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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화제가 될 수밖에 없겠지.

'내가 봐도 놀랄 정도였으니까.'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에 박제된 셰그윈과의 결투.

플레이어의 시점에서 촬영된 게 아니었다.

사방에서 카메라 들이댄 것 같은 앵글.

그리고 블록버스터 영화 뺨치는 편집까지.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는 이는 한 명밖에 없으리라.

'레이먼 션.'

아주 그냥 액션 영화 뺨치게 찍어주신 덕분에 커뮤니티는 난리가 났다.

셰그윈과 합을 주고받는 장면에서는 슬로우모션까지 걸어놓지를 않나. 포장도 모자라 금칠까지 덕지덕지 발라놓으셨다.

-실화냐고ㅋㅋㅋㅋ검성보다 더 검성 같은데?

-슬로우 걸었어도 눈이 따라갈 수 없음 ㄹㅇ

-내가 우산으로 싸울 때부터 알아봤자너ㅋㅋ 검술 실력

당연하게도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그야 저 움직임은 나의 검술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으니까.

모든 건 에고 소드.

[전설]급 아이템.

귀철 덕분이란 말이다...!

'하여튼 철면피.'

그러나 내 얼굴에서.

그 진실이 드러날 리가 없었으니.

괜히 내가 봐도 놀랄 정도라는 게 아니었다.

알고 봐도 속을 정도로 표정이 진지한 게.

과연, 검성의 자리를 두고 벌이는 결투라고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구만.

달칵─

내려놓는 것은 티백이 잠긴 찻잔.

하지만 나는 이해한다고 해도.

그랑펠의 심기가 용납할 수 있을 리가 없겠지.

나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레이먼 션, 그대에겐 자격이 없다."

마지막 순간.

셰그윈이 발산했던 더없이 푸른 검강.

그가 긍지를 되찾은 덕분인지.

그게 아니라면 칭호 [숭고]의 효과 때문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의 마지막을 구경거리로 만들 자격이."

승리에 환호하는 이들을 책망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셰그윈과 나 사이에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잖아? 마지막 순간, 어째서 지옥의 불길이 셰그윈을 집어삼켰는지도 모를 거다. 지옥의 불이 뭔지도 모를 테니까.

근데.

그쪽은 전부 알고 있잖아, 레이먼 션.

모든 걸 알면서도 그러는 건.

그랑펠의 긍지께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서 말이야.

"언젠가 우리가 만나게 될 날을 기대하겠다."

언제가 될 줄은 모르겠다만.

나도 기대가 되는걸?

모든 일의 원흉이잖아, 레이먼 당신이야말로.

나도 갚아줄 게 있다는 말이다.

'그쪽만 아니었어도.'

내가 수치사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는데!

됐다, 당사자는 듣지도 못할 신세 한탄은 관두자.

게다가 당장은 확인할 게 있었으니까.

시공간의 결투에서 승리.

승리로 지급된 보상.

그건 금화였다.

정확하게 일백(一百) 개.

"금화라...."

그놈의 청렴결백.

부귀영화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거든, 그랑펠.

하지만 그냥 금화가 아니니까 조금은 인내심을 가지고 살펴봐라.

[시공간의 금화]

[등급 : 에픽]

[제한 : 초월자]

[효과 : 시공간에서 화폐로 사용 가능.]

[설명 : 초월자의 영역, 시공간에서 통용되는 금화.]

시공간의 금화.

한마디로 [고인물 커뮤니티], 『시공간』에서 쓰이는 돈이었다.

상세한 쓰임새야 아직은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AAU에서 전해준 정보가 있긴 했다만, 어떤 식으로 구현됐을지는 직접 경험해야 알 수 있는 거니까. 시공간의 결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그래도 사교장에서의 사용법만큼은 이미 알고 있지.

"으음."

이거 봐.

차 주문하는 데 필요하다니까 그냥 넘어가는 거.

대체 얼마나 티타임을 중요하게 여기는 건데?

물론, 승리 보상은 금화로 끝이 아니었다.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에 결투 영상이 업로드된 참이다.

그에 따른 수익이 내 앞으로 떨어질 터.

그야말로 진짜 부귀영화였으니, 내게는 쓸데없는 보상이었지만.

'...적금이라 생각하자.'

모아두면 노후에라도 다 쓸데가 있겠지.

어쨌든, 형식적인 승리 보상은 거기까지.

사실 이제부터가 진짜 보상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칭호를 확인했다.

[초월자 : 그대의 초월적인 경지는 초월자라 불리기에 충분하다. - 현재 도달한 성취 : 서클 (모든 마법 발현력 1,000% 상승) / 미완성 쾌검술 / 없음 / 없음....]

성취에 새롭게 떠오른 미완성 쾌검술.

그렇다.

이번에도 그랑펠의 재능이었다.

마법을 목격한 것만으로 따라 발현하듯.

셰그윈의 쾌검술마저 합을 겨루며 목격하고.

결국에는 습득해 냈다는 것이다.

'아직 미완성이라 효과가 명시되진 않았지만....'

갈고닦는다면.

서클처럼 제대로 된 효과가 떠오르지 않을까?

내게는 금화나 돈보다도 훨씬 와 닿는 수확이었다.

다른 누구의 검술도 아닌 검성.

셰그윈의 검술을 습득한 셈이었으니까.

나는 읊조렸다.

"그대의 검로는 내가 이어 걷겠다."

참 고상하게도 돌려서 말하는구나, 그랑펠.

"진정한 승리를 거머쥐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뒤끝 한번 장난 아니구나, 그랑펠.

진정한 승리가 뭐냐고?

기승전악마.

당연하게도 성전에서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유혹에 넘어간 셰그윈이었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 긍지를 되찾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악한 건 셰그윈의 연약함을 파고들어 기만한 악마였으니까.

'이렇게 또 긍지에 긍지를 얹는구나....'

백날 발버둥 치면 뭐 하냐?

버틸만하면 남의 긍지마저 얹어버리는데.

하지만 말했다시피 모든 것이 나의 업보겠지.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

'...맞아, 홈페이지에 박제가 안 된 게 어디냐?'

어디에 내놔도 부끄러운 이름.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개인정보를 비공개로 돌려놔서 다행이다, 진심....

.

.

.

시공간의 사교장.

보이는 건 테이블에 널브러진 여인 뿐이었다.

...저 사람, 언제부터 저러고 있는 건데?

사교장에 입장한 사내는 혀를 찼다.

"마녀님은 금화 벌어서 전부 연초 사는 데 쓰십니까?"

"주둥아리 다물지 그러느냐."

"...쩝, 무서워서 말도 못 걸겠네."

일출의 무사.

짧은 흑발의 사내는 자리에 앉았다.

짤랑─

금화 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곧장, 물이 담긴 컵 한 잔이 허공에서 나타났다.

"크."

금화 한 닢짜리 『달의 정화수』.

삼키기 무섭게 육체의 피로가 씻은 듯 사라졌다.

사내는 사교장을 살폈다.

"...마녀님,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귀한 영약으로 만든 연초를 입에 달고 사는 건 아무리 금화가 많다고 해도 과소비 아닙니까? 뭐, 금화 많다고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무려 한 개비에 금화 열 개짜리 연초.

그걸 귀한 걸 언제나처럼.

뻑뻑 피워대는 '남쪽 바다의 마녀'님 말고는.

다른 초월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내는 어깨를 으쓱였다.

"다들 여러모로 바쁜가 보군."

아르카나 대륙의 상황을 보면 그럴 법도 하지.

지금이야말로 초월자들.

각자가 자기 뜻을 펼칠 시기일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는 의외였다.

"웬일로 영감이 안 보이네."

셰그윈.

다른 초월자들과 다르게.

자신의 검로만을 추구하는 노인네.

"물어볼 게 좀 있었는데."

셰그윈이 젊음을 되찾았든, 뭐가 됐든.

사내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어차피 검에 관한 담론 말고는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런 사내의 시야에 문득, 양피지가 들어왔다.

힐끗─

사내가 연초 기운에 널브러진 여인을 흘겨봤다.

"이것도 확인 안 하셨네. 제가 까봅니다?"

사교장에 새로운 소식이 도착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거늘.

대답도 못하는 게 저건 완전 중독이라니까, 중독.

사내는 고개를 내젓고는 양피지를 펼쳤다.

그런 사내의 얼굴에 동요가 일었다.

"...시공간의 결투에서 사망?"

...셰그윈, 그 영감이?

몇 차례 대화를 나눠봤기에 알 수 있었다.

셰그윈, 그가 상당한 실력의 검사였다는 것을.

애초에 자신과 같은 초월자가 아니던가?

"...어떤 놈이냐?"

사내는 그 상대의 이름을 확인했다.

그리고 흠칫했다.

그건 여태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

그렇기에 추측할 수 있는 단 한 사람.

"신참인가."

그랬다.

업적 평가 때는 드러나지 않았던 사내의 이름이.

양피지에 적혀있었다.

사내가 그 이름을 읊조렸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

그때였다.

덜컥!

옆자리에 널브러져 있던 마녀가 몸을 바로 세웠다.

그렇지 않아도 매서운 눈을 더욱 날카롭게 뜨면서.

사내에게 말했다.

"다시 말해."

"...갑자기 무슨 소리를?"

"그 이름, 다시 말하라고."

...이름?

길어서 제대로 듣지 못했나.

사내가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그러자 마녀가 되뇌었다.

"그랑펠.... 클라우디...? 크, 클라우디 가문...?!"

◈ 200화. 산맥이든 하늘이든 오를 뿐이다

목요일.

AAU.

약속의 시간이 지난 순간.

성현준은 으어어 탄식을 쏟아냈다.

"진짜, 이게 얼마 만이에요 선배?"

정기 업데이트 내역, 없음!

한동안 정기로도 모자라서.

긴급으로 업데이트를 쏟아내던 아르카나였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건지는 몰라도.

"고맙다, 레이먼 션."

중얼거린 성현준은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기억도 안 나요. 목요일 정시 퇴근이라니."

그런데 어째서인가.

장단을 맞춰줘야 할 윤수겸은 대답이 없었다.

왜, 불길한 예감은 늘 틀리지 않는 걸까.

성현준은 그를 바라봤다가 기겁했다.

"...선배, 뭐 하시는 거예요 지금!!"

"응? 뭐 하긴 일하지."

"아니, 지금이 일할 때냐고요! 자축부터 해야지!"

그렇지 않아도 성실한 선배가 요즘 따라 더 성실해지셨다. 그 탓에 덩달아 피곤해지는 건 옆자리의 자신이었다.

왜, 박 지부장님부터 오가면서 한마디씩 건네오셨으니까.

-"요즘 신입들은 말이야. 파이팅이 없어."

이어지는 끔찍한 훈화 말씀.

그래, 선배님이자 보스의 말이니까 경청해 보자.

신입의 긍지를 가지고 들으려고 해봐도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야 시작부터 억울한 말이었으니까.

세상에 n년 차 신입이 어딨단 말인가!

AAU의 입사 조건?

단 하나였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코스모에 재직했을 것.

하지만 레이먼 션의 행방불명과 함께 폐사한 코스모가 신입사원을 뽑을 리가 없었으니.

"아니, 선배! 평생 막내가 말이 되느냐고요!"

성현준은 그때나 지금이나 앞으로나.

평생 신입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원망스러운 눈초리가 윤수겸을 향한다.

"선배까지 저한테 가혹하실 거예요?"

"아까부터 뭔 소리야, 대체."

"왜 자발적으로 야근을 하시냐고요. 선배!"

야근을 왜 하기는.

드륵─

의자를 바짝 당기고.

꼿꼿하게 허리를 편 윤수겸이 말했다.

"대리의 긍지."

"아, 진짜!!"

"하하, 농담이고 뭐라도 해야지."

윤수겸은 고갯짓했다.

수백 개의 모니터.

거기에 떠오른 건 플레이어들의 모습.

"너도 저런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지 않아?"

정기 업데이트는 떠오르지 않았어도, 플레이어들은 멈추지 않았다.

제로 산맥 곳곳에서 사냥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윤수겸은 말을 이었다.

"다들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다고."

이전과는 달랐다.

플레이어들에게선 웃음기가 보이지 않았다.

제로 산맥의 위험성 때문인지.

아니면 플레이어로서의 긍지 때문인지.

알 방법은 없었지만.

저들을 보고 있자니....

윤수겸이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봤다.

"이 양심에 찔린다는 거지."

그 말에 성현준은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래도 선배, 혼자만의 생각이 아닌 것 같았다.

업무 시간이 이미 훌쩍 지났거늘.

누구 하나 자리를 뜬 이들이 없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건설적인 대화들.

"네임드몹 패턴은? 어떻게 뭐 좀 나왔나?"

"네, 종족별로 고유 패턴값을 찾긴 했는데.... 이게 제로 산맥 몹들한테도 적용이 된 건지, 확신할 수가 없어요."

"그거면 됐어. 판단은 우리가 아니라 플레이어들이 하는 거잖아."

털썩─

결국, 성현준은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네. 아무래도 해야겠네요. 평생 막내."

평소엔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선배들이었거늘.

다 착각이었구나 싶었다.

'...아니지.'

이제야 비로소 코스모 시절.

하늘 같던 선배님들의 위엄을 찾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왜, 퇴근 안 하고?"

"됐습니다. 연차가 몇인데, 저도 신입 티 내기 싫거든요."

"그래? 그럼, 이것 좀 부탁해도 될까?"

"뭔데요?"

그렇지 않아도 어떤 것부터 손대볼까,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성현준은 윤수겸이 보내온 링크를 확인했다.

떠오른 건 이미지 파일이었다.

"도마뱀...? 이 아니라 이거 드래곤이죠? 날개!"

"응, 맞아."

"잠깐만, 드래곤을 저한테 맡기신다고요?"

어째, 드래곤의 사이즈가 아담하기는 하다만.

갑자기 용이라니.

끝판왕이라니.

영, 신입이 맡을 정도의 콘텐츠가 아닌뎁쇼.

"선배, 이건 좀...."

부담스러워진 성현준이 반문하려던 찰나.

윤수겸이 추가 자료를 보내왔다.

자료에 적힌 건 다름 아닌 클래스 목록.

"스압 뭐야, 새삼스럽게 진짜 많네요."

"그렇지? 전투 클래스만 따져도 수천 개니까."

"근데, 이걸 또 왜 저한테 보내신 건데요?"

그것도 드래곤 관련 파일이랑 같이?

"당연히 제로 산맥이 등장했으니까."

"드래곤이면 아직 한참 먼일이잖아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미리미리 정보를 수집해 둬야지. 물론, 당장도 드래곤과 관련된 정보를 필요로 하는 플레이어가 있을지도 모를 테고."

"엥? 누구요?"

"누구겠어? 그 클래스 목록에서 하나만 찍어 봐."

"클래스 목록에서.... 아!"

그 말에 성현준은 떠올렸다.

아르카나의 무수한 클래스.

그중 고작 백여 남짓한 히든 클래스 중 하나.

[용기사]의 존재를.

"스칼!!"

딸깍.

클릭과 동시에 떠오르는 용기사의 정보.

전직 조건부터 클래스 퀘스트 줄거리까지.

새삼스럽게 느끼는 거지만.

세상은 넓고 참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했다.

"스칼은 어떻게 이런 조건을 뚫고 전직한 걸까요?"

"플레이어들이 보통 사람이야? 오픈 초창기엔 근력 스탯 하나 때문에 며칠씩 목검만 휘두르는 사람도 있었는데. 뭐, 한 명쯤은 있을 법도 하지."

"하긴...."

성현준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다, 어느 정도 의문도 풀렸으니까.

슬슬 시작해 볼까.

그러곤 곧장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그러니까.... 선배가 원하는 건 인류와 드래곤이 충돌하지 않는 선택지죠?"

"우리 서당개, 척하면 척이구나? 뭐, 진짜 먼 훗날이라면 모를까. 당장으로서는 승산이 없잖으니까. 호열 씨가 나선다고 하더라도...."

"그렇죠. 혹시라도 깨어나서 날갯짓이라도 한다고 생각하면 뒤따를 피해가 어마어마할 테니까요. 역시, 스칼밖에 없겠네요. 그런 선택지는."

용기사는 드래곤을 다룰 수 있는.

[테이밍]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으니까.

'그렇다면....'

용기사, 스칼의 클래스 퀘스트를 도울 수 있는 정보를 수집해야 하겠지. 보자.... 한참 동안 자료를 훑어보던 성현준이 드디어 그 시작점을 찾았다.

"[악룡(惡龍) 사냥꾼] 퀘스트, 여기부터려나?"

*

제로 산맥.

그 옥탑방엔 드래곤이 산다.

그렇기에 잊어선 안 될 퀘스트가 하나 있었다.

[월드 퀘스트 : 악룡(惡龍) 사냥꾼]

사악한 용의 일족을 사냥한 자여.

산맥의 전설이 그대를 부르고 있다.

─제로 산맥 최정상에 도달하라. (진행 중)

[텟퍼른 미궁] 균열.

악룡, 깨워선 안 될 존재를 처치하고 떠오른 월드 퀘스트.

악룡을 처치하는 데 가장 많은 기여를 한 덕분인가.

나만 플레이어들과 다른 퀘스트를 받게 됐었지.

"제로 산맥, 그리 높지 않더군."

포탈로 순간이동 해놓고는 허세 부리지 마라, 그랑펠.

제로 산맥이 얼마나 높은 줄 알고서는 하는 말이냐고!

왜, 위성사진에서도 저거 엄청 크게 나온다니까?

그랑펠의 말대로.

나는 포탈을 발현.

당장에라도 제로 산맥 최정상에 도달할 수 있기는 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도달하는 게 아니라 뒷감당이었다.

그러다 진짜로 깨어나면 어쩔 건데?!

비바체....

그러니까 드래곤의 둥지 바로 밑에서 셰그윈과 소란을 벌인 덕분에.

나는 미약하게나마 체감했다는 말이다.

드래곤의 압도적인 기운을!

드래곤과 비견되는 유이한 존재, 엘프.

엘시도어에게선 느낄 수 없던 압박감이었다.

물론, 내가 엘시도어를 만만하게 볼 수 있는 건 [첫 세계수의 축복] 버프 때문이었지만.

어쨌든....

'지금, 나로선 맞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거지.'

방금 말했던 [첫 세계수의 축복], [천적관계], 마지막으로 귀철까지.

발버둥 치면서 본의 아니게 거품이 잔뜩 끼어버린 나였다.

하지만 언제나 잊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주제 파악.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숭고, 초월자]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595]

[능력치]

근력 : 130 / 민첩 : 131 / 마력 : 514 / 행운 : 12 / 심미 : 中 / 집념 : 1

[보유 포인트 : 0]

애초에 마탑도 이기지 못한 게 드래곤들이다.

탑주가 행동불능에 빠진 지금은?

말할 것도 없겠지.

드래곤이 깨어나고, 인류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순간에는....

나랑 너만 긍지에 가라앉아서 끝나는 일이 아니라니까, 그랑펠?

"허나, 산은 올라야 산인 법. 절차를 지켜야겠지."

그래, 말 한번 잘했다.

제로 산맥이 괜히 거대하고.

괜히 그 꼭대기에 드래곤이 있는 게 아니다.

아래에서부터 차근차근 산맥을 오르며, 드높은 정상에 도달할 때가 되면 알아서 드래곤과 맞설 수 있는 레벨을 갖추게 되는 구조겠지.

그렇지 않습니까, AAU 선생님들?

'그래서 설정해 둔 것일 테니까.'

십만(十萬) 동굴을.

제로 산맥에 존재하는 십만 개의 동굴.

AAU의 설정에 따르면 [던전], [미궁], [유적], [전장] 등등.

'다양한 콘텐츠가 존재한다고 했겠다.'

제로 산맥이 현실에 나타난 지금.

십만 동굴은 십만 개의 [균열]로 봐도 무방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가능하겠는데?'

드래곤과 대적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는 게.

역시 괜히 아르카나의 창조자들이 아니다.

전부 계획이 있잖아, 계획이.

'계획 없이 좋은 거, 멋있는 거, 있어 보이는 거라면 다 때려 박은 누구랑은 다르게 말이야.'

그래도 어쩌겠냐.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일이다.

게다가 관점을 바꿔서 생각해 보자.

'사실 좋아할 게 아니긴 하다.'

드래곤.

균열 십만 개를 클리어해야 범접할 수 있는 존재.

그렇게 환산하니까, 얼마나 무지막지한 상대인지 깨닫게 된다.

그런 의미에선 잘했다, 호열아.

"십만 개의 동굴인가. 내게 안배는 필요치 않거늘."

그래, 위축되는 것보단 긍지 넘치는 게 나은 법.

물론, 그 무거우신 긍지에 가라앉을지도 모른다는.

크나큰 부작용이 있기는 하다만.

주제 파악만큼이나 전문분야라는 것이다.

발버둥 치는 건.

'그런 의미에서.'

스칼과는 대화를 나눠봐야 한다.

스칼의 클래스는 무려 히든 클래스, 용기사.

무엇보다 스칼은 나를 악룡 사냥꾼이라고 불렀다.

악룡 사냥꾼 퀘스트에 관해 무언가를 알고 있는 거겠지.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지만.

'어쩌면 드래곤과 충돌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작은 가능성이라도 파고들어야 한다.

사실 십만 동굴을 전부 클리어하는 것도 큰 가능성은 아니었으니까.

아쉬운 놈이 더 치열하게 발버둥 친다고 생각하자고.

물론.

"스칼, 그대는 자격부터 갖추는 게 우선이다."

스칼은 그랑펠에게 밉보인 상태였으니.

나로서는 우려스럽다.

그랑펠의 쓴소리에 스칼이 토라지기라도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피곤한 일이었으니까.

"격식과 긍지를."

그런 의미에서 진정 좀 하자, 그랑펠.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부귀영화에 덧없으시고, 또 청렴결백하신 너는 알 턱이 없겠지만.

자고로 심적 안정에는 무언가를 사는 게 제격이다.

'쇼핑이 최고란 거지.'

그나저나.

"찬물에도 우러난다라. 흥미롭군."

고작 신상 녹차에 너그러워지다니.

너도 참 쉬운 남자구나, 그랑펠.

.

.

.

슥슥─

아르카나 공식 랭킹 1위, 스칼.

스칼은 빗질을 멈추지 않았다.

기분이 좋은 듯 꼬리를 흔드는 자신의 애마(愛馬).

알렉산더를 향해 중얼거렸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알렉산더?"

무엇이 잘못됐을까?

이호열.

인류의 영웅.

플레이어들에게도 한없이 자비로운 존재.

그런데.

어째서.

나하곤 말조차 섞지 않으려 한단 말인가!

스칼은 여러모로 억울했다.

"실패도 모자라서 굴욕이라니. 괴롭다, 알렉산더."

스칼은 대다수 플레이어들과 달랐다.

정확히는 그 시작점부터가.

스칼이 그동안 극도로 정체를 숨긴 이유?

그건 자신의 가문 때문이었으니까.

본명, 스카라 로스차일드.

스칼은 지구상 몇 안 되는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중세부터 이어져 온 가문의 막대한 부와 권력.

모든 것을 쥐고 태어난 그에게 인생은 너무나도 쉬웠다.

그런 스칼에게 아르카나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또 다른 세상이라니.

현실과 다르게.

쟁취할 게 한가득이라는 소리였으니까.

스칼의 아르카나 플레이 목적은 간단했다.

아르카나 대륙을 내 발아래에 두겠다.

그런 목표를 가진 스칼에게 용기사는 더없이 적합한 클래스였다.

아르카나 대륙 최강의 생물, 드래곤에게 목줄을 채우는 것만큼.

확실한 정복의 상징도 없을 테니까.

대격변 이후에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스칼은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균열을 클리어하고, 성장해 왔다.

안내자 역할을 해준 클래스 퀘스트를 따라서.

그런데.

"...이게 뭐냐고 진짜."

스칼의 퀭한 눈이 퀘스트창을 향했다.

[클래스 퀘스트 : 악룡(惡龍) 사냥꾼]

전설의 존재.

드래곤과 마주하려는 자여.

그들과 마주할 수 있는 격을 갖추어라.

처음 클래스 퀘스트가 떠올랐을 때는.

드디어 목표가 코앞으로 다가왔구나, 싶었다.

그러나.

─금역에 잠든 악룡을 처치하라. (실패)

난데없이 실패란다.

실패, 그 단어를 보는 순간.

스칼은 기절할 뻔했다.

태어나서 처음 맛본 실패.

실패의 쓴맛이 이런 거란 말인가?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끔찍한 실패를 반복할 수 있단 말인가? 식음을 전폐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니까 스칼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새롭게 갱신된 퀘스트 목표.

─악룡 사냥꾼과 조우하라. (진행 중)

실패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

누군가가 자신의 퀘스트 목표.

악룡을 가로챘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누군가를 찾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세상이 하도 떠들썩했어야지.

이호열.

금역, 텟퍼른.

악룡, 깨워선 안 될 존재.

머릿속에서 맞춰져 갔던 퍼즐.

그쯤에서 스칼은 움직였다.

-"떨거지는 필요 없다."

-"이호열, 나는 그쪽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

-"대단하신 악룡 사냥꾼 씨."

하지만 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내가 대단하다고 칭찬까지 했는데."

악룡 사냥꾼, 호열은 자신에게 시간조차 내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애마에게 한탄하는 와중.

"?!"

스칼은 접한 것이었다.

호열이 드래곤이 잠든 제로 산맥.

최정상 언저리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툭─

손아귀에서 떨어지는 빗.

"서, 설마."

...이호열도 드래곤과 관련된 퀘스트를 받은 건가?

악룡을 처치한 지금이라면.

드래곤과 마주할 격까지 갖췄을 터.

혹시, 내가 실패한 퀘스트가 이호열에게 옮겨간 거라면...?

"!"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림.

드래곤을 타고 하늘을 누비는 호열의 모습.

스칼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 안 돼! 내 드래곤!!"

◈ 201화. 다만 그 전에 (1)

드높은 제로 산맥.

그럼에도 산이기에 산답게 오르겠노라.

다짐한 내게 필요한 건 준비였다.

철저하게 해야지, 등산 준비.

"산이라, 그저 계단처럼 오르면 되는 것을."

이봐요, 그랑펠 씨.

참 나, 누가 보면 내가 잘못된 건 줄 알겠네.

누가 봐도 그쪽이 이상한 거라니까?

'내가 마탑 계단에서부터 알아봤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또각─

거리는 구두를 신고 산을 오르냐고.

그리고 복장도 말이야.

기능성 등산복까진 바라지도 않아, 내가.

아무리 [온기]와 [첫 세계수의 축복] 버프가 있다고 하더라도.

어디 뒷산도 아니고 제로 산맥에서까지 정장은 좀 아니지 않냐?

그런 의미에서 확인해 두자.

드워프들이 나를 위해 제련 중이라는 새로운 방어구 말이야.

까다로운 심미안이 퇴짜를 놓지 않을까, 걱정은 한시름 덜어놓은 상태였다.

다른 이도 아니고 하이엘이 살폈다면 착용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겠지.

귀철의 제련도 끝난 참이었으니까.

슬슬 방어구도 막바지 작업에 한창이지 않을까.

그나저나 귀철하니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귀철의 난해한 아이템 정보창.

[?]

[등급 : 전설]

[제한 : 알려지지 않음]

[효과 : 알려지지 않음]

[설명 : 고귀한 자아를 가진 에고 소드.]

그 이름이 물음표인 이유는.

주인인 내가 아직 이름을 붙이지 않은 덕분이겠지.

"작명인가."

...제발, 의미심장하게 읊조리지 말아 주라, 그랑펠.

귀철에다가는 또 어떤 이름을 붙일까, 심히 걱정된다는 말이다.

'제한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도 뭐, 짐작이 되고.'

귀하신 [에픽] 아이템보다도 귀한 [전설] 아이템이다.

나야 [업적 : '전설'을 써내려가는 자]의 효과 덕분에.

전설급 아이템을 사용하기 위해선 친화력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사용 제한을 짐작할 수 없겠지. 적혀있는 것처럼 알려지지 않았다고 여길 만큼.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효과는....'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귀철의 말.

-애송이가 감히 이 몸을 가늠하려 들지 마라.

걔, 분명 셰그윈에게 그렇게 말했었지.

'그 힘을 가늠할 수 없기에 알려지지 않았다....'

당장 생각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겠구나.

뭐, 실제로도.

귀철의 성능은 나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셰그윈을 압도하게 만들어 줬으니까.'

그것도 검 대 검으로.

[천적관계]가 발동된 상태이긴 했다만.

귀철이 아니었다면, 나는 셰그윈에게 언제 숨통이 끊겼어도 이상하지 않았겠지. 그 쾌속의 움직임은 눈으로 따라기도 벅찼으니까.

냉정하게 따지자면.

나는 셰그윈에게 천적빨도 모자라서 템빨까지 끌고 온 다음에야 승리할 수 있었단 말이었다.

심지어 셰그윈은 검기조차 발산하지 못한 상태였고.

또 한 번 깨닫게 된다, 나의 나약함을.

그러나 한탄하지 않겠다.

제로 산맥이라는 판이 펼쳐진 지금.

레벨은 쟁취하는 것.

실제로 제로 산맥이 업데이트된 이후.

최상위권 플레이어들의 레벨은 가파르게 상승 중이었다.

그중에서도 삼인방.

──────

스칼 : 525레벨

록스 : 524레벨

류오쥔춘 : 523레벨

──────

각각 1레벨의 격차라니.

그건 셋과는 큰 접점이 없는 나조차도.

약간은 흥미진진해질 정도의 라이벌 구도였다.

하지만 조금은 의외인걸.

-근데.... 스칼은 이제 뭐함?

-ㅇㅇ?

-아니;; 다른 플레이어들은 제로 산맥에서 하루종일 사냥만 하는데 스칼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임? 자기 혼자만 제자리걸음 중이지 않음??

-ㄹㅇ 이러다가 록스한테 역전되는 거 아님?

-왜 록스임? 류오쥔춘한테 따일 수도 있지

-ㅋㅋ말이 되는 소리를 하셈

미국과 중국.

샤이닝과 천하통일.

록스와 류오쥔춘이 끼어있는 탓일까.

커뮤티니, 곳곳에선 키보드 배틀이 끊이질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나랑 별 관련도 없는 이야기.

궁금해도 쏟아지는 업무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겠지.

그러나.

'확실히 스칼의 활동이 뜸해졌지?'

[월드 퀘스트 : 악룡(惡龍) 사냥꾼].

퀘스트를 위해서도.

또 아주 작은 가능성을 위해서라도.

스칼과는 대화를 나눠보겠다고 계획했던 바였다.

이 또한 업무의 연장선이라고 봐도 무관하단 말씀.

나는 이내 읊조렸다.

"숫자에 연연하는 것은 좋지 않은 법이거늘."

하여튼 그놈의 고집.

귀철이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웠나 했더니만.

다 너한테 배운 거였구나, 그랑펠.

그래도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 있다.

'이제부턴 레벨에 연연할 때가 아니야.'

아르카나 시스템에서 레벨?

레벨 업마다 주어지는 포인트는 하나.

1레벨은 1스탯 포인트의 가치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것이 아르카나에서 스탯이 달린 아이템이 천문학적인 가격에 거래되는 이유였으니까.

하지만 겪어보니까 알게 됐다.

체력 단련 보상이라든가. 비약초의 효과라든가. 스탯은 다른 방식으로도 성장시킬 수 있다는 걸. 물론, 나에게만 해당하는 말일 수도 있겠지.

그럼에도 생각에 변함은 없다.

이제부터는 레벨보다 근본적인 능력을, 그릇을 성장시켜야 하니까. 사실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다.

꼭 깨닫는 게 아니더라도, 악마족 몬스터만 봐도 알 수 있었거든.

"격은 숫자 따위로 극복할 수 없는 것."

같은 레벨의 일반몹과 보스몹이 다르듯.

일반적인 악마와 마왕은 그 무게감부터가 달랐으니.

그런 의미에선 우려가 될 수밖에 없다.

거악(巨惡).

그 녀석들은 대체 어떤 강함을 가지고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상당히 찝찝해지는군.

'확실히 마왕들과는 다르다.'

데카라비아부터 시작해서 시무아르드 가문을 좀먹었던 율라까지. 마왕들은 제각각 움직임을 보였다.

그랑펠의 관점으로 말하자면 지나치게 나댔다고나 할까?

'다시 태어난 탐욕을 제외하면....'

그에 반에 거악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상위 마왕, 가미긴이 지옥에 처박혔든 말든.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렇다.

그게 내가 언제까지고.

신세를 한탄할 수 없는 이유였다.

만약 지금의 평화가 폭풍전야라면....

나에게는.

아니, 인류와 아르카나 대륙에 시간은 많지 않을 테니까.

뭐, 그런 면에선 레벨 시스템이 무의미하다고 볼 수는 또 없겠군.

보다시피 플레이어들에겐 경쟁이라는, 동기부여가 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입을 열었다.

"레이먼 션."

그게 레이먼 션.

그쪽이 플레이어들에게 아르카나 시스템을 덧입힌 이유일까.

지금의 나, 이호열로서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내게 안배 따윈 필요 없다."

말했던 것처럼 그쪽은 그랑펠한테 제대로 찍혔다니까.

"감히 나를 숫자로 가늠하려 들지 마라."

물론, 그건 그랑펠의 사정이고.

나는 주어진 시스템을 전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의 효율을 뽑아낼 필요가 있다는 거다.

그런 의미에선 우선, 1레벨이라도 올려보자.

[집념 : 정신력을 능력치로 환산한다. 집념이 상승할 때마다 환산되는 능력치가 추가로 상승.]

집념의 효율을 계산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지.

'내 팔자야.'

그런 의미에서는 참 인생사 새옹지마다.

직장인 시절.

부장님한테 깨져가면서도.

끌려가지 않았던 주말 등산을 다 가보게 생겼구나, 호열아....

*

아이언 캐슬 호.

드레드센 마을 생존자들은 무사히 안토니움에 정착했다.

덕분에 북적거리던 아이언 캐슬 호도 잠잠해졌다.

흐르는 정적─

드워프가 원래부터 과묵한 종족이라서?

그럴 리가 있나.

드워프가 금속만큼이나 달고 사는 것이 술이었다.

술이 들어가면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호탕한 웃음소리고. 정리하자면 지금의 침묵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벌컥!

"...뭔가 자네들?"

귀철과의 자존심 한판 대결.

그 승부를 마친 드워프 최고의 대장장이.

월스와일은 며칠 동안 앓아누웠었다.

비록 짧더라도 굵은 강골을 자랑하는 게 드워프들.

그것도 모자라 숨을 쉬는 것만큼 익숙한 제련이 아니던가?

월스와일, 자신도 얼마나 제련에 심혈을 기울였기에 이런 피로가 쏟아지는 것인가. 새삼스럽게 놀라울 정도였다.

그런데.

"아니, 왜 다들 그렇게 널브러져 있는 겐가?"

체인워커를 비롯한 모든 드워프가 아이언 캐슬 호의 차디찬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나마 반응할 힘이 남아있던 젊은 드워프 하나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월스와일 님, 깨어나셨습니까?"

"그렇다네. 그보다 이게 무슨 일인가, 자네들?"

"그게.... 하얗게 불태웠습니다."

"하얗게 불태워? 뭘?"

"휴식하시는 동안 제련을 끝냈거든요."

그렇다.

탈진한 월스와일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드워프들은 호열의 방어 장비 제작에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쉴 새 없이 망치를 두들기고 보석을 세공하고 심지어는 바느질까지 해가면서.

"뭐?"

그러니까 월스와일은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제련한 귀철이야, 그 재료가 워낙 희귀하고 또 지랄.... 아니, 유별났기에 그렇다고 치더라도. 방어구엔 귀철에 비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일 요소가 없지 않았던가?

물론, 재료의 질이 떨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마력의 백금.

고순도 마력석.

남색 나비 실타래....

드래곤에 맞서는 호열을 위한 장비였다.

과거, 아르카나 대륙이 온전하던 시절. 저 재료 중 하나라도 대륙에 풀리게 된다면 그 가치는 웬만한 영지와 맞먹을 정도였으니.

그 말인즉.

"자네들, 대체 얼마나 무리를 한 게야?"

그저 탈진할 정도로 전력을 기울였다는 소리겠지.

월스와일은 당장 그 결과물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체인워커!"

"...음? 깨어난 건가?"

"어디 있나? 자네들이 제련했다는 장비!"

"아, 그거라면 이미 하이엘께서 호열 경에게 전달하러 간 참이네."

"뭣? 벌써?!"

흔들흔들!

궁금증을 해결하지 못하다니.

월스와일은 안타까운 마음을 체인워커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것으로 표출했다. 그의 손아귀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체인워커가 웃었다.

"으하하. 걱정할 것 없네."

"...?"

"자네가 제련한 에고 소드에 손색없는 방어구를 제련해 냈다고. 내가 장담하겠네. 우리가 자네의 손재주를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체인워커의 눈매가 결연히 반짝였다.

"정말 최선을 다했으니 말일세. 믿어주게."

"...."

"게다가 우리도 호열 경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으니."

"...!"

드워프, 최고의 대장장이라는 칭호가 괜히 뒤따른 게 아니다.

귀철과 수십 일 동안 한 치의 양보 없는 신경전을 벌인 것도 괜한 자존심을 부린 게 아니란 뜻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월스와일이 고집을 꺾었다.

"그런가.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체인워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자네에게도 한소릴 들으면 어쩌나 싶었네."

"자네에게도? 왜, 또 누가 뭐라고 하던가?"

"정말 기절하듯 잠들었던 모양이군."

"?"

체인워커가 속삭였다.

"귀철을 보는 줄 알았네."

"...그게 무슨 소리야?"

"두 정령님들을 말하는 것이네."

체인워커는 다시금 떠올리고 말았다.

귓가에 맴도는 하이엘과 디엔드.

귀철을 뺨치는 두 정령의 까다로운 요구사항들을.

-"한없이 깊은 어둠을 표현하기엔 부족하군."

-"조금 더 화려한 세공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한없이 화려할 필요가 있겠군."

-"저 또한 같은 의견입니다."

하얗게 불태웠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다.

증명하듯 하얗게 질린 체인워커의 얼굴.

그 반응에 월스와일의 가슴 속에서.

간신히 잠재웠던 궁금증이 다시금 샘솟았다.

투박한 손아귀가 또 한 번 체인워커의 멱살을 붙잡았다.

흔들흔들!

"대체 뭘 어떻게 만든 게야, 자네들!"

"부탁인데, 그만 흔들면 안 되겠나?"

"설명하게! 당장 말해주게!"

"...진심으로 멀미가. 우욱!"

과연, 드워프는 흥이 넘치는 종족이다.

.

.

.

십만 동굴.

십만 개나 있다고 제로 산맥에 널려있을 거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면적은 호주에 맞먹을 정도. 그 높이는 성층권을 가뿐하게 돌파할 정도의 웅장함이시다.

'위치를 알고 있지 않는다면 찾기 어렵단 거지.'

그 증거로 플레이어들은 십만 동굴 중에서 단 하나의 동굴조차 찾지 못한 상태였다. AAU에게서 나와 똑같은 정보를 전달받았어도 말이지.

물론, 내게는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한테는 「마법」이 있었으니까.

산맥을 뒤덮다시피 발현해 뒀던 라이트.

그 마력 덩어리를 탐색.

'간섭 과정에서 시야 공유를 더하면....'

이렇게 특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동굴의 위치를.

포탈의 좌표는 발견한 동굴 앞.

고오오─

나는 곧장 포탈을 발현, 진입했다.

이게 말은 굉장히 쉬워 보였지만, 마르셀로가 들어도 경악할 정도의 마법 발현일 거다.

애초에 시야 공유 간섭 과정 자체가 [마안(魔眼)의 망원경]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었으니까.

'마법도 모자라서 아이템의 효과까지 어느 정도 따라서 발현할 수 있다니.'

새삼스럽게 서클이 대단하긴 하다.

서클을 형성함으로써.

비로소 그랑펠의 재능을 제대로 활용하는 기분이군.

그랑펠 성격에 어째 우쭐할 법도 한데.

이거,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구만.

동굴 앞에 서자 떠오른 메시지.

[던전 : 용암의 사이렌]

[적정 레벨 : Lv.800]

[붕괴 진행도 : 0%]

예상대로 동굴은 균열 취급이었다.

다른 점은 붕괴 진행도가 0퍼센트에 멈춰있다는 것.

제로 산맥이 이미 붕괴한 상태나 다름없는 덕분이겠지.

'천적관계 없이 800레벨 던전인가.'

그냥 몬스터라면 우려할 필요가 없었거늘.

나는 런던에서 던전의 위험성을 경험했었다.

던전의 변수를 생각하면 혼자서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는 거지.

그러나 누가 혼자라는 거냐.

나에게는 누구보다 듬직한 동료.

아니, 분신이 셋이나 있는데.

하이엘, 디엔드, 귀철까지.

다들 어디에 내놔도 약간 낯 뜨거워진다는 게 문제지만....

나는 곧장 동굴에 진입했다.

그러곤 우선 하이엘의 이름을 불렀다.

이내,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하이엘.

그런데, 품에 안고 있는 그거.

혹시 내 새로운 방어구니, 하이엘?

아니, 근데 잠깐만.

무슨 방어구가 그렇게 휘황찬란한 건데?!

◈ 202화. 다만 그 전에 (2)

그랑펠의 심미안을 걱정할 게 아니었다.

나, 이호열의 수치사를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아니, 진짜로 뭐가 이렇게 화려해?!

외관부터 천천히 살펴보자.

이걸 재킷이라고 해야 하나.

정말 어디 중세시대 귀족.... 아니, 귀족도 웬만한 귀족은 넘보지도 못할 정도로 화려한 만듦새구나. 검은색에 가까운 남색의 원단.

그 오묘한 빛깔을 그랑펠식으로 표현하자면.

"동트기 직전의 하늘빛인가."

시각적인 표현 한번 죽여주는구나.

두 번 표현하다가는 나까지 죽이겠어, 아주.

'어쨌든.'

그 원단 위를 수놓은 건.

딱 봐도 무진장 비싸 보이는 은빛의 자수였다.

목 부분의 카라부터 라펠까지.

이어진 자수의 문양이 낯뜨거울 정도로 화려하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으니.

양쪽 어깨에 견장들은 또 뭐냐.

움직일 때마다 거추장스럽게 흔들릴 것 같은 모양이다. 조금 더 자세히 살피기 위해 들여다보는데.... 이거 심지어 보통 은도 아닌 것 같은데?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의 효과.

아르카나 대륙, 모든 광물에 관한 지식을 습득한 덕분에 나는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력의 백금]이다.'

마력의 백금.

광맥이 존재하지 않기에 그 물량이 지극히 한정적이라는 귀하신 몸.

당연하게도 그 효과 또한 일반적인 광물과 비교할 게 아니거늘.

그런 마력의 백금을 고작 재킷 하나에 얼마나 때려 박은 거야, 이게? 양쪽 어깨의 견장만 하더라도 그 무게가 몇십 돈은 족히 나갈 것 같은데.

베스트에, 벨트에, 바지에 소모된 무게까지 고려한다면....

정말, 백금괴 단위로 마력의 백금을 사용한 모양이었다.

양심이 있다면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심혈을 기울인 모양이군."

의복을 대할 때만큼은 한없이 진심.

까다로운 그랑펠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월스와일을 비롯해서 다들 엄청 고생했겠구나, 다들.

하이엘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주군께서 흡족해하시니 비로소 마음이 놓입니다."

...그래, 하이엘.

네가 여러모로 애를 쓴 것 때문에.

아니, 덕분에.

이런 방어구가 탄생한 거겠지.

어버이날 자식이 만든 카네이션을 받는 부모의 마음이 이런 건가.

그러니까 또 걸쳐볼 수밖에 없겠구나.

'다만 그 전에.'

장비의 스펙도 확인해 보자.

혹시라도 착용 제한을 충족시키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나는 떠오르는 정보창을 하나씩 살펴나갔다.

그런데, 잠깐만.

[여명을 기다리는 자의 트라우저]

[여명을 기다리는 자의 셔츠]

[여명을 기다리는 자의 베스트]

[여명을 기다리는 자의 벨트]

[여명을 기다리는 자의 재킷]

세트 아이템이란 사실에 놀란 게 아니었다.

'여명을 기다리는 자아아아?!'

검은색에 가까운 남색.

그걸 보고 동트기 직전의 하늘빛이라고.

분명, 그랑펠은 그렇게 지껄였었지.

'드워프들이 그런 감성을 가졌을 리가 없다.'

이건 그랑펠을 똑 빼닮은 감성의 소유자만 할 수 있는 작명.

당연하게도 떠오르는 건 한 사람.

아니, 한 정령뿐이었다.

디엔드, 너로구나.

나는 흘러나오려는 탄식을 꾹 틀어막았다.

'...그래, 다른 사람한테 보여줄 것도 아니고.'

참아보자.

그저.

나만 조금 민망할 뿐이다, 호열아.

그런 의미에서는 성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착용하는 거라고, 정신 승리가 필요하다.

나는 차례대로 정보창을 살폈다.

"!"

그리고 흠칫했다.

[등급 : 에픽]

다섯 개의 장비, 모두가 에픽 등급이었다.

내가 [전설] 등급의 귀철을 습득했다고 한들.

에픽 아이템의 가치는 바뀌지 않는다.

하나하나가 마왕의 전리품과 맞먹는 가치를 지녔다는 소리...!

"과연."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아니, 투자된 재료의 가치와 그걸 제련한 드워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한다면 오히려 에픽 등급은 적절한 판정일지도 모른다.

[제한 : Lv.500 / 높은 수준의 명성]

일단, 다행이다.

레벨 제한, 500레벨.

[높은 수준의 명성]이라는 추가 제한이 걸려있기는 했다만. 내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높은 수준의 명성 정도야, 칠죄종 탐욕을 쓰러트렸을 때부터 충족시켰으니까.

내가 이렇게 성장했다.

속으로 우쭐거리기도 잠깐.

정보창과 별개로.

추가 메시지가 떠올랐다.

[장인의 손재주로 착용 제한이 대폭 완화되었습니다.]

[적용된 장인의 손재주 효과 : - Lv.300]

...아니, 성장했다는 말은 취소.

'아직도 갈 길이 멀구나.'

장인의 손재주 효과가 아니었다면 레벨 제한이 무려 800레벨. 드워프가 아니었다면 바짓가랑이에 다리 한 짝 넣어볼 수도 없었을 뻔했잖아, 이거?

[효과 : 세트 아이템 착용 시, 발현]

[설명 : 오직 '여명을 기다리는 자'를 위해 제작된 장비. 명품, 수작, 대작. 그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고귀함을 표현할 수 없기에 그 어떤 수식어도 붙지 않았다.]

설명에도 나와 있듯.

오직 여명을 기다리는 자.

그러니까 나만을 위해서 만든 장비라고 하니 고맙기는 한데....

어째 효과가 약간 특이하다.

'에픽 아이템이 다 그렇기는 하지만.'

마왕의 전리품도 그렇고.

에픽 등급부터는 그 효과가 확실히 고유했다.

마안의 망원경이나 지휘봉만 하더라도 플레이어는 물론.

아르나카인들조차 의문스러워 할 효과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물론, 효과는 성능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

아르카나 시스템에서 장비 아이템의 공격력이나 방어력은 따로 표시되지 않는다. 공격력과 방어력을 계산하고 수치화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

다만, 짐작은 할 수 있다.

[사악한 지룡의 송곳니]

[등급 : 유니크]

[제한 : Lv.800]

[효과 : 없음]

[설명 : 용이 되지 못한 지룡의 송곳니로 만든 검. 지룡의 태생적 한계로 특별한 효과는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 파괴력은 어떤 무기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다.]

착용 제한을 고려해도 특출난 수준이라면, 설명에서든 효과에서든.

어떤 식으로든 플레이어가 그 성능을 알아볼 수 있게 해줬으니까.

'하여튼 등급 값을 한다니까?'

물론, 에픽템이라 그런가.

설명은 구체적이기보다는 심상치 않았지만.

걱정할 건 아니다.

착용해 보면 알게 되지 않겠어?

'마침 테스트 장소도 있고.'

본래 장비의 착용 제한은 800레벨로, 현재 내가 진입한 [던전 : 용암의 사이렌]의 적정 레벨과 같았다. 이보다 적절한 상황도 없다는 말씀.

둥실─

마력으로 허공에 옷가지들을 띄우고 환복한다.

뜬금없이 동굴 입구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다만, 절도와 자신감 넘치는 동작만큼은 어디 명품관 탈의실에서 갈아입는 것처럼 우아했으니.

남은 건 이제 재킷뿐이다.

옷가지 중에서도 유달리 화려한 재킷.

정말로 아뿔싸, 소리가 절로 나온다.

'뭔 파란 보석까지 달렸어. 진짜.'

훈장이야, 뭐야.

그렇게 재킷에 손을 뻗는데.

잠깐만, 손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다.

하나같이 전부 똑같은 정보창을 띄웠으니까. 그중에서도 유달리 외면하고 싶었던 재킷의 정보 확인을 마지막까지 미룬 게 화근이었다.

[제한 : Lv.700]

장인의 손재주 효과를 적용받고도 700레벨.

그렇다는 건 원래는 일천(一千) 레벨짜리 아이템이라는 거잖아?

어째 내가 심각하게 휘황찬란하다 싶었다...!

나는 슬쩍 하이엘을 바라봤다.

그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심히 부담스럽구나.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가득하다.

앞으로 100레벨이나 남았다니.

700레벨을 달성하기 전까지는 세트 효과도 확인할 수 없다니.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지만.

역시나 겉으로 드러나는 법은 없었으니.

촤락─

나는 뻔뻔하게도 재킷을 집었다.

그러고는 어깨 위에 걸쳤다.

그렇다.

이것이 현시점에서의 나의 최선이다.

왜냐고?

이놈의 레벨 때문에.

재킷에 팔 한 짝 넣어볼 수조차 없으니까.

'...그나마 다행인가.'

마력으로 어깨에 재킷을 자석처럼 붙여놓을 수 있다는 게.

그런 나의 모습에 하이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하이엘, 그런 착용법은 차마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 말에 나의 몰골을 한번 살펴본다.

다른 플레이어의 장비들도 만만치 않게 판타지적이니까. 대충 이해하고 넘어가려고 하더라도. 어깨에 재킷을 걸치는 것만큼은 정말 받아들이기 힘들구나....

'...받아들일 수 없다면.'

좋아.

빠르게 700레벨에 도달.

제한을 충족하면 되는 일이다.

그러니까 레벨 따윈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했으면서도.

레벨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심오한 모순 속에서 나는 걸음을 옮겼다.

또각─

아차.

말이 나온 김에.

이놈의 또각 구두도 어떻게 바꿔 신든가 해야지....

*

제로 산맥.

광활한 신대륙에서는 사냥이 한창이었다.

균열에서도 사냥은 계속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뭘 모르고 하는 말이었다.

"그야말로 총력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직 플레이어만이 입장할 수 있는 균열과는 달랐다.

지역으로 추가된 제로 산맥.

현실에 모습을 드러낸 몬스터들은 현대의 화기에 무방비했으니까.

탕─!!

아르카나 대륙에선 들릴 수 없는 총성.

천하통일의 길드 마스터, 류오쥔춘은 외쳤다.

"전군 전진!"

이유 없이 항공모함 편대를 이끌고 온 게 아니다.

제로 산맥이 균열이 아닌 지역으로 추가된 시점.

류오쥔춘은 모든 계획을 끝마쳤다.

대격변의 시대가 도래한 뒤.

빛이 바랬던 조국의 군사력을 활용하겠노라고.

[군주]의 클래스 스킬 발동.

류오쥔춘의 눈이 빠르게 전황을 살핀다.

계속되는 사냥으로 지친 기색이 역력한 플레이어들.

류오쥔춘이 그들의 후방으로 병력을 투입했다.

탕!

투두두!

탕탕!

대격변 초창기.

세계는 현실을 범람한 몬스터에게 대응하기 위해 신무기를 개발했다.

과연, 인류를 지탱했던 [과학]의 힘은 위대했다.

몬스터라고 한들.

살상력을 극대화한 대 몬스터용 신무기를 견뎌내기는 어려웠던 것.

그러나 균열에선 이야기가 달라졌다.

균열에 진입할 수 있는 건 오직 플레이어뿐.

플레이어 중 그런 신무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이들이 극소수에 불과할뿐더러.

신무기로 몬스터를 사냥해 봤자 막대한 경험치 손해는 물론, 스킬 숙련도조차 제대로 올릴 수가 없었으니까.

천하통일의 간부, 유지오.

"영락없이 고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녀가 감격한 듯 말을 이었다.

"역시, 류 군주님이십니다. 그런 애물단지들을 이런 방식으로 활용하실 줄은 저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제로 산맥의 몬스터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쏟아지는 탄약, 수백 발을 맞고도.

최후에 최후까지 발악을 멈추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물량에 장사는 없다.

쿠궁.

쿵.

쿠구궁.

곳곳에서 쓰러지는 산맥의 맹수들.

그러자 류오쥔춘에게 메시지가 떠올랐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투입된 군병력은 일반인이 아닌 전원 플레이어였다.

천하통일에 입문할 자격을 갖추지 못한 조국의 저레벨 플레이어들.

류오쥔춘에게 그들을 육성할 생각 따윈 없었다.

애초에 저들은 자신의 검과 방패조차 되지 못한 존재.

그저 디디고 나아갈 발판에 불과했으니까.

류오쥔춘의 눈이 번뜩였다.

'그렇다. 오직 나만이 가능하다.'

플레이어에게 의존하던 다른 [군주]들은 모조리 도태됐다.

살아남은 건 플레이어들 위에서 군림하는 오직 자신뿐.

'제로 산맥이 모습을 드러낸 이상, 시간문제다.'

524레벨.

비로소 같은 눈높이.

록스, 나는 너를 뛰어넘겠다.

스칼, 그대 또한 마찬가지다.

류오쥔춘의 레벨 업 소식은 실시간으로 록스에게도 전해졌다.

"아니. 이러다가 따라잡히는 거 아니야, 록스?"

드미트리에 호들갑에 록스는 웃었다.

"하하. 그럴지도 모르지."

"웃어? 이런 상황에 웃음이 나와? 진심?"

"뭐, 총까지 가져와서 쏴대는데 어쩌겠어?"

말과는 반대로 록스의 눈매는 가늘어졌다.

'목격하고도 깨닫지 못했나, 류오쥔춘?'

호열과 검성의 결투.

결투에서 록스는 깨달았다.

중요한 건 레벨이 아니라는 것을.

어째서 호열이 플레이어에게 라이언 하트 기사단과 마탑을 비롯한.

아르카나 대륙인들과 교류할 기회를 주었는지도.

'레벨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걸.'

록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류오쥔춘의 방향성은 잘못됐다고.

그렇기에 조급한 마음 따윈 들지 않았다.

물론, 그 평온함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잠깐만, 록스?"

나무 위에서 주변을 정찰하던 카밀라가 흠칫했다.

"이거, 예기치 못한 손님이 찾아오셨는데?"

그건 카밀라에게 몇 안 되는 좋지 않은 기억을 심어준 인물이었다.

흔치 않은 카밀라의 반응에 록스는 직감할 수 있었다.

그 불청객이 누구인지를.

류오쥔춘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라이벌.

"스칼이군."

정답이라는 듯.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산맥에 울렸다.

이내, 산맥 아래에서 스칼이.

황금빛 갈기를 흩날리는 그의 알렉산더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칼의 등장을 마지막으로.

제로 산맥에 집결한 아르카나 공식 랭킹 1, 2, 3위.

카밀라가 찝찝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쟤 표정이 왜 저래? 화난 것 같은데, 록스?"

"!!"

무엇이 스칼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인가?

고조되는 긴장감 속에서.

점차 스칼이 가까워졌다.

.

.

.

스칼은 입안에서 되뇌었다.

"이호열."

...아니지. 만남에 앞서서 격식과 예절부터.

"이보시게, 호열 경 대체 어디 있단 말이오?"

당사자가 듣는다면 기겁할 말을 잘도.

그런 스칼에게 록스는 물론.

샤이닝 길드 전원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으니까.

다그닥!

알렉산더의 말발굽은 멈추지 않았다.

쌔앵!

대화를 나누기는커녕.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자신들을 스쳐 지나가는 스칼.

정적 속에서─

"...엥?"

드미트리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203화. 너도 긍지냐?

거대 연합.

물과 기름은 나름대로 섞여가고 있었다.

[명검을 문 늑대개].

650레벨의 네임드 몬스터답게 그 움직임은 심상치 않았다.

스슥─

늑대개가 숲 사이를 누비자.

우지끈─

주변의 고목들이 순식간에 쓰러져 나갔다.

둥실─

허공에 뜬 드론.

전황을 지켜보던 남철민이 말했다.

"영리하네. 전장을 자기들 입맛대로 바꾸고 있는데?"

괜히 혼자만 검을 입에 문 게 아니라는 건가.

늑대개는 야전사령관이라도 된 것처럼.

전장을 자신과 동족에게 유리한 지형으로 바꾸어 놓고 있었다.

히사기가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늑대의 피가 섞여서 그런가. 개답지 않게 거치네요."

바뀐 지형 탓에 행동이 제약된 상황.

하지만 말했다시피.

절대 섞이지 않을 것 같던 물과 기름.

가온과 이나즈마는 서서히 융화되어 갔다.

남태민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착각하고 있구나. 똥개들."

"...?"

"하긴 늑대개가, 진짜 야성이 뭔지 어떻게 알겠어?"

야만전사.

바바리안, 남태민은 히사기에게 선언했다.

"저 검을 물고 있는 놈은 내가 맡는다. 원래 짐승이란 게 우두머리만 조지면 사기가 꺾이는 법이거든. 그때부터 한 마리씩, 알아들었지?"

거목들이 쓰러지며 만들어진 지형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무리 민첩하다고 하더라도 두 발로 걷는 이상.

움직임에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소리.

그러나 남태민에겐 해당하는 말이 아니었다.

[광폭화].

고유 스킬을 발동함과 동시에.

마치 네 발로 뛰는 것처럼.

몸을 숙인 채 뛰쳐나가는 남태민.

파바박!

과연, 야성을 그대로 간직한 짐승과도 가까운 움직임.

그 박력에 늑대개들조차 놀라서 깨갱거릴 정도였다.

히사기가 중얼거렸다.

"정말, 개 같으시군요."

욕도, 중의적 표현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감상.

남태민은 정말 사냥감을 포착한 사냥개라도 된 것처럼.

우두머리를 향해 달려갔으니까.

히사기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마창사.

슈슈슉!

창 끝에서 쏟아져 나오는 예리한 마력 줄기.

히사기의 창이 허공을 가르자 길목을 가로막았던 거목들이 여러 갈래로 쪼개졌다.

히사기의 지휘에 따라 거대 연합의 플레이어들이 늑대개 무리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남태민과 히사기.

그리고 길드원.

각자는 절대 인정하려 들지 않겠지만.

"아주 척척 맞으셔들."

뭐, 라이벌?

호열 씨만 아니었어도 상종도 안 해?

이젠 웃기지도 않는다.

"구라를 쳐도 그럴싸하게 치던가."

남태민과 히사기.

두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가온과 이나즈마.

길드원 전원이 서로의 약점을 보완해 주고 있었다.

물론, 그게 가능한 건 악연으로 대립하던 시절.

서로서로 약점을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켰던 경험 때문이었지만. 제삼자, 그것도 유럽인의 시선으로 한일 감정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버서커 길드원들이 은근하게 말했다.

"우리 가끔은 소외감 든다니까, 언니?"

"미친, 소외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물론, 언니는 그런 거 못 느끼겠지만."

"흥."

광전사는 고독할수록 강해지는 클래스다.

생명력이 낮아질수록, 전투가 계속될수록 전투력이 상승하는 클래스였으니까. 어차피 그런 광전사의 호흡에 페이스를 맞출 플레이어는 많지 않았다.

레오니가 양손을 치켜들었다.

"외로우면 너도 두 개씩 들던가."

어쩌면 그래서 쌍검에 이끌렸던 건지도 모르지.

이내, 제각각 날뛰기 시작하는 거대 연합.

그 광경에 흠칫한 건 다름 아닌 세컨드 썬이었다.

간부, 재커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슈, 슈레이그. 우리 아무래도 잘못 찾아온 것 같은데?"

슈레이그는 순간,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세컨드 썬 또한 정식으로 성전에 참전했던바.

동맹이라고 할 수 있는 거대 연합과 호흡을 맞춰볼 생각에 그들의 뒤를 쫓았거늘.

펼쳐진 광경은 예상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재커리가 다시금 말을 잇는다.

"연합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야. 저걸?"

각자의 개성이 강해도 너무 강하지 않은가!

세컨드 썬.

자신들부터가 최상위권 길드이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전장에 체계적인 약속이나 호흡 따윈 없다는 것을.

하지만 슈레이그에게는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저게 최선일지도."

가온과 이나즈마, 버서커까지.

셋은 상위 길드 중에서도 특색이 뚜렷한 길드였다.

특히나 유럽의 버서커를 제외하면.

가온과 이나즈마는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압도적인 위치에 속한 두 길드가 아니던가.

자신의 방식으로 랭커를 차지한 만큼.

고유의 스타일은 쉽게 변할 수 없겠지.

"무규칙 속의 규칙이라는 건가."

모순과도 같은 말.

그게 정말 실현이 가능한 것인가.

누구든 의심할 수밖에 없는 광경.

그러나 슈레이그는 웃어넘겼다.

"뭐, 긍지라면 그걸 가능케 할지도 모르지."

과연, 그런 슈레이그의 생각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전투가 끝나고.

슈레이그가 거대 연합의 길드 마스터들에게 합류 의사를 전했다.

이야기는 속전속결이었다.

"긍지?"

"물론, 긍지입니다."

"호흡을 맞춰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레오니, 한 사람만 빼고.

"???"

뭔데, 저것들.

자기들만 아는 암호야, 뭔데.

레오니는 어이를 상실할 지경이었건만.

이내,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다그닥!

알렉산더의 말발굽 소리였다.

히히힝!

샤이닝을 포함해 수많은 플레이어들을 외면하듯.

스쳐 지나온 스칼이.

마침내 거대 연합 앞에서 멈춰 선 것이었다.

레오니는 순간 당황했다.

'얜 또 뭐냐.'

그렇지 않아도 긍지문답에 정신이 아득해졌던 참.

그런데.

난데없이 스칼이라니.

'실물은 처음인데.'

레오니와 버서커는 최근 들어 크게 성장한 플레이어, 길드였다.

두문불출하는 랭킹 1위, 스칼과는 접점이 없는 게 당연한 일.

그러나 나머지 세 사람은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괴물께서 움직이시기 시작한 건가.'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스칼이 최강자의 자리를 유지하는 것?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히든 클래스빨이든, 뭐든, 어떻게든.'

그러나 대격변 이후.

호열의 등장 이전까지.

최강에서 내려오지 않는 스칼을 보고 남태민을 비롯한 랭커들의 생각은 뒤바뀔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쌓인 경험 덕분이었다.

'괴물이라는 사실에 변함은 없겠죠.'

목숨을 걸고 진입해야 하는 균열이다.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는 길드원들과 함께 진입해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균열이란 말이다. 하지만 스칼에겐 몸을 담은 길드 따윈 없었다.

그렇다고 스칼에게 동료라 부를 수 있는 플레이어가 있느냐고 묻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스칼은 모습 자체를 드러내는 일이 적었으니까.

그런데.

"크흠."

그 스칼이 자신들의 앞에 멈춰 서서는.

목을 가다듬고 있었다.

목적이 있는 게 분명했다.

물론, 그 목적이 마냥 호의적이라는 법은 없는 법.

모두가 경계를 늦추지 않는 채.

스칼의 입술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스칼이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대체, 긍지가 무엇입니까?"

입이 열리자 탁─ 하고.

풀려버리는 긴장의 끈.

레오니가 혀를 내둘렀다.

...아니, 진짜, 진심으로, 너마저도 긍지라고?

*

"긍지의 행보에 방해가 되는군."

...오해하지 마라.

내가 한 말이 아니다.

디엔드가 뱉은 헛소리란 말이다.

디엔드가 무어라 말할 때마다 저걸 그냥 아르카나 대륙으로 되돌려 보내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뭐, 백번 양보해서 틀린 말까지는 아니네.

실제로 행보에 방해되긴 했으니까.

'열기가 장난이 아니야.'

[용암의 사이렌]이라는 던전명에 걸맞게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새빨간 용암의 바다였으니까. 근데, 그게 대체 긍지랑 무슨 상관이냐고!

'됐다. 말하면 나만 피곤해진다.'

급하게 디엔드를 외면한 나는 용암의 바다를 둘러봤다.

과연, 보통 동굴이 아니라는 비로소 실감이 난다.

용암의 호수도 아니고.

바다라고 비유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거다.

정말 바다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다.

"과분한 것을 품고 있군."

...그나마 주어라도 생략해 줘서 고맙다, 그랑펠.

하다 하다 산맥에게 말을 거는 미친 사람처럼 보이진 않겠구나.

어쨌든.

시기가 적절하게 새로운 장비를 갖춰 입게 돼서 다행이다.

마법부여로 화염 속성 친화력을 떡칠하지 않아도 용암의 열기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에픽 등급의 위용이라는 거겠지.

재료가 재료이니만큼 기본적인 방어력과 속성 친화력은 일정 수준 이상 겸비했다는 것이다.

'그나저나.'

어째 길이 보이지 않는데.

다른 장소도 아니고 던전에선 당황할 일도 아니다.

다른 던전이 그랬던 것처럼.

용암의 바다를 건널 수 있는 장치가 숨겨져 있겠지.

'괜히 던전 공략에 탐험가가 필수인 게 아니네.'

내 눈으로 벽면이라든가, 발밑이라든가, 둘러본다고 한들 뭐가 들어올 리가 없겠고.... 결국, 내 방식대로 용암의 바다를 건널 수밖에 없다는 소리.

그런 내 생각을 알아차린 건가.

"제 어둠은 용암의 강렬한 열기조차도 집어삼킬 수 있습니다, 주군."

디엔드가 먼저 입을 열고.

"불꽃을 먹고 자라는 식물에 관해서는 저보다도 주군께서 더욱 잘 알고 계시겠지요? 혹시라도 제 축복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그에 질 새라 하이엘이 고아하게 말을 잇는다.

고유 정령인 하이엘.

그리고 상위 정령조차 긴장하게 하는 디엔드다.

이 정도의 용암쯤이야, 식은 죽으로 만들 수 있겠지.

든든하구나.

든든해.

근데, 든든한 걸 떠나서 얘들아....

너희가 양쪽에서 그렇게 말하니까.

나, 조금 머리가 어질어질해진다.

'말끝마다 주군, 주군...!'

서로가 서로를 물들여 가면 어떡하니, 진짜.

'내가 이래서 둘 다 소환하는 걸 꺼린 건데.'

그럼에도 하이엘과 디엔드.

두 정령을 소환한 이유는 간단했다.

왜긴 왜야, 정령마법에 조금 더 친숙해지기 위해서지.

[초월자 : 그대의 초월적인 경지는 초월자라 불리기에 충분하다. - 현재 도달한 성취 : 서클 (모든 마법 발현력 1,000% 상승) / 미완성 쾌검술 / 없음 / 없음....]

정령마법 또한 마법의 한 갈래.

서클로 상승한 발현력을 제대로 써먹기 위함이었다.

마탑의 마법사만큼이나 학구열이 강한 누군가는 묻겠지.

정령의 {자연} 능력.

그리고 『마법』은 다른 개념이 아니었느냐고.

예리한 궁금증이다.

그랑펠이 칭찬과 함께 녹차 티백을 부상으로 내어줘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의 질문.

그렇다, 정령마법은 사실상 정령의 {자연} 능력을 보조하는 마법에 불과했으니까.

'페이얀 선임의 마법도 그 개념을 벗어나지 못했다.'

어쩔 수 없다.

{『기이』}가 아니고서야 극복할 수 없는 마법의 한계였으니까.

하지만 나와 그랑펠은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야만 한다.

깨닫게 됐으니까.

어쩌면 기이야말로.

거품을 완전히 걷어내더라도.

내가 다른 이들보다 앞서는 유일한 분야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런 기이에 소홀히 할 것 같냐.'

무엇보다 상위 마왕, 가미긴에게도 먹혀들었던 기이다.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여러 개념의 기이를 갈고닦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 나의 결론.

"하이엘, 디엔드."

"하이엘, 듣고 있습니다."

"존명, 나의 한없이 깊은 어둠이시여."

...무슨 대답이 이렇게 길어.

어째 대답 때문에 벌써 힘을 빼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만.

용암 따위에 아까운 마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둘 다.

"힘을 비축해 두거라."

"?"

"용암 따위에 그대들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다른 플레이어나 아르카나인은 몰라도.

이래 봬도 기이의 선구자인 내게 용암 따위야.

설령 바다처럼 넘실거린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까.

마침 새 장비의 성능을 확인해 보고 싶기도 했고.

"...!!"

아니, 그렇다고 감격한 표정을 지을 것까진 없거든?

양쪽에서 쏟아지는 부담스런 눈빛 속에서.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

흩날리는 재킷.

마력에 감응해 일렁이는 백금의 자수들.

그런 내가 발현한 것은 [『기이, 절대영도』].

효과는 굉장했다.

부글거리는 형태와 빛을 유지한 채.

급속도로 얼어붙어 버린 용암.

절대영도가 만들어 낸 풍경은 더없이 아름다웠으니.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심미 : 上]

아무래도 심미가 한 단계 상승한 것 같다고.

그러나 기쁨에 솔직하지 못한 이놈의 주둥이.

나는 언제나처럼 지껄이고야 말았다.

"과한 열기는 사양하지. 찻물을 데울 필요는 없으니."

이런 상황에 찬물에도 잘 우러나는.

신상 녹차를 구매했다고 자랑하지 마라, 그랑펠.

됐다, 애써 걸음을 옮기는데....

"?"

문득,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上에 다다른 심미의 효과가 발동됩니다.]

...잠깐, 추가 효과 개방이다!

◈ 204화. 이것이 나의 길이다

어쩐지.

절대영도에 얼어붙은 용암이 지나치게 화려하다 싶었다.

이걸 말로 표현하기 어려워서 그렇지.

바다처럼 물결치던 붉은 용암이 색을 유지한 채.

그대로 얼어붙은 풍경.

그러니까 그랑펠식으로 표현하자면....

마치 루비의 바다와 같았으니.

상태창을 열어 확인하지 않아도 촉이 왔다는 거지.

또각─

빙판 위를 걷는 거나 마찬가지.

더욱더 또렷한 구두 소리와 함께.

나는 얼어붙은 용암 위를 건넜다.

그나저나 간이 커도 상당히 크구나, 그랑펠.

'무섭지도 않냐.'

절대영도가 기이라는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절대 녹아내릴 일은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 위를 걷는 건 다른 문제였으니.

마탑 계단과는 또 다른 공포감이다, 이거.

'우선 뭐가 보일 때까진 걸어야 해.'

순간이동, 포탈을 발현하기 위해선 목적지의 좌표가 필요하다.

하지만 용암의 바다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당장은 포탈을 발현할 수 없다는 뜻.

계속 아래를 내려다봐서 더 무서운 건가.

일단, 시선부터 옮겨보자.

마침 적절하게 떠오른 메시지가 있었다.

[심미 : 上]

상태창을 열어 확인해 본다.

확실하게 심미가 상승해 있었다.

그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 여명 세트를 입었는데.

재킷, 하나 정도는 입지 않고 걸쳤더라고 하더라도.

심미가 상승하는 데에 큰 무리는 없겠지.

[上에 다다른 심미의 효과가 발동됩니다.]

그런데, 上을 찍었다고 추가 효과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무엇보다 나는 심미를 발동하지 않았다.

효과가 저절로 발동된 것.

'설마, 패시브 효과라도 추가된 건가?'

그래서 그 효과란 게 뭔데?

시뻘건 용암에 대한 공포감도 잊고,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는데.... 어째 아름답다는 것 말고는 뭐 바뀐 게 없는 것 같다?

다시금 되새겨 보는 심미의 효과.

마법에 있어서 심미는 복사, 붙여넣기 신공과도 같았다.

마력을 무지막지하게 잡아먹는 복잡한 간섭 과정을.

극소량의 마력으로 대체할 수 있었으니까.

'사실 최근 사용 빈도가 뜸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지.'

과거, 마력에 허덕대던 때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단순히 스탯만 놓고 따지자면 아직도 마르셀로는 물론.

대부분의 선임 마법사들보다도 마력량이 뒤처질 테지만.

'비약초도 모자라서 영약으로 기름칠.'

결정적으로.

[첫 세계수의 축복]이라는 무지막지한 버프가 상시 발동 중인 내가 아니던가.

덕분에 서클의 경지에 올라, 고위 마법을 발현하면서도 마력에 허덕대지 않을 수 있었단 거지.

'굳이 심미까지 발동할 필요가 없었어.'

마력에 쩔쩔맬 시기는 지났으니까.

그래서 추가 효과 개방에 조금 기대했건만.

어째....

'영 갈피가 안 잡히는데?'

다행스럽게도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설령 내 눈이 놓쳤다고 한들.

양쪽 어깨에 눈을 대신할 든든한 분신들이 있었으니까.

"주군, 길이 보입니다."

...길이 보여?

긍지의 길.

이딴 소리 하면 진짜 소환 해제해 버린다, 디엔드. 너.

나는 궁시렁을 삼키고 시선을 옮겼다.

그랬더니, 정말 길이 보였다.

나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는 형태로.

"찰나의 시간에 이리도 고아한 길을 발현하시다니. 주군에 비하면 저, 하이엘의 심미는 아직 한참 부족한 것 같습니다."

뭔데, 저 화려한 대로(大路)는?!

솟구쳐 오른 용암의 형태가 마치 조각과도 같았다.

비유하자면 개선문 같달까?

그래, 조각상처럼 복잡한 마법이 발현되는 것.

그것도 심미의 특징 중 하나였지.

하지만 문제는 그 스케일이다.

'크다.'

역시나 말도 안 되게 웅장하다.

[첫 세계수의 축복]에 [심미]의 뛰어난 마력 효율을 고려하더라도.

마력이 왕창 빠져나가진 않았을까.

의심해 볼 정도로.

그런데.

'...추가 마력 소모가 없다고?'

그대로였다.

기이, 절대영도를 발현할 때 소모된 마력 말고 추가로 소모된 마력은 없었다. 그러니까 요란하게 떠들어대는 디엔드의 말과는 다르게.

"이것이야말로 주군께서 열어주신 길...!!"

내가 나의 의지로 발현한 길이 아니란 거지.

그렇다면 가능성은 하나뿐이다.

어딘가로 향하는 '길'을 여는 것.

그게 바로 上에 다다른 심미의 효과구나?

*

유스라 왕국.

탐험가 연맹 본대.

연맹 탐험가들은 막바지 준비에 한창이었다.

"본격적으로 경쟁이 시작되겠군, 아론."

"내가 너랑 경쟁? 주제를 알아라, 롬버스."

"하긴 내 주제가 그대보다 고상하긴 하지."

베테랑 탐험가 아론과 롬버스는 물론.

현역 탐험가로 복귀한 연맹장, 파비앙까지.

플레이어, 아르카나인을 구분할 필요는 없었다.

모두가 긴장감 속에서 자신을 정비하고 있었으니까.

거기엔 박휘강도 포함되어 있었다.

"드디어 저희 탐험가들이 밥값을 할 때가 온 거죠!"

제로 산맥의 십만 동굴이야말로.

탐험가들이 긍지를 발휘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

간만에 활기찬 분위기에 파비앙도 조금은 몸이 달아올랐다.

"엄밀히 따지자면 복귀 후 첫 행보도 아닌데 말이야."

텟퍼른 미궁 균열.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파비앙은 호열에게 면목이 없어졌다.

그래 봤자 미궁이라 생각하고 자신만만했거늘.

호열이 아니었다면 공략은커녕.

미궁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래서 첫걸음처럼 느껴지는 건가."

그러나 제로 산맥에서는 달라야만 한다.

그야 제로 산맥의 십만 동굴은 텟퍼른 미궁처럼 미지의 금역(禁域)이 아니었으니까. 파비앙, 자신만 하더라도 공략을 한 동굴이 십여 개는 되지 않았던가?

파비앙은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이야 전부 바다에 잠겨버렸을 테지만."

전설의 탐험가, 파비앙에게도 제로 산맥 중턱은 밟아보지 못한 장소였다. 그러나 산맥 저지대의 동굴을 탐험하며 나름대로 특징을 파악했던바.

파비방이 탐험가들 앞에 섰다.

"제로 산맥 출정에 앞서 그대들에게 전하겠네."

그 목소리에 집중되는 탐험가들의 시선.

"그대들도 알다시피 십만 개의 동굴에는 각자 고유한 규칙이 존재하네. 모험가들의 언어로는 필드 타입이 다르다고 하는 거겠지. 어떤가, 내 말이 맞나?"

파비앙의 물음에 박휘강이 넙죽 대답했다.

"넵, 정확하십니다!"

고개를 끄덕인 파비앙이 말을 이었다.

"던전, 미궁, 전장.... 어떤 동굴에 어떤 규칙이 존재하는지는 진입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 그 기대감이 탐험의 묘미라고는 하나, 우리는 탐험가들은 더 이상 묘미만을 위해 탐험에 매달릴 수 없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 비장감이 감도는 건 덤이었다.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

각자의 세계가 절멸의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성전에도 참전했다.

그러나 비전투 클래스인 탐험가가 총력전에서 활약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 때문에 아쉬움을 삼키던 탐험가들이 아니던가?

'낯선 균열과는 달라.'

'던전은 내 전문분야라고.'

'미궁 공략 콘텐츠로 20만 구독자를 끌어모은 나다.'

갈증을 해갈할 기회가 왔다는 것.

파비앙도 모두와 같은 심정이었다.

피식, 입가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탐험가로서 편견에 한 방 먹여줘야 하는 순간이겠지. 그래서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나답지 않은 짓을 하겠다고 결정을 내렸네. 그러니 다들 이제부터 내 말을 명심하도록 하게나."

앙숙인 아론과 롬버스만 봐도 알 수 있듯.

탐험가들은 서로가 경쟁자였다.

아르카나 대륙이 광활하다고는 해도.

결국 탐험 장소는 유한한 법.

그 때문에 자신의 탐험 요령을 다른 탐험가에게 떠들어대지 않았다.

탐험가들의 공생을 위해 설립된 연맹에서도 그에 관한 이야기는 암묵적으로 오가는 일이 없었다.

일종의 금기.

"첫째로, 필드에는 알려지지 않는 길이 존재하네."

그러나 파비앙은 연맹장으로서 금기를 깼다.

"...!!!"

탐험가들의 경악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파비앙은 전설의 탐험가로서 쌓아온 경험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건 잠자코 듣고 있던 아론과 롬버스조차도 흠칫할 정도로 새로운 개념이었다.

"알려지지 않은 길이라니요...?"

"던전이나 미궁엔 수많은 갈림길이 존재하지만.... 결국, 끝으로 향하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게 탐험의 상식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상식으로는 그러네."

알려지지 않은 길.

당황하는 게 당연하다.

수많은 필드를 공략해 온 자신조차도.

알려지지 않은 길을 목격한 건 단 한 번에 불과했으니까.

박휘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그 장소만 특별했던 건 아닐까요?"

"아니."

"!"

얼마나 단호한 대답인지.

박휘강의 입에선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한 번밖에 목격하지 못한 이유? 단지 나의 능력 부족 때문이라고 단언할 수 있네. 하지만 보상은 확실했지. 그 길의 끝에서 나는 무엇보다 값진 전리품을 거머쥐었으니까."

...무엇보다 값진 전리품?

"바로 진실을."

거기까지 말했어도 감을 잡지 못하는 탐험가들.

파비앙은 또 한 번 안도했다.

역시, 현역으로 복귀하길 잘했군.

이런 햇병아리들에게 모든 걸 맡길 순 없지.

그러곤 너그럽게 물었다.

"다들 생각해 봤는가?"

"무엇을 말입니까, 파비앙 연맹장님?"

"아론, 롬버스. 그대들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가?"

"??"

"텟퍼른 미궁의 깨워선 안 될 존재."

아론과 롬버스는 눈빛을 교환했다.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그 거대한 동공을.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두 탐험가는 흠칫했다.

"녀석이 미궁의 암벽 속에 파묻혀 있던 이유를."

"!!!"

그제야 파비앙이 말한 진실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던전과 미궁, 온갖 필드엔 몬스터가 존재한다.

파비앙은 공략을 거듭해 오며 위화감을 느껴왔던 것이다.

어째서 그 심장부에는 언제나 몬스터가 존재하는 것인가를.

'그거야 당연히 게임이니까....'

"...!!!"

생각하던 플레이어들은 흠칫했다.

아니, 아르카나는 더 이상 게임이 아니었다.

박휘강은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전부 이유가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연맹장님?"

텟퍼른 미궁.

당시 그곳엔 박휘강도 있었다.

그 또한 전부 목격했다는 것이다.

[텟퍼른 흑의 계약자].

그들이 어떤 행동을 보였는지를.

그들과 깨워선 안 될 존재.

또 텟퍼른에 얽힌 사연이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었는데....

"정답이네, 모험가여. 여태껏 수많은 던전과 미궁, 온갖 필드를 공략해 온 나지만. 그 의문을 해결할 수 있던 탐험은 고작 단 한 번에 불과했지."

"...설마, 그 한 번이라는 게?"

"설마가 맞네. 알려지지 않은 길에 진실이 있었네."

진실이라니.

파비앙은 대체 무엇을 목격한 것인가?

쏟아지는 눈빛 속에서.

파비앙의 눈이 빛났다.

"진정한 의미의 공략에 도달했다는 것이네."

*

사이렌.

언제부터일까.

인어(人魚)의 마모된 기억은 언제나 푸른 바다를 향했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바다를.

정말로 우스운 일이지?

부글부글.

솟아오른 암벽 위에서 붉은 용암을 바라본다.

존재할 리 없는 기억 속에서.

사이렌은 바다를 떠올렸다.

바다는 이렇게 뜨겁지 않았지.

또 무의미하게 넓지도 않았지.

용암의 바다가 아닌 진짜 바다에는.

자신 말고도 다른 생명체들이 헤엄치고는 했으니까.

용암 말고는 무엇 하나 보이지 않는 공간 속에서 시간 감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바다를 상상할 때만큼은 마음이 평온해졌다.

"!"

그러나 종종 평온은 깨지곤 했다.

정확하게는.

누군가가 용암의 바다에 발을 들인 순간.

어째서인가.

사이렌은 자신도 모르게 흉포해지고는 했으니까.

어째서일까.

어째서 나는.

뜨겁기만 한 이 공간을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하는 걸까.

그것은 저주와도 같았다.

사이렌은 진심으로 바랐다.

누구라도 좋았다.

죽을 수 없어 살아있는 자신의 숨통을 누구라도 끊어주기를.

그런 사이렌의 귓가에 문득,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무언가를 단호하게 내딛는 소리가.

이상한 일이지.

가본 적이 없는 바다에서도.

용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낯선 소리였다.

바다든 용암이든 내디딜 곳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정말 이상한 일이지.

멀리서 다가오는 형체.

한데 사내는 분명 용암을 걷고 있었다.

풍덩─

본심과 관계없이 사이렌은 암벽 위에서 용암으로 몸을 던졌다.

머릿속에 각인된 사명은 오직 하나.

용암의 바다를 지켜야만 한다는 것.

더욱더 흉포하게 날뛰어야만.

그래야만 누군가 자신을 저주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

그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정말로 이상한 일이지?

"...?"

피부와 비늘이 타들어 갈 정도로.

뜨거워야 할 용암이 뜨겁지 않았다.

아니, 뜨겁지 않은 걸 넘어서 차디찼다.

"...!"

마치 상상 속에서 염원하던.

바다를 헤엄치는 중이라고.

착각하게 될 정도로.

.

.

.

심미(審美).

살필 심.

아름다울 미.

아름다움을 살펴서 찾는다는 뜻이다.

아름다움으로 향하는 길이 화려하든, 험하든, 복잡하든 상관없다.

그랑펠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도달하고 말 테니까.

지금처럼.

[퀘스트 : 용암의 사이렌]

수천 개의 갈림길 중.

단 하나의 길을 목격한 자여.

오직 그대만이 사이렌을 구원할 수 있다.

─용암의 사이렌과 조우하라. (성공)

─용암의 사이렌을 처치하라. (실패)

─용암의 사이렌의 염원을 이루어내라. (진행 중)

물론, 그 고집을 감당해야 하는 나는 상당히 귀찮겠지.

그럼에도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거다.

용암을 바닷물처럼 냉각시키는 억지를 부려서라도.

─용암의 사이렌의 염원을 이루어내라. (성공)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

.

.

제로 산맥 최정상, 용의 둥지.

"...."

노룡(老龍)은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산맥의 심장에서부터 들려오는 아름다운 노랫소리.

사이렌이로군.

"...."

노룡은 생각을 곱씹었다.

과연, 나의 어머니시여.

세계수시여, 당신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이내, 노룡이 거대한 육체를 일으키며 말한다.

"영겁의 잠에서 깨어나라, 동족들이여."

드디어 때가 왔노라.

"여명이 도래했다."

◈ 205화. 운수 좋은 날 (1)

심미가 발현한 위풍당당한 개선문.

이어지는 길의 끝에는 던전의 심장부가 있고.

던전의 보스몹인 사이렌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순수하게 감탄했다.

괜히 [上] 등급의 추가 효과가 아니라는 거구나.

'길찾기 서비스야, 뭐야.'

십만 개의 동굴.

이제 고작 첫 번째 동굴이었거늘.

시작부터 용암의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던 꼴.

막막함에 자괴감에.

현자타임이 찾아올 뻔한 가뭄 속 단비와도 같았으니.

'잘하면 앞으론 솔플도 가능하다는 거잖아?'

결국, 파비앙이나 탐험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나였다.

딱히 파비앙을 꺼릴 이유는 없었지만.

호열 경부터 호열 총사령관님까지.

파비앙이 나를 부르는 호칭은 꺼려지는바.

'하이엘, 디엔드, 귀철도 모자라서 파비앙까지?'

그들의 수다를 듣고 있노라면....

뭘, 클리어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현기증으로 쓰러질지도 모를 것 같았으니까. 심미에 감사하며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나아가던 순간이었다.

[퀘스트 : 용암의 사이렌]

퀘스트가 떠오르더니 지금이었다.

♪♩♬─

울려 퍼지는 사이렌의 청아한 목소리.

디엔드는 드디어 입을 다물었고.

하이엘은 지그시 눈을 감고 감상평을 쏟아냈다.

"듣는 이까지 행복하게 해주는 노래로군요."

과연, 하이엘.

그랑펠의 분신답게 교양에 있어서만큼은 빠지는 구석이 없구나. 물론 클래식 음악과는 담을 쌓은 나, 이호열의 귀에도 감미롭기는 하다.

'그나저나.'

슬그머니 확인하는 마력량.

단숨에 절반이나 써버렸다.

그럴 만도 하다.

'원래 섬세한 조절이 어려운 법이니까.'

무작정 얼려버리는 게 능사가 아니었다.

용암을 바다처럼 차갑게 만드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때문에 절대영도 대신 일반적인 빙결마법을 발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하여튼 그랑펠 고집 한번 들어주기 빡세네.

─용암의 사이렌을 처치하라. (실패)

─용암의 사이렌의 염원을 이루어내라. (성공)

그럼에도 선택지 중에서 아래를 고른 건 잘한 짓 같았다.

그 사정을 모를 때는 몰라도.

알고도 사이렌을 처치하는 건 영 내키지 않는 일이었을 테니까.

무려 800레벨짜리 던전 보스 몬스터.

경험치가 아깝기는 하다만.

몬스터가 사이렌만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래도 경험이 쌓이고 짬밥을 먹어서일까.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던전에 몬스터가 존재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거다.

배경과 설정이 뒤따르는 것도 당연한 거고.

그러나 아르카나가 현실이 된 지금.

아르카나는 코스모, AAU의 영역 밖에 있었다.

AAU가 제공하는 정보에서도 알 수 있듯.

개발 단계에선 콘셉트에 불과하던 것들이 원래부터 존재하던 것처럼.

아르카나 대륙에서 살아서 숨 쉬고 있다는 것. 그들은 단지 균열을 통해 현실에 나타났을 뿐이었다.

'각자가 배경과 설정을 가지고서는.'

그래, 그것이 AAU가.

아르카나는 더 이상 게임이 아니다, 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이유였지.

'사이렌에게도 사연이 있던 거야.'

나는 그런 사이렌을 처치하는 대신.

그 사연에 얽힌 퀘스트를 해결한 거고.

'빡세다. 빡세.'

텟퍼른에서도 느낀 거지만.

어째 그 사연이라는 거 한 번도 쉽게 알려주는 법이 없다.

구시렁거리는 와중,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금을 울리는 노래입니다, 주군."

사연 있는 자들의 동병상련이라는 건가.

먹구름처럼 물기를 머금은 디엔드.

역시나 그랑펠의 분신답게.

못지않게 손이 많이 가는구나, 너도.

'내가 아니면 누가 달래주겠냐, 또.'

하지만 그 전에.

퀘스트 보상부터 확인하자.

[던전 : 용암의 사이렌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던전의 보스인 사이렌을 처치하지 않았건만.

클리어 메시지는 확실하게 떠올랐다.

그 말인즉.

나랑 사이렌은 더 이상 적대 관계가 아니란 거겠지. 다른 플레이어들은 어떨지 모르겠다만, 내게는 사이렌이 시스템상으로 몬스터로 취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뭐, 설명을 덧붙일 것도 없나.

♪♩♬♩♪─

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차가운 용암을 헤엄치는 모습만 봐도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게다가 연달아서 메시지까지 떠올랐다.

[숨겨진 장소 : 용암의 바다에 진입하셨습니다.]

숨겨진 장소.

던전이 그 명칭부터가 바뀐 것이다.

유스라, 프로스트, 뮤온과 같은 지역처럼.

[용암의 사이렌과의 관계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용암의 바다에서의 영향력이 상승합니다.]

[용암의 사이렌과의 우호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연달아 떠오르는 메시지.

추측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군.

해당 지역과의 우호도가 최대치에 도달했다는 건 다르게 말해서.

해당 지역에서 '권한 기능'을 활성화할 수 있다는 뜻.

'잠깐만.'

...이거 경험치를 아까워할 일이 아니었다.

나 지금 제로 산맥 알박기에 성공한 거 아닌가?

십만 동굴 공략은 물론.

산맥 최정상에 도달하기 위한.

전초기지를 세웠단 소리지.

"모든 것은 첫걸음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이번만큼은 한껏 폼을 잡아도 인정이다, 그랑펠.

먼 미래를 생각해 보자.

경험치보다 이쪽 선택지의 보상이 훨씬 나아 보였거든.

'지금이야 내 거품에.... 그것도 아주 풍성한 거품에 가려져서 악마 쪽도 상황 파악을 못 하는 눈치였지만.'

성전에서만큼은.

인류와 아르카나 대륙은 변함없는 열세였다.

나는 그런 상황에서 제3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몬스터를 아군으로 포섭한 것이었다.

'물론, 사이렌만 특이한 경우일 수도 있겠지.'

까놓고 인간과 악연으로 얽힌 몬스터도 얼마든지 존재할 테니까.

그러나 그걸 착각할 염려는 없다.

그래, 내게는 [심미]가 있었으니까.

그냥 길이 열렸을 때만.

퀘스트가 떠올랐을 때만.

따라가면 되는 거잖아?

그러나 말했다시피 쉽지 않은 길이다.

'아니, 막말로 방금 사이렌만 하더라도.'

그 사연을 알게 된다고 해도, 그걸 실현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나부터가 [첫 세계수의 축복]이라는 사기 버프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으니까.

웬만해선 실패할 수밖에 없겠지.

그런 의미에선 나, 대단한 일을 해낸 걸지도...?

"때론 낯선 길의 풍경도 나쁘지 않군."

그러나 긍지 높으신 그랑펠 님께서 자신의 고생을 남에게 생색을 내는 법이 없었으니. 나의 억울함을 알아주는 건 역시 시스템밖에 없구나.

[사이렌의 노래가 당신을 축복합니다.]

[행운이 대폭 상승합니다.]

[남은 시간 : 23시 59분]

'!'

음알못인 내 귓구멍에도 음색이 참 감미롭구나 했더니, 버프였다.

그것도 생전 처음 보는 [행운] 스탯 상승 버프였다.

'대폭 상승이라고?!'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행운] 스탯의 역할은 구체적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행운.

작게는 치명타를 때리고, 회피하게 해준다든가.

크게는 장비 강화를 성공하게 해준다든가.

기껏해야 그 정도에 불과했다는 거지.

하지만 역시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나였다.

왜, 1포인트씩.

[행운]에 적선하듯 투자할 때마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데!

그리고 그런 [행운]을 미신이라고 외면했을 때는?

'갑자기 마왕이 쏟아지질 않나.'

하여튼, 난리가 났지.

그런 의미에서 이건.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메시지였다.

버프의 지속시간은 오늘 단 하루.

남은 하루를 더없이 알차게 보내야 할 이유가 생긴 것.

나는 입을 열었다.

"하이엘, 이곳을 네게 맡기마."

백 마디 말보다 우리 사이엔 텔레파시가 효율적이지.

던전에서 지역이 됐으니까. 지역이라 부를만한 기반이 필요할 터.

당장은 어떻게 발을 디딜 공간부터 만드는 게 우선이었다.

"저 하이엘, 주군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그 역할을 해줄 건 막대한 물을 양분으로 삼아 자라났던 '아쿠아리우 떡갈나무'와 비슷하면서도 정반대. 막대한 열기를 양분으로 삼아 자라나는 '블러디아 관상목'이다.

고오오─

하이엘은 곧장 {자연} 능력을 발현했다.

그러자 용암의 바다.

그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치는 블러디아 관상목들.

관상목답게 화려하네.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지나칠 수 있나.

입에서 그랑펠어가 쏟아진다.

"순수한 땅에 걸맞은 순수한 속내구나."

해석하자면 나무의 줄기가 투명하다는 것이다.

그게 나무 주제에 피와 관련된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유였다. 용암이 뿌리, 줄기, 이파리 곳곳으로 퍼져 나가는 모습이 마치 혈관을 타고 흐르는 혈액 같았거든.

─?

문득, 멈춘 노래.

사이렌이 용암 속에서 얼굴을 반만 내밀고는 자라나는 관상목을 살피고 있다. 놀랄 만도 하다. 실시간으로 울창해지는 게 보일 정도의 성장 속도였으니까.

뭐, 내게는 익숙하지만.

'비약초를 영약으로 키워낸 축복이라고.'

블러디아 관상목쯤이야.

쑥쑥 자라나게 하는 게 당연하지.

어느새 두꺼워진 나뭇가지가 발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안심하고.'

이제, 대폭 상승한 행운의 효과를 제대로 써먹어야 할 시간이 왔군.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역시나 사냥이다.

말했다시피 나는 레벨에 연연하지 않아야 하면서도.

레벨을 올려야만 하는 모순에 빠진 상황이 아니던가.

몸을 돌리자 눈치 없이 펄럭거리는 재킷─

'한참 남은 레벨 제한은 둘째 치더라도.'

[집념]의 효율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레벨을 올려 스탯 포인트를 획득해야 했다.

그러니까 나는 곧장 포탈을 발현했다.

목표 좌표는 제로 산맥.

이제부터.

사연이 없는 몬스터는 두려움에 떨도록 하라.

"따라오너라, 디엔드."

*

어나더 스페이스 호.

지구 위를 공전하는 또 하나의 우주정거장.

대격변 이후.

균열에 대응하기 위해 떠오른 AAU 소속의 우주선이었다. 실시간으로 생성되는 균열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게 바로 어나더 스페이스 덕분이었다.

포착되는 이상 징후 없음─

계기판을 들여다보던 중년 사내.

그는 간만에 한숨을 뱉었다.

이제야 실감이 났다.

"진짜 없는 거구나, 정기 업데이트."

"의심도 많으시지."

"의심? 컴컴한 우주를 떠다니며 지구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없던 의심도 생길 수밖에 없을걸? 난 아직도 가끔씩 의심하거든."

우주에서도 선명하게 내려다보이는 제로 산맥.

어디 선명하게 보인다 뿐인가?

그 최고봉은 우주에서도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높게 솟아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그 꼭대기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어나더 스페이스의 관측 렌즈를 통해 선명히 촬영되어야 하거늘.

"이게 몰래카메라는 아닐까, 하고 말이야. 우리가 렌즈로 보고 있는 게 사실은 다 조작된 영상이 아닐까, 싶다는 거지. 봐봐, 말이 된다고 생각해? 우주에 구름이라니."

우주에 안개라니.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은 덤.

마법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란 것이다.

사내는 장난스럽게 화를 냈다.

"제기랄! 마법이란 걸 내 두 눈으로 직접 보지만 않았어도 절대 인정하지 못했을 텐데. 빌어먹게도, 보고 말았어. 마법을 믿는 과학자라니."

한탄에 여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간만에 활기차신 모습이 보기 좋으시네요. 뭐 레이먼 션이 빌어먹을 놈이긴 해도 여태까지 거짓말은 하지 않았잖아요."

업데이트 내역이 없다면 없다는 것.

내역에 떠오르지 않는 균열이야 문제없다.

기껏해야 적정 레벨 200 이하.

레벨 업에 열이 오른 플레이어들 선에서 금세 클리어되는 게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좋은 날에 너무 신경 쓰지 말자구요."

"윽. 뭔데."

"찜질팩이요."

"이 뜨거운 걸 왜 얼굴에 덮어?"

"제가 대신 들여다보고 있을 테니까. 잠깐이라도 눈 좀 붙이시라고."

사내는 투덜거리면서도 어윽 신음을 흘렸다.

확실히 피로가 가시는 느낌이긴 하네.

그렇게....

사내가 자신도 모르게 짧은 단잠에 빠진 순간이었다.

"서, 선배?"

"응?"

"저기, 저게...!"

"!"

툭─

반사적으로 부릅뜬 눈.

바닥에 떨어진 찜질팩.

다급한 목소리에 직감할 수 있었다.

터졌구나.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가지 가능성.

긴급 업데이트.

그로 인한 균열의 출현.

어나더 스페이스 호의 역할은 단, 일각이라도.

신속하게 지구에 균열의 위치를 포착하고 알리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마법."

그러나 과학을 기반으로 우주에 떠오른 어나더 스페이스 호가 아르카나의 개념을 완벽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했다. 때문에 완전 자동화 시스템은 존재할 수 없었다.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

두 세계의 괴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학자이면서도 마법을 목격한 자신의 몸을 갈아 넣어야만 했다.

"어디냐."

언제 눈을 감았느냐는 것처럼.

사내는 눈을 부릅떴다.

그런 사내의 시선이 계기판을 향했다.

그런데.

"...뭐야?"

포착되는 이상 징후 여전히 없음─

사내는 생각했다.

...진짜 몰래카메라인가?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깨달았다.

"거기가 아니라 저, 저기요...!"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다름 아닌 지구.

그랬다.

제로 산맥 최정상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블랙홀...?!"

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격하게.

균열과는 명백히 다르다.

이건 마치 힘으로, 억지로 공간을 찢는 듯한 광경.

"...!!"

그렇다.

두 사람은 비슷한 것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깨진 차원의 틈] 균열의 출현에서.

"말도 안 돼."

그러나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블랙홀처럼 일그러진 공간.

공간을 향해 활강하는 거대한 형체.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지구에 무전을 보냈다.

"여기는 AAU 어나더 스페이스 호. 제로 산맥 최정상에서 이상 징후 포착. 드래곤이 공간을 찢고.... 아니, 차원을 찢고 활강하기 시작했다!!"

.

.

.

[마안(魔眼)의 망원경].

망원경이 비추는 아르카나 대륙의 풍경.

나는 더없는 배신감에 휩싸였다.

아니, 행운이 대폭 상승했다면서?

드래곤, 엘프, 초월자, 그리고 마왕까지.

그냥 행운이 아니라.

행운의 편지였냐?

이게 갑자기 무슨 난장판인데!

◈ 206화. 운수 좋은 날 (2)

아르카나 대륙.

제국 수도, 안토니움.

상공에 부유 중인 아이언 캐슬 호.

"가끔은 제국의 밀맥주도 나쁘지 않더군."

"가끔? 말은 똑바로 해야지. 수십 년만 아닌가?"

"그런가? 으하하. 그래서 먹을 만했던 거였구만."

몸에 남아있던 제련의 피로감.

밑바닥에 깔렸던 진한 피로까지.

맥주로 흘려보낸 드워프들은 다시금 일과로 복귀했다.

악마들의 활동이 위축된 현재, 최우선 목표는 역시나.

"정찰 편대는 출격을 준비하지."

퀴른베르크 기계탑의 잔해를 찾는 것.

그 역할을 수행하는 건.

아이언 캐슬 호 내부에 탑재된 소형 비행선, '셉터'였다.

각각 셉터에 오르는 드워프 조종사들.

베테랑 조종사, 거너가 장난스럽게 입을 연다.

"근데, 체인워커."

"?"

"이건 음주 비행 아닌가? 으하하."

시답지 않은 농담에 체인워커가 반응한다.

"자네, 어떻게 된 게 맥주가 물보다 연하다고 투덜댔던 게 몇 시간 전이지 않나? 헛소리 그만하고 다녀오게. 슬슬 안토니움에서도 떠나야 할 때가 됐으니까."

호열의 상위 마왕 처치.

그 덕분에 찾아온 아르카나 대륙의 평화.

덕분에 잠시나마 비행을 멈추고 안토니움에 머물던 드워프들이었다.

그러나 성전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사건이 터질지 알 수 없다는 뜻.

"안토니움, 그중에서도 주점 상인들이 서운해하겠군."

"어디 보자, 우리가 올려준 매상이 얼마였지?"

"거너 님, 맹물 같다면서 혼자서 몇 통을 비우셨는지."

"내가 그랬나? 으하하."

월스와일은 허전한 선내를 바라봤다.

드레드센 마을의 생존자, 꼬맹이들이 뛰어다닐 땐 그렇게 정신이 사나울 수 없었는데. 막상 사라지니까 빈자리가 상당히 크게 느껴졌다.

체인워커가 말을 건네왔다.

"떠나기 전에 황제를 만날 생각이네."

"그래? 자네가? 웬일로?"

악크샨의 절멸.

그 후로 인간들과의 교류를 완전히 끊어버린 드워프였다. 제국이라고, 황제라고 예외일 순 없었다.

어찌 본다면 악크샨의 절멸은 영지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제국의 책임이었으니.

"세월이 과거조차 잊게 한 건가, 체인워커?"

월스와일의 물음에 체인워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설령 잊었다고 해도 잊을 수 없네."

악크샨, 그들을 위해서라도 뒤끝은 남겨두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동시에 호열이 있었다.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

체인워커는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봤다.

"그렇기에 고집을 꺾고 만나겠다는 걸세."

호열 경.

그대라면 분명 안토니움을, 제국에게 등을 돌리지 않았겠지. 때문에 체인워커는 정찰에서 수집한 정보를 황제에게 직접 전달할 생각이었다.

"과거에서 교훈을 얻었다면 우리의 말을 새겨듣지 않겠나."

.

.

.

위잉─

셉터 호가 하늘을 활강했다.

소형 비행선의 크기는 마차보다도 작았다.

조종석의 크기 또한 드워프 맞춤으로, 드레드센의 꼬맹이들이나 간신히 탑승할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다.

"보자. 잔해가...."

아담한 셉터 호여도 그래도 있을 건 전부 있었다.

드높은 상공에서 대륙에 널브러진 기계탑의 잔해를 찾아낼 정도의 기술력. 드워프 기술력의 집약체인 아이언 캐슬 호, 그 일부가 셉터 호였으니 무리는 아니지.

"?"

그런 셉터 호가 이상 신호를 감지했다.

거칠게 요동치는 마력 감응 계기판.

거너의 얼굴에 순간 긴장이 서렸다.

"...최대치라고?"

최대치에 도달한 것도 모자라서.

계기판을 뚫고 나갈 듯 좌우로 흔들리고 있다.

이 정도의 마력 감응력이라면 분명 원인이 있을 터.

거너는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급격하게 하늘에 드리우는 먹구름.

번쩍─

"갑자기 벼락...?"

쿠르릉!

"이런 빌어 처먹을 날씨가 있나!"

셉터보다도 수백, 수천 배는 커다란 아이언 캐슬 호조차도 악천후 속에서의 비행은 자유롭지 못했다.

비도 모자라서 천둥 벼락이 내리치는 날에 셉터를 타고 하늘을 누빈다?

자살행위, 다른 말로는.

"드워프식 자연사겠구만, 이건."

이미 아이언 캐슬 호로부터 멀리 떨어진 상황이다.

번쩍─

지금부터 부지런히 비행해도 무사히 복귀하란 법이 없을 정도로.

하늘에선 요란하게 벼락이 내리쳤다.

그러나 거너는 조종대를 돌리지 않았다.

"하늘아, 내가 이대로 물러설 것 같으냐?"

성전(聖戰)에서의 경험이 있었다.

정보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악크샨, 그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기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채.

그들의 최후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으니.

"벼락? 피하면 그만이지."

선언한 순간에도 요동치는 계기판.

근원을 찾기 전까지는 아이언 캐슬 호 조종대를 돌리지 않겠노라.

거너는 멈추지 않고 셉터를 조종했다.

그리고 목격했다.

"...!"

모험가들의 세계로 옮겨간 제로 산맥.

덕분에 생겨난 광활한 평지.

그곳에 모습을 드러낸 존재들을.

"저, 저건!"

기계탑의 잔해까지도 살펴볼 수 있는 셉터 호의 성능이다.

그렇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뾰족하게 솟아오른 귀.

"...엘프?"

엘프, 그것도 하나둘이 아니었다.

여태까지 대륙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존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려 일백(一百)에 가까운 엘프가 무리 지어 평지에 기립해 있었다.

"저들이 어째서?"

이런 장소에 모여있단 말인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우려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거너는 마른침을 삼키고 조종대를 세게 붙잡았다.

'더 늦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머리가 외치고 있었지만 외면했다.

그러나 드워프 특유의 쇠고집도 오래갈 순 없었다.

반짝─

시야를 건드리는 빛.

처음에는 벼락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

벼락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하지만 지금의 섬광은 땅에서부터 하늘로.

정확히는 자신을, 셉터 호를 향해 뻗어져 왔으니까.

찰나의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내 존재를 알아차렸다!'

끼릭!

경악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조종대를 틀었다.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가는 섬광.

그 잔향이 뒤늦게 고막을 강타했다.

지이이이잉─!

"!"

아이언 캐슬 호 마력사출포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굉음.

그러나 지금의 섬광은 그리 거창한 게 아니었다.

거너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고, 고작 화살에 불과했단 말이다!'

피한 게 기적으로 말 그대로 천운(天運).

"벼락은 피해도 저런 건!"

끼리릭!

거너는 다급하게 조종대를 돌렸다.

엘프가 어째서 단체 행동에 돌입했는지.

그 이유는 알아낼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명확하게 알아냈다.

"누구든 가리지 않는다는 거군."

자신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자에겐 고민할 필요도 없이 활시위를 당긴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드워프들에겐 귀중한 정보였다. 제국에게도, 호열에게도 마찬가지겠지.

쿠르릉─!!

"젠장,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쏟아지는 뇌우 속.

아이언 캐슬 호에 무사복귀 한 거너가 중얼거렸다. 곧장 체인워커에 달려가니, 이미 몇몇 드워프 조종사들이 심각한 얼굴로 대화에 한창이었다.

"체인워커. 그리고 다들 할 말이 있네."

엘프의 등장이야말로 그 어떤 소식보다 중요한 정보일 터.

그렇게 생각하고 입을 열었건만.

아니었다.

가까워질수록 또렷해지는 대화 소리.

"악마, 그 기운은 틀림없이 마왕급이었습니다."

"마왕이라고? 이런 미친...!!"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빌어먹게도 나 또한 목격하고 말았네."

"목격? 무엇을 말인가?"

"자네는 몰라도. 체인워커, 그대는 기억하고 있을걸세. 과거, 우리들의 왕께서 살아계실 적. 우리의 왕국에 찾아온 인간 사내 한 명을."

체인워커가 흠칫하여 되물었다.

"악크샨은 아닐 테고.... 설마, 우르스를 말하는 겐가?"

"맞네. 우리에게서 기계 팔을 얻어간 그 사내. 그 기계 팔이네. 그건 틀림없이 철완의 우르스였네! 그 작자가 아르카나 대륙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어!"

"맙소사."

맙소사라니, 체인워커.

"...이보게,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아, 거너. 그대도 무사히 복귀했는가?"

"체인워커, 방금 내가 들은 말들이 전부 사실인가? 악마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철완의 우르스가 다시금 아르카나 대륙에 모습을 나타냈다고?"

"그래, 들은 그대로네."

"젠장,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거너가 이내 말을 이었다.

"나는 엘프를 목격했네. 그것도 일백(一百)씩이나."

"...!!!"

거너가 탄식 섞인 안도를 뱉어냈다.

"빌어먹을, 다들 살아서 돌아온 게 천운이구만."

*

엄밀하게 따져볼까?

이게 정말 대폭 상승한 행운의 효과가 맞는지 말이야.

일단, [마안(魔眼)의 망원경].

마왕의 전리품을 인벤토리에 챙겨온 건 희소식이 분명했다.

마왕급 악마.

엘프.

초월자.

망원경이 아니었다면 까맣게 몰랐을 테니까.

그래, 좋게좋게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사건이 터진 걸 시기적절하게 알게 됐으니까.

애써 행운 덕분이라고 생각해 본다.

그런데.

진동하는 스마트폰.

AAU 측에서 도착한 재난 문자.

그와 동시에 플레이어에게만 발신되는 문자까지.

거기엔 분명 그 단어가 적혀있었다.

'드래곤'이라고.

드래곤이 제로 산맥 최정상에서 포착됐다고.

나는 산맥 최정상을 향해 읊조렸다.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조심성이 깊구나."

그랑펠어를 번역하자면.

기척도 없이 언제, 어디로, 날아갔느냐는 말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지구를 박살 내려고 들지는 않아서 말이야.

'게다가 AAU가 관측한 정보에 따르면.'

제로 산맥 최정상에서.

[깨진 차원의 틈] 균열과 유사한 현상이 포착됐다고 했겠다.

그쯤에서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드래곤은 균열을 열 수 있는 건가?'

불완전하지만 아르카나 대륙과 통하는 균열을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니까....

정말로 행운의 편지에 당한 기분이다!

악마에 엘프에 초월자에 화룡점정으로 드래곤까지.

말 그대로 전례 없던 초대형 사건이잖아, 이거?!

'이대로면 균열이 생성될 수밖에 없다.'

긴급 업데이트로든, 정기 업데이트로든.

장담할 수 있었다.

현재 나의 전력은 물론이거니와 성전에 참전한 아군의 전력을 전부 규합한다고 한들. 저 사이에선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기밖에 되지 않을 거라고.

드래곤과 엘프는 말할 것도 없겠지?

그나마 만만한 게 악마와 초월자였거늘.

어째 그 둘조차 범상치 않았으니까.

나는 다시금 망원경을 들여다봤다.

망원경의 효과는 마안의 시야를 공유하는 것이다.

느끼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마안의 감각이 느껴진다는 뜻.

그렇기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보통 악마가 아니야.'

마안이 전율하고 있었다.

이런 건 마왕을 엿볼 때도 느낄 수 없던 반응이거늘. 상위 마왕은 모르겠다만, 서열 30위에 육박하는 중위 마왕들을 볼 때도 느낄 수 없던 반응이란 말이다.

게다가.

'하지만 마왕과는 다르다.'

외관상으로는 악마보다는 인간에 가까웠다.

노골적인 악기(惡氣)가 아니라면 악마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마지막으로.

'엘프를 앞에 두고도 주눅이 든 기색이 없어.'

엘프의 강함?

몇 번이나 강조하지만 엘시도어를 보면 알 수 있었다.

800~900레벨에 육박하는 악마를 단칼에 도륙 낸 것으로도 모자라 그림자 용병단원, 락키드에게 치명상을 입혔던 엘시도어였다. 그런 엘프가 무려 백(百).

그렇다면 역시 가능성은 하나뿐이겠지.

"거악."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구나, 거악(巨惡).

진짜로!

거악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한 일인데.

거악도 모자라 엘프, 저들과 같은 공간에 초월자가 있었다.

어떻게 초월자인 걸 알아볼 수 있었냐고?

정확히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시공간의 사교장에서 마주쳤던 얼굴이었으니까.

'나한테 큰 관심이 없던 두 사람 중 하나였다.'

남녀 각각 한 명.

『사교계에서 그랑펠의 존재는 사막의 오아시스 혹은 신기루와 같았다. 사교 자리를 즐기지 않았기에 모습을 드러내는 날은 많지 않았거늘. 홀연히 등장하는 날에는 모든 이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말았으니....』

사교장에서 그랑펠에게 시선을 빼앗기지 않았다는 것?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뭣하지만.

초월자 중에서도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거겠지.

커다란 골격.

아무렇게나 기른 덥수룩한 머리카락.

사실 외관으로도 평범한 축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무엇보다 큰 특징은 그 양팔이 기계로 되어있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이렇게 보자마자 알아차릴 수 있었고.

뭐, 어찌 됐든 다들 나타난 건 좋다 이거야.

'그래서 다들 이유가 뭔데?'

문제는 그 목적이다.

'가만히 있다가 왜 그러는 거냐고!'

그랑펠의 성격 같았으면.

다짜고짜 포탈을 발현.

저 사이로 순간이동 하고도 남을 정도의 답답함이다, 이건!

"기이여. 이런 상황에서도 나의 발목을 붙잡는 것인가."

봐봐, 아르카나 대륙으로 갈 방법만 있었다면.

겁도 없이 저기로 달려갔을 거라니까?

내가 아는 그랑펠은.

그런 의미에서는 방법이 없어서 안도해야 하는 건가....

가출하려던 어이를 붙잡고 차분하게 생각해 본다.

'일단, 상황을 전하는 게 최우선이다.'

아르카나 대륙에 있는 이들에게 사실을 알려야 할 터.

그래야 어떤 식으로든 대비책을 세울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이쪽 상황도 크게 여유로울 건 없다.

'시간의 흐름을 생각하면....'

무려 4배나 빠른 아르카나 대륙의 시간.

당장 저 장소에서 사건이 터지고.

몇 시간 뒤.

현실에 균열이 생성돼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겠지.

나는 입을 열었다.

"디엔드."

"명을 내려주십시오, 주군."

"내 생각을 체인워커에게 전하도록 하여라."

텔레파시를 통해 전하는 머릿속의 정보.

이내, 디엔드가 명령대로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러더니 다시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주군."

과연,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는 게 체감이 된다.

찰나처럼 느껴지는 시간에 체인워커에게 소식을 전하고, 그쪽의 소식까지 가져오다니. 그나저나.... 이어지는 디엔드의 말에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드워프들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거기까진 그냥 다행이구나, 싶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체인워커라면 미리미리.

대비책을 세우고 있을 테니까.

경악한 이유는 지금부터다.

"또한 황제가 이끄는 제국군이 곧장 출정을 떠났다고 합니다. 행선지는 제로 산맥 인근으로, 그 목적은 마을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함. 드레드센을 구원한 주군의 긍지에 따르기 위함이랍니다...!"

...감격에 겨워 말하지 마라, 디엔드.

나는 지금 진심으로.

머리가 깨질 것처럼 어지러우니까.

거악, 초월자, 엘프, 드래곤, 이젠 제국까지?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행운이 아니다.

행운의 편지가 확실하다고.

그러나 나는 담담하게 읊조렸다.

"그런가."

그랬다.

내가 번뇌하는 와중에도.

아르카나 대륙의 시간은 4배속으로 흐르는바.

이제부터 나는 최선의 판단을.

4배속으로 내려야만 한다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곧장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가서 전해라."

이런 상황에서도.

더없이 나답게.

뻔뻔하게.

"내가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이제부터 뱉은 말을 실현할 시간이다, 그랑펠.

◈ 207화. 운수 좋은 날 (3)

제국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다.

황제는 찰나의 평화 속에서 판단했다.

수도성, 안토니움만 하더라도 그렇다.

제국 영토 대다수가 파괴된 지금 추가적인 식량 조달은 없다. 당분간은 제국의 창고에 저장된 식량으로 버텨낸다고 하더라도 그 후에는....

"그런가.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때문에 드워프의 지도자, 체인워커에게 소식을 전해 들었음에도.

황제는 동요하지 않았다.

언제라도 각오하고 있던 덕분이겠지.

"대신들은 들어라."

황제는 신하들 앞에서 선언했다.

"그대들이 알고 있던 찬란한 제국은 무너진 지 오래다. 악마와의 전쟁으로, 부끄러운 내전으로. 우리의 제국은 붕괴 직전까지 내몰린 상황이다."

"...!"

황제 폐하께서 스스로 저런 말씀을 하실 줄이야.

신하된 자로서 면목이 없었다.

고개를 숙인 이들에게 황제의 말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오늘까지 제국이 무너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안토니움의 백성이 짧게나마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은 누구의 덕분인가?"

아첨하기 좋아하는 간신이 있었다면.

이쯤에서 황제 폐하의 이름을 부르짖었겠지.

그러나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제국이다.

아첨할 간신배들은 남아있지 않았다.

누군가 답한다.

"한없이 깊은 어둠 속 한 줄기 빛 덕분입니다."

그 대답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모험가, 이호열 경 덕분이다."

모험가들의 세계에서 검성, 셰그윈을 비롯한 반군 연합을 안토니움에서 퇴각하게 한 그였다.

황제의 음성이 더욱더 결연해졌다.

"그는 황제인 나를, 제국의 수도인 안토니움을 특별히 여겨 구원한 게 아니다. 부끄럽게도 나는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변두리 영지, 드레드센 또한 구원해 냈으니까. 그렇다. 모험가가 황제인 나조차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다는 것이다."

드레드센 마을 생존자들을 통해 퍼진 호열의 영웅담.

황제는 그 일련의 경험에서 깨달았다.

"그는 어떠한 시련에도 물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양보하지 않은 것이다. 합리화하지 않은 것이다. 타협하지 않은 것이다. 끝까지 자신의 긍지를 관철한 것이다."

나는 황제다.

나야말로 제국의 중심이기에 결코 휘청거려서는 안 된다.

황제의 자리를 핑계로 도피해 온 자신과는 다르게.

하지만 깨닫게 된 지금.

황제에겐 더 이상 물러설 생각 따윈 없었다.

다그닥─

갑옷도 모자라 투구까지 착용한 황제가 기병들 앞에 섰다.

모인 병력은 대략 오천(五千).

안토니움에서 용맹하기로 손꼽히는 병사들을 추려낸 것이었다.

황제는 가감 없이 말했다.

"오늘 우리는 사지(死地)로 돌격할 것이다."

그래, 말 그대로 죽음의 땅이리라.

자신들에게 방해되는 존재라면, 누구에게든 다짜고짜 살의를 드러낸다는 엘프 무리.

과거, 아르카나 대륙을 공포에 떨게 한 미치광이 철완의 우르스.

그리고 다시금 활동을 시작한 것인가.

마왕, 이상으로 악기(惡氣)를 내뿜는다는 악마까지.

그런 전장에서 기껏해야 5천의 제국 병사들?

드워프들의 말을 빌리자면....

정말, 엘프의 화살 한 방에 전멸할 수도 있겠지.

그럼에도 황제는 물러설 수 없었다.

"그곳에 나의 백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더는 외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니까.

목적지는 제로 산맥 인근의 소도시, 폴스타.

현재 생존 중인 백성의 수는 대략 삼천 남짓.

삼천이라, 절대 적지 않은 숫자였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말하겠지.

대를 위해서는 소를 희생해야 할 때도 있지 않으냐고.

고작 작은 도시 하나에 황제가 움직일 필요가 있느냐고.

그자를 비난하지 않겠다.

자신조차도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었으니.

그러나 그것은 계산의 영역이다.

"내 사전에 저울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긍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대들은 두려운가?"

황제가 묻는다.

"아닙니다, 폐하─!"

사기충천한 대답이 이어진다.

안토니움에서 병사로서 생존한 이들이야말로 무수한 생사의 고비를 넘어왔을 터.

거기에 황제가 진두지휘하는 지금. 사지로 향하는 병사들의 기세는 오히려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다그닥─

출정.

안토니움을 떠나는 황제.

제국 최고위 마법사, 내쉬 윌리엄은 각오를 다졌다.

"폐하, 저도 원정에 함께하겠습니다."

형님과 다르게 마탑에 입성조차 하지 못한 자신이다.

합류한다고 하더라도 아주 큰 도움은 되지 못하겠지.

그럼에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런 내쉬에게 황제는 대꾸했다.

"불허한다."

"...네?"

"내쉬, 그대는 안토니움을 지키는 방패다."

"...!"

"그대라는 방패로 고작 나를 지킬 생각은 없다."

감동적인 말씀이었거늘, 내쉬는 내쉬였다.

형님, 저는 정말 폐하의 신뢰를 받고 있는 게 맞을까요?

제 능력이 부족해서 써주시지 않는 건 아닐까요?

결국, 반신반의하면서도 대답했다.

"...내쉬 윌리엄, 폐하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

망원경이 비추는 풍경.

디엔드가 전해 온 소식대로였다.

정말, 황제가 직접 이끄는 제국군이 난장판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책임져라, 그랑펠.

전부 너한테 물든 덕분이잖아!

'전염병도 아니고, 뭔데, 진짜.'

그렇다.

이번에도 긍지가 문제였다.

솔직하게 긍지가 넘치는 행보이긴 하다.

혹시라도 백성들이 위험에 처할까 봐.

직접 병력을 이끌고 나서는 황제라니.

좀 감동이네.

"그대도 비로소 깨달은 것인가."

...아무리 그래도.

제국의 황제를 아랫사람 대하듯 말하지 마라, 그랑펠.

게다가 마냥 흡족해할 일이 아니라고, 이건!

왜, 아까도 말했었잖아?

절대적인 열세.

아르카나 대륙 최강의 무력 집단이라 불리는 마탑을 비롯.

온갖 강자들이 합류한 이쪽의 연합군조차도 열세란 말이다.

제국이라고 다를까.

심지어 황제의 검이나 다름없는 라이언 하트 기사단조차도.

이곳, 현실에 떨어진 상황이란 말이다.

'이런 말까지 하긴 싫지만.'

제국은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없다.

누구 하나의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하는 순간엔 황제를 포함.

전원이 전멸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겠지.

이 절망스런 상황에서 잘도 입을 털었구나, 그랑펠.

'내가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니!'

일단, 나의 최선을 떠올려본다.

말했다시피 내가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는 방법은 없었다. [만물과 통하는 지도]의 효과를 아껴뒀다면 모를까. 그 효과는 상실한 지 오래전이었으니까.

'현재 마법부여학 수준으론 복구도 불가능해.'

그렇다면.

나와 달리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디엔드.

그리고 하이엘을 통하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건데.

'그것도 한계가 있어.'

{고유 정령}, 하이엘.

어둠의 정령, 디엔드.

정령 중에서도 강한 축에 속하는 둘이라고는 해도.

저 난장판 속에서 활약할 수 있으리라곤 기대하지 않는다.

물론, 하이엘과 디엔드야.

여러모로.

내 상상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니까.

'제국군을 보호하는 데까진 성공한다고 치자고.'

그런데.

황제와 제국군.

그리고 폴스타의 백성까지 구원한다고 해서 이 대형사건이 끝나는 게 아니잖아? 내가 원하는 건 저 난장판이 균열을 통해 현실로 넘어오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일단락을 짓는 거란 말이다.

"디엔드. 주군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일단, 디엔드를 제국군에게 합류시키는 건 바뀌지 않는 선택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거악, 엘프, 초월자라는 건데....

그나마 다행인 건 초월자의 정체라도 알아낸 건가.

"그대가 바로 소문의 우르스였군."

『철완의 우르스』.

알려진 것만으로 수십 개의 영약을 섭취했다는 서적 속의 인물.

그 덥수룩한 머리칼의 사내가 우르스였다니.

영약을 큰 부작용 없이 섭취할 수 있는 타고난 체질 덕분에 초월자가 되고, 정말로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되어 기나긴 세월을 살아온 거겠지.

'그런 반응도 이해가 되네.'

긴 세월을 살며 볼 꼴, 못 볼 꼴을 다 보고 살아왔을 테니까.

내가 사교장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든, 유난을 떨든, 뭐든.

큰 관심이 없던 거겠지.

'그런 우르스가 움직였다라....'

이유는 모르겠다만, 제발 서로들 시비만 붙지 않기만을 바란다.

하여튼, 자각이 없다.

당신들은 전부 다 거물이라니까? 작은 다툼이 일어나도 곧바로 대형사건. [전장] 균열이 생성되고, 긴급 업데이트가 떠오를 수도 있단 말이다.

하지만 나의 절박한 속내와 달리.

입에선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으니.

"차라리 그편이 나을지도 모르겠군."

...이봐요, 그랑펠 씨.

듣는 사람 없다고 막말하기야?

그러나 드높은 긍지께서 내 눈치를 볼 리가 있나.

"아니, 그편이 옳겠구나. 내가 그대들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닌, 그대들이 나를 찾아오는 것이 순리일 테니까."

...진짜 미쳤나 봐!

하여튼 우리 위대한 가문 후계자님의 콧대 한번 높으시다.

거악이든, 엘프든, 우르스든, 주눅이 드는 법이 없다.

그야말로 항상의 자세다.

그런데.

"...!"

덕분인가.

급박한 상황에서도 언제나처럼 냉철한 머리.

덕분에 나는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 나와 악마 사이의 천적관계.

그걸 뛰어넘는 '또 하나의 천적관계'를...!

[축복의 위계질서].

완전히 다른 두 세계.

아르카나 대륙이 아닌 현실에 묶여있는 나였다.

마찬가지로 현실의 엘시도어에게는 [축복의 위계질서]를 들먹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아르카나 대륙에 있는 엘프들에게 위계질서의 효과를 바랄 순 없다는 뜻.

하지만 말이야.

[첫 세계수의 축복].

그거 나만 받은 게 아니거든.

그랬다.

세계수의 축복을 받고 '격'까지 상승한 존재가 있었으니까.

나는 지체하지 않았다.

곧장, 그 이름을 불렀다.

"하이엘."

*

태초의 산맥.

제로 산맥조차 아르카나 대륙에서 모습을 감추다니.

아젠트레스는 입술을 짓이겨 물었다.

"이런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아젠트레스는 동족들을 바라보았다.

가엾게도 어머니의 축복을 상실한 이들.

더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게 됐다.

모두가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젠트레스에게 엘프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송구합니다, 로드. 놓치고 말았습니다."

상공에서 느껴지던 불순한 시선─

그 형편없는 고철 덩어리는 드워프 놈들의 것이었겠지.

짤막한 몸뚱이를 화살로 꿰어버리라고 명령했건만.

기껏해야 이 정도 거리에서 화살이 빗나갈 줄이야.

'천운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아젠트레스는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니다."

그래, 모든 책임은 어머니.

우리에게서 축복을 앗아간 아둔한 세계수여.

그대에게 있는 것일 테니까.

저벅─

"어떻게 고민은 끝난 건가?"

아젠트레스는 자신에게 다가온 존재를 바라보았다.

외관은 틀림없이 인간.

그러나 '존재'라고 칭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지독한 악취.

그건 인간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뭘 그리 노려보는 거지? 그쪽들이 원하는 건 간단하잖아, 영생! 밥상은 내가 저쪽에 깔끔하게 차려놨다니까. 솟구치는 '식탐'에 솔직해지기만 하면 된다고."

시슬리에서 아르카나 대륙으로 첫걸음을 내디디며 수많은 악마와 만났던 아젠트레스와 엘프들이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악마는 그들과 무언가 달랐다.

인간도, 악마도 아닌.

제3자.

엘프의 시선에서 바라봤을 때.

'다르다.'

아젠트레스는 대륙에서 참살한 악마들을 떠올렸다.

악마는 하나같이 멍청하며 저열했다.

인간보다 무식한 존재가 바로 악마였다.

왜냐고?

-"제, 제발 목숨만은...!!"

인간들은 자신들에게 목숨을 구걸했지만.

-"엘프? 썩 괜찮은 몸뚱이구나."

악마들은 주제도 모른 채 되려 달려들었으니.

그런 의미에서 눈앞에 악마는 달랐다.

무엇보다 머리를 쓸 줄 알았다.

-"악마라고 다 같은 악마가 아니라고 그러네. 나는 결이 조금 다른 악마라니까? 누구보다 당신네의 심정을 나는 잘 알고 있지."

-"?"

-"나도 영겁을 살아왔거든. 좀 복잡한 존재라서."

칠죄종.

악마는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다.

그러고는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칠총사 중 누군지는, 어차피 그쪽도 관심 없을 테니까. 소개는 생략하지. 내가 제안하는 건 하나. 단지 선택지 하나를 소개하려는 것뿐이니까."

그리고 지금이었다.

"간단하지? 타락하면 영생을 되찾을 수 있다."

아젠트레스는 그 이야기를 무시할 수 없었다.

엘프인 자신부터가 영겁의 존재였다.

덕분에 상대가 정말로 영겁을 살아온 존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쿠릉!

아젠트레스는 뇌우가 몰아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마치 나를 책망하는 것 같군요, 아둔한 어머니시여.

작게 읊조렸다.

"그러나 잘못된 선택은...."

아젠트레스의 안광이 번뜩였다.

"당신께서 먼저 내리시지 않았습니까?"

생기를 잃어가는 몸을 바라본다.

칠죄종에게서 제안을 들었을 때부터.

내렸던 결정은 단 한 순간도 바뀌지 않았다.

먹겠다.

"좋아요. 다들 제가 차린 식사가 마음에 드시길 바랍니다."

칠죄종은 그렇게 말하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메뉴명은 '폴스타'입니다. 부디 즐겨주시길."

저벅저벅─

아젠트레스와 엘프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보잘 것 없는 인간의 마을이었다.

이제 와서 낌새를 알아차리고 도망친다고 하더라도 무의미한 짓에 불과했으니까.

칠죄종이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예상치 못한 애피타이저까지 도착한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죠? 뭐, 우리 손님들에게 저 정도쯤이야. 한 입 거리도 되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다그닥─

들려오는 건 말발굽 소리.

아젠트레스는 입을 열었다.

"식탐은 죄악이다. 넘치는 것은 버려라."

타락?

착각하지 말 거라.

우리는 그저 악마의 힘을 이용하는 것뿐이니까.

그 말에 칠죄종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찰나였다.

"이전의 실수를 만회하겠습니다."

끼긱─!

곧장 활시위를 당기는 엘프.

과연, 수천의 병사를 한 입 거리라 표현한 이유가 있었다.

화살촉에서 일렁이는 것은 걷잡을 수 없는 마력.

그러나.

"...?"

당겨진 활시위가 놓이는 일은 없었다.

엘프와 폴스타의 제국군.

그 사이에 모습을 드러낸 작디작은 무언가.

그것은 더없이 고아했다.

'정령왕.... 아니, 그 이상.'

아젠트레스마저 착각하게 할 정도로.

우아한 외관을 뽐내는 정령.

그 정령이 곧, 입을 열었다.

"나, 하이엘이 주군의 명에 따라 명한다."

마치 '누구'처럼 더없이 차가운 음성으로.

"축복의 위계질서에 따라."

"...?"

"멈추어라."

"...!!!"

그러자 아젠트레스와 일백(一百)의 엘프가 정지했다.

◈ 208화. 운수 좋은 날 (4)

아젠트레스는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았다.

손과 발이 거칠게 떨리고 있었다.

움직여 보려 필사적으로 힘을 주어봤거늘.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젠트레스 님...?"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동족, 모두가 자리에 멈춰서 움직일 수 없었다.

심지어는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엘프조차도.

'저건 대체.'

아젠트레스의 시선이 하이엘을 향했다.

처음에는 정령왕이라고 생각했다.

감히 나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는 정령은 정령의 왕, 그대들밖에 없을 테니까. 그러나 의문이었다. 정령왕이 어찌하여 대륙의 일에 신경을 쓴단 말인가?

다행히도 착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 하이엘이 주군의 명에 따라 명한다."

...주군이라고?

괜히 왕이란 칭호가 붙는 게 아니다.

진정으로 군림하는 존재이기에 왕이란 말이다.

그런데, 풍겨오는 기세로만 보자면.

정령왕보다도 상위 존재일지 모르는 저 정령에게.

진정으로 섬기는 주군이 있다는 말인가?

'대륙에 그런 존재가 있을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다고.

애써 내린 판단은 또 한 번 어긋났다.

아젠트레스의 동공이 확대됐다.

-"축복의 위계질서에 따라 멈추어라."

축복의 위계질서...?

그 어떤 마법도, 정령의 자연 능력도 감히 자신들의 몸을 옥죄어 올 순 없다. 틀림없다. 저 말대로 이건 아둔한 우리의 어머니, 세계수의 힘이다.

"어라라라."

악취가 느껴진다.

칠죄종, 악마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알을 굴린다.

감히 이 몸의 눈앞에서 이리저리 손을 흔들어댄다.

"이야, 이거 진짜로 멈춰버리셨네요? 우리 콧대 높으신 손님들께서 이렇게 순순히 멈추란 소리에 따를 리는 없겠고...."

사악하게 입꼬리를 올려 보인다.

"뭔진 몰라도 잡힌 거구나. 약점."

나를, 엘프를 능멸하다니.

마음 같아서는 식사고, 거래고, 영생이고.

다 때려치우고 녀석의 목을 절단하고 싶었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었다.

"너는 누구냐."

하이엘을 향해 간신히 말을 잇는 게 고작이었으니.

그러나 짧은 한마디에 담긴 살의는 더없이 흉흉했다.

거악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이야, 이래서는 누가 악마인지 모르겠네."

그러나 호열의 분신이다.

작디작은 몸집을 가진 하이엘이었거늘,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다.

더없이 올곧은 자세며 더없이 한결같은 표정까지.

하이엘은 답했다.

"나의 주군께서는 질문을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

"그대에게 물을 자격은 없다."

정확히는 받아쳤다.

"감히...."

더욱더 거세지는 아젠트레스의 살기.

그건 깔깔거리던 거악조차 눈치를 보게 하는 수준이었다.

허나, 되돌아오는 것은 여전히 고고한 하이엘의 목소리뿐.

"엘프여, 그대는 어째서 거악과 마주했는가."

"!!"

그 질문엔 아젠트레스는 물론, 거악까지 흠칫했다.

그들의 시선에서, 하이엘은 조금 전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었으니까. 식사에 관한 것은 물론, 거악이라는 자신의 정체를 단번에 파악하다니.

"씁. 오래 살았어도 유명인사까진 아닌데 말이야."

그런 하이엘의 비범함은 거악조차도 경계하게 할 정도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신경이 쓰이는 건.

저런 말도 안 되는 정령에게 섬기는 주군이 존재한다는 것.

'어디냐.'

아젠트레스는 감각을 일깨웠다.

분명, 주군이라는 자가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을 터.

드높은 상공의 드워프조차 알아차렸던 엘프의 감각이다.

그 신경을 한껏 곤두세웠건만.

'없다.'

언제나처럼 하늘에 뜬 마안(魔眼)뿐.

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이엘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나의 주군께선 잡생각 또한 허가하지 않으셨다."

말이 떨어지는 순간, 사라지는 잡념.

"주군의 질문에 답하라."

자신도 모르게 벌어지는 입.

"...영생을 되찾기 위함이었다."

굴욕이다.

할 수만 있다면.

이런 말을 내뱉은 자신의 혀를 잘라버리고 싶을 정도의 치욕이다.

하지만 덕분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대들은 헛된 것을 쫓았구나."

"...?"

"그대가 갈망하는 세계수의 축복은 나의 주군께서 거머쥐고 계시니까."

그랬구나.

그 주군이란 놈이야말로.

우리에게서 어머니의 축복을 앗아간 존재로구나.

아젠트레스는 그 순간, 판단을 내렸다.

세계수의 축복의 행방을 알게 된 이상.

더 이상 악마의 힘은 필요치 않았다.

'녀석을 어떻게 해서든 찾아내면 되는 일이다.'

지금까지 어떻게 모습을 숨기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만.

결국, 아르카나 대륙에 있을 터.

대륙 전역을 샅샅이 뒤지는 수고쯤이야 감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잠깐만, 장사 방해는 이야기가 조금 다른데."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을 거악.

칠죄종, 식탐이 아니었다.

목적 달성이 코앞에 있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정령 하나 때문에 모든 게 틀어진다고?

"유감이지만, 손님 여러분."

엘프를 향하는 식탐의 눈매.

"허가되지 않는 메뉴는 폐기 예정입니다."

그러니까 잔머리 굴리지 말고 똑똑히 지켜보라고.

식탐은 악취를 흘리며 하이엘에게 다가갔다.

찢어진 것처럼 흉측하게 벌어지는 주둥이.

인간의 가죽에 가려져 있던 거악의 본질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 규율이라는 거 나한테는 효과가 없는 모양이니까."

세계수라니.

나는, 내 형제들은.

그런 어머니 둔 적이 없거든.

"...?"

그러나 식탐은 하이엘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식탐의 앞을 누군가가 가로막았으니까.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우르스였다.

철컥─

우르스가 철완을 들어 올렸다.

식탐은 멈칫했다.

'인간?'

그러나 느껴지는 기운은 인간을 초월한 것이었다.

설마, 이 녀석도 셰그윈과 같은 초월자인가?

아젠트레스도 흠칫한 건 마찬가지였다.

'...내가 놓쳤다?'

신경을 곤두세웠을 때.

우르스는 틀림없이 감각의 반경 안에 있었다.

그럼에도 놓쳤다는 건.

사내가 의도적으로 기척을 죽였다 것.

목적이 있는 난입이라는 뜻이었다.

엘프, 거악, 초월자.

드디어 서로가 마주한 순간.

우르스는 입을 열었다.

"엘프든 정령이든 누구든 좋다."

이어지는 말에 아젠트레스는 다시금 확신했다.

"부디 내게 세계수의 위치를 털어놓아라."

아무래도 모조리 도륙을 내야겠다고.

*

[마안(魔眼)의 망원경]을 들여다본다.

난장판이 기어코 개판이 됐구나.

엘프야 [축복의 위계질서]로 제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거악하고, 우르스는 내가 어찌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다행이다.

'고생했다, 디엔드.'

황제가 이끄는 제국군.

그들이 폴스타의 주민을 구출해 안토니움으로 고삐를 돌리는 데까진 성공했으니까. 일단, 거악의 계획 하나는 막아낸 셈이였으니까.

그나저나 진심으로 치졸들 하시군.

'다들 이름값 좀 하면 덧이라도 나는 거냐고.'

그런 의미에선 잘하고 있다, 하이엘.

정말로 그랑펠 뺨칠 정도로.

하이엘이 뒷일 생각 없이 나서준 덕분에.

지켜보기만 하던 나도 대충 상황 파악을 끝낼 수 있었거든.

일단, 엘프는 정말로 한결같았다.

"긍지 없는 무의미한 삶을 갈구하는 것인가."

영생?

받은 것도 되돌려주고 싶다고, 나는.

아니, 평생 흑역사에 시달린다고 생각해도 끔찍한데. 흑역사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추악한 짓을 대가로 영생을 살아봤자 무슨 의미가 있는 건데?

진짜 내가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괜히 너희 어머니가....'

아니, 세계수가.

축복을 앗아간 게 아닌 것 같다.

그 난폭한 엘시도어는 양반이었다고 느껴지게 할 정도라니.

하나같이 얼마나 개차반인 거야, 성질머리들이.

우르스도 참 여전했다.

'세계수가 목적일 줄이야.'

엘프와 거악이 대화를 나눌 때는 별 관심도 없어보이더만. 하이엘이 나타나고, 세계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우르스는 전장에 끼어들었다.

'그놈의 영약 사랑.'

만물의 어머니인 세계수다.

그런 세계수에 내재된 기운은 영약이라 봐도 무방하겠지.

단지 어느 누구도 세계수를 씹어 삼킬 엄두를 내지 못했을 뿐.

그러나 우르스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서적의 일화만 보더라도, 영약을 향한 우르스의 광기는 세계수를 뿌리까지 잘근잘근 씹어먹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진짜 꼬여도 엄청나게 꼬였다. 이거.'

각자의 이유로 다들 쉽게 물러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이대로라면 정면충돌은 시간문제.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대형사건.

균열 생성까지도 시간문제겠지.

나는 망원경을 바라봤다.

[손길에 작은 행운이 깃듭니다.]

[일시적으로 망원경 조작에 능숙해집니다.]

[효과의 지속시간이 증가합니다.]

...병 주고 약 주냐?

어쨌든, 대폭 상승한 행운이 도움되기는 했다. 사실 망원경의 지속시간은 제국군이 폴스타에 도착했을 때쯤 끝났어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다행히도 아직까진 똘망똘망 눈을 뜨고 있군.

그래, 너라도 양심이 있다면.

되도록 눈을 감을 생각은 하지 마라, 망원경아.

'하이엘에게 저 전장은 무리야.'

나와 함께라면 모를까.

하이엘은 전투에 익숙하지 않았으니까.

하이엘이 저 삼파전에서 활약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막말로 축복의 위계질서를 요령껏 활용하면 또 모르지만.'

그랑펠을 쏙 빼닮은 하이엘이다.

나, 이호열처럼 잔머리를 굴려 위계질서를 써먹을 리가 있겠냐고.

결국,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건가.

"약속되지 않는 만남은 한 번에 처리하는 편이 효율적이지."

...이런 상황에서도 말은 참 술술 나온다.

젠장, 균열이라는 변수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나.

4배속으로 그에 관한 전략을 세워본다.

지금 당장 마르셀로에게 텔레파시를 보내고....

쿠릉─!

"...?"

그랬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간과하고 있었다.

잠깐이나마 잊고 말았던 것이다.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그런 시스템을 통해.

대폭 상승한 행운의 효과를.

쿠쿠구구궁─!

아르카나 대륙에 쏟아지는 뇌우(雷雨).

이내, 대륙의 하늘이 갈라지기 시작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찢어지기 시작했다.

그 차원의 틈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꿈틀거린다.

그러더니 이내,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다.

드래곤이다.

.

.

.

드래곤의 울음소리가 대륙에 울려 퍼진다.

그 울음소리는 서로의 숨통을 끊기 위해서.

당장에라도 맞붙을 기색이었던 우르스와 식탐조차 멈추게 할 정도였다.

"흐음."

노룡, 유낙서스는 황폐해진 아르카나 대륙을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거대한 동공으로 엘프를.

정확하게는 아젠트레스를 바라보았다.

유낙서스가 말했다.

"아젠트레스."

어머니시여.

"나의 어리석은 아우여."

어찌하여 당신께서.

저들에게서 축복을 거두어 가셨는지 알겠습니다.

유낙서스가 우레와도 같이 꾸짖었다.

"아직도 어머니의 뜻을 깨닫지 못한 것인가!"

만물을 지배하는 생물, 드래곤.

어머니의 축복 없이 드래곤 로어에 정면으로 노출된 탓인가.

전율하는 전신의 감각들.

그러나 덕분에 빌어먹을 위계질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젠트레스가 우득─거리는 목을 풀며 답했다.

"다물어라, 유낙서스. 도마뱀 자식아."

.

.

.

그러니까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엘프의 이름이 아젠트레스고....

그런 아젠트레스가 드래곤, 유낙서스의 아우라고?

이건 예상치 못한 출생의 비밀인데?

잠깐만, 그러면 족보가 이게 어떻게 되는 거야?!

세계수.

드래곤.

엘프.

그리고....

나랑 하이엘?

순간, 나는 설마 하는 가능성을 떠올렸다.

'...위계질서가 드래곤한테도 유효한 건가?'

거기까진 확신할 수 없다.

설령 형제라고 하더라도 드래곤은 세계수의 축복을 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실제로 엘시도어도 축복은 오직 엘프들의 전유물이라고 말했었으니까.

게다가.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야.'

나는 세계수 족보의 막내로서 부탁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큰형, 쟤들 좀 어떻게 좀 말려 봐!

나, 이호열.

누나만 셋.

조르기 하나만큼은 자신 있다고 생각했건만.

유낙서스는 더욱더 격노해 울부짖고 있었으니.

"알아듣지 못했다면 알아들을 때까지 꾸짖어 주겠다."

떠오르고야 말았다.

[노룡(老龍), 엘더 드래곤 유낙서스가 출현합니다.]

본격적인 출현 메시지가.

진짜로 말리기는커녕 싸우러 온 거구나.

형보다 누나가 낫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구나.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시도해 보자꾸나, 하이엘.

유낙서스에게도 [축복의 위계질서]가 유효한지를!

.

.

.

하이엘이 유낙서스의 콧잔등 위에 서서 말한다.

"축복의 위계질서에 따라 명한다."

"...?"

"진정하시길, 유낙서스."

"...!"

그러자 우레가 잦아들었다.

◈ 209화. 운수 좋은 날 (5)

"쇠약해진 육체가 문제가 아니었구나, 아젠트레스. 네 영혼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파멸한 모양이니. 이 슬픔을 이루 말할 수 없구나, 나의 아우여."

엘프.

저들이 어머니의 축복을 상실한 순간에도 유낙서스는 반신반의했었다.

제아무리 못난 아우여도, 고결했던 영혼만큼은 한결같을 것이라 생각했거늘.

전부 나의 착각이었구나.

유낙서스의 눈동자가 지상의 악을 향했다.

저것이 바로 악마로군.

대륙과 어머니를 이런 꼴로 만든 존재들.

끓어오르는 감정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마계(魔界)로 활강.

저들의 땅을 대륙보다 처참한 꼴로 불살라 버리고 싶었다.

허나, 그럴 순 없겠지.

나의 어머니께서 그것을 바라시지 않았으니까.

세계수의 뜻은 유낙서스조차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처음이었다.

당신께서 나에게, 우리에게 부탁을 해온 것은.

그러니 따를 뿐이다.

그래, 언제까지고 잠에 빠져있는 것도 무료한 일이었으니.

그런 의미에서는 간만에 심장이 뛰었다.

'그 이후로는 처음이군.'

용마대전(龍魔大戰).

찰나의 유희는 나름대로 즐거웠거늘.

이번엔 과거처럼 즐길 수만은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우리의 목숨을 내던져야 했으니.

"알아듣지 못했다면 알아들을 때까지 꾸짖어 주겠다."

늙고 병든 나에게 걸맞은 전장이다.

아우, 아젠트레스와 엘프들은 물론.

억누른 감정을 표출하기에 적합한 악마 하나.

그런 악마와 마주한 인간까지.

모두의 눈빛은 각오가 된 듯 보였으니.

누구 하나 휘말려들 걱정하지 않고 날뛸 수 있겠구나.

'그대들이라면 어머니의 뜻을 실현할 수 있겠지.'

파지직─!

이내, 유낙서스의 몸에서 일렁이는 거대한 기운.

"!!!"

단순한 마력이라 표현하기에는 부족했다.

얼마나 짙고 방대한 마력이라는 것인가.

마력이 시각화한 것도 모자라 일대의 기후.

심지어는 지형마저 바꾸어 놓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내려치는 벼락이 유낙서스의 전신을 휘감은 순간이었다.

유낙서스의 시야 가운데 '무언가'가 난입했다.

그 실체는 작디작았건만, 어째서인가 커다랗게 보였다.

"!"

그럴 수밖에.

무언가, 하이엘이 내려앉은 곳은 유낙서스의 콧잔등이었으니까.

하이엘은 주군, 호열의 뜻을 충직하게 따랐다. 호열을 믿어 의심치 않고서는 또렷하게 말했다.

"축복의 위계질서에 따라 명한다."

"...?"

"진정하시길, 유낙서스."

드래곤과 엘프는 다르다.

같은 세계수에서 태어났지만, 그 외관처럼 가지고 태어난 능력도 달랐다. 만물의 지배하는 생물, 칭호에 걸맞게 드래곤에게 모자란 것은 없었다.

하지만 엘프는 아니었다. 세계수는 그런 엘프를 가엾이 여겨 축복을 내렸다.

드래곤은 세계수의 축복을 받지 못한 게 아니었다. 받지 않은 것뿐이다. 필요치 않았으니까.

그들은 태생 자체로 완벽한 존재였으니까.

세계수의 축복을 받은 적이 없었기에.

당연하게도 드래곤인 유낙서스에게 [축복의 위계질서]가 유효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유낙서스는 하이엘의 말에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말았다.

'그랬군.'

작디작은 정령에게서 어머니의 기운이 느껴진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느슨해지고만 유낙서스의 눈빛.

마치 어린 막내를 바라보는 것처럼 따뜻한 시선이었다.

그러나 그대여.

"유감스럽게도 그 부탁에는 응할 수 없겠구나."

유낙서스가 뇌리로 전달해 왔다.

-걱정할 것 없다. 모든 건 어머니의 뜻이니까.

텔레파시.

차원을 찢고 오갈 수 있는 드래곤이다.

그렇기에 그 목소리는 호열에게도 전해졌다.

-설령 내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여명이여.

.

.

.

드래곤이 얼마나 강하냐고?

그건 메시지를 보고 깨달을 수 있었다.

엘프에 거악에 초월자가 모인 전장이다.

적정 레벨로 환산하면 일천도 그냥 넘을걸?

어지간해서는 출현 메시지를 출력할 수 없다는 거다.

그러나 유낙서스는 보란 듯이 출현 메시지를 띄워냈다.

그런 유낙서스가 [축복의 위계질서]에 멈칫했을 땐 흠칫했다.

행운의 편지가 아니라 진짜 행운이었던 건가.

찰나의 순간, 혼자서 김칫국부터 마셨던 나였으니까.

드래곤을 위계질서로 부려 먹을 수 있다니!

월드 퀘스트, [악룡(惡龍) 사냥꾼]의 클리어는 물론.

드래곤의 능력으로 아르카나 대륙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거잖아?

아르카나 대륙에서는 [최후의 모험가] 효과로 죽어도 부활할 수 있는 나였으니까.

얼마든지 위험을 감수하면서 성장 속도를 낼 수 있을 터.

그러나, 김칫국이 괜히 김칫국이겠냐고.

나, 이호열.

누나만 셋인 막내이기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치 내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유낙서스의 시선.

그건 나를 바라보던 웬수들의 눈빛과 똑같았다.

흠칫하기도 잠깐, 머릿속으로 유낙서스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텔레파시.'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

완벽히 다른 두 세계.

일반적으론 텔레파시로 의사소통하는 게 불가능하다. 하지만 드래곤만큼은 예외겠지.

균열에 얽매이지 않고, 차원을 찢고 아르카나 대륙과 현실을 오가는 데 텔레파시 정도야.

내가 놀란 건 텔레파시의 내용 때문이었다.

'여, 여명?!'

그 민망한 이름을 그쪽이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

아니지.

그것보다.

'...죽는 게 어머니의 뜻이라고?'

첫 만남부터 대뜸 유언을 남기는 게 어딨어?!

나야 굴러 들어온 자식이니까.

집안 사정, 세계수의 뜻 같은 건 알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물론, 가족 행세를 하고 싶은 마음 따위도 없다.

막내 취급은 집에서도 실컷 받고 있거든.

게다가.

'아니, 뜻이고 나발이고.'

유낙서스 씨.

그쪽이 날뛰시면 이쪽이 곤란해진다니까요?

엘프에 거악에 초월자만 하더라도 충분히 벅차단 말이다.

그런데 드래곤이라니.

균열의 클리어를 떠나 균열 자체가 버티지 못할 스케일이었다. 균열 생성 후, 얼마 가지 않아서 균열 붕괴도가 100퍼센트를 돌파해 버리겠지.

'그런 게 도심지에 생성된다면....'

그 전투의 여파로 도시가, 나라가, 대륙이 지도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심각한 상황 속에서 나는 잘도 입을 놀렸다.

"세계수의 뜻이라니. 착각이 지나치군."

태연하게도.

"자식의 죽음을 바라는 부모는 없는 법이다."

황제도 모자라서.

드래곤, 세계수 앞에서도 한결같이 꼿꼿하구나, 그랑펠.

하지만 나도 어느 정도는 공감하는 바였다.

유낙서스의 말만 들었을 땐.

세계수가 유낙서스의 죽음을 원하는 것처럼 들렸으니까.

그래도 가정사는 들어보고 싶다는 거지, 굴러 들어온 막내로서.

"대화가 필요하겠군, 유낙서스."

물론, 텔레파시도 혼잣말도 닿을 리가 없으니.

나 혼자 일방적으로 약속을 잡았을 뿐이지만.

잡설은 거기까지였다.

이젠 정말 행동에 돌입해야 한다.

'나도, 하이엘도 최선을 다했어.'

이쯤에서 인정할 건 인정하자.

그럼에도 이 개판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그나마 위안할 거리는 균열 생성 시기를 늦췄다는 것 정도려나.

'균열에서 모든 걸 쏟아부을 수밖에.'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

균열이 생성되면 직접 얼굴을 맞댈 수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답답하진 않겠지.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도 입은 쉬질 않는다.

"나는 행운 따위 믿지 않는다."

어쩐지, 그 소리를 이번에는 왜 안 하나 했다. [행운] 스탯에 포인트를 투자하려고 할 때마다, 미신을 운운하며 훼방을 놓던 그랑펠의 똥고집이 아니던가?

펄럭─

타이밍 좋게도 불어오는 바람.

"행운도 운명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것이다."

네, 어련하시겠습니까요.

내가 속으로 빈정거리던 순간이었다.

아르카나 대륙의 하늘에서 포탈의 빛무리가 일렁였다.

...잠깐, 빗자루가 하늘을 날고 있다?

말 그대로 포탈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빗자루.

그런데 빗자루 위에 올라탄 여인이 낯설지가 않았다.

저 치렁치렁한 복장.

'시공간의 사교장에서 본 것 같은데?'

확실하다.

우르스와 더불어 시공간의 사교장에서 내게 관심이 없던 또 한 명의 초월자다.

아니, 어떻게 보면 우르스보다 심했었지. 저쪽은 아예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는 단 한 번도 들어올리지 않았었으니까.

'갑자기 또 뭔데.'

당연하게도.

나는 이 개판에 그녀가 등장한 이유 따윈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순간처럼."

...긍지에 가라앉아도 주둥이만큼은 떠오를 것 같구나, 그랑펠.

.

.

.

남쪽 바다의 마녀.

그녀는 망망대해를 날았다.

남은 『영약 궐련』은 단 한 개비.

씁, 입맛을 다신 마녀는 아래로 보이는 남녘 바다를 노려봤다.

"...문어 대가리가."

심해 속에서 수천 개의 다리가 꿈틀거린다.

빌어먹을 환각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볼 때마다 구역질이 치밀어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무엇하나 보이지 않는 심해에서부터 환청이 들려온다.

『도망가도 소용없다.

운명을 받아들여라.

네 손으로 종말을 시작하라.

고통스러운 삶을 애써 부여잡지 말거라.』

"진짜 궐련 땡기네."

『바다의 대흉』.

놈의 저주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은 값비싼 영약 궐련을 태울 때밖에 없었다.

심정 같아서는 사교장에서 궐련이나 태우며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 있고 싶었건만.

쿠르릉─!!

거대한 기운이 넘실대는 대륙을 보면 그런 생각은 말끔히 사라졌다.

흡연 욕구도 참아내고 쉴 새 없이 비행한 덕분인가.

어느덧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했다.

다시는 이 땅을 밟지 않겠다고 다짐했었건만.

그 풍경조차 잊어버려 포탈조차 열 수 없었건만.

마녀가 씁쓸하게 웃었다.

"세월이라는 게 참 무서워."

개 같은 기억은 미화시키고.

그나마 좋았던 기억만 남겨두니까 말이야.

당신께서도 제 말에 동감하시겠죠?

"그러니 돌아오신 거겠죠."

마녀는 지체하지 않았다.

영약 궐련의 부작용.

뿌예진 기억 속에서 제로 산맥 인근의 모습을 떠올렸다.

머릿속에 풍경을 그려 좌표를 포착.

허공에 포탈을 열었다.

과정은 더없이 신속했다.

마녀는 포탈에서 빠져나온 뒤 목격했다.

드래곤, 엘프, 거악, 초월자.

대륙이 요동치던 원흉을.

마녀는 혀를 찼다.

정말로 세월이 무섭다.

"마계도 그렇고, 시슬리도 그렇고, 제로 산맥도 그렇고."

과거에는 다들 정말 얌전했었는데 말이야.

마녀는 품속을 뒤졌다.

자연스럽게 손가락에 끼워 꺼내는 건 마지막 한 개비의 영약 궐련.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부득이하게 마력을 써야 할 것 같았으니까. 그 전에 머리를 맑게 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 당장 종말을 시작하라.

연기를 들이켜자 귓가에 맴돌던 『바다의 대흉』의 목소리가 옅어진다. 그래, 그렇게 닥치고 있으라고 문어 대가리. 지금부터는 너도 듣는 처지가 되어야 할 테니까.

"후우─"

뿜어져 나오는 짙은 연기.

마녀는 전장을 내려다봤다.

자연스럽게 가장 낯익은 얼굴로 시선이 갔다.

우르스.

처음 사교장에 발을 들였을 때는 정말 햇병아리 같았는데.

내가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사이에.

삐뚤어져도 한참을 삐뚤어진 길을 선택했구나.

"뭐, 귀쟁이들은 한결같이 재수가 없고."

싸가지에 비해 과분한 외모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엘프.

대체 무슨 복을 가지고 태어난 건지.

마녀는 그들을 향해 신랄한 비판을 뱉었다.

"여전히 목청 하나는 끝내주시고."

드래곤, 유낙서스에겐 그다지 감정 없음.

마녀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옮겨갔다.

"그중에서도 너는 특히 눈치가 없구나."

칠죄종, 탐식을 향하는 눈초리.

바다의 대흉을 노려볼 때에도 평온하던 마녀의 심기가 격하게 요동을 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부터 내뱉을 이야기에는 이 자리의 누구도, 심지어는 나조차도 무관할 수 없었으니까.

고오오오─

격동하는 마녀의 마력.

덕분에 전장 모두가 마녀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남쪽 바다의 마녀.

그녀가 어느 정도의 강함을 가졌는지를 떠나서.

이 자리 모두에겐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시작되는 마녀의 말.

"다들 주제 파악이라는 걸 하면 어떨까 싶은데."

이어지는 이야기에는.

"...정녕 사실이란 말인가?"

"마, 말도 안 돼!!"

"아니, 절대 그럴 리 없다."

"...?!"

모두가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 땅에서 '그 이름'을 거론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다들 잘 알고 있겠지? 하지만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나는 내 목숨에 맹세코 말할 수 있어."

마녀는 말을 이었다.

"클라우디가 돌아왔다고."

◈ 210화. 안부를 나눌 상황은 아니군 (1)

나는 마안의 망원경이 보여주는 풍경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망원경을 노려봤다.

...눈, 제대로 뜨고 있는 거 맞지?

그래도 미덥지 못해 메시지까지 확인했다.

[손길에 작은 행운이 깃듭니다.]

[일시적으로 망원경 조작에 능숙해집니다.]

[효과의 지속시간이 증가합니다.]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니란 건데.

그동안 워낙 믿지 못할 일을 자주 경험한 나다.

그중에서도 오늘이야말로 역대 최고.

빌어먹게 다이나믹한 하루를 보내면서.

앞으로 장담하는 건 되도록 자제하자고 다짐한 나였거늘.

그럼에도 장담해야겠다.

유낙서스, 거악, 우르스, 아젠트레스와 엘프들까지.

전장에 선 이들에겐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가 옳든, 옳지 않든.

다들 정말로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싸움을 말릴 수 있는 존재?

장담하겠다.

현실에는 물론, 아르카나 대륙에도.

내가 알고 있는 지식 속에서 그런 존재는 없다고.

그러니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쪽은 누구신데요?

포탈 속에서 빗자루를 타고 등장한 초월자.

그녀가 등장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싸움이 멈췄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이건 강함을 따질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무엇보다 모인 이들이 초월자 한 명에 위축될 위인들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뿐이겠지.

저 이름 모를 초월자가.

싸움을 끝낼만한 소식을 들고 왔다는 것.

아니, 대체 무슨 소식이길래?

궁금증이 치솟았건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 이유란 걸 들을 수 없었다.

텔레파시라니, 이 순간만큼은 마법이 원망스럽구나.

'치사하게.'

물론, 내가 망원경으로 관찰 중이란 사실을 알아차렸을 리는 없고 단순하게 시끄러운 천둥소리 때문이겠지. 저런 굉음 속에선 아무리 목청이 커도 대화할 수 없을 테니까.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구나.

"비로소 잠잠해졌군."

언제나처럼 말은 잘하는 그랑펠을 애써 외면하고는 생각해 본다.

그러니까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결국,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건가?'

유낙서스부터 거악까지.

모두가 거짓말처럼 싸움을 멈추고 해산.

자리를 떠날 때까지도 서슬퍼런 눈빛들을 보면 미련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았지만. 어쨌거나, 당장은 싸울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이유를 알지 못해 끝맛이 시원하진 않았지만.

'후우─'

속으론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당장의 의문이야, 나 혼자만 궁금하면 끝나는 거였지만.

만약, 빗자루를 탄 초월자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운수 좋은 날 결말이 날 뻔했으니까.'

그래도 지구 멸망 엔딩은 피한 건가.

그야말로 대폭 상승한 행운 덕에 만난 은인이다.

사람이라면 응당 감사해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거늘.

나는 한결같이 내뱉고야 말았다.

"말하지 않았나. 행운도, 운명도 개척하는 거라고."

하여튼, 한마디도 안 지려고!

물론, 아르카나 대륙에까지 들리진 않았겠지만.

나는 양심상, 철없으신 그랑펠을 대신해 심심한 사과를 전했다.

...그게 설명하기는 복잡한데, 사춘기라 미안합니다.

.

.

.

[사이렌의 노래가 당신을 축복합니다.]

[행운이 대폭 상승합니다.]

아르카나 대륙에 펼쳐졌던 개판.

대사건이 일단락된 시점에서 남은 효과의 지속 시간만큼은.

정말로 알차게 활용하리라, 다짐한 나였다.

그 시작은 의심이었으나.

은인의 등장으로 모든 게 평화롭게 끝난 지금.

행운의 효과는 증명된 셈이었으니까.

나는 재킷을 펄럭이며 숲속을 바라봤다.

[전쟁광 순록 : Lv.750]

[전쟁광 순록 우두머리 : Lv.800]

제로 산맥의 중턱.

외관은 몬스터보다 평범한 짐승에 가깝다고 하더라도 그 강함은 무시할 수 없다. 대다수의 플레이어가 제로 산맥 토끼에게 호되게 고전하고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일반몹 다섯에 네임드몹 하나.'

[천적관계]는 발동되지 않은 상황.

레벨 차이를 고려하면 초월의 경지에 이른 마법을 발현하지 않고 사냥하는 건 불가능하다.

클래스 퀘스트를 통해서 마력을 제외한 스탯도 꾸준하게 단련하기는 했다만.

동레벨의 근접 계열 클래스 플레이어들보다는 떨어지는 게 사실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대들에겐 가혹한 일이겠지."

귀철을 손에 쥐었다.

"그러니 배려하마."

잠깐, 배려는 누구 마음대로 배려야?

설령 전설템, 귀철을 손에 쥔다고 하더라도.

귀철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않는 이상.

나는 셰그윈과의 결투 때처럼 현란한 움직임을 펼칠 수 없었다.

물론, 나 이호열의 잔머리 같아서는.

'나야 평생 귀철한테 맡기고 싶지!'

사회가 괜히 분업으로 발달한 게 아닌 법.

그렇지 않아도 신경 쓸 우물이, 살 구멍이 많은 내가 아니던가? 검술에서만큼은 얌전하게 귀철이 이끄는 길로 따라가고만 싶은 게 사실이었다.

'흔히 하는 말로 버스 승객이 되고 싶었단 거지.'

그러나.

"응답하라."

긍지가 남에게 운전대를 순순히 넘길 리 있으랴.

어떤 고생길이라도 첫 번째로 나서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그랑펠이 아니던가. 결국, 개고생 하는 건 이번에도 나라는 말이었다...!

곧, 시작되는 전투.

느껴지는 에고 소드.

귀철의 음성.

-이것이 나의 주인이란 말인가.

귀철이 그렇게 말꼬리를 흐렸을 때는 흠칫했다.

검성, 셰그윈을 꾸짖을 정도로.

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귀철이 아니던가.

내 얕디얕은 밑천을 알아본 건 아닐까.

순간, 도둑이 제 발을 저린 거지.

하지만 기우였다.

-어떤 전장에서도 변하지 않는 마음가짐이라니.

...그래, 얘가 누구 분신인데.

-과연, 그런 마음가짐이 단기간에 검강을 그토록 짙게 만든 것이겠지. 역시나,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그대의 검로에 함께할 수 있어 기쁘다, 나의 주인이여!

한결같은 마음가짐?

틀린 말은 아니긴 하네.

발버둥에 피어오른 한없이 풍성한 거품 덕분에.

적정 레벨만 따져도 최소 일백에서 수백 레벨이나 높은 균열과 몬스터만 상대해 오던 나였으니까. 심지어 검강의 성취를 이뤄낸 것도 한 번 사망한 덕분이었는데.

'때론 모르는 게 서로에게 좋을 때도 있는 거지.

귀철아, 네가 기쁘다면 다행이구나.

슥─

좋은 게 좋은 거로 생각하고 귀철을 휘둘렀다.

꼭 검술이 아니더라도 『흑마법』부터 시작해서 『사격』까지.

내가 보수공사를 해야 할 우물들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검술을 선택한 이유?

그건 뚜렷한 목표가 있기 때문이었다.

[초월자 : 그대의 초월적인 경지는 초월자라 불리기에 충분하다. - 현재 도달한 성취 : 서클 (모든 마법 발현력 1,000% 상승) / 미완성 쾌검술 / 없음 / 없음....]

미완성을 넘어 완성에 다다른다면.

서클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효과가 개방될 터.

노력 대비 가장 큰 결과물이 예상되는 선택지를 고른 셈이지.

전쟁광 순록 무리와의 전투.

굳이 설명할 것도 없이 나의 승리였다.

재킷 하나는 착용한 게 아니라 걸쳤다고 하더라도.

에픽템으로 도배를 한 것도 모자라 전설템까지 손에 든 나란 말이다. 이 정도 레벨 차이 정도는 가뿐하게 무시할 정도의 템빨이란 거지.

거기에다가 미완성이라고는 하나 쾌검술까지.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은 3단계 상승해 598레벨.

600레벨에 가까워져서인가.

레벨 업이 더뎌진 게 새로운 벽에 부딪힌 게 여실히 체감됐다. 그렇다고 해도 다른 플레이어들과 비교하면 말도 안 되는 성장 속도긴 하지만.

'지금도 종일 사냥 중이겠지, 다들.'

1레벨을 올리기 위해 하루가 뭐냐.

경우에 따라선 며칠씩 사냥을 멈추지 않는 플레이어들이다.

그 노력을 생각해서라도 투덜거리지 말자, 호열아.

'...근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못 참겠는데?'

나도 참 진짜로 어떻게 된 게.

하나도 쉽게 가는 법이 없구나.

나는 상태창을 보며 탄식을 삼켰다.

[집념 : 1]

[보유 포인트 : 3]

새롭게 개방한 스탯인 심미와 집념.

심미야 처음부터 수치부터가 상, 중, 하로 구분되어 있었으니까. 자연스럽게 포인트 분배는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었다.

'그런데 집념아.'

너는 아라비아 숫자의 탈을 쓰고 그러면 안 되지!

'악크샨이 웬일로 사기 스탯을 주나 했다, 내가.'

누구보다 노오오오력을 중요시하는 악크샨.

그런 악크샨, 악마 사냥꾼들이.

날로 먹을 수 있는 스탯을 전수해 줬을 리가 있겠냐고.

나는 집념의 효과를 떠올렸다.

[집념 : 정신력을 능력치로 환산한다. 집념이 상승할 때마다 환산되는 능력치가 추가로 상승.]

불굴에 가까운 그랑펠의 정신력 덕분인진 몰라도.

집념은 1포인트에 대략 스탯 50포인트의 효율을 보였다.

앞으론 1레벨에 50레벨의 효율을 낼 수 있겠구나.

흡족했었거늘.

역시나 김칫국이었다.

'집념을 상승시키는 법이야 뻔하지.'

그놈의 지긋지긋한 노가다겠지, 뭐!

집념이 개방된 순간처럼.

한계를 초월한 단련을 해야 할 게 뻔했다.

그런 의미에선 휴식을 취할 새가 없겠구나.

'그래도 행운 효과로 집념을 상승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나도 모르게 사서 고생할 생각부터 하는 게.

어째, 나까지 그랑펠의 긍지에 전염된 기분이었지만....

흑역사에 시달리는 자괴감은 내일 느껴도 늦지 않는다.

[남은 시간 : 16시 14분]

나는 사이렌의 축복 지속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시간은 오후에 즐기는 차와 같은 법이니까."

오늘은 왜, 그 소리를 왜 안 하나 했다.

*

마탑의 집무실.

[남은 시간 : 54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장담하겠다.

오늘처럼 고된 하루는 또 없을 거라고!

그렇지 않아도 바쁜 일과에 시달리는 나였거늘. 그걸로도 부족해서 대폭 상승한 행운의 본전을 뽑기 위해 부지런히 이곳저곳을 오갔다는 뜻이다.

"나쁘지 않은 하루였군."

주둥이에서 그런 말이 나왔으니 말 다 한 거지, 뭐.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찻물이 데워질 때까지 찬찬히 되새겨보자.

[집념 : 2]

일단, 고된 훈련 끝에 집념은 1포인트가 상승했다.

기쁘면서도 동시에 흠칫했다.

행운이 대폭 상승했는데.

이런 훈련량에 고작 1포인트면 평상시엔 어떻다는 걸까.

걱정을 지울 수가 없었거든.

"요행은 요행에 불과한 법이었군."

찬물에 우러나는 신상 녹차는 취향이 아니라고.

이런 타이밍에 이야기하지 마라, 그랑펠.

그래도 집념의 효과를 생각하면 납득할 수 있는 고생이었지.

팔굽혀펴기 도중 눈앞이 흐려지던 순간.

상승했던 집념.

그 효과로 상승한 근력이 무려 100포인트였으니까.

'평생 노가다 탈출은 불가능하겠구나.'

과정은 건너뛰고 결과만 놓고 보자면 집념은 사기 스탯이 맞았으니까.

앞으로도 꾸준히 기절할 때까지 단련해야겠지.... 물론, 대폭 상승한 행운의 효과는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들른 유스라 왕국 집무실에서도 적잖은 성과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반가운 성과는 아무래도 국왕, 하쿠나가 직접 전해온 소식이었다.

-"그간 송구했습니다. 비로소 각오가 섰습니다."

하쿠나는 그동안 검을 제대로 들지 못했다.

정확히는 날붙이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었다. 칼과 창, 방패를 볼 때마다 고대 왕국 시절 지켜내지 못한 백성들이 눈앞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모자라더라도 저의 책무를 다하겠습니다."

그런 하쿠나가 과거를 극복한 것.

내게는 여러모로 희소식이었다.

하쿠나가 트라우마를 극복한 것도 축하할 일이었지만.

덕분에 내 업무도 조금은 줄어들 것 같았으니까.

조금은 숨통이 틔였달까?

또각─

한결 가벼워진 걸음.

마탑으로 복귀하니, 또 하나 반가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양피지에 떠올라있던 글귀.

필체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마르셀로가 보내온 서신이었다.

안부에 감사에.

요란한 수식어를 제외하고.

핵심만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

탑주님께서 처음으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

마탑 최상층.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력 구체 속에서 눈을 감고 부유 중인 탑주.

그런 탑주에게서 움직임이 포착됐다는 것이었다.

물론, 움직임이라고 하더라도.

대단한 게 아니라 손가락을 꿈틀거리는 게 고작이었다지만.

'전례에 없던 일이라니까.'

평소보다 경쾌한 그의 필체.

마르셀로가 얼마나 들떴는지 말해주는 듯했다.

물론, 나도 기쁘다.

[퀘스트 : 마탑의 재건]

마법사의 탑에 존재하던 모순의 실체.

진리 추구라는 마탑의 목적조차 불순해진 지금.

마탑을 그 기반부터 바로 세워라.

─탑주와 조우하라. (진행 중)

─도주한 악마 숭배자를 처분하라. (성공)

─진정한 진리를 찾아라. (진행 중)

어쨌거나, 막막했던 퀘스트에 진전이 생긴 셈이었으니까.

달칵─

찻잔에 뜨겁게 달궈진 물을 따르며 읊조렸다.

"마무리가 중요한 법이거늘."

그렇다.

이렇게 충실한 하루를 보내고 대략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이 남았다.

물론, 남은 한 시간 또한 알차게 보낼 생각이었다.

시공간의 사교장에 입장할 예정이었거든.

'만나봐야지, 생명의 은인.'

빗자루를 타고 나타난 이름 모를 각성자를 말이야.

행운이 대폭 상승한 지금이라면.

서로 엇갈려 만나지 못할 확률도 줄어들 터.

그러니까 나는 지금.

사교장 방문을 영 달가워하지 않는 그랑펠을 달래기 위해.

티백 녹차를 우려내고 있다는 말이다.

'메뉴판에 별게 다 있던데 녹차는 없다니.'

나는 진지하게 읊조렸다.

"시공간에도 로켓 배송이 시급하겠군."

.

.

.

나의 육체를 지배하는 그랑펠의 격식이다.

사교장에서는 더욱더 격식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는바.

한결같이 꼿꼿한 자세는 물론, 그 걸음걸이와 언행까지.

섣부르게 경거망동하게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교장에 진입한 내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경고'였다.

"정체를 밝혀라."

정말로.

마지막으로 장담하건대.

시공간의 사교장에 '절대 있을 수 없는 인물'이 있었으니까.

◈ 211화. 안부를 나눌 상황은 아니군 (2)

『시공간』 혹은 [고인물 커뮤니티].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엔 괴리가 존재했으니까. 설정만 존재하던 고인물 커뮤니티가 시공간으로 실현되면서 몇몇 요소가 추가되는 건 확인했던 바였다.

커뮤니티가 사교장으로 구현된 것부터 시공간의 결투가 콜로세움에서 진행되는 것까지. 물론, 그런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원칙은 있다.

시공간은 오직 초월자를 위한 공간이라는 것.

서클이라든가.

쾌검술이라든가.

그게 아니면 가미긴을 지옥에 처박아 넣은 나처럼.

누가 봐도 경악할 만할 업적을 세운다든가.

말 그대로 초월자.

고인물이라 불릴 '격'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뭣하지만.

'특출나야 한다는 거지.'

아르카나 대륙에 시공간이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까다로운 자격시험까지 생각하면 초월자의 수는 많을 수 없었다.

'내가 목격한 이들은 대략 열댓 명 남짓.'

기나긴 아르카나 대륙의 역사를 생각하면 정말로.

시대에 획을 그은 인물들만 시공간에 진입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내가 내 얼굴에 금칠하는 기분이군.'

하지만 내 특기가 무엇이냐, 주제 파악이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초월자의 격을 갖추게 된 건.

나 혼자만의 능력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마왕 쟁탈전으로 지옥의 문이 열렸던 특별한 상황. 거기에 [악크샨의 유지]로, 지옥에서 불러낸 악크샨 선배님들의 협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업적이란 걸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장담할 수 있었다.

현시점에서 플레이어 중 나를 제외하면 시공간에 진입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거라고. 레벨은 숫자에 불과하다는 점이나 히든 클래스라는 변수를 고려하더라도 말이야.

현시점에서 시공간은 감히 플레이어가 넘볼 영역이 아니라는 거다.

또각─

그렇기에 나는 걸음을 옮겼다.

플레이어는 진입할 수 없는 시공간의 사교장.

정말로 난데없게도.

테이블에 모습을 드러낸 '고깔모자'에게로.

커다란 고깔모자.

그 얼굴은 가려서 보이지 않았지만.

늘어진 금발의 머리칼이 틀림없었다.

제시 하인네스였다.

나는 입을 열었다.

"정체를 밝혀라."

달칵─

내 말에 제시의 모습을 한 누군가가 쥐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는다.

'...잠깐만.'

이럴 때는 차(茶)를 향한 그랑펠의 광기가 도움되기도 하는구나.

풍기는 향으로 홍차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으니까.

그래, 그게 바로.

나도, 그랑펠도 확신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였다.

제시가 유일했었거든.

-"죄송합니다! 역시, 차는 맛이 없네요!"

내가 대접한 녹차를 남긴 사람은.

티백 녹차가 싸구려여서가 아니었다.

제시의 변명 아닌 변명에 따르면, 자신은 커피부터 홍차까지.

차라는 차는 사실 입에 대지도 못한다고 실토했었으니까.

본인의 입으로 말했다는 거야.

"혹시, 벌써 제 이름을 잊어버리신 건가요?"

그러니까 그딴 연기는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연기를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거기선 물음표가 아니라 느낌표로 말을 끝내야 하거든.

"마지막으로 묻겠다."

"...?"

"정체를 밝혀라."

새삼스럽게 느끼는 거지만, 목소리 한번 냉랭하다.

덕분에 제시도....

아니, 제시가 아니지.

제시를 연기하는 저쪽도.

시치미를 떼어볼 생각은 일찌감치 접은 것 같았지만.

슥─

천천히 움직이는 고깔모자.

고깔모자 아래에서 얼굴이 드러난다.

낯선 말투가 들려온다.

"뭘까, 어떻게 알아차린 걸까, 달라진 건 없는데."

달라진 게 없기는.

동공에 느낌표가 없는 게.

딱 봐도 제시가 아니잖아.

'설마.'

그나저나 이놈의 직업병은 어쩔 수가 없구나.

겉모습은 제시 하인네스지만, 정신은 제시 하인네스가 아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악마 빙의 가능성이었다.

'아니, 냄새가 나지 않아.'

게다가 [천적관계]도 발동되지 않았다.

이번엔 기승전악마가 아니라는 건가.

그래서일까, 더욱더 의문이 드는걸.

누구냐, 너?

"딱히 속이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그냥 장난 좀 쳐보려고 한 거였거든. 이거, 내 머릿속을 꺼내서 보여줄 수 있으면 바로 내 장난기를 이해해 줄 텐데."

어설픈 연기를 집어치우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곳곳에서 늘어지는 목소리엔 여유가 넘쳤다.

산전수전 다 겪은 연륜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이런 상황에서.

다리를 꼬고 앉은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겠지.

하지만 나로서는 다행스럽게도.

"당연히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겠지? 이 상황에 관한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면 아무래도 말이 길어질 것 같은데...."

날이 선 태도는 아니로군.

이내, 맞은편 의자를 향하는 시선.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순순히 남의 말에 따를 위인은 아니지. 무언의 제안을 외면하고 꼿꼿하게 서서 바라보고 있자니, 제시의 탈을 쓴 누군가가 능청스레 중얼거렸다.

"아차, 격식. 제일 중요한 건데, 깜빡했네."

그러곤 사교장의 메뉴판을 띄웠다.

"차라도 대접할 테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격식에 살고, 격식에 죽는다.

존댓말에 나는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안타깝게도.

'애초에 목적은 빗자루를 탄 초월자였지만....'

현재 사교장에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제시가 제시가 아니란 걸 알아차린 지금.

이것도 그냥 넘어갈 순 없는 일이었다.

왜냐니.

제시의 몸을 차지한 그쪽이 누군지는 몰라도.

이쪽은 한 명, 한 명이 아쉬운 입장이거든.

'인류의 핵심 전력 중 하나라고, 제시 하인네스는.'

클래스는 무려 대마법사.

제시의 잠재력은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명성이 자자했다고 들었다.

일반적인 플레이어라면 말도 걸지 못할 NPC들이 제시에겐 호의적이었다고 했었지. 심지어 하르콘과도 안면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그러니까 그 자초지종이란 걸 들어보자.

"저랑 같은 홍차로 하실까요?"

그 말에 나는 테이블에 놓인 찻잔을 바라봤다.

유감스럽게도 시공간의 사교장에 녹차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알기에.

이미 녹차로 충분한 도핑을 마치고 온 내가 아니던가?

덕분에 나는 미련 없이 말했다.

"잡설은 생략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더욱더 차갑게 말을 이었다.

"우리가 한가로이 티타임을 즐길 사이는 아니니."

단순하게 홍차가 취향이 아닌 거면서.

녹차라면 좋다고 얻어 마실 거였으면서.

그럴싸해 보이는 이유를 덧붙이지 마라, 그랑펠....

*

당대 최고의 마법사가 누구인가?

대격변 이전.

아르카나 대륙엔 종종 그런 질문이 떠돌고는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평범한 이들에게 마법사는 동경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화룡, 카림제바.

만년설, 세니오스.

온순한 거인, 유그위드 등등....

더군다나 물고 물리는 상성이 존재하는 마법이다.

정답이 없는 가위, 바위, 보가 제일 재미있듯.

당대 최고의 마법사가 누구인가란 질문에 정답은 없었지만, 적당히 떠들기 좋은 질문이었단 것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따를 수밖에 없다.

뚜렷한 최강이 없다면.

어째서 대마법사는 대마법사라 불린단 말인가.

몇몇 마법사들은 말해왔다.

"능력을 떠나 대마법사는 이명에 가깝지."

"일반적인 마법사와는 그 결이 다르니까."

"비교 대상이 될 수가 없네, 그쪽은."

"유일한 존재를 어떻게 다른 이들과 비교한단 말인가?"

그래, 대마법사는 쟁취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단지 대마법사로 선택받는 것일 뿐.

그런 대마법사로 모험가인 제시 하인네스가 선택된 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제국의 황제조차도.

"어쩌면 이 또한 여신의 은총일지도."

언제나 마탑의 눈치를 봐야 했던 제국에는 더없는 기회였다.

대마법사인 제시를 아군으로 포섭할 수 있다면.

언제까지고 마탑이란 불안요소에 떨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러나.

"변수에 변수로군."

마탑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이례적으로 모험가인 제시의 마탑 입성을 허가했다.

자격 증명 과정을 생략하고 견습 마법사 계급을 부여한 것이었다.

그런 과감한 결정을 내린 게 누구인가?

수석은 물론.

원로 마법사들조차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렇다, 모든 게 탑주의 뜻이었다.

탑주가 의식을 잃은 채.

마력 구체 속에서 부유하기 직전.

적어둔 서신의 유일한 전언이 바로 제시 하인네스의 처분이었다.

여기까지가 세간이 알고 있는 대마법사.

그리고 현시점의 대마법사.

제시 하인네스에 관한 정보였다.

"그런데, 정말로 그게 끝이었을까?"

제시의 껍데기가 씰룩거렸다.

"마법사란 족속은 기본적으로 오만하지. 마탑의 수석으로서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 않나? 마법사들 사이에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원로, 수석, 선임, 숙련, 견습.

다섯 계급으로 분류되는 마탑의 마법사들.

그러나 어떤 계급도 스승과 제자로 칭할 순 없었다.

그나마 밀접하다고 할 수 있는 선임과 숙련 마법사조차도 협력 관계에 불과, 선임 선출 기간에는 경우에 따라 경쟁 관계가 되곤 했으니까.

"대마법사라고 그 본성을 억누를 수 있었을까?"

곡선을 그리는 눈꼬리.

그 낯선 눈웃음이 다시금 제시가 아닌.

제시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타인이라는 걸 상기시킨다.

"스승과 제자라.... 그렇게 생각했던 게 한두 명 정도는 있었을지도 모르겠는데. 뭐, 나를 포함해서 대다수는 아니었을 거란 말이야."

톡─

고깔모자의 챙을 건드리는 손가락.

"이 정도까지 말했으면 알아들었으려나?"

정리하자면 이러했다.

전대 대마법사들은 의식으로서 '고깔모자'에 깃들어 존재한다.

그 목적은 마법의 경지를 넘어선 극한을 목격하기 위함.

극한에 도달하기 위한 최적의 방법이 바로.

대마법사들이 계승해 온 일인전승이라는 것이었다.

"왜, 아무런 말이 없으실까요? 대마법사의 실체가 생각과는 전혀 달라서? 우리 이 수석께서도 어쩔 수 없는 마법사니까. 내 마음을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눈매가 초승달처럼 더욱 가늘어졌다.

"육체라는 족쇄는 식견을 좁게 만든다고 하지. 그렇다면 새로운 육체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떨까? 그걸 넘어서 아르카나 대륙이 아닌 또 다른 세계에서 태어난 모험가의 육체로 바라보는 세상은?"

그렇다.

그것이 대마법사의 그릇으로 제시 하인네스를 선택한 이유였다.

제시의 탈을 쓴 대마법사'들'의 결정이었다.

"물론, 당사자가 모든 걸 이해하고 동의했기에 가능한 일이지. 어떤 심적인 변화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최근 들어 이 아이, 꽤 노력하고 있었거든. 그러다가 마력 탈진으로 기절해 버렸지만."

대마법사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렇게 말했다.

"이 아이가 지금처럼 정신을 잃었을 때나 이렇게 뛰쳐나올 수 있다는 거지. 누구의 의식이 발현되는지는 순전하게 운. 그런 의미에서 나한테는 천운이었나?"

대체 이게 얼마 만에 하는 바깥 구경이야.

너스레도 잠깐.

대마법사 중 하나가 속닥거렸다.

"그런데, 그 내 몫의 금화는 바닥나서 그런데...."

비워진 찻잔을 들면서.

"한 잔만 얻어 마실 수 있을까? 아니지, 까요?"

그러자 마침내 잠자코 있던 호열이 입을 열었다.

"단순히 마법의 극한을 목격하기 위함이었나."

"맞아. 마탑식으로 말하자면 '진리'라는 거지. 사실, 그렇지 않아도 이 아이가 힘내준 덕분에 그 진리라는 게 슬슬 눈에 보이는 것 같거든. 신기하게도 그 어려운 개념을 이해하고 있더라고? [『기이』]라고."

물론, 마법에 관한 이해력이 형편없기는 하다만.

그건 우리가 있으니까 우려할 건 아니지.

대마법사는 끝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 아이는 처음부터 그릇의 역할이었으니까."

그건 명백한 사족이자 실수였다.

"그렇다면 유감이군."

"...유감?"

"기이로 향하는 길."

그것은 오만이나 방종이 아니었다.

그만한 자격이 있기에 감히 내뱉을 수 있는 말.

확신에 찬 목소리가 대마법사에게 이어졌다.

"그 길에 자네들은 없을 테니까."

.

.

.

하도 애지중지하길래.

보통 고깔모자가 아니겠거니, 짐작은 했었다.

그런데, 대마법사의 의식이 깃들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것도 하나둘도 아니고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말이야...!

물론, 그 이유에 흠칫하진 않았다.

만년설, 세니오스 원로 마법사.

그가 진작 마법사에 관한 환상을 제대로 깨주신 덕분이지. 마법사란 족속이 원래부터 글러 먹었다는 건 직접 봐서 잘 알고 있는 나였거든.

게다가 제시, 본인도 알고 있었겠지.

제시는 대마법사의 클래스 퀘스트를 수행 중이었으니까.

플레이어의 특권인 시스템이 존재하는 이상, 제시도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로 향하는지 시스템창을 통해 파악했을 거다.

문득, 떠오르는 대마법사의 말.

-"...어떤 심적인 변화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최근 들어 이 아이, 꽤 노력하고 있었거든."

거악에 마왕에 제로 산맥까지.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의 연속.

그럼에도 제시는 무력감을 딛고 일어섰다는 거겠지.

다른 플레이어들이 성장을 위해 제로 산맥을 찾은 것처럼. 제시도 성장을 위해 대마법사의 클래스 퀘스트를 진행했을 거다.

그래, 그게 제시의 긍지였겠지.

그런데 말이야.

뭐, 그저 그릇에 불과해?

그랑펠 앞에서 타인의 긍지를 업신여기다니.

대마법사, 당신들은 큰 실수를 한 거야.

"그 길에 우리가 없을 거라고?"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내가 그 [『기이』]의 창시자이자.

현시점에서 마법의 극한에 가장 가까운 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테니까.

"이 시간부로."

"...?"

그러니까 착각하지 말란 말이다.

"기이의 창시자인 내가."

"...뭐?"

주제를 파악시켜줄 테니까.

"기이를 향한 그대들의 접근을 불허한다."

"!!!"

◈ 212화. 그대였군