으면 좋겠군."
*
마탑.
유그위드는 집결한 선임 마법사들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인자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로써 마탑의 치부가 세상에 들통이 났군요."
이 수석, 특히 그대에겐 면목이 없답니다.
카림제바를 비롯한 원로들의 반란부터.
마탑을 지키기 위해.
또 바로 세우기 위해.
자신에게로 모든 관심을 돌리던 호열이었다.
그러나 그 희생이 무색해지게도.
"곧장 초고위 마법 발현이라니. 기운도 넘치시지."
마탑,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탑주.
우리 탑주님께서 거하게 뒤통수를 쳐주셨다.
당연한 말이지만, 유그위드를 비롯한 이곳에 모인 선임들은 정확한 상황을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깨닫게 됐다.
"어째서 이 수석이 침묵을 지켰는지 알 것 같군요."
"수석께서는 차마 말씀하실 수 없으셨던 겁니다."
"마티스."
흑마도학 선임, 마티스가 입을 열었다.
"이 수석께서는 늘 마탑을 우선시 여기셨습니다."
크리스탈 홀에서의 침묵 또한 배려가 확실했다.
탑주가 적의를 드러내고 발산한다면, 마탑이 나서서 탑주를 저지해야 할 터. 이 자리의 누구도 그런 상황을 반가워할 리 없을 테니까.
그러나.
"결단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탑주가 누구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지,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탑주의 행동이 이곳.
모험가들의 세계에 크나큰 위협이 된다는 것.
"이 수석에게 모든 것을 떠넘길 순 없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유그위드 님."
"이런, 벨리에 선임이군요."
"저 또한."
"오호, 나스로우?"
그들을 필두로 스무 명의 선임 마법사 전원이 의견을 일치시켰다.
유그위드는 다시 한번 미소를 흘렸다.
아무래도 괜한 걱정을 한 듯싶었다.
"다행이네요. 혼자 나설 걱정은 덜었어요."
그런 유그위드의 눈빛이 이내, 돌변했다.
온순한 거인, 유그위드.
카림제바나 세니오스처럼 『마법』에서 비롯된 이명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마탑에 입성한 후.
선임에서 수석, 원로를 거쳐오며 뒤늦게 붙은 이명이었다.
유그위드에게 그런 이명이 붙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그럼, 본격적으로 나서볼까요?"
인자한 미소 속에 감춰진 냉철한 판단.
유그위드에겐 결단력이 있었다.
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거인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법.
그런 의미에서 유그위드는 거인이었다.
스스로 내린 결정에서 단 한 번도 물러선 적이 없었으니까.
서늘한 농담이 이어졌다.
"따지자면 이건 탑주를 향한 반역이 되겠군요? 뭐, 나쁘지 않습니다. 기왕 마탑에 발을 들인 김에 나이라도 내세워 탑주 자리에 앉아보는 것도 좋겠어요. 후후."
유그위드는 곧장 마력흔을 추적했다.
탑주의 마력흔보다는....
이 수석의 마력흔을 추적하는 편이 훨씬 수월하겠지.
그리 생각했거늘.
유그위드가 너털웃음을 뱉었다.
"...정말로 보통이 아니군요, 이 수석?"
마력흔조차 추적할 수 없다니.
이게 바로 [『기이』]란 말인가요?
그대의 말이 맞았군요.
그대에게 서클은 거쳐 가는 경지에 불과했어요.
"그러니 탑주의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하늘로 되돌려버린 거겠죠."
원로인 유그위드조차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기이.
신선한 충격에 감탄하기도 잠깐.
유그위드가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가 노망이 난 게 아니라면, 이 수석의 마력은 우리 같은 범인(凡人)은 감히 추적할 수 없는 경지에 올라선 것 같군요. 그렇지 않은가요, 마티스?"
"원로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뱅그릿, 그대가 보기엔 어떤가요?"
"네, 넵! 자, 잠시만요!"
순수마력학 선임, 뱅그릿.
그는 선임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마력감응력을 가졌다.
마력에게 선택받았다고 할 정도의 감응력. 축복에 가까운 재능이 제대로 된 마도 교육을 받지 못한 평민, 뱅그릿을 선임 자리에 올려놓았다 해도 무방했으니까.
"유그위드 원로님의 말씀이 옳으신 듯합니다."
물론, 그런 뱅그릿에게도 무리는 무리였다.
"어쩔 수 없군요."
유그위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마르셀로 수석의 도움을 받아야겠어요."
"마르셀로라면...."
"그러고 보니 보이질 않는군요?"
호열과 함께 기이의 길을 걷는 마르셀로라면.
마력흔을 추적하는 것쯤은 능히 해낼 수 있을 터.
유그위드는 마르셀로에게 텔레파시를 전달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이런."
벨리에가 흠칫해서는 물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유그위드 원로님?"
"아무래도 우리가 늑장을 부린 모양입니다."
"네?"
"마르셀로에게 텔레파시가 닿지 않는군요."
"그 말씀은...?"
"아마 마르셀로 수석도 이 수석과 같은 공간. 그러니까 탑주가 발현한 마력 소용돌이에 진입한 모양입니다. 이거, 두 수석을 쫓기에 늙은이는 무리란 걸까요?"
물론, 엄살이었다.
말했다시피 거인은 이미 발을 내디뎠으니까.
유그위드가 곧장 마르셀로의 마력흔을 추적.
이내, 포탈을 발현했다.
유그위드가 말했다.
"늦었지만, 부지런히 두 수석을 쫓아봅시다."
.
.
.
나는 맞은편에 선 마르셀로를 바라봤다.
"이호열 수석. 나는 당신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마르셀로는 그렇게 말하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나름대로 진지한 목소리인데.
내게는 이보다 웃긴 말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지금처럼 사적인 자리에서 나를 향한 마르셀로의 호칭은 '경'으로 고정되어 있었거든. 내가 말하지 않았었나, 탑주? 그쪽이 알던 마탑이랑 지금 마탑은 좀 상황이 달라졌다고.
그러니까 이딴 유치한 환각 따윈 치워버리란 거야.
"수업이라 칭하기엔 지나치게 가볍군."
나는 진심을 담아 말을 이었다.
정기 학회의 사전 검증이 이뤄지던 토파즈 홀.
그곳에서 내뱉었던 독설처럼.
"마탑의 체면을 떨어트리지 않기를 바란다. 탑주."
그런 내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그 의견에 동감입니다."
이번엔 진짜였다.
"당신이 알고 계실 리가 없으시겠습니다만. 경께서는 저를 그저 마르셀로라고 부르십니다. 수석이란 불필요한 칭호를 붙이지 않으시지요. 물론, 원로님들에게도 마찬가지십니다."
...어째 나를 존댓말도 모르는 놈이라고 돌리는 것 같다만.
어쨌든.
반갑다, 진짜 마르셀로.
그런데 어째 마르셀로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탑주 앞에서 아련해야 할 눈빛이....
어째 활활 불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이내,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마르셀로도 마법사였단 사실을.
그랬다.
저 활활 불타는 눈빛은 만년설, 세니오스의 그 눈빛.
"뭐, 그래야 당신답지만."
나.
"아니, 한결같아 보이셔서 오히려 좋습니다."
아무래도.
"그래야 꺾는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탑주와 마르셀로의 관계를 단단히 착각한 것 같다...!
◈ 217화. 수업 (2)
마르셀로 시무아르드.
시무아르드 가문에 기생하던 마왕조차 탐냈던 재능의 소유자. 천부적인 재능의 앞길을 가로막을 것은 없었으니. 대륙 마도 가문에선 이런 이야기가 떠돌기도 했다.
"시무아르드가에서도 손꼽히는 천재라더니...."
"과연, 가문에 국한될 재능이 아니군요!"
"마탑의 선임 자리를 노려볼만한 재능입니다."
마도 가문이기에 마탑이 어떤 장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들. 그런데 마탑에 입성하는 것도 아니고 선임의 자리를 꿰찰 정도라 평가하다니.
누구 하나쯤은 과장이라고 반박할 수도 있었거늘.
뒷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이런 소년이 모든 주류 분파의 마법을 익히다니요!"
열댓 살 무렵.
마르셀로는 마탑을 지탱하는 스무 개 분파의 마법.
주류 마법을 중급 수준까지 자유롭게 발현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 마르셀로가 마탑 입성에 발목을 붙잡힐 리는 없었다.
"저 가냘픈 소년이 시무아르드의 아이인가요?"
"오호라."
"견습을 두고 담소라니, 상당히 낯선 반응들이시군요."
마탑에서 견습 마법사는 햇병아리 취급이다.
분파에 소속될 수도 없으며 증명할 능력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마르셀로는 예외였다. 그는 견습 마법사 때부터 수많은 선임의 눈총을 받았다.
'비교할 수 없는 재능이군.'
'탐나지만 위험하다.'
'...오히려 내 자리를 위협할 수도 있을 정도.'
고작 견습 마법사가 선임 마법사의 견제를 받는다?
과거에도, 지금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아니, 마탑 역사상 전례 없던 일이었다.
누군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었다.
"그와 같은 세대가 아닌 것에 감사해야죠."
제아무리 출중한 재능의 소유자라고 하더라도.
마탑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공간이었으니까.
설령 마르셀로가 자신들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다고 한들.
적잖은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물론, 그런 안일함은.
"...시무아르드가 사전 검증을 통과했다고?"
"아직 분파도 택하지 않았잖아요?"
"설마, 견습 때 연구를 끝마쳤단 소린가!"
견습에서 숙련.
마치 진급만을 기다렸다는 듯.
사전 검증을 통과하고 정기 학회에 선 마르셀로 덕분에 사라져 버렸지만.
그 시점부터 마르셀로는 선임들의 경쟁 상대가 되었다.
"그가 어떤 분파를 선택하는지에 달렸네요."
"우리 중 한 명의 자리가 위태로워지겠죠."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그러나.
마르셀로는 또 한 번 예측을 뛰어넘었다.
선택하지 않고 창조해 낸 것이다.
『이론마법학』.
마법의 역사를 바꾸었다고 평가받는.
완전히 새로운 분파를.
그 이후부터는 알려진 그대로였다.
이론마법학은 모든 마법을 한 단계 진보시켰으며 마르셀로는 그 공을 인정받아 선임 마법사. 그리고 유력 후보 마티스를 제치고 수석의 자리에 올라섰다.
가장 위대한 업적을 세운 최연소 수석의 탄생이었다.
그날, 마르셀로는 수석의 자격으로 원탁회의에 참가했다.
처음으로 탑주와 조우했다.
그리고 마주했다.
"흠, 수석의 무게를 견디기엔 한없이 병약해 보이는 꼬맹이로구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다시 선임의 자리로 돌아가 그 몸뚱이부터 돌보는 게 어떻겠느냐?"
"...!"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벽'을.
벽, 탑주는 마르셀로에게만 가혹했다.
이론마법학 앞에서도 태도는 한결같았다.
"마법이란 글줄로 풀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꼬마."
"그걸 가능케 하는 게 이론마법학입니다. 그리고 성년이 훨씬 넘은 제게 꼬마라는 호칭은 삼가주시길 바랍니다."
"그런가. 알겠다, 마르셀로 꼬마 수석."
"...."
탑주는 시시콜콜 마르셀로의 꼬투리를 붙잡았다.
탑주를 제외한 마탑의 모두가 마르셀로의 재능을 알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수석의 자리를 내려놓고 떠날 정도의 모독이었다.
유그위드는 그 모습에 웃음을 삼켰었다.
"탑주께도 저런 삐뚤어진 면이 있으실 줄이야."
자신을 비롯해.
모든 마법사는 정상의 범주에서 어긋나 있다.
말했다시피 그건 마르셀로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쉽게 말하자면....
탑주와 마르셀로는 서로에게만 비틀어져 있었다.
"알고 계십니까? 그런 걸 꼬투리라고 합니다."
"무례하구나, 꼬마 수석."
"어순을 바꾼다고 담긴 의미가 달라지진 않습니다."
"알았다, 수석 꼬마."
"...."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겠지.
천하의 마탑.
탑주와 수석 마법사가 최상층에서 이리도 유치한 대화를 나누고 있으리라고는.
그러나 지독하게도 맞닿지 않을 것 같던 두 사람의 평행선은 어느 날 갑자기 일방적으로 끊겨버리고 말았다.
"...탑주님?"
마치 번데기 속에 웅크린 애벌레처럼.
탑주가 마력 구체에 갇히고 말았으니까.
누구의 소행도 아니었다.
"확실하게도 탑주님의 마력흔이네."
탑주, 스스로 행한 일이었다.
마르셀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을 가로막았던 유일한 벽, 탑주.
그 벽을 자신의 힘으로 무너트릴 수 없게 된 꼴이었으니까.
그러나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세월이 흐르고 마르셀로는 끝내 인정했다.
"제가 무지했습니다."
탑주는 자신과 이론마법학의 부족함을 정확하게 알아봤다는 사실을.
마르셀로는 탑주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이론마법학을 더욱 발전시켰다. 언젠가 탑주와 다시 만날 날을, 탑주에게 자신을 증명할 날을 기다리며....
.
.
.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마법사들은 죄다 나사가 빠져도 단단히 빠졌어!'
마르셀로는 단순히 탑주를 존경한 게 아니었다.
쉽게 말하자면.
탑주를 꺾어도 자신의 손으로 꺾겠다는 뒤틀린 감성.
그것조차 한 단어로 줄여보자면 '애증'이라는 것이었다...!
"말씀드리지 않고 뒤쫓아 송구합니다. 경."
송구할 것 없다, 마르셀로.
언제나 말하지만, 지원군은 언제나 다다익선이다.
다만, 양심상 끌고 올 수 있는 지원군이 많지 않을 뿐이지. 발버둥 치는 도중 잔뜩 끼어버린 거품 탓에 지독한 난이도에 휘말리는 내가 아니던가?
'사실 마음 같아선 총출동 명령이라도 내리고 싶다.'
거대 연합부터 라이언 하트 기사단까지.
든든한 지원군의 덕을 보고 싶다는 거다.
하지만 지금만 하더라도 몇몇을 제외하면 탑주와 마주해서 무사할 수가 없겠지.
특히 플레이어 쪽은 전멸이다.
'물론, 제시는 예외지만.'
탑주의 제자이자 편애를 받는 제시는 깍두기 취급이니 제외.
거기에 마르셀로가 합류하긴 했다만.
마르셀로를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능력을 떠나서 나, 처음 봤거든.
"이에 관한 책임은 복귀 후 절차를 거쳐 지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방금 전해드린 사연 말입니다."
저렇게 의욕적인 마르셀로의 모습은.
오죽했으면 텔레파시에서도 감정이 느껴졌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겠네, 마르셀로."
마르셀로까지 합류한 이상.
이건 더 이상 제시만을 위한 수업이 아니게 됐다.
어깨너머로 대마법사의 마법을 습득할 나는 물론.
탑주에게 자신의 성장을 증명하고자 하는 마르셀로까지.
각자의 사연이 얽힌 전장이라는 거지.
"제시 하인네스 견습 마법사."
"네! 듣고 있습니다, 마르셀로 수석님!"
"그대에게도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아, 네! 괜찮습니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나는 대마법사의 정체를 정확히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인가.
제시는 그저 마르셀로가 대마법사와 연이 있다고 짐작하는 모양이군.
물론, 마르셀로도 같은 처지다.
'탑주가 무의식 상태라는 걸 아직 알아차리지 못했어.'
...아니, 애초에 탑주가 대마법사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긴 한 건가? 탑주 이전, 전대 대마법사들의 정체가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만 봐도 가능성은 낮았다.
제시는 모험가였기에 대마법사란 게 알려진 특이한 경우였으니까.
'꼬여도 단단히 꼬였어.'
나는 일단, 한숨을 삼켰다.
'이거, 또 나만 마음이 무거운 거잖아.'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이보다 와닿을 수 없다...!
"와아, 이게 다 환각마법이었다니요!"
제시는 정말로 수업인 줄만 알고 있고.
"오랜만에 재회인데, 답조차 없으시군요."
마르셀로는 탑주의 껍데기에 말을 걸고 있다.
얽히고설킨 사정을 전부 알고 있는.
나만 굉장히 심각한 상황이란 것이다.
그러나 내색할 순 없었다.
그랑펠의 긍지를 떠나서.
애초에 그럴 틈조차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탑주의 육체가 출현합니다.]
"!"
출현 메시지.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지금까지는 예고에 불과했다는 것.
환각마법이 발현해 낸 풍경이 서서히 걷혀가기 시작했다.
이내, 순수한 마력으로 전환.
그 상태에서 곧장 발화(發火)했다.
마르셀로가 이를 갈았다.
"정말로 상황 파악을 못 하고 계시는군요, 당신은."
이론마법학의 창시자.
모든 주류 마법을 이론으로 정립했던 마르셀로였다.
당연하게도 먹고 먹히는 마법의 상성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는 뜻.
마르셀로가 곧장 물의 방벽을 펼쳤다.
"불에는 물...!"
제시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렇게 단순한 마법이 아니다, 저건.
간섭 과정에 들어간 수고를 따지면.
상위 마법 세 개를 동시에 발현한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치지지직─!
그럼에도 역부족이었다.
물이 불에게 우위라는 것도 어느 정도 수준이 맞아떨어질 때의 이야기지. 모든 걸 집어삼키는 겁화는 물조차도 증발시켜 버리는 법이니까.
"칫."
마르셀로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다니.
진짜로 흔한 광경이 아니네.
그나저나 언제까지 팔짱을 끼고 참관만 하고 있을 순 없다.
이걸로 확실하게 깨달았거든.
탑주의 육체는 명백하게 폭주하고 있단 사실을.
"도가 지나치군."
분리된 의식과 육체에서 오는 괴리겠지.
'그 간섭 과정이 짐작조차 안 되니까.'
탑주조차 완벽하게 발현할 수 없었던 거겠지.
의식이 안배를 남겨뒀던 것과 무관하게.
육체는 그저 날뛸 뿐이라는 것.
그러니 이제부터는 더 이상 수업이라고 할 수 없었다.
내가 뱉을 말은 정해져 있었다.
"수석으로서 승인할 수 없는 수업이군."
...패기롭게 입을 떼긴 했는데.
상성을 앞세운 마르셀로의 마법조차 압살을 당할 정도였지. [첫 세계수의 축복]을 내세운다고 하더라도 마법만으론 당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저쪽도 나와 마찬가지로 서클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야.
결국, 시작부터 진심으로 갈 수밖에 없겠군.
나는 곧장 기이 발현을 준비했다.
역시나 가장 효율이 좋은 건 반전 마법이겠지.
그러나 속성 마법을 반전시키면 순수한 마력으로 되돌아갈 뿐이다.
'탑주는 그 마력에 다시 간섭할 터.'
제아무리 탑주라고 하더라도 마력이 무한하지는 않다.
이만한 마력을 소모했다면 분명 육체에 부담이 올 수밖에 없겠지.
환각에 화염마법이라니.
마력 소모량으론 최상위를 다투는 마법 중 하나였으니까.
'그쪽 좋은 일을 해줄 것 같아?'
대마법사를 쓰러트리기 위해선 치밀해야 한다. [첫 세계수의 축복]이 발동 중인 나의 마력 재생력은 최대치라고 봐도 무방하니까. 마력의 우위를 앞세우겠단 것이다.
그런데.
"...!"
"...어?"
마르셀로와 제시가 멈칫거렸다.
아무런 감정변화도, 의식조차 느껴지지 않는 탑주의 육체에서 이상이 포착됐으니까. 탑주의 입가에서 한 줄기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경험했다고 알아차린 건가.
제시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건 분명, 마력 탈진이겠죠...?"
메테오 스트라이크에 환각에 화염 마법까지.
연속으로 발현해 놓고선.
몸이 멀쩡할 거로 생각하면 양심이 없는 거지.
이쯤에서 냉정하게 선언하겠다.
탑주, 그쪽의 계획은.
아무래도 대차게 실패한 것 같다고.
"전 납득할 수 없습니다."
비틀어진 동경.
그러나 마르셀로는 분명 탑주를 존경했다.
자신의 부족함을 꿰뚫어 본 건 탑주가 유일했으니까.
"대체 무슨 이유로...?"
마르셀로의 동공이 흔들렸다.
비로소 그런 탑주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거늘.
탑주는 더 이상 자신이 알던 탑주가 아니었을 테니.
나는 입을 열었다.
"제시 하인네스."
"네, 듣고 있습니다!"
"유감스러운 소식을 전해야겠군."
"...아, 저도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요!"
고깔모자에서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제시는 말을 전해왔다.
직감할 수 있었다.
고깔모자 속에서도 뭔가 일어나고 있다고.
하지만 괜찮다.
모두에게 상처뿐인 수업은 여기서 끝이니까.
나는 말을 이었다.
"그대의 수업은 이쯤에서 끝내겠다."
"네!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집중하도록."
"...네?"
"이 수업은 수석인 내가 책임을 지고 끝마칠 테니."
메테오 스트라이크.
환각마법.
그리고 지금의 화염마법까지.
나는 탑주가 발현하는 최상위 마법들을 지켜보며 깨달았다.
아무래도 나는 내 입으로 지껄였던 것처럼.
감히 '초월자의 경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기이의 경지'에 올라선 것 같다고.
그 말인즉.
"그대의 발현에서 배울 것은 없었다."
"...."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것이 변했다고."
이런 화염마법 따위야.
역상성인 빙결의 기이.
[『절대영도』]로도 상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쩌저저적!
순식간.
입김이 쏟아져나올 정도로 냉각된 일대.
나는 탑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시간부로 나의 수업을 시작하겠다."
"수업 도중 질문은 받지 않겠다."
"대답하는 건 내가 아닌 탑주, 그대니까."
거참 뒤끝 한번 길구나, 그랑펠.
그런 의미에서 각오해라, 탑주.
사전 검증만으로도 마탑을 눈물로 적셨던 나였다.
그런 나의 첫 수업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을 테니까!
.
.
.
요동치는 마력의 소용돌이.
뒤늦게 도착한 원로, 유그위드.
그리고 스무 명의 선임 마법사 전원은 목격했다.
"정말이지, 이 수석 그대는...!!"
◈ 218화. 수업 (3)
사라진 탑주가 날뛰고 있다.
호열과 마르셀로.
두 수석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움직였다.
그럼에도 원로 유그위드를 비롯한 마탑의 선임들이 전원 출탑한 이유는 간단했다. 탑주야말로 마법의 정점과 가장 가까운 존재였으니까.
호열이 서클을 형성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
그에 반해 탑주가 서클을 형성한 시점은 아득한 과거였다.
때문에 유그위드는 판단한 것이었다.
설령, 기이의 존재가 된 호열이라고 한들.
경험의 차이를 극복할 순 없으리라고.
물론, 크나큰 오산이었지만.
뱅그릿이 말을 더듬었다.
"지, 지나치게 일방적이에요!"
호열은 일방적으로 탑주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마치 '격'이 다르다는 것처럼.
탑주가 어떤 초고위 마법을 발현해도.
호열에게선 당황한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유그위드는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오늘만 몇 번을 놀라는지 모르겠군요."
이래서야 정말 노파심이 돼버리지 않았는가?
마법사의 결투는 검과 방패를 들고 싸우는 전사의 싸움과 다르다. 막상막하란 존재하지 않는다.
마력에서 비롯되는 마법이다. 더 강한 마법이 약한 마법을 집어삼키듯 승부가 갈린다는 뜻이다.
"역시, 탑주님. 저 정도의 화염마법을...!"
화염마법학 선임, 벤쉬 윌리엄.
그런 마법의 성질을 무엇보다 잘 드러내는 마법 중 하나가 바로 화염마법이었다.
벤쉬가 화룡, 카림제바와 맞서길 꺼렸던 이유가 바로 화염이 더 큰 화염에 편승하는 성질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수석님이시라면.'
카림제바를 제압했던 호열이라면.
화염마법에 맞서 화염마법을 발현하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빙결마법이라뇨?!"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역상성으로 타, 탑주님을 제압하다니?"
한 번이 아니었다.
탑주가 특정 마법을 발현할 때마다.
호열은 오히려 그 마법에 역상성인 마법을 발현해 되받아쳤다.
그 광경은 마치....
정령학 선임, 페이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친절하게 알려주시는 모습 같지 않나요?"
"알려주다니, 무엇을요? 페이얀, 선임?"
"알고 있는 상식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처럼요."
"...!!!"
그랬다.
마법을 발현하는 호열은 정말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모든 것을 내려다보며.
그리 알려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대들이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그것만으로도 경악할 일이었거늘.
마티스는 알고 있었다.
호열의 재능은 단순한 마법에만 국한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범접할 수 없는 적합한 마력.
흑마법에 관한 호열의 재능은 분명 마법적 재능.
그 이상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장담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말인가요, 마티스 선임?"
"이 순간에도 이 수석께서는 전력을 다하지 않고 계신다는 것을."
"...진심인가요?"
"제가 농담하는 걸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
왜, 현실에 그런 말이 있다.
극도로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 다르지 않다고.
그 말을 여기에다가 가져다 붙일 수도 있겠구나.
극도로 발달한 마법.
그 파괴력만큼은 기이와 다르지 않다!
정말이지, 무지막지한 마법 발현력이다.
같은 서클이라고 해도, 그 서클을 체화한 시간이 다르다는 거겠지. 내 마법 발현력이 서클의 효과로 1,000퍼센트 상승했다면, 탑주는 적어도 2,000퍼센트 출력으로 마법을 쏟아붓는 느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장하다, 호열아.
'마법에서 격을 맞춰둬서 망정이지.'
비약초의 육성법에서 시작해서 영약을 키워내고 강제로 서클을 형성한 것까지. 그 개고생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기이로도 저 무지막지한 초고위 마법을 되받아치지 못했을 거다.
그나저나....
"정해진 길이 꼭 답이란 법은 없다."
진짜로 수업하듯 말하지 말아줄래, 그랑펠?
나는 폭주한 탑주의 육체가 쏟아내는 초고위 마법을 모조리 무력화시키면서도, 재잘재잘 입을 열고 있었다. 애초에 탑주는 의식도 없는 상태인데 왜 말을 거는 건데.
"마법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그렇게 말해봤자 저쪽엔 안 들린다니까?
"마법의 상성? 한계에 자신을 가두지 마라."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그런 명언 비슷한 말을 쏟아낸다.
정말로 말은 그럴싸하게 들린다.
'아르카나인들은 내가 지어낸 말로 속을지도 몰라.'
왜, 나는 탑주의 마법을 다방면으로 받아치면서 뱉은 말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인가, 제시의 동공에서도 느낌표는 사라지지 않았다.
"한계에 자신을 가두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제발.
세상이 모를지라도.
지껄이고 있는 나는 알고 있단 말이다.
내가 발현 중인 기이가 얼마나 단순한지를!
마법에 그냥 기초 과학 수준을 더한 것뿐이라니까?
그냥 인터넷에 검색해서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는.
과학 개념 몇 가지를 덧붙인 거란 말이다.
물론, 쉽지 않다는 건 안다.
'달라도 너무 다르니까.'
하긴 나도 그랑펠의 설정이 없었다면 마법의 구조는 개뿔.
마법이 스킬과 다르다는 사실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했겠지.
근데, 아무리 뻔뻔해도 정도라는 게 있지.
이런 걸로 우쭐대고 싶진 않단 말이다.
하지만 나의 절규가 표출될 리가 있나.
입에선 더욱더 태연한 말이 튀어나온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나?"
당연히 대답은 없다.
"대답이 없다는 건 긍정의 뜻으로 알아듣겠다."
정말 한마디, 한마디 지껄일 때마다 수치심에 고통스러워지는구나. 하지만 이 뻔뻔함이 나의 수치심을 고려해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나는 재킷을 펄럭이며 말을 이었다.
"수업을 재개하지."
.
.
.
마르셀로는 호열을 바라봤다.
과연, 경은 나날이 발전하시는군요.
특히나 기이에 관해서는.
"같은 길을 걷고 있다고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마르셀로는 마법 못지않게 이 세계의 과학을 탐구했다.
그러나 새로운 개념을 간섭 과정에 더하는 건.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쉽지 않았다.
지금처럼 머리가 복잡한 상황에선 더더욱.
호열에서 탑주로 옮겨가는 시선.
압도적.
탑주에게 승산은 없었다.
탑주, 스스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출혈량이 심상치 않다.'
탑주는 몸이 버티지 못할 수준까지.
마구잡이로 초고위 마법을 발현하고 있었다.
마르셀로는 이를 악물었다.
'각오는 됐습니다, 경.'
탑주께서 어째서 저러시는 것인지.
이유는 알지 못했다.
물어도 대답조차 하시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명백하게 위험했다.
당장만 하더라도 호열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모험가들의 세계는 탑주가 발현한 메테오 스트라이크에 반파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동안 마탑이 호열에게 진 신세를 생각하면.... 설령 호열이 움직이지 않았어도. 마탑이, 자신이 나서서 탑주를 저지했을 것이다.
탑주 못지않게 승부의 행방을 잘 알고 있는 건.
또 하나의 당사자 호열일 터.
그러나 어째서인가.
호열은 아까부터 승부에 결착을 짓지 않고 있었다.
탑주의 마음이 돌아설 기미는 보이지 않았거늘.
호열은 자신이 뱉은 말을 오롯이 지키고 있었다.
"수업을 재개하지."
수업.
말 그대로.
탑주에게 깨달음을 주려는 것처럼.
그저 탑주의 마법을 받아칠 뿐이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그건 탑주가 눈을 뜨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기다려 왔던 자신조차 엄두 낼 수 없는 행동이었다.
마르셀로는 탑주를 바라봤다.
그 외관은 시간이 멈춘 듯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은 오직 하나, 동공뿐.
언제나 나른함이 깃들었던 눈빛이 더없이 공허했다.
마치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당신은 어째서 그런 모습으로...."
언제나 냉철함을 잃지 않았던 머리가 어수선했다.
그런 와중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견습 마법사 제시 하인네스였다.
"뒤늦게 알아차렸습니다. 저분이 탑주님이시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마르셀로 수석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제시는 어째서 탑주가 대답이 없는지.
무차별적으로 마법을 쏟아붓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대마법사로서, 전대 대마법사인 탑주의 의식이 고깔모자에 깃들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고뇌하는 마르셀로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대의 말은."
마르셀로의 목소리가 거칠게 떨렸다.
"탑주께서 전대 대마법사였다는 말입니까?"
제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셀로는 그제야 눈치챘다.
견습 마법사인 제시가 이런 공간에 있던 이유를.
그리고 떠올렸다.
탑주가 양피지에 남겼던 서신을.
"...그때부터 모든 게 계획된 것이었습니까?"
언제나 나른했던 그 얼굴.
낯빛 아래 숨겨진 목적이 있으셨던 거였군요.
하지만 어리석습니다, 탑주님.
"목숨을 내던지면서까지 추구해야 할 목적이라니."
이 세상에 그런 건 없다고.
"그런 건 진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호열을 지켜보며.
마르셀로는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까 탑주를 향해 소리칠 수 있었다.
"진정으로 이것이 당신이 원한 결말이었습니까!"
탑주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저 호열과 마법을 주고받을 뿐.
그럼에도 마르셀로는 목에 핏줄을 세우며 외쳤다.
"정말로 당신은 단 한 순간도 후회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매 순간 후회했습니다. 어째서 당신께서 깨어있을 땐 나의 부족함을 깨닫지 못했는지. 이제야 당신의 앞에서 나를 증명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탑주는 여전히 답하지 않았다.
"저를 이런 식으로 기만하셨어야 했습니까!"
마르셀로의 외침이 모든 이들에게 전해졌다.
제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 처음 알게 된 사연이었지만.
마치 모든 게 대마법사인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 같았으니까.
마음이 편치 않았다.
"...."
마탑은 그저 침묵을 지켰다.
그중에서 벨리에는 지그시 주먹을 쥐었다.
마르셀로가 느낄 상실감을 짐작할 수 없었다.
한결같은 건 오직 호열뿐이었다.
마르셀로의 절규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탑주와 쉴 새 없이 마법을 주고받는다.
무엇 하나 알아듣지 못하는 탑주의 육체를.
정말로 가르치려 드는 것처럼.
그래, 누군가에게 그것은 미련하게.
또 누군가에겐 냉랭하게.
다른 누군가에겐 꺾이지 않는 긍지로 보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시스템이 바라보기엔 언제나와 같았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나?"
가장 험한 길을 걷게 되더라도.
모든 것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숭고].
그런 숭고함은 변화를 일으키는 법이었다.
[숭고의 효과로 작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자 탑주의 입술이 움찔거렸다.
"...이런 마지막을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늦었군."
호열이 그 목소리를 들었다.
"허나, 이제라도 깨달았다면 되었다."
.
.
.
그래.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애초에 시작부터 잘못됐잖아?
마법으로 비유하자면 탐색 과정부터 잘못됐다는 거야.
애초에 기이에 접근하는데, 목숨이 왜 필요한 건데?
무엇보다 그랑펠이 목숨을 담보로 기이의 영역에 진입한 이들을 두고 보고 있을 것 같아? 그래, 대마법사 양반들. 그쪽을 말하는 거야.
나는 점멸하는 퀘스트 목표를 바라봤다.
●폭주한 탑주의 육체를 처치하라. (진행 중)
탑주.
내가 그쪽의 계획에 얌전히 따를 거로 생각했다면 큰 착각이다.
나는 퀘스트 목표가 제시하는 길이 아닌.
또 다른 길의 존재를 알게 된 참이거든.
흩날리는 무수한 마력 입자들.
"...어라?"
그 마력의 입자들이 실이 되어 제시의 고깔모자를 휘감는다.
그래, 저 길이야말로 또 다른 길.
上에 도달한 [심미]가 제시하는 결말이다.
원래 배운 건 제때 써먹어야 잊어버리지 않는 법이다.
그러니까 나는 지체하지 않았다.
제시의 고깔모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툭─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해서 고깔모자를 탐색한다.
육체와 의식을 강제로 분리하는 마법이라고 했겠다.
자연스레 고깔모자에 스며들었을 탑주의 마력흔을 헤아렸다.
마력흔에서 마법의 구조를 파악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제시 하인네스."
"...네! 고개는 들지 못하지만, 듣고 있습니다!"
...너무 세게 고깔모자를 짚었나, 미안한 일이지만 사과를 건넬 새는 없었다. 절차에 따라서 그 당사자의 의견을 구하기도 빠듯했거든.
"그대에게서 스승을 돌려받아도 되겠는가."
"스승이라면, 탑주님의 의식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그렇다."
곧바로 화답이 들려왔다.
"물론이죠! 그게 올바른 절차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누가 가르쳤는지 예의 하나는 바르다.
두 당사자와 신속한 합의를 마쳤으니.
나는 곧장 마력을 끌어올렸다.
반전 마법을 발현했다.
그와 동시에 눈앞이 점멸했다.
●폭주한 탑주의 육체를 처치하라. (실패)
메시지가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많이 컸구나, 마르셀로 꼬마 수석."
"...!"
"그리고 거하게 신세를 졌군. 이호열 수석."
탑주의 의식이 육체로 돌아왔다는 것.
◈ 219화. 해프닝...?
AAU.
지부장들은 보고서를 넘겼다.
──────
공식 홈페이지.
긴급 업데이트 내역 업로드 이후.
01시 : 14분 : 58초 경과 시점.
──────
스륵─
──────
플레이어, 이호열.
미합중국 유타주에서 최초 목격.
대기권에 진입한 소행성 집단(미구현 스킬, 메테오 스트라이크로 추정)을 다시금 우주로 되돌려 보냄. 이후, "소박한 소원들이구나."라는 말을 남기고 포탈을 발현.
이하, 목격자 목격담 첨부.
──────
"마치 되감기 버튼을 누른 것 같았다."
"불꽃놀이를 보는 것 같았다...? 하긴 어린이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요. 그나저나 메테오 스트라이크라니. 이거 그거잖아요?"
"맞습니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콘셉트 단계에 그쳤던 마법사 계열 클래스의 최종 스킬. 나 원 참, 그 스킬이 실존했다는 것만으로도 경악할 일인데...."
"한술 더 뜨셔서 되받아치기까지 하시다니."
"놀라기엔 이르죠. 다음 장으로 넘어가시죠."
스륵─
──────
남태평양 이스터 섬.
서쪽 해상에서 이상 현상 포착.
탑주가 발현한 마력 구름으로 추정.
이후, 대략 1시간가량 격한 마력 충돌 현상 발생.
──────
"마력이 충돌하던 그 시점부터. 아마도 이호열 유스라 총책임자님께서는 탑주와 전투를 벌이고 계셨을 겁니다. 저 안갯속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외부에서 포착된 관측 자료가 있긴 있습니다."
"주변 바다 일대가 증발했다가 다시금 얼어붙었다...? 잠깐만요. 저렇게 두꺼운 마력 구름을 뚫고, 저런 영향을 끼쳤다고요? 그럼, 저 안쪽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단 거죠?"
"불지옥과 얼음 지옥을 오갔겠죠."
"허."
지부장들이 혀를 내두르며 페이지를 넘긴다.
"마력 구름이 서서히 걷히고 상황은 종료. 이후는 함께 시청하셨던 인터뷰 그대로입니다. 언제나처럼 이호열 유스라 총책임자님께서 사건의 전말을 밝히셨죠."
모니터에 떠오른 인터뷰 영상.
-"탑주는 정신을 잃고 깨어난 상태였다."
"설마, 탑주가 그런 상태였을 줄이야."
"그보다 구체적인 사정을 밝히시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저라면 그냥 넘어갔을 겁니다. 분명 이것도 마탑 내부사정이셨을 텐데...."
"사건에 관한 책임을 지시겠다는 거겠죠. 수석으로서."
"원래 우리 같은 사람은 헤아릴 수 없는 법입니다."
그래, 저 자신감을 어찌 따라갈 수 있겠는가?
화면 속에서.
일말의 흔들림 없이 선언하는 호열의 모습.
-"허나, 이제 우려할 것은 없다."
"정말, 저렇게 든든한 말이 또 없군요."
"안심하면 안 됩니다. 도움이 되지 못한 거에 경각심을 가져야지."
"그런데, 다들 그다음에 하신 말씀 이해하셨나요?"
"다음에 하신 말씀이요?"
"들어보세요."
-"이로써 수업은 끝난 참이니까."
난데없이 수업이 끝난 참이라니.
대체 무슨 수업을 말하는 걸까?
호열이 마지막에 남긴 말 한마디.
덕분에 세상의 관심은 다시금 호열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
-뭐긴 뭐임 참교육이겠지ㅋㅋㅋㅋㅋㅋㅋ
-이호열이 탑주를 참교육했다고???
-당연하지 그것밖에 더 있음??
-ㄹㅇ 제대로 밝혀진 건 두 사람 행적밖에 없긴 함
참교육이라니.
아주 그냥 거품기가 따로 없구나, 그랑펠...!
물론, 인정할 건 인정하겠다. 서클을 형성하면서 기이의 위력 또한 급격하게 상승한 나였다. 덕분에 탑주를 압도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검성도 모자라서 이젠 탑주까지???
-이게 문무겸비가 아니면 뭐임ㅋㅋㅋㅋㅋ
-이러다가 다음엔 드래곤도 참교육하는 거 아님ㄷㄷ
그냥 담백하게.
사실만 늘어놓아도 과분한 기대가 쏟아졌거늘.
아무리 그래도 이건 거품이 심각하다...!
특히 마지막에 저 댓글.
뭐, 내가 드래곤을 참교육할 거라고?!
'얼마 전에도 말이야.'
사이렌의 축복으로 천운이 따르던 그날.
나는 [마안의 망원경]으로 살펴본 아르카나 대륙에서 목격했단 말이다. 엘더 드래곤, 유낙서스의 무시무시함을! 드래곤, 그거는 그냥 체급이 다르다니까?
드래곤은 차원을 찢어.
내가 [미완성 쾌검술]을 완성하고, 검술로도 초월자의 경지에 도달한다면 모를까.... 지금 시점에서 드래곤과 치고받고 싸울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것이다.
누구는 이렇게 심각한데.
"세상이 소란스럽군."
달칵─
찻잔까지 기울여 가면서.
정말 남 이야기하듯 하는구나, 그랑펠.
허나, 그랑펠의 태도는 사실 틀리지 않았다.
세상이 소란스러운 건 나 때문이 아니니까.
순전 탑주, 그쪽 때문이었지.
나는 찻잔을 말끔하게 비운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나만 고생할 생각은 없거든.'
자, 이제 뒤끝을 갚아줄 시간이다.
.
.
.
마탑의 최상층.
"...."
내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예상할 순 있었다.
나, 지금 엄청나게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을까?
그럴 수밖에 없다.
내 시야에 들어온 건 웬 고양이 한 마리였으니까.
샥샥─
혓바닥 내밀고는 앞발 솜뭉치를 열심히도 핥는다.
이제서야 내 차가운 시선을 알아차렸나.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연다.
나오는 건 야옹─ 소리가 아닌 사람의 말이다.
"누구 덕분에 육체가 작살이 나서 말이네. 회복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잠깐 형태를 바꾸었지. 온종일 늘어져 있기에 이보다 적합한 형태도 없거든."
나도, 그랑펠도 답하지 않았다.
전에도 한번 말했던 것 같은데.
내게도, 그랑펠에게도 고양이의 귀여움은 통하지 않는다.
덕분에 내 태도는 조금도 느슨해지지 않았다.
"탑주, 그대에게 들어야 할 대답이 있다."
역시나 존댓말은 과감하게 생략.
다행히도 탑주는 시시콜콜하게 따지지 않았다.
하여튼, 누구처럼 꼰대가 아니라서 다행이군.
"대답이라, 마땅히 해드려야겠지. 그런 의미에선 입이 고양이가 되었어도 할 말이 없군. 그대도 짐작했다시피 나의 계획은 보란 듯이 실패해 버렸으니 말일세."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야 하는 거 아닌가?
과연, 마르셀로에게 듣던 그대로네.
언행이 제멋대로다.
물론, 이쪽도 제멋대로인 걸로는 뒤지지 않지만.
"비약적인 간섭 과정이었다."
이거 봐라.
다짜고짜 잘못된 점부터 지적하는 거.
나는 탑주 상대로 사전 검증이라도 하듯 말을 이었다.
"조금이라도 성공적인 발현에 다다르고 싶었다면 탐색 대상에 보다 폭넓은 이해가 필요했다. 허나 무엇보다 가장 큰 실수는 육체에 남겨진 무의식을 간과한 것일 터."
탑주의 고양이 귀가 뾰족해졌다.
"...지독하게도 집요하구나. 한때, 잠깐이나마 그대에게 호기심을 가졌던 게 후회될 정도야. 그렇게 나의 치부를 철저히 들춰야만 직성이 풀리는 건가?"
물론,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말했잖아.
내가 마탑에 괜히 눈물 바람을 몰고 온 게 아니라니까.
"...빌어먹을 잔소리."
파바박─
탑주가 앞발로 한껏 솟은 귀를 털어내고 나서야 나의 훈수는 끝이 났다. 물론, 독설만 내뱉은 건 아니다. 칭찬할 부분에 대해선 칭찬을 아끼지 않는 게 긍지였으니.
"그럼에도 메테오 스트라이크는 인상적이었다."
덕분에 어깨너머로 제대로 배웠거든.
탑주의 육체가 발현했던 초고위 마법들을!
현시점에서 알차게 써먹을 수 있다고 말할 순 없었다.
발현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마력 소모량이 극심하다는 걸.
탑주만 하더라도 반동으로 입에서 피를 뿜어낼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머릿속에 새겨놨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당장이 아니더라도 훗날 사용할 날이 올 터.
장담하건대.
내가 발현할 수 있는 마법 중.
메테오 스트라이크의 파괴력은 단연코 최강이었다.
'거기에 기이까지 더한다면?'
그 파괴력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지 않을까.
탑주의 고양이 꼬리가 살랑거렸다.
"그것 참으로 위로가 되는 칭찬이군, 이호열 수석. 육체에 남겨진 기억을 되돌아보니, 그대에게 유효하게 작용했던 마법은 하나도 없었던 것 같은데. 독설도 모자라서 이제는 당사자를 앞에 두고 조리돌림이라니."
그러더니 진짜 고양이처럼 몸을 축 늘어트렸다.
"덕분에 피폐해진 의식이 더욱더 메말라 버렸다."
피폐해진 의식이라.
그렇지 않아도 물어보려고 했었는데.
나는 탑주의 엄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의식의 공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탑주 또한 초월자였으니까.
『의식의 공간』이 무엇을 말하는지 설명할 필요는 없다.
시공간의 사교장과 비슷한 의식의 공간이 분명.
고깔모자에도 존재할 테니까.
탑주가 슬며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대가를 치르고 있었지."
"대가라면."
"도대체 몇 대를 이어져 내려온 건지, 나조차도 헤아릴 수 없는 대마법사의 규율을 어긴 죗값이겠지. 추악한 계획을 저지하려던 게 죄라면 죄겠군. 그래."
추악한 계획이라.
마탑 퀘스트에 나와 있는.
대마법사들의 음모를 말하는 건가.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탑주가 눈치껏 말을 이었거든.
"제자에게 텔레파시조차 보낼 수 없는 위기에 처했었지만.... 보다시피 이호열 수석, 그대 덕분에. 이렇게 고양이의 모습으로나마 살아남았을 수 있었군. 정식으로 감사를 표하겠네."
누가 들으면 내가 고양이 몸에 의식을 되돌려놓은 줄 알겠다.
딴죽을 걸고 싶었지만.
그것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게 있었다.
그래서 대마법사들의 음모라는 게 정확히 뭔데?
"나의 치부를 비롯해서 생전 처음 보는 마법의 구조까지 파악해 내는 이호열 수석, 그대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추악한 계획은 차마 예상하지 못했을 걸세."
탑주는 잔뜩 뜸을 들였다.
"부디 놀라지 말게. 대마법사, 그들은...."
솜방망이를 핥던 혓바닥도 멈추고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악마와 목적이 일치하네."
악마라.
솔직하게.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들은 진정으로 아르카나 대륙의 멸망을 바라고 있었으니까. 오직, 그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서. 대마법사의 지식을 계승하며 새로운 그릇들을 세뇌시켜 왔지."
대마법사들이 어째서 아르카나 대륙의 멸망을 바랐는가?
이유까지는 알지 못해도 짐작하고 있었거든.
아르카나 대륙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
대마법사, 당신들 같은 강자들이 멸망을 바랐으니까.
대륙은 악마에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무너진 거겠지.
"짐작하고 있었다."
나의 담담한 대답에 탑주의 털이 곤두섰다.
"...짐작하고 있었다고?"
킁킁─
코를 찡긋거리더니 감탄사를 뱉는다.
"과연, 거짓말을 하는 냄새는 아니군. 이래서야 뜸을 들인 보람이 없구만, 이호열 수석. 은인인 그대에게 하나 정도는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아쉬워라."
도움을 주고 싶었다면.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탑주가 마탑에 복귀한 이상.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나는 그쪽에게 상당히 많은 일을 떠넘길 생각이었거든.
앞으로 내가 워낙 바쁘게 발버둥쳐야 해서 말이지.
물론, 당장 일을 떠넘기겠다는 건 아니다.
'요양 중인 사람을 너무 건드는 것도 좋지 않으니까.'
슬슬 돌아갈까.
나는 발길을 돌리려다가 멈칫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한 가지는 더 물어봐야겠군.
나의 반전 마법 덕분에.
탑주의 의식은 고깔모자에서 원래의 육체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제시의 클래스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 이전에 그 불길한 고깔모자를 계속 쓰고 있어도 되는 건가.
탑주는 느긋하게 하품했다.
"무슨 걱정을 하는가 했더니만."
그러곤 다시금 자신의 솜방망이를 핥았다.
"참으로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 이호열 수석."
뜻 모를 말을 해왔다.
"그 늙은이들이 내 제자에게 한동안 말을 거는 일 따윈 없을 게 당연하지 않은가? 나를 포함해서 모두가 이호열 수석, 그대의 기척을 느꼈으니까. 대체 어떤 미친 작자가 그대와 마주하고도 흑심을 품을 수 있겠는가?"
...잠깐만, 그 말은.
그거, 대마법사들이 나한테 쫄았다는 소리야?
뭐냐, 이쯤 되니까 슬슬 무서워진다.
나, 설마.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강해진 건가?
.
.
.
쓸데없이 성실한 게 죄라면 죄다.
채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나는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 말인즉.
밀린 서류를 처리하기 위해서 유스라 왕국.
집무실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인물과 조우했다.
아르카나 공식 랭킹 1위.
용기사, 스칼.
집무실에 들어선 그가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나이다, 이호열 경."
...이봐요, 스칼 씨.
당신은 왜 또 초면부터 말투가 그 모양이야?!
중세시대에서 방금 튀어나왔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격식을 갖춘 인사는 또 대체 무엇이냔 말이냐. 하여튼, 그랑펠이 여러 사람 망쳐놓는구나.
속으로 탄식을 삼키기도 잠깐.
나는 퀘스트창을 확인했다.
[월드 퀘스트 : 악룡(惡龍) 사냥꾼]
사악한 용의 일족을 사냥한 자여.
산맥의 전설이 그대를 부르고 있다.
─제로 산맥 최정상에 도달하라. (진행 중)
용기사, 스칼이라면.
월드 퀘스트와 관련된 정보를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나였다.
'뭐, 그게 아니더라도.'
제로 산맥이 출현하고.
드래곤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지금.
스칼과는 퀘스트의 퍼즐 조각을 맞춰볼 필요가 있겠지.
"자리에 앉지."
내 권유에 스칼은 곧장 자리에 착석했다.
그런데, 어째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이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는 뜻에서 차라도 한잔 나누려고 했는데.
그렇게 급하다면 어쩔 수 없지.
"이야기는 전해 들었다."
에노크는 전해왔다.
내게 반드시 전해야 하는 말이 있다면서.
스칼은 어제부터 황금 궁전 앞에서 나를 기다렸다고.
'이게, 참 바람을 맞히려고 그런 건 아닌데.'
그렇지 않아도 대화를 나눠볼 생각이었는데.
스칼 입장에선 타이밍이 야속하다고 해야겠군.
괜히 내가 미안해져서 평소보다 너그럽게 말했다.
"용건을 말해도 좋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스칼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짐작했던 대로.
역시나, 드래곤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그런데.
방금 뭐라고 그랬냐, 스칼?
아르카나 대륙에 누가 돌아왔다고?
위대애애애한 가문?
'그거 설마.'
에이.
아니.
...진짜로?!
◈ 220화. 내 두 눈으로
호령(號令).
호열이 아닌 호령이 맞다.
정확하게는 귀철이 제로 산맥을 호령하고 있었다.
내 손으로 쥐고 휘두르는 귀철을.
마치 다른 집 검인 양 말하는 이유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으하하! 좋다, 더 격하게 날뛰어 보거라. 야생이여!
내 검이라고 밝히기엔 심하게 부끄러웠으니까.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한마디가 쏟아져 나온다.
마음 같아선 커뮤니티에 질문 글이라도 올려보고 싶어진다.
──────
Q. 원래 에고 장비는 전부 이렇게 말이 많나요?
──────
그럼 이런 답변이 올라오겠지.
──────
A. 에고 장비? 세상에 그딴 게 어딨음ㅋ
──────
그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결국,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이라는 거지.
귀철에게 입을 다물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나도 그러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가 있어야지.
"끝까지 꺾이지 않았던 야성. 그대들은 충분히 명예로웠다."
이놈의 입!
보다시피 그랑펠과 귀철의 감성은 아주 그냥 천생연분 수준이었다. 덕분에 고통스러운 건 양쪽에서 시달리고 있는 나, 이호열뿐이라는 거지.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옛날보다는 나아졌지.'
플레이어로 막 각성했을 무렵.
고작 놀한테 예절 교육을 운운하던 때에 비하면야.
지금은 누구에게 이런 모습을 들켜도 둘러댈 명분이 있었다.
왜, 방금 처치한 몹만 하더라도 무려 700레벨짜리 몬스터였거든.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숭고, 초월자]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601]
[능력치]
근력 : 141 / 민첩 : 139 / 마력 : 517 / 행운 : 12 / 심미 : 上 / 집념 : 2
[보유 포인트 : 0]
추가된 하루의 일과.
제로 산맥에서 꾸준하게 몬스터를 사냥한 지도 나흘째였다. 덕분에 600레벨의 벽을 돌파하고, 1레벨이 추가로 상승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레벨이 아니다.
레벨보다 근본적인 능력.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들을 얼마나 상승시켰는지.
그 점에 더욱 중점을 두기 시작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도 나름대로 진전이 있었다.
일단, 몬스터를 상대하며 되도록 『마법』은 사용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밸런스 붕괴잖아?
서클의 효과로 발현력이 증폭된 마법이다. 이미 초월자의 경지에 올라선 마법으로 몬스터를 사냥하는 건 무의미하게 경험치만 채울 뿐이었으니까.
"무엇이든 효율이 중요한 법."
시간은 오후에 즐기는 차....
아니, 아니, 이게 아니지.
금과 같은 법이니까.
게다가 경험치야 아르카나 대륙, 퀴른베르크 기계탑에서 조달할 수 있다. 역시 유산이 최고다.
덕분에 이제부터 현실에서의 사냥은 단순하게 경험치를 획득하는 목적에 그치지 않을 수 있었다.
슥─
미완성 쾌검술을 가다듬는 노력은 물론.
석궁을 활용하는 사격술까지.
그야말로 여러 방면에서.
악마 사냥꾼답게.
근본적인 능력을 키우는 데에 집중했다는 것.
'기이로 발전시킬 가능성도 있으니까.'
물론.
플레이어들이 알게 된다면 경악을 금치 못할 육성 방식이다.
아주 그냥 사서 고생을 한다고 하겠지.
그렇다면 나는 답해주리라.
"때론 천천히 거닐어야 보이는 것이 있지."
아니, 그렇다고 낭만 넘치게 대답할 필요는 없었는데....
-그 말이 더없이 옳다. 나의 주인이여.
넌 또 이런 말에 맞장구치지 마라, 귀철.
어쨌거나, 나는 나흘간의 가장 큰 성과를 불러냈다.
하이엘과 디엔드.
간만에 주어진 시간에 둘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거든.
나는 입을 열었다.
"하이엘, 디엔드."
"하이엘이 주군의 부름에 답했습니다."
"부르셨습니까, 주군."
왜, 도플갱어와 마주치면 죽는다는 말이 있는데.
하이엘, 디엔드, 귀철.
무려 셋이나 되는 분신과 한데 마주한 나였다.
벌써부터 현기증이 나려 하지만 꾹 참아보자.
'일단, 디엔드는 기대했던 만큼.'
디엔드의 전력을 내 두 눈으로 확인한 적은 없지만, 강함을 짐작하고는 있었다.
첫 등장 때부터 정령학 선임 페이얀의 계약 정령 파이어 드래이크를 긴장하게 하였던 어둠의 정령 디엔드였다. 못해도 상위 정령급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단 거지.
'하지만 하이엘은 간과하고 있었어.'
인정하겠다, 편견 때문이었다.
그야 나는 하이엘의 과거를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나도 모르게 간과했다. 하이엘이 포식자의 늪지대에서처럼 여전히 겉만 화려한 존재일 거라고.
'엘프를 멈춰 세울 수 있는 하이엘인데 말이야.'
그러나 하이엘은 엄연한 고유 정령이자 나와 함께 [첫 세계수의 축복]을 받은 존재였다.
{자연} 능력이 전투에 특화되어 있지 않다고 한들, 일반적인 몬스터들로서는 넘볼 수 없는 존재라는 것.
그 증거가 눈에 보였다.
짐승 타입 몬스터들이 전부 하이엘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녀석들이 온순한 게 아니었다.
호전성이라면 맹수도 치를 떨 초식 동물, [전쟁광 순록]도 섞여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너도 교육한 거구나, 하이엘.'
누굴 닮아서 그런지, 일타강사라고 불러도 손색없겠구나.
그런 하이엘을 보고 있자니, 슬슬 이해가 되기도 했다.
어째서 고깔모자 속 대마법사들이 나를 보고 잔뜩 움츠렸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고나 할까?'
사실 당사자인 나도 새삼스럽게 놀랐거든.
첫 세계수의 선택을 받은 정령, 하이엘.
검성을 압도했던 귀철.
디엔드까지.
잔뜩 거품이 낀 나를 제쳐놓고 보더라도.
저 셋을 한 번에 다루는 이가 있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흠칫할 수밖에 없을 터.
그런 의미에선 더없이 든든했다.
그러니 이 세상에 두려워할 것이 없어야 했거늘.
이 순간, 나의 마음은 평온하지 못했다.
"숲의 동물들에게 주군의 예절론을 설파했습니다."
이젠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주접을 떠는 하이엘 때문에?
"저 또한 본받겠습니다, 주군."
그게 아니라면 그 유난을 보고 배우는 디엔드 때문에?
-과연...!
그것도 아니면 해괴한 풍경에도 감탄하는 귀철 때문에?
그래, 평상시라면.
이것만으로도 정신적 고통을 호소했을 나였다.
하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는.
이런 건 사소한 해프닝으로 만들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으니.
그렇다.
스칼이 내게 전해온 이야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위대한 가문'에 관한 소식 때문에.
[클래스 퀘스트 : 전룡소집(全龍召集)]
노룡이 외쳤다.
아르카나 대륙에 '위대한 가문'이 돌아왔노라고.
모든 드래곤은 사건의 진위를 파악하길 원한다.
─대륙으로 집결하는 드래곤을 목격하라. (선택)
스칼은 용기사의 클래스 퀘스트를 내게 공유했다.
그걸 보는 순간.
나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위대한 가문』
그 단어 위로 겹쳐 보이는 설정이 있었으니까.
『위대한 가문의 후계자였으나 악마에게 그 가문이 몰락.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인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이하 그랑펠은 그 악마에게 복수하기 위해 악마 사냥꾼의 길을 걷게 됐다.』
왜, 세상에 많고 많은 수식어 중에서.
하필이면 '위대한' 가문인 건데?!
나는 최대한 냉정하고 상식적으로 생각했다.
클라우디.
그랑펠과 마찬가지로.
중2병에 시달리던 내가 설정한 가상의 가문이었다.
아르카나 대륙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가문이겠지.'
뭣보다 그 위대한 가문이 돌아왔다잖아?
'적어도 나는 과거를, 이름을 아직까지 잘 숨기고 있다고.'
애써 추스르는 속마음.
그럼에도 마냥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나는 지금도 체감하고 있단 말이다.
좋은 걸 다 가져다가 붙인 그랑펠의 설정을!
'물론, 스케일이 다르긴 하지.'
보자....
어렴풋이 클라우디가(家)의 설정이 떠오른다.
그 시절, 삐딱하던 내가 '위대한'이란 수식어를 붙일 정도.
쉽게 말해서.
그랑펠에 버금갈 정도로.
낯뜨거워지는 설정이 한가득이었지, 진심으로.
...정말로, 만에 하나.
그 설정들이 실현된다면?
혹시라도 아르카나 대륙에 클라우디가의 흔적이 남아있다면?
장담하겠다.
적어도 나는 아르카나 대륙에선 고개를 들고 살 수 없을 거다.
그러니까 그런 일 자체를 만들지 않아야겠지.
왜냐고?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나는 이 빌어먹을 이름을.
아르카나 대륙엔 물론.
현실에 밝힐 생각 따윈 절대 없으니까.
'특히 웬수들이 알기라도 하는 날엔 진짜...!'
그러니까 나는 스칼에게 선언했었다.
-"내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 믿지 않겠다."
그런 뜻이 아니건만.
본의 아니게 뱉어버린 냉랭한 말.
스칼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부디 이해해 주길 바란다.
이쪽은 목숨(수치사)이 걸린 일이었으니까!
*
AAU 유스라 지부가 창설된 이후.
각 지부들 간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지부장들뿐만 아닌 사원 사이의 교류 또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잦아졌다는 뜻.
윤수겸이 카메라에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이야,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얼굴이야?"
"잘 지냈어, 톰? 카트리나도 여전하네."
"연락 한번 안 하다가 이제 와서 손 흔들기는."
"에이, 알잖아? 우리 보스가 누구인지."
"하긴 천하의 미스터 박 밑에서 죽어나가고 있겠지?"
AAU 대한민국 지부장, 박민재.
CEO 레이먼 션을 정면으로 들이받은.
여러 의미에서 전설적인 인물.
그의 반골 기질이야 AAU가 코스모인 시절부터 전 지부에 자자했었다. 그런 박민재가 지부장으로, 윤수겸의 보스로 발령됐다는 소식에 조의를 표했던 톰과 카트리나였다.
"그래도 가끔은 부럽다니까?"
"미쳤어? 내가 부럽다고? 왜?"
"나름 가까울 거 아냐. 이호열 플레이어랑."
"나도 동감."
호열의 이름이 거론되자 카트리나가 카메라에 얼굴을 들이댔다.
자신들보다는 호열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을 윤수겸이 아닌가.
카트리나가 의욕적으로 말을 이었다.
"접점이나 교류가 있을 거 아니야! 그래서 뭐야? 대한민국 지부만이 알고 있는 이호열 유스라 총책임자님에 관한 정보는? 진짜 비밀엄수할게. 필요하다면 톰도 저기다 치워버릴게."
뭔가 했더니 그런 질문?
완전 헛물을 켜고 있다들.
윤수겸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너희 긍지가 뭔지 알고 있니?"
"긍지? 알지. 이호열 총책임자님이 입에 달고 사시는 말."
"그래, 그런 분에게 특별 대우란 게 존재하겠어?"
"아...."
두 사람은 단번에 납득했다.
하긴 그동안 호열이 보여준 행보를 생각하면....
호열에게 차별이란 존재하지 않겠지.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조차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공명정대한 호열이었으니까.
헛물을 켠 세 사람은 곧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옛날 추억을 되살려 보자는 거지?"
"맞아. 스토리 짜맞추던 그때 그 추억."
"초 쳐서 미안한데 말이야. 그게 의미가 있긴 한가?"
"톰, 제발. 미안할 거면 말을 꺼내지 마."
"카트리나, 쟤 옆구리 한 대만 때려 봐."
셋이서 티격태격하고 있으니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하지만 마냥 웃고 있을 순 없다.
이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순 없었으니까.
얻어맞은 옆구리를 매만지던 톰이 입을 열었다.
"우선 인정할 건 인정하고 시작하자고. 어쩌면 아르카나는 게임일 때부터 우리의 컨트롤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런 전제를 깔고 가자는 거야."
"인정."
"오케이. 뭐, 정답은 레이먼만 알고 있겠지만."
매사에 비관적이지만 막상 하면 잘하는 톰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몇 개인지 덜컥, 겁이 난다는 거지. 왜, 악마가 나타나기 이전까지 아르카나 대륙은 그래도 꽤 평화로웠잖아?"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제국 전쟁처럼 큰 사건들이 있긴 했다만, 이번 성전에 비하면 애들 장난 수준이었으니까. 그래서 말하고 싶은 게 뭔데, 톰?"
"핵심은 간단해."
그리고 예리했다.
"그 태평성대엔 이유가 있었을 거라는 것."
"...기나긴 평화에 이유가 있었다?"
"단순하게 악마가 업데이트돼서 난장판이 된 게 아니란 거야?"
톰은 어깨를 으쓱였다.
"전제를 깔았잖아? 모든 게 원래부터 존재했다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설정 배경이 원래부터 존재했던 거라고. 최근만 하더라도 마탑이란 좋은 예가 있겠군."
"악마들이 등장하지 않았던 건 설정 때문이 아니라...."
"탑주의 부재처럼 드러나지 않았던 모종의 사정이 있던 거다?"
"맞아. 그러니까...."
타닥─
톰이 키보드를 두들기자 올라오는 텍스트 한 줄.
[아르카나 대륙의 평화엔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그런 평화가 깨진 데에도 이유가 있다."
.
.
.
시공간의 사교장.
흑색의 머리칼.
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동녘.
그곳에서 온 일출의 무사는 아르카나 대륙에 관한 지식이 부족했다. 애초에 아르카나 땅을 밟게 된 것도 '마계 지각 대변동' 덕분이었으니까.
당연하게도 그는 알지 못했다.
"용감하구나. 그 이름을 언급하다니."
한 초월자의 말에 일출의 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쪽 바다의 마녀.
그녀가 보였던 반응을 잊을 수 없었다.
그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다니.
그동안 사교장에서 봐왔던.
무기력한 모습과는 명백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자연스러운 의문이 들었다.
대체 그 이름이 무엇이길래, 그토록....
그러나 일출의 무사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전설의 재림부터 대흉 토벌."
"심지어는 그대의 고향에 전해졌던 '그 사건'까지도."
"동쪽에서 온 무사여, 믿을 수 있겠나?"
"그 모든 사건의 배후엔 한 가문이 있었다는 걸."
"그렇다. 클라우디다."
"클라우디가 있었기에 대륙은 이제껏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 클라우디가 사라졌기에 대륙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
"...!!!"
말문이 막힐 정도로 충격적인 과거에.
◈ 221화. 그것은 어두운 역사
클라우디 가문.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의 연속이다.
그러나 사실이라고 인정한다면....
'납득이 된다.'
현재 아르카나 대륙에 펼쳐지고 있는 모든 사건을 설명할 수 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자신만 하더라도 목격하지 않았던가? 보란 듯 하늘을 활강하는 전설 속의 존재, 용(龍)무리를.
일출의 무사가 입을 열었다.
"...틀림없이 진실이겠지?"
그러자 냉랭한 대답이 돌아왔다.
"모욕이군. 내가 그 이름을 거론하며 거짓을 더할 작자처럼 보이던가? 무지를 이해해 주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네, 동녘의 무사여."
"그런 뜻은 아니었다. 단지...."
사교장에 정적이 맴돌았다.
'폭풍전야란 말인가.'
무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토록 사교장이 텅텅 비어버린 모습은 처음이다.
자신만 하더라도.
클라우디에 관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꽤 긴 시간 사교장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간신히 눈앞의 초월자와 조우했다.
'그럴 만도 하겠군.'
클라우디를 둘러싼 과거사가 전부 사실이라면.
초월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물어도 되나?"
"보기보다 호기심이 많군. 좋아, 들어보겠네."
"그런 위대한 가문이 어째서 자취를 감췄던 거지?"
초월자는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로, 무지하기 짝이 없기에 던질 수 있는 질문이야."
그러더니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무리 나라고 하더라도 그 질문엔 답변해 줄 수 없네. 내게는 그날을 거론할 자격도, 용기도 없으니까. 그러나 그대에게 한 가지 조언 정도는 해주지."
다짜고짜 조언이라니.
"방금 가졌던 의문은 이 자리에서 잊어버리게나."
"...잊어버리라니, 어째서지?"
"그 호기심이 자네의 명줄을 앞당길 수도 있으니까."
의문을 가지는 것만으로 명줄을 앞당길 거라니.
이래서는 조언을 가장한 저주가 아닌가?
무사는 순간적으로 불쾌해졌다.
그러나 이내, 섬뜩한 말이 들려왔다.
"그대는 분명, 저주라고 생각했겠지?"
"...!"
과연, 초월자였다.
속마음을 꿰뚫어보다니.
역시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일출의 무사는 착각하고 있었다.
초월자는 진심으로 무사의 무지를 안쓰럽게 여겼으니까.
그러니까 덧붙였다.
"동녘에도 저주란 개념이 있다면 딱히 설명은 하지 않겠네. 저주에 경계할 정도라면 그 위험성 또한 알고 있단 뜻일 테니까. 그렇기에 더더욱 관심을 끄라는 것이다."
무사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찌 저주를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저주 혹은 흑마법.
그건 더없이 이질적인 힘이었다.
'끔찍한 경험이었다.'
일출의 무사, 자신 또한 저주에 당해 며칠 동안 목소리를 빼앗겼던 기억이 있었으니까. 덕분에 이어지는 초월자의 말을 이해하는 데에 무리는 없었다.
"그것은 클라우디에 지고 만 헤아릴 수 없는 빚."
"...?"
"단지 엿보는 것만으로도 감당할 수 없을 저주에 시달리게 될 정도로. 아르카나의 어느 누구도 들추고 싶어 하지 않을 더없이 어두운 역사."
그렇다.
그것이 바로 아르카나 대륙의 모든 강자가 날뛰기 시작한 이유였다.
그런 클라우디가 아르카나에 돌아왔으니까.
그 어두운 역사를 클라우디, 스스로 들추기라도 하는 날에는....
"감히 누구도 그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을 테니까."
"...!!!"
*
칠죄종, 식탐.
칠죄종이란 이름은 무색해진 지 오래였다.
칠죄종은 이제 자신을 포함해서 불과 다섯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지옥에 처박혀 버린 탐욕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질투의 행방은 묘연하기 그지없었다.
한쪽 팔이 잘린 채로 돌아다니던 것도 모자라서는.
이젠 대륙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리다니.
식탐은 빠득 이를 갈았다.
"도움이라곤 되지 않는 머저리 같은 새끼."
"...?"
살기가 넘실거리는 혼잣말에 주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쑥대밭이 된 아르카나 대륙이다.
그런 대륙에서 운영 중인 주점이라면 그 수준은 말하지도 않아도 알만했다.
덜그덕─
삐걱─
덜그덕─
조악한 테이블에 깔린 냄새부터 지독한 싸구려 술.
가죽에 양념만 더했다고 하더라도 믿을 정도로 질긴 음식뿐.
손님들 또한 마찬가지다.
"술맛 떨어지게 지랄은."
"뭐, 동료가 어디서 뒈지기라도 했나? 으하하."
"거기, 닥치라고 새끼야. 기분 잡치게 하지 말고."
피에 절은 검과 방어구.
피폐한 눈빛이 저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말한다.
버려진 아르카나 대륙에서 살아남았다는 건 그런 뜻이었다.
물론, 식탐에게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절대 있을 수 없다.'
무려 수십 년 전의 일.
돌아올 수 있었다면 진작 돌아왔을 것이다.
무언가를 잘못 알고서는 지껄인 말이었을 것이다.
식탐은 끊임없이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뱉었다.
"그딴 개소리를 나더러 믿으라고?"
악(惡)에서 태어난 악, 그 자체.
당연하게도 타인의 말 따윈 신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토록 신경을 쓰는 이유는 간단했다.
마찬가지로.
개소리라고 여겼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았단 거다.
악크샨의 부활.
개소리라 치부했던 소문.
하지만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가.
가미긴을 지옥에 처박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식탐은 깨달았다.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다는 것을.
식탐이 중얼거렸다.
"...돌아왔다면 누가 돌아왔다는 거지?"
그때였다.
쾅!
소리와 함께 테이블이 뒤집어졌다.
"미친 새끼가 내 목소리 안 들려?!"
"?"
"당장 꺼지라고, 이 새끼야! 니 새끼가 들어오자마자 술맛이 싹 달아났으니까. 아까부터 뭐라 뭐라 중얼거리질 않나. 악마라도 씌인 거냐? 엉?"
깨진 그릇.
식탐은 바닥에 널브러진 음식들을 바라봤다.
형편없는 음식이지만, 분명 자신의 식사였다.
시선을 옮겨 사내를 바라봤다.
"씐 게 아니라면?"
"뭐라는 거야, 미친 새끼가."
"내가 악마라면 어찌하겠느냐고 묻는 거야."
"...!!!"
스릉─
감이라는 게 있다.
"역시, 악마 새끼였어!"
어떤 삶을 살아왔든 생사의 갈림길 하나만큼은 셀 수 없이 넘나들었던 사내들이었다. 식탐의 말이 농담이 아니었다는 걸 곧장 알아차렸단 소리.
사내가 단검을 식탐의 목에 겨눈 채 으르렁거렸다.
"술맛이 달아난 이유가 있었어. 이 빌어먹을 새끼."
이내, 식탐을 둘러싸는 무리.
대략 스물이 훌쩍 넘어 보였다.
그러나 식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단지 중얼거렸다.
"이런 걸로 배를 채우긴 싫은데."
그리고 모든 게 끝났다.
와그작─
으드득─
우드득─
부서지고 깨지고 씹히는 소리.
"으으...."
주점의 주인장은 몸을 움츠리고 벌벌 떨었다.
싸움을 말릴 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광경.
식탐의 손바닥으로 사내들이 빨려 들어갔다.
와드득─
그리고 끔찍한 소음만이 주점을 가득 채웠다.
손님의 호출이 들려왔다.
식탐이었다.
"주인장."
"...!"
"미안하지만 물 한 잔만 부탁하지."
어차피 저항할 힘 따윈 없었다.
사내는 두려움을 억누르고 물이 담긴 잔을 건넸다.
식탐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이거, 소란을 피워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가뜩이나 심란한데, 적당히 시비를 걸어야지."
"죄송합니다. 조용히 하겠습니다."
"아, 그래 주겠나? 고맙네."
이런 주점에서 싸움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평상시였다면 대수롭지 않게 난장판이 된 주점을 정리하고, 수리비를 받아냈겠지만 사내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눈앞에 악마가 있었으니까.
장정을 스물이나 집어삼킨 악마가.
"소문이 진짜든, 가짜든 유효한 해결책을 찾아야 해."
식탐은 사내가 공포에 떠는 것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인간을 스무 명이나 집어삼킨 지금도.
머릿속은 여전히 클라우디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했으니까.
고요해진 주점.
들려오는 건 공포로 뛰는 주인장의 심장 박동뿐.
덕분인가, 머릿속에 썩 괜찮은 방법이 떠올랐다.
"나서서 확인해 보면 되는 일이었어."
좋다.
미끼를 던지겠노라.
클라우디라면 반드시 물 수밖에 없는 미끼를.
그 미끼 역할엔 더없이 적합한 놈들이 있었다.
그래, 분수를 모르는 악마들 말이야.
마왕.
마계에서 태어난 잡종 주제에.
악(惡)의 왕을 자처하는 우스운 녀석들.
가미긴처럼 본래부터 존재했던 십좌(十座)의 마왕을 제외하면 하나같이 버러지 같은 놈들이었다.
아, 가미긴이 지옥에 떨어진 지금. 이제 진정한 마왕은 아홉밖에 남지 않았나.
"이거, 잘하면 여러모로 적합한 디너쇼가 될지도?"
좋아, 머뭇거려선 안 되겠지.
드래곤, 엘프, 초월자까지.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클라우디의 소식을 듣지 않았던가?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움직이기 전에 먼저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계산하지."
"...괜찮습니다."
"정말로 괜찮은 거 맞나?"
"정말로 받지 않겠습니다."
"그래?"
주머니를 뒤지는 것처럼.
식탐은 아가리를 벌린 손바닥 속을 뒤졌다.
설령 금은보화라고 해도 그런 곳에서 나온 걸 받을 순 없었다.
이내, 식탐이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여신이시여.'
이름 모를 악마에게서.
저를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내가 믿지도 않던 신을 찾던 그때였다.
문득, 식탐이 사내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말이야."
"?!"
"술은 몰라도 음식 장사는 그만두는 게 좋겠어."
바닥에 널브러진 음식을 보더니 씨익 웃었다.
"내 뱃속에 있는 사내에게 감사하는 게 좋을 거야. 저따위 음식을 입에 댔다면 그대를 먼저 집어삼켰을 것 같거든. 인간보다 맛없는 음식을 내놓은 죄로 말이지."
사악한 미소.
덜덜덜─
사내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하, 농담이야. 농담. 고생하게, 주인장."
식탐이 완전히 주점을 빠져나가고 나서야 깨달았다.
여신의 보살핌 같은 게 아니었다.
자신이 살아남은 건 단순하게 악마의 변덕 때문이었다고.
*
하여튼 쉴 수 있는 날이 없구나.
나는 원탁회의를 마치자마자 집무실로 복귀했다.
원탁회의에서 딱히 내가 할 일은 없었다.
원탁회의 이전에.
탑주가 나서서 자신이 벌였던 민폐에 관해 사과의 뜻을 밝혔었거든.
'...그거랑 별개로 묘하게 얄밉다.'
알다시피 원탁회의는 변화했다.
계급에 구애받지 않는 회의이기는 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마탑의 우두머리인 탑주가 빠져선 안 되는 법.
그런데, 설마 고양이의 모습으로 참석할 줄이야!
'아주 뻔뻔한 게 그랑펠 이상이야.'
견습, 숙련 마법사들이 탑주의 변신을 간파할 순 없었다.
하지만 탑주, 그쪽은 당사자잖아?
인간이면서 태연하게 고양이인 척하는 건 또 뭔데?
배를 만져도 가만히 있더니, 나중엔 아주 골골 소리까지 내더라?
'거, 팔자 좋으시네.'
누구는 방금까지 제로 산맥에서 사냥과 고뇌를 반복하다가 왔는데.
저렇게 태평하다니.
아무리 요양 중이라고 하더라도.
심보가 뒤틀리는 건 어찌할 수 없었다.
그래도 위안거리를 찾자면....
'다음 주부터 정기 학회였나?'
나는 다짐했다.
이번 학회에선 탑주를 제대로 부려 먹겠노라고!
명분은 충분하다.
그랑펠의 긍지에 어긋나지도 않는다.
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게 있거든.
자리에 요구되는 책임.
높은 자리에 있다면 그 책임을 져야지, 우리 탑주님.
달칵─
물론, 나도 그 책임감에 시달리고 있다.
언제나처럼 책상 위에 잔뜩 쌓인 출탑 신청서.
보자, 찻잔을 내려놓고.
벤쉬의 출탑 신청서에 불합격을 휘갈기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본능에 따라 양피지로 시선이 옮겨갔다.
처음 보는 낯선 필체가 떠올라 있다.
나서기 좋아하는 이놈의 오지랖.
덕분에 마탑 전원의 출탑 신청서를 꼼꼼하게 살펴봤던 나였다.
그럼에도 낯선 필체라는 건 그 작자의 서신이라는 거겠지.
'탑주.'
크게 찍힌 도장이 필체의 주인을 확정 짓는다.
'뭔데, 이거.'
고양이 발바닥 직인.
그렇다.
확실히 탑주가 보내온 서신이었다.
'왠, 직인?'
글씨를 썼으면 서명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뜬금없이 발바닥 도장은 뭔데.
대수롭지 않게 여겼건만.
읽고 보니 확실히 직인이 필요한 사항이긴 했다.
그런데....
──────
현 탑주로서 차기 탑주로 이호열 수석, 그대를 추천하겠다.
──────
뭐어어어어?
나더러 탑주?
아니, 어딜 도망가려고 개수작이야!!
◈ 222화. 설명이 필요한가?
할짝─
혓바닥으로 솜뭉치를 핥는다.
탑주는 크리스탈 홀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원탁회의를 이렇게 바꾸어 놓을 줄이야.
굴러들어온 돌이기에 이런 발상을 할 수 있다는 건가.
"미야옹─"
그것은 흡족하다는 뜻이 담긴 울음이었다.
왜, 다른 건 다 떼어놓고 보더라도.
비로소 이름값은 톡톡히 하는구나.
원형 구조의 크리스탈 홀에서 벌어지는 회의.
실로 원탁회의답다는 뜻이다.
"고양이?"
"혹시, 누가 데려오신 건가요?"
"아뇨! 입장할 때부터 앉아있더라고요."
"아이, 귀여워라. 이름이 뭐니?"
"클레, 지금 고양이에 한눈이 팔려있을 땐가요?"
본인더러 귀엽다?
폴리모프보다 못한 변신 마법조차 간파하지 못하는 견습, 숙련 마법사들이다. 귀엽다는 건 오히려 자신이 햇병아리들에게 해줄 말이었거늘.
"미야옹."
그래도 턱을 긁어주는 손길은 썩 나쁘지 않군.
결국, 탑주는 견습 마법사 플레이어의 무르팍에 자리 잡고 원탁회의를 지켜봤다.
모든 계급의 마법사가 한데 모인 것도 놀라운 일인데, 모험가까지 섞여 있다니.
과거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저 모습도 마찬가지지.'
서로 긴밀하게 대화를 나누는 선임들의 모습.
탑주는 골골 소리를 내며 생각했다.
이호열 수석, 아무리 보아도 그대가 나보다 낫군.
그러다가 문득, 킁킁 코를 찡긋거렸다.
'바쁜 모양이구나.'
제자, 제시의 냄새는 풍겨오지 않았다.
물론, 제시가 원탁회의에 참가했다고 한들.
먼저 다가갈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야 면목이 없지 않은가.
'못난 스승은 폐만 끼쳤으니.'
제시, 너라면.
분명 자신 때문에 그런 상황이 벌어졌었다고 자책을 했겠지.
모든 것은 나의 모자람 때문이었는데 말이야.
그러나 탑주는 제시를 걱정하지 않았다.
'나보다 나은 스승을 찾아서 다행이구나.'
그래, 이호열 수석.
그는 나보다 훨씬 나은 스승일 테니.
제시를 떠올리자 제시와 함께 있을 때가 생각났다.
그런 탑주의 눈에 들어온 건 다름 아닌 스마트폰.
툭툭─
탑주가 앞발로 플레이어의 손을 건드렸다.
"왜, 그래?"
"미야옹."
"놀아달라는 거야? 지금은 안 돼."
어차피 딴청을 피웠으면서 회의에 집중한 척하기는.
'이미 얼굴은 기억해 뒀다, 견습 마법사.'
내게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주지 않으면 탑주의 권한으로 엄벌을 내리리라. 탑주의 치졸한 협박이 전해진 걸까. 플레이어가 스마트폰을 탑주에게 들이댔다.
"자, 이거라도 보고 있을래?"
화면에 떠오른 건 넷튜브 영상.
그 제목은 [고양이들이 좋아하는 영상]으로.
어항 속 물고기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영상이었다.
탑주는 생각했다.
'과연, 흥미롭구나.'
...아니지, 이게 아니라.
'어디, 세상 소식을 확인해 볼까?'
고깔모자 속에서 제시의 감각을 공유했던 탑주다.
플레이어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시스템]에 관한 지식까지 섭렵한 마당에 스마트폰 조작쯤이야. 어깨너머로 보았다고 하더라도 숙지하고 있다.
꾹─
탑주가 발바닥으로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솜방망이를 따라 움직이는 화면.
그러던 중 탑주의 앞발이 멈췄다.
하늘을 수놓은 별똥별 무리.
'메테오 스트라이크.'
육체에 새겨졌던 기억에 왜곡은 없었다.
'나는 정말로 발현했던 거야.'
초고위 마법.
현시점에서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발현할 수 있는 건.
오직 자신의 육체밖에 없었을 테니까.
꾹─
탑주는 그 영상에 발바닥을 찍었다.
그리고 이내.
"먀."
탄식했다.
자신의 몸이 이 꼴이 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저런 초고위 마법을 10연속으로 발현하다니.
마력 탈진도 모자라서.
사망에 이르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폭주했었구나, 나의 육체는.
'무엇이 그리도 억울했던 게냐, 몸뚱아.'
하찮게 야옹거리기도 잠깐,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이호열 수석은 어떻게 저걸 막아낸 거지?'
탑주는 자신의 마법적 지식을 전부 되새겨 보았다.
그럼에도 마땅한 해결책은 떠오르지 않았다.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추락시킬 정도의 마법을 발현한다고 한들.
'하늘에서 그 잔해가 쏟아질 터.'
그게 바로 메테오 스트라이크가 초고위 마법이자 종말을 불러오는 마법으로 불리는 이유였다.
그 해답이 이 영상에 담겨있다는 것이냐. 탑주가 극도로 집중해서 액정을 노려보았다.
"뭐야? 영상이 넘어갔네? 다시 틀어줄...."
"하악!"
"깜짝아! 알겠어. 안 만질게."
털까지 곤두세우며 그날의 전말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
메테오 스트라이크가 하늘을 거슬러 되돌아갔다는 사실을.
탑주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게 무슨 초초초고위 마법이란 말인가, 이호열 수석...?
*
마탑.
마르셀로의 집무실.
"역시, 제가 찾아가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우려할 것 없네."
"그러시다면 다행입니다."
달칵─
나는 마르셀로가 내려놓은 찻잔을 바라보았다.
찻잔에 잠긴 티백.
말할 것도 없이 녹차였다.
'여러 생각이 드는데.'
말하지 않아도 내 취향을 고려해 주는 것에 감사해야 하나?
그게 아니면 얼마나 녹차에 집착했길래.
마탑에서도 티백 녹차를 대접받는 사실에 민망해해야 하는 건가?
'...일단, 적시자.'
이 순간, 내게 필요한 건 심적 안정이었으니까.
"향이 좋군."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는 마르셀로의 책상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고양이가, 탑주가 있었다.
탑주가 능청스럽게 말한다.
"우리 차기 탑주님께 직접 찾아뵐 생각이었는데."
뭐래, 진짜!
내가 그놈의 차기 탑주 소리 때문에 심장이 철렁해서 달려왔구만.
게다가 찾아오긴 어딜 찾아오려고.
내가 괜히 마르셀로의 집무실을 빌린 줄 알아?
"유감이지만, 그런 친절은 사양하지."
나, 이호열이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 데에 큰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랑펠이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 데엔 구체적인 이유가 있었으니.
그렇다.
옷매무새.
브로치의 각도에도 극도로 집착하는 그랑펠이다.
그런데, 고양이 털을 참을 수 있겠냐고.
심란한 나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르셀로가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입을 연다.
"그나저나 호열 경께서 차기 탑주라니. 저는 물론 찬성입니다만.... 갑자기 무슨 이유 때문이십니까? 앞으로 탑주님의 결정에 관해서는 반드시 그 이유를 들어야겠습니다."
...이유를 묻는 건 좋은데.
당사자인 내 의견도 묻지 않은.
탑주의 독단적인 결정에 찬성부터 하지 말아주라, 마르셀로.
'그보다 이유나 좀 들어보자.'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탑주의 자리를 떠맡을 생각은 죽어도 없다.
수석의 무게.
심지어는 마르셀로랑 나눠 든 수석의 무게만 하더라도 무거워서 가라앉을 것 같단 말이다. 게다가 그랑펠의 오지랖이 어디 보통 오지랖이야?
'탑주의 무게를 짊어졌다간 나, 진짜 죽는다.'
그걸 떠나서도.
저 고양이가 얄미워서라도 탑주 자리를 떠맡을 생각 따윈 없다. 무단결근하다가 복귀하자마자 사직서라니. 대체 사회생활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물론, 나의 속마음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덕분에 탑주는 느긋하게 운을 떼었다.
"나는 원탁회의 도중 알아차리고 말았네. 이호열 수석, 그대가 내 육체가 발현한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어떻게 막아냈는지를 말이야."
원탁회의 도중 그걸 알아차렸다고?
어떻게?
의문이 들어서 집중했더니만.
"스마트폰. 모험가들의 마도구를 통해서 말이지."
그거였구나.
어쩐지.
플레이어 무르팍에서 내려올 생각을 안 하더라.
마르셀로가 말을 덧붙였다.
"아, 그거라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호열 경께서 분명, 그거 하나면 손가락을 까딱하는 것만으로 원하는 물건을 문 앞으로 소환하실 수 있다고 하셨죠."
내가?
언제?
하여튼 이놈의 입방정!
놀라서는 기억을 더듬어 보는데....
'아, 로켓 배송.'
마탑에 로켓 배송을 요구할 때 그때가 분명하다.
이 또한 기이라고.
합리화하면서 마탑에다가 배달 기사의 출입 허가를 받아냈었지.
"그렇다."
덕분에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뻔뻔하게 대꾸.
그러고는 일단, 침묵을 지켰다.
이제부터는 잘못 입을 놀렸다가는.
진짜 탑주 자리를 떠맡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상사에게 불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나는 이어지는 탑주의 말을 더더욱 경청했다.
"이호열 수석, 그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다행인 건.
고양이의 몸으로는 아무리 무게를 잡아도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그럼에도 한껏 치솟은 꼬리가 탑주가 더없이 진심이라는 걸 말해주는 듯하다.
"대체 무엇이었나? 그 마법은."
"말씀 중에 실례지만, 그 마법이라면?"
마르셀로의 조심스러운 말에 탑주가 답했다.
"나의 육체가 발현했던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어떻게 하늘로 되돌려 보낼 수 있던 것이지? 마치 아무런 마법도 발현되지 않았던 것처럼. 본래의 상태로 그대로. 설령, 기이라고 하더라도 그 기반이 되는 마법이 있을 터."
더욱더 진지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부끄럽게도 탑주인 나조차도 그대의 마법이 무엇인지 간파할 수 없었네. 그래, 그것이 바로 내가 탑주의 자리에서 물러나려는 이유이기도 하지. 이호열 수석, 그대의 마법적 능력은 나를 아득히 넘어선 게 분명하니까."
...잠깐만, 그게 이유였어?
역시, 아무리 봐도 나한테 떠넘기려는 게 확실하다.
나는 내 입장에서 한마디라도 거들어 주려나, 싶어서 마르셀로를 바라봤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마르셀로 수석?
"반전 마법입니다."
"오호라, 반전 마법. 알고 있던 건가, 마르셀로?"
"그렇습니다. 저 또한 의문을 가졌으니까요."
부디 탑주와 진지하게 말을 섞지 마라, 마르셀로.
인정할 건 인정하는 나였지만.
오해는 제대로 바로잡아야겠지.
'기이라면 또 모를까.'
반전 마법은 그렇게 대단한 마법이 아니었으니까.
탐색 → 간섭 → 발현.
마법의 구조를 단순하게 역발현하는 것.
그게 반전 마법이었으니까.
"...네?"
마르셀로가 멍한 표정으로 되묻는다.
'시한부의 저주가 사라져서인가.'
최근 들어 마르셀로의 다양한 표정을 보는 것 같은데....
이해하기가 힘들었나, 싶어서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친절하게 비유까지 덧붙였다.
"발현된 마법을 탐색. 마치 묶인 매듭을 차례로 풀어내듯. 간섭 과정을 역으로 수행하고 발현하면 그것이 바로 반전 마법이라는 것이다."
내가 설명했지만 참 명확하군.
그래, 묶인 매듭을 푸는 일련의 과정.
그것이 반전 마법에 들어가는 수고로움이었으니까.
물론, 남의 마법에 간섭하는 건 나한테도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메테오 스트라이크에 간섭하는 건 서클을 형성하지 못했다면 시도조차 못 해봤을걸?
그런데, 내 친절한 설명이 무색해지게도.
탑주는 코웃음을 뱉었다.
"정말 그게 전부인가, 이호열 수석?"
"그렇다."
그렇다니까요.
뭐, 대단한 게 있는 줄 아셨습니까?
그러니까 반전 마법을 핑계로 삼아서는.
얼렁뚱땅 탑주 자리를 떠넘길 생각은 그만두시죠.
"하하하. 경께서는 정말이지."
탑주만 코웃음을 뱉었다면 가뿐하게 무시했을 텐데.
마르셀로까지 웃고 있었다.
문득, 불안감이 느껴졌다.
'...나 뭐 말실수라도 한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있나.
있는 걸 그대로 말한 것뿐인데!
언제나처럼 당당히 고개를 세운 내게 탑주가 말했다.
"그랬군. 이제야 이해가 됐네. 그대에게는 메테오 스트라이크의 간섭 과정이 단순한 매듭처럼 보였던 거야. 그러니까 그걸 역순으로 발현할 수 있던 거였고."
"그렇다."
이제야 말이 좀 통하는구나, 싶었는데....
어째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도 눈치라는 게 있었기에 그쯤에서 알아차렸다.
...혹시, 그 매듭을 푸는 게 정말로 거창하고 대단한 거였나?
탑주와 마르셀로.
두 사람의 마법적 재능은 마탑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수준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가능할 줄 알았다.
왜냐니.
나부터도 그냥 하면 됐으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나 보다.
"알고 계십니까, 경? 저와 같은 범재들은 일반적인 간섭 과정에서도 꽤나 애를 먹습니다. 경께서는 매듭이라 표현하신 그 일련의 과정이 더없이 복잡한 난제 풀이처럼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이번엔 탑주가 마르셀로의 말을 거들었다.
"그런데, 그 간섭 과정을 역으로 거슬러 파악하는 것도 모자라서는 발현까지 다다른다고? 정말로 찬란한 재능이 아닐 수 없군, 이호열 수석."
아무래도 반전 마법은.
날로 먹는 마법, 그 이상으로.
훨씬 대단한 것 같았다!
그나저나.
"고맙군."
이런 분위기에서 우쭐거리지 마라, 그랑펠.
이러다가 정말로 나한테 탑주 자리를 떠넘기면 어쩌려고 그러냐.
물론, 너는 잘 해내겠지.
쏟아지는 과대평가를 기어코 현실로 만들어 낼 테니까.
하지만 덕분에 고생하는 건 나란 말이다.
"탑주이기 전에 마법사로서 넘어갈 수 없는 일이군."
탑주가 의미심장하게 말을 잇는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경."
마르셀로가 무게를 더한다.
"그러니 탑주로서 그대에게 정식으로 권유하겠네."
...아니, 잠깐만.
칭찬이 분명한데, 마냥 좋아할 수가 없다.
탑주의 꼬리가 살랑거림과 동시에.
시야가 점멸했으니까.
어허, 누구 마음대로 퀘스트를 들이미는 거냐니까?!
◈ 223화. 설명이 필요하다면 (1)
마탑.
흐르는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저 사실 벌써 걱정이 앞서요...."
"이번엔 몇 명이나 눈물을 훔칠지."
"저는 그냥 이번 학회 포기하려고요. 자신이 없어요."
다가온 정기 학회의 중압감 때문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조금 달랐다.
숙련 마법사들이 두려워하는 건 정기 학회가 아닌.
학회 이전에 거쳐야 하는 토파즈 홀 사전 검증이었으니까.
슥─
마탑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시선은 자연스럽게 토파즈 홀을 향하게 된다.
숙련 마법사들은 그곳에서 들려왔던 소리를 잊을 수 없었다.
"아직도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아...."
그리고 발 없는 말엔 과장이 더해지는 법이었다.
"너희 그거 들었어?"
"뭘 들어?"
"아니, 마탑 괴담 말이야...!"
"괴담? 여기가 학교냐. 또 뭔 이상한 소릴 하려고."
"아니, 이상한 소리가 아니라 내가 확실히 들었다니까? 왜, 숙련 마법사님들이 하시는 말씀! 정기 학회만 가까워지면 저 토파즈 홀에서 처량한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대."
햇병아리도 과할 정도.
플레이어들은 마탑의 모든 게 낯설었다. 더군다나 견습 마법사는 정기 학회와 큰 관련이 없었으니. 토파즈 홀에서 사전 검증이 이뤄지는지도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덕분에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괴담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러나 소문이 무색하게도.
괴담의 진위는 확인할 수 없었다.
부유 정원.
"...잠깐, 그 말 사실인가요?"
"헉헉, 물론입니다!"
가쁜 숨을 내뱉는 숙련 마법사, 린느.
마찬가지로 숙련 마법사인 지브릴이 그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이호열 수석께서 사전 검증에 불참하신다고요? 정말인가요? 틀림없는 사실이에요?"
"저기. 지브릴 양, 잠깐 숨 좀 돌리고...."
"이건 중대 사항이에요, 린느!"
"사, 사실입니다! 방금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지브릴이 린느를 추궁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지브릴이 사전 검증 과정에 지레 겁먹을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그래, 호열이기 때문이었다.
"제 상식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요!"
수석의 무게.
그 무게를 오롯이 감당하는 이호열 수석님이셨다. 중대사가 끊이지 않는 바쁜 일정 중에도 무수한 출탑 신청서에 친히 서명을 해주시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
그런 이호혈 수석께서 사전 검증에 불참하신다?
"분명, 이유가 있다는 뜻이에요."
지브릴이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사정이 있으시길래."
사전 검증에 불참하신다는 걸까요?
그런 지브릴과 별개로 몇몇 숙련 마법사들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마탑에 눈물 바람을 몰고 왔던 이호열 수석이시다. 그런데 이번 사전 검증에 불참하신다니?
"우리 이거 기회 아니야...?"
"...나, 마음 바꿨어. 당장 검증 신청하고 온다."
"와씨, 깨질 각오하고 사전 검증 신청하길 잘했다."
그러나 크나큰 착각이었다.
호열이 자리를 비웠다는 건.
자신의 빈자리를 채울 안배를 준비해 뒀다는 뜻이었으니까.
토파즈 홀에선 눈물 바람이 아닌 스산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마탑 복도에 울리는 음울한 목소리.
"다음, 안단테 루스 숙련 마법사."
그렇다.
흑마도학 선임 마법사.
마티스 딘 카를.
같은 선임 마법사들(사실, 벤쉬 혼자만이다.)조차 두려워하는 그가.
호열의 빈자리를 대신한 것이었다.
"부디 그대는 나를 실망케 하지 말게나, 안탄테."
숙련 마법사들에겐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이었다....
*
모순.
지금 내 감정을 그보다 잘 표현할 단어도 없다.
"음."
반값 할인 중이라 구매한 녹차맛 쿠키.
그 쿠키의 맛이 괜찮은 듯싶으면서도.
흡족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수석의 업무 중 하나.
토파즈 홀 사전 검증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었다.
다름 아닌 탑주가 건넨 퀘스트 덕분에 말이지.
"심히 아쉽군."
...그보다 주어를 똑바로 해라, 그랑펠.
누가 보면 내가 녹차 쿠키에 아쉬워하는 사람처럼 보일 거 아니야?
당연하게도 이 감정은 사전 검증을 향한 아쉬움이었다.
이놈의 책임감.
어쨌든, 이토록 막중한 수석의 업무다.
당연히 아무에게나 떠넘기지 않았다.
"그대라면 잘 감당하리라 믿는다."
나는 마티스에게 내 빈자리를 맡겼다.
마르셀로야 지금도 담당하고 있는 업무가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마르셀로 이전 유력한 수석 마법사 후보였던 마티스라면.
내 공백쯤이야 채우고도 남겠지.
-"경의 신뢰에 보답하겠습니다."
원래도 대외 활동을 잘 가지지 않는 마티스였거늘.
내 부탁에 생전 처음 사전 검증을 떠맡게 된 꼴이군.
그런 의미에서 마티스에겐 차 한잔 대접해야겠지.
나는 읊조렸다.
"마탑엔 여전히 불필요한 절차가 많구나."
아무리 퀘스트가 걸려있다고 한들.
그랑펠이 합리적인 이유 없이 남에게 자신의 짐을 떠맡길 위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마티스에게 사전 검증을 부탁한 이유는 따로 있지 않았다.
마탑의 규율 때문이었다.
"이번만큼은 준수하지."
그래. 준수해야지 별수 있겠냐, 그랑펠.
네가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정기 학회 참여자가 사전 검증까지 담당하는 건.
'그건 오지랖 수준을 넘어선 거라고.'
그나저나 정기 학회 참여라니.
진짜, 내 팔자야.
나는 퀘스트창을 확인했다.
[퀘스트 : 학파 창시]
고고한 마법적 성취를 이룩한 그대여.
정기 학회에서 그대의 성취를 증명하고.
새로운 마법의 창시를 알려라.
─정기 학회에서 '반전 마법'을 발표하라. (진행 중)
다짜고짜 고양이로 변했을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탑주는 정말로 능글맞았다.
조삼모사를 아주 잘 써먹는다고나 할까.
학파 창시도 만만치 않게 꺼려지는 일인데.
'아무리 그래도 차기 탑주보다는 낫겠지....'
나도 모르게.
그런 나약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내 팔자에 무슨 학회 발표냐고.
'그것도 정말 대단한 성취를 이룬 거면 또 몰라.'
반전 마법.
그건 말 그대로.
그냥 거꾸로 하니까 된 건데.
'무슨 학파를 창시하고 발표까지 하냐고....'
그러나 탑주는 물론이요.
마르셀로도 더없이 진심이었다.
불현듯 떠오르는 마르셀로의 한껏 상기된 목소리.
-"규율에 따르면 탑주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성취를 증명해 마탑에 기여해야 합니다. 경의 반전 마법이라면 기여치를 채우고도 충분하겠지요. 그건 제가 창시한 이론마법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수준의 마법이니 말입니다."
아니, 나는 승진 욕심 같은 거 조금도 없다니까 마르셀로?
심정 같아서는 이딴 퀘스트 따위 포기하고 싶단 말이야.
하지만 마르셀로의 말을 듣고 나자, 나도 모르게 혹하고 말았다.
'...기여치라.'
그거 [관계도]랑 [영향력]을 말하는 거겠지?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하다.
웬만하면 전부 최대치를 찍고 싶은 욕구.
그와 동시에 솟구치는 나, 이호열의 물욕까지.
'최대치에 도달하고 [권한] 기능을 활성화하면....'
말 그대로 마탑을 주물럭거릴 수 있는 건가?
문득, 마탑에 발을 들였을 때의 각오가 떠오른다.
정말로, 그런 날이 온다면.
마탑에 쌓인 마도구를 마음대로 사용하겠노라.
다짐했었지, 아마.
물론, 이놈의 긍지가 사리사욕으로 마탑의 뿌리를 뽑는 걸 용납할 리가 없었지만.... 유스라에서도 그렇고, 뮤온에서도 그렇고 겪어봐서 알고 있잖아?
관계도와 영향력이 높아서 손해 볼 일은 없다는걸.
'좋아, 해보자.'
사실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은 것도 한참 전 일이었다.
문제는 마음을 먹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게 어떻게 발표해야 한단 말인가?
'마르셀로, 심지어 탑주도 이해를 못 했는데.'
내가 아무리 친절하게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정기 학회에 참석한 마법사들이 그걸 이해할 수 있겠냐고.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다.
내가 아는 그랑펠이라면 거기서 한술을 더 뜰 게 분명했으니.
"이보다 직관적인 마법도 없거늘."
청중들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되려 면박을 줄까 봐.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발표를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지.
"허나, 이해하겠다."
더군다나 마탑은 과거의 폐쇄적인 마탑이 아니다.
이전보다 많은 플레이어가 마법사로서 정기 학회에 참여할 터. 덕분에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플레이어들의 손가락을 타고 세계로 퍼져 나가겠지.
'...제발 낯뜨거운 짓만 하지 말자.'
그나저나 알 수 없는 인생이다.
실상은 별거 없는 반전 마법이거늘.
그걸로 마탑에서 학파를 창시하게 되다니.
그 이름을 거품 학파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지 않을까.
지금도 민망해질 지경인데.
스스슥─
이제부터는 그 거품을 최대한 그럴싸하게 포장해야 했다.
드넓은 크리스탈 홀 청중 앞에서.
내 거품에, 금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깃털펜을 휘갈기며 침음을 삼켰다.
...녹차 쿠키가 유달리 씁쓸하구나.
*
정기 학회 당일.
학회 일정을 확인한 마법사들은 경악했다.
"마, 마지막 순서가...?"
"이호열 수석님의 발표?!"
"이래서 사전 검증에 불참하셨던 거였나!"
"뭐라고? 이호열 수석께서 발표를?!"
지브릴과 클레를 비롯한 숙련 마법사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탑의 수석 말고도, 워낙 맡은 직책이 많은 이호열 수석이 아니시던가?
클레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정말로 대단하세요. 존경심이 들 정도예요."
비약초의 육성법.
정기 학회 발표를 준비하며 그 중압감을 경험했던 클레였다. 사전 검증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크리스탈 홀, 강단에 서는 그 순간까지 머릿속은 더없이 복잡했었다.
"저는 먹을 때도 잘 때도. 머릿속에서 연구 생각이 떠나질 않았었거든요.... 그런데 이호열 수석님께서는 다른 일정을 수행하시면서 학회 발표를 준비하신 거잖아요?"
잠자코 있던 린느가 꼬투리를 잡았다.
"아니. 엄밀하게 따지면 그건 아니죠, 클레 양."
"...네?"
"왜, 이 수석께서는 이번 사전 검증에 참여하지 않으셨으니까요옷?! 지, 지브릴 양?! 가, 갑자기 제 팔뚝은 왜 꼬집으시는 건가요?"
지브릴이 경멸 가득한 눈빛을 린느에게 쏟아냈다.
"숙련 마법사 정도 됐으면 마탑의 규율 정도는 숙지하는 게 좋겠군요, 린느. 상식적으로 학회 발표자가 타인의 연구를 사전 검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아."
"이번 발언은 좀 성급하셨네요, 린느 씨."
얼마나 망한 망언이었으면 클레까지.
린느에게 한마디를 덧붙였을까.
린느가 입을 다물자 지브릴의 낯빛이 다시금 진지해졌다.
"분명 엄청난 발표를 하실 거예요, 수석님이시라면요!"
견습 마법사.
플레이어들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정기 학회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거늘.
플레이어 커뮤니티엔 학회 관련 게시글이 가득했다.
──────
일정 오피셜 떴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실화냐? 이호열 수석 발표라고 ㄷㄷ
마지막에 큰 거 오냐???
피날레 확실하게 장식할듯 ㄹㅇㅋㅋ
그저 호멘
──────
입이 근질거렸지만,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 수는 없었다.
말했다시피 개회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건만.
어째서인가, 선임 마법사 전원이 크리스탈 홀에 착석해 있었으니까.
누군가 속삭였다.
"...진짜 보통 발표가 아니긴 한가 봐요."
심지어는 원로 마법사, 유그위드까지도.
덕분에 정기 학회는.
거품처럼 잔뜩 부푼 기대감 속에서 시작됐다.
.
.
.
그 결과부터 말하자면.
이번 정기 학회의 파급력은 가히 역대 최고였다.
마법적 성취는 물론.
마탑을 넘어서 대중적으로도.
전 세계 모든 이들에게 『반전 마법』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각인시켰으니까.
그렇다.
그 시작은 작은 소란으로부터였다.
마지막 순서.
호열이 강단에 선 그 순간.
누군가 작게 중얼거렸다.
"...클라우디?"
◈ 224화. 설명이 필요하다면 (2)
서열 63위.
마왕, 안드라스.
올빼미 머리의 악마가 부리를 열었다.
"본좌더러 마계의 잡종이라."
틀림없는 모욕.
그러나 안드라스의 반응은 평소의 모습과 달랐다.
파괴를 일삼는 그답지 않게 눈앞의 대상을 흥미롭게 바라볼 뿐.
그럴 수밖에.
자신과 마주한 것은 거악, 칠죄종 식탐이었으니까.
식탐은 이죽거렸다.
"마왕을 자칭하는 자여."
"!"
놀란 건 안드라스가 아니었다.
안드라스 휘하의 악마 군단장들이 흠칫했다.
마계의 잡종이란 모욕도 모자라서 왕좌까지 모독하다니.
아무리 거악이라고 하더라도 정도가 지나치지 않은가?
그러나 안드라스는 이번에도 노하지 않았다.
그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실로 정확한 말이군."
"...!!!"
저런 망언을 인정하시다니?
악마 군단장들이 혼란스런 표정을 짓는다.
그와 반대로 식탐의 입꼬리는 하늘을 향했다.
"주제를 알았나? 그대는 잡종이다. 나와 미련한 형제들처럼 악(惡)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며 십좌(十座)의 마왕들처럼 막대한 힘을 가지고 태어나지도 않은, 반푼이 같은 존재란 의미다."
안드라스는 침묵을 지켰다.
'과연, 거악은 거악이로군.'
악크샨의 부활 이후.
안드라스는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다.
아르카나 대륙을 절멸의 위기로 몰아넣은 지금.
자신을 포함한 마왕들은 고작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 하나를 어찌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식탐이 자신을 찾아온 것이었다.
"허나, 내가 그 잡종의 피를 극복할 방법을 알려주마."
더없이 혹하는 제안을 가지고서는.
식탐.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그는 거악.
악에서 태어난 악, 그 자체였다.
다른 마왕들의 속마음을 어느 정도 꿰뚫어 볼 수 있을지라도.
저 순수한 악을 꿰뚫어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안드라스가 되물었다.
"내가 그대의 말을 신뢰할 것 같은가?"
식탐은 웃었다.
"믿고 말고는 그대의 자유다. 그러나 들어서 손해 볼 건 없다고 장담하지. 저열한 마계의 피 따위야. 보다 짙은 악을 집어삼키면 극복할 수 있을 테니까."
"...짙은 악이라."
흐르는 피의 묽고 진함은 갈릴지라도.
같은 악마의 피가 흐르기에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부정적인 기운에서 힘을 얻는 자신들이 아니던가.
안드라스의 부리가 벌어졌다.
"우스운 이야기군, 거악이여."
"우습다?"
"본좌는 이 대륙의 모든 것을 죽이고 죽여왔다. 시체로 산을 쌓았으며 피로는 강을 이루었다. 내게 저항한 이들은 갈가리 찢어 짐승의 모이로 던져줬으며 구차하게 살아남은 이들은 유린하다가 죽였다."
"오호라."
"그런 내가 행하지 못한 악행이 있단 말인가?"
식탐은 역시나 웃었다.
"당연하다."
"무엇이지?"
"너는 아직 들춰보지 못하지 않았느냐?"
"...들춰보지 못했다?"
"그 '과거'를."
시종일관 히죽거리던 식탐조차 '과거'를 언급한 순간.
그 낯빛이 바뀌었다.
안드라스는 직감할 수 있었다.
정말로.
그 '과거'란 것에.
심상치 않은 것이 묻혀있으리라고.
그러니까 말했다.
"그런가, 그 과거가 나를 찾아온 이유로군."
"맞다. 나는 그대를 과거를 들춰낼 미끼로 쓸 예정이다."
"미끼라."
"과거를 들추기 위해 그대를 내던지겠다는 말이다. 그대가 과거와 마주해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어쩌면 그대는 진정한 마왕으로 거듭날지도 모르겠지. 알다시피 공석이 생긴 참 아닌가?"
공석, 가미긴의 자리를 말하는 것일 터.
"내가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는가?"
식탐이 어깨를 으쓱였다.
"잡종이 왜 잡종인 줄 아나?"
"?"
"잡스럽고 차고 넘치기에 잡종이다."
순수한 악다웠다.
악마의 성질머리를 더없이 잘 알고 있군.
마치 그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느낌이다.
그러나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기도 했다.
이내, 안드라스가 답했다.
"제안에 응하지."
"올빼미라 그런가, 새대가리도 새대가리 나름이군."
"그래서 본좌가 들춰야 하는 과거란 무엇이지?"
그토록 대단한 과거라면.
분명, 복잡한 이야깃거리가 얽혀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식탐은 고작 '한 단어'를 뱉어냈을 뿐이었으니까.
"클라우디. 그거면 충분하다."
"...?"
"그 한 단어가 세상을 요동치게 할 테니까."
*
크리스탈 홀.
마탑의 공간답게 그 구조는 심히 판타지적이다.
겉보기에는 단순하게 화려한 원형의 공간처럼 보였거늘.
문으로 연결된 이면(異面)에는 특수한 공간이 존재한다는 거다.
대기 공간.
쉽게 말해 다음 발표자를 위한 대기실이다.
물론, 평범한 대기실이었다면.
"나쁘지 않군."
그랑펠 입에서 이런 반응이 나오지는 않았겠지.
특수한 구조라 호들갑을 떨지도 않았을 거다.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아찔한 크리스탈 홀의 전경.
분명, 크리스탈 홀에 딸린 문을 열고 입장한 대기실이었는데.
나는 크리스탈 홀을 천장에서 내려다보듯 지켜보고 있었다!
'그냥 순수하게 감탄하면 될 텐데.'
이것도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이겠지.
"환각마법은 아니군."
탐색, 간섭, 발현의 과정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내겐 더없이 익숙하다."
그야 익숙할 수밖에 없겠지.
프로젝터랑 유사한 간섭 과정의 마법이었으니까.
아르카나 식으로 말하자면....
마탑 버전 [마안의 망원경]이라고나 하면 되려나.
'다만 크리스탈 홀에서만 유효하지만.'
이름부터가 괜히 크리스탈 홀이 아니다.
여러 종류의 마력석 중에서도 귀한 축에 속하는 '마력 크리스탈'로 지어진 공간. 사방의 마력 크리스탈이 마력을 증폭시켜 이런 사치스러운 마법 발현이 가능한 거겠지.
'그나저나....'
슬슬 순서가 다가오고 있었다.
크리스탈 홀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내가 아니던가.
덕분에 홀에 가득한 기대감이 피부로 와 닿는 것 같았다.
그래서 긴장했냐고?
그럴 리가 있나.
오히려 뻔뻔하게 즐기고 있다면 모를까!
『반전 마법』
새로운 학파 창시를 알릴 발표를 준비하면서 나는 또 한 번 깨달았다. 그랑펠의 철면피 두께는 감히 예상하기 힘들 정도로 두껍다는 사실을.
"그대들이라면 능히 이해할 것이라 믿는다."
그 한마디에 담긴 뜻은 명확했다.
이해를 못 해도.
내 잘못이 아니다.
이해를 못 한 그대들의 잘못이다.
'아주 그냥 긍지가 철철 넘치십니다, 우리 그랑펠 님...!'
나는 다시금 크리스탈 홀을 내려다봤다.
그랑펠의 심보를 알고 나서 기대 중인 마법사들을 보니.
마음이 편하려야 편할 수가 없다.
'저 기대감이 공포로 바뀌는 것도 머지않았구나.'
오늘은 또 어떤 언행으로.
마탑에 어떤 파란을 불러일으킬지.
나조차도 짐작할 수가 없구나.
하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진 최선을 다 해봐야겠지.
그런 의미에서 열심히 포장했거든.
최대한 그럴싸해 보이게.
'사실....'
이게 또 적성에 맞기는 했다.
왜, 별것도 아닌 걸 포장하는 거.
그거 그랑펠의 주특기잖아?
노가다나 다름없는 육체 단련?
한계에 도전하는 숭고한 도전.
티백 녹차?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차.
단순한 웹서핑?
이 또한 기이를 향한 탐구.
'...늘어놓고 보니 심히 부끄럽기는 하다만.'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이 포장 실력 덕분에.
발표 시간을 채우지 못할 걱정 하나는 덜어냈으니까.
짝짝짝─
박수 소리가 들려온다.
빙결마법학 선임, 커튼 레블의 발표가 끝나고 드디어.
나의 순서가 오고야 말았단 것이다.
당당하게 기립.
또각─
나는 항상의 자세로 크리스탈 홀.
강단을 향해 나아갔다.
물론, 여명의 재킷은 언제나처럼 어깨에 걸친 채.
평소였다면 자괴감을 호소했을 차림새이지만....
'차마 거기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
지금 내 머릿속엔 반전 마법의 발표를.
성공적으로 끝마쳐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으니까.
우선, 나는 크리스탈 홀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유그위드부터 뱅그릿까지.
원로부터 선임 마법사들은 전원 참석.
'...기지개 켜는 거 얄밉네.'
쭈욱─
내가 나타나자마자 고양이 몸을 늘리는 탑주의 모습도 보인다.
다들 모였으니, 질질 끌 것도 없겠지.
나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고오오─
마력을 끌어올리자 크리스탈 홀을 장식한 마력 크리스탈이 감응해 반짝거린다. 마력 크리스탈을 투과한 마력이 마치 거대한 도화지를 펼치듯 허공에 흩뿌려진다.
'이제 보니까 시스템창 비슷하기도 하고.'
곧 마력의 입자들이 허공에 활자를 새겨넣는다.
손가락을 까딱일 필요조차 없다.
머릿속에 활자를 되뇌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렇게 허공에 떠오른 단어.
『반전 마법』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우리 그랑펠이 좀 까칠하긴 해도 괴팍하진 않다.
소란스럽다고 윽박지르는 성격파탄자는 아니란 거지.
"...반전 마법? 그게 뭐야?"
플레이어들은 물론.
"반전 마법.... 혹시 무언가 알고 있나요, 클레 양?!"
"네? 그걸 왜 제게...?"
숙련 마법사.
"배, 뱅그릿 선임 혹시 뭔지 알고 있습니까?"
"아뇨. 저도 처음 듣는데요...!"
"잠자코 집중하는 게 어떻겠나, 벤쉬 윌리엄 선임."
"흐억."
마티스와 벤쉬를 비롯한 선임 마법사 전원.
"이런, 이건 생각지도 못했는걸요."
심지어는 원로 마법사, 유그위드까지.
다들 쉽사리 짐작하지 못하는 눈치다.
예상했던 반응이다.
현재 크리스탈 홀에 반전 마법에 관해 알고 있는 건.
나와 마르셀로, 저 능글맞은 고양이밖에 없었으니까.
나는 입을 열었다.
"반전 마법, 그 창시자는 나다."
첫 마디부터 직구.
내가 던진 말이었지만, 직구도 이렇게 정직한 직구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그러나 같은 말도 누가 어떻게 내뱉느냐에 따라서 다른 법이지.
쏟아지는 집중 속에서 나는 말을 이었다.
"반전 마법. 원리는 실로 간결하다. 탐색, 간섭, 발현. 마법의 구조를 그저 역순으로 나열한 것뿐. 그렇다. 반전 마법의 탐색 대상은 이미 발현된 마법이며 그 간섭 과정에 역으로 간섭, 본래의 상태로 반전시키는 것이다."
웅성거림이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커진다.
"...이, 이 수석님께선 아주 쉽게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저런 발현이 정말 가능한 건가요?"
"아니, 저건 마법 발현력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래, 발현력의 문제가 아니긴 하지.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금칠하면서.
나도 인지를 하게 됐거든.
'그랑펠의 재능이 얼마나 무지막지한 수준인지를.'
반전 마법의 창시자로서 단언하겠다.
내가 반전 마법을 아무리 친절하게 설명하고, 덕분에 그 구조를 이해한 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실전에서 반전 마법을 발현할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으리라고.
한마디로 말하자면.
반전 마법은 오직 그랑펠만을 위한 마법이란 것이다.
그 사실을 알기에 나는 태연하게도 말했다.
"그대들이 발현할 수 있기를 바라지는 않겠다."
어째 어감이 약을 올리는 것 같기도 한데, 진심이거든.
"그대들은 이해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렇게까지 말했어도.
분위기는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라고.
마법 관련 지식에 정통할수록.
반전 마법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랑펠이 너그러워진 이유이기도 하고.'
그런 그랑펠의 인자함이 때론 이상한 방향으로 발현되기도 하는 법. 서론부터 충격과 공포에 빠진 청중을, 우리 인자하신 그랑펠 님께서 외면하실 리가 없었으니.
나는 선언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려하지 말도록."
"...?"
"그대들이 반전 마법을 이해할 때까지."
"...!"
"정기 학회는 끝나지 않을 테니까."
잠깐만.
이해할 때까지 끝나지 않는 수업이라고...?
그게 정말 청중들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랑펠?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그랑펠, 넌 절대 누군가를 가르치는 직업은 하면 안 되겠다.
전국 교수 협회도 경악을 금치 못할.
끔찍한 선언을 한 거라고, 너는 지금!
'그보다.'
나는 어쩌라고...?
빌어먹을 팔자야.
간신히 수치사를 피했더니, 과로사가 기다리고 있었구나.
그러나 착각이었다.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
"...뭐야, 이거?"
이어 크리스탈 홀에 울리는 스마트폰 진동음─
아는 만큼 보였기에.
플레이어들은 내 반전 마법 설명에 집중할 수 없었겠지.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을 테니까.
'뱉은 말은 지킨다. 내가.'
너그럽게 이해한다고 말했었으니까.
학회 도중 스마트폰 알림 확인 정도야 이해하겠다.
그런데, 어째 들려오는 대화가 심상치 않았다.
"긴급 업데이트라는데?"
"...마, 마왕이라고? 뜬금없이?!"
"아니, 잠깐만. 균열이 아니라 지역 추가라고?"
긴급 업데이트.
마왕.
균열이 아닌 지역 추가.
괜히 일제히 진동이 울린 게 아니라는 거였나.
그래도 거기까지는.
사고가 따라갈 수 있었다.
악마가 어떤 족속들인데.
악크샨의 부활.
가미긴 처치의 약빨이 영원토록 지속되리라곤 기대하지 않았거든.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나는 깨닫고 말았다.
수치사를 피하긴 개뿔...!
"마왕이 누굴 찾고 있다는데?"
"찾는다고? 플레이어? 아니면 아르카나인?"
"잠깐만, 분명...."
고막을 파고드는 한 단어.
"클라우디! 클라우디라고 했어!"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크으으을라아아우우우디?!
내 이름....
아니, 그 이름이 왜 거기서 나오는 건데!!
◈ 225화. 뇌리에 새겨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